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한양 도성과 궁궐

도성과 궁궐

아베베1 2012. 3. 28. 11:21

 

 

 

 이미지 사진은  북한산성 대성문 의 모습이다  2012.3.18. 산행시 담은 사진이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도성과 궁궐


태조가 처음으로 한양성을 쌓았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세속에서의 명칭은 동대문 과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 남쪽에 숭례문 남대문과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과 서쪽에 돈의문 신문(新門) 과 서북쪽에 창의문과 북쪽에 숙정문(肅靖門) 닫혔다 과 동북쪽에 혜화문 동소문(東小門)의 처음 이름은 홍화(弘化)였는데, 중종 신미년에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과 서로 혼동된다 해서 혜화(惠化)라고 고쳤다. 이 있다.
○ 경복궁은 태조 3년에 세웠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근정전 남쪽에 근정문(勤政門), 또 그 남쪽에 홍례문(弘禮門), 동쪽에 일화문(日華門), 서쪽에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사정전ㆍ강녕전ㆍ연생전(延生殿)ㆍ경성전(慶成殿)ㆍ교태전(交泰殿)ㆍ함원전(含元殿)ㆍ양심당(養心堂)ㆍ비현각(丕顯閣)ㆍ인지당(麟趾堂)ㆍ자미당(紫微堂)ㆍ청연루(淸讌樓)ㆍ융문루(隆文樓)ㆍ융무루(隆武樓)ㆍ경회루ㆍ흠경각(欽敬閣)ㆍ보루각(報漏閣)ㆍ간의대(簡儀臺)ㆍ동궁(東宮)이 있다. 《여지승람》
○ 창덕궁은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는데 태조 때에 세웠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인정전(仁政殿)ㆍ선정전(宣政殿)ㆍ보경당(寶慶堂)ㆍ동궁이 있다. 《여지승람》
○ 창경궁은 창덕궁 동쪽 옛 수강궁(壽康宮) 터에 있는데 태조조에 세웠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 성종 계묘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ㆍ인수대비(仁粹大妃)ㆍ안순왕후(安順王后)의 세 궁을 위해서 창경궁을 개축하였는데, 명정전(明政殿)ㆍ문정전(文政殿)ㆍ인양전(仁陽殿)ㆍ경춘전(景春殿)ㆍ통명전(通明殿)ㆍ양화당(養和堂)ㆍ여휘당(麗暉堂)ㆍ환경전(歡慶殿)ㆍ수녕전(壽寧殿)ㆍ환취정(環翠亭)ㆍ선원전(璿源殿)ㆍ비궁당(匪躬堂)이 있다. 《여지승람》
○ 경덕궁은 돈의문 안에 있는데 광해군때 세웠고 다음에 상세하다. 영종(英宗) 때 이름을 고쳐 ‘경희궁(慶熙宮)’이라 하였다. 다음에 상세하다.
○ 창덕궁 후원은 창경궁 후원과 통했는데, 열무정(閱武亭)이 있다. 정자 곁에 네 우물이 있는데, 마니(摩尼)ㆍ파려(玻瓈)ㆍ유리(琉璃)ㆍ옥정(玉井)인데 세조 때 판 것이다.
○ 서총대(瑞葱臺) 결(缺)
○ 경성을 5부(部) 49방(坊)으로 나누었는데, 중부 관할 8방은 징청(澄淸)ㆍ서린(瑞麟)ㆍ수진(壽進)ㆍ견평(堅平)ㆍ관인(寬仁)ㆍ경행(慶幸)ㆍ정선(貞善)ㆍ장통(長通)이다.
○ 동부 관할 12방은 숭신(崇信)ㆍ연화(蓮花)ㆍ서운(瑞雲)ㆍ덕성(德成)ㆍ숭교(崇敎)ㆍ연희(燕喜)ㆍ관덕(觀德)ㆍ천달(泉達)ㆍ흥성(興城)ㆍ창선(彰善)ㆍ건덕(建德)ㆍ인창(仁昌)이다.
○ 남부의 11방은 광통(廣通)ㆍ호현(好賢)ㆍ명례(明禮)ㆍ태평(太平)ㆍ훈도(薰陶)ㆍ성명(誠明)ㆍ낙선(樂善)ㆍ정심(貞心)ㆍ명철(明哲)ㆍ성신(誠身)ㆍ예성(禮成)이다.
○ 서부의 8방은 인달(仁達)ㆍ적선(積善)ㆍ여경(餘慶)ㆍ황화(皇華)ㆍ양생(養生)ㆍ신화(神化)ㆍ반송(盤松)ㆍ반석(盤石)이다.
북부의 10방은 광화(廣化)ㆍ양덕(陽德)ㆍ가회(嘉會)ㆍ안국(安國)ㆍ관광(觀光)ㆍ진장(鎭長)ㆍ명통(明通)ㆍ준수(俊秀)ㆍ순화(順化)ㆍ의통(義通)이니, 이 제도는 모두 정도전이 정한 것이라 한다. 《지봉유설》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壽進坊)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수진(壽進)’이라 하여 오래 살려 했던 것인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수진의 조짐이라고 말하였다.
○ 종루는 운종가에 있으며 태조 4년에 각(閣)을 세웠는데, 세종이 고쳐서 층루를 짓고 종고(鐘鼓)를 달아 새벽과 밤을 알리게 했다. 권근(權近)이 종명(鐘銘)과 서문을 지었다.
○ 세조가 큰 종을 만들어서 처음에는 사정전에 두려고 하였다가 이후에 광화문 밖 서쪽에 각(閣)을 짓고 종을 달았다. 신숙주가 그 종명(鐘銘)과 서문을 지었다. 《여지승람》
광화문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에도 큰 종이 있으니, 모두 새벽과 밤을 알리는 것이다. 정릉(貞陵)은 돈의문 안에 있고 능(陵) 옆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고 절도 폐쇄되었으나 큰 종은 아직도 있다. 원각사(圓覺寺)는 서울 안에 있었는데, 절이 없어졌으나 큰 종은 아직도 있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으로 있으면서 건의하여 두 큰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놓고, 역시 시각을 알리려 했으나, 김안로가 죄를 입어 종을 달지 못하고 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임진년의 난리에 적군이 분탕질을 마구 자행하여 광화문의 종과 종루의 종이 모두 녹슬고 못쓰게 되었는데, 계사년에 임금이 서울로 돌아와서 갑오년 가을에 남대문에 종을 달아 시각을 알리도록 명하였다. 정유년 겨울에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종을 옮겨 달라고 명하였다. .t;청천견한록(聽天遣閒錄).
○ 경성의 팔영(八詠)은 기전산하(畿甸山河)ㆍ도성궁원(都城宮苑)ㆍ열서성공(列署星拱)ㆍ제방기포(諸坊碁布)ㆍ동문교장(東門敎場)ㆍ서강조박(西江漕泊)ㆍ남도행인(南渡行人)ㆍ북교목마(北郊牧馬)이다.
○ 십영(十詠)은 장의심승(藏義尋僧)ㆍ제천완월(濟川玩月)ㆍ반송송객(盤松送客)ㆍ양화답설(楊花踏雪)ㆍ목멱상화(木覓甞花)ㆍ전교심방(箭郊尋芳)ㆍ마포범주(麻浦泛舟)ㆍ흥덕상화(興德賞花)ㆍ종가관등(鐘街觀燈)ㆍ현석조어(玄石釣魚)이다.
○ 남산의 팔영(八詠)은 운횡북궐(雲橫北闕)ㆍ수창남강(水漲南江)ㆍ암저유화(岩底幽花)ㆍ영상장송(嶺上長松)ㆍ삼춘답청(三春踏靑)ㆍ구일등고(九日登高)ㆍ척헌관등(陟巘觀燈)ㆍ연계탁영(沿溪濯纓)이다. 《여지승람》
○ 반송정(盤松亭)은 모화관 북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소나무가 서리고 구부러져 그 밑의 그늘이 수십 보(步)나 되는데, 고려 때 임금이 남경에 가다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다.” 하며 본조 초기까지도 있었다. 《여지승람》 모화관 남쪽 못을 여기에 팠다. 태종조(太宗朝)에 있다.
○ 세속에서 이르기를, 한도(漢都)는 어린애를 업은 바위가 밖으로 달아나는 형상이 있기 때문에 산 이름을 ‘모악(母岳)’이라 하였고, 남쪽 산은 ‘벌아(伐兒)’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가는 길을 가로막아서 가지 못하게 함이고, 서쪽은 ‘병전현(餠廛峴)’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떡을 먹여 달래어 머물러 있도록 함이다. 《지봉유설》
세속에서 이르기를, 목멱산에는 잠두(蠶頭)가 있기 때문에 항상 남쪽에 뽕나무를 심었으며, 지금의 잠실평(蠶室坪)이다. 서강 와우산(臥牛山)은 소의 형상인 까닭에 북쪽에 안현(鞍峴)이 있고 남쪽에 사포초장(沙浦草場)이 있으며, 안현 남쪽에 계당(鷄堂)이 있기 때문에 그 동쪽에 과산(窠山)이 있다 한다. 지금의 원현(圓峴)이니 대개 방언에 원(圓)과 과(窠)가 음(音)이 같기 때문이다. 땅 이름이 비록 맞지 않으나, 당초에 이름을 지은 뜻이 과연 이러했는지 알 수가 없다.
○ 성 밖에 네 대원(大院)이 있는데, 세조가 재주 있는 중에게 명하여 짓도록 한 것이다. 보제원(普濟院)은 동대문 밖에 있는데, 3월 상사(上巳)일과 9월 중양(重陽)에 이 누대 위에서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의 잔치를 하사하였다. 홍제원(弘濟院)은 사현(沙峴) 북쪽 들에 있는데,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가득하고 위에 조그만 정자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서울에 오는 날에는 그 정자에서 쉬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뒤에 정자가 없어지니, 지금은 중국 사신이 홍제원에서 쉰다. 순치(順治) 무자년에 고쳐 세웠으며, 조사(詔使)조에 있다. 제천정(濟川亭)은 북한강의 위에 있으며, 풍경이 아름다워서 중국 사신이 경치를 구경하려면 먼저 이 정자에 올라갔고, 전송하거나 맞이하는 벼슬아치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사평원(沙平院)은 한강 남쪽 사교(沙郊)에 있는데, 땅의 형세가 낮아서 오직 행인 가운데 날이 저물어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만 여기서 유숙할 뿐이었다.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희우정(喜雨亭)이 있으니, 이것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이었는데, 뒤에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었다.성종이 해마다 농사를 구경하고, 또 배를 모아 수전(水戰)을 연습할 때 친히 거둥하여 구경하니,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이라 고치고, 친히 시(詩) 몇 수를 지어 조신 중에 글을 잘하는 자들에게 모두 차운해 지으라고 명하고, 이것으로 현판을 만들어 정자 위에 둘러 걸게 하였다. 월산대군이 죽은 뒤로는 성종이 다시 거둥하지 않았다.
○ 중 하나가 일찍이 전관교(箭串橋)를 놓았는데, 많은 돌을 써서 큰 냇물에 걸쳐 다리를 만들었다. 이 다리는 길이가 3백여 보(步)나 되고 집과 같이 편안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다니는 것 같았으니 이것을 제반교(濟盤橋)라 하였다. 또 동대문 밖 왕심평(往尋坪)에 큰 다리를 놓아 이름을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는데 모두 임금이 손수 어필로 써서 이름을 정한 것이다. 《용재총화》
○ 성종이 산릉(山陵)에 다닐 때 제천정(濟川亭)이 협소하기 때문에 그곳의 중에게 개축을 명했더니, 두서너 해가 되어도 완성하지 못하고 겨우 기둥만 세워져 있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후 중국 사신 왕헌신(王獻臣)이 왔을 때에 조정에서 이를 완성하고 단청을 더했었다. 《용재총화》
○ 궁성은 경성 안에 있는데, 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고 높이가 21척 1촌이며, 네 문이 있는데 남쪽은 광화 옛이름은 정문(正門)이다. 요, 북쪽은 신무(神武)이며, 동쪽은 건춘(建春)이고, 서쪽은 영추(迎秋)이다. 《여지승람》
○ 보충 : 국도(國都)의 동쪽 방면이 텅 비었기 때문에 동쪽 문 현판에는 글자 하나를 더했고, 그 성에는 담을 쳤으니 옛사람들의 세심한 뜻을 볼 수가 있다. 효종 때 이미 하도감(下都監)을 설치하고, 또 훈련도감 군사를 동쪽 마을로 옮긴 것도 역시 이 뜻이었다.정종은 장용영(壯勇營)을 이현(梨峴)에 두고 본영의 장령(將領)과 군교(軍校)로 하여금 통화(通化) 동쪽 이현 위로 옮겨 살게 하였으니, 이 역시 선대의 뜻을 계승하고 앞일을 계획하는 성상의 가르침이었다. 《일득록(日得錄)》
○ 보충 : 옛날에 효종이 심양(瀋陽)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따라온 한인(漢人)들을 대궐 밖 근처에 살게 하여 저희들끼리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한가롭게 거주하여 아무런 생업이 없었다. 물고기를 잡아서 임금에게 바치니 이것을 ‘한인어(漢人魚)’라 하였다. 지금의 좌ㆍ우통계(左右統契)가 바로 이곳이다. 내가 이것을 만든 것은 오로지 종묘를 호위하기 위한 것이다.옛 사례에 제사를 지낸 뒤에 궁내를 수선하고 또 풀을 뽑고 눈[雪]을 쓰는 일 같은 것은 동부 관리가 방민(坊民)들을 거느리고 하는 것이 나라의 전례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이를 없애고 다만 통계 백성들에게만 품값을 주고 시키게 했으니, 내가 궁원(宮園)을 위해서 한 일은 한 가지도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득록》
○ 태종 13년(1413)에 경복궁 후전(後殿) 서쪽 누각이 허물어져 임금이 거둥했다가 이것을 보고,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게 명하여 급히 수리하라고 하였다.박자청이 약간 서쪽으로 옮기고 그 규모를 조금 넓혀 새로 지었는데, 또 그 땅이 너무 넓은 것을 염려하여 누각 둘레에 연못을 깊이 파고 연꽃을 심으며 못 가운데에 두 섬을 만들었다. 임금이 훈구대신들을 불러 함께 즐기고, 이 누대를 ‘경회루’라 이름하고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여지승람》
○ 세종 3년(1421)에 태상왕(太上王 태종대왕)이 임진현(臨津縣)에 거둥하여 들 가운데 술자리를 차리고 놀다가 도성이 허물어진 것을 언급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의정 이원(李原) 등에게 이르기를, “도성은 수리하지 않을 수 없는데, 큰 토목공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그러나 잠시 수고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편안하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편안한 것을 주상에게 남겨주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도성은 마치 집의 울타리와 같습니다. 이제 곡식도 차츰 익기 시작하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도(道)의 장정 30여만 명을 뽑아서 성을 쌓았다.
○ 세종 때 집현전 수찬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을 가지고, 도성 안의 냇물과 개천에 더러운 물건을 버리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하자고 청하였다.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이 소를 올리기를, “범월봉(范越鳳)은 오계(五季 오대(五代))의 한 술사였습니다. 이른바 ‘명당의 물에서 냄새가 나고 더럽고 불결하면 패역하고 흉잔(凶殘)한 징조이다.’ 한 것은 장사지내는 땅의 길흉을 말한 것이고, 도읍의 형세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대개 범월봉의 뜻은 신도(神道)는 깨끗한 것을 숭상하기 때문에, 물이 불결하면 신령이 편안하지 못하여 이 같은 응보(應報)가 있다는 것이고 국도(國都)를 논한 것은 아닙니다. 도읍한 곳을 말씀드리면 사람의 수효가 번성하면 자연히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이 쌓이게 되니, 반드시 소통시키는 도랑과 넓은 내[川]가 도성 사이에 동서남북으로 정비되어, 그 더러운 것을 흘려 보낸 후에라야 도성 안을 깨끗이 할 것이니, 지금 도성에는 그 물이 맑을 수가 없습니다.이제 도읍의 물을 한결같이 산골짜기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하려면, 이것은 형세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치로 말하더라도 생사가 서로 다르고 귀신과 사람의 몸이 다르온데, 묘지에 쓰는 일을 어찌 국도에 쓴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효첨의 말이 정직하다.” 하고 드디어 이현로의 말을 쓰지 않았다. 《여지승람》 《동각잡기》
○ 이때 풍수하는 자들이 궁성의 북쪽 길을 막고 성 안에 가산(假山)을 만들어 지맥(地脈)을 돕자고 청하니, 어효첨이 소를 올리기를, “이제 궁성터를 보건대 땅으로 들어간 깊이가 역시 한 길이 넘습니다.가령, 술사의 말과 같이 이미 땅 속을 한 길이 넘도록 파서 성의 주맥(主脈)을 끊었다면, 사람들이 길(북로(北路))로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은 역시 사소한 일이 됩니다. 또 끊어진 산맥에 흙을 보탠다면 이것은 살을 도려 내고 상처를 합치는 것이니, 어찌 혈맥이 통하겠습니까. 만일 그 기맥을 통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궁성을 헐어야 할 것이니 이것은 필연 당치 않은 이치입니다.” 하였다.
○ 세조가 도성을 중수하였다. 《여지승람》
○ 세조가 경성의 지도를 만들고자 하여 친히 정척(鄭陟)ㆍ강희맹(姜希孟)ㆍ양성지(梁誠之) 등을 거느리고 삼각산의 서현봉(序賢峯)에 올라 가서 산의 형세와 물의 갈라짐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t;남원군정안(南原君政案). 《괴애집(乖崖集)》
○ 연산군 갑자년(1504) 가을에 내도성(內都城)을 쌓고, 성터 밖에 있는 민가는 헐어 없앴다. 《고사촬요》
○ 명종 8년 계축(1553) 9월에 경복궁에 화재가 나서 사정전(思政殿) 안이 모두 불에 타서 대왕대비와 왕대비의 고명(誥命)도 역시 불에 타버렸다. 다음해 갑인년에 경복궁을 고쳐서 준공하였다. 《고사촬요》
○ 일찍이 중종 계묘년(1543) 정월 경복궁 동궁에 화재가 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대내(大內 궁내)에 또 화재가 나서 사정전(思政殿) 남무(南廡)까지 불에 타버렸다. 이에 명종이 사정전에 거처하지 않고 수라와 반찬을 감했으며 종묘에 제사지내어 사실을 고했다.이해 봄에 임금이 이미 창덕궁으로 옮겨 거처하고, 우의정 윤개(尹漑),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 등에게 명하여 제조(提調)로 삼아 동궁을 짓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찬성 윤원형(尹元衡) 등에게 명하여 제조로 삼아 대내를 수리하게 하고, 사인(舍人) 박민헌(朴民巘)에게 흠경각(欽敬閣)을 복원하게 하였다. 갑인년 여름에 흠경각ㆍ동궁ㆍ사정전ㆍ비현각(丕顯閣)ㆍ교태전ㆍ연생전(延生殿)ㆍ경생전(慶生殿)ㆍ양심당(養心堂)ㆍ자미당(紫薇堂)ㆍ강녕전이 차례로 준공되니, 11월에 종묘에 고하고 12월에 4전(殿)으로 도로 옮겼다. 《퇴계집(退溪集)》 .t;중수기(重修記).
○ 이때 경복궁의 중수가 거의 끝나려 하자, 심연원과 윤개가 도감 제조(都監提調)로서 가서 공사한 것을 조사할 때에 외각(外閣)의 창문과 문호를 보니, 모두 주홍색ㆍ구리빛의 무늬 놓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윤개가 크게 노하여 즉시 당해 낭관 이인건(李仁健)을 잡아다가 목에 형구를 채우고 꾸짖기를, “오직 대내의 침실에만 비단을 사용하는데, 어찌 변변치 못한 미관말직이 감히 아첨하여 잘 뵈어서 명예를 구하려고 법을 이같이 허물어뜨리느냐. 마땅히 법제를 무너뜨린 죄로써 다스리라.” 하고 말 속에 노염이 일어났다.이인건은 바로 심연원의 사위였는데 심연원은 듣고도 못들은 체하고 있다가 그가 땅에 엎드려 살려 주기를 빌고 지극히 곤욕을 받은 뒤에 천천히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인데 나이 젊은 신진으로서 나라의 법에 제한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망녕된 일을 했을 뿐이요, 일부러 법을 허물어뜨리려 한 일은 아닌 듯한데 제도를 무너뜨린 죄를 적용하는 것은 너무 중하지 않은가. 그 다음 법을 생각해 주시오.” 하여 드디어 추고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기재잡기》
○ 《대전(大典)》에 기재된 바로는 궁성에서 백 척(尺) 되는 데까지는 사람들의 집을 짓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법전이 비록 이와 같았으나 실지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궁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백성들의 집이 즐비하여 백년 된 옛집까지도 많이 있었다. 선조가 궁성을 누르고 집을 지은 자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여, 이에 법전을 상고하여 보라고 명하여 백 척(尺) 안에 있는 민가는 헐도록 하니 백성들이 많이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조야첨재》
○ 임진년에 병화를 입었다.
○ 광해군 기유년(1609)에 창덕궁을 중건하여 준공하니, 을묘년에 임금이 창덕궁으로 옮겼다. 옛 행궁을 고쳐서 경운궁(慶運宮)이라 하고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대비궁(大妃宮)을 방비하게 하였다.
○ 병진년에 창경궁을 중건하여 준공되니,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인경(仁慶)ㆍ경덕(慶德) 두 궁을 짓고 인왕산 밑에 있던 인가를 모두 헐어 없앴다.
○ 술자가 원종(元宗)의 사저(私邸)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하므로 이 궁을 세워서 그곳 형세를 누른 것이다. 인경궁(仁慶宮)은 인조 때에 헐어버렸다. .t;국조전모.에는, ‘인경궁에서 남은 재목을 가지고 홍제원(弘濟院)을 지었다.’ 하였다.
○ 일찍이 임진난 뒤 병오년에 장차 경복궁을 수리하려 하는데, 전 현령 이국필(李國弼)이 올린 소에,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니 마땅히 창덕궁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극력 말하니, 조정에서 그의 의논에 좇아서 팔도의 백성들에게 포목 반 필씩을 내게 하고 물 주변에 있는 고을에서는 포목 대신으로 쌀을 내게 하여, 배로 운반해다가 기와를 굽고 인부를 부리는 비용에 쓰도록 하고, 삼공, 호조 판서, 공조 판서가 이 일을 주관하였다.무신년에 국상(國喪)이 나서 기유년에 중국 사신이 왔는데, 접대할 때 쌀과 포목을 덜어 내어 창덕궁 짓는 데 쓰도록 하였다. 기유년에 준공하였으니 그해에는 꺼림이 있어서 임금이 즉시 옮기지 않았다. 《갑신만록(甲申謾錄)》
○ 광해군이 교하(交河)에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였다. 광해조 조에 상세하다.
○ 현종 때 임금이 자의(慈慤)ㆍ인선(仁宣) 두 대비를 모셨는데, 효종 때 세운 만수전(萬壽殿)은 자의대비의 거처하던 곳이며 서쪽에 있었고, 임금이 또 따로 한 궁전을 지어서 이름을 집상전(集祥殿)이라 하였으니 인선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동쪽에 있었다. 대개 한(漢) 나라 장락궁(長樂宮)ㆍ장신궁(長信宮)의 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2전(二殿)은 창덕궁에 있다.
○ 숙종이 예연당(蘂淵堂)에서 탄생하여 신유년에 이 당(堂)에서 가례를 올렸고, 기묘년에 세자가 이 당에서 홍역을 치렀다. 이에 중전이 이러한 경사스러운 일을 합쳐서 이름을 정해 달라고 청하여 당 이름을 집경당(集慶堂)이라 고치고,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지어 바치게 하고 사슴 가죽을 하사했다. 《명곡집》
○ 숙종 기미년(1679, 숙종 5) 4월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당초에 도성을 정할 때에 그 방위를 보고 각 문을 설치한 것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남소문(南小門)은 손방(巽方)에 있으니 곧 소양문(少陽門)입니다. 옛날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그 집이 남소문 안 길가에 있어서 시끄러움을 꺼려하여 다른 일로 핑계해서 이 문을 닫았는데, 그 후에 이것을 그대로 두고 열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술사들도 이것을 아뢰는 자가 많으니 이러한 어리석은 말을 비록 취하여 믿을 수 없으나, 지금 백성들의 마음이 답답하여 모두 이 문을 다시 열기를 원하니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여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권대운(權大運)도 말하기를, “이 문은 진실로 열지 않을 수 없으나, 다만 폐쇄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공인과 장인을 이용하여 수축할 곳이 없지 않을 것인데 지금 장인들은 모두 강도(江都)로 갔으니,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6월에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어제 빈청에서 세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남소문은 옛날에 있던 것을 지금 폐지했다.’ 하고, 술사들은 말하기를, ‘소양문을 열어야 할 것인데 열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인지(麟趾)ㆍ종사(螽斯)의 경사에 매양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이제 만일 옛터를 찾아서 소양(少陽)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면 마땅히 상서로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며, 또 말하기를, ‘남소문은 김안로가 제 마음대로 닫았던 것이니 역시 열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며, 공조 판서 오정위(吳挺緯)가 그 중에도 더욱 이 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신이 오정위와 함께 옛 문이 있던 터를 가 보고 구관당상(句管堂上)을 내보내기를 청하였으며, 방민(坊民)들 중에서 평상시에는 부역에 응하지 않던 자를 써서 일을 시키시기를 청하여, 이제 공사를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신이 요즘 대략 방서(方書)와 지지(地志)를 보건대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니, 대개 소양의 위치는 본래 정동(正東)에 있고, 하도(河圖)의 수(數)에 소양이 셋을 차지하여 다섯을 얻어 여덟을 이루는 묘함이 있고, 낙서(洛書)의 그림에도 소양이 역시 셋째 자리를 차지했으니, 하도와 낙서에 모두 삼(三)이라는 숫자를 좌우에 둔 것은 곧 동쪽을 말한 것입니다.하늘이 세 번째 목(木)을 낳았으니, ‘목’이란 진(震)의 형상이요, 진은 또 동쪽의 괘(卦)입니다. 곤(坤)이 건(乾)에 구하여 초효(初爻)를 얻어서 진이 된 까닭에 한 번 구해서 아들을 얻었다고 했으니, 이것이 진이 장자(長子)의 방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태자가 거처하는 곳을 춘궁(春宮)이라 하고, 또한 동궁(東宮)이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대개 진에서 취한 것이고, 동남쪽은 손(巽)입니다.방기가(方技家)에서는 또 한 가지 말이 있는데, 목(木)은 해(亥)에서 나서 미(未)에 그치는 것이니, 해(亥)로부터 묘(卯)에 이르기까지는 양기(陽氣)가 바야흐로 생기고 해[日]가 성한 데로 향하는 것이므로, 이는 모두 소(少)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진(辰)으로부터 미(未)에 이르기까지는 양기가 이미 성하여 장차 쇠한 데로 나아가니, 이는 모두 노(老)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진(辰)과 사(巳)는 손(巽)의 방위로써 괘(卦)로는 장녀(長女)가 되고, 오행(五行)으로는 금(金)이 처음 나는 곳이 되는데, 금은 역시 음이요 양은 아니니, 이른바 ‘소양(少陽)의 방위’라는 것은 실상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또 《여지승람》은 바로 우리 성종조 때 지은 것으로서 중종 경인년에 이행(李荇) 등에게 명하여 증보한 것입니다. 1년 뒤 신묘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이행을 내쫓고 자기가 대신하였으며, 그 뒤 또 7년 만에 패하여 죽었는데, 옛 문이 만일 김안로가 권력을 잡을 때 닫혔다고 하면 이 책은 곧 김안로가 권력을 잡기 전에 이룬 것일 것이고,이 문은 응당 이행이 기록한 내용 안에 있을 것인데, 이제 경도(京都) 성곽 조(城郭條)를 상고하건대, 경성의 팔문(八門)은 남쪽을 ‘광희(光熙)’라 한다 하였으므로 신(臣)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소위 ‘광희’라는 것이 과연 바로 남소문(南小門)의 바른 이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수구문(水口門)의 본 이름입니까. 지금 성문이 이미 여덟이 되는데, 만일 이 문을 다시 열고 보면 경성이 마땅히 구문(九門)이 될 것이니, 조종조에서 도읍을 만들 때의 처음 제도에 어긋날 듯하며, 또 옛날에 그 간정(間正)을 분별하고 방문(方門)을 상고해서 이룩한 뜻도 아닐까 합니다.더욱이 김안로가 제 마음대로 닫았다는 말은 더욱 명백한 증거가 없고, 거리에 떠도는 근거 없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니, 처음에 의논을 정했다고 해서 졸지에 문을 여는 일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t;술이.
○ 숙종 을해년(1695, 숙종 21)에 진휼청(賑恤廳)에서 아뢰어 도성 안에 있는 마른 소나무를 베어 팔자고 하니, 판윤 임상원(任相元)이 소를 올리기를, “나무를 도적질해서 베는 일이 날로 늘어날까 걱정되어, 차라리 땔나무로 베어서 팔아 국가의 비용을 도운다면, 이 방법이 역시 좋은 듯 하나 마른 나무를 모두 없애자면 산 나무도 베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부리(府吏)로 하여금 한 그루씩 지켜서 각각 한 사람씩 조사하여 금하지 않는다면, 저들의 수많은 도끼가 한꺼번에 들이닥쳐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조사하는 역량이 반드시 쉽게 두루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진실로 소나무를 기르고자 한다면 마른 줄기나 썩은 움을 저절로 떨어져 저절로 없어지도록 내버려 둔들 또한 무엇이 아깝습니까.”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듣지 않았다.
또 초기(艸記)에, “마른 소나무를 팔기 시작한 것은 5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온 성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어, 산 소나무에 대해 엄하게 주의하여 일체 베지 못하게 금했으나, 성중의 인부(人夫)가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어 산과 골짜기를 뒤덮어 힘대로 베어 가져 가니, 살고 마른 것을 막론하고 모두 도끼로 베이게 되어 본부(本府)의 약간 명의 금지하는 관리가 거의 손을 댈 곳이 없고,그 가운데 또 돈도 내지 않고 첩문(帖文)도 없는 자가 태반이나 되어 빈손으로 와서 길을 가득 메우나 관원들이 금할 사이가 없고, 아전들도 따질 수가 없어 돈이 진휼청으로 들어온 것은 겨우 백 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소나무가 없어진 것은 벌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큰 이익이 한번 열리자 온갖 간사한 일이 따라 일어나서 거짓을 빙자하여 갈수록 더욱 심하니, 가령 진휼청에서 사산(四山)의 나무를 모조리 팔아서 수천 냥의 돈을 더 받는다 하더라도, 그 진휼하는 물자에 있어서 지극히 박하고 지극히 적으면서 관가에 손해가 되는 것은 더욱 클 것입니다.도성 사면의 모든 산에 백년 동안 기른 재목이 하루 아침에 모두 없어지고, 더욱이 북악은 이 국가의 진산(鎭山)이요 예법에 맞게 제사지내는 땅인데, 벌겋게 벗어진 산을 만들어 초목이 모두 없어져서 기상(氣像)이 쓸쓸하게 되었으나, 그 바라봄에 있어서도 극히 한심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나무를 파는 일을 곧 중지시켜서 소나무의 채벌을 금지하고 기르는 뜻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였다. 《염헌집》
○ 영종 경진년에 경덕궁(慶德宮)의 이름과 음(音)이 장릉(章陵)의 시호와 같다고 해서 경희(慶熙)로 고쳤다.
○ 보충 : 고사(故事)에 대궐의 건물은 5년에 한번씩 보수하고, 3년에 한번씩 수리하며, 봄ㆍ가을로 보살피게 하였다. 옛 재상 민진원(閔鎭遠)과 고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가장 수리를 잘했다고 하였다. 매양 담을 쌓을 때면 반드시 당상관ㆍ당하관과 장인의 성명을 담벽에 썼으니, 대개 그 오래되는 것을 상고하고 일을 잘하고 잘못한 것을 알고자 함이었으니, 옛사람들이 일의 실속에 이와 같이 힘썼다. 《일득록》


 

[주D-001]인지(麟趾)ㆍ종사(螽斯) : 《시경》의 편명들인데, 왕자들이 많이 출생한 것을 노래한 시이다.
[주D-002]하도(河圖) : 복희씨(伏羲氏) 때에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짊어지고 나왔다는 그림이다.
[주D-003]낙서(洛書) : 우(禹)임금 때에 낙수(洛水)에서 거북이가 짊어지고 나왔다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