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일두 정여창

일두 정여창 고택

아베베1 2012. 3. 20. 14:26

 

 ▲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의 모습이다 (2012.3.19. 오후의 모습 )

 

 

 

 일두 (一두) 정여창  선생님은 해동18현이시고 동양오현에 들어가시는 분으로 유교적으로  학문적으로 존경받는 분 중의 한분으로 , 사화에 관련되어 많은 아품을 겪은 분이시 기도 하다

 저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분이시다

 전주최공 문성공  8세손 이신 부호공 휘 浩文 17대 조고님의 장인 어른되시는 분이시다 본관은 하동인이며 호는 일두 선생이시다

 저의 선조님이신 문성공 5세손이신 예문관 직제학을 지내신 휘 연촌 선생님이

 함양현감을 제수 하셨고 , 연촌공의 손자이신 휘 연손 방조님이 함양현감을 제수하셨기에  咸陽과는 인연이 많았으며 , 저의 선친의 고향이신 山淸과는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는 지리적 연관관계를 가진 곳이기도하다 . 

   

 ▶ 일두선생의 신도비의 내용에

  ..8세손  女長適 副護軍崔浩文。

    9세손                   生子彥淸  

        외 손녀 사위는 관찰사, 청백리에 녹선되신 

                           풍천임공   임호신 이시다      

 

[함성호의 옛집 읽기]<31>정여창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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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경남 함양군 함양읍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낮은 산과 넓은 들로 둘러싸인 편안한 마을이 나온다. 200년 이상 된 고택이 즐비한 개평마을이다. 여기에 스승인 김종직과 함께 조선 오현(五賢)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일두 정여창(一두 鄭汝昌·1450∼1504)의 고택이 있다.

이 마을에는 일두 고택 외에도 풍천 노씨 대종가와 오담 고택, 하동 정씨 고가와 노 참판댁 고가 등이 흙담과 흙담 사이의 길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길을 따라가다가 높은 솟을대문이 나타나는 곳에 이르면 정려패(旌閭牌·효자와 충신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내린 상패)가 다섯 개나 걸려 있는 집이 나온다. 이 집이 정여창의 고택이다.

지어진 당시의 원형을 추정하기 매우 어렵지만 사랑채 앞의 석가산(石假山) 조형은 어느 정도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보고 있다. 안채는 사랑채가 지어진 100년 후에 지어진 것이다. 이 집은 경남의 사대부 살림집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고 있다. 경남 지방의 사대부 집은 경북 지방의 같이채 배치와 달리 따로채 배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집 역시 사랑채, 안채, 안사랑채, 별당 등이 따로채를 이루며 담과 마당으로 나뉘고 결합돼 있다.(그러나 이런 지역적 특징은 건축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후와 지리, 인문적 조건에 따라 그런 배치가 나왔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건축에서도 학제 간 연구가 절실한 이유다)

이 집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사랑채 앞에 만든 석가산이다. 석가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풍수적인 비보(裨補)로 쌓는 조산(造山)과 다른 점은 규모가 훨씬 작고 관념적이라는 것이다. 작은 규모지만 산과 바위, 물과 나무가 모두 들어 있다. 한마디로 동양 전통의 신선사상을 조형물로 나타낸 것이다. ‘축경(縮景)’이라고도 하는데 산수를 줄여서 즐긴다는 뜻으로 석가산과 분재, 수석 등을 포함한다.

이 석가산을 즐기는 장소가 바로 사랑채의 누마루다. 마치 석가산과 조응하듯이 활달한 처마를 펼치고 있는 이 누마루는 정여창 고택의 백미다. 안채와 사랑채가 각각 남서향과 동남향으로 방향을 달리하는 것도 다른 안대(案對)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깥의 풍경을 빌리고, 또 줄여서 마당에 들여 놓은 집이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출처 :동아일보 자료   

 

 

일두선생 문집  


神道碑銘 幷序○鄭蘊 a_015_491b


惟我東方。自殷太師設敎。蔚然有變夷之風。而寥寥數千載。眞儒者罕出。在麗季。惟鄭文忠公015_491c一人而已。入我朝。聞而知之者。有若五先生焉。先生其一也。先生諱汝昌。字伯勖。其先貫河東。後徙居咸陽郡。有諱之義。判宗簿寺事。諱復周。判典農寺事。諱六乙。贈漢城府左尹。寔先生曾若祖若考三世也。母崔氏。牧使孝孫之女。以景泰元年庚午。生先生。生有異質。左尹通判義州時。先生在齠齔。華使張寧。一見知其爲非常兒。作說以名之。後左尹爲咸吉道虞侯。拒叛將李施愛。死之。先生絶而復穌。入積尸中求遺體歸葬。時年十八矣。服制畢。上嘉左尹衛國功。015_491d命官其嗣。先生以父敗子榮爲不忍。辭不受。奉養母夫人。滫瀡備至。母夫人所爲。無甚害於義。不敢違。母夫人亦知子之志。不欲傷。故母無過擧。子無曲順之失。癸卯。中進士試。母夫人又欲見決科之榮。乃遊太學。每夜深。必兀然端坐。於是。泮中知其有思道之功。益尊敬之。及南歸。母夫人方在癘染中。人勸令在外候問。先生不聽徑入。未幾。母夫人遘癘不起。擗踊嘔血。幾至滅性。治喪不顧俗忌。襲斂殯奠。皆以禮。人甚危之。而癘患自熄。先生終無恙。人皆以爲孝感所致。015_492a方伯聞其行。令郡官辦葬具。先生以煩民力怨及親。爲辭不受。凡有欲助之者。皆不聽。期啜粥。三年憂。苴杖不出廬外。危坐終日。不脫絰帶。旣祥。不歸家。入頭流山。皇皇有如有求不得之狀。人勸酒肉。輒涕泣不肯。郡守曺梅溪偉躬造勉之。以爲先王中制不敢過。於是不敢辭。寺正趙孝仝,參議尹兢。疏薦其學行。成廟嘉之。特授昭格署參奉。先生陳情固辭。成廟題其疏尾曰。聞汝之行。予不覺出涕。行不可掩。而今猶如此。是汝之善也。兄弟姊妹。分土田臧獲。先生擇015_492b其磽薄老弱者自占。猶有不厭其心者。則復以己所得與之。成廟庚戌。登丙科。補藝文館檢閱。遷侍講院說書。輔導以正。東宮頗不悅。卽求補外。甲寅。出監安陰縣。縣素稱凋弊。先生首訪民隱。嚴立科條。櫛垢爬痒。民獲蘇醒。期月之間。恩信周遍。吏民相戒。莫敢欺負。暇日。招選鄕子弟之秀異者。親自敎誨。遠近聞風多來學。坐戊午史禍。謫鍾城七年。無幾微怨悔見於色辭。府定庭燎之役。每使星入府。躬自燃火。不懈益謹。其行乎患難如此。六鎭近胡域。無文風久矣。先015_492c生擇其可與語者。敎誨不倦。未幾。有中進士科者。斯非過化之妙歟。甲子夏四月一日。易簀于謫所。壽五十有五。輿歸咸陽。葬昇安洞艮坐坤向之原。是年秋。史禍復作。其可忍言哉。不數年。昭雪無餘憾。褒贈祀典。愈久愈隆。郡儒建書院。特賜灆溪之號。春秋用小牢享之。自戊辰以後。館學儒生。請從祀文廟。歲以爲常。萬曆庚戌。始蒙允。八月。賜祭於家。於是先生道學之光。益彰於世矣。先生之學。以濂洛爲準的。讀書以窮理爲先。處心以不欺爲主。日用工夫。不出誠015_492d敬之外。至於治平之律令格例。無不究其極。求諸治縣。已見其端緖矣。與寒暄金先生。俱遊佔畢金先生之門。志同道合。許以莫逆。論道講學。動必相隨。惜其微言餘論。不少傳於世。而先生平日著述。又火於戊午之禍。豈不爲後學之長痛乎。嗚呼。彼小人者。雖或螮蝀於一時。然至於公論之久長。蓋亦莫得以掩之。列聖褒崇之恩。多士景慕之誠。有如滄海之深。北斗之高。百世之下。聞其風而興起感發者。不在於立懦廉頑之後。則雖使先生坐廊廟於當時。其風效之015_493a及於無窮者。夫豈或之過哉。先生娶宗室桃平君末生之女。恭靖大王之孫也。生二子四女。長希稷。直長。次曰希卨。正郞。希稷。嫡無嗣。只有庶子如山。希卨。取堂弟希參之子彥男爲後。女長適副護軍崔浩文。生子彥淸。壻任虎臣。觀察使。其次適生員趙孝溫。生子安壽。次適李賢孫。生子承壽。又其次適薛公諄。生子璿。彥男。同知。生子大民。縣監。庶子秀民。參奉。縣監生一男一女。男曰弘緖。文學正。女曰房元震。察訪。學正初娶贈都承旨楊士衡之女。生二男一女。男曰015_493b光漢。生員。曰光淵。進士。女適李皦。後娶林眞㦂之女。有一女。適郭文浣。參奉生三男。弘纘,弘繼,弘經。弘經生光淑,光湜。餘幼。如山有子二人。曰天壽,桂壽。天壽之子。元禮,亨禮。桂壽之子。曰興禮。元禮,興禮。以先生蔭除參奉。合嫡庶曾玄男女凡若干人。銘曰。
於皇上天。閔茲東偏。日趨澆漓。乃降碩儒。于嶺之隅。金聲玉姿。先生之生。抱負非輕。文不在茲。泝求洛閩。窮源嚼眞。不尙文詞。潛心論討。實踐深造。要在不欺。躬于孝悌。達以詩禮。聖賢是希。015_493c晩武天庭。兆足以行。誰其尼之。鳴琴十室。化成期月。施止於斯。天生何意。天嗇何以。世道之悲。惟其耿光。沒世彌彰。躋于孔祠。蘫水洋洋。昇山蒼蒼。不渴不隳。能令大名。山高水淸。不在斯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