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의 의병활동/의숙공 (휘 강) 의병장

1559년(명종 14)∼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견(汝堅), 호는 소계(蘇溪). 최운철(崔云哲)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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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崔堈)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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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견(汝堅)
소계(蘇溪)
시호 의숙(義肅)
생년 1559(명종 14)
졸년 1614(광해군 6)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전주(全州)
활동분야 무신 > 무신

[상세내용]

최강(崔堈)에 대하여
1559년(명종 14)∼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견(汝堅), 호는 소계(蘇溪)최운철(崔云哲)의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崔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뒤 1605년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56세로 죽었다.

1816년(순조 16)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형 최균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純祖實錄
雙忠錄

[집필자]

김동수(金東洙)



고종 8년 신미(1871, 동치10)
  5월 3일(임진) 맑음
좌목
 서상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서상돈(徐相敦)ㆍ강문형(姜文馨)을 교리로, 조면호(趙冕鎬)를 장악원 정으로, 박종병(朴宗秉)을 감찰로, 장호근(張皓根)을 전적으로, 김규식(金奎軾)을 서학 교수(西學敎授)로, 권응선(權膺善)을 병조 정랑으로 삼았다. 증 병조판서 어재연(魚在淵)에게 충장(忠壯)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이정(李)에게 충민(忠愍)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박성양(朴成陽)에게 정헌(定憲)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최강(崔堈)에게 의숙(義肅)의 시호를, 증 병조판서 배명순(裵命純)에게 충숙(忠肅)의 시호를, 증 호조판서 최산휘(崔山輝)에게 효헌(孝憲)의 시호를, 증 이조판서 겸 좨주 김상악(金相岳)에게 문간(文簡)의 시호를, 고 좌참찬 임상원(任相元)에게 효문(孝文)의 시호를, 고 공조 판서 이희경(李熙絅)에게 정무(貞武)의 시호를, 고 영의정 박승종(朴承宗)에게 숙민(肅愍)의 시호를 내렸다.

雜著
日錄 亂中日錄散佚。只有戊戌日錄。 b_011_238d



[戊戌正月]
戊戌正月初一日丁亥朔朝。一寓齊會相賀。行酒一廵罷。以收募義粮。運餉天兵事。晩下山南。運粮軍先我到。見我不來。卽還其家。待明齊發云。○初二日。又下山011_239a南爲。督發義粮事也。遇李禮勛鄭仁耆少話。還入椹村。見吳陜川澐,朴居昌廷琓,主簿廷璠,成參奉亮。相議運粮事。○初四日。訪吳陜川。遇李重茂聞賊酋淸正與唐將戰數敗。將出降云。天道好還。人事至此。東民從此有再生之望。皇朝之恩。天地莫量。○初七日至爾勿谷。遇許弘祖,朴齊賢,李休復,李成範,成簡,李富春,光春及正字柳霽叙話。入水口洞。訪宋進士學懋 遠器。其子光宅亦在傍。竟夜懸燈措畫壺漿之事。○初八日。與金上舍允諧 鳳儀,金士粹。分向水村訪諸友。至崔德祐家。聞唐師解圍退次月城云。前日所聞皆妄傳。憤歎何極。入州見011_239b牧伯問之果然。李參謀汝唯,鄭察訪而敬亦在坐。相對咄咄。酒數廵罷出。歷訪大浦李僉知範而還。○初十日下廣巖。見前兵使金應瑞論時事。○十一日。入州見新兵使鄭起龍。遇李天培,宋光啓,曺器哉同話。曺次邁乃是新知而殷勤若舊識。以素相聞名也。○夜夢上瑤臺有詩云。風暖瑤臺別㨾春。桃花李蘂四字而已。未畢而覺。卽踵之曰一般新。將身忽入三淸界。今我殊非昔日身。○十二日。路遇昌原官吏介生。備聞昌邑遭亂以來。孑遺餘民。皆不聊生。極可矜惻。朴喜生訪李光春在柳士華家。邀余同宿。朴弘貞亦至。話至夜分。書帖送鄭011_239c兵使。爲昌原民招集事也。○十四日夜。有感作詩曰自爇松明到夜深。却將蓍草筮升沉。窮通自古皆由命。君子行違易上尋。○二十三日。金海守李汝恬贈一老馬。猶可代步爲幸。○二十四日。以事往河濱。訪鄭銑,鄭鏞。歷入竗洞。訪朴僉知不遇。與朴忠胤,崔斗雲,都聖兪。共觀松溪懸吐韓文。○二十七日。往花路訪加德僉使崔堈,判事李應星,崔塤,崔均。同話而別。

[戊戌二月]
二月初七日。渡伽川及窟峴。聞賊夜襲安林。午入棘田。殺掠不可勝計。逃亂士女顚沛劻勷。遍于山野。卽蒼黃馳還。與金允諧,金士粹,裴仲約,李晦可議避地。遂定計011_239d向湖西。○初八日。允諧,仲約,晦可先發。士粹及張善由,柳秀弘與余同發。李得龜,李山壽,李成節來別。暮至酉谷器哉寓。上舍等先至迎喜。宋君沃,許國柱,曺以坤,以觀來見。○初九日。歷訪朴應敎而章。朴亦以十五發行云。○十一日。過金泉入忠淸界。登途五日。始就一日程。可謂遅遅吾行也。路遇宋學懋。宋亦卜地來也。○十五日。遭雨留永同。允諧吟一絶云身際干戈客路遙。行裝還似過楓橋。請君莫用窮途哭。應有江山待我曹。余亦忘拙而次之。見集中 十八日至沃川眞藥驛。逢牙山人元夢賢,金德明,金質民。細聞牙山事。夢賢弟夢吉家在大011_240a覺村。許以借居。其意可感。○十九日。踰陶峴向牙山。脚部頓憊。寸寸運步。遇洪州人田菑自元帥所來。言賊焚蕩星州上枝。殺掠甚多。朴僉知忠復家亦參其禍云。驚慘不可言。頃年以來。嶺南人士疲於奔竄。多寄寓湖西。而且聞新昌溫陽等地。地僻土饒。可以棲住。故吾輩辛勤跋涉。將向其處。待定居之後。以爲移奉兩親之計。而前頭人事又未可卜。奈何奈何。暮投宋村。村以宋爲名者。以宋氏家盛居也。○二十四日。至正右山。村居士夫吳宗範,宗吉,吳鉉及京人金澨,柳瑜迎話。金公長者。前尙州牧金澥之從昆弟也。又與裴陽智素善。聞其謝世。011_240b嗟悼不已。宗吉邀至其家饋酒。因聞時事諸奇。○二十五日。過燕歧東伊村。入崔洁家。洁出酒欵待。且贈三斗稻。以備行粮。可謂富而好義者也。○三十日。主人出饋酒饌。始覺今日是寒食也。節序上壠。傭丐盡然。獨我輩羈旅他鄕。瞻望庭闈。又思先壠。中情如割。

[戊戌三月]
三月初三日。與一行發出。過魂巖踰狐嶺度廣坪。路遇唐兵數三輩。問吾遠來之故。少無攘奪之志。前所聞者。果過傳也。至豊瑞村。村居士夫徑出迎之。至李演家止宿。聞南奇賊警益熾。我居靡定。戀親思鄕。心緖錯裂。○初四日。與士粹,春孫上子隱橋。遇雨入貢稅洞。尋崔洵,011_240c尹廷顯。聞南洞柴草有裕而土地不膏。金谷則近溫陽郡市。流人謀食甚便。且土廣云。○初六日。發向溫陽。寓木洞李宗彦家。宗彦天安人而文士也。從容叙話。欵待甚厚。虗外室以處之。且見其二子應生,貴生。正子美詩所謂遂空所坐堂。安居奉我歡。誰肯艱難際。豁達露心肝者也。○初十日。與晦可士粹擧室同發。移寓于牙山李兵使世豪金谷田舍。兵使乃蔚山裴公允鼎之壻。而於吾爲戚從妹夫。聞吾寄住卽來訪。借田舍及耕地。極可感幸。火餘屋宇只有數間。一行從徒皆有不滿之意。然旣爲瑣旅。自當隨遇而安奈何。○十一日。訪李思道。011_240d李公鐵城人。與余有戚誼。姜珍山鳳壽。李公之妹夫也。出迎同話。留饋夕飯。見待欵厚。傾盖而故。非虗語也。○十八日。李恒,李時說來訪。時說。時稷之再從也。如見元賓。爲之悵然。○二十日。李思道,姜鳳壽,永壽,興慶,昌慶,李察訪鐵榦,孟主簿惟精,直長惟明,通判惟吉,申主簿泓,姜渰,王德裕等。出文告洞中收送米斗。周急之義可感。○二十二日。張益奎,金孝成,金壽朋,金應祥。自嶺南來。聞李汝唯捐世。朴齊賢除王子師傅。一日中悲喜交幷。

[戊戌四月]
四月初一日。姜珍山遣其子來邀。遂與晦可,士粹往赴011_241a之。飮酒賦詩。珍山有詩曰白石淸溪六七曲。黃冠野服兩三人。提壺不是耽歡樂。爲向殘花餞暮春。句法圓熟可喜。翌日又坐溪亭。談說古今。且以詩話。姜老可謂長於詩者也。○初七日。牙山路中。遇宣傳官李吉元。驚喜不可言。因與入縣穩叙。聞都事金九鼎在舘就訪之。都事榮川人。與余有舊。金侍直達孝亦至。三人鼎坐談話。不覺夜深矣。○十日。歷見溫井。經亂之餘。人民皆非。而石欄依舊。感舊傷今。爲懷如何。

[戊戌五月]
五月初二日。李恒來訪。同入紫霞洞。泉淸石滑。景致奇絶。或漱或濯。逍遙竟日。晡後山雨微作。促杖下來。○禮011_241b山倅盧伋來訪。○初九日。歷入洪州蘆隱洞。訪朴判官思齊。朴亦流寓於此。爲有姓親也。握手歡叙。酒數廵辭出。見防禦使朴名賢。爲其舊城主也。暫話而別。直至州城。時洪丈可臣爲牧伯。頃在丙申。與防禦朴公討平李夢鶴。勳名藉甚。聞吾至卽迎入欵待。情禮俱到。以余流寓。饋贐頗厚可感。○二十日。發行向春陽。○二十八日。到春陽。經年曠省。親候俱安。欣慰曷極。

[戊戌六月]
六月初三日。寄簡于惟政。○十八日。聞賊入永川,慶山境。唐將秘關上京。又聞唐將高某中丸而死云。醜虜陸梁。迄今未已。痛甚痛甚。○二十五日。發向湖西。盖以金011_241c谷新寓之餘。旅契蕭條。移奉旣無計。又不可以久留故也。拜辭出門。五內如焚。

[戊戌七月]
七月初六日。到寓所。同寓皆會。叙行役勞苦。○十二日。與諸益遊過鴈寺浴椒泉。○十三日。士粹作國難思良相賦。性初製策。余偶題一絶曰靑山斜日獨來尋。竹屋荊扉薜荔陰。客去小軒棊子靜。夜牎松籟一張琴。○十四日。善山人黃河潤來訪。黃錞之族人也。與安仁老李希冉。方寓公州云。河潤兄河澄。文察訪之壻也。聞察訪之子瑞日已逝。文家只有此子。今亡矣可惻。○十五日。此日中元也。客中時序。如水東逝。春而夏。夏而秋矣。幾011_241d何而不歲且窮也。不辰之歎。尙寐無吪。一寓中酒食稍豊。黃昏同寓諸益。露坐行酒數廵罷。○延風守呂應祿及朴玹來訪。呂字成之。朴字伯售。○十六日。過金智驛。聞里人李德之病死。其子斷指出血飮之而甦。事已上聞云。彼乃村巷間凡民。而誠孝所感。至於如此。欽歎欽歎。○二十日。早朝一寓齊出耕地種菜。或耕或播或坐或息。且復吟詩。以暢幽懷。筋力雖憊。有同隱遯者事。緬思古人谷口之鋤鹿門之耘。亦如是耶。今日乃吾生朝。同寓皆具酒殽來會。情意可感。而但客地僑寓。定省久曠。戀親之意。此日彌切。○二十一日。家奴自劉綎陣所還。言軍011_242a容壯嚴。亦有楚猿及駱駞。猿能焚敵陣。駞能載運也。○聞方伯入郡。與余有舊。卽往見之。眷厚之意。周恤之誼。㢠出尋常。自顧樗散。何以得此。可感又可愧。

[戊戌八月]
八月十二日。聞賊數百。見殲於茂朱地云。○十五日。日月易邁。忽已中秋。因思去年此日。旅次魯谷。今年此日。寄寓金谷。風蓬人事。歲歲如此。不知明年。又在何處。痛歎痛歎。○二十一日。黃會元自嶺南來傳妻母舍世。不勝痛悼。○二十五日。聞賊酋秀吉斃於七月初四日。故賊兵稍稍亡歸云。聞極痛快。而此等之說。雖屢有之。終歸虗傳。今者此語。又未知如何耳。

[戊戌九月]
九月初六日。夢與鄭景任穩話。覺來不勝悵然。○十一日。前大司成黃公暹執義權公春蘭。以天兵募粮事通文來到。二公是嶺南人。余雖在寓。義不可以不應。遂與性初往赴。士林會薦姜珍山,郭進士。出文招集境內士子。相議措置。只得若干斛。可歎。○十二日。親自牽牛。牧於善餘舊基。荒薺連空。鼯鼠號鳴。因想故園遺址。亦必類此。言念及此。可堪噎欝。○十三日。往李思道家。借聯芳集及鐵城李氏譜來。○十七日。夢侍主上。從容經席。終夜不已。草莽之臣。涓埃報蔑。夢被殊遇。感涕徒零。玆用識之。○二十四日。有人自湖南來。言曳橋賊陣011_242c勢甚堅。攻之不易。且北賊稱以祭其先祖健墓。來踏我境。此虜狡猾。恐他日大爲國家之患。極可驚慮也。○二十七日。以事至新昌。歷訪咸安人趙光先鄭天祐金漑趙中立。與之欵語。路遇自嶺來人。聞天兵及我軍圍賊有日。及到溫陽。與高山立相遇於馬上。亦言曳橋賊見破於天兵及我軍。賊勢甚挫云。天心悔禍。自今始也。喜不可言。

[戊戌十月]
十月初四日。聞西厓柳相公爲羣小所構誣。將見斥罷云。公當龍蛇之亂。爲國宗臣。盡瘁王室。謀猷䂓畫。忠勤貞亮。當世無比。而今乃至此。誠如是也。國無人焉。011_242d王誰與爲國。又聞天朝以我通信於倭奴。有詰責之語云。南賊未退。上朝有譴。小邦惶蹙。有不可言。不知吾東何時太平。痛歎。○初七日。訪姜遇文,應文,餘慶。遇李芳話。芳乃姜龍壽新壻。咸安趙丈宗道戚從也。問吾以巴山事。情轉殷勤。還寓。裴仲約之子剋自嶺南來。始知妻母謝世之報。黃會元誤傳也。因留剋而宿。聞嶺奇。某也生。某也死。某移卜於某地。某仍寓於某邑。某事如舊。某事非昔。賊勢摧挫。我軍乘勝。晉賊退次於泗川。唐師進軍於晉陽。合道歡聲。已騰萬口。楊經理且進兵泗川。亦可見泗賊之亦退也。一日之內。旣聞妻母之無恙。011_243a又聞賊奴之敗北。今日所得。亂離後第一好消息也。家人自聞訃後。每月朔望擧奠。自今日始廢奠。○二十一日。傳畫曳橋賊陣形勢圖。爲見攻守機也。○二十四日。就李察訪精舍。終日穩話。晴牎凈几。相對吐肝。心神歸定。若脫塵臼。此所謂一日淸閒一日仙者也。因就申主簿第。諸益滿座。斯須日云暮矣。○二十八日。聞皇朝主事丁應泰誣劾楊經理。掩敗爲功。欺慢朝廷。又誣奏我國引倭入寇。上憤怒不視事者屢日。擧朝遑遑。罔知攸措云。噫以我聖上三十年事大之意。乃有此誣。臣子之心憤惋曷極。遂下姜從事鳳壽家。約會李宗彦,011_243b黃浹,申東秀,孫夢說,朴光前,金鏺,李鐵榦,姜興慶,姜得璜。議呈文邢軍門。以明主上被誣事。

[戊戌十一月]
十一月初一日。往赴松亭。欲更議呈文事。邑中士子來會者纔十餘人。率皆晩到。可歎。○初三日。與性初往長命。見方伯終日穩叙。凡百時事及傍近守令賢否。皆入於論說中。又於燈下入夜打話。見邸報知鄭寒岡先生陞嘉善。不勝爲吾道幸。○二十四日。聞曳橋賊玄蘇,平行長等已出乘舟。劉綎陣入據曳橋。舟師擊其後。破三十餘艘。泗川賊沈安道焚壘泛海。蔚山賊淸正亦撤兵渡海云。雖曰好消息。如此語前此多有之。恐又如前也。011_243c○二十八日。聞統制使李舜臣與賊戰。中丸而逝。諸帥死者亦六十餘人。賊之留屯二南者。皆撤兵渡海。狀聞昨日上京云。喜幸何極。但恨不至隻輪不返。而終使爲國長城之一大將遽至不幸痛歎。

[戊戌十二月]
十二月初三日。李芳自都元帥所來。槩言戰所死事者。統制使李舜臣,興陽縣監高德章,加里浦僉使李英男,及樂安郡守,咸平縣監,巨濟縣令,梨津權管,舒川萬戶,慶尙右水營虞候。並失其姓名。▣州牧使南維,全羅右水使安衛中丸。時不死云。又咸安人趙英漢丁酉八月在黃石山城。被據入日本。今年八月離日本。泊于曳橋。011_243d以日本所聞見。達唐將及李統制云。秀吉以七月死。有三國曾爲秀吉所呑幷。其中一國怨毒最深。以是屠掠秀吉境。吉子在襁褓。莫知攸措。其下送書于淸正,沈安道,平行長,玄蘇等云。內變猝急。可速撤歸。以救國亂云。故釜山賊淸正及金海賊。十一月十二日發出渡海。而沈安道兵爲李統制所擊。盡殲於水上。得脫者一二艘。安道被擒於慶尙右水使李藎臣。此十一月十八日事也。順天賊平行長玄蘇。十一月十九日亦逃遁渡海。南邊賊警一時廓掃云。秀吉之稔惡已久。天心悔禍。身死未冷。變亂中作。聞極痛快。○下書堂。姜善伯諸人咸集。011_244a相賀賊報。且令學徒製古風。諸公請余敎授。余辭之。欲以性初,晦可爲師。僉意皆然。遂使晦可宿食於書堂。性初往來于棧橋書堂。○初九日。放大赦。以誕元孫也。○十三日。訪忠州牧金命胤於金灘。自周柳至金灘。皆昔所經行處也。舊時人居。蕩然無存。敗垣遺墟。蓬蒿滿目。客懷不勝悽然。遇金伯胤,魚夢龍,鄭繼元,柳惟寅同話。○十六日。下靑龍村。訪姜希望,柳惟精。遭亂以後。一未見面。今來七年。始得相遇。鄕井故舊。盡歸泉下。只餘兩老免死。他鄕萬里。邂逅萍蓬。感懷如何。歷訪朴潤身,安仁老而歸。○三十日。此日歲除也。流寓年年。客中過歲。011_244b默坐思之。不堪嗚咽。定省之曠。今已幾月。闕掃先塋。七年于玆。其爲人子者。可不爲之愴感乎。拭淚南望。雲天一涯。渺渺此身。何日言旋。顧瞻歔欷。滿目悽然。誰知我懷。惟此同寓。

[己亥正月]
己亥正月初一日。黃會元來訪。○夜夢與鄭景任話。又得刀子一柄。○初三日。下書堂。洞中諸益皆會。酒餠雜進。使學徒製詩。分曹集句。盡歡而罷。○初七日。聞徐科道明當至天安。以辨誣上書事。與性初同往天安。盖以回文書我等名字。且以製呈文屬余。辭不獲已。遂構呈文草。文逸不收 至木洞見黃湜,鄭希益,鄭檣,金應會。至棧橋011_244c書堂。與趙之柔,李汝載,柳思正,李縡話。聞李瀞除淸州牧使可喜。○初八日至天安。科道之行昨昏入。今早已發。而儒生輩亦無至者。未得呈文。可歎。○二十二日。士粹自德鄕來。聞呈文事尙此遲延。可歎。○柳景宜贈硯。豊川石也。石品頗佳。而但差大不宜於行槖耳。○二十五日。與性初至木洞。訪李宗彦。問呈文事。李云昨始呈文。徐給事見其文。多嘉奬語。且云入草室自焚。寧有是理。山虎入村。自傷其身。所謂草室。指我國也。自傷者。指丁主事也。辨誣呈文。於是有光。殊極爲幸。

[己亥二月]
二月初七日。有詠懷一絶。見集中 ○十五日。聞唐將劉綎011_244d誣奏以自去倭賊爲勦滅。而陳給事則以實奏達。皇上大怒。勑還大軍云。○二十一日。公州牧呂裕吉以書要我。懇懇之意。溢於言表可感。○二十三日。發向公州。○二十五日。至公州。牧伯以餞唐將之行。方在江上。將暮牧伯至直入舘所。歡迎叙話。○二十六日。携酒登江臺。絲竹粉黛畢至。坐客朴澄,李義生,李藑,呂複吉,䄄吉,趙相禹,相湯,呂晩,呂碩賓也。主人判官呂應周也。兵戈之餘。有此勝會。一則可喜。一則可惻。日暮還舘。

[己亥三月]
三月初一日。別牧伯。呂䄄吉齎酒送行。情甚殷勤可感。○十二日。此日寒食也。各以所辦奠先而罷。吾有詩云011_245a云。見集中 性初次曰髮白頻携鏡。愁多強把杯。怊悵淸明節。年年客裏回。又李晦可末聯寓追慕之誠云不踏城南路。空煩一夢回。吾又題一絶云一樽誰共醉。笙鶴隔紅霞。所寓地有紫霞洞故及之。性初步韻曰雲隔三淸殿。春深八桂花。羽衣歸去後。誰與共餐霞。○十九日。至棧橋書堂。聞京奇。李相公恒福以辨誣使。陳奏皇朝。快蒙伸雪。主事丁應泰斥罷云。我國得覩天日之皎然。可謂天監孔昭。○二十一日。留別諸寓。發向春陽。○二十七日。到春陽。經年僑寓。定省久曠。承歡膝下。始有今日。欣慰之極。繼之以嗚咽。洞中諸公皆來見。余贈詩011_245b曰春陽縣裏遇春陽。村酒農談也不妨。莫道經年爲客苦。承歡今日卽吾鄕。





 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임진년 상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왜인 귤광련(橘光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광련은 일명 강광(康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작은 두목[小酋]이다. 경인년(1590, 선조 23)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명 나라를 말함)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吉)이 귤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의지가 이 말을 수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길이 대노하여 곧 귤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 후 만력 34년 병오년(1606, 선조 39) 일본 국왕 원가강(源家康)이 평성(平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계신(全繼信)과 역관(譯官) 박희근(朴希根)을 회답사(回答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년(1611, 광해군 3)에 유상(柳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彝良性非求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亂胡爲少信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冠負國尙不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었고야 / 夷狄之人乃如此
하였다.

여름 4월. 왜적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장수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두목들을 보내어 상세한 것은 강항(姜沆)의 장계(狀啓)에 있다.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침입해 들어오다. 평행장(平行長)이 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과 함께 선봉이 되어 병선 4만여 척과 군사 1백만으로 바다를 덮고 와서는, 13일 새벽 안개가 자욱한 기회를 타서 곧장 부산(釜山)으로 쳐들어 왔다. 그때 첨사(僉使)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조공(朝貢) 오는 왜인이라고만 생각하고 걱정거리로 여기지도 않았는데, 잠시 후 병선이 무수히 몰려오는 것을 보고야 급히 돌아와 성으로 들어갔다. 성문이 겨우 닫히자 왜적들은 이미 상륙하여 성을 백 겹으로 포위하였으며, 얼마 안 가서 성은 함락되었고 정발은 죽었다. 왜적의 변란이 심히 다급해서 조야(朝野)가 창황하였다. 정 발은 나라를 위해 순절했으나 은명(恩命)을 받지는 못했었는데, 그 후 만력 31년 계묘년(1603, 선조 36)에 정발의 처 임씨(任氏)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를, “발은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도, 어떤 사람은 정발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고 하니, 지하의 억울한 혼이 눈을 감지 못합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특별히 포상을 내려주시기를 청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임금이 본도 순찰사(巡察使)에게 명하여 정발이 전사한 곡절을 탐문해서 아뢰라 하니, 순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좌수사(左水師) 이영(李英)에게 이첩하였고, 이영이 회보하기를, “그때 토병(土兵) 가은산(加隱山) 등 3명은 탈출할 수가 있어서 죽지 않았는데, 이들이 모두 말하기를, ‘첨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왜선이 무수함을 보자 급히 부산진에 돌아와서 성 밖의 주민과 군인 등을 독촉하여 빠짐없이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사람을 시켜 왜관(倭館)에 머물러 있는 왜인을 가보게 했는데, 단지 네 명이 있을 뿐이어서 곧 잡아 가두게 하였습니다. 또 전선(戰船)ㆍ방패선(防牌船)ㆍ중선(中船) 등 도합 세 척을 모두 배 바닥에 구멍을 뚫어 물에 가라앉게 한 뒤에, 첨사는 남문의 성루(城樓)에서 밤을 지냈습니다. 그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왜적이 성 뒷산을 둘러싸고 진을 치자 첨사는 군중(軍中)에 영을 내려 동요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고는, 마침내 서문으로 옮겨가 수비했습니다. 그런데 왜적이 일시에 함께 진격해 와 높은 곳을 점령하고 고함을 치면서 탄환을 비오듯이 쏘아대는데, 쏘는 탄환치고 맞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첨사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첨사의 첩도 스스로 목 베어 죽었으니,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가은산 등은 쌓인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오후에 왜적이 군중에 영을 내려 남은 백성들을 죽이지 말라 하여 다 배 위에 잡혀 있다가 17일에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운운.’ 하였습니다.” 하다. 순찰사가 그 회보에 의하여 자세히 아뢰다.
14일. 왜적이 동래(東萊)를 함락하였는데 부사(府使) 문과(文科) 출신의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평화시의 예에 따라 파견되었다. 송상현(宋象賢)은 죽고, 좌위장(左衛將)인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언성(李彦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왜적에게 항복하다. 하루 전에 송상현은 왜적이 대거 침입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인접 고을 군사를 불러다 동래성을 지켰다. 이리하여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동래성에 달려 들어왔는데, 부산이 이미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절제장(節制將)이니 본영(本營)을 지켜야지 여기에 있을 게 아니다.”라고 핑계하고, 성을 나가려 했다. 이때 송상현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고립된 성이 함락되려고 하는데, 주장(主將)이 구원해 주러 왔다가 어찌 차마 버리고 간단 말이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않은 채 아병(牙兵) 20명만을 남겨 놓고 가 버렸다. 이날 날샐 무렵 적병이 대거 진격해 와서는 우선 허수아비를 만들어 붉은 옷에 푸른 건을 씌우는 한편, 등에는 붉은 기를 지우고 허리에는 긴 칼을 채워서 그것을 긴 장대 끝에 꽂아 담 사이에 늘어 놓자, 성 안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도망치며 울부짖었으며, 왜적은 칼을 휘두르면서 마구 성 안으로 쳐들어 왔다.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 중위장(中衛將)인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대장(代將) 송봉수(宋鳳壽),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등이 모두 이 싸움에 죽었다. 송상현은 남문 성루에 올라 갑옷 위에 단령(團領)을 입고 관대를 띠고는 교의에 앉아 있었다. 왜적은 그가 부사임을 알고 생포하려 하였으나, 송상현이 가죽신 신은 발로 두 차례나 차고 왜적을 꾸짖기를,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러한 것이냐. 우리는 너희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너희는 왜 이런 짓을 하기에까지 이른단 말이냐.” 하니, 왜적이 몹시 성내면서 그를 잡아 끌고 목 베려 할 즈음에도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사가 남문의 성루에 있을 때 왜적이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자 부사는 그를 쏘아 죽였으며, 뭇 왜적이 난입하자 부사는 장검으로 두 왜적을 쳐죽이고 죽었다.”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그의 첩은 북도의 기생이었는데 역시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송상현과 함께 죽였다. 양첩(良妾) 이소사(李召史)는 자녀를 데리고 일본에 잡혀 갔다가 그 후 갑오년(1594, 선조 27)에 평행장(平行長)이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와 화평을 의논할 때 석방되어 돌아왔다. 왜적은 그들을 의리 있는 사람이라 여기고는, 두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 성 동문 밖에 묻고 나무패를 세워 표적을 해주었다. 부사가 조용히 죽음을 당할 그때 관노(官奴) 급창(及唱)이 소리쳐 울며 달려 들어가 손으로 부사의 옷자락을 잡고 기꺼이 그와 함께 죽으니, 왜적이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애초에 부사가 경내의 대소 부녀들을 모아 모두 성 안에 들어와 있게 하였는데, 성이 함락되자 왜적들이 그들을 모두 문루 위로 몰아 오르게 하고, 기생과 악공에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벌여 모여 신나게 놀았으며, 창고를 다 털어서 준비했던 배에 싣고 저희 나라로 돌려보내다. 포위를 당하기 전에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재배하고 부채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暈] 서매, 크디큰 진영(鎭營)을 구해 내지 못하누나.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라고 손수 써서 그것을 집 종에게 주어 그의 부모한테 가서 알리도록 하다. 그 후 왜적들도 포로된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충신은 오직 동래부사 한 사람뿐이다.” 하다. 부채면의 16자(字)는 안 상산(顔常山)의 “신(臣)은 무상(無狀)하니, 죽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말과 문신국(文信國)의, “인(仁)을 이룩하고 의(義)를 취한다.” 한 찬(贊)과 더불어 전후로 같은 정신이다. 글을 읽고 비감(悲感)에 젖어 모르는 결에 눈물을 흘렸으니, 천고에 걸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역적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족하리라. 그때 본도의 감사(監司) 김 수(金睟)가 진주(晉州)에 있었는데, 부산의 급보가 졸지에 도착하자 마침내 좌우 도(道)의 군사들을 독촉 징발해서 계속 구원하러 나가게 하다.
15일. 김수가 진주로부터 달려 반성(班城) 진주의 속현 까지 갔는데, 거기에서 부산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곧 장계를 갖추어 급히 보내고 군대를 정비해 가지고는 함안(咸安)을 거쳐 칠원(漆原)에 이르렀다. 본도의《순영록(巡營錄)》에 나온다. 그때 본도의 우병사 신길(申硈)은 이미 갈리어 조대곤(曹大坤)이 그와 교체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조대곤이 노쇠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경질하고 김성일(金誠一)로 대신하였다.
○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변기(邊璣)와 조경(趙儆)을 경상 좌우 방어사로, 성응길(成應吉)ㆍ양사준(梁士俊)ㆍ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을 경상 중좌우 조방장(慶尙中左右助防)으로, 곽영(郭嶸)을 전라 방어사로, 이유의(李由義)ㆍ김종례(金宗禮)ㆍ이지시(李之時)를 전라 중좌우 조방장으로, 이옥(李沃)을 충청 방어사로 하다.
16일. 왜적의 군사가 길을 나누어 전진했는데,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이 양산(梁山)을 지나면서 그곳을 깡그리 불태워 버렸다. 김수는 영산(靈山)에 이르러 왜적이 이미 양산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밀양(密陽)으로 달려갔는데, 적병이 대거 이르자 바로 영산(靈山)으로 후퇴하였다가 밤중에 초계(草溪)를 건너 전라 감사에게 이첩하였는데,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의 화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 4천 명과 도의 군관 3, 4명을 보내 주시오.” 하다. 이 통첩이 도달하자 호남은 겁에 질려 들끓고 다들 적을 피할 마음만을 지니고 있었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이 후퇴하여 소산(蘇山) 동래의 속역(屬驛)이다. 에 머물렀다. 이각은 이날 병영으로 달려 돌아가서는 싸우고 지키고 하는 대비에는 뜻이 없었고, 수석 진무(鎭撫)를 독촉해서 사람과 말을 내어 자기 첩과 면포(綿布) 천여 필을 운반해 옮겨 놓으라고 시키다. 진무가 어려운 기색을 보이자 이각이 대노하여 당장에 그를 목 베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은 왜적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식과 기계를 불태우고는 도망쳐 버리다. 본도《순영록》에 나온다.
17일. 좌우의 왜적이 여러 고을에 가득 찼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다. 한 대열은 언양(彦陽)에 함빡 몰려 들었다가 이어 경주(慶州)를 범했고, 중도(中道)로 오는 왜적은 곧장 밀양 가는 길로 해서 바로 들어 갔다. 부사 박진(朴晉)은 양산에서 후퇴하여 돌아와 황산(黃山)의 높은 잔교(棧橋)가 강에 임해 있는 그곳에서 적의 길을 막았다. 적장은 은색 가마를 타고 은색 우산을 펴고서 줄기차게 휘몰아 바싹 뒤쫓았다. 박진은 힘을 내어 싸워 여러 급(級)의 목을 베었고, 박진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 역시 연달아 여러 왜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왜적이 이미 재[嶺]를 넘어 그의 귀로를 끊어 앞뒤로 적을 맞이하자 박진이 본부(本府)로 달려 돌아와 창고를 불사르고 성을 나섰는데, 왜적은 이미 성 밖에 가득 차 있었다. 박진은 단기(單騎)로 충돌하여 포위를 허물고 왜적의 목 2급(級)을 벤 다음 달아나니, 이로 말미암아 원근의 사람들은 곧 박진의 이름을 알게 되다.《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8일. 왜적의 배 2백여 척이 부산에서 이동하여 김해(金海)를 함락시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은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애초에 중위장(中衛將)인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고 서예원은 남문을 지키면서 종일 접전했는데, 밤중에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 사칭하여 문지기를 찍어 죽이라 하고는 먼저 도망했고 서예원 역시 이유검을 추격한다고 청탁하고는 서문으로 해서 달아나, 김해성이 마침내 함락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9일. 적병이 밀양에서부터 또 영산(靈山)ㆍ청도(淸道) 등지를 범해 깡그리 불태워 없앴는데, 그 기세가 바람에 불길 같고 진동하는 우레 같아 지나가는 곳이 다 초토(焦土)가 되었다. 김수는 합천(陜川)에 머물러 있으면서 또 전라도에 이첩하였는데, “경상감사가 전달하는 일입니다. 흉악한 왜적이 어제 밀양에서 성을 함락시킨 다음 또 영산에 침범하고 곧장 성주(星州) 길로 향했는데, 이어 대구 길로 올라갈지의 여부는 미리 알 수 없습니다. 현풍(玄風)ㆍ창녕(昌寧) 등지의 공사(公私) 집들은 다 비어 있고, 본도의 각 병영에서는 모두 우관(右關) 운봉현(雲峯縣)에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다.
20일. 경상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병영으로 갔다. 애초 김성일이 어명을 받고 잽싼 걸음으로 달려 내려가 의령(宜寧)에 당도하고는, 정진(鼎津)을 거쳐 병영에 직접 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때 적병이 강의 우안(右岸)에 가득 모여 들자, 김성일의 휘하 장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길은 왜적의 소굴에 가장 가까우니 진주로 해서 함안(咸安)에 도달하느니만 못하다. 그렇다면 왜적과도 좀 멀리 떨어지게 되지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주장은 군령이 엄하여 곧장 전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니, 이 길은 위험하다.” 하고는, “정진에는 배가 없습니다.” 하고 김성일을 속이고 다시 그의 아들 김혁(金湙)에게, “강물이 불고 배가 없으니 진주 길로 가는 것이 편리합니다.” 하고, 힘들여 간하도록 당부했다. 김성일이 군관 김옥(金玉)을 시켜 가보게 했는데, 김옥이 돌아와서는, “배가 없어서 건널 수 없으니 진주 길로 빨리 가야 하겠습니다.” 하고 속여 보고했다. 그때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이 촌락의 집에 있다가 새 장수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배례하고, “영감이 오셔서 군민의 기운이 배가했습니다만 왜 정진으로 바로 건너지 않으시고 진주로 해서 돌아 가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성일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길을 와 본 일이 없소만, 틀림없이 휘하 장병들이 왜적을 두려워하여 나를 속인 것이오.” 하다. 그리고는 직접 가서 보니 큰 배가 강 언덕에 대어 있었다. 김성일이 대노하여 김옥ㆍ김혁 등을 잡아들여 형을 집행하게 했는데, 김옥이 큰 소리로, “김옥의 죄는 마땅히 참형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이 전쟁에 임하실 때 한 번 목숨을 바쳐 속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고 외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네가 속죄를 요구하였으니 앞으로 왜적을 만나거든 반드시 먼저 나서서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의 죄까지 다스리어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하고는, 곧 군사들을 재촉하여 강을 건너 해망원(海望原)에 이르렀다.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이곳에 후퇴하고 있었는데, 김성일을 보자 깜짝 놀라 읍하면서 맞이하고 그에게 직인과 부절을 넘겨 주고는 곧 하직하고 가려 하니, 이에 김성일이 그를 준렬하게 책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곤수(閫帥 병사나 수사를 일컬음) 신분으로 군사를 가지고도 진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김해(金海)를 함락당했으니, 그 죄는 마땅히 형을 받아야 하오. 더구나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이 극렬한 변란에 임해서 의리상 도망쳐서는 안 되오.” 하자, 조대곤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띠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얼마 안 있다가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도착했다고 알리자, 조대곤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면서 김성일에게 말에 올라 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그를 꾸짖어 저지시킨 다음 군사들에게 망동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고, 용맹한 군사를 골라 좌우의 복병을 잠복시키고 왜적을 기다렸다. 두 왜적이 흰 말을 타고 새깃으로 만든 옷[羽衣]과 금 갑옷에, 사방에 귀와 눈이 있어 빙글빙글 도는 게 답차(踏車)의 모양과도 같은 금가면(金假面)을 착용하고는 칼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앞으로 다가오자 장병들이 겁내어 떨었다. 그러나 김성일은 조대곤과 편안히 걸상에 마주 앉아 있었는데 왜적은 그가 꼼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고, 부채를 휘두르면서 걸어오는 왜적 수십 명이 그 뒤에 있었다. 김성일이 군관 20여 명을 시켜 앞에 가 그들을 쏘게 하고 또 용맹한 군사를 골라 돌격하게 했으나, 다들 서로 돌아보며 먼저 나가라고 미루는 것이었다. 김성일은 특히 김옥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 기왕에 먼저 나서서 공을 세우겠다고 하여 놓고 지금에 와서 회피할 수 있겠느냐.” 하니, 김옥이 곧 앞장 서서 말에 올라 수 리 밖에까지 쫓아가서 그 금가면의 말탄 왜적을 쏘아 거꾸러뜨리고는,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하여 금안장[金鞍]ㆍ준마(駿馬)ㆍ보검(寶劍) 등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전투는 병졸이 1천 명도 되지 않고 병기도 쓸어낸 듯이 없었건만, 적의 날카로운 칼날을 좌절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군의 사기가 약간 진작되매, 곧 군관 원사립(元士立)과 이숭인(李崇仁)을 시켜 괵수(䤋首)를 바치고 장계(狀啓)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나서야 보졸들을 앞에 가게 하고 김성일은 맨 뒤에서 고삐를 조여잡고 천천히 갔다. 이날 밤 김성일이 함안으로 진을 옮기고, 내상(內廂)을 수습하려고 하였는데 자기를 체포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충성스런 분기에 격동되어 사졸들이 목숨을 내놓고 죽기를 무릅쓰면서 힘을 내어 싸워 강한 왜적이 부지하지 못했는데 당시의 장병들은 왜 이것을 거울 삼지 않았는가.
○ 김수가 합천에서 지례(知禮) 쪽으로 도망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1일. 우도(右道)의 왜적은 영산(靈山)을 거쳐 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지를 지나서 깡그리 태워 없앴고, 중도(中道)의 왜적은 청도(淸道)로부터 경산(慶山)과 대구(大丘)를 지나가 홍수가 밀어닥치듯 산과 들을 메웠으니, 이때부터 강 좌우의 길이 막혀 버렸으며 좌도(左道)의 왜적은 울산(蔚山) 좌병영(左兵營) 등지를 향해 전진했다. 이각(李珏)은 서산(西山)으로 나가서 진을 쳤는데, 그때 열세 읍의 군사들이 모두 도착하여 성에 들어갔다.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이 동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각이 성을 비우고 나가서 진을 치려고 하자 윤 안성이 말하기를, “어찌 성을 버리고 나가서 진을 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이각이 대답하기를, “공은 우후(虞候) 등 여러 수령(守令)과 성을 지키면 되오. 공이 가지고 있는 석전군(石戰軍)을 나에게 예속시켜 주기를 바라오. 나는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나가 서산에 진을 치고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하겠소.” 하다. 마침내 이각이 서문으로 해서 성을 나가더니 윤안성 등을 돌아보고 태화강(太和江)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저곳에 꽉 차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하고는, 곧 서산으로 향해 달려 가니, 윤안성이 흥분하여 꾸짖으며 칼을 잡고 그를 노렸다. 우후(虞候) 원응두(元應斗) 역시 도망칠 생각을 갖자, 윤안성이 성을 내며 힐책하기를, “주장이 까닭없이 성을 나갔으니 그 죄는 마땅히 참형을 받아야 한다. 그나마 너희들을 남겨두고 성을 지키게 했는데, 너희들까지 또 도망가려는 거냐.” 하니, 원응두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적병의 또 한 패가 언양(彦陽)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켰다. 그때 부윤(府尹) 윤인함(尹仁涵)은 포망장(捕亡將)으로 서천(西川)에 있었고, 판관(判官) 박의장(朴毅長),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 등은 성 안에 있었다. 왜적의 기병(騎兵) 한 명이 동문 밖에까지 달려와서 패문(牌文)을 꽂아 놓고 갔다. 그것을 가져다 보니,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씌여 있으매,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은 계원장(繼援將)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모양(牟陽)까지 달려가고 있었고 하양(河陽)의 대장(代將) 역시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가고 있었는데, 하양은 본래 방어사의 소속이었으므로, 병사가 하양 대장으로 하여금 물러가 방어사의 지휘를 받게 하다. 우복룡이 막 길가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들이 후퇴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자, 그들이 왜적의 선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불러다 물어보게 하다. 대장이 사실대로 대답하였으나, 우복룡은 몰래 자기 군중(軍中)에 호령하여, “이들은 왜적의 앞잡이가 아니면 틀림없이 도망하는 군사들이다.” 하고는 자기 군사들을 시켜 하양의 군사들을 포위해 잡아다가 점검을 가장하고 깡그리 죽여버리니, 흘린 피가 개울을 이루다. 하양 한 고을의 군민이 이로 인하여 탕진돼 버리다. 우복룡은 곧 토적(土賊)을 잡아 목베었다고 방어사에게 사후 보고를 내다. 《경상도 순영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22일. 김성일(金誠一)이 체포 명령에 응하여 길을 떠나다. 앞서 김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와 어탑(御榻) 앞에서, “일본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니 근심할 일이 없을 것을 보증합니다.” 하고 아뢴 적이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전번에 아뢴 말의 책임을 추궁하여 이 명령을 내린 것이다. 김성일이 체포 명령이 도달하리라는 소식은 들었지만 길이 막혀서 아직 당도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이 아직 내리지 않았고 큰 적은 앞에 닥쳐 있는데, 병사로서 어떻게 진(鎭)을 쉽사리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김성일은, “군명(君命)을 오래 지체시켜서는 안 된다.” 하고 곧 길을 떠난 것이다. 이날 우후(虞候)와 이협(李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김성일이 가는 도중에 김수(金晬)가 나와 만나보고 그의 피체(被逮)를 위로하니, 김성일은 말이나 안색에 전연 나타내지 않고 다만,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영공(令公)께서는 힘써 왜적을 토벌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시오.” 하였다. 영리(營吏)들이 서로 말하기를, “체포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나랏일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충신이다.” 하다. 조대곤(曹大坤)이 용서를 받아 다시 병사가 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珏)과 원응두(元應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 만한 10여 두(斗)의 해마석(海磨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거(鵬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 유학(幼學) 곽재우(郭再祐)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宜寧) 사람이다. 처음에 그는 여러 성이 연달아 함락되고 여러 진(鎭)의 주장들과 방백ㆍ수령들이 모두 깊은 산으로 피하여 감히 교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섭게 나무라며 말하기를, “성스러운 조정에서 2백여 년 동안이나 신하들을 길러 왔건만, 갑자기 위급한 사태가 일어나자 모두 자신을 보전할 계책이나 찾고 임금의 난경(難境)은 돌보지 않으니, 지금 만약 초야에 묻힌 몸이라 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전국 3백 주(州)를 통틀어 남자란 하나도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어찌 만고의 수치가 아니겠느냐.” 이리하여 자기 가산을 전부 뿌려 흩어진 군졸들을 모으고,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선 전사(戰士)에게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서는 전사들의 처자에게 입혔으며, 또 충의로써 군사들을 격려하였다. 이때부터 모집된 전사들 중에 심대승(沈大承)ㆍ권란(權鸞)ㆍ장문장(張文章)ㆍ박필(朴弼) 등 10여 인은 다 용감하고 활 잘 쏘는 사람들로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곽재우와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이날 서로 같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정하고 수하의 용사 50여 명을 시켜 의령(宜寧)ㆍ초계(草溪)에 있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 내고, 또 기강(岐江)에 거둬들인 배의 조세미(租稅米)를 가져다가 모집한 군사들을 먹이니,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어떤 사람은 그가 발광한다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적질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도 그를 토적(土賊)이라고 순찰사(巡察使)에게 보고하여 군졸들이 다 흩어져 버렸었는데, 그때 마침 초유사(招諭使)가 내려와 그의 이름을 듣고는 그를 불러다 만나 보고야 의병을 일으키라고 격려하니, 이리하여 군졸들이 되돌아왔다. 이에 곽재우는 더욱 힘을 내어 왜적을 토벌하였다. 적이 많고 적은 것을 묻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가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한 사람으로 열 명을 당해내었다. 그가 싸울 때는 반드시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융복(戎服)의 갓에 갖추던 장식을 말함)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자호(自號)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빼앗곤 했는데, 그가 내왕하는 동작이란 잽싸게 출몰하는 것이어서 왜적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런 후에 그는 말을 빙그르 돌리고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는 것을 군사를 움직이는 절차로 삼으니, 왜적들은 그의 군사가 많은지 적은지를 몰라서 감히 바싹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는 진을 친 곳으로부터 왜적이 있는 곳에까지 이르는 길의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잇달아 척후소를 두어 이상(異狀)의 유무를 은밀하게 보고하도록 마련하였으니, 왜적이 1백 리 밖에 도착해도 진 안에서 그를 먼저 알고 미리 준비하고 있는지라 언제나 편하고 힘이 들지 않았으며 언제나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았다. 만약 왜적이 많이 오면 그들이 바라보이는 산에다 사람들을 시켜 손잡이 하나에 가지가 다섯씩 달린 횃불을 밤새도록 들고서 무서운 함성을 올리며 서로 호응하게 하여 천병 만마(千兵萬馬)가 있는 것같이 하였으니, 왜적들은 바라보다가 곧 달아나 버렸다. 또 정예한 군인을 골라서 요새지에 잠복시키고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잠자코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게도 하였으니, 왜적 역시 그를 ‘홍의장군’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불사르고 노략질을 하지 못하였다. 곽재우는 또 군사들을 단속하여 말하기를, “요(要)는 왜적을 죽여야 하는 것뿐이다. 목을 베어다 공(功)을 요구해서 무엇하겠느냐. 만약 후일 공의 대가(代價)를 받기 위해서 왜적을 토벌한다면 그것은 성심에서 우러나 하는 일이 아니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좇아 끝내 수급(首級)을 바치는 일이 없었다. 순찰사의 진에 있던 무사 김경로(金景老)ㆍ김경납(金景納) 등이 곽재우를 모함하자, 곽재우 역시 김수(金睟)가 하는 짓에 분개하여 격문을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그를 토벌하려 하였지만, 김수가 곽재우를 모반죄로 몰아서 장계를 올리는 바람에 곽재우는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초유사가 양편을 조정해 준 덕으로 마침내 무사하였다. 또 초유사가 삼가(三嘉)의 군사를 곽재우에게 주니, 곽재우는 두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윤탁(尹鐸)을 대장(代將)으로, 박사제(朴思齊)를 도총(都摠)으로, 허자대(許子大)를 군기제조(軍器製造) 책임자로, 정연(鄭演)을 독역사(督役使)로, 권란(權鸞)을 돌격장(突擊將)으로, 이운장(李雲長)을 수병장(收兵將)으로, 심대승(沈大承)과 배맹신(裵孟伸)을 선봉장(先鋒將)으로, 허언심(許彦深)을 군 급량(給糧) 책임자로, 강언룡(姜彦龍)을 무기 수리(武器修理) 책임자로 하였다. 초유사는 또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하여 그 수(즉 모집한 군사들의 수효)를 파악하는 일까지 겸임시키고, 성세(聲勢)를 이루어 곽재우를 돕게 하였다. 시골의 넉넉한 집에서는 쌀을 내고 소를 잡아 매일 돌려가며 군사들을 먹이니, 군의 성세가 크게 떨쳤다. 강의 아래 위에 있는 10여 개 소의 얕은 여울목마다 모두 척후를 잠복시켜, 왕래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아 서로 응원하니 왜적이 감히 물을 건너 오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 백성들은 평화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초야에서 일어나 충의(忠義) 두 글자를 받들고 수륙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적 1백 급(級)을 쏘고 베고 하여 죽였다.
○ 한성 판윤(漢城判尹)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하고, 전 목사 김여물(金汝岉)을 종사(從事)로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는데, 신립이 출동할 때엔 위의가 엄숙하여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다. 우리나라의 장수는 비록 이름은 훌륭하지만 위엄과 용맹 하나뿐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적들이 어찌 너를 살려 주겠는가. 아깝다! 어떻게 이 왜적을 제압할 건가.
23일. 중도(中道)로 오는 대부대의 왜적은 인동(仁同)을 불태워 버리고, 우도(右道)의 왜적은 현풍(玄風)으로 해서 길을 나누어 낙동강(洛東江)을 건너서는 성주(星州)를 불태워 버리니, 성주 판관(星州判官) 고현(高晛)은 도망쳐 달아났고, 목사 이덕렬(李德悅)이 겨우 몸만 살아 남아서 끝까지 고을을 지키다. 토적(土賊)이 성 안에 들어와 점거하고 있으면서 목사를 가칭(假稱)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으자, 궁박해진 백성들은 의지할 데가 없어 토적에게 항복하고 부동하는 자들도 많다. 좌도(左道) 왜적의 한 떼는 경주(慶州)로부터 진격하여 영천(永川)을 함락시켰는데 군수 김윤국(金潤國)은 도망쳐 달아났고,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왜적도 이날 진격하여 창원(昌原)을 함락시켜 병영을 모두 불태워 없애고, 이어 칠원(漆原)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다. 또 좌도 왜적의 한 떼는 장기(長鬐)로 향해 진격해 왔는데, 현감 이수일(李守一)이 경주로부터 후퇴하여 돌아와서 장기성 밖에 진을 쳤으나, 적병이 사방에서 진격해 와서 이수일은 곧 후퇴하고 말았다. 영천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신령(新寧)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고 이어 안동(安東)으로 향했는데, 부사 정희적(鄭熙績)은 도망쳐 달아났고, 좌방어(左防禦) 성응길(成應吉)과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은 의흥(義興)에 머물러 있으면서 움츠리고 물러난 채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때 김수(金睟)는 지례(知禮)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만 도순찰사의 지휘만 받고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24일.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은 인동(仁同)으로 해서 낙동강을 건넌 다음 선산(善山)으로 진격하여 함락시켰고, 신령에 머물러 있던 왜적은 의흥으로 옮겨 함락시키니 현감 노경복(盧景福)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김수가 박진(朴晉)과 배설(裵楔)에게 선산에 가서 왜적을 정탐하라 했는데, 도중에 죽패(竹牌)를 차고 있는 7명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박진 등이 왜적의 무리인가 의심하여, 말 앞에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면서 꿇어앉아 왜의 글을 바치는 것이었다. 위쪽에는 크게 영(令) 자 한 자를 썼고, 그 아래에는 잔 글씨로, “군현의 백성들은 속히 옛집으로 돌아가 남자는 모를 심고 보리를 거두며, 여자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각각 자기 집 일에 힘쓰라. 만약 우리 군사가 법을 범하면 반드시 처벌한다. 천정(天正) 20년 월 일 습유시중(拾遺侍中) 평의지(平義智).” 라고 씌어 있고, 그 아래엔 이름까지 적혀 있다. 박진 등이 그들을 포박해 오다가, 졸지에 왜적을 만나자 버리고 달아났다. 그때 영남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 이르렀는데 척후(斥候)에 밝지 못한지라, 왜적이 이미 선산을 지났다고 고하는 자가 있었는데도 이일은 그가 군중(群衆)을 현혹시킨다고 노하여 그를 목베어 죽인 다음 군중(軍中)에 돌려 보이니, 왜적이 이미 다가왔음을 듣고서도 감히 먼저 고하는 자가 없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어리석은 자라도 천 가지를 생각하면 반드시 한 가지는 아는 게 있기 마련인데, 가소롭다, 차라리 한 가지도 아는 게 없을 망정 척후로 정탐을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요략이요, 사술(詐術)과 궤모(詭謀)는 명장(名將)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건만, 정도(正道)만 지켜 패배를 기다린다는 일은 옛날에도 있었단 말을 못 들었다.
25일. 대부대의 왜적이 선산으로부터 상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매, 이일(李鎰)이 대패하여 달아났는데, 이날 새벽 안개가 자욱할 무렵 포성이 들려 오자 왜적의 선봉이 이미 죽현(竹峴)에 당도했음을 바로 알아채고 이일이 성 밖 북천(北川)에 나가 진을 치다. 왜적은 혹 칼을 번쩍이고 껑충거리며 들어오기도 하고 쥐새끼같이 엎드려 무릎으로 기어서 전진하기도 하여 순식간에 들판을 덮어버렸다. 아군이 저절로 붕괴되어 북천을 꽉 메우게 되매 왜적이 돌격하는 기병으로 짓밟게 하니 시체 쌓인 것이 산더미 같다. 종사관 박지(朴篪), 이일의 종사관이다. 이경류(李慶流), 변 기(邊璣)의 종사관이다. 윤섬(尹暹)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살해되었고, 이일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달려 충주(忠州)로 돌아오다. 박지는 김수의 사위다. 그때 나이는 22세, 홍문관 교리로 조정에 있었는데 이일이 어명을 받았을 때 김수는 막 경상 감사가 되었었다. 박지가 자기 군중에 있으면 김수도 반드시 마음과 힘을 기울여 주리라 생각하여 자기의 종사관으로 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고,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었는데 이때에 와서 죽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박지는 왜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로 피해 들어가 있다가 함양(咸陽) 사람 인언룡(印彦龍)을 만나서, “나는 18세에 장원 급제하여 나라의 은혜를 받았건만 지금 전쟁이 불리해졌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용안(龍顔)을 뵙겠나.”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다.
26일. 흉악한 왜적이 상주(尙州)로부터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은 변란 초기부터 관청의 문을 떠나지 않았다. 이날도 막 대문 앞에 앉아서 관의 창고를 부수어 흩뜨린 토적(土賊)을 처형하고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방비가 허술한 문으로 해서 들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고, 신길원은 홀로 말을 타고 산 기슭으로 피해 들어갔다. 왜적이 쫓아가서 그를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나 신길원이 호되게 꾸짖고 굽히지 않자 왜적이 그의 사지를 절단한 후에 죽였는데, 그는 죽을 때까지도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성(睢陽城)에서 순절한 장순(張巡)이 있을 뿐이다.
○ 좌도 왜적의 한 떼가 군위(軍威)를 불태워버리고 연달아 비안(庇安)을 함락시키니 현감 김인갑(金仁甲)이 도망쳐 달아났고, 한 떼는 장기(長鬐)로부터 영일(迎日)과 감포(甘浦)를 불태우고 약탈하다. 안동 판관 윤안성(尹安性)이 단기(單騎)로 부(府)에 돌아왔는데 부사가 도망쳤음을 알고서, 서쪽으로 풍기(豐基)에 가니 군수 윤극임(尹克任) 역시 성을 버리고 도망가다.
○ 김수(金睟)가 지례(知禮)로부터 거창(居昌)에 돌아와 초계 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을 목베다.
○ 신립(申砬)이 용인(龍仁)을 지나다가 왜적의 기세가 창궐한다는 소식을 듣고 밀계(密啓)를 올려, “왜적의 기세가 무척 성해서 정말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사세가 답답하고 절박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운운.” 하니, 도성에서는 신립을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었는데 답답하고 절박하다고 한 밀계의 소식을 듣고, 사민(士民)들이 들끓고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도망쳐 흩어지다.
○ 신립이 달려 충주(忠州)를 지나서는 조령(鳥嶺)을 막아 적의 길을 끊으려고 하였으나 길이 험하고 막힌 데가 많아서 말타고 활쏘기가 불편하겠기로 후퇴하여 충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이 왜적의 정세가 어떤가를 물으니, 이일이 대답하기를, “이 적은 경오년(1570, 선조 3)과 을묘년의 그것과는 견줄 게 아니며, 경오년의 왜적은 겨우 웅천(熊川) 두어 고을을 함락시키고는 패하여 돌아갔고, 을묘년의 왜적은 달량(達梁)을 함락시켜 병사(兵使) 원적(元迪)을 죽이고는 잇달아 강진(康津) 등의 고을을 함락하여 영암(靈巖)에까지 왔다가 패하여 돌아갔다. 또 북쪽 오랑캐같이 쉽사리 제압되지도 않습니다. 이제 험준한 데를 점거하여 적의 길을 끊지 못하였으니 만약 넓은 들판에서 교전한다면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후퇴하여 서울이나 지키십시오.” 하니, 신립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패군(敗軍)한 데다 또 군졸들을 경동(驚動)시키니 군법으로는 목베어야 마땅하다마는, 왜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공을 세워서 속죄하여라.” 하고, 마침내 달천(㺚川)충주의 땅이다. 에 주둔하다.
27일.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과 조방장(助防長) 이지시(李之詩)가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남원(南原) 운봉(雲峯)으로부터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영남을 구원하러 가다.
○ 흉악한 왜적이 조령을 넘어 달천으로 달려 들어오니 신립은 패전하여 죽었다. 당초 적병은 두 재[嶺]의 넘기 어려움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당도하자 산길은 고요하고 사람의 발자취도 전연 없는지라 마침내 크게 기뻐하여 날뛰면서 곧장 충주를 범했다.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汝岉)이 이일(李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척후장(斥候將) 김효원(金孝元)ㆍ안민(安敏) 등이 달려와서, “왜적의 선봉이 이미 다가왔습니다.” 하고 고하자, 신립은 그들이 군중을 놀라게 한 일에 노하여 당장 그 두 사람을 목 베고 이어 영을 내려 진의 대오를 바꾸게 하였다. 그러나 적병이 이미 아군의 뒤로 나와 천 겹으로 포위하자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달천의 물로 뛰어들었다. 왜적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시체가 강을 메웠으며, 신립과 김여물도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 경상 우병사 조대곤(曹大坤)이 후퇴하여 회산서원(晦山書院)에 숨다. 때마침 창원(昌原)에 잔류하고 있던 왜적 40여 기(騎)가 피란하는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강물을 거슬러 건너와 의령(宜寧)의 신반(新反)을 약탈하고 마침내 빈틈을 타 성으로 들어가서는 관아와 성문을 불사르니, 조대곤이 마침 삼가(三嘉)에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닥쳐온 줄로만 생각하고 군기와 북을 버리고 숨었던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비안(庇安)의 왜적이 예천(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주둔하고 중도(中道)의 대부대 왜적이 인하여 충주를 함락시키니, 목사 이종장(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충주 등지의 사람들은 신립의 대군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변란을 당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군대가 패하였다. 적병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약탈하고 하는 참상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왜적이 우리나라에 말을 전해오기를, “정탁(鄭琢)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 운운.” 하다.
28일. 성주(星州)의 왜적이 개령(開寧)과 금산(金山)을 연달아 함락시키다. 우도의 방어사 조경(趙儆)과 그의 종사 이수광(李睟光)이 군사들을 거두어 가지고 추풍(秋風) 금산의 역 이름이다. 을 막아 적의 길을 끊었으나 군사들이 무너져 달아나다.
○ 경상 좌도의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이 의성(義城)으로부터 사잇길로 해서 안동(安東)의 풍산(豐山)으로 후퇴하고는 창고를 깡그리 불사르고 가버리다. 왜적은 다인(多仁)에서 하풍진(河豐津)을 건너 함용(咸龍) 땅으로 전진하여 당교(唐橋)에다 진을 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 감사의 영리(營吏)인 이(李)란 사람이 전라감사에게 고목(告目)을 보내며 말하기를, “지금 도착한 소식통에 의하면 왜적들이 옷 안에 갑옷을 입었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으나, 옷 밖에는 모두 갑옷을 입지 않고 병기인즉 단지 철환(鐵丸)을 쏘고 칼을 쓸 뿐입니다. 다른 재주는 없으나 다만 철환을 쏘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쏘는 것이 빗발치듯 하여 그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 고을의 군기고 외에 관사 같은 것은 태우지 않고, 읍내와 길가에서는 큰 집과 좋은 마을만을 골라서 불을 지릅니다. 중도(中道)의 왜적은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정도라서 그들은 동래(東萊)ㆍ양산(梁山)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경산(慶山)ㆍ대구(大丘)ㆍ인동(仁同) 및 선산(善山)을 거쳐 오며 다 태워 버렸습니다. 적들이 상주(尙州)에 이르렀을 때 순변사(巡邊使)가 그들과 접전하였지만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패배당했습니다. 왜적의 무리는 상주와 함창(咸昌)도 태우고 이미 조령(鳥嶺)에 이르렀고 불일간 조령을 넘어갈 기세까지 있다고 합니다만,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은 겨우 4, 5백 명으로 김해(金海)ㆍ창원(昌原)으로 해서 우병영을 불태웠는데, 이곳에 이르렀을 때 우병사가 그들과 접전했으나 이기지 못했습니다. 왜적은 함안(咸安)ㆍ칠원(漆原)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을 거쳐 오면서 모두 불태웠고, 거기서부터 둘 내지 세 대열로 나누어 편성했는데 한 대열은 2백여 명으로 지금 성주(星州)에 도달해서 막 그곳의 여러 마을을 수색하고 있고, 또 한 대열의 1백 5, 60명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을 거쳐 고령(高靈)의 뒤로 향했는데 역시 그 후에 간 곳은 모르겠습니다. 또 흩어진 왜적 □3명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몰래 금산(金山)에 도착하자 우도의 방어사가 접전했는데 아군이 무너져 달아난 후 간 곳은 역시 모르겠습니다. 우도의 왜적이 어느 길로 해서 올라갈 계획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좌도의 경조(慶州) 길로 해서 가는 왜적이 올라갈지의 여부에 관해서도 한 번 변이 일어난 후로는 여러 고을이 텅 비고 도로는 끊기고 막히고 하여, 한 장의 소식도 받아 보지 못했습니다. 한편 왜선 20척이 부산포(釜山浦)를 떠나 이미 거제도(巨濟島)에 도달했는데, 우수사와 전라 좌수사가 지금 그를 공격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왜적이 가는 곳마다 젊은 남자는 모두 목 베고, 늙은이와 어린이 및 여인은 죽이지 않으나 예쁜 여자와 여염집에서 훔친 물건은 소와 말에 실려서 길에 연달아 있습니다. 싣고 가는 소와 말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끌고 가게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사로잡아다가 자기 무리로 삼은 것이 태반이나 됩니다. 이 밖에 소소한 행동을 낱낱이 들어서 말하기 어렵기에 대강 써 보냅니다. 운운.” 하다.
○ 우도의 왜적이 호서(湖西)로 들어가 황간(黃澗)ㆍ청산(靑山) 등의 고을을 불태우다. 이 길의 왜적은 그 수효가 사실 적어서 양호(兩湖)의 군사로 넉넉히 막아낼 수 있었는데, 장병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멀리서 왜적을 바라보고는 먼저 무너졌다. 비록 적군은 정예하고 아군은 둔하다고 하나, 사실은 장병들이 마음을 다하지 않은 데서 그렇게 된 것이다. 아깝다, 양호의 허다한 고을에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었던가.
○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서쪽으로 명 나라에 긴급한 사정을 고하기로 계획을 정하고 우선 이원익(李元翼)과 최흥원(崔興元)을 보내어 평안도ㆍ황해도를 순찰하게 하고, 또 대신에게 명해서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립하여 군사와 국무의 중대한 일을 감무(監撫)하도록 하게 하였다. 대신 유홍(兪泓)이 울며 간하기를,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있는데, 전하께서 어디로 가십니까. 가벼이 움직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 흔들리게 하셔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룡포로 눈물을 닦으면서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소.” 하고는, 백성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곧 성을 등지고 한바탕 싸워 볼 계획하에 애통한 교서를 내렸다.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로 하여 경기의 남은 장정을 있는 대로 거느리고 한강 가에 진을 치게 하고, 병조와 비변사(備邊司)에게는 성을 지키는 기구를 독려해 마련하도록 하였다.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아깝다! 2백 년 동안 휴양한 끝에 어찌하여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흉악한 왜적의 무리에게까지도 부끄럽다.
29일. 전라감사 이광(李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昌)에서 함양(咸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2백 년이나 길러온 그 속에 충신과 의사(義士) 없음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는, 밤중에 중전과 함께 여러 궁인(宮人)들을 거느리고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서 서울을 떠나서 아침에 벽제(碧蹄)에 이르렀다. 도중에 비를 만나 곤룡포는 다 젖었고, 동네가 텅 비어 팔진미(八珍味) 식사도 궐한 채 장단(長湍)으로 달려갔으나, 부사는 이미 도망했고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사람이라곤 없어 일행이 모두 굶주린 채 잠시 쉬고는 곧 개성부(開城府)로 향하다. 이때에 편히 살며 침식(寢食)하는 백성들은 어찌하여 충의심을 일으키어 왜적을 토벌하지 않고 이날 같은 전례없는 비통을 남겼단 말이냐!
○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이 군사를 거느리고 금산(金山) 땅에 이르자 본도 우방어사 조경(趙儆) 등이 와 합세하여 금천역(金泉驛)에 이르러 왜적 5급(級)을 베었다. 이어 군(郡) 내에 잔류한 왜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군사를 전진 포위하여 잡아 30여 급을 목 베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50여 명이었다. 곽영이 곧 전라도에 돌아와서 막 접전할 때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鄭起龍)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 전라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청도로 향했다가 곧 전라도로 돌아가다. 애초에 선전관이 서울에서 본진(本陣 즉 전라도에 있는 이유의의 진을 말함)에 와서 교지를 전하기를,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충주(忠州)로 달려가서 신립(申砬)의 지휘를 받아라.” 하였다. 이유의가 어명을 받고 연산(連山)까지 갔었지만 신립이 이미 패하여 왜적이 경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끌고 돌아간 것이다.
○ 왜적이 우리나라 장병이 잘 무너짐을 알자, 소수의 군사로 깊이 들어가는 위험성에 대한 의구심도 갖지 않아 혹은 10여 명, 혹은 5, 6명으로 패를 지어 마구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하다.
5월 1일. 흉악한 왜적이 경기도에 가득 들어와 한강 이남이 연기와 화염으로 하늘이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뒤흔드니 용인(龍仁)ㆍ수원(水原)ㆍ광주(廣州) 등지가 깡그리 불타버리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경내(京內)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개유첩(開諭帖)을 내리기를, “듣자니, 민간인들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키며 다들 다른 데로 피해갈 계획을 하고 있다 하나, 호남과 영남 사이에 높은 산과 큰 개울이 있으니 졸지에 닥쳐올 근심은 전연 없다. 더구나 지금 경상 우수사가 왜적을 많이 잡아 승세(勝勢)가 크게 떨치고 있으니, 각기 마음을 놓고 생업에 안정하여 서로 경동(驚動)하지 말고 함께 농사일에나 힘써라.” 하다. 남원은 호남과 영남 사이에 있고 내가 본부, 즉 남원에 있었기 때문에 호남ㆍ영남 및 본부의 일을 기록하는 것이 퍽 상세한 것이다.
2일.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漢濱]ㆍ광나루[廣津]ㆍ마전(麻田)ㆍ사평(沙平)ㆍ동작(銅雀) 등처에서 일시에 떼[桴]를 타고 마구 건너왔는데,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배리(陪吏)가 원수(元帥)의 교의(轎椅)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 5일의 거리가 된다.
○ 거가(車駕)가 송도(松都)에 이르자 잠시 멈추고 김명원(金命元)에게 명해서 임진강(臨津江)을 차단하게 하고 정철(鄭澈)과 윤두수(尹斗壽)을 방면하여 좌ㆍ우의정을 시켰으며, 동인과 서인의 싸움으로 벌을 받았던 것이다. 교지를 내려 호남과 영남의 군사를 소집하다. 교지는 아래 14일 조에 있다.
3일. 왜적이 장안성(長安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도 양산(梁山)의 관노(官奴) 황응정(黃應禎)이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너의 나라는 방어는 해서 무엇할 거냐. 불과 20일이면 틀림없이 서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보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왜적들이 지나가는 여러 고을에는 모두 두목[酋]을 남겨두어 원[宰]이라 칭하고, 우매한 백성들을 꾀어 모아서는 창고의 곡식을 풀어주었으며 겸하여 명패(名牌)를 만들어서 그들이 항복하여 내부(來府)하였음을 표시하게 하니,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많이 고식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부산(釜山)으로부터 서울과 개성(開城)에 이르는 세 길의 상하 30리마다 진(陣) 하나씩을 설치해서, 깊이 들어가다가 길이 막히게 될 우려에 대비하였다. 서울에 입성한 후에는 먼저 궁궐과 종묘를 불태우고 연달아 공사(公私)의 가옥을 태우며, 숨겨 둔 재물을 뒤져내어 매일같이 본토(즉 일본)에 보내고, 군사들을 휴식시켜 관서(關西)와 북쪽 길로 향할 계획을 세우다.
○ 경상 좌병사 이각(李珏)과 좌수사 박홍(朴泓)이 각각 우후(虞候)들을 거느리고 방어사 성응길(成應吉), 조방장(助防將) 박종남(朴宗男)ㆍ변응성(邊應星), 안동 판관(安東判官) 윤안성(尹安性), 풍기 군수(豐基郡守) 윤극임(尹克任), 예천 군수(醴泉郡守) 변양우(邊良祐) 등과 근왕(勤王)을 핑계 삼아 영남을 버리고 죽령(竹嶺)을 넘어갔는데, 그 후 원수(元帥)가 임진강에서 이각을 목 베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칠포만호(漆浦萬戶) 문관도(文貫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있다고 여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에게 보낸 서한에,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면, 오직 애통하고 절박한 취지로 격문을 띄워가지고 사방의 충의있는 동지를 불러 유시하여 지체없이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씻기나 바라야겠습니다만, 격문의 말이 만약 간절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길이 없으니 격문을 거칠고 엉성하게 지어서는 안 됩니다. 격문을 지으셔서 속히 보여주기를 감히 바랍니다. 오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갓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또 이 뜻을 사중(士重)김천일(金千鎰)의 자(字)이다. 등의 제공(諸公)에게 알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다.
○ 고경명이 이광에게 보낸 답서에,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오직 매일같이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입니다. 방금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이 속태우고 있는 가운데 귀하의 글월을 지금 받았습니다만, 끝까지 다 펴 읽기도 전에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군요. 저 경명은 쇠병(衰病)으로 여생을 밭[田] 사이에 묻고 침상에 누워 있으면서, 위로는 행장(行裝)을 갖추고 급히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문안드리지 못하고 또 막부(幕府)로 가서 군사 계획을 곁에서 돕지도 못하니, 근심과 부끄러움에 몸 둘 곳을 모르며, 한 번 죽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말씀하신 격문은 제가 비록 오랫동안 글 짓는 일에서 손을 떼었지만, 의리상 감히 피하지 못하겠기에 삼가 이에 지어 보내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말의 조리가 엉성하여, 귀하께서 말씀하신 충의지사(忠義之士)를 창도하여 거병(擧兵)하게 하라는 취지를 선양할 길이 없음이 한스럽습니다. 다만 저 경명이 월초(月初)부터 이 고을 동부에 있는 집으로 옮겨와 있는데, 지금 귀하의 글월을 보니, 3일에 낸 것인데 6일에야 군졸이 빈 집에다 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늦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늦어서 일에 맞춰 쓰이지 못할까 무척 근심하고 있습니다. 구구한 제 심정을 망령되이 진술할 것이 있어 별지(別紙)에 기록했습니다. 간절히 바라거니와, 귀하는 못난 이 사람이라 해서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을 버리지 마시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 충의의 뜻을 넓히시어 과연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게 하십시오. 김사중(金士重)이 마침 편지를 보내왔기에 귀하의 뜻을 갖추어 전하였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운운. 나머지는 마음이 어지러워 이만 줄입니다.” 하고, 또 별지에, “오늘의 할 일 중엔 군대를 길러서 근왕(勤王)하는 것이 첫째 가는 충의입니다. 그리고 또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단결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횡포한 왜적의 침범은 물론 그 소요스러움을 견딜 수 없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끝없이 군사를 불러 모은다면 백성들은 더욱 그들의 생업에 안정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도 이르기를, ‘군사는 정예하기에 힘쓰지, 많기에 힘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잘만 쓴다면 지금 있는 군사로도 넉넉히 승리를 거둘 것이고, 만약 잘 쓰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다만 나라의 근본이 날로 흔들리고 나라의 일이 날로 빗나갈 뿐입니다.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셨는데, 기성(箕城 평양을 두고 한 말임)이 피폐하여, 백관과 유사(有司)의 수요를 공급해 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대관들의 식사 공급까지도 한심스럽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산(君山)이 세미(稅米)를 바치러 강에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법성(法聖)의 창고도 양곡을 실은 배가 아직 떠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많은 상을 내걸고 조졸(漕卒)을 후하게 모집하고 서해로 배를 몰아서 대동강의 나루에 도달하게 해서, 가령 그 반만이라도 행재소(行在所)까지 보낼 수 있다면 비단 군대와 국가의 수요가 그 덕으로 충족될 뿐 아니라 사방의 인심까지도 역시 그것이 힘이 되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왜적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와서 천 리를 전진하며 전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그들로 하여금 외람되이 서울을 점거하게 하여 육로가 이미 막혔다고는 하지만, 서쪽의 바닷길들은 그래도 아직 막히지 않았으니 이번에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는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평상시의 사례처럼 못난 말석의 용렬한 장수 따위나 억지로 시켜서 가지고 가게 한다면 의외의 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람으로 배질에 능통한 자를 뽑아가지고 정예한 군졸을 정해 주어 일면으로는 싸우고 일면으론 나아가는 계획을 행하게 한다면 군량이 무사히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행도(行都) 군사들의 사기 역시 조금은 진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민심이 소란하여 군사 모으기가 쉽지 않으니, 서둘러 조치해서 조졸(漕卒)만을 시켜서 전례대로 가지고 가게 하는 것도 혹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흘 정도나 지연되는 경우 저들 왜적이 약탈해 갈 생각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를 일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호령이 군중에 이르지 않고 사방의 소식이 행도에 도달하지 않으니, 이야말로 통곡하며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만약 중한 값으로 보자기[鮑作]를 후히 모집해서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고 납서(蠟書)를 전달하게 하여 무사히 갔다 오면 관자(官資)에 보직(補職)해 주거나 혹은 미포(米布)를 넉넉하게 주는 두 가지 중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해 주고, 또 그 처자를 관□에 데려다 놓고 그가 돌아올 동안을 기한으로 매일 보통 지급하는 양보다 배가 되는 주식(酒食)을 지급해 주어, 밖으로 구휼하고 양육해 주는 은혜를 보이면서 안으로는 붙들어 두는 계획을 시행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방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합해 근왕(勤王)하게 되면, 요는 수륙으로 동시에 진격해야 하는 것이니 대군은 곧장 탄탄한 길로 해서 진격하고 기병(奇兵)은 간간이 바닷길로 나아가, 왜적들로 하여금 앞뒤로 적(敵)을 맡게 하여 빠른 우레에 귀를 가릴 사이가 없듯 공격한다면 이는 또한 병가(兵家)에서 쓰는 기정(奇正)의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父老)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다. 아! 조그마한 왜적들이 독하기론 벌과 전갈이 모인 듯하고, 천성은 뱀을 타고났도다. 그들은 음흉하게도 중국을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석륵(石勒)의 도적들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듯 쳐들어왔으니 종묘 사직의 수치가 한이 없고, 말갈(靺鞨 원문은 몰갈(沒喝))의 군대가 강가에 머무르려 하듯 한강에 임했으니 조정의 근심 또한 한정이 없다. 이 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밤낮으로 애통한 조서(詔書)가 내리고 산과 강에 기도하는 정성을 드리게 되었으니, 온 땅끝까지의 피를 지닌 우리 모든 사람이 마음을 썩히며 팔를 걷고 나서야 할 일인 것이다. 누군들 주먹에 힘을 주고 창을 휘두르지 않겠는가.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 비록 서로 돕는 힘을 잃었다지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근왕(勤王)하는 충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차마 원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하늘을 이고 살 것인가. 전례 없는 치욕을 씻기 바라는 바이다. 관운장(關雲長)ㆍ장비(張飛)와 같은 맹장들이 범처럼 무섭고, 매가 공격하듯이 날랜 용사들은 숲과 같이 많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中原)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할 젠 간담이 말[斗]같이 컸고, 장숙야(張叔夜)가 들어가 경락(京洛)을 구원하였을 땐 눈물이 은하수를 매단 것 같았다. 범을 그리고 용을 그린 기[虎旌 龍旌]로 장막 위에서 제비 둥우리를 쓸어버리듯 하고, 사모(蛇矛)와 월극(月戟)으로 솥 속에서 노는 물고기를 잡듯 하길 기대한다. 너희들 호남은 본래 예의의 지방으로 일컬어져 왔거니와 실로 인재가 많은 고장이다. 모두 질풍(疾風) 앞의 억센 풀[勁草]같이 굳은 절개를 나타내고 함께 변란기의 충신이 되어 다오. 그리고 우리 왕실이 2백 년 동안 길러 준 은덕을 생각하고, 너희들 억만 인의 강개에 찬 뜻을 한결같이 하여라.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를 위해선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하며, 대의(大義)를 무기로 앞장서서는 장수를 목 베고 깃발을 뽑아 적의 수레바퀴 한 짝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게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대(一代)에 공이 높았던 충갑(冲甲) 성은 원(元)이다. 고려 때 사람인데, 필부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하여 큰 난리를 평정하다. 아니면 후손에까지 은택을 미치게 했던 차달(車達)성은 유(柳)이다. 고려 때의 문화(文化) 사람이다. 난에 임하여 양곡이 모자라자, 차달이 수레를 가지고 개인의 양곡을 운반해다 군에 보급해 주었다. 난이 평정된 후, 차달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녹훈(錄勳)하다. 만 못하다 하겠는가. 몸을 국가에 바치도록 권면하여 절조를 지키고 죽을 힘을 다하기를 기약할 것이요, 왜적 때문에 군부(君父)를 버리지 말고 힘을 다하고 목숨 버릴 것을 맹세하라. 격문이 도달하거든, 각각 충의로써 권면하여 장부들을 이끌고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오라.” 하다. 이광(李洸)은 애초에 왜적이 서울 등지에까지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역한 군사들의 유언비어가 아닌가 하고 의심했었다. 방백의 신분으로는 살아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즉시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 및 관대(冠帶)를 전주(全州)의 진전(眞殿)에 모아 두고는 고부(古阜)의 자기 본가로 피해 가다. 대중의 여론이 시끄럽게 일어나 그를 허물하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다시 군대를 맡아 보게 된 것이다. 이번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할 때 왜적의 소식이 희미하매, 본국의 역적이 왜적과 함께 서울로 올라간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퍽 많다.
○ 이광이 영남의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내다.
우리 국가는 13대에 걸쳐 태만한 일도 없었고 황음(荒淫)한 일도 없어서 도덕을 잃지 않았고, 2백 년 동안 가는 사람 좇지도 오는 사람 막지도 않아서 전쟁을 일삼지 않았으며, 조심스러이 강토를 지키며 세심하게 준비를 해왔다. 근자에 추한 오랑캐[醜虞 왜인을 말함]가 성의를 표해 오기로 성군(聖君)의 포용있는 도량을 약간 보여주었고 조정은 그들을 회유할 셈으로 그들의 말을 경솔하게 신용하였더니, 오랑캐의 마음이란 흉악하기 짝이 없어 마침내 의리를 배반한 음모를 구사하여 독사가 물듯이 악독한 마음을 앞다투어 내고 벌과 전갈 같은 독을 함부로 쏘아 우리 장병을 살해한 것이 만이나 천 이상이었고, 우리 성을 함몰시킨 것도 어찌 수십으로 헤아릴 정도이겠는가. 안진경(顔眞卿)의, “본 적이 없다.” 한 말과 양만석(楊萬石)의, “어찌 그리 많으냐.”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요, 유총(劉聰)이 곧장 신주(神州)로 향하자 진실(晉室)의 위태로움이 다급하여지고, 말갈[沒喝]이 하상(河上)에 들어오자 송조(宋朝)의 치욕이 말할 수 없이 되었던 그 일에나 견줄 수 있겠나. 왜적의 죄는 이미 하늘까지 치닫아 귀신의 음주(陰誅)가 이미 의정(議定)된지라, 그들은 패하여 반드시 그 피를 땅에 칠하리니 우리 군사의 현륙(顯戮)을 가해야 할 것이다. 이제 충의를 무기로 삼는 삼군(三軍)으로 배성의 일전[背城之一戰]을 결행하려는 터에 누가 동창의 계교[東窓之計]를 내세우고, 서촉(西蜀)으로의 피란을 서둘러 권했단 말이냐. 깃발이 보일락 말락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금 가마는 서리와 이슬에 젖었고, 처량하게 봉상(鳳翔)에 머무는 옥 수레에는 바람과 먼지가 날린다. 강(江) 위에 정정당당하던 우리 군사들은 물결처럼 달아나고 새같이 흩어졌으며, 서울 안의 높고 낮은 집들은 연기에 싸이고 구름 속에 잠겼다. 부고(府庫)의 정책은 소연(蕭然)하고 곳집에 저축해 둔 곡식은 몽땅 없어졌다. 이 일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나, 시대의 형편인지라 어찌 하리오. 조사아(祖士雅)가 중원을 평정하겠다고 맹세한 일에서 그 의분을 상상할 수 있거니와 장숙야(張叔夜)가 서울에 들어가 방위하였음은 충의심을 쏟은 것이다. 평탄하건 험악하건 언제든지 함께 힘을 다해 목숨을 바치기를 꾀해야 할 일이건만 위태롭고 모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차마 함께 하늘을 이고 구차하게 안일을 구하겠는가. 나 이광(李洸)은 재질이 예악의 고장에 노닐 사람이 못 되지만, 잘못 시서(詩書)의 장수로 임명을 받아, 두 차례나 방면(方面)의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매, 늘 나라만이 있을 뿐이라는 충성심을 품어 왔었다. 이에 이성(李晟 당 나라 때 충용을 겸비한 인물)의 충성을 다해서 정전(鄭畋 당 나라 말년 황소(黃巢)의 난을 수습한 인물)의 격문을 전한다. 심히 애통하고 심히 급히 급하니, 어찌 허수하게 하며 느긋하게 할 일이겠는가. 설경선(薛景仙)은 나룻길로 해서 먼저 공물(貢物)을 상납한 후 의병을 일으켰고, 한세충(韓世忠 송(宋)의 명장(名將))은 바닷길로 해서 행영(行營)으로 가 경기 지방을 회복하고자 바람에 날리는 깃발로 치는 호령에 산악 같은 위엄으로 강남을 번개같이 떠나서는 한강 북안을 무섭게 바라본다. 장군이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우니, 누군들 주먹을 불끈 쥐고 적장의 기를 뽑으려 하지 않겠는가. 병졸은 노숙(露宿)을 하면서 모두 쓸개를 핥듯 복수를 다짐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어 적을 쳐부수길 원하고 있다. 만약 선수를 잡는 기회를 잃는다면 뒷수습을 잘하려는 계획은 크게 어긋날 것이다. 공(公)들은 다 임금의 고굉(股肱)이 될 좋은 자질을 가진 몸으로 모두 번진(藩鎭)에 처하고 있고, 함께 문화를 숭상하는 시대에 나서 어찌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정성을 떨치지 않으리오. 임금의 능에 경건히 참배하여 조종의 수치를 시원하게 씻고, 거가(車駕)를 공손히 맞아 부로(父老)들의 소망을 크게 위로하라. 불을 지펴 털을 사르듯 하기를 기약할 것이며, 태산을 들어 새알을 짓누르듯 할 것을 맹세하라. 아울러 천지에 빌어 청룡도(靑龍刀)로 의지(義智)의 머리를 자르고, 함께 산천에 맹세하여 적토마(赤兎馬)로 현소(玄蘇)의 피를 밟아라. 만약 머뭇거리다가 날짜가 늦어져 의병 징발에 기회를 놓친다면 천지의 신(神)에게 부끄럽고, 백 대를 두고 죄를 짓게 될 것이니, 그러고야 무슨 면목으로 다시 천지의 사이에 서겠는가. 아! 서관(西關) 하늘 끝으로 파천하시매, 북극성도 제자릴 옮겼도다. 가슴을 쳐도 그 슬픔 한이 없고, 분연히 날아가려 한들 길이 없다. 우리 호남ㆍ호서와 영동ㆍ영북의 모두는 멀고 가깝고를 물을 것 없이 계속 비휴(豼貅)같은 군사들을 일제히 몰고 가서 저곳 이곳에서 속속 앞뒤로 곧장 두들겨 대어, 천지에 가득찬 요망한 기운을 거두어 버리고 확청(廓淸)의 공을 이룩하게 하라. 왜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의심을 떨치고 나아가 왜적 토벌하기를 기할 것이며,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에 보답할 것이지 달아나서 목숨을 살려 치욕을 당하는 일 따위는 없기를 바란다.
○ 거가가 송도(松都)를 떠나 해서(海西)를 향하였는데, 관서(關西)의 노상에서 겪은 곤고(困苦)를 신민으로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루는 산골짜기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밤새도록 식사를 올리지 못해 촌 여인이 울면서 조밥을 드렸다. 임금이 그것을 드시고 이르기를, “이 맛은 팔진미보다 낫다. 조의 귀중함이 이와 같구나, 이와 같아.” 하였다. 또 하루는 비가 심해 갈 수가 없어서 길가 촌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임금은 방앗간[杵室]에 들고, 신하들 거가를 호종한 자가 10여 명이었다.은 빗속에 엎드려 종일 굶주렸다. 비통하다. 우리 소중화(小中華)는 동이(東夷)와 북적(北狄) 사이에 끼어 있으니, 변란의 반발이 어느 대엔들 없었으랴. 그러나 함락의 비참과 파천의 치욕이 어찌 이러한 극단에까지 이른 적이 있었겠는가. 애석하다. 농사일을 장려하여 우리를 먹여준 군부(君父)가 여러 차례 궐선(闕膳)하기까지 하는 비참한 지경을 당했고, 세심하게 백성을 다스린 임금이 마침내 궂은 비에 괴로움을 당했으니, 이 적이야말로 만세를 두고도 잊을 수 없거든, 이 몸 한 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신민된 자로서 비록 서쪽으로 퇴각하는 데에 달려가서 목숨을 바치지는 못하였더라도, 마땅히 동해에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어야 할 것이다.
4일. 영남 초유사 김 성일(金誠一)이 남원(南原)에 도착하다. 김성일이 애초에 체포한다는 어명에 따라 직산(稷山)까지 갔으나 사면을 받고 도로 초유사의 책임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조정이 서쪽으로 옮겼음을 알고 통곡하면서 돌아오다. 호남과 호서의 길이 막혔기 때문에 충청도의 내로(內路)로 해서 내려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이광(李洸)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왜적이 서울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자, 징을 울려 군대를 퇴각시키니 육군(六軍)이 무너져 돌아오다. 그때 곽영(郭嶸)은 조방장 이지시(李之詩), 종사관 이용순(李用諄) 등을 거느리고 금산(金山)으로부터 돌아와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다.
○ 곽재우(郭再祐)가 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합천(陜川) 등 여러 고을을 수복하니, 우도의 왜적들 중에는 소문을 듣고 철거한 자들이 퍽 많았다. 곽재우가 정진(鼎津)에 진을 치고 낙동강 연변의 왜적을 추적해서 잡았다.
5일. 영남 초유사 김성일은 함양(咸陽)으로 향하고, 본도 도순찰사 김수(金睟)는 함양에서 출발하여 운봉(雲峯)으로 가는데, 도중에 초유사를 만났다. 초유사가 말하기를, “지방을 맡은 신하라면 마땅히 맡은 지방을 사수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이오. 온 도를 다 잃으면서도 구하지 못한 주제에 단기(單騎)로 멀리 와봤자 무슨 구제할 길이 있겠소. 원컨대, 영공(令公)은 속히 돌아가시오.” 하매, 김수가 함양으로 돌아갔다가 이어 안음(安陰)으로 갔다. 김성일이 함양에 도달하니, 군수 이각(李覺)이 홀로 빈 관아에 앉아 있는데 다만 늙은 아전 수 명이 있을 뿐이었다. 김성일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자, 함안의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다 모여들었다. 김성일이 그 자리에서 격문을 아래와 같이 기초하다.
초유사는 도내의 수령, 변장(邊將), 문ㆍ무 출신의 부로(父老) 자제와 한량(閑良), 군민(軍民) 등에게 유시(諭示)하노라. 국운이 중도에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외람되이 발동하여 나라 땅에서 마구 날뛰고 동서로 충돌하면서 웅장한 성과 큰 진(鎭)도 아랑곳없이 함락시켜 버리고, 10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미 관령(關嶺)을 넘고 곧장 서울로 쳐들어갔다. 그리하여 임금은 파천하고 온 나라 사람이 도망쳐 달아나니, 이 동방의 나라가 생긴 이래로 오랑캐 화(禍)의 참혹하기가 오늘날과 같은 적은 없었다. 여러 병사(兵使)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 어떤 자는 풍문만을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고 어떤 자는 겁을 집어 먹고 움츠리기만 하며, 또 수령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이건만 모두 처자를 이사시키고 무기고를 태워 버려서는, 한 사람도 의를 지켜 굽히지 않고 충성심을 발휘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으니,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이 또 무엇을 믿고, 흩어져 달아나지 않겠는가. 미친 파도가 마구 몰려오듯 하여 막아낼 수가 없으매, 성마다 창을 멘 병졸이 없고 읍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신하가 없다. 그리하여 왜적이 가는 곳마다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하여 마침내 영남 한 도를 왜적의 굴혈로 만들었고,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부서지듯 하여 아침 저녁 동안도 지켜내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대체 무슨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한갓 변장과 수령의 허물뿐이겠는가. 군사와 백성도 그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 큰 변란을 당하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싸울 뜻을 지녔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이 오기도 전에 군사와 백성이 앞장서서 달아나 산림 속에 잠복하고는 구차스럽게 살아남을 계획이나 함으로써 백성이 없는 수령과 군사 없는 장수를 만들었으니, 앞으로 누구와 함께 적을 방어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싸울 때 유사(有司)로서 죽은 자는 30여 명이나 되었지만 백성은 그들을 위해 죽은 자가 없었으니, 이는 노약(老弱)한 백성들이 구렁에 빠져 죽어도 유사들이 그들의 고난을 구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 도망쳐 무너지기만 하는 이 변은 맹자(孟子)가 말한, 「너한테서 나온 것이 너한테로 돌아가는 것이다.」한 그것이 아니냐.’ 하지만, 아! 그것이 무슨 말인가. 최근 몇 년 동안 부세(賦稅)가 중했고 부역이 많아서 백성은 과연 명령을 견뎌내지 못했다. 그러나 성지(城池)의 방비 기구(器具)는 모두 불의의 변에도 대비할 만큼 보전되어 있었으니, 지금 와서 볼 때 성스러운 임금이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려던 생각이 원대했던 것이다. 그것이 어찌 백성을 학대해서 자신의 이(利)나 꾀한 것이었겠는가. 하물며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이 비록 승부는 있었으나, 같은 중국(中國)이었기 때문에 백성에게는 별 이해(利害)가 없다. 그러나 이 이[齒]에 물들인 무리는 우리 땅에 들어오자, 곧 차지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부녀자들을 사로잡아 처첩으로 삼고 장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도륙하였으며, 마을을 습격하여 깡그리 불태웠고 공사(公私)의 소장품(所藏品)을 다 그자들의 소유로 하여, 그 해독이 사방에 두루하였고 피가 천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의 화(禍)는 차마 말할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정말 지사(志士)가 창을 베고 잠을 자야 할 때이며, 충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러나 67주(州) 가운데 여지껏 충의를 부르짖으며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이라곤 없었고, 오히려 도망쳐 살아나는 데 있어서 혹시 남보다 뒤지지 않을까 하는 일이나 또는 입산(入山)하는 일에 있어서 좀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것만을 염려하니, 어찌 이루 개탄할 수 있겠는가. 설사 산으로 들어가 왜적을 피해서 끝내 자기 몸과 집안을 보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그리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거든, 하물며 보전할 도리가 만무한 경우에 있어서랴. 본관은 이 점을 철저하게 구명해서 군사와 백성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 주리라. 이 왜적은 서울을 범하는 데 마음이 급하여 군사를 지체하지 않고 가기 때문에 그 피해가 모든 고을에 두루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왜적이 뜻을 이룬 후, 그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충만하게 되면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하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테면 홍수의 흐름이 하늘에 치닿고 무서운 불길이 들판을 태우듯 할 터인데, 아! 우리 억만의 생령(生靈)이 또 어느 곳에 몸을 둘 것인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시간이 감에 따라 양식이 떨어져 다들 깊은 산 속의 시체가 될 것이고, 나온다 해도 부모 처자는 그자들의 포로가 되는 곤욕을 당할 것이다. 의관을 갖춘 사족(士族)들은 그자들의 어육(魚肉)이 되어서, 항복하면 영원히 효경(梟獍)의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칼 맞아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니, 이런 일이야 어찌 지혜로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사생(死生)만을 가지고 말한 것일 뿐이다. 아! 군신 간의 대의(大義)는 하늘의 법도요 땅의 도리니, 이른바 백성의 떳떳한 양성(良性)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혈기가 있고 곡식을 먹는 우리들로서, 임금이 몽진(蒙塵)하고 종묘 사직이 전복되려 하며 만백성이 어육으로 문드러지듯 하는 것을 우두커니 보기만 하고 조금도 근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하늘의 법도와 땅의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부모가 왜적의 칼을 맞고 골육이 서로 보전되지 못하여 개인적인 가문의 화(禍) 역시 참혹할 것이니, 자제 된 자가 머리를 움켜쥐고 쥐같이 달아나기나 하고 만 번이라도 죽을 힘을 내어 부모 보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자식 된 도리에는 어찌 되겠는가. 다만 영남은 본래부터 인재가 많은 고장으로 1천 년의 신라, 5백 년의 고려, 그리고 우리 조정의 2백 년 동안 충신과 효자의 뛰어난 명성과 의열(義烈)이 청사(靑史)에 빛나고 절조와 의리의 아름다운 습속이 동방에서 첫째가는 것은 사람들이 다 함께 알고 있는 바이다. 근자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해도, 퇴계(退溪)ㆍ남명(南溟 조식(曹植)의 호) 두 선생이 한 시대에 같이 나서 도학(道學)을 제창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히고 사람의 기강(紀綱)을 바로잡는 일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자, 선비들도 그 감화에 점점 물들어 사숙(私淑)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또 평소엔 허다한 성현의 책들을 읽어 그 얼마나 자신만만한 사람들이었더냐.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오직 살 길이나 탐내고 죽음을 회피하는 일만을 서둘러, 임금을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돌리는 죄악에 스스로 빠져 버리니 구차스러이 세상에 산다 한들 어떻게 머리로 하늘을 이고 살고, 지하에 죽어 가서도 또한 어떻게 우리 선대(先代)의 현자(賢者)들을 뵈올 것인가. 의관을 차리고 예악을 숭상하던 몸을 욕되게 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몸에 무늬 놓는 습속을 따를 수 있겠는가. 2백 년 동안 지켜온 종묘 사직을 차마 왜적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산천을 차마 왜적의 굴혈로 둘 수 있겠는가. 중화(中華)가 변하여 이적(夷狄)이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그런 일을 참을 수 있으며 또 할 수 있겠는가.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치는 것을 으뜸가는 공로로 삼는 진(秦) 나라도 처음에는 순전한 이적(夷狄)은 아니었건만, 노중련(魯仲連)은 오히려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 것을 달갑게 여겼다. 풀로 엮은 옷을 입고 꿈틀거리는 섬 오랑캐가 얼마나 추잡한 종자인데, 그자들이 우리 땅을 훔쳐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욕보이는 대로 내버려만 두고, 그자들을 몰아내고 목 베어 죽일 방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자들은 용맹스러운데 우리는 겁이 많고, 저자들은 예리한데 우리는 둔하니 비록 군사를 일으켜도 성사할 수 없다.” 하니, 아! 그렇게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냐.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성패로 인하여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약 때문에 지기(志氣)가 꺾이지 않아,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면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패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빈 주먹을 버티며 흰 칼날을 무릅쓰고 끝까지 싸워 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나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병법의 금기(禁忌)를 범한 것이다. 어떻게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들이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나, 용맹하거나 겁많은 것이 어찌 고정된 것이겠는가. 충의에 격동되면 약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도 있고, 적은 수효로 많은 수효를 대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단지 마음을 한 번 돌리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보건대, 도망치거나 무너진 졸병들이 산골짜기에 가득 깔려 있는데, 이들도 처음에는 비록 몸을 도망쳐서 살기를 바랐다가도 마침내 한 번 죽는 것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 바치려고 생각할 것이나, 다만 솔선하여 부르짖는 사람이 아직 없었을 뿐이다. 이러한 때에 있어서 만약 한 사람의 의사(義士)만이라도 분발하고 일어나 한 번 외치기만 한다면 원근의 장정들이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같이 호응해 올 것은 가만히 앉아서도 획책할 수 있는 일이다. 성상(聖上)께서 이미 애통한 교서(敎書)를 내렸으며, 또 이 소신(小臣)을 못난이로 여기지 않고 초유(招諭)하는 책임까지 맡기셨다. 당(唐) 나라 때의 씩씩한 무부와 표한(剽悍)한 병졸도 흥원(興元 당 덕종(唐德宗)의 제2 연호, 서기784)년에 덕종이 이회광(李懷光)의 반란 때 내린 조서에 울었거늘, 하물며 추로(鄒魯)의 공자와 맹자의 교훈을 받드는 우리 군사들이 어찌 주먹을 불끈 쥐고 의분에 차 임금의 위급을 구하기 위해 나가지 않겠는가. 진실로 원하건대, 이 격문이 도달하는 날에 수령은 온 고을의 사람들에게 똑똑하게 알려주고, 변장(邊將)은 장병들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 문무(文武)의 조관(朝官)과 부로(父老)ㆍ유생(儒生) 등은 각각 서로 정해서 일러주어 동지들을 불러 모아서 의열(義烈)로 격려하여 혹은 마을을 보호하여 스스로 지키고, 혹은 군사를 끌고 전투를 도와야 할 것이다. 부유한 백성은 차달(車達)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군사들의 식량을 보급해 주고, 용맹한 군사는 충갑(冲甲)의 무기를 휘두르면서 왜적을 죽이도록 하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 전투에 임하기 위해 일시에 다 일어나면 아군의 성세가 크게 떨치고 사기가 백 배 되어 호미자루 창자루도 예리한 무기가 될 것이니, 아무리 왜적의 긴 창과 큰 칼인들 또 무엇이 무서울 게 있겠는가.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치욕을 씻는 데 만전을 기할 것이요,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리 있는 귀신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니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본관은 한 부유(腐儒)인지라 비록 군사에 관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 군신 간의 대의는 그래도 대강 들었다. 한 도가 다 결딴이 난 후에 임명을 받아, 초(楚) 나라를 보존시킬 마음은 간절하면서 아직 포서(包胥)의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고, 사당[廟]에 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은 장순(張巡)의 의열(義烈)을 사모한 것일 뿐이니 오히려 의사들의 힘에 의뢰하여 해[日]를 취(取)하는 공을 이루기 바라고 있다. 조정의 포상 제도가 뒤에 있으니, 다들 잘 알지어다. 애초에 김성일이 문사(文士)를 시켜 격문을 기초하게 하였으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기가 지었는데, 말이 감격에서 우러나 붓을 먹물에 적실 사이도 없이 단숨에 써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륵(金玏)을 안집사(安集使)로 삼아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지금 영남의 부(府)ㆍ진(鎭)이 연이어 왜적에게 함락된 것은 한 도의 병력이 적어서가 아니다. 다만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각 읍의 군민(軍民)들이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달아나서 와해(瓦解)되기에 이른 것이니, 그들의 본의야 어찌 항복해서 왜적에게 부동(附同)하려고 한 것이었겠느냐. 만약 식견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똑똑하게 효유(曉諭)하고 충의로써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지들을 규합하며 또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관군(官軍)에 협력하여 결사적으로 싸우게 한다면, 지금이라도 구제할 길이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원충갑(元冲甲)은 한낱 필부로서 의병을 일으켜 큰 적을 꺾어 물리쳤으니 그것이 한 가지 좋은 전례다. 행상호군(行上護軍) 김륵을 본도에 내보내어 그로 하여금 원근의 백성들을 두루 효유하고 충의로운 군사들을 격려하고 권면하여 목숨을 바쳐 근왕(勤王)하게 하노라.” 하다. 김륵은 경상도 영천(榮川) 사람이니, 그는 사잇길로 해서 영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모병통문(募兵通文)하다. 처음에 경상도 함안(咸安) 출신의 문신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 등이 서울에서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 본도에 달려 돌아왔다. 조종도가 이노에게 말하기를, “우린 고향 땅에 들어가면 의병을 일으켜야 합니다. 만일 성사하지 못한다면 동지들과 물에 빠져 죽을 망정 의리상 왜적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하더니, 이번에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었다. 다음 글은 의병을 모집하는 글이다. 임금의 고통을 급한 일로 여겨서 이적(夷狄)의 화(禍)를 물리치는 것은 충의(忠義) 중에서도 급선무요, 국가의 위기에 관하여 도모하여서 생사(生死)의 근심을 잊음은 정절(貞節) 중에서도 큰 것이다. 만물 중에서 가장 영묘(靈妙)하여 사람이 되고, 다같은 백성 중에서 뛰어나 선비가 된다. 왜 영묘하다 하는가? 사람은 군신과 부자의 윤리를 알기 때문이다. 왜 뛰어나다고 하는가? 선비는 의(義)와 이(利)의 향배(向背)를 분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땅에 나는 것을 먹고 살았으면 모두 신하이지, 어찌 많은 녹을 먹은 자만이 죽어야 하겠는가. 요량없는 비여(匪茹 자신을 요량하지 않는다는 뜻)로 적이 태원(太原)까지 왔던 일은 옛날에 어쩌다 있었던 일이라 하겠거니와, 곧장 서울에 침범하기론 이번의 일이 가장 극심하다. 임금은 파천하여 어디서 바람과 이슬에 시달리고 계신지 막연하고, 종묘 사직이 진동하여 놀랐으니 신령이 어디에 의지해서 오르내리시는지 슬프구나. 쥐같이 달아나고 새같이 숨어 거의가 다 임익(林翼)같이 창[戈]을 버렸고, 애첩을 죽이고 말을 잡아 먹어 장순(張巡)같이 결사적으로 지킨 사람이 있다 함은 들어보질 못했다.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냐. 이는 실로 사람의 도리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일이다. 2백 년 동안이나 길러온 보람이 어디에 있는가. 60주(州)의 충의가 쓸은 듯이 없어졌다. 광야에 울어도 돌아갈 곳이 없고, 백일하에 고개를 들자니 낯이 없도다. 부모가 병이 들었는데 어찌 운명에만 맡겨 약을 쓰지 않으리오.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어도 혹 하늘에 힘입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죽는 것이 비록 싫지만 천지에 그물이 쳐 있으니 도망갈 길 없고, 살 길을 설사 구차하게 얻고 싶어도 개 돼지 틈에서야 차마 살 수 있겠는가. 죽는 것이 같을 바엔 차라리 의에 죽을 것이다. 감히 살기를 바라는가. 인(仁)에 생명을 버려라. 나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면 편안할 수 있겠으며, 까까머리 되고 이[齒]에 물들이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관군은 도망쳐 형벌을 겁내고 나오지 않으니, 의병이 힘차게 움직여 충의심을 떨치고 앞다투어 와주기를 바란다. 하물며 주상(主上)께서 서쪽으로 행차하시던 날에 애통하고 간절한 교서를 내리고, 따로 목숨을 바치는 신하를 골라서 특히 초유사로 보내셨다. 윤음(綸音)이 내리자 듣는 사람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성유(星諭 초유사의 격문(檄文))가 이르는 곳마다 그를 본 사람들은 응당 목숨 바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진실로 바라거니와, 여러 군자들은 글을 읽어 평소 모두 나라에 보답할 뜻을 품고 있었을 것이니, 위급한 이때에 임하여 의당 임금을 위해 죽는 절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각기 부형들을 권면하고 자제들을 격려하며, 이웃 마을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며 노복들을 격려하여 거느리되, 혹은 활과 화살을 혹은 칼을 차고서 단결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세차게 용기를 고무하여 이 초유에 부응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이 어찌 나라만의 다행한 일이리오. 각 개인에 있어서도 문 앞의 원수를 없애는 일인 것이다. 한편 군대를 탈영하여 피해 숨은 자들까지도 모두 스스로 나타나 모일 것인즉, 그들에 있어서도 비단 전날의 죄가 다 용서될 뿐더러 회복된 후의 포상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다시 바라는 바는, 그들을 십분 타일러서 역(逆)과 순(順)에 화복이 매었음을 알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천만 다행한 일인가 한다. 정말 이렇게만 한다면 살아서는 씩씩한 사나이가 될 것이고 죽어서도 빛나는 혼이 될 것이며, 장사지낼 땐 포신(鮑信)의 형상을 새기게 될 것이고 능(陵)에는 방덕(龐德)의 형상을 그리게 될 것이니, 연약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강개하게 죽는 것이 어떠한가. 만약 의병의 근왕(勤王)으로 말미암아 하늘 길이 다시 맑아짐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의병으로 나섰다고 해서 반드시 다 죽는 것도 아닌 데다가, 장차 함께 중흥(中興)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마땅히 각각 힘쓸지어다. 아!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양성(良性)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람의 기강(紀綱)인들 어찌 영원히 떨어지겠는가. 이 한 장의 통고문을 보면 반드시 천 번이나 기절하며 통곡하게 될 것이다. 조종도 등이 쓰다. 그 후 정유년(1597, 선조 30)에 조종도는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절개를 지키고 죽었으니, 그가, “차라리 의에 죽어야 한다.” 한 처음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장수 평청정(平淸正)ㆍ평행장(平行長) 등이 서울에서부터 길을 나누어 출발하다. 애초엔 왜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군사를 8부(部)로 나누었는데, 1부의 무리가 거의 10여만 명에 달했고 총대장(總大將)은 각각 4,5 명으로 해서 우리나라 8도를 나누어 맡기로 하였다. 그런데 북방은 군사의 비결에 꺼리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들 장수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사나운 자를 택하여 함경도로 보냈던 바 평청정이 그를 맡은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수길 등은 서울에 머물러 주둔한 채 남별궁(南別宮)에 들어가 있었고 평청정 등은 서울에서 동쪽 길을 잡아 강원도를 지나 함경도로 향했는데, 이들이 지나 가는 곳은 적지(赤地)가 되어 천 리를 가도 사람 사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평행장ㆍ평의지(平義智) 등은 서울에서 서쪽 길을 잡아 해서(海西)로 향했는데,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신길(申硈)을 중군(中軍)의 장군으로 삼고 이빈(李薲)과 이천(李薦)을 좌우의 장군으로 삼아 임진(臨津)에서 방어하다.
14일.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또 근왕병 도합 10여 만을 동원하여 전주(全州)에 주둔하였는데 군량을 수송하는 자가 갑절로 늘어나다.
○ 군사를 징발하는 교지가 있었다. 당초에 조정이 송도(松都)에 머무르고 있을 때 호남과 영남에 교지를 내렸으나, 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와서야 본도에 도착한 것이다. 그 내용의 대략은, “왜적이 경기(京畿)에 가득 밀려 들어와 형편상 부득이 송도에 주차(駐箚)하면서 사방에 명령을 내려 왜적 토벌의 계획을 하게 하는 터이다. 경(卿)은 경상 우도에 은밀히 내통하여 경내(境內)의 군사를 총동원해 가지고 올라와 구원하도록 하라.” 하였다. 내린 교지는, 반 조각의 막종이에 잘게 써서 겨우 글자 모양을 이룬 것으로 시골집의 사사로운 편지 조각과도 같았으니, 백성으로서 그것을 본 사람 치고 눈물을 뿌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광이 그를 영남에 전송했다. 김수(金睟)가 안음(安陰)으로부터 함양(咸陽)에 가서, 방어사 조경(趙儆), 종사관 이수광(李睟光), 조방장 양사준(梁士俊) 등을 거느리고 함양으로부터 남원(南原)으로 향하니 그때 전라병사 최원(崔遠)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에 와서 진을 쳤다.
18일. 김수(金睟)가 남원(南原)으로부터 전주(全州)에 갔는데, 이광(李洸)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김수를 패군(敗軍)한 장수라 하여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김수 일행의 병마는 점점 도망쳐 흩어졌고 장병들은 각자 말을 끌고 가버렸다. 이윽고 김수도 이 광을 만나 약속하고 출발하다.
○ 순창(淳昌)과 옥광(玉果)의 군사들이 먼 곳에 가서 싸우는 것을 싫어한 끝에, 도리어 흉악한 음모를 꾸며 형대원(邢大元)과 조인(趙仁)을 맹주(盟主)로 추대하고는 노령(蘆嶺)을 근거지로 난동을 일으키다. 이윽고 본군(本郡)으로 군사를 돌이키고 향사당(鄕射堂)과 형옥(刑獄)을 불태우매, 군수 김예국(金禮國)이 단신으로 탈출하여 이광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다. 이광은 병사(兵使)에게 군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전진시켜 토벌해서 잡으라 했는데, 그때 마침 담양 부사(潭陽府使) 이경린(李景麟)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로 가다가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한테 추격을 당하여 담양의 군사도 무너져 버리다.
19일. 이광이(李洸)이 전주(全州)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서울로 향하다. 군사 5만여 명은 이광이 통솔하였는데 전주 부윤과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 수령 20여 명을 거느리고 익산(益山)으로 해서 충청도에 있는 내포(內浦)를 지나면서 진군하고, 군사 4만 8천여 명은 방어사 곽영(郭嶸)이 통솔하였는데 조방장 이지시(李之詩)와 김종례(金宗禮) 및 남원 부사(南原府使)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충청도의 대로(大路)로 해서 진군하여서, 모두 진위(振威)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다. 김수(金睟)도 이광을 따라 내포로 향하다.
○ 본도 군량 수송의 수량은 감사의 분부에 따라 각 관아에서 인부 두 사람에 한 바리, 품관(品官)은 8명에 한 바리, 교생(校生)은 8명에 한 바리씩으로 한 것들과 공(功)을 세우려고 자진해서 군량 수송에 응모한 짐바리, 그리고 각 지방 관아의 수령과 여러 장병들의 개인적인 짐바리 등,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아 길에 잇달아 있다.
20일. 남원(南原)ㆍ구례(求禮)ㆍ순천(順天)의 군사 8천여 명이 전주(全州)에 와서 참전하다가 일시에 흩어져 마구 찌르는 창에 죽은 자들이 퍽 많았다. 이광(李洸)의 군관 옥경조(玉景祚) 등이 칼을 뽑아 후퇴하는 자들을 베어 죽이자, 무너져 가던 군사들이 옥경조를 에워싸고 전주까지 와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은 판관 노종령(盧從岭)에게 영(令)을 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타일러 모아 보내라고 했고, 구례 현감 조사겸(趙士謙) 등은 직접 본읍에 돌아가 군사들을 불러 모은 다음, 달려 돌아가서는 은진(恩津)까지 이르렀다. 전주ㆍ광주(光州)ㆍ나주(羅州)의 군사가 용안(龍安)에 도달해서 역시 일시에 흩어지자 수령 등이 길에서 불러 모아 봤지만, 무너진 군사들을 한데 모을 수는 없었다. 이광 역시 길에서 머뭇거리곤 하여 전진하기를 꺼리는 기색이 많았다.
○ 병사(兵使) 최원(崔遠)이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순창(淳昌)으로 향했는데, 반란을 일으킨 군졸을 토벌하려는 것이다. 그는 우선 남원 판관 노종령을 시켜 달려가 실정을 탐지케 했는데, 김예국(金禮國)이 이미 조인(趙仁) 등을 잡아서 죽여 버렸는지라, 나머지는 다 불문에 부쳤다.
○ 김성일(金城一)이 함양(咸陽)으로부터 산음(山陰)에 도착하니, 현감 김낙(金洛)이 김성일에게 환아정(換鵝亭)에 사관(舍館)을 정해 주고 다반상[茶盤]을 대단스럽게 차려드렸다. 그러나 김성일이 변색을 하고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 같은 성찬은 신하로서 오늘날 차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먹는다 해도 목구멍에 넘길 수 없다.” 하니, 김낙이 부끄러워하며 사죄하고 물러갔다. 산음현 사람 오장(吳長),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 등이 모두 칼을 집고 김성일을 찾아뵈니, 김성일이 오장 등에게 말하기를, “제군이 은근하게 찾아왔으니 반드시 기이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하였다. 김경근이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대의를 펴고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니, 김성일이 웃으면서, “부질없는 소릴. 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한다.” 하였다. 김낙이 군사를 모았는데 8백여 명에 달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흉악한 왜적이 진해(鎭海)ㆍ고성(固城) 등지를 불태워 재물을 없애버리니, 본도 우수사 원 균(元均)이 퇴각하여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진을 치고 전라도의 수군에 구원을 청하다. 적병이 진주(晉州)로 향한다고 떠들썩하자,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은 지리산에 숨어 피하였다. 김성일이 이 소식을 듣고, 본주(本州 즉 진주)에 달려가니, 경내(境內)는 싹 비어 있었다. 판관은 김성일이 진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김성일이 명령을 전하여 나오라 했는데, 이경은 등창이 발작하여 죽었다. 김성일이 김시민에게 영을 내려, 수천 명의 군사를 정돈하여 가지고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손승선(孫承善)을 수성유사(守城有司)로, 허국주(許國柱)와 정유경(鄭惟敬)을 복병장(伏兵將)으로, 하천서(河天瑞)를 군량 책임자로, 강기룡(姜起龍)을 병기 책임자로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병이 고성으로부터 사천(泗川)에 와 머무르면서 진주를 범하려 하자, 김성일이 군관 중에서 용맹하고 건장한 자 10여 명을 시켜 강을 건너가 쳐서 쫓으니 왜적이 곧 퇴각하였다. 다시 군사를 나누어 사천의 성 밑까지 진격해 들어가서는 그들의 나무하고 물 긷는 길을 끊어버리자, 왜적은 퇴각하여 고성으로 돌아갔다. 또 전 군수 김대명(金大鳴)을 도소모관(都召募官)으로 하여 생원(生員) 한계(韓誡)ㆍ정승훈(鄭承勳)과 함께 군사 6백여 명을 모집하여 고성의 의병장 최강(崔堈) 등과 합병(合兵)해 가지고 혹은 유인하기도 하고 혹은 매복했다가 야습하게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왜적의 무리가 무너져 웅천(熊川)ㆍ김해(金海) 등지로 향하였다. 김대명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창원(昌原)의 마산포(馬山浦)로 들어가서 진을 쳤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각 도 사림(士林)들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이 빈번하게 나돌다. 이때부터 국가의 명맥에 활발한 기세를 얼마간 떨치게 되었다.
○ 경기 감사 권징(權澄)의 통서(通書)에,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에 온 것은 실은 모반한 백성들이 군사를 청한 데서였다. 그런데 수길(秀吉)에게 군공(軍功)을 보고할 때 모반한 백성들이 번번이 억눌리고 깎여 내리게 되자 분한 마음을 품게 되어 평의지를 쳐 죽이고 이때의 거짓 소문이 대부분 이러한 따위다. 모반한 백성들과 왜적이 두 군으로 나뉘었으니, 오래 가지 않아서 틀림없이 자연 무너져 흩어질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한 대장이 겨우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모화관(慕華館)에서 왜적과 교전하여 꽤 많은 자들을 목베고 사로잡았는가 하면, 왜적은 북쪽으로 퇴각하여 신문(新門)으로 해서 들어가는데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가 서로 죽인 것이 또한 많았다고 한다. 또 왜적의 장수 한 사람이 임진강을 건너려 하자, 김명원(金命元)이 강의 요지를 지키고 있어 많은 자들이 편전(片箭)에 맞아 왜적들이 건널 수 없었고, 왜적이 배 두 척을 구하여 그 군사들을 가득 실었는데 강 복판에서 뒤집혀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하였다.
○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대부대의 왜적이 하루는 사람을 죽여서 시위하라는 영을 내리자, 동대문으로부터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반식경에 쓰러진 시체가 길에 가득 차고, 왜적에게 항복하고 부동(附同)한 백성이 채 도망가지 못한지라, 피바다와 살더미의 참상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루가 지나서야 중지시켜 다시 살육을 엄금하고 각 문에다 방을 내걸기를, “남자는 농사에 힘써 자기 생업에 안정하고, 여인은 누에고치 길쌈을 일삼아라.” 하고, 또 강원도와 경기도에 글로 고시하기를, “대왕(大王)은 이미 도망갔고 중국도 지금 일본에 예속되었으므로 사자[使价]를 보내 각 도를 다스리려 하니, 나라의 선비들 및 촌 백성들이 일본에 복종하기를 전대(前代)에 복종한 것 같이 함에 어찌 이론(異論)이 없겠는가? 그러나 지금 군현(郡縣)의 관창(官倉)에 있는 미곡ㆍ옥백(玉帛)ㆍ사마(絲麻) 등은 흩어 없애지 말아야 한다. 또 모(某) 목사[牧主]ㆍ모(某) 현감이며, 백성 남녀들도 역시 아무데나 가지말고 사자를 섬기기를 바란다. 이 점 유의하라. 천정(天正 당시의 일본 연호) 임진년 월 일, 풍신수가(豐臣秀家)ㆍ행정(行貞)ㆍ길성(吉城) 등이 양도(兩道)의 이(吏)ㆍ호(戶)ㆍ예(禮)ㆍ형(刑)ㆍ공(工)의 백(伯 즉 그 관계 책임자를 말함) 등에게 부치노라.” 하였다. 흉악하고 해괴한 말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만 대를 두고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그런데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과 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해군 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左水營) 앞바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척후병(斥候兵)이 외쳐 보고하기를, 작은 배 한 척이 와두해(瓦頭海)로부터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히 척후선을 시켜 물어본즉, “경상도 옥포만호 이 모요. 적병이 가득히 몰려와 여러 진(鎭)이 와해됐소. 우수사 원 모가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퇴각하여 노량을 지키고 있는데, 흉악한 왜적이 뒤쫓아 와서 이미 사천(泗川)과 남해(南海) 바다에 가득 차 있소. 전라도의 함대가 그 선봉을 격파하여 주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영남의 바다는 끝장이 나고 화가 호남으로 닥쳐올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이 점을 숙고하시오.” 하였다. 이순신 등이 그 말을 듣고는 다들 놀라서 서로 돌아보는 것이었다.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湛)이 그때 여러 장수 중의 한 사람으로 진중에 있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서로 미루고 칭탁하는 것을 보자 팔뚝을 걷어올리고 크게 소리치기를, “영남은 왕의 땅이 아닌가. 이 왜놈은 나라의 적이 아닌가. 영남 바다의 여러 진이 이미 다 함몰되고 단지 몇 척의 배만이 우리 경내에 와서 정박해 있으며 저 사나운 왜적이 요량없이[匪茹] 이미 그 뒤에 와 있다는데, 우리가 한 도의 완전한 군대를 가지고 여기서 관망이나 하면서 구원을 청하는 말을 듣고도 걱정 않고, 왜적이 온 것을 보고도 마음이 태연한 채 앉아서 영남 바다의 군사를 오늘 다 없어지게 만든다면, 내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남의 위급한 것을 구해주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서 왜적을 기다린다면 겁 많고 나약한 게 아니오. 장군께서 헤아려 하시오.” 하니, 여러 장수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그를 질시하였지만, 이순신은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밤을 지냈다. 이튿날 새벽, 이순신이 장병들을 모아 놓고 어영담을 불러다 말하기를, “광양 현감은 영남을 구원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는데, 나도 생각해 보니 역시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영남 바다에서의 왜적 토벌은 반드시 노량에서 끝나는 것은 아닐텐데, 깊고 먼 물길을 시험해 본 사람이 없으니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어영담이 말하기를, “그것은 내가 맡겠소이다. 나를 선봉으로 삼아 주기 바랍니다.” 하자, 이순신이 기뻐하면서, “광양의 말에 따라 분부하겠다.” 하고, 곧 장군기를 세우고 소라를 불며 대포를 터뜨리고서 어영담을 선봉으로, 방답귀선장(防踏龜船將) 신여량(申汝良)을 척후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구사직(具思稷) 등을 중위(中衛)의 좌ㆍ우장으로 하고는 이억기(李億祺)의 군함과 합세하여 노량으로 향발(向發)하여 원균과 만나기로 했다. 먼저 떠난 배가 광주(光州)의 바다에 이르자, 왜적의 배 5, 6척이 노를 바삐 저어 퇴각했다. 아군이 이들을 쫓아가자 그 배들에 탔던 왜적은 육지로 올라가서 달아났다. 아군이 그 배들을 다 부숴버리니 아군의 군졸들은 기운이 났다. 날이 저물어 배를 돌려왔다. 이튿날 새벽, 또 영남 바다로 향하여 견내량(見乃梁)에 도착하였는데, 적선들이 바다를 덮고 와서 척후장 신여량은 이미 왜적에게 포위되어 있으면서 부채를 흔들어 뒷 군사들에게 물러가라고 신호했다. 이순신은 바다가 좁은 것을 보고 느릿느릿 퇴각하여 여러 배들이 차례로 나왔고, 이 억기는 이미 주도(柱島) 밖으로 달아나 있었다. 방답첨사(防踏僉使) 이순신(李純信)이 큰 소리로, “사또는 왜 우리 두 배의 장수만을 버리고 갑니까?” 외쳤으나, 이순신(李舜臣)은 대답하지 않았다. 적병은 아군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급히 노를 저어 쫓아왔다.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순신은 소라와 나팔[角]을 불게 하여 일시에 기를 흔들고 함성을 지르며 배를 돌려 왜적과 맞붙어 싸웠다. 이억기도 노를 재촉하여 뒤따라 와서, 허다한 배들이 다 천지현전(天地玄箭 화살 가운데 천ㆍ지ㆍ현의 세 종류가 있음)을 발사하여 총소리가 바다를 뒤흔들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가득 찼다. 접전한 지 얼마 안 되어 적선은 다 침몰되고 왜적은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목을 벤 것만도 1백여 급이나 되었다. 그 이튿날, 어영담이 계속 선도(先導)가 되어 진해(鎭海) 바다를 거쳐 거제(巨濟)에 이르렀다. 당항포(唐項浦)ㆍ진도(珍島)의 배와 남도포(南桃浦)의 배가 앞서 가다가 왜적의 복병선(伏兵船) 2척을 만나 접전했는데, 왜적이 패배하고 육지로 내려 달아나자 그 배들을 불태워 버렸고, 이어 왜적의 배 25척을 만나 접전했다. 이달 5일, 삼도(三道)의 여러 배들이 합동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함대를 쳐 없애고 술시(戌時 지금의 하오 8~11시 동안의 시간을 말함)에 가서야 끝냈다. 6일, 경상 우수영의 전함이 전라도 보성(寶城)의 배와 합동으로 왜적의 큰 배 2척을 공격하여 불태워 없앴다. 그 이튿날, 왜적의 배들이 율포(栗浦)에서 떠나 일본으로 향하는 것을 삼도의 해군이 가덕도 앞바다까지 쫓아 갔는데, 적병은 우리 배들이 돌진하는 것을 보자 배를 돌려 우리 배들을 맞아 싸웠다. 소라 소리가 한 번 울리자 총통(銃筒)을 일제히 발사하였고 화살과 돌이 뒤섞여 쏟아지며, 섭불[薪火]을 요란하게 던지니 함성이 바다를 진동시키고 연기와 불길은 하늘에 가득 찼다. 왜적의 배가 부서진 것이 1백여 척이고,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으며, 수백 급의 목을 거두었다. 그 가운데 큰 배가 한 척 있었는데, 층루(層樓)가 마련되어 있고 그 높이는 3, 4장(丈) 가량에 10여 명을 앉힐 수 있었으며, 밖에는 붉은 깁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안에는 금은으로 장식된 병자(屛子)가 있어 생김새가 퍽 견고하여 쳐부수기 어렵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바로 왜적의 주장(主將)이 탔던 배였다. 그 배 안에서 금색의 둥근 부채 한 자루를 얻었는데, 한쪽 면의 중앙엔 ‘6월 8일에 수길이 서명함[六月八日秀吉着署]’이라고 씌어 있었으며, 그 오른편에는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의 5자가, 왼편에는 ‘타정류류수전(鼉井流流守殿)’의 6자가 씌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수길이 축전수에게 표신으로 준 물건일 것이고, 그 배에서 목 베인 왜장(倭將)은 바로 축전수였을 것이다. 원균의 배들은 비록 그 수효는 적었지만 돌격을 잘했다. 이순신의 배 형상은 거북이 같았으며 위에 지붕 판자를 덮어 씌우고 두루 쇠못을 박았는데, 그것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범접하기 어려웠고 또 퍽 견고하고 빨라서 전투에 나가기 편리했다. 거기다 어영담의 귀신 같은 지도(指導)를 얻어 전후의 전공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군영에 돌아와 장계를 올려 전후의 전승을 알렸다. 어영담은 경상도 함안(咸安) 사람으로 대담한 군략이 세상에 뛰어나고 유달리 강개하였으며, 과거하기 전에 이미 여도(呂島)의 만호가 되었고 급제 후에는 영남 바다 여러 진의 막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바다의 얕고 깊음과 도서(島嶼)의 험하고 수월함이며, 나무하고 물 긷는 편의와 주둔할 장소 등을 빠짐없이 다 가슴속에 그려 두었기 때문에, 해군 함대가 전후에 걸쳐 영남 바다를 드나들며 수색하거나 토벌할 때면 집안 뜰을 밟고 다니듯이 하여 한 번도 궁박하고 급한 경우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로 해군 함대의 전공은 어영담이 가장 높았는데도 단지 당상관에 올랐을 뿐, 선무훈(宣武勳)에는 참여하지 못하여 남쪽 사람들은 다들 애석히 여겼다.
○ 경기도 수원(水原)에 주둔한 왜적이 글로 고시하기를, “지난 20일 일본에서 사람을 서울로 보내 이 친구를 보내게 했다. 저 일본 사람이 길에서 조선 사람이 머리를 채취하는 것을 물은즉 그 이튿날 목을 벤 사람을 내놓고 그 수효를 세었다. 이것은 악한 사람이 한 짓이다. 또 조선 사람에게 기식(寄食)하던 5명을 사로잡았는데 그 가운데 4명에게는 사형을 집행했고 남은 한 사람은 명 나라를 다루는 계략에 통해서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지나가게 해준 것이다. 이 자가 양성부(陽城府)에 있는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물어서 양성의 촌 백성이 그를 집에 돌려보내 주었다. 풍신행정(豐臣行貞)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보내졌는데 그가 수원에 체류하는 동안 장군 수종(秀宗)이 지령서를 주어 이르기를, ‘백성 남녀는 집으로 돌아가게 할 것. 수원군을 예로 취하고 단속하라.’ [去二十日日本差人至京城使托差越斯友朋彼日本人於道問朝鮮採首則明日出人數右惡人打果又生擒寄食五人中四人行死罪一人者此通爲明計差過也此者問在陽城府居歸云陽城村氓爲歸家豐臣行貞從京城差越水原滯留之間將軍秀宗任旨書百姓男女令歸宅者水原郡禮取可束] 하였다.” 하다. 글 뜻이 알아보기 힘들어 재록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왜란 중에 일어난 한 가지 일이기 때문에 써둔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왜적이 선릉(宣陵)ㆍ정릉(靖陵) 두 능을 파내다. 선릉은 성종(成宗)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고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이다. 진실로 이 왜적은 만세를 두고 잊어서는 안 되겠다.
○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과 의홍(義弘) 등이 임진강을 건너고 신힐(申硈)이 이 싸움에 죽었으며, 김명원(金命元)ㆍ이빈(李薲) 등이 패하여 관서(關西)로 달아났다. 애초에 의지(義智) 등이 10여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쇄도해서는 강에 방비가 있음을 알자 산골짜기에 군사들을 숨겨 두고 매일같이 약하게만 보였다. 신힐(申硈)은 왜적의 무리들을 엉성하게만 보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니, 잠복했던 왜적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함성을 지르면서 닥쳐 오는 소리가 하늘에 치닿는 듯하고 그 형세가 바람에 불길 같아서, 손쓸 사이도 없이 혹은 칼에 맞아 죽고 혹은 물에 몸을 던지고 하여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질 못했다. 신 힐 역시 강물에 빠져 죽고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일시에 놀라 흩어져 버렸다. 전 수사(水使) 유극량(劉克良)은 원수별장(元帥別將)으로 군에 있었는데, 그는 왜적의 모략을 염탐해 알았으므로 신힐에게 건너가지 말기를 청했지만 신힐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나무라며 몰아세우고는 강을 건넜던 것이다. 마구 찍어댈 때에도 유극량은 조금도 자기 부서를 떠나지 않고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원수 종사관 홍봉상(洪鳳翔)도 원수에게 관광(觀光)의 일을 고하기 위해 강을 건넜는데 왜적이 마구 몰아댈 때 역시 물에 빠져 죽었다. 애석하다. 홍 종사는 양을 따라 범떼 속으로 들어갔으니 사람들은 쓸데없는 죽음을 당했다고 나무라지마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 피난하는 사람들은 각기 가깝고 편리한 대로 피난했다. 영남의 좌도 사람들은 산으로 들어 간 외에는 다 영동(嶺東)으로 들어가고 우도 사람들은 전라도로 넘어 들어갔으며, 호서 사람들 역시 그렇게 하고 경기 사람들은 다 강화(江華)ㆍ아산(牙山) 등지로 들어가다. 계사년(1593, 선조 26)에 왜적이 물러간 후 고향에서 살아갈 길이 없자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는데, 계사년과 갑오년(1594, 선조 27)에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변고를 빚게 됐다.
○ 김해ㆍ동래(東萊) 등지의 사람들은 다 왜적에 붙어서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며 여인을 더럽히고 하였는데 왜적보다 심하였다. 김해의 경우에 도요저(都要渚) 마을은 낙동강 연변의 큰 고장인데, 왜란 초기부터 왜적에 붙어서 도적질을 하고 혹은 지난날의 원수를 갚기도 했다. 한 서원(書員)은 일본에 들어가서 전세(田稅)를 마련하느라고 혹 뱀을 잡아다가 그 세미(稅米)에 충당하기도 했으니, 왜인이 천성으로 뱀 먹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창원(昌原)의 왜적은 전라 감사를 자칭했고, 향리(鄕吏) 현호준(玄虎俊)은 전라 감사의 배리(倍吏)라 자칭하여 선문(先文 관리 출장의 도착일을 미리 알리는 공문)을 발송하기도 하다. 본도의《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를 나누어 좌ㆍ우 순찰(巡察)을 두었는데, 이성임(李聖任)을 좌순찰로 했다. 당시 적병이 경상 좌우도에 가득 차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어명이 내린 것이다.
○ 초유사(招諭使)가 다음과 같은 통유문(通諭文)을 내다.
해적이 도량(跳梁)하여 우리 성지(城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우리 생령(生靈)을 도륙하였으며, 동서로 충돌하면서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나, 67읍 중에서 한 사람도 충의를 제창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나라의 치욕을 씻은 자가 없었고 우두커니 앉아서 온 고장[道]을 왜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였습니다. 종묘 사직은 깃술[綴旒]보다 위태롭게 되었고 정기(正氣)라곤 쓸은 듯이 없어져 국토[山河]엔 수치만이 안겨 있으니, 무릇 혈기를 가진 자라면 누군들 통분히 여기지 않겠습니까. 본관은 어명을 받들고 이 땅에 와서 눈물을 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이 왜적과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여러 읍이 무너져 달아난 끝에 병력은 이미 꺾여진 터인지라 빈 주먹을 뻗고 흰 칼날을 무릅쓰면서 홀로 서서 분개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귀하는 여염에서 분발하고 일어나 의병을 불러모아 가지고 강중(江中)에서 왜적의 배를 섬멸하여 의병의 명성을 한 고장에 날려 사람마다 기운을 돋구었다 하니, 선대부(先大夫)께서 훌륭한 자손을 두었다고 하시겠습니다. 그 뜻을 끝까지 관철하기에 힘쓰고 의병을 더욱 확장하여 역내(域內)에서 돼지 같은 왜적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출하여, 위로는 임금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충효의 가문을 빛낸다면 또한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본관이 비록 노둔하고 졸렬하기는 하나 충의가 천성에 뿌리박고 있으니,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남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동지를 규합하여 의열(義烈)로써 그들을 격려한 다음 족하(足下)들과 더불어 좌우로 제휴하여 함께 하늘을 받치고 태양을 맑히는 공을 이룩하기 원하고 있습니다만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살아서는 충의로운 선비가 되고, 죽어서는 충의로운 귀신이 되는 일이니 귀하께서는 노력하십시오. 의령(宜寧)의 곽 의사(郭義士)께 내림.
○ 평의지가 송도를 함락하고 다시 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해서 깡그리 불타 없어지다.
○ 조정이 서경(西京 평양)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駐蹕]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팔도에 반포하다.
조종이 창업해 놓은 기업(基業)에 자리잡고 편안하게 지내느라 위험이 닥쳐올 일을 잊고 있다가 이미 전쟁의 핍박에 직면해 버린 이때 원량(元良)을 왕세자로 하고 신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노라. 왕위가 비록 불안하긴 하지만 난시(亂時)라 하여 어찌 경사를 잊겠는가. 이에 파천길을 옮겨야 하는 날에 즈음하여 널리 고유(告諭)하는 글을 선포하노라. 못난 이 몸이 명철하지 못하여 국가의 다난한 때를 만났다. 25년 동안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억만의 생령이 나를 떠나 버리니 앞으로 닥쳐올 백성의 원망을 어찌하리오. 다행히 이번에 인지(麟趾 세자를 가리킴)의 노래를 널리 폄은 실로 조종의 가호(加護) 있으심에 힘입은 것이로다. 백성을 무육(撫育)하는 방법에는 비록 부끄러움이 있지마는 왕세자를 세우는 것은 마땅히 일찍 해야 되는 줄로 생각하노라. 책봉의 예(禮)는 근엄하게 해야 한다는 한신(漢臣)의 장주(章奏)가 한갓 잦았거니와 날짜를 오래 늦추면 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다만 이 야만 오랑캐의 외침(外侵)이 마침 국내(國內)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빚어져, 수도를 침범하고는 사방으로 파급되어 여러 성의 장벽이 일제히 무너졌다. 재앙이 내 신변에까지 다가와 칠묘(七廟)의 의관(衣冠)이 옮겨졌으니 나라의 운명은 다급하고 인심은 두려워하기만 한다. 내 어찌 양위(讓位)를 부질없이 고집하겠는가. 이때야말로 세자를 정하는[定本] 일을 서둘러야 할 시기인 것이다. 둘째 아들 광해군 혼(琿)은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철하며, 학문은 정밀하고 민첩하며, 어질고 효성스러움이 일찍부터 드러나 오랜 동안 억조 백성들의 촉망을 받아 왔고, 그들은 또 그의 덕을 구가(謳歌)하면서 그에게 귀의(歸依)하기를 생각하여 왔으니, 그는 선왕의 왕위를 계승할 만하다. 이에 그를 세자로 진봉(進封)하고 인하여 그로 하여금 군사를 위로하고 나라를 감독하게 하노라. 이 일이 비록 창졸간에 거행되는 것이기는 하나 그 계획은 사실 전에 정해진 것이니 모든 백관(百官)들은 내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말하지 말라. 나라의 근본이란 본래 급작스러이 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평양에 와서야 비로소 중외(中外)에 반포하게 되었다만, 전에 서울에서 이미 모든 백관의 축하까지 받았던 것이다. 온 나라 안[關中]에 소해(小海)의 은택이 미쳐 있고 길에서는 전성(前星)의 광휘(光輝)가 바라보인다. 황천(皇天)도 우리 조종을 보우하는데 사직(社稷)인들 어찌 한쪽 구석 땅에서 편안하겠는가. 적의 혼이 이미 가 버리자 한강의 바람과 물결이 맑아지기 시작하였고, 관군이 분발하려 마음먹자 우리 진터가 확청(廓淸)되어 간다. 용루(龍樓)에 문침(問寢)하는 예절이 갖추어질 것이고, 학금(鶴禁)은 구도(舊都)의 위의를 회복할 것이다. 아! 신민은 내가 고하는 뜻을 살펴 알아서 태자를 위해 죽음을 바치고 나 한 사람의 수치를 남기지 않게 하기를 원하노라. 성심으로 널리 고하니, 너희들은 다 나와서 들어 보아라. 아! 큰 강을 건너는 데 그 나루터조차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 것과도 같구나. 어려움을 구출하기 위해 원자(元子 즉 왕세자)를 공경스러이 보호하라. 현명한 계승자를 택하여 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기대에 따른 것이다. 후일의 승평(昇平)은 실로 오늘의 이 일에 말미 암는 것이다.
○ 경상도 영천(永川) 사람 진사(進士) 정세아(鄭世雅), 신녕(新寧) 사람 봉사(奉事) 권 응수(權應銖), 하양(河陽) 사람 봉사 신해(申海),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이 다 군사를 모집해서 왜적을 토벌하다. 정세아가 그때 나이 67세였다. 왜적이 막 본성(本城)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정세아가 좌수(座首) 유몽서(柳夢瑞), 생원(生員) 조희익(曹希謚) 등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가지고 왜적을 잡아 목 벤 것이 무척 많았다. 그 후 성을 회복하고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다 정세아 등이 먼저 나서서 일한 힘이었다. 권응수는 애초에 수영(水營)의 군관으로 자제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土賊)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고, 요로에다 군사를 잠복시켜 흩어져 다니는 왜적들을 목 베어 죽이기도 하였으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혹은 요격(邀擊)하고 혹은 추격하곤 하여 일찍이 두려워하고 피한 적이 없었고, 누차 습격도 당했으나 말[馬]이 씩씩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초유사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최강은 젊어서부터 글을 해득했고 늦게야 무과에 급제하였다. 담(膽)이 커서 무인이 승진 청탁 따위를 하는 짓을 수치스럽게 여겼고, 한편 성질이 강직해서 자기 뜻을 굽혀서 남에게 따르질 못했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사는 비록 적었으나 그들한테서 인심을 얻었으며 전투에 당해서는 자신이 앞장서서 싸워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함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많은 사람을 통솔하는 재주에 있어선 이들보다도 나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운봉 현감(雲峯縣監)이 다음과 같이 치보(馳報)하다.
이번 5월 24일 자시에 도부(到付 문서가 도착한 것)한, 5월 23일 진주(晉州)에서 성첩(成貼 책임자가 문서에 서명하여 그 문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하는 것)한 경상 초유사의 비밀 전통(傳通 차례로 서로 전하는 통문)에 말하기를, “당일 창원(昌原)에 사는 황봉찬(黃奉贊)의 종 침향(沉香)이 본 부사(府使)에 현납(現納)한, 퇴로한 호장[戶長] 황중명(黃仲明)이 5월 22일에 성첩하여 고목(告目)한 속에, ‘본부(本府)에 머물러 진수(鎭守)하고 있는 왜인은 2백여 명이나마, 늘 동리에 왜적이 혹 백여 명이 떼를 지어 횡행하고 미포(米布)와 잡물(雜物)을 깡그리 가지고 갈 뿐 아니라, 이달 22일 김해에서 온 왜적의 말에 의하면 당일 부(府)에 들어와 9백여 명을 받아들여 사용하며, 전라감사ㆍ어사ㆍ도사ㆍ찰방 네 행차의 칭호로 그 도에 나갔다 오고 또 부중(府中)에 머물러 있기도 하며, 함안(咸安)ㆍ의령(宜寧)ㆍ삼가(三嘉)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ㆍ함양(咸陽)ㆍ운봉(雲峯)ㆍ남원(南原)ㆍ임실(任實)ㆍ전주(全州)에 선문(先文 출발하기 전 먼저 도착 일자를 알리는 글)을 내어 그곳을 향해 갈 것을 차례로 전통하였고, 동 행차의 배리(陪里) 현호준(玄虎俊), 마두(馬頭) 이녹상(李祿祥)이 당일 배행(陪行)할 것을 예정하고 계획하였다가 어제 비가 내려 오늘 떠나는 것이라고 하며, 다른 왜적은 혹은 웅천(熊川)의 길로 해서 혹은 김해의 길로 해서 혹은 백여 명 혹은 50여 인이 잇달아 부에 들어가고 혹은 서울로 올라간다.’ 고 고목이 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이며, 왜적의 선성(先聲)은 믿을 수 없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노리(老吏)가 방금 왜적 가운데서 왜적이 하는 바를 본 것이 이러하니, 이 고목과 같다면 왜적이 전주로 향해 가는 계획은 거짓이 아닌 것 같은데, 호남의 장병들은 쓸은 듯이 내지(內地)에 근왕하러 갔으니 극히 우려된다. 차례로 전통하여 방비하고 조치하여 날마다 새로이 변란에 대비하되, 본도의 순찰사와 좌우 수사가 있는 곳에 모두 치보하여 앞의 일을 전통할 것이다. 이것 역시 함안의 가장(假將) 이향(李享)이 진고(進告)한 것인데, 왜적으로 전라 감사를 칭호하는 자가 이미 함안ㆍ의령ㆍ정진(鼎津)에 도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황중명의 고목이 과연 거짓이 아니니 참고하여 시행할 것이다. 이상 순찰사에 보고함.
○ 세자에게 다음과 같이 하교하다.
큰 물을 건너는 데 나루터 없어 바야흐로 배와 노로 건널 바를 계획하고, 넘어진 나무에 싹이 돋은 것 같아서 오직 나랏일을 부탁하는 데 마땅한 사람 얻은 것을 다행하게 여겨, 이에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겨 부흥의 대업을 이룩하기 바란다. 돌아보건대 나는 덕이 엷은 몸으로 외람되이 나라의 큰 기틀을 지켜, 음우(陰雨)가 내리기에 앞서 뽕나무 껍질을 거두는 데 경계함이 있어서 매양 깊은 밤중에 썩은 새끼줄로 말을 모는 것같이 조심하였으니 어찌 백성의 병폐를 소홀하게 하였겠는가.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바다 섬의 추악한 오랑캐가 사람과 짐승이 본성을 달리함을 생각지 않고, 처음에는 상국(上國 명(明) 나라)에 유감을 품고 하늘을 향해 활을 당겨 쏘려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하여 감히 사람을 씹는 입을 움직여서, 모든 백성들을 거의 남김없이 유린하고 서울에까지 급히 충돌해 온 것이다. 칠묘(七廟)가 불타 소진되었으니 폐허가 된 데 개탄함을 견디지 못하겠고 삼궁(三宮)이 별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파천하는 어려움을 함께 하였으니, 이미 사람과 귀신의 분노가 극도에 다다랐고 섶에 누워 쓸개를 핥으면서라도 그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비록 나라의 운이 불행해서라고는 하지마는, 진실로 내가 덕이 적고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로다. 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이 이미 심하나 백성들은 그 덕을 알지 못하고, 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이 한갓 간절하나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어디로 돌아갈 건가’ 하는 원한은 바야흐로 깊고 깊은 물에 임하는 것 같은 두려움은 점차로 극심해지니, 제사를 주관하여 신주를 받들 중대한 자 아니면 나라를 일으키고자 하는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음을 생각하노라. 세자 혼(琿 광해군)은 훤칠하고 숙성하며 그의 인효(仁孝)는 본래부터 알려져 뭇 아래 사람들이 아껴 추대하니 넉넉히 중흥의 운을 족히 찬할 수 있는지라, 사방의 사람들이 그를 구가(謳歌)하여 다들 이르기를, “우리 임금의 아들이시로다.” 한다. 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 전에 결정하였고, 군국의 대권을 총수(總帥)하는 명령을 의논할 수 있도다. 이에 혼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섭리하게 하노니, 무릇 관작을 제배(除拜)하고 상벌을 시행하는 등의 일을 편의에 따라 스스로 결단하게 하노라. 아! 영무(靈武)의 의기(義旗)를 돌려와 이 나라의 건곤(乾坤)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게 되기를 바라거니와, 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를 놓고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노라. 나라 사람들은 각각 세자를 돕고 추대하는 마음을 격려하여 함께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이룩하라. 너희들 정부는 중외에 뚜렷이 일러주어 다들 이 일을 들어서 알게 하라. 그 때문으로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잘 알리라 생각하노라.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은진(恩津)에 도달하여 본부(本府)의 선비들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다.
부관(府官)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위하여서로다. 현풍(玄風)에 사는 선비[士子] 곽재우(郭再祐)본래는 현풍 사람인데 지금 의령(宜寧) 처의 고향에 산다 가 왜적에게 완전히 함락된 땅에서 단지 촌락의 군사를 거느리고 재차 적병을 구축(驅逐)하여 왜적의 배가 다시는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였는 바 그 의로운 명성과 높은 절조를 듣기만 하여도 모르는 결에 탄복하여 멀리서 배례(拜禮)하였다. 본도는 아름다운 풍속의 일컬어지는 것이 여러 도의 으뜸이로되 아직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므로 극히 수치스러웠는데, 듣자하니 김능성(金綾城)익복(益福)이 그때 본현을 맡고 있었다. 이 뜻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업(王業)을 회복하려 한다 하는바 이로서도 족히 이곳에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의관 자제(衣冠子弟)들의 집에 통문(通文)하고 의논하여 나라가 2백 년 동안 휴양해 준 은혜를 생각하고 한 도의 전체가 충의를 느끼는 이름을 이룩하게 된다면, 영광이 한 몸에 가해지고 은택이 만 대에 미치며, 청사에 새겨진 공명(功名)이 사람들의 보고 듣는 가운데 밝게 빛날 것이니, 급속히 거행해서 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이다.
○ 대군(大軍)이 서울에 다다른 뒤에 호남의 각 관아에서 남은 장정 및 품관(品官)ㆍ교생(校生)ㆍ팔결(八結)ㆍ연호(煙戶) 등의 군사들을 다 모아서 성의 방어에 대비시키다.
○ 경기도의 문신(文臣) 우성전(禹聖傳)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 병마절도사가 통지하는 사연으로 순찰사에게 도부(到付)한 관내(關內)에, 지금 도착한 충청 감사의 관내에 전하기를, “행재소의 도로가 갑자기 막혀 소식이 통하지 않으므로 사람을 모집해서 계본(啓本)을 가지고 상경케 하였더니, 당일로 동인(同人)이 비변사(備邊司)에 가지고 관내에 하교하신 것이 있었소. 5월 9일의 강원 감사의 글에, ‘전문(傳聞)하건대, 성에 들어온 왜적은 발이 붓고 기운이 빠져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을 잡니다. 운운.’ 하거늘, 죽기를 무릅쓰고 싸울 군사 50명을 상을 내걸고 모집하여 하늘에 고하고 함께 맹세케 하여 어두운 틈을 타서 왜적을 마구 찍어 죽이려고 8일에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했더니, 5월 8일 도검찰사(都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의 서장(書狀)에, ‘군관 유정언(柳廷彦)을 시켜 성 밑에 잠입하여 왜적의 기세를 엿보게 했더니, 왜적의 기세가 급히 쇠해서 낮에는 오로지 약탈을 일삼고 밤에는 흩어져서 곤히 잠자느라 우리들이 왕래하는 것도 모른다 하며, 신의 서울집 종이 왜적 가운데서 빠져 나와 말하기를, 신의 집 역시 왜적에게 약탈당했는데 왜적의 형상을 보니, 단지 단검(短劍)을 가졌을 뿐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포로된 자들이 반이나 섞여서 흩어져 나가 도적질을 하고, 어떤 사람이든 총이나 활을 쏘면 검을 풀고 목숨 살려 주기를 요구합니다.’ 하기에, 그 기세가 곤궁한 것이 두려워할게 못 될 듯하여 곧 50명의 군사들과 더불어 많은 상을 걸고 결속하고서 10일을 기해 성에 들어가 왜적들을 마구 찍어 죽이기로 하였더니, 5월 10일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서장에, ‘왜적의 무리들은 욕기(慾氣)가 방자스러워 꺼리는 것이 없는데, 적은 수로 출몰하여 약탈하던 무리 또한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피살되니, 우리나라 사람 중에 왜적을 보면 다들 쏘아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당초에 우리나라는 헛된 소식에 두려워 동요하여 겁내지 않는 자가 없었고, 어리석은 백성 중에는 혹 애걸하여 구차스럽게 살아날 계획을 하는 자가 생기고는 했는데, 왜적이 서울을 점거하게 되자 온갖 하는 짓들 치고 해괴하지 않은 게 없어 무릇 혈기가 있는 자는 다 그 해독을 입기에 이르렀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들 역시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그 시끄럽게 외치고 드나들던 자들 치고 기운이 빠지고 발이 붇지 않은 이가 없어 호통치던 기세는 없어지고 목숨을 내놓은 도둑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전날에 두려워하던 자들은 분격하고, 살아나기를 꾀하던 자는 원망하고 성내어 다들 왜적을 무찌를 것을 생각하여서 제창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는데, 서울에서 왜적에 굽혔던 무리들 역시 왜적들을 저격할 계획을 합니다.’ 하였고, 5월 10일 검찰사의 글에, ‘왜적 가운데 포로가 되었던 사람 정인(鄭仁) 등 3인을 잡았는데 그 모두가 말하기를, 「왜적으로 철환(鐵丸)을 가진 자는 4, 5인 중에 겨우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이 가진 철환의 수효는 15, 16알에 불과하다. 왜적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으로 앞잡이 노릇을 하던 자가 5분의 1이 남아 있고, 여러 왜적이 동리에 갈라져 있으면서 평상시같이 숙면하면서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아서 아침에 세수를 하고서야 비로소 칼을 찬다. 장수는 대낮이 되어야 일어나고 혹은 10명씩 혹은 20명씩 모여 있으면서 별로 진을 치거나 변고에 대비하자는 생각이 없다.」하였습니다. 대개 왜적의 무리들이 재물을 얻고난 후에 소와 말을 많이 약탈해서 한강으로 보내는 걸 보니, 군사를 퇴각시킬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였소. 이상의 갖가지 서장은 계하한 것이니, 이에 앞서 우리나라 인민들이 왜적의 소식을 잘못 듣고 서로 겁을 내어 싸우지도 않고서 스스로 무너졌으니 모든 것이 다 극히 통분스러운 일이오. 지금 왜적의 기세가 이러하니 무릇 의기(義氣)가 있는 자는 분발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르고 왜적을 잡아야 할 것이오. 각 도의 각 관원에게 급속하게 알려 주도록 하시오. 운운.” 하다.
○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경상도 상주(尙州) 사람이다. 가 초유사(招諭使)에게 다음과 같은 계(啓)를 바치다.
작고 추한 것들이 중국을 어지럽히는 해독을 쌓아 수치스럽고 욕됨이 이미 종묘에까지 미쳤습니다. 한낱 필부이기는 하나 목숨을 바치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계획을 감히 사신께 고하고자, 계시는 천막을 바라보며 눈물을 뿌리고 울면서 글월에 부쳐 성심을 피력하는 터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국가가 아름다운 덕을 전해온 것은 실로 고대의 상(商) 나라와 주(周) 나라에 그 성대함을 비길 것입니다. 신령하고 성스러운 임금이 왕위를 계승해 내려온 13대 동안 위대하게 드러나고 위대하게 왕업을 계승하여 물품이 풍부하고 백성은 편안하였습니다. 2백 년 동안 모든 것이 풍부하여 군의 기록은 병란에 익숙하지 않았고 (즉 전쟁이 없었다는 말임) 백성들의 생업은 단지 농경과 양잠을 알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리오. 숨겨진 섬의 흉악한 괴수[凶酋]가 감히 나라를 무시하는 교활한 계교를 마구 부려 자기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악을 쌓은 것이 이미 궁(窮)과 한(寒)보다 심하였고, 그 군대를 몰아다가 우리 언덕에 버티고 있으니 불공함이 훈육(獯鬻)밀(密) 같은 점이 있습니다. 그 군사를 일으키는 데 핑계로 잡을 만한 말이 없음을 부끄러워하여,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으로 우리나라를 책하였습니다. 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고 소리쳐 말하니, 묵특[冒頓]의 서신이 지나치게 교만한 것이요, 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고 말하니 포악한 진(秦)의 공갈이 무궁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 끝없는 흉악함에 성내니 하늘의 뜻이 어찌 역적을 돕는 데에 용납하겠습니까. 무릇 군대란 의리로 보아 곧지 못하여 굽으면 기운이 쇠하기 마련이고 소나기는 아침 내 계속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우리 임금께서 진노하여 왜적을 징벌하도록 명령하였으니 태산이 어찌 알을 짓눌러 깨는 일을 힘들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어찌된 국운입니까. 위태로운 때를 당해서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여 융성한 때를 빼앗았으니 외적을 막는 성을 구축하였으나 그것이 나라에 무슨 조그마한 이익인들 있겠으며, 거기다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모아다가 그들이 반드시 흩어져 버려 도저히 버텨내지 못할 땅을 준다는 것은 본래 삼척동자조차도 부끄러워하는 일입니다. 조정의 계획이 그 마땅함을 잃은 것이 이미 그러했거니와 변방을 지키는 신하가 군율(軍律)을 범함이 어찌 그다지도 심합니까. 병사(兵使)가 군영의 군사를 옹유하고 있으면서도 머물러 꺽이어 지척에서 부산(釜山)을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방백(方伯)은 왜적의 창끝을 피해서 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호남ㆍ호서 경계에 있고, 그 아래로 주목(州牧)ㆍ부사(府使)에서 군수ㆍ현감에 이르기까지 칼날을 맞대고 창끝을 겨루어 본 일도 없이 아기(牙旗 상아로 만들어졌다는 대장의 기)는 들판 가운데에 끌리고는 하였으니, 이들은 평소 부절(符節)을 차고 성군의 은덕을 생각하고 살다가 위급한 때에 와서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마의 법[司馬之法 군법(軍法)]이 만약 시행된다면 이런 사람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입니다.(즉 사형을 가해 주살될 것이라는 말) 이러한 자들의 무책임한 소행 때문에, 마침내 새나 다닐 험준한 요새지가 지켜지지 않아 영남의 생령(生靈)들이 도륙되어 썩어 문드러지게 하였고, 임금이 몽진하니 빈교(邠郊)의 행색이 참담했습니다. 피비린내와 연기가 종묘의 악기를 그을리고 물들였으며, 원한에 찬 귀신들은 가시나무 덤불 속에서 소리쳐 울고 있습니다. 말을 하면 다만 마음 아픈 것을 더할 뿐, 고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우리들은 태평세대에 살아남은 좁은 골목길의 지친 백성들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사는 것도 임금님의 인자하신 은혜가 아닌 것이 없으니, 사방이 흔연히 성군의 교지를 받아 풀 속에 엎드리고 물구렁에서 자며 구차하게 살아남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였으리오. 난리를 만나게 되어 집이 부서진 것은 잠시 버려둔다 하더라도 나라가 당한 치욕을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병법(兵法)을 모르면 참된 선비가 아닙니다. 설사 건곤을 변하게 할 웅대한 군략이 없다고 하더라도 오직 하늘에서 내려준 진정한 마음은 누구나 다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니, 누구인들 충군 애국하는 본성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이에 원수와 같이 하늘을 이고 사는 분함이 절박하여 마침내 창을 베고 잠을 잘 각오로 왜적과 싸울 모의를 하여 동지들을 모아 작전 계획을 하고, 흩어져 도망간 군졸을 불러 거두어 요해지를 택해서 복병을 설치해 왜적을 요격하여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기로 한 것입니다. 다만 이 목사나 수령들이 피해서 달아난 끝이라 바로 민심이 극도로 흩어져 있으니, 군기(軍旗)와 군고(軍鼓)를 주관할 자가 없어 군중에 지휘할 사람이 없고 기율을 엄하게 하기 어려워 전진에 임해서 군사들이 달아나 버릴 우려가 있으므로, 세울 만한 좋은 계책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막대한 근심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우리 주(州)의 지형은 사실 우리나라의 하늘이 내려 준 부고(府庫)입니다. 예의(禮義)가 행해지고 민간의 습속이 돈독하고 후한 것은 신라 1천 년의 여풍이 있음이요, 창고가 차 있고 호구는 많은 것은 진한(辰韓) 70주의 중심되는 요지(要地)인 것입니다. 크게 집중되는 여러 진(鎭)을 모을 수 있고 긴 강의 상류를 둘러 있으니, 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수복되지 못했다고는 하나,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없겠습니까. 진실로 수양(睢陽)을 포기하고 지키지 아니한다면, 이는 1천 리 되는 강회(江淮)의 땅을 없애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좋은 계략을 헤아려 보건대, 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이상이 없습니다. 진실로 좋은 장수를 택해서 진무(鎭撫)케 하고 그로 하여금 의로운 외침을 피력하여 주선합니다. 정병을 골라서 낙동강[洛水]의 나루터를 지켜서 바닷길로 수송해 돌아가는 뱃길을 끊고, 곁 군(郡)에 격문을 내어 용추(龍湫)의 좁은 목을 거점으로 버티게 하여 고개를 넘어 도망해 돌아가는 관문을 막습니다. 가까이는 낙동강 좌안의 여러 주와 연락하고 멀리는 호남의 큰 군영과 호응해서 성세를 합해 멀리 몰고 간다면 군사들의 기세는 절로 배가할 것이요, 충의를 내걸고 곧장 전진한다면 그때에는 뭇 백성들의 마음이 다 돌아올 것입니다. 비록 바다를 건너가서 수길(秀吉)의 머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하여도, 어찌 한강에 나아가 인의의 칼로 무도한 왜적의 고기를 저미는 것이 또한 어렵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영공(令公)께서는 충신(忠信)이 만맥(蠻貊)의 땅에서도 행해지고 인의(仁義)는 성현으로부터 배운 바입니다. 악비(岳飛)가 갓 금패(金牌)를 받자 3군이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장준(張浚)이 다시 황하가에 부임해 오자 백성들은 이마에 손을 얹고 좋아하였습니다. 영공의 마음 속은 귀신도 알아 증명하고, 군기[旋旗]는 부로(父老)들의 바람[望]이 매여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건대, 우리 무리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는 것은 다른 고장에 비한다면 피나는 정성에서 우러난 것입니다. 1백 년 동안을 두고 이룩해 놓은 문물이 남김없이 없어진 것을 가슴 아프게 여긴다면 대의(大義)를 창도하여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한때 의로운 기운을 의탁할 곳이 없음을 염려하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장수를 바라나 만나기가 어렵고, 조그만 마음을 안고서 스스로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예가 없는 것이니 영공의 계극(啓戟 고관을 전도(前導)하는 붉은 칠을 한 창으로, 여기서는 초유사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이 어찌 내임(來臨)하는 것을 꺼리겠으며, 뜻을 지닌 자는 일이 반드시 이룩되는 것이니 비린내 나는 것들을 신속히 쓸어버릴 수 있을까 하나이다. 부디 광야에서 외뿔소도 아닌데 헤매고 있는 우리들을 가련하게 여겨, 저 들판의 당신의 얼룩말을 돌려 우리가 있는 곳으로 빨리 와 주소서. 아! 무릇 이 바다에 둘러싸인 땅 안에 살아있는 백성이면 누구인들 이씨(李氏)이 적자(赤子)가 아니겠습니까. 해바라기 같은 한 조각의 정성스러운 충심은 나라의 녹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에 따라서 얕고 깊은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요, 7척의 초개 같은 몸으로 왜적을 제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보고서 사생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백(竹帛 역사)에 이름을 남기느냐를 따질 것 없이, 다만 창과 칼 사이에 목숨을 바쳐야만 할 것입니다. 동해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일이 이룩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그곳에 빠져버려도 늦지 않을 것이고, 북극성이 실로 머리 위에 임해 있으니 의(義)는 마땅히 취해야 하고 사는 것은 구차하게 굴지 않을 것입니다. 사뢸 말씀은 대략 이상과 같으니 나머지 말은 이만 줄입니다. 영공의 안색을 받들게 될 때를 기다리며 마음속을 삼가 진술합니다.
24일. 이광(李洸)의 군대가 온양(溫陽)에 머물다. 충청 순찰사 윤선각(尹先覺)이 방어사 이옥(李沃), 병사 신익(申益)과 더불어 먼저 이미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두 남도 순찰사와 같이 한때에 서울로 향하였다. 곽영(郭嶸)은 군대를 거느리고 공주(公州)를 지나 천안(天安)으로 향하였다.
26일. 대군이 다 진위평(振威坪)에 모이니 무릇 13만이다. 깃발이 해를 가리고 군량을 운반하는 대열이 1백여 리에 늘어섰다. 경호(京湖)의 피난민이 양떼를 몰고 가는 위세를 잘못 믿고 혹간 돌아와 모이는 자들도 있다.
○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이 또 전라도의 해군[舟師]에게 영남 바다에서 적을 토벌해 주기를 청하다. 6월의 좌수영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에 보인다.
○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정인홍은 경상도 합천(陜川) 사람이다. 처음에 관군이 무너져 흩어지고 왜적이 멀리 몰아가 곧장 서울을 향하였으므로 대가가 서북으로 몽진하자, 정인홍이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추(郭趨) 및 그 제자들과 함께 의거를 모의하고 여러 읍의 사민에게 통문을 냈는데, 들은 자치고 분발하기를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제자인 하혼(河渾)ㆍ조응인(曹應仁)ㆍ문경호(文景虎)ㆍ권양(權瀁) 등 막료들로 유사를 갈라 정해서 그들로 하여금 병사를 모으게 하고, 또 박이장(朴而章)과 문홍도(文弘道)에게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임무를 맡기고,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아 모집한 군대를 맡겼다. 손인갑이 초계(草溪)의 사막(沙幕)에서 전사하니, 현령 김준민(金浚民)으로 대신하게 했다가 오래지 않아 교체시켰다. 그후 전투에 임해서 장수를 정해 매복하고 습격하고 하는 것이 하나 둘로 계산할 수 없었다. 개산(開山)의 습격ㆍ언안(彦安)의 전승, 성현(星峴)과 정야(井野)의 포위, 단계(丹溪)와 가전(檟田)의 성공(成功) 같은 것들은 그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전승을 보고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대부분 보고하지 않아 군공(軍功)은 남의 맨끝에 있었으나 사실인즉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가운데에서는 정인홍이 첫째였다. 김수(金睟)는 삼가(三嘉)ㆍ초계(草溪)ㆍ성주(星州) 및 고령(高靈)의 군대를 그에게 맡겼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이 전라 감사를 칭호하여 의령(宜寧)의 정진(鼎津)으로 몰려 닥쳐오니,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해서 그를 물리치다.
○ 전라 좌우도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킬 것을 제창하다. 좌도는 전 부사인 첨지 고 경명(高敬命)을 대장에 모셨고,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와 학관(學官) 양대박(梁大樸)을 종사(從事)로 하고, 정랑(正郞) 이대윤(李大胤)과 정자(正字) 최상중(崔尙重)ㆍ양사형(楊士衡)ㆍ양희적(楊希廸) 등을 모량유사(募糧有司)로 삼았다. 우도는 전 부사인 김천일(金千鎰)을 대장으로 모셨다. 고경명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전에 동래사(東萊府使)를 지냈고, 김천일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전에 수원사(水原府使)를 지냈다. 애초에 유팽로가 서울이 함락되어 거가가 서북으로 봉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주야로 외쳐 울며 편안히 침식을 하지 못하고, 동지 양대박 및 양희적과 더불어 고경명을 찾아 가서 지방의 병사를 서둘러 일으켜 북으로 향해 근왕(勤王)할 것을 모의하니, 고경명은 그들이 먼저 생각해 낸 것을 기뻐하며 흔연히 그들을 따랐다. 즉일로 여러 읍에 격문을 돌려 추성(秋城)에 모이도록 불러 날을 정하고 깃발을 세웠다. 본도에서 의병을 제창한 것은 유팽로 등이 첫째였으므로, 호남에 삼창의(三倡義)라는 말이 생겼다.
○ 경상도 고령(高靈)의 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 천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정인홍(鄭仁弘)에 예속하고, 정예한 군사를 골라서 전투에 참가하다. 무계(茂溪)의 싸움, 안언(安彦)의 승리, 성주(星州)에서 성(城) 태운 일 및 사대(沙代)ㆍ가천(伽川)의 전역(戰役)을 모두 도왔다. 또 낙동강의 왜적을 공격하여 온 배를 포획하니, 많게는 5, 6척에 이르렀다. 정인홍은 초유사에게 보고한 바, 소모관(召募官)의 막하에서 왜적을 목 벤 것 역시 30여 급에 이르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좌도는 감사(監使)와 병사(兵使)ㆍ수사(水使)가 없어 명령이 오랫동안 폐해졌고, 도로가 막혀 여러 읍의 일을 들어 알 수 없었다. 영덕 현감(盈德縣監) 안진(安璡)이 우순찰사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좌도의 여러 읍은 다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오직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 효순(韓孝純), 용궁 현감(龍宮縣監) 우복룡(禹伏龍) 및 예안 현감(禮安縣監) 신지제(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운운.” 하였다. 세 고을이 성을 각각 지킬 수 있는 것은 세 읍이 왜적에게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좀 멀기 때문이지, 죽기를 무릅쓰고 수비하며 버티고 싸우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전 목사 김홍민(金弘敏)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애초에 평의지(平義智)가 충주(忠州)에서 이덕형(李德馨)을 만나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염려하면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6월에 평의지가 대동강 변에 도달하여 또 이덕형을 만나고자 하니, 앞장서서 성을 나가 강 가운데 배를 띄우고 만나 보고서 물러 나왔다.
6월 1일. 절충장군 행부호군 지제교(折衝將軍行副護軍知製敎) 고경명(高敬命)이 도내 여러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치고(馳告)하다.
이번에 본도의 근왕군(勤王軍)이 금강(錦江)에서 퇴각하던 날 한 차례 무너지고 다시 여러 군(郡)에서 초유(招諭)할 때에 무너진 것은, 대개 단속하는 방법이 어긋나 기율이 없으므로 와전되는 말이 자주 일어나서 여러 병사들의 마음이 놀라고 의심스러워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 비록 흩어져 없어진 나머지의 병사들을 수습하여도 사기가 꺾여 정예한 기운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긴급한 소용에 응하여 후일의 효력을 책할 수 있겠는가. 매번 생각하건대 승여(乘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파천했는데 관직 있는 자들이 달려가 문안드리는 일이 오래도록 없었고, 종묘 사직이 재가 되어 버렸는데 왕사(王師 왕의 군사)가 숙청하는 일은 아직도 멀었으니 이런 일에 언급하게 되면 아픔이 마음속까지 사무친다. 생각하면 우리 본도는 본래부터 병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력하다고 일컬어져 왔다. ‘성조(聖祖 태조)께서 황산(荒山)에서 승리를 거두신 것은 우리 삼한(三韓)을 다시 이룩하신 공이 있고, 선대(先代 고려)가 낭산(朗山)영암(靈巖) 에서 전투할 때는 한 조각의 돛도 돌아가지 못했다.’ 는 노래가 있어 지금까지 혁혁하게 사람들의 이목에 빛나고 있는데, 그때 용기를 떨쳐 먼저 나서서 장수을 목 베고 적기(敵旗)를 뽑아온 자는 이 도의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근년부터 유도(儒道)가 크게 일어나 사람들이 모두 뜻을 세워 학문을 하게 되었으니, 임금을 섬기는 대의(大義)를 그 누구인들 강론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유독 오늘날에 이르러서 의로운 소리는 없어지고 겁내어 혼란해져 스스로 무너져서 여지껏 한 사람도 기운을 내어 왜적과 창끝을 마주치고 싸우기를 생각하는 자는 없고, 앞다투어 자기 몸과 처자를 보전할 계책을 꾸며 머리를 끌어안고 쥐같이 달아나는 것만 혹시나 남에 뒤질까 두려워하니, 이것은 본도의 사람들이 나라의 은혜를 깊이 저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지금인즉 왜적의 기세가 크게 꺾이었고 우리 임금의 위령(威靈)이 날로 뻗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대장부가 공을 세울 기회이고 임금에게 보답할 때인 것이다. 나 고경명은 경전(經典)의 장구(章句)나 따지는 우활한 선비로 학문은 병법에 어두우나 장수를 뽑는 이 자리를 위촉받아 망령되이 대장에 추대되었으니, 이미 흐트러진 사병들 마음을 수습하지 못해 나를 추대한 두세 명 동지들의 수치가 될까 두려워하는 터이다. 다만 신하의 의리로는 마땅히 국난에 죽어야 하는 것이고, 겸해서 군대는 의리상 곧은 것을 세다고 여기니 그 수효의 많고 적은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오직 담을 크게 갖고 눈물을 뿌리며 전투를 하여 사병들의 앞장이 되기를 생각하여, 임금의 은혜에 약간이나마 보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달 11일이 군사를 결집하는 기일이다. 무릇 우리 도내의 사람들은 아비가 아들에게 일러 주고 형이 아우에게 권면하여 의로운 군대를 규합해서 함께 일어나, 용맹스럽게 결단을 내려 선(善)에 따를 것을 바라나니 미혹되어 자신을 그르치지 말게 하라.
3일. 삼 도(三道)의 군대가 수원(水原)에 머무르다. 이광(李洸)이 독성(禿城)에 진을 쳤다. 본부의 왜적은 대군이 갑자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이틀 전에 이미 도망쳐 용인(龍仁)의 왜적과 합세하였다.
○ 좌의병(左義兵)의 진중의 회문(回文)은 다음과 같다.
의병은 오는 11일에 떠난다. 여러 장비는 다 구비되었으나 군량만은 나올 데가 없다. 대장이 이미 모은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가까운 곳의 각 고을에서 편의에 따라 빌릴 수 있는 것이나, 무릇 토지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남아 쌓은 것이 있는 자는 모두 임의대로 양을 정하여 군사들의 식사에 댈 물자를 도와야 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다. 얻은 군량은 그 반이 수송 비용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과 말이 천 리를 가는 비용 같은 것이 다 그것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만약 정병(精兵)이나 군마(軍馬)나 짐 싣는 말 중에 자기가 소유하는 것에 따라 내놓아서 도와주면 심히 다행이겠다. 부전운량장(赴戰運糧將) 진사 박천정(朴天挺), 유학 양희적(楊希廸), 재향운량장(在鄕運糧將) 정랑 이대윤(李大胤), 정자 최상중(崔尙重) 등.
○ 적병이 해서로부터 돌려서 관서로 향하니 거가를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이 흩어진 병사들을 거두어 모아 기성(箕城 즉 평양)을 수비하고 김억추(金億秋) 등을 대동강에 매복시켜 방어하게 하다.
○ 전 좌랑 김면(金沔)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김면은 경상도 고령(高靈) 사람이다. 처음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대가를 따라 가려고 했으나, 정인홍(鄭仁弘)이 김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기를 원해서 김면은 고령에서 병사를 모았던 것이다. 김면은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서 졸지에 고령현의 경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이를 막았다. 김면은 고령 같은 쇠미한 고을로는 왜적을 막아내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드디어 거창(居昌)으로 달려갔는데, 거창의 선비들이 이미 적인(跡人) 속칭 산척(山尺)이라 한다. 약간을 모았으므로 그것을 김면에게 소속시켰다. 김면은 곧 여러 군사를 뽑아내게 하여 곽준(郭䞭)ㆍ문위(文緯)ㆍ윤경남(尹景男)ㆍ박정번(朴廷璠) 및 유중룡(柳中龍)을 참모와 장서기(掌書記 문서 맡는 사람)로 삼고 박성(朴惺)에게 군량을 모으도록 하였다. 4, 5일 사이에 병사 2천여 명을 모아서 2백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현 북부의 우현(牛峴)ㆍ상암(箱巖)ㆍ목통(木通)ㆍ마령(馬嶺) 등 여러 곳을 수비하게 하고, 대군을 영솔하여 고령으로 나가서 진을 쳤다. 왜적의 배가 강류(江流)를 따라 내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독려하여 이를 요격하니, 마침내 성한 배 2척을 노획하고 왜적을 목 벤 것이 80여 급이나 되었다. 이 전투는 실은 박정완(朴廷琬)이 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아래 박정완전에 보인다. 그 노획한 배에 실려있는 물건들은 다 내탕(內帑)의 진귀한 보물이었다. 그중에서 금종이로 꾸민 장지[障子] 한 벌을 얻었는데 광묘(光廟 즉 세조, 휘는 유(瑈))의 어휘(御諱)가 쓰여 있었고, 제복(祭服) 두 벌과 붉은 신[赤舃 임금의 예복에 신는 신을 말함] 두 켤레가 있으므로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지례(知禮)의 적장이 우현을 넘으려고 할 때에 복병장 이형(李亨)이 전사하였다. 김면은 거창이 진주(晉州) 이상 일대 지역의 두뇌같이 중요한 지역이라 거창이 지켜지지 않으면 10여 읍 역시 지켜내기 어렵다고 여겨, 마침내 장수를 정해서 고령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거창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례의 왜적을 막았다. 전 부사 서예원(徐禮元)을 중위장(中衛將)으로, 만호(萬戶) 황응남(黃應男)을 부장으로 삼았다. 지례에 웅거해 있던 왜적을 습격하여 종들을 대대적으로 많이 잡았는데, 배설(裵楔)이 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다 섬멸하지 못하고 나머지 무리들은 밤중에 도망쳤다. 또 정인홍과 약속하고 성주(星州)의 왜적을 공격하여 양군이 합세해서 포위하였다. 왜적이 개령(開寧)으로부터 와서 지원하자, 배설을 시켜 그 길을 차단하게 하였으나 배설이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러 군사들이 왜적의 구원병을 보자 크게 무너졌다. 김면이 마침내 거창으로 돌아왔다가 지례로 옮겨가서 진을 치고 복병을 나누어 보내 금산(金山)의 왜적을 저지하여 거창으로 충돌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감사가 함양(咸陽)ㆍ안음(安陰)ㆍ산음(山陰)의 군사를 김면에게 예속시켰다. 왜적의 기세가 한창 왕성하여 전투로 쉬는 날이 없자, 감사가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을 시켜 김면을 위해 조방(助防)해 주게 하였다. 하루는 왜적이 또 수없이 밀려와 사랑암(沙郞巖) 지례의 땅이다. 을 지나가자 김면이 말을 달려 검을 휘두르며 김시민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 높은 벼슬자리로 공을 대우한 것은 요컨대 오늘에 쓰기 위한 것이오. 죽음이 있을 따름이지 퇴각해서는 안 되오.” 하니, 김시민이 마침내 말을 돌려서 달려 들어가 계속하여 두 명의 왜적을 쏘아 잡았다. 여러 군사들이 크게 외치며 왜적을 무너뜨리자, 왜적이 그제서야 퇴각하였다. 이때부터 금산과 개령의 왜적들이 뒤이어 약탈을 계속하여 9월부터 12월까지 전투를 하지 않은 날이 없어 장병들이 갑옷을 벗은 일이 없었으니, 혹은 밤중에 찍어 들어오고 혹은 유인해 내어 큰 전투가 10여 차례였고 꺾어 물리친 적이 30여 번이었다. 그 후 합도의병 도대장(合道義兵都大將)으로 승임(陞任)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면과 정인홍 두 장수가 곽재우에 이어서 일어나 강회(江淮) 즉 낙동강 일대를 막아 나머지 읍들을 보전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전공을 논한다면 물론 작은 것이 아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김면이, 박정완(朴廷琬)이 왜적의 배를 노획하고 80여 급을 목 벤 공을 억눌러 나타내 주지 않았고,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에서 복병을 쓴 작전을 도와 주지 않고 도리어 그가 여러 사람의 모의를 어기고 패군했다는 죄로 몰아넣었으니, 진실로 공(功)을 시기하여 모함한 흔적이 있음을 면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5일. 이광(李洸)이 선봉장 백광언(白光彦)을 시켜 용인(龍仁)에서 왜적을 탐지하게 하다. 왜적이 현의 북쪽인 북두문(北斗文)이라는 작은 산에 진을 쳤는데, 진은 미약하고 군사는 쇠잔하여 그 기세가 외롭고 약한 것 같았다. 백광언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이것은 영세한 왜적이니, 급히 공격하고 때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였다.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 율(權慄)이 방어사의 중위장으로 군중(軍中)에 있었는데, 이광에게 강력히 말하기를, “서울이 멀지 않고 큰 왜적이 앞을 막고 있는데, 작은 적과 다투어 교전해서 군사의 위세를 꺽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이광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곧 조방장 이지시(李之時) 및 선봉인 수령 등을 백광언에게 주어 전투를 독촉하였다. 백광언 등은 적이 눈앞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육박해 들어가 도전했는데, 묘시부터 사시에 이르기까지 적병이 잠복하고 나오지 않자, 오시에 이르러 아군이 해이해졌다. 이때 왜적이 풀 속에 엎드려 무릎으로 전진해 와 검을 휘두르며 일제히 일어나 아군 가운데로 쳐들어오니, 왼쪽에서 목 베고 오른쪽에서 찍어대고 하여 아군의 전사자가 부지기수였다. 이지시ㆍ백광언, 고부 군수(古阜郡守) 이윤인(李允仁), 함열 현감(咸悅縣監) 정연(鄭淵) 등이 모두 이 전투에서 피살되어 대군의 기세가 꺾였다. 이날 교지가 서해로부터 용인의 진중에 도달하여 경상좌우순찰사와 좌감사 이성임(李聖任)을 도로 합하게 하니, 길이 막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6일. 삼도(三道)의 군대가 용인에서 무너지다. 이날 아침 이광(李洸) 등이 점차로 군사를 전진시켜 광교산(廣敎山)에 진을 치고 군에 영을 내려 조반을 먹게 하였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일어나자마자 왜적의 기병이 돌격해 왔다. 먼저 왜적 다섯이 왔는데, 금 가면을 쓰고 흰 말을 탔으며 흰 기를 가지고 검을 휘두르며 곧장 전진해 온 것이다. 충청 병사 신익(申益)은 선봉으로 앞에 있다가 왜적의 위세를 바라보기만 하고 먼저 무너져버려 10만의 장병이 일시에 다 흩어졌는데, 왜적이 기병 수 명으로 10여 리나 쫓아가다가 가버렸다. 이광 등 여러 장수들이 교서(敎書)ㆍ인신(印信)ㆍ절월(節鉞)ㆍ기휘(旗麾)와 군기(軍器)ㆍ군량 등 배수(倍數)로 수송해 온 물건들을 다 버려두었는데, 왜적이 횃불 하나로 그것들을 태워버렸다. 이때 서울에 머물러 있던 왜적의 장수 20여 명이 각각 은 가마를 타고 호위병을 대단스럽게 벌여 세우고서 모두 붉은 옷을 입고 모자를 썼으며, 부녀자들은 말을 타고 쌍을지어 나와 길을 가득히 채우고 앞으로 가는 것을 연일 계속하고 멈추지 않았다. 아군은 서울의 왜적이 우리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해 간다고 생각했다. 그 후 왜적에게 포로로 잡혔던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서울의 왜적은 나와서 광주(廣州)에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아군이 양천(陽川)의 북쪽 포구에 도달하기를 기다려 남쪽으로부터 엄습하여 한강으로 몰아부치려고 하였는데 아군이 피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만두었다.” 하였다. 우리 대군이 무너져 돌아갈 때에 전일 경기와 양호 지방의 피난에서 돌아와 모였던 사람이 많이 짓밟혀 다치고 노약자들이 질겁을 해 달아났으며 곡성이 우레같이 울려났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이 여러 도의 수재(守宰) 및 사민(士民)과 군인 등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급히 보냈다.
근자에 국운이 중도에 비색한 때문으로 섬 오랑캐가 밖에서 짖어대어, 처음에는 역적 양(亮)이 맹약을 어긴 일을 본받아 하더니 마침내는 오랑캐 오(吳) 나라가 중국을 먹어 들어오던 짓을 자행해서, 우리가 경계하고 있지 않은 틈을 타 허한 데를 짓이겨대고 멀리 몰고 들어와 ‘하늘을 속일 수 있다’고 여기며 마음대로 곧장 올라왔다. 장수의 절월(節鉞)을 가진 자는 기로(岐路)에서 서성대고 한 군(郡)의 인신(印信)을 찬 자는 수풀 깊은 속으로 도망가서 왜적을 군친(君親)에게로 돌려버렸다. 이것을 참을 수 있는가. 지존(至尊)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게 하고서 네 마음이 편안한가? 어찌 생각하였으랴, 1백 년이나 휴양해 온 백성 가운데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하나도 없으랴. 고군(孤軍)으로 깊이 들어간 것은 여진(女眞)이 본래 병법을 몰랐던 것이요, 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대한(大漢)이 본래 책략이 없었던 것이다. 장강(長江)이 급작스레 그 천연의 요해지를 잃어버려서 흉악한 칼날이 이미 신경(神京)에 육박한 것이니, 남조(南朝)에 인물이 없었다는 조롱은 진실로 가슴 아프거니와, 북군(北軍)이 날아서 건너왔다는 말은 불행하게도 근사하구나. 이제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떠나던 마음으로 명황(明皇)이 촉(蜀) 땅으로 갔던 일을 하셨으니 이는 대체로 역시 종묘사직을 위한 지극한 계획에서 나온 것이다. 이에 사방의 지방관이 잠시 애쓰는 것은 기탄하지 않거니와 공락(鞏洛)의 놀란 먼지 속에 임금의 안색에 자주 깊은 진념이 나타났고, 민아(岷峨)의 위험한 잔도(棧道)로 푸른 일산[翠華]이 긴 노정을 멀리 갔다.
하늘이 낸 이성(李晟)이 적을 숙청한 것은 바로 원로(元老)에 힘입었고, 조서를 초한 육지(陸贄)의 애통한 말은 또 성조(聖朝)에서 내렸다. 무릇 혈기를 가지고 생명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분개하고 죽으려 들지 않겠는가. 어찌하랴! 사람의 모의가 좋지 않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이 잦았도다. 봉천(奉天)의 거가(車駕)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상주(相州)의 군대가 이미 무너졌으며, 준동하는 저 벌이나 전갈 같은 무리[蜂蠆之醜]에게 고래나 상어 같은 힘으로 목을 베는 것이 아직도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성문에 임시로 쉬고 날아도는 것이 어찌 장막의 제비와 다르겠으며, 외람되이 기보(畿輔)에 버티고 있으니 그 날뛰는 것이 울 안의 원숭이와도 같다. 비록 하늘의 군사가 소탕해버릴 때가 있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 흉악한 무리가 뛰어 달아나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 고경명은 단심과 만년의 절개를 가지고 머리가 희어지도록 썩은 선비[腐儒]로 살아왔으나, 밤중의 닭소리를 듣고는 국가의 다난함을 견디지 못하여 중류(中流)에 뜬 배의 노를 치면서 스스로 외로운 충성을 허락하였노라. 한갓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는 정성을 품고 모기나 등에[虻]가 산을 지려 드는 것같이 턱없는 힘을 헤아리지 않고,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지향하고자 옷소매를 떨치고 단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여럿과 맹세했다. 곰을 치고 표범을 끌어대는 군사들이 우레같이 세차고 바람같이 날며,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건너뛰는 무리가 구름같이 합치고 비같이 모였으니, 이는 대개 핍박한 후에 응하여 억지로 나가게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신하로서 충의에 찬 마음이 다 함께 지극한 본성에서 우러난 것이니, 존망의 위기에 임하여 감히 미미한 몸을 아끼겠는가. 군사는 의로써 이름 지었으니 본래 벼슬[職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군대는 곧은 것으로 말미암아 씩씩해지는 것이지 취약한가 견고한가를 따지는 것은 아니어서, 대소의 군대들이 모의하지 않고도 뜻을 같이하였고, 원근의 장정들이 소식을 듣고서 다 함께 분발했다. 아아! 우리 여러 군[列郡]의 수재(守宰)들과 여러 길[諸路]의 사민(士民)들의 충성이 어찌 임금을 잊었겠는가.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할 것이다. 혹은 병기(兵器)와 의장(儀仗)으로 도와 주고 혹은 양식으로 구제해 주며, 혹은 말을 달려 군사의 행렬 앞을 가고 혹은 쟁기를 놓고 밭에서 분기하여 힘이 미칠 만한 것을 헤아려 오직 의로운 데로 돌아가 임금을 고난으로부터 막아낼 수 있다면,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멀리서 생각하건대, 행궁(行宮)은 서쪽 땅에 멀리 있으나 묘당(廟堂)의 대계(大計)가 장차 정해지리니, 왕업(王業)이 어찌 한쪽에 치우쳐 안정할 것이랴! 잘 패[敗宮]하면 망하지 않나니 복덕(福德)이 바야흐로 오(吳) 나라 분야에 임했고, 깊은 근심으로 열어 주니 노래하고 읊조리는 데 더욱 한가(漢家)를 생각하게 된다. 호걸스럽고 준일한 인물이 시세를 바로잡을 제 신정(新亭)에서 마주보고 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부로(父老)들이 임금을 기다리니 곧 구도(舊都)에 임금이 돌아오는 것을 보리라. 생각하건대 마땅히 힘을 내서 앞서 나가야 할 것이므로 이상 마음속을 털어놓고 고하노라.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라도 의병장 행부호군 고경명이 삼가 제주절제사 양공(楊公) 그때 양대수(楊大樹)가 본주의 목사였다. 의 휘하에 치고(馳告)하나이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침략을 자행하여 임금께서 몽진하였는데, 지존으로 하여금 홀로 근심하게 해 놓고 처자를 보호할 계책만 먼저 생각하여 왼발을 들여다보고 먼저 응하니 그 누가 사직을 지키는 마음을 가졌겠소. 흥원(興元)의 거가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상주(相州)의 군대는 이미 무너져서,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의 적을 빨리 소탕하여도 아직 회복할 기약은 멀었고, 군량은 버려져 도리어 원수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국사를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고경명이 이에 의로운 깃발을 들고 요사한 무리를 숙청하러 나서자 소식을 듣고 그림자같이 모여들었는데 대부분 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이고, 예리한 무기를 들고 먼저 나서는 중에는 또한 연조(燕趙)의 검객도 들어 있습니다. 다만 한스럽기는, 보졸의 발[足]이 될 것이 없어 말을 채찍질하여 양(良)을 찌를 것을 바라기 어려운 것입니다. 멀리 생각건대, 바다 동쪽의 탐라(耽羅) 땅은 중국의 기북(冀北)과 다름이 없어서 골짜기를 뛰어넘어 다니며 사냥을 할 뿐만 아니라 전투 행진에 따라다녀 또한 목숨을 의탁할 만하다 하니, 만약 그곳에서 나는 말을 바닷배에 가득 실어 보내 주신다면 우리 군대의 위용이 크게 드러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귀관께서는 임금의 은혜를 깊이 받아 해역(海域)을 전제(專制)하고 계시니 글로써 호소하면 응당 한 곳의 여론을 일으킬 것이며, 팔뚝을 걷어올리고 외치면 어찌 10실(室)의 마을에 충신(忠信)한 사람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만약 장사 중에 나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또 그러한 인간의 상정을 막지 말기를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대신 지은 것이다.
○ 전라도 의병대장 장하사(張下士),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ㆍ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 4도의 여러 읍의 수재 및 향교(鄕校)ㆍ당장(堂長)ㆍ유사에게 다음과 같이 삼가 재배(再拜)하고 통문(通文)하다.
외람되게 생각하건대, 섬 오랑캐가 불공함으로 임금께서 멀리 파천하고 7묘(七廟)가 재가 되어버렸으며 만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는 진실로 고금에 있어 본 일이 없던 변고이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할 때입니다. 그러나 방진(方鎭)의 중신(重臣)들은 관망하면서 머뭇거려, 군사를 징집하는 교지가 한두 차례 내린 것이 아닌데도 한 사람도 머리를 북으로 향하고 적과 싸워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오늘날의 사대부는 조정을 저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외람되이 생각하건대, 호남은 본래 군사가 정예한 것으로 일컬어져 왔었는데, 근왕군이 겨우 금강(錦江)에 도달하자 도성이 함락되고 거짓말이 멀리 퍼졌으며 주장(主將)은 여러 사람의 의론을 널리 물어 볼 겨를도 없이 급히 진을 파하라는 영을 내려 10 만의 무리가 까닭 없이 그냥 돌아가버리고 온 도의 민심이 흉흉하여 흡사 미친 듯한 물결이 마구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두 번째의 군사 모집에 가서는 하천한 백성과 지극히 우매한 자들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으니 컴컴한 방안의 근심은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직의 복과 조종의 위령에 힘입어, 무너져 달아났던 병졸들이 매일같이 모여 와 군의 성세가 크게 진작되어 혹시나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를 맞이할까 바랐더니, 사람의 모의가 좋지 못하였고 하늘이 내리는 앙화가 가시지 않아서 적은 수의 적이 겨우 나타나자 대군이 또 무너지고 군량을 버려 도리어 원수 왜적의 도움이 되었으니, 아아! 우리 역대 성군께서 수백 년 동안 함양한 나머지에 어찌 적개심에 찬 신하가 한 사람도 없습니까! 공론이 아래에 있는 것을 옛사람이 이미 불길하다고 하였으나, 황폐한 풀섶에서 의병을 창도하는 것은 역시 계략상 부득이했음을 알 것입니다. 군부(君父)가 환난 가운데 놓여져 있는데 그 밖의 일을 돌아볼 겨를이 있겠습니까. 거듭 생각하건대, 영남과 양호는 진실로 우리 동쪽 나라의 근저(根柢)입니다. 그런데 영남인즉 의병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중간이 왜적의 굴혈에 막혀 있어서, 곧장 서울에 올라가 근왕(勤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서 1천 리의 땅엔들 어찌 의기 있는 사나이가 없었겠습니까마는, 왜적들이 죽이고 빼앗는 여세에 겁을 집어먹고 역시 자신을 구해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중외에서 믿는 것은 호남 한 도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막부(幕府 대장 있는 곳)에서 만 번 죽고서라도 기어이 관철해 낼 계획을 세우고 한 지방의 여러 사람을 격려한 결과, 민심은 왕실을 생각하고 열사들이 운집하여 보병과 기병의 수효가 이미 5만 2천에 이르러 바야흐로 북쪽으로의 길을 멀리 몰고 들어가 요사한 왜적의 무리를 소탕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1천 리의 길에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사사로운 힘으로는 해내기 어렵습니다. 만약 의를 좋아하는 여러 군자들이 힘을 합해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면 비상한 큰 공이 어찌 한 사람의 손에서 다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이 나라의 땅 치고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습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이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제공께서는 함께 나라를 위해 따라 죽을 뜻으로 분발하고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를 다해서 각기 미곡을 내어 군의 식량을 도와 주신다면, 능히 양주(揚朱)와 묵적(墨翟)을 막겠다고 말하는 자 역시 성인(聖人)의 무리일 것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산골짜기가 험준하고 평탄한 것과 도로가 우회하고 곧고 한 것은 그 고장의 군사가 가리켜 인도하지 않는다면 역시 창졸간에 당하는 곤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그 고장의 사람을 모집해서 우리 군의 기세를 돋구게 해 주신다면, 비단 종묘 사직의 깊은 수치를 한바탕 씻어버릴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부자 형제로 창이나 화살에 죽은 이들 역시 황천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일은 비록 어리석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 마음 아파하고 걱정하겠거늘, 하물며 여러 고을의 수재(守宰)들은 다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차마 근왕군의 곤란[秦瘠]을 좌시하겠습니까. 반드시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남의 밥을 먹으면 남의 일을 위해 죽는다.” 했거니와, 만약 소식을 듣고 강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자가 있다면, 원하건대 소반의 피를 입에 찍어 바르고 함께 왕의 일에 종사하겠거니와 혹 한 끼 양식과 자재를 군 앞에 수송해 주어도 역시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해서와 관서는 비록 도로가 통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마는 각각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해서 사잇길로 해서 나와 차례로 전해서 일각도 지체하지 않는다면 원근에서 그 소문을 듣고 혹 그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통문이 도착한 날 여러 고을 향교의 당장과 유사는 각각 한 통씩 베껴서 경내의 선비들에게 전해 그들로 하여금 모르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정기록》에 나온다.
○ 고경명과 김천일(金千鎰), 양산숙(梁山璹)과 곽현(郭玄)을 시켜 출사표(出師表)를 받들고 서해로 해서 행조(行朝)로 보내다. 그때 적병이 5, 6도(道)에 가득 차 있었고 경기와 황해가 더욱 심했기 때문에 서쪽으로 가는 길이 끊겼었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수로가 통하게 되었다.
○ 각처의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항복하고 붙좇는 자들을 나누어 여러 분탕된 고을의 수령으로 정하여 온 경내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니, 박무금(朴茂金)이 김해(金海)를, 중[僧] 찬희(贊熙)가 밀양(密陽)을 맡은 따위가 그것이다. 찬희는 성에 들어와 군민(軍民)을 꼬여 모으다가 박진(朴晉)이 몰래 잡아서 죽였고, 박무금은 그 후 도망쳐 나와 용서를 받았다.
○ 왜적이 창녕(昌寧)ㆍ현풍(玄風)으로부터 금산(金山)에 이르는 한 줄기의 큰 길을 닦고 위아래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중간에 위치한 성주(星州)는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많아 왜적이 큰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는데, 현풍에서 좀 멀어서 무계(茂溪) 나루가 두 지점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요해지이므로, 왜적이 나루 서쪽 산 위에 주둔하여 수륙의 길을 통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의 좌우편 도로가 막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다니지 못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손인갑(孫仁甲)에게 말하기를, “무계의 왜적이 현풍과 성주 사이에 끼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도와 주고 있으니 반드시 이 왜적을 먼저 제거해서 강길을 끊어 놓은 후에야 성주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손인갑이 옳다 여겼다. 마침내 정인홍을 군의 주장으로 추대하고 지난달 27일에 군사 행동을 시작했다. 초계(草溪)에서 위급을 고해 와 달려가니 왜적의 기병 백여 기가 마을의 집을 태우고 약탈하다가 군사가 온 것을 보고 강길로 향해 달아나므로 추적하였으나 따라가지 못하였다. 29일에 고령(高靈)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거창(居昌)의 군사를 불러 약속하기를, “함께 무계를 공격하자.” 하고 요구하였으나 김면(金沔)이 병장기가 완비되지 못해 5, 6일이 늦어질지 모른다 하니, 정인홍이, “군사는 많은데 양식이 적으니 날짜를 끌어서는 안 된다.” 하고, 군사를 전진시키기로 결의하였다. 손인갑이 먼저 가서 무계의 형세를 살피겠다고 요청하여 정인홍이 허락하니, 손인갑이 곧 두어 사람을 데리고 밀탐하고 돌아와 드디어 세 길로 진군할 계획을 결정하였다.
고령 영병장(高靈領兵將) 김응성(金應成), 성주 기군장(星州起軍將) 이승(李承) 등이 와서 모였다. 이달 4일 밤을 타서 진군하였는데,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사람이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다. 좌돌격(左突擊) 조응형(曹應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재를 넘어가자 군졸들이 헛되이 놀라 스스로 무너졌다. 대장(大將)이 지휘하는 한 진(陣)만은 움직이지 않아서 그로 말미암아 약간 안정되어 도로 모였으나, 밤중에 쳐서 소굴을 불태우려는 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5일. 여명에 정인홍(鄭仁弘)이 우선봉 한여택(韓汝澤)ㆍ좌선봉 하종해(河宗海)를 시켜 군사를 끌고 오른쪽 재로 해서 곧장 무계역(茂溪驛)에 이르게 하고, 고령 대장(高靈代將) 정상례(鄭尙禮)를 시켜 왼쪽 재의 대로로 해서 진군하게 하였다. 또 전 군수 이언성(李彦誠)과 성정국(成定國)으로 하여금 성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언역(安彦驛)의 길에 매복하여 성주(星州)에서 후원해 오는 왜적을 끊게 하고, 정언충(鄭彦忠)을 시켜 노다촌(老多村)에 매복케 하여 강을 내려가는 왜적을 끊게 하였으며, 정인홍은 손인갑(孫仁甲)과 더불어 중위군을 거느리고 곧장 왜적의 군막을 짓이겨 대었다. 왜적이 약탈한 재보(財寶)를 무계의 역사(驛舍)에 가뜩 쌓고 횃불 하나로 태워버리고 소와 말을 빼앗았다. 한여택과 하종해가 몸을 솟구치고 나서서 역전(力戰)했는데, 왜적의 장수가 큰 기를 세우고 나와서 싸우다가 아군이 많고 정예한 것을 보고는 막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전한 기세를 타고 사면으로 육박해 들어가 싸워서 그 양곡을 저장한 외막(外幕)을 불태우고 전진하고 후퇴하며 일제히 활을 쏘니, 왜적의 기세가 매우 군색해져서 자리ㆍ거적ㆍ땔나무 등으로 가리면서 자위(自衛)했는데 죽은 자가 퍽 많았다. 처음 철환(鐵丸)을 쏜 인시부터 사시에 이르자 포성은 끊어지고 곡성만이 났다. 아군이 다가가 불을 질러 태워버리려 했는데, 나머지 왜적이 달아나 강으로 들어가 배를 강물 복판에 끌고 들어갔다. 이때에 의외에도 구원하러 온 왜적 수백 명이 현풍(玄風)으로부터 갑자기 나루터 가로 왔다. 그때가 거사할 시초라 활과 화살이 넉넉하지 못했고 아군은 새벽에 진군해서 군사들이 다들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힘을 다해 싸워 지쳐 빠져버렸는데, 갑자기 생생한 기운을 가진 적의 공격을 받았고 거기에 화살 또한 이미 다한지라 감히 무리한 전투를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막(幕) 안에 있던 왜적은 6, 7명이 쫓아왔을 뿐인데 5리도 못 오고 돌아가버렸다. 수일 후에 합천(陜川)의 군사가 피난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사람을 잡았는데, 공술하기를, “막 안의 왜적은 1백 40여 명이었는데 죽은 자가 반이 넘고 나머지는 다 화살에 다쳐 한 떼의 왜적이 거의 다 이 전투에서 소탕되었으나, 불을 지르지 못하고 퇴각하여서 이로 말미암아 왜적이 군사를 증가시키고 주둔하는 군막을 더욱 넓히고 있습니다.” 하였다. 손인갑이 가리현(加利縣)으로부터 돌아와 고령에다 진을 치고, 정인홍은 하혼(河渾)ㆍ권양(權瀁)ㆍ이승(李承)ㆍ김응성(金應成) 등과 더불어 산 위와 가운데 길로 해서 돌아와 가림(檟林)에다 진을 쳤다가 곧 매촌(梅村)에 진을 합치고 싸운 공을 치보(馳報)하였다. 그때에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비로소 와서 무계의 습격을 단독으로 거사한 것을 자못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때 군졸들은 군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싸움터에서 각각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오래도록 돌아 오지 않고 단지 수백 명만이 뒤따르고 있었다. 손인갑이 이것을 근심하여, “군졸이 모이지 않으니 선생은 가르쳐 주시오.” 하자, 마침내 격문을 돌려 그들을 불러 모았는데 수일 동안에 다 모였다. 흩어져버렸던 끝이라서 사람들의 마음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을 감행하지 못하고 다만 잘 타이르고 엄하게 경계할 따름이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왜적의 배 18척이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에 있다. 으로부터 올라와 정승 안국사(政丞安國寺)의 행차라 자칭하고 가야산(伽倻山)을 탐승하려고 했는데, 이 자가 바로 전날 전라 감사를 칭하고 창원(昌原)에서 선문(先文)을 띄웠던 자이다. 정진(鼎津)에 이르러 곽재우(郭再祐)에 의해 퇴각당하고 영산(靈山)ㆍ창녕(昌寧)으로 해서 기강(岐江)을 건너려 할 때 전라 감사라 칭하고 호남으로 향하면서 또 선문을 보내 맞이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초계(草溪)ㆍ의령(宜寧) 등지의 사민들은 두려워서 혹은 산으로 도망하여 나오지 않기도 하고, 우매한 자는 혹 환영하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곽재우는 또 왜적 앞에까지 달려가서 도망한 사민(士民)을 끌어내어 의리로 타이르고 창고를 풀어 군사를 먹이며 병졸을 엄격하게 다루어 방비를 갖추었다. 왜적이 곽의 병졸이 부오(部伍)가 엄정(嚴整)함을 보고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정진의 홍의장군이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 하고 퇴각하여 쌍산(雙山)으로 해서 성주(星州)로 향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안국사(安國寺)는 강항(姜沆)의 계문(啓文) 가운데 보인다.
○ 박진(朴晉)을 경상 좌병사로 삼다. 그때 박진은 김수(金睟)의 근왕군을 따라 온양(溫陽)까지 갔다가 명령을 받고 도로 내려와 본도에 도달했는데, 사천(泗川)ㆍ하동(河東)ㆍ곤양(昆陽) 및 진주(晉州)의 왜적의 기세가 막 성하기 때문에 낙동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김성일(金誠一)이 우도에서 글을 보내 이르기를, “장군께서는 포상하는 어명을 받들어 병권을 장악하고 변경에 임해 위엄 있는 명성이 이미 드러나 온 도가 간성(干城)같이 믿고 있는데, 다만 왼쪽 길이 막히고 끊어져 위무(威武)를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지금 진주가 적병의 공격을 받게 되어 정세가 심히 위급한데 본관의 수하에 비록 천으로 헤아리는 군사가 있기는 하지마는 저 같은 백발 서생은 군무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만약 단기(單騎)로라도 이곳에 오신다면 의병을 다 장군의 휘하에 드리고자 합니다. 생각건대, 좌우의 병사가 안팎으로 호응하여 사천(泗川)의 소수 왜적을 토벌하여 큰 진(鎭)인 진주를 보전해서 내지(內地)를 지키게 되는 것은 장군께서 발을 한 번 드는 데 달려 있으니, 좌ㆍ우도의 책임이 다르다는 말로 사양하지 마시고 종전에 결심하였듯이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따라 죽겠다던 뜻을 실현하도록 하십시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15일. 적병이 평양을 함락시키고 조정은 의주(義州)로 향하다. 몇 일 전에 적병이 대동강에 다가들자 그곳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 11일에 거가가 숙천(肅川)으로 가서 이덕형(李德馨)을 보내 요동(遼東)에 가서 위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중전(中殿)은 강계(江界)로,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각각 나누어 보내고, 세자에게 명해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원도로 가게 하였다. 거가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기성(箕城)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동에 치자(馳咨)하여 내부(內附)하기를 청하고 이어 의주(義州)에 도달했는데 시종하는 관원으로 따라간 자가 단지 수십 명에 불과하였다. 그때 중국 지방에서는, “조선이 왜를 향도한다.”는 헛말까지 나와 수도에까지 전해져서 병부(兵部)에서 차관(差官) 황응향(黃應陽) 등을 보내와 실정을 살펴보게 하였다. 임금이 그들을 용만관(龍灣館) 의주의 객사이다. 에서 접견하였는데, 담화하는 동안에 황응양이 왜적의 중[僧]인 현소(玄蘇) 등이 평양에서 본국의 예조에 보낸 글을 보고는 가슴을 두들기고 눈물을 쏟으면서 말하기를, “중국을 위해 대신 병화를 당하면서도 의롭다는 명성은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이 악명을 받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황응양이 사정을 퍽 자세하게 회보하여 명 나라 병부에서 강력히 상주(上奏)하여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사은사(謝恩使) 신점(申點)이 중국의 수도에서 곡소(哭訴)하고 병ㆍ예부 각 아문(衙門)에서 계속 상주하여 위급을 고하자, 중국 조정에서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으로 하여금 요동병 3천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하였다. 고사(考事)에 나온다.
○ 종실(宗室) 호성감(湖城監)을 양호(兩湖)로 파견하여 의병을 징집시키다. 호성감은 양호 땅에 도달하여 충의로운 내노(內奴)를 내놓아 군사로 하고 자진하여 근왕군에 나오는 자도 역시 허락하였다.
○ 좌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全州)로 나아가 진을 치고 의병을 불러 모았으며, 이어 본도의 여러 고을에 글을 보내 이르다.
대장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기 위한 것이다. 국가의 일이 이러한 극단에 이르렀으니 오늘의 소망은 오직 의병을 일으키는 데 있는데, 불러 모인 수효는 수백에 불과하다. 비록 강개(慷慨)에 찬 뜻이 당당하여 범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성세가 떨치지 않으니, 관군이 조력하는 것이 아니면 만전지계가 아닌 것 같다. 조전군(助戰軍)은 다소를 불구하고 단지 정예한 것을 택하고 전일 낙오한 사람을 극력 불러모아 충의로써 타일러 주야를 불문하고 급히 구원하러 보낼 것이다.
○ 전라 감사 이광(李洸)이 김수(金睟)와 더불어 전주로 도망해 돌아오다. 김수는 곧 함양(咸陽)으로 향하여 이어 거창에 도달하니, 그때 김성일(金誠一) 역시 본현에 머물러 있었다.
○ 성주(星州)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이 사방의 문에 봉명국(奉命國)이라고 써 붙이다.
○ 적장 청정(淸正)이 강원도를 지나 철령(鐵嶺)으로 쇄도하였는데, 철령 이전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함경 체찰사 김귀영(金貴榮)과 감사 유영립(柳永立)이 남병사(南兵使) 이 영(李榮)과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을 거느리고 도내의 기력이 왕성하거나 약한 남정(男丁) 5만여 명을 다 모아 가지고 철령을 지켰다. 선봉의 왜적이 연일 교전하다가 패하고 물러나자, 청정이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도달해서 당장에 선봉장을 목 베고서는 영을 내리기를, “한 번 북이 울리면 개미같이 달라 붙어라. 감히 뒤지는 자는 죽는다.” 하고는 곧 자신이 말에서 내려 검을 휘두르며 독전하니, 적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나서서 그 기세가 바람에 타오르는 불과 울려나는 우레 같았다.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김귀영 등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육진(六鎭)으로 향해 달아났다. 청정이 철령에서 이기고 함경도로 들어와 불태워 없애고 도둑질을 하는데, 그 죽이고 노략질하는 것의 참혹함이 다른 도의 몇 갑절이나 되었다.
○ 전라 병사 최원(崔遠)이 군사 2만여 명을 동원하여 본도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2천과 함께 근왕군으로 서울로 향하다.
○ 도원수(都元帥)가 팔도에 전한 격문은 다음과 같다.
군대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는 곧아야 씩씩해진다. 바야흐로 왜적을 토벌하는 계획을 넓히고 의가 병들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감히 근왕하는 일을 늦추겠는가. 무릇 우리 동지들은 각기 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신성한 임금이 계승하여 거듭 밝아 태평세월이 계속되어 누누이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의 은택이 젖어 있고, 음우(陰雨 위험한 일)에 앞서 선처하여서 수천 리 땅에 옥촉(玉燭 계절 따른 기후)이 고루 조정되어 2백 년 동안 금사발[金甌 국가의 계승된 왕실]에 흠이 없었으므로 장차 안으로는 태평하고 밖으로는 안정되기를 기대하였더니, 도리어 문관은 안일에 흐르고 무장은 장난으로 여기게 되었다. 준동하는 저 바다섬의 간악한 오랑캐는 사실 천지간의 추악한 종자로, 처음에는 중국에 감정을 품고서 하늘을 쏘는 활을 당기려고 하다가 끝내는 우리나라에 앙화를 전가시키고 감히 사람을 씹는 부리를 놀렸다. 요(堯) 임금을 보고 짖는 개가 진(秦)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격으로, 저녁 봉화가 겨우 한궁(漢宮)에 도달하였는데 요사한 독기는 이미 상령(商嶺)을 둘러쌌다. 장강(長江 양자강)의 험한 요새를 잃어버렸으니 진실로 군대의 율법이 엄하지 않은 때문이었고, 임금이 몽진하였으니 조정의 계획이 길하지 않았음을 넉넉히 볼 수 있다. 종묘와 사직이 재로 타버리고 조정과 저자가 변천하였으며, 심한 독이 여염에 두루 미쳤고 더러운 소문이 원근에 뚜렷이 드러났다. 귀신과 사람의 분노가 이미 극도에 도달하였으니, 군부(君父)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는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러 성이 흙같이 무너지는데 오직 성문을 열고 맞이해 절할 줄만 알고 뭇 장수들은 담이 떨어졌으니 누가 용기를 내어 먼저 나설 수 있겠는가. 우리가 고수하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저들이 멀리 몰고 들어오는 위세를 도와 주었으니, 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찌 예전에 알던 사람을 기다릴 것인가. 만일 안진경(顔眞卿)이 다시 살아난다면 마땅히 무슨 꼴을 할 것인가. 하물며 지금 저 왜적들은 미쳐 날뛰고 교만하고 게을러져 있으며 들떠 붙어 살고 외로이 매달려 있다. 힘은 이미 싸우고 공격하는 데 지쳐버렸으니 그 기세는 반드시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고, 욕망은 오직 약탈에만 있으니 뜻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실(漢室)을 생각하는 이들은 앞다투어 노래를 바치고 적에게 붙었던 자도 또한 대부분 헤어졌으니, 이미 죽을 길에 놓인 도적이 되어버려 구차하게 살아날 꾀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음에랴. 세성(歲星 5성의 하나, 목성(木星))이 기(箕 별자리 이름)의 분야를 지키니 복덕(福德)이 내릴 징조가 있음을 알겠고, 큰 하늘이 송(宋)을 도우니 어찌 나라를 회복하는 데 기약이 없으랴. 지금 나는 외람되이 추곡(推轂 대장에 임명하는 의식)하는 은혜를 받들고 흉적을 제거하는 책임을 전적으로 위임 받아 여러 도의 도순찰사를 겸임하여 군사 3천을 거느리고 이달 10일에 행재소를 배사(拜辭)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서 수레를 뛰어 넘던 날랜 사람들은 태반이 장교로 편입되었고, 관서의 장수를 넘어뜨리던 인재가 다 부오에 예속되어 있어 3군의 사기가 점차 진작되고 만민의 마음이 약간 소생했다. 이는 진실로 한 나라의 신자(臣子)가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몸을 잊고 순국할 때인 것이다. 생각건대,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들은 혹은 지방의 전권을 장악하고 혹은 병권을 위임 받아 한 도에서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어찌 막고 보호하는 정성을 잊을 것인가. 서방(西方)에 미인(美人)을 바라볼 때에 드는 생각이 눈물을 뿌리는 아픔에 간절할 것이다. 의당 범이나 사자 같은 군대를 거느리고 뱀이나 돼지 같은 무리를 함께 쓸어내야 할 것이다. 수미(首尾)로 협공하여 번갈아 기각(掎角 두 편에서 서로 잡아당겨 협공으로 포획함)의 태세를 이루고 동서로 함께 진격하여 입술과 이와 같이 지원한다면, 구멍에 든 개미가 된 격이니 도망칠 수 있겠는가. 솥 안에 든 물고기가 된 형편이니 뭉글어뜨릴 것이다. 아래 옷을 찢어 발을 싸매고서라도 어찌 천리길의 수고를 꺼릴 것인가. 머리를 풀어 헤친 채 갓을 매어 쓰고서라도 한 집안을 구하는 데에 서둘러야 할 것이다. 각기 세상에 보기 드문 은혜를 갚고 힘써 비상한 공훈을 세울 것이니, 힘쓸지어다. 시기를 놓치지 말도록 하라. 때는 두 번 얻기 어려우니. 운운.
그때 김명원(金命元)이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흩어진 군사들을 거두어 순안(順安)에서 왜적을 막고 있었다.
○ 요동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왜적의 변란에 관한 것으로 준분수도(準分守道)의 자문(咨文)에, “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우연히 본 바에 의하면, 왜왕 관백(關白)은 이미 그 나라 사람에게 사살되었다. 그래서 이 글을 전하는 것으로, 본사는 조선 국왕이 수고스러운 대로 왜의 인심이 흩어진 기회를 이용하여 관원들을 독려하고 통솔해서 힘써 회복을 꾀하도록 바란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니, 자문을 예조에 내리기를, “수길은 유구(琉球) 사람에게 사살되어서 이것은 다 소문이다. 평양에서 기병 전투를 할 때 행장(行長)ㆍ의지(義智)ㆍ조신(凋信)이 장수가 되었다. 운운.” 하였다.
○ 좌수영 영리(左水營營吏)의 고목(告目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수사(水使)는 지난 5월 29일 영을 떠나 곧장 남해(南海) 경내의 노량(露梁)으로 가서 경상 우수사와 만났습니다. 같은 날 사천(泗川) 선창(船滄)의 왜인 4백여 명이 산에 올라 진을 치고 흰 기치(旗幟)를 세웠고, 누각 같은 적선이 13척이었는데 종일 접전하여 그 배들을 다 격파하였습니다. 화살에 맞고 죽은 왜적이 부지기수였고, 1급(級)을 목 베었습니다. 이달 2일에 당포(唐浦) 선창의 왜인 3백여 명이 포구에 들어와 분탕질하고 험준한 곳에 기대서 포를 쏘는데 왜선 9척의 크기가 판자집 같았습니다. 그중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層樓)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층루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그를 목 베었고, 또 9급을 목 베고 그 배들을 깡그리 격파하였으며, 화살을 맞아 죽은 자들 역시 많았습니다. 5일에는 고성(固城)의 당항포(唐項浦)에 왜의 큰 배가 다수 숨어서 정박하고 있으므로 곧장 그곳으로 향하였고 본도 우수사가 뒤이어 구원하려 달려와서 그와 함께 같이 그 포구로 갔는데, 왜의 큰 배 12척, 작은 배 22척이 바다에 분산되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한 척의 큰 배에는 층루가 우뚝 솟아 있고 그 누 위에는 왜장이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화살에 맞아 추락하매 또 그 자를 목 베었습니다. 그 배에서 얻은 분군(分軍)한 서류 7축(軸)에 기재된 왜인의 수효는 5천여 명인데 각각 자기 이름 밑에 피로 물들인 서명이 있으니, 틀림없이 삽혈동맹(歃血同盟)일 것입니다. 그 배를 다 격파하고 43급을 목 베었습니다. 8일에는 거제 땅 율포(栗浦) 앞 바다에서 왜의 큰 배 6척을 추격 나포하고 또 37급을 목 베었으니 도합 89급을 목 베었습니다. 본도 우수사와 경상 우수사가 합해서 2백여 급을 목 베었고, 가덕(加德)ㆍ천성(天城)ㆍ몰운대(沒雲臺) 등지를 연 이틀 동안 샅샅이 뒤졌으나 전혀 왜적의 종적이 없었습니다. 10일에 영에 돌아왔을 때에야 겨우 아뢰었습니다. ” 하였다.
17일. 손인갑(孫仁甲)이 사원동(蛇院洞)성주(星州) 남쪽 20리에 있다. 에 복병을 매설했다가 불리하여 퇴각하고, 박응성(朴應星)이 용사(勇士) 장호(張浩)와 같이 적군에 달려가 죽다. 처음에 성주(星州)와 현풍(玄風)의 왜적이 강줄기를 따라 연달아 널리 목책(木柵)을 시설해서 짐바리를 운반하다 떠내려보냈다. 그러자 손인갑이 말하기를, “사원동ㆍ안언(安彦) 등지에 복병을 매설하면 되겠다.” 하고, 마침내 사군(射軍) 수백을 골라서 저녁을 이용해 떠났다. 김면(金沔)에게 지원군을 청했으나 김면 휘하의 장병들이 대부분 가려 하지 않자, 김면이 사람을 시켜 복병 작전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러나 손인갑이 듣지 않고 사동(蛇洞) 길에다 복병을 매설하였다. 이날 왜적 3백여 명이 성주에서부터 짐을 운반하다 흘러 내려 왔는데, 손인갑이 약정하기를, “주장이 포 쏘기를 기다려서 발사하라.” 하였다. 유격장 박응성이 약정을 어기고 돌출했는데 왜적의 무리가 많고 정예해서 아군이 패배하였다. 박응성 등은 힘을 내어 싸우다 죽었다. 박응성은 맨 먼저 응모하여 용감하게 힘내어 싸웠고 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적을 경시하다가 죽으니 전군이 그를 아까워 하였다. 이 거사에 있어서 손인갑은 매복할 곳은 많은데 사군(射軍)이 적어서 김면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김면이 구원해 주지 않아 일을 그르치게 되었으므로 자못 불만스런 생각을 갖게 되었다.
19일. 김면(金沔)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가다. 그때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거창에 있었는데,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에 있던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장차 거창으로 마구 들어올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합천(陜川)과 고령(高靈)의 군대에게 영을 내려 우마현(牛馬峴)을 막으러 오게 하였다.
손인갑이 그 영을 듣고 곧 행장을 차리자, 정인홍이 말하기를, “금산의 왜적이 급하기는 하나 무계(茂溪)의 왜적 역시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된다. 지금 만약 군사를 철수하여 그곳으로 옮겨 간다면 고령과 합천은 장차 왜적의 소굴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가서 김공의 거동을 탐지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가 만약 군사를 끌고 돌아오면 우리는 움직여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때 초유사의 전령을 가진 자가 금산의 진에서 나와 그것을 김면에게 내보이자, 김면이 답서를 쓰기를, “거창 현감(居昌縣監)이 문서로 운운한 것은 손인갑이 여러 사람의 의론을 어기고 복병을 매설했다가 패전하여 왜적이 반드시 충돌해 올 것이므로 사세가 돌아가기 어렵소.” 하니, 손인갑이 대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군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해 주지 않고 나한테 허물을 돌리니 이것이 과연 군자의 생각인가. 그가 가지 않는 바에는 나는 불가불 초유사의 명령에 따라야 하겠다.” 하고, 곧 군사를 이끌고 권빈역(勸賓驛)까지 가서 말에 먹이를 먹이는데 그때 김면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곳을 달려 지나므로 손인갑이 더욱 그를 의심하였다. 그때 마침 초유사의 전령이 또 와서 영을 내리기를 오지 말라고 하여, 손인갑은 마침내 돌아와 버리고 정인홍이 혼자서 김성일을 가 만나보고 돌아왔다. 김면은 거창으로 간 후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정인홍ㆍ김면 두 사람의 군사가 두 갈래로 갈라져, 김면은 거창을 진수(鎭守)해서 우마현(牛馬峴)을 방어하고 정인홍은 고령을 진수해서 성주와 무계의 왜적을 방어하였다. 전치원(全致遠)과 이대기(李大期)는 초계(草溪)에 진을 치고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 강우(江右) 일대가 그 덕분으로 보전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낙동강에서 왜적의 배가 위에서부터 흘러 내려오다가 두 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놓고 내려갔는데, 곽재우가 배를 고스란히 나포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그 배에 실려있는 것은 다 궁중의 보물들이었는데, 태조가 착용했던 목화[靴]도 들어 있었다. 곧 그 보물들을 초유사에게 보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성주의 주부(主簿) 배설(裵楔)이 본 주의 가장(假將)이 되어 군사 수백 명을 모아 복병을 매설하여 왜적의 통로를 차단하고 목 벤 수효가 퍽 많아 포상되어 합천 군수로 승진하였다. 그의 부친 전 군수 배덕문(裵德文) 역시 왜적에 붙좇은 중[僧] 찬희(贊熙)를 잡아 목 베어 상으로 판사(判事)의 직을 받았다. 그때 찬희는 성주의 왜적에 붙좇아 들어가서 판관(判官)이라 가칭하고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꾀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곽재우가 왜적 안국사(安國寺)와 정진(鼎津)으로부터 강을 격해서 서로 맞서 있으므로, 왜적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강줄기를 따라 올라갔다. 곽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좇아 올라가 성주 안언 역로(安彦驛路)에 이르러 정병을 거느리고 가만히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몇 급의 목만을 얻어가지고 퇴각하였다.
○ 곽재우는 김수(金睟)가 도(道)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왜적이 왔을 때는 조금도 방어할 계획이 없었고 근왕하기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몰랐으니, 우리 도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여 감히 얼굴을 들고 다시 온 것이구나. 나는 군사를 옮겨 먼저 그를 쳐야 하겠다.” 하였는데, 김성일이 준책해서 그만두고 마침내 김수에게 아래와 같이 격문을 보냈다.
가슴 아프다. 우리 온 도를 무너져 흩어지게 만들었고 우리 서울을 함락하게 하였으며, 우리 성상을 파천하게 만들고 우리 온 나라 백성들의 간과 골을 땅바닥에 으깨지게 만든 것은 다 네가 한 것이다. 너의 죄악이 천지에 가득 찼는데도 네가 스스로 모른다면 이것은 우매한 인간이다. 네가 과연 우매한 인간인가. 너는 우매한 인간이 아니라, 재앙과 변란을 양성(釀成)하여 이 같은 극단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니, 온 천하의 토끼털[필(筆)]을 다 모지라지게 해도 네 죄를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고, 온 천하의 대[竹 옛날에는 대를 엮어 종이를 대신하였음]를 다 없앤다 해도 네 악을 다 써내기에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모두들, 기한을 정해서 성을 쌓게 해서 백성들을 학대한 것이 혹심했던 것을 너의 죄라고 하고, 군사를 절제(節制)하는 데 방법이 없어서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한 것을 너의 죄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내지(內地)에 성을 쌓는 것은 비록 인심을 잃었다고는 하나 마음은 적을 방어하는 데 있었은즉 그것은 네 죄가 아니다. 군사를 절제하는 데 전도(顚倒)한 것은 비록 군사의 기밀을 패하게 하였다고는 하나 재주가 병란을 대응하는 데 모자라서 그랬은즉 역시 너의 죄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너를 죄 준다면 어떻게 네 마음을 굴복시키겠느냐. 그러나 네 죄가 하나 있으니, 왜적을 환영한 일이다. 왜적을 환영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온 도의 정병과 용사 5, 6백 명을 뽑아 인솔하고서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먼저 밀양(密陽)으로 달아났고, 밀양이 패하게 되자 또 가야(伽倻)로 도망쳤으며, 왜적이 상주(尙州)를 지나가자 거창(居昌)으로 물러나 숨었다.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치도록 한 적이 없어 마침내 왜적으로 하여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것같이 하여, 종내는 열흘 안에 수도가 함락되게 하였다. 자기 몸 붙일 곳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근왕을 칭탁하고 도망쳐 운봉(雲峯)을 넘어 갔으니,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느냐. 하늘을 속일 수 있겠느냐. 네 죄의 둘째가 있으니, 패전을 기뻐하는 것이다. 패전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늙은 겁장이 조대곤(曹大坤)은 본래 책망할 게 못 된다. 그러나 한 도의 원수(元帥)로 김해(金海)의 함락을 구해내지 못한데다가 왜적을 보기도 전에 먼저 있던 곳[主鎭]을 버리고 정진(鼎津)으로 퇴각해서 진을 쳤고, 정진은 왜적이 있는 곳에서 몇 백 리나 떨어져 있었는데 헛되이 놀라 무너져 회산서원(晦山書院)으로 도망쳐 들어가 마침내 여러 진(陣)과 각 읍들이 풍문만을 듣고 무너져 도망치게 만들었은즉, 조대곤의 죄는 주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도 너는 그 자를 목 베어 내걸어 사람들의 마음을 경각시키지 않았으니, 너는 과연 성(城)을 버리고 패전한 군율을 모르는가. 네 죄의 셋째가 있으니, 나라의 은혜를 잊은 것이다. 은혜를 잊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조상은 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고 하니, 녹도 후했고 은총 또한 융숭하였다. 그러니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휴척(休戚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사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 만약 충의의 기운을 분발하고 강개한 마음을 발동하여 자신이 사졸에 앞서 죽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무릇 우리 영남의 2 백여 년을 두고 배양해 온 사람들이 어찌 몸을 잊고 죽음을 무릅써서 나라의 치욕을 씻어버리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너는 군부(君父)의 파천을 기뻐하고 수도의 함락을 달갑게 여겼으니, 너는 과연 군부의 곤란을 서둘러 구해낼 줄 모르는 자인가. 네 죄의 넷째가 있으니, 불효다. 불효란 무엇을 말하는가? 듣건대, 네 아비는 비록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참으로 강개하고 충의로운 선비이었다. 만약 네 아비로 하여금 지금의 변란을 당하게 했다면, 반드시 의병을 권장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았을 것이다. 땅속에 들어간 영령이 생각건대, 반드시 어두운 가운데에서 너의 한 짓을 가슴 아파하고 너의 불궤(不軌)함을 분해하며, “임금을 무시하고 어버이를 잊은 일이 내 자식한테서 나올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하고 말할 것이다. 네 죄의 다섯째가 있으니, 세상을 속인 것이다. 세상을 속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조정에 출사할 때 조정에서는 강과경직(剛果耿直)하다고 지목하였고, 영남에 절(節)을 갖고 내려왔을 때 영남에서는 너를 총명재예(聰明才藝)하다고 일컬었다. 강과 경직하고 총명 재예한 사람이 정말로 절충(折衝)하고 어모(禦侮)할 마음이 있었다면 험준한 곳에 거점을 두고 견고하게 진지를 지켜서 멀리 몰고 들어오는 적을 막는 것이 고리를 굴리는 것[轉環]같이 쉬웠을 터이다. 그런데 너는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서 한 가지 계책도 획책하지 않고 한 가지 모의도 시행하는 일이 없이 왜적이 도륙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은즉, 전일의 강과와 재예는 좋은 작위를 낚으려는 것이었으나 오늘의 우매한듯 겁내는듯 하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이냐. 네 죄의 여섯째가 있으니, 무치(無恥)한 것이다. 무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너는 영남을 왜적에게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가서 근왕군에 몸을 기탁했다가, 근왕군이 용인(龍仁)에 도달했을 때 왜적 6명을 보고는 군량을 버리고 군기(軍器)를 내던지고 금관자(金貫子)를 잃어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것은 미리 금관자를 버리고 군사 중에 섞여 왜적으로 하여금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차하게나마 살아 보자는 마음은 평소에 정해졌던 것이고, 구차하게 살아나는 꾀는 못하는 짓이 없었던 것이다. 네 죄의 일곱째가 있으니, 남의 성공을 꺼리는 것이다. 성공을 꺼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가 도내에 있으면서 네가 왜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마음이 저상해서, 앞장서서 적에게 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초유사가 충성심을 격발하고 의기(義氣)를 고무하여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만들어 동지들이 목숨을 내놓게 된 덕분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좀 가라앉고 성세가 자연 커져서 지역 내의 왜적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거가를 받들어 돌아오는 날을 가리키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었다. 그런데 너는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고서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하고 지휘권을 발동해서 의병들로 하여금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을 갖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다 이룩하게 된 공을 망치게 만들었은즉, 전의 악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하더라도 지금의 죄는 용서할 수 없다. 아아! 북쪽 하늘은 멀고 도로는 막혀서 왕법(王法)이 시행되지 않아 네 목이 아직도 온전한 것이다. 너의 가짜 기운과 떠도는 혼이 비록 천지 사이에서 보고 숨쉬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는 사실 머리 없는 시체다. 네가 만약 신하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네 군관을 시켜 네 머리를 베어 버리도록 하여 천하와 후세에 사과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 머리를 베어서 귀신과 사람의 분을 풀도록 할 것이다. 너는 알아 두라.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당초에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사의 위세가 날로 성해 가고 왜적을 죽인 것이 퍽 많았다. 우병사 조대곤이 그의 성공을 꺼려 계사(啓辭) 안에 의심하는 말을 써 넣었고 감사 김수(金睟) 역시 계문 안에 불측한 말을 꾸며 넣었다. 이에 이르러 곽재우 역시 앞의 격문에 든 김수의 죄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경상도 의령(宜寧)의 유학(幼學) 신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백 차례 큰절을 하고 주상전하께 말씀을 드리나이다. 엎드려 듣건대, 수도가 함락되고 거가 파천했다 하니, 북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지고 통곡을 억제하지 못하나이다. 왜적이 오자 씩씩한 사나이와 건장한 장수가 누구나 다 빠짐없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난 것은 무기가 견고하고 예리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아서가 아니며, 단지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져서 흙같이 무너지는 탈이 있었기 때문이었나이다. 대저 사람들의 마음을 흩어지게 한 자는 바로 김수입니다. 김수는 두 차례에 걸쳐 이 도의 감사를 지냈는데 정치를 하는 것이 맹호보다 더 포학하여 성군의 은택이 막혀서 내려오지 않아 흙같이 무너질 형세가 이미 일이 생기기 전에 나타났습니다. 왜적이 오기에 이르러서는 자신이 먼저 퇴각해 숨어버리고 온 도의 수장(守將)으로 하여금 한 번도 무기를 맞대고 싸우지 않고 성문을 열고 큰 적을 맞아 들여 혹시나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게 만든 것이 마치 저 왜적이 우리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으니, 김수의 죄는 비록 머리털을 잡아쥐고서 주살한다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신이 김수에게 격문을 보내 이르기를, “가슴 아프다. 운운. 너는 알아 두라.” 하였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혹 도주(道主)의 과오를 말한 것을 잘못한 짓이라고도 합니다. 평상시 무사한 날에 있어서는 물론 자기 도주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마는, 이같이 위급하여 존망이 우려되는 때에 만약 다들 잠자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도주가 있는 것만 알고 전하가 계신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경상도 전체의 모든 사람이 전하의 신하라면 어찌 김수의 죄를 용인하고 이 나라가 망해가는 때에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송(宋) 나라의 고종(高宗)이 호전(胡銓)의 상소를 들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천하 후세의 원한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꼴 베고 나무하는 자의 말이라도 채납하여 주신다면 중흥의 공은 곧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니, 종묘 사직이 매우 다행할 것이고 신민들이 심히 다행할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노둔(駑鈍)하여 강호(江湖)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이제 왜적의 변을 당해 종료 사직이 위태로우니, 스스로 조상 3대에 조정에서 벼슬 한 일을 생각할 때 신비한 모의와 계략은 비록 자방(子房 한 고조를 도운 군략가인 장량(張良))에 미치지 못하나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신이 정녕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 번 죽을 각오로 4월 22일에 의병을 모집하고 일어나서 왜적을 막아 왔던 것으로, 다행히 전하의 위령(威靈)에 힘입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힘을 다해서 죽은 후에야 그만둘 것을 마음으로 맹서하거니와 이 하찮은 신의 심정은 전연 딴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신의 광기와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신의 어리석은 충정을 살피소서.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의령의 의병장 곽재우가 온 도의 의병 여러 군자에게 널리 고한다. 김수는 나라를 망하게 한 큰 역적이다. 《춘추(春秋)》의 대의를 가지고 논하자면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를 주살할 수 있다. 따지는 사람은, 혹 도주(道主)의 과오조차도 말할 수 없는 노릇인데 하물며 그 목을 베겠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나, 이것은 단지 도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임금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왜적을 영접하여 서울에 들여놓고 임금으로 하여금 파천하게 한 자를 도주라고 해서 되겠는가. 수수 방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는 자를 신하라고 해서 되겠는가. 온 도의 사람들이 다 김수의 신하가 된다면 김수의 죄를 말하거나 김수의 머리를 베어서는 안 되겠지만, 온 도의 사람이 주상 전하의 신하 아닌 자가 없다면 나라를 망하게 한 역적을 사람들이 다 죽일 수 있고 패망을 기뻐하는 간악한 인간을 다들 목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은 혹 김수를 목 베는 것이 일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나라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역적을 치면 그것이 이른바 일의 체통이다. 김수가 일의 체통을 멸실한 지 오래되니 일의 체통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것은 본래 따져서는 안 될 것이나, 먼저 간악한 인간을 목 베어 군대를 돌아가게 하라는 조서가 없게 만든 연후에 거가를 받들어 돌아와 중흥의 공을 세운다면 그것은 일의 체통에 크게 어울린다. 엎드려 원하건대, 의병으로 나선 여러 군자들은 격문을 자세히 보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김수가 있는 곳에 모여 그 목을 베어 행재소에 바치라. 그렇게 하면 공(功)이 수길(秀吉)의 목을 바치는 것보다 갑절이 될 것이니 의사들은 이 점을 알아두라. 혹시 수령들이 나라가 망할 것과 임금에 대한 대의(大義)를 생각하지 않고 도적 김수에 부회(傅會)하여 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의거를 못하게 한다면 김수와 함께 같이 주살할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그때 김 수는 거창으로부터 산음(山陰)으로 옮겨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위의 격문을 보게 되어 분하고 놀라움을 견디지 못했다. 김경근(金景謹)이 또 치고(馳告)하기를, “곽재우가 영공(令公)을 해치려고 대군을 거느리고 오니 속히 피해야 하오,” 하여, 김수가 그날로 밤중에 함양으로 달려가 군수를 시켜 성을 지키고 계엄을 펴고 봉화(烽火)를 늘어놓고 기다리게 하고, 또 막하의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가 오면 응전하여 이를 방어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이어 군관 김경눌(金景訥)을 시켜 곽재우에게 격문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격문에 이르기를,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곽재우야, 너는 네가 역적임을 아느냐. 의병을 일으킨다고 가탁(假托)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실패하고 탄로가 나서 억만 년 후에까지 그 추악한 냄새를 남긴 자가 동탁(董卓)의 역적질이 아니었느냐. 옛 기록에 이르기를, “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하였고, 또, “대부를 독단적으로 죽이지 말라.” 하였은즉, 서열이 높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비록 죽어야 할 법을 범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임금의 생살지권(生殺之權)을 함부로 가하지 않는 것은 중신(重臣)을 대우하는 도리인 것이다. 본도의 순찰사는 일찍이 육경(六卿)을 지내고 두 차례나 옥절(玉節)을 잡았으며, 하물며 한 도의 도순찰사의 직책을 받았음에랴. 설사 순찰사가 직접 큰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임금으로부터 그 죄를 물어야 하지 조정에서도 처치할 것이 아닌데 하물며 본도의 사람이 그 어찌 법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너 역적이 난리의 틈을 타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전한 것은 의거를 가탁하여 불궤한 짓을 음모하다가 흉악한 모략이 깨져서 탄로날 때를 위해 미리 자기를 보전하기 위한 계략이었음에 불과하다. 지금 왜적의 기세가 굳세고 거침없어 이미 수도를 함락시키고 거가가 파천하였으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강개한 뜻을 가진 자라면 비록 녹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창을 베고 자며 적개심으로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할 것이어늘 하물며 본도와 같이 병화를 면한 고을 사람들이겠는가. 낙동강 동쪽은 몇 번이나 함락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근처의 주현(州縣)이 단지 7, 8군데가 남았을 뿐이다. 소수의 왜적이 모여서 주둔하고 있는데 지금 고성ㆍ성주ㆍ금산(金山)에 버티고 있으며, 또 금산(錦山)을 함락시키고 장차 거창을 함락시키려 하고 있으니, 나머지 7, 8개 읍도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기식(氣息)이 엄엄(奄奄)하여 약이 넘어가지 않고 호흡이 불통하고 혈색이 단지 입술에만 남아 있어 살 길은 10분의 1밖에 없는 것과도 같다. 너 역적의 마음이 만약에 의기에 격동되어 나왔다면 마땅히 순찰사ㆍ초유사와 김송암(金松庵 김면)ㆍ정내암(鄭箂嵒 정인홍) 두 선생과 힘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느라 여가가 없을 것인데, 오직 반역할 마음만으로 먼저 한 도의 대장을 제거하려고 죄를 늘어놓고 격문을 전해 그로 하여금 정벌하는 책모에 전심하지 못하게 하여, 남아 있는 7, 8개의 읍이 장차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이 횡행하는 데 직면하여 자매와 처첩이 깡그리 사로잡혀 가고 부자 형제가 다 어육이 되어 비참하게 도륙되었으니 부모 처자가 있는 자들이 어찌 네 몸뚱아리를 난도질하고 네 살을 씹으려 들지 않겠느냐. 너 역적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은 전후로 낭패(狼狽)하여 진퇴유곡으로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너 역적이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네 마음속에 작정하기로는, 국가가 공허할 때에 무뢰한 무리들을 많이 모아서 개인적인 은혜로 이들을 묶어 심복을 만들어 작은 왜적을 약탈하여 군의 성세를 크게 떨쳐 불행히 일이 가라앉으면 일대(一代)의 원훈(元勳)이 될 기회를 잃지 않을 것이고, 만약 요행히 나라가 망하면 또 새 왕조를 창립하는 대공을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화심(禍心)을 품고 의병을 가탁하여 초계(草溪)의 관곡(官穀)을 점취하고 진주(晉州)의 전세(田稅)를 탈취하는 등 공공연히 도적질을 자행했다. 네 도당 정대성(鄭大成)이 주살될 때, 순찰사가 역적인 네가 장수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의심하고 막하에 자세히 캐어 물었었는데, 만약 안세희(安世熙)ㆍ김경눌(金景訥) 두 사람이 네가 역적이 아님을 힘써 진술하지 않았더라면 너의 머리와 발은 벌써 각각 따로 떨어졌을 것이고, 너 역적의 혼 역시 동탁과 지하에서 뉘우치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는 순찰사는 한 도의 방백에 불과했고, 방백이 거느린 것은 5, 6인에 불과하여서, 절제(節制 지휘권)가 병사와 수사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왜란이 일어나 버린 후에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부터 밀양으로 달려갔고, 밀양ㆍ청도(淸道) 등 5, 6개 지방이 2, 3일 내에 연달아 함락되어 왜적이 성주를 범하게 되자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하자 달려서 지례(知禮)로 향했다. 도중에 성주 가천리(伽川里)를 지나 마을 가에 말을 멈추고 유생 등 4, 5인을 초치하여 의병을 일으킬 뜻을 타일러 주고서는 가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지례까지 갔는데, 그때에 비로소 도순찰사(都巡察使)의 임명을 받았으나 거느린 것이 역시 막하의 사람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도주한 패군 이유검(李惟儉)을 초치하여 목 베어 장대에 내걸고 죄를 청했고, 김해의 조대곤이 백의종군하는 것을 구원해 주지 않았으나 조대곤은 금산에서 독전(督戰)하여 수백 급을 목 베었고, 여러 읍에 장수를 정해서 포로와 수급을 많이 올리게 하였으니, 이것들은 다 순찰사의 절제가 탁월했음에 연유한 것이다. 이제 왜적이 이미 고개를 넘어갔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어 버리자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겠다는 뜻을 행재소에 치계(馳啓)하고 겨우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雲峯)까지 갔는데, 이어 초유사가 전라 순찰사가 공주로부터 돌아 내려오고 전주에서는 아직 군사를 조달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또 초유사의 강력한 만류에 따라 돌아와 안음(安陰)에 머물렀다. 급히 와서 구원하라는 교지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마음에 맹서하여 홀로 1백 명을 거느리고 수원까지 나가서 머물렀는데, 도중에서 소수의 왜적들을 만났으나 목 베어 죽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은 퇴각해 가 버렸다. 그 이튿날에 이르러 왜적의 무리가 진으로 돌격해 왔는데 양호의 순찰사들은 다 이미 달아나 버렸고 본도의 순찰사 막하의 장병은 이미 전투에 나가게 했으므로 단지 수삼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으나, 조금도 겁을 내지 않고 차고 있던 검을 뽑아서 퇴각하는 장수를 목 베이려고까지 하며 혼자서 후퇴하는 군대의 뒤를 따라가 우리 군대를 손상 없이 온전히 돌려왔으니 이런 것들이 충분(忠憤)의 분발이 아니겠느냐. 너 역적이 비록 살해하려고 가슴속의 흉악한 모략을 실제로 자행하기는 하나, 조정의 명령이 아직 팔방에 행해지고 대장의 명령 역시 한 도에 행해지고 있다. 한 도와 팔방의 사람들이 다 고개를 숙여 너 역적의 수하에 복종하고 순찰사가 해를 입는 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극성스러운 왜적이 충돌해 오던 초기에 큰 진(鎭)을 연속하여 함락시키고 분탕하고 도륙하였으므로 태평시대의 백성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흩어졌으니 장수된 자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수풀을 찍듯[樧] 무인지경에 들어가듯 곧장 찌르고 유린해 들어와 도성에 마구 들어왔으니 이것은 순찰사가 절제하지 못한 소치는 아니다. 너 역적이 비록 ‘죄를 씌우려면 어찌 말 없는 것을 근심하랴’ 하여 감히 흉악 처참한 일을 하고 이미 막하의 사람들에게 격문을 전해 자객(刺客)의 일을 하도록 위협하였으나, 순찰사는 미치광이의 말로 버려 두고 일소에 부쳤을 따름이다. 너 역적은 또 순찰사에게 격문을 냈는데 거기에 지적한 말을 보니 다 거짓되고 사실이 없으나, 그 가운데 충의기절(忠義氣節)로 순찰사의 선인(先人)에 허락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천리(天理)가 민멸(民滅)하지 않은 곳이라 이를 수 있다. 옛부터 지금까지 충의기절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때에 의를 제창하고 근왕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바가 한결같이 정대하고 거짓 없는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남이 이간하지 못하고 행하는 일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다. 송조(宋朝)의 여러 충성스러운 신하에 비길 인물은 당대의 김ㆍ정 두 선생이다. 너 역적은 본래 볼 만한 행실이 없었으면서도 의병을 칭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몰래 꾸몄고, 도당과 우익(羽翼)은 다 음험 무상하고 흉악 무도한 사람들인즉 지금이 흉악하고 참혹한 말은 너 역적만이 한 짓이 아니다. 네가 반역한 상황을 순찰사가 행조(行朝)에 치계하였고, 곰과 범 같은 장수와, 산을 뽑아낼 인재가 다 순찰사의 막하에서 서로 다투어 너를 잡아오겠다고 자청하고, 가슴 아파하지 않는 이가 없어 격문을 내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원문(轅門)에 묶어 오게 하여 불궤한 너를 효시(梟示)하자 한다. 네가 지금 와서 항복하면 멸족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니 길흉 화복 사이에서 너 역적 도당은 각각 거취를 살펴라. 또 너 역적이 평소에 행한 패역 무도한 정상은 말할 수는 있겠으나 말하면 추악해지니 잠시 내버려두고 거론하지 않는다. 잘 알아 두어라.
○ 경상도 순찰사 막하의 김경로(金敬老) 등이 곽 의사의 진중에 격문을 내어 다음과 같이 이르다.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전한다. 무릇 천하의 일 중에 그 기미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지혜로운 자라도 혹 모르지마는,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지극히 우매하다 하더라도 모르는 자가 없다. 이제 곽재우의 평소의 패악한 행실과, 기회를 이용하여 흉악한 짓을 자행하는 정상은 명백하여 보기 쉬우니 지혜로운 자를 기다린 연후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내의 사람들이 혹 다 알지 못해서 같이 도당에 들어가 함께 무도한 지경에 빠졌으니 남 몰래 제군을 아깝게 생각하는 터이다. 잠시 그중에서 여럿이 다 아는 것을 들어서 말할 터이니 제공(諸公)은 자세히 듣고 그 정상을 알아서 거취를 정하고 향배를 결정하라. 곽재우는 본래 탐욕스럽고 포악한 사람으로 부모의 세도를 믿어 오로지 할경(割耕 남의 밭을 침범해서 자기 농사를 짓는 일)을 일삼고 남의 소와 말을 빼앗으며, 그가 사귀는 것은 다 흉악한 이지(李旨) 같은 도배(徒輩)들인즉 그 마음이 바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덕수(文德粹)가 토주(土主)를 모략하여 죽이고 방백을 질책해 욕하며 병사를 고소한 것은 다 곽재우가 도와 주지 않은 것이 없은즉 그 마음의 음흉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왜적의 변란이 생긴 뒤 의병에 가탁하여 무뢰한 무리를 꾀어 모아서 먼저 초계의 창고를 파괴하고 군량ㆍ청밀(淸蜜) 및 군기(軍器)ㆍ잡물을 전부 훔쳐 갔으며, 또 의령현 창고의 곡식을 약탈하고 또 진주의 전세(田稅) 4백여 석을 개인 창고에 옮겨 넣고서, 인근의 무뢰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은혜를 베푸는 거리로 삼았다. 그리하여 왜적을 쫓아내기 전에 흉계를 꾸며 표면으로는 왜적을 치는 것으로 보이고 속으로는 신하 노릇 하지 않을 모략을 간직하고 있었다. 먼저 방백을 제거하려고 군현(郡縣)에 격문을 전하고 읍재(邑宰)를 모략을 써서 죽여 위아래의 인민들을 공갈하고 말하기를, “방백은 백성을 독촉하여 성을 쌓느라고 생령(生靈)을 못살게 굴었고 방어를 하지 않아 왜적으로 하여금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해할 것이다.” 하니 멍청하고 우매한 백성들과 강(講)에 낙방한 유생(儒生)들은 날로 흉악하고 패란한 술수 속에 빠져 들어감을 모르고 충의의 고장으로 하여금 난폭한 곳으로 변하게 만들어 장차 온 도를 옥석이 함께 타게[俱焚] 하려고 하니, 천년 후에까지 악명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제공이 깊이 부끄러워 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또 곽재우가 애당초 거병한 것이 진정한 의거였던가. 만약 그것이 의거였다면 왜적이 막 성할 때에 직면하여서는 자기의 사적인 유감을 버리고 왜적 토벌에 전심하여 생령을 편안해지도록 구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한 것에는 힘쓰지 않고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고 윗사람을 무시하는 계략을 행했으니, 이 점으로 해서 곽재우의 마음 먹음을 사람들이 다 의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제공이 유독 그를 의심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이노(李魯)가 마음 쓰는 것은 천고에 찾아볼 수 없이 악한데 곽재우는 그의 재물을 탐내 그의 딸을 데려다 첩을 삼았으니, 곽재우의 마음 쓰는 것이 실로 개돼지 같아서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자라면 멀리서 바라보고는 되돌아 가 버리고 더럽혀질까 겁낼 터인데, 제공은 다 그에게 부동하여 오직 그 명령에만 복종하니 제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사 곽재우가 흉계를 실행할 수 있어서 우리 읍재를 죽이고 우리 방백을 해치며 마침내는 불궤한 짓을 꾸미는 날에 이르게 된다면, 제공은 그래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라서 스스로 난동 반역의 죄에 빠지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곽재우가 하는 일에 따르지 않고 충신 열사가 되겠는가. 시비 이해와 길흉 화복은 오늘 하는 일에 판연하게 가름되는 것이다. 바라건대, 제공은 일찍이 반역과 충순의 이치를 분별하여 먼저 곽재우의 머리를 베어서 원문(轅門)에 가지고 와 바치면 모든 백성이 그 사기(士氣)를 기뻐할 것이고, 국가에서는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서 꽃다운 이름을 영원토록 남기고 작록을 무궁토록 누릴 것이니 어찌 아름답고 좋지 않겠는가. 의를 사모하는 무리들이 그 모함하는 말을 가슴 아파하여 감히 그 거짓됨을 신변하여 이르기를, “초계와 의령에서 양곡을 취한 것 등의 일은 이미 초유사의 계사에 상세하므로 잠시 내버려 두고 변론하지 않겠거니와, 진주의 전세(田稅)에 관한 일인즉 평시 본주의 세미는 남강(南江)으로부터 배가 기강(岐江)으로 해서 가는데 이때에 와서는 배가 기강에 이르자 적병이 돌연히 닥쳐 와서 격군(格軍 : 뱃군 즉 선박의 승무원)이 배를 버리고 흩어져 쌀 실은 배만 빈 강에 홀로 떠 있은 것이 10여 일 되었다. 그러므로 도둑에게 줄 우려가 있어 의사가 거두어서 군량으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 이른바 기강에 버려진 배의 세미라 한 것이 이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죄를 씌우려고 정당한 물건을 탈취했다고 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 삼가(三嘉)의 진사 윤언례(尹彦禮),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등이 위의 격문을 보고는 곧 여러 읍에 통문(通文)을 내어 김경로 등이 의사를 모함한 죄를 폭로하여 다음과 같이 이르다.
요사이 순찰사의 군관배가 곽 의사에게 보낸 글 두 가지를 보니 하나는 “역적 곽재우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고, 하나는 “곽재우의 도당에게 격문을 보낸다.” 하였다. 의사가 과연 역적이고 도당을 가진 자인가. 그 가운데 말한 것은 다 부회하고 날조한 말들로 단지 자기네들의 음흉하고 사특하며 정의를 해치는 마음을 드러내기에 족할 뿐이지, 곽 의사의 병폐를 만들어 내기에는 부족하다. 충의를 가리켜 역적이라 하니 그것은 진회(秦檜)의 흉악하고 교활한 묵은 술수다. 진회 하나로도 악비의 군대를 돌림으로 분을 풀기에 족했거늘, 하물며 여러 진회가 순찰사의 막하에 모였음에랴. 의병에 앞장서 일한 이가 어찌 그 때문에 한심해지지 않겠는가. 곽 의사가 여러 군대가 달아나고 무너질 때를 당해서 백 번 죽어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결행하여 충의가 과격하고 절실하며 이름이 올바르고 말이 순리함은 사람들이 이목이 있는 이상 췌언할 필요가 없거니와,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군현의 울타리 구실을 하였는데, 아! 충성이 곽 같고 의기가 곽 같은데도 역시 역적의 이름을 면치 못하니, 그 자들이 의사를 해치는 것은 바로 의병을 해치는 것으로 그 자들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다. 의사가 근자에 낸 격문에는 사실 경솔하게 움직인 점이 있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충의에 분격한 지나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 하필 그것을 깊이 허물해서 무엇하랴. 저 군관배는 한갓 왜적을 환영한 순찰사가 있는 것만 알았지 왜적을 토벌하는 의사가 있는 것은 모르고 곽에게 격문을 전해서 사적인 유감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한다. 그 사적인 유감이라는 것은 이러하다. 김경눌(金景訥)과 이노(李魯)는 사이가 나빠진 지가 오래되어 여러 해 동안 이노를 모함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 이 변을 만나 자기 가슴속의 흉계를 실행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던 차에 의사의 격문(檄文)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곽의 첩은 이의 딸이니 이노를 죽일 구실은 여기에 있을 게다.” 하고, 이노를 뒤에서 사주한 괴수로 만들고 곽을 사주당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김경눌 역시 사람이니 어찌 곽공이 의사이고 충신임을 모르기야 하랴마는, 자기 원수를 갚으려고 의사를 가리켜 역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을 임금[宸聽]께 앙달(仰達)하고 싶으나 북쪽 하늘은 아득히 멀어 소리내어 외쳐도 도달하지 않는다. 엎드려 원하건대, 여러 곳의 의병소(義兵所)에서 각각 통문을 내어 의사의 명백한 마음으로 하여금 참소하고 모함하는 자에게 희생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 다행한 일이다. 아! 올바른 도리를 지닌 타고난 본성은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고 역순(逆順)과 시비는 본래 공론(公論)이 있는데도 감히 대악 무도한 이름을 충신 의사의 위에 덮어 씌우려고 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은가. 맹자가 이르기를, “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賊]이라 한다[賊義者謂之賊].” 하였는데, 대의(大義)를 제창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무죄한 자를 무고한 자를 역적이라고 하겠는가? 제군은 이 점을 깊이 살피라.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김경근(金景謹)이 거창에 갔는데 김성일(金誠一)이 막 자고 있었다. 김경근이 말씀드리기를, “곽재우가 순찰사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저 김경근이 이미 고하여 피하게 하였사오니 영공(令公)께서도 선처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김성일이 병을 핑계하여 면회를 거절하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네가 산음(山陰)에서 나를 만났을 때 팔뚝을 걷어 올리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김수(金睟)를 목 베지 않으면 천지에 대의를 펼 길이 없다.’ 하였고, 곽재우는 어리석은 사내이니 너희들이 부탁한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하고 전하니, 김경근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물러갔다. 김수는 격문을 전해 곽재우를 크게 꺾어 놓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무척 두려워하는 마음이 들어 비밀리에 김성일에게 내통하여 곽재우를 타이르게 하였다. 김성일 역시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김수를 원망하는 것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로 말미암아 불의의 변고를 초래하게 될까 두려워져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의병장은 왜적의 변란이 일어난 시초부터 재산을 탕진해서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분발하여 자신은 돌보지 않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해 왜적을 토벌하는 것만으로 마음을 먹고 살아왔으니 비록 옛날의 열사라 한들 어찌 그보다 더했겠습니까. 본관이 임지에 도착하자 곧 글을 보내 초청하였던 바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본관을 함께 할 자가 못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만나 주었고, 한 번 읍하는 사이에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후 고립 무원한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여 먼저 나서서 왜적을 토벌하여 전후로 목을 베인 것이 퍽 많아, 왜적이 말을 몰고 전진하여 마구 들어오지 못해 그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보존되었고, 뛰어난 명성이 사방으로 빨리 퍼져 듣는 사람 치고 감동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원근에서 호응해 와서 왜적을 토벌해 버릴 공훈을 손꼽아 기대하였으니, 의병장의 영웅적인 풍도와 의열은 비단 한 대에 떨치고 빛날 뿐 아니라 또한 죽백(竹帛)에 기록되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홀지(忽地)에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감히 패만(悖慢)한 말을 마구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방백이 어떠한 관직이고 의병장이 어떠한 인물인데 감히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방백이 비록 실제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본래 조정이 있어 처치할 것이고 도민이 손을 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의사는 충의의 가문에서 태어나 왜적을 토벌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이 이룩되려고 하는데, 스스로 함정에 빠져 일족을 멸망시킬 곳으로 빠져 들어가리라고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당(唐) 나라의 반역한 병졸이 주장(主將)을 쫓아 내고서 □ 패란을 초래한 것이 무릇 몇 사람이었습니까. 전복한 수레의 전철을 그대로 밟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미혹했다가 되돌아 온다는 경계는 태역(大易)에서 교훈한 바이거니와 앙화를 바꿔 복으로 만드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니, 나의 충고를 따른다면 순조로워 복이 많아질 것이고 따르지 않으면 거슬러서 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기미는 사이에 머리털도 안 들어갈 정도로 미묘하니 의병장은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 김해에 주둔해 있는 왜적 1천여 명이 고성(固城)으로 옮겨 들어가다. 왜장이 은가마를 타고 감사를 자칭하고 진주를 범하려 하여 진주성 내의 장병이 본도 여러 진(鎭)에 구원을 청하였다. 곽재우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갔는데 도중에 초유사의 글을 보고는 말을 세우고 답서를 다음과 같이 썼다.
곽재우는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삼가 초유사 합하(閤下)께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타이르시는 글을 보고 극도로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간곡하신 가르치심과 친절하신 타이르심은 다 저 곽재우로 하여금 장래 닥쳐올 앙화를 모면하고 막대한 공을 이룩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찌 합하의 지극한 인애로우심으로 저 곽재우를 자식같이 보신 데서 그렇게 하신 것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나라를 위한 마음이 지성에서 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왜적을 토벌하는 데 자기 몸을 잊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내리신 말씀은 억양이 너무 지나쳐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뻐하고 두려워하게 할 것이나, 저 곽재우는 그 때문에 기뻐하지도 않고 또 그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아! 합하가 순찰사를 위하여 꾀하시는 것은 충성스러우십니다. 다만 두렵기는 순찰사가 합하를 위해 꾀하는 것은 그렇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순찰사 역시 사람입니다. 어찌 자기 죄를 자기가 모르기야 하겠습니까. 순찰사가 말하는 것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순찰사가 하는 일은 합하께서 고치게 만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순찰사의 마음을 합하께서 고치실 수 있으시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합하의 지성(至誠)과 후덕으로도 끝내 순찰사의 마음을 고치시지 못하신다면, 저 곽재우가 두려운 것은 합하를 모함하는 말이 반드시 순찰사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합하께서는 저 곽재우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처지에 빠질 것을 근심하였으나 저 곽 재우는 합하께서도 끝내는 그렇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하실까 두려워합니다. 합하께서 저를 아끼시는 마음으로도 저를 비륜(非倫)하고 불궤(不軌)하다고 의심하시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순찰사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하물며 저 곽재우와 공을 다투는 자에 있어서야 어떻겠습니까. 저 곽재우가 자신을 죽이고 일족을 멸망시키는 앙화가 반드시 닥쳐오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는 것은, 천성에서 우러나 졸지에 고칠 수 없고 울분에 찬 마음을 급히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합하는 임금이 보내신 분인즉 합하의 가르치심은 곧 왕의 말씀과 같으니, 어찌 감히 한낱 자기의 소견을 고집하고 합하의 가르치심을 어기겠습니까. 진주에서 긴급을 고해 와 군사를 거느리고 개금원(介金院)에 왔습니다. 군무가 복잡하여 만의 하나도 사뢰지 못하고 줄입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김수가 의병장 김면(金沔)에게 글을 보내 곽재우를 진정시켜 달라고 하니, 김면 역시 곽재우가 분에 못 견뎌 하는 마음을 알고 있어 의외의 환난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곧 곽재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다.
막부(幕府)의 이름을 듣고 늘 흠앙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더운 날씨에 거느리신 군사들에게 도움이 있고 지휘가 만안하시길 바랍니다. 저 김면은 일개의 썩은 선비로 애써 군에 있으니 어찌 도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갓 스스로 두려워하고 염려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다만 사람의 책모가 좋지 않아서 왜적이 고개를 넘어가게 놓아주어 수도를 지키지 못해 어가[大駕]가 몽진(蒙塵)하기에까지 이르렀은즉 그 책임은 돌아갈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이 아닌데도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키셨습니다. 근심할 것은 의기(義氣)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오직 처사가 마땅함을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금 행재(行在)가 멀리 떨어져 있어 주청이 통하지 않으니, 우리 민간에서 거사한 사람들은 의뢰할 데가 없어 부득이 왕이 임명한 사람한테서 명령을 받은 연후에야 이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 왜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고 근왕(勤王)할 수 있게 되며, 체통에 질서가 있게 되고 일을 해가는 데 조리가 있게 됩니다. 만약 일을 그르친 사람을 죄를 주어야 한다고 운운(云云)하는 바가 있다면, 의기가 당당한 점은 있지마는 순리로 공을 이룩하는 방법에는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귀하께서 충성심을 떨쳐 한바탕 외치심에 천백 명이 그림자같이 따라 나서서 물에서 공격하고 뭍에서 전투하여 흉악한 왜적이 도망쳐 흩어졌으니, 낙동강 우안(右岸) 일대를 안도하고 근심없이 지내게 만든 것은 실로 의사의 공입니다. 이른바 강회(江淮)를 차단하여 그 기세를 막은 것은, 지금에도 역시 그 사람이 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여 마지않게 합니다. 오직 원컨대 귀하께서 다행히 하찮은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일에 임해서는 반드시 그것의 순리를 생각하셔서 그 이미 자란 것은 누루시고 그 지극하지 못한 것은 증진시키셔서 의를 모아 멀리 뻗어나가게 하여 결함이 없게 하신다면, 일대에 솟구쳐 나오고 만고에 빛나게 되실 것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마침 곽시리(郭是理)가 돌아가는 편을 인해서 구구하나마 사모하는 마음을 대략 적었습니다. 이만 줄이며 삼가 글월을 올립니다. 면배(沔拜).
○ 김수가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소신(小臣)이 위로 성명(聖明)의 명철하심을 믿고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방비하는 제구를 만약 충분히 조치해 둘 수 있다면 왜적이 충돌해 오는 환난에 대해 막아낼 보탬이 거의 있으리라고 여겨, 임지에 도착한 초기에 방어하는 한 가지 일을 조금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지에 성을 구축하는 데 교생(校生)들을 일시에 많이 징발해다 쓴 것이 신이 원한을 모은 근원이었으니, 사람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일을 이룩할 수 있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우병사 신할(申硈)이 마침 신과 뜻이 맞아 비록 날쌘 군사에게 지나치게 엄히 한 폐단이 있기는 하나, 그가 나랏일에 마음을 다한 정성은 실로 가상한 것이어서 그와 더불어 일을 같이 하여 무릇 군무에 관련된 일은 다 함께 의논하여 처치하였던 것이 □□□ 물정을 격하게 한 것입니다. 문덕수(文德粹)의 상서(上書)는 온 도의 사람들이 대부분 이성(異姓)의 삼촌질(三寸姪) 전 직장(前直長) 이노(李魯)의 조종이었다고 생각하여, 또 신이 전에 장계(狀啓)에서 약간 그 뜻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므로 이노가 소신을 해치려고 하는 생각을 어찌 잠시라도 잊었겠습니까.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의 기세가 창궐하였으니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겠으나,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방으로 날조하고 모함하는 일은 더욱 못하는 짓이 없을 만큼 성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첩으로 삼아 사위가 된 의령에 사는 곽재우는 시초에 의병을 일으켰을 때 곽월(郭越)의 아들이라 자칭하고 무뢰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수종하게 하였으며, 나장(羅將 고을의 장교)들을 엄연히 대동하고 초계(草溪)의 남쪽 대로로부터 행군하여 관청에 돌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먼저 지키는 자와 관가 사람을 묶고 관의 창고를 쳐부수었으며, 쌀과 밀가루 및 기름ㆍ꿀ㆍ찹쌀가루[眞末] 등 잡물까지 전부 훔쳤습니다. 또 사창(司倉)의 창고 문을 부수고 군량과 곡물을 깡그리 훑어내서 자기의 도당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고을의 삼공형(三公兄) 등이 문서[文狀]로 보고해 왔으나 신이 생각하기는, 곽월은 세족(世族)인데 세족의 아들이 어찌 도적질을 감행하는 일이 있겠는가. 틀림없이 무뢰한 육지의 도적들이 곽월의 아들을 가칭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듣고 보아서 보고하라 하여 역시 회송한 뒤에 병사 조대곤(曹大坤)이 이미 치계하였고 신 역시 공형의 문서만을 낱낱이 들어 계달(啓達)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또 듣건대, 의령의 신반현(新反縣)의 창곡(倉穀)을 초계에서 한 것같이 훔쳐 가졌고, 진주의 전세선(田稅船) 4척을 공공연하게 약탈해서 개인 창고에 옮겨 넣어가지고 근방의 못된 도배들에게 나눠 주어 은혜를 갚을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곽재우가 정말로 국가의 위급한 난국을 위해 의병을 이끌고 왜적을 공격하려는데 군량이 없었다면 마땅히 수령에게 고하거나 혹은 신이 있는 곳에 보고하여 법에 따라 받아 내다가 먹여야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 겁탈을 자행하여 극악한 왜적이 하는 짓과 같은 점이 있으므로 신은 그가 패역(悖逆)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뚜렷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적을 토벌하는 데 급했고 또 그가 마음을 고치고 선에 따르게 되기를 바라 각 관원에 통유(通諭)하여 그로 하여금 와서 나타나게 하고 서서히 그 끝장을 보고서 다시 치계할 요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곽재우가 병사(兵使)의 체포령을 신이 시킨 것이라고 잘못 듣고는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공공연히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있는 곳에서 발설하였고, 신이 보낸 영리(營吏)를 죽이려고까지 하였는데 김성일이 극력 말려서 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미신(微臣)의 구구한 생각은 그를 진정시키는 데 있으므로 불쾌한 감정을 안색이나 언사에 나타내지 않고 도리어 그를 위해 장계를 올려 그의 군공을 보고하여 그를 가장(嘉獎)하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분노와 원한이 가시지 않아 시험에 떨어진 유생들을 꼬여내어 도당을 매일같이 많이 모아 이름을 위병이라고 칭해서, 겉으로는 왜적을 토벌하는 흔적을 나타내고 속으로는 불측한 계략을 품고 있으니, 모르는 사람은 의병이라고 생각하지마는 아는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예측하기 어려운 환난을 빛어낼 것이라고 근심하여, 자제들에게 엄명을 내려 그들 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사람까지도 있었고 무도한 말을 지껄이는 것을 들은 사람도 많습니다. 신이 일찍 처치해 버리지 않은 것은 사세에 난처한 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먼저 소신 막하의 장병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자객의 짓을 하게 강요하였고, 또 신의 죄를 늘어놓아 여러 읍에 통문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난동을 꾸미라고 권고하였는데, 수령 중에 고을 사람을 그것에 따르지 못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수령까지도 함께 죽이겠다는 뜻도 역시 그 통문 중에 언급하였습니다. 또 소신이 있는 곳에 격문을 보내왔는데 그 흉악한 말은 입으로 말할 수 없으나, 기한을 굳게 작정하여서 성을 구축하는 데 백성들을 못살게 학대하고 절제(節制)에 방법을 어겨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세운 신의 죄입니다. 성을 구축한 일은 신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적이 마구 들어오게 만든 것은 과연 신의 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태평 시절 백 년에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니, 군졸들이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고, 변방의 장수들은 죽기가 아까워 퇴각한 것이 어찌 다 신의 절제가 올바른 방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변란이 발생한 후 각 항의 절제의 득실(得失)은 다 어람(御覽)을 거쳤거니와, 한 도의 정병 용사 5, 6백 명을 뽑아서 거느리고 다니면서 동래가 함락되는데 먼저 밀양으로 달아나고 밀양이 함락되는데 또 가야로 도망갔으며,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해 숨었고 한 번 장병을 권면해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왜적을 공격하게 하지 않았으므로 그 자신이 몸둘 곳을 몰라 근왕을 칭탁하여 도망쳐 운봉을 넘어갔다고 지적하면서 신의 죄라고 합니다. 당초 신은 순찰사의 임무를 겸하고 있지 않아 원래 거느리고 다니는 군관이 없었습니다. 계청하여 8인을 보탠 가운데 홍윤관(洪允寬)과 김경로(金敬老)는 조방장을 겸했기 때문에 이미 좌ㆍ우도로 각각 파견하였고 이응성(李應星)은 변란이 생기기 전에 당포(唐浦)의 조전장(助戰將)으로 보냈으며, 강만남(姜晩男)과 장처문(張處文)은 변란이 생긴 후에 즉시 동래 등지로 파견하여 그로 하여금 구원하는 일을 맡게 하였고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있는 곳에 전령하여 정병 각 30명씩을 뽑아서 주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신의 수하에는 본래 군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구전(口傳)으로 군관 6인과 안세희(安世熙) 등을 특명으로 치송(馳送)한 것을 추가한 것과 도내의 가솔군관(假率軍官) 약간 명 및 가덕 첨사(加德僉使) 최몽성(崔夢聖)ㆍ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 등을 다 합해도 단지 50인에도 차지 않았으니, 이른바 5, 6백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다닌다고 한 것은 거짓으로 모함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지난 4월 15일 아침 신이 진주에서 왜적이 경내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갖추어 치계하고 오후에 출동하였는데, 도중에서 부산과 동래 두 진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없이 길을 재촉하여 16일 저녁에 밀양까지 달려갔으니, 이는 동래의 함락을 듣고 서둘러서 밀양으로 달려 들어간 것이지 동래로부터 퇴각해 달아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성을 지키고서 변란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본부(本府)의 성이 빗물에 태반이 무너졌는데 채 수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부의 군사는 부사 박진(朴晉)이 능사창군(能事槍軍) 세 부대와 아울러 남은 군사 전부를 거느리고 동래ㆍ양산 등지를 구원하러 달려갔고, 성을 지키는 나머지의 사람은 노약자 겨우 백여 명뿐이었습니다. 인근에 있던 청도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의 군사들 역시 가야 할 곳으로 가버렸으므로, 합세하여 함께 지킬 도리가 전연 없었습니다. 신이 만약 그 성에서 포위된다면 동서로 책응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기 때문에, 왜적이 본부의 작원(鵲院)을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퇴각하여 영산을 지켰고 밀양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또 초계로 퇴각하였으며, 왜적이 또 김해를 함락시키고 초계의 길로 향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합천으로 옮겨가서 주둔하였고 왜적이 성주를 범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고령으로 달려갔으며, 왜적이 금산(金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례로 달려갔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가까이에 있으면서 책응하기 위한 계획이었으며, 각처에 무너져 흩어진 졸병 겨우 4백여 명을 얻어 방어사 조경(趙儆)과 조방장 양사준(梁士俊)에게 나눠주어 그들로 하여금 달려가 금산을 구원하게 하였습니다. 조경ㆍ양사준 등이 한 차례 금산에서 접전한 후부터 군졸들이 다 흩어져 이때부터 비록 각 관원을 독려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으나, 도망간 군졸들이 죄책을 받을까 겁을 내어 깊은 산에 들어가 있으면서 오직 자기가 있는 곳이 깊지 않을까 두려워할 뿐이었습니다. 다시 생원ㆍ진사 및 유식한 품관(品官)을 시켜 흩어진 군졸을 소집하게 하였으나 생원ㆍ진사 역시 깊은 산으로 들어가 버려 급작스레 군졸을 모을 길이 없어졌고 방어사는 이미 군졸이 없는 장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왜적이 지례의 땅을 범하자 비로소 거창으로 왔는데 그때 왜적이 이미 의령ㆍ삼가(三嘉) 등지를 범했으므로 거창은 사실상 왜적이 침범한 복판에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주둔하고 있는 것은 위아래로 책응하기 위한 계책에서였고, 변란이 발생한 후에 가야까지는 가보지도 않았습니다. 도망했던 군졸 중에는 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자진해서 신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자가 많았으나, 그들을 혹은 병사에게 보내고 혹은 방어사에게 보내고 하였더니 곧 도망가 버렸고 또 그렇게 나눠서 보냈기 때문에 역시 신이 있는 곳에도 자진해서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병사ㆍ방어사 등은 단지 군관만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신은 그래도 힘을 내어 싸우지 않는다고 누차 글을 보내서 신칙(申飭)하고 군관을 잡아다가 엄하게 교훈을 하였습니다. 곽영(郭嶸)ㆍ이지시(李之詩) 등이 호남에서 정병을 거느리고 지례에 와서 2일 동안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경 등이 한군데 같이 있으면서 곧 전투하러 나가지 않았으므로 신이 그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의 군관인 손인갑(孫仁甲)ㆍ강만남(姜晩男)ㆍ장처문(張處文) 등에게 전령을 발급하여 양사준(梁士俊) 등을 형벌 집행차 그곳으로 보내니, 곽영 등이 금산으로 달려가 왜적 20여 급을 목베었습니다. 이른바 밀양이 패전하자 또 가야로 도망갔고 왜적이 상주를 지나자 거창으로 퇴각하여 숨어버리고 한 번도 장병을 권면하여 왜적을 공격하게 한 일이 없다고 한 것이 또 거짓으로 모함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왜적이 영로(嶺路)를 넘었는데 충청도의 여러 장병 역시 패해 왜적이 곧장 서울로 들어갈 앙화가 조석으로 박두하였으니, 이 일을 생각하면 울음 소리와 눈물이 다같이 나와 다른 일의 계획을 생각할 경황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타고남은 것들을 수습하여 호남 감사 이광(李洸)과 합세하여 근왕할 뜻으로 절차에 따라 장계로 올리고 군사 1천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운봉까지 갔습니다. 김성일(金誠一)을 통하여 비로소 어가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시어 서울이 이미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광 역시 전주로 군사를 철수해 버리고 정병을 더 뽑느라고 아직 출동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고군(孤軍)을 거느리고 혼자 가기에는 사세가 퍽 어렵고, 김성일이 강력하게 권하기를 군대를 돌리고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아 주부(州府)에 웅거하고 있는 왜적을 토멸하여 군현(郡縣)을 수복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다시 근왕하는 군대를 일으키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군량이 단지 20일분뿐이어서 도중에 낭패할 근심이 생길까 두려워 잠시 본도를 돌아왔으니, 도망쳐 넘어가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도리어 근왕을 칭탁한 것으로 신의 죄를 삼는 것입니다. 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한 것은 급히 서둘러 경내의 왜적을 소탕하고 구원하러 오라 하신 □ 교지를 삼가 따른 것인데, 왜적에게 영남을 버려 두고 운봉을 넘어 전라도에 들어가 근왕을 칭탁하였다고 죄를 삼는 것은 또한 사실과 다르지 않습니까. 부끄러움을 잊고 치욕을 참으며 얼굴을 들고 다시 와서 호령을 내고 지휘권을 발동하여 의병으로 하여금 풀어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초유사로 하여금 이룩되어가는 공을 무너뜨리게 하였다는 것으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대저 정인홍(鄭仁弘)ㆍ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킬 모의를 할 때에는 열 가지 책략을 조목조목 진술해서 신과 왕복하며 상의하였고, 군량ㆍ군기(軍器)의 준비와 문서류의 처리는 다 신에게 문의해서 시행하였습니다. 합천의 의병장 손인갑은 바로 신이 정해서 보낸 사람이니, 그 처사의 온건함은 진실로 곽재우의 황당함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신이 본도로 돌아온 후 온갖 대소사를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였고 다른 곳의 의병 역시 다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의병이 일호(一毫)라도 흩어져 버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려 들었겠습니까. 의병들의 일은 다 초유사 김성일과 의논해서 처치하였고 조금도 독자적으로 막은 일은 없었으며, 두 사람 사이(즉 김수와 김성일 사이를 말함)에 장병이 오가는 말은 믿거나 의심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친절하게 만나서 약속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른바 이룩되려 하는 공을 깨뜨렸다고 한 것 역시 거짓입니다. 하물며 현존하는 여러 장수들을 통솔하고 의병을 규합하여 군현을 수복해서 곤경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는 성지(聖旨)가 간절하셨으니, 이른바 의병이라는 것을 신이 어찌 호령하고 지휘할 수 없겠나이까. 그런데 저렇게 운운(云云)하니 그 마음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령 그가 전해지는 말로 인하여 오해해서 무지하게 망령되이 굴었다 하더라도 반역한 백성이 된 결과를 면치 못하고 그가 왜적을 토벌한 공이 끝내 그 죄를 보상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이노(李魯)ㆍ문덕수(文德粹) 등이 다 한 집안에서 연결된 사람으로 세 사람의 유감이 위세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이노는 매일 곽재우 곁에 있으면서 모해를 가르치고 꾀느라 있는 힘을 다하고 흉계를 실행하기를 바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초유사 김성일이 이러한 해괴한 소식을 듣고는 누차 글을 보내서 화복(禍福)을 진술하여 극력 타일러 진정하기를 바랐고, 김면ㆍ정인홍 및 다른 의병 역시 다들 그를 책하였습니다. 그가 혹시 그의 악한 마음을 뉘우치는 수가 있고 또 종내 진정한다면 그것이 신의 본뜻이니, 그가 정말로 얼굴을 고쳐서 깨닫는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를 처음같이 대우해서 그의 공을 완성하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앙화의 기틀이 이미 발동하였으니, 신의 생사는 아마도 열흘 안에 결정될까 염려하나이다. 신의 죄는 본래 조정에서 처치할 것이 있을 터인데 이렇게 진달하는 것은 스스로 변명하는 데 가까우니, 온당하지 못한 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짓으로 모함하는 정상을 죽기 전에 내내 생각하여 다 진술하면 지하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될까 합니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자초지종을 통문하여 그로 하여금 선처토록 하겠습니다만, 이미 변고를 당하고서도 다시 얼굴을 억지로 들고 그대로 머무르며 온 도에 호령할 수 없으니 속히 처치하여서 한 지방을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 초유사 김성일이 곽재우가 충열(忠烈)한 인물인데 모함을 당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그의 무죄함을 밝혀서 다음과 같이 치계하다.
의령 사람 곽재우가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토벌한 일은 이미 누차 계달하였습니다. 지금 의외의 변이 생각지 못한 데서 나와 적절히 처리할 길을 몰라 극히 근심하고 있나이다. 곽재우는 바로 고 통정대부 곽월(郭越)의 아들이고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손녀 사위입니다. 중간에 무예를 배우다가 버리고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됨이 질박하고 문채가 없으며, 부모 상중에 슬픔을 다해 이웃에서는 다들 그를 효자라고 불렀습니다. 왜적의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병사와 수사가 뒤이어 달아나고 왜적이 밀양을 범하게 되자, 감사 김수는 지휘하는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영산으로 퇴각해 돌아왔다가 곧 초계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곽재우가 분연히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달아났는데도 형벌을 가하지 않고,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에 나왔는데 초계로 퇴각해 달아났으니, 감사 역시 목 베어야 한다.” 하고는, 검을 짚고 길에서 만나 죽이려 하기에 동향 사람들이 강력하게 말려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우병사 조대곤(曹大坤) 및 방어사ㆍ조방장ㆍ수령 등이 하나같이 다 소문만 듣고 무너져 달아나 열흘지간에 왜적이 서울의 궁궐을 범하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올리며 강개하여 말하기를, “이 무리들이 왜적을 보호해서 서울에 들어가게 하여 임금에게 화를 끼쳤으니 다 목 베어야 한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있는 넓은 자리에서 늘 큰 소리로 그렇게 말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의 재물을 풀어서 장병들을 모집하였습니다. 그의 첩이 말하기를, “왜 쓸데없는 죽음을 할 계획을 합니까.” 하였는데, 곽재우가 크게 노하여 검을 뽑아 목 베이려 하였고, 처자의 의복을 전사(戰士)의 처자들에게 풀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게 되자, 자기 처자를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에게 맡기고, 모집한 장병들을 거느리고 왜적을 치겠다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다들 곽재우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의령과 초계 두 읍이 패전하여 관아가 비어 있고 의령의 관고(官庫)는 이미 분탕되었으므로 곽재우의 군사는 가지고 있는 양곡이 없어서 초계 및 신반현(新反縣)의 관고에 있던 양곡을 풀어서 군사들을 먹였는데, 합천 군수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적으로 몰아 병사에게 보고하였고 병사는 명을 내려 그를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곽재우의 군대에 응모했던 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들 흩어져 가 버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이 갓 임지에 도착해서 즉시로 글을 보내서 불렀더니 곽재우 군대의 사기가 다시 진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 왜적을 쳤는데, 왜적이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곽재우는 반드시 먼저 나서서 달려가 돌격하기 때문에 그가 거느린 전사들은 용기가 백배하여 일당백(一當百)의 구실을 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곽재우는 전투할 때면 반드시 홍초첩리(紅綃帖裡)를 착용하고 당상관의 갓[堂上笠飾]을 갖추고는 홍의 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자호하고, 말을 달려 적진을 스치며 오가는 것이 섬광같이 빨라서 왜적이 비록 일제히 철환(鐵丸)을 쏘아도 맞추지 못합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며 천천히 가서 군사를 행진시키는 절도로 삼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고 호드기를 불게 하여 겁내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혹은 산 숲 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만들어 놓고 호각을 불고 시끄럽게 북을 치기도 하고, 혹은 곳곳에 복병을 매설해서 사람이 없는 것같이 조용하게 있다가 왜적이 오면 곧 쏘아 죽이기도 합니다. 혹은 왜적의 배를 몰아 강 언덕에까지 가서 추격해 쏘기도 하고 하여 전투를 하지 않는 날이 없고, 전투를 하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는데, 왜적의 수급(首級)을 베인 수효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많고 왜적을 쏘아 죽인 것은 부지기수입니다. 왜적들은 그를 ‘홍의장군’ 이라 하고 감히 상륙하여 도적질을 하지 못하니, 의령ㆍ삼가 두 읍의 인민들은 다 생업에 안정하고 농사에 힘써 오곡의 풍성함이 평화시와 다름이 없습니다.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에는 곽재우의 공이 많습니다. 곽재우는 갑작스레 삼도의 군대가 수원에서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미친 사람같이 위험하고 망령된 말을 무수히 발설하였고, 순찰사가 글을 보내 그를 칭찬하고 장계를 올려 그의 공을 아뢰었어도 여전히 마음을 돌리지 않아 사람들 중에는 혹 그렇게 하면 앙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그를 경계하기도 하였으나, 곽재우는 반드시 검을 거머잡고 성을 내고는 하였습니다. 지금 곽재우는 갑작스레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을 보내 죄를 차례로 늘어놓고 토죄하겠다고 떠들어대며, 또 여러 읍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내어 토죄할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소식을 듣고 경악하여 모르는 결에 눈이 휘둥그래져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서 의령의 관원을 시켜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 하였으나,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로는, 곽재우가 실제로 반역할 마음이 있다면 그가 한창 정병을 장악하고 있으니 한 역사(力士)에게 잡힐 상대가 아니고, 만약 반역할 마음이 없다면 글 한 장으로 족히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곧 곽재우에게 친서를 내어 여러 가지로 비유를 들어 일깨워 주었고 김면 역시 글을 보내 경계하였던 바, 곽재우는 타이르는 말에 마음을 바꿔 순종하였고, 진주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고자 이미 떠나갔다고 합니다. 곽재우가 일개 도민(道民)으로 도주(道主)를 범하려 하고 심지어 도주의 죄를 성토하여 격문을 보내고 하였으니, 비록 나라를 위해 분노하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하지마는 형적이 난동을 부리는 백성이 된 바에는 곧 토죄해야 의당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후에 고군(孤軍)으로 용기를 떨쳐 왜적을 격파해내어 도내의 남은 백성들이 그를 간성(干城)으로 의지하고 있는데, 지금 난언(亂言) 때문에 곧 주륙(誅戮)을 가한다면, 남은 성을 보존하고 왜적을 방어할 계책이 없어져 군사와 백성들은 그의 죄를 알지 못한 채 일시에 무너져 흩어질 것입니다. 신이 사태를 임시로나마 진정시킬 계획으로 재삼 경계하여 곽재우가 이미 순종하였는데 도순찰사에게 죄를 죄었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 어려워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됩니다. 신이 듣기에는 을묘년 왜변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군(靈嵒郡)으로부터 다른 읍으로 달아났던 바, 전 수원 부사 윤기(尹箕)가 그때 유생의 신분으로 포위된 성 안에서 검을 뽑아 그를 목 베려고 하였는데 김주는 성내지 않고 담소로 대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논자(論者)는 지금까지 윤기의 용기를 칭찬하고, 김주가 능히 용납하였던 것을 장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제 곽재우의 일은 비록 심히 광기를 띠고 망령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사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감사 역시 김주가 대처한 것같이 하면 조용하고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수(金晬)에게 글을 보내 그로 하여금 선처하게 한다면 근심할 만한 변고는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김수가 곽재우를 반란한 역적으로 장계를 올려 아뢰었고 또 다른 사람이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으니, 과연 그렇게 죄를 씌운다면 비단 그가 그런 죄목에 불복할 뿐 아니라 온 도의 민심을 아마도 수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극히 가슴 아픕니다. 그가 충의로 분발한 정상과 용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공은 온 도에 널리 알려져 아동과 주졸(走卒)까지도 다 곽 장군을 칭송합니다. 또 듣건대 곽재우는 군사를 잘 쓰고 장수의 재질이 있다고 하니, 만약 광기 띠고 망령된 자에 대한 주벌을 좀 늦춘다면 반드시 좋은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불행하게도 임명을 받은 후에 두 번이나 이러한 변고를 당했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으로 길을 잡아 운봉현에 도달했었는데 호남 사람이 순찰사 이광이 근왕하는 데 늑장을 부린다고 그를 토죄(討罪)하려 한다고 어떤 사람이 신에게 몰래 말해 왔습니다. 신은 대의(大義)를 가지고 의사를 꺾어 말리고, 곧 이광에게 통지하여 대비하게 하고자 김수에게 의논했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근왕하는 것이 느리다고 해서 토죄하려고 하는 것이니, 의사라고 할 수 있소. 만약 그 사람을 죽인다면 온 도의 민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니 이광이 있는 곳에 통지해서는 안 되오.” 하여,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바로 이와 유사합니다. 김수가 만약 호남의 의(義)에 대처하던 태도로 곽재우에게 대처한다면 난처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및 김면이 곽재우를 경계한 글과 그의 답서를 함께 베껴서 올려 보냅니다. 이 계사(啓辭)에서 넉넉히 공의 충후하고 깨끗한 마음을 알 수 있다.
○ 흉악한 왜적이 지례(知禮)에서부터 호남을 범하다. 적인(狄人) 5, 6명이 청학장군(靑鶴將軍)ㆍ백학장군(白鶴將軍)을 자칭하고 매복하여 왜적들을 사살하니 왜적이 좀 물러났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조금 있다가 대부대의 왜적이 무주현(茂朱縣)으로 마구 들어와 불태워 버리고 도적질을 하였다. 그때 본도 방어사 곽영(郭嶸)은 금산(錦山)에 진을 치고 조방장 이유의(李由儀)는 팔량(八良)에 진을 쳤으며, 이계정(李繼鄭)은 육십현(六十峴)에 진을 치고, 장의현(張義賢)은 부항(釜項)에 진을 쳤으며, 김종례(金宗禮)는 동을거지(冬乙巨旨)에 진을 쳐서 수비하며 왜적의 변란을 대기하였다. 적병이 또 옥천(沃川)으로부터 금산으로 향하자 방어사도 군(郡)의 성 안으로 퇴각해 들어가서 감사에게 구원을 청하니, 이광(李洸)이 군사 8백을 내어 장수를 정해서 금산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23일. 성주(星州)의 왜적 7백여 명이 양정(羊亭)으로 나와 진을 치고 가야산을 탐색하려 하였고, 또 한 떼는 지례(知禮)로부터 무주(茂朱)로 향하면서 순영(順英) 등 마을을 분탕질하다. 순영은 무주의 역 이름이다. 또 고성(固城)의 왜적 1천여 명이 고성의 성 밖에 나와서 주둔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서북을 잠식해 들어가는 왜적이 지나온 여러 도에 연속하여 진지를 마련해서 후면을 공격 당하는 데 대비하다.
○ 적병이 금산(錦山)으로 들어가다. 곽영(郭嶸)과 김종례(金宗禮)는 퇴각하여 고산(高山)에 숨었다. 왜적이 무주와 금산을 나누어서 점거하고 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지를 분탕질하였다. 어떤 사람이 왜적 속에서 나와 말하기를, “이 왜적은 바로 전날 창원(昌原)에서 전라 감사를 자칭하여 선문(先文)을 낸 자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곧장 전주(全州)로 향하려 하였으나 홍의장군에게 저지당하자, 우회해서 성주와 지례를 경유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운운.” 하였다. 본도 여러 읍에서 남은 장정을 찾아 모아가지고 길을 나누어 방어했는데, 왜적이 금산으로 막 들어오자 그때의 군수 권종(權悰)이 병으로 죽었다.
○ 이 광(李洸)은 전주에서 본주(本州) 사람 문관(文官) 이정란(李廷鸞)을 주의 수성장(守城將)으로 하여 이웃 읍의 군사를 모아 계엄을 펴고 왜적의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고, 또 남원(南原)에 전령하여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키게 하였다. 그때 본부(本府)의 선비들이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여 향병(鄕兵)이라 칭하고 전 목사 정염(丁焰)을 장수로 추대하였다.
○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전주로부터 여산(礪山)으로 향발하여 비밀리 장병들과 의논하기를, “금산과 무주의 왜적이 이미 용진(龍鎭)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틀림없이 전주와 남원에 뜻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대군이 본진(本鎭)을 다 떠나가야 할 것이니 노약자만을 남겨서 수비시킬 것이다. 우리 군대가 진산(珍山)으로부터 그 자들이 생각하지 않은 곳으로 나가 나머지 무리들을 다 죽여버리고 뒤쫓아 추격하면, 그 왜적들은 전진해도 거점을 얻지 못하고 후퇴해도 돌아갈 곳이 없어 중도에서 낭패하여 스스로 황산(荒山)의 패전을 초래할 것이다.” 하고, 군사를 이끌고 은진(恩津)의 연산(連山)을 향해서 떠났다. 같은 진의 군량색(軍糧色)을 고목(告目 천한 사람이 높은 이에게 올리는 글)하기를, “가지고 있는 군량은 여산군(礪山郡)에서 수납(輸納)하겠나이다.” 하였다. 색리(色吏)는 남원의 색리이고 군량은 남원의 군량이다. 대체로 의병을 돕는 일은 각 읍이 다 그러했다. 대장의 행차가 22일 전주를 떠나 23일 여산에 머물렀다. 당일 도부(到付)한 금산의 전통(傳通)에, 옥천(沃川)의 양산현(陽山縣)을 분탕질한 왜적이 본군을 지향해 와 진을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24일 동군(同郡)의 전통에는, 10리 거리에 진을 칠 것이라 했고, 서울의 왜적은 신립(申砬)과 윤두수(尹斗壽)가 각각 좌우 대장이 되어 1천여 명을 잡았다는 것이었으며, 여산군수가 구전(口傳)한 내용은 의병이 은진ㆍ연산ㆍ금산으로 지양한 것과 우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행차와 병사(兵使)가 일시에 직산(稷山)으로부터 진위(振威)로 향한 것이었다.
○ 조방장 이유의(李由義)가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岭) 등을 거느리고 팔량(八良)으로부터 금산의 송현(松峴)으로 진을 옮겨서, 왜적이 남쪽으로 부딪쳐 내려올 우려에 대비하였다.
○ 합천 의병장 손인갑(孫仁甲)은 초계(草溪)의 마진(馬津)에서 큰 전투를 하여 강 연안의 왜적을 깡그리 죽이고, 손인갑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앞서 손인갑은 강 연안의 왜적이 물을 따라 내려간다는 초계에서의 치보(馳報)를 듣고, 손인갑이 밤중에 군사를 전진시켰으나 초계의 의병이 이미 강 연안의 왜적을 토멸해 버렸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끌고 돌아왔다. 그런데 안장을 채 내려 놓기도 전에 초계의 보고가 오기를, 강 연안의 왜적이 또 많이 닥쳐왔다고 하였다. 손인갑은 시간을 다퉈 달려갔고 또 정인홍에게 보고하였다. 정인홍은 여명에 길을 떠났다. 왜적의 배 12척이 약탈한 물건을 무겁게 싣고 초계를 지나가는데 초계와 고령의 군대는 고립되고 약해 감히 잡지 못해서 손인갑이 그들과 합세하여 왜적과 크게 싸워 깡그리 섬멸하였다. 떠가는 배가 강을 덮었는데 그중 배 한 척이 노를 급히 저으며 도망갔으나 모래 여울의 물이 얕아서 급히 배질할 수 없었다. 손인갑은 승전한 기세를 타고 물에 들어가서 추격했는데 모래턱이 부드러워 사람과 말이 함께 물에 빠졌다. 여러 군사들이 미처 건져내지 못했으므로, 온 전진(戰津)의 군사들이 참담하고 사기가 저상하여 수급(首級)을 벨 생각도 없어지고 크게 통곡하며 돌아왔다. 대체로 이때에는 군사들이 전투에 익숙하지 않아서 주장(主將)이 몸소 사병에 앞서 나가지 않으면 적에게 나가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인갑은 전투할 때마다 먼저 자신이 적의 칼날과 맞섰기에, 한 좋은 장수를 잃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사병들 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촌락 사람들이 그 소식을 듣고 역시 모두 슬프게 울었다. 정인홍은 김준민(金俊民)을 감사에 □계청하여 손인갑이 거느리던 군대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김준민은 처음에 거제(巨濟)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왜적의 변란이 갓 일어나자 성지(城池)를 수선해 가지고 사수할 계획을 세웠다. 김수(金晬)가 근왕을 칭탁하여 군관을 데리고 다니다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감사의 휘하에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정인홍이 권양(權瀁)을 보내 김준민으로 손인갑이 맡았던 자리를 대신 맡도록 해달라고 청해 김수가 허락하고 그를 보냈다. 용감할 수 있고 겁낼 수 있고 하는 것은 병가(兵家)의 기략(奇略)이다. 물에 들어가서 죽은 것은 혹 황하수를 맨몸으로 건너려는 아둔한 짓이라는 나무람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목숨을 탐내어 나라를 잊는 도배와 비한다면 이 손인갑은 살기를 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인 것이다. 슬프도다.
○ 금산(錦山)ㆍ무주(茂朱)에 있는 왜적의 기세가 매우 거세어서 내지(內地)로 쳐들어오므로 백성들이 공포심에 싸여 있었다. 이때에 정염(丁焰)이 남원(南原)의 향병장(鄕兵將)이 되어 남정(南亭)에 머물고 있었는데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정염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의 추물(醜物 첩(妾)을 말한 것임)이 일가집 사람으로 언어를 좀 알아 들을 만한데, 오늘 아침에 전주(全州)에 윤씨의 첩은 전주 기생이다. 와서 왜적의 동향과 그 밖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 내용에,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이 금산(錦山)의 왜적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관군(官軍)은 적의 떼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덮쳐 공격하려 하였다. 이윽고 왜의 복병이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관군은 수가 많지 않아서 감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산(高山)으로 후퇴하여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구원을 청하자, 8백 명을 뽑아 보냈다 하니, 길가에서 패해 무너졌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서울에 있는 적은 크게 패하여 서울 안에는 남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병사(兵使)가 군사를 돌이켜 방금 고산으로 향하는 중이라 하고 후군(後軍)인 의병도 역시 고산으로 향한다 하며, 왜적이 옥천(沃川) 경계에 주둔하고 감히 금산(錦山) 지대를 들어오지 못한다 하니 이것으로써 적의 수효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컨대 각 진영에 선포하여 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도록 하라. 신립(申砬)ㆍ윤두수(尹斗壽) 제군이 적의 무리를 모조리 무찔렀다고 하니 하느님이 우리 종묘 사직을 도와 주려는 것이라 매우 기쁘다.
○ 전라도 의병장 행 부호군(行副護軍) 고경명(高敬命)이 본도 도순찰사(都巡察使) 절하(節下 순찰사를 말한 것)에 다음과 같이 격문을 발송하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일으켜 임금의 행차가 멀리 순행길을 떠나시니 중외(中外)에서 믿는 것은 오직 호남(湖南)밖에 없는데, 겨우 군사를 일으키라는 어명(御命)을 받들자 갑자기 근왕(勤王)하는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니 절하의 마음 속에는 반드시 어떤 계획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절하의 실지 행동에 있어서는 납득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의 명령은 비록 막혀 끊어졌다 하더라도 한 도내의 물의도 역시 두려운 것이외다. 지난번 용인(龍仁)에서 무너진 것은 실로 선봉장이 패전한 때문이었으나 절하가 주장(主將)이 되어 있는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절하는 오늘의 입장에 있어 어떻게 계획하시렵니까? 행여 지나간 실패를 잘 수습하여 주상전하의 남쪽에 대한 근심을 덜어드림으로써 기왕의 허물이 씻겨지고 새로운 업적이 역사에 찬란하게 된다면, 비단 성조(聖朝)에서 난리를 다스리고 정상으로 돌려놓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절하에 있어서도 역시 화가 복이 되는 날일 것이외다. 본도 의병이 당초 북도로 향해서 난리를 평정시키고 전하의 행차를 모셔 오려고 했었는데, 길에서 들으니 윤 정승[尹左相]이 서ㆍ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서울에 머물러 있는 적을 토벌한다 한즉, 북방의 일은 염려가 없음이 거의 보증됩니다. 그러나 호서(湖西)의 적이 금산(錦山)으로 들어오는데, 방어할 군사가 아직도 용계(龍溪)에 주둔하고 한 사람도 다짐하며 앞서 나오는 자가 없으니, 절하가 이 시기에 있어 진정 병력을 널리 모집하여 형세를 크게 벌리지 않으시면 가엾은 우리 호남 한 지방 백성들은 모두 적의 칼날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 것이외다. 그렇게 되면 절하는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강회(江淮)를 보장(保障)하지 못하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적이 다 쓰러지고 전하께서 돌아오시어 교서(敎書) 한 장을 내려 사방에 포고한다면, 비단 호남 사람들만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뿐 아니요 절하 역시 무엇으로써 충성을 바치고 허물을 보상하겠습니까. 절하가 혹 저 왜적이 워낙 사나워서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고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지켜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그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버리면, 적의 성집이 경망하고 조급한지라 지구전은 계속하지 못할 것이니 열흘이 넘지 않아서 큰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외다. 다 같이 왕의 신하가 되어 나랏일을 함께 하는지라, 피차의 사이가 있을 수 없고 형세를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 소견을 자세히 참작해야 할 것인즉 부디 계획을 잘하여 후회를 끼침이 없기 바랍니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임진년 6월 일 만력(萬曆 명(明) 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20년 전라도 의병대장 행 부호군 고경명(高敬命)은 해남(海南)ㆍ강진(康津) 두 고을의 사군(使君)으로 있는 의병장 휘하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전일 추성(秋城 담양(潭陽))에서 의거(義擧)하던 당시에 가슴속의 끓는 피를 편지 한 장에 쏟아서 각 읍 수령에게 두루 고하여 함께 어려운 고비를 극복해 나가자고 호소했으나, 정성이 사람을 감동하지 못해서 아무리 외쳐도 반응이 없으니 초야의 인생이 다만 빈주먹만 두들길 뿐이어서 무기와 군량의 뒷받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이윽고 들은즉 격문을 받아 보고서 정병을 내어 응원해 준 사람은 호남 50주(州) 중에 유독 두 고을의 원님이 있어, 그 소문이 미치는 곳마다 사기가 백배나 더함과 동시에 정의의 군사를 기다려서 적의 무리를 쓸어버리려 했던 것이외다. 그런데 뜻밖에 병사(兵使)가 격문을 띄워 부르고 있으니 앞으로의 거취가 자유스럽지 못할까 깊이 염려됩니다. 지금 금산의 왜적이 청진(淸鎭)의 왜적과 형세가 서로 연접되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자유로우므로, 한 부대는 이미 용담(龍潭)을 함락시키고 또 한 부대는 무주(茂朱)를 함락시켜 세 군데 소굴을 만들고서 완산(完山 전주(全州))을 침범하기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완산 고을은 비단 호남 지방의 근본이 될 뿐만 아니라 진전(眞殿)을 모신 곳으로서 실로 우리 성조(聖朝)의 발상지이므로, 나 고경명은 의기(義旗)를 그쪽으로 돌이켜 적의 칼날을 방어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즉 저 왜적이 본래 잔꾀가 비상한데다 진산(珍山)의 병력은 극히 약하니, 만약 적으로 하여금 진산ㆍ연산(連山) 같은 험하고 좁은 곳을 넘어서서 은진(恩津)ㆍ여산(礪山) 같은 평탄한 길로 돌진하게 한다면 어찌 다만 호남만 앞뒤로 공격을 받을 뿐이겠습니까. 금강(錦江)의 군사마저 장차 동요가 될 것이외다. 그래서 호서(湖西)가 불통되고 적의 세력이 치성하면 호남의 군량을 어떻게 수원(水原)에 수송할 것이며, 이때 본도 병사 최원(崔遠)ㆍ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에 주둔하였다. 조정의 소식을 어떻게 사방에 전달하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용담ㆍ무주의 적으로 하여금 뒤를 돌아보는 염려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서서히 두 고을 군사를 기다려서 곧장 적의 굴혈을 엄습하여 흉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나아가나 물러가나 근거가 없게 만들어 놓으면, 국가를 보전하는 상책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역시 완산부(完山府)를 구원하는 하나의 좋은 계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들이 지금 만약 예전 상도만을 고수하고 변통할 줄을 모른다면 나 고경명 역시 군사는 외롭고 힘은 적어서 선뜻 움직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호남의 적도 쉽게 전제(剪除)할 수 없고 수원의 아군이 혹시라도 또 시일만 허송하게 될 것입니다. 병사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호남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만약 적의 무리가 오늘에 아무 지대를 통과하고 내일에 아무 현(縣)에 침입한다는 소문을 듣는다면, 식량은 공급되지 않고 군의 정세는 흉흉할 것이니, 이야말로 목전에 닥친 위급이라 비록 지혜있는 자가 아니라도 짐작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외다. 그렇다면 두 원님이 합세해서 금산의 적을 치는 것은 다만 호남을 보장하는 계책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병사를 위하여 서로 응원하는 꾀도 될 것입니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경우에 따라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않을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일의 기미에 임하여 융통성이 있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마치 교주고슬(膠柱鼓瑟 변통할 줄 모른다는 뜻)하듯이 외곬으로 나가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병사가 멀리 천리 밖에 있어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지극히 위급한 처지에 빠졌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적을 버리고 후회를 남겨서야 되겠습니까.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두 원님이 위로 수원의 기한에도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 금산의 약속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뒷날의 공론이, “적의 칼날을 도피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스스로 계획을 잘해서 남의 비난을 듣지 말도록 하시오.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고종후(高從厚)가 지었다.
○ 재상(宰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리다.
양산(梁山)ㆍ밀양(密陽)이 연달아 함락된 뒤로 적의 군사가 승세를 타서 이미 거침없이 몰고 갈 기세가 있다는 것을 듣고, 식자 계급에서는 적들이 우리의 허점을 찔러 곧장 올라갈 것을 근심하여 간담이 써늘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순찰사(巡察使)가 나주(羅州)에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하루빨리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서 응원해 줄 것을 바랐고 광주 목사(光州牧使) 정윤우(丁允祐) 역시 순찰사를 보러 가서 빨리 근왕(勤王) 길에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으나, 순찰사가 막연히 들으며 염려하지 아니하니 정 공이 민망히 여기며 그저 물러 나오고 온 도내 사람들은 한갓 두 주먹만 움켜쥐며 통분해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징병하라는 교지가 내리자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온 도내 군사를 모두 일으켜 일제히 여산(礪山)으로 치닫게 하였는데, 집합 일자는 너무 촉박하고 겸하여 장맛비가 열흘에 걸쳐 내렸습니다. 그러자 각 읍의 수령들은 기약에 뒤졌다는 꾸지람들을 받을까 두려워서 길에서 마구 몰아쳐 밤낮 없이 달리는지라 군사들은 배고픔과 목마름이 자심하여 스스로 길가에서 목을 매어 죽는 자까지도 있었으니, 그 괴로운 형상이 이처럼 심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원망하고 배반하지 않는 것은 모두 근왕(勤王)의 일이 시급하여 정의로써 군사를 일으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찰사가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서울이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 한 군관(軍官)을 시켜서 손에 전령패(傳令牌)를 가지고 말을 달려와 외치게 하기를, “진을 파하라. 진을 파하라.” 하니, 모든 군사가 아연하지 않는 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두 수령이 공주로 달려가서 순찰사를 보고 진을 파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말했으나, 순찰사가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한꺼번에 모두 흩어져 함부로 욕하고 길에 가득히 들어차서 모두 하는 말이, “순찰사는 근왕에 전력할 뜻이 없으면서 다만 우리들만 괴롭힌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군중들이 모두 짜증을 내며 비로소 해산할 생각이 나자 마치 물이 내리 쏟아지듯 하여 억제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두 번째 군사를 징집하게 되자 여러 고을의 군사 중에 도중에서 무너져 흩어진 자가 서로 잇달았으며, 비록 더러 불러서 집합시키기도 했으나 막 집합시켜 놓으면 바로 무너져 그렇게 하기를 두 번 세 번 가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광주로 말하면 박광옥(朴光玉) 군과 더불어 흩어져 도망간 군사를 분주히 개유(開諭)하고 수습해서 천자(賤子)인 고종후(高從厚)와 고인후(高因厚)로 하여금 나누어 거느리고 수원(水原)의 전소(戰所)에 가서 광주 목사에게 교부(交付)하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순찰사는 도중에서 머뭇거리며 모든 군사를 돌려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4, 5일 동안 유숙하노라니 사람은 모두 비를 맞고 서 있었습니다. 용인(龍仁) 싸움에 이르러 왜적의 군사는 수도 적고 형세도 궁해서 산마루 험한 곳에 진을 치고 울을 막아 스스로 방위하고 있는데, 충청도 순찰사ㆍ절도사의 병력과 전라도 순찰사ㆍ방어사의 병력이 수효가 십만으로 헤일 만하니 그런 조그마한 무리쯤이야 족히 깃발 한 번 휘두르면 박멸할 수 있었을 것이어늘, 불행히도 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사람들이 적을 경솔히 여겨 먼저 올라가다가 한꺼번에 진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대부대가 아직 건전한 이상 승리를 거두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3명의 왜적이 앞장서서 곧장 전진하는 것을 보고서 충청 절도(忠淸節度)의 군사가 먼저 무너지고 여러 진이 계속 무너져 화약ㆍ총통(銃筒)ㆍ전마(戰馬)를 모두 적에게 버려두었습니다. 나 고경명이 몸소 전사(戰士) 4, 5명을 만나본 바 매우 자상히 말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같이 모두 동일하며, 장성 현감(長城縣監) 백수종(白守宗)이 하는 말도 역시 전사들과 서로 같았으니, 고금 천하에 싸우다 패한 자가 퍽 많지만 이와 같이 통분하고 애석한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순찰사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충청도 내포(內浦)를 경유하여 임피(臨陂)에 당도하자 곧 도내 열읍에 공문을 띄워 정병을 징발하여 바닷길로 임진(臨津)에 도달하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소란하여 선뜻 명령에 응하지 아니하니 비록 억압하여 몰아댄다 해도 마침내는 반드시 전과 같이 분산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순찰사가 지금 태인(泰仁)에 있으면서 의논할 일이 있다고 칭탁하고 격문(檄文)을 띄워 좌수사(左水使) 이순신(李舜臣)과 무주(茂朱)의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을 불러 모두 태인에 모이게 하였는데, 태인은 좌수영(左水營)과의 거리나 무주와의 길이 모두 너무 머니, 오늘날 적병이 국내에 밀어닥쳐 변란이 숨 한 번 쉴 만큼 짧은 시간에 달려 있는데 순찰사가 의논한다는 일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 고경명이 이때 전주에 있으면서 이계정이 달려 가는 것을 보고 또 각관(各官)에서 전달한 보고를 얻어 본즉, 왜적이 무주의 속현(屬縣)에 들어와 민가를 불태웠고 적의 배 두 척이 또 순천(順天)에 침범하여 온 경내가 계엄 속에 들었으니, 대개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이용하여 간첩으로 삼기 때문에 빈틈을 타서 몰래 들어온 것입니다. 순찰사의 전후 처사를 더듬어 보면, 실로 그 의도가 무엇을 하려고 함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ㆍ부윤(府尹) 권수(權燧)를 만나본즉, 이때 최철견은 전라 도사가 되었고, 권수는 전주 부윤이 되었다. 역시 순찰사의 의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니 괴이한 일이요, 통분할 일입니다. 당초 병사(兵使) 최공(崔公)이 의병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얼굴에 나타내며, 도울 수 있는 일이면 힘을 다했습니다. 그때 순찰사가 다른 지방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순찰사에게 공문을 보내 각 고을의 남은 무기를 의병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킨 후로 약간의 무기를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 얻었으나 대개는 묵고 헐어서 쓰지 못할 물건들이며 그나마 수효도 많지 않아서 일행 중에 군관(軍官)까지도 다 갖지 못했는데, 하물며 싸우는 마당에 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듣자니 순찰사가 용인에서 패전한 후부터는 매양 본도의 인심이 고약하다고 트집을 잡으며 오직 도망친 군사들에게만 허물을 돌리어 뒷날 자신을 합리화할 계책을 하고 있다가, 마침내 의병이 한 번 일어나서 모집에 응하는 자가 구름같이 모이는 것을 보고서 순찰사가 마음이 몹시 달갑지 않아서, “군고(軍庫)를 함부로 열었다.” 하고 명목을 잡는데 까지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요 두려운 일입니다. 무릇 수령 가운데 의거에 따르기를 원하는 이도 역시 많으나 순찰사에게 간섭을 받아[掣肘] 끝내 의병 노릇을 할 수 없게 되고 수령들도 또한 순찰사의 행동을 본받은 자가 있어 다방면으로 저해하여 의거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좌절시켜서 심지어 의병 모집에 응한 자의 처자를 잡아다 가두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래도 다시 종군을 하고 떠나려고 하지 않으니 진실로 슬픈 일입니다. 요즘에 각 도의 근왕군(勤王軍)은 한 번도 왜적과 더불어 싸운 일이 없이 양경(兩京)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적이 무서워서 임금을 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취화(翠華 임금의 수례)가 길을 떠나 멀리 함경도[咸關]로 순행하고 계시니 구구히 기대할 바는 오직 의병을 한 번 일으키는 데 있거늘, 순찰사의 뜻이 이와 같고 조정은 천리 밖에 떨어져 있어 대궐 문앞에 나아가 호소할 길이 없은즉, 원한을 품고 스스로 불칙한 죄망에 걸려 죽을까 심히 두렵습니다. 믿는 바는 먼 데나 가까운 데나 모두 소문을 듣고 호응하여 힘세고 날랜 자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쉬지 않고 모여들고 있으니, 오직 벌판에 나아가 눈물을 뿌리며 이 심정을 밝힐 것을 생각할 따름입니다.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고금의 정론이니, 성공하고 못할 것은 계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바라건대 상공(相公)은 비생(鄙生)의 일편단심을 통찰하시어 곡단(曲端)과 같이 원통하게 죽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태헌(苔軒)의 수초(手草)로 《정기록(正氣錄)》에 나온다.
○ 전주 전 만호(萬戶) 황박(黃璞)이 자원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아 웅현(熊峴)에 복병을 설치하니, 웅현은 바로 전주와 진안(鎭安)의 경계이다. 이때에 이광(李洸)이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과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감(鄭湛) 등을 복병장으로 삼아 웅현을 파수하게 했는데 황박이 가서 조력한 것이다.
○ 경상 초유사(慶尙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전 현풍 군수(玄風郡守) 엄홍(嚴泓)을 본군의 병장으로 삼고, 곽찬(郭趲)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에 현풍 등지의 유수한 집안들은 모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가야산(伽倻山)이나 덕유산(德裕山) 등지로 들어갔는데, 김성일이 영지(令旨)를 전달하여 엄홍 등을 불러 본임(本任)으로 정하고, 또 격문을 띄워 이민(吏民)을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라의 운수가 극히 비색하여 칠치(漆齒 왜적을 이름)가 몰아 들어오니 임금은 파천(播遷) 길을 떠나시고 종묘 사직은 먼지를 무릅쓰게 되었다. 슬프다! 사람이면 다 양심이 있는 법이니, 무릇 이 땅에 살며 밥을 먹는 자는 누구나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영남(嶺南)은 본시 추로(鄒魯 문명의 나라를 이름)의 고장이라 일컬어져 왔거니와 현풍 한 고을은 더욱이 선비의 집단지가 되어 있으니, 그 사이에 절의를 위해 죽은 이를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지금 적이 성중을 점령하고 사방으로 나와 불을 지르고 있으니 그 해를 입는 자는 부모가 아니면 곧 처자다. 위로 군부(君父)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요, 아래로 형제의 원수와는 더불어 하루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알건대, 산중에 엎드려 있는 자는 창을 베고 자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이 일찍이 잠시도 마음에 잊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분개하며 적을 토벌한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워낙 극성스러운 적의 무리가 가득 몰려들어 우리 백성이 싸워 볼 만한 여지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의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 지조를 바꾸지 않고, 용맹 있는 사람은 강하고 약한 것으로 기운이 꺾이지 않는 법이니, 원컨대 긴밀히 서로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그 힘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다면, 고을에 있으면서 충갑(冲甲)의 군사처럼 떨쳐도 좋고, 형세가 능히 자립할 수 없거들랑 군사를 이끌고 병사의 진영으로 가도 좋다. 혹시 당면한 직책을 버릴 수 없다고 여긴다면 강을 건너 의거에 참여해도 무엇이 불가할 것 있겠느냐. 지난 번에 합천(陜川)과 의령(宜寧)에서 정인홍(鄭仁弘)의 경우와 고령(高靈)에서 좌랑(佐郞) 김면(金沔)의 경우에 충성을 떨치고 의기를 다하여 한 번 외치자 각 고을이 호응하였고, 요즘 와서는 군사의 성세가 크게 떨치니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거의 확실하다. 본군의 백성들이 왜놈의 위력에 겁내지 말고 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가다듬어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충의로운 분기가 격동하여 용기가 백 배나 솟을 것이니 저 왜적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적하겠는가. 하물며 지금 왜적이 얼마 안 되는 군사를 끌고 깊이 들어와서 그 흉악한 기운이 이미 개성(開城)의 청석(靑石)에서 꺾이었고 서경(西京 평양)의 대동강에 침몰되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어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빼앗기고 명(明) 나라 병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조(祖)ㆍ곽(郭)ㆍ왕(王) 세 대장이 각기 정병 여러 만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달려와 응원하며, 해군 10만 명이 산동성(山東省)으로부터 곧장 왜놈의 소굴을 공격하고 있으니 우리 세력은 저절로 확장되고 적은 망할 날이 머지 않은즉 이야말로 뜻있는 선비가 옷소매를 떨치며 공을 세울 절호의 시기다. 만약 시일을 끌다가 앉아서 기회를 잃는다면 화란을 안정시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장차 군신(君臣) 간의 대륜(大倫)에 비추어 죄를 얻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서겠는가. 다만 무식한 서민은 임금을 섬기는 의를 모를 수도 있은즉 그들에게는 오직 상과 벌로 권하고 징계할 수 있으니, 그들은 조정에서 내린 방목을 보지 못했는가. 공천(公賤)이나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목 하나나 둘을 베어 바친 자에겐 육품(六品)의 관직을 주고 목 셋을 바친 자에겐 통정(通政 삼품)을 주고, 왜의 장수를 베어 바친 자에겐 가선(嘉善 종이품(從二品))을 주어 공을 기록한다 하였다. 무부(武夫)와 용사가 급히 의병에 참여하여 날랜 기운으로 전쟁에 임한다면, 높게는 통후(通侯)의 인(印)을 받을 수 있고 낮아도 공신의 반열에 서게 되어 영화가 한 세상에 빛나고 덕택이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는가. 만약 혹시 계책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여전히 숲 속에만 숨어 있다면, 비록 왜놈의 칼날은 벗어날지 모르나 깊은 산중에서 굶어 죽는 신세를 면하겠는냐. 가령 만에 하나로 목숨을 유지한다 해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면 국가에는 엄연한 형벌이 있으니 비단 제 자신만 목이 달아날 뿐 아니라 그 처자된 사람까지도 사형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몸소 싸워 큰 공을 이루고 중한 상을 받는 것에 비하면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이 어떠하겠느냐.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이 될 것이니 너희들은 부디 힘쓸지어다. 비안(庇安) 등 여러 읍에 모두 이 격문을 띄웠다.
○ 중외(中外)의 대소 신민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리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내가 이치를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여 정가가 그 요령을 잃었고, 어진 덕도 실지로 있지 아니하여 은택이 아래로 미치지 못했으며, 토목(土木)의 공사는 연이어 거듭 백성의 힘을 곤하게 했고, 궁중(宮中)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조그마한 이끗으로 백성을 죄망에 몰아넣었다. 심지어 바깥 지방의 산택(山澤)까지도 세력가에게 점령을 당하여 뭇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한데, 나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오직 변방의 근심만 생각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며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기어이 민생을 보호해서 적의 칼날을 면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성의 원망은 더욱 쌓이고 이로 인해서 인심은 더욱 이반되어, 적의 군사가 경내에 가까이 오자 형세를 바라보고 먼저 무너지니 백성을 보호하자는 설비가 마침내 도적에게 필요한 물자가 되고 말았다. 말이 이에 미치니, 스스로 용납할 길이 없구나. 나는 생각건대, 영남은 실로 인재의 부고로서 부로들은 충성과 효도를 가르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혀서, 저 옛날 김유신(金庾信)은 강개(慷慨)한 결심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김춘추(金春秋)는 앞장서서 적진에 달려 들었는데, 이 모두 본 지방 인물들이니 도내 80여 고을에 어찌 충의의 선비가 없겠느냐. 그런데 오직 너희 사서(士庶)는 네 아비와 네 할아비가 국가의 후한 은혜에 젖었는데 하루아침에 난리를 당하자 이내 나를 버리고자 하니, 나는 너희들을 허물하지 않으나 너희가 차마 나를 버린단 말이냐. 윤대(輪臺)에서 내린 한제(漢帝)의 한 장 조서(詔書)는 바로 평시에 지난 일을 후회한 것 뿐인데도 한 나라 백성이 오히려 감격했거늘, 하물며 지금 난리 중에 성상(聖上)께서 애통하심이 이에 이르고 허물을 자책하심이 이에 이르렀음에랴. 이는 실로 초목ㆍ곤충도 모두 감동할 일인데, 더구나 양심을 지니고 윤리를 아는 우리 사람임에랴. 더구나 의리를 알고 충성을 품은 선비들임에랴. 진실로 마땅히 전장에서 목숨을 던져 적개심을 다해야 할 터인데, 한 사람도 북면(北面)하고 근왕(勤王)하여 임금을 위급한 시기에 구출하는 자가 없어 임금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용만(龍灣) 천리 밖에 머무르게 하니, 원통도 하다.
○ 명(明) 나라 장수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의주(義州)에 당도하다.
○ 경상도 고령(高靈) 선비 박정완(朴廷琬)이 장사 4백여 명을 모집하여 강 기슭에 복병을 설치하고, 사재를 기울여 군량을 구입하여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창녕(昌寧)ㆍ현풍(玄風)ㆍ성주(星州)에 왕래하며 충돌하는 적들을 많이 잡았다. 그리고 또 배를 수선하고 수장(水杖)을 설치하여 강을 타고 내려 오는 적을 막았다.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한 것은 실로 박정완의 힘이 컸는데 공을 나누는 데는 참여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긴다. 《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도 초계(草溪)의 전치원(全致遠)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군사를 모집해 일으켜 정인홍(鄭仁弘)에게 소속되어 무계 및 낙동강에 왕래하는 적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가을 7월 2일. 적병이 용담(龍潭)으로부터 장수(長水)로 향하자 조방장(助防將) 이유의(李由義) 등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가다. 남원 판관(南原判官) 노종령(盧從岭)이 본부로 달려가서, “적의 부대가 이미 장수를 지나갔으니 곧 두 관아(官衙)의 권속을 남산 밖 산동촌(山洞村)으로 보내어 대피시키고 묘봉사(妙峯寺)로 들어가라.” 외치고, 노종령도 단신으로 도망쳐서 이날 밤에 원천촌(原川村)으로 들어가 잤다. 내 집에 유숙하였다. 이튿날 산동(山洞)으로 가본즉 수성원군(守城元軍)ㆍ팔결연호군(八結煙戶軍) 및 향병(鄕兵)은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고 부사(府使) 윤안성(尹安性) 만이 홀로 부 남쪽 술산(述山)에 남아서 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적병이 오지 않았다.
이유의의 분산된 군사는 모두 중도에 떠도는 자들이라, 성중에 함부로 들어와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마구 가져가니 교방(敎坊)ㆍ관청이 일시에 탕진되고, 경내 사람들도 역시 성중에 들어와 그 나머지 물건을 훔쳐냈다. 윤안성은 적이 오지 않는 것을 알고 또 난병(亂兵)이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듣자, 말을 돌이켜 달려 들어와 그중 심한 자를 목 베고 임춘루(臨春樓)에 주둔했다. 동문루의 이름이다. 부사는 바로 나의 아버지와 한 마을에 살던 옛친구 분이시라, 때마침 내가 난리를 피해서 용추동(龍湫洞)에 있다가 그 연유를 듣고 달려가 뵈니 부사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민간을 방문해서 도로 집합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방(坊)에 첩지를 내려라. 운운” 하였다.
3일. 적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도는데 관부의 물건을 옮겨 둘 방법이 없으니, 마침내 왜적의 소득이 될 바에야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무방하다고 여겨 심히 금지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창(司倉)ㆍ관청 각처의 잡물이 전부 탕진되어 조석의 지공(支供)조차 나올 데가 없었다. 형편이 부득이 하여 팔결군(八結軍)은 따로 지출을 하는데 명분 없는 징수는 역시 심히 미안하므로 각 방(坊)에 관청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을 잘 개유하여, “자진해서 다시 바치면 원래 도덕질해 간 것이 아니니 죄를 따질 까닭이 만무하며, 많은 수효를 바친 사람에게는 그 수효 중 삼분의 일을 상으로 줄 터이니 급히 실행하라.” 하였다.
○ 전날 김면(金沔)ㆍ곽재우(郭再祐) 양군(兩軍)에서 노획한 왜놈 장물 가운데 궁중의 물건이 많이 들어 있으므로 김 성일(金誠一)은 남원 고을이 적과 거리가 멀다 여겨 보내어 보관하게 했는데, 3일 난병이 도적질해 가서 전부 없어졌다.
4일. 전 도사(都事)는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기로 나서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沃川) 사람인데 처음에 귀양가 있던 곳으로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어 본현(本縣) 마을 집에 와 있으면서 낮에는 농사 짓고 밤에는 글 읽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이윽고 서울이 무너지고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고 분주히 의병을 모집하여 이날에 공주(公州)에서 깃발을 들었는데 모집에 응한 자가 천여 명이었다. 손수 격문을 초하여 삼도(三道)에 전달했다.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과 땅의 큰 덕은 생(生)이니 만물이 각기 제 자리를 얻게 할 것을 생각하라. 귀신과 사람이 미워하는 것은 적(賊)이니 원수를 같이 쳐서 그 고을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 모두들 보고 들으면, 거의 분개하고 미워하리라. 저 침략해 오는 왜적을 보면 버릇없는 묘민(苗民)보다 심하구나. 사람 죽이기를 풀 베듯이 하여 원한이 온 나라에 가득찼고, 군장(君長)을 시해하기를 여우와 토끼 사냥하듯 하니 죄가 하늘에 사무쳤다. 저 한착(寒浞 은(殷) 나라의 역적)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을 모르고, 역량(逆亮 금(金) 나라 임금)이 멀리 치러 갔던 것을 본떴다. 달콤한 말과 간사한 꾀로 처음에는 이익을 제공하여 사람을 속이더니, 자취를 감추고 군사를 숨기어 마침내 바다를 넘어 땅을 차지하려 드는구나. 태평한 지 오래라, 비록 막아낼 만한 군사가 없다지만 유린해서 깊이 들어오니 이처럼 번질 것은 생각지 않았다. 조령(鳥嶺)이 마침내 무너지니 한강(漢江)에서 무기가 번뜩이는 것이 원통하고, 용여(龍輿 임금의 수레)가 멀리 순행하니 변방에서 북두별 바라보는 것이 슬프도다. 어찌 생각했으랴! 수백 고을에 끝내 한 명의 남아가 없을 줄이야. 남의 자식을 고아로 만들고 남의 아내를 과부로 만들어도 오히려 화기[和光]를 손상하여 재앙을 이룬다 하거늘, 백성의 집안을 도륙하고 백성의 살림을 불태우면 어찌 악이 차서 죄를 부르지 않을까 보냐. 서민의 원한은 날로 쌓이고 의사의 기운은 달로 더하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죄 짓고 도망간 사람들을 수용하는 것이 탐욕 많은 금수(禽獸)보다 심함에랴. 사람의 꼴을 지녔으면 양심이 있을텐데 측은하고 수치스러운 생각이 전혀 없으니, 하늘의 명령을 받들면 반드시 천벌을 봉행(奉行)하게 되는 것이다. 어찌 힘세고 강포한 자를 무서워하랴. 전쟁을 잘하는 자는 최상의 형(刑)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백기(白起 진(秦) 나라 장수)가 사형을 받았다. 죽이길 좋아하는 자는 대벽(大辟 목 베어 죽이는 형)을 범하는 것이니, 뒤에는 황소(黃巢 당(唐) 나라 역적)가 패해 처단되었다. 그러므로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모두 이 왜적을 떳떳이 죽일 것을 생각한다 들었고, 또한 반드시 산천 귀신이 이미 추악한 무리를 음주(陰誅)하기로 의논했으리라. 그런데 우리 군사를 이끌어 가는 규율을 생각하면, 대개 《주역(周易)》에 나타난장인(丈人)의 원길(元吉)이 아니다. 누가 황금으로 띠를 두르고 백마(白麻 사장령)의 소중한 선고를 받았는가. 영호(嶺湖)를 돌고 돌면서 군부(君父)의 근심과 급함도 모르고 경기 근처에 머뭇거리면서 단단한 오랑캐를 앉아서 불러들이며, 삼도(三道)를 끼고 있으면서 앞서 출전한 자를 구원하지 않고 한 번 패함으로 인해 영영 뒤에 일어날 기회조차 잃었으니, 그 도적을 기른 큰 죄상을 따진다면 어찌 분곤(分閫 임금의 특명을 받은 대장)의 대권을 맡을 수 있으랴.
묘당(廟堂 조정)은 격리되어 머나먼데, 적진은 빙 둘러서 첩첩하구나. 군사의 기세는 누차 꺾이어 한탄만 하고 민생이 다시 소생할 길은 끊어졌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두면 반드시 미란(糜爛 죽이 풀어진 것같이 썩어 문드러짐)되고 말 것이다. 장차 기자(箕子)가 끼친 풍화로 하여금 영원히 야만의 지역이 되게 한단 말이냐. 하늘이 이 나라를 도와서 아직도 호남 한 지역이 온전하니, 백성이 주도(周道 조국)를 생각하매 어찌 초호(楚戶)의 세 집이 없을쏜가. 우격(羽檄 징병하는 격문)이 강을 지나는 것을 조목조목 보니, 과연 한 마디 말이 중함을 알겠다. 고 동래(高東萊)는 적을 잘 추적하고 김 수원(金水原)은 군사를 잘 쓰며, 곽 장군(郭將軍)은 영남(嶺南)에서 군사를 이끌어 용감한 기운이 있고 김 진사[上舍]는 바다 고을에서 격문을 날려 열렬한 위엄을 지녔다. 이 분들은 모두 세상을 바로잡을 영재들이라 반드시 사람을 움직일 묘법이 있을 것이니, 머지 않아 비후(豼貅) 같은 용감한 군사가 왕성하게 모여서 개나 쥐 같은 오랑캐를 없앨 것이다. 하물며 호서(湖西)의 선비들 풍습은 진실로 등군(鄧君)의 본뜻에 갑절은 되어 앞다투어 적개심을 품고 있으니 어찌 역사에 남길 공이 없을쏘냐. 청컨대 한 번의 수고를 꺼리지 말고 세 번 이기는 공을 이루도록 기약하세. 의당 뜻이 같으면 서로 호응할 것이니, 응당 온 나라가 멀리 합세하리라. 인헌(仁憲)의 기특한 꾀를 쓰니 단정코 손녕(孫寧)의 낯가죽을 벗기게 될 것이고, 무목(武穆)의 묘한 계산을 생각하니 모름지기 올출(兀朮)이 수염 깎는 꼴을 볼 것이다. 뜻이 해이하지 않으면 귀신이 감동하고 사람이 따르는 것이요, 일을 이루고자 하면 하늘이 돕고 땅이 보호하나니, 어찌 무도한 도적으로 하여금 밝은 나라에 오랫동안 불법을 범하게 할까보냐. 원충갑(元冲甲)이 한 번 북을 울리고 용맹을 떨치자 합단(哈丹)을 계악(鷄嶽)에서 무찌르고 금(金) 원후(元侯)가 한 번 활을 쏘아 적을 죽이자 몽고병(蒙古兵)을 황민(黃岷)에서 물리쳤으니, 이들은 선비와 승려로서 무력이 있는 명장이 아니지만 한 번 생각을 잘함으로써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남겼느니라. 이 나라 강산을 돌아보면 실로 인재의 부고(府庫)이다. 전조(前朝) 말엽에 해적이 여러 번 침략했으나 선배들의 힘을 입어 물리쳤고, 을묘년 여름에 갑자기 변방의 난리가 일어났으나 호걸들이 나서서 평정했다. 이제 백 년 동안이나 백성을 잘 길러냈는데, 어찌 만갑(萬甲 만군(萬軍))을 가슴속에 감춘 이가 없으랴. 혹은 백 보 밖에서 쏘아 버들잎도 뚫고 혹은 큰 산에 들어가 맨손으로 범을 잡으니, 문무(文武)를 차별해 보는 것은 정책의 그릇됨이 한탄스럽다. 생각건대 국가를 제 몸같이 여겨 신하된 도리를 다하는 자를 보기 어렵구나. 환란을 당하면 어찌 뒷 조심을 경솔히 하랴. 옛일을 거울 삼는 자는 마땅히 사전에 방비해야 한다. 진실로 천지를 돌려놓을 만한 계략이 있다면 어찌 황하(黃河)가 띠 되고 태산이 숫돌 되도록 영원하자는 맹서를 아끼겠는냐. 삼도의 힘을 합하여 위급을 해결하는 것이 오직 이때요, 일생의 재주를 다하여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이날이다. 뜻을 같이한 우리 여러 선비는 이 얻기 어려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감한 무인들과 결속하여 위급한 국맥(國脈)을 이어 나가도록 하자꾸나. 우리의 활을 당기고 우리의 화살을 먹여서 먼저 아지발도(阿止拔都)의 목구멍을 쏘고 그대의 창을 들고 그대의 방패를 나란히 하여 괴자(拐子)의 발을 연이어 찍는다면 적은 저절로 놀라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며 백성은 응당 도로 모일 가망이 있을 것이다. 밭을 매는 자는 늦은 곡식을 가꾸게 되고 나무 베는 자는 불에 탄 집을 수리하며, 호남과 영남의 한 길을 시원스레 터서 장사꾼들이 사방에 영원히 통할 것이다. 당 나라 현종(玄宗)을 파촉(巴蜀)에서 모셔 왔듯이 우리 성주를 모셔 오면 당연히 애통히 여기는 조서가 내릴 것이고, 순(舜) 임금이 조정의 사목(四目)을 밝혔듯이 우리 이목을 밝혀 약석(藥石) 같은 말을 모아들이면, 옛날의 폐단이 절로 제거되고 좋은 세상의 은택이 미쳐올 것이니, 한 번 싸움에 힘을 다해야만 후손에게 복을 끼치리라.
5일. 적병이 진안(鎭安)으로부터 전주(全州)로 향하니 이광(李洸)이 이정란(李廷鸞)을 시켜 본부의 각종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각 읍 군졸을 거느리고 만경대(萬頃臺) 산성으로 나가 진을 치고, 영남으로 공문을 발송하여 이르기를, “금산(錦山)의 왜적이 이미 무주(茂朱)ㆍ용담(龍潭)ㆍ진안 등지를 점령하고 또 전주에 침범하여 혹은 감사(監司)ㆍ안무사(安撫使)의 명령이라 칭탁하고 오로지 군사의 모집을 일삼으니, 놈들이 지나가는 열읍에는 우매한 백성들이 앞다투어 서로 따라붙는데 금산ㆍ용담이 더욱 심하다.” 하였다. ‘공문을 발송하여’ 이하는《경상 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온다.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고령(高靈)으로부터 밤에 낙동강(洛東江)을 건너 먼저 공문을 발송해 이르기를, “상사(上使)에 관한 것이다. 병사가 감사의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따라 온양(溫陽)에 당도하여, 명을 받고 도로 내려와 각 읍의 군병(軍兵)을 완전히 정돈하여 적을 토벌하고자 당일에 안동(安東) 등지로 떠나는 중이다. 여러 군사와 빠졌던 장정을 수색해 내서 요로에 복병을 설치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을 것이며, 각종 군량과 잡색 군사는 주장이 인솔하고 아병(牙兵)ㆍ업무(業武)ㆍ무재(武才)ㆍ전마(戰馬)ㆍ쇄마(刷馬)ㆍ수군ㆍ육군은 따로 정하여 상사에게 문서를 작성해 올려서 전령을 기다리도록 하며, 적들이 왕래하는 것을 잇달아 빨리 알리되 함락당한 각 읍에 대해서는 당초 접전한 상황과 함락당한 절차를 장계에 일일이 따져서 보고해야 한다. 용궁(龍宮)ㆍ예천(醴泉)의 적이 깃발을 올리고 물러가기를 서두르고 있으니 각 읍 수령들은 군졸을 집합하고 복병을 설치해 요격해서 큰 원수를 갚도록 할 것이다. 운운.” 하다. 박진이 샛길로 밀양(密陽)ㆍ풍각(豐角)에 당도하여 흩어진 백성을 불러들이는데, 박진이 전에 본군 부사를 지냈기 때문에 종군을 자원하는 자가 5백여 명이었다. 언양 현감(彦陽縣監) 김옥(金玉)과 봉사(奉事) 김대허(金大虛) 등 2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안동을 점령할 양으로 신녕(新寧)에 도착하였는데 안동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신녕 의병장인 봉사 권응수(權應銖)를 조전장(助戰將)으로 삼아 청송(靑松)ㆍ안덕(安德)으로 전향하여 진보(眞寶)에 당도했다. 안동 사람 진사(進士) 신경립(辛敬立)이 찾아와 안동 지세와 적이 주둔한 형상을 자세히 진술하면서, “적병이 만 명이 채 못 되니 오히려 쳐부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박진이 말하기를, “내 앞에 거느린 군사가 겨우 8백 명밖에 되지 않고 그나마도 모두 하도(下道)의 군사들이라 본부(本府) 도로가 멀고 가까움과 굽고 곧은 상황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가까운 지역 사람을 더 모집하여 본부 사람을 길잡이로 삼은 연후라야 진격할 수 있소. 그러니 경솔히 행동할 일이 아니오.”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비안(庇安)에 주둔한 적이 방을 써서 붙이기를, “당도자(當途者) 일본국 재상(宰相)이 어명(御命)을 받든 것은 세상을 교화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목적이니, 군내(郡內)의 사람이 산중이나 혹은 해외로 피난간 자는 집으로 돌아와 전과 같이 편안히 살라. 일본 사람으로 당인(唐人)의 처자를 빼앗은 자는 포박해서 죽이고 있으니, 농업에 종사하는 자는 부지런히 밭을 갈고 물을 대고 풀을 제거하여 가을 수확을 기다리라. 조선(朝鮮)에서 만약 무기를 가지고서 우리 군사의 왕래를 방해한다면 모조리 잡아서 형벌할 것이며, 만약 도망한 백성이 하소연할 일이 있으면 기록해서 개령(開寧) 우리 장군의 진으로 아뢰라. 이상 조목에 대하여 혹시 의심할지 모르나 하느님이 밝게 내려다보니 절대 어기지 않을 것이다. 천정(天正) 20년 7월 일. 안예 재상(安藝宰相) 대리 완호원차 삼보원충(完戶元次三寶元忠).” 하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적의 장수는 휘원유로(輝元留老)이니, 개령ㆍ비안(庇安)의 적은 필시 휘원의 부하일 것이다. 그 사연을 보니 흉악하고 간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6일. 이광이 막하 군사를 시켜 노종령(盧從岭)을 잡아다 곤장을 때려 사실 무근인 일에 놀라게 한 죄를 다스리다.
○ 경상도 삼가(三嘉)의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 형제가 군사를 모집하여 9백여 명을 얻었고, 봉사(奉事) 노흠(盧欽), 유생(儒生) 권양(權瀁)과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權濟) 등이 또한 의병을 일으키니, 김성일(金誠一)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당일로 장계를 올려 함안(咸安) 사람 이정(李瀞)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았다. 이때 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는데 이날에야 임소로 돌아와서 일을 함께 했다. 이정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군수에게 소속시켜 진해(鎭海)ㆍ창원(昌原)에서 충돌하는 적을 대항하였는데, 매번 싸움에 이기면 선뜻 공을 군수에게 돌리고 자신은 참여하지 않았다. 박사제(朴思齊)는 봉사 윤탁(尹鐸)을 대리 장수로 삼아 그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곽재우(郭再祐)에게 부속시켜 영산(靈山)ㆍ창녕(昌寧)을 왕래하는 적을 방어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고경명(高敬命)이 연산(連山)에 머물러 진을 치고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에게 영(令)을 전달하여 금산(錦山)에 남아 뒤처진 적을 치자고 약속했는데, 이광이 군관을 시켜 고경명에게 군사를 돌이켜 함께 지키기를 청하였다. 고경명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연산에서 떠나 진산(珍山)으로 전진하면서 정예부대를 뽑아서 길을 나누어 정탐하게 했다. 이광이 곽영에게 영을 전달하여, “달려오라.” 했는데, 곽영이 듣지 아니하고 의병을 따라 금산으로 향하였다.
○ 경상도 금산(金山) 소모관인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면서 권응성(權應星)을 임시 장수로 삼았는데, 김면(金沔)의 지례(知禮)ㆍ금산 싸움에 권응성이 협조해 공격한 공이 있었다. 그 후 권응성은 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 죽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창녕(昌寧)의 생원 신방즙(辛邦楫),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이 군사 7백여 명을 모아 복병을 설치하고 적을 쳐서 서로 계속 적의 귀를 베어 바쳤다. 보인(保人) 조열(曹悅)과 성천희 등은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녕을 포위하여 종일토록 교전하는데, 적 한 놈이 백마(白馬)를 타고 자칭 고을 원님이라 하므로 마침내 그 놈을 쏘아 당장 죽게 하였다. 그런 지 3일 후에 적은 울을 불태우고 도망갔다. 전 의령 목사(宜寧牧使) 소모관 오운(吳澐)이 한 고을을 개유(開諭)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얻었다. 《경상순영록》에 나온다.
8일. 적이 웅현(熊峴)을 넘으니 복병장(伏兵將) 김제 군수(金堤郡守) 정담(鄭湛)이 싸우다 죽다. 처음에 도복병장인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이 중봉(中峯)에 진을 치고 황박(黃璞)이 그 위에서 지키며 정담은 그 아래서 지키는데. 이광(李洸)이 장병을 더 보내어 군의 위세를 도왔다. 이날 동이 틀 무렵에 거의 수천 명에 달하는 왜적의 선봉 부대가 모두 기(旗)를 등에 꽂고 칼을 휘두르며 곧장 우리 진 앞으로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가 하늘에 잇닿고 쏘는 탄환이 비오듯 하였다. 이복남 등이 결사적으로 먼저 나와 활을 쏘아 낱낱이 명중시키며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우니 적병이 점점 퇴각하였다. 아침 해가 동으로 올라와, 뒤의 적이 산과 골짜기를 덮으며 크게 몰려오는데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었다. 산중턱을 육박하여 여러 부대로 나누어 들어와 싸우는데 흰 칼날이 어울려 번쩍이고 나는 탄환이 우박 쏟듯 하였다. 뒤를 이어 응원하는 적이 얼마 안 있다가 또 와서 합세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과 같았다. 황박은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 되어 무너져 나주 진중으로 들어갔다. 적병이 승세를 타고 충돌하여 고갯마루로 오르니 나주의 진 역시 무너졌다.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도 후퇴하여 살 수는 없다.” 하고, 용감히 적과 더불어 육박전을 벌이다 죽었다. 이복남 등은 싸우면서 후퇴하여 안덕원(安德院)에 전주 동쪽 10리 길에 있다. 군사를 주둔하였다. 그 후 만력(萬歷)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김제군의 유생(儒生) 조성립(趙誠立) 등이 정담의 덕과 의를 사모한 나머지 그 공적이 드러나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김찬(金瓚)에게 신원장(申寃狀)을 올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조성립 등이 검찰사(檢察使) 상공(相公) 합하(閤下)에 글월을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착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포상하고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을 주는 것은 국가의 권면하는 법전입니다. 작고한 군수 정담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강개하며, 난리가 한창 심할 적에 본군 원으로 오게 되자 충성심을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며 용맹 있는 장정들을 뽑아들여 소 치고 술 걸러 배부르게 먹이니 병사들이 감격하여 그 밑에서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공산(公山)으로부터 진을 파하던 날에 공산은 곧 공주(公州)이니, 이광(李洸)이 처음 근왕(勤王)한 곳이다. 전 현감 어득준(魚得濬)과 더불어 울며 말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 근왕하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으니 주장(主將)의 뜻을 알 수 없다. 장차 의병을 이끌고 멀리 전하의 행차를 따를 생각을 하면서, 육지를 거쳐 좇으려고 하는가. 경기의 왜적이 그득히 퍼져서 바다를 건너 고을로 진군하고 있으니, 연해(沿海)가 아니면 본래 배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 전하께서 계신 데까지 이를 것인가.” 하였습니다. 매양 밥상을 대하면 문득 송구하게 여겨 달게 먹지 않으면서 장좌(將佐)들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나물 한 가닥 쌀 한 톨이 모두 주상께서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주상께서 서도(西道)로 파천하시어 기갈(飢渴)이 매우 심하실텐데 나는 너희들과 더불어 차마 이 밥을 먹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마음에 편안할 일이겠느냐.”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본군 선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아무 해에 과거에 올라 아무 해에 아무 벼슬이 되었다가 지금 또 급이 올라서 이 고을에 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를 이미 후히 입었다. 하물며 아들 하나가 있어 집안 일을 맡길 만하니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한들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내가 하는 것을 보라.” 하고, 인하여 목이 마르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일찍이 조방장(助防將) 백광언(白光彦)에게 왕래하여 합심해서 적을 토벌하기로 하였으므로, 온 도내가 이 사실을 듣고 모두 국사(國士)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서 용감한 자들이 마음을 의지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병장이 되어 웅현(熊峴)에 방어하러 갈 적에는 주효를 조촐하게 장만하여 고사를 지내고 떠났으며, 그곳에 가서 보고는 험준한 데를 가려서 나무를 베어 울을 막고 군사들과 더불어 맹서하기를, “절대 싸워야 하며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적병 만여 명이 고개로 올라오자 군수가 활쏘는 군사를 독려하여 거느리고 진 앞에 서서 활을 쏘는데, 하나도 적중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적의 무리가 쓰러져 여러 번 퇴각하였습니다. 적의 괴수 한 놈이 백마를 타고 붉은 기를 꽂고 그 무리를 독려하여 곧장 진 앞으로 다가오자, 군수가 다시 두어 걸음을 앞으로 나가 화살을 뽑아 활에 먹이며 여러 장령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화살로 반드시 저 괴수놈을 떨어뜨릴 것이다.” 했는데, 과연 그 화살에 맞아 넘어지므로 모두가 탄복하였습니다. 혹자가 나가서 그 적의 귀를 베어 오려고 하자 군수가 꾸짖고 말리며 말하기를, “네가 내 진중에 있는데 어찌하여 공을 탐내느냐.” 하고, 중지시켰습니다. 적이 군수의 진은 마침내 침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나주 진의 허술한 곳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오니 그 진의 장병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비장(裨將) 한 사람이 바삐 와서 말하기를, “저쪽 진이 이미 무너져 적의 선봉이 충돌해 들어오니 조금 후퇴하여 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군수는 눈을 부릅뜨고 크게 꾸짖으며 종사관 이봉(李葑) 및 보좌관 몇 명과 더불어 굳건히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기를, “차라리 적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이 몸을 끌고 달아나서 적으로 하여금 길게 몰아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욱 세차게 활을 쏘니 뒤미처 오는 적이 일시에 사방을 포위하여 마침내 힘이 다해 죽었습니다. 아! 슬픈 일입니다. 본군 사람들이 가서 군수의 시체를 찾는데, 쌓인 시체 속에서 옷섶에 성명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확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싸우다 죽을 뜻은 평소부터 정해졌던 것입니다. 살아 돌아온 각 읍 장병들이 오며 가며 서로 말하기를, “아무 고을 군수는 적을 토벌할 적에 활을 쏘면 반드시 맞히고 맞히면 반드시 꿰뚫었다. 그가 단독으로 죽인 것이 수백 명이며 또 그가 죽인 적의 장수는 가장 괴걸한 자인데, 그 적이 바로 전라 감사라 자칭하던 자다. 적은 글월을 만들어 제사하며 통곡하고 돌아갔다. 흉악한 왜적이 마침내 전주에 충돌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담의 힘이니 어찌 난리가 평정된 이날에 힘을 모아 사당을 세워 풍패(豐沛 전주)를 보존한 공을 보답하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하며, 경내에 초빈을 하고 초하루ㆍ보름과 세시(歲時)에 곡하고 제를 지내니 본군 사람들이 의를 사모하는 것은 이에 그칠 따름입니다. 지금 흉적이 물러갔으니 죽은 이의 충렬을 위로하고 장래의 용사를 격려하는 것이 국가에 있어 어찌 조금인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합하는 조정에 장계하여 이 사적이 없어지지 않게 하여 주소서.
9일. 적병이 양양역(襄陽驛)으로 전진하여 여염집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했다. 이튿날 적의 떼가 거침없이 날뛰어 완산성(完山城) 밖에서 진을 치고 드나들며 도적질을 하니, 이광(李洸)이 금구(金溝)로 도망해 가서 만경대(萬頃臺) 군사들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우리 군사가 분주하는 것을 보고 자기의 뒤를 습격할까 의심하여 그날 밤으로 금산(錦山)ㆍ무주(茂朱)로 돌아갔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전주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산성이 무너진 것이 도리어 유리하게 되었다. 한창 적병이 성 아래에서 충돌할 적에 경기전 주관(慶基殿主官) 오씨(吳氏)가 어영(御影)을 받들고 옥구(沃溝)로 달아나 뱃길로 서해 바다를 거쳐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에 도달하니, 주상 전하께서 울며 절을 드리시고 친히 제사하신 후 예조(禮曹)에 명령하여 영변(寧邊)에 고이 모시게 하셨다. 그 후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光海君) 7년 가을 9월 18일에 다시 전주에 모셨다.
○ 경상도 영산(靈山)에 사는 공휘겸(孔撝謙)이란 자가 난리 초반에 적에게 붙어 함께 서울에 와서 자기 집에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당연히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될 것이요, 낮아도 밀양 부사(密陽府使) 벼슬은 차지할 것이다.” 하고, 또 주상전하께 범하는 말이 있으므로 곽재우(郭再祐)가 듣고 몹시 분개하였다. 하루는 공휘겸이 제 집에 돌아오는 것을 곽재우가 포박해 다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쾌하게 여겼다. 이때에 거세고 사나운 남의 집 종들이 많이 주인을 죽이고 횡포를 부려 혹은 칼질을 하며 혹은 간음을 하므로, 곽재우가 들을 적마다 즉시 잡아 죽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지례(知禮)의 적이 거창(居昌)을 범하는데 적의 장수가 은가마를 타고 큰 기 세 개를 세우고 고함을 치며 들어오자, 김면(金沔)이 힘껏 싸워 후퇴시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상주(尙州) 사람 진사(進士) 김각(金覺), 교서관 정자(正字) 이준(李埈)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는데 그 격문은 다음과 같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파천하시어 돌아오지 못하시고 세상은 몹시 어지러우니, 적개심을 분발할 책임은 신하된 도리상 당연히 져야 한다. 묻노니, 밤낮으로 와신상담하는 나머지에 가슴속에 계획하는 여러 가지 일이 족히 흉한 적의 심장을 쳐부술 수 있겠는가. 지금 여러분이 다스리고 있는 두어 고을만은 적의 부대가 이미 물러갔으나 그 밖에는 아직도 가득 차 있으니, 국가에 보답하는 의거와 울타리를 굳건히 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타는 불길을 잡는 것보다 급한데 같은 배에 풍파를 만났으니 어찌 구원을 늦출 수 있겠는가. 함께 협조하고 성의를 다하여 각기 부족한 힘을 합쳐서 방휼(蚌鷸)의 형세를 좌절시킴이 오직 이때이다. 나 이준은 하늘에다 활을 쏘는[射天] 흉적을 없앨 마음이 분발하여 취일(取日 몽진한 임금을 도로 모셔옴)의 공을 이루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일찍이 동지 2, 3사람과 더불어 흩어진 군사 약간 명을 모집하여 서울에 침범한[侵鎬] 적을 무찔러 서쪽으로 파천하신[踰梁] 군색함을 위로해 드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불행히 본주가 난리를 겪은 나머지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하고 무기창고도 불에 타 없어졌으니, 군량은 반쪽의 콩도 저장된 것이 없고 무기는 한 개의 화살촉도 남은 것이 없어서, 저 옛날 제(齊) 나라 군사가 밥을 배부르게 먹었던 것처럼 먹이기는 어렵고 주(周) 나라 군사가 창을 겨누고 섰듯이 무기를 대주지 못하고 있다. 우레처럼 공격하고 번개처럼 달리는 날랜 군사는 모두 다 빈 보따리뿐이요 구정(九鼎)을 들 수 있고 적의 깃발을 빼앗을 만한 힘센 무리는 태반이 빈 주먹이라, 적을 토벌할 뜻은 있으나 무력을 써볼 수 있는 바탕이 없어 실로 오늘날의 큰 근심이 되는 것이외다. 생각건대, 제공(諸公)들이 다스리는 고을은 난리를 겪은 것이 본 고을같이 심하지는 아니하니 만약 한계를 구별하지 않고 적을 토벌하는 준비에 힘을 같이해 주신다면, 저 허세를 부려 날뛰는 놈들쯤은 바로 한 바다에 거꾸러져 사라져가는 잿더미와 같은 격이니 한 도내의 많은 병력으로 어찌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개미처럼 모여서 그 독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리까. 엎드려 바라건대, 각기 역량이 미치는 대로 혹은 한 바리의 곡식이나 혹은 부스러기 쇠붙이라도 모아서 보내주시면, 제공에게 힘 되는 것은 극히 미세하지만 군수에 소용되는 것은 매우 긴요할 것입니다. 군사는 먹을 양식이 있어 싸 가지고 가는 데 근심이 없고 무기는 마음껏 쓸 수 있어 만족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적은 부뚜막에 걸린 솥 속의 고기라 문드러지게 삶아낼 것이요 우리는 진흙 속과 이슬 속에서 헤매는 부끄러움을 쾌히 씻을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서로 구원해주신 공이 중흥하는 즈음에 힘입은 바 클 것입니다. 이에 무기와 군량을 조달하는 책임자 두 사람을 보내어 편지를 올려 속마음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만약 월(越) 나라와 진(秦) 나라가 서로 형편을 상관하지 않듯이 여기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형세를 무시한다면, 기대했던 본의가 심히 아닐 것이며, 협력하여 일을 같이 하자는 청원을 또 어느 곳에 구하리까.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금산(錦山)에 진을 친 왜적이 다음과 같은 글월을 고시하다.
대일본(大日本) 대왕은 정치의 도를 조선에 베풀어 백성들을 구휼하려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바다와 육지의 길을 막아 도리어 원수를 사는가. 이른바 당랑(蟷蜋 사마귀)이 수레바퀴를 항거하고 비부(蚍蜉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든다는 말이 바로 이것인가. 이로 인해 깊은 여항(閭巷)을 찾아 들어가서 기병ㆍ보병이 깃발을 드날리고 칼날을 비껴 드니, 성문은 소실되고 집집마다 포성이 진동하였다. 역당들을 모조리 잡아 목을 잘라 죽이려고 했으나 죄과의 많고 적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또 그 부모 처자가 가엾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하여 굶주림을 구원해서 생명을 보존하게 했다. 비록 이같이 했으나 싸우려 달겨드는 자는 살해할 것이다. 지난번 무관으로 들[野]에 있었던 사람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옛집으로 돌아가서 해를 따라 풍속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정리하여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일본 황제가 조선 황제와 더불어 반드시 회합을 갖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어찌 알지 못하느냐. 아무쪼록 이 말을 산중의 무관에게 알리어 활과 칼을 버리고 와서 항복한다면 무슨 죄를 당하겠느냐. 만약 이 뜻을 위반하는 일이 있으면 거듭 이 땅에 주둔하여 수백 명의 병관(兵官)을 거느리고 다시 살륙을 가할 것이다. 장협(長鋏) 오장대왕(吾將大王)이 거듭 안무하여 옛 조정에서 이 나라 천자를 위하니, 또한 천행(天幸)의 은혜가 내리기를. 이만 줄인다. 천정(天正) 20년 부상(扶桑) 신 안국사(安國寺). 이것을 보면 과연 전라 감사라고 칭호한 자이다.
또 투서(投書)를 얻어 보니, ‘야운(野雲)’이라 했다. 고경명(高敬命)이 해석하기를, “넓은 들에 희미한 구름 끊어지고, 빈 산에 조각달이 비끼었구나.” 하였다.
○ 이광이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남원(南原)의 수성장(守城將)으로 임명하였는데, 권율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남원을 지키면서 도내 각 읍에 공문을 띄워 이광이 근왕(勤王)하는 데 오지 않은 죄상을 들어 공격하기로 하였다.
○ 합천(陜川)의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이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의 적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 이때 김준민은 처음 와서 재주를 시험해 본 바 없었고,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 이홍우(李弘宇)의 군사는 이부산(伊傅山)에 있었으며, 고령(高靈)ㆍ합천의 군사는 가천(伽川) 성주 서면의 마을 이름이다. 에 있고 문여(文勵)의 군사도 역시 성주에 있어 모두 정인홍의 지휘를 받았다. 정인홍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반드시 대부대의 적을 만난 연후에야 나가 싸우되, 무릇 우리 장병은 앞서 나가 적을 공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많이 죽이는 것을 으뜸가는 공으로 삼는다. 적을 쏘아 죽이는 것이 그 다음이요, 공을 요청하기 위해 적의 머리를 베어 오는 것이 최하이다.” 하였다. 이날 밤에 성주 대교천(大橋川) 위에 머물러 진을 치고 새벽을 기다리는데, 큰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도저히 싸울 수 없으므로 부득이 회군하여 고령 마을 집으로 돌아왔다. 정인홍이 말하기를, “종묘 사직은 빈 터가 되고 적의 세력은 날로 더해가고 있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본시 힘을 다해 한 번 결전하여 적개심을 분발하기로 한 것인데, 사세가 지연되어 앉아서 시일만 허비했으며 하느님이 돕지 아니하여 오늘도 또 이러하니 이는 실로 내가 국가를 위하는 정성이 박약한 소치이다. 이를 장차 어찌하랴.” 하며, 목이 메어 눈물만 흘리고 말을 못하였다. 김준민이 옆자리에 있다가 감격한 얼굴로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어쩔 도리 없으나 내일 만약 비가 갠다면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즉시 전령하여 다시 약속을 정하고 밤중에 군사를 내서 사원동(蛇院洞) 안언(安彦) 길 옆에 진을 치고서 군사를 6, 7개소에 매복시키되, 서로 한두 마장 거리를 떨어지게 하였다. 정인홍은 중위(中衛)를 인솔하여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서 굽어보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튿날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서 김준민이 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노다촌(老多村)을 육박하니 바로 무계(茂溪) 진 밖이었다. 적이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는데, 돌과 나무토막으로 막은 울이 심히 견고하여 쳐부술 수 없으므로 곧 기세만 올리고 되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무계의 적은 철거하여 성주의 적과 합하고, 현풍(玄風)의 적은 철거하여 대구(大丘)의 적과 합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곽재우(郭再祐)가 경상 우도 열개의 읍을 수복하니 적병이 모두 좌도로 달아났다. 처음에 현풍ㆍ창녕(昌寧)ㆍ영산(靈山)에 주둔한 적이 매우 성하여 구름과 잇닿을 만큼 진을 높이 치고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어 성주와 상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재우는 본래 신기한 꾀가 많은지라, 정예 부대 수백 명을 뽑아서 현풍으로 끌고나가 혹은 산상에서 군사를 보고 혹은 성 밖에서 말을 달려 백 가지로 싸움을 거니, 적이 시종 감히 나오지 못했다. 곽재우가 또 한 자루에 다섯 가지가 난 횃불을 만들어 밤중에 고갯마루에 올라 일시에 불을 붙여 들어 불빛이 적진에 비치게 하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포를 쏘고 고함을 치며 여럿이 서로 응하여 말하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 여기 있으니 내일 접전하게 되면 반드시 다 죽이고 말 것이다. 너희들은 후회하지 말라.” 하고, 곧 불을 꺼버리고 몰래 물러났다. 그리고 밝은 새벽에 보니 현풍의 적이 간밤에 이미 도망가 버렸다. 이 거사는 마침 무계의 싸움과 같은 때였기 때문에 적은 더욱 공포심이 생겨서 도망간 것이다. 그 후 5일 만에 창녕의 왜적이 역시 소문을 듣고 철거했는데, 오직 영산의 적이 군사가 많고 강함을 믿고서 오래도록 옮기려 하지 아니하였다. 곽재우가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고하여, 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합천(陜川) 등의 군사를 내게 하여, 합천ㆍ삼가의 군사는 윤탁(尹鐸)이 영솔해서 후원을 하게 하고, 의령의 군사는 곽재우가 거느리고 적진과 마주 보는 봉 위에 들어가 진을 쳤다. 3진으로 나누어 곽재우가 중앙에 있었으므로 적의 선봉부대 기병 백여 명이 말을 달려 돌격하여 곧장 중앙으로 범하는데, 곽재우는 조금도 놀라지 아니하고 적의 전봉(前鋒)으로 갑옷 입은 자를 쏘았으며 5, 6명을 연달아 넘어뜨렸다. 적의 탄환이 비오듯 하는데도 곽재우는 태연자약하였다. 군사들이 자기 몸으로 곽재우를 가리며 결사적으로 어울려 싸워 화살과 돌을 마구 던지니, 적의 선봉 말 수십 필이 넘어져 죽고 적도 매우 많이 죽었다. 남은 적이 잠깐 후퇴하자 성 안에 있는 적이 격전하는 것을 바라보고 한꺼번에 나란히 나오니, 윤탁의 군사가 무너져 흩어지므로 적은 승세를 타서 육박했다. 곽재우는 형세가 서로 대적하지 못하게 되어 한편 싸우며 한편 후퇴해서 산으로 올라가 적을 회피하니 적도 역시 감히 끝까지 추격하지 못하였다. 저물녘에 흩어진 군사를 모아보니 하나도 사상을 당한 자 없었다. 곽재우가 윤탁이 구원하지 아니하고 먼저 도망간 죄를 책하여 장차 형에 처하려 하였는데, 윤탁이 다음에 공을 세워 형을 보상하기를 자원하므로 마침내 다시 약속하기를, “명일에 나가 싸워 불리하거든 또 명일에 나가 싸우고 그래도 불리하면 3, 4일을 한하여 기어코 반드시 이기도록 하라. 운운.” 하였다. 이튿날 새벽녘에 곽재우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들어가 고개 위에 진을 치고 사람을 보내서 정탐하였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밥 짓는 연기도 전혀 나지 아니하여 아무런 동정이 없으므로 그들이 무슨 계획이 있는가 의심했는데, 밝은 아침에 사람을 시켜 살펴보니 적은 밤중에 군막을 불태우고 이미 도망하여 까마귀 까치만 성첩에 날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창녕 한 길은 적병이 단절되고, 오직 중간 길로 밀양(密陽)ㆍ대구에서 인동(仁同)ㆍ선산(善山)에 이르기까지가 적이 왕래하는 길목이 되었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전지(傳旨)로 인하여 군공(軍功)에 내리는 상의 격식을 알게 된 뒤로부터 혹은 굶주린 백성이나 도망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적의 머리라 속여 바치고 관작과 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는데, 군공으로 출신(出身)한 자는 흔히 이런 수법에서 나왔다. 경상도 의흥현(義興縣)에서 굶주린 백성 두 사람의 머리를 베어 터럭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바친 자가 있다 하므로 순찰사가 본군 원을 시켜 조사해 보게 하였다. 곧 수령으로서 공을 요청한 자의 행위인 듯한데 확실치 못해서 마침내 덮어 두고 묻지 않았다. 의성현(義城縣)에서 왜놈의 머리를 베어 바치고 출신한 현령인 정희현(鄭希賢)이 관가에 잔치를 베풀어서 축하하니 조정의 한 벼슬아치가 시를 지어 조롱하기를,
주린 백성 머리 위에 계화가 둥실 떴고 / 飢民頭上桂花浮
붉은 첩지 가운데 원망의 피 흘렀구려 / 紅紙群中怨血流
원님의 잔치자리 술이 응당 있을텐데 / 太守慶筵知有酒
어찌 남은 술 나누어 우는 귀신 위로하지 않는가 / 盍分殘瀝慰啾啾
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경상도 예안(禮安) 고을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는데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이 격문을 지어 열읍을 효유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안집사(安集使) 김늑(金玏)이 영천(榮川)에서 훈련봉사(訓鍊奉事) 권희순(權希舜)을 의성(義城) 수성장으로, 박사(博士) 황서(黃曙)를 풍기(豐基) 수성장으로, 전 현감 이유(李愈)를 예천(醴泉) 수성장으로, 유학 박연(朴淵)을 의흥(義興) 수성장으로 삼아서 한 고을 군무를 각자 담당하게 하였으니 대개 열읍 수령들이 모두 도망간 때문이다. 이유가 안동(安東)의 생원인 김익(金翌), 진사(進士) 김윤사(金允思), 정로위(定虜衛) 안숙(安淑) 등과 더불어 각각 마을 안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다인(多仁)의 적을 방어하였다. 다인은 예천의 속현이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안집사 김늑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벼슬아치들 50여 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都事) 안제(安霽), 전 검열(檢閱)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출신(出身) 권전(權詮)을 영병장(領兵將)으로 삼았다. 인하여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관아에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 이때에 적의 군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수령들이 제 마음대로 도망갔는데, 유독 예안 현감 신지제(申之悌)만은 관문에 군사를 모으고 말에 재갈을 물리고서 변란을 대비하며 토적(土賊)을 잡아 죽이고 창고를 굳건히 지켰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안동의 생원 임흘(任屹)이 열읍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로써 개유(開諭)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양식을 모아서 함께 나라의 적을 토벌하였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경상도 김해(金海)에 진을 친 적의 배 5백여 척이 제포(薺浦)로 옮겨 정박하였다. 창녕(昌寧)ㆍ영산(靈山)의 적이 강가에 나와서 진을 치고는 혹은 의령(宜寧) 원이라 칭하고 혹은 초계(草溪) 원이라 칭하고서 장차 두 고을로 향하려 하는데 곽재우(郭再祐)가 의병(疑兵)을 설치하여 물리쳤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이는 직전에 아직 수복하지 못했을 때의 일인 듯하다.
○ 대가(大駕)는 의주(義州)로 행차하시고 학가(鶴駕 세자의 행계(行啓))는 이천(伊川)으로 이주(移駐)했다. 이는 충청 감사가 전하는 통문도 있거니와 영남 순영(巡營) 마도(馬徒) 강만택(姜萬澤)이 행조(行朝)로부터 와서 말한 것이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적의 장수 청정(淸正) 등이 북도 20여 고을을 모두 함락시켜 천 리의 주위에 농작물이 하나도 없으니, 봄철의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놈들은 그래도 두만강까지 밀고 나가서 야인(野人)의 마을 6, 7부락을 불태워 없애고 돌아갔다.
10일. 전라좌도 의병대장 고경명(高敬命)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토벌하다 패하여 전사하다. 하루 앞서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과 군사를 합하여 좌ㆍ우익을 만들어 금산 성문 밖 10리 지점에 나가 진을 쳤다. 고경명이 먼저 날랜 기병 수백 명을 발동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쏘아대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이 말에서 낙상하여 후퇴해 달아나자 적의 군사가 그 기회를 타서 육박하므로 우리 군사가 차츰 퇴각했다.
석양 무렵에 이르러 적병이 성 안으로 들어가므로 고경명이 재주 부리는 사람 30여 명을 시켜 성 밑으로 토성(土城) 들어가게 하고, 성 밖의 관사와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또 진천뢰(震天雷 대포(大砲))를 쏘아 성 안의 창고를 불태우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물을 길어다 불을 껐다. 해가 저물자,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을 치고 지켰다.
이튿날 동틀 무렵에 관군ㆍ의병 여러 진이 적의 처소로 진격하였다. 고경명은 추촌(楸村) 앞산에 웅거하여 진지를 정하고 곽영은 사직당(社稷堂) 뒷산에 머물러 결진하여, 관군은 북문에서 싸우고 의병은 동문에서 싸웠다. 적의 무리가 마침내 진지를 비우고 나와 고함치는 소리가 하늘에 연이어지니, 형세가 바람 앞에 불길과 같았다. 먼저 관군에게 덤벼드니, 선봉장 영암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달려 먼저 달아났다. 적이 인하여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등의 진을 육박하니, 곽영이 관망하다 도망해 달아났다.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지고, 고경명 및 그 아들로 문신인 고인후(高因厚)와 종사관 유팽로(柳彭老), 장서기(掌書記)인 유학 안영(安瑛) 등이 다 죽었다. 고경명의 큰 아들 전 현령 고종후(高從厚)는 무너져 흩어질 적에 아버지와 아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무너지는 군사 속에 끼어 나왔기 때문에 죽지 않았다.
○ 그 후 고종후가 이적(李適)에게 답장을 냈는데 다음과 같다.
섬 오랑캐가 난리를 꾸며 임금께서 멀리 파천해 계시니 한 집안의 삼 부자가 함께 벼슬에 오른 이상, 재주는 비록 천박하나 차마 앉아서 국가가 전복되는 것을 볼 수 없어 도내 인사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 고종후는 죽은 아우와 더불어 먼저 본주의 무너진 군사들을 개유시켜 거느리고 가서 수원(水原)의 진에 부속시키고, 장차 평양으로 향하려 하다가 길이 막혀 돌아왔습니다. 죽은 아우는 와서 담양[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키는 날에 참여했고, 저 고종후는 여산(礪山) 중로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와서 태인현(泰仁縣)을 거쳐 폐한 금구현(金溝縣)에 당도하여 인원을 모집하는 한편, 바닷길로 격문을 제주도에 전하여 사슴 쫓는 빠른 말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죽은 아우는 선친(先親)을 모시고 전주[完山]로 향하여 남원 일대의 군사와 회합하고 저 고종후는 김제(金堤)ㆍ임피(臨陂) 등 고을을 경유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해서 여산에 모이기로 기약했습니다. 죽은 아우는 또 전주로부터 휘하(麾下) 용사를 거느리고 진안(鎭安)ㆍ무주(茂朱) 등지에 복병하여 영남에서 침범하는 적의 군사를 막았고, 선친은 여전히 전주에 머물러 변을 대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 안 되어 무주에 침범했던 적병이 도로 영남으로 향한 연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삼 부자가 여산(礪山)에 모여 호서(湖西)ㆍ경기(京畿)ㆍ해서(海西)에 격문을 띄워 평안도에 전달되게 하고서 길을 떠나 은진(恩津)에서 유숙하고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황간(黃澗)ㆍ영동(永同)의 적이 금산(錦山)을 넘어왔다는 말을 듣자 휘하 군사들이 모두 돌아가서 본도를 구원하려 하였습니다. 상의한 끝에 연산(連山)으로 나가 주둔하여 험하고 굳건한 지대를 점령함으로써 양호(兩湖)의 군사와 양식을 바탕 삼아 서서히 적의 형세를 관찰하여 남으로 내려가든지 북으로 올라가든지 하자 하고, 마침내 연산으로 향하여 두 길을 보려고 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전주부의 형세가 날로 급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군(珍山郡)으로 들어갔다가, 진산에서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와 군사를 합하여 좌우익을 만들어, 의병이 종일토록 고전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적에게 밀려 10여 리를 후퇴해 달아났다가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하여 성 밖의 객사(客舍)를 불태우고 진천뢰(震天雷)를 써서 성 안의 창고를 연소시키니, 적에게 사로잡혀 간 부녀자들이 힘을 합해 물을 길어다 불을 껐습니다. 관군이 만약 힘을 합하여 격전했다면 싸움이 하루도 다 걸리지 않았을텐데, 관군이 힘을 쓰지 아니하고 또 해가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니 방어사가 진산 군수를 보내 내일의 일을 의논하였습니다. 저 고종후가 부친께 말씀드리기를, “오늘은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이긴 기세를 타서 군사를 온전히 하여 회군했다가 형세를 보아 다시 와서 들락날락하며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적과 대치하여 이 밤을 묵는다면 밤중에 적이 쳐 들어올 염려가 있습니다.” 하였더니, 부친께서 말씀하시길,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내가 죽을까 두려워하는 모양이나, 나는 국가를 위하는 일인데 한 번 죽은들 무엇이 유감되랴.” 하시므로, 저 고종후가 감히 더 말씀드리지 못하고 물러났으며, 방어사는 이날 저녁에 여러 장수들 중에서 힘껏 싸우지 아니한 자를 치죄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날 밤에 의병의 진영을 침범하기로 모의하고 있었는데 복병해 있던 우리 장교가 듣자니, 사람이 물 건너는 소리가 나므로 한 졸병을 보내 밭 가운데서 기다려 보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밭 가운데 잠복해 있던 왜적이 이를 보고서 자기들의 계획이 의병에게 발각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후퇴해 달아났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진격하였는데, 적의 떼가 갑자기 자기 진을 비우고 몰려와 우리 방어진(防禦陣)의 여러 장수에게 덤벼드니, 영암 군수(靈嵒郡守) 김성헌(金成憲)이 대번에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서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도 모두 포위를 당하자 방어진은 바라만보고 무너졌습니다. 의병의 큰 진은 방어진과 서로 바라보며 마주 진치고 있었으므로 이미 그들이 후퇴해 달아난 것을 알고, 오히려 단독으로 적을 당할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싸움에 나간 의병이 관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드디어 퇴각해 달아나 중군진으로 들어와서 진중이 소란했으나, 아직도 든든히 마음을 갖고 대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뒤에 와서 방어진을 바라보고 문득 놀라며 외치기를, “방어가 퇴각해 달아났다.” 하자, 의병의 진이 드디어 무너져 흡사 거센 물결이 가로지르는 듯하여 다시 억제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의병의 진이 무너지지 않았을 때 선친은 맨 가운데 계셨고 저 고종후는 한쪽 가에 있었으며, 죽은 아우는 독전소(督戰所)로부터 와서 한쪽 가에 있었는데, 무너질 때 저 고종후의 말이 가시덤불에 걸려 넘어져서 말을 다시 굴레 지어 가노라니 여러 군은 이미 멀어져서 그 뒤를 따라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부자 형제를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살아서 오히려 말하고 밥먹으니 천지에 죄를 진 몸이라, 날로 신의 꾸지람을 기다릴 따름입니다. 선친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우다 패하면 오직 죽는 것밖에 없다. 우리들이 성공하고 못하는 것에 국가의 안위가 매여 있으니 어찌 한 몸의 화와 복에 그칠 따름이랴.” 하셨습니다. 군사가 무너지던 날 말에서 떨어져서 말이 빨리 달아나니 모시고 가던 유생(儒生) 안영(安瑛)은 작고한 판서(判書) 이후백(李後白)의 외손인데 말에서 내려 자기의 말을 바치고 걸어서 따라가다가 안영도 역시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건장한 말을 타고 먼저 나와서 그 종에게 묻기를, “대장이 포위망을 벗어났느냐?” 하니, 종이 답하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였습니다. 유팽로가 즉시 고삐를 돌려 말을 채찍질하여 선친을 난군(亂軍) 속에서 시종하니, 선친이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먼저 나가지 않는가.” 하자, 유군이 대답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구차히 살려 하겠습니까?” 하고, 여러 번 말해도 선뜻 가지 아니하고 종시 보호했던 것입니다. 아! 통분하외다. 불초한 몸이 능히 전장에서 죽지 못하고 유독 두 열사로 하여금 선친과 같은 날에 죽게 하였으니 천지간에 한 죄인이라, 통곡밖에 무슨 말을 하리까. 아우는 뒤에 떨어져서 이미 무너진 군사를 정돈하려 하다가 진에서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먼저 달아나서 다행히 함께 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의병과 승군(僧軍)의 조력을 얻어 시체를 수습해 왔으며 선친도 변을 당한 즉시 몰래 산중에 매장했다가 역시 의병과 승군의 주선을 입어 입관(入棺)해 와서 두 상(喪)은 이미 고이 장사지냈으니 불초는 비록 죽어도 유감은 없습니다. 병든 몸이 항상 하루도 보전 못 할까 염려했었는데, 변란이 생긴 후에는 죽음을 기약하고 4월 이후로는 노상 말 위에 있었으며 비를 무릅쓰고 들판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의병을 수행하다가 이 대고(大故 선친의 상(喪)을 말함)를 만나니 친구들이 모두 장사를 치루기 전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완악한 목숨이 조금 연장되어 무사히 장사를 치렀습니다. 이와 같이 구차히 산 것은 병든 어머님과 어린 아우를 위하려는 생각이요, 또 죽은 아우의 4남 1녀를 길러 그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다만 병의 뿌리가 깊이 박혀 한 번 발작하면 비록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이라도 역시 손을 들 수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의병이 두 번째 일어난 것은 대개 선친이 남긴 서업(緖業 사업)으로 인한 것이며, 용감한 군사와 건장한 말은 바로 선친이 제주도에 격문을 보내어 불러온 것입니다. 저 고종후가 그 군사를 따르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말하기를, “슬픔을 머금고 병든 몸을 부지하라. 반드시 죽어서 유익할 것이 없다.” 하며, 또 생각해 보니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아버지의 친상(親喪)과 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일이 아우나 조카로는 외롭고 약하여 해내기가 어려우므로 참고 기다렸습니다. 장사를 지낸 다음날 영위(靈位)에 곡하고 떠나 의병의 도청(都廳)으로 가서 여러 친우와 일을 같이 하여 선친의 소원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 생각이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처분에 맡길 뿐입니다. 어버이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면 살아서 무엇하리까. 다만 한 번 분명하게 죽는 것이 원입니다. 운운. 부자 형제가 함께 전진(戰陣)에 있다가 패전을 당하여 서로 잃고 홀로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여 지금까지 천지의 사이에 숨을 쉬고 있으니 신명이 용서하지 못할 바라,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지금 보내주신 편지를 받들어, 어머니를 모시고 적을 피하여 온 집안이 평안하심을 알았습니다. 저 고종후는 처자에 힘입어 보전하고 있으나 한결같이 비감할 따름입니다. 쇠한 병으로 본시 편한 날이 없었는데 또 이 대고(大故)를 만나니 비록 조금이나마 완악한 목숨을 연장하여 어머니와 아우를 보전하고 또 죽은 아우의 고아들을 기르고 싶으나, 기력이 끝내 지탱하지 못할 것을 스스로 두려워합니다. 부자간의 슬픔이란 남에게 말할 수 없거니와, 죽은 아우는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기술이 없었는데 한갓 구구한 충의로써 옷소매를 털고 일어나서 노상 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홀로 진의 전면을 담당하며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상 말하기를, “오늘날 일은 비록 제 몸을 희생하고 가족을 함몰시킬지라도 오히려 후회할 것이 없다.” 하여, 친한 이들은 대개 다 들었습니다. 그는 군사가 무너지자 뒤에 남아 목숨을 바쳤는데 무상한 이 몸은 홀로 몸뚱이를 보전하였으니, 못[池] 가에 봄 풀이 나면 혜련(惠連)의 꿈을 누가 꾸며 비바람 치는 한 밤중에 옛 언약을 어디서 찾으리오.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간장이 무너지나 그 영특한 모습은 눈앞에 완연합니다. 곧장 저승으로 따라 가고 싶으면서도 오히려 말하고 밥 먹으니 무슨 사람이라 하리까.
또 별지(別紙)에,
우리 온 집안이 무예(武藝)를 배우지 않은 것은 여러 사람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구구한 충의로써 인심을 격동해 일으키려는 것이었는데, 죽은 아우는 본래 의기에 찬 남아라 죽음을 결심하였습니다. 일찍이 적병이 조령(鳥嶺)을 넘은 뒤로 의병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여 형제가 함께 격문을 지었는데 그 대략에, “조령은 평탄한 길과 다름이 없고 한강(漢江)은 넓이가 허리띠 하나 만하니, 이때를 당하여 국가의 안위는 비록 대신에게 달렸지만 이처럼 방심해서 되겠는가. 모두 싸움터에 나가서 죽어야지.” 하였고, 또 이르기를, “2백 년을 이 땅에서 옷 입고 밥 먹은 것은 모두 여러 선왕이 생성(生成)해주신 은덕인데,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였으며, 그 끝 구절은 죽은 아우가 단독으로 지은 것인데 이르기를, “저놈들이 몰려들면 노중련(魯仲連)처럼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단(田單)이 제(齊) 나라를 도로 찾듯 하는 일을 바랄 뿐일세.”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역시 그 마음가짐을 징험해 알 수 있습니다. 격문이 완성되었으나 여러 친구들은 응종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본도 관군이 아직 온전하니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는 군사가 모자랄 염려가 없으며, 서로 좋아하지 않는 자가 혹시 군사 일으킨 것을 가지고서 모함한다면 어찌하랴.” 하고, 우리 온 가족도 역시 이르기를, “격문을 띄웠으나 호응하지 않으면 유익은 없고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하여, 마침내 일을 중지하였습니다. 이광(李洸)이 금강(錦江)에서 군사를 후퇴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장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나주(羅州)의 김천일(金千鎰) 영공(令公)이 편지를 보내 다짐하며, 격문을 돌려 그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들어 죄를 성토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저 고종후의 일가가 답보(答報)하기를, 순찰사가 나랏일에 성실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죄가 있다 하겠으나 이와 같이 처리한다면 사체에 어긋날 염려가 있으며, 더구나 순찰이 방금 다시 거사하는 마당에 있어 도내 선비들이 말을 모아 성토한다면 순찰이 도내를 호령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군(軍)과 민간이 복종하지 않을 염려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김천일은 이광과 사돈 간이 되므로 절실히 권하여 순찰사로 하여금 최후의 효과를 거두도록 선도하여 과연 순찰사가 군사를 일으켰는데, 각 읍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금강(錦江)에서 아무 까닭 없이 진을 파하고서 지금 무엇하자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려 하는가.” 하며, 곳곳마다 흩어져 도망가 있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근심이 실로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므로 각 읍 관리와 선비들이 함께 설유하여 간신히 떠나 보냈으나, 도중에서 계속 없어져 산중으로 들어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의병을 일으킬 계획으로 한편으로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한편으로는 대군을 계속 원조하려 하였습니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지고 의병은 격문을 돌려 북으로 올라가면서 근거지인 전주를 구원하려 하다가 금산에서 실패하였으니, 비록 공은 세우지 못했지만 당시에 만약 의병이 없었던들 호남 지방이 어육(魚肉)의 화를 입게 되었을 것은 왜놈이 들어왔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김천일 영공이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약속했으나 그 군사는 다만 나주(羅州) 한 고을에서만 징발하였기 때문에 먼저 출발하게 된 것이요, 가친은 몸소 다니며 여러 고을의 군사를 수합했기 때문에 맨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가친이 일찍이 편지에 이르기를, “적이 어찌 하루인들 호남을 잊으랴. 대개 반드시 근왕(勤王)하는 의병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기다리는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김 영공은 이미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 강화(江華)로 들어갔고, 선친은 군사를 호서(湖西)에 머무르게 했던 초기에 본도에서 경보가 있어 조정에까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속에서 한을 품게 되었으니 아! 원통합니다. 선친께서 일찍이 가족에게 말씀하시기를, “금년에 천문[天象]을 본즉 장성(將星)이 좋지 아니하니 장수에게 반드시 이롭지 못한 일이 있으리라.”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가친은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반드시 죽을 것을 각오하셨던 것입니다. 지난 해 7월에 선대에서 손수 심은, 집 앞의 큰 나무 두 그루가 바람에 뽑혔고, 금년 5월에 본 고을 객사(客舍) 향소문(鄕所門) 앞에 선 수백 년 된 고목이 또 바람에 뽑혀 향소문을 눌러서 문이 부서지고 담이 무너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찌 알았겠습니까. 본 고을에서 의병을 먼저 일으켜서 내 한 집만 유독 그 화를 받을 것을. 아! 원통합니다. 이광이 두 번째 군사를 일으킬 적에 격문을 우리 집에 부탁하므로 우리 형제가 합작해서 글월을 이루어 보냈는데 도착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격문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는 다만 그가 과오를 인증하고 죄를 보상하여 국가에 충성을 다하기만 원했는데, 그가 도리어 의병에게 감정을 품고 선친이 국사에 몸바친 뒤에 장계를 올리면서 사실과 틀리게 했으며, 함께 죽은 여러 사람의 사적도 또한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 채 조정에 올렸으니, 조정에서 어찌 이 경위를 다 알 수 있으리까. 아! 원통합니다. 또 생각하건대, “태조(太祖)께서 대업을 창건하신 것은 실로 하느님의 뜻을 받드신 것이다. 압록강(鴨綠江)에서 군사를 돌이켜 대의가 천하에 빛났고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덕이 강역을 덮었으니, 신령은 끝내 반드시 힘입을진대 은택을 어찌 잊을쏜가.”라는 이 글월은, 그 당시 격문 가운데 든 것인데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고자 하여 아울러 기록해 올립니다. 이상은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3년 만에 동궁(東宮)에서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22년 갑오년(1594, 선조 27) 정월 20일 기해(己亥) 왕세자(王世子)는 삼가 신하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 이희간(李希幹)을 보내어 증직 판서(判書) 고 공(高公)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대략(大略) 취해 읊은 3천 수의 시는 몇몇 곳에 벽사롱(碧紗籠) 있던 예전에 지은 것이요, 편의한 방략(方略) 12조목은 2번이나 고향에 남긴 사랑이로다. 국가의 다난한 때를 당하여 충의를 외치며 전장에 나섰구려. 옷소매를 걷고 일어서니 무부(武夫)들도 입이 닫히고 기가 눌리며, 당상에 올라 맹서하니 3군이 팔목을 내밀며 죽음을 결단했지요. 군중은 공을 맹주로 추대했고 사람들은 공의 의거를 흠모했소. 조정에서 군사를 훈련한 지 30년에 적을 토벌하는 것은 도리어 서생(書生)에게서 나왔고, 국가가 선비를 기른 지 2백 년에 충성을 바친 것을 다행히 이번에야 보았도다. 어찌하여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는가. 마침내 일목(一木)이 지탱하기 어려웠구려. 혈전(血戰)을 벌여 천금의 몸을 범의 입에 몰아넣었고, 남아란 죽을 자리에 죽는거라, 7척의 몸을 홍모(鴻毛)보다 가벼이 여겼소. 큰 공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장한 뜻을 품은 채 순절하다니, 일의 성패는 운명이니 다시 말해 무엇하리. 하늘이 착한 사람을 보답한다는 것을 누가 과연 측량하리까. 한 집안에서 나랏일에 죽은 자가 세 분이라, 1개월 사이에 화를 받은 것이 가장 혹심했소. 죽어도 썩지 않아서 영령의 상기도 남아 있으리니, 혼이여! 알거든 다 흠양하시라. 《정기록》에 나온다.
○ 그 후 윤근수(尹根壽)가 다음과 같이 서(敍)를 지었다.
아! 이 책은 임진왜란의 초기에 참의(參議) 고 공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킬 적에 쓴 격문과 통문(通文) 및 왕복한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글이 참의의 수필이 아니면 임피(臨陂) 형제의 수필로서, 한 집안 충의의 사연이 모조리 들어 있어 열렬한 기백이 말 밖에 넘치니, 아! 공경할 만한지고. 사라지는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어 보존되었으며 직언(直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실천에 옮겼으니, 이야말로 신하가 국난에 임하여 절개를 다하는 행동을 권장한 것이 자못 무궁하다 하겠다. 아! 공이 그 아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것은 실로 변성양(卞成陽 변호(卞壺))과 같은데, 문장으로 말하자면 변성양은 전하는 것이 없이 장원 급제한 몸으로 적의 손에 순절하였다. 공은 또 문신국(文信國 문천상(文天祥))과 같은데, 문신국의 두 아들은 다만 길 가에서 병들어 죽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또 공의 두 아들이 전후로 순절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니, 공의 한 집에서 이루어진 것이 어찌 보기 드물만큼 우뚝 뛰어났다고 이르지 않겠는가. 승명각(承明閣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는 사가(賜暇)를 받아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고, 노란 인끈을 띠고 큰 고을 맡아서는 청렴 결백으로 소문이 났으며, 가마귀 떼 같은 군사로 날래고 강한 적과 항거하여서는 다만 대의로써 격려했노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는지라 뜻과 같이 되지 않았으니, 몸을 던져 순절하여 마침내 충절로써 나타났네. 공이야말로 한 세상의 전인(全人)이 아니겠는가. 세상에서 날마다 문인(文人)더러 실용성이 적다고 헐뜯는 자가 많으나, 이를 보면 어찌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뉘우치지 않겠는가. 옛날 나일봉(羅一峯)이 문문산(文文山)의 첩(帖)에 발(跋)을 쓰면서 스스로 이르기를,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이라.” 하였는데, 이 기록을 읽는 자는 글자 글자마다 울움이 터질 것이니 글자 하나에 눈물 한 방울 정도가 아니다. 을미년(1595, 선조 28)에 내가 영남(嶺南)을 다녀오다 봉성(鳳城)에 머물렀는데, 공의 아들 유후씨(由厚氏)가 나를 공의 지기지우(知己之友)라 하여 객관(客館)으로 찾아와 보고 이 책을 보이면서 책 이름을 지어 달라고 청하므로 나는《정기록(正氣錄)》이라 쓰고 아울러 서문의 청탁마저 허락했다. 그러나 이내 이루지 못하고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유후씨도 역시 세상을 떠났으니 슬픈 일이다. 지금 그 아우 용후씨(用厚氏)가 또 예전의 청을 거듭하는데 내 어찌 감히 죽은 이에게 허락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만두겠는가. 더구나 이로 인해 감개 무량한 바 있으니, 《정절집(靖節集 도잠(陶潛))》ㆍ《문산집(文山集 문천상(文天祥))》 등을 간행하게 한 것이 특명에서 나왔으며 바로 병란 직전의 일인즉, 성상의 깊으신 생각으로 오늘날이 있을 것을 짐작하시고 미리 절의를 배양하기 위해 생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뜻과 서로 합치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이 《정기록》이 세상의 교화에 관계되는 것이 실로 《문산집》 등과 더불어 나란할 것이니, 어찌 한 집안에만 수장하는 데 그쳐서야 되겠는가. 난리가 평정되고 의논이 문사(文事)에 미친다면 신하를 위해 충성을 권하는 것이 이 책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판각해서 세상에 반포하기를 나는 공수(拱手)하고 기다리는 바이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 32) 10월 □일 수충공성 익모수기 광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해평부원군 겸지 경연사(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輔國崇祿大夫海平府院君兼知經筵事) 윤근수(尹根壽)는 서(敍)함. 《정기록》에 나온다.
○ 비문(碑文)은 유명 조선국 증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행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겸 초토사 고공 신도비명(有明朝鮮國贈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行通政大夫工曹參議知製敎兼招討使高公神道碑銘)이라 하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나라에 왜난(倭難)이 있자 참의 고공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온 절개를 나타냈다. 이윽고 십여 년이 지났으나 신도비문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루는 공의 자제 용후(用厚)가 나를 찾아보고 청하기를, “선친이 공의 형제와 종유한 바 있으니 선친이 나랏일에 몸을 바친 전말은 공께서 분명히 아는 바이므로, 감히 공의 비문 한 장을 얻어서 이 사적을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원입니다.” 하고, 또 그 자당의 명을 말하였다. 아! 공의 사적을 이야기하면 눈물이 나며 슬픔이 그지없으니, 내 비록 글은 잘 못할망정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왜적이 크게 몰려와 침범할 즈음에 공은 광주(光州) 향리에 있었다. 우리 군사가 싸울 적마다 무너져 조령(鳥嶺)의 요새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호남 순찰사가 왕실(王室)을 호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공은 홀로 아들 고종후(高從厚)ㆍ고인후(高因厚)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했다. 이윽고 또 임금께서 서도로 파천하시고 도성(都城)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공은 밤낮으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순찰사가 근왕병(勤王兵)을 영솔하고 금강(錦江)에 당도하자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진을 파하여 온 도내 인심이 흉흉하였다. 공이 순찰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뒤에라도 잘하도록 책망했는데 말이 진지하고 절실했으나 반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공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통분하게 여기고, 나주 사람 전 부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흥복(興復)할 것을 계획하며 편지 왕래가 많았다. 공은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고 5월 무자일에 담양부(潭陽府)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옥과(玉果) 사람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 등이 공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으니, 공은 본시 군사면에 익숙하지 못하지만 개연히 장단(將壇)에 오르며 늙고 병든 것으로써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도내에 격문을 발송하여, 모집에 응한 자가 날마다 모여 들었다. 6월 기해일에 공이 담양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섰다. 이때 삼도(三道)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져 호서(湖西)ㆍ호남이 더욱 흔들렸는데 유독 공을 의지하여 자중했다. 공은 전주로부터 군사를 정돈하여 북으로 올라가 여산(礪山)에 당도하자 손수 격문을 초하여 여러 도에 고하여 관서(關西)로 도달하게 했다. 공이 장차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는데, 적이 황간(黃澗)으로부터 금산(錦山)으로 넘어올 때 군수가 패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형세가 더욱 성하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 군사들이 앞다투어 돌아가 본도를 구원하고자 하였고 공도 역시 그렇게 여겼다. 7월 경신일에 공이 마침내 군사를 진산(珍山)으로 옮겨 금산의 적을 치려 하는데, 날랜 군사로 모집에 응한 자가 갈수록 많아서 군(軍)의 기세가 더욱 떨쳤다. 병인일에 드디어 장병들에게 부서를 정하여 금산으로 들어가서 방어사 곽영(郭嶸)과 더불어 좌ㆍ우익이 되었다. 공이 먼저 정병 수백 기(騎)를 보내어 곧장 적의 소굴로 내닫게 하였는데, 그들이 적에게 눌려 후퇴하게 되었다. 공이 북을 울려 싸움을 독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죽음을 걸고 싸워 도로 적병을 토성(土城)에서 제압했다. 성 밖의 관사(館舍)를 불태우고 또 대포를 쏘아 성 안을 연소시키자 기세가 올랐다.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해 나오므로 의병이 사면으로 포위 공격하니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감히 더 나오지 못했다. 마침 날이 저물고 관군이 또 싸움에 조력하고자 아니하였으며, 토성이 두텁고 완전하여 졸기에 무너뜨릴 수 없으므로, 마침내 퇴군하여 진으로 돌아왔다. 이날 저녁에 방어사가 사람을 보내어 명일에 협력하여 싸울 것을 약속하니, 공의 맏아들 고종후가 공에게 말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이득을 보았으니 이 승리의 기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살펴 다시 나와 적을 곤란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며, 적과 대치하여 들에서 잔다면 혹시 야습(夜襲)을 당할까 염려됩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너는 부자의 정으로써 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직분이다.” 하다. 이날 밤에 적이 과연 침범하기를 모의하고 몰래 나와 복병을 설치하려 하다가 순라군(巡羅軍)에게 발각되었다. 이튿날 정묘일에 공이 방어사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는데, 공은 적과 5리쯤 떨어져서 진을 머물러 방어의 진과 마주 보게 되었다. 공이 8백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싸움을 걸어 미처 어울리지 못했는데, 적이 자기네 진지를 비우고 몰려 나와 먼저 관군에게 범하니 방어사 관하 장수 김성헌(金成憲)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도망갔다. 적이 광주(光州)ㆍ흥덕(興德) 두 진을 덮치니 방어의 진이 그 바람에 따라 무너지므로 공은 단독으로 담당할 계획을 하고 군사로 하여금 모두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대기하게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외치기를, “방어의 진이 무너졌다.” 하니, 의병의 진도 따라서 무너졌다. 공은 진작부터 하는 말이, “나는 말타기가 익숙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면 오직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좌우에서 공더러 말을 타고 뛰라고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구차히 죽음을 모면하려 하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하가 공을 부축하여 말에 올려 앉혔는데, 공은 이내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빠져 달아나므로 공의 부하 유생(儒生)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공을 태우고 자기는 도보로 시종했다. 공의 종사관(從事官) 유팽로(柳彭老)가 탄 말은 몹시 날래서 먼저 나오게 되어 그 마부에게 묻기를, “대장이 벗어났느냐?” 하자, 마부가 벗어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유팽로가 문득 말을 몰고 도로 난병(亂兵) 속으로 들어가 공을 모시니, 공이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면하지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벗어나라.” 하니, 유팽로가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차마 대장님을 버리고 살 길을 찾겠습니까.” 하였다. 적의 칼날이 마침내 공에게 미쳐 공이 결국 죽고 유팽로는 제 몸으로 공을 막다가 다 함께 죽었으며, 안영도 죽었다. 공의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가 무사(武士)를 거느리고 앞 줄에서 화살과 돌 속을 출입하다가 군사가 무너지자 말에서 내려 그 부하들을 정제하고 진에서 전사했다. 근처 고을 백성들은 공이 패했다는 말을 듣자 노소간에 모두 짐을 짊어지고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우리들은 이제 다 죽었다.” 하며, 곡성이 들판에 진동하였다. 진은 무너졌으나 군사들이 공의 생사를 모르고 차츰 와 모였는데, 마침내 공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모두 울부짖으며 해산했다. 남도 백성들은 알건 모르건 간에 다 서로 조문하며 원통하게 여겼다. 공이 백발 늙은 서생으로 국가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일어서서 호남 의병의 선창이 되자, 비록 어리석고 조급한 군졸이나 산중에 도피한 자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다투어 모여들어 한 달 이내에 의병의 수효가 수천 명에 달했으니, 대개 공의 의기가 지성에서 우러나서 남을 감동시킬 만했기 때문이다. 공이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천문(天文)을 쳐다보고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장성(將星)이 좋지 않으니 장수에게 반드시 불리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은 진실로 생사의 이치에 밝음과 동시에 의거하는 날부터 벌써 목숨을 던질 것을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내 금산에 있는 왜적을 토벌하게 되자 사위 박숙(朴橚)에게 편지를 주어 집안일을 부탁하였으니, 공이 처사한 것을 보면 대개 본래부터 마음을 결정했던 모양이다. 왜적이 금산에 웅거해 있을 적에 병권을 장악한 문신ㆍ무신의 장수들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방황하고 있는데, 유독 공은 일의 성패를 헤아리지 아니하고 친히 범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과 더불어 혈전(血戰)을 벌여 몸을 나라에 바쳐 순절했다. 비록 승첩을 올려 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공이 순절한 후로 공이 전장에 나가 죽는 것을 보고서 적을 공격하는 자가 계속해 일어났기 때문에, 적이 비록 여러 번 이겼으나 사상자가 역시 반을 넘었으며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밤에 도망했은즉 국가에서 호남을 보유하여 뒷날 국토를 회복하는 근거지가 된 것에 대하여 그 공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공의 체백(體魄)이 몰래 금산 산중에 묻혔었는데, 적의 군사가 가로막고 있어 바로 곧 거두어 묻지 못하고 8월 모일에야 그 아들 고종후(高從厚) 등이 의병ㆍ승병(僧兵)을 청하여 공의 시체를 발굴해 내서 무릇 40여 일만에 비로소 염습했다. 성상께서 용만(龍灣)에 계시던 날에 공이 의병을 일으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하여 공에게 공조참의 겸 초토사(工曹參議兼招討使)를 제수하고 글월을 내려 위로했는데 그 글월에, “열읍(列邑)을 지휘하여 모든 것을 조달해서 도성을 회복하게 하라.” 하신 말이 있었다. 이때에 공조 좌랑(工曹佐郞) 양산숙(梁山璹)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남으로 돌아오게 되자, 성상께서 면대하여 타이르시기를, “돌아가거든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金千鎰)에게 말하라. 그대들이 하루빨리 강토를 회복해서 나로 하여금 그대들의 얼굴을 볼 날이 있게 하라.” 하였는데, 벼슬이 전달되기 전에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성상께서는 매우 슬퍼하시고 관작을 위에 있다. 추증하도록 명령했으며, 뒤에 다시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의 증직을 내렸다. 공이 순절하자 순찰사는 예전 혐의로써 심지어, “어두운 밤에 군사를 몰고 가다가 군사가 무너져 죽었다.” 하며, 공을 모함하여 장계를 올렸는데 그 이후 이정엄(李廷馣)이 순찰이 되어 공을 표창하여 나랏일에 죽었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글에, “고 모는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에 나섰으며 몸소 적의 진지에 들어가 적과 혈전을 벌이다가 불행히 패하여 부자가 함께 죽었다.” 하여, 비로소 그 실상을 파악했다고 한다. 을미년(1595, 선조 28) 여름에 유사(有司)를 명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게 했고, 신축년(1601, 선조 34) 가을에 문생 전 현감 박지효(朴之孝) 등의 상소로 인하여 특명으로 광주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게 하여 액호(額號)를 포충사(褒忠祠)라 내리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이어 봄가을로 제향을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말게 하라고 했으니, 아! 이로써 군신 간의 의를 볼 수 있다. 공의 휘(諱)는 경명이요, 자(字)는 이순(而順)이며, 파계는 제주(濟州)에서 나왔는데, 그 선세에서 장흥(長興)으로 관향(貫鄕)을 받아 장흥 고씨가 되었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 중종 28) 11월 30일 무진일에 태어났으며, 아들 6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고종후인데 정축년(1577, 선조 10)에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며 상차(喪次)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아비의 원수를 갚기로 맹서하고 영(嶺) 밖에서 전전(轉戰)하여 싸우다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강에 빠져 죽었다. 그 후에 도승지(都承旨)의 증직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은 곧 고인후이니 기축년(1589, 선조 22)에 문과에 급제했으며 공을 따라 함께 진중에서 죽어 예조 참의(禮曹參議)의 증직을 내렸다. 운운. 윤근수(尹根壽)는 찬(撰)함.
○ 그 후 또 치제하였는데 그 제문은 다음과 같다.
만력 31년 계묘 8월 모일에 국왕(國王)은 신하 호조 정랑(戶曹正郞) 조엽(趙曄)을 보내 판서 고경명의 영(靈)에 제사한다. 영은 성화(聲華)가 일찍부터 드러나고 재주와 학식이 다 우수하며, 문필은 천 사람보다 뛰어나고 가슴속에 수만 군사가 들었었네. 선(先) 조정에 뽑히어 무오년(1558, 명종 13)에 문과 했다. 여러 번 장솔(張率)의 벼슬에 옲겼고, 중간에 이르러 침체되어 안진경(顔眞卿)의 얼굴을 보지 못했도다. 하루아침에 왜적이 침입하자 여러 고을이 파도처럼 휩쓸려서 곽주영(郭州營) 안에 성유(成裕)처럼 모두 밤에 도망을 치니 수양성(睢陽城) 안에 장순(張巡)마냥 사수할 자 누구던가. 유독 의기를 분발하여 군사를 모아서 목숨을 바쳐 나라에 보답하려고 맹서했네. 성지(城池)나 무기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어느 누가 몰아치는 오랑캐를 막아내리오.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크나 작으나 모두 호응하니, 실로 의열(義烈)을 먼저 외친 때문이로다.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허락하는데 한 번 죽는 것이 어찌 어려우랴. 정의의 군사란 강한지라, 순(順)과 역(逆)이 이미 구별되었다. 곧은 편은 언제나 씩씩한 법이라, 많고 적은 것으로 어찌 따지리오. 피를 마시고 단에 오르며, 주먹을 들고 칼날을 무릅썼네.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과연 알기 어려운 법이라오. 죽을 곳을 얻었으니 글 읽는 선비더러 담력 없다 이르지 마오.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은 부자(父子) 세 사람일세. 매양 묘소를 수축할 겨를이 없어 한이더니, 이제 영을 모실 곳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네. 사당 모양이 매우 엄숙하니 족히 절개 굳은 장부의 기풍을 상상할 만하고, 향화(香火)가 해마다 끊어짐이 없으니 한 고을 선생으로 제사하는 정도가 아니외다. 이는 조정에서 거행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선비들의 주선에서 나왔구려. 절개를 천추(千秋)에 표시하고자 하니 사당이 어찌 편액(扁額)이 없을쏜가. 포충(褒忠)이란 두 글자를 내리니 실상과 이름이 서로 알맞네. 시골 마을이 찬란하여 빛이 나니 어찌 조청헌(趙淸獻 조림(趙林))의 이표(里表)에 비할 뿐이랴. 길손이 손으로 가리키며 눈물을 떨어뜨리니 반드시 현산(峴山)의 귀부(龜趺 양고(羊祜)의 비석돌)만이 아니로세. 제사를 드리기 위해 조관(朝官)을 보내는데 관작을 추가(追加)함에 있어 판서(判書)가 오히려 부족하오. 천운이라 어찌하리, 정충(精忠)은 구천에서 다시 보기 어려우리니, 혼이여! 돌아와서 박한 제물이나마 한 잔 술에 흠양하시라. 모두《정기록》에 나온다.
○ 경기도 수원 충의위(忠義衛) 홍언수(洪彦秀)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다. 홍언수가 미천한 몸에서 낳은 아들이 있으니, 이름은 홍계남(洪季男)으로 용맹과 힘이 무리중에서 뛰어났다. 경인년(1590, 선조 23)에 통신사(通信使)의 군관이 되어 황진(黃進)과 더불어 일본을 다녀왔기로 그놈들의 강약을 자세히 알고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아비의 군사를 따라 적을 쳐서 여러 번 싸워 승첩을 올렸다. 전후로 적의 귀를 베어 온 것이 백여 개에 달했으므로, 인근에 진을 친 적들이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곧 군공(軍功)을 들어 본부(本府)의 판관을 제수했다.
○ 충청도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 전라도(全羅道) 전 보성 현감(寶城縣監) 임계영(任啓英)ㆍ박광전(朴光前) 등이 능성 현령(綾城縣令) 김익복(金益福) 등과 더불어 삼가 두 번 절하며 열읍 여러 벗님에게 돌리는 글월은 다음과 같다.
아! 국가가 믿고서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래 삼도(三道)가 건재하기 때문이었는데, 경상ㆍ충청은 이미 무너져 적의 소굴이 되었고 오직 호남만이 겨우 한 모퉁이를 보전해서 군량의 수송과 군사의 징발이 모두 이 한 도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국가를 부흥할 기틀이 실로 이에 있다. 그런데 이제 서울이 급박하다 하여 순찰(巡察)은 정병을 거느리고 바닷길로 올라갈 계획을 하고 있고, 병사(兵使)는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이미 금강(錦江)을 넘었으며, 두 의병장의 진 역시 각기 근왕(勤王)을 위하여 이미 본도를 떠났다. 열읍의 장사(將士)들도 장차 나가기로 결정되어 남은 군사가 몇이 없으므로 적이 들어오는 중요한 길목에 방비가 극히 허술하고 호서(湖西)의 적이 이미 본도 경계선을 범했으니, 석권(席卷)의 형세가 장차 이루어질 터인데 극복할 희망은 무엇을 믿겠는가. 국가의 일이 너무도 위태하니 진실로 통곡할 일인 동시에 이야말로 의사(義士)가 분발할 때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적이 성 밑에 당도할 때, 우리 장정들을 무찔러 죽일 것은 뻔한 일이다. 슬프다! 우리 민생이 몸 둘 곳이 어디며 실가(室家)는 어느 곳에 둔단 말이냐. 영남에서 이미 이렇게 당한 것은 귀로도 들었고 눈으로도 보았으니, 산중으로 도망가 숨을 수도 없고 구차히 목숨을 보전하여 살길도 없어서 결국 죽고 말 것이다. 기왕 죽을진대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는가. 하물며 만에 하나라도 중요한 길을 막아 지켜서 적의 세력을 저지시킨다면 사지(死地)에서 살아나는 것도 이 기회요, 부끄럼을 씻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도 이 때인 것이다. 대체로 우리 도내에는 반드시 누락된 장정과 흩어져서 도망간 군사가 있을 것인즉, 만약 식견있는 선비들이 서로 함께 불러 들여 권면하고 격려해서 힘을 모아 일어나 스스로 한 군단을 편성하고 적의 향하는 바를 감시하여 굳건히 요충지대를 지킨다면 위로 관군의 성원이 될 것이요, 아래로 한 지방의 생명을 안보할 것이다. 이 시기에 미처 일을 도모하기는 영남 사람 만한 이가 없는데 영남 사람은 적을 만난 처음에 한 마음으로 단결하여 막아 내려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망치는 것만 일을 삼았다. 이는 비록 허둥지둥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데서 나온 까닭이었으나, 오늘날 생각하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적의 세력이 팽창하여 가옥들이 불에 타고 처자들이 능욕을 당하고서야 의사가 분연히 일어나서 많은 수효의 적들을 목 베거나 사로잡았으니, 비록 사람의 마음을 비교적 강인하게 하였다고 하겠으나 역시 이미 늦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제군들은 모두 이와 같은 일을 징계 삼아 나태한 습성을 버리고 남보다 먼저 출발하여 기약한 날짜에 뒤지지 않도록 하라. 우리들은 본시 활 쏘고 말 달리는 재주가 없고 병법도 알지 못하니 지휘하여 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는 너무도 생소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남보다 먼저 창의한 것은 한편으로 의사의 뜻을 격려하고 한편으로 용사의 기운을 분발하자는 바이니, 인간의 양심이 일찍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반드시 흥기하는 바 있을 것이다. 이 격문이 도착하는 날에 곧 뜻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온 고을을 효유하여 군인들을 기록해 가지고 이달 20일 보성(寶城) 관문으로 와 모이도록 하라. 한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임금이 욕을 당해도 구원할 줄 모른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오. 모두 전말을 생각하여 창의할 것이니, 여러분은 도모하시라.
○ 송제민(宋濟民)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삼가 나 송제민(宋濟民)이 지난달 23일에 의병장을 따라 수원산성(水原山城)에 당도하여 5일 동안 머물렀는데, 서울에 있는 적이 아직 치성하고 청주(淸州)ㆍ진천(振川) 등지의 유동하는 적이 역시 날뛰는데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가면 군량을 수송하지 못할 염려가 있었으므로, 온 진중이 모두 비생(鄙生)을 추천하여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길을 막고 있는 적을 소탕하고, 구원 오는 군사를 통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와서 충청도의 사우(士友)들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한 바 20일 사이에 정병 2천여 명을 얻어서 공론에 따라 전 도사(都事) 조헌(趙憲)을 추대하여 좌의대장(左義大將)을 삼아 황간(黃澗)ㆍ영동(永同) 이하의 적을 방어하게 하고, 전 찰방(察訪) 박춘무(朴春茂)를 우의대장(右義大將)으로 삼아 금강(錦江) 이상의 적을 방어하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일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금산(錦山)의 패보(敗報)를 들었으니 시운인가, 천명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사(人事)를 제대로 극진히 하지 않은 탓인가. 말을 돌이켜 남쪽으로 돌아와 의병이 흩어지기 전에 다시 또 소집해 볼 계획이었는데, 은진(恩津)에 당도하자 비로소 대군이 흩어져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아! 사람이 누군들 죽음이 없으리오만 죽을 자리를 얻어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섬 오랑캐가 한창 극성을 부리던 날을 당하여 강병과 용장들도 역시 모두 관망하지 않으면 달아나서 구차스레 목숨을 유지하는데, 고제봉(高霽峰)은 유아(儒雅)한 문관으로서 본시 군사면에 대한 일을 알지 못했으나 하루아침에 군중의 추대를 받아 문득 장단(將壇)에 올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임금에게 보답했다. 그 아들은 아비를 따라 죽어서 충성과 효도가 아울러 한 집안에 났으니 죽어도 영화가 남아서 열렬한 빛이 있는지라, 사람마다 한 번 죽음은 있는데 고제봉은 유독 그 도리를 다하고 그 자리를 얻었으니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깊이 애통할 일은 임금님께서 서도를 순행하시고, 종묘와 사직이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선 7도가 모두 흉한 왜적에게 유린을 당했는데 오직 호남 한 도만이 아직까지 다행히 보전되었으니 국가를 회복할 기본이 실로 이곳에 있거늘, 장수는 태만하고 군사는 교만하여 걸핏하면 무너져 흩어지고 마는 것이다. 대개 창의한 후부터 인심이 비로소 진정되어 모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번 싸워 패하자 의기가 꺾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도리어 나태한 장수와 교만한 군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아! 저 완악하고 패역한 군졸들이 공(功)을 좋아하고 이욕을 탐내어 유익하면 나가고 해로우면 피하는 것은 본시 그들의 제 몸을 꾀하는 상투 수단이라, 무엇을 책하며 무엇을 나무라겠는가마는, 일찍이 호남은 예의의 지방으로 선왕이 휴양(休養)해 주신 은혜에 젖은 지가 수백여 년인데 평시에 선비라 자칭하여 인의(仁義)를 자랑하는 자들도 이미 공명만 탐내어 피하기를 꾀하며, 수천의 굳센 졸병들도 일시에 무너져 흩어져서 한 사람도 장수의 죽음을 막아낸 자가 없으니 이 어찌 무식한 무리들의 웃음거리만이랴. 실로 흉한 오랑캐에게 부끄럼이 될 것이다. 아! 피를 입에 바르고 장수에게 다짐하던 추성(秋城 담양)의 부정(府庭)이 저기 있고, 마음으로 천지 신명에게 맹서하여 밝은 해가 내리비침이 저러하니 모르겠도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천지간에 용납을 받을 것인가. 아! 인의가 마음에 박힌 것은 실로 하늘에서 받은 바라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이니 진실로 피차의 다름이 없지만, 물욕에 팔리어 그 본심을 상실한 자가 간혹 있으니 사람의 형상을 하고 짐승의 마음을 지닌 자도 역시 있을 것인 즉, 충성과 효도를 어찌 사람들 모두에게 책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 왜적을 토벌하는 일은 역시 불충하고 불효하는 자들도 함께 원하는 바이니, 어찌 충신이나 의사의 사사로운 원수일 뿐이겠는가. 이미 당한 바를 들어 말하면 남의 처자 자매를 잡아다가 열 놈이 다투어 간음하여 죽게 하는 일이 잇달아 일어나고, 부형을 찔러 죽이고 아이들을 삶아 죽이며, 동네 인가를 불태우고 재물을 약탈하며, 남의 소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노복을 부려먹으며, 좋은 전답을 탈취하고 남의 선산을 헐어 버리어 궁흉 극악(窮兇極惡)이 천지에 가득 차니 무고한 백성들이 난을 피해 도망가다 길가에 넘어지고 구렁창에 빠져 죽어 그 수효가 몇천만 명인지 헤아릴 수 없는 정도다. 요즘 7도(道)가 탕진되고 또 5고을이 함락되었는데, 그 5고을은 실로 호남의 함곡관(函谷關) 같은 존재로 사방이 막혀서 산을 의지해 험하고 굳건하니 이쪽에서는 공격하기 어려운 점이 있고, 저 왜적놈들은 팔을 내뻗는 편리함이 있다. 이 형세를 따지면 이미 쉽고 어려운 차이가 있으며, 우리 군사는 이제 막 꺾이어 사기가 □저상되고 적은 이미 승세를 탔으니 왜의 세력은 저절로 확장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웅현(熊峴)의 혈전(血戰)에 힘입어 적의 기세가 조금 꺾였고 전주가 방비 태세를 갖추고 있으므로, 놈들이 힘을 요량하여 스스로 물러가니 형세가 몰아 쫓아낼 가망이 있다. 호서(湖西)의 의병이 은진(恩津)ㆍ연산(連山)ㆍ진안(鎭安)ㆍ옥구(沃溝)를 옹위하여 수비하는 품이 질서가 있고, 대장 조헌(趙憲), 참장(參將) 이천준(李天駿)이 시대에 부응하는 인물로서 천심을 측정하고 시국을 관찰하여 적을 요량해서 승리를 결정하여 옛사람에게 못지 않다. 형세상 놈들이 서쪽으로나 북쪽으로 달아나지는 못할 것이며 반드시 무주(茂朱)를 경유하여 동으로 영남을 향해 도망갈 것이나, 김(金)ㆍ곽(郭) 두 장수가 군사를 쓰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할 것이니 반드시 영(嶺)을 넘어서지 않으려 들 것이며, 중국 군사 5만 명이 우리 근왕(勤王)의 군사와 함께 천지를 뒤흔들며 북으로부터 남으로 내려오면 송도(松都)ㆍ한양(漢陽)에 있는 적의 도망병과 충청도에 있는 적의 남은 부대가 내리 밀려서 돌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금산(錦山)의 적과 합세하여 서ㆍ남으로 충돌하되 궁지에 빠진 신세라 죽음을 걸고 달려들 것이니, 후퇴하기 좋아하는 장수로 무너지기 잘하는 군사를 몰아친다면 어찌 반드시 지탱할 것을 보장하랴. 이것이 실로 호남 부로(父老)와 사민(士民)들의 막대한 근심거리인 것이다. 아! 옛사람은 천하의 백성을 나의 동포로 삼았는데 하물며 우리 본도 선비들은 조상 때부터 이 땅에서 태어나고 이 땅에서 살았으니 선인들의 혼백이 깃들여 있는 곳이요, 부모 처자가 편안히 살던 곳이요, 형제 자손들이 생식(生息)한 곳이요, 이웃 친구들과 교유하던 곳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변을 만나 오랑캐 놈들의 신첩(臣妾)과 노복(奴僕)이 된다면 이 이상의 욕됨이 있겠는가. 한 번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일 것이다. 더구나 흉한 참변이 계속되어 골육과 친척이 함께 적의 손에 도륙됨에 있어서랴 기왕 죽을 바에야 오히려 적과 싸워서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이제 만약 한 번 싸움을 피하고 반드시 살 길을 찾고자 할진대 그 살 길을 마침내 얻지 못한다면 오늘날 같은 참화가 있을 뿐이요, 그렇지 않고 한 번 싸움을 결심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꼭 죽을 이치도 없는 것이며 결국 참혹한 화를 면하고 길이 무궁한 복을 받을 것이니, 이는 모두 절박하여 결코 그만둘 수 없는 거사이다. 어찌 반드시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우러난 연후에만 그러하겠는가. 아! 배를 함께 타다 물에 빠지면 서로 건져주는 것은 호(胡)와 월(越)도 한 마음이라 했는데, 무릇 한 도(道) 안에서 함께 사는 우리로서는 실로 배를 같이 탄 형세로서 서로 물에 빠질 염려가 조석에 임박했으니, 비록 호ㆍ월의 사람이라도 부득불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어려움을 면해야 하겠거늘 하물며 산천의 기품(氣稟)이 서로 흡사하고 학문의 취향도 서로 같아서 실로 형제의 의(義)가 있은즉 옛사람이 이른바 막연한 동포라는 말 따위에 그칠 바가 아니다. 무릇 우리 도내 각읍 부로(父老)들은 아비가 그 자식을 권장하고 형이 그 아우를 권면하여 지조와 절개를 가다듬고 다시 의병을 일으켜 흉한 칼날을 막아서, 위로 임금의 원수를 갚고 사람과 귀신의 분을 씻으며 아래로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전하여 길이 그 가업을 편안히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 호성감(湖城監)이 양호(兩湖)에서 군사를 수합하여 2천여 명을 얻어 아산(牙山)을 경유하여 서해(西海)로 배를 타고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근왕(勤王)의 길을 떠나다.
○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진안으로 향하다가, 순찰사가 다시 나누어준 군사를 진산(珍山) 이현(梨峴)으로 전진시켜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등과 더불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복병을 설치하다.
○ 곽영(郭嶸)이 금산(錦山)에서 무너져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영(營)에 머물고 있는 영리(營吏)의 고목(告目)이 있어 그대로 전주에 머물게 하다. 그 종사관(從事官) 한 사람 이용순(李用諄) 이 한산(韓山)에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머물러서 아직 영에 돌아오지 않았다. 금산에 돌아와 모인 적이 사방으로 흩어져 불을 놓고 수색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여 전보다 배나 참혹했다. 20일에 진산(珍山) 관사를 불태우고 다시 금산으로 들어와 혹은 옥천(沃川)으로 물자를 실어내며, 무주(茂朱)의 적도 역시 물자를 지례(知禮)로 실어내어 모두 후퇴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고 동현(同縣)의 현감 장 별장(張別將)과 어 복병장(魚伏兵將) 등이 보고해 왔다. 진산(珍山)과 동원(東院)은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 무안 현감(務安縣監)ㆍ해남 현감(海南縣監) 등이, 이현(梨峴)은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저고리(苧古里)는 영광 군수(靈光郡守)가, 추현(杻峴)은 고산 현감(高山縣監)이, 송치(松峙)는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함평(咸平)은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조림원(照臨院)은 남평 현감(南平縣監)이, 순찰사 군관 전몽성(全夢星), 별장(別將) 남응길(南應吉)은 장수(長水)로부터 무주(茂朱) 지경을, 순창(淳昌)은 보성 군수(寶城郡守)ㆍ장수 현감이, 탄전(炭田)ㆍ죽치(竹峙) 등지는, 임실현감(任實縣監)ㆍ진안 현감(鎭安縣監) 등이 방어하되 형세를 보아 진격하라는 명령도 역시 전달하여 발송했다. 그리고 임피 현령(臨陂縣令)에게 군사 8백 명을 거느리고 황화정(皇華亭)에서 결진(結陣)하여 성원할 것을 어제 전령(傳令)하여 발송했다. 명(明) 나라 군사가 7일에 평양(平壤)을 포위하니 적의 떼가 이미 도망하여 서울의 적과 함께 모두 노량(露梁)을 건너고 청계산(靑溪山)에서 진위(振威)까지 잇대어 결진하여 아산(牙山)으로 향했다고 한다. 교동(喬桐) 공생(貢生) 고언백(高彦伯)이 밤에 평양에 들어가 적을 놀라게 하여 적의 무리 2백여 명이 저희들끼리 서로 쳐 죽이고 이로 인해 후퇴해 도망갔으므로 곧 그 사람을 등용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삼았다고 한다.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의 군관 이충(李冲)이 행재소(行在所)로부터 도총도사(都摠都事)의 직을 제수 받아 옥과(玉果)를 지나가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용천(龍川)으로 옮기시고 동궁(東宮)의 행차는 이미 강계(江界)에 도착했으며, 온갖 관원은 나누어 정해지고 두 곳의 비빈(妃嬪)은 다만 칠가(七駕)가 시종하고 있으며, 임해(臨海)는 이미 북도로 파천했다. 대개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으며 주상께서도 안녕하시다. 명 나라 군사 3만 명이 이미 용천(龍川)에 도착했으며, 뒤이어 구원병도 와서 강변에 진을 치고 있다. 요동 윤(遼東尹) 이성량(李成樑)요동 자사(遼東刺史)인데 아들 이여송(李如松)ㆍ이여남(李如楠)ㆍ이여백(李如栢)ㆍ이여매(李如梅)ㆍ이여판(李如板)ㆍ이여회(李如檜)ㆍ이여오(李如梧) 8형제를 두어 세상에서 8장군이라 칭한다. 의 후임으로 조승훈(祖承訓)이 대장이 되고 왕(王)ㆍ양(楊)ㆍ곽(郭)ㆍ사(史) 등 여러 장수가 그 부관이 되어,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급급히 싸움을 서두르니 그 성의가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대동강 싸움에 적의 진중에서는 평의지(平義智)가 대장이 되고 행장(行長)ㆍ현소(玄蘇)ㆍ평수장(平秀長)이 부장이 되어 삼위(三衛)로 나누어 군사를 거느렸는데, 한 위(衛)의 수효가 많을 적에는 3천여 명에까지 달했다. 그래서 부중(府中)에 머무른 여러 장수들이 여러모로 계획을 세워 일제히 만여 개의 화살을 쏘아 한 위의 적을 모조리 죽였다. 우리 군사가 굳건히 지키고 적이 이미 기운이 꺾였는데, 뜻밖에 간사한 술책을 내어 밤에 얕은 여울물을 건너 어둠을 타서 내려 몰아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평양을 함락당했다. 적이 주둔하던 날에 관서(關西) 용사 두어 사람이 밤에 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4장수 중에 가장 나이 젊은 자 한 놈을 쏘아 죽였는데 실로 이 놈은 의지(義智)였다. 그래서 남은 적은 해서(海西)로 도망해 내려가고 서울에 머물던 적도 그 수가 역시 얼마 되지 않으니, 국토를 회복할 것이 손꼽아 기대된다. 평양 윤(平壤尹) 송언신(宋言愼) 이 싸움에 진 책임으로써 교체되었다.
○ 금산의 적 수천여 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의 복병장(伏兵將)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저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 명을 베었다.
○ 곽영(郭嶸)이 광주 판관ㆍ보성 군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무주의 적을 탐색하고, 조방장(助防將) 이계정(李繼鄭)은 금산에 들어와 적을 탐색하다가 모두 무너져 도망갔다. 이때에 본도 장병이 여러 번 적의 두 소굴을 공격했으나 한 번도 승첩을 거두지 못하고 매양 무너지고 마니 이 어찌 반드시 저 왜적이 용감하고 날래서만이겠는가. 아! 어찌 남자다운 사람 하나가 없단 말이냐.
○ 영남 초유사(招諭使)의 공문 내에, “금월 23일 창원 부사(昌原府使)가 보고해 온 것을 보면 금월 19일에 성중에서 항시 머물러 있는 왜적과 계병부(桂兵部) 도합 33명이 성 안에 사는 잡인(雜人) 10명을 불시에 잡아다가 물건을 짊어지게 하고 기관(記官) 박춘정(朴春丁)과 함께 김해(金海)ㆍ해양(海洋)의 선척(船隻)을 간망(看望)하러 나갔다 돌아왔다고 하며, 항상 머물러 있는 왜적도 역시 본토로 돌아갈 생각이 있다고 했다. 지금 김해에 나갔다 온 사람을 만나서 적의 거취를 물은즉 김해ㆍ해양 각처의 적선이 즐비하고 좌우 산기슭에는 가설된 집들이 잇대어 있으며, 김해ㆍ밀양(密陽)에 교통하는 사람들과는 소를 치고 술을 빚어 서로 함께 마시고 씹어서 이웃 마을 사람과 같이 지냈다. 이렇게 지나는 10여 일 사이에 왜적 6명이 서울로부터 내려와서 귀에 대고 말을 전해주자, 뭇 왜적이 일시에 통곡하며 두 고을을 교통하는 사람을 남녀도 가려내지 않고 모조리 베어 죽여 2백여 명에 달했으며, 각처의 가설된 집들도 수효대로 불을 놓았고 강에 가득하던 배는 하룻밤 사이에 다 내려갔으니 군사를 거두어 도망갈 계획을 하는 것 같다. 귀도(貴道)의 금산ㆍ무주에 있는 왜적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통지해 달라.” 하다. 이상은 전라도에 보낸 공문이다.
○ 좌의병(左義兵) 진중의 사자(士子)들이 흩어진 군사 8백여 명을 소집하여 전 화순 부사(和順府事) 최경회(崔慶會)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고 금월 26일 광주에서 기고(旗鼓)를 세웠는데, 골(鶻)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우도(右道)로부터 군사를 모아 남원으로 향하면서 우의병(右義兵)이라 일컬었다. 거사하던 날에 여러 군(軍)에 다음과 같이 통시(通示)하였다.
한 사람을 상 줌으로써 천만 사람을 권하는 것이다. 지금 의병의 패전에 유학(幼學) 안 영(安瑛)은 그 주장이 탄 말이 놀라는 것을 보고서 자기가 탄 말을 주장에게 주어 대신 타게 하고 도보로 포복(匍匐)하다가 달갑게 죽음을 당했으며, 학유(學諭) 유팽로(柳彭老)는 왜적의 칼날이 어지럽게 번쩍일 때 노복들이 모두 달려나가 적의 칼날을 피하라고 간청하자, 성내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만약 달아난다면 주장을 어느 곳에 두겠느냐.”하고, 그 주장의 노복이 다 흩어져서 말이 전진할 수 없음을 보자 자기 종을 명하여 주장을 보호해서 나가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뒤를 따라 적을 막다가 갑자기 칼에 맞아 죽었다. 아! 인심이 극도로 어지러운 이즈음을 당하여 임금을 배반하고 나라를 잊어버리며 목숨을 탐내어 구차히 살아가는 것이 곳곳마다 다 그러하고, 윗사람에게 친히 하며 어른을 위해 죽는 일은 전혀 들을 수 없는데, 이 두 사람은 이익을 꾀하거나 공을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서 마침내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여 분연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만약 급급히 그 절의(節義)를 드러내어 한때의 이목(耳目)을 솟구치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꺾여진 사기를 일으켜 세우며 무너진 강상(綱常)을 붙잡을 수 있으랴. 일이 시급하지 않은 것 같지만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하니, 바라건대 각 읍 향교(鄕校)ㆍ향소(鄕所)에 각각 부물(賻物)을 거두어 되는 대로 사람을 시켜 그 집에 조문하고, 의거(義擧)한 뒤에 그 해골을 거두어 제사를 드리고 말미를 갖추어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의기를 고무시키도록 하라.
○ 호남ㆍ영남 수군이 견내량(見乃梁)에 거제(巨濟)ㆍ고성(固城)의 경계이다. 모여 왜적의 큰 배 10척, 중ㆍ소선 70여척을 발견하고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가 두 번째 총통(銃筒)을 쏘았으나 전혀 깨어질 형세가 없으므로, 한산도(閑山島) 큰 바다로 퇴진하여 다시 삼도의 여러 선박과 더불어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다. 적선 10척이 포위망을 벗어나 달아나니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가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다. 10일 적선 70여 척이 안골포(安骨浦) 선창에 결진하고 있으므로 삼도의 여러 전선 백여 척이 돌진하여 접전을 벌였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 《경상 순영록》에 나온다.
○ 전 현감 임계영(任啓英)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 임계영은 전라도 보성(寶城) 사람으로, 처음에 본도 관군과 의병이 함께 근왕(勤王) 길에 나가고 온 도내가 공허하게 되자 흉한 왜적이 틈을 타서 경내에 쳐 들어오니 충돌당할 근심이 조석에 박두하여 내지(內地)의 위태로움이 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는 것보다 더하므로, 임계영은 동지 여러 사람과 더불어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해서 방어할 계획을 했다. 그래서 본군에서 출발하여 낙안(樂安)ㆍ순천(順天)을 경유하여 남원으로 향해 다니면서 군사를 수합하여 천여 명을 얻어 좌의병(左義兵)이라 칭하고, 호(虎) 자로 장표(章標)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범을 그려 만들었다가 나중에 호 자의 인(印)을 만들었다.
○ 김천일(金千鎰)ㆍ최원(崔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수원(水原)으로부터 인천(仁川)으로 향하면서 본도에다 구원병을 요청하니, 이광(李洸)이 조방장 이유의(李由義)와 진도군수 선거이(宣居怡)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다.
○ 영남의 왜적이 몰려 전일에 해인사(海印寺)에서 밥을 빌어먹던 막실(莫失)ㆍ막돌[莫石]을 호남으로 보내어 형세를 엿보게 하다. 초유사의 비밀이다.
○ 경기도 과천 현감(果川縣監)이 전달한 통문 내용에, “적병 한 부대가 개성부(開城府) 청석동(靑石洞)에 진을 치고 있다가 우리 군사에 패하였고, 신립(申砬)이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로 왜놈의 의복을 바꾸어 입고 몰래 도성으로 들어와 적 2백여 명을 마구 베었으며, 도원수 윤두수(尹斗壽)의 소속 군사가 또 적 1천여 명을 베어서 서울에 있는 적이 후퇴해 달아났다.” 하다.
○ 영남 초유사(嶺南招諭使)의 공문 내에, “본도 우도(右道) 여러 의병 2만여 기(騎)가 날마다 적을 공격하여 고령(高靈) 이하는 이미 회복되었으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적이 진퇴를 마음대로 못하고 나왔다 도로 들어가는 형편이니, 산중에 피란간 사람들에게 급히 이 기별을 전해서 사람마다 분연히 일어나 적을 치게 할 것이다.” 하다. 《경상 순영록》에 보인다.
○ 도순찰사(都巡察使)가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당일로 병사에게 도부(到付)된 첨지를 보면, “지금 도착한 어지(御旨) 내에, ‘요동(遼東)에서 크게 정병 5만 명을 풀어서 강변에 머물러 성원을 하게 하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원(楊元)이 귀순한 오랑캐 5천 명을 친히 거느리고 앞서 와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으며, 조 총병(祖總兵)ㆍ곽 유격(郭遊擊)ㆍ왕 유격(王遊擊) 세 대장이 각기 수천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이미 압록강을 건넜고, 사 유격(史遊擊)은 정예부대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었다. 어제 저녁 의주 목사(義州牧使)가 등초해 보낸 관전보(寬奠堡) 표첩(票帖) 내에 중국에서 산동도(山東道) 수군 10만으로 하여금 수로를 경유하여 곧장 왜적의 소혈(巢穴)을 두들길 모양이라 했으니, 경(卿)은 아무쪼록 연해 각 읍에 이 연유를 적어 관문이나 길거리에 방(榜)을 걸어 두루 알리라.’ 하셨다. 어지가 협정에 의거하여 이러하기에, 중국의 구원병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와서 군의 형세가 크게 떨쳤으니 왜적을 무찔러 없애고 국토를 회복할 날을 손꼽아 기약한다. 이 역시 민간에 알려 모두 듣게 하라.” 하다. 이상 공문은 각읍에 보낸 것임.
○ 왜적이 평양에 들어온 뒤로 매일 나가 도적질을 하되 부산(斧山) 밖을 벗어나지 않고 돌아오며 마치 무엇이 두려워서 감히 못하는 것이 있는 듯이 보이니 예언[讖記]의 말도 다 거짓은 아닌 듯싶다. 부산(斧山)은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이때에 참언(讖言)에, “왜적 난리 7년에 부산으로부터 부산까지 오고, 왜놈 난리 10년에는 압록으로부터 압록까지 온다.” 하였다.

[주D-001]안 상산(顔常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충신 안고경(顔杲卿)이니, 원문의 안 상산(顔常山)은 안 평원(顔平原)의 잘못인 듯하다. 안평원 열전(列傳)에 ‘신무상죄당사(臣無狀罪當死)’라는 말이 있다.
[주D-002]문 신국(文信國) : 남송(南宋) 말년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이니, 위왕(衛王) 때 신국공(信國公)을 봉했다.
[주D-003]내상(內廂) : 여기서는 안쪽 지방[內地] 즉, 함안ㆍ창원ㆍ이령 등지를 말한 듯하다.
[주D-004]한(漢) 나라의 …… 나라 붕거 :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남송 말년의 명장 악비(岳飛)이니, 붕거(鵬擧)는 악비의 자(字)이다. 이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주D-005]장순(張巡) : 당(唐) 나라 때의 사람이다.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병(起兵)하여 안녹산을 토벌했는데, 허원(許遠)과 수양을 지키고 있다가 수양성이 함락되매 안녹산을 역적이라 꾸짖고 피살되었다.
[주D-006]납서(蠟書) : 편지를 납덩이 속에 넣어서 물이 새어들지 않게 한 것이다. 《송사(宋史)》
[주D-007]석륵(石勒) : 진(晉) 나라 때 중국을 침범하여 후조(後趙)를 세운 갈인(羯人 : 중국의 변경 민족)이다.
[주D-008]조사아(祖士雅) : 진 나라 때의 명장 조적(祖逖)의 자(字)이다. 조적이 진 원제(晉元帝) 때 군사를 통솔하여 북벌하기를 자청하자, 원제는 그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하였다. 그가 북벌군을 거느리고 장강을 건너갈 때 노를 치며 맹서하기를, “중원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다시 건너게 된다면, 이 강물에 빠져 죽겠다.” 하였던 바, 조적은 마침내 석륵을 격파하여 황하 이남의 땅을 회복하였다.
[주D-009]장숙야(張叔夜) : 송 나라 때의 사람으로 금(金) 나라 군대와 싸워 용맹을 떨쳤다. 《송사(宋史)》
[주D-010]사모(蛇矛)와 월극(月戟) : 사모는 창의 한 종류로 전장에 쓰는 무기이니, 장팔사모(丈八蛇矛)라고도 한다. 월극도 창의 일종으로, 날이 초생달같이 굽어 그리 칭한 것이다.
[주D-011]안진경(顔眞卿) : 당 나라 때 사람으로 그가 평원 태수(平原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경이 군사를 일으켜 안녹산을 토벌하자 북방의 여러 군에서는 그를 맹주로 추대하여 하북초토사(河北招討使)로 하였다.
[주D-012]유총(劉聰) : 진(晉) 나라 때 흉노의 황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진 나라를 침략하였다.
[주D-013]동창의 계교 : 송(宋) 나라 진회(秦檜)가 부인 왕씨와 동창에서 귤(橘)을 희롱하면서 악비(岳飛)를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
[주D-014]서촉(西蜀)으로의 피란 : 당 현종(唐玄宗)이 서촉으로 피란하였으므로, 선조의 거가가 서행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15]봉천(奉天)으로 향하는 …… 먼지가 날린다 : 당 덕종(唐德宗) 부자가 금(金)의 군사에게 잡혀 봉상현 봉천으로 끌려간 고사가 있는 바, 선조의 파천을 형용한 말이다.
[주D-016]이에 물들인 무리 : 왜적들은 이빨에 칠을 하였으므로 칠치(漆齒)라 부른다.
[주D-017]포서(包胥)의 충성 : 춘추 시대 초 나라의 대부 신포서(申包胥)가 초 나라의 보전을 위해 힘을 다한 바 있다. 《춘추(春秋)》정공(定公) 4년
[주D-018]포신(鮑信) : 중국 후한 말년의 절개가 있던 인물로, 황건적(黃巾賊)과 접전하다 죽었다. 《후한서(後漢書)》
[주D-019]방덕(龐德) :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 변경 민족인 저강(氐姜)의 침공을 격파하였다.
[주D-020]범진(范鎭)의 머리털이 허옇게 돼버린다 : 범진은 북송(北宋) 때의 명신이다. 인종(仁宗)이 재위 35년에 후사가 없으매, 범진이 종실의 근속(近屬) 중에서 현량한 자를 골라 황제의 지위를 계승시킬 준비를 하라고 건의하였으나, 집정자의 저지로 실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범진은 굽히지 않고, 인종에게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우니, 인종도 울면서 말하기를, “짐은 경의 충성을 아오. 경의 말이 옳소. 하지만 다시 2, 3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오.” 하였다. 범진이 장주를 10여 차례 바치고 1백여 일 동안 어명을 기다린 끝에 수염과 머리가 희어지자, 조정에서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다. 《송사(宋史)》권 337
[주D-021]소해(小海) : 세자를 가리킨다. 《산해경(山海經)》에 “원고(元臯) 위에서 남으로 유해(幼海)를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유해는 소해(小海)이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는 대해(大海)에 비하고, 태자(太子)는 소해에 비한 것이다.
[주D-022]전성(前星) : 세자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志)에, “심(心)이란 별이 있는데, 중간 별[中星]은 천자(天子)를, 앞 별[前星]은 태자(太子)를, 뒷 별[後星]은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하였다.
[주D-023]용루(龍樓) : 한(漢) 나라 성제기(成帝紀)에 있는 말로, 성제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 계궁(桂宮)에 거처하였는데 임금이 태자를 불러 용루문(龍樓門)으로 나오게 했었다.
[주D-024]학금(鶴禁) : 한 나라 궁궐소(宮闕疏)에 있는 말로, 학궁(鶴宮)은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인데 어느 사람이라도 드나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학금(鶴禁)이라 하였다.
[주D-025]칠묘(七廟) : 중국의 고제(古制)에 의하면, 천자가 칠묘를 두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서울에 있는 종묘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예기(禮記)》〈王制〉
[주D-026]윤대(輪臺)에서 과오를 뉘우침 : 윤대는 중국 신강성 서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한 나라 무제(武帝)가 중앙아시아(당시에는 서역(西域)이라 했다)를 정벌하여 군사가 그곳까지 가 있었으나, 무제가 병으로 죽을 때에 윤대에 군사 보낸 것을 후회하는 조서를 내렸다.
[주D-027]봉천(奉天)에서 자기를 허물함 : 봉천은 당 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에 있던 현이다.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반역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는데, 그곳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는 조서(詔書)를 내리니 그것을 죄기조(罪己詔)라 한다.
[주D-028]영무(靈武)의 의기(義旗) : 당 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현종(顯宗)은 촉(蜀)으로 파천했는데, 그의 아들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즉위하고 안녹산을 물리쳐 당 나라를 수복했다. 그 고사를 가지고 세자 혼(琿 즉 후의 광해군)에게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광복시킬 것을 기대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주D-029]미앙궁(未央宮)의 수주(壽酒) : 미앙궁(未央宮)은 중국 한(漢) 나라 때 지금의 섬서성 장안현 서북의 장안의 고성(故城) 안에 세웠던 궁전 이름. 새해를 축복하는 뜻으로 마시는 술. 미앙궁의 수주는 서울의 궁전을 회복하기를 고대하는 선조의 마음을 나타낸 말.
[주D-030]중국 : 하(夏)를 옮긴 말이다. 여기서는 글의 서두로 감개를 나타내는 대목에 쓰인 것이므로 반드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D-031]궁(窮)과 한(寒) : 궁과 한은 모두 중국 고대 하 나라 시대의 역적으로 궁은 유궁후예(有宮后羿)의 약한 것이니, 그는 하 나라를 역적질하였고 한은 한착(寒浞)이니 후궁유예의 아들로 역적질한 아비를 죽이고 그 아비의 자리를 빼앗았던 역적이다.
[주D-032]훈육(獯鬻) : 중국 고대의 변경 족속인 흉노(匈奴)의 별칭으로,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포악한 짓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33]밀(密) : 주 문왕(周文王) 때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밀인이 불공하여 감히 큰 나라를 거역하였다[密人不恭, 敢距大邦].” 하였다. 《시경(詩經)》〈대아(大雅)〉
[주D-034]연교(燕郊)에서 말을 키우겠다 : 연교는 중국 북방의 수도(首都)가 있는 곳의 교외로, 그곳에 말을 치겠다는 것은 중국을 점령하겠다는 말이다.
[주D-035]덕진(德鎭)으로 교질(交質)해야 한다 : 덕진은 주민에게 은덕을 베푸는 산이니, 덕진으로 교질하겠다고 하는 것은 중국의 명산을 내놓으라는 말이 된다.
[주D-036]조정의 계획 : 원문에는 묘(廟) 밑에 한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여기서는 묘산(廟算)으로 보고 ‘조정의 계획’으로 옮겼다.
[주D-037]교령(嶠嶺)에 머뭇거리며 : 원문에 교영(喬英)이라 한 말은 ‘교만하게 굴며’라고 해석이 되는데, 나는 교(嶠)와 영(嶺)의 오서라 보므로 모두 영남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준순교영(逡巡喬英)’을 영남에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주D-038]빈교(邠郊) : 빈(邠)은 옛날 주 문왕의 조부인 태왕(太王)이 있던 도읍이었는데, 적(狄)의 침략으로 그곳에서 쫓겨나 기산(岐山)으로 옮겼다 한다.
[주D-039]하북(河北) 지역이 비록 흩어지고 :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황하 이북이 모두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이다.
[주D-040]수양(睢陽) : 지금의 하남성 상구현(商丘縣) 남부에 있던 지명으로,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그곳을 굳게 지켜 장강(長江)과 회하(淮河) 일대의 땅을 막아 안녹산 군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주D-041]악비(岳飛)가 갓 …… 우레같이 통곡하였고 : 악비는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다. 여러 차례의 무공으로 태위소보(太尉少保)에까지 올라 하남북제로초토사(河南北諸路招討使)가 되어 금군(金軍)을 대파하고 수일 내로 황하를 건너가 실지(失地)를 광복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진회(秦檜)는 금과의 화의(和議)를 주장하여 하루에 12번 금자패(金字牌)를 내려 악비를 소환했다. 삼군이 통곡한 것은 그때의 일이다. 그 후 진회는 만사설(萬俟卨) 등을 시켜 악비를 탄핵해서 체포 투옥하여 처형하여,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주D-042]장준(張浚) : 남송 초기 주전파의 거물이다. 송 나라 고종(高宗) 때 천섬경서제로선무사(川陝京西諸路宣撫使)로 금을 제어하고 있다가 주화파인 진회에게 몰려 영주(永州)로 좌천되었다. 효종(孝宗) 때에 가서 추밀사(樞密使)를 제수받고 강회(江淮)의 군사를 도독(都督)하였으니, 주전파로 널리 민간의 환영을 받았다.
[주D-043]해바라기 : 해바라기는 해를 항상 처다본다 하여, 충신이 항상 임금을 향하는 데 비유한다.
[주D-044]동해가 바로 …… 않을 것이고 : 옛날 전국 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가 강성하여서 여러 나라를 침략하자 진 나라를 황제로 존칭하고 종주국을 삼자는 의논이 생겼는데 이때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선비가, “나는 차라리 동해를 밟고 죽을지언정 진 나라같이 악독한 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길 수 없다.” 하고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D-045]의병(疑兵) : 군사가 많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미는 것, 또 그렇게 꾸민 군사를 말한다.
[주D-046]역적 양(亮)이 …… 어긴 일 : 북송 때에 여진족(女眞族)이 금(金) 나라를 건국하고 송(宋) 나라를 침략하여 송 나라가 강남으로 쫓겨 갔으므로 이때부터 남송이라 한다. 남송에서는 금 나라에게 신하가 되겠다는 서약을 올리고 겨우 두 나라의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금 나라에서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임금을 죽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으므로 역적인 양이라 하여 역량(逆亮)이라고 부른다. 그 완안량은 남송과 평화의 약조를 깨뜨리고 남송을 침략하다 남송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자신까지 부하 군대의 손에 살해되었다.
[주D-047]중행(中行)을 매질하지 않은 것은 : 중행률(中行律)은 원래 한(漢) 나라 사람인데, 흉노족(匈奴族)에 항복하여 흉노의 참모가 되어서 도리어 한 나라를 괴롭혔다.
[주D-048]장강(長江)이 급작스리 …… 날아서 건너왔다 : 중국이 남북조로 갈렸을 때, 양자강(揚子江)을 하늘이 만들어 준 참호[天塹]라 하여 그 강을 건너오려거든 날아서 건너오라 하였으나 그 장강을 건너게 하였다면 남조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라는 말이다.
[주D-049]태왕(太王)이 빈(邠) …… 떠나던 마음 : 주(周) 나라의 조상 태왕은 빈(邠 : 豳)에 살았는데 융적(戎狄)의 침입을 받았다. 나라 사람들은 융적과 싸우려고 했으나 태왕은 전쟁에 군사들이 죽는 것을 측은하게 여겨 기산(岐山) 밑으로 옮겨가 살았는데 빈에 살던 사람들이 다 그를 따라와 살았다. 태왕은 그때에 가서 비로소 주라는 국호를 정하고 융적의 습속을 물리치고 성곽과 궁실을 세워 나라를 경영했다. 아들 문왕(文王) 대에 주는 크게 팽창하고 손자 무왕(武王)의 대에 이르러서는 중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태왕은 무왕이 추존한 칭호이고 그 이전에는 고공단보(古公亶父)로 불리웠다.
[주D-050]명황(明皇)이 촉(蜀) …… 갔던 일 : 당 나라 때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이 위태로워지자 현종(玄宗)은 몽진하여 촉으로 파천했다.
[주D-051]공락(鞏洛) : 공현(鞏縣)은 지금의 중국 하남성 영양현(榮陽縣) 서부의 낙수(洛水) 동안(東岸)에 있었는데, 안녹산 반란 때에 당 나라 군사가 이곳에서 패했으므로 황제가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D-052]민아(岷峨)의 위험한 …… 멀리 갔다 : 당 현종이 촉으로 들어갈 때 그러한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 민아(岷峨)는 촉 땅의 산으로 민은 민산(岷山), 아는 아미산(峨嵋山)이다. 취화(翠華)는 임금이 탄 수례의 장식이니, 그것을 타고 가는 임금을 말하는 뜻으로 쓰인다.
[주D-053]이성(李晟) : 당 나라 때의 사람으로 덕종(德宗) 때 주자(朱泚)의 반란을 평정하여 수도를 수복하였고, 황제가 봉천(奉天)에 포위되어 있을 때 그 포위를 풀어 황제를 구출했다.
[주D-054]육지(陸贄) : 당 덕종의 신하로 덕종이 봉천에 포위되어 있을 때 측근에서 시종하였다. 임금이 매일 백으로 헤아릴 만큼 많은 조서를 내리는데 붓을 휘둘러 그것을 써내리기를 생각이 샘솟듯하여 다 사정을 곡진하게 나타내고 그때 그때의 필요에 잘 맞춰 나갔다고 한다.
[주D-055]상주(相州) : 중국 하남성 안양현(安陽縣)에 있었는데, 당 나라에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구절도(九節度)의 군대가 반란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주D-056]장막의 제비 : 장막을 버티고 있는 나무에 제비가 집을 짓고도 그 천막이 곧 없어질 것을 모르고 찍찍거린다는 것으로 대단하지 않아 소탕해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주D-057]밤중의 닭소리 : 밤중에 닭이 우는 것은 난리가 날 징조라 한다.
[주D-058]중류(中流)에 뜬 …… 노를 치면서 : 중국에 여러 호족(胡族)이 침략하여 서진(西晉)이 멸망하고 황족 한 사람이 강남으로 쫓겨가서 동진(東晉)을 건국하였는데, 그때에 조적(祖逖)이라는 사람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자강을 건너서 호족을 정벌하러 떠날 적에 양자강 중류에서 배의 노를 치면서, “만일 저 오랑캐를 쳐서 평정하지 못한다면 저 강물과 같이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고 맹서하였으나 그는 중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D-059]복덕(福德)이 바야흐로 …… 분야에 임했고 : 하늘의 복덕성(福德星)이 비치는 땅을 침략하면 침략하는 나라가 도리어 패한다고 한다.
[주D-060]노래하고 읊조리는 …… 생각하게 된다 : 한(漢) 나라가 중간에 왕망(王莽)에게 역적질을 당한 때가 있었는데 왕망이 정치를 하도 포악하게 하여서 백성들은 노래하는 데도 한 나라 옛적을 생각하였다 한다.
[주D-061]신정(新亭) : 중국 강소성 남경시 남쪽에 있었던 정자로, 동진 때 시세가 혼란하여 명사들이 이곳에 모여 서로 보고 개탄하였다 한다.
[주D-062]흥원(興元) : 흥원은 당 나라 서울 서북쪽에 있는 땅으로 당 나라 희종(僖宗)이 황소(黃巢)의 반란군을 피하여 그곳으로 파천하였었다.
[주D-063]형초(荊楚)의 기특한 인재들 : 옛날 중국 초 나라에는 뛰어나게 용맹한 인물들이 많이 났다는 것을 취해서 쓴 말임.
[주D-064]연조(燕趙)의 검객 : 옛날 중국 연ㆍ조 지방에서는 검술에 비상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D-065]말을 채찍질하여 …… 찌를 것 : 관우(關羽)가 조조(曺操)에게 있을 때에 원소(袁紹)의 대장 안량(顔良)이 대군을 거느리고 조조를 공격해 왔으므로 조조도 군대를 내어서 응전하게 되었다. 양군이 대진하면서 안량은 수백 명의 부장들에게 옹위되어 진두에 나섰는데 그때에 관우는 조조에게 적토마(赤兎馬)라는 좋은 말을 선사 받았다. 그래서 관우는 그 말을 몰고 달려가서 안량의 진으로 들어가 안량을 단번에 찔러 죽였다. 그것은 그 좋은 말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주D-066]기북(冀北) : 기북은 중국의 북경 근처로 예전부터 좋은 말의 산지로 유명하였다.
[주D-067]노적가리를 가리켜 내주던 의기 : 중국 삼국 시대에, 오(吳) 나라 주유(周瑜)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노숙(魯肅)의 집에 들러 군량을 달라고 청했다. 노숙의 집에는 양곡 노적가리가 둘이 있었는데 각각 3천 곡(斛)씩이 들어 있었다. 노숙이 그 중의 하나를 가리켜 그것을 주유에게 주었다는 고사이다.
[주D-068]양주(揚朱)와 묵적(墨翟) : 유가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양주의 사상이나 극단적인 박애주의자 묵적의 사상을 이단으로 극력 배척한다. 양주와 묵적을 배척하는 자는 곧 선비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9]곤란 : 중국의 진(秦) 나라는 서북에 위치하여 있고 월(越) 나라는 동남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래서 ‘월 나라 사람이 진 나라 사람이 수척한 곤란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는 말이 있다.
[주D-070]봉명국(奉命國 : 천명을 받든 나라라는 뜻으로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입장에서 일본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주D-071]주여숙(柱厲叔)이 이것을 …… 기다릴 것인가 : 춘추 시대의 사람으로, 거(莒)의 오공(敖公) 밑에서 벼슬을 살다가 그 재능이 알려지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바닷가에서 살면서 극도의 빈곤에 쪼들렸다. 오공이 변란을 당하자 그는 벗들과 하직하고 오공에게 가서 목숨을 바치겠다고 나섰다. 주여숙의 이러한 행동은 후세의 임금 중에 인물을 못 알아 보는 자를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임금의 은총을 받고도 임금의 급난에 자신만을 보전하려 드는 신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주D-072]안진경(顔眞卿)이 다시 …… 할 것인가 : 당 나라 안녹산의 반란 때에 하북 17군(郡)이 모두 붕괴하여 안녹산에게 항복하였는데 오직 평원 태수(平原太守) 안진경만이 성을 지켰으므로, 현종이 “짐은 안진경이 어떻게 생겼는지[作何狀] 모르나 참 장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73]세성(歲星)이 기(箕)의 …… 기약이 없으랴 : 이 글에서 한실과 송은 다 중국의 한족이니 변경의 침략적인 족속과 비교해서 나타낸 말이다. 즉 여기서는 곧 조선의 왕실 내지 조선을 말한 것이다. 세성이 기의 분야를 지켜서 복덕이 내릴 징조가 있다고 한 것은, 기를 조선의 분야로 보고서 한 말로 고래의 점성술(占星術)에 기대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74]서방(西方)에 미인 : 미인은 임금을 나타낸 말이다. 《시경(詩經)》〈패풍(邶風)〉
[주D-075]순무(巡撫)가 당보(搪報)를 …… 되었다. 운운. : 이것은 명 나라 때의 자문인데, 형식이 특이하고 원문 전후에 약간의 혼란이 있어 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자(咨)는 동등한 기관 사이에 쓰는 공문 형식이다. 원문의‘須至’의 ‘至’는 ‘知’의 와오일 것이고, ‘吉’자 위에는‘秀’자가 오탈했을 것이고, ‘凋信’의 ‘凋’자는 ‘調’의 와오일 것이다.
[주D-076]10대의 주불(朱紱)이요 7대의 은장(銀章)이라 : 주불은 붉은 색의 치마 같은 무릎 덮개로, 고관 대작이 수레에 탈 때 사용하였다. 은장은 은으로 만든 인장으로 고제(古制)에 의하면 2천 석의 녹을 타는 벼슬을 하면 그 관인을 은으로 만들고 ‘모관지장(某官之章)’이라 새겼다 한다.
[주D-077]금관자(金貫子) : 금으로 만든 관자이다. 관자는 망건에 달아 망건 줄을 꿰는 작은 고리로, 금관자는 종2품의 벼슬하는 사람이라야 붙였다.
[주D-078]호전(胡鈿) : 호전은 주화파의 괴수 진회(秦檜)를 목 베고 금에 항전(抗戰)할 것을 상소했다. 곽재우는 호전이 진회를 목 베라고 주장한 것이 정당한 것같이 자기가 김수를 목 베자고 하는 것도 정당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주D-079]동탁(董卓) : 중국 동한(東漢) 말년의 사람으로, 전공(戰功)이 있어 영제(靈帝) 때 전장군(前將軍)이 되었고 병주목(幷州牧)의 벼슬을 얻었다. 영제가 죽자 하진(何進)의 부름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도에 들어가 환관을 죽이고 그 일이 평정되자 자기가 상국(相國)이 되어 소제(少帝)를 폐하고 하태후(何太后)를 시해(弑害)하고 헌제(獻帝)를 세웠다. 음란하고 흉폭하여 그 해독이 조야에 퍼져 원소(袁紹) 등이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였는데, 동탁은 헌제를 끼고 장안으로 천도하여 자기가 태사(太師)가 되어 가지고 제위를 찬탈할 생각을 품었다. 왕윤(王允)이 역사(力士) 여포(呂布)를 꾀어 동탁을 자살(刺殺)시키고 그 족속을 멸했다.
[주D-080]형벌은 대부에게는 올라가지 않는다 : 본래 대부 이상에는 형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대부 이상이면 형벌을 받을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형벌을 적용할 필요가 없고 또 형벌을 받을 만한 죄를 대부가 범했다면 형벌을 받기 전에 자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그런 뜻으로 쓴 것은 아니고 곽재우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그 말을 내세운 것이라 하겠다. 《예기(禮記)》〈곡례(曲禮)〉
[주D-081]옥절(玉節)을 잡았으며 : 지방 장관이 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82]강회(江淮)를 차단하여 …… 구실을 하였는데 : 낙동강 연안을 지켜 그 일대를 안온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주D-083]정의를 해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 : 《맹자(孟子)》 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나 약간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원문에는 ‘적인자 위지적(賊仁者謂之賊)’이 아니라, ‘적의자 위지잔(賊義者謂之殘)’이라 하였다.
[주D-084]근왕(勤王) : 왕실에 힘을 다한다는 말이다. 《춘추(春秋)》에, 호언(狐偃)이 진후(晉侯)에게 말하기를, “제후(諸侯)를 구하려면 근왕하는 것밖에 없다.” 하였으므로, 후세에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구원하는 것을 근왕이라 하였다.
[주D-085]간섭을 받아 : 사람을 시켜 일을 하게 하고 뒤에서 방해한다는 말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單父) 고을의 원님이 되자 글씨 잘 쓰는 사람을 청하여 글씨를 쓰라 하고 뒤에서 팔목을 끌어당기며 글씨가 잘 되지 않으면 성내니, 글씨 쓰는 자가 돌아 가서 노(魯) 나라 임금께 고했다. 노 나라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복자천이 내가 자기 일을 간섭할까 두려워서 한 짓이다.” 하였다. 《설원(說苑)》
[주D-086]곡단(曲端) : 송(宋) 나라 사람으로 금인(金人)과 싸워 공이 있었는데, 뒤에 다른 사람의 참소를 만나 옥중에서 죽었다.
[주D-087]한착(寒浞)처럼 스스로 넘어질 줄 : 한착은 하대(夏代)의 사람으로 유궁후예(有窮后羿)가 제위를 빼앗아 하 나라 대신 유궁씨(有窮氏)로 일컬을 때 그의 재상이 되었다가 후일 예(羿)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후에 소강(小康)에게 멸망되었다.
[주D-088]장인(丈人)의 원길(元吉) : 《주역》의 지수사(地水師) 괘에 보인다.
[주D-089]초호(楚戶)의 세 집 : 초(楚) 나라 남공(南公)이 예언하기를, “초 나라 3집만 남아도 진(秦) 나라를 멸할 수 있다.” 하였다.
[주D-090]혜련(惠連) : 혜련이 10살 때 이미 글을 잘 지으니 그 형 사영운(謝靈運)이 매양 혜련을 대하면 좋은 글구가 저절로 나왔다. 영운이 일찍이 영가(永嘉) 서당(西堂)에서 시를 사색하다 못이루었는데 꿈에 문득 혜련을 보고, “못 가에 봄 풀이 돋아난다 [池塘生春草].” 하는 글귀를 얻었다 한다. 《남사(南史》〈사혜련전(謝惠連傳)〉

 

 

난중잡록 2(亂中雜錄二)
임진년 하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전라 중조방장(全羅中助防將) 이유의(李由義)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경기(京畿)로 향하다.
○ 창녕(昌寧)ㆍ청도(淸道)의 적이 절도사라 자칭하고, 밀양(密陽)의 적은 군왕이라 자칭하고 일시에 올라오면서 길을 닦는다 하다.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에 나옴. ○ 이러한 통분하고 해괴한 말들을 보니 이 적을 만세에 잊을 수 없다 하겠다.
○ 적이 영천(永川)으로부터 봉고어사(封庫御史)라 칭하고 신녕(新寧)으로 향하는데 안동(安東)의 병장 권응수(勸應銖)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誠) 등과 더불어 박연(朴淵)에서 적을 만나서 크게 이겨 벤 것이 매우 많고 병기와 돈과 곡식과 문서 등 물건을 빼앗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영천의 의병(義兵)과 선비들이 본 고을에 둔(屯)치고 있는 적을 멸하기를 도모하여 계책을 이미 정하고 권응수ㆍ홍천뢰(洪天賚)에게 원병(援兵)을 청하다. 응수가 두어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신해(申海)ㆍ정대임ㆍ조성 등과 영천으로 나아가서 추평(楸坪)에 있는 적에게 군사의 위엄을 보여 추격하여 강변(江邊)에 이르렀다가 돌아오고 다음날에 또 그와 같이하였더니 적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또 다음날에 여러 군사가 합세하여 나아가 포위하여 성문을 쳐부수고 북치고 부르짖으며 들어가니 적이 황급하여 달아나 관사(官舍)로 들어갔으므로 바람을 따라 불을 질러 거의 다 태워 죽이고 혹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었으며, 수백여 급(級)을 베다.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치계(馳啓)하여 응수는 통정대부에 승급되고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 여러 사람에게 관직으로 상을 주기를 등차(等差)가 있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3일. 김면(金沔)이 지례(知禮)에 둔친 적을 토벌하여 거의 다 태워 죽이다. 전라도의 아름다운 여자들이 많이 적에게 포로되어 있다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함께 다 태워 죽이다. 우리 군사 중에 죽은 자도 5천여 명이다. 남은 적이 도망하여 성주(星州)로 향하였는데 성주의 군사가 무찔러서 남김 없이 멸하다. 이때에 김면은 거창(居昌)에 주둔하여 지례ㆍ금산(金山)의 길을 막고 정인홍(鄭仁弘)은 성주에 주둔하여 고령(高靈)ㆍ합천(陜川)의 길을 질러 막았으며,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에 진을 쳐서 함안(咸安)ㆍ창녕ㆍ영산(靈山)에서 강을 건너는 적을 방비하니 우도(右道) 일대가 보존될 수 있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안동의 적이 나와서 풍산(豐山)에 둔치므로 박진이 청송(靑松)으로부터 안동에 들어가 성을 수습하다. 이보다 먼저 적이 군위(軍威)ㆍ의성(義城)ㆍ안동ㆍ예천 등의 고을에 나누어 둔쳐 사방으로 나와 분탕질을 하더니 영천에서 섬멸당한 뒤로는 군위의 적은 철수하여 개령(開寧)으로 향하고 의성ㆍ안동ㆍ예천의 적도 또한 동류를 이끌고 풍산 구담(九潭)에 물러와 둔치니 경상좌도의 인민이 조금 생기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풍산의 적이 또한 상주(尙州)로 물러와 합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아! 우리나라 3백 고을에 적이 없는 데가 몇 고을인고. 이것으로 미루어 추한 무리의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4일.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팔결군(八結軍)에게 명하여 호(壕)를 파도록 하였는데 5일 만에 끝마치다. 이때 본부(本府)에서 사역에 응한 사람이 1천 7백여 명이다.
○ 부산의 적이 칡 줄기를 가지고 왜인의 손바닥을 꿰어 우리나라의 봉비(封臂)와 같이하여 차사(差使)라 칭하고 상도(上道)에 있는 적에게 보내어 내려오기를 재촉한 때문에 모든 적이 흘러내려 길에 가득 찼는데, 우도 각 고을 의병이 곳곳에 구름처럼 일어나서 진주(晉州)ㆍ함양(咸陽)ㆍ거창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적을 쏘아대고 있다니 지금 이때에 무찔러 멸하지 못하면, 위로 임금의 수치를 씻고 아래로 백성이 살육된 것을 위로하지 못할 것이다. 민간에 포고하여 겁내지 말고 선등(先登)하게 하라. 함양 전통(傳通) 통문(通文).
○ 경주(慶州)의 부윤과 판관(判官)이 모두 도망해 숨었으므로 초유사(招諭使)가 우도에 있으면서 전령(傳令)하여 본부(本府) 사람 훈련봉사(訓練奉事) 김호(金虎)로 도대장(都大將)을 삼고,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로 소모관(召募官)을 삼고 진사 최신린(崔臣隣)으로 소모유사(召募有司)를 삼다. 김호 등이 이미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더욱 분발하다. 2일에 적 5백여 기(騎)가 언양(彦陽)으로부터 노곡(奴谷)으로 몰려 왔는데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여 명을 거느리고 포위하여 싸워서 김호가 총에 맞아 죽었으나, 오히려 퇴각하지 아니하고 싸우니 적이 달아나 본주(本州)의 대진(大陣)으로 돌아가다.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50여 급을 베었으니 경주 전후의 승전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동궁(東宮)이 처음에 평양(平壤)에서 대가(大駕)와 서로 이별하면서 통곡하고 각자 헤어져 영상(領相) 최흥원(崔興源) 등을 거느리고 영변(寧邊)으로 달아났다가 적병이 날로 가까워 오므로 또 정주(定州)로 달려갔다가 정주로부터 비밀리 황해도를 지나 강원도로 향하였는데 낮에는 숨고 밤에 행(行)하여 고생이 말할 수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천(伊川)에 행차를 머물렀는데 전라도 의병들이 근왕(勤王) 하러 바로 올라온다는 소문을 듣고 손수 글을 써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에게 전해 보내기를, “내가 외람되이 임시섭정[權攝)의 명령을 받아 회복의 계책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재주와 덕이 엷어서 감당치 못할까 두렵다. 대가를 멀리 떠난 것이 이제 이미 천 리이니 다만 서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오늘날에 국사(國事)는 이미 10에서 8, 9는 틀렸고 밤낮 오직 근왕하는 군사만 바랄 뿐인데,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한창 근심과 걱정이 절박하던 즈음에 여러분이 의병을 일으켜 이미 경성(京城)에 가까이 왔다 하니 이는 실로 천지 종묘 사직의 영(靈)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한 것이다. 종묘 사직의 존망이 오직 여러분이 힘을 서로 합하느냐의 여하에 달렸으니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하여 큰 공을 세우기에 힘쓸 일이다.” 하다.
○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이 첨지 정염(丁焰)에게 통첩한 것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 전하께서 이천현(伊川縣)에 계시면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수서(手書)를 내리신 것을 보았는데, 반도 다 읽지 못하여 슬픈 느낌이 먼저 생겨 눈물이 절로 흘렀소. 이어 들은즉 주상 전하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중국 군사를 따라 이미 서울로 향하셨다 하오. 흉한 적의 화(禍)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고 군부의 바람이 이러한 극도에 이르렀으니 이 날에 신자된 자는 죽느니만 못하오.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의기(義氣)를 주창하여야 할 것인데, 부사인 나는 사람됨이 지극히 둔하여 봉직(奉職)이 형편없고 일마다 조치를 잘못하여 난을 감당하는 재주가 못 되니, 능히 군사와 백성을 통솔하지 못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하는 즈음에 두 번이나 군사가 붕괴되었소. 지난달 3일에 이르러 헛소문 때문에 뭇 군사가 무너지고 난민이 되어 필경에는 도적질이나 약탈을 함부로 하여 관가와 민간이 텅텅 비어 있었소. 이때를 당하여 내가 홀몸으로 성에 있으면서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렸더니, 국가의 위령(威欞)이 아직 끊어지지 않아서 도망했던 백성이 이미 모여 들었고 무너졌던 군사가 도로 안정되었소. 큰 변을 여러 번 당하여 마음이 두서가 없을 뿐 아니라 성의가 부족하여 능히 인심을 감동시키지 못하니, 비록 위에 말한 왕세자의 간절한 말씀을 보아도 저 줄지어 늘어선 이들에게 능히 명령할 수 없소. 그러니 경내(境內)의 부로 기구(父老耆舊)는 이 곡절을 알고 마음을 다하여 힘쓰고 격려하여 혹은 의병에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이상과 같이 첨지 정염에게 통첩한다.
○ 정염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이극(貳極)이 내리신 수서에 이와 같이 목마르게 기대하시고 주상께서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셨다 하니, 신자 된 자로서 어찌 제 집에서 밥 먹고 잠자면서 사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고만 있겠습니까. 부사의 하체(下帖)에 이른바 혹은 의병으로 달려가고 혹은 싸우고 지킬 뜻을 굳게 하라 한 것은 분수에 따라 할 일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지마는 다만 지금 민가에 전연 일이 없는 이가 없어 성을 지키고 물건을 운반하는 데도 또한 미칠 겨를이 없는데, 또 기운을 내어 일하는 것을 어찌 사람마다 독촉하여 나약한 사람들을 억지로 몰아서 싸움터로 보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양가(良家)의 자제로서 조금 활을 쥘 줄 아는 이와 장정(壯丁)으로 군적(軍籍)에서 빠진 자가 반드시 없다고 속일 수 없으니, 부락에서 한두 사람을 내어 준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 인정만 보아서 평상시처럼 하지 말고 이미 그런 사람을 뽑았거든 온 부락이 힘을 합하며 밑천을 대어 보내면 국가의 바람을 거의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저 정염과 같이 늙고 정신없는 것이 감히 스스로 권하고 격려함이 아니라 이미 성주(城主 부사)의 하체를 받고 나서 저의 소견을 부친 것이니 여러분은 알아주십시오.
○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치보(馳報)에, “적세(賊勢)를 정탐하기 위하여 사람을 경상도 고성(固城) 감치[柹峙]에 보내었더니 복병장(伏兵將) 곤양 군수(昆陽郡守)가 회답하기를, ‘사천(泗川)의 도훈도(都訓導) 최막금(崔莫金)이라고 하는 자가 고성의 적중(賊中)에 들어가 있었는데 제 집에 왕래하다가 복병이 있는 곳에서 잡혀 공술(供述)하기를 「적중에 자진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왜놈을 만나 포로가 되어 살려 달라 애걸하고 인하여 적중에 들어갔더니, 적이 먼저 진주의 창고에 있는 곡식이 얼마인 것과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과 얼굴 예쁜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으므로, 아름다운 여자는 모르고 진주의 곡식은 대충 말해 주고 전라도로 가는 바른 길은 하동(河東)이라 하였다.」하였습니다.’ 하였고, 또 그 사람을 방금 진주의 관(官)에서 가두어 두었다는 것을 통보한다.” 하다.
○ 왕세자가 이천에 머문 지 한 달여 만에 적병이 사방에서 나오므로 따라간 모든 재상과 더불어 밤에 곡산(谷山)으로 가서 강동(江東)으로 가고 강동으로부터 성천(成川)으로 갔다가 도로 영변으로 향하니, 중도에 위태로운 변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각 도의 의병에게 내린 글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지 않아 섬 오랑캐가 방자히 만행을 부리고 있는데, 각 고을에서 의사(義士)들이 있는 덕분으로 군사가 위엄을 떨치고 있으니, 이에 한마디 말로 여러 사람에게 고하노라. 생각건대, 분수도 모르는 오랑캐들이 초여름에 쳐들어오자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감사(監司)들은 대개 앉아서 보고만 있었고, 진장(鎭將)과 수령들은 거의 버리고 도망한 자가 많았다. 도성에 개도 닭도 남은 것이 없으니 뭇 백성들의 도탄을 어찌 차마 보며, 나라에 예악(禮樂)을 지키지 못했으니 종묘가 폐허 됨을 어이하랴. 대가가 멀리 한구석으로 행차하시고 적의 칼날이 8도에 두루 미쳤네.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파천(播遷)하심 어인 일이냐. 벌써 한 달이 되었구나. 대동강에 사람 없으니 적을 뉘 막으리. 못난 내가 분조(分朝)의 책임을 맡아, 이리저리 다니던 끝에 용안(龍顔)을 천 리에 이별하였구나. 흩어지고 도망한 군사를 수습하여 한 성(城)에서 분조의 체통을 보전하였네. 비록 나라가 이와 같으나 아마도 때를 기다림이 있으리. 중국에 호소하여 구원을 청하니 황제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니 신하의 절개를 오늘에 보겠도다. 나는 큰 난을 감당하지 못하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리지 않으리라. 평안도에서 이천(伊川)으로 갈 때 여러 번 변고를 겪었고, 곡산(谷山)으로 해서 성천에 도달할 때 온갖 고생을 맛보았네. 감히 위험한 데를 피해 편안함을 찾음이 아니라, 오직 국가 회복의 대계를 생각함이다. 항상 원수 갚아 수치를 씻을 것을 생각하여 적과는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한다. 비록 왕래하느라 헛고생을 하더라도 또한 온갖 위험도 꺼리지 아니하리라. 원수의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내가 안존할 땅 없는 것이 민망하도다. 섶에 누우며 창을 베고 자는 마음이 어찌 잠깐인들 해이하랴. 마음이 아파서 살고 싶지 않다. 너의 군사와 백성들이 협조하고 따라서 다행히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니, 이는 실로 열성(列聖)의 은택이 미친 바이며 또한 너희들의 정성과 절개가 드러난 바이로다. 난리가 너무 크매 토벌하기 더욱 괴롭구나. 뒤돌아 볼 겨를이 없으니 민생이 살 곳을 안정하지 못하고, 싸움에 쉬지 않으매 사졸이 또한 밖에서 오래 있었네. 갑옷과 투구에 이[虱]가 생기니 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이 있을 것이요, 해 저물어 소와 양이 내려오니 언제 오려느냐는 탄식이 응당 간절하리. 하물며 가을 날씨가 점점 차지는데 일찍 추워지는 서도(西道)는 어이하랴. 거처할 곳도 없으니 얼고 배고픔의 걱정을 뉘라서 면해 주리. 어떻게 해를 넘길꼬. 살 준비를 마련하지 못했네. 너희들은 비록 애써서 나를 따르건만 나는 홀로 무슨 마음으로 너희들을 수고시키랴.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치매 몸에 병이 든 것 같도다. 너희들의 옷 없는 것을 보매 비단옷 겹으로 입음이 부끄럽고, 배고프고 목마름을 애처롭게 여기매 쌀밥 먹는 것이 어찌 마음 편하랴. 이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음식 약간을 베푸노라. 소를 잡아 군사 먹이고 술을 쏟아 물을 마시게 하니 역사에 있는 말을 감히 잊으랴. 그윽히 옛사람의 일을 사모한다. 내가 이미 속마음을 너희들에게 전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나라 위해 몸을 바치라. 옛적 신릉군(信陵君)이 출병할 때에, 부자(父子)가 함께 군중(軍中)에 있는 자는 아비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서 부모를 봉양하며, 형제 없는 외아들은 전장에 가지 말라 하였다. 이 말이 책에 있는데 내가 어찌 모르랴. 다만 사세가 급박하므로 징발이 소요(騷擾)스럽게 되었다. 뉘라서 부모가 없으랴. 거리에 나와 기다리는[倚閭] 생각을 위로하기 어렵구나. 또한 아내가 있을지니 집을 떠난 한이 오랫동안 맺혔으리. 아! 공(功)에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에는 반드시 징계함을 감히 오늘날에 어기지 않으리라.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그를 위해 죽을 것을 너희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요망한 적을 쾌히 소탕하지 못하면 어찌 평일의 품은 뜻을 이루리오. 원하노니, 함께 전장으로 달려가서 천하의 형세를 일신하는데 같이 도모하며, 궁궐을 맑게 하고 능침(陵寢)에 절하여 왕가(王家)를 다시 세울 것이며, 삼경(三京 한성(漢城)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을 회복하고 대가를 돌아오시게 하여 다함께 영원토록 태평을 누리자. 황신(黃愼)이 지음.
○ 경상도 선산부(善山府)가 순차로 전통(傳通)하기를, “지난달 18일에 충청 감사의 사통(私通)과 공주 목사의 관문(關文)에, 평택현(平澤縣)의 치보(馳報)에 이르기를, ‘총병(總兵) 양원(揚元)이 평양의 적을 이기자, 개성ㆍ경성의 적이 모두 나와서 광나루로부터 양천 해구(楊川海口)에 이르도록 결진(結陣)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였고, 동시에 도부(到付)한 감사의 관문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해 돌아온 사람의 말에, 적이 중국의 군사가 대대적으로 이른다는 말을 듣고 밤낮 없이 내려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이달 초에 경상 우수사가 전라 좌수사와 더불어 고성(固城)에서 적과 접전하여 배 70척을 부수고 머리 3백 급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알 수 없으며, 군사를 효유하여 수합해 모아서 적을 치도록 약속한 일입니다.” 하였다.
○ 김수(金睟)를 불러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임명하고 경상도를 좌우도로 나누어 각기 순찰사를 두어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성일의 장계(狀啓)는 다음과 같다.
5월 이후에 신이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한 번도 돌아오지 아니하므로, 행재(行在)의 기별을 알 길이 없어 밤낮으로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평양을 또 지키지 못하여 대가가 의주로 옮겨 가시고 동궁은 안협(安峽)에 와 머문다 하니, 오장이 무너져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신이 좌도 순찰사에 임명된 지 이미 오래었는데도 교서(敎書)와 인신(印信)이 아직 내려오지 않으니 이것은 반드시 적병이 가득 차서 길이 통하기 어려운 소치일 것입니다. 좌도의 적세를 말하면, 6월 초순 이후까지도 흥해(興海)ㆍ청하(淸河)ㆍ영덕(盈德)ㆍ영해(寧海)ㆍ진보(眞寶)ㆍ청송(靑松)ㆍ안동(安東)ㆍ예안(禮安)ㆍ봉화(奉化)ㆍ풍기(豐基)ㆍ영천(永川)ㆍ예천(醴泉)ㆍ용궁(龍宮)등 10여 고을이 아직 적을 겪지 않았는데, 이제는 용궁ㆍ예천ㆍ안동ㆍ예안ㆍ봉화가 이미 함몰되어 대개 30여 성(城)에 한 치도 깨끗한 땅이 없습니다. 신이 비록 동쪽으로 강을 건너도 다시 발을 붙일 곳이 없으니, 변이 난 뒤로부터 좌우도가 나뉘어 호령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좌도에는 앞장서 일어나 적을 치는 이가 없었으므로 적이 더욱 거리낌이 없어 땅을 저들이 차지하여 각기 고을의 원이라 칭하고, 집을 짓고 농토를 가꾸어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신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선비 중에 유식한 자를 선택하여 소모관(召募官)을 지키고 무변(武弁) 가운데 재주 있는 자로 가장(假裝)을 삼았습니다. 영산(靈山)에는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 생원 신방즙(辛邦楫), 창녕(昌寧)에는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성안의(成安義), 급제(及第) 성천유(成天裕), 보인(保人) 조열(曺悅), 유학(幼學) 곽찬(郭趲), 업무(業武) 신의일(辛義逸)이 각기 군사 6백여 명을 모아서 매복을 시켜 적을 쳐서 연달아 괵(馘)을 바치고, 이달 4일에 조열ㆍ성천유 등이 군사 1천여 명을 합하여 창녕을 포위 엄습하여 종일토록 교전하여, 고을 원이라 칭하는 백마 탄 왜놈을 소아 죽이자 사흘 만에 적이 책(柵)을 불태우고 도망하였습니다. 신녕(新寧)의 권응수(權應銖)는 신이 통문을 돌리기 전에 이미 군사를 일으켜 적을 쳤으므로 그대로 의병대장을 시켰더니, 지난달 27일에 병사 박진의 명령을 받고 하양(河陽) 의병장 신해(申海)와 더불어 네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영천에 성을 점령한 적을 쳐서 남김없이 무찔렀는데, 하양(河陽)ㆍ신녕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의성(義城)의 적은 모두 달아나고 안동의 적은 또 풍산현(豐山縣)으로 이둔(移屯)하였습니다. 박진이 부성(府城)에 들어가 있으면서 바야흐로 진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며, 현풍(玄風)ㆍ영산(靈山)의 적도 역시 공격할 만한 기회가 있으므로 고령(高靈)ㆍ합천(陜川)ㆍ초계(草溪)의 의병으로 하여금 현풍을 치게 하고 창녕ㆍ의령(宜寧)의 군사로 영산을 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습니다. 곽재우(郭再祐)가 이보다 먼저 현풍ㆍ영산 등 고을을 수복하였는데, 여기서 또 적이 있다 한 것은 적의 오고 감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우도에는 전 좌랑 김면(金沔)이 거창(居昌)의 군사를 거느리고 본 현의 경계를 지켜서 금산(金山)ㆍ무주(茂朱)의 적을 방비하고 가장 전 주부 손승의(孫承義)와 전 수문장 제말(諸沫) 등으로 하여금 나누어 고령을 지켜서 성주(星州)의 적을 막게 하였으며, 전 장령 정인홍(鄭仁弘)으로 가목(假牧)을 삼고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으로 가장을 삼아서 유학 이대기(李大期)ㆍ전치달(全致達)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함께 초계를 지켜서 초계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방비하였으며, 봉사(奉事) 윤탁(尹鐸)은 박사제(朴思齊)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의령ㆍ승진(昇津) 및 신반현(新反縣)을 지키고 유학 곽재우ㆍ봉사 권난(權鸞) 등은 그 모집한 군사 및 전 목사 오운(吳澐)이 모은 군사를 거느려 영산ㆍ창녕ㆍ현풍 및 강가에 왕래하는 적을 지키며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은 관군 및 군수 김대명(金大鳴) 등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려 고성(固城)ㆍ진해(鎭海)의 적을 막고,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ㆍ칠원 현감(漆原縣監) 이방좌(李邦佐)ㆍ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렬(鄭得悅)ㆍ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은 각기 그 성으로 돌아와서 싸우고 지킨 공이 많았습니다. 함창(咸昌)ㆍ상주(尙州)ㆍ지례(知禮)ㆍ선산(善山)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ㆍ고성 밖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합니다. 이 달 3일에 김면이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 등을 거느리고 지례를 화공(火攻)하여 창고 안에 들어 있는 적을 태워 죽이자 남은 적이 금산으로 도망해 갔습니다. 김면이 현재 다시 화구(火具)를 준비하여 금산 의병장 박사(博士) 여대로(呂大老), 가장 권응성(權應星) 등과 더불어 동군(同郡 금산)을 공격하려 합니다. 7일에 창원 부사 장의국(張義國)이 함안ㆍ칠원 등지의 군사와 더불어 나가 본부(本府)를 포위하여 적 10여 급을 베니 남은 적이 패하여 김해로 달아나고 군량이 남아 있으므로 의국이 그 성에 들어가 있습니다. 진해ㆍ고성의 적은 모두 배를 잃고 빠져 나갈 길 없는 도적이 되어 죽을 각오로 지키므로 진주ㆍ함안의 군사가 여러 번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수사(水使) 원균(元均)이 본진(本鎭)을 버린 뒤에 다만 전선(戰船) 네 채가 있었는데, 전라 좌우도의 수군을 청해 와서 세 번 해전을 벌여 아울러 크게 이겨서 수백 급을 베고 적선 백여 척을 부수었으며,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헤일 수 없었습니다. 적이 크게 겁내어 호남으로 가겠다고 소리를 치면서도 마침내 움직이지 못하고, 바다를 건너려는 자는 반드시 산에 올라 망을 보아 서해에 배가 없는 것을 알고야 떠나니, 변고가 생긴 뒤로 전공(戰功)은 양도(兩道) 수사가 제일입니다. 지금 또 들은즉 호남의 수군이 크게 이르러 장차 모든 섬을 토벌하고자 한다 합니다. 6월 중에 전라 감사라 자칭하는 왜놈이 창원으로부터 바로 함안에 이르러 의령의 승진을 건너고자 하다가 곽재우가 막으니 곧 김해로 돌아갔고, 거창에 침범하려 하다가 김면에게 퇴각을 당하였으며, 지례를 경유하여 무주현으로 향해 충청도의 적과 합하여 금산(錦山)에 들어가서 연달아 무주ㆍ용담(龍潭)ㆍ진안(鎭安) 등 모든 고을을 함락시키자, 전주(全州)의 위급함이 아침, 저녁에 임박하였는데, 다행히 적이 불리하여 퇴각하여 1천여 명이 몰래 본도(本道)로 오는 것을 김면이 지례의 지경에 매복을 시켰다가 불시에 뒤를 밟아 치니 적이 패하여 달아나서 이로부터 적이 감히 다시 오지 못하고 대부분 옥천(沃川)의 지경으로 들어갔습니다. 남은 적은 현재 금산ㆍ무주에 머물고 있는데 호남 사람들이 감히 몰아내지 못하므로, 적이 소리치기를, “여러 곳의 왜병을 합하여 다시 들어와 침략하겠다.” 합니다. 영남ㆍ호남 사람들이 능히 근왕하여 적을 치지 못하는 것을 순찰사에게 허물을 돌렸는데 이 도에는 곽재우가 감히 도주(道主)에 격문을 보낸 것을 신이 겨우 진정시켰고, 호남에서는 광주 목사 권율(權慄) 등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직무를 행하여 적을 치지 못하여 모르는 체하고 있다고 그 죄를 열거하여 도내에 통문을 돌렸습니다. 대개 본도의 형세는, 좌도는 위에 진술한 바와 같으므로 신이 비록 강을 건너가더라도 일은 할 수가 없고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일부는 버티어 부지할 수 있겠으나 명령이 이미 내렸으니 지체하여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좌도의 숨어 있는 수령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영접하도록 하였으니, 그 보고가 이르기를 기다려 칼을 집고 강을 건너 사생결단을 하려 합니다. 엎드려 듣건대, 천병(天兵)이 크게 이르러 회복함이 희망이 있다 하니 신이 그동안 죽지 않아 난이 평정되어 환도하시는 날을 보게 된다면 비록 군량만 허비한 죄로 만 번 죽음을 받아도 뉘우침이 없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좌의병장(左義兵將) 임계영(任啓英)이 장흥(長興) 선비들에게 다음과 같이 격문을 돌리다.
의병을 일으킴이 유생으로부터 주창되었은즉 이름이 사류에 참여한 자는 마땅히 분기하여 사졸의 선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식하고 어리석은 병졸들과 게을리 놀던 무리 또한 모두 의기로 달려오고 있는데도, 장흥은 큰 부(府)이면서 동지 1, 2명 외에는 모두 겁내고 움츠려 여기에 종사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여러분은 무슨 별다른 뜻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로서는 요행히 살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인데, 여러분은 홀로 임금을 생각하지 않는가.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면 정거(停擧)함이 늦을 것이다. 군율(軍律)이 지극히 엄한데 지금 우선 기다리고 있으니, 모름지기 다시 생각하여 일제히 모일 것이요 후회를 남기지 말라. 종사(從事) 정자(正子) 정사제(鄭思悌)가 지었다. 뒤에도 다 이와 같다.
○ 임계영이 낙안(樂安)에서 본군(本郡)에 이르러 격문을 돌린 것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오늘날 일은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이다. 금산(錦山)의 패전에 의기가 저상되어 다시 진작할 길이 없으므로 우리들이 세상일에 어두움을 생각지 않고 의병을 일으켰으니 다 같은 사람의 마음에 거의 흥기됨이 있으리라 여겼다. 지금 군성(郡城)에 와 주둔하여 이웃 고을 의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본군의 사람들은 응모는 그만두고라도 한 사람도 나와 보는 이가 없으니 별다르게 무슨 뜻이 있는 것인가. 듣자 하니 당초에 의병의 격문이 올 때에 본 읍에서 물리칠 뜻이 있으나 믿을 수 없다 하더니, 지금으로 보건대 과연 헛말이 아니로다. 군수의 뜻도 군인(郡人)과 같으니 군인이 시킨 것임을 알겠다. 우리들의 이 의거는 공사(公事)를 위함이요 나라를 위함인데 이 고을서는 사(私)라고 보니, 아! 이 고을 사람들은 홀로 임금이 없는가. 우리에게는 손익이 될 것이 없지마는 후일에 공론이 없을까.
○ 임계영이 순천(順天)에 이르러 본부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켜 적개(敵愾)함은 사람의 마음이 함께 바이며 동궁의 수찰(手札)이 의병을 장려하매 말이 심히 정성스럽고 슬프며 뜻이 심히 애통하니, 신자 된 이로서 누군들 감개하고 눈물을 떨구며 온 힘을 바치고자 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왜적이 천병에게 쫓겨 남도로 흩어져 내려왔는데 곤경에 몰린 짐승처럼 싸워 당할 길이 없어, 불사르고 약탈하는 화가 도처에 마찬가지이니 가정과 재물을 장차 누가 보전하랴. 그러니 하루아침에 적의 소유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내놓아 군수(軍需)에 약간의 도움이 되게 함이 나을 것이다. 승평(昇平)은 큰 부(府)라 물자가 풍부하고 인구도 많으며, 또 풍년이 들어 벼가 구름처럼 많으니, 어찌 앉아서 풍족한 것을 누리면서 국가의 일을 모르는 체하겠는가. 명가우족(名家右族)은 다 국가의 은혜를 알고 또 사체(事體)를 살필 것이니 타이르기를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요, 촌락의 평민에게도 또한 이 뜻을 전파하여 널리 거두고 부지런히 모아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주장하여 때에 맞춰 잇달아 원조한다면 승평 한 부가 옛날 한(漢) 나라를 일으킨 관중(關中)이 될 것이다. 원하건대 여러분은 힘써서 태만하지 말지어다.
○ 좌의병장 임계영이 순천 전 만호(萬戶) 장윤(張潤)으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군사를 끌고 남원으로 향하여 각 고을에 돌린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병을 일으키는 말은 전의 격문에 다하였으니 여러분은 다 보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수천 명의 날랜 군사를 뽑아서 바야흐로 적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최(崔)의 군사와 더불어 협력하려 하므로 준비가 한창 급한데, 군대에 현재 양식이 없어 두어 고을에서 판출(辦出)하니 유장(儒將 선비로서 장수가 된 이)으로서 계속 시킬 도리가 없다. 이것은 우리들만이 맡을 걱정이 아닌데 여러 귀읍(貴邑)에 이름난 허다한 선비들이 일찍이 그 책임을 함께 나눈 이가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분에게도 다 같이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분함이 있는데 이 의거들을 보고 어찌 차마 마음에 모르는 체한단 말인가. 하물며 금산ㆍ무주의 적이 소굴을 만들어 한 도의 형세가 털끝 하나처럼 위태로운 마당에, 여러분은 아침 저녁으로 구차하게 편안히 지낼 생각이 있는가. 이때를 당하여 신자 된 이라면 감히 제 몸을 제 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재물을 제 것으로 생각하여 한자 한치를 아끼겠다는 것인가. 지금 비록 내도록 요구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민간에서 곤하고 쪼들리지마는 숨이 아직 붙어 있는 동안에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분이 비록 혹 병이나 사고가 있어 의병에 종사 하려 하지 않더라도, 군량을 계속해 원조하는 것만은 오히려 힘써 도모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군사들이 풍우를 무릅쓰는 고생에 대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흉한 적이 분탕질하는 화를 생각하여 각기 분발하고 격려하며, 마음과 힘을 다하여 양식을 보내고 넉넉지 못한 것을 도와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먼저 국경의 적을 무찌르고 마침내는 근왕의 뜻을 다하여 궁금(宮禁)을 숙청하여 거가(車駕)를 모셔 환도하게 한다면, 군량을 운반하여 끊이지 아니하던 옛날의 소하(蕭何)가 한 나라에 세운 공만을 장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가 바라건대 힘써서 태만함이 없을지어다.
○ 천병 중에 점을 치는 자가 우리 국가의 운수를 점치고 말하기를, “문교(文巧)로 풍속이 폐단이 되었으매 장차 큰 질박[大質]으로 돌아가리라. 엎어져 죽은 이가 삼대[麻]와 같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 떠서 흐르며 사람들이 그 어미만 알고 그 아비를 모르리라. 그런 뒤에야 난리가 그치리라.” 하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의 군사가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머물다.
○ 광주 목사 권율로 나주 목사를 삼다.
○ 진주 판관 김시민이 전 병사 조대곤(曹大坤), 사천 현감 정득렬 등과 더불어 사천ㆍ고성ㆍ진해에 있는 적을 습격하니, 적이 점차로 도망하여 가다. 함안 군수 유숭인과 칠원 현감이 방좌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달아나 병영(兵營)으로 들어가다. 모든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타서 나아가 포위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여 가다. 시민이 드디어 연도의 각 고을을 수복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현(郭玄)ㆍ양산숙(梁山璹) 등이 서해로 해서 십생구사(十生九死)로 행조(行朝)에 도달하여 표문을 올리니 임금이 친히 남방의 소식을 묻고 두 사람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인하여 전라도의 사민들에게 내리는 교서를 선포하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王若曰].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능히 백성을 보존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다. 한편으로는 인화(人和)를 잃고 한편으로는 적병을 방어하는 데에 실패하여 나라를 잃고 서쪽으로 파천하여 의주에 물러와 머문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다. 종묘 사직은 폐허가 되고 신하와 인민은 어육이 되었다. 창창(蒼蒼)한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죄는 오로지 나에게 있으니 진실로 부끄러움이 깊도다. 서쪽과 남쪽이 멀리 떨어져 소식을 들을 길이 없다가, 이광(李洸)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붕궤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부터는 남쪽에서 구원병을 기다릴 생각을 다시는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곽현 등이 수로와 육로를 거쳐 도달하여 고경명(高敬命)ㆍ김천일이 의병 수천을 모집하여 절도사 최원의 병마(兵馬) 2만과 함께 수원에 나와 둔쳤다고 보고하니, 덕이 없는 나로서 남이 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하여 줌이 어찌 이에까지 이르렀는고. 우리 조종들의 깊은 인애(仁愛)와 후한 은택이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되어 맺혀진 것이, 아! 지극한 것이로다.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여 곧 양산숙 등을 보내어 너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알리게 하노니, 그대 다사(多士)들은 내가 알리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이제 25년째이다. 비록 사랑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은택이 아래에 통하지 못하였고 지혜는 물정을 살피지 못하여 정사에 조치를 잘못함이 많았으나, 본심인즉 일찍이 백성을 사랑하고 물정을 알려는 데에 뜻을 두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요 몇 년 사이에 변방에 허술함이 많고 군정(軍政)이 해이해진 것을 보고는, 오직 성이 높고 참호가 깊으며 갑옷만 견고하고 칼날만 예리하면 왜적을 막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여 중앙과 지방에 신칙(申勅)하여 엄하게 방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성이 더욱 견고할수록 국세는 더욱 약해지고 참호를 더욱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날로 깊어져서, 일찍이 가을 뽕잎이 떨어지고 기왓장들이 풀어지듯이 점차 이 지경에 이를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구나. 더구나 궁중의 사람들을 엄밀히 단속하지 못하여 백성들의 세세한 이권까지 그물질하고 형벌이 정당함을 잃어서 원통한 기운이 화기(和氣)를 손상하였다. 왕자(王子)들이 산택(山澤)의 이권을 점령하자 세민(細民)들이 생업을 잃어 걱정하였다. 백성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니 내가 무슨 변명이 있으리오. 이에 유사로 하여금 모두 파하여 돌려주었다. 이러한 일들 역시 어찌 내가 다 알았던 것이리오. 내가 몰랐던 것 역시 나의 죄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비록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차라리 내 몸을 희생으로 삼아 천지 종사 모든 신령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미 이러하니, 바라건대 너희 사민들은 나에게 허물을 고치어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도록 허락하여다오. 나의 잘못은 대략 이미 진술하였거니와 이번의 전란은 실로 얼토당토않은 것이다. 미련한 저 오랑캐가 감히 하늘을 쏘려는[射天] 꾀를 내어, 혹은 우리더러 저의 반역에 편당이 되기를 요구하고 혹은 우리더러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므로 내가 대의에 의거하여 배척하고 거절하였더니, 올빼미의 성질이 나의 큰 덕을 잊고 작은 분을 풀려하였다. 나는 종사가 망하고 신민을 버릴 수가 있을지언정 군신(君臣)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보신다 하여 대의를 우주에 밝히고 가슴속을 해와 별에 밝게 헤쳐 위아래 신령들에게 부끄러움이 없고자 할 뿐이다. 곤궁과 위축을 당하면서 천조(天朝)에 달려가 호소하였더니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 요동 총병관(遼東總兵官)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유격장군(遊擊將軍) 등 병마 1만을 거느리고 평양을 진격도록 허락하여 서울까지 이르러 왜적을 소탕하려고 기약하니 천병의 소식이 미치는 곳에 사민들은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나의 행전(行殿)이 비록 한구석에 궁박하게 있으나, 천조에서 또 호(湖)ㆍ절(浙) 지방에서 왜적과 싸운 경험이 있는 6천을 징발하여 아침 저녁으로 압록강을 건널 것이며 본도(평안도)의 군사와 말이 또한 수만이 모였으니 응당 다시 실패할 걱정은 없을 것이다. 너희 경명(敬命) 등이 이미 경기도에 이르렀으니 부디 기회를 보아 힘을 합하여 경성을 수복하라. 금성(金城)과 평양을 점령하였던 적도 기세가 이미 꺾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이 두 곳의 적만 제지하면 나머지 지엽의 적은 싸우지 않고도 절로 평정될 것이다. 지금 각 도가 모두 왜적의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오직 호남 한 도가 온전하니, 너희가 만일 힘쓰지 아니하면 또 어디를 믿으랴. 군량이 모자라거든 경(京)ㆍ호(湖)의 국고를 너희들이 먹도록 맡길 것이요, 무기가 다되거든 너희들이 쓰도록 맡기리니 각기 힘쓸지어다. 이제 경명을 공조 함의에 제수하여 초토사를 겸하고, 천일을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로 승진시켜 창의사(倡義使)를 겸하며 박광옥(朴光玉) 등 이하도 각각 차등 있게 벼슬을 주노라.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忠義)는 벼슬과 상을 기다리지 않겠지만, 내가 은혜를 베푸는 데는 이 밖에 다른 것이 없으니 도착하거든 받고 더욱 힘을 다하라. 또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로 하여금 충청ㆍ전라도 등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나의 뜻을 선유(宣諭)하고 군무(軍務)를 감독하게 하노니, 너희들은 그의 절제(節制)를 받아서 각기 용감함을 뽐내라. 용만(龍灣 의주) 한구석에서 국세가 위험하여 땅의 한계가 이미 다되었으니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사람의 일이 이미 극도에 다다랐으니 이치가 마땅히 회복함을 구할 것이다. 가을의 서늘함이 동하자마자 국경은 일찍 차가워지는구나. 저 장강(長江 압록강)을 보건대 역시 동으로 흐르니,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나의 한 생각이 물처럼 흐르누나. 이 교서가 이르거든 각기 나의 뜻의 슬픔을 불쌍히 여김이 있으리라. 아! 하늘이 이성(李晟)을 낳았으니 도성을 수복하도록 기대하고, 날로 장소(張所)가 능묘에 탈이 없다고 보고하기를 바라노라. 가뭄에 비구름 바라듯 하는 바람에 어서 부응하여 내가 서리와 이슬을 맞고 있는 괴로움을 면하게 하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아마도 잘 알 것이다. 이호민(李好閔)이 지은 것이다. ○ 아! 멀리 서쪽 국경에 파천하시어 임금께서 몽진하시는데 남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는 신자가 이제 애통의 교서를 보니 어찌 슬픈 회포가 없으랴. “죄가 오로지 나에게 있다.”는 것은 성덕의 겸손함이 지극하심이고, “다시는 남으로 바랄 수 없으니, 신정(新亭)에서 서로 만나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백성들은 마땅히 나를 허물할 것이라.”는 말씀은 귀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며, “내가 손가락을 깨묾이 이와 같다.” 하신 말씀은 입으로 차마 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군신의 대의는 하늘이 내려다본다.”는 말씀은 비록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가히 격동할 만하며,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한 생각이 강물처럼 흐른다.”는 그 말씀을 듣고 통곡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닐 것이다. 초야에 벌레 같은 신하는 미천한 정성을 견딜 수 없어 애오라지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읊어 서쪽으로 바라며 눈물을 흘린다. “궁궐에는 벼와 기장이 났고 용암에는 우림(羽林: 임금을 호위하는 친위대)이 체류하네. 한관(漢官)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주도(周道)는 마침내 찾기 어렵네. 북쪽을 바라보는 외로운 신하의 눈물이요 동으로 돌아오길 생각하는 성주(聖主)의 마음일세. 열 줄의 애통교시를 보고 나니 뜻이 침침하네.” 하다.
○ 경상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상동(上同) 운운. 소식을 들을 길이 없어 본도(영남)의 사세와 적의 기세가 쇠하였는지 왕성한지 어떠한 줄을 알지 못하였더니, 근자에 들은즉, 우도 감사(右道監司) 김수(金睟)가 용인에서 패하여 물러갔고, 좌도 감사(左道監司) 김성일이 진주에서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좌병사(左兵使) 이각(李珏)이 싸우지 않고 도망한 죄로 참형(斬刑)을 당하여 박진이 충성스럽고 용감하다 하여 이각을 대신하였고, 우병사(右兵使) 조대곤이 노쇠하여 양사준(梁士俊)으로서 대신하였으며, 변응성(邊應星)이 좌도 수사(左道水使)가 되었다 하니, 그들이 각기 본도로 돌아가서 힘을 써서 한 일이 있는가 모르겠다. 좌도에는 영해(寧海) 일대와 우도에는 진주 등 몇 고을이 아직 보전되었다 하니 이것이 사방 십 리 되는 땅이나 군사 일려(一旅)보다 낫지 않겠는가. 본도는 백성이 신실하고 후하며 본시 충의가 많으니 너희 다사들이 진실로 서로 분려(奮勵)한다면 반드시 회복의 바탕이 되지 않으리란 법도 없을 것이다. 들은즉, 정인홍ㆍ김면(金沔)ㆍ박성(朴惺)ㆍ곽일(郭)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ㆍ노흠(盧欽)ㆍ곽재우ㆍ권양(權瀁)ㆍ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이 의병을 일으켜서 군사를 모집함이 이미 많았다 하고 배덕문(裵德文)은 이미 적승(賊僧) 찬희(贊熙)를 죽였다 하니, 본도의 충의가 오늘날에도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더욱 믿겠도다. 하물며 곽재우는 전술이 비상하여 적을 죽인 것이 더욱 많았으되 공을 조정에 아뢰지 않는다 하니, 내가 더욱 기특히 여기노라. 내가 그의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한이로다. 호남에도 또한 전 부사 고경명과 김천일 등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본도 절도사 최원의 병마 2만과 더불어 나아와 수원에 머무르면서 바야흐로 경성을 회복하도록 도모하고, 그의 부하 양산숙 등으로 하여금 수로와 육로로 달려와서 행재(行在)에 아뢰는데, 내가 그의 아룀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려 한편으로는 위로되고도 슬펐다. 이제 양산숙 등이 군중(軍中)으로 돌아가는 편에 이 글을 부쳐 그로 하여금 전하여 이르게 하노니, 너희 사중(士衆)들은 내가 말하는 뜻을 알도록 하라. 내가 왕위에 오른 이래로 운운. 상동 군사들이 마땅히 분발하기를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광포한 왜적이 죄악을 쌓아 이미 가득 찼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더구나 평양의 적이 여러 번 야습(夜襲)을 당하여 세력이 쇠하였으니 섬멸할 것을 기약할 수 있다. 곧 맑은 가을이 철을 재촉하여 태백성(太白星)이 바야흐로 높아서 우리 군사의 머무는 곳에 살기가 이미 응하니 충의가 향하는 곳에 어느 적인들 꺾지 못하랴. 너희 사민들은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비록 고경명 등과 힘을 합쳐 북으로 올라오지 못하더라도, 본도에 유둔(留屯)한 적 또한 많고 왕래하는 자 또한 많아서 길에 잇달았다 하니, 마땅히 서로 요해지를 끼고서 적들이 노략질하는 것을 나누어 무찌르도록 하라. 또한 마땅히 길 옆에 군사를 매복시켜 좌우로 서로 응하여 혹 맞아서 치고 혹은 뒤밟아 쳐서 적으로 하여금 마음 놓고 다니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 한 놈도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도록 만들고, 온 지방을 깨끗이 하고 평정시켜 노약(老弱)을 불러들여 살게 하라. 그런 뒤에 힘을 합하여 경성으로 나의 행차를 맞아 돌아가면, 너희 사민들이 살아서는 아름다운 이름을 누리고 은택이 자손에게까지 흐를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랴. 정인홍 제용감 정(濟用監正), 김면 합천 군수, 곽일 예빈시 정(禮賓寺正), 박성 공조 정랑, 곽재우 유곡 찰방(幽谷察訪), 이대기(李大期)ㆍ전우(全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표창하고 장려하노니, 생각건대, 너희들의 충의는 벼슬과 상을 기대하지 않겠지마는 운운. 상동
○ 처음에 정철이 강계(江界)의 적소(謫所)로부터 풀려와서 행조(行朝)에 따라갔다가 이미 체찰사(體察使)의 명을 받고 또 호남의 소식을 듣고는 초토사 고경명에게 편지하기를, “살아 돌아와서 차마 오늘의 일을 보게 되어 조복(朝服)으로 눈물을 닦으니 눈물이 말라 피가 이어 흐릅니다. 어찌 차마 말하랴, 어찌 차마 말하랴. 좌랑 상산숙이 와서, 형이 창의(倡義)하여 군사를 일으켜 호산(壺山 여산(礪山))까지 왔다고 들으니, 친구의 사사로운 정으로 배나 기쁠 뿐이 아니라 천안(天顔 임금의 안색)에 기쁨이 있고 백관들에게 희색이 돕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복을 내리는 하늘이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모름지기 기운을 내고 전진하여 회복에 한결같이 뜻을 두어 임금의 행차를 봉영(奉迎)하기를 날로 바랍니다. 나는 외람되이 도체찰사의 명을 받아서 장차 내일 발정(發程)하려 하였다가 길이 막힐 것이 염려가 되므로 당분간 기다릴 뜻이 있으니 어떻게 귀결이 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종이는 다되고 말은 길어 우선 여기서 줄입니다. 철(澈) 배(拜).” 하다. 교지와 이 편지가 왔는데, 경명은 이미 한을 머금고 전사하였으니, 슬프도다.
○ 이광ㆍ윤선각(尹先覺)의 벼슬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나주 목사 권율로서 전라 순찰사를 삼았으며, 공주 목사 허욱(許頊)으로 충청 순찰사를 삼고 이순신(李舜臣)에게 자헌대부의 계자(階資)를 내리다.
○ 영해 부사(寧海府使) 한효순(韓孝純)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삼다. 교지에,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경상좌도는 아직 보존되었으나 다만 도내에 감사ㆍ병사ㆍ수사가 없어서 조정의 소식이 통하지 못하므로 인심이 붙일 데가 없다. 그래서 비록 창의(倡義)하여 적을 치는 사람이 있으나 통솔하기에 어려운데, 좌감사 김성일은 길이 통하지 않아 아직 간 곳을 모르고 사기(事機)는 심히 급하다. 이제 그대를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토포사를 겸하게 하노니 성일이 미처 부임하기 전에 그대는 군현(郡縣)을 통솔하여 적을 치는 일을 맡고 또 성일이 있는 곳을 찾아서 급히 부임하도록 하여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치도록 하라. 군사나 백성으로 공이 있는 자는 일일이 자세히 기록하여 후일에 논공(論功)할 증거를 삼고 공사(公私)의 종은 곧 면천(免賤)해 주도록 하라.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은 각 고을이 연달아 무너질 때에 적을 베어 공을 세웠으니 극히 가상하다. 역시 당상관으로 승진시키고 그 나머지 공이 있는 사람도 역시 예(例)에 따라 논상(論賞)할 것이니 그리 알라.” 하다. 이 교서는 길이 막혀서 서너 달을 지나서 효순이 감사가 된 뒤에 도착하였다.
9일. 보성 군수(寶城郡守)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엿보다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고 남평 현감(南平縣監) 한순(韓諄)은 적에게 죽었으며, 죽은 군인이 5백여 명이다.
○ 진주 판관(晉州判官) 김시민(金時敏)을 본주(本州)의 목사로 승진시키다. 변란이 처음 났을 때에 시민이 순찰사의 명령으로 날랜 기병(騎兵) 50여 인을 거느리고 영산(靈山)으로 달려가 진군하여 작원(鵲院)에서 맞아 쳤는데 참퇴장(斬退將) 윤탁(尹鐸)과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이 모두 붕궤되다. 거느린 군사 1백여 명이 모두 전사하고 숭인은 홀로 강물에 빠져 헤엄쳐 나왔는데, 시민이 옷을 벗어 입혀서 함께 돌아오다. 김수(金睟)가 군관을 시켜 시민에게 전령하기를, “적이 이미 고성(固城)의 길로 향하였으니 빨리 막아 끊으시오.” 하다. 시민이 곧 고성으로 달려오니 적이 이미 고성을 점령하여 전진할 수가 없어서 본주로 돌아온즉, 성중의 사졸들이 이미 흩어졌다가 차차로 돌아와 모여서 기세가 점차로 떨치다. 시민이 사졸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하면서 사수할 계책을 하다. 사천을 점령하였던 적이 장차 본주를 범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조대곤(曺大坤)과 더불어 정병(精兵) 1천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사천성 밑에 이르렀더니, 적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다. 이튿날에 또 진군하여 적을 십수교(十水橋)에 만나니 현에서 5리쯤의 거리다. 군사가 모두 죽도록 싸워서 머리 몇 급(級)을 베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으니 적이 퇴각하여 달아나므로 추격하여 성 밑에까지 갔다가 돌아오다. 이로부터 군사들의 기운이 배나 되다. 얼마 안 되어 적이 밤에 도망가 고성의 적과 합하다. 시민이 모든 군사에게 명령하여 고성의 적을 습격하고자 하다. 드디어 정병을 뽑아서 진주(晉州)의 남쪽 영선현(永善縣)에 진을 쳤다가 밤중에 군사들로 하여금 재갈을 머금게[啣枚] 하고 가만히 대둔령(大屯嶺)을 넘어서 새벽에 고성의 성 밑에 이르러 북치고 고함치며 위엄을 뽐내다. 적이 두렵고 위축되어 수일 만에 밤에 도망하여 진해(鎭海)에 있는 적과 합세하여 철병하여 창원(昌原)으로 가니, 세 고을이 연달아 수복되어 군의 기세가 크게 떨치다. 이때에 이르러 목사가 되다. 김면은 시민이 장수와 군사의 인심을 얻은 줄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응원하게 하다. 시민이 곧 정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달려가서 김면과 합하여 금산(金山)의 적을 쳐서 머리 수십 급을 베고 수 일 있다가 또 나가 싸워서 머리를 벤 것이 역시 많았다. 시민이 칼에 맞아 발이 상하자, 김면이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 얼마 안 되어 금산 등지의 적이 잇달아 도망가자, 시민이 진주로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좌병사 김성일(金誠一)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신이 이미 좌도의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右道)의 일은 마땅히 아뢸 것이 아니나, 다만 소신이 처음부터 의병을 주관하였으니 지금 만일 상례에 맡겨두고 근심스러운 기회를 눈으로 보고도 아뢰지 아니한다면 실로 신하된 의리가 아닙니다. 이러므로 한두 가지 조건을 외람되이 진술하여 직무 외의 일을 간섭한다는 혐의를 피하지 못하나이다. 당초에 김면은 고령(高靈)ㆍ거창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각기 적을 쳐서 기세가 떨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은명을 받아 합천 군수가 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제수되매, 고령ㆍ합천ㆍ거창 세 고을의 군사가 모두 그 장수를 잃고 마음이 해이하여 적을 칠 뜻이 없으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일이 진정될 동안에는 각기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전대로 적을 치게 하소서. 전 군수 곽일(郭)은 초계(草溪)의 가수(假守)가 되어 직무를 잘 보아 군사와 백성들이 사모하여 모두 진군수(眞郡守)가 되기를 바라고 군수 정눌(鄭訥)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곽일로 본군의 군수를 삼으소서. 전 목사 오운(吳澐)은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온 현을 타일러 군사 2천여 명을 모아서 노약자는 빼내어 보(保)를 삼고 군기를 주조하여 전투에 쓰게 하여 의령(宜寧) 한 고을이 온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니, 이 몇 사람의 공은 실로 도내에서 함께 아는 바입니다. 일이 의병에 관계되므로 감히 직책을 넘어 외람되게 아뢰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나주 판관(羅州判官) 이복남(李福男)으로 본도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다.
○ 전라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는 담양(潭陽)ㆍ순창(淳昌)으로 해서,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은 구례(求禮)로 해서 남원(南原)에 모이다. 경회가 본부 전 첨사 고득뢰(高得賚)로 부장(副將)을 삼으니, 남원의 선비와 백성으로 의병에 모집된 자가 거의 6, 7백 명이 되다. 두 군사가 장수(長水)에 이르러 유둔(留屯)하고 부장으로 하여금 금산(錦山)ㆍ무주(戊州)의 적을 잡을 조치를 하게 하였다.
○ 최원(崔遠)ㆍ김천일(金千鎰) 등이 장단(長湍)에서 적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처음에 경기에서 피란한 조관(朝官)들과 의병들이 모두 강화(江華)에 있다가 두 군사가 근왕(勤王)하는 것을 보고 흔연히 기운이 나서 여러 차례 적을 치도록 권하였고 두 장수도 역시 군사들이 해이해질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본 지방의 군사와 합세하여 강을 건너 장단에서 적을 엿보았는데 적이 군사를 감추고 약한 체하여 우리 군사를 유인하다. 여러 장수들이 급히 군사를 시켜 육지에 내려가 잡게 하였더니 적병이 사면에서 일어나 기세가 바람을 탄 불길 같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고 천일 등은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쪽배를 타고 달아나다. 수일이 지난 뒤 전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당일에 죽음을 면하고 숨어 있는 자 들을 몰래 불러 모으게 하니 겨우 1천여 명을 얻다.
27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과 중[僧] 의장(義將) 영규(靈圭) 등이 금산(錦山)에서 적을 치다가 패하여 죽다. 그 뒤 만력 23년 을미년(1595, 선조 28)에 전지(戰地)에 비를 세우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는 증 참판(贈參判) 조공(趙公)이 순절한 땅으로서 부하와 함께 죽은 병사들이 매장된 곳이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 25)에 왜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우리 땅을 범하였다. 우리 군사가 닿는 곳마다 번번이 붕괴되어 감히 그 칼날을 막는 자가 없었다. 왜적이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몰아서 바로 한강을 건너오니 삼경(三京 한양(漢陽)ㆍ개성(開城)ㆍ평양(平壤))이 모두 지켜지지 못하고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나 근왕(勤王)하는 자가 전혀 없었다. 이때에 공이 옥천(沃川)의 시골집에 있다가 홀로 분연히 일어나서 피를 뿜으며 격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순찰사와 수령들이 모두 방해하였다. 공이 잉에 동지와 문생인 전승업(全承業)ㆍ김절(金節) 등과 더불어 충청 우도로 달려갔더니 전 참봉 이광륜(李光輪)과 선비 신난수(申蘭壽)ㆍ장덕개(張德盖)ㆍ고경우(高擎宇)ㆍ노응탁(盧應晫) 등이 공의 의기를 사모하여 앞다투어 와서 모였다. 드디어 군사와 군량을 모집하고 혹은 기계를 주조하여 7월 4일에 공주(公州)에서 기(旗)를 세우니 군사가 1천 7백이었다. 이때에 왜적이 공주를 점령하매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사가 붕궤되었다. 공이 청주(淸州)로 진군하여 8월 1일에 바로 성의 서문 밖을 두드려서 승장(僧將) 영규와 진(陣)을 연합하였다. 공이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종일토록 독전(督戰))하니 적이 크게 패하여 마침내 저들의 송장을 태우고 밤에 달아났다. 이로부터 충청 좌도 여러 둔(屯)의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날랜 군사를 가려서 바로 행조(行朝)로 달려가려고 온양(溫陽)까지 이르자, 금산에 있는 왜적이 다시 창궐하여 장차 충청ㆍ전라도를 침범하려 하였다. 순찰사가 공의 동지를 소개로 하여 공을 만나 금산의 적을 치는 것에 대해 의론하자고 청하였다. 부하 장교들도 역시 대부분 말하기를, “국가의 땅이 모두 적에게 점령당하고 오직 충청ㆍ전라도만이 침범당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를 도와서 중흥의 열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버리고 서울로 올라간다면 이것은 충청ㆍ전라도가 없어지는 것이요, 또 먼저 금산의 적을 무찔러서 뒤를 밟을 적을 끊은 뒤에 북으로 가서 근왕하여도 늦지 않다.” 하므로, 공이 이에 공주로 돌아왔더니 순찰사와 뜻이 또 서로 틀어졌다. 대개 의병을 일으킬 처음에 공이 순찰사에게 글을 보내어, 그가 군사를 끼고 스스로 호위하고 근왕하는 데는 뜻이 없어 충신과 의사(義士)의 기운을 누른다고 책하였더니 순찰사가 사감을 품은 것이었다. 이에 이르러 순찰사가 각 고을에 공문을 돌려 무릇 공의 취하에 모집되어 있는 자에 대해 그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또 관군에 영을 내려 서로 응원하지 않게 하니, 휘하의 군사가 이미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고 다만 의사 7백 명이 공을 따라 사생을 같이하려는 이가 있을 뿐이었다. 8월 25일에 군사를 옮겨 금계(錦溪)로 가려 하니 별장(別將) 한 사람이 극력 말리기를, “적이 명종(明宗) 을묘년(1555)에 호남에서 패한 것을 징계하여 지금 금계를 점령한 자는 특히 정예한 부대요 수효도 수만인데, 어찌하여 우리의 오합(烏合)한 군사를 가지고 당적하겠습니까. 마땅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고 또 조정의 명령을 기다립시다.” 하다. 공이 울면서 맹세하기를, “임금께서 지금 어디 계시건대, 감히 승패를 말하리오.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나는 한번 죽음을 알 뿐이다.” 하고, 드디어 영규와 군사를 연합하여 진군하였다. 일찍이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과 27일에 일제히 협공(夾工)하기를 약속하였었는데 권율이 글을 보내어 기일을 변경하였으나, 글이 도착하기 전에 공이 이미 금산군에서 10 리의 거리에 당도하여 전라도 군사를 기다렸다. 적이 정찰해 알고 맞아 공격하여 우리가 미처 진을 치기 전에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번갈아 나와서 우리에게 대들었다. 공이 이내 군중(軍中)에 영을 내리기를, “오늘에는 다만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니, 생사와 진퇴에 있어 의(義) 자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라.” 하니, 군사들이 모두 명을 따라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힘껏 싸운 지 한참 만에 적이 세 번 패하여 겨우 다시 정돈하였는데, 우리 군사는 이미 화살이 다되었다. 적이 드디어 막하로 몰려 들어오자, 군사가 도망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웃으며, “장부가 죽으면 죽었지, 위태로움에 이르러 구차히 살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북채를 들고 독전하기를 더욱 급히 하니, 군사들이 죽음을 각오로 달려들어 맨주먹으로 적을 치면서도 오히려 행오(行伍)를 이탈하지 않고 마침내 공과 함께 죽어서, 삶을 바라고 요행히 면한 자가 없었다. 적도 역시 그만큼 죽어서 세력이 드디어 꺾이자, 남은 군사를 거두어 진중으로 돌아가면서 곡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그 송장을 사흘 동안 운반하여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여 이내 쌓아서 불태웠으며, 마침내 무주에 있는 적과 함께 모두 도망하였다. 그러므로 충청ㆍ전라가 보존되어 국가가 그 덕에 오늘날의 중흥이 있게 되었으니, 공이 비록 패하여 죽었으나, 충청ㆍ전라를 보존하여 왜적을 꺾고 막은 공이 어떻다 하겠는가. 공이 군사를 일으킨 몇 달 동안 일찍이 형벌을 쓴 적이 없었으나, 군사들이 모두 명령에 복종하여 이르는 곳마다 숙연히 정제하여 시끄러움이 없었다.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는 멀고 가까운 데서 달려와 모여서, 비록 관에게 극력 방해를 당하여 처자가 옥에 갇혔으면서도 또한 공을 사랑하고 사모하여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한 자가 있었다. 그의 패함을 듣자 거리에 곡성이 서로 들리며 전사한 집에서도 사사로운 원망을 하지 않고 오직 공의 죽음을 슬퍼하며, 뒤에 처져서 죽지 아니한 자도 자기의 죽음 면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만 의탁할 데가 없음을 한탄하여서 충청 우도의 사람들은 천한 하인까지도 모두 소식(素食)을 하였으니, 공의 덕이 사람에게 감동됨이 깊었던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일이 위에 알려지자, 임금께서 매우 애도하시어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의금부 춘추관사로 증직하고 그 아들 완도(完堵)를 태릉 참봉(泰陵參奉)으로 제수하였으며 달마다 집에 곡식을 내렸으니 아! 이로써 군신 관계를 보겠도다. 아! 평상시에는 큰 소리를 하다가 작은 이해에 임해서는 두려워하고 피하여 앞으로 갔다가 물러갔다가 하는 자가 많은데, 공과 같은 이는 전일에 곧은 상소를 올리고 국사(國事)를 말하여 여러 번 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곧은 말을 한다는 명성이 일시에 진동하였고, 한가히 물러나 처하다가 국난을 듣고는 곧 분발하여 먼저 의병의 깃발을 날려 비록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어 몸에 화살을 맞고 순국하였으니, 그가 전날 말한 바와 맞추어 보매 부절(符節)이 합한 듯 스스로 마음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또 국가에 문관으로서 전쟁에 달려가야 할 책임이 없고 공은 또 당시에는 관직도 없었는데도 한갓 의로써 일어났으니, 군사를 멈추고 기회를 보아서 조정의 명령을 기다린다 하더라도 누군들 불가하다 하리오마는,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강한 적에게 항거하여 죽어서 후회가 없었으니 어찌 열렬한 남자가 아니랴. 공이 신묘년(1591, 선조 24)에 왜적의 사신이 왔을 때에 문득 조정에 글을 올려 그 사신을 베어 천조(天朝)에 보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 늠름한 기색과 의연한 말이 바로 해나 달과 더불어 빛을 다투었으니, 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뒤로 공의 한 장의 상소를 보겠다. 또 천문에 특히 밝아서 하루는 동남쪽에서 큰 우레 같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는 공이 울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천고(天鼓)라는 것이니, 왜적이 이제 반드시 바다를 건널 것이다.” 하였다. 그 말이 과연 증험되어 날짜도 틀리지 않았으니, 공은 이인(異人)이 아니고 무엇인고. 역적 정(鄭)가를 배척하면서 예(羿)와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그 뒤에 그 말이 마치 촛불로 비추고 거북으로 점친 것 같았으니, 이것은 사람마다 전해 외우는 바이다. 기타 사적과 행실이 탁월하고 빛나는 것도 진실로 전하지 아니할 수 없지마는, 이제 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한 가지 일은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것이다. 공의 8대조 휘(諱) 천성(天性)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당하여 박주(博州)에서 두 번 이기고 안주(安州)에서 패하여 순국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그 조상의 충절에 강개하여 탄복하고 추모하며 칭도하기를 좋아하더니 지금 마침내 능히 닮았으니, 또한 기이하도다. 공의 휘는 헌(憲)이요, 자는 여식(汝式)이요, 호는 중봉(重峯)이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문과에 올랐다. 집이 가난하여 처자는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모친을 봉양하는 데는 맛난 음식과 따뜻한 옷이 부족함이 없게 하였고, 몸소 밭 갈아 끼니를 대면서도 여가에는 항시 성현의 글을 대하여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글 읽은 것이 아닌가. 인륜과 의리를 외우고 말하여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기를 기약하였고, 생사에 분명하여 본래 마음에 정한 까닭에 창졸의 즈음에 능히 우뚝하게 스스로 성취함이 이와 같으니, 가히 공경할 만하도다. 행조에서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교서를 내려 봉상시 첨정(奉尙寺僉正)을 제수하였으나, 공이 또한 미처 보지 못하였다. 군사가 패한 이튿날에 공의 아우 조범(趙範)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지에 들어가니, 공은 기(旗) 밑에서 죽었고 장수와 군사들은 모두 그 옆에 죽어 있었다. 조범이 곧 공의 시체를 지고 옥천으로 돌아와서 4일 만에 빈(殯)하였는데, 안색이 살아 있는 듯하여서 성낸 기운이 발발(勃勃)하여 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흐늘거리므로 사람들이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된 줄을 몰랐다. 공을 따라 전사한 7백 명은 대개 공의 열렬함을 사모하여 듣고 보면서 격동된 자들로서 몸을 버리는 데 뒤질까 두려워하여 온 군사가 모두 충의의 귀신이 되기를 사양하지 않았으니, 특히 이번 전란 이래로 다른 군중에서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옛 역사에 상고 하여 보아도 또한 듣기 드문 바이다. 또 그 중에 더욱 드러난 이로 참봉 이광륜 중임(仲任)은 효도와 우애가 타고났으며 강개히 절개가 있어 향병(鄕兵) 수백을 모집하여 실로 시종일관 공을 돕다가 마침내 죽음을 함께 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봉사 임정식(任廷式)은 성품이 질박하고 정직한데다가 활 쏘고 말 타는 재주가 있어서 척후병을 거느리고 진(陣) 밖에 있다가 형세가 급한 것을 바라보고는 말을 채찍질해 돌진하여 왜놈 두엇을 쳐 죽이고 죽었다. 선비 김절(金節)은 의병을 모집하는 데 맨 먼저 따라서 전공이 많았다. 이려(李勵)는 바로 고(故) 수상(首相) 이탁(李鐸)의 손자로 학문을 좋아하고 행실이 돈독하였으며, 그의 가풍을 계승하더니 공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 의기로 따라왔다가 진중에서 함께 죽었다. 또 만호(萬戶) 변계온(邊繼溫), 현감 양응춘(楊應春), 봉사 곽자방(郭自防), 무인(武人) 김헌(金獻)ㆍ김인남(金仁男)ㆍ이양립(李養立)ㆍ정원복(鄭元福)ㆍ강충서(姜忠恕)ㆍ박봉서(朴鳳瑞)ㆍ김희철(金希哲)ㆍ이인현(李仁賢)ㆍ황삼양(黃三讓)ㆍ박춘년(朴春年)ㆍ한기(韓琦)ㆍ박찬(朴贊)은 모두 편비(偏裨)로서 혹은 선등(先登)하여 견고한 적을 꺾고 혹은 적을 죽이기를 많이 하여 용맹과 열렬함이 남의 이목에 빛난 자들이다. 선비 박사진(朴士振)ㆍ김선복(金善復)ㆍ복응길(卜應吉)ㆍ신경일(辛慶一)ㆍ서득시(徐得時)ㆍ윤여익(尹汝翼)ㆍ김성원(金聲遠)ㆍ박혼(朴渾)ㆍ조경남(趙慶男)ㆍ고명원(高明遠)ㆍ강몽조(姜夢祖)는 모두 혹은 문학으로 혹은 행실로 알려진 이들인데, 살아서는 공의 문하에 출입하였다가 전장에서 공과 죽음을 같이한 자들이다. 공의 아들 완기(完基)는 씩씩한 용모에 체격이 듬직하였으며 성질이 남보다 뛰어났었는데, 군사가 패하자 일부러 그 의관을 화려하게 하여 공의 죽음을 대신하려 하니 적이 대장인 줄 알고 그 시체를 부숴버렸다. 적이 이미 물러가자, 공의 문도(門徒) 박정량(朴廷亮)ㆍ전승업(全承業)이 곧 가서 7백 의골(義骨)을 수습하여 모아 한 무덤을 만들었다. 정량은 기특한 선비라 옛 도리를 힘써 행하고 승업은 단아하여 경학(經學)에 통하고 행실을 다듬었는데, 공의 막하에 있다가 마침 임무를 받아 밖에 나갔었기 때문에 난에서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비석을 세워서 영원히 전하기를 선창하였더니 불행히 연달아 병들어 죽었다. 동문(同門) 민욱(閔昱)은 의를 즐기는 자라, 그들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애석히 여겨 그 뜻을 이어 경영하여 충청도 선비들 및 금산의 기로(耆老)들과 의론이 합하였다.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또한 비용을 보조하여 돌을 다듬기를 이미 마치자, 진사 송방조(宋邦祚)가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참판 조헌의 마음과 일을 아는 이가 몇 분인데 모두 세상에 살아 있지 아니하니 감히 자네에게 부탁하네.” 하였다. 내가 참판을 잘 알았는데 그가 순국한 초기 내가 행조에 있다가 듣고 특히 슬퍼하였다. 그러나 천 리에 서로 바라보면서 순국한 그 자리에 술 한 잔을 부어서 예전 마음을 풀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글을 짓고 사적을 적어서 이 일을 돕게 되었으니 어찌 글이 훌륭하지 못하다는 핑계로 사양하리오마는, 다만 노쇠한 나머지에 어찌 능히 그 사적을 빛나게 써서 땅 밑에 7백의 충혼을 위로하여 그들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할 수 있으랴. 아! 상심된다. 일을 기록하고 시를 지어 끝에 부치노라, 하고, 그 시에,
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臣有大綱
목숨을 바쳐 직분을 갚음은 / 授命酬分
지사의 당연함이건만 / 志士所程
이해가 그것을 빼앗아 / 利害奪之
진실로 실천한 이가 적으니 / 允蹈者鮮
난에 임해서야 나타나네 / 臨難乃明
강직한 조공은 / 侃侃趙公
학문이 이미 실천되어 / 學旣踐實
충성에 합하고 바른 것을 밟았네 / 合忠履貞
전년 용사의 해가 / 昔歲龍蛇
운이 양구를 당하여 / 連屬陽九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네 / 島夷構兵
금탕이 험함을 잃어 / 金湯失險
감히 막아내는 이 없어 / 莫敢儲胥
바로 한경에 처들어 왔네 / 直抵漢京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파천하매 / 鑾輅西遷
공이 피눈물을 흘리니 / 公泣其血
의는 중하고 몸은 가벼웠네 / 義重身輕
팔을 걷고 한 번 외치매 / 振袂一呼
의병들이 일제히 분발하여 / 義旅齊奮
소리에 메아리가 따르듯 하였네 / 如響赴聲
강개히 창을 베고 자면서 / 慷慨枕戈
군사를 멈춤이 없이 / 誓無留陣
청주에서 적을 멸하기로 맹세하였네 / 覆賊于淸
흉한 기세가 심히 치성하여 / 兇焰孔熾
금계를 차지하였는데 / 盤據錦溪
누가 그 고래를 잡아 죽일꼬 / 孰剪奔鯨
공은 우리 군사에게 / 公激我師
이 놈들을 멸한 뒤에 조반을 먹자고 맹세하고 / 滅此朝食
바로 나아가 감히 공격했네 / 直前敢攖
혈전하기 한참 만에 / 血戰逾時
화살은 다되었으나 / 矢盡途窮
북소리는 오히려 울렸네 / 枸鼓猶鳴
적을 많이 죽여서 / 殺賊過當
임금의 은혜를 갚았으니 / 以報主恩
비록 패했으나 오히려 이긴 것이네 / 雖敗亦嬴
임금 위해 죽는데 어찌 피하며 / 殉君胡避
장수 따르는데 어찌 두려워하랴 / 從師胡惘
열렬하다! 한 군영이여! / 烈哉一營
일이 행조에 알려지자 / 事聞行朝
충의를 표창하고 벼슬을 내려 / 褒忠錫秩
특별히 임금의 정을 표시하셨네 / 特軫震情
옛사람이 말하기를 / 人亦有言
부서져서 완전함이 있고 / 有碎而完
떨어질수록 꽃이 핌이 있다고 하였네 / 有殞而榮
마침내 그 몸은 죽었으나 / 竟毁其魄
실로 그 천성을 온전히 하여 / 實全其天
그 신령이 위로 올라가리 / 其神上征
끓어오르는 기운과 울려 퍼지는 소리가 / 騰氣犇音
우레가 되고 벼락이 되어 / 爲雷爲霆
우루루 쿵쾅쿵쾅 / 殷殷轟轟
저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 掃彼欃槍
남방의 기강을 지키니 / 以桿南紀
국토가 편안케 되었네 / 彊塲載寧
진 터의 구름은 아득하고 / 陣雲莾蒼
들새는 슬피 우는데 / 野鳥哀吟
충의의 넋이 한 구덩에 묻혔구나 / 毅魄同坑
서대는 구름에 솟고 / 西臺陵雲
진악이 옆에 있어 / 震岳在傍
아울러 이 무덤을 표시하누나 / 幷表厥塋
오는 천추에 / 有來千秋
이 큰 비를 읽으면 / 讀此豐碑
그 사람들이 살아 있는 듯하리라 / 其人若生
하였으니,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가 지었다.
그 뒤 권필(權鞸)의 시에,
몇 번이나 운대의 난간을 꺾었으며 / 幾折雲臺檻
초수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長吟楚水醒
종래로 큰 군자는 / 從知大君子
작은 조정에 처하지 않음을 알겠네 / 不處小朝廷
곧은 기운은 천지를 베고 / 直氣斬天地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니 / 孤忠炳日星
높디높은 금산의 빛은 / 崔嵬錦山色
만고에 이렇듯 푸르네 / 萬古只摩靑
하였으니, 중봉을 위해 지은 것이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각 고을로 하여금 근왕할 군사를 징발하게 하다.
○ 경상도 예안(禮安) 사람 정자(正字) 유종개(柳宗介)가 군사를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얼마 안 되어 패하여 죽다. 이보다 먼저 경상 좌도 산골의 궁벽한 10여 고을에는 전란이 조금 멀었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아침 저녁으로 구차히 생명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서 각기 처자를 보호하여 가재(家財)를 골짜기 안에 숨겨두고, 그 중에 한두 명의 강개한 선비들이 무인과 도망한 군사들을 격동시켜 권하여 적을 칠 의리로 타이르는 이가 있으면 왜적을 끌어들여 화를 입힐 것이라 하여 도리어 전쟁에 대해 말하는 이를 허물하다. 종개가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먼저 창의(倡義)하여 향병 수백을 모집하여 큰 산 가운데에 진을 쳤다. 강원도의 적이 평해(平海)ㆍ울진(蔚珍) 등지를 분탕한다는 말을 듣고 장차 광비촌(廣比村)을 넘어서 장서(掌書) 윤흠신(尹欽信)과 윤흠도(尹欽道)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치려하였는데, 적의 선봉이 변복(變服)하고 가만히 오매 척후병이 깨닫지 못하여 매복하였던 군사가 모두 흩어지다. 종개 등이 창졸에 적을 만나서 용감히 싸워 퇴각하지 않았으나, 힘이 다되고 구원병이 없어서 마침내 살해를 당하다. 적이 드디어 예안ㆍ영해(寧海)를 분탕질하고 가니, 이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의병을 경계하여서 모집에 응하기를 즐기지 아니하다. 그 뒤에 초유사의 격문이 우도로부터 간간이 좌도 각 고을에 전해져서 문무(文武)ㆍ부로(父老)ㆍ사민(士民)에게 두루 타일러서 국가의 은혜를 잊음을 책하고 의병에 참가하기를 격동시키다.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이 또 통문을 내어 말이 간절하였고, 또 영천(榮川)ㆍ풍기(豐基)의 선비 김대현(金大賢)ㆍ곽수지(郭守智) 등과 향병을 소집하였으며, 이상은 7월 사이의 일이다. 전 한림 김해(金垓), 생원 금응훈(琴應勳), 진사 임흘(任屹), 생원 이정백(李廷栢)ㆍ배용길(裵龍吉) 등이 예안ㆍ안동에서 일어나고, 전 현감 이유(李愈)와 진사 권욱(權旭)ㆍ이광옥(李光玉)이 예천(醴泉)에서 호응하다. 찰방 조현(趙玹), 생원 이함(李涵)ㆍ유학(幼學) 백현룡(白見龍) 등이 또한 영해에서 일어나고, 그 사이에 서로 호응하는 이로 신홍도(申弘道)는 의성(義城)에서, 이인호(李仁好)는 의흥(義興)에서, 진사 이영남(李榮男)과 홍위(洪瑋)는 군위(軍威)에서, 김희(金喜)는 비안(比安)에서, 민근효(閔根孝)ㆍ권계창(權季昌)은 청송(靑松)에서 호응하니, 물고기 비늘처럼 일어나서 군사가 만여 명이 되는데 모두 김해의 통솔을 받다. 김해는 충의롭고 강개한 자질로 신의가 본래 남에게 미더움을 받았으므로 먼 데나 가까운 데서 유위(有爲)할 것을 기대하여 간 곳마다 사람들이 적을 치는 데 힘쓰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또 9월 조에 나옴.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모든 장사(壯士)와 더불어 안강(安康)에 모여서 군관 권응수(權應銖)와 판관 박의장(朴毅長)으로서 선봉을 삼아서 16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밤에 40여 리를 행군하였다. 아침에 경주성(慶州城)에 육박하여 장사를 뽑아서 성 밖의 인가를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변할 수 없다. 대군이 포위하여 공격하였는데 적병이 경주 남쪽 10여 리로부터 불의에 돌진하여 우리 군사의 뒤를 습격하니, 대군이 놀라 무너져서 장수와 군사들이 갑옷을 버리고 무기를 던지며 달아나다. 적이 기세를 타서 급히 추격하니 송장이 쌓이고 서천(西川)의 물이 다 붉어졌으며 경주ㆍ영천(永川)의 의사들이 모두 죽다. 대개 하루 전에 언양(彦陽)에 있는 적이 와서 깊은 골짜기에 매복하여 우리 군사를 정탐해 기다렸는데도 모든 장수들이 살피지 못하여 패군하게 된 것이니, 사람들이 모두 통분히 여기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이유의(李由義)가 군사를 거느리고 행군하여 직산(稷山)에 다다르다. 경기도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이 충청 병사 신익(申益)과 약속하기를, 죽산(竹山)의 적을 협공(恊攻)하여 횃불을 드는 것으로 신호를 삼고 밤을 틈타 진군하기로 하다. 유의 또한 약속에 참여하여 군사를 보내 응원이 되다. 호남의 군사가 몰래 죽성(竹城) 밖 5리 되는 땅에 도착하여 경기와 호서의 군사를 기다렸는데, 두 군사가 이르기 전에 적이 이미 먼저 알고 은밀히 기병(奇兵)을 내보내어 앞뒤로 덮치니 우리 군사가 크게 무너져 달아났고 죽은 자가 길에 겹겹이 쌓이다.
○ 충청도 영동(永同)의 선비들이 향병을 모집하고 본 고을의 수령인 한명윤(韓明胤)을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다. 그 통문은 다음과 같다.
양남(兩南) 호서(湖西) 열읍(列邑)의 명부(明府) 및 각 촌락 대소첨존시(大小僉尊侍)에게 삼가 고합니다. 왜적이 한번 범하여 왕경(王京)을 함몰시키매 임금께서 서쪽으로 파천하시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으니, 북쪽을 바라보매 심장이 무너져 통곡을 견딜 수 없소. 일국의 백성으로 직분상 마땅히 죽음을 바쳐야 할 터이나, 우리들이 형편없어 지혜는 병을 이끄는 데에 어둡고 생각은 띠풀 베는 데에 어두워 지금껏 이 적과 한 하늘 밑에 살았으므로 통곡하는 원통함은 아마 피차가 한 가지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리오. 다만 우리 고을 선비들이 나의 비루하고 옹졸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의장(義將)으로 추대하므로 선비들이 적을 치는 마음에 감동되어 옳은 일에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니, 감히 급무(急務)를 가지고 문득 호소하오. 대개 적을 치는 데는 군량을 준비함보다 먼저 할 것이 없고, 싸워 이기는 것은 무기의 날카로움에 달린 것이오. 군량이 부족하면 적을 칠 수가 없고 무기가 예리하지 못하면 싸워봤자 이기지 못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오. 내가 지키는 이 고을은 본래 적은 백성이 살고 호서와 영남에 끼어 있어 적의 요충이 되어서, 서울을 오르내리는 적이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고 금계(錦溪)로 왕래하는 적 역시 여기로 길을 삼으므로, 분탕질의 참혹함이 다른 고을보다 배나 되고 농사의 황폐함이 각 고을보다 심하오. 온 동리에 종을 단 듯한 집도 없고 백묘(百畝)에 반 포기의 작물도 없소. 무기고는 잿더미가 되었고 병기는 쓸은 듯 없어졌으며, 창고가 불에 타서 군사를 먹일 길이 없소. 관가에서 대여해 줄 희망이 끊어졌으니 군사에게 주린 빛이 있고, 사람들이 싸울 재주가 없으니 누군들 무용(武勇)을 드날리리오. 하물며 이 적변(賊變)에 여름부터 가을까지 혹은 맞이하여 공격하고 혹은 야습을 하여 많고 적음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쫓고야 말았소. 한 번 공격 한 뒤로 활이 부서지고 화살이 다되어 없는 데 따라 곧 준비하나 재물이 다하고 힘이 다되었으며 또 전일의 야습에서 남았던 활과 화살까지 아울러 다되었소. 만약 이때를 당하여 적이 충돌해 온다면 빈 주먹으로 버틴 군사들이 누가 능히 호응하며, 배가 고파 뱃속에서 뇌성처럼 울리는 군사들이 감히 전투하기를 바라리오. 흩어져 사방으로 가게 하자니 나라 원수를 갚지 못하겠고 합쳐 모아 요지에 매복시키자면 무기와 양식이 함께 다되었으니, 온갖 방법으로 생각해도 어쩔 바를 모르겠소. 이에 부득이한 요청으로 첨존시(僉尊侍)에게 두루 고하오. 삼가 원컨대, 여러분들은 온전한 고을에 살고 있으니 우리가 모래를 말질하는 민망함을 불쌍히 여기고 우리가 땔나무를 끄는 뜻을 생각하여, 공사(公私)의 전곡(錢穀)을 넉넉하게 하여 배고픈 군사를 같이 구제하고 화살촉과 어교(魚膠)를 많이 내어 병기를 만들게 한다면 적을 치기 위한 성심이 직접 무력에 맞서 싸우는 자와 일반일 것이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남에게 급한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능히 구하지 못한다면, 내게 급한 일이 있을 때엔 남이 누군들 구해 주리오.” 하였소. 이 때문에 산에 올라서 경계(庚癸)를 부르매 신숙조(申叔糶)가 양식을 주었고, 전진(戰陣)에 나아가 무기라 다되었음을 고하매 각완(卻完 춘추 시대 진(晉) 나라 대부)이 무기를 도와주었거늘 하물며 오늘날을 당하여 국적(國賊)을 멸하지 못했음이리오. 그대의 재물과 힘을 한 가지로 하여 피차를 헤아리지 말고 오랑캐가 거의 다 섬멸되려는 때에 특별히 병기와 양식의 은혜를 베풀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급함[倒懸之急]을 함께 풀어 준다면 심히 다행일 것이오. 서쪽 궁궐을 우러러 바라보매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으니, 어쩌면 서로 만나서 이 뜻을 터놓고 고하리오. 종이를 대하니 목이 메어 우선 이만 줄입니다.
○ 경상도 영해 부사 한효순(韓孝純)이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등과 더불어 적을 치기를 약속하였는데, 적이 강원도로부터 와서 동쪽에서 진지를 합쳐 영해를 범하고자 하다. 효순이 군관 장기(張豈) 등을 시켜 군사를 매복시켜 맞아 치니 적이 이내 물러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도의 사민들이 김성일(金誠一)이 좌도의 감사로 옮겨 제수된 것을 듣고, 어린애가 젖을 잃은 것처럼 답답하여 통문을 돌려 모여서 구공(寇公)의 길을 막으려 하다. 그 통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영남은 왜적이 침범한 뒤로 모든 성이 와해되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장수는 썰물처럼 물러나고 수령들은 쥐처럼 숨으며, 백성과 군사는 붕궤되어 숨고 읍과 촌락이 소조(蕭條)하여 죄다 흉하고 추한 놈들의 굴혈(窟穴)이 되어 다시는 손댈 곳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 초유사 김상공(金相公)이 판탕(板蕩)한 나머지에 애통의 교서를 받들어 간담을 버티고 눈물을 뿌리며 이 적과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여, 의를 선도하여 회복함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아 임지에 도착하는 날 곧 각 고을에 통문으로 타일러서 군신의 분(分)을 밝히고 복수할 의를 창도하였다. 말이 간절하매 충의가 격발되어 듣는 이는 팔을 휘두르지 않는 이가 없었고 글을 보는 이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는 이가 없어서 같은 소리로 서로 응하고 멀든 가깝든 그림자처럼 따랐으니, 피곤하고 흩어진 천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흉하고 추하며 한창 날뛰는 왜적에게 항거하여 요해지를 차단해 적의 기세를 꺾어서 국가로 하여금 거의 회복될 희망이 있게 한 것이 그 누구의 힘인가. 지금 들은즉 초유사가 좌도의 감사로 옮겨 제수되었다 하니, 이 어찌 다만 몇 고을 사민의 복 없음이리오. 아마도 또한 장수와 군사들이 마음이 이반되어 해이해지고 흩어질 형세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니, 한 삼태기에 공(功)이 무너져서 또 회복의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망했다가 다시 보존된 것은 초유공이 온 때문이요, 뒤에 거의 성공했다가 다시 무너질 것도 초유공이 가는 때문이다. 가나오나 마찬가지로 국사를 위한 것이지마는 늦고 급한 형편에는 피차의 구별이 있고 좌도나 우도가 다 같이 한 도이니, 적을 평정할 기회는 반드시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뜻은 여러분과 더불어 먼저 구공을 빌려 달라는 소를 올리어 선전관(宣傳官)의 가는 편에 부치고, 또 머물러 살려 달라는 청을 초유공에게 바치기를 생각하노니 상상컨대 여러분은 반드시 기약하지 않고도 마음으로 맞는 점이 있을 것이다. 깊이 원하노니 여러분께서 고을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다음달 1일에 우리 고을 향교에 와서 모이면 매우 다행이겠다. 유학 강위로(姜渭老) 등.
○ 경상 좌감사 김성일이 거창으로부터 초계(草溪)에 이주(移駐)하기 위하여 장차 강을 건너려는데 선비 이대기(李大期) 등이 길을 막고 머물기를 청하였다. 성일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이미 명하셨으니 어찌하랴.” 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 좌도로 가서 우도의 여러 선비들이 적을 친 일을 크게 칭찬하여 일일이 공을 논하여 아뢰니 뭇사람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여 좌도의 인심이 쭉 따랐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피란하여 산에 들어갔던 경상 우도 사람들이 날짜가 오래되어 양식이 떨어지자 모두 호남으로 나오다. 이와 같이 남원부가 영남의 경계에 닿아 있으므로 유민(流民)과 원주민이 서로 반반이다.
○ 금산에 머물던 적의 기병(騎兵) 4백여 명이 무주(茂朱)에 이르러 그대로 머문다 하다. 경상도 합천 진사 박이문(朴而文), 안음(安陰) 진사 정유명(鄭惟明) 등이 소를 올려 김성일을 우도 감사에 유임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고 토포사(討捕使) 한효순으로 좌도 순찰사를 삼다. 이때에 모든 지방 관원들이 모두 샛길을 다니기 때문에 큰 길에는 사람이 없었더니, 효순이 순찰사가 된 뒤에는 항상 자줏빛 도포를 입고 나팔과 피리를 울리며 방백의 위의를 성대히 하여서 각 고을에 둔치고 있는 적들이 성에 올라서 가리키며 바라보아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로부터 길이 비로소 통하여 사람들이 그의 행차를 보고는, 다시 우리 관원의 위의를 보겠다고 하였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와 전라도 수병(水兵)의 모든 장수들이 가덕도(嘉德島)에서 적을 치다가 녹도 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이 죽고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돌아오다.
9월. 김성일이 좌도로부터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와서 다시 우도 감사가 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성주(星州)에 진을 쳤던 적에게 이미 무계(茂溪)ㆍ현풍(玄風)의 응원이 없어져서 세력이 심히 외롭고 약해졌으므로, 정인홍(鄭仁弘)이 김면(金沔)과 세력을 합쳐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더니, 김준민(金浚民)은 형세가 불편하다 하여 어렵게 여기고 의심하는 빛이 있었으나 여러 사람의 의론으로는 모두 진격함이 옳다 하여 드디어 진격하기로 결정하다. 모든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각기 부대를 정돈하고 수십 리에 둘러 포진하니 군사의 형세가 심히 장하였다. 인홍과 김면이 가평(可坪)에 대진(對陣)하니 성주성(星州城)에서 5리나 가까웠다. 모든 군사가 차례로 전진하여 성문을 포위하고 육박하며 진퇴하고 충돌하며 유인하여 도전하나, 왜적이 나오지 아니하고 다만 철환(鐵丸)으로 방어하였다. 종일토록 진퇴하여도 성을 함락시킬 기구가 없어서 해가 저물자 본진으로 돌아오고, 이튿날에 다시 진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면이 배설(裴楔)을 시켜 부상현(扶桑峴)에 매복을 시켜 개령(開寧)에서 응원하러 오는 적을 방비하게 하다. 배설이 응낙하고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어찌 서생에게 절제(節制)를 받아서 그를 위해 중로에 매복한다는 말인가.” 하고 드디어 가지 않았다. 이날 밤에 성주의 적이 개령에 달려가서 급함을 알리매 개령의 적이 크게 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이 알지 못하고 이튿날에야 바야흐로 성을 지킬 기구를 준비하였다. 응원하는 적이 불시에 크게 이르러 학익진(鶴翼陣)을 치고 에워쌌으며 성중의 적 또한 성문을 열고 앞뒤에서 공격하였다. 김면이 갑자기 말에 올라 먼저 나갔으나, 우리 군사들이 기와 북을 버리고 도망해 무너지다. 인홍은 꼿꼿이 앉아 움직이지 아니하고 선비를 김면에게 보내어 진정시키기를 권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안장을 얹은 말을 가지고 와서 인홍에게 급히 피하기를 청하매 인홍이 부득이하여 또한 나가다. 김준민이 뒤에 있어 싸우다가 퇴각하다가 하여 모든 군사를 방위하니 이로 하여 군사들이 많이들 죽음을 면하다. 고령(高靈)의 가장(假將)손승의(孫承義)는 탄환에 맞아 죽었고 사사(射士) 이죽(李竹)은 금안장에 탄 왜장을 쏘아서 칼로 베어 죽이다. 우순찰사(右巡察使) 김성일이 합천 의병군관(義兵軍官)을 잡아와서 품(稟)하지 않고 거사한 허물을 책하여 곤장을 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도 의병장들이 회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리 지방이 변란의 초기부터 적의 소굴이 되어 도륙과 약탈의 참혹함이 다른 지방보다 더욱 극심하였다. 우리 부로(父老)와 선비들은 이리저리 도망하여 다른 지방으로 피하였으므로, 간혹 선비들이 분기하여 의병을 일으키려는 자가 있어도 속수무책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길이 탄식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군세가 크게 떨쳐서 적의 칼날이 이미 꺾이었고 각 고을의 선비들이 각기 의병을 일으켜서 기율(紀律)이 이미 성립되었고, 전일의 피해 도망하였던 자들이 들과 산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분기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런데 우리 본부(本府)에는 이 국가의 백성이 아닌 이가 없는데도 유독 아무도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없으니, 비록 적의 세력이 날뛰는 소치라 하더라도 임금의 원수를 어이하랴. 생각건대 여러 부형과 동지가 비록 도피한 중에 있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분기하기를 생각하는 뜻은 일찍이 밥 먹고 숨쉬는 사이에도 마음에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갓 이 마음만 있고, 나와서 거사를 도모하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한결같이 숨어 엎드렸을 뿐이라면 사림의 가운데 설 수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신자의 도리에 죄를 지음이 이미 크지 않겠는가. 간절히 원하건대 부로와 선비ㆍ백성들로 가까운 곳에 피란해 있는 자들은 이달 8일에 의성(義城) 지보사(只寶寺) 앞에 모여서 상의하고 처치할 것이니, 길이 막혀 어렵다고 스스로 저상(沮喪)하지 말라. 명부(名簿) 외의 인원은 응당 간신히 도피해 있어 듣지 못할 것이니, 또한 모두 추록(追錄)하여 서로 통하고 타일러서 때맞춰 와 모이도록 할 것이다. 이 중에 응당 강서(江西)의 인사들은 필시 저 지방에 피란해 있을 것이나, 그 중에는 응당 창의(倡義)한 사람이 있을 것이므로 아직은 이쪽에 피란해 와서 있는 분에게만 고하노니, 그 가운데 혹 기록되지 않은 이는 각기 듣고 본 대로 추록하여 전하고 서로 고하라. 군부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함께 살 수 없으며 문 안에 들어온 도적은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 바이다. 만약 피란하여 곤궁한 중에 내 몸도 어찌할 겨를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일에 관계하랴 한다면, 그것은 8월의 교서를 보지 못하였는가. 무릇 신민이면 받들어 읽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gm를 것이니, 그것을 읽고도 태연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찌 인도(人道)로 책할 수 있겠는가. 유사(有司)가 된 이들은 와서 호응하려는 자들을 단결시키도록 하라. 9월 4일 정자 노경임(盧景任) 등.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남원 읍내의 건장한 사람 70여 명이 모여서 적을 치기를 도모하여 이응수(李應水)를 함께 추대하여 장수로 삼았고, 경내(境內)의 승려들 또한 군사를 뽑아 모아서 두인(斗仁)으로 장수를 삼다.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크게 기뻐하여 곧 양식과 기계를 주어서 무주로 들여 보내었더니, 응수등이 모두 군사를 통솔할 재주가 없어서 적을 보고는 무너져 돌아오다. 그 뒤에 두 군사가 모두 적개병(敵愾兵)에 속하다.
7일. 황해도의 적이 나아가 연안(延安)을 포위하였는데, 초토사 이정암(李廷馣)과 조방장(助防將) 김대정(金大鼎) 등이 크게 부수어 쫓다. 처음에 임진강에서 패전한 뒤에 황해도 24군(郡)에 한 사람의 의사도 없고 진장(鎭將)과 수령은 모두 목숨이나 구하기를 도모하며 일도의 각 고을이 모두 분탕질과 약탈을 당하여 온 도내가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오직 연안부(延安府)가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적병이 이르지 않다. 정암 등이 패한 장수와 흩어진 군사를 거두어 모아서 함께 죽음을 바쳐 지킬 계책을 하여 부내의 남녀를 모두 부대에 편입하고 근처의 돈과 양식을 실어다가 먹을 것을 준비하였으며, 척후병과 봉화를 신중히 배치하고 요지에 매복을 시켜 밤낮으로 변을 기다렸다. 이때에 이르러 본도에 웅거하였던 적추(賊酋)들이 군사 5, 6만여 명을 합하여 기세등등하게 쏜살같이 연안으로 달려와서 성을 포위 공격하다. 정암이 먼저 땔나무를 염주관(鹽州館) 입구에 쌓아두어 불행한 경우에 스스로 타 죽어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는, 적이 성 밑에 이르자 여러 장수와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켜서 밤낮으로 순찰하였다. 군사와 백성을 위로 하고 타이르며 같이 죽기로 맹세하기를, “8도가 모두 적에 점령을 다하였고 오직 이 한 성이 국가의 소유이다. 지금 또 불행히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함이 여기에 있다. 하물며 능히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 천백의 생명이 하루아침에 끊길 것이다.” 하니, 사졸들이 듣고 모두들 격분하여 기운을 내고 먼저 성에 오르며, 선동하여 다친 곳을 싸매고 나와 싸웠다. 그러나 적의 세력이 날로 늘어나고 구원병은 이르지 않으니, 포위를 당한 지 6일이 되매 성이 심히 외롭고 위태로워지다. 정암이 쌓아둔 땔나무 속에 들어가 누워서 종을 시켜 불을 지르게 하니, 사졸들이 듣고는 피눈물을 머금고 다시 성에 오르며 피로한 군사들이 다시 싸워 하나가 적병 천을 당해내다. 마침 동서에서 바람이 일어나매 전현룡(田見龍)ㆍ조신옥(趙信玉) 등이 섶을 불태워 성 밑으로 던지기를 무수히 계속하니, 불길은 세고 바람은 급하매 적의 군사들이 혼란하여 죽은 자가 수를 헤일 수가 없다. 남은 무리들이 본진으로 달아나 돌아가는데 추격하여 머리를 베인 것이 심히 많다.
○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이 행조(行朝)에서 출발하여 경기ㆍ충청도로 오면서 배가 황해도를 지나다가, 밤에 연안을 바라보매 포성과 불꽃이 천지를 뒤흔들다. 정철이 성중의 인명을 생각하고 눈물 흘리기를 마지아니하다. 9일에 장연(長淵)의 금사사(金沙寺)에 이르러 바다의 바람이 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흘을 유숙하다. 또 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이 연달아 패하여 죽었음을 듣고 뜰에다 신위를 설치하고 절하고 술잔을 올리며 통곡하다. 밤에 절간의방에서 사율(四律) 한 수(首)를 슬피 읊어서 종사관(從仕官) 정설(鄭渫)ㆍ황붕(黃鵬)에게 보내어 화답을 구하다. 그 시에,
열흘 동안 금사사에 머무르는데 / 十日金沙寺
삼 년 동안 고국을 생각한 듯 / 三秋故國心
한밤의 호수는 서늘한 기운을 뿜고 / 夜湖噴爽氣
돌아가는 기러기는 슬프게 울고 가네 / 歸雁有哀音
적이 있으니 자주 칼을 보고 / 虜在頻看鏡
친구가 죽었으매 거문고를 끊으려 하네 / 人亡欲斷琴
평생에 외우던 출사표를 / 平生出師表
난을 당해 다시 길이 읊노라 / 臨難更長吟
하다. 또 남정가(南征歌)를 지어서 충의로써 타이르다.
○ 경상도 의병장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인홍, 합천 군수 김면에게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임금과 신하는 천지의 떳떳한 법이요, 충의는 인도(人道)의 대절(大節)이니 본래 있는 바이라 억지로 힘쓰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너희 영남은 신라가 일어난 땅이므로 부로는 충효를 실천하고 자제들은 시서(詩書)를 익혔으니, 비록 탕패(蕩敗)한 나머지라도 어찌 분기하는 무리가 적으리오. 중악(中岳)에서 달에 맹세하였으매 김유신(金庾信)의 칼이 칼집에서 뛰어 나왔고, 한산(漢山)에서 적을 꺾었으매 실여(實予 신라 때 사람)의 몸에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전일에 적이 처음 이르렀을 때에 창의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음을 괴이하게 여겼더니, 그것은 장신(將臣)들이 소리만 듣고도 놀라 도망한 탓이었고 사민들은 뜻밖에 당하매 불러 모으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제는 각 고을에 밥 짓는 연기가 끊어졌고, 한 지방이 물결처럼 일렁거린다. 백성은 어육이 되어 다시 살아나기를 도모하지 못하고 창고는 잿더미가 되어 손을 댈 곳이 없다. 내가 서쪽으로 파천한 뒤로 이미 남도에 대하여는 절망하였더니, 어찌 뜻하였으랴. 인홍과 김면이 앞장서서 군사를 모아 결심하고 적을 쳐서 몇 달 사이에 벌써 수천의 군사를 얻었으니, 의기를 하늘이 내려다보아 열사들이 메아리처럼 응한 것이다. 마른 밥을 싸가지고 군량으로 삼으니 백성에게서 긁어모았던 관가의 창고는 텅 비었을 뿐이요, 대를 깎아 활을 만드니 무고(武庫)에 쌓았던 갑옷과 병장기는 어디에 있는고. 정암 나루에서 군사를 떨치니 도망하는 적은 넋이 빠졌고, 무계에서 칼을 휘두르니 흐르는 송장이 강에 찼구나. 관군은 어찌 그리도 잘 붕괴되며, 의사는 어찌 그리도 모두 이기는고. 이는 관군이 겁내는 것은 군법인데 군법이 엄히 시행되지 못하였고, 의병이 결합된 것은 의(義)인데 의는 퇴각을 생각지 않음이다. 처음부터 성 쌓고 참호 파는 힘을 덜어서 백성의 힘을 후히 기르고 감사나 병사ㆍ수사의 봉작을 옮겨서 선비들의 마음을 굳게 맺어야 함을 알았더라면, 적의 혼백이 벌써 동래(東萊)의 들판에서 흩어졌을 것이며 독한 칼날이 어찌 평양성에 이르렀으랴. 오직 내가 밝지 못했던 탓이니,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랴. 근일에 본도 영리(營吏) 강만택(姜萬澤)이 돌아가는 편에 한 장의 종이로 죄기(罪己)의 교서를 내려 천 리에 심정을 토로하였는데, 다만 바다와 산을 건너갈 것이니 군주(郡州)에 잘 도착되었는지가 의문이다. 이에 최원(崔遠)의 군중(軍中)을 통하여 거듭 나의 뜻을 타이르고 인하여 적정(賊情)을 탐지하노니 너희들은 나의 뜻을 살피도록 하라. 나의 소회야 다함이 있으랴. 깊은 가을 서리와 이슬에 종묘사직의 신주(神主)가 표박(漂泊)함이 민망하고 국경의 강변에 장전(帳殿 임시로 임금의 장막을 치고 거처하는 곳)의 쓸쓸함을 부치누나. 고향을 그리워함은 귀천이 다르지 않으며, 돌아가고픈 생각은 아침 저녁으로 날마다 간절하도다. 다행히 천조(天朝)에서 불쌍히 여겨 용맹한 장수들이 명을 받들고 병부시랑(兵部侍郞) 1원(員)을 보내어 광녕진(廣寧鎭)ㆍ요동진(遼東鎭) 등지의 협수(協守)ㆍ총병(總兵) 등 관(官)을 통솔하고 70만의 군마를 내었으며, 아울러 양식과 군수품을 운반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와서 지금에 이르러 왕경(王京)의 적을 소탕하였다. 이달 11일에 유격 장군(遊擊將軍) 장기공(張奇功)이 선봉을 거느리고 강을 건넜고 강절(江浙) 지방의 유격 장군 심유경(沈惟敬)이 연포수(連炮手)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황제께서 내려주신 은(銀)을 가지고 15일에 강을 건넜다. 천병(天兵)이 곧 이르게 되매 산악에 광채가 움직인다. 하늘은 개고길이 말랐으니 바로 오랑캐를 잡을 시기요, 말은 살찌고 활은 굳세니 실로 적을 죽일 기회로다. 철마(鐵馬)가 대정강(大定江)ㆍ청천강(靑川江)에 뻗쳤으며 군함은 등래(登萊)ㆍ강절에 연이었다. 미친 도적이 죄악을 쌓을 대로 쌓았으니 하늘의 주벌이 마땅히 내릴 것이다. 하물며 우리 의병 열사의 무리들이 경기ㆍ황해ㆍ충청도에서 아울러 일어나서 도처에서 적의 수급을 베고 날마다 승전을 보고하는 것은 실로 천지가 가만히 도와서 그러함이니, 이는 바로 종묘사직이 중흥할 기회로다. 너희 다사(多士)들은 다시 충성을 가다듬으라. 들은즉, 김성일은 거창에 주둔하고 한효순은 영해를 보존하였다 하므로 그들에게 좌우도 순찰사ㆍ관찰사 관직을 내리고 대소(大小) 의병장에게 아울러 차등을 두어 관직을 제수하니, 너희들은 나아가서 절제를 받고 또한 함께 계책을 정하여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맞아 그의 뒤를 습격할 것이요, 적이 둔친 곳을 엿보아 그의 병영을 야습하라. 미리 여기서 이래라 저래라 통제하기는 어려우니 기회를 보아 하는 것은 너에게 맡기노라. 손인갑(孫仁甲)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을 애통히 여겨서 판서의 중직을 내리며, 이형(李亨)이 전사한 것을 민망히 여겨서 아들 한 사람을 벼슬시킨다. 벼슬과 상줌은 관계없이 역사에 기록함을 어찌 아끼랴. 다만 먼저 영남을 평온히 하고서야 비로소 빨리 나의 행차를 영접하라. 나의 말을 다하려 하니 눈물이 먼저 흐른다. 내가 어찌 잊으리오. 너희들은 마땅히 힘쓸지어다. 아, 예악(禮樂)의 고장에서 오랑캐의 기운을 쓸어버린다면 산이 숫돌처럼 닳고 물이 띠처럼 마를 때까지 영원히 봉작(封爵)의 영화를 누릴 것이다. 이에 교시하니 의당 잘 알 것이다. 이 교서를 받고야 어찌 힘을 다하여 적을 칠 마음이 없으리오.
○ 경상 감사가 복수할 일로 관문(關文)을 내리니, 다음과 같다.
흉한 적이 뜻대로 날뛴 후로 각처의 약탈한 인물을 일본으로 보내어 날마다 연달았소. 지금에는 경성에 있던 적이 전보다 배나 흘러 내려오면서 남자와 부녀를 묶어서 내려오는 것이 그 수를 알 수 없어 길에서 곡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아니하는데 읍이나 마을을 지날 적에는 반드시 소리치기를, “나는 아무 도(道) 아무 관(官) 아무의 부모ㆍ처첩ㆍ자녀다, 나는 경성 아무 동네 문무관(文武官) 아무의 부모ㆍ처첩ㆍ자녀이다, 우리 고향을 버리고 우리 부모를 떠나서 적에게 몰리어 멀리 타국으로 가니 황천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우리를 살아 돌아오도록 해주소서. 장사들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 힘을 다하여 적을 점멸해 주소서.” 하오. 약탈의 참혹함은 비록 말하지 아니해도 알았지마는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간장이 찢어지려 하오. 본도의 관병ㆍ의병 모든 군사는 비록 붕괴된 뒤라도 통분하지 아니함이 없어 앞을 다투어 맞아 공격하여 기어이 한 놈도 돌려보내려 하지 아니하오. 각 도의 여러 장수들은 군민(軍民)을 격동시켜 협력하여 원수를 갚으시오. 이 일로 충청도ㆍ전라도에 관문으로 통지하오.
○ 무주(茂朱)의 적이 소굴을 불 지르고 철병하여 모두 금산(錦山)으로 돌아가매, 본도 관병ㆍ의병 여러 장사들이 무주로 달려가 점령하다. 적이 올 때에는 소리만 듣고 도망했다가 적이 퇴각하고 나면 앞장을 서서 들어가 처치하니 그런 장수와 군사를 어디다 쓰랴.
16일. 금산의 적이 나와서 옥천(沃川)으로 향하였다가 중도에 모여서 밤낮으로 다시 금산으로 들어가더니, 이튿날 밤중에 철수하여 옥천으로 향하고 인하여 성주(星州)ㆍ개령(開寧)으로 내려가다.
○ 안성(安城)의 적이 경기 의병장 홍언수(洪彦秀)를 죽이다. 언수가 그의 아들 계남(季男)과 처음부터 군사를 일으켜 여러 번 큰 공을 세워서 적을 벤 것이 매우 많다. 이로 인하여 계남은 당상관에 승진되어 경기 조방장에 제수되다. 이때에 이르러 계남은 다른 군사와 합세하기를 의론하려고 마침 다른 진(陣)에 나간 사이에 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언수가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적이 언수의 송장을 가지고 가다. 계남이 일의 급함을 듣고 본진으로 달려 돌아온즉 이미 군사의 패하고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곧 혼자 말을 타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문에서 크게 외치기를, “너희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나도 또한 너희들에게 죽겠노라.” 하니, 적이 언수의 송장을 던져서 돌려주고는 기병(奇兵)을 내어 사면으로 둘러쌌다. 계남이 왼손으로 아버지의 송장을 안고 오른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니,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송장을 진중에 두고 추격하여 몇 놈을 베니 적이 더욱 겁내어서, 마을을 분탕질하다가도 사람들이 계남의 이름만 부르면 적이 반드시 도망하다.
○ 진주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진해(鎭海)에 있는 적장 소평태(小平太)를 꾀어 잡아서 판윤 김수(金睟)에게 부쳐서 행조(行朝)에 보내다. 혹은 평소태(平小太)라고도 한다.
○ 천조에서 유격 장군 심유경을 보내어 평양에 들어가서 행장(行長) 등과 약속하기를, 평양성 밖 40리에 표(標)를 세워서 다시는 그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이때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말을 퍼뜨리기를, “평양성 적장에 심안도(沈安度)란 자가 있는데 유경과 동성(同姓)이므로 그 때문에 유경이 적진에 출입한다.” 하다. 나는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의심한다. 적장 도진병고두의홍(島津兵庫頭義弘)이 이때에 의지(義智)와 함께 평양에 있었다. 도진은 성이요, 병고두는 관직이요, 의홍은 이름이다. 뒤에 정유재란에 행장과 의홍이 하동(河東)으로부터 바로 남원으로 갈 적에 유경이 요동에 있으면서 관하(管下) 우파총(牛把摠)을 보내 말렸으나 되지 않았었는데, 그때에도 역시 행장 심안도 등의 군사라고 말하였다. 뒤에 그들이 퇴각하여 둔치고 있을 때에 의홍이 사천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사천의 적장 심안도가 심유경과 동성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본다면 성이 심이라는 말도 반드시 헛것이다. 왜적이 그의 장수를 부를 때에는 반드시 관직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므로 순천의 적이 중납언(中納言)인 행장을 부를 때에 주락갑(注樂甲)이라 한다. 왜음(倭音)이 우리의 한자음과 다른 까닭에 중(中)을 주(注)라 하고 납(納)을 낙(樂)으로 언(言)을 갑(甲)이라 한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해 듣고 주락갑을 행장의 이름이라 여겼다. 이러므로 의심컨대 심안도라는 말은, 뒤에 왜적에게 잡혔다가 돌아온 자에게 물은즉 왜음 도(島)는 심만(沈萬)이라 하고 진(津)을 도(度)라 한다 하니, 유경과 동성이란 것은 분명히 틀린 것이다. 임진년에 순천을 침범한 적장이 36명이요, 정유년에 침범한 적장이 27명인데 심안도라는 이름은 없으니 이것은 왜음이 전해져 잘못된 까닭이다.
○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을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본도 우병사로 제수하고 양사준(梁士俊)을 파직하다.
○ 경상도 안동 선비들이 의병을 일으키다. 이때에 생원 김윤명(金允明), 진사 배용길(裵龍吉) 등이 초유사의 격문을 보고 부로들에게 고하여 이달 9일에 금법사(金法寺)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앞의 사람들이 먼저 가서 기다렸더니 전 현감 권춘란(權春蘭), 전 봉사 안제(安霽), 전 검열 김용(金涌), 진사 신경립(辛敬立) 등이 모두 와서 모이다. 의(義) 자는 스스로 뻐기는 혐의가 있다 하여 향병이라고 칭하다. 기약을 정하여 13일에 또 임하현(臨河縣)에 모였는데 전 예천 현감(醴泉縣監) 이유(李愈) 또한 참여하여 임하의 모임에는 사람 수를 백으로 헤아렸다. 김윤명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배용길로 부장(副將)을 삼아서 17일에는 향교에 모여서 일을 시작하는데, 윤명은 몸이 쇠하고 처사가 둔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생원 이정백(李廷栢)이 대신하다. 전 검열 김해(金垓)가 예안(醴安)으로부터 와서 합세하기로 모의하고, 이튿날에 일직현(一直縣)에서 동맹하여 예안ㆍ안동ㆍ의성(義城)ㆍ의흥(義興)ㆍ군위(軍威)ㆍ비안(比安)을 합하여 하나의 진을 만들어 다시 김해로서 대장을 삼고 정백ㆍ용길은 부장이 되며 안동 향교를 진소(陣所)로 삼다. 신경립은 문서를 맡다. 소속된 각 고을의 남정(男丁)은 모두 관군에 들어갔으므로 군사가 1만 명이 차지 못하자, 이에 선비와 품관(品官)을 모두 징발하여 건장한 자는 군대에 속하고 늙고 약한 이는 종[奴]을 대신하여 쌀을 바치게 하니 일부(一府)에서 얻은 것이 마침내 5백여 원(員)과 쌀ㆍ콩 1천여 석이 되다. 약속하기를, “적의 머리를 베는 것으로 상공(上功)을 삼는다면 먼저 베려고 다투다가 적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들의 이 일은 다만 적을 죽이려는 것이니, 잘 쏘아 꼭 죽이는 것으로써 상공을 삼고 머리 베고 왼쪽 귀를 베는 것은 차공(次功)으로 하자.” 하다. 그 뒤에 김면이 합도 대장(闔道大將 전라도 의병대장)이 되고 경립이 의병 명부를 가지고 강을 건너서 충청도 황간(黃澗)으로 둘러서 거창에 도달하다. 김면이 명부를 열람해 보매 모두 유생으로 편성되어 있으니, “이야말로 참의병이로다.” 하다. 이듬해 계사년에 김해는 천병을 따라 경주에 있다가 계림(鷄林)에서 병으로 죽다. 일이 위에 알려지매 홍문관 수찬으로 증직되었고, 생원 금응훈(琴應壎)이 대신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심유경이 평양의 적진에서 나와 순안(順安)에 와서 본국이 일본과 국교를 통하여 변란이 일어난 사실을 역관(譯官) 진효남(陳孝男)에게 물으니, 유경이 적장들의 말을 믿고 들었으므로 이 물음이 있었으니, 슬프도다. 효남이 대답하기를, “일본의 대마도(對馬島)는 땅이 가까우므로 저들이 개시(開市)를 위하여 때로 혹 왕래하나, 우리나라에서는 백여 년 동안 일본에 일체 사신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일에 일본이 근년 이래로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하여 천조에 범하려 한다는 풍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교린(交隣)한다 칭하고 일본에 가서 사정(事情)을 탐지한 일이 있으니, 전일에 아뢴 글 가운데 또한 진술하였습니다. 그 후로 영원히 서로 배척하고 끊어서 길이 통하지 않았고 이로 인하여 원한을 맺었습니다.” 하다. 유격(遊擊) 유경(惟敬) 이 데리고 갔던 무리가 다 나오고 다섯 사람만을 성중에 머물게 하면서 다음달 5, 6일 사이에 유격이 두 번째 입성할 것이라 하다. 유격이 곧 송 시랑(宋侍郞 응창(應昌))에게 글을 보내어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7, 8일에는 마땅히 도착하게 하고 요동의 양향(糧餉)을 운반하여 평양에 주둔하여 뒷날의 계책을 하게 하였다. 또 효남에게 이르기를, “내가 왜장과 말을 많이 하였는데 행장이 국왕을 보고자 하였다. 내가 도리에 불가하다는 뜻으로 거절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노야(老爺)의 말이 이치가 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대장부가 식언(食言)하지 아니할 터이라. 50일 안에 가정(家丁)을 보내고 나 역시 뒤이어 와서 서로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평양성을 우리에게 돌릴 일은 어찌할 터인가?’ 한즉, 행장이 지도를 내어 보이며, ‘조선 팔도에 평안도 또한 그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데 어찌해서 평양의 서쪽만이 천조의 지방이 되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본시 천조의 지방이므로 조사(詔使)가 올 적에 국왕이 이 땅에서 영접한다.’ 하였다. 행장이, ‘비록 천조의 지방이 아니더라도 이미 의정(議定)된 것이니 평양 서쪽은 곧 노야(老爺)에게 돌리고 마땅히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아서 서쪽은 대명(大明) 지방이 되고 동쪽에는 일본 지방으로 할 것이나 다만 이 성을 어느 군사로 지키겠는가?’ 하였다. 나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겠다.’ 하니, 행장이, ‘노야의 견해가 옳다. 조선 군사로 지켜서는 안 된다. 나는 노야의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경성으로 돌아가겠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왜장이 함경도에 있는 자가 두 왕자(王子)를 포로로 하고 있다 하니, 지금 통지해 타일러서 돌려보내고 포로된 사람들 또한 모두 풀어주게 하며, 각처의 왜인들은 모두 돌아가라.’ 하였더니, 행장이 말하기를, ‘관백이 나를 평안도로 보냈으니 평양성은 내가 주장하지마는, 다른 도는 내가 관장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노야와 함께 관백에게 가는 것이 어떠한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조정이 나를 시켜 다만 이 성에 갔다 오라 하고, 대동강을 건너는 데는 조정의 명령이 없으니 어찌 감히 넘을 수 있겠는가.’ 한즉 행장이 생각을 한참 하더니, ‘노야의 말이 이치가 있다. 노야는 두 사람을 시켜 봉서(封書) 한 통을 써서 관백에게 보내고, 나는 열 사람을 시켜 구봉(求封 명(明)에서 관백을 봉해 주기를 구함) 문서를 가지고 노야와 함께 북영으로 가면 어떻겠는가?’ 하므로, 내가 허락하였다.” 하다. 효남이 말하기를, “왜적이 언제 평양성에서 물러갑니까?” 하니, 유격이 말하기를, “천병이 크게 오면 적이 물러갈 것이다.” 하다. 이때에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수상(首相) 김귀영(金貴榮), 판서 황정욱(黃廷彧), 승지 황혁(黃赫),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 및 여러 조신(朝臣) 허명(許銘) 등과 그의 내권(內眷)들까지 함께 몰래 회령(會寧) 땅에 모여 있었는데, 본도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본부의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과 공모하고 청정(淸正)에게 밀통하여 불시에 야습하여 모두 포로로 잡아 경성으로 들여 보냈다. 그러므로 유경이 왜장과 말하다가 끝에 왕자를 돌려 달라는 일을 언급하였던 것이다. 이영은 그 뒤에 살아와서 복주되었고, 김귀영 이하 여러 신하는 모두 귀양갔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이요, 허영은 임해군의 장인이다.
○ 경상 우도 감사가 정랑(正郞) 박성(朴惺)으로 모곡차사원(募穀差使員)을 삼다. 이노(李魯)가 글을 지어 열읍(列邑)에 통문하였는데 그 글에, “백 척의 나무 이미 빠졌다가 한 치의 뿌리에 생기가 돌아오고,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이루어지려다가 한 삼태기가 모자라 큰 공이 이지러진다. 진실로 국가에 이로움이 있다면 의당 내 몸에 아까움이 없어야 하리라.” 하였다. 이러한 구절들은《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군사와 백성에게 효유(曉諭)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이 앙화를 내리매 섬 오랑캐가 침범하였으니, 각 고을이 붕괴되매 강회(江淮)가 보장(保障)의 험함을 잃었고 옛 서울이 함몰되매 도성 사람이 서리(黍離)의 시를 슬피 읊는다. 구묘(九廟)가 티끌을 무릅쓰고 임금의 행차가 멀리 파천하였으며, 2백 년의 예악 문물이 하루아침에 없어졌으니 예로부터 드문 병화(兵火)의 참혹함이다. 슬프다!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혹은 칼날에 걸려 피를 풀밭에 쓰러지고 혹은 부모가 잡혀가서 의탁할 바를 잃었으며, 혹은 처자가 더럽혀지고 욕을 보아 집을 보존하지 못하니 이 원수를 생각하매 어찌 한 하늘을 이고 살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뉘우치매 회복함은 기약이 없었는데 상국(上國)이 구원병을 보내어 신병(神兵)이 대동강에 모였고 영남ㆍ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서 맹렬한 장사가 한강 언덕에 구름 뭉치듯 하였으니, 칼날이 이르는 바에 적의 넋이 이미 빠져나갔다. 전승의 보고가 끊이지 않고 전장에서 적의 귀를 베어 바침이 연달았으며, 더구나 적의 괴수 평수길(平秀吉)이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와서 바다 위에서 주자 남은 군사들은 기운을 잃어 항복하며 혹은 거리에서 울부짖고 혹은 영동(嶺東)으로 달아나니, 너희 장사들의 힘으로 이 망해가는 적을 멸하기는 바로 벌겋게 달구어진 화롯불에 털 하나를 태우는 격이요 도끼를 갈아 버섯을 치는 격이라 할 것이다. 내가 왕명을 받고 동쪽으로 와서 국사(國事)를 권서(權署)하매 원수를 갚고자 괴롭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며 창을 베고 자며 날새기를 기다리니, 이 적과는 함께 살지 아니하기를 맹세한다. 너희 군사와 백성이 누구인들 우리 열성조(列聖朝)께서 길러낸 사람이 아니겠는가. 위로는 국가의 수치를 생각하고 아래로 사삿집의 욕됨을 생각하여 분기하고 적을 섬멸할 것이 정히 이때로다. 벼슬과 상은 나에게 있으니 나는 너희에게 아끼지 않을 것이다. 아, 죽을 마음만이 있고 살려는 생각을 말아서 적개(敵愾)의 공을 함께 아뢰고 성상을 받들어 옛 도읍에 돌아와서 어서 내소(來蘇)의 희망을 위로하라.
○ 경상 좌병사 박진(朴晉)이 안강(安康)에 주둔하고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박의장(朴毅長)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낮에는 성 밑에 달려 돌격하여 군사의 위엄을 보이고 밤에는 산머리에다 횃불을 벌이고 포를 쏘아 놀라게 하니, 이로 말미암아 경주의 적이 숨어 나오지 못하다가 얼마 안 되어 성을 비우고 밤에 도망하다. 의장이 성에 들어가서 창고의 곡식 4백여 석을 수합하고 길도 통할 수 있게 되니, 부윤 윤인함(尹仁涵)이 기계(杞溪)에 있으면서 의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게 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황제가 사신 설번(薛藩)을 보내어 행조에 와서 주상을 위로하기 위하여 조서를 가지고 오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하노라. 그대 나라가 대대로 동번(東藩)을 지키고 평소 공순함을 바쳐서 의관(衣冠)과 문물이 낙토(樂土)라 칭해졌는데, 근간에 왜놈들이 창궐하여 크게 함부로 침략해서 왕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을 약탈하여 점령하매 생민이 도탄에 빠져 멀고 가까운 곳이 없이 소란해지고 국왕이 서쪽으로 바닷가에 피하여 거친 들에 거처하니, 그대가 난리를 겪은 상황을 생각하매 짐의 마음이 측은하다. 어제 급하다는 소식을 전하기에 이미 변방 장수에게 영을 내려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고 이제 또 행인(行人 외교관) 설번을 시켜 국왕에게 이르니, 마땅히 그대 조종(祖宗)이 대대로 전해온 기업을 생각할 것이요 어찌 차마 하루아침에 가벼이 버리랴. 급히 수치를 씻고 흉악한 놈들을 제거하여 수복을 힘껏 도모하라. 다시 마땅히 계속하여 선유(宣遊)하니, 해국(該國) 문무 신민은 각각 임금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굳게 하고 원수를 갚는 의리를 크게 분발하라. 짐이 이제 문무 대신(文武大臣) 2원(員)에게 명하여 요양(遼陽)의 정예한 군사 10만을 통솔하고 적을 치는 것을 도우러 가서 해국의 병마와 앞뒤로 협공(挾攻)하여 흉악한 적을 섬멸하여 남은 종자가 없기를 기하도록 하였다. 짐이 밝으신 천명(天命)을 받아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에게 군주가 되어 있는데 방금 만국이 모두 편안하고 시해가 안정되었거늘 어리석은 이 조그맣고 하찮은 놈들이 감히 횡행하므로 다시 동남의 연해(沿海) 여러 진(鎭)에 신칙하고 아울러 유구(琉球)ㆍ섬라(暹羅) 등 나라에 선유하여 군사 10만 명을 모아 동쪽으로 일본을 쳐서 악인의 거괴(巨魁)의 목을 베어 바다 물결이 고요해지도록 하니, 벼슬과 상주는 후한 은전을 짐이 어찌 아끼랴. 대저 선대의 강토를 회복함이 이것이 대효(大孝)요, 군부(君父)의 환란에 급히 달려감이 이것이 지극한 충성이다. 해국의 군신은 본래 예의(禮義)를 아니 반드시 능히 짐의 마음을 잘 알아서 옛 강토를 빛나게 회복하여 국왕으로 하여금 개가(凱歌)를 울리며 환도하여 종묘사직을 지키게 하고, 길이 번병(藩屛)을 지켜짐이 먼 지방을 구휼하고 소국을 어루만져 기르는 뜻을 위로할 것이다. 공경할지어다. 그러므로 공경히 이를 선유하고 행인 설번을 시켜 받들고 조선에 달려가서 국왕 및 문무 신민에게 선유하노니 힘써 수복을 도모하기를 시행하라.
○ 8도 신민에게 선유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황천이 우리나라가 왜적에게 침략받은 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겨 특별히 행인(行人) 설번을 보내어 성지(聖旨)를 선유하고 인하여 크게 군사를 보내어 적을 쳐서 우리의 생령(生靈)을 건지고, 우리의 강토를 회복시켜 주려고 기필하시었다. 그래서 힘이 1천 근의 중령을 들어 낙천근이라고 불리는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를 시켜서 남방의 정예한 화포수(火炮手)로 혼자서도 1백 명을 당해내는 자 5천 명을 거느려 선봉으로 삼고, 광녕총병관(廣寧總兵官) 양소(楊韶)는 요병(遼兵) 및 가정(家丁)ㆍ달자(㺚子)ㆍ철기(鐵騎) 3만 명을 거느리고 다음이 되며, 병부 상서(兵部尙書) 송응창(宋應昌)은 소진(蘇鎭)ㆍ산동(山東)ㆍ산서(山西)ㆍ선부(宣府) 등의 대군을 통솔하여 뒤이어 와서 육로로는 평양으로 달려가서 바로 공격하여 소탕하고 수로로는 두 패로 나누어, 수륙 모든 군사가 모두 경성에서 모여 멀리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약속하였으니 전장(戰將)이 3백 명이요, 군사가 무릇 70만 명이다. 천병의 위엄으로 이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 것은 비유컨대 태산을 들어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아! 너희 대소 서민들은 조종의 옛 백성으로 이제 함몰되어 섬 오랑캐를 위하여 복역(服役)하고 혹은 그 부모와 처자를 잃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아니하랴. 어찌 원수 갚을 뜻이 없으랴. 마땅히 각각 힘을 다하고 분발하여 왜적을 메어 공을 바치면 난이 평정되는 날에 공신(功臣)을 녹(錄)하여 은택이 후손에게 미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천병이 멀리 몰아 짓밟을 즈음에 반드시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근심을 면치 못할 것이니 비록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각기 힘써서 공을 바치라. 왜장 한 놈을 베는 자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가선대부에 승진시킬 것이요, 왜적의 머리 한 개를 베는 자는 공신이 되고 적중에 들어 있던 자도 왜적을 베어가지고 나오면 죄를 면할 뿐 아니라 아울러 그 공을 녹할 것이다. 모두 알라.
○ 황제의 칙서(勅書)를 반포하는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임금답지 못하여 이렇게 천고에 없던 적변을 당하여 삼경(三京)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 저기 파천하며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생령이 어육이 되었으니 천지와 조종에게 죄를 얻음이 지극하도다. 오직 우리 성천자(聖天子)께서 생각하고 구휼하기를 자성(子姓)의 나라와 같이 보아 전후로 군사를 크게 발하여 만 리에 달려와 구원하고 은(銀) 2만여 냥을 주어 군수(軍需)를 하게 하니, 지금껏 지탱하여 한구석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추호도 모두 황제의 은혜로다. 이제 또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과인에게 대효를 힘쓰라 하고 신민들에게 지극한 충성을 힘쓰게 하여, 한 통의 윤음이 정녕하고 간절하여 귀에다 대고 타이름과 같을 뿐만이 아니니 다 읽기도 전에 울음소리와 눈물이 함께 나오는구나. 스스로 생각하건대 박덕한 몸이 어찌하여 이것을 천조에 얻었는고. 불행 중의 다행히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노라. 무릇 혈기 있는 자로서 이 칙유를 보는 이는 누군들 감동되고 격동되어 정성을 다하여 적을 치기로 생각하지 아니하랴. 이에 별지에 등서하여 각 도에 게시하노라. 아! 3백 60여 고을에 어찌 충의 호걸의 선비가 적으랴마는 당초에 변란이 갑작스레 일어난데다 태평을 누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진실로 방위하는 힘을 바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더욱 원한을 쌓았고 선비들은 분발하기를 생각하며, 적도 또한 지극히 흉악함을 저지르던 나머지 조금 쇠하여 하늘이 우리에게 앙화를 내린 데 대해 뉘우침을 성하게 볼 수 있으니, 적을 꺾어 소탕함이 정히 이 기회에 있도다. 무릇 너희 대소 인민은 비록 과인을 생각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우리 선왕의 남기신 덕택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비록 우리 조종이 남긴 덕택을 생각하지는 아니하더라도, 홀로 성천자의 은혜로운 뜻을 생각하여 너희 부모 형제와 처자의 원수를 갚지 않겠는가. 힘쓸지어다. 힘쓸지어다.
○ 천사(天使) 설번이 행재(行在)에 하루 동안 머물다가 돌아가면서 먼저 천조에 보고하니, 다음과 같다.
행인사(行人司) 행인직 설번이 왜적의 정상이 교활하여 걱정할 만하므로 군사를 발하여 마땅히 급히 구해야 함과 방어의 한두 가지 사의(事宜)를 아울러 진술하여 성명(聖明)께서 참고하심에 대비합니다. 전에 우리 병부(兵部)에서, 오랑캐 놈이 반란하여 서로 싸우고 왜놈의 정상이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성명께 간절히 빌어서 빨리 문무 대신을 보내어 토벌하기를 경략(經略)하여 급한 환란을 풀어줄 일로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조선이 왜놈의 침략을 당하여 국왕이 심히 급하게 청병하므로 이미 다관(多官)의 회의를 거쳐 득실을 결정하고 예부(禮部)를 시켜 번직(藩職)을 파견하여 칙서를 받들고 가서 조선 국왕에게 선유하게 하였습니다. 공경히 받들고 곧 조선에 달려가서 칙서를 열어 선유하니 해국 임금과 신하가 감동되어 울지 않는 이가 없어 모두 말하기를, “황제의 은혜가 소국을 구원함이 참으로 천지의 은혜와 같다.” 하고,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바라는 것이 큰 가뭄에 구름 바라듯 합니다. 그 임금과 신하가 슬피 호소하는 간절한 말과, 곤궁하고 고생하는 정상을 눈으로 본 것을 근거하건대 진실로 존망이 순간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사세의 민망함은 조선에 있지 않고 우리나라의 국경에 있으며, 직(職)이 깊이 염려하는 바는 국경에 있지 않고 내지(內地)의 진동(震動)함에 있습니다. 군사를 발하여 토벌함을 어찌 잠시인들 늦출 수 있겠습니까. 직은 청컨대 반드시 닥쳐올 사세와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방어할 지방의 사의를 헤아려서 황상을 위하여 진술하겠습니다. 대저 요진(遼鎭)은 경사(京師 북경)의 팔이며 조선은 요진의 울타리요, 영평(永平)은 기보(畿輔)의 중지(重地)이며 천진(天津)은 또 경사의 문정(門庭)입니다. 2백 년 동안 복건(福建)ㆍ절강(浙江)은 항상 왜환을 만나도 요양ㆍ천진에서는 왜구가 있음을 듣지 못한 것은 조선이 병풍이 되어 가려 준 까닭입니다. 압록강에 비록 세 길이 있으나 서쪽에 가까운 두 길은 물이 얕고 강이 좁아서 말이 뛰어 건널 수 있고, 나머지 한 길은 동서의 거리가 화살 두 개의 거리에 불과하니 능히 그것을 믿고 방어하여 지키겠습니까. 만약 왜놈이 조선을 차지한다면 요양의 백성이 하룻밤도 베개를 편안히 하여 눕지 못할 것입니다. 순풍이 한 번 빠를 때에 돛대를 날리고 서쪽으로 온다면 영평ㆍ천진이 첫째로 화를 당할 것이며 경사가 진동하여 놀라지 않겠습니까. 직은 사사롭고 지나친 걱정을 견딜 수 없어서 발길 가는 곳마다 곧 상세히 묻고 널리 알아보았으며 또 사람을 시켜 바로 평양 지방에 가서 정탐하였습니다. 그 회보에 의거하건대, 모두 이르기를, 왜적들이 각기 남의 집 부녀를 겁탈하여 살림을 차리고 창고를 수선하여 군량과 마초를 많이 저장하여 오래 머물 계획을 하고, 병기를 더 제조하고 민가의 활과 화살을 수색해 모아서 싸우는 데 쓰려고 한다 하니 이것은 그 뜻이 작은 데에 있지 아니합니다. 신이 도착하는 날에 그들이 서쪽으로 와서 압록강에 열병(閱兵)을 하겠다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는데 조선의 신민들이 쩔쩔매어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다행히 유격 심유경이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단기(單騎)로 가서 말을 통하여 50일을 약속하여 그들의 침범할 기간을 늦추면서 우리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꾀로 저들을 속일 적에 역시 저쪽에서도 이 꾀를 가지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겠습니까. 저것들이 간사하고 교활하여 한창 평양을 함락할 때에는 “조선에 길을 빌려 중국에 원수를 갚겠다.” 하더니, 지금은 ‘길을 빌려 조공(朝貢)하겠다.’ 합니다. 전일에는 중국과 대등하지 못함을 천고의 유한(遺恨)으로 삼다가 문득 또 심유경을 만나 조공을 통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순식간에 거만스럽고 욕하는 말을 하였다가 잠깐 사이에 공순한 말을 하니, 이로써 그들이 간사하여 신빙하기 어려움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10년 만에 한 번 공물을 바치기로 일정한 기간이 있었고, 공물을 바칠 적에 전에는 영파부(寧波府)를 거쳤고 또 귀주(貴州) 지방도 있는데 이제 와서는 조선을 끼고서 우리에게 맹약을 강요하니, 신은 생각건대 여러 겹의 번역을 거쳐서 조공하는 자는 아마도 이와 같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두고 문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 꾀를 헤아리건대, 이렇게 거짓으로 강화를 청하는 척하여 우리의 군사를 늦추려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혹은 강이 얼기를 기다려서 요양을 범하거나 혹은 봄을 기다려서 천진을 범할는지도 또한 알 수 없는 바입니다. 만일 이때에 빨리 큰 군사로써 임하지 아니하면 저들은 “침범하는 곳마다 우리를 감히 누가 어쩌랴.” 할 것이니, 순순하게 돛대를 돌리리라는 것을 신은 믿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조선이 거의 망하여 위태로움이 조만간에 임박해 있으나 칙서가 한 번 선포되어 그들의 충의의 마음을 고동시키고 그들의 적개(敵愾)한 기운을 진작시키매, 그 나라 사람들이 회복하기를 생각하여 왜적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인심을 이용하고 정예한 군사를 주어 그들과 함께 왜적을 협공하면 왜놈을 반드시 기일을 정하여 섬멸할 수 있겠으나, 시일만 끌다가 저것들이 가난하고 궁한 백성을 불러 모으고 유리(流離)하는 자를 안정시키며 또 조선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하고 새 임금 있는 것을 좋아한다면 비록 1백만 군사가 있은들 되겠습니까. 혹자는,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가서 토벌하면 그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재촉하는 격이다.” 하는 이도 있으나, 직은 “토벌하면 올 것이요 토벌하지 않아도 역시 올 것인데, 토벌하면 평양의 동쪽에서 견제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이 더디어 화가 작을 것이요 토벌하지 않으면 평양 밖에 함부로 날뛰므로 그들이 오는 것이 빨라 화가 클 것이니, 속히 토벌하면 우리가 조선의 힘을 빌려서 왜적을 사로잡을 것이요 더디게 토벌하면 왜적이 조선인을 거느리고서 우리를 대적할 것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신은 군사를 내어 토벌하는 것을 잠시라도 늦출 수 없다고 여기는 것 비록 대병(大兵)이 일시에 일제히 모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연달아 군사를 내어 조선에 성세(聲勢)의 도움이 되게 하면 조금이라고 오랑캐의 넋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군사를 일으키는 비용으로는 군량이 막대한데 직이 조선에게 저축한 바를 물어본즉 7, 8천 명을 한 달 먹일 양식은 겨우 되고 부족한 것은 우리가 대주기를 의뢰한다 하고, 그 나라 임금과 신하들도 역시 인마(人馬)를 많이 내어서 압록강 부근에 있기를 원합니다. 평양을 수복한 뒤에는 그 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또한 우리 군사들이 그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원수 갚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양식을 즐겨 바칠 것이니, 절로 지방에 따라 양식을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왜적이 쌓아둔 것도 있음이리까. 관전보(寬奠堡) 같은 데는 지방이 5백여 리인데 원액 관군(原額官軍)은 수효가 이미 극히 적은데다가, 지금 각영(各營)에서 조발해간 선봉(選鋒)ㆍ초마(哨馬) 및 연만(年滿), 도망친 자, 죽은 군사를 제하고 나면 관전보에 실제로 있는 영군(營軍)은 다만 3백 30여 명뿐입니다. 이미 왜를 막으려 하고 또 오랑캐를 막자니 보(堡)를 지키는 데 군사가 없을 수 없고 적을 질러 막는 데 사람이 없을 수 없으니, 왜가 만일 오게 되어 막는다면 직은 관전보 등지의 군사를 속히 더 설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사람은 오랑캐를 막는 데 잘하고 남방 사람은 왜를 막는 데에 잘하니, 만일 왜와 싸운다면 남방 군사 2만 명을 쓰지 않고는 어찌 그 칼날을 꺾어 그 날랜 기운을 좌절시키겠습니까. 그런즉 남방 군사를 속히 조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장기(長技)는 말 달리고 활 쏘는 데 있고 왜의 장기는 조총(鳥銃)에 있으니, 우리 화살을 쏘는 곳에는 투구와 갑옷으로 피할 수 있지마는 조총을 쏘는 곳에는 군사와 말이 당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등패(藤牌)가 있으면 이미 몸을 가릴 수 있고 또 말도 가릴 수 있으니 등갑(藤甲)과 조총을 속히 준비해야 합니다. 신이 말한 바는 아마도 모든 신하들이 이미 말하였을 것이니 어찌 신이 누누이 진술함을 기다리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하루가 빠르면 조선이 하루에 망하는 화를 면할 것이요, 하루가 더디면 우리 영토에 하루의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간절히 바라건대 성명께서 밝으신 결단을 내리시고 해부(該部 병부)에 명령하시어 담당한 모든 신하에게 의론하게 하시고 병마(兵馬)를 재촉하여 전진하게 하면 국토에 다행이요 종묘사직에 다행이겠습니다. 직은 기인(杞人)의 걱정을 견디지 못하나 날씨와 바람은 차고 중도에서 병이 나서 빨리 달려가지 못하고, 의인(義人) 설지(薛志)를 시켜 글을 가져가서 병부에 아뢰나이다.
○ 경상도 의병장 김면이 호남 방백에게 구원을 청하는 글을 내다.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의거(義擧)는 바야흐로 일하기에 급하고,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것이니[脣亡齒寒] 한 임금의 국토에 어찌 피차를 구분하리오. 이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위태로운 자를 구하여야 할 사세를 당하여 감히 우리를 도와 달라는 소회를 진술하나이다. 그윽히 생각하건대, 군부(君父)의 병을 급히 여김은 신하로서의 지극한 정성이요 환란을 나누는 것은 이웃에 대한 도(道)의 대의입니다. 진정(秦庭)에서 통곡함은 실로 초(楚) 나라를 보존할 마음을 가진 것이며 업(鄴)의 군사가 달려가 구원함은 조(趙) 나라가 침략을 받은 화를 구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오창(敖倉)의 곡식이 아니었으면 성고(成皐)를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진양(晉陽)의 군사가 없었더라면 한단(邯鄲)이 가장 위태로웠을 것입니다. 제(齊) 나라의 곡식이 노(魯) 나라의 배고픔을 구해야 할 것이요, 절강(浙江)의 수자리[戍]를 마땅히 회(淮)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장호(張鎬)의 구원병이 만약 급히 왔더라면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어찌 수양(睢陽)을 잃었겠으며, 소하(蕭何)의 군량 공급이 넉넉하지 못하였던들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어찌 파촉(巴蜀)을 보존하였겠습니까. 나라의 사경(四境)은 사람의 한몸과 같으니 병을 치료하는 데 머리니 발이니 가릴 것이 없고, 난을 구하는 데 어찌 동쪽과 서쪽을 구별하리오. 우리 이남(二南 영남ㆍ호남)은 영(嶺) 밖의 견아(犬牙)요, 별은 화유(火維)의 분야이다. 거진(巨鎭)과 웅주(雄州)는 남방에서 병풍 울타리가 되고, 금성(金城)과 천부(天府)는 부강함이 동방에서 으뜸으로, 유아(儒雅)는 주(周) 나라의 추로(鄒魯)요 물산은 촉(蜀) 나라의 형주(荊州)ㆍ익주(益州)이니, 나라의 재정(財政)이 여기서 나오고 지리(地利)가 여기서 믿을 만한 것입니다. 불행히 본도(本道)에 개ㆍ돼지가 날뛰매, 금탕(金湯)이 험함을 잃어서 60고을 닭 울고 개 짖던 지방이 이제는 오랑캐의 싸움터가 되었다. 수백 년 길러진 생령이 모두 도륙의 칼날에 죽었습니다. 인가가 모두 불타니 오직 봄 제비가 숲 속에 둥지를 짓는 것을 보고, 황새와 조개가 오래 버티매 벌써 가을 기러기가 우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초목도 빛을 잃고 강산이 부끄럼을 띠고 있습니다. 제 나라 70성 중에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 등 쇠잔한 고을만이 남았고, 삼천 리 검각(劍閣) 가는 길에 외로운 신하 두보(杜甫)가 슬퍼하였습니다. 나라를 걱정하다 희게 센 머리칼이 1천 줄기요, 적을 토벌할 단심(丹心)은 한 말[一斗 담이 큼을 말함]입니다. 밤중에 월(越) 나라 쓸개를 맛보매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이 가슴에 버티었고, 반 년 동안 오(吳) 나라 섶에 잠자매 갑옷에 이[虱]가 생겼습니다. 오랑캐와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고 국가는 강을 건너 한구석에 있을 수 없으니, 눈물을 뿌리며 맨주먹을 떨칩니다. 처음엔 하(夏) 나라의 일려(一旅)도 없더니, 마음이 백일(白日)을 가리켜 맹세하매 거의 당 나라의 중흥(中興)을 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하늘이 우리를 돕고자 한 덕분에 인심이 아직도 나라를 생각하여 마음에 충의가 같으니,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구름처럼 달려오고 땅은 동서가 없이 먼 데 가까운 데서 모두 호응하였습니다. 군사의 기세가 점점 떨치어 적의 머리를 많이 베었으니, 어질고 성스러운 열두 임금이 깊이 만백성에게 덕을 쌓아 문명한 소중화(小中華)는 하루아침에 오랑캐가 되지 않음을 이에 알겠습니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 온전할 수 있으매 회복의 근저가 대강 성립되었습니다. 다만 한되는 것은 병화(兵火)가 휘몰아쳐서 군수가 텅 비었습니다. 천으로 만으로 쌓아둔 것이 적에게 갖다주는 물자가 되어 버렸고, 갈아두고 마련해 둔 것이 화살 잃고 화살촉 다된 한탄이 되고 말았으니, 군대는 당장의 양식이 없고 군사들은 정예로운 기계가 없습니다. 교위(校尉)가 무기(戊己)의 군대만을 거느렸으니 누가 한 나라 화살의 신(神)이라 칭하겠으며, 군사는 경계(庚癸)의 소리가 슬프니 양식의 운반을 독려하기 어렵습니다. 군비를 얻어내자니 부자에게도 이미 다 긁어냈고 쇠를 거두어들이자니 백성들에게서도 역시 모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없어 두 손 놓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러러 생각건대 영공(令公)은 회서(淮西)의 소범(小范)이요 강좌(江左)의 이오(夷吾)이니, 만 리의 장성(長城)이 되어 명망이 이미 온 나라에 증합니다. 사방에 병영(兵營)이 많으니 걱정이 어찌 한 지방에만 치우치겠습니까. 이공(二公)이 섬(陝)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한마음으로 주(周) 나라를 보좌하기는 다름이 없었습니다. 서쪽으로 회(淮)를 치고 북으로 연(燕)을 치매 성공하는 이가 있는 것이니, 현(縣)이 지경을 넘고 군(郡)이 한계를 넘었다고 간섭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물며 호남 전체가 온전히 보존된 것은 본도가 피폐한 것과는 다른데이겠습니까. 군량과 말먹이를 멀리 운반하는 수고도 없었고 병력이 거듭 피곤한 적도 없었으며, 어깨를 쉬고 편안히 잘 수 있도록 조금 편안하여졌으니 사기(士氣) 또한 배나 더할 것입니다. 원컨대 무의편(無衣篇 《시경(詩經)》의 편명으로,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로 나가자는 내용임)을 한 번 외어서 위엄 있고 강한 무용(武勇)을 부르신다면 창이(瘡痍)한 남은 군사가 온전한 군사에게 원조를 빌리고, 배고프고 목마른 피곤한 군사들이 든든한 배부름으로 찡그림을 펼 수 있을 것이니, 장차 사람마다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분발하고 군사마다 죽음을 바치는 충성을 간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적벽(赤壁)의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고 곤양(昆陽)의 무소와 코끼리가 사방으로 흩어질 것이요, 남쪽 하늘의 초(楚) 나라 기운이 깨끗이 소탕되고 북궐(北闕)의 요(堯)의 이마를 다시 보게 될 것을 나는 날로 바라오만, 누구와 더불어 이것을 준비하겠습니까. 슬픕니다! 촉으로 가는 잔도(棧道)에 구름이 아득하고 한궁(漢宮)에는 풀이 푸르며, 땅은 멀고 하늘은 넓은데 달빛은 속절없이 의주에 비치고 세월은 바뀌었는데 모구(旄丘)에 칡은 이미 변하였습니다. 부로(父老)들은 한관(漢官)의 위의(威儀)를 바라고 남녀들은 주왕(周王)의 수레바퀴를 기다리니, 신하로서 이 지경을 당하여 죽고 삶을 어이 논하겠습니까. 두견(杜鵑)을 읊으며 평강(平江)에 부쳐 있음은 진실로 부득이 함이요, 누른 감자를 던져 올출(兀朮 금 나라 대장)을 놀라게 함을 진실로 바랍니다. 제갈(諸葛)이 몸 바침을 함께 본받고, 숙(叔)ㆍ백(伯)이 귀먹은 듯함과 같게 하지 마시오.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당 나라 종묘에 공경히 뵈었으니 이성(李晟)의 충성이 볼 만하였고, 신정(新亭)에 모여서 초수(楚囚)처럼 함께 슬퍼하니 진(晉) 나라 신하들이 한구석에 편안히 살아 있었음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2일. 전라 좌우 의병장이 무주(茂朱)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남원에 와서 진을 치다. 최(崔)는 객사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임(任)은 광한루(廣寒樓)에 머물렀다. 이유의(李由義)를 경상 좌수사로 삼다. 이보다 먼저 유의가 천병계원사(天兵繼援使)로 서울에 달려가 직산(稷山)에 이르렀는데, 죽산(竹山)에서 군사가 패하고 남양(南陽)에 옮겨 주둔하여 그대로 강화를 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명령을 받고 그 군사를 광주 판관(光州判官) 등에게 맡겨서 강화로 들여보내고, 자신은 단기(單騎)로 도로 호남으로 내려와서 이어 영남으로 향하다.
○ 임금의 급함에 달려오지 않고 용인(龍仁)에서 패군하여 퇴각한 죄를 논하여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광(李洸)을 잡아가다. 이때에 이광이 순천에 있었는데 도사가 서해로부터 본도에 이르러 추적하여 체포하고 가면서 남원을 지나다. 도사가 광한루에 이르렀는데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자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서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천 리 행조(行朝)에서 명령을 받고 남쪽으로 왔으니 남방 의사(義士)들이 적을 토벌하는 일을 들은 대로 곧 보고하는 것이 나의 뜻이요, 하물며 나는 임금의 계신 데서 왔으니 남도 사람들이 앞다투어 임금의 안부를 물을 것인데 어찌하여 거절하고 들이지 않는가.” 하니, 임계영(任啓英)이 곧 객사의 서헌으로 가서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들어가 도사를 만나고 이야기하고서 물러가다. 이튿날에 도사가 북쪽으로 돌아가다.
○ 전라 감사 권율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달려가는데 각 고을 수령과 승장(僧將)ㆍ처영(處英) 등이 따르다.
○ 순천의 무사(武士) 강희열(姜希說)이 군사 2백여 명을 모아서 비(飛) 자로 군표(軍票)를 삼아 거느리고 남원으로 와서 적이 있는 처소로 향하다. 처음에 희열이 고경명(高敬命)을 따라 군사를 일으켰다가 금산(錦山)의 패전에 분하여 울면서 고향에 돌아와서 전일에 모집한 사람들을 소집하여 단결시켜 군대를 만들었는데 최경회의 의병이 뒤이어 일어나면서 합세하자고 불렀으나 응하지 않더니 이때에 이르러 양식과 기계를 준비하여 싸움터로 달려가다.
24일. 부산에 유둔(留屯)하던 적 등원랑(藤元郞)ㆍ평조신(平調信) 등이 동래ㆍ김해의 왜적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아울러 전진하여 한 무리는 노현(露峴)으로부터 한 무리는 웅천(熊川)으로부터 안민현(安民峴)을 넘어서 창원(昌原)에 범하였는데, 병사 유숭인(柳崇仁)이 관군과 의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우니 불리하였다. 이때에 우도 몇 고을의 군사가 노현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이 불의에 달려들어 함부로 죽여 남음이 없었다. 이튿날에 숭인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또 싸워서 크게 패하다. 적 80여 명이 바로 창원에 들어가서 읍내를 분탕질하고 물러나 사화촌(沙火村)에 둔치다. 숭인이 모든 장사(將士)와 더불어 마산포(馬山浦)에 진을 치니 이튿날에 적병이 합세하여 나아가 함안(咸安)에 둔치다.원랑과 조신 이것들은 작은 적장이니, 이번에 온 대장 중에는 또 다른 장수가 있었을 것이나 미처 전해 듣지 못하였으므로 이와 같다.《경상순영록》에서 나왔다.
○ 경상도 함창(咸昌)ㆍ당교(唐橋)의 적이 모여서 큰 진이 되어 용궁(龍宮) 등지에 횡행하면서 장차 다시 내지(內地)로 범하려 하는데, 좌감사 한효순이 안동에 있으면서 장기 현감(長鬐縣監) 이수일(李守一)로 대장을 삼아서 만호 민정홍(閔廷鴻) 등과 각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을 지키게 하고 또 안동 부사 우복룡(禹伏龍)으로 도지휘대장(都指揮大將)을 삼아서 예천 땅에 진을 치게 하며, 영천(榮川)의 향병과 춘양(春陽)의 의병들이 합세하여 나아가 치다가 크게 무너져 돌아오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 우감사 김성일이 왜적이 다시 내지에 뚫고 들어올 걱정으로 전라 감사 및 좌우 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다.
28일. 수병(水兵) 여러 장수들이 웅천 바다를 수색하여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돌아오다.
○ 전라 좌도 의병대장이 본도 병영 우후에게 전령하니, 다음과 같다.
당일에 도부(到付)한 경상 우도순찰사 관문(關文) 내에,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몰아오매 여러 장수가 붕괴되어 흩어지고 병사(兵使)는 퇴각하였다. 25일에 적이 이미 창원의 병영 등지에 침입하였으니 내지에 뚫고 들어올 걱정이 조석간에 급박하였는데, 적의 세력은 치성하고 우리 군사는 적어서 당적할 수 없다. 성주(星州)에 유둔한 적이 방금 거창의 길을 엿보아 동쪽으로 충돌하고 서쪽으로 공격하는 변이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있을 것이다. 적이 바야흐로 진주(晉州)ㆍ의령(宜寧)ㆍ산음(山陰) 등지를 도모하는데 만약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적이 반드시 바로 귀경(貴境 전라도)을 범할 것이다. 사세가 위급하고 절박하니 남원 근처의 군병은 산음 등지로 순천 등지의 관군은 진주로 장수를 정하여 거느려 보내며, 귀도(貴道 전라도)의 두 의병대장이 지금 남원에 유둔하고 있다 하기에 달려와 구원할 일로 공문을 보내는 것이니 두 대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음ㆍ의령의 길에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와 싸움을 도와줄 것으로 관문하였다. 적의 세력이 치성하여 마구 몰아 북으로 범할 걱정이 조석간에 박두하였으니 각 관군은 급히 출동하여 의병과 일시에 합세하여 달려가 구원할 것이다.
○ 전 남원 참봉 변사정(邊士貞)이 본부의 부로 박계성(朴繼成)과 흩어진 군사를 모았는데, 가까운 고을의 관군이 와서 붙는 자가 매우 많아서 수십 일 안에 2천여 명을 얻고 적개(敵愾)라는 두 글자로 군표를 하다.
○ 왕명으로 전하기를, “수령과 변방 장수 중에 싸우다 죽었거나 도망한 곳에는 각도의 감사가 현재 있는 사람 중에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택하고 결원된 곳에 임시로 임명하여 일을 보도록 한 뒤에 아뢰라.” 하다.
10월 1일. 적이 함안군(咸安郡)의 동남쪽 경계를 분탕질하고 곧 부다현(富多峴)을 넘다. 부다현은 함안ㆍ진주(晉州)의 경계로 진주ㆍ사천(泗川)ㆍ곤양(昆陽)ㆍ하동(河東)ㆍ단성(丹城)ㆍ산음(山陰)의 군사들이 여기에 매복하였더니, 적이 불의에 달려들어서 죽은 자가 심히 많고 남은 군사는 무너져 달아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2일. 적병이 소촌(召村 진주에 있는 역 이름)에 옮겨 둔치다. 본도 우감사 김성일(金誠一)이 첨정(僉正) 조종도(趙宗道)를 보내어 전라 좌우 의병 및 여러 장수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가 남원(南原)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운봉(雲峯)ㆍ함양(咸陽)으로 향하고 인하여 산음ㆍ단성으로 향하다.
3일. 적병이 길을 나누어 진주로 향하는데 한 무리는 마현(馬峴)을 넘고
한 무리는 불천(佛遷)을 넘어서 바로 진양(晉陽)을 공격하다. 이튿날에 선봉 천여 기(騎)가 진주 동봉(東峯) 위에 달려왔다가 돌아가다.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이 싸움에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려와서, 성에 들어가 함께 지키기를 원하니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는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통솔하는 방법이 어긋나서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며, “적병이 이미 어울렸으므로 성문을 엄하게 경계하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열고 닫으면 갑자기 침입할 염려가 있으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을 함이 옳습니다.” 하다. 숭인이 들어가지 못하고 도로 나오다가 성 밖에서 적을 만났는데 사천 현감 정득열(鄭得說),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 등과 함께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곽재우(郭再禑)가 시민이 숭인을 들이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이 계책이 족히 진주성을 완전히 보존하였으니 진주 사람의 복이로다.” 하다.
6일. 적병이 나아가 진주를 포위하다. 이때에 목사의 군사 3천 7백여 명과 곤양 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백여 명이 성중에 있어 부대를 나누어 지키다.
○ 해남 가장(海南假將)이란 전 판관 성천지(成天祗)가 본현에서 군사를 모아서 뇌진군(雷震軍)이란 석 자로 군표(軍標)를 삼고, 양식과 기계를 마련하여 근왕(勤王)하려고 북쪽으로 향하여 흥양(興陽)ㆍ낙안(樂安)ㆍ순천(順天)ㆍ구례(求禮)를 거쳐 남원을 지나가다. 이때에 관군과 의병이 동쪽으로 달리기도 하고 서쪽으로 향하기도 하면서 혹은 근왕(勤王)하겠다 칭하고, 혹은 적을 치러 가겠다 하여 칼과 창이 서로 부딪쳐 각 고을의 군사와 말이 제때에 일제히 출발하지 못하였다. 이것 때문에 천지가 남원 부사 윤안성(尹安性)을 크게 힐난하다.
○ 진주를 포위한 적이 군사를 갈라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을 하다.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가 단성(丹城)에 군사를 주둔하였더니, 적병이 갑자기 들이닥쳐 장수와 군사가 놀라 무너지다. 적이 단성을 불태웠는데, 협천 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이 쳐서 쫓다. 아래 장계의 끝에 있다.
○ 경상 우순찰사 김성일이 또 정랑(正郞) 박성(朴惺)을 보내어 좌의병에게 응원을 청하니, 임계영(任啓英)이 남원으로부터 함양으로 향하다.
○ 진양이 포위를 당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구원병은 이르지 않고 적은 날로 치성하다. 목사 김시민이 온갖 방법으로 계책을 내어 밤낮으로 방어하면서 항상 일심으로 죽음을 같이할 것으로써 모든 군사에게 권면하고, 몸소 밥과 장(漿)을 가지고 분주히 다니면서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을 구하며 탄환이 비처럼 쏟아져도 서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때때로 눈물 흘리며 타이르기를, “온 나라가 함몰되고 남은 데가 적어서 다만 이 한 성이 나라의 명맥에 관계되는데 지금 또 불리하다면 우리 국가는 그만이다. 하물며 한 번 패하면 성중에 있는 천백의 인명이 모두 칼끝의 원귀가 될 것이니, 아! 너희 장사(將士)들은 힘을 다하여 용감하게 싸워서 죽을 각오를 하여야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는 이가 없다. 싸움이 오래되어 화살이 다되매 성중이 위태롭게 여겨 두려워하다. 시민이 밤에 사람을 시켜 성을 넘어 나가 달려가서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가 군기(軍器)를 보내려 하나 보낼 만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다. 이에 중한 상(賞)을 걸고 영리(營吏) 하경해(河景海)를 얻어서 부탁하여, 경해가 밤을 타서 가만히 가서 성 밑에 도달하자, 문을 열고 들여서 장전(長箭) 백여 부(部)를 얻어서 뒤이어 쓰게 되니 군사들이 기운이 배나 나다.
○ 고성(固城) 의병장 최강(崔堈)ㆍ이달(李達) 등이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진주를 응원하다. 최강이 밤에 망진산(網陣山)에 올라서 군사들로 하여금 각기 4, 5개의 횃불을 들고 혹 나갔다 물러갔다 하며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치매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니 적병이 놀라다. 성중의 군사들이 듣고는 기뻐 날뛰며, “이는 반드시 고성 의병장 최강ㆍ이달이 와서 응원하는 것이다.” 하다. 이달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두골평(頭骨坪)에 진을 치고 마구 공격하여 베어 죽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응원하다. 아래 장계에 나왔다.
○ 강원도 도순찰사의 종사관 겸 소모대장(召募大將) 홍인상(洪麟祥)인데, 뒤에 이름을 이상(履祥)으로 고쳤다. 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이 가득 찼는데 백성들이 전쟁을 몰랐다가 소문만 듣고 흩어졌으며, 마침내 거가(車駕)가 파천하고 종묘는 폐허가 되었으며, 옛 도읍의 산천이 달라졌고 백 년의 문물이 모두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원통함이 뼈에 사무치도다. 다행히 하늘의 뜻이 난리를 싫어하고 인심이 한(漢)을 생각하여 창의(倡義)하는 무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회복의 시기를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임금 없고 부모 없다던 중들도 오히려 의기를 분발하여 무리를 모아 몽둥이로 적을 치거늘 하물며 도포 입은 우리 선비들은 국가 교육의 은택에 오래 젖어서 임금을 섬기는 대의를 아는 자들임이랴. 서쪽 국경은 일찍 추워져 전하께서 반드시 고생스러우실 것이며, 능(陵)에는 풀이 우거져 제사가 오랫동안 끊어졌으니 이것은 신자(臣子)로서 눈물을 뿌리며 팔을 걷고서 창을 베개 삼아 적을 쳐야 할 때이다. 대저 추운 겨울을 겪어야 소나무ㆍ잣나무가 늦도록 푸르름을 알 수 있고, 결이 좋지 않은 재목을 만나야 연장이 잘 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우리 충의의 선비가 어찌 힘쓰지 아니하랴. 당직(當職)은 일찍이 제독(提督 지방의 학관(學官))의 직에 있어 외람되게 스승의 자리에 앉았으나 평시에 강론(講論)할 때 대의(大義)로써 가르치지 못하고서, 이제 난리의 때를 당하여서야 무리를 불러 모으고자 의병의 선창이 되어 강토에 요망한 기운을 맑히기를 맹세하고 회복의 큰일을 성취하려고 생각하니, 이것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아! 한강 남쪽 새재[鳥嶺] 북쪽에 왜놈의 진(陣)이 바둑판처럼 벌여 있어 민생이 어육이 되니 분탕한 즈음에 불러 모으기 실로 어려우나, 여주(驪州) 한 고을은 적의 속에 끼어 있어 동쪽으로 원주, 서쪽으로 죽산(竹山), 남쪽으로 충주(忠州), 북쪽으로 광주(廣州) 사면으로 적이 충만하여 한 지경이 쓸어 없어졌으니, 여주가 보존되지 못하면 죽산의 적을 도모할 수 없고 죽산의 적을 도모하지 못하면 경성을 수복할 수 없게 되므로, 여주 한 고을의 성패는 실로 국가 흥망이 관계된 바이다. 이것은 마땅히 밤낮으로 속을 태우고 뒤에 통곡할 바이다. 충청ㆍ전라 두 도는 겨우 완전하고 선비들이 많아 평소 부고(府庫)라고 칭하여졌으니 무릇 우리 충의의 선비들은 반드시 우리보다 먼저 의병의 깃발을 들었을 것이나 각 고을에 흩어져 있어 통일된 데가 없으니, 원컨대 통문을 돌려 모여서 날짜를 약속하고 의병을 일으켜서 중국의 군사와 호응하여 의각(犄角)의 형세를 이루어 흉한 무리를 섬멸하고 경성을 수복한다면 어찌 조정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길 뿐이랴. 그대들 조상의 혼령이 또한 모두, “내가 후손이 있구나.” 할 것이다. 당직은 지금 강원 도순찰사의 명령이다 을 받들어 이 소모 대장의 임무를 맡아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각 고을에 군사를 모집하고 각 관에서 군량을 판출(辦出)하노니, 무릇 각 고을의 생원ㆍ진사ㆍ교생(校生)들은 맨 먼저 대의를 내세우고 모든 선비들도 또한 용략(勇略)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한 달씩 분번(分番)하여 안성에 방어진을 치고, 유사(有司)를 많이 정하여 양식과 기계를 판출하여 배에 실어 충청도 평택현(平澤縣)으로 운반하기에 마음을 다하여 각기 함께 일어나 한가지로 원수를 갚을 일이다. 이상을 충청ㆍ전라에 통문하노라.
이상(履祥)이 두 도에 돌아다니며 모집하나 두 도의 사람들이 각기 의병을 일으키므로 응하는 자가 적다.
10일. 진주 목사 김시민이 적병을 성 밑에서 크게 부수니 남은 적이 도망하여 본진으로 돌아가므로 추격하여 소촌역(召村驛)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오다. 본도 우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 있다가 승전의 보고가 이르매 본주로 달려와서, 적의 송장이 서로 베개 삼아 깔렸고 피비린내가 땅에 가득한 것을 보고 탄복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이어 성에 들어가 목사가 누워 있는 방 안 탄환에 맞아 안에 누워 있었다. 으로 들어가 위로하고 감탄하기를 한참이나 하였으며,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으로 가목사(假牧使)를 삼아서 그 군사를 대신 거느리게 하고 즉일로 장계를 올리니, 다음과 같다.
김해ㆍ부산(釜山)에 유둔하던 적이 3만여 명을 모아 합쳐서 마구 몰아 함께 전진하여 9월 24일에 세 패로 나누어 노현(露峴)의 군사를 습격해 부수고, 27일에 또 창원부를 범하매 병사(兵使)가 다시 패하여 전후에 죽은 자가 1천 5백여 명이나 되니, 군사의 마음이 저상되고 백성들은 무너져 흩어졌으며, 적병은 승세를 타서 마치 회오리바람과 같았습니다. 본원 2일에는 나아가 함안을 함락시키고 5일에 선봉으로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의 북봉(北峯)에 바로 이르러 형세를 두루 보고 가로질러 달리면서 뽐내었으나, 목사는 성중에 전령하여 못 본 척하고 화살 한 개 총알 한 개를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하고, 다만 성내에 잘 바라보이는 곳에 용대기(龍大旗)를 세우고 장막들을 많이 치고 성중의 노약자와 남녀를 다 모아서 모두 남자 옷을 입혀서 군세(軍勢)를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날 신시에 적들이 온 길로 도로 향하자 목사가 곧 날래고 건장한 사람을 시켜서 산에 올라 바라보았는데, 적병 수만 명이 진주 동쪽 10리 되는 임연대(臨淵臺) 등지에 진을 쳤습니다. 6일 이른 아침에 적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일시에 마구 몰아 말을 타고 가로 달리는 놈들이, 혹은 자루가 긴 둥근 금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흰 바탕 누른 무늬의 금 삽선[翣翁]을 짊어졌는데 온갖 채색으로 그려서 바람을 따라 펄럭이매 광채가 번쩍거리며, 혹은 닭털로 만든 관을 쓰고, 혹은 머리를 풀어 헤친 가면을 썼으며, 혹은 뿔이 있는 금색 가면을 쓰고 각기 잡색 기(旗)를 짊어졌는데 길거나 넓은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었고, 혹은 푸른 일산을 받쳤거나 붉은 일산을 들고 흰 칼날이 햇빛에 번쩍거리매 살기가 하늘에 뻗치니, 무릇 기괴한 형상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세 패로 갈라 산을 덮어 내려 와서 한 패는 동문 밖 순천당산(順川堂山)에 진을 치고서 성중을 내려다보고, 또 한 패는 개경원(開慶院)으로부터 바로 동문을 지나서 봉명루(鳳鳴樓) 앞에 벌여 섰으며, 또 한 패는 향교 뒷산으로부터 바로 순천당산을 넘어서 봉명루의 왜놈들과 합하여 한 진이 되고, 기타 각 봉우리에 둘러선 왜놈은 벌처럼 개미처럼 둔취하였습니다. 왜놈 장수 6명은 모두 검정 단의(單衣)를 입고 쌍견마(雙牽馬)를 타고 창과 칼을 가진 자가 앞뒤에 끼고 섰으며, 희거나 검은 옷을 입은 여자들 역시 쌍견마를 타고서 시종하는 왜놈을 많이 거느리고 장수 왜놈의 앞에 섰으며, 걸어서 따르는 여자들 또한 그 수가 많았습니다. 순천당산에 진을 친 왜놈은 총수(銃手)가 1천여 명쯤 되는데 성중을 향하여 총알을 일제히 쏘니 뇌성이 진동하고 우박이 날리는 것 같으며, 3만여 왜놈이 일시에 크게 소리치니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중에서는 전연 동요하지 않고 고요하기가 사람이 없는 것 같다가 그놈들의 기운이 쇠하기를 기다려서 또한 소리 지르고 북을 두드리고 포를 쏘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적들이 흩어져 민가로 들어가서 문판(門板)이나 관판(棺板)을 혹은 마루판을 가져와서 성밖 백 보 밖에 벌여 세워 놓고 판목(板木) 안에 가만히 엎드려 총 쏘기를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편의 민가에 분탕질하고 또 동편의 초가지붕을 걷으며, 혹은 촌락의 대[竹]를 베고 혹은 짚을 실어 와서 일시에 만들어 6, 7리에 뻗쳤는데 모두 푸른 장막으로 둘렀습니다. 장수 왜놈은 혹은 향교 안에 들어가고 혹은 민간의 큰 집에 거처하였습니다. 이날 소와 말에 짐을 싣고 점심부터 저물녘까지 연락을 끊이지 않고 동쪽으로부터 들어오더니, 초경(初更)에 적이 한 곳에서 호각을 불자 곳곳에서 서로 응하고 뭇 왜놈들이 소리를 높이다가 식경(食頃)에 그치고, 총 쏘는 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지 않고 막사를 지은 곳곳에 밤새도록 불을 피웠습니다. 이날 밤에 곽재우가 심대승(沈大承)을 보내 군사 2백여 명을 거느리고 향교 뒷산에 올라서 호각을 불고 횃불을 들자 성중 사람들이 또한 호각을 불어 서로 응하니, 적들이 크게 놀라 소란하여 횃불을 들고 산에 올라 밤새도록 자지 못하였습니다. 7일에 적들이 아침부터 저물 때까지 총을 쏘아 그치지 않고 또 장편전(長片箭)으로 어지럽게 성중에 쏘고 군사를 나누어 사방으로 적들이 흩어져 불태우고 약탈하니 수십 리 안에 민가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먼 곳 가까운 곳의 긴 대를 죄다 꺾어서 묶거나 엮고 솔가지를 많이 모아서 진 밖에 높이 쌓았으며 큰 나무를 베어다가 끊이지 않고 실어 들이는데 어디 쓸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목사는 군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힘써서 밤이면 악공을 시켜 문루 위에서 피리를 불어 한가로움을 보였습니다. 적진 가운데 조선 아이들이 많은데 혹은 서울말을 하고 혹은 시골말을 하면서 매양 성에 돌아다니며 크게 외치기를, “경성이 이미 함락되었고 8도가 붕괴되었는데 새장 같은 진주성을 네가 어찌 지키랴. 속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오늘 저녁에 개산 아빠[介山父]가 오면 너희 장수의 세 머리를 마땅히 깃대 위에 달 것이다.” 하니, 성중 사람들이 분노하여 소리를 높여 꾸짖고자 하나 목사가 금지하여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진 뒤에 적이 대 엮은 것[竹編]을 가만히 동문 밖에 세웠는데 수 백보에 뻗쳤으며 그 안에 판자를 벌여 세우고 빈 섬[石]에다 흙을 담아 포개어 언덕을 만들어서 성을 내려다보아 총을 쏘고 화살을 피할 처소를 만들었는데, 대 엮은 것이 앞을 가렸으므로 우리 군사가 처음에는 몰랐다가 아침에 보니 이미 토성(土城)이 되었습니다. 8일에 적이 대나무 사닥다리[竹梯]를 많이 만들었는데 수천 개나 되었으며 또 넓은 사닥다리를 만들어 대를 심히 빽빽하게 엮었는데 넓이가 한 칸쯤이나 되었으며, 멍석을 덮어서 비늘처럼 연달아 배열하여 여러 군사가 바로 올라올 길을 만들고, 또 3층의 산대(山臺)를 만들어 윤전(輪轉)하여 성을 누를 계책을 하였습니다. 목사가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세 번 쏘아서 산대 만드는 왜놈을 관통하니, 놀라고 두려워하여 물러갔습니다. 목사는 적이 솔가지를 많이 쌓은 것이 성을 넘으려 함이며 대나무 엮은 것으로 앞을 막은 것은 성에 맞닿으려 함인 줄을 추측해 알고 불 지를 도구를 미리 준비하되, 생나무가 젖어서 태우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종이에다 화약을 싸서 묶은 마른 섶 속에 넣어서 성밖으로 던져 솔가지를 태울 준비를 하였습니다. 성 위에는 진천뢰(震天雷)ㆍ질려포(蒺藜砲)ㆍ큰 돌덩이를 설치하여 성에 붙는 적을 치려 하고 또 자루가 긴 도끼와 낫 등 물건을 준비함은 윤전산대(輪轉山臺)를 부수기 위함이요, 여장(女墻) 안에는 또 가마솥을 많이 설비하여 물을 끓여서 적에 끼얹으려 하였습니다. 낮에는 여장 안에 군사를 매복시켜 서서 내다보지 못하게 하고 풀 인형을 많이 만들어서 활에다 화살을 메기고 성 위에 나왔다 숨었다 하게 하였으며, 군사에게 엄하게 단속하여 헛되게 화살을 쏘지 말게 하고 상시에 돌을 던져 적으로 하여금 성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적이 대 엮은 것을 많이 만들어 점차로 성에 가까이 오고 흙을 쌓기를 점점 높이 하였으며, 두 곳의 산대는 4층을 만들고 앞에는 목판을 달아 화살과 돌을 가리면서 총 쏘는 처소를 만들었습니다. 밤 2경에 고성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와 본주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이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각기 십자횃불을 가지고 남강(南江) 밖 진현(晉峴) 위에 벌여 서서 호각을 불자 성중 사람들이 구원병이 이른 것을 바라보고 곧 큰 쇠북을 울리며 호각을 불어 호응하니, 적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떠들면서 곧 각 막사에다 불을 피우고 각기 복병을 보내어 강변에 가로막고 벌여 서서 구원병을 막았습니다. 9일 새벽에 적 2천여 명이 단성으로 향하는 길에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고 한 떼는 단계현(丹溪縣)으로 향하다가 합천 가장 김준민에게 쫓기고, 한 떼는 단성 읍내를 분탕질하다가 역시 김준민에게 쫓겼으며, 한 떼는 살천(薩川)으로 향하다가 정기룡(鄭起龍)ㆍ조경형(曺敬亨)에게 쫓겨서 해가 저물자 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대로 남아 있던 왜놈들은 총을 쏘고 화살을 발사하여 종일토록 그치지 아니하고 흙을 지고 나르는 역사를 전일에 비하여 더욱 급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산대에 올라 무수히 총을 쏘자, 성중에서는 현자총통을 세 번 쏘아 대 엮은 것을 뚫고 또 큰 목판을 뚫었으며 한 화살은 적의 가슴을 뚫어 즉사하니 그 뒤에는 적이 감히 다시 산대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복병장 정유경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진현으로부터 사천(沙遷)에 이르러 벌여 서서 열병(閱兵)하고, 또 용사 20여 명을 뽑아서 남강 밖에서 분탕질하는 적과 대[竹] 베는 놈들을 무찔렀습니다. 본진에 남아 있던 왜놈 2백여 명이 강을 건너 추격하자, 정유경이 퇴각하였습니다. 이날 저녁 때에 적이 횃불을 들고 열을 지어 왕래하면서 서로 약속하는 형상을 하였습니다. 한 아이가 달아나 신북문(新北門)에 이르니 바로 본주에서 포로가 되었던 자였습니다. 불러들여 적의 실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일 새벽에 적이 힘을 합하여 성을 공격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10일 4경 초에 각 막사에 불을 밝히고 짐을 싣고 나가 거짓으로 퇴각하는 형상을 보여 우리 군사를 태만하게 하고 그런 뒤에 불을 끄고 가만히 돌아왔습니다. 4경 중에 두 떼로 갈라서, 한 떼는 1만여 명이 동문 새 성에 육박하여 각기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혹은 방패를 지고 혹은 향교에 제사지내는 대그릇을 쓰며 혹은 멍석을 베어 머리를 싸고 혹은 쑥대나 엮은 풀로 관을 만들어 써서 화살과 돌을 피하고, 3층의 가면을 쓴 풀 인형을 만들어서 차례로 사닥다리에 올라 우리 군사를 속였습니다. 그런 뒤에 적이 성에 기어오르고 말 탄 왜놈 1천여 명이 뒤를 따라 돌진하면서 비 오듯이 탄환을 쏘아대고 뇌성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장수 왜놈은 말을 달려 횡행하면서 칼을 휘둘러 독전(督戰)하였습니다. 목사는 동문 북격대(北隔臺)에 있고 판관은 동문 옹성(擁城)에 있어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혹은 진천뢰와 질려포를 쏘고 혹은 큰 돌을 던지며, 혹은 불에 달군 쇠[火鐵]를 던지고 혹은 짚을 태워 어지럽게 던지며 끓는 물로 적에게 끼얹으니, 적이 물밤쇠[菱鐵]을 밟거나 활에 맞고, 돌과 화살에 맞아 죽거나 머리와 얼굴이 불에 탄 자가 수없이 많았으며, 또 진천뢰에 부딪쳐 엎어져 죽은 것이 삼[麻]처럼 쌓였습니다. 성 동쪽에서 한창 싸울 때에 또 한 떼 1만여 명이 어둠을 타고 가만히 와서 돌연히 구 북문(舊北門) 밖에 이르러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방패를 짊어지고 형세가 장차 뛰어들 듯하였는데, 성가퀴를 지키는 군사들이 모두 놀라 무너졌다가 전 만호 최덕량(崔德良), 목사의 군관(軍官)인 이납(李納)ㆍ윤사복(尹思復)이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싸웠습니다. 무너졌던 군사가 다시 모여 방법대로 적을 방어하기를 동문과 한결같이 하여 노약과 남녀까지도 돌을 던지고 불을 던져 성중에 기왓장 돌과 초가지붕이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한참 만에 동방이 밝으려 하자 적세가 조금 누그러지는데 목사가 왼편 이마에 탄환을 맞아 정신을 잃었습니다.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이 북격대를 대신 지키며 활 쏘는 군사를 거느리고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쌍견마를 탄 왜장을 죽였고, 4경부터 교전하여 진사시(辰巳時)나 되자 적이 비로소 퇴군하였습니다. 두 곳 싸움터에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적들이 곧 송장을 끌고 가서 촌락에서 불 속에 태웠으므로 머리를 벤 것은 겨우 30여 개에 불과하였습니다. 적이 물러간 후에 촌락에 불태운 뼈가 곳곳에 쌓여 있고 장수 왜놈의 송장은 농에 넣어 가지고 메고 갔으며 포로가 되었던 사람과 우마를 버리고 창황히 도망해 가는 데도, 목사가 총알에 맞고 장수와 군사가 힘이 다되었으며 또 계속 응원하는 군사가 없어서 추격해 다 죽이지를 못하였으니 지극히 통분합니다. 목사는 난이 난 후에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염초(焰硝) 5백 10여 근을 미리 제조하여 두고 왜놈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총통 70여 자루를 새로 제조하여 경내(境內)에 재간 있는 사람들을 따로 뽑아서 상시로 총 쏘기를 익혔습니다. 그 때문에 싸움에 임하여 화약을 물 쓰듯 하고 섶 속에 화약을 싸서 성 밖에 던지며 연달아 총을 쏘아 큰 적을 꺾었습니다. 대개 온 나라가 붕괴된 나머지에 한 사람도 감히 성을 지킬 계책을 못하는데, 목사만은 능히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서 바깥 응원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능히 큰 적을 물리쳐서 한 도를 보전할 뿐만이 아니라 또 호남을 보호하여 적으로 하여금 내지에 달려들지 못하게 하였으니, 목사의 공은 이것이 큽니다.
○ 처음에 진주가 여러 진(陣)에 급함을 고하였더니 정인홍(鄭仁弘)이 가장 김준민과 중위장(中衛將) 정방준(鄭邦俊) 등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예한 사수(射手) 5백여 명을 선택하게 하여 달려 보내어 구원하다. 본월 9일에 단계에 이르니 해가 이미 뜨다. 큰 마을 하나가 시내의 동편에 있는데 앞에 대숲이 있다. 사람도 피곤하고 말도 피곤하므로 머물러 밥을 짓다. 전라 우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바야흐로 단성에 머물러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로 전진하려 하다. 단성의 피란하는 남녀들이 산에 올라서 바라보고는, “절라도 대군이 본현에 머물러 있고 또 합천 군사가 잇달아 올 것이니 다행히 잠깐이나마 죽음을 면하겠구나.” 하다. 밥 먹은 뒤에 장수와 군사들이 출발하니 짐수레가 앞에 섰다. 몇 리쯤 가자 앞서 가던 자가 뛰어와 외치기를, “많은 적이 여기 이르렀다.” 하였다. 준민이 놀라 일어나 보니 단성 청고개(靑古介)로부터 단계에 이르기 까지 산과 들의 촌락을 일시에 분탕질하여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자욱하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다. 준민 등이 불의에 이것을 당하자 사세가 심히 창황하여 몸을 날려 말에 뛰어올라 대숲 밖에 나가서 아래위로 달리며 충돌하는 즈음에 군관 윤경남(尹慶南) 등이 또한 달려와서 크게 외치기를, “두 장수가 이미 포위 속에 들었는데 너희들은 와서 구하지 않느냐.” 하다. 이에 5백여 명이 고함을 치며 함께 나가니 적이 우리 군사를 바라보고는 대숲 속으로부터 차차로 나왔는데 큰 군사의 매복이 있을까 겁내어 접전한지 얼마 안 되어 퇴각하여 시냇물을 건너다. 두 진이 상대하고 있는 곳에 화살은 비 오듯 하고 총소리는 뇌성과 같다. 적이 아직도 용감히 싸우고 퇴각하지 않다가 마침 승의장(僧義將) 신열(信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잇달아 이르매 세력이 더욱 장하여 사기(士氣)가 절로 배나 되어 일시에 어울려 공격하니 적이 드디어 퇴각하여 달아나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청고개에 이르니 적이 기를 버리고 산으로 달아나다. 또 서쪽으로 읍내를 바라보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가리고 총소리는 폭죽과 같다. 정방준이 준민을 불러 말하기를, “저것은 반드시 전라도 군사가 적과 싸우는 것이니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곧 단성으로 달려가니 엎어진 송장이 길에 서로 잇달았다. 전라 의병장은 이미 붕괴되어 물러가고 남은 적이 뒤에 떨어져서 분탕질을 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돌진하는 것을 보고 관망하며 물러가다. 군사들이 물을 길어 창고의 불을 끄고 불에 타다 남은 쌀 6백여 석을 수합하여 관인(官人)을 불러 지키게 하고 이튿날 진양(晉陽)으로 진군하니, 성은 이미 포위가 풀려 있다. 성중 사람들이 모두 합천 군사에게 말하기를, “어제 적이 갑옷을 버리고 칼을 끌고 달아나는 자가 많더니 이제 곧 퇴각해 도망하기에 우리들 생각에, ‘아마도 모처(某處)에서 접전하는 이들이 그놈들의 예기(銳氣)를 꺾어서 그런 것이리라.’ 하였더니, 반드시 그대들이었구나.” 하다. 준민 등이 추격하여 함안까지 이르렀다가 미치지 못하고 돌아오다. 최강(崔崗)ㆍ이달(李達)이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반성(班城)에 이르러 머리 20여 개를 베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왜적이 당초에 국경에 침범할 때에 크게 성세를 떠벌리고 척후병을 곳곳에 나누어 보내 우리 군사로 하여금 서로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깊은 산골까지 수색한 연후에 각처의 작은 진을 철수하고 부산(釜山)으로부터 경성에 이르기까지 다만 일로(一路)에 거진(巨鎭)을 벌여 놓다. 사방으로 흩어져 죽이고 약탈하는 데 군사가 부족하므로, 경상도에서 점거한 것이 좌도에는 오직 부산ㆍ동래(東萊)ㆍ경주(慶州)ㆍ밀양(密陽)ㆍ청도(淸道)ㆍ대구(大丘)ㆍ영천(永川)ㆍ영산(靈山)ㆍ창녕(昌寧)ㆍ현풍(玄風) 등 열 고을이요, 우도에는 오직 웅천(熊川)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ㆍ진해(鎭海)ㆍ고성(固城)ㆍ성주(星州)ㆍ금산(金山)ㆍ개령(開寧)ㆍ선산(善山)ㆍ상주(尙州)ㆍ함창(咸昌)ㆍ문경(聞慶) 등 열두 고을인데, 한 곳에 유둔한 왜놈은 적으면 수백 명을 밑돌지 아니하고 많아도 1천 명을 넘지 않거늘 오직 고성 근처에 모여 유둔한 적이 거의 수천에 가깝다. 이것으로 헤아리건대 영남의 적은 반드시 5만 명에 불과할 것이요, 그 장기(長技)는 조총ㆍ단총에 불과하여 엄습하는 외에는 다시 다른 재주가 없다. 밤이면 갔던 놈들이 도로 와 길을 점차 가득 채워서 수효가 많다는 것을 보이는데, 우리 군사는 왜적 열 놈만 보면 으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하여 적을 토벌할 뜻이 없고 나머지 6도도 그렇지 않은 데가 없거늘, 하물며 평안ㆍ경기ㆍ함경 3도의 왜놈 수효가 이 도보다 두서너 배가 되는데 우리 군사의 힘은 이 도보다 약하여 소문만 듣고는 먼저 무너져서 방어할 뜻이 없으니 온 나라가 함몰됨이 괴이할 것도 없다. 아! 통분하도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각 진에 복수하기를 타이르는 교서를 내리니, 다음과 같다.
왕세자는 이렇게 말하노라. 이 왜적과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 수 없고, 만세에 잊을 수 없다. 우리 종묘사직을 폐허로 만들고 우리 승여(乘輿 임금의 행차)를 거리로 파천하게 하였으며, 우리 능을 범하고 우리 도시와 촌락을 잿더미로 만들어서, 우리 조종께서 수백 년 길러 놓은 백성을 도륙하고 닭 울고 개 짖으며,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던 강토 천 리를 하루아침에 갈대와 띠풀로 가득 차 쓸쓸하게 만들었으니, 말이 이에 미치매 문득 살기를 잊고 창을 베게삼아 밤새도록 잠 못 든다. 슬프다 ! 우리 장수와 군사들아! 누가 부모가 없으리오. 이끌고 잡고 받들고 업어서 오직 오래 살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한 부부가 있어 죽으나 사나 함께하기로 맹세하였으며, 형제는 사랑하여 손이나 발과 같고 아들 딸 어린 것은 살펴 주는 것인데, 난리가 극도에 이르러 국가가 함몰되어 혹은 칼날에 걸리어 피가 풀밭을 적시고 혹은 포로로 잡혀 참혹함과 악독함을 당하였으며, 더럽히고 욕을 보여 인도(人道)가 땅에 떨어졌다. 지금 이 오랑캐는 나라의 원수일 뿐 아니라 너희의 사사 원수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을 밥 먹고 숨쉬는 동안인들 어찌 잊으랴. 내가 듣건대 옛말에 어버이의 원수는 날을 넘기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드려 통곡하면서 날을 넘기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인데 세월이 이럭저럭 지나 한 해가 또한 저물었다. 슬프다! 너희들의 마음을 나는 헤아린다. 창을 잡고 싸움에 따라 다니며 피를 뿜고 울음을 삼키어 기회를 살펴 분발하여 이적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리라. 속담에 이르기를, “새끼 가진 개는 범을 습격하고, 알을 품은 닭은 삵괭이를 친다.” 하였으니, 지극한 정이 발동하는 바에 강함과 약함이 아주 달라진다. 비겁하던 사나이도 의를 사모하면 용맹이 맹분(孟賁 옛날 중국의 용사)보다 지나치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적을 치면 누구인들 한 사람이 백 놈을 당해내지 못하랴. 사방에 둘러있는 3백 고을 중에 원한을 품은 자가 적어도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한 사람이 1백 명을 당하면 진실로 1백만의 강적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곰을 두들기고 표범을 잡는 장수와 뇌성처럼 무섭고 바람처럼 날랜 군사가 또 따라서 몰아줌이랴. 내가 감무(監務)의 명을 받고 편안히 처할 겨를이 없이 제군들과 함께 난을 평정하기를 원하고 이에 천병이 국토를 제압하였으니, 소탕할 것이 기약이 있다. 그러나 한 집의 원수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스스로 손을 대지 않는다면 이것은 효자 인인(仁人)의 마음이 아니요, 예의(禮義)의 나라가 장차 오랑캐가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에게 크게 고하노니 너의 마음을 가다듬고 너의 기운을 떨쳐서 각자 제 원수를 갚고 사람마다 힘껏 싸워서 평행장(平行長)의 머리를 베어 음기(飮器)를 하고 또 현소(玄蘇)의 피를 가지고 흔고(釁鼓)한다면 어찌 마음에 쾌하지 않겠는가. 아! 인(仁)한 이는 어버이를 버리지 않는 것이며 의로운 이는 임금을 뒤로 하지 않는 것이니, 《춘추(春秋)》에는 백대의 법을 밝혀 원수 갚음이 위대하였다. 충성과 효도가 두 가지 길이 아니니 기특한 공을 일찍 세우라.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任啓英)의 상소는 다음과 같다.
왜적의 화가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리오마는 뜻밖에 흉하고 독한 것들이 성세(盛世)에 나왔으니 나라가 수렁에 빠진 욕은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도 없나이다. 파천하신 행차가 지금까지 체류하였으나 한 사람도 칼날을 내밀고 적에게로 향하는 이가 없고 각 고을은 소문만 듣고 달아나서 인심이 붕괴된 것이 물이 가로 흐름과 같으니, 만약 의를 선창한 모든 신하들이 한(漢)을 생각하는 마음을 고동시켜 넘치는 내를 막아 물길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나라로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신은 멀리 바다 구석에 처하여 하늘을 깁기[補天]에 힘이 부족하여 원수 놈들과 한 하늘 밑에서 살기를 모두 부끄러워하면서도 죽을 처소를 얻지 못하여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의 화가 호남에 침입하자 의장신(義將臣) 고경명이 금산(錦山)에서 패하여 죽자, 한 도의 선비와 백성의 마음으로 흐느끼고 간담이 서늘하여 새처럼 보고 짐승처럼 숨쉬면서 적의 칼날이 짓밟는 것을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신은 그윽히 생각건대, 이때를 당하여 요행히 살 수 없으니 다같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나라에 목숨을 바치리라 하였더니, 고을 사람 아무 아무 등이 먼저 신의 마음을 알고 의론이 서로 합하여 고을의 자제들을 권면하여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고 빠진 장정을 불러 모집하여 향병(鄕兵) 2백여 명을 얻었으며, 장흥(長興)의 아무 아무 등이 또한 정예한 군사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와서 신에게 소속하고 좌도를 거쳐 적의 초소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 위의 교만한 장수와 게으른 군사, 토호 백성과 비겁한 사나이들이 모두 유병(儒兵)을 오활(迕闊)하다 하여 헐뜯는 자도 있고 방해한 자도 또한 많아서 기꺼이 서로 도와주려고 하지 않으니, 군량과 무기를 사사로이 판출하기가 심히 군색하였습니다. 행하여 남원에 이르자 부사 윤안성(尹安性)이 의거를 장려하여 마음을 다해 주선하여 부중의 선비들이 자원하여 날라다 주는 자가 약간이었고 옆 고을의 선비들이 소문을 듣고 호응한 연후에 양식이 부족함이 없고 병력이 차차 강화되었습니다. 전 부사 최경회 또한 경명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우도로부터 나오매 신이 더불어 합세하여 장수현(長水縣)에 함께 주둔하여 혹은 기병(騎兵)으로 침략하고 혹은 달려 들어가 충돌하면서 어지러이 쏘니 무주(茂朱)의 적이 지탱하지 못하여 먼저 도망하였습니다. 신이 그들이 반드시 금산의 적과 서로 합쳐서 도망할 것을 헤아리고 부장(副將) 장윤(張潤)을 보내어 선봉으로 달려가게 하였더니 그날 밤중이 못 되어 적이 이미 도망하였고, 신이 보낸 장사(壯士)들 1백여 명이 추격하여 경계 밖으로 나가 영동(永同) 등지에까지 이르렀으나 흉적의 자취가 이미 멀어 추한 종자들을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실로 신들이 군사를 쓰는데 기회를 잃은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방을 돌아보매 모두 비린내에 물들었고 홀로 이 호남이 겨우 완전히 보존되었으니, 아마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아서 우리가 회복할 터전을 열어준 것입니다. 신이 곧 마땅히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서 승여를 호위할 것이나, 다만 생각건대 이 지방이 비록 서울에서 머나 군사며 말이며 부고(府庫)를 운반하는 근본이니 한 나라에 있어서 관중(觀中)과 같은 관계입니다. 그런데 지금 병사(兵使)는 군사를 끌고 멀리 갔으며 순찰사는 군사를 전부 가지고 근왕하였으므로 적이 허한 틈을 탈는지 흉한 꾀를 헤아리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경상도 우감사 신 김성일이 급히 글을 보내어 위급한 사정을 말하기를, “김해ㆍ부산의 적이 합세하여 멀리 몰아 이미 단성을 함락시키고 호남의 경계에 가까이 왔다.” 하기로, 신이 부득이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 나아가서 요해지를 끼고 싸움도 하고 방어도 하여서 한편으로 영남의 응원을 하고 한편으로 호남 경계의 충돌을 방어하여 국가의 중흥을 만에 하나라도 보존하려 하나이다. 신이 매양 교서를 받들어 읽으매, 울며 피를 뿌려서 마음은 더욱 붉어지고 한 몸은 더욱 가벼우나 문전에 박두하는 왜적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여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가지 못하니 오활하고 늦춘 죄는 만 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물은 일만 번 굽이를 꺾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가는 것이니 신의 몸은 비록 먼 데 있어도 마음은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장차 한 지방이 염려 없는 사세를 본 연후에 호남ㆍ영남 여러 의병과 힘을 합하고 꾀를 같이하여 길에 걸리는 적을 소탕하고 경성을 수복하려는 것이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신은 일개 오활한 선비로 본시 재주와 책략이 부족하나 구구히 이 의거를 하는 것은 뜻이 바다를 메우려는 새와 같고 어리석기가 산을 옮기려는 사나이보다 더하여 충성의 격동된 바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이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돌아보지 못하는 바입니다. 호걸의 선비들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계속해 일어나게 하여 인심을 진정시키고 적의 기운을 탄압하여, 하늘을 떠받치고 해를 목욕시켜 중흥을 도우겠다는 것이 또한 신의 망령된 계책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굽어 살피소서. 행재소(行在所)가 멀고 먼 데 난리로 막히고 떨어져서 간절한 정성을 아뢰지 아니할 수 없어 삼가 종사관 신(臣) 모를 보내어 소를 받들어 올리니 통곡하고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 8도에 교서를 내려 방학(放學)하게 하다. 이보다 먼저 병술년(1586, 선조 19)년에 지방 장관 밑에 제독(提督)을 두어 부속된 향교를 순시하며 독려하여 날로 학문을 힘쓰게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교훈하는 관원을 모두 혁파하고 봄ㆍ가을의 석전(釋奠)을 폐하며, 유생을 몰아서 군대에 편입하고 교노(校奴)를 관노(官奴)로 삼다.
○ 태인(泰仁)의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향병 2백여 명을 모집하여 웅(熊) 자로써 장표(章標)를 삼고, 기계를 마련하고 양식을 마련하여 영남으로 향하다.
○ 임계영(任啓英)이 거창에 주둔하니, 최경회가 군사를 끌고 잇달아 이르러 장윤(張潤)ㆍ고득뢰(高得賚) 등을 보내어 본도 의병장 김면(金沔)과 더불어 협력하여 개령의 적을 토벌하여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많다.
○ 체찰사 정철(鄭澈)이 아산(牙山)에 배를 대었는데 전라 감사 권율이 지나는 길에 찾아가 만나서 근왕하러 간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정철이 말하기를, “행재소는 길이 멀어 도달하기가 쉽지 않고 또 임금의 기체가 평안하시며, 천병이 크게 이르러 군사는 많고 먹을 것은 적어 자용(資用)이 심히 군색하니, 먼 지방의 군사가 가벼이 나아가지 말 것이요 맡은 지방으로 물러가 보존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책이다.” 하다. 권율이 듣지 않고 전진하여 수원부의 독성(禿城)에 진을 치다.
○ 소모어사(召募御史) 변이중(邊以中)을 충청도ㆍ전라도에 보내어 군사를 모집하여 근왕하게 하다. 이중은 호남 사람이다. 서해를 거쳐 본도로 향하다.
○ 전라도 해남의 진사 임희진(任希進)과 영광(靈光)의 전 첨정(僉正) 심우신(沈友信) 이 각기 향병 수백 명을 뽑아서 군량과 기계를 마련하여 아울러 영남으로 달려가다. 희진은 표(彪) 자로 장표를 삼고, 우신은 의(【義】)자로 장표를 삼다. 이때 전후에 의병을 일으킨 이가 호남에 무릇 28여 장수요 8도가 모두 그러하였는데, 나머지 소소하게 스스로 모집한 장수들은 이루다 기록할 수도 없다.
○ 동복 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을 익산 군수(益山郡守)로 승진시키다. 이현(梨峴)에서 승전한 보고가 올라오자 또 충청 조방장(助防將)으로 승진시키고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가자하다.
○ 적괴(賊魁)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왜장들에게 말을 전하기를, “한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 겨울이 매우 차니 추위를 막을 준비를 어떻게 하는가?” 하다. 청정(淸正) 등이 답하기를, “겨울 추위는 족히 걱정할 것이 없으나 다만 잔당(殘黨)인 전라도가 항거하여 굴복하지 않으므로, 내년 봄에는 협력하여 공격할 계책을 하고 있으니 급급히 군사를 더 보내어 원조하여 주소서.” 하다.
18일. 세 개의 해가 함께 나왔다. 국가가 함몰되고 임금이 파천하였으니, 변괴가 나오는 것이 괴이할 것도 없다.
○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의 온 가족이 포로가 되었으므로 윤탁연(尹卓然)으로 대신하였더니, 그 뒤에 영립은 도망해 왔는데 그 어머니는 아직 왜적의 수중에 있었다. 영립이 충성과 효도에 다 어긋났다 하여 매[鷹]를 왜적에게 바치고 어머니를 돌려주기를 빌었더니 적이 허락하였다 하다.
○ 전라 감사 권율이 수원 독성에 있으면서 행조(行朝)에 장계하니 임금이 찼던 칼을 풀어 전하여 보내 주며 말하기를, “모든 장수 중에 명령을 받지 않는 자가 있거든 이 칼로 처치하라.” 하다. 이때에 경성의 적이 호남 군사가 또 수원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군사 수만 명을 내어 길을 나누어서 침범하였다. 권율이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적은 오산(烏山) 등지에 세 군데 병영을 만들고 날마다 도전하였으나, 권율이 또한 응하지 않고 때때로 기병(奇兵)을 내어 매복시켰다가 쏘고 베니 적이 밤에 병영을 불태우고 도로 경성으로 들어가다. 바야흐로 적이 침범할 때에 권율이 날마다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본도에 응원병을 처하니, 정철이 전라 도사에게 급히 글을 보내기를, “흉한 적이 수원 땅에 가득하여 청회(靑回) 오산의 들판에 적진이 퍼져 있고, 독성 밑에는 날마다 싸우지 않을 때가 없다. 한 도의 주장이 바야흐로 적병의 포위 속에 있는데 사방을 돌아보아도 응원이 없으므로 날마다 3번씩이나 급히 보고하니, 본도의 관군과 의병을 성화(星火)같이 발송하여 수원성의 군사를 구하라.” 하다. 도사 최철견(崔鐵堅)과 변사정(邊士貞)ㆍ임희진 등 의병이 달려가 응원하다.
○ 평안도 묘향산의 늙은 중 휴정(休靜)이 중 1천여 명을 모집하고 유정(惟政)으로 부장(副將)을 삼아 양식과 기계를 마련하여 적을 토벌하다.
○ 진주 목사 김시민이 졸하다. 시민이 총알에 맞은 뒤로부터 그자신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더욱 국사만을 생각하여 머리를 들고 때때로 북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총알에 맞은 데가 낫지 않아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군중에서는 적이 알까 겁내어 숨기고 발상(發喪)하지 않다. 그러나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아서 곡하는 소리가 서로 들리었고, 1년이 넘도록 남녀들이 소찬을 먹다. 행상(行喪)이 함양(咸陽)에 이르자 조정에서 표창하여 우병사로 승진시킨 것이 알려지다. 감사의 장계로 인하여 서예원(徐禮元)으로 대신 목사를 삼다. 그 뒤에 포로가 된 사람으로 왜국에 있는 자가 우감사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왜적이 매양 진주 목사를 일컫고 또 그때의 왜장으로 우시등원랑(羽柴藤元郞)이라는 자는 수길의 종질로서 병력이 가장 강하였는데, 패하여 창원으로 도망가서 분하고 한스러움이 병이 되어 죽었다.” 하다.
○ 천조의 병부(兵部)에서 군사를 내어 조선을 구할 것을 아뢰어 청하고, 또 말값[馬價]은 2만 냥을 청하여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으로 하여금 본국의 사신 신점(申點)과 함께 조선에 가져다주다. 황제의 성지를 받드니 그 내용에, “조선이 본시 공순함을 바쳐서 우리의 속국이 되었으니, 왜적의 침략을 받고 있는데 어찌 앉아서 보랴. 요동진무관(遼東鎭撫官)을 시켜 곧 정예한 군사 2지(枝)를 보내어 응원하게 하고 인하여 은 2만 냥을 내어 그 나라에 가져가서 군사를 먹이게 하며, 대홍저사(大紅紵絲) 안팎 두 벌로 국왕을 위로하라.” 하다. 병부에서 참장 낙상지(駱尙志)를 보내어 남방 군사를 거느리고 강 언덕에 둔치다. 본국에서는 계속하여 심희수(沈喜壽)ㆍ윤근수(尹根壽) 등을 보내어 속히 요광(遼廣)에 구하여 주기를 청하느라고 행차가 길에 잇달았으나 대병(大兵)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북경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다.
○ 적개의병장(敵愾義兵將) 변사정(邊士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다. 이보다 먼저 사정이 단기(單騎)로 달려가 정철을 보았더니, 정철이 군과 이잠(李潛)을 내주며 부장으로 삼게 하다. 사정이 더불어 같이 돌아와서 부장으로 삼다. 이때에 이르러 행군하여 공주까지 이르렀다가 체찰사의 분부로 인하여 돌아와 옥천으로 가서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토벌하다.
○ 충청도의 노상(老相) 심수경(沈守慶)이 의병을 일으켜 조대곤(曺大坤)으로 부장을 삼고, 건의(健義)로서 장표를 삼다. 대곤이 먼저 경상도 우병사로 있다가 탈직(奪職)되고, 김수(金睟)를 따라 행조로 가다가 충청도에 이르렀는데 수경이 만류하여 부장을 삼다. 그 뒤에 행조에서 건의장(健義將)으로 8도 의병 도대장을 삼고 인(印)과 어도(御刀)를 주다.
○ 천장(天將)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등이 평양[箕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가다. 처음에 승훈 등이 의주로부터 순안(順安)에 진군하여 적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빨리 교전하려 하였으나, 다만 군사가 적으므로 잇달아 올 구원병을 기다리다. 이때에 이르러 승훈이 군사를 4초(哨)로 나누어 군대마다 각기 우리나라 사람 1백 명을 시켜 길잡이를 삼고, 사유는 선봉장이 되어 밤에 60여 리를 행군하여 새벽에 평양에 도달하여 성문을 쳐서 부수는데 고함소리가 하늘에 뻗치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하다. 적병이 거짓으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오자 사유가 급히 성에 들어갔더니, 행장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맞아 싸워서 남김없이 마구 죽이고 사유도 거기서 죽다. 조승훈 등이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달아나 요동으로 돌아가다.
○ 강우(江右)의 사우(士友)에게 통문한 것은 다음과 같다.
슬프다! 우리의 종묘사직이 잿더미가 되고 폐허가 된 지가 지금 몇 달이며, 우리 성상께서 평안도로 파천하여 계신 지는 지금 몇 달인고. 난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추한 오랑캐들이 우리의 예악 문물을 더럽혔으니, 하늘이 장차 앙화내린 것을 뉘우쳐 인심을 계발해 줄 것이다.’ 하였는데, 저놈들은 이미 우리의 동족이 아니요, 또 죽이고 약탈하기를 함부로 하니 사람들이 누가 한(漢)을 생각하지 아니하리오. 요망한 기운을 소탕하여 양경(兩京 경성과 평양)을 평정함이 마땅히 오래지 아니하리라 하였더니, 슬프다! 사직의 신하로 능히 봉천(奉天)의 거가(車駕)를 돌아오시게 하고 간성(干城)의 장수로 능히 이(李)ㆍ곽(郭)의 충성을 나타내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자고로 변란의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대처할 인재가 있는 것인데 지금에는 유독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슬프다! 종거(鍾簴 악기)가 땅에 던져졌고 준조(尊爼 제기)가 먼지를 뒤집어썼으니, 하늘에 오르내리는 조종의 신령이 떠돌아 어디 의탁할꼬. 원수의 적이 오히려 떨치니, 섬멸할 날이 기약이 없다. 주상께서 창을 베개 삼는 뜻이 어찌 잠깐인들 조금이라도 해이하리오. 근자에 내리신 교서를 엎드려 읽으매 끝에 이르기를, “땅의 한계는 이미 다되었는데 나는 장차 어디로 돌아가랴. 돌아가고파 하는 한 생각이 물의 흐름과 같도다.” 하셨으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가 비감하여 눈물을 뿌리지 아니하랴. 인홍(仁弘) 등은 어리석은 생각에 격동되어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않고 창의하여 군사를 모아 회복을 도모하였으나 군사를 거느린 지 반 년에 근근이 한 구역만을 지키고, 아직도 유둔한 적을 섬멸하지 못하니, 슬프고 분함이 더욱 괴로워 마음이 타는 듯하도다. 지금 임계영(任啓英)ㆍ최경회(崔慶會) 두 사람이, “적을 토벌하는 데는 처음부터 피차의 구별이 없다.” 하고, 정예한 군사 수천을 거느리고 가까운 땅에 와서 주둔하면서 인홍 등과 더불어 성주ㆍ개령의 적을 치고자 하여 열렬한 의기가 보고 듣는 이를 감동시키니, 실로 하늘이 국가를 도와 강토를 회복할 징조로다. 다만 군량이 부족한데 판출할 계책이 없으니, 저 수천의 군사를 무엇으로 먹일꼬. 영남 50여 고을이 모두 적지 천리(赤地千里)가 되었고 오직 강우 6, 7고을이 추수가 좀 잘되었으나 관에서 새로 팔아 들인 곡식은 다만 우리 군사만 먹여도 오히려 넉넉지 못할까 염려되거늘, 하물며 호남의 군사에게 공급할 수 있으리오. 옛글에 이르기를, “양식이 부족하면 굳게 지킬 땅이 없다.” 하였으니, 양식과 물자가 계속 공급되지 못하면 비록 호남의 의병이라도 붕괴되어 흩어짐을 면치 못할 것이니, 회복을 하려는 자로서 어찌 군량을 판출하기를 생각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사우들은 이미 말 타고 활 쏘는 재주에 부족하니, 시석(矢石)의 전장에 달려가서 왜놈 하나라도 쏘아서 적개의 충성을 바치려 한다면 그만이지마는 만분의 일이나마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군량을 공급하는 일일 것이다.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들이 동지에게 두루 타일러서 성의를 다하여 곡식을 낸다면 적은 것을 쌓아 많은 것이 되어 호남 군사의 수개월 양식을 공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회복할 계책을 성취시키게 하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하는 것이니, 제 몸도 족히 아끼지 못하거든 하물며 감히 그 재물을 아끼랴. 들은즉 호남의 의사들은 행재에 경비가 부족할 것을 생각하여 서로 권면하여 쌀 수만 석을 모아서 의곡(義穀)이라 이름하여 배에 싣고 수레로 운반하여 평안도로 보내 바치었으니 그 충성이 지극하다. 돌아보건대, 강우의 많은 선비들은 그 재력(財力)이 진실로 호남의 전성(全盛)함에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의곡의 장한 일은 본받지 못하지만, 감히 그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힘이 미치는 데에 따라서 바다에 한 방울의 물을 보태고 태산에 한 티끌을 보태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또 각 고을 중에 능히 선창하는 이가 있으면 같은 뜻으로 응하는 자가 절로 기약하지 않고도 이르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러므로 감히 각 고을에 유사(有司)를 정하여 성명을 기록하였으니, 선창에 도가 있으면 그 지성이 귀신도 감동시키거늘 하물며 사람이리오. 하물며 의리를 아는 사람이리오. 제군은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본도의 여러 의병에게 보내는 격문은 다음과 같다.
의거로 군사를 일으킴은 오로지 국가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이다. 흉하고 추한 놈들이 침범한 지 이제 이미 한 달이 넘었는데 관군이 여러 번 붕괴되어 소탕할 기약이 없다. 7도의 생령이 이미 어육이 되었고 다만 호남 한둘만이 겨우 보전함을 얻었으니, 지금 만약 기회를 잃으면 어찌 회복의 공을 성취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구하랴. 이때가 바로 의기 분발한 선비가 몸을 잊고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우리들은 용성(龍城)으로부터 거창(居昌)에 와 주둔하여 바야흐로 영남의 여러 어진 분들과 협력하여 개령ㆍ성주 등지의 적을 치려 하나,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와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약하여 바로 흉한 칼날을 치기가 어려워서 백가지로 생각하여도 상책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사(公私)가 모두 군색하여 앉아서 응원병만을 기다려도 아직까지 먼저 소리치는 장수가 이 경계에 이르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비록 반드시 까닭이 있다고야 하겠지마는 왜 그리 더딘지 또한 부끄러움이 없지 못하다. 개령의 험한 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을 지키기 어렵고 운봉을 한번 잃으면 다시는 군사를 쓸 땅이 없을 것이니, 만일 흉한 오랑캐가 마구 몰아 빈다면 그 뒤에는 제군이 비록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가득 찬 적을 막으려 한들 피곤한 군사를 거느리고 굳센 적에게 항거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엎드려 원하노니, 제군은 각기 정예한 군사를 통솔하고 시기에 맞추어 와 응원하여 좌우의 어금니처럼 서로 의뢰하고 고기비늘처럼 잇달아 나온다면, 위엄이 미치는 곳에 적이 반드시 간담이 꺾어질 것이니 합세하여 일제히 치면 어떤 견고한 적인들 꺾지 못하리오. 비린내와 누린내를 소탕하고 씻어서 멀리 개령의 지경까지 막으면, 호남은 절로 완전하여져서 국가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기미가 이와 같은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리오. 다시 원하노니, 제군은 좋은 계책을 힘써 생각하여 후회가 있게 하지 말지어다. 임기응변은 병가(兵家)에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급한 데로 달려가 형세를 타는 것은 지사(志士)가 숭상하는 바이다. 만약 머뭇거리고 핑계하다가 늦어서 기회에 미치지 못하면 다만 모든 벗의 꾸짖음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조정의 법이 있을 것이니, 두렵지 아니하리오.
○ 성주ㆍ개령에 점거한 적이 더욱 치성하므로 관군과 의병이 연달아 싸워 불리하다. 본도의 감사와 모든 의병장이 여러 번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간절히 구원병을 청하였더니, 정철이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을 영장(領將)으로 삼아서 본도의 관군 5천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개령ㆍ성주의 전투를 돕게 하다. 남간 등이 해인사(海印寺)에 진군하여 영남의 여러 장수들과 협력하여 성주성을 치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왔는데 죽은 자가 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다.
○ 조정이 용만(龍灣)에 오래 체류하매, 성을 버리고 거둥한 것을 후회하니, 따라가 있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당시의 수상이던 이산해(李山海)에게 허물을 돌렸다. 이때에 산해가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에 귀양가 있으면서 시를 지어 스스로 해명하기를, “성난 물결에 함께 빠지는 것은 자식이 달갑게 여기는 바이나, 몰래 업고 깊은 산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가. 백성들의 충의가 응당 무수하리니, 1려(旅)로 중흥함이 반드시 어려운 것만은 아니리.” 하다.
○ 영유(永柔)에서 무과를 보여서 무신 5천 명을 얻고, 또 의주에서 문무과를 함께 보여 문신 13명과 무신 6백 명을 얻다.
○ 휴정(休靜)을 가선대부로 승진시켜 팔도 승병 도총섭(八道僧兵都摠攝)을 삼고, 유정(惟政)은 절충장군으로 승진시켜 부총섭을 삼다. 적을 토벌하여 공이 많으므로 이런 승진이 있다.
11월. 경기 조방장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복수할 일로 격문을 전하니, 다음과 같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이 이와 같이 심하여 승여가 서쪽으로 파천하니, 만백성이 의탁할 데가 없도다. 눈을 들어 강산을 보매 그 누가 간장이 찢어지지 아니하랴. 이 땅에서 먹고 살고 혈기를 가진 자들은 모두 마땅히 창을 베개 삼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으며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복수해야 할 것인데, 내가 불행히 이 참혹한 처지를 당하여 흉한 칼날 아래 아버지와 형이 모두 목숨을 잃었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살기를 원하여 이 적들과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있겠는가. 인하여 생각건대, 원근의 선비와 백성들이 나와 같이 참혹하고 비통한 일을 당한 이가 반드시 백이나 천으로 헤아리는 정도에만 그치지 아니할 것이므로 이에 여러 장사들을 모집하여 한 군대를 만들어 복수하는 군사[復讐之軍]라고 이름 하여 부형의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하는데, 제군들은 어떻다 하겠는지 모르겠다. 그대의 아버지ㆍ형ㆍ아내ㆍ자식이 참살당하여 해골이 들판에 드러나서 원흔이 의탁할 데 없이 황천이 아득한데, 우리가 홀로 편안히 물러나서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황천에 혼령이 있건대 감히 내가 아들이 있고 아우가 있다 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털끝이 쭈뼛하다. 제군들이 만약 이 말을 옳다고 한다면, 부형과 처자의 원수가 있는 이들은 마땅히 각기 징발하고 모집하여 무기를 준비하여 날짜를 약속하고 발정(發程)하여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조금 풀어서 《춘추》의 의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떠하겠는가. 이상을 8도에 통문함.
○ 통문은 다음과 같다.
때를 불행히 만나서 가화(家禍)가 망극한데 불초한 고자(孤子 아버지가 죽은 상주의 자칭)는 초토(草土 상중에 있다는 뜻)에 병들어 아직도 이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있었더니, 이제 첨지 홍계남(洪季男)이 먼저 대의로 주창하여 여러 도에 전해 타일러서 원통함을 참고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같이 적을 쳐서 원수 갚을 일을 도모하니, 사람의 마음은 같은 바이거늘 누가 흥기하지 아니하리오. 조완도(趙完堵) 군은 아사(亞使) 조헌(趙憲)의 아들이라 반드시 장차 아버지의 군사를 수습하여 호서에서 깃발을 들 것이다. 고자는 비록 못났으나 친상(親喪)이 이미 땅 속에 들어갔으니 이 몸은 죽어도 또한 유감이 없으므로 애통함을 무릅쓰고 병든 몸을 붙들고 본도의 동지 제군들과 군사와 기계를 모집하여 북으로 가서 적에게 죽을 계책을 하려 하노니, 엎드려 생각하건대, 여러분도 역시 즐겨 들을 바일 것이다. 슬프다! 구차히 살아 이에 이르매 윤기(倫紀)가 멸하였다. 다만 인품이 미천하고 힘이 약하여 일을 선창하지 못함이 한이더니, 홍공(洪公)이 이미 선창하였는데 고자 등이 또 손을 소매 속에 넣고서 따라 일어나지 않고 늙어서 방구석에서 죽는다면 장차 어찌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뵈오리오. 홍공은 명성과 위엄이 이미 드러나서 그를 빌려 일할 만하고, 태인(泰仁)ㆍ진원(珍原)ㆍ장성(長城)의 3사군(使君 지방의 수령)이 또한 종천(終天)의 원통함을 품어서 이 적과 함께 살지 않기를 맹세하였으며, 도체찰상공(都體察相公)이 군사를 합쳐 원수 갚을 것을 허락하여 법규로써 구속하지 않기로 하였고, 군량과 무기도 뒷날의 걱정이 없으니, 다만 제공이 호응하느냐의 여하에 달려 있다. 아! 호남 사람이라야만 일을 같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생각하건대 서울에서 남장으로 적을 피해온 사람인들 어찌 부자 형제의 원수가 없겠는가! 비록 적의 칼날에는 요행히 면하였으나 풍상을 겪어 고생으로 부모를 잃은 이도 또한 이 적을 잊지 못하리라.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밑에 살지 않으며, 형제의 원수와는 나라를 같이하지 않으며, 벗의 원수는 칼을 돌리지 않는다는 의리를 거듭 생각하라. 망친(亡親)께서 추성(秋城)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에 남방의 제공이 국사에 같이 죽기로 기약하여 향을 태우고 하늘에 맹세하여 대장으로 추대하였을 때에는 진실로 형제의 의가 있었으니, 불행히 공업(功業)을 마치지 못하였으나 제공이 어찌 차마 길가는 사람을 보는 것같이 하겠는가. 당일에 부하로 있던 무사들은 다 이미 의병으로 달려갔을 것이나 혹시 일로써 집에 있거나 혹시 진터에 나누어 수자리하는 자들은, 원컨대 고자를 불초하다고 하지 말고 추성에서 피를 마시며 맹세하던 것을 생각하여 큰일을 같이 성취시킴이 어떠하오. 제공들이 만약 가하다고 생각하거든, 엎드려 비노니 일제히 광주(光州)에 모여서 면대하여 맹세와 약속을 맺고 출병할 기일을 정하기를 지극히 비나이다. 월일에 전 임피 현감(臨陂縣監) 고종후(高從厚).
후록(後錄) 1. 비록 원수 갚는 데 뜻이 있어도 병들고 약하여 능히 종사하지 못할 자는 무기로 서로 부조하든지 혹은 건장한 종을 대신 보내든지 혹은 쌀과 베를 내든지 혹은 전마(戰馬)나 짐 싣는 말을 내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할 것이니, 하천(下賤)ㆍ빈궁(貧窮)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비록 한 되의 쌀 한 치의 쇠라도 모두 서로 부조함이 가하다. 아! 정위(精衛)가 바다를 메우고 한 삼태기로 산을 만드나니, 다만 그 정성에 있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1. 한갓 피난하여 온 사람으로서 앞장서서 맨손으로 서로 도울 만한 것이 없는 이는 혹은 자신이 군중에 따르든지 혹은 군량을 모집하되, 수수방관하지 말고 한 팔의 힘이라도 같이 들어줌이 어떠하오.
○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이 거창으로부터 합천 해인사로 진을 옮겨서 영남 의병장 정인홍과 협력하여 성주의 적을 쳤다. 자세한 것은 계사년 5월 조에 나타나 있다. 최경회는 그대로 거창에 머물러서 김면과 개령에서 같이 일하다.
○ 심유경(沈惟敬)이 중국 조정에 갔다 와서 다시 평양의 적진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가 가지고 간 병부의 칙서에 중국 군사가 와서 구원한다는 말이 있다.
○ 복수 의병장 전 현령 고종후가 한 것은 다음과 같다.
제주(濟州)ㆍ정의(旌義)ㆍ대정(大靜) 3고을, 고성(高姓)ㆍ양성(梁姓)ㆍ문성(文姓) 3가 문호의 모든 어른에게 고하나이다. 옛적 태고 때에 인물이 생기기 전인 시초에 하늘이 세 신을 한라산 밑에 내려 보내시건대 고씨ㆍ양씨ㆍ부(夫)씨요, 또 아름다운 여인과 망아지ㆍ송아지의 종자를 함께 주어 한 지방에 터를 여는 조상이 되었으니, 이제에 이르러 인구의 번성함과 말을 많이 길러냄이 대개 세 신인의 덕택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 후세에 자손이 혹은 바다에 떠서 이리저리 옮겨 여러 곳에 흩어져 사니, 세상에서 이른바 제주 고씨, 제주 양씨는 모두 그 후손입니다. 고자의 선대도 고려 말기에 장흥(長興)의 고씨가 되었고, 부성(夫姓)의 후예는 지금에 문씨가 되어 처음의 부씨는 세상에 알려진 이가 없습니다. 지금 비록 분파(分派)가 되고 세계(世系)가 멀어서 경사와 조문에 통하지 않으나, 최초에 세 신인이 탄생한 상서와 형제의 의리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이목을 비추어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칭도하는데, 하물며 그 자손이 된 자들이야 어찌 차마 그 옛날을 생각지 아니하고 원수 갚는 사람을 대번에 길가는 사람처럼 보겠습니까. 근일에 망친이 적이 경성을 범하고 7도가 붕괴된 초기에 먼저 의병을 선창하였는데, 몸이 흉한 칼날에 죽어 하루에 부자(父子)가 국사에 함께 죽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표장과 증직을 더하고 길 가던 사람도 듣고는 절로 눈물이 흐르거늘, 하물며 우리 한 뿌리에서 나온 사람이야 어찌 깊이 마음에 감동되지 않겠습니까. 불초한 고자는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족히 망부(亡父)의 일을 이을 만하지는 못하나, 종천의 원통함을 씻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감히 사노(寺奴)의 군사를 거느리고 복수의 싸움을 하려 하나 본도에는 공사(公私)간에 파멸되어 군기와 전마(戰馬)를 마련할 도리가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 3고을에는 물력(物力)이 홀로 완전합니다. 이에 격문을 가지고 사노와 대소 신민에 타이르는 동시에, 다시 생각한즉 동성(同姓)의 친함은 만세에 잊지 못할 의가 있으며 양성ㆍ문성 두 집도 또한 그 처음에 함께 생겼으니 한마디 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간담을 헤쳐 고하니, 소문을 듣고 의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바라건대 3성(姓) 여러 어른들은 개연히 탄식하고 함께 불쌍히 여기시어 그 재력에 따라서 혹은 전마를 내고 혹은 힘을 합해 서로 부조하여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하여서, 위로는 하늘에 오르내리는 선조의 뜻을 맞추고 아래로는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바라는 바를 위로해 주심이 어떠하오. 정은 넘치고 말은 움츠러져 여쭐 바를 모르겠나이다. 《정기록(正氣錄)》에서 나옴.
○ 사노 의병장(寺奴義兵將) 전 현령 고종후가 운운한 것은 다음과 같다.
삼가 여러 고을 의병청 제공과 고을 안의 여러 군자에게 고하나이다. 고자는 저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바야흐로 첨지 홍계남, 조아사의 아들 완도와 더불어 함께 복수할 계책을 도모하던 차에 도체찰 상공께서 또 사노장(寺奴將)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고자가 비록 지혜와 재주가 얕고 짧아서 망부의 뜻을 계승할 수는 없으나 종천의 원통함을 한번 씻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감히 금혁(金革)의 변례(變禮)를 좇아 이 적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지 않기로 맹서하니 여러 군자께서도 들으시면 또한 반드시 마음에 슬프게 여기실 것입니다. 생각건대 사노의 수효는 비록 명부는 만들었으나 늙고 약한 자를 추려내는 것을 오로지 아전들의 손에 맡기고 보니, 속이고 협잡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고자가 일을 일으키는 공효(功效)는 이것을 중하게 믿었는데 만약 징발한 것이 실지와 다르면 군사의 모양이 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제공께서 살피고 관리해 주시어 아전들로 하여금 농간을 하지 못하게 해 주시면, 건당한 자가 뇌물을 써서 빠질 수 없을 것이니 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자는 비록 사사 원수를 갚는 것이지만 실로 나라의 적을 치는 것이니, 여러 군자께서 그 수고를 꺼리지 않으시고 저의 뜻을 이루어 주시면 어찌 다만 고자 한 집의 죽은 이와 산 이가 감사할 뿐이겠습니까. 다시 바라건대, 조금이나마 불쌍히 여겨 주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후록. 오늘날 나라 안이 임금의 땅 아님이 없고 사해(四海)의 안이 모두 형제이니, 고자의 일을 사정(私情)으로나 공의(公義)로 헤아려 보건대 모두 예사로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각 고을 제공 중에 의병을 모집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본래부터 친밀한 사이라야만 힘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널리 통문을 보내니 일정하게 지정한 데가 없으면 서로 미루고 사양할 염려가 있고 또 평소에 서로 아는 사이에는 한마디 간청이 없을 수 없으므로, 감히 의병청 제공 외에 또 따로 제공의 성명을 기록하면서 혹 비록 평소에 안면이 없이 명성만 서로 들은 분 또한 감히 외람되이 성명을 쓰니 협력해 함께 싸우기를 바라나이다. 《정기록》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상세히 알 수 없다.
○ 경상도 인동(仁同)의 향병장 장사진(張士珍)이 본현의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다. 사진이 날래고 용맹스럽고 담략(膽略)이 있어 처음부터 열성으로 적을 토벌하다가 그의 아우 사규(士珪)가 전사하자 더욱 스스로 분발하여 별장(別將)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해지를 지키다. 하루는 동현(同縣)에 둔쳤던 적 수백 명이 불의에 덮쳤는데 사진이 다만 용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힘껏 싸워 먼저 비단옷 입고 은 투구 쓴 적을 쏘고 머리를 베어 창 끝에 꽂으니 적도들이 부르짖고 울며 도망해 갔다. 사진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쏘아 죽인 것이 수없이 많았다. 그 후 10일 만에 왜놈이 군사를 있는 대로 몰아 다시 이르러서 먼저 10여 기병(騎兵)으로 유인하여 도전하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적을 쏘매 활시위 소리에 응하여 적이 넘어지다.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서 추격해 죽였는데, 매복하였던 적이 돌연히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사진이 앞뒤로 적에게 쌓여 좌편으로 치고 오른편으로 항거하다가 힘이 다하여 죽다. 일이 조정에 보고 되니 통정대부로 증직하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정곤수(鄭崑壽)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병부에서 황제에게 청하여 말값 은 3천 냥을 주어서 궁면(弓面)과 화약 등을 사서 운반해 가기를 허락하다. 고사(攷事)에서 나옴.
○ 황제가 병부시랑 정3품이다. 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군문제독(經略軍門提督)을 삼고, 동지(同知) 종1품이다 이여송(李如松)으로 제독군무(提督軍務)를 삼아서 남북 관병(官兵) 4만여 명을 통솔하여 와서 본국을 구원하다.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좌협대장(左協大將)이 되었는데 부총병 왕유익(王有翼)ㆍ왕유정(王維貞), 참장 이여매(李如梅)ㆍ이여오(李如梧)ㆍ양소선(楊紹先) 및 선봉 부총병 사대수(査大受)ㆍ손수렴(孫守廉), 참장 이영(李寧), 유격(遊擊) 갈봉하(葛逢夏) 등이 다 통솔되다.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은 중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임자강(任自强), 참장 이방춘(李芳春), 유격 고책(高策)ㆍ전세정(錢世禎)ㆍ척금주(戚金周)ㆍ주홍모(周弘謨)ㆍ방시휘(方時輝)ㆍ고승(高昇)ㆍ왕문(王問) 등이 모두 통솔되다.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은 우협대장이 되었는데 부총병 조승훈(祖承訓)ㆍ오유충(吳惟忠)ㆍ왕필적(王必迪)ㆍ참장 조지목(趙之牧)ㆍ장응충(張應种)ㆍ낙상지(駱尙志)ㆍ진방철(陳邦哲), 유격 곡수(谷遂)ㆍ양심(梁心) 등이 다 통솔되다. 참장 방시춘(方時春)은 중군(中軍)이 되고, 비어(備禦) 한종공(韓宗功)은 기고관(旗鼓官)이 되며,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종5품이다. 유황상(劉黃裳)과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6품이다. 원황(袁黃)은 찬획(贊劃)이 되고, 호부 주사(戶部主事) 애유신(艾惟薪)은 군량을 감독하니, 특명으로 길을 배로 재촉하여 달려와 구원하게 하다. 고사(考事)에서 나옴.
○ 성지(聖旨)로 유격 장기공(張奇功) 등을 시켜 은을 내어 군량과 마초를 사서 의주로 옮기는데 연로(沿路)로 운반하여 군량을 대주다. 고사에서 나옴.
○ 호남 의병을 청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슬프도다. 바다 도적이 세력을 믿고 침범하매 경계에서 막아낼 사람이 없어 7도의 강산이 적의 손에 모두 함몰되었는데, 오직 우리 호남만이 잠식됨을 면하여 조종의 강토가 지금까지 그대로 있는 것은 한두 의병장들이 충의를 분발하고 격려하여 의사를 모아 합한 힘이 아니었던가. 용성(龍城)ㆍ금산(錦山) 두어 성이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곧 도리어 섬멸되고 완산(完山) 한 부(府)가 거의 먹힐 뻔하다가 결국 보존되어 승전의 보고가 여러 번 날아와, 추한 무리가 넋을 잃어 한 도의 생령이 안심하고 살게 되매 다른날의 회복이 여기에서 근거가 될 것이니, 적개(敵愾)의 큰 공이 태상(太常 시호와 훈공을 정하는 곳)에 기록할 만하다. 그들의 고풍(高風)이 미치는 곳에 누가 감동되어 사모하지 않으리오. 인홍(仁弘) 등은 각 고을이 붕괴된 나머지에 분기하고 장수와 군사들이 흩어진 뒤에 수습하여 간신히 불러모아 겨우 1 려(旅)를 얻어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鷸蚌相持]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르니, 군사는 피곤하고 양식은 부족한데 여러 성을 점령한 적은 좌우에 벌여 있고 길에 왕래하는 왜놈은 먼 데나 가까운 데에 가득하다. 부상당하고 굶주린 군사를 거느리고 한창 날뛰는 적을 항거하자니 또한 어렵도다. 근일 이래로 적의 세력이 더욱 치성하여 이웃 고을에 개미처럼 모였던 놈이나 상도(上道)에서 후퇴한 놈들이 모두 성주로 모여서 실로 수효가 많으니, 마구 침입할 염려가 아침이 아니면 곧 저녁에 닥칠 것이다. 오늘 혹 방어에 실책하면 겨우 남은 8, 9고을도 장차 차례로 지키지 못할 것이니, 왜적들이 몰아 짓밟을 걱정은 역시 호남 지방에서도 같이 염려되는 바이다. 하양(下陽)이 한번 함락되매 우(虞)와 괵(虢)이 따라서 망하고, 한단(邯鄲)이 굳게 지켜지니 조(趙)와 위(魏)가 함께 온전하였다. 본도가 호남에 대해서는 곧 우ㆍ괵의 하양이요 조ㆍ위의 한단이니 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을 것인데, 막부에서 어찌 영남의 존망을 멀거니 쳐다보고 염려를 하지 않는가. 오직 생각건대 막부에서 평원군(平原君)의 사자[使]를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강황(江黃)의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저 무용스런 군사들이 와서 한쪽에 주둔한다면, 이것이 실로 순치(脣齒)의 형세를 살펴서 능히 남의 곤란함을 급히 여기는 의리라 할 것이다. 그러나 형(邢)을 구원하는 부분에 ‘머문다[次]’ 라고 쓴 것은 《춘추[麟經]》에서 비방한 바이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됨은 옛 사서(史書)에 경계한 바입니다. 만약 혹시 군사를 끼고 주저하여 멀리 성원(聲援)만 할 뿐이라면, 비록 나물을 캐는 것은 산에 있는 호랑이 때문에 꺼린다지만 장호(張鎬)의 구원병은 수양(睢陽)의 패함에 유익이 없었으니, 늦추어서 기회를 잃었다는 책임이 돌아가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任)ㆍ최(崔) 두 장수가 멀리 이웃 도의 위급함을 구원하여 새로 칼날이 한창 날래고 피곤한 군사도 용기를 솟구치니 크게 승리할 기약은 날짜를 정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삼가 원컨대 막부에서는 웅장한 계책을 쾌히 결단하여《시경》〈무의편〉을 읊고 와서 두 장수와 더불어 계책을 맞추고 힘을 한 가지로 하면, 본도의 사기(士氣)가 믿는 바가 있어 스스로 배나 될 것이며 충청도의 군사도 또한 서로 의지하여 떨칠 것이다. 그리하면 소륵(疏勒)의 외로운 성이 추한 오랑캐에게 삼켜지지 않고, 즉묵(卽墨)의 남은 성이 망한 제(齊) 나라의 업(業)을 수복할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아니하리오. 슬프다! 종묘가 바람과 먼지를 뒤집어썼는데 깨끗이 소제할 기약이 없고, 금여(金輿)가 서리 이슬을 맞는데 돌아오실 날이 언제이뇨. 서쪽으로 바라보고 통곡하니, 눈물도 더 뿌릴 것이 없어라. 송 나라 강왕(康王)이 금(金) 나라 병영에 억류를 당하였고, 승상(丞相)이 오파(五坡)에 포로가 되었도다. 임금의 욕됨이 이와 같으니 의리가 진실로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창을 베개로 삼는 분함은 피차에 같은 바이요 경계는 비록 호남ㆍ영남으로 갈리었으나 형세는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였으니, 때를 놓쳐서 미치지 못하면 배꼽을 물어뜯은들[噬臍]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부로(父老)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바야흐로 고자(高子)가 오기를 기다리니, 숙(叔)ㆍ백(伯)은 여러 날이 걸리는지라 위(衛) 나라 사람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 깊은 마음속에서 나온 말이니, 선생들께서는 힘쓸지어다. 정인홍 등.
○ 좌의병 통문은 다음과 같다.
군량의 급한 것을 글월을 써서 달려가 고한 지가 여러 번인데도 아직 답장을 보지 못하였으니, 깊이 부끄럽고 괴이하게 여긴다. 혹시 중간에 지체되어 여러분에게 보여지지 못하였는가 걱정되므로 번독함을 잊고 다시 말씀을 드리노라. 대저 의병을 일으켜 적을 치는 것은 오로지 국가를 위함이니, 군량 한 가지는 피차를 구별함이 없이 오직 넉넉한가 급한가를 볼 뿐이다. 지금 우리 군사가 처한 곳은 곧 호남ㆍ영남의 목구멍인 격으로 성산(星山)에 웅거한 적이 세력을 길러 치성해지려 하고 있다. 만약 여기가 지켜지지 못하면 운봉(雲峯) 이하에는 다시 험하고 막혀 방어할 만한 데가 없으니, 우리 도의 위태로움을 장차 구할 수가 없고 회복의 터전도 또한 의지할 데가 없으니, 기회의 중대함이 진실로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우리들이 이 때문에 여기에 힘을 써서 싸움도 하고 지키기도 하여 쳐서 죽인 것이 많으니 추한 놈들을 섬멸할 형세가 이미 우리의 눈앞에 있다. 다만 영남이 함몰된 나머지에 군량을 공급할 계책이 없고 우리들의 준비한 것은 또한 이미 다되어 거의 이룬 공이 하루아침에 폐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리들만이 담당할 걱정이리오. 동도(同道)의 유식자로서 마땅히 한심히 여길 바이다. 대저 먹는 것이 군사보다 먼저이니 먹을 것이 없으면 군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漢) 나라를 일으킨 공이 소하(蕭何)에게 갈 것인저. 하물며 지금 유림에서 거사하는데 나가는 자는 군대에서 힘을 다하고 위에 머물러 있는 자는 군사를 위해 양식을 준비함이 한결같이 공의(公義)이니, 기회에 나아가 싸움을 이기는 것은 내가 그 책임을 감당하려니와 양식을 끊이지 않게 함은 누가 그 중책을 맡을꼬. 여러분이 공사(公事)를 위하는 마음으로 응당 경영하고 도모하여 널리 거두고 모았을 것이며 또 들은즉 청(廳)을 세울 지시와 준비가 있어 장차 기다리는 바가 있다 들었다. 우리 군사의 급함이 이미 이와 같고 여러분이 계책하는 바도 역시 이와 같으니, 한 마음으로 서로 도울 것이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그 몸도 생각지 않거늘 하물며 그 재물을 생각하랴. 사재(私財)도 감히 생각하지 않거늘 하물며 향교나 서원의 소유는 곧 유가(儒家)의 공물(公物)인데도 지금 쓸데없이 둔다는 말인가. 삼가 원하건대 제공이 혹은 공(公)이거나 혹은 사(私)이거나 있는 대로 그에 따라서 번개처럼 싣고 별처럼 운반하여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는 듯한 바람은 풀어 주면 이 일을 능히 끝낼 것이니, 어느 것이 여러분의 덕택이 아님이 있겠는가. 삼가 원하건대 여러분은 자세히 살펴 힘써 도모하소서. 이상은 호남에 보낸 통문이다.
○ 합천 군수 김면을 본도 우병사로 임명하고,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를 통정대부로 가자하다.
○ 충청도 사람 이산겸(李山謙)이 조헌(趙憲)의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일어나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적을 토벌하다.
○ 경기도 진사 원연(元埏)이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용인(龍仁) 금령(金嶺)의 적에게 크게 패하다. 원연은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의 아우이다. 적령은 역의 이름인데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이 적은 곧 30리마다 일둔(一屯)씩을 둔 적이다.
○ 상의대장(尙義大將)이 합세할 일로 통문 하니, 다음과 같다.
오랑캐가 침범한 때를 당하여 군웅(群雄)이 병립할 수 없는[連鶴不栖] 걱정이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감히 어리석은 계책으로써 만전의 계책을 돕고자 하나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 비록 한두 가지가 아니지마는 오늘날의 사세로 헤아려 본즉 가장 급선무는 합세하여 힘껏 싸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관군과 의병이 곳곳마다 벌 떼처럼 일어나는데 각기 맹주(盟主)가 있어서 깃발을 나누어 세워 군령에 통솔이 없고 여럿의 마음이 일치하지 못하니, 좌를 치려고 하면 갑(甲)이 달려와 원조하기를 꺼리고 우(右)를 치려고 하면 을(乙)이 경계를 넘을 수 없다고 핑계합니다. 피차의 사이에 전혀 입술과 이[脣齒]가 서로 의지하는 듯한 형세가 없고, 앞뒤의 진(陣)에 손발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듯 함이 없으며, 심지어 월(越) 나라 사람이 진(秦) 나라 사람의 수척함을 보듯 하여 앉아서 구원하지 않는 자도 있고, 서로 의지할 데가 없어 마침내 패하는 자도 있습니다. 때를 끌고 날을 끌어 적의 세력을 점점 기르고 오늘에 싸우지 아니하고 내일에 싸우지 않아 우리는 점차로 약해져서 마치 불이 기름을 태우듯 합니다. 마침내 전란이 오래 끌어 북풍의 눈비가 박두하는데 대가(大駕)가 파천하여 서쪽 국경에서 오랫동안 고생하고 계시니, 어찌 국가의 깊은 수치가 아니며 신민의 오랜 슬픔이 아니리오. 대저 우리와 적의 강하고 약한 것이 비록 현격하게 다른 것 같으나 만약 두어 진(陣)의 힘을 가지고 한 떼의 적을 섬멸한다면, 이것은 활활 타는 불을 들고 마른 풀에 날아 들어 태우는 것과 같아서 저 죽음을 앞에 둔 적의 무리를 한번 휘두르는 깃발에 다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고 오히려 매복을 설치하는 것으로써 급선무를 삼고 소굴을 질러 끊는 거조가 없다면, 비록 한두 가지의 공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모래사장의 사람이 흙을 짓이겨 맹진(孟津)을 막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찌 날로 치성하는 적의 화에 효과가 있으리오. 큰 공을 도모하는 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을 생각지 않는 것이며 기특한 계책을 내는 자는 반드시 뜻밖의 깊은 생각이 있는 것이니, 적을 치는 방법이 어찌 매복을 설치하는 데만 그칠 따름이리오. 세가 약하면 힘이 큰 자에게 압제를 당하고 원조가 고단하면 많은 군사에 좌절을 당함은 어리석은 이나 지혜 있는 이나 한 가지로 아는 바이거늘, 오히려 성패(成敗)에 요리조리 의심하고 이롭고 불리한 형세에 앞뒤로 오도가도 못하고서 1년의 오랜 세월을 끌면서 구벌(九伐)의 쾌함을 본받지 못하고 한갓 양식을 운반하는 허비만 있고 승리를 보고하는 기약을 보지 못하여 온 나라가 반이나 오랑캐의 땅이 되고 만백성이 전부 불타는 막사의 제비꼴이 되었소. 만약 이러기를 그치지 않으면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국사가 이루어질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옛날 충의의 선비는 국사가 위급할 즈음을 당하면 꺾이고 패함으로 저상(沮喪)하지 아니하고 세가 약하다고 싸우지 않는 일은 없었습니다. 우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일을 가지고 판단하건대 한구석 탄환만한 지역을 3국이 솥발처럼 맞선 즈음을 당하여 동으로 치고 서로 쳐서 앞뒤로 백 번 싸웠으므로 그의 말에, “우리와 적이 양립하지는 못할 것이요, 왕업이 한쪽에서 편안할 수는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치는 것이 낫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10배의 군사로써 한 귀퉁이의 적을 질러 끊는 것은 애당초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한다면 다시는 할일이 없습니다. 적이 와서 범할 때를 당하면 극력으로 방비하고 적이 물러갈 제는 합세하여 나아가 공격하여, 번갈아 싸워서 적을 애먹이는 공을 세우고 적을 구경이나 하여 길러 주는 걱정이 없게 하는 이것이 실로 지금의 급무입니다. 조개와 도요새처럼 서로 버티어 아직까지 섬멸하는 것을 늦추고 있으니 하루이틀 지나 다시 몇 달이나 더 걸린다면 군량은 이미 다되고 백성은 모두 흩어져서 비록 굳게 지키려 하여도 되지 못하고 적이 우리 땅을 점령한 것은 전일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군사의 양식이 다 된뒤를 타서 저 적의 물고 삼키는 화를 마구 저지른다면, 누가 다시 활을 당겨 적에게 항거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말이 이에 미치매 꿈에도 놀라고 먹다가도 목에 걸립니다. 원하건대, 모든 군자는 의리로 임금을 버리지 말고 충성으로 목숨을 바쳐, 하늘을 쏘는 흉한 놈들에게 마음을 분격하여 해를 취하는 공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실로 국가의 간성(干城)이요 중류의 지주(砥柱)일 것입니다. 제군의 하루가 없으면 인도(人道)의 하루가 없는 것이니, 온 나라 사람들 중에 누군들,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의 옷을 입었으리라.” 하지 않으리오. 신포서(申包胥)의 한 몸이 오히려 능히 초(楚) 나라를 보존하였고 1려(旅)의 군사가 족히 하(夏) 나라를 일으켰으니, 지금의 병력이 전일보다 10배가 되는데 여러 군자의 충성을 분발하는 절개는 또 어찌 옛사람보다 뒤지리오. 다만 군사를 거느린 지는 시일이 경과되었는데 성공을 고하는 기약이 없는 것은 진실로 군사를 거느린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대로 하고 능히 합세하여 힘껏 싸우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군사를 쓰는 것은 졸렬하더라도 빠른 것이 좋지, 교묘하더라도 더딘 것을 숭상하지는 않습니다. 시사의 위급함은 불타는 것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원컨대 주저하지 말고 속히 큰 계책을 내십시오. 풍문에 들은즉 근지에 유둔하던 적이 여러 번 야습을 당하고는 도망한 놈이 반이 넘는다 하고, 더구나 가을이 지나 날씨가 차가워지는데 적들의 거처는 서늘하고 엷게 되어 있으며 본래 벗고 사는 놈들이라 견디기에 익숙지 못하여 알몸으로 얼어 죽은 놈이 길에 서로 잇다랐다 합니다. 아마도 흉하고 교활하며, 사납고 추한 놈들이 죄악이 쌓일 대로 쌓였는데도 우리가 기회를 잃어 섬멸할 기약이 없으니 하늘이 반드시 추위를 빌려서 남김없이 죽이려 하심일 것입니다. 그러고 본즉 미친 적들이 우리 땅에 오래 지체하다가 겨울을 넘기는 것이 또한 국가의 불행 중 다행이 아닌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악한 자에게 앙화를 주는 하늘의 뜻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천시(天時)에 할 만한 기회가 왔으니 적이 어찌 그 목숨을 오래 끌 수 있으리오. 이러한 심한 추위를 당하여 급히 공격하고 놓치 말아야 할 기회가 이때입니다. 양쪽 진에서 통신하는데 편지 한 장이면 족하겠지마는 소모관(召募官)에게 부탁하여 간절한 뜻을 전달하는 것은 삼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일에 회맹(會盟)할 때에 마침 사기(事機)로 인하여 크게 거사하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하면 통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시 고충(苦衷)을 가지고 감히 이렇게 전하니, 상세한 것은 전하는 이의 입으로 다할 것입니다. 각기 개미 힘을 다하고 함께 닭ㆍ개의 피를 마시어, 성하(城下)의 맹세로 하여금 패상(㶚上)의 희롱에 돌아가지 말게 합시다. 삼가 바라노니, 제군은 각기 힘쓰소서.
○ 전라 좌ㆍ우의병이 오래 영남에 있어서 성주ㆍ개령의 적과 여러 번 싸웠으나 한번도 전승(全勝)한 때는 없고 비록 몇몇 베어 죽인 공은 있으나 정병과 용사들의 피해가 너무 많으므로 두 장수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철병하여 북으로 가서 근왕할 계책을 하는 이가 많으니, 영우(嶺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머물러서 살려 달라고 굳이 청하다. 인동 선비 장봉한(張鳳翰)이 임계영에게 글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한 것이 어찌 우연함이리오. 그 충성과 용맹이 다른 관군과 견줄 바가 아니요 의기에 분발함이 또 중들의 유가 아닙니다. 의로운 소리와 높은 절개가 늠름하여 창졸의 사이에 계책을 결단하고, 위태롭고 망하는 즈음에 자신을 잊고서 기회에 나아가 싸우는 것은 오직 의일 뿐이요 크고 작은 것과 강하고 약한 것은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의병의 앞에는 강한 적도 강함이 되지 못하고 많은 적들도 많은 것이 되지 못하여 부딪치면 부서지고 범하면 타버려서 그 형세가 마른 가지나 썩은 가지를 꺾은 것과 같이 쉬운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옛날 주(周) 나라에 있어서는 정 무공(鄭武公)과 위 문후(魏文侯)요 당 나라에 있어서는 곽자의(郭子儀)ㆍ이광필(李光弼)이 이런 분들입니다. 그런 시대에도 얻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하대(下代)이겠습니까. 대저 이와 같이 얻기가 어려운데 우리나라의 많은 선비들은 태학관(太學館)에 올빼미가 낢을 통분히 여기고 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을 부끄럽게 여겨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개미 같은 군사를 모은 자가 곳곳마다 일어나지 아니한 곳이 없어 정신으로 싸우니, 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충과 의가 모두 열렬하여 정성이 금석(金石)을 꿰뚫은 것은 전라도가 제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조종 2백 년의 교화가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난리를 당한 즈음에 분발하게 하고, 호남의 의사들이 더욱 그 가운데 흥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므로 임금께서 파천하시고 백관이 도망해 숨으며 빛나던 종묘사직이 이미 기장이 우거진 폐허가 되었는데도, 임금께서 다행히 여기시는 바는 전라도의 군사가 완전한 것입니다. 피란하는 백성들이 도마 위의 고기와 솥 속의 물고기를 면하지 못하고 유리(流離)하는 고생이 이미 극도에 달하였는데도, 백성들이 믿는 바는 전라도가 그 지킴이 견고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아래의 희망이 모두 전라도에 있을 뿐 아니라 왜적이 두려워하는 바도 역시 호남 한 도이니,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실로 물러앉아서 매우 위급한 오늘날에 기대를 저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가(大駕)를 눈과 서리 같은 모진 고생 가운데서 맞아 모셔올 것을 생각해야 하고 백성이 물과 불 같은 재난에 빠진 것을 보고 건져낼 것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힘을 다하여 국사에 절충하는 절개를 지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선등(先登)하는 용맹을 바치는 이것이 장군이 바라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도 60고을의 남은 백성 중에 산골에 숨은 자가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언제나 끝남이 있을 것인가.” 하는 글귀를 읊고, 호남을 바라보고는 매양, “왜 날을 지체하는고.” 하는 시를 읊조리면서 피란한 가운데서 목을 늘이고 바라는 것이 여후(黎侯)가 숙백(叔白)을 바라는 것보다 심함이 있습니다. 이제 겨울철이 닥쳐 추위의 위엄이 치성하니 각기 나라에 보답한 마음을 열렬히 가지고 앞다투어 원수 갚을 칼날을 갈아서 멀리 풍상의 고생을 무릅쓰고 발섭(跋涉)하는 괴로움을 꺼리지 말아서, 금릉(金陵)의 달밤에 깃발이 펄럭이고 감문(甘門)의 서리에 북소리가 들리어 즐거이 부르짖는 소리는 산이 무너지고 물이 뒤집는 듯 뛰고 날치는 기운은 번개가 번쩍거리고 뇌성이 달리는 듯하여, 그 뜻이 장차 길보(吉甫)의 토벌을 따르고,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의 전진을 좇아 궁금(宮禁)을 숙청하고 왕국을 평정하리니, 이것이 어찌 헛되게 갔다가 헛되게 돌아오는 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은 우리 백성이 북치는 소리를 듣고는 비록 바구니의 밥과 병에 넣은 장[簞食壺漿]을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영접하지는 못하나마 모두 기쁜 빛으로 서로 고하기를, “우리 장군은 위무(威武)와 용략(勇略)이 의를 제일로 삼는 분이로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장사(將士)가 구름처럼 모이고 호령이 엄숙하게 행하며 군세(軍勢)가 이와 같이 장할까.” 하여, 이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자주 이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적을 죽이는 데는 모두 일곱 발자국 안에 허물없기를 기약하여 대를 쪼개는 형세와 매[鷹]처럼 드날리는 공을 하루아침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일에 전도(前導)가 밤에 놀라 망녕되이 대군이 별처럼 흩어지게 만들어 적을 잡을 기세를 놓쳤으니 이것이 어찌 장군의 실책이리오. 실로 영남의 군사들이 미친 개 같은 왜놈들에게 겁을 내는 것이 벌써 하루아침 하루저녁의 일이 아니므로, 적이 우리를 추격한다는 말을 그릇 전하여 퇴군한 죄를 가지고 마침내 장군의 군사로 하여금 회군할 의사가 있게 한 것입니다. 아! 백 번 싸워 백 번 패하여도 마지막에 한 번 이기는 것만 같지 못하거늘 어찌 한 번 놀란 일로 가고 머무는 것을 결정하리오. 대저 근왕한다는 것은 반드시 근왕하는 실제를 다한 연후에야 그 명칭에 맞추어 그 직책을 저버리지 아니한다 할 것입니다. 강회(江淮)의 외로운 성으로 감히 반역한 갈노(羯奴)를 항거하고 죄를 성토하는 한 장의 편지로 능히 백만의 군사를 물리쳤으니, 만고 이래로 의병이라 칭함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무릇 이 몇 사람이 만일 혹 적세의 강약을 비교하고 한 몸의 이해를 헤아렸다면 그 이름을 듣건대는 의사(義士)와 같은 점이 있지마는 그 실지를 돌아보면 도리어 겁쟁이와 같으니 의에 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군자는 그 실지를 다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장군은 맹렬하기가 범과 같은 용사와 곰과 같은 군사를 끼고 하늘에 뻗치는 칼을 짚으며 해를 휘두르는 창을 잡고서 의병으로 이름하고 호남의 의사를 끼고 왔으니 그 이름이 장하지 않습니까. 난을 평정하여 바른 데로 돌림이 이 한 걸음에 있고, 엎어지는 것을 붙들고 위태로움을 유지하는 것도 이 한 걸음에 있으니, 그 맡은 것이 중하고 그 책임이 큽니다. 그렇다면 어찌 소장부(小丈夫)처럼 싸워서 이기면 의기가 등등하고 싸워서 패하면 군세가 움츠러들어서 한 번의 승부 사이에 진퇴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반드시 의병의 군문에 위엄이 사랑함보다 앞서고 군령이 엄숙하여 오직 의(義)를 따른다면, 방숙(方叔)의 계책이 장하여 매우 치성하던 적세가 스스로 위축되어 날로 위축된 강토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맹시사(孟施舍)의 용맹을 굽히거나 조괄(趙括)의 겁(怯)을 내어 도끼가 이지러지지도 않았는데 오던 길로 수레를 속히 돌린다면 어찌 환영하였던 백성이 실망할 뿐이겠습니까. 또한 성상이 회복하실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적에게 약함을 보임이 또한 심할 것입니다. 생(生)은 날뛰는 적의 세력이 이로부터 모진 독을 함부로 뿜고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이 더욱 물과 불에 빠진 고통을 당할까 염려합니다. 그런즉 장군이 이번에 가시는 것을 혹자는 국가의 불행이라 합니다. 애당초 사방에 두루 의론하여 의기를 떨쳐 군사를 모집하던 실제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 이름과 그 실지가 현저히 다르니 혹자가 의병이라 말하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나이다. 바라건대 장군은 생각하소서. 또 가는 것을 속히 할 수 없는 이유는, 지난 7월에 성상께서 손수 쓰신 조서를 만 리나 되는 평안도에 반포하시어 도탄에 빠진 남은 백성을 위로하고 군사를 모집한 의사들을 표창하셨습니다. 한 장의 윤음으로 신자의 정성을 격려하고 충의를 가상히 여김이 호남의 장수와 군사에게 더욱 극진하시니, 전하의 명철하심으로 어찌 모르고 이같이 칭찬하겠습니까. 과감한 기풍이 이미 무사할 때에 증험되었으므로 충성과 의분은 세상이 요란한 뒤에 더욱 미더웠던 것인데, 이제 적의 굴혈에 와서 벤 머리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고 창과 칼을 거두어 넣으며 빠진 이를 건지러 왔던 수레를 장차 돌리려 하니, 비록 젖을 바라고 우는 어린애는 돌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파천해 계신 전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모구(旄丘 앞이 높고 뒤가 낮은 언덕)의 칡이 서도의 풍상에 마디가 변하였고 깃발이 오기를 바라는 기대는 한갓 경동의 부로들에게만 간절하니, 처량한 기상이 기하(岐下)의 천도(遷都)에 견줄 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중흥을 생각하는 형세는 다만 호남의 의사들을 믿는데, 군사를 주둔한 지 10일 만에 혈전(血戰)하는 정성을 바치지 아니하니 장차 하늘이 돌보지 않음인가. 어찌 불행함이 이에 이르는가. 영남의 군사는 흩어지고 도망한 중에 불러 모았으니 흙 무너지듯 붕괴되던 나머지에 여러 번 물러감이 진실로 형세가 그러하지마는, 장군의 군사는 강하고 날래며 용감함이 견줄 데 없는데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 대한 의리를 알면서도 오히려 장한 기운이 꺾이어 도리어 군사를 돌리겠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전일에 올 때에는 한갓 아녀(兒女)들의 슬퍼함만 있었고 지금 돌아갈 때에는 피리와 북으로 환송함이 없으리니, 내일 아침 호남으로 가는 길에는 산하(山河)에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부로들이 물어보면 장차 무슨 말로 답하시렵니까. 다만 부로에게 답할 말이 없을 뿐 아니라 호남 의사의 낙담함이 장차 장군으로부터 비롯할 것입니다. 상가 원하건대, 장군은 종묘사직이 폐허가 될 것을 깊이 애통히 여겨서 다시 근왕의 정성을 굳게 할 것이요 돌아가는 걸음을 빨리하지 마소서. 남도를 수복하여 소목공(召穆公)의 경영을 성취하고 이수(李收)의 토벌이 성공할 때는 지금이 그때입니다. 저는 무(武)로는 적을 막을 재주가 모자라니 창을 메고 싸우는 노력도 감당할 수 없고, 문(文)으로는 적을 퇴각시킬 수 없으니 어찌 무의(無衣)의 시를 화답하겠습니까. 장차 신포서(申包胥)의 정성을 본받아서 진(秦) 나라 뜰에 통곡 하고저 하나 갈 길이 아득하니 누구에게 의탁하리오. 멀리 북극(北極 임금의 별을 상징함)을 쳐다보니 슬픈 눈물이 하늘에 사무칩니다.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는 우뚝한 우리 장군이 지금 세상의 곽자의와 이광필로 기린각(麒麟閣) 위에 공이 반드시 제일이 되어 개선(凱旋)하는 날에 문무(文武)의 덕을 칭송하여 다시 〈6월편〉을 노래하기를 원하나이다. 장군은 장한 기운을 더하시어 곤이(昆夷)의 주둥이를 무찔러 주소서. 도망해 숨어 다니는 중에 소리를 삼키는 울음을 견딜 수 없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생각하소서.
○ 호종 전연서 별좌(扈從典涓署別坐) 경상도 고령 사람 김응정(金應禎)이 전하는 변란 후의 소식은 다음과 같다.
당초에 사변을 듣고는 모든 일이 창황하였고, 또 한 사람도 장수될 만한 사람이 없어 이일(李鎰)은 함부로 싸워서 처음은 대군이 패하였고, 신립은 한신도 아니면서 배수진(背水陣)을 쳐서을 쳐서 또 온 나라의 장사(壯士)를 다 죽였다. 주상과 조정은 항상 신(申)ㆍ가(李)를 장성(長城)처럼 믿었다가, 두 장수가 패한 것을 듣고는 인심이 놀라고 당황하였고 한두 정승이 처음으로 서도로 파천할 의론을 내어 경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대가가 도성을 떠나시게 되었다. 온 성중의 남녀들이 거리를 메워 물결처럼 달려서 길에 엎어지듯 자빠져서 구렁에 가득 찼는데, 대가를 호위하여 따르는 자가 겨우 수십 인이었다. 평양에 행차를 멈추시고 강변 7고을의 토병(土兵)을 긁어모아 임진강에서 방어하였더니, 적이 산곡에 군사를 감추고 수일 동안 약한 형세를 보였다. 이때에 신할(申硈)이 중군이 되고 이빈(李薲)ㆍ이천(李薦)이 좌우군이 되었는데, 좌우군이 이르기 전에 중위(中衛)가 먼저 돌진하였다. 적의 복병이 사면에서 일어나자 우리 군사가 혹은 물 속에 던져지고 혹은 칼날과 탄환에 죽어서 흐르는 송장이 강물을 막았고, 남은 군사들은 낙담하고 정신이 없어 투구를 떨어뜨리고 말을 버리고서 모두 무너져 흩어졌다. 적이 송경(松京)과 황해도를 함락시키고 대동강 가에 세 군데 진을 쳤다. 호종해 온 모든 신하들이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 성을 지키고 매복을 설치하며 명주 30여 동(同)과 포목 40여 동, 군량 7만여 석을 거두어들이니 군세가 조금 떨치고 인심이 분발하기를 생각하였다. 창성(昌城)의 관인(官人) 임욱경(任旭慶)이 모집한 용사들이 자원하여 먼저 올라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쳐서 적의 중위를 섬멸시키고 적의 선봉장을 베니 적의 세력이 크게 꺾이고 양곡이 다하여 물러가려 하였는데, 중화(中和) 사람이 향도(向導)가 되고 경통사(京通事) 김덕겸(金德謙)이 계책을 도와주어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인도하여 오니, 수장(守將) 김억추(金億秋)ㆍ성취(成鷲)ㆍ박석명(朴錫命)ㆍ김응서(金應瑞) 및 감사 송언신(宋言愼), 병사 이윤덕(李潤德) 등이 모두 달아났다. 그러나 성을 지키기를 심히 엄히 하였다. 임금이 울면서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한 몸은 상관할 바 아니나 차마 아녀들이 욕을 당하는 것을 앉아서 볼 수 없다.” 하고, 거가가 장차 출발하려고 성문을 열도록 명하니 재상들이 굳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듣자니 두어 사람이 출성하기를 청하는 이가 있었다 한다. 윤좌상(尹左相)은 혼자 성 위에 앉았다가 적이 성을 포위한 연후에 단기(單騎)로 나갔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기로 계책을 결정하여 중전(中殿)을 강계(江界)로 보내고 동궁(東宮)을 강원도로 보내며, 임금은 하루 밤낮에 수백 리를 달려서 용천(龍川)에 멈추었다. 여러 신하들이 붕괴되어 흩어진 두어 장수를 잡아 베고 김명원(金命元)으로 원수(元帥)를 삼아서 순안(順安)에서 방어하여 여러 번 싸워 다 이겼으므로 적이 감히 마구 몰아가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요양(遼陽)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더니, 중국의 유격 장군 사유(史儒)ㆍ왕유정(王惟貞)ㆍ왕수관(王守官) 대조변(戴朝弁)ㆍ서일현(徐一賢) 및 부총병(副總兵) 수양정(修養正)과 관전보 참장(寬典堡參將) 조승훈(祖承訓) 등이 나오고, 광녕위 총병(廣寧衛摠兵) 양소(楊紹)가 동요(東遼) 동양참(東陽站)을 출동시켜 감독하였다. 형양성 밑에는 논이 많다. 또 비가 왔다. 사유가 군사를 나누어 4초(哨)로 만들어서 매 초마다 각기 우리 군사 백 명으로서 전도를 삼아서 밤을 무릅쓰고 성을 부수어 일시에 돌입하니 적이 놀라서 대동문(大同門)으로 나왔다. 우리 군사가 1초는 인도해 들어가고 나머지 3초는 들어가진 아니하니, 적이 다시 싸워서 사유가 죽고 중국의 말 5천 필과 중국 병사 4백여 명을 상실하였으며 나머지는 다 돌아왔다. 예조 판서를 보내어 요동에 청병하였더니, 구련성(九蓮城) 양 총병(楊總兵)이 인하여 북경의 조정에 아뢰었다. 절강(浙江) 장수 낙상지(駱尙志)는 손으로 천 근의 무게를 들어 호를 낙천근이라 하는 자인데 그와 송응창(宋應昌) 등이 포수(砲手) 3천을 거느리고 근일에 구원하러 나올 것이라 하였다. 황제가 사신 설번(薛蕃)을 보내어 주상을 위로하고 하루를 머물다가 돌아가고 중국 병사 수만이 왔는데, 모두 평지에서 달리기만 일삼고 활 쏘는 것은 훌륭하지 못하므로 당분간 포수가 오기만 기다렸다. 동궁은 한 달 여를 이천(伊川)에 머물다가 적병이 사방에서 오자 성천(成川)으로 옮겨서 머물렀다. 바야흐로 영변(寧邊)으로 향하려 할 때에 동궁을 모신 신하는 영상 최흥원(崔興元), 우상 유홍(兪泓), 이상상(二上相) 최황(崔滉)이요 임금을 모신 여러 신하는 풍원군(豐原君) 유성룡(柳成龍), 좌상 윤두수(尹斗壽)ㆍ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예조 판서 윤근수(尹根壽), 형조 판서 한응인(韓應寅)과 구사맹(具思孟)ㆍ유은(柳垠)ㆍ심충겸(沈忠謙)ㆍ박충간(朴忠侃)ㆍ정사위(鄭士偉)ㆍ이충원(李忠元)ㆍ심희수(沈喜壽)ㆍ오억령(吳億齡)ㆍ이국(李)ㆍ이정립(李廷立)ㆍ홍인상(洪麟祥)ㆍ박응복(朴應福)ㆍ정곤수(鄭崑壽)ㆍ민준(閔濬)ㆍ홍성민(洪聖民)ㆍ이해수(李海壽)ㆍ백유함(白惟諴)뿐이었다. 임금이 평양을 나올 때에 김귀영(金貴榮)으로 함경도 도체찰사를 삼아서 이양원(李陽元)ㆍ황정욱(黃廷彧) 부자 등과 더불어 임해군(臨海君)ㆍ순화군(順和君)을 모시고 함경도로 가게 하였다.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게 될 경우에 행차를 따를 이를 물으니, 위에 열기한 신하들이었다. 유홍과 최황으로 하여금 종묘의 5신주를 모시고 동궁과 더불어 영동(嶺東)으로 들여보냈다. 적병이 함경도로 침입하자, 김귀영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榮)이 우수하다 하여 도순찰사로 정하여 남ㆍ북병사를 통제하게 하였더니, 북병사 한극함(韓克諴)이 그 밑에 있기를 부끄러워하여 나이를 다투고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군졸들이 단결되지 아니하고 겸하여 함흥(咸興)의 생원 진대유(陳大猷)가 처음으로 반역하였다. 왕자와 여러 재신(宰臣)들이 함께 회령으로 들어가자 관노(官奴) 국경인(鞠景仁)이 공모하고 적을 끌어들여 두 왕자와 그의 부인, 기타 조신(朝臣)들을 잡아서 왜장에게 항복하였다. 왜장이 가마에 왕자 및 여러 재신들의 부인을 메고서 가는 곳마다 객사에 거처시키고 문천(文川)에 이른 지가 지금 거의 한 달이나 되었으니, 지금은 아마 낙양(洛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함경 감사 유영립(柳永立) 및 판관과 그의 가족들이 포로가 되었다가 유영립은 도망해 나왔고, 새 감사 윤탁연(尹卓然)은 겨우 평안도 경계 설한령(薛罕嶺) 밑에 별하소보(別河小堡)를 보존하였다. 적이 회령을 포위하고 6진을 치고서 강을 건너 호(胡)를 치자, 모든 호들이 멀리 도망하고 그 부락을 다 불태우고 돌아왔다. 전일에 청원사(請援使)가 요동에 이르러 수양정(修養正)의 말을 들었는데, 우리 사신이 중국 병사가 패한 데 대해 사과하니, 답하기를, “군사는 사지(死地)인데 어찌 우리만 살고 저들만 죽으란 이치가 있는가. 그리고 천시(天時)ㆍ지리(地利)ㆍ인화(人和)가 귀한 것인데 전해 들은즉 평양의 지세는 모두 진흙땅이요 또 논이 많다 하니 이것은 지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계절이 한창 장마비가 왔으니 이것은 천시를 얻지 못한 것이요 상국(上國)과 본국이 언어가 통하지 못하여 뜻이 통하지 못하니 이것은 인화가 없음이니, 그 때문에 패한 것이다. 반드시 남병(南兵)이 오고 겸하여 들판이 마르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달리어 적을 쫓을 수 있을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여 근일에 나가서 구원하리라.” 하였다. 옛날 주 나라 말기에 천자가 7국의 전쟁을 구하기 어려웠거늘, 하물며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로 북으로는 오랑캐에 인접하고 남으로 섬 왜놈[島夷]에 이웃하여 전쟁이 늘 연달았어도 중국 병사가 와서 구원함이 이런 극진함에 이른 적이 없었다. 이로써 본다면 회복할 수 있는 일맥의 희망을 이것으로 알 수 있고, 남쪽에서 의병이 곳곳에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것이 큰 기회이다. 다만 들은즉 적이 경영한 지 여러 해 만에 그 소굴을 거의 비우고 온 것은 재물을 도둑질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처음 나올 때에는 여러 장수에게 부서를 나누어 각도에 흩어져 들어가서 분탕하고 전복시킨 연후에 명년 2월에는 요동을 범하기로 계획을 하였다는데, 지금은 평양에서 항거하고 각도에서 근왕하는 군사와 중국 병사가 구름처럼 모이니, 적의 계획이 아마도 중간에 저지될 것이다. 다만 함경도와 강원도의 모든 적이 경성과 평양의 모든 적과 더불어 성세가 서로 응하여 동래로부터 평양에 이르기까지 길에 막힘이 없어 적들이 모두 큰 도회지를 점령하였고 우리 군사는 곳곳의 들에 둔쳐서, 주인과 객이 바뀌어 괴로움과 편함이 형세가 다르다. 또 행재소를 호위하는 이, 동궁을 따르는 이, 순안에 있는 원수의 소관, 강동(江東)에 있는 이일(李鎰)이 거느린 바, 삼현(三縣)에 있는 김응서(金應瑞)가 거느린 바, 최원ㆍ김천일의 의병 만여 명과 호서(湖西)ㆍ삼포(三浦)ㆍ해서(海西)에 각기 감사ㆍ순찰사ㆍ방어사 등이 모두 군관 수천 명씩을 거느리니, 군사는 작고 장수는 많아서 여러 도에 의병을 일으켜 근왕하는 장수와 군사가 무려 수십만이다. 군사와 말이 한 달 동안 먹을 양식과 콩이 적어도 수만 석은 되어야 하는데도 각 고을의 창고는 타버려서 저축이 없고, 도망한 백성과 싸우는 군사는 농사를 짓지 못해 수확이 없어 얼마간의 시일에 복구할 수 없을 듯하니, 군량을 판출하기 어렵다. 하늘이 만약 우리를 돕는다면 평양을 수복하고 경성에 환도할 수 있으련만 통곡한들 어찌하랴. 대가는 중국 병사가 나와서 구원하여 평양의 적을 물리친다면 정주(定州)로 향하여 점차 연안(延安)에 머무를 것이다. 이정암(李廷馣)ㆍ김대정(金大鼎)ㆍ전현룡(田見龍)이 함께 연안을 지켰는데, 적이 7일 밤낮을 온갖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능히 성을 잘 지켜서 마침내 완전히 보존하였다.
○ 구례(求禮)의 석주(石柱)와 운봉(雲峯)의 팔량(八良) 등에 새로 성을 쌓다. 두 곳은 호남의 요해지로 전에 성터가 있었다. 이때에 본도 방어사 곽영(郭榮)이 9월부터 항시 남원에 주둔하면서 조방장ㆍ별장 등을 영남 경계에 나누어 보내어 성을 쌓아 지키게 하였다. 석주에는 별장 및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이 지키고, 팔량에는 조방장 이복남(李福男)과 운봉 현감 남간(南侃)이 지키며, 정동(井洞)의 육십치(六十峙)에도 모두 지키는 장수가 있어 매복을 설치하여 방비하다. 이복남은 곰티[熊峴]에서 힘껏 싸운 공으로 당상에 승진하다.
○ 소모관 안민학(安敏學)이 동궁에게 명령을 받아서 호서에서 군사와 말을 조달하다.
○ 경상도 군량 차사원(軍糧差使員)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敎) 오운(吳澐)의 통문은 다음과 같다.
금년의 왜변은 개국 이래로 우리 동방에서 있지 않던 바이니, 군부(君父)의 욕됨과 사사 가문의 화는 말하면 통분하다. 어찌 차마 다 말하랴. 흉한 놈들을 제거하고 원수를 갚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우리와 적이 서로 버티어 지금 벌써 8개월이란 오랜 시일이 되었다. 온 나라가 함몰되어 착수할 땅이 없으니, 우선 우리 영남 우도로 말한다면 전란을 면하여 심히 파멸되지 않은 데가 겨우 7, 8고을 인데 앞뒤로 적을 맞아 조석을 보장할 수 없어, 불타는 처마의 제비요 솥 속에 든 물고기에 불과할 뿐이로다. 다행히 의병 제군과 적개(敵愾)한 장사(壯士)들의 힘을 입어 오늘날까지 보전하였는데, 군량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다되고 군사들이 붕괴되어 흩어짐이 서로 잇달아서 손을 묶은 것처럼 방책이 없다. 신농(神農)이 이른바, ‘비록 돌성 천 길과 탕지(湯池) 백 보가 있더라도 곡식이 없으면 능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의 급한 걱정이로다. 전란을 참혹히 겪었으매 칼날에 죽은 자가 거의 반이나 되고 남은 군사는 아직도 놀라 산곡에 숨어서 굶주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자가 많으니, 만약 양식을 쌓아 놓고 불러 모으면 10일 동안에 모두 다시 모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일은 곡식이 있으면 군사가 있고, 군사가 있으면 적을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관가의 곡식은 탕진되고, 6월 이후에는 오로지 민간의 곡식에 의뢰하였는데 그것이 다되어 계속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전일의 납속(納粟)은 관에서 지명하여 정한 것이요 자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 본즉 3석으로부터 1백 50석에 이르기까지 차등이 있게 관직으로 상을 주고 허통(許通)하고 면천(免賤)하게 되었으니 압입하는 바에 따라서 사목(事目)이 분명하고, 만약 납입한 것이 규격에 꼭 맞지 않는 것도 반드시 받아들이면 공사(公私)에 서로 이익될 것이다. 대저 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는 것은 각기 신자의 의리를 다하는 것이니, 어찌 상을 내리기를 기대하겠는가. 다만 관직의 임명에 응하여 국가의 수용에 보조하는 것은 도리에 합당한 것으로 더욱 부득이한 것이다. 하물며 양식이 다되어 군사가 흩어져 만약 마구 쳐들어오는 적을 막지 못하여 약간 보존되었던 땅도 끝내 적의 소굴이 된다면, 몸도 또한 보존하지 못할 것인데 비록 곡식이 있다 한들 먹을 수나 있겠는가. 일의 득실은 다른 이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니 보수를 받지 못할까 의심하지 말고 당분간 내 곡식을 가졌다고 다행으로 여기지도 말며 서로서로 권유하여 기회를 잃지 말라. 비인(鄙人)은 이 급하고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 국가에 보답할 방법이 없다가 마침 군량을 판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진실로 원하건대 제군 중에 납입하기를 원하는 자와 더 납입하는 자는 힘의 미치는 데 따라서 서명(署名)하고 아울러 석수(石數)를 기록하라.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12월. 행재(行在)에서 동요로 불리는 시가 있으니,
부슬비 서울 거리에 버들빛이 푸르니 / 細雨天街柳色靑
봄바람이 불어들매 말발굽이 가벼워라 / 東風吹入馬蹄輕
전일 대관들 환도하는 날에 / 舊時名宦還朝日
즐거운 개가 소리 한양성에 가득하리 / 奏凱歡聲滿洛城
하다. 혹자는 회복될 징조라고 말하였다.
○ 주상전하께서 먼 변방에 오래 체류하니 비감하여 시를 읊기를,
국사가 창황한 날에 / 國事蒼黃日
누가 곽ㆍ이의 충성을 능히 하랴 / 誰能郭李忠
빈을 떠남은 큰 계책을 위함이요 / 去邠存大計
회복은 제공을 믿네 / 恢復仗諸公
관산의 달에 통곡이요 / 慟哭關山月
합수의 바람에 상심일세 / 傷心鴨水風
조신들아 금일 후에도 / 朝臣今日後
오히려 다시 서인이니 동인이니 하려나 / 尙可更西東
하였다.
○ 최원(崔遠)은 노쇠하였으므로 면직되고, 진도 군수(珍島郡守) 선거이(宣居怡)로 전라 병사를 삼다. 곽준(郭峻)의 관직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하고 조방장 이복남(李福男)으로 전라 방어사를 삼다. 거이는 이때에 수원(水源)에 있었는데, 최원이 강화(江華)로부터 나와서 인부(印符)와 군사를 인계하다.
○ 남원 진사 방처인(房處仁)이 군사를 모집하여 광양(光陽)의 도탄(陶灘) 진주(晉州)와의 접계이다. 에 매복을 설치하고, 도탄의복(陶灘義伏)이라는 네 글자를 전사(篆寫)로 새겨서 군장(軍章)을 삼다.
○ 군사가 일어난 지 1년 만에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여 약간의 남은 저축도 모두 탐관(貪官)의 손에 들어갔으므로 벼슬을 파는 것이 사세가 부득이하게 되다. 1백 석을 내면 3품의 되고 30석을 내면 5품을 주다. 계사년ㆍ갑오년에 이르러서는 120석만 내면 가선당상(嘉善堂上)에 승진시켰으나 응모하는 사람이 없었다.
○ 경상 좌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도내에 유둔한 적이 인동(仁同)ㆍ대구(大邱)ㆍ청도(淸道)ㆍ밀양(密陽)ㆍ기장(機張)ㆍ동래(東萊) 및 함창(咸昌)으로부터 당교(唐橋) 등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유둔하고 있는데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심히 치성하니, 신은 비록 한 도의 힘을 다하여서라도 반드시 이 적을 먼저 치는 것으로 목표를 삼겠습니다. 병사 박진(朴晉)과 우후(虞侯) 권응수(權應銖), 밀양 부사 이수일(李守一) 및 부장(部將) 정대임(鄭大任) 등 모든 장수가 모두 안동ㆍ예천(醴泉) 등지에 모여서 경영하고 살핀 지가 이미 수개월이 가까우나, 적이 편리한 지점을 점거하고 있고 더구나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어 아직까지 한 번도 공격하지 못하니, 통분하고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여 정예한 군사 2천 명을 선발하여 응수에게 맡겨서 기회를 보아 밤에 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장차 10여 고을의 군사와 말을 징발하여 의성(義城)ㆍ안덕(安德) 등지에 주둔하여 인동의 적세를 엿보아 만약 기회만 오면 크게 한번 공격할 것이며, 만약 불편하면 날랜 군사를 가지고 밤에 습격하려 합니다. 또 병사로 하여금 대구의 적을 밤에 공격하게 하여 이미 약속을 정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군량이 매우 어려워서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싸가지고 오도록 하자니 민간에 한되 한말의 저축이 없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잇달았으며, 관량(官糧)을 주자 하니 각 고을의 창고가 간 곳마다 비었으니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안동 향병 대장(鄕兵大將) 김해(金垓)ㆍ이정백(李廷栢)ㆍ배용길(裴龍吉) 등이 좌순찰사에게 올린 글은 다음과 같다.
1. 기율(紀律)을 세울 것입니다. 무기는 흉한 기구요, 싸움은 위태로운 일인데 쟁기로 밭 갈고 호미로 밭 매던 백성들을 합하여 흉하고 위태로운 땅으로 가게 하면서 먼저 기율을 세우지 않으면, 비유컨대 양떼를 몰아서 맹수를 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능히 성공이 있으리오. 옛말에 이르기를, “군사가 장수를 두려워하는 자는 이기고 적을 겁내는 자는 패한다.” 하였으니, 만약 군사가 적을 겁내지 않는다면 그 두려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율을 세우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기율을 버리고서 군사들이 흩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사닥다리 없이 하늘에 오르고, 배를 버리고서 바다를 건너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에 패전한 장수들은 모두 분명한 벌을 피하고 가르치지 못한 백성만이 엄한 벌을 당하니, 도망한 군사만을 베어도 군정(軍政)이 날로 해이해지는 것보다는 한 장수를 베어 기강이 절로 서는 것이 낫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한 사람을 베는 것은 만 사람을 온전히 하는 바이다.” 하였으니, 원컨대 상공(相公)은 기율을 세워서 붕괴되어 흩어짐이 없게 하소서.
2. 관하 수령의 출척(黜陟)을 엄하게 할 것입니다. 천지 사이에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은 모두 도적이라 하는데, 밖에 있는 도적은 그 해가 얕고 안에 있는 도적은 그 해가 깊으니, 밖에 있는 도적을 치려 하면 먼저 안의 도적을 제거하여야 합니다. 무릇 지금에 민심을 잃어서 붕괴하게 만든 것은 실로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들이 토색질하고 빼앗아 먹기를 혹독히 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나, 대궐이 아득하고 멀어서 상벌(賞罰)이 일정하지 못하고 겸하여 상공께서 남의 허물을 용서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감화시키려 하는 까닭에, 저 큰 쥐들이 윗사람의 용서하는 도량을 가만히 엿보아 스스로 벌을 면할 꾀를 쓰고 반이나 죽게 된 백성들의 피를 날로 짜내어 더욱 몸을 살찌울 교묘한 꾀를 부리니, 그 해독이 도리어 왜보다도 심함이 있습니다. 가까운 고을에 몇몇 수령의 죄상이 현저한 것은 상공께서 이미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옛날 범방(范滂)이 천하를 깨끗이 맑힐 뜻이 있자 소문만 듣고 인끈[印綬]을 풀어 놓고 가는 자가 서로 잇달았으니, 원컨대 상공은 수령의 출척을 엄히 하여 민적(民賊)을 제거하소서.
3. 좋아함과 미워함을 밝힐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좋아함과 미워함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착한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요 악한 것은 사람들의 미워하는 바입니다. 천하에 어찌 좋아함과 미워함이 분명치 않고서 능히 국가를 보존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에는 위로 임금과 신하에서 아래로 친구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서하는 것으로 덕을 삼고 충고하는 것을 잘못으로 보아서, 할 말을 하니 않고 구차스럽게 날을 보내어 좋아함과 미워함이 분명하지 않고 시비가 정하여지지 못하여 인심이 의혹하여 좇을 바를 알지 못하니, 국가가 위태로움이 대개 여기에서 말미암았습니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곽공(郭公)이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쓰지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면서도 능히 제거하지 못하여 망하는 데 이르렀다.” 하였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어진 이를 보고도 등용하지 못하고, 착하지 못한 이를 보고도 멀리하지 못하는 것은 태만함이다. 사람이 좋아하는 바에 반대되면 재앙이 반드시 몸에 미친다.” 하였으니, 원컨대 상공께서는 좋아함과 미워함을 밝혀서 인심을 일정하게 하소서.
4. 비용을 절약할 것입니다. 이 난리를 당하여 각 고을이 텅 비었는데, 사신을 접대하는 것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니 군관이 많아서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상시에 있어서도 또한 감당하기 어렵다 하거늘 지금 이 난리에 어찌 당하겠습니까. 소위 군관이란 것은 비록 없을 수는 없으나 반드시 쓸 때가 있는 것이요 보통 출입에는 인도하고 따르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니, 군관이 비록 적더라도 위의를 갖출 만합니다. 상공께서 만일 싸움터로 달려갈 뜻이 있다면 병사 이하가 모두 상공의 군관인데, 하필 잡되고 지저분한 무리들을 써야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상공은 비용을 절약하여 한 폐단을 제거하소서. 무릇 이 네 가지 조건은 비록 훌륭한 계책은 아니라도 진실로 난을 평정하려면 이것을 버리고는 계책이 없습니다. 다만 적을 토벌하는 방책은 이 네 가지보다 급한 것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에 전일에는 군사를 뽑는 방법을 건의하여 전구(前驅)에 쓰게 하였더니, 도리어 사패(射牌)의 항오에 편입하여 마침내 행차를 호위하는 것으로 삼으니 몸을 부지하는 데도 겨를이 없는데 용맹을 뽐낼 것은 어느 때이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상공이 능히 이 네 가지 조건에 반드시 먼저 유의한 연후에야 군사를 가르치고 적을 토벌할 수 있는 것이요, 만약 이 말을 좋다고만 하고 깊이 살피지 아니하여 썩은 선비의 말이라고 본다면, 한신(韓信)ㆍ백기(白起 진(秦) 나라의 명장)가 장수가 되고 군사를 1백만이나 거느린다 해도 상공이 장차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대저 건의하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실용에 적합함이 어렵고, 말을 구하는 것이 어려움이 아니라 채택하여 시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어리석은 저희들은 이미 건의는 하였으나 그 말이 실용에 적합할지 않을지는 알지 못합니다. 혹시 상공께서 전일에 말을 구하던 성의를 그대로 지니어 반드시 채용하여 시행하시면, 국가를 위해 수치와 욕을 씻는 데에 아마도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상공은 굽어 살피소서.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함창 의병 소모관 전 봉교(奉敎) 정경세(鄭經世)는 좌도 각 고을 수령 및 사림 제군자(士林諸君子)에게 격문으로 고하나이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난리가 평정되지 않은 때 세 계절이 이미 다 지났으나 원수의 적이 아직 치성하여 평정하고 회복하기가 거의 기약이 없으니, 신하와 백성 된자로서 적과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통분함은 피차가 마음이 한 가지 일 것이니, 차마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대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인이라 스스로 헤아려 보매 유위(有爲)할 수가 없는 줄을 극히 잘 알고 있으나, 분격한 뜻으로 능히 힘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의병으로 모이는 거사를 초가을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사의 세력이 고단하고 약하여 아직도 성 하나 공격하여 부수지 못하고 진 하나 섬멸하지 못하였으며 구구이 베어 죽인 것이 비록 반백(半百)에 이르렀으나, 정위새[精衛鳥]가 돌을 물어다 바다를 메우매 바다는 메워지지 아니하니 이 사이에 통분하고 민망한 생각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수년 동안 전란의 나머지에 연로(沿路) 일대에는 공사(公私)가 텅 비어 군량이 땅을 쓴 듯 떨어졌는데 판출할 길이 없어 온갖 방법으로 경영하여 근근이 지탱한 지가 지금 이미 6개월입니다. 사방으로 망연히 돌아보아도 호소할 곳이 없어 장수와 군사가 굶주리고 피곤하여 용맹을 베풀 곳이 없으니, 수양(睢陽)의 군사는 겨우 쥐를 파먹는 것을 면하였고 동군(東郡)의 군사는 겨우 아직 투구를 삶아 먹을 지경에만 이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왼쪽에 밥이 있고 오른쪽에 죽이 있는 낙(樂)은 없고 아침에 흩어지고 저녁에 무너질 걱정이 있는데, 이러고도 여러 군자에게 고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의 죄입니다. 그윽히 생각건대, 좌도[江左]의 여러 주변에는 비록 전란을 겪었으나 적이 오래 머물지 아니하여 농사의 풍년이 평일과 다름이 없거늘 하물며 적이 가지 않은 고을도 있음이겠습니까. 남은 것을 나누어 위급한 이를 구해주고 가산을 탕진하여 군비를 돕는 것은 이것이 정히 여러 군자가 힘을 다할 시기입니다. 아,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승여가 진흙과 이슬을 맞으며 고생하시며 남은 백성이 거의 죽어가니, 연(燕) 나라의 점령을 당한 제(齊) 나라의 땅 중에 보존된 것이 몇 성이었습니까. 수천 리 조총의 강토와 2백 년 의관과 문물이 모두 왜놈[卉服]의 손과 불꽃 속에 들어갔으니, 무릇 이 땅에서 먹고 살아 이씨의 신하와 백성이 된 자라면 누구인들 창을 베고 쓸개를 맛보아 하늘에 사무치는 통분을 조금이나마 풀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여러 군자께서 피눈물을 삼키는 정성을 가지신 지가 오래일 것입니다. 위청(衛靑)은 일개 천한 종의 출신이로되 오히려, “흉노를 멸하지 못하였는데 집을 가질 수 없다.” 하였고, 복식(卜式)은 한 평민이로되 오히려, “재물이 있는 자는 관에 납입하고, 용맹이 있는 자는 변방에서 죽으면 흉노를 멸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 나라 때에 흉노는 반드시 토벌해야 할 죄가 없었지마는 신하된 이가 능히 그 임금을 위하여 뜻을 가다듬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무제(武帝)가 오랑캐를 물리쳐서 땅을 개척한 공이 예전 역사에서 견줄 자가 없거늘, 하물며 오늘날의 욕됨은 실로 신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는데 이겠습니까. 닥쳐올 걱정이 또 오늘보다 심함이 있을 터인즉 오늘의 일은 진실로 조금도 늦출 수가 없는데, 우리들의 정성이 능히 옛사람과 같다면 또 어찌 적을 멸하지 못하고 공을 세우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격문이 이르는 날에는 많으나 적으나 힘에 따라 각기 양식을 내어 군향(軍餉)을 도와주어서 이 모집된 군사로 하여금 붕괴되어 흩어지는데 이르지 않고 불러 모은 군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게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아, 북궐(北闕)의 애통한 교서는 모두 신자가 피눈물을 뿌려야 할 말씀이니 동해에 빠져 죽기 전에는 우리들이 목숨을 바칠 날이 이를 것입니다. 기꺼이 들으실 것이라 생각하므로 이에 충고하나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경상도 안동의 전 검열 김용(金涌)이 군사를 모집하는 통문은 다음과 같다.
아, 이것이 어떠한 때인가. 이 어찌 몸을 숨기고 해를 피하여 제 몸만 편안하기를 도모할 날이랴. 승여가 파천하고 경성이 함몰되며, 열한대의 왕릉이 먼지를 뒤집어썼고 억만 백성의 피가 땅에 흘렀다. 신하가 되고 자식이 되어 군부의 수치와 욕됨이 무궁하고, 부모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부가 되어 골육의 원통함이 이미 지극한데, 아, 죽지 않고 남은 우리가 어찌 차마 환한 대낮에 낯을 들고 팔짱을 낀 채 요망한 적을 보면서 원한을 씻을 도리를 생각하지 아니하랴. 하물며 혹독한 불길이 사방에서 치성하여 누에가 뽕잎을 점차 먹어 들어오는 것 같고, 우리들이 어육이 될 걱정은 비늘처럼 차례로 겹쳐 오니 비록 한 구석에서 구차히 살려하여도 역시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이 짐승이 된다면 모르거니와 진실로 우리 군부를 생각하여 원수와는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 수 없는 것을 안다면 어찌 한번 죽음을 결단하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생등(生等)은 복수를 결심하여 쓸개를 맛보기 여러 달이 어서 밤중에 주먹을 불끈 쥐고 관병을 모으려 하니 관병이 이미 흩어졌고, 막부(幕府)에 협력하려 하니 막부는 제 직임이 아니었다. 썩은 선비의 오활한 계책이 시설(施設)할 데 없는 줄을 오래 전부터 알았지마는 오히려 목숨을 버릴 각오를 잊지 아니함은 참으로 원수를 갚아야 할 의리가 있고 헛되게 죽어서는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용감한 사람을 얻어 심복의 동지를 삼는다면 바다를 굴리고 산을 돌리는 것도 모두 어려울 바가 없을 것이니, 저 적이 비록 많은들 무엇이 두려우랴. 이에 감히 남은 장정들에게 두루 타이르고 옆으로 중들을 모았더니 수십 일이 못 되어 수백 명이 되었다. 장차 몸을 잊고 약속에 달려가서 마음과 힘을 일치하여 나아가 죽는 것이 영광이 되고, 퇴각하여 사는 것이 욕이 되는 줄을 알 것이니, 저 도망하고 붕괴된 군사가 오직 두려워 쥐처럼 숨기에 겨를이 없는 자들과 비교해 볼 때에 그 용감함과 비겁함이 또한 현저하지 아니한가. 다만 난을 겪은 뒤에 이미 도두 탕진되어 양식은 콩 반쪽의 저축이 없고 기계는 활촉 한 개도 남은 것이 없어 우레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칠 군사가 거의 다 빈 전대[橐]만 가졌고, 기를 들고 힘을 뽐낼 무리들이 반은 빈주먹이라, 한갓 왜놈을 잡을 뜻은 간절하나 용맹을 쓸 곳이 없으니 이것이 실로 오늘의 한 가지 큰 걱정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열 집 사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것이요, 흙덩이의 보탬도 태산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한두 이웃 고을은 집이 모두 열 집이 넘고 선비가 모두 의리를 아니 적이 경계에 들어오기 전에 준비할 길이 있다. 윗사람을 위해 죽는 데에 어찌 을가(乙可)의 종이 없겠는가. 대대로 농사에 힘썼으니 또한 차달(車達)의 곡식이 많을 것이다. 진실로 원하건대, 글이 이르는 날에는 각기 정성을 다하여 충성을 바치기를 생각하여, 향병에 이미 나갔다고 핑계대지 말고 관군에 다 맡겼다고 어렵게 알지 말라. 힘이 미치는 데는 응모하기를 메아리[響]처럼 하여 혹은 자제를 보내고 혹은 종을 보내며, 혹은 군량의 소용으로 쌀이나 콩, 피곡(皮穀)이나 필목(匹木), 혹은 군기에 소용되는 것으로 아교나 깃, 전죽[箭]이나 철물 같은 것을 가지고 갖가지로 서로 도와 한번 승낙에 변함이 없으면 여러분이 가진 것 중에서 내놓기는 어렵지 않고 군수(軍需)에 쓰이는 데는 심히 관계되어 나라를 중흥시키는 정성이 이 한 번의 도움에 의뢰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만약 웅번(雄藩)과 거진(巨鎭)도 간 곳마다 흙 무너지듯 하고 용사와 명장(名將)도 모두 바람처럼 쓰러지는데 ‘백면 서생(白面書生)이 무엇을 하랴.’ 하고 한 번 웃기만 하고 힘을 써주지 아니한다면 자못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것이니, 마음을 맞추어 원수를 갚겠다는 원을 또 장차 어디에 기대하랴. 아, 이제부터는 죽고 사는 것이 마땅히 적을 치고 치지 못하는 데서 결정되리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어찌 국록을 먹고 먹지 않음으로 인하여 차별이 있으리오. 일이 성공하면 신명과 사람에게 설분(雪憤)이 될 수 있고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헛된 죽음에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니 여러 군자들은 힘쓸지어다. 《경상순영록》에서 나옴.
○ 소모사(召募使) 변이중(邊以中)이 완산(完山)에서 각 고을에서 징발한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길로 향하다.
○ 송응창(宋應昌)ㆍ이여송(李如松)이 대군을 거느리고 중국 조정에서 우리나라로 오는데 주사관(主事官) 원황(袁黃) 등이 먼저 강을 건너 용만(龍灣)에 이르러 권유문(勸諭文)을 내니, 다음과 같다.
흠차 경략방해어 왜군 병부무고 청리직방청리사 원외랑(欽差經略防海禦倭軍兵部武庫淸吏職方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사주사(司主事) 원황은 의병을 권유하여 광복(匡復)을 함께 도모하노라. 살피건대 그대 나라가 본시 문물을 숭상하고 대대로 충성을 돈독히 하더니 근자에 왜이(倭夷)가 무도하여 마구 몰아와 집어삼켜 임금과 신하가 풀밭에 파천하여 유리(流離)함이 어찌 이리도 곤한고. 대명 황제께서는 그대들이 2백 년간 신하의 직분을 삼가 지켜온 것을 생각하여 만금의 비용을 아끼지 아니하고 장수를 명령하여 와서 토벌하게 하신다. 그대 나라 가운데 어찌 종척(宗戚)으로 중한 소임을 맡아 충성과 의분이 마음에 가득한 이가 없겠으며, 어찌 현관(縣官)으로 지방을 지켜 강개히 목숨을 바치는 이가 없겠으며, 어찌 충신으로 임금이 욕되면 신하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은 이가 없겠으며, 어찌 의사로 몸을 버려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가 없으리오. 마땅히 황제께서 떨친 위엄을 받들어 속히 의병을 불러 각기 일려(一旅)의 군사를 이끌고 함께 아홉 번 토벌[九伐]할 뜻을 펴라. 지금 왜구는 비록 강성하나 그 형세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요, 그대 나라는 비록 미약하나 그 형세는 반드시 이긴다. 시험 삼아 헤아려 보자. 우선 천도(天道)로써 말하겠다. 조선의 분야는 석목(析木)의 부분에 해당하고 지난해부터 세성[木星]이 인방(寅方)에 왔는데 일본이 와서 침범하니, 이것은 우리가 득세하였는데 저놈들이 침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역행(逆行)하면 비록 강성하더라도 반드시 약해질 것이 첫째이다. 왜구는 추위를 겁내는 것인데 금년은 궐음(厥陰)이라 풍목(風木)이 하늘을 맡아서 양명조금(陽明燥金)이 초(初)의 기(氣)가 되니, 입춘(立春) 뒤에도 오히려 2, 30일 동안은 한기가 녹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시(天時)를 꾀할 수 있는 것이 둘째이다. 그대 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 성중에 있는데 새벽에 일어나 기상을 바라본즉 아름다운 서기(瑞氣)가 비단과도 같고 그림과도 같다. 그러므로 왕기(王氣)가 우리한테 있으매 형세가 반드시 회복된 것이 셋째이다. 다음에는 인사(人事)로써 논하겠다. 대국의 웅장한 군사가 범과 같고 곰과 같으며, 무적(無敵)의 대포를 한 번 쏘면 한 발(發)에 천보씩 가니 저들이 힘을 헤아리지 않다가 마땅히 가루가 될 것이 첫째이다. 경략 송(經略宋 소응창)은 지혜가 깊고 꾀가 감추어져 있어 귀신도 측량하기 어렵고, 제독 이(提督李 이여송)는 가슴속에 가득한 충의와 백 번 싸움을 겪은 용맹으로 옛 명장의 기풍이 있다. 본직(本職)이 본래 충성을 가지고 그들과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힘을 맞추어 이 적을 멸하여 천자에게 보답하기를 맹세하고 두 나라의 군사를 합하였으니, 궁한 적을 몰아내기는 떨어지는 것을 떨치는 것과 같이 쉬울 것이 둘째이다. 관백(關白)이 포악하여 위로는 그 임금을 협박하고 아래로는 그 백성을 혹사하니 하늘이 그들을 망치려고 우리에게 손을 빌리는 것이다. 어제 국왕을 뵈었는데 거동이 안상(安詳)하고 얼굴이 준수하고 장하니 형세가 반드시 중흥할 것이요, 그대 나라에서 전에 보낸 여러 사신이 천조에 청병할 적에 성의가 간측(懇側)하여 눈물이 쏟는 듯하여 신포서(申包胥)가 초국(楚國)을 위해 우는 충성과 방불하니 임금과 신하가 이러한데 어찌 끝내 함몰되리오. 이것으로 적을 토벌하면 어느 공인들 이루지 못하랴. 왜놈이 믿는 바는 오직 조총(鳥銃)인데 세 번 쏜 뒤에는 곧 계속하기 어렵고, 그 군사가 비록 많으나 강한 놈은 얼마 없어 앞에 오는 1, 2백 명만 죽이면 나머지는 모두 바람을 따라 도망할 것이니 이것이 가히 이길 기회요, 정히 지사(志士)의 공을 세울 시기이다. 우리 조정에서 영을 내리기를 우리나라 그대 나라 사람을 물론하고 다만 평수길(平秀吉) 및 중 현소(玄蘇)를 사로잡거나 베는 자는 은 1만 냥을 상으로 주고 백작(伯爵)을 봉하여 세습하며 수길의 가신(家臣) 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평조신(平調信) 등 이름있는 여러 추장(酋長)을 사로잡거나 베이는 자는 매번 은 5천 냥을 상주고 지휘사(指揮使)를 세습하며, 그 이하에 무릇 베이고 포로로 잡은 데는 각각 상격(賞格)이 있을 것이다. 그대 나라 신하와 백성이 다만 능히 때를 타고 군사를 모아서 함께 큰 공을 세우면, 이미 본국의 사직을 회복하고 또 천조의 후한 상을 받아서 쇠한 나라의 남은 백성으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시조가 될 것이니 어찌 유쾌하지 않겠는가. 이를 위하여 글을 내리니 모름지기 속히 각 도의 신하와 백성에게 전해 보여서 의병으로 이미 일어난 자는 곧바로 전진하고, 일어나지 않은 자는 속히 불러 모아 혹은 협력하여 적의 위세를 꺾고 혹은 번갈아 나가 싸워서 적의 세력을 분산되게 하며, 혹은 그 물러가는 길을 막고 혹은 그 양식 운반의 길을 끊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스스로 편리한 데에 따라 하기를 허락하노라. 이를 위하여 글을 내니 꼭 도착하게 하라.
25일. 경략 송응창과 제독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들어와서 곧 본국에 격문을 보내니, 다음과 같다.
흠차 경략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어 왜군무 병부시랑 송(欽差經略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兵部侍郞宋)은 조선 국왕에게 격문을 보낸다. 동해에 개국하여 천조에 정삭(正朔 정월 초하루)과 조공을 받든 지 2백 년간에 충성과 공순함을 바치기를 하루같이 하였다. 시서(詩書)를 외우고 법받아 학사(學士)와 유자(儒者)의 풍도가 빛나니 다른 나라와 견줄 바가 아니다. 지금 황제께서 신성하사 사해를 어루만져 편안케 하여 만이(蠻夷)를 복종시킬 적에 유독 왕의 나라의 책봉에는 덕의가 심히 두터웠다. 지금 북으로는 달단(韃靼)에 이르고, 남으로는 안남(安南)ㆍ섬라(暹羅) 등 모든 나라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합밀(哈密) 여러 민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향화(向化)되어 머리를 조아리고 토산물을 바쳐 앞다투어 뒤질까 저어하는데, 저 일본은 조그만 미꾸라지처럼 섬 안에 있으므로 다시 묻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찌 왕의 나라와 이웃하여 왕이 선량한 종족으로 풍속이 무(武)를 익히지 않았음을 업신여기고 문득 마구 엄습하여 전란을 일으켜서 이미 왕경(王京)을 빼앗고 평양을 점령하며, 왕의 두 아들을 포로로 하고 왕의 선영[先墳]을 파헤치며, 충신을 찢고 열녀를 죽이니 극히 악하고 참혹하고 독함은 신명과 사람이 함께 분히 여긴다. 왕이 이미 파천하여 의주에 거처하고 세력이 부족하고 힘이 약하여 천조에 구원을 청하니 폐하께서 깊이 측은히 여기시고 크게 성내시어 본부(本部 병부)에 명령하여 소사마(少司馬)로 하여금 깃발과 도끼를 잡게 하시었다. 군사가 일어나매 꾀있는 신하와 맹렬한 장사가 비바람처럼 모여들어 활을 당기고 창을 뽐내며 말을 달리고 수레를 몰아, 비단 깃발은 하늘의 해를 가리고 우레 같은 북소리는 바다 물결을 진동하여 모두 강한 놈을 베고 약한 이를 붙들며 곤란한 이를 건지고 충성된 이를 보전케 하여 천하에 대의를 펴고 큰 이름을 만세에 날리려 하고 있다. 왜놈이 비록 우둔하나 역시 지각이 있는 것들이니, 우리 군사가 동으로 와서 토벌하는 것을 듣고 곧 머리를 숙여 땅에 엎드리고 헐떡이는 주둥이로 밤에 도망하여 저의 본국에 돌아가 평정하여 한다면, 이것은 그들이 형세를 헤아리고 힘을 비교하여 화(禍)를 바꿔 복을 만들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매하여 마음을 바꾸지 않고 자신들이 견고하다고 믿는 것이 전과 같다면, 곧 불수레를 몰고 귀신의 채찍을 갈겨서 번개처럼 달리고 뇌성처럼 빨리 평양을 포위하고 함락시켜 선봉을 피칠할 것이다. 하물며 이미 민(閩)ㆍ광(廣)의 장수로 하여금 섬라(暹羅)와 유구(琉球) 여러 나라의 군사와 연락하여 배를 젓고 돛대를 날려 바로 일본의 소굴을 두들기고 다시 진(秦 섬서(陝西))의 정예(精銳)와 촉(蜀 사천(四川))의 극모(僰矛), 연(燕 북경 이북)의 철기(鐵騎)와 제(齊 산동(山東))의 지극(枝戟), 삭방(朔方 요동(遼東))의 건아(健兒)를 징발하여 봉황성(鳳凰城)에 진을 쳤는데이겠는가. 압록강을 건너 대마도에 도달하여 맹세하기를, 왜놈의 종족을 벌하여 피가 바다에 뜨고 골수는 산에 발라 귀역(鬼蜮)이 모두 소멸되고 이무기와 고래들을 끊어 죽여서 왕으로 하여금 왕경에 돌아가서 옛 땅을 안정시켜 폐하에게 보답하고 우러러 빛나는 기운을 펴기로 하였다. 왕은 지금 마땅히 복수의 일념으로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보아 그대 나라의 사대부와 더불어 남은 군사를 수합하여 용맹을 떨쳐 힘껏 싸워서 회복하기를 도모할 것이니, 저 평양 제도(諸道)에 어찌 충의와 호기(豪氣)로 내응하는 이가 없겠는가. 가만히 꾀하고 묵묵히 통하여 지혜를 깊이하고 정신을 길러서 그 형편을 보아 요해지를 굳게 지키라. 천병이 이르기를 기다려 한 곳에 군사를 합하여 왕에게 음부(陰符)를 주고 장수들에게 분포하여 진군할 차례를 지시하여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 함께 기이한 공을 바랄 것이니 폐하의 신령하심을 드러내고 기자(箕子)의 옛 땅을 보존하도록 하라. 불과 같이 해외에 공을 세운 것은 성탕(成湯)의 군사요, 일려로 하(夏) 나라의 왕업을 중흥시킨 것은 소강(小康)의 어짊이니, 왕은 힘써서 대대로 떨치게 할지어다. 격문이 이르거든 자세히 생각하여 마땅히 율령(律令)과 같이하라.
○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이 종사관(從事官) 송영구(宋英耈)로 하여금 군사와 말을 충청ㆍ전라에서 수합하여 천병에 합세하라는 격문에 응하기로 하다. 이때에 남정(男丁)은 노약(老弱)한 자들까지 모두 징발되어 싸움터로 나갔으므로, 영구가 지경에 들어가자 군사를 수합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이르는 고을마다 품관(品官)과 교생(校生)으로 하여금 각기 한 명씩을 바치게 하고 바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군대에 가게 하였더니, 선비들이 종사관의 앞에 들어와서 명단을 바치는 것이 모두 부호(浮戶)였으므로 문득 도망하여 흩어지기에 다시 선비들을 군사에 충당하여 각 고을의 수령들이 친히 데려다가 전주(全州)에 바치는데 정철이 듣고 중지시켰다. 영구는 다만 산졸(散卒) 수백 명만 얻어서 경성으로 향하였다. 당시에 남원 판관 노종령(盧從齡)이 이미 파면되고 홍영(洪嶸)을 임명하였더니, 이에 이르러 홍영이 영구를 따라 경성으로 가는데 각 고을 수령이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계사년 3월 경성 수복 후에 모두 돌아왔다.
○ 개령(開寧)에 주둔한 왜장이 본현의 백성에게 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우시안예(羽柴安藝)와 재상(宰相) 휘원(輝元)은 일본의 관백(關白)인 수길(秀吉)에게 명을 받았다. 우리 왕이 대명(大明)에 뜻이 있어 이 나라에 길을 빌리려 하였더니 이 나라 국왕이 듣지 않았으므로 이에 장수들을 명령하여 모든 장수를 8도에 나누었다. 유악(帷幄) 가운데서 계획을 하여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하니, 그 성을 함락하고 그 마을을 불태워 없고 이미 조선 국왕을 손바닥 속에 쥐었다. 개령 백성에게 고하노니, 개령 백성들은 왜 돌아오지 아니하는가. 돌아와서 각기 그 직업에 안정하여 농부는 제 농사를 지어 혹은 물을 대고 풀을 매며, 장사꾼은 장사하여 혹은 그 재물을 교통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옳다. 비록 깊은 산골에 있어 종적을 숨기고 1백 년을 지낸들 또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재물을 좋아하고 처자를 위하는 자는 큰일을 이루지 못하나니 너희들이 속히 산에서 내려와 항복하면 상관(上官)이 알아서 재물을 빼앗고 처자를 포로하는 자를 금할 것이다. 그 사이에 비록 법을 범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 죄에 중벌을 줄 것이니 주면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느냐. 이 글을 보매 더욱 그놈들의 고기를 먹고 싶다.
경기 감사 권징(權澄)이 파면되고 심대(沈岱)가 대신하여 삭녕(朔寧)에 와 있었는데 적병이 불의에 야습하여 드디어 죽임을 당하였다. 적이 심대의 머리를 가져다가 서울에서 효시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이다. 심대의 아들이 은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가서 아버지의 머리를 가지고 나와 몸에 연결하여 장사지냈다.


[주D-001]급(汲) : 적병의 머리 하나 베는 것을 급이라 한다. 그것은 적의 머리 하나에 벼슬[爵] 1급을 주던 옛날의 예에 의해서 부른다.
[주D-002]봉비(封臂) : 종을 심부름시킬 때에 빨리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종의 팔에다 노끈으로 아프게 묶고 거기다 도장을 찍어 봉하여 돌아와서야 풀어주는 방법이니, 종이 그 아픔을 못 견디어 빨리 돌아오게 된다.
[주D-003]근왕(勤王) : 왕실의 일에 군사로써 힘을 다하여 근로하는 것이다.
[주D-004]임시 섭정[權攝] : 선조(宣祖)가 의주로 파천하면서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을 후방에 머물게 하여 임시로 섭정하게 하였다.
[주D-005]이극(貳極) : 임금의 자리를 극(極)이라 하므로 세자는 이극이라 한다. 이(貳)는 부(副)의 뜻이다.
[주D-006]분조(分朝)의 책임 : 임금이 파천해 가면서 세자에게 분조의 권한을 준 것이니, 분조는 조정의 지부(支部)란 말이다. 즉 조정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는 것이다.
[주D-007]나 홀로 고생한다는 슬픔 : 《시경(詩經)》에 “나만 홀로 현명하여 노고하네[我獨賢勞].” 하였으니, 국사(國事)에 혼자 오래 고생한다는 의미이다.
[주D-008]술을 쏟아 …… 마시게 하니 :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전쟁할 때에 어느 사람이 임금에게 술 한 병을 바쳤는데, 임금이 전쟁하는 군사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고 싶으나 술이 적어서 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술을 하수(河水)에 쏟아서 군사들로 하여금 그 물을 마시게 하니, 군사들이 감격하여 힘껏 싸워서 초 나라가 크게 이겼다.
[주D-009]신릉군(信陵君) : 전국 시대(戰國時代) 위(魏) 나라의 신릉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 나라의 침략을 받은 조(趙) 나라를 구하였다.
[주D-010]적개(敵愾)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왕의 노함을 적대한다[敵王所愾].”는 말이 있는데, 신하가 임금의 적을 공격한다는 뜻이다.
[주D-011]관중(關中) :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項羽)와 싸워서 천하를 통일하였을 때에 지금의 서안(西安)인 관중을 근거지로 하였다.
[주D-012]궁금(宮禁)을 숙청 : 당(唐) 나라 덕종(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을 만나 지방으로 파천하고 주자가 서울을 점령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주자를 쳐서 멸하고 서울을 수복한 뒤에 덕종에게 아뢰는 글에 “신이 이미 궁금을 숙청하였습니다[臣已肅淸宮禁].” 하였다. 궁금은 곧 궁궐을 말한다.
[주D-013]소하(蕭何) : 한 고조가 항우와 싸울 때에 관중을 지키고 있던 소하가 군량을 끊이지 않고 전지에 보급하였으므로 뒤에 공신이 되었다.
[주D-014]문교(文巧)로 ……그치리라 :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어떤 사람이 한 나라 초연수(焦延壽)가 《주역(周易)》의 학자로서 지은 점치는 책인 《초씨림(焦氏林)》으로 점을 치니, 그 중에 이 문구가 있었다. 원문에는, 「文巧俗敝, 將反大質, 僵死如麻, 血流漂杵, 民知其母, 不知其父, 然後乃止.」라고 되어 있다.
[주D-015]하늘을 쏘려는 꾀 : 은(殷) 나라 임금 무을(武乙)이 가죽 주머니에다 피를 담아 놓고서 활로 쏘면서, “내가 하늘을 쏘아서 이겼다.” 하였는데, 그 뒤 들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 여기서는 왜놈이 명(明) 나라를 침범하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D-016]장소가 …… 바라노라 : 송(宋) 나라가 중원(中原)을 금(金) 나라에 빼앗기고 남방에 쫓겨 와 있을 때, 상소가 북으로 중원에 들어가서 선대의 능들을 살펴보고 보고를 올렸다.
[주D-017]한관의 위의를 어디서 볼꼬 :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을 쳐부수려고 의병들이 많이 일어났는데, 유수(劉秀)가 왕망의 의관 제도를 버리고 다시 한 나라 제도를 썼더니, 백성들이 보고 환영하며, “오늘날에 다시 한 나라 관(官)의 위의(威儀)를 볼 줄 몰랐다.” 하였다.
[주D-018]주운(朱雲)의 칼을 청하였으니 : 한(漢) 나라의 주운이 임금에게 아첨한 신하를 베라고 곧은 말을 한 일이다. 임금이 노하여 어사(御史)를 시켜 끌고 가서 죽이게 하니 주운이 크게 소리 지르기를, “장차 땅 밑에 가서, 옛날에 곧은 말 하다가 죽은 충신인 용봉(龍逄)ㆍ비간(比干)과 놀겠다.” 하고, 난간을 잡고 놓지 않자, 난간이 꺾어졌다.
[주D-019]호방형(胡邦衡)의 봉사(封事) : 남송(南宋)의 호전(胡銓)의 자가 방형이니, 금(金) 나라와 강화하여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상소를 올리고 귀양갔다.
[주D-020]역적 정 …… 착(浞)에게 비하였는데 : 하(夏) 나라 때에 유궁후 예(有窮后羿)는 한착(寒浞)이 극히 흉악한 역적이었다. 전주(全州) 사람 정여립(鄭汝立)이 처음에는 큰 선비로 이름이 나서 이이(李珥) 등이 추천하고 이발(李潑) 등이 친하였는데, 조헌(趙憲)이 그를 장차 예나 착과 같은 자이다 하였고, 그 뒤에 정여립이 역적의 죄로 죽었다.
[주D-021]신하는 큰 강이 있으니 : 삼강(三綱)에, “아버지는 아들의 강(綱 그물의 벼리줄)이 되고 임금은 신하의 강이 되며, 지아비는 아내의 강이 된다.” 하였다.
[주D-022]용사의 해 : 임진년과 계사년의 왜란이므로 용(龍 辰)과 사(蛇 巳)의 해라 하였다.
[주D-023]운이 양구를 당하여 : 음양가(陰陽家)에 백륙 양구(百六陽九)라는 말이 있으니, 1백 6년 중에 심한 재난의 해가 있다고 한다.
[주D-024]초수(楚水)에서 깨어 있음을 읊었으니 : 초(楚) 나라의 굴원(屈原)이 강호(江湖)에 추방을 당하여 글을 짓기를, “온 세상이 다 취하였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하였다.
[주D-025]지혜는 병을 이끄는 데 :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비록 병을 이끌어 물을 긷는 조그만 지혜만 있어도 제 그릇을 지켜서 남에게 주지 아니한다.” 한 말이 있다.
[주D-026]종을 단 듯한 집 : 《춘추좌전》에, “집이 달아 놓은 종과 같다[室如懸磬].” 한 말이 있으니, 그것은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왜적의 분탕질로 그런 빈 집도 없어졌다는 말이다.
[주D-027]모래를 말질하는 민망함 : 남북조 시대 송(宋) 나라 장수 단도제(檀道濟)가 군중에서 양식이 떨어지자 적이 그 틈을 노릴까 염려하여 군량이 새로 도착된 것처럼 꾸미느라고 밤에 모래를 말질[斗]하여 헤아리는 소리를 외쳐 적을 속였더니, 아침에 적들이 양식 더미가 쌓인 것을 보고는 퇴각하였다.
[주D-028]땔나무를 끄는 뜻 : 《춘추 좌전》에, 진(晉) 나라가 초(楚) 나라와 싸울 때에 진 나라 장수 난지(欒枝)가 땔나무를 끌고서 거짓 도망하는 척하다가 옆으로 공격하여 승전하였다.
[주D-029]한 삼태기에 공이 무너져서 : 공자(孔子)의 말에, “아홉 길[九仭]의 산을 만드는 데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공이 무너진다.” 하였다.
[주D-030]구공을 빌려 달라는 소 : 한(漢) 나라 구순(寇恂)이 하내 태수(河內太守)로 있다가 갈렸는데, 광무제(光武帝)가 하내를 지나자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구공(寇公)을 1년만 더 살려 달라 하였다.
[주D-031]학익진(鶴翼陣) : 진법(陣法)의 하나이니, 학이 날개를 벌리는 형상으로 진을 치는 것이다.
[주D-032]가장(假將) : 조정의 명령이 빨리 통하지 못하므로 각 도의 순찰사 등이 임시로 장수를 임명하니, 이를 가장이라 한다.
[주D-033]친구가 …… 끊으려 하네 : 옛날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매 종자기(鍾子期)가 곡조를 잘 알았는데,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줄을 끊어 버리고 다시 타지 않았다.
[주D-034]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위(魏)를 치려고 출병하면서 임금에게 올린 표문(表文)을 출사표(出師表)라 하였다.
[주D-035]중악(中岳)에서 달에 …… 뛰어나왔고 : 김유신이 소년 시절에 나라를 구할 큰 뜻을 품고 경주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뒤에 대장이 되어 당 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치는데 당 나라 대장과 말다툼이 있어 유신이 성을 내니 칼이 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주D-036]죄기(罪己)의 교서 : 나라 일이 위급하면 임금이 민심을 위로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죄를 돌려 스스로 꾸짖고 뉘우치는 글을 발표한다.
[주D-037]손인갑이 강물에 빠져 죽었음 : 손인갑은 창녕 사람으로 낙동강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뒤에, 달아나는 왜놈을 추격하다 모래 속에 빠져 죽었다.
[주D-038]관백 : 한(漢) 나라 소제(昭帝)가 어리므로 곽광(霍光)이 정무를 맡았으므로 모든 정부는 곽광에게 먼저 경유하여 여쭈었다〔關白〕. 일본의 막부(幕府)가 정무를 마음대로 하므로, 관백(關白)이라 칭하였다.
[주D-039]내소(來蘇) : 《서경(書經)》에, “우리 임금을 기다렸더니 임금이 오니 살아났다[待我后后來其蘇].” 하였다.
[주D-040]옥석구분(玉石俱焚) : 《서경》에, “곤강에 불이 붙으면 옥과 돌이 함께 탄다[火炎崑岡玉石俱焚].” 하였으니, 곤강은 옥이 생산되는 산이므로 불이 나면 옥과 돌이 구별 없이 탄다는 말이다. 대개 난리에 양민과 적이 한꺼번에 죽는 경우를 비유한 것이다.
[주D-041]진정(秦庭)에서 통곡함은 …… 가진 것 : 오(吳) 나라가 초(楚) 나라에 침입하매 임금이 도망하였다. 초 나라 신하 신포서(申包胥)가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매 진 나라에서 얼른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신포서는 진 나라 궁전의 뜰에 서서 7일 7야로 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진왕이 감동되어 군사를 내 주었다.
[주D-042]업(鄴)의 군사가 …… 주기 위함 : 진(秦) 나라가 조(趙) 나라를 침노할 때에 위(魏) 나라 신릉군(信陵君)이 업(鄴)에 주둔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조 나라를 구하였다.
[주D-043]오창(敖倉)의 곡식이 ……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요 : 한 고조(漢高祖)가 성고에 있는 오창에 쌓인 곡식을 먼저 점령하여 전쟁에 이기는 기본이 되었다.
[주D-044]견아(犬牙) : 옛날에 지방을 나눌 때에 이 군(郡)과 저 군과의 경계를 평행으로 하지 않고 개의 어금내[犬牙]처럼 서로 교착되게 하였다.
[주D-045]화유(火維) : 화유는 남방의 분야이니, 남방이 화(火)에 속한 까닭이다.
[주D-046]금성(金城)과 천부(天府) : 금성은 쇠로 만든 것처럼 견고한 성이란 말이요, 천부는 하늘이 자연적으로 만든 부(府)라는 뜻이다.
[주D-047]추로(鄒魯) : 맹자가 추(鄒)에 살았고 공자가 노(魯)에 살았으므로 그 후세에 그 지방에 학자가 많다.
[주D-048]금탕(金湯) : 금성탕지(金城湯池)란 말이다. 탕지는 끓는 못이니, 사람들이 건너지 못하는 것이므로 험한 방어 지대에 비유한다.
[주D-049]봄 제비가 …… 짓는 것 : 《남사(南史)》에 나온 말이니, 참혹한 난리를 겪어서 인가가 없으므로 봄 제비가 집 지을 곳이 없어 숲 속 나무에 집을 지었다 하였다.
[주D-050]제 나라 …… 고을만이 남았고 :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전부 짓밟았는데 거ㆍ즉묵 두 성이 남아서 수복하는 근거가 되었다.
[주D-051]삼천 리 …… 두보(杜甫)가 슬퍼하였습니다 : 당 나라 시인 두보가 난리를 만나 촉중(蜀中)에 피해 있으면서 지은 시가 많으니, 검각은 촉중의 높은 산이다.
[주D-052]하(夏) 나라의 일려(一旅) : 하(夏) 나라 소강(少康)이 일려의 남은 군사로 중흥하였다.
[주D-053]강회(江淮)의 보장(保障)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리에 장순이 수양성을 굳게 지켜서 적세를 막아 강회에 보장이 되었다.
[주D-054]누가 한 나라 …… 신이라 칭하겠으며 : 한 나라 경공(耿恭)이 북선우(北單于)와 싸울 때에 화살에 독약을 발라서 쏘며, “한 나라 화살은 신(神)이 있으니 맞으면 이상한 징조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화살을 맞은 자는 상처가 부풀어 올랐다 한다.
[주D-055]경계(庚癸)의 소리 : 경계는 양식이 떨어졌다는 암호이니, 《춘추좌씨전》에 나온다. 양식이 떨어지면 밤에 ‘경계’ 하고 외치라 하였으니, 곡식은 서방[庚方]에 속하고 물은 북방[癸方]에 속하므로 곡식을 청하는 암호로 쓴 말이다.
[주D-056]회서(淮西)의 소범(小范) : 송 나라에서 서하(西夏)를 방어하기 위하여 회서를 지키는 이가 전에는 범옹(范雍)이 있고 뒤에는 범중엄(范仲淹)이 있으므로 중엄을 소범이라 하였는데, 서하에서 범중엄을 두려워하였다.
[주D-057]강좌(江左)의 이오(夷吾) : 이오는 춘추시대 제 나라 관중(管仲)의 자이다. 진(晉) 나라가 중국을 빼앗기고 강좌(江左 강동(江東))로 옮아갔을 때에 왕도(王道)가 승상(丞相)으로 있었다. 환이(桓彛)가 처음 강동에 가서 조정이 미약한 것을 보고 실망하였으나, 왕도를 보고는, “내가 관이오(管夷吾)를 보았으니 다시 걱정이 없다.” 하였다.
[주D-058]이공(二公)이 섬(陝)을 나누기는 하였으나 : 주공(周公)은 섬의 서쪽을 맡고 소공(召公)은 섬의 동쪽을 맡았다.
[주D-059]적벽(赤壁)의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고 : 조조(曹操)가 80만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江東)을 치려고 적벽강(赤壁江)에 군사를 끌고 가서 군중에서 시를 짓기를, “달 밝고 별 드문데 까막까치가 남으로 나네.” 하였다. 곧 싸움에 패하여 도망하여 돌아왔다.
[주D-060]곤양(昆陽)의 무소와 …… 흩어질 것이요 : 한 나라를 회복하려는 군사들이 곤양(昆陽)에서 왕망(王莽)의 백만 군사와 싸우는데 왕망의 군사는 물소[犀] 코끼리[象] 호랑이들을 몰고 와서 싸움을 돕게 하였다. 비가 크게 오매 모진 짐승들이 벌벌 떨면서 흩어지고 왕망의 군사는 패하고 말았다.
[주D-061]요(堯)의 의미를 …… 될 것을 : 어느 사람이 공자를 보고, “그의 이마는 요(堯)와 같다.” 하였다. 여기서는 임금의 얼굴을 말한 것이다.
[주D-062]촉으로 가는 잔도(棧道) : 당 명황(唐明皇)이 안녹산의 난을 피하여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촉에는 산길이 험하여 잔도(棧道 사닥다리 길)로 통행하였다.
[주D-063]한궁(漢宮)에 풀이 푸르며 : 이것은 서울의 궁궐이 풀밭이 된 것을 말한다.
[주D-064]숙(叔)ㆍ백(伯)이 귀먹은 듯함 : 《시경》에 〈모구편(旄丘篇)〉에, 여(黎)의 임금이 나라를 잃고 위국(衛國)에 와 있으매 그 신하들이 시를 짓기를, “높은 언덕[旄丘]의 칡덩굴이 벌써 마디가 컸구나. 우리가 여기 온 지 세월이 오래되었는데, 위국의 신하인 숙(叔)ㆍ백(伯)들은 귀먹은 듯 우리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구나.” 하였다.
[주D-065]궁금(宮禁)을 숙청하고 …… 볼 만하였고 : 당 나라 이성(李晟)이 주자(朱泚)난을 평정하고 임금에게 올린 글에, “신이 궁금을 숙청하고 종묘에 공경히 뵈니, 악기도 옮기지 않았으며 종묘의 모양이 전일과 같습니다.” 한 문구가 있었다.
[주D-066]신정에 모여서 ……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 진(晉) 나라가 강동 한구석으로 쫓겨간 뒤에 하루는 여러 사람들이 신정에 모여서 놀다가 주이(周顗)가 눈물을 흘리며 고국을 생각하였다. 왕도(王導)가, “마땅히 힘을 다하여 국사를 할 것이지, 초수(楚囚)처럼 서로 대해 우는가.” 하였다. 초수는 초 나라의 종의(鍾儀)가 진 나라에 포로가 된 것을 인용한 말이다.
[주D-067]음기(飮器)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 지백(智伯)이 조 양자(趙襄子)를 멸하려 하다가 도로 패하여 죽었다. 조 양자는 지백의 두골(頭骨)에 옻칠을 하여 마시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주D-068]흔고(釁鼓) : 옛날에 북을 새로 만들면 짐승의 피로 발라서 틈[釁]을 메우는데, 전시에는 적을 잡아 죽여서 쓰기도 하였다.
[주D-069]하늘을 깁기 : 옛날 전설에 하늘이 기울어지는 것을 여와씨(女媧氏)가 돌을 다듬어서 하늘을 기웠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붙든다는 뜻이다.
[주D-070]사직의 신하로 …… 돌아오시게 하고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에 봉천(奉天)으로 파천하였는데 이성(李晟)이 장안(長安)을 수복하여 임금을 모셔왔다. 덕종은, “하늘이 이성을 낳은 것은 사직을 위함이로다.” 하였다.
[주D-071]간성(干城)의 장수 : 무인(武人)은 국가를 방어하고 보호하는 방패[干]와 성(城)이다 하였다. 《시경(詩經)》
[주D-072]이(李)ㆍ곽(郭)의 충성 : 당 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은 이광필(李光弼)ㆍ곽자의(郭子儀) 두 장수의 공으로 평정되었다.
[주D-073]종천(終天)의 원통함 : 하늘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부모의 원수를 말한다.
[주D-074]정위(精衛) : 새의 이름이니, 옛날 염제(炎帝)의 딸이 바다에 빠져 새로 변하여 동해를 메우려 하였다 한다.
[주D-075]금혁(金革)의 변례(變禮) : 상주가 국가의 난을 당하였을 때에는 상례를 지키지 못하고 변례로 무기[金]를 들고 갑옷[革]을 입고 나오는 것이다.
[주D-076]맹진(孟津)을 막는 것 : 작은 흙으로 맹진(孟津)의 세찬 물결을 막는 데 비유하였다.
[주D-077]중류의 지주(砥柱) : 황하의 중류에 지주라는 바위 기둥이 있으니, 홍수가 아무리 범람하여도 지주는 우뚝 서 있다.
[주D-078]태원(太原)을 침략당한 욕 : 주 선왕(周宣王) 때에 북방 오랑캐가 태원을 침범하였다.
[주D-079]기운이 산하(山河)를 웅장하게 하고 : 조(趙) 나라 충신 조정(趙鼎)이 분하게 죽으면서, “나의 기운이 산하가 되어 본조(本朝)를 웅장하게 하리라.” 하였다.
[주D-080]길보(吉甫) : 주 선왕(周宣王)의 신하로 오랑캐를 축출하였다.
[주D-081]곽거병(霍去病) : 한 무제의 명장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주D-082]일곱 발자국 …… 없기를 기약하여 : 《서경(書經)》에 군령(軍令)을 선포하는 서사(誓辭)에, “세 발자국 다섯 발자국 일곱 발자국 안에 군령을 범치 말라.” 하였다.
[주D-083]매처럼 드날리는 공 : 강태공(姜太公)이 목야(牧野)의 싸움에 매처럼 드날렸다[鷹揚] 한다.
[주D-084]갈노(羯奴) : 오호(五胡)의 하나로 흉노의 별종이니, 산서성(山西省)에 살았다.
[주D-085]방숙(方叔) : 주 선왕의 장수로 북방 오랑캐를 쳐서 쫓았다.
[주D-086]맹시사(孟施舍)의 용맹 : 《맹자》에, “맹시사의 용맹은 적을 헤아린 뒤에 나아가고, 이길 것을 생각한 뒤에 시작한다.” 하였다.
[주D-087]조괄(趙括)의 겁 : 조(趙) 나라 장수 조괄은 겁이 많아서 진(秦) 나라 군사에게 패하였다.
[주D-088]도끼가 이지러지지도 : 주공(周公)이 동방을 정벌하고 돌아오면서, “나의 도끼가 이미 이지러졌네.” 하였다.
[주D-089]기하(岐下)의 천도(遷都)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적(狄)의 침략을 피하여 기산 밑으로 옮기었다.
[주D-090]이수(李收) : 전국 시대 조 나라의 명장으로 흉노를 토벌하였다.
[주D-091]기린각 : 한 나라 선제(宣帝)가 공신(功臣)들을 기린각(麒麟閣)에 초상을 그려 붙였다.
[주D-092]6월편 : 《시경》의 편명(篇名)으로, 주 선왕이 흉노를 토벌한 일을 읊은 시다.
[주D-093]곤이(昆夷) : 주 문왕(周文王)이 곤이의 강함을 당하지 못하여 섬겼었다.
[주D-094]배수진(背水陣) : 임진 왜란 때 신립이 조령(鳥嶺)을 지키자는 김여물(金汝物)의 말을 듣지 않고 한신(韓信)의 병법을 본받는다고 충주의 달천(撻川)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쳤다가 패하였다. 한신이 조(趙) 나라와 싸울 때에 배수진을 쳐서 이기자, 싸운 뒤에 여러 장수들이 묻기를, “병법에, ‘오른쪽과 등 뒤에는 산과 언덕을 두고 앞과 왼편에는 물을 끼고 진을 친다.’ 하였는데, 오늘 장군이 물을 등 뒤에 두고 진을 쳐서 이긴 것은 어떤 까닭입니까?” 하였다. 한신이 말하기를, “내가 한 방법도 병법에 있으니, 군사를 죽을 땅에 집어넣어야 힘껏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제군들은 내가 평소부터 어루만져 길러온 부하들이 아니니 장판의 사람을 몰아서 싸우는 것과 같다. 편리한 땅에 진을 치면 모두 도망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등 뒤에 물이 있어 갈 데가 없으니 전진이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신립은 경우와 사세가 다른 데도 이 병법을 잘못 썼다가 패하여 죽었다.
[주D-095]천시(天時)ㆍ지리(地理) …… 귀한 것인데 : 《맹자》에, “천시가 지리보다 못하고 지리가 인화보다 못하다.” 하였다.
[주D-096]허통 : 서얼이나 문벌이 낮은 자는 문과에 올라 청직(淸職)을 할 수 없었는데, 여기서는 곡식을 바친 자에게 청직의 길을 터준 것이다.
[주D-097]면천 : 천인(賤人)에게 신분의 구속을 풀어 주어 천역(賤役)의 기록에서 빼준 것이다.
[주D-098]빈을 떠남 : 주 나라 태왕(太王)이 적을 피하여 도읍인 빈을 버리고 옮겨갔다.
[주D-099]범방(范滂)이 천하를 …… 서로 잇달았으니 : 후한(後漢) 말기에 각 지방에 탐관이 많으므로 안찰(按察)하는 사자(使者)를 나누어 보냈다. 범방이 수레에 오르면서 천하를 맑힐 뜻이 있자, 탐관오리들이 소문만 듣고도 인수를 풀어 놓고 가는 자가 많았다.
[주D-100]곽공(郭公)이 착한 …… 망하는 데 이르렀다 : 제 환공(齊桓公)이 놀러 나갔다가 한 노인을 만나서 그 지방의 역사를 물은즉 노인은, “저기가 곽공이 망한 터입니다.” 하였다. 제 환공이, “곽공은 어찌하여 망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곽공은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겼습니다.” 하였다. 제 환공이, “그런데 왜 망하였는가?” 하니, 답하기를, “착한 것을 착하게 여기면서 쓰지를 못하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기면서도 제거하지 못하므로 망하였습니다.” 하였다.
[주D-101]수양(睢陽)의 군사는 …… 것을 면하였고 : 당 나라 장순(張巡)이 수양을 치는데, 오래 포위되어 양식이 없으므로 나는 새를 그물로 잡아먹고 사람까지 수만 명을 잡아먹었다.
[주D-102]아홉 번 토벌 : 촉한(蜀漢)의 강유(姜維)가 한(漢) 나라를 회복하기 위하여 중원(中原)을 아홉 번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