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도봉서원앞에 물속에일부 잠겨 있던 고산앙지 각자가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서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고산 앙지 각자는 물속에 있을 때에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
천년고찰 도봉산 천축사의 모습 선인봉 만장봉이 내려보이는 곳에 위치
도봉산의 아름다운 모습 자주로 찍어도 언제나 멋이는 곳이기도하다
이재(李栽)
조선 효종(孝宗)-영조(英祖) 때의 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주리론(主理論)으로 영남학파를 이끈 성리학의 대가로 많은 문인을 배출했으며, 저서로 《성유록(聖喩錄)》·《금수기문(錦水記聞)》·《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 등이 있음.
시대: 조선후기
연도: 1657-1730
한천서원(寒泉書院)
조선 정조(正祖) 때 경기도 용인(龍仁)에 건립한 서원. 1802년(순조 2)에 사액되고, 도암(陶庵) 이재(李縡)를 배향함.
陶菴先生集卷四十七
行狀[一]
祖考右議政府君家狀 代仲父作 a_195_48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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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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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시문집. 문집은 율곡의 문하생인 박여룡(朴汝龍) 등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상의하여 편집하였고, 시집은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가 엮어 1611년(광해군3) 해주(海州)에서 간행하였다. 그 후 1682년(숙종8)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속집ㆍ외집ㆍ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고, 1742년(영조18)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율곡의 5대손 진오(鎭五)와 협의하여 시집ㆍ문집ㆍ속집ㆍ외집ㆍ별집 등을 합본하고 여기에 《성학집요(聖學輯要)》ㆍ《격몽요결(擊蒙要訣)》과 부록을 보편(補編), 《율곡전서》로 개제(改題)하여 1749년(영조25)에 간행하였다. 1814년(순조14) 습유(拾遺) 6권과 부록 속편을 보충, 해주에서 중간(重刊)하였다. 목판본이며, 총 44권 38책이다.
용릉은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의 지명으로 북송의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가 살던 곳이다. ‘밝은 달〔霽月〕’은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약칭으로 주돈이의 사람됨을 형용한 말이다. 황정견(黃庭堅)이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주돈이의 높은 인품과 탁 트인 흉금을 묘사하여 “흉금이 시원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에 달이 씻긴 듯하다.〔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봉의 인품과 흉금이 주돈이의 그것과 같다는 뜻이다.
(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舂陵)의 주무숙(周茂叔)은 인품이 매우 고상해서,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처럼 가슴속이 쇄락하기만 하다.”고 평한 내용이 나온다. 무숙(茂叔)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자(字)이다.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온화하고 깨끗한 심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황정견(黃庭堅)은 “염계(濂溪)의 마음은 깨끗하여 속된 기운이 없는 것이 마치 ‘비가 갠 뒤의 온화한 바람과 밝은 달〔光風霽月〕’ 같다.” 하였다. 염계는 주돈이(周敦頤)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로 …… 할까 : 송유(宋儒) 주염계(周濂溪)처럼 익재의 인품이 고결했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濂溪詩)〉 서문에 “용릉 땅의 주무숙은 인품이 매우 고결해서, 가슴속이 쇄락한 것이 마치 비 갠 뒤의 바람과 달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如光風霽月]”는 말이 나온다. 무숙은 주염계의 자(字)이다.
송유(宋儒)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소싯적에 주돈이(周敦頤)를 공경하여 그에게 찾아가서 배운 것처럼 자신도 고운을 스승으로 받들고서 배우고 싶다는 뜻이다. 광풍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를 뜻하는 말인데,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흉중이 쇄락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이요 갠 달과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는 말이 나온다. 염계는 주돈이의 호요, 무숙은 그의 자이다. 동락(東洛)은 동도(東都) 낙양(洛陽)이라는 뜻으로, 낙양 출신인 정씨(程氏) 형제를 가리킨다.
김수증(金壽增)
조선 효종(孝宗)-숙종(肅宗) 때의 문신·학자. 김상헌(金尙憲)의 손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동생 김수항(金壽恒)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으로 들어가 은둔함.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음.
金壽增墓碣
先生諱壽增字延之姓金氏系出安東以高麗太師諱宣平爲始祖以左議政諡文正公淸陰先生諱尙憲爲祖以同知中樞府事諱光燦爲考妣曰延安金氏淸州牧使諱珠之女也以天啓甲子四月十四日生先生自幼恬靖與物無竸其在文正公側進退惟謹凡承一言片辭靡不默識而廣記終身佩服與誨錫子孫皆是道也好讀書工篆隷文詞沛然不規規於程式文正公嘗稱其醇雅庚寅中生員第二名壬..
김수증 선생의 비문의 내용에
선생의 휘는 수증(壽增)이고 자는 연지(延之)이며 성은 김씨인데 김씨의 가계는 안동에서 나왔다. 고려 태사 선평(宣平)이 시조이다.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청음선생(淸陰先生) 김상헌(金尙憲)이 조부이고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이 부친이다. 모친은 연암김씨(延安金氏)로 청주목사 주(珠)의 딸이고, 천계(天啓) 갑자년 4월 14일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고요함을 좋아하여 남과 겨루지 않았다
《시경》〈소아(小雅) 거할(車舝)〉에 “높은 산 우러르고 큰길을 가는도다.〔高山仰止 景行行之〕”라고 한 것과 《논어》〈자한(子罕)〉에서 안연(顔淵)이 공자를 묘사하여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다.〔
동춘당문집내용에
○ 우암이 화양(華陽)에서 와서 문병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높은 산을 올려다보며 / 高山仰止
큰길로 간다 / 景行行止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이 하늘에서 부여받는 떳떳함은 / 民之秉彝
이 훌륭한 덕을 좋아함이로다 / 好是懿德
하였다. 이러한 마음이 같이 있어서 흥기하는 것이 또한 어찌 고금이 다르겠는가?
이 문집의 간행으로 우리나라에 충효의 도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각각 천부의 직분을 다함은 국가에 한없는 아름다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신은 어리석고 누추함을 헤아리지 않고 즐거이 이 말을 한다.
고산앙지(高山仰止) :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高山仰止 景行行止 四牡騑騑 六轡如琴 覯爾新昏 以慰我心”이라 보이는데, 이는 대부가 주유왕(周幽王)을 나무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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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문(經史門) | ||||
고산앙지(高山仰止) |
시(詩)를 읽는데 경솔히 할 수 없다. 후유(後儒)들의 해석은 모두 상스러운 말이 많고 고상한 뜻이 없으므로, 간혹 옛사람이 말한 본래의 뜻에 따라서 읽어야만 깊은 의미를 바로 알 수 있다. “솔개가 난다” “물고기가 뛴다.”라는 말 같은 것은 진실로 중용(中庸)에서 해설한 한 대문이 아니면 후세 사람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또 “높은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한다.” “큰 길로 걸어가는 것처럼 한다”라는 말 같은 것도 잠깐 보면 거기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잘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런데 성인(聖人)은 칭찬하기를 “시인(詩人)으로서 인(仁)을 좋아하기를 이와 같이 하여 도(道)를 따라서 행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몸이 늙는 줄을 모르고 날로 힘쓰다가 몸이 마친 후에 그만두는[已] 사람도 있다.” 하였다.
이로 본다면 그 긴요한 뜻은 지(止) 자에 있다는 것인데 이 지(止)와 이(已) 두 글자는 서로 같은 뜻이다. 지(止)는 《대학(大學)》 “지선에 그친다[止於至善].”는 주에, ‘반드시 여기에 그쳐서 옮기지 않는 뜻이다[必至於是而不遷之意].’ 하였으니, 역시 잘 발휘한 말이다. 대개 큰 길로 걸어가는 군자(君子)는 남들이 반드시 우러러 바라보지 않으며, 어떤 이는 웃으면서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높은 산이 앞에 있으면 어리석은 자거나 불초한 자거나 모두 쳐다보지 않는 이가 없으니, 비록 낮게 보려고 한들 되겠는가? 어질고 지혜 있는 자는 큰 길로 걸어가는 군자(君子)에게도 역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이다. 오직 우러러볼 뿐만 아니라 반드시 행하려고 해서 반드시 지키는 이 큰 도(道)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높은 산을 쳐다보는 것처럼 한다는 것뿐이고 큰 길로 걸어가는 것처럼 한다는 것뿐이다. 이 큰 길로 가다가 중간에서 그만두는 자도 있기는 하나, 처음부터 자기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미리 헤아려서 그만 걷어치운다는 뜻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무릇 시(詩)에 지(止)자를 쓴 것은 모두 이런 뜻이다.
만약 단장취의(斷章取義)한 것이 작자의 뜻과 서로 반대된 셈이라고 한다면 아마 이런 이치가 없을 것이요, 다만 후인들이 투철한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계속 밝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친다.”라는 따위 같은 말이 바로 이것이다.
[주D-001]시(詩) : 《시경》을 가리킴.
[주D-002]솔개가 난다 물고기가 뛴다[鳶飛魚躍] : 《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에, “鳶飛戾天 魚躍于淵 豈弟君子 遐不作人”이라고 보임.
[주D-003]중용(中庸) : 《예기(禮記)》 중의 한 편명. “詩云 鳶飛戾天 魚躍于淵 言其上下察也”라고 하였음.
[주D-004]고산앙지(高山仰止) : 시경 소아(小雅) 거할(車舝)에, “高山仰止 景行行止 四牡騑騑 六轡如琴 覯爾新昏 以慰我心”이라 보이는데, 이는 대부가 주유왕(周幽王)을 나무란 시.
[주D-005]계속 밝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친다.[於緝熙敬止] :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假哉天命 有商孫子 商之孫子 其麗不億 上帝旣命 侯于周服” 이라고 보임.
동춘이 일찍이 병중에서 손자 병원(炳遠)에게 명하여 ‘고산앙지(高山仰止)’ 4자를 써서 벽에 걸게 하고 말하기를,
하고, 또 ‘일조청빙(一條淸氷)’ 4자를 써서 걸게 하고 말하기를,
하였다. 이때 와서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쓴 글씨를 가리키며 선생에게 이르기를,
하니, 선생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하니, 동춘은,
하였다. 그 뒤 며칠 만에 동춘이 죽자 선생은 3개월 동안 복(服)을 입고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 대개 선생은 동춘과 어려서부터 같이 배웠으며, 서로 장대(長大)한 뒤에 정분이 매우 깊었다. 비록 조정에 벼슬하면서 논의할 때에 더러 엇갈리는 것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대체는 다 마찬가지로 돌아갔었다. 동춘이 죽은 뒤부터 더욱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항상 외로운 탄식이 있었다. 장사 때가 되자 제문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광중(壙中)에 가서 영결(永訣)하였다. 뒤에 묘지문(墓誌文) 및 유사(遺事)를 지었다.
○ 이해에 자운서원(紫雲書院)의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지었다.
서원(書院)은 파주(坡州) 자운산(紫雲山) 아래에 있으니, 실로 율곡 선생(栗谷先生)을 제향(祭享)하는 곳인데, 곧 율곡 선생의 무덤 아래이다. 묘도(墓道)에 옛날 백사(白沙)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나, 그 글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으므로 사류(士類)의 제공(諸公)이 선생에게 고쳐 짓기를 힘껏 청하였다. 선생이 여러 번 사양하여도 되지 못하였다. 제공(諸公)이 또 예전 비를 없애 버리고 세우려 하므로 선생이 힘껏 그 불가함을 말하고 또,
하고, 드디어 서원(書院)의 묘정(廟廷)에 세웠다.
○ 송시열은 정미년(1607)에 났다. 그의 어머니 곽씨(郭氏)는 꿈에 명월주(明月珠)를 삼켰고, 그의 아버지 갑조(甲祚)는 꿈에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옥천(沃川) 구룡촌(九龍村)에서 났으므로 아명(兒名)은 ‘성뢰(聖賚)’라 하였고 경오년(1630)에 김장생(金長生)한테서 공부했다. 효종이 무술년(1658)에 이조 판서로 제수하고 담비 갖옷을 하사하시며 은밀히 이르기를, “요동(遼東)과 계문(薊門)의 풍상 속을 장차 같이 다니자.” 하였다. 이에 기해년(1659)에 효종의 상사를 당한 뒤로는 늘 제삿날이 되면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서 종일 통곡하다가 담비 갖옷에다 발문(跋文)을 써서 하늘에 사무치는 애통을 기록하였다. 임자년(1672)에 송준길의 병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가서 문병하였다. 과거에 송준길이 병중에 손자 병원(炳遠)에게 명하여 ‘고산앙지(高山仰止)’란 글자를 쓰고, 또 ‘일조청빙(一條淸氷)’이란 글자를 써서 벽에 걸었는데, ‘고산앙지’라는 글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것은 오직 공(公)이라야 해당되리라.” 하니, 송시열이, ‘일조청빙’이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것은 오직 형이라야 해당될 것이오.” 하였다.
을묘년(1675)에 홍원(洪原)으로 귀양 갔는데, 철령(鐵嶺)에 올라가 시를 짓기를
길 떠나 철령 마루턱에 오르니 / 行登鐡嶺嶺
내 마음 역시 철과 같도다 / 我心還如鐡
하였다. 이때에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사계(沙溪 김장생)가 전해준 율곡(栗谷)의 수서(手書)를 권상하(權尙夏)에게 주며 만동묘(萬東廟)의 일을 부탁했다. 또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제문을 지어서 손자 회석(晦錫)에게 주고, 유소(遺疏)와 효종의 어찰과 대비의 어찰은 손자 주석에게 주면서 ‘곧을 직[直]’한 자로서 자손과 문인들을 경계하였다.정읍(井邑)에 이르러 권상하의 손을 잡고 뒷일을 부탁하는데, 권상하가 묻기를, “상사에 무슨 예법을 써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주장으로 삼고 김장생이 엮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참고하라.” 하였고, “염할 때에 무슨 옷을 입혀야 합니까.” 하고 물으니, “심의(深衣)를 입히고 그 다음에 주자가 한가히 있을 때 입던 야복(野服)을 입히고, 그 다음엔 황조(皇祖 명 나라)의 유제(遺制)인 난삼(襴衫)을 입히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장하고 사업은 효종의 뜻과 사업을 주장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조정에 있을 때 한 일은 오직 정릉(貞陵)을 복위시킨 한 가지 일이다.” 하고, 직령의(直領衣)를 몸에 걸치고 약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그 전날 밤에 흰 기운이 하늘에 뻗치더니 이날 밤 규성(奎星)이 땅에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 위에 뻗쳤다. 유명(遺命)으로 관(棺)은 부판(附板)을 썼다. 《조야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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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절구(五言絶句) 78수(七十八首) | ||||
강으로 가다 10수 |
석양빛은 모래 언덕 비추이는데 / 夕照平沙岸
인가들은 여기저기 숲 곁에 있네 / 人家亂樹邊
외로운 배 어느 곳의 나그네인데 / 孤舟何處客
저녁 안개 낀 강가에 홀로 묵는가 / 獨宿暮江烟
사람들 말 풀밭 속서 들려오는데 / 人語草田中
풀숲 깊어 사람 모습 아니 보이네 / 草深人不見
강바람은 선들선들 불어서 오고 / 江風吹徐徐
해가 높이 떠도 이슬 되레 빛나네 / 日高露猶泫
비 묻어와 강가 나무 모습 흐리고 / 雨色迷江樹
서늘 기운 옷 속으로 스미어 드네 / 新凉入熟衣
일엽편주 타고 고향 향해 가나니 / 扁舟故鄕去
바라던 바 어긋났다 말하지 마소 / 莫道願相違
푸른 절벽 강물 속에 곧장 꽂히어 / 蒼壁揷江心
검은 무쇠 같은 천고 색을 띠었네 / 積鐵千古色
뱃사람은 겁나 감히 말 못하는 건 / 舟人不敢語
물 아래에 교룡 사는 굴 있어서네 / 下有蛟龍宅
강 거슬러 오를 때엔 밧줄로 끌고 / 上灘百丈牽
여울 타고 내려갈 땐 노가 춤추네 / 下灘雙楫舞
갈 때에는 갈대숲을 따라서 가고 / 行緣蘆葦叢
멈출 때엔 수양버들 숲에 배 대네 / 止泊楊柳樹
어두운 숲 침침하여 고요도 한데 / 暝樹沈沈靜
모래 언덕 무너져서 기울어 있네 / 崩沙仄仄斜
반딧불이 잇달아서 나는 저편에 / 連飛度螢火
언뜻언뜻 인가 모습 보이는구나 / 隱隱見人家
이호 아래 배를 대어 정박을 하매 / 泊舟梨湖下
현인 생각 그리워서 견딜 수 없네 / 懷賢思不禁
높은 산을 바라보고 큰길 따르며 / 高山與景行
평생 동안 우러르는 마음 지녔네 / 緬仰百年心
전쟁이야 전조 시대 일이거니와 / 戰伐前朝事
그 옛날의 파사성이 남아 있다네 / 婆娑有古城
성가퀴는 가을 풀에 파묻히었고 / 女墻秋草沒
오늘날엔 태평 시절 이어진다네 / 今日屬昇平
만고토록 남아 있을 교산의 무덤 / 萬古喬山宅
성인 의관 고이 묻혀 있는 곳이네 / 衣冠葬聖人
그 몇 년의 비바람을 거치었는가 / 春秋幾風雨
돌 기린엔 푸른 이끼 잔뜩 끼었네 / 苔蘚石麒麟
문 앞에는 수양버들 늘어서 있고 / 楊柳門前逕
절 뒤에는 부용봉이 솟아나 있네 / 芙蓉寺後峰
동암 바위 밝은 달빛 속에 있는데 / 東巖月明裡
중 모습은 그림 속에 그려져 있네 / 僧在畵圖中
[주D-002]현인(賢人) : 여기서는 중종조(中宗朝)의 명신(名臣)인 김안국(金安國)을 가리킨다. 김안국은 자가 국경(國卿)이고 호가 모재(慕齋)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천(利川)으로 물러나 살면서 조그마한 서재를 지어 놓고는 은일(恩逸)이라는 편액을 내건 다음, 그곳에서 날마다 여러 학도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주D-003]높은 …… 따르며 : 옛사람 중에 높은 덕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사모하고, 밝은 행실이 있는 자에 대해서는 그를 모범으로 삼아 행한다는 뜻이다. 산은 덕, 길은 행실의 비유로 쓰였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거견(車牽)에 “높은 산을 우러러보고 큰길을 따라가네.〔高山仰止 景行行止〕” 하였다.
[주D-004]파사성(婆娑城) : 여주(驪州)에서 서북쪽으로 40리 되는 강가에 있는 성이다. 임진왜란 때 승장 의엄(義嚴)이 수축했다.
[주D-005]교산(喬山)의 무덤 : 옛날에 황제(黃帝)를 장사 지낸 곳으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지역에 있다. 여기서는 세종(世宗)의 무덤인 영릉(英陵)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06]벽사(甓寺) : 여주의 신륵사(神勒寺)이다. 절 안에 벽돌로 쌓은 탑이 있으므로 이렇게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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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저(雜著)] | ||||
황강문답(黃江問答) [한홍조(韓弘祚)] 영숙(永叔)은 바로 한홍조인데 예산(禮山)에 살았다. |
영숙(永叔)이 이산(尼山)의 일에 관한 시말(始末)을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때 청성(淸城 김석주(金錫胄))이 은밀히 그 기미를 알고 마침내 세밀히 밝혀내어 경신년의 옥사를 이루었다. 대개 남인들은 생각하기를 ‘이 옥사는 오로지 제복과 허견이 바라지 못할 자리를 넘본 소치이니 필시 그들 당사자만 죄를 받으면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해를 범한 역적과는 다르다.’ 하였는데, 흑수배(黑水輩 여강(麗江)에 살던 윤휴의 일파)는 윤휴가 사화를 입었다 하여 청성을 보기를 마치 남곤(南袞)ㆍ심정(沈貞)처럼 하였다. 이것이 남인들이 경신옥사(庚申獄事)를 원통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윤증은 권시(權諰)의 사위이고 윤증의 아우 추(推)는 이유(李)의 사위인데, 권시와 이유는 남인의 거두(巨頭)이며, 권시의 아들 기(愭)와 이유의 아들 삼달(三達)은 또 남인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윤증과 윤추는 자연 권기ㆍ이삼달과 어울릴 때가 많았다. 대체로 가까이 지내면서 서로 진심을 토로하는 경우는 처남 매부 간이 제일인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신년의 옥사에 대해 들은 것도 모두 권기와 이삼달의 말을 통해서였으며, 청성의 사실을 들은 것도 모두 권기와 이삼달의 말이었다. 그런데 윤증은 원래 허약한 사람이라서 드디어 그 말을 누설하여 청성이 훗날 큰 화의 원흉이 되게끔 만들었다. 윤증은 또 생각하기를 ‘우암이 거제(巨濟)에서 돌아와 만약 청성의 사실을 듣게 되면 필시 청성과 다른 입장을 취할 것이다.’ 하였는데, 급기야 우암이 올라와 옥사를 듣고는 말하기를 ‘청성은 사직을 보호한 공로가 없지 않다.’ 하였다. 이에 윤증이 크게 놀라 낙담하면서 말하기를 ‘이 어른의 소견이 어찌 이와 같을까. 만약 이 어른을 따르다가는 끝내 함정에 빠져 마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같은 꼴이 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버티고 대립할 생각을 먹게 되었다. 그러나 후원자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급기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을 얻은 후에 비로소 배반의 뜻을 보였는데, 현석을 얻는데도 곡절이 있었다.
과거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내가 당로(當路)하게 되면 반드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ㆍ율곡(栗谷 이이(李珥)) 두 선생께서 시행하지 못한 사업을 이룩할 것이다.’ 하였는데, 경신옥사(庚申獄事)를 치른 후,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영상(領相)이 되고, 노봉(老峯)이 좌상이 되고, 청성(淸城)이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노봉은 평소 청성과 뜻이 맞지 않았고, 또 외척(外戚)들끼리 어울려 일을 같이한다는 비난도 듣기 싫어하였다. 이때 마침 청성이 사은사가 되어 청 나라로 떠나자, 노봉은 드디어 자신의 뜻을 시행하고자 하여 문곡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문곡이 머리를 저으면서 그 불가함을 말하기를 ‘지금 대옥을 막 치른 상황인데 임금이 어리고 백성들이 의심하여 잘 따르지 않는다. 이런 때에는 오직 조용히 진압하여 국맥을 유지해야 할 것이요, 분란을 일으켜 전복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노봉이 손을 쓰지 못하였다. 그런데 사류가 말하기를 ‘민상(閔相)이 전일에 한 말은 모두가 헛된 과장이었다. 지금 당로(當路)했는데, 왜 한 가지 일도 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서 공격과 비난을 집중하였다.
이에 노봉이 몹시 민망해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이는 문곡이다. 산림(山林) 출신이 조정에 있게만 되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고, 드디어 문곡을 탄핵하여 제거하고 우암을 불러들이고자 하여 즉시 임금에게 아뢰고 승지를 보내 우암을 불렀으나, 우암은 오지 않았다. 또 현석을 부르자, 현석이 말하기를 ‘내가 들어가고 싶기는 하다. 그러나 산림 출신이라서 주인이 없으면 일을 성취시킬 수 없다.’ 하니, 노봉이 말하기를 ‘내가 주인이 되겠다.’ 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산림 출신이 척신(戚臣)에 의지하여 제대로 국사를 다스린 자가 어디 있는가.’ 하니, 노봉이 더욱 민망해하면서 말하기를 ‘우암을 여기에 있게 하면 들어오겠는가?’ 하자, 현석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행이겠다.’ 하였다.
이에 노봉이 상에게 아뢰고 승지를 보내면서 우암에게 글을 보내기를 ‘당로(當路)하고 싶지 않더라도 잠시 상경하여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내 비록 혐의 때문에 현직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으나, 나를 화숙의 주인으로 삼는다면 내가 어찌 나가지 않겠는가. 또 내가 태묘(太廟)의 휘호(徽號)를 주청할 일이 있는데, 화숙이 후원자가 되어야 하겠다.’ 하고, 드디어 여주(驪州)로부터 부름에 달려왔다. 경강(京江)에 이르러 현석을 맞아 함께 입경할 뜻으로 권유하자, 현석이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현석이 드디어 입경하여 날마다 우암 곁을 떠나지 않으며 제자의 도리를 행하며 몹시 공손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윤자인(尹子仁 윤증)을 부르면 좋겠습니다.’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자인이 오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현석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소자와 함께 여기에 있는데 그가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우암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한번 불러 보라.’ 하였다. 현석이 즉시 상에게 아뢰고 윤증을 불렀다.
이에 윤증이 상경하다가 과천(果川) 나양좌(羅良佐)의 집에 머물러 사직하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현석이 말하기를 ‘내가 가서 만나 보고 그와 함께 입경하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윤증을 만나 보았다. 이에 윤증이 그를 머물게 하고 함께 유숙하면서 현석에게 말하기를 ‘추가로 녹훈(錄勳)한 것을 삭제한 후에야 일을 할 수 있을텐데, 형이 녹훈을 삭제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윤증이 말하기를 ‘외척의 흉악한 무리를 물리친 후에야 일을 할 것인데, 형이 외척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윤증이 말하기를 ‘오늘날 행태를 보건대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고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는 비호한다. 이 풍조를 제거한 후에야 일을 할 것인데, 형이 이 풍습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니, 현석이 말하기를 ‘불가능하다.’ 하였다. 대개 추가로 녹훈되었다고 한 것은 김익훈(金益勳)ㆍ이사명(李師命)의 무리를 가리킨 것이고, 외척은 청성ㆍ광성(光城 김익훈)ㆍ노봉을 가리킨 것이고, 오늘날의 행태라고 한 것은 우암을 가리킨 것이었다. 윤증이 말하기를 ‘이 세 가지를 제거하지 않는 한 내가 들어갈 길은 없다.’ 하고, 현석을 3일 동안 머물게 하면서 권기(權愭)와 이삼달(李三達)에게 들은 말을 다 말해준 뒤 말하기를 ‘만약 우암을 따르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하였다. 현석이 드디어 크게 놀라 풀이 죽어 돌아오자, 우암은 이미 윤증에게 당한 줄 알았다. 현석은 우암에게 고하지 않고 바로 어전에 들어가 우암이 건의한 휘호(徽號)의 의논을 극력 반대하고 파주(坡州)로 돌아가 버렸다. 우암은 일이 와해됨을 보고 고양(高陽)에서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갔다가 화양동(華陽洞)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서울의 연소배가 현석을 따르게 되었는데, 현석이 윤증과 가까이 지내게 되어 윤증의 무리가 점차 성대해졌다. 이에 곧 그 아비의 묘문(墓文) 및 이른바 목천(木川)의 사건으로 인해 마침내 우암을 배반하였는데, 실상은 윤증이 본래 서인 출신으로서 남인 속으로 깊이 들어가 화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문의 일은 단지 우암과 대립하기 위한 제목일 뿐이었다. 이 사실의 곡절에 대해서는 맥락을 간추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아는 사람이 드물다.”
영숙(永叔)이 광남(光南) 김익훈(金益勳)의 일에 대해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때 김환(金煥)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본래 서인으로서 무예를 닦다가 오인(午人)의 손에 등과(登科)한 사람이었다. 청성이 남몰래 김환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라에 대변이 생겼는데 이를 알아낼 길이 없다. 네가 은밀히 잘 살펴 알리도록 하라.’ 하니, 김환은 불가능하다고 사양하였다. 이에 청성이 위협하기를 ‘만약 명을 따르지 않으면 너를 참(斬)할 것이다.’ 하니, 김환이 ‘지시하는 대로 하겠으나 은밀히 살필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였다. 청성이 이르기를 ‘허새(許璽)와 허영(許瑛)이 지금 용산(龍山)에 있으니, 네가 피접(避接)한다고 핑계하고 그 이웃집에 가서 깊이 사귄 후에 그들과 어울려 장기를 두도록 하라 그러다가 그들을 이길 때에 네가 넌지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해 보라. 그러면 그들의 기색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만약 괴이하게 여기는 기색이 없거든 그대로 함께 유숙하면서 은밀히 함께 모반할 것을 의논하라. 그렇게 하면 그 진위(眞僞)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환이 말하기를 ‘그가 그런 뜻이 없이 도리어 나를 모반한다고 하면 어찌합니까?’ 하였다. 이에 청성이 이르기를 ‘그것은 모두 내 손에 달린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김환에게 은전(銀錢)을 주어 교제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김환이 한결같이 그 말대로 실행한 결과 허새와 허영이 과연 호응해 왔다.
김환이 이를 청성에게 고하자, 청성은 또 유명견(柳命堅)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유명견에게는 김환이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명견의 친척인 전익대(全翊戴)와 사귀면서 명견의 동정을 탐지했는데, 미처 자세히 탐지하기도 전에 청성이 부득이한 일로 청 나라에 사신을 가게 되어 김환에게 시킨 일을 광남(光南)에게 맡겼다. 이에 광남이 김환으로 하여금 속히 명견의 소식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김환은 늘 남몰래 익대에게 묻곤 하였다. 익대는 단지 수상한 일을 갑옷과 활을 만드는 등의 일이었다 알릴 뿐, 실제로 확실한 제보는 없었다.
또 고변한 내용 중에 이덕주(李德周)가 바로 괴수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세밀히 살피게 하였는데, 미처 살피기도 전에 갑자기 물의가 일어 말들을 하기를 ‘김환이 은밀히 살피는 체하면서 실은 반역을 꾀한다.’ 하며, 내외가 떠들썩했다. 광남이 즉시 김환을 불러 그런 사실을 알리고 시급히 고변하게 하니, 김환이 몹시 두려워하여 군뢰(軍牢 죄인을 호송하는 병졸)를 청하며 이르기를 ‘익대를 잡아 같이 고변했으면 한다.’ 하자, 광남이 즉시 군뢰 1쌍(雙)을 주었다. 김환이 밤을 틈타 익대의 집에 가서 급히 익대를 불러내 군뢰를 시켜 잡아 집으로 돌아온 뒤 내실에 감금하고 협박하기를 ‘네가 나와 함께 급히 고변해야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하니, 익대가 말하기를 ‘유(柳)가 본래 모반한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무고하겠는가.’ 하고, 굳이 거절하며 듣지 않았다. 김환이 곧 광남에게 고하여 의금부에 가두게 하고, 이어 광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장 들어가 고변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게 한 뒤에는 즉시 익대를 불러 그 사실을 문초할 것이니, 단단히 가두고 기다리라.’ 하니, 광남이 드디어 가두었다.
이에 김환이 고변하니 즉시 국청이 설치되어, 허새와 허영을 잡아들였는데, 이들은 한 차례 장(杖)을 내리기도 전에 모두 자복(自服)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환이 바로 훈신(勳臣)이 되어 중계(中階)에 올라앉게 되었다. 김환은 익대가 어지러이 말하여 진실성이 없게 될 경우 자신의 일에 방해될까 두려운 생각이 들어 끝내 익대를 잡아들이지 않았다.
광남은 익대를 잡아갈 것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내 소식이 없자, 몹시 걱정되고 난처하여 직접 국청에 나아가 사실을 고하였다. 이때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위관(委官)이었는데, 국청의 일은 어명으로 나온 것이나 죄인의 초사(招辭)가 아니면 감히 거론하지 못한다고 하자, 광남이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마침 청성이 청 나라에서 귀국하여 함께 위관(委官)이 되었는데, 광남에게 이르기를 ‘아방(兒房 대궐 안 장신들이 기숙하는 곳)에 나아가 밀계(密啓)하라. 사건을 국청에 회부한 후에야 조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광남이 문장을 구사할 줄 몰라 계사를 초할 수 없다고 하자, 청성이 종이 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대략 계사를 초잡아 준 뒤 아뢰게 함으로써 사건이 국청에 회부되었다. 이에 즉시 익대를 불러 문초하였는데, 익대는 김환이 이미 훈신(勳臣)이 되어 자리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도 고변하면 저와 같이 될 것이라고 여겨, 곧 유명견의 모반을 무고하였다. 이에 즉시 유명견을 잡아들여 익대와 대질시켰지만 끝내 혐의를 찾지 못하자 익대를 참하였다. 이것이 곧 광남의 일의 전말이다.
대개 처음에 고시관이 시권(試卷)을 밀계한 것과 상이 은밀히 그 일을 청성에게 부탁한 사실, 그리고 청성이 또다시 광남에게 위임한 일이 모두 철저하게 비밀리에 이루어져 당시 연소배들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연소배들은 광남이 김환에게 자금을 주어 허새와 허영을 유인하게 하고는 끝내 역모로 몰아 죽게 했다는 말만을 듣고는 마침내 광남을 몹시 옳지 못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익훈(益勳)이 남을 반역으로 유도한 것은 그 마음씨가 자신이 직접 반역을 꾀한 것보다 심하다…….’ 하며 장차 처벌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때 우암이 여강(驪江)에 있었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함께 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승지 조지겸(趙持謙)이 여러 날 동안 모시고 묵으면서 광남이 역모를 유도한 그 형편없는 마음씨를 자세히 말하니, 우암이 이 말을 듣고는 역시 형편없는 짓이라고 하면서 비록 죽는다 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연소배들이 드디어 크게 기뻐하면서 어른의 소견도 자기네의 뜻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급기야 우암이 입경하자, 문곡(文谷)ㆍ노봉(老峯)ㆍ청성(淸城)이 그 사건의 본말을 다 알리고, 또 광성(光城 김익훈(金益勳))의 가족이 찾아와 그 곡절을 호소하였다. 이에 우암이 비로소 사건의 전말을 알고 말하기를 ‘일이 과연 이러하다면 익훈은 죄가 없다.’ 하였는데, 연소배들이 몹시 분개하면서 말하기를, ‘장자(長者)도 편애하여 그 초지를 달리하는가.’ 하였다. 이렇게 해서 조지겸(趙持謙)ㆍ한태동(韓泰東)이 마침내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수없이 많았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효종 당시의 군신이 복수를 꾀하던 일에 대하여 사람들이 지금까지 오활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일이 과연 어떠하였습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숙(永叔)이 강빈(姜嬪)의 일에 대해 묻자,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조는 드디어 조경을 축출하고 그 상소문 중에서 난역을 일으키려 한 유장(有將) 두 글자를 취하여 강빈의 죄목을 삼았는데, 우암이 이 일로 일찍이 조경을 그르게 여겼다고 한다. 조경은 그래도 약과다. 윤휴와 홍우원(洪于遠)이야말로 이첨(爾瞻)의 무리이다. 그 당시 조관(照管 감시하여 단속함)이란 어맥(語脈)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윤휴에게서 나온 줄만 알고 홍우원에게서 나온 줄은 모르는데, 그 곡절을 말해 주겠다.
대개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 제복(諸福 복창군 정(福昌君楨)ㆍ복선군 남(福善君柟)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 및 여러 남인(南人)들과 날이 갈수록 깊이 사귀면서 남몰래 궁녀를 간음하기까지 하는 등 장차 이롭지 못하게 될 조짐이 보였다. 이런 사실을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알고 있었으나 청풍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이때 허정(許珽)이란 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인조 잠저 때의 친구 허계(許啓)의 아들로서 장안의 대협객이었다. 하루는 느닷없이 청풍의 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겉은 남인이지만 속은 서인이고, 공은 겉은 서인이지만 속은 남인이다. 오늘날 내가 공과 더불어 편론(偏論)을 해보려 하는데 좋은가?’ 하였다. 이에 청풍이 어찌 편론이라고 하는지 묻자, 허정이 말하기를 ‘인조께선 우리 아버지와 자별한 교우 관계를 맺으셨다. 그러고 보면 인조의 자손과 우리 아버지의 자손은 곧 세교(世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세교 집 자손이 이처럼 미약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하니, 내가 이 때문에 걱정이 되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청풍이 그 말을 듣고 홀연히 생각하기를 ‘성상이 유약한 데다 질병이 많고 또 형제와 친자식도 없으며 보호해 줄 만한 친숙한 대신도 없는데, 저들 제복과 남인들이 갈수록 서로 결탁하고 있다.’ 하면서, 크게 마음속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에 입궐하여 정(楨)과 남(柟)이 궁중과 교통(交通)한 정상을 아뢴 다음, 이어 정과 남을 가두고 궁녀를 곤장치니, 궁녀가 마침내 각각 자백하였다. 그러자 남인들은 청풍이 궁녀를 거짓 자백하게 하여 왕손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면서 도리어 청풍에게 죄를 전가시킬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허적(許積)이 영상의 신분으로 들어가 제복(諸福)의 애매함과 청풍의 무함을 고하였다. 이때 명성왕후가 장막 뒤에 있다가 대성통곡하면서 허적을 질책하기를 ‘그대가 여러 조정을 섬겨온 구신(舊臣)으로서 국은을 입은 것이 얼마나 큰데,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감히 내가 목격한 일을 애매하다고 하는가.’ 하니, 허적이 황공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며 바로 제복을 처벌할 것을 청하고 나왔다. 그런데 그 이튿날 윤휴와 홍우원이 아뢰기를 ‘자전(慈殿)을 관속(管束)하여 정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관속(管束)이란 두 글자가 흉참하기 그지없었으므로 세간에 나온 문자는 조관동정(照管動靜 동정을 살피고 단속함)으로 고쳤다. 이것이야말로 이첨과 같은 무리의 심술이 아니겠는가. 적신(賊臣) 조사기(趙嗣基)는 문정왕후(文定王后)에 비교하기까지 하였는데, 가령 이들 무리가 시간을 좀 더 얻었더라면 어찌 유폐하는 일을 자행하지 않았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영숙(永叔)이 묻기를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가 갑인년 이후에 행한 데 대한 일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합니다. 그 상세한 내용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계축년(1673, 현종14)에 우암은 만의(萬義)에 있고 초려는 궁촌(宮村)에 있었는데, 하루는 한 장의 서찰을 우암에게 보내 이르기를 ‘서울 사람들이 매양 찾아와 기해년의 예설을 묻는데 이를 응수할 겨를이 없다. 이 글을 만들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니, 검토하고 고쳐서 보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한 글자 한 글자 보아가며 글자와 말에 병통이 있는 곳을 가려 손수 수정을 가하였는데, 그 하단에 ‘탕(湯) 임금과 무왕(武王)이 제후로 천자가 되었으니, 제후로 대접해야 하는가?’고 말한 대목이 있었다. 우암이 이에 대해 답서를 보내기를 ‘오늘날 세상에 처하여 자꾸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킨 채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고, 그 예설을 돌려보냈다.
그 뒤 갑인년에 우암은 장기(長鬐)로 귀양 가고 초려(草廬)는 영변(寧邊)으로 귀양 갔다. 이때 김지(金潪)가 이순악(季舜岳)의 집에 갔는데 이옹(李顒)의 아들도 와서 자리를 같이 하였다. 대개 김지는 이순악의 사위이고 순악과 이옹은 석호(石湖) 윤문거(尹文擧)의 사위이다. 이런 연유로 마침 한 집에 모이게 되었는데, 잠시 후에 순악의 매부 이하진(李夏鎭)도 와서 참석했다. 김지와 이옹의 아들은 재신(宰臣 이하진)이 들어오자 자리를 피해 밖에 나가 들었는데, 하진이 순악에게 이르기를 ‘요즘 보니 이유태(李惟泰)가 가장 착한 사람이다.’ 하였다. 순악이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니, 하진이 말하기를 ‘그의 새로운 예설(禮說)을 보지 않았는가? 그 예설을 보니 전일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 대개 군자의 도란 허물을 고치는 것이 미덕인데 지금 유태가 능히 이렇게 하니, 내가 위에 아뢰어 석방시켜 등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른바 예설이란 곧 계축년에 우암에게 보내온 예설을 말하고, 이른바 전일의 견해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탕 임금ㆍ무왕 운운한 한 조목을 가리킨 것이었다. 김지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장기(長鬐)로 가서 우암에게 고하니, 우암은 초려의 저번 예설이 양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고 특별히 새로운 예설이 있는가 의심하였다. 그러던 차에 윤증이 마침 장기로 왔다. 우암이 윤증에게 묻기를 ‘요즘 들으니 초려가 새로운 예설을 냈다고 하는데 그대가 들었는가?’ 하니, 윤증은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윤증이 떠나올 때 서구(敍九 송주석(宋疇錫))에게 초려의 예설이 여기에 있느냐고 묻자, 서구는 송자신(宋子愼)이 가져갔다고 말하였다. 윤증이 자신을 찾아가 그 예설을 가져다 보고 서신으로 초려를 책망하였다. 이에 초려가 곧 우암이 수정한 예설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이는 나 혼자 한 것이 아니고 우암과 상의하여 한 것이다. 그런데 우암이 본래 음험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모르는 척하고 나의 비방거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였다. 윤증이 그 예설을 가져다가 수정한 곳을 보니 과연 우암의 필적이었다. 이에 윤증 또한 우암이 과연 초려가 말한 것과 같다고 의심하였다.
그리고 초려가 적소(謫所)에서 말하기를 ‘내가 한번 입을 열면 우암은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이를 초려의 생질 김모가 듣고 윤휴의 아들 의제(義齊)에게 말하자, 의제가 다시 권유(權惟)에게 말하였다. 권유는 곧 권시(權諰)의 아들이며 우암의 사위이다. 권유가 이를 우암에게 알리자, 우암 집 자제가 초려에게 상당히 언짢은 말을 하였다. 초려 또한 이 말을 듣고 권유를 책망하기를 ‘그대가 과연 헛된 말을 우암에게 하였느냐?’ 하자, 권유는 말한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우암이 이 말을 듣고 또 권유를 책망하기를 ‘그대는 지난날 어찌하여 어른의 말을 허투로 하였느냐?’ 하니, 권유가 대답하기를 ‘초려 어른의 말씀은 틀림없는 초려 어른의 말씀이나, 그 어른께서 말이 밖으로 나간 것을 몹시 민망히 여겼기 때문에 소자는 자연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또 초려가 귀양 가는 길에 이담(李橝)이 거리에 나가 전별하였는데, 이때 초려는 앞뒤로 일관성이 없는 망언을 하였다. 그러자 이담이 마침내 이 말을 서울에 전파하여 그 소문이 퍼지자 모두 비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전에는 그렇게도 기세가 등등하더니 뒤에 와서는 어찌 그리도 겁을 내는가.’ 하였는데, 초려가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우암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형의 문도들이 나를 공격하며 조롱한다고 하는데, 금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이에 우암이 그 위인을 비열하게 여기어 다만 답하기를 ‘우리들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세상에 떠드는 말은 웃어 넘기는 것이 좋다.’ 하였는데, 초려는 끝내 우암 역시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상국(相國) 이숙(李䎘)이 장기(長鬐)로 가서 우암을 보고 말하기를 ‘앞서 초려의 편지를 보니, 우암 편에서는 인조(仁祖) 통서(統緖)까지 끊으려 한다고 하였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때 송자신(宋子愼)이 말하기를 ‘대체로 복제(服制)에 있어 장자(長子)에 대해 3년으로 하는 것은 적자와 적자가 계승하여 3대를 이은 연후에야 가하다.’ 하였는데, 이는 본래 자신이 상복의 제도를 통론(通論)한 말이었다. 그런데 초려는 곧 이 말을 부회(傅會)하여 생각하기를 ‘인조 역시 지손(支孫)으로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기 때문에 우암 편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하고, 이른바 인조의 통서(統緖)까지 끊으려 한다는 말을 입 밖에 냈던 것이다. 이에 송 장성 시도(宋長城時燾 장성은 택호)가 듣고 크게 노하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남인도 하지 않은 말인데 초려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는 우리 집에 멸족의 화가 일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는데, 초려가 그 말을 듣고 또 서신을 보내 극구 해명하였다. 얼마 후에 초려가 석방되어 돌아오다가 도중에서 상소하기를 ‘신의 소견은 전과 다름이 없으니 석방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광성(光城)이 승지에게 말하여 그 상소를 되돌려 주게 하였다. 그후 경신년(1680, 숙종6)에 초려가 또 상소하기를 ‘효종을 적자(嫡子)로 간주하는 것은 신의 견해일 뿐 아니라 송모(宋某)의 견해 역시 신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송모 또한 죄가 없다.’ 하고, 드디어 우암을 석방하여 청풍(淸風)에 부처(付處)하였다. 이에 우암이 아뢰기를 ‘신의 죄는 전과 변함이 없는데 상께서 그릇 남의 말을 들으시고 뜻밖에 감형을 해 주시니, 의리상 편안치 못합니다.’ 하고, 그대로 장기에 머물며 올라오려 하지 않았다. 이에 금오랑(金吾郞)이 말하기를 ‘상께서 이미 중도부처하였으니 마음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므로, 부득이 길을 떠났는데, 조령(烏嶺)에 이르기 전에 또 방면(放免)되어 화양(華陽)으로 돌아갔다. 대저 우암이 끝내 초려의 일을 말하여 공격하지 않았던 것은, 이 일이 자기에게만 관계될 뿐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일처럼 세도(世道)와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이 윤증과 갈라서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영숙(永叔)에게 말해 주었다.
대개 그 날짜를 상고해 보니 정월에 써 놓았다가 6월에 비로소 부친 것이었다. 우암이 몹시 놀라고 서구 또한 안색을 변하면서 이것이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우암이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는 필시 중간에서 이루어진 말들일 것이다. 어떻게 답서를 하면 화숙(和叔 박세채(朴世采))의 의혹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옛날에 송강(松江)이 율곡(栗谷)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뜻밖에 모두 숙헌(叔獻 이이(李珥))의 손에 죽게 되었다.’고 하니, 율곡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는 사화를 입고 죽는데 불과하지만, 나는 사림을 해친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증거로 삼아 회답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이 말로 답하고 그 하단에 또 말하기를 ‘내가 전에 화숙과 함께 선조(先祖)가 금주위(錦州衛)에서 조병(助兵)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휘호의 논쟁이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니, 현석이 답서를 보고 마침내 감동을 받고는 우암의 말을 경청하면서 점차 연소배가 희재(希載) 등과 결탁하는 것을 혐오하게 되었다.
또 그때 최신(崔愼)이 현석을 배척하는 소를 올리려 하자 문곡(文谷)과 노봉(老峯)이 말려서 소를 올리지 못하였는데, 송인일(宋仁一 송순석(宋純錫))이 마침 서울에 있다가 서신으로 그 일을 우암에게 고하였다. 그러자 우암이 즉시 최신에게 책망하는 서간을 보내 이르기를 ‘현석은 나와 도의로 사귀는 친구이다. 네가 나를 사문(師門)이라고 칭하면서 감히 나의 도의의 교우(交友)를 배척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와 같이 하려거든 다시는 나를 보지 말라.’ 하고는, 그 편지를 봉함하지 않고 인일(仁一)에게 보내 그로 하여금 읽어보고 최신에게 전하게 하였다. 인일이 그 서신을 볼 때 이 운촌 동보(李芸村同甫)가 한 자리에 있다가 옆에서 그 서간을 보고는 나가서 현석에게 보였다. 현석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였는데, 그 자손 또한 모두 감격하면서 말하기를 ‘우암의 본의가 실로 이와 같은데, 지난날 망녕되이 비난했으니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후부터 현석과 우암의 집안은 전과 같이 화평하게 지냈다. 대개 현석이 윤증의 유혹을 받긴 하였으나 실은 연로배들이 척신(戚臣)에게 빌붙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들과 더불어 화합하려 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물러났던 것이다. 그리고 갑자년(1684, 숙종10) 이후로 자기를 따르는 연소배들이 점차 희재(希載)의 무리와 서로 가까이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크게 깨닫고는, 자신이 우암과 불화하게 된 것은 본래 자인(子仁 윤증)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윤증을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 그런데 윤증 자신은 생각하기를 ‘갑자년 이후로는 우암이 실로 고립되어 서인들도 따르는 사람이 없다.’ 하였는데, 급기야 기사년에 우암이 배소(配所)로 떠날 때 경향의 선비들이 모두 구제하는 소를 올리고 또 그 배소로 수행한 자가 무려 수백 명이며 자기와 사이가 좋던 자들도 모두 분주하게 주선한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의심하여 말하기를 ‘어찌 인심의 경향이 이와 같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다가 우암이 세상을 떠난 후 현석이 복(服)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인심이 이렇게 기울어진 것은 화숙의 소행 때문이다.’ 하고는, 서신으로 현석을 책망하기를 ‘이미 스승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데 왜 복을 입었는가?’ 하니, 현석이 답하기를 ‘율곡이 퇴계에 대하여 석 달 복을 입었기에 나 역시 이를 본받아 복을 입었다.’ 하였다. 이에 윤증이 또 우암을 퇴계에 비교하는 것이 의심스러워 서신으로 묻기를 ‘형은 율곡이 아니고 송모는 퇴계가 아닌데 어째서 꼭 복을 입는 것인가?’ 하자, 현석이 이로 인해 더욱 불쾌하게 여겼는데, 윤증이 남인들에게 추대되어 우암을 그토록 배척하는 것을 보고는 윤증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 그때 남인들이 현석을 귀양 보내려 하면서 정유악(鄭維岳)으로 하여금 윤증에게 그 가부를 묻게 하니, 윤증이 대답하기를 ‘조정의 일을 내가 어찌 논하겠는가.’ 하였는데, 현석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면서 그 심술을 통탄하였다. 이것이 현석이 윤증과 갈라서게 된 곡절이다.
이에 앞서 우암이 언젠가 이르기를 ‘사람들이 이렇게 화숙을 공격하지만 화숙은 끝내 나를 잡을 사람이 아니다. 다만 견해가 서로 다른 곳이 있기 때문에 때로 나를 의심하지만 그의 심술이 잘못되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두려운 자는 윤증이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현석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자인(子仁)이야말로 자제와 같은 사람입니다. 선생께 유고가 있다 하더라도 자인이 어찌 감히 배반하겠습니까.’ 하니, 우암이 이르기를 ‘그대가 자인을 아는 것이 나만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후 우암의 말이 부절(符節)을 합한 듯 꼭 맞았으니, 우암이야말로 성인(聖人)이시라 하겠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최신(崔愼)이 우암에게 올린 제문에 ‘사람들 모두가 윤증이 우리 선생을 죽였다고 말하는데, 그 자취는 비록 미세하나 그 일은 몹시 뚜렷하다.’ 하였으니, 이는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하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후 김 군평 만준(金君平萬峻)이 또 이산(尼山)에서 찌푸린 얼굴로 우암에게 와 고하기를 ‘윤증이 소생의 집과 선생의 집을 모두 죽이려 합니다.’ 하니, 우암이 또 책망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내가 들은 하나의 묘맥(苗脈)이다. 또 박태회(朴泰晦)에게 들으니, 그 말에 이르기를 ‘이원정(李元楨)의 아들 담명(聃命)이 기사년 초에 대사간으로 올라와 그들에게 말하기를 ‘김수항(金壽恒)은 곧 우리의 원수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송모는 석주(錫胄)가 경신년(1680, 숙종6) 사화를 일으킬 때 거제(巨濟)에 있었으니, 수항이나 석주배와 서로 모의할 수 있었겠는가. 또 이 두 사람은 송모를 영수로 삼고 있으니 지금 만약 율을 가하면 반드시 사화라고 이를 것인데, 이것 또한 고민이다. 따라서 그곳에 그대로 안치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자, 한 남인이 말하기를 ‘서로 모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담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탐지해내는가.’ 하니, 한 남인이 ‘만약 권기(權愭)를 시켜 윤증에게 묻게 하면 윤증은 필시 숨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권기로 하여금 윤증에게 물어보게 하니, 윤증이 말하기를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 당시 석주와 두 차례 서신을 왕래한 적이 있었다.’ 하였다. 그러자 남인들이 마침내 두 차례의 서신이 필시 모의한 것이라고 여겨 기사사화(己巳士禍)를 빚어냈다.’ 하였다.
이것이 태회가 전한 말인데, 태회는 본래 믿을 만한 사람이 못 되니 이것이 의심스럽다. 그러나 두 차례 서신을 했다는 것은 또한 묘맥(苗脈)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태회가 알 수 있는 일이 못 되니 이것으로 말하면 믿을 수 있을 듯하다.”
영숙이 어째서 묘맥이라고 말하느냐고 묻자,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이산(尼山) 윤증의 서간에 ‘동춘(同春)이 도시기관(都是機關)이라고 하였다.’고 한 것도 묘맥(苗脈)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이 우암ㆍ동춘 두 선생의 묘의(廟議)에 관한 일을 들었느냐고 묻기에, 영숙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해 주었다.
옛날에 우리나라 인조ㆍ명종 두 묘위(廟位)를 체천할 때 우암은 또한 주자의 논을 위주하여 말하기를 ‘아조(我朝)의 목조(穆祖)는 또한 송 나라의 희조(僖祖)와 같고, 아조의 태조와 태종은 또한 송 나라의 태조ㆍ태종과 같다. 그렇다면 아조의 목조는 마땅히 태조가 되어 백세토록 불천하고 태조와 태종은 세실을 삼아야 한다. 또 아조의 영녕전(永寧殷)은 옛 법이 아니다. 묘제(廟制)로 논하건대 세실을 두지 않고 태조만을 둔다면 조주(祧主 체천된 신주)를 모두 태조의 협실(夾室)에 보관해야 한다. 지금 강헌(康獻 태조(太祖)의 휘호)으로 세실을 삼지 않고 목조(穆祖)를 조주로 삼는다면 그 조주를 강헌의 협실로 내려 보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조상의 신주를 자손의 협실에 보관하는 것은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이것이 주자가 반드시 희조를 태조(太祖)로 삼으려 했던 이유이니, 아조도 이를 준행해야 마땅하다.’ 하고, 동춘은 말하기를 ‘주자는 체제(禘祭)와 협제(祫祭)를 의논하면서 또한 제후는 2종(二宗)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본묘(本廟)는 2소ㆍ2목 외에 오직 태조를 포함하여 5묘가 될 뿐이니, 세실을 세우는 것은 부당하다. 그리고 일단 세실을 세우지 않고 태조 1묘만 세웠고 보면, 역시 강헌을 태조로 삼고 목조는 체천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제후의 임금은 처음 봉해진 임금으로 시조를 삼는 예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우암이 말하기를 ‘이것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주자가 2종이 없다고 말한 것이 경(經)에는 보이지 않는데,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른바 처음 봉해진 임금을 시조로 삼는 것이 예라고 한 것은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주공(周公)으로 말하면, 주공 이상은 모두 천자이므로 노(魯) 나라가 제사할 수 없기 때문에 노 나라에서 주공을 시조로 삼은 것은 이치로 보나 형세로 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제(齊) 나라에 봉해진 태공(太公)의 경우, 태공이 어찌 그 조상의 5묘를 세우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미 5묘를 세웠다면 또한 그중 가장 높은 이를 태묘(太廟)로 삼지 않았겠는가.’ 하였는데, 두 선생의 의견이 끝내 합치되지 않았다. 우암이 동춘의 묘지에 이르기를 ‘억지로 의견을 같이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의 고매한 점이다.’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의논은 실로 우리나라의 대 거조이며 두 선생의 대 주장이니, 후세의 학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다.”
선생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고 각각 헤어져 돌아갔는데, 희삼이 곧바로 산해의 집에 가서 그 말을 고하였다. 산해가 이 말을 듣고 몹시 놀라고 두려워하던 차에 마침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이 이르렀다. 산해가 구봉에게 고하기를 ‘어른께서 나를 죽이려 하니 나는 분명 죽을 것이다.’ 하였다. 대개 산해는 여립을 추천한 전장(銓長)이었고 어른이란 우계를 가리킨 것이다. 이로부터 산해는 우계와 송강에게 앙심을 품고 항상 중상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산해가 영상이 되고 서애(西涯)가 우상이 되고 송강이 좌상이 되었다.
이때 선조(宣祖)에게 적사(適嗣)는 없었으나 왕자(王子)는 많았다. 조신(朝臣)들의 생각은 일찍부터 김 숙의(金淑儀)의 소생 광해군에게 있었고 선조의 뜻은 곧 김 인빈(金仁嬪)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에게 있었다. 산해가 유(柳)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정승이 된 지 오래인데도 건의한 일이 없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지금 좌상이 새로 정승의 자리에 들어왔으니, 필시 건의할 만한 급선무가 있을 것이다. 우상이 그와 함께 계책을 물어 함께 아뢰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유상(柳相)이 드디어 송강을 보고 산해의 의도를 고하였다. 이에 송강이 말하기를 ‘성상의 연세가 이미 지긋한데 후사를 세우지 못하였으니 세자를 세우는 한 가지 일이야 말로 오늘날의 급선무일 듯하다. 그러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니, 유상이 대단히 옳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산해도 드디어 두 정승과 함께 들어가 계청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이틀 전에 산해가 은밀히 인빈(仁嬪)의 남동생 김공량(金公諒)을 불러 말하기를 ‘지금 새 정승이 광해군을 세워 세자로 삼을 것을 청하려 하는데, 인빈을 제거하지 않으면 불편하므로 인빈을 제거하려 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가? 인빈이 해를 입으면 화가 반드시 그대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였는데, 공량이 크게 두려워하면서 즉시 인빈에게 들어가 고하였다. 인빈이 울면서 상에게 호소하기를 ‘소인의 집에 돌아가 죽기를 원합니다.’ 하자, 상이 괴이하게 여겨 사실을 물었다. 인빈이 아뢰기를 ‘지금 들으니 새 정승이 광해를 세워 세자를 삼으면서 소인을 죽이려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어디서 그런 근거 없는 말을 들었는가? 그런 일은 만무하다.’ 하였다.
이튿날 산해가 복통을 핑계로 오지 않자 송강이 유상과만 어전에 입시하였다. 송강이 먼저 건저(建儲)가 시급한 일임을 아뢰니, 상은 이미 인빈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고 있던 차라, 이를 듣고 몹시 노하며 이르기를 ‘아직 내가 있는데 건저를 청해서 무엇하려는가.’ 하며 노발대발하였다. 이에 송강이 그만 물러 나와 대죄하였는데, 유상은 감히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이것이야말로 산해가 송강을 제거하려는 교묘한 술책이었는데, 유상은 실로 산해의 계책을 알지 못하고 그에게 이용만 당했을 뿐이었다. 이때 서인 측에서 공량의 소행이라는 것을 은밀히 알아채고 궁중을 선동한 그 행동에 노하여 양사(兩司)가 합계(合啓)로 청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이 말하기를 ‘공량 때문에 합계하려 하다니, 어찌 그리도 피폐해졌는가. 내가 지금 서전(西銓)에 있으니, 공량을 부하로 삼아 죄로 얽어 죽여도 늦지 않다.’ 하고, 즉시 공량을 막하로 삼았다. 산해가 그런 의논을 알고 공량에게 말하니, 공량이 두려워하여 인빈에게 고하자, 인빈이 즉시 상에게 호소하였다. 상이 노하였으나 달리 구제할 방법이 없자,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손자 윤신지(尹新之)를 부마(駙馬)로 간택하여 인빈의 사위를 삼음으로써 그 아우로 하여금 차마 공량을 죽이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이 산해가 간사한 술책을 부린 정상인데, 또한 선조가 서인을 미워하게 된 곡절이다.
그런데 산해가 송강에 대해 유감을 품은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이때 연회가 있어 온 조정의 백관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산해만 일이 있어 가지 못하고 시(詩)를 지어 보내면서 연월 밑에 이름은 쓰지 않고 아옹(鵝翁 산해)이라고만 썼다. 송강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대감이 오늘 참으로 자기의 소리를 낸다.’ 하였는데, 산해가 듣고 몹시 언짢아 하였다고 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급기야 광해가 즉위하여 산해를 몹시 싫어하자 산해 또한 크게 두려워 하여 그만 인홍(仁弘)ㆍ이첨(爾瞻)의 무리와 결탁하였는데, 폐모(廢母)에 관한 모든 일은 실제로 산해가 앞에서 음모하고 인홍이 뒤에서 그 흉억을 행한 것이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로부터 선조가 청양을 몹시 미워하였는데, 동인(東人)들이 은밀히 상의 뜻을 탐지하고 드디어 청양을 물리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런데 오직 정송강과 김황강(金黃岡 이름은 계휘(繼輝)ㆍ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부)만이 그 기미를 알았기 때문에 곧바로 동인을 소인이라고 공격하였는데, 율곡 선생이 그 일을 알지 못하고 동ㆍ서의 분당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편론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초 서인이 과격했던 것은 아니었다.”
영숙이, 송강과 황강이 왜 그 까닭을 율곡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영숙(永叔)이 묻기를 “율곡 선생은 윤임(尹任)이 무죄라 하고, 퇴계 선생은 사직(社稷)의 죄가 없지 않다고 하였는데, 두 선생의 소견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개 퇴계는 항상 산림에 있었고 고봉은 벼슬하여 서울에 있었는데, 퇴계가 들은 것은 모두가 고봉의 말이었다. 그런데 고봉이 이미 삭훈(削勳)을 불가하게 여겼고 보면, 퇴계가 윤임에 대해 사직의 죄가 없지 않다고 한 것은 괴이할 것이 없다. 대개 윤임은 무부(武夫)로 유악(帷幄)에 있었다. 그래서 퇴계는 생각하기를 ‘그가 본래 무지한 사람으로 높은 자리에 있었으니 어찌 그 마음가짐이 단정한 선비와 같을 수 있었겠는가.’ 하였기 때문에 의심하게 된 것이고, 율곡은 생각하기를 ‘윤임이 무부이긴 하나 드러난 죄가 없고 당시의 제현(諸賢)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윤원형(尹元衡)과 윤원로(尹元老)는 본래 불측한 소인이고, 을사년(1545, 명종 즉위년) 인종(仁宗)의 죽음 또한 후세의 의혹이 없지 않다. 따라서 단연코 윤임이 죄가 있다고 한다면 제현도 죄가 있는 것이 되고, 제현이 죄가 없다면 윤임 역시 죄가 없다. 이미 죄가 없다고 한다면 윤원형의 녹훈을 깎지 않고 어찌하랴.’ 한 것이니, 이것이 율곡 선생이 극력 삭훈을 주장하게 된 이유로서 후세의 큰 공안(公案)이 된 것이다.”
영숙이 묻기를 “율곡 선생은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이 충신은 될지언정 유자(儒者)의 기상은 없다고 하였고, 우암 선생은 신도비(神道碑)를 지으면서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때의 역사가 많이 궐실되었다.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물으니, 퇴계는 「허물이 있는 중에서도 허물이 없음을 구해야 하고 허물이 없는 중에서 허물이 있음을 구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참으로 지론이다…….’고 하였습니다. 그 곡절을 듣고 싶습니다.” 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후에 권근(權近)이 중국에 봉명사신으로 갔을 때 명 태조(明太祖)는 고려조가 혼란하여 왕씨(王氏)를 신씨(辛氏)로 변경하였음을 듣고 권근을 보고는 그 사실을 힐책하며 책망하는 조서까지 내렸다. 권근이 그 조서를 가지고 귀국하였으나 감히 내보일 수가 없었다. 이때 창왕도 명 나라가 자기를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원한을 품었는데, 이에 최영(崔瑩)과 함께 상국(上國)을 범하려고 하여 태조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태조가 요동(遼東)으로 행군하던 도중에 돌이켜 생각하기를 ‘고려는 본래 왕씨의 나라요 신창(辛昌)의 나라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왕씨를 세워야 한다는 선언을 하고 회군(回軍)하여 돌아왔다. 돌아오는 즉시 최영을 죽이고 신창을 폐위한 다음 공양왕(恭讓王)을 영입하여 임금으로 세웠다. 그리고는 드디어 녹훈(錄勳)하였는데 포은도 그 녹훈에 참여하였다. 그런데 포은이 일단 신창을 왕창(王昌)으로 여겨 몸소 그를 섬겼고 보면 어찌하여 왕창을 부지하지 못하고 폐립(廢立)의 공훈에 참여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포은이 만일 태조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창을 신창으로 여기었다면 어찌하며 애당초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겼단 말인가.”
영숙이 묻기를,
영숙이 묻기를,
지난 무오 기사년에 낙담하였는데 / 從來戊己可傷魂
을사년간에 일이 다시 어려워졌네 / 乙巳年間事更屯
천추에 이름 남긴 이는 두 학사이고 / 千古留名兩學士
구천에서 통분하는 이는 한 왕손일세 / 九泉含痛一王孫
시비는 계속되어 끝내 진정시키기 어렵고 / 是非滾滾終難定
훼예는 분분하여 논하기 쉽지 않네 / 毁譽紛紛未易論
어떻게 세찬 바람 얻어 음산한 구름을 걷어버리고 / 安得長風掃陰翳
해 달을 높이 드러내 천지를 밝힐까 / 高懸日月照乾坤
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두 학사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와 퇴계 선생이다. 지난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석주(石洲)의 별집(別集)을 초(抄)할 때 이 시를 별집 중에 실었는데, 우암이 그 위에 찌를 붙여 이르기를 ‘이 시의 지적한 것이 이러이러한 것인데 공이 아는가?’ 하자, 문곡이 깜짝 놀라 즉시 그 시를 별집의 판(板)에서 뽑아버렸다고 한다.”
영숙이 최명길(崔鳴吉)의 일을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또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사실이 청 나라에 발각되자 청 나라가 우리를 책망하며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신하를 잡아 보내도록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부득이 임 장군(林將軍)을 잡아 보냈는데, 임 장군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도망쳤다. 일이 장차 난처하게 되자 최상이 곧 말하기를, ‘당시 독보를 명 나라에 보낸 일은 임모(林某)와 신이 실제로 그 묘책을 주장하였으니 신이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상에게 아뢰고는 그 아들 후량(後亮)과 함께 스스로 청 나라에 갔다. 대개 이 걸음이 생사에 관계된 연유로 해서 최상의 집에서는 초종(初終)의 모든 기구를 갖추어 가지고 떠났으며 여러 관리와 친우들도 전송하면서 은자(銀子) 수천 냥을 마련해 주었다.
그 당시 청음도 청 나라로 잡혀가 최상과 한 집에 갇혔는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후량이 은자를 써서 그 아비를 구출하려 하였으나 청음이 혹시라도 그 일을 알까 염려되었다. 이에 청음을 찾아가 산의생(散宜生 주(紂)에게 뇌물을 주어 유리옥(羑里獄)에 갇힌 주 문왕(周文王)을 구했음)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는데, 청음이 옛날의 현인(賢人)이라고 대답하였다. 후량이 또 그렇다면 산의생의 한 일이 부당한 것이 없느냐고 묻자, 청음은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후량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드디어 그 은자를 정명수(鄭命壽)에게 주어 그 화를 늦추게 하였다.
또 최상은 처음에 청음이 진심으로 춘추대의를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구하려는 심산이 있었다고 의심하였는데, 급기야 함께 청 나라에 갇혀 사생이 박두하되 꿋꿋이 변함없는 마음을 보고서야 그 의기심을 믿고 감복하였다. 그러고 청음도 처음에는 최상이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여기었는데, 급기야 청 나라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오랑캐에게 굴하지 않는 것을 보고서야 그 본심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에 함께 벽을 사이에 두고 갇혀 있는 상황에서 서로 시(詩)를 지어 화답하였는데, 그중 청음의 시에 ‘끝내 두 대(代)의 우호를 닦으니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네.[終修兩世好 頓釋百年疑]’라 하고, 최상의 시에 ‘그대의 마음 돌이 아니니 끝내 굴리기 어려우나 나의 도는 고리와 같아 이르는 곳마다 자유롭네.[君心非石終難轉 吾道如環信所隨]’라 하였다. 이것이 서로의 유감을 해소한 한 가지 일이다.
그후 최상 집 자손들은 청음이 자기의 조상과 서로 조그마한 원한도 없다고 생각하여 정의(情誼)가 몹시 두터웠는데, 청음 집 자손은 별로 대단히 좋게 여기지 않고 그저 서로의 안부나 끊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청음의 연보(年譜)를 작성할 때 이 사실 전부를 빼 버렸는데, 우암이 이를 보고 문곡에게 서신으로 이르기를 ‘본말을 갖추어 기록하는 것이 연보의 체재이다. 하물며 서로의 유감을 해소한 일은 본래 선생의 성대한 덕에 손색이 없는 것이니 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였으나, 문곡은 끝내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또 우암이 일찍이 이르기를 ‘요즈음 사람들은 명길이 강화(講和)한 일은 책망하면서 감히 후인이 척화하지 않은 것은 비난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명길이 강화를 주장한 것은 사세가 위급하여 만부득해서였으니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후세의 명류(名流)들은 평안한 때에 한 사람도 척화의 계책을 낸 사람이 없이 오랑캐들에게 굽히기를 달갑게 여기기만 했으니 이런 자들이야말로 죄를 받아야 한다. 위급한 때 강화를 주장한 자만 유독 죄가 있고 평안한 때 강화를 주장한 자는 또 죄가 없다면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명길을 마음속으로부터 복종시키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삼신전(三臣傳)》을 우암이 개정한 곡절을 들은 적이 있냐고 묻기에, 영숙이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비록 삼학사를 죽이지는 않았으나 / 我雖不殺三學士
한밤중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하네 / 中夜思之心自驚
천도는 본래 순환하는 것이런가 / 天道由來好回還
흰머리로 오늘날 또다시 서쪽으로 가네 / 白頭今日又西行
라고 한 내용이었다. 우암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시는 선상공(先相公)의 작품이 아니란 말인가?’ 하니, 후량이 말하기를 ‘시는 과연 선인의 시이다.’ 하였다. 이에 우암은 그렇다면 감히 고칠 수 없다고 하고 끝내 그가 청한 대목을 고치지 않았다. 후량은 자기의 요청을 다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에 말하기를 ‘저희 집이 대감에게 받은 은혜가 많습니다. 저희 집 자손이 어찌 감히 문하를 어기겠습니까?’ 하였는데, 그후에 자손이 마침내 그와 같이 하였다.”
영숙이 대규모(大規模)와 엄심법(嚴心法)을 물으니, 선생이 이르기를,
대개 우암은 윤씨 집에 대하여 팔송공(八松公 미촌(美村)의 부(父) 황(惶))때부터 교분이 그처럼 두터울 수 없었고,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 등도 외우(畏友)로 섬겼으며, 윤증(尹拯) 또한 우암에 대해 당세의 망사(望士)로 극진히 섬겼다. 따라서 우암의 입장에서는 옳지 못한 곳이 보이더라도 묵묵히 참고 칭찬이나 하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었다. 그랬다면 당후(唐後 지명. 곧 윤증 가문)를 추복(趍服)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암을 섬겼을 것이며, 또 훗날 대화(大禍)의 조짐도 없었을 것이니, 이 어찌 좋은 일이 아니었겠는가. 우암이 이를 모른 것은 아니었다. 오직 효종(孝宗)으로부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중책을 받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천리에 관계되거나 사설(邪說)에 관련되는 일이 있으면 화복과 이해를 일체 돌아보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성내어 극언하기를 마지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 당후(唐後)의 일에 대하여 내가 서구(叙九 송주석(宋疇錫))와 함께 여러 차례 너무 과격하여 뒷날의 화를 부르게 될까 염려됨을 말씀드렸고, 회석(晦錫 우암의 손자)은 때로 울면서 간하기를 ‘어찌 자손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였으나, 우암은 다만 미소를 지으면서 서서히 말하기를 ‘나로 말미암아 천리와 인심은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자손을 보호하지 못하는 것과, 남을 따라 오염되어 사행(邪行)에 휩쓸려 자손을 보전하게 되는 것을 후세로 하여금 평가하도록 하였을 때, 그 어느 것이 낫겠는가.’ 하였다. 이것이 우암의 도량으로서 화복과 이해에 집착하지 않고 존경과 친밀에 집착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소위 간기의 도량으로서 바로 배우기 어려운 점이다. 위공의 도량 또한 화복과 이해에 일체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자가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영숙이 백겸(伯謙)의 앞서 있었던 일의 전말을 물으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급기야 지난해 이하성(李廈成)이 그 조부를 위해 자칭 변무소(卞誣疏)를 올리면서, 동춘의 해탄을 인용하여 우암을 공격하는 자료로 삼았다. 그러므로 문인들의 변무의(辨誣議)가 서울에서 일어났고, 정경유(鄭慶由) 곧 병() 그 소본(疏本)을 나에게 보내 가부를 가리게 하였다. 내가 이때가 마침 병이 있어 손자 아이를 시켜 읽히고 그 내용을 들었다. 처음에는 누가 초안한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 문세를 듣고 나서야 백겸(伯謙)의 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중간에 동춘의 사실에 이르러 말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받들어 순종하는데 모(某)만이 유독 배척하니 그 화연(譁然)할 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송모(宋某)가 모(某)에 대하여 해탄한 것은 무슨 일인가? 옛날에 명도(明道)와 이천(伊川)은…….’이라고 한 대목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생각하기를 ‘모에 대하여 해탄한 것은 무슨 일인가라고 한 말은 위의 화연(譁然)의 말과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하였기 때문에, 경유(慶由)에게 답하기를 ‘모(某)는 한결같이 두 선생을 섬겼는데 폄의(貶議)하는 것 같아 듣고 싶지 않다.’ 하였다. 그런데 그후에 백겸의 말을 들으니, 그 본의가, 화연이라고 한 것은 다만 온 세상 사람만을 말한 것이고, 모에 대하여라고 한 것은 단지 명도 운운의 말머리로 삼은 것이라고 하였다. 백겸의 본의야 과연 이와 같았다 할지라도 송모의 해탄 구절 뒤에 차부지어(且夫至於) 등의 문자를 붙이지 않고 바로 화연의 밑에 접속시켰고 보면, 사람들이 보기에 나의 처음 본 의사와 같을 것이 괴이하지 않다. 이것이 백겸이 글자를 제대로 안배해 쓰지 못한 곳이다.
또 두 가문이 서로 시끄럽게 된 원인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 당시 내 손자가 그 소본의 이 대목을 등서하여 그 장인 송병익(宋炳翼 동춘의 손자)에게 보냈더니, 병익이 백순(伯純)에게 보였다. 백순은 처음부터 또한 백겸이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회중(懐中 송씨(宋氏)의 세거지 회덕(懷德))의 박정채(朴廷采)ㆍ송하적(宋夏績) 등이 그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백겸을 비난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까지 하고, 또 세제(世濟)의 무함이 조상에까지 미쳤으니 자손된 백겸이 그 어찌 통분스럽지 않겠는가. 대개 하적이란 자는 본래 백겸의 집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기화로 그 사사로운 원한을 풀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씨가 형편없다 하겠다. 이로부터 백순 또한 격노하여 말하기를 ‘우암을 변무한 사람이 난적이 된다면 이는 우암으로 난적을 삼는 것이다.’ 하니, 회중의 무리가 그 말을 듣고 백순 또한 백겸과 함께 동춘을 무함한다고 하면서 백순까지 아울러 공격하였다. 이로 인하여 두 집의 자손이 서로 패를 갈라 버티게 되었다. 얼마 후에 회중 사람 7, 8명이 연명하여 나에게 백겸을 징벌할 일을 물어 왔기에, 내가 답하기를 ‘신모(申某)의 일은 실로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남의 문장력을 흠잡아 징벌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그후 내가 화양동(華陽洞)으로 가니 백순ㆍ백겸도 와서 함께 모였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망(謬妄)’ 두 자를 풀어 말하며 백겸을 책망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이는 말을 다하기 전에 승복할 일이다.’ 하였다. 내가 이어 백겸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이번 일이 또한 실수가 없는 것이 아닌데, 지금 만약 한 번 사과하면 허다한 분란이 모두 없는 일로 될 것이다. 어찌 이처럼 고집하는가?’ 하니, 백겸이 말하기를 ‘저들이 소생을 무고할 뿐 아니라 선조까지 무함하니, 사과하고 싶어도 어떻게 사과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과하는 글을 대략 몇 구절 만들어 나에게 서신을 보내라. 그러면 내가 회중 사람들에게 보여 일이 없도록 하겠다.’ 하니, 백겸은 충고해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는데 끝내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 또 을유년 4월에 백겸이 여기에 왔을 때 9일 동안 상대하면서 사과할 것을 역설하자, 그때도 돌아가면 충고해 준 대로 하겠다고 하였으나, 역시 실행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운 일인데 고집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이것이 백겸의 병통인 것이다.
두 집 자손에게 내가 항상 이르기를 ‘우암과 동춘 두 선생은 어려서부터 사계(沙溪)의 문하에 함께 노닐며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그리고 춘당(春堂)이 임종할 때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와 일조청빙(一條淸氷)으로 서로 인정하였고, 세인들 또한 매양 사문(沙門)의 양송(兩宋)으로 일컫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두 집 자손이 서로 불화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며, 그 흐름의 폐단은 끝내 동춘 자손이 우암을 헐뜯게 되고 우암 자손이 동춘을 헐뜯는 일까지도 있을지 모른다. 삼분오열(三分五裂)된 이때를 당하여 어찌 사소한 일로 이처럼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가? 왜 급급히 서로 사과하여 구의(舊誼)를 되찾지 않는가?’ 하였는데, 송병익은 말하기를 ‘일원(一源)이 사과하면 내가 유감을 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일원이 사과하지 않으니, 내가 차마 먼저 굽힐 수는 없다.’ 하고, 송백순은 말하기를 ‘그들은 이미 내가 춘당(春堂)을 모욕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내가 먼저 사과하면 나는 과연 춘당을 모욕한 사람이 된다. 내가 이미 모욕한 일이 없는데 내가 먼저 사과할 의리가 없다.’ 하였다. 이와 같이 서로 버티며 세월이 갈수록 격렬해져 내 말을 듣기를 진월(秦越)같이 여길 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순은 나를 책망하여 왜 사정(邪正)을 판단하지 못하느냐고 하고, 병익은 나를 책망하여 왜 백순과 백겸을 배척하지 않느냐고 한다. 이것이 무슨 의리이며 무슨 처사인가. 이것이 근래 일의 줄거리이다.”
선생이 《의례(儀禮)》에 구고(舅姑)의 복(服)을 기년(期年)으로 한 이유는 무엇이냐고 묻기에, 영숙이 예의 뜻을 감히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더니, 선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D-002]기해년에 …… 예론(禮論) : 효종(孝宗)의 승하에 따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로, 서인 송시열 등의 기년설(期年說)과 남인 윤휴 등의 3년설(三年說)이 대립되었던 예론을 말함.
[주D-003]갑인년의 화 : 숙종 즉위년 효종의 승하에 따른 자의대비의 상복을 기년(期年)으로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삭탈관직하고 그 일파를 추죄(推罪)한 사건을 가리킴.
[주D-004]경신년의 옥사 : 숙종 6년에 있었던 소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말함. 허적ㆍ윤휴 등 남인이 대거 실각하고 송시열 등이 다시 등용됨으로써 서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주D-005]점필재(佔畢齋) …… 것이다 :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史草) 문제로 점필재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을 때, 그의 제자였던 한훤당까지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일을 말함.
[주D-006]태묘(太廟)의 …… 일 : 태조의 휘호인 “太祖康憲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이 세조의 휘호인 “世祖惠莊承天軆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나 선조의 휘호인 “宣祖昭敬正倫立極成德洪烈至誠大義格天煕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보다도 적다는 이유로 태조의 존호를 추가할 것을 주청하려 한 일. 숙종 9년 송시열이 이를 건의했으나, 박세채(朴世采)의 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07]그 아비의 묘문(墓文) :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탁한 윤선거(尹宣擧)의 묘문임. 송시열이 부탁을 받고는 앞서 윤선거가 윤휴를 천거한 점을 불쾌하게 여기어 “행장(行狀 박세채(朴世采)가 씀)에 이미 다 말하였다.”고 기피하면서 일축하였는데, 이것이 절교를 하게 된 명분이 되었다.
[주D-008]목천(木川)의 사건 : 목천 사람 허황(許璜)이란 자가 윤선거를 강도 부노(江都浮奴)라고 하더라는 말을 송시열이 전파하였다 하여 윤증이 송시열을 의심하게 된 사건이다. 뒤에 허언(虛言)임이 밝혀졌다.
[주D-009]강빈(姜嬪)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으로 병자호란 때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했다. 뒤에 세자가 인조의 미움을 받다가 죽은 후, 어선(御膳)에 독약을 넣었다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 소행의 장본인으로 무고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숙종 44년(1718)에 신원(伸冤)되었다.
[주D-010]김홍욱(金弘郁) : 효종 5년(1654)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강빈(姜嬪)의 사사(賜死)가 억울하다고 상소한 죄로 친국(親鞫)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는데, 뒤에 신원되었다.
[주D-011]현석이 …… 의견 : 태조(太祖)의 휘호가 후대 임금보다 적을 수 없다는 이유로 태조의 휘호를 추가할 것을 송시열이 건의한 데 대해 박세채가 반대한 것을 말함.
[주D-012]향동문답(香洞問答) : 송주석(宋疇錫)의 편서로, 송시열이 박세채ㆍ이단하(李端夏) 등과 문답한 시사(時事)를 기록한 책.
[주D-013]선조(先祖)가 …… 일 : 효종이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청 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뒤 청 나라의 정서(征西) 전투에 참여한 일을 가리킴.
[주D-014]왕도(王導)와 진 원제(晉元帝)의 관계 : 원제는 원래 공왕(恭王)의 비(妃) 하후씨(夏侯氏)가 소리(小吏)인 우씨(牛氏)와 간통해 낳아 진의 중흥주가 되었으므로 우계마후(牛繼馬後)란 말이 전한다. 그런데 왕도는 원제의 기량을 알고 세자 때부터 보좌하다가 원제가 즉위하자 승상(丞相)이 되었다. 《晉書 帝記6 元帝》
[주D-015]봉성군(鳳城君) 찬축(竄逐) : 봉성군은 중종의 아들로 이름은 완(岏), 자는 자첨(子瞻). 명종이 즉위한 뒤 윤원형(尹元衡) 일파로부터 계림군(桂林君)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입고 찬축되고 사사(賜死)되었다.
[주D-016]삼신전(三臣傳) : 삼학사(三學士), 즉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에 잡혀가 피살된 홍익한(洪翼漢)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의 전기(傳記)를 말한다.
[주D-017]을유년의 일 : 이경석(李景奭)이 인조 23년(1645)에 이조 판서가 되어 인사의 행정을 쇄신하고 숨은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당시 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이유태(李惟泰) 등이 요직에 오르게 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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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曲松間漾玉船。冠巖初日映前川。携筇坐待佳朋至。遠岫平蕪捲夕煙。文谷金壽恒
二曲僊巖花映峯。碧波流水漾春容。落紅解使漁郞識。休說桃源隔萬重。霽月宋奎濂
三曲曾聞詠壑船。上游移櫂問何年。山禽解說滄桑事。下上其音正可憐。丈巖鄭澔
四曲松崖萬丈巖。日斜林影翠毿毿。怡情正在幽深處。雲白山靑集一潭。睡谷李畬
五曲雲煙深復深。武夷精舍此山林。翛然杖屨淸溪上。誰會吟風詠月心。谷雲金壽增
六曲春深釣綠灣。歸時溪月照松關。濠梁上下天機活。魚我相忘果孰閑。三淵金昌翕
七曲楓巖倒碧灘。錦屏秋色鏡中看。悠然獨坐忘歸路。一任霜風拂面寒。遂庵權尙夏
八曲溪山何處開。琴灘終日好沿洄。牙絃欲奏無人和。獨對靑天霽月來。芝村李喜朝
九曲文巖雪皓然。奇形掩盡舊山川。遊人謾說無佳景。未肯窮尋此洞天。校理宋疇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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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3○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錄) | ||||
[제가기술잡록(諸家記述雜錄)] |
사씨(史氏)는 말한다.
내가 한번은 농암 형에게 장난삼아 말하기를,
농암 형은 또 문장을 너무 쉽게 지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나에게도 문장을 지을 때 반드시 요간(料簡)하게 하라고 권하였다. 요간은 다듬는다는 뜻이니, 구양수도 이렇게 하였다고 한다. 농암 형을 보건대, 만년에 접어들어 병중에 문장을 지을 때조차 반드시 마음과 힘을 남김없이 쏟았다. 이 때문에 지은 글이 매우 드물었고 글 짓는 일을 매우 어렵게 여겼던 것이다. 글을 지은 뒤에 종종 병세가 악화된 적이 있었는데, 이 또한 요간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듯하다.
《주역(周易)》의 고경(古經)은 복희(伏羲)의 팔괘, 그리고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단사(彖辭)와 효사(爻辭)를 경(經)으로 삼고 공자가 지은 십익(十翼)을 전(傳)으로 삼아, 이것들이 각자 별도로 엮여 서로 섞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공씨(孔氏)의 유서(遺書)입니다. 훗날 정현(鄭玄)과 왕필(王弼) 등에 이르러 비로소 단전(彖傳)과 상전(象傳)을 떼어 각각의 괘와 효 아래에 나누어 붙였으니, 한때 살펴보기 편하게 하려던 것이었으나 고역(古易)의 존엄한 체제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송나라의 조열지(晁說之)와 여조겸(呂祖謙)이 차례로 바로잡아 경과 전을 구분함으로써 공씨 유서의 원형을 회복하였는데, 주자가 이것을 매우 옳다고 하였습니다. 정자의 《역전(易傳)》은 왕필의 판본을 따랐지만, 주자의 《본의(本義)》는 오로지 고역(古易)을 따랐기에 각기 별도의 책으로 세상에 통행되었습니다. 급기야 명나라의 유신(儒臣)들이 황명을 받들어 찬정(纂定)하게 되어서는 정자의 《역전》과 주자의 《본의》를 하나로 합쳤으니, 지금 공사 간에 통행하는 판본이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장(章)과 구(句)를 나누는 데 장애가 있을 뿐 아니라 범례의 내용도 서로 어긋나므로 읽기에 불편하고, 주 부자께서 고역을 존숭하신 뜻도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습니다.
신의 스승 고(故) 판서 문간공 김창협이 일찍이 자세히 고증하여 고경의 편차를 따라 한 책을 엮었습니다. 몇 년만이라도 더 살아 이 글을 완전히 익혔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책을 맨 가죽끈이 끊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신은 그 책을 받아 읽어 보고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옥당에 명하여 들이라 하시고 한번 읽어 보신 다음, 운각(芸閣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간행하게 하고 한가할 때 살펴보신다면, 참고하여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기원 어유봉의 상소를 요약하였다. -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가 말하기를,
우리 고을의 선비들이 서원을 지어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동계(桐溪 정온(鄭蘊)),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 네 분의 유현을 제사 지내려고 하였으나 오랜 세월을 지체하며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고을의 남쪽 60리쯤 되는 화곡(華谷)에 서원을 지어 이미 지난달 22일에 봉안을 마치고 농암 선생을 함께 제향하였다. 네 분의 유현은 예전에 이 지방에서 수령의 직임을 맡았던 적이 있었기에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푼 기간이 길다. 하지만 선생은 북평사(北評事)로 이곳을 지나가 체류한 기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사모하는 정도가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덕이 사람들에게 빠르게 퍼진다는 말을 믿을 만하다. - 문인 이재형(李載亨)의 《송암집(松巖集)》에 나온다. -
농암이 지은 고문은 전아하고도 공정하여 구양수(歐陽脩)와 증공(曾鞏)의 체제를 깊이 터득하였다. 고시(古詩)의 선체(選體)는 전한 인물이 없었는데, 근래에 농암 형제가 심혈을 기울여 고시체를 지어 그 작품이 많았다. - 문인 이의현(李宜顯)의 〈도곡만록(陶谷漫錄)〉에 나온다. ○ 아래도 같다. -
학문의 요점은 책을 정밀하게 읽는 데 있다. 만약 깊이 탐구하지 않고 대충 읽고 넘어간다면 비록 천 번을 읽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주자어류》에서 책 읽는 법을 매우 자세히 논하였으니 살펴볼 만하다. 젊었을 때 보니, 농암은 책을 읽을 때 목소리를 길게 늘여 여운을 남기면서 반복하여 읊조렸다. 이 때문에 한 번 읽는데 시간이 한참 걸렸으니, 정밀하게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 뒤라야 득력(得力)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문형(文衡)을 맡은 이가 거의 100여 명인데, 그중에 고문을 아는 사람은 윤월정(尹月汀 윤근수(尹根壽)), 이백사(李白沙 이항복(李恒福)), 신상촌(申象村 신흠(申欽)), 장계곡(張谿谷 장유(張維)),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 이택당(李澤堂 이식(李植)), 김식암(金息庵 김석주(金錫胄)), 이서하(李西河 이민서(李敏叙)), 김농암(金農巖) 등 몇몇 사람뿐이다. 그 밖의 사람들은 재주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 시험에 얽매였기 때문이다.
선생께서는 《죽천집(竹川集)》의 〈우계기(遇溪記)〉를 읽고 몇 군데 오자를 교정하였다. 그리고 말미에 쓰기를,
농암은 일찍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명망이 대단하였다. 마침내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게 되었는데, 모부인께서 그가 당상관의 관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씀하기를,
농암이 젊었을 때 꿈에서,
송공 요화(宋公堯和)의 〈유사(遺事)〉에,
간이(簡易 최립(崔岦))의 문장은 웅장하고 심오하며 기이한 생각을 바탕으로 말재간을 부렸으니, 마치 다섯 섬 무게의 활을 맹분(孟賁), 오획(烏獲)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계곡(谿谷)의 문장은 언뜻 보기에 얕은 것 같지만 반복할수록 원대하고 여유로워, 마치 천리에 푸르게 펼쳐진 강하에 물고기와 용, 수많은 배가 그 속에 있는 것과 같다. 택당(澤堂)의 문장은 마치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에 바위 기운이 맺혀 석종유가 되고 숲이 무성하여 새나 짐승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농암의 문장은 마치 복건을 쓰고 도복을 입은 사람이 산림과 경전 사이를 한가로이 노니는 것 같아 온화하고 의젓하며 공손하여 말마다 이치에 맞으니 참으로 유자의 기상이다. - 남공철(南公轍)의 《금릉집(金陵集)》에 나온다. ○ 아래도 같다. -
정묘(正廟)가 연석에서 이르기를,
정묘께서 일찍이 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농암의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은 정밀하고 깊으며 치밀하여 숨겨진 진수를 드러내 밝혔다. 그리하여 퇴계와 율곡이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나아간 경우도 많으니, 의리에 끝이 없어 전대의 현인이 남겨 둔 것을 후대의 현인이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문집을 간행할 때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은 그의 논설이 율곡과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삭제하기를 강력히 주장하였기에 원집에는 빠져 있다. 그 뒤 연보를 간행할 때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가 그 요점을 모아 덧붙였으나 그래도 전문(全文)을 완전하게 수록한 것만은 못하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 오희상(吳熙常)의 〈노주잡지(老洲雜識)〉에 나온다. ○ 아래도 같다. -
농암이 일찍이 말하기를,
성명(性命)과 이기(理氣)에 대한 논설은 우리나라의 선비들 가운데 율곡과 농암이 가장 훌륭하니, 모두 도의 묘리를 드러내어 경전의 보조가 되었다. 그러나 율곡의 논설은 깊은 조예와 독창적인 이해가 영롱하고 분명하지만, 타고난 자질이 매우 뛰어나 어렵지 않게 터득하고 쉽게 드러내었기 때문에 강론하는 사이에 남이 한 말은 다 드러내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농암은 타고난 자질이 율곡만 못하나, 깊이 생각하였으므로 남들의 생각을 잘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두루 자세히 논변하여 전체를 다 아울러 가르쳐 주어 사람들이 싫증나지 않도록 하였다.
율곡의 말씀은 명쾌하고, 농암의 말씀은 조리가 있다.
농암의 사단칠정설과 삼연의 미발설(未發說)은, 후세의 선비들 중에 이 이치에 도달한 이가 드무니, 옛사람이 드러내지 못한 것을 드러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유현들 가운데 성명(性命)의 근원에 대한 참된 견해가 있는 이는 율곡 이후로는 농암이 으뜸일 것이다. 그렇지만 삼연도 난형난제라 하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지금 그들의 논저에 나타난 것을 대상으로 삼아 나의 부족한 소견으로 헤아려 본다면 농암은 정밀하며 깊고 치밀하여 논리 전개에 착오가 없고, 삼연은 통창하고 비범하여 옛말을 답습하지 않았으니, 비록 중국에서라도 그 짝이 드물 것이다.
양지(良知) 두 자는 본디 맹자의 말인데, 상산(象山 육구연(陸九淵))이 끄집어내어 화두로 삼았다.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대학(大學)》의 치지(致知)와 짜 맞추어 문호를 세우고 주장을 펼쳤으니, 그의 의도는 이것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정자와 주자의 풀이를 쓸어버리고 천하를 바꾸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속임수와 애매모호한 투식으로 그의 옅고 좁은 식견을 가리려 한 것일 뿐, 실제로는 이치에 닿지 않는다. 맹자의 이 말은 헤아리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본연의 선(善)이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뿐이다. 본연의 선이 천리이기는 하지만 헤아리지 않고 알 수 있는 부분에 나아가 그것의 능소(能所 체용)를 보면 구별이 없을 수 없다. 농암은 여기에 대해서 매우 명쾌한 말을 남겼다.
농암 선생은 도의 근원을 정확히 보아 그 경지로 깊이 들어가고 혼자서 깨달았으니, 율곡 이후의 유일한 사람이다. 삼연이 이른바 “주자의 충신”이라고 한 것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유현들은 누구나 아버지와 스승의 의리가 있으니, 그들을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회옹(晦翁)도 송나라의 유현들에게 의론이 미치면 구차하게 피하지 않았으니,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의리와 그 행적을 공정하게 논하는 문제는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매우 참람하고 망녕된 일인 줄 잘 알지만, 나의 좁은 소견으로 내 멋대로 헤아려 본 적이 있다. 내 생각에 우리나라 400년 동안 유현들이 배출되어 매우 많았으니, 송나라 이후로 없던 일이다. 그렇지만 사도(斯道)를 앞장서서 밝히고 학문이 순수하고 덕을 갖추었으며 성현의 깊고 은미한 뜻을 드러내어 후세를 열어 준 공으로 말하자면 정암, 퇴계, 율곡, 농암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정암, 퇴계, 율곡에 대해서는 이미 옛 선비들 사이에 정해진 평가가 있지만, 지금 농암의 시대와는 그다지 멀지 않아 그의 덕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아, 공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니, 백세 뒤에 진정한 선비가 나온다면 나의 말에서 취할 점이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중용》의 “그 보지 못한 바를 경계하고 그 듣지 못한 바를 두려워한다.[戒愼乎其所不睹 恐懼乎其所不聞]”라는 구절을 읽으면서 비록 농암의 통관동정설(通貫動靜說)을 위주로 이해하긴 하면서도, 내심 ‘미발(未發)’이니, ‘부도불문(不睹不聞)’이니 한 것은 비록 마음을 위주로 하고 처지를 위주로 한 차이가 있지만 지극히 고요한 지경의 공부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요사이 새로운 것을 알았다. “그 보지 못함을 경계하고 그 듣지 못함을 두려워한다.[戒愼乎其不睹 恐懼乎其不聞]”라고 말하지 않고 그 사이에 소(所) 자를 하나씩 넣은 것은 위의 “떠날 것이면 도가 아니다.[可離非道]”라는 한 구절과 연결된 것으로서 가리키는 뜻이 조금 더 넓다. - ‘보지 못한 바 듣지 못한 바[所不睹不聞]’는 곧바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不睹 不聞]’라고 한 것과는 말뜻에 차이가 있다. - 자사의 뜻은, 보고 들은 것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발(發)과 미발(未發)로 구분하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사물과 접하지 않았을 때를 말한 것이었다. 그제야 농암의 이른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는 것은 그저 사물을 접하지 않았을 때이지, 이 마음이 지극히 고요한 지경을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 말씀이 참으로 변경할 수 없는 지론임을 알았다.
농암이 이른바, “이(理)의 이름은 사물로 인하여 성립한다.”라는 말은 숨은 뜻을 크게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후세의 선비들이 허공에서 허상을 찾는 병통을 바로잡을 수 있다.
녹문(鹿門)이 말하기를,
녹문은 농암의 “인의예지의 마음은 금수가 태어날 때 구비하지 못하였다.”라고 한 말을 잠깐 보고서 자기의 견해와 비슷한 점을 기뻐하고는 마침내 만년에 견해를 바꾼 증거라고 여겼다. 이것은 편전설(偏全說)에 임시로 덧붙여 그 논변의 잘못을 분별한 것일 뿐, 근원이 하나라는 부분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한 것은 아님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그 아래에 ‘지각호오(知覺好惡)의 정(情)’을 대비하여 설명한 부분을 보면 그와 같이 논조를 세운 뜻을 알 수 있다. 녹문은 삼연을 곧장 배척하고 농암을 힘써 따르고자 하였으나 억지로 이끌어 좌지우지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 녹문은 임성주(任聖周)의 호이다. -
농암이 “인의예지의 마음은 금수가 태어날 적에 근본적으로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라고 한 말은 갑자기 보면 의심스러운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의심날 것이 없다. 진서산이 동정(動靜)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과 금수가 다 같이 한마음을 지녔다고 말한 것이 매우 분명치 않기 때문에 농암의 말이 이와 같았을 뿐이다. 시험 삼아 경전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심(心) 자를 말한 곳에서는 사실 대부분 이발설(已發說)을 붙였다. 여기서 인의예지의 마음을 말한 것은 이 또한 분명히 이발(已發)의 작용을 가지고 말한 것으로, 맹자의 이른바, “측은지심은 인이고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고 시비지심은 지이다.”라고 한 심(心)이 이것이다. 금수가 태어날 때 사람과 마찬가지로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을 부여받았더라도 그것이 드러나 작용하는 부분에서 과연 어찌 이 심을 온전히 갖출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곧 이른바 “체는 온전하나 용은 작용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만일 또 이것을 가지고 의심한다면 내가 이미 앞서 이에 대해 논변한 바가 있다.
〈농암잡지〉에 이르기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은 세상에 드문 영웅호걸로 명나라가 흥기하는 때를 만났고 마침 주자가 편찬한 서적들이 차례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마침내 그것을 얻어 탐구하고 실천하여 주(周)나라를 따르고 중화(中華)의 예법을 쓴 시조가 되었다. 우리 조선이 그 업적을 계승하여 그 연원과 계통이 비로소 찬란하게 거론할 수 있게 되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은 행실을 독실하게 닦고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치중하느라 모두 미처 글을 써서 후세에 남기지 못하였으며, 퇴계는 학문을 깊이 탐구하였고 율곡은 타고난 자질이 성현에 가까웠고, 화양(華陽 송시열(宋時烈))은 강직 정대하고 삼주(三洲 김창협)는 분명하고 진실하여 우뚝하게 유가의 종장이 되었으며, 모두 논저를 남겼다. 그들이 전범으로 삼고 높이 받든 내용은 모두 주자에다 그 근본을 두고 있으니, 그 근본으로 삼은 원칙과 법규는 참으로 어디를 살펴보아도 어긋나지 않고 먼 후대의 성인이 보더라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 종현손(從玄孫) 김매순(金邁淳)의 《대산집(臺山集)》에 나온다. ○ 아래도 같다. -
정묘께서 일찍이 근신에게 하유하기를,
농암의 설에,
농암의 설에 또 이르기를,
농암, 삼연, 포음 형제는 나란히 뛰어나고 우애가 돈독하여 마치 하남(河南)의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가 함께 나온 것과 같다. 농암은 정심하고 치밀하여 문장이 착오가 없고, 삼연은 명석하고 비범하여 옛글을 답습하지 않았으니, 비록 중국에 두더라도 필적할 자가 드물 것이다. 포음은 경전의 연구에 전념하여 뛰어난 지식과 탁월한 이해력으로 두 형이 드러내지 못한 점을 종종 드러내었다. 농암의 손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는 문로(門路)가 바르고 법도에 맞았으며 이치를 보는 면에서도 지극히 분명하였으니, 가학(家學)의 영향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 홍직필(洪直弼)의 《매산집(梅山集)》에 나온다. ○ 아래도 같다. -
삼주(三洲)의 묘지에,
갑론을박 논쟁이 끊임없으니 / 甲是乙非爭
정주 이후 사람은 격물치지 공부를 / 安在程朱後
쉽게 한단 의미가 어디 있으랴 / 無勞格致精
주자 주석 그 풀이는 뉘 손에 맡길건고 / 朱子註脚付諸誰
심성에 관한 연구 나 몰라라 하면서 / 懶從心上加硏究
이제는 격물치지 할 것 없다 하누나 / 却謂今無可致知
예로부터 어질고 걸출한 사람으로서 세상의 화를 입거나 뜻하지 않은 재앙에 걸린 자들은 대부분 각오를 다지고 인내심을 길러 부족한 점을 보완함으로써 덕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환난에 처해서는 환난에 맞게 행하니, 군자는 가는 곳마다 스스로 만족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농암과 삼연 두 선생은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로 원통하고 비참한 나머지 살고 싶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제때에 덕과 학문을 닦아 착실히 높은 경지로 나아가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문곡은 그 자신이 이룩한 업적이 사실 높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이 드러나 영원토록 전해지게 된 것은 훌륭한 두 아들 덕택이다.
김퇴어(金退漁)와 윤임재(尹臨齋) 등 몇 사람은 거의 임금의 얼굴도 몰랐다. 그러나 맑은 풍도와 높은 절개로 세교를 떠받친 점으로 말하자면, 이는 이른바, 보답할 수 없는 큰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몇 사람은 무악(武樂)의 경지에는 이르렀으나 소악(韶樂)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모름지기 농암(農巖)과 한천(寒泉)처럼 은거하면서 경전을 연구하고 정학(正學)을 제창하여 탁월하게 당시와 후세의 표준이 되어야 제일류(第一流)라고 이를 만하다. - 김퇴어는 이름이 진상(鎭商)이고, 윤임재는 이름이 심형(心衡)이다. 한천은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또 다른 호이다. -
농암은 논변할 때에 다투려는 마음이나 이기려는 기세가 한 점도 없었다. 공정하게 듣고 두루 관찰하여 남의 말을 남김없이 이해하였으니, 비록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답변하게 하더라도 감히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단지 듣는 대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예컨대 〈사변록변(思辯錄辨)〉이나 〈지지설(知智說)〉 따위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호운봉(胡雲峯 원나라 호병문(胡炳文))과 심파양(沈番陽 송나라 심귀보(沈貴珤))은 도(道)와 기(器)의 차이를 보지 못하여 지각(知覺)을 지(智)로 알았으니, 이(理)로 뭇 이치를 오묘하게 하고 이(理)로 하늘의 이치를 포용하는 것을 면치 못하였다. 농암의 논변은 정심하고 치밀하여 터럭만큼도 틀림이 없는데, 후세의 선비들 중에는 믿고 따르는 이가 반반이니, 비단 민언휘(閔彦暉 민이승(閔以升))만 의혹을 품는 것은 아니다. 삼연은 또 〈지자설(智字說)〉을 지어 농암의 미진한 뜻을 더 드러내어 밝혔는데, 그 내용이 통창하고 비범하여 이전 사람들의 말을 답습하지 않았다. 나는 두 선생의 주장을 일찍부터 굳게 믿으며 거기에 한마디도 덧붙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서의 선비들 가운데 동물이 오상(五常)의 윤리를 갖추지 않았다는 설을 주장하는 자는 걸핏하면 농암이 우옹에게 올린 문목을 구실로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정한 것일 뿐 정론이 아니니, 문목의 체제는 본디 이런 법이다. 또 농암이 이른바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는 것은 기(氣)가 환히 통하거나 막히는 일이 있고 이(理)가 그에 따라서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온전하거나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곧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두고 한 말이다. 언제 부여받은 본연지성이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가. 이것이 어찌 동물이 오상을 부여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겠는가. 연옹이 사람과 동물이 함께 섞인 것을 문제로 여겨 그것을 분리하려 한 것은 다만 호서 선비들의 주장에 자극을 받아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다.
석실서원의 선비들이 농암을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논의를 꺼내었는데, 이 논의는 터럭만큼의 다른 생각도 없이 순전히 공적인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누가 여기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이분은 타고난 자질이 명석하기로는 석담(石潭)에 버금가며, 문리가 치밀한 점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욱 뛰어나다. 도의 깊은 뜻을 드러내고 육경을 지켰으니, 그 공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연옹(淵翁)이 이른바, “한 글자의 밝은 가르침으로 한 시대의 선치(善治)를 얻어내려 하지 않았고 차라리 우리나라가 어진 재상을 잃을지언정 주자에게 충신이 없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 아닌 듯하다. 세상에 배향하는 전례가 없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약 있다면 역대의 유현들 중에서 가려 뽑을 때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지금 이 논의는 다시 헤아릴 것도 없다. 다만, 시절이 적당하지 않은 듯할 뿐이다.
농암의 사단칠정설은 정심하고 치밀하여 사소한 흠도 없으니, 비단 이 어른의 글에서 으뜸일 뿐만이 아니다. 주자 이후 송나라와 명나라, 그리고 우리나라의 유현들 중에서 이(理)에 대해 말한 이가 수십, 수백 명에 그치지 않으나 그보다 앞서는 이는 없다고 하겠다. 율옹(栗翁 이이)과 견해가 다른 부분은 단지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한 것이다.”와 “칠정은 기를 위주로 한다.”라는 한 구절뿐이다. 농암이 이른바, “칠정은 비록 이와 기를 겸하나 그중에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는 것이며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이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말은 기를 위주로 하는 자가 말하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는 퇴계가 미처 말하여 드러내지 못한 점이요, 율곡이 모두 드러내지 못한 것이니, 죽은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두 유현도 빙그레 웃을 것이다. 그러니 율곡과 다르다고 의심하여 원집에서 삭제하기를 권하였던 황강(黃江)의 선비들에 대한 나의 의혹이 더욱 심해진다. 지금 선생의 은미한 말씀을 널리 알리고자 하면서 이 논의를 누락시킨다면, 이것은 맹자를 찬양하면서 양기(養氣)와 성선(性善)을 언급하지 않고, 주자(周子)를 드러내면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을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록 험난한 길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저 도도하게 흘러가는 구당협(瞿唐峽)이나 염예퇴(灩澦堆)의 물결과 같더라도 그것이 태양처럼 밝고 옥처럼 깨끗한 선생을 어찌할 수 있겠는가.
[주D-002]문왕(文王)과 주공(周公) : 대본은 ‘文王文公’인데, 한국문집총간 184집에 수록된 《기원집》 〈기원선생연보 권2〉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장계곡(張谿谷) : 대본은 ‘張豁谷’인데, 한국문집총간 92집에 수록된 《계곡집(谿谷集)》에 의거하여 ‘豁’을 ‘谿’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명심견성(明心見性) : 불교 용어로, 세속의 일체 잡념을 떨쳐 버리고 잡념으로 인해 잃어버린 본성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주D-005]삼매(三昧) : 불교 용어로, 잡념을 떨쳐 버려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청정한 경지에 전념한다는 뜻이다.
[주D-006]환난에 …… 없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4장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7]보답할 …… 것이다 : 주자가 진순(陳淳)에게 보낸 편지에, “불우하여 독선기신(獨善其身)함으로써 천하에 대의를 밝혀 천하의 학자들로 하여금 모두 우리의 도가 올바른 줄 알아 지키면서 윗사람이 불러다 쓰기를 기다린다면, 이것이 바로 보답할 수 없는 큰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어찌 반드시 나아가 세상을 다스려야만 하겠는가.” 하였다. 《晦菴集 卷36》
[주D-008]무악(武樂)의 …… 못하였다 : 공자(孔子)가 소악(韶樂)을 평하여,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좋다.” 하였고, 무악을 평하여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 하였다. 진선진미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論語 八佾》
[주D-009]지자설(智字說) : 한국문집총간 165집에 수록된 《삼연집(三淵集)》 권25 〈논지자설(論智字說)〉을 가리킨다.
[주D-010]농암이 …… 문목 : 〈우재 선생께 올리는 《중용(中庸)》의 의문점에 대한 문목[上尤齋中庸疑義問目]〉을 말한다. 《農巖集 卷12》
[주D-011]한 글자의 …… 않았고 : 대본은 ‘以一字明訓 博一世善治’인데, 《삼연집》 권32 〈제중씨농암선생문(祭仲氏農巖先生文)〉에 의거하여 ‘以’ 앞에 ‘不’ 1자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12]죽은 사람 : 대본은 ‘九京’인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 ‘京’을 ‘原’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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