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2.10.13. 설악산 공룡능선

2012 .10.13. 설악산 비선대의 가을

아베베1 2012. 10. 14. 12:48

 

 

 

 

 

 

 

燕石册七
 碑銘
雪嶽大圓堂大師碑銘 壬子 a_247_133c


雪嶽。名于域中。古淸寒子曁三淵翁遺躅尙在。而淵翁所與爲淨社之游。如賾道人䧺大師。其人皆靈淑所鍾。超上津筏。其道殊而其致一。後之尙賢者。奚方內外之間焉。予退居白城之墅。有比丘道圓者。自雪嶽走千里。爲師乞銘。問其師。乃賾道人高足大圓大師也。噫。卽其淵源之所自。可以知師矣。師法名無外。號大圓堂。本文姓。高麗江城君益漸之後。父壽遠。母金氏。夢月而娠。旣生。肌膚淨潔。不藉洗浴。爲兒嬉戱。皆作佛事。見者異之。甫成童。當戊申國難。奔赴南漢。守堞有勞。難已。賞射獲多當第。遂力辭而歸。忽247_133d自念人之最於物者。以有靈明也。其可緣形役性。喪吾神珠乎。旣而。父母擇對。將諏日送之。乃中夜脫身。走入雪嶽。問道日菴大師。卽賾道人也。賾與語奇之。傳其心印。繇其上有雪巖,月渚,楓潭,鞭羊。以接乎淸虛。於師六世也。師夙有慧識。於內外典。深探獨得。以開衆覺。中年苦眼眚。於是面壁心灰。回光內照。行益苦道益尊。蔚然爲一代叢林之宗。今上辛亥七月乙酉。寂于雪嶽之極樂菴。壽七十八。臘六十。臨化。謂衆曰。我將行矣。其勿以彌文累我。旣焚化。有光燭天。移日不去。門僧慧遠得靈珠一顆。爲浮圖以藏之云。予仍詰之曰。圓。爾道。以無爲爲宗。顯揚褒大。何有於247_134a師哉。圓曰。以爲無也。則三千大界。便作空華。以爲有也。則眞妄皆境。隨所在而致力。亦人之道也。圓貌古而氣淸。遍習笁典。專心所事。殆古所謂不見其山。願見其木者歟。遂爲之銘曰。
赴難逃賞。淸虛之風兮。因性早覺。月渚之通兮。五祖傳印。臨濟之宗兮。由戒入定。水止鑑空兮。雪山嵯峨。寶珠玲瓏兮。於千萬劫。皎皎靡終兮。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영조61730경술雍正811월 19일, 태어나다.
영조131737정사乾隆28城南 樂谷에서 叔氏 兪彥鋐과 함께 伯氏 兪彥鏶에게 수학하다.
영조171741신유乾隆612兪彥鏶에게서 五書 二經을 마치다.
영조201744갑자乾隆915대사헌 閔遇洙의 딸과 혼인하다.
영조321756병자乾隆212711월, 장인 閔遇洙의 상을 당하다.
영조371761신사乾隆2632庭試 丙科에 합격하여 承文院에 보임되다.
영조381762임오乾隆2733시강원 說書가 되다.
영조391763계미乾隆2834승문원 주서를 거쳐 성균관 전적이 되다. ○ 12월, 정언이 되다.
영조411765을유乾隆3036가을, 朴趾源, 申光蘊 등과 金剛山을 유람하다.
영조421766병술乾隆31375월, 홍문록에 올라 수찬, 부수찬, 교리, 부교리가 되다. ○ 諸家의 要語를 字韻으로 분류 「字義類彙」 2편을 완성하다.
영조431767정해乾隆32388월, 부수찬이 되다. ○ 경기 어사가 되다.
영조471771신묘乾隆3642弼善에 오르고, 종부시 정이 되다. ○ 응교, 부응교에 전보되고 館職에 두루 제수되다. ○ 사서, 겸필선, 보덕을 거쳐 서학ㆍ남학ㆍ중학ㆍ한학 교수를 역임하다. ○ 3월, 權震應이 裕昆錄에 관해 상소한 일로 해직되었는데, 옥당의 동료와 차자를 올려 그를 구원하자 護黨한다는 이유로 南海에 유배되다.
영조481772임진乾隆37433월, 淸明黨으로 지목되어 黑山島로 유배되어 庶民이 되다.
영조491773계사乾隆3844湖堂에 首望으로 選拔되다. ○ 京畿 御史가 되다. ○ 京畿 都事, 鴻山 현감, 扶安 현감을 역임하다.
영조511775을미乾隆4046가을, 春坊의 宮官이 되다.
영조521776병신乾隆4147정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 좌랑이 되고, 곧 정랑이 되다. ○ 7월, 승지를 거쳐 이조와 예조의 참의, 병조의 參知가 되다. ○ 9월, 규장각 설립과 함께 직제학이 되고, 이어 明義錄 纂輯堂上이 되다.
정조11777정유乾隆42485월, 이조 참의가 되다. ○ 6월, 開城 유수가 되다. ○ 實錄都廳堂上이 되고, 특별히 特進官에 선임되다.
정조21778무술乾隆4349玉冊書寫의 공로로 嘉義의 품계에 오르다. ○ 6월, 이조 참판이 되다.
정조31779기해乾隆44505월, 동지경연사, 도승지가 되다. ○ 6월, 대사헌이 되다. ○ 9월, 홍문관 제학, 도총부 부총관, 비변사ㆍ종묘서ㆍ사역원ㆍ제용감 제조 등을 역임하다. ○ 강화 유수가 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사직하다.
정조41780경자乾隆45513월, 직제학을 거쳐 형조 판서가 되다. ○ 5월, 한성부 판윤을 거쳐 홍문관 제학이 되다.
정조51781신축乾隆46521월, 예조 판서가 되다. ○ 2월, 동지경연사가 되고, 곧 강화 유수가 되다. ○ 4월, 홍국영이 제거된 뒤에 그의 致仕를 추론하며 소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徐命善의 탄핵을 받아 刊削되었으나 곧 서용되다. ○ 10월, 지경연사가 되다.
정조61782임인乾隆47532월, 예문관 제학이 되다. ○ 형조 판서가 되다.
정조71783계묘乾隆4854「璿源譜略」의 御序를 寫進한 일로 正憲에 오르다. ○ 3월, 이조 판서가 되다. ○ 10월, 伯氏 兪彥鏶의 상을 당하다.
정조81784갑진乾隆49551월, 지경연사가 되다. ○ 2월, 모친상을 당하다.
정조101786병오乾隆51574월, 부인 민씨의 상을 당하다. ○ 6월, 형조 판서, 예문관 제학이 되다. ○ 10월, 대사헌이 되다. ○ 12월, 평안도 관찰사가 되다.
정조111787정미乾隆52582월, 우의정이 되다. ○ 10월, 冬至正使로 중국에 가다. 왕복하는 사이에 부인의 〈遺事〉를 정리하다.
정조121788무신乾隆53593월, 북경에서 돌아와 복명하다. ○ 12월, 趙德隣의 복관, 趙進道의 削科件과 관련되어 제주에 위리안치되다.
정조141790경술乾隆55613월, 유배에서 풀려 석방되다.
정조191795을묘乾隆60661월, 좌의정이 되다. ○ 10월, 許積ㆍ金聖鐸의 復官과 柳星漢의 상소로 상차하다. 이로 인해 鄭東浚 등 時輩의 탄핵을 받다. ○ 12월, 30차례에 걸쳐 사직을 요청하다.
정조201796병진嘉慶1672월, 군문 도제조의 사직을 청하다. ○ 3월 19일, 졸하다. ○ ‘忠文’으로 시호를 내리다. ○ 일찍이 「周易」 大壯卦의 ‘大壯則止’에서 ‘則止’를 따서 自號하다.
순조21802임술嘉慶7-정조 묘정에 배향되다.

기사전거 : 自誌ㆍ兪彥鎬妻墓誌銘(兪彥鎬 撰), 兪彥鎬自誌後追記(兪漢雋 撰, 自著 準本),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영정조 시대 老論 峻論의 영수이자 문장가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에 대한 부록문자나 저술 관계 기록은 찾기 어렵다. 다만 1784년 생전에 쓴 〈自誌〉와 族姪 兪漢雋이 쓴 〈自誌後追記〉를 통해 행적을 살펴볼 수 있으며, 역시 유한준이 1791년경에 쓴 燕石集序 등을 통해 저자의 저술 관계와 생전에 자편고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유한준의 「自著」 또한 정리되지 못한 필사본으로 본집의 서문이 모두 세 번이나 나오는데 「著草」와 「壬戌本自著」에는 ‘燕石集序’로, 「準本」에는 ‘止軒集序’로 실려 있으나 내용은 모두 같다. 그중 “족부 止軒公이 지은 燕石集은 詩 500편(546), 序記 37편(39), 題跋銘贊說 40편(45), 狀誌碣 35편(61), 祭文哀辭 42편(50), 書牘 155편(178), 疏箚啓議 65편(75), 講義奏對書箋 37편, 傳史斷雜著 10편 등으로 시문이 합해서 천여 편에 이른다.”라고 하여 1790년 경에 자편한 원고의 규모를 서술하고 있는데, 편수 옆에 늘어난 편수를 加筆한 부분은 이후 더 증보된 稿本의 편수를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 朴趾源이 쓴 〈愚夫艸序〉에서도 “그 燕石集을 읽어보니 忌諱와 嫌疑에 저촉되는 글이 많다.”(燕巖集 卷7)라고 하였다. 따라서 저자가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자편하여 가치없는 물건을 비유하는 뜻의 ‘燕石’, ‘愚夫艸’ 등의 謙辭를 題名으로 붙여서 知人들에게 보여 주고 평을 부탁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위의 자편고는 남아 있지 않고 현재 전하는 저자의 문집은 장서각(4-6275)에 소장되어 있는 13책의 필사본이 유일한 전본이다. 이 필사본의 특징은, 우선 詩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은 文稿이며, 전체적으로 1750년∼1794년경 간의 작품이 문체별로 구분되어 있지만, 序跋, 疏, 祭文, 議 등의 문체는 1784년∼1786년을 중심으로 두 시기로 나뉘어 책을 달리하여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序의 경우 책1에는 1754년∼1782년까지의 저작이, 책11에는 1786년∼1794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이는 1784년 저자가 모친상을 치르던 즈음에 저술을 중단하고 이제까지의 원고를 정리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참고로 저자의 〈自誌〉도 1784년에 쓴 것이다. 또한 본집은 작품이 끝나는 곳마다 여백이 그대로 남아 있어 후에 작품의 추가와 편집이 편리하도록 도모한 의도가 엿보이며 군데군데 제목 위에 圈點이 있는 것으로 보아 刪定을 위한 교정고본으로 쓰인 듯하다. 한편 작품 말미나 글 윗부분에 종종 작품에 대한 평이나 감상을 쓴 글이 적혀 있는데 이는 저자나 편찬자의 글이라기보다는 소장자가 쓴 잡문인 듯하다.
본집에 실린 작품 수를 燕石集序에 나오는 증보된 편수와 비교해 보면, 詩稿는 일실되었다고 하더라도 序記 29편, 題跋銘贊說 40편, 墓道文 46편, 祭文哀辭 51편, 편지 30편, 疏箚啓議64편, 講義奏對書箋 30편, 傳史斷雜著 9편으로 총 300여 편의 문이 실려 있어 200여 편의 차이가 난다. 결국 본집은 1784년경 1차 정리 이후, 1790년경 「연석집」으로 편차하여 兪漢雋에게 서문을 받고, 1795년경에 재차 그간의 시문을 첨가하여 자편한 고본인데 詩稿와 文稿의 일부가 - 특히 편지와 묘도문 부분 - 유실된 필사본으로 보인다. 그 이후의 轉寫 경위는 알 수 없다.
본서의 저본은 筆寫年 未詳의 장서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燕石集序ㆍ止軒集序(兪漢雋 撰, 自著)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불분권 1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문이나 발문, 목차 모두 실려 있지 않다. 초기 자편고에서 500여 편의 시가 있다고 하였고, 본집의 책3에도 저자가 詩友들과의 수창시를 詩錄으로 정리하고 쓴 題後, 跋 등이 실려 있어 별도의 詩稿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후 遺失된 때문인지 본 문집에는 시가 실려 있지 않다.
책1은 1753년∼1782년 간에 지은 序 13편이 실려 있다. 1754년 장인인 貞菴 閔遇洙의 61壽를 축하하는 壽序와, 1757년에 金敏材와 西都에서 勝景을 유람하고 지은 〈贈金丈士修序〉, 醫書 가운데 要言을 뽑아 분류하여 엮은 「百家精蒐」에 대한 서문, 유람을 떠나는 이들에게 주는 〈送尹伯常遊四郡序〉, 〈送朴仲固洪述祖相纘遊楓嶽序〉 및 자편한 책인 「用圭錄」, 「字義類彙」, 「林居四訣」, 「歸潔錄」, 「習池淸言」에 대한 서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字義類彙」는 字義에 따라 類別로 편차한 字書로, 諺譯을 붙이기도 하고 經史의 要語나 중국의 방언을 採錄하여 달아두기도 하는 등 1766년부터 10여 년간 틈틈이 작업해 온 것인데,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상자에 담겨있던 것을 正書하여 2권으로 엮은 책이다. 또 「歸潔錄」은 20여 년간 관직의 升黜, 召命法就, 筵席이나 官衙에 나아간 일 등 관직생활과 관련된 세세한 일들까지 매일매일 기록하여 6권으로 엮은 책인데, 「實錄」 卒記에 “갑오년 이후 奏對한 것과 그 사실들을 손수 기록하여 한 책으로 만들어서 家廟에 보관해 두었는데, 집안 사람이라 하더라도 열람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 것이 이 「歸潔錄」을 의미하는 듯하다.
책2는 1758년∼1777년 동안에 지은 記 13편으로, 綾城에 있는 淵月法師의 암자인 淵月菴, 忠原에 사는 李德甫의 愚軒, 南孝大의 재실인 讀耕齋, 李仁甫의 書齋에 써준 悅樂齋 등 건축물에 대한 기문이 있고, 그 외 〈東園雅集記〉는 李深遠의 거처에서 벗들과 모여 文酒를 즐겼던 시말을 기록한 것이고, 〈東園雅集圖小記〉는 이심원의 死後에 저자가 동원의 모임을 그린 그림을 보고서 그간의 경위와 감회를 적은 것이다. 또 〈移摛文院事實記〉는 御命을 받들어 규장각 제원이 거주하는 摛文院의 移建 내력을 적은 것이다.
책3은 1755년∼1781년 간에 쓴 題跋이다. 장인 閔遇洙가 저자에게 보내 준 편지 40여 편을 민우수 사후에 帖으로 엮은 뒤 발을 쓴 〈蟾湖書牘跋〉, 梨湖에서 金鎭商과의 수창시를 모은 〈梨湖詩帖跋〉, 蒼窩公과 松鶴을 유람하며 함께 읊은 시 30여 편을 엮은 뒤에 쓴 〈題南遊酬晿詩後〉, 伯氏 兪彥鏶이 소장하고 있던 陶菴 李縡의 유묵 병풍에 적은 〈陶菴遺墨屛跋〉 등 모두 27편이다.
책4는 贊, 銘, 箴, 上梁文, 敎書, 箋文(1757∼1781), 玉冊文이다. 家藏하고 있던 劒에 대해 지은 〈三寅劔贊〉 등 3편의 贊, 국화를 넣어 만든 베개에 대해 지은 〈菊枕銘〉 등 4편의 銘이 있다. 箋은 모두 12편인데 그중 〈東朝昇遐慰大殿箋〉 등 3편은 代作이고, 箴, 上梁文, 敎書, 玉冊文은 각각 1편씩 수록되어 있다.
책5는 30편의 書(1786∼1794)와 9편의 疏(1786∼1787)이다. 書는 저작 연대순으로 배열한 다른 문체와는 달리 수신인별로 분류하였다. 그중 兪漢炅에게 보내는 편지가 11편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그 외에 柳知養(汝思), 睦萬中, 趙鎭球, 洪樂舞(伯能), 權能彥 등에게 보낸 편지이다. 다른 문집을 살펴보면 저자는 金鍾厚, 朴趾源 등과도 편지를 주고받았고 閔遇洙에게 받은 편지는 帖으로 엮을 정도의 양이었는데 본집에는 1786년 이후 몇 년간의 편지만 실렸기 때문에 대상과 편수가 매우 적은 듯하다. 내용은 주로 시를 주고받으며 품평을 구하거나, 墓誌를 부탁하기도 하고 학문이나 일상의 근황을 묻는 내용들이다. 그 밖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1788년 제주 유배시에 쓴 것으로서, 家事에 대한 부탁과 유배지에서의 근황 및 심회를 적은 글들이다. 疏는 이조 판서, 평안 감사, 우의정 등을 사직하는 내용이다.
책6∼7은 墓誌銘(1784∼1792) 19편, 墓碣銘(1786∼1794) 12편, 墓表(1784∼1794) 12편, 碑銘 1편이다. 墓誌銘은 官歷을 중심으로 1784년까지의 자신의 평생을 기록한 〈自誌〉가 맨 앞에 실려 있는데, 참고로 族姪인 兪漢雋의 문집인 「자저」 準本에 〈族父領敦寧忠文公自誌後追記〉라는 제목으로 1784년부터 沒年인 1796년까지의 저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로는 부인 驪興閔氏, 伯氏 兪彥鏶, 장모 漆原尹氏 등 주로 친인척에 대한 글이 많다. 묘갈명은 洪重模, 洪允輔, 洪命基, 朴宗植, 李益烍 등에 대한 것이고, 墓表는 백씨 兪彥鏶, 삼종형 兪彥鎰, 族孫 兪元柱, 종형 兪彥鏡과 兪彥欽 등 일가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비명은 1792년에 지은 것으로 大圓堂大師에 대한 것이다.
책8은 祝文 5편, 祭文(1787∼1794) 19편, 遺事 1편, 蒙演이다. 축문은 1786년 文孝世子에 대한 축문 외에는 모두 祈雨祭文과 이에 대한 報謝文이다. 제문은 貞陵과 文禧廟의 親祭文 외에 부인에 대한 제문이 4편, 사위 宋啓樂에 대한 제문이 2편, 그 밖에 李稚喬, 金致瑞 등에 대한 것이 있다. 遺事는 부인에 대한 것이고, 〈蒙演〉은 유배중 「南華經」을 읽고 기술한 箚錄이다.
책9는 祭文(1750∼1786) 20편, 哀辭(1755∼1783) 7편, 遺事 1편이다. 제문에는 報祀祭文, 祈雨文, 親祭文, 吿由祭文이 친인척들의 제문과 함께 실려 있다. 哀辭는 李鼎燁, 閔百善, 金魯材 등에 대한 것이고, 遺事는 종속부 兪拓基에 대한 것이다.
책10은 疏(1766∼1783) 32편, 箚(1767∼1781) 7편, 啓 2편, 議 1편이다. 疏는 주로 辭職疏이고, 그 외 陳情疏, 乞養疏, 引嫌疏 등이 있다. 차자로는 1771년 南海로 유배가게 된 원인이 된 權震應을 구원하는 차자, 「續明義錄」을 올리는 차자 등이 있다. 啓는 1777년에 올린 討逆啓이고, 議는 대사성시에 올린 學規通變에 관한 議이다.
책11은 論(1776∼1795) 26편, 序(1778~1794) 3편, 跋(1788∼1794) 5편이다. 論은 所懷를 진달하거나 別諭를 받고 나서 논한 것들 및 時事에 관한 것들도 눈에 띈다. 序는 陶菴 李縡가 經史와 諸子書에서 處變에 관한 것들을 뽑아 27권으로 만든 「宙衡」을 임종시에 문인인 伯氏 兪彥鏶에게 뒷마무리를 부탁하였는데, 책이 나오자 도암의 손자가 저자에게 부탁하여 쓴 서문인 〈宙衡序〉, 족질인 兪漢雋의 문집 서문 〈蒼厓自著序〉, 兪漢雋의 아들과 손자의 문집인 「通園稿」의 서문이 실려 있고, 跋은 부인의 遺物인 장인 閔遇洙의 手筆 병풍에 쓴 〈題夫人舊屛後〉 등이다.
책12는 議 13편, 書筵講義, 經筵講義이다. 議는 〈趙岱勘律議〉 1편만 1795년으로 저작 연도가 밝혀져 있으며, 내용은 事案에 대한 당부를 논한 것이 많다. 書筵講義는 1762년 9월에서 1765년 4월까지 29차에 걸쳐 서연에서 강의한 내용을 담고 있고, 經筵講義는 1771년 3월, 1776년 8월부터 1777년 5월, 1780년 3월부터 1781년 4월까지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 「小學」, 「孟子」, 「春秋」, 「近思錄」, 「陸宣公奏議」 등에 대한 것이다.
책13은 傳(1757∼1790) 4편, 明義錄斷, 內閣故事이다. 傳은 南原의 義犬을 다룬 〈義狗傳〉 등이다. 明義錄斷은 洪鳳漢과 洪麟漢 형제 등 홍씨의 세도에 관한 실상을 밝힌 글이고, 內閣故事는 왕명으로 찬술하였으나 귀양가는 바람에 올리지 못했던 글이다.

필자 : 辛容南


위치 :강원도 양양군 도천면 장항리 신흥사 해제 :이 비는 1764년(영조 40년)에 세운 것으로 조돈(趙暾)이 글을 짓고 김상숙(金相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따르면, 설악산에는 예부터 선정사(禪定寺)가 있으니,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에 통산(洞山), 각지(覺智), 봉정(鳳頂) 세 조사(祖師)가 설법한 곳이다. 1644년(인조 22년) 난리통에 이 절 역시 불에 타고 말았는데 후일 승려 영서(靈瑞)가 정결한 사찰을 다시 창건하여 옛 모습을 새롭게 하고 신흥사(神興寺)라고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서쪽의 오세암(五歲庵)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머물던 곳이며 영시암(永矢庵)은 김창흡(金昌翕)이 은둔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탁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雪嶽山 新興寺 由來

이 가람은 신라(新羅) 진덕여왕 6년(서기652)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향성사(香城寺) 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인데 중향성(衆香城)은 금강산(金剛山) 철위산(鐵圍山)을 의미하며 불토국(佛土國)은 부처님께서 교화 할 대상적 국토라는 의미와 정치적 형태의 국가라고 하는 뜻과 어울린 말이다.

처음 향성사지는 지금의 켄싱턴호텔 자리에 세워져 46년간 존속하다가 효소왕 7년(서기 698)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당시 9층이던 향성탑이 현재 켄싱턴호텔 앞에 3층만 남아 있어 옛 향성사의 역사를 말해주듯 옛날을 잊지 않게 하고 있다.

향성사가 화재를 당한지 3년 후 의상조사께서 능인암(현재 내원암)터에 다시 중건하고 사명(寺名)을 선정사(禪定寺)라고 개칭 하였다. 그 후 946년간 수많은 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 정진하여 왔으나 조선 인조20년(서기1642)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소실된 것을 2년후 영서(靈瑞)혜원(惠元)연옥(蓮玉) 세분의 고승들께서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 말씀 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奇瑞)를 얻고 절을 중창하니 지금의 신흥사이다. 절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吉地)를 점지해 주어 흥왕(興旺)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한 것이다. 6·25사변때 고성군 건봉사는 전소되었고 영북지역의 대본산 기능이 마비되었을 무렵 고암, 성준 두 스님의 원력으로 여기 신흥사를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하여 업무를 이관하게 되었다. 이후 신흥사는 영동지역의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불사를 전개해 나갔다. 속초노인복지관을 개관하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사회복지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춘천에는 불교방송지국을 개국하여 포교에 전념하는 사찰이 되었다. 이렇게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자 신흥사가 과거의 신흥사가 아니라 새로운 신흥사가 되었다며 신흥사(新興寺)의 귀신 신자(神字)를 시대에 맞게 새로울 신자(新字)로 고쳐 사용하자는 중론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영동불교를 새로 일으킨다는 서원을 담아 사명(寺名)을 신흥사(新興寺)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의 유래 (신흥사 의 자료 발췌) 

설악산은 처음엔 설산(雪山), 설봉산, 설악산이라고도 불렀읍니다.

한반도 중부 평령을 가등한 영점에 높이 멋지게 솟아 오른 설악산은 해발 1,708m로 우리 나라에서 세번째로 높은 산입니다. 태백산맥을 동·서 양쪽으로 나눠 서쪽을 내설악, 강원도 인제군이라고 하면 동쪽을 외설악, 강원도 속초시라고 부릅니다.

금강산은 고구(古久)로 서림의 상합이라고 불렸지만 설악산은 살매 설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한 해답이라고 하겠읍니다.

원래 설(雪)은 살의 음역이요, 살은 인간의 법률의 활동상을 뿜어 놓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산다고 생명, 숨을 쉬니 호흡, 인간, 쌀미(米), 샘천 등을 포함하는 한 어군(語群)이 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불타의 몸에서 나온 염주와 연골을 가리켜 사리라고 합니다.

청정한 생명의 신비적인 표시물을 연골이라고 하였으니 ‘설악’이라는 ‘설’은 결국 신성을 의미하는 살의 음력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금강산 대(對) 설악산, 설악산 대 금강산, 금강산과 설악산은 아형아제라, 금강산을 성(형)이라 하고 설악산을 동생이라고 할 수가 없고, 설악산을 성이라 하고 금강산을 동생이라고 할 수가 없다. ‘금강산과 설 악산은 아형아제’(1)[주]동생이라고도 할 수 없고 형이라고도 할 수 없음. 다투어 주장함을 뜻함.다. 금강산은 그 어여쁜 아가씨가 화장을 하고 노상에 앉아 노정을 하고 있는 형색이라고 하면, 거머뭉특한 남자가 떡 골방지 침을 도사리고 앉아 있는 형색입니다. 금강산보다 설악산이 더 높고


[55 쪽] 

과연 멋있는 게 설악산이지요.


농암집 제4권
 시(詩)
설악산(雪嶽山)을 바라보며


나무 끝에 기이한 산 차례로 나오는데 / 木末奇峯次第生
수정처럼 고운 빛이 사람을 놀래키네 / 晶熒秀色使人驚
그 누가 알았으랴 풍악산 향성 외에 / 誰知楓嶽香城外
옥을 깎아 세운 듯한 산이 또 있을 줄을 / 更有山如削玉成


농암집 별집 제2권
 부록(附錄) 1
제문 [김창흡(金昌翕)]


아우 창흡(昌翕)

유세차 무자년(1708, 숙종34) 6월 임오삭 5일 병술에 아우 창흡은 떡이며 술 등 제물로 중씨(仲氏) 농암 선생의 영전에 삼가 제사를 올립니다.
아, 가슴 아픕니다. 제가 중씨와 형제로 살아온 지 56년인데, 중씨와는 두 살 터울로 태어나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이날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지나간 세월을 회상해 보면 통곡하거나 허둥대던 날들이 대부분이고 예법을 챙기면서 화락하게 지내던 날들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이 때문에 앞으로라도 서로 의지하여 산림 속에서 10년 동안 함께 살아 보자고 기약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제 몸은 이제 반쪽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하에 애처로운 자 가운데 우리 형제와 같은 경우가 또 없으나, 그 신세와 운명을 가지고 논하면 사람들은 이 아우보다도 중씨를 더 가엽게 여깁니다. 아, 살아서는 남들처럼 살아 보지 못하고 죽을 때는 남들의 죽음보다 더 참혹하였기에 저 길가는 행인도 울먹이고 왕래하던 문객들도 괴로워하는 바이니, 골육지간이야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너무도 슬픕니다. 대체로 중씨의 인의 도덕에 감복하여 현달하고 번창할 것을 축원했던 사람은 ‘어쩌면 그렇게도 상응하는 보답을 받지 못했단 말이냐.’ 하고, 가슴속에 쌓은 경륜을 대강 알아 그 문장과 경학(經學)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어찌 십중 한둘이라도 시험해 보지 못했단 말이냐.’ 하면서 혹은 복이 극에 이르자 다시 깎아 줄인 것이라 하여 천도(天道)에 유감을 표하는가 하면 혹은 국가의 운이 시들어 유능한 인물이 죽었다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인(仁)을 좋아하고 재주를 아낀 나머지 대체로 모두 극도로 애통해하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중씨 당사자의 처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우의 우매한 소견으로 평소에 중씨의 광대한 마음의 실체를 알고 있었으니 가슴이 훤히 트여 아무런 간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아름다운 물건과 좋은 일에 관해서는 자기 자신이 이미 그것을 거부하는 뜻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미 천지간의 한 죄인으로 자처하였으므로 곤궁이 곧 자신의 분수가 되었으니, 어찌 복을 받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일찍이 유현(儒賢)의 출처에 대해 가르침을 받든 적이 있습니다. 중씨께서는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도를 크게 행한 사례는 워낙 오래전의 일이니 차치하고, 공자와 맹자 같은 성현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으며, 정자와 주자 같은 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났으나 겨우 환장각(煥章閣)에서 시강(侍講)하거나 행궁 편전(行宮便殿)에서 차자로 아뢰는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현자가 가는 길이 험난하여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의 바른 법을 버리고 수준을 낮추어 시대 상황에 따라 업적을 이루거나 임기응변의 수단을 부린다면 구차한 것이다. 더구나 그보다 더 하찮은 것으로서 경륜이 천도를 통달하지 않아 견강부회를 일삼거나 문장이 지리를 아우르지 않아 곱게 꾸며 대는 것을 공으로 삼는 경우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이와 같은 견지에서 논한다면, 대체로 세상에서 중씨를 위해 유감을 표한 것들은 모두 중씨께서 이미 거부한 복이며 국가를 위해 도움 주기를 원한 것들은 그저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아 보자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처지를 슬퍼한 것이지, 마음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백년의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그 득실을 따진 자는 일개 한 사람을 위해 슬퍼한 것이고, 당대의 재주를 논하면서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해하는 자는 겨우 한 나라를 위해 애도한 것입니다. 오직 사문(斯文)을 유구한 세월 동안 강구해 왔지만 오히려 완전히 밝히지 못한 일이 곧 식자의 마음에 맺힌 한이며 또한 중씨가 눈을 감지 못한 점입니다. 곧 직(稷)이나 설(契)과 같은 업적을 이루는 것이 그의 소임이 아니고, 따로 스스로 짊어진 짐이 매우 컸으며, 왕자교(王子喬)나 적송자(赤松子)와 같은 장수를 누리는 것이 그의 기대가 아니고, 늙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끈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 그 유감을 말하는 것이 비로소 중씨의 마음을 아는 진정한 눈물이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천지는 자연의 도가 있고 성인은 경전의 이치가 있으며 대현(大賢)은 훈고(訓詁)의 의리가 있습니다. 천지가 말하지 않은 것을 성인이 말하니 이것은 천지가 성인을 기다린 셈이 되고, 성인의 경전 가운데 분명하지 않은 것을 대현이 풀이하니 이것은 성인의 경전이 훈고를 기다린 셈이 되며, 훈고로 다 풀이하지 못하고 남겨 둔 것은 후대의 학자가 다뤄 주기를 기다렸으니, 이 또한 주자의 심오한 뜻입니다. 그런데 주자 이후로 의리가 크게 밝아져 더 이상 강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말은 사람들의 안목을 어둡게 하기 쉽습니다. 만일 이런 설이 맞는다면 주자 이후에 학문하는 자는 과연 예법만 지키고 학문은 널리 닦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주자가 “내가 한 공부를 나와 똑같이 하지 않는다면 나의 경지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주자를 모르면서 또 누구를 감히 말하겠습니까. 중씨께서는 매번 이 아우와 이에 관해 언급하면서 세상 유자들의 고루한 식견에 통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 주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도(吾道)의 학통이 우리 동국으로 들어와 황무지가 개척되자 오랑캐의 고루한 풍속이 약간 바뀌었으며, 주자의 학문에 대해 도산(陶山 이황(李滉))이 깊이 연구하고 석담(石潭 이이(李珥))이 드러내 밝힌 일은 바뀐 풍속으로 인해 생긴 뛰어난 경우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리는 무궁하고 문견은 한계가 있는 법이므로 이따금 결함이 미봉한 데서 생기거나 잘 꾸민 것이 도리어 본의를 어둡게 만들기도 하였으니, 도가 밝아지기 어려운 사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한편, 또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마음인데 비뚤어지거나 올바로 되는 것이 고개를 들거나 숙이는 사이에 좌우되고, 어두워지기 쉬운 것이 눈인데 눈동자를 돌리는 사이에 백태가 낍니다. 이 때문에 혹은 성현의 말씀을 왜곡하여 자기의 뜻에 맞추는가 하면 혹은 남북의 갈림길을 분간하지 못하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다 마음과 눈이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어쩌다가 다행히 잘못 이해한 오류를 면할 경우에는 또 마음이 흡족하고 입이 무거워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내지 못하니, 이는 곧 연평(延平 이통(李侗))의 논변이 회옹(晦翁)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이유이며 자후(子厚 장재(張載))의 필력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경외심을 일으킨 이유입니다. 수레는 일단 꾸며 놓은 다음에 사람이 그것을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맞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널리 배우고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무난히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학이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실체를 온전히 갖춰야 하는 점이 있고, 인품에는 단점과 장점을 은폐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고금의 인물을 대상으로 본심을 지켜 보전하고 실천을 독실하게 한 경우를 찾아보면 우리 중씨처럼 뛰어난 자가 사실 없는 것은 아니나, 도리를 묻고 배우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이 아우는 우리 중씨에게만 하늘이 가르쳐 주고 신령이 풀이해 주어 그 능력을 독차지하게 하였다고 봅니다. 대체로 하늘로부터 얻은 자질이 사실 총명한 데다 공평한 마음을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비범한 논변의 재능을 겸비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다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수면처럼 반듯하여 만물이 기준을 취하는 것은 공정한 것이고 거울처럼 맑아 사물의 형체를 계속 비추더라도 지치지 않는 것은 밝은 것인데, 대지의 기반이 바르게 자리를 잡고 하늘의 밝은 빛이 내리비추는 가운데 느긋하게 물러서고 여유롭게 전진하면서 그 중앙으로 들어가서는 장차 그대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면서 털끝만큼이라도 노력을 그만두려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얕고 깊은 데를 순서대로 섭렵하되 어렵고 쉬운 것을 가리지 않아, 헝클어진 실오리가 손길에 닿으면 풀리고 응어리져 뭉친 부분이 칼집이 들어가면 결에 따라 갈라졌습니다. 처음에 뭔가를 훤히 알았을 때는 마음을 비워 느긋하게 음미하였고, 나중에 그것을 문장으로 써낼 때는 착오가 없어 통쾌하였습니다. 이는 대체로 눈이 마음을 따라 밝아져서 참모습을 보게 되고 붓이 혀와 일치되어 오묘한 풀이가 나온 것입니다. 서로 간에 전달하는 묘리를 논한다면 마음과 눈, 붓과 혀가 하나로 융화되었고, 훤히 통달한 공효를 따진다면 경전의 가르침과 천지의 이치가 모두 각기 기다렸던 결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앞서 이른바 주자가 후세 사람이 자기의 미진한 부분을 천명해 주길 기다렸던 그 인물이 곧 우리 중씨가 아닐까 합니다.
대체로 고상하고 훤히 트인 자질로 겸허하게 각고의 공력을 들였으니, 이는 세상에 드물게 나오는 인물이며, 또 천리를 받들어 따르는 정신이 위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조정에 두지 않고 적막한 임야에 내던진 것은 아마도 총명을 더욱 배양하여 크게 키울 만한 업적을 이루려고 한 것일 것입니다. 이는 대체로 한두 글자의 분명한 뜻을 가지고 한 세상의 이상 정치를 얻어내려 하지 않은 것으로서, 차라리 당대의 조정이 유능한 보좌를 잃게 할지언정 주자에게 충신이 없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니, 이 또한 하늘이 한번 세상에 파견한 뜻이 있지 않았는가 합니다. 남헌(南軒 장식(張栻))이 주자가 한가로운 가운데 학업을 닦는 것을 가지고 아마도 하늘의 뜻일 것이라고 하였는데, 역시 옛날이 오늘날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용히 중씨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면 중씨 또한 하늘이 부여한 책무가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정진을 거듭하였으며 질병을 이유로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강하여 쉬지 않는 하늘의 덕을 따르고 옛 성인을 높은 산처럼 우러르며 느긋하게 일신의 영욕과 세상의 성쇠를 다 잊고서 끼니조차 잊을 정도로 학문을 닦고 이미 얻은 학문을 즐겨 근심 걱정을 몰랐으니, 또 어찌 그 수명이 이 정도에서 멈출 것이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아, 애통합니다. 아, 애통합니다.
평소에 진정으로 주자에게 충성을 바치려고 원하였으나 그 소원을 이룬 것은 겨우 몇 권의 차목(箚目)이 있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 손을 대지 못한 것으로서 결함을 척결하고 숨은 뜻을 밝혀 주길 대기하고 있는 삼례(三禮)의 많은 내용과 《주역(周易)》의 심오한 의미에 관해서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슴속에 처량하게 나열되어 있으면서 오늘을 교화하고 후대에 전수하려 한 것들이 장차 이 세상을 하직함과 동시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후학의 귓전에 넘쳐흐르는 그 고명한 말씀과 오묘한 논리는 아직도 여운이 감돌고 있는데 마침내 날로 멀어지고 날로 잊혀 가게 되었습니다.
요즘 중씨가 남긴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이것저것 기록해 놓은 문자를 열람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강절(康節 소옹(邵雍))이 66세 때 지은 〈노거음(老去吟)〉 시를 기록하고,
이내 나이 십 년만 되돌린다면 / 使我却十年
그런대로 큰일을 이루겠건만 / 亦可少集事
어이하랴 무심한 천지 사이에 / 如何天地間
세월 다시 돌아올 이치 없으니 / 日無再中理
그 밑에 주를 달기를, “내 나이가 지금 52세이니 강절과 견주어 볼 때 13년이 더 남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한창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것을 기뻐하며 앞을 향해 한층 더 노력하면서 더 늙기 전에 큰일을 성취함으로써 늙은 뒤에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려 하였으니, 그 뜻이 장대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수명을 더 늘려 소옹(邵翁)의 나이 정도에 이르러 본디의 소원을 이루었더라면 한가로이 음양의 이치를 음미하며 장차 번개를 채질하고 바람을 잡아 올라타는 조화를 부리는 영역으로 들어가 그 수준이 여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8, 9년을 하늘은 장차 누구에게 주려고 중씨에게서 떼어냈단 말입니까.
삼가 생각건대, 중씨는 이 유학에 대해 정관(靜觀 이단상(李端相))의 문하에 있을 때부터 이미 그 단서가 열렸고, 중간에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脩)의 문정에 출입하여 거의 문장을 가지고 세상에 표방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가문이 화를 당해 자신을 폐기한 뒤로 화려한 것을 줄이고 또 줄임으로써 숙련된 것은 생소해지고 생소한 것은 숙련이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돌아보면 이 아우가 골육 중에서 스승을 얻은 일은 마치 자유(子由 소철(蘇轍))가 자첨(子瞻 소식(蘇軾))에게 배운 경우와 같았습니다. 처음에 절차탁마한 것은 다만 문자를 가지고 하면서 밝은 식견과 민첩한 재주를 내심 견주어 보기도 하였으나 중씨가 진보하는 속도는 말 10필을 몰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내가 걸으면 걸어가고 달리면 달려가다가 내 수레를 앞질러 가는데 발에 흙먼지도 묻지 않고 저 멀리 달려감에 이르러서는 뒤쪽에서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장성하여 뜻이 전일하지 않을 때 시를 품평하고 문장을 논하면서 중씨가 두보, 이백을 거론하면 이 아우도 두보, 이백을 거론하고 시대를 거슬러 포조(鮑照), 사조(謝脁), 조식(曹植), 유정(劉楨)까지 올라가 함께 즐겼고, 중씨가 한퇴지(韓退之), 구양수(歐陽脩)를 거론하면 이 아우도 한퇴지, 구양수를 거론하고 시대를 거슬러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 《좌전(左傳)》, 《국어(國語)》까지 올라가 중씨를 따라 좋아하였습니다.
하던 일이 게을러지고 마음이 주변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 데다 한번 죄인이 되어 온갖 인연이 모두 허무해진 뒤에는 서리가 내리고 물이 줄어들어 근본을 돌아보는 때가 되었습니다. 중씨가 수(洙), 사(泗), 염(濂), 낙(洛)을 거론하면 이 아우도 수, 사, 염, 낙을 거론하여 즐기는 취향이야 변했지만 가르치고 배우는 일념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두보, 이백, 한퇴지, 구양수가 이제는 수, 사, 염, 낙으로 변하였고 이전에 미산(眉山 소식(蘇軾)과 소철(蘇轍)) 형제가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아름다운 전례를 뒤따라 이루어 보려 했던 것이 이제는 하남(河南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함께 도학을 강론했던 전례를 사모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서로 다정하게 학문을 연마하여 무한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세상길은 험난하고 사우(師友)의 도가 닫혀서 문밖을 나가더라도 갈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간혹 한번 나가 뜻에 맞는 벗을 찾아보면 가는 곳마다 생소하여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결국 서글픈 심정으로 돌아와 중씨를 모시고 소리를 길게 뽑아 시가를 읊조리노라면 고저장단의 가락이 잘 들어맞는 상대가 곧 여기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곤 하였습니다. 오경(五經) 백가(百家)와 삼재(三才) 만상(萬象)에서부터 구주(九州) 오악(五岳)의 온갖 기괴한 것까지 거론할 대상으로 삼아 모이고 흩어지는 이치에 관해 토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토론을 시작하면 반드시 끝까지 하여 온종일 이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등불 아래에서 첫닭이 울 때까지 계속하면서 지친 줄 몰랐습니다.
이따금 헤어져 따로 지내더라도 만나면 반드시 새로운 강론이 있고 운치도 있었습니다. 산이며 강물로 인해 서로를 향한 우리 형제의 정신은 막히지 않았으니, 우뚝 솟은 설악산의 백연(百淵 백담(百潭))이며 넘실대는 미호(渼湖)의 삼주(三洲) 사이에 높은 허공의 솔개와 깊은 물속의 고기가 서로 오가는 데에 무슨 거리낄 것이 있겠습니까. 산 위의 밝은 달과 물가의 맑은 바람을 한가로이 읊조리고 즐기는 데에 흉금이 쏠려 있었기에 이처럼 속세를 초월했던 것입니다. 다만 저 한계령(寒溪嶺) 한 구역은 일찍이 중씨가 발자취를 남겼으나 백연은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백연 곁에 나의 정사(精舍)가 이루어지면 그곳에서 학문을 익히는 낙을 중씨와 함께 누릴 생각이었고, 중씨도 이곳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조만간에 중씨의 건강이 회복되면 중씨를 모시고 흰 구름, 밝은 달과 어울려 고사리를 캐던 절사(節士)의 옛터를 더듬고 계수나무 숲에 노닐던 은자의 여운을 찾으면서 한두 명의 선비를 모아 시를 짓던 고사를 함께 따라 했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에서 늘 떠나지 않았으나,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씨가 강석(講席)을 펼 만한 산속의 새 절에서 삼례(三禮)와 《주역(周易)》에 관한 연구를 곧 마무리할 생각이었으나 만년의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생사가 그만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겨울 백연에서 이 아우가 편지 한 통을 써서 깊은 산속 얼음과 눈 덮인 가운데 반가운 벗이 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알렸더니 중씨가 기뻐하며 보내 준 답장에 너무도 부러워하는 말씀이 있었고 끝에는 또 서글퍼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 중씨의 마지막 글이 되었습니다. 서로 헤어진 뒤로 6, 7개월 동안 남을 가르치면서 식견이 부족한 것을 알고 가슴에 가득 쌓인 의문과 멀리 돌아다니며 산수를 보고 느낀 감정들을 돌아가는 날을 기다렸다가 모두 낱낱이 토로하려 하였습니다만, 막상 중씨의 병상 아래에 당도해서는 삼키고 뱉어내지 못하여 답답한 가슴을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이 아우가 살아 있을 세월이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이 답답한 가슴을 안고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게으른 이 아우가 조금이나마 올바로 서고 약간의 도리를 알게 된 것은 중씨의 가르침 덕분이었으며, 그 때문에 오늘의 이 아우가 있는 것입니다. 흉변을 만나고부터는 간담이 다 뭉개지고 살아갈 맛이 뚝 떨어지니 지금 이와 같은 의식으로 어찌 다시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학업에 힘을 쏟을 수 있겠습니까. 헤아려 보면 이제부터 중단되어 마침내 평소에 권장해 주던 뜻을 저버리게 되었으니, 이 점이 또 슬퍼지는 부분입니다. 저를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산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합니다만, 따져보면 이것은 제 속마음을 알아주는 말이 아닙니다. 백원(百源)과 나부(羅浮)에서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으니, 제가 어찌 시끄럽고 어지러운 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세월을 보낼 일거리는 그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품에 안고 나의 옛 은거지로 돌아가 심력을 다해 연구하되, 중씨가 편찬한 차목(箚目)을 참고하여 그 내용을 막힘없이 알게 된다면, 그런대로 정신이 중씨와 서로 가까워져 생사가 우리를 가로막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이 아우가 태만해지는 때가 있으면 그때마다 중씨의 고명한 영혼이 자나 깨나 통하는 때에 일깨워 주어 공부가 퇴보하지 않도록 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니 오장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기타 가족 형제들의 슬퍼하는 심정과 정각에 쌓인 서적을 처리하는 문제와 궤연에서 곡하는 부녀들이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이루 다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사문(斯文)의 영원한 아픔이 크다고 할 수 있으므로 오로지 이를 위하여 끝없이 하소연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아, 애통합니다.

[주D-001]삼례(三禮) : 《의례(儀禮)》와 《주례(周禮)》와 《예기(禮記)》이다.
[주D-002]백원(百源)과 나부(羅浮) : 백원은 중국 하남성(河南省) 소문산(蘇門山) 지역의 지명으로 송나라 소옹(邵雍)이 은거했던 곳이고, 나부는 중국 광동성(廣東省) 동강(東江) 북쪽에 위치한 산 이름으로 진(晉)나라 갈홍(葛洪)이 도를 닦았던 곳이다. 여기서는 설악산이나 금강산 등 우리나라의 명산을 가리킨다.

청장관전서 제69권
 한죽당섭필 하(寒竹堂涉筆下)
신라ㆍ고려의 석각(石刻)

성사집 대중(成士執大中 사집은 대중의 자)이 일찍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사설(僿說)》에 실려 있는 고비(古碑)를 적어서 나에게 보여 주면서, 영남(嶺南)의 고적(古蹟)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성대중이 보여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한(三韓) 이전의 것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그 이후의 것은 근세에 왕손 낭선군(朗善君)이 편집한 《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에 거의 다 실려 있다.
경주(慶州)에는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와 대각간 김유신묘비(大角干金庾信墓碑)가 있다.
삼수현(三水縣)에는 초방원비(草方院碑)가 있으니 바로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의 순수(巡狩)를 새긴 것이다. 생각건대 실직(悉直)이 처음에는 신라에 소속되었다. 그렇다면 영동(嶺東)의 땅도 다 옛날에는 신라의 소유였고 동시에 철령(鐵嶺)의 밖까지도 그 순수가 미쳤던 모양인데, 그후 고구려가 땅을 개척하여 바다에 미치게 되어서는 다시 이 땅을 차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여현(扶餘縣)에는 평백제탑명(平百濟塔銘)이 있는데 이는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세운 것이고, 또 평제비(平濟碑)가 있는데 이는 당(唐) 나라 유인원(劉仁願)이 세운 것이다.
진주(晉州) 지리산(智異山)의 단속사(斷俗寺)에는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가 있는데 승(僧) 영업(靈業)이 쓴 것이고, 쌍계사(雙溪寺)에는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가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짓고 직접 쓴 것이다.
양양(襄陽) 설악산(雪嶽山)에는 홍각선사비(弘覺禪師碑)가 있는데 왕우군(王右軍 우군(右軍)은 왕희지(王羲之)의 별칭)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합천(陜川) 가야사(伽倻寺) 홍류동(紅流洞)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시각(詩刻)이 있고, 보령(保寧) 성주산(聖住山)에는 명혜화상비(明慧和尙碑)가 있는데 최치원이 지은 것이다.
광양(光陽) 백학산(白鶴山) 옥룡사(玉龍寺)에는 도선비(道詵碑)가 있고, 봉화(奉化) 태자산(太子山)에는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朗空大師白月棲雲塔碑)가 있는데 김생(金生)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문경(聞慶) 희양산(曦陽山)에는 지증선사비(智證禪師碑)가 있는데, 이는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신라(新羅)의 고적이다.
원주(原州) 건등산(建登山) 흥법사(興法寺)에는 진공대사비(眞空大師碑)가 있는데, 당 문황(唐文皇 문황은 당 태종(唐太宗)을 말한다)의 글에 고려 태조의 글씨로 된 것이다.
영암(靈巖) 월출산(月出山)에는 도선(道詵)의 창사비(創寺碑)가 있고, 직산(稷山) 소사평(素沙坪)에는 홍경사비(弘慶寺碑)가 있고, 금산(金山)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에는 대장당기(大藏堂記)가 있는데 왕우군(王右軍)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의흥(義興) 화산(華山) 인각사(麟角寺)에는 선각국사비(善覺國師碑)가 있는데, 민지(閔漬)의 글에 왕우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고성(高城) 삼일포(三日浦)에는 매향비(埋香碑)가 있고, 양주(楊州)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에는 나옹화상비(懶翁和尙碑)와 지공대사비(指空大師碑)가 있는데 모두 이 색(李穡)의 글로 된 것이다. 또 본조(本朝 조선) 무학(無學)의 비가 있다.
임천(林川) 보광사(普光寺)에는 원명국사비(圓明國師碑)가 있는데 원(元) 나라 게 혜사(揭奚斯)의 글씨에 위소(危素)의 글로 된 것이다.”
사집(士執)이 말하기를,
“충추(忠州) 개천(開天) 내촌(內村)에 있는 개천사비(開天寺碑)는 진(晉) 나라 천복(天福 후진(後晉)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세운 것이고, 금천(衿川) 안양면(安養面) 염불암(念佛庵) 아래에는 깨어진 안양사비(安養寺碑)가 있는데 이는 고려초의 것이다.”
하였다.

[주D-001]《사설(僿說)》에 실려 있는 고비(古碑) : 《성호사설》 제30권 시문문(詩文門)의 ‘동방석각(東方石刻)’ 참조.
[주D-002]《대동금석록(大東金石錄)》 :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순수비(巡狩碑)부터 조선 선조(宣祖) 때까지의 비(碑)ㆍ탑(塔)ㆍ석당(石幢)ㆍ석각(石刻) 등의 탁본집. 정편(正編) 5책, 속편 2책, 도합 7책이다. 저자인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는 서화(書畫)에 능하였으며 이 책 외에도 《대동명필첩(大東名筆帖)》 등 많은 책을 편했다. 《성호사설》에는 이의 저자가 낭원군(朗原君)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낭원군은 낭선군의 친 아우이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주D-003]실직(悉直) :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의 옛이름.

연암집 제7권 별집
 종북소선(鍾北小選)
선귤당기(蟬橘堂記)

영처자(嬰處子 이덕무(李德懋))가 당(堂)을 짓고서 그 이름을 선귤당(蟬橘堂)이라고 하였다. 그의 벗 중에 한 사람이 이렇게 비웃었다.
“그대는 왜 어지럽게도 호(號)가 많은가. 옛날에 열경(悅卿)이 부처 앞에서 참회를 하고 불법을 닦겠다고 크게 맹세를 하면서 속명(俗名)을 버리고 법호(法號)를 따를 것을 원하니, 대사(大師)가 손뼉을 치고 웃으면서 열경더러 이렇게 말을 했네.
‘심하도다, 너의 미혹됨이여. 너는 아직도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중이란 육체가 마른 나무와 같으니 목비구(木比丘)라 부르고 마음이 식은 재와 같으니 회두타(灰頭陀)라 부르려무나. 산이 높고 물이 깊은 이곳에서 이름은 있어 어디에 쓰겠느냐. 너는 네 육체를 돌아보아라. 이름이 어디에 붙어 있느냐? 너에게 육체가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지만, 이름은 본래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니 장차 무엇을 버리려 한단 말이냐? 네가 정수리를 만져 머리카락이 잡히니까 빗으로 빗은 것이지, 머리카락을 깎아 버린 이상 빗은 있어 무엇하겠느냐.
네가 장차 이름을 버리려고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도 아니요 땅이나 집도 아니며, 금이나 주옥이나 돈도 아니요 밥이나 곡물도 아니며, 밥솥이나 가마솥도 아니요 큰 가마나 큰솥도 아니며, 광주리도 술잔도 아니요 곡식 담는 각종 제기(祭器)도 고기 담는 제기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나 칼이나 향낭(香囊)처럼 풀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요, 비단 관복이나 학(鶴)을 수놓은 흉배(胸背), 서대(犀帶)나 어과(魚果)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끝에 원앙(鴛鴦)을 수놓은 베개나 술이 달린 비단 장막처럼 남에게 팔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때나 먼지처럼 물로 씻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물까마귀 깃으로 토해 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마른 딱지처럼 손톱으로 떼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네 이름이기는 하지만 너의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입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이 부르기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되고 영광스럽게도 치욕스럽게도 되며 귀하게도 천하게도 되니, 그로 인해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멋대로 생겨난다. 기쁨과 증오의 감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유혹을 받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공포에 떨기까지 한다. 이빨과 입술은 네 몸에 붙어 있는 것이지만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는 셈이니, 네 몸에 언제쯤 네 이름이 돌아올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저 바람 소리에 비유해 보자. 바람은 본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나무에 부딪침으로써 소리를 내게 되고 도리어 나무를 흔들어 댄다. 너는 일어나 나무를 살펴보아라. 나무가 가만히 있을 때 바람이 어디에 있더냐? 너의 몸에는 본시 이름이 없었으나 몸이 생겨남에 따라 이름이 생겨서 네 몸을 칭칭 감아 너를 겁박하고 억류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저 울리는 종에 비유해 보자. 북채를 멈추어도 그 소리는 울려 퍼진다. 그렇듯이 사람의 몸이 백 번 죽어도 이름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것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마치 매미의 허물이나 귤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매미 소리를 찾거나 귤 향기를 맡으려 한다면 이는 껍질이나 허물이 저처럼 텅 비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처음 태어나서 강보(襁褓)에서 응애응애 울 때에는 이러한 이름이 없었다. 부모가 아끼고 기뻐하여 상서로운 글자를 골라 이름을 지어 주고, 다시 더럽고 욕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이 모든 게 다 네가 잘 되기를 축원한 것이다. 너는 이때만 해도 부모에 딸린 몸이어서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성장하고 나서야 네 몸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었고 ‘나’를 입신(立身)하고 나서는 ‘그’가 없을 수 없으니, ‘그’가 ‘나’에게 와서 짝이 되어 몸이 홀연 한 쌍이 되었다. 한 쌍의 몸이 잘 만나서 자녀를 두니 둘씩 짝을 이루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
그리하여 몸이 이미 여럿이다 보니 거추장스럽게 되어 무거워 다닐 수가 없게 된다. 비록 명산(名山)이 있어 좋은 물에서 놀고 싶어도 이것 때문에 즐거움이 그치고 슬퍼하고 근심하게 되며, 사이좋은 친구들이 술상을 차려 부르면서 이 좋은 날을 즐기자고 말을 해도 부채를 들고 문을 나서다 도로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이 몸에 딸린 것을 생각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네 몸이 얽매이고 구속을 받는 것은 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이는 네 이름과 마찬가지여서, 어려서는 아명(兒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이 있으며, 덕(德)을 나타내기 위해 자(字)를 짓고 사는 곳에 호(號)를 짓는다. 어진 덕이 있으면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덧붙인다. 살아서는 높은 관작(官爵)으로 부르고 죽어서는 아름다운 시호(諡號)로 부른다. 이름이 이미 여럿이라 이처럼 무거우니 네 몸이 장차 그 이름을 감당해 낼지 모르겠다.’
이는 《대각무경(大覺無經)》에 나온 이야기일세. 열경(悅卿)은 은자(隱者)로서 이름이 아주 많아 다섯 살 적부터 호(號)가 있었지. 때문에 대사(大師)가 이로써 경계한 것이네.
갓난아기는 이름이 없으므로 영아(嬰兒)라 부르고 시집가지 않은 여자를 처자(處子)라고 하지. 따라서 영처(嬰處)라는 호는 대개 은사(隱士)가 이름을 두고 싶지 않을 때 쓴다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귤(蟬橘)로써 자호(自號)를 하였으니 자네는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일세. 왜냐하면 영아는 지극히 약한 것이고 처자란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어서, 사람들이 자네의 유약함을 보고는 여전히 이 호로써 부를 것이요, 매미 소리가 들리고 귤 향기까지 난다면 자네의 당(堂)은 앞으로 시장처럼 사람이 모이게 될 걸세.”
이에 영처자(嬰處子)가 말하기를,
“대사가 한 말과 같이, 매미가 허물을 벗어 그 허물이 말라붙고 귤이 시들어서 그 껍질이 텅 비어 버렸는데 어디에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있겠소? 이미 좋아할 만한 소리와 빛과 내음과 맛이 없는데 사람들이 장차 껍질이나 허물과 같은 외물에서 나를 찾겠소?”
하였다.

[주D-001]그대는 …… 많은가 : 이덕무는 젊은 시절에 삼호거사(三湖居士) · 경재(敬齋) · 팔분당(八分堂) · 선귤헌(蟬橘軒) · 정암(亭巖) · 을엄(乙广) · 형암(炯菴) · 영처(嬰處) · 감감자(憨憨子) · 범재거사(汎齋居士) 등의 호를 지녔다. 《靑莊館全書 卷3 嬰處文稿1 記號》 그 밖에 청음관(靑飮館) · 탑좌인(塔左人) · 재래도인(䏁睞道人) · 매탕(槑宕) · 단좌헌(端坐軒) · 주충어재(注蟲魚齋) · 학초목당(學草木堂) · 향초원(香草園) 등의 호가 있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호는 청장관(靑莊館)과 아정(雅亭)이다.
[주D-002]열경(悅卿) : 김시습(金時習)의 자이다. 김시습 역시 청한자(淸寒子) · 동봉(東峯) · 매월당(梅月堂)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 등 호가 많았다. 법호는 설잠(雪岑)이다.
[주D-003]회두타(灰頭陀) : 두타(頭陀)는 범어(梵語)의 음역(音譯)으로 행각승(行脚僧)을 말한다.
[주D-004]어과(魚果) : 과(果)는 신표(信標)라는 뜻이다. 물고기 모양을 나무에 새기거나 구리로 빚어 허리띠에 차던 관리의 신표를 말한다. 어부(魚符) 또는 어패(魚佩)라고도 하였다.
[주D-005]몸이 …… 생겨서 : 원문은 ‘卽有是事 廼有是名’으로 되어 있으나 이본에 ‘卽有身故 乃有是名’으로 되어 있어 이본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6]다시 …… 주었으니 : 유아 사망률이 높던 당시에 귀신이 데려가지 말라고 일부러 ‘개똥이’와 같은 천한 이름을 지어 불렀던 풍습을 말한다.
[주D-007]몸이 홀연 : 원문은 ‘遂忽’로 되어 있는데 뜻이 어색하다. 《종북소선》에 ‘身忽’로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번역하였다.
[주D-008]한 쌍의 …… 만나서 :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혼의(昏義)에 “혼례란 장차 두 성씨가 잘 만나는 것〔婚禮者 將合二姓之好〕”이라 하였다.
[주D-009]둘씩 …… 같았다 : 자녀들이 차례로 결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팔괘가 음효(陰爻)와 양효(陽爻)의 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비유하였다. 이 구절이 ‘卽成四身’으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들과 딸을 두어 네 몸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주D-010]몸이 …… 보니 : 원문은 ‘身之旣多’인데, ‘몸이 이미 넷이다 보니〔身之旣四〕’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1]이것 …… 그치고 : 원문은 ‘爲此艮兌’인데, 간괘(艮卦)는 그침〔止〕을 상징하고, 태괘(兌卦)는 즐거움〔說〕을 상징한다. 이 구절이 ‘이 네 몸 때문에〔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2]이 …… 생각하여 : 원문은 ‘爲此卦身’인데, ‘이 네 몸을 생각하여〔爲此四身〕’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3]몸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 원문은 ‘以多身故’인데, ‘몸이 넷이기 때문이다〔以四身故〕’로 되어 있는 이본도 있다.
[주D-014]《대각무경(大覺無經)》 : 허구로 지어낸 불경 이름이다.
[주D-015]다섯 …… 있었지 : 김시습은 다섯 살 적에 세종 앞에서 시를 지어 명성을 떨쳤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오세(五歲)’라고 불렀다고 한다. 《梅月堂先生傳》 오세암(五歲菴)도 그의 당호(堂號)라는 설이 있다.

三淵集卷之二十四
 
東遊小記 a_165_495b


普門菴在雪岳東側。自襄陽登岳。菴據五分之四而高焉。南對雪岳萬峰負勢競上。箇箇竦厲。凜然有不可干之色。菴前近地。有香爐臺。奇巖層積。坐其上。指點羣峰。令人叫絶。其捴攬衆妙之勢。與正陽鳳頂略同。而若論其劍戟圖畵可以驚心動魄。則彼反有遜焉。自內山五歲菴。踰嶺而未及普門六七里許。行跨165_495c 嶺脊而東向俯視。但見其萬劍束鋩。千戟攢枝。屹屹直上。騰騰飛動。乍遇之。令人錯愕。終焉喜忭。便有朝睹甘夕死之意。嘗覽海內奇觀。惟黃山圖似之。或恐其瑩秀森疎勝此而有未可知矣。普門菴東臨大海。可觀日出。下有萬丈簾瀑。其爲具勝。邈不可及。
食堂泉石。在普門下流十里地。而巖泉洒落。洞府宏暢。夾以丹崖翠嶺。而不至襯礙。雪岳遠峰。層現於雲靄間者隱隱。可坐而挹也。若以諸山泉石通較而定品。則此爲上乘無疑。雖如曲淵之十二瀑。支離谷之九淵。造化雖巧。不合於徜徉枕嗽。自當別論。惟閉門165_495d 巖水簾洞。可相高下。而猶嫌其過於幽晦。谷口有數三佳處。坐地欠妥帖。石理欠瑩潤。不無愧色。外是而萬瀑碧霞潭,松面僊遊洞,華陽葩串洞,尙州甁泉崖,曦陽白雲臺。皆不能盡美無疵。碧霞有激射之快。而地步苦窄。僊遊有幽敻之致。而風韻不足。葩串以盤石見長。而大覺板冗。甁泉以玲瓏爲巧。而全無映帶。雖白雲臺上戴碧峰。下展白石。差可俯仰。而猶未具森列停瀉之致。令人意味易窮焉。可與食堂等論哉。自餘瑣瑣。不足與較。雖有一二未經眼者。間有名稱而參互見聞。槩未有傑然者。吾東泉石之觀。蓋止此165_496a 矣。
土王城瀑布。在食堂十餘里許。巨壁參雲。瀑流中劈而下。壁旣展廣。流不屈曲。其勢甚壯。毋論上乘。寒溪瀑名殆可與開先爭雄。若論其高。則不翅數千丈。海風江月之句。惟此瀑當之。東距滄溟。不滿二十里。祈雨時人有溯其頂者。水源頗豐大。旱未嘗斷流。自前往來者。只從道上泛看。一番稱壯。未嘗爲之闡揚。余停策良久。細看其北邊對地。有一土岡。可以攀上。若就其顚。作爲一臺。則爲嶺東一快觀也。
靑鶴洞上下十餘里。窈窕幽敻。殊不淺野。大率多兩165_496b 崖嶄絶。淵水沉墨。若巨甕蓄黛。沸成層湍。或連亘數百步。間有展拓宛轉處。頗可漱弄。所欠水不澄瑩。石皆玄黯。觀音遷以上。夾溪有圓峰峭壁。可供眄挹者數三處。石潭記所謂石門求之邈如也。食堂巖則廣可布百人食床。而無奈其石色醜黑。坐勢欹仄。鏡潭亦欠圓成。若比襄陽食堂。則不翅奴主之別。坐巖上。衆峰環衛。儼若鬼神。西北矗雲峰。嶷然雄峙。氣象可畏。一入洞中。若與人世隔絶。幽致亦可悅也。沿溪西入。歷抱回巖負回巖。行可六七里。至九龍淵。觀其結局短窄。不可與楓岳支離谷爭雄。而最緊者一淵輒165_496c 一瀑。瀑淵相承。層層成級。勢若貫珠。其爲首尾只百餘步。而東西緣巖。左右斜睨。玲瓏歷落。足爲奇賞也。自下而數凡五瀑。高可二三十丈。而第四瀑最妙。所謂鶴巢則乃在別澗。去龍淵幾數十里。巖泉無可觀。故不往。捴論一洞之勝。則食堂巖以下。趕不上萬瀑百淵。而九龍淵則具體而微。栗谷品題。恐不免爲溢美。而契玄 僧名 之欲以此壓倒葩串萬瀑者。多見其持論不根矣。
鏡浦臺外海內湖。具從容闊大之致。足爲天下勝覽。不知如何。而登之。自令人終日忘歸。然須廣披襟胸。165_496d 大著眼目而後。可領其要。間有小眼潔證者。規規吹索於渚涯之間而謂無足觀。則亦淺之爲知也。
香湖瀟洒可愛。無愧於牛溪題品。而亭閣所據。稍似低微。若以文章爲比。則鏡浦爲大家。而此爲名家。其猶王孟之於李杜乎。
華巖寺在彌水坡東側。環擁素嶂。俯臨滄海。坐寺樓。可觀日出。下有六七分泉石。淸絶可賞。水碓相連周繞禪房。南嶺有聖人臺巨巖平帖。可坐百餘人。南挹天吼山。東俯永郞靑草兩大湖。縹緲憑虗。令人有褰裳涉海之意。

三淵集拾遺卷之二十七
 日記
雪岳日記 乙酉 a_167_189d



[八月]
二十四日晴。將往麟蹄。朝食後拜辭家廟及伯氏。歷違仲氏于東門。午後徑由石串。見大有作別。暮到金村哭墓。
二十五日晴。拜辭先墓。起向石室。遍謁諸塋。取道文洞駐馬。與玄祥 一作李澐 作別。秣馬鵝湖。暮到檗溪。養167_190a 謙在焉。園廬蕪漫。不堪着眼。惟案山松翠森秀可喜。夜宿草堂。溪聲滿聽。不至聒睡。夜有風雨。
二十六日。終日雨。往吊李叟于逍遙谷午飯。披簑而返。中路頗沾濕。
二十七日晴。向夕俶裝踰梨峴。宿金忠義愛山家。將以借馬也。適其往赴社會。坐待良久。始見乘醉而返。明燈敍舊。意欵欵也。勸我以燒酒。辭之牢甚。則換取白酒以進。强飮二盃而罷。
二十八日晴。鷄鳴治行。蓐食待曙而發。騾背瘡爛不堪騎。騎金忠義馬以行。具附騾背而行。大霧不辨167_190b 路。踰松峙歷迷源。都不分曉。誤入獐。地名迷路。旋卽復路。行四五里又迷行。向津路遇行人指示。不遠而復。迤右踰欝業峴。頗峻急。峴盡路稍夷。輒逢泛波下流。緣遷東北行。右踰一峴。乃幾思峴也。嵬磊多石不可騎。下馬行數百步。荒原幽藪間。小溪淙琤。田塍交錯。夾路有池臺䟽鑿痕。可知爲鄭司藝舊業也。先考甞爲京畿都事時。歷訪鄭公。見其池臺之美。曲曲幽妙。似非人世。雅言所及。亹亹不厭。挽語中所謂龍溪一洞。在今日眞成千古。攬轡彷徨。不覺有榟澤丘墟之感。過此而野平江豁。路167_190c 傍稼事。在在茂秀。亦有好村落。多在西岸。無何涉江。灘深不及馬腹。灘名卽博議暗也。涉後遵遷而東。有翠巖可據。下有扁舟載柴而西下。回軋亂石間。迅若飛鳧而逝。望之杳然。陟一高臯。卽佳亭子。秣馬少留。主人名李以信。人品頗好。擘畫路程曲折頗詳暢。自梨峙至此衆云三十里。而實則四十里也。前進十里曰楸谷。過此山氣明媚。白麓翠松。在在皆然。盖有具家墓山焉。觀其風氣。允宜人之居葬。而以田土論之則瘦軟太甚。行四五里。無可掛鎌處。踰一小峴曰揷日 一作月 峴。下峴曲曲回阻。167_190d 令人意瞀。單行實有長弓之怕也。沙路紆轉。馬蹄不歷。一石稍轉而爲九萬。地名 野色莽然。恰與迷 一作述 源爭闊狹。水右邊下。有頑峰屹峙若奴。一作努力 男金剛卽八峰也。東入一谷。踰所謂地藏峴。欲向屈其村而患無嚮導。有一牽牛者指路頗詳。將越峴少坐班草。秣馬以生菽。休養馬力而後始登登焉。其高可與天磨車峴相伯仲。下峴有暝色。一路紆回。信馬而行晻靄中。紅樹素石。景色異常。有溪淸駛。赴江如馬。涉溪登原。有犬吠聲。始到所謂屈其村。自佳亭至此六十里。
167_191a二十九日晴。早飯後散步平臯。江水在其下。左有溪流會之。涉溪有岩。高起十餘丈。上可着亭。稍欹側爲欠。西岸巉岩。屹然作對。相距一牛鳴。有村老鄭起先者隨至岩上。談話頗欵。移登西岩。勢若劍脊。凜不可久臨。歸卧休憊。丁敏輩供蕎麥麵。以當夕飯。
晦日。早起借得村馬以載槖。癸峰子隨來。東行十餘里。三次涉江。灘水及馬腹。寒凜不可堪。癸峰以河魚痛落後。屢顧懸懸竟不至。使墨世牽騎且叱駄。路頗坦夷。過洪川邑。行十餘里秣馬。與日村村漢167_191b 皆稱品官。拒人甚牢。僅得一斗屋以休憇。店主快意見待。遂贈一筆。行踰馬嶺路甚平。騾背雖瘡。自忘疲頓也。到泉甘驛。問舊識李承雲則病不相接。移就隣舍。乃承雲姪家也。越房踈冷多風。僅得經夜。俄有一漢出欵。云是主人之兄。而人事欵暢。勸以入歇內房而不從焉。


[九月]
初一日晴。朝送墨世於麟衙。使傳書得騎卜以來。終日憊痛。殊無悰緖。
初二日。墨世傳麟衙書。以馬一匹及二官人來。爲送屈其馬。作書付墨世還送。行踰健伊嶺四十里。到167_191c 馬奴驛。訪金興業家寄宿。燃松明話。至夜深渴甚思水。主人餽一梨。甘爽多水。頓瘳渴喉。
初三日。早起喫白粥而發。騾背瘡甚。托主人以調治。行緣  遷越看儀津到麟衙。與主倅兄敍話。食後隨主倅兄出坐江邊觀放鷹。
初四日晴。觀射帿。
初五日晴。隨主倅兄往觀龍淵放鷹捕魚。就岩角危峭處設席飽食。夕有雨意急馳還。
初九日晴。食後緣遷行十五里。秣馬于圓通朴吏家。乃春發婦翁家也。受菉麵點心。得馬輸槖。行入暗167_191d 谷越三嶺。嶺盡水出。翠壁白石。洒落洗心。迫暮不徜徉可嘆。馳過藍橋到葛驛。微月掛林抄矣。宿春發家。
初十日。朝食到石門板屋。修粧頗愜意。可以過冬。登弄月㙜。周覽形勢。使春發塗窓。
十二日晴。往處板屋。見碧雲寺僧擔佛入谷。村人皆奔波。使春發加土板上。
十三日晴。入曲淵暫憇池世男家。往投碧雲寺。觀東菴新搆處。地高明頗愜素尙。
十四日晴。晩有風。閑游溪邊。跳越溪南。坐岩上東望。167_192a 五歲菴後諸峰。逈出雲表。興寄悠遠。五歲僧雪捴來見。
十五日晴風。將向五歲菴。使一僧携枕具而往。獨先沿溪而東。觀宋堯卿所占屋基。溪潭之幽奇。峰嶺之森秀。殆過碧雲。而面勢端的則有遜焉。到兪泓窟。迤入水簾洞。乃宋堯佐宿處。其奇勝不可盡述。還到兪泓窟。捨溪東入。土岡邐迤。令人足酸。霜葉塡磎。尤妨步屧。艱踰一嶺。蹣跚坐葉。而下至五歲。諸峰環衛。森若鬼神。板屋生白。與雪捴終夜談禪。曉月步小庭。尤覺惺然。
167_192b十六日風。別雪捴步上後岡。直上十里。始至嶺上。內外峰巒。一覽無餘。下瞰外山。萬戟攢列。一一干霄而上。宛似黃山啚。循嶺北上又四五里。斜從二素岩。蹂踏短栢。稍稍下嶺。又逢磊礧。艱步十餘里。至普門菴。平看萬峰森列。菴東峰缺。海色萬里。實天下之奇觀也。菴空無僧。靜坐前楹。取落葉煎湯澆飯。卽上香爐臺。卽菴之南偏。眺望尤奇。沿澗而下。度一畧彴。則瀑落萬仞。不可睨視。凜凜移步。魂悸膽掉。到極危處。斜掛一條朽松。廣纔數尺。一跌則不可取矣。過此登登降降。左右皆萬仞絶壑。此所167_192c 謂馬脊岩也。甞聞華山有蒼龍嶺。危險無雙。未知比此如何耳。艱行十許里。至食堂岩。岩石平滑可坐。左右峰壁森秀者甚多。其中金剛窟最奇。傍有丹壁甚佳。仰挹俯嗽。神襟爲之洒落。若論其勝美具會則曲淵中亦少其匹。但觀止一曲。不能層現疊出爲未暢。此爲上食堂。刻飛仙臺三字。下食堂勝致頗劣。亦刻卧仙臺。行十里到神興寺。處地野陋。南有權金城土王城。隱隱環衛。
十七日晴。將向洛山。寒溪僧告歸。與神興僧步出洞門。觀土王城。瀑布飛流廣壁。勢甚奇壯。若就其北167_192d 岡作一觀臺。則不惟上乘風斯下。雖廬山亦未必過之矣。涉大川到降仙驛。有金世俊者。悶其徒步之難。借一騎馬。卽馳向洛山。歷見金剛一夕飯。與剛一步到洛山。散步梨花臺。胸襟豁然。夜觀月出不淸快。曉起見日出又不利。曙色朣朧中。出步廣庭。鯨音宏亮。與海濤相應。守更僧上殿唱梵。令人魂淸。
十八日晴。金剛一借馬東馳十許里。到雙湖訪崔斯文斗明。一作道鳴 講話亹亹。入夜始就枕。
十九日晴。發向襄陽。觀河趙臺。海天兩際。軒豁呈露。167_193a 岸側詩岩。奇詭萬狀。前有一石峰。屹然有相揖勢尤奇。秣馬洞山。一作洞仙 歷介麻浦到香湖。宿李進士永敷家。
二十日晴。蓐食到新村。訪辛進士聖洙。並轡過連谷沙月。到北坪歷辛聖潤家。到鏡湖訪沈生貟世棠一作世緯 不遇。沿湖而步上鏡浦亭。辛魯淸及澤之追到亭上。與論物色。澤之盛稱甑山之勝。登之果快勝。較亭上之觀殆數倍也。夜宿辛聖夏家。乃澤之之兄也。夜君五襆被來話。乃聯枕。
二十一日晴。與澤之並馬向丘山。歷覽梧竹軒基。行167_193b 穿州府。歷訪金萬謙。乃癸丑同榜也。過乾金野度。訪道橋鳶魚臺。至丘山前有永歸岩。遠在百餘步。不與院  帶。泉石亦不佳。午食向松潭。山路極難。冒昏到松潭。辛魯淸在焉。齋任李天植作人頗佳。聞其孝行卓絶。
二十四日。與君五將訪  並馬歷  谷。過白雲遷。有泉石頗佳。遇微雨忙向兔谷。林壑  峻坂得平丘。迤西入小谷。度靑鶴岩。
二十五日雨。晩晴猶霂霡。欲向九龍淵。而以無霽意。且爲休養足力不動。終日卧溫室。數喚沙彌問天167_193c 氣。夜間雲拆見星。旋復晻翳。
二十六日朝雨。冒雨騎馬而出洞口。兩衲隨焉。歷昨日所經村家。南踰一嶺。卽小栢峴。踰峴有平郊。幽暢可居。可知爲栗谷所記嶺下平郊也。僧輩謂長者基。沿溪行三里。又有一坪。亦名長者基。亦云有菴基。記所謂板屋者隱約在是也。無何捨馬遇觀音遷。中開巨淵。洶漰沈黑。南邊 一作北 皆絶崖。行緣南崖數百步許。凜凜匍匐而行。中間兩處仄滑數丈。幾足二分垂外。余率爾暫過。顧見匍匐恂目狀。始自生怖。岩勢  欹石色醜黑。比諸食堂襄陽。大167_193d 有等級。過此岩壁益幽奇。無何爲息堂岩。峭壁四圍。森嚴若神。西北特崒者。可知爲矗雲峰也。鏡潭在岩前。水頗澄渟。而幅圓不廣。岩上刻秘仙岩鏡潭天遊洞八字。旁有尹魯西題名。余觀君五神情。似難並遊九龍淵。勸令休坐岩上曰。得如栗谷足矣。余與燦師攀緣抱回負回等岩。凡四涉水而九龍淵口。九淵相連。一瀑下輒有一淵。東西緣壁而睨視。淵瀑層見。貫珠相連。巧妙無比。若論局勢之宏雄。不及楓岳與支離谷 卽寒溪 遠矣。歸到食堂。君五坐石上。使僧炊飯以待。去來只一炊頃矣。兩167_194a 客兩僧列坐攤飯。其味甚淵永。是時雨歇。天氣淸美。沿溪徜徉。至長者基。得所謂漲雲潭。兩崖高懸。湍流迅奔。可爲洞中泉石之上乘。僧言李仲培來遊時。亦按栗谷記文而搜發此潭云。返寺日未落。僧輩皆賀涉險善返。夜睡甚濃。脚力不至甚酸。
二十七日。出山至曲淵。下馬暫憇。過兔谷。與君五分路。至新村訪辛進士夔。乃聖洙甫叔父也。聖洙亦來話。夕至香湖。李進士準備人馬。俾送君五家騎率。暮得小艇泛香湖。舟中小酌。海色湖光。向夕愈佳。比初歷加勝。
167_194b二十八日。食後發行。至其士浦秣馬。暮至佛城。一作雙湖與主人聯枕。
二十九日。主人勸留。鄭纘祖聞余來留。自洛山來話。


[十月]
初一日。平朝鄭友先去。余稍遅發。行至水次村秣馬。歷靑草湖至圓岩。日已銜山。問村人以禾岩路。依俙尋去。路遇神興僧。指示前路較分明。未昏至寺。寺前泉石極淸絶。坐寺樓平見滄海。汝信上人引入小禪室。幽靜愜意。與信師聽秋 一作聯枕 軟語。水碓格格。終夜有聲。
初二日。開窓東有氛靄。不利見日。然赤霞遍海。窓櫳167_194c 動色。沿澗東步。上見飛瀑蜿蟺。白石成級。食後擬上聖人基。信師使寺僧整輿隨。余以手揮之。不耐苦勸而乘之。距基數十步始下輿。臺有三層。皆可坐而嘯咏。最東者極超曠。坐見大海。與三湖相縈。天吼山在西。從臺南而下。人馬已待。騎上彌水坡。艱險無比。踰嶺至賊潭。奇峰環合。瀑泉亦佳。可改惡名爲仙遊潭。過門岩窓岩。亦可寓目。歷龍臺洞至葛驛。討食春發家。暮至權家宿。
初五日。至板屋。浚東泉作井。長城居士來。
初八日。聞任扞城過。出見班荊。墨世來居士來。始入167_194d 板屋。焚香明燭。神慮洒然。春發亦宿。
初十日陰。慧明來得京書。聞濟姪占魁。書自衙中來。
十四日。始寒。彛姪來留論易。得衙閣書。墨世亦隨來。入夜月色甚佳。與彛姪步出弄月臺。俯臨澄潭。光景晃朗。石門受月處。閃閃有奇彩。逍遙良久而返。
十五日寒。與彛姪踰屋後牛踰嶺。至雙溪。徜徉移時。欲從前路返則憚其斗絶。將跳越溪石作路石門。而水漲石凍。彷徨未濟。偶逢權命一兩子。纔橫木架溪。扶之以度。逶迤歸板屋。
十七日。微雪大寒。村氓來會。綢繆簷楹。使張會一作167_195a 擔桶。慧眼來過。食後至弄月臺。觀潭水合冰。燈後官人至。承衙軒書。帶有兩雉。
十八日大寒。作答送郡齋。李興業持酒來勸。廣學來。白羊谷吳生來。得仲氏書。吳乃池世男上典也。
二十三日。風寒稍緩。喫太粥。春發告歸。吳生貟自曲淵出來送言。
二十四日寒减。夕有風霰。喫太粥。吳公來見。夕回謝。
二十八日。大風且雪。入夜風益厲。雪未蔽地。


[十一月]
初三日。暄夜雪。居士還。汝信上人寄書。以餠梨及草席見貽。權命一供蕎麥餠。李興伯納衙祿167_195b 米。盖孔方所換也。
初六日晴暄。元秀才來。權命一供豆粥。張會一傳家書。
十二日晴。食後登後岡望雪岳及廣業洞壑。降至屋基。察其面背風水之會。夕後權命一來傳衙軒書。中有家信。伯氏及致謙書。
十六日寒。廣學六岑來設泡。
二十五六日暄。鄭善業納衙祿米。碧雲徐居士來謁。與論東菴搆繕事。


[十二月]
初五日寒。藍橋李繼叔來。出遊石門冰澗。貴167_195c 同從之。167_195d三淵集拾遺卷之二十七

耐齋集卷之四 南陽洪泰猷伯亨甫著
 
遊雪嶽記 a_187_065a


由麟蹄縣東北行三十里。抵三叉嶺。旣踰嶺則谷甚深。兩山壁立。樹密而林鬱。自下視天。僅如匹練然。日187_065b 月至子午而始光照焉。眞所謂子午谷也。稍下而平。溪水漸大。往往有蒼然之石。未數里。値大溪水。西流而合。卽曲百潭下流也。岸皆白礰平地。皆千章之松。蒼老鬱然。松盡而始有田。田上八九家。聚成一村。卽亂溪驛也。又行十里餘。渡溪得葛驛村。村居益寥落而皆板屋。前通嶺路。商賈不絶。而尙能淳欵。不似路傍人風也。過此則逕多嶄巖之石。不可以馬。始理屐而行。自村前循溪而入。未數步。得曲百潭。忽瞻特峯。矗矗然千丈直聳。如竹笋之初生。奇已甚矣。其下澄潭。潭上白石。水平鋪而流。有魚數十。方洋洋而遊。自187_065c 是山一回水一曲。石一逞奇。而爲淺潭爲深綠之潭。爲水簾爲噴瀑爲卧流之瀑。爲盤石爲疊壁。可坐而可玩者。殆不可周數也。此猶雪嶽之淺境耳。其水石之壯。已爽人襟抱矣。行三十里。皆石路危崖。攀緣負抱。重足而過。故棧有負回抱回之名焉。石路竆而又得一峻嶺。嶺竆而始得山開而洞豁。有村三四家。隔溪而居。初自嶺上。望有人煙。怳然以爲僊源別界也。又循溪行五里。得深源寺。前峯頗奇峻。溪流激激然淸。夜尤有聲可聽。由寺而東僅數里。得金三淵精舍。其異者直書樓。有峯一帶橫開。如獸蹲。如禽顧。如人187_065d 冠冕而行。其狀百千。色又皎潔。如明月之夜。如微霰之朝。無一點塵埃氣。得此而居者。亦知爲高人也。又循溪而上里餘。得兪泓窟。窟無異勝可言。特一偃石半俯而成龕。其中可容數人。昔兪松塘遊此山。而時無寺可休。乃經宿於窟。以是名云。由窟而右轉一危磴。入十二瀑洞。其溪石之勝。類曲百潭。而愈益淸瑩。左右雪峯。類三淵舍所見。而愈益奇壯。間有高嶂絶壁。攢聳重疊。樹皆楓栝。方秋鮮紅。如糚畫障而列繡屛。炫煥詭特。令人可驚而可喜。每坐處。眷顧不忍去。入此洞上下十數里之間。失晷爲多也。晩乃到十二187_066a 瀑。皆上瀑下潭。橫放峻盪。勢激聲壯。第四瀑以上。三瀑相連。流如布練。中狹成槽而墜之潭。其色正黑。不可測其深也。第一瀑。左右雙流。右長幾百尺。左長三減其一。間又不能數十步。而雙虹相對。耀日炫彩。下石皆滑。不可迫視。右邊有巖稍平可坐。而望去瀑遠。飛沫凄凄。漫空霧靄。尙能潤人衣裾。雖愛其奇徘徊難捨。而過淸不可久也。由左瀑而南登崖。又下循其上流而行。路斷不可尋。彷徨者久之。忽見溪上。巖有累石。若不無意者。從僧言此入定僧前往還時所置。以爲路標也。由是以往路疑處。輒皆有石。賴以不迷。187_066b 然益峻險披薈翳。攀崖石扶杖愼足。而後僅免顚仆。非雅意山水有濟勝具者。雖欲至而不能也。行二十里。尙不離乎竆山亂林之中。而暝色已蒼蒼然起矣。方憂恐不知所出。而忽有一小菴隱見於巖巒間。不覺心眼俱明如逢故人矣。至菴。菴空火在竈。香炷佛龕。知僧去亦不多時也。菴號鳳頂。高得雪嶽十之九。諸山之前所仰而視者。皆若撫其巓。後峯較尤高。而至此則亦不過數仞石耳。其巍然可測而知也。初至時。林巒寂然而已。及夜半。風大作萬竅俱號。巖壑爲動。然天色淸明。上下未必如此。蓋亦處地高。海風相187_066c 激而然也。朝自菴左登塔臺有大石。其上累塔如浮屠。僧云釋迦佛舍利藏於是。轉而向右。益高而豁前。望滄海迷茫無際。亦一壯觀也。自此攀壁而下五六里。至稍平處。巖壁泉石之勝。亦不下於十二瀑之下流。又二十里餘。得閉門巖。最爲此洞佳處。兩壁削立。聳峙如門關然。若與塵世限矣。自巖而右。踰一峻巘。爲五歲菴。峯巒之奇秀。盡三淵舍所見而較優云。逢雨狼狽。不可歷尋爲可恨也。循溪而下。復與兪泓窟會。遊事亦至此而竆矣。凡遊鳳頂者。由窟而左。則先閉門而後十二瀑。由窟而右。則先十二瀑而後閉門。187_066d 言遊覽次第。大抵如此。雪嶽之爲山。雄跨關東西。其陰則襄陽。其陽則麟蹄。襄之勝。稱食堂瀑戒祖窟。而余未見者。麟之勝稱曲百潭,深源寺,三淵精舍,十二瀑,鳳頂菴,閉門菴。而皆余之所已詳者。若論其峯巒泉石之奇。十二瀑爲最也。余見名山多矣。惟金剛可與此山相伯仲。其他無有能與抗者。然金剛名播中華。而此山之勝。雖東人。知者蓋寡。則此山實亦山之隱者也。故余詳敍其勝如此。將以誇視鄕里之朋遊。而又開夫世之求名山水而未盡知者。同遊者。宗人受甫其字。姨弟任君道彦其字。從姪李君振伯其字。187_067a 從僧省文義俊。

海左先生文集卷之二十三
 
雪嶽記 a_239_462d


戊戌秋。余赴襄陽任。北顧雪嶽。巉巉雲際甚壯。而迫吏事。不克往遊焉。翌年三月。約祥雲丞張君顯慶士膺,州之士人蔡君載夏。同發。戚姪申匡道,女婿兪孟煥,家兒若衡從。辛丑宿神興寺。環寺而爲天吼,達摩,239_463a土王諸峰。皆雪嶽外麓也。壬寅。命寺僧弘運者。導肩輿。北由飛仙洞入。峰態水聲。已覺爽人神魄。仰視絶壁。削立數百尋。捨輿而登。壁皆石級。一級一喘。顧士膺。猶在下級也。謝不能從行。登馬脊嶺。忽大風作。霧雨窈冥四塞。弘運告是爲中雪嶽也。日晴則見嶽之全體云。薄暮入五歲庵。奇峰四擁。森然欲搏人。而中開土穴。窈然受庵。梅月堂金公時習。甞遯于此。庵有二眞。寫公儒釋狀。余爲低佪悲之。公自號五歲童。故庵名。癸卯。踰左麓而下。折而東。循大壑而上。嶺勢視馬脊加峻。絙而前後推者相附麗。十里而後。登獅子239_463b峰絶頂。是爲上雪嶽。而塞天地皆山也。若鵠翔若劒立若菡萏者。皆峰。若若釜若盎甕者。皆谷。山皆石無土壤。深靑若積銕色。獅子之東。稍隩衍。有庵名鳳頂。傳高僧鳳頂常住云。由獅子下。緣崖而南。崖窄廑容趾。趾所循爲積葉爲崩石爲僵木。凌兢不可度。而左右山皆奇峰。迭出林木上。水自後嶺來。布谷而下。谷皆石。晶瑩若雪而水被之。石勢之起伏凹凸廣狹而水形焉。大畧爲瀑者十數。而雙瀑益奇。爲潭爲洑爲漫流者不勝計。而稱水簾者益奇。若是者竟日。而入永矢庵。庵卽金三淵昌翕所名。甞隱于此云。峰壑239_463c幽奇。有土可種。多芳林茂樹。終夜聞杜鵑聲。甲辰。渡水而南行谷中。谷水皆木石槎枒不受足。稍上而石盡白。忽變紫赤。盤陀水面。左邊石壁紺碧。水歧瀉其中决决鳴。前有嶺甚峻。伏輿而登。循左麓而下百步。前對石壁幾數十尋。色蒼潔。瀑從巓飛下。玲瓏如白蜺。風乍製則中斷爲烟雪。飄灑滿空。餘沫。時時吹人衣。令從者吹篴。與瀑聲相應答。瀏亮一壑。是爲寒溪瀑也。余謂弘運曰。復有此否。曰。無之矣。過楓嶽九龍瀑遠甚矣。東南林壑絶美。東爲五色嶺。有靈泉。宜痞積。多水石。望之幽怪。而日暮不可窮。踰嶺還。抵百潭239_463d寺宿。乙巳。北出之。循飛仙洞後嶺而下。嶺懸急。皆錯石多竅。少失足則輒僵仆。而南指馬脊諸峰。歷歷雲際。不知何以能致我於其上也。宿神興。丙午還。雪嶽據麟襄二州。而麟得四之三。獅子峰之東。爲晴峰。視獅子差高。而所得止東海。西南北之爲雪嶽。無加得於獅子。故不果登。獅子之南爲雙瀑水簾。西爲五歲。又其西爲永矢。又其西爲百潭。遠海涵其北。楓嶽靑出若螺䯻。寒溪瀑在西南。自新興至五歲四十里。五歲至獅子四十里。獅子至永矢四十里。永矢至寒溪三十里。寒溪至百潭三十里。百潭至神興四十里。環239_464a雪嶽而可行者凡二百有二十里。可輿者凡四十里。


明美堂集卷十 全州李建昌鳳朝著
 
雪嶽山五歲菴藏經閣記 a_349_154d


上御極之初。浮圖南湖奇於陜川海印寺。印大藏經六千卷。通爲二分。明年。航海而東。其一。藏于五臺。其一。藏于雪嶽之五歲五歲菴者。東峰淸寒子。僧號雪岑。賜謚文節金先生之故居也。世傳先生以神童進見。賜帛。以此知名。後壯大。人猶目爲金五歲。一說五歲。與傲世音近。先生自况也。而僧徒又謂上世有五歲童子。成道於雪嶽。未知孰信。然先生雖浮圖乎游。然其349_155a淸忠大節。可與天壤俱弊。詩曰。高山仰止。孔子曰。伯夷,叔齊餓死於首陽之下。人到于今稱之。雪嶽固以奇勝聞。然其能爲後人所仰所稱。以是菴在耳。菴舊有佛像及先生眞影而已。印經之來。始藏于菴後之堂。其地石确善圮。後十年。浮圖混虛圓建閣。移經於菴東北隅。十數年而又圮。僧衆憚之。久而莫能修。二十六年春。浮圖芸先暠。自京山。募木石匠五十四人而至。大拓其址。培厚築固。悉撤其傍寮舍。以爲閣而增大之。凡層架者二。上爲十楹以藏經。下爲僧居。其袤倍之。役自三月始。閱二百有奇日落之。用錢以緡計者一萬六千。其九千則遠近所施舍。其七千。暠之私也。於是。暠與弟子宜禪來。告余請記。余遜謝久之。349_155b旣自惟平生慕淸寒先生之風。假如先生今存。雖爲之掃除給役於菴中。心誠甘之。幸以文字。綴區區之名。竊附其遺躅之所寓。於義可不辭。抑又思浮圖之說。固與吾儒異。然苟挈而儗之。其事佛。猶吾有君師。而其崇奉其書。猶聖人之典籍。國家之令憲焉已。讀書爲士。誰不欲出而事主。明聖王六藝六典之道以有施與。立於天下。而要其所就。恒不能萬一於所期。乃如壞衣菜食之徒。獨能一朝。奮勵建竪。無所爲而不如其志。此王介甫,曾子固所以論盛衰得失之故。而咎敎化之不壹者也。然若淸寒先生。生聖人之世。甫自齓提。已名當時。其所學。又豈不誠君子儒哉。而事謬不然。旣無所裨益於成敗。反以資夫異說者之349_155c口以爲侈。以此觀之。殆亦有天焉。不亶如介甫,子固云也。然先生固遘其不常者耳。若夫順處平進。可爲而不效則是又何哉。余方遠悲先生。而近愧奇與暠。盖有不勝其慨。幷書之以貽。

嘉梧藁略冊四 月城李裕元景春著
 
奉先寺遇雨 a_315_131d


我尋山寺必遇雨。雨師與我同一府。霜岳雪岳雲岳滯。聖寺德寺巖寺苦。七佛殿前繭足滑。五歲庵下蠟315_132a屐努。今日來宿奉先寺。如何風雨又號怒。淸凈道塲厭塵跡。故放商羊空中舞。一切隨喜都忘却。深深爇香閉蒭戶。生平不習入定法。一枝談柄有誰柱。披簑急出山扃外。雲末白日未當午。

세종 6년 갑진(1424,영락 22)
 1월25일 (임인)
일본국 사신 규주와 범령이 가지고 있던 산수도 및 도호의 찬과 시를 구하다

규주와 범령이 가지고 있던 산수도(山水圖) 및 도호(道號)의 찬(讚)과 시(詩)를 구하니, 직집현전(直集賢殿) 어변갑(魚變甲)이 지은 산수도찬(山水圖讚)에 이르기를,
“층층이 솟은 뫼는 만 길이요,
흐르는 물은 천 구비라.
구름과 아지랭이는 나뭇가지에서 일고,
다락과 높은 집은 바위에 섰도다.
보일듯 말듯
방호(方壺)인가 봉래(蓬萊)인가.
상인(上人)의 참된 생각
천기(天機)를 앗아 왔네.
그린 솜씨 묘한 재주
정미함을 캘 수 없다.
아아,
이것이 이른바
마힐(摩詰)의 그림을 보고
그 속에 시(詩)가 들어 있다 함이로다.”
직집현전(直集賢殿) 유상지(兪尙智)의 산수도시(山水圖詩)에 이르기를,
“연기 서린 물과 구름 낀 산이 옅고 짙은데,
여기저기 누각들은 나무 속에 쌓여 있네.
돌길을 돌고 돌아 찾을 곳은 어디냐.
뾰족 솟은 봉우리 사이로 굴러 들어가리라.”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유효통(兪孝通)의 시(詩)에 이르기를,
“손님이 찾아와서 산수도를 보이는데,
언뜻 보니 아아 방호산이 여기로다.
층층으로 섰는 뫼는 천첩 구름속에 숨어 있고,
옛 절은 아득하게 두어 그루 고목 사이에 섰구나.”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신장(申檣)의 시(詩)에 이르기를,
“검푸르게 우거진 나무 숲 층층이 덮여 있고,
만경창파 물머리에 일엽편주(一葉片舟) 떠 있구나.
절벽과 먼 뫼는 은은히 비치는데,
보면서 오노라니, 아아, 여기가 단구(丹丘)이었던가 하노라.”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김상직(金尙直)의 죽헌시(竹軒詩)에 이르기를,
“궁벽한 땅에 고요히 사노라니,
헌창을 열어놓고 대숲과 마주 보네.
맑고 여윈 그 자태를
눈 서리인들 어찌하리.
저 달이 떠오르면 금빛으로 체[篩]질하고,
바람이 불어오면 구슬소리 알연(戛然)하였다.
스님이 보낸 임과 마주 앉아서,
무심히 오손도손 속삭여 보네.”
신장(申檣)의 매창시(梅窓詩)에 이르기를,
“옥 같은 고운 송이 눈[雪]을 뚫고 방긋 웃네.
맑고 맑은 네 모습은 꽃 가운데 으뜸이다.
저무는 해 차거운 마음 뉘라서 알아 줄까.
오직 높으신 그 임만이 꼭 오셔야 하리.”
어변갑(魚變甲)의 설암시(雪庵詩)에 이르기를,
“허공에 솟은 설악 몇 층이더냐.
암자 안에 고승은 벽만 보고 있더라.
맑은 정신 깨끗한 기골 마음은 안 매이니,
끓고 찌고 골치 아픈 인간 세상 아니 보리.”
집현전(集賢殿) 부교리(副校理) 안지(安止)의 화관음찬(畫觀音讚)에 이르기를,
“푸른 물구비 한 구비에
천첩 돌벼랑 둘려있고,
흰 옷 입고 미소짓는 참된 모습
소[淵]처럼 맑고 달처럼 밝도다.
몸은 여기에 있으나
마음은 어디에도 없도다.
여러 중생들아, 다 오너라.
괴로움 뽑아 주고 즐거움 피게 하리.”
하였다.
【원전】 2 집 575 면
【분류】 *어문학-문학(文學) / *외교-왜(倭)





매월당집(梅月堂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梅月堂集
판심제 梅月堂詩集
간종 활자본(改鑄甲寅字)
간행년 1583年刊
권책 詩集 15권ㆍ文集 8권 합 9책
행자 10행 18자
규격 26.4×16.9(㎝)
어미 上下三葉花紋魚尾
소장처 日本 蓬左文庫
소장도서번호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3
 저자
성명 김시습(金時習)
생년 1435년(세종 17)
몰년 1493년(성종 24)
법명 雪岑
 悅卿
 梅月堂, 東峯, 淸寒子
본관 江陵
시호 淸簡
특기사항 南孝溫ㆍ安應世ㆍ洪裕孫 등과 교유
 가계도
 金元侃
 郞將
 金日省
 忠順衛
 仙槎張氏
 
 金時習
 
 南氏
 訓鍊院都正 南孝禮의 女
 安氏
 

기사전거 : 世系圖 등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세종171435을묘宣德101서울 명륜동에서 태어나다.
세종211439기묘正統45李季甸 문하에서 「중용」ㆍ「대학」을 읽다. ○ 세종의 부름을 받고 〈三角山詩〉를 짓다. 詩才를 인정받아 비단 50필을 하사받다. ○ ‘五歲童子’로 불리다.
세종291447정묘正統1213金泮ㆍ尹祥에게 수학하다.
세종311449기사正統1415모친상을 당하다.
~~~~~~~訓鍊院 都正 南孝禮의 딸과 결혼하다.
세조11455을해景泰621三角山 重興寺에서 독서하던 중 단종이 遜位한 사실을 알고 서책을 태우고 승려가 되다. 法名을 雪岑이라고 하다.
~~~~~~~水落山(水落精舍)ㆍ金鰲山 등지에서 修道하다.
세조41458무인天順224〈遊關西錄〉을 짓다.
세조61460경진天順426〈遊關東錄〉을 짓다.
세조91463계미天順729〈遊湖南錄〉을 짓다.
~~~~~~~孝寧大君의 권고로 세조의 불경언해 사업을 도와 內佛堂에서 교정의 일을 맡다.
세조111465을유成化131慶州 남산에 金鰲山室을 짓고 독서하다. 茸長寺 梅月堂書齋에서 「金鰲新話」를 짓다.
세조131467정해成化333효령대군의 청으로 圓覺寺 낙성식에 참석하다.
세조141468무자成化435금오산에서 〈山居百詠〉을 짓다.
~~~~~~~仙槎縣(蔚珍) 酒泉臺 옆에 우거하다. 근처 聖留窟에 머물다.
성종121481신축成化1747還俗하여 祖父의 祭祀를 지내다.
~~~~~~~安氏와 결혼하다.○ 부인상을 당하고 다시 산에 들어가 중이 되다.
성종161485을사成化2151〈禿山院記〉를 짓다.
성종211490경술弘治3569월, 重興寺에 머물던 중 金馹孫ㆍ南孝溫의 방문을 받고, 함께 白雲臺ㆍ도봉산을 유람하다.
성종221491신해弘治457雪岳山에 들어가다.
성종241493계축弘治6592월, 鴻山縣 無量寺에서 졸하다.
선조161583계미萬曆11-王命으로 芸閣에서 문집을 간행하다.(李山海의 序)
현종111670경술康熙9-梅月祠(慶州)에 專祀되다.
숙종111685을축康熙24-彰節書院(寧越)에 享祀되다.
숙종301704병술康熙43-西山書院(咸安)에 享祀되다.
영조381762임오乾隆27-八賢祠(寧越)에 享祀되다.
정조61782임인乾隆47-이조판서에 추증되다.
정조81784갑진乾隆49-‘淸簡’의 시호를 받다.
--1927정묘---후손 金鳳起가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金時習傳(李珥 撰)ㆍ文集附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散失된 自書詩稿를 李耔가 구하여 이것을 補寫ㆍ추가하여 3권으로 엮고 1521년 序를 지었다. 그 후 朴祥ㆍ尹春年이 시문을 수집하고, 尹春年이 저자의 傳을 붙여 간행하였는데《舊本》, 구본은 전하지 않는다.
1583년(선조 16)에 선조가 芸閣에 명하여 改鑄甲寅字로 간행하게 하였다.《甲寅字本》 갑인자본은 구본을 증보한 것으로 보여지며, 권수에 이자ㆍ李山海가 지은 序 2편과 윤춘년ㆍ이자가 지은 傳 2편이 실려 있고 詩集과 文集으로 나누어 총 23권 9책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 본은 현재 국내에는 完本이 없고 日本 蓬左文庫에 完本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이 본의 傳寫本이 소장되어 있으며,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만송문고에는 零本 2책(권8~9, 권12~13)이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인조 때 17권 9책으로 改刊되었다고 「朝鮮圖書解題」에 기술되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1927년에 후손 金鳳基가 附錄을 부편하여 新活字로 간행하였다.《新活字本》 신활자본은 詩集 15권ㆍ文集 6권ㆍ부록 2권 합 23권 6책으로 되어 있으며, 附錄에는 여러 문헌에서 뽑은 저자관계 기록ㆍ서원봉안문ㆍ祭文 등이 실려 있다. 또한 畫像과 遺筆ㆍ世系圖가 첨부되어 있는데, 畫像과 遺筆에는 각각 宋時烈이 지은 跋이 실려 있다. 권미에 후손 金鳳起의 跋과 任事錄이 있다. 이 본은 현재 간송미술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국립중앙도서관,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규장각본에는 附錄이 빠져 있다.
文集과 별도로 詩集만이 1583년에 癸酉字로 간행되었는데, 완본은 전하지 않고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零本으로 소장되어 있다. 또한 關西ㆍ關東ㆍ湖南ㆍ金鰲를 유람하면서 지은 詩로 엮은 「四遊錄」이 두 차례에 걸쳐 간행되었다. 간행 년도와 간행자는 모두 불명인데, 두 편의 後序로 보면 저자의 自書詩稿에서 「四遊錄」과 紀行詩 수십 수를 뽑고 권수에 肖像과 淸寒圖書를 첨부, 간행한 것이 初刊이고 그 후 초간본을 바탕으로 木板 1책으로 간행한 것이 중간본이다. 중간본은 문집 甲寅字本 이후에 慶州尹 尹貽永의 협조를 받아 간행된 것이다. 「四遊錄」은 현재 간송미술관, 고려대 만송문고, 규장각, 성균관대, 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583년에 간행된 改鑄甲寅字本으로 日本 蓬左文庫藏本이다. 이 중 권13의 第11板이 권23의 제11판으로 錯簡되었으므로 同一本인 고려대학교 晚松文庫藏本에서 補完하였고, 또 권17의 제3판이 落張이므로 同本의 傳寫本인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에서 補寫하였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詩集 15권ㆍ文集 8권 합 9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521년에 쓴 李耔의 序, 1583년에 쓴 李山海의 序와 尹春年이 지은 〈梅月堂先生傳〉 그리고 선조의 명으로 1582년에 지은 李珥의 〈金時習傳〉이 실려 있다. 이어 目錄이 있다.
詩集 권1~8에는 各體詩를 주제나 제재(내용) 혹은 문체별로 묶어 小題를 달아 편차하였다. 권별 소재를 보면, 권1에는 古風ㆍ紀行ㆍ述懷, 권2에는 詠史ㆍ詠東國故事ㆍ懷舊ㆍ時事ㆍ宮殿ㆍ陵廟ㆍ題人居室ㆍ居室ㆍ閑適ㆍ卽景ㆍ堂宇ㆍ城郭ㆍ田圃, 권3에는 仙道ㆍ釋老ㆍ隱逸ㆍ寺觀ㆍ節序, 권4에는 夢ㆍ晝夜ㆍ月ㆍ雨雪ㆍ風雲ㆍ山岳ㆍ江河ㆍ泉石ㆍ溪澗ㆍ樓閣ㆍ亭榭ㆍ園林ㆍ燕飮ㆍ菓實ㆍ書畫ㆍ文章ㆍ婦女ㆍ文房ㆍ器用ㆍ燈燭, 권5에는 食物ㆍ酒ㆍ茶ㆍ禽ㆍ獸ㆍ蟲ㆍ魚ㆍ竹ㆍ木花草, 권6에는 菜ㆍ菌蕈ㆍ投贈ㆍ簡寄ㆍ尋訪ㆍ酬答ㆍ惠貺ㆍ送別ㆍ遊賞ㆍ題詠, 권7에는 疾病ㆍ醫藥ㆍ傷悼ㆍ山居集句ㆍ調詞ㆍ樂章, 권8에는 歌ㆍ行ㆍ吟ㆍ和陶가 각각 실려 있다. 권9~14에는 遊覽時 지은 작품들을 엮어 편명을 달았는데, 권9에는 1458년에 엮은 〈遊關西錄〉, 권10에는 1460년에 엮은 〈遊關東錄〉, 권11에는 1463년에 엮은 〈遊湖南錄〉, 권12에는 1473년에 엮은 〈遊金鰲錄〉이 실려 있고 위 「四遊錄」 末尾에는 각각 後志가 첨부되어 있다. 권13에는 〈關東日錄〉, 권14에는 1486년경에 지은 〈溟州日錄〉이 실려 있다. 권15에는 賦와 雜體詩가 실려 있다.
권16 이하는 文集으로, 권16~17에는 雜著 20편, 권18에는 論 4편, 권19에는 贊 31편이 각각 실려 있다. 권20에는 傳(10편)ㆍ說(9편)ㆍ辨(3편)ㆍ序(1편)ㆍ義(8편), 권21에는 銘(8편)ㆍ箴(3편)ㆍ記(1편)ㆍ誥(1편)ㆍ篇(1편)ㆍ書(3편), 권22에는 騷賦(7편)ㆍ琴操(1편)ㆍ辭(1편), 권23에는 騷註(1편)ㆍ雜說(3편)이 각각 실려 있다.

필자 : 吳世玉

 

 

택당선생 속집 제4권
 시(詩)
누대 위에서 지은 즉흥시


날마다 산 누대에 쓸쓸히 홀로 앉았나니 / 日日山樓坐寂寥
돌아갈 고향 땅은 북두(北斗) 자루 가까운 곳 / 故園歸路近璿杓
천지보다 먼저 찾은 바다 동쪽 봄빛이요 / 海東春色先天地
아침저녁 유다른 산 너머 풍광이라 / 嶺外風光異暮朝
설악산 꼭대기엔 흰 눈이 여전한데 / 雪嶽峯巓仍雪積
화진포(花津浦)엔 꽃잎이 벌써 흩날려 / 花津縣裏已花飄
다투어 보고하는 놀라운 농사 소식 / 驚聞農鳸爭來報
어젯밤에 된서리가 벼 싹을 망쳤다나 / 昨夜嚴霜隕稻苗

 

해동역사 제32권
 석지(釋志)
명승(名僧)

○ 정 법사(定法師) : 정 법사는 고려 사람이다. 《고시기(古詩紀)》 ○ 살펴보건대, 정 법사의 영고석시(詠孤石詩) 한 수가 《진시(陳詩)》에 실려 있으며,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신성(信誠) : 당나라 고종(高宗) 총장(總章) 원년(668) 12월에 고구려를 격파하고 승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았는데, 먼저 항복한 데 대해 상을 내린 것이다. 《책부원귀(册府元龜)》 ○ 신성에 대한 일은 본서 인물고(人物考) 천남생전(泉男生傳)에 상세하게 나온다.
○ 혜관(慧灌) :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32년(624)에 고려(高麗)의 승 혜관이 와서 조회하자, 그로 하여금 원흥사(元興寺)에 머물게 하였다. 그해 여름에 크게 가물자 기우(祈雨)하도록 명하였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 혜자(慧慈) : 일본 추고천황 때 고려의 사문(沙門) 혜자가 와서 태자(太子)의 사(師)가 되었는데, 백공(百工)이 모두 혜자를 조사(祖師)로 삼았다. 《상동》
○ 혜편(慧便) : 일본 민달천황(敏達天皇) 13년(584)에 파마국(播磨國)에서 수행(修行)하는 자를 찾아 고려의 승으로서 환속한 자를 찾아내었는데, 이름이 혜편이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 살펴보건대, 이상의 혜관, 혜자, 혜편 세 승은 백제의 승인 듯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 진표(眞表) : 진표는 백제 사람이다. 집이 금산(金山)에 있으며, 대대로 수렵을 일삼았는데, 뒤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칼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러고는 고통스럽게 참회하면서 온몸을 들어 땅에다가 짓찧었으며, 뜻이 계법(戒法)을 구하는 데 있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자신에게 계법을 전해 주기를 서원(誓願)하면서 밤을 낮삼아 공력을 쏟았는데, 빙빙 돌면서 물동이를 두드리되, 마음 마음마다 간단(間斷)이 없었고 생각 생각마다 부지런히 하였다. 7일이 지난 다음 아침이 되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현신하여 손으로 쇠로 된 석장(錫杖)을 흔들면서 진표를 위하여 가르침을 발하고 계율을 발하였으며, 이어 앞에서 방편(方便)을 주었다. 그러자 진표는 이 상서로움에 감동하여 전보다 더욱더 용맹하게 정진하였다. 14일이 되자, 어떤 커다란 귀신이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진표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는데, 진표의 몸이 상한 곳이 없었다. 이에 기어서 석단(石壇) 위로 올라가자, 다시금 마귀의 형상이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백 가지 천 가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21일째 되는 날, 아침 동이 틀 무렵에 길한 상서를 나타내는 새가 울면서 말하기를, “보살이 온다.” 하였는데, 이에 보니 흰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높고 낮음을 분간할 수가 없고, 산천이 평탄하여 은색의 세계를 이루었다. 도솔천(兜率天)의 주인이 그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석단 주위를 돌았는데, 향기로운 바람과 꽃비가 한꺼번에 어우러져 모여들었다. 조금 있다가 자씨(慈氏)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석단 앞에 이르러서는 손을 드리워서 진표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선재(善哉)라. 대장부가 계법을 구함이 이와 같아 두 번에 이르고 세 번에 이르렀구나. 소미로(蘇迷盧)는 손으로 밀쳐 버릴 수 있지만 너의 마음은 물리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이어 계법을 주었다. 진표는 몸과 마음이 화락해지면서 마치 삼선(三禪)의 경지와 같아져, 의식(意識)이 낙근(樂根)과 더불어 서로 호응하였다. 그리고 4만 2천 가지의 복하(福河)가 항상 흘러 일체의 공덕(功德)에 의해 이윽고 천안(天眼)이 트였다. 자씨(慈氏)가 직접 세 벌의 법의(法衣)와 와발(瓦鉢)을 주고는 다시 진표(眞表)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또 무릎 아래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었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玉)도 아닌 것이 바로 첨(籤)과 같은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에는 구자(九者)라고 씌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팔자(八者)라고 씌어 있어 각각 두 자씩 씌어 있었는데, 이것을 진표에게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사람이 계법을 구하고자 할 경우에는 마땅히 먼저 죄를 참회하여야만 하는데, 죄와 복은 성품을 지키는 것[持性]과 성품을 범하는 것[犯性]이다.”
하였다. 다시금 108개의 첨을 더 주었는데, 각 첨 위에는 백팔 번뇌(百八煩惱)의 명목이 씌어 있었다. 여래(如來)가 사람에게 계법을 줌에 있어서는 혹 90일 동안이나 40일 동안이나 21일 동안을 고통을 참으면서 정진하여 참회해 기한이 다 차면 구자첨(九者籤)과 팔자첨(八者籤) 두 첨에다가 백팔 번뇌의 첨을 합하여서 부처 앞에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첨을 던지는데, 땅에 떨어진 첨을 보고서 그 죄가 없어졌는지 그대로 남아 있는지를 징험한다. 만약 백팔 개의 첨이 사방으로 날아가고 오직 팔자첨과 구자첨만이 단(壇) 한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을 경우에는 바로 상상품계(上上品戒)를 얻는다. 만약 여러 첨이 비록 멀리 날아갔다 하더라도 혹 한두 개의 첨이 날아와서 팔자첨과 구자첨에 부딪치면 이 첨을 뽑아 보고서 거기에 무슨 번뇌의 이름이 씌어 있는가를 보고,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참회하게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참회한 번뇌첨을 가지고 구자첨과 팔자첨과 함께 던져서 그 번뇌첨이 날아간 자는 중품계(中品戒)라 이름한다. 만약 여러 첨이 팔자첨과 구자첨을 뒤덮으면 죄가 없어지지 않아서 계를 얻을 수가 없으며, 다시금 더 참회해서 90일이 지나면 하품계(下品戒)를 얻는다. 자씨가 다시금 거듭 고하면서 가르치기를,
“팔자첨은 신훈(新熏)이고, 구자첨은 본유(本有)이다.”
하면서, 여러 차례 부탁하였다. 자씨의 행차가 이미 돌아감에 산천을 덮었던 구름이 걷혔다. 이에 진표가 천의(天衣)을 가지고 천발(天鉢)을 잡았다. 그런데도 진표는 오히려 오하(五夏)를 더 비구(比丘)로 있으면서 수행한 다음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왔다. 그러자 초목들이 가지를 낮게 드리워서 길을 덮음에 계곡이 높고 낮음이 없이 평탄하게 되었으며, 새와 짐승이 다 진표의 발걸음 앞에 엎드려 있었다. 또 공중에서 소리가 울려 촌락과 고을에 고하기를,
“보살이 산에서 나오는데 어찌하여 영접하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남녀의 백성들이 머리카락을 펴서 진흙을 덮는 자도 있었고, 옷을 벗어서 길에 까는 자도 있었고, 천과 담요로 발을 감싸는 자도 있었고, 꽃자리와 아름다운 방석으로 구덩이를 메우는 자도 있었다. 이에 진표가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곡진히 부응하여 일일이 다 밟고 지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반 단(端)의 백첩(白氎)을 가지고 와서 길 가운데에 폈는데, 진표는 이를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를 피하여 다른 길로 갔다. 그 여자가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기니, 진표가 말하기를,
“내가 자비심이 없어서 평등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침 보니 그 천 사이에는 모두 도야지 새끼가 있기에 내가 산 목숨을 상하게 될까 염려되어 밟지 않고 피해 간 것이다.”
하였다. 그 여자는 본디 도축하는 집의 여자로 고기를 팔아서 이 포(布)를 산 것이었다. 이때부터 항상 호랑이 두 마리가 있어 진표의 좌우에 붙어서 따라다녔는데, 진표가 호랑이에게 말하기를,
“나는 성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길을 인도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가다가 수행할 만한 곳을 만나면 천천히 걸어서 갔다. 호랑이가 30리쯤 가다가 어느 산 언덕으로 올라가서는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에 진표가 주장자를 나뭇가지에 걸고서 풀을 깔고 단정히 앉으니, 사방의 신자들이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왔다. 그들과 함께 가람(伽藍)을 짓고는 금산사(金山寺)라고 이름하였다. 《신승전(神僧傳)》
○ 도침(道琛) :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百濟)를 평정하자, 부도(浮屠) 도침이 주류성(周留城)에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신당서》 ○ 백제세기(百濟世紀)에 상세하게 나온다.
○ 관륵(觀勒) : 일본 추고(推古) 10년(602)에 백제국의 승 관륵이 와서 천문지리서(天文地理書)와 역서(曆書),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바쳤다. 《화한삼재도회》
○ 법명(法明) : 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이 집정(執政)할 때 백제의 선니(禪尼)인 법명이 대마도(對馬島)에 와서 오음(吳音)으로 《유마경(維摩經)》을 읽었는데, 그때 오음으로 읽었으므로 “대마도에서 읽은 것이 일본에서 오음으로 불경을 읽게 된 기원이다.” 한다. 《일본유마회연기(日本維摩會緣起)》
○ 묵호자(墨胡子) : 사문(沙門) 묵호자는 신라 사람이다. 눌지왕(訥祗王) 때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자, 군인(郡人) 모례(毛禮)란 사람이 자기 집에 토굴(土窟)을 짓고 그를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이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왕에게 향(香)을 하사하였는데, 임금과 신하가 그것의 용도와 이름을 몰랐다. 이에 묵호자가 말하기를,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아름답게 퍼져 신성(神聖)에게 치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 번째는 불타(佛陀)이고, 두 번째는 달마(達摩)이고 세 번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를 살라서 축원을 드리면 반드시 영검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왕녀(王女)의 병이 위독하였는데, 묵호자가 향을 사르고 축원을 드리자 병이 얼마 있다가 나았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몹시 후하게 보답하였다. 《화한삼재도회》 ○ 살펴보건대, 이것이 신라 불교의 시초인데,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실려 있는 것과 내용이 같다.
○ 무루(無漏) : 석(釋) 무루의 성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바다 배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천축국(五天竺國)으로 가서 팔탑(八塔)을 예배하려고 하였다. 이미 사막(沙漠)을 건너서 우전국(于闐國)을 지나 서쪽으로 가 총령(蔥嶺)에 이르러서 큰 절에 들렀는데, 그 절의 비구(比丘)들은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중들이었다. 중들이 무루가 천축으로 가는 뜻을 물어보고는 기절(奇節)이 없으면서 천축으로 간다고 여겼다. 이에 승들이 말하기를,
“옛 기록에 이름나지 않은 사람은 천축으로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곳에는 독룡(毒龍)이 사는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독룡을 교화하여 징험이 있으면 그곳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무루가 그들의 요청에 의하여 연못가의 언덕에 올라가 보니, 오직 호상(胡床) 하나만 보였다. 이에 그 호상에 앉아 있었다. 밤이 장차 다하려고 할 때에 이르러서 우레와 번개가 치더니 그 괴물이 기운(氣運)을 토하매 갖가지로 변화가 일어나면서 밝았다가 어두워지곤 하였다. 무루는 눈을 감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에 큰 뱀이 나타나서는 그의 무릎 위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이에 무루는 그를 몹시 불쌍하게 여겨 삼귀(三歸)를 받게 하자 뱀이 떠나갔다. 그러고는 다시 노인의 형상으로 변하여 와서는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법사의 덕분에 도탈(度脫)하게 되었으니, 의리상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3일 후에 비늘이 덮인 몸을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반석(盤石)이 있는데, 그곳이 이 제자가 형체를 버린 곳이니, 역시 저의 유해를 찾아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무루가 묵묵히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천축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이곳에 관음성상(觀音聖像)이 있는데, 그곳에다 기도하면 영검이 있으니, 기도하면서 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길하고 상서로운 조짐을 얻을 것이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무루가 이에 관음성상 앞에 서서 선정(禪定)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여 49일이 지나자 온몸에 종기가 생겨 몸을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는데, 곧바로 탄알만 한 크기의 쥐새끼가 나타나 왼쪽 넓적다리에서 누런 색깔의 고름을 여러 말 빨아내자 종기가 모두 나았다. 무루가 기한이 다 되어 응험을 얻자, 여러 중들이 말하기를,
“선사를 보건대 화연(化緣)이 마땅히 당나라 땅에 있겠다.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교화할 뜻을 간직하고 있으면 이익되는 바가 많을 것이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부질없이 보고 듣는다 하더라도 억지로 교화할 수 없다는 것을 선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무루는 성현(聖賢)의 말이 반드시 헛된 말이 아닐 것이라고 여겨 즉시 되돌아왔는데, 출발할 즈음에 중들이 무루에게 말하기를,
“난(蘭)을 만나면 즉시 그곳에 머물러라.”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산의 이름에 난(蘭) 자가 들어간 곳이 있었다. 이에 말[馬] 앞에서 그 말을 기억해 내고는 드디어 그 산속으로 들어가서 백초곡(白艸谷)이란 곳을 찾아내어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얼마 뒤에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 숙종(肅宗)이 영무(靈武)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금색(金色)을 한 사람이 어전(御前)에서 보승불(寶勝佛)을 염불하는 꿈을 꾸었다. 다음 날에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자,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사문(沙門) 가운데 행적이 일반 중들과 다른 사람이 이 산에 살고 있는데, 항상 그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를 불러오자, 황제가 보고서 이르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다.”
하고는, 곧바로 내사(內寺)에 있게 하고 공양하였다. 무루는 여러 차례 표장(表章)을 올려서 예전에 숨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마음에 그를 몹시 아꼈으므로 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뒤에 없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내문(內門)의 오른쪽 미닫이 위에 두 발이 생겨났는데, 땅 위로 몇 자가량 떠 있었다. 문지기가 이 사실을 상주하자, 황제가 보련(步輦)을 타고 직접 그곳에 임하여, 옛날에 숨어 살던 산 아래에 장사 지내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표(遺表)를 찾아내었다. 이에 즉시 그대로 하게 하고는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상여를 호송해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무루가 회원현(懷遠縣)에서 교화를 많이 행하였으므로, 그를 인하여 그곳에다 집을 짓고는 하원(下院)이라고 불렀는데, 상여가 이곳에 이르러서는 신좌(神座)를 들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별도로 당우(堂宇)를 지어 그곳에다 안치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체(眞體)가 단정하게 그대로여서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신승전(神僧傳)》
○ 무루(無漏)는 신라의 승이다. 현종(玄宗)이 어느 날 저녁에 어떤 사문(沙門)이 온몸에 금빛을 띠고 보승여래(寶勝如來)의 이름을 외우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이에 대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하란(賀蘭) 백초곡(白艸谷)에 이름이 무루라고 하는 신라의 승이 있는데, 항상 이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있으니, 자못 이상합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를 불러 행재소(行在所)에서 만나 보고는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승이다.”
하고는, 드디어 호승(胡僧) 불공(不空)과 더불어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기도하게 하였다. 입적(入寂)할 때는 합장을 하고서 땅에서 몇 자가량 공중에 뜬 채로 죽었다. 예전에 그가 살던 골짜기에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호송하여 가다가 회원현(懷遠縣)의 하원(下院)에 이르자 문득 시신을 들 수가 없었다. 이에 마침내 향니(香泥)를 전신에 바른 다음 하원에 두었다. 《속문헌통고》
○ 지장(地藏) : 석(釋) 지장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 신라국왕의 지속(支屬)이다. 마음은 자비로웠으나 얼굴 모습이 추악하였으며, 천부적으로 영오(穎悟)함을 타고났다. 머리를 깎고 출가한 다음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지양(池陽)에 이르러서 구자산(九子山)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몹시 좋아하였다. 이에 곧바로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그곳에서 살았다. 지장이 일찍이 독충(毒蟲)에 쏘이고도 단정히 앉아서 무념 상태에 있었는데, 잠시 뒤에 어떤 아름다운 부인이 예를 올리고는 약을 먹이면서 말하기를,
“소아(小兒)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샘물을 나오게 하여 허물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사라졌는데, 앉은 자리의 좌우를 보니 샘물이 펑펑 솟아올랐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구자산의 신령이 샘물을 솟아나게 하여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하였다. 지덕(至德) 연간 초에 제갈절(諸葛節)이란 사람이 촌부들을 데리고 산기슭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갔는데, 아주 깊이 들어가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지장만이 홀로 석실(石室)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방에는 다리가 부러진 솥이 있었고, 솥 안에는 흰 흙과 쌀을 섞어서 밥을 지어 먹고 있었다. 여러 아이들이 이를 보고는 경탄하면서 말하기를,
“화상(和尙)이 이와 같이 고생하고 있는 것은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더불어서 선방(禪房)을 지었는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큰 절이 되었다. 신라에서도 그 소문을 듣고 바다를 건너 서로 찾아왔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짐에 따라 그들을 먹일 길이 없었다. 이에 지장이 돌을 헤쳐서 청백색의 흙을 얻었는데, 껄끄럽지가 않고 국수와 같아서 그것을 대중들에게 먹였다. 그의 대중들이 법설(法說)을 들어 정신을 기르기를 청하면서 음식으로 목숨을 기르지 않으니, 남방 사람들이 ‘삐쩍 마른 대중[枯槁衆]’이라고 부르면서 모두들 숭앙하였다. 용담(龍潭)의 곁에 흰 흙무더기가 있었는데, 아무리 취해도 없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대중들을 모아 놓고 이별을 고하였는데, 간 곳을 알 수가 없었고, 단지 산이 울고 돌이 떨어지며 종이 울리는 소리만 들렸다. 결가부좌한 채 죽으니, 나이 99세였다. 그의 시신을 함 속에 앉혀 두었다. 그 뒤 3년이 지나서 탑 속에 넣으려고 하였는데, 얼굴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시신을 마주 들 즈음에는 골절(骨節)이 마치 쇠로 된 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신승전》
○ 김지장(金地藏)은 신라국의 승이다. 지덕(至德) 연간에 바다를 건너와 청양(靑陽)의 구화산(九華山)에 살았다. 일찍이 바위 틈에 있는 흰 흙을 밥과 섞어 먹자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99세에 갑자기 대중들을 불러 모은 다음 이별을 고하였는데, 단지 산이 울고 바위가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으며, 잠시 뒤에 함 속에서 입적(入寂)하였다. 3년이 지난 뒤에 장차 탑 속에 넣으려고 하면서 보니 얼굴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았으며, 마주 들 때에는 골절이 모두 쇠사슬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속문헌통고》 ○ 《전당시(全唐詩)》에, “김지장은 신라국의 왕자이다. 지덕(至德) 초에 바다를 건너와 구화산(九華山)에서 살았다.” 하였다. ○ 《구화산록(九華山錄)》에, “화성사(化城寺)가 구화산에 있는데, 절이 매우 아름답다. 당나라 때 신라의 왕자 김지장이 수행하던 곳이다. 김지장탑(金地藏塔)이 또 절 뒤에 있다.” 하였다. ○ 주필대(周必大)의 《성재집(省齋集)》에 실려 있는 ‘김지장탑을 배알하다.[謁金地藏塔]’는 시는 다음과 같다. “덩굴 잡고 험산 타긴 재빠르기 원숭인데, 돌 모서리 옷 걸리고 신발 자주 뚫어지네. 멀리서 김지장탑 찾아온 걸 이상하게 생각 말라, 일찍이 옥계 앞을 천천히 걸었노라.[攀蘿度險捷猱猿 石角鉤衣屨屢穿 莫訝遠尋金地藏 也曾徐步玉階前]”
도수충(屠粹忠)의 김지장찬(金地藏贊)에,
밥에는 진흙이 뒤섞이어 있었고 / 食飯雜泥
함 열자 골상이 생시처럼 나타났네 / 開函見骨
산봉우리 어찌하여 구 자로 이름했나 / 峯何取九
살아 백 년 채우지 못하였네 / 生不滿百
하였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금사(金師) : 승 금사는 신라 사람이다. 수양(雎陽)에 살았는데, 녹사참군(錄事參軍) 방완(房琬)에게 이르기를,
“태수(太守) 배관(裴寬)이 바뀔 것입니다.”
하였다. 방완이 언제 바뀔 것인가를 묻자, 말하기를,
“내일 오전에 칙서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공과 더불어 군(郡)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서로 만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칙서가 오는가를 살피고 있었는데, 오전에 역사(驛使)가 두 차례 봉첩(封牒)을 가지고 왔으나 그런 내용이 아니었으므로, 방완은 금사의 말이 틀린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또 한 역사가 봉첩을 가지고 와서는 말하기를,
“배공(裴公)의 관직이 바뀌어 안륙별가(安陸別駕)로 되었다.”
하였다. 이에 방완이 수레를 보내어 금사를 맞이해 오게 하고, 또 자신이 직접 갔는데, 과연 군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배관을 만났다. 금사를 불러다 물으니, 금사가 말하기를,
“관직은 비록 바뀌었으나, 복장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 생질들은 각각 흩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칙서가 도착해서 별가에 제수하였는데, 자주빛 인끈은 그대로 있었고, 생질들은 각자 흩어지게 되었다. 《신승전》
○ 무상(無相) : 석(釋) 무상은 신라국 사람으로, 그곳 왕의 셋째 아들이다. 현종(玄宗)이 불러다 보고는 선정사(禪定寺)에 있게 하였는데, 호를 무상(無相)이라 하였다. 마침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서 좌선(坐禪)하였다. 검은 소 두 마리가 있어 앉아 있는 자리의 아래에서 뿔을 마주 댄 채 빙빙 돌면서 몸 가까이 다가와 아주 위태로웠고, 차갑기가 얼음 같은 털북숭이 손이 소매 속으로 들어와서는 몸을 더듬으면서 배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도 무상은 조금도 경동하지 않았다. 매번 입정(入定)에 들 때마다 대부분 5일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눈이 많이 쌓이자 갑자기 맹수 두 마리가 다가왔다. 그러자 무상은 스스로 몸을 깨끗이 씻고 알몸으로 맹수 앞에 누워서 자신의 몸을 맹수에게 보시(普施)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두 마리의 짐승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냄새를 맡으면서 빙빙 돌다가는 그대로 떠났다. 무상은 가끔씩 밤중에 좌상(坐床) 아래로 내려가 호랑이의 수염을 움켜잡고 있었다. 얼마 뒤에 산에서 산 지 조금 오래되자 옷은 떨어지고 머리카락은 길게 자라 사냥꾼들이 이상한 짐승인 줄 알고 활로 쏘려다가는 멈추곤 하였다. 다시 무덤 사이에 정사(精舍)를 짓고 사니, 성도 현령(成都縣令) 양익(楊翌)이 사람들을 현혹시킨다고 의심하였다. 이에 그곳에 와서는 그의 무리 20여 명에게 명해서 그를 잡아 끌고가게 하였다. 그런데 그의 무리들이 무상의 몸 가까이 다가가자 모두들 몸이 떨리면서 정신을 잃었다. 조금 뒤에는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모래와 돌이 바람에 날려 곧장 청사(廳舍) 안으로 날아들었으며, 발과 장막이 바람에 날아갔다. 이에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절하면서 숨이 차서 감히 말을 못하였다. 양익이 잘못을 뉘우치자 바람이 그쳤다. 이에 무상을 받들어 모시고 예전에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냈다.
무상이 성도(成都)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어떤 역사(力士) 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말하기를,
“저의 힘을 희사하여 땔나무를 베어 스님께서 밥 지을 때 쓰도록 공양하겠습니다.”
하였다. 무상의 동생이 신라에서 새로 왕이 되었는데, 무상이 갑자기 본국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위태롭게 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장차 자객을 보내어 죽이려고 하였는데, 무상은 이런 사실을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말하기를,
“땔나무를 하는 현자(賢者)는 잠시 이리 오라.”
하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에 작연(灼然)이라는 손님이 올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불자(佛子)가 상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밤이 되자 땔나무를 하는 자가 칼을 가지고 방석을 끼고는 선자(禪者)의 곁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얼마 뒤에 벽 위에서 어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드디어 몸을 날리면서 칼을 휘두르니, 거한의 몸체와 목이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다. 뒷문에 본디 큰 구덩이가 있었으므로 그를 끌어다가 그곳에 매장한 다음, 다시 흙으로 덮어 그 흔적을 없애 버리고는 땔나무를 하던 자가 떠나갔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무상이 땔나무를 베던 자를 불러서 사례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보이지 않았다. 무상이 일찍이 부도(浮圖) 앞에 있는 잣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 잣나무가 탑 높이와 똑같아지면 탑이 무너질 것이다.”
하였다. 회창(會昌 841~846) 연간에 이르러서 탑이 무너졌는데, 잣나무와 탑의 높이가 똑같았다. 또 말하기를,
“절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연못은, 왼쪽은 국이고 오른쪽은 밥이다.”
하였는데, 대중들에게 먹일 때 음식이 모자라면 사람들을 시켜서 그것을 퍼내게 하니, 과연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다. 그의 신이(神異)함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지덕(至德) 원년(756, 경덕왕15)에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상동》
○ 현광(玄光) : 석 현광은 해동(海東) 웅주(熊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형산(衡山)으로 가서 사대화상(思大和尙)을 만나 본 뒤에 강남(江南)에 머물러 있었다. 본국에서 온 배에 부탁하여 몸을 싣고 해안을 떠났는데, 이때 채색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러면서 붉은 깃발과 오색 깃발이 휘날리며 하늘에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천제(天帝)께서 해동(海東)의 현광 선사(玄光禪師)를 부르신다.” 하였다. 현광이 공수(拱手)의 예를 올리고는 사양하여 피하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조금 뒤에 궁성(宮城)으로 들어갔는데, 인간 세상의 궁전이 아니었다. 호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고기들이었으며, 귀신들도 간간이 섞여 있었는데, 누군가 말하기를,
“오늘은 천제께서 용왕궁(龍王宮)에 내려오셔서 선사의 법설을 들어 친히 법문(法門)을 증득(證得)하려고 하신다. 우리들 수부(水府)에서도 선사의 은혜를 받고자 한다.”
하였다. 이미 보전(寶殿)에 올라간 다음에 다시 높은 대(臺)로 올라가서는 물음에 따라서 말해 주었다. 대략 7일간 그렇게 한 다음에 용왕이 몸소 나와 전송하였다. 그가 탔던 배는 바다에 떠 있는 채 가지 않고 있었다. 현광이 다시 배에 오르자, 뱃사람이 반나절이 지났을 뿐이라고 하였다. 현광이 웅주(熊州)의 옹산(翁山)에 집을 짓고 머물렀는데, 그 집이 사찰로 되었다. 그 뒤에는 간 곳을 모른다. 《상동》
○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 : 조열지(晁說之)의 《반야경소(般若經疏)》 서문에 이르기를,
“진(陳)나라에서 수(隋)나라로 넘어오는 사이에 천태산(天台山)의 지자대사(智者大師)가 멀리 용수(龍樹)에게 연원(淵源)을 대어 하나의 대교(大敎)를 세웠는데, 아홉 번 전하여 형계(荊溪)에 이르렀고, 형계가 다시 전하여 신라에 이르러서 법융, 이응, 순영에게 전하였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이 일본(日本)에 전파되어 해외에서 성하여졌다.”
하였다. 《석문정통(釋門正統)》
○ 원효(元曉) : 당나라 초기에 해동(海東)에 원효란 자가 있었는데, 성은 설씨(薛氏)이다. 동해(東海)의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마음을 내어 불법(佛法)으로 들어와 스승을 따라 배웠으며, 항상 떠돌아다녀 있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의리의 굴레를 용감하게 깨뜨리고 법문(法文)의 진(陣)을 마음대로 넘나듦에 씩씩하고도 굳세어서 앞으로 나아감에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그곳 사람들이 만인(萬人)을 상대할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상법사(湘法師)와 더불어 당나라로 들어갔으나 인연이 닿지 않아 당나라로 들어갈 마음이 없어졌다. 얼마 뒤에는 말투가 미치광이 같고 행동거지가 제멋대로여서 거사(居士)와 같이 술집과 사창가를 돌아다녔는바, 마치 지공(誌公)이 쇠칼과 쇠지팡이를 잡고 다니는 것 같았다. 혹 소(疏)를 지어서 저잣거리에서 강론하기도 하고, 혹 가야금을 뜯으면서 사우(祠宇)에서 노닐기도 하였으며, 혹 여염집에서 자기도 하고 산속에서 좌선(坐禪)하기도 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인연에 따라 행동하여 전혀 정처가 없었다. 이때 국왕이 백좌(百座)를 두고 《인왕경(仁王經)》을 강하면서 널리 덕이 높은 사람을 찾았다. 그러자 본주(本州)에서 그의 명망이 높다는 이유로 천거하여 나아가게 하였는데, 덕이 높다고 하는 여러 사람들이 원효의 사람됨을 싫어하여 왕에게 들이지 말라고 참소하였다. 얼마 뒤에 왕이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구하였다. 왕이 대안성자(大安聖者)를 불러 보충하게 하였다. 그런데 대안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람으로, 형상과 복장이 특이하였으며, 매번 시장 바닥에서 동발(銅鉢)을 두드리면서 ‘대안대안(大安大安)’이라는 소리를 외쳐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대안이 말하기를,
“속히 원효에게 가져다주어야만 강론할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 원효가 상주(湘州)에 있었는데, 사자(使者)에게 말하기를,
“이 경(經)은 시본이각(始本二覺)으로 종지(宗旨)를 삼는다. 그러니 나를 위하여 각승(角乘)을 마련하라.”
하였다. 그런 다음 책상을 가져다가 두 뿔 사이에 놓고 벼루와 붓을 다시 그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 수레 위에서 소(疏)를 저술해 5권을 이루었다. 또 《약소(略疏)》 3권을 지어 황룡사(皇龍寺)에서 강론하였다. 그러자 왕과 신하와 도사(道士)와 속인(俗人)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법당을 에워쌌는데, 원효가 설법하는 것이 위의가 있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 감에 있어서 법도가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난날에 백 개의 서까래를 뽑을 때에는 내가 비록 참여되지 못하였지만, 오늘 아침에 대들보 하나를 건너지르는 데는 오직 나만이 할 수가 있다.”
하니, 당시의 덕이 높다고 이름난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으며, 마음속으로 참회하였다. 처음에 원효가 자취를 보이는 것을 알기가 어렵고 사람을 교화함에 있어서 일정하지 않아, 혹 쟁반을 던져서 대중을 구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였으며, 혹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혹 천지 사방에 죽었다고 고하기도 하였으니, 역시 배도(盃渡)나 지공(誌公)의 무리이다. 《탐현기(探玄記)》에 이르기를,
“원효 법사는 이 경소(經疏)를 저술하여 사교(四敎) 등급을 세웠다.”
하였다. 《회현기(會玄記)》
○ 당나라 초기에 해동의 원효 법사(元曉法師)가 역시 사교(四敎)를 세웠는데, 첫 번째 삼승교(三乘敎)는 사제(四諦)와 연기(緣起)에 관한 경(經)이고, 두 번째 삼승통교(三乘通敎)는 《반야경(般若經)》,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이고, 세 번째 일승분교(一乘分敎)는 《범망경(梵網經)》 등이고, 네 번째 일승만교(一乘滿敎)는 《화엄경(華嚴經)》 등이다. 《현담(懸談)》 ○ 삼가 살펴보건대, 원효는 바로 신라 사람 설총(薛聰)의 아버지이다.
○ 의상(義湘) : 의상은 해동 화엄종(華嚴宗)의 초조(初祖)이다. 원효(元曉)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다가 밤중에 고총(古塚)에서 자게 되었는데, 이를 인하여 유심(唯心)의 진리를 통달하게 되었으므로 원효는 신라로 돌아가고 의상은 당나라로 들어갔다.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현수 국사(賢首國師)와 함께 지상(至相)을 섬겨 화엄종을 전수받아 해동으로 돌아와 크게 넓혔다. 《회현기(會玄記)》
○ 홍혜(弘惠) : 피일휴(皮日休)의 ‘신라 홍혜상인을 전송하며[送新羅弘惠上人]’라는 시의 서문에, “경인년(870) 11월에 신라의 홍혜상인이 신라의 동서(同書)와 더불어서 나에게 영취산(靈鷲山) 주 선사(周禪師)의 비문(碑文)을 지어 주기를 청하여, 이를 가지고 돌아감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하였다. 《전당시(全唐詩)》
○ 《전등록(傳燈錄)》에 실려 있는 신라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의 법사(法嗣)에 신라국 본여 선사(本如禪師)가 있다.
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계림(鷄林) 도의 선사(道義禪師), 신라국 혜철 선사(慧徹禪師), 신라국 홍척 선사(洪陟禪師)가 있다.
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의 법사에 신라 무염 선사(無染禪師)가 있다.
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현욱 선사(玄昱禪師), 신라국 각체 선사(覺體禪師)가 있다.
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도균 선사(道均禪師)가 있다.
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품일 선사(品日禪師)가 있다.
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충언 선사(忠彦禪師), 신라국 가지 선사(迦智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온 뜻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말하기를, “네가 과두(裹頭)해 가지고 오기를 기다려서 너에게 말해 주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매 선사(大梅禪師)의 종지(宗旨)입니까?” 하니, 가지 선사가 이르기를, “낙(酪)과 근본[本]을 동시에 던져 버리라.” 하였다.
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의 법사에 신라 대모화상(大茅和尙)이 있다. 대모화상이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스승을 알고자 하면 무명(無明)의 마음속에서 알아차려야 할 것이며, 상주(常住)하여 마르지 않는 성품을 알고자 하면 만물(萬物)이 변천하는 속에서 알아차리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모화상의 경계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기봉(機鋒)을 드러내지 않겠노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기봉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맞설 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의 법사에 문성대왕(文聖大王)과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있다.
신라 척 선사(陟禪師)의 법사에 흥덕대왕(興德大王)과 선강태자(宣康太子)가 있다.
천룡화상(天龍和尙) 법사에 신라 언충 선사(彦忠禪師)가 있다.
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의 법사에 신라 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가 있는데, 본국에서는 요오대사(了悟大師)라 부른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拂子)를 세웠다. 승이 말하기를, “그것만이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불자를 놓아 버렸다. 승이 묻기를, “이(以) 자도 아니고 팔(八) 자도 아니면 그것이 무슨 자입니까?” 하니, 순지 선사가 원상(圓相)을 그려 보였다. 어떤 승이 선사의 앞에서 다섯 꽃으로 된 원상을 그리니, 순지 선사가 그 그림을 지워 버리고 따로 하나의 원상을 그렸다.
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지리산화상(智異山和尙)이 있다. 어느 날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겨울이 춥지 않으니 섣달 뒤에 보리라.” 하고는, 문득 자리에서 내려갔다.
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흠충 선사(欽忠禪師), 신라 행적 선사(行寂禪師), 신라 낭 선사(朗禪師), 신라 청허 선사(淸虛禪師)가 있다.
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금장화상(金藏和尙)이 있다.
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의 법사에 신라 청원화상(淸院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말을 달려 공을 다투면 누가 그것을 얻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누가 그것을 얻지 못하는 자이겠는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다투지 않는 것이 좋겠군요.”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다투지 않더라도 역시 허물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야만 허물이 없게 할 수 있습니까?” 하니, 청원화상이 이르기를, “요컨대 애당초 잃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잃지 않는 곳을 어떻게 하면 단련할 수 있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두 손으로 떠받들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의 법사에 신라 와룡화상(臥龍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대인(大人)의 상(相)입니까?” 하니, 와룡 선사가 이르기를, “자라장(紫羅帳) 속에는 손을 드리우지 않는다.”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손을 드리우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아서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12시 가운데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원숭이가 털 있는 짐승을 잡아먹었다.” 하였다.
곡산(谷山) 장 선사(藏禪師)의 법사에 신라 서암화상(瑞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흑과 백이 모두 없어지고 불안(佛眼)이 열렸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네가 속[內]으로만 집착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새로 탄생한 왕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깊은 궁궐에 있어서 끌어내어도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또 신라의 박암화상(泊巖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선(禪)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옛 무덤은 집이 되지 못한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한갓 거마(車馬)의 자취만 남겼구나.”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교(敎)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패엽(貝葉)으로는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이니라.” 하였다. 또 신라의 대령화상(大嶺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겨우 동관(潼關)에 와서 그만둘 때에는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그것은 단지 길거리의 살림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살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하면 얻으나 맞닥뜨리면 얻지 못하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체득하면 얻는데 어찌하여 맞닥뜨리면 얻지 못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체득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그 가운데의 일이 어떠합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존귀하지 않느니라.” 하였다.
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대무위 선사(大無爲禪師)가 있다.
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의 법사에 신라 경유 선사(慶猷禪師), 신라 혜 선사(慧禪師), 신라 운주화상(雲住和尙)이 있다. 승이 묻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어떤 사람이 말합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노승이 말할 수 있느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화상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여러 부처님들이 바로 나의 제자이니라.” 하였다. 승이 말하기를, “화상께서는 그 뜻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운주화상이 이르기를, “군왕(君王)을 상대하지 않았더라면 20방(棒)은 때렸어야 하겠구나.” 하였다.
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혜운 선사(慧雲禪師)가 있다.
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의 법사에 신라국 구산화상(龜山和尙)이 있다.
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의 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는 신라 사람이다.
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는 신라국 사람이다.
육조대사(六祖大師)가 입적(入寂)하였을 때 흙덩이 속에 넣으면서 철엽(鐵葉)과 칠포(漆布)를 가지고 목 부분을 감쌌는데, 육조대사가 일찍이 말하기를, “5, 6년 뒤에 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머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뒤에 장만(張滿)이란 자가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신라의 승 김대비(金大悲)에게 돈 2만 냥을 받고는 육조대사의 머리를 가지고 해동(海東)으로 가서 공양하게 하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탑을 열다가 발각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신라의 무명승(無名僧) : 상주(商州) 사람 가운데 병이 들어서 수족(手足)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걸음을 못 걷는 자가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병을 잘 고치는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하였으나, 치료하지 못하였다. 이에 집안사람이 길가에다 놓아두고는 구해 줄 자를 찾았는데, 우연히 어떤 신라의 중이 보고는 고하기를,
“이 병은 약초 하나면 치료할 수가 있는데, 이 땅에도 그 약초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병자를 위하여 산으로 들어가서 그 약초를 찾아내었는데, 바로 위령선(威靈仙)이었다. 병자로 하여금 이를 복용하게 하니, 며칠이 지난 뒤에는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 산인(山人) 등사제(鄧思齊)가 이를 알고는 드디어 그 사실을 전하였다. 《본초도경(本草圖經)》
부(附) 신라의 무착 선사(無著禪師) -《전당시(全唐詩)》에 석법조(釋法照)의 ‘무착 선사가 신라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無著禪師歸新羅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신라의 승 아각(雅覺)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장교(張喬)의 ‘승 아각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僧雅覺歸新羅]’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도신(道侁) : 조선(朝鮮)의 최씨(崔氏) 집 채마밭에서 자란 오이[瓜]의 길이가 한 자 남짓하였는데, 여자가 이를 먹고 임신을 하였다. 아들을 낳아 7일 동안 버려두었는데, 비둘기와 제비가 날아와 날개로 아이를 덮어서 길렀다. 자라나서 승이 되어 당나라로 들어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 《삼재조이(三才藻異)》 ○ 살펴보건대, 도신은 신라 말기에 당나라로 들어가서 일행의 지리법을 배웠는바, 세상에서는 동방지리가(東方地理家)의 시조라고 칭한다.
도수충(屠粹忠)의 도신찬(道侁贊)에,
후손을 하늘이 이어 줌에 / 瓜瓞天綿
칠일 동안 새들이 날개로 덮었다네 / 鳥覆其七
법중들의 가슴속 포부 가운데 / 法衆胸羅
승이 그 가운데 하나를 얻었도다 / 僧得其一
하였다. 《상동》
○ 제관(諦觀) : 송나라 태조(太祖) 건륭(建隆) 원년(960, 광종11) 10월이다. 당초에 천태교(天台敎)의 경전이 오대(五代) 때의 난리를 겪으면서 불에 타 완질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오월왕(吳越王) 숙(俶)이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日本)과 고려(高麗)로 가서 이를 구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려에서 사문(沙門) 제관(諦觀)을 파견하여 천태교에 관한 논소(論疏)의 여러 글을 가지고 나계(螺溪)에 이르러서 적 법사(寂法師)를 알현하게 하니, 일종(一宗)의 교문(敎文)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계(螺溪)가 이를 보운(寶雲)에게 전수하고, 보운이 이를 법지(法智)에게 전수하고, 법지가 크게 강설(講說)을 열어 드디어 교관(敎觀)을 중흥시켰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오월왕전(吳越王傳)》
○ 여가(如可) : 송나라 단공(端拱) 2년(989, 성종8)에 고려가 승 여가를 파견하여 표문을 가지고 와 알현하면서 《대장경(大藏經)》을 내려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를 내려 주고, 이어 여가에게 자의(紫衣)를 하사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송사》
○ 의천(義天) : 의천의 성은 왕씨(王氏)로, 고려국 인효왕(仁孝王)의 넷째 아들이다. 영화를 버리고 출가하여 우세 승통(祐世僧統)에 봉해졌다. 원우(元祐)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 도를 묻자, 주객(主客) 양걸(楊傑)에게 칙명을 내려 의천을 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에 가서 법(法)을 전수받게 하였다. 금산(金山)에 이르자, 불인(佛印)이 앉은 채로 그의 예를 받았다. 이에 양걸이 놀라서 불인에게 물으니, 불인이 말하기를,
“의천은 이국(異國)의 중일 뿐입니다. 만약 내가 도를 굽히고 세속의 방식을 따라 제방(諸方)이 이미 한쪽 눈을 잃은 것처럼 행동한다면 무엇을 가지고 중국의 선법(禪法)을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조정에서는 그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전당의 혜인원에 이르러서 《화엄소초(華嚴疏鈔)》를 가지고 의심나는 부분을 자문받아 깨우치면서 해가 바뀌어서야 끝마쳤다. 이에 화엄(華嚴) 일종(一宗)의 글 뜻이 없어졌다가 다시 전해졌다. 《속문헌통고》 ○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의천이 선종(宣宗) 2년(1085) 을사에 송나라로 들어갔는바, 바로 원풍(元豐) 8년이다. 그 뒤에 원우(元祐) 4년(1089, 선종6)에 수개(壽介) 등을 파견하여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리고, 겸하여 금탑(金塔)을 바쳤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원우 초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도를 물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송 원풍(元豐) 8년에 고려국의 왕자 승통(僧統) 의천(義天)이 들어와 조공을 바쳤는데, 인하여 정원 법사(淨源法師)에게 수교(首敎)를 배우기를 청하면서 금으로 쓴 한역본(漢譯本) 《화엄경(華嚴經)》 3백 본을 절로 들이고, 금을 시주하여 화엄대각(華嚴大閣)과 화엄장탑(華嚴藏塔)을 건립하여 숭배하니, 영종(寧宗)이 화엄경각(華嚴經閣)이라고 쓰고 이종(理宗)이 이암(易庵)이라고 썼다. 원나라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4)에 고려의 심왕(瀋王)이 조서를 받들고서 이곳에서 향(香)을 올리고 경(經)을 읽었으며, 지정(至正) 말년에 절이 불탔다가 조선 초에 중수하였는데, 세속에서는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한다.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정원(淨源)에게 제전(祭奠)을 올린다는 명분으로 탑 2개를 바쳤는데, 이때 마침 소자첨(蘇子瞻)이 항주(杭州)의 지사(知事)로 있다가 상소를 올려 이르기를,
“금탑(金塔)을 바치는 것을 거절하여 그가 오고자 하는 뜻을 끊어 버리소서.”
하니, 신종(神宗)이 따랐다. 《이상 모두 서호지(西湖志)》 ○ 살펴보건대, 《동파집(東坡集)》에 이르기를, “원우 4년에 고려의 승통 의천이 수하시자(手下侍者) 수개(壽介)ㆍ계상(繼常)ㆍ영류(領流)와 원자(院子) 김보(金保)ㆍ배선(裵善) 등 5명을 데리고 와서 항주(杭州)에서 죽은 승을 제사하였다.” 하였는데, 예문지(藝文志)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찍이 상고해 보건대, 고려사(高麗寺)는 본디 선종(禪宗)의 사찰로, 천성(天成) 2년(927)에 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이 실로 절을 창건하고 칙명을 내려 혜인사(慧因寺)라고 이름하였으며, 송나라 신종조(神宗朝)에 이르러서 진수 법사(晉水法師)란 자가 있어서 마명대사(馬鳴大士)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화엄경(華嚴經)》의 여러 경의(經義)에 주석을 내고 해석하였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유전(流傳)되었다. 고려의 세자가 -살펴보건대, 왕자 의천(義天)은 세자가 아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조회함에 미쳐서는 사문(沙門)이 되어 모시면서 스승의 법을 전해 받기를 청하였다. 이에 고려사(高麗寺)라고 칭하게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남아 있는 법파(法派)는 고려의 세자로부터 이미 17대나 전해졌다.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좌승(左丞) 포맹종(蒲孟宗)이 항주(杭州)를 안무(安撫)하면서, 혜인사(慧因寺)가 고려사(高麗寺)로 바뀌었고 선종(禪宗)이 교종(敎宗)으로 바뀌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돌에 이름을 새기기를 주청하였다. 그 뒤로 종(宗)과 교(敎)가 번갈아 나왔는데, 《전등록(傳燈錄)》에서 칭한 회상사(懷祥寺), 의령사(義寧寺)는 바로 선종이다. 《서하집(西河集)》
살펴보건대, 《고려사》 종실열전(宗室列傳)에 이르기를, “문종(文宗)의 넷째 아들 대각 국사(大覺國師) 왕후(王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인데, 송나라 철종(哲宗)의 휘(諱)를 피하여 자로서 불리어졌다. 왕후는 문종 19년(1065) 을사에 출가(出家)하였는데, 천성이 총명하여 오교(五敎)를 문득 통달하고 널리 유술(儒術)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호(號)를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라 하였다. 왕후가 송나라로 들어가서 불법(佛法)을 구하려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2년(1085) 4월에 이르러서 왕후가 몰래 제자 두 사람을 데리고 송나라 상인 임영(林寧)의 배를 따라 송나라로 갔다. 송나라에 도착하자 황제가 수공전(垂拱殿)에서 인견하였는데, 객례(客禮)로 대우하면서 총애함이 지극하였다. 왕후가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불법을 묻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주객원외(主客員外) 양걸(楊傑)을 관반(館伴)으로 삼아 오중(吳中)의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니게 하였다. 그 뒤 조서를 받들고서 동쪽으로 돌아오자, 왕이 태후(太后)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서 왕후를 맞이하였다. 왕후가 석전(釋典) 및 경서(經書) 1천 권을 바쳤다. 그리고 또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할 것을 주청한 다음, 4천 권이나 되는 많은 서책을 요(遼)나라와 송나라에서 사와 이를 모두 다 간행하였다. 처음으로 천태종(天台宗)을 창시하여 국청사(國淸寺)에 두었다. 그 뒤에 해인사(海印寺)로 물러나 있다가 숙종(肅宗) 때에 졸하니, 책봉하여 대각 국사(大覺國師)라고 추증하였다.” 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복건(福建)의 상인이 항주(杭州)에서 고려의 화물(貨物)을 받아 본문 사이에다 주석을 달면서 《화엄경(華嚴經)》을 만드는데, 비용을 아주 많이 들여 인판(印板)을 만들어서는 공공연하게 배로 실어 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왕후(王煦)가 바친 석전(釋典)은 항주에서 새겨 만든 것인가? 우리나라의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장경판(藏經板)은, 고지(古志)에 “신라 애장왕(哀莊王) 정묘년에 새겨 만든 것이다.”고 하였는데, 애장왕이 재위한 19년 동안에는 정묘년이란 해가 없다. 이는 대개 선종(宣宗) 4년 정묘년에 의천(義天)이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서 간행한 것인데, 애장왕 정묘년으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의천이 해인사로 물러나 있었으니, 해인사에 판(板)을 보관하는 것 역시 안 될 것이 없다.
○ 진각(眞覺) : 항주(杭州) 용화사(龍華寺)의 영조(靈照) 진각 선사(眞覺禪師)는 고려 사람이다. 거처함에 있어서 오직 납의(衲衣) 한 벌만 입고 지냈으므로 민중(閩中) 사람들이 ‘조포납(照布衲)’이라고 불렀다. 승이 묻기를,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였다는데, 어떤 것이 보리수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크기가 고련수(苦楝樹)만 하다.”
하였다. 승이 그 까닭을 물으니, 이르기를,
“본디 좋은 말[馬]이 아닌데 어찌하여 수고롭게 채찍질을 해 대는가.”
하였다. 천복(天福) 정미년(947, 정종2)에 항주의 대자산(大慈山)에서 입적하여 탑에 안치되었다. 《속문헌통고》
○ 《전등록》에 실려 있는 고려의 여러 승은 다음과 같다.
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설악산(雪嶽山) 영광 선사(令光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화상의 가풍(家風)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분명히 기억하라.”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제법(諸法)의 근원입니까?” 하니, 선사가 이르기를, “지시한 데 대해 사례하노라.” 하였다.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 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처음에 정혜(淨惠)의 문하에서 기봉(機鋒)을 발하였는데, 고려의 왕이 그를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청하자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국왕이 마음의 법문을 듣고 예우하기를 아주 극진하게 하였다. 어느 날 왕궁으로 들어오기를 청하자 설법을 하러 당(堂)에 올라갔다. 혜거 국사가 위봉루(威鳳樓)를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이르기를, “위봉루가 여러 상좌(上座)들을 위하여 벌써 다 거량을 마쳤다. 여러분들은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어떻게 알았는가? 모른다 하면 어째서 위봉루를 모르는가? 진중(珍重)하라.” 하였다. 혜거 국사의 설법은 중국에 퍼지지 않았으며, 또한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또 고려 영감 선사(靈監禪師)가 있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청정한 가람(伽藍)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소의 외양간이 그것이다.” 하였다. 승이 묻기를,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하니, 영감 선사가 이르기를, “저 어리석은 놈을 끌어내라.” 하였다.
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혜홍 선사(慧洪禪師)가 있다.
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의 법사에 고려국 탄연 국사(坦然國師)가 있는데, 왕위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이상 모두 전등록》 ○ 살펴보건대, 《전등록》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여러 승들은 드러난 사실이 별로 없으므로, 지금 각자 별도로 조목을 세워 기록하지 않고, 단지 신라와 고려로 구분하여 조목을 세운 다음 합쳐서 기록하였다.
환상인(幻上人) -《원시선(元詩選)》에 부약금(傅若金)의 ‘환상인이 고려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幻上人還高麗]’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식무외(式無外) -《원시선》에, 장저(張翥)의 ‘식무외가 고려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送式無外歸高麗國]’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고려 정포(鄭誧)의 《설곡집(雪谷集)》에 ‘식무외상인이 연경에서 노닐다가 장차 강남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며[送式無外上人遊燕京將往江南]’라는 시가 있다.-
엄상인(嚴上人)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유기(劉基)의 ‘차운하여 신라 엄상인의 가을날에 부쳐 보인다는 시에 화답하다.[次韻和新羅嚴上人秋日見寄]’라는 시 2수와 ‘거듭 운을 써서 신라 엄상인의 시에 답하다.[重用韻答新羅嚴上人]’라는 시 2수가 실려 있다. ○ 살펴보건대, 신라는 마땅히 고려로 되어야 한다.-
굉연(宏演) -《열조시집》에 조선의 석(釋) 굉연의 ‘자청궁에서 노닐며[遊紫淸宮]’라는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 송운대사(松雲大師) : 일본 경장(慶長) 11년(1606, 선조39)에 조선의 송운대사가 와서 강화(講和)를 요청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
○ 무명 선사(無名禪師) : 강희(康煕) 30년(1691, 숙종17)에 내가 자성(慈聖) 현 선사(賢禪師)를 보내어서 고려사(高麗寺)로 들어가 당에 올라가 설법하게 하였는데, 그때 재관(宰官)과 사민(士民)들 몇 명이 당 아래에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선사가 고려의 선사에게 법을 받았는데, 현 선사에게 법을 준 고려 선사가 아직도 방장(方丈)으로 있다.”
하였다. 이에 모두들 첨앙하는 예를 올릴 생각으로 그를 찾았으나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얼마 뒤에 음식의 공양을 마치고 수희(隋喜)를 하고자 하여 욕당(浴堂)에 이르니, 노납(老衲)이 흰머리를 드리우고 화로를 끼고 있는 것이 보였는데, 다 떨어진 가사를 입은 채 두 눈을 감고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따르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그 노선사(老禪師)이다.”
하였다. 이때 보고 있던 사람 수십 명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그를 놀라게 하지 않고 있다가, 얼마 뒤에 모두 탄식하면서 흩어져 갔다. 《서하집(西河集)》

[주D-001]혜관(慧灌) :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의 승으로, 수나라에 가서 길장(吉藏)에게 삼론종(三論宗)의 종지를 배우고 돌아와, 영류왕 7년(624)에 일본으로 가 삼론종을 선양하여 일본 삼론종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주D-002]고려(高麗) : 고구려이다. 《일본서기》에서는 고구려를 통상 고려로 표기하고 ‘고마’로 읽고 있는데, 이러한 훈독(訓讀)은 맥(貊)에서 연유한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41쪽》
[주D-003]혜자(慧慈) : 영양왕(嬰陽王) 6년(595)에 일본에 건너가 백제의 승 혜총(慧聰)과 함께 법흥사(法興寺)에 살면서 포교하였으며,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으로 있었다.
[주D-004]혜편(慧便) :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펴려 하였으나, 일본의 백성들이 너무 미개하여 속세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평원왕(平原王) 26년(584)에 백제의 사신 녹량(鹿梁)이 미륵불상(彌勒佛像)을 가지고 오자, 일본의 대신인 소아마자(蘇我馬子)가 불상을 모시고 봉향(奉香)할 사람을 구함에 혜편이 마침내 뽑혔다. 이에 소아가 혜편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그의 세 딸을 혜편에게 보내어 비구니(比丘尼)가 되게 하였는데, 이것이 일본 비구니의 시초이다.
[주D-005]파마국(播磨國) : 현재의 일본 병고현(兵庫縣) 일대에 있었다.
[주D-006]금산(金山) :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진표의 출생지를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이라고 하였다.
[주D-007]도솔천(兜率天)의 주인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가리킨다. 도솔천은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제4천(天)으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12만 유순(由旬)되는 곳에 있는 천계(天界)이다.
[주D-008]자씨(慈氏) :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말한다.
[주D-009]소미로(蘇迷盧) : 수미산(須彌山)을 가리킨다. 수미산은 불교(佛敎)의 세계설(世界說)에서 세계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다고 하는 산으로, 꼭대기에는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고, 중턱에는 사천왕(四天王)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높이는 물 위로 8만 유순(由旬)이고 물 아래로 8만 유순이며, 가로의 길이도 그와 같다고 한다.
[주D-010]삼선(三禪)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 가운데 색계의 제삼선천(第三禪天)을 말한다. 이 천(天)을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하며, 심묘(深妙)의 선정(禪定)에 따라 심신(心身)의 쾌락이 생긴다.
[주D-011]천안(天眼) :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오안(五眼) 가운데 하나로, 색계(色界)의 천인(天人)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한다. 사람 가운데에서도 선정(禪定)을 닦으면 얻을 수 있으며, 색계(色界) 사대(四大)로 만든 청정한 안근(眼根)이 거칠고 자세하고 멀고 가까운 일체의 모든 색(色)과 중생(衆生)의 미래에 있을 생사(生死)의 상(相)을 미리 알 수가 있는데, 여기에는 선정(禪定)에 의하여 수득(修得)한 천안과 태어나면서부터 얻는 생득(生得)한 천안이 있다.
[주D-012]와발(瓦鉢) : 흙으로 만든 바리때로, 부처가 제자들에게 쓰게 한 것이다.
[주D-013]첨(籤) : 첨은 끝이 뾰족하여서 물건을 꿸 수 있도록 만든 도구인데, 여기서는 점을 치는 대쪽인 간(簡)의 뜻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간자(簡子)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주D-014]하나에는 …… 있어 : 《삼국유사》 권4 진표전간에는 이 부분에 대해 “미륵보살이 감응해 나타나 189개의 간자(簡子)를 주면서 이르기를, ‘이 가운데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은 묘계(妙戒)를 비유한 것이요, 제9간자는 구족계(具足戒)를 얻은 것에 비유한 것이다. 이 두 간자는 나의 손가락뼈이며, 나머지는 모두 침향(沈香)과 단향(檀香)으로 만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주D-015]신훈(新熏) : 신훈종자(新熏種子)를 가리킨다. 유식종(唯識宗)에서 팔식(八識) 가운데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중에 있는 종자로, 후천적으로 여러 가지 정신 작용에 의하여 훈부(熏附)한 것을 말한다.
[주D-016]본유(本有) : 본유종자(本有種子)를 가리킨다. 신훈종자의 반대 개념으로, 아뢰야식에 잠재되어 있는 종자로서, 훈습(薰習)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존재한 것을 가리킨다.
[주D-017]오하(五夏) : 5년 동안 수행하였다는 뜻으로, 하(夏)는 하안거(夏安居)를 뜻한다.
[주D-018]주류성(周留城)에 …… 일으켰다 : 주류성은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다.
[주D-019]관륵(觀勒) : 삼론(三論)의 대가로, 무왕(武王) 3년(602)에 일본에 건너가 원흥사(元興寺)에 있으면서 불교 전파에 힘썼다.
[주D-020]법명(法明) : 백제의 비구니로, 의자왕(義慈王) 15년(655)에 대마도에 가서 오음으로 《유마경》을 독송하였다.
[주D-021]대직관겸족(大織冠鎌足) : 일본의 대신으로, 천지천황(天智天皇) 8년(669)에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해행총재(海行摠載)》 권1 일본국기(日本國紀)에는 대직관(大職冠)으로 되어 있다.
[주D-022]오음(吳音) : 중국 오월(吳越) 지방에서 쓰인 음으로, 일본에서는 불교도가 경전을 독송(讀誦)할 때 대개 오음으로 읽으며, 불교어(佛敎語)는 대개 오음으로 발음된다.
[주D-023]묵호자(墨胡子)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흑호자(黑胡子)로 표기되어 있다.
[주D-024]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선산(善山)이다.
[주D-025]승가(僧伽) : 범어 Samgha의 음역으로, 입도자(入道者)를 뜻한다. 불제자(佛弟子), 비구(比丘), 사문(沙門)이라고도 한다.
[주D-026]오천축국(五天竺國) : 동, 서, 남, 북, 중의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주D-027]팔탑(八塔) : 팔대영탑(八大靈塔)을 가리킨다. 팔대영탑은 석존(釋尊)과 관계가 깊은 성지(聖地) 여덟 곳에 세운 탑으로, 부처가 탄생한 가비라국(迦毘羅國) 남비니원(藍毘尼園)의 탑, 성도(成道)한 마가타국(摩迦陀國) 이련하원(泥連河園)의 탑, 최초로 설법한 파라내국(波羅奈國) 녹야원(鹿野園)의 탑, 신통력을 나타낸 사위국(舍衛國) 기타원(祇陀園)의 탑, 도리천(忉利天)에서 칠보(七寶)의 계단으로 내려온 승가시국(僧伽尸國) 곡녀성(曲女城)의 탑, 대중을 교화하여 돌아오게 한 마갈타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의 탑, 수량(壽量)을 생각하여 열반(涅槃)에 들 것을 예언한 비야리성(毘耶離城)의 탑, 입멸(入滅)한 구시나성(拘尸那城)의 탑을 말한다.
[주D-028]우전국(于闐國) :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로, 총령(蔥嶺)의 북쪽에 있으며, 우전(于殿), 계단(谿丹), 굴단(屈丹), 구달살라(瞿怛薩那) 등으로도 표기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는 경전(經典)이 모두 이곳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주D-029]총령(蔥嶺) : 지금의 파미르 고원(高原)에 뻗어 있는 큰 산맥을 말한다. 옛날에 중국에서 인도로 가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던 산맥이다.
[주D-030]삼귀(三歸) : 불문(佛門)에 처음 귀의할 때 하는 의식으로, 불(佛), 법(法), 승(僧)에 귀의함을 말한다. 삼귀의(三歸依), 삼귀계(三歸戒)라고도 한다.
[주D-031]도탈(度脫) : 생사(生死)의 바다를 건너서, 미계(迷界)를 벗어나 오계(悟界)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주D-032]화연(化緣) : 교화하는 인연을 말한다. 부처와 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은 교화할 인연이 있는 까닭이므로, 만일 이 화연이 다하면 곧 열반(涅槃)한다.
[주D-033]산의 …… 곳 : 하란산(賀蘭山)이다.
[주D-034]안사(安史)의 난(亂) :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난을 말한다.
[주D-035]영무(靈武) : 당나라 때 현(縣)을 두었던 곳으로, 신성(新城)의 서북쪽에 있었다.
[주D-036]보승불(寶勝佛) : 금강계(金剛界) 만다라(曼茶羅) 팔엽연대(八葉蓮臺)의 남방월륜(南方月輪) 중앙에 위치해 있는 부처를 말한다. 일체의 재물과 보배를 맡은 부처이다. 보생불(寶生佛)이라고도 한다.
[주D-037]불공(不空) : 진언종(眞言宗)의 부법(付法) 제6조(祖)로, Amoghavajra의 음역이다. 불공금강(不空金剛)이라고도 한다. 사자국(獅子國) 사람으로, 남양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16세 때 중국에 들어와 밀학(密學)을 닦아 부법의 조(祖)가 되었다. 현종(玄宗)이 그에게 귀의하여 궁중에 단을 만들고 관정(灌頂)을 받았다.
[주D-038]지장(地藏) :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나라의 승으로, 그가 죽을 때 대중(大衆)에게 고하고 함 속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죽었는데, 함 속의 얼굴이 3년 뒤에도 그대로였다 한다. 그 자리에 탑을 세웠는데, 최근에 그 탑 속을 확인한 결과 아직도 죽을 때의 모습과 같이 유체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그를 육신보살(肉身菩薩)로 추앙하고 있으며, 그가 있던 곳에 육신전(肉身殿)을 세웠다.
[주D-039]도수충(屠粹忠) : 청나라 정해(定海) 사람으로, 호가 지암(芝巖)이며, 《삼재조이》의 저자이다.
[주D-040]방완(房琬) : 원문에는 ‘方琬’으로 되어 있다. 《신승전(神僧傳)》 권6에 의거하여 ‘房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1]부도(浮圖) : 범어인 Stupa의 음역으로, 탑(塔)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을 부도라고 한다.
[주D-042]현광(玄光) : 신라 진흥왕 때의 승으로, 중국 진(陳)나라로 가서 형산(衡山)의 혜사(慧思)에게 《법화경(法華經)》 안락행품(安樂行品)을 배운 다음 돌아왔다. 뒤에 남악(南岳)의 조영당(祖影堂)에 28인을 그렸는데, 그 가운데 들었고,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의 조당(祖堂)에도 들었다.
[주D-043]웅주(熊州) : 신라 9주의 하나로,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주D-044]조열지(晁說之) : 송나라 사람으로 자가 이도(以道)이며, 사마광(司馬光)을 흠모하여 호를 경우(景迂)라고 하였다. 소식(蘇軾)의 천거에 의해 관직에 나왔으며, 여러 서책을 박람하였고, 서화에 뛰어났다.
[주D-045]지자대사(智者大師) : 수(隋)나라의 승으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지의(智顗)를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을 중심으로 해서 불교를 통일하여 천태종을 완성하였으며, 진왕(陳王) 양광(楊廣)에게서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호를 받았다. 《법화현의(法華玄義)》, 《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의 저서가 있다.
[주D-046]용수(龍樹) : 인도의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크게 드날린 Nagarjuna의 음역이다. 마명(馬鳴)의 뒤에 세상에 나와 대승 법문(大乘法文)을 성대히 선양하매 대승 불교가 이로부터 발흥하였다. 제2의 석가(釋迦),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고 일컫는다.
[주D-047]형계(荊溪) : 중국의 승으로 형계(荊溪)에 살았던 잠연(湛然)을 가리킨다. 잠연은 천태종의 5세로, 종풍(宗風)을 선양하고, 주석서(註釋書)를 많이 지었다. 묘락대사(妙樂大師), 기주 법사(記主法師)라고도 한다.
[주D-048]상주(湘州) 사람이다 : 원문에는 ‘相州’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宋高僧傳)》 권4에 의거하여 ‘湘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원효의 출생지가 《삼국유사》 권4에는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의 경산군(慶山郡) 압량면(押梁面) 신월동(新月洞) 부근으로 추측된다.
[주D-049]상법사(湘法師) : 원문에는 ‘相法師’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湘法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지공(誌公) : 원문에는 ‘志公’으로 되어 있는데, 《송고승전》 권4에 의거하여 ‘誌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지공은 양(梁)나라의 승 보지(寶誌)로, 성은 송씨(宋氏)이고, 시호는 묘각대사(妙覺大師)이다. 음식을 수시로 먹었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자나 되었으며, 신통한 일을 많이 나타내었고, 예언을 많이 하였다.
[주D-051]백좌(百座) : 《인왕경(仁王經)》을 강독하는 불교의 법회로, 인왕회(仁王會), 인왕도량(仁王道場)이라고도 하는데,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호국적(護國的)인 성격이 강하였다.
[주D-052]인왕경(仁王經) :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과 당나라 불공(不空)이 번역한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두 종류가 있다. 부처가 16국 왕으로 하여금 그 나라를 보호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을 수지(受持)하여야 한다고 말한 경이다.
[주D-053]대안성자(大安聖者) : 신라 진흥왕 때부터 선덕왕 때까지 활동하였던 고승으로, 원효가 그에게 사사(事師)하였던 듯하다.
[주D-054]시본이각(始本二覺) :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말한다. 본각은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理體)를 말하고, 시각은 수행에 의하여 증(證)한 각체(覺體)를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은 심생멸문(心生滅門)의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무명(無明)인 불각(不覺)과 진여(眞如)인 각(覺)으로 나누며, 각은 다시 시각과 본각으로 나눈다.
[주D-055]각승(角乘) : 각(覺)과 각(角)이 음이 같으므로 소의 두 뿔로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비긴 것이고, 승(乘)은 불법(佛法)을 수레에 비긴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635쪽 주》
[주D-056]약소(略疏) :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말하는데, 중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주D-057]배도(盃渡) : 진(晉)나라의 승으로, 기주(冀州) 사람이며, 성명은 미상이다. 항상 나무로 만든 잔[盃]을 타고 물을 건넜으므로 사람들이 배도화상(盃渡和尙)이라고 불렀다. 세세한 행실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신통력이 탁월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의 유래를 알지 못하였다.
[주D-058]탐현기(探玄記) : 당나라 법장(法藏)이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말한다. 모두 20권으로 되어 있다.
[주D-059]경소(經疏) : 원효가 지은 《반야삼매경소(般若三昧經疏)》, 《반야심경소(般若心經疏)》, 《금강반야경소(金剛般若經疏)》 등을 말한다.
[주D-060]사교(四敎) : 이른바 원효사교(元曉四敎)를 말한다. 원효사교는 원효가 부처의 일생 동안의 가르침을 판단하여 4교로 나눈 것으로, 삼승교(三乘敎), 삼승통교(三乘通敎), 일승분교(一乘分敎), 일승만교(一乘滿敎)를 말한다.
[주D-061]사제(四諦)와 …… 경(經) : 사제는 사성제(四聖諦)라고도 하며, 고(苦), 집(集), 멸(滅), 도(道)를 말한다. 제(諦)는 불변여실(不變如實)의 진상(眞相)이란 뜻이다. 연기(緣起)는 범어 Pratiyasamutpada의 음역으로 인연생기(因緣生起), 즉 연이 되어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경은 이들 내용이 실려 있는 《아함경(阿含經)》을 말한다.
[주D-062]유심(唯心)의 …… 들어갔다 : 원효가 34세 때 동학(同學)을 하던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닦으러 당나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에 이르러서 어느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 날 아침에 깨어 보니 해골 속에 있는 더러운 물이었음을 알았다. 이에 급히 토하다가 깨닫기를, “마음이 나면 여러 가지 법이 나고 마음이 없어지면 해골과 둘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에, 삼계가 오직 마음뿐[唯心]이라 하셨으니, 부처님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본국으로 돌아왔다.
[주D-063]현수 국사(賢首國師) :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으로, 현수는 그의 자(字)이다. 속성(俗姓)이 강(康)이었으므로 강장 국사(康藏國師)라고도 한다.
[주D-064]지상(至相) :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주석(住錫)하면서 화엄종을 드날렸던 지엄(智儼)을 가리킨다. 지엄은 화엄종의 제2조로, 지상 존자(至相尊者), 지상대사(至相大師)라고도 칭한다.
[주D-065]피일휴(皮日休) : 당나라의 문장가로, 자가 습미(襲美), 일소(逸少)이며, 육귀몽(陸龜蒙)과 친하게 지내 당시에 피륙(皮陸)이라고 칭하였다. 함통(咸通 860~873) 연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D-066]남악(南嶽) 양 선사(讓禪師) : 형산(衡山)의 남악(南嶽) 관음원(觀音院)에서 주석하였던 회양(懷讓)을 가리키는데,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전법(傳法) 제자로, 대혜 선사(大慧禪師)라고도 한다.
[주D-067]법사(法嗣) : 법통(法統)을 사속(嗣續)하는 제자라는 뜻으로, 스승의 인가(印可)를 받아 법을 전하는 자를 말한다.
[주D-068]서당(西堂) 장 선사(藏禪師) : 강서(江西)의 개원사(開元寺)에 있었던 서당지장(西堂智藏)을 가리킨다.
[주D-069]계림(鷄林) : 신라를 말한다. 중국에서는 흔히 계림과 신라를 혼용하였다.
[주D-070]도의 선사(道義禪師) : 법호는 원적(元寂)으로, 중국에 가서 강서(江西)의 개원사에서 법장에게서 의심을 결단하고 법을 이어받으니, 법장이 “불법을 전하는 것을 그대가 아니면 누구에게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이름을 도의(道義)라고 고쳤다.
[주D-071]혜철 선사(慧徹禪師) :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로, 혜철(惠哲)이라고도 하며, 자는 체공(體空)이고 시호는 적인(寂忍)이다. 지장(智藏)이 이미 죽은 뒤에 중국에 들어가서 심인(心印)을 받았다.
[주D-072]홍척 선사(洪陟禪師) : 남한조사(南漢祖師)라고도 하며, 시호는 증각(證覺)이다. 당나라로 들어가서 법장에게 심인을 받았다.
[주D-073]마곡(麻谷) 철 선사(徹禪師) : 보철(寶徹)을 가리킨다. 마곡은 산서성(山西省) 하동현(河東縣)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보철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설법하였다.
[주D-074]무염 선사(無染禪師) : 신라 때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파(聖住山派)의 개조로, 휘(諱)는 무주(無住)이고, 시호는 대랑혜(大朗慧)이다. 중국에 들어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참방(參訪)하여 인가(印可)를 받고 여러 곳을 두루 찾아다님에 그의 이름이 알려져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이라 불리었다.
[주D-075]장경(章敬) 운 선사(惲禪師) : 당나라 때의 승인 회운(懷惲)을 가리킨다. 장경은 경조(京兆)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76]현욱 선사(玄昱禪師) :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개조로, 현육(玄育), 혜목(慧目)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원감(圓鑑)이다. 회운(懷惲)이 입적한 뒤에 중국에 들어가 인가를 받았다.
[주D-077]남전(南泉) 원 선사(願禪師) : 보원(普願)을 가리키는데, 남전(南泉)은 지명인 동시에 그의 호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로, 지양(池陽)의 남전(南泉)에 선원을 짓고 30년 동안 내려가지 않았으며, 학인(學人)을 준엄하게 다루어서 남전참묘(南泉斬猫), 남전겸자(南泉鎌子), 남전모란(南泉牡丹)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주D-078]도균 선사(道均禪師) : 도윤(道允)을 가리키며, 도운(道雲)이라고도 한다. 호는 쌍봉(雙峰)이며, 시호는 철감(澈鑑)이다. 황해도 봉산(鳳山) 출신으로, 헌덕왕 17년(825)에 당나라로 들어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에게 법을 받았으며, 문성왕 4년(842)에 귀국하였다.
[주D-079]염관(鹽官) 안 선사(安禪師) : 원문에는 ‘監官’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0에 의거하여 ‘鹽官’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제안(齊安)을 가리키며, 염관은 항주(杭州)에 있는 현(縣) 이름이다. 당나라 말기의 호법승(護法僧)으로, 지엄(智儼)에게서 배웠으며, 염관현의 해창원(海昌院)에서 강설하였다.
[주D-080]품일 선사(品日禪師) : 구산선문 가운데 도굴산파(闍崛山派)의 개조로, 범일(梵日)이라고도 하며, 시호는 통효(通曉)이다.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에 들어가 제안 선사를 참방하여 제안 선사의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이다.”라는 한마디 말에 크게 깨우치고 6년 동안 섬겼다.
[주D-081]대매(大梅) 상 선사(常禪師) : 법상(法常)을 가리킨다. 대매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그는 이곳에 호성사(護聖寺)를 짓고 종풍을 크게 떨쳤다.
[주D-082]서쪽에서 온 뜻 : 초조(初祖)인 달마(達磨)가 서천(西天)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禪法)을 전한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그 뜻을 참구(參究)하는 것이 바로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을 참구하는 것이다. 선문답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이다.
[주D-083]과두(裹頭) : 승들이 입는 가사(袈裟)로 머리를 싸매는 것으로, 선문답(禪問答)에서 자주 인용된다.
[주D-084]근본[本] : 근본은 낙(酪)을 만드는 근본인 우유(牛乳)를 뜻한다.
[주D-085]귀종(歸宗) 상 선사(常禪師) : 지상(智常)을 가리킨다. 귀종은 여산(廬山)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086]상주(常住) : 이 부분이 원문에는 ‘常任’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10권에 의거하여 ‘常住’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87]기봉(機鋒) : 기(機)는 수행에 따라 얻은 심기(心機)이고, 봉(鋒)은 심기의 활용이 날카로운 모양을 뜻한다. 선객(禪客)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의 예민한 활용을 말한다.
[주D-088]신라(新羅) 증 선사(證禪師) : 대증 선사(大證禪師)를 가리킨다.
[주D-089]신라 척 선사(陟禪師) : 홍척 선사(洪陟禪師)를 가리킨다. 홍직 선사(洪直禪師)라고도 한다.
[주D-090]천룡화상(天龍和尙) : 중국 항주(杭州)의 승으로, 명주(明州) 대매산(大梅山) 법상 선사(法常禪師)의 법을 이어받았다.
[주D-091]앙산(仰山) 적 선사(寂禪師) : 혜적(慧寂)을 가리킨다. 앙산은 그의 호이며, 위앙종(潙仰宗)의 개조로, 대앙산(大仰山)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주D-092]오관산(五冠山) 순지 선사(順支禪師) : 오관산은 장단(長湍) 주위에 있는 산이다. 순지는 헌안왕(憲安王) 3년(859)에 당나라에 가서 혜적(慧寂)에게서 법을 받았으며, 그의 시호(諡號)가 요오 선사(了悟禪師)이다.
[주D-093]불자(拂子) : 원문에는 ‘佛子’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3에 의거하여 ‘拂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불자는 불가에서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터는 데 쓰는 도구이다.
[주D-094]임제(臨濟) 현 선사(玄禪師) : 의현(義玄)을 가리킨다. 임제종(臨濟宗)의 개조(開祖)로, 황벽 희운(黃蘗希運)의 제자이며, 임제는 그의 호이다.
[주D-095]석상(石霜) 저 선사(諸禪師) : 경저(慶諸)를 가리키며, 석상은 그의 호이다.
[주D-096]행적 선사(行寂禪師) : 문성왕(文聖王) 10년(848)에 당나라에 건너가 15년 동안 명산을 돌아다니면서 수도하였으며, 석상 경저에게서 심인(心印)을 받아 귀국하여 효공왕(孝恭王) 때 국사(國師)가 되었다. 시호는 낭공대사(朗空大師)이다.
[주D-097]동산(洞山) 개 선사(价禪師) :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를 가리킨다. 동산은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서주부(瑞州府) 고안현(高安縣)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동개가 이 산의 보리원(普利院)에서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주D-098]구봉(九峯) 건 선사(虔禪師) : 도건(道虔)을 가리킨다. 구봉은 균주(筠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099]운개(雲蓋) 원 선사(元禪師) : 지원(志元)을 가리킨다. 운개는 담주(潭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00]대인(大人) : 부처나 보살을 가리킨다.
[주D-101]자라장(紫羅帳) 속 : 자라장은 자색의 비단으로 된 휘장으로, 귀인이 있는 곳에 치는 장막이다. 선어(禪語)에서는 이를 가장 존귀한 곳인 제왕(帝王)의 거처를 뜻하는바, 일반 사람이 엿볼 수 없는 제왕의 거처를 상식적(常識的)인 사고가 미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경지에 비유한 것이다.
[주D-102]12시 : 하루 24시간을 말한다. 예전에는 하루를 12시로 나누었다.
[주D-103]패엽(貝葉) : 불경(佛經)을 가리킨다. 패다라(貝多羅) 나무의 잎에다가 쓴 경문(經文)을 말한다.
[주D-104]동관(潼關) : 원문에는 ‘潼開’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7에 의거하여 ‘潼關’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동관은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관문(關門)의 이름이다.
[주D-105]설봉(雪峯) 존 선사(存禪師) : 원문에는 ‘雲峯’으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19에 의거하여 ‘雪峯’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의존(義存)을 가리킨다. 설봉은 복주(福州)에 있다.
[주D-106]운거(雲居) 응 선사(膺禪師) : 도응(道膺)을 가리킨다. 운거는 그의 호이면서 동시에 강서성(江西省) 건창(建昌)에 있는 산 이름으로, 도응이 이곳에 주석하여 동산(洞山)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다.
[주D-107]경유 선사(慶猷禪師) :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활동하였던 승려로, 시호는 법경(法鏡)이다.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운거 도응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였으며, 고려 태조는 그를 왕사(王師)로 섬겼다.
[주D-108]방(棒) : 막대로 때리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종장(宗匠)이 사람을 대할 때 방으로 치거나 대갈(大喝)을 발하는데, 방은 덕산(德山)에게서 시작되고 갈(喝)은 임제(臨濟)에게서 나왔다.
[주D-109]백조(白兆) 원 선사(圓禪師) : 지원(志圓)을 가리킨다. 백조는 안주(安州)에 있는 산 이름이다.
[주D-110]장경(長慶) 능 선사(稜禪師) : 혜릉(慧稜)을 가리키며, 장경은 그의 호이다. 설봉(雪峯) 의존(義存)의 제자로 초경(招慶)과 장경(長慶) 두 곳에서 개당(開堂)하여 설법하였다.
[주D-111]홍주(洪州) 백장산(百丈山) : 강서성(江西省) 남창부 봉신현에 있는 산으로, 대웅산(大雄山)이라고도 하며, 백장대사(百丈大師)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만들어서 선문(禪門)의 의식(儀式)을 제정한 곳이다.
[주D-112]명조(明照) 안 선사(安禪師) : 동산(洞山) 양개 선사(良价禪師)의 법사(法嗣)인 소산(疏山) 광인 선사(光仁禪師)의 법사를 이었다. 《경덕전등록》 권17에 그의 문답(問答)이 실려 있다.
[주D-113]영주(郢州) 파초산(芭蕉山)의 혜청 선사(慧淸禪師) : 앙산(仰山) 남탑(南塔) 광용 선사(光涌禪師)의 법사로, 《경덕전등록》 권12에 그의 문답이 실려 있다.
[주D-114]그 뒤에 …… 발각되었다 : 일설에는 김대비가 장정만(張淨滿)에게 돈을 주고 조계(曹溪)의 육조탑(六祖塔)에서 육조대사의 머리를 훔쳐 내어 해동으로 돌아와 공양하였는데, 지금의 지리산 쌍계사(雙溪寺) 탑전(塔殿)에 봉안한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그것이라고 한다.
[주D-115]위령선(威靈仙) :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만목(蔓木)으로, 여름에는 희고 큰 꽃이 피는데, 주로 인가 부근에 관상용으로 심는다. 이 위령선의 뿌리는 한의(韓醫)에서 담이나 풍(風), 습(濕) 등을 다스리는 데 쓴다.
[주D-116]도신(道侁) : 신라 말기에 활동하면서 《도선비기(道詵秘記)》를 지은 도선(道詵)을 가리킨다.
[주D-117]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 : 일행은 당나라의 승으로, 밀교(密敎)를 익혀서 지리법에 능통했다고 한다. 일행이 죽은 해는 727년으로, 도선은 그보다 대략 2백 년 뒤에 활동하였으며, 또한 당나라에는 가지 않았는바, 도선이 일행의 지리법을 직접 전수받은 것은 아니다.
[주D-118]법중(法衆) : 불법(佛法)을 따르는 중승(衆僧)을 가리키는바, 출가한 오중(五衆)을 모두 칭한다.
[주D-119]제관(諦觀) : 고려의 승으로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었다. 《천태사교의》는 각지에 유포되어 일본에도 전해졌다. 그가 천태종의 서적을 중국에 전하여 천태교가 중국에서는 다시 유행하였으나, 그가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고려 천태종의 맥은 끊기게 되었는데, 의천(義天)이 중국에 가서 천태교를 배운 다음 고려로 돌아와 천태종을 수립하였다.
[주D-120]오월왕(吳越王) 숙(俶) : 오월의 창건자인 전류(錢鏐)의 손자로, 자가 문덕(文德)이고 시호가 충의(忠懿)이다.
[주D-121]적 법사(寂法師) : 중국 천태종(天台宗)의 중흥조(中興祖)인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송고승전(宋高僧傳)》 권7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주D-122]나계(螺溪) : 나계 존자(螺溪尊者) 의적(義寂)을 가리킨다.
[주D-123]교관(敎觀) :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의 두 문(門)을 말한다. 교상은 이론이고 관심은 실천의 뜻이다. 교관이문(敎觀二門), 교문관문(敎門觀門)이라고도 한다.
[주D-124]인효왕(仁孝王) : 인효(仁孝)는 문종(文宗)의 시호(諡號)이다. 문종은 묘호(廟號)이다.
[주D-125]우세 승통(祐世僧統) : 우세는 “넓은 지혜로 가르침의 근본을 열고 큰 진리로 세상을 돕는다.[廣智開宗弘眞佑世]”라는 뜻의 별호이고, 승통은 승려를 다스리는 고위 직책이다.《金崙世, 東師列傳, 廣濟院, 1991, 64쪽 주》
[주D-126]원우(元祐) 초 : 《동사강목》 제7 하에는 송 신종 원풍(元豐) 8년(1085, 선종2) 4월에 왕의 아우 왕후(王煦)가 도망하여 송나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주D-127]전당(錢塘)의 혜인원(惠因院) : 이때 혜인원에 정원 선사(淨源禪師)가 있었다. 송 철종이 의천에게 법을 가르칠 만한 승을 천거하게 하자, 중국 불교계에서 동경(東京) 각엄사(覺嚴寺)의 유성 선사(有誠禪師)를 천거하였는데, 유성 선사가 다시 전당 혜인원의 정원 선사를 자기 대신 천거하였다.
[주D-128]불인(佛印) : 이름은 요원(了元)이며, 자는 각로(覺老)이다. 개선(開先) 선섬(善暹)의 법을 이었으며, 소식(蘇軾)과 서로 시를 지어 화답하기도 하였다.
[주D-129]제방(諸方) : 여러 종파의 승려들을 말한다.
[주D-130]정원(淨源) : 북송의 승으로, 호는 잠수(潛叟)이고, 자는 백장(伯長)이다. 항주(杭州)의 혜인원(惠因院) 등에 있었으며, 의천(義天)에게서 금으로 쓴 《화엄경(華嚴經)》 세 가지 역본(譯本) 180권을 받아서 장경각(藏經閣)을 짓고 봉안하였다.
[주D-131]수교(首敎) : 《동사열전(東師列傳)》 권1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에, “표문을 올려서 현수의 가르침을 전해 주기를 청하였다.[乞傳賢首敎]” 하였는바,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 즉 현수 법사(賢首法師)의 가르침을 말한다.
[주D-132]오월(吳越)의 충무왕(忠武王) : 오월은 오대(五代) 시대 때 10국 가운데 하나이며, 충무왕은 오월을 개국한 전류(錢鏐)를 가리킨다.
[주D-133]진수 법사(晉水法師) : 정원 선사(淨源禪師)를 말한다. 진수는 그의 호이다.
[주D-134]마명대사(馬鳴大士) : 중인도(中印度) 마갈타국 사람으로, 부처가 죽은 지 6백 년 뒤에 세상에 나온 대승(大乘)의 논사(論師)이다. 북쪽으로 월지국(月支國)에 들어가서 대승 불교(大乘佛敎)를 전하였으므로 대승 불교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 《불소행찬(佛所行讚)》 등이 있다.
[주D-135]종(宗)과 교(敎) : 종은 종지(宗旨), 곧 불교의 근본 취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선종(禪宗)을 뜻하며, 교는 경론(經論)에 의해 표현한 언교(言敎)의 의미로 교종(敎宗)을 뜻한다.
[주D-136]오교(五敎) : 신라 불교가 한창 성하였을 때 경교(經敎)를 공부하던 불교의 다섯 가지 종파(宗派)로, 열반종(涅槃宗), 남산종(南山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 법성종(法性宗)을 말한다.
[주D-137]고련수(苦楝樹) : 멀구슬나무로, 전단(旃檀)을 말한다.
[주D-138]천룡(天龍) 기대사(機大師) : 중기(重機)를 가리킨다. 천룡은 산 이름이며, 청원(淸原) 행사(行思)의 법손(法孫)이다.
[주D-139]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140]보문(普門) 변 선사(辨禪師) : 원문에는 ‘普明辨禪師’로 되어 있는데, 《경덕전등록》 권26에 의거하여 ‘普門辨禪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희변 선사(希辨禪師)를 가리키며, 보문은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사찰의 이름이다.
[주D-141]육왕(育王) 심 선사(諶禪師) : 개심(介諶)을 가리킨다. 육왕은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에 있는 산 이름으로, 개심이 이곳에 있는 광리사(廣利寺)에 주석하였다.
[주D-142]탄연 국사(坦然國師)가 …… 되었다 : 탄연은 고려 의종(毅宗) 때의 승으로,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堂語句)를 중국 광리사의 개심(介諶)에게 써 보냈더니 찬탄하면서 가사(袈裟)와 의발(衣鉢)을 전해 왔다. 그의 속성은 손씨(孫氏)로, 여기에서 왕위를 버리고 사문이 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 말한 것이다.
[주D-143]경장(慶長) : 원문에는 ‘長慶’으로 되어 있는데, 《동양연표(東洋年表)》에 의거하여 ‘慶長’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144]수희(隋喜) : 남의 착한 일을 보고 따라서 기뻐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오회(五悔) 가운데 하나이다.
숙종 7년 신유(1681,강희 20)
 5월11일 (계해)
강원도 여러 고을에서 지진이 일어나다

강원도(江原道)에서 지진(地震)이 일어났는데, 소리가 우뢰가 같았고 담벽이 무너졌으며, 기와가 날아가 떨어졌다. 양양(襄陽)에서는 바닷물이 요동쳤는데, 마치 소리가 물이 끓는 것 같았고, 설악산(雪岳山)의 신흥사(神興寺) 및 계조굴(繼祖窟)의 거암(巨巖)이 모두 붕괴[崩頹]되었다. 삼척부(三陟府) 서쪽 두타산(頭陀山) 층암(層巖)은 옛부터 돌이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모두 붕괴되었다. 그리고 부(府)의 동쪽 능파대(凌波臺) 수중(水中)의 10여 장(丈) 되는 돌이 가운데가 부러지고 바닷물이 조수(潮水)가 밀려가는 모양과 같았는데, 평일에 물이 찼던 곳이 1백여 보(步) 혹은 5, 60보 노출(露出)되었다. 평창(平昌)·정선(旌善)에도 또한 산악(山岳)이 크게 흔들려서 암석(巖石)이 추락하는 변괴(變怪)가 있었다. 이후 강릉(江陵)·양양(襄陽)·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정선(旌善) 등의 고을에서 거의 10여 차례나 지동(地動)하였는데, 이때 8도(八道)에서 모두 지진이 일어났다.
【원전】 38 집 529 면
【분류】 *과학-지학(地學)
명미당집(明美堂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명미당집(明美堂集)
판심제 명미당집(明美堂集)
간종 활자본(鉛活字)
간행년 1917년 간행
권책 20권 8책
행자 10행 24자
규격 18.8×11.8(cm)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도서번호 위창古3648-文62-1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49
 저자
성명 이건창(李建昌)
생년 1852년(철종 3)
몰년 1898년(고종 35)
 봉조(鳳朝), 봉조(鳳藻)
 명미당(明美堂), 영재(寧齋), 담녕재(澹寧齋), 결당거사(潔堂居士)
본관 전주(全州)
특기사항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 등과 교유
 가계도
 李是遠
 判書
 사기집(沙磯集)
 李象學
 郡守
 坡平尹氏
 尹滋九의 女
 李建昌
 
 達城徐氏
 徐長淳의 女
 結城張氏
 張仁根의 女
 李範夏
 
 鄭萬朝의 女
 
 李建昇
 主事
 鄭基晩의 女
 
 李建冕
 
 李圭聞의 女
 
 側室
 
 女
 
 金容吉
 
 女
 
 鄭商容
 

기사전거 : 李是遠行畧ㆍ李象學行狀ㆍ李象學妻坡平尹氏行略ㆍ李建昌妻達城徐氏墓誌銘(李建昌 撰), 韓國系行譜, 全州李氏德泉君派譜 등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철종31852임자咸豐21江華島 沙曲에서 태어나다.
철종121861신유咸豐1110四書三經에 통하다.
고종31866병인同治515文科에 급제하다.
고종51868무진同治7175월, 假注書가 되다. ○ 〈過說〉을 짓다.
고종71870경오同治9193월, 주서가 되다. ○ 12월, 姜瑋의 「聽秋閣收艸」에 발문을 쓰다.
고종81871신미同治10201월,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체직되다. ○ 7월, 修撰이 되다. ○ 9월, 獻納이 되다. ○ 가을, 全家가 서울에서 10리 떨어진 湖垌에 寓居하다.
고종91872임신同治11215월, 헌납, 수찬이 되다. ○ 9월, 교리가 되다. ○ 10월, 持平이 되다.
고종101873계유同治12221월, 헌납이 되다. ○ 3월, 부인 達城徐氏의 상을 당하다.
고종111874갑술同治13231월, 암행어사에 뽑히다. ○ 5월, 병조 정랑으로 彗星을 관찰하다. ○ 7월, 冬至使의 書狀官이 되다. ○ 10월, 燕京에 가다.
고종121875을해光緖1244월, 귀국하다. ○ 9월, 司書가 되다.
고종131876병자光緖2257월, 홍문관 응교가 되다. ○ 가을, 玉堂에 직숙하면서 〈瀛洲夢游歌〉를 짓다. ○ 11월, 사헌부 장령이 되다.
고종141877정축光緖3266월, 홍문관 수찬이 되다. ○ 가을, 충청우도 암행어사가 되다.
고종151878무인光緖4274월, 충청 감사 趙秉式의 貪汚를 書啓하다. ○ 6월, 암행어사 때에 金鶴鉉을 杖殺했다는 이유로 關西 碧潼郡에 유배되다.
고종161879기묘光緖5282월, 閔泳翊의 도움으로 유배에서 풀려나다.
고종171880경진光緖6293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 10월, 사간원 사간이 되다.
고종181881신사光緖7304월, 問事郎廳이 되다.
고종191882임오光緖8316월, 書狀官이 되다. ○ 7월, 대원군의 행차 때 護行官이 되다. ○ 8월, 통정대부가 되다. 특명으로 知製敎의 직함을 영구히 겸대하다. ○ 경기 암행어사가 되다.
고종201883계미光緖932여름, 암행어사에서 돌아오다.
고종211884갑신光緖10331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다. ○ 3월, 모친상을 당하다. 서울에서 江華로 返葬하다.
고종231886병술光緖1235〈韓狗篇〉을 짓다.
고종241887정해光緖13363월, 형조 참의가 되다. ○ 8월, 병조 참지가 되다.
고종251888무자光緖14371월, 부친상을 당하다. 梁山에서 返柩하다.
고종281891신묘光緖174010월, 한성부 소윤이 되다. ○ 11월, 錢貨의 유통 폐단과 외국인의 주택 구입의 문제점을 논하는 상소를 올리다.
고종291892임진光緖1841왕명으로 咸興에 가서 亂民을 按覈하다. 돌아와서 承旨가 되다.
고종301893계사光緖19424월, 兩湖의 邪匪를 토벌할 것과 아울러 陳勉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 8월, 이 일로 全羅道 寶城에 유배되다.
고종311894갑오光緖2043봄, 유배에서 풀려나다. ○ 嘉善大夫에 오르다. ○ 6월, 죽은 季弟 李建冕을 위해 〈謙山篋藁敍傳〉을 짓다. ○ 7월, 공조 참판이 되다. ○ 갑오개혁으로 새 관제가 시행되어 여러 차례 協辦, 特進官, 侍講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 ○ 鄭文孚의 「農圃集」 續集 跋文을 쓰다.
고종321895을미光緖2144겨울, 斷髮令이 내리자 海島로 피신하다.
고종331896병신光緖22453월, 海州府 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세 차례 상소하여 사양하다. 원래의 관직으로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이 내리고 이어 古群山島에 유배되었다가 한 달 만에 풀려나다. ○ 〈明美堂詩文集敍傳〉을 짓다.
고종341897정유光武1463월, 특명으로 징계를 사면받다.
고종351898무술光武2476월 18일, 졸하다.
1912임자崔南善이 光文社에서 「黨議通略」을 간행하다.
1917정사12월, 金澤榮이 南通 翰墨林書局에서 문집을 간행하다.

기사전거 : 明美堂詩文集敍傳ㆍ李象學行狀(李建昌 撰),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日省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병인양요 때에 순절한 忠貞公 李是遠의 손자로, 15세에 文科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소유하였으며 문장에 뛰어나 金澤榮에 의해 麗韓九家의 한 사람으로 뽑혔고,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격은 암행어사로 있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少論에 속하며 江華에 살면서 陽明學을 家學으로 물려받은 이른바 江華學派에 속한다. 明美堂은 저자의 堂號로 조부 李是遠이 순절할 때 유언으로 程子의 ‘質美者明得盡[기질이 깨끗한 사람은 도리를 잘 안다]’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저자를 권면한 데에서 유래한 말이다.
저자의 시문은 弟 李建昇이 저자의 사후에 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수집 편차하여 산삭한 다음 金澤榮에게 刪正을 부탁하여 定稿本을 만들었다. 그 후 영남의 선비 河謙鎭, 李曄, 安鎭宇, 文樸, 尹在鉉과 호남의 선비 黃瑗, 李炳浩, 安鍾鶴 등이 저자의 유고를 인멸시킬 수 없다 하여 출판 비용을 갹출하고, 김택영에게 校讎를 부탁하여 1917년 12월에 김택영이 中國 南通의 翰墨林書局에서 20권 8책의 연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위창古3648-文62-13), 성균관대학교 존경각(D3B-348),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1468)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978년에 「明美堂集」과 「黨議通略」을 합본하여 亞細亞文化社에서 「李建昌全集」上下 2책을 간행하였고, 1984년에는 명미당전집 편찬위원회가 「明美堂全集」 2책을 宣文出版社에서 간행하였다.
이 밖에 저자의 저술로 「당의통략」과 「讀易隨記」가 있는데, 「당의통략」은 崔南善이 1912년에 저자의 再從弟인 李建芳이 所藏한 寫本 2책을 저본으로 朝鮮光文會에서 新活字로 간행한 것이다. 「독역수기」 1권은 만년에 易學을 연구하며 저술한 것으로 간행되지 못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917년 중국 한묵림서국에서 연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金澤榮 撰), 跋(李建昇ㆍ金學權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서는 20권 8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張謇이 쓴 ‘明美堂集’ 書簽, 1917년 金澤榮이 쓴 서문이 있으며, 각 권의 앞에는 목록이 있다.
권1에는 賦 4편이 실려 있다. 〈淸川江賦〉는 1879년 2월에 碧潼 유배지에서 석방되어 돌아오는 도중 청천강에 이르러 소회를 적은 것이다.
권2~6은 시로서 시모음집의 형태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2에는 閑居收草 11제, 北游詩草 53제, 俊游餘草 18제, 直指行卷 29제가 실려 있다. 북유시초는 1874년 10월에 冬至書狀官으로서 燕京으로 출발하여, 1875년 4월 귀국할 때까지 지은 시를 모은 기행시이다. 준유여초는 1876년부터 1877년까지 지은 시를 모은 것으로, 첫 번째 시의 제목인 ‘준유’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중 〈瀛洲夢游歌〉는 옥당에서 직숙하던 밤에 꿈을 꾼 내용을 적은 것이다. 직지행권은 주로 1877년과 1878년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있을 때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이 중 〈田家秋夕〉은 농촌 현실을 견문하고 지은 愛民詩이며, 〈落花巖〉, 〈伐吾龍〉 등은 百濟의 멸망에 대한 소회를 적은 懷古詩이다.
권3에는 西征紀恩集 45제, 南樓吟草 23제, 又直指行卷 12제가 실려 있다. 서정기은집은 1878년 6월에 평안도 碧潼郡으로 유배되었다가 1879년 석방되어 강화도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이 중 〈小荷返虞日作〉의 제목에, 경진년(1880)과 신사년(1881)의 시는 없어졌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 남루음초는 1882년에 지은 시를 모은 것으로, 海印寺, 金烏山 採薇亭에 대한 시들이 있다. 우직지행권은 1882년부터 1883년까지 경기 암행어사로 있을 때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권4에는 少休收草 36제, 海上吟藁 39제가 실려 있다. 소휴수초는 1883년부터 1887년까지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이 중 〈韓狗篇〉은 韓氏家에서 기르던 개의 충절을 기린 장편시로 한구와 같은 충성스런 인물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高靈歎〉은 申叔舟의 懷古와 自歎의 형식으로 구성된 樂府詩로서, 東史를 읽고 樂府 1편을 지어 달라는 家弟의 요청으로 지은 것이다. 해상음고는 1890년부터 1891년까지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이 중 〈孫石墳〉은 음력 10월 20일에 부는 매서운 바람인 孫石風 일명 손돌풍에 얽힌 고사를 읊은 시이다. 손석은 고려 때 江華의 뱃사공으로 피란하는 임금을 태우고 강화로 가다가 배 안에서 의심을 사서 억울하게 斬刑을 당했는데, 손석이 죽은 10월 20일이면 어김없이 大風이 분다는 俗說이 있다.
권5에는 北行吟卷 15제, 南遷紀恩集 47제, 亂藁 29제가 실려 있다. 북행음권은 1892년 咸興에서 백성들의 소요가 일어나 왕명을 받고 按覈하러 갔을 때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남천기은집은 1893년 言事로 전라도 寶城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어 돌아올 때까지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여기에는 李沂가 黃玹과 文社를 결성하여 白雲山에서 독서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어 준 시, 사면을 받고 돌아오는 중에 松廣寺에 묵었을 때의 시 등이 있다. 난고는 1895년부터 1896년까지 지은 시를 모은 것으로, 綺堂 鄭元夏, 汶園 洪承憲과 수창한 시, 斷髮令 소식을 듣고 지은 시 등이 있다.
권6에는 碧城紀行 44제, 補遺 21제, 再補 12제가 실려 있다. 벽성기행은 1896년 海州府 觀察使에 부임하여 곧 면직되고 古群山島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될 때까지의 지은 시를 모은 것이다. 이 중 〈讀延安府志……〉는 「延安府志」를 읽고 李廷馣의 延安城 死守에 대한 사실을 요약하여 李恒福의 延安大捷碑에서 빠뜨린 부분을 언급한 시이다. 이 밖에 興宣大院君의 서거 소식을 듣고 지은 五律 10수 등이 있다. 보유는 문집의 편차가 끝난 뒤에 수집한 시를 모은 것이며, 재보는 보유를 편차한 뒤에 수집한 시를 모은 것이다. 보유와 재보는 대부분 시 제목의 아래에 이 시가 본집의 어느 위치에 수록되는 것이 합당한지를 주석으로 달고 있다. 〈古次雜絶〉은 江華의 史蹟에 대해 七言律詩 16수로 읊은 것이다.
권7에는 疏 8편이 실려 있다. 〈擬論時政疏〉는 성상께서 富國强兵에 뜻을 두고 국가 제도를 개혁할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대사간 재임시에 지은 것이다. 〈論錢幣房屋疏〉는 錢貨를 변통하는 폐단과 외국인의 주택 매입 폐단을 논한 것이다. 그 밖에 經筵 侍講과 海州府 觀察使를 사양하는 사직소가 실려 있다.
권8에는 書 7편이 실려 있다. 〈擬客上平津侯書〉는 客이 公孫弘에게 올리는 편지를 假設하여 지은 擬書이다. 〈答友人論作文書〉는 글을 짓는 것은 달리 秘法이 있는 게 아니라 많이 읽고 많이 짓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서, 실제 글을 짓는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 族丈 李象秀, 舍弟 李建昇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권9에는 書 5편, 序 14편이 실려 있다. 書는 洪承憲에게 보낸 편지가 3편인데, 漢나라의 신하로서 曹操의 신하가 된 荀彧의 인물평을 논한 편지와 出處에 대해 논한 편지 등이다. 序는 湖南伯으로 나가는 鄭範朝, 과거에 응시하는 黃玹, 燕京에 가는 金澤榮, 季弟 李建冕, 北道를 안찰하는 韓章錫에게 주는 送序와 姜瑋의 「古歡堂詩收艸」, 저자의 「黨議通略」에 대한 서문 등이다. 「당의통략」은 저자의 독창적인 저작이 아니고 조부 李是遠이 지은 「國朝文獻」에서 黨爭에 관계된 내용을 뽑아 만든 것이라고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권10에는 序 9편, 記 16편이 실려 있다. 서는 李聖會와 韓應周에게 주는 送序, 釋 函溟의 「歷代紀年」, 梁居安의 「六化集」, 李震相의 「畝忠錄」, 成大鎬의 妻 宜寧南氏의 詩藁인 「貞一軒詩藁」, 南冥 曺植의 年譜에 대한 서문이다. 記는 鎭川 所屹山의 金庾信 祠堂에 대한 기문을 비롯하여 金時習의 舊居인 雪嶽山 五歲菴의 藏經閣, 通度寺의 玉蓮菴과 順天 仙巖寺의 大乘菴 重修記文 등이다.
권11에는 記 7편, 論 5편이 실려 있다. 기는 梅泉 黃玹의 서재에 대한 기문인 〈苟安室記〉, 海鶴 李沂의 서재에 대한 기문인 〈質齋記〉 등이다. 논은 朋黨의 원인을 ‘道學太重’, ‘名義太嚴’, ‘文辭太繁’, ‘刑獄太密’, ‘臺閣太峻’, ‘官職太淸’, ‘閥閱太盛’, ‘承平太久’의 여덟 가지로 분석한 〈原論〉 등이 있다.
권12에는 跋 4편, 說 9편, 書事 3편이 실려 있다. 발은 金澤榮의 「崧陽耆舊傳」, 申緯의 「紫霞詩鈔」, 李最善의 「石田集」, 鄭文孚의 「農圃集」에 대한 발문이다. 설은 허물에 대해 17세에 지은 〈過說〉을 비롯하여 인조의 생모인 仁獻王后의 服制에 대해서 논한 〈論啓運宮禮說〉, 효종이 죽자 그의 모후 趙大妃의 복제를 둘러싸고 1659년에 일어난 己亥禮訟에 대한 〈論己亥禮說〉이다.
권13에는 雜著 9편이 실려 있다. 이 중 〈易說僭疑〉는 저자의 「讀易隨記」에서 뽑은 것으로, 疑太極不應稱一, 疑五行 등 7항목으로 나누어 「易經」의 의심나는 부분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은 것이다.
권14에는 잡저 3편, 祭文 18편이 실려 있다. 〈伯夷列傳批評〉은 본문에 상세한 주석을 붙이고, 말미에는 古人의 글을 보는 방법 등 저자의 문장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면서 〈백이열전〉을 심도 있게 분석한 글이다. 제문은 季祖 李喜遠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亡妻 達城徐氏, 季弟 李建冕 등을 제사한 글, 沁都의 士民을 대신하여 丙寅洋擾 때 강화도에 침략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친 大將軍 梁憲洙를 제사한 글, 임진왜란 때 熊峙와 幸州에서 승리한 忠莊公 權慄에 대한 치제문이다.
권15에는 제문 3편, 哀辭 2편, 家傳 2편, 傳 6편이 실려 있다. 제문은 碧潼郡에 유배되었을 때 洞仙嶺의 산신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 글, 부친을 대신하여 지은 甑山縣의 祈雨祭文과 虎患 때문에 성황당 신에게 고하는 글이다. 애사는 辛未洋擾 때 강화도의 廣城堡에서 순절한 鎭撫中軍 魚在淵에 대한 것이 있는데, ‘忠壯’의 시호를 내려 충절을 기린 내용이 後書로 첨부되어 있다. 가전의 〈謙山篋藁敍傳〉은 季弟 李建冕이 죽고 나서 그의 文藁인 「正一錄」을 처음으로 본 뒤에 평소의 事行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한 글로서 1894년에 지은 것이다. 傳은 李春日, 李象秀, 安州의 妓生 百祥月, 韓成履, 靜菴 趙光祖에 대한 것이다.
권16에는 傳 4편, 銘 7편, 贊 1편이 실려 있다. 전은 金時習과 金麟厚를 立傳한 〈淸隱傳〉, 莊獻世子의 여종으로 수절하여 정조 때 守則으로 賜號된 李氏를 입전한 〈李守則傳〉, 효성스럽고 의리를 중시한 李根洙를 입전한 〈秋水子傳〉, 자신의 履歷을 상세하게 기록한 〈明美堂詩文集敍傳〉이다. 명은 烈女 石氏와 韓氏, 효자 高正鎭의 旌門銘, 景峰大師, 离峰和尙의 塔銘 등이다.
권17에는 行狀 1편, 行略 2편, 事略 3편이 실려 있다. 선친 李象學의 행장, 조부 李是遠의 행략, 모친 坡平尹氏의 행략과 朴齊敎, 鄭允容, 桐溪 鄭蘊의 사략이다.
권18에는 事略 2편, 墓表 1편, 家誌 3편이 실려 있다. 六臣과 李匡德의 사략, 慶州金氏二世三墓表, 丙寅洋擾 때 殉節한 조부 이시원과 從祖父 李止遠의 묘지명 등이다.
권19에는 墓誌銘 12편이 실려 있다. 亡妻 徐氏, 許灌, 金憲基, 崔啓翁, 李德言, 李命允, 梁憲洙, 趙徹林, 姜瑋, 鄭文升, 徐有喬 등에 대한 것이다.
권20에는 墓碣銘 14편, 補遺 2편이 실려 있다. 묘갈명은 李最善, 李寅馪, 李悌源, 金序, 李希夔, 洪祐獻, 洪祐命, 鄭箕錫, 李重允, 林愼源, 朴熙命, 曺命勳에 대한 것과 〈洪州洪氏世葬阡碑銘〉, 〈李志壽墓碣陰記〉이다. 보유는 李炳浩의 墓舍인 永慕齋에 대한 기문과 古歡堂 姜瑋의 「孫武子批評」에 대한 발문이다.
권미에는 1917년에 쓴 李建昇의 발문과 金學權, 安鍾鶴, 李爗의 발문이 있다.

필자 : 김기빈(金圻彬)


牧隱文藁卷之六
 
負暄堂記 a_005_044c


雪嶽上人。懶翁弟子也。師之卓錫神光。移于圓寂。于露骨。于淸平。于五臺。而住松廣。自松廣而檜岩。由檜岩而瑞雲,吉祥諸山。然後復住檜岩也。上人皆從之。朝夕熏灸。頗有所得。其與一宿覺雖曰異調。然非日用而不知者所敢望也。求予名其堂。予之▣▣神勒。上人在群中。目其貌。秀而靜。耳其言。簡而當。予心奇之矣。故不復讓。乃以負暄塞責而告之曰。師之師號師以雪嶽。蓋取千山鳥飛絶。萬徑人蹤滅之氣象也。005_044d纖塵不立。全體獨露。迥出雲表。非陰陽寒暑之所可得而凌轢也明矣。然血氣之所在。性命之所存。淡飧以實其腹。麤衣以掩其體。則雖絶學無爲者。亦所不免也。吾想雪嶽冬居。甁水凍。爐火灰。井氷合。寒洌甚矣。朝日出高峯入短簷。溫溫乎其可親也。負之暄目氣舒而神融。雖犀帷鳳炭深閨之燠。無以過之。扁之堂。不爲虛美矣。夫至道無形。因物可見。而物與我又非二也。雪則寒。日則暄。暄氣舒。寒氣縮。非獨吾身也。天地之道也。而其至理存乎其間。心焉而已矣。心之微雖曰方寸。至道之所在也。故不以寒熱故有小變。005_045a堂堂全體。蓋天蓋地矣。上人宴坐所求。不在斯歟。不在斯歟。予之熱惱熾甚。對師煎茶。未知何日也。

 

 

 

 

 

 

 

 

 

 

 

 

 

 

 

牧隱文藁卷之六
 
負暄堂記 a_005_044c


雪嶽上人。懶翁弟子也。師之卓錫神光。移于圓寂。于露骨。于淸平。于五臺。而住松廣。自松廣而檜岩。由檜岩而瑞雲,吉祥諸山。然後復住檜岩也。上人皆從之。朝夕熏灸。頗有所得。其與一宿覺雖曰異調。然非日用而不知者所敢望也。求予名其堂。予之▣▣神勒。上人在群中。目其貌。秀而靜。耳其言。簡而當。予心奇之矣。故不復讓。乃以負暄塞責而告之曰。師之師號師以雪嶽。蓋取千山鳥飛絶。萬徑人蹤滅之氣象也。005_044d纖塵不立。全體獨露。迥出雲表。非陰陽寒暑之所可得而凌轢也明矣。然血氣之所在。性命之所存。淡飧以實其腹。麤衣以掩其體。則雖絶學無爲者。亦所不免也。吾想雪嶽冬居。甁水凍。爐火灰。井氷合。寒洌甚矣。朝日出高峯入短簷。溫溫乎其可親也。負之暄目氣舒而神融。雖犀帷鳳炭深閨之燠。無以過之。扁之堂。不爲虛美矣。夫至道無形。因物可見。而物與我又非二也。雪則寒。日則暄。暄氣舒。寒氣縮。非獨吾身也。天地之道也。而其至理存乎其間。心焉而已矣。心之微雖曰方寸。至道之所在也。故不以寒熱故有小變。005_045a堂堂全體。蓋天蓋地矣。上人宴坐所求。不在斯歟。不在斯歟。予之熱惱熾甚。對師煎茶。未知何日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