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별 족보 서문, 가전 등/안동권씨 족보서문

안동권씨족보서(安東權氏族譜序) 계묘년

아베베1 2012. 6. 25. 15:58

순암선생문집 제18권
서(序)
안동권씨족보서(安東權氏族譜序) 계묘년


《주례(周禮)》를 보면, 소사(小史)가 계통(系統)을 정하고 소목(昭穆)을 분별한 데서 세본(世本)이 만들어졌고, 이를 뒤이어 성계록(姓系錄)이나 씨족지(氏族志) 같은 것들이 생겼다. 그러니 후세의 제가(諸家)의 보첩(譜牒)은 모두가 소사(小史)의 유규(遺規)인 것이다. 위로는 조정에 세신(世臣)이 있고 사람에게는 세주(世胄 종손)가 있어서 기강이 바로잡히고, 아래로는 조상을 높이고 근본을 중히 여기며 효제(孝悌)를 독실히 행하므로써 풍속이 후해졌으니, 이는 세교(世敎)에 크게 관련이 있는 것이다.
아, 아버지를 같이하면 형제가 되고, 조부를 같이하면 공시(功緦 대공(大功)·소공(小功)과 시마복)의 친척이 되고, 5세(世)가 되면 단문(袒免)의 친족이 되며, 여기에서부터는 점점 멀어져서 친속(親屬)이 다한다. 그러나 그 시초를 더듬어 올라가서 말하자면 모두가 한 사람의 몸으로부터 형체가 나누어진 사람이니, 형체는 비록 나뉘었어도 한 몸에서 나온 것이 마치 나무의 가지와 줄기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과 같고 물의 지류(支流)가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과 같다. 만약 이런 이치를 모르고 계통(系統)이 문란하거나 소목을 징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선왕(先王)이 종손을 세워 종족을 수합한 뜻이겠는가.
영가(永嘉 안동(安東)의 옛 명칭)의 권씨는 신라 말기에 일어나 고려 때에 성하였고 본조에 들어와 크게 창성하였는데, 4대에 걸쳐 다섯 명의 공(公)이 난 원씨(袁氏)와 8대에 걸쳐 재상(宰相)이 난 소씨(蕭氏)와 더불어 천여 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견줄 만하니, 아, 훌륭하도다. 그 종족이 크고 번성하기 때문에 보첩도 엄청나서 자세하게 하기가 어렵고, 힘은 딸리고 일은 크므로 또 낱낱이 개정(改整)하기가 어렵다.
권군 익언(權君益彦)이 이것이 오래 되어 계통이 없어질까 염려하여 족인(族人) 아무개와 더불어 그 7대조 동흥부원군(東興府院君) 이하를 정리해서 하나의 소보(小譜)를 만들었으니, 대개 세상에서 말하는 주동(鑄洞)의 권씨가 모두 동흥공을 조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공의 독실한 행실과 후한 덕은 한 세상에 알려져 성조(聖朝)에서 정려(旌閭)하여 포상하고 사림이 조두(俎豆)를 갖추어 제향을 받들고 있다. 또 다섯 아들이 모두 현달(顯達)하니 가문의 성함이 당세에 비할 곳이 없다. 그러니 실로 권씨의 중시조(中始祖)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노천(老泉 소순(蘇洵)으로 소식(蘇軾)의 부친임)이 소씨의 족보를 만들면서 고조로부터 시작하고서 말하기를,
“친(親)이 다하면 정(情)이 다하고 정이 다하면 기쁜 일에 경축하지 않고 근심스러운 일에 조문하지 않으니, 기쁨에 경축하지 않고 근심에 조문하지 않으면 길가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하였다. 아, 저 10세, 20세의 친족은 멀어져서 그 형세가 실로 길가는 사람과 같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7세 이하를, 모두 족(族)을 찾고 속(屬)을 일컫는다면 멀다고 할 수 없다. 한번 책을 열어보면 소목이 나열되고 자손이 순서를 이어 마치 같은 당(堂)에서 함께 자리하고 있는 듯하니, 비록 친(親)이 다하고 복(服)이 다했다 할지라도 기쁨에 경축하고 근심에 조문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9세가 동거했던 장씨(張氏 수·당(隋唐) 때 장공예(張公藝)의 집안)와 7세가 동거한 곽씨(郭氏 곽준(郭雋)의 집안)가 전사(前史)에서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권군의 이 일이 어찌 훌륭한 것이 아니겠는가. 군이 나와 인척 관계가 된다 하여 편지를 보내 서문을 청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 짓겠는가마는 또 감히 사양할 수도 없어서 감히 짓고 보니 참람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