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전라 전주부

전주 관련 자료

아베베1 2012. 5. 22. 10:00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의 모습이다 (2012.5.23.)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진흥왕(眞興王) 十六年春一月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다  (555년 1월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16년 봄 정월에 비사벌 (比斯伐) [譯註 001] 에 완산주 (完山州) [註 001] 를 설치하였다. [譯註 002] 

註 001 ≪삼국사기≫권36, 잡지(雜志)5 지리(地理)3 전주(全州)조  에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완산은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 이므로 백제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이때에 설치된 완산주는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의 비사벌주(比斯伐州)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117쪽).譯註 001 지금의 경상남도 창녕 지역으로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에 화왕군(火王郡)으로 개명하였다. ≪삼국사기≫권34, 잡지(雜志)3 지리(地理)1 양주(良州) 화양군조  참조.譯註 002 ≪삼국사기≫ 권36 잡지 지리(3) 全州 條에도 이와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완산은 현재의 전북 전주 지방으로 백제 땅이었기 때문에 신라가 이곳에 주를 설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진흥왕 16년(555)에 설치된 완산주는 창녕에 설치된 比斯伐州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주제분류정치>행정>군현>주·부 색인어<지명> 비사벌, 완산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신문왕(神文王)
四年冬十一月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다  (684년 11월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5년(685년) 봄에 다시 완산주 (完山州)를 설치하고 [註 001] 용원 (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註 001 완산주(完山州) 복치설(復置說)은 ≪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3  에 ' 全州 本百濟完山, 眞興王16年爲州, 26準州發, 神文王5年 復置完山州'라 한, 잘못된 기사(記事)에 인한 두찬(杜撰)이다.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전주 ( 全州 )의 땅[그 때는 백제(百濟)의 심장지지(心臟之地)]을 취하여 주(州)를 삼았다는 것은 원래 어림없는 오해(誤解)로, 이 오해는 전주 ( 全州 )의 고명[古名 : 비사벌(比斯伐)]과 지금의 창녕(昌寧)의 고명[古名 : 비사벌(比斯伐)]이 같은 데서 생긴 것이다. 즉 동명(同名)으로 인하여 창녕비사벌주(昌寧比斯伐州)의 치폐(置廢) 연대(年代)를 전주 ( 全州 )의 그것과 흔동한 것이니, 여기의 완산주(完山州) 복치(復置)는 실상 시치(始置)로 고쳐 보아야 한다.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96  , 202쪽) 이 기사는 ≪삼국사기≫ 권36 잡지 지리(3) 全州條  의 "" 全州 는 본래 백제의 完山으로 眞興王 16년에 州를 삼았으며, 26년에 폐하였다가 神文王 5년 다시 完山州를 설치하였다""는 기사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신라가 백제의 중앙부에 州를 설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착오는 당시 전주 의 옛 이름(比斯伐)과 昌寧의 옛 이름(比斯伐)이 같았기 때문이다. 진흥왕 16년(555)에 설치된 완산주는 창녕에 설치된 比斯伐州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신문왕 5년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이 해에 전주 에 처음으로 完山州가 설치되었다고 하겠다.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47쪽)주제분류정치>행정>군현>주·부
정치>행정>관직>지방관직
정치>행정>관인>인사·제도 색인어<이름> 용원 <지명> 완산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三國史記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신문왕(神文王)
五年   청주를 설치하고 복세를 총관으로 삼다  (685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거열주 (居列州)를 빼앗아 청주 (菁州) [註 001] 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9주(州) [註 002] 가 구비되었다. 청주 에는 대아찬(大阿湌) 복세 (福世)를 총관으로 삼았다.
註 001 신라 9주의 하나로 주 소재지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이다. ( 이재호, ≪삼국사기≫Ⅰ, 솔출판사, 2006  , 305쪽) 현재의 경남 진주시 지방이다. 경덕왕대 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대 다시 菁州라 하였다.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47쪽)註 002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에 나눈 9주로 사벌주(沙伐州, 尙州), 삽량주(良州, 良州), 청주(菁州, 康州), 한산주(漢山州, 漢州), 수약주(首若州, 朔州), 웅천주(熊川州, 熊州), 하서주(河西州, 溟州), 완산주(完山州, 全州 ), 무진주(武珍州, 武州)를 말한다. ( 이재호, ≪삼국사기≫Ⅰ, 솔출판사, 2006  , 305쪽) 이때의 九州(구주)는 1) 一善州[일선주 : 善山(선산)] 2) 歃良州[삽량주 : 梁山(양산)] 3) 漢山州[한산주 : 廣州(광주)] 4) 首若州[수약주 : 春川(춘천)] 5) 何瑟羅州(하슬라주) 6) 所夫里州[소부리주 : 扶餘(부여)] 7) 完山州[완산주 : 全州 ( 전주 )] 8) 菁州[청주 : 晉州(진주)] 9) 發羅州[발라주 : 羅州(나주)]를 가리킴인 듯(6년·7년條(조)에 약간의 改編(개편)이 있음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상, 을유문화사, 1996  , 202쪽) 신문왕 5년에 완비된 9州는 一善州·梁州·漢山州·首若州·河瑟羅州·所夫里州·完山州·菁州·發羅州등 이었는데, 신문왕 6년과 7년에 약간의 개편이 있었다. 한편 신라가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재편한 것은 중국의 옛날 禹王 때의 9주를 모범으로 한 天下觀에 의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 9주는 중국 고대에 천하를 아홉으로 나누어 관념하던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 p.211)주제분류정치>행정>군현>주·부
정치>행정>관직>지방관직
정치>행정>관인>인사·제도 색인어<이름> 복세 <지명> 거열주, 청주, 청주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메일보내기 개인정보보호정책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 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 견훤(甄萱)
    •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다
드디어 무진주 (武珍州) [譯註 001] 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註 001] 아직 감히 공공연히 왕을 칭하지는 못하였다.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 지절(持節)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註 002] 전주 자사(行 全州 刺使) 겸 어사중승(御史中丞)상주국(上柱國) 한남군개국공(漢南郡開國公) 식읍이천호(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본 열전에서는 892년을 후백제 원년으로 보았으나 ≪삼국유사≫에는 원년을 88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라가 庚寅(930)까지 42년간 지속되었다는 열전의 기록으로부터 역산하여도 원년은 889년이 합당하다. 한편 남원 實相寺의 片雲浮屠碑片에는 “政開十年 庚午“(910)의 기록이 있으니 이는 견훤이 나라를 전주 로 옮긴 후에 연호를 칭하였다고 생각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826쪽).
전주 , 무주, 공주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백제의 옛 땅을 셋으로 나누어 설치한 州로서 견훤이 신라의 관직을 自署할 때부터 백제의 계승을 표방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박한설, 「후삼국의 성립」,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7, 619∼620쪽)(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826~827쪽).
현재의 광주광역시 일대이다.

 

 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g_050r_0030_0160

  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견훤(甄萱)
신라를 공격하다가 물러나다  (920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성암본 보물 제722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정명] 6년(920)에 견훤 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례성(進禮城) [註 001] 으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신라 왕이 아찬 김률 (金律)을 보내 태조 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태조 가 군대를 출동시켰다. 견훤 이 이를 듣고 물러났다. 견훤 은 우리 태조 와 겉으로는 화친을 맺었으나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註 001 경남 金海郡 進禮面 新安里·松亭里에 걸쳐 있는 토성, 즉 進禮山城을 가리킨다( 김윤우, 「신라말의 구사성과 진례성고」, ≪사학지≫ 22  , 155∼160쪽). ≪삼국사기≫ 권36 주석 132 참조. 今西龍, 이병도, 신호철은 경남 청도로, 이재호는 전북 무주에 비정하였다. ≪삼국사기≫ 권36 지리지 전주 조에는 무주의 경덕왕대 군현 이름으로 進禮郡이 보이고 있으나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명왕 4년조에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으로 진군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무주설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828쪽). 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이름> 견훤, 김률, 태조, 태조, 견훤, 견훤, 태조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g_037r_0030_0090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지리(地理)四 백제(百濟)
완산주의 군∙현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완산 (完山) [註 001] 한편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이르며 한편으로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 두이현 (豆伊縣) [註 002] 한편왕무(往武)라고도 이른다. , 구지산현 (仇智山縣) [註 003] , 고산현 (高山縣) [註 004] , 남원 (南原) [註 005] 한편고룡군(古龍郡)이라고도 이른다. , 대시산군 (大尸山郡) [註 006] , 정촌현 (井村縣) [註 007] , 빈굴현 (賓屈縣) [註 008] , 야서이현 (也西伊縣) [註 009] , 고사부리군 (古沙夫里郡) [註 010] , 개화현 (皆火縣) [註 011] , 흔량매현 (欣良買縣) [註 012] , 상칠현 (上柒 [譯註 001] 縣) [註 013] , 진내군 (進乃郡) [註 014] 한편진잉을(進仍乙)이라고도 이른다. , 두시이현 (豆尸伊縣) [註 015] 한편 부시윤(富尸伊 [譯註 002] )이라고도 이른다. , 물거현 (勿居縣) [註 016] , 적천현 (赤川縣) [註 017] , 덕근군 (德近郡) [註 018] , 가지나현 (加知奈縣) [註 019] 한편가을내(加乙乃)라고도 이른다. , 지양초현 (只良肖縣) [註 020] , 공벌공현 (共伐共縣) [註 021] , 시산군 (屎山郡) [註 022] 한편 절문(折 [譯註 003] 文)이라고도 이른다. , 감물아현 (甘勿阿縣) [註 023] , 마서량현 (馬西良縣) [註 024] , 부부리현 (夫夫里 [譯註 004] 縣) [註 025] , 벽골군 (碧骨郡) [註 026] , 두내산현 (豆乃山縣) [註 027] , 수동산현 (首冬山縣) [註 028] , 내리아현 (乃利阿縣) [註 029] , 무근현 (武斤縣) [註 030] , 도실군 (道實郡) [註 031] , 력평현 (礫坪縣) [註 032] , 돌평현 (堗坪縣) [註 033] , 금마저군 (金馬渚郡) [註 034] , 소력지현 (所力只縣) [註 035] , 알야산현 (閼也山縣) [註 036] , 간소저현 (干 [譯註 005] 召渚縣) [註 037] , 백해군 (伯海郡) [註 038] 한편백이(伯伊)라고도 이른다. , 난진아현 (難珍阿縣) [註 039] , 우평현 (雨坪縣) [註 040] , 임실군 (任實郡) [註 041] , 마돌현 (馬突縣) [註 042] 한편마진(馬珍)이라고도 이른다. , 거사물현 (居斯勿縣) [註 043] 이다.
註 001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 시( 全州 市)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5쪽).註 002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이서면(伊西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5~316쪽).註 003 지금은 전라북도 김제시(金堤市) 금구면(金溝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6쪽).註 004 지금은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고산면(高山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6쪽).註 005 지금은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6쪽).註 006 지금은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칠보면(七寶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7쪽).註 007 지금은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7~318쪽).註 008 지금은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정우면(淨雨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8쪽).註 009 지금은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 금산면(金山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8쪽).註 010 지금은 전라북도 정읍시(井邑市) 고부면(古阜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9쪽).註 011 지금은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부안읍(扶安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9쪽).註 012 지금은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9쪽).註 013 지금은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흥덕면(興德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9~320쪽).註 014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錦山郡) 금산읍(錦山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0쪽).註 015 지금은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부남면(富南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0쪽).註 016 지금의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용담면(龍潭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1쪽).註 017 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茂朱郡) 무주읍(茂朱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1쪽).註 018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 가야곡면(可也谷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1쪽).註 019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論山市)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2쪽).註 020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여산면(礪山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2쪽).註 021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화산면(華山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2~323쪽).註 022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임피면(臨陂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3쪽).註 023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함라면(咸羅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3쪽).註 024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옥구읍(沃溝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3쪽).註 025 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회현면(澮縣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4쪽).註 026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4쪽).註 027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 만경면(萬頃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4쪽).註 028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 용지면(龍池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4~325쪽).註 029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 청하면(靑蝦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5쪽).註 030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金提市) 성덕면(聖德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5쪽).註 031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순창읍(淳昌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5~326쪽).註 032 지금의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적성면(赤城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6쪽).註 033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은 청웅면(靑雄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6쪽).註 034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금마면(金馬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6쪽).註 035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6~327쪽).註 036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낭산면(朗山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7쪽).註 037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 봉동읍(鳳東邑) 장구리(長久里)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7쪽).註 038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장계면(長溪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8쪽).註 039 지금의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진안읍(鎭安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8쪽).註 040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장수읍(長水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8쪽).註 041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임실읍(任實邑)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8~329쪽).註 042 지금의 전라북도 진안군(鎭安郡) 마령면(馬靈面)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9쪽).註 043 지금의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번암면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 (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29쪽).譯註 001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정신문화연구원本에서는 柒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譯註 002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현종실록자본(현중실록자본) ≪삼국사기≫에서는 伊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譯註 003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折로 되어있으나, ≪고려사(高麗史)≫  에서는 忻으로 나와있지만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을 따른다.譯註 004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현종실록자본(현중실록자본) ≪삼국사기≫에서는 里로 나와 이를 교감하여 따랐다.譯註 005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에서는 干으로 되어있으나, ≪고려사(高麗史)≫  에서는 于로 나와있지만 중종간행본(중종간행본) ≪삼국사기≫을 따른다.주제분류정치>행정>군현>주·부
정치>행정>군현>군
정치>행정>군현>현 색인어<지명> 완산, 두이현, 구지산현, 고산현, 남원, 대시산군, 정촌현, 빈굴현, 야서이현, 고사부리군, 개화현, 흔량매현, 상칠현, 진내군, 두시이현, 물거현, 적천현, 덕근군, 가지나현, 지양초현, 공벌공현, 시산군, 감물아현, 마서량현, 부부리현, 벽골군, 두내산현, 수동산현, 내리아현, 무근현, 도실군, 력평현, 돌평현, 금마저군, 소력지현, 알야산현, 간소저현, 백해군, 난진아현, 우평현, 임실군, 마돌현, 거사물현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g_050r_0030_0070

  三國史記  卷第五十 列傳 第十
견훤(甄萱)
완산주에서 백제의 복수를 공언하다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옥산서원본1537년 보물 제525호 ] [성암본 보물 제722호 ] [정덕본1512년 보물 제723호 ] 견훤 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 [譯註 001] 에 이르니 주(州)의 백성들이 환영하고 고마움을 표하였다. 견훤 이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여 좌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삼국의 시초를 찾아보니, 마한 이 먼저 일어나고 후에 혁거세 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진한 과 변한 은 그를 뒤따라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백제는 금마산 (金馬山)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되었는데, 총장(摠章) 연간 [註 001] 에 당 나라 고종 이 신라의 요청으로 장군 소정방 (蘇定方)을 보내 배에 군사 13만을 싣고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신라의 김유신 (金庾信)이 흙먼지를 날리며 황산 (黃山)을 거쳐 사비 (泗沘)에 이르러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 에 도읍하여 의자왕 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
註 001 당 高宗의 연호로 668∼9년 2년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는 착오이다. 백제가 망한 660년은 顯慶 5년이므로 현경 중이라고 해야 한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 827쪽). 譯註 001 현재의 전북 전주 시.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투이유 색인어<이름> 견훤, 견훤, 혁거세, 고종, 소정방, 김유신, 의자왕 <지명> 완산주, 금마산, 황산, 사비, 완산 <국명> 마한, 진한, 변한, 당, 당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三國遺事  卷 第二
紀異第二    後百濟·甄萱
후백제를 건국하다  (892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 [조병순 소장본 ] 初 萱 生孺褓時父耕于野母餉之以兒置于林下虎來乳之郷黨聞者異焉及壮體皃雄竒氣倜儻不凡從軍入王京赴西南海防戍枕戈待敵其氣恒為士卒先以勞為裨将唐昭宗景福元年是新羅真聖王在位六年嬖竪在側竊弄國權綱紀紊弛加之以飢饉百姓流移群盗蜂起扵是 萱 竊有叛心嘯聚徒侣行撃京西南州縣所至響應旬月之間衆至五千遂襲 武珎州 自王猶不敢公然稱王自署為新羅西南都統行 全州 刺史兼御史中承上柱國漢南國開國公龍化元年己酉也一云景福元年壬子是時 北原 賊 良吉 雄強 弓裔 自投為麾下 萱 聞之遥授 良吉 職為裨將 萱 西廵至 皃山州 州民迎勞喜得人心謂左右曰百濟開國六百餘年 唐 髙宗 以新羅之請遣將軍 蘇定方 以舡兵十三万越海新羅 金庾信 卷土歴 黄山 與 唐 兵合攻百濟滅之予今敢不立都以雪宿憤乎遂自稱 後百濟王 設官分職是唐光化三年新羅 孝恭王 四年也 
주제분류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왕실>국왕>신상색인어<이름> 萱, 萱, 良吉, 弓裔, 萱, 良吉, 萱, 髙宗, 蘇定方, 金庾信, 後百濟王, 孝恭王 <지명> 武珎州, 北原, 皃山州, 黄山 <국명> 唐, 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삼국유사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y_002r_0010_0220_0040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후백제와 고려의 대립  (918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 [조병순 소장본 ] 정명(貞明) [譯註 001] 4년 무인에 철원경 (鐵原京) [譯註 002] 의 민심이 졸지에 변하여 우리 태조 (太祖)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견훤 은 이 소식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경하(慶賀)하고 마침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智異山)의 죽전(竹箭) 등을 바쳤다. 
견훤 은 우리 태조 와 겉으로는 화친하면서 속으로는 시기하여 그는 태조 에게 총마(驄馬)를 바치더니 (동광, 同光) 3년 [譯註 003] 겨울 10월(925년)에는 기병(騎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조물성 [註 001] 까지 이르렀다. 태조 도 역시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와서 그와 대적하였다. 견훤 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태조 는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 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從弟) 왕신 (王信)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 도 역시 외생질 진호 (眞虎)를 볼모로 교환하였다. 12월에 견훤 은 거서(居西) [譯註 004] 지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사자를 후당 (後唐)에 보내서 번신(藩臣)이라 일컬었다. 후당 [譯註 005] 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시중 판백제군사(檢校太尉 兼侍中 判百濟軍事)의 벼슬을 주고, 전과 같이 도독행전주자사해동서면도통 지휘병마판치등사 백제왕(都督行全州刺史 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判置等事 百濟王)이라 하고 식읍 [註 002] 2천 5백 호로 하였다. 
註 001 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금오산성으로 비정된다( 김갑동, 「후백제 견훤의 전략과 영역의 변천」,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註 002 후삼국과 병존하던 북중국의 나라는 후량, 후당과 거란의 태조와 태종대인데, 17년 동안 존속했던 후량과는 거의 외교관계를 맺지 않고 주로 후당과의 교섭에 치중하였다.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하지 않은 이유는 후량의 정세불안과 같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후량이 당을 멸망시켰다는 대외 명분 때문이라 생각된다. 반면에 후당은 명분상으로나마 당을 잇는 정통왕조로 자처하였다. 한반도에서 패권을 다투던 후삼국이 후량과 통교함으로써 역적의 오명을 함께 쓸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후삼국은 스스로 정통왕조로 자처했고 또 그렇게 받아들여진 후당에 사신을 보내 자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후백제는 신라와 고려가 후당에 빈번히 사신을 보낸 것과 달리 단 2차례의 사신만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권덕영, 「후백제의 해외교섭 활동」,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譯註 001 중국 5대 후량(後梁) 말제(末帝)의 연호로 915년~920년에 사용하였다.譯註 002 현재의 강원도 철원군 일대이다.譯註 003 중국 5대 후당(後唐) 장종(莊宗) 동광 3년(925)을 가리킨다(≪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譯註 004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居昌’으로 나와 있는데, 현재 경상남도 거창군이다.譯註 005 923년 산서성에 기반을 두고 있던 이존욱(李存勗)은 후량(後梁)의 말제(末帝)를 살해하고 낙양에서 당을 재건한다는 기치 아래 후당을 건국하여 935년 후진이 세워지기까지 13년동안 유지된 나라이다. 주제분류정치>외교>절교>나라 색인어<이름> 태조, 견훤, 견훤, 태조, 태조, 태조, 견훤, 태조, 견훤, 왕신, 견훤, 진호, 견훤 <지명> 철원경, 지리산 <국명> 후당, 후당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백제의 멸망  (660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 [조병순 소장본 ] 당 나라 현경(顯慶) [譯註 001] 5년에 이르러, 이 해는 의자왕 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던 해이며, 신라 김유신 이 소정방 [譯註 002] 과 더불어 백제를 쳐서 평정하였다. 백제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당 나라는 그 땅에 웅진 (熊津) [註 001] · 마한 (馬韓)· 동명 (東明)· 금련 (金蓮)· 덕안 (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酋長)들을 도독부(都督府) 자사(刺史)를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신라 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고서 웅주 (熊州) [譯註 003] · 전주 ( 全州 ) [譯註 004] · 무주 (武州) [譯註 005] 등 세 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註 001 백제 제22대 문주왕 즉위년(475)에 고구려의 침입과 개로왕의 패사(敗死)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한성(漢城)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건설한 백제의 도읍지이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직접적인 계기는 고구려의 침략과 개로왕의 패사, 그리고 한성의 폐허화 등이 있었지만, 도읍으로 웅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즉, 문주왕의 웅진 천도는 자연지리적인 조건 이외에 주변 지방 세력과의 관계도 고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남석, 「백제 웅진 왕도와 웅진성」, ≪마한·백제문화≫17, 2007  ). 개로왕 정권에 참여한 지배계급이 패전과 천도의 혼란기에 몰락하면서 문주왕은 개로왕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귀족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때 등장하는 세력이 해씨(解氏)이다. 해씨는 목씨(木氏) 세력과 함께 웅진 천도를 주도함으로써 중앙 정계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해씨는 고구려의 재침입을 고려하면서 자신들의 근거지였던 북방(北方) 지역에서 멀지 않고 토착 세력이 강하지 않은 지역인 웅진을 선택하였다. 동시에 그들에게 우호적인 연씨(燕氏) 세력이 웅진 근처에 있었던 것도 고려되었을 것이다(정재윤, 「문주·삼근왕대 해씨 세력의 동향과 곤지계의 등장」, ≪사학연구≫60, 2000). 연씨 입장에서도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 위해 유력한 귀족인 해씨의 후원이 필요했었을 것이다( 이기백, 「웅진시대 백제의 귀족세력」, ≪백제연구≫9, 1978  ). 그러나 패전의 후유증과 귀족연합의 기반 위에서 문주왕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문주왕은 본거지를 잃은 부여족계통의 구(舊)귀족인 해씨, 진씨와 남부에 기반을 두고 있던 사택씨(沙宅氏), 연씨(燕氏)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정권쟁탈전을 제어하지 못했다(정재윤,「문주·삼근왕대 해씨 세력의 동향과 곤지계의 등장」, ≪사학연구≫60, 2000). 이후 웅진시대에 일어난 왕의 피살과 반란 등의 내분으로 인해 왕은 이를 수습하고 세력개편을 통한 왕권 강화를 위해 사비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보이는 사씨(沙氏) 세력과의 긴밀한 협조가 이루어진다. 결국 성왕 16년(538)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게 되고 웅진은 문주왕에서 성왕 재위 기간인 약 60여 년간(475~538) 백제의 도읍으로 이용된 것이다(김주성, 「사비천도와 지배체제의 개편」, ≪한국사≫6, 국사편찬위원회, 1995). 그러나 웅진성은 사비로 천도한 뒤에도 지방통치의 중심성인 5방성 가운데 하나인 북방성(北方城)으로써 계속 기능하게 된다. 왕도(王都)의 천도와 관계없이 사비시대에도 웅진성은 군사, 행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현숙, 「백제시대의 지방통치와 영역」,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1998  ). 이외에도 웅진성이 5방성 가운데 가장 중심성이였으며, 별궁(別宮)으로도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譯註 001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로 656년~660년에 사용하였다.譯註 002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구당서(舊唐書)≫권83 열전33 소정방).譯註 003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지금의 공주 일대이다.譯註 004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 시를 가리킨다. 본래 백제의 완산 또는 비사벌, 비자벌로 불렸는데, 진흥왕대 이후 신라에 병합되면서 완산주로 불렸고, 경덕왕대 이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졌다.譯註 005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가리킨다.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으며, 신라 경덕왕 16년 이후 무주라고 불렸다. 고려 태조 23년에 광주로 개칭되었다.주제분류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 색인어<이름> 의자왕, 김유신, 소정방 <지명>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웅주, 전주 , 무주 <국명> 당, 신라, 당, 신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y_002r_0010_0220_0010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견훤의 출생과 계보  (867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 [조병순 소장본 ] 후백제 (後百濟) 견훤 (甄萱) 
≪ 삼국사 (三國史)≫ 본전(本傳) [註 001] 에는 “ 견훤 은 상주 (尙州) 가은현 (加恩縣) [註 002] 사람으로, 함통(咸通) [譯註 001] 8년 정해에 태어났다. 본래의 성은 이(李)씨였는데 뒤에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 (阿慈个) [註 003] 는 농사지어 생활했는데 광계(光啓) [譯註 002] 연간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산주(尙州) 에 웅거하여 스스로장군 [譯註 003] 이라고 일컬었다.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중에 견훤 은 남보다 뛰어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 이비가기 (李碑家記)≫ [註 004] 에는 “ 진흥대왕 의 왕비 사도 (思刀) [譯註 004] 의 시호는 백융부인 [譯註 005] 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 (仇輪公) [譯註 006] 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譯註 007] 선품 (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譯註 008] 작진 (酌珍) [註 005] 이 왕교파리 (王咬巴里) [註 006] 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 (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 [註 007] 이다. 아자개 의 첫째부인은 상원부인 (上院夫人) [譯註 009] 이요, 둘째부인은 남원부인 (南院夫人) [譯註 010] 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훤 (萱)이요, 둘째아들이장군 능애 (能哀)요, 셋째아들이장군 용개 (龍蓋)요, 넷째아들이 보개 (寶蓋)요, 다섯째아들이장군 소개 (小蓋)이며, 딸이 대주도금 (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註 001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 그러나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 예컨대 견훤이 함통 8년(867)에 태어났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구삼국사(舊三國史)≫ 견훤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이희관,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정상의 몇 가지 문제」,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註 002 본 조의 내용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을 통해 신라시대에는 가은현이 상주 관내의 고령군(古寧郡)에 속해 있었으며, 그 지명이 가해현이었다가 경덕왕 때에 가선현으로 고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가은현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현종이 상주목(尙州牧)의 속현으로 삼았으며, 뒤에 공양왕이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겨 속하게 하였다. 신라시대의 고령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咸昌邑)이며, 가은현은 상주와 함창 부근이었다고 비정된다( 강인구·김두진·김상현·장충식·황패강, ≪역주 삼국유사≫2, 이회문화사, 2002  ). 이 지역에 견훤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견훤산성(甄萱山城)이 있다.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표고 약 400m의 속칭 장바위산을 에워싼 성벽 길이 약 1㎞의 석성이다. 산성의 안쪽에서는 기와편이나 토기편 등이 다량 출토되고 있어서 제법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주읍지(尙州邑誌)≫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라고 하였으며, 견훤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산성뿐만 아니라 상주 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 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정영호, ≪상주지구 고적조사 보고서≫, 단국대학교출판부, 1969).註 003 아자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에서는 아자개(阿慈介)로, 같은 책 신라본기 경명왕(景明王) 2년조에는 아자개(阿玆盖)로, ≪고려사≫권1 태조(太祖) 원년(918)  에는 아자개(阿字盖)로 나타나 있으며,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아자개(阿慈蓋)로 표시되어 있다. 이렇듯 여러 기록에서 같은 음의 다른 한자로 표기되어 있는 현상은 동음이사(同音異寫)라고 하며, 모두 동일인으로서 견훤의 아버지로 보고 있다. 아자개는 신라 말·고려 초의 지방 세력가로서 처음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신라 하대의 혼란기에 전국 각지에서 농민을 포함한 지방 세력이 봉기하자, 아자개는 헌강왕(憲康王) 11년(885)-진성여왕(眞聖女王) 원년(887)에 사불성(沙弗城,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을 근거지로 군대를 일으켜 장군을 자칭하였다. 기존의 경제적 기반을 토대로 가병(家兵)·사병(私兵)적 성격의 군사적인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견훤이 이(李)씨 성을 가지고 있다가 견(甄)씨로 바꾼 점을 통해서 아자개의 성이 이씨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난한 농민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아자개가 사불성(沙弗城)의 장군을 칭할 정도라면 경제적·사회적인 기반을 가진 토착 세력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 신호철, ≪후백제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 그 뒤 그의 아들인 견훤이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거하고, 효공왕 4년(900) 완산주(完山州)를 근거로 후백제를 세운 이후에도, 아자개는 계속해서 상주 지방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 후 아자개의 행적은 ≪고려사≫권1 세가1 태조 원년(918)조에 “갑오일에 상주 반란군의 두령 아자개(阿字蓋)가 사절을 시켜 귀순하여 왔으므로 왕이 의례를 갖추어 그 사절을 맞이하도록 명령하였다(甲午 尙州賊帥阿字盖遣使來附 王命備儀迎之)”라 하여 918년 7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고려사≫에 보이는 아자개(阿字盖)와 견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아자개가 견훤과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고려사≫에 견훤과 아자개의 관련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아자개가 고려에 내부할 때 견훤의 형세로 보아 아들의 적에게 귀항(歸降)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는 점을 들어 양자는 출신 지방만 같을 뿐 전혀 별개의 지방 세력으로서 부자지간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상기, ≪동방사논총≫, 서울대학교출판부, 1974  ). 그리고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훤조에 천성(天成) 2년(927)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취(攻取)하여 불태운 기록이 보이는데, 근품성은 견훤의 출신지로 알려진 상주의 속현이다. 고향 지방에 대한 처리로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견훤의 출신지가 상주라는 점과 아자개와 견훤이 부자간이라는 점을 부인하고 있다(박경자, 「甄萱의 勢力과 對王建關係」, ≪숙대사론≫11·12합본, 1982).註 004 본 조에 인용된 두 경우를 모두 견훤의 가계에 대해 기록한 ≪이제가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병도, ≪(原文幷譯註)三國遺事≫, 동국문화사, 1956  ). 그러나 경우를 나누어 해석하는 입장도 있다. 이 견해는 ≪이제가기≫의 사료적 가치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견훤의 가계보(家系譜)로 해석하였는데, 앞에 인용한 것은 책이름이 ≪이비가기(李碑家記)≫로 견훤 선대(先代)의 기록이고, 뒤의 인용한 책이름은 ≪이제가기≫로 견훤 후대(後代)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신호철, ≪후백제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 한편, ≪이제가기≫를 고려 중말기(中末期) 사람으로 짐작되는 이제(李磾)의 사가보첩(私家譜牒)과 같은 기록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상기, 1974) 또한 고창군(古昌郡) 전투와 같은 고려 측 관점이 강하게 노출된 정보가 ≪이제가기≫에 담겨 있었을 리 없다고 하여 신뢰하지 않는 입장도 있다( 이강래, 「≪삼국유사≫후백제견훤조의 재검토」,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註 005 본 조에서는 견훤의 할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진흥왕-구륜공-선품(善品)-작진(酌珍)-아자개(阿慈个)-견훤으로 이어지는 견훤의 원계(遠系)는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이도학, 「견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 여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註 006 본 조에 따르면 진흥왕-구륜공-선품(善品)-작진(酌珍)-아자개-견훤으로 이어지는 견훤의 원계(遠系)는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이도학, 「甄萱의 出身地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 2001). 여기 외에는 기록이 없다. 註 007 견훤의 가계가 신라 진흥왕과 관련된 김씨 혈통이라는 기사는 실제로 신라 왕실과 연결되었다는 것보다는 정치적 의도, 즉 신라 전통의 계승 차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도학, 「진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 2000).譯註 001 당(唐) 17대 의종(懿宗)의 연호로 860년~873년에 사용하였다.譯註 002 당(唐) 희종(僖宗)의 연호 중 하나로 885년~887년에 사용하였다.譯註 003 원래는 신라 최고의 군관(軍官)이었는데 신라말에 지방 호족들이 득세하면서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譯註 004 모량리(牟梁里) 각간(角干) 영실(英失)의 딸로서, 진흥왕 33년(572)에 죽은 태자 동륜(銅輪)과 진지왕이 된 왕자 사륜(舍輪)의 어머니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에 따르면, “秋八月 … 王妃亦効之爲尼, 住永興寺”,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36년(614)조에는 “春二月 … 永興寺塑佛自壞 末幾 眞興王妃比丘尼死”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 염촉멸신(原宗興法 猒髑滅身)조에는 “國史云 建福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壞 未幾 眞興王妃比丘尼卒 按眞興乃法興之姪子 妃思刀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 亦出家爲尼 而非永興寺之創主也 則恐眞字當作法 謂法興之妃巴刁夫人爲尼者之卒也”라고 하였으며, ≪삼국유사≫ 왕력에는 “第二十四眞興王 … 母只召夫人 一作息道夫人朴氏 牟梁里英失角干之女”라고 하였다. 이는 사도부인을 진흥왕의 어머니로 보는 것으로, ≪삼국유사≫ 후백제견훤조나 ≪삼국사기≫ 진흥왕 즉위년조와 혼선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본문 외에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의 어느 곳에도 사도부인이 백숭부인(白夫人)으로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譯註 005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즉위원년조에 ‘朴氏 思道夫人’이라 했고 ≪삼국유사≫ 권1 왕력에는 ‘一作息道夫人朴氏’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 외에 어디에도 백융부인을 시호되었다는 기록은 없다.譯註 006 견훤의 고조부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씨 집안의 계보(系譜)인 이제가기에 신라의 김씨 왕가의 계보가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계보가 정치적 의도에서 생겨난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다( 이도학, 「견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 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2001  ). 한편,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진흥왕조에는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銅輪)과 둘째 아들인 사륜(舍輪)이 나와 있을 뿐, 구륜공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譯註 007 신라 17관등 중 제3관등이다.譯註 008 신라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譯註 009 본 조에서는 상원부인을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첫째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아자개는 견훤·능애(能哀)·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대주도금(大主刀金) 등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중 누구의 소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원문에서 후에 인용한 ≪이제가기(李磾家記)≫에서는 상원부인이 견훤의 아내로 기록되어 있다.譯註 010 본 조에서는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의 둘째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아자개는 견훤·능애(能哀)·용개(龍盖)·보개(寶盖)·소개(小盖)·대주도금(大主刀金) 등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고 하였는데, 상원부인과 남원부인 중 누구의 소생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남원부인은 이곳 외에 다른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주제분류사회>사회조직>신분>성씨 색인어<이름> 견훤, 견훤, 아자개, 견훤, 진흥대왕, 사도, 백융부인, 구륜공, 선품, 작진, 왕교파리, 원선, 아자개, 아자개, 상원부인, 남원부인, 훤, 능애, 용개, 보개, 소개, 대주도금 <지명> 상주, 가은현 <서명> 삼국사, 이비가기 <국명> 후백제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 三國遺事  卷 第二
  •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출생에 관한 이설  (892년 미상 음력)
또 ≪고기(古記)≫에는 이렇게 말했다. [註 001]
“옛날에 부자 한 사람이 광주 (光州) [譯註 001] 북촌(北村) [註 002] 에 살았다.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번 자줏빛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관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을 찾아 북쪽 담 밑에 이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아기를 배어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 (甄萱)이라 일컬었다.
경복(景福) [譯註 002] 원년(元年) 임자(壬子)에 이르러 왕이라 일컫고 완산군 (完山郡) [譯註 003] 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다스린지 43년 청태(淸泰) [譯註 004] 원년(元年) 갑오(934년)에 견훤 의 세 아들이 반역하여 견훤 태조 에게 항복하였다. 아들 금강 이 즉위하여 [譯註 005] 천복(天福) [譯註 006] 원년(元年) 병신(936년)에 고려 군사와 일선군 (一善郡) [譯註 007] 에서 싸웠으나후백제(後百濟)가 패배하여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다.
이 내용은 본문 외에 다른 문헌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를 ≪고기(古記)≫에서 전하는 내용을 견훤의 탄생설화가 아닌 혼인설화라고 인식하여, 견훤의 처가를 광주 지역의 토착 호족 세력으로 바라본다(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하지만 이를 혼인설화가 아닌 탄생설화로 보고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견훤의 출생지 및 아자개와의 관계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다( 김상기, 「견훤의 가향에 관하여」, ≪가람이병기박사송수논문집≫, 1966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한편 견훤이 광주 출신의 여자와 결혼했을 개연성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견훤의 혼인설화로 이해한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지 않기도 한다( 이희관,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정상의 몇 가지 문제」,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광주 북촌에 대해 ‘常州 北村’의 오각(誤刻)으로 보기도 한다( 이도학, 「진훤의 출신지와 그 초기 세력기반」,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 주류성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2000).
현재의 광주광역시 일대이다.
당 소종(昭宗)의 연호 중 하나로 892년~893년에 사용하였다.
현재 전라북도 전주 시 일대이다.
중국 5대 후당(後唐) 폐제(廢帝)의 연호이다. 청태 원년은 고려 태조 9년(934)이다. 그러나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한 기사는 본문의 뒷부분과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 청태 2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의 청태 원년은 청태 2년의 誤記이다.
여기에는 금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검(神劍)’의 잘못인 듯하다. 본문의 뒷 부분이나 ≪삼국사기≫ 권50 열전 견훤조에는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을 사랑하였으므로, 그의 형들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3형제가 난을 일으켜 신검이 왕으로 등극하였다고 나와 있다.
중국 5대 후진(後晉) 고조(高祖)의 연호이다.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이다.
주제분류
사회>인구>생로병사>출산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색인어
<이름> 견훤, 견훤, 견훤, 태조, 금강 <지명> 광주, 완산군, 일선군

 

  확장검색 > 디렉토리검색 > 형태별 > 도서 > 삼국유사 > 卷 第二 > 제2 기이(紀異第二) >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 후백제를 건국하다 
삼국유사자료소개
 범례
 해제
 상세검색
 글자 크게 작게 출력 오류신고 리스트 이전검색 다음검색 이전자료 다음자료 상위자료 원문보기 원문팝업 HOI : NIKH.DB-sy_002r_0010_0220_0030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
후백제를 건국하다  (892년 미상 음력)
원문이미지 [판본전체] [규장각본1512년 국보 306-2호 ] [조병순 소장본 ] 처음에 견훤 이 나서 포대기에 싸였을 때, 아버지는 들에서 밭을 갈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밥을 가져다 주려고 아이를 수풀 아래 놓아 두었더니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니 마을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아이가 장성하자 몸과 모양이 웅장하고 기이했으며 지기가 크고 기개가 있어 범상치 않았다. 
군인이 되어 서울로 들어갔다가 서남 해변에 가서 변경을 지키는데 창을 베개삼아 적을 대비하였으니 그의 기상은 항상 사졸에 앞섰으며 그 공로로 비장(裨將) [註 001] 이 되었다. 당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원년은신라 진성왕의 재위 6년이다. 이때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곁에 있어서 국권을 농간하니 기강이 어지럽고 해이하였으며, 기근이 더해지니 백성들은 떠돌아다니고 도둑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견훤 은 남몰래 반역할 마음을 품고 무리를 불러모아 서울의 서남 주현(州縣)들을 공격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호응하여 한 달 동안에 무리는 5천 명이나 되었다. 드디어 무진주 (武珍州) [譯註 001] 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공공연하게 왕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스스로신라서남도통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국개국공이라고 하였다. 용기(龍紀) [譯註 002] 원년 기유(889년)였다. 혹은 경복 원년 임자(892년)의 일이라고도 한다. [註 002] 
이때 북원 (北原) [譯註 003] 의 도둑 양길 (良吉)의 세력이 몹시 강성하여 궁예 (弓裔) [譯註 004] 는 스스로 그의 부하가 되었다. 견훤 이 이 소식을 듣고 멀리 양길 에게 직책을 주어 비장으로 삼았다. 견훤 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 에 이르니 주의 백성들이 영접하면서 위로하였다. 견훤 은 민심을 얻은 것이 기뻐하여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백제가 나라를 열은 지 6백여 년에 당 나라 고종 (高宗)은신라의 요청으로 소정방 (蘇定方) [譯註 005] 을 보내어 수군 13만 명으로 바다를 건너게 하고신라의 김유신 (金庾信)은 군사를 다 거느리고 황산 (黃山) [譯註 006] 을 거쳐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그러니 내가 이제 어찌 국도를 정하여 예전의 원한을 씻지 않겠는가” 드디어 스스로 후백제왕 이라고 일컫고 관직을 설치했으니 이때가 당나라 광화(光化) [譯註 007] 3년(900년)이요,신라 효공왕 (孝恭王) 4년이다. 
註 001 신라의 무관직에는 비장이 나타나 있지 않아 그 성격을 명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이를 보좌관으로 해석하기도 하였고(이병도,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 견훤이 일반 군인으로부터 승진한 그 다음 직위가 비장이었기 때문에 비장은 소규모 부대를 이끄는 하급지휘관직으로 보기도 하였다( 이희관, 「견훤의 후백제 건국과정상의 몇 가지 문제」, ≪후백제와 견훤≫, 서경문화사, 2000  ).註 002 ≪삼국사기≫ 견훤조, 연표, 신라본기 진성왕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서는 견훤의 건국을 892년으로 기술하여, 견훤의 후백제 건국을 892년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기존 연구에서 사료를 그대로 받아들여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이후 백제국이 수립될 때까지를 마치 동시에 일어난 사건처럼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후 백제국이 수립될 때까지를 마치 동시에 일어난 사건처럼 취급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후 후백제가 건국되기까지 10여년간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룩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본문의 내용과 내용 뒤에 보이는 42년 庚寅을 바탕으로 후백제의 건국 紀年을 889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6  ).譯註 001 현재 광주광역시 일대이다.譯註 002 당(唐) 소종(昭宗)의 연호로 889년에 사용하였다.譯註 003 현재의 강원도 원주 일대이다.譯註 004 후고구려의 건국자로, 재위 기간은 910~918년이다.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왕인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이라 하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이다. 궁예는 태어나면서부터 신라 조정에서 배척을 받아 신분을 속이고 유모 밑에서 자랐다. 일찍이 세달사(世達寺)에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고 하였다. 진성왕 즉위 후 초적이 일어나자, 그는 기훤에게 의탁하여 뜻을 펴고자 했으나 잘 대우해 주지 않자, 892년(진성왕6)에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의 군사를 빌어 원주로부터 예전, 영주, 평창, 강릉 등을 점령한 그는 이를 기반으로 한강과 임진강 연안을 공략한 후,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칭하였다. 이후 한강과 임진강 연안을 공략한 후, 901년에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고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칭하였다. 이후 918년에 이르기까지 28년 동안 통치하다가 왕건을 추대한 세력에 의해 축출되어, 평강 지역의 백성에게 피살되었다.譯註 005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구당서(舊唐書)≫권83 열전33 소정방).譯註 006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읍이다.譯註 007 당 소종(昭宗)의 연호로 898년~900년에 사용하였다.주제분류정치>왕실>국왕>국명·연호
정치>왕실>국왕>신상 색인어<이름> 견훤, 견훤, 양길, 궁예, 견훤, 양길, 견훤, 견훤, 고종, 소정방, 김유신, 후백제왕, 효공왕 <지명> 무진주, 북원, 완산주, 황산 <국명> 당, 당Copyright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과천시 교육원로 86 메일보내기 개인정보보호정책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통일신라
碑文(I)
雙溪寺 眞鑑禪師塔碑

 
소재지(출토지) 慶南 河東郡 花開面 雲樹洞 雙溪寺   이미지보기
                              
시대 887년  
크기 높이 203cm、폭 100cm、글자크기 2cm  
서체 및 재질 楷書  
주제분류 문화>문화재>금석문>碑文  
역주자 金南允  
解釋文
 

解釋文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

 
前 중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篆字의 제액을 씀.

 
무릇 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五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가효)을 얻으니 미각은 六經에서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善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廬山의 慧遠이 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있어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더불어 至善의 道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心法을 말씀하신 데 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고 그림자처럼 가서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데 이르는 것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공자가 문하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으니 저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하는 데 들어맞은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慧昭이며 속성은 崔氏이다. 그 선조는 漢族으로 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阿㜷{弥/女}(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天時를 이용하는 것으로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업으로 삼았다. 손으로 그물을 맺는데 힘쓰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데 부합하였다. 능히 부모에게 콩죽을 드려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넉넉하였고 진실로 養親의 노래(采蘭之詠)에 들어 맞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이내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원 20년(804), 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서쪽으로 건너 가게 되었는데 속된 일에도 재능이 많아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나라의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나 滄州에 이르러 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는데 처함이 참으로 칠도인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길이 붉은 수염의 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達磨와 함께 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知見을 증득하였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紫閣으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空을 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태화 4년(830) 귀국하여 大覺의 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尙州 露岳山 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經을 듣게 한 것 또한 그것 만이 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 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성 3년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慧昭라 하였는데 昭자는 聖祖의 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僧稠가 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慧遠公의 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六祖靈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곧 『梁史』에 “시중 저상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王土에 살면서 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고 하였고, 또 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평소 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玉泉의 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楊晉方과 숭문대의 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眞鑑禪師, 탑명을 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暘谷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가 비석을 이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法은 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혹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門人들의 큰 바램으로 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五能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銘을 지어 이른다.

 입을 다물고 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松門에 빛나리라.

 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奐榮이 글자를 새김.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