본관 연혁
안악(安岳)은 황해도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양악군(楊岳郡)이라 했고 신라 때에는 장구진(長口鎭)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안악으로 개칭되어 1018년(현종 9) 풍주(豊州)에 편입되었다가 1106년(예종 1) 감무를 두었다. 1348년(충목왕 4)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89년(선조 22)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08년(선조 41)에 다시 군이 되었다. 8‧15해방 당시에는 안악읍‧대원면‧용순면‧은흥면‧대행면‧서하면‧안곡면‧용문면‧문산면 등 1개 읍 8개 면 113개 리였다. 북한은 1952년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안악군의 일부를 은천군으로 분리시켰고, 신천군의 일부를 넘겨받아 안악군의 영역을 조정하였다. 1954년에 재령군의 신환포리 일부가 덕성리로 편입되었고, 남정리 일부를 평정리로, 구와리 일부를 복사리로, 대추리 일부를 굴산리로, 노암리 일부를 한월리로 각각 편입시켰다. 1974년 에는 유설리 일부를 덕성리와 노암리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유설리는 오국리와 통합시킨 후 유설리는 폐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안악군이다.
성씨의 역사
안악이씨(安岳李氏)의 시조 이견(李堅)은 고려 공민왕 때 검교(檢校) 문하대승(門下大丞)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문헌에 따르면 그는 고려 충정왕 원년에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에 임명되고 이어 충정왕 2년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다. 특히 이견은 1360년(공민왕 9) 홍건적이 의주(義州)‧정주(定州)‧서경(西京) 등지에 침입했을 때 안주도만호(安州都萬戶) 안우(安祐), 상만호(上萬戶) 이방실(李芳實), 부만호 김어진(金於珍) 등과 함께 상장군으로 출전하여 크게 공을 세웠고, 함종(咸從)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한편 경상도의 한 집안에서 이견 이전의 이위(李魏)까지 소급되는 자세한 계보를 적은 문서가 발견되어 시조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신축보(辛丑譜) 세보에는 이 문서를 믿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단순히 참고용으로 싣고 있다. 따라서 현재 후손들은 세계가 분명한 이견을 시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이견의 아들 이정림(李挺林)이 황해도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세거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원래 본관은 양산(楊山)이었는데, 조선 세종 때에 안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즉, 6세손 이계을(李桂乙)은 고려 말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로 있다가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이 한을 품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의 아들 안악감무(安岳監務) 이신(李晨)이 두문동산 기슭에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 그 묘 앞에서 자결하여 부자 충절로 유명하였다. 그 후 조선 세종 때 와서 부자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나라에서 이신을 안악군(安岳君)으로 추봉하고 그 때까지 양산이씨(楊山李氏)로 써오던 관향을 안악이씨로 고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분적종 및 분파
군수공당한파(郡守公唐漢派)
무우당공이수파(無憂堂公耳壽派)
죽림공운기파(竹林公雲起派)
죽헌공운장파(竹憲公雲長派)
진사공욱파(進士公郁派)
진사공침파(進士公沈派)
참봉공기파(參奉公奇派)
참봉공운행파(參奉公雲行派)
참봉공팽령파(參奉公彭齡派)
참봉공해파(參奉公瀣派)
참의공잠파(參議公潛派)
첨정공송령파(僉正公松齡派)
학생공맹파(學生公孟派)
학생공억정파(學生公億楨派)
학생공운승파(學生公雲勝派)
학생공응벽파(學生公應壁派)
학생공의파(學生公誼派)
호당공희순파(湖堂公希舜派)
주요 세거지
서울특별시 일원
부산광역시 일원
대구광역시 일원
인천광역시 일원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경상남도 의령군 칠곡면 산남리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
경상남도 산청군 오부면 오전리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