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조선왕조실록 의령기록

무신 6년(1128), 송 건염(建炎) 2년ㆍ금 천회(天會) 6년 의령애 화순장 설치

아베베1 2012. 7. 13. 14:00





려사절요 제9권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무신 6년(1128), 송 건염(建炎) 2년ㆍ금 천회(天會) 6년

○ 봄 정월에 금 나라에서 소회옥(蕭懷玉)을 보내와 생신을 하례하였다.
○ 이자겸의 아내 최씨를 소환하였다.
○ 인덕궁(仁德宮)에 불이 났다.
○ 2월에 남경 궁궐에 불이 났다.
○ 3월에 이공수를 문하시중, 김부일을 수사도 판상서병부사, 김향을 동중서문하평장사, 이숙(李璹)을 검교사도 수사공 좌복야 판례부사, 최자성을 판공부사로 임명하였다.
○ 정주(定州)에 흉년이 들자, 조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서 구제하였다.
○ 최사전(崔思全)을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 수사공 상서좌복야로 임명하였다.
○ 조서를 내리기를, “농업과 길쌈을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일은 성왕이 급선무로 여기는 것이다. 이제 수령들이 취렴을 이익으로 여겨, 근검하여 백성을 보살피는 사람이 적어 창고가 텅텅 비고 백성이 궁핍한데다가, 노동력을 징발하여 백성이 수족을 둘 곳이 없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니, 나라를 풍부하게 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본의가 아니다. 주ㆍ군에 명령하여 쓸데없는 일을 정지하고, 급하지 않은 정무는 철폐하라." 하였다.
○ 여름 4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요즈음 천문에 변화가 일어나고 기후가 고르지 못하니, 마땅히 유사에게 명령하여 죄수를 살펴 이죄(二罪) 이하는 사면하고, 국내의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늙은이 및 중환자와 절부ㆍ의부ㆍ효자ㆍ홀아비ㆍ과부ㆍ고아ㆍ자식 없는 늙은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차등 있게 물품을 주게 하라." 하였다.
○ 대방공(帶方公) 보(俌)가 경산부(京山府)에서 졸하였다. 자겸이 망하자 왕이 소환하고자 하였으나 명령이 내리기 전에 죽었다.
○ 갑술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횡단하였다.
○ 조서를 내리기를, “귀양간 사람 척준경이 비록 병오년 2월의 죄를 받았으나, 그 해 5월의 공이 역시 적지 아니하며, 최유적(崔惟迪)이 그 아들의 죄에 연좌되었으나, 사실은 자기가 지은 죄가 아니며, 박승중(朴昇中)은 비록 죄가 있으나, 문장으로 여러 대를 섬겨 명성이 매우 현저하니, 모두 죄를 참작하여 고장으로 옮겨 주기를 허락한다." 하여, 준경은 곡주(谷州)로 옮기고, 승중은 무안현(務安縣)으로 옮겼는데, 승중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 이원철(李元哲)등 29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5월에 종묘사직과 산천에 비오기를 빌었다.
○ 6월에 최홍재(崔弘宰)를 문하시랑 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이전에 자겸이 한안인(韓安仁)을 귀양보낼 때에 홍재도 그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이때에 간관의 논박이 있었기 때문에 맨 나중에 불러들였다.
○ 송 나라에서 형부 상서 양응성(楊應誠)과 제주 방어사 한연(韓衍) 등을 보내왔다. 이전에, 응성이 벽란정(碧瀾亭)에 이르러 접반소(接伴所)에 공문을 보냈는데, 그 공문에, “귀국의 예의가 성실하고 두터워, 만일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반드시 쓸데없이 번거로운 수고가 있을까 합니다. 이성(二聖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이 먼 곳에 계시니 신하로서 차마 음악을 들을 수 없습니다. 조서를 받들고 표문을 드리는 날 이외에는 음악을 쓰지 마시고, 아울러 의대와 화주(花酒)를 보내는 일도 폐지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왕이 조서를 수창궁(壽昌宮)에서 맞으니, 그 조서에,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미약하여 변경에 변란이 생겼다. 짐(朕)이 위업을 계승하여 바야흐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노라. 생각건대, 삼한(三韓)의 옛 땅은 실로 여러 대에 걸쳐온 우방이다. 지난번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정에 와서 하례를 하였으나 마침내 어려운 상황을 당하여 답례로 보내는 사절이 늦었다. 아마 우리의 사정이 많았음을 생각하여 평소의 마음에 변함이 없을 줄 아노라. 이번에 금 나라에 보내는 서한을 받들고 특히 사절 일행을 보내는데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기에 진실로 곤란한 난관이 있을 것이니 재난을 구제하고 백성을 진휼하는 데에 반드시 도와주어라. 약소한 물건을 보내니 평소의 전례에 미치지 못하나 도착되는 대로 받으라." 하였다.
응성 등이 또 차자(箚子)를 드렸는데 그 차자에, “옛날 주 나라 왕실이 난을 당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진문공(晉文公)에게 말하기를, '제후의 마음을 얻으려면 왕실에 헌신하는 것 만 한 일이 없으니 제후들이 그것을 믿을 것이며, 또 크게 의로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진문공은 왕실을 안정시킨 뒤 이어 패업을 이루었으니 이것이 역사에 실려 영원한 세대까지 빛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귀국은 해동(海東)에서 가장 큰 나라로 알려졌고, 대대로 충순(忠順)함을 나타내어 사절이 왕래한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귀국을 대우하는 데 은혜와 예절이 특별히 두터워 처음부터 조금도 쇠하지 않았습니다. 요즈음 난국을 당하여 국가에 일이 많더니 뜻밖에 오랑캐가 농간을 부리어 마침내 이성(二聖 흠종과 휘종)이 먼 곳으로 가 계시니, 상하가 근심과 걱정으로 편안히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거듭 생각건대, 귀국은 예의를 지키며 의를 중히 여겼고, 또 우리나라에서 은혜로 대우한 것이 여러 해가 되었으니, 다른 나라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이런 위급한 일을 당하여 의리상 마땅히 소망하는 바이며, 바로 대의를 바로세워 왕실에 헌신할 시기입니다. 지금의 황제께서 처음으로 왕위에 올라 사신을 보내어 국왕을 위문하시고 나아가서 뱃길로 두 분의 황제를 모셔 오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지난 조서를 받들던 날에도 이미 대강 말씀을 드렸고 계속하여 공문으로 거듭 번거롭게 하여 정성과 간절함이 모두 극진하니 이 뜻을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귀국에서 말하기를, '금 나라로 가는 도로가 험난하여 갈 수 없다.' 하나 조종조 때 금 나라의 사람이 귀국의 사자를 따라 입공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길이 개통되어 있었으며 다닐 수 없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귀국은 또한 금 나라의 사람들도 이 길을 통행할까 염려할 듯하나 금 나라의 사람이 거란을 파한 뒤부터는 모두 하동(河東)과 산북(山北)을 경유하여 사절이 왕래하니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귀국이 금 나라의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하겠지만 응성(應誠) 등이 이번에 사절로 오는데 비무장 인원 1백 10명으로 다만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가서 강화를 하려는 것이며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귀국에서는 다만 길을 인도하여 사절의 일행이 국경에 이르러 먼저 금 나라 사람에게 보고하여 그 가부를 듣고 혹 인원수를 줄이라 하면 모든 것을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니, 이것으로 문제가 생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귀국의 길을 통하여 두 분의 황제를 맞아 들인다면 2백 년 동안 충성으로 따르던 의리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러 왕이 대우하여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은공을 갚는 것이 과거보다 갑절 더할 것이며, 사방의 모든 나라가 더욱 훌륭한 명성을 우러러 보며 높은 의리에 믿고 복종할 것이니, 실로 무궁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요, 귀국의 중신(重臣)들도 모두 돕고 받드는 충성을 가질 것입니다. 국가에서 포상하는 은전이 영원한 세대에 전할 것이요. 일시적으로 한 사신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닙니다. 감히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피력하였으니, 국왕께서는 중신들과 상의하여 이 일을 협조하여 이루게 하시고, 별안간에 일어난 오랑캐로 인하여 오랫동안 친근하게 지내던 중국의 우호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빨리 결정을 하여 지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글로 답하기를, “본국이 조종조 이래로 대국을 정성으로 섬긴 까닭으로 신종황제로부터 태상도군황제에 이르기까지 한집안처럼 생각하여 그 특이한 은혜와 두터운 예절을 이루 다 말 할 수 없습니다. 생각건대, 천지 같은 은덕이 그 보답을 바라지 않았지만, 우리의 감격한 뜻은 행여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랐습니다. 삼가 듣건대, 두 황제께서 멀리 가시어 온 나라가 걱정과 울분으로 지내는데, 비록 직무상 제때에 달려가서 위문하지는 못할지언정 신하된 마음에 어찌 편안히 있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또 황제의 효성스러움과 공경하심과 여러분들의 충의는 반드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킬 것이니, 천지와 귀신이 함께 서로 도와서 협조할 것이니 어찌 두 황제께서 오래 사막에서 고생하게 되겠습니까. 빨리 서울 궁궐로 돌아오시어 천하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기를 항상 축원하고 있습니다. 황제가 처음 즉위하시어 먼저 시신(侍臣)을 보내어 조서를 전하고 우리 나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여 가서 두 황제를 맞아오게 하고, 또 사신과 부사(副使)가 조서를 전하던 날에 낱낱이 직접 말씀하였고, 계속 공한을 보내어 간절한 뜻이 상세하고 극진하니 감히 명을 받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여진은 처음에 부락에 흩어져 살아 일정한 군주가 없었기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예속되어, 간혹 우리 사절을 따라 상국에 들어가 조공하더니, 이 뒤로 점점 강성하여 항상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근자에는 대요(大遼)를 함몰하고 상국을 침범하여 이로부터 무력이 더욱 커져서 우리나라로 하여금 칭신(稱臣)하게 하고, 의례를 약정하는 데 일체 옛날에 요나라를 섬기던 예절대로 하였지만,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 풍속이 싸움을 좋아하고 항상 우리가 상국을 따르는 것을 싫어하여 왔는데 근자에는 국경에다 성과 보루를 수축하며 병사를 모아 주둔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만약 사절이 길을 빌려 저들의 국경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시기하고 의심하여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답례의 사절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사절을 보내어 입조하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만일 참으로 바닷길이 편리한 줄 안다면 우리나라의 보전이 어려울 것이요. 회남(淮南)과 양절(兩浙)의 연해의 지역도 그들이 넘겨다보는 우려를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감히 태연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 문제는 사실상 중대하여 감히 말을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사절과 부사(副使)는 충심을 곡진히 살펴 당초의 생각을 조금 돌이켜 돌아가 궐하에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 가을 7월에 참지정사 이숙(李璹)이 파면되었다. 이숙의 아내 김씨가 그 동복 아우 인규(仁揆)와 재산을 다투어 사이가 나빴는데, 이숙의 아들 온경(溫卿)이 익명으로 고소장을 내어 인규를 무고로 죄를 얽어 밤에 어사대에 투서하려다가 순검에게 잡혀 부자가 다 죄를 받았다.
○ 8월에 송 나라 사신 양응성(楊應誠) 등이 돌아갔다. 왕이 표문으로 회답하기를, “제실(帝室)이 많은 어려움을 당하여 왕의 수레가 멀리 옮겨 가시니 다만 놀라움만 더할 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날아서 갈 도리도 없어 계신 곳에 가서 문안드릴 길이 막혔음이 유감스럽습니다. 불행을 나누고 환난을 구제함에 마땅히 적개의 충성을 바쳐야 하는데 미약한 힘과 천박한 재주로 근왕의 노력을 펴기 어렵습니다. 걱정과 부끄러움은 더욱 심하오나 신명이 굽어보시는 바입니다. 마침 신이 왕위를 계승하면서부터 액운을 당하여 재난과 흉년이 연달아 들어 사람과 물자가 모두 쇠잔한데, 안으로는 반역하는 신하의 발호하는 흉변으로 곤란을 당하였고, 밖으로는 강국이 침략하는 기회가 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이제 겨우 내란을 진정하고 아울러 이웃 나라와의 강화를 이루었으니 성공이라 할 수는 없으나 요행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된 것입니다. 나라의 힘을 다하여 조정의 명에 따르며 미약한 노력을 다하여 여러 왕조의 총애하여 주신 은택에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사정이 곤란하여 일이 제대로 이루기 어렵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저의 정성을 굽어 살피시어 신이 바야흐로 곤란한 지경에 놓여 있음을 잘 헤아리시고 사실상 신이 태만스러운 것이 아님을 용서하시어 영구히 덕을 베풀어 주시고 곡진히 보전해 주신다면 밝은 태양을 두고 마음을 맹세하오니 하늘처럼 비쳐 주실 것을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응성(應誠) 등이 그치지 않고 왕복하였다. 또 답장을 보내기를, “상국에서 이전에 조서를 내려 우리나라로 하여금 여진에 가서 내조하도록 말하게 하였으나, 우리 나라는 여진으로 하여금 중국의 풍부함과 강성함을 엿보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조서 대로 시행하지 않았더니, 조정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침내 여러 방면으로 그들을 불러 들이고 금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습니다. 저들은 이미 중국의 허실을 알고 넘겨다보는 마음이 한번 움직이자, 멀리 군사를 몰아 깊숙히 쳐들어와 경사(京師)를 소란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금 나라와 영토가 서로 접하여 실정을 너무도 상세히 알고 있는데, 지금 사절이 이곳을 경유하여 간다면 곧 시기와 의심으로 분쟁이 생겨 발길이 미처 돌아서기 전에 벌써 화가 닥칠 것입니다. 가령 사절이 여기서 저 곳에 들어간다면 저들도 반드시 이 곳을 거쳐 답례를 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 나라는 동으로 큰 바다를 끼고 있어 더욱 수전에 능하니 저들이 회답의 사절을 보내는 것을 핑계하여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만일 전함을 준비하여 바다로 내려와 불의에 공격을 가한다면, 염려되는 것은 북으로는 육상의 전투에 고통을 받고, 남에서는 해상 전투에 고통을 당하여 아래 위로 적을 받아서 위험이 반드시 클 것이니 일이 이렇게 되면 후회한들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나라가 조서를 시행할 수 없는 것은 하늘과 땅이 환하게 보고 있고 감히 말로 꾸며 대는 것이 아니니 여러 날 오랫동안 버틸지라도 다시 다르게는 상의할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날을 가리어 회답하는 표문을 붙이기를 청하였다.
응성(應誠) 등이 대답하기를, “귀국의 군신은 꼭 해가 된다고만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으며, 다만 사절로 온 사람을 돌려보내려고만 하니 이것은 마침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붙이는 표문도 받지 않고 전례에 의한 잔치와 폐백과 의대ㆍ예물들도 모두 받아 들이지 않고 갔다.
○ 예부 시랑 윤언이(尹彦頤)를 송 나라에 보내어 표문을 올렸다. 그 표문에, “이전에 황제 두 분께서 멀리 가셨다는 말씀을 듣고 온 삼한이 모두 슬퍼하였습니다. 이미 달려가서 위문을 드려 신자의 성의를 펴지 못하고 또한 먼저 의병을 일으켜 국가의 위난에 달려가지도 못하였습니다. 이제 원수부(元帥府 고종(高宗)이 휘종(徽宗)의 제 9자(第九子)인데, 도원수(都元帥)로서 황제의 위에 올랐다.)로부터 일어나 기업을 이어받으시고 신민과 함께 가신 황제를 맞아들이려 하니 조서가 내리자 늙은이와 어린이까지 눈물을 흘렸으며, 성의가 나타나 먼 곳과 가까운 곳이 모두 마음이 정해집니다. 지극한 정성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인데 어찌 그 감응이 없겠습니까. 두 황제가 돌아오실 기회가 바로 지금입니다. 신은 집안이 분탕을 겪은 다음이라 국가가 시끄러운 때를 당하여 경하하는 예절을 올릴 겨를이 없었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외람되게 먼저 사절을 보내 주셨습니다. 비록 명을 내리심은 엄중하나, 상황이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저 금 나라는 우리 압록강과 연접해 있는데, 벌써 중국을 짓밟은 위세를 타서 또 이웃 나라를 해칠 뜻이 있습니다. 항상 비밀리 첩자를 시켜 틈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만일 사절이 길을 빌려서 갔다는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곧장 일을 일으킬 것입니다. 혹은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하면서 문책을 가할 것이며 혹은 답례한다는 명목으로 통과하기를 요청할 것으니 이 도로의 요충 지대에서 장차 무슨 말로 거절하겠습니까.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서로 다투기도 어려우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 하니 상국의 화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찌 오늘만 분할 뿐이리오. 반드시 다른 때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곤란한 점이 많은 것이지 태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신이 속으로 향모하는 마음을 품은 것을 생각하시고, 신이 밖으로 침략의 위협을 받음을 딱하게 여겨 주시어 산과 숲 같은 넓은 도량으로 받아 주시고 우레 같은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우리나라도 다행히 보전되고 상국에서도 변방의 위태로움이 없게 되면 제후를 거느리고 주 나라를 높이던 제 환공(齊桓公)과 진 문공(晉文公)의 옛일을 하겠다고는 감히 기대하지 못하나, 그 토산(土産)을 따라서 우공(禹貢)을 마련하는 데 청주(靑州)와 서주(徐州)의 옛 법식을 어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 교서를 선포하여 이르기를, “짐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외척이 권세를 잡아 위엄도 부리고 복도 만들어 내어 해를 당한 사람이 많았다. 한안인(韓安仁)을 죽이고 문공미(文公美)와 최홍재(崔弘宰) 등 50여 명을 귀양보내어 이 때문에 조정이 텅 비고 과인이 고립 상태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붕당을 많이 만들어 화란이 장차 측량하기 어렵게 되었는데, 병오년 2월에 측근에 있던 관원과 한 두 대신이 그 권세를 제거하기를 청하므로 짐이 감히 따르지 아니할 수 없었더니 그는 마침내 악독한 짓을 부려 궁궐의 전각ㆍ부서ㆍ창고를 침범하여 남김없이 다 태워 버렸고, 짐은 연덕궁(延德宮)에 나가니 모든 좌우에 있는 시종과 군사를 베어 죽이거나 더러는 귀양보내어 흉악한 기세가 더욱 치열하고, 변란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최사전(崔思全)이 은밀히 척준경을 타일러 마음을 합하고 계책을 정하여 흉악한 역도를 소탕하고 다시 종묘사직을 편안하게 하니, 공적을 잊을 수 없도다. 마땅히 유사에게 명하여 삼한후 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다음에 쓰게 하라." 하였다.
○ 서경으로 행차하였다. 중 묘청과 분사검교소감 백수한(白壽翰)이 스스로 음양의 술법을 안다 하고 허황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켰다. 정지상은 역시 서경 사람이라 그 말을 깊이 믿고 말하기를, “상경(上京 개성(開城))의 기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타서 남은 것이 없고, 서경에는 왕기(王氣)가 있으니 마땅히 임금께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아야 된다." 하였다. 마침내 근신 김안(金安)과 모의하기를, “우리가 만일 주상을 받들어 서도(西都)로 옮겨가서 상경으로 삼는다면 마땅히 중흥공신이 될 것이다. 다만 일신만이 부귀할 뿐이 아니라, 자손에게도 무궁한 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퍼뜨려 서로 칭찬하며 근신 홍이서(洪彛敍)ㆍ이중부(李仲孚) 및 대신 문공인(文公仁)ㆍ임경청(林景淸)이 따라서 호응하여 드디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묘청(妙淸)은 성인(聖人)이요, 백수한(白壽翰)도 그 다음이니 국가의 일을 모두 물은 다음에 행하고 그들이 건의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받아들인다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잘 되어 국가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고, 이에 차례로 모든 관원에게 서명을 청하니 평장사 김부식(金富軾), 참지정사 임원애(任元敱), 승선 이지저(李之氐)만은 서명하지 않았다. 글이 올라가니 왕이 비록 의심을 가졌으나 여러 사람이 강력하게 말하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묘청 등이 아뢰기를, “신등이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지세를 관찰하니 이것이 곧 풍수가들이 말하는 큰 꽃 모양의 터입니다. 만약 궁궐을 지어서 거처하면 천하를 병합할 수 있으며, 금 나라가 폐백을 가지고 스스로 항복할 것이며, 36국이 모두 신하가 될 것입니다." 하였기에 이번 행차가 있었다.
○ 9월에 이유(李愈)를 보내어 금 나라에 가서 천청절(天淸節)을 하례하였다.
○ 행차에 따라온 재신과 추신에게 명하여 묘청과 백수한과 함께 임원역 지역에 새 궁궐 터를 보아 정하게 하였다.
○ 임경청(林景淸)을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였다.
○ 겨울 10월에 동남해 안무사(東南海安撫使) 정응문(鄭應文)이 아뢰기를, “명진(溟珍 경남 거제)ㆍ송변(松邊 경남 거제)ㆍ아주(鵝洲 경남 거제) 세 고을의 해적 좌성(佐成) 등 8백 20명이 귀순하여, 이미 합주(陜州 경남 합천) 삼기현(三岐縣 경남 삼가(三嘉))에 귀후장(歸厚場)ㆍ취안장(就安場)과, 진주(晉州)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설치하여 그들을 정주하게 하였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하였다.
○ 왕이 서경에서 돌아왔다.
○ 이부 상서 최유(崔濡), 위위 소경(衛尉少卿) 송근(宋覲)을 금 나라에 보내어 경사를 선포함에 대하여 사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 11월에 유원서(兪元胥)를 금 나라에 보내어 생신을 하례한 데 대하여 사례하고 김택(金澤)은 새해를 하례하였다.
○ 임원역을 옮기고 새 궁궐을 짖는데 내시 낭중 김안(金安)에게 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때가 바야흐로 추위가 심하여 백성의 원망이 심하였다.
○ 12월에 윤언이(尹彦頤)가 송 나라에서 돌아왔다. 조서에 이르기를, “짐(朕)이 얼마 전에 사절을 보내어 급히 먼 지역을 급히 보낸 것은 부형(父兄)께서 멀리 가셔서 물과 육지가 계속 가로막혀 아득한지라, 길을 빌려 갈 수도 없으니 문안할 마음 더욱 간절하였도다. 마침내 변경 국가의 옛 정리를 믿고 행여 영토를 통과할 것을 바랐더니, 갑자기 글을 올려 지극한 정성을 갖추니 여러 날 동안 열람하고 마음속으로 개탄하였노라. 다만 효성하고 우애하는 생각은 비록 나의 뜻을 이루려 한 것이나, 사전에 염려하는 마음 또한 인정(人情)에 당연한 일이다. 이미 극진한 태도를 알았으니 변방을 지킬 것을 잊지 말라." 하였다.
○ 최사전(崔思全)을 참지정사로, 한충(韓冲)을 추밀원 부사로 임명하였다.
○ 금 나라에서 금주(錦州) 관내 관찰사 사고덕(司古德), 위위 소경 한방(韓昉) 등을 보내 왔다. 조서의 요지에 이르기를, “송 나라 태상황(太上皇) 조길(趙佶)과 소제(少帝) 환(桓)이 은혜를 배반하고 신의를 잃었기 때문에 토벌을 행하여 포로가 되어 얼마 전에 조서를 내려 궁궐에 불러들이고 따라서 그 잘못을 직접 책망하였다. 그러나 죄를 용서해야 하겠고,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야 하겠기에 마침내 그를 차마 버리지 못하였노라. 다만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이치에 순하지 못하므로 또한 작호를 이미 붙여 조길을 혼덕공(昏德公), 조환(趙桓)을 중혼후(重昏侯)로 강봉하였다. 일이 이미 새롭게 되었으니 사리상 마땅히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대ㆍ피륙ㆍ은으로 만든 그릇 등 물품을 주노라." 하였다.
사고덕(司古德) 등이 직접 어록(語錄)을 수교했는데, 그 요지에 이르기를, “추밀원의 차자(箚子)를 통하여 주상의 말씀을 받자오니 보주(保州 평북 의주(義州)) 땅은 처음에 조유(詔諭)가 있어 다시는 수복하지 않기로 한 것이오니, 귀국에서 당연히 옛법을 따라 왕실을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조정에서 그 땅을 아끼지 않고 특히 갈라 주었는데, 그 뒤에 몇 해가 지나도록 귀국에서는 아직 맹세하는 표문을 바치지 아니하며, 위에 말한 주성(州城)을 점령하여 지키니, 도리에 어찌 온당하다 하겠는가. 또 그 위협을 당하여 왔거나 도망하여 옮겨 사는 호구(戶口)가 그 수가 상당히 많은데 모두 사망하였다 하니 자못 믿을 수 없도다. 귀국이 과연 정성을 다하여 주상을 섬긴다면 곧 맹세하는 표문을 올리시오. 그러면 조정에서도 약속하는 조서를 회답하여 줄 것이며, 겸하여 따로 지휘(指揮)를 내려 거듭 경계를 획정하고 모든 것을 힘써 관대하게 처리하여, 장구한 계책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명을 들으니 감사하고 송구함을 견딜 수 없다. 뒤에 마땅히 표문을 올려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001]청주(靑州)와……법식 : 《서경》 우공편(禹貢篇)에, “(禹)가 치수(治水)에 성공한 뒤에 전국을 9주(九州)로 나누어 각기 토산물로 공(貢)바치게 하였다" 하였는데, 청주(靑州)·서주(徐州)는 9주 중에서도 동방에 있으므로,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