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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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附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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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彼天嶺。淑氣鍾焉。乃篤鉅人。公得其全。天敍五典。孝源百行。公實因心。粹然其性。纔免於懷。已知愛敬。餘力學問。覃思賢聖。旣本諸身。乃微於民。政事文章。隨遇驚人。治尙惇倫。人安俗厚。拱于法筵。士仰山斗。恒言孝悌。必稱堯舜。其詞甚忠。聽無不信。章疏懃懇。字字典謨。庶幾禮樂。陶鑄唐虞。進非求榮。退非忘世。時出緖餘。亦優經濟。所不盡者。崦嵫日短。義情輕重。能全者罕。公惟兩臻。盛名隨之。槪公平生。皆孝之推。名載太史。功在斯文。百世在後。不昧其芬。公之可傳。何待於碑。我言非諛。多士之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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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道碑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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雜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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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으로 이임하는 과천 태수 최공 응형에게 주며, 겸하여 내가 병들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먼 이별을 하게 되었다는 뜻을 보이다 2수 [贈果川太守崔公應亨移任積城兼示病不曾相奉仍作遠別之意 二首] |
파성에 숙도가 오는 것이 어찌 늦은고 / 巴城叔度來何暮
가시나무에 깃들어 산 지도 다섯 해나 됐어라 / 枳棘鸞栖五載多
매화 핀 누각에 거문고 울려 마음은 자유롭고 / 梅閣琴鳴心不累
꽃 핀 마을에는 개가 졸고 정치는 너그러우리 / 花村犬睡政無苛
담대는 문안 인사에 인색한 게 아니건만 / 澹臺不是慳趨候
사마는 늘 숙환을 앓고 있음을 탄식했어라 / 司馬常嗟抱宿痾
습지를 소제하여 와서 머물게 하려 했거늘 / 將潔習池停皀盖
친분 오랜 동파와 홀연 이별하게 될 줄 어이 알았으랴 / 寧知忽別舊東坡
일개 고을은 큰 재능 펼칠 곳 못 되거늘 / 一縣終非展驥路
무성의 금각에서 몇 해나 세월 보냈던가 / 武城琴閣幾寒暄
삼년 동안 병들어 칩거하느라 찾아뵙지 못했는데 / 三年病蟄違淸眄
오년 동안 은덕을 베풀어주니 지극히 감사하구려 / 五載仁添感至恩
구공을 빌려 고을 더 다스리게 하고 싶어했더니 / 欲借寇公仍舊政
소자의 떠나는 부임 행차에 도리어 놀라노라 / 飜驚蘇子動新旛
노잣돈 주는 산음의 노인을 본받지 못했지만 / 携錢未效山陰叟
멀리 훌륭한 풍모 상상해 길이 잊지 못하리라 / 遙想風流永不諼
[주C-002]최공 응형 : 최응형(崔應亨). 1581~?,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여회(汝會)이고 서울에 살았다. 1610년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했다.
[주D-001]파성(巴城)에 …… 늦은고 : 훌륭한 지방관의 부임을 뜻한다. 파성은 적성의 이칭인 듯하다. 후한(後漢) 염범(廉范)은 자가 숙도(叔度)이다. 그가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었을 때, 화재를 예방하려고 백성들이 밤에 작업하는 것을 못하게 하던 구제(舊制)를 고쳐서 밤에 작업을 하되 화재에 대비하여 물을 저장하도록 엄히 명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기면서 노래하기를 “염숙도(廉叔度)여 어찌 그리 늦게 왔던가. 화재를 우려해 밤일을 금지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편안하게 일하네. 평소에 저고리가 없었더니, 지금 바지가 다섯일세.[廉叔度來何暮 不禁火民安作 平生無襦今五袴]” 하였다. 《後漢書 卷61 廉范傳》
[주D-002]가시나무에 깃들어 산 : 고을 수령을 맡아 있음을 뜻한다. 후한(後漢) 왕환(王奐)이 “탱자와 가시나무는 난새나 봉황이 깃들 곳이 아니니, 백 리쯤 되는 작은 고을이 어찌 큰 현인이 있을 고을이겠는가.[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 하였다. 《後漢書 卷106 仇覽傳》
[주D-003]매화 핀 누각 : 매화 핀 누각은 지방 수령의 관아를 뜻한다. 남조(南朝) 양(梁)나라 하손(何遜)이 건안왕(建安王)의 수조관(水曹官)으로 양주(楊州)에 있을 때 관청 뜰에 매화 한 그루가 있어서 매일같이 그 나무 아래서 시를 읊곤 하였다. 뒤에 낙양(洛陽)에 돌아갔다가 그 매화가 그리워서 다시 양주로 발령해주길 청하여 양주에 당도하니 매화가 한창 피었기에 매화 나무 아래서 종일토록 서성거렸다. 두보(杜甫)의 〈화배적등촉주동정송객봉조매상억견기(和裴迪登蜀州東亭送客逢早梅相憶見記)〉에 “동각의 관매가 시흥을 움직이니, 도리어 하손이 양주에 있을 때 같구나.[東閣官梅動詩興 還如何遜在楊州]” 하였다.
[주D-004]담대(澹臺)는 …… 아니건만 : 담대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다. 여기서는 개결(介潔)한 성품의 상대방이 자신을 자주 찾아왔음을 뜻한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었을 때 공자가 “좋은 사람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자유가 “담대멸명이라는 이가 있는데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절대로 저의 집에 오지 않습니다.[有澹臺滅明者 行不由徑 非公事未嘗至於偃之室也]” 하였다. 《論語 雍也》
[주D-005]사마(司馬)는 …… 탄식했어라 : 자신에게 숙환이 있음을 뜻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는 자가 장경(長卿)인데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06]습지(習池)를 …… 했거늘 : 원님인 상대방을 자신의 집으로 놀러오게 하려 했다는 뜻이다. 습지(習池)는 습가지(習家池)의 준말로 습씨(習氏) 집의 연못이란 뜻이다. 진(晉)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산간(山簡)이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에 있을 때 경치가 좋은 습씨의 못을 고양지(高陽池)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곳으로 가서 노닐며 흠뻑 취해서 돌아왔다. 당시 아동들이 노래하기를 “산공은 어디로 가는가? 고양지로 가는 게지. 해 저물녘 말에 거꾸로 실려 돌아오나니 술에 흠뻑 취해서 아무것도 모르네.[山公出何許 往至高陽池 日夕倒載歸 酩酊無所知]” 하였다. 《晉書 卷43 山簡傳》
[주D-007]친분 …… 알았으랴 : 동파(東坡)는 송(宋)나라 문호인 소식(蘇軾)의 호이다. 여기서 동파는 상대방을 가리킨다. 소식이 7년 동안 황주(黃州) 수령으로 있다가 여주(汝州)로 옮겨갈 때에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도정(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주D-008]무성(武城)의 금각(琴閣) : 훌륭한 지방 수령이 거처하는 곳을 뜻한다. 제자인 자유(子遊)가 무성(武城)이란 고을의 읍재(邑宰)로 있으면서 현가(絃歌)로 백성을 교화하는 것을 보고 공자가 흐뭇해 하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오.” 했다. 《論語 陽貨》
[주D-009]구공(寇公)을 …… 싶어했더니 : 선정(善政)을 베푼 지방관을 유임시켜 줄 것을 청하는 것이다. 후한(後漢) 때 구순(寇恂)이 영천 태수(穎川太守)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도적을 평정했다. 뒤에 영천에서 다시 도적이 일어나자 천자를 따라 출정했을 때 영천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 구순을 일년 동안 더 영천 태수로 유임시켜 다스리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後漢書 卷46 寇恂列傳》
[주D-010]소자(蘇子)의 …… 행차 : 오래 고을을 다스린 지방관의 이임(離任)을 뜻한다. 송(宋)나라 문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7년 동안 황주(黃州) 수령으로 있다가 여주(汝州)로 옮겨갈 때에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이 도정(都亭)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주D-011]노잣돈 …… 노인 : 후한(後漢) 유총(劉寵)이 세 번 벼슬을 옮겨 회계 태수(會稽太守)가 되었다. 조정에서 그를 대신으로 불러 회계를 떠날 때, 눈썹에 흰 털이 난 대여섯 늙은이가 산음현(山陰縣)의 약야산(若邪山) 골짜기에서 한가로이 나와 각각 백전(百錢) 씩의 돈을 유총에게 보내주었다. 《後漢書 卷106 劉寵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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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4일(경술) 맑음 |
좌목 | |
金頊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金頊爲持平, 柳椐爲持平, 安獻徵爲右副承旨, 崔惠吉爲同義禁, 韓興一爲京畿監司, 梁曼容爲執義, 崔應亨爲知禮縣監。
公諱夢翼。字景南。柳氏系出文化。其鼻祖車達。佐麗祖統合三韓。策壁上勳。位大丞。世襲圭組。迄麗代入本朝。有諱寬。以淸儉顯。事太祖太宗。官至左議政。自號夏亭。居第不蔽風雨。常庇以傘。太宗篤嘉之。命錄十世。卒諡文簡。諱孟聞。吏曹參判。寔公五代祖也。高祖。擢魁科。司憲府監察贈弘文館副提學。曾祖順行。高陽郡守贈兵曹參判。祖希渚。弘文館副提學。考用恭。司憲府監察。妣河東鄭氏。成均生員孝孫之女。高麗平章事淑瞻後也。公以嘉靖壬午十月某甲生。天資寬厚。器宇宏遠。于內行克修。其遘內外艱。廬墓三年持制如一日與諸昆弟姊妹友愛備至人無間焉。所與交。皆一時勝流。少力學績文。屢擧不售。卽未老而廢。李靑蓮後白。以詩諷勸。竟不撓。至戊辰。以文簡公蔭。授司圃署別坐。移掌苑。例陞典牲署主簿。出宰仁同縣。秩滿。拜宗簿寺主簿。超拜刑曹正郞。不階佐直陞。蓋蔭仕極選也。守咸安郡。郡丁大侵。民瘵阻飢。公至拯賑罄其誠。俾獲奠居。繡衣廉知之褒奏。宣廟特賜表裏奬之。邑人豎石以寓去後思。瓜遷軍資監判官。陞僉正。亡何。以盈德縣屢經匪人。銓部承特簡敎。擧公以授。下車甫踰年。治行最一道。聲流聞。使价之過是邦者咸加禮。而旁邑宰至有記公績爲式者焉。萬曆辛卯三月辛丑。疾卒于官。其易簀也。遺命不少爽。屛婦孺。怡然觀化。享年七十。葬于羅州茅山元井里抱丙原。先兆也。公初娶咸陽朴氏。贈通禮斗精之女。再娶淸安李氏。士人斗南之女。三娶驪興閔氏。處士德龜之女。判書審言玄孫。內蘊莊敬。外持柔婉。視前室一女洎側室子女。猶己出。御婢僕能莅而恩。閨壼之間。肅穆如也。淑人之考早下世。未置嗣。淑人奉其祀。臨終。謂其子浚曰。私親之廟。權安於此。非其所也。我歿後。汝當襲享。宜立廟先人舊基云。生嘉靖丙午。歿于天啓乙丑。祔葬公墓。公有二男三女。男長洬。文科縣監。次浚。上庠筮仕。尙衣判官。閔氏出。女長適縣監崔應虞。李氏出。次適縣監李應蓂。次適進士黃庭悅。閔氏出。側室二男一女。男湜,淂。女孫仁甲妾。洬無子。浚子誠吾承宗。察訪。浚四男。長卽誠吾。次愼吾。次昌吾生員。次亨吾進士。崔應虞二女。李惟賢,尹弘坡。李應蓂三男。亨徵,賢徵,昌徵進士。黃庭悅一男二女。男克順參奉。女閔聖徽判書。崔滾判官。誠吾三男二女。長尙運。愼吾四男二女。長尙輔。昌吾一女。亨吾五女。李亨徵七男一女。長弘猷主簿。賢徵三男。長弘璧。昌徵一女。內外玄曾百餘人。可略也。噫。公以大姓華胄。服遺訓而趾前媺。宜若克需世大施。而顧坐數奇。厪見其一斑者。稱循良郡邑間。豈未食之報。竟無徵也耶。判官公雖亦困公車。不樂仕進。屛居松楸下。恬靜自靖。而子姓繁昌。擧斤斤不欲替家聲。裕後之慶。意其在斯歟。判官公不鄙夷某。猥託以幽竁之文。辭不獲。謹系以銘。銘曰。
而源之深流宜長。而璞之委瑩未章。可徵惟後。餘慶其昌。銘而无媿。碩士之藏。
인조 16년 5월 11일 (계유) 원본64책/탈초본4책 (9/25) 1638년 崇禎(明/毅宗) 11년
申得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인조 16년 5월 22일 (갑신) 원본65책/탈초본4책 (3/12)
1638년 崇禎(明/毅宗) 11년
崔應亨이 하직함
인조 23년 5월 30일 (신해) 원본91책/탈초본5책 (15/15)
1645년 順治(淸/世祖) 2년
金藎國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金藎國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金頊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인조 24년 3월 11일 (무오) 원본93책/탈초본5책 (12/12)
1646년 順治(淸/世祖) 3년
金頊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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