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8.13. 목멱산

2012.8.13. 목멱산 야등

아베베1 2012. 8. 14. 10:15

 

 

 

 

 

 

 

 

 

 

고려사절요 제6권
 숙종 명효대왕 1(肅宗明孝大王一)
병자 원년(1096), 송 소성 3년ㆍ요 수륭 2년


○ 봄 정월 동여진에서 아부한(阿夫漢)ㆍ고란곤(高蘭昆)ㆍ두문(豆門) 등 1백 7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조(詔)하기를, “짐이 선왕의 검소하셨던 덕을 이어받아 행하고자 하여 음식의 가짓수를 감하고 기호(嗜好)대로 다 하지 아니하는데, 근래에 들으니 '내외의 풍속이 사치를 좋아함이 한도가 없어서 음식에도 잔과 쟁반이 지나치게 많아 풍속을 상하게 한다.' 하니, 마음이 매우 통탄스럽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등급을 정하고, 어사대에서 규찰하게 하라." 하였다.
○ 왕의 생신을 대원절(大元節)이라고 하였다.
○ 2월 우원령(禹元齡)을 요에 보내어 전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것에 사례하였다. 표문에, “번신(藩臣)의 생일을 기억하고 화사(華使)를 보내어 은총을 내려주시니, 마땅히 배수(拜受)해야 하지만, 병든 몸이 더욱 약해져서 마침내 친히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임시로 한 지방을 지키면서 전왕을 대신하여 두터운 은혜를 받자온바, 조서에 별도로 기록한 것은 이미 전하여 부쳤습니다…" 하였고, 전왕의 표문에는, “신은 일찍부터 허로병(虛癆病)이 들어서 치료(治療)하기 어려웠습니다. 번방(藩邦)의 중한 업무를 진실로 잠시나마 비울 수 없사옵고, 공물 바치는 법을 혹시라도 궐하게 할 수 없사오므로, 감히 숙부에게 미루어 이에 국권을 위임하였습니다. 세상일을 포기하고 별제(別第)에 물러나 있어서 파리한 자질은 늘 장빈(漳濱)에 누웠사옵고, 황홀한 혼(魂)은 다만 대악(岱嶽)에 놀고 있습니다. 병이 이미 심하여 위태하온데, 어찌 낫기를 바라오리. 근자에 들으니, 공첩(公牒)이 갑자기 왔는바 황제의 말씀이 내린 줄을 알았습니다. 기복시키는 특례를 주고 책봉을 거행하는 성대한 의식을 행하고, 모든 것을 탕감하여 원하고 바라는 바에 맞게 하는 것과 또 생일을 축하해 줄 것과 특별히 물품을 하사하고자 미리 유시(諭示)하시나, 잔명(殘命)이 조그만 공로도 없었사오니, 이때에 어찌 후하게 주심을 받으오리까. 불쌍하게 여기시어 간절한 아룀을 굽어 살피셔서 다시 왕위에서 물러남을 곧 허락함을 내리시고 생일 축하의 사신 보내는 것을 중지하여 병든 신(臣)에게 무거운 짐을 영구히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 전왕이 흥성궁(興盛宮)에 나아가서 거처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 말을 따랐다.
○ 서여진에서 아라화(阿羅火) 등이 내조하였다.
○ 3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간신 이자의(李資義) 등이 사사로이 미곡을 축적하여 수량이 거만(鉅萬)이온데, 이것은 모두 백성을 착취하여 모은 것이니 관에서 몰수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지례사(持禮使) 고민익(高民翼)을 요의 동경(東京)에 보내었다.
○ 김보신(金輔臣) 등 30명, 명경 4명, 은사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4월 선정전에 나아가서 해[日]가 저물도록 조회를 하였다. 중서성에서 아뢰기를, “때는 만물이 자라는 철이온데, 3월 이래로 기후가 어긋나서 물이 맺혀 얼음이 되고, 서리가 내려 만물을 죽이며, 밤에 번개가 갑자기 쳤습니다. 《홍범 오행전(洪範五行傳)》에 '우박은 음(陰)이 양(陽)을 협박하는 상(象)이다.' 하였고, 경방(京房)의 《역전(易傳)》에는 '죽이는 형벌이 이치에 벗어나면, 그 재앙으로 서리가 내린다.' 하였으며, 또 '위에서 한쪽 말만 치우치게 들어서, 하정(下情)이 막혀 이해를 잘 생각하지 못하고 준엄하고 급하게만 힘쓰는 실책이 있으면, 그 재앙으로 항상 기후가 차다.' 하였사오며, 또 '군사를 일으켜서 망령되게 죽이면, 이것을 법이 없다 하는 것이온데 그 재앙으로 여름에도 서리가 내려서 오곡(五穀)을 죽인다.'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어린 임금께서 병환이 심하여 정사를 결단함이 밝지 못하고 모후가 정사를 대리하여, 미혹에 빠져 법도를 잃으니 흉한 사람이 틈을 타서 반란을 도모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륙을 크게 행하여 그 무리를 남기지 않으나, 처결할 때에 정상(情狀)을 밝게 살피지 못하여 구금된 자 중에는 반드시 죄 없는 이도 있었을 것이므로, 원망하는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화기가 변해서 재앙으로 된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천명에 순응하여 대통을 이어 모든 정사를 바로잡았사오니, 어사대와 상서ㆍ형부에게 모든 의심되는 옥사로서 옳고 그름이 확정되지 못한 것을 빨리 정당하게 처결하여 원통하고 과람함이 없게 하시고, 사실이 아닌 것을 무고한 자는 모두 번좌(反坐)하도록 하시어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시면, 민정(民情)이 서로 즐거워하여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받아 들였다.
○ 현종(顯宗)ㆍ경종(景宗)의 두 능을 배알하였다.
○ 5월 요의 동경에서 지례사(持禮使)로 예빈부사(禮賓副使) 고양정(高良定)이 왔다.
○ 6월에 경종의 신주(神主)를 영릉(榮陵 경기도 개풍군 진봉면 탄동리)으로 옮기고 선종을 태묘(太廟)에 부(祔)하였다.
○ 진명도부서사 문주방어판관(鎭溟都部署使文州防禦判官) 이순혜(李順蹊) 등이 해적(海賊)과 싸워 머리 17급(級)을 베었다.
○ 동여진에서 영손(英孫) 등 17명이 내조하였다.
○ 왕이 동지(東池)에 배를 띄워서 술자리를 베풀고, 재상과 근신을 불러 참여하게 하여 함께 시를 지었는데, 밤중에 이르러 우레와 비가 오자 중지하였다.
공복(功服) 친족끼리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가을 7월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서 역대 깊이 간직하였던 문서를 열람하고 부질(部帙)이 완전한 것은 나누어서 문덕전 어서방(御書房)과 장령전(長齡殿) 비서각(祕書閣)에 간직하고, 또 양부(兩府)의 재신(宰臣) 및 고원(誥院)ㆍ사한(史翰)ㆍ내시 문신(內侍文臣)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 8월 동각(東閣)에는 국가원로를, 좌우동락정(左右同樂亭)에는 서민의 늙은이를 모아 향연(饗宴)을 베풀었는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음식을 권하고 이어 의복ㆍ폐백ㆍ실ㆍ솜[綿]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동여진에서 와돌을(臥突乙)ㆍ고마요(古馬要) 등이 오자, 왕이 번사(蕃事 오랑캐 지방의 일들)를 묻고 주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 귀령각(龜齡閣)에 나아가서 무반의 장군 이하의 활쏘기ㆍ말몰기를 친히 사열하였는데 11월이 되어서 마쳤다.
○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글을 올려서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국에 세 곳의 서울이 있으니, 송악(松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이 되는데, 11ㆍ12ㆍ정ㆍ2월은 중경에 머물고, 3ㆍ4ㆍ5ㆍ6월은 남경에 머물며, 7ㆍ8ㆍ9ㆍ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한 뒤 일백 60여 년에는 목멱양에 도읍한다.' 하였는데, 신은 지금이 바로 새 서울에 순주(巡駐)할 시기라고 여깁니다. 지금 국가의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으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니, 이에 점술가인 문상(文象)이 그 말에 따라서 부동(附同)하였다.
○ 9월에 우복야 참지정사 박인량(朴寅亮)이 졸하였다. 인량은 문장이 전아하고 화려하였다. 송 나라 희령(熙寧) 연간에 김근(金覲)과 함께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저술한 척독(尺牘)ㆍ표(表)ㆍ장(狀) 및 시를 송 나라 사람이 칭찬하여, 두 사람의 시와 문을 간행까지 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요에서 압록강을 지나와서 경계(境界)로 삼으려고 하자, 인량이 진정표를 지었는데, “온 하늘 아래가 왕의 땅, 왕의 신민 아님이 없는데, 얼마 안 되는 땅의 나머지를 하필 내 경계니 내 관할이니 할 것입니까." 하고, 또 "문양(汶陽)의 옛 토지를 돌려주어서 저희 나라를 돌보아 주시면,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려서 태평 시대에 춤추오리다." 하니, 요의 황제가 보고 그 의논을 중지하였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고 하였다.
○ 탐라 성주(星主)가 사람을 보내와서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 회경전(會慶殿)에서 《인왕경(仁王經)》을 3일 동안 강(講)하고 중 1만 명을 밥먹였다.
○ 겨울 10월 시중(侍中) 소태보(邵台輔)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관고(官誥)를 내리고, 겸해서 금은 그릇과 의대(衣襨)ㆍ비단ㆍ포목ㆍ안장차린 말 및 음악ㆍ꽃ㆍ술을 하사하여 그의 집에서 잔치하게 하였다.
○ 동지사정(東池射亭)에 나와서 좌복야 황중보(黃仲寶) 등을 불러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쏘게 하였더니, 어사중승(御史中丞) 김경용(金景庸)이 먼저 곡(鵠)을 맞히자, 은접시 5개와 말(馬) 1필을 하사하고 그 밖에도 맞힌 자에게는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 송 나라 상인 홍보(洪輔)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오연총(吳延寵)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 11월 소충(蘇忠)을 요에 보내서 공물을 바치고, 백가신(白可臣)은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다.
○ 12월 요에서 이유신(李惟信)을 보내와서 전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 조하기를, “옛 제도에 모든 관리가 송사(訟事)를 결단하는 데에 소사(小事) 5일, 중사(中事)는 10일, 대사(大事)는 20일이고, 도죄(徒罪) 이상의 옥사를 안핵(按覈)하는 데에는 30일로서 이미 정한 기한이 있으니, 내외 유사는 거듭 밝혀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장빈(漳濱) : 한 나라 왕찬(王粲)이 장빈(漳濱)에 병들어 누웠다는 시(詩)가 있으므로, 병든 것을 장빈에 있다고 한 말이다.
[주D-002]번좌(反坐) : 예를 들어, 사형에 해당한 죄로 무고(誣告)하면 무고한 자가 도리어 사형을 받고, 귀양갈 죄로 무고하면 도리어 귀양가게 하는 법률이다.
[주D-003]공복(功服) 친족 : 대공(大功 : 9월)·소공(小功 : 5월)의 복을 입을 친족 관계이다.
[주D-004]문양(汶陽) : 춘추 시대에 노(魯)가 문양(汶陽)의 토지를 제(齊)에게 빼앗겼다가, 공자(孔子)가 외교를 잘한 덕으로 문양의 토지를 되찾았다.
[주D-005]관고(官誥) : 지금의 사령장(辭令狀)과 같은 것인데, 다만 그 당시에는 임명하는 전교(傳敎)의 문장을 지어서 첨부하였다.

 

태조 3년 갑술(1394,홍무 27)
 12월3일 (무진)
왕도 공사의 시작에 앞서 황천 후토와 산천의 신에게 고한 고유문

임금이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神)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告由文)은 이러하였다.
“조선 국왕 신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 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뢰건대,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 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윽이 생각하니, 신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도움을 받아,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조선(朝鮮) 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 일관(日官)이 고하기를, ‘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 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 이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 신 단(旦)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종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천도한 것인데, 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 ‘종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 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 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 유사에게 분부하여 이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 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매,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 신 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 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神)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 그 고유문은 이러하였다.
“왕은 이르노라! 그대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 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 대개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山)을 봉하여 진(鎭)이라 하고, 물[水]을 표(表)하여 기(紀)라 하였다. 그러므로, 명산(名山) 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 그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조선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이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 이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삼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 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 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 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신도 또한 영원히 먹을 것을 가지리라. 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
【원전】 1 집 72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국조보감 제40권
 현종조 2
8년(정미, 1667)

○ 1월. 원자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았다. 상은 면류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인정전(仁政殿)에 납시고, 왕세자는 칠장관(七章冠)ㆍ공정책(空頂幘)ㆍ적말(赤襪)ㆍ적석(赤舃) 차림으로 예를 거행하였는데 태도와 모습이 의젓하기가 성인(成人)과 같았고 일거일동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그때 왕세자의 나이 겨우 7세였으므로 뜰을 메워 선 신료들 모두가 목을 늘이고 지켜보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로부터 3일 후 상은 하례를 받고, 교서를 반포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 2월. 성균관 유생들이 무슨 일로 하여 문묘(文廟)의 신문(神門)에서 하직인사를 고하고는 관을 비우고 나가버렸다. 그리하여 관관(館官)이 그 사실을 예조에 보고했는데, 예조가 전례를 상고한바 유생들이 관을 비우고 나가게 되면 그날 맨 먼저 예관(禮官)을 보내고 다음으로 승지를 보내 유생들을 타일러 들어오도록 만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예조의 당상관들 모두가 유고였으므로, 상이 지관사(知館事) 김수항(金壽恒)과 대사성(大司成) 조복양(趙復陽)에게 명해 함께 성묘(聖廟)에서 숙직하게 하고 유생들을 들어오도록 타이르는 일을 지관사가 대행하도록 했다.
○ 4월. 상이 대비를 모시고 온양 온천에 행행하면서 본도에 명해 모든 공상(供上)을 다 적당히 줄이도록 했으며, 나이 80 이상인 자에게는 가자(加資)와 함께 옷가지와 먹을 것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그리고 상평창 곡식을 풀어 길가 떠돌이들을 진구하고 온양(溫陽)ㆍ천안(天安)ㆍ직산(稷山) 3개 읍의 조세를 매 결당 2말씩 견감해 주게 했으며, 행차 때 역사를 했던 고을은 1말씩을 견감해 주도록 했다.
○ 판중추부사 홍명하(洪命夏)가 상차하기를,
“백성을 교화시키고 미풍양속을 만드는 길은 무엇보다도 존성(尊聖)이 최고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왕들이 순수할 때면 다 성묘(聖廟)에다 제를 올렸던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성종대왕이 영릉(英陵) 행행 때 여주(驪州)에다 대가를 멈추시고 관원을 보내 향교(鄕校)에 제를 올렸는데, 그 일이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0가구의 읍에도 반드시 충신(忠信)은 있다고 했는데 행조(行朝) 가까이에 있는 고을에도 쓸 만한 인재가 왜 없겠습니까. 두 전조(銓曹)로 하여금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하게 하시면 그 역시 사기를 앙양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여, 상이 중신을 보내 태뢰(太牢)로 온양 향교에 제를 올리게 하고, 조이중(趙爾重)ㆍ신인립(愼仁立)ㆍ박효상(朴孝相)ㆍ권회(權誨) 이상 4인에게 직을 제수했는데, 이 넷은 다 본도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 윤4월. 가뭄으로 인해 관원을 보내 도내의 명산 대천에 가 비를 빌게 하고, 또 재신(宰臣)을 보내 우사단(雩祀壇)과 삼각산(三角山)ㆍ목멱산(木覓山) 및 한강에 가 빌게 했으며, 또 중신을 보내 종묘ㆍ사직 그리고 북교(北郊)에 가 빌게 했다. 그리고 도내의 죄수들을 소결하고, 사족(士族)으로서 나이 30이 지나도록 빈한해서 시집 장가 못 간 자들을 관에서 물자를 대주어 성혼을 시키고, 노비들 신공도 지정해서 징수할 길이 없는 것들은 그 일체를 탕감했다.
○ 상이 대비를 모시고 온천에서 돌아와 피전(避殿)ㆍ감선(減膳)ㆍ철악(撤樂)ㆍ구언(求言)을 하고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소결했다. 한재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 관동ㆍ관서의 유랑민들이 서울까지 떠돌아와 굶주리고 병든 자가 수천 명에 달했는데,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그들을 동서 활인서(活人署)에다 나누어 수용하고 식량을 대주면서 구료(求療)에 임하도록 명했다.
○ 5월. 경창(京倉)의 대두(大豆) 1천 5백 석과 전미(田米) 5백 석을 흥원창(興元倉)으로 옮겨다가 관동의 기민들을 진구했다.
○ 7월. 강화도 군량미 5백 석을 기민 진구에 쓰도록 명했다.
○ 강계부(江界府)의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서원 이름을 계몽(啓蒙), 경성부(鏡城府)의 고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사당 이름을 창렬(彰烈)로 내렸다. 두 고을의 사민(士民)들 청을 따른 것이었다.
○ 강화도 군향곡 5백 석을 기민 진구에 대주었다.
○ 8월. 흉년으로 인하여 경기 도내 전지 조세를 전액 면제하고 대동미도 매 결당 1말 6되씩만 징수하여 관수(官需)에 이용하고 나머지는 기민 먹이는 데 보태도록 명했다.
○ 10월. 고 필선(弼善) 정뇌경(鄭雷卿)의 모친이 죽었는데, 상사에 필요한 것들을 대주고, 선왕조에서 하사했던 늠록(廩祿)을 앞으로 3년까지 그대로 주도록 했고, 고 부제학 정홍익(鄭弘翼) 처상에도 상사에 필요한 것들을 대주도록 명했다. 대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11월.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도록 했다.
○ 경덕궁(慶德宮) 곁에다 집상전(集祥殿)을 건립하도록 명했다. 그때 상이 자의(慈懿)ㆍ인선(仁宣) 두 대비를 모시면서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이 온갖 정성을 다했는데, 자의대비가 거처하는 만수전(萬壽殿) 동편에다 따로 전각 하나를 건립하고 이름을 집상이라 하여 그곳을 인선대비 거소로 삼았으니, 마치 한(漢) 나라 때의 장락궁(長樂宮)과 장신궁(長信宮) 같은 제도를 본뜬 것이다.
○ 12월.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말하기를,
“영남의 유청군(有廳軍 낙강군(落講軍) 즉 보충대)들이 한 몸으로 세 가지 역을 하고 있어 그들 괴로움과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충훈부(忠勳府)의 충의(忠義)에 부정하게 소속된 자 및 군적에 입적되지 않은 자가 많게는 1천여 명이나 되고 있는데 그들은 당연히 여정(餘丁)이므로 해마다 그들 일인당 베 2필씩을 징수하여 유청군 한 몫을 그들이 담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 나머지는 금군(禁軍)의 보인(保人)으로 지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상이 그대로 윤허했던 것이다.
○ 고 충신 안홍국(安弘國)에게 관작을 추증하라고 명했다. 홍국은 임진왜란 당시 보성 군수(寶城郡守)로서 전라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의 중군(中軍)이 되어 안골포(安骨浦)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배 한 척의 군대로 수많은 적선을 격파하고 끝내 탄환에 맞아 죽은 사람으로 그의 충의(忠義)와 위대한 절개를 말하자면 이순신과 같은 자였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홍국의 아들 종술(宗述)이 상소하여 그 실상을 아뢰었기 때문에 그렇게 명하였던 것이다.

태종 16년 병신(1416,영락 14)
 5월25일 (병진)
다시 국무당과 감악산·덕적산·목멱산에 기양제를 행하다

다시 국무당(國巫堂)과 감악산(紺岳山)·덕적산(德積山)·목멱산(木覓山) 삼성(三聖)에 기양제(祈禳祭)를 행하였다.
【원전】 2 집 118 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訥齋集卷之二 南原梁誠之著
 奏議
便宜二十四事 春秋大射。增置五京。嶽鎭海瀆。設蕃部樂。議行冠禮。定服色。禁服妖。祭前代君相。護前代陵墓。文廟從祀。武成立廟。配享功臣。文崔立祠。侍臣蔭子。文武科法。遣子入學。革其人法。議罷分臺。州郡奴婢。區處白丁。諸州判官。諸鎭置衛。京都四輔。諸道置鎭。○丙子三月二十八日。以集賢殿直提學上。 a_009_298a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古今治亂之迹。民俗艱難之事。靡不洞照。宵旰圖009_298b治。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三韓一盛際也。方今朝廷得失。民間利病。大臣謀之。臺諫論之。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臣以庸劣獲侍經幄。愧無寸效上補聖德。凡國家小大之事。罔不商確於微衷。而思有以裨益乎萬一。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伏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盖金人承遼俗。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亦藩國之盛事也。我東方雄據海東。自三國至于前朝。郊天饗帝。無不爲之。今固不能悉遵其舊。稍倣遼金009_298c故事。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行大射禮。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士氣亦增。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盖遼金渤海。並建五京。前朝又建四京。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而只置兩京。豈不次哉。况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是東郊之地。固非腹裏比也。乞以京都爲上京。漢城府,開城府爲中京。屬京畿右道。以慶州爲東京。全州爲南京。平壤爲西京。咸興009_298d爲北京。各設土官。加定軍兵。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而緩急亦足以賴矣。
一。嶽鎭海瀆。盖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本朝嶽鎭海瀆名山大川之祀。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多有可議者焉。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至於妙香山。檀君所起。九月山。有檀君祠。太白山。神祠所在。金剛山。名聞天下。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實爲國之北嶽。臨津。國之西關。龍津。國之東關。洛東江。慶尙大川。蟾津。全羅大川。博川江。卽古大寧江。以至菩提津009_299a五臺山。皆不載祀典。且東南西海神祠。皆自開城府而定之。亦乖方位。乞命禮官。詳加考定。以三角山爲中岳。金剛山爲東岳。九月山爲西岳。智異山爲南岳。長白山爲北岳。白嶽山爲中鎭。太白山爲東鎭。松岳山爲西鎭。錦城山爲南鎭。妙香山爲北鎭。又移祭東海神於江陵。西海於仁川。南海於順天。北海 鴨綠江上流 於甲山。以龍津爲東瀆。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覓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五臺山,雉岳山,義館嶺,竹嶺山,爲名山。熊津,臨津,菩009_299b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倻津。主屹山。于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古今皆三十四。而仍舊者十七。移祭者四。新陞者十三。可永革者亦十三矣。
一。設蕃部樂。盖中國之樂。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本朝所用。有軒架皷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大抵樂者。象成者也。自太祖乘運而興。太宗,世宗相繼而作。東隣獻琛。北國款塞。制禮作樂。雅俗皆正。而獨蕃樂未之議焉。方009_299c今聖上龍飛。新登大位。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常數百人。稽顙闕庭。海東文物。未有盛於此時者也。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女眞歌舞。爲北部樂。日本樂。習於三浦倭人。女眞樂。習於五鎭野人。其衣冠制度。不爲怪異譏誚之狀。燕東使則兼用北樂而不用東樂。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燕中國使則並用東北樂。于以用之朝廷。奏之宗廟。賁餙太平之治。以光我祖宗之業。不勝幸甚。
一。議行冠禮。盖古者。男子二十而冠。所以將責009_299d成人之道也。宋末。進士尹穀在圍城中。行冠禮。鄕人譏之。答云。欲令兒曹冠帶。見先人于地下。其重冠禮如此。東方則前朝明宗時。元子行冠禮。其後無聞焉。乞命禮官。博採古禮。兼考時王之制。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年十三。行冠禮。以笠子,頭巾,紗帽爲三加。或用紗帽,幞頭,梁冠。其未冠者。不許入學婚嫁從仕。于以克復先王之制。丕變外國之陋。幸甚。
一。定服色。盖服色之定。所以辨上下一風俗。不可不嚴也。元人尙白。大明尙黑。以至日本尙009_300a靑。皆有一定之制焉。吾東方朝冠公服。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任用雜色。甚爲鄙俚。乞依公服體制。堂上官以上爲一色。六品以上爲一色。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諸衛軍士爲一色。京外良人吏胥爲一色。公私賤口工匠爲一色。以此依品。漸次穿着。或純用一色。以齊國俗。至於女服。亦皆詳定。
一。禁服妖。盖衣裳之制。所以別男女貴賤也。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成爲三層。009_300b轉相慕效。擧國皆然。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前日。中原女子多服左袵之衣。見聞者皆以爲非吉兆。今女着男服。亦豈嘉祥也哉。况後世。唯女服上衣下裳。最爲近古。若如此從心爲之。則男女衣服。可以自相制度。無所不至矣。何至今不變乎。乞命攸司。定限禁止。其如前穿着者。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以爲貧病者之服。
一。祭前代君相。臣竊觀大明諸司職掌。遣官祭歷代君相。用以太牢。甚盛擧也。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而或有當祭不祭者。又或無配009_300c享大臣。似爲欠典。乞每年春秋。於東郊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 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 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以新羅金庾信,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 禦哈丹有功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一。護前代陵墓。臣觀續六典。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各定守護二戶。使禁樵採。太祖陵。加一戶。甚盛德也。然臣竊惟歷代君王。雖未能009_300d皆有功德於斯民。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其不省所在者已矣。其陵墓如古。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豈不可悶也哉。乞令有司。於前後朝鮮,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仔細尋訪。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別無功德者。置二戶。正妃陵墓。亦置一戶。略蠲征徭。禁其樵蘇。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文廟從祀。盖東方自箕子受封以後。洪範遺敎。久而不墜。唐爲君子之國。宋稱禮義之邦。文009_301a獻之美。侔擬中華。而配食文廟者。獨新羅之薜聦,崔致遠。高麗之安珦三人而已。臣聞學士雙冀在前朝。始設科擧。以振文風。文憲公崔冲又設九齋。以敎諸生。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本朝文忠公權近。其文章道德。人皆可以垂範萬世。乞皆配享先聖。以勸後人。若曰東方賢者。焉能如古之人。則孔孟之後。亦有程朱。且賢者如是其難也。則後人何學爲聖賢乎。中國之配享者。果皆如孔孟程朱乎。東方之士。皆不可如中國人乎。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以009_301b示勸懲之意。然後可以動人觀聽而風移俗易矣。
一。武成立廟。盖文武之道。如天經地緯。不可偏廢。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立廟享祀。與文宣王比。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吾東方先聖之祀。上自國學。下至州郡。而武成王無祠宇。只祭纛神四位。豈非闕典歟。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乞倂纛所于訓鍊觀而立武成廟。祭禮配食。略依文廟制度。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姜邯贊,楊䂓,尹009_301c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芳實,崔瑩,鄭地。本朝之河敬復,崔潤德配享。
一。配享功臣。盖本朝前後五功臣。皆屬忠義衛。三朝原從之人。亦皆宥罪錄後。與元之四㤼薜。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然臣聞前朝配享大臣。稱爲功臣。每大恩例。必錄子孫。本朝五廟。俱有配位。皆功存王室。澤及生民者也。乞依五功臣例。或依原從諸人賜號。配享功臣。並令宥後世祿。且前朝及本朝將相有功德於民者之子009_301d孫。亦使搜訪。特加恩命。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文崔立祠。盖臣聞聖人之制祭禮也。法施於民則祀之。能禦大患則祀之。吾東方舊無木綿種。前朝文益漸。奉使留元。始得而種之。遂流遍一國。至今無貴賤男女。皆衣綿布。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而歷代無火藥之法。前朝末崔茂宣。始學火砲之法於元。東還而傳其術。至今軍陳之用。利不可言。茂宣之功。萬世除民害也。益漸之功。萬世興民利也。其澤被生民。豈曰小哉。009_302a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春秋。令本官行祭。其子孫稱爲功臣。宥罪錄用。
一。侍臣蔭子。盖本朝承蔭之法。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其待士大夫之恩至矣。然其法。三品以上官外。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新參數日。纔拜監察。而蔭及子孫。而或有侍從數十年。蔭不及後者。誠爲可惜。况宋史以宰執,侍從,臺諫並言之。乞四品以下六品以上舘閣兩制。侍從諸臣之子。特許承蔭。公道幸甚。
一。文武科法。盖今文科初塲講經之時。四書五009_302b經外。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實無定䂓。中塲則並試古賦。本非急務。又進士以此取之。終塲則諸史時務。雖參酌出題。至論歷代之事。權辭以對曰。漢唐之治。何足論於今日。取之者亦不以爲意。以此。史學不明。甚爲不可。且武科試。並講四書五經。亦爲未便。乞武經七書外。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文科則四書五經外。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中塲。試表箋。以習臣子事上之文。試詔敎。以習君上令下之文。終塲。歷代時務。迭出爲題。如今年009_302c試歷代。明年試時務。以此定制。以新科擧之法。
一。遣子入學。盖子弟入學。其利有六。得賢師友。而質問疑難。一也。親炙賢士大夫。而薰陶其氣質。二也。人心風俗。彼此形勢。無不知之。三也。親見文獻之美。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四也。或購求墳典。以補闕遺。五也。因以學中國之語音。以正象譯之訛。六也。今雖奏請。似難蒙允。乞於入朝每行李。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學問精熟。文章敏贍。器局宏遠者各一人。就差入送。不煩遊學。則庶幾所見旣廣。所得亦多。009_302d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革其人法。盖前朝太祖統一三韓。以土豪爲戶長。設鄕職。仍使諸郡吏之子孫。爲其人分番侍衛。卽古質子之意也。逮至于後。視爲賤隷。使之苦役。甚無理也。且其人番上之時。或斂民布貨。或賣其田產。駄載而來。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其直六朔四十五匹。此則刻民之之膏血。而供京師遊手之人也。大抵鄕吏姦猾者雖多。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無不爲之。其忍又使爲苦役乎。况三009_303a丁一子。選爲吏胥。至于登正科。躋顯仕。爲國將相者。固非一族。亦士出於農之意也。何必與賤隷。同爲苦務哉。若以役重。非其人不可當。則臣之意。以謂非其人膂力有以當之也。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以其餘爲利。其剝民何如也。今諸司外方奴子三丁爲一戶。一戶五年一番上。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乞自今罷其人之法。只令加定選上奴子。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如是則官家之事。固無不成矣。若以臣之言爲不可。姑試數009_303b年。幸甚。
一。議罷分臺。盖分遣臺臣。本以察守令之貪暴也。察民生之休戚也。其爲名豈不美哉。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道各有監司,首領官。州各有守令,敎官。或有少尹,判官。有節制,處置使。有鎭兵馬使,萬戶,千戶。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非不多。而又遣臺員。豈不民少而官多乎。况今之監司。卽所謂外憲而黜陟守令者也。何必更遣臺臣。以輕監司之權乎。非徒監司之權輕也。反與守令。009_303c同心掩覆。而避分臺之擧劾矣。使分臺但擧大綱而已。則不如不遣之爲愈也。若至於發姦摘伏。則其流之弊。吹毛覓疵。使官吏畏首畏尾。不得措其手足。益長小民凌上告訐之風矣。近日立法之始。尙有過中之弊。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大抵國家政令。固不可柔懶以爲之。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漢宣帝,唐宣宗。皆以剛明聦察爲治。而漢唐之業遂衰。然則剛明聦察。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伏望殿下以寬裕爲政。而勿以苛急爲貴。罷近日分臺之法。009_303d遵前日行臺之䂓。其守令不法。全委監司。考核而殿最之。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而民安其業矣。
一。州郡奴婢。盖外方官奴。其數不等。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平壤官奴。亦數千戶。殘郡則數未盈十。而貢賦賓旅之煩。與他郡不甚相遠。或有人吏之妻負戴於道路者。誠爲不均。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量給殘郡。仍以他郡剩數官奴。充給其司。則庶幾勞逸均而州郡實矣。
009_304a一。區處白丁。盖白丁。或稱禾尺。或稱才人。或稱韃靼。其種類非一。國家悶其不齒於齊民也。稱白丁以變舊號。屬軍伍以開仕路。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本非我類。遺俗不變。自相屯聚。自相婚嫁。或殺牛。或丐乞。或行盜賊。且前朝之時。契丹來侵。最先鄕導。又詐爲倭形。始起於江原道。蔓延于慶尙道。至遣將以討平之。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太半皆此類也。親戚姻黨。連綿八道。小則饑饉。大則兵興。皆可慮也。乞自今不令別作一戶。皆定爲甲士,侍衛,鎭009_304b軍,奉足。使之一一夾居。仍禁其往來他郡。其獨處山谷。或自相婚娶。或行宰殺。或行寇賊。或作樂丐乞者。京外痛禁。其犯者。並罪戶首。又三世不犯禁者。不復稱白丁。而使同爲編戶。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而盜賊稍息矣。
一。諸州判官。盖張官置吏。本以爲民也。今大州簿書雲委。使客坌集。守令以一身。何睱勸農事。何睱聽詞訟。義倉斂散。委之豪猾。斯民之害。不可勝言。乞於京畿水原,楊州。慶尙道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光州,南原等州。特設判官。民009_304c生幸甚。
一。諸鎭置尉。盖秦法。每郡守以治民。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設分道將軍。以主兵事。又有鎭將。有縣尉。今八道六十一處。稱某州道。又稱某鎭。或令左右翼。或自爲一鎭。皆置軍兵。使之團鍊。以戒不虞。誠良法也。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糓。聽理詞訟。勸農興學。一應民事。尙未能辦。亦安能全心治兵。以備緩急乎。乞於各鎭依例置尉。若未能皆置。則其有判官處。文武交差。無判官處。特令置尉。
009_304d一。京都四輔。盖京都。卽所謂北漢山城也。在三國之時。則三國交戰之地。及前朝統一。本朝定都之後。則以之控制四方。昔自四方而爭中央。今在中央而制四方。其形勢可知也。三山鎭北。大江繞南。西有臨津。東有龍津。土地沃饒。道里均適。漕運所會。畜牧所便。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則可知其天作之地也。且石城虎踞。朝市碁布。宮闕嚴肅。閭閻殷富。誠萬世之業也。但今中外。列置翼鎭。而京都畿內。只設三鎭。實爲未便。且富平府。雖古安南之地。在今日實009_305a無所係。原平府。據臨津之險。又可以提交河挈豐德。而扼倭寇於海口也。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前朝紅賊之南下。必由乎此。而四通五達之地也。乞依前朝左右輔例。以楊州爲後輔。水原爲前輔。廣州爲左輔。原平爲右輔。則前後左右。皆有臣鎭。而東南二鎭在江外。西北二鎭在江內。南北之勢均。而京師益壯矣。且京城十門。東大門外。皆無甕城。須待豐年並築之。或者以爲使彼賊至於內地。則國不國矣。何用城爲。况昇平百年。有何盜賊。然臣以爲吾東方城郭之009_305b國也。旣不能逐水草爲行國。則其城郭之備。不可緩也。前朝顯宗之於契丹。高元之於蒙古。恭愍之於紅賊。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恭愍,高元之時則已矣。顯宗之時。豈不堂堂而有此患乎。况前日中國。亦有變乎。倘曰州鎭有城。賊不足恤。則韃靼之於中國。豈無長城乎。倘曰疆域不與之鄰。勢不相及。則蒙人之於燕京。豈但數千里乎。但無敵人之侵耳。但恃吾之有備耳。豈有以數千里之大國。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又安知百年無事乎。此臣所以深思過慮。拳拳009_305c不已者也。
一。諸道置鎭。盖臣竊料方今置鎭。又當置者八。當减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一。如平安道慈城。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當自爲一鎭者也。大抵諸道州郡。皆設翼鎭。旣非要郡。則不必各自爲一鎭。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當各倂爲一鎭者也。且京畿富平府。不必置鎭處也。至於平安道煕川。據狄踰嶺,博川。有大江,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處。咸吉道會寧。童槍舊居。黃海道瑞興。據岊嶺。京畿水009_305d原南路要衝。原平。據臨津。慶尙道蔚山。倭船到泊之處。且有留居倭人。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

訥齋集卷之二 南原梁誠之著
 奏議
便宜二十四事 春秋大射。增置五京。嶽鎭海瀆。設蕃部樂。議行冠禮。定服色。禁服妖。祭前代君相。護前代陵墓。文廟從祀。武成立廟。配享功臣。文崔立祠。侍臣蔭子。文武科法。遣子入學。革其人法。議罷分臺。州郡奴婢。區處白丁。諸州判官。諸鎭置衛。京都四輔。諸道置鎭。○丙子三月二十八日。以集賢殿直提學上。 a_009_298a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古今治亂之迹。民俗艱難之事。靡不洞照。宵旰圖009_298b治。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三韓一盛際也。方今朝廷得失。民間利病。大臣謀之。臺諫論之。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臣以庸劣獲侍經幄。愧無寸效上補聖德。凡國家小大之事。罔不商確於微衷。而思有以裨益乎萬一。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伏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盖金人承遼俗。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亦藩國之盛事也。我東方雄據海東。自三國至于前朝。郊天饗帝。無不爲之。今固不能悉遵其舊。稍倣遼金009_298c故事。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行大射禮。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士氣亦增。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盖遼金渤海。並建五京。前朝又建四京。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而只置兩京。豈不次哉。况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是東郊之地。固非腹裏比也。乞以京都爲上京。漢城府,開城府爲中京。屬京畿右道。以慶州爲東京。全州爲南京。平壤爲西京。咸興009_298d爲北京。各設土官。加定軍兵。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而緩急亦足以賴矣。
一。嶽鎭海瀆。盖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本朝嶽鎭海瀆名山大川之祀。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多有可議者焉。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至於妙香山。檀君所起。九月山。有檀君祠。太白山。神祠所在。金剛山。名聞天下。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實爲國之北嶽。臨津。國之西關。龍津。國之東關。洛東江。慶尙大川。蟾津。全羅大川。博川江。卽古大寧江。以至菩提津009_299a五臺山。皆不載祀典。且東南西海神祠。皆自開城府而定之。亦乖方位。乞命禮官。詳加考定。以三角山爲中岳。金剛山爲東岳。九月山爲西岳。智異山爲南岳。長白山爲北岳。白嶽山爲中鎭。太白山爲東鎭。松岳山爲西鎭。錦城山爲南鎭。妙香山爲北鎭。又移祭東海神於江陵。西海於仁川。南海於順天。北海 鴨綠江上流 於甲山。以龍津爲東瀆。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覓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五臺山,雉岳山,義館嶺,竹嶺山,爲名山。熊津,臨津,菩009_299b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倻津。主屹山。于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古今皆三十四。而仍舊者十七。移祭者四。新陞者十三。可永革者亦十三矣。
一。設蕃部樂。盖中國之樂。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本朝所用。有軒架皷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大抵樂者。象成者也。自太祖乘運而興。太宗,世宗相繼而作。東隣獻琛。北國款塞。制禮作樂。雅俗皆正。而獨蕃樂未之議焉。方009_299c今聖上龍飛。新登大位。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常數百人。稽顙闕庭。海東文物。未有盛於此時者也。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女眞歌舞。爲北部樂。日本樂。習於三浦倭人。女眞樂。習於五鎭野人。其衣冠制度。不爲怪異譏誚之狀。燕東使則兼用北樂而不用東樂。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燕中國使則並用東北樂。于以用之朝廷。奏之宗廟。賁餙太平之治。以光我祖宗之業。不勝幸甚。
一。議行冠禮。盖古者。男子二十而冠。所以將責009_299d成人之道也。宋末。進士尹穀在圍城中。行冠禮。鄕人譏之。答云。欲令兒曹冠帶。見先人于地下。其重冠禮如此。東方則前朝明宗時。元子行冠禮。其後無聞焉。乞命禮官。博採古禮。兼考時王之制。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年十三。行冠禮。以笠子,頭巾,紗帽爲三加。或用紗帽,幞頭,梁冠。其未冠者。不許入學婚嫁從仕。于以克復先王之制。丕變外國之陋。幸甚。
一。定服色。盖服色之定。所以辨上下一風俗。不可不嚴也。元人尙白。大明尙黑。以至日本尙009_300a靑。皆有一定之制焉。吾東方朝冠公服。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任用雜色。甚爲鄙俚。乞依公服體制。堂上官以上爲一色。六品以上爲一色。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諸衛軍士爲一色。京外良人吏胥爲一色。公私賤口工匠爲一色。以此依品。漸次穿着。或純用一色。以齊國俗。至於女服。亦皆詳定。
一。禁服妖。盖衣裳之制。所以別男女貴賤也。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成爲三層。009_300b轉相慕效。擧國皆然。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前日。中原女子多服左袵之衣。見聞者皆以爲非吉兆。今女着男服。亦豈嘉祥也哉。况後世。唯女服上衣下裳。最爲近古。若如此從心爲之。則男女衣服。可以自相制度。無所不至矣。何至今不變乎。乞命攸司。定限禁止。其如前穿着者。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以爲貧病者之服。
一。祭前代君相。臣竊觀大明諸司職掌。遣官祭歷代君相。用以太牢。甚盛擧也。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而或有當祭不祭者。又或無配009_300c享大臣。似爲欠典。乞每年春秋。於東郊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 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 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以新羅金庾信,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 禦哈丹有功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一。護前代陵墓。臣觀續六典。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各定守護二戶。使禁樵採。太祖陵。加一戶。甚盛德也。然臣竊惟歷代君王。雖未能009_300d皆有功德於斯民。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其不省所在者已矣。其陵墓如古。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豈不可悶也哉。乞令有司。於前後朝鮮,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仔細尋訪。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別無功德者。置二戶。正妃陵墓。亦置一戶。略蠲征徭。禁其樵蘇。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文廟從祀。盖東方自箕子受封以後。洪範遺敎。久而不墜。唐爲君子之國。宋稱禮義之邦。文009_301a獻之美。侔擬中華。而配食文廟者。獨新羅之薜聦,崔致遠。高麗之安珦三人而已。臣聞學士雙冀在前朝。始設科擧。以振文風。文憲公崔冲又設九齋。以敎諸生。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本朝文忠公權近。其文章道德。人皆可以垂範萬世。乞皆配享先聖。以勸後人。若曰東方賢者。焉能如古之人。則孔孟之後。亦有程朱。且賢者如是其難也。則後人何學爲聖賢乎。中國之配享者。果皆如孔孟程朱乎。東方之士。皆不可如中國人乎。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以009_301b示勸懲之意。然後可以動人觀聽而風移俗易矣。
一。武成立廟。盖文武之道。如天經地緯。不可偏廢。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立廟享祀。與文宣王比。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吾東方先聖之祀。上自國學。下至州郡。而武成王無祠宇。只祭纛神四位。豈非闕典歟。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乞倂纛所于訓鍊觀而立武成廟。祭禮配食。略依文廟制度。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姜邯贊,楊䂓,尹009_301c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芳實,崔瑩,鄭地。本朝之河敬復,崔潤德配享。
一。配享功臣。盖本朝前後五功臣。皆屬忠義衛。三朝原從之人。亦皆宥罪錄後。與元之四㤼薜。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然臣聞前朝配享大臣。稱爲功臣。每大恩例。必錄子孫。本朝五廟。俱有配位。皆功存王室。澤及生民者也。乞依五功臣例。或依原從諸人賜號。配享功臣。並令宥後世祿。且前朝及本朝將相有功德於民者之子009_301d孫。亦使搜訪。特加恩命。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文崔立祠。盖臣聞聖人之制祭禮也。法施於民則祀之。能禦大患則祀之。吾東方舊無木綿種。前朝文益漸。奉使留元。始得而種之。遂流遍一國。至今無貴賤男女。皆衣綿布。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而歷代無火藥之法。前朝末崔茂宣。始學火砲之法於元。東還而傳其術。至今軍陳之用。利不可言。茂宣之功。萬世除民害也。益漸之功。萬世興民利也。其澤被生民。豈曰小哉。009_302a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春秋。令本官行祭。其子孫稱爲功臣。宥罪錄用。
一。侍臣蔭子。盖本朝承蔭之法。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其待士大夫之恩至矣。然其法。三品以上官外。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新參數日。纔拜監察。而蔭及子孫。而或有侍從數十年。蔭不及後者。誠爲可惜。况宋史以宰執,侍從,臺諫並言之。乞四品以下六品以上舘閣兩制。侍從諸臣之子。特許承蔭。公道幸甚。
一。文武科法。盖今文科初塲講經之時。四書五009_302b經外。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實無定䂓。中塲則並試古賦。本非急務。又進士以此取之。終塲則諸史時務。雖參酌出題。至論歷代之事。權辭以對曰。漢唐之治。何足論於今日。取之者亦不以爲意。以此。史學不明。甚爲不可。且武科試。並講四書五經。亦爲未便。乞武經七書外。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文科則四書五經外。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中塲。試表箋。以習臣子事上之文。試詔敎。以習君上令下之文。終塲。歷代時務。迭出爲題。如今年009_302c試歷代。明年試時務。以此定制。以新科擧之法。
一。遣子入學。盖子弟入學。其利有六。得賢師友。而質問疑難。一也。親炙賢士大夫。而薰陶其氣質。二也。人心風俗。彼此形勢。無不知之。三也。親見文獻之美。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四也。或購求墳典。以補闕遺。五也。因以學中國之語音。以正象譯之訛。六也。今雖奏請。似難蒙允。乞於入朝每行李。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學問精熟。文章敏贍。器局宏遠者各一人。就差入送。不煩遊學。則庶幾所見旣廣。所得亦多。009_302d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革其人法。盖前朝太祖統一三韓。以土豪爲戶長。設鄕職。仍使諸郡吏之子孫。爲其人分番侍衛。卽古質子之意也。逮至于後。視爲賤隷。使之苦役。甚無理也。且其人番上之時。或斂民布貨。或賣其田產。駄載而來。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其直六朔四十五匹。此則刻民之之膏血。而供京師遊手之人也。大抵鄕吏姦猾者雖多。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無不爲之。其忍又使爲苦役乎。况三009_303a丁一子。選爲吏胥。至于登正科。躋顯仕。爲國將相者。固非一族。亦士出於農之意也。何必與賤隷。同爲苦務哉。若以役重。非其人不可當。則臣之意。以謂非其人膂力有以當之也。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以其餘爲利。其剝民何如也。今諸司外方奴子三丁爲一戶。一戶五年一番上。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乞自今罷其人之法。只令加定選上奴子。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如是則官家之事。固無不成矣。若以臣之言爲不可。姑試數009_303b年。幸甚。
一。議罷分臺。盖分遣臺臣。本以察守令之貪暴也。察民生之休戚也。其爲名豈不美哉。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道各有監司,首領官。州各有守令,敎官。或有少尹,判官。有節制,處置使。有鎭兵馬使,萬戶,千戶。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非不多。而又遣臺員。豈不民少而官多乎。况今之監司。卽所謂外憲而黜陟守令者也。何必更遣臺臣。以輕監司之權乎。非徒監司之權輕也。反與守令。009_303c同心掩覆。而避分臺之擧劾矣。使分臺但擧大綱而已。則不如不遣之爲愈也。若至於發姦摘伏。則其流之弊。吹毛覓疵。使官吏畏首畏尾。不得措其手足。益長小民凌上告訐之風矣。近日立法之始。尙有過中之弊。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大抵國家政令。固不可柔懶以爲之。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漢宣帝,唐宣宗。皆以剛明聦察爲治。而漢唐之業遂衰。然則剛明聦察。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伏望殿下以寬裕爲政。而勿以苛急爲貴。罷近日分臺之法。009_303d遵前日行臺之䂓。其守令不法。全委監司。考核而殿最之。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而民安其業矣。
一。州郡奴婢。盖外方官奴。其數不等。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平壤官奴。亦數千戶。殘郡則數未盈十。而貢賦賓旅之煩。與他郡不甚相遠。或有人吏之妻負戴於道路者。誠爲不均。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量給殘郡。仍以他郡剩數官奴。充給其司。則庶幾勞逸均而州郡實矣。
009_304a一。區處白丁。盖白丁。或稱禾尺。或稱才人。或稱韃靼。其種類非一。國家悶其不齒於齊民也。稱白丁以變舊號。屬軍伍以開仕路。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本非我類。遺俗不變。自相屯聚。自相婚嫁。或殺牛。或丐乞。或行盜賊。且前朝之時。契丹來侵。最先鄕導。又詐爲倭形。始起於江原道。蔓延于慶尙道。至遣將以討平之。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太半皆此類也。親戚姻黨。連綿八道。小則饑饉。大則兵興。皆可慮也。乞自今不令別作一戶。皆定爲甲士,侍衛,鎭009_304b軍,奉足。使之一一夾居。仍禁其往來他郡。其獨處山谷。或自相婚娶。或行宰殺。或行寇賊。或作樂丐乞者。京外痛禁。其犯者。並罪戶首。又三世不犯禁者。不復稱白丁。而使同爲編戶。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而盜賊稍息矣。
一。諸州判官。盖張官置吏。本以爲民也。今大州簿書雲委。使客坌集。守令以一身。何睱勸農事。何睱聽詞訟。義倉斂散。委之豪猾。斯民之害。不可勝言。乞於京畿水原,楊州。慶尙道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光州,南原等州。特設判官。民009_304c生幸甚。
一。諸鎭置尉。盖秦法。每郡守以治民。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設分道將軍。以主兵事。又有鎭將。有縣尉。今八道六十一處。稱某州道。又稱某鎭。或令左右翼。或自爲一鎭。皆置軍兵。使之團鍊。以戒不虞。誠良法也。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糓。聽理詞訟。勸農興學。一應民事。尙未能辦。亦安能全心治兵。以備緩急乎。乞於各鎭依例置尉。若未能皆置。則其有判官處。文武交差。無判官處。特令置尉。
009_304d一。京都四輔。盖京都。卽所謂北漢山城也。在三國之時。則三國交戰之地。及前朝統一。本朝定都之後。則以之控制四方。昔自四方而爭中央。今在中央而制四方。其形勢可知也。三山鎭北。大江繞南。西有臨津。東有龍津。土地沃饒。道里均適。漕運所會。畜牧所便。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則可知其天作之地也。且石城虎踞。朝市碁布。宮闕嚴肅。閭閻殷富。誠萬世之業也。但今中外。列置翼鎭。而京都畿內。只設三鎭。實爲未便。且富平府。雖古安南之地。在今日實009_305a無所係。原平府。據臨津之險。又可以提交河挈豐德。而扼倭寇於海口也。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前朝紅賊之南下。必由乎此。而四通五達之地也。乞依前朝左右輔例。以楊州爲後輔。水原爲前輔。廣州爲左輔。原平爲右輔。則前後左右。皆有臣鎭。而東南二鎭在江外。西北二鎭在江內。南北之勢均。而京師益壯矣。且京城十門。東大門外。皆無甕城。須待豐年並築之。或者以爲使彼賊至於內地。則國不國矣。何用城爲。况昇平百年。有何盜賊。然臣以爲吾東方城郭之009_305b國也。旣不能逐水草爲行國。則其城郭之備。不可緩也。前朝顯宗之於契丹。高元之於蒙古。恭愍之於紅賊。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恭愍,高元之時則已矣。顯宗之時。豈不堂堂而有此患乎。况前日中國。亦有變乎。倘曰州鎭有城。賊不足恤。則韃靼之於中國。豈無長城乎。倘曰疆域不與之鄰。勢不相及。則蒙人之於燕京。豈但數千里乎。但無敵人之侵耳。但恃吾之有備耳。豈有以數千里之大國。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又安知百年無事乎。此臣所以深思過慮。拳拳009_305c不已者也。
一。諸道置鎭。盖臣竊料方今置鎭。又當置者八。當减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一。如平安道慈城。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當自爲一鎭者也。大抵諸道州郡。皆設翼鎭。旣非要郡。則不必各自爲一鎭。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當各倂爲一鎭者也。且京畿富平府。不必置鎭處也。至於平安道煕川。據狄踰嶺,博川。有大江,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處。咸吉道會寧。童槍舊居。黃海道瑞興。據岊嶺。京畿水009_305d原南路要衝。原平。據臨津。慶尙道蔚山。倭船到泊之處。且有留居倭人。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

訥齋集卷之二 南原梁誠之著
 奏議
便宜二十四事 春秋大射。增置五京。嶽鎭海瀆。設蕃部樂。議行冠禮。定服色。禁服妖。祭前代君相。護前代陵墓。文廟從祀。武成立廟。配享功臣。文崔立祠。侍臣蔭子。文武科法。遣子入學。革其人法。議罷分臺。州郡奴婢。區處白丁。諸州判官。諸鎭置衛。京都四輔。諸道置鎭。○丙子三月二十八日。以集賢殿直提學上。 a_009_298a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古今治亂之迹。民俗艱難之事。靡不洞照。宵旰圖009_298b治。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三韓一盛際也。方今朝廷得失。民間利病。大臣謀之。臺諫論之。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臣以庸劣獲侍經幄。愧無寸效上補聖德。凡國家小大之事。罔不商確於微衷。而思有以裨益乎萬一。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伏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盖金人承遼俗。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亦藩國之盛事也。我東方雄據海東。自三國至于前朝。郊天饗帝。無不爲之。今固不能悉遵其舊。稍倣遼金009_298c故事。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行大射禮。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士氣亦增。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盖遼金渤海。並建五京。前朝又建四京。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而只置兩京。豈不次哉。况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是東郊之地。固非腹裏比也。乞以京都爲上京。漢城府,開城府爲中京。屬京畿右道。以慶州爲東京。全州爲南京。平壤爲西京。咸興009_298d爲北京。各設土官。加定軍兵。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而緩急亦足以賴矣。
一。嶽鎭海瀆。盖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本朝嶽鎭海瀆名山大川之祀。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多有可議者焉。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至於妙香山。檀君所起。九月山。有檀君祠。太白山。神祠所在。金剛山。名聞天下。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實爲國之北嶽。臨津。國之西關。龍津。國之東關。洛東江。慶尙大川。蟾津。全羅大川。博川江。卽古大寧江。以至菩提津009_299a五臺山。皆不載祀典。且東南西海神祠。皆自開城府而定之。亦乖方位。乞命禮官。詳加考定。以三角山爲中岳。金剛山爲東岳。九月山爲西岳。智異山爲南岳。長白山爲北岳。白嶽山爲中鎭。太白山爲東鎭。松岳山爲西鎭。錦城山爲南鎭。妙香山爲北鎭。又移祭東海神於江陵。西海於仁川。南海於順天。北海 鴨綠江上流 於甲山。以龍津爲東瀆。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覓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五臺山,雉岳山,義館嶺,竹嶺山,爲名山。熊津,臨津,菩009_299b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倻津。主屹山。于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古今皆三十四。而仍舊者十七。移祭者四。新陞者十三。可永革者亦十三矣。
一。設蕃部樂。盖中國之樂。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本朝所用。有軒架皷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大抵樂者。象成者也。自太祖乘運而興。太宗,世宗相繼而作。東隣獻琛。北國款塞。制禮作樂。雅俗皆正。而獨蕃樂未之議焉。方009_299c今聖上龍飛。新登大位。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常數百人。稽顙闕庭。海東文物。未有盛於此時者也。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女眞歌舞。爲北部樂。日本樂。習於三浦倭人。女眞樂。習於五鎭野人。其衣冠制度。不爲怪異譏誚之狀。燕東使則兼用北樂而不用東樂。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燕中國使則並用東北樂。于以用之朝廷。奏之宗廟。賁餙太平之治。以光我祖宗之業。不勝幸甚。
一。議行冠禮。盖古者。男子二十而冠。所以將責009_299d成人之道也。宋末。進士尹穀在圍城中。行冠禮。鄕人譏之。答云。欲令兒曹冠帶。見先人于地下。其重冠禮如此。東方則前朝明宗時。元子行冠禮。其後無聞焉。乞命禮官。博採古禮。兼考時王之制。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年十三。行冠禮。以笠子,頭巾,紗帽爲三加。或用紗帽,幞頭,梁冠。其未冠者。不許入學婚嫁從仕。于以克復先王之制。丕變外國之陋。幸甚。
一。定服色。盖服色之定。所以辨上下一風俗。不可不嚴也。元人尙白。大明尙黑。以至日本尙009_300a靑。皆有一定之制焉。吾東方朝冠公服。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任用雜色。甚爲鄙俚。乞依公服體制。堂上官以上爲一色。六品以上爲一色。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諸衛軍士爲一色。京外良人吏胥爲一色。公私賤口工匠爲一色。以此依品。漸次穿着。或純用一色。以齊國俗。至於女服。亦皆詳定。
一。禁服妖。盖衣裳之制。所以別男女貴賤也。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成爲三層。009_300b轉相慕效。擧國皆然。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前日。中原女子多服左袵之衣。見聞者皆以爲非吉兆。今女着男服。亦豈嘉祥也哉。况後世。唯女服上衣下裳。最爲近古。若如此從心爲之。則男女衣服。可以自相制度。無所不至矣。何至今不變乎。乞命攸司。定限禁止。其如前穿着者。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以爲貧病者之服。
一。祭前代君相。臣竊觀大明諸司職掌。遣官祭歷代君相。用以太牢。甚盛擧也。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而或有當祭不祭者。又或無配009_300c享大臣。似爲欠典。乞每年春秋。於東郊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 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 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以新羅金庾信,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 禦哈丹有功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一。護前代陵墓。臣觀續六典。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各定守護二戶。使禁樵採。太祖陵。加一戶。甚盛德也。然臣竊惟歷代君王。雖未能009_300d皆有功德於斯民。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其不省所在者已矣。其陵墓如古。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豈不可悶也哉。乞令有司。於前後朝鮮,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仔細尋訪。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別無功德者。置二戶。正妃陵墓。亦置一戶。略蠲征徭。禁其樵蘇。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文廟從祀。盖東方自箕子受封以後。洪範遺敎。久而不墜。唐爲君子之國。宋稱禮義之邦。文009_301a獻之美。侔擬中華。而配食文廟者。獨新羅之薜聦,崔致遠。高麗之安珦三人而已。臣聞學士雙冀在前朝。始設科擧。以振文風。文憲公崔冲又設九齋。以敎諸生。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本朝文忠公權近。其文章道德。人皆可以垂範萬世。乞皆配享先聖。以勸後人。若曰東方賢者。焉能如古之人。則孔孟之後。亦有程朱。且賢者如是其難也。則後人何學爲聖賢乎。中國之配享者。果皆如孔孟程朱乎。東方之士。皆不可如中國人乎。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以009_301b示勸懲之意。然後可以動人觀聽而風移俗易矣。
一。武成立廟。盖文武之道。如天經地緯。不可偏廢。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立廟享祀。與文宣王比。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吾東方先聖之祀。上自國學。下至州郡。而武成王無祠宇。只祭纛神四位。豈非闕典歟。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乞倂纛所于訓鍊觀而立武成廟。祭禮配食。略依文廟制度。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姜邯贊,楊䂓,尹009_301c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芳實,崔瑩,鄭地。本朝之河敬復,崔潤德配享。
一。配享功臣。盖本朝前後五功臣。皆屬忠義衛。三朝原從之人。亦皆宥罪錄後。與元之四㤼薜。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然臣聞前朝配享大臣。稱爲功臣。每大恩例。必錄子孫。本朝五廟。俱有配位。皆功存王室。澤及生民者也。乞依五功臣例。或依原從諸人賜號。配享功臣。並令宥後世祿。且前朝及本朝將相有功德於民者之子009_301d孫。亦使搜訪。特加恩命。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文崔立祠。盖臣聞聖人之制祭禮也。法施於民則祀之。能禦大患則祀之。吾東方舊無木綿種。前朝文益漸。奉使留元。始得而種之。遂流遍一國。至今無貴賤男女。皆衣綿布。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而歷代無火藥之法。前朝末崔茂宣。始學火砲之法於元。東還而傳其術。至今軍陳之用。利不可言。茂宣之功。萬世除民害也。益漸之功。萬世興民利也。其澤被生民。豈曰小哉。009_302a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春秋。令本官行祭。其子孫稱爲功臣。宥罪錄用。
一。侍臣蔭子。盖本朝承蔭之法。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其待士大夫之恩至矣。然其法。三品以上官外。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新參數日。纔拜監察。而蔭及子孫。而或有侍從數十年。蔭不及後者。誠爲可惜。况宋史以宰執,侍從,臺諫並言之。乞四品以下六品以上舘閣兩制。侍從諸臣之子。特許承蔭。公道幸甚。
一。文武科法。盖今文科初塲講經之時。四書五009_302b經外。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實無定䂓。中塲則並試古賦。本非急務。又進士以此取之。終塲則諸史時務。雖參酌出題。至論歷代之事。權辭以對曰。漢唐之治。何足論於今日。取之者亦不以爲意。以此。史學不明。甚爲不可。且武科試。並講四書五經。亦爲未便。乞武經七書外。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文科則四書五經外。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中塲。試表箋。以習臣子事上之文。試詔敎。以習君上令下之文。終塲。歷代時務。迭出爲題。如今年009_302c試歷代。明年試時務。以此定制。以新科擧之法。
一。遣子入學。盖子弟入學。其利有六。得賢師友。而質問疑難。一也。親炙賢士大夫。而薰陶其氣質。二也。人心風俗。彼此形勢。無不知之。三也。親見文獻之美。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四也。或購求墳典。以補闕遺。五也。因以學中國之語音。以正象譯之訛。六也。今雖奏請。似難蒙允。乞於入朝每行李。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學問精熟。文章敏贍。器局宏遠者各一人。就差入送。不煩遊學。則庶幾所見旣廣。所得亦多。009_302d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革其人法。盖前朝太祖統一三韓。以土豪爲戶長。設鄕職。仍使諸郡吏之子孫。爲其人分番侍衛。卽古質子之意也。逮至于後。視爲賤隷。使之苦役。甚無理也。且其人番上之時。或斂民布貨。或賣其田產。駄載而來。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其直六朔四十五匹。此則刻民之之膏血。而供京師遊手之人也。大抵鄕吏姦猾者雖多。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無不爲之。其忍又使爲苦役乎。况三009_303a丁一子。選爲吏胥。至于登正科。躋顯仕。爲國將相者。固非一族。亦士出於農之意也。何必與賤隷。同爲苦務哉。若以役重。非其人不可當。則臣之意。以謂非其人膂力有以當之也。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以其餘爲利。其剝民何如也。今諸司外方奴子三丁爲一戶。一戶五年一番上。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乞自今罷其人之法。只令加定選上奴子。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如是則官家之事。固無不成矣。若以臣之言爲不可。姑試數009_303b年。幸甚。
一。議罷分臺。盖分遣臺臣。本以察守令之貪暴也。察民生之休戚也。其爲名豈不美哉。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道各有監司,首領官。州各有守令,敎官。或有少尹,判官。有節制,處置使。有鎭兵馬使,萬戶,千戶。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非不多。而又遣臺員。豈不民少而官多乎。况今之監司。卽所謂外憲而黜陟守令者也。何必更遣臺臣。以輕監司之權乎。非徒監司之權輕也。反與守令。009_303c同心掩覆。而避分臺之擧劾矣。使分臺但擧大綱而已。則不如不遣之爲愈也。若至於發姦摘伏。則其流之弊。吹毛覓疵。使官吏畏首畏尾。不得措其手足。益長小民凌上告訐之風矣。近日立法之始。尙有過中之弊。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大抵國家政令。固不可柔懶以爲之。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漢宣帝,唐宣宗。皆以剛明聦察爲治。而漢唐之業遂衰。然則剛明聦察。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伏望殿下以寬裕爲政。而勿以苛急爲貴。罷近日分臺之法。009_303d遵前日行臺之䂓。其守令不法。全委監司。考核而殿最之。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而民安其業矣。
一。州郡奴婢。盖外方官奴。其數不等。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平壤官奴。亦數千戶。殘郡則數未盈十。而貢賦賓旅之煩。與他郡不甚相遠。或有人吏之妻負戴於道路者。誠爲不均。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量給殘郡。仍以他郡剩數官奴。充給其司。則庶幾勞逸均而州郡實矣。
009_304a一。區處白丁。盖白丁。或稱禾尺。或稱才人。或稱韃靼。其種類非一。國家悶其不齒於齊民也。稱白丁以變舊號。屬軍伍以開仕路。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本非我類。遺俗不變。自相屯聚。自相婚嫁。或殺牛。或丐乞。或行盜賊。且前朝之時。契丹來侵。最先鄕導。又詐爲倭形。始起於江原道。蔓延于慶尙道。至遣將以討平之。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太半皆此類也。親戚姻黨。連綿八道。小則饑饉。大則兵興。皆可慮也。乞自今不令別作一戶。皆定爲甲士,侍衛,鎭009_304b軍,奉足。使之一一夾居。仍禁其往來他郡。其獨處山谷。或自相婚娶。或行宰殺。或行寇賊。或作樂丐乞者。京外痛禁。其犯者。並罪戶首。又三世不犯禁者。不復稱白丁。而使同爲編戶。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而盜賊稍息矣。
一。諸州判官。盖張官置吏。本以爲民也。今大州簿書雲委。使客坌集。守令以一身。何睱勸農事。何睱聽詞訟。義倉斂散。委之豪猾。斯民之害。不可勝言。乞於京畿水原,楊州。慶尙道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光州,南原等州。特設判官。民009_304c生幸甚。
一。諸鎭置尉。盖秦法。每郡守以治民。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設分道將軍。以主兵事。又有鎭將。有縣尉。今八道六十一處。稱某州道。又稱某鎭。或令左右翼。或自爲一鎭。皆置軍兵。使之團鍊。以戒不虞。誠良法也。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糓。聽理詞訟。勸農興學。一應民事。尙未能辦。亦安能全心治兵。以備緩急乎。乞於各鎭依例置尉。若未能皆置。則其有判官處。文武交差。無判官處。特令置尉。
009_304d一。京都四輔。盖京都。卽所謂北漢山城也。在三國之時。則三國交戰之地。及前朝統一。本朝定都之後。則以之控制四方。昔自四方而爭中央。今在中央而制四方。其形勢可知也。三山鎭北。大江繞南。西有臨津。東有龍津。土地沃饒。道里均適。漕運所會。畜牧所便。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則可知其天作之地也。且石城虎踞。朝市碁布。宮闕嚴肅。閭閻殷富。誠萬世之業也。但今中外。列置翼鎭。而京都畿內。只設三鎭。實爲未便。且富平府。雖古安南之地。在今日實009_305a無所係。原平府。據臨津之險。又可以提交河挈豐德。而扼倭寇於海口也。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前朝紅賊之南下。必由乎此。而四通五達之地也。乞依前朝左右輔例。以楊州爲後輔。水原爲前輔。廣州爲左輔。原平爲右輔。則前後左右。皆有臣鎭。而東南二鎭在江外。西北二鎭在江內。南北之勢均。而京師益壯矣。且京城十門。東大門外。皆無甕城。須待豐年並築之。或者以爲使彼賊至於內地。則國不國矣。何用城爲。况昇平百年。有何盜賊。然臣以爲吾東方城郭之009_305b國也。旣不能逐水草爲行國。則其城郭之備。不可緩也。前朝顯宗之於契丹。高元之於蒙古。恭愍之於紅賊。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恭愍,高元之時則已矣。顯宗之時。豈不堂堂而有此患乎。况前日中國。亦有變乎。倘曰州鎭有城。賊不足恤。則韃靼之於中國。豈無長城乎。倘曰疆域不與之鄰。勢不相及。則蒙人之於燕京。豈但數千里乎。但無敵人之侵耳。但恃吾之有備耳。豈有以數千里之大國。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又安知百年無事乎。此臣所以深思過慮。拳拳009_305c不已者也。
一。諸道置鎭。盖臣竊料方今置鎭。又當置者八。當减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一。如平安道慈城。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當自爲一鎭者也。大抵諸道州郡。皆設翼鎭。旣非要郡。則不必各自爲一鎭。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當各倂爲一鎭者也。且京畿富平府。不必置鎭處也。至於平安道煕川。據狄踰嶺,博川。有大江,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處。咸吉道會寧。童槍舊居。黃海道瑞興。據岊嶺。京畿水009_305d原南路要衝。原平。據臨津。慶尙道蔚山。倭船到泊之處。且有留居倭人。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

태조 7년 무인(1398,홍무 31)
 3월19일 (병인)
광주에서 새로 종이 주조되었으므로 백악과 목멱산에 제사를 지내다

광주(廣州)의 새로 주조(鑄造)한 종(鐘)이 이루어졌으므로 백악(白岳)과 목멱(木覓)에 제사를 베풀었다.
【원전】 1 집 118 면
【분류】 *광업(鑛業) / *예술(藝術)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訥齋集卷之二 南原梁誠之著
 奏議
便宜二十四事 春秋大射。增置五京。嶽鎭海瀆。設蕃部樂。議行冠禮。定服色。禁服妖。祭前代君相。護前代陵墓。文廟從祀。武成立廟。配享功臣。文崔立祠。侍臣蔭子。文武科法。遣子入學。革其人法。議罷分臺。州郡奴婢。區處白丁。諸州判官。諸鎭置衛。京都四輔。諸道置鎭。○丙子三月二十八日。以集賢殿直提學上。 a_009_298a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古今治亂之迹。民俗艱難之事。靡不洞照。宵旰圖009_298b治。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三韓一盛際也。方今朝廷得失。民間利病。大臣謀之。臺諫論之。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臣以庸劣獲侍經幄。愧無寸效上補聖德。凡國家小大之事。罔不商確於微衷。而思有以裨益乎萬一。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伏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盖金人承遼俗。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亦藩國之盛事也。我東方雄據海東。自三國至于前朝。郊天饗帝。無不爲之。今固不能悉遵其舊。稍倣遼金009_298c故事。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行大射禮。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士氣亦增。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盖遼金渤海。並建五京。前朝又建四京。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而只置兩京。豈不次哉。况元世祖許我以儀從本俗。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是東郊之地。固非腹裏比也。乞以京都爲上京。漢城府,開城府爲中京。屬京畿右道。以慶州爲東京。全州爲南京。平壤爲西京。咸興009_298d爲北京。各設土官。加定軍兵。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而緩急亦足以賴矣。
一。嶽鎭海瀆。盖一代之興。必有一代之制。本朝嶽鎭海瀆名山大川之祀。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多有可議者焉。龍興江。我太祖興運之地。至於妙香山。檀君所起。九月山。有檀君祠。太白山。神祠所在。金剛山。名聞天下。長白山。在先春嶺之南。甲山之北。實爲國之北嶽。臨津。國之西關。龍津。國之東關。洛東江。慶尙大川。蟾津。全羅大川。博川江。卽古大寧江。以至菩提津009_299a五臺山。皆不載祀典。且東南西海神祠。皆自開城府而定之。亦乖方位。乞命禮官。詳加考定。以三角山爲中岳。金剛山爲東岳。九月山爲西岳。智異山爲南岳。長白山爲北岳。白嶽山爲中鎭。太白山爲東鎭。松岳山爲西鎭。錦城山爲南鎭。妙香山爲北鎭。又移祭東海神於江陵。西海於仁川。南海於順天。北海 鴨綠江上流 於甲山。以龍津爲東瀆。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覓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五臺山,雉岳山,義館嶺,竹嶺山,爲名山。熊津,臨津,菩009_299b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倻津。主屹山。于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古今皆三十四。而仍舊者十七。移祭者四。新陞者十三。可永革者亦十三矣。
一。設蕃部樂。盖中國之樂。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本朝所用。有軒架皷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大抵樂者。象成者也。自太祖乘運而興。太宗,世宗相繼而作。東隣獻琛。北國款塞。制禮作樂。雅俗皆正。而獨蕃樂未之議焉。方009_299c今聖上龍飛。新登大位。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常數百人。稽顙闕庭。海東文物。未有盛於此時者也。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女眞歌舞。爲北部樂。日本樂。習於三浦倭人。女眞樂。習於五鎭野人。其衣冠制度。不爲怪異譏誚之狀。燕東使則兼用北樂而不用東樂。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燕中國使則並用東北樂。于以用之朝廷。奏之宗廟。賁餙太平之治。以光我祖宗之業。不勝幸甚。
一。議行冠禮。盖古者。男子二十而冠。所以將責009_299d成人之道也。宋末。進士尹穀在圍城中。行冠禮。鄕人譏之。答云。欲令兒曹冠帶。見先人于地下。其重冠禮如此。東方則前朝明宗時。元子行冠禮。其後無聞焉。乞命禮官。博採古禮。兼考時王之制。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年十三。行冠禮。以笠子,頭巾,紗帽爲三加。或用紗帽,幞頭,梁冠。其未冠者。不許入學婚嫁從仕。于以克復先王之制。丕變外國之陋。幸甚。
一。定服色。盖服色之定。所以辨上下一風俗。不可不嚴也。元人尙白。大明尙黑。以至日本尙009_300a靑。皆有一定之制焉。吾東方朝冠公服。實倣中國。而常時好着白衣。任用雜色。甚爲鄙俚。乞依公服體制。堂上官以上爲一色。六品以上爲一色。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諸衛軍士爲一色。京外良人吏胥爲一色。公私賤口工匠爲一色。以此依品。漸次穿着。或純用一色。以齊國俗。至於女服。亦皆詳定。
一。禁服妖。盖衣裳之制。所以別男女貴賤也。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成爲三層。009_300b轉相慕效。擧國皆然。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前日。中原女子多服左袵之衣。見聞者皆以爲非吉兆。今女着男服。亦豈嘉祥也哉。况後世。唯女服上衣下裳。最爲近古。若如此從心爲之。則男女衣服。可以自相制度。無所不至矣。何至今不變乎。乞命攸司。定限禁止。其如前穿着者。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以爲貧病者之服。
一。祭前代君相。臣竊觀大明諸司職掌。遣官祭歷代君相。用以太牢。甚盛擧也。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而或有當祭不祭者。又或無配009_300c享大臣。似爲欠典。乞每年春秋。於東郊合祭前朝鮮王檀君,後朝鮮王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 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 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以新羅金庾信,金仁問,高句麗乙支文德,百濟黑齒常之,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 禦哈丹有功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一。護前代陵墓。臣觀續六典。高麗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各定守護二戶。使禁樵採。太祖陵。加一戶。甚盛德也。然臣竊惟歷代君王。雖未能009_300d皆有功德於斯民。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其不省所在者已矣。其陵墓如古。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豈不可悶也哉。乞令有司。於前後朝鮮,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及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仔細尋訪。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別無功德者。置二戶。正妃陵墓。亦置一戶。略蠲征徭。禁其樵蘇。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一。文廟從祀。盖東方自箕子受封以後。洪範遺敎。久而不墜。唐爲君子之國。宋稱禮義之邦。文009_301a獻之美。侔擬中華。而配食文廟者。獨新羅之薜聦,崔致遠。高麗之安珦三人而已。臣聞學士雙冀在前朝。始設科擧。以振文風。文憲公崔冲又設九齋。以敎諸生。至於文忠公李齊賢,文忠公鄭夢周,本朝文忠公權近。其文章道德。人皆可以垂範萬世。乞皆配享先聖。以勸後人。若曰東方賢者。焉能如古之人。則孔孟之後。亦有程朱。且賢者如是其難也。則後人何學爲聖賢乎。中國之配享者。果皆如孔孟程朱乎。東方之士。皆不可如中國人乎。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以009_301b示勸懲之意。然後可以動人觀聽而風移俗易矣。
一。武成立廟。盖文武之道。如天經地緯。不可偏廢。唐肅宗。尊太公爲武成王。立廟享祀。與文宣王比。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吾東方先聖之祀。上自國學。下至州郡。而武成王無祠宇。只祭纛神四位。豈非闕典歟。今訓鍊觀。卽宋朝武學也。乞倂纛所于訓鍊觀而立武成廟。祭禮配食。略依文廟制度。又以新羅之金庾信。高句麗之乙支文德。高麗之庾黔弼,姜邯贊,楊䂓,尹009_301c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芳實,崔瑩,鄭地。本朝之河敬復,崔潤德配享。
一。配享功臣。盖本朝前後五功臣。皆屬忠義衛。三朝原從之人。亦皆宥罪錄後。與元之四㤼薜。宋之錄隨龍。恩無以加矣。然臣聞前朝配享大臣。稱爲功臣。每大恩例。必錄子孫。本朝五廟。俱有配位。皆功存王室。澤及生民者也。乞依五功臣例。或依原從諸人賜號。配享功臣。並令宥後世祿。且前朝及本朝將相有功德於民者之子009_301d孫。亦使搜訪。特加恩命。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一。文崔立祠。盖臣聞聖人之制祭禮也。法施於民則祀之。能禦大患則祀之。吾東方舊無木綿種。前朝文益漸。奉使留元。始得而種之。遂流遍一國。至今無貴賤男女。皆衣綿布。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而歷代無火藥之法。前朝末崔茂宣。始學火砲之法於元。東還而傳其術。至今軍陳之用。利不可言。茂宣之功。萬世除民害也。益漸之功。萬世興民利也。其澤被生民。豈曰小哉。009_302a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春秋。令本官行祭。其子孫稱爲功臣。宥罪錄用。
一。侍臣蔭子。盖本朝承蔭之法。卽唐之資蔭。宋朝任子之意也。其待士大夫之恩至矣。然其法。三品以上官外。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新參數日。纔拜監察。而蔭及子孫。而或有侍從數十年。蔭不及後者。誠爲可惜。况宋史以宰執,侍從,臺諫並言之。乞四品以下六品以上舘閣兩制。侍從諸臣之子。特許承蔭。公道幸甚。
一。文武科法。盖今文科初塲講經之時。四書五009_302b經外。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實無定䂓。中塲則並試古賦。本非急務。又進士以此取之。終塲則諸史時務。雖參酌出題。至論歷代之事。權辭以對曰。漢唐之治。何足論於今日。取之者亦不以爲意。以此。史學不明。甚爲不可。且武科試。並講四書五經。亦爲未便。乞武經七書外。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文科則四書五經外。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中塲。試表箋。以習臣子事上之文。試詔敎。以習君上令下之文。終塲。歷代時務。迭出爲題。如今年009_302c試歷代。明年試時務。以此定制。以新科擧之法。
一。遣子入學。盖子弟入學。其利有六。得賢師友。而質問疑難。一也。親炙賢士大夫。而薰陶其氣質。二也。人心風俗。彼此形勢。無不知之。三也。親見文獻之美。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四也。或購求墳典。以補闕遺。五也。因以學中國之語音。以正象譯之訛。六也。今雖奏請。似難蒙允。乞於入朝每行李。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學問精熟。文章敏贍。器局宏遠者各一人。就差入送。不煩遊學。則庶幾所見旣廣。所得亦多。009_302d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一。革其人法。盖前朝太祖統一三韓。以土豪爲戶長。設鄕職。仍使諸郡吏之子孫。爲其人分番侍衛。卽古質子之意也。逮至于後。視爲賤隷。使之苦役。甚無理也。且其人番上之時。或斂民布貨。或賣其田產。駄載而來。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其直六朔四十五匹。此則刻民之之膏血。而供京師遊手之人也。大抵鄕吏姦猾者雖多。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無不爲之。其忍又使爲苦役乎。况三009_303a丁一子。選爲吏胥。至于登正科。躋顯仕。爲國將相者。固非一族。亦士出於農之意也。何必與賤隷。同爲苦務哉。若以役重。非其人不可當。則臣之意。以謂非其人膂力有以當之也。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以其餘爲利。其剝民何如也。今諸司外方奴子三丁爲一戶。一戶五年一番上。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乞自今罷其人之法。只令加定選上奴子。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如是則官家之事。固無不成矣。若以臣之言爲不可。姑試數009_303b年。幸甚。
一。議罷分臺。盖分遣臺臣。本以察守令之貪暴也。察民生之休戚也。其爲名豈不美哉。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道各有監司,首領官。州各有守令,敎官。或有少尹,判官。有節制,處置使。有鎭兵馬使,萬戶,千戶。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非不多。而又遣臺員。豈不民少而官多乎。况今之監司。卽所謂外憲而黜陟守令者也。何必更遣臺臣。以輕監司之權乎。非徒監司之權輕也。反與守令。009_303c同心掩覆。而避分臺之擧劾矣。使分臺但擧大綱而已。則不如不遣之爲愈也。若至於發姦摘伏。則其流之弊。吹毛覓疵。使官吏畏首畏尾。不得措其手足。益長小民凌上告訐之風矣。近日立法之始。尙有過中之弊。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大抵國家政令。固不可柔懶以爲之。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漢宣帝,唐宣宗。皆以剛明聦察爲治。而漢唐之業遂衰。然則剛明聦察。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伏望殿下以寬裕爲政。而勿以苛急爲貴。罷近日分臺之法。009_303d遵前日行臺之䂓。其守令不法。全委監司。考核而殿最之。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而民安其業矣。
一。州郡奴婢。盖外方官奴。其數不等。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平壤官奴。亦數千戶。殘郡則數未盈十。而貢賦賓旅之煩。與他郡不甚相遠。或有人吏之妻負戴於道路者。誠爲不均。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量給殘郡。仍以他郡剩數官奴。充給其司。則庶幾勞逸均而州郡實矣。
009_304a一。區處白丁。盖白丁。或稱禾尺。或稱才人。或稱韃靼。其種類非一。國家悶其不齒於齊民也。稱白丁以變舊號。屬軍伍以開仕路。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本非我類。遺俗不變。自相屯聚。自相婚嫁。或殺牛。或丐乞。或行盜賊。且前朝之時。契丹來侵。最先鄕導。又詐爲倭形。始起於江原道。蔓延于慶尙道。至遣將以討平之。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太半皆此類也。親戚姻黨。連綿八道。小則饑饉。大則兵興。皆可慮也。乞自今不令別作一戶。皆定爲甲士,侍衛,鎭009_304b軍,奉足。使之一一夾居。仍禁其往來他郡。其獨處山谷。或自相婚娶。或行宰殺。或行寇賊。或作樂丐乞者。京外痛禁。其犯者。並罪戶首。又三世不犯禁者。不復稱白丁。而使同爲編戶。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而盜賊稍息矣。
一。諸州判官。盖張官置吏。本以爲民也。今大州簿書雲委。使客坌集。守令以一身。何睱勸農事。何睱聽詞訟。義倉斂散。委之豪猾。斯民之害。不可勝言。乞於京畿水原,楊州。慶尙道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光州,南原等州。特設判官。民009_304c生幸甚。
一。諸鎭置尉。盖秦法。每郡守以治民。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設分道將軍。以主兵事。又有鎭將。有縣尉。今八道六十一處。稱某州道。又稱某鎭。或令左右翼。或自爲一鎭。皆置軍兵。使之團鍊。以戒不虞。誠良法也。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糓。聽理詞訟。勸農興學。一應民事。尙未能辦。亦安能全心治兵。以備緩急乎。乞於各鎭依例置尉。若未能皆置。則其有判官處。文武交差。無判官處。特令置尉。
009_304d一。京都四輔。盖京都。卽所謂北漢山城也。在三國之時。則三國交戰之地。及前朝統一。本朝定都之後。則以之控制四方。昔自四方而爭中央。今在中央而制四方。其形勢可知也。三山鎭北。大江繞南。西有臨津。東有龍津。土地沃饒。道里均適。漕運所會。畜牧所便。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則可知其天作之地也。且石城虎踞。朝市碁布。宮闕嚴肅。閭閻殷富。誠萬世之業也。但今中外。列置翼鎭。而京都畿內。只設三鎭。實爲未便。且富平府。雖古安南之地。在今日實009_305a無所係。原平府。據臨津之險。又可以提交河挈豐德。而扼倭寇於海口也。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前朝紅賊之南下。必由乎此。而四通五達之地也。乞依前朝左右輔例。以楊州爲後輔。水原爲前輔。廣州爲左輔。原平爲右輔。則前後左右。皆有臣鎭。而東南二鎭在江外。西北二鎭在江內。南北之勢均。而京師益壯矣。且京城十門。東大門外。皆無甕城。須待豐年並築之。或者以爲使彼賊至於內地。則國不國矣。何用城爲。况昇平百年。有何盜賊。然臣以爲吾東方城郭之009_305b國也。旣不能逐水草爲行國。則其城郭之備。不可緩也。前朝顯宗之於契丹。高元之於蒙古。恭愍之於紅賊。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恭愍,高元之時則已矣。顯宗之時。豈不堂堂而有此患乎。况前日中國。亦有變乎。倘曰州鎭有城。賊不足恤。則韃靼之於中國。豈無長城乎。倘曰疆域不與之鄰。勢不相及。則蒙人之於燕京。豈但數千里乎。但無敵人之侵耳。但恃吾之有備耳。豈有以數千里之大國。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又安知百年無事乎。此臣所以深思過慮。拳拳009_305c不已者也。
一。諸道置鎭。盖臣竊料方今置鎭。又當置者八。當减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一。如平安道慈城。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當自爲一鎭者也。大抵諸道州郡。皆設翼鎭。旣非要郡。則不必各自爲一鎭。黃海道長淵與豐川。康翎與瓮津。當各倂爲一鎭者也。且京畿富平府。不必置鎭處也。至於平安道煕川。據狄踰嶺,博川。有大江,三登。則平壤東北路要害處。咸吉道會寧。童槍舊居。黃海道瑞興。據岊嶺。京畿水009_305d原南路要衝。原平。據臨津。慶尙道蔚山。倭船到泊之處。且有留居倭人。皆當置鎭者也。小臣自癸酉冬。叨受上旨。考定京畿及八道地圖。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一切州鎭之事。靡不講究。故敢陳管見。至于再三。伏惟睿鑑垂察。


세종 8년 병오(1426,선덕 1)
 3월25일 (기미)
명나라 사신이 목멱산에 오르다

두 사신이 목멱산(木覓山)에 올라 도성과 한강을 굽어보고 말하기를,
“정말 좋은 땅이라.”
하고, 인하여 활을 쏘고,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켰다.
【원전】 3 집 16 면
【분류】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