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담유고/성수시화(惺叟詩話)

성수시화(惺叟詩話)

아베베1 2012. 3. 30. 09:20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북한산성의 모습이다 ( 2012.3.18. 춘설이 내린  삼각산의 모습이다)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說部) 4
성수시화(惺叟詩話)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 역시 정곡(鄭谷)ㆍ한악(韓偓)의 유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개는 경조하고 부박하여 후(厚)한 맛이 없다. 다만
가을 바람 일어라 애달픈 노래 / 秋風唯苦吟
한 세상 돌아봐도 지음 드무네 / 世路少知音
삼경이라 창밖에는 비가 으시시 / 窓外三更雨
만리라 등잔 앞엔 내 고향 생각 / 燈前萬里心
이라 한 절구(絶句) 한 수가 가장 훌륭하며, 또 다른 한 연구(聯句)에,
먼 나무는 강둑 길에 들쭉날쭉하고 / 遠樹參差江畔路
찬 구름은 말 앞의 봉우리에 떨어지네 / 寒雲零落馬前峯
라 하였으니, 역시 아름답다.
정 대간(鄭大諫 고려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고려 전성기에 있어 가장 아름답다. 유전된 것은 극히 적지만 편편이 모두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 부는 객선에 구름은 조각조각 / 風送客帆雲片片
이슬 엉긴 궁 기와엔 옥빛이 번쩍번쩍 / 露凝宮瓦玉粼粼
이라 한 것은 조금 가볍다 하겠고
버들 숲에 지게 닫은 엳아홉 집이라면 / 綠楊閉戶八九屋
밝은 달에 발 걷은 서너너덧 사람일레 / 明月捲簾三四人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신기하고 뛰어나다. 그,
바위 머리 소나무는 조각달에 늙었고 / 石頭松老一片月
하늘 끝의 구름은 천 점 산에 나직하네 / 天末雲低千點山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어렵지만 역시 청초(淸楚)한 맛을 지니고 있다.
정 대간의 서경시에
비 갠 긴 뚝에 풀빛은 더욱 짙고 / 雨歇長堤草色多
님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 언제나 다할 날이 있으리 / 大洞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는 것은 지금까지 절창이라고 일컫는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모두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 시만은 남겨 두었었다. 그 뒤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이 이 시에 화운(和韻)하기를,
강 언덕 길고 긴데 휘늘어진 능수버들 / 水岸悠悠楊柳多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터니 / 小船爭唱采菱歌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가웁고 / 紅衣落盡西風冷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 日暮芳洲生白波
라 했고, 이익지(李益之 이달(李達)의 자)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서로 사이해서 아가씨가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 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기약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고되이 배 저어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船逆上波
라 했다. 두 시가 매우 훌륭하여 왕소백(王少伯 소백은 당 나라 왕창령(王昌齡)의 자)ㆍ이군우(李君虞)의 여운이 있으나 이는 채련곡(採蓮曲)이라 서경 송별시의 본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도 유원순(兪元淳)의 문, 이인로(李仁老)의 시를 일컬었으니 이 대간(李大諫)의 시는 참으로 당시의 제일이었다. 그의
몇 번이나 이[蝨] 문대며 좋은 도략 일렀던고 / 幾回捫蝨話良圖
라는 구절은 썩 훌륭하여 구종길(瞿宗吉)의
지난날엔 이광 따라 범바위를 쏘더니 / 射虎他年隨李廣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의 춤을 추네 / 聞鷄中夜舞劉琨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 팔경시(八景詩) 또한 아름답다.
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 孔雀屛深燭影微
원앙새는 쌍쌍 자니 어찌 각각 날아가리 / 鴛鴦雙宿豈分飛
애닯구나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 自憐憔悴靑樓女
길이 남을 위하여 시집갈 옷 짓다니 / 長爲他人作嫁衣
라 했으니, 대개 대간이 오래도록 하관(下官)으로 있어 상기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랐으므로 재상의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의 시는 부려하고 방일하다. 그 칠석우(七夕雨)란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그 시에
얇은 적삼 삽자리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 輕衫小簞臥風欞
꾀꼬리 울음 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깼네 / 夢覺啼鸎三兩聲
짙은 잎에 가린 꽃은 봄 뒤까지 남아 있고 / 密葉翳花春後在
엷은 구름 헤친 햇살 빗속에 밝도다 / 薄雲漏日雨中明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읽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또,
관인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 官人閑捻笛橫吹
부들자리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 蒲席凌風去似飛
천상에 걸린 달은 천하가 함께 누릴 텐데 / 天上月輪天下共
내 배에 혼자 싣고 돌아오나 여기네 / 自疑私載一船歸
라고 한 시 또한 지극히 고일(高逸)하다.
같은 시대의 한림(翰林) 진화(陳澕)는 이 문순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했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그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 처졌는데 / 小梅零落柳僛垂
한가로이 청람(淸嵐) 밟아 걸음걸이 느리네 / 閑踏靑嵐步步遲
어점(漁店)은 닫기고 사람 소리 드문데 / 漁店閉門人語少
온 강의 보슬비는 실실이 푸르네 / 一江春雨絲絲碧
라고 한 작품은 청경(淸勁)하여 읊조릴 만하다.
사인(舍人) 홍간(洪侃)의 시는 농염(濃艶)하고 청려(淸麗)하다. 그 나부인(懶婦引)과 고안(孤雁) 등의 시편(詩篇)은 가장 훌륭하여 성당(盛唐) 시인의 작품과 흡사하다.
이견간(李堅幹)의 시에
여관에는 호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니 / 旅館挑殘一盞燈
사신(使臣)의 풍미가 중보다 담박하네 / 使華風味淡於僧
창 너머 두견 소리 밤새도록 듣노니 / 隔窓杜宇終宵聽
산꽃의 몇째 층에 울음소리 나는고 / 啼在山花第幾層
라 했는데, 이 시를 두고 당시에는 절창이라고 일렀다.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 이른바 두견이란 곧 소쩍새의 무리였다. 절강(浙江) 사람 왕자작(王子爵), 사천(泗川) 사람 상방기(商邦奇)가 함께 강릉(江陵)에 왔으므로 그들에게 내가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두견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개 시인들은 흥을 붙여 말하는지라, 비록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가운데 그 말을 쓴 것이다. 이를테면
수풀 너머 흰 잔나비 울음 부질없이 듣노라 / 隔林空聽白猿啼
와 같은 경우, 우리나라에는 본시 잔나비가 없고,
집집마다 긴 대 숲에 비취새 울음 우네 / 脩竹家家翡翠啼
와 같은 경우는, 파랑새를 보고 염주취(炎洲翠)라 한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서 해당화를 흔드네 / 鷓鴣驚簸海棠花
와 같은 경우는, 때까치가 깍깍 우는 것을 보고 행부득(行不得)이라 한 것이니, 모두 이와 같은 유이다.
원외(員外) 김극기(金克己)는 시상(詩想)이 극히 교묘하다. 겨울날에 핀 이화(李花)를 읊으면서 끝 구에
기이한 향내가 굴 속에 모여들어 / 無乃異香來聚窟
한궁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네 / 漢宮重見李夫人
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 시인이 아직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주(義州)에 있으면서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늘그막에 서로 즐길 만하니 / 文章向老可相娛
일검 짚고 변새(邊塞) 돌며 오거서(五車書)를 우러르네 / 一劍游邊尙五車
공무(公務)를 파하니 새리된 줄 내 몰라라 / 衙罷不知爲塞吏
종이 창문 밝은 곳에 누워 책을 보누나 / 紙窓明處臥看書
라 하였으니 그 세속 근심을 물리쳐 보내는 심사를 후련하게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최예산(崔猊山) 이익재(益齋 익재는 이제현(李齊賢)의 호)의 시권(詩卷)을 모두 먹칠해 지우고 다만,
얇은 이불에 한기(寒氣) 나고 불등은 흐릿한데 / 紙被生寒佛燈暗
상좌중은 한밤 내내 종 울리지 않는구나 / 沙彌一夜不鳴鍾
아마도 자고 난 손 문을 일찍 열고 나서 / 應嗔宿客開門早
뜰 앞에 눈 덮인 솔 보라 할까 꺼렸겠지 / 要見庭前雪壓松
라는 시 하나를 남겨두자, 익재가 크게 탄복하며 지음(知音)으로 여겼다고 하나 이는 모두 과장된 이야기다. 익재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으니 화오서곡(和烏棲曲)과 민지(澠池) 등의 고시(古詩)는 모두 옛 시에 핍근하고 여러 가지 율시(律詩)들 또한 홍량(洪亮)하다. 젊을 적에 지은 영사시(詠史時)의
뉘라서 알리오 업하의 순문약이 / 誰知鄴下荀文若
길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 永愧遼東管幼安
이라는 것이나, 또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떠날 줄 몰랐다면 / 不解載將西子去
월궁에는 도리어 고소대(姑蘇臺) 하나가 있었으리 / 越宮還有一姑蘇
라는 작품과, 또
이라는 등의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규모에 들어맞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발(發)하지 못했던 것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역시 영웅이 범인을 무시한 격이라 다 믿을 수는 없다.

익재의 장인은 곧 국재공(菊齋公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인데 부부가 함께 94세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다. 익재공이 장인을 애도한 만시(挽詩) 한 연(聯)에
항아는 광한전에 님 오시길 기다리나 / 姮娥相待廣寒殿
거사는 다만 홀로 도솔천에 돌아가네 / 居士獨歸兜率天
라고 했다. 권공(權公)이 부처를 좋아했기에 낙천도솔(樂天兜率)에 비유한 것은 무방하겠으나, 항아가 약을 훔친 것은 자고로 시인들이 속세로부터 선계(仙界)로 올라간 것을 비유함이 상례였는데, 이를 장모에게 쓴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昨過永明寺]’라는 작품은 별로 수식하거나 탐색한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 허영양(許穎陽)은 이를 보고 ‘당신네 나라에도 이와 같은 작품이 있소.’라고 했다. 그의 부벽루(浮碧樓) 시는 대편(大篇)인데 거기에
문 머리엔 고려 시가 상기도 걸렸으니 / 門端尙懸高麗詩
당시에도 하마 중화 문자 깨쳤다네 / 當時已解中華字
라고 했으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깔보기는 했으나 또한 문정공의 시에는 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정공은 원(元)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응봉한림(應奉翰林) 구양규재(歐陽圭齋) 이름은 현(玄)ㆍ 우도원(虞道園) 이름은 집(集)의 무리가 모두 추장(推獎)하였다. 규재는 탄복하면서
“우리의 의발(衣鉢)은 마땅히 해외로 그대에게 전해지리라.”
하였다. 그 후 문정공이 고려조 말에 곤궁해져서 이리저리 옮기며 쫓겨 다닐 적에, 문하생과 옛 동료 관리들도 모두 배반하여 돌을 던지니, 공이 시를 지어
의발은 마땅히 해외로 전하리란 / 衣鉢當從海外傳
규재의 한 말씀이 아직 귀에 낭랑한데 / 圭齋一語尙琅然
근래의 물가 모두 날개 돋혀 올라가나 / 近來物價俱翔貴
호올로 내 문장은 한 닢 값이 안 나가네 / 獨我文章不直錢
라 했는데, 대개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元)이 얼승(孼僧)을 보내왔을 적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작은 군사로 그들을 덕흥(德興)에서 크게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포상하여 문정공과 태조에게 명하여 함께 대정(大政)에 참여케 하였다. 교지(敎旨)를 선포하는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이르기를
“문관으로는 이색(李穡)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모(李某 이성계를 말함)를 쓰니 나의 사람 씀이 어떻소.”
하였다. 태조는 문정공과 사귐이 매우 두터웠기에 자기의 당호(堂號)를 지어 달라고 청하니, 문정은 송헌(松軒)이라 이름하고 설(說)을 지어 이를 권면하였으며, 또한 환조(桓祖)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후에 문정공이 외지(外地)에 유배되면서 아들 종학(種學)ㆍ종선(種善)도 모두 먼 곳에 귀양 가게 되자 문인 정총(鄭摠)ㆍ정도전(鄭道傳)이 문정을 여지없이 공격하였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송헌이 나라 맡자 나는 귀양 가게 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속엔들 이런 생각 어찌 한 번 해봤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鄭)이 게다가 대의에 참여한다니 / 二鄭況聞參大議
한 집안이 모일 날 언제 다시 있으리 / 一家完聚更何時
라 하였다. 첫구[首句]는 비록 가긍하나 뜻은 심히 오만하다.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의 호)은 이학(理學)과 절의가 일시의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하였다. 그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시에,
정주라 중구절(重九節)에 높은 곳을 올라보니 / 定州重九登高處
국화는 의구하다 눈에 비쳐 환하구나 / 依舊黃花照眼明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에 연해 있고 / 浦漵南連宣德鎭
산등성이 북으로 여진성에 비껴 있네 / 峯巒北倚女眞城
백 년 사이 전란(戰亂)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 百年戰國興亡事
만 리의 나그네는 강개한 정 끓는고야 / 萬里征夫慷慨情
술상 파하자 원수(元帥)는 말 붙들어 올라타고 / 酒罷元戎扶上馬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에 비치누나 / 淺山斜日照行旌
라고 했으니, 음절(音節)이 질탕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고장 태수는 이천 석의 자리라 / 風流太守二千石
옛 친구 해후하여 삼백 배를 기울이네 / 邂逅故人三百杯
라 한 것이나, 또는,
나그네 고향 못 가 제비 새끼 만나고 / 客子未歸逢燕子
살구꽃 떨어지자 복사꽃도 떨어지네 / 杏花纔落又桃花
라 한 것과, 또는
매화 핀 창에는 봄빛 이르고 / 梅窓春色早
판자 집 지붕에는 빗소리 많네 / 板屋雨聲多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방하게 펄펄 드날리니 그 사람됨과 비슷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여아는 머리에 꽃을 꽂고 / 江南女兒花揷頭
웃으며 짝을 불러 방주 가에 노는데 / 笑呼伴侶游芳洲
노 저어 돌아오니 날은 지려 하고 / 盪槳歸來日欲暮
원앙이 쌍쌍 날아 그지없는 시름이네 / 鴛鴦雙飛無限愁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또한 악부(樂府)와 흡사하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청신하고 섬부하였으니,
목은(牧隱)이,
“경지(敬之 김구용의 자)가 붓을 내려 쓰면 마치 운연(雲煙)과 같다.”
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일찍이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폐백을 요동(遼東)에 바치니, 도사(都司) 반규(潘奎)가 경사(京師)에 잡아보냈다. 그 자문(咨文)에 ‘말 50필’이라 할 것을 ‘5천 필’이라 잘못 적었기 때문이다. 명(明)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나라가 요동백(遼東伯)과 사교(私交)한 것에 대해 성을 내고 또 말하기를
“말 5천 필이 오면 풀어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고 했다. 이때 이 광평(李廣平 광평부원군 이인임(李仁任)을 말함)이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는데 평소에 공의 무리들과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황제가 공을 대리(大理)에 유배시키니,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생은 명이라 하늘 뜻을 어이하리 / 死生由命奈何天
동으로 부상 바라보니 고향 길은 아득한데 / 東望扶桑路渺然
양마라 오천 필이 어느 제나 닿을는지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 핀 문 밖에는 풀만 수북 우거졌네 / 桃花門外草芊芊
라 하였고, 또 무창(武昌)에서 지은 시에서
황학루 앞에는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
강따라 발 드리운 주막은 몇천 챈고 / 沿江簾幕幾千家
추렴한 돈 술을 사와 회포를 푸노라니 / 醵錢沽酒開懷抱
대별산 푸르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
라 했는데, 공은 마침내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그뒤 참의(參議) 조서(曺庶)가 또한 금치(金齒)에 유배당한 수년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황주(黃州)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 어루고 / 水光山氣弄晴沙
버들 푸른 긴 뚝에는 천만 채 집이로세 / 楊柳長堤千萬家
무수한 상선은 성 아래 대고 / 無數商船城下泊
죽루의 연월에는 젓대 노래 드높네 / 竹樓煙月咽笙歌
라고 하였다. 나는 장부의 몸으로 좁은 땅에 태어나 천하를 유람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왔었는데 두 공(公)은 비록 이방(異方)에 유배되었으나 그래도 오ㆍ초(吳楚)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쾌사라 할 수 있겠다.
이도은(李陶隱 도은은 이숭인(李崇仁)의 호)의 오호도시(嗚呼島詩)를 목은(牧隱)은 추장하여 성당(盛唐)에 비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삼봉(三峯)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고 기구한 화마저 당하게 되었다. 지난날 주 태사(朱太史)가 이 작품을 보고 또한 매우 감탄하였다. 그
산북과 산남으로 세로는 갈라지고 / 山北山南細路分
송화는 비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 松花含雨落紛紛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로 돌아오니 / 道人汲井歸茅舍
한 가닥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 一帶靑煙染白雲
라고 한 시는 유수주(劉隨州 당 나라 유장경(劉長卿))에게 무엇이 모자란다 하겠는가?
국초(國初)에는 정교은(鄭郊隱 교은은 정이오(鄭以吾)의 호)ㆍ이쌍매(李雙梅 쌍매는 이첨(李詹)의 호)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 시에
이월도 무르익어 삼월이 오려 하니 / 二月將闌三月來
한 해의 봄빛이 꿈속에 돌아오네 / 一年春色夢中回
천금으로도 가절은 살 수가 없으니 / 千金尙未買佳節
술 익는 뉘 집에서 꽃은 정히 피었는고 / 酒熟誰家花正開
라 한 시는 당인(唐人)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소리 쟁그랑쟁그랑 / 神仙腰佩玉摐摐
고루에 올라와서 벽창에 걸어놓고 / 來上高樓掛碧窓
밤 들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 入夜更彈流水曲
한 바퀴 밝은 달이 가을 강에 내리누나 / 一輪明月下秋江
라고 한 시 역시 빼어난 아취가 있다.
쌍매의 문앵시(聞鸎詩)에
삼십육궐(三十六闕) 후궁에 봄 나무 깊숙하고 / 三十六宮春樹深
미인이 꿈을 깨니 남창은 어둑해라 / 蛾眉夢覺午窓陰
영롱한 울음소리 수심 엉겨 듣자 하니 / 玲瓏百囀凝愁聽
모두가 향규의 님 바라는 마음일레 / 盡是香閨望幸心
라 했으니 두목지(杜牧之)의 시와 흡사하다.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때 이미 관직이 현달하였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체하며 세상을 즐기고 지내면서 사평원주(沙坪院主)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당여(黨與)로서 외지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길에 줄이은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 柴門日午喚人開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돌에 앉으니 / 步出林亭坐石苔
어젯밤 산중의 비바람이 거칠더니 / 昨夜山中風雨惡
개울 가득 흐르는 물 꽃잎이 떠 내려오네 / 滿溪流水泛花來

세종조(世宗朝)에는 인재가 일시에 배출되어 뛰어난 문장 석학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고시(古詩)는 옛사람에 비하면 자못 부끄러울 뿐 아니라 율시나 절구에 있어서도 놀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의 시가 지리하지만 그래도 부섬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도 있다. 이를테면
노는 벌은 쉴 새 없이 날기만 하고 / 游蜂飛不定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 조누나 / 閑鴨睡相依
달빛은 벌레 소리 너머 비치고 / 月色蛩音外
은하는 까치 그림자 속에 흐르네 / 河聲鵲影中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 번 난새 타고 철적을 불며 / 更欲乘鸞吹鐵笛
깊은 밤 밝은 달에 강남을 찾고 싶네 / 夜深明月過江南
와 같은 구절들은 역시 아취가 있다.

김괴애(金乖崖 괴애는 김수온(金守溫)의 호)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 柴門不整臨溪岸
산 비에 아침마다 물 나는 걸 보누나 / 山雨朝朝看水生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에 중은 납의(衲衣)를 깁고 / 窓虛僧結衲
고요한 탑에 손은 시를 짓누나 / 塔靜客題詩
라 한 구절들은 매우 한원(閑遠)하여 운치가 있다.

강경순(姜景醇 경순은 강희맹(姜希孟)의 자)의 양초부(養蕉賦)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또한 청경(淸勁)하다. 그 병여음(病餘吟)에
남창에 종일토록 세사(世事) 잊고 앉았으니 / 南窓終日坐忘機
뜨락 채엔 사람 없어 새는 날기 배우네 / 庭院無人鳥學飛
가는 풀에 그윽한 향내 어디에서 나는지 / 細草暗香難覓處
묽은 연기 낡은 빛에 부슬부슬 비내리네 / 澹煙殘照雨霏霏
라 하고, 영매(詠梅)에,
어둘녘 울 가에서 퍼진 가지 보고서 / 黃昏籬落見橫枝
느린 걸음 향내 찾아 물가에 와 닿으니 / 緩步尋香到水湄
천년의 나부산(羅浮山) 둥근 달이 / 千載羅浮一輪月
지금에 와 비치니 꿈이 깨일 때로세 / 至今來照夢回時
라 한 시구들은 모두 한아(閑雅)하여 읊조릴 만하다.

서사가(徐四佳)가 오랫 동안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므로 동시대의 강진산(姜晉山 진산은 강희맹(姜希孟)의 봉호)ㆍ이양성(李陽城 양성은 이승소(李承召)의 봉호)ㆍ김영산(金永山 영산은 김수온(金守溫)의 봉호)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문형(文衡)을 주관하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이양성의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들 푸른 골목에 동녘 바람 저물었고 / 綠楊門巷東風晩
풀 푸른 못가에 부슬비는 침침하네 / 靑草池塘細雨迷
라 한 구절은 당 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는 고체(古體)를 본뜬 것이 없는데 오직 성화중(成和仲 화중은 성간(成侃)의 자)이 안연령(顔延齡)ㆍ도잠(陶潛)ㆍ포조(鮑照) 세 사람의 시를 본뜬 세 편의 시는 깊이 그 법을 얻었으며 여러 절구 역시 당의 악부체(樂府體)를 얻었으니 이분에 힘입어 가까스로 적요함을 면하게 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의 글은 요체는 깨달았으나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오로지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에게서 나왔으니 전고자(銓古者 고전을 비평하는 사람)가 작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 중형은 일찍이 그의 시를 말씀하기를
학 울자 맑은 이슬 내려 맺히고 / 鶴鳴淸露下
달 뜨자 큰 고기 뛰어오르네 / 月出大魚跳
라 한 구절은 결코 성당(盛唐)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오는데 중이 장삼을 꿰매고 / 細雨僧縫衲
찬 가람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 寒江客棹舟
와 같은 구절은 심히 한담(閑淡)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
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시 속에 / 十年世事孤吟裏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에 / 八月秋容亂樹間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에서 지은,
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 上方鍾動驪龍舞
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 萬竅風生鐵鳳翔
라 한 구절의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함만 같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우주를 버팀직한 시구이다. 그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에서는
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 桃花浪高幾尺許
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 銀石沒頂不知處
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 兩兩鸕鶿失舊磯
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 銜魚却入菰蒲去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

김열경(金悅卿 열경은 김시습(金時習)의 자)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니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시문도 초매하나 마음 쓰지 않고 유희삼아 지었기 때문에 억센 화살의 최후와 같아서 매양 허튼 말이 섞이니 장타유(張打油)와 같아 싫증이 난다. 그가 세향원(細香院)에 쓴 시에
아침해 돋으려 하니 새벽빛이 갈라지고 / 朝日將暾曙色分
숲 안개 걷힌 곳에 새는 떼를 부르누나 / 林霏開處鳥呼群
먼 봉에 뜬 푸른 빛 창 열고 바라보며 / 遠峯浮翠排窓看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에서 듣는다 / 隣寺鍾聲隔巘聞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솥을 엿보고 / 靑鳥信傳窺藥竈
벽도화 떨어져 이끼에 비추이네 / 碧桃花下照苔紋
아마도 신선은 조원각(朝元閣)에 돌아가서 / 定應羽客朝元返
솥 아래 한가로이 소전문을 펴 보리 / 松下閑披小篆文
라 했고, 소양정(昭陽亭)에서는
새 너머 하늘은 끝나려 하고 / 鳥外天將盡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 吟邊恨未休
산은 첩첩 북을 따라 굽이쳐 가고 / 山多從北轉
강은 절로 서쪽 향해 흐르는구나 / 江自向西流
먼 물가에 기러기 내려와 앉고 / 雁下汀洲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려오네 / 舟回古岸幽
어느 제나 속세 그물 떨쳐버리고 / 何時抛世網
흥을 따라 이곳에 다시 와 놀아볼까 / 乘興此重遊
라 했고, 산행(山行)에서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 고치고 / 兒捕蜻蜓翁補籬
작은 개울 봄 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 小溪春水浴鸕鶿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 靑山斷處歸程遠
등나무 한 지팡이 비껴 메고 오누나 / 橫擔烏藤一個枝
라 했는데, 모두 속기를 떨쳐버려 화평(和平)하고 담아(澹雅)하니 저 섬세하게 다듬는 자들은 응당 앞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조매계(曺梅溪 매계는 조위(曺偉)의 호)ㆍ유뇌계(兪㵢溪 뇌계는 유호인(兪好仁)의 호)는 일시에 함께 성명을 드날렸으나 정순부(鄭淳夫 순부는 정희량(鄭希良)의 호)보다는 못했다. 그 혼돈주가(渾沌酒歌)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蘇東坡)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맘 비춰 고국에 다다르고 / 片月照心臨故國
낡은 별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 殘星隨夢落邊城
라고 한 구절은 극히 신일(神逸)하며,
나그네 길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 客裏偶逢寒食雨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 봄을 생각하네 / 夢中猶憶故園春
라 한 시구에는 중당(中唐)의 고아(高雅)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 안 뵈고 눈만 보이나니 / 春不見花唯見雪
기러기 안 오는 곳 사람 어이 찾아오리 / 地無來雁況來人
라 한 구절은 비록 다듬은 흠이 있으나 또한 다정다감하다.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아침해는 붉게 뿜어 발해에 솟구치고 / 朝日噴紅跳渤澥
갠 구름 희게 펴져 무려산(巫閭山)을 나오네 / 晴雲挹白出巫閭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 마루 눈으로 비껴 닿고 / 凍雨斜連千嶂雪
주린 까마귀 한 수풀 바람에 놀라 우네 / 飢烏驚叫一林風
라 한 시구는 노창(老蒼)하고 기걸(奇杰)하다. 통주(通州)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승경(勝景)인지라 / 通州天下勝
누각들이 구름 하늘에 솟았구려 / 樓觀出雲霄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物貨) 쌓이고 / 市積金陵貨
강 줄기는 양자의 물결로 가네 / 江通揚子潮
가을이라 갈가마귀 물가에 내리고 / 寒鴉秋落渚
저녁 되니 외론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 獨鶴暮歸遼
말에 탄 신세는 천리 나그네 / 鞍馬身千里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멀고멀어라 / 登臨故國遙
라 했는데, 이 역시 기막히게도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수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은 일찍이, 김일손(金馹孫)의 글이나 박은(朴誾)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성(正聲)은 아니나 엄진(嚴縝)하고 경한(勁悍)하다.
흐린 봄날 비 오련다 새는 서로 지저귀고 / 春陰欲雨鳥相語
늙은 나무 무정하니 바람 절로 슬퍼지네 / 老樹無情風自哀
와 같은 구절은 당의 섬려(纖麗)한 시풍만을 배운 자로는 어찌 감히 그 경지에 올라설 수 있으랴.
폐주(廢主 연산군을 가리킴)는 비록 황란(荒亂)하였으나 또한 시문을 좋아하였다. 강목계(姜木溪 목계는 강혼(姜渾)의 호)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 寒食園林三月暮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 落花風雨五更寒
라 한 시구로 시제(詩題)를 내고서 근신(近臣)들에게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는데 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이라 궁 버들은 찬 내에 잠기고 / 淸明御柳鎖寒煙
쌀쌀한 봄바람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 料峭東風曉更顚
지는 꽃 땅에 붉게 포개지고 / 不禁落花紅襯地
나는 버들개지 하늘 희게 뒤덮누나 / 更敎飛絮白漫天
못물 너머 높은 누각 구슬발을 걷고 / 高樓隔水褰珠箔
세오마(細烏馬)는 꽃을 찾아 비단 언치 빛내네 / 細馬尋芳耀錦韉
금동이 술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 醉盡金樽歸別院
오색 끈 흔들리며 그림 난간 가로 끄네 / 綵繩搖曳畫欄邊
라 했는데, 폐주는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폐주가 죽은 희첩(姬妾)을 슬퍼하여 사신(詞臣)들로 하여금 만시(挽詩)를 짓게 하였는데 이백익(李伯益 백익은 이희보(李希輔)의 자)이 시를 짓되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 宮門深鎖月黃昏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들린다 / 十二鍾聲到夜分
어디메 청산에 옥골을 묻었는지 / 何處靑山埋玉骨
가을 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듣겠네 / 秋風落葉不堪聞
라 하니 폐주가 극찬하였고 드디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서 직제학(直提學)으로 발탁되었다. 두 편 시가 비록 좋기는 하나 두 사람도 또한 이 때문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李容齋)를 첫째로 함이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순숙(純熟)하다. 오언고시(五言古詩)는 두보(杜甫)와 진후산(陳後山)의 품격과 비슷하여 고고(高古)ㆍ간절(簡切)하여 글이나 말로는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에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로
평생에 사귄 벗 모두 늙어 죽어가고 / 平生交舊盡凋零
흰머리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라 / 白髮相看影與形
때마침 고루에 달조차 밝은 밤엔 / 正是高樓明月夜
애처로운 피리소리 어찌 차마 들으리 / 笛聲凄斷不堪聽
는 감개가 무량하여 이를 읽노라면 가슴이 메어진다.

국조(國朝)의 시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용재 상공(容齋相公)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ㆍ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ㆍ충암(冲庵) 김정(金淨)ㆍ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족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齋)는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지천(黃芝川)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익지(李益之)가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여장(權汝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정호음은 추앙 굴복하는 경우가 적었고 다만 눌재의 시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고적부터 흘러오고 / 西北二江流太古
동남의 두 산줄기 신라를 파고드네 / 東南雙嶺鑿新羅
라는 것과,
거문고 타던 사람은 학 가의 달로 가고 / 彈琴人去鶴邊月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에 오네 / 吹笛客來松下風
라는 시구를 써 놓고 스스로 탄식하며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르기를,
“허종경(許宗卿)의 시에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 野路欲昏牛獨返
강 구름이 비오려 하니 제비가 낮게 나네 / 江雲將雨燕低飛
라는 구절은 강목계(姜木溪)의
붉은 제비 엇날자 바람은 버들 스치고 / 紫燕交飛風拂柳
청개구리 와글 울자 비는 산에 어둑어둑 / 靑蛙亂叫雨昏山
이라 한 시구와 서로 대적할 만하다.”
고 했다. 그 당시 ‘신기재의 시는 중체(衆體)를 모두 갖추었으나 호음은 칠언율시에만 능했으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고들 했는데, 호음은 ‘그의 중체가 감히 내 율시 한 구를 당할소냐.’ 했으니 그의 자부가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
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
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
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
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
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
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
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
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호음이 그것을 보다가 《춘정집(春亭集)》이 나오니 땅에 던져버렸고, 《매계집(梅溪集)》은 펴보고 웃으며 덮었는데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佔畢齋集)》만은 집어들고 익히 보기를 마지않았다. 익지가 엿보니 모두 뽑아서 줄을 그으니 대개 그들을 좋아하여 소재로 취해 시의 자료로 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에 가장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는 시구를 물었더니
산 나무 함께 우니 바람 언뜻 일어나고 / 山木俱鳴風乍起
강물 소리 문득 높자 달이 홀로 걸렸네 / 江聲忽厲月孤懸
라는 구절을 사람들이 깎은 듯 아름답다고들 하고,
산꼭대기에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 다투고 / 峯頂星搖爭缺月
나무 위에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숨는고야 / 樹顚禽動竄深蕞
라는 시구 역시 시상(詩想)은 교묘하지만 마침내
빗기운 노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 雨氣壓霞山忽暝
냇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 川華受月夜猶明
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에 뉘엿 비치고 / 落日臨荒野
갈가마귀 저문 마을 내리는고야 / 寒鴉下晩村
빈 수풀엔 연화가 싸늘히 식고 / 空林煙火冷
초가집도 사립문 걸어 닫았네 / 白屋掩柴門
는 유장경(劉長卿)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牛島歌)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하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가진 재치를 다 부렸다. 그래서 신기재(申企齋)는 그를 추존(推尊)하여 장길(長吉)에게 견주었다.
최원정(崔猿亭 원정은 최수성(崔壽峸)의 호)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靜庵 조광조의 호)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황급히 물을 달라고 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제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났다.”
고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
“이는 우리들을 풍자하는 말이다.”
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원충(元冲 김정(金淨)의 자)이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 / 淸曉巖峯立
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 / 白雲橫翠微
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 / 江村人不見
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 / 江樹遠依依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萬義寺)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중이 지키고 있고 / 古殿殘僧在
수풀 끝엔 저녁 종 맑게 울리네 / 林梢暮磬淸
창문은 트이어 천리 끝 닿고 / 窓通千里盡
담장이 눌러 서니 뭇산은 평평 / 牆壓衆山平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 木老知何歲
새는 별난 목청 우짖고 있네 / 禽呼自別聲
험난한 세망에 걸릴까 근심하려니 / 艱難憂世網
오늘에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 今日恨吾生
라고 했다. 결구(結句)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도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애석하구나.

김이숙(金頣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읊조리기를
봄은 우전의 산천 밖에 무르익고 / 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우정의 조수 사이 아뢰누나 / 樂奏虞庭鳥獸間
라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어(詩語)이다.”
고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이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해 정시(庭試)에 들어가니 연산(燕山)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봄날 이원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들춰보다.[春日梨園弟子沈香亭畔閑閱樂譜]’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閑) 자를 압운(押韻)으로 해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이 생각하니 그 글귀가 꼭 들어 맞는지라 이내 그걸 가지고 써 냈다. 강목계(姜木溪 목계은 강혼(姜渾)의 호)가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크게 칭찬하고 장원(壯元)을 시켰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본디 글을 잘 안다고 이름이 난지라 참시관(參試官)을 하면서,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 즉시 그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신낙봉(申駱峰 낙봉은 신광한(申光漢)의 호)의 시는 청절(淸絶)하여 아취가 있다. 중추(中秋)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中秋舟泊長灘]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 기슭에 외론 배 매고 보니 / 孤舟一泊荻花灣
양 갈래 맑은 강에 사면에는 산이로세 / 兩道澄江四面山
인세(人世)에도 이 밤 같은 달이야 없을까만 / 人世豈無今夜月
백년 가도 바랄쏜가 이 가운데 보는 달을 / 百年難向此中看
이라 하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船上望三角山]라는 시에
외론 배 잡아타고 광릉(廣陵) 나루 떠나오니 / 孤舟一出廣陵津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몸이라 / 十五年來未死身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 我自有情如識面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할 수 있으랴 / 靑山能記舊時人
라 했다. 김 공석(金公碩)의 옛 집을 지나며[過金公碩舊居]라는 시에
같은 때 귀양살이 몇 사람이 남았는고 / 同時逐客幾人存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누나 / 立馬東風獨斷魂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길에 / 煙雨介山寒食路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 不堪聞笛夕陽村
라 하고, 삼월 삼짇날에 박대립에게 부침[三月三日寄朴大立]이라는 시에
삼월 삼일 구월 구일 해마다 만나자던 / 三三九九年年會
옛 약조는 남아 있되 일은 오직 어그러져 / 舊約猶存事獨違
방초에 답청할 날 오늘이 맞건마는 / 芳草踏靑今日是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가 아닐세 / 淸尊浮白故人非
바람 앞의 제비 소리 앳되게도 들리나 / 風前燕語聞初嫩
비내린 뒤 꽃가지는 또한 보기 어렵네 / 雨後花枝看亦希
모동의 어른들이 탈속(脫俗)한 이 많으니 / 茅洞丈人多不俗
봄옷을 전당잡힐 생각이 없을쏜가 / 可能無意典春衣
라 했으니, 편편이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기(雄奇)함에 있어서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에 미치지 못하나 청창(淸暢)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하겠다.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시는 시취(詩趣)가 있어 이따금 성당시(盛唐詩)에 접근하고 있다. 신광한과 정사룡 등 노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바야흐로 포도(蒲桃) 그림 족자를 놓고 시를 읊으려 하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음이 술에 취해 와서는 붓을 빼앗아 들고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호음이 그냥 두라고 하니, 장음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 落日枯楂上
우뚝 앉아 고개도 아니 돌리니 / 兀坐首不回
아마도 천산의 메아리 듣는 거지 / 想聽千峯響
라 하였다. 호음이 크게 칭찬하고는 붓을 놓아버리고 짓지 않았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성당 이주가(伊州歌)의 법이니 이른바 한 구절이라도 끊어 놓으면 시편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퇴휴(蘇退休 퇴휴는 소세양(蘇世讓)의 호)가 젊었을 적에는 상 좌상(尙左相 상진(尙震)을 가리킴)과 동료로 지냈는데 상(尙)이 하관(下官)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린 화축(畫軸)을 가지고 퇴휴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퇴후가 절구 한 구를 지어 써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 비치고 / 蕭蕭孤影暮江潯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 紅蓼花殘兩岸陰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대며 / 漫向西風呼舊侶
구름 물 만 겹이나 깊은 줄 모르누나 / 不知雲水萬重深
라 했으니, 함축된 의사가 심원한지라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심어촌(沈漁村 어촌은 심언광(沈彦光)의 호)은 늘그막에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자 내쫓겨 북도방백(北道方伯)이 되었는데 시를 짓기를
넓은 강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거늘 / 洪河欲濟無舟子
추운 나무 시드는데 더부살이 있구나 / 寒木將枯有寄生
라 했으니, 대개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것일 것이다.
임석천(林石川 석천은 임억령(林億齡)의 호)은 사람됨이 고매하고 시 역시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洛山寺詠)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형세로 문세(文勢)가 날아 꿈틀거려 그 기이한 경치와 자못 장려함을 다툴 만하였다. 그 시에
마음은 유수와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 心同流水世間出
꿈에는 백구 되어 강 위를 나네 / 夢作白鷗江上飛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높아 신룡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풍류가 호일(豪逸)하고 그 시 또한 펄펄 나는 듯하니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이고 / 花低玉女酣觴面
끊어진 산은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 山斷蒼虯飮海腰
라 한 시는 지금까지 사람 입에 회자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를 몹시 사랑하여 만년까지도 문득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면 임사수(林士遂 사수는 임형수의 자)와 더불어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고광(高曠)하고 이수(夷粹)한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은 그의 등취대시(登吹臺詩)를 극찬하여 고적(高適)ㆍ잠참(岑參)의 높은 운이라 했다고 한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곳에 / 梁王歌舞地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 此日客登臨
구름을 능지를 강개한 흥취 / 慷慨凌雲趣
옛을 묻는 처량한 마음이로세 / 凄凉弔古心
긴 바람은 먼 들에 일어나는데 / 長風生遠野
밝은 해는 층산(層山) 뒤에 숨어 버리네 / 白日隱層岑
그 시절의 번화한 일들을 이제 / 當代繁華事
아득하니 어디에서 찾아보리오 / 茫茫何處尋
라 한 것은 침착하고 준위(俊偉)하여 가늘고 약한 태를 일시에 씻어버렸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하서가 죽은 후 영남(嶺南)의 하양(河陽)에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소생하여 말하기를,
“꿈에 천부(天府)에 갔었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소원(小院)으로 데리고 가니 거기에 윤건(綸巾)을 쓴 학사가 있어 김하서라고 하면서 ‘너는 금년에 하늘에 오름이 합당치 않으니 나가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며 시로써 보냈는데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 대년(大年)은 그 자(字)인데 / 世億其名字大年
천문(天門)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 뵈었더라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 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볼지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계 돌아가 함부로 전치 말라 / 歸去人間莫浪傳”
고 하였다.
세억은 효자였는데, 그 후 과연 77세에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선친(先親)께서는 늘,
“윤장원(尹長源)의 재주는 따를 수 없다.”
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쪽배 위에 꿈은 천리 떠도는데 / 海闊孤舟千里夢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다 / 月明長笛數聲秋
한 것과,
맞바람이 살구에 불어 중문을 때리네 / 交風吹杏打重門
라는 시구를 매양 칭송하면서 청절(淸切)하여 고시(古詩)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선친께서는 기묘년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權習齋 습재는 권벽(權擘)의 호)가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가면서 우리 선친을 송별한 시에,
평생의 회포 좋이 푸리라 여겼더니 / 懷抱平生擬好開
담소를 이제부턴 모시기도 흔찮구려 / 笑談從此未多陪
달빛 비친 요하 건너 나는 사신길 떠나고 / 朝天我渡遼河月
유령 매화 찾으며 군은 부절(符節) 안고 가리 / 擁節君尋庾嶺梅
맡은 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 職事道途俱可念
이별이라 노쇠(老衰)라 서로 재촉하네 / 別離衰謝兩相催
공무 여가 벗 그리는 노래를 짓는다면 / 公餘倘有停雲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주기 바라네 / 佇望詩筒數寄來
라 하였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적당하다고 칭찬하셨다.

선친의 송행시첩(送行詩帖)에 있는 소상(蘇相 소세양을 가리킴)의 시 가운데
백옥당 이뤄진 지 오래이러니 / 白玉堂成久
황금대 하사받기 오늘이라네 / 黃金帶賜今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朴守庵 수암은 박지화(朴枝華)의 호)의 시 가운데,
경월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 忽看卿月上
내 옷이 화사하다 뉘 아깝다 하리 / 誰惜我衣華
라는 절구는 바로 경책(警策)이다. 그가 미암(眉庵)을 애도한 시에
천추의 푸른 바다 물결 위에서 / 千秋滄海上
백일은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 白日大名垂
라 한 것은 어찌 두릉(杜陵 두보를 가리킴)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박수암이 청학동(靑鶴洞)에서 놀며 지은 시에,
고운은 당 나라 진사였으니 / 孤雲唐進士
당초에 신선을 아니 배웠네 / 初不學神仙
만촉같은 삼한의 날이라면 / 蠻觸三韓日
풍진은 온 누리에 가득찼구려 / 風塵四海天
영웅을 어이 가늠할 수 있으리 / 英雄那可測
진결은 본디 아니 전하는 것을 / 眞訣本無傳
봉래산(蓬萊山)에 한번 들어가 버린 후에 / 一入蓬山去
청향(淸香)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 淸芬八百年
는 연한(淵悍 깊고 굳셈), 간질(簡質 조촐하고 질박함)하며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것이다.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의 호)가 풍악(楓岳)에서 놀 제 돌 위에 시를 새겨
백옥경과 / 白玉京
봉래섬엔 / 蓬萊島
아득할손 연파는 예스럽고 / 浩浩煙波古
따스할손 풍일(風日)은 좋을씨고 / 熙熙風日好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 碧桃花下閑來往
학 등의 피리 소리 천지는 늙어가네 / 笙鶴一聲天地老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때에 송경(宋暻)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서자(庶子)였다. 그 또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 鶴軒昂
봉은 휘적이며 / 鳳逶遲
삼신산 아래로 굽어보고 / 三山朝下
오색구름 가운데를 질러 나네 / 五雲中飛
천지는 석 자의 지팡이라면 / 乾坤三尺杖
신세는 한 벌의 육수의로세 / 身世六銖衣
바위 꼭지 나무에 긴 칼 좋이 걸어두고 / 好掛長劍巖頭樹
맑은 샘 희롱하며 붉은 지초(芝草) 캐먹노라 / 手弄淸泉茹紫芝
고 하니, 봉래가 극도의 찬사를 보내고 돌아가신 형도 기꺼이 칭찬하였다.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
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
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
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
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
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
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
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
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
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
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소재(蘇齋) 노(盧) 정승이 승축(僧軸)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 및 익지(益之)의 시가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이 시대에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 當代文章伯
유독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 唯稱李與崔
라 하였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중형 또한 말하기를,
“이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시(唐詩)를 법받은 자로서는 그 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학은 가을 하늘에 내려오고 / 中天笙鶴下秋霄
천년의 고운은 하마 벌써 적막하구나 / 千載孤雲已寂寥
밝은 달 트인 문엔 유수가 놓였으니 / 明月洞門流水在
어디쯤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네 / 不知何處武陵橋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면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여겼었다.
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명(地名)은 시(詩) 속에 들여와도 우아한 맛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대기는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 氣蒸雲夢澤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 波撼岳陽城
와 같은 시구를 보면 무릇 열 글자 중에서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그 위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이요, 그 힘쓴 곳은 다만 증(蒸)자와 감(撼)자, 이 두 글자뿐이니 시를 짓기가 어찌 수월하지 않은가.”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또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 정승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 路盡平丘驛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진다네 / 江深判事亭
청파의 저녁에 버들빛 짙고 / 柳暗靑坡晩
백악의 봄날에 하늘은 맑네 / 天晴白嶽春
같은 구절은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

박사암(朴思庵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의 시에
은파에 오래 젖어 이 마음 쉴새없이 / 久沐恩波役此心
새벽 닭 울자마자 조복(朝服)을 챙기누나 / 曉鷄聲裏戴朝簪
강남의 들집이 봄풀에 파묻히니 / 江南野屋春蕪沒
도리어 산승시켜 대숲을 지키라네 / 却倩山僧護竹林
라 했으니 아, 사대부로서 그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의 녹봉에 끌리어 고개를 숙이고 이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한 번 탄식의 소리를 내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은 근대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近體詩)에 솜씨가 뛰어나다. 노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황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모두 1천년 이래의 절조이다. 그러나 장편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양경우(梁慶遇)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어떠할지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경우가 박(朴)ㆍ이(李)의 잠두(蠶頭)는 어떤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한퇴지(韓退之)에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억세고 한 사람은 번거로우니 그 지극한 것은 아니다.”
고 하니,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호)의 진양형제도(晉陽兄弟圖)와 충암의 우도가(牛島歌)는 어떤지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굉걸(宏烋)하나 막힘이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음침하다.”
고 하니,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하여 대답하되,
“어잠부(魚潛夫 잠부는 어무적(魚無迹)의 호)의 유민탄(流民歎)과 이익지의 만랑무가(漫浪舞歌)일 것이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시로 본다면 기재(奇才)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그 역시 크게 웃었다.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和順)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金潤)과 서로 사귀고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병사(兵使)가 일찍이 진남루(鎭南樓)를 건축하고는 진사를 맞아 들여 대편(大篇)의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술김에 한번 붓을 휘저어 육십 구를 이뤘는데 그 첫구에 이르기를
만 근의 무지개 들보 주작을 누르고 / 虹梁萬鈞壓朱雀
용이마엔 공손랑이 칼춤을 추네 / 龍顔舞劍公孫娘
라 했으니,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근근히 기슭에 닿자 정자에 올라 시를 짓기를
의관은 모두 쓸려 광류에 잃었지만 / 衣冠俱被狂流失
몸은 부모님 주신 대로 남았구나 / 身體猶存父母遺
높은 정자 다시 올라 갠 경치 보노니 / 更上高亭看霽景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네 / 秋山淡碧入新詩
라 하였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60세 후에 처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유일(遺逸)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
시재(詩才)는 우뚝하니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나 / 詩才突兀行間出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네 / 官況蹉跎分外奇
이 모두 인생에는 각기 명이 있으니 / 摠是人生各有命
유유한 남은 일은 미뤄두고 지날밖에 / 悠悠餘外且安之
라 하였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 이백생(李伯生 백생은 이순인(李純仁)의 자)ㆍ최가운(崔嘉運 가운은 최경창(崔慶昌)의 자)ㆍ하대이(河大而 대이는 하응림(河應臨)의 자) 의 무리들이 함께 당운(唐韻)을 숭상하여 대궐안의 소도(小桃)를 두고 읊어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이에 화운하기를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댔는데 / 無數宮花倚粉牆
벌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을 좇아가네 / 游蜂戲蝶趁餘香
늙은이는 봄바람을 채 보지 못하고 / 老翁不及春風看
속절없이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이로세 / 空有葵心向太陽
라 하였다. 이처럼 함축된 뜻이 심원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니 시를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것 고운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成牛溪 우계는 성혼(成渾)의 호)의 한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에 운산이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에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拜鵑窩)위에 뜬 삼경의 달빛은 / 拜鵑窩上三更月
아마도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
고 하였는데,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으뜸이다. 그의 시가 초년부터 당을 법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平海)에 귀양 가서 비로소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高霽峰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의 시 또한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는 가운데 크게 진보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에 문장이란 부귀 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과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얻은 후에라야 묘경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공(二公)뿐만 그러하랴. 고인이 모두 이러하니 유주(柳州)로 좌천됐던 유자후(柳子厚)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고죽(崔孤竹)의 시는 한경(悍勁)하며 백옥봉(白玉峯 옥봉은 백광훈(白光勳)의 호)의 시는 고담(枯淡)하다. 모두 당시(唐詩)의 노선(路線)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李益之)는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러므로 최ㆍ백을 함께 뭉쳐 나름대로 대가를 이루었다.

고죽(孤竹)의 시는 편편이 다 아름다우니 반드시 갈고 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은 다음에야 내놓기 때문이다. 이가(二家 최경창, 백광훈)의 시를 나는 골라서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음(正音)에 들어 맞을 만하나 그 밖의 것은 뇌동(雷同)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그리고 돌아가신 형님의 고가행(古歌行) 소재 정승의 오언율시, 황지천의 칠언율시, 이손곡(李蓀谷)ㆍ백옥봉 및 돌아가신 누님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을 만들고 읽어보니 그 음절(音節)과 격률(格律)이 모두 고인에게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氣)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 소리를 돌이킬 수 있을 것인가?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시가 비록 번잡한 것 같으나 기(氣)는 나름대로 창대(昌大)하여 작가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호)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실지의 안목은 높아서 일세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나와 여장ㆍ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만을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는 허세가 있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
실지는 망형(亡兄)의 글을 칭찬하기를,
“문장을 깊이 아는 자는 허미숙(許美叔 미숙은 허봉(許篈)의 자)이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묻기를,
“후배로서 누가 망형을 잇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 그를 이을 만하니 청량(淸亮)함은 미치지 못하나 농후(濃厚)함은 그를 넘어선다고 봅니다.”
했다.
정송강(鄭松江 송강은 정철(鄭澈)의 호)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思美人曲) 및 권주사(勸酒辭)는 모두 그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이론(異論)하는 자들은 이를 배척하여 음사(陰邪)하다고는 하지만 문채와 풍류는 또한 엄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있어 왔다. 여장이 그의 묘를 지나며 시를 지었는데
빈산에 나뭇잎 우수수 지니 / 空山木落雨蕭蕭
상국의 풍류는 이곳에 묻혀 있네 / 相國風流此寂寥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 惆悵一杯難更進
지난날 가곡은 오늘 두고 지은 걸세 / 昔年歌曲卽今朝
라 했다. 자민이 강 가에서 노래를 듣는다[江上聞歌]의 시에
강 어귀에 그 뉘라서 미인사(美人辭)를 부르니 / 江頭誰唱美人辭
때마침 강 어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 正是江頭月落時
서글퍼라 님 그리는 무한한 마음을 / 惆悵戀君無恨意
세상에선 오로지 여랑만이 알고 있네 / 世間唯有女郞知
라 했는데, 두 시가 모두 송강의 가사(歌辭)로 인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들 자민의 시는 둔하여 드날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에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 푸르르게 늘어지니 / 雨晴官柳綠毿毿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라네 / 客路初逢三月三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 共是出關歸未得
가인은 망강남의 노래를 부르지 마소 / 佳人莫唱望江南
는 청초(淸楚)하고 유려(流麗)하니 중국 사람들과의 차이가 어찌 많다 할 수 있겠는가?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
“평양에 함께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교(交) 자로 운을 내니 고공(高公)이 이에 화답하기를,
마을 연댄 벼 기장은 삼추 지나 무르익고 / 連村稌黍三秋後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이라 초승일세 / 一路風霜十月交
라 하므로 나도 모르게 굴복하게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참판(參判) 유영길(柳永吉)의 시는 비록 시경(詩境)은 협소하나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금슬은 성급히 해를 녹이고 / 瑟錦消年急
금 병풍은 웃음 사기 더디구려 / 金屛買笑遲
발에 비친 석류는 곱기도 하고 / 映箔山榴艶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 通池野水淸
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고 하였다.
윤 사문 면(尹斯文勉)이 사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떠나 어느 산을 지나가는데 산 속에 초가집이 있었다. 거기서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펴 보니 늙은이가 다가와서 빼앗으며,
“되지 않은 작품이라 남의 눈에 보여 줄 수가 없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쓴 빗을 읊은 시만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얼레빗 빗질하고 참빗으로 빗질하니 / 木梳梳了竹梳梳
빗질 천 번 쓸어 내려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回蝨已除
어찌하면 만장 길이 큰 빗을 얻어다가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들의 물것을 남기잖고 쓸어낼꼬 / 盡梳黔首蝨無餘
그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전주 진사 유호인(兪好仁)이라고도 한다.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
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 竊食東華舊學官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 盆山雖好可盤桓
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飛盧峯)을 감도니 / 十年夢繞毗盧頂
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 / 一枕松風夜夜寒
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형(仲兄)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서
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 白屋經年病
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루 밤 서리 / 靑苗一夜霜
라 읊었는데, 임자순은 이를 극찬하고,
백옥 청묘는 열 글자의 시사(詩史)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중형도 임자순의
오랑캐 일찍이 이십 주를 엿볼 적엔 / 胡虜曾窺二十州
장군은 말 솟구쳐 봉후를 취했는데 / 將軍躍馬取封侯
지금은 절새에 정벌 싸움 없으니 / 如今絶塞無征戰
장사는 옛 역루에 한가로이 잠을 자네 / 壯士閑眠古驛樓
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
중형이 풍산(豐山) 역에서 벽에 쓴 시 한 수를 보니
세상에는 준재를 알아 줄 이 없는데 / 世上無人識俊才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나 / 黃金誰爲築高臺
변방 서리 검푸른 귀밑털 다 물들이니 / 邊霜染盡靑靑鬢
필마(匹馬)로 음산을 열 번이나 오가네 / 疋馬陰山十往來
라 했다. 말 기운이 감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우졸(郵卒)에게 누구의 작품인 가고 물었더니 병영 군관 손만호(孫萬戶)가 지은 것이라고 했다 한다.
임진년(1592, 선조25) 6월 28일은 명종(明宗)의 기일(忌日)이라 신제이(申濟而 제이는 신노(申櫓)의 자) 가 곡구역(谷口驛)에서 시를 쓰기를
선왕께서 이 날에 군신을 버리실 적 / 先王此日棄群臣
유언은 은근히 성인에게 부탁했네 / 末命慇懃托聖人
스물이라 여섯 해에 향불이 끊어지니 / 二十六年香火絶
소리쳐 우는 사람 늙은 유민(遺民)뿐이로세 / 白頭號哭只民遺
라 하니,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백옥은 조원(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영월(寧越)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짓기를
오일 간은 장간이요 삼일 간은 영월(寧越)이니 / 五日長干三日越
노릉의 구름에 슬픈 노래 목이 메네 / 哀歌唱斷魯陵雲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라 / 妾身亦是王孫女
이곳의 두견 소린 차마 듣지 못할레라 / 此地鵑聲不忍聞
라 하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익지의
동풍에 촉제(蜀帝) 혼 괴롭고 / 東風蜀魄苦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네 / 西日魯陵寒
라는 시구와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우사(羽士) 전우치(田禹治)는 사람들의 말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하며 그의 시는 매우 청월(淸越)하다. 일찍이 삼일포(三日浦)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 秋晩瑤潭霜氣淸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 天風吹下紫簫聲
푸른 난(鸞)은 오지 않고 하늘 바다 넓으니 / 靑鸞不至海天闊
서른 여섯 봉우리에 가을 달은 밝도다 / 三十六峯秋月明
라 하니, 이를 읽노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젊었을 적에 정백련(鄭百鍊)을 만나 본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병이 들어 귀신을 만났는데 절구를 지을 줄 알더라고 했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 잠을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 酒滴春眠後
발 걷은 앞에서 꽃은 날리네 / 花飛簾捲前
인생이 얼마나 된단 말가 / 人生能幾許
비 내리는 하늘 슬피 바라보노라 / 悵望雨中天
와 또
만리라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 萬里鯨波海日昏
벽도꽃[碧桃花]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 碧桃花影照天門
난새 수레 한 번 가서 천년이나 고요터니 / 鸞驂一息空千載
후령의 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 緱嶺靈簫半夜聞
는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인간 소리가 아니었다.

부안(扶安)의 창기 계생(桂生)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세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라는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짓기를
한 가락 요금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 一曲瑤琴怨鷓鴣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 荒碑無語月輪孤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 峴山當日征南石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 亦有佳人墮淚無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李汝仁)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호)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호)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
라 하니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자가 있어 또한 시에 능했다. 일찍이 문지기를 했는데, 그의 동류(同類)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하고 연약했다. 까닭에 권여장은 만당(晩唐)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체라고 일컬었으니 대개 그 연약함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본조(本朝)의 승려로는 시에 능한 자가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參寥)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수운 같은 발자취 이미 여러 해더니 / 水雲蹤迹已多年
의기가 서로 맞아 인연됨을 기뻐하네 / 針芥相投喜有緣
종일토록 객헌에 봄날은 적막한데 / 盡日客軒春寂寞
지는 꽃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 落花如雪雨餘天
라 하니, 준결(俊潔)한 맛이 있다.


 

[주D-001]한밤중……춤을 추고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로 재직할 때 매우 가깝게 지냈다. 어느날 같이 잠을 자다가 밤중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곤의 발을 차서 깨우면서 “이것은 좋은 소리이다.” 하고는 일어나서 춤을 춘 고사를 가리킨다. 《晉書 卷62 祖逖傳》
[주D-002]몇 번이나……일렀던고 : 진(晉) 나라 왕맹(王猛)이 환온(桓溫) 앞에서 거리낌없이 이를 잡으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고사. 《晉書 苻堅載記》
[주D-003]최예산(崔猊山) : 예산은 고려 말의 문인 학자인 최해(崔瀣)의 호인 예산농은(猊山農隱). 가세가 빈한하여 만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에서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저서에 《졸고천백(拙藁千百)》ㆍ《동인지문(東人之文)》이 있다.
[주D-004]순문약(荀文若) : 문약은 후한(後漢) 시대 사람 순욱(荀彧)의 자. 절개를 굽혀 조조(曹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분무사마(奮武司馬)를 지냈다. 《三國志 卷10 荀彧傳》
[주D-005]관유안(管幼安) : 유안은 후한 관녕(管寧)의 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절개를 지키며 산속에 묻혀 살았다. 《三國志 卷11 管寧傳》
[주D-006]서시(西施)를……떠날 줄 : 서시는 춘추(春秋) 시대 월(越) 나라의 미녀(美女).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자, 범려(范蠡)가 서시를 취하다가 오왕 부차에게 바쳐 그의 마음을 황란(荒亂)하게 만들어서 오 나라를 패망시켰는데, 그 후 서시는 끝내 범려를 따라 배를 타고 오호(五湖)로 떠났다는 고사이다.
[주D-007]고소대(姑蘇臺) : 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 나라를 격파하고 미인 서시(西施)를 얻어 그를 거처하게 하기 위해 건축한 대(臺) 이름.
[주D-008]유랑(劉郞)이……생겼을 걸 : 잠총(蠶叢)은 촉왕(蜀王)의 선조. 촉주(蜀主) 유비(劉備)가 어렸을 때 중종(中宗)의 아이들과 뽕나무 아래서 놀 때에 농담으로 “내가 반드시 이 뽕나무처럼 생긴 우보개거(羽葆蓋車)를 타게 될 것이다.” 한 고사를 가리킨다. 《三國志 卷32 劉備傳》
[주D-009]장타유(張打油) : 저속한 시를 뜻함. 《양승암집(楊升庵集)》에 의하면, 당(唐) 나라 장타유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노란 개는 몸 위가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 위가 부어올랐다.[黃狗身上白 白狗身上腫]"고 한다.
[주D-010]조원각(朝元閣) : 노자(老子)를 제사지내는 도관(道觀)의 이름.
[주D-011]노국(魯國)에선……했고 : 분수에 지나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 노(魯) 대부 장문중(莊文仲)의 인(仁)스럽지 못한 것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원거(爰居 : 바다새의 일종)에 제사 지낸 것이라고 하였다. 《左傳 文公 2年》
[주D-012]남방에……돌아왔네 : 남의 비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풍질(風疾)에 좋은 의이인(薏苡仁)을 여러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를 싣고 왔다고 비방하였다.
[주D-013]배견와(拜鵑窩) : 박순(朴淳)의 별장 이름.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으로 본관은 충주(忠州)임.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