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현 분의 문집/고봉 기대승

고봉 기대승 선생의 문집의 내용중에

아베베1 2012. 8. 12. 15:05

 

 

고봉집 제1권
 [시(詩)]
계해년(1563, 명종18)에 원기가 다시 시 자 운을 써서 보내 주므로 용문과 함께 화답하고 드디어 왕복하였다. 오후에 해미 현감 양숙전이 마침 오자 통판이 그를 위해 무이루에 올라 잔치를 베풀고 과녁을 쏘았는데 나도 참석하였다. 원기는 술에 취해 나오지 못하고 아름다운 시만 여러 차례 보냈다. 용문과 나는 화답할 겨를이 없고 술에도 피곤해서 연이어 차운하지 못한 것이 4, 5편 되었다. 취중에 글씨가 마구 쓰여 마침내 희담이 되고 자못 모양을 못 이룬 것도 있지만 그런대로 한번 웃자는 것이다.〔癸亥 圓機再用詩字韻寄示 同龍門和呈 遂與往復 午後海美倅梁叔躔適來 通判爲上撫夷 設筵射帿 余亦參 圓機被酲未出 獨佳什屢至 龍門曁余酬答不暇 復困杯勺 未能繼次者 蓋四五篇焉 醉墨淋漓 終相爲戲 頗有做不成者 聊以博笑云〕



회포를 풀기는 오히려 술인데 / 開懷猶綠酒
흥을 일으켜 다시 시를 짓누나 / 發興更新詩
우연히 세 사람 모여 이야기 나누니 / 偶作三人話
이 일이 도리어 기이하여라 / 還令此事奇
서로 만남 계속하기 어려우니 / 相逢難袞袞
돌아가는 길이 더딜 수밖에 / 歸路且遲遲
여윈 말 타고 읊조리며 멀리 가니 / 瘦馬吟鞭遠
서산에 해 지는 때로다 / 西峯落日時

또〔又〕


강가의 매화에 봄빛이 왔으니 / 江梅春已着
그윽한 꽃송이 시를 재촉하는 듯 / 幽萼似催詩
여러 편을 그대는 빨리 짓는데 / 累紙公何捷
외로이 시 읊으매 나는 기이한 것 없네 / 孤吟我未奇
정 머금은 글 쉽게 못 이루고 / 含情詞就久
병 많아 술도 더디 깨네 / 多病酒醒遲
긴 해에 맑은 이야기로 머무니 / 永日留淸語
조용한 방에서 마주 앉은 때로다 / 虛堂對榻時

또〔又〕


나도 일찍 돌아가려 했지만 / 歸策吾當早
머문 것은 시 화답 위함이네 / 停驂爲和詩
사흘이나 흥겹게 놀았으며 / 歡娛三日勝
일생에 기이한 풍치로다 / 風韻一生奇
버들은 연기에 늘어져 매끄럽고 / 柳嚲烟光潤
매화는 햇빛을 머금어 더디네 / 梅含日色遲
서로 만나 좋은 경관 수작하니 / 相從酬美景
맑은 꿈 다른 때에도 기억하리라 / 淸夢記他時

또〔又〕


고집스럽고 옹졸함 쓸모없는데 / 伉拙知無用
붓을 잡고 늦게나마 시를 배웠네 / 含毫晩學詩
좋은 시 만들려고 생각 깊이 하고 / 思深篇致意
글자도 기이코자 괴롭게 읊는다 / 吟苦字求奇
영웅이 이제 수가 있는데 / 英雄今有數
호해의 모임이 어찌 더딘고 / 湖海會何遲
자리를 재촉하며 자주 흥 더하니 / 催席頻添興
서로 보며 한바탕 웃는 때라오 / 相看一笑時

또〔又〕


봄날은 높은 누각에 밝은데 / 春日明高閣
한가로운 시름 참으로 시흥 때문이네 / 閑愁正惱詩
바쁜 속에 처음으로 흥을 보내니 / 忙中初遣興
어려운 곳이라 어찌 기이할 수 있는가 / 難處豈能奇
우뚝하게 앉아 깊이 마음을 쓰고 / 兀坐游心遠
나지막이 읊조리며 더디게 글자를 놓네 / 微吟下字遲
재주가 없어 나는 졸음 오려 하니 / 才疎吾欲睡
많은 시간 머리터럭 흩뜨렸네 / 散髮更多時

또〔又〕


맑은 새벽에 병든 눈이 활짝 열리니 / 淸晨開病眼
맑은 바람 이는 듯한 몇 수 시로세 / 幾首穆如詩
경색은 원래 흥을 돋우는 것이고 / 景色元挑興
정회는 어찌 기이함을 자랑할까 / 情懷豈詑奇
어린 종은 어서 가자 자주 아뢰고 / 小奚愁報數
외론 손님은 더딘 걸음 괴이하게 여긴다 / 孤客怪行遲
후일의 모임은 어느 곳이 될까 / 後會知何處
봄 강물 푸르게 불어날 때이리라 / 春江綠漲時

또〔又〕


미묘한 역경을 엿보기 어려워서 / 微妙難窺易
화평한 시를 설명하기 좋아하네 / 和平愛說詩
마음 맞으니 참으로 맛이 있고 / 會心眞有味
눈에 들어오면 다시 기이하여라 / 寓目更成奇
글은 어찌 삼동만으로 족하겠는가 / 文豈三冬足
성공은 십 년 동안 기다려야 하리 / 功須十載遲
고향의 초가집 조용하니 / 故園茅屋靜
얼마나 많은 세월 책을 펼쳤던가 / 披卷幾多時

또〔又〕


수작함에 내 뜻을 아는 이가 많으니 / 相酬多會意
내가 어찌 시를 피하겠는가 / 吾豈敢逃詩
옛 격률 정하고 또 묘하거니와 / 舊格精仍妙
새소리도 바르고 또 기이하네 / 新聲正又奇
채찍을 휘두르니 해 저물어 시름하고 / 揮鞭愁日晩
술을 대하니 봄이 오래기를 원하네 / 對酒願春遲
남쪽 북쪽에 갈려 있다 혐의일랑 마소 / 南北休嫌阻
부평초도 만날 때가 있다오 / 萍蓬亦有時

또〔又〕


좋은 손님 찾아왔다 하니 / 似聞佳客至
우리들도 시 짓는 일 쉬자꾸나 / 吾輩合休詩
활이 굳세지만 재간은 도리어 빠르고 / 弓勁才還捷
술잔 깊으니 흥도 자못 기이하구나 / 盃深興太奇
빈 누각에 봄빛이 아름답고 / 虛閣靑春好
외로운 성에 해는 느리네 / 孤城白日遲
좋은 놀이는 으레 퍼지기 마련이라 / 勝遊從爛熳
북소리도 요란하게 울리누나 / 雷鼓亂鳴時

또〔又〕


닭 잡느라 번거롭게 칼을 놀리지만 / 鷄割煩游刃
높은 회포 시 읊음 폐하지 않았네 / 高懷不廢詩
글씨는 백영의 건장함을 임서하고 / 書臨伯英健
글자는 자운의 기이한 글자를 묻네 / 字問子雲奇
벽이 굳건하니 적수 없음 알고도 남는데 / 堅壁知無敵
항복서 올리니 스스로 더딘 것이 부끄럽네
/ 投降愧自遲
겹겹의 포위 술을 만나 풀리니 / 重圍須酒解
누대 위에서 술잔을 잡았노라 / 樓上把盃時

또〔又〕


봄 누대에 기대어 있으니 / 徙倚春樓上
강산이 시흥을 도와주는구나 / 江山爲助詩
담담한 연기는 도리어 빛을 띠었고 / 淡烟還帶色
먼 나무는 다시 기이함 더하네 / 遠樹更添奇
북소리 자주 들려오는데 / 鳴鼓頻頻報
새 시편 짐짓 더디어지는구나 / 新篇故故遲
이완과 긴장 예로부터 전해 오니 / 弛張傳自古
좋은 일 때를 같이하여 다행이로다 / 勝事幸同時

또〔又〕


술을 얻어 새 흥이 나지만 / 得酒生新興
거친 성품이라 이미 시를 꺼리네 / 踈狂已諱詩
누대의 구름은 빗방울이 엉기고 / 樓雲霏漸合
연못의 달은 그림자 기이하여라 / 池月影初奇
옥 술잔에 회포 시원하게 열리고 / 玉斝開懷遠
거문고엔 손가락 서서히 놀린다 / 瑤琴下指遲
맑은 놀이 원래 스스로 좋은데 / 淸遊元自勝
더구나 봄철의 행락임에랴 / 行樂況春時

또〔又〕


난간에 기대어 한가히 시 읊으니 / 憑欄閒覓句
참으로 간재의 시를 생각하네 / 正憶簡齋詩
푸른 대나무에 모두 시를 쓸 것이고 / 靑竹題應遍
찬 매화 대하면 또한 기이하구나 / 寒梅對又奇
맑은 이야기 회포를 실컷 풀었고 / 淸談開抱盡
취한 후 술잔을 더디게 잡기도 하네 / 泥醉把盃遲
거꾸러지며 반가워함 의심하지 마오 / 顚倒休相訝
만나는 장소 이도 한때로다 / 逢場此一時

또〔又〕


하늘땅에 큰 뜻 부질없이 품었으니 / 乾坤空抱志
한 기예 시 읊음을 웃노라 / 一技笑吟詩
그런데도 굳건히 붓을 휘두르니 / 猶復揮毫健
모름지기 기이하게 운을 맞춰야지 / 須應押韻奇
급급한 압박을 강하게 받으니 / 剛被侵陵急
더딘 수색을 어이 견디리 / 那堪搜索遲
서로 만나면 참으로 번뇌스러우니 / 相逢眞自惱
깊은 밤 괴로이 생각하는 때로다 / 深夜苦思時

또〔又〕


누대 위에서 맑은 잔치 열었으니 / 樓上開淸宴
아문에서 좋은 시 이어 쓴다 / 衙中繼好詩
하늘의 별빛 구름 속에 나타나고 / 天星雲裡見
산속의 불빛은 깊은 밤에 기이하구나 / 山火夜深奇
촛불 가까이 자주 옮겨 앉고 / 蠟燭移頻近
술잔을 잡아 멈추지 않았네 / 花盃把不遲
즐거움이 한창 다하지 않았는데 / 歡娛方未畢
닭 울음소리 요란하게 들려오네 / 喔喔聽鷄時

또〔又〕


처음으로 활쏘기 끝내고 / 初罷鳴弓射
다시 붓을 대어 시를 쓰네 / 還爲落筆詩
소반을 치니 노래 절로 호방하고 / 擊盤歌自放
기생을 끼니 좌석도 기이하여라 / 擁妓坐成奇
고개가 내둘리는 시 읊음 어찌하리 / 最奈吟頭掉
느릿느릿 춤가락도 시름겨이 보네 / 愁看舞袖遲
이 풍류 참으로 다행스러우니 / 風流眞自幸
아름다운 흥이 당장에 솟아나네 / 佳興聳當時

또〔又〕


고상한 담론은 나의 술에서 나오지만 / 高談縱我酒
맑은 흥은 그대의 시가 빌미로다 / 淸興祟君詩
남 따라 크게 취하기도 하고 / 大醉從他得
내 맘대로 미친 듯 읊기도 하네 / 狂吟任自奇
엷은 연기 숲에 서려 어울리고 / 微烟侵樹合
새 달도 느릿느릿 산으로 내려가네 / 新月下山遲
노래하고 춤추는 자태를 구경하니 / 歌舞看餘態
난만하게 회포를 푸는 때로다 / 開懷爛熳時

또〔又〕


열백 번 겨뤄도 그대에게 지고 마니 / 百籌輸子去
높은 흥이 시를 멈춰 다행이로세 / 高興幸休詩
술잔을 잡으면 생각이 솟아나고 / 把酒思還逸
등잔 옮기니 일이 또한 기이하여라 / 移燈事亦奇
날카로운 바람은 장막 밖에서 불어오고 / 尖風隔幔動
외로운 달 숲 옆에 떠오른다 / 孤月傍林遲
뒷날 밤에도 서로 만날 수 있지만 / 後夜知相對
회포를 풀기로는 이때만 못하리라 / 開懷欠此時

또〔又〕


송천은 나와 뜻이 같은 벗님인데 / 松川吾執友
존백도 시를 능히 하지 / 尊伯更能詩
우연히 아름다운 의표 접하였고 / 偶接嘉儀靜
돌이켜 소자의 기이함을 보았네 / 還窺小子奇
밤 자리에 술잔을 조용히 나누었으니 / 夜席傳盃細
높은 누대에 파연도 더디었네 / 高樓罷宴遲
두 고을은 냇물 길이 먼데 / 兩鄕川路遠
어느 때나 또 우연히 만나 볼까 / 邂逅又何時

또〔又〕


밤에 돌아와서 방에 누워 / 夜室且歸臥
한가로이 동해시를 펼쳐 보았네 / 閑繙東海詩
조각 말도 그 입에서 나왔으니 / 片言猶出口
이십 수에 점점 기이함을 알겠도다 / 卄首轉探奇
화답하고 싶지만 나는 재주가 없고 / 欲和吾嫌拙
기다리자면 그대는 늦다고 하리 / 相須子苦遲
등불을 돋우며 공연히 붓만 깨무니 / 挑燈空吮墨
우뚝하게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하였네 / 兀坐不眠時

또〔又〕


깊은 술잔은 봄의 일을 따르고 / 深酌從春事
정을 융화하긴 옛 시가 있네 / 融情有古詩
엉성하면서도 호탕한 성격 많고 / 迂踈多跌宕
진부한 것이 신기하게 변화했네 / 臭腐化神奇
피곤한 졸음에 일어나기 어려우니 / 困睡知難起
새벽빛 느림을 깨닫지 못하여라 / 晨光不覺遲
청아한 아낙 내 뜻 시험하지 마오 / 淸娥休試意
술에 만취하여 병풍에 기대었노라 / 醉爛倚屛時

또〔又〕


등잔 심지 자주자주 돋우며 / 燈燼頻頻剪
시름에 잠겨 각각 시를 읊었노라 / 愁顔各詠詩
그대를 만남 참으로 다행이고 / 逢君眞是幸
붓을 뽑아 드니 또한 기이하여라 / 拈筆亦爲奇
원적은 어찌 능히 숨겠으며 / 元積能何隱
용문은 공교롭게 스스로 느리누나 / 龍門巧自遲
외로운 자취 절망을 알겠노니 / 孤蹤知絶望
빈 여관에 누워 쉬었노라 / 空館臥休時

또〔又〕


용문은 정신 맑아 잠자지 않고 / 龍門淸不寐
촛불 돋우며 다시 시를 쓰네 / 剪燭更題詩
생각이 씩씩하니 편편마다 빼어나고 / 思壯篇篇逸
정이 새로워 구구마다 기이하네 / 情新句句奇
새벽이라 별은 드물게 보이고 / 寥落天星曉
물시계 소리 톰방톰방 울리네 / 丁東玉漏遲
미친 듯한 흥 스스로 부끄러워 / 自慙狂興爛
아침까지 드릉드릉 코 골며 잤네 / 鼾睡達朝時

또〔又〕


어저께 누대에서 술을 마셨는데 / 昨日樓中飮
시도 한 수 기억할 만하네 / 端須記一詩
활은 당기면 반드시 맞히고 / 彎弓發必中
젓대 부니 더욱 기이하게 들리누나 / 橫笛聽尤奇
함께 취해 기세등등하고 / 共作騰騰醉
서로 이끌며 느 / 侵陵元積老
서쪽 방에서 홀로 술을 깨었노라 / 西室獨醒時
릿느릿 걷기도 했네 / 相携步步遲
원적 노인에게 침범했지만


 

[주D-001]닭……놀리지만 :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림을 말한다.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읍재(邑宰)가 되어 예악을 가르쳐 고을 사람들이 모두 현악(弦樂)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공자가 무성에 가서 그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割鷄焉用牛刀〕” 하였다. 《論語 陽貨》 칼을 놀린다는 것은 《장자》〈양생주(養生主)〉에 보이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고사를 들어 말한 것이다.
[주D-002]백영(伯英) : 후한 장지(張芝)의 자이다. 초서(草書)를 잘 써서 사람들이 초성(草聖)으로 일컬었다.
[주D-003]자운(子雲) : 한나라 때 부(賦)의 대가인 양웅(揚雄)의 자이다. 양웅이 고자(古字)를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유분(劉棻)이 일찍이 그에게 찾아가 기이한 글자를 배웠다 한다. 《漢書 卷87 揚雄傳》
[주D-004]벽이……부끄럽네 : 싸울 때 힘이 모자라면 성벽을 굳게 지키고 싸우지 않는 것이 최상인데, 시재를 겨룬 것이 잘못이라고 뉘우친다는 뜻이다.
[주D-005]이완과 긴장 : 《예기》〈잡기(雜記)〉에 “활을 조이기만 하고 늦추지 않듯이 백성을 오랫동안 부리기만 하고 풀어 주지 않는다면 문왕ㆍ무왕일지라도 다스리지 못하고, 활을 풀어 놓기만 하고 조이지 않듯이 백성을 안일에 빠지게 한다면 문왕ㆍ무왕도 하지 않을 것이니, 한 번 조이고 한 번 늦추는 것이 문왕ㆍ무왕의 도이다.〔張而不弛 文武弗能也 弛而不張 文武弗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 하였다.
[주D-006]봄철의 행락 : 이백(李白)의 〈월하독작(月下獨酌)〉에 “잠시 달과 그림자를 짝하니, 모름지기 봄날에 즐기어야지.〔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하였다.
[주D-007]간재(簡齋) : 진여의(陳與義)의 호이다. 정강(靖康)의 난 이후에 북송(北宋)의 시인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간재만이 남았는데, 그 시재가 탁월하고 변화에 능했다 한다.
[주D-008]송천(松川) : 양응정(梁應鼎 : 1519∼1581)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이다. 저서에 《송천유집》, 《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
[주D-009]존백(尊伯) : 상대방의 형님을 말한다.
[주D-010]용문(龍門) : 용문처사(龍門處士) 남격(南格)을 가리킨다. 동강(東岡) 언경(彦經)의 아들로서 조식(曺植)과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고봉집 제2권
퇴계 선생에 대한 제문



융경(隆慶) 5년(1571, 선조4) 세차 신미(歲次辛未) 1월 갑자삭(甲子朔) 4일 정묘(丁卯)에 후학 고봉 기대승은 먼 곳에서 주과(酒果)의 제전(祭奠)을 갖추어 재배(再拜)하고 곡하여 보내어 퇴계 선생의 영좌(靈座) 앞에 감히 아룁니다.
아, 애통합니다. 대들보가 꺾이고 태산이 무너졌으니, 제가 다시 어떻게 마음을 가누겠습니까. 위로는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짐을 애도하옵고 아래로는 만학(晩學)이 의지할 곳을 잃음을 슬퍼하오니, 어찌하여 저로 하여금 뼈가 놀라고 혼이 날아가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지난해 중동(仲冬) 초순(初旬)에 저는 한 통의 편지를 올려서 기거(起居)를 문안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인편에 혜서(惠書)를 받자오니, 10월 15일에 쓰신 것으로 이웃 고을의 자제에게 부탁해서 전해 부쳐 온 것이었습니다. 내용을 보오니 저에게 모가 너무 드러남을 경계하셨고, 또 시사(時事)가 염려스러울 만함을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물격(物格)과 무극(無極)의 해석에 있어서 번거로이 서찰을 왕복하면서도 끝내 합하지 못하던 것들이 마침내 의견이 합치하여 한 길로 돌아가게 되오니, 다행스러운 마음과 위안되는 충정(衷情)을 말로는 진실로 다 표현할 수 없으며, 마음으로도 다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이와 같다면 친히 장구(杖屨)를 모시고 직접 음성을 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헤어져 있는 시름을 씻고 어리석음을 계발(啓發)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어 그달 보름에 이생 함형(李生咸亨)의 인편을 통해 편지 한 장을 올려서 구구한 정을 아뢰었습니다. 하인이 돌아올 때가 되어서는 마침내 손수 쓰신 편지를 곧바로 부쳐 주셨습니다. 처음에 우환이 심하여 더욱 사람을 응접하는 데 권태감을 느낀다고 말씀하였고, 다시 가슴에 담증(痰症)이 갑자기 일어나며 다른 증세까지 합병하여 신음하고 있다고 말씀하였고, 끝에는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였으며, 저에게 오랫동안 한가히 있으면서 고요히 공부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자획(字劃)이 전과 다름을 이상히 여겼으나, 신기(神氣)가 크게 감소하셨음을 깨닫지 못하고는 망녕되이 생각하기를 옛날 증세가 우연히 발작한 것이니 마땅히 약을 쓰지 않아도 쾌차하시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것이 영결(永訣)하는 글이 되어 다시는 가르침을 받들 수 없을 줄 알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납월(臘月) 20일에 저는 마침 금성(錦城)의 서촌(西村)에 있었는데, 이생(李生)의 급보를 받고 선생이 8일 저녁에 역책(易簀)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놀라 울부짖어 실성통곡하며 애통함이 흉중에 가득하였으므로 이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영손(令孫)인 상사(上舍)의 편지를 얻고서야 그간 선생이 병환을 앓으신 상세한 내용을 알았으며, 또 뒤에 제가 올린 편지는 선생의 병환 때문에 미처 궤안(几案)의 옆에서 봉함을 열어 아뢰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득한 천지에 만나 뵈올 길이 없사오니, 오직 여생을 다하고 지하에 간다면 혹시라도 선생의 의형(儀刑)을 접하여 남은 종적(踪迹)을 뒤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애통합니다. 저는 삼가 생각하건대 완악하고 비루한 자질로 실로 인도해 주시는 지극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은혜가 이미 깊고 의(義)가 중하여 마음이 매양 향해 달려가서 감히 그대로 있지 못하였습니다. 생각에는 영외(嶺外)의 수령 자리를 얻어서 몸소 문장(門牆)에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세월이 더욱 빨리 흘러감을 탄식할 뿐이고, 항상 도체(道體)가 장수하시고 강녕하시기만을 축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인간의 일을 기약할 수 없어서 갑자기 부음(訃音)을 받는단 말이옵니까.
애통하여 사모하면서 길이 울부짖으니 가슴은 답답하고 답답하여 더욱 서글퍼집니다. 천 리 먼 길에 애도하는 말을 엮어서 한 잔 술에 부치오니, 애통하여 저의 정을 다할 수 없사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선생의 영령이 계시면 부디 저의 작은 정성을 굽어 살피소서. 아, 애통하옵니다. 흠향하소서.




융경(隆慶) 6년(1572, 선조5) 세차 임신(歲次壬申) 2월 무자삭(戊子朔) 17일 갑진(甲辰)에 후학 고봉 기대승은 삼가 주과(酒果)를 가지고 사람을 보내어 퇴계 선생의 궤연(几筵) 앞에 올리옵니다.
아, 선생께서 후학을 버리신 지가 지금 벌써 15개월이 되었습니다. 후학들이 추모하는 애통함은 날이 갈수록 쌓이니, 더욱 멀어질수록 잊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사(人事)와 세도(世道)에 대한 감회까지 겹치니 애통하고 애통하옵니다.
근년 이래로 저는 전리(田里)에 엎드려 있어서 비록 학문을 연구하고 탐색하는 일에 힘을 다하지는 못합니다만, 또한 때로는 한두 가지 새로운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질정(質正)할 곳이 없으니, 매양 옛날 선생과 왕복하며 논변(論辯)하던 즐거움을 생각하면 더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지난 초기(初朞)에 저의 생각에는 멀리 한 잔 술을 올리고자 하였으나, 길이 멀고 노복(奴僕)이 적어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답답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제 감히 소략하게나마 변변찮은 물건을 장만하여 작은 정성을 올리오니, 선생께서는 밝게 강림하시어 우리 후학들의 뜻을 도와주소서. 아, 애통하옵니다.


 

[주D-001]대들보가……무너졌으니 : 퇴계(退溪)의 죽음을 슬퍼하는 말이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꺾이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자공(子貢)이 이 노래를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가 장차 어디를 우러러보며,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라고 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002]역책(易簀) : 스승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증자(曾子)가 임종할 때 일찍이 계손(季孫)에게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대부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깔 수 없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다음 운명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檀弓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