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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4.13. 인왕산 주변 산책

아베베1 2012. 4. 15. 16:30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산천의 형승(形勝)


서울[漢都] 성 안에는 경치 좋은 곳이 비록 적으나 그 중에서 노닐 만한 곳은 삼청동(三淸洞)이 가장 좋고, 인왕동(仁王洞)이 그 다음이고, 쌍계동(雙溪洞)ㆍ백운동(白雲洞)ㆍ청학동(靑鶴洞)이 또 그 다음이다. 삼청동은 소격서의 동쪽에 있다.계림제(鷄林第)로부터 북쪽에 어지럽게 서 있는 소나무 사이에는 맑은 샘물이 쏟아져 나온다. 물을 따라 올라가면 산은 높고 나무는 빽빽히 섰으며 바위로 된 골짜기가 깊숙하다. 몇 리를 못 가서 바위가 끊어져 낭떠러지를 이룬 곳이 있는데, 물이 낭떠러지의 허공에 뿌려져 흰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흩어지는 물방울은 구슬이 뛰는 것 같다.그 아래에 물이 모여서 깊고 큰 못이 되었다. 그 곁은 평탄하고 넓어서 사람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높은 소나무들이 그 위에 엉켜 덮여 있고 바위 사이에는 모두가 진달래와 단풍잎으로 봄과 가을에는 붉은 그림자가 비치어 빛이 난다. 지위가 높고 점잖은 사람으로 와서 노는 이가 많다. 그 위로 두어 걸음 올라가면 연굴(演窟)이다.
인왕동은 인왕산 아래의 구불구불하고 깊은 골짜기가 복세암(福世庵)을 에워두른 곳인데, 골짜기의 물은 합류하여 시내를 이루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활쏘기를 한다. 쌍계동은 성균관의 웃골[上谷]에 있다. 두 샘물이 산골의 실개천을 이루었는데 김뉴(金紐) 자(字)는 자고(子固)이다. 가 개천가에 초당을 짓고 복숭아를 심어 무릉도원을 모방하니 진산(晉山) 강희맹(姜希孟)이 여기에 대하여 글[賦]을 지었다. 김뉴의 문장과 풍류가 당시 세상에 드날렸으므로 호걸들이 그를 따라 노는 이가 많았다. 백운동은 장의문(藏義門) 안에 있는데 중추(中樞) 이염의(李念義)가 이곳에 살았다. 시인들이 그의 유거(幽居)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지은 것이 있으나 이염의는 글을 알지 못하였다.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골에 있는데 골이 깊고 맑은 개천이 있어서 활쏘기 장소를 차릴 만하다. 그러나 산이 민둥민둥하여 수목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성 밖에 놀 만한 곳은 장의사(藏義寺)의 앞 개천이 가장 좋은데 시냇물이 삼각산의 여러 골짜기에서 흘러나온다. 골짜기 안에는 여제단(厲祭壇)이 있고 그 남쪽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옛 터가 있다. 절 앞에는 겹쳐 포개진 돌들이 수십 길이나 되어 수각(水閣)을 이루었는데 절 밑 수십 보(步) 되는 곳에 차일암(遮日岩)이 있다.바위는 매우 험하고 높아 냇물을 베고 있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고, 바윗돌은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다. 급한 물줄기가 어지럽게 쏟아져서 맑은 하늘에 우레가 우는 듯 귀를 시끄럽게 하는데 물은 맑고 돌은 희어서 완연히 속세를 벗어난 뛰어난 경치이므로 벼슬아치들이 와서 노는 이가 끊어지지 않는다.물을 따라 몇 리를 내려가면 부처바위[佛岩]가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새겨 놓았다. 시냇물은 북쪽으로 꺾어져 곧게 서쪽으로 흐른다. 그 사이에 예전에는 물방아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그 아래의 몇 리 되는 곳이 홍제원(弘濟院)이다. 홍제원의 남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언덕에는 큰 소나무들이 가득한데 그 위에 예전에는 정자가 있었다. 중국 사신이 옷을 갈아 입던 곳이었는데 정자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사현(沙峴)의 남쪽에서 모화관까지의 사이에는 좌ㆍ우 양쪽에 키 큰 소나무 들과 밤나무 숲이 겹겹으로 서로 뒤섞이어 덮여 있다. 서울의 활쏘기 하는 이, 전송하는 이, 영접하는 이들이 많이 여기에 모인다. 그러나 쏟아지는 계곡의 급류도 맑게 흐르는 물도 없다.목멱산(木覔山)의 남쪽 이태원(梨泰院)의 들에는 고산사(高山寺)의 동쪽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며 큰 소나무가 골에 가득하여 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하러 많이 간다. 서쪽으로 가면 진관사(津寬寺)ㆍ중흥사(中興寺)ㆍ서산사(西山寺)가 있고,골[洞]의 북쪽에는 청량사(淸涼寺)ㆍ속개사(俗開寺) 등이 있으며, 골의 동쪽에는 풍양사(豐壤寺)가 있고, 남쪽에는 안양사(安養寺) 등이 있다. 모두 높은 산과 큰 시내가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쉴 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서울에서 가깝지 않기 때문에 놀러 오는 사람이 드물다.《용재총화》
○ 개성부 : 송악이 진산(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부소(扶蘇)였고 또 곡령(鵠嶺)이라고도 일컬었다. 그 아래가 만월대(滿月臺)이다. 소위《송사(宋史)》에, “큰 산을 의지하고 궁전을 지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만월대의 뒤가 자하동(紫霞洞)이다. 동부(洞府)는 그윽하고 막혔으며 시냇물은 맑고 잔잔하여 가장 뛰어난 절경이다. 남쪽에 있는 용수산(龍首山)ㆍ진봉산(進鳳山)이 내안산(內案山)을 이루고 있다. 진봉산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진봉산 철쭉이라고 한다.
○ 천마산(天磨山) : 송악의 북쪽에 있다. 모든 봉우리가 높고 험하여 하늘을 찌르는 듯한데 바라보면 푸른 기운이 서린다.
○ 면주동(綿紬洞) : 오관산(五冠山) 밑에 있으며, 골 안은 매우 넓다. 골짜기 입구에 해를 가리는 바위가 있는데 바윗돌은 넓고 평탄하여 앉을 만하다. 돌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옛사람들이 장막의 기둥을 세운 곳이라고 말한다. 《여지승람》에는 장단(長湍)에 들어 있다.
○ 산대암(山臺岩) : 송경(松京)의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백 길이나 되는 절벽의 형상이 색을 칠한 누각같다. 화담(花潭)은 영통동(靈通洞) 입구에 있다. 못가에는 그림 병풍을 펴 놓은 것 같은 푸른 절벽이 높게 서 있고 못 곁에 작은 바위가 있는데 4면이 깎은 듯하다. 여기에도 또한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다.이 못에서부터 위는 산이 둘러 있어 길이 꾸불꾸불하여 시냇물을 여러 번 건너야 영통동에 이르게 된다. 영통동은 오관산 밑에 있다. 《여지승람》에는 장단에 들어 있다. ○ 화담은 경치가 뛰어나게 좋으며, 서경덕(徐敬德)이 은거하던 곳이다. 못가의 바위에 서사정(逝斯亭)이 있다.
○ 박연(朴淵) : 천마산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다. 형상이 돌로 만든 장독과 같아 넘어다보면 아주 검다. 못의 중심에 솟아나온 반석(盤石)이 있는데 섬바위라고 한다. 물이 절벽으로 흘러 사나운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열 길은 될 것이며,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비치고 나는 구름이 높은 돌다리를 씻는 듯, 우레가 내닫고 번개가 치는 것 같아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속세에 전하기를, “예전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이 못 위에서 피리를 불었더니 용왕의 딸이 감동하여 박 진사를 끌어들여 남편으로 삼았다. 그래서 못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또는 박 진사의 어머니가 와서 울다가 못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못 이름을 고모담(姑姆潭)이라고도 한다.” 한다. 폭포 아래에 범사정(泛槎亭)이 있다.
○ 대흥동(大興洞) : 박연에서 올라가면 산은 점점 더 높아지고 물은 더욱 맑아지며 바윗돌은 매우 험준하다. 관음굴 앞에 이르면 물이 깊어 못을 이루고 있다. 물 속에서 솟아나온 돌이 있는데 이를 구담(龜潭)이라고 한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깊은 웅덩이가 있는데 물이 몹시 맑다. 4면이 모두 돌인데 어떤 것은 책상이나 평상 같고, 어떤 것은 담장이나 집과 같다.그 위는 모두가 오래된 소나무이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샘물이 동쪽 벼랑에서 솟아 나오는데 여기를 보현동(普賢洞)이라고 하고 또 두어 걸음 올라가면 마담(馬潭)이라고 하는 곳이 있다. 또 몇 리를 올라가면 대흥사(大興寺)가 있다. 골짜기에 수목이 무성하여 여름에는 목련화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을이면 단풍과 황엽(黃葉)이 물 밑에 거꾸로 비치니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모두《여지승람》에 있다.
○ 장단의 석벽 : 강물의 원류는 안변(安邊)ㆍ영풍(永豐)에서 나와 이천(伊川)ㆍ안협(安峽)을 거쳐 마전(麻田)에 이르러 대탄(大灘)과 합류하고 부동(府東)에 이르러 두기진(頭耆津)이 되는데 양쪽 언덕에 푸른 돌이 수십 리를 벽처럼 서 있어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거둥하여 놀던 곳이라고 한다. 그 아래가 임진 나루터이다.
○ 여주의 청심루(淸心樓) : 객관(客館)의 북쪽에 있다. 여강의 동쪽 언덕인 봉미산(鳳尾山)에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벽돌 탑이 있어 세상에서는 벽사(甓寺)라고 부른다. 절 옆 강변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는데 낭떠러지의 돌들이 아주 기묘하다. 강의 남쪽 언덕 아래에 말바위가 있는데 전설에는 바위 아래에 여룡(驪龍)이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 영평(永平) 결(缺)
○ 충청도 청풍(淸風 청주)의 한벽루(寒碧樓) : 객관의 동쪽에 있는데 큰 강물을 굽어보고 있다.
○ 단양의 도담(島潭) : 군 북쪽 24리 되는 곳에 있다. 세 바위가 한복판에 솟아 있다. 못에서부터 물을 수백 보쯤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석벽이 만 길이나 되어 보이는데 황양목(黃楊木)과 측백나무가 바위틈에 거꾸로 나 있고, 바위에 구멍이 문같이 생겨 있어 바라보면 딴 세상 같다.
○ 구담(龜潭) : 양쪽 언덕의 석벽이 하늘에 높이 솟아 해를 가리었다. 왼 쪽과 오른 쪽에 강선대(降仙臺)ㆍ채운봉(彩雲峯)ㆍ옥순봉(玉笋峯)이 만 길이나 솟아 있는데 순전히 하나의 돌이다. ○ 가은암(可隱岩)ㆍ상선암(上仙巖)ㆍ중선암(中仙巖)ㆍ하선암(下仙巖)이 있다.
○ 이락루(二樂樓) : 군의 서쪽에 있다. 김일손(金馹孫)의 기문(記文)이 있다. 운암(雲巖)은 읍의 동남쪽에 있다. 서애 유성룡의 정자 터가 있다.
○ 제천의 의림지(義林池) : 못 서쪽에 후선정(候仙亭)이 있다.
○ 영춘(永春)의 성산(城山) 남쪽에 있는 석굴 :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넓이는 10척이 넘으며 깊게 들어가서 끝이 없다. 물이 철철 흘러나오는데 깊이는 무릎이 잠길 정도이고 얼음과 같이 맑고 싸늘하다. 고을 사람이 횃불 열 자루를 갖고 들어갔는데 굴이 아직 끝나기 전에 횃불이 다하여 돌아 나왔다 한다.
○ 소백산 결(缺)
○ 충주의 달천(達川) : 임진왜란 때 명 나라의 장수가 물맛을 보고 “중국의 여산 폭포(廬山瀑布)와 같다.”고 말하였다. 달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금천(金遷) 앞에 이르러 청풍강(淸風江)과 합류한다. 금천은 대도시이다. 금천의 서쪽 십여리 되는 곳에 가흥창(嘉興倉) 조운창 이 있다. .t;팔역지(八域誌).
○ 탄금대(彈琴臺) : 신라 때 선인(仙人) 우륵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 보은의 속리산 : 현(縣)의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 정상에 문장루대(文藏樓臺)가 있다.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은 앉을 만하다. 대(臺)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도 줄지 않고 장마에도 불지 않는다.세 갈래로 나누어져서 반공(半空)으로 흘러내려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이 된다. 산 아래에는 여덟 개의 다리를 아홉 번 돈다는 팔교구요(八橋九遙)라는 이름이 있다. 한 줄기의 물이 빙 돌고 굽이마다 다리가 있는데, 법주사(法住寺)에 이르게 된다. 절의 서쪽 봉우리에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자연히 생겨난 천연석이다. 《여지승람》
○ 영동(永同)의 용연(龍淵) : 현의 서쪽 16리에 있으며, 골짜기 입구의 양쪽 언덕은 깎아 세운 듯한 석벽이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맞보고 있는데 바위로 된 봉우리는 높고 가파르다. 중간에 돌절구처럼 생긴 곳이 있어 못의 하류가 여기에 괴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상에서는 기연(妓淵)이라고 부르는데 물이 넘쳐서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아 흐른다.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여지승람》
○ 공주의 금강 : 강물을 내려다 보는 곳에 사송(四松)ㆍ금벽(錦壁)ㆍ독락병(獨樂屛) 등의 정자가 있다. 올라가서 조망을 즐길 만한 경치가 있다. 쌍수산성(雙樹山城)의 공북루(拱北樓)는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 첫째 유성(儒城), 둘째 경천(敬天), 셋째 이인(利仁), 넷째 유구(維鳩)는 세상에서 말하는 살 만한 곳이다.
○ 계룡산의 서북쪽에 있는 용연(龍淵) : 물이 넘쳐서 큰 시내를 이루니 산의 남쪽과 북쪽에 경치 좋은 곳이 많다. 동쪽에는 봉림(鳳林)이 있고 북에는 갑사(岬寺)와 동학사(東學寺)가 있다.
○ 부여의 백마강 : 조룡대(釣龍臺)ㆍ낙화암ㆍ자온대(自溫臺)ㆍ고란사(皐蘭寺) 등이 있으니 백제 때의 고적이다. 암벽이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덕산(德山)의 가야산 결(缺)
○ 보령(保寧)의 영보정(永保亭) : 최고의 명승지라고 일컫는다.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려는 날개와 같고/地如拍拍將飛翼
누각은 흔들흔들 매지 않은 배와 같다/樓似搖搖不繫篷
고 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 청라동(靑蘿洞) 결(缺)
○ 해미(海美)의 가야산 : 상왕산(象王山)과 서로 연해 있다. 동쪽 가야사(伽倻寺)가 있는 동학(洞壑)은 곧 옛날 상왕(象王)의 궁궐이 있던 터이다. 서쪽에 수렴동(水簾洞)이 있는데 산악과 폭포가 매우 기묘하다. 북쪽에 강당동(講堂洞)ㆍ무릉동이 있는데 수석이 또한 아름답다.
○ 남포(藍浦)의 성주산(聖住山) : 남ㆍ북의 두 산이 합하여 큰 골짜기가 되었다. 수구(水口)가 밝고 깨끗하다. 산 밖에서 검은 옥벼루를 생산하는데 이따금 관상(觀賞)에 쓰일 만한 돌이 난다.
○ 화계(花溪) 결(缺)
○ 홍주의 광천(廣川) 결(缺)
○ 청주의 화양동(華陽洞) : 선유산(仙游山) 칠성대(七星臺)로부터 서쪽으로 재[嶺]의 능선을 넘어가면 여기가 외선유동(外仙游洞)이다. 조금 내려가면 청주의 파곶산(葩串山)인데 동천(洞天)이 깊숙이 뚫려 있다. 큰 시냇물이 암석의 골짜기와 돌벼랑으로 쏟아져 내려와 천번 돌고 만번 굴러 흐르니 경치가 기괴하고 맑고 빼어나다. 그 아래가 화양동인데 수석(水石)이 더욱 기묘하고 뛰어나다. 그 가운데 만동묘(萬東廟)가 있다.
○ 강원도 회양(淮陽)의 단발령(斷髮嶺) : 천마산의 금성현(金城縣)의 경내에 있다. 속언에, “이 재에 올라 금강산을 본 자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이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금강산 : 또는 개골(皆骨)ㆍ열반(涅槃)ㆍ풍악(楓岳)ㆍ지달(怳怛)이라고도 부르며 모두 1만 2천 봉이다. 내산과 외산을 합하여 1백 8개소의 절이 있다. 단발령으로부터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는 사이에 백천동(百川洞)ㆍ업경대(業鏡臺)ㆍ백화암(白華菴)ㆍ표훈사(表訓寺)를 지나게 된다. 정양사(正陽寺)에 오르면 천을대(天乙臺)ㆍ개심대(開心臺)ㆍ헐성루(歇星樓)가 있어서 가장 이 산의 참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바로 중향성(衆香城)과 마주 대하고 있어서 경치를 완상하기에 더욱 좋다.명소(名炤)와 낙월(落月)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ㆍ금강대ㆍ망고대(望高臺) 등의 봉우리들이 앞뒤로 둘러 벌여 섰다. 북쪽으로 들어가면 만폭동인데 바위 위에 양사언(楊士彦)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岳 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있다. 골짜기 안의 보덕굴(普德窟)에는 관음각(觀音閣)이 있다.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고 밖으로 구리쇠 기둥을 세워 그 위에 작은 집 세 칸을 만들었는데 쇠사슬로 얽어서 바윗돌에 못박아 놓았다.
물줄기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덟 개의 못이 있는데, 관음담(觀音潭)ㆍ진주담(眞珠潭)ㆍ화룡담(火龍潭)ㆍ벽하담(碧霞潭)ㆍ□ 구(龜) □이라 한다. 진주담과 벽하담이 가장 기묘하다. 수건애(手巾崖)라는 돌이 있고, 사자암이라는 봉우리가 있으며, 불지암(佛地菴)ㆍ송라암(松蘿菴)이라는 암자가 있다.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마하연(摩訶衍)ㆍ묘길상(妙吉祥)이다. 송라암의 동쪽 큰 골에는 무수한 폭포들이 갈라지고 나누어져서 아득하게 퍼져 흐르는 것이 마치 흰 무지개 같다. 봉우리와 암석은 솟아 있는 것은 날이 선 칼과 같고, 날카로운 것은 송곳과 같고, 우뚝 치켜 든 것은 손과 같고, 서루 마주 닿은 것은 이빨과 같고, 굽은 것은 팔꿈치 같고, 가로 뻗은 것은 팔과 같다.불지암(佛地庵)은 또한 매우 그윽하고 가장 아름답다. 만회암(萬灰庵)을 거쳐 백운대에 오르는데, 구경하는 사람들은 쇠줄을 붙잡고 올라가서 중향(衆香)ㆍ백옥(白玉)ㆍ석병(石屛)을 관람한다. 중향성은 만인봉(萬仞峯)의 정상에 있다. 모두 흰 돌인데 층계가 있어 탁자를 펴 놓은 것 같다. 탁자 위에 한 개의 서 있는 돌을 안치하였는데 불상 같으나 얼굴의 형상이 없다.좌ㆍ우의 돌 상탁 위에도 작은 석상들을 두 줄로 배열하였는데 또한 얼굴의 형상은 분명치 않다. 속언에 담무갈(曇無竭)이 여기에 머물어 살았다고 전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비로봉(毗盧峯)이다. 정면으로 동해 바다를 굽어보고 있는데 여름이라도 오히려 춥다. 산기운과 안개가 얼룩지고 엉겨서 구름빛 같다.또 원통곡(圓通谷)ㆍ수미탑(須彌塔)ㆍ백탑동(百塔洞) 등 여러 경치 좋은 곳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기이한 경치가 아닌 것이 없다. 구룡연에 내팔담(內八潭)이 있는데 큰 폭포가 높은 산봉우리로부터 날아 내려오면서 굽이굽이에 못을 이룬 것이 여덟 층인데, 위험하여 들어가기는 어렵다.영원암(靈源庵)ㆍ마하연(摩呵衍)에서 내수참(內水站)으로 넘어가면 여기가 내금강과 외금강의 분계이며 은선대(隱仙臺)를 지나 유점사에 이른다. □ 영기연(永其淵)은 금강산의 북쪽 기슭에 있다.
○ 고성(高城)의 금강외산 : 불정암(佛頂巖)에는 구멍이 있는데 깊이가 바닥이 없다. 속언에 용녀(龍女)가 나와 불정화상(佛頂和尙)의 설법을 들었다고 전한다. 불정대(佛頂臺)에 올라 12폭포를 바라보면 푸른 언덕과 석벽들이 그림 병풍처럼 둘러섰는데 폭포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상이 흰 무지개 같은 것이 열둘이다.유점사의 불전은 능인전(能仁殿)이라고 하는데 역대의 왕실에서 하사한 옛 기물들이 많다. 만경동(萬景洞)에는 선담(船潭)이 있다. 상원(上院)ㆍ중원(中院)ㆍ내원(內院)ㆍ만경대를 이리저리 다니면 동해의 뛰어난 경치를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성불암(成佛菴)에서 해뜨는 것을 보고 발연사(鉢淵寺)에서 중의 무리가 폭포로 달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발연으로부터 비스듬히 신계사(新溪寺)로 돌아 옥류동(玉流洞)에 이르러 구룡연을 항하면 곧 내팔담(內八潭) 외에, 아홉번째로 꺾이는 곳인데 폭포가 기이하고 웅장하다. 신물(神物)이 물의 소용돌이 속에 숨어 있어서 사람의 소리가 조금만 높으면 문득 우레가 울고 비가 오는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한다.
○ 만물초(萬物草) : 금강산 동북쪽의 동천(洞天)에 있다.
○ 삼일포(三日浦) : 겹쳐진 봉우리와 포개진 멧부리로 둘러쌓였는데 그 가운데에 36봉이 있다. 계곡은 맑고 그윽하며 몽천사(夢泉寺)라는 절이 있다. 호수의 중심에 작은 섬이 있는데 푸른 돌이 편편하지 않다. 거기에 사선정(四仙亭)이 있는데 옛날 영랑(永郞)ㆍ술랑(述郞)ㆍ남랑(南郞)ㆍ안상(安詳) 등 네 신선이 놀던 곳이라고 한다.호수의 남쪽 작은 봉우리에 돌로 된 감실(龕室)이 있다. 봉우리의 북쪽 낭떠러지의 돌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이라고 붉게 쓴 여섯 글자가 있다. 암자 뒤 문암(門巖)에서 해뜨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의 가운데에 또 매향비(埋香碑)ㆍ사자암 등 여러 좋은 경치가 있다.
○ 해산정(海山亭) : 고을의 관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는 금강산을 쳐다보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바라보며, 남쪽으로는 긴 시내를 굽어보고 있다.
○ 남강(南江)의 대호정(帶湖亭) 결(缺)
○ 해금강(海金剛) :《여지승람》에는 포구라고 하였다. 산에 바위가 우뚝 솟아 층층으로 포개져서 계단과 같고 위에는 백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바다 가운데 암석이 바둑처럼 놓여 있는데 돌은 모두 흰빛이다.해안에는 석봉이 그림처럼 벌여 서 있다. 동쪽을 바라보면 5리나 되는 사이에 석봉이 병풍처럼 벌여 있고, 봉우리 아래에는 돌들이 있어서 용이 움켜잡고 호랑이가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물을 따라 내려가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구경하면 그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배에서 뱃사람이 전복 따는 것도 보인다.
○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 군의 북쪽 20리에 있다. 가로 뻗은 봉우리가 갑자기 바다로 뻗어 섬과 같다. 바닷가 언덕 낭떠러지에 줄지은 돌들이 빗살과 같이 정연하게 늘어섰고, 수십 개의 돌기둥이 언덕 곁에 모여 섰는데 언덕에서 10여 보(步) 떨어진 곳에는 또 네 개의 돌기둥이 따로 떨어져 물 가운데 섰다. 돌은 모두 6면으로 되어 있다.줄지어 선 돌 수백 개가 한 돌기둥을 이루었는데 기둥도 또한 6면(六面)이다. 돌기둥 위에는 다복솔[矮松]이 있는데 수명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알 수 없다. 여기를 사선봉(四仙峯)이라고 일컫는다. 봉우리에서 조금 북쪽 해안에는 돌의 모양이 또 틀리니, 어떤 것은 길고 어떤 것은 짧으며, 어떤 것은 쌓여 있고 어떤 것은 흩어져 있으며, 어떤 것은 기대어 있고 어떤 것은 가로질러 있다. 이 돌은 모두 4면인데 혹 5면도 있으며 기괴하고 이상하게 생겼다. 총석정은 가로지른 봉우리 위에서 돌기둥을 마주 굽어보고 있다.
○ 금란굴(金幱窟) : 나무 없는 민둥 봉우리가 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조금씩 낮아져서 바다를 굽어 본다. 봉우리의 낭떠러지에 굴이 있는데 넓기는 7, 8척이나 되고 깊이는 10여 보(步)쯤 된다. 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굴의 네 모퉁이의 석벽은 높이가 3척이며, 돌의 무늬는 노란색인데 아롱져서 금색으로 무늬가 있는 가사(袈裟)와 같다.
○ 옹천(甕遷) : 또는 왜륜천(倭淪遷)이라고도 한다. 군의 남쪽 65리에 있다.
○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 : 현의 북쪽 7리에 있다. 긴 능선이 구불구불하게 동쪽에 도사리고 있다. 3면이 모두 큰 호수인데 물가는 모래섬을 굽어 둘러 있고 밖은 큰 바다가 둘러 있다.바다 가운데 일곱 개의 섬이 호수와 바다 사이에 죽 늘어섰으며 푸른 솔이 길을 끼고 있다. 시중대의 옛이름은 칠보(七寶)였는데 감사 한명회(韓明澮)가 올라와 유람할 때 그를 정승에 임명한다는 명령이 왔기 때문에 마침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간성(杆城)의 청간정(淸澗亭) :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석봉이 우뚝 솟았는데 층층마다 대(臺)와 같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 위에는 용트림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만경루가 있으며, 대의 아래에는 돌들이 어지럽게 울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돌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
○ 선유담(仙游潭) : 군의 남쪽 10리 되는 산골에 있다. 작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반은 호수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영랑호(永郞湖) : 군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둘레가 30여 리이다. 암석이 기묘하고 괴이하며, 호수의 동쪽에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반은 호수의 가운데로 들어가 있다.
○ 화담(花潭) 결(缺)
○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 부의 동북 쪽 15리의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일명 낙산사라고 한다. 이화정(梨花亭)ㆍ빈일료(寶日寮)가 있고 절의 동쪽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관음굴이 있다.
○ 설악 외산(雪嶽外山) : 신흥사(神興寺)ㆍ내원암(內院庵)을 지나 방향을 바꿔 계조굴(繼祖窟)을 향하면 굴은 천후산(天吼山) 아래에 있다. 두루 식당폭포(食堂瀑布)를 구경할 수 있다.
○ 쌍성호(雙城湖) : 부(府)의 북쪽 40리 되는 간성군과의 경계에 있다. 호수의 주위가 수십 리나 되며, 뛰어난 경치가 영랑호보다 더 좋다.
○ 강릉의 경포대 : 부의 동북쪽 15리 거리에 있다. 일명 경호(鏡湖)라고도 한다. 주위는 20리인데 물은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며 사면과 중앙의 깊이가 같다. 서쪽의 언덕에 산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대(臺)가 있으며, 옆에 약(藥)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갯벌의 동쪽에 판자다리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고 한다.다리 밖은 죽도(竹島)이고 죽도의 북쪽은 흰 모래가 5리나 된다. 모래밭 저편에는 끝없는 바다가 있는데 해뜨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절묘한 경치이다. 호수에서는 적곡합(積穀蛤)이 난다. 보충 : 예전에는 경포대에 온방(溫房)과 양실(涼室)이 있었는데 감사 박명준(朴命俊)이 철거했다. 이는 사객(使客)들을 오래 묵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희암집(希庵集)》
○ 한송정(寒松亭) : 경포대의 남쪽 두어 마장되는 곳에 있다. 차[茶] 끓이던 샘과 돌 부엌과 돌절구가 있는데 네 신선이 놀던 곳이다.
○ 대관령 : 아흔 아홉 굽이이다. 서쪽에는 서울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재의 허리에 원읍현(員泣峴)이라는 고개가 있고, 재 아래에는 구산동(丘山洞)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 오대산 : 강릉부의 서쪽 1백 40리의 거리에 있다. 동쪽에는 만월봉(滿月峯), 남쪽에는 기린봉(麒麟峯), 서쪽에는 장령봉(長嶺峯), 북쪽에는 상왕봉(象王峯), 중앙에는 지로봉(智罏峯) 등 다섯 봉우리가 둘러섰는데 각 봉의 대(臺)마다 각각 한 암자가 있다. 산 아래에 월정사(月精寺)가 있고 절 곁에는 사고(史庫)가 있다.또 금강연이라는 못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반석이며, 폭포가 10척(尺)을 흘러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서대(西臺) 밑에 통을 댄 수함(水檻)이 있는데 곧게 솟아오르는 샘물은 그 빛과 맛이 보통 물과 다르다. 이것이 서쪽으로 흘러서 한강의 원류가 된다.
○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이한 바위가 무더기로 늘어섰다. 그 위에 높다란 누각을 가설하여, 아래로 오십천(五十川)을 굽어본다. 냇물이 굽이쳐 돌아서 못이 되었다.
○ 태백산의 황지(黃池) : 산 위에 들이 벌여 있는데, 위에는 작약봉(芍藥峯)이 있고, 아래에는 우리나라 시조가 살던 옛터가 있다고 하나 그 곳을 알 수가 없다. 황지의 물이 남쪽으로 30여 리를 흘러가서 작은 산을 뚫고 남쪽으로 나가는데 이를 천천(穿川)이라고 한다. 이것이 낙동강의 원류가 된다.
○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여지승람》에는 평해에 들어 있다.
○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 : 군의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솔이 만 그루나 있고 흰 모래는 눈과 같다. 이상의 아홉 고을을 영동 9군(嶺東九郡)이라고 한다.
○ 인제 설악의 한계폭포(寒溪瀑布) : 산 위에 성이 있고, 냇물이 성 안에서 흘러나와 폭포를 이루었다. 매달린 것 같은 물줄기가 수백 척(尺)이나 내려 쏟아지니 바라보면 하늘에서 흰 무지개 드리운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중국 장수가 중국의 여산폭포보다 좋다고 말하였다 한다. 원통역에서부터 동쪽은 겹친 멧부리와 높은 나무의 숲에 싸여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며, 시냇물은 가로 세로 흘러서 건너는 곳이 서른 여섯 곳이나 된다.또 남쪽 봉우리는 절벽이 천 길이나 되는데 기묘하고 괴이하여 형용할 수가 없다. 그 아래에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 못을 이루었는데, 또 그 동쪽 몇 리 되는 곳에는 벼랑을 따라 작은 길이 있고 암벽의 빈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으며 봉우리 바위는 높게 뻗어나 용이 움켜잡고 범이 끌어당기는 것과 같고 층층대와 같이 여러 층의 돌이 무수하니 지형이 뛰어난 경치가 영서에서 제일이다.
○ 원주의 치악산 : 산 안에는 계곡이 많고 경치가 그윽하며 기이하다. 산에는 신령한 감응이 많아서 사냥꾼도 감히 짐승을 잡지 못한다.
○ 사자산(獅子山) : 치악산의 동북쪽에 있다. 30리에 걸쳐 물과 바위가 있는데 주천강(酒泉江)의 근원이다. 남쪽에는 도화동(桃花洞)ㆍ두릉동(杜陵洞)이 있는데 모두 시내와 샘물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춘천의 우두촌(牛頭村) : 소양강 위에 두 갈래 물이 합류한 삼각주(三角洲) 안에 있으며 물 부근에 돌이 있다.
○ 정선의 풍혈(風穴) : 대음산(大陰山)의 바윗돌 사이에 있다. 그 아래에 얼음을 두면 여름이 지나도록 녹지 않는다. 또 물구멍이 있는데, 남강(南江)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나뉘어져 땅 속으로 들어갔다가 모마어촌(毛麻於村)에 이르러 땅 위로 솟아 나온다.
○ 대음강(大陰江)의 하류에 용암연(龍岩淵)이 있다.
○ 철원의 북관정(北寬亭) : 결(缺)
○ 보개산(寶蓋山) : 결(缺)
○ 고석정(孤石亭) : 큰 바위가 3백 척 높이로 우뚝 솟았다. 바위를 따라 올라가면 구멍이 하나 있는데 배를 땅에 대고 들어가면 열 사람 정도가 앉을 만하다. 큰 냇물이 바위 아래에 이르러 못이 되고 서쪽으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른다. 앞뒤에 바위 멧부리가 벽처럼 서 있다.
○ 순담(筍潭) : 결(缺)
○ 평강(平康)의 정자연(亭子淵) : 큰 시냇물이 세 방면의 분수령으로부터 마을 앞에 흘러 와서 깊이가 두 배를 수용할 만하다. 석벽이 병풍같이 둘러 있고, 언덕 위에는 정자와 누대가 있다. 여기는 황씨(黃氏)가 대를 물려가며 사는 곳이다.
○ 이천(伊川)의 광복산촌(廣福山村) : 현의 북쪽 60리에 있다. 안변(安邊)ㆍ영풍(永豐)의 물이 여기에 이르러 깊어지고 고리처럼 둘렀다. 북쪽에는 고미탄(古美灘)의 깊은 물과 검산(劍山)의 막힌 데가 있다.
○ 경상도 안동의 학가산(鶴駕山) : 두 갈래의 물 사이에 있다. 산세는 오관산(五冠山)과 삼각산과 흡사하나 다만 돌로 된 봉우리가 적다. 아래에 풍산(豐山)의 들이 있다.
○ 영호루(映湖樓) : 낙동강의 원류가 태백산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 예안에 이르러 동쪽으로 꺾어져 서쪽으로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비로소 커지면서 굽이쳐 돌아 호수가 된다. 무협(巫崍)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오른쪽에 버티고 있다. 누각의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누각의 북쪽에 신라 때의 옛 절이 있는데 절의 정전이 들 가운데 높다랗게 서 있다. 서쪽에는 관왕묘(關王廟)의 석상이 있다.
○ 귀래정(歸來亭)과 임청각(臨淸閣) : 이씨(李氏)가 대대로 전해오며 사는 곳인데 영호루와 함께 읍 중의 이름난 경치이다.
○ 하회(河回) : 서애 유성룡의 옛집이 있는 곳이다. 깊이 괴인 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산은 학가산(鶴駕山)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석벽이 강 위를 빙 둘러 있어 그 경치가 조용하고 빼어나게 아름답다. 위에는 옥연정(玉淵亭)과 작은 승암(僧菴)이 바위 사이에 띄엄띄엄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진실로 뛰어난 경치이다. 하회 마을의 위와 아래에는 또 삼구정(三龜亭)ㆍ수동(繡洞)ㆍ구담(九潭)ㆍ가일(佳逸) 등 강가에 이름난 마을들이 있다.
○ 임하(臨河)의 몽선각(夢仙閣), 학봉 김성일의 옛집, 내성(奈城)의 청암정(靑岩亭) 찬성 권벌(權撥)의 옛집, 춘양(春陽)의 한수정(寒水亭) 정언 권두경(權斗經)의 세거지 은 모두 태백산 남쪽 물가에 자리잡은 이름난 마을들이다.
○ 청량산(淸涼山) : 산맥이 태백산에서 내려와 예안강(禮安江) 위에서 우뚝 솟았다. 밖에서 바라보면 다만 흙 봉우리가 두어 줄기뿐이다. 강물을 건너 골 안에 들어가면 사면의 석벽이 만 길이나 되는 높이로 빙 둘러 있어서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안에 난가대(爛柯臺)가 있는데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이라고 한다. 그 곁에 한 노파의 석상이 석굴 속에 안치되어 있다. 산에는 연대사(蓮臺寺)가 있다.
○ 문경의 새재[鳥嶺] : 결(缺)
○ 계립령(鷄立嶺) : 결(缺)
○ 병천(甁川) : 속리산의 남쪽에 환적대(幻寂臺)가 있다. 온갖 바위와 골짜기로 오솔길도 알 수가 없다. 냇물이 청화산(靑華山)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용추(龍湫)에 흘러가는데 이것이 병천이다. 냇물의 남쪽에 있는 도장산(道藏山)과 청화산과 마주 보고 있다. 두 산 사이의 용추에서부터 그 위를 통틀어 용유동(龍游洞)이라고 한다.골 안의 평지는 모두 반석이다. 큰 냇물이 돌 위에 질펀하게 퍼져 흐르면서 조그마한 폭포가 되기도 하고, 작은 못이 되기도 하며 물발[水簾)이 되기도 하면서 물통[水槽] 같기도 하고 절구 같기도 하며, 짐승 같기도 하여 천태만상의 경치는 기기괴괴하다. 그 가운데 송씨(宋氏)의 정자가 있다.
○ 선유산(仙遊山) : 청화산의 동북쪽에 있다. 산정은 평탄하고 계곡이 매우 길다. 위에 칠성대(七星臺)ㆍ호소굴(虎巢窟) 진인(眞人) 최도(崔)와 도사 남궁두(南宮斗)가 도를 수련하던 곳이다. 이 있다. 시냇물이 흘러내려가 낭풍원(閬風苑)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대탄(大灘)으로 들어간다.
○ 풍기(豐基)의 욱금동(郁錦洞) : 소백산 아래에 있다. 물과 바위가 수십 리에 걸쳐 있다. 위에 비로전(毗盧殿)이 있고, 욱금동 입구에 퇴계의 서원이 있다.
○ 죽령 : 결(缺)
○ 예안의 도산 : 황지(黃池)에서 나오는 물이 여기서 큰 시내를 이룬다. 시내 위의 양쪽 산이 합하여 긴 골짜기가 되고 산기슭에는 모두 석벽이 있다. 퇴계가 거처하던 암서헌(岩棲軒)이 지금도 있다. 도산의 하류에 있는 분강(汾江)은 유수 이현보(李賢輔)의 고향이고, 그 남쪽은 좨주 우탁(禹倬)의 고향으로서 모두 경치가 좋은 곳이다.
○ 순흥(順興)의 죽계(竹溪) : 소백산에서 흘러나온다. 물과 바위가 청명하다. 위에 백운동 서원이 있다.
○ 청하(淸河)의 내연산(內延山) : 바위와 폭포의 좋은 경치가 있다. 산에 대ㆍ중ㆍ소 세 개의 돌솥이 바위 위에 벌여 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세 개의 돌[三動石]이라고 일컫는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약간 움직이는데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
○ 합천의 가야산 : 해인사가 있고 거기에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입구에는 홍류동(紅流洞)의 무릉교(武陵橋)가 있다. 나는 듯 쏟아지는 냇물과 반석으로 된 계곡이 수십리나 된다. 동북쪽에 만수동(萬水洞)이 있다.
○ 청송(靑松)의 주왕산(周王山) : 돌로 동부(洞府)를 만들었다. 샘과 폭포가 뛰어나게 기묘하다.
○ 대구의 팔공산(八公山) : 석봉이 가로 뻗쳐 있고 시내와 산이 자못 아름답다.
○ 비슬산(琵瑟山) : 산 속에 솟아 오르는 샘물과 천석(泉石)이 있다.
○ 청도(淸道)의 운문산(雲門山) : 이어져 있는 봉우리와 첩첩이 겹친 멧부리가 둘러 있고, 계곡은 깊숙하고 그윽하다.
○ 오산(鰲山) : 군의 남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에 한 골짜기가 있는데 이름을 고사동(高沙洞)이라고 한다. 날씨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려고 하면 먼저 골짜기가 울고 구름 기운을 뿜어낸다. 구름이 고사동 안으로 들어가면 비가 오고, 고사동 밖으로 나가면 바람이 분다.
○ 의흥(義興)의 바람구멍 : 현(縣)의 동쪽 30리에 있는 화산(華山)의 기슭에 있다. 넓이는 3자 2치이고, 길이는 2자 8치이다. 바람이 구멍에서 나오는데 매우 차다. 초여름에도 반드시 얼음이 언다.
○ 의성의 얼음구멍 : 빙산(氷山)의 큰 바위 아래에 있다. 높이는 3자이고, 넓이는 4자 8치이며, 가로 들어간 것이 5자 1치인데 이것을 바람구멍이라고 한다. 또 바위 바닥에 바로 내려 뚫어진 구멍이 있는데 넓이는 1자나 되나 깊고 얕은 것은 알 수 없다.입하(立夏) 뒤에 살얼음이 얼고, 매우 더워지면 얼음이 굳어지고, 토우(䨪雨 안개가 끼고 내리는 이슬비)가 끼면 얼음이 녹는다. 봄과 가을에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며, 겨울이 되면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얼음구멍이라고 한다.
○ 진주의 지리산 :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산을 둘러싸고 아홉 고을이 있으며, 산의 높이와 넓이는 몇백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동쪽은 천왕봉(天王峯)이라 하고, 서쪽은 반야봉(般若峯)이라 한다.서로 연결된 계곡은 깊고 커서 백 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다. 산의 맨 꼭대기에 향적사(香積寺)ㆍ가섭대(迦葉臺)가 있고 내를 따라 서쪽에는 화암사(華岩寺)ㆍ연곡사(燕谷寺)가 있으며, 남쪽에는 신흥사(神興寺)ㆍ쌍계사가 있다.이 절에는 최고운(崔孤雲 최치원)의 화상이 있다. 냇가의 석벽에는 큰 글자로 ‘고운(孤雲)’이라고 새긴 것이 많다. 큰 냇물이 신흥사 앞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또 한 줄기 물이 향적사(香積寺) 앞에서 내려와 살천(薩川)에 이르러 진주를 돌아서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것을 청천강(菁川江)이라고 한다.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천불암(千佛菴)이 있고, 암자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굴이 있다.동쪽으로 바다를 굽어보며 서쪽으로 천왕봉을 등지고 있어 맑은 경치가 절묘(絶妙)하다. 이 굴을 ‘암법주굴(巖法主窟)’이라고 부른다. 또 만수동ㆍ청학동이 있는데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고, 청학동을 지금은 해계(海溪)라고 한다.
○ 함양의 지리산 : 북쪽에 영원동(靈源洞)ㆍ군자사(君子寺)ㆍ유점촌(鍮店村)ㆍ벽소운동(碧霄雲洞)ㆍ추성동(楸城洞)이 있는데 모두 경치 좋은 곳이다. 산골물이 합쳐서 임천(瀶川)이 되고, 흘러 내려 가서 용유담(龍游潭)이 된다. 용유담의 양쪽에는 바윗돌이 평평하게 깔리고 겹쳐 쌓였는데 다 갈아 놓은 것 같다.가로 놓이기도 하고 옆으로 펴지기도 하였다. 어떤 것은 큰 장독을 닮았는데 그 깊이는 바닥이 없고, 어떤 것은 술단지 같기도 하여 천 가지 만 가지로 기기괴괴하다. 물 속에는 가사어(袈裟魚)라는 물고기가 있다. 물은 군(郡)의 남쪽 25리 지점에 이르러 엄천(嚴川)이 된다. 시내를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면 개천과 돌의 경치가 매우 기이하다.
○ 산청의 환아정(換鵞亭)
○ 웅천(熊川)의 수락암(水落巖) : 율천현(栗川峴)의 남쪽 시냇물이 산허리의 바윗돌 사이로 흘러 들어가 수십 길의 폭포를 이루는데, 세 갈래로 나누어 아래로 쏟아진다. 그 지방 사람들이 다음해의 장마와 가뭄을 점치게 되는데 전라도가 가물려면 서쪽 갈래가 마르고, 경상도가 가물려면 동쪽 갈래가 마르며, 충청도가 가물려면 가운데 갈래가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 동래의 해운대(海雲臺) : 현(縣)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기슭이 바다에 들어가서 누에고치의 머리와 같다. 그 위는 모두 동백(冬柏)과 두충(杜沖)으로 덮여 있다.
○ 순흥(順興)의 부석사(浮石寺) : 떠 있는 바위와 식사(息沙)가 있고 선비화(仙飛花) 나무가 있으며 취원루(聚遠樓)가 있다.
○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 전라도 전주의 만경대(萬景臺) : 부(府)의 동남쪽 10리 거리인 고덕산(高德山)의 북쪽 기슭에 있다. 석봉이 기이하게 빼어나고 형상이 층층으로 겹쳐진 구름과 같다. 그 위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사면에 숲이 울창하고, 석벽은 그림과 같다. 서쪽으로 여러 산도(山島)를 바라볼 수 있고,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하며, 동남쪽은 태산(太山)을 등지고 있어서 경치가 천태만상이다.
○ 광주의 무등산 : 서석산(瑞石山)이라고도 한다. 한가운데는 높고 주위는 차차 낮으며, 높고 크게 50여 리를 웅장하게 서려 있다. 위에는 돌 수십 개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 높이는 백 척이나 될 것 같다. 주봉사(主峯寺)가 있고, 그 곁에 세 개의 돌이 있는데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된다. 이름을 삼존석(三尊石)이라고 한다. 또 십대(十臺)가 있으니 그 중의 하나가 풍혈대(風穴臺)이다. 석벽 아래에 바람구멍이 있다.
○ 영암의 월출산 : 가장 높은 봉우리를 구정봉(九井峯)이라고 한다. 바위가 우뚝 솟은 것이 있으니 높이가 두 길이 된다. 그 곁에 구멍 하나가 있는데 겨우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산 정상에 올라가면 20명이 앉을 수 있다. 그 평평한 곳에 오목하게 파여서 물동이처럼 물을 담고 있는 것이 아홉 개가 있는데 비록 가물더라도 마르지 않는다.봉우리 아래에 돌 두 개가 층층으로 된 바위 위에 우뚝 따로 서 있으니 높이는 한 길이 넘고 둘레는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은 산 정상에 붙었고 동쪽은 절벽을 굽어보고 있다. 그 무게는 비록 몇천, 몇백 명을 동원하더라도 움직일 것 같지 않은데도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 떨어지지 않으니 움직이는 돌이라고 부른다. 영석산(靈石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에 도갑사(道岬寺)가 있고, 서쪽 기슭에는 조암(槽巖)의 물과 바위가 있다.
○ 강진의 백운동(白雲洞) : 월출산의 남쪽에 있다.
○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 돌로 생긴 산세가 기묘한 경치이다. 항상 자줏빛 구름과 흰구름이 그 위에 덮여 있다.
○ 금산(錦山)의 덕유산(德裕山).
○ 제원천(濟源川)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 : 산의 사면이 벽처럼 섰는데 층층으로 끊겨져서 치마와 같다. 여기에 사고(史庫)가 있다.
○ 주계(朱溪) : 냇물과 산의 경치가 뛰어나게 좋다.
○ 용담(龍潭) : 주취산(珠崒山)에서 냇물이 흘러가 수성천(壽城川)이 되어 달계(達溪)로 들어간다.
○ 구례 : 서쪽에는 봉동(鳳洞)의 물과 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화엄사(華嚴寺)ㆍ연곡사(燕谷寺)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며, 남쪽에는 구만(九灣)이 있다. 지리산의 서쪽 가지가 여기서 끝난다. 잔수진(潺水津)이 둘러 안고 있다.
○ 장수의 장계(長溪) 결(缺)
○ 동복(同福)의 적벽(赤壁) : 내를 따라 올라가면 물염정(勿染亭)이 있다.
○ 남원의 광한루 결(缺)
○ 부안의 변산 : 산기슭이 서해(西海) 속으로 뾰족하게 들어갔다. 산봉우리가 백여 리를 빙 둘러 여러 겹으로 겹쳤으며 깊숙하고 그윽하다.
○ 순천 조계산(曹溪山)의 송광사(松廣寺) : 물과 바위가 깨끗하고 봉만(峯巒)이 밝고 곱다.
○ 순창의 복흥(福興) : 양쪽에 산을 끼고 큰 들이 열렸다. 냇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 황해도 문화(文化)의 구월산 결(缺)
○ 해주의 부용당(芙蓉堂) 결(缺)
○ 수양산(首陽山) : 폭포가 있고 산정(山頂)에 대(臺)가 있다. 그 가운데에 석담(石潭)의 물과 바위가 있다.
○ 연안의 와룡지(臥龍池) :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남대지(南大池)이다. 겨울에 용이 이 못의 얼음을 가[耕]는 것을 보고 다음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 장연(長淵)의 백사정(白沙汀) : 남쪽에는 연지(蓮池)가 있고 북쪽에는 승선봉(勝仙峯)이 있다. 삼면이 바닷가인데, 흰 모래가 평평하게 펴져 있는데,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무더기로 쌓여서 모래 언덕을 이루었다. 잔솔과 해당화가 붉은빛과 푸른빛을 서로 비친다. 또 입죽암(立竹巖)ㆍ비로봉(毗盧峯)이 있다.
○ 평산(平山)의 총수산(葱秀山) : 깎아 세운 듯한 절벽과 가파른 벼랑이 흐르는 물을 아래로 굽어보고 있다. .t;동월기(董越記).
○ 멸악산(滅惡山) : 면악(綿岳)이라고도 한다. 동쪽 기슭의 화천동(花川洞)에 높은 재와 큰 무덤이 있다. 속언에 전하기를, 청(淸) 나라 사람들의 조상이 살던 땅이라고 한다. 《팔역지》
○ 황주(黃州) 결(缺)
○ 함경도 무산(茂山)의 백두산 : 바로 장백산(長白山)이다. 산이 모두 세 층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2백 리나 되고 가로 뻗친 것이 천 리나 된다. 그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가 80리이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과 혼동강(混同江)이 된다.동북쪽으로 흐른 것은 소하강(蘇下江)과 속평강(速平江)이 된다. 동쪽으로 흐른 것은 두만강(豆滿江)이 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고 하였는데, 아마 속평강(速平江)을 가리킨 듯하다. 《여지승람》에는 회령부에 들어 있다.
○ 회령의 쌍개암(雙介巖) : 부(府)의 남쪽 1백 43리에 있다. 바위의 높이는 열 길이 넘는다. 가운데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물이 항상 솟아 나온다. 그 동쪽 1리 거리에 또 바위가 있는데 바다를 위압하는 기세로 대치하고 있다. 양쪽 벼랑은 천 척(尺)이다. 위에 깊은 못이 있는데, 비가 오기를 빌면 잘 감응한다.
○ 경흥의 적지(赤池)
○ 부령(富寧)의 형제암(兄弟巖) : 부(府)의 남쪽 20리에 있다. 산기슭에 두 바위가 마주 보고 섰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다. 작은 시내가 그 사이를 흘러내린다.
○ 허통곡(虛通谷) : 물과 돌이 맑고 경치가 기묘하나, 찾아가는 사람이 드물다.
○ 경성(鏡城)의 명간천(明澗川)
○ 명천(明川)의 칠보산 동부(七寶山洞府) : 돌로 된 지세가 깎아지른 듯이 험하고 굴은 조각한 것 같다.
○ 귀문관(鬼門關)
○ 길주의 성진(城津)
○ 장백산
○ 마천령(磨天嶺)
○ 단천(端川)의 마운령(磨雲嶺)
○ 이성(利城)의 시중대(侍中臺)
○ 함흥의 함관령(咸關嶺)
○ 낙민루(樂民樓) : 남쪽으로 군자하(君子河)를 굽어보고 있다. 물 위에 만세교(萬歲橋)가 있는데, 다리의 길이는 5리나 된다.
○ 영흥의 용흥강(龍興江)
○ 안변(安邊) 설봉산(雪峯山)의 석왕사(釋王寺) : 산 위에 세 개의 석봉이 높이 서 있기 때문에 검봉산(劍峯山)이라고도 한다.
○ 황룡산(黃龍山) : 산 위에 용추(龍湫)가 있다. 또 골 안에 구연(九淵)이 있는데, 물과 돌이 뛰어나게 좋으며 오압산(烏鴨山)이라고도 한다. 학포(鶴浦)의 큰 호수는 주위가 30여 리이고, 사면이 모두 흰 모래이다. 언덕의 모래 가운데에 해당화가 환하게 핀다. 약한 바람이 잠깐만 불어도 가는 모래가 날려 작게는 무더기를 이루고 크게는 봉우리를 이룬다. 경치는 영동 육호(嶺東六湖)에 비길 곳이 아니다.
○ 국도(國島) : 부(府)의 동쪽 6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흰 모래가 명주와 같다. 그 위를 산이 반원의 구슬처럼 둘러 있다. 벼랑의 돌들은 모두 모나고 바르며 벽처럼 가지런하게 늘어섰다. 언덕의 돌들은 평평하고 둥근 것이 배열되어 있는데 한 면에 한 사람씩 앉을 만하나 가지런하지는 않다.수백 보를 가면 낭떠러지의 높이가 수백 척이 되는데, 그 돌들은 흰 빛이고 모나고 바르며, 길고 짧은 것이 일치한다. 한 줄기마다 그 꼭대기에 모두 작은 돌 한 개씩을 이고 있어서 화표주(華表柱)의 머리와 같다. 작은 굴이 있는데, 배를 타고 들어가면 점점 좁아져서 배가 들어갈 수가 없어,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다.굴의 좌ㆍ우쪽에 묶어 세운 듯한 돌들은 바깥면의 것과 같으나 더욱 정연하고 가지런하다. 굴의 윗면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석각(石脚)들은 모두 평평하고 반듯하여 장기판이나 바둑판을 엎어 놓은 것 같으며 마치 그 하나하나를 톱으로 끊어 놓은 것과 같다. 굴 북쪽에 둥근 돌이 배열된 곳이 있는데, 천 명은 앉을 수 있다.벼랑의 곁을 동남쪽으로 수백 보 더 가면 낭떠러지의 돌모양이 조금 달라진다. 물에 닳아 조그만 원으로 길이 5, 60척 되는 돌이 네모난 철망을 만들어 담아 놓은 것 같은데, 전면이 한 가닥이 다른 한 가닥과 같아서 사람들이 철망석이라고 한다. 이곡(李穀)의 기문 사면으로 둘러선 돌기둥 가운데는 모래 흙으로 화살대를 만들었다는 말이 전해 온다.
○ 영풍(永豐)
○ 평안도 평양 : 금수산의 모란봉이 진산(鎭山)이다. 대동강이 성(城) 밖을 둘러서 남쪽으로 흐른다. 대동문(大同門)의 문루는 강을 굽어보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 연광정(練光亭) : 덕암(德巖)의 절벽 위에 있다. 강의 남쪽에는 십 리나 되는 긴 느릅나무 숲이 있다. 연광정을 돌아 북쪽으로 가면 청류벽(淸流壁)이 있다. 벽(壁)이 끝난 곳에 부벽루가 있는데 영명사(永明寺)의 동쪽이다. 절 뒤의 금수산(錦繡山) 산 정상을 을밀대(乙密臺)라고 부른다. 누대 아래의 강가에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고, 강의 상류에는 백은탄(白銀灘)과 능라도(綾羅島)가 있다.
○ 성천(成川)의 강선루(降仙樓) : 비류강(沸流江)을 굽어보고 있다. 삼백 칸이나 되어 건축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8도의 누각 중에서 첫째이다. 서쪽으로 흘골산(紇骨山)을 마주보고 있는데, 12개의 기이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깎아 세운 듯하다.
○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 : 누대의 곁 성 밖에는 칠불사(七佛寺)와 칠승석상(七僧石像)이 있다.
○ 영변의 약산동대(藥山東臺)
○ 묘향산 : 태백산이라고도 한다. 밖은 흙산이나 봉우리의 허리 위는 모두 기암수석이다. 동부(洞府)는 겹겹으로 둘러져서 성곽과 같고, 큰 냇물이 그 사이에 넓게 퍼져 있다. 위에 단군이 화생(化生)하였다는 석굴이 있다.
○ 의주의 통군정(統軍亭) : 압록강 위에 있다.


 

[주D-001]겨울에 …… 점친다 : 매년 겨울에 얼음이 터질 때, 세로 혹은 가로 터진다. 사람들이 이것을 용경(龍耕)이라고 하여 다음해의 풍년ㆍ흉년을 점친다. 가로 터지면 다음해 풍년이, 세로 터지면 홍수가 나고, 전연 터지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동국여지승람》참조.

 

 

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도성과 궁궐


태조가 처음으로 한양성을 쌓았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세속에서의 명칭은 동대문 과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 남쪽에 숭례문 남대문과 서남쪽에 소의문(昭義門) 서소문 과 서쪽에 돈의문 신문(新門) 과 서북쪽에 창의문과 북쪽에 숙정문(肅靖門) 닫혔다 과 동북쪽에 혜화문 동소문(東小門)의 처음 이름은 홍화(弘化)였는데, 중종 신미년에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과 서로 혼동된다 해서 혜화(惠化)라고 고쳤다. 이 있다.
○ 경복궁은 태조 3년에 세웠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근정전 남쪽에 근정문(勤政門), 또 그 남쪽에 홍례문(弘禮門), 동쪽에 일화문(日華門), 서쪽에 월화문(月華門)이 있고, 사정전ㆍ강녕전ㆍ연생전(延生殿)ㆍ경성전(慶成殿)ㆍ교태전(交泰殿)ㆍ함원전(含元殿)ㆍ양심당(養心堂)ㆍ비현각(丕顯閣)ㆍ인지당(麟趾堂)ㆍ자미당(紫微堂)ㆍ청연루(淸讌樓)ㆍ융문루(隆文樓)ㆍ융무루(隆武樓)ㆍ경회루ㆍ흠경각(欽敬閣)ㆍ보루각(報漏閣)ㆍ간의대(簡儀臺)ㆍ동궁(東宮)이 있다. 《여지승람》
○ 창덕궁은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는데 태조 때에 세웠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인정전(仁政殿)ㆍ선정전(宣政殿)ㆍ보경당(寶慶堂)ㆍ동궁이 있다. 《여지승람》
○ 창경궁은 창덕궁 동쪽 옛 수강궁(壽康宮) 터에 있는데 태조조에 세웠다. 태조조에 상세하다.
○ 성종 계묘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ㆍ인수대비(仁粹大妃)ㆍ안순왕후(安順王后)의 세 궁을 위해서 창경궁을 개축하였는데, 명정전(明政殿)ㆍ문정전(文政殿)ㆍ인양전(仁陽殿)ㆍ경춘전(景春殿)ㆍ통명전(通明殿)ㆍ양화당(養和堂)ㆍ여휘당(麗暉堂)ㆍ환경전(歡慶殿)ㆍ수녕전(壽寧殿)ㆍ환취정(環翠亭)ㆍ선원전(璿源殿)ㆍ비궁당(匪躬堂)이 있다. 《여지승람》
○ 경덕궁은 돈의문 안에 있는데 광해군때 세웠고 다음에 상세하다. 영종(英宗) 때 이름을 고쳐 ‘경희궁(慶熙宮)’이라 하였다. 다음에 상세하다.
○ 창덕궁 후원은 창경궁 후원과 통했는데, 열무정(閱武亭)이 있다. 정자 곁에 네 우물이 있는데, 마니(摩尼)ㆍ파려(玻瓈)ㆍ유리(琉璃)ㆍ옥정(玉井)인데 세조 때 판 것이다.
○ 서총대(瑞葱臺) 결(缺)
○ 경성을 5부(部) 49방(坊)으로 나누었는데, 중부 관할 8방은 징청(澄淸)ㆍ서린(瑞麟)ㆍ수진(壽進)ㆍ견평(堅平)ㆍ관인(寬仁)ㆍ경행(慶幸)ㆍ정선(貞善)ㆍ장통(長通)이다.
○ 동부 관할 12방은 숭신(崇信)ㆍ연화(蓮花)ㆍ서운(瑞雲)ㆍ덕성(德成)ㆍ숭교(崇敎)ㆍ연희(燕喜)ㆍ관덕(觀德)ㆍ천달(泉達)ㆍ흥성(興城)ㆍ창선(彰善)ㆍ건덕(建德)ㆍ인창(仁昌)이다.
○ 남부의 11방은 광통(廣通)ㆍ호현(好賢)ㆍ명례(明禮)ㆍ태평(太平)ㆍ훈도(薰陶)ㆍ성명(誠明)ㆍ낙선(樂善)ㆍ정심(貞心)ㆍ명철(明哲)ㆍ성신(誠身)ㆍ예성(禮成)이다.
○ 서부의 8방은 인달(仁達)ㆍ적선(積善)ㆍ여경(餘慶)ㆍ황화(皇華)ㆍ양생(養生)ㆍ신화(神化)ㆍ반송(盤松)ㆍ반석(盤石)이다.
북부의 10방은 광화(廣化)ㆍ양덕(陽德)ㆍ가회(嘉會)ㆍ안국(安國)ㆍ관광(觀光)ㆍ진장(鎭長)ㆍ명통(明通)ㆍ준수(俊秀)ㆍ순화(順化)ㆍ의통(義通)이니, 이 제도는 모두 정도전이 정한 것이라 한다. 《지봉유설》
정도전의 집이 수진방(壽進坊)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수진(壽進)’이라 하여 오래 살려 했던 것인데, 오래 살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수진의 조짐이라고 말하였다.
○ 종루는 운종가에 있으며 태조 4년에 각(閣)을 세웠는데, 세종이 고쳐서 층루를 짓고 종고(鐘鼓)를 달아 새벽과 밤을 알리게 했다. 권근(權近)이 종명(鐘銘)과 서문을 지었다.
○ 세조가 큰 종을 만들어서 처음에는 사정전에 두려고 하였다가 이후에 광화문 밖 서쪽에 각(閣)을 짓고 종을 달았다. 신숙주가 그 종명(鐘銘)과 서문을 지었다. 《여지승람》
광화문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에도 큰 종이 있으니, 모두 새벽과 밤을 알리는 것이다. 정릉(貞陵)은 돈의문 안에 있고 능(陵) 옆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고 절도 폐쇄되었으나 큰 종은 아직도 있다. 원각사(圓覺寺)는 서울 안에 있었는데, 절이 없어졌으나 큰 종은 아직도 있다.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으로 있으면서 건의하여 두 큰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놓고, 역시 시각을 알리려 했으나, 김안로가 죄를 입어 종을 달지 못하고 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임진년의 난리에 적군이 분탕질을 마구 자행하여 광화문의 종과 종루의 종이 모두 녹슬고 못쓰게 되었는데, 계사년에 임금이 서울로 돌아와서 갑오년 가을에 남대문에 종을 달아 시각을 알리도록 명하였다. 정유년 겨울에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종을 옮겨 달라고 명하였다. .t;청천견한록(聽天遣閒錄).
○ 경성의 팔영(八詠)은 기전산하(畿甸山河)ㆍ도성궁원(都城宮苑)ㆍ열서성공(列署星拱)ㆍ제방기포(諸坊碁布)ㆍ동문교장(東門敎場)ㆍ서강조박(西江漕泊)ㆍ남도행인(南渡行人)ㆍ북교목마(北郊牧馬)이다.
○ 십영(十詠)은 장의심승(藏義尋僧)ㆍ제천완월(濟川玩月)ㆍ반송송객(盤松送客)ㆍ양화답설(楊花踏雪)ㆍ목멱상화(木覓甞花)ㆍ전교심방(箭郊尋芳)ㆍ마포범주(麻浦泛舟)ㆍ흥덕상화(興德賞花)ㆍ종가관등(鐘街觀燈)ㆍ현석조어(玄石釣魚)이다.
○ 남산의 팔영(八詠)은 운횡북궐(雲橫北闕)ㆍ수창남강(水漲南江)ㆍ암저유화(岩底幽花)ㆍ영상장송(嶺上長松)ㆍ삼춘답청(三春踏靑)ㆍ구일등고(九日登高)ㆍ척헌관등(陟巘觀燈)ㆍ연계탁영(沿溪濯纓)이다. 《여지승람》
○ 반송정(盤松亭)은 모화관 북쪽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소나무가 서리고 구부러져 그 밑의 그늘이 수십 보(步)나 되는데, 고려 때 임금이 남경에 가다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다.” 하며 본조 초기까지도 있었다. 《여지승람》 모화관 남쪽 못을 여기에 팠다. 태종조(太宗朝)에 있다.
○ 세속에서 이르기를, 한도(漢都)는 어린애를 업은 바위가 밖으로 달아나는 형상이 있기 때문에 산 이름을 ‘모악(母岳)’이라 하였고, 남쪽 산은 ‘벌아(伐兒)’라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가는 길을 가로막아서 가지 못하게 함이고, 서쪽은 ‘병전현(餠廛峴)’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떡을 먹여 달래어 머물러 있도록 함이다. 《지봉유설》
세속에서 이르기를, 목멱산에는 잠두(蠶頭)가 있기 때문에 항상 남쪽에 뽕나무를 심었으며, 지금의 잠실평(蠶室坪)이다. 서강 와우산(臥牛山)은 소의 형상인 까닭에 북쪽에 안현(鞍峴)이 있고 남쪽에 사포초장(沙浦草場)이 있으며, 안현 남쪽에 계당(鷄堂)이 있기 때문에 그 동쪽에 과산(窠山)이 있다 한다. 지금의 원현(圓峴)이니 대개 방언에 원(圓)과 과(窠)가 음(音)이 같기 때문이다. 땅 이름이 비록 맞지 않으나, 당초에 이름을 지은 뜻이 과연 이러했는지 알 수가 없다.
○ 성 밖에 네 대원(大院)이 있는데, 세조가 재주 있는 중에게 명하여 짓도록 한 것이다. 보제원(普濟院)은 동대문 밖에 있는데, 3월 상사(上巳)일과 9월 중양(重陽)에 이 누대 위에서 기로(耆老)와 재추(宰樞)의 잔치를 하사하였다. 홍제원(弘濟院)은 사현(沙峴) 북쪽 들에 있는데, 푸른 소나무가 그 위에 가득하고 위에 조그만 정자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서울에 오는 날에는 그 정자에서 쉬면서 옷을 갈아입었다. 뒤에 정자가 없어지니, 지금은 중국 사신이 홍제원에서 쉰다. 순치(順治) 무자년에 고쳐 세웠으며, 조사(詔使)조에 있다. 제천정(濟川亭)은 북한강의 위에 있으며, 풍경이 아름다워서 중국 사신이 경치를 구경하려면 먼저 이 정자에 올라갔고, 전송하거나 맞이하는 벼슬아치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사평원(沙平院)은 한강 남쪽 사교(沙郊)에 있는데, 땅의 형세가 낮아서 오직 행인 가운데 날이 저물어 강을 건너지 못하는 자만 여기서 유숙할 뿐이었다.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희우정(喜雨亭)이 있으니, 이것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이었는데, 뒤에 월산대군의 소유가 되었다.성종이 해마다 농사를 구경하고, 또 배를 모아 수전(水戰)을 연습할 때 친히 거둥하여 구경하니, 이름을 망원정(望遠亭)이라 고치고, 친히 시(詩) 몇 수를 지어 조신 중에 글을 잘하는 자들에게 모두 차운해 지으라고 명하고, 이것으로 현판을 만들어 정자 위에 둘러 걸게 하였다. 월산대군이 죽은 뒤로는 성종이 다시 거둥하지 않았다.
○ 중 하나가 일찍이 전관교(箭串橋)를 놓았는데, 많은 돌을 써서 큰 냇물에 걸쳐 다리를 만들었다. 이 다리는 길이가 3백여 보(步)나 되고 집과 같이 편안하여 다니는 사람들이 평지를 다니는 것 같았으니 이것을 제반교(濟盤橋)라 하였다. 또 동대문 밖 왕심평(往尋坪)에 큰 다리를 놓아 이름을 영도교(永渡橋)라 하였는데 모두 임금이 손수 어필로 써서 이름을 정한 것이다. 《용재총화》
○ 성종이 산릉(山陵)에 다닐 때 제천정(濟川亭)이 협소하기 때문에 그곳의 중에게 개축을 명했더니, 두서너 해가 되어도 완성하지 못하고 겨우 기둥만 세워져 있었다.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후 중국 사신 왕헌신(王獻臣)이 왔을 때에 조정에서 이를 완성하고 단청을 더했었다. 《용재총화》
○ 궁성은 경성 안에 있는데, 둘레가 1천 8백 13보(步)이고 높이가 21척 1촌이며, 네 문이 있는데 남쪽은 광화 옛이름은 정문(正門)이다. 요, 북쪽은 신무(神武)이며, 동쪽은 건춘(建春)이고, 서쪽은 영추(迎秋)이다. 《여지승람》
○ 보충 : 국도(國都)의 동쪽 방면이 텅 비었기 때문에 동쪽 문 현판에는 글자 하나를 더했고, 그 성에는 담을 쳤으니 옛사람들의 세심한 뜻을 볼 수가 있다. 효종 때 이미 하도감(下都監)을 설치하고, 또 훈련도감 군사를 동쪽 마을로 옮긴 것도 역시 이 뜻이었다.정종은 장용영(壯勇營)을 이현(梨峴)에 두고 본영의 장령(將領)과 군교(軍校)로 하여금 통화(通化) 동쪽 이현 위로 옮겨 살게 하였으니, 이 역시 선대의 뜻을 계승하고 앞일을 계획하는 성상의 가르침이었다. 《일득록(日得錄)》
○ 보충 : 옛날에 효종이 심양(瀋陽)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따라온 한인(漢人)들을 대궐 밖 근처에 살게 하여 저희들끼리 한 마을을 이루었는데, 한가롭게 거주하여 아무런 생업이 없었다. 물고기를 잡아서 임금에게 바치니 이것을 ‘한인어(漢人魚)’라 하였다. 지금의 좌ㆍ우통계(左右統契)가 바로 이곳이다. 내가 이것을 만든 것은 오로지 종묘를 호위하기 위한 것이다.옛 사례에 제사를 지낸 뒤에 궁내를 수선하고 또 풀을 뽑고 눈[雪]을 쓰는 일 같은 것은 동부 관리가 방민(坊民)들을 거느리고 하는 것이 나라의 전례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이를 없애고 다만 통계 백성들에게만 품값을 주고 시키게 했으니, 내가 궁원(宮園)을 위해서 한 일은 한 가지도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일득록》
○ 태종 13년(1413)에 경복궁 후전(後殿) 서쪽 누각이 허물어져 임금이 거둥했다가 이것을 보고, 공조 판서 박자청(朴子靑) 등에게 명하여 급히 수리하라고 하였다.박자청이 약간 서쪽으로 옮기고 그 규모를 조금 넓혀 새로 지었는데, 또 그 땅이 너무 넓은 것을 염려하여 누각 둘레에 연못을 깊이 파고 연꽃을 심으며 못 가운데에 두 섬을 만들었다. 임금이 훈구대신들을 불러 함께 즐기고, 이 누대를 ‘경회루’라 이름하고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여지승람》
○ 세종 3년(1421)에 태상왕(太上王 태종대왕)이 임진현(臨津縣)에 거둥하여 들 가운데 술자리를 차리고 놀다가 도성이 허물어진 것을 언급하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면서 우의정 이원(李原) 등에게 이르기를, “도성은 수리하지 않을 수 없는데, 큰 토목공사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그러나 잠시 수고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편안하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 수고로움을 감당하고 편안한 것을 주상에게 남겨주는 것이 역시 옳지 않겠는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도성은 마치 집의 울타리와 같습니다. 이제 곡식도 차츰 익기 시작하니 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도(道)의 장정 30여만 명을 뽑아서 성을 쌓았다.
○ 세종 때 집현전 수찬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을 가지고, 도성 안의 냇물과 개천에 더러운 물건을 버리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하자고 청하였다.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이 소를 올리기를, “범월봉(范越鳳)은 오계(五季 오대(五代))의 한 술사였습니다. 이른바 ‘명당의 물에서 냄새가 나고 더럽고 불결하면 패역하고 흉잔(凶殘)한 징조이다.’ 한 것은 장사지내는 땅의 길흉을 말한 것이고, 도읍의 형세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었습니다.대개 범월봉의 뜻은 신도(神道)는 깨끗한 것을 숭상하기 때문에, 물이 불결하면 신령이 편안하지 못하여 이 같은 응보(應報)가 있다는 것이고 국도(國都)를 논한 것은 아닙니다. 도읍한 곳을 말씀드리면 사람의 수효가 번성하면 자연히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이 쌓이게 되니, 반드시 소통시키는 도랑과 넓은 내[川]가 도성 사이에 동서남북으로 정비되어, 그 더러운 것을 흘려 보낸 후에라야 도성 안을 깨끗이 할 것이니, 지금 도성에는 그 물이 맑을 수가 없습니다.이제 도읍의 물을 한결같이 산골짜기 물처럼 맑고 깨끗하게 하려면, 이것은 형세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치로 말하더라도 생사가 서로 다르고 귀신과 사람의 몸이 다르온데, 묘지에 쓰는 일을 어찌 국도에 쓴단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효첨의 말이 정직하다.” 하고 드디어 이현로의 말을 쓰지 않았다. 《여지승람》 《동각잡기》
○ 이때 풍수하는 자들이 궁성의 북쪽 길을 막고 성 안에 가산(假山)을 만들어 지맥(地脈)을 돕자고 청하니, 어효첨이 소를 올리기를, “이제 궁성터를 보건대 땅으로 들어간 깊이가 역시 한 길이 넘습니다.가령, 술사의 말과 같이 이미 땅 속을 한 길이 넘도록 파서 성의 주맥(主脈)을 끊었다면, 사람들이 길(북로(北路))로 다니는 것을 금하는 것은 역시 사소한 일이 됩니다. 또 끊어진 산맥에 흙을 보탠다면 이것은 살을 도려 내고 상처를 합치는 것이니, 어찌 혈맥이 통하겠습니까. 만일 그 기맥을 통하게 하려면 반드시 먼저 궁성을 헐어야 할 것이니 이것은 필연 당치 않은 이치입니다.” 하였다.
○ 세조가 도성을 중수하였다. 《여지승람》
○ 세조가 경성의 지도를 만들고자 하여 친히 정척(鄭陟)ㆍ강희맹(姜希孟)ㆍ양성지(梁誠之) 등을 거느리고 삼각산의 서현봉(序賢峯)에 올라 가서 산의 형세와 물의 갈라짐을 자세히 조사하였다. .t;남원군정안(南原君政案). 《괴애집(乖崖集)》
○ 연산군 갑자년(1504) 가을에 내도성(內都城)을 쌓고, 성터 밖에 있는 민가는 헐어 없앴다. 《고사촬요》
○ 명종 8년 계축(1553) 9월에 경복궁에 화재가 나서 사정전(思政殿) 안이 모두 불에 타서 대왕대비와 왕대비의 고명(誥命)도 역시 불에 타버렸다. 다음해 갑인년에 경복궁을 고쳐서 준공하였다. 《고사촬요》
○ 일찍이 중종 계묘년(1543) 정월 경복궁 동궁에 화재가 나더니, 이때에 이르러 대내(大內 궁내)에 또 화재가 나서 사정전(思政殿) 남무(南廡)까지 불에 타버렸다. 이에 명종이 사정전에 거처하지 않고 수라와 반찬을 감했으며 종묘에 제사지내어 사실을 고했다.이해 봄에 임금이 이미 창덕궁으로 옮겨 거처하고, 우의정 윤개(尹漑), 예조 판서 정사룡(鄭士龍) 등에게 명하여 제조(提調)로 삼아 동궁을 짓게 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찬성 윤원형(尹元衡) 등에게 명하여 제조로 삼아 대내를 수리하게 하고, 사인(舍人) 박민헌(朴民巘)에게 흠경각(欽敬閣)을 복원하게 하였다. 갑인년 여름에 흠경각ㆍ동궁ㆍ사정전ㆍ비현각(丕顯閣)ㆍ교태전ㆍ연생전(延生殿)ㆍ경생전(慶生殿)ㆍ양심당(養心堂)ㆍ자미당(紫薇堂)ㆍ강녕전이 차례로 준공되니, 11월에 종묘에 고하고 12월에 4전(殿)으로 도로 옮겼다. 《퇴계집(退溪集)》 .t;중수기(重修記).
○ 이때 경복궁의 중수가 거의 끝나려 하자, 심연원과 윤개가 도감 제조(都監提調)로서 가서 공사한 것을 조사할 때에 외각(外閣)의 창문과 문호를 보니, 모두 주홍색ㆍ구리빛의 무늬 놓은 비단을 사용하였다. 윤개가 크게 노하여 즉시 당해 낭관 이인건(李仁健)을 잡아다가 목에 형구를 채우고 꾸짖기를, “오직 대내의 침실에만 비단을 사용하는데, 어찌 변변치 못한 미관말직이 감히 아첨하여 잘 뵈어서 명예를 구하려고 법을 이같이 허물어뜨리느냐. 마땅히 법제를 무너뜨린 죄로써 다스리라.” 하고 말 속에 노염이 일어났다.이인건은 바로 심연원의 사위였는데 심연원은 듣고도 못들은 체하고 있다가 그가 땅에 엎드려 살려 주기를 빌고 지극히 곤욕을 받은 뒤에 천천히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내 사위인데 나이 젊은 신진으로서 나라의 법에 제한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망녕된 일을 했을 뿐이요, 일부러 법을 허물어뜨리려 한 일은 아닌 듯한데 제도를 무너뜨린 죄를 적용하는 것은 너무 중하지 않은가. 그 다음 법을 생각해 주시오.” 하여 드디어 추고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기재잡기》
○ 《대전(大典)》에 기재된 바로는 궁성에서 백 척(尺) 되는 데까지는 사람들의 집을 짓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법전이 비록 이와 같았으나 실지로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궁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백성들의 집이 즐비하여 백년 된 옛집까지도 많이 있었다. 선조가 궁성을 누르고 집을 지은 자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여, 이에 법전을 상고하여 보라고 명하여 백 척(尺) 안에 있는 민가는 헐도록 하니 백성들이 많이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조야첨재》
○ 임진년에 병화를 입었다.
○ 광해군 기유년(1609)에 창덕궁을 중건하여 준공하니, 을묘년에 임금이 창덕궁으로 옮겼다. 옛 행궁을 고쳐서 경운궁(慶運宮)이라 하고 분사(分司)를 설치하여 대비궁(大妃宮)을 방비하게 하였다.
○ 병진년에 창경궁을 중건하여 준공되니,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인경(仁慶)ㆍ경덕(慶德) 두 궁을 짓고 인왕산 밑에 있던 인가를 모두 헐어 없앴다.
○ 술자가 원종(元宗)의 사저(私邸)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말하므로 이 궁을 세워서 그곳 형세를 누른 것이다. 인경궁(仁慶宮)은 인조 때에 헐어버렸다. .t;국조전모.에는, ‘인경궁에서 남은 재목을 가지고 홍제원(弘濟院)을 지었다.’ 하였다.
○ 일찍이 임진난 뒤 병오년에 장차 경복궁을 수리하려 하는데, 전 현령 이국필(李國弼)이 올린 소에,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니 마땅히 창덕궁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극력 말하니, 조정에서 그의 의논에 좇아서 팔도의 백성들에게 포목 반 필씩을 내게 하고 물 주변에 있는 고을에서는 포목 대신으로 쌀을 내게 하여, 배로 운반해다가 기와를 굽고 인부를 부리는 비용에 쓰도록 하고, 삼공, 호조 판서, 공조 판서가 이 일을 주관하였다.무신년에 국상(國喪)이 나서 기유년에 중국 사신이 왔는데, 접대할 때 쌀과 포목을 덜어 내어 창덕궁 짓는 데 쓰도록 하였다. 기유년에 준공하였으니 그해에는 꺼림이 있어서 임금이 즉시 옮기지 않았다. 《갑신만록(甲申謾錄)》
○ 광해군이 교하(交河)에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였다. 광해조 조에 상세하다.
○ 현종 때 임금이 자의(慈慤)ㆍ인선(仁宣) 두 대비를 모셨는데, 효종 때 세운 만수전(萬壽殿)은 자의대비의 거처하던 곳이며 서쪽에 있었고, 임금이 또 따로 한 궁전을 지어서 이름을 집상전(集祥殿)이라 하였으니 인선대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동쪽에 있었다. 대개 한(漢) 나라 장락궁(長樂宮)ㆍ장신궁(長信宮)의 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2전(二殿)은 창덕궁에 있다.
○ 숙종이 예연당(蘂淵堂)에서 탄생하여 신유년에 이 당(堂)에서 가례를 올렸고, 기묘년에 세자가 이 당에서 홍역을 치렀다. 이에 중전이 이러한 경사스러운 일을 합쳐서 이름을 정해 달라고 청하여 당 이름을 집경당(集慶堂)이라 고치고, 좌의정 최석정(崔錫鼎)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지어 바치게 하고 사슴 가죽을 하사했다. 《명곡집》
○ 숙종 기미년(1679, 숙종 5) 4월에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당초에 도성을 정할 때에 그 방위를 보고 각 문을 설치한 것은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남소문(南小門)은 손방(巽方)에 있으니 곧 소양문(少陽門)입니다. 옛날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그 집이 남소문 안 길가에 있어서 시끄러움을 꺼려하여 다른 일로 핑계해서 이 문을 닫았는데, 그 후에 이것을 그대로 두고 열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습니다.술사들도 이것을 아뢰는 자가 많으니 이러한 어리석은 말을 비록 취하여 믿을 수 없으나, 지금 백성들의 마음이 답답하여 모두 이 문을 다시 열기를 원하니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여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권대운(權大運)도 말하기를, “이 문은 진실로 열지 않을 수 없으나, 다만 폐쇄된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공인과 장인을 이용하여 수축할 곳이 없지 않을 것인데 지금 장인들은 모두 강도(江都)로 갔으니,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 6월에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冑)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어제 빈청에서 세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남소문은 옛날에 있던 것을 지금 폐지했다.’ 하고, 술사들은 말하기를, ‘소양문을 열어야 할 것인데 열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인지(麟趾)ㆍ종사(螽斯)의 경사에 매양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이제 만일 옛터를 찾아서 소양(少陽)의 기운을 통하게 한다면 마땅히 상서로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하며, 또 말하기를, ‘남소문은 김안로가 제 마음대로 닫았던 것이니 역시 열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며, 공조 판서 오정위(吳挺緯)가 그 중에도 더욱 이 말을 주장하고 있습니다.신이 오정위와 함께 옛 문이 있던 터를 가 보고 구관당상(句管堂上)을 내보내기를 청하였으며, 방민(坊民)들 중에서 평상시에는 부역에 응하지 않던 자를 써서 일을 시키시기를 청하여, 이제 공사를 시작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신이 요즘 대략 방서(方書)와 지지(地志)를 보건대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니, 대개 소양의 위치는 본래 정동(正東)에 있고, 하도(河圖)의 수(數)에 소양이 셋을 차지하여 다섯을 얻어 여덟을 이루는 묘함이 있고, 낙서(洛書)의 그림에도 소양이 역시 셋째 자리를 차지했으니, 하도와 낙서에 모두 삼(三)이라는 숫자를 좌우에 둔 것은 곧 동쪽을 말한 것입니다.하늘이 세 번째 목(木)을 낳았으니, ‘목’이란 진(震)의 형상이요, 진은 또 동쪽의 괘(卦)입니다. 곤(坤)이 건(乾)에 구하여 초효(初爻)를 얻어서 진이 된 까닭에 한 번 구해서 아들을 얻었다고 했으니, 이것이 진이 장자(長子)의 방위가 된다는 것입니다. 태자가 거처하는 곳을 춘궁(春宮)이라 하고, 또한 동궁(東宮)이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대개 진에서 취한 것이고, 동남쪽은 손(巽)입니다.방기가(方技家)에서는 또 한 가지 말이 있는데, 목(木)은 해(亥)에서 나서 미(未)에 그치는 것이니, 해(亥)로부터 묘(卯)에 이르기까지는 양기(陽氣)가 바야흐로 생기고 해[日]가 성한 데로 향하는 것이므로, 이는 모두 소(少)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진(辰)으로부터 미(未)에 이르기까지는 양기가 이미 성하여 장차 쇠한 데로 나아가니, 이는 모두 노(老)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진(辰)과 사(巳)는 손(巽)의 방위로써 괘(卦)로는 장녀(長女)가 되고, 오행(五行)으로는 금(金)이 처음 나는 곳이 되는데, 금은 역시 음이요 양은 아니니, 이른바 ‘소양(少陽)의 방위’라는 것은 실상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또 《여지승람》은 바로 우리 성종조 때 지은 것으로서 중종 경인년에 이행(李荇) 등에게 명하여 증보한 것입니다. 1년 뒤 신묘년에 김안로(金安老)가 이행을 내쫓고 자기가 대신하였으며, 그 뒤 또 7년 만에 패하여 죽었는데, 옛 문이 만일 김안로가 권력을 잡을 때 닫혔다고 하면 이 책은 곧 김안로가 권력을 잡기 전에 이룬 것일 것이고,이 문은 응당 이행이 기록한 내용 안에 있을 것인데, 이제 경도(京都) 성곽 조(城郭條)를 상고하건대, 경성의 팔문(八門)은 남쪽을 ‘광희(光熙)’라 한다 하였으므로 신(臣)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소위 ‘광희’라는 것이 과연 바로 남소문(南小門)의 바른 이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수구문(水口門)의 본 이름입니까. 지금 성문이 이미 여덟이 되는데, 만일 이 문을 다시 열고 보면 경성이 마땅히 구문(九門)이 될 것이니, 조종조에서 도읍을 만들 때의 처음 제도에 어긋날 듯하며, 또 옛날에 그 간정(間正)을 분별하고 방문(方門)을 상고해서 이룩한 뜻도 아닐까 합니다.더욱이 김안로가 제 마음대로 닫았다는 말은 더욱 명백한 증거가 없고, 거리에 떠도는 근거 없는 말에 지나지 않을 뿐이오니, 처음에 의논을 정했다고 해서 졸지에 문을 여는 일을 일으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t;술이.
○ 숙종 을해년(1695, 숙종 21)에 진휼청(賑恤廳)에서 아뢰어 도성 안에 있는 마른 소나무를 베어 팔자고 하니, 판윤 임상원(任相元)이 소를 올리기를, “나무를 도적질해서 베는 일이 날로 늘어날까 걱정되어, 차라리 땔나무로 베어서 팔아 국가의 비용을 도운다면, 이 방법이 역시 좋은 듯 하나 마른 나무를 모두 없애자면 산 나무도 베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부리(府吏)로 하여금 한 그루씩 지켜서 각각 한 사람씩 조사하여 금하지 않는다면, 저들의 수많은 도끼가 한꺼번에 들이닥쳐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을 것이니, 조사하는 역량이 반드시 쉽게 두루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진실로 소나무를 기르고자 한다면 마른 줄기나 썩은 움을 저절로 떨어져 저절로 없어지도록 내버려 둔들 또한 무엇이 아깝습니까.”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이를 듣지 않았다.
또 초기(艸記)에, “마른 소나무를 팔기 시작한 것은 5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온 성안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어, 산 소나무에 대해 엄하게 주의하여 일체 베지 못하게 금했으나, 성중의 인부(人夫)가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어 산과 골짜기를 뒤덮어 힘대로 베어 가져 가니, 살고 마른 것을 막론하고 모두 도끼로 베이게 되어 본부(本府)의 약간 명의 금지하는 관리가 거의 손을 댈 곳이 없고,그 가운데 또 돈도 내지 않고 첩문(帖文)도 없는 자가 태반이나 되어 빈손으로 와서 길을 가득 메우나 관원들이 금할 사이가 없고, 아전들도 따질 수가 없어 돈이 진휼청으로 들어온 것은 겨우 백 분의 1밖에 되지 않으며, 소나무가 없어진 것은 벌써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큰 이익이 한번 열리자 온갖 간사한 일이 따라 일어나서 거짓을 빙자하여 갈수록 더욱 심하니, 가령 진휼청에서 사산(四山)의 나무를 모조리 팔아서 수천 냥의 돈을 더 받는다 하더라도, 그 진휼하는 물자에 있어서 지극히 박하고 지극히 적으면서 관가에 손해가 되는 것은 더욱 클 것입니다.도성 사면의 모든 산에 백년 동안 기른 재목이 하루 아침에 모두 없어지고, 더욱이 북악은 이 국가의 진산(鎭山)이요 예법에 맞게 제사지내는 땅인데, 벌겋게 벗어진 산을 만들어 초목이 모두 없어져서 기상(氣像)이 쓸쓸하게 되었으나, 그 바라봄에 있어서도 극히 한심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나무를 파는 일을 곧 중지시켜서 소나무의 채벌을 금지하고 기르는 뜻을 보존하게 하소서.” 하였다. 《염헌집》
○ 영종 경진년에 경덕궁(慶德宮)의 이름과 음(音)이 장릉(章陵)의 시호와 같다고 해서 경희(慶熙)로 고쳤다.
○ 보충 : 고사(故事)에 대궐의 건물은 5년에 한번씩 보수하고, 3년에 한번씩 수리하며, 봄ㆍ가을로 보살피게 하였다. 옛 재상 민진원(閔鎭遠)과 고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호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가장 수리를 잘했다고 하였다. 매양 담을 쌓을 때면 반드시 당상관ㆍ당하관과 장인의 성명을 담벽에 썼으니, 대개 그 오래되는 것을 상고하고 일을 잘하고 잘못한 것을 알고자 함이었으니, 옛사람들이 일의 실속에 이와 같이 힘썼다. 《일득록》


 

[주D-001]인지(麟趾)ㆍ종사(螽斯) : 《시경》의 편명들인데, 왕자들이 많이 출생한 것을 노래한 시이다.
[주D-002]하도(河圖) : 복희씨(伏羲氏) 때에 하수(河水)에서 용마(龍馬)가 짊어지고 나왔다는 그림이다.
[주D-003]낙서(洛書) : 우(禹)임금 때에 낙수(洛水)에서 거북이가 짊어지고 나왔다는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