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 휘 덕지 등/5세 휘 득지 관련기록

휘 득지 문성공 5세손 (19대 방조)

아베베1 2012. 9. 16. 14:31

 

택당선생 별집 제7권
 묘갈(墓碣)
최 직장(崔直長)의 묘갈명 병서


전주 최씨(全州崔氏)는 멀리 고려 때부터 유래하는데,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서 향족(鄕族)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시조(始祖)인 시중(侍中) 최아(崔阿)가 최용봉(崔龍鳳)을 낳고 최용봉이 최을생(崔乙生)을 낳았는데, 모두 관위(官位)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직학사(直學士) 최담(崔湛)과 소윤(少尹) 최득지(崔得之)를 거쳐 현감인 최자목(崔自睦)의 때에 이르러서 고부(古阜)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상장군(上將軍) 최분(崔汾)과 군수 휘(諱) 명손(命孫)과 휘 희윤(希潤)과 휘 진하(鎭河)를 거쳐서, 휘 여호(汝浩)가 김약우(金若愚)의 딸인 강진 김씨(康津金氏)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을사년(1545, 인종 1)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는 안(安)이요, 자(字)는 모(某)이다. 공은 자질이 총명하였고 행동거지 또한 바르고 성실하였다. 전후에 걸쳐 어버이 상을 당했을 적에도 모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며 건강을 해칠 정도로 슬퍼하였고, 비갈(碑碣)을 세워 선인(先人)의 덕을 기리고 사우(祠宇)를 세워 돈독하게 제사 드리는 일에 대해서 집안이 빈궁하다는 이유로 조금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우인 최부(崔富), 최인(崔寅), 최용(崔容)과 더불어 40년 동안이나 동거하면서 의식(衣食)을 함께하는 가운데, 선(善)을 권면하고 잘못된 점을 경계하여 윤리(倫理)와 기강이 가지런해지게 하였다. 이는 대체로 효성과 우애에 대한 공의 정성이 천성적으로 뿌리를 내린 위에 예법에 통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바로 그런 까닭에 사랑하면서도 외설스럽게 되지 않고 시간이 오래 흐르면 흐를수록 서로 공경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자제들이 받들어 일을 행할 때에도 마치 관부(官府)와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므로, 고향 사람 모두가 존경하며 중히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설혹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히 침해하며 모욕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공은 소싯적에 박사(博士)가 되기 위한 학업에 매진해 본 적도 있었으나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담박한 경지를 지키면서 자신의 몸을 닦아 나갔는데, 세상에서는 이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일찍이 왜란(倭亂)이 일어났을 때 고향 사람들의 앞장에 서서 군대에 대한 비용을 도와 준 공을 세워 선공감 직장(繕工監直長)의 직책을 상으로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공은 부안 김씨(扶安金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 문정공(文貞公)의 후예로 김효순(金孝純)의 딸이다.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최경승(崔敬承)이고, 차남은 최경행(崔敬行)으로 참봉에 천거되었으나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측실 소생으로 1남 2녀가 있으니, 아들은 최경직(崔敬直)이고, 사위는 정섬(鄭暹)과 이비응(李匪鷹)이다. 최경승은 4녀 1남을 두었으니, 아들은 최천급(崔天及)이고, 사위는 이해(李海)와 김지간(金地干)과 문홍망(文弘望)과 정동일(鄭東一)이다. 최경행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최천용(崔天聳)과 최천통(崔天通)이고, 사위는 방명도(房明燾)이며,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최천급은 아들 최유(崔裕)를 두었다. 그 밖에 내외손이 많은데 다 기재하지 못한다.
공은 만력(萬曆) 을묘년(1615, 광해군 7) 12월 19일에 죽었다. 묘지는 선영에 있는데, 군의 관아 동쪽 모곡(某谷) 묘위(卯位)의 혈(穴)에 묻혀 있다. 의인(宜人)은 공보다 31년 앞선 을해년(1575, 선조 8)에 죽어, 봉분만 달리한 채 같은 묘역에 묻혀 있다. 나는 일찍이 동향(同鄕)의 자제로 공의 행업(行業)에 대해서 상세히 들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미처 가서 배우지는 못하였다. 이 때문에 공의 전형(典刑)을 추억하여 그 행적을 서술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명하는 바이다.

나라는 글만 화려하면 재질이 있다 하고 / 國尙詞華以爲材
선비는 청담(淸談)을 얘기하면 통달했다 일컫나니 / 士談名理以爲通
최공이 본성 지키려고 전원으로 돌아가서 / 宜乎崔公守拙田園
덕 감추고 살았던 것도 당연했다 하리로다 / 潛德以終者乎
하지만 자신의 한 몸에서 한집안으로 / 然自身而家
다시 향리까지 그 풍도(風度) 흠모하였나니 / 鄕里欽風
만약 공의 성품을 살펴본다면 / 揆厥所性
낮출 자 누구이며 높일 자 누구일까 / 孰卑孰隆
나의 이 비명(碑銘)은 결코 아첨 아니요 / 我銘非諛
공심(公心)에서 우러나온 정당한 평가로세 / 尙論之公


 

[주D-001]31년 …… 죽어 : 공이 죽은 을묘년(1615)보다 31년 앞선 해는 을축년(1565, 명종 20)인바, 기록상의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주D-002]본성 …… 돌아가서 :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시에, “남쪽 들판 한끝을 개간하고서, 본성 지키려고 전원으로 돌아왔네.[開荒南野際 守拙歸田園]”라는 구절이 있다. 《陶淵明集 卷2 歸田園居》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


동쪽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4리,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5리, 남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쪽으로 여산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2리, 북쪽으로 충청도 연산현(連山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9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고산현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조에 다시 나누었고,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봉산(鳳山)ㆍ난등량.
【성씨】 본현 고(高)ㆍ송(宋)ㆍ전(全)ㆍ배(裴), 가(價) 가(賈)라고도 한다. 천(千). 운제(雲梯) 배ㆍ백(白)ㆍ수(水)ㆍ송ㆍ유(兪).
【풍속】 사신(邪神)에 제사하기 좋아한다.
【형승】 위봉절령벽립만인(危峯絶嶺壁立萬仞) 이규보의 기에,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길이나 벽처럼 서 있고,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내려서야 다닐수 있다.” 하였다.
【산천】 주줄산(珠崒山) 현의 동쪽 34리, 운제현에 있다. 대둔산(大芚山) 현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솔산(兜率山)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불명산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운제산(雲梯山) 운제현에 있는데, 산이 아주 높고 험하다. 탄현(炭峴) 현의 동쪽 50리에 있는데, 진산군(珍山郡) 이현(梨縣)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가점(加岾) 현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15리이며, 용계성(龍鷄城)이 그 동쪽에 있다. 용계천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의 하나는 현의 탄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주의 이현에서 나오는데, 합쳐서 북쪽으로 흘러 충청도 연산현 경계에 들어간다. 남천(南川) 근원이 운제ㆍ주줄 두 산에서 나와 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전주 경계에 들어간다. 용연(龍淵)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데, 범의 머리를 담그면 문득 효응이 있다. 『신증』 용연 운제현 동쪽 15리에 있는데, 샘물이 솟아나서 못이 되었고, 주위는 1리쯤 되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증험이 있다.
【토산】 오수정(烏水精) 현의 동쪽 이암현(耳巖峴)에서 난다. 녹반(綠礬) 현의 동쪽 월막암혈(月幕巖穴)에서 난다. 꿀[蜂蜜]ㆍ송이[松蔈]ㆍ감ㆍ석류ㆍ모시ㆍ옻ㆍ석이[石蕈].
【누정】 요산루(樂山樓)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권건(權健)의 시에, “그림 기둥 조각한 난간 제작이 공교로운데, 경영한 것은 응당 농사일[田功] 위해서이리. 날카로운 산봉우리 앞뒤로 둘러 있고, 논두렁 밭둑들은 동서로 엇비슷하구나. 못 수면에는 갈매기 그림자 깨끗하게 잠기고, 담장 머리엔 버들 가지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네. 주인의 마음 바탕 얼마나 너그러운가. 기묘한 경치 다 거두어 눈 가운데[眼中] 넣는다.” 하였다. 권가루(勸稼樓) 객관 남쪽에 있는데, 현감 김석현(金錫賢)이 세웠다.
【학교】 향교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옥포역(玉包驛)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서원(西院)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삼기원 삼기정 아래에 있다. 이생원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불우】 화암사(花巖寺)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하여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워진 나무가 있었는데, 푸른 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栴檀木)이라고 부른다. ○ 고려 백문절(白文節)의 시에,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말[馬]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시내를 타고 있는 정자 벽에는 시가 가득하고, 풍헌(風軒)의 현판에는 용과 교룡이 꿈틀거리네. 현공(玄公)이 지은 기문 옛말을 모았는데, 황견유부(黃絹幼婦) 세상에 드물도다. 샘물은 비녀다리같이 갈라져서 구슬을 내뿜는데, 문득 오목한 돌 만나 몇 개의 못 이루었네. 백 마리의 고기는 여기서 노닐고, 아홉 마디 창포(菖蒲)는 푸른 실처럼 어지럽다. 열 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두드리면 산새들은 모두 놀라 날아가네. 지팡이 짚고 웃고 맞는 것은 참으로 방미(厖眉 큰 눈썹인데, 점잖은 사람)인데, 종남산(終南山) 엄연한 노인의 풍모로다. 흰 옷 입은 신선은 달 가득한 자태인데, 단정히 앉은 높은 당은 팔부위중(八部圍中)에 싸였네. 누런 모란꽃은 뜰을 비추고, 작약(芍藥)꽃에 취서시(醉西施 일종의 작약)도 있도다. 대통으로 나오는 가는 물줄기는 씻고 양치질 하겠고, 약포(藥圃)와 채전(菜田)에 가물들면 뿌려도 주네. 부들 자리에 찻잔 두고 말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비로자나물(毗盧遮那佛)과 해장(海藏 연화세계(蓮花世界))을 혓바닥 밑에서 펼쳐내네. 면마(眠魔 잠 귀신)가 찾아오면 반드시 항복기(降服旗) 꽂으리니,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은 지 80년이라. 내가 와서 도 물으며 스승되기 청하니, 배운 학식 다 털어 주어 헛되이 돌아감을 면했도다.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三竿] 기울었도다.” 하였다. 위봉사(威鳳寺)ㆍ운암사(雲巖寺) 모두 주줄산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도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ㆍ여단 모두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고적】 운제폐현(雲梯廢縣)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운산(雲山)이다. 본래 백제 지벌지현(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덕은군(德殷郡)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 전주에 붙였다. 본조 태조 원년에 이 고을에 붙였다. 삼기정(三奇亭)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 하연(河演)의 기에, “고산현의 동쪽 5리쯤에 조그마한 산등성이가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서 있다. 그 아래에는 긴 시냇물이 있어 빙빙 돌면서 맑고 맑은데,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있어 무성하게 우거져 푸르르며, 그 서쪽은 편평하게 고르다. 임인년 봄 내가 순찰 차 이곳에 도착하여 올라가 관람하니, 안개와 초목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눈앞에 보이는데, 그 중에도 물ㆍ돌ㆍ소나무는 특히 기묘하게 좋은 경치였다. 이에 3기(奇)라고 이름을 정해 나무를 깎아 써 두었더니, 지금 현감 최득지(崔得之)가 여기에다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나는 처음 명명(命名)한 사람이라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개 사람의 정(情)은 물(物)에 감동이 되어서 변하는데, 눈으로 보는 바는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냇물이 맑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연(本然)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고, 돌이 높게 겹친 것을 보면 확연(確然)히 뽑지 못하는 뜻이 더욱 굳어지며, 소나무가 늦도록 푸른 것을 보면 곧고 굳은 절개가 더욱 높아지는데, 이 산등성이의 세 가지 물건이 어찌 관람하는 데에 기이하고 무더운 여름철의 휴식하는 쾌락뿐이겠는가. 내가 보는 바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 올라서 감흥이 되어 마음을 붙이고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마음을 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목욕하고 바람 쏘이면서 읊조리고 돌아가는 즐거움이 될 것이니, 옛날에 내가 명명한 뜻을 대개 짐작할 것이다.” 하였다.
용계성(龍鷄城) 용계천(龍溪川)가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10리쯤 되고, 서북쪽으로 연산현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옛 성이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4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지금은 반절이나 무너졌다.
【인물】 고려 고의화(高義和) 천성이 조용하고 날쌔며 여력(膂力)이 있었다. 군보대정(軍補隊正)에 뽑혔고, 후에 벼슬이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이르렀다.【효자】 고려 유석진(兪石珍) 현리(縣吏)이다. 아버지 천을(天乙)이 악질에 걸렸는데, 발작만 되면 숨이 끊어지니, 석진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고 하니, 석진은 곧 왼손 무명지를 잘라 말대로 해서 먹였는데, 아버지 병이 곧 나았다. 차달(車達) 운제현 지불역(祗弗驛) 백성이다. 형제 세 사람이 늙은 어머니를 같이 봉양하는데, 차달이 자기 아내가 어머니에게 삼가지 않는다고 쫓아버리니, 두 아우도 다 장가를 들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성종 9년에 세 사람을 다 역을 면해 주고, 그 소원에 따라 주현에서 호적에 넣어주었다.
【제영】 연촌일경유(連村一徑幽) 고려 최영유(崔永濡)의 시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은 나라 일에 종사하면서 인해서 좋은 놀이 점령함이라네. 갈가마귀는 둑 위 나무에서 울고, 들 오리는 시냇물에 떠 있도다. 눈 덮인 천봉우리는 수척하고, 시골로 이어진 한 길은 깊숙하네. 멀리 와서 좋은 경치 만났으니, 말 세우고 다시 오래 머문다.” 하였다. 수포원촌류(水抱遠村流)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산은 가까운 성곽 따라 둘러 있고, 물은 먼 마을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운심동부유(雲深洞府幽) 정지담(鄭之澹)의 시에,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후하고, 구름 깊으니 동부가 깊숙하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남면(南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면(西面)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운동(雲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서(雲西)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북(雲北)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3면은 운제(雲梯)의 옛 현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산창(山倉) 비봉산성(飛鳳山城)에 있다.
【교량】 세심교(洗心橋)ㆍ봉림교(鳳林橋)ㆍ호액교(虎額橋)ㆍ거사교(居士橋).
【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뽕[桑]ㆍ묵토(墨土) 서쪽 30리에 있는 부금리(赴金里)에서 난다.


[주D-001]황견유부(黃絹幼婦) : 황견유부(黃絹幼婦)라는 말은 변해 쓰는 말이다. 한 나라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한 말인데, 황견(黃絹)은 물들인 실[色絲]이니 절(絶) 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가 된다. 그래서 절묘(絶妙)하다는 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4권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

동쪽으로 용담현(龍潭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34리, 전주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55리, 남쪽으로 같은 부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쪽으로 여산군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32리, 북쪽으로 충청도 연산현(連山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29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고산현 난등량(難等良)이라고도 한다. 이었는데, 신라 때 전주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감무를 두어 진동(珍同)을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조조에 다시 나누었고, 후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봉산(鳳山)ㆍ난등량.
【성씨】 본현 고(高)ㆍ송(宋)ㆍ전(全)ㆍ배(裴), 가(價) 가(賈)라고도 한다. 천(千). 운제(雲梯) 배ㆍ백(白)ㆍ수(水)ㆍ송ㆍ유(兪).
【풍속】 사신(邪神)에 제사하기 좋아한다.
【형승】 위봉절령벽립만인(危峯絶嶺壁立萬仞) 이규보의 기에, “높은 봉우리 우뚝한 재가 만길이나 벽처럼 서 있고, 길이 매우 좁아서 말을 내려서야 다닐수 있다.” 하였다.
【산천】 주줄산(珠崒山) 현의 동쪽 34리, 운제현에 있다. 대둔산(大芚山) 현의 북쪽 45리에 있다. 도솔산(兜率山) 현의 북쪽 35리에 있다. 불명산 현의 북쪽 30리에 있다. 운제산(雲梯山) 운제현에 있는데, 산이 아주 높고 험하다. 탄현(炭峴) 현의 동쪽 50리에 있는데, 진산군(珍山郡) 이현(梨縣)까지의 거리는 20리이다. 가점(加岾) 현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15리이며, 용계성(龍鷄城)이 그 동쪽에 있다. 용계천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의 하나는 현의 탄현에서 나오고, 하나는 전주의 이현에서 나오는데, 합쳐서 북쪽으로 흘러 충청도 연산현 경계에 들어간다. 남천(南川) 근원이 운제ㆍ주줄 두 산에서 나와 현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전주 경계에 들어간다. 용연(龍淵)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데, 범의 머리를 담그면 문득 효응이 있다. 『신증』 용연 운제현 동쪽 15리에 있는데, 샘물이 솟아나서 못이 되었고, 주위는 1리쯤 되며, 날이 가물 때 비를 빌면 증험이 있다.
【토산】 오수정(烏水精) 현의 동쪽 이암현(耳巖峴)에서 난다. 녹반(綠礬) 현의 동쪽 월막암혈(月幕巖穴)에서 난다. 꿀[蜂蜜]ㆍ송이[松蔈]ㆍ감ㆍ석류ㆍ모시ㆍ옻ㆍ석이[石蕈].
【누정】 요산루(樂山樓)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권건(權健)의 시에, “그림 기둥 조각한 난간 제작이 공교로운데, 경영한 것은 응당 농사일[田功] 위해서이리. 날카로운 산봉우리 앞뒤로 둘러 있고, 논두렁 밭둑들은 동서로 엇비슷하구나. 못 수면에는 갈매기 그림자 깨끗하게 잠기고, 담장 머리엔 버들 가지 바람에 가볍게 나부끼네. 주인의 마음 바탕 얼마나 너그러운가. 기묘한 경치 다 거두어 눈 가운데[眼中] 넣는다.” 하였다. 권가루(勸稼樓) 객관 남쪽에 있는데, 현감 김석현(金錫賢)이 세웠다.
【학교】 향교 현의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옥포역(玉包驛)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서원(西院)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삼기원 삼기정 아래에 있다. 이생원 현의 동쪽 40리에 있다.
【불우】 화암사(花巖寺) 주줄산에 있다. 가느다란 잎사귀에 털이 덥수룩하여 허리띠처럼 어지럽게 드리워진 나무가 있었는데, 푸른 빛이 구경할 만하며, 다른 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속에서는 전단목(栴檀木)이라고 부른다. ○ 고려 백문절(白文節)의 시에,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소나무와 회나무는 하늘에 닿고 댕댕이 줄 늘어졌는데, 백 겹 이끼 낀 돌다리는 미끄러워 발 붙이기 어렵구나. 말[馬] 버리고 걸어가니 다리는 피곤한데, 길을 통한 외나무다리는 마른 삭정이일세. 드물게 치는 종소리는 골을 나오기 더디고, 구름 끝에 보일락말락 지붕마루 희미하다. 시내를 타고 있는 정자 벽에는 시가 가득하고, 풍헌(風軒)의 현판에는 용과 교룡이 꿈틀거리네. 현공(玄公)이 지은 기문 옛말을 모았는데, 황견유부(黃絹幼婦) 세상에 드물도다. 샘물은 비녀다리같이 갈라져서 구슬을 내뿜는데, 문득 오목한 돌 만나 몇 개의 못 이루었네. 백 마리의 고기는 여기서 노닐고, 아홉 마디 창포(菖蒲)는 푸른 실처럼 어지럽다. 열 발짝 못 걸어서 소나무 사립문 있는데, 두드리면 산새들은 모두 놀라 날아가네. 지팡이 짚고 웃고 맞는 것은 참으로 방미(厖眉 큰 눈썹인데, 점잖은 사람)인데, 종남산(終南山) 엄연한 노인의 풍모로다. 흰 옷 입은 신선은 달 가득한 자태인데, 단정히 앉은 높은 당은 팔부위중(八部圍中)에 싸였네. 누런 모란꽃은 뜰을 비추고, 작약(芍藥)꽃에 취서시(醉西施 일종의 작약)도 있도다. 대통으로 나오는 가는 물줄기는 씻고 양치질 하겠고, 약포(藥圃)와 채전(菜田)에 가물들면 뿌려도 주네. 부들 자리에 찻잔 두고 말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비로자나물(毗盧遮那佛)과 해장(海藏 연화세계(蓮花世界))을 혓바닥 밑에서 펼쳐내네. 면마(眠魔 잠 귀신)가 찾아오면 반드시 항복기(降服旗) 꽂으리니, 옆구리를 자리에 대지 않은 지 80년이라. 내가 와서 도 물으며 스승되기 청하니, 배운 학식 다 털어 주어 헛되이 돌아감을 면했도다.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에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는 세 장대[三竿] 기울었도다.” 하였다. 위봉사(威鳳寺)ㆍ운암사(雲巖寺) 모두 주줄산에 있다. 안심사(安心寺) 도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 3리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ㆍ여단 모두 현의 북쪽 4리에 있다.
【고적】 운제폐현(雲梯廢縣)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지금 이름은 운산(雲山)이다. 본래 백제 지벌지현(只伐只縣)이었는데,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덕은군(德殷郡)의 영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때 전주에 붙였다. 본조 태조 원년에 이 고을에 붙였다. 삼기정(三奇亭) 현의 동쪽 6리에 있다. ○ 하연(河演)의 기에, “고산현의 동쪽 5리쯤에 조그마한 산등성이가 있고,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서 있다. 그 아래에는 긴 시냇물이 있어 빙빙 돌면서 맑고 맑은데,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있어 무성하게 우거져 푸르르며, 그 서쪽은 편평하게 고르다. 임인년 봄 내가 순찰 차 이곳에 도착하여 올라가 관람하니, 안개와 초목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눈앞에 보이는데, 그 중에도 물ㆍ돌ㆍ소나무는 특히 기묘하게 좋은 경치였다. 이에 3기(奇)라고 이름을 정해 나무를 깎아 써 두었더니, 지금 현감 최득지(崔得之)가 여기에다 정자를 짓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나는 처음 명명(命名)한 사람이라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대개 사람의 정(情)은 물(物)에 감동이 되어서 변하는데, 눈으로 보는 바는 그 느낌이 더욱 간절하다. 냇물이 맑은 것을 보면 내 마음 본연(本然)의 밝은 덕이 더욱 밝아지고, 돌이 높게 겹친 것을 보면 확연(確然)히 뽑지 못하는 뜻이 더욱 굳어지며, 소나무가 늦도록 푸른 것을 보면 곧고 굳은 절개가 더욱 높아지는데, 이 산등성이의 세 가지 물건이 어찌 관람하는 데에 기이하고 무더운 여름철의 휴식하는 쾌락뿐이겠는가. 내가 보는 바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후세의 군자들이 여기에 올라서 감흥이 되어 마음을 붙이고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마음을 잡고 성정(性情)을 기르는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목욕하고 바람 쏘이면서 읊조리고 돌아가는 즐거움이 될 것이니, 옛날에 내가 명명한 뜻을 대개 짐작할 것이다.” 하였다.
용계성(龍鷄城) 용계천(龍溪川)가에 있는데, 탄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10리쯤 되고, 서북쪽으로 연산현까지의 거리는 30리이다. 옛 성이 있고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4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지금은 반절이나 무너졌다.
【인물】 고려 고의화(高義和) 천성이 조용하고 날쌔며 여력(膂力)이 있었다. 군보대정(軍補隊正)에 뽑혔고, 후에 벼슬이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에 이르렀다.【효자】 고려 유석진(兪石珍) 현리(縣吏)이다. 아버지 천을(天乙)이 악질에 걸렸는데, 발작만 되면 숨이 끊어지니, 석진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시고 울부짖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 사람의 뼈를 피에 타서 마시면 나을 수 있다.”고 하니, 석진은 곧 왼손 무명지를 잘라 말대로 해서 먹였는데, 아버지 병이 곧 나았다. 차달(車達) 운제현 지불역(祗弗驛) 백성이다. 형제 세 사람이 늙은 어머니를 같이 봉양하는데, 차달이 자기 아내가 어머니에게 삼가지 않는다고 쫓아버리니, 두 아우도 다 장가를 들지 않고, 같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성종 9년에 세 사람을 다 역을 면해 주고, 그 소원에 따라 주현에서 호적에 넣어주었다.
【제영】 연촌일경유(連村一徑幽) 고려 최영유(崔永濡)의 시에, “스스로 좋아하는 것은 나라 일에 종사하면서 인해서 좋은 놀이 점령함이라네. 갈가마귀는 둑 위 나무에서 울고, 들 오리는 시냇물에 떠 있도다. 눈 덮인 천봉우리는 수척하고, 시골로 이어진 한 길은 깊숙하네. 멀리 와서 좋은 경치 만났으니, 말 세우고 다시 오래 머문다.” 하였다. 수포원촌류(水抱遠村流) 윤자운(尹子雲)의 시에, “산은 가까운 성곽 따라 둘러 있고, 물은 먼 마을을 안고 흐르네.” 하였다. 운심동부유(雲深洞府幽) 정지담(鄭之澹)의 시에,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후하고, 구름 깊으니 동부가 깊숙하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남면(南面) 처음이 5리, 끝이 10리. 서면(西面)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북면(北面)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운동(雲東)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서(雲西)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운북(雲北)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위의 3면은 운제(雲梯)의 옛 현이다.
【창고】 읍창(邑倉)ㆍ산창(山倉) 비봉산성(飛鳳山城)에 있다.
【교량】 세심교(洗心橋)ㆍ봉림교(鳳林橋)ㆍ호액교(虎額橋)ㆍ거사교(居士橋).
【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뽕[桑]ㆍ묵토(墨土) 서쪽 30리에 있는 부금리(赴金里)에서 난다.

[주D-001]황견유부(黃絹幼婦) : 황견유부(黃絹幼婦)라는 말은 변해 쓰는 말이다. 한 나라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한 말인데, 황견(黃絹)은 물들인 실[色絲]이니 절(絶) 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少女)이니 묘(妙) 자가 된다. 그래서 절묘(絶妙)하다는 말이다.


잠곡유고 제13권
 신도비명(神道碑銘)
우의정을 지낸 민 문경공(閔文景公)의 신도비명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즉위한 첫해에 가장 먼저 어진 재신(宰臣)을 택해 재상으로 삼았으니, 문경공 민기(閔箕)가 바로 그 사람이다. 재상으로 있은 지 몇 달 만에 갑작스레 죽어서 새롭게 하는 지극한 다스림을 돕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애석하게 여기고 있다.
공의 휘는 기(箕)이고 자는 경열(景說)이며, 여흥인(驪興人)으로, 고려 때 태사(太師)를 지낸 민영모(閔令謨)의 후손이다. 고조는 사재감 직장을 지낸 휘 징원(澄源)으로,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을 지낸 휘 형(亨)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형조 참의를 지낸 휘 효손(孝孫)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양천 현령(陽川縣令)을 지낸 휘 세류(世瑠)로,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장령 이인석(李寅錫)의 딸인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홍치(弘治) 갑자년(1504, 연산군 10)에 탄생하였다. 5세 때 양(梁) 나라의 주흥사(周興嗣)가 운을 단 《천자문(千字文)》을 배웠는데, ‘진초(晉楚)’ 두 글자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진 나라와 초 나라가 있기 이전에는 글자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니, 듣는 자들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6, 7세 때 엄연하기가 마치 어른과 같았으며,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읽어 이미 학문하는 방도를 알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로는 사람들이 모두 학문하는 것을 기피하여 종사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공은 개연히 발분하여 사서(四書)를 싸 들고 절로 올라가서 구부려 책을 읽고 우러러 생각하면서 밤낮없이 6, 7년 동안 계속하였다. 항상 이르기를, “옛 사람들은 글을 읽음에 있어 반드시 충분하게 읽고 깊이 생각한 뒤에 해석하였는데, 지금은 선유(先儒)들이 훈석(訓釋)을 해 놓아 보기만 하면 알 수가 있으니, 무슨 스스로 터득하는 공부가 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사서를 손으로 베껴 쓰면서 깊 궁구하였는데, 이해하여 깨닫는 바가 있으면 책에 쓴 다음 선유들의 학설과 대조하여 징험하였다. 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 가서 질정(質正)을 하였으니, 모재가 몹시 기이하게 여겨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세상의 유자(儒者)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신묘년(1531, 중종 26)에 사마시에 급제하였고, 기해년(1539) 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괴원(槐院)을 거쳐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곧바로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선발에 뽑혔다가 추천되어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가을에 설서(說書)로 승진하였는데, 너무 빨리 승진하였다는 이유로 논박을 받아 체차되었다. 다시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겨울에 주서(注書)에 제수되었다. 경자년(1540)에 홍문관 정자와 저작을 역임하였다. 신축년(1541)에 수찬으로 전보되었다가 병조 낭관에 제수되었다.
임인년(1542)에 시강원 사서를 겸하였고, 천거되어서 이조 낭관이 되었다. 이때 공의 부친이 양천 현령(陽川縣令)으로 있었다. 공이 귀성(歸省)하여 어머니의 병을 보살폈는데, 직접 약을 맛보면서 침식을 폐하기까지 하였다. 7월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다음 해 선공(先公)께서 또 관(官)에서 졸함에 공은 통곡을 하면서 슬퍼하여 거의 실성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을사년(1545, 인종 1)에 복제(服制)를 마치고 8월에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이때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하면서 큰 옥사(獄事)를 일으킨 탓에 사류(士類)들이 거의 다 죽었다. 그런데 공은 상복을 입고 외방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통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끝내 화를 면할 수가 있었다. 천거되어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 이기(李芑)가 이때 권상(權相)으로 있으면서 조정을 협박하였는데, 공은 그의 하료(下僚)로 있으면서 하는 일마다 서로 어긋났으나, 공은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비록 이기의 노여움을 받았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므로, 이기가 몹시 껄끄럽게 여기면서도 흠잡을 만한 꼬투리가 없어 해칠 수가 없었다.
병오년(1546,명종1)에 응교로 승진되었고, 정미년(1547)에 병으로 사임하였다가 사도시 첨정을 거쳐 봉상시 부정이 되었다. 무신년(1548)에 전한에 제수되었고, 기유년(1549)에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 5월에 충주(忠州)에서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공이 문사관(問事官)이 되었다. 옥사가 끝나자 통정 대부로 승진하여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동부승지로 있으면서 이문정시(吏文庭試)에서 수석을 차지해 가선 대부로 승진하였다가 또다시 너무 빨리 승진하였다는 이유로 논박을 받았다. 이어 좌부승지로 전보되었다가 체차되어서 공조 참의,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신해년(1551)에 대사성에 제수되었고, 임자년(1552)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북경(北京)에 가서 조회(朝會)하였다. 계축년(1553)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을묘년(1555)에 또다시 이문정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가선 대부로 승진되었는데, 외임으로 나가 호서(湖西)를 안찰하였다. 병진년(1556)에 조정으로 들어와 공조 참판이 되었다. 정사년(1557)에 대사간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무오년(1558)에 도헌(都憲)으로 전보되어 차자를 올려 ‘임금이 대신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예로써 해야 하며, 간쟁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극력 진술하였는데, 말이 몹시 절실하여 권귀(權貴)의 뜻을 거슬러 드디어 좌천되었다. 신유년(1561)에 다시 호서를 안찰하고 들어와서 대사성이 되었다. 또 사헌부의 장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잡기에 힘썼으며, 뜻이 격양(激揚)시키는 데 있었으나 지나치게 심하게 하지는 않았다. 병조 참판과 이조 참판으로 전보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이 임금을 위협하면서 권세를 제멋대로 부렸다. 공이 한두 명의 재신들과 더불어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의리를 극론(極論)하여, 마침내 큰 간인(奸人)을 내쫓아서 조정이 맑아졌다. 이때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이미 죽었는데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공은 종사의 대계(大計)를 몹시 염려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에 나오는 ‘정국본(定國本)’ 한 편을 뽑아 영상 이준경(李浚慶)에게 올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마땅히 상(上) 앞에서 이 의리를 개진하여야 한다.” 하였는바, 이 영상(李領相)이 큰 계책을 정함에 있어서는 공의 힘이 컸던 것이었다. 얼마 뒤에 한성부 판윤으로 승진하였다.
병인년(1566, 명종 21)에 이조 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제수되었다. 상이 성심으로 어진 이를 구하면서 공으로 하여금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를 천거하게 하여 이항(李恒) 등 6명을 얻었다. 상이 이들을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는 차등 있게 관직에 제수하였는데,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실로 공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 나머지 공도(公道)를 넓히고 선류(善類)들을 드러내며, 재주에 따라 직임을 주는 등 능히 전형관의 직임을 다한 것은 일일이 다 기록할 수조차 없이 많다.
정묘년(1567)에 형조 판서로 전보되었다. 이때 명 나라 융경 황제(隆慶皇帝)가 새로 즉위하여 한림(翰林) 허국(許國)과 급사중(給事中) 위시량(魏時亮)이 조서를 받들고서 우리 나라로 왔는데, 공이 우참찬으로서 관반(館伴)이 되었다. 6월에 명종(明宗)이 승하하고 선조(宣祖)가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었다. 중국 사신이 국경에 있는데 나라에 대상(大喪)이 있어 내외가 흉흉하였다. 공은 변례(變禮)에 처하여 접대를 함에 있어 잘못됨이 없게 하였다. 예조 판서로 옮겨서는 영천(永遷)하는 예식과 친제(親祭)하는 의식을 잘 치르도록 주선하고 이치에 합당하게 조처하니, 물의(物議)가 훌륭하게 여겼다.
10월에 우의정으로 승진 제수되었다. 공은 명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격의 차서에 따르지 않고 갑작스레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니, 반드시 복이 지나친 데 대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피를 토하면서 간절하게 사직하였으나, 끝내 윤허받지 못하였다. 이에 공은 평소에 담비증(痰痺症)이 있었는데도 억지로 애써서 조정에 나아갔다.
무진년(1568, 선조 1) 1월 17일에 관청에서 퇴근하다가 행동이 불편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 관대 차림을 하고서 손님을 만나 보다가 갑자기 구토를 하면서 정신을 잃어 잠을 자는 것처럼 혼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에 상이 승지를 파견하여 문안하였으나, 이미 구제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향년(享年)이 65세였다.
상이 몹시 애도하면서 조회(朝會)를 철폐하였으며,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뜻하지 않게 대신이 서거하였는바,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 하였으며, 또 승지를 파견하여 와서 조문하였다. 이해 4월에 통진(通津)의 치소(治所) 북쪽 해좌 사향(亥坐巳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평온하고 넓었으며, 고요하고 조용하여 아무리 창졸간이라 하더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안색을 바꾸는 법이 없었다. 상대방을 접함에 있어서 진실되게 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집에 있거나 관청에 있을 적에는 사람들이 일찍이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착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게 추켜세우는 법이 없었으며, 착하지 못한 사람도 능히 포용하였다. 혹 어떤 사람이 남의 단점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말하기를, “완전한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계려(計慮)가 심원하여 다른 사람들이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으며, 자신의 덕을 숨기기를 잘하여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인묘(仁廟)께서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학문이 고명하여 궁료(宮僚)들을 아주 신중하게 선발하였는데, 공은 항상 춘방(春坊)에 있었다. 인묘께서 즉위하였을 적에는 공이 막 부모의 상을 마쳤는데, 조정에서는 공이 조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기었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가 도헌(都憲)이 되어서 공을 찾아와 묻기를, “현재 해야 할 일 가운데 어느 것을 가장 먼저 해야 하는가?” 하자, 공이 말하기를,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이 급하다. 본원(本源)이 되는 곳인 임금이 통철하고 명쾌하게 되면 나머지 일은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충주(忠州)의 옥사(獄事)에 있어 공은 마음 속으로 원통함에 대해 상심하고 있었으며, 또 그로 인해 승진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으면서도 감히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승이 되어서는 경연 석상에서 그 원통함에 대해 극력 논하니, 상께서 깊이 받아들였다.
윤원형(尹元衡)의 종조(從祖) 동생인 윤춘년(尹春年)이 바로 공의 표매(表妹)의 아들이었는데, 시론(時論)을 틀어잡고서 정권을 농단하고 있었다. 공은 평소에 그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겨 그와 더불어 내왕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므로 자못 배제당하였다. 좌상으로 있던 윤개(尹漑)가 시사(時事)를 주도하자, 공이 끝까지 올라간 용은 후회가 있기 마련이라는 설로 풍자하니, 윤개가 기뻐하면서도 본뜻을 헤아리지는 않았다. 공이 그렇게 한 것을 미워하던 자가 일에 따라서 공을 헐뜯자, 상이 공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서 극언(極言)하자, 공을 미워하던 자들이 이 일을 매개로 하여 공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자약하게 대처하였다.
공은 세 번이나 대사성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앞뒤로 5, 6년이나 되었는데, 온 힘을 다하여 가르치면서 종시토록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은 학식도 있고 행실도 있어서 명망이 평소에 드러나, 조야에서 잔뜩 기대를 하면서 모두들 너무 늦게 정승이 된다고 하였다. 좌의정으로 있던 이명(李蓂)이 일찍이 입시하여 늙어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또 육경(六卿) 가운데 재주와 덕이 정승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있다고 아뢰었는데, 이는 대개 공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공은 성인(聖人)들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맹자(孟子)》와 《주역(周易)》을 가장 좋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행실을 닦고 세상에 대처하는 도리가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주역》을 모르면 마치 담벼락을 마주하고 선 것과 같다. 그러니 종신토록 외워 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으며, 머물러 있는 곳을 관물재(觀物齋)라고 이름하였다.
말년에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읽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사학(史學)이 경학(經學)과 비교하여 어떠하기에 공은 그처럼 좋아하는가?” 하고 묻자, 공은 대답하기를, “무릇 국가의 치란과 흥망, 인재의 현부와 진퇴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고문(顧問)에 대비하여 성학(聖學)을 도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낭료(郞僚)로 있을 적에 상이 신광한(申光漢)에게 뒷날에 문형(文衡)을 맡길 만한 자가 누구인가를 물으니, 신공이 공이라고 대답하였다. 공의 문장은 경술(經術)에 근본을 두었으며, 법도에 맞아 점잖고 명확하면서도 고상하였으므로, 나라에서 반포하는 교서(敎書)는 대부분 공의 손에 의해 지어졌다.
공은 종족들에게 화목하게 대하여 오래 전에 한 약속도 저버리지 않았으며, 형제들 사이에는 우애가 아주 돈독하였다. 나라를 위해 계획함에 있어서는 항상 원기(元氣)를 보양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기고 군덕(君德)을 보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경연에 입시하여서는 계옥(啓沃)한 것이 많았으며, 논의를 할 즈음에는 진정시키기를 유념하였는바, 혹 소요스러울 것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부득이한 일이라면 마땅히 먼저 해야 하겠지만, 다급한 일이 아니라면 조용하게 바로잡고 촉박하게 하다가 전도되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한다.” 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어렸을 적에 집은 가난하고 부모님은 연로하시어, 시문(時文)을 짓는 데 힘써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나의 평소의 뜻은 이런 것이 아니다. 성명(性命)의 근원을 궁구하고 공자(孔子)와 안자(顔子)가 즐긴 것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풍진(風塵) 속에서 그럭저럭 지내다 보니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게 되었다. 이것이 운명이란 말인가.” 하였다.
공은 찰방 김택(金澤)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고려에서 시중을 지낸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아들이 없어서 종제(從弟)인 민순(閔筍)의 둘째 아들 민수도(閔守道)를 후사로 삼았다. 민수도는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상서원 부직장에 이르렀으며, 판서 성세장(成世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넷으로, 민대인(閔大仁), 민대륜(閔大倫), 민대수(閔大脩), 민대숙(閔大俶)이고, 딸은 둘로, 사인(士人) 홍효충(洪孝忠)과 김현(金睍)에게 시집갔다.
민대인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민진원(閔震遠)으로 의금부 도사이고, 차남은 민진흥(閔震興)으로 성균관 진사이다. 1녀는 찰방 유성립(柳誠立)에게 시집갔다. 민진원의 1남은 민원(閔晼)이고, 1녀는 사인 최득지(崔得之)에게 시집갔다. 민대륜은 군기시 첨정으로 단지 1녀만 있는데, 첨지 이구원(李久源)에게 시집갔다. 민대수는 성균관 생원으로 1남을 두었는데, 민진경(閔震慶)이다. 민진경의 1남은 민윤(閔昀)으로 전 임실 현감(任實縣監)이고, 2녀는 참봉 유헌길(柳軒吉)과 진사 신명성(申命晠)에게 시집갔다. 민대숙은 후사가 없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90년이 되었는데, 묘비의 글이 없었다. 어느날 현감 민윤이 퇴계 선생(退溪先生)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신도비명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후생 말학으로서 견문이 고루한바, 참으로 감히 거칠고 졸렬한 말로 공의 일과 업적을 서술할 수가 없었으나, 현손(玄孫)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퇴계 선생이 지은 행장의 글에 따라서 차례대로 서술하고 신도비명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선 / 人之爲學
사물 이치 궁구함이 귀한 거라네 / 貴於窮格
성현들이 지은 글을 읽으면서는 / 讀聖賢書
더욱더 사색해야 하는 법이네 / 尤當思索
진실되고 진실되네 상공께서는 / 允矣相公
마음에서 스스로 터득했다네 / 於心自得
들어서 놓음이 마땅하였고 / 宜擧而措
공 이루어 은택이 미치게 했네 / 功成致澤
하늘이 남겨 두길 원하지 않아 / 天不慭遺
어쩜 그리 빠르게도 빼앗아 갔나 / 奪之何速
공에게 이미 재주 주어 놓고서 / 旣才之畀
베풀게 하는 데는 인색하였네 / 而施之嗇
나라의 입장에선 불행한 거고 / 邦家不幸
백성들도 복 없기는 마찬가지네 / 民亦無祿
만고토록 한스러움 남아 있기에 / 萬古遺恨
이 빗돌에 새기어서 남겨 두누나 / 留之玆石


[주D-001]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교리(校理), 수찬(修撰)을 선거 임명하는 기록을 말한다. 본관록(本館錄), 관록(館錄)이라고도 한다.
[주D-002]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 : 명종 4년 4월에 윤임(尹任)의 사위인 이홍윤이 충주(忠州)에 살면서 그의 아버지 이약빙(李若氷)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원통히 여겨 분개하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그와 사이가 나쁘던 그의 형 이홍남(李洪男)이 역모(逆謀)를 하였다고 고변(告變)하였다. 이로 인해 강유선(康惟善), 이이(李彝), 안세장(安世章) 등 33명이 처형되었으며, 충주는 강호(降號)하여 유신현(維新縣)으로 삼고 충청도는 청홍도(淸洪道)로 고쳤다. 《燃藜室記述 卷10 明宗朝故事本末》

 

 

潛谷先生遺稿卷之十三
 神道碑銘
右議政閔文景公神道碑銘 a_086_243a


我宣祖大王卽位之初年。首擢賢宰。爰立作相。文景閔公其人也。居數月。奄然捐館。不能贊揚維新之至治。人到于今惜之。公諱箕。字景說。驪興人。高麗太師令謨之後。高祖司宰監直長諱澄源。贈戶曹參議。曾祖宗親府典籖諱亨。贈吏曹判書。祖刑曹參議諱孝孫。贈議政府左贊成。考陽川縣令諱世瑠。贈議政府領議政。妣全義李氏。掌令仁錫之女。086_243b贈貞敬夫人。公生於弘治甲子。五歲。學周興嗣韻千字。至晉楚二字曰。未有晉國楚國之前。字義云何。聞者大奇之。六七歲。儼若成人。讀小學,大學。已知爲學之方。自己卯士禍以後。人皆以學問爲諱。莫肯從事。公慨然發憤。笈四書上寺。俯讀仰思。夜以繼日。幾六七年。常謂古人之讀書。必熟講深思而後解。今則先儒訓釋。寓目可知。有何自得之功。遂手書四書。究尋領會。有所契悟。書諸冊子。參驗先儒之論。又取質於金慕齋。慕齋大異之。嘆曰。此非世儒所及也。辛卯。中司馬。己亥春。登文科。由槐院錄玉堂。旋被賜暇之086_243c選。薦入史局。秋。陞說書。以驟進論遞。還爲檢閱。冬。拜注書。庚子。遷弘文正字著作。辛丑。轉修撰。移拜騎省。壬寅。兼侍講院司書。薦爲天官郞。時先公爲陽川縣令。公歸省母病。親嘗藥餌。至廢寢食。七月。丁艱。明年。先公又卒于官。公號慟毀戚。幾至滅性。乙巳。服闋。八月。拜副校理。時權奸用事。捏起大獄。士類殲盡。而公持服在外。不與人通。故竟得免。薦爲議政府舍人。李芑時以權相。脅制朝廷。爲其下僚。事多相戾。而公持正不撓。雖逢彼怒。少無所怵。芑甚嗛之。而無隙可乘。不得中傷。丙午。陞應敎。丁未。病辭。爲司편001僉正,奉086_243d常副正。戊申。拜典翰。己酉。陞直提學。五月。忠州李洪胤之獄起。公爲問事官。獄竟。陞通政。拜副提學。以同副承旨。居首於吏文庭試。陞嘉善。又以驟陞論。仍轉左副。遞拜工議參知。辛亥。拜大司成。壬子。奉使朝京。癸丑。拜吏議。乙卯。又魁吏文。陞舊秩。出按湖西。丙辰。入爲工曹參判。丁巳。移大司諫。戊午。轉都憲。上箚極陳人主待大臣以禮。納諫諍有容之意。言甚切至。忤於權貴。遂左遷。辛酉。再按湖西。入爲大司成。又長風憲。務持大體。意在激揚。而不爲太甚。轉兵,吏曹參判。時尹元衡脅君擅權。公與一二宰臣。極論必去之086_244a義。放斥大奸。朝廷淸明。而順懷旣殂。國本靡定。公極以宗社大計爲憂。袖大學衍義定國本一篇。呈領相李公浚慶曰。當於上前。開陳此義。李相之贊定大策。公有力焉。俄而。陞判尹。丙寅。拜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上求賢以誠。使擧經明行脩之士。得李恒等六人。上引見便殿。除官有差。贊揚。實出於公。其他恢公道。揚善類。隨才授任。克盡銓衡之職者。事不可殫記。丁卯。轉刑曹判書。時隆慶皇帝新卽位。翰林許國,給事中魏時亮奉詔東來。公以右參贊爲館伴。六月。明宗昇遐。宣祖入承大統。華使在境。086_244b國有大喪。內外洶洶。而公處禮之變。儐事罔愆。移判禮曹。永遷之禮。親祭之儀。攝贊周旋。處置合理。物議多之。十月。超拜右議政。公聞命兢惶。謂人曰。不循資序而遽登台鼎。必有福過之災。瀝血懇辭。竟不允。公素有痰痺之病。而黽勉趨朝。戊辰正月十七日。自公而退。擧止不爽。翊朝。冠帶見客。忽嘔逆不省。昏迷如寐。上遣承旨問之。已不可救矣。遂卒于正寢。享年六十五。上震悼。輟朝。傳于政院曰。不意大臣卒逝。不勝哀慟。又遣承旨來弔。是年四月。葬于通津治北亥坐巳向之原。先兆也。公天資夷曠。沈靜086_244c從容。雖倉卒間。無疾言遽色。待人接物。任眞無矯。處家在公。人未嘗見其喜慍。見善無過譽。不善能有容。或有攻人之短者。必曰。全人豈易得。舍短取長可也。計慮深遠。出人意表。善自韜晦。不求人知。仁廟在東宮。學問高明。妙選宮寮。公常在春坊。及卽位。公纔免父母之喪。朝廷佇公還朝。以任論思之責。宋圭菴爲都憲。來問于公曰。當今之事。何者爲急。公曰。正君爲急。人主本源之地。洞澈明快。則餘事。不難爲也。忠州之獄。公心傷其冤。且愧其陞。而不敢言。及爲相。極陳其冤於經席。上深納之。尹元衡從祖弟086_244d春年。卽公表妹之子也。專執時論。擅弄政柄。公素薄其爲人。羞與之往來。故頗見排擠。尹左相漑。主張時事。公以亢龍有悔之說。諷之。尹相說而不繹。惡之者隨事毀短。上意不悅。公上箚極言。疾公者因此媒孼。欲害公。公處之自若。公三爲大成。首尾五六年。敎誨甚力。終始不倦。公有學有行。名聞素著。朝野屬望。咸以爲作相之晩。左議政李蓂嘗入侍。辭以老病。且啓六卿中。有才德可堪具瞻者。蓋指公也。公不觀非聖之書。最好孟子,周易曰。人之行已處世之道。盡在此中。不知易。如面墻而立。雖終身誦之。可也。名其086_245a所居齋曰觀物。晩年。喜讀綱目。或問史學與經學何如。而公好之至此。公曰。凡國家治亂興亡。人才賢否進退。若不了了於心。其何以備顧問。補聖學乎。其在郞僚時。上問申光漢。他日。可典文衡者誰。申公以公對。公之文章。本於經術。典重確雅。國之絲綸製作。多出其手。公敦睦宗族。不棄久要。兄弟之間。友愛甚篤。凡爲國家計。常以輔養元氣爲務。輔成君德爲本。入侍經筵。啓沃弘多。論議之際。存心鎭靜。慮或騷擾曰。若不得已之事。在所當先。非汲汲之事。則從容救正。使不至促迫顚倒可也。嘗自歎曰。少時家086_245b貧親老。勉爲時文。僥倖科第。若平生之志。則不在此。欲究性命之源。探孔顏之樂。而悠悠風塵。日暮途遠。茲可謂命也耶。公娶察訪金澤之女。高麗侍中方慶之後。無子。以從弟筍之第二子守道。爲後。官于朝。爲尙瑞院副直長。娶判書成世章女。生四男。曰大仁,大倫,大脩,大俶。二女。適士人洪孝忠,金睍。大仁生二男。長震遠。義禁府都事。次震興。成均進士。一女。適察訪柳誠立。震遠一男。睕。一女。適士人崔得之。大倫。軍器寺僉正。只有一女。適僉知李久源。大脩。成均生員。一男。震慶。震慶一男。昀。前任實縣監。二女。適參奉柳086_245c軒吉。進士申命晟。大俶。無後。公之沒已九十年。而墓刻無文。一日。縣監手奉退溪先生之狀。請銘於余。余以後生末學。聞見孤陋。固不敢以荒蕪拙語。稱道公之事業。而重違玄孫之懇。一從先生紀實之文。撰次而銘之。銘曰。
人之爲學。貴於窮格。讀聖賢書。尤當思索。允矣相公。於心自得。宜擧而措。功成致澤。天不憖遺。奪之何速。旣才之昇。而施之嗇。邦家不幸。民亦無祿。萬古遺恨。留之茲石。


[편-001]䆃 :

세종 21년 기미(1439,정통 4)
 7월7일 (계축)
고산 현감 최득지를 불러 보다

고산 현감(高山縣監) 최득지(崔得之)가 하직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근년 이래로 해마다 가물어서 화곡(禾穀)이 흉년이 들었으니, 민생(民生)이 염려된다. 오직 본도(本道)는 지난해에 조금 풍년이 들었고, 금년에 비가 또 흡족하나, 다만 곡식을 옮기[移粟]는 것으로 인하여 인력(人力)이 매우 피곤하여졌으니, 네가 그 고을에 가서 마땅히 환상(還上)을 거두고 흩어 주는 법과 농상(農桑)을 권과(勸課)하는 사무에 유의하여, 오직 이를 힘쓸지어다.”
하니, 득지(得之)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은택이 넘쳐 흐르오니, 백성들이 베개를 편안히 하여야 할 터인데, 혹 소요(騷擾)한 폐단이 있는 것은 특히 수령이 직책을 다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 말이 대단히 내 뜻에 합한다. 이 말을 폐하지 말아서 나의 지극한 뜻에 맞게 하라.”
하였다.
【원전】 4 집 22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농업-농작(農作) / *농업-권농(勸農) / *재정-창고(倉庫)


세종 7년 을사(1425,홍희 1)
 12월28일 (계사)
창원 부사 장우인·장수 현감 최득지가 사조하니 인견하다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우인(張友人)·장수 현감(長水縣監) 최득지(崔得之)가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수령은 나가서 백 리의 땅을 맡아 다스리며 한 고을을 전단(專斷)하는 것이니, 그 임무가 가볍지 아니하다. 그래서 신중하게 선임(選任)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생각하여 잊지 말고 요역(徭役)을 경하게 하고 세금을 적게 하여 백성을 보호하라.”
하였다.
【원전】 2 집 708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敬齋先生文集卷之四
 附錄
年譜 a_008_457a


皇明太祖高皇帝洪武九年丙辰 高麗禑二年
八月十三日乙未亥時。先生生于晉州尼丘山下餘沙村第。
尼丘在州西四十里。屹然臨水。河氏世居其下。俗傳禮義如魯闕里故名。餘沙。今稱沙月。
十二月。王考晉山府院君苦軒公卒。
十年丁巳。先生二歲。
008_457b十一年戊午。先生三歲。十二年己未。先生四歲。
十三年庚申。先生五歲。
八月。曾王考晉川府院君松軒公卒。
○先生與群兒戲遊。躓仆傷額。母夫人戒之曰。古書云。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毀傷。孝之至也。先生聞甚惕然。憂形于色。自是行不妄動。擧止有度。手不持玩好之物。口不出鄙倍之言。
十四年辛酉。先生六歲。
秋。從皇考木翁公于豐海營。
008_457c時木翁公爲海西觀察使。
十五年壬戌。先生七歲。
秋。從木翁公自豐海還京第。
第在松京。先是。松軒公占松岳之東岡以居。晚年還鄕。及木翁公從仕于京。修葺舊第而居焉。
十六年癸亥。先生八歲。
始入小學。
木翁公敎之以孝悌忠信。先生曰。何不言敬。木翁公曰。旣行孝悌忠信。則敬在其中。
正月。祖妣貞敬夫人卒。
008_457d十七年甲子。先生九歲。
春。讀伯夷傳。
讀至於首陽採薇而食。顧謂伯兄郡事公曰。首陽周地。薇亦周物。何以隱於周地而食周物。木翁公奇之。
十八年乙丑。先生十歲。
文辭大進。筆法端正。
李牧隱穡見而奇之曰。此非鴨江以東之才。其早成。雖唐,宋諸儒。未必過此。
夏。從木翁公于淸州任所。
008_458a時木翁公服闋。拜淸州牧使。
十九年丙寅。先生十一歲。
時旭元國男女三十餘人。漂到蔚山津。路過淸州。先生於路上觀之。旭元人聚觀先生曰。偉哉眞大人氣像。女人以雜佩遺之。先生微笑曰。吾本不喜玩好之物。況女子雜佩。豈丈夫所取。遂不受。
二十年丁卯。先生十二歲。
秋。從木翁公自淸州還京第。
時木翁公自淸州還朝。拜兵曹判書。
008_458b二十一年 高麗昌元年 戊辰。先生十三歲。
二月。陪木翁公遊春塘。拜冶隱吉先生。
木翁公與冶隱暢懷于春塘。共論王室艱危。先生進曰。不事二君。是人臣之道。冶隱顧語木翁公曰。此兒一言。眞吾輩職分乎。
二十二年 恭讓王元年 己巳。先生十四歲。
受業于圃隱鄭先生。
木翁公。與圃隱道同志合。又所居隣近。昕夕相從。至是命先生就學。先生天姿近道。立志甚高。旣得賢師。益加自勉。深究性理之學。
008_458c二十三年庚午。先生十五歲。
從木翁公于淸風任所。
木翁公旣辭大司馬之命。不欲安於朝。屢乞外補。是歲除淸風郡守。
二十四年辛未。先生十六歲。
秋。從木翁公自淸風還鄕。
時麗運將訖。王室艱危。木翁公不忍宗國之亡。遂自職所。托疾歸鄕。
十月。入京謁圃隱先生。
及還。圃隱送至洞外曰。君去南。吾道南。
008_458d二十五年 我太祖大王元年 壬申。先生十七歲。
四月。哭圃隱先生。
先生早歲及門。薰炙道義。深被奬育之恩。至是在鄕承訃。驚慟不已。後挽其子宗本。有契托趨庭後。情同骨肉親之句。
二十六年癸酉。先生十八歲。
二十七年甲戌。先生十九歲。
二月。聘夫人星山李氏。
重大匡開城尹存性女。月城府院君慶州李成林外孫。○按姜通亭淮伯。卽松軒公外孫。其夫008_459a人李氏。乃先生夫人之兄也。其孫晉山君希孟撰通亭行狀。有曰。希孟生三歲。鞠於王母。王母常敎余曰。乃祖嘗器表姪河某之爲人。以吾季妹妻之。河公嘗治第晉曲。乃祖戒之曰。子當踐敭美官。爲國大相。非終老鄕曲者。勸令之京。後其言無一不中云。
二十八年乙亥。先生二十歲。
秋。中司馬鄕試兩場及文科漢城試。
二十九年丙子。先生二十一歲。
春。中司馬,覆試兩場。008_459b夏。擢文科會試。金益精榜下三等第一人
三十年丁丑。先生二十二歲。
正月。授從仕郞奉常寺錄事。直藝文館。
秋。自晉州就居京城鑄洞。後移居敦義門外
三十一年戊寅。先生二十三歲。
建文皇帝元年 定宗大王元年 己卯。先生二十四歲。
十二月。陞通仕郞春秋館修撰官。
二年庚辰。先生二十五歲。
十二月。陞務功郞門下注書。
按朝野記聞。是歲命先生改官制。以門下及008_459c都評議司。合爲議政府。
三年 太宗大王元年 辛巳。先生二十六歲。
四月。陞宣務郞濟用庫副使。
五月。移宣敎郞供正庫副使。
四年壬午。先生二十七歲。
五月。加承訓郞。拜司憲府監察。
先生以年少新進。初入殿中。百僚整肅。
太宗文皇帝永樂元年癸未。先生二十八歲。
五月。除承議郞典農寺主簿。
六月。移承訓郞奉常寺主簿。
008_459d閏十一月。拜承議郞。仍奉常寺主簿。兼尙瑞院錄事。
十二月。拜禮曹佐郞。兼尙瑞院直長。
子孝明生 官至副正
二年甲申。先生二十九歲。
正月。仍禮曹佐郞。兼尙瑞院主簿。
七月。遷直長。
十月。移兵曹佐郞。仍兼尙瑞院主簿。
十二月。陞奉訓郞。移刑曹佐郞。復移供正庫使。
三年乙酉。先生三十歲。
008_460a正月。加奉直郞。拜吏曹正郞。
十二月。移兵曹正郞。加通善郞。
四年丙戌。先生三十一歲。
二月。拜吏曹正郞。加通德郞。
閏七月。仍吏曹正郞。兼知製敎。
十二月。陞朝散大夫奉常寺副令。直集賢殿。
五年丁亥。先生三十二歲。
十二月。除奉列大夫知安岳郡事。兼勸農兵馬團練副使。
六年戊子。先生三十三歲。
008_460b春。乙任安岳。
先生初受郡寄。專意民事。誠於惠恤。勤於勸課。築迎春亭片月亭大樹亭魚躍亭筆峯亭。視篆之暇。登臨巡省。勸督農事。又作農謳數闋以相之。民樂趨業。治化大行。出安岳名宦錄
七年己丑。先生三十四歲。
八年庚寅。先生三十五歲。
春。自安岳秩滿還朝。
七月。拜奉直大夫禮賓寺少尹。
九年辛卯。先生三十六歲。
008_460c春。子悌明生。官至佐郞
十年壬辰。先生三十七歲。
七月。除奉直大夫全羅道都觀察黜陟使經歷所經歷。不赴。
八月。拜內資寺少尹。直寶文閣。加奉正大夫。
十二月。遷典祀寺副令。直集賢殿。陞世子右文學。
按筆苑雜記。先生燕居常著烏紗帽。去軟角。焚香靜坐。終日吟哦。爲詩奇古。筆法遒勁。時在春坊。作詩寫之。河浩亭崙嘆曰。河文學作而河文008_460d學寫之。亦一人間寶玩也。自是一世搢紳求詩文者。皆欲先生作而書之。
十一年癸巳。先生三十八歲。
四月。除典祀寺令。直集賢。殿陞世子左文學。
五月。子友明生。官至同知中樞。號蓮塘。配享新川書院。
十二年甲午。先生三十九歲。
正月。移典祀寺少尹。
三月。移敬承府少尹。兼世子左文學。
九月。拜司憲府掌令。直集賢殿。
十三年乙未。先生四十歲。
008_461a二月。陞中訓大夫。除中和郡事兼平安道左翼兵馬團練副使。不赴。
三月。直寶文閣。
十四年丙申。先生四十一歲。
六月。加中直大夫。拜司憲府執義。
先生在臺。獨持風裁。言事稱旨。上心嘉之。
十五年丁酉。先生四十二歲。
四月。擢拜通政大夫承政院同副代言,經筵參贊官,寶文閣直提學,知製敎,春秋館編修官兼判軍器監事,知工曹事。
008_461b先生與諸代言入謝。上執先生手曰。卿知所以在此乎。先生對以未知。上曰。曩卿在臺獨奏。克揚憲職。予於此時。已知卿矣。先生拜謝而退。
六月。陞拜右副代言。兼如故 兼判軍資監事。知戶曹事。
九月。除左副代言,集賢殿直提學。經筵製敎,春秋幷仍。 兼判司宰監事知刑曹事
十二月。除右代言。兼如故 兼判軍資監事。知戶曹事。
008_461c十六年戊戌。先生四十三歲。
七月。除左代言。兼如故 兼判司僕寺事。知兵曹事。
八月。參侍宴。陞知申事兼尙瑞尹,修文殿直提學,春秋館修撰官,判典祀寺事。知吏曹內侍茶房事。
世宗實錄曰。戊戌八月十日。上卽位。詣上王殿獻壽。孝寧大君補,領敦寧柳廷顯,領議政韓尙敬,右議政李原及宗親駙馬,六代言侍宴聯句。聯句見本集 ◑時國家多事。策應不一。而先生周旋其間。小心謹愼。兩宮際遇交隆。賞賜稠008_461d疊。
扈從廣津。
國朝寶鑑曰。恭靖大王避暑在廣津。上王與上幸東郊臺山。邀恭靖王置酒極歡。抵暮而罷。上王乘白馬而還。中途下馬。召知申事河演。謂曰。予素愛此馬馴良。今遺主上。又顧謂演曰。吾父子之事。歷代所無。
十七年 世宗大王元年 己亥。先生四十四歲。
入侍經筵。進講大學衍義。
先生以扶正道興斯文爲已任。而職在論思。尤008_462a惓惓於勉聖學。是歲世宗新卽位。首開經筵。虛心問道。筵臣皆極一時之選。先生時以參贊官。與同僚論奏明剴。剖柝精詳。逐日賜對。竟晷而罷。◑國朝寶鑑曰。元年。始開經筵。領經筵事朴訔,李原,知經筵事柳觀,下季良,同知經筵事李乙剛,參贊官河演,金益精,李隨,尹淮,侍講官鄭招,柳穎,侍讀官成槪,檢討官金赭,副檢討官權蹈等進講大學衍義。上好學不倦。日御經筵。未嘗暫廢。
二月。陞嘉善大夫。拜江原道都觀察黜陟使。兼兵008_462b馬節制使,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公事。
原州卽王考苦軒公遺愛之地。先生一意爲治。克追家聲。
十月。入爲右軍都摠府同知摠制,寶文閣提學。
十八年庚子。先生四十五歲。
正月。拜禮曹參判兼寶文閣提學。以進紙箚。兼請免金銀事奉使如京。
陛辭之日。先生請曰。朝廷若問代以何物。對之如何。上王曰。國家選擇而使卿。在卿專對如008_462c何耳。
三月還。仍拜禮曹參判。兼如故
時巨濟人民避倭流寓於居昌加祚縣。上王及上特命還徙於水內本土。仍命先生主掌施行。◑按癸酉先生寄李中樞詩序。有曰。己亥春。吾以禮曹參判。主掌施行云。而今考政案。先生於己亥春。初陞嘉善。未及拜禮參。行狀亦曰。庚子正月。拜禮參。當更攷。◑又按東國歷代編年。是歲始設集賢殿云。而先生於太宗丙戌。已有集賢之直。且太宗戊戌。始開經筵008_462d云。而先生於丁酉。已帶經筵之職。編年與政案相左。並當更攷。
十九年辛丑。先生四十六歲。
十月。拜全羅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勸農管學事,提調刑獄公事。
二十年壬寅。先生四十七歲。
春。作高山三奇亭記。
是歲春。先生巡到高山縣。縣東數里許。有一小岡。景致殊絶。水石及老松尤奇勝。先生登臨娛玩之餘。斫木白而書之曰三奇。及還。縣監崔得008_463a構亭其上。請先生記之。其略曰。見水之淸。則吾心本然之明德益明。見石之巖巖。則確然不拔之志益堅。見松之晚翠。則貞固之節益高。此岡三物。足以爲操心養性之機云。
巡到長興。作長寧城記。
城卽府城。以其合遂寧縣。故取長興遂寧二字而名之。
九月。到南原府遊山洞。有詩刻石。詩見本集
後乙丑。監司韓磌憫其字刓。命工改刻。因記事曰。山洞在南原中防縣。河監司適宿縣舍。夢有008_463b老翁來告曰。吾有五孫爲君饋被捕。願勿殺。仍以詩贈之。覺而問之。果有五生鯉。卽令放之。仍遊淵上。忽雲氣晦暝。有黃龍初出左曲。次出右曲。終出首如馬頭。白髥黑角。熟視良久。欣然而逝。傳說洋洋。而不及詩中。先生德量。益可想云。○按芝峯類說。記此事言監司河某。而不言名。乃曰監司見龍怖死。蓋傳聞之誤。
十二月。以兵曹參判召還。
士民攀轅願留。至以土石遮道成阜。
二十一年癸卯。先生四十八歲。
008_463c三月。拜司憲府大司憲。上疏斥佛。
先生旣長憲府。以激濁揚淸。斥邪扶正爲已任。凡士大夫貪淫無行者。彈擊不少饒。朝著爲之肅然。時承高麗末弊。崇奉浮屠。至有試選爵秩奉養土田之規。先生慨然上疏。極言其廣立佛宇施土田納臧獲之非。仍請於京師只留二寺。諸道各止二三。永罷試選之法。勿下僧職之批。疏上。上下其議。大臣亦以爲宜。卽命並曹溪,華嚴七宗爲禪,敎兩宗。京外只留三十六寺。量給土田。餘悉罷之。○姜晉山希孟所撰先008_463d生行狀曰。時世宗銳意於治。諸大臣若贊上行之。盡如公言。則豈非吾道之幸。
撰柳忠景公墓誌。
柳公名亮。卽先生女壻。京生父。
二十二年甲辰。先生四十九歲。
四月。拜刑曹參判。
十二月。拜中軍都摠制。同日又拜慶尙道都觀察黜陟使兼兵馬都節制使。
南忠簡智所撰先生神道碑曰。世宗勵精治道。尤致詳于庶獄庶愼。凡廷僚之可大用者。旣008_464a簡在心。必試之方岳。嶺。新羅舊疆。地踔遠。號難治。歲乙巳。命大司憲河公。旣之任。政明修擧。治成績煕云去。○按政案。先生之拜嶺伯。在甲辰十二月四日。而碑云乙巳。似以翌年莅任爲言。
仁宗昭皇帝洪煕元年乙巳。先生五十歲。
春。之任嶺營。以擇遣參佐。狀請于朝。
時先生二親。年皆望入。而先生建節本道。季弟溥又以高陽縣監。受暇同來。人皆榮之。○朝廷擇遣南智爲都事。○南公所撰碑曰。公旣之任。008_464b有決輒當。一日。閱久牒。得細大疑滯凡一笥。以狀請于朝。擇庶僚之有材幹可參決決疑。公所恢恢爾。特謙邦不自專。恐一事或致誤曠分憂也。余不佞承乏佐幕。幕禮畢。可辨者專。可質者覆。公亦不異焉。遂猥推詡器局。賜交忘年。雖公之誤知余。而余之得幸於嶺大矣。
閏七月。序本道營主題名記。序見本集
八月。巡到禮安。作秋興亭記。
亭在縣之客館東。郡守朴潔所建。先生名以秋興。仍記其事。
008_464c到咸安。登淸範樓。
樓卽郡守禹承範所建。禹公請名於先生。命以淸範。○按洪汝方記曰。樓用郡守之名。欲其人之不忘也。加之以淸。慕其人之德也。
到宜寧縣有記。
按輿地勝覽。有蒼江大野高岡茂林之語。
登密陽嶺南樓有詩。詩見本集
登巨濟撫夷樓有詩。
先是巨濟人民之還徙也。先生以禮參主掌施行。及爲監司。親承上旨。凡本縣軍民事之未008_464d遑者。率以便宜措置。勞來撫摩。於是。縣境大蘇。
到晉州。與南都事智共登矗石樓。
樓在州之南江上。○按名臣錄。先生與南公行到晉州。嘆山川雲物之勝。南改容曰。山川雖勝。品官甚惡。先生大笑。人服其雅量。
奉敎編慶尙道地理誌。
時上敎春秋館。令各道方伯收送地理誌。先生奉旨。令大丘郡事琴柔,仁同縣監金鑌掌其事。編成十部上之。於是。道人經歷南智,判官鄭介保,東都尹吳湜請別纂一部。藏之本營。先008_465a生從之。仍作序記其事。
奉敎。以四書五經大全及性理大全等書鋟板。
一部輸校書館。一部置本營。
十二月。以吏曹參判召還。
宣宗章皇帝宣德元年丙午。先生五十一歲。
正月。拜忠淸道觀察黜陟使兼兵馬節制使。辭不赴。移拜禮曹參判。
二年丁未。先生五十二歲。
八月。除仁順府尹。同日。移拜平安道都觀察黜陟使管學勸農事兼平壤府尹。
008_465b三年戊申。先生五十三歲。
春。坐事罷。謫守天安郡。
碑文曰。天安之謫。言者過言。非公過也。公自過無幾微色云。○先生再受郡寄。四秉節鉞。爲政廉平。以革弊利民爲先。所至氏恒愛之。雖去而追思不已。
四年己酉。先生五十四歲。
春。自天安召還。
碑文曰。上察公忠諒。不一年召還。在謫亦優恤。蓋異恩數云。
008_465c四月。加嘉靖大天。拜兵曹參判。
八月。拜黃海道觀察黜陟使。不赴。移拜右軍都摠府摠制。
五年庚戌。先生五十五歲。
閏十二月。加資憲大夫。拜刑曹判書。與許相公稠奉敎纂五禮儀。
採洪武舊制及東國儀禮。參酌損益。而稟旨取裁。
六年辛亥。先生五十六歲。
二月。拜藝文館大提學。
008_465d時上在位日久。明習國家事。知先生才器。每加奬拔。際遇日隆。先生文章典雅。學問精深。爲世儒宗。至是遂典文柄。
六月。丁先妣貞敬夫人憂。秋。葬貞敬夫人于楊州豐壤之八賢洞。
先夫人以至正丁亥生。是月二十七日卒。享年八十五。
七年壬子。先生五十七歲。
八年癸丑。先生五十八歲。
八月。服闋。起拜三軍都鎭撫。掌禁府。未幾又拜大008_466a司憲。
按先生憲長之拜。政案則在於八月。而行狀曰十二月。當更攷。
十二月。丁皇考木翁公憂。
木翁公自壬申以後。謝絶世事。決意嘉遯。及諸子仕宦干京。爲便養之。方奉至于京。而木翁公義不八城。僦屋於敦義門外。先生以所居鑄洞。稍間於親側。乃移居奉侍。與諸兄弟盡誠色養。別構一堂於親側。名曰具慶。兩親康彊無恙。俱踰八耋。歲時節日。奉觴稱壽。凡所以慰悅親心008_466b者。靡所不至。一時搢紳之士。無不欽嘆。至爲詠歌其事。如國老鄭郊隱以吾首爲絶句以倡。權陽村近,崔提學興孝,趙判院末生,辛參判引孫繼而和之。尹淸香淮序以記之。木翁公以至正庚寅生。是月十二日卒。享年八十四。先生連遭巨創。年方衰暮。而前後居憂。情文備至。人皆稱孝。
九年甲寅。先生五十九歲。
春。葬木翁公于先夫人墓右。仍廬墓三年。
十年乙卯。先生六十歲。008_466c英宗睿皇帝正統元年丙辰。先生六十一歲。
二月。服闋。
三月。修葺具慶堂。改扁永慕。
先生旣外除。修葺木翁公舊堂。蓋以茅茨。而處其中。改扁永慕。以寓羹墻之思。子姪請易以瓦。先生嘆曰。先人舊居。垂之後人。以昭儉德。不亦可乎。其勿改也。○木翁公嘗仕松京。修葺松軒公舊居。改扁永慕。倩畫成障。以著先世儉約之德。且戒兒孫雖當改貫。必遵舊制。先生之改扁永慕。不許易瓦。蓋有來矣。
008_466d四月。拜刑曹判書。
六月。陞拜議政府右參贊。
洪府尹汝方以詩賀之。先生次其韻。
秋。爲義禁府提調。
與趙判院末生,皇,甫判書仁,沈判書道源同爲提調。
十一月。兼修文殿提學。
先生次金學士韻。有曰。先祖飄纓處。今吾繼踵時。蓋以王考苦軒公曾爲修文提學故也。
十二月。拜禮曹判書。仍兼修文提學。
008_467a二年丁巳。先生六十二歲。
八月。拜吏曹判書。仍兼修文提學。
十月。加正憲大夫。
十二月。以吏判兼寶文閣大提學。是歲始定兩南貢稅法。
時國法尙未一定。先生與一二執政定行貢稅年分法。地分六等。年分九等。以上下其稅。而先從兩南爲始。
三年戊午。先生六十三歲。
以詩答柳府尹思訥書。兼寄殽酒。
008_467b柳公書云。去丙辰年數大匈。申子謹聞之悲嘆。蒸霜華備美酒送慰之。能無事過了。推數者又云。今戊午亦難。閤下如申公之惠則可免。先生送以酒肉。兼寄詩戲之。有豈啻好過今戊午。敢將殽酒祝高年之句。
十月。陞拜議政府左參贊。兼修文殿大提學。
時北虜連年有警。朝廷遣崔潤德,李順蒙將兵討之。而餘患未息。上留意邊事。日與三司六卿文武大臣。講畫戎務。昕夕不輟。領相黃喜,左相孟思誠,右相權軫,判中樞河敬復,吏判許008_467c稠,兵判崔士康,戶判安純,禮判申商,工判趙啓生,贊成李孟畇,成抑,參贊申槪及先生,咸吉道觀察使鄭欽之,節制使金宗瑞或登對。或箚論商確未已。
十二月。兼世子左賓客。
四年已未。先生六十四歲。
六月。以左參贊兼判吏曹事。仍兼世子左賓客。
時上欲貸死囚。先生與相臣黃喜,申槪,贊成李孟畇等論奏輕刑害及良善之弊。仍援大叔寬縱之害。子產寬猛之喩以申之。請從律文。008_467d上從之。
行四孟朔頒祿之制。
先生與諸宰執稟旨講定。
五年庚申。先生六十五歲。
五月。陞拜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仍兼修文殿大提學。判吏曹事。
時吏判崔府誤擧人注官。上御思政殿受常參。大司憲鄭甲孫啓曰。判書崔府固失銓政。河某素知事體。而有此誤擧。請鞫之。先生與崔府入侍奏曰。臣職在判選。敢曰不知。仍自引請008_468a罪。上知其無他。遂怡顏兩解之。
六年辛酉。先生六十六歲。
五月。喪長子孝明。
宣德末。勸登武擧。至是以軍資副正卒。年三十九。後贈吏曹參判。
九月。陞左贊成。兼如故 答李云義書。
兼寄以詩。有金風八月猶炎瘴。自愧疏慵職贊成之句。
七年壬戌。先生六十七歲。
三月。扈從伊川溫井之幸。聯和匪懈堂詩帖。
008_468b匪懈堂。安平大君瑢號也。大君於東書堂古帖室。得宋英宗宸翰八景詩。蹋其詩晝其圖。仍名其堂曰八景。請當世之善詩者賦以歌之。先生與集賢藝文諸學士成三問,崔恒,鄭麟趾,南秀文等十七人咸作詩親筆。聯成一帖。中朝人翁正春以八分書其首曰海宇奇觀云。
定各品行守法。
先生與諸宰稟旨所定也。◑時上益明治體。凡軍國大小事務。一委政府。至於銓選之政。專責吏部。先生入贊大政。出判曹務。淸白自勵。008_468c盡心奉公。重惜名器。裁抑僥倖。處事必計之於未爲之前。慮之於已行之後。由是事無過擧。敷奏之際。言語精當。動輒稱旨。眷注日隆。
八年癸亥。先生六十八歲。
三月。扈駕溫陽。
七月。以左贊成。兼判戶曹事。始改田品。
先生平時禮接士大夫。門無停客。及判銓曹前後五載。一切不受私謁。至被論斥。而不以爲意。性厭奔競。嘗有詩曰。廣迎秪爲明時輔。用捨何由獨見聞。至是改判戶部。◑先生判地部。與諸008_468d宰稟定田分五等歲分六等之法。
九年甲子。先生六十九歲。
三月。扈駕椒井。自椒井因事先還。賦賀醴泉詩。寄侍從諸友。詩見本集
時上以風患。又幸淸安之椒井。先生與李公塏,申公叔舟,黃公守身,李公思哲,安平大君瑢侍從。有詩聯和。
閏七月。以左贊成。兼行承政院都承旨。
按行狀所載。履歷如此。而政案則是年無都承旨批目。可疑。且政案以正統八年七月爲閏。008_469a誤。
十二月。加崇祿大夫。仍左贊成。
十年乙丑。先生七十歲。
正月。加大匡輔國崇祿大夫。陞拜議政府右議政。領集賢殿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以年滿七十賜几杖。
先生於釋褐之初。已有公輔之望。至是大拜。時上以憂勤有疾。命世子參決庶務。先生與首相黃喜,左相申槪同心協輔。上傾心委任。
十一年丙寅。先生七十一歲。
008_469b贈守陵官南智詩。
二月。昭憲王后薨。因山旣成。守陵官難其人。南公闋私喪。伏闕下自請大被時議。先生首以詩解之。一時名公繼而和之。柳參議義孫作序美之。於是時議乃息。◑南公撰先生碑曰。記昔丙寅。余守昭憲聖后陵。公辱以詩。起居同朝諸公亦和之成軸。今在篋。擬以爲傳家寶。今於誌公之文。尤有所感慨云。◑按名臣錄。鄭文成麟趾傳記昭憲山陵時事。有曰。領議政河某云云。而先生領相之拜。在於後四年庚008_469c午。則名臣錄。恐字誤。
十二年丁卯。先生七十二歲。
春。爲文科讀卷官。
取李承召等三十三人。
六月。陞左議政。兼如故
按政案。先生之陞左揆在是月。而行狀作正月。當更攷。
秋。拜殿試讀卷官。
取姜希孟等二十五人。◑姜公撰先生季子同樞公旌門記曰。丁卯秋。文孝公典貢擧。希孟釋008_469d褐爲壯元常在門下。欽仰德音。式刑動靜久矣云。
又爲重試讀卷官。
取集賢殿修撰成三問等十九人。◑慵齋䕺話曰。丁卯重試。成謹甫三問居首。金墩,李塏,申叔舟,崔恒,朴彭年,李石亨,柳誠源,李克增,李胤保,李成,鄭昌孫,金禮蒙。皆居三等云。
九月。同政府六曹大臣。會成均館明倫堂。賦詩頌御賜尊鐘。
辛判書碩祖成均館受賜尊鐘記曰。成均館。008_470a舊有靑畫鐘一事。品頗奇絶。太示命有司匣而藏之。丁卯八月。大司成鄭麟趾從容以啓。上卽賜白尊二雙白鐘畫鐘各二雙並御酒。越數日重陽。政府六曹大臣。會明倫堂課諸生。設賜器酌黃封以相慶。酒半。右議政河公某賦詩以頌。卿士繼而和之云。按行狀及政案。先生之拜左揆。已在是歲之春夏。而辛公猶云右議政。可疑。
十三年戊辰。先生七十三歲。
時國家昇平日久。先生與右相南公智同在相008_470b府。貫餙文治。世以太平良相稱。◑一日。先生顧謂南公曰。監司若非急足。幾爲都事所躡。蓋以慶尙監司時。南公爲都事。而相得甚歡故也。一時傳爲美談。
十四年己巳。先生七十四歲。
作晉州鄕校四敎堂記。
堂在州東三里。敎官姜公元亮所建。走書請記于先生。記見本集
八月。送子友明。從軍北行。
天朝時有北虜之警。上憂之。命將往備。先生008_470c自以身在相位。義同休戚。使季子應募佐幕。作詩送行。勉以奮忠輔國毋負所生。
恭宗景皇帝景泰元年庚午。先生七十五歲。
正月。送倪侍講 謙, 司馬給事 兩詔使。
時翰林侍講錢塘倪公,給事中司馬公奉詔來宣。及還。先生與河東鄭麟趾。河陽許翊,坡平尹炯,昌寧成念祖,光山李先齊,完山李思哲,晉陽鄭陟,圖山高得宗,驪江李審,韓山李季甸,李塏,東萊鄭昌孫,丹城金鉤,鷲山辛碩祖,㠉梁崔恒,咸從魚孝瞻,延山李石亨,晉山姜孟卿,丹溪008_470d河緯地,陽城李芮,李承召,魯山李永瑞,達城徐居正,西原韓繼禧,平陽朴彭年各賦詩爲贐。高靈申叔舟爲之序。昌寧成三問爲之跋。其後有人購書燕肆。得一書。名遼海編。乃倪侍講,司馬給事在本國時。與諸公酬唱之作也。流布中國。爲絶世奇觀云。
二月。論大慈庵重修之非。
先生親見麗末崇佛之弊。故常以扶正闢邪。爲挽回世道之責。每遇佛老之事。必極力觝斥。是月世宗昇遐。文宗卽位。欲重修大慈庵。先008_471a生以爲新政之初。不可崇信左道。復修已撤之屋。固爭之。上自先生爲師傅時素敬重。故遂從之。○先生於文宗之立。身居相位。輔翊新政。故有詩敍懷曰。精一心傳授受時。手扶初日出咸池。又有德乏雖嫌違物論。年高稍幸稱朝儀之句。
秋。掌試。
取權擥等三十三人。
十月。陞拜領議政府事。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以老病再上疏乞退。不許。008_471b傳犀帶於幸君碩祖。
按筆苑雜記。自國初相府有三公相傳犀帶一腰。傳必門生。爲中書故事。傳或失人。則爲世所譏。故不輕傳授。自黃翼成喜,許文敬稠相傳至先生。又傳辛文僖。其後帶不復傳。傳犀帶詩。見本集。
二年 文宗大王元年 辛未。先生七十六歲。
正月。修世譜。
先生以爲先世之積累。不可以不念。宗支之親疏。不可以不知。遂修明譜系。著爲圖籍。名之曰上集下集。以遺後來。仍作序以記之。
008_471c二月。作自警箴。
先生自少爲學。從事於敬。嘗自號敬齋。書揭朱子箴干壁。以爲常目之地。日用行事。動以古人自期。不殖產業。不畜聲色。閨門之內雍雍如也。平居鷄鳴盥櫛。正衣冠。拜家廟。身爲首相。年紀篤老。而未嘗或廢。不以事務叢萃。祁寒盛暑有變也。坐必向闕。手不釋卷。左右圖書淡如也。淸素儉約。出於天性。尤以利慾之陷人爲戒。作箴以自警。其略曰。貴則近禍。富則不仁。如何雲壑。怡養精神。一片顏巷。樂在其中。三逕陶園。皓008_471d月淸風。聖賢尙然。況乎小儒。屋八九間。可容殘軀。田數十畝足。慰飢渴。我安我分。不趨利慾。其年高位。尊而淸白。自勵不懈。於律身如此。
三月。乞暇還鄕。重修凝石影堂。祔以皇考木翁公遺像。立寶藏庫。
影堂在集賢山之凝石寺。卽先生曾王考松軒公妥眞之所也。是歲。先生弟大諫公潔遞付西樞。先生與之乞暇還鄕。重修影堂。祔以木翁公像。仍出財力。以爲香火之資。名曰寶藏庫。賦詩揭壁。大諫公和之。玩易齋姜碩德,承旨姜孟卿,008_472a敦寧府事李明晨,左議政皇甫仁,贊成金宗瑞,參贊安崇善,吏曹判書鄭麟趾,都承旨李季甸,右贊成鄭苯。皆次其韻。
夏。拜文科讀卷官。
取洪應等四十人。
冬。以老疾乞解機務。不許。辭愈力。乃令致仕。
先生歷事五朝。感激恩遇。益勵淸謹。五載掌銓。七年爲相。憂國如家。終始不懈。故雖當休致之年。屢上乞退之章。而上眷彌隆。不卽賜允。至是始許。
008_472b三年壬申。先生七十七歲。
二月。作承恩亭記。
錦城大君瑜。卽世宗大王第六子也。作亭於恩賜瑞雲坊華山下。扁以承恩。請先生記之。◑先生釋負居家。年高病深。而猶日焚香靜坐。不廢吟哦。人有求詩。援筆立就。而詞致筆畫。兩臻其妙。人皆寶重。
四年 端宗大王元年 癸酉。先生七十八歲。
七月。有疾。上臨視。咨以國事。又問家中有何所恨。先生對曰。國家昇平。朝野無事。而猥蒙聖008_472c恩。榮寵已極。有何所恨。但殿下沖年嗣服。基業艱大。臣雖死不能忘耳。八月十五日辛亥。考終于城西之正寢。遺命不作佛事。訃聞。上震悼。輟朝三日。致賻賜祭。十月。葬于仁川蘇萊山負坎之原。上命官庀葬事。神道碑文成。左議政南智撰
時長子孝明已卒。仲子悌明。季子友明。與承祀孫福山奉葬如禮。友明仍廬墓三年。
五年甲戌。
贈諡文孝公。太常獻議。勤學好問曰文。慈惠愛親曰孝。配享文宗廟庭。論師傅舊恩也。
008_472d英宗睿皇帝天順七年 世祖大王八年 癸未
九月。行狀成。晉山君姜希孟撰
命錄淸白吏。旌忠孝門。
光廟卽阼乙初。重先生名德。特陞季子友明僉樞。召以都鎭撫。至是命錄先生於淸白吏。又命旌閭。
憲宗純皇帝成化三年丁亥
二月。建影堂。
季子友明性至孝。且善繪事。嘗手摹先生及貞敬夫人像。及大人卒。友明奉葬于先生墓左。仍008_473a廬墓。是歲喪畢。建先生影堂于墓傍。祔以夫人像。置位田以爲春秋香火之資。事載三網行實。弘治乙卯。追祔友明像。
神宗顯皇帝萬曆三十六年 宣祖大王四十一年 戊申
秋。移建影堂于陜川之冶罏縣。
先是。季子友明仍家仁川。奉守影堂。至是。其宗孫早歿無嗣。後孫洗馬渾,主簿應寶移奉眞像于所居鄕。陝川也。○曾在壬辰。仁川影堂遇兵燹。失先生影幀。亂平。渾與從姪應寶,景緯等往省舊堂。夢。先生來語曰。吾久困於蘇萊北巖石008_473b間。翌朝往驗。果得影幀。蓋賊齎去。漸覺背重不能踰嶺。大懼。還置于此。仍題其巖曰此天下名宰相像云。
四十三年 光海君七年 乙卯。
移建忠孝門于陜川冶罏影堂前。十月。賜額影堂曰妥眞。
時蘇萊旌門。歲久頹廢。一時卿士之論。皆以爲不可不重建。而宜于影堂所在處。是月十四日。全城君李準,知事李時彥,凝川君朴震元,驪城君李志完,同中樞宋英耇,前佐郞河應觀,前察008_473c訪河渾,社稷令朴綵,奉事河濂,前判官河彥楨,前主簿河應寶,前主簿河宗海,司果河震,僉知鄭震哲,前縣監柳世溫,將仕郞河應濩,前懸令李敏善,生員申命休,前參議李尙吉,前獻納曺挺立,幼學河景新,從仕郞河景咸,河岦等以移建旌門之意呈禮部,入啓允下。李準等仍以影堂宣額之意。申請于禮部。入啓蒙允。賜額曰妥眞。
熹宗哲皇帝天啓四年 仁祖大王二年 甲子
三月。陝川,新川書院成。
008_473d是歲。陜之多士齊議建祠。而以先生季子蓮塘公友明配享。○後正廟丙午。復以五世孫暮軒河渾,璞齋金紐,恥軒柳世勛配享。
毅宗皇帝崇禎十三年庚寅。
上遣官賜祭。
因相臣金瑬所啓。○是歲。嶺南觀察使具鳳瑞以先生外裔。巡到陜川。奉審妥眞堂遺像。憫其綃本剝落。捐俸改模。仍贊曰三韓眞氣。一代宗臣。經綸當日。功德在人。
肅宗大王三十四年戊子
008_474a春。文義友鹿書院成。
先是。先生嗣孫贈承旨鮐壽自京徙居文義。後孫必淸模奉眞像于鮐壽所居。士林齊議。仍作俎豆之所。
是歲。上遣官賜祭于墓所。
四十四年戊戌
二月。躋享于晉州宗川書院。
院卽先生弟大諫公潔,後孫謙齋弘度,台溪溍並享之所。至是士林以爲先生本鄕。合有崇奉之禮。遂躋享焉。
008_474b英宗大王二年丙午
春。安岳肅淸堂成。
安岳卽先生遺愛之鄕。故士民立祠。奉安遺像。
正宗大王十年丙午
冬。長淵盤谷書院成。
移建肅淸堂爲書院。
二十一年丁巳
八月。上親製祭文。遣承旨宋銓賜祭于墓所。
純祖大王十九年己卯
008_474c春。移建妥眞堂。
堂舊在書院西。址礎傾陊。士林合議。移建于院東。郡守徐鳳輔相其役。◑妥眞堂祭品。自萬曆乙卯。已有官供定式。而歲久漸減。是歲秋。禮判金魯敬移關本道。推復如古。後四年癸未。郡宰李魯俊備儀復初。
二十一年辛巳
春。茂朱柏山書院成。
湖南卽先生觀風遺愛之地。故士林建院崇奉。
二十六年丙戌
008_474d夏。文集成。
先生詩文。多失於兵燹。五世孫渾收拾。編入於晉陽聯稿刊行。渾所撰聯稿跋。略曰。晉山姜通亭淮伯得松軒,苦軒五六絶句。誦而傳之。我敬齋聞而錄之。我先君又得木翁敬齋詩若干篇。並蓮塘遺錄精寫一通。猶恨所得不敷。往在戊子。再從弟淏遊兩湖。得敬齋詩百有餘首。封寄請入梓。余受而藏之。歲丙午。蒐輯爲一卷。名日晉陽聯稿。 至是。後孫達海,達明等復搜輯而重刊焉。
憲宗大王八年壬寅
夏四月。陞友鹿影堂爲書院。
本道觀察使姜時永因文義,淸州,公州,燕岐,懷008_475a德五邑多士及後孫寅煥,箕泓,漢基之議。陞享爲院。甘結本縣。奉進享羞。且遵忠勳府成均館完議。畫定院生十七名保奴二十名。
哲宗大王八年丙辰
秋。改刊文集于友鹿書院。
後孫寅煥,在九,箕泓,在準,龜泓,萬基幹其事。○先生有箕城三十一詠。至是始搜而並刻之。前是。南判書秉喆撰安岳丘臺碑。金判書洙根,李判書明迪撰南原山洞碑。閣序亦附之。
隆煕紀元後十三年己未
008_475b冬。重刊文集于密陽之秣方山房。
後孫大永,鍵,致祚,弘基,基鎬,尙洛,錠,冀祚,箕範,潤孝,大斗,在圖,鎭贊,璣秉,鎭東,傍裔泰奭幹其事。

白湖先生文集卷之二十二
 
書家孟所藏鄭古玉畫牛簇後 a_123_394a


123_394b我穆陵辛卯歲。朝廷旣罪治獄大臣。收用播棄。時鄭古玉碏。有友生崔姓者處於南海之濱。有命畀以一官。鄭公手寫此圖寄與。崔得之遂不起云。今觀此圖。牛在郊原有草有樹。處樹之陰。眼有睡思而頭無羈絆。蓋非宗廟之犧。亦無耒耟負曳之役者。鄭公。韻士也。其爲此也。寓意固深。崔君能識此意爲去就。其志亦遠矣。惜其名之不傳也。然崔君能自疏於榮利。亦殆非蘄身後名者矣。家孟得此於海濱之人。海濱之人。猶能言其事如此。此又與陶弘景畫二牛有相似者。古今人趣味。亦同有相契者矣。田居無事。掛123_394c 是圖於壁。感昔人之志。於是乎識。牧牛子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