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금위영 이건기
숙종이 37년 신묘년 4월에 훈련도감과 어영청, 금위영에 명을 내렸다. “백제의 옛 성을 개축한 뒤 각각 군영을 설치한 다음 목적지에 군량을 저장하고 무기를 준비하여 국가가 변란을 맞아 다급할 때 장차 서울의 백성들과 함께 하늘이 내린 이 요새를 지킬 수 있게 하라.”
그 해 10월 성을 완축한 뒤 금위영을 설치했다. 용암(龍巖) 동남쪽으로부터 보현봉(普賢峯) 아래까지는 2821보이고 1,065개의 살받이가 있다. 성문은 대동문(大東門)과 소동문(小東門) 둘이고 문 위에 초루(譙樓)와 암문(暗門) 두 개를 설치했다. 시단봉(柴壇峯)에 장대를 짓고 그 아래 방옥(房屋) 10간을 두니 성랑 61채에 모두 178간이다. 보국사(保國寺), 보광사(普光寺), 용암사(龍巖寺), 태고사(太古寺)의 네 절에 소속시켰다.
군대의 영사와 창고는 90여 간으로 처음에는 소동문 안에 세웠는데, 그 지세가 높고 비바람이 거셀 뿐만 아니라 모퉁이에 물길이 나서 무너지기 쉬워 을미년(1715년) 3월에 보국사 아래로 옮겨 세웠다.
초관 곽의빈(郭義賓)이 재력을 잘 관리하고, 파총 장우진(張友軫)이 공사를 잘 감독하여 8월에 완성을 고하게 되었다. 돌계단 120보를 쌓고 중당은 부손(負巽:동남을 뒤로 함) 방향으로 지었는데, 중군 이하가 거처할 곳과 창고, 행랑 등 모두 해서 145간이다.
산이 깊은 물을 품고 있어 맺은 것이 더욱 완고하니 영원히 보호할 만한 곳이라고 한다. 을미년(1715)은 곧 대명 숭정 갑신년 후 72년이다.
도제조 이이명(李頤命) 기록.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碑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 今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 命訓 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 置軍營御信地廋糧備械 國家 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 也其十月城役完本營等自龍巖 東南至普賢峯下二千八百二十 一步一千六十五垜城門二曰大 東小東皆上設譙樓暗門二柴壇 峯爲將臺下有房屋十間城廊六 十區凡一百七十八間保國普光 龍巖太古四寺屬焉營舍倉庫九 十餘間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 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 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哨官 郭義賓經紀財力把摠張友軫董 領攻役至八月告成石砌一百二 十步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 倉廏門廊共一百四十五間山抱 水深結構增固可以永護儲胥云 乙未卽 大明崇禎甲申後七十 二年也 都提調李頣命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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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승도절목명문(北漢山僧徒節目銘文)
北漢僧徒節目」
北漢山城卽保障重地也寺刹之剏建僧徒之募」
入是豈徒然哉卽由於爲山城守護之意是去」
乙夫何挽近以來僧殘寺敗莫保朝夕此曷故焉」
盖僧徒之不殫燥濕竭力奉公者渠之所望惟」
在於摠攝一窠而每當差代城外僧圖差之弊」
比比有之由是而僧無固志散而之四勢所固然」
今當摠攝瓜遆之時若不申明定式以圖永久」
則其何以慰悅僧徒俾盡守護之責哉況受」
敎定式不啻鄭重則其在遵奉之道豈敢少」
忽茲成節目刻之于石爲去乎依此遵行毋墜成」
憲事」
一 摠攝有闕差代時依今番例初受缿笛更捧」
圈點後以多點施行俾知其公平無私之意是」
齊」
一 今此申明定式之後如有城外僧圖差者城內」
諸僧以受 敎定式及今番節目齊訴營門」
期無毀劃之地是齊」
一 今番定式寔出於爲僧徒支保之意則摠攝」
軆此憧憧之心寺弊則期於矯革奉公則克盡」
恪勤俾有來頭實效之地是齊」
乙卯五月 日寺洞金 等內」
북한산성금위영이건기비(北漢山城禁衛營移建紀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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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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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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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재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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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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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지정문화재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8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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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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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112cm, 너비 235cm, 두께 22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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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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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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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132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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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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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자/서자/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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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내 대성암(大成庵) 아래 옛 금위영 자리에 위치한 북한산성으로 금위영을 이건하는 일을 기념하는 비이다. 원래 금위영은 동소문(東小門) 안에 있었으나 그 지세가 높아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지기 쉬우므로 보국사(輔國寺) 아래로 옮기게 되었는데, 금위영 이건기비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의 재료는 화강암으로 뒷면은 땅에 묻혀 있고, 개석은 장대석(長臺石)의 앞쪽에만 낙수면(落水面)을 새겼다. 즉, 와비(臥碑)의 형식으로 비문의 끝부분에 ‘을미즉대명숭정갑신후칠십이년야도제조이이명지(乙未卽 大明崇禎 甲申後 七十二年也 都提調李頥命識)’란 명문으로 보아 1715년(숙종 41년)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비석의 마멸이 심하고 일부 소실된 부분이 있어 전체적인 내용을 판독하기가 어렵다. 비문의 전반부에는 숙종 37년 4월에 훈련도감(訓練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백제의 고성(古城)인 북한산성을 나누어 개축하게 하고 각 군영을 설치하도록 하여 군량을 저장하고 유사시에 대응케 하였으니 그 해 10월에 석곽의 보수가 완료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문의 후반부에는 금위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으로 능암(能庵) 동남쪽에서 보현봉(普賢峯) 아래까지 2,821보(步)를 쌓았다. 1,065개의 살밭이와 2개의 성문(대성문, 소동문)이 있는데 그 위에 우각을 설치하였다. 이외에 장대(將臺), 방실(房室), 성곽 등을 축조하였다. 태고(太古) 외 4개의 사찰이 성내에 있으며 군영의 막사와 창고 90여 칸은 3월에 4개의 사찰 중 하나인 보국사로 옮겼다. 공사는 8월에 준공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비석은 특이한 형태와 함께 금위영을 북한산성으로 이건하면서 새롭게 만든 금위영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금위영이 이건하게 된 이유 등을 담고 있어 당시 수도 방위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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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趙連美,「朝鮮時代 神道碑 硏究」, 숙명여자대학교대학원, 1999 (단행본)고양시 ;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고양시, 1999 (논문)金右臨, 1998,「朝鮮時代 神道碑 · 墓碑 硏究」, 고려대학교대학원 (단행본)고양시 ; 고양문화원, 1998,『高陽金石文大觀』, 고양시 (논문)李敏植,「朝鮮時代 陵墓碑에 關한 硏究」, 한성대학교대학원, 199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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