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휘 보천 (사상공) 관련기록/휘 보명 묘표

문인 최보명(崔普明)

아베베1 2012. 6. 7. 13:15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최보명(崔普明)]



문인 최보명(崔普明)

선생이 살았을 적에는 / 先生之生
우리 도가 의지하였는데 / 吾道其依
선생이 돌아가셨으니 / 先生之亡
후학은 누구에게 가리오 / 後學何歸
어찌 알았으랴 선생이 / 豈意先生
이렇게 돌아가실 줄이야 / 而至於斯
시운 때문인가 천명 때문인가 / 時耶命耶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 / 孰實尸之
아, 슬프도다 / 嗚呼痛哉
훌륭하도다 선생이여 / 猗歟先生
기운과 도량이 빼어났네 / 氣度挺特
상서로운 난새나 봉황 같기도 하고 / 祥鸞瑞鳳
차가운 물이나 가을 달 같았네 / 寒水秋月
게다가 문헌세가에 태어나 / 矧乎文獻
그 세덕을 이었다네 / 迺其世德
일찍부터 선조의 가르침 받아 / 早襲先訓
구용(九容)과 사물(四勿)을 실천하였고 / 克踐九四
굳은 뜻으로 힘써 행하기를 / 篤志力行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네 / 夙夜靡怠
입신양명한 지 얼마 안 되어 / 立揚無幾
혹독한 당화를 만났으니 / 黨禍斯酷
육아의 시 읊기를 그치고 / 詩廢蓼莪
산림에 사는 것을 달게 여겨 / 分甘丘壑
임금의 부름 빈번했으나 / 新命雖勤
지조는 더욱 확고하였네 / 素守愈確
매미 허물 벗듯 속세를 버리고 / 蟬蛻塵埃
경전을 깊이 파고들어 / 沈潛經籍
지극히 깊고 미세한 뜻을 / 窮深極微
정밀하게 분석하였네 / 毫分縷析
단사표음(簞食瓢飮)으로 살면서도 / 一簞一瓢
그 즐거움 바꾸지 않았고 / 不改其樂
문 앞에는 항상 신발이 가득하여 / 戶屨常滿
정성스레 인도하였네 / 諄諄誘掖
모든 서원과 사우는 / 凡厥院宇
대부분 비고 적막한데 / 率多虛寂
오직 이 석실서원만은 / 唯此石室
백록동처럼 유독 빼어나 / 特一白鹿
배우는 무리 가득하여 / 學徒莘莘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였네 / 儼然千百
귀를 열어 주고 눈을 뜨게 하여 / 聾披瞽發
비운 채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니 / 虛往實歸
사람을 진작시킨 공로는 / 作人之功
옛적에도 드문 일이었네 / 在古亦稀
여사로 문장을 익혔으니 / 餘事文章
실로 인의에 근본하여 / 實本仁義
포백숙속(布帛菽粟) 같은 맛이라 / 菽粟之味
모두들 귀하게 여겼다네 / 人皆知貴
하늘이 어진 이 보우하지 않아 / 天不佑仁
갑자기 후사를 잃게 되었으니 / 奄哭其嗣
수지가 남긴 글을 / 受之遺唾
회옹이 깊이 슬퍼하였지
/ 晦翁深悲
맑고 순수함은 상하기 쉽고 / 淸粹易愆
질병이 따르기 마련이나 / 疾病相隨
다행히도 올봄에 / 何幸今春
저절로 병이 나아 / 勿藥而喜
절간에서 바람을 쐬고 / 蕭寺和風
강가에서 달을 구경했네 / 江皐月夕
지팡이 짚고 소요하며 / 杖屨逍遙
마음껏 유유자적하니 / 隨意自適
아마도 이제부터는 / 意謂自此
장수를 누릴 줄 알았는데 / 永享耈耋
몇 달 되지도 않아 / 曾未數月
갑자기 돌아가셨네 / 遽至易簀
임금은 애도하고 / 當宁震悼
사림은 오열하니 / 士林摧咽
아, 슬프도다 / 嗚呼痛哉
이 나로 말하자면 / 顧此小子
가장 못난 사람인데 / 最居人下
어리석다 여기지 않고 / 不鄙其愚
특별히 가르쳐 주셨네 / 特加銜轡
책 들고 항상 모시면서 / 執經常侍
참으로 열심이었지만 / 誠非不篤
상을 치르거나 병에 걸려 / 衰麻疾疢
열 번 추위에 한 번 햇볕 쬐는 듯 / 十寒一曝
성품도 어둡고 막혔기에 / 性且昏蔽
마음으로 터득하지 못하여 / 實昧心得
가까이 모시고 지내면서 / 奉以周旋
학업을 마치기를 바랐는데 / 庶冀卒業
어찌 알았으랴 오늘에 와서 / 那知今日
나의 스승을 빼앗길 줄을 / 奪我丈席
어두운 길을 더듬게 되었으니 / 擿埴冥途
갈 곳 몰라 헤매이네 / 倀倀何之
대문과 담장은 그대로인데 / 門墻如昨
모든 일이 이미 글렀구나 / 萬事已非
옛적 내가 배우러 갔을 적에 / 昔我趍隅
옥 같은 용모에 쇠북 같은 목소리 / 玉色金聲
이제 내가 와서 보니 / 今我來思
흰 장막에 붉은 명정뿐이네 / 素帷丹旌
그 모습 영원히 멀어지고 / 儀刑永隔
그 말씀 들을 곳 없구나 / 謦欬無聞
서럽게 울부짖으니 / 長號大慟
오장이 타는 듯하고 / 五內如焚
하늘에 호소할 길이 없으니 / 籲天無階
누가 나의 슬픔을 알겠는가 / 孰知我悲
어둡지 않은 영령이 있거든 / 不昧者存
성의로 차린 제물을 흠향하소서 / 庶歆誠意


 

[주D-001]구용(九容)과 사물(四勿) : 군자가 몸을 닦는 데에 마땅히 지녀야 할 족용중(足容重)을 위시한 아홉 가지 자세와 인(仁)을 행할 때 경계해야 할 비례물시(非禮勿視) 등 네 가지 실천 강령을 말한다.
[주D-002]수지(受之)가 …… 슬퍼하였지 : 수지는 주희의 아들 주숙(朱塾)의 자인데, 주희보다 앞서 죽었다. 농암의 아들 김숭겸이 농암보다 먼저 죽은 일이 주희의 경우와 흡사하므로 그에 비유한 것이다.
농암집 별집 제4권
 부록(附錄) 3○제가장소(諸家章疏)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하기를 청하는 소 양주 유생(楊州儒生)을 대신하여 지었다.

문인(門人) 어유봉(魚有鳳)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문교(文敎)의 융성함이 전대를 능가하여 제사 지내는 사우(祠宇)가 고을마다 널려 있습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높이고 받드는 사람은 참된 선비이자 훌륭한 스승을 누구보다도 우선하니, 유학을 선양하고 사림을 격려하는 효과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사문(斯文)을 붙들어 세울 만한 도덕과 학문이 충분하고 후학의 모범이 될 만한 점이 있다면, 비록 세월이 지나 먼 후대라 하더라도 그 풍도를 듣고 그 업적을 상상한 나머지 존숭하고 보답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한 시대에 함께 살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아 존경하고 심복한 사람들로서 그 도덕이며 업적이 거룩하기가 옛사람의 수준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것을 깊이 알고 있다면, 사우에 봉안하여 제향을 올리는 예를 더욱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근래에 세상을 떠난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창협(金昌協)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아, 김창협이 일가를 이루고 조정에 선 때는 바로 우리 전하의 임술년(1682, 숙종8)으로, 경연을 드나들며 가까이서 가르침을 드렸던 기간이 거의 예닐곱 해에 이르렀습니다. 훌륭한 말씀과 오묘한 논리는 지금까지도 전하의 귓전에 남아 있을 것이니, 김창협의 훌륭한 점은 참으로 전하께서도 통촉하시는 바일 것입니다. 신들의 한두 마디 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학문을 닦고 도에 나아간 공부로 말하자면 대부분 만년에 물러난 뒤의 일이니, 전하께서 혹시 자세히 알지 못하시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던 바를 전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김창협은 타고난 성품이 매우 빼어나고 총명이 남다른 데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보고 들은 바가 몸에 배었기에 분발하여 경술과 문장을 익혔습니다. 나이가 들어 사우(師友)들 사이를 출입하며 보고 느끼고 절차탁마하면서 도를 추구하려는 뜻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마침내 경전의 주석에 관한 학설과 정자, 주자의 성리(性理)에 대한 논의를 깊이 탐색하고 힘써 궁구하여 대의를 분명히 터득하였습니다. 관직을 그만둔 뒤로는 오로지 사도(斯道)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공부와 치밀하게 본심을 지키고 성찰한 노력이 지난날에 비해 더욱 전일하고 독실하였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뜻을 겸손히 하여 미진한 바를 더욱 추구하고, 충분히 몸에 배도록 하여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다리며, 반복하여 축적하면서 진리를 터득하지 못하면 발분하여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진리를 터득하면 즐거워서 걱정도 잊어버리는 과정을 수행하여 반드시 진정으로 알고 실천에 옮기고 나서야 멈추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는 바가 날이 갈수록 정밀하고 밝아졌으며 지닌 바가 날이 갈수록 높고 원대해져서 내면의 덕이 은연중에 날로 드러나는 실상을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또 듣건대 주자의 학문은 공자 이후로 한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김창협은 주자에 대해 자나 깨나 승복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존숭하고 믿으면서, 사서(四書)의 집주(集註)와 장구(章句)로부터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 같은 책까지 참고하여 고증하고 곱씹으며 파고들어, 그 말이 절실하고 정확하여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일찍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편찬하였는데, 김창협이 옥당에 있었을 때 왕명을 받들어 교정하고, 따로 문목을 만들어 편지를 보내 질문하였는데, 그의 인정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끝내 송시열의 간절한 부탁을 받게 되어서는 깊은 산속에서 책을 품은 채 쉬지 않고 연구하여 깊은 뜻을 풀어내어 그 일을 마침으로써 주자의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터럭만큼도 남기지 않고 찬란히 빛나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그가 평생토록 공력을 쏟은 바는 오로지 주자의 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논변과 저술은 여기에 근본을 두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해하여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인접한 것까지 두루 통달하여 그 의미를 넓게 알았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의 의혹을 깨뜨리고 속된 선비들이 인습해 오는 오류를 바로잡은 점에 있어서는 이전 사람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말하더라도 옳을 것입니다. 대저 성현의 가르침은 반드시 먼저 널리 배운 뒤에 예로써 요약하며, 배우고 묻고 사색하고 분변한 뒤에 그것을 독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후세의 학자들은 요약하기만 하고 널리 배우는 데 힘쓰지 않아 진실로 고루해진 허점이 있으며, 널리 배우는 데만 힘쓰는 사람은 그저 범위만 넓고 부실하여 진정으로 도를 터득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찌 배운 것을 존숭하고 아는 것을 실천하는 근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김창협의 학문으로 말하자면 먼저 널리 배우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노력을 통해 터득하였기에 이 도리를 두루 정밀하게 보았으므로, 위로 진리를 통달하는 공부가 절로 투철하고 명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반성하여 몸가짐을 지키면서도 자랑하지 않고 텅 비고 고요하게 길렀으며, 구차하고 어려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간략하고 평이하게 행하였습니다. 집안에 근본을 두고서 향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화평하고 간절하였기에 풍속을 도탑게 할 수 있었으며, 말로 표현하고 절개로 드러난 것도 모두 바르고 깨끗하여 세상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었으니, 그 높고 깊은 조예와 완전하고 순수한 성취를 따지자면 어찌 세상에 드문 훌륭한 선비가 아니겠습니까.
아, 김창협과 같은 어진 이가 세상에 나아가 쓰였더라면 치도(治道)를 아름답게 수식하여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쳤을 것이나, 불행히 화를 당한 뒤로는 맹세코 스스로 버려지고자 하였습니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끝내 간곡히 부르시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조야(朝野)에서 모두 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향리에서 덕을 쌓아 유림의 사표(師表)가 되었기에 가까이는 일개 고을로부터 멀리 팔도에 이르기까지 분발하여 본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니, 세교(世敎)에 도움 된 바가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이 그를 세상에 남겨 두지 않아 끝내 우리의 도가 의지할 곳이 없게 하였으니, “백순(伯淳)이 복이 없는 것은 천하 사람이 복이 없는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신들은 본디 도덕을 아는 선비가 아니므로 감히 김창협의 도덕과 학문을 엿보고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평소 마음속으로 감복하였던 사람들로서 그가 참된 선비이자 훌륭한 스승임을 잘 알고 있으니, 표창하고 떠받드는 도리로 볼 때 그 한 사람만을 위한 사우를 세우는 일을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들이 사는 고을에 이른바 석실(石室)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바로 선정신 문충공(文忠公) 김상용(金尙容)과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을 함께 제향한 곳으로, 나중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부제학 이단상(李端相) 등 세 신하를 배향하였습니다. 김창협은 김상헌의 증손이자 김수항의 아들이며, 이단상과는 사제의 의리가 있습니다. 또 만년에는 서원 아래의 강가 언덕 위에 집을 짓고 날마다 여러 문생과 책을 읽고 도를 강론한 지가 거의 10여 년에 이르렀으니, 제향하는 일은 이곳부터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감히 앞장서서 동지들을 이끌고 글을 올려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담당하는 신하에게 문의하시고 서둘러 많은 선비의 청을 따르시어 사문을 빛내고 사림의 바람을 이루어 주소서.

[주D-001]백순(伯淳)이 …… 말 : 백순은 송나라 정호(程顥)의 자이다. 정호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의 재상인 부필(富弼)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한 말이다. 《伊洛淵源錄 卷3》 여기서는 농암을 정호에 견주어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는 뜻으로 쓰였다.

黎湖先生文集卷之二十四
 墓碣銘
成均生貟金公墓碣銘 a_196_500a



古今稱人之孝者多以居喪爲言。非謂養生之不爲孝也。盖以喪爲人道之終。必於此而自盡。視養生爲尤孝故也。且夫自親之始死。至於練祥二十五月之間。聖人必就夫飮食哭泣衰絰而制爲許多禮節。若是者。無非因其變而順之也。是雖修飭之君子。其哀情不能不視初漸輕。有能一於哀慕。其心未始有老少之異。如故成均生貟金公者。則其爲孝也可不謂至矣乎。盖公八歲而孤。血泣哀毁。素食能經年。侍母夫人疾。晝夜扶護。甞糞驗甜苦。禱北辰祈代。有苦庾黔婁之爲者。一日。母夫人氣塞。公如不欲生。亟割手指以血進。卽有奇效。頓然回甦。夜纔艾而旋欲。雖再進血而竟不幸。公呼天痛擗。屢絶屢甦。日噉溢糜。不甞塩豉葅蔬之屬。氣息綿綴。不能拜起。以伯氏參奉公聲大慟哭懇諭之故。小祥後始進䟽食。哭泣愈哀。若不保朝夕。而卒能免於滅性。人以爲得神助。雖除喪而孺慕內篤。拜墓必哭盡哀。讀書至說孝子追慕處。未嘗不流涕。與公言者不忍及於父母。恐聞之而悲慟也。以二親筆迹及手澤所存。藏之篋衍。以爲時省展痛之地。及歿而命並殉于壙。嗚呼。子之孝於父母。天性固爲最切。而然而允蹈者則亦鮮矣。若公幼能致哀。老益追慕。直至臨死之日而猶不忘乎孝。豈非發於誠心自然而不能已者耶。其居喪與喪畢而終身慕如此。則前乎此而事生之孝爲可知也矣。公壽五十六而以肅廟己卯二月二十日歿。歿而洞人上公行誼於朝。命贈公司憲府持平。公諱聲玉。字集卿。氏出安山。上祖高麗左僕射肯弼。入我朝有諱定卿。吏曹典書。蓮城君。生諱漑。左贊成。謚平胡。公之六世祖也。高祖諱琳。郡守。曾祖諱彦樑。副護軍。祖諱台祿。贈司僕寺正。考諱讚。以行誼稱。贈左承旨。妣安東金氏。奉訓郞鼎三之女。直提學塡之後也。公制行高。燕居無惰容。雖盛暑不脫行縢。熟於吉凶。綿蕞食卒。應之無錯。事兄與嫂如父母。撫諸姪如子。睦親族信朋友。此又見孝之推也。公弱年抱疾。不能課學。忽奮發自力。晩中辛未生員。人惜其屈於大科。甞隨李公世弼訟宋文正寃。每以不得同李公竄逐爲恨。娵恭人李氏。國姓。生貟昌徵女。定宗大王第六男從生之後也。事姑甚孝。後公一年以毁終。宗黨頌其仁。久而有餘思。祔公葬於永平淸溪山負丁之原。擧二男。錫垕生貟。錫奎。一女婿。士人崔普命。錫垕一男相一。側出四女幼。錫奎三男。相德進士,相澤,相泌。三女。長適鄭百曾。相一一男。相德一男。並幼。崔普命未育。有所後子致雲。公歿今四十有三年而相德謁余爲墓銘。銘曰。
秉彛則一。民不興行。若公然後。不愧孝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