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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스크랩 (전주최씨) 관련기사

아베베1 2012. 7. 27. 15:04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32〉최씨의 유래<세계일보>
  • 입력 2012.06.28 11:24:01, 수정 2012.06.28 11: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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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본관은 43본그중 대부분은 6부 촌장이었으며소벌도리와 그 24세손 최치원의 후손들
  • 최씨는

    최씨(崔氏)는 우리나라 성씨 중 김씨·이씨·박씨에 이어 4번째로 많은 인구가 있는 성씨이다. 2000년 인구주택 총조사의 성씨 및 본관 집계 결과에 따르면 최씨는 총 가구수 67만6773호가 있으며, 인구는 216만9704명으로 나타나 있다.

    최씨의 시조는 신라를 건국한 6부족의 하나인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를 정씨의 시조라고 하고, 진지촌의 지백호를 최씨의 시조로 적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외에 삼국사기 등 대부분의 정사서에서는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를 최씨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어, 최씨 문중에서는 소벌도리를 최씨의 시조로 삼고 있다.

    최씨는 문헌에 387본까지 기록되어 있지만,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본관은 43본이다. 그중 대부분은 신라 6부 촌장이었으며, 박혁거세의 양부였던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와 그 24세 손인 최치원(崔致遠)의 후손들이다. 즉, 소벌도리의 자손이면서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라진 본관들과 최치원 아랫대에서 갈라진 후손들인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고구려 계통과 외래(중국) 이주민을 시조로 삼고 있는 본관도 있고, 김씨에서 최씨를 사성 받은 본관도 존재한다. 또한 같은 소벌도리의 후손이면서 최씨를 쓰지 않고, 다른 성씨(진주소씨·晉州蘇氏)를 쓰는 경우도 있다.

    최씨의 주요 본관은 경주(慶州)를 비롯하여 전주(全州)·해주(海州)·강릉(江陵)·탐진(耽津)·수성(隋城)·삭녕(朔寧)·화순(和順)·초계(草溪)·월성(月城)·영천(永川)·수원(水原)·강화(江華)·충주(忠州)·낭주(朗州)·동주(東州) 등이 있다. 그중 김씨였다가 사성을 받아 최씨가 된 수성(수원)최씨가 있으며, 중국 계통의 충주최씨가 있다.

    국보 제47호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최치원이 쓴 것으로 알려진 비문에는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이며, 선조가 수나라 출신으로 고구려의 포로가 되어 고구려 멸망 후 전주 근방인 금마에서 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본관별 최씨 현황


    현재 우리나라의 최씨는 신라 6촌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 소벌도리로 전한다. 하지만, 신라 말까지 세계를 상고할 수 없어, 대부분의 본관들은 신라 말에서 고려 중엽의 인물을 시조로 삼고 있다.

    그중 가장 많은 인구가 있는 경주최씨의 시조는 신라 말의 학자인 최치원이다. 그의 8세손으로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최애(崔?)가 처음으로 경주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최치원과 함께 신라 말 3최의 하나이며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낸 언위(彦僞)를 시조로 하는 계통도 있다. 

    경주최씨 등의 실질적인 시조로 알려진 최치원.
    최치원의 후손으로 경주최씨에서 분파, 관향을 달리하는 계통으로는 월성최씨를 비롯하여 강화·흥해·통천·광주(廣州)·진주·청주·원주·계림·고부·태인·영흥·연풍최씨 등이 전한다. 월성최씨는 시조 최치원과의 계대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조선 선조 때 무과에 올라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최진립(崔震立)을 시조로 삼아 경주에서 분적했다.

    강화최씨는 고려시대에 상서좌복야를 지냈다는 시조 최익후(崔益厚)가 최치원의 10대손으로 경주에서 분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역시 최치원의 후예로서 조선조의 최득보(崔得寶)를 시조로 하는 광주최씨는 득보가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뒤 평안북도 안주로 옮겨가 살면서 이전의 거주지였던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밖에 최치원의 15세손 최연(崔淵)이 흥해로, 최윤순(崔允順)이 계림으로 각각 분적했다.

    전주최씨에는 본관은 동일하되 시조를 달리하면서 서로간의 소목을 밝힐 수 없는 4개의 계통이 있다. 최균(崔均·고려 인종 때 등과하여 명종 때 예부낭중을 지내고 完山府院君에 추봉됨)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와 최순작(崔純爵·고려 정종 때 등과하여 문하시중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최아(崔阿·고려 충숙왕 때 完山君에 봉해짐)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그리고 최군옥(崔群玉·고려시대에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完山府院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가 있다. 

    대전 뿌리공원의 경주최씨 유래비.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전주최씨에서 분파된 동성이본(同姓異本)으로 영천·흥해·순천 등이 있으며 초계·양천 등도 그 뿌리를 전주최씨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한다. 문헌에 의하면 전주최씨 사도공파의 시조 최균의 후손 중 10세손 최한(崔漢)이 영천으로 분적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천최씨 족보에서는 선대가 진한(辰韓) 사량부(沙梁部) 대인(大人)으로 고려 명종 때 벼슬을 하고 연산군(燃山君·연산은 지금의 영천)에 봉해짐으로써 영천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전주최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흥해최씨는 최균의 10세손인 최호(崔湖)가 검교대장군을 지내고 곡강군(曲江君·곡강은 지금의 흥해)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 세거의 인연을 따라 흥해를 관향으로 삼아 분적했다. 초계최씨의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補祚功臣)이 되고 팔계군(八溪君·팔계는 지금의 초계)에 봉해진 용궁(龍宮)으로 전한다. 그는 전주최씨 문열공파의 시조 최순작의 후예이다. 또 광양최씨의 선대는 초계최씨와 같으며, 시조는 최한영(崔漢英)이다.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을 배출한 해주최씨의 시조는 최온(崔溫)이다. 해주는 최온의 선대부터의 세거지였으므로 관향이 되었다. 뒷날 청송·부안·아산·용궁최씨가 해주최씨로부터 분파한 것으로 전한다. 부안최씨의 시조로 전하는 최창일(崔昌一)은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부안으로 낙향했다. 동주최씨는 태사공 최준옹(崔俊邕·고려 태조를 도와 三韓功臣이 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최준옹의 증손 최석(崔奭)이 관직에서 물러나 동주에 정착한 것이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고려 목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해동공자 최충(해주최씨)의 영정.
    강릉최씨는 본은 같되 시조를 달리하는 3개 계통이 있다. 최필달(崔必達·고려 태조를 도와 삼중대광으로 慶興府院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경주계, 최문한(崔文漢·고려 충숙왕의 부마로 뒷날 강릉으로 은거함)을 시조로 하는 강화계, 대경공(大卿公)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전주계가 있다.

    삭녕최씨의 시조는 평장사 최천로(崔天老)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로 전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최천로와 최유가를 원조(遠祖)로 하나 그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친어모군낭장(新禦侮軍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를 지낸 최연(崔?)을 각각 1세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는 2개의 계통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삭녕을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순최씨의 시조는 서북면도감판관을 지낸 최언(崔堰)으로 전하나, 다른 문헌에는 그의 선대로서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내고 오산군(烏山君·오산은 지금의 화순)에 봉해진 최세기(崔世基)를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또 다른 계통으로는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계통도 있다.

    낭주(朗州·지금의 영암)를 관향으로 하는 낭주최씨의 시조는 신라말의 최흔(崔昕)이라고 한다. 그는 영암 사람으로 오랫동안 그곳에서 세거해온 것으로 전하는데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이어온 듯하다. 최흔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엽의 인물 최희소(崔希沼)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수성최씨는 신라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후손이 아니라 최씨를 사성 받은 영규(永奎)를 시조로 한다. 영규는 본래 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16대손인데 고려 원종 때 수주호장(隋州戶長)으로 있으면서 효제(孝悌)로써 백성을 잘 다스려 충렬왕이 그를 수성백(隋城伯·수성은 지금의 수원)으로 봉하고 최씨 성을 하사했다. 이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수성으로 삼았다.

    충주최씨의 시조는 중국 청하(淸河) 사람으로 당 소종(昭宗)의 명을 받아 신라 말 원종과 애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다가 그대로 예성(蘂城·지금의 충주)에 눌러 살았다는 최승(崔陞)으로 전한다. 그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선왕 때 인물로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진 최공의(崔公義)와 최고(崔暠)를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 밖에도 간성·양주·개성·나주·용주·직산·황주·안동·영암·완산·정주·죽산·진산·우봉·상원·하양·하음·한남·풍천 등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가 있다.

    최씨의 기원과 유래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최씨는 신라 6부족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 6부족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 진지촌(?山珍支村),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 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3대 유리이사금 때 6부족에게 사성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소벌도리의 성씨가 최씨는 아니었다. 즉, 돌산 고허촌이 최씨성을 하사받고, 그 시조로 소벌도리를 모시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부에 성씨를 하사한 왕은 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이다. 유리왕은 6부의 지명을 개칭하여, 알천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 돌산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 무산 대수촌을 잠량부, 취산 진지촌을 본피부(本皮部), 금산 가리촌을 한저부(漢저部), 명활 산고야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면서 6부의 촌장에게 성을 내렸다. 양산촌의 알평에게는 이씨, 고허촌의 소벌도리에게는 최씨, 대수촌의 구례마에게는 손(孫)씨, 진지촌의 지백호에게는 정(鄭)씨, 가리촌의 기타에게는 배(裵)씨, 명활촌의 호진에게는 설(薛)씨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소벌도리는 정씨로, 지백호에게는 최씨를 하사했다고 다르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계통의 최씨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전주 근처의 금마로 적고 있다. 또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라 외에 고구려 계통에서도 최씨가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최씨 기록을 보면, ‘낙랑의 최리(崔理)’가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왕자 호동을 사모해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의 아버지 이름이 최리이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과 구분하여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최씨 낙랑’을 거론하기도 한다.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알려진 진주소씨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씨를 소씨로 고쳤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이다.”(네이버 백과사전)

    따라서 최씨의 기원은 산둥반도 근처에 살다가 고조선에 소속된 제후라는 설과 신라 박혁거세의 양부인 소벌도리라는 설, 낙랑공주의 아버지 이름이 최리였던 점을 볼 때 낙랑 태수의 성씨라는 설, 또는 고구려 계통에서 내려온 최씨(최치원의 진감선사비문) 등의 다양한 계통이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13대 미추왕과 17대 내물왕, 23대 법흥왕을 전후하여 신라 내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신라는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기틀과 신분제적 질서가 확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26대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김씨라는 성이 쓰인 것을 감안할 때, 최씨라는 성이 탄생된 것은 3대 유리왕 때가 아니라,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 문화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34〉 전주최씨<세계일보>
  • 입력 2012.07.24 18:17:51, 수정 2012.07.25 17: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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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공신 최명길
영의정 6번 한 최석정
조선시대 명문가 명성

  • 이들의 상계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적인 고증이 없어 통일된 시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일부에서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 최치원(崔致遠)의 상계에서 갈라진 계통(최군옥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과 최치원 이후에서 갈라진 계통(최순작과 최균을 시조로하는 문열공파와 사도공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또다른 계통(최아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에서는 중국 전래설이 거론되는 형편이다. 따라서 전주최씨는 하나의 본관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같은 시조의 자손으로 여기기엔 무리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주최씨는 조선시대에 상신 3명, 대제학 2명, 청백리 3명, 문과급제자 109명을 배출하였다. 특히 최균의 자손인 사도공파의 인물들이 많다. 

    전주최씨를 명문가 반열로 일으킨 사람은 태종 때 청백리에 녹선된 최유경(崔有慶)을 들 수 있다. 상신·대제학·청백리가 모두 그의 자손에서 나왔다.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崔鳴吉)이 있다. 그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숙종 때 영의정), 최석항(崔錫恒·경종 때 좌의정) 형제도 정승을 지냈다. 특히 최석정은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또 최군옥의 후손인 문충공파에서는 고려 말기에 ‘두문동(杜門洞 72현’에 들어 있는 최양(崔瀁)이 있다. 

    그 외에도 고려 말기에 좌참찬을 지낸 최부(崔府), 태종 때의 예문관직제학을 지낸 최덕지(崔德之), 선조 때의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최철견(崔鐵堅)과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최기필(崔琦弼)·최균(崔均)·최경행(崔敬行) 등도 있다. 

    전주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12만2147가구에 39만254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18%를 차지하는 숫자다.

    또한 전주최씨에서 분적된 본관들도 다수 존재한다.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강릉최씨, 최호를 시조로 하는 곡강최씨, 최원을 시조로 하는 양천최씨와 양천최씨에서 갈라진 금천최씨, 최한을 시조로 하는 영천최씨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완산최씨, 진산최씨, 초계최씨, 황주최씨, 흥해최씨 등도 전주최씨에서 분적한 본관들이라고 알려진다. 

    최양선생유허비각. 정몽주의 생질인 만육 최양은 조선 태조와 태종의 연거푸 부름에도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켜 훗날 ‘최고집’의 별칭이 전해지게 한 두문 72현 중의 한 명이다.
    전주최씨 4계통의 연혁과 인물

    문열공파

    전주최씨 문열공파의 시조인 최순작은 조선 초기(태종)에 청백리로 녹선된 평도공 최유경의 7세조이다. 그는 고려 정종 때 벼슬에 나가고 고려 문종 때 중서시랑 평장사가 되었다. 그는 여진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병부상서 겸 신호위 상장군이 되었으며, 완주개국백(完州開國伯)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그의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행적을 기록한 문열공 사적에는 “최순작은 완산 사람으로 신라시대 3최의 하나이면서 고려 초기에 평장사를 지낸 완산백 최언위의 후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가 경주최씨였던 최언위의 후손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최언위로부터 최순작까지의 계보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의 아들 최숭은 이부시랑에, 최공은 개성소윤에 올랐다. 

    문열공파는 다시 안렴사공파, 중랑장공파, 별장공파, 좌윤공파, 판윤공파, 양도공파, 경절공파, 검추공파, 감무공파 등으로 갈라진다. 그 후손으로는 고려 의종과 문종 때 공부상서와 수문전태학 겸 대장군을 역임한 최남부(崔南敷), 청백리 최유경과 그의 조부인 선부전서를 지낸 최득평이며, 아버지는 감찰대부를 지낸 문정공 최재(崔宰)가 있다. 

    특히 최유경의 집안은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크게 흥해 그의 아들들이 모두 큰 벼슬을 지냈다. 한성부판윤을 지낸 최사위(崔士威),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돈령부사를 지낸 최사의(崔士儀), 사헌부 지평을 지낸 최사규, 우찬성을 지낸 최사강(崔士康), 첨중추원사를 지낸 최사용(崔士庸), 그리고 막내인 최사흥이 있다.

    넷째인 최사강은 3남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좌참찬을 지낸 최승녕이고, 차남은 군수를 지낸 최승정, 그리고 막내는 첨정을 지낸 최승종이다. 그의 딸들도 태종의 서자인 성녕군 이인과 혼인하고, 세종의 6남인 금성대군 이유와 혼인하였다. 또 장남 최승녕의 딸은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과 혼인하였고, 증손녀가 예종의 후궁이었던 공빈최씨이다. 

    그리고 최유경·최사강의 직계 후손들은 인조반정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청나라와 화해할 것을 주장하던 주화론의 대표주자인 문충공 최명길(영의정)이 최사강의 7대손이다. 또한 최명길의 손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최석정과 좌의정을 지낸 최석항도 있다. 

    경기 용인시 기흥읍에 있는 죽정 최유경의 묘.
    사도공파 


    전주최씨 사도공파는 최균을 시조로 하고 있다. 사도공 최균은 고려 중기의 충신으로 완산군에 봉해졌다. 그는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의종 때 합문지후(閤門祗候)에 제수되었으며, 명종 때에는 예부낭중 겸 태자문학을 역임했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다가 패하여 살해되었다. 그래서 훗날 예부상서에 이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최균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의 지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최치원의 몇 대손인지 그의 상계가 어떤지에 대해선 파악되지 않고 있다.

    전주최씨 가운데에서 최균의 후손인 사도공파가 가장 숫자가 많고 인물도 많이 배출했다. 시조 최균의 아들이 최보순(崔甫淳)이다. 그는 참지정사와 형부상서를 지내고 수태사 판이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아우 최보연(崔甫延)은 형부상서를 지냈다. 

    최균의 손자인 최비일(崔毗一)은 대제학과 첨의찬성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최성지(崔誠之)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대사헌을 거쳐 첨의찬성사에 이르고 광양군에 봉해졌다. 그는 충선왕을 도와 개혁정치를 주도했는데, 조정의 기강 확립·조세 공평·농잠업 장려·동성결혼 금지와 귀족횡포를 엄단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그가 원나라에서 배워온 역학(易學)과 수학(數學)은 고려시대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조선시대에 들어와 최문도(崔文度)는 전법판서와 첨의참리를 지냈으며, 최용의 아들 최부(崔府)는 세종 때 경기도 관찰사를 지내고, 명나라에 다녀온 후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최현(崔晛)은 병조참지와 대사성을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대사헌에 증직된 최명룡(崔命龍)은 역학과 음양은 물론 불교경전에도 정통해서 전주의 인산서원과 부안의 옹정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성공파

    전주최씨 문성공파의 시조는 문성공 최아이다. 그는 고려 충숙왕 때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하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선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의 아들들이 크게 이름을 떨쳤다. 큰아들 최용생(崔龍生)은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를 지내 안렴사공파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아들 최용각(崔龍角)은 검교대호군을 지내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의 시조가 되었고, 셋째아들 최용갑(崔龍甲)은 원나라의 과거에 합격하여 판사공파(判事公)의 시조가 되었다. 또 막내인 최용봉은 중랑장을 지냈다. 

    최아를 시조로 한 것은 조선후기 감찰공 최세영(監察公 崔世榮)이 전주최씨 문성공계 족보를 발간하면서 고증을 통해 시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최씨 각 계파(系派)의 역사를 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성공의 선조는 최균이라고 하기도 하고 최순작이라고 하기도 하며…”라고 적어놓았다. 또 문성공 제단 비문에는 “전주최씨는 문성공을 시조로 하니 공의 선조는 전해오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문성공파에서는 문성공의 막내아들인 중랑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공민왕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던 월당공 최담(月塘公 崔?)이 유명하다. 그는 세상이 혼탁함을 비관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냈으나 아들 4형제가 모두 큰 벼슬을 하였다. 첫째인 최광지(崔匡之)는 조선 태종 때 집현전 제학을 역임했고, 그의 아우 최직지(崔直之)는 나주판관과 순창도사를, 셋째 최득지(崔得之)는 사헌부 감찰을, 막내 최덕지(崔德之)는 남원부사를 역임했다. 

    그 외에도 ‘동국통감’ 편찬에 관여했던 최명손, 세조 때 호조참판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최한경, 충청감사와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룡, 청백리에 녹선된 최여림 등이 유명하다. 또 최운철의 아들 최균과 최강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최기필은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하여 창렬사에 제향되었다. 또 영조 때 최광벽은 돈령부 도정과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전주최씨 문성공파조 최아 시향. 전주최씨 문성공파 후손들이 시조인 최아의 묘소에서 시향을 올리고 있다.
    문충공파 

    전주최씨 문충공파의 시조는 최군옥이다. 문충공 최군옥은 동주최씨(철원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참고로 동주최씨는 경주최씨의 시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갈라진 본관이다. 최군옥은 고려 선종 때 삼중대광에 올라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르고 보국승록대부로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그의 맏아들 최송년(崔松年)은 의종 때 밀직사사를 역임했고, 둘째 최구년(崔龜年)은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문하찬성을 역임한 후 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숙공 최유의 아들인 최선능(崔善能)은 삼중대광 문하찬성사에 올라 상산부원군에 봉작되었고, 그의 둘째아들인 최칠석(崔七夕)은 정남대장군 겸 원수가 되어 칠월칠석에 대마도정벌을 함으로써 칠석(七夕)이라는 이름을 사명받았다. 조선개국 후에도 경기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했다. 

    문충공파에서는 정몽주의 생질로 우왕 때 이부상서와 대제학을 역임했던 만육당 최양(崔瀁)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전주 봉강리에 은거하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태조 이성계는 물론 태종이 친구의 예로 대하며 전답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고, 끝까지 절개를 지켜 ‘최고집’이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시호는 충익공이며 두문 72현록에 기재되었다. 

    그 후손으로는 인조 때 이괄의 난을 평정한 최응일이 진무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그의 아우 최응수는 결성군에 봉해진 후 선천부사를 역임했다. 문충공계는 최여징의 부사공파, 최진강의 목사공파, 최여녕의 군수공파, 최여정의 도사공파, 최여관의 현감공파, 최여달의 판서공파, 최만득의 교위공파 등이 있다. 

    전주최씨의 근현대 인물

    전주최씨에서 현대의 정관계 인물 중에는 최재유 전 보사부장관, 최광수 전 외무부장관과 최동규 전 산자부장관이 있으며, 전·현직 국회의원으로 최순주 전 국회부의장, 최병국 최갑환 최석림 최경식 최치환 등이 있다. 또 재계와 학계에서는 최주호(우성산업회장), 최정호(연세대 교수) 등이 있고, 연예계에서는 최진실과 최재성이 전주최씨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성회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