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회재 이언적

회재 선생(晦齋先生)의 묘지명 (회재 이언적)

아베베1 2012. 4. 9. 10:38

 

 

백사집 제2권

묘지(墓誌)
회재 선생(晦齋先生)의 묘지명


아, 오래되었도다. 옛날 숙황제(肅皇帝) 24년인 을사년에 하늘이 우리 나라에 혹독하게 재앙을 내리어 인묘(仁廟)가 승하하자 명묘(明廟)는 상중(喪中)에 있었고 모후(母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니, 인정(人情)이 흉흉하였다. 이 때 이기(李芑)라는 신하가 있어 신인(神人)을 속이고 임금의 밝음을 뒤바꾸어, 이에 두세 원흉(元兇)과 함께 임금은 어린 사람이라서 옛날의 일을 미처 알지 못할 것이라 하고, 대궐을 들어가서 상변(上變)을 하였다. 그래서 이 날 양전(兩殿 문정왕후와 명종을 가리킴)이 충순당(忠順堂)에 함께 나왔는데, 이기 등이 장차 윤임(尹任)ㆍ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을 대역(大逆)으로 무고하려고 하자, 조정에 있는 뭇 신하들이 원하구(轅下駒)처럼 두려워하여 감히 기(氣)를 내서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 때에 좌찬성(左贊成) 신(臣) 회재 선생(晦齋先生) 이언적(李彦迪)과 우찬성(右贊成) 신 권공 벌(權公橃) 같은 이가 있어 대신(大臣)다운 말을 했다가 끝내 여기에 연좌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이 선생이 병으로 작고하여 그 다음 해에 경주(慶州)에 반장(返葬)하였다.
그러자 대부(大夫)들은 조정에서 서로 눈을 부릅뜨고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 선비들은 태학(太學)에서 서로 누구를 힘입어 학업을 고증할 데가 없음을 탄식하였으며, 백성들은 초야에서 서로 원망하여 말하기를,
“철인(哲人)이 시들어 떨어졌으니, 마치 대천(大川)이 막힌 듯이 몹시 억울하고 답답하여 말할 수 없는 인심(人心)을 어떻게 밝힐 수 있겠는가.”
그로부터 13년 뒤에야 천일(天日)이 거듭 밝아지고 정화(政化)가 다시 새로워져서, 간흉(奸兇)들을 내쫓고 준량(俊良)들을 높이 등용하면서, 명하여 선생의 관질(官秩)을 예와 같이 회복시켰다. 그리고 우리 선종(宣宗)이 즉위함에 미쳐서는 능히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서 노유(老儒)들을 불러들여 조정의 반열을 빛나게 하니, 선생의 도(道)가 이로 말미암아서 크게 밝아졌다. 천관(天官)에서는 관작을 추증하고, 종백(宗伯)은 치제(致祭)를 하고, 태상(太常)은 시호를 의정하여 문묘(文廟)에 배향시킴으로써, 덕(德)을 세워서 보답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지난번 눈을 부릅뜨고 감히 말하지 못하던 자들은 그제야 입을 열고 길이 말하기를,
“오직 하늘은 속일 수 없다.”
하였다. 그리고 선비들은 믿어 의지할 곳이 있게 되고 백성들은 우러러 사모할 곳이 있게 되어, 모두 이구동성을 말하기를,
“선생의 도는 이미 남김없이 일성(日星)처럼 빛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저술을 간행하지 못하고, 가장(家狀)도 찬집하지 못하였으며, 묘도(墓道)에는 비석도 세우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들의 수치일 뿐이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이에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은 가장을 서술하고, 소재(蘇齋) 노 선생(盧先生)은 문집의 서문을 쓰고,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은 그 묘(墓)에 제(題)하기를,
“영의정에 추증된 문원공 회재 선생의 묘이다[贈領議政文元公晦齋先生之墓].”
하였으니, 아, 완비되었도다. 작고한 이를 슬퍼하고 높이는 일을 더할 수 없게 하였으니, 덕을 이루어 무궁한 후세에 남김으로써 사람들이 그 영예로운 명성을 길이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 등 원흉들은 한 세상에 폭위(暴威)를 떨치어 애써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았는데,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래지 못하여 이내 패배함으로써 뿌리와 싹이 모조리 절단되어 모욕을 받아 사람의 대열에 끼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후세 자손에 이르러서는 비록 뻔뻔스럽게 사람의 면목은 갖추었더라도 남들의 금수(禽獸)처럼 보아서 모두가 침을 뱉으면서 자신을 더럽힐까 염려할 것이니, 선악의 응보와 시비의 공평함이 그 당시와 후세에 있어 어떠한가? 후세에 임금을 섬기면서 충성을 다하지 않고 어진 이를 해치고 나라를 패망시키는 자들에게도 또한 조금의 경계가 될 수 있겠다.
선생이 작고한 지 57년이 지난 지금에 그 손자 준(浚)이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선대부(先大夫)를 칭술(稱述)하는 전례는 사문(斯文)의 현회(顯晦)가 매인 것이라 후손이 사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직 이 묘지(墓誌)가 없으므로 감히 이것을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그대는 힘써 주시오.”
하므로, 내가 깜짝 놀라면서 묘지를 지을 사람이 못 된다고 사양하니, 준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사람이 어찌 자신을 모르겠습니까. 그대가 보더라도 지금 이 일의 부탁을 그대가 아니면 누가 받아야겠습니까?”
하였다. 이렇게 무릇 일곱 번을 왕복한 끝에 끝내 사양할 수 없게 되자, 내가 말하길를,
“고봉의 풍부한 문장으로도 퇴계가 지은 가장에 대해서 감히 말을 덧붙이지 않았는데, 지금 새로운 말을 만들어 그 가장에 군더더기 붙이는 일을 내가 어찌 감히 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삼가 가장을 상고해 보니, 그 대략은 아래와 같다.
“선생은 총명함이 뛰어나 타고난 자품이 도(道)에 가까워서, 속학(俗學)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고 이것을 강구하기 위해 몸소 실천하는 것을 강명(講明)하여, 치지(致知)ㆍ성의(誠意)의 자리에 힘을 썼다. 사람됨이 안온하고 묵중하고 단아하고 자상하며 평소에 고상한 지취가 있었다. 그래서 뭇 사람과 함께 학업을 익힐 적에도 혹 다른 사람들이 곁에서 장난을 하며 시끄럽게 떠드는 일이 있더라도 마치 못 들은 것처럼 하였다.
만년에는 주(州)의 서북쪽에 있는 자옥산(紫玉山) 속에 땅을 가려 집을 짓고 그 당(堂)을 독락(獨樂)이라 명명하고는, 세상일을 사절하고 한 방에 단정히 앉아 좌우에 서책을 벌여두고 깊이 연구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공부를 하였다. 그리하여 이전에 비해 더욱 깊고 또 전일하게 한 다음에는 이전에 들은 것은 있느나 깊이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마치 마음 속으로 융회(融會)되어서 친절하고 증험이 있는 듯하였다.
게다가 깊고 조용한 지취를 기르고 오랜 세월을 쌓아가면서, 성리(性理)를 깊이 연구하여 성현(聖賢)의 진수(進修)하는 방도를 준행하고, 고명(高明)의 경지를 마음 속으로 완미하여연어(鳶魚)의 유행하는 묘(妙)를 즐기었으며, 신심 성정(身心性情)에 근본하여 가향 방국(家鄕邦國)에 이를 행하였으니, 이른 바 체(體)와 용(用)이 있는 학문인 것이다. 말은 마치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았고, 몸은 마치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으나, 간사한 자를 배척하고 위의(危疑)한 인심을 진정시키는 데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곧바로 나가서, 비록 맹분(孟賁)ㆍ하육(夏育) 같은 용사(勇士)로도 그 지기(志氣)를 빼앗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예(精詣)한 견해와 독득(獨得)의 오묘함은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에게 준 무극태극(無極太極)을 논한 글 4,5편에 가장 잘 나타났는데, 그 글의 내용은 오도(吾道)의 본원(本原)을 천명하고 이단(異端)의 사설(邪說)을 물리쳐서, 정미(精微)를 관통하고 상하(上下)를 관철한 것이 일체 순수한 바름[正]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 우리 동국(東國)은 옛날에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기는 했으나 그 학문은 전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고려 말기로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이 도에 뜻을 둔 호걸(豪傑)의 선비가 없지 않았고, 세상에서도 또한 그분들에게 도학이라는 명칭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를 상고해 보면 거개가 명성(明誠)의 실상이 미진하였고, 후세에서 칭도하자면 또 증빙할 만한 연원(淵源)이 없다. 그래서 후세의 학자들로 하여금 심축(尋逐)할 곳이 없어 지금까지 민멸한 지경에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생의 경우는 사사(師事)하여 수학(受學)한 데도 없이 스스로 사학(斯學)에 분발하여, 어두운 가운데 날로 밝아져서 덕은 행실에 부합되고, 찬란하게 글을 써 놓아서 말은 후세에 남았으니, 이런 분을 동방에서 찾는다면 그 수준이 드물 것이다.”
나는 삼가 이 글을 두세 번 읽고 말하기를,
“훌륭하고도 극진하도다. 참으로 유도자(有道者)를 잘 형용하였도다. 후세의 말할 줄을 아는 자가 어찌 감히 여기에 덧붙이겠는가. 고봉은 참으로 칭술(稱述)을 잘 하였도다.”
하였다. 그리고 나는 삼가 선사(先師)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여기에 세계(世系)와 이력(履歷)을 붙여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옛날을 상고하건대, 여주(驪州)에 향공진사(鄕貢進士) 이세정(李世貞)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 자신이 연일(延日)에 살다가 다시 경주(慶州)로 옮겨 살았다. 휘권(權)은 부사직(副司直)이었고, 이분이 휘 숭례(崇禮)를 낳았는데 숭례는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이분이 휘 수회(壽會)를 낳았는데 수회는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蕃)을 낳았는데, 번은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계천군(溪川君) 손소(孫昭)의 딸에게 장가들어 (弘治) 신해년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이 있었는데 9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계유년에 성균관 생원이 되고, 갑술년에 등제(登第)하였는데, 이 때 나이 24세로 (芸閣)에 들어갔다. 신사년에는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시강원 설서(侍講院設書),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가, 이윽고 외직을 요청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나갔다. 병술년에는 들어와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가 이조 정랑, 사헌부 장령에 전임되었다. 기축년에는 사성(司成)으로부터 나가서 밀양 부사 (密陽府使)가 되었는데, 아전들은 순종하고 백성들은 사모하였다. 경인년에는 부름을 받고 들어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정유년에는 들어와서 장악원(掌樂院)ㆍ종부시(宗簿寺) 첨정(僉正)을 거쳐 옥당에 들어가서는 교리(校理), 응교(應敎)가 되고, 정부에 들어가서는 검상(檢詳), 사인(舍人)이 되었으며, 군기시 정(軍器寺正)으로부터 직제학에 전임되었다가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승진되었다.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에게 정성으로 관유(寬裕)의 도리를 행하여 편안함이 있고 수고로움은 없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공덕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주에서 일강 십조(一綱十條)로 된 만여언(萬餘言)의 소(疏)를 올리자, 중묘(中廟)가 칭찬하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옛날의 진덕수(眞德秀)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하고, 즉시 명하여 동궁(東宮)에게 전해 보였다. 그리고는 특별히 선생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시켜 병조참판 겸 세자우부빈객으로 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말을 하여 쓰임이 있는 것은 다행이거니와, 이것을 관작의 매개로 삼는 것은 대단히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
하고, 극력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후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신축년에는 작질이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되어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가, 이윽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진되어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이어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나가게 되자, 간원(諫院)이 만류하기를 청하였으나, 선생이 또 모친 봉양하는 데에 편리하게 해 주기를 간절히 요청하므로, 상(上)이 그 곳 지주(地主)로 하여금 선생의 모친에게 식품을 보내주게 하였는데, 선생은 더욱 강력하게 외직을 요청하니, 조정에서 마지못하여 본도(本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임명하였다. 갑진년에는 다시 한성부 판윤이 되어 좌부빈객(左副賓客)을 겸했다가, 마침 병으로 사체(辭遞)되었다. 이 해에 인묘(仁廟)가 즉위하여 맨 먼저 선생을 불러 의정부 우찬성 (議政府右贊成)으로 삼았다.
그 배(配) 정부인(貞夫人) 박씨(朴氏)는 선무랑(宣務郞) 숭부(崇阜)의 딸인데, 후사가 없으므로, 선생의 종제(從弟)인 통(通)의 아들 응인(應人)을 후사로 삼았다. 응인은 현감(縣監)으로 졸관(卒官)하였고, 4남을 두었는데, 의윤(宜潤)ㆍ의징(宜澄)ㆍ의활(宜活)ㆍ의잠(宜潛)이다. 서자(庶子)는 전인(全人)이고 서녀(庶女) 한사람은 일찍 죽었다. 전인의 두 아들은 준(浚)ㆍ순(淳)이고, 준의 아들은 굉(宏)ㆍ용(容)이다.
선생은 선조(先祖)를 받드는 데는 정성을 다했고,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독실하였으며, 아우들에게는 우애하였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엄격하였으며, 종척(宗戚)들에게는 화목하였고, 향당(鄕黨)에서는 서로 친목하였다. 그리고 간원에 있을 적에는 이미 폐해진 김안로(金安老)를 다시 기용하자는 논의를 극력 저지하면서 그의 간악한 정상을 지적하였으므로, 김안로가 들어오자 선생은 파면되었다. 김안로가 뜻을 얻음에 미쳐서는, 일찍이 경주(慶州) 사람이 김안로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얻은 일이 있었는데, 김안로가 그 사람에게 비밀리에 말하기를, “절대로 이모(李某)가 알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생이 전주에 있을 적에는, 일찍이 절일(節日)을 만나서 부인(府人)들이 나희(儺戱)를 베풀자, 당시 관찰사였던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도 오히려 수시로 돌아보고 웃곤 하였으나, 선생은 초연하여 마치 보이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황급한 때를 당해서도 조용하고 정직함을 스스로 굳게 지키어 급한 말이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찍이 옥당에 있을 적에는 혹 동료들과 조용히 앉아서 종일토록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있었으므로, 함께 대좌한 사람들이 모두 숙연하여 더욱 공경하였다. 이는 대체로 그 지경(持敬)의 공부가 깊은 데서 나온 것이요 꾸며서 한 것이 아니었다.
선생이 찬성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인묘가 미령하여 사적으로 영상(領相) 윤인경(尹仁鏡)에게 이르기를,
“주상(主上)이 후사가 없으므로 조정에서 걱정들을 많이 하는데, 공(公)은 어찌하여 건백(建白)을 해서 일찍 대군(大君)을 세제(世弟)로 삼아 국본(國本)을 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 후 명묘(明廟)가 즉위하여 미쳐 백관(百官)이 모여서 수렴(垂簾)의 의제(儀制)를 논할 적에 윤인경이 말하기를,
“지금 대왕대비(大王大妃)와 왕대비(王大妃)가 다 계시니, 국정(國政)을 어디에서 들어야겠는가?”
하고 물었으나, 좌우에서 아무런 말이 없자, 선생이 이르기를,
송 철종(宋哲宗) 때의 고사(故事)가 절로 있는데 무엇이 의문될 게 있겠는가. 또 세상에 어찌 수숙(嫂叔)이 정전(政殿)에 함께 임어하는 일이 있겠는가.”
하니, 뭇 사람의 의논이 마침내 정하여졌다.
이 해 8월에 대왕대비가 윤원형(尹元衡)에게 밀유(密諭)를 내려 윤임(尹任)을 제거하려고 꾀할 적에 이기(李芑)와 정순붕(鄭順朋)ㆍ임백령(林百齡) 등이 윤원형의 뜻을 헤아려 받듦으로써 충순당(忠順堂)의 입대(入對)가 있게 되었는데, 이 네 원흉들이 옆에서 으르렁거리므로 온 좌중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선생이 나와서 여기에 대항하여 말하기를,
“일은 모름지기 공명정대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화(士禍)가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지금 온 나라가 한마음이어서 감히 부정한 생각을 하는 자가 없으니, 윤임 한 사람을 죄주는 것은 다만 고추 부서(孤雛腐鼠)와 같을 뿐입니다. 그런데 내지(內旨)를 정원(政院)으로 내리지 않고 다른 데로 내리었으니, 이것이 바로 일의 작용이 분명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인심이 불안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장차 이런 처사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또 신하라는 것은 의당 섬기는 데에 전일해야 하는 것이니, 지난날에 대행왕(大行王)을 전일하게 섬겼던 것을 지금에 와서 어찌 깊이 죄주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금상(今上)은 왕대비(王大妃)에 대해서 친(親)으로 따지면 수숙(嫂叔)의 사이이고, 의(義)로 따지면 모자(母子)의 사이인데, 혹 미안한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왕대비에 대해서 어찌하겠습니까. 신들 또한 죄를 짓게 될 것이니, 후세에 경계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줄줄 흘리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두려워서 고개를 움츠렸으나, 선생은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 때 이기 등은 옆에서 탄식을 하며 진작부터 선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후 선생이 옥당에서 헌납(獻納) 백인걸(白仁傑) 등과 함께 서로 소장(疏章)을 올려 밀지(密旨)의 부당함을 논하자, 내전(內殿)에서 이기 등을 불러서 이르기를,
“종사(宗社)에 재앙이 닥쳤는데, 어찌 밀지 내리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도리어 나라를 지키는 사람을 부정하다 하여 끝없이 논박하고 있으니, 이의(異議)를 막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 꼴이 될 수 있겠는가. 백인걸을 하옥시키고 대간직(臺諫職)을 삭제하라.”
하였다. 이 때 정순붕은 병 때문에 소명(召命)을 받들어 가지 못하고 사관(史官)에게 밀의(密議)를 보내어 아뢰었다. 이어 전교(傳敎)가 내리자 좌우에서는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선생이 권벌(權橃)ㆍ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그 사실을 설명하니, 좌우에서 선생에게 부탁하여 그 의논을 초(草)하였는바, 그 사어(辭語)가 매우 적절하여 일이 조금 완화되었다.
그런데 이기 등이 이미 상의 노염을 격동시켜 놓은데다, 정순붕이 나와서 말하기를,
“이모(李某)가 경연(經筵)에서 물러나가 주상(主上)이 영명(英明)하다는 것을 말하자, 유인숙은 묵묵부답하고 있었는데,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내전에서 이 말을 인하여 전교하기를,
“유인숙이 기뻐하지 않은 기색에 대해서 이모가 말을 했다.”
하여, 장차 선생을 증인으로 삼아서 싸잡아 죄를 씌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선생이 즉시 변명하기를,
“아무 날에 신이 물러가 실록청(實錄廳)에서 유인숙을 만나서 다만 성상의 자질이 고명(高明)하고 학문 또한 많이 진취되었다는 것을 말했을 뿐인데, 실로 유인숙의 기색이 어떠했는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지척(咫尺)의 자리에서 신이 감히 숨기지 않습니다.”
하여, 일이 조금 완화되었었다.
그 후 유관 등이 사사(賜死)됨에 미쳐서는 조정에 있는 뭇 흉도(兇徒)들 가운데 혹은 만족스러운 기색을 가진 자도 있어 평상시와 다름없이 온 좌중이 떠들썩하게 웃곤 하였으나, 유독 선생은 두세 명의 재신(宰臣)과 함께 몹시 슬픈 표정으로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보는 이가 이미 선생이 오래지 않아 화를 입게 될 것을 알았었다.
이 해 9월에 책훈 행상(策勳行賞)이 있었는데, 선생은 또 상소하여 극력 사양함으로써 마침내 흉도들에게 거슬리어 날로 공격을 받다가, 그 다음 해 3월에는 근친(覲親)을 인하여 고향에 돌아가서 마침내 그대로 들어 앉아 나가지 않았다. 이 해 9월에 이기가 상에게 아뢰기를,
“이모는 세자(世子)에게 아첨하여 붙어서 중종(中宗)을 배반하였고, 십조(十條)의 소(疏)를 올려서 임금의 수족(手足)을 잡아매었으며, 또 유인숙과 친구를 맺어 역신(逆臣)을 변호하여 구했습니다.”
하니, 대하헌 윤원형, 지평 진복창(陳復昌)이 덩달아 찬성하여 선생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부제학(副提學)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를 고변(吿變)하자, 이기 등이 이것을 인하여 일망타진함으로써, 한 시대의 정인(正人)으로 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ㆍ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璜)ㆍ유희춘(柳希春)ㆍ김난상(金鸞祥)ㆍ권벌(權橃) 등 30여 인이 모두 화난을 입었고, 선생 또한 면치 못하였다.
이에 앞서 본도(本道)의 도사(都事)가 간관(諫官)이 되어 입조(入朝)하는 길에 선생에게 들러서 말하기를,
“이기가 장차 정승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보기에는 이기의 사람됨이 음험하여 정사를 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고 하였다. 그런데 이기가 정승이 됨에 미쳐 양사(兩司)가 과연 선생을 탄핵하였으니, 이기는 항상 그 마음 속에 사영(射影)을 잊지 않고 있으면서, 일찍이 칼끝을 숨기고 날개를 거둔 채로 우리의 틈만을 엿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윤원형이 사귀기를 청했을 때도 선생이 그의 간사함을 알고는 끊어 버리고 허여하지 않았으므로, 윤원형이 선생에게 앙심을 품은 것 또한 매우 깊었었다. 또 충순당의 입대(入對)에 미쳐서는 윤인경이 일찍이 무계(誣啓)한 사실이 있었던 데 대하여, 선생이 물러나와 그것을 변명했었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지난날의 흔단을 잡고 따라서 해독을 부려 꺾었으니, 세 사람의 원한이 한데 모인 것이다. 천도(天道)가 혹 정해지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악인(惡人)이 많아서 천도를 이긴 것인가?
처음 견책(譴責)의 명을 듣고 온 가족이 부르짖어 울었으나, 선생은 평상시와 똑같이 음식을 먹고 담소(談笑)를 하였다. 그리고 유배 생활을 할 적에는 일찍이 책상 위에다 스스로 경계하는 말을 써 놓았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하늘을 섬기는 데에 미진함이 있었는가? 군친(君親)을 위하는 데에 성실하지 못함이 있었는가? 마음을 가지는 데에 바르지 못함이 있었는가?”
하였으니, 비색한 운수를 만나서도 종일토록 삼가는 공부를 늦추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선생이 일찍이 《봉선잡의(奉先雜儀)》를 저술하여 한 집안의 일상 생활의 예로 삼았고, 유배지에 있을 적에는 또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ㆍ《속혹문(續或問)》ㆍ《구인록(求仁錄)》ㆍ《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의 책을 저술하여 세상에 행해지고 있으니, 그 학문의 일부분이라도 엿보아 흥기하려는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서 고증한다면 또한 대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고도(古道)를 들을 수 없으므로 어두운 자는 밝은 데에 가서 찾는 것이고, 고인(古人)을 알 수 없으므로 선배(先輩)가 후생(後生)에게 교훈을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선배로서 존신(尊信)하여 의심하지 않을 만한 분으로는 의당 퇴계만한 이가 없는데, 퇴계가 이미 그 도를 높이고 그 학문을 믿어서 후학들에게 교훈을 남겼으니, 나는 이 때문에 이것을 명(銘)으로 삼는 바이다.


 

[주D-001]원하구(轅下駒) : 수레 끌채 밑의 망아지를 말하는데, 그 망아지는 힘이 약하여 수레를 잘 끌 수 없으므로, 사람이 힘이 모자라서 망설이고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2]연어(鳶魚)의 …… 묘(妙) : 천지(天地)에 드러나 도(道)의 묘용(妙用)을 이른다. 자사(子思)가 이르기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오르고, 물고기는 못에서 뛴다.[鳶飛戾天 魚躍于淵]’ 하였으니, 도의 작용이 상하(上下)에 나타난 것을 이른 말이다.”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 第12章》
[주D-003]어두운 …… 밝아져서 : 군자(君子)의 도가 안에 온축되어 점차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자사(子思)가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은은하되 날로 밝아지고, 소인의 도는 선명하되 날로 없어진다[君子之道 闇然而日章 小人之道 的然而日亡].” 하였다 《中庸 第33章》
[주D-004]송 철종(宋哲宗) 때의 고사(故事) : 송 신종(宋神宗)이 죽고 어린 철종이 즉위했을 때, 철종의 모후(母后)인 신종비(神宗妃) 황태후(皇太后) 주씨(朱氏)도 있었으나, 철종의 조모(祖母)인 영종비(英宗妃) 태왕태후(太皇太后) 고씨(高氏)가 수렴 섭정(垂簾攝政)하였던 고사를 이른 말이다.
[주D-005]사영(射影) : 물여우[蜮]라는 곤충의 별칭인데, 이 곤충은 독기(毒氣)가 있어 모래를 머금었다가 사람을 보고 쏘면 종기(腫氣)가 생긴다고 하므로, 전하여 사람이 흉독을 품고 남을 음해(陰害)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