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5.18. 삼각산 비봉능선

2012.5.18. 삼각산 산행

아베베1 2012. 5. 19. 11:03

 

 

 

 

 

 

 

 

 

 

 

 

 

 

 

 

 

 

 

 

 

 

 

 

 

 

 

 

 

완당전집 제1권
 고(攷)
진흥왕의 두 비석에 대하여 상고하다[眞興二碑攷]




이상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함경도(咸鏡道) 함흥부(咸興府) 북쪽으로 1백 10리쯤 되는 황초령(黃草嶺) 아래에 있었던 것인데, 비가 지금은 없어졌다. 나는 이단(二段)의 탁본(拓本)만을 취득하여 이를 합해서 관찰한 결과 모두 12행(行)으로 되어 있는데 그 길이와 넓이는 알 수가 없다.
지금 탁본을 가지고 보건대, 밖은 난격(欄格)으로 되어 있어 하단(下段) 제2행의 짐(朕) 자와 제3행의 응(應) 자 밑은 바로 난격과 접(接)하였고, 응(應) 자는 제5행 맨 밑의 口와 서로 마주하였으며, 상단(上段)은 망결(亡缺)되었다. 현존한 글자로 가장 높이 위치한 것은 제5행의 미(未) 자이다.
그리고 지금 위로 미(未) 자에서부터 아래로 口에 이르기까지를 한(漢) 나라 건초척(建初尺)으로 재본 결과 길이가 4척 4촌 5푼이다. 넓이로 말하면, 제1행에 난격이 있고 제12행의 하단 밖에도 난격이 있어 이를 건초척으로 재본 결과 넓이가 1척 8촌이다. 그러나 난격 밖의 길이와 넓이 및 두께에 대해서는 모두 알 수가 없다.
비문이 모두 12행임은 난격으로 정할 수 있고 그 하단 글자의 끝도 또한 난격으로 정할 수 있으나, 다만 상단은 망실되어 그 끝까지가 몇 자인지를 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제 가장 높이 위치한 제5행을 기준으로 삼아 아래에 서술하는 바이다.
제1행은 20자가 완전하다. 가장 위에 위치한 팔(八)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넉 자가 모자란다. 가장 아래에 위치한 야(也) 자는 제5행의 제24자에 해당한 口자와 서로 마주하였고 아래는 그대로 비어 있다. 그러나 이 줄은 기왕 제수(題首)이고 보면 이 야(也) 자가 바로 그 끝이요, 망결된 글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2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다. ―모두 29자임― 가장 위의 세(世)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짐(朕)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3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두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소(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응(應)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4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0자임― 가장 위의 사(四) 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라고 아래 맨 끝의 화(化) 자는 제5행과 끝이 같다.
제5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27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한 자이며 깎인 것이 석 자이다. ―모두 31자임― 가장 위의 미(未) 자는 이 비문 가운데서 가장 높이 위치한 글자이다. 아래 맨 끝의 口자는 제4행의 화(化) 자와 끝이 같다.
제6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깎인 것이 여덟 자이며 빈칸이 하나이다. ―모두 28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口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7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8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며 깎인 것이 한 자이고 빈 칸이 둘이다. ―모두 23자임― 가장 위의 氺자가 제5행에 비하면 일곱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冫+七)자는 제5행에 비하면 한 자가 모자란다.
제8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21자임― 가장 위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여덟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9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6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석 자이다. ―모두 19자임― 가장 위의 阝자는 제5행에 비하면 아홉 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冖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0행은 글자가 완전한 것이 14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두 자이다. ―모두 16자임― 가장 위의 乀자는 제5행에 비하면 13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자는 제5행에 비하면 두 자가 모자란다.
제11행은 13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전(典)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5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 사(舍)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 자가 모자란다.
제12행은 12자가 모두 완전하다. 가장 위의 훼(喙) 자는 제5행에 비하면 16자가 모자라고 맨 아래의 윤(尹) 자는 제5행에 비하면 석자가 모자란다.
이상 모두 12행에서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이며 깎인 것이 17자이고 빈칸이 셋으로 총 2백 72자이다.
비석의 상단이 이미 망실되었으니 그 규수(圭首)와 전액(篆額)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북한산(北漢山)의 비 또한 이 비와 동시에 세워진 것인데 규수를 만들지 않았으니, 이 비도 북한산의 비와 같은 예일 듯하다.
비문(碑文)에 이르기를 “8월 21일 계미(癸未)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세차(歲次) 무자(戊子) 추팔월(秋八月)이라” 하였으니, 상고하건대 신라 진흥왕 29년이 무자년으로 그 해가 바로 대창(大昌)으로 개원(改元)한 해이다. 이 해가 고구려(高句麗) 평원왕(平原王) 10년, 백제(百濟) 위덕왕(威德王) 15년에 해당하고, 중국(中國)에서는 진 폐제(陳廢帝) 백종(伯宗)의 광대(光大) 2년, 북제 후주(北齊後主) 위(緯)의 천통(天統) 4년, 후주 무제(後周武帝) 옹(邕)의 천화(天和) 3년, 후량 세종(後梁世宗) 귀(巋)의 천보(天保) 7년에 해당한다.
《북사(北史)》 제후주본기(齊後主本紀)에 의거하면 “천통 4년 6월 초하루(갑자)에 큰 비가 내렸고 갑신일에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였고, 또 주무제본기(周武帝本紀)에는 “천화 3년 6월 갑술일에 패성(孛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며, 《남사(南史)》 진폐제본기(陳廢帝本紀)에는 “광대 2년 6월 정해일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 해 6월 초하루가 갑자일이고 24일이 정해일인 것이다. 주무제본기에는 “7월 인일에 양충(楊忠)이 죽었다.”고 하였고, 진폐제본기에는 “7월 무신일에 신라국(新羅國)에서 사신을 내어 조공(朝貢)하였다. 임술일에 영양왕(永陽王)을 세웠다.”고 하였으니, 갑자에서 임술까지가 모두 59일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작은 달이 있었을 것이고 보면 7월 그믐날이 의당 임술일이고 8월 초하루가 의당 계해일이 된다. 또 주무제본기에는 “8월 을축일에 한원라(韓元羅)가 죽었다. 계유일에 제(帝)가 대덕전(大德殿)에 임어했다.” 하였으니, 을축일이란 곧 8월 3일이고 계유일이란 곧 11일인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8월 21일이 의당 계미일이 되니 이 비문에 기록된 것과 서로 부합이 된다.
신라왕의 시호는 중엽부터 시작되었고, 처음에는 모두 방언(方言)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거서간(居西干)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이라 칭한 것이 하나이고, 이사금(尼師今)이라 칭한 것이 16이고, 마립간(麻立干)이라 칭한 것이 넷이다.
《삼국사(三國史)》에 의거하면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5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지증(智證)이라 하였으니, 신라의 시법(諡法)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였다. 이로부터는 왕이 훙한 뒤에는 반드시 그 시호를 썼다. 그러므로 진흥왕본기(眞興王本紀)에도 37년조에 “왕이 훙하였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 비석은 진흥왕이 스스로 만들어 세운 것인데도 엄연히 진흥대왕(眞興大王)이라 칭하였고, 북한산의 비문에도 진흥이란 두 글자가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법흥(法興)이니 진흥이니 하는 칭호는 장사지낸 뒤에 칭한 시호가 아니요, 바로 생존시에 부른 칭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제서(北齊書)》 무성제(武成帝) 하청(河淸) 4년의 조서(詔書)에는 “신라국왕 김진흥(金眞興)을 사지절 동이교위(使持節 東夷校尉)로 삼는다.” 하였고 《수서(隋書)》 개황(開皇) 14년조에는 “신라왕 김진평(金眞平)이 사신을 보내와서 하례하였다.” 하였으며, 《당서(唐書)》 정관(貞觀) 6년조에는 “진평(眞平)이 졸하고 그의 딸 선덕(善德)을 왕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 보면 진흥이니 진평이니 하는 등의 칭호는 분명히 시호가 아니다.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시법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서》의 기록에서 김무열(金武烈)이라 칭하지 않고 김춘추(金春秋)라 칭하였으니,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이 비석에서 진흥이라 칭한 것도 역시 생존시에 호칭한 것이다.
지금의 함흥부(咸興府)는 옛날 동옥저(東沃沮)의 땅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여기에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고, 후한(後漢) 초기에는 불내후국(不耐侯國)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高句麗)에 소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예전(濊傳)에 의거하면 “불내예(不耐濊)가 한말(漢末)에 다시 고구려에 소속되었다.” 하였고, 또 동옥저전(東沃沮傳)에는 “나라가 작아서 대국(大國)의 사이에서 핍박을 받아 마침내 고구려에 신속(臣屬)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에 말한 동옥저와 불내가 곧 지금의 함흥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국조왕(國祖王)조에 의하면 “4년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으로 창해(創海)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한 광무제(漢光武帝)의 중원(中元) 원년에 해당한다.
함흥의 땅은 분명히 후한 때부터 이미 고구려에 소속되었는데, 이 비문에서 “관할 지경을 순수한다.[巡狩管境]”고 하였고 보면, 진흥왕 때에는 함흥이 또 신라의 소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 비문에는 또 “사방으로 지경을 열어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서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진흥왕 때 이 땅을 새로 얻은 것이고, 그 이웃 나라라는 것은 바로 고구려이다.
《삼국사》 신라본기에 의하면, 진흥왕 17년에 비렬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다가 29년에는 비렬홀주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했다고 하였는데, 비렬홀은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달홀은 지금의 고성군(高城郡)이다.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비렬홀은 또한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했다’고 칭한 것이다. 이 비석 또한 진흥왕 29년(무자)에 세워졌을 것인데, 그 순수(巡狩)의 일은 필시 사서(史書)에서 빠뜨렸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비석이 세워진 자리는 바로 고구려와의 정계(政界)인 것이다.
지금 안변에서 북쪽으로 함흥까지가 3백 리이고, 함흥에서 북쪽으로 황초령(黃草嶺)까지가 1백 리인데, 그 사이에 반드시 군현(郡縣)이 있었을 터이련만, 《삼국사》 지지(地志)에 의하면 신라의 자취가 겨우 비렬홀에 미쳤으니, 사서에서 빠뜨린 것인지, 혹은 함흥이 당시에 비렬홀에 속했었는지 모르겠다.
《동국지지(東國地志)》에 이르기를 “신라 진흥왕이 지금의 안변부를 비렬주로 삼고 고원(高原)을 정천군(井泉郡)으로 삼았으며, 함흥의 황초령 및 단천(端川)에도 순수비가 있고 보면 옥저도 때로 신라에서 빼앗은 바가 되었던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나온다.― 하였다. 그러나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정천군은 지금의 덕원(德源)이요 고원(高原)이 아니니,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는 것은 또한 분명한 증거가 없다.
신라본기 법흥왕(法興王)조에 의하면 “23년에 비로소 연호(年號)를 칭하여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했다.” 하였고, 진흥왕조에는 “12년에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이라 하였다. 29년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에는 대체로 천자(天子)의 제도를 썼기 때문에 비문에서 짐(朕)이라 칭하였고, 또 제왕이 연호를 세운다[帝王建號]는 말도 있으니, 이 해에 연호를 대창으로 고쳤기 때문이었다.
진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불교(佛敎)를 받들었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머리를 깎고 중의 옷을 입고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호하여 여생을 마치었다.” 하였고, 또 직관지(職官志)에는 이르기를 “국통(國統)이 1인이니 또는 사주(寺主)라고도 하는데, 진흥왕 12년에 혜량법사(惠亮法師)를 사주로 삼았고, 대도유나(大都唯那)가 1인인데 진흥왕이 비로소 보량법사(寶良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으며, 대서성(大書省)이 1인인데 진흥왕이 안장법사(安藏法師)를 여기에 임명하였다.” 하였으니, 이 비문에 기록된 사문도인(沙門道人)이라는 것도 혜량ㆍ안장의 유일 것이다. 비문의 법장(法藏)ㆍ혜인(慧忍)이라는 것은 두 중의 이름인데, 대신(大臣)의 위에 기록한 것은 그들을 높인 때문인가 보다.
대등(大等)이란 신라의 관명(官名)이다. 《삼국사》 법흥왕본기에 “18년에 이찬(伊飡)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를 총리하게 하였으니, 상대등이란 관직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그 지위는 지금의 재상과 같다.” 하였고, 아래로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르러서는 처음에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선덕왕(善德王) 때에는 처음에 수품(水品)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그 다음은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았는데, 그 관직에서 죽거나 계승하는 일을 사서에서는 반드시 기록하였다.
또 직관지에 이르기를 “상대등은 혹은 상신(上臣)이라고도 한다.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하여 보면 대등(大等)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또 색복지(色服志)에는 “진골(眞骨)의 대등은 복두(幞頭)를 임의로 쓴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비문에도 대등이 있으니, 여기에 의거한다면 당시 상대등ㆍ사대등 두 대등 외에 또 그냥 대등이라고만 칭한 관직도 있었던가?
제7행의 거(居) 자 아래에 이지러지고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冫+七)자는 이것이 혹 칠(柒) 자인가 싶다. 상고하건대, 진흥왕 때에 거칠부(居柒夫)가 있었으니 여기에 기록된 것이 혹 사람인가 싶다. 《삼국사》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6년에 대아찬(大阿飡) 거칠부에게 명하여 문사(文士)들을 널리 모아서 국사(國史)를 찬수하게 했다.” 하였고,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진흥대왕 6년(을축)에 조지(朝旨)를 받들어 국사를 찬수하고 진찬(珍飡) 벼슬이 더해졌다.”고 하였으니, 그의 벼슬이 대아찬에서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한 것이다. 또 진흥왕본기에 “12년에 거칠부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게 해서 승승장구하여 10개 군(郡)을 탈취했다.” 하였는데, 이때는 사관(史官)이 그의 관직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진지왕본기(眞智王本紀)에는 “원년에 이찬(伊飡)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하였으니, 그가 이찬 벼슬을 한 것은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비문에는 대등이라고 칭하였는데, 그가 대등 벼슬을 한 것도 어느 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직관지에 이르기를, “사신(仕臣)은 혹은 사대등(仕大等)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25년에 처음으로 설치했는데, 직위는 급찬(級飡)에서 파진찬(波珍飡)까지로 했다.”고 하였는데, 이 비석은 29년에 세웠으니 즉 사대등을 설치한 뒤인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관제(官制)에 급찬이 파진찬의 밑에 있으니, 거칠부가 6년에 이미 파진찬이 되었다면 응당 다시 급찬으로 강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칠부의 벼슬이 처음에 대아찬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한 것은 6년에 있었던 일이고, 그 다음 파진찬에서 사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5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며, 그 다음 사대등에서 이찬으로 승진한 것은 반드시 29년 이후에 있었던 일이고, 맨 마지막에 이찬에서 상대등으로 승진한 것은 바로 진지왕 원년에 있었던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을 세운 것이 그가 사대등으로 있을 때에 해당하니,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틀림없이 거칠부인 것이다.
수가(隨駕)의 조목에 훼부(喙部)라 칭한 것이 여섯이고 사훼부(沙喙部)라 칭한 것이 셋이니, 서로 뒤섞어 칭한 까닭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나는 생각하건대, 신라의 육부(六部) 가운데 양부(梁部)ㆍ사량부(沙梁部)가 있으니, 아마 이것이 훼부ㆍ사훼부의 변칭(變稱)인 듯하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하기를 “진한(辰韓)은 본디 연인(燕人)이 피난간 곳이기 때문에 ‘㴍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읍리(邑里)를 ‘沙㴍’ ‘漸㴍’라 칭한다.” 하였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이르기를 “신라 사람의 방언에 ‘㴍’의 음을 ‘道’로 읽기 때문에 지금 혹 ‘沙梁’의 ‘梁’ 또한 ‘道’로 칭한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㴍’자는 자서(字書)에도 보이지 않고, 연(燕) 지방에 탁수(涿水)가 있었으니 ‘㴍’은 아마 ‘涿’의 와전인 듯하다. 또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에 이르기를 “그곳 풍속은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호칭하고, 그 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여 마치 중국에서 군현(群縣)을 말하듯이 한다. 그 나라에는 여섯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록이 있다.” 하였으니, 곧 여섯 탁평이 아마 육부일 듯한데 그것은 평(評) 자와 부(部) 자가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당서(唐書)》 신라전에는 탁평(啄評)을 훼평(喙評)으로 기록하였으니, 대체로 ‘喙’자와 ‘啄’자가 서로 비슷하고, ‘啄’자와 ‘涿’자가 서로 비슷하고 ‘涿’자와 ‘㴍’자가 서로 비슷하며, ‘㴍’은 또 ‘梁’으로 변하여 방언이 서로 전습하는 가운데 점차로 와오(訛誤)된 것이니, 훼부(喙部)가 바로 양부(梁部)라는 것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만일 훼부와 사훼부가 계품(階品)이었다면 응당 저렇게 뒤섞어 써서 존비(尊卑)가 구별이 없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각각 거주하는 곳을 기록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삼국사》 직관지에 의하면 신라의 관호(官號)가 17등으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이벌찬(伊伐飡)으로 혹은 이벌간(伊罰干), 또는 각간(角干)이라고도 하며, 둘째는 이척찬(伊尺飡)으로 혹은 이찬(伊飡)이라고도 하며, 셋째는 잡찬(迊飡)으로 혹은 잡판(迊判) 또는 소판(蘇判)이라고도 하며, 넷째는 파진찬(波珍飡)으로 혹은 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하며, 다섯째는 대아찬(大阿飡), 여섯째는 아찬(阿飡)으로 혹은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하며, 일곱째는 일길찬(一吉飡)으로 혹은 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하며, 여덟째는 사찬(沙飡)으로 혹은 사돌간(沙咄干)이라고도 하며, 아홉째는 급벌찬(級伐飡)으로 혹은 급벌간(及伐干)이라고도 하며, 열두번째는 대사(大舍), 열세번째는 사지(舍知)로 혹은 소사(小舍)라고도 하며, 열네번째는 길사(吉士)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찬(飡)과 간(干)이 서로 혼용되었다. 또 색복지(色服志)에 이르기를 “이찬(伊飡)과 잡찬(匝飡)은 금관(錦冠)을 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잡(迊)과 잡(匝)은 서로 같은 것이다. 또 귀산전(貴山傳)에 이르기를 “부친 무은(武殷)은 아간(阿干)이었다.” 하였으니, 아찬(阿飡)이 바로 아간인 것이다. 또 이르기를 “진평왕 건복(建福) 19년에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ㆍ무리굴(武梨屈)ㆍ이리벌(伊梨伐)과 급간(級干) 무은(武殷)ㆍ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百濟)를 막게 하였다.” 하였으니, 급벌간(及伐干)이 바로 이 급간(級干)인 것이다. 또 직관지에 “길사(吉士)는 혹은 계지(稽知), 또는 길차(吉次)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곧 《당서》에서 길주(吉主)라고 칭한 것이다. 이 비문에는 소사(小舍) 아래에 길지(吉之)가 있는데, 지(之)와 지(知)는 음이 서로 비슷하니 이는 아마 제14등관인 길사(吉士)인 듯하다.
그렇다면 비문에 있는 잡간(迊干)은 바로 제3등관이고, 그 다음 대아간(大阿干)은 바로 제5등관이고, 그 다음 급간(及干)은 바로 제9등관이고, 그 다음 대사(大舍)는 바로 제12등관이고, 그 다음 소사(小舍)는 바로 제13등관이고, 그 다음 길지(吉之)는 바로 제14등관이니 기록한 것이 모두 차서가 있어 문란함이 없이 가지런하다.
복동지(服冬知)ㆍ비지부지(比知夫知) 등은 모두 인명(人名)이다. 신라본기에 의하면, 내물왕(奈勿王) 때에는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가 있었고, 법흥왕 때에는 내마(奈麻) 법지(法知)가 있었으며, 진평왕 때에는 이찬 노지(弩知)가 있었으니, 그 때의 인명은 많이 방언(方言)으로 했던 것이다.
또 거칠부전(居柒夫傳)에는 이르기를 “진흥대왕 12년에 왕이 대각찬(大角飡) 거칠부와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태(比台), 잡찬(迊飡)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波珍飡)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將軍)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나오는 비차부가 곧 이 비문의 비지부지인 듯하다. 관명(官名)에서 계지(稽知)와 길차(吉次)가 이미 서로 통하고 보면 인명(人名)에서 비지(比知)와 비차(比次)가 어찌 서로 다를 것이 있겠는가.
진흥왕 12년에 비차부의 벼슬이 이미 대아간이었는데, 29년 순수(巡狩)할 당시에도 아직 그 벼슬로 어가(御駕)를 따라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제9행의 가장 윗글자는 우방(右傍) 阝만 남았는데 이는 부(部) 자인 듯하다. 셋째번에 있는 것은 혜(兮) 자인데 이는 인명의 하단(下段)이다. 신라 벌휴왕(伐休王) 때에 을길찬(乙吉飡) 구수혜(仇須兮)와 조비왕(助賁王)의 비(妃) 아이혜(阿爾兮)가 있었고, 진평왕 때에는 상사인(上舍人) 실혜(實兮)가 있었으니, 신라 사람은 혜(兮) 자로 이름을 지은 경우가 또한 많다. 그렇다면 기록된 것은 반드시 두 자로 된 이름이다.
또 제11행의 가장 위의 전(典) 자는 바로 관명(官名)이다. 신라의 관직은 전(典) 자로 호칭된 것이 많으니, 이를테면 회궁전(會宮典)ㆍ빙고전(氷庫典)ㆍ금전(錦典)ㆍ약전(藥典)ㆍ율령전(律令典) 등의 유가 바로 그것이다.
종인(從人)은 대사(大舍)의 종인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세택(洗宅)은 종사지(從舍知) 2인이 있고, 숭문대(崇文臺)ㆍ악전(嶽典)ㆍ감전(監典) 등의 관서에도 모두 종사지 2인씩이 있는데, 사지(舍知)는 곧 소사(小舍)이다. 소사에게 이미 종인이 있고 보면 대사에게 또한 어찌 종인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 사간조인(沙干助人)이란 곧 사찬(沙飡)의 조인(助人)이다. 직관지에 의하면, 예궁전(穢宮典)에 조사지(助舍知) 4인이 있고, 회궁전(會宮典)에 조사지 4인이 있다. 사지(舍知)에게 이미 조인이 있고 보면 다른 관(官)에도 반드시 조인이 있을 것이니, 사간에게 조인이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간은 바로 제팔등관(第八等官)이니, 응당 길사(吉士)의 밑에 기록하지 않겠지만, 사간의 조인은 낮은 것이기 때문에 끝에다 기록한 것이다. 길사의 밑에 또 소사(小舍)만 있고 그 이름은 이지러진 것은 이 또한 소사의 조인인 것이다.
제9행의 ‘(䒑/衆)內’와 제11행의 ‘(䒑/衆)公’에서 두 ‘(䒑/衆)’ 자가 서로 같은데 혹은 회(懷) 자 같기도 하고 혹은 애(哀) 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거하면, 법흥왕과 진흥왕을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이 비문 또한 애공이니, 두 ‘(䒑/衆)’ 자는 분명히 애(哀) 자인 것이다.
또 제10행의 가장 위의 ‘一’은 아마 사(舍) 자인 듯하다. 제9행에는 대사애내(大舍哀內)가 있고, 제10행에는 또 대사약사(大舍藥師)가 있으니, 그 사이에 기록된 것은 반드시 다 대사일 것이고, 여난(與難) 또한 의당 벼슬이 대사였던 것이다.
제1행 태왕(太王)의 태(太)는 바로 대(大)와 같은 것이요, 명기(銘記) 밑에 야(也) 자가 있는 것은 특별한 예(例)이다. 제2행의 ‘●’은 역(亦) 자에서 위의 점이 빠진 것이고, ‘(日/丁)’은 시(是) 자에서 아래 파(波 파임을 이름)가 빠진 것이다. 제3행의 ‘(그/尸)’은 위(違) 자이다. 제4행의 ‘寸耎’은 봉연(封堧) 두 자의 왼쪽이 이지러진 듯하다. 제5행의 ‘十’은 래(來) 자이고, ‘口’은 여(如) 자이다. 제7행의 ‘咅’는 부(部) 자이고, ‘(冫+七)’은 칠(柒) 자인 듯하다. 제9행의 ‘阝’은 ‘부(部)’ 자이고, 10행의 맨 위의 ‘乀’은 사(舍) 자이며, 맨 밑의 ‘’ 또한 사(舍) 자이다. 그 나머지 불완전한 글자들은 모두 알 수가 없다.
대등훼부거칠(大等喙居咅) ―대등은 관명(官名)이고 훼부는 지명(地名)이며, 거칠은 인명(人名)의 상단(上段)이다.― 지(知) ―인명의하단이다.― 잡간훼부복부지(迊干喙部服不知) ―잡간은 관명이고, 복부지는 인명이다.― 대아간비지미지(大阿干比知未知) ―대아간은 관명이고 비지미지는 인명이다.― 급간미지(及干未知) ― 급간은 관명이고 미지는 인명의 상단이다.― 혜((䒑/亅)) ―인명의 하단이다.― 대사사훼부영지(大舍沙喙部另知) ― 대사는 관명이고 영지는 인명이다.― 대사애내(大舍(䒑/衆)內) ―애내는 인명이다.― 종인훼부(從人喙部) ―종인은 대사(大舍)의 종인이고 인명은 이지러지고 없다.― 훼부여난(喙部與難) ―여난은 인명이고 그의 벼슬은 또한 의당 대사(大舍)인 것이다.― 대사약사(大舍藥師) ―약사는 인명이다.― 사훼부□형(沙喙部(䒑/馬)兄) ―’(䒑/亅)兄’ 인명이고 그 벼슬은 역시 의당 대사이다.― 소사(小人) ―관명만 있고 인명은 이지러졌다.― 전훼부분지(典喙部分知) ―전(典)은 관명의 하단이고 분지는 인명이다.― 길지애공흔평(吉之(䒑/衆)公欣平) ―길지는 관명이고 애공흔평은 인명이다.― 소사(小舍) ―관명만 있다.― 훼부비지(喙部非知) ―관명은 이지러졌고, 비지는 인명이다.― 사간조인사훼부윤(沙干助人沙喙部尹) ―사간조인은 관(官)이고 윤은 인명의 상단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진흥왕 순수 정계비(眞興王巡狩定界碑)가 함흥부의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어 왕통을 계승하여 몸가짐을 스스로 삼간다.[朕紹太祖之基 纂承王統 兢身自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방으로 지경을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고, 이웃 나라와 맹약을 맺어 화사(和使)를 서로 통한다.[四方托境 廣獲民土 隣國誓信 和使交通]’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무자년 가을 8월에 관할 지경을 순수하여 민심을 채방한다.[歲次戊子秋八月 巡狩管境 訪採民心]’ 하였습니다. 신(臣)은 삼가 상고하건대, 초방원은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백여 리쯤 되는 초황령(草黃嶺) 아래에 있는데, 방(坊)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황(黃)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곧 방과 황의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정희(正喜)는 상고하건대, 황초령(黃草嶺)이 지금 함흥부의 북쪽으로 1백 10리쯤에 있고 그 영(嶺) 밑에는 원(院)이 있는데, 고금에 걸쳐 이를 기록하는 이들이 혹은 초방(草坊)으로, 혹은 초방(草方)으로, 혹은 초황(草黃)으로, 혹은 황초(黃草)로도 기록을 해왔으나 그 실상은 한가지이다.
근세의 유 문익공 척기(兪文翼公拓基)의 집에 소장된 《금석록(金石錄)》 ―곧 비목(碑目)들을 나열해 놓은 것이다.― 에 의하면 ‘삼수 초방원의 진흥왕순수비[三水草坊院眞興王巡狩碑]’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대체로 삼수군에 초평원(草坪院)이 있어 이를 혹은 초방(草坊)이라고도 일컫기 때문에 지금 사람들이 혹은 삼수에서 이를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이 비문 제2행의 맨 밑에 짐(朕) 자가 있고, 제3행의 맨 위에 소(紹) 자가 있으나, 상단(上段)이 이미 이지러져서 소(紹) 자의 위로 몇 자가 더 있었는지를 지금 알 수 없는 일인데, 《문헌비고》에서는 “짐이 태조의 기반을 이었다.[朕紹太祖之基]”고 새기어, 소(紹) 자를 곧바로 짐(朕) 자에 승접시킨 것은 잘못이다. 또 왕위(王位)를 왕통(王統)이라고 한 것도 잘못이다.
《해동집고록(海東集古錄)》에 이르기를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씩이어서 전 비문은 4백 20자인데, 이지러져서 분변할 수가 없고 분변할 만한 것은 겨우 2백 78자이다.”고 하였다. ―《문헌비고》에서 나온 말이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12행에 행마다 35자인 경우, 전 비문에 빈칸이 하나도 없어야만 4백 20자가 된다. 그러나 지금 현존한 탁본(拓本)을 가지고 본다면 이미 제1행의 하단에 빈칸이 일곱 자나 있고 제6행에는 빈칸이 한 자가 있으며 제7행에도 빈칸이 두 자나 있어 4백 20자가 될 수 없으니, 그 설(說)이 엉성하다. 또 탁본 가운데 글자가 완전한 것이 2백 39자이고 불완전한 것이 13자인데, 지금 여기에는 “분변할 만한 것이 겨우 2백 78자이다.” 하고, 또 “행마다 35자이다.”고 하였으니, 모두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때에 본 것도 아마 지금의 탁본에 불과했을 터인데, 사견으로 억측하여 근거 없이 말을 한 것이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본기를 상고하건대, 진흥왕 16년인 무자년 겨울 10월에 북한산(北漢山)에 순수하여 봉강(封疆)을 개척해서 정하고, 12월에 북한산으로부터 오면서 경유하는 주군(州郡)에 모두 1년분의 조세(租稅)를 면제해 주었으니, 무자년은 과연 진흥왕이 함흥에 순수한 해이다. 그리하여 8월에 봉강을 정하고 10월에 북한산을 왔다가 12월에 환도(還都)한 것인데, 8월의 일만 유독 사서에 빠진 것일 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鼎立)해 있을 때에 신라의 땅은 비렬홀(比列忽)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비렬홀은 바로 지금의 안변부이다. 그리고 삼국이 통합된 이후에도 천정(泉井)을 넘어가지 못했는데, 천정은 곧 지금의 덕원부(德源府)이다. 함흥은 안변의 북쪽으로 2백여 리쯤에 있고, 단천(端川)은 함흥의 북쪽으로 3백 60리쯤에 있는데, 이 순수비를 가지고 본다면 단천 이남이 일찍이 신라 영토로 꺾여 들어왔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모두 나타나지 않은 것인데, 유독 먼 변방의 편석(片石) 하나가 남아서 천고의 고사(故事)가 되었다.”고 하였다.
정희는 상고하건대, 진흥왕 원년이 경신년이고 16년이 을해년이고 29년이 무자년이니, 여기에서 16년을 무자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진흥왕이 16년에 과연 북한산에 순수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함흥에 봉강을 정한 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사서에서 빠뜨린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이렇게 여러 말을 늘어놓았단 말인가. 이것도 잘못이다. 지금 안변에서 함흥까지가 3백 10리이고 함흥에서 단천까지가 3백 80리이니, 도리(道里)를 논한 것도 잘못되었다. 그리고 단천에 진흥왕비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지 못했으니, 단천 이남의 지역이 신라로 꺾여 들어왔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이상의 것은 곧 구탁본비(舊拓本碑)의 하단이다. 이 탁본은 또한 빗돌이 꺾어져서 두 조각이 된 것이다. 그 흔적은 제1행의 순수(巡狩) 두 글자 사이로부터 시작하여 제2행의 시이(是以) 두 글자 사이를 통과해서 죽 연하여 왼쪽으로 내려갔다. 또 제3행의 위(違) 자 아래, 우(又) 자 위와 제4행의 부(府) 자 아래, ‘寸’자 위와 제5행의 노(勞) 자 아래, 유(有) 자 위와 제5행의 충(忠) 자와 상대가 되는 제6행의 제14번째 빈칸을 통과하여 제7행의 훼(喙) 자 아래, 거(居) 자 위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연결된 흔적이 있으니, 이는 빗돌이 꺾여서 생긴 틈이다.
또 제6행의 고(顧) 자 아래와 7행의 인(忍) 자 아래의 맨 끝까지와 제11, 12행의 맨 꼭대기와 애(哀) 자 아래와 조(助) 자 아래의 이지러진 것은 모두 종이가 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다음에 소개되는 것은 함흥에 있는 순수비의 상단(上段)이다.〉




이상의 신라 진흥왕순수비는 지금 경도(京都)의 북쪽으로 20리쯤 되는 북한산 승가사(僧伽寺) 곁의 비봉(碑峯) 위에 있다. 길이는 6척 2촌 3푼이고 넓이는 3척이며 두께는 7촌이다. 바위를 깎아서 밑받침으로 삼았고, 위에는 방첨(方簷)을 얹었는데 지금은 그 방첨이 밑에 떨어져 있다. 전액(篆額)이 없고 음기(陰記)도 없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글자가 모호하여 매행마다 몇 자씩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 아래로는 제6행의 상(賞) 자와 제8행의 사(沙) 자가 글자의 끝이 되었고, 위로는 현존한 제1행의 진(眞) 자가 가장 높은데 그 이상은 분별할 수가 없다.
전 비문 가운데 분별한 것이 70자인데, 이를 서로 비교 대조해 보면, 제1행의 가장 높이 위치한 진(眞) 자로부터 제8행 아래 맨 끝의 사(沙) 자까지를 기준하여 모두 21자이다. 그중에 분변할 만한 것은 제1행에 12자, 제2행에 3자, 제3행에 4자, 제4행에 3자, 제5행에 7자, 제6행에 4자, 제7행에 3자, 제8행에 11자, 제9행에 11자, 제10행에 8자, 제11행에 4자이고, 제12행은 모호하여 한 자도 알아볼 수가 없다.
북한산(北漢山)은 한 무제(漢武帝)의 강역(疆域)이었는데, 뒤에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고,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삼국사》 본기에 의거하면, 진흥왕 16년에 왕이 북한산에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획정(劃定)하였고, 18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했으니, 이는 진흥왕이 새로 얻은 것이다. 또 29년에는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했는데, 남천주는 지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 진평왕 25년에 이르러서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략하였고, 26년에는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이것으로 본다면 북한산은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이니, 이 비석은 곧 경계를 정한 것이었다.
이 비문에 연월(年月)이 마멸되어 어느 해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진흥왕본기에 의하면 남천주를 설치한 때가 비렬홀주(比列忽州)를 폐한 때와 서로 같은 해인데, 황초령의 비가 비렬홀주를 폐하던 해에 세워졌고 보면 이 비도 의당 같이 남천주를 설치하던 때에 세워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자가 있으니, 반드시 남천주를 설치한 이후에 세워졌을 것이다. 또 진흥왕의 재위(在位) 기간이 37년이고 보면, 그것이 세워진 때는 29년에서 37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비문 제1행의 태왕(太王)이란 글자와 제5행의 충신정성(忠信精誠)이란 글자와 제7행의 도인(道人)이란 글자는 모두가 황초령의 비문과 같다. 또 부지(夫智)는 곧 황초령비문의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이니, 지(智)는 지(知)와 같은 것이다. 급간(及干) 미지(未智) 또한 황초령비문에 있는 것이니, 이 두 비가 동시에 세워진 것인가 싶다.
제8행의 급간내대지(及干內大智)는 급간은 곧 관명이고 내대지는 곧 인명이다. 간남천군주사(干南川軍主沙)란 것으로 말하면, 간(干)은 바로 관명의 하단이니 아간(阿干)ㆍ잡간(迊干) 등과 같은 것이다. 지금 탁본을 보건대, 간(干) 자의 윗자는 마치 잡(迊) 자인 듯하나 감히 단정할 수는 없다. 군주(軍主)는 곧 도독(都督)이다. 《삼국사》 직관지에 “도독은 9인이다. 지증왕(智證王) 6년에 이사부(異斯夫)를 실직주 군주(悉直州軍主)로 삼았는데,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이를 총관(總管)으로 고쳤고, 원성왕(元聖王) 원년에 도독으로 일컬었다. 관등(官登)은 급찬(級飡)에서 이찬(伊飡)까지로 했다.” 하였으니, 외관(外官)으로 중대한 관직이다. 사(沙)는 바로 거주하는 부명(部名)의 상단이거나 혹은 인명의 상단일 것이다. 제9행의 대내□지(大奈□智)에서 대내□(大奈□)는 관명이다. 직관지에 대내마(大奈麻)ㆍ내마(奈麻) 두 명칭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것은 바로 대내마인 것이다. 지(智)는 곧 인명의 상단이다. 차내(次奈)에서 차(次)는 곧 인명의 하단이요, 내(奈)는 바로 관명의 상단이니 반드시 내마(奈麻)일 것이다.
이 비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요승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르렀다는 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라고 잘못 칭해왔다. 그런데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1796~1820) 병자년 가을에 내가 김군 경연(金君敬淵)과 함께 승가사(僧伽寺)에서 노닐다가 이 비를 보게 되었다. 비면(碑面)에는 이끼가 두껍게 끼어 마치 글자가 없는 것 같았는데, 손으로 문지르자 자형(字形)이 있는 듯하여 본디 절로 이지러진 흔적만은 아니었다. 또 그때 해가 이끼 낀 비면에 닿았으므로 비추어 보니, 이끼가 글자 획을 따라 들어가 파임획[波]을 끊어버리고 삐침획[撇]을 만멸시켰는지라, 어렴풋이 이를 찾아서 시험삼아 종이를 대고 탁본을 해내었다. 탁본을 한 결과 비신은 황초령비와 서로 흡사하였고, 제1행 진흥(眞興)의 진(眞) 자는 약간 만멸되었으나 여러 차례 탁본을 해서 보니, 진(眞) 자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이를 진흥왕의 고비(古碑)로 단정하고 보니, 1천 2백 년이 지난 고적(古蹟)이 일조에 크게 밝혀져서 무학비(無學碑)라고 하는 황당무계한 설이 변파(辨破)되었다. 금석학(金石學)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우리들이 밝혀낸 일개 금석의 인연으로 그칠 일이겠는가.
그 다음해인 정축년 여름에 또 조군 인영(趙君寅永)과 함께 올라가 68자를 살펴 정하여 돌아왔고, 그후에 또 두 자를 더 얻어 도합 70자가 되었다.
비의 좌측에 새기기를 “이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인데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하고, 또 예자(隸字)로 새기기를 “정축년 6월 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와서 남은 글자 68자를 살펴 정했다. [丁丑六月八日 金正喜趙寅永來審定殘字六十八字]” 하였다.


 

[주D-001]육부(六部) : 신라 수도인 경주(慶州)의 행정 구역. 신라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육촌(六村)을 신라 유리왕(琉璃王) 때에 육부로 고쳤다고 하는데, 즉 알천 양산촌(閼川梁山村)을 양부(梁部)로,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로,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을 본피부(本彼部)로,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을 점량부(漸梁部)로,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을 한기부(漢祇部)로,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습비부(習比部)라 하고 육부에 각각 이(李)ㆍ최(崔)ㆍ정(鄭)ㆍ손(孫)ㆍ배(裵)ㆍ설(薛)의 육성(六姓)을 주었다고 한다.

 

완당전집 제2권
 서독(書牘)
조운석 인영 에게 주다[與趙雲石 寅永]


비바람 몰아치는 가운데 사람을 생각하니 그리운 정을 풀 수가 없습니다. 형(兄)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문을 굳게 닫고 혼자 지내십니까?
그런데 재차 비봉(碑峯)의 고비(古碑)를 가져다가 반복하여 자세히 훑어보니, 제1행 진흥태왕(眞興太王) 아래 두 글자를 처음에는 ‘구년(九年)’으로 보았었는데 ‘구년’이 아니고 바로 ‘순수(巡狩)’ 두 글자였습니다. 또 아래 ‘신(臣)’ 자 같이 생긴 것은 ‘신’ 자가 아니고 바로 ‘관(管)’ 자였습니다. 그리고 ‘관’ 자 밑에 희미하게 보인 것은 바로 ‘경(境)’ 자이니, 이것을 전부 통합해 보면 곧 ‘진흥태왕순수관경(眞興太王巡狩管境)’ 여덟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예(例)는 이미 함흥(咸興) 초방원(草旁院)의 북순비(北巡碑)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7행의 ‘도인(道人)’ 두 글자는 또 초방원 북순비의 ‘시수가 사문도인(時隨駕沙門道人)’이란 말과 착오 없이 딱 들어맞습니다.
또 제8행에는 ‘남천(南川)’이란 두 글자가 있는데, 이 두 글자는 바로 이 비(碑)의 고실(故實)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으니, 이 비는 의당 진흥왕 29년 이후에 세운 것이지, 진흥왕 16년에 북한산주에 순행(巡幸)하여 봉강(封疆)을 척정(拓定)할 때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또 제9행의 ‘부지급간미지(夫智及干未智)’ 여섯 자는 저 초방원의 비에서 수가(隨駕)한 여러 사람들의 관작(官爵)과 성명(姓名)을 기록한 것과 부합되니, ‘부지급간미지’ 이 여섯 자는 바로 관명과 인명인 듯하나, 어느 것이 관명이고 어느 것이 인명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史)의 직관(職官)에 있어서는 예전부터 빠진 글이 많아서 또한 자세히 고증할 수가 없고, 대체로 초방원의 비와 동시에 세운 것만은 확실한데,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라고 보는 경우에 대해서는 감히 확실하게 증거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평왕(眞平王) 26년에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고 보면 이 비가 진평왕 26년 이전에 세워진 것이 또 분명해집니다.
진흥왕 29년에 남천주를 설치함으로부터 이후로 진평왕 26년까지가 모두 38년간인데, 초방원의 비에서 지금 비로소 상고해 보니, 그것이 진지왕(眞智王) 때에 세운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진지왕 때에 세운 것임을 아는가 하면 그 까닭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아들입니다. 진지왕 때에는 거칠부(居漆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었는데, 초방원 비문의 수가(隨駕)한 사문도인(沙門道人) 법장(法藏)ㆍ혜인(慧忍) 두 사람 아래에 ‘口等居‘ 등의 글자가 있으니 저의 소견으로는 본디 좀벌레로부터 손상을 입은 것이라고 봅니다. 위의 이지러진 글자는 마침내 그것이 없어졌으나 다른 본(本)에는 반드시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대(大) 자의 왼쪽 삐침 획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이지러진 글자의 상반(上半)은 이것이 원래 이지러진 것으로서 그것이 칠(漆) 자의 윗부분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거칠부(居漆夫)가 상대등(上大等)이 된 때가 진지왕 원년인데 진지왕은 왕위(王位)를 4년간 누리었고, 진평왕이 이어 즉위한 원년 8월에는 이찬(伊飡)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니, 거칠부가 상대등으로 있었던 기간은 곧 진지왕의 재위 4년간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초방원의 비 또한 진흥왕 때에 세운 것이 아니고 바로 진지왕 때에 세운 것으로 진지왕도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巡狩)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고, 역사에 기재된 지리(地理)는 비렬홀(比列忽)에 불과하지만, 초방원의 비를 통해 비렬홀 이북의 2백 리 지역이 또 신라(新羅)의 영토로 꺾여 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진지왕이 북쪽으로 순수한 사실은 역사에서 상고할 데가 없으나, 이 거칠부가 수가(隨駕)한 것으로 말하자면 진지왕이 또 일찍이 북쪽으로 순수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두 비의 문자가 서로 같은 곳이 많은 것으로 보면 두 비를 동시에 세운 것이 확실하고, 그 시기 또한 모두 진지왕 때에 있었던 듯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임하필기 제32권
 순일편(旬一編)
승가사(僧伽寺)의 비석에 대한 고찰


북한산(北漢山) 남쪽에 승가사가 있다. 그 위가 비봉(碑峯)인데, 기둥 하나가 사람처럼 우뚝 서 있다. 시속에서는 고려 승 도선(道詵)의 비인데 지금은 글자가 없어졌다고 전한다. 병자년(1816, 순조16)에 운석(雲石) 조공(趙公 조인영(趙寅永))이 추사(秋史)와 함께 답사하여 비석에 남아 있는 글자를 찾아보니 진흥왕비(眞興王碑)였다. 그래서 마침내 공인(工人)에게 탑본하게 하여 자세히 글자를 살펴보니, 완전히 닳아 없어져 억지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을 제외하고 자획이 분명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글자가 모두 92자였다. ‘진흥왕’이라는 세 자, ‘순수(巡狩)’라는 두 자, ‘남천(南川)’이라는 두 자 같은 것은 모두 실제 사실로 증명되며 사서(史書)의 내용으로 고증을 해 본 것이다. 상고하건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진흥왕 16년(555)에 왕이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순행하여 봉강(封疆)을 넓혀 정하였고, 29년(568)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두었다고 하였다. 이 비는 바로 그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비문에 ‘진흥’이라는 두 자가 있는데, 지증왕본기(智證王本紀)에 근거하면 신라의 시법(諡法)이 이때부터 시작되었고, 지증왕 뒤로 법흥왕(法興王)을 거쳐 진흥왕에 이르렀다. 진흥왕 때 미리 시호를 일컫지 않았을 것이므로 진흥왕 사후에 세운 듯하다. 진평왕(眞平王) 26년(604) 기록에 의거하면 이때 남천주를 폐하고 다시 북한산주를 두었는데, 비문에 ‘남천’이라는 두 자가 있으니 또한 남천주를 폐하기 전인 듯하다. 진흥왕 원년(540)은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6년이고, 진평왕 원년(579)은 진 선제(陳宣帝) 태건(太建) 11년이니, 따져 보면 양(梁)ㆍ진(陳) 사이에 새긴 것이다. 또 상고하건대, 함흥부(咸興府)의 초방령(草芳嶺)에 진흥왕 북순비(北巡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탑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存齋集卷之十五 密城朴允默士執著
 
三角山四十韻 a_292_281c


嵬彼白頭鎭北藩。橫截華夷最獨尊。逶迤南來起鐵嶺。興王舊基發本源。自嶺馳奔八百里。有山崢嶸觸天門。骨相精氣之所鍾。祥雲瑞靄常吐呑。翠髻在五去其二。一一洗出玉女盆。削成萬仞銅鐵色。汰却千292_281d古沙土痕。疑是名山五百年。金精玉液始相噴。天命攸歸孰敢禦。餠峴石犬空相蹲。保佑邦國啓千萬。拱護京都拓乾坤。春秋祀享儀文備。亢旱祈禱誠意存。美哉屛翰天所設。鬼斧神工爭趨奔。或如金蓮之並蒂。或如玉筍之交根。或如凌厲之嚴霜。或如淸明之初暾。或如蒼龍之爭騰。或如紫鸞之齊騫。或如堆塲之囷廩。或如駕雲之幢旛。或如聯袂之友朋。或如同氣之弟昆。或如顧對而携手。或如追隨而接言。或如欲墜而復起。或如欲去而回翻。或圓或直又或銳。奇態妙狀不暇論。吾東千里無不見。使人可望不可捫。292_282a支分脉延何紛紜。欲以數計意先惽。西指甑峰與。一帶聯亘勢欲掀。東望走麓苦多端。牛邱水里海東村。北瞻壽坡開明麗。淸潭泉瀑鳴潺湲。最愛南距龍蜿蜒。去作北嶽鍾眞元。又有鷹峯靑突兀。飄然高擧無攀援。金城湯池大鋪叙。五雲多處闢九閽。於戱國祚萬年永。猗歟本支百世蕃。山河自是爲國寶。國寶元不在璵璠。漢北形勝所鞏固。依山爲城不知煩。後營管轄何宏遠。米穀甲兵與車轅。城邊險阻盡置堠。山下閒曠皆設屯。捍禦門前陰雨計。一陣行伍充緇髡。禪樓翠瓦照山谷。分占十二給孤園。邦家望秩292_282b禮所篤。釋氏依歸意亦惇。時維深冬天已寒。我來弊屋托餘樊。木葉盡脫層氷裂。惟有蒼翠滿前軒。奉我五世墳墓地。香火無保子孫。知是靈神之攸曁。仰望可以窮朝昏。於國於家大功德。生生世世不可諼。

 

存齋集卷之十五 密城朴允默士執著
 
三角山四十韻 a_292_281c


嵬彼白頭鎭北藩。橫截華夷最獨尊。逶迤南來起鐵嶺。興王舊基發本源。自嶺馳奔八百里。有山崢嶸觸天門。骨相精氣之所鍾。祥雲瑞靄常吐呑。翠髻在五去其二。一一洗出玉女盆。削成萬仞銅鐵色。汰却千292_281d古沙土痕。疑是名山五百年。金精玉液始相噴。天命攸歸孰敢禦。餠峴石犬空相蹲。保佑邦國啓千萬。拱護京都拓乾坤。春秋祀享儀文備。亢旱祈禱誠意存。美哉屛翰天所設。鬼斧神工爭趨奔。或如金蓮之並蒂。或如玉筍之交根。或如凌厲之嚴霜。或如淸明之初暾。或如蒼龍之爭騰。或如紫鸞之齊騫。或如堆塲之囷廩。或如駕雲之幢旛。或如聯袂之友朋。或如同氣之弟昆。或如顧對而携手。或如追隨而接言。或如欲墜而復起。或如欲去而回翻。或圓或直又或銳。奇態妙狀不暇論。吾東千里無不見。使人可望不可捫。292_282a支分脉延何紛紜。欲以數計意先惽。西指甑峰與。一帶聯亘勢欲掀。東望走麓苦多端。牛邱水里海東村。北瞻壽坡開明麗。淸潭泉瀑鳴潺湲。最愛南距龍蜿蜒。去作北嶽鍾眞元。又有鷹峯靑突兀。飄然高擧無攀援。金城湯池大鋪叙。五雲多處闢九閽。於戱國祚萬年永。猗歟本支百世蕃。山河自是爲國寶。國寶元不在璵璠。漢北形勝所鞏固。依山爲城不知煩。後營管轄何宏遠。米穀甲兵與車轅。城邊險阻盡置堠。山下閒曠皆設屯。捍禦門前陰雨計。一陣行伍充緇髡。禪樓翠瓦照山谷。分占十二給孤園。邦家望秩292_282b禮所篤。釋氏依歸意亦惇。時維深冬天已寒。我來弊屋托餘樊。木葉盡脫層氷裂。惟有蒼翠滿前軒。奉我五世墳墓地。香火無保子孫。知是靈神之攸曁。仰望可以窮朝昏。於國於家大功德。生生世世不可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