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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講義) 옥당고사(玉堂故事)를 덧붙임

아베베1 2012. 8. 24. 09:08

농암집 제10권
 강의(講義) 옥당고사(玉堂故事)를 덧붙임
옥당고사(玉堂故事)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는 사람은 날로 진보하고, 날로 새로워지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날로 퇴보하니, 진보하지 않고서 퇴보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오직 성인의 도만이 진보도 없고 퇴보도 없는데 이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천하의 이치가 진보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하는 법이니, 하늘이 날마다 운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추락하고 물이 날마다 흐르지 않으면 반드시 썩고 거울을 날마다 닦지 않으면 반드시 흐려지고 몸을 날마다 씻지 않으면 반드시 때가 끼는 법이니, 모든 사물에 미루어 볼 때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학문의 도가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이 때문에 정이(程頤)가 이러한 이치를 깊이 밝혀서 배우는 사람들에게 날로 새로워지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한계가 있으며 인욕(人欲)은 혼미해지기 쉬운데 천리는 회복되기 어려우니, 만일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져서 끊임없이 진보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학문은 날로 황폐해지고 덕은 날로 손상되어 전날에 얼마간 쌓아 놓은 것이 다 실추되고 말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배를 저어 급류를 거슬러 올라갈 적에 저어 나가는 힘이 조금만 모자라도 수백 길이나 떠내려가는 것과 같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도에 있어서는 사실 진보하고 퇴보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살펴보면 한시도 자신의 도가 이미 지극하다고 하여 덕을 향상시키고 학문을 닦는 일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禹) 임금은 촌음(寸陰)을 아꼈고, 탕(湯) 임금은 반명(盤銘)을 지었으며, 문왕(文王)은 천도를 순일하게 지켜 태만히 하지 않았고, 주공(周公)은 밤새 성인의 도를 궁리하였고, 공자는 밥 먹는 것도 잊고 분발했던 것이니, 지금 전하는 비록 뛰어난 지혜를 타고나시고 도가 고명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학문을 닦는 정성은 조금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더위 때문에 강독을 중지한 것이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그간에 경연관을 소대(召對)한 것도 두세 차례에 지나지 않았으니, 신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하의 쉬지 않고 익혀야 할 공부가 혹 끊기는 일이 있어 날로 진보해야 할 덕이 약간이라도 퇴보함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지금은 처서(處暑)도 이미 지났으니 당연히 경연을 열어야 하는데, 승정원의 품계(稟啓)로 인하여 다시 뒤로 미루었으니 이렇게 하루 이틀 가다 보면 더욱 학업이 소홀해질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근심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정이의 이 말을 주워 모아 고사(故事)를 아뢰는 바입니다. 신은 또 주희(朱熹)의 “공부는 끊기기 쉽고 의리는 미루어 찾기가 어렵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매우 근심스럽고 두렵다.”라는 말을 기억하는데, 이 말은 더욱 경계로 삼을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이 말도 함께 유념하시어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일을 급히 해야 함을 생각하시고 시일은 놓치기 쉽다는 것을 돌아보시어 하루빨리 경연을 열고 자주 신들을 만나 보시어 학문에 힘쓰는 도를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하시면 더할 수 없는 다행이겠습니다. - 이하는 계해년(1683, 숙종9)에 올린 것이다. -

진덕수(眞德秀)가 말하기를, “우리나라 역대 임금의 융성했던 시기에 명망 있는 학자들을 선발하여, 경연을 모시게 하여 이영각(邇英閣)과 숭정전(崇政殿)으로 자연스럽게 맞아들여 정사에 관해 자문하고 밤에는 궐 안에 숙직시켜 불시에 불러 대담하였으니, 이는 성학(聖學)을 계속 밝혀 성총(聖聰)을 넓히기 위한 것으로서 실로 정관(貞觀) 연간과 동일한 법이었다. 낮에 자문을 받는 것만도 충분한데 또 굳이 밤에까지 대담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군주의 한 마음을 공격하는 많은 것들 중에 음악과 여색이 가장 빠져들기 쉽다. 낮에는 날마다 조회하여 대신들이 엄하게 도열하여 좋은 말과 바른 논의가 쏟아져 나오므로 마음을 보존하여 지키기가 쉽지만, 밤에 깊은 궁궐 안에서 만나는 사람은 환관의 무리거나 아니면 후궁들이라서 번잡하고 화려한 것이 뒤섞여 눈을 현혹하고, 기이하고 정도에 지나친 기교들이 다 마음을 어지럽히기에 충분하므로 그 마음을 지키고 수양하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밤에 소대하는 이로움이 낮에 접견하는 것보다 더 큰 이유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진덕수가 논한, 송나라 조정에서 시신(侍臣)을 맞이하여 자문한 사례는 진정 후세의 모범이 될 만합니다. 그리고 밤에 소대하는 이로움이 낮에 가르침을 청하는 것보다 더 크다고 한 말은 더욱 절실하고 지극합니다. 우리 조종조의 시신을 접견하는 제도는 송나라보다 더 잘 갖추어져 하루 동안에 조참(朝參), 상참(常參)이 있고 또 조강(朝講), 석강(夕講)이 있는데도 부족하다고 여겨 또 소대(召對), 야대(夜對)를 두었으니 이는 실로 전하께서 이미 따라 행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이전부터 야대를 할 때에는 전례에 따라 술을 내리는 일이 많아 마침내 과도하게 취해 체모 없이 떠들어 댐으로써 군신간에 점잖게 어울려 좋은 말을 아뢰는 이로움이 전혀 없었으니, 이는 조종의 본디 의도한 바가 아닙니다. 신들은 앞으로는 야대를 수시로 가지시되 지나치게 술을 내리시지 말고 다만 전후에 강학한 경전의 뜻을 가지고 진지하게 하문하시고 시사(時事)의 잘잘못과 민간의 고통과 고금의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웠던 자취에 이르기까지 모두 토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성상의 총명을 틔우고 마음을 무젖게 하며 상하의 마음을 환히 알게 되는 정도가 아침과 낮에 강학하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로 경연에 참가하여 도움되는 것은 없고 다만 자주 임금을 가까이하여 충심을 바치고자 할 뿐이지만, 아마 환관과 후궁들이 전하를 앞에서 가까이 모시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진덕수의 이 말을 주워 모아 정서하여 올리는 바이니 전하께서는 헤아려 주소서.

송나라 학자 여동래(呂東萊)가 말하기를, “역사서를 볼 적에 다스려짐을 보면 다스려졌구나 생각하고 어지러움을 보면 어지럽구나 생각하며, 한 가지의 일을 보면 오직 한 가지만을 아는 데에 그친다면 역사서를 보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역사서를 읽을 때 마치 자신이 그 속에 있는 듯이 여겨 어떤 일의 이해와 시대의 어려움을 보면 반드시 책을 덮고 만일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서를 보면 학문도 진보되고 지식도 높아질 것이니, 그래야만 유익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역사서를 읽을 적에는 먼저 전체적인 성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한 시대의 기강과 풍속 및 소장(消長)과 치란(治亂) 등을 합하여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秦)나라의 포학함과 한(漢)나라의 관대함 같은 것이 다 전체적인 성향이니, 그 한쪽으로 치우친 것과 말류의 폐단이 드러난 부분을 고찰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또 한 임금의 전체적인 성향을 알아야 하는데, 예를 들면 한 문제(漢文帝)의 관대함과 한 선제(漢宣帝)의 엄함 같은 따위이다. 전체적인 성향이란 대체적인 성격인데, 예를 들어 한 시대의 전체적인 성향이 관대하다면 한두 임금이 다소 엄하다 해도 그 관대함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고, 한 임금의 전체적인 성향이 엄하면 한두 가지 일이 다소 관대하다 해도 그 엄함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역사서를 읽을 때에는 자신의 생각으로 이것을 이해해야 좋다.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진(晉)나라가 셋으로 나뉘어진 문제에 있어서도 이미 천하의 전체적인 성향이 있었고 다시 한 나라의 전체적인 성향이 있었던 것이니, 이 시대의 역사를 볼 때에도 역시 앞서의 예와 같이 보아야 한다. 대체로 먼저 한 시대의 전체적인 성향을 안 뒤에 그 속에 들어가서 한 나라의 전체적인 성향을 보아야 하는데, 이 두 가지는 서로 관련이 있다. 전체적인 성향을 안 뒤에는 관건이 되는 요소를 보아야 한다. 나라의 흥망과 일의 성패와 사람의 간사하고 정직함은 기미와 맹아에서 그 원인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를 관건이 되는 요소라고 한다. 역사를 읽을 적에 성패를 가지고 시비를 판단해도 안 되고 경솔히 의견을 세워 쉽게 의견을 내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이치에 입각하여 판단하고 몸으로 체득하여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고 익숙히 보면서 여러 가지로 참고하여 이해하고 숙련을 거쳐야 하니, 그런 뒤에야 시사(時事)와 일의 실상을 점점 잘 구별해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살펴보건대 역사서를 읽는 방법에 대해 과거의 학자들이 논한 것이 많지만 여조겸(呂祖謙)의 이 말처럼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경서는 이치를 논하고 역사서는 사건을 기록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공부할 적에 경서를 근본으로 삼고 역사서는 말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치 밖에 일이 있지 않고 일 밖에 이치가 있지 않으니, 그렇다면 역사서에 기록된 것도 모두 이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롭고 해로움, 옳고 그름, 다스려지고 어지러움, 흥하고 망한 기록이 수천만 가지라서 궁구하기 쉽지 않을 듯하긴 하지만 사건에 따라 그 이치를 연구해 보면 모두 다 그렇게 된 까닭이 있으며 모두 다 대처하는 방도가 있으니, 만일 잘 보고 터득하는 것이 있으면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 도리에 밝아지는 공부가 어찌 이 밖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한갓 섭렵하여 기억하고 읽을 뿐이라면 이치를 알거나 마음에 터득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사로이 총명을 발휘하여 지식이나 넓히고 올바른 의지를 잃어 실제적인 공부를 해치는 수단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살펴보건대 여조겸의 이 논의는 오로지 전체적인 성향을 알고 관건이 되는 요소를 살피는 것을 주된 요지로 삼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사람은 각기 그 시대의 법도를 세우지 않은 경우가 없는데, 기강과 풍속의 좋고 나쁨이 이에 달려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전체적 성향입니다. 그리고 천하의 일이 무궁하지만 성패와 안위는 항상 털끝만한 기미의 사이에서 판가름나는 법이니, 이것이 이른바 관건이 되는 요소입니다. 나라를 다스릴 적에 먼저 전체적인 성향을 살피지 않으면 한 시대의 정치를 바르게 하고 만대의 기반을 확립할 수 없으며, 관건이 되는 요소를 잘 살피지 못하면 한때의 잘못된 인재 등용으로 인하여 패망의 화가 끝내 구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임금이 역사서를 읽을 적에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그 전체적인 성향의 좋고 나쁨과 일의 관건이 되는 요소의 잘잘못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연구하고 살펴서 그렇게 된 까닭을 깊이 알아 마음속에 분명하게 해야 하고, 그러한 뒤에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만난 때를 돌아보고 증험해 보아서 정치를 할 때에 그 전체적인 성향이 어떠해야 너무 관대하거나 너무 엄하거나 너무 매끄럽거나 너무 투박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살펴서, 한쪽으로 치우친 폐단을 바로잡고 중정(中正)하게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관건이 되는 요소에 관해서는 더욱 자세히 살피고 삼가서, 한 가지 정사와 명령에서부터 한 사람을 진용하고 퇴출시키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에 따른 안위와 치란의 관계를 살펴서, 혹시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없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역사서를 읽고 얻은 것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많은 역사서를 읽고 외기만 하는 경우와 그 차원이 다릅니다.
전하께서 요사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강독하고 계시는데 신들은 학문이 엉성하고 식견이 어두워 일마다 미루어 말씀드려 성상의 지혜를 넓혀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황송하고 부끄러울 뿐 달리 기여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유(先儒)가 논한 역사서 읽는 법을 취하여 성상께 읽을거리를 제공하면서 뒤에 이처럼 신들의 해설을 붙였으니 성상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주C-001]옥당고사(玉堂故事) : 작자가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인 1681년(숙종7) 7월 5일 홍문관 관원의 공동 명의로 작성하여 숙종에게 올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