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해동18현 우암 송시열

우암 선생(尤菴先生) 묘표

아베베1 2012. 7. 6. 16:05

 한수재선생문집 제31권
 묘표(墓表)
우암 선생(尤菴先生) 묘표


공자(孔子)는 주(周) 나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제후(諸侯)들이 방자하여 난신(亂臣)ㆍ적자(賊子)가 두려워할 줄을 몰랐으므로 《춘추(春秋)》를 써서 만세토록 신자(臣子)가 지켜야 할 바를 엄히 하였다. 주자(朱子)는 송(宋) 나라 말기에 태어났는데 당시는 오랑캐들이 중국을 어지럽혀 두 황제(휘종(徽宗)과 흠종(欽宗))가 북으로 옮겨 감을 당했으므로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여 불공대천(不共戴天)의 대의를 밝혔다. 그런데 선생의 생애는 또 대명(大明) 말기를 당하여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온 천지에 비린내가 가득한 상황을 눈으로 보고서 성모(聖謨)를 곁에서 도와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는 일을 자기가 해야 할 일로 여겼던 것이다. 대체로 하늘은 기수(氣數)의 영향을 받아 치(治)와 난(亂)이 한 번씩 뒤바뀌지 않을 수 없는데, 난세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을 내어 대강(大綱)ㆍ대법(大法)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 왔었다. 아, 이는 하늘이 후세를 너무나도 염려하여 하신 일로서 그것이 어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선생의 휘(諱)는 시열(時烈)이요 자(字)는 영보(英甫)인데, 수옹공(睡翁公) 휘 갑조(甲祚)의 셋째 아들로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 연호) 정미년(1607, 선조40) 11월 12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 수옹공의 꿈에 공자가 자기 집에 왔으므로 이를 이상히 여겨 어렸을 때 이름을 성뢰(聖賚)라고 하였다. 그리고 늘 격려하기를 “주자는 공자 후신이고 율곡(栗谷)은 주자 후신이다. 주자를 배우려면 당연히 율곡부터 배워야 한다.” 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이러한 교육을 받아 온 선생은 드디어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성현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뒤 사계(沙溪)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율곡으로부터 전수된 학문을 모조리 다 배웠으며, 또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하여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의 공부를 보건대 치지(致知)ㆍ존양(存養)을 실천, 확충하는 일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경(敬)으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지(知)와 행(行)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따로 없었는데,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아지자 정밀하고 순일하며 휴결없이 원숙하고 티없이 밝았다. 선생은 또 일찍이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고 성인이 만사를 처리하는 방식은 직(直)일 뿐으로서 공자ㆍ맹자 이후로 서로 전수한 것은 오직 직(直)이라는 글자 하나뿐이라고 여기고 그것을 일생 동안 실천해야 할 지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동이나 말이 모두 청천백일처럼 정대하고 광명하여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가 있었다. 이상이 선생의 학문에 관한 대략적인 것이다.
인조(仁祖) 11년(1633)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여 경릉 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뒤이어 대군(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대군은 바로 잠저(潛邸) 때의 효종(孝宗)으로서 서로의 제우(際遇)가 융숭했던 것은 사실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는 왕을 호종하고 남한산성에 갔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성을 나와 곧바로 시골로 내려가 산골에 묻혀 일생을 마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두 번씩이나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효종이 즉위하여 대의(大義)를 온 세상에 펼 목적으로 장령(掌令)으로 제수하여 불렀고 또 그 고명(誥命)에 위호(僞號 청(淸)의 연호)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이 거기에 감격하여 들어와 사은하고 연이어 진선(進善), 집의(執義)에 올랐는데, 당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ㆍ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ㆍ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등 여러 선생이 선생과 조정에 함께 있었으므로 사람들 모두가 지치(至治)가 실현되리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적신(賊臣)이 국가 기밀을 은밀히 누설하는 바람에 밖으로부터의 공갈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 결과 서로들 하나하나 물러가고 말았는데, 선생에게 승지ㆍ찬선(贊善)ㆍ이조 참의가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와서 상이 힘찬 용기를 발하여 밀찰(密札)로 선생을 부르자 이에 마침내 구치(驅馳)할 뜻을 굳히고 이듬해인 무술년에 예조 참판으로 입조하였다. 상은 선생을 총재(冢宰)로 특별 승진시키고 국정 전반에 관하여 논의하였는데, 그때야말로 왕과 선생의 사이가 마음과 경륜(經綸)이 빈틈없이 서로 맞았으므로 세상에서는 둘의 사이를 소열(昭烈 중국 삼국 시대의 유비(劉備))과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늘이 이 땅에 재해를 더 주려 했던지 효종이 승하함으로써 일이 모두 와해되면서 세상을 담당할 뜻도 다시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산릉(山陵)의 일이 끝나자마자 마침내 다시 처음의 길을 걷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양조(兩朝 현종조(顯宗朝)와 숙종조(肅宗朝))에 걸쳐 예우(禮遇)가 융숭하여 양전(兩銓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장(長)을 여러 번 지냈고 세 번이나 황각(黃閣 재상직)에 들어갔지만 선생의 뜻은 돌같이 굳어 있었다. 그리하여 전후로 국가에 일이 있을 때면 비록 애써 입조하였으나 오래 머물러 있은 적은 없었다. 현종(顯宗) 무신년(1668)이나 금상(今上 숙종(肅宗)) 계해년(1683) 같은 때는 임금도 선왕의 정치를 재현해 보려는 뜻을 가지고 있어 도를 행할 가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시속이 시기하고 소인배들이 훼방하여 수수방관하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으니, 그 역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신덕(神德 조선 태조의 계비 강(康)씨인 신덕왕후)의 복위(復位 현종(顯宗) 10년에 순원현경(順元顯敬)의 휘호가 가해졌음)와 태조의 휘호(徽號), 그리고 효종의 세실(世室) 문제가 모두 선생의 발론으로 실현을 보아 천상(天常)이 선생 덕택으로 어두워지지 않았으니, 이는 천고의 대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상은 선생의 출처(出處)에 관한 대략적인 것이다.
선생은 효종으로부터 세도(世道)를 밝힐 부탁을 받고는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바로잡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바로 세우는 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도(道)가 나로 인하여 세상에 밝아지기만 한다면 비록 만번을 죽더라고 여한이 없겠다.” 하였다. 그러므로 윤휴(尹鑴)가 언젠가 주자를 무시하고 그의 장구(章句)를 고친 데 대하여 사문(斯文)의 난적(亂賊)이라고 극력 공격하였으며, 윤휴를 도와 좌지우지하는 자가 있을 때는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 따라 난신(亂臣)ㆍ적자(賊子)에 대해서는 먼저 그 패거리부터 다스려야 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윤휴의 패거리들이 밤낮으로 눈을 부릅뜨고 보았는데, 갑인년(1674, 현종15)에 와서 예론(禮論)을 핑계 삼아 화를 꾸민 결과 드디어 북으로 남으로 귀양 가게 되었고 마침내는 섬 속에 갇히기까지 하는 등 화색(火色)이 갈수록 급박해졌으나 선생은 끄떡없이 구사미회(九死靡悔)의 뜻을 견지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 귀양에서 풀려 나갔을 때는 세상이 또 크게 변하였다. 문인인 윤증(尹拯)이 자기 아버지가 윤휴와 제휴하다가 선생에게 배척을 당했다 하여 평소 감정을 품고는 제멋대로 틈을 만들다가 마침내 윤휴의 무리가 다시 일어나게 되자 해기(駭機)를 서로 부추겨 드디어 기사년(1689, 숙종15)의 참화가 있게 하였다. 아, 그 일을 어떻게 차마 말하겠는가.
선생이 목숨을 거두기는 정읍현(井邑縣)에서였는데 때는 6월 8일이었다. 선생은 죽음을 당하여 치상(治喪) 절차 및 입도(入道)의 방법에 대해서까지 문인을 불러 부탁하며 조용하고 여유롭기가 평일과 다름없었다. 그날 밤 동방에 큰 별이 떨어지고 백기(白氣)가 무지개처럼 가로질러 있었으므로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특명으로 설원(雪寃)하여 복작(復爵)케 하고 사제(賜祭)ㆍ사시(賜諡)하는 한편 장지를 옮길 때는 또 예장(禮葬)을 명하는 등 마지막을 장식해 주는 예도에 빈틈이 없었다. 천도(天道)가 다시 돌아오면 공의(公義)도 반드시 펴질 것이므로 또한 유감될 것은 없다고 하겠으나, 당습(黨習)이 이미 고질화되고 괴이한 일들이 층층으로 생겨 사문(斯文)의 액(厄)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상이 선생이 화를 당한 대략적인 내용이다.
언젠가 선생이 말하기를 “주자가 나온 이후로 의리(義理)가 조금도 가리어짐 없이 크게 갖추어졌으므로 후학으로서는 다만 주자만을 존경하고 믿어 그의 학문을 밝히기에 진력해야 한다. 성인이 되고 현인이 되는 길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꼭 무엇을 서술하여 후세에 남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녕된 일로서 군더더기일 뿐이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이 한 공부는 모두가 정자와 주자의 뜻을 드러내 밝힌 일들이었는데, 비록 위태롭고 곤혹스러운 유배 생활 속에서도 밤낮으로 깊은 상념에 잠겨 확실히 깨닫기 전에는 놓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 한마디 글귀 하나라도 약여하지 않음이 없어 비록 초학자라도 그 귀취(歸趣)를 훤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예컨대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는 장기(長鬐)에 있을 때 저술한 것이고, 《어류소분(語類小分)》은 거제(巨濟) 시절에 편찬한 것이며, 《문의통고(問義通攷)》는 제주(濟州)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심경석의(心經釋疑)》는 퇴계(退溪)의 강록(講錄)을 왕명에 의하여 손질한 것이고, 이 밖에 문집 1백여 권이 있어 앞으로 세상에 행해질 것이다.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고려(高麗)의 판원사(判院事) 대원(大原)을 그 시조로 삼는다. 아조(我朝)에 와서는 쌍청당(雙淸堂) 유(愉)가 태종(太宗) 때 회덕(懷德)에 물러가 살았다. 선생의 증조는 휘가 귀수(龜壽)인데 봉사(奉事)로서 판서에 추증되었고 호는 서부(西阜)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상중에 있을 때 흰 제비와 관련된 이적이 있었다. 조부의 휘는 응기(應期)인데 벼슬은 도사(都事)로서 찬성에 추증되었다. 수옹공은 봉사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큰 절의가 있어 효종으로부터 포전(褒典)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선비(先妣) 곽씨(郭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추증되었는데 그 아버지는 충신인 자방(自防)이다. 선생의 배위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서 도사 덕사(德泗)의 딸인데, 수원 무봉산(舞鳳山)의 미향(未向)으로 된 선생의 묘소에 합부(合祔)되어 있다.
선생의 뒤를 이은 아들 기태(基泰)는 도정(都正)을 지냈고, 두 딸은 각각 현감 권유(權惟)와 선비 윤박(尹搏)에게 시집갔으며, 서출의 딸은 민주경(閔周鏡)의 처가 되었다. 손자 은석(殷錫)은 현감, 주석(疇錫)은 교리(校理), 무석(茂錫)은 군수, 순석(淳錫)은 현감이고, 회석(晦錫)은 일찍 죽었으며, 손녀는 현감 최성서(崔星瑞)에게 시집갔다. 외손인 이정(以鋌)ㆍ이개(以鍇)ㆍ부사(府使)인 이진(以鎭)은 권유의 소생이고, 은교(殷敎)ㆍ주교(周敎)는 윤박의 소생이다. 증손 현손도 많으나 다 쓰지 않았는데, 적증손(嫡曾孫)인 일원(一源)은 학행(學行)이 있어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선생은 손자 주석이 가학(家學)을 잘 이었다 하여 항상 애지중지하면서 후사(後事)를 모두 그에게 맡겼다. 또 묘 앞에 큰 비를 세우지 말고 다만 상하(尙夏)로 하여금 짧은 표석에다 몇 줄만 적어 후인이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하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거창하게 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아, 선생의 사적을 다 쓰자면 비록 1백 척(尺)이 되는 비(碑)라도 모두 기록하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그리고 선생이 조정에서 행한 대사업은 역사책에 소상히 나타나 있고 집에 있을 때의 행실은 세상의 표준과 법도가 되어 사람들 모두가 외워 영원히 전해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큰 줄거리만을 추려 이상과 같이 엮어 보았다. 아, 율곡 선생이 먼저 나시고 선생이 그 뒤를 이어 우리 해외(海外)에 도학(道學)의 전통을 심어 놓았는데, 어쩌면 하늘의 정기(正氣)가 동쪽으로 옮겨와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주자의 도학이 율곡에 와서 다시 밝아졌고 율곡의 업적은 선생에 와서 더욱 범위가 넓어졌으니, 율곡이 가령 천개일명(天開日明)이라면 선생은 지부해함(地負海涵)이었다. 세상에 덕(德)을 아는 이가 있다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틀림없이 믿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대의는 춘추의 그것이요 / 義秉春秋
도학은 주자를 계승하였다 / 學傳武夷
뭇 유자를 집대성하여 / 集群儒成
백세의 스승이 되었다 / 爲百世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