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4.9. 도봉산

2012.4.10. 자전거 산책 (도봉산 무수골의 봄소식

아베베1 2012. 4. 9. 16:57

 

 따스한 봄날의 자전거 산책이었다  

 무수골은 예전부터 근심이 없는 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무수골에는 왕족 묘지와 여러성씨의

묘지가 산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봄이오는 소식은 아름다음을 더 할듯 합니다 ..

 

 

 

 

 

 

 

 

 

 

 

 

 

 

 

 

 

간이집 제2권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대사헌(大司憲) 한공(韓公)의 신도비명



우리 명종대왕(明宗大王)께서 재위하신 지 22년이 되면서 군자와 소인의 실정을 더욱 잘 알게 되어 오직 공론(公論)만을 채택하시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명을 내리시기를, “아, 지난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에 두세 명의 원흉(元兇)이 있을 당시, 내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불안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그때에 외척들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방조한 나머지, 그들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마침내는 선량한 인사들까지 피해를 보게 만들었다. 대체로 자기들에게 아부하지 않거나 예전부터 원수처럼 미워했던 인사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아니면 가차없이 조정에서 쫓아냈으므로, 이미 죽어서 지하에 있는 이나 아직 생존해 있는 이나 모두들 지금까지 원한이 계속 쌓이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이를 비통하게 여기고 있으니, 그대 의정부(議政府)의 신하들은 억울함을 씻어 줄 수 있는 길을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미 죽은 이로서 복관(復官)된 이가 약간 명 되었고, 생존해 있으면서 복관이 되어 다시 서용(敍用)된 이가 약간 명 되었는데, 모두가 당세(當世)의 홍유(鴻儒)요 석사(碩士)로서 성망(聲望)을 드날리던 이들이었다. 이때에 한공(韓公) 휘(諱) 숙(淑)도 가선대부(嘉善大夫) 대사헌(大司憲)으로 복관되었으니, 이는 공이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되는 때였다.
그 뒤 10년이 지난 오늘날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8)에 이르러, 한공의 손자인 상사생(上舍生) 항(恒)이 공의 아우인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 호(濩)가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나에게 와서 공의 묘도(墓道)에 새길 비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양을 하자, 그가 말하기를, “저는 선생의 문장이야말로 우리 할아버지를 불후(不朽)하게 해 주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도 지위가 높은 대관(大官)에게 글을 부탁하여 중하게 되시려고는 분명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저의 백부님과 아버님의 명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삼가 살피건대, 한씨(韓氏)는 당진현(唐津縣)에서 나와 우리나라의 명문거족이 되었다. 휘 공서(公瑞)라는 분이 고려(高麗) 때에 등제(登第)하여 이름을 날렸는데, 높이 현달해야 할 분이 일찍 죽고 말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뒤에 자손들이 음덕을 받아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공의 고조와 증조와 조부와 부친 때까지는 모두 그다지 떨치지를 못하였다. 고조인 휘 경(慶)은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이었고, 증조인 휘 척(陟)은 제용감 부정(濟用監副正)이었고, 조부인 휘 윤우(允祐)는 계공랑(啓功郞)이었고, 부친인 휘 근(瑾)은 세자익위사 좌세마(世子翊衛司左洗馬)였는데, 공이 귀하게 됨에 따라 계공에게는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추증되고 세마에게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이 추증되었다.
참판은 고성 이씨(固城李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좌의정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휘 원(原)의 증손녀요 사온서 영(司醞署令)으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된 휘 평(泙)의 딸로서, 홍치(弘治) 갑인년(1494, 성종25)에 공을 낳았다.
공의 자(字)는 자순(子純)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점점 자라면서 성취한 바가 있게 되었으므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 역시 그저 여유작작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사마시(司馬試)를 통과하고 나서 가정(嘉靖) 을유년(1525, 중종20)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 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에 보임되고 나서 천거를 통해 내한(內翰)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고 봉교(奉敎)에 이르렀다. 제조(諸曹)의 이력을 보면, 예조에서는 좌랑(佐郞), 병조에서는 좌랑과 정랑(正郞), 형조와 공조에서는 정랑을 거쳤다. 제시(諸寺)의 이력을 보면,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 사복시(司僕寺)와 장악원(掌樂院)의 정(正)을 거쳤다. 외직(外職)으로는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간 적이 있었고, 봉상시에 있을 때에 질정관(質正官)으로 사신을 따라 경사(京師)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인묘(仁廟)께서 동궁(東宮)으로 있을 적에 벌써 학문의 조예가 깊었으므로 당시 시강원(侍講院)의 관원을 선임(選任)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공은 사서(司書)에서부터 보덕(輔德)까지의 관직을 모두 차례로 역임하였고, 필선(弼善)이 된 것만도 네 차례나 되었다.
대간(臺諫)에 있을 적에는 더욱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일찍이 헌납(獻納)과 지평(持平)을 두 차례 지내고 장령(掌令)을 네 차례나 지낸 뒤 사간(司諫)을 한 번, 집의(執義)를 또 두 번 역임하였다. 장령의 직책을 마지막으로 수행하고 있을 적에는 대사헌인 양연(梁淵) 등과 함께 ‘정유년에 권세를 휘두르던 사람이 나라의 일을 그르쳤으니 법대로 처치해야 한다’는 뜻으로 논핵(論劾)하여, 은상(恩賞)을 받고 한 등급 위의 품계(品階)로 뛰어오르면서 집의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의정부에서 공을 낭료(郞僚)로 추천한 결과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이 되기도 하였으니, 이는 누가 보아도 엄선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또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다. 공은 이전에도 선발 대상에 뽑혔다가 번번이 권력자의 음모로 인해 그 길이 막히곤 하였는데, 이 때문에 물의(物議)가 억울하게도 늦게야 들어오게 되었다고 공을 위해 탄식을 하였지만, 공은 또한 이런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 들어와서 부응교(副應敎)와 응교(應敎)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조사(詔使)가 왔을 적에는 문례관(問禮官)으로 참여하여 주선(周旋)을 잘 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일단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오른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으며, 전직(轉職)한 끝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는데, 그저 문서만 출납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유익하게 헌체(獻替)하며 군왕을 보좌하였다. 유지(有旨)에 의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랐으며,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얼마 뒤에 강원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때에 물의가 공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는 것을 어렵게 여겨 조정에 붙잡아 두려고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무를 교대하고 돌아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공조(工曹)와 호조(戶曹)의 참판을 역임하고 나서 대사헌의 제수를 받았으니, 이것이 계묘년의 일이었다. 다시 유지에 의해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오르면서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너무 빨리 승진시킨다는 언관(言官)의 논핵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갑진년(1544, 중종39)에 동지중추부사로 사신의 명을 받고 동지사(冬至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을사년 7월에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있다가 다시 사신의 명을 받고 경사에 가서 인묘(仁廟)의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호(諡號) 및 왕위 계승에 대한 일을 청하였다. 그러던 중에 9월에 이르러 옥사(獄事)가 일어나면서, 공이 사신의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관작(官爵)이 삭탈되고 말았다.
병오년(1546, 명종1) 8월에 옥사(獄事)가 더욱 치밀하게 얽혀들어, 공이 이산군(理山郡)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은 두려워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대부인(大夫人 모친)을 그리워하고 걱정하는 이외에는 근심 어린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경신년(1560, 명종15) 10월에 병으로 죽으니, 향년 67세였다. 이에 수레에 관곽(棺槨)을 싣고 돌아와, 양주(楊州) 해유재[蟹踰岾] 아래 선영(先塋)의 옆에 장사를 지내었으니, 이때가 그 이듬해 3월 갑신일이었다.
공은 사람됨이 온화하고 소탈한 데다가 아량이 있었으며, 자질구레한 예법 따위는 굳이 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구차하게 이야기하고 웃으려 하지를 않았으며,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크나큰 절조(節操)를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다.
공의 부친인 참판공(參判公)은 가묘(家廟)에서 일을 행할 때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 주희(朱熹))의 《가례(家禮)》를 준행(遵行)하였으며, 삼년상을 당했을 적에도 여묘(廬墓)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세상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었다. 그런데 공의 행실을 살펴보아도 더더욱 효성이 독실하기만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그 가문의 전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은 조정에 몸담고 있던 중년(中年)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유배지에서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 모두를 경례(經禮 정상적인 예법)와 변례(變禮 비상 사태에 임기응변하는 예법)에 따라 온당하게 조처하였다. 공은 동기(同氣 형제자매)를 대할 때 은의(恩意)를 극진히 하였으며, 대공(大功)ㆍ소공(小功)ㆍ시마(緦麻)의 복(服)에 해당되는 친척에 대해서도 몰인정하게 강쇄(降殺)한 적이 없었다.
공에게는 두 명의 아우가 있었으니, 바로 밑은 판교(判校)이고, 사인(舍人)인 주(澍)는 막내이다. 이 형제 세 사람도 모두 서생(書生)의 옷을 벗고서, 그동안 때를 만나지 못했던 선조의 뒤를 이어 아름다운 벼슬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공의 경우는 어사대(御史臺 사헌부)의 어른이 되기까지 하였고 보면, 현달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쯤 되었고 보면 사람들이 하던 말이 여기에서 징험되었다고도 할 만하다.
그러나 공은 적소(謫所)에서 복관(復官)되지 못한 채 죽었고, 사인공은 본래 사인의 신분으로 귀양을 갔다가 복관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으며, 판교공은 승문원(承文院)의 정자(正字)로 있다가 쫓겨난 뒤 다시 복관되어 옮겨져서 판교에 이르렀으나 금년에 역시 죽었다. 그러고 보면 이들 모두 세상에 큰 업적을 남기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지는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늘이 진정 이런 식으로 공의 가문에 보답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는 화복(禍福)이라는 것은 원래 하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유독 그런 말을 지어내어 붙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공의 후손들에게서 징험이 나타날 때까지 아직도 기다려야 할 것인가.
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채씨(蔡氏)는 관향이 인천부(仁川府)이다. 증조의 휘는 명양(明陽)으로 경기 수군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였고, 조부의 휘는 징(澄)으로 태천 군수(泰川郡守)였으며, 부친의 휘는 유손(裕孫)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이다.
부인은 말이 없이 조용한 가운데 온화한 기품을 지니고서, 빈부(貧富) 때문에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으며, 제수(祭需)를 삼가 마련하고 일가친척들과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니, 이는 천성적으로 지극한 성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을 내조하고 자부(子婦)를 가르치면서 모두가 아름답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하였는데, 나이 76세 되던 융경(隆慶) 임신년(1572, 선조5) 3월에 죽어 5월 임인일에 부장(祔葬)되었다.
자식으로는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다. 장남 한열(韓說)은 함경도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차남 한의(韓誼)는 충의위(忠義衛) 신악(申渥)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들 모두 공이 당한 일 때문에 과거에 응시해서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장녀는 전임 별좌(別坐) 권대성(權大成)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유학(幼學) 윤건원(尹建元)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내시 교관(內侍敎官) 안사흠(安士欽)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충의위(忠義衛) 이은(李垠)에게 출가하였다.
한열은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름이 한율(韓慄)인데 아직 장가들지 않았다. 장녀는 홍적(洪迪)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박요현(朴姚賢)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남이인(南以仁)에게 출가하였다. 한의는 1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바로 한항(韓恒)으로 충의위 신사(愼思)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유덕신(柳德新)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권대성과 이은의 처(妻)는 자식 없이 일찍 죽었다. 윤건원은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름이 윤익(尹翼)이고, 딸은 안세걸(安世傑)에게 출가하였다. 안사흠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안윤제(安允濟)와 안광제(安匡濟)와 안강제(安康濟)이고, 장녀는 신박(申樸)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어리다.
홍적은 지금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이고, 유덕신은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이며, 나머지는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이에 내가 삼가 공의 공적(公的)인 일 가운데 큰 것만을 추려서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군자가 닦는 것을 / 君子之修
소인은 원수로 삼나니 / 小人所仇
정유년에 행한 그 일 / 前乎丁酉
을사년에 앙갚음 당했도다 / 乙巳而後
더 이상 길이 막혀 드날리지 못한 채 / 薄遏其揚
황막한 변방에 끝내 유배당했나니 / 卒纍于荒
우리 공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던가 / 繄公曷故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만들지 못했기 때문일세 / 唯不刓厥方
직질(職秩)은 육경(六卿)의 바로 아래 참판이요 / 亞卿之秩
벼슬은 사헌부의 어른 직책이었나니 / 司憲之官
관작 삭탈당했어도 영광으로 알았거늘 / 削也爲榮
더구나 지금 이미 복관이 됐음에랴 / 矧今旣還
공이야 마땅히 후세에 전해질 분 / 維公可傳
어찌 비명(碑銘)이 필요가 있으랴만 / 何待於碑
그래도 나의 글 새기는 것은 / 刻我文者
오로지 자손의 생각 때문이러라 / 子孫之思


 

[주D-001]헌체(獻替) : 헌가체부(獻可替否)의 준말로, 군왕의 입장에서 행해야 할 것은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될 것은 폐기토록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2]정유년에 …… 그 일 : 한숙(韓淑)이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정유년에 대사헌 양연(梁淵)과 함께 중종(中宗)의 밀지(密旨)를 받고 김안로(金安老), 채무택(蔡無擇), 허항(許沆) 등을 탄핵하여 처형시킨 일을 말한다.
[주D-003]모서리 …… 때문일세 : 올곧은 절조를 바꿔 세상의 풍조에 따라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초사(楚辭)》 구장(九章) 회사(懷沙)에 “모서리 깎아 둥글둥글 돌아가는 세상이여, 나는야 떳떳한 법도 바꾸지를 않았어라.[刓方以爲圓兮 常度未替]”라는 말이 있다.

 

송계만록(松溪漫錄)
송계만록 상(松溪漫錄 上)



권응인(權應仁) 찬

○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은 문장으로 이름났다. 남지정(南止亭 곤〈袞)의 호)이 언제나 일컫기를,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호)의 시, 탁영의 문장’이라 하였다.
그의 문집은 세상에 성행하고 있으나 시는 드물게 전한다. 삼가현(三嘉縣) 관수루(觀水樓)의 한 율시(律詩)는 다음과 같다.
한 가닥 시내 낀 마을에 흰 연기 오르는데 / 一縷溪村生白煙
지는 해에 염소들 앞을 다퉈 내려오네 / 羔羊下佸謾爭先
높은 누에 항아리 술 동서의 나그네요 / 高樓樽酒東西客
십 리의 농촌 남북으로 뻗어 있네 / 十里桑麻南北阡
소리 있는 시구 적어 노니는 이 옹졸하나 / 句乏有聲遊子拙
일 없어 술 마시니 사또는 어질구나 / 杯斟無使君賢
난간에 기대어 다시 황혼이 지기 기다려 / 倚欄更待黃昏後
물을 보며 달이 하늘 복판에 이른 것 보네 / 觀水仍看月到天
시와 문이 어느 것이 나은지 보는 이는 자세히 살피라.
○ 옛날, 검률(檢律) 함자예(咸子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촉석루(矗石樓)에 쓴 시는 다음과 같다.
산은 둘러 있고 물은 절로 흐르는데 / 山自盤環水自流
몇몇 해에 이 강머리에 성쇠가 있었는고 / 幾年興廢此江頭
일찍이 놀던 곳에 방황하며 다시 아끼노니 / 彷徨更惜曾遊處
전에는 봄바람 불더니 이제는 가을이네 / 昨是春風今是秋
벽에 달아두어 널리 사람들의 말에 올랐다. 제삼구(第三句)는 특히나 기력이 없는데, 모두 절창(絶唱)이라 일컬음은 웬일인가? 천한 사람으로서 이만한 시를 지었으므로 대단하게 여긴 것이나 아닌가 한다.
○ 옛날 한 부인의 ‘부여회고시(扶餘懷古詩)’는 다음과 같다.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 白馬臺空經幾歲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 落花巖立過多時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 靑山若不曾緘黙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 千古興亡問可知
어떤 사람은 어우동(於宇同)이 지은 것이라 한다.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
○ 옛날 두세 선비가 기생들을 데리고 산사(山寺)에 모여 놀았다. 술이 얼근하여 취해 누웠는데 옆에는 거문고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어떤 중이 밖으로부터 왔는데, 얼굴은 얼룩지고 검었으며 옷은 남루하였다. 그가 몰래 거문고 바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니 줄 튀김쇠로 높은 집을 흔드니 / 鵾絃鐵撥撼高堂
섬섬옥수의 요조한 아가씨라 / 玉指纖纖窈窕娘
무협에 우는 원숭이 애절한 눈물 짓고 / 巫峽啼猿哀涙濕
소상에 돌아가는 기러기 원망 소리 길구나 / 瀟湘歸雁怨聲長
얼음 깊은 창해엔 용의 읊음 웅장하고 / 凍深滄海龍吟壯
성긴 소나무에 맑음이 사무치니 학의 꿈 서늘하다 / 淸徹疏松鶴夢涼
곡이 다하니 삼성은 비끼고 달 또한 떨어지니 / 曲罷參橫仍月落
뜰 가득한 산색이 새벽에 창창하네 / 滿庭山色曉蒼蒼
그리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정허암(鄭虛菴 희량(希良)의 호)이 아니면 이렇게 지을 수 없다.’ 하였다.
○ 정승 정 문익공(鄭文翼公 광필(光弼)의 시호)이 김해로 귀양갈 때에 도중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비방이 산처럼 쌓였어도 마침내 용서받으니 / 積謗如山竟見原
이승에 천은을 보답할 길 없어라 / 此生無計答天恩
높은 재 열 번 넘는데 두 줄기 눈물이요 / 十登峻嶺雙垂涙
긴 강 세 번 건너니 홀로 애를 끊는구나 / 三渡長江獨斷魂
막막한 먼 산은 구름이 먹을 푼 듯 / 漠漠遠山雲潑黑
망망한 벌판 비는 물동이를 거꾸로 쏟는 듯 / 茫茫大野雨飜盆
저녁에 바다에 닿은 동성 밖에 투숙하니 / 暮投臨海東城外
초가집은 쓸쓸한데 대나무 문이로세 / 茅屋蕭蕭竹作門
덕 있는 사람은 반드시 말도 잘한다는 것이 정말이다. 그의 손자 임당 상공(林塘相公)이 시법(詩法)을 이어 전하니, 정말 두심언(杜審言)에게 두보(杜甫)가 있는 격이다. 문익공(文翼公)의 이름은 정광필이요, 임당(林塘)의 이름은 정유길(鄭惟吉)이다.
○ 진천(晉川 진천은 봉호(封號)) 강혼(姜渾)이 성주(星州) 기생 은대선(銀臺仙)에게 깊이 정이 들어 절구(絶句) 삼장(三章)을 지어주었는데, 그 제이장에,
고야산 선인 옥설같은 이 흰 살결 / 姑射仙姿玉雪肌
새벽 창 금 거울에 나비 눈썹 그리누나 / 曉窓金鏡畫蛾眉
아침 술 반쯤 취해 얼굴이 붉어지니 / 卯酒半酣紅入面
동풍에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네 / 東風吹鬢綠參差
하였다. 내가 그 기생을 보았을 때는 나이 이미 80이 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검은 귀밑머리 흐트러지던 것이 이제는 흰 귀밑머리 흐트러지는 것[白參差]이 되었습니다.”
하고,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 강 진천(姜晉川)의 동래(東萊) 정변루시(靜邊樓詩)에,
대마도 푸른 산은 외기러기 밖이요 / 對馬靑山孤雁外
부상의 붉은 해는 오색 구름 끝이로다 / 扶桑紅日霱雲端
하였다. 좋기는 좋지만 어찌 ‘성주에서 비에 막히다[星州阻雨]’라는 시에서,
붉은 제비는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에 스치고 / 紫燕交飛風拂柳
푸른 개구리 어지러이 우는데 비는 산에 젖었더라 / 靑蛙亂叫雨渾山
라고 한, 그림같은 시만 하겠는가?
○ 어무적(魚無迹)공의, ‘길 주서 고리(吉注書故里)’에 쓴 율시의 함련(頷聯)에,
수양산 고사리는 은 나라의 남은 풀이요 / 首陽薇蕨殷遺草
율리의 전원은 진 나라의 옛터네 / 栗里田園晉故墟
라고 하였다. 고사(故事)를 쓴 것이 매우 타당하여 고금에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연구(聯句)는 본래 길(吉) 선생이 지은 것인데 어무적이 풀어 만든 것이다.”
하는데, 상하의 구법(句法)을 살펴보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니, 이 말이 아마 그럴 듯하다. 다만, 선생의 문집 가운데 과연 이 연구가 있는지 모르겠다.
○ 안동(安東)에 청렴 결백한 선비 이효칙(李孝則)이 있었는데, 어무적과 함께 조령(鳥嶺)을 넘었다. 이효칙이 한 절구를 지었다.
추풍에 누른 잎은 우수수 떨어지는데 / 秋風黃葉落紛紛
주흘산 높이 솟아 반은 구름 속에 묻혔네 / 主屹山高半沒雲
이십사교 흐느껴 우는 물을 / 二十四橋鳴咽水
한 해 세 번 나그네 길에서 듣네 / 一年三度客中聞
어무적이 그만 붓을 놓고 말았다.
○ 적암(適菴) 조신(曺伸)이 황폐한 절에 들어가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그 경련(頸聯)에,
길에는 올 가을 낙엽 덮였고 / 逕覆今秋葉
부엌에는 전일 불 때던 나무 남았네 / 厨餘去日樵
하였는데, 구법(句法)이 기기 절묘하여 사람들이 서로 전하며 읊었다. 그러나 적암이 스스로 자기 작품을 뽑은 것에는 이 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젊어서 지어 만족스럽지 않아서 버린 것이나 아니겠는가?
○ 이 정승(李政丞) 용재(容齋 행(荇)의 호) 선생의 ‘제갈 무후를 읊다[詠諸葛武侯]’라는 시에,
사생을 나라에 허하여 힘을 다했는데 / 死生許國無遺力
성패로 사람을 논하는 것은 어린애지 / 成敗論人是小兒
하였다. 의논이 공정하고 글도 또한 새롭다. 중국 사신[天使] 당고(唐皐)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아득한 삼산은 솥을 엎은 것으로 보이고 / 縹緲三山看覆鼎
굽이친 한 띠의 물은 투금강에 닿았어라 / 逶迤一帶接投金
하였다. 복정은 삼각산(三角山)의 별명이요, 양화(楊花) 나루를 투금강이라 하기도 한다. 대구가 아주 잘 들어맞는다. 이 일련(一聯)은 소퇴휴(蘇退休) 상공(相公)이 지은 것이다. 소퇴휴가 말하였다. 《황화집(皇華集)》을 얻어 본 것이 기억나는데, 대(帶) 자는 수(水) 자였다. 대(帶) 자는 아마 전하는 사람들이 잘못 전한 것일 게다. 용재(容齋)의 이름은 이행(李荇)이요, 퇴휴의 이름은 소세양(蘇世讓)이다.
○ 김모재(金慕齋) 상공(相公)이 성주(星州) 기생 의침향(倚沉香)에게 준시에,
예쁘고 추한 것도 인연도 말하지 말자 / 不論姸醜不論緣
오래 거처하니 자연 사람 마음 끄는구나 / 處久令人意自牽
하였으니, 인정에 절실하다. 모재(慕齋)의 이름은 김안국(金安國)이다
○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어잠부(魚潛夫)와 교유하였다. 그의 시에,
봄꿈은 진 나라 이세보다 어지럽고 / 春夢亂於秦二世
실없는 근심은 노 나라 삼가처럼 강하다 / 閑愁强似魯三家
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말로써 고금의 시인들이 이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잠부(潛夫)란 무적(無迹)의 자(字)이다. 한수(閑愁)는 다른 책에는 추회(秋懷)라 한 데가 있다.
○ 기재(企齋) 신 상공(申相公)이, ‘동지(同知) 장언양(張彦陽)이 연경(燕京)에 가는 것을 보내다’라는 시에,
오늘에 주 나라를 관광하는 오 나라 계찰이요 / 今日觀周吳季札
전에 오랑캐에게 화친하던 한 나라 장건이라 / 舊時和虜漢張騫
하니, 만좌(滿座)가 다시 붓을 대지 못하였다. 조송강(趙松岡)이 말한 것이다. 기재(企齋)의 이름은 신광한(申光漢)이요, 송강(松岡)의 이름은 조사수(趙士秀)이며, 기재의 조카이다.
○ 호음(湖陰) 정 상공(鄭相公)이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언덕에 작은 집을 짓고, 그 벽에 용재(容齋)ㆍ눌재(訥齋)ㆍ적암(適菴)의 세 수만을 걸어두었으니, 이 세 분이 호음이 존경하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용재의 시 한 연(聯)에,
강호에 고기가 즐거움을 얻었으며 / 江湖魚得計
종고는 새가 좋아하지 않는다 / 鐘鼓鳥非情
하였는데, 호음이 항상 이 구를 칭찬하였다. 호음의 이름은 정사룡(鄭士龍)이다.
○ 안분(安分)이 의주(義州)의 취승정(聚勝亭) 시를 차운한 시에,
한 물은 흘러 환괘가 되었고 / 一水流成渙
세 산은 끊어져서 곤괘를 지었구나 / 三山斷作坤
라고 한 구는 정말 진기한 말인데, 아래 구가 더욱 기묘하다.
○ 조사(詔使) 공운강(龔雲岡)이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안분당(安分堂)이 선위사(宣慰使)로 갔는데, 안분당이 중국 사신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일하에 떨친 이름 두성의 남북이요 / 日下高名斗南北
천애에 이별주는 옥동서 잔이로다 / 天涯別酒玉東西
하니, 중국 사신이 말하기를,
“이 시가 지극히 아름다우니 우리가 당연히 우대(優待)를 하여 그 시에 보답하겠다.”
하고, 안분당이 들어가 뵐 적마다 반드시 의자에서 내려와서 답하니, 안분당이 이것으로 스스로 뽐내었다. 내가 호음에게 말하니, 답하기를,
“이것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고 실은 내 손에서 나왔다.”
하였다. 황산곡(黃山谷) 시에,
가인은 두성의 남북이요 / 佳人斗南北
미주는 옥동서로다 / 美酒玉東西
하였다. 이 시는 단지 그 시의 두서너 자를 고친 것인데, 이것을 감탄하고 칭찬하는 것은 막막(漠漠) 음음(陰陰)의 등류인 것이다. 공선(龔仙)이 어찌 황산곡의 시를 보지 못하였던가?
○ 서사가(徐四佳)가 조사(詔使) 기순(祈順)의 시에 차운하여,
금암은 날이 따스하여 버드나무 새로 피고 / 金巖日暖初楊柳
검수는 봄이 차서 두견 아직 멀었네 / 劍水春寒未杜鵑
하였는데, 유촌(柳村) 황여헌(黃汝獻) 공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호음에게 물으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줄 모르겠다. 말에 병폐가 있다.”
하였다. 한 사람은 칭찬하고 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니, 두 사람의 뜻이 같지 않다. 물러나 생각하니, 이 한 연구는 오로지 원(元) 나라 사람의 시어(詩語)를 쓴 것인데, 저것은 두 땅이 서로 떨어져 있어서 초(初)ㆍ미(未) 두 자가 합당하다. 그러나 금암과 검수 사이는 아침에 떠나 저녁에 닿을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날이 따스하다느니 봄이 차다느니 하는 그런 차이가 있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말에 병폐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호음의 말을 옳다 해야 할 것이다. 사가(四佳)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다.
○ 퇴휴(退休) 소 상공이 의주 취승정(聚勝亭)의 휘(暉) 자 운을 차운하면서,
맑은 강 비단 같다는 사현휘요 / 澄江如練謝玄暉
라는 구를 지어놓고 짝을 맞추지 못하고, 어숙권(魚叔權) 공에게 맞추도록 부탁하였다. 어숙권이 맞추기를,
초생달 낫을 간다는 한 이부라 / 新月磨鎌韓吏部
라 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마(磨)가 사(似)만큼 온전하지 못한 것같다.
○ 호음(湖陰)이 원접사로 갔을 때, 김백순(金伯醇)이 의주 목사(義州牧使)였다. 호음이 소관(所串)의 관(館)에 이르러 시를 지어 보내었다.
누가 문무 다 갖춘 이 적다 하는고 / 誰云文武雙全少
창 비낀 오늘날에 다시 시를 짓는다 / 橫槊如今更賦詩
뱃속에 웅도 있으매 절제사를 맡았고 / 腹有雄圖專節制
손에는 어려운 일 없으매 사업을 시행하네 / 手無難事達施爲
나그네 떠나고 누에 오르는 저녁이요 / 賓筵客散登樓夕
밤 장막 남은 등잔 이별도 아까워라 / 夜帳殘燈念別時
옥문관에 지체한 것 예부터 있는 일이니 / 留滯玉關從古事
명년에 남보다 먼저 봉황지에 들 것이오 / 明年先賀鳳凰池
이것은 문집에 빠진 것이다. 내가 우연히 그 원고를 얻었다.
○ 미전(薇田) 왕학(王鶴)이 기자묘(箕子廟)를 참배하고 시를 지었다. 호음(湖陰)이 사(師) 자 운을 짓기에 군색하여 며칠을 두고 다듬었는데, 지을수록 난삽하여 종사관(從事官)에게 부탁하자, 정랑(正郞) 이홍남(李洪男)이 즉석에서 써내려갔다.
삼인이 비록 행적은 다르지만 / 三仁雖異迹
백세에 오히려 같이 스승으로 삼는다 / 百世尙同師
하였다. 호음의 재주로도 때로는 간혹 막히는 수가 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랴?
○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백마강’ 시는 다음과 같다.
나라 망하니 산과 물이 옛날과 다른데 / 國破山河異昔時
홀로 강달이 남아 몇 번이나 차고 기울었다 / 獨留江月幾盈虧
낙화암 위의 꽃은 아직도 남았으니 / 落花巖上花猶在
비바람 그 당시에 다 불어 떨어뜨리지 못하였나 / 風雨當年不盡吹
이 사문 강남(李斯文江男)의 시는,
고국에 올라 보니 마침 달이 오를 때라 / 故國登臨月上時
백제의 왕업이 여기 이루고 망했네 / 濟王家業此成虧
용 죽고 꽃 떨어진 천 년의 원한은 / 龍亡花落千年恨
동풍에 부는 한 피리에 부쳤네 / 分付東風一笛吹
이 두 시는 당시 사람들이 서로들 우열(優劣)을 논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아래 시 첫째 구가 너무 싱거운 것같다. 동(東) 자를 혹은 서(西) 자라 하기도 한다.
○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꿈에 시 한 연구(聯句)를 얻었다.
바람은 마른 잎 나부끼어 강 언덕에 지고 / 風飄枯葉江干墮
구름은 먼 산 안고 바다 위에 솟아난다 / 雲抱遙岑海上生
그후에 관동(關東) 관찰사가 되어 삼척(三陟) 죽서루(竹西樓)에 올라보니, 보이는 것이 과연 이전의 꿈과 맞았다. 사람의 일이란 미리 정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송강(松岡) 조사수(趙士秀)가 제주(濟州) 목사로 나갔을 때, 임석천(林石川)이 그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일찍 남악에 올라 바라보니 / 嘗登南岳望
외로운 섬 바다 가운데 있네 / 孤島海中央
뱃길은 서쪽으로 절강에 통하고 / 舟楫西通浙
말들은 천상의 방성에 응했구나 / 驊騮上應房
관원으로 오는 것이 귀양과 무엇이 다르랴 / 爲官何異謫
이번 이별이 가장 상심되네 / 此別最堪傷
진신(搢紳)들이 모두 그 시를 고인(古人) 기상이 있다 하였다. 석천(石川)은 해남(海南) 사람이니 남악(南岳)은 분명 그 현의 산일 것이다.
○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병신년(1536, 중종 31)에, 호음(湖陰)이 등왕각(滕王各閣) 배율(排律) 20운(韻)을 지어 정시(庭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가선(嘉善)의 품계(品階)에 올랐다. 전편(全篇)이 웅장하고 기특 건실하여 정말 걸작이었다. 단 노두(老杜 두보(杜甫))의 ‘청강(淸江)ㆍ백석(白石)ㆍ죽색(竹色)ㆍ송성(松聲)’의 말들을 사용하였는데 노두의,
청강 백석은 마음 상하게 아름답고 / 淸江白石傷心麗
연한 꽃술 짙은 꽃 눈에 가득 아롱지네 / 嫩蕊穠花滿目斑
옛 담장은 아직도 대 빛 / 古墻猶竹色
빈 각은 스스로 소나무 소리 / 虛閣自松聲
라 한 것은, 등왕정(滕王亭)을 읊은 것이지, 등왕각을 읊은 것은 아니다. 등왕각은 홍주(洪州)에 있고, 등왕정은 낭주(閬州)에 있는데, 공(公)은 정을 두고 읊은 것을 등왕각에다 끌어썼으니, 잘못이다. 당시 보락당(保樂堂) 김 정승(金政丞 안로(安老))이 고시한 것인데, 과연 모르고 한 것인가? 알면서 이것을 밝히지 못한 것인가?
○ 이회재(李晦齋) 선생의 경산현(慶山縣) 동헌(東軒) 시에,
우는 뻐꾹새는 가지 위에 일곱이요 / 鳴鳩枝上七
나는 제비 비 속에 쌍쌍이라 / 飛燕雨中雙
하였는데, 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외에도 볼 만한 것이 매우 많다. 공은 시학(詩學)을 오로지 하지 않았으나 성정(性情)에서 자연히 우러나오는 것이 이러하였으니, 품성(稟性)이 고명하면 애쓰지 않아도 이런 시구를 얻을 수 있음을 알겠다. 회재(晦齋)의 이름은 이언적(李彦迪)이다.
○ 재상 최연(崔演)의 문장은 호건(豪健)하여 필한(筆翰)이 물 흐르는 것같다. 인종(仁宗)의 만시(挽詩)는 이러하다.
삼년상을 짧게 한 한 나라를 마음으로 낮추보고 / 三年短制心嫌漢
오월을 여막에 거처함은 예법이 등 나라보다 낫네 / 五月居廬禮過滕
전고(典故)를 쓴 것이 매우 적당하다. 임 사문 형수(林斯文亨秀)가 인종의 만장을 짓기를,
오늘의 눈물을 차마 가지고서 / 忍將今日淚
작년 옷을 거듭 적시랴 / 重濕去年衣
하였다. 중종(中宗)이 승하하고 1년이 되지 않아 인종(仁宗)이 승하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나 뜻은 극진하였다.
○ 임 사문(林斯文 임형수(林亨秀)를 말함)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하는 한 연구(聯句)를 얻었는데, 그뒤에 황산곡(黃山谷)의 시집을 보니 거기에,
세상에 어찌 천리마가 없겠는가 / 世上豈無千里馬
사람 가운데 구방 고를 얻기 어렵도다 / 人中難得九方皐
라는 글귀가 있었다. ‘세상’이라 한 것은 나의 ‘천하’보다 못하고, 그의 ‘사람 가운데[人中]’라 한 것은 나의 ‘인간(人間)’보다 낫다.”
하였다. 생각으로는 황산곡의 이 말은 고금에 뛰어났으며, 그후로 어찌 여기에 겨룰 사람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우연히 합치되었다면 그는 천 년 뒤에 황산곡과 겨룬다 할 수 있다.
○ 유촌(柳村)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서울에 들어와 신기재(申企齋)에게, ‘근래에 누구의 가작(佳作)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임공 형수(林公亨秀)가 탐라(耽羅)에 목사로 나가,
산은 왕자국에 서려 있고 / 山蟠王子國
물결은 노인성을 차도다 / 波蹴老人星
라는 글귀를 얻었는데, 이것이 가장 아름답다.’ 하였소.”
하였다. 내가 호음에게 질문하였더니, 곧 말하기를,
“나는 그것이 좋은 줄 모르겠다.”
하였다.
○ 중국 사신 왕(王)씨가 올 때, 호음(湖陰)이 원접사(遠接使)로 가고, 홍재상(洪宰相) 인재(忍齋)공이 역시 원접사로 갔다. 환관(宦官) 천사도 함께 용만(龍灣)에 있었다. 호음이 홍 재상에게 주는 시의 셋째 연구에,
진지를 겨루어 기운 저상되니 의당 물러나야 하고 / 摩壘氣沮宜退舍
난초 향기 맡아 마음 꺾이니 함께 깃발 멈췄구나 / 襲蘭心折共停旄
내가 저(沮) 자가 음률[律]에 맞지 않는다고 아뢰니, 공(公)이,
“쇠(衰) 가가 어떠냐?”
물었다. 내가,
“최(摧) 자만큼 힘이 없습니다.”
하니, 공이,
“네가 옳다.”
하였다. 중국 사신에게 주는 시에,
접해와 진성 만여 리에 / 鰈海秦城餘萬里
몇 겹 구름 나무 놀을 격하였네 / 幾重雲樹隔煙微
라고, 하였다. 내가,
“운(雲) 자에 또 연(煙) 자를 붙여 온당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운(雲) 자를 춘(春) 자로 바꾸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네 말이 옳다’하였다. 공은 시를 적을 때마다 반드시 나로 하여금 붓을 쥐게 하였고, 매번 글자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생각이 나지 아니하면 나에게 하문(下問)하여, 답한 것이 뜻에 맞으면 바로 고치고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다. 내가 경성(京城)에 도착하여 춘(春) 자의 뜻을 가지고 동료들에게 품평을 청하니, 유항(柳沆)이 말하기를,
“너 역시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춘수(春樹)를 쓴 아래에는 운(雲) 자를 붙이는 것이 옳다마는 연(煙) 자는 본색어(本色語)가 아니다.”
하였다. 내가 탄복해 마지않았다. 운(雲) 자를 《황화집(皇華集)》에 적어 넣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인재(忍齋)는 이름이 홍섬(洪暹)이다.
○ 종곡(鍾谷) 성 징군(成徵君)은 다만 몸가짐이 매우 고상했을 뿐 아니라, 문장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시를 보는 이가 드물었다. 그 시에,
한 번 종산 속에 들어오니 / 一入鍾山裏
소나무와 대 속 초가에 누웠구나 / 松筠臥草廬
하늘이 높은데 머리 어찌 구부리랴 / 天高頭宜俯
땅은 좁아도 무릎을 펼 만하네 / 地膝滕猶舒
이름난 이 어느 누가 살았는고 / 名下何人在
숲 사이 이 늙은이 남았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 손은 자연 끊어지니 / 柴門客自絶
거문고와 책을 파하는 날이 없더라 / 無日罷琴書
하였다. 이와 같은 작품은 비록 옛 사람들 시집 가운데 두더라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아깝도다.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한스럽다.
○ 남명(南溟) 조 처사(曺處士 조식(曺植))가 사미정(四美亭) 호음(湖陰)의 시에 차운하였다. 첫째,
늙어서 매운지 신지 구미마저 잃었고 / 垂老辛酸口失宜
늙는 것 잊었으나 기는 잊지 못했네 / 縱然忘老未忘機
백 굽이 뚫린 깊은 골에 몸은 오히려 나그네요 / 百穿深壑身猶客
반쯤 잠든 높은 정자 꿈이 벌써 기이하다 / 半睡高亭夢已奇
병목(마을 이름)의 늦은 봄에 사람은 이미 갔고 / 竝木殘春人舊謝
사방(물이름)의 가랑비에 물 비로소 불어나네 / 舍邦微雨水初肥
장군은 유에 봉해질 계책 어찌 없겠는가 / 將軍肯少封留計
일개 서생이 또한 이곳에 있도다 / 一介書生亦在斯
하였고, 둘째에,
언덕에 날마다 즐거움 어기지 않아 / 斯干日日樂無違
이것을 버리고 하늘 이야기 한들 진기할 것 없네 / 舍此談天未是奇
지리산 삼장 사는 곳과 비슷하고 / 智異三藏居彷彿
무이 구곡(武夷九曲) 물이 비슷하구나 / 武夷九曲水依俙
담에 덮은 기와는 늙어 바람에 나부끼어 가고 / 鏝墻瓦老風飄去
돌길 갈림길 깊어도 말이 스스로 아네 / 石路歧深馬自知
흰 머리로 거듭 오니 옛 주인이 아니고 / 皓首重來非舊主
한 해 봄 다 가는데 옷 없다는 시 읊조린다 / 一年春盡咏無衣
하였다. 말은 고상하고 뜻이 깊어 얕은 식견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일 반드시 양자운(揚子雲)이 나와야 이것을 알 것이다.
○ 정승 김귀영(金貴榮)이 영남(嶺南) 관찰사로 나갔을 때 그 거제현루(巨濟縣樓)의 시는 이러하다.
붉은 단풍 가득한 만산에 자주 말을 멈추고 / 紅樹萬山頻駐馬
흰 구름 천 리에 홀로 누에 오르누나 / 白雲千里獨登樓
가을을 슬퍼함과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이 아울러 나타나 있다.
○ 송이암(宋頣庵)이 서원(西原 청주의 옛 이름) 기생에게 주는 시에,
헤어질 때 띠를 풀어 옷 대신 남겨두니 / 臨分解帶當留衣
이것으로 가는 허리 한 둘레 둘러보라 / 敎束纖腰玉一圍
상상컨대, 단장하고서 더욱 아름다울 제 / 想得粧成增宛轉
다른 사람 끌어 비단 이불로 들어가리 / 被他牽挽入羅幃
하였다. 향렴체(香奩體)가 매우 사랑스럽다. 이암(頣菴)은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다.
○ 사암(思菴) 박 정승(朴政丞)이 젊었을 때 승방(僧房)에 자면서 시를 짓기를,
취하여 산가에 자고 깨어보매 의심되니 / 醉睡山家覺後疑
백운이 골에 가득하고 달이 잠길 때로다 / 白雲平壑月沈時
소연히 홀로 걸어 숲 밖으로 나와보니 / 翛然獨出脩林外
돌길에 지팡이 소리 자는 새가 아는구나 / 石逕笻聲宿鳥知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숙조지(宿鳥知) 선생이라 하였다. 이것은 정곡(鄭谷)의 자고시(鷓鴣詩)와 조하(趙嘏)의 의루시(倚樓詩)와 같은 따위다. 박상국(朴相國)의 시는 이백(李白)에게서 나왔는데, 청신(淸新)하고 뛰어나 세상에 전하는 것이 매우 많다. 내가 가야산(伽倻山)에 노닐면서 그 찌푸림을 본떠서[効顰] 지어보았다.
세상 일은 홍교 밖이요 / 世事紅橋外
지팡이 소리는 학의 꿈속이로다 / 笻聲鶴夢中
이것은 이른바 제 능력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사암(思菴)의 이름은 박순(朴涥)이다.
○ 관원(灌園) 박계현(朴啓賢)이 조송강(趙松岡)에게 올린 시의 일련(一聯)에,
시명은 일성적을 사양하지 않고 / 詩名不讓一聲笛
정승의 사업은 아직도 반부 글에 남아 있다 / 相業猶存半部書
하였다. 전고가 매우 타당하다.
내가 학관(學官) 유이손(柳耳孫)에게 보낸 시에,
하였으니, 이것은 호랑이를 그리다가 개를 그리고 만 것이다.
○ 가정(嘉靖) 갑자년(1564, 명종 19) 무렵에 서울에 말이 전해지기를,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제천정(濟川亭) 벽에 붙였으니,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일찍이 전조에 오얏 심는 것을 보았는데 / 曾見前朝種李辰
동풍이 열두 번째 봄이로다 / 東風一十二回春
학은 화표의 천 년 기둥에 돌아오니 / 鶴歸華表千年柱
눈물로 청산의 한 줌 흙을 적시더라 / 涙洒靑山一掬塵
단풍 언덕 새벽종의 신륵사요 / 楓岸曉鐘神勒寺
잔디밭 저녁 피리 광나루에 울리더라 / 煙莎晩笛廣陵津
맑은 가을 노 소리는 여강을 지나가니 / 淸秋鼓枻驪江去
누 위의 어느 누가 여동빈을 알아보리 / 樓上何人識洞賓
어느 사람이 지은 것인지 이상한 말이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은 신선의 시라 하였다. 내가 일찍이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과 이 이야기를 언급한 적이 있다. 청강이 말하기를,
“내가 젊을 때부터 이 시를 들은 지 오래되었다. 내 친구 아무개가 지은 것이다.”
하였다. 그것을 근일에 지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정자의 벽에 걸었다는 말 역시 맹랑한 말이다.
○ 이증영(李增榮)이 합천 군수(陜川郡守)로 있으면서 가장 잘 다스렸다. 합천사람 사문 주이(周怡)가 그에게 송별시를 지어주기를,
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소인은 사람에게 돈을 준다.”
하였으니, 이 글과 뜻이 아울러 묘한 것이다.
○ 가정(嘉靖) 병진년 무렵에 명(明) 나라 사람 유응기(劉應箕)가 왜구(倭寇)에게 잡혀 배 안에 감금되었다가 우리 나라 사람에게 사로잡혀 서울에 왔다.
그가 시를 지었다.
전쟁을 원망하지 하늘을 원망하랴 / 只怨干戈不怨天
고국 떠나 길은 천리 만리 / 離鄕去國路千千
근심에 싸인 병골은 쇠한 운명 슬프고 / 愁纒病骨哀衰運
눈물 홍안에 뿌려 젊은 나이 우노나 / 涙洒紅顔泣盛年
달 보며 고향 생각 서쪽 국경 밖이요 / 見月思歸西塞外
구름 보며 마음은 북당 앞으로 달리누나 / 看雲心逐北堂前
모구의 칡을 보니 세월 얼마 흘렀는고 / 旄丘見葛何多日
고생으로 외로운 몸 여기서 곤욕 당하네 / 尾瑣孤身因此邊
이 재상(李宰相) 아계공(鵝溪公)이 젊었을 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
곤의 바다 고래 물결 하늘에 닿아 아득하고 / 鯤海鯨波杳接天
남쪽 형국(초 나라 땅) 아득하니 몇 삼천 리 되는고 / 南荊迢遞幾三千
이국 땅에 유리하니 오직 외로운 그림자만 / 流離異國惟孤影
타향에 굴러굴러 한창 어린 나이로다 / 飄泊他鄕是弱年
나비꿈 때때로 국경 밖에 전하지만 / 蝶夢有時傳塞外
기러기 편지는 집 앞에 닿을 길이 없네 / 雁書無路抵家前
알겠노라 그대의 밤마다 어버이 그리는 생각 / 知君夜夜思親處
가을비 쓸쓸히 객침가를 적셔주리 / 秋雨蕭蕭客枕邊
당시 유(劉)의 나이 15~16세요, 아계공의 나이는 17~18세여서 나이는 모두 어렸으나 시는 이미 문장을 이루었다. 자고로 일찍 현달한 사람은 반드시 숙성(夙成)하는 법이다. 아계는 지금 재상(宰相)이 되었는데, 유응기도 역시 현달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급제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하니, 과연 그런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아계(鵝溪) 상공 이산해(李山海)는 나이 7~8세도 되기 전에 능히 큰 글자를 썼고, 이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을 다 쓰고 나면 발에 먹물을 묻혀서 종이 끝에 자국을 찍으니, 사람들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13세에 호서(湖西)의 향시(鄕試)를 보아 해원(解元 향시의 장원)이 되었으니, 천재가 아니면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그를 지목하기를 신동(神童)이라 하였다. 일찍 청운(靑雲)에 올라, 이름이 자자하더니, 40이 겨우 넘자 반열은 구극(九棘)에 올랐고, 수년이 못 되어 뛰어 홍화(弘化)에 오르고, 50에 정승이 되었으니, 근래에 드물게 보는 일이다. 이는 재주와 명예를 함께 가진 사람이라 할 것이다.
○ 상사(上舍) 정작(鄭碏)의 우인(友人)을 보내는 시에,
친우는 천 리에 행색이 있는데 / 故人千里有行色
늙은이는 한 봄을 좋은 회포 없어라 / 老子一春無好懷
하였으니, 만당(晩唐)의 시체(時體)를 깊이 얻었다.
○ 두보(杜甫) 시에,
하늘로부터 왔으매, 글쓴 곳이 젖었고 / 自天題處濕
여름을 당하여도 입으니 시원하다 / 當夏着來淸
라고 한 자천(自天)이나 당하(當夏) 등 글자는 경전(經傳)에서 온 말이다. 시에 경전에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예부터 그 법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학사 어숙권(魚叔權)에게 준 시에,
시단에선 내가 못나서 달아나면서 뒤에 섰고 / 詩壇我屈奔而殿
술자리에선 그대 높으니 술잔은 그대 먼저네 / 酒社君尊酒則先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한단(邯鄲)의 걸음을 배우는 것이다.
○ 내 친우 박지화(朴枝華)가 남의 만장(挽章)을 쓴 시에,
구만리 높은 하늘 고래 타고 날았다가 / 天高九萬騎鯨去
햇수로 삼천 년에 학이 되어 돌아오오 / 歲到三千化鶴回
하였다. 자못 시법(詩法)을 체득하였다.
○ 사문 조징(趙澄)이 영남 도사(嶺南都事)로 있으면서 제영(題詠)을 즐겨하여 판(板)에 새겨 벽에 걸었는데, 시와 부(賦)가 반반씩 되니 사람들이 기롱하였다. 사문 신의충(申義忠)은 조징과 동년(同年) 친우였다. 공해(公廨) 변소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측간에 졸구가 없는 것 보니 / 厠間無拙句
조가 아직 안 온 것을 알겠도다 / 知趙不曾來
신후(申侯 후(侯)는 원이라는 뜻)는 이것으로 이름이 났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신(申)의 10자가 조(趙)의 백 편을 누를 수 있다.”
하였다.
○ 학사 신응시(辛應時)가 중국 사신 구희직(歐希稷)을 이별하는 시에,
해국의 꿈은 길이 북극에 있고 / 海國夢魂長北極
초강 안개비는 또 동풍이네 / 楚江煙雨又東風
하였으니, 매우 좋다. 구공(歐公)은 초(楚) 땅의 사람이었다.
○ 정랑(正郞) 하응림(河應臨)은 매우 시명(詩名)이 있었다. 신녕현(新寧縣) 죽정(竹亭)의 시에 차운하였다.
햇빛이 이미 산빛을 어둡게 하고 / 日色已將山色瞑
나그네 마음은 대 속과 함께 비었더라 / 客心還與竹心空
그 외의 아름다운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천사(賤士) 강윤정(姜允精)은 젊을 때부터 시로 이름났다. 그의 아방궁시(阿房宮詩)에 이런 글귀가 있다.
만 백성의 힘을 허비하여 / 虛費萬民力
석 달의 붉은 불길 만들었네 / 圖爲三月紅
군산문적시(君山聞笛詩)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지는 달 아직 남아 강물은 망망한데 / 落月未落江茫茫
한 곡조 아련하니 찬 조수 소리더라 / 一曲杳隨寒潮聲
사림(士林)들이 전하며 읊어 온다.
○ 나의 친우 임필(林苾)군은 많은 책을 널리 보았고 문장도 잘 지었는데, 특히 시에 뛰어났다. 그의 낙양명원시(洛陽名園詩)에,
곡수ㆍ낙수는 깊은 해자요 / 穀洛爲深塹
숭산ㆍ망산
은 두터운 담 / 嵩邙作厚垣
경기는 삼진의 등골에 합하였고 / 畿合三晉脊
서울은 구주의 뿌리를 잡았구나 / 都扼九州根
희씨가 처음 열었던 도읍 / 姬氏初開邑
당 나라 사람이 처음 동산을 세웠네 / 唐人始立園
군주는 전성한 날을 맞이하고 / 君逢全盛日
신하는 태평의 은혜 받았네 / 臣受太平恩
갑제는 가지런히 구름과 줄을 짓고 / 甲第齊雲列
높은 누각은 물을 눌러 껑충 뛴듯 / 危樓壓水騫
낙화는 만호에 날아 있고 / 落花飛萬戶
수양버들은 천문을 가리었다 / 垂柳掩千門
이것은 30운(韻)이나 되는 긴 것으로 다 적지 못한다. 호음(湖陰)이 보고, ‘아주 좋다, 아주 좋다.’하였다. 이상 세 사람(신응시ㆍ강윤정ㆍ임필은 시학(詩學)에 뛰어난 점이 많았으나 불행히도 모두 일찍 죽었다. 만약 하늘이 그들에게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어찌 이 정도에 그치고 말았겠는가?
○ 강윤정(姜允精)의 군산문적시(君山聞笛詩)는 장단구(長短句) 30여 운(韻)으로 되었는데, 대관재(大觀齋) 심의(沈義)공이 그 시의 짧은 구는 두 자를 더 보태고 긴 구는 몇 자를 줄여서 모두 칠언(七言)으로 하여 이 글을 자기 문집에 실었다. 대관재는 일대의 거장(巨匠)이니, 어찌 남의 글을 도둑질하였겠는가? 반드시 한 창려(韓昌黎)가 옥천자(玉川子 노동(盧仝)의 호)의 월식시(月蝕詩)를 모방한 것을 본딴 것이리라. 그 제목을, ‘희롱으로 군산문적시에 차운하다’ 한 것으로 보아 더욱 알 수 없는 일이다.
○ 《대관집(大觀集)》중의 ‘두 마리 소를 그린 부[畫二牛賦]’는 실은 그 중씨(仲氏) 정승(政丞 심정(沈貞))이 지은 것을 일부러 자기 문집에 실었고, ‘월부를 모방한 것[擬月賦]’이란, 그의 조카 승지 사순(思順) 공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두 편이 《대관집》에 실린 것은 잘못이다. 그의 종손(從孫)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의 호) 상공(相公)이 말한 것이다.
○ 중국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의 《황화집(皇華集)》의 서(序)는 조정에서 호음(湖陰)에게 짓도록 한 것인데, 마침 병이 나서 어숙권(魚叔權) 공에게 초안을 잡게 하여 자신이 수십 자를 고쳤다. 그러므로 문집에는 싣지 않았다. 친히 어예미(魚曳尾)에게 들은 것이다. 어(魚)의 헌호(軒號)다. 혹은 야족(也足)이라 하기도 한다.
○ 옛날 책사종(翟嗣宗)이 회남위(淮南尉)로 있었는데, 그때 감사(監司)에게 매우 곤욕을 당하였다. 역관(驛館)에서 거미를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실을 짜며 왕래하니 북같이 빠른데 / 織絲來往疾如梭
늘 공중에 올라 그물 만들기 좋아하네 / 長愛騰空作網羅
남을 해칠 몸과 마음 매우 적지마는 / 害物身心雖甚少
하늘에 늘어진 그물도 또한 많지 않구나 / 漫天網紀亦無多
숲 사이 자는 새들 너를 미워하지마는 / 林間宿鳥應嫌汝
발 아래 나는 벌레 그가 가장 너를 두려워한다 / 簾下飛虫最懼汝
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배우지 말지어다 / 莫學螳螂捕蟬□
모름지기 알아야지. 참새가 너를 잡을 줄을 / 須知黃雀奈君何
임자중(林子中)이 그를 불러 경박한 시를 짓지 말라고 꾸짖었다.
○ 우리 동방(東方)에도 역시 무사(武士) 이장길(李長吉)이 있었는데, 그가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있을 때 백성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자하 자하 또 자하야 / 子賀子賀復子賀
관탕 민재 모두 비우고 / 官帑民財一倂空
오직 강산은 옮기지 못하여 / 惟有江山移不得
화공을 명하여 병풍 위에 그렸네 / 命工圖畫上屛風
자하(子賀)는 장길의 자(字)다..
○ 또 사문 조희(曺禧)가 성주 목사(星州牧使)였다. 어떤 사람이 역(驛)의 벽(壁)에 적었다.
하늘 위의 남궁자요 / 天上南宮子
구름 사이 이 사군이라 / 雲間李使君
조교는 키가 구 척이니 / 曺交長九尺
뉘 능히 우열을 가릴꼬 / 優劣孰能分
상공 남궁숙(南宮淑)ㆍ상공 이윤경(李潤慶)은 이 고을에 원을 지냈는데, 모두 치적(治績)에 명성이 있었다. 또,
백성이 비록 입을 다물고 말이 없으나 / 民雖結舌摠無言
가죽 속에는 각자의 춘추가 있다 / 皮裏春秋各自存
장초의 알음 없는 것이 정말 즐거우리 / 萇楚無知眞可樂
이 몸 어디메 도원으로 피할꼬 / 此生何處避桃源
하였다. 그는 원성을 듣게 만들었으니, 과연 좋지 못하나, 조롱하는 사람도 또한 잘한다 할 수 있겠는가?
근년에 어떤 사람이 장편을 지어 종루(鐘樓) 기둥에 걸어서 낱낱이 조정 사대부(士大夫)를 헐뜯었으니, 진실로 조정에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니면 바로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일 것이다. 시는 비록 볼 만하였으나, 실로 책사종(翟嗣宗)의 죄인인 것이다.
○ 우리 동국(東國)에 무인(武人)으로 시에 능한 사람은 박휘겸(朴撝謙) 이후로 전혀 이름난 사람이 없다. 중묘조(中廟朝)에 중추(中樞) 이사증(李思曾)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시에 탐닉하는 버릇이 있었다. 함경 일도의 시판(詩板) 중에 상정(橡亭)이라 한 것이 그 사람이다. 그 시는 혹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근세에 함양군(咸陽郡)에 한 무사가 있는데, 성은 정(鄭)이요, 이름은 척(陟)이며, 스스로 호를 죽계(竹溪)라 한다. 그의 시에,
죽계의 늙은이는 벼슬을 마다 하고 / 竹溪窮老謝籫纓
이 누각에 누웠으니 병든 몸 가벼워라 / 臥着玆樓病骨輕
물새 한 울음에 산비도 멎을시고 / 水鳥一聲山雨歇
구름에 새어나온 저녁 놀 반쯤 밝았더라 / 漏雲殘照半邊明
하였다. 무인이라고해서 가벼이 볼 수 없다.
○ 조송강(趙松岡)이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로 나와 나에게 말하기를,
“열읍(列邑)의 제영(題詠)을 두루 보니, 서사가(徐四佳 이름은 서거정(徐居正)) 공의 울산(蔚山) 동헌(東軒) 시에,
누각은 악양루와 겨루어 천하에 제일이요 / 樓敵岳陽天下一
땅은 봉래도와 인접하여 바다 가운데 셋이로다 / 地隣蓬島海中三
한 것이 가장 기특하고 장하였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상공 안침(安琛)의 창녕(昌寧) 추월헌(秋月軒) 시에,
물결은 흩어져서 소동파의 백을 짓고 / 搖波散作東坡百
그림자 대하니 정말 이태백의 셋이로다 / 對影眞成李白三
라고 한 것과 어느 것이 낫습니까?”
하니, 공은,
“저것은 웅장하고 이것은 공교로우니, 서로 막상 막하이다.”
하였다. 내가 울산(蔚山) 남헌(南軒) 시에, 차운한 것은 이러하다.
백조 가고 난 거기에 바다 있고 / 白鳥去邊惟有海
청산 다한 곳에 다시금 마을 있다 / 靑山盡處更有村
이 역시 사가정(四佳亭)과 비슷한 뜻이다.
○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선연(嬋姸)이라는 동(洞)이 있다. 빽빽이 들어박힌 무덤은 모두 이원제자(梨園弟子)들이 묻힌 곳이다. 이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청천(聽天) 심 상공(沈相公)이 정을 쏟았던 기생도 이 안에 묻혀 있다. 공이 한 절구를 지었으니, 그 삼구와 사구에,
장부의 한 죽음을 끝내 면치 못할 바엔 / 丈夫一死終難免
원하노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었으면 / 願作嬋姸洞裏魂
하였다. 내가 홍양(洪陽)에 가서 놀았는데, 그때 공은 호서 절도사(湖西節度使)로 장차 이 읍에 부임하려 할 때 내가 교방가요(敎坊歌謠)를 짓기를,
인생의 뜻 맞은 곳 남북 구별없으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 속 혼일랑 아예 되지 마오 / 莫作嬋姸洞裏魂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몹시 웃었다.
○ 심 상공(沈相公)의 시는 평담(平澹)하고 난숙(爛熟)하여 조탁(雕琢)한 흔적이 없고, 백향산(白香山 백거이(百居易))의 기풍이 있어 세상에 풍화(風花)를 숭상하는 사람들은 중시하지 않았으나, 나 혼자 애완(愛玩)하여 버리지 못하니, 비록 영인(郢人)의 도끼 바탕[郢質]이라 하여도 좋다.
고금 중국 사신의 시를 고하(高下)에 대해 평한 이가 없었다. 내가 호음(湖陰)에게 품평을 청하니, ‘기순(祈順)이 제일이요, 예겸(倪謙)ㆍ동월(董越)이 다음이요, 김식(金湜)은 칠언 율시(七言律詩)가 극히 좋고, 장영(張寧)은 좀 미숙한 것같다.’ 하였다. 공은 일찍이 동규봉(董圭峯 동월(董越))의,
강 비 추위를 빚어 나무 끝에 오고 / 江雨釀寒來樹抄
재 구름 어둠을 나누어 바위 언덕에 떨어진다 / 嶺雲分瞑落巖阿
라는 구를 읊으면서 찬양한 적이 한번만이 아니었다.
○ 무릇 중국 사신이 평안 역관(平安驛館)에 올 때면, 동인(東人)의 시판(詩板)을 일체 떼어버리고, 단지 대동강(大同江) 선정(船亭)에 정지상(鄭知常)의,
비 갠 긴 둑에 풀빛은 짙은데 / 雨歇長堤草色多
라는 시만 남겨두었다. 호음 상공(湖陰相公)이 말하기를,
“목은공(牧隱公)의 부벽루(浮碧樓) 시에,
어제는 영명사를 지나 / 昨過永明寺
오늘 부벽루에 올랐네 / 今登浮碧樓
성은 비었는데 달은 한 조각이요 / 城空月一片
바위는 늙었는데 구름은 천추로다 / 石老雲千秋
한 것은 절묘하여 사람을 감동시킨다.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발을 구르며 칭찬하였다. 이것이 정지상의 시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고, 이것 역시 남겨두고 떼지 않았다.
○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는 강산 풍물(江山風物)이 서로 으뜸을 겨루는데, 영남루는,
가을 깊어 큰길엔 붉은 단풍 비쳐 있고 / 秋深官道映紅樹
날 저문 어촌에는 흰 연기 난다 / 日暮漁村生白煙
한 낚시 어부는 빗소리 밖이요 / 一竿漁父雨聲外
십리길 나그네는 산 그림자 가이로세 / 十里行人山影邊
라고 한 등의 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촉석루는 전할 만한 가작이란 하나도 없다. 한 사람의 시작으로 영남에는 뛰어난 시가 있고, 촉석루에는 옹졸한 것은 촉석루의 기승(奇勝)이 영남루보다 나아서 잘 형용을 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 가정(嘉靖) 임임년(1542, 중종 37)에 내가 중씨(仲氏) 참판공(參判公)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예부(禮部)를 관광(觀光)하는데, 절강(浙江)의 서생(書生) 5~6인이 먼저 와 있었다. 땅에 글을 적어 서로 문답하고, 한 절구를 지어보였다.
중국 조정 예부에 부평같이 모였으니 / 天朝禮部風萍集
천리의 관광객은 각각이 다른 고향 / 千里觀光各異鄕
가장 괴로운 건 내일 아침 이별하면 / 最苦明朝又分手
푸른 하늘 가을 숲이 정히 푸르리 / 碧天秋樹正蒼蒼
내가 곧 그 시의 운에 따라 지었다.
서리 바람 나무에 불어 성겨 누른 잎 떨어지니 / 霜風吹樹隕疏黃
소슬한 찬 소리에 고향 생각 괴롭도다 / 蕭瑟聲寒苦憶鄕
같은 나그네로 내가 가장 먼 곳이니 / 同作旅遊吾最遠
바다 하늘 나직한데 흩어진 산 푸르구나 / 海天低襯亂山蒼
서로 끌며 몰려와 보고는 선생이라 불렀다. 내가 사양하여 말하기를,
“중국 선비들의 과분한 칭찬이 이미 감사한데, 또 선생은 무슨 말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재주를 보는 것이지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번 걸음에 무령현(撫寧縣) 벽에 한 율시를 지어 붙였다. 그 1 연(聯)에,
말 통하려고 땅에 글 쓰기 번거롭고 / 通言煩畫地
악을 보러 중국을 방문한 것 기쁘다 / 觀樂喜朝天
하였다. 그후 임술년간에 한 압마관(押馬官)이 와서 말하기를,
“어떤 현의 관사가 다 낡아 다시 지었는데, 그 시를 쓴 구벽(舊壁)은 완연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였다. 케케묵고 누추한 시에서 뭐 취할 것이 있다고 그렇게 남겨두고 보는고. 중국이 인재를 아끼는 것을 알 수 있다.
○ 나의 친우 정화(鄭和)는 문익공(文翼公)의 서자로 선천(宣川)에 살았는데, 당시 사문 유영길(柳永吉) 공이 이 군에 원으로 갔다. 정화가 해구(海鷗) 알 12개를 원에게 올리니, 원이 편지로 답하기를,
“그대가 바야흐로 바닷가에 살면서 먼저 12백구를 죽였으니, 후일에 망기(忘機)하면 누구와 벗할 것인가?”
하였다. 이래서 정화가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내가 용만(龍灣) 여인에게 정을 쏟아 그를 위하여 집 한 채를 지어 주었다. 수년이 못 가 그 사람이 집을 뜯어 이사해 버렸다. 야족(也足) 어공(魚公) 야족(也足)은 어 학관(魚學官)의 호 이 용만을 19번이나 출입하였으나, 한번도 구룡연(九龍淵)을 보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나와 그도 함께 ‘살풍경’이란 별명을 얻었다. 내가 시를 지었다.
백구 죽인 늙은이는 고기 없는 연고이고 / 殺鷗病叟緣無肉
집 뜯어 간 가인은 오지 않는다 원한이네 / 撤屋佳人怨不來
만약 살풍경 등급대로 술을 마신다면 / 若第殺風浮白飮
내가 당연하게 셋째 잔을 마셔야지 / 我今當飮第三杯
다음날, 야족공이 배를 타고 구룡연을 거슬러 올랐으나 바람이 세어 밀리고 말았다. 내가 또 먼저 시에 첩운(疊韻)하여 지었다.
아홉 용이 힘을 모아 배 하나를 물리치고 / 九龍倂力排舟退
백조가 떼를 지어 문죄하러 오누나 / 白鳥成群問罪來
이것은 어(魚)와 정(鄭)을 아울러 조롱한 것이다. 내가 집을 지을 때, 목사(牧使) 유경심(柳景深)이 그 집에 편액(扁額)하면서 ‘집권(執權)’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이어 낭패를 당하니,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호) 상공이 선위사(宣慰使)로 용만에 와서 그 시에 차운하여 나를 조롱하기를,
집권한 늙은이가 권을 버리는 잔을 마시다니 / 執權翁飮釋權杯
하였으니, 고사를 잘 썼다고 할 만하다.
○ 중국 사신 왕경민(王敬民)의 ‘새벽에 출발하여 조서를 반포하러 가다[早行頒詔]’라는 시에,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계신 듯 두터운 정으로 조서를 반포하니 / 天威咫尺頒殊渥
동국의 의관들이 모두들 절하며 조아리네 / 東國衣冠盡拜稽
하니, 원접사(遠接使) 율곡(栗谷) 이이(李珥) 상공이 그 운에 차운하여 지었다.
은은한 만세 소리 상서로운 안개 드날리니 / 殷殷呼嵩騰瑞霧
삼한의 머리들이 일시에 조아리네 / 三韓厥角一時稽
대개 계(稽) 자는 다 측성(仄聲)으로 쓰이는데, 왕공이 이미 틀린 것을 율곡이 따라 틀리게 썼으니, 어째서일까? 내가 그 시를 상공에게 평하니, 상공이 곧 운자를 바꾸었다. 그러므로 《황화집(皇華集)》에 실은 것은 초고와 다른 것이다. 율곡은 재주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박식 다문(博識多聞)한데도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는 이렇게 착오하여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뻔하였는데, 하물며 재주가 율곡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 임무를 맡은 자는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 중국에 나만호(羅萬湖)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임오년(1582, 선조 15)에 황태자가 탄생하였을 때에 조서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오게 되었다가, 나이 늙었기 때문에 황홍헌(黃洪憲) 공과 바꾸게 되었다. 나(羅)의 ‘계문에서 사냥을 보다[薊門見獵]’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눈에 띄는 언덕들은 백 번 전쟁한 땅 / 滿目邱墟百戰餘
나그네 심정은 시든 풀처럼 처절하다 / 旅情衰草共悽如
차운 산 옛 토성에 가을 사냥 만났으며 / 寒山古堠逢秋獵
먼 물 외로운 등불에 밤 고기잡이 보이더라 / 遠水孤燈見夜漁
집은 소상강에 저녁 비도 많은 곳 / 家在瀟湘多暮雨
기러기 분포에서 날아오나 고향 편지 없더라 / 雁來湓浦少鄕書
친구는 한 번 이별에 삼천 리 / 故人一別三千里
슬프다 동과 서에 정처 없구나 / 惆悵東西未定居
구법(句法)이 원활하여 이른바 판자 위에 탄환(彈丸) 구르는 것같다. 이것은 전해 들은 것이고, 그의 작품을 많이 얻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 여자로서 시를 잘 짓는 사람은 예로부터 드문데, 하물며 재인(才人)을 얻기 어려운 지금에랴? 옥봉 여도사(玉峯女道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의 낭군이 지방의 수령이 되어 공사로 서울에 갔다. 그때 북쪽 오랑캐가 침입하였다. 여자가 시를 지어 낭군에게 부쳤다.
싸우는 것은 비록 서생의 길과 다르지만 / 干戈縱異書生道
나라 근심으로 응당 머리 셀 것이네 / 憂國唯應鬢髮蒼
적을 칠 이때 곽거병을 생각하고 / 制敵此時思去病
오늘날 산가지 놀리는 것 장량을 생각하네 / 運籌今日憶張良
원성의 싸움 피는 산하를 붉게 물들이고 / 源城戰血山河赤
아보의 요망한 기운 일월도 누르스름 / 阿堡迷氛日月黃
서울 소식은 아직 오질 않으니 / 京洛音徽尙不達
창호의 봄빛 처량하네 / 滄湖春色亦悽涼
창호란 사는 곳의 물 이름이다. 그 낭군이 집에 돌아오자 또 한 절구를 적었다.
버드나무 강 언덕에 오마의 울음 소리 듣고 / 柳外江頭五馬嘶
반을 깨고 수심에 취하여 누각을 내릴 때라 / 半醒愁醉下樓時
봄꽃 붉은 빛이 야위어져 거울 보기 부끄러우나 / 春紅欲瘐羞看鏡
시험 삼아 매창 향해 반달 눈썹 그려보네 / 試畫梅窓却月眉
두 시는 청신 원활하고 장하고 고와서, 부인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닌 듯하여 매우 가상하다. 그는 사문 조원(趙瑗)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 진성(晉城)에 승이교(勝二喬)라는 기생이 있었다. 어릴 때 이름은 억춘(憶春)이었으며, 마관(馬官 찰방(察訪)) 김인갑(金仁甲) 군이 사랑하였다. 그에게 시를 가르치니, 천성이 매우 영리하여 자못 시어(詩語)를 이해하였다. 작품도 간혹 맑고 고운 것이 있었으니,
강양관 안에 서풍이 이니 / 江陽館裏西風起
뒷산은 취하려 하고 앞강은 맑았어라 / 後山欲醉前江淸
사창에 달은 밝고 온갖 벌레 우짖으니 / 紗窓月白百虫咽
홀로 누운 찬 이불에 꿈조차 못 이룬다 / 孤枕衾寒夢不成

서풍은 의상에 불고 / 西風吹衣裳
세월 따라 모습도 쇠하여 가네 / 衰容傷日月
연당에 가을비 성기고 / 蓮堂秋雨疏
이슬 가지에 찬 매미는 흐느껴 울부짖네 / 露枝寒蟬咽

서리 오는 밤 기러기 날아 떨어지는 소리 / 霜雁墮飛聲
적막하게 산성을 지나간다 / 寂寞過山城
그대 생각하는 외로운 꿈 깨니 / 思君孤夢罷
가을달 창문에 밝게 비치네 / 秋月照窓明
이와 같은 작품은 매우 이소(離騷)의 운치가 있다. 나이 30이 못 되었으나, 젊고도 총민(聰敏)하였다. 만약 스스로 중단하지 않았더라면 옥봉여도사(玉峯女道士)와 같은 지경에 이르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주D-001]두심언(杜審言)에게 …… 격 : 두심언은 당(唐)의 이름난 시인인데, 그의 손자가 두보다.
[주D-002]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주D-003]길 주서 고리(吉注書故里) : 고려 말기에 길재(吉再)가 주서(注書)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善山)에 돌아가서 뒤에 조선의 벼슬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주D-004]함련(頷聯) : 율시의 앞의 연구(聯句)로서 제3, 제4의 두 구.
[주D-005]수양산 …… 풀이요 : 주(周) 나라가 은(殷) 나라를 멸하자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그것을 불의(不義)라 하여 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주D-006]율리의 …… 옛터네 : 도연명(陶淵明)이 진(晉) 나라 신하로서 진 나라를 빼앗은 송(宋)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율리(栗里)에서 농사 짓고 살았다.
[주D-007]이십사교(二十四橋) : 주흘산에 있는 다리 이름이다.
[주D-008]성패로 …… 논하는 것 : 촉한(蜀漢) 제갈량(諸葛亮)이 위(魏) 나라를 토벌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여 성패(成敗)를 가지고 그의 재주를 평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D-009]봄꿈은 …… 어지럽고 : 진 시황(秦始皇)의 아들 이세(二世) 때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나라가 곧 망하였다.
[주D-010]실없는 …… 삼가 : 춘추 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의 권신 맹손(孟孫)ㆍ숙손(叔孫)ㆍ계손(季孫)을 가리킨다.
[주D-011]계찰(季札) : 춘추 시대(春秋時代) 오(吳)의 공자(公子) 계찰(季札)이 주(周) 나라에 관광(觀光)하여 각국의 음악을 들었다.
[주D-012]장건(張騫) : 한 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이 서역(西域)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를 개통하였다.
[주D-013]종고는 …… 않는다 : 부귀가 자기에게 당치 않다는 뜻이다. 《장자(莊子)》에, “종고(鐘鼓)는 안(鷃 새 이름)을 즐겁게 하지 못한다.” 하였다.
[주D-014]환괘(渙卦) : 《주역(周易)》 64괘의 하나.☰☵의 형상으로 되었음.
[주D-015]곤괘(坤卦) : 《주역(周易)》 8괘의 하나. ☷의 형상으로 되었음.
[주D-016]막막(漠漠) 음음(陰陰) : 당(唐) 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에, “막막수전비백로(漠漠水田飛白鷺), 음음하목전황리(陰陰夏木囀黃鸝)”라는 시가 있는데, 이것은 남의 오언시(五言詩)에다가 ‘막막 음음’의 글자만을 보태어 표절하여 칠언시(七言詩)를 만든 것이다.
[주D-017]맑은 …… 사현위요 : 유송(劉宋) 때 시인 사현휘(謝玄暉)의 ‘맑은 강은 깨끗하기 비단같다[澄江淨如練]’는 시가 유명하다.
[주D-018]초생달 …… 한 이부 :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새 달은 낫을 갈아놓은 것 같다[新月似磨鎌]”는 글귀가 있다. 이부(吏部)는 한퇴지의 관직이다.
[주D-019]창[槊] 비낀 …… 짓는다 : 조조(曹操)는 문무(文武)를 모두 갖추어 군중에서 창을 비껴들고 시를 지었다.
[주D-020]옥문관(玉門關)에 …… 일이니 : 한(漢) 나라 반초(班超)가 서역(西域)에 도호(都護)로 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여, “다만 생전에 옥문관(서역과의 경계)에 들어가는 게 소원이다.” 하였다.
[주D-021]명년에 …… 들 것이오 : 금원(禁苑) 안에 있는 못의 이름이다. 곁에 중서성(中書省)이 있어서, 중서성 또는 재상을 비유해서 말한다.
[주D-022]삼인 : 은(殷) 나라 말기의 세 충신, 즉 미자(微子)ㆍ기자(箕子)ㆍ비간(比干)을 가리킨다.
[주D-023]용 죽고 : 당(唐)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칠 때에 조룡대(釣龍臺)에서 용을 낚았다 한다.
[주D-024]말들은 …… 응했구나 : 하늘에 방성(房星)이라는 별이 있는데 말[馬]은 방성의 정기를 타고 났다 한다. 제주도에 좋은 말이 많이 난다는 뜻이다.
[주D-025]우는 …… 일곱이요 : 《시경(詩經)》에, “뻐꾹새가 뽕나무에 있으니, 그 새끼가 일곱이로다[鳲鳩在桑 其子七兮].” 한 구절이 있다.
[주D-026]삼년상을 …… 한(漢) 나라를 : 한 문제(漢文帝)가, “대공(大功)은 15일, 소공(小功)은 14일, 시마(緦麻)는 7일만에 복을 벗으라.”는 유조(遺詔)를 내려, 달을 날로 바꾸는[以月易日] 단상제(短喪制)가 그뒤부터 행해졌다. 《史記 漢文帝紀》
[주D-027]여막에 …… 등(滕) 나라보다 : 등 문공(滕文公)이 그의 부왕 등 정공(滕定公)의 상에 종래의 단상제(短喪制)를 무시하고 고례(古禮)의 삼년상(三年喪)을 행하면서 다섯 달 여막에 거처하였다. 《孟子 滕文公上》
[주D-028]천하에 …… 어렵도다 : 진 목공(秦穆公)이 천리마를 구하려고 말을 잘 보는 백락(伯樂)의 제자 구방고(九方皐)를 보냈더니, 석 달만에 돌아와서 천리마를 구해 놓았다고 아뢰었다. “무슨 말이냐?” 물으니, “누런 암말입니다.” 하였다. 목공이 사람을 보내어 말을 몰고 오니, 검은 수말이었다. 목공이 백락에게 “자네의 제자가 수말인지 암말인지, 누른지 검은지도 모르니, 어찌 말을 알아 보았겠는가?” 하니, 백락은, “구방고는 말의 천기(天機)만 보기 때문에 속만 알고 겉은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였다. 과연 그 말이 천하에 좋은 말이었다.
[주D-029]노인성 : 옛날 제주도의 성주(星主)가 곧 왕자였다. 제주에는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이 비친다 한다.
[주D-030]진지를 겨루어 : 시(詩)로써 서로 겨룬다는 뜻이다.
[주D-031]난초 …… 맡아 : 공자(孔子)의 말에, “어진 사람과 사귀면 난초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 절로 향기가 몸에 밴다.” 하였다.
[주D-032]접해(鰈海) : 조선의 근해를 말한다. 중국에서 보는 동해, 즉 우리 나라에서 가자미가 난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주D-033]황화집(皇華集) : 《시경(詩經)》에, 황황자화(皇皇者華)라는 시편은 왕명을 받은 사신(使臣)을 읊은 것이므로, 중국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지은 글과 거기에 화답한 접반사(接伴使)의 시를 편찬하여 《황화집(皇華集)》이라 하였다.
[주D-034]성 징군(成徵君) : 징군(徵君)은 학문 덕행(學問德行)이 있어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존칭이다. 징사(徵士)라고도 한다.
[주D-035]유(留)에 …… 계책 : 장량(張良)이 한(漢) 나라의 공신(功臣)으로서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주D-036]하늘 이야기 : 제(齊) 나라 추연(騶衍)이 광대(廣大)한 천지의 이치를 잘 말하므로 당시 사람들이 하늘 이야기하는 연[談天衍]이라 하였다.
[주D-037]삼장(三臧) : 불교에는 경(經)ㆍ율(律)ㆍ논(論) 등 세 가지 불서(佛書)가 있는데, 이것을 삼장(三臧)이라 하고, 이것을 통달한 중을 또 삼장이라 부르기도 함.
[주D-038]무이 구곡(武夷九曲) : 주자(朱子)가 살던 무이산(武夷山)의 시내가 아홉 굽이였는데, 주자가 구곡시(九曲詩)를 지었다.
[주D-039]옷 …… 읊조린다 : 《시경(詩經)》에 무의편(無衣篇)이 있으므로 자기의 옷 없는 데에 인용한 것이다.
[주D-040]양자운(揚子雲) …… 알 것이다 : 한(漢)의 학자 양웅(揚雄)을 가리킨다. 자운(子雲)은 그의 자다. 그가 《주역(周易)》을 모방하여 《태현경(太玄經)》을 지었더니, 그의 친구 유흠(劉歆)이 보고, “이 책은 뒷사람 장딴지나 덮을 것이다.” 하니, 그는, “후세에 반드시 알아줄 양자운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41]어버이를 생각하는 뜻 : 당(唐) 나라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에 관원으로 갈 때에 그 부모는 하양(河陽)에 있었다. 그는 태항산(太行山)에 올라서 공중에 나는 흰 구름을 바라보고, “우리 부모 계신 데가 저 구름 밑에 있다.” 하고, 서서 슬피 울었다. 김귀영(金貴榮)의 시에 흰 구름을 쓴 것이 부모 생각하는 뜻을 포함하였다는 말이다.
[주D-042]헤어질 때 …… 남겨두니 : 한퇴지(韓退之)가 중 태전(太顚)과 작별할 때에 그의 옷을 남겨두게 하였다.
[주D-043]향렴체(香奩體) : 시(詩)의 한 체로 당(唐)의 한악(韓偓)에서 시작된 미인을 읊은 노래 종류이다.
[주D-044]자고시(鷓鴣詩) : 당(唐) 나라 정곡(鄭谷)이 자고새[鷓鴣]를 읊은 시가 유명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정자고라 불렀다.
[주D-045]의루시(倚樓詩) : 당(唐) 나라 조하는, “긴 피리 한 소리에 사람이 다락에 기대었네[長笛一聲人倚樓]”라는 시가 유명하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의루(趙倚樓)라 불렀다.
[주D-046]찌푸림을 본떠서[効顰] : 월(越) 나라 미인 서시(西施)가 가슴 앓는 병이 있어 가슴을 움켜 쥐고 찡그리는 그 모양도 매우 어여쁘자, 이웃 여자가 그것을 보고 저도 찡그린 고사에서 나온 말로, 덩달아 흉내 냄을 뜻한다.
[주D-047]일성적(一聲笛) : 조하(趙嘏)를 말한 것임. 주 49) 참조.
[주D-048]정승의 …… 있다 : 송(宋) 나라 정승 조보(趙普)가 태종(太宗)에게 말하기를, “신이 《논어(論語)》 반부(半部)를 가지고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하였고, 반부를 가지고 폐하(陛下)를 보좌하여 태평의 정치를 이룩하겠습니다.” 하였다. 여기서는 송강(松岡)의 성이 조씨이므로 조하(趙嘏)ㆍ조보(趙普)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49]공권의 …… 흔들었다 : 유공권(柳公權)은 명필(名筆)이요, 유종원(柳宗元)은 문장으로 유명하였다. 유이손(柳耳孫)의 성을 따라 이 두 사람을 인용한 것이다.
[주D-050]호랑이를 …… 것이다 : 한(漢) 나라 마원(馬援)의 말에, “범을 그리려다가 도리어 강아지가 된다.” 하였다. 서투른 솜씨로 남의 언행을 흉내내려 하거나, 어려운 일을 하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는 비유이다.
[주D-051]학은 …… 돌아오니 : 한(漢) 나라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어 갔다가 천 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학(鶴)이 되어 화표기둥[華表柱]에 앉았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052]여동빈 : 신선 여동빈(呂洞賓)의 시에, “악양에 세 번 취하여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네[三醉岳陽人不識]”라는 글귀가 있다.
[주D-053]만 사람의 …… 쓸까 : 좋은 사적을 돌에 새기지 않고도 여러 사람의 입으로 전하는 것을 구비(口碑)라 한다.
[주D-054]한 마디 …… 무어랴 : 노자(老子)의 말에, “부자는 사람을 전송할 때에 재물로 노자를 주고, 어진 사람은 사람을 송별할 때에 좋은 말[言]을 준다.” 하였다.
[주D-055]북당(北堂) : 《시경(詩經)》에 북당(北堂)이란 말이 나왔는데, 그것은 부인의 거처하는 곳을 말한 것이다. 후세에는 어머니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56]모구(旄丘) : 《시경(詩經)》 모구편(旄丘篇)에 “모구(旄丘 앞은 높고 뒤는 낮은 언덕)의 칡은 마디가 굵어졌다. 숙이여 백이여 어찌 이리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가?[旄丘之葛兮 何誕之節兮 叔兮伯兮 何多日也]” 하였다. 이것은 여국(黎國)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서 머문 지가 오래 되어도 위국에서 자기네를 원조하여 본국으로 보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여 지은 것이다.
[주D-057]나비꿈 : 《장자(莊子)》에,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다.” 하였다.
[주D-058]구극(九棘) : 가시나무[棘] 아홉 그루를 심어서 조신(朝臣)의 반열로 삼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주례(周禮)》에, “조정 신하들의 서는 자리에 가시[棘]로 둘렀는데, 왼편 구극(九棘)에는 고ㆍ경대부(孤卿大夫)가 자리잡고, 오른편 구극에는 공ㆍ후ㆍ백ㆍ자ㆍ남(公侯伯子男)이 자리잡는다.” 하였다. 여기서는 경(卿 판서) 줄을 말한다.
[주D-059]홍화(弘化) : 교화를 넓히는 직책을 맡은 공으로, 삼공(三公)의 다음인 삼고(三孤) 즉 소사(小師)ㆍ소부(少傅)ㆍ소보(少保)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찬성(贊成)을 말한다. 《書經 周官》
[주D-060]달아나면서 …… 섰고 : 《논어(論語)》에서 나온 말인데, 싸우다가 패하여 달아나는데[奔] 뒤에 섰다[殿]는 말이다.
[주D-061]술자리에 …… 먼저네 : 《맹자(孟子)》에, “마을 사람보다 형을 공경하지마는, 술자리에서는 마을 사람에게 술잔을 먼저 준다.” 하였다.
[주D-062]한단(邯鄲)의 …… 배우는 것 : 남의 흉내를 내어 일을 행하여 그 본분을 잃어버림을 비유한 말이다. 한단(邯鄲)은 조(趙)의 도읍. 《장자(莊子)》에, “한단 사람이 걸음을 잘 걷는 것을 보고 연(燕) 나라 소년이 그곳에 가서 걷는 방법을 배웠는데, 습득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국의 걸음걸이까지도 잊어버리고 기어 나왔다.” 하였다.
[주D-063]동년(同年) : 과거(科擧)에 함께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주D-064]북극(北極) : 북극성이 모든 별 중에 가장 가운데 있고, 다른 별들이 그 주위에 있는 것과 관련하여 임금이 있는 곳을 말한다.
[주D-065]석 달의 …… 만들었네 : 진 시황(秦始皇)이 아방궁(阿房宮)을 크게 지었더니, 뒤에 항우(項羽)가 불을 질렀는데, 궁이 너무 커서 석 달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고 탔다 한다.
[주D-066]낙양명원시(洛陽名園詩) : 송(宋) 나라 사람이 《낙양명원기(洛陽名園記)》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것은 오대(五代)의 전란이 있기 이전 번화한 낙양에서 유명한 정원(庭園)들을 기록한 글이다.
[주D-067]곡수(穀水) …… 망산(邙山) : 곡수ㆍ낙수, 숭산ㆍ망산은 모두 낙양에 있는 물과 산이다.
[주D-068]삼진(三晉) : 한(韓)ㆍ위(魏)ㆍ조(趙)인데, 본시 모두 진(晉)의 대부(大夫)로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삼진이라 한다.
[주D-069]희씨(姬氏) : 중국 주(周) 나라를 말한다.
[주D-070]천문(千門) : 한(漢) 나라 건장궁(建章宮)이 천문만호(千門萬戶)였다. 여기서는 큰 궁궐이란 뜻으로 썼다.
[주D-071]장단구(長短句) : 시에 오언(五言)ㆍ칠언(七言)의 일정한 제한이 없이 섞어서 짓는 시체(詩體)이다.
[주D-072]두 마리 …… 부[畫二牛賦] : 양(梁) 나라 도홍경(陶弘景)이 산중에 있었다. 양 무제(梁武帝)가 벼슬을 주겠다고 부르니, 도홍경이 소 두 마리를 그려서 바쳤는데, 한 마리는 화려한 굴레와 고삐로 꾸며 한 사람이 채찍을 들고서 몰고 있고, 한 마리는 굴레도 고삐도 없이 자유롭게 풀밭에 있었다. 그것은 부귀영화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산중에 살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는 그것을 제목으로 하여 글을 지었던 것이다.
[주D-073]월부를 모방한 것[擬月賦] : 남제(南齊) 때 사장(謝莊)이 지은 월부(月賦)가 유명한데, 여기서는 그것을 모의(摹擬)하여 지은 글이다.
[주D-074]사마귀가 매미 잡는 것 : 《오월춘추(吳越春秋)》에,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가만히 엿보느라 참새가 저를 쪼아 먹으려고 따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주D-075]자하(子賀)는 …… 자(字)다 : 당(唐) 나라 시인 이하(李賀)의 자가 장길(長吉)이므로 그것을 모방한 것이다.
[주D-076]구름 …… 이 사군(李使君) : 진(晉) 나라 때에 순명학(荀鳴鶴)과 육사룡(陸士龍)이 서로 처음 인사하면서, “나는 해아래[日下] 순명학이다.” 하니, “나는 구름 사이 육사룡이다.” 하였다. 이것은 높은 데 있다고 자기를 추켜서 말한 것이다. 사군(使君)은 사또란 말이다.
[주D-077]조교는 …… 구 척이니 : 《맹자(孟子)》 고자(告子) 하(下)에 “조교(曹交)는 키가 9척이나 되는데, 곡식만 먹을 뿐이다[今交九尺四寸以長 食粟而已].” 하였다. 여기서는 조희(曺禧)를 조롱한 말로 썼다.
[주D-078]가죽 …… 있다 :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칭찬하여, “계야는 가죽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서,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감추어져 있다.” 하였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각각 속셈과 분별력이 있음을 이른다.
[주D-079]장초의 …… 즐거우리 : 《시경(詩經)》에, “언덕에 장초(萇楚 초목 이름)가 있으니…… 너의 알음 없음이 부럽구나[隰有萇楚…… 樂子之無知].” 하였다. 그것은 당시에 정치는 까다롭고 부역은 중하여, 백성이 고통이 심하므로 차라리 초목처럼 아무것도 몰라 걱정 없는 것을 부러워한다는 뜻이다.
[주D-080]이 몸 …… 피할꼬 : 진(晉) 나라 무릉(武陵) 어부(漁父)가 우연히 산중에 숨어 사는 도원(桃源)이란 곳에 들어갔더니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옛적 진(秦) 나라 때에 포학한 정치를 피하여 깊은 산중으로 피해 와서 수백 년 바깥세상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였다.
[주D-081]바다 …… 셋이로다 : 삼신산(三神山)을 이른다.
[주D-082]물결은 …… 짓고 : 소동파(蘇東坡)가 물에 비친 달을 두고 지은 시에, “동파의 그림자가 물 따라 달 따라 백이 될 수 있다.”는 글귀가 있다.
[주D-083]이태백의 셋 : 이태백의 시에, “달 아래 춤추니 나와 달과 그림자 합쳐서 세 사람이네.” 하는 구절이 있다.
[주D-084]이원제자(梨園弟子) : 당 명황(唐明皇)이 음악하는 사람 양성하는 곳을 이원(梨園)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기생을 가리킨 것이다.
[주D-085]교방가요(敎坊歌謠) : 지방에 관원이 부임할 때에 교방(敎坊 기생 양성하는 곳)에서 새 노래를 지어 영접하기도 한다.
[주D-086]풍화(風花) : 바람이니 달이니 꽃이니 하고 실속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말한 것이다.
[주D-087]영인(郢人)의 …… 바탕[郢質] : 옛적에 영(郢)에 도끼질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의 코끝에다 백토(白土)를 조금 붙여두고 도끼질로 그 백토를 다 깎아내어도 코는 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코를 대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그의 기술을 알기 때문에 안심하고 코를 대주었다. 그뒤에 그 사람이 죽고 나자 도끼를 던지며, “이제는 나의 바탕이 죽었으니, 어디에 기술을 쓰랴.” 하였다.
[주D-088]악을 …… 기쁘다 : 계찰(季札)이 주(周) 나라에 가서 각국의 음악을 감상하였다.
[주D-089]망기(忘機) : 《열자(列子)》에, “바닷가의 한 사람이 매일 해오라기와 친하게 놀아서 해오라기가 사람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내일은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서 내가 보게 하여라.’ 하였더니, 그 이튿날에는 해오라기들이 공중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하였다. 그것은 전에는 해오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기심(機心)을 잊었던 때문에 해오라기들도 무심하게 친해진 것이요, 뒤에는 ‘해오라기를 잡겠다.’는 기심이 있기 때문에 해오라기가 피한 것이다.
[주D-090]살풍경(殺風景) : 풍경을 해치는 것이란 뜻으로, 이상은(李商隱)의 잡찬(雜纂) 살풍경(殺風景)에, “꽃 사이에서 큰 소리로 꾸짖는 것, 꽃을 보고 눈물 흘리는 것, 이끼 위에서 자리 펴는 것, 수양을 찍어버리는 것, 꽃위에 속옷 말리는 것, 석순(石筍)에 말 매는 것, 달 아래 불 잡고 있는것, 기생과 앉은 자리에 세속 일 말하는 것, 과원(果園)에 나물 심는 것, 산 등지고 누각 짓는 것, 화가(花架) 아래 닭과 오리 기르는 것, 꽃을 대해 차 마시는 것, 거문고 태워 학(鶴) 삶는 것.”이라 하였다.
[주D-091]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漢武帝) 때의 명장(名將)으로 흉노(匈奴)를 쳐서 공을 세웠다.
[주D-092]장량(張良) : 한 고조(漢高祖)의 창업 공신. 한 고조가 말하기를, “장막 가운데서 산가지[籌]를 놀려서 천 리 밖에 승산(勝算)을 결정하는 것은 장자방(張子房 자방은 양의 자다)이다.” 하였다. 《漢書》
[주D-093]오마(五馬) : 수령(守令) 행차의 이칭으로 태수(太守)의 수레에는 사마(駟馬)에 말 한 필을 더 붙여준 데서 온 말이다.
[주D-094]봄꽃 붉은 빛 : 자기의 얼굴빛을 말한 것이다.
[주D-095]승이교(勝二喬) : 중국 삼국 시대(三國時代) 강동(江東)에 교공(喬公)의 두 딸이 절세미인으로, 언니는 손책(孫策)의 아내가 되고, 동생은 주유(周瑜)의 아내가 되었다. 그들을 이교(二喬)라 하였는데, 이 기생은 이교보다 낫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

 

약천집 제22권
 행장(行狀)
좌찬성에 추증된 정공(鄭公)의 시호를 청한 행장



공은 휘가 발(撥)이고 자가 자고(子固)이니 경주(慶州) 사람이다. 고려 때에 휘 진후(珍厚)가 군기 윤(軍器尹)에 봉해졌는데 그 후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희계(熙啓)는 개국 공신에 참여되고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계림군(雞林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양경(良景)이다. 양경의 후손은 고관대작이 서로 이어졌다. 5세에 휘 명선(明善)이 있었으니, 벼슬이 간성 군수(杆城郡守)인데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릴 적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말수와 웃음이 적었다. 《소학(小學)》의 내용 중에 “거처할 때에는 부모에게 공경을 지극히 한다.”는 말에 깨달음이 있어 종신토록 외우고자 하였다. 약관 시절에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통달하였는데, 이때 모부인이 연로하므로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봉양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선임되고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3년 만에 명성이 온 경내에 가득하였다. 면직하고 돌아왔는데, 마침 오랑캐가 종성(鍾城)으로 쳐들어오자 원수(元帥)의 막부(幕府)로 달려갔다. 오랑캐의 난리를 평정하고 돌아와서 거제 현령(巨濟縣令)에 제수되었다가, 들어와 비변사의 낭관이 되었다.
하루는 대신들이 모여 앉아 공을 불러 붓을 잡게 하고 입으로 글을 불러 주었는데, 비록 경서의 깊은 내용과 벽자(僻字)라도 모두 불러 주는 소리에 따라 물 흐르듯이 써 내려가니, 좌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크게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칭찬과 명망이 자자하여 팔사(八司)의 낭관을 두루 겸직하였다. 승진하여 위원 군수(渭原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임기가 차자 승진하여 훈련원 부정으로 들어오고 사복시 정으로 옮겼으며 이어 내승(內乘)을 겸하였다.
당시 왜적과의 사이가 나빠지니, 조정에서는 남쪽 지방에 대한 우려가 있어 공을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로 제수하고 준례에 따라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를 더하였다. 공은 부임하러 떠날 적에 울면서 모부인에게 하직하기를, “이 자식이 벼슬하려는 것은 본래 어버이를 봉양하고자 해서이나, 이미 군주의 신하가 되었으니 또 나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입니다. 충성과 효도를 둘 다 온전히 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어머니께서는 이 자식을 염려하지 마소서.” 하니, 모부인은 눈물을 훔치고 등을 어루만지면서 경계하기를, “잘 부임하라. 네가 충신이 되면 내가 무슨 서운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무릎을 꿇고서 가르침을 받고 아내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우리 어머니를 섬기기를 내가 집에 있을 때와 똑같이 해 주시오.” 하니, 좌우에 있던 자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공은 부산진에 이르러 새벽부터 밤늦도록 갈고 닦아서 결사적으로 지킬 계책을 세웠다.
공은 흔(昕)이라는 한 아들이 있었는데 공을 따라 임소로 갔다. 임진년(1592, 선조 25) 4월 3일에 공이 망해루(望海樓)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자리가 반쯤 무르익자 공은 아들 흔을 불러 명하기를, “오늘 잔치를 베푼 뜻을 네가 아느냐? 이는 바로 내가 너와 결별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만약 천천히 간다면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니, 오늘 즉시 떠나거라.” 하였다. 흔이 울면서 말하기를, “과연 이와 같다면 이 자식이 어찌 차마 홀로 돌아가겠습니까.” 하자, 공은 말하기를, “부자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하니, 너는 돌아가서 내 어머니와 네 어미를 봉양하라.” 하고는 종자(從子)를 꾸짖어서 부축하여 말에 태워 보냈다.
13일에 척후병이 적침의 경보를 알려 왔다. 공이 신속히 배를 타고 바다에 내려가니 왜적의 배가 이미 바다를 뒤덮고 있었다. 공은 단지 세 척의 전함이 있을 뿐 뒤에 오는 지원군도 없었는데,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후퇴하면서 성으로 돌아와서는 성 밖의 민가들을 모두 불태워 육박전을 벌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은밀히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날 밤 넓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달빛이 대낮처럼 밝았는데, 적들이 성의 사면을 따라 올라와 이미 긴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공은 성루에서 장검을 짚고 봉사로 하여금 퉁소를 불게 하여 평소와 같이 편안하고 한가로우니, 군사와 백성들이 안정하여 놀라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왜적들이 육박하여 성으로 올라오니, 칼날의 기운이 하늘에 번득이고 대포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공은 장병들을 인솔하고 힘을 다해 성을 순행해서 적을 무수히 사살하여 세 곳에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한낮이 되자 성안에 화살이 떨어지니, 한 비장(裨將)이 나와서 아뢰기를, “성을 빠져나가 구원병을 기다리소서.”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 이 성의 귀신이 될 것이니, 감히 성을 버릴 것을 다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고, 또다시 군중에 명령하기를,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라.” 하여 강력히 싸우지 않는 자들을 격발시키니, 장병들이 모두 울면서 감히 떠나지 못하였다.
얼마 후 공이 탄환을 맞고 죽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공에게는 모시는 첩이 있었으니, 이름이 애향(愛香)으로 나이가 18세였다. 애향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곡하고 시신의 곁에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종 용월(龍月)도 적에게 달려들어 싸우다가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공에게 병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그 후 추포(秋浦) 황신(黃愼)이 통신사로 일본에 들어가니, 왜장 평조신(平調信)이 공의 충성과 용맹함을 극구 칭찬하여 말하기를, “우리 군대가 처음 바다를 건너 부산진의 성안에서 크게 기세가 꺾였으니, 만일 그의 병력이 많았더라면 어찌 함락시킬 수 있었겠는가. 부산진 이후로는 감히 우리의 칼날을 막은 자가 없었다.” 하였으며, 또 애향이 함께 죽은 일을 말하고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왕래하는 왜인들 또한 말하기를, “귀국의 장수로는 오직 부산의 흑의장군(黑衣將軍)이 가장 두려워할 만하다.” 하였다.
천계(天啓) 임술년(1622, 광해군 14)에 진(鎭)의 병졸이 왕명을 받들고 온 사신을 맞이하여 공의 의열(義烈)을 추후에 드러내어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이 일의 전말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인조조에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처음으로 사당을 세우고 송공 상현(宋公象賢)과 함께 모셔 제사를 올렸는데, 충렬(忠烈)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금상(今上) 신유년(1681, 숙종 7)에 동래 부사의 상소로 인하여 대신에게 의논해서 좌찬성을 더 추증하였으며, 계해년(1683)에 또다시 경연관의 진계(陳啓)로 인하여 대신에게 하문하여 정려문을 세웠다.
아들 흔은 의리상 원수인 왜적과 함께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으므로 왜적과 싸우다가 죽은 사람의 자식들과 결의하여 맹세하는 글을 짓고 청(廳)을 만들고는 ‘복수(復讐)’라 불렀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사(水使)에 이르렀다. 흔의 아들은 현감 백기(伯基)가 있고, 백기는 여덟 아들 이열(爾說), 이상(爾尙), 이량(爾亮), 이필(爾弼), 이광(爾光), 이원(爾), 이재(爾載), 이식(爾栻)을 두었는데, 조정에서는 충신의 고아들을 구휼하는 은전을 미루어서 연달아 관작을 내렸다.
공은 비록 무예에 종사하였으나 항상 일찍 일어나 책을 읽어서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독서를 폐하지 않았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몸을 삼가고 신칙해서 행실이 학자보다 더 뛰어났다. 왜란을 만나 국가를 위해 죽은 충절은 진실로 근원한 바가 있으니, 하루아침에 비분강개한 자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충절이 어떻게 이처럼 열렬하게 종과 첩에게 미칠 수 있었겠으며, 저처럼 깊이 이국(異國)의 무리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겠는가.
아, 슬프다. 공은 법전에 있어 마땅히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있어야 하므로 감히 공이 남긴 사적을 뽑아서 사실에 근거하여 시호를 지음에 대비하는 바이다.


 

[주D-001]팔사(八司) : 정식 명칭은 아니고 사(司) 자가 붙은 여러 개의 부서로, 비변사(備邊司),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전함사(典艦司), 전연사(典涓司), 내수사(內需司), 전설사(典設司), 준천사(濬川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가 있으나 이것은 세손이 있을 때에만 있었다. 그러나 이들 부서에는 모두 낭청이 없고 별제(別提) 등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위에 열거한 사 자가 붙는 8개 관서가 아니고 부(府)나 감(監), 시(寺), 원(院), 서(署) 등의 부서에 소속된 낭관 계급의 관리를 가리킬 수도 있다

簡易文集卷之二
 神道碑銘幷序
大司憲韓公神道碑銘 a_049_220a



我明宗大王在位之二十二年。益知君子小人之情。惟公論是用。乃若曰。咨。往在乙巳二三元兇時。予幼沖國疑。助外戚忌克。以構大獄。遂施于善類。凡其不依阿及故所讐疾。匪殺則逐無遺力。迄有積憾于幽明。予用隱焉。爾議政府。其議疏雪之。當是時。歿得復官者若干人。存得復以用者若干人。皆世鴻儒049_220b碩士。聲望譁然。維韓公諱淑。實復嘉善大夫大司憲。蓋卒七年矣。又後十年。卽今萬曆乙亥也。韓公之孫上舍生恒。以公弟承文院判校濩所爲狀。來乞文於岦。以刻石公之墓道。而辭不可。曰。恒知子之文足以不朽吾大父也。恒之大父。非必借重於大官者。且恒受吾世父吾父命也。岦謹按。韓出唐津縣。爲國右族。有諱公瑞。及麗朝登第有名。宜達而夭。人謂其必有後。而公之高曾祖考皆未振。諱慶。尙瑞院判官。諱陟。濟用監副正。諱允祐。啓功049_220c郞。諱瑾。世子左洗馬。公貴。贈啓功戶曹參議。洗馬兵曹參判。參判室固城李氏。左議政銕城府院君諱原之曾孫。司醞署令贈都承旨諱泙之女。以弘治甲寅生公。公字子純。幼志於學。長克有成。以應科目。綽如也。正德癸酉。司馬。嘉靖乙酉。及第。補權知承文正字。用薦入內翰。爲檢閱。至奉敎。於諸曹。禮爲佐郞。兵爲佐郞, 正郞。刑若工爲正郞。於諸寺。爲判官奉常。爲僉正宗簿。爲正司僕及掌樂院。於外爲江原道都事。其爲奉常。以質正官從使049_220d京師。仁廟在東宮。學已深造。侍講之官。時難其選。公自司書至輔德皆更。而爲弼善者四。在臺諫尤號擧其職。嘗再爲獻納, 持平。四爲掌令。以至爲司諫, 執義亦一再。而其末爲掌令也。同都憲梁淵等。論丁酉用事人誤國。寘之法。用得賞一資。進執義。相府薦公郞僚。爲檢詳, 舍人。甚選也。迺後。又錄弘文館選。公前此膺選。輒爲用事人陰沮。物議遲之。而公亦不知。入館爲副應敎, 應敎, 直提學。詔使之至。充問禮官。以善周旋稱。旣陞通政階。拜049_221a同副承旨。轉至都承旨。獻替有裨益。不專出納而巳。有旨陞嘉善。拜兵曹參判。尋使觀察江原。時議重公一出。欲留之。不果。代還。同知中樞府。歷工, 戶二曹參判。至拜憲長。則歲癸卯也。復有旨超資憲。拜工曹判書。爲言官論驟陞而寢。甲辰。以同樞奉使。賀冬至京師。乙巳七月。以漢城府右尹。又奉使告仁廟訃。請諡及承襲。九月。獄起。公未竣事。已被削奪官爵。丙午八月。獄益密。謫公于理山郡。公於是不色駭以懼。而憂戀大夫人外。居049_221b無戚戚之言。庚申十月。以病卒。年六十七。輿櫬而歸。葬于楊州蟹踰岾下先塋之側。用明年三月甲申也。公爲人和易有量。不飾邊幅。然其接物。言笑不苟。至大節。有不可奪者。公考參判公。家廟行事。一遵朱文公禮。喪三年。不離廬墓。以著於聞。而公之爲行。尤篤於孝。蓋家法也。其在朝中年。丁外艱。曁哭大夫人于謫。則於禮之經變。盡以宜。待同氣。極其恩意。至功, 緦之親。無甚殺焉。公有二弟。仲則判校。而舍人澍。其季也。三人皆釋褐。登美仕於049_221c祖先不偶之餘。公又至長御史。不可謂不達。而驗人言者矣。而公在謫未復以卒。舍人公本以舍人出謫。復未幾卒。判校公以院正字黜。復遷至判校。今年亦卒。皆不得有終以大有爲於時也。天固以是施於公家耶。無乃人所謂福禍者。天無與焉。而獨扶樹其名耶。抑猶復有待於後者乎。公配貞夫人蔡氏。籍仁川府。曾祖諱明陽。京畿水軍節度使。祖諱澄。泰川郡守。考諱裕孫。修義副尉。夫人沈靜溫懿。不以貧富爲憂樂。而謹祭饋。睦宗姻者。出049_221d於至性。以相夫子。以訓子婦。咸厥令美。年七十六。隆慶壬申三月卒。五月壬寅。祔葬有子男二人。女四人。男曰說。娶咸鏡道觀察使宮淑女。次曰誼。娶忠義衛申渥女。皆以公故。不急應擧求仕。女長適前別坐權大成。次適幼學尹建元。次適內侍敎官安士欽。次適忠義衛李垠。說生一男三女。男曰慄。未娶。女長適洪迪。次適朴姚賢。次適南以仁。誼生一男三女。男卽恒。娶忠義衛愼思女。女長適柳德新。餘幼。權大成李垠妻。無子早死。尹建元生049_222a一男一女。男曰翼。女適安世傑。安士欽生三男二女。男曰允濟, 匡濟, 康濟。女長適申樸。次幼。洪迪。今爲弘文正字。柳德新。典艦司別提。餘未官。岦謹摭公事之大者以爲銘。銘曰。
君子之修。小人所仇。前乎丁酉。乙巳而後。薄遏其揚。卒纍于荒。繄公曷故。唯不刓厥方。亞卿之秩。司憲之官。削也爲榮。矧今旣還。維公可傳。何待於碑。刻我文者。子孫之思。


명종 8년 계축(1553,가정 32)
 10월23일 (병신)
동지중추부사 남궁숙의 졸기

동지중추부사 남궁숙(南宮淑)이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숙은 용렬하고 비천한 자질에 지식은 없이 명리(名利)만 탐하였다 그가 관찰사와 수령이 되었을 때에 거짓을 꾸며 부정한 일을 많이 행하였으며 세상을 속이고 벼슬자리를 도적질하여 마침내 2품에 이르렀으므로 식자들이 나무랐다. 그러나 자기 맡은 일에 힘썼으므로 사람들이 능력있는 관리라고 일컬었다.
【원전】 20 집 167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중종 23년 무자(1528,가정 7)
 5월26일 (병신)
정시 시관이 시권 피봉의 이름 쓸 데를 베고 공봉한 자의 처벌을 건의하다

정시(庭試) 시관(試官)이, 제술 시험에 입격(入格)한 유생(儒生)들의 책문(策文) 4편을 입계(入啓)하고,【생원 이장(李璋)은 상지하(上之下), 생원 김반천(金半千)은 삼상(三上), 생원 이영(李瑛)은 삼중(三中), 생원 남궁숙(南宮淑)은 삼하(三下)였다.】 또 입격한 책문【삼하(三下)이다.】 1편을 입계하기를,
“이 시권(試券)은 피봉(皮封)의 이름 쓸 데를 베었고, 이어 그 위쪽도 베어 성명을 쓰지 않고 공봉(空封)했습니다. 이는 간사한 꾀를 부린 것인 듯하니 추고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전교하였다.
“유생들의 제술 중에 수석인 사람은 바로 회시(會試)에 직부(直赴)하도록 하고 차석인 사람은 3분(分)을 주고 또 그 다음 사람은 2분을 주고 또 그 다음 사람은 1분을 주라. 또 이 공봉한 시권은 반드시 간사한 꾀를 부린 것이다. 전일에도 시험장에서 또한 이런 일이 있었는데, 유생들의 풍습이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일이니 추고하라.”
【원전】 16 집 671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명종 8년 계축(1553,가정 32)
 10월23일 (병신)
동지중추부사 남궁숙의 졸기

동지중추부사 남궁숙(南宮淑)이 졸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숙은 용렬하고 비천한 자질에 지식은 없이 명리(名利)만 탐하였다 그가 관찰사와 수령이 되었을 때에 거짓을 꾸며 부정한 일을 많이 행하였으며 세상을 속이고 벼슬자리를 도적질하여 마침내 2품에 이르렀으므로 식자들이 나무랐다. 그러나 자기 맡은 일에 힘썼으므로 사람들이 능력있는 관리라고 일컬었다.
【원전】 20 집 167 면
【분류】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知守齋集卷之十五
 
咸悅南宮氏族譜序 a_213_575c


南宮氏複姓也。謹按族姓書云。南宮姬姓。周文王四友南宮子之後。春秋時。顯於魯宋者六人。而敬叔最著。自是以降。歷漢唐而未有聞焉。至宋復始有登第者四人。而訖于皇明。又寥寥也。獨我東著籍于咸悅者。自麗之大將軍元淸始焉。而流傳其先從箕子東來。豈或如唐城洪氏之以才子來敎。延安李氏之213_575d以中郞留仕。而乘牒佚闕。盖不可攷。在麗代。冠冕固相承蟬連。而至我朝。以文科進。旣過十數。又多歷淸顯而登宰列焉。唯譜牒之成。至今未遑。盖曾有佐郞埞,縣監欽及宗孫瑗,奉事鏡諸公。前後修輯而不及刊也。今者判官㯖竭誠鳩財。將以印行于世。而奉事公之孫馝。以不佞亦係彌甥。要以一言敍其事。余謂是譜也閱幾世經營。今始有就。則諸君之盡心於斯。誠亦善矣。在昔儒先至以厚風俗。管攝天下人心。歸之於明譜系。又有以無位而可以化天下。推之於修譜。若是乎譜系之修不修。不啻係一家事。亦可謂213_576a關天下治化。而獨恠夫近世諸家譜牒。日修而月成。幾乎家家有譜。則是宜風漸厚俗漸醇。而求其實。非徒不能然。而又或不如前何也。無亦前之未遑不及修。雖若少文。固自有愨質者存乎內。而近之切切於唯譜是急。或流於文勝而徇外否乎。是亦宜修譜者之不可不加之意也。吾家譜。前亦屢修。旣以是自警。且以之奉勉爾。

性潭先生集卷之二十四
 墓表
松齋崔公墓表 a_244_606d



公諱柱極字宅元。孝友之篤。文行之雅。爲遐陬士友所推重。縣侯詠其懿德。邑誌載其徽蹟。噫。斯可以諗夫今與後也。全州之崔。以高麗門下侍中文成公阿爲鼻祖。歷幾世至諱哲。版圖判書文簡公。寔公十二代祖也。曾祖諱時煥階通政。以孝㫌閭。祖諱命尹。考諱泰東。妣慶州金氏。鳴八之女。公生於肅廟壬辰八月五日。禀質粹美。幼不喜遊戱。長益簡重。事親極其志物之養。當其癠憂。焦心嘗糞。割指進血。及遭艱哀毁踰節。廬墓盡制。奉先之道。隨力致誠於精禋。平居與諸弟晝宵相守。湛樂講劘。訓子姪以義方。惟以閉戶看書爲究竟法。有時植杖田疇而亦未嘗釋卷。蕭然弊廬。蔬糲不繼。而處之晏如。每鷄鳴而起。洞誦庸學諸書。犂然有自得之趣。甞勉戒後進曰人之爲學。只在於收其放心而已。癸巳年六十二而十月二十七日疾革。沐浴更衣。遂就枕而卧。執其弟手曰吾今逝矣。須善導諸兒。無壞家法也。兩胤迭進其指血。公忽開眼視之曰吾方順命就盡。不宜爲無益之事也。有頃而卒。其從容整暇。實無愧於古人之正終矣。翌年二月。葬于逐雲先兆辛向之原。從遺命也。公持躬秉心。御家處鄕。一切皆從忠信中做出來。感服人者甚多。至使穿窬者化爲善良。竟於歿後有祭社之議。雖其沈淪以終。固可慨恨。而遺蹟之不宜泯沒者有如是焉。公配信川康氏世溫女。生于丙申。歿於壬寅。葬在公墓南麓艮坐原。有三男。爀基,炯基,炳基。四女適朔寧崔普恒,安東權之正,咸安李東彥,東萊鄭允恊。爀基生四男奉珪,敏珪,道珪,有珪。一女適利川徐有玟。炯基二男並幼。二女適咸悅南宮湜,利川徐宗說。炳基二男幷幼。一女適扶安金宗璞。嗚呼。今距公歿三十餘載。而焯焯羣行。傳誦不已。維玆墓石之鐫。尙其永世不泐也夫。

 

속동문선 제4권
 칠언고시(七言古詩)
춘수(春愁)



서거정(徐居正)

봄시름이 이엄이엄 뿌리와 줄기가 있어서 / 春愁綿綿有根蔓
해마다 해마다 끊임없이 돋아나네 / 年年歲歲生不齗
크기는 우주에 가득 가늘기는 털 같아 / 大盈六合細入髮
청춘 치고 어느 날에 시름이 없으리 / 無有靑春不愁日
가무하는 누각엔 들어갈 길 없는지 / 謌臺舞閣入無因
궁항에 와서 유인만 찾는구나 / 却來窮巷尋幽人
유인이 피하려 하나 피할 곳이 없으니 / 幽人欲避避無地
시름만은 유신타마는 신도 탈이로세 / 愁獨有信信亦崇
예로부터 천지간에 시름이 없다면은 / 古來天地若無愁
백발이 내 머리를 우롱치 않으련만 / 白髮亦不欺吾頭
바라건대 저기 저 봄강물을 봄술로 변하여서 / 我願春江變作春酒淸
높디 높은 만고의 수성을 말끔 씻어 내과져 / 洗盡崢嶸萬古之愁城
시름은 제 시름대로 취하기는 취하는대로 / 愁自有愁醉自醉
시름하여 살거나 취해 죽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소 / 愁生醉死君擇二


 

[주D-001]수성(愁城) : 근심을 성에 비유하여 수성(愁城)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