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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도봉서원을 짓는데 일조를 하신 유희경 선생관련자료

아베베1 2012. 9. 19. 09:49


 최근 도봉산 입구 예전 수영장 자리에 촌은 유희경선생의 시비가 건립되었다

 도봉산은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유의경선생의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고자 하여 이자료들을 수집하여 보았다 

 유희경선생은 도봉산아래 거주를 하시면서 당시 양주목사 남언경이 불암산 선산으로 오가는 길에  눈에 띠어서 

 추천되어 문인으로서 학문을 배우는등 당시에 능한 학자이기도 하시다 . 

 박순,  남언경의 문인이었다 

 

유희경(劉希慶)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시인. 본관은 강화(江華). 천인 신분이지만 남언경(南彦經)에게 《가례(家禮)》를 배우고 특히 상례(喪禮)에 통달하였으며,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함.

시대: 조선후기 연도: 1545-1636




작자의 나이 57세 때인 1707년(숙종33)의 작품이다. 《촌은집》의 저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본관은 강화(江華)로,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박순(朴淳)에게 당시(唐詩)를 배우고 남언경(南彦經)에게 《가례(家禮)》를 배워 학문의 경지가 높았으므로, 당대 명사들의 인정을 받아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30년 동안 병석에 누운 어머니 배씨(裵氏)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 내었고, 그 기저귀를 빨아 바위에 펼쳐 놓고 말리며 그 곁에서 종일토록 글을 읽은 것으로 유명하다. 《村隱集 卷2 附錄 墓表》

  

촌은집(村隱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村隱集
판심제 村隱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707年刊
권책 3권 2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1×14.9(㎝)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726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55
 저자
성명 유희경(劉希慶)
생년 1545년(인종 1)
몰년 1636년(인조 14)
 應吉
 村隱
본관 江華
특기사항 朴淳, 南彥經의 문인. 白大鵬과 함께 風月香徒로 불림
 가계도
 劉道致
 
 劉業仝
 
 裵氏
 
 劉希慶
 
 許氏
 
 劉舜民
 譯官
 劉禹民
 
 劉聖民
 
 劉士民
 
 劉逸民
 寧國原從勳
 劉希雲
 

기사전거 : 墓表(金昌翕 撰), 行錄(南鶴鳴 撰)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인종11545을사嘉靖2412월 27일, 서울 大廟洞에서 태어나다.
명종121557정사嘉靖3613부친상을 당하다. ○ 여묘살이 중 水落山 선영을 오가던 南彥經의 눈에 띄어 후의를 입다.
명종141559기미嘉靖3815삼년상을 마치고 남언경에게 「文公家禮」를 배우다. ○ 모친이 이후 30여 년을 병석에 누웠는데 지성으로 봉양하다.
~~~~~~~思菴 朴淳에게 唐詩를 배우다.
선조61573계유萬曆129楊州 牧使로 부임한 남언경을 도와 趙光祖를 위한 道峯書院을 건립하다.
~~~~~~~扶安邑을 놀러갔다가 名妓 癸生(본명은 香今, 호는 梅窓, 1573~1610)을 만나 풍류로 더불다.
선조251592임진萬曆2048왜란이 일어나 宣祖가 西幸하자 義兵을 모집, 賊勢를 정탐하다. ○ 친구인 書吏 白大鵬이 戰死하다.
선조271594갑오萬曆2250宣祖가 공로를 듣고 하교하여 포상하다.
선조341601신축萬曆2957淨業院 하류에 ‘枕流臺’를 짓고 시를 읊으며 자적하고, 호를 ‘村隱’이라 하다.
광해군11609기유萬曆3765詔使가 잇따라 나와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五部 부녀자의 반지를 거둬 충당케 하다. 이 공로로 通政大夫에 오르다.
광해군71615을묘萬曆4371柳夢寅이 〈劉希慶傳〉을 지어 칭송하다.
광해군101618무오萬曆4674李爾瞻이 廢母論을 일으켜 五部의 父老들에게 상소하라고 위협하였으나 따르지 않다. 이 일로 평소 친숙하였던 그와 절교하다.
인조11623계해天啓379完平府院君 李元翼이 공의 절개를 아뢰자 인조가 가상히 여겨 嘉善階로 올려주다. ○ 6월, 畫工 李澄에게 부탁하여 〈林莊圖〉를 그리고 李好閔, 柳根 등에게 詩와 序를 청탁, 詩軸을 만들다. ○ 疎菴 任叔英의 喪에 옷을 벗어 염습해 주다.
인조21624갑자天啓480사대부의 요청으로 함께 金剛山을 유람하다.
~~~~~~~永安尉 洪柱元의 잦은 방문을 받다. 그때마다 仁穆大妃가 酒饌을 내리다.
인조91631신미崇禎487老人階로 嘉義大夫가 되다.
인조141636병자崇禎9922월 6일, 졸하다. ○ 도봉서원 동쪽 楊州 莊義洞에 장사 지내다.
인조241646병술順治3-아들 劉逸民이 沈器遠 역모사건을 처리한 공으로 寧國原從功臣에 봉해지고, 저자에게 資憲大夫 漢城府判尹이 증직되다.
~~~~~~-아들들이 芸閣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다. (竹西病夫의 跋)
숙종241698무인康熙37-金昌翕이 묘표를 짓다.
숙종311705을유康熙44-洪世泰가 묘지명을 짓다.
숙종331707정해康熙46-증손 劉泰雄이 목판으로 문집을 중간하다. (金昌協의 序)

기사전거 : 墓表(金昌翕 撰), 墓誌銘(洪世泰 撰), 行錄(南鶴鳴 撰)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생전에 자신이 지은 詩 수백 수를 韓平公 李慶全에게 보여 주면서 刪定을 부탁하고 序(引)를 받아 1628년 1권의 시집으로 정리해 두었다. 이것을 저자의 사후에 여러 아들이 芸閣 活字를 써서 인출하였다. 《초간본》
그 뒤 저자의 손자 劉自勗이 저자와 여러 문인의 唱和詩를 모은 枕流臺錄과 林莊圖題詠을 합하여 다시 1권의 詩稿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과 초간본 1권의 시집을 합하여 金昌協에게 산정과 편차를 부탁하였다. 여기에 다시 저자 생전에 柳夢寅이 지은 〈劉希慶傳〉, 劉自勗의 부탁으로 金昌翕이 지은 묘표와 南鶴鳴이 지은 행록, 劉自勗의 아들 劉泰雄의 부탁으로 洪世泰가 지은 묘지명, 李敏求의 「東州集」에 실린 기사를 전재한 遺事를 합하여 부록 1권으로 묶어 1705년경 3권의 繕寫本으로 만들었다. 그 뒤 劉泰雄이 湖南의 萬戶로 나가게 되자 간행을 도모하여 1707년에 3권 2책의 木板本으로 간행하였다. 《중간본》
현재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중간본이 규장각(奎7263)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707년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金昌協 撰), 引(李慶全 撰), 跋(李植, 竹西病夫 撰)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3권 2책으로 되어 있는 詩集이다.
권수에는 1707년에 쓴 金昌協의 序와 1628년에 쓴 李慶全의 引이 실려 있고, 목록은 없다.
권1에 실린 詩는 오언절구 13題, 육언절구 2題, 칠언절구 96題, 오언율시 49題, 오언배율 5題, 칠언율시 37題, 오언고시 3題로, 詩體別 분류에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저자의 시를 편차한 바 있는 李慶全은 ‘淸高疎暢하여 옛 唐人의 調格을 잃지 않았다.’고 하였다. 律詩에 특히 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내용에는 〈懷癸娘〉, 〈贈癸娘〉 등 소싯적에 풍류를 함께 하였던 梅窓 癸生과 나눈 시가 여러 수이고, 각지의 산수를 유람한 편력으로 〈叢石亭〉, 〈登正陽寺天逸臺〉 등 金剛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시, 淸平寺, 龍門寺, 中興寺 등의 사찰과 息影亭, 練光亭, 淸溪書齋, 金陵菊村 등을 읊은 시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道峯書院과 그 근처의 寧國洞, 牛耳洞, 枕流臺 등을 노래한 것도 많다. 권말에 李植이 1628년에 쓴 跋이 있는데, 저자가 생전에 자신의 詩集을 보여 주고받은 글로서 「澤堂集」에는 〈村隱詩集小引〉으로 실려 있다.
권2는 附錄으로, 柳夢寅이 지은 傳, 金昌翕이 지은 墓表, 洪世泰가 지은 墓誌銘, 南鶴鳴이 지은 行錄이 있고, 李敏求의 「東州集」 斲輪錄에 실린 시가 遺事로 수록되어 있다.
권3은 枕流臺錄이다. 枕流臺는 淨業院 하류에 지은 臺로서, 저자와 여러 문인이 수창한 詩와 記, 序들을 편차해 놓은 기록이다. 記序에는 任叔英, 李睟光, 曺友仁, 成汝學이 지은 〈枕流臺記〉 4편을 비롯하여 金玄成의 〈贈枕流主人序〉, 曺友仁의 〈遊枕流臺序〉, 지은이 未詳의 〈題枕流臺記後〉가 실려 있다. 酬唱詩에는 疎菴 任叔英의 序가 실려 있고, 任叔英, 車天輅, 李睟光, 申欽, 李達, 洪慶臣, 柳永吉, 李安訥 등과 차운한 시가 있다. 이어 1617년에 쓴 栗園과 李植의 後序, 1625년에 쓴 李埈의 후서가 실려 있다. 酬唱詩續錄에는 李植이 쓴 〈枕流臺賦詩圖序〉를 비롯하여, 李植, 嚴惺, 李昭漢, 韓興一, 呂爾徵, 李景稷, 洪瑞鳳, 崔鳴吉 등과 차운한 시가 있다. 이어 〈寧國洞林莊圖題詠〉이 附記되어 있는데, 1623년에 畫工 李澄에게 부탁하여 林莊圖를 그리고 李好閔, 柳根 등에게 詩와 序를 청탁, 詩軸으로 만든 것이다.
권미에는 1705년에 쓴 竹西病夫의 跋이 실려 있는데, 重刊 때 쓴 것이다.

필자 : 金圻彬

농암집 제22권
 서(序)
《촌은집(村隱集)》 서

촌은(村隱) 유군 희경(劉君希慶)은 천민 출신이지만 시를 배우고 예를 익혀 성대하게 사군자의 기풍이 있었고, 거처하는 침류대(枕流臺)는 궁성과의 거리가 지척에 불과했지만 산림 속의 사람처럼 초탈하여 고요하게 지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선배들의 문집에서 종종 침류대시(枕流臺詩)를 보고는, 그 사람됨이 그러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나중에 유군의 시고(詩稿)를 그의 손자 자욱(自勗)에게서 얻어 읽어 보니, 여러 명사들의 서(序), 인(引), 제영(題詠)이 모두 들어 있고 행적도 자세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유군은 실로 위대한 점이 있었던 것이지, 앞서 말한 성대한 기풍과 초탈한 자세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사람의 도리는 오륜(五倫), 명분(名分), 의리(義理)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이것이 확립된 뒤에 하나의 재능과 작은 선행도 붙어 있을 곳이 있어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행실과 고상하고 오묘한 문장을 지녔다 하더라도 큰 절조가 잘못된 이상 더는 볼 것이 없다. 이것이 주 부자(朱夫子)가 기(紀), 당(唐), 왕(王), 저(儲)를 비판한 까닭이다.
유군이 광해군(光海君) 때에 행한 일은 당대의 어진 사대부들도 혹 어렵게 여겼으니, 유군은 오륜이며 명분과 의리 등 사람으로서의 큰 도리에 유감이 없는 것이다. 그가 이이첨(李爾瞻)에게 대답한 한마디 말은 더더욱 뜻이 완곡하고 간절하여, 봉인(封人)의 고깃국을 먹지 않은 데 대한 대답과 비슷하다.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튀어나온 말인데도 사납지 않은 엄숙함이 있었으니,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어질지 않고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세상에 구양씨(歐陽氏 송나라 구양수(歐陽脩))처럼 훌륭한 사관(史官)이 있다면 유군에 관한 한 줄의 전(傳)을 지어 영고숙(潁考叔)을 논한 그 속에 넣는다 해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유군은 담박하고 고아하며 맑고 소탈한 성품으로, 시를 짓는 것도 더욱 산뜻하여 좋았다. 그러나 큰 절조가 이와 같지 않았다면 어찌 세상에서 귀하게 여겨져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기억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시고(詩稿) 두 권 중에 한 권은 유군 자신이 지은 것이고, 한 권은 제현(諸賢)이 유군을 위해 지어 준 것이다.
자욱이 나에게 산정(刪定)하고 편집하여 한 질로 합쳐 달라고 청하여 내가 겨우 정서(正書)를 마쳤을 때에, 그의 아들 태웅(泰雄)이 호남의 만호(萬戶)가 되어 급히 판각(板刻)에 들어갔다. 그러고는 나에게 서문을 요청하기에 나는 유군의 큰 절조를 특별히 드러내어 후인들에게 분명히 고하는 바이다. 이 글을 읽고도 옷깃을 여미며 공경심이 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증민(烝民)〉 첫 장(章)의 뜻이 사라질 것이다.

[주C-001]촌은집(村隱集) 서 : 작자의 나이 57세 때인 1707년(숙종33)의 작품이다. 《촌은집》의 저자인 유희경(劉希慶)의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본관은 강화(江華)로,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박순(朴淳)에게 당시(唐詩)를 배우고 남언경(南彦經)에게 《가례(家禮)》를 배워 학문의 경지가 높았으므로, 당대 명사들의 인정을 받아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30년 동안 병석에 누운 어머니 배씨(裵氏)의 대소변을 손수 받아 내었고, 그 기저귀를 빨아 바위에 펼쳐 놓고 말리며 그 곁에서 종일토록 글을 읽은 것으로 유명하다. 《村隱集 卷2 附錄 墓表》
[주D-001]주 부자(朱夫子)가 …… 비판한 : 기(紀), 당(唐)은 한(漢)나라 기준(紀逡)과 당임(唐林)이고, 왕(王), 저(儲)는 당(唐)나라 왕유(王維)와 저광희(儲光羲)를 가리킨다. 주희(朱熹)가, “기준과 당임의 절개가 비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신망(新莽)의 조정에 벼슬하였고, 왕유와 저광희의 시 작품이 청아하고 심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안녹산(安祿山)의 조정에 빌붙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가까스로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이 그저 뒷사람의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곧, 사람으로서의 기본 윤리인 오륜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이룬 성과는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晦庵集 卷76 向薌林文集後序》
[주D-002]그가 …… 비슷하다 : 1617년(광해군9)에 조정에서 이이첨의 주도하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서궁(西宮)에 유폐하자는 이른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유희경이 평소에 사이좋게 지내던 이이첨과 절교하고 만나지 않았는데,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이첨으로부터 힐책을 받자, 대답하기를, “소인은 어미가 있어 봉양에 전념하느라 공을 찾아갈 겨를이 없습니다.” 하였다. 이는 자신의 입장을 가탁하여 자식이 어미를 폐하는 패륜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뜻을 담고 있다. 《村隱集 卷2 附錄 墓表》 봉인(封人)은 영곡 봉인(潁谷封人)의 약칭으로,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영고숙(潁考叔)을 말한다. 정 장공(鄭莊公)이 어머니 강씨(姜氏)를 증오하여 성영(城潁)에 안치하고 “황천에 가기 전에는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는데, 영고숙이 장공이 하사한 음식을 먹으면서 고깃국은 밀쳐 두고 먹지 않았다. 장공이 그 까닭을 묻자, “소인에게 어미가 있는데 소인의 음식은 맛보았지만 임금님의 음식은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을 소인의 어미에게 주어도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이 말은 들은 장공은 잘못을 뉘우치고 어머니와 화해하였다 한다. 곧 완곡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유희경의 말이 옛날 영고숙의 말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春秋左傳 卷1 隱公元年》
[주D-003]증민(烝民) 첫 장(章)의 뜻 : 증민은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이다. 그 첫 장의 내용은 “하늘이 뭇 백성을 내었으니 사물이 있는 곳에 법이 있다네. 백성이 지닌 본성은 이 거룩한 덕을 좋아한다네.[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彝 好是懿德]”라는 것인데, 그 뜻은 ‘하늘이 만든 인간 사회는 어떤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관한 올바른 법이 있다. 이를테면, 귀와 눈이 있는 곳에는 소리를 들어 느끼고 형체를 보아 아는 기능이 있기 마련이고, 아비와 자식이 있는 곳에는 아비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아비를 효성으로 받드는 마음이 있기 마련이다.’는 것이다.



상촌선생집 제17권
 시(詩)○오언절구(五言絶句)
유희경 시축에 대하여 읊다[題劉希慶軸]



한평생을 한 골짝에서 사노라니 / 生涯一壑在
오두막을 흰구름이 감싸고 있다네 / 小屋白雲封
팔십 나이에도 얼굴은 비단결 같아 / 八十顔如練
몸을 날려 바위 봉우리를 오른다네 / 飛身上石峯

기이(其二)

사람은 진류처럼 숨어 살고 / 人似陳留隱
시는 정시 소리를 바짝 뒤따르고 / 詩追正始聲
그대 그림 속 집을 보노라면 / 看君畵裡屋
내 마음이 바다 산을 찾아간다네 / 起我海山情

[주D-001]사람은 …… 숨어 살고 : 숨을테면 꼭꼭 숨어야 한다는 뜻. 진류(陳留)는 어느 지명(地名)인데 진류 사람 장승(張升)이 후한(後漢)환제(桓帝) 때 붕당 싸움을 피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진류로 돌아오다가 길에서 친구를 만나 풀을 깔고 앉아서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그 곳을 지나다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용이 비늘을 감추지 못하고 봉황이 날개를 감추지 못했으니 이 높이 쳐진 그물 속에서 가면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비록 울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하였다고 함. 진류노부(陳留老父). 《後漢書 陳留老父傳》

상촌선생집 제20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66수
유희경 시축에 제하다[題劉希慶軸] 2수

유생(劉生)은 시장에 사는 사람이지만 십분에 일의 이윤을 추구하는 장사치를 하지 않고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따라 놀기를 좋아했으며 시례(詩禮)로 몸단속을 하였다. 도봉산(道峯山) 아래다 집을 짓고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있는데, 지금 나이 칠십 구세지만 몸놀림이 가볍고 건강하며 얼굴도 동안(童顔)이어서 내 그의 사람됨을 좋아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시를 써달라기에 이렇게 읊어 그에게 주었다.

수레 앞에 여덟 추졸 그도 나는 소용없고 / 車前八騶吾不管
재상이고 삼공이고 그도 모두 부질없어 / 兩府三事都悠悠
흰구름이 항상 있고 흐르는 물 옥과 같은 / 白雲長在水如玉
시내 머리에 집을 지은 그대가 제일 부럽네 / 羨爾結廬溪上頭

기이(其二)

십년 동안 쫓겨났다 이제야 돌아오니 / 十年放逐今始還
이도 머리도 다 빠지고 허리 다리 뻣뻣하다네 / 齒髮已空腰脚頑
뺨 고이면 아침에 시원한 기운 있으리니 / 柱笏朝來有爽氣
시가 되거든 그대의 그림 속 산에다 쓰려네 / 詩成題爾畵中山
성소부부고 제25권
 설부(說部) 4
성수시화(惺叟詩話)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호) 최 학사(崔學士)의 시는 당말(唐末)에 있어 역시 정곡(鄭谷)ㆍ한악(韓偓)의 유를 벗어나지 못하고 대개는 경조하고 부박하여 후(厚)한 맛이 없다. 다만
가을 바람 일어라 애달픈 노래 / 秋風唯苦吟
한 세상 돌아봐도 지음 드무네 / 世路少知音
삼경이라 창밖에는 비가 으시시 / 窓外三更雨
만리라 등잔 앞엔 내 고향 생각 / 燈前萬里心
이라 한 절구(絶句) 한 수가 가장 훌륭하며, 또 다른 한 연구(聯句)에,
먼 나무는 강둑 길에 들쭉날쭉하고 / 遠樹參差江畔路
찬 구름은 말 앞의 봉우리에 떨어지네 / 寒雲零落馬前峯
라 하였으니, 역시 아름답다.
정 대간(鄭大諫 고려의 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고려 전성기에 있어 가장 아름답다. 유전된 것은 극히 적지만 편편이 모두 절창이다. 이를테면
바람 부는 객선에 구름은 조각조각 / 風送客帆雲片片
이슬 엉긴 궁 기와엔 옥빛이 번쩍번쩍 / 露凝宮瓦玉粼粼
이라 한 것은 조금 가볍다 하겠고
버들 숲에 지게 닫은 엳아홉 집이라면 / 綠楊閉戶八九屋
밝은 달에 발 걷은 서너너덧 사람일레 / 明月捲簾三四人
라는 구절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신기하고 뛰어나다. 그,
바위 머리 소나무는 조각달에 늙었고 / 石頭松老一片月
하늘 끝의 구름은 천 점 산에 나직하네 / 天末雲低千點山
라는 구절은 딱딱하고 어렵지만 역시 청초(淸楚)한 맛을 지니고 있다.
정 대간의 서경시에
비 갠 긴 뚝에 풀빛은 더욱 짙고 / 雨歇長堤草色多
님 보내는 남포에 구슬픈 노래 /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물 언제나 다할 날이 있으리 / 大洞江水何時盡
이별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 더하네 / 別淚年年添綠波
라는 것은 지금까지 절창이라고 일컫는다. 부벽루 현판에 새겨진 시들은 중국 사신이 오게 되자 모두 철거한 일이 있었는데 이 시만은 남겨 두었었다. 그 뒤에 최고죽(崔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이 이 시에 화운(和韻)하기를,
강 언덕 길고 긴데 휘늘어진 능수버들 / 水岸悠悠楊柳多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요란터니 / 小船爭唱采菱歌
붉은 꽃도 다 져서 서풍은 차가웁고 / 紅衣落盡西風冷
해 저문 물가엔 흰 물결만 일어나네 / 日暮芳洲生白波
라 했고, 이익지(李益之 이달(李達)의 자)는,
연잎은 들쭉날쭉 연밥은 주렁주렁 / 蓮葉參差蓮子多
연꽃 서로 사이해서 아가씨가 노래하네 / 蓮花相間女郞歌
돌아 올 땐 물목에서 벗 만나자 기약했기에 / 歸時約伴橫塘口
고되이 배 저어 거슬러 올라가네 / 辛苦移船逆上波
라 했다. 두 시가 매우 훌륭하여 왕소백(王少伯 소백은 당 나라 왕창령(王昌齡)의 자)ㆍ이군우(李君虞)의 여운이 있으나 이는 채련곡(採蓮曲)이라 서경 송별시의 본뜻과는 다르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서도 유원순(兪元淳)의 문, 이인로(李仁老)의 시를 일컬었으니 이 대간(李大諫)의 시는 참으로 당시의 제일이었다. 그의
몇 번이나 이[蝨] 문대며 좋은 도략 일렀던고 / 幾回捫蝨話良圖
라는 구절은 썩 훌륭하여 구종길(瞿宗吉)의
지난날엔 이광 따라 범바위를 쏘더니 / 射虎他年隨李廣
한밤중 닭 울음에 유곤의 춤을 추네 / 聞鷄中夜舞劉琨
라는 시와 비슷하며, 그 팔경시(八景詩) 또한 아름답다.
이 대간이 승정원(承政院)에서 숙직하며 지은 시에
공작 병풍 깊은 곳에 촛불 그림자 희미한데 / 孔雀屛深燭影微
원앙새는 쌍쌍 자니 어찌 각각 날아가리 / 鴛鴦雙宿豈分飛
애닯구나 초췌한 청루 속의 여인이여 / 自憐憔悴靑樓女
길이 남을 위하여 시집갈 옷 짓다니 / 長爲他人作嫁衣
라 했으니, 대개 대간이 오래도록 하관(下官)으로 있어 상기 등용되지 못했는데 동료들은 모두 재상 길에 올랐으므로 재상의 사령장(辭令狀)을 초(草) 하면서 느낀 바가 있어 이 시를 지은 것이었다.
이 문순(李文順 이규보(李奎報)의 시호)의 시는 부려하고 방일하다. 그 칠석우(七夕雨)란 시는 참으로 절창이다. 그 시에
얇은 적삼 삽자리로 바람 난간에 누웠다가 / 輕衫小簞臥風欞
꾀꼬리 울음 소리 두세 번에 꿈을 깼네 / 夢覺啼鸎三兩聲
짙은 잎에 가린 꽃은 봄 뒤까지 남아 있고 / 密葉翳花春後在
엷은 구름 헤친 햇살 빗속에 밝도다 / 薄雲漏日雨中明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읽기만 해도 시원해진다. 또,
관인이 한가로이 젓대를 골라 부니 / 官人閑捻笛橫吹
부들자리 바람 타고 날아갈 듯하구나 / 蒲席凌風去似飛
천상에 걸린 달은 천하가 함께 누릴 텐데 / 天上月輪天下共
내 배에 혼자 싣고 돌아오나 여기네 / 自疑私載一船歸
라고 한 시 또한 지극히 고일(高逸)하다.
같은 시대의 한림(翰林) 진화(陳澕)는 이 문순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했는데 그의 시는 매우 맑고 아름답다. 그
매화는 떨어지고 버들가지 처졌는데 / 小梅零落柳僛垂
한가로이 청람(淸嵐) 밟아 걸음걸이 느리네 / 閑踏靑嵐步步遲
어점(漁店)은 닫기고 사람 소리 드문데 / 漁店閉門人語少
온 강의 보슬비는 실실이 푸르네 / 一江春雨絲絲碧
라고 한 작품은 청경(淸勁)하여 읊조릴 만하다.
사인(舍人) 홍간(洪侃)의 시는 농염(濃艶)하고 청려(淸麗)하다. 그 나부인(懶婦引)과 고안(孤雁) 등의 시편(詩篇)은 가장 훌륭하여 성당(盛唐) 시인의 작품과 흡사하다.
이견간(李堅幹)의 시에
여관에는 호롱불 하나 남은 심지 돋우노니 / 旅館挑殘一盞燈
사신(使臣)의 풍미가 중보다 담박하네 / 使華風味淡於僧
창 너머 두견 소리 밤새도록 듣노니 / 隔窓杜宇終宵聽
산꽃의 몇째 층에 울음소리 나는고 / 啼在山花第幾層
라 했는데, 이 시를 두고 당시에는 절창이라고 일렀다.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 이른바 두견이란 곧 소쩍새의 무리였다. 절강(浙江) 사람 왕자작(王子爵), 사천(泗川) 사람 상방기(商邦奇)가 함께 강릉(江陵)에 왔으므로 그들에게 내가 물었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는 두견이 아니라고 하였다. 대개 시인들은 흥을 붙여 말하는지라, 비록 그 물건이 아니더라도 시 가운데 그 말을 쓴 것이다. 이를테면
수풀 너머 흰 잔나비 울음 부질없이 듣노라 / 隔林空聽白猿啼
와 같은 경우, 우리나라에는 본시 잔나비가 없고,
집집마다 긴 대 숲에 비취새 울음 우네 / 脩竹家家翡翠啼
와 같은 경우는, 파랑새를 보고 염주취(炎洲翠)라 한 것이고,
자고새는 놀라서 해당화를 흔드네 / 鷓鴣驚簸海棠花
와 같은 경우는, 때까치가 깍깍 우는 것을 보고 행부득(行不得)이라 한 것이니, 모두 이와 같은 유이다.
원외(員外) 김극기(金克己)는 시상(詩想)이 극히 교묘하다. 겨울날에 핀 이화(李花)를 읊으면서 끝 구에
기이한 향내가 굴 속에 모여들어 / 無乃異香來聚窟
한궁에서 이 부인을 다시 보네 / 漢宮重見李夫人
라고 하였으니, 이는 옛 시인이 아직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주(義州)에 있으면서 지은 시에는
문장이란 늘그막에 서로 즐길 만하니 / 文章向老可相娛
일검 짚고 변새(邊塞) 돌며 오거서(五車書)를 우러르네 / 一劍游邊尙五車
공무(公務)를 파하니 새리된 줄 내 몰라라 / 衙罷不知爲塞吏
종이 창문 밝은 곳에 누워 책을 보누나 / 紙窓明處臥看書
라 하였으니 그 세속 근심을 물리쳐 보내는 심사를 후련하게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최예산(崔猊山) 이익재(益齋 익재는 이제현(李齊賢)의 호)의 시권(詩卷)을 모두 먹칠해 지우고 다만,
얇은 이불에 한기(寒氣) 나고 불등은 흐릿한데 / 紙被生寒佛燈暗
상좌중은 한밤 내내 종 울리지 않는구나 / 沙彌一夜不鳴鍾
아마도 자고 난 손 문을 일찍 열고 나서 / 應嗔宿客開門早
뜰 앞에 눈 덮인 솔 보라 할까 꺼렸겠지 / 要見庭前雪壓松
라는 시 하나를 남겨두자, 익재가 크게 탄복하며 지음(知音)으로 여겼다고 하나 이는 모두 과장된 이야기다. 익재의 시에는 좋은 작품이 매우 많으니 화오서곡(和烏棲曲)과 민지(澠池) 등의 고시(古詩)는 모두 옛 시에 핍근하고 여러 가지 율시(律詩)들 또한 홍량(洪亮)하다. 젊을 적에 지은 영사시(詠史時)의
뉘라서 알리오 업하의 순문약이 / 誰知鄴下荀文若
길이 요동의 관유안에 부끄러울 줄 / 永愧遼東管幼安
이라는 것이나, 또
서시(西施)를 배에 싣고 떠날 줄 몰랐다면 / 不解載將西子去
월궁에는 도리어 고소대(姑蘇臺) 하나가 있었으리 / 越宮還有一姑蘇
라는 작품과, 또
이라는 등의 작품들에 이르러서는 모두 규모에 들어맞고 이전 사람들이 미처 발(發)하지 못했던 것이니 어찌 낮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이는 역시 영웅이 범인을 무시한 격이라 다 믿을 수는 없다.

익재의 장인은 곧 국재공(菊齋公 국재는 권보(權溥)의 호)인데 부부가 함께 94세까지 살았으나 부인이 공보다 먼저 죽었다. 익재공이 장인을 애도한 만시(挽詩) 한 연(聯)에
항아는 광한전에 님 오시길 기다리나 / 姮娥相待廣寒殿
거사는 다만 홀로 도솔천에 돌아가네 / 居士獨歸兜率天
라고 했다. 권공(權公)이 부처를 좋아했기에 낙천도솔(樂天兜率)에 비유한 것은 무방하겠으나, 항아가 약을 훔친 것은 자고로 시인들이 속세로부터 선계(仙界)로 올라간 것을 비유함이 상례였는데, 이를 장모에게 쓴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이 문정(李文靖 문정은 이색(李穡)의 시호)의 ‘어제 영명사에 들르다[昨過永明寺]’라는 작품은 별로 수식하거나 탐색한 흔적 없이 저절로 음률에 맞아서 읊으면 신일(神逸)하다. 허영양(許穎陽)은 이를 보고 ‘당신네 나라에도 이와 같은 작품이 있소.’라고 했다. 그의 부벽루(浮碧樓) 시는 대편(大篇)인데 거기에
문 머리엔 고려 시가 상기도 걸렸으니 / 門端尙懸高麗詩
당시에도 하마 중화 문자 깨쳤다네 / 當時已解中華字
라고 했으니, 비록 우리나라 사람을 깔보기는 했으나 또한 문정공의 시에는 감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정공은 원(元)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니 응봉한림(應奉翰林) 구양규재(歐陽圭齋) 이름은 현(玄)ㆍ 우도원(虞道園) 이름은 집(集)의 무리가 모두 추장(推獎)하였다. 규재는 탄복하면서
“우리의 의발(衣鉢)은 마땅히 해외로 그대에게 전해지리라.”
하였다. 그 후 문정공이 고려조 말에 곤궁해져서 이리저리 옮기며 쫓겨 다닐 적에, 문하생과 옛 동료 관리들도 모두 배반하여 돌을 던지니, 공이 시를 지어
의발은 마땅히 해외로 전하리란 / 衣鉢當從海外傳
규재의 한 말씀이 아직 귀에 낭랑한데 / 圭齋一語尙琅然
근래의 물가 모두 날개 돋혀 올라가나 / 近來物價俱翔貴
호올로 내 문장은 한 닢 값이 안 나가네 / 獨我文章不直錢
라 했는데, 대개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원(元)이 얼승(孼僧)을 보내왔을 적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놀랐는데 우리 태조(太祖)가 작은 군사로 그들을 덕흥(德興)에서 크게 격파하여 쫓아버렸다. 태조가 개선하자 공민왕은 그 공을 포상하여 문정공과 태조에게 명하여 함께 대정(大政)에 참여케 하였다. 교지(敎旨)를 선포하는 날 공민왕은 기뻐하며 좌우에게 이르기를
“문관으로는 이색(李穡)을 쓰고 무신으로는 이모(李某 이성계를 말함)를 쓰니 나의 사람 씀이 어떻소.”
하였다. 태조는 문정공과 사귐이 매우 두터웠기에 자기의 당호(堂號)를 지어 달라고 청하니, 문정은 송헌(松軒)이라 이름하고 설(說)을 지어 이를 권면하였으며, 또한 환조(桓祖)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후에 문정공이 외지(外地)에 유배되면서 아들 종학(種學)ㆍ종선(種善)도 모두 먼 곳에 귀양 가게 되자 문인 정총(鄭摠)ㆍ정도전(鄭道傳)이 문정을 여지없이 공격하였다. 그러자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송헌이 나라 맡자 나는 귀양 가게 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속엔들 이런 생각 어찌 한 번 해봤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鄭)이 게다가 대의에 참여한다니 / 二鄭況聞參大議
한 집안이 모일 날 언제 다시 있으리 / 一家完聚更何時
라 하였다. 첫구[首句]는 비록 가긍하나 뜻은 심히 오만하다.

정포은(鄭圃隱 포은은 정몽주의 호)은 이학(理學)과 절의가 일시의 으뜸이었을 뿐 아니라 문장도 호방하고 걸출하였다. 그가 북관(北關)에서 지은 시에,
정주라 중구절(重九節)에 높은 곳을 올라보니 / 定州重九登高處
국화는 의구하다 눈에 비쳐 환하구나 / 依舊黃花照眼明
개펄은 남으로 선덕진에 연해 있고 / 浦漵南連宣德鎭
산등성이 북으로 여진성에 비껴 있네 / 峯巒北倚女眞城
백 년 사이 전란(戰亂) 치른 나라의 흥망사에 / 百年戰國興亡事
만 리의 나그네는 강개한 정 끓는고야 / 萬里征夫慷慨情
술상 파하자 원수(元帥)는 말 붙들어 올라타고 / 酒罷元戎扶上馬
낮은 산에 기운 해는 깃발에 비치누나 / 淺山斜日照行旌
라고 했으니, 음절(音節)이 질탕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또
풍류 고장 태수는 이천 석의 자리라 / 風流太守二千石
옛 친구 해후하여 삼백 배를 기울이네 / 邂逅故人三百杯
라 한 것이나, 또는,
나그네 고향 못 가 제비 새끼 만나고 / 客子未歸逢燕子
살구꽃 떨어지자 복사꽃도 떨어지네 / 杏花纔落又桃花
라 한 것과, 또는
매화 핀 창에는 봄빛 이르고 / 梅窓春色早
판자 집 지붕에는 빗소리 많네 / 板屋雨聲多
라 한 구절들은 모두 호방하게 펄펄 드날리니 그 사람됨과 비슷하다.
포은의 시에
강남의 여아는 머리에 꽃을 꽂고 / 江南女兒花揷頭
웃으며 짝을 불러 방주 가에 노는데 / 笑呼伴侶游芳洲
노 저어 돌아오니 날은 지려 하고 / 盪槳歸來日欲暮
원앙이 쌍쌍 날아 그지없는 시름이네 / 鴛鴦雙飛無限愁
했으니, 호탕한 풍류가 천고에 빛을 내며 시 또한 악부(樂府)와 흡사하다.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의 시는 매우 청신하고 섬부하였으니,
목은(牧隱)이,
“경지(敬之 김구용의 자)가 붓을 내려 쓰면 마치 운연(雲煙)과 같다.”
고 칭찬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일찍이 회례사(回禮使)가 되어 폐백을 요동(遼東)에 바치니, 도사(都司) 반규(潘奎)가 경사(京師)에 잡아보냈다. 그 자문(咨文)에 ‘말 50필’이라 할 것을 ‘5천 필’이라 잘못 적었기 때문이다. 명(明)의 고황제(高皇帝)는 우리나라가 요동백(遼東伯)과 사교(私交)한 것에 대해 성을 내고 또 말하기를
“말 5천 필이 오면 풀어서 돌아가게 해 주겠다.”
고 했다. 이때 이 광평(李廣平 광평부원군 이인임(李仁任)을 말함)이 국정(國政)을 맡고 있었는데 평소에 공의 무리들과 사이가 나빠 끝내 말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황제가 공을 대리(大理)에 유배시키니, 공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사생은 명이라 하늘 뜻을 어이하리 / 死生由命奈何天
동으로 부상 바라보니 고향 길은 아득한데 / 東望扶桑路渺然
양마라 오천 필이 어느 제나 닿을는지 / 良馬五千何日到
도화 핀 문 밖에는 풀만 수북 우거졌네 / 桃花門外草芊芊
라 하였고, 또 무창(武昌)에서 지은 시에서
황학루 앞에는 물결 솟구치는데 / 黃鶴樓前水湧波
강따라 발 드리운 주막은 몇천 챈고 / 沿江簾幕幾千家
추렴한 돈 술을 사와 회포를 푸노라니 / 醵錢沽酒開懷抱
대별산 푸르른데 해는 이미 기울었네 / 大別山靑日已斜
라 했는데, 공은 마침내 유배지에서 죽고 말았다.
그뒤 참의(參議) 조서(曺庶)가 또한 금치(金齒)에 유배당한 수년 만에 석방되어 돌아왔는데, 황주(黃州)에서 지은 시에
물빛과 산 기운은 맑은 모래 어루고 / 水光山氣弄晴沙
버들 푸른 긴 뚝에는 천만 채 집이로세 / 楊柳長堤千萬家
무수한 상선은 성 아래 대고 / 無數商船城下泊
죽루의 연월에는 젓대 노래 드높네 / 竹樓煙月咽笙歌
라고 하였다. 나는 장부의 몸으로 좁은 땅에 태어나 천하를 유람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왔었는데 두 공(公)은 비록 이방(異方)에 유배되었으나 그래도 오ㆍ초(吳楚)의 산천을 다 보았으니 참으로 인간의 쾌사라 할 수 있겠다.
이도은(李陶隱 도은은 이숭인(李崇仁)의 호)의 오호도시(嗚呼島詩)를 목은(牧隱)은 추장하여 성당(盛唐)에 비길 만하다고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삼봉(三峯)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게 되고 기구한 화마저 당하게 되었다. 지난날 주 태사(朱太史)가 이 작품을 보고 또한 매우 감탄하였다. 그
산북과 산남으로 세로는 갈라지고 / 山北山南細路分
송화는 비 머금어 어지러이 떨어지네 / 松花含雨落紛紛
도인이 물을 길어 초가로 돌아오니 / 道人汲井歸茅舍
한 가닥 푸른 연기 흰 구름을 물들이네 / 一帶靑煙染白雲
라고 한 시는 유수주(劉隨州 당 나라 유장경(劉長卿))에게 무엇이 모자란다 하겠는가?
국초(國初)에는 정교은(鄭郊隱 교은은 정이오(鄭以吾)의 호)ㆍ이쌍매(李雙梅 쌍매는 이첨(李詹)의 호)의 시가 가장 훌륭했다. 정교은 시에
이월도 무르익어 삼월이 오려 하니 / 二月將闌三月來
한 해의 봄빛이 꿈속에 돌아오네 / 一年春色夢中回
천금으로도 가절은 살 수가 없으니 / 千金尙未買佳節
술 익는 뉘 집에서 꽃은 정히 피었는고 / 酒熟誰家花正開
라 한 시는 당인(唐人)의 아름다운 경지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쌍매의
신선이 차고 온 옥소리 쟁그랑쟁그랑 / 神仙腰佩玉摐摐
고루에 올라와서 벽창에 걸어놓고 / 來上高樓掛碧窓
밤 들어 다시금 유수곡을 타노라니 / 入夜更彈流水曲
한 바퀴 밝은 달이 가을 강에 내리누나 / 一輪明月下秋江
라고 한 시 역시 빼어난 아취가 있다.
쌍매의 문앵시(聞鸎詩)에
삼십육궐(三十六闕) 후궁에 봄 나무 깊숙하고 / 三十六宮春樹深
미인이 꿈을 깨니 남창은 어둑해라 / 蛾眉夢覺午窓陰
영롱한 울음소리 수심 엉겨 듣자 하니 / 玲瓏百囀凝愁聽
모두가 향규의 님 바라는 마음일레 / 盡是香閨望幸心
라 했으니 두목지(杜牧之)의 시와 흡사하다.

석간(石磵)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때 이미 관직이 현달하였으나 늘그막에는 미친 체하며 세상을 즐기고 지내면서 사평원주(沙坪院主)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당여(黨與)로서 외지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길에 줄이은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한낮에 사람 불러 사립문 열고 / 柴門日午喚人開
숲 속 정자로 걸어나가 이끼 돌에 앉으니 / 步出林亭坐石苔
어젯밤 산중의 비바람이 거칠더니 / 昨夜山中風雨惡
개울 가득 흐르는 물 꽃잎이 떠 내려오네 / 滿溪流水泛花來

세종조(世宗朝)에는 인재가 일시에 배출되어 뛰어난 문장 석학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고시(古詩)는 옛사람에 비하면 자못 부끄러울 뿐 아니라 율시나 절구에 있어서도 놀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서사가(徐四佳 사가는 서거정(徐居正)의 호)의 시가 지리하지만 그래도 부섬하고 아름다워 간간이 좋은 구절도 있다. 이를테면
노는 벌은 쉴 새 없이 날기만 하고 / 游蜂飛不定
한가한 오리는 서로 기대 조누나 / 閑鴨睡相依
달빛은 벌레 소리 너머 비치고 / 月色蛩音外
은하는 까치 그림자 속에 흐르네 / 河聲鵲影中
라 한 구절이나
다시 한 번 난새 타고 철적을 불며 / 更欲乘鸞吹鐵笛
깊은 밤 밝은 달에 강남을 찾고 싶네 / 夜深明月過江南
와 같은 구절들은 역시 아취가 있다.

김괴애(金乖崖 괴애는 김수온(金守溫)의 호) 시 또한 호방하다. 이를테면
사립문 삐딱하게 시냇둑에 다다르니 / 柴門不整臨溪岸
산 비에 아침마다 물 나는 걸 보누나 / 山雨朝朝看水生
라 한 구절이나,
밝은 창에 중은 납의(衲衣)를 깁고 / 窓虛僧結衲
고요한 탑에 손은 시를 짓누나 / 塔靜客題詩
라 한 구절들은 매우 한원(閑遠)하여 운치가 있다.

강경순(姜景醇 경순은 강희맹(姜希孟)의 자)의 양초부(養蕉賦)는 대단히 훌륭하며, 그의 시 또한 청경(淸勁)하다. 그 병여음(病餘吟)에
남창에 종일토록 세사(世事) 잊고 앉았으니 / 南窓終日坐忘機
뜨락 채엔 사람 없어 새는 날기 배우네 / 庭院無人鳥學飛
가는 풀에 그윽한 향내 어디에서 나는지 / 細草暗香難覓處
묽은 연기 낡은 빛에 부슬부슬 비내리네 / 澹煙殘照雨霏霏
라 하고, 영매(詠梅)에,
어둘녘 울 가에서 퍼진 가지 보고서 / 黃昏籬落見橫枝
느린 걸음 향내 찾아 물가에 와 닿으니 / 緩步尋香到水湄
천년의 나부산(羅浮山) 둥근 달이 / 千載羅浮一輪月
지금에 와 비치니 꿈이 깨일 때로세 / 至今來照夢回時
라 한 시구들은 모두 한아(閑雅)하여 읊조릴 만하다.

서사가(徐四佳)가 오랫 동안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므로 동시대의 강진산(姜晉山 진산은 강희맹(姜希孟)의 봉호)ㆍ이양성(李陽城 양성은 이승소(李承召)의 봉호)ㆍ김영산(金永山 영산은 김수온(金守溫)의 봉호)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문형(文衡)을 주관하지 못하고 먼저 죽었다. 이양성의 제비를 읊은 시에
버들 푸른 골목에 동녘 바람 저물었고 / 綠楊門巷東風晩
풀 푸른 못가에 부슬비는 침침하네 / 靑草池塘細雨迷
라 한 구절은 당 나라 시인의 시구와 흡사하다.
우리나라 시는 고체(古體)를 본뜬 것이 없는데 오직 성화중(成和仲 화중은 성간(成侃)의 자)이 안연령(顔延齡)ㆍ도잠(陶潛)ㆍ포조(鮑照) 세 사람의 시를 본뜬 세 편의 시는 깊이 그 법을 얻었으며 여러 절구 역시 당의 악부체(樂府體)를 얻었으니 이분에 힘입어 가까스로 적요함을 면하게 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호)의 글은 요체는 깨달았으나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으니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崔岦)의 호)가 그를 가장 업신여겼다. 그의 시는 오로지 소식(蘇軾)ㆍ황정견(黃庭堅)에게서 나왔으니 전고자(銓古者 고전을 비평하는 사람)가 작게 보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 중형은 일찍이 그의 시를 말씀하기를
학 울자 맑은 이슬 내려 맺히고 / 鶴鳴淸露下
달 뜨자 큰 고기 뛰어오르네 / 月出大魚跳
라 한 구절은 결코 성당(盛唐)의 시에 뒤지지 않으며,
가랑비 오는데 중이 장삼을 꿰매고 / 細雨僧縫衲
찬 가람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 寒江客棹舟
와 같은 구절은 심히 한담(閑淡)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대체로 맞는 말씀이다.
이전 사람들은 점필재가 여강(驪江)에서 읊은,
십년간의 세상사는 홀로 읊는 시 속에 / 十年世事孤吟裏
팔월의 가을빛은 어지러운 숲 사이에 / 八月秋容亂樹間
라는 구절을 칭송해 왔다. 그러나 신륵사(神勒寺)에서 지은,
상방에서 종 울리니 여룡은 춤을 추고 / 上方鍾動驪龍舞
만 구멍에 바람 우니 철봉이 나래 치네 / 萬竅風生鐵鳳翔
라 한 구절의 홍량(洪亮)ㆍ엄중(嚴重)함만 같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우주를 버팀직한 시구이다. 그 보천탄즉사(寶泉灘卽事)에서는
복사꽃 띄운 물결이 몇 자나 높았는고 / 桃花浪高幾尺許
은석은 목까지 잠겨서 어딘지 모르겠네 / 銀石沒頂不知處
쌍쌍의 가마우지 여울돌을 잃고 / 兩兩鸕鶿失舊磯
물고기 물면 갈대숲으로 들어가네 / 銜魚却入菰蒲去
라 했는데 이는 가장 항고(伉高)하며, 《동경악부(東京樂府)》는 편편마다 모두 예스럽다.

김열경(金悅卿 열경은 김시습(金時習)의 자)의 높은 절개는 우뚝하니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시문도 초매하나 마음 쓰지 않고 유희삼아 지었기 때문에 억센 화살의 최후와 같아서 매양 허튼 말이 섞이니장타유(張打油)와 같아 싫증이 난다. 그가 세향원(細香院)에 쓴 시에
아침해 돋으려 하니 새벽빛이 갈라지고 / 朝日將暾曙色分
숲 안개 걷힌 곳에 새는 떼를 부르누나 / 林霏開處鳥呼群
먼 봉에 뜬 푸른 빛 창 열고 바라보며 / 遠峯浮翠排窓看
이웃 절 종소리는 언덕 너머에서 듣는다 / 隣寺鍾聲隔巘聞
파랑새는 소식 전하며 약 솥을 엿보고 / 靑鳥信傳窺藥竈
벽도화 떨어져 이끼에 비추이네 / 碧桃花下照苔紋
아마도 신선은 조원각(朝元閣)에 돌아가서 / 定應羽客朝元返
솥 아래 한가로이 소전문을 펴 보리 / 松下閑披小篆文
라 했고, 소양정(昭陽亭)에서는
새 너머 하늘은 끝나려 하고 / 鳥外天將盡
읊조림 끝에 한은 그지없어라 / 吟邊恨未休
산은 첩첩 북을 따라 굽이쳐 가고 / 山多從北轉
강은 절로 서쪽 향해 흐르는구나 / 江自向西流
먼 물가에 기러기 내려와 앉고 / 雁下汀洲遠
그윽한 옛 기슭엔 배 돌려오네 / 舟回古岸幽
어느 제나 속세 그물 떨쳐버리고 / 何時抛世網
흥을 따라 이곳에 다시 와 놀아볼까 / 乘興此重遊
라 했고, 산행(山行)에서는,
아이는 잠자리 잡고 할아비는 울 고치고 / 兒捕蜻蜓翁補籬
작은 개울 봄 물에 가마우지 목욕하네 / 小溪春水浴鸕鶿
푸른 산 끊긴 곳에 돌아갈 길은 머니 / 靑山斷處歸程遠
등나무 한 지팡이 비껴 메고 오누나 / 橫擔烏藤一個枝
라 했는데, 모두 속기를 떨쳐버려 화평(和平)하고 담아(澹雅)하니 저 섬세하게 다듬는 자들은 응당 앞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이다.
조매계(曺梅溪 매계는 조위(曺偉)의 호)ㆍ유뇌계(兪㵢溪 뇌계는 유호인(兪好仁)의 호)는 일시에 함께 성명을 드날렸으나 정순부(鄭淳夫 순부는 정희량(鄭希良)의 호)보다는 못했다. 그 혼돈주가(渾沌酒歌)는 매우 훌륭하여 소동파(蘇東坡)와 흡사하다.
조각달은 이 맘 비춰 고국에 다다르고 / 片月照心臨故國
낡은 별 꿈을 따라 변방 성에 떨어지네 / 殘星隨夢落邊城
라고 한 구절은 극히 신일(神逸)하며,
나그네 길 우연히 한식 비를 만나니 / 客裏偶逢寒食雨
꿈속에서 오히려 고향 봄을 생각하네 / 夢中猶憶故園春
라 한 시구에는 중당(中唐)의 고아(高雅)한 운치가 있고,
봄이 와도 꽃 안 뵈고 눈만 보이나니 / 春不見花唯見雪
기러기 안 오는 곳 사람 어이 찾아오리 / 地無來雁況來人
라 한 구절은 비록 다듬은 흠이 있으나 또한 다정다감하다.
이망헌(李忘軒 망헌은 이주(李冑)의 호)의 시는 가장 침착하여 성당(盛唐)의 풍격이 있다.
아침해는 붉게 뿜어 발해에 솟구치고 / 朝日噴紅跳渤澥
갠 구름 희게 펴져 무려산(巫閭山)을 나오네 / 晴雲挹白出巫閭
와 같은 시구는 매우 힘이 있으며
언 비는 천 산 마루 눈으로 비껴 닿고 / 凍雨斜連千嶂雪
주린 까마귀 한 수풀 바람에 놀라 우네 / 飢烏驚叫一林風
라 한 시구는 노창(老蒼)하고 기걸(奇杰)하다. 통주(通州)에서 지은 시는
통주는 천하의 승경(勝景)인지라 / 通州天下勝
누각들이 구름 하늘에 솟았구려 / 樓觀出雲霄
저자에는 금릉의 물화(物貨) 쌓이고 / 市積金陵貨
강 줄기는 양자의 물결로 가네 / 江通揚子潮
가을이라 갈가마귀 물가에 내리고 / 寒鴉秋落渚
저녁 되니 외론 학은 요동으로 돌아가네 / 獨鶴暮歸遼
말에 탄 신세는 천리 나그네 / 鞍馬身千里
정자에 오르니 고국은 멀고멀어라 / 登臨故國遙
라 했는데, 이 역시 기막히게도 왕유(王維)ㆍ맹호연(孟浩然)의 수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남지정(南止亭 지정은 남곤(南袞)의 호)은 일찍이, 김일손(金馹孫)의 글이나 박은(朴誾)의 시는 쉽게 얻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으로 옳다. 박은의 시는 비록 정성(正聲)은 아니나 엄진(嚴縝)하고 경한(勁悍)하다.
흐린 봄날 비 오련다 새는 서로 지저귀고 / 春陰欲雨鳥相語
늙은 나무 무정하니 바람 절로 슬퍼지네 / 老樹無情風自哀
와 같은 구절은 당의 섬려(纖麗)한 시풍만을 배운 자로는 어찌 감히 그 경지에 올라설 수 있으랴.
폐주(廢主 연산군을 가리킴)는 비록 황란(荒亂)하였으나 또한 시문을 좋아하였다. 강목계(姜木溪 목계는 강혼(姜渾)의 호)가 오랫동안 도승지로 있었는데, 연산이 언젠가
한식이라 동산 숲에 삼월은 저물고 / 寒食園林三月暮
꽃 날리는 비바람에 오경은 싸늘하네 / 落花風雨五更寒
라 한 시구로 시제(詩題)를 내고서 근신(近臣)들에게 지어 바치도록 명하였는데 목계의 시가 장원으로 뽑혔다. 그 시에
청명이라 궁 버들은 찬 내에 잠기고 / 淸明御柳鎖寒煙
쌀쌀한 봄바람 새벽 되어 더욱 몰아치네 / 料峭東風曉更顚
지는 꽃 땅에 붉게 포개지고 / 不禁落花紅襯地
나는 버들개지 하늘 희게 뒤덮누나 / 更敎飛絮白漫天
못물 너머 높은 누각 구슬발을 걷고 / 高樓隔水褰珠箔
세오마(細烏馬)는 꽃을 찾아 비단 언치 빛내네 / 細馬尋芳耀錦韉
금동이 술 실컷 취해 별원으로 돌아오니 / 醉盡金樽歸別院
오색 끈 흔들리며 그림 난간 가로 끄네 / 綵繩搖曳畫欄邊
라 했는데, 폐주는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준 물건도 매우 많았다. 언젠가 폐주가 죽은 희첩(姬妾)을 슬퍼하여 사신(詞臣)들로 하여금 만시(挽詩)를 짓게 하였는데 이백익(李伯益 백익은 이희보(李希輔)의 자)이 시를 짓되
궁궐 문은 깊이 잠겨 달빛도 황혼인 제 / 宮門深鎖月黃昏
열두 번 종소리가 밤중에 들린다 / 十二鍾聲到夜分
어디메 청산에 옥골을 묻었는지 / 何處靑山埋玉骨
가을 바람에 지는 잎 소리 차마 못듣겠네 / 秋風落葉不堪聞
라 하니 폐주가 극찬하였고 드디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서 직제학(直提學)으로 발탁되었다. 두 편 시가 비록 좋기는 하나 두 사람도 또한 이 때문에 이름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李容齋)를 첫째로 함이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순숙(純熟)하다. 오언고시(五言古詩)는 두보(杜甫)와 진후산(陳後山)의 품격과 비슷하여 고고(高古)ㆍ간절(簡切)하여 글이나 말로는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에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로
평생에 사귄 벗 모두 늙어 죽어가고 / 平生交舊盡凋零
흰머리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라 / 白髮相看影與形
때마침 고루에 달조차 밝은 밤엔 / 正是高樓明月夜
애처로운 피리소리 어찌 차마 들으리 / 笛聲凄斷不堪聽
는 감개가 무량하여 이를 읽노라면 가슴이 메어진다.

국조(國朝)의 시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용재 상공(容齋相公)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ㆍ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ㆍ충암(冲庵) 김정(金淨)ㆍ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족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국조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소재(盧蘇齋)는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지천(黃芝川)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익지(李益之)가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여장(權汝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용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정호음은 추앙 굴복하는 경우가 적었고 다만 눌재의 시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벽 위에
서북의 두 강은 태고적부터 흘러오고 / 西北二江流太古
동남의 두 산줄기 신라를 파고드네 / 東南雙嶺鑿新羅
라는 것과,
거문고 타던 사람은 학 가의 달로 가고 / 彈琴人去鶴邊月
피리 부는 손은 솔 아래 바람에 오네 / 吹笛客來松下風
라는 시구를 써 놓고 스스로 탄식하며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또 이르기를,
“허종경(許宗卿)의 시에
들길이 어두워 오는데 소는 홀로 돌아오고 / 野路欲昏牛獨返
강 구름이 비오려 하니 제비가 낮게 나네 / 江雲將雨燕低飛
라는 구절은 강목계(姜木溪)의
붉은 제비 엇날자 바람은 버들 스치고 / 紫燕交飛風拂柳
청개구리 와글 울자 비는 산에 어둑어둑 / 靑蛙亂叫雨昏山
이라 한 시구와 서로 대적할 만하다.”
고 했다. 그 당시 ‘신기재의 시는 중체(衆體)를 모두 갖추었으나 호음은 칠언율시에만 능했으니 그에게 못 미칠 것 같다.’고들 했는데, 호음은 ‘그의 중체가 감히 내 율시 한 구를 당할소냐.’ 했으니 그의 자부가 이러했다.
호음의 황산역시(黃山驛詩)는 다음과 같다.
지난날 쫓긴 왜구 이곳에서 섬멸할 때 / 昔年窮寇此殲亡
혈전 벌인 신검(神劍)에는 붉은 빛깔 둘렸다네 / 鏖戰神鋒繞紫芒
한의 깃대 꽂힌 흔적 돌 틈에 남아 있고 / 漢幟豎痕餘石縫
얼룩진 옷 적신 피는 노을 빛을 물들이네 / 斑衣漬血染霞光
소슬바람 살기 띠어 수풀 뫼는 엄숙하고 / 商聲帶殺林巒肅
도깨비불 음기 타니 성루는 묵어졌네 / 鬼燐憑陰堞壘荒
동방 사람 어육(魚肉) 면킨 우 임금의 덕일진댄 / 東土免魚由禹力
소신이 해를 그려 어찌 감히 칭찬하리 / 小臣摸日敢揄揚
기걸(奇杰)하고 혼중(渾重)하니 참으로 훌륭한 작품이다. 절강(浙江)의 오명제(吳明濟)가 이 시를 보고 비평하기를,
“그대의 재주는 용을 잡을 만한데 도리어 개를 잡고 있으니 애석하다.”
고 했는데 대개 당시(唐詩)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찌 그를 작게 평가할 수야 있겠는가.
이익지(李益之)는 어릴 적에 두시(杜詩)를 호음(湖陰)에게 배웠는데 하루는 익지더러 서가 위의 여러 책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호음이 그것을 보다가 《춘정집(春亭集)》이 나오니 땅에 던져버렸고, 《매계집(梅溪集)》은 펴보고 웃으며 덮었는데 대개 가볍게 여긴 것이었다. 오직 《점필재집(佔畢齋集)》만은 집어들고 익히 보기를 마지않았다. 익지가 엿보니 모두 뽑아서 줄을 그으니 대개 그들을 좋아하여 소재로 취해 시의 자료로 하려는 것이었다. 언젠가 평생에 가장 마음에 만족하게 여기는 시구를 물었더니
산 나무 함께 우니 바람 언뜻 일어나고 / 山木俱鳴風乍起
강물 소리 문득 높자 달이 홀로 걸렸네 / 江聲忽厲月孤懸
라는 구절을 사람들이 깎은 듯 아름답다고들 하고,
산꼭대기에 깜빡이는 별은 조각달과 빛 다투고 / 峯頂星搖爭缺月
나무 위에 움직이는 새는 깊은 떨기 숨는고야 / 樹顚禽動竄深蕞
라는 시구 역시 시상(詩想)은 교묘하지만 마침내
빗기운 노을 눌러 산은 문득 어두워지고 / 雨氣壓霞山忽暝
냇빛은 달을 받아 밤에도 밝구나 / 川華受月夜猶明
라 한 구절보다는 못하니, 이는 마치 신이 도운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다.
김충암(金冲庵 충암은 김정(金淨)의 호)의 시에
지는 해는 거친 들에 뉘엿 비치고 / 落日臨荒野
갈가마귀 저문 마을 내리는고야 / 寒鴉下晩村
빈 수풀엔 연화가 싸늘히 식고 / 空林煙火冷
초가집도 사립문 걸어 닫았네 / 白屋掩柴門
는 유장경(劉長卿)의 시와 흡사하다. 그의 우도가(牛島歌)는 심오하고 황홀하며 미묘하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며 가진 재치를 다 부렸다. 그래서 신기재(申企齋)는 그를 추존(推尊)하여 장길(長吉)에게 견주었다.
최원정(崔猿亭 원정은 최수성(崔壽峸)의 호)은 세상을 내리보고서 벼슬하지 아니하고 화나 면하기를 바랐다. 하루는 제현(諸賢)이 정암(靜庵 조광조의 호)의 집에 모였는데 원정이 밖에서 들어오며 숨이 가빠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황급히 물을 달라고 해 마시고는,
“내가 한강을 건너올 제 물결이 솟구치고 배가 부서져 거의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났다.”
고 하니, 주인이 웃으면서,
“이는 우리들을 풍자하는 말이다.”
고 했다. 원정이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자 원충(元冲 김정(金淨)의 자)이 시를 지었는데
맑은 새벽 바위 산 봉우리 우뚝한데 / 淸曉巖峯立
흰 구름은 산 기슭에 비꼈네 / 白雲橫翠微
강촌에는 사람 모습 보이지 않고 / 江村人不見
강변 나무 저 멀리 아득하누나 / 江樹遠依依
라 했다. 원정이 만의사(萬義寺)에 올라 지은 시에,
옛 불전엔 몇 안 되는 중이 지키고 있고 / 古殿殘僧在
수풀 끝엔 저녁 종 맑게 울리네 / 林梢暮磬淸
창문은 트이어 천리 끝 닿고 / 窓通千里盡
담장이 눌러 서니 뭇산은 평평 / 牆壓衆山平
나무는 몇 해나 늙어 왔는지 / 木老知何歲
새는 별난 목청 우짖고 있네 / 禽呼自別聲
험난한 세망에 걸릴까 근심하려니 / 艱難憂世網
오늘에 내 인생을 한탄하노라 / 今日恨吾生
라고 했다. 결구(結句)에 뜻이 담겨 있으니 아마도 스스로 화를 입을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 애석하구나.

김이숙(金頣叔 이숙은 김안로(金安老)의 자)이 젊어서 관동에 놀러갔을 때 꿈에 귀신이 나타나 읊조리기를
봄은 우전의 산천 밖에 무르익고 / 春融禹甸山川外
풍악은 우정의 조수 사이 아뢰누나 / 樂奏虞庭鳥獸間
라 하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네가 벼슬길을 얻을 시어(詩語)이다.”
고 하므로 꿈을 깨고 나서 이를 기억해 두었다. 다음해 정시(庭試)에 들어가니 연산(燕山)이 율시 여섯 편을 내어 시험을 치렀는데 그 가운데 ‘봄날 이원 제자들이 침향정 가에서 한가로이 악보를 들춰보다.[春日梨園弟子沈香亭畔閑閱樂譜]’라는 시제(詩題)를 가지고 한(閑) 자를 압운(押韻)으로 해서 시를 지으라는 문제가 있었다. 김이 생각하니 그 글귀가 꼭 들어 맞는지라 이내 그걸 가지고 써 냈다. 강목계(姜木溪 목계은 강혼(姜渾)의 호)가 고시관(考試官)이 되어 크게 칭찬하고 장원(壯元)을 시켰다. 김모재(金慕齋 모재는 김안국(金安國)의 호)가 본디 글을 잘 안다고 이름이 난지라 참시관(參試官)을 하면서,
“이 구절은 귀신의 소리지 사람의 시가 아니다.”
하고 즉시 그 출처를 묻자 김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신낙봉(申駱峰 낙봉은 신광한(申光漢)의 호)의 시는 청절(淸絶)하여 아취가 있다. 중추(中秋)에 배를 긴 여울에 대고[中秋舟泊長灘]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 기슭에 외론 배 매고 보니 / 孤舟一泊荻花灣
양 갈래 맑은 강에 사면에는 산이로세 / 兩道澄江四面山
인세(人世)에도 이 밤 같은 달이야 없을까만 / 人世豈無今夜月
백년 가도 바랄쏜가 이 가운데 보는 달을 / 百年難向此中看
이라 하고, 배 위에서 삼각산을 바라보며[船上望三角山]라는 시에
외론 배 잡아타고 광릉(廣陵) 나루 떠나오니 / 孤舟一出廣陵津
열다섯 해 동안 죽지 못한 몸이라 / 十五年來未死身
나는야 정이 있어 아는 얼굴 같지만 / 我自有情如識面
청산이야 옛사람을 기억할 수 있으랴 / 靑山能記舊時人
라 했다. 김 공석(金公碩)의 옛 집을 지나며[過金公碩舊居]라는 시에
같은 때 귀양살이 몇 사람이 남았는고 / 同時逐客幾人存
동풍에 말 세우고 홀로 애를 태우누나 / 立馬東風獨斷魂
한식이라 안개비 자욱한 개산 길에 / 煙雨介山寒食路
석양 마을 젓대 소리 차마 듣지 못할레라 / 不堪聞笛夕陽村
라 하고, 삼월 삼짇날에 박대립에게 부침[三月三日寄朴大立]이라는 시에
삼월 삼일 구월 구일 해마다 만나자던 / 三三九九年年會
옛 약조는 남아 있되 일은 오직 어그러져 / 舊約猶存事獨違
방초에 답청할 날 오늘이 맞건마는 / 芳草踏靑今日是
맑은 동이 흰 술은 옛 친구가 아닐세 / 淸尊浮白故人非
바람 앞의 제비 소리 앳되게도 들리나 / 風前燕語聞初嫩
비내린 뒤 꽃가지는 또한 보기 어렵네 / 雨後花枝看亦希
모동의 어른들이 탈속(脫俗)한 이 많으니 / 茅洞丈人多不俗
봄옷을 전당잡힐 생각이 없을쏜가 / 可能無意典春衣
라 했으니, 편편이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기(雄奇)함에 있어서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의 호)에 미치지 못하나 청창(淸暢)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하겠다.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의 시는 시취(詩趣)가 있어 이따금 성당시(盛唐詩)에 접근하고 있다. 신광한과 정사룡 등 노대가들이 어느 집에 모여 바야흐로 포도(蒲桃) 그림 족자를 놓고 시를 읊으려 하는데 생각에 잠겨 미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장음이 술에 취해 와서는 붓을 빼앗아 들고 족자 위에 쓰려 했다. 주인이 말리려 하자 호음이 그냥 두라고 하니, 장음은 절구 두 수를 지었는데 그 하나에
늙은 원숭이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지는 해는 마른 등걸 위에 비치네 / 落日枯楂上
우뚝 앉아 고개도 아니 돌리니 / 兀坐首不回
아마도 천산의 메아리 듣는 거지 / 想聽千峯響
라 하였다. 호음이 크게 칭찬하고는 붓을 놓아버리고 짓지 않았다. 손곡(蓀谷 이달(李達)의 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는 성당 이주가(伊州歌)의 법이니 이른바 한 구절이라도 끊어 놓으면 시편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퇴휴(蘇退休 퇴휴는 소세양(蘇世讓)의 호)가 젊었을 적에는 상 좌상(尙左相 상진(尙震)을 가리킴)과 동료로 지냈는데 상(尙)이 하관(下官)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재상이 되자 기러기 그린 화축(畫軸)을 가지고 퇴휴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퇴후가 절구 한 구를 지어 써 보냈는데
쓸쓸한 외그림자 저녁 강가 비치고 / 蕭蕭孤影暮江潯
붉은 여뀌꽃 시들어 두 기슭에 그늘졌네 / 紅蓼花殘兩岸陰
부질없이 서풍 향해 옛 짝을 불러대며 / 漫向西風呼舊侶
구름 물 만 겹이나 깊은 줄 모르누나 / 不知雲水萬重深
라 했으니, 함축된 의사가 심원한지라 상 정승이 보고는 탄식하며 서글퍼했다. 심어촌(沈漁村 어촌은 심언광(沈彦光)의 호)은 늘그막에 김안로(金安老)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자 내쫓겨 북도방백(北道方伯)이 되었는데 시를 짓기를
넓은 강 건너려니 나룻배가 없거늘 / 洪河欲濟無舟子
추운 나무 시드는데 더부살이 있구나 / 寒木將枯有寄生
라 했으니, 대개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것일 것이다.
임석천(林石川 석천은 임억령(林億齡)의 호)은 사람됨이 고매하고 시 역시 사람됨과 같았다. 낙산사영(洛山寺詠)은 마치 용이 오르고 비가 내리는 형세로 문세(文勢)가 날아 꿈틀거려 그 기이한 경치와 자못 장려함을 다툴 만하였다. 그 시에
마음은 유수와 함께 세상으로 나오고 / 心同流水世間出
꿈에는 백구 되어 강 위를 나네 / 夢作白鷗江上飛
라 한 구절은 기상이 높아 신룡이 바다를 희롱하는 뜻이 있다.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풍류가 호일(豪逸)하고 그 시 또한 펄펄 나는 듯하니
고개 숙인 꽃은 술에 취한 옥녀의 얼굴이고 / 花低玉女酣觴面
끊어진 산은 바닷물 마시는 푸른 용의 허리로다 / 山斷蒼虯飮海腰
라 한 시는 지금까지 사람 입에 회자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를 몹시 사랑하여 만년까지도 문득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어찌하면 임사수(林士遂 사수는 임형수의 자)와 더불어 서로 대면할 수 있으랴.”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는 고광(高曠)하고 이수(夷粹)한데 시 역시 그 인품과 같았다.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은 그의 등취대시(登吹臺詩)를 극찬하여 고적(高適)ㆍ잠참(岑參)의 높은 운이라 했다고 한다. 그 시에
양왕이 노래하고 춤추던 곳에 / 梁王歌舞地
오늘은 나그네가 올라왔노라 / 此日客登臨
구름을 능지를 강개한 흥취 / 慷慨凌雲趣
옛을 묻는 처량한 마음이로세 / 凄凉弔古心
긴 바람은 먼 들에 일어나는데 / 長風生遠野
밝은 해는 층산(層山) 뒤에 숨어 버리네 / 白日隱層岑
그 시절의 번화한 일들을 이제 / 當代繁華事
아득하니 어디에서 찾아보리오 / 茫茫何處尋
라 한 것은 침착하고 준위(俊偉)하여 가늘고 약한 태를 일시에 씻어버렸으니 참으로 귀중히 여길 만하다.

하서가 죽은 후 영남(嶺南)의 하양(河陽)에 오세억(吳世億)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소생하여 말하기를,
“꿈에 천부(天府)에 갔었는데 붉은 옷 입은 저승 사자가 소원(小院)으로 데리고 가니 거기에 윤건(綸巾)을 쓴 학사가 있어 김하서라고 하면서 ‘너는 금년에 하늘에 오름이 합당치 않으니 나가 힘써 행실을 닦으라.’ 하며 시로써 보냈는데 그 시는
세억은 그 이름, 대년(大年)은 그 자(字)인데 / 世億其名字大年
천문(天門) 열고 들어와 자미 신선 뵈었더라 / 排門來謁紫微仙
일흔 일곱 지난 뒤에 서로 다시 볼지니 / 七旬七後重相見
인간 세계 돌아가 함부로 전치 말라 / 歸去人間莫浪傳”
고 하였다.
세억은 효자였는데, 그 후 과연 77세에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선친(先親)께서는 늘,
“윤장원(尹長源)의 재주는 따를 수 없다.”
고 말씀하시며, 그의
넓은 바다 쪽배 위에 꿈은 천리 떠도는데 / 海闊孤舟千里夢
두어 가락 젓대 소리 달 밝은 가을이다 / 月明長笛數聲秋
한 것과,
맞바람이 살구에 불어 중문을 때리네 / 交風吹杏打重門
라는 시구를 매양 칭송하면서 청절(淸切)하여 고시(古詩)에 핍진하다고 하셨다.

선친께서는 기묘년에 영남 관찰사를 제수받으셨는데 권습재(權習齋 습재는 권벽(權擘)의 호)가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가면서 우리 선친을 송별한 시에,
평생의 회포 좋이 푸리라 여겼더니 / 懷抱平生擬好開
담소를 이제부턴 모시기도 흔찮구려 / 笑談從此未多陪
달빛 비친 요하 건너 나는 사신길 떠나고 / 朝天我渡遼河月
유령 매화 찾으며 군은 부절(符節) 안고 가리 / 擁節君尋庾嶺梅
맡은 일 갈 길이 모두 다 염려스럽고 / 職事道途俱可念
이별이라 노쇠(老衰)라 서로 재촉하네 / 別離衰謝兩相催
공무 여가 벗 그리는 노래를 짓는다면 / 公餘倘有停雲詠
시통이나 자주자주 부쳐주기 바라네 / 佇望詩筒數寄來
라 하였는데, 선친께서는 간절하고 적당하다고 칭찬하셨다.

선친의 송행시첩(送行詩帖)에 있는 소상(蘇相 소세양을 가리킴)의 시 가운데
백옥당 이뤄진 지 오래이러니 / 白玉堂成久
황금대 하사받기 오늘이라네 / 黃金帶賜今
라는 구절을 사람들은 아름답게 여긴다. 그러나 박수암(朴守庵 수암은 박지화(朴枝華)의 호)의 시 가운데,
경월이 높이 뜬 걸 문득 보노니 / 忽看卿月上
내 옷이 화사하다 뉘 아깝다 하리 / 誰惜我衣華
라는 절구는 바로 경책(警策)이다. 그가 미암(眉庵)을 애도한 시에
천추의 푸른 바다 물결 위에서 / 千秋滄海上
백일은 큰 이름을 드리웠도다 / 白日大名垂
라 한 것은 어찌 두릉(杜陵 두보를 가리킴)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박수암이 청학동(靑鶴洞)에서 놀며 지은 시에,
고운은 당 나라 진사였으니 / 孤雲唐進士
당초에 신선을 아니 배웠네 / 初不學神仙
만촉같은 삼한의 날이라면 / 蠻觸三韓日
풍진은 온 누리에 가득찼구려 / 風塵四海天
영웅을 어이 가늠할 수 있으리 / 英雄那可測
진결은 본디 아니 전하는 것을 / 眞訣本無傳
봉래산(蓬萊山)에 한번 들어가 버린 후에 / 一入蓬山去
청향(淸香)만 팔백 년을 남아 전하네 / 淸芬八百年
는 연한(淵悍 깊고 굳셈), 간질(簡質 조촐하고 질박함)하며 사려 깊은 맛이 있으니 두보와 진자앙의 진수를 깊이 얻은 것이다.

양봉래(楊蓬萊 양사언(楊士彦)의 호)가 풍악(楓岳)에서 놀 제 돌 위에 시를 새겨
백옥경과 / 白玉京
봉래섬엔 / 蓬萊島
아득할손 연파는 예스럽고 / 浩浩煙波古
따스할손 풍일(風日)은 좋을씨고 / 熙熙風日好
푸른 복사꽃 아래 한가로이 오가며 / 碧桃花下閑來往
학 등의 피리 소리 천지는 늙어가네 / 笙鶴一聲天地老
라 했으니 신선의 흥취가 있다. 같은 때에 송경(宋暻)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서자(庶子)였다. 그 또한 이 시에 이어 읊기를
학은 높이 날아오르고 / 鶴軒昂
봉은 휘적이며 / 鳳逶遲
삼신산 아래로 굽어보고 / 三山朝下
오색구름 가운데를 질러 나네 / 五雲中飛
천지는 석 자의 지팡이라면 / 乾坤三尺杖
신세는 한 벌의 육수의로세 / 身世六銖衣
바위 꼭지 나무에 긴 칼 좋이 걸어두고 / 好掛長劍巖頭樹
맑은 샘 희롱하며 붉은 지초(芝草) 캐먹노라 / 手弄淸泉茹紫芝
고 하니, 봉래가 극도의 찬사를 보내고 돌아가신 형도 기꺼이 칭찬하였다.
봉래가 강릉 군수로 있을 적에 익지(益之 이달(李達)의 자)를 손님으로 대우했는데 사람됨이 행실이 없어 고을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다. 선친이 편지를 보내 그를 변호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밤 연기에 오동 꽃 떨어지고 / 桐花夜煙落
바다 숲에 봄 구름 사라지도다 / 海樹春雲空
고 읊었던 이달(李達)을 만약 소홀히 대한다면 곧 진왕(陳王 위(魏) 조식(曺植)의 봉호)이 응양(應瑒)ㆍ유정(劉楨)을 처음 잃던 날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고 했다. 그러나 대접이 조금 허술해지자 익지는 시를 남기고 작별하는데
나그네 가고 머물 사이란 것은 / 行子去留際
주인이 눈썹 까딱하는 사이라 / 主人眉睫間
오늘 아침 기쁜 빛을 잃게 됐으니 / 今朝失黃氣
오래잖아 청산을 생각하리 / 未久憶靑山
노국에선 원거에게 제사를 했고 / 魯國鶢鶋饗
남방에 출정가서 율무 갖고 돌아왔네 / 南征薏苡還
소 계자는 가을 바람 만나자마자 / 秋風蘇季子
또 다시 목릉관을 나가는구나 / 又出穆陵關
라 읊으니, 공이 크게 칭찬과 사랑을 더하며 그를 처음처럼 대접했다. 선배들이 붕우간에 서로 바로잡아 주는 의가 어떠했던가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풍류 있는 훌륭한 재사를 또 어찌 쉬이 얻을 수 있겠는가?
소재(蘇齋) 노(盧) 정승이 승축(僧軸)에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의 호) 및 익지(益之)의 시가 있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이 시대에 제일가는 문장으로는 / 當代文章伯
유독 이와 최를 일컫는다오 / 唯稱李與崔
라 하였는데, 대체로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중형 또한 말하기를,
“이의 시는 신라 이래로 당시(唐詩)를 법받은 자로서는 그 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그의 시 중에서,
중천의 생학은 가을 하늘에 내려오고 / 中天笙鶴下秋霄
천년의 고운은 하마 벌써 적막하구나 / 千載孤雲已寂寥
밝은 달 트인 문엔 유수가 놓였으니 / 明月洞門流水在
어디쯤 무릉교가 있는지 궁금하네 / 不知何處武陵橋
라 한 작품을 칭송하면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여겼었다.
조지세(趙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는 일찍이
“우리나라 지명(地名)은 시(詩) 속에 들여와도 우아한 맛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대기는 운몽택을 쪄서 올리고 / 氣蒸雲夢澤
파도는 악양성을 뒤흔든다네 / 波撼岳陽城
와 같은 시구를 보면 무릇 열 글자 중에서 여섯 글자가 지명이고, 그 위에 네 글자를 보탠 것이요, 그 힘쓴 곳은 다만 증(蒸)자와 감(撼)자, 이 두 글자뿐이니 시를 짓기가 어찌 수월하지 않은가.”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또한 일리는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노 정승의 시인
길은 평구역에서 다해 버리고 / 路盡平丘驛
강물은 판사정에서 깊어진다네 / 江深判事亭
청파의 저녁에 버들빛 짙고 / 柳暗靑坡晩
백악의 봄날에 하늘은 맑네 / 天晴白嶽春
같은 구절은 또한 대단히 훌륭하다. 이것은 글귀 만드는 묘법에 있을 뿐이나 쇠로서 금을 만들기에 무엇이 해로우랴?

박사암(朴思庵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의 시에
은파에 오래 젖어 이 마음 쉴새없이 / 久沐恩波役此心
새벽 닭 울자마자 조복(朝服)을 챙기누나 / 曉鷄聲裏戴朝簪
강남의 들집이 봄풀에 파묻히니 / 江南野屋春蕪沒
도리어 산승시켜 대숲을 지키라네 / 却倩山僧護竹林
라 했으니 아, 사대부로서 그 누군들 은퇴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한 치의 녹봉에 끌리어 고개를 숙이고 이 마음을 저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다. 이 시를 읽으면 한 번 탄식의 소리를 내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노소재(盧蘇齋 소재는 노수신(盧守愼)의 호)ㆍ황지천(黃芝川 지천은 황정욱(黃廷彧)의 호)은 근대의 대가로서 둘 다 근체시(近體詩)에 솜씨가 뛰어나다. 노의 오언율시(五言律詩)와 황의 칠언율시(七言律詩)는 모두 1천년 이래의 절조이다. 그러나 장편시는 이만 못하니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양경우(梁慶遇)가 일찍이 나에게
“우리나라에서는 칠언고시를 누가 잘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다. 그래서,
“글쎄 어떠할지 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니, 경우가 박(朴)ㆍ이(李)의 잠두(蠶頭)는 어떤지 차례로 물어 왔다. 내가 대답하기를,
“한퇴지(韓退之)에서 나왔으되 한 사람은 억세고 한 사람은 번거로우니 그 지극한 것은 아니다.”
고 하니,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호)의 진양형제도(晉陽兄弟圖)와 충암의 우도가(牛島歌)는 어떤지 물었다. 대답하기를
“진양형제도는 굉걸(宏烋)하나 막힘이 있고 우도가는 기이하나 음침하다.”
고 하니, 그렇다면 결국 누구에게 돌아가겠느냐 하여 대답하되,
“어잠부(魚潛夫 잠부는 어무적(魚無迹)의 호)의 유민탄(流民歎)과 이익지의 만랑무가(漫浪舞歌)일 것이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시로 본다면 기재(奇才)가 그대들 가운데서 많이 나왔소.”
하니, 그 역시 크게 웃었다.

선친께서는 자제들이 화순(和順)에 있었던 까닭에 진사 김윤(金潤)과 서로 사귀고 매양 그의 시를 칭찬하시곤 했다. 병사(兵使)가 일찍이 진남루(鎭南樓)를 건축하고는 진사를 맞아 들여 대편(大篇)의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술김에 한번 붓을 휘저어 육십 구를 이뤘는데 그 첫구에 이르기를
만 근의 무지개 들보 주작을 누르고 / 虹梁萬鈞壓朱雀
용이마엔 공손랑이 칼춤을 추네 / 龍顔舞劍公孫娘
라 했으니, 굉장한 걸작이다. 일찍이 물길로 가다가 배가 부서져 근근히 기슭에 닿자 정자에 올라 시를 짓기를
의관은 모두 쓸려 광류에 잃었지만 / 衣冠俱被狂流失
몸은 부모님 주신 대로 남았구나 / 身體猶存父母遺
높은 정자 다시 올라 갠 경치 보노니 / 更上高亭看霽景
가을 산 맑고 푸르러 새 시에 들어오네 / 秋山淡碧入新詩
라 하였으니, 높은 흥취가 대단하다. 그는 60세 후에 처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유일(遺逸)로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내가 수안(遂安)에 부임하는 날 황지천이 시로 전송하여
시재(詩才)는 우뚝하니 동료들 가운데 뛰어나나 / 詩才突兀行間出
벼슬 복은 어그러져 분수 밖에 기구하네 / 官況蹉跎分外奇
이 모두 인생에는 각기 명이 있으니 / 摠是人生各有命
유유한 남은 일은 미뤄두고 지날밖에 / 悠悠餘外且安之
라 하였으니, 자못 감개가 깊다. 공이 젊어서 옥당(玉堂)에 있을 적에 이백생(李伯生 백생은 이순인(李純仁)의 자)ㆍ최가운(崔嘉運 가운은 최경창(崔慶昌)의 자)ㆍ하대이(河大而 대이는 하응림(河應臨)의 자) 의 무리들이 함께 당운(唐韻)을 숭상하여 대궐안의 소도(小桃)를 두고 읊어 작품이 꽤 많았는데 공이 이에 화운하기를
무수한 궁중 꽃은 흰 담장에 기댔는데 / 無數宮花倚粉牆
벌 나비는 노닐며 남은 향을 좇아가네 / 游蜂戲蝶趁餘香
늙은이는 봄바람을 채 보지 못하고 / 老翁不及春風看
속절없이 태양을 향하는 해바라기 마음이로세 / 空有葵心向太陽
라 하였다. 이처럼 함축된 뜻이 심원하고 조사(措辭)가 기한(奇悍)하니 시를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되지 않겠는가? 부드러운 것 고운 것 바람 꽃 따위를 읊은 시는 오히려 그 중후한 맛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사암(思庵 박순(朴淳)의 호) 정승이 돌아가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오직 성우계(成牛溪 우계는 성혼(成渾)의 호)의 한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 그 시에
세상 밖에 운산이 깊고 또 깊으니 / 世外雲山深復深
시냇가에 초가집은 이미 찾기 어려워라 / 溪邊草屋已難尋
배견와(拜鵑窩)위에 뜬 삼경의 달빛은 / 拜鵑窩上三更月
아마도 선생의 일편단심 비추리라 / 應照先生一片心
고 하였는데,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

근대의 관각시(館閣詩)에서는 이아계(李鵝溪 아계는 이산해(李山海)의 호)가 으뜸이다. 그의 시가 초년부터 당을 법받았으며 늘그막에 평해(平海)에 귀양 가서 비로소 심오한 경지에 이르렀다. 고제봉(高霽峰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의 시 또한 벼슬을 내놓고 한거하는 가운데 크게 진보된 것을 볼 수 있었으니, 이에 문장이란 부귀 영화에 달린 것이 아니라 험난과 고초를 겪고 강산의 도움을 얻은 후에라야 묘경에 들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이공(二公)뿐만 그러하랴. 고인이 모두 이러하니 유주(柳州)로 좌천됐던 유자후(柳子厚)나 영외(嶺外)로 귀양 갔던 소동파(蘇東坡)에서도 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고죽(崔孤竹)의 시는 한경(悍勁)하며 백옥봉(白玉峯 옥봉은 백광훈(白光勳)의 호)의 시는 고담(枯淡)하다. 모두 당시(唐詩)의 노선(路線)을 잃지 않았으니 참으로 천년의 드문 가락이다. 이익지(李益之)는 이들보다 조금 크다. 그러므로 최ㆍ백을 함께 뭉쳐 나름대로 대가를 이루었다.

고죽(孤竹)의 시는 편편이 다 아름다우니 반드시 갈고 닦아 마음에 걸림이 없은 다음에야 내놓기 때문이다. 이가(二家 최경창, 백광훈)의 시를 나는 골라서 《국조시산(國朝詩刪)》에 넣은 것이 각기 수십 편인데 그 시들은 음절이 정음(正音)에 들어 맞을 만하나 그 밖의 것은 뇌동(雷同)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고죽의 오언 고시와 율시, 그리고 돌아가신 형님의 고가행(古歌行) 소재 정승의 오언율시, 황지천의 칠언율시, 이손곡(李蓀谷)ㆍ백옥봉 및 돌아가신 누님의 칠언절구를 모아 한 질의 책을 만들고 읽어보니 그 음절(音節)과 격률(格律)이 모두 고인에게 가까웠으나 한스러운 것은 기(氣)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아, 누가 그 본래 소리를 돌이킬 수 있을 것인가?

근일에는 이실지(李實之 실지는 이춘영(李春英)의 자)가 시문에 능하다. 그 시가 비록 번잡한 것 같으나 기(氣)는 나름대로 창대(昌大)하여 작가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권여장(權汝章 여장은 권필(權韠)의 호)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다. 실지의 안목은 높아서 일세의 사람들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나와 여장ㆍ자민(子敏 이안눌(李安訥)의 자)만을 괜찮다고 여겼다. 그는, ‘허는 허세가 있고 권은 말랐으며 이는 융통성이 없다.’ 고 하였는데 역시 지당한 평론이다.
실지는 망형(亡兄)의 글을 칭찬하기를,
“문장을 깊이 아는 자는 허미숙(許美叔 미숙은 허봉(許篈)의 자)이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묻기를,
“후배로서 누가 망형을 잇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신흠(申欽)의 호)이 그를 이을 만하니 청량(淸亮)함은 미치지 못하나 농후(濃厚)함은 그를 넘어선다고 봅니다.”
했다.
정송강(鄭松江 송강은 정철(鄭澈)의 호)은 우리말 노래를 잘 지었으니, 사미인곡(思美人曲) 및 권주사(勸酒辭)는 모두 그 곡조가 맑고 씩씩하여 들을 만하다. 비록 이론(異論)하는 자들은 이를 배척하여 음사(陰邪)하다고는 하지만 문채와 풍류는 또한 엄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를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연달아 있어 왔다. 여장이 그의 묘를 지나며 시를 지었는데
빈산에 나뭇잎 우수수 지니 / 空山木落雨蕭蕭
상국의 풍류는 이곳에 묻혀 있네 / 相國風流此寂寥
서글퍼라 한 잔 술 다시 권하기 어려우니 / 惆悵一杯難更進
지난날 가곡은 오늘 두고 지은 걸세 / 昔年歌曲卽今朝
라 했다. 자민이 강 가에서 노래를 듣는다[江上聞歌]의 시에
강 어귀에 그 뉘라서 미인사(美人辭)를 부르니 / 江頭誰唱美人辭
때마침 강 어귀에 달이 지는 시각이라 / 正是江頭月落時
서글퍼라 님 그리는 무한한 마음을 / 惆悵戀君無恨意
세상에선 오로지 여랑만이 알고 있네 / 世間唯有女郞知
라 했는데, 두 시가 모두 송강의 가사(歌辭)로 인해 나온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들 자민의 시는 둔하여 드날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그가 함흥에 있을 때에 지은 시에
비 개자 관가의 버들 푸르르게 늘어지니 / 雨晴官柳綠毿毿
객지에서 처음 맞은 삼월 삼짇날이라네 / 客路初逢三月三
다 함께 고향 떠나 돌아가지 못한 신세 / 共是出關歸未得
가인은 망강남의 노래를 부르지 마소 / 佳人莫唱望江南
는 청초(淸楚)하고 유려(流麗)하니 중국 사람들과의 차이가 어찌 많다 할 수 있겠는가?

중형은 고제봉(高霽峰)에게 깊이 심복하여 늘 말하기를,
“평양에 함께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교(交) 자로 운을 내니 고공(高公)이 이에 화답하기를,
마을 연댄 벼 기장은 삼추 지나 무르익고 / 連村稌黍三秋後
한 고을의 서리 바람은 시월이라 초승일세 / 一路風霜十月交
라 하므로 나도 모르게 굴복하게 되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참판(參判) 유영길(柳永吉)의 시는 비록 시경(詩境)은 협소하나 좋은 곳이 있으니,
이를테면
금슬은 성급히 해를 녹이고 / 瑟錦消年急
금 병풍은 웃음 사기 더디구려 / 金屛買笑遲
발에 비친 석류는 곱기도 하고 / 映箔山榴艶
연못으로 통하는 들물은 맑기도 하네 / 通池野水淸
등의 시구는 밝고 굳세어 즐길 만하다.”
고 하였다.
윤 사문 면(尹斯文勉)이 사명을 받들고 호남으로 떠나 어느 산을 지나가는데 산 속에 초가집이 있었다. 거기서 한 늙은이가 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펴 보니 늙은이가 다가와서 빼앗으며,
“되지 않은 작품이라 남의 눈에 보여 줄 수가 없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겨우 첫머리에 쓴 빗을 읊은 시만을 보았는데 다음과 같았다.
얼레빗 빗질하고 참빗으로 빗질하니 / 木梳梳了竹梳梳
빗질 천 번 쓸어 내려 이는 벌써 없어졌네 / 梳却千回蝨已除
어찌하면 만장 길이 큰 빗을 얻어다가 / 安得大梳長萬丈
백성들의 물것을 남기잖고 쓸어낼꼬 / 盡梳黔首蝨無餘
그 이름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전주 진사 유호인(兪好仁)이라고도 한다.

임자순(林子順 자순은 임제(林悌)의 자)은 시명이 있었는데, 우리 두 형은 늘 그를 추켜 받들고 인정해 주면서, 그의 삭설은 변방 길에 휘몰아치네[朔雪龍荒道]라는 시 한 편은 성당(盛唐)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고 했다. 일찍이 그의 말을 들으면 어느 절에 가니 승축(僧軸)에
동화에서 밥을 빌던 옛날의 학관이라 / 竊食東華舊學官
분산이 좋아 노닐 만하다지만 / 盆山雖好可盤桓
십 년이나 그리던 꿈 비로봉(飛盧峯)을 감도니 / 十年夢繞毗盧頂
베갯머리 솔바람 밤마다 서늘하네 / 一枕松風夜夜寒
라 했는데, 어사(語詞)가 심히 탈쇄(脫洒)하나 그 이름이 빠져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했다. 세상에 참으로 버려진 인재가 있어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형(仲兄)이 사명을 받들고 북방에 나가 압호정(壓胡亭)에 올라서
백옥에는 해 지난 병든 백성들 / 白屋經年病
푸른 벼를 망쳐 버린 하루 밤 서리 / 靑苗一夜霜
라 읊었는데, 임자순은 이를 극찬하고,
백옥 청묘는 열 글자의 시사(詩史)로다 / 白屋靑苗十字史
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중형도 임자순의
오랑캐 일찍이 이십 주를 엿볼 적엔 / 胡虜曾窺二十州
장군은 말 솟구쳐 봉후를 취했는데 / 將軍躍馬取封侯
지금은 절새에 정벌 싸움 없으니 / 如今絶塞無征戰
장사는 옛 역루에 한가로이 잠을 자네 / 壯士閑眠古驛樓
라는 시를 칭찬하여 협기(俠氣)가 펄펄 뛴다고 하였다.
중형이 풍산(豐山) 역에서 벽에 쓴 시 한 수를 보니
세상에는 준재를 알아 줄 이 없는데 / 世上無人識俊才
누굴 위해 황금으로 높은 대를 쌓았나 / 黃金誰爲築高臺
변방 서리 검푸른 귀밑털 다 물들이니 / 邊霜染盡靑靑鬢
필마(匹馬)로 음산을 열 번이나 오가네 / 疋馬陰山十往來
라 했다. 말 기운이 감개하고 매우 훌륭하여 우졸(郵卒)에게 누구의 작품인 가고 물었더니 병영 군관 손만호(孫萬戶)가 지은 것이라고 했다 한다.
임진년(1592, 선조25) 6월 28일은 명종(明宗)의 기일(忌日)이라 신제이(申濟而 제이는 신노(申櫓)의 자) 가 곡구역(谷口驛)에서 시를 쓰기를
선왕께서 이 날에 군신을 버리실 적 / 先王此日棄群臣
유언은 은근히 성인에게 부탁했네 / 末命慇懃托聖人
스물이라 여섯 해에 향불이 끊어지니 / 二十六年香火絶
소리쳐 우는 사람 늙은 유민(遺民)뿐이로세 / 白頭號哭只民遺
라 하니, 보는 자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의 누님 난설헌(蘭雪軒)과 같은 시기에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조백옥(趙伯玉 백옥은 조원(趙瑗)의 자)의 첩이다. 그녀의 시 역시 청장(淸壯)하여 지분(脂粉)의 태가 없다. 영월(寧越)로 가는 도중에 시를 짓기를
오일 간은 장간이요 삼일 간은 영월(寧越)이니 / 五日長干三日越
노릉의 구름에 슬픈 노래 목이 메네 / 哀歌唱斷魯陵雲
첩의 몸도 이 또한 왕손의 딸이라 / 妾身亦是王孫女
이곳의 두견 소린 차마 듣지 못할레라 / 此地鵑聲不忍聞
라 하니, 품은 생각이 애처롭고 원한을 띠어 익지의
동풍에 촉제(蜀帝) 혼 괴롭고 / 東風蜀魄苦
석양에 노릉은 싸늘하네 / 西日魯陵寒
라는 시구와 한가지로 쓰라린 가락이다.

우사(羽士) 전우치(田禹治)는 사람들의 말에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고 하며 그의 시는 매우 청월(淸越)하다. 일찍이 삼일포(三日浦)에서 지은 시에
늦가을 맑은 못에 서리 기운 해맑은데 / 秋晩瑤潭霜氣淸
공중의 퉁소 소리 바람 타고 내려오네 / 天風吹下紫簫聲
푸른 난(鸞)은 오지 않고 하늘 바다 넓으니 / 靑鸞不至海天闊
서른 여섯 봉우리에 가을 달은 밝도다 / 三十六峯秋月明
라 하니, 이를 읽노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젊었을 적에 정백련(鄭百鍊)을 만나 본 일이 있었다. 그때 그가 병이 들어 귀신을 만났는데 절구를 지을 줄 알더라고 했다. 그의 시 중 가장 좋은 것으로
봄 잠을 자고 나서 술을 따르니 / 酒滴春眠後
발 걷은 앞에서 꽃은 날리네 / 花飛簾捲前
인생이 얼마나 된단 말가 / 人生能幾許
비 내리는 하늘 슬피 바라보노라 / 悵望雨中天
와 또
만리라 거센 파도에 바다 해는 저무는데 / 萬里鯨波海日昏
벽도꽃[碧桃花] 그림자는 하늘 문에 비치네 / 碧桃花影照天門
난새 수레 한 번 가서 천년이나 고요터니 / 鸞驂一息空千載
후령의 영소 소리 한밤중에 들리네 / 緱嶺靈簫半夜聞
는 그 음운이 맑고 그윽하여 인간 소리가 아니었다.

부안(扶安)의 창기 계생(桂生)은 시에 솜씨가 있고 노래와 거문고에도 뛰어났다. 어떤 태수가 그녀와 가깝게 지냈다. 나중 그 태수가 떠난 뒤에 읍인들이 그를 사모하여 비를 세웠는데 계생이 달밤에 그 비석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하소연하며 길게 노래했다. 이원형(李元亨)이라는 자가 지나다가 이를 보고 시를 짓기를
한 가락 요금은 자고새를 원망하나 / 一曲瑤琴怨鷓鴣
묵은 비는 말이 없고 달만 덩실 외롭네 / 荒碑無語月輪孤
현산이라 그날 양호(羊祜)의 비석에도 / 峴山當日征南石
눈물을 떨어뜨린 가인이 있었던가 / 亦有佳人墮淚無
라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절창이라 했다. 이원형은 우리 집에 드나드는 관객(館客)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와 이여인(李汝仁)과 함께 지냈던 까닭에 시를 할 줄 알았다. 다른 작품도 좋은 것이 있으며, 석주(石洲 권필(權韠)의 호)가 그를 좋아하고 칭찬했다.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葛川) 임훈(林薰)을 따라 광주(光州)에 있으면서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호)의 별장에 올라 그 누각에 전인(前人)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
라 하니 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자가 있어 또한 시에 능했다. 일찍이 문지기를 했는데, 그의 동류(同類)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하고 연약했다. 까닭에 권여장은 만당(晩唐)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체라고 일컬었으니 대개 그 연약함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본조(本朝)의 승려로는 시에 능한 자가 매우 드문데 오직 참료(參寥)가 으뜸이다. 그가 어떤 사람에게 준 시에
수운 같은 발자취 이미 여러 해더니 / 水雲蹤迹已多年
의기가 서로 맞아 인연됨을 기뻐하네 / 針芥相投喜有緣
종일토록 객헌에 봄날은 적막한데 / 盡日客軒春寂寞
지는 꽃 눈처럼 비 갠 하늘에 날리네 / 落花如雪雨餘天
라 하니, 준결(俊潔)한 맛이 있다.

[주D-001]한밤중……춤을 추고 : 진(晉) 나라 조적(祖逖)이 유곤(劉琨)과 함께 사주 주부(司州主簿)로 재직할 때 매우 가깝게 지냈다. 어느날 같이 잠을 자다가 밤중에 닭우는 소리를 듣고는 곤의 발을 차서 깨우면서 “이것은 좋은 소리이다.” 하고는 일어나서 춤을 춘 고사를 가리킨다. 《晉書 卷62 祖逖傳》
[주D-002]몇 번이나……일렀던고 : 진(晉) 나라 왕맹(王猛)이 환온(桓溫) 앞에서 거리낌없이 이를 잡으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고사. 《晉書 苻堅載記》
[주D-003]최예산(崔猊山) : 예산은 고려 말의 문인 학자인 최해(崔瀣)의 호인 예산농은(猊山農隱). 가세가 빈한하여 만년에는 사자갑사(獅子岬寺)에서 밭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저서에 《졸고천백(拙藁千百)》ㆍ《동인지문(東人之文)》이 있다.
[주D-004]순문약(荀文若) : 문약은 후한(後漢) 시대 사람 순욱(荀彧)의 자. 절개를 굽혀 조조(曹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분무사마(奮武司馬)를 지냈다. 《三國志 卷10 荀彧傳》
[주D-005]관유안(管幼安) : 유안은 후한 관녕(管寧)의 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절개를 지키며 산속에 묻혀 살았다. 《三國志 卷11 管寧傳》
[주D-006]서시(西施)를……떠날 줄 : 서시는 춘추(春秋) 시대 월(越) 나라의 미녀(美女).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자, 범려(范蠡)가 서시를 취하다가 오왕 부차에게 바쳐 그의 마음을 황란(荒亂)하게 만들어서 오 나라를 패망시켰는데, 그 후 서시는 끝내 범려를 따라 배를 타고 오호(五湖)로 떠났다는 고사이다.
[주D-007]고소대(姑蘇臺) : 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 나라를 격파하고 미인 서시(西施)를 얻어 그를 거처하게 하기 위해 건축한 대(臺) 이름.
[주D-008]유랑(劉郞)이……생겼을 걸 : 잠총(蠶叢)은 촉왕(蜀王)의 선조. 촉주(蜀主) 유비(劉備)가 어렸을 때 중종(中宗)의 아이들과 뽕나무 아래서 놀 때에 농담으로 “내가 반드시 이 뽕나무처럼 생긴 우보개거(羽葆蓋車)를 타게 될 것이다.” 한 고사를 가리킨다. 《三國志 卷32 劉備傳》
[주D-009]장타유(張打油) : 저속한 시를 뜻함. 《양승암집(楊升庵集)》에 의하면, 당(唐) 나라 장타유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노란 개는 몸 위가 하얗게 되고, 하얀 개는 몸 위가 부어올랐다.[黃狗身上白 白狗身上腫]"고 한다.
[주D-010]조원각(朝元閣) : 노자(老子)를 제사지내는 도관(道觀)의 이름.
[주D-011]노국(魯國)에선……했고 : 분수에 지나친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한다. 노(魯) 대부 장문중(莊文仲)의 인(仁)스럽지 못한 것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원거(爰居 : 바다새의 일종)에 제사 지낸 것이라고 하였다. 《左傳 文公 2年》
[주D-012]남방에……돌아왔네 : 남의 비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마원(馬援)이 교지(交趾)를 평정하고 돌아올 때 풍질(風疾)에 좋은 의이인(薏苡仁)을 여러 수레에 싣고 왔는데 그를 미워하는 자들이 금은보화를 싣고 왔다고 비방하였다.
[주D-013]배견와(拜鵑窩) : 박순(朴淳)의 별장 이름.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菴)으로 본관은 충주(忠州)임.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 벼슬은 영의정을 지냈음.
 성호사설 제7권
 인사문(人事門)
백대붕(白大鵬)
청장관전서 제53권
이목구심서 6(耳目口心書六)

초공(焦贛 공은 초연수(焦延壽)의 자)의《역림(易林)》의 괘(卦)는 모두 4천 96인데, 말이 매우 심오하여 세상에서 특유(特有)한 문자(文字)이니, 아마도 그 마음이 영통(靈通)하여 사물(事物)에 대하여 느끼지 않은 것이 없었던 때문인 것 같다. 또 세상을 욕함이 매우 혹독하여 한숨짓고 눈물 나는 곳이 많았는데, 이는 원성(元成 한 원제(漢元帝)와 한 성제(漢成帝))의 시대에 정치가 날로 쇠하였으므로 이 책에다 울분을 가탁해 표현한 글이 아닌가 싶다. 또 회학(詼謔)이 배를 쥐고 웃게 하는 것이 있으니 또한 웃음거리이다. 그렇다면 초 선생은 군자일까. 종백경(鍾伯敬 백경은 종성(鍾惺)의 자)이 말하기를,
“참언(讖言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방 같기도 하고, 재담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우의(寓意) 같기도 하고, 탈속(脫俗)한 것 같기도 하여, 생각이 남다르고 정(情)이 그윽하며, 글이 심오하고, 판단이 명쾌하다.”
하였고, 또,
“수십백 언(言)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한 글자ㆍ한 문구 속에 명확하게 나타냈다.”
했으니, 참으로 명언(名言)이다.

초공의《역림》의 주사(繇辭 점사(占辭))는 영험(靈驗)이 특이하였다. 우리나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어떤 사람이 세상 일을 점치니,
“글이 교묘하고 풍속이 쇠했으니 장차 대질(大質 옛날의 질박한 것)로 돌아가리라. 엎어져 죽은 시체가 삼대같이 널려 있고 피가 흘러 절굿공이를 뜨게 하며 사람들이 모두 그 어미만 알 뿐 아비를 모르게 되고서야 싸움이 그치리라.”
했는데, 후에 임진왜란 때 명 나라 군대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을 때 부녀자를 간통하여 자식을 많이 낳았으니, 그 말이 비로소 징험(徵驗)되었다. 근자에 또 들으니, 서울의 한 백성이 아내를 잃어버리고 이웃 선비에게 와서 점쳐주기를 청했는데, 선비는 본디 점칠 줄을 몰랐으므로 초공의《역림》에 의하여 점괘를 뽑아보니,
“남산(南山)의 대확(大玃)이 내 아름다운 아내를 훔쳤다.”
고 나왔다. 선비가 이르기를,
“그대는 시험삼아 남산으로 가서 계속해서 대확을 불러보라. 반드시 대답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이어 아내를 찾게 될 것이다.”
했다. 백성이 그 말대로 했더니 과연 키 큰 한 총각이 문을 나와서 대답했으며, 또 문 안에 절구질하는 여자가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 아내였다고 한다.

《주역약례(周易略例)》는 진(晉) 나라 왕필(王弼)이 지은 것이다. 유가(儒家)에서 비록 노장(老莊)의 명분과 이론을 가지고《주역》을 논했음을 비방하지만, 그 문사(文辭)가 분명하고도 깨끗하여 읽을 만하다. 형숙(邢璹)가 말하기를,
“《약례》는 크게는 일부(一部)의 지귀(指歸)를 총괄했고 작게는 육효(六爻)의 득실을 밝혀서, 역순(逆順)의 이치대로 따르고 정위(情僞)의 발단(發端)에 응변(應變)하였으므로 효용(效用)에는 행장(行藏)이 있고 사(辭)에는 험이(險易)가 있으니, 이를 보는 자는 천지를 경위(經緯)하고 귀신을 탐측(探測)하여 널리 나라를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다.”
했으니, 또한 믿음이 독실하다 하겠다.

《약례》의 명상(明象)에,
“대저 상(象)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고 말은 상을 밝히는 것이다.”
했는데, 형도의 주(注)에,
“건(乾)은 능히 변화할 수 있다. 따라서 용(龍)은 변화하는 동물이므로 건상(乾象)을 밝히려면 용을 빌어서 건을 밝히고 용을 밝히려면 말을 빌려서 용을 상징하는데, 용은 뜻을 상징하는 것이다.”
했다.《약례》에,
“말은 상을 밝히는 것인데 상을 얻으면 말을 잊고 상은 뜻을 지니는 것인데 뜻을 얻으면 상을 잊으니, 마치 올무는 토끼를 잡는 것인데 토끼를 잡으면 올무를 잊고, 통발은 고기를 잡는 것인데 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말은 상의 올무이고 상은 뜻의 통발인 것이다.”
했으며, 주에,
“이미 용상(龍象)을 얻었으면 그 말은 잊어도 되고, 이미 건상을 얻었으면 그 용은 버려도 된다.”
했다. 《약례》에,
“같은 유(類)를 미루어 그 상(象)으로 삼을 수 있고 뜻에 맞으면 그 징험으로 삼을 수 있다. 뜻이 진실로 건실(健實)에 있다면 하필 말이겠으며, 유가 진실로 유순(柔順)에 있다면 하필 소랴. 어떤 자는 말[馬]을 건으로 고정하였는데, 비괘(賁卦)를 따져 보면 말은 나왔으나 건은 없다. 그렇다면 허위(虛僞)의 말이 퍼져 통기(統紀)를 세우기 어렵다.”
했다. 나는 그 말이 극히 이치에 맞으니 이를 미루어서 글 읽는 방법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서는 그 말의 격조(格調)가 후세의 난만(爛熳 아름답게 꾸며진 것)함만 못하다는 것으로 노장(老莊)의 학문이라 하여 배척하는 것일까. 마음을 화평하게 하여 고요히 읽는다면 지극한 도리(道理)를 볼 수 있으니, 진대(晉代)의 청담(淸淡 노장의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설(說)을 말한다.)이라는 것으로 탓하여 공격해서는 안 된다.

경방(京房)은 초공(焦贛)의 제자로《역전(易傳)》을 지었는데, 실로 세응점(世應占 세응은 경방 역학(易學)의 용어로서 괘효(卦爻)가 상응(相應)함을 말한다.)의 원조(元祖)이다. 그 내용에는 삼역(三易《연산(連山)》ㆍ《귀장(歸藏)》ㆍ《주역(周易)》)을 분별하고 오행(五行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을 운행하고 사시(四時)를 바르게 하고 24기(氣 기는 절기를 말하는데 1년은 24절기이다)를 조절하고 72후(候 24절기를 각각 3후로 나눈 것)를 살피고 5성(星 금성ㆍ목성ㆍ수성ㆍ화성ㆍ토성)의 위치를 바르게 하고 28수(宿)가 제자리에 놓이게 하며, 세응의 비복(飛伏 경방 역학의 용어로서 괘가 나타나는 점이 비, 나타나지 않는 것이 복이다.)ㆍ건적(建積 음양 오행의 운행)이 있는데 경씨(京氏)의 글이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분열되어 각각 다르다.
원우(元祐 송 철종의 연호) 연간에 고려에서 서적을 바쳤는데《경씨주역점(京氏周易占)》 10권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전하는 것은《역전》3권이 있을 뿐이다. 송 나라 때 고려에서 바친 서적 가운데《안자조의(顔子朝義)》가 있었으나 의심컨대 위서(僞書)인 것 같았는데,《역전》도 그때에 함께 바쳤던 것인 듯하다.
그러나 고려는 어디에서 이것을 얻어서 다시 중국에 바친 것일까. 바친《역전》이 오늘날 중국에는 비록 전하지 않는다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전하지 않음은 어찌된 것일까. 그것도 또한 위서(僞書)가 아닐까. 상고하건대, 초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 도(道)를 깨달아 몸을 망칠 자는 경생(京生)이다.”
했으니, 더욱 초군(焦君)이 군자임을 알겠다.

삼분(三墳)의 글이 송 나라 원풍(元豐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연간에 당주(唐州)의 민가(民家)에서 비로소 나왔다.《주례(周禮) 태복(太卜 춘관(春官)에 속한다)에,
“삼역(三易)은 첫째《연산(連山)》, 둘째《귀장(歸藏)》, 셋째《주역》이다.”
했다. 두자춘(杜子春)은 말하기를,
“《연산》은 복희(伏羲)가,《귀장》은 황제(黃帝)가 지었다.”
했고, 정현(鄭玄)은,
“하(夏)에서는《연산》, 은(殷)에서는《귀장》, 주(周)에서는《주역》이라고 했다.”
했고, 공안국(孔安國)은,
“복희ㆍ신농(神農)ㆍ황제의 글을 삼분이라고 한다.”
했고, 공영달(孔穎達)은,
“《세보(世譜)》등 글을 상고하건대, 신농을 연산씨 또는 열산씨(列山氏)라고 하고 황제를 귀장씨라고도 했으니, 이는 모두 대호(代號 살던 고장 이름을 가지고 이름을 대신하는 것)이다.《주역》에 주(周)를 일컫게 된 것도 기양(岐陽)의 땅 이름을 취한 것이다.”
했고, 정어중(鄭漁仲 어중은 정초(鄭樵)의 자)은,
“하후씨(夏后氏)의《역》이 당 나라 때 와서 비로소 나왔으나 지금은 없다.《귀장》에 대하여는《당서(唐書)》에 사마응(司馬膺)의《귀장주》13권이 있었으나 지금은 역시 없고, 《수서(隋書)》에는 참군(參軍) 설정(薛貞)의《귀장주》13권이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초경(初經)ㆍ제모(齊母)ㆍ본저(本著) 3편뿐인데, 글이 궐란(闕亂 글이 빠져 있고 내용이 뒤섞인 것)이 많은데다가 그 말이 질박(質朴)하고 그 뜻이 예스러우니, 뒷사람이 능히 이런 글을 지을 수 있겠는가.”
했고, 마단림(馬端臨)은,
“《연산》ㆍ《귀장》은 하(夏)ㆍ상(商)의《역》이다. 그렇지만 《귀장》은《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서《연산》은《수서(隋書)》경적지(經籍志)에 없으니, 아마도 두 글이 진(晉)ㆍ수(隋) 사이에서 나왔을 것이다.《연산》은 유현(劉炫)이 지은 위작(僞作)이니,《귀장》 역시 이 같은 종류이다.”
했고, 장준경(章俊卿 준경은 장여우(章如愚)의 호)이 말하기를,
“자춘의 말이 옳은 것일까.《귀장》에서 무엇을 근거로 요(堯)가 순(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냈다고 하고, 또 무엇을 근거로 은왕(殷王)을 말했단 말인가. 그렇다면《귀장》은 황제의 글이 아니고《연산》 또한 복희의 글이 아닌 것이다. 강성(康成 정현의 자)의 말이 나은 것일까.《세보》에서 무엇을 근거로《연산》ㆍ《귀장》은 모두 대호(代號)라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또한 하(夏)ㆍ상(商)의 글이라고도 할 수 없다. 아마도 복희ㆍ황제가 그 이름을 만들고 하ㆍ상 때에 이를 인하여서《역》을 만든 것 같다.”
하고, 예운(禮運《예기》편명)에,
“내가 곤건(坤乾)을 얻었다.”
하였는데, 그 주해(注解)에,
“상 나라의 음양서(陰陽書)를 얻은 것인데, 그 남아 있는 책 가운데《귀장》이 있다.”
했다.《귀장》이 상 나라의 글이라면《연산》이 어찌 하 나라의《역》이 아니랴. 황보 밀(皇甫謐)이 말하기를,
“하 나라는 염제(炎帝)를 인하여《연산》이라고 했고, 은 나라는 황제를 인하여《귀장》이라 했다.”
했는데,《연산》이 과연 복희의 글이라면 황보밀이 또 어떻게 염제를 인했다고 말할 수 있었으랴. 주(周) 나라는 자월(子月)을 정삭(正朔)으로 삼았는데 대개 천통(天統)을 얻은 것이므로《주역》은 건(乾 건괘(乾卦))을 첫머리로 했고, 상(商) 나라는 축월(丑月)을 정삭으로 삼았는데 실로 지통(地統)을 얻었으므로《상역(商易)》은 곤(坤)을 첫머리로 했고, 하(夏) 나라는 인월(寅月)을 정삭으로 삼았는데 실로 인통(人統)을 얻었으므로 이를 괘의 첫머리로 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간(艮)이 정월에 가깝기 때문에《하역(夏易)》은 간을 첫머리로 했다. 오내(吳萊)가 말하기를,
“《주역》은 오래되었다. 선천(先天)의《역》은 복희가 그린 것인데, 문왕(文王)이 이를 정리했다.”
했는데, 복희가 어떻게《연산》을《역》으로 하고 또 간을 괘의 첫머리로 했는가. 대저 연산은 열산(列山)인데 열산은 본디 신농의 옛 나라이며, 괘의 첫머리인 간은 또 산이 포개어 있는 현상이 있다.《귀장》은 본디 황제의 별호(別號)요, 다른《역》이 아니라《곤건역(坤乾易)》이 이것인데 또 어찌 쪼개어서 둘로 할 수 있으랴. 내가 이제 널리 제가(諸家)의 설(說)을 찾아 모아서 간추려 보건대 말이 각각 다른데, 장씨(章氏)의 말이 조금 낫다고 보겠다.
그러나 3역(易)이 스스로 한 글이 되고《삼분》이 스스로 한 글이 되니, 혼동해서 말해선 안 된다. 진가(眞假)를 논할 것 없이《연산》ㆍ《귀장》은 순전히 점사(占辭)인데, 지금은 얻어 볼 수 없다. 이른바《삼분》을 지금 본다면, 삼역의 괘상을 열기(列記)하고 성기(姓記)ㆍ황책(皇策)ㆍ정전(政典) 등을 실었는데,《상서(尙書)》의 전(典 요전(堯典)ㆍ순전(舜典)), 모(謨 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ㆍ익직모(益稷謨))를 모방한 것이다. 그리고《연산》ㆍ《귀장》은 각각 글이 있는데도, 이른바《곤건역》은 어찌해서 그 글이 없단 말인가.《곤건역》을 만약《주역》으로 돌린다면,《삼분》에 무엇 때문에 형분(形墳)ㆍ지황(地皇)ㆍ헌원씨(軒轅氏)를 기재하고《곤건역》에는 ㆍ양음(陽陰)ㆍ토수(土水)ㆍ우풍(雨風) 등 명목을 나열했을까. 생각건대, 역(易 《연산》ㆍ《귀장》)을 위작(僞作)한 자가《주례》의 3역 설만 따랐고 따로《주역》을 편찬하지 않았고,《삼분》을 위작한 자는 공안국의 복희ㆍ신농ㆍ황제의 글이라는 설에 좇아 성기 등 편을 나누어 편찬하고 아울러 3역을 만들었는데 괘상(卦象)이 스스로 모순되었음을 알기가 어렵지 않다.

이제《삼분》의《곤건역》을 읽어 본다면 ‘일산의 높은 봉우리, 월산의 비스듬한 산마루, 운기는 채색이 영롱, 산기는 자욱, 천기는 물 위에 떴다. [日山危峯月山敍巓雲氣散彩山氣籠煙川氣浮光]’ 등 말은육조(六朝)의 구기(口氣)이지 어찌 당요(唐堯) 이전의 문자이겠는가. 또 복희의 책사(策辭)에 이른바 ‘천왕이 전교대에 올랐다.[天王升傳敎臺]’는 것도 또한 천근(淺近)하다.《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 이미 이 같은 명목이 없고 그 후 수천년을 내려오면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인데, 송 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민간에서 나왔단 말인가. 도리어 빙거(憑據)가 있는《급총서(汲冢書)》만 못하다.
그 처음으로 얻어서 서문(序文)을 쓴 자가 독신(篤信)하여서 윤정(胤征《서경(書經)》 하서(夏書)의 편명)에서 정전(政典)의 ‘때에 앞서는 자도 죽여서 용서하지 않고, 때에 미치지 못하는 자도 죽여서 용서하지 않는다.[先時者殺無赦不及時者殺無赦]는 것을 인용하였으니, 어찌 뒷사람이 속일 수 있는 것이랴.’ 했다. 나는 간사한 자가 위서를 만들려면 몰래 고서(古書)를 인용하여서 그 흔적을 어지럽힌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또한 잔재주인 것이다. 양(梁) 나라 주흥사(周興嗣)가 지었다는《천자문(千字文)》을 한 장제(漢章帝)가 썼음은 어찌된 것인가. 이것도 또한 이 같은 종류이다.

자하(子夏)와 자공(子貢)은 모두 성인(聖人)의 문(門)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이니, 그 시(詩)를 말함이 응당 이설(異說)이 없어야만 하는데도, 이제 자하의《모시(毛詩)》의 소서(小序) 및 자공의 시전(詩傳)을 읽어 본다면 어찌 그다지도 상반(相反)되는가. 시험삼아 관저(關雎《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편명(篇名))를 가지고 논하겠다.
소서에서는,
“이는 숙녀(淑女)를 얻어 군자에게 짝지어줌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심이 어진 여자를 인진(引進)하는 데 있는 것이요, 여색(女色)에 빠지게 하는 데 있지 않으며, 요조(窈窕 여인의 용모와 심덕이 다 같이 아름다운 것)한 어진 여자를 생각할 뿐 선도를 해칠 마음이 없는 것이다.”
했는데, 시전에서는,
“문왕(文王)의 비(妃) 사씨(姒氏)가 숙녀를 얻어서 내직(內職)에 공봉(供奉)케 할 것을 생각하여 관저를 지은 것이다.”
했으니, 서로 크게 다르다.
주자(朱子)가 동한(東漢)의 위굉(衛宏)이 지은 것으로 의심했지만, 그 지내온 내력이 멀다는 것으로 오히려 그 동안에 혹시 참말로 전수(傳授)한 징험(徵驗)이 있을 수도 있는 것으로 보았다. 굉은 사만경(謝曼卿)에게 배우고 만경은 모공(毛公)에게 배웠는데, 반고(班固)가 말하기를,
“모공(毛公)이 스스로 자하에게서 나왔다고 했는데, 정현은 곧장 고서(古序)를 가리켜 자하가 지었다고 했으니, 실로 모공의 말을 따른 것이다.”
했는데, 이제 그 원류(源流)를 상고하건대 이와 같다. 그렇다면 위굉이 그 스승이 전한 말을 엮어서 만들었는데, 정현은 이를 구실(口實)로 하여 자하의 글이라고 하는 것일까.

이제 소서를 상고하건대, 편찬한 풍(風)ㆍ아(雅)ㆍ송(頌)의 순서가 주전(朱傳 주자의《시집전(詩集傳)》)과 같으니, 주자가《모전 (毛傳 모장(毛萇)의《시전(詩傳)》)》을 따른 것은《모전》은 소서와 서로 표리(表裏)가 되기 때문이다. 다만 생시(笙詩)의 차례는 주자가《의례(儀禮)》를 따랐으므로 소서와 같지 않다.

사가시(四家詩) 가운데, 한(漢) 나라 때 제인(齊人) 원고(轅固)가 지은《시전》은 위(魏) 나라 시대에 없어지고, 노인(魯人) 신배(申培)의《시전》및《시설(詩說)》중《시전》은 진(晉) 나라 시대에 없어져서 지금은《시설》 1권만이 전하고, 역시 한대의 연인(燕人)인 한영(韓嬰)이 지은《내전(內傳)》ㆍ《외전(外傳)》이 있었는데, 지금은 단지《외전》이 있을 뿐이며, 역시 한대의 조인(趙人) 모장(毛萇)의《시전》이 있는데 이를 모두 합하여 4가(家)라 한다.
한대(漢代)에는 단지 3가(家 원고ㆍ신배ㆍ한영)의 글만을 학관(學官)을 두어 가르쳤는데, 위굉ㆍ가규(賈逵)ㆍ마융(馬融)ㆍ정현(鄭玄)의 무리가 모두《모시(毛詩)》를 좇기에 이르렀으므로 배우는 자가 흡연(翕然)히 이를 따랐으며 위(魏)ㆍ진(晉)에 이르러는 3가가 모두 폐하여졌다. 복상(卜商)에서 10여 번 전하여 노 나라 사람 모형(毛亨)에 이르렀고 형은 장(萇)에게 전수하였으니, 장은 소모공(小毛公)이고 형은 대모공(大毛公)이다.

자공의《시전》과 신배의《시설》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그 편차(編次)의 차례가 두 글이 다 같이 주남(周南)ㆍ소남(召南)ㆍ노(魯)ㆍ패(邶)ㆍ용(鄘)ㆍ위(衛)ㆍ왕(王)ㆍ제(齊)ㆍ위(魏)ㆍ당(唐)ㆍ조(曹)ㆍ증(鄫)ㆍ정(鄭)ㆍ진(陳)ㆍ진(秦)ㆍ소아(小雅)ㆍ소아속(小雅續)ㆍ소아전(小雅傳)ㆍ대아(大雅)ㆍ대아속(大雅續)ㆍ대아전(大雅傳)ㆍ주송(周頌)ㆍ상송(商頌)으로 되어 있는데,《시설》에는 단지 상송 위에 두 개의 송(頌) 자가 있을 뿐이다. 구양공(歐陽公 송 나라의 구 양수(歐陽脩))이 말하기를,
“주남ㆍ소남ㆍ패 ㆍ용ㆍ위ㆍ왕ㆍ정ㆍ제ㆍ빈(豳)ㆍ진(秦)ㆍ위ㆍ당ㆍ진(陳)ㆍ조로 되어 있는 이것은, 공자가 시(詩)를 산수(刪修 쓸데없는 부분을 깎아 내어 정리하는 것)하기 전의 것으로 주(周) 나라 태사(太師 악관(樂官)의 우두머리)의 악가(樂歌)의 차례이고, 주남ㆍ소남ㆍ패ㆍ용ㆍ위(衛)ㆍ왕ㆍ회(檜)ㆍ정ㆍ제ㆍ위(魏)ㆍ당ㆍ진(秦)ㆍ진(陳)ㆍ조ㆍ빈으로 되어 있는 이것은, 정씨(鄭氏)의《시보(詩譜)》의 차례이다.”
하였는데, 상고하건대, 모두 소서(小序)ㆍ주전(朱傳)과 같지 않다.

자공(子貢)의《시전(詩傳)》과 신배(申培)의《시설(詩說)》에 서리(黍離)는 대동소이하니 또 놀랍고도 괴이하다.《시전》에는,
“왕세자 의구(宜臼)가 그 임금 유왕(幽王)을 시해(弑害)하고 낙읍(雒邑)에서 자립(自立)했는데, 윤백(尹伯) 봉(封)이 서도(西都 호경을 말한다)를 지나다가 슬퍼서 서리를 지었다.”
했고,《시전》에는,
“유왕이 신(申)을 치니 신후(申侯)가 희(戲)에서 맞아 싸워서 왕을 쏘아 시해하고 평왕(平王)을 신에서 세웠다. 신에서 낙읍으로 옮길 적에 진백(秦伯)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견융(犬戎 서쪽 지방에 있었던 오랑캐)을 호경(鎬京)에서 몰아내게 하고, 곧이어 윤백 봉을 보내어 진백의 군대를 호궤(犒饋)하게 했는데, 봉이 옛날의 종묘(宗廟)ㆍ궁실(宮室)을 지나다가 진 나라 사람이 모두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서 벼와 기장이 자란 것을 보고 방황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
했다. 이른바 의구가 유왕을 시해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나《시설》이《모전(毛傳)》에 조금 가깝다.《시전》에는,
“제 양공(齊襄公)이 왕을 - 2자 원문 빠짐 - 했으므로 주(周) 나라 사람이 이를 부끄럽게 여겨서 하피농의(何彼穠矣《시경》국풍의 편명)를 지었다.”
했는데,《시설》에는,
“하피농의는 제 양공(齊襄公)이 노 환공(魯桓公)을 죽이자 장왕(莊王 주 나라 왕)이 일을 화해시키려고 하여, 영숙(榮叔 주 나라의 대부)을 시켜 환공에게 명(命 작위(爵位)를 주는 것)을 내리고 이어서 장공(莊公 노 환공의 뒤를 이은 임금)으로 하여금 주혼(主婚)케 하여 환왕(桓王)의 누이를 양공에게 시집보내게 하니, 주 나라 사람이 이를 슬퍼하여 지은 시이다.”
했다. 두 사람이 모두 이 시를 소남(召南)에 넣지 않고 왕풍(王風)에 넣었으니, 이는 근리(近理)하다. 평왕(平王 주 나라의 왕)과 제후(齊侯 제 양공)는 분명히 그 사람이 있는데 고주(古注)에 ‘오정의 왕과 제일의 후[午正之王齊一之侯]’라고 한 것은 알 수 없다. 《춘추(春秋)》의 장공(莊公) 원년에,
“왕희(王姬)가 제 나라로 시집갔다.”
고 썼는데 이는 환왕의 딸이자 평왕의 손녀가 제 양공에게 하가(下嫁 왕녀가 신하의 집에 시집가는 것)했기 때문에 시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니《시설》에서 이른바 환왕의 누이라는 것은 모순이다. 그 시를 자세히 완미(玩味)하여 보면, 위의(威儀)가 저와 같고 가벌(家閥)이 저와 같으니 아름답긴 아름답지만, 양공이 선한 사람이 아닌 뜻을 은연중에 볼 수 있으니, 부끄럽게 여기고 슬퍼한 것이다.
정어중(鄭漁仲)이 말하기를,
“3백 편의 시는 모두 노래랄 수 있는데, 노래한다면 각각 그 나라의 소리에 따라야 한다. 주남(周南)ㆍ소남(召南)ㆍ왕풍(王風)ㆍ빈풍(豳風)의 시가 다 같이 주 나라에서 나왔지만 네 나라의 소리로 나뉘어졌고 패(邶)ㆍ용(鄘)ㆍ위풍(衛風)의 시가 다 같이 위(衛) 나라에서 나왔지만 세 나라의 소리로 나뉘어졌다.”
하였다. 그렇다면 하피농의(何彼穠矣)는 무슨 까닭에 왕풍(王風)에 넣지 않았을까. 아마도 시를 만든 시대는 동주(東周)이고 시를 모은 곳은 소남(召南)이기 때문인 것 같다.

《한시외전(韓詩外傳)》10권은, 경전(經典)ㆍ자사(子史 제자(諸子)의 글과 사서(史書))를 이것저것 인용하여 추연(推演)하여서 약간 뜻을 달리하는 것이 있고, 간혹 자기 말을 넣기도 했다. 대체로 우언(寓言 다른 사물을 가탁하여 의견이나 교훈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말)이 많아서 때로는 도가(道家)의 흐름과 같고 혹 범위가 참위(讖緯 미래를 예언하는 것)에 까지도 미치고 있으니, 이는 한유(漢儒) 고유(固有)의 풍습인 것이다. 그러나 문장이 뛰어나서 읽을 만하고, 그 사기(辭氣)가 간측(懇惻)하여서 깨우칠 만하다. 효자의 말을 많이 인용하여서 애절(哀絶)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사람은 효제(孝悌)하는 자로 여겨진다. 비록 극히 순진(醇眞)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또한 유자(儒者)의 무리이다. 멀리 한 가지 일을 인용하고는 끝에 가서 반드시 시의 말을 따서 풀이하고 있지만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우활(迂闊)한 점이 있다.《한시》에 ‘태평한 시대에는 벙어리ㆍ귀머거리ㆍ절뚝발이ㆍ애꾸ㆍ뻗정다리ㆍ난쟁이ㆍ요사(夭死)가 없다.《시경》 주송(周頌) 유고(有鼓)에,
장님 악사여 장님 악사여 / 有瞽有瞽
주 나라 종묘 뜰에 있네 / 在周之庭
했는데, 이들을 모두 주(紂)의 여민(餘民)이라 했으나, 어찌 주를 인연하여 눈먼 자가 생겼으랴! 심히 무의미한 말이다.
그 성품을 논함이 매우 정대(正大)하여서 동중서(董仲舒)의 기장(騎墻)의 학문에 비해서 훨씬 낫다. 그 내용에,
“고금(古今)이 마찬가지이다. 유가 다르지 않으면 비록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이(理 천리(天理))를 같이하는 까닭에, 성품이 이(理)를 따라서 미혹(迷惑)되지 않는다.”
했고, 또 이르기를,
“고치의 성품은 실이 되는 것이지만 여공(女工)이 불때서 물에 끓여 그 실가닥을 뽑아 내지 않으면 실이 되지 못하고, 알의 성품은 병아리가 되는 것이지만 좋은 닭이 여러 날 동안 품에 품지 않으면 닭이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성품이 선하지만 성명(聖明)한 임금이 이끌어서 도덕을 심어 주지 않으면 군자가 되지 못한다.《시경》대아 탕(蕩)에,
하늘이 많은 백성 내셨지만 / 天生烝民
그 명은 믿을 수 없다네 / 其命匪諶
시작은 있지 않음이 없으나 / 靡不有初
마무리 잘하는 예는 드무네 / 鮮克有終
했다.”
하였다.

대덕(戴德)의《예기(禮記)》가《대대례(大戴禮)》가 되고 대성(戴聖)의《예기》가 《소대례(小戴禮)》가 되니, 이제 삼례(三禮 《주례(周禮)》ㆍ《의례(儀禮)》ㆍ《예기(禮記)》)의 열(列)에 세운 것이 이것이다. 《주례(周禮)》ㆍ《의례(儀禮)》는 주(周) 나라 사람의 옛 경전(經典)이고, 두 대씨(戴氏)의 기록은, 여러 학자의 설(說)을 모아서 두 경서의 전(傳)으로 만든 것이다. 한(漢) 나라가 일어났을 때 예서(禮書)가 무릇 3백 14편이었는데, 대대(大戴)가 산수(刪修)하여 85편으로 하고 소대(小戴)가 다시 이를 손익(損益)하여서 43편으로 만들었는데, 곡례(曲禮)ㆍ단궁(檀弓)ㆍ잡기(雜記)를 상하편(上下篇)으로 나누었다. 마융(馬融)이 다시 여기에다 명당위(明堂位)ㆍ월령(月令)ㆍ악기(樂記)를 더해서 전부 49편이 되었다.
이제 대대의 글은 앞의 38편이 모두 산일되어 단지 39에서 81편까지만 남아 있는데, 중간에 또 4편이 산일되었고 거기에다 제73편이 둘이 있어서 모두 40편이다. 이른바 81편이라는 것도 이하 4편이 또 빠진 것이다. 소대가 뽑아 모은 것이 정요(精要)한 것이 많아서《예경(禮經)》의 우익(羽翼)이 되기에 족하므로 한(漢) 나라 시대에 학관(學官)을 두어서 오늘에 이른다. 대대의 글은 군더더기가 많기 때문에 세상의 선비들이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일까.

하소정(夏小正《대대례》의 편명)은 하(夏) 나라 시대의 월령(月令)을 전해온 것인데 한(漢) 나라의 유자(儒者)가 조목마다 소석(疏釋 주소(注疏)를 더하여 해석하는 것)을 더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달에 따라 표제(標題)하였는데 글이 매우 간략하면서도 예스럽다. 소석(疏釋)은 원문과 잇달아 있으나 하(何) 자와 야(也) 자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이 공양(公羊)ㆍ곡량(穀梁)의 전(傳)과 같으므로 정문(正文)과 석문(釋文)의 분별을 알 수 있다. 애공문(哀公問)편 및 투호(投壺)편은 소대기(小戴記)와 크게 다를 것 없고, 예찰(禮察)은 경해(經解)와 같고, 증자대효(曾子大孝)편은 제의(祭義)와 서로 비슷하다. 권학(勸學) 및 예삼본(禮三本)은《순자(荀子)》에 보이고 보부(保傅)편은 가의(賈誼)의 소(疏)에 보이고, 제계(帝繫)ㆍ본명(本命)ㆍ역본명(易本命) 등은 또《관자(管子)》ㆍ《회남자(淮南子)》ㆍ《공자가어(孔子家語)》등의 글과 같다. 《소대기》의 월령은 여불위(呂不韋)에게서 취하였고 치의(緇衣)는《공손니자(公孫尼子)》에 바탕을 두었으며, 중용(中庸)ㆍ대학(大學)은 자사(子思)와 증자(曾子)가 지은 것이고, 곡례ㆍ왕제(王制)는 곡대 박사(曲臺博士 한 선제(漢宣帝) 때 후창(后蒼)을 말한다)에게서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두 대씨(戴氏)의《예기》는 모두 여러 학자의 설(說)을 모은 것이니,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은 있을 수 없다.

동중서(董仲舒)의《춘추번로(春秋繁露)》가 17권 82편(篇)인데, 그 중에서 세 편은 일실되었다. 본전(本傳 《한서(漢書)》동중서전(董仲舒傳))을 상고하건대 춘추 시대의 일의 득실(得失)을 논한 것으로, 문거(聞擧)ㆍ옥배(玉杯)ㆍ번로(繁露)ㆍ청명(淸明)ㆍ죽림(竹林) 등 수십 편 10여만 언(言)이었는데, 안사고(顔師古)의 주(注)에,
“모두 그가 저술한 책 이름이다.”
했다. 이제 책을 통틀어서《번로》라고 이름했는데, 편명(篇名)에 옥배ㆍ죽림ㆍ옥영(玉英)ㆍ정화(精華) 등속이 있을 뿐, 이른바 청명이 없는 것으로 보면, 이 몇 가지가 모두 책 이름이요 결코 편명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본디《번로》가 몇 편, 옥배ㆍ청명 등 책이 각각 몇 편씩 있었을 것인데, 후세에서 착란(錯亂)을 일으켜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제《번로》가 단지 서명(書名)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번로》의 편명이 없는 것을 보면, 더욱 본전에서 문거ㆍ옥배ㆍ번로 등을 서명으로 열거(列擧)했음을 징험(徵驗)케 한다. 그 밖의 편은 모두 편 안의 몇 글자를 따서 이름으로 했으니, 초 장왕(楚莊王)ㆍ왕도(王道)ㆍ멸국(滅國) 같은 것이 이것이다. 편 안에 본디 옥배ㆍ죽림 등 글자가 없는 것을 하필 억지로 만들어 나열하면서 이름으로 했겠는가. 책이 한번 흩어지자 뒷사람이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그 중 몇 편의 이름을 깎아 버리고 이 같은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그렇지만 옥영ㆍ정화ㆍ청명이 어찌하여 증감(增減)을 달리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제 비록 어느 편에서 어느 편까지가《번로》의 글이고 어디서 어디까지가 옥배ㆍ죽림 등의 글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로 합쳐서《동씨춘추(董氏春秋)》ㆍ《동씨서(董氏書)》또는《동자(董子)》로 이름할 수 있다. 옥배를 고쳐 문공편(文公篇)으로 죽림을 상사편(常辭篇)으로, 옥영을 일원편(一元篇)으로 정화를 신사편(愼辭篇)으로 하고, 거기에다 삼책(三策) 및 춘추결사(春秋決事)까지 붙여서 편철(編綴)한다면,《동씨전서(董氏全書)》가 되기에 족하여서 단지《번로》로 이름하는 무의미한 것보다 좋을 것이다.
동씨의 글은 웅혼(雄渾)하고 굉박(宏博)해서 모두 읽을 만하니,《논형(論衡)》에서 이른바 ‘글 중의 오획(烏獲)이다.’ 한 것이 헛말이 아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곤고(困苦 합리적인 표현을 위해서 애쓰는 것)하여서 정채(精彩) 없는 것이 극히 좋은 점이다.”
했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렇다. 단 그 성정(性情)을 논함에 있어 박잡(駁雜)하고 또 때로는 재이(災異)ㆍ참위(讖緯)로 구애(拘礙)받고 있는데, 중서(仲舒) 같은 유자(儒者)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았거든, 하물며 유자정(劉子政 자정은 유향(劉向)의 자)의 부자(父子)이랴!

위상전(魏相傳《한서(漢書)》에 보인다)에 보면, 상(相)이 고황제(高皇帝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가 저술한《천자소복(天子所服)》을 인용하여서 말하기를,
“춘ㆍ하ㆍ추ㆍ동은 천자가 복행(服行)할 것이니, 마땅히 천자의 도수(度數)를 법칙(法則)으로 해야 합니다. 중알자(中謁者) 조요(趙堯)로 봄을, 이순(李舜)으로 여름을, 아탕(兒湯)으로 가을을, 공우(貢禹)로 겨울을 맡게 하소서.”
했는데, 네 사람의 이름이 우연히도 당(唐)ㆍ우(虞)ㆍ하(夏)ㆍ상(商)의 임금의 이름과 같아서 마치 뜻이 있어서 사시(四時)에 분배한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상스럽다.

왕원미(王元美 원미는 왕세정(王世貞)의 자)가 일찍이,
“표절(標竊)하고 모방하는 것이 시의 큰 병폐이다.”
했는데, 그 자신의 시가 전적으로 이 같은 병폐를 범하고 있다. 아아! 왕원미ㆍ이반룡(李攀龍)의 무리가 조금이라도 개원(開元)ㆍ대력(大曆) 시대의 어구(語句)를 말하지 않았더라면, 중랑(中郞)ㆍ수지(受之) 등의 욕을 면했을 것이다.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인물을 논함은 진실로 어렵다. 원종도(袁宗道)가 차례로 여러 나라 대부(大夫)의 우열(優劣)을 논평하여서 말하기를,
“공렬(功烈)로 논한다면 마땅히 관씨(管氏 관이오(管夷吾))를 으뜸으로 하여 호(狐 호언(狐偃))ㆍ조(趙 조최(趙衰))가 그 다음이 되고 오(敖 손숙오(孫叔敖))ㆍ백리해(百里奚)가 또 그 다음이다. 심덕(心德)으로 논한다면 전금(展禽 유하혜(柳下惠))을 으뜸으로 하여 교(僑 공손교(公孫僑))ㆍ원(瑗 거원(蘧瑗))ㆍ찰(札 계찰(季札))이 다음이고, 사회(士會)ㆍ사섭(士燮 사회의 아들)이 또 그 다음이다.”
했으니, 그 차례를 논함이 매우 정밀하고도 명확하다.

한(漢) 나라 장안(長安)의 허상(許商)이 산수(算數)를 잘하여서 구경(九卿)에 이르렀다. 그 문인(門人)을 이름붙여서 당임(唐林)은 덕행(德行), 오장(吳章)은 언어(言語), 왕길(王吉)은 정사(政事), 계흠(炔欽)은 문학(文學)에 능하다 했다. 왕망(王莽)의 시대에 임ㆍ길은 구경이 되고, 흠ㆍ장은 박사(博士)가 되었다. 상이 공자(孔子)의 일을 답습했으니, 망이 그 제자를 씀이 마땅하다고 할 만하다.

양무구(楊無咎)가 창관(娼館 창녀의 집)에 놀면서 왜벽(矮璧 작은 구슬)에다 매화 가지를 그렸더니, 왕래하는 사부(士夫)가 많이 가서 보았으므로, 창녀가 이를 힘입어서 그 집이 소문났었는데, 도둑이 그 구슬을 훔쳐가자 거마(車馬)가 갑자기 드물어졌다. 장 일인(張逸人)이 일찍이 최씨(崔氏)의 주로(酒罏 술 파는 목로)에 제(題)하기를,
무릉성 안 최씨 집의 술은 / 武陵城裏崔家酒
지상에는 없고 천상에만 있는 것 / 地上應無天上有
운유하는 도사가 한 말을 마시고서 / 雲遊道士飮一斗
백운 깊은 동구에 취해 누웠네 / 醉臥白雲深洞口
했는데, 이로부터 술 사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시와 그림은 잔재주인데도, 창관과 주점으로 하여금 갑자기 값을 더하게 함이 이 같거늘, 하물며 성현(聖賢)을 섬기는 자이랴!

송(宋) 나라 동유(董逌)의《전보(錢譜)》에, 해동 번전(海東番錢 우리나라 돈을 말함)을 실었는데 모두 네 가지 양식이 있으니, 삼한중보(三韓重寶)ㆍ동국통보(東國通寶)ㆍ동국중보(東國重寶)ㆍ해동통보(海東通寶)이다. 상고하건대, 고려 숙종(肅宗) 정축년에 비로소 돈을 주조(鑄造)하였으니, 그 양식은 그때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조선통보(朝鮮通寶)는《전보》에 실려 있지 않다.

춘추 시대(春秋時代)는 2백 42년인데《좌씨전(左氏傳)》이 19만 언(言)이고, 황제(黃帝)부터 한 무제(漢武帝)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인데《사기(史記)》가 70만 언이며, 반고(班固)의《한서(漢書)》는 12제(帝) 2백 31년에 1백만 언이다. 시대가 내려올수록 일이 더욱 많아지고, 일이 많을수록 말이 더욱 번잡(繁雜)하게 된다.

주기(酒器)인 6이(彝)에는 배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뒤집힘을 경계하는 것이고, 술주정하는 것을 후(酗)라 하는데 이는 흉덕(凶德)을 경계하는 것이다. 《주관(周官《주례(周禮)》의 별칭)》의 평씨(萍氏)가 기주(幾酒 술을 함부로 팔거나 때도 아닌데 빚는 것 같은 행위를 금하는 것)를 맡았는데《본초(本草《본초강목》의 약칭)》에 개구리밥[萍]이 능히 술을 이긴다고 했으니, 옛사람의 술에 대한 경계가 정미(精微)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취(醉) 자는 졸(卒 죽음을 뜻함)에 매이고 성(醒) 자는 생(生)에 매였으며, 치(巵) 자는 위(危)와 비슷하고 배(杯) 자는 불(不)에 속한다.

석수도(石守道 수도는 석개(石介)의 자)는 괴설(怪說)을 지어서 양대년(楊大年 대년은 양억(楊億)의 자)의 문체(文體)를 풍자(諷刺)하였고, 왕이(王彝)는 문요(文妖)를 지어서 양염부(楊廉夫 염부는 양유정(楊維楨)의 자)의 제작(製作)을 깎아 내렸는데, 글 이름이 괴(怪)ㆍ요(妖)로 되어 있으니, 남을 비방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신이 괴요로 빠짐을 깨닫지 못했다.

《동사(東史 동사강목(東史綱目))》에,
“단군이 팽오(彭吳)에게 명하여 국내의 산천을 다스려서 민거(民居)를 전정(奠定)했다.”
했으니, 홍수(洪水)의 세상에서 중국에 백우(伯禹)가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본기통람(本紀通覽)》에,
“우수주(牛首州)에 팽오의 비가 있다.”
고 했는데, 우수주는 지금의 춘천이다.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수춘 강원도 춘천의 별칭은 본디 맥의 나라 / 壽春是貊國
길 통하기는 팽오 때부터 / 通道自彭吳
하였다.《한서(漢書)》의 식화지(食貨志)를 상고하건대, 무제(武帝) 때에 팽오가 길을 뚫어 예맥(穢貊)과 조선(朝鮮)을 통하고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팽오는 무제의 신하요 단군의 신하가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에 정밀치 못한 것이 이러하다.
《포박자(抱朴子)》에,
“세속(世俗)에 신부(新婦)를 희롱하는 법이 있으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속에서 추잡한 말로 묻고 빨리 대답하기를 요구하면서, 혹 초달로 때리기도 하고 발을 얽어매어 거꾸로 달기도 하므로 피가 흐르고 팔다리가 꺾이기에 이른다.”
했다. 양용수(楊用修 용수는 양신(楊愼)의 자)의《단연록(丹鉛錄)》에,
“오늘날에도 이 풍속이 세상에 아직 남아 있어서, 신부를 맞는 집에서 새 사위가 몸을 피하여 숨으면, 뭇 남자가 다투어 농지거리로 신부를 희롱하는데 이를 학친(謔親)이라고 이른다. 혹 치마를 걷어올리고 바늘로 살을 찌르기도 하고 버선을 벗기고 발바닥을 때리기도 한다.”
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신랑(新郞)을 괴롭히고 놀리는 것과 같다. 신랑의 발을 거꾸로 달고 발바닥을 몽둥이로 때리면서 이름하여 족장(足杖)이라고 하는데, 혹 죽게 되는 자도 있으니 누습(陋習)인 것이다. 그러나 농지거리로 신부를 놀리는 것은 더욱 추잡하다.

가생(賈生 가의(賈誼))이 죽었을 때에 나이 겨우 33세였는데, 그의 석서부(惜誓賦)에,
“내 몸이 늙어 날로 쇠함을 슬퍼하네.”
했고, 또,
“나이를 자꾸만 먹으니 몸이 날로 쇠하네.”
했는데, 그 말이 노성(老成)하여서 여온(餘蘊)이 없으니, 상서롭지 못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의 호) 박 학사(朴學士)가 화(禍)를 입을 때, 나이 겨우 26세였는데, 시(詩)에 흔히 노(老) 자와 쇠(衰) 자를 써서,
몸 점점 시들어 얼굴 주름져 / 漸成枯枯老容顔
이제 흰 머리로 시서의 맛 느끼겠네 / 白首詩書今有味
하는 글귀가 있었으니, 정상에 반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진정표(陳情表)에는 충효(忠孝)의 뜻이 애연(藹然)하니, 진실로 길인(吉人) 선사(善士)이다. 양절 반씨(陽節潘氏)가 진정표에 ‘소시(少時)에 위조(僞朝 삼국 시대 촉한(蜀漢)을 말한다)를 섬겼습니다.’고 한 말을 나무랐는데, 손상애(孫霜厓)의 시에,
위조라 한 것은 공의 글이 아닌 것 같은데 / 僞朝料得非公筆
당시의 필적을 볼 수가 없네 / 不得當時墨本看
했다. 양용수(楊用修)가 말하기를,
“불서(佛書)에서 이 글을 인용하여서 위조를 황조(荒朝)로 만들었으니, 이밀(李密)의 초본(草本)에 그렇게 쓴 것이다. 그런데 진(晉) 나라에서 이를 고쳐서 사기(史記)에 넣었다.”
했으니, 상애도 또한 불서에서 인용한 것을 본 것일까.

항주(杭州) 사람이 소나무를 깎아 작은 조각을 만들되 얇기는 종이처럼 하고, 유황(硫黃)을 녹여 그 끝에 바른 다음 이름하여 발촉(發燭) 또는 쉬아제후비(焠兒齊后妃)라고 하였는데, 가난한 자가 발촉을 업으로 한 것은 이것이 그 시초이다.《청이록(淸異錄)》에,
“삼목(杉木)을 얇게 깎아 유황을 바르고 이를 인광노(引光奴)라고 부른다.”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버드나무를 깎아서 만들고 단지 석류황(石硫黃)이라고 이름한다.

고려의 초창기(草創期)의 말에 큰 것을 왕(王)이라고 했으니 이는 왕 태조(王太祖)가 일어나리라는 참언(讖言 예언)이고, 고려 말기에 별안간 멥쌀을 입쌀[李米]이라고 했으니 이는 우리 왕조(王朝)가 일어날 조짐이었던 것이다. 진(晉 후진(後晉)) 나라 천복(天福 진 출제(晉出帝)의 연호) 연간에 절중(浙中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지방)의 아이들과 장사치들이 모두 조(趙) 자를 어조사(語助辭)로 하여서 얻는 것을 말할 때에는 조득(趙得)이라 하고 옳다고 할 때에는 조가(趙可)와 같은 식으로 했는데, 뒤에 송조(宋朝)가 수선(受禪)하자 전씨(錢氏)가 땅을 바쳤으므로 절중이 모두 조씨(趙氏)에게 속했다.

어떤 이가 초추(抄秋)와 초동(抄冬)의 뜻을 묻기를,
“7월ㆍ10월이 초가 되는가, 아니면 9월ㆍ12월이 초가 되는가? 세상 사람이 혼용(混用)하는데 어떤가?”
하기에 내가 종백경(鍾伯敬)의 시에 ‘초동의 외로운 배 초동(初冬)에 떠나온 것이네.[抄冬孤艇發初冬]’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초(抄)는 끝달을 말하는 것이다.”
했다. 그리고 양 원제(梁元帝)의《찬요(纂要)》에,
“9월을 말추(末秋)ㆍ초추(抄秋)라고 하고, 12월을 모동(暮冬)ㆍ초동(抄冬)이라고 한다.”
했다.

옛사람은 이름짓는 데 있어 흔히 물건 이름을 썼으니, 또한 순박한 풍속인 것이다. 초광(楚狂)의 이름이 접여(接輿), 연협(燕俠)의 이름이 점리(漸離)와 같은 것이다. 하나는 풀이니,《설문(說文)》에,
“마름풀[莕]이 접여(菨餘)이다.”
했고, 하나는 벌레이니,《설문》에
“점(螹)은 점리(螹離)이다.”
했다. 비록 글자 모양은 다르지만 그 음은 같으니, 또한 시대가 내려오면서 잘못 전해진 것일까.

한(漢) 나라 제도에 삼공(三公 승상ㆍ대사마ㆍ어사대부)은 월봉(月俸)이 3백 50곡(斛)이고 중이천석(中二千石)에서 백석(百石)에 이르기까지 무릇 14등인데, 중이천석은 월봉이 1백 80곡이고 백석은 16곡이다. 후한(後漢)은 대장군(大將軍)ㆍ삼공의 월봉이 3백 50곡, 중이천석이 72곡에다 전(錢) 9천, 백석에 이르러서는 월봉이 4곡 8두(斗)에다 전 8백이다. 진(晉) 나라는 제1품이 1천 8백 곡이고, 후주(後周)는 무릇 구명(九命 명은 벼슬의 등급)인데 삼공이 1만석, 일명(一命)인 하사(下士)에 이르러는 1백 25석(石)이다. 당(唐) 나라는 정1품이 1년에 7백 석에다 전 3만 1천, 종9품에 이르러서는 52석에다 전 1천 9백 17이다. 송 나라는 41등인데 재상(宰相)ㆍ추밀사(樞密使)가 한 달에 전 3만 1천, 보장정(保章正)에 이르러서는 전 2천이다. 명 나라는 정1품은 달마다 쌀 87석을 지급하고 종9품은 5석이다.
고려는 중서령(中書令)ㆍ상서령(尙書令)ㆍ문하시중(門下侍中)이 세미(歲米) 4백 석이고, 조교(助敎)에 이르러서는 10석이다. 국조(國朝 조선)는 정1품의 세봉(歲俸)이 98석에다 비단 6필ㆍ정포(正布) 15필ㆍ저화(楮貨) 10장(張)이고, 종9품은 12석에다 정포 2필ㆍ저화 1장이다. 임진왜란 이후는 정1품의 세봉이 60여 석이고, 주포(紬布)ㆍ저화는 없다.

왕완정(王阮亭 완정은 왕사진(王士禛)의 호)의《지북우담(池北偶談)》에,
“곽양아(霍亮雅)는 곡주(曲周) 사람으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으며 의협심이 강했다. 죽은 뒤에 그 고을 사람 유진체 봉원(劉津逮逢源)이 시를 지어서 곡하기를,
문전에는 빚 받을 손이 줄지어 섰고 / 門前債客鴈行立
집 안에는 술꾼이 늘어서 있네 / 屋內酒人魚貴眼
하였는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패가(敗家)한 자제의 편모(片貌)이다.’ 했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이는 당 나라 사람의 시인데, 완정이 어찌 알지 못했을까. 이파(李播)의 시에는 책객(債客)을 책주(債主)로, 옥내(屋內)를 옥리(屋裏)로, 주인(酒人)을 취인(醉人)으로 했다.

《고금주(古今黈)》에,
“후직(后稷)ㆍ지(摯)ㆍ요(堯)ㆍ설(契) 네 사람은 다 같이 제곡 고신씨(帝嚳高辛氏)의 아들이다. 설은 13대 만에 탕(湯)을 얻었고 직은 14대 만에 문왕(文王)을 얻었다.”
했다. 그렇다면 하(夏) 나라가 4~5백 년을 누리고 상(商) 나라가 또 5~6백 년을 누려서, 함께 1천여 년에 문왕이 비로소 났다. 만약 대수(代數)를 가지고 비교한다면 문왕이 탕에 비해서 단지 한 대(代)가 미치지 못할 뿐이니, 은(殷)의 선조는 어찌 한결같이 요사(夭死)하고 주(周)의 선조는 어찌 한결같이 장수(長壽)했단 말인가. 이것이 심히 의심스럽다. 전의 기록에 반드시 탈오(脫誤)가 있을 것이다.

복희씨(伏羲氏)부터 청 나라 건륭(乾隆 고종(高宗)의 연호)에 이르기까지 정통(正統) 천자(天子)가 2백 50명이고, 여후(呂后)ㆍ무후(武后)를 합쳐 계산하여 무통(無統 계통이 없는 것) 천자가 위(魏)ㆍ오(吳)ㆍ남북조(南北朝)에서 오계(五季 오대(五代)의 극도로 어지러웠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통계 85명이고, 참칭(僭稱)한 가짜 제왕(帝王)이 후예(后羿)에서 오삼계(吳三桂)에 이르기까지 2백 70여 명이고, 춘추(春秋)ㆍ전국(戰國)의 군주가 4백 90여 명이 있다. 신묘년 맹추(孟秋)에 대강 계산하여 여기에 기록한다.

《고금주》에,
“치초(郗超)의 치(郗)는 치(絺)의 음과 같이 읽고, 격선(郄詵)의 격(郄)은 격(綌)의 음과 같다.”
했는데, 지금 사람은 다시 분별하여서 밝히지 않고 모두 기역반(綺逆反)의 음인 격을 따르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양용수(楊用修)의《단연록(丹鉛錄)》에,
“용이 새끼 아홉을 낳았는데 용이 되지 못했다. 첫째는 비희(贔屭)로 형상이 거북 같고 무거운 것을 등지기 좋아하는데, 지금 비(碑)의 귀부(龜趺 거북 받침)이다. 둘째는 치문(鴟吻)으로 성품이 바라보기를 좋아하는데, 지금의 지붕 위 기와의 짐승이다. 셋째는 포뢰(蒲牢)로 소리지르기를 좋아하는데, 지금의 종뉴(鍾紐)다. 넷째는 폐안(狴犴)으로 형상이 범 같은데 옥문(獄門)에 서 있다. 다섯째는 도철(饕餮)로 음식을 좋아하여 솥뚜껑 위에 서 있다. 여섯째는 공하(蚣)로 성품이 물을 좋아하여 다리 기둥에 서 있다. 일곱째는 애자(睚眦)로 성품이 죽이기를 좋아하여 칼코등이에 서 있다. 여덟째는 금예(金蜺)로 형상이 사자(獅子)와 같은데, 연화(煙火)를 좋아하여 향로(香爐)에 서 있다. 아홉째는 초도(椒圖)로 형상이 고동과 같은데 성품이 닫기를 좋아하여 문의 손잡이 위에 서 있다.”
하였는데, 나는 상고하건대, 지금 의금부(義禁府) 청사(廳事)를 호두각(虎頭閣)이라고 이름하니, 이는 용의 넷째 새끼의 뜻을 취한 것이 아닐까 한다.

맹촉(孟蜀)의 왕인개(王仁鍇)가 손으로 책 베끼기를 좋아하여 수천 권에 이르렀는데, 모두 백등지(白藤紙)에다 잘게 써서 극히 단정하고도 아름다웠으며, 매양 아침이면 책장 위에서 한두 가지 새로 베낀 것을 볼 수 있었다. 원준(袁俊)은 집이 가난하여 책이 없어서 남에게서 빌려 보았는데 반드시 책을 베끼는 것으로 공부를 삼아서 매일 50장씩 초했다. 글 읽는 자가 마땅히 이 같은 방법을 써서 이것으로 미공(眉公)이 독서하던 16가지 방법에 보태야 할 것이다.

조제(調劑)한 약을 탕(湯)ㆍ음(飮)ㆍ자(子)ㆍ환(丸)ㆍ단(丹)ㆍ고(膏) 등으로 이름하는데 뜻이 있으나, 홀로 산(散)만은 뜻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술잔 가운데 술 한 되 드는 것을 작(爵), 두 되 드는 것을 고(觚), 석 되 드는 것을 치(觶), 넉 되 드는 것을 각(角), 다섯 되 드는 것을 산(散)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산으로 이름하는 것이 이 같은 뜻이 아닐까. 무릇 산이란 모두 가루약으로 익원산(益元散)ㆍ통성산(通聖散) 같은 유가 이것인데 뒤에 탕ㆍ음에 있어서도 산으로 이름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호창(虎倀 범에게 잡혀 먹힌 사람의 영혼)은 신 것을 좋아하므로 함정(陷井)으로 가는 길에 매자(梅子 매화나무 열매)를 놓아 두면 창귀(倀鬼)가 범을 인도하여 그리로 가게 한다. 도깨비는 두더지를 즐기는데 먹으면 죽는다. 어떤 사람은 개구리를 먹어도 죽는다고 한다. 요사스런 여우는 닭을 즐기는데, 오자유(梧子油 오동나무 열매 기름)를 먹으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닭을 오자유에 담가서 여우에게 먹이면 비록 꼬리 아홉 달린 사람을 잘 홀리는 것이라도 반드시 죽는다. 범의 일은《기원기(寄園記)》에 나오고 여우의 일은《유계외전(留溪外傳)》에 나온다.

아조(我朝)에서는 한림천(翰林薦)을 혁파하기 전에는 서문(誓文)에,
“올바른 인물을 추천하지 않으면 재앙이 자손에게 미칠 것이다.”
했으니, 그 일을 중히 여긴 것이다.
청 나라 강희제(康熙帝) 무진년에 고시관(考試官) 서건학(徐乾學)이 서문(誓文)을 짓기를,
“모등(某等)은 감히 판향(瓣香)을 사르면서 사맹(司盟)에게 밝게 고합니다. 모등이 조정의 명을 받아 예위(禮闈 예부(禮部)에서 과거 보이는 것)에서 시험을 맡게 되니, 학술(學術)이 고루(固陋)하와 제대로 인재를 얻어서 국가의 임사(任使 일을 맡기고 부리는 것)에 대비(對備)치 못하고, 한미(寒微)한 자가 진출하고 뛰어난 자가 억제되어 처사(處事)가 밝지 못하게 될 것을 크게 두려워합니다. 이 때문에 신명(神明)께 맹세하노니, 편사(偏私) 완이(玩易 장난 삼아 하고 소홀히 하는 것)가 있어서 내 마음이 공변되지 못하고, 맡은바 직책을 삼가지 못하여 위로 성은(聖恩)을 저버리고 아래로 현명한 인사(人士)들을 저버린다면 신(神)은 죄주시어, 어진이를 가리고 그릇된 자를 나타나게 한 재앙과 벌을 입게 하여 당대(當代)에 미치게 하소서, 삼가 여기에 씁니다.”
했다. 한림을 추천하는 서문과 그 뜻이 같다.

신라의 사다함(斯多含)은 나이 15~16세에 풍모(風貌)가 청수(淸秀)하고 지기(志氣)가 방정(方正)하였으므로, 그때 사람이 화랑(花郞)으로 만들었으며 그 무리가 무려 2천 명이었다. 명 나라의 육경대(陸瓊臺)는 천자(天資)가 고매(高邁)했고 동림(東林)에서 회강(會講, 선비를 모아서 강론하는 것)했는데, 나이 30도 안 되어서 제자가 벌써 8백 명이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비슷하다. 포의(蒲衣)는 8세에 요(堯)가 스승으로 섬겼고, 역자(睪子)는 나서 5세에 우(禹)를 도왔으며, 항탁(項槖)은 7세에 공자의 스승이 되었다.
나리리 나라리리 / 羅李李羅羅李李
임금 노릇하기도 어렵고 / 爲君難
신하 노릇하기도 어려우니 / 爲臣難
어렵고도 어려우니 / 難又難
창업도 어렵고 / 創業難
수성도 어려우니 / 守成難
어렵고도 어렵네 / 難又難
이는 모두 태평소곡(太平簫曲)이다.
농동 농동 농동 농롱동 농롱동 / 籠同籠同籠同籠籠同籠籠同
농동 농동 농동 농롱동 농롱동 / 籠同籠同籠同籠籠同籠籠同
농동 농동 농동 농롱동 농롱동 / 籠同籠同籠同籠籠同籠籠同
이것은 뇌고(擂鼓 북 치는 것)의 삼통(三通)이다.
사곡(詞曲)에 영선객(迎仙客)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나련 이련 나련리 나련리 / 囉嗹哩嗹囉嗹哩囉嗹哩
나리 연리 나련나 연리련 / 囉哩嗹哩囉嗹囉嗹哩嗹
나리 연리 나리련 이라련 / 囉哩嗹哩囉哩嗹哩囉嗹
이는 농동과 함께 모두《오륜전비기(五倫全備記)》에 보이는데,《기》는 곧 구경산(丘瓊山 경산은 구준(丘濬)의 자)이 세상을 풍자(諷刺)한 연극으로서 섭첩청전(葉疊靑錢 첩청은 호)이 사단(詞段)마다 보충하여서 무릇 4권이다. 오늘날 이것을 언문(諺文)으로 번역하여 《노걸대(老乞大)》《박통사(朴通事)》와 함께 과목으로 정하여서 역관(譯官)을 가르친다.

명 나라 능적지(凌迪知)의《만성통보(萬姓通譜)》는《사성운보(四聲韻譜)》를 가지고 편찬했다. 합계한 성(姓)이 2천 7백 53인데, 복성(複姓)이 1천 31, 3자 성(姓)이 66, 4자 성이 2다. 왕원미가 말하기를,
“유(劉)씨의 본관(本貫)이 가장 많아서 25, 왕(王)씨가 다음으로 24, 장(張)씨가 그 다음으로 21, 이(李)씨가 또 다음으로 11이다.”
했는데, 모두 우리나라 이씨의 본관이 60여 가지가 되는 것만 못하다.

완정(阮亭)의《지북우담》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호) 선생의 시 10여 연구(聯句)를 싣고, 그 아름다움을 매우 칭찬했다. 이제 완정의《대경당집(帶經堂集)》을 보니 장난 삼아 원유산(元遺山)의 논시 절구를 본따서 지은 36수(首)가 있는데, 건안(建安 후한 헌제(後漢獻帝)의 연호)에서부터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말기에 이르기까지의 시인(詩人)을 차례로 서술했다. 서른 세번째의 시에,
엷은 구름 떠돌다 소고사에 부슬비 내리니 / 澹雲微雨小姑祠
국화 빼어나고 난초 시드는 팔월 절기네 / 菊秀蘭衰八月時
이는 조선 사신의 글로 기억되는데 / 記得朝鮮使臣語
과연 동쪽 나라의 성률(聲律)을 아는 시로세 / 果然東國解聲詩
하고, 주(注)에,
“명 나라 숭정 연간에 조선 사신이 등주(登州)를 지나면서 지은 것이다.”
했는데, 앞의 두 구는 청음의 시이다.

도현경(都玄敬 현경은 도목(都穆)의 자)의 경사향산기(京師香山記)를 읽었는데 거기에,
“절에 들어가 천불전(千佛殿)을 보니, 전각(殿閣)이 원형(圓形)으로 만들어지고 극히 정교(精巧)했다.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초년에 중관(中官 환관(宦官))의 손에 창건되었는데, 중관은 고려 사람이었다. 일찍이 그 나라 금강산에 원전(圓殿)이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그 제도를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했다. 일찍이 금강산에 원형의 전각이 있음을 듣지 못했는데, 정양사(正陽寺)에 6모의 전각이 있으니 그 제도인가 의심스럽다.

《왕이상집(王貽上集)》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이휘조(李輝祖)의 신도비(神道碑)를 실었는데 그 내용에,
“철령 이씨(鐵嶺李氏)는 영원백(寧遠伯) 성량(成樑) 때부터 벌열(閥閱)로 명(明) 나라에서 드날렸고 본조(本朝 청 나라)에 와서는 그 집안이 더욱 번영하여 들어와서는 유악(帷幄)에 참여하고 나가면 장수가 되었다. 그 선대(先代)가 조선(朝鮮)에서 나왔으니, 양평(襄平)에 옮겨와 사는 것이 영(英)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은 군공(軍功)으로 철령위 도지휘사(鐵嶺衛都指揮使)가 되었는데, 아들은 문빈(文彬)이다. 문빈이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춘미(春美)니, 춘미의 아들 경(涇)이 영원백을 낳았다. 둘째아들은 춘무(春茂)니, 춘무의 아들은 윤(潤)이고 윤의 아들은 성공(成功)이다. 성공이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여연(如梴)으로 태원부(太原府)를 맡았다. 셋째는 여재(如梓)인데 여재의 아들 항충(恒忠)은 부도통(副都統)을 지내고 1등 아달합합번(阿達哈哈番, 청 나라 때 작위(爵位)의 명칭)을 세습(世襲)했다.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는 휘조(輝組)다.”
했다.
그 종형 음조(廕祖)도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 휘조의 세 아들 곤(錕)ㆍ굉(鋐)ㆍ개(鍇)도 모두 벼슬했다. 항충이 청 나라에 항복할 때에 영원의 파계(派系)는 나라일에 죽어서 홀로 쇠미했다. 여송(如松)의 후예로서 우리나라에 유락(流落)한 자가 능히 이것을 알까. 여연의 아들 합합번 사충(思忠)의 묘지(墓誌)는 왕경봉(汪竟峯)이 지었다.

사람의 몸에 관한 글자를 가지고 물건의 형상에 비유하는 것이, 심히 서로 맞지 않을 것 같지만 옛날에도 혹 있었으니, 모두 전아(典雅)하여서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될 만하다. 물가 미(湄) 자 같은 것은 물의 눈썹[水之眉]이다. 옷섶이 보이는 곳을 의자(衣眦)라고 하니, 이는《장자(莊子)》에 ‘독(督)에 연유하여서 경상(經常)을 삼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독은 사람의 독맥(督脈)이니, 곧 등마루를 이름이다. 그렇다면 임맥(任脈)은 옷섶[衣袵]의 섶[袵]과 같은 것이다.《예기(禮記)》에 ‘말은 검은 등마루에다 얼룩 비(臂)이다.’ 했고,《산해경》에 ‘수마(水馬)는 모양이 말과 같고 무늬 비[文臂]에다 쇠꼬리이다.’ 했는데, 비는 곧 앞다리이다.《장자》에 이른바 벌레 비[蟲臂]도 앞다리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황제(黃帝)의 신하 창힐(蒼頡)이 글자를 만든 것만 알고, 또 저송(沮誦)이 있어 창힐과 더불어 이름을 가지런히 함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단지 목왕(穆王 주 목왕(周穆王))의 신하 조보(造父)가 말 잘 모는 것만 알고, 또 분융(犇戎)이 있어 조보와 더불어 이름을 가지런히 함을 알지 못한다.

세상에서는 소로 밭가는 것이 한(漢) 나라 조과(趙過)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의문이 많다. 염경(冉耕)의 자가 백우(伯牛)이고 주(周) 나라 사람이니, 소로 밭가는 것이 조 과보다도 먼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두 필 소를 짝지워 밭간 것이 과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산해경》을 상고하건대,
“후직(后稷)이 백곡(百穀)의 씨를 뿌렸으며, 직의 손자 숙균(叔均)이 비로소 소로 밭갈기를 시작했다.”
했으니, 그렇다면 소로 밭간 지는 오래되었다. 숙균이 무릇 네 번 보이는데 그 하나는 ‘순(舜)의 아들을 상균(商均)이라고 했다.’했고 하나는 ‘제준(帝俊)이 후직을 낳고 후직이 백곡을 심었다. 직의 아우를 태새(台璽)라고 하니 숙균을 낳았다. 숙균이 그 아버지와 직을 대신하여 백곡의 씨를 뿌리고 밭갈이를 시작했다.’했으니, 그렇다면 순의 아들과 더불어 이름이 같으며, 숙균은 직의 조카가 된다. 그리고 주(周) 나라의 선대(先代)에는 농사를 업(業)으로 하는 이가 많았던 것이다.
또 하나는 ‘치우(蚩尤)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黃帝)를 치니, 황제가 응룡(應龍)을 시켜 공격하게 했다. 치우가 풍백(風伯)ㆍ우사(雨師)에게 일러서 큰 비바람을 불러 일으키니, 황제가 발(魃 가뭄의 신)이라고 하는 천녀(天女)를 내려보내어 비를 그치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하늘로 올라감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그가 있는 곳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숙균이 황제에게 말하여서 적수(赤水) 북쪽에 안치시키고 숙균이 전조(田租 전지(田地)를 맡은 벼슬아치)가 되었다.’ 했으니 그렇다면 숙균은 당우(唐虞)의 사람이 아니다.
《경재고금주(敬齋古今黈)》에 ‘전한(前漢)의 조과가 비로소 소로 밭가는 법을 썼다.’ 했는데, 석림(石林 석림은 섭몽득(葉夢得)의 호)이 염백우(冉伯牛)ㆍ사마우(司馬牛)가 모두 경(耕)을 이름으로 한 것을 인용하여 조과 이전에 있었음을 입증(立證)하면서,
“밭갈이에 소를 쓴 것이 아니면, 어찌 취하여 이름과 자로 만들어서 서로 배합(配合)시켰으랴. 옛날에는 가래로 갈고 보습[犁]은 쓰지 않았는데 후세에 와서 보습을 쓰는 방법으로 변했다. 가래는 사람을 쓰고 보습은 소를 쓰니 조과가 특히 그 제도를 가감했을 뿐 소를 쓰는 것이 과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했고, 또,
“공자가 얼룩소[犁]의 새끼가 빛이 붉고 뿔이 어여쁨을 말했으니, 공자 때에 벌써 얼룩소를 썼던 것이다.”
했다.
이자(李子 이덕무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는 말하기를,
“석림이 조과 이전에 벌써 소로 밭갈았음을 말한 것은 진실로 옳다. 그러나 염백우ㆍ사마우의 이름과 자를 비교하여 말하고서 또 별안간 얼룩소 새끼를 말하였으니 말이 어찌 그다지도 앞뒤가 맞지 않는가. 얼룩소는 얼룩무늬이게 마련이니, 오늘날에 고양이 개 따위 털빛이 얼룩인 것을 모두 얼룩이[黧]라고 한다. 옛날에는 글자가 적어서 무릇 음이 서로 비슷한 것은 모두 통용하였지만, 석림이 얼룩무늬의 얼룩소[犁]를 밭가는 가래[犁]와 같이 본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했다.

국자감(國子監)의 생도 육만령(陸萬齡)이, 위충현(魏忠賢)이《삼조요전(三朝要典)》을 반행(頒行)한 것으로 공자가《춘추》를 만든 데 비유하고, 양연(楊漣)ㆍ좌광두(左光斗)ㆍ주조서(周朝瑞)ㆍ위대중(魏大中) 등 여러 분을 죽인 것을 공자가 소정묘(小正卯)를 벤 일에 비유하여 국학(國學)의 오른편에 사당(祠堂)을 세워서 선성(先聖)과 함께 높이기를 청했다. 강서 순무(江西巡撫) 양방헌(楊邦憲)이 주(周 주돈이(周惇頤))ㆍ정(程 정호(程顥)와 정이(程頤))ㆍ주(朱 주희(朱熹)) 등 세 현인(賢人)의 사당집을 헐고, 겸하여 담대자우(澹臺子羽)의 사당집을 빼앗고서 그 상(像)을 부숴 버렸으며, 사릉(思陵 명 회종(明懷宗))이 즉위한 처음에 위충현의 사당 세우기를 소청(疏請)했다. 강희(康熙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연간에 도주(道州)에서 주렴계(周濂溪 염계는 주돈이의 호)의 자손으로서 부세(賦稅)를 바치지 못한 자가 있었는데 주수(州守) 장대성(張大成)이 주렴계의 사당으로 가서 선생의 상(像)에 칼을 씌우고 사흘 동안 쇠사슬을 채웠으니, 성현(聖賢)이 재액(災厄)을 당함이 이에 이르러서 극도에 달했다.

평양 영명사(永明寺) 안에 굴(窟) 하나가 있다. 시험삼아 그 안에 서서 보면 좌우가 모두 석축(石築)으로 되어 있으니, 높이가 거의 1장(丈)이고 너비는 6~7자쯤 되며 위에도 돌로 덮고 돌 위는 언덕으로 되어 있다. 굴이 매우 길어서 서쪽을 향해 60~70보(步)를 가면 앞이 캄캄해서 사람을 시켜 횃불을 들고 들어가다가 횃불이 희박한 공기에 의해 꺼지면 되돌아오곤 했다. 세상에서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 기린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으로 전해져서 기린굴(麒麟窟)이라고 이름했다. 내가 직접 보았는데, 빙고(氷庫)와도 같았다.
《후한서(後漢書)》를 상고하건대,
“그 국도(國都)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신(襚神)이라고 하며 10월에 영고(迎鼓)로 하늘에 제사지낸다.”
했고,《당서(唐書)》에는,
“국도 왼편에 큰 굴이 있는데 신수(神襚)라고 이름하며, 10월에 왕이 직접 여기에 제사지낸다.”
했으니, 이 굴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이 굴이 어느 왕 때에 비롯되고 무슨 신(神)을 위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 동명성왕의 무덤이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만약 그 속을 깊이 찾아본다면 징험(徵驗)할 수 있을 것이다.

당 나라 진자앙(陳子昂)이 지은 관도 곽공(館都郭公)의 희(姬) 설씨(薛氏)의 묘지(墓誌)에 이르기를,
“희인(姬人)의 성은 설씨이니 동명국왕(東明國王) 김씨의 후예이다. 옛적에 김왕(金王)이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별달리 설(薛) 땅에 봉함을 받아 설을 성(姓)으로 하였으며, 대대로 김씨와는 혼인하지 않았다. 그 고조ㆍ증조가 모두 김왕의 귀신(貴臣)ㆍ대인(大人)이다. 아버지 승충(承冲)이 당 나라 고종 때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그때 황제께서 그 공로에 보답하기 위하여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에 임명했다.”
하였다.
내가 상고하건대, 고구려(高句麗)의 시조가 동명왕(東明王) 고주몽(高朱蒙)이니, 이제 동명국왕 김씨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저 설(薛)은 신라의 대성(大姓)이고 김(金) 또한 신라 왕의 성이다. 당 나라 무덕(武德 당 고조의 연호) 4년에 신라 사람 설계두(薛罽頭)가 바다를 건너는 배편으로 당 나라에 들어가 태종 때에 좌무위과의(左武衛果毅)에 임명되었고, 당 나라가 고구려를 치기에 이르러 힘써 싸우다가 주필산(駐蹕山) 밑에서 죽었는데 태종이 어의(御衣)를 벗어서 시체를 덮어 주고 대장군 벼슬을 주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武烈王)의 둘째 아들로 23세에 당 나라에 들어가고, 고종 때 당 나라 군대를 인도하여 함께 백제를 쳤는데, 뒤에 벼슬이 주국(柱國)에 이르렀고 당 나라에서 죽었다. 자앙이 이른바 설승충이란, 설계두가 승충으로 이름을 고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별달리 설 땅에 봉함을 받았다.’는 말에 대하여는 우리나라 옛 고을에 본디 설(薛)로 이름한 곳이 없다. 그렇다면, 고종 때 무위(武衛)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김인문과 함께 나라로 돌아왔다.’ 했으니, 인문이 당 나라로 들아간 것이 태종 때였을는지도 모른다. 또 말하기를 ‘황제가 그 공로에 보답했다.’고 했으니, 계두가 종정(從征)하여 공이 있었기 때문에 황제가 그 공을 어여삐 여긴 것이다. 이른바 황제는 태종이라고 생각한다.
지(誌)에 또,
“희인은 어려서 옥 같은 아름다움이 있었으므로 소시에 선자(仙子 신선을 뜻함)라고 불렀다. 나이 15세에 대장군이 죽자 머리 깎고 중이 되었으며 보수 보살(寶手菩薩)을 만나보고는 6년 동안 마음을 닦았건만, 청련(靑蓮)이 이르지 않으니, 노래하기를,
번뇌를 버리고 숙정을 생각했는데 / 化雲心兮思淑貞
열반(涅槃)의 경지에 이르렀건만 사람을 볼 수 없어 / 洞寂滅兮不見人
아리따운 요초는 힘차게 자라는데 / 瑤草芳兮思氣氳
어쩔거나 이 내 청춘 / 將奈何兮靑春
했다. 마침내 환속(還俗)하여 우리 곽공(郭公)에게 시집왔다. 장수(長壽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연호) 2년 계사년 2월 17일 통천현(通泉縣) 관사(官舍)에서 졸(卒)했다.”
했다. 상고하건대,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19년 을사에 설 장군이 죽었는데, 그때 희인의 나이가 15세였다. 그렇다면 희인은 신묘생이 되니, 설 장군이 당 나라에 간 지 10년에 비로소 딸을 낳았던 것이다.

송 나라 희령(熙寧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말기에 낙양(洛陽) 지방에 한 백성이 봉황산(鳳凰山) 밑에서 밭갈다가 돌 비를 얻었다. 사방 너비가 2자 남짓했는데 부인이 그 지아비의 무덤에 기록한 글이었다. 그 글의 제목은 한 나라 진사 조인(曹禋)의 묘지명(墓誌銘)이라고 되어 있고 내용에 이르기를,
“군(君)의 성은 조씨고 이름은 인이며 자는 예부(禮夫)이니, 대대로 낙양 사람이다. 28세에 두 번 대책(對策)에 응했으나 뽑히지 못하고 장안(長安)에서 돌아오는 도중 죽으니, 조정의 경대부(卿大夫)와 시골의 고로(故老 나이 많고 학덕이 높은 사람)가 이 소식을 듣고 효우(孝友)ㆍ목인(睦婣)ㆍ독행(篤行)ㆍ능문(能文)의 인사가 왜 이다지도 일찍 죽는가 하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몸은 그 소식을 듣고서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어머님을 위로하기를 ‘집에 남쪽 밭이 있어서 어버이를 봉양하기에 족하고 방에 남은 책이 있어서 자식을 가르치기에 족합니다. 무릇 하늘과 땅 사이에 처한 자로 생사(生死)의 명수(命數)는 도망할 수 없는 것이니, 슬퍼하고 기뻐할 것이 뭐 있습니까.’했다. 병자년 3월 18일에 졸하여 그 해 10월 15일에 봉황산 언덕에 장사지냈다. 내 성은 주씨(周氏)로 군의 아내이다. 군의 집에 시집온 지 18년에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나이 아직 어리다. 그 은정(恩情)ㆍ의리(義理)를 잊을 수 없는 까닭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세상에 나는 것도 운명 죽는 것도 운명, 진실로 이 이치에 통달한다면 무엇을 슬퍼하리. 삶은 덧없는 것이고 죽음은 쉬는 것, 한탄할 게 뭐 있는가 어머님의 근심을 위로하네.”
했다.
내가 생각건대, 인이 28세로 병자년에 죽었고 주씨가 조에게로 시집온 지 18년 되었다면 인이 10세에 장가든 것이다. 한(漢) 나라 왕길(王吉)이 올린 세속(世俗)에서 일찍 혼인한다는 상소를 여기에서 상고할 수 있다 하겠다. 부인의 글이 또한 사리(事理)에 밝고 뜻이 맑아서 읽을 만하다.《문선(文選)》의 이선(李善)의 주에,
“오균(吳均)의《제춘추(齊春秋)》에 ‘왕검(王儉)이 말하기를「석지(石誌)는 예전(禮典)에 나오지 않는다. 송 나라 원가(元嘉 남조(南朝) 송 문제(宋文帝)의 연호) 연간에 안 연지(顔延之)가 왕임(王琳)의 석지를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했다.’ 하였다.”
하였으니, 한 나라 시대에 이미 지가 있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혹시 무덤 앞에 세웠던 것이 쓰러져서 땅 속에 묻힌 것일까. 뒤에 고문호(高文虎)의 《요화주한록(蓼花洲閑錄)》에도 조인의 묘지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는데 ‘30세에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밑에 ‘군에게 시집온 지 8년이다.’ 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전본(前本)은 역시 송 나라 사람의 글에서 나왔다.

문인(文人)으로서 인색한 것은 더욱 애석한 일이고 문인으로서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쾌활하다고 하겠다. 이백(李白)이 배 장사(裵長史)에게 올린 글에,
“지난날에 동쪽으로 유양(維揚, 양주(揚州))에 논 지 1년을 넘지 않아서 금(金) 30여 만을 흩었으니, 실의(失意)에 빠진 공자(公子)가 있으면 모두 구제했습니다.”
했다.
한유(韓愈)가 사람과 사귐에 있어 죽은 이가 있으면 그 자녀를 구휼(救恤)하여서 혼가(婚嫁)까지도 마쳐 주었으니, 맹교(孟郊)ㆍ장적(張籍) 따위가 이것이다. 그리고 비문을 만들고 휘호(揮毫)를 받아서 베풀기도 했다. 퇴지(退之 한유의 자)는 은혜를 베풀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또 후배를 추천하고 장려하기를 잘했다. 퇴지는 황보식(皇甫湜)과 더불어 한 세상에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는데, 우승유(牛僧孺)가 그 배운 바를 가지고 찾아가 뵈니, 두 분이 크게 칭찬했다. 그리고 우승유가 출타한 틈을 타서 그 집을 방문하고, 그 문에다 큰 글씨로 ‘한유와 황보식이 함께 방문했다.’고 썼다. 이튿날 유궐(遺闕 좌우습유(左右拾遺)와 좌우보궐(左右補闕)의 청환(淸宦)) 이하의 사람이 모두 가서 투자(投刺 명함을 들이는 것)했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하(李賀)는 나이 7세에 이름이 경사(京師)를 진동했다. 퇴지와 황보식이 그 글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 같은 옛사람은 우리가 일찍이 알지 못했지만, 이 같은 지금 사람이야 모를 리 있으랴.”
했다. 그리고 두 분이 그 집에 찾아가 ‘높은 수레가 찾아왔네.[高軒過]’ 하는 제목의 시를 짓게 했다. 아아! 지금은 이 같은 풍도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은혜를 베푸는 것조차도 논할 것 없는데 남을 장려하는 일이 어디에 있으랴. 만 권의 책을 모두 읽었다고 하지만 단지 시기할 시(猜) 자와 자랑 긍(矜) 자를 알 뿐이니, 문장(文章)을 하여 어디에 쓰랴.
당 나라 양 좨주(楊祭酒 양경지(楊敬之))가 인재를 사랑했는데, 공이 일찍부터 강남(江南)의 선비 항사(項斯)를 알고 있었는데, 시를 지어 보내기를,
번번이 시를 볼 적마다 시가 모두 좋아 / 度度見詩詩總好
높은 그 인격 대해 보니 시보다도 빼어났네 / 及觀標格過於詩
내 평생에 남의 선을 감출 줄 몰라 / 平生不解藏人善
가는 곳마다 사람 만나면 항사를 말한다오 / 到處相逢說項斯
했는데, 이로 말미암아서 이름이 떨쳤으며, 마침내 높은 과거에 올랐다. 사대부(士大夫)의 마음가짐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남의 재능(才能)을 시기하는 자는 향을 사르고 마음을 깨끗이 해서, 이 시에 대하여 정례(頂禮 이마를 땅에 대고 절하는 것)해야 할 것이다.

일본 상모 다호군 비문(日本上毛多胡郡碑文)에 적혀 있는 변관부(弁官符)에,
“상야국(上野國)의 편강군(片罡郡)ㆍ녹야군(綠野郡)ㆍ감량군(甘良郡) 세 고을 안의 민호(民戶) 3백 호부(戶部)를 양성다호군(羊成多胡郡)에 떼어 주었고, 화동(和銅) 4년 3월 9일 갑인에 선포(宣布)했다. 좌중변(左中弁) 정5위(位) 하다치비진인(下多治比眞人), 태정관(太政官) 2품 수적친왕(親王), 좌태신(左太臣) 정2위 석상존(石上尊), 우태신(右太臣) 정2위 등원존(藤原尊).”
이라 했는데, 이 비는 다호군 지촌(池村)에 있고 사자관(寫字官)은 일본 동도(東都 동경(東京)의 별칭(別稱))의 평린(平鱗)인데 자는 경서(景瑞)이다.
갑술년에 이 비를 보고 비로소 밝혀 냈는데, 전일의 호사자(好事者)들이 모두 보지 못했던 것이다. 마침내 비문을 탁본(拓本)하고 여러 서적(書籍)을 인용하여서 부각(附刻 부대(附帶)된 각문(刻文))을 고증했는데, 봉후(封侯)의 식채비(食采碑 식채는 식읍(食邑)을 주는 것)였다. 글이 알지 못할 것이 많고 글자는 크기가 어린애 손바닥만큼씩 한데, 기고 박락(奇古剝落)하여서 예학명(瘞鶴銘)이나 노공(魯公 당 나라 안진경(顔眞卿)의 봉호)의 글씨와 매우 비슷했다. 어떤 것은 마치 동자(童子)가 먹으로 까마귀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서여오(徐汝五)는 ‘기이하기는 기이하지만 글자가 글자를 이루지 못했다.’ 했으며, 김영중 두열(金英仲斗烈)은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화동 4년(711) 갑인(甲寅)은 바로 일본의 원명천황(元明天皇) 4년이고, 당 나라 예종(睿宗) 경운(景雲) 2년인데, 오늘의 왜황(倭皇) 위보력(僞寶曆) 6년(1756) 병자에 탁본할 때까지가 함께 1천 46년이다. 《고전보(古錢譜)》를 상고하건대 일본의 화동통보(和同通寶)가 있는데, 동(銅)과 동(同)이 다름이 있으니, 혹시《전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고증(考證)하여 변관(弁官)을 해명(解明)한 데는,《직원초(職原抄, 일본 관제(官制)에 대한 기록)》를 인용하여서 ‘변(辨)이 7인, 좌우대변(左右大辨)이 2인이다.’ 했으며, 수적친왕을 해명한 데는,《공경보임(公卿補任 역시 일본 관제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여서 ‘태정관 2품 수적친왕임을 알았다.’ 했다. 변(弁)은 변(辨)이고, 수(穗)와 적(積)이 의(衣) 변과 화(禾) 변의 다름이 있으나 이는 서로 통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銅)과 동(同)이 역시 통용되는 것일까.《고증기(考證記)》의 한 가지 일이 매우 기이(奇異)해서 이제 여기에 기록한다.
“성급양(成給羊)의 뜻은 확실히 알 수 없다. 토인(土人)이 양태부비(羊太夫碑)로 부르니, 토인이 전하는 기록에 따르기로 한다. 이는 석염곡(石鹽谷)의 두 골짜기가 소번(小幡) 양태부의 고을이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높은 바위가 험하여 짐승도 달리지 못하며, 꼭대기에 큰 바위가 있으니 속칭 어전석(御前石)이라고 한다. 또 팔속성(八束城)이 있어 팔속령(八束嶺)에 접했으니, 인하여서 이 이름을 얻었다. 양씨(羊氏)는 경사(京師)에 조회(朝會)할 때마다 반드시 용구(龍駒)를 탔고 한 더벅머리가 따랐는데 더벅머리의 다리가 8척(尺)이기 때문에 팔속소경(八束小脛)이라고 했다. 화동 4년에 어떤 사람이 상변(上變)하여 양씨가 반역하려는 상황을 고하니, 주장(主將) 모(某)가 관병(官兵)을 거느리고 가서 쳤다. 양씨는 항거해 싸우지 못하고 단기(單騎)로 달아나 지촌(池村)에 이르러서 자살했다. 그 머리가 뽑혀 날아가 지촌에 떨어지니 곧 장사지내고 비를 세워서 지금도 아직 남아 있다. 용구는 달아나 마정촌(馬庭村)에 이르러 날아서 하늘로 올랐으니, 지금의 마정산(馬庭山) 서운사(瑞雲寺)가 그곳이다. 양씨의 재(宰)가 양 부인(羊夫人)을 따라 도망하여 낙합촌(落合村)에 이르러서 관병에게 핍박당하자 부인 및 7빈(嬪)과 재가 모두 죽었으니, 칠흥산(七興山) 종수사(宗水寺)가 곧 여기이다. 지촌의 민가에서 곽란(癨亂)을 앓는 자가 양씨의 사당에 기도하면 곧 그친다. 물 속의 돌을 캐내어 그 신(神)의 사당집을 지었다.”
했다.
왜(倭)의 글을 상고하건대,
“등원광사(藤原廣嗣)가 성무제(聖武帝 성무천황(聖武天皇)) 천평(天平) 18년에 현방(玄昉)에게 참소당하자, 광사가 의분(義憤)을 느껴서 모반(謨叛)했으나 싸움에서 패하고, 스스로 칼로 머리를 끊고서 하늘로 올라갔다. 살았을 때에 용구(龍駒)를 얻었으므로, 태재부(太宰府)에서 내량경(奈良京)에 이르기까지 하루에 왕반(往返)할 수 있었다.”
했으니, 이 일이 서로 비슷하다.

고려 선종(宣宗) 8년에 진봉사(進奉使) 이자(李資) 등이 송 나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황제께서 우리나라에 좋은 서적이 많음을 들으시고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관원)에게 명하여 구할 도서의 목록을 써 주게 하고 말하시기를 ‘권질(卷帙)이 부족한 것은 반드시 베껴서 보내라.’ 하셨습니다.”
하였는데, 서목(書目)은 다음과 같다.
《백편상서(百篇尙書)》ㆍ순상(荀爽)의《주주역(注周易)》10권,《경방역(京房易)》10권, 정강성(鄭康成)의《주주역(注周易)》9권, 육적(陸績)의《주주역(注周易)》14권, 우번(虞翻)의《주주역(注周易)》9권,《동관한기(東觀漢記)》1백 20권, 사승(謝承)의 《후한서(後漢書)》1백 30권,《한시(韓詩)》22권, 업준(業遵)의《주모시(注毛詩)》20권, 여침(呂忱)의《자림(字林)》7권,《고옥편(古玉篇)》30권,《괄지지(括地志)》5백 권,《여지지(輿地志)》30권,《신서(新序)》3권,《설원(說苑)》20권, 유향(劉向)의《칠록(七錄)》20권, 유흠(劉歆)의《칠략(七略)》7권, 왕방경(王方慶)의《원정초목소(園亭草木疏)》27권,《고금록험방(古今錄驗方)》50권,《장중경방(張仲景方)》15권,《원백창화시(元白唱和詩)》1권,《심사방(深師方)》,《황제침경(黃帝鍼經)》9권,《구허경(九墟經)》9권,《소품방(小品方)》12권,《도은거효험방(陶隱居效驗方)》6권,《시자(尸子)》20권,《회남자(淮南子)》21권, 공손나(公孫羅)의《문선주(文選注)》,《수경(水經)》40권, 양호(羊祜)의《주노자(注老子)》2권, 나십(羅什)의《주노자(注老子)》2권, 종회(鍾會)의《주노자(注老子)》2권, 완효서(阮孝緖)의《칠록(七錄)》, 손성(孫盛)의《진양추(晉陽秋)》,《삼자(三子)》3권, 손성의《위씨춘추(魏氏春秋)》20권, 간보(干寶)의《진기(晉紀)》22권,《십륙국춘추(十六國春秋)》1백 2권, 위담(魏澹)의《후위서(後魏書)》1백 권, 어환(魚豢)의《위략(魏略)》, 유번(劉璠)의《양전(梁典)》30권, 오균(吳均)의《제춘추(齊春秋)》30권, 원행충(元行冲)의《위전(魏典)》60권, 심손(沈孫)의《제기(齊紀)》20권, 《양웅집(揚雄集)》5권, 《반고집(班固集)》14권, 《최인집(崔駰集)》10권, 《급총기년(汲塚紀年)》 14권, 《사령운집(謝靈運集)》 20권, 《안연년집(顔延年集)》41권, 《삼교주영(三敎珠英)》1천 권, 공관(孔逭)의《문원(文苑)》1백 권,《유문(類文)》1백 권, 《문관사림(文館詞林)》1천 권, 중장통(仲長統)의《창언(昌言)》, 두서(杜恕)의《체론(體論)》,《제갈량집(諸葛亮集)》24권, 왕희지(王羲之)의《소학편(小學篇)》1권, 주처(周處)의《풍토기(風土紀)》1권, 장읍(張揖)의 《광아(廣雅)》4권,《관현지(管絃志)》4권, 왕상(王祥)이 지은《음악지(音樂志)》, 채옹(蔡邕)의《월령장구(月令章句)》12권, 신도방(信都芳)이 지은《악서(樂書)》9권,《고금악록(古今樂錄)》13권,《공양묵수(公羊墨守)》15권,《곡량폐질(穀梁廢疾)》3권,《효경유소주(孝經劉邵注)》1권,《효경위소주(孝經韋昭注)》1권,《정지(鄭志)》9권,《이아도찬(爾雅圖贊)》2권,《삼창(三蒼)》3권,《비창(埤蒼)》3권, 위굉(衛宏)의 《궁서(宮書)》1권,《통속문(通俗文)》2권,《범장편(凡將篇)》1권,《재석편(在昔篇)》1권,《비룡편(飛龍篇)》1권,《성황편(聖皇篇)》1권《권학편(勸學篇)》1권,《진중흥서(晉中興書)》80권,《고사고(古史考)》25권,《복후고금주(伏侯古今注)》8권,《삼보황도(三輔黃圖)》1권,《한관해고(漢官解詁)》3권, 《삼보결록(三輔決錄)》7권,《익도기구전(益都耆舊傳)》14권,《양양기구전(襄陽耆舊傳)》5권, 혜강(嵇康)의《고사전(高士傳)》3권,《현안춘추(玄晏春秋)》3권, 간보(干寶)의《수신기(搜神記)》30권,《위명신주(魏名臣奏)》31권,《한명신주(漢名臣奏)》29권,《금서칠지(今書七志)》10권,《세본(世本)》4권,《신자(申子)》2권,《수소자(隨巢子)》1권,《호비자(胡非子)》1권, 하승천(何承天)의《성원(性苑)》ㆍ《고사염씨족지(高士廉氏族志)》1백 권,《십삼주지(十三州志)》14권,《고려풍속기(高麗風俗記)》1권,《고려지(高麗志)》7권,《자사자(子思子)》8권,《공손니자(公孫尼子)》1권,《신자(愼子)》10권,《조씨신서(晁氏新書)》3권,《풍속통의(風俗通義)》30권,《범승지서(氾勝之書)》3권,《영헌도(靈憲圖)》1권,《대연력(大衍曆)》,《병서접요(兵書接要)》7권,《사마법(司馬法)》,《한도(漢圖)》1권,《동군약록(桐君藥錄)》2권,《황제대소(黃帝大素)》3권,《명의별록(名醫別錄)》3권,《조식집(曹植集)》30권,《사마상여집(司馬相如集)》2권, 환담(桓譚)의《신론(新論)》10권,《유곤집(劉琨集)》15권,《노심집(盧諶集)》21권,《산공계사(山公啓事)》3권,《서집(書集)》80권, 응거(應璩)의《백일시(百一詩)》8권,《고금시원영화집(古今詩苑英華集)》20권,《집림(集林)》20권,《계연자(計然子)》15권.
이때는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6년(신미)이다.

왕원미(王元美)가 천하의 문맹(文盟)의 주권(主權)을 잡아서 남의 성가(聲價)를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했으니, 문인(文人)으로서 아직 없었던 일이다. 자기를 추종하는 자는 끌어 주고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자는 배척하면서 해내(海內)의 명사(名士)를 모두 손아귀 속의 물건으로 만들었다. 시기하는 자도 많았지만 재앙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융성(隆盛)하고 문명한 세상이라서 몸을 용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와 친하게 지낸 자는 전후하여 각각 다섯 사람인데 전오자(前五子)는 제남(濟南)의 이반룡(李攀龍), 오흥(吳興)의 서중행(徐中行), 남해(南海)의 양유예(梁有譽), 무창(武昌)의 오국륜(吳國倫), 광릉(廣陵)의 종신(宗臣)이요, 후오자(後五子)는 남창(南昌)의 여왈덕(余曰德), 포절(浦折)의 위상(魏裳), 흡군(歙郡)의 왕도곤(汪道昆), 촉군(蜀郡)의 장가윤(張佳允), 신채(新蔡)의 장구일(張九一)이요, 광오자(廣五子)는 곤산(崑山)의 유윤문(兪允文), 위군(魏郡)의 노담(盧枏), 복양(濮陽)의 이선방(李先芳), 효풍(孝豐)의 오유악(吳維嶽), 남해(南海)의 구대임(歐大任)이요, 속오자(續五子)는 양곡(陽曲)의 왕도행(王道行), 위군의 석성(石星), 영남(嶺南)의 여민표(黎民表)ㆍ예장(豫章)의 주다규(朱多煃)ㆍ우읍(虞邑)의 조용현(趙用賢)이다.
또 두 사람의 벗이 있으니, 종백(宗伯) 왕석작(王錫爵)과 아우 학헌(學憲) 세무(世懋)다. 그의 말에,
“원어(元馭 왕석작의 자(字))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를 지닌 나를 발탁하여 태상(太上)에 올려 놓고 또 갈고 닦아서 성취케 했으니, 내 벗이지만 실지는 내 형인 셈이다. 경미(敬美)는 나를 바로잡아 주고 보전케 했으니, 내 아우이지만 실지는 내 형인 셈이다.”
했다.
또 오자(五子)를 중복하여 기록했으니, 사마(司馬) 왕도곤(王道昆)ㆍ참정(參政) 오국륜(吳國倫)ㆍ헌부(憲副) 여왈덕(余曰德)ㆍ어사대부(御史大夫) 장가윤(張佳允)ㆍ장구일(張九一)이다. 그의 말에,
“지난날에 오자편(五子篇)을 만들었고 또 그 뒤에 오자편을 만들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미 반이 죽어갔다. 이제 살아남은 자가 일시(一時)에 모였기 때문에 오자(五子)를 만들었다.”
했다.
또 말오자(末五子)가 있으니, 태사(太史) 조용현(趙用賢)ㆍ참정(參政) 이유정(李維楨)ㆍ의부(儀部) 도융(屠隆)ㆍ박사(博士) 위윤중(魏允中)ㆍ선배(先輩) 호응린(胡應麟)이다. 그의 말에,
“여사(汝師)는 지난날에 이미 언급(言及)되었지만 그 경지(境地)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런 까닭에 중출(重出)해도 무방하다.”
했는데, 여사는 곧 조용현으로서 속오자에 들어 있던 자이다.
또 이 밖의 함께 놀던 자 40인을 거두어서 사십영(四十詠 시인(詩人)의 뜻)으로 했으니, 첨사(僉事) 황보방(皇甫汸)ㆍ방백(方伯) 막여충(莫如忠)ㆍ장사(長史) 허방재(許邦才)ㆍ산인(山人) 주천구(周天球)ㆍ산인 심명신(沈明臣)ㆍ태사(太史) 왕조적(王祖嫡)ㆍ첨사(僉事) 유봉(劉鳳)ㆍ선배 장봉익(張鳳翼)ㆍ왕손(王孫) 주다귀(朱多)ㆍ산인(山人) 고맹림(顧孟林)ㆍ진사(進士) 은도(殷都)ㆍ고공(考功) 목문희(穆文熙)ㆍ선배 유황상(劉黃裳)ㆍ태학(太學) 장헌익(張獻翼)ㆍ태학(太學) 왕치등(王穉登)ㆍ산인(山人) 왕숙승(王叔承)ㆍ선부(選部) 주홍약(周弘禴)ㆍ상새(尙璽) 심사효(沈思孝)ㆍ고공(考功) 위윤정(魏允貞)ㆍ항주(杭州) 유균(喩均)ㆍ황주(黃州) 추적광(鄒迪光)ㆍ명부(明府) 여상(余翔)ㆍ장군(將軍) 장원개(張元凱)ㆍ경조(京兆) 장명봉(張鳴鳳)ㆍ시어(侍御) 형동(邢侗)ㆍ이부(吏部) 추관광(鄒觀光)ㆍ산인 조창선(曹昌先)ㆍ태학 서익손(徐益孫)ㆍ태학 구여직(瞿汝稷)ㆍ태사 고소방(顧紹芳)ㆍ왕손(王孫) 주기봉(朱器封)ㆍ선배 황정수(黃廷綬)ㆍ사리(司理) 서계(徐桂)ㆍ산인 왕백조(王伯稠)ㆍ무재(茂才) 왕형(王衡)ㆍ태학(太學) 주도관(注道貫)ㆍ태학 화선계(華善繼)ㆍ부막(府幕) 장구이(張九二)ㆍ수재(秀才) 매정조(梅鼎祚)ㆍ문학(文學) 오가등(吳稼竳)이다.
이 밖에도 같은 때에 귀유광(歸有光)ㆍ탕현조(湯顯祖)ㆍ서위(徐渭) 같은 이는 모두 왕원미ㆍ이반룡을 배격했으므로 사십 명의 열에 참여하지 못한 것일까.
대체로 명목(名目)을 표방(標榜)한데 있어 자기가 만든 것도 죽계육일(竹溪六逸)과 같은 것. 있고,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여 만든 것도 상산사호(商山四皓)와 같은 것. 있고, 죽은 뒤에 후인이 추후로 만든 것도 주자(朱子)가 찬양한 여섯 선생과 같은 것. 있고,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화(禍)를 전가(轉嫁)시키려 하여 만든 것도 명 나라 말기의 《점장록(點將錄)》과 같은 것. 있다. 만약 문장 도학(道學)이 있고 지기(志氣)가 맞아서 서로 추양(推讓)하여서 명목(名目)이 저절로 생긴다면, 혹 군자의 미담(美談)이 되고 소대(昭代)의 성대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세의 사람은 결코 남의 표방(標榜)을 받을 수 없는데, 하물며 스스로 명목을 만들어서 남의 비방과 조소(嘲笑)를 받음에랴! 그리고 또 경박 방탕으로 흐르기 쉬우니, 후생(後生) 소자(小子)는 망령되게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고 또 함부로 남에게 명목을 가해서도 안 된다.
고려의 이인로(李仁老)ㆍ오세재(吳世才)ㆍ임춘(林椿)ㆍ조통(趙通)ㆍ황보항(皇甫抗)ㆍ함순(咸淳)ㆍ이담지(李湛之) 등이 스스로 일대의 호걸이라 해서 벗이 되어 자칭 칠현(七賢)이라 하고 시주(詩酒)로 방약무인(旁若無人)했다. 세재가 죽자 담지가 이규보(李奎報)에게,
“그대로 보충할까?”
하니, 규보가 말하기를,
“칠현이 무슨 조정의 관작(官爵)이라고 그 결원(缺員)을 보충하랴.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의 뒤를 이은 자가 있음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니, 모두 크게 웃었다. 또 시를 짓게 했는데, 규보가 즉석에서 읊기를,
알 수 없네 칠현 중에서 / 未識七賢內
누가 오얏씨를 뚫었는지 / 誰爲鑽核人
하니, 좌중이 모두 성내었다. 그 이른바 칠현이란 모두 실없는 사람에 속했다. 아조(我朝)에 와서 이산해(李山海)ㆍ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최립(崔岦)ㆍ이순인(李純仁)ㆍ윤탁연(尹卓然)ㆍ하응림(河應臨)ㆍ송익필(宋翼弼)을 당시의 팔문장(八文章)으로 일컬었다. 이들은 모두 문학이 뛰어났으면서도 서로 표방하지 않았으니, 성세(盛世)의 미담(美談)이 되기에 족하다. 그리고 또 송구봉(宋龜峯 : 구봉은 송익필의 호)은 한미(寒微)한 신분으로도 그 안에 참여했으니 당시의 공론(公論)의 바름과 풍속의 순후함을 알겠다. 그 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오자시(五子詩)에 인성(寅城 본관) 정자용 홍명(鄭子容弘溟 자용은 자)ㆍ덕수(德水 본관) 장유(張維)ㆍ금성(錦城 본관) 박중연 미(朴仲淵瀰 중연은 자)ㆍ연성(延城) 이천장 명한(李天章明漢 천장은 자)을 열거하였다. 상고하건대 5의 수에 차지 못하니 상고해야 한다. 이미 오자(五子)를 술(述)하고서 또 오자를 더하여 통틀어서 십자편(十子篇)으로 만들었으니, 덕수(德水) 이여고 식(李汝固植 여고는 자)ㆍ완산(完山) 이자시 민구(李子時敏求 자시는 자)ㆍ연일(延日 본관) 정덕여 백창(鄭德餘百昌 덕여는 자)ㆍ해숭(海嵩 본관) 윤중우 신지(尹仲又新之, 중우는 자)이다. 이것도 5의 수에 차지 못한다. 모두 명류(名流)이니, 당시의 인문(人文)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계신잡지(癸辛雜志)》에,
“바다를 다니는 배는 반드시 큰 판자(板子)로 그 외면(外面)을 보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체(船體)를 해저(海蛆 배를 갉아먹는 벌레)가 갉아먹는다.”
했다. 상고하건대 일본 사람도 이 같은 방법을 써서 갑강(甲舡)이라고 하여 오래되면 벗겨 버리고 다시 새 판자를 갈아대어 선체가 늘 새것과 같다. 갑신년에 통신사(通信使)가 돌아올 때에 공장(工匠)을 시켜서 그 법을 배워 오게 했다. 병술년에 바다를 건널 때에 역관(譯官)이 비로소 이 제도를 썼는데 물이 그 사이에 들어가 배가 뒤집혀 1백여 명이 죽었으니, 이는 장치(裝治 꾸며 만드는 것)가 왜인(倭人)같이 정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공(恭) 자는 연해 보이고 경(敬) 자는 딱딱해 보인다.”
했고, 면재 황씨(勉齋黃氏 면재는 송 나라 학자 황간(黃幹)의 호)는,
“공은 머리를 숙인 것 같고, 경은 머리를 든 것 같다.”
했으며, 서산 진씨(西山眞氏 서산은 송 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의 호)는,
“경은 견강(堅强)의 뜻이 있고, 공은 유순(柔順)의 뜻이 있다.”
하여, 경과 공에 대한 분별이 세 분이 모두 같았는데, 북계 진씨(北溪陳氏 북계는 송 나라 학자 진순(陳淳)의 호) 혼자만,
“경 공부(工夫)는 세밀하고 공의 기상은 활대(闊大)하며, 경의 의사는 비굴(卑屈)하고 공의 의사는 존엄(尊嚴)하다.”
하여, 세 분 선생과 말이 다르다.

《노자(老子)》에 이르기를,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체하는 것이 상(上)이고,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것이 병폐(病弊)이다.”
했는데,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는 것이 병폐라면 알면서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닌가. 공자가 말하기를,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아는 것이다.”
했는데, 이 말은 명백하여 뒤에 오는 폐단이 없기 때문에 만세(萬世)의 법이 될 수 있다.

이 노유(李老儒) 아무가 술수(術數)의 서적을 잘 해득했다. 내가 일찍이 묻기를,
“모든 점가(占家 여기서는 점서(占書))에서 어느 것이 가장 좋습니까?”
하니, 이씨가 한참만에 대답하기를,
“평생에 한 가지 점서를 독신(篤信)하는데《중용(中庸)》에 ‘지성(至誠)이면 앞일을 알 수 있다.’ 했으니, 이것으로 족합니다. 그 밖의 잡서는 모두 방류(旁流)입니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했다.

여오(汝五)가 일찍이 말하기를,
“글자를 쓰는 것은 심화(心畫 글씨에는 쓰는 사람의 마음이 나타난다고 해서 하는 말)가 아님이 없다. 무엇을 가지고 아느냐 하면, 왼손에 붓을 잡고 쓰는 것이 비록 오른손으로 쓰는 것과 같이 편리하지는 못하지만 그 글자 모양은 자가(自家)의 본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발가락에 붓을 끼우고 쓰거나, 입에 붓을 물고 쓰거나 다 그와 같으니, 이것이 심화가 아니랴.”
했다.

자공(子貢)의《시전(詩傳)》에 ‘간혜(簡兮)는 영인(伶人 악관(樂官))의 이름이고 간(簡)은 간(柬)과 통한다.’ 했는데, 신배(申培 한(漢) 나라 사람)의《시설(詩說)》에도 역시 그렇다. 신대(新臺)를 소서(小序)에서는 신(新),《시전》에서는 친(寴),《시설》에서는 친(親)이라 했다.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의관(衣冠)을 수칙(修飭)하여 위의(威儀)를 엄숙히 하는 자를 사람이 비웃어 말하기를 ‘저 사람은 가식하는 것이다. 그 마음속에는 무한(無限)한 욕심이 있으면서 억지로 수양(修養)이 있는 것처럼 꾸미니, 무익(無益)하다. 감정(感情)대로 행동하여 눕고 싶으면 눕고 식(食)ㆍ색(色)을 말하고 싶으면 서슴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심히 쾌활한 것만 못하다.’ 하는데, 이 논법(論法)이 어떤가?”
하니, 유 아사(柳雅士) 영건(榮健)이 말하기를,
“비록 가식하는 자가 있다지만, 마치 음식을 대하여 먹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사양하고서 먹는 것과 같으니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초 장왕(楚莊王)이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서 날이 저물도록 마시게 했는데 모두 거나하게 취했다. 마침 전상(殿上)에서 촛불이 꺼지자 왕후(王后)의 옷을 끌어당기는 자가 있었는데 후가 그 관(冠)끈을 잡아당겨서 끊었다.”
했다. 나는 이 말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긴다. 장왕이 비록 패자(伯者)이긴 하지만 어찌 그 후를 끼고서 군신(群臣)과 같이 전각 안에서 야음(夜飮)할 리 있으랴. 그리고 왕자(王者)가 밤에 잔치하면서 촛불 하나만을 밝혔을 리가 없다.

《대대례기(大戴禮記)》제계편(帝繫篇)에 ‘고수가 중화를 낳았으니 이가 제순이고, 상을 낳은 다음 오를 낳았다.[瞽叟産重華 是爲帝舜 及象産敖]’ 했는데, 이 글뜻은 알기 어렵다. 고수가 세 아들을 낳아서 순ㆍ상ㆍ오라고 했다면, 그 이른바 ‘아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는 모질고, 상은 오만하다.[父頑母囂象敖]’ 함은 어찌된 것인가.
사마천(司馬遷)이 비록 제계편을 인용하여서 삼대세표(三代世表)를 만들었다지만 순이 황제(黃帝)에게는 9대손이 되고 요(堯)에게는 4대 종손이 된다. 그렇다면 요가 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냄은 어찌된 것인가.

내 일찍이 배불리 먹는 것이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해서 글읽기에 크게 불리함을 깨달았다. 손이 말하기를,
“소년들을 두루 살펴보니 밥을 많이 먹는 자는 모두 요사(夭死)했다.”
했다. 이제《박물지(博物志)》를 보니,
“적게 먹을수록 마음이 열리고 수(壽)를 더하며, 많이 먹을수록 마음이 막히고 수를 던다.”
했으니, 앞에서 말한 것이 징험(徵驗)이 있음을 알겠다.

날마다 진귀(珍貴)한 음식을 먹어야 배부르다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나의 밥만 못하고, 날마다 넓은 궁관(宮觀)과 높은 누대(樓臺)에 논다 해도 돌이켜 생각한다면 내 정당(正堂)만 못하며, 날마다 자집(子集)ㆍ백가(百家)를 읽는다 해도 돌이켜 생각한다면 내 경서(經書)만 못하다.
이 노유(李老儒) 아무가 말하기를,
“경서 이외에는 뜻을 해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고, 또,
“육상산(陸象山 상산은 육구연(陸九淵)의 자)의 학문은 서적(書籍)을 버리고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육경(六經)으로써 자기의 소주(小註)를 삼는다고 하니, 이 말이 매우 좋지 않다. 나는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육경을 불태우게 될까 걱정된다.”
했다.

예로부터 바둑을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는 비록 어진이라도 물들지 않고 태연하기가 심히 어렵다. 위소(韋昭)ㆍ왕숙(王肅)ㆍ갈홍(葛洪)ㆍ도간(陶侃)ㆍ안지추(顔之推)ㆍ피일휴(皮日休)ㆍ임포(林逋) 등 몇 사람이 있지만 이들도 힘써 물리쳤다. 나는 평생에 바둑을 좋아하지 않아서 잘 두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고 싶지도 않다. 남이 혹 말하기를,
“다른 놀음은 끊어야 하지만 바둑은 한가롭고도 맑은 풍치(風致)가 있으니 할 만하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바둑은 죄의 괴수가 된다. 모든 놀음이 어찌 이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랴. 놀음을 물리치려면 먼저 바둑부터 물리쳐야 한다. 사업을 폐지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둑판의 길을 다투면서 시끄럽게 떠드니 맑은 풍치를 보기도 전에 먼저 바둑의 노예가 된다.”
했다.

관자(管子)가 젊은 남녀에게는 오자(五子)라고 부르고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에게는 제군(諸君)이라고 하니, 오자란 젊었다고 해서 낮추는 뜻이고 제군이란 늙었다고 해서 공경하는 뜻인가, 아니면 제(齊) 나라의 방언인가.

옛날에는 잠잘 때에 침의(寢衣)가 있었으니 응당 침관(寢冠)이 있었을 것인데도, 지금은 두풍(頭風)을 앓는 자만이 침관이 있다. 내 일찍이 관영(管寧 삼국 때 위(魏) 나라 사람)이 풍파(風波)를 만나 ‘사흘 동안 머리를 싸매지 못한 것을 스스로 자책하였다. [自訟三晨不裹頭]’ 한 말을 좋아했다. 그 말은 1각(刻)이라도 관을 벗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갑신년에 동배(同輩) 5~6명의 소년이 여름 석달 동안 과거 공부에 열중했는데, 여러 사람이 끝까지 한 번도 관을 벗지 않았다니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것이다.《풍속통(風俗通)》을 보니,
“건(巾)은 머리를 신칙하는 것이고 옷은 몸을 가리는 것이니, 사군자(士君子)가 스스로 이적(夷狄)과 구별하는 것이다. 오직 상자(喪者)ㆍ송자(訟者 자책하는 자)만이 맨머리로 초막에 거처한다.”
했으니, 심히 내 뜻에 흡족했다.

내 이미 세상에 전해지는《삼분(三墳)》의 글이 후세의 위작(僞作)임을 변명했는데, 그것을 얻은 내력도 괴이하거니와 또 서(序)를 붙인 자가 송 나라 사람이다. 그런데 서문 끝에 성명을 쓰지 않았으니 매우 의문으로 여겼다. 이제 왕응린(王應麟)의 《상서고이(尙書考異)》를 상고하건대,
“원풍(元豐) 연간에 모점(毛漸)이 서경(西京)에서 얻었다.”
했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장천각(張天覺)이 비양(比陽)의 민가에서 얻었다고 했으니, 옛것이 아니다.”
했다. 내가 그 서문을 상고하건대,
“원풍 7년에 내가 서경에 봉사(奉使)하여 속읍(屬邑)을 순안(巡按 순행하면서 안무(按撫)하는 것)할 때에 당주(唐州) 비양(泌陽)을 경유하게 되었다. 마침 우정(郵亭 역 마을의 객사(客舍))이 없어서 민가에 들었는데 그 문에 ‘《삼분》의 글을 아무가 빌려갔다.’고 했다.”
했다. 두 사람의 말은 참으로 분별하기 어렵다.《고이》에는 비양(比陽)이라 하고 여기서는 비양(泌陽)이라고 했으니, 비(比)와 비(泌)가 음이 같아서 잘못된 것일까.

일찍이 어떤 사람의 문집(文集)을 보니 격물(格物)ㆍ물격(物格)의 말을 분별했는데 그 내용은,
“격물이란 당 나라 사람의 시에 ‘길을 가다가 물의 원천에 이르렀네.[行到水窮處]’ 한 것과 같은 것이고, 물격이란 당 나라 사람의 시에 ‘한밤 등잔 앞에서 10년 동안의 일들이[半夜燈前十年事] 한꺼번에 비에 젖듯이 마음 위에 떠오르네.[一時和雨到心頭]’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공문(孔門)의 여러 제자가 지(知)를 묻고 인(仁)을 물은 일들은 모두 격물이고, 일관(一貫)이라고 한 데 대하여 증자(曾子)가 ‘네’라 한 것은 물격의 일이다.”
했다. 비유를 든 것이 매우 이치에 맞기 때문에 여기에 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화기(和氣)는 천도(天道)를 감동시키는 근본이고 필묵(筆墨 문장을 뜻함)은 중화의 기운이니 이는 천지 복택(福澤)의 기운이다.’ 했고, 또 ‘뜻과 같지 않은 일을 당하면 처리할 뿐이요 다시 번뇌하거나 얽매이지 말라.’ 했고, 또 ‘가난한 벗을 시시로 생각해서 쌀이 없어도 남의 굶주림을 급하게 여긴다.’ 했고 또 ‘글을 읽어서 얻음이 있으면 그 선(善)을 나 혼자의 것으로 하지 않고 그것을 남에게 고하여 함께 누리도록 한다.’ 했고, 또 ‘사서(史書)를 읽고 일을 논할 때에는 반드시 잘한 것은 칭찬하는 동시에 경솔하게 남을 죽일 놈이라고 책하지 않는다.’ 했고 또 ‘벗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면, 유언(流言)을 듣고는 믿지 말라.’ 했고, 또 ‘딸을 가르치는 일에 유의해서 남의 집안의 대를 이어 복록과 큰 음덕(陰德)을 이루게 해야 한다.’ 했다. 내가 이 몇 가지 일에 있어 조금 행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또한 미칠 수 없는 것이 있는 까닭에 매양 생각하고 잊지 아니해서 일생 동안 본받아 실행하려 한다.
세상에서 모두 왕원미(王元美)를 문장의 종로(宗老 종장(宗匠), 원로(元老))라고 여겨 그 큰 이름에 압도되어 부러워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그렇다. 그렇지만 그 문장의 폐단에 두 거령(巨靈 귀신과 같은 큰 존재)이 됨을 알지 못했다. 마적(馬弔 투전 비슷한 것)이라는 도박하는 법을 만들었고《금병매(金甁梅)》란 음란한 서적을 만들었다. 우통(尤侗)은 청 나라 선비이다. 계도문(戒賭文)을 지어서 이를 물리치기에 힘을 기울였는데, 명 나라 시대에는 위로는 진신(縉紳)에서부터 아래로 조예(皁隷 남의 집 하인)에 이르기까지 마치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친 것처럼 되어서 염치(廉恥)를 모름이 극도에 달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끝에 말하기를,
“나는 이 같은 풍습이 명 나라 말기에 가장 성(盛)했음을 들었다. 틈(闖 명말의 유적(流賊) 이자성(李自成)이 틈왕(闖王)을 일컬었음)이니, 헌(獻 유적(流賊)에 장헌충(張獻忠)이 있었음)이니, 또는 대순(大順 장헌충이 대서국왕(大西國王)을 일컫고 연호를 대순으로 했음)이니, 유적 작란(流賊作亂)이니 하여 그 명목이 다 맞아들었고 상공마적(相公馬弔)ㆍ백로완성(百老阮姓)ㆍ남도망국(南渡亡國)이니 하는 명목을 붙여서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 먼저 나타났던 것이다. 성왕(聖王)이 위에 있다면 어찌 이 요사스런 것을 용납했으랴. 감히 사구(司寇 형벌과 도둑을 맡은 벼슬)에게 고하노니 마땅히 엄 형(嚴刑)을 만들어서 천강(天罡)ㆍ지살(地煞 음양가(陰陽家)에서 이르는 악귀(惡鬼)) 같은 존재인 대도(大盜)의 무리는 교명(敎命)을 기다릴 것 없이 주벌(誅罰)하되, 범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경(黥 얼굴에다 입묵(入墨)하는 것)하고, 그 도보(圖譜)를 불태워서 이를 근절(根絶)시키소서.”
했다. 그 큰 재앙이 됨을 어찌 이루 말하랴.《금병매》가 한 번 나오니 음란(淫亂)을 조장(助長)함이 컸다. 소년들이 이 책을 보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기니 해(害)가 또한 크다.

명 나라 말기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설(小說)이 사람의 마음을 그릇된 길로 빠지게 했다. 종산(鍾山)의 황주성(黃周星)은 청 나라 사람이다. 말하기를,
“내 나이 60에 비로소 전기(傳奇 소설)를 만들 것을 생각했는데, 의연(毅然)히 인천락(人天樂)의 일종을 엮고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재미있는 경지로 들어가므로 이에 종사(從事)함이 늦었음을 깊이 후회한다.”
했으니, 아, 의혹(疑惑)됨이 심하도다.

청 나라 선비 주문위(周文煒)가 홀로 소설을 배척하여 말하기를,
“옛사람이 ‘황노직(黃魯直 노직은 황정겤(黃庭堅)의 자)이 염사(艶詞 남녀 애정에 관한 글)를 지어서 음사(淫邪)한 말로 사람의 마음을 방탕하게 만들었으니, 그 죄가 악도(惡道 죽어서 지옥으로 가는 것)에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근일에 소설을 짓는 사람들은 어찌 염사에 그치랴. 비상(非常)한 보응(報應)을 사람마다 직접 볼 것이니, 책상 머리에 한 조각 종이와 몇 낱글자라도 마땅히 모두 불태워야 한다. 심술(心術)을 파괴하고 행동을 그르치는 것이 모두 이 같은 글이 유인하는 것이다. 가정의 아녀자(兒女子)라고 해서 어찌 글자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랴. 한번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어찌 두렵지 않으랴.”
했다. 이 말은 참으로 통쾌하다. 황주성에 비한다면 어찌 하늘과 땅의 차이에 그치랴. 표출(表出)하여 써서 동지(同志)로 삼는다.

청 나라 선비 용면(龍眠) 석방(石龐)의《천외오어(天外悟語)》에,
“김성탄(金聖歎 성탄은 김위(金喟)의 자)은 시내암(施耐菴 내암은 시자안(施子安)의 자)의 후신(後身)이다. 시내암이《수호지(水滸志)》를 지어서 설봉(舌鋒)을 한껏 휘둘렀는데 성탄에 이르러 일장(一場)의 살겁(殺劫)을 만나서 전인(前因)을 마쳤다.
했으니, 적합하다 이 말이여! 비록 농이긴 하지만 매우 시원스럽다. 성탄이《수호지》를 비평했음을 가지고 한 말이다.

4월 현등(懸燈 석가 탄일 밤에 등불 켜는 것)의 밤에 성(城)에 가득한 등간(燈竿 등을 다는 장대)이 총총하기가 마치 별과도 같았다. 내가 담 밖에서 어떤 남자가 중얼거리는 것을 가만히 들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깨진 징소리 같았다. 이르기를,
“별안간 급한 비가 쏟아지고 세찬 바람이 잇달아 불어 와서 등불이 모두 꺼지기 바란다. 내가 다니면서 그 등을 줍겠다.”
했다. 내가 그 말을 들으니 마치 그 흉악한 얼굴과 못된 심술을 보는 것 같았다. 아, 이 마음을 미루어 보면 무슨 일인들 못하랴.

세상에서 전하기를,
“부잣집 광 속에는 반드시 구렁이 또는 족제비가 있는데 그것을 업(業)이라고 이른다. 사람들이 때로 흰죽을 쑤어 바치고 신(神)처럼 대접한다.”
하기에 나는 이 말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런데《사보(蛇譜)》를 보니 ‘빛이 약간 누른데다 간간이 푸른빛을 띠고 배는 희고 혀는 붉으며 이가 검다. 길이는 4~5척을 넘지 않는데 집 광 밑에 굴을 뚫을 것 같으면, 곡식이 반드시 들어있는 것보다 갑절이 더 들어올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귀사(富貴蛇)라고 한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반드시 술과 고기, 향불과 등잔을 진설(陳設)하고서 제사한다.’ 했으니, 비로소 세상에서 일컫는 업을 알게 되었다. 또 망아지 비슷한 것이 있어서 구업(駒業)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알 수 없다. 그러나 업이 달아나면 집이 따라서 망한다고 한다.

《문심조룡(文心雕龍)》에,
“몸은 다른 시대에 태어났지만, 뜻을 도(道)와 함께 펴서 마음을 만고(萬古)의 옛 시대에 세우고 회포를 천재(千載) 후대(後代)에 전한다면, 금석(金石)이 부스러진다한들 그 소리야 사라질쏘냐.”
했다. 나는 궁(窮)한 사람이 글을 많이 저술하나 지나치게 궁한 자는 글도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저술한 것이 뒷사람에게 혜택을 입혀서 글뜻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다면 궁한 속에서도 통(通)함이 있는 자이지만 혹시 후세 사람에게 침 뱉고 욕하는 것을 당한다면 이는 천하에서 제일 궁한 자이다. 그렇다면 저서(著書)가 전하지 않는 자는 궁하고 또 궁한 속에서도 통함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르기를,
“우주(宇宙)가 생겨난 때가 아득히 멀고 인물이 많이 나왔지만 무리에서 뛰어나는 것은 지술(智術)일 뿐이고, 세월이 덧없어서 성령(性靈)이 오래 있지 못하니, 명성(名聲)을 높이고 뜻을 발양(發揚)함은 제작(製作)일 뿐이다.”
했다. 내가 다행히 수천 년 전함을 얻더라도 천지의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논한다면, 문뢰(蚊雷 모기가 떼지어 요란한 소리를 내는 것)가 벽사(碧紗 푸른 빛깔의 깁)의 휘장을 스쳐가는 데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문심조룡》에,
“뫼가 우뚝 솟고 물이 감돌아 / 山沓水匝
숲 위에 구름이 뭉게뭉게 / 樹襍雲合
눈이 오가니 / 目旣往還
마음 또한 움직이네 / 心亦吐納

봄날은 더디고 / 春日遲遲
가을 바람은 소슬하니 / 秋風颯颯
가는 정을 전송하는 듯 / 情往似贈
오는 흥에 답하는 듯 / 興來如答
절묘(絶妙)하게 감정을 풀이하여 글을 만든 것이 진부(陳腐)한 문사(文士)가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했으니, 내 일찍이 이 말을 좋아했다.

종질(宗姪) 심계(心溪)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대과(大科)는 오히려 쓰일 곳이 있지만, 이른바 소과(小科)는 과연 의거(依據)할 것이 무엇입니까? 아저씨께서 과업(科業 과거 공부)을 익히신다면 왜 대과의 업만을 익히지 않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소과는 세상에서 문호(門戶)를 위한 계책으로 삼는다.”
했다. 심계가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서 정병(正兵 군사)이 되더라도 조금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아저씨께서는 자손이 정병이 되면 걱정하실 것입니다.”
했다. 내가 웃으면서,
“내 마음은 할연(豁然)하여 얽매임이 없어서 사생(死生)이나 팽상(彭殤 팽은 장수하는 것 상은 요사하는 것)을 꼭 같이 생각하는데, 어찌 후세의 문벌(門閥)을 걱정할 겨를이 있으랴. 이것은 나를 잘 알지 못해서이다.”
하니, 심계도 웃었다.

정해년 4월에 심계(心溪)의 집에 이르러서, 종질 및 족종질(族宗姪) 명섭(命燮)과 같이 담론(談論)하면서 날을 보냈다. 내가 말하기를,
“세상에는 마음을 즐겁게 하는 일이 얼마쯤 있지만, 모두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눈썹을 찌푸릴 때가 십상팔구(十常八九)다. 친척이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가 뜻밖에 모여서 서로 화기애애하게 말을 나누는 이것이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다. 나는 일찍이 도오류(陶五柳 도잠(陶潛)이 집가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오류 선생으로 불렀다)의 이른바 ‘친척의 정다운 말을 기뻐한다.’는 말을 가지고 지극한 학문적인 말이며 지극한 문장법이라고 생각했다.”
하니, 심계가 두 손을 마주 잡으면서,
“옳습니다.”
했다.

박유자(朴孺子) 제운(齊雲)은 재질(才質)이 뛰어나고 지혜가 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 일찍이 일곱 자(字)로 된 말을 가지고 있으니 ‘선한 일을 하여 얻는 효과가 여색을 참아서 얻는 효과와 같다.[爲善之效如忍色]’는 것이다.”
했다. 나는 한참 생각한 후에,
“뒤에 오는 해(害)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하니, 유자가 말하기를,
“뒤에 오는 해가 없을 뿐만 아니다. 선한 일을 하기가 극히 어려운 것이 여색을 참기가 극히 어려운 것과 같다. 그러나 그 효과에 이르러서는 여색을 참아서 해가 없는 것과 같다.”
했다.

백대붕(白大鵬)의 시에,
술 취하여 수유꽃 머리에 꽂고 혼자서 즐기다가 / 醉挿茱萸獨自娛
명월이 배에 가득하니 빈 술병 베개 삼았네 / 滿船明月枕空壺
곁의 사람들아 무엇하는 자임을 묻지 말라 / 旁人莫問何爲者
흰 머리로 풍진 겪은 전함사(典艦司)의 종 / 白首風塵典艦奴
했는데, 이 시가 세상에서 유명하다. 내 일찍이 이 사람이 어느 재상에게 올린 고목(告目 상사람이 양반에게 올리는 글)을 보고서 노예(奴隷)임을 알았으나 사적(事迹)은 알지 못했다. 유몽인(柳夢寅)이 지은 촌은유희경전(村隱劉希慶傳)을 보니,
“서리(書吏) 백대붕과 수창(酬唱)했다. 허성(許筬)이 일본에 사신 가게 되었을 때 백대붕ㆍ유희경과 함께 생사(生死)를 같이하려 했으나 희경은 늙은 어버이 섬기는 일 때문에 거절하고 다만 대붕과 함께 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대붕이 왜중(倭中)의 일에 밝다고 하여 억지로 그를 데리고 갔는데,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했다. 그렇다면 나라를 빛냈을 뿐만 아니라 죽을 곳을 얻어 죽었으니, 서예(胥隷)라고 해서 멸시할 수 있으랴. 그 시를 보고서 이미 그 호협하고 통달한 정도를 알았다. 일찍이 전함사(典艦司)의 서리(書吏)가 되었기 때문에 전함노(典艦奴)라고 자칭한 것일까.

양웅(揚雄)의 사람됨은 칭송과 비방이 반반이다. 그 문장(文章)이나 재주는 아름답지만 실절(失節)한 것은 큰 잘못이다. 주 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존칭)의 논박을 기다리지 않고도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논박이 심히 정당하다. 그 말에,
《극진미신(劇秦美新)》을 지었고,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망령되게 천록각(天祿閣)에서 몸을 던지며 천명(天命)을 알지 못했으니, 동자(童子)의 행위이다. 그런데도 환 담(桓譚)은 노자(老子)보다 낫다 하고 갈홍(葛洪)은 중니(中尼)에 비교하여 사람을 탄식케 했다. 이 사람이 산술(算術)에 밝고 음양(陰陽)을 해득했기 때문에《태현경(太玄經)》을 지어서 몇 사람을 감복시킨 것이다. 남긴 말과 행실이 손경(孫卿 전국 시대 조(趙) 나라 사람 순황(荀況)의 별칭)ㆍ굴원(屈原 전국 시대 초 나라 사람 굴평(屈平)인데 원은 그의 자(字)이다)에게도 미치지 못하면서 어찌 대성(大聖)의 높은 풍도를 바라랴. 그리고《태현경》이 이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장 항아리나 덮을 쓸데없는 휴지일 뿐이다.”
했으니, 말이 심히 쾌활하다. 사마속수(司馬涑水)는 어찌 안씨(顔氏)의 견해(見解)에도 미치지 못했을까!

심계(心溪)가 일찍이 탄식하기를,
“풀 잘 먹는 조랑말을 한 필 사 두고 문 닫고 글을 읽다가 의심나고 어려운 곳을 만나면, 곧 말을 타고 책을 싸서 안장에 걸고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찾아가서 토론하고 돌아가면 좋지 않으랴.”
했다.

심계가 일찍이 말하기를,
“윤 교부(尹敎傅) 득관(得觀)이 ‘세상 선비들은 단지 달이 햇빛을 받아서 밝다는 것만 알 뿐 해도 또한 달빛을 받아서 밝음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이는 음양이 서로 도와서 빛을 내기 때문이라 한다.”
했다.

변자흠(邊子欽)이 말하기를,
“나의 타고 난 성품이 소활하여 기심(機心)이 없기를 바랐는데 근래에 기심이 차츰 싹틈을 느끼고 있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나?”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전후 좌우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이 기심에 관계되는 것이 아님이 없는 까닭에 응수(應酬)하고 주선(周旋)하다 보면 자연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는 남보다 더욱더 수양에 힘쓰지 않은 때문이니 매우 슬픈 일이다.”
했다. 자흠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믿을 만하다. 세상에 나다니면 기심을 끊을 방법이 없다. 10년 뒤에는 내가 진세(塵世)에서 벗어나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리라. 응접(應接)하는 것이 없으면 기심이 자연 없어질 것이니 이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
했다. 내가 웃으면서, ‘부처가 되려는가?’ 하니, 자흠이 말하기를,
“내가 선비의 본색(本色)을 지니면서 기심만 끊을 뿐이니, 깊은 산 속에 산들 무슨 해될 것이 있으랴.”
했다.

지평(持平)에 추증된 효자 예귀주(芮歸周)는 영남 사람이다. 그가 어린아이 적에 문득 꿇어앉아서 어머니의 젖을 빨았으며 커서 음식을 먹을 때면 반드시 어른보다 뒤에 했다. 어버이의 병을 간호할 때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였으며 입으로 항문(肛門)을 불어서 부모의 뱃속을 덥게 하여 효험을 얻기에 이르렀다. 노루 고기가 약에 좋다고 하니 범이 산 노루를 던져 주었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상기를 마치자 몸이 쇠하고 병들어서 아침저녁으로 돌아보고 소제할 수 없게 되매 단(壇)을 모으고 망배(望拜)했다. 을유년에 그 증손 수홍(秀弘)이 그 행실을 기록해 가지고 경사(京師)로 와서 사대부(士大夫)의 문(文)과 시를 구했다. 이 사람은 효성이 매우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남쪽 지방에 대명량(大明粱)이라고 하는 벼가 있는데, 소쇄원(瀟灑園 양산보(梁山甫)의 호)의 후손 제신(濟身)이 화양동(華陽洞)에 글을 보내어 대명량을 파종(播種)하여서 황묘(皇廟)의 자성(粢盛)으로 삼게 하고, 또 여러 어진이의 시를 구하여 이를 칭양(稱揚)했다. 금중(禁中) 대보단(大報壇) 앞에 꽃이 있으니 또한 대명홍(大明紅)이라고 부른다.

명 나라 사람으로서 하대복(何大復 대복은 하경명(何景明)의 호)이 새로이 시의 문호(門戶)를 세우고자 했으나 줄곧 문호를 세우지 못하고 끝내 당 나라 사람의 지배 아래 있었다. 서문장(徐文長)에 와서 새로운 문호를 세우자는 의논이 두드러지게 나왔지만 역시 왕(王 왕세정(王世貞)ㆍ이(李 이반룡(李攀龍))를 심하게 욕하지 않았는데, 원중랑(袁中郞 중랑은 원굉도(袁宏道)의 자)에 이르러서 심하게 욕하고 거의 왕ㆍ이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서문장의《초□시서(肖□詩序)》에,
“옛사람의 시는 감정에 바탕을 두었지 감정을 꾸며서 짓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시는 있었으나 시인은 없었는데 후세에 와서 시인이 있게 되었다. 시를 구하는 명목이 많아서 이루 응할 수 없기에 이르고 따라서 시의 격조(格調) 또한 많아서 이루 평론할 수 없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시에는 모두 본래 그 같은 감정이 없는데도 감정을 만들어서 지은 것이다. 감정을 만들어서 짓는 것은 그 취향(趣向)이 시의 명예를 구(求)하는 데 있고 시의 명예를 구하게 되면 그 형세가 반드시 남의 시의 격조를 답습하여 그 화려한 말을 본뜨기에 이른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시의 실지가 없어지게 되니, 이를 두고 시인은 있어도 시는 없다는 것이다.
사물(事物)의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자가 일어나서 이를 구(救)하면서 ‘글은 한(限)이 있으되 이치는 다함이 없고 격조의 화려한 말은 한계가 있으되 이치가 의논을 낳음에는 궁진함이 없다.’고 했다. 이리하여 시를 지음에 있어 모두 이치에서 추출해내고 의논을 주(主)로 했으므로, 성품이 시원스런 자는 그 글이 밝고 성품이 답답한 자는 그 글이 딱딱하다. 이치가 깊고 의논이 높은 시는 사람이 알기 어렵고 이치가 통달하고 의논이 평이(平易)한 시는 사람이 알기 쉽다. 대저 이 두 시가(詩家)는 한결같이 배우(俳優)가 꾸민 것이다. 그렇지만 저것은 한이 있고 이것은 한이 없다고 본다면 한이 없는 것은 진실로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
했다.
섭자숙(葉子肅)의 시서(詩序)에,
“사람이 새 소리를 배웠다면 그 소리는 새이지만 성품은 사람이고, 새가 사람의 말을 배웠다면 그 소리는 사람이지만 그 성품은 새다. 이것으로써 사람과 새의 한계(限界)를 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날 시를 짓는 자가 무엇이 이것과 다르랴. 내 스스로 얻은 것에서 나오지 않고 한갓 남이 일찍이 말한 것을 훔쳐서 말하기를 ‘어느 편(篇)은 아무의 체(體)이고 어느 편은 그렇지 않다. 어느 구절은 아무의 것과 같고 어느 구절은 그렇지 않다.’ 하니, 이는 글이 극히 아름답다지만 이미 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했다.
그렇지만 왕ㆍ이의 이름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이와 달리 중랑은 말마다 비난했다.

서문장(徐文長)의 글이 신묘(神妙)함에 대하여 내가 일찍부터 경탄(驚嘆)하고 기이하게 여기던 바다. 그가 꿈을 꾸고 감동하여 적모(嫡母)의 제사를 지낸 제문을 더욱 좋아했다. 그 제문에,
“지난날 어머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어젯밤 꿈에는 병드신 몸으로 옷을 벗고서 방구석에 앉아 창문으로 몸을 가리고 계셨습니까. 저는 그 증상(症狀)을 진찰하고는 울부짖으며 얼굴이 상기된 채 어쩔 줄 몰랐습니다. 치료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여쭙기를 곧 ‘나으실 것입니다.’ 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면서 어머님을 부축하여 평상에 뉘고 울음을 그치고 꿈을 깼는데 눈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었습니다. 병드신 어머님을 꿈꾸면서도 슬픔을 금치 못하였는데 꿈을 깨서는 그 죽음을 더욱 슬퍼하게 되니, 자식의 마음이 어떠하리까.”
했다. 문장(文長)은 효자임에 손색이 없다. 내가 이 글을 읽을 때면 눈물이 갓끈을 적시지 않은 때가 없었다.

청(淸) 나라 선비 우통(尤侗)의 자는 전성(展成)이고 호는 회암(悔庵)인데 장주(長洲) 사람이다. 외국 죽지사(外國竹枝詞) 백여 편을 만들어서 각각 그 나라의 풍속을 말하고 또 각주(脚注)를 달았다. 시험삼아 조선(朝鮮)을 읊은 것을 본다면 모두 네 수(首)인데, 풍문(風聞)을 거두어 모은 것으로 잘못된 것이 많다. 이제 모두 여기에 기록한다. 중국에서 최근의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 시대가 먼 것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 첫째에,
고구려를 하구려라고 낮추었으니 / 高句麗降下句麗
조선이라는 옛이름만 못해 / 未若朝鮮古號宜
천리 되는 왕경에 갖가지 놀이 벌이니 / 千里王京陳百戲
한성에서 아직도 한궁의 의식 보겠네 / 漢城猶見漢宮儀
했고, 주(注)에,
“고조선(古朝鮮)은 고구려에 합병되었다. 수(隋) 나라가 정벌했으나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낮추어서 하구려라고 했다. 홍무(洪武 명 태조의 연호) 연간에 공물(貢物)을 바치고 조서(詔書)를 받들었으므로 다시 조선이라고 했다.”
했으니, 이는 중간에 고려(高麗)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 둘째에,
넓은 소매와 긴 옷자락에다 절풍건 쓰고 / 長衫廣袖折風巾
붓으로 종이 위에 한자를 쓰네 / 硾紙狼毫漢字眞
세가로서 나라 전함이 오랬음을 자서했으니 / 自序世家傳國遠
상서 편 안의 구주를 전수한 사람일세 / 尙書篇內九疇人
했다. 이백(李白)의 시에도,
금화로 꾸민 절풍건이다 / 金花折風巾
했는데, 이는 곧 갓(笠子)이다. 그 갓의 양테가 평직(平直)하게 생겨서 바람을 가를 수 있다. 그럼 신라 때에는 금화(金花 금으로 만든 꽃장식)로 갓을 장식했던 것일까. 그 셋째에,
양화도 나루터에 살구꽃이 붉고 / 楊花渡口杏花紅
팔도의 노래 동쪽 나라 풍속을 실었네 / 八道歌謠東國風
가장 생각나는 것은 비경 같은 여도사 / 最憶飛瓊女道士
상량문 지어서 일찍이 광한궁에 이르렀네 / 上樑曾到廣寒宮
했으며, 주에,
“그 나라에 8도(道)가 있고 양화도는 한강(漢江) 가에 있으며, 규수 허경번(許景樊)은 뒤에 여도사가 되었는데 일찍이 광한궁 백옥루(白玉樓)의 상량문을 지었다.”
했다. 그러나 별안간 살구꽃이 붉다는 말은 어찌 두서(頭緖) 없는 것이 아니랴. 그리고 팔도 가요(八道歌謠)의 문구는 너무 무미(無味)하고 양화도는 한강의 중간에 위치하여 몇 굽이가 되므로 그냥 강가라 할 수 없으며, 난설헌(蘭雪軒) 허씨(許氏)를 허경번이라 한 것은 매우 옳지 않고 그가 여도사가 되었다는 말도 전여성(田汝成)의《광여기(廣輿記)》에 나오는 말을 따른 것이다.《광여기》에,
“허씨의 남편 김성립(金誠立)이 왜란(倭亂)에 순절(殉節)하자 허씨가 여도사가 되었다.”
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근거 없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이 같은 말을 만들어내서 중국 사람을 속인 것일까. 그리고 중국의 기록에서 허난설헌과 허경번을 두 사람으로 나누고 있으니 더욱 가소롭다. 부인이 글에 능하고 재주가 많은 때문에 이 같은 욕이 미치는가. 매우 개탄(慨嘆)할 만하다. 그 넷째에,
여덟 살 난 어린이 이름은 황창 / 八歲小兒號黃昌
칼춤으로 능히 백제 임금 베었네 / 舞劍能誅百濟王
다시 가배의 회소곡 불러 / 更唱嘉俳會蘇曲
아침부터 길쌈하여 벌써 광주리에 찼다오 / 朝來蠶績已盈筐
했는데, 주에,
“신라의 황창(黃昌)이 여덟 살에 그 임금을 위하여 백제로 가서 저자에서 칼춤을 추자, 왕이 곧 궁 안으로 불러들여서 춤추게 했는데 이를 틈타서 찔러 죽였다.”
했다.

김예원(金藝園) 두열(斗烈)의 자는 영중(英仲)이고 호는 남촌(南村) 또는 갈관재(褐寬齋)라고 했는데, 시문(詩文)이 뛰어났다. 또 전(篆)ㆍ주(籒)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 및 도서(圖書)ㆍ인장(印章)에도 정신을 쏟아서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전서(篆書)가 특히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니 참으로 뜻이 높은 기이(奇異)한 인사(人士)다. 그 도장(圖章)의 자서(自敍)에,
“탄성(誕聖) 후 5년 욕불(浴佛 석가 탄일) 이틀 전날 기해시(己亥時)에 내가 광산(光山) 김두열(金斗烈)로 태어났으니, 신라의 선원(璿源 왕실(王室) 계통)이고 조선의 시례(詩禮)의 문벌일세. 반악(潘岳 진(晉) 나라 사람)의 필법(筆法)으로 직청(直淸)의 뜻을 붙이기를 원한다.”
했으니, 을묘(1735, 영조 11) 4월 6일 기해생(己亥生)이다. 반악을 말한 것은 가풍(家風)을 서술한 것이고, 직청은 유빈(柳玭 당 나라 사람)의 자(字)다.

김예원자(金藝園子)의 오언 고시(五言古詩)는 한(漢)ㆍ위(魏)의 기풍(氣風)이 있어서 모두 읽을 만하다. 부인의 죽음을 애도한 시에,
그대가 죽은 뒤부터 / 自君之歿矣
친척이 보내는 편지 괴로워 / 厭見親戚札
사람들이 죽은 줄 모르고 / 不知人已歿
아직도 병의 차도를 묻네 / 猶問病劇歇
내 비록 마음이 굳센 자이지만 / 我雖剛腸者
어찌 차마 그 말에 답할쏜가 / 何忍答其說
답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은 줄은 아나 / 不答知不可
답하려니 목이 메네 / 欲答已嗚咽
또,
어느 때 그대 잊기 어려운가 / 何處難忘君
아침저녁 제전 드릴 때이네 / 朝哺祭奠時
제전이란 살았을 때 하던 일 본뜨는 것 / 祭奠象生爲
살았을 때 하던 일을 본뜨는 것이 가장 슬퍼 / 象生最可悲
지난날 그대 음식 먹을 때 / 昔君飮食時
더 주랴 물으면 사양을 했네 / 請益亦或辭
지금 상에 가득 차린 음식 / 如今滿床設
어찌하여 도무지 모른 척하나 / 胡爲摠無知
했다. 그 옥천정녀행(沃川貞女行)에,
옥천에 가인이 있어 / 沃川有佳人
옛사람의 정렬에 손색이 없네 / 無愧古貞烈
젊은 나이로 여항에 살면서 / 少小在閭巷
길쌈으로 생활을 경영했지 / 紡績聊生活
남편이 양홍과 다르니 / 良人異梁鴻
어찌 맹광의 덕을 알랴
 / 焉知孟光德
사나운 바람이 날로 불어서 / 暴風日以吹
경수 위수의 청탁이 혼동되더라도 / 涇渭混淸濁
첩에게 마음속 맹세 있으니 / 妾有寸心誓
단지 옛날의 여칙을 알 뿐이네 / 但知古女則
새 사람의 투기도 마음에 두지 않노니 / 不嫌新人妬
내 낭군과 정답게 살기 원했네 / 願我郞好合
낡은 집은 겨우 무릎을 펼 만하고 / 破屋僅容膝
낮은 울타리 집 두메 산골에 있네 / 短籬當深峽
언제나 맹수의 침공을 겁내서 / 常恐虎豹警
낭군에게 출입 삼가기 경계했네 / 戒郞愼出入
밤이 어두워지면 마음 먼저 떨려서 / 夜黑心先怕
손 붙들고 무릎 마주했네 / 扶持膝相接
사나운 바람이 등잔불을 끄고 / 獰風吹燈滅
천둥 같은 소리 창문을 뚫어 / 疾雷破窓閤
범이 낭군을 물고 갈 때 / 虎以良人去
창황히 일어나서 낭군을 붙들었네 / 蒼皇起扶執
지나는 곳마다 가시나무가 많아 / 所過多荊棘
온몸에 붉은 피 흐르네 / 肌肉流血赤
맹세코 낭군을 벗어나게 하리니 / 誓使郞或脫
첩의 몸이야 아까울 것 없어 / 妾身無可惜
행인도 구하려 드니 / 行人爲之救
범도 감동되어 풀어 주었네 / 虎亦感以釋
백년을 같이 살자는 약속 / 庶幾百年約
이제부터 안락을 기대하리 / 從此期安樂
저 끈질기게 노리는 범이 / 惟彼耽耽者
밤마다 무너진 벽틈으로 엿봐 / 夜夜窺毁壁
외마디 소리에 놀라 일어나니 / 一聲忽驚起
낭군의 숨소리 들리지 않아 / 不聞良人息
한밤중에 문을 나가 울부짖으며 / 夜半出門啼
허둥지둥 범의 뒤를 따랐지 / 顚倒追虎跡
한 번 겪은 것도 액인데 / 一之旣之厄
이다지도 혹독히 두 번이나 당하다니 / 再此又何酷
날이 찬데 버선도 벗고 / 天寒足不襪
더구나 뱃속엔 아이까지 있어 / 況復兒在腹
산길은 너무도 험하여 / 山路苦險阻
더 가려 하나 힘이 없다네 / 彳行無餘力
바람을 향해서 손가락 깨물고 / 向風囓余指
샘에 가서 머리를 감았네 / 臨泉濯余髮
손가락 깨물어서 신기에게 맹세하고 / 囓指質神祗
머리 감아서 달님 별님에게 빌었네 / 濯髮祝星月
낭군이 죽는다면 너무 억울해 / 郞死亦何辜
첩의 몸으로 속하기 원하오 / 願以妾身贖
구슬피 울면서 호소하니 / 哀哀哭且訴
천지도 불쌍히 여기네 / 天地爲慘惻
낭군이 범의 잔등 위에서 / 良人虎背上
오히려 바람결에 울음소리 들었네 / 尙聞風末哭
별안간 얼굴 보이는 것 같아 / 忽看然疑面
소리를 찾아 허겁지겁 달려왔네 / 尋聲來顚跌
죽어서 헤어지는 줄 알았다가 다시 살아서 만나니 / 死別還生逢
놀랍고도 기뻐서 마음이 황홀해 / 驚喜殊怳惚
낭군이 마음을 조금 진정하고서 / 良人稍定魂
내게 전말을 들려주었네 / 爲我敍顚末
그대의 애끊는 정성 아니었던들 / 靡爾斷斷誠
내 어찌 호구에서 벗어났으리 / 吾豈虎口脫
그대의 울음 산도 울리고 / 爾哭山可裂
그대의 마음 하늘이 알았네 / 爾心天可質
사나운 범도 감동이 되어 / 虎狼亦相感
나를 버리고 차마 먹지 못했네 / 捨我不忍食
몹쓸 성품 아주 버리지 못해서 / 惡性終未已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시 노려보니 / 閃閃且注目
도마 위에 오른 한 덩어리 고기인양 / 一塊俎上肉
형세가 급하기 경각에 달렸었는데 / 急勢在頃刻
높은 벼랑이 별안간 무너져 / 蒼崖忽崩拆
순간에 범은 치여 죽었네 / 忽然壓虎殺
범이 죽자 내가 살아났으니 / 虎殺吾則活
이는 신의 가호를 입은 것이네 / 得此冥冥隲
신의 가호가 어찌 내 힘이랴 / 冥冥豈我隲
그대의 호소가 하늘을 감동시켜서였네 / 賴爾聲上徹
말을 마치자 흐느끼면서 / 語罷爲一泣
감탄하면서도 마음이 슬퍼지네 / 感嘆中自怛
마을 사람이 서로 이르기를 / 里人相謂曰
그 정렬 사라지게 할 수 없다고 / 烈哉不可滅
관가로 들어가 소리를 같이하여 / 齊聲入官家
태수에게 이 일을 말했더니 / 爲向太守說
태수가 차탄을 마지않았으며 / 太守嗟嘆久
관찰사에게 첩보하니 / 牒報都觀察
관찰사도 혀가 닳도록 칭찬하고서 / 觀察亦嘖嘖
조정에 알리려 했네 / 將以朝廷達
대궐문 구중으로 깊은데다 / 天門九重深
환관이 또 소리쳐 꾸짖으므로 / 閽者亦嗔喝
먼 시골 사람의 / 遂令下土人
곧은 행실 사라지게 했네 / 貞行任泯滅
내 본디 강개한 자로 / 僕本慷慨者
한번 듣고서 감탄이 절로 나오네 / 一聞感嘆發
포상이 그대에게 무슨 상관 있으랴 / 褒賞何關爾
그대의 높은 절개 부끄러울 것 없어 / 若節爾無怍
우리나라 예의의 풍속이 / 吾東禮義俗
그대를 힘입어서 다시 떨쳤으니 / 賴爾應更作
옛 정렬에 비겨 무슨 한이 있으랴 / 何恨古貞烈
이적(異蹟)은 그대 혼자뿐 / 異事惟爾獨
아! 저 기량의 아내는 / 嗟彼杞梁妻
성을 무너뜨렸지만 무슨 이익이 있었나
 / 崩城竟何益
또 듣건대 천산의 바위는 / 又聞天山石
남편 그리며 부질없이 슬퍼만 할 뿐이니 / 望夫空悲切
어찌 옥주의 이 여자만 하리 / 豈如沃州女
본말에 빠진 것 없네 / 本末無欠缺
한 번 우니 행인이 오고 / 一哭行人來
두 번 우니 바위가 떨어졌고 / 二哭山石落
사람이 와서 그 죽음 구해 주고 / 人來救其死
바위가 떨어져서 그 액을 없앴네 / 石落滅其厄
장부도 하기 어려운 일을 / 丈夫所難能
한 여자에게서 보았으며 / 乃於一女覿
사족에게서도 들어보기 어려운 것을 / 士族所罕聞
아랫사람에게서 얻어들었네 / 爰得下賤閥
서까래 같은 붓으로 / 願將如椽筆
그녀의 중루갈 새기려오 / 鐫彼中壘碣
했다. 시에 깨우치는 말이 많을 뿐 아니라 사적이 특이하다. 내게 전에 향랑가(香娘歌)가 있었는데 이 시와 함께 부녀자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 이는 신미년의 일이라고 한다.

허적(許積)은 충주에서 났다. 네 살 때 갑자기 있는 곳을 몰랐다가 옥상(屋上)에서 참새 새끼를 잡아서 물어뜯는 것을 보았는데, 사다리도 없이 옥상에 오른 것을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귀하게 되면 사람을 죽일 상징(象徵)이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일찍이 그가 독사를 죽였는데 뱀이 푸른 기운을 내불어서 적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어서 아들 견(堅)을 낳았는데 뒤에 역모(逆謀)로 죽었다.”
했다. 또 전하기를,
“일찍이 대관(臺官)이 되었을 때에 여염집 여자가 새로 시집가서 비단옷을 입는 것을 보고 법금(法禁)을 범했다고 하여, 아전을 보내 잡아다가 추국(推鞫)하여 죽였는데, 죽을 때 여자가 눈을 부릅뜨고 한참 노려보다가 죽었다. 그 뒤 견을 낳았는데 그 여자를 매우 닮았다.”
했다.
견이 아이 적에 소매 속에 복어(鰒魚)를 넣어 가지고 살구와 복숭아를 치면 아이들이 따라다니면서 이를 주웠으며, 은(銀)으로 만든 거북으로 이불 네 귀퉁이를 물려서 눌렀으며, 겨울에는 초피(貂皮)로 요강을 쌌으니, 그 외람되게 사치스러움이 모두 이런 유였다. 성품이 총혜(聰慧)하여 글을 직접 읽지 않고 단지 사람을 시켜 경사(經史)를 읽게 하고 자기는 누워서 들으면서도 모두 기억하여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 경신년에 복주(伏誅)될 적에 적(積)도 연좌(連坐)되어 죽게 되었는데, 스스로 죄안(罪案)을 쓰기를,
“아들 역적 견을 두었으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했다. 사직단 서쪽에 허적의 옛 집터가 있다.

박엽(朴曄)의 자는 숙야(叔夜)니, 사람됨이 호걸스러웠다. 어릴 때 공치기를 좋아했으며 재간이 있어 귀신같이 일을 헤아렸다. 일찍이 신인(神人)을 만났는데 엽에게 고하기를,
“천 사람을 살리면 잘 죽을 수 있다.”
한 것을 천 사람을 죽이라는 말로 잘못 듣고 살육(殺戮)을 자행했다. 광해군을 섬겨 10년 동안 평안 감사(平安監使)가 되기를 허락받아 8년을 지냈다. 계해년에 인조가 정난(靖難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것)한 뒤 사신을 보내어 죽였다. 엽이 죽인 사람이 무려 9백 9십 9명이었는데 마지막 사람에게 형(刑)을 가할 적에 큰 아이 하나가 대동강 가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엽이 머리를 돌려 꾸짖어서 물로 들어가라 하니 아이가 피하지 못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으므로 천명을 채웠다. 위령(威令)이 서도(西道)에 행하여져서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창궐했으면서도 감히 침범하지 못한 것은 엽의 힘이었다.
일찍이 자객(刺客)을 보내 건주 오랑캐 추장의 모자에 있는 구슬을 훔쳐와 번시(番市 오랑캐 시장)에다 팔았는데 오랑캐가 이로부터 두려워하여 복종했다. 죽음에 임하여서 탄식하기를,
“왜 나를 10여 년만 살려 두지 않는가.”
했으니, 정축년의 환란을 미리 알았던 것 같다. 일찍이 장인(匠人)을 불러 집을 지으면서 대들보를 올리려 할 때에 그 대들보 중간에 구멍을 뚫게 했는데,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랐었다. 그 뒤 엽이 새문안 대궐을 맡아서 짓는데 대들보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엽의 집 대들보가 가장 크다고 하여 공장(工匠)이 가서 기와를 벗겼으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그 집이 아직도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내가 우중(雨中)에 누워서 일생 동안 남에게 빌린 물건을 생각해 보니 낱낱이 셀 수 있었다. 내 성품이 매우 옹졸하여 먼저 남의 눈치를 살펴서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으면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상대방이 내게 대하여 조금도 인색하지 않음을 확실히 안 뒤에야 비로소 말했다. 남의 말이나 나귀를 빌린 것은 단지 6~7회뿐이고, 그 외는 모두 걸어다녔다. 혹시 남의 하인이나 말을 빌리면 그 굶주리고 피곤함을 생각하여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으니, 결코 천천히 걸어다니는 것만큼 편치 못했다. 부모님이 병중에 계셨는데도 약을 지을 길이 없어서 친척에게 돈 백 문(文)과 쌀 몇 말을 빌린 일이 있다. 일찍이 아내가 병들어 원기(元氣)가 크게 쇠하였으므로 친척에게 약을 빌었는데 마음이 서먹하여, 부모님의 병환 때에 구(求)하는 것과 같지 않았다. 물정에 어두워서 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지만 역시 크게 욕됨은 면했다.

내 평생에 큰 병통이 있으니, 나같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처세에 졸렬한 자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산수(山水)를 논하고 문장을 이야기하고 민풍 요속(民風謠俗)에 이르기까지도 되풀이하며 담론하여서 그칠 줄 모르며, 해학(諧謔)과 웃음을 섞어 가면서 흉금을 털어놓고 밤을 새우니, 남은 내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 만약 상대방과 취미가 서로 맞지 않아서 남이 말하는 것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말하는 것을 남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비록 억지로 웃고 말하려 하여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정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나를 알아주는 자에게는 다 말할 수 있지만 나를 몰라주는 자에게는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실지에 맞는 표현이다. 매양 기운을 내어 사람들 속에 섞이려 애쓰지만 나이 30이 가깝도록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한스럽다.

내 몸이 파리하고 연약하여 입은 옷조차도 견디지 못할 정도이지만, 남의 음험(陰險)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혈기가 솟구쳐 올라 곧 손을 들어 치려 하니, 이는 군자의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이 아니다. 내가 항상 경계하여 말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모든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기를 오래 했더니 이에 심상(尋常)하여져서 마치 바보처럼 되었다. 이리하여 남들이 나를 시비를 모르는 자로 의심하기도 하고 혹 자기 편의(便宜)만을 도모하는 사람으로 지목하기도 하며, 혹 노자(老子)의 도(道)를 좋아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나 또한 이를 달게 여겨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이 어찌 참으로 내 마음을 아는 자이랴. 도량이 매우 좁아서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할 만한 올바른 기력(氣力)이 없으면서, 내 한 조각 객기(客氣)가 남을 욕하고 비판한다면 어찌 몸을 욕되게 하는 요인(要因)이 되지 않으랴. 내 말을 받아들여서 선을 하기에 민첩한 자가 있다면 내 어찌 그 허물을 남김없이 말하지 않으랴.

소인의 무리가 사소한 이익에 집착(執着)되어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적마다, 혼자서 탄식하고 꾸짖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관(冠)을 찢어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려고도 했고 굴평(屈平)의 회사(懷沙)와 포초(鮑焦)의 입고(立枯)를 부러워도 했다. 그러나 눈을 감고 시간을 보내면 화기(火氣)가 비로소 가라앉고 도리어 자신의 속이 너무 좁은 것을 느낀다. 이에 마침내 관평(寬平)ㆍ화완(和緩)ㆍ유원(悠遠)ㆍ허정(虛靜) 등 자의(字義)를 생각하면 심계(心界)가 비로소 편안하고 고요해진다. 그렇지만 답답할 때가 많고 편안할 때가 적으니 이것은 객기(客氣)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유자(儒者)의 함양하는 법을 얻어서 이를 바로잡으랴.

조식(曹植 위 무제(魏武帝) 조조(曹操)의 아들)의 무제(武帝) 뇌문(誄文)에 ‘깊은 궁궐문을 한번 닫으니 존령이 길이 숨었네.[潛闥一扃 尊靈永蟄]’ 했고, 또 문제(文帝) 뇌문(誄文)에 ‘황제가 비록 쓰러져 죽었지만 천록은 길이 이어지리.[皇雖殪沒 天祿永年]’ 했으니, 옛사람이 글을 지을 적에 진실로 말을 가리지 않았던 것인가.

《역서소문(易書素門)》에,
“진(秦) 나라 이전의 옛글은 협운(叶韻 운에 맞추는 것)이 많은데,《도덕경(道德經)》이 더욱 그렇다.”
했다. 그리고 옛날 시골의 노래나 마을의 상말이 입을 나오기만 하면 벌써 운을 이루었으니, 이는 세상이 아직도 순진하여서 하늘이 심어준 소리가 투박해지지 않았던 것이다.《논어》의 소(疏)에,
“공야장(公冶長)의 변작어(辨雀語)에,
짹짹짹짹 / 唶唶嘖嘖
흰 연꽃 핀 물가에 / 白蓮水邊
곡식 실은 수레가 뒤엎어져 / 有車覆粟
수레바퀴는 진창에 빠지고 / 車脚淪泥
소는 뿔이 부러졌네 / 犢牛折角
다 거두지 못하니 / 收之不盡
함께 가서 같이 먹세 / 相呼共啄
했다.”
하였는데, 새도 능히 운을 맞추는 것일까.

[주D-001]비괘(賁卦) …… 건(乾)은 없다 : 비괘는 위에 간(艮 ☶), 아래에 이(离 ☲)로 구성되어서 건(乾 ☰)은 들어 있지 않고 다만 육사(六四)의 효사(爻辭)에 “백마가 나는 듯이 온다.[白馬翰如]”는 말이 있다.
[주D-002]육조(六朝) : 다 같이 강남(江南)에 위치한 건강(建康 : 지금의 남경)을 도읍으로 했던 오(吳 3국의 하나)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 등 여섯 왕조이다.
[주D-003]생시(笙詩) : 《시경》소아(小雅)의 남해(南陔)ㆍ백화(白華)ㆍ화서(華黍)ㆍ유경(由庚)ㆍ숭구(崇丘)ㆍ유의(由儀) 등 6편을 말한다.
[주D-004]기장(騎墻) : 두 집 사이에 있는 담에 올라탄 것. 즉 이쪽 집으로 갈 수도 있고 저쪽 집으로 갈 수도 있어서 정해진 방향이 없음을 말하다.
[주D-005]글 중의 오획(烏獲) : 오획은 전국시대 진(秦) 나라 사람으로 힘이 세었다. 즉 동중서의 글이 힘찬 것을 뜻한다.
[주D-006]중랑(中郞)ㆍ수지(受之)등의 욕 : 중랑은 명 나라 사람 원굉도(袁宏道)의 자, 수지는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전겸익(錢謙益)의 자이다. 이들은 모두 왕원미의 표절(剽竊)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주D-007]이(彝) : 종묘(宗廟)에 늘 비치된 주기(酒器). 계이(鷄彝)ㆍ조이(鳥彝)ㆍ황이(黃彝)ㆍ호이(虎彝)ㆍ유이(蜼彝)ㆍ가이(斝彝)의 여섯 가지가 있다.
[주D-008]《노걸대(老乞大)》 : 작자는 미상이나 고려 말기부터 사용되었던 중국 말 학습서로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종 때 최세진(崔世珍)이 한글로 번역했다.
[주D-009]《박통사(朴通事)》 :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중종 때에 박씨 성을 가진 통사가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주D-010]청련(靑蓮) …… 않으니 : 청련은 불교의 진리를 상징한 말. 여기는 부처의 밝은 눈을 얻어서 견성(見性)할 수 없음을 뜻한다.
[주D-011]전오자(前五子) : 전오자를 비롯하여 후오자(後五子)ㆍ광오자(廣五子)ㆍ속오자(續五子)ㆍ말오자(末五子) 등의 명칭은 시인으로 지목하는 시기의 차례를 주로 하고 그 범위도 참작하여서 문집(文集)에 표기(標記)한 대목이다.
[주D-012]죽계육일(竹溪六逸) : 이백(李白)ㆍ배정(裵政)ㆍ공소보(孔巢父)ㆍ장숙명(張叔明)ㆍ한준(韓準)ㆍ도면(陶沔) 등 죽계(竹溪)의 여섯 주우(酒友)이다.
[주D-013]상산사호(商山四皓) : 동원공(東園公)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ㆍ기리계(綺里季) 등 네 노인으로 진(秦) 나라 말기에 난세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숨어 살았다.
[주D-014]주자가 …… 여섯 선생 : 주돈이(周敦頤)ㆍ정호(程顥)ㆍ정이(程頤)ㆍ소옹(邵雍)ㆍ장재(張載)ㆍ사마광(司馬光) 등이다.《朱子大全 六先生畫像贊》
[주D-015]《점장록(點將錄)》 : 장수의 이름을 적은 책 이름.
[주D-016]일관(一貫) : 《논어(論語)》 이인(里仁)에 공자가 “삼(參)아, 오도(吾道)는 하나로 관철된다.” 했다.
[주D-017]성탄에 이르러 …… 전인(前因)을 마쳤다 : 성탄은 시내암이 지은 《수호지(水滸志)》를 근거 없는 것으로 비판했으면서도 자신은 도리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지어 《수호지》가 다하지 못한 것을 종결지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18]《극진미신(劇秦美新)》 : 시황(始皇)의 진(秦) 나라를 비판하고 왕망(王莽)의 신(新) 나라를 찬양한 글.《漢書 揚雄傳》
[주D-019]천록각(天祿閣)에서 …… 알지 못했으니 : 양웅(揚雄)이 왕망의 옥관(獄官)이 자기를 잡으러 온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여 천록각에서 몸을 던졌으나 죽지 않았고, 그 뒤에 왕망에게 벼슬하면서 《극진미신》을 지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주D-020]사마속수(司馬涑水)의 …… 못했을까 : 속수는 사마광(司馬光)의 호. 그가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양웅을 찬양하여 “양자의 말은 그 뜻이 지극히 깊고 의론이 성인의 길에 어긋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자(諸子)에서 높이 뛰어난 사람이다.” 하였다.
[주D-021]황묘(皇廟) :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를 이름. 명 나라 신종(神宗)ㆍ의종(毅宗) 두 임금을 모신 곳이다.
[주D-022]대보단(大報壇) : 명 나라 태조(太祖)ㆍ신종ㆍ의종 등 세 임금을 제사지내던 단으로 궁중에 있었다.
[주D-023]구주(九疇)를 …… 사람일세 : 기자(箕子)를 말한다. 기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수했다 한다.
[주D-024]비경(飛瓊)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서왕모(西王母)의 시녀. 여기는 우동(尤侗)이 말하는 허경반(許景樊)을 비유했다.
[주D-025]황창(黃昌) : 신라의 무동(舞童).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慶州府)에 “그의 나이 15~16세에 백제왕을 죽였다.” 했다.
[주D-026]가배(嘉俳)의 회소곡(會蘇曲) : 가배는 팔월 추석날이고 회소곡은 경주부 안의 처녀들이 추석날 기념으로 모여 길쌈을 겨루어 진 편에서 부르는 가곡인데, 슬픈 뜻이 들어 있다.
[주D-027]남편이 …… 덕을 알랴 : 후한(後漢) 때 사람 양홍(梁鴻)이 같은 고을에 사는 맹광(孟光)의 어진 덕행을 취하여 그 얼굴이 변변치 못함도 상관 않고 아내로 맞이하여 단란한 부부가 된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맹광은 양홍의 뜻에 순종하고 양홍은 맹광의 덕을 알아서 일생 동안 변함이 없었다 한다.
[주D-028]경수 위수 …… 혼동 되더라도 : 경수는 물이 흐리고 위수는 맑다. 여기서는 남편이 아내와 첩을 구별 못함을 뜻한다.
[주D-029]기량(杞梁)의 …… 무슨 이익이 있었나 : 기량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 사람. 기량이 거(莒)를 치다가 전사하자, 그 아내가 시체를 거두고 성 밑에서 곡(哭)한 지 열흘 만에 성이 저절로 무너졌다 한다.
[주D-030]중루갈(中壘碣) 새기려오 : 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이 외척 왕씨(王氏)의 전권(專權)을 근심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왕씨 일파를 공격하자 원제(元帝)가 그 충성을 높이 사서 중루교위(中壘校尉)에 임명했다 하여, 이 정녀(貞女)의 행실을 찬양하는 비를 쓰겠다는 뜻에 비유한 말이다.
[주D-031]회사(懷沙) : 굴평이 지은 글. 전국 시대 초(楚) 나라 사람 굴원(屈原)이 간신의 참소로 추방당하고 실의(失意)에 빠져 유랑하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을 때에 회사부(懷沙賦)를 지어서 자기의 뜻을 술회했다.《史記 屈原列傳》
[주D-032]포초(鮑焦)의 입고(立枯) : 포초는 주(周) 나라 때 은자(隱者)로 밭을 갈아서 먹고 우물을 파서 마셨으며 아내가 길쌈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어느 날 굶주려서 산 속에 있는 대추를 따 먹는데 어떤 이가 ‘그 대추는 그대가 심은 것인가?’ 했더니, 먹은 것을 토해 버리고 그 자리에서 말라 죽었다.




청장관전서 제35권
 청비록 4(淸脾錄四)
유희경(劉希慶)

유희경은 제복장(祭服匠)으로 호는 촌은(村隱)이다. 일찍이 이이첨(李爾瞻)과 사귀었었는데, 뒤에 이첨이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의론을 주장하자 이내 절교하였다. 그의 양양도중(襄陽途中)이라는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산은 비 기운 머금고 물은 연기 머금었는데 / 山含雨氣水含煙
청초호 가엔 흰 해오리 졸고 있네 / 靑草湖邊白鷺眼
해당화 밑으로 가노라니 / 路入海棠花下去
꽃잎이 채찍에 걸려 떨어지네 / 滿地香雪落揮鞭
최대립(崔大立)은 역관(譯官)인데, 호는 창록(蒼麓)이다. 그의 ‘상우야음(喪耦夜吟)’ 이란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오리는 졸고 향불 꺼져 밤 이미 깊었는데 / 睡鴨香消夜已闌
빈 집에 혼자 누우니 베갯머리 차갑구나 / 夢回虛閣枕屛寒
매화나무에 걸린 아름다운 조각달 / 梅梢殘月娟娟在
당년에 깨어진 거울 보는 것 같네 / 猶作當年破鏡看
김효일(金孝一)은 금루관(禁漏官)으로 호는 국담(菊潭)이다. 그의 ‘자고(鷓鴣)’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청초호 물결 시내에 연했는데 / 靑草湖波接連溪
엄나무 우거진 곳에 쌍쌍이 깃드네 / 刺桐深處可雙棲
상강의 두 여인 원혼이 남았으니 / 湘江二女怨魂在
황릉묘를 향하여 울지 말아라 / 莫向黃陵廟裏啼
이들은 모두 인조(仁祖) 때 여항(閭巷)에서 시에 능하였다.

[주D-001]모후(母后) …… 를 의논 : 1617년에 이이첨(李爾瞻)이 정인홍(鄭仁弘) 등과 발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켰던 일을 말한다.
[주D-002]상강(湘江)의 두 여인 : 순(舜) 임금의 두 아내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말한다. 《述異記》에 “옛날 순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수(巡狩)하다가 붕어하자 아황과 여영이 상강 가에 이르러 통곡하다가 빠져 죽었다.” 하였고 그곳에는 아황과 여영의 황릉묘(黃陵廟)가 세워졌다.
천인(賤人) 백대붕의 시에 “백발로 풍진을 무릅썼는데 전함사(典艦司)의 종이로세[白首風塵典艦奴]” 하였으니, 나는 매우 


음집 제4권
 오언율시(五言律詩) 106수(一百六首)
유희경(劉希慶)의 시권(詩卷)에 차운하다

담 둘러쳐 자그마한 밭 일구었고 / 環堵營三畝
도랑을 쳐 작은 연못 만들었다네 / 穿渠作一池
높은 정은 절로 시은같이 된 데다 / 高情自市隱
깊은 맛은 다시금 꽃가지에 있네 / 幽賞更花枝
장자께선 문밖에 와 수레 멈추고 / 長者門留轍
청류는 시 수레 가득 싣고서 오네 / 淸流軸滿詩
내 몸 쇠해 흥취마저 다한 그날은 / 吾衰興盡日
창망하게 국화 핀 걸 바라볼 때리 / 悵望菊斑時

[주D-001]시은(市隱) : 학문과 재주가 있으면서도 시장의 장사꾼이 되어 숨어 지내는 것을 말한다. 옛날의 은사(隱士)들은 대개 산림(山林) 깊숙한 곳에 살았었다. 그러나 그중에 특별한 인물은 하급 관료로 있으면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조은(朝隱) 혹은 관은(官隱)이라고 하며, 어떤 인물은 저자에 들어가서 조그만 장사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그것을 시은(市隱)이라 하였다.가엾게 여긴다. 국법(國法)에, 종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어서 비록 기특한 재주가 있어도 천인에 그칠 따름이니, 이 시 한 구(句)에 또한 그의 원통해 하고 억울해 하는 뜻을 볼 수 있다.
대붕이 유희경(劉希慶)과 친한 벗으로서 시를 주고 받아, 책 한 질(帙)이 되니, 당시의 경대부들이 모두 허여(許與)하였다. 학사(學士) 허성(許筬)이 일본으로 사신갈 때에 함께 갔었으며, 뒤에 이일(李鎰)이 ‘일본의 일을 잘 안다’ 하여, 데리고 가다가 군사가 패하여 군중(軍中)에서 죽었는데, 그의 출신이 한미(寒微)하였기 때문에 드러나지 못하였다.
유몽인(柳夢寅)이 “서기(徐起)ㆍ박인수(朴仁壽)ㆍ권천동(權千同)ㆍ허억건(許億健)이 모두 학행(學行)으로 유명하였다.” 하였는데, 오직 고청(孤靑) 서기만이 이름나 있고 딴 사람들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니, 이처럼 인멸(湮滅)된 것이 또한 한량 있겠는가.

[주C-001]백대붕(白大鵬) : 조선조 선조(宣祖) 때의 천인(賤人)으로 시에 능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했으며, 임진왜란 때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따라 전지(戰地)인 상주(尙州)에서 전사하였다. 《類選》 卷9下 經史篇8 論史門.



택당선생집 제9권
 인(引)
촌은 유희경의 시집에 쓴 짧은 글[村隱劉希慶詩集小引]

유촌은(劉村隱)은 시에 노련한 솜씨를 보여 주고 있는데, 지금 나이가 84세에 이르렀는데도 소아(騷雅)의 기풍이 여전히 미간(眉間)에 배어 나오고 있다. 한평공(韓平公)이 궤짝을 열고 수백 편을 찾아낸 다음 이를 정리해 서문을 붙여서 동호인(同好人)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시들이 모두 청초(淸楚)하여 읊을 만하였다.
나는 일찍이 ‘시는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만큼 꼭 책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요컨대 그 정수(精粹)를 온축(蘊蓄)해 두고서 묘하게 표현해 내기만 하면 될 뿐이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가령 유옹(劉翁)으로 말하면, 여정(閭井)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니, 지금 박사(博士)라든가 유생(儒生)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 한 번이라도 마음껏 송습(誦習)을 하고 글 짓는 공부에 매진해 본 적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들을 능가하는 점이 있게 되었으니,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단지 청허(淸虛)하고 과욕(寡欲)하여 흉중에 더러운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유옹은 일생 동안 유명한 산수(山水)를 왕래하면서 틈만 있으면 초석(草石)과 어조(魚鳥)를 완상(玩賞)하였으며, 간간이 종장(宗匠)과 재사(才士)며 일민(逸民)과 석사(釋士)를 접하면서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하였는데, 이러한 일을 어려서부터 만년에 이르도록 일관되게 계속해 왔기 때문에, 가슴속에 온축된 정영(精英)이 무가내하로 자연히 솟아나오게 된 것이었다.
더구나 유옹이 한창 혈기방장한 때에는 국조(國朝)의 시교(詩敎)가 활짝 꽃을 피워 삼당(三唐)의 시대를 멀리 뛰어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관각(館閣)의 대가(大家)들이 바야흐로 연허(燕許)의 경지를 치닫고 있었음은 물론이요, 가령 하료(下僚)인 조신(朝臣)들의 시를 보더라도 힘차게 새가 울고 높이 날아오르는 듯 하였으니 모두가 원외(員外)요, 협률(協律)로서 소리(蘇李)를 따르는 율양(溧陽)의 무리 아닌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아래로 소리(小吏)와 일반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들 까마귀처럼 울어제치고 모래 사장의 학처럼 뽑아 대는 시구들 거의 모두가 금옥(金玉)처럼 울리면서 성운(聲韻)을 잃지 않았으니, 예컨대 유옹이나 백대붕(白大鵬)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래서 당시에 이들을 풍월향도(風月香徒)라고 불렀는데, 향도는 서류(庶流)의 수계(修禊)에 대해서 붙이는 이름이었다. 그리고는 학사(學士)와 선생(先生)들이 그들에 대해서는 몸을 낮춰 예우하면서 이따금씩 함께 어울려 시를 주고받으며 노래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풍요(風謠)의 유의(遺意)가 애애(藹藹)하게 배어나오곤 하였으니, 얼마나 성대한 광경이었다고 하겠는가.
 택당선생 별집 제5권
 서(序)

그녀가 사랑했던, 그녀를 사랑했던 유희경의 애절한 그리움의 시<부안읍 매창공원>

 

 

                                   <漢詩>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시 두 수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내소사와 직소폭포가 있는 부안은 황진이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梅窓)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전라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590년 무렵 부안으로 찾아온 시인 유희경을 만나 사귀면서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기약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짧은 시간이나마 사랑을 주고받았던 이들은 이별의 애절함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킨

한시로 달래고 있다

.

 매창은 옷을 꿰매면서 문득 떠오른 유희경이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시로 남긴다.

 

28살 연상의 유부남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던 유희경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배어있는 연시다.

그녀는 유희경을 사모하는 정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自恨/매창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유희경 또한 시간이 갈수록 부안에 있는 매창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는다.

이런 전설에 따라

 

내소사 경내에도 유희경이 그리워하던 벽오동이 심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없지만 벽오동이 있긴 있었다.

 

매창과 유희경은 서로 떨어져 있기에

바느질을 하거나

나무를 보면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어 옥구로 남겨놓았다.

 

유희경의 마음은

아래의 “계량을 그리워하며”라는 한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懷癸娘/유희경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매창(梅窓)




유생(劉生)의 침류대(枕流臺) 시권(詩卷) 뒤에 쓴 글

나는 학업을 늦게야 시작했기 때문에, 당세(當世)에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린 분들과 일찍부터 교유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들어와서 자신의 식견이 보잘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는, 서울에 와서 몇 달 동안이나 지도해 줄 분들을 찾아 보았지만, 그동안 흠모해 왔던 천신(薦紳)과 점필 선생(佔畢先生)들은 이미 태반이나 세상을 하직하셨고, 또 아직 살아 계신 분들은 더할 나위 없이 현달(顯達)하고 귀하게 된 나머지 그 집의 문턱이 너무나도 높았기 때문에 직무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명(高明)하신 분들에게 지도받을 길이 비좁아, 천박하기만 한 이 몸이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스스로 애석하게 생각하며 회한(悔恨)의 정에 젖어들고 있던 차에, 어느 날 유수 희경(劉叟希慶)이 동악(東岳) 숙부의 편지를 들고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그와 만나는 순간 금방 그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원래 시가(詩歌)에 능하여 왕맹(王孟)의 체격(體格)을 터득했을 뿐만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사상례(士喪禮)를 익히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사람됨이 돈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 시인(詩人)의 병통이라 할 옹고집쟁이와 같은 습기(習氣)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큰 명성을 누리게 된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와 교유한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누대(累代)의 조정에서 풍아(風雅)가 뛰어났던 이들뿐이었는데, 그가 평소에 함께 어울리며 즐겁게 노닐었던 추억이나 그 당시의 풍자(諷刺) 섞인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를 위해서 멋들어지게 펼쳐 놓을 때면, 그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피곤한 줄도 모른 채, 마치 그 사람들을 내가 직접 만나 그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착각마저 들곤 하였으니, 아, 이만하면 또한 충분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편 생각건대, 우리 동방의 문학지사(文學之士)는 우리 선조(先朝) 때에 이르러 전성기(全盛期)를 맞았다고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그때에 느지막하게 태평 성세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면서 제도와 문물이 제대로 갖추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으니, 그 높고 낮음을 상고해 볼 때 당대(唐代)의 천보(天寶) 시대와 흡사했다는 생각마저도 드는 것이다.
양자운(揚子雲)의 말 가운데 “선비가 왕도(王道)를 운위하지 않으면 나무꾼도 비웃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한대(漢代)의 융성함을 일컬은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유수(劉叟)로 말하면, 그저 평범하게 민간에 묻혀 사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문예(文藝)를 가지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 그의 동료들 백 명이나 천 명보다도 훨씬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명공(名公) 거인(巨人)들과 호리(毫釐) 사이에서 그 장단(長短)과 득실(得失)을 비교해 본다 하더라도 혹 그들을 넘어서는 점이 있으니, 그러고 보면 선조(先朝) 당시에 얼마나 멋진 정치가 펼쳐져 사람들을 교화시켰는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내가 당시의 성세(盛世)에 몸담고서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유수(劉叟)가 현달(顯達)하여 귀한 신분이 되지도 않고 또 먼저 세상을 하직하지도 않고서 나를 찾아와 준 것은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유수가 초가집에서 흰 머리로 늙으면서 시권(詩卷)을 소매 속에 넣고 나가도 적당히 찾아갈 곳을 알지 못하다가, 이제 비로소 서로 만날 사람을 만나 마음이 계합(契合)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으니, 유수도 ‘참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良自苦人]’이라고나 하겠다.
유수(劉叟)가 이번에는 또 자기가 축조(築造)한 침류대(枕流臺)를 소재로 하여 모아 놓은 시문축(詩文軸) 하나를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는 그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 모두가 찬미하여 지은 글이 들어 있었고, 그의 작품 역시 그 속에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이 시문들을 수습한 시기가 늦었기 때문에, 소로(蘇老)나 아옹(鵝翁) 그리고 최(崔)ㆍ백(白) 등 여러 분의 시가 함께 들어 있지 않은 아쉬움은 있었지만, 이 시문들만으로도 내용이 풍성하고 또 감칠맛이 있었다.
유수가 그 맑은 재질을 온축(蘊蓄)한 위에 쾌적한 물가 나무숲 사이를 소요하며 종횡으로 토해 놓은 시문들이 마치 보석 가게처럼 찬연하기만 하니, 이 글들이야말로 그의 이름과 더불어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인데, 내가 또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다만 내가 뒤늦게 태어나 성세(盛世)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아쉬움 속에서도 그나마 유수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뜻을 서술하고자 할 따름인데, 뒷날 마음이 고독한 선비가 이 글을 읽는다면 어찌 또 더불어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력(萬曆) 정사년 초여름 하순에 덕수(德水) 이식(李植)은 시내 북쪽 우거(寓居)에서 쓰다.

[주C-001]유생(劉生) : 유희경(劉希慶)을 가리킨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특히 예론(禮論)과 상례(喪禮)에 밝아서 국상(國喪) 때 그에게 물어 볼 정도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왔고,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이 폐모(廢母)의 소(疏)를 올리라고 강권하자 그와 절교하고는 은거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인조반정(1623) 뒤에 절의(節義)로써 포상되었다.
[주D-001]천신(薦紳)과 점필 선생(佔畢先生) : 고위 관원의 경력자와 평생 독서인(讀書人)을 뜻한다.
[주D-002]동악(東岳) : 이안눌(李安訥)의 호이다.
[주D-003]왕맹(王孟) : 당(唐) 나라의 시인인 왕유(王維)와 맹호연(孟浩然)의 병칭이다.
[주D-004]사상례(士喪禮) : 《의례(儀禮)》의 편명이다.
[주D-005]선조(先朝) : 선조(宣祖)의 치세(治世)를 가리킨다.
[주D-006]천보(天寶)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年號)로, 현종 초기의 개원(開元) 및 당 태종(唐太宗)의 정관(貞觀) 시대와 더불어 성세(盛世)로 일컬어진다.
[주D-007]참으로 …… 사람 : 《심경(心經)》 3권 부주(附註)에 “사마군실(司馬君實)이 일찍이 분란을 걱정한 나머지 때때로 한밤중에 일어나서는 날이 새도록 잠들지 못하곤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자기 자신을 괴롭힌 사람이었다고 할 것이다.[君實嘗患慮紛亂 有時中夜而作 達朝不寐 可謂良自苦人]”라고 한 정자(程子)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8]소로(蘇老)나 …… 백(白) : 소로는 호가 소재(蘇齋)인 노수신(盧守愼), 아옹은 호가 아계(鵝溪)인 이산해(李山海), 최는 최경창(崔慶昌), 백은 백광훈(白光勳)을 가리킨다.그러다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병란(兵亂)과 형륙(刑戮)의 시대를 겪게 되는 바람에 의관(衣冠)들이 몰락하여 기운이 시들해지고, 유옹의 무리 역시 일찍 죽거나 매몰되는 등 지난날의 기상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는데, 오직 유옹만은 장수(長壽)를 누리며 명성을 독점하여 제공(諸公)의 칭상(稱賞)을 받고 있으니, 이 어찌 그렇게 된 소이연(所以然)이 없다고 하겠는가.
아, 이 시집을 보노라면 세상을 논할 수도 있고 사람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니, “회풍(檜風) 이하는 평할 것도 없다.[自檜以下無譏焉]”는 말일랑 하지를 말지어다.
무진년 섣달에 택당 이식은 쓰다.

[주D-001]소아(騷雅) : 《이소경(離騷經)》과 《시경(詩經)》의 대아(大雅), 소아(小雅)를 병칭한 말로, 시문(詩文)에 대한 재질을 가리킨다.
[주D-002]일민(逸民)과 석사(釋士) : 절행(節行)이 탁월하여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과 불승(佛僧) 등 수도자를 가리킨다.
[주D-003]삼당(三唐) : 시작(詩作)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던 당대(唐代)를 세 단계의 시기로 나누었던 시가(詩家)의 분류법으로, 초당(初唐), 성당(盛唐), 만당(晚唐)을 말한다.
[주D-004]연허(燕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신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으로,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기 때문에 “燕許大手筆”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新唐書 蘇頲傳》
[주D-005]원외(員外)요 …… 없었다 : 모두 시문(詩文)에 일가견을 지닌 가운데 고아(古雅)한 시풍(詩風)을 숭상하였다는 말이다. 원외와 협률은 원외랑(員外郞)과 협률랑(協律郞)의 준말로 예로부터 이 관직에 몸담고 있던 이들 가운데 시문에 능한 자가 많았다. 소리(蘇李)는 한 무제(韓武帝) 때의 소무(蘇武)와 이릉(李陵)으로, 이들로부터 오언시(五言詩)가 비롯되었다는 것이 통설(通說)이다. 율양(溧陽)은, 나이 50에 등제(登第)하여 율양위(溧陽尉)라는 하급 관직에 몸담았던 당(唐) 나라 시인 맹교(孟郊)를 가리키는데, 특히 오언에 능했던 그의 시에 대해서는 ‘탁흥심미(託興深微)’ 하고 ‘결체고오(結體古奧)’ 하다는 평이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시 ‘천사(薦士)’에 “오언시 한 나라 때 비로소 나와, 소무와 이릉이 처음 시체(詩體)를 바꾸었네.[五言出漢時 蘇李首更號]”라 하고, 또 “지지리도 고생하는 우리 율양위, 나이 쉬흔에 그리도 폭삭 늙었는고.[酸寒溧陽尉 五十幾何耄]”라고 한 구절이 있다. 《韓昌黎集 卷2》
[주D-006]백대붕(白大鵬) : 선조(宣祖) 때의 시인. 전함사(典艦司)의 노복(奴僕)으로, 호협한 기상이 시에 넘쳐 흘렀으며, 통신사 허성(許筬)을 따라 일본에 다녀 왔다가, 임진왜란 때 상주(尙州) 싸움에 참가하여 전사하였다. 《國朝人物考》
[주D-007]수계(修禊) : 고대 민속(民俗)의 하나로, 음력 3월 상순의 사일(巳日) 경에 물가로 나가 즐겁게 노닐면서 재액(災厄)을 예방하던 일을 말한다.
[주D-008]회풍(檜風) …… 없다 : 논평할 가치도 없을 만큼 하찮은 작품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오(吳) 나라 계찰(季札)이 노(魯) 나라에 가서 주(周) 나라의 음악을 차례로 들어 보고는 모두 평을 하였는데, 회(檜) 나라 이하의 민요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가하지 않았다[自檜以下無譏焉]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傳 襄公 29年》


그녀가 사랑했던, 그녀를 사랑했던 유희경의 애절한 그리움의 시<부안읍 매창공원>

 

 

                                   <漢詩>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시 두 수


삼도헌과 함께 맛보기

 

 내소사와 직소폭포가 있는 부안은 황진이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 매창(梅窓)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전라도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서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1590년 무렵 부안으로 찾아온 시인 유희경을 만나 사귀면서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


 그러나 유희경이 서울로 돌아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기약없는 이별을 하게 된다.

짧은 시간이나마 사랑을 주고받았던 이들은 이별의 애절함을 그리움으로 승화시킨

한시로 달래고 있다

.

 매창은 옷을 꿰매면서 문득 떠오른 유희경이 사무치게 그리워

눈물을 흘리며 시로 남긴다.

 

28살 연상의 유부남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던 유희경을 향한 애절한 마음이 배어있는 연시다.

그녀는 유희경을 사모하는 정을 평생토록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한다.

  

自恨/매창


春冷補寒衣 봄날이 차서 엷은 옷을 꿰매는데

紗窓日照時 사창에는 햇빛이 비치고 있네

低頭信手處 머리 숙여 손길 가는 대로 맡긴 채

珠淚滴針絲 구슬같은 눈물이 실과 바늘 적시누나


 유희경 또한 시간이 갈수록 부안에 있는 매창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는다.

이런 전설에 따라

 

내소사 경내에도 유희경이 그리워하던 벽오동이 심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없지만 벽오동이 있긴 있었다.

 

매창과 유희경은 서로 떨어져 있기에

바느질을 하거나

나무를 보면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어 옥구로 남겨놓았다.

 

유희경의 마음은

아래의 “계량을 그리워하며”라는 한시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懷癸娘/유희경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뿌릴 젠 애가 끊겨라                                                 

 

                             

 매창(梅窓)  

 커폐에서 남진 나훈아  (스크랩)


村隱集卷之一江華劉希慶應吉著
 五言絶句
懷癸娘 a_055_007a



娘家在浪州。我家住京口。相思不相見。腸斷梧桐雨。

광해군 9년 정사(1617,만력 45)
 12월2일 (계사)
남부 방민의 희인 등이 중대사의 결정과 종묘 사직의 안정을 상소하다

남부(南部)의 방민(坊民) 희인(希仁) 등이 상소하여 속히 큰 계획을 정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니, 의정부에 계하하였다.【당시에 이이첨이 허균으로 하여금 흉악한 무리들을 널리 모아 그의 집에다 채워두고 좌우로 불러주고 대응하여 날마다 6, 7편의 상소문을 지어 번갈아가며 올리게 하였다. 간혹 적합한 사람이 없으면 이름을 위조하여 올렸다. 김개(金闓)가 우윤(右尹)이 되어 방민들을 억지로 몰아대면서 옥에 가득 채우기까지 했으나 거리의 부로(父老)들은 울부짖으며 따르지 않는 자도 있었다. 결국은 삼의사(三醫司), 내삼청(內三廳), 도감 군교(都監軍校), 산학(算學)과 율학(律學) 등 각사의 서리(胥吏)들이 혹독히 매를 맞고 서로 상소하기까지 하였다. 대개 당초에 허균과 김개 등이 후한 이득을 미끼로 흉악한 무리들을 모집하여 말하기를 ‘만약 폐모론이 성공하게 되면 전시(殿試)에 직부하도록 허락할 것이며, 정훈(正勳)에 기록하고 군(君)으로 봉할 것이다.’ 하였으므로 무뢰배들 가운데 호응한 자가 많았다. 흉소가 의정부에 내려진 뒤에 병조가 군사를 배정하여 수직하도록 하였는데, 김희설(金希契)이란 자가 심한 독촉을 받고도 목숨을 걸고 거부하면서 따르지 않자, 헌부는 그에게 형장을 가하여 죽였다. 노인 유희경(劉希慶)도 여러 달 가두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원전】 32 집 665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枕流㙜二十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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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岳丹楓
深秋扶病上層㙜。岳面丹楓錦帳開。一歲良辰是重九。金魚須換碧香來。
南山翠靄
浮沉聚散本無蹤。下壓層城上出峯。若使元暉摹此景。奇形異態固難同。
叉溪浣紗
山雨初收散碧霞。玉流淸淺見瓊沙。春來女伴多情思。手弄微波浣越紗。
鵂巖採樵
雨後山光翠欲浮。採樵斧影落巖頭。斜陽一曲樵歌興。不換人間萬戶侯。
尼院暮鍾
洞裏春晴雲捲遅。崢嶸寶殿接村籬。暮鍾搖落前峯外。知是比丘參佛時。
天壇曉磬
白蓮峯下紫淸壇。琪樹瓊花露氣寒。道士焚香拜北斗。一聲金磬落雲端。
三山暮雨
三山屹立碧芙蓉。半隱雲端半出空。日暮長風吹雨過。層巒疊嶂有無中。
萬井炊烟
萬井相連十里賖。樓㙜隱映夕陽斜。靑烟處處隨風起。盡是鍾鳴鼎食家。
上林玩月
玉宇澄淸雨乍晴。仙人掌上露華淸。應知一㨾中天月。此夜林間分外明。
御苑賞花
春光先入地中胎。麗日和烟淑氣催。始識東君勤用意。千紅萬紫一時開。
花階蝶舞
數仞宮墻澗水湄。千般花木各爭輝。多情最是尋香蝶。遶蘂攀枝自在飛。
柳市鶯歌
三月秦川雨乍晴。東風低拂柳絲輕。鶯兒巧舌多情思。啼送淸歌一兩聲。
古井秋螢
洞口秋霖陰復晴。井欄苔濕撲流螢。騷人恐失三餘學。手拾歸來替短檠。
新豐酒旗
三月村南綠映紅。遊人覽物立東風。新豐店裏靑帘在。沽酒何須問牧童。
星嶺長松
落落長松御苑中。蒼髯不改四時同。平生性癖耽寒節。最愛凌霜十八公。
曲城殘照
層巒隱映添佳氣。碧落虛明散彩霞。欲識箇中無限好。曲城高處夕陽斜。
弼峯晴雪
弊裘凝坐强裁詩。正是窮陰雪下時。日暮天風雲捲盡。亂峯晴影玉參差。
御溝紅葉
蟬聲已報漢宮秋。欲寫幽懷不自由。昨夜風霜搖落盡。滿溪紅葉入淸溝。
西泮濯纓
寒流一派繞芹宮。潑潑泉源淡若空。童子數三冠者六。詠歸幽興浩無窮。
東澗採春
春風習習草新綠。山雨欲來雲四垂。閑隨流水度幽壑。正是碧桃花發時。

枕流㙜 a055_01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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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在長安紫陌東。門前流水碧溶溶。丹砂鍊罷無餘事。坐對三山第一峯。
昌德宮西景福東。中間一壑水溶溶。人來莫謂無佳翫。看取中天聳碧峯。


枕流㙜[村隱] a055_04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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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築溪邊一小㙜。滿枝紅艷未全開。新豐正在南鄰近。須把金龜換酒來。
芝峯
籬外淸溪溪上㙜。㙜前無數小桃開。慇懃莫遣隨流水。怕有漁郞入洞來。
揭水潺潺漱石㙜。亂峯蒼翠鏡中開。眞源徹底淸無滓。倘有巢由洗耳來。
一區風月閟仙㙜。花外柴扉午不開。最是此間淸興富。溪山自入好詩來。
玄翁 申公欽
溪水泠泠遶小㙜。桃花無數兩邊開。壷中別有閑天地。世上光陰自去來。
蓀谷 李公達
紫鸞橫跨下瑤㙜。別有壺中日月開。流水落花門半掩。主人無乃避秦來。
北村
一畒庭中半是桃。落花臨水帶林臯。蕭然怳入玄都觀。便覺劉郞氣槩豪。
石澗縈廻一小㙜。蓬門經歲未曾開。閑中盡日無人過。惟見桃花逐水來。
鹿門 洪公慶臣
五柳何如種五桃。枕流差擬嘯東臯。塵埃蹤跡烟霞趣。始見男兒氣像豪。
何事劉郞喜種桃。風塵蹣跚笑夔臯。悠悠人世多昏醉。肯向螟蛉作二豪。

枕流㙜賦詩圖序[澤堂居士] a055_05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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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啓乙丑穀日。上以大祀受釐。百官罷奏事。余退自內㙜。病寒甚。枕流主人劉翁强起余。賞其家早梅。於是。鄭校理德餘,嚴獻納敬甫,李正言道章,韓翰林振甫,呂正字子久。與令宰洪勉叔,勉卿兄弟皆來會。李使君尙古踵到。時勉叔將之官。且爲叙別來也。翁居無長物。只盤松一株如覆宇。盆梅半落。餘香裊娜。翁出酒食。間以蔬果。儉而有致。吾儕稍出壺榼以佐之。飮酣。翁首賦一律。吾等繼和。至月上乃罷。余謂曾在峽江。有此境而無此客。今居城市。有此客而無此暇。劉翁以詩禮顯。枕流之名聞國內。然以爲未有如斯會之適也。遂作圖。幷錄諸作。以爲後覽。澤堂居士。題。

침류대에서 여러 학사들에게 준 유희경의 시에 차운하다〔次劉希慶枕流臺諸學士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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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노니 지난날 도원 속에서 / 憶向桃源裏
한가로이 대숲 아래 못을 보았지 / 閑窺竹下池
풀은 오늘날 길을 가득 뒤덮고 / 草封今日逕
솔은 석년의 가지를 드리웠으리라 / 松偃昔年枝
성시에 자리한 은자의 집이요 / 城市幽人宅
계산을 노래한 학사들의 시로다 / 溪山學士詩
병중에 부질없이 옛 흥이 일어나 / 病來空舊興
시를 읊조리며 석양을 보낸다오 / 吟送夕陽時
[주-D001] 유희경(劉希慶) : 
1545~1636.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ㆍ시은(市隱)이다. 아버지는 종7품인 계공랑(啓功郞)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랐고 시를 잘 지었으며, 특히 예론(禮論)과 상례(喪禮)에 밝아서 국상(國喪) 때 그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자기 집 뒤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枕流臺)’라 하고 그곳에서 당대의 이름난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았으며, 그 화답한 시를 모아 《침류대시첩》을 만들었다. 그는 또 같은 천인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저서에 《촌은집》,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주-D002] 침류대에서 …… 차운하다 : 
1625년(인조3) 정월에 유희경이 이식(李植), 정백창(鄭百昌) 등 당대의 명사들을 침류대에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 시를 주고받으며 노닐었으며, 이 시회(詩會)를 기념하기 위해 〈침류대부시도(枕流㙜賦詩圖)〉를 남겼다. 이때 읊은 유희경의 〈경정제학사(敬呈諸學士)〉에 지봉, 이식, 정백창, 이경직(李景稷), 최명길(崔鳴吉), 장유(張維), 김상헌(金尙憲) 등 당대의 저명한 문인 20여 명이 차운을 하였는데, 《침은집》 권3 〈수창시속록(酬唱詩續錄)〉에 자세히 보인다. 유희경의 원운 〈삼가 여러 학사들에게 드리다〔敬呈諸學士〕〉는 다음과 같다.
학사님들 찾아와 노니는 곳이니 / 學士來遊地
습가지를 따질 필요가 뭐있으랴 / 何須問習池
서리는 성긴 대나무 잎에 붙었고 / 霜粘踈竹葉
눈은 이른 매화 가지를 누르누나 / 雪壓早梅枝
다행히 등룡의 자리에 끼었으나 / 幸忝登龍席
도리어 격발의 시에 부끄럽다오 / 還慚擊鉢詩
다시 만날 날이 응당 있으리니 / 後期應有日
정말 좋은 봄날 답청할 때라오 / 正好踏靑時
《村隱集 卷3 酬唱詩續錄 敬呈諸學士》
[주-D003] 도원(桃源) :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세상을 피해 은거하는 곳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복숭아나무가 가득한 침류대를 가리켜서 한 말이다. 도잠(陶潛)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의하면, 동진(東晉)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의 한 어부가 일찍이 시내를 따라 한없이 올라가다가 문득 도화림(桃花林)이 찬란한 선경을 만났는데, 그곳에는 진(秦)나라 때 피란 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지봉집》 권21 〈침류대기(枕流臺記)〉에 “침류대 위아래에는 잡목이 전혀 없고 어여쁜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물 양쪽에 늘어서 있어 분홍 꽃비가 허공에 흩날리고 비단 물결이 춤을 추는 듯하니, 옛날의 무릉도원도 이보다 화려하지 않을 것이다.〔臺上下, 幷無雜卉, 夭桃累十株, 夾水左右, 紅雨灑空, 錦浪如舞, 古之桃源, 不侈於是矣.〕”라고 하였다. 《陶淵明集 卷6 桃花源記》 《芝峯集 卷21 枕流臺記》 《村隱集 卷3 枕流㙜記》

 유희경은 한미한 사람이다. 경성에 살며 침류당을 짓고 시냇가에 복숭아나무를 심고 시은이라 자호하였다. 성품은 담백하고 욕심이 없었으며 문장을 좋아하여 여러 사람들이 많이 어울렸다. 선친께서도 일찍이 시를 주신 적이 있었으니 “눈 덮인 집에 금서는 차갑고, 매화 핀 창 아래 담소 나누니 향기롭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제 그가 죽은 지 이미 30년인데, 홀연 꿈에서 보니 차분한 그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 바위골의 아름다움을 장황히 말하고는 나에게 시를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잠에서 깨어 기록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劉希慶賤隷也居京城作枕流堂緣溪種桃自號市隱性恬淡寡欲喜文辭諸公多顧遇先君所嘗贈詩有曰雪屋琴書冷梅窓笑語香者是已死今三十年忽夢見從容如似爲仙人者盛論巖洞之美請余賦詩覺而記之其詩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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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선이 떠나고 바다에 먼지 생기니 / 臞仙一去海生塵
번개처럼 이슬처럼 아득히 많은 세월 지났네 / 電露茫茫閱世頻
가꾸던 붉은 벼랑에 바람과 햇빛도 좋은데 / 管領丹崖好風日
복사꽃 흐드러진 봄 풍경 감상할 이 없구나
/ 無人共賞碧桃春
[주-D001] 유희경(劉希慶) : 
1545~1636.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이다. 《柳下集 卷10 劉村隱墓誌銘》
[주-D002] 침류당(枕流堂) : 
유희경이 계곡의 너른 바위에 돌을 더 쌓아 평평하게 만들고 그 위에 지은 집으로 추측되나 자세하지는 않다. 이수광이 유희경의 집에 놀러 갔다가 지은 〈침류대기(枕流臺記)〉에 “계곡 상류에 우리 집이 있습니다. 누대가 있는데 누우면 발끝에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습니다.[川上流, 吾居也. 有臺枕其趾, 而桃花盛開.]”라고 하였다는 유희경이 말이 기록되어 있다. 《村隱集 卷3 枕流臺記》 또 《유하집(柳下集)》 권10 〈유촌음묘지명(劉村隱墓誌銘)〉에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고 집은 정업원 아래에 있어 그 시냇가에 돌을 쌓고 대를 만들어 이름 짓기를 침류라고 하였다.[性愛山水, 家在淨業院下, 卽其溪上壘石爲臺, 名之曰枕流.]”라고 하였다.
[주-D003] 구선(臞仙)이 …… 생기니 : 
유희경이 죽고 난 뒤에 많은 세월이 흘렀다는 말이다. 구선은 몸은 야위고 정신은 맑은 노인을 형용하는 말로, 여기서는 유희경을 가리킨다. 해생진(海生塵)은 바다에서 먼지가 피어난다는 말로, 긴 시간을 의미한다. 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 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待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於往昔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성인들이 모두 바닷속에서 다시 먼지가 날릴 것이라고 말하였다.[聖人皆言海中行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神仙傳 卷3 王遠》
[주-D004] 번개처럼 …… 지났네 : 
유희경이 죽은 뒤로 많은 세월이 금세 지났다는 말이다. 전로(電露)는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무상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금강경(金剛經)》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에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건을 들어 “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如露亦如電]”라고 하였다.
[주-D005] 가꾸던 …… 없구나 : 
유희경이 가꾸어 놓은 침류대의 봄 풍경은 좋은데 유희경이 죽어서 함께 감상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단애(丹崖)는 붉은 벼랑으로, 여기서는 침류대를 가리킨다. 《유하집(柳下集)》 권10 〈유촌음묘지명(劉村隱墓誌銘)〉에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고 이름을 침류라 하였다. 옆에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수십 그루를 심으니 매번 봄철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시내에 곱게 비쳤다.[卽其溪上壘石爲臺, 名之曰枕流, 傍植桃柳數十株, 每春時紅綠照爛川谷.]”라고 하였다
村隱集卷之三○枕流㙜錄
寧國洞林莊圖題詠
1 贈劉老人[五峯 李公好閔]
2 楊州之樓院迤西。有寧國洞。洞中。重建靜庵先生書院。洞外。卽大路也。七十九歲人劉希慶舊莊。在洞之東北隅。今欲結茅。將終老焉。倩龍眠李澄筆。寫之爲圖。以南郭相公所題詩若序來示余。要和其韻。遂書以與之。[孤山 柳公根]
3 劉生居市井間。不逐什一爲利。乃顧從賢士大夫遊。詩禮飭躬。結廬道峯山下以自適。今年七十有九。步履輕健。色若童孺。余喜其爲人。今來求詩。口占贈之。六首。 [玄翁]
4 題劉老人林莊圖[稚川 尹公昉]
5 余老倦筆硯。公退。只昏昏思睡。時有山僧叩門求詩。始輒嗔而却之。再來雖不免酬塞。强爾塗抹。殊無意致。劉老人來。輒說禮談詩。華悃藹然。尤以不索詩爲喜。一日。忽袖軸示之。要余題其面。余笑曰。君亦效山僧耶。軸上有幽居之畫。使人起廬山結廬之興。遂次原韻。書以贈之。[月沙]
6 劉老人苦索詩。步玄翁相國三絶以歸之。[柳川 韓公浚謙]
7 劉老人應吉。手携一卷子來。索詩甚懃懇。無論工拙。情不可拒。不嫌續貂之譏。謹次原韻以贈之。[仙源 金公尙容]
8 劉翁地微而有儒行。數來訪余。說禮疑。盖所謂求益者。余以是重之。與之忘形焉久矣。一日。以所得詩軸來示。求屬和。適余有南歸意。次玄翁,南郭二韻。以爲留別語[愚伏 鄭公經世]
9 往在乙亥年間。始與劉生相識。時余甫年十三。生且踰三十矣。每來見余。輒相對怡然。終夕乃去。至今白首如一日。殆所謂目擊而存者也。近數歲。袖軸求和甚勤。余拒之曰。余嘗爲生贈詩若文者屢矣。今衰且病。安能重爲斯役乎。生固曰。然。業已成軸。不可無子言。余辭不獲。盖生好道之誠。老而彌篤。故以反求之義勉之。生以爲何如。[芝峯]
10 劉翁應吉。生長闤闠間。讀書學禮。口不道塵俗語。行年八十五歲。神觀精健。類有道者。喜吟詩。所著有若干首。德水李汝固序之。盛有稱引。自言小築在道峯山下。欲歸老待盡。爲子姓所勸止。作小幅圖。以寓其懷。諸公多爲詩之。余知劉翁久矣。桑楡晩景。何爲長處黃塵中。木落歸根。須自作生活可也。遂次韻勖之。[谿谷]
11 劉叟十日前來訪。示卷中諸作。仍索次贈。値余小極。無意塞請。昨者。西銓追擧叟戊午抗節之蹟。仰稟褒典。聖上特陞二品階。以侈寵之。實出於扶植彛倫。崇敭節義之盛意也。余始蹶然而起。把筆一就。以寓今日聳倒之思。非道向來山莊之致云爾。[鶴谷]
12 先君子少與徐萬竹先生。爲莫逆交。劉叟久事萬竹。而獲習於先君子。不肖等髫齔已名呼。劉叟今顚髮種種。兩世六十年往來。情誼不衰。可謂信人。况兼他美。信如諸公所稱道者哉。重其人。不得辭其請。詩不工不計也。[淸陰 金公尙憲]
13 余之不文。叟之所知。而袖軸求詩。何其謬也。無乃以余最詳於知叟之事。而欲叙其顚末耶。當叟之抗節板蕩也。余亦遭譴而心竊歎焉。及叟之事聞見褒也。余又與議而掌其事焉。知叟之詳。宜莫如余。况此村莊歸老之圖

 




墓表[金昌翕]     

       
君名希慶。字應吉。村隱其號。所居枕流㙜。有諸賢之賜與名。今其地入於都揔府。所植一松猶在云。爲人恬愨好古。少學唐詩於思菴朴公。受禮說於東崗南公。遂博綜三禮註踈及杜典,丘儀。以究雜服之學。凡所口講指畫。曲有据依。自國恤以至士喪。莫不待君而含斂。其未遍詣。則送麻裁服者。相接於枕流臺下。君一皆順應。閑則對松而哦。一時哲匠。咸造其巷。與共筆硯。要爲溟岳遊。未嘗以老疾辭。其襟韻如此。君生於嘉靖乙巳二月。歿於崇禎丙子二月。凡在輦轂下九十二年。於國家否泰平陂。所閱多矣。每値時變。輒有可觀之節。壬辰倭亂。義募市民。爲勤擧。戊午。母后之廢。朝議䝱街居耆老使投踈。不從則刑。君不爲撓。素善李爾瞻。至是。惡而絶跡。出遇見詰。答曰。小人有母。專於奉養。未暇踵公門云。君實有孝行。十三。喪父。葬之以禮。凍體負土。遂廬其下。母裵三十年帖席。夙夜于側。身自浣滌廁牏。而以其暇劬書。行篤而學敏。斯見其文質矣。君系出江華。祖道致。父業仝。盖皆卑微。配許氏。年亦踰九十而歿。同葬道峯。有子五人。舜民,禹民,聖民,士民,逸民。內外曾玄。二百餘人。君始以壬辰起義。受宣廟之褒。至癸亥反正而仁廟嘉其節。命爵嘉善。其得通政資。則以甞贊肉食者。謀裕國需。是亦忠之致也。旣耋而例加嘉義。歿。用子逸民原從勳。贈君資憲大夫漢城府判尹。就其所坐地。亦旣隆顯矣。然踈菴任公。高君之賢。而陋我邦制曰。蓬蓽綺紈。才孰長短。而流品是拘。尙德哉斯言也。余以先古有枕流之契。而在今日世道之感。竊愛夫小人有母之說。是以。樂爲表闡。而忘其不文。遂書此。以與爲君孫者自勖云。崇禎紀元後七十一年戊寅春正月日。安東金昌翕。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