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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옹 최해 선생 관련 자료 (나의공부방 )

아베베1 2012. 10. 15. 10:05



                   졸옹 최해 선생이 지으신 고서 (고려대박물관에 보관중)  


高麗史節要 卷之二十四
 忠肅王
[庚申七年 元 延祐七年]

春正月,辛巳朔,元,來告日當食,停賀正禮,百官素服以待,不食,癸未,乃行賀禮。○遣摠部典書,尹碩,如元賀千秋節,吉昌君權準,賀聖節。○二月,郞將玉純,自元來報帝崩,百官會哭于紫門,遣檢校評理秦良弼,如元陳慰。○王,微行獵于郊。○三月,上王,承皇太后旨,命刷宦者伯顏禿古思等六人所奪土田臧獲,歸其本主,伯顏禿古思,自宮爲閹,因緣事仁宗皇帝藩邸,佞險多不法,上王深嫉之,伯顏禿古思知之,思有以中傷之,以仁宗及皇太后,待上王厚,不得發,嘗無禮於上王,上王,請於太后,杖之,怨恨益深,及仁宗崩,太后亦退居別宮,禿古思益無所畏,厚啗八思吉,百計誣譖之。○遣評理金廷美,如元賀登極。○夏四月,以權溥,爲僉議政丞,金利用,爲贊成事,趙雲卿,李光逢,爲評理。○元,遣禮部郞中忽剌出,來頒卽位詔。○五月,上王復請於帝,降香江南,蓋知時事將變,冀以避患也,行至金山寺,帝遣使急召,令騎士擁逼以行,侍從臣僚,皆奔竄,興禮君朴景亮,遂安君李連松,仰藥而死,蓋伯顏禿古思方用事,恐王不免也。○六月,遣大護軍尹吉甫,如元獻鷂。○秋七月,以蔡洪哲,爲平康君,崔誠之,判民部,金廷美,趙延壽,爲贊成事,元忠,爲評理,金元祥,爲三司使,尹莘傑,柳墩,爲密直使,李齊賢,知密直司事,鄭允興,爲密直副使。○遣贊成事金廷美,如元問上王起居。○八月,元,遣使命復給伯顏禿古思田民,且求童女火者。○改監試爲擧子試,右代言許富,掌是試,取鄭乙輔等八十餘人,富不解文字,唯取榜頭一人,其餘不分優劣,以坼名先後書之,人皆笑之。○王,微行,畋于近郊。○九月,塑文宣王像,王出銀甁三十,以助其費,宰樞皆出幣,助之。○上王,還至大都,帝命中書省,差官護送本國,安置,王,遲留不卽發。○賜崔龍甲等三十三人及第,李齊賢,朴孝修,所取也,王嘉孝修淸白,賜銀甁五十,米百石,令辦學士宴。○丁亥,幸平州溫井,戊戌,百官迎謁中門,判官趙文瑾,喝于駕前,馬驚,王,怒命執之,百官皆走,自後微行,見人則輒令歐之。○冬十月,遣丹陽府注簿安軸,長興庫崔瀣,司憲糾正李衍宗,應擧于元,瀣遂中制科。○元下上王于刑部,旣而祝髮,置石佛寺。○十一月,以金利用,都僉議政丞吳潛,爲贊成事,尹碩,爲密直副使。○遣大護軍鄭績,如元獻童女,尹碩,郭惟堅,問上王起居。○十二月,元,流上王于吐蕃,撒思結之地,去京師萬五千里,隨從宰相崔誠之等,皆逃匿不見,唯直寶文閣朴仁幹,前大護軍張元祉等十八人,從至流所,伯顏禿古思,讒訴不已,禍幾不測,賴丞相拜住,營救得免。○遣政丞金利用,如元進方物,又遣張沅,尹莘係,獻盤纏于上王。○以全英甫,爲密直副使。○百官,上書中書省,訟上王之冤。○大集僧徒于旻天寺,爲上王祈禱。○復置政房,以代言安珪,掌銓注,右常侍林仲沇,議郞曹光漢,應敎韓宗愈等,參之。



 가정집 잡록
이중보(李中父)가 사명을 완수하고 원나라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


한림 이중보가 정동행성에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즈음에 나에게 들러 하직을 고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진사과(進士科)의 시험을 통해서 인재를 뽑는 것은 본래 당나라 때에 성행하였다. 장경(長慶) 초기에 김운경(金雲卿)이 최초로 신라 빈공(賓貢)의 신분으로 두사례(杜師禮)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로부터 시작해서 천우(天祐) 말년에 이르기까지 빈공을 대상으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한 자는 모두 합쳐서 58인이었고, 오대(五代)의 양(梁)과 당(唐) 때에는 또 32인이 나왔는데, 대개 발해(渤海)의 제번(諸蕃) 출신인 10여 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사람들 모두가 동방의 인사들이었다.
우리 고려에서도 일찍이 송나라에 인재를 천거하여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그 결과 순화(淳化) 연간에 손하(孫何)가 주관한 과거에서 왕빈(王彬)과 최한(崔罕)이 급제하였고, 함평(咸平) 연간에 손근(孫僅)이 주관한 과거에서 김성적(金成績)이 급제하였고, 경우(景祐) 연간에 장당경(張唐卿)이 주관한 과거에서 강무민(康撫民)이 급제하였다. 정화(政和) 연간에는 또 황제가 친히 시험을 보여 권적(權適)과 김단(金端) 등 4인에게 특별히 상사 급제(上舍及第)를 내렸다. 이를 통해 동방에 대대로 인재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본래 과거를 거행할 때마다 별도로 치르는 시험으로서 급제자 명단의 끄트머리에 이름을 덧붙일 뿐 정식으로 급제한 사람 축에 끼이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제수하는 것을 보더라도 낮고 한산한 관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어떤 때는 관직도 없이 그냥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거룩한 원나라에서는 천하의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며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에, 인재를 등용할 때에도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동방의 인사들이 중원의 준수한 인사들과 나란히 응시하여 급제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자가 이미 여섯 명이나 된다.
중보가 맨 마지막에 나오긴 하였으나 우수한 성적으로 뽑혀서 조정의 관직을 제수받았고, 그 영예가 양친에게까지 미쳐서 모두 은명(恩命)을 입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영광스럽게 조서를 받들고 고국에 사신으로 와서 고당(高堂)의 모친을 뵙고 선영(先塋)에 분황(焚黃)을 하여 살아 계신 분이나 돌아가신 분 모두에게 영예가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중보가 득의양양하게 고향에 돌아온 것이야말로, 장경(長卿)이나 옹자(翁子)가 촉(蜀)과 월(越)에서 뻐기던 정도일 뿐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집안의 문창공(文昌公) -휘(諱)는 치원(致遠)으로, 본국에서 추봉(追封)한 것이다.-은 나이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이던 함통(咸通) 15년(874, 신라 경문왕1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중산위(中山尉)를 거쳐 회남(淮南) 고 시중(高侍中 고변(高騈))의 막좌(幕佐)가 되었으며 관직이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28세에 사명을 받들고 귀국하였으므로, 고향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당나라 말기로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사방으로 외롭게 떠돌아다니며 번진(藩鎭)에서 기식(寄食)하였으며, 또 어사의 직질(職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직(實職)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돌아와서도 나라가 또 크게 혼란한 가운데 길이 막혀서 복명(復命)을 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니 그 평생을 논해 본다면 고생만 하였을 뿐 영화를 누린 것은 별로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중보는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만나 화려한 근시(近侍)의 지위에 올랐다. 여기에 또 나이가 바야흐로 장년(壯年)인 데다가 뜻이 갈수록 겸손하기만 하여 그 양양한 전도(前途)를 쉽게 헤아릴 수 없고 보면, 집안을 드러내고 나라를 영예롭게 하는 것이 어찌 지금 한때로 그치겠는가. 필시 부귀를 한껏 누리고 공명을 천하에 가득 떨치는 가운데 주금(晝錦)의 당우(堂宇)를 동한(東韓)에 크게 짓는 것을 보게 되리니, 모르겠다마는 후세 사람들이 중보를 옛날 동방의 사람들과 비교해서 어떻게 평하겠는가.
이와 함께 기억나는 것이 또 있다. 나도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외람되게 연경에 가서 회시(會試)에 응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해에는 거자(擧子)가 정액(定額)을 채우지도 못해서 좌방(左榜)에 오른 자가 겨우 43인이었는데 나는 요행히 21번째에 끼이게 되었다. 그리고 개모 별가(蓋牟別駕)의 임명을 받았으나 그 관직에 부임한 지 몇 개월 만에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였다. 지금 향리에 물러나 살아온 지 어언 13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동안 품었던 장한 뜻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이제는 다시 날고뛰는 기세를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요즈음 중보를 보노라면 내가 끝내는 자포자기하여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게 되었음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성명(聖明)하신 임금님의 기대를 저버린 부끄러움을 또 어떻게 말로 다할 수가 있겠는가. 중보는 아무쪼록 더욱 힘쓸지어다. 그리하여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해서 아홉 길의 산을 만들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할지어다. 나는 중보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다. 그래서 그의 행실을 칭송한 다음에 나의 졸렬한 과거의 행적을 스스로 비판함으로써 그를 다시 북돋우려고 하였다.
원통 을해년(1335, 충숙왕 복위4) 3월 1일에 계림(鷄林) 최해(崔瀣)는 서(序)한다.

송시(送詩)


모골이 범류와 다른 것을 진작 알고서 / 早知毛骨異凡流
청운의 뜻 이룰 날을 눈 비비고 기다렸지 / 刮目靑雲得意秋
삼급의 풍뢰가 봉필에서 일어나서 / 三級風雷起蓬蓽
구천의 우로가 송추에 흡족하였도다 / 九天雨露洽松楸
이별의 정 일으키는 압록강의 짙은 버들이요 / 鴨江柳暗牽離思
멋진 놀이 기다리는 한림원의 만개한 꽃이로다 / 鰲禁花開待勝遊
한잔 술로 회포를 풀 날 다시 언제일까 / 尊酒論懷更何日
흰머리 이 몸의 일은 창주에 부칠 수밖에 / 白頭身事付滄洲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지음

설창에서 십 년 내내 열심히 공부했다 해도 / 雪窓雖積十年勤
기예 겨루는 과장에서 손쉽게 공을 세우다니 / 戰藝場中易策勳
이번에 가면 공명은 지푸라기 줍듯 할 터 / 此去功名如拾芥
그대를 허용치 않을 대각이 어디 있으리오 / 有何臺閣不容君
정승(政丞) 권한공(權漢功) 지음

푸른 시냇가에 성대하게 차려 놓은 송별 자리 / 祖席高張碧澗濱
서쪽 교외에 날 저물며 황사 먼지 자욱해라 / 西郊日薄藹黃塵
올해는 눈이 한식까지 계속해서 내리는데 / 今年雨雪連寒食
곳곳마다 불을 피워 명절 맛이 나지 않네 / 觸處煙火阻令辰
방초도 떠나는 말을 머무르게 할 수 없는데 / 芳草未堪留去馬
푸른 버들이 어떻게 가는 사람을 매어 두랴 / 綠楊豈解繫行人
남아는 사방을 경영할 뜻을 가져야 하는 법 / 男兒自有四方志
갈림길에서 그토록 상심할 것이 뭐 있으랴 / 安用臨岐苦愴神
창정(昌定) 안진(安震) 지음

규벽이 우리 동방을 비추어 / 奎璧照東方
선리가 향곡에서 태어났나니 / 仙李生鄕曲
온후한 얼굴에 영특한 기상 / 睟面氣英奇
미옥을 속에 감춘 원석이었다네 / 璞中藏美玉
머리 묶고 나를 따라 노닐 그때에 / 結髮從我遊
오경이 이미 뱃속에 들어 있었는데 / 五經已在腹
진정한 재질을 아는 이 누가 있었으랴 / 無人識眞才
뜬소문만 믿을 뿐 목격한 사실은 무시했다오 / 貴耳而賤目
하루아침에 계리(計吏)와 함께 가서 / 一朝與計偕
황제를 뵙고 장옥에서 겨룬 결과 / 謁帝戰場屋
세 차례 이기는 뛰어난 공을 세웠나니
 / 三捷收奇功
조정은 금원의 파목을 얻었더라오 / 禁苑得頗牧
가슴에는 적선의 문사를 안고서 / 腸摛謫仙詞
연촉을 대하며 고상하게 노래했고
 / 高詠對蓮燭
손에는 태사의 붓을 쥐고서 / 手持太史筆
한청의 죽간에 올곧게 기록했지요
 / 直書汗靑竹
지난해 금의환향한 것은 / 去年錦還鄕
상여가 사신으로 서촉에 간 것 / 相如使西蜀
사마가 광휘를 발하는 가운데 / 駟馬生光輝
훤당 앞에 색동옷을 걸쳤더라오
 / 萱堂披綵服
양지의 효도는 입양에 있는지라 / 養志在立揚
할애하며 국육을 하직한다마는
 / 割愛辭鞠育
그대를 위해 봄을 아쉬워하나니 / 爲君惜芳辰
연못 둑에 지금 봄풀이 푸르니까
 / 池塘春草綠
나는야 좋은 계책 그르쳤으니 / 伊我誤良圖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 悔之不可復
하사받은 관복을 그냥 상자 안에 놔둔 채 / 賜袍在篋閑
구름 사이 날아가는 황곡을 부러워하노라 / 坐羨雲間鵠
죽계(竹溪) 안축(安軸) 지음

천자가 구언하며 만방에 조서를 내리매 / 天子求言詔萬方
선생이 수계하여 현량에 응했다네
 / 先生隨計應賢良
급제자 명단에 높이 올라 화려한 직질에 옮겨지고 / 高登桂榜遷華秩
조칙을 받든 사신의 신분이 되어 고향을 빛냈다오 / 光捧芝綸耀故鄕
우악한 은총이 가문에 드리워지고 / 優渥異恩垂蕊闥
기쁜 기색이 훤당에 넘쳐흐르도다 / 氤氳喜氣滿萱堂
편히 놀며 즐기는 것이 어찌 남아의 일이리오 / 宴安不是男兒事
어서 가서 공경이 되어 성황을 보좌하시기를 / 往取公卿佐聖皇
여강(驪江) 민자이(閔子夷) 지음

한림원의 이후는 우리 동방의 인걸 / 翰苑李侯東方傑
문장의 근원 호호하여 측량하기 어려워라 / 浩浩詞源固難測
기둥에 쓰고 황조에 간 것이 엊그제인데 / 纔看題柱入皇朝
어느새 사신 수레 타고 고국에 오셨구려
 / 已見乘軺歸故國
노모를 즐겁게 해 드린 지도 얼마 되지 않는데 / 高堂綵戲未幾何
왕사에 일정이 있어서 더 머물 수 없다네 / 王事有程留不得
요수 건너 연경에 가는 기나긴 여행길에 / 遼水燕山去路長
못 잊어 하는 우리를 기억이나 해 주실는지 / 能記吾曹苦相憶
내군(萊郡) 정천유(鄭天濡) 지음

옛날 내가 관을 아직 쓰기도 전에 / 昔吾方未冠
오래 두문불출하는 그대 소식 들었지요 / 聞子久閉門
몸을 수사 사이에 허락한 이상에는 / 許身洙泗間
헌상 따위를 논할 것이 있으리까 / 軒裳安足論
만리 밖으로 드높이 날아가는 저 학을 / 昂昂萬里鶴
구름 너머로 어떻게 쫓아갈 수 있으리오 / 雲表誰能攀
유자는 진부하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 爲儒孰云腐
오늘 다 함께 파안대소할 일이로세 / 今日共破顔
기분 좋게 풍운이 서로 만난 이 시대에 / 快哉風雲會
동방에 돌아와 자리를 어찌 따뜻하게 할까
 / 東歸席豈溫
평소에 그래도 서로 언약한 바가 있으니 / 平生還有約
그대에게 한마디 안 해 줄 수 있으리까 / 贈子得無言
계림(鷄林) 이달존(李達尊) 지음

생각하면 지난 경신년 가을에 / 伊昔庚申秋
똑같이 동사의 방에 올랐고
 / 同登東士榜
또 빈흥과에 외람되게 끼어 / 又忝賓興科
중조에 함께 갈 수 있었다네 / 中朝得偕往
극위에서 더불어 격전을 치르면서 / 棘闈與酣戰
창을 들고 삼엄하게 서로 향할 적에 / 矛戟森相向
하나의 화살이 벌써 어긋났는지라 / 一箭已不勝
아직도 분한 마음에 앙앙불락하는데 / 含憤猶怏怏
그대는 몇 겹의 포위망을 뚫었다 하니 / 聞子透重甲
높은 산을 더더욱 우러러볼 수밖에 / 高山益瞻仰
천자가 바야흐로 유자를 중히 여겨 / 天子方重儒
온화한 안색으로 은혜롭게 장려하며 / 溫色垂恩獎
백옥당에 그대의 자리를 배치하였나니 / 置之白玉堂
성대한 식탁에 상아로 된 걸상이라 / 綺食而象牀
게다가 조명으로 귀근을 허락받았나니 / 詔命許歸覲
휘황하게 빛나는 사신의 행차여 / 使華耀皇皇
은전이 부모님에게까지 미쳐 / 寵典及父母
두 분을 봉한 교지가 향기로우니 / 兩封芝牒香
구천의 아버님도 물론 감격하시겠지만 / 九泉感已徹
살아 계신 어머님 기쁨이 또 어떠하리오 / 存者喜可量
고당에서 색동옷 입고 춤을 추면서 / 高堂舞綵衣
정성을 기울여 축수의 술잔을 바쳤다오 / 瀝懇稱壽觴
남아가 한번 문장을 토해 내면 / 男兒吐文章
일월과 빛을 다투어야 하고말고 / 日月須爭光
돌아보건대 나는 풍진 속에 떨어져서 / 顧余落風塵
평소의 업도 스스로 힘쓰지 못하는데 / 素業不自强
그대가 청자를 줍듯 하는 것을 보고 / 看君拾靑紫
기러기 날개를 더위잡고 싶기도 하오마는 / 且願攀鴻翔
운니처럼 길이 완전히 달라진지라 / 雲泥旣異途
부드럽게 쳐다보며 괜히 배회할 뿐이라오 / 翹首空徊徨
직산(稷山) 백문보(白文寶) 지음

한림의 호기 호탕해서 거두기 어렵나니 / 翰林豪氣浩難收
호해의 선비 원룡의 백척루라고나 할까
 / 湖海元龍百尺樓
나도 공을 따라 상국에 노닐고 싶어라 / 我欲從公遊上國
시골구석은 답답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 安能鬱鬱在荒陬
서원(西原) 정포(鄭誧) 지음

책문에 답하던 당년에 왕의 손님이 되더니 / 答策當年利用賓
올 때에는 비단옷 입고 조서를 받들었네 / 來時衣錦捧絲綸
동관에서는 기수의 선비임을 알아차렸고 / 東關竊識棄繻士
남군에서는 단직의 어버이를 영광되게 했네 / 南郡歸榮斷織親
떠나는 발걸음 더딘 것은 날을 아끼는 마음 때문 / 去國行遲因愛日
조회할 기한이 박두해서 봄날을 따라 가려 한다네 / 朝天期迫欲隨春
그대가 청운에 뛰어올라 성공한 것을 보니 / 見君騰躍靑雲興
시서가 사람을 저버리지 않음을 믿겠도다
 / 始信詩書不負人
죽계(竹溪) 안보(安輔) 지음

[주D-001]장경(長慶) : 당나라 목종(穆宗)의 연호이다.
[주D-002]빈공(賓貢) : 타국에서 중국의 조정에 천거한 인재를 가리킨다.
[주D-003]천우(天祐) :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哀帝)의 연호이다.
[주D-004]순화(淳化) : 송나라 태종(太宗)의 연호이다.
[주D-005]함평(咸平) : 송나라 진종(眞宗)의 연호이다.
[주D-006]경우(景祐) :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이다.
[주D-007]정화(政和) : 송나라 휘종(徽宗)의 연호이다.
[주D-008]분황(焚黃) : 선조에게 증직(贈職)이 내려졌을 때 그 임명장을 누런 종이에 복사하여 무덤 앞에 가지고 가서 고한 뒤에 불태우는 것을 말한다.
[주D-009]장경(長卿)이나……것이다 : 금의환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한나라의 사마상여(司馬相如)나 주매신(朱買臣)의 경우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말이다. 장경과 옹자(翁子)는 각각 사마상여와 주매신의 자인데, 이들의 고사는 다음과 같다. 사마상여가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촉군 태수(蜀郡太守) 이하가 모두 교영(郊迎)하였으며, 현령(縣令)은 ‘몸소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달림으로써〔負弩矢先驅〕’ 존경하는 뜻을 보였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한나라 주매신이 만년에 영달하여 회계 태수(會稽太守)로 부임할 때 누더기 차림에 인수(印綬)를 허리에 차고 군저(郡邸)에 가자 아전이 인수를 발견하고는 경악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치우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주매신을 경멸하며 버렸던 옛날의 아내와 그 남편도 끼어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上 朱買臣傳》
[주D-010]주금(晝錦)의 당우(堂宇) : 주금은 낮에 비단옷을 입는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에 가는 금의환향을 의미한다. 송나라의 명신(名臣) 한기(韓琦)가 일찍이 재상으로 무강군 절도사(武康軍節度使)가 되어 자기 고향인 상주(相州)를 다스리면서 그곳에 주금당(晝錦堂)을 세우고 또 시를 지었는데, 구양수가 그 시에 의거해서 〈상주주금당기(相州晝錦堂記)〉라는 기문을 지어 한기의 뜻을 칭송한 고사가 있다.
[주D-011]좌방(左榜) : 원나라는 과거 급제자를 두 개의 방(榜)으로 나누어 게시하였다. 우방(右榜)에는 몽고인과 유럽 계통의 색목인(色目人)을 게시하였고, 좌방에는 화북(華北)의 한인(漢人)과 강남(江南)의 남인(南人)을 게시하였는데, 고려인은 좌방에 속하였다. 《元史 卷81 選擧志1》 원나라는 우측을 중시하며 숭상하였다. 양증(梁曾)이 안남(安南)에 사신으로 가서 이른바 ‘우측을 숭상하는 새 조정의 예법〔新朝尙右之禮〕’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元史 卷178 梁曾列傳》
[주D-012]한 삼태기의……할지어다 : 《서경》〈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부지런하지 못한 점이 혹시라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이니, 이는 마치 아홉 길의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여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夙夜 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삼급(三級)의……일어나서 : 가정이 용문(龍門)의 폭포처럼 넘기 어려운 3장(場)의 시험을 통과하여 급제의 영광을 안았다는 말이다. 원나라의 과거는 몽고ㆍ색목인(色目人)에게는 2장을, 한인(漢人)ㆍ남인(南人)에게는 3장의 시험을 부과하였는데, 고려 출신은 한인과 남인 부류에 속하였다. 제1장에서는 명경(明經)과 경의(經疑) 2문(問)을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내에서 출제하고, 또 오경(五經) 중 하나에서 경의(經義)를 택하게 하였으며, 제2장에서는 고부(古賦)ㆍ조(詔)ㆍ고(誥)ㆍ장(章)ㆍ표(表) 중 하나를 시험하고, 제3장에서는 경사(經史)와 시무(時務)에 관한 책문에 대해 1000자 이상의 직설적인 답변을 요구하였다. 《元史 卷81 選擧志1》 황하 상류 용문에 ‘세 계단〔三級〕’으로 된 폭포가 있는데, 대어(大魚)가 이 밑에까지 와서 이 폭포를 뛰어올라야만 용이 된다는 고사가 있기 때문에, 과거 시험장의 정문을 용문이라고도 한다. 봉필(蓬蓽)은 오두막의 사립문을 뜻하는 봉문필호(蓬門蓽戶)의 준말인데, 여기서는 여건이 너무나 열악해서 제과(制科)에 급제하기가 무척 어려운 고려 출신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14]구천(九天)의……흡족하였도다 : 선조가 추증(追增)되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이다. 구천은 궁중을 뜻하고, 송추(松楸)는 선영을 뜻한다.
[주D-015]창주(滄洲) :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완적(阮籍)이 지은 〈위정충권진왕전(爲鄭沖勸晉王箋)〉의 “창주를 굽어보며 지백에게 사례하고, 기산에 올라가 허유에게 읍을 한다.〔臨滄洲而謝支伯 登箕山而揖許由〕”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경치 좋은 은자의 거처로 흔히 쓰인다. 《文選 卷20》
[주D-016]설창(雪窓) : 진(晉)나라 손강(孫康)이 가난해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자 눈빛에 비추어서 책을 읽으며 고학(苦學)했다는 ‘손강영설(孫康映雪)’의 성어가 있다.
[주D-017]규벽(奎璧) : 28수(宿)에 속하는 규수(奎宿)와 벽수(璧宿)의 병칭으로, 옛날에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여겼다.
[주D-018]선리(仙李) : 이씨(李氏) 성을 지닌 걸출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자(老子)가 이수(李樹) 아래에서 태어나서 성을 이(李)로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당나라 왕실에서 노자의 후손이라고 자처하였으므로 그 종족을 선리라고 지칭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참고로 두보의 시에 “선리의 서린 뿌리 크기도 하여, 걸출한 후손들 대대로 빛났어라.〔仙李蟠根大 猗蘭奕葉光〕”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詩集 卷2 冬日洛城北謁玄元皇帝廟》
[주D-019]하루아침에……세웠나니 : 가정이 3장(場)을 모두 통과하고서 제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는 말이다. 계리(計吏)와 함께 간다는 말은 지방의 거자가 중앙의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한나라 공손홍(公孫弘)이 학관(學官)의 제도를 만들면서, 지방의 인재들을 “계리와 동행하게 해서 태상으로 보내 박사 제자(博士弟子)들처럼 수업 받게 해야 한다.〔當與計偕 詣太常 得受業如弟子〕”라고 건의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 장옥(場屋)은 과거 시험장을 가리킨다. 원나라의 과거는 몽고ㆍ색목인(色目人)에게는 2장을, 한인(漢人)ㆍ남인(南人)에게는 3장의 시험을 부과하였는데, 고려 출신은 한인과 남인 부류에 속하였다. 제1장에서는 명경(明經)과 경의(經疑) 2문(問)을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 내에서 출제하고, 또 오경(五經) 중 하나에서 경의(經義)를 택하게 하였으며, 제2장에서는 고부(古賦)ㆍ조(詔)ㆍ고(誥)ㆍ장(章)ㆍ표(表) 중 하나를 시험하고, 제3장에서는 경사(經史)와 시무(時務)에 관한 책문에 대해 1000자 이상의 직설적인 답변을 요구하였다. 《元史 卷81 選擧志1》
[주D-020]금원(禁苑)의 파목(頗牧) : 문무를 겸비하고 재략(才略)이 탁월한 조정의 시종신(侍從臣)을 뜻하는 말이다. 파목은 전국 시대 조나라의 명장인 염파(廉頗)와 이목(李牧)을 병칭한 말인데, 당 선종(唐宣宗) 때 한림학사 필함(畢諴)이 강족(羌族)을 격파할 대책을 상세히 올리자, 황제가 “우리 조정의 시종신 중에 염파와 이목 같은 명장이 있을 줄 어떻게 생각이나 했겠는가.〔孰謂頗牧在吾禁署〕”라고 하고는, 필함을 절도사로 임명해서 공을 세우게 했던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83 畢諴列傳》
[주D-021]가슴에는……노래했고 : 가정이 이백(李白)처럼 황제의 앞에서 시가를 읊는 기회를 얻었다는 말이다. 적선(謫仙)은 인간 세계에 귀양을 온 신선이란 뜻으로, 당 현종 때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을 처음 만나서 그의 글을 보고는 붙여 준 별칭이다. 연촉(蓮燭)은 황금 연꽃 모양의 촉등(燭燈)으로, 신하에 대한 왕의 특별 예우를 표현할 때 곧잘 쓰이는 말이다. 당나라 영호도(令狐綯)가 궁궐에서 밤늦게까지 황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갈 무렵에 촛불이 거의 다 꺼지자, 황제가 자신의 수레와 황금 연촉을 주어 보냈는데, 관리들이 이것을 보고는 황제의 행차로 여겼다는 고사가 전한다. 《新唐書 卷166 令狐綯列傳》
[주D-022]손에는……기록했지요 : 가정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에 임명된 것을 말한다. 한청(汗靑)은 옛날에 청죽(靑竹)을 불에 구워서 그 속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오게 해서 쓰기에 편리하고 좀이 슬지 않게 한 것을 말하는데, 보통 사책(史冊)을 뜻한다.
[주D-023]지난해……걸쳤더라오 :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처럼 사신의 신분으로 금의환향한 뒤에 모친을 위해 수연(壽宴)을 벌이며 즐겁게 해 드렸다는 말이다. 사마상여가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촉군 태수(蜀郡太守) 이하가 모두 교영(郊迎)하였으며, 현령(縣令)은 ‘몸소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달림으로써〔負弩矢先驅〕’ 존경하는 뜻을 보였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또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 “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 색동옷을 걸쳤다는 말은 춘추 시대 초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老萊子)가 70의 나이에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떨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初學記 卷17 引 孝子傳》
[주D-024]양지(養志)의……하직한다마는 : 가정이 입신양명을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계속 머물러 있고 싶은 어버이의 곁을 떠난다는 말이다. 양지는 어버이의 뜻을 제대로 알고서 그대로 따르는 정신적인 효도로,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등 부모의 육신만을 위하는 물질적인 봉양과 상대되는 말인데, 《맹자》〈이루 상(離婁上)〉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입신양명은 《효경(孝經)》〈개종명의(開宗明義)〉의 “이 몸은 모두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자신의 몸을 바르게 세우고 바른 도를 행하여 이름을 후세에 드날림으로써 부모님을 드러나게 해 드리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라는 말을 요약한 것이다. 할애(割愛)는 친애의 정을 떼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국육(鞠育)은 《시경》〈육아(蓼莪)〉의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셨네.〔父兮生我 母兮鞠我〕”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를 뜻한다.
[주D-025]그대를……푸르니까 : 시상이 샘솟을 찬란한 봄을 뒤에 놔두고서 고생스러운 먼 여행길을 떠나야 하는 가정에게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말이다.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이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다가 꿈에 족제(族弟)인 사혜련(謝惠連)을 만나 보고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명구를 얻은 뒤에 “이 시구는 신령이 도와준 덕분에 나온 것이지 나의 말이 아니다.〔此語有神功 非吾語也〕”라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19 謝惠連列傳》
[주D-026]하사받은……채 : 안축도 1324년(충숙왕11)에 제과(制科)에 제3갑(第三甲)으로 급제하여 요양로 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을 제수받았다.
[주D-027]천자가……응했다네 : 가정이 원나라 황제가 친히 시험하는 책문에 응시했다는 말이다. 수계(隨計)는 계리(計吏)를 따라간다는 말로, 지방의 거자가 중앙의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한나라 공손홍(公孫弘)이 학관(學官)의 제도를 만들면서, 지방의 인재들을 “계리와 동행하게 해서 태상으로 보내 박사 제자(博士弟子)들처럼 수업 받게 해야 한다.〔當與計偕 詣太常 得受業如弟子〕”라고 건의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21 儒林列傳》 또 한유의 시에 “처음에 향공진사(鄕貢進士)의 신분으로 계리를 따라 상경해서, 택궁에서 활쏘기를 시험하는 것처럼 과거 시험장에 몇 번이나 들어가 응시했다.〔初隨計吏貢 屢入澤宮射〕”라는 말이 나온다. 《韓昌黎集 卷2 縣齋有懷》 현량(賢良)은 한 문제 때부터 시작된 과거 제도로, 책문을 통해 직언과 극간(極諫)을 잘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현량문학(賢良文學) 혹은 현량방정(賢良方正)이라고도 한다.
[주D-028]기둥에……오셨구려 :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 “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
[주D-029]수사(洙泗) :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개의 강물 이름으로, 이곳이 공자의 고향에 가깝고 또 그 강물 사이의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보통 유가(儒家)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30]헌상(軒裳) : 수레와 관복을 뜻하는 말로, 출세하여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말한다.
[주D-031]유자(儒者)는……말했던가 : 남송 고종 때 한림학사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진여의(陳與義 : 1090~1138)의 시에 “도를 늦게 배운 것이 지금 새삼 한스러워, 유자치고 어느 누가 진부하지 않으리오.〔學道始恨晩 爲儒孰非腐〕”라고 탄식한 구절이 나온다. 《簡齋集 卷5 別岳州》 그는 시에 능했는데, 시대를 상심하며 세상일에 비분강개한 작품들이 많다.
[주D-032]기분……할까 : 성군과 현신이 만나 서로 의기투합하는 시대를 만난 만큼,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정도로 고향에 머물러 쉴 틈이 없으니 어서 서둘러 조정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풍운이 서로 만났다는 것은 《주역》〈건괘 문언〉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風從虎〕”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또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戱)〉에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스해질 틈이 없었고, 묵자의 집 굴뚝은 검게 그을릴 틈이 없었다.〔孔席不暖 墨突不黔〕”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23》
[주D-033]이달존(李達尊) : 가정의 좌주(座主)인 이제현(李齊賢)의 아들이다. 1340년(충혜왕 복위1)에 28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는데, 《가정집》 권11에 그의 묘표가 실려 있다.
[주D-034]생각하면……올랐고 : 백문보(白文寶)가 1320년(충숙왕7)에 이제현이 주관한 수재과(秀才科)에서 18세의 나이로 가정과 함께 급제한 것을 말한다.
[주D-035]또……끼어 : 백문보가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에 급제하여 제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는 말이다. 빈흥(賓興)은 빈객으로 예우한다는 뜻으로, 주나라 때에 향대부가 소학에서 현능한 인재를 천거할 적에 그들을 향음주례(鄕飮酒禮)에서 빈객으로 예우하며 국학에 올려 보낸 것에서 유래하여, 향시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주례》〈지관(地官) 대사도(大司徒)〉에 “향학(鄕學)의 삼물, 즉 세 종류의 교법을 가지고 만민을 교화하는데, 인재가 있으면 빈객의 예로 우대하면서 천거하여 국학에 올려 보낸다.〔以鄕三物敎萬民而賓興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극위(棘闈) : 경비가 삼엄한 과거 시험장을 말한다.
[주D-037]하나의……어긋났는지라 : 과목(科目) 3장 중 제1장에서 이미 그르치고 말았다는 말이다.
[주D-038]그대가……보고 : 가정이 제과에 급제한 뒤에 마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쉽게 존귀한 관직을 얻었다는 말이다. 《삼국지》 권25〈위서(魏書) 고당륭전(高堂隆傳)〉에, 선비가 경술에 밝지 못한 것이 흠이지 만약 경술에 밝기만 하다면 “존귀한 관직을 얻는 것은 마치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其取靑紫如俯拾地芥耳〕”라는 말이 나온다. 한나라 때에는 공후와 구경(九卿)이 각각 자수(紫綏)와 청수(靑綬)를 찼다고 한다.
[주D-039]기러기……하오마는 : 참고로 한나라 왕포(王褒)의 〈사자강덕론(四子講德論)〉에 “천리마 꼬리에 붙어 있으면 천리를 함께 치달릴 수도 있고, 기러기 날개를 더위잡으면 사해를 날아갈 수도 있으니, 내가 비록 우둔하긴 하지만 그대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附驥尾 則涉千里 攀鴻翮 則翔四海 僕雖頑嚚 願從足下〕”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26》
[주D-040]운니(雲泥)처럼……달라진지라 : ‘한 사람은 하늘 위의 구름에 올라타고, 한 사람은 땅 위의 진흙탕을 밟고 다닌다〔乘雲行泥〕’라는 뜻으로, 이제는 두 사람의 지위가 예전과 현격히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주D-041]한림(翰林)의……할까 : 세상을 구하려는 호걸스러운 기상이 가정의 몸 전체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이다. 원룡(元龍)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진등(陳登)의 자이다. 국사(國士)의 이름을 지니고 있던 허사(許汜)가 유비(劉備)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진원룡(陳元龍)은 호해지사(湖海之士)로서 아직도 호기가 없어지지 않았더라. 나를 손님으로 대하려는 뜻도 없이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자기는 큰 침상 위에 드러눕고 나는 그 아래 침상에 눕게 하더라.”라고 불평을 하자, 유비가 “구전문사(求田問舍)나 하는 당신에게는 그 정도라도 대접을 잘해 준 것이다.”라고 진등을 옹호하면서 “만약 소인 대접을 했더라면 자기는 백척루(百尺樓) 위에 올라가 눕고 당신은 땅바닥에 눕도록 했을 것이다. 어찌 위아래 침상의 차이만 두었겠는가.”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주D-042]책문(策問)에……되더니 : 가정이 제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관원이 된 것을 말한다. 《주역》〈관괘(觀卦) 육사(六四)〉에 “나라의 휘황한 빛을 봄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 노릇을 하며 벼슬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기수(棄繻) : 비단 종이를 둘로 나눠서 만든 증명서 즉 통행 증명서를 버렸다는 말로, 한(漢)나라 종군(終軍)의 고사이다. 종군이 젊어서 장안(長安)으로 갈 적에 걸어서 관문에 들어서니, 그곳을 지키는 관리가 수(繻)를 지급하면서 다시 돌아올 때 맞춰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종군이 앞으로 그런 증명서는 필요 없을 것이라면서 버리고 떠났는데, 뒤에 종군이 알자(謁者)가 되어 사신의 신분으로 부절(符節)을 세우고 군국(郡國)을 돌아다닐 적에 그 관문을 지나가자, 옛날의 관리가 알아보고는 “이 사자는 바로 예전에 증명서를 버린 서생이다.〔此使者乃前棄繻生也〕”라고 말했다 한다. 《漢書 卷64下 終軍傳》
[주D-044]단직(斷織) : 베틀의 베를 잘랐다는 말로, 자식에 대한 현모의 철저한 교육을 뜻한다. 맹자가 어려서 공부를 중단하고 집에 돌아오자, 맹자의 어머니가 베틀에서 짜던 베를 칼로 자르고는 “네가 공부를 중단한 것은, 내가 이 베를 자른 것과 같다.〔子之廢學 若吾斷斯織也〕”라고 하였는데, 맹자가 이 말을 듣고 분발하여 대유(大儒)가 되었다고 한다. 《列女傳 鄒孟軻母》
[주D-045]떠나는……때문 : 노모의 곁을 차마 떠날 수가 없기에 떠나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는 말이다. 한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효지(孝至)〉에 “이 세상에서 오래 가질 수 없는 것은 어버이를 모실 수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효자는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는 동안 하루하루 날을 아낀다.〔不可得而久者 事親之謂也 孝子愛日〕”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조회할……한다네 : 고국에 머물러 시주(詩酒)를 즐기면서 봄날을 보내고도 싶지만, 중국 조정에 돌아가야 할 기한에 쫓긴 나머지 어쩔 수 없이 길에서 봄을 보내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D-047]그대가……믿겠도다 : 가정이 36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 것을 말한다. 송나라 왕십붕(王十朋)의 “이름 이룸 늦다고 한탄하지 마오, 시서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으니까.〔莫恨成名晩 詩書不負人〕”라는 시구가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梅溪集 前集 卷2 至樂齋讀書》



정집 잡록
이중보(李中父)가 정동행성(征東行省)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전송하며 지은 서(序)

고려는 아조(我朝)에서 옛날 봉건제도가 행해지던 때의 제후국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고 직접 사람을 뽑아 관원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자질이 우수한 인재들 모두가 그 나라에서 설행하는 과거 시험을 통해 그 나라에서 벼슬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황경(皇慶) 연간에 천하의 인재를 대상으로 과거 시험을 보이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이로부터는 고려에서도 예부에서 실시하는 과거에 응시하는 자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말단으로 급제하는 대열에 끼이곤 하였으므로 동성(東省)의 재속(宰屬)에 임명되거나 가까운 주군(州郡)에서 벼슬하거나 하였는데, 일단 귀국하고 나면 곧바로 그 나라의 현관(顯官)이 되었을 뿐 다시 서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봉건제도가 없어진 뒤로 천하의 벼슬하려는 자들이 천자의 조정에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된 것은 형세로 볼 때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지금 고려의 경우는 그 나라에서 직접 사람을 뽑아 관원으로 임명할 수가 있기 때문에, 자질이 우수한 인재들이 왕왕 그 나라에서 설행하는 과거 시험을 통해 그 나라에서 벼슬할 수가 있는데도, 다시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경사(京師)에 와서 응시하고 있으니,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나라에서 인정을 받는 것보다는 조정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 훨씬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록 말단으로 급제하여 시시한 관직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그 나라에서는 매우 영광스럽게 여기는 터인데, 더군다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화려한 근시(近侍)의 직책을 차지함으로써 천하 사람들이 모두 영예로 여기는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원통(元統) 원년(1333, 충숙왕 복위2)에 천자가 친히 책문(策問)으로 진사를 뽑을 적에, 내가 외람되게 염내(簾內)의 신분으로 시권(試券)을 검토하였는데, 고려의 이곡(李穀)이 답한 대책문(對策文)이 독권관(讀券官)의 인정을 크게 받아 을과(乙科)로 뛰어올라 급제하였고, 마침내는 재상이 천자에게 아뢰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영예로운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 이듬해에 황상(皇上)이 크게 학교를 일으킬 적에, 중보가 제서(制書)를 받들고 동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에 조정에서 인정을 받은 것을 가지고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림은 물론이요, 나아가 향당까지 영광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내가 그의 출행을 장하게 여겨 고하기를,
“그대가 돌아가서 방인(邦人)과 제우(諸友)를 보거든 다음과 같이 말하라. ‘황상은 문명(文明)한 덕을 지니신 분으로, 유능한 인재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시기 때문에 원방(遠方)의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법이 없다. 이는 마치 증청(曾靑)과 단안(丹矸)이 중국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중국이 실제로 쓰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선비는 자기가 쓰이기에 적합하지 못할까 걱정해야지 중국이 자기를 쓰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학교를 일으키는 조서를 무엇 때문에 멀리 이 땅에까지 반포하겠는가.’”
하였다.
《주역》의 〈점괘(漸卦)〉에 “기러기가 공중으로 날아간다. 그 깃털을 의식에 쓸 수 있으니, 길하다.〔鴻漸于逵 其羽可用爲儀 吉〕”라고 하였다. 동방의 빼어난 인재가 중보와 함께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와서 봉황처럼 춤추는 광경을 내가 장차 보게 될 것인가.
원통(元統) 2년(1334, 충숙왕 복위3) 4월 18일, 국자감 조교(國子監助敎) 보전(莆田) 진려(陳旅)는 서(序)한다.

송시(送詩)


그림보다 더 나은 진도의 연화를 떠나 / 珍島煙華畫不如
백암성 아래의 길 구불구불 돌아서면 / 白巖城下路縈紆
수레 타신 사신을 향인이 모두 알아보리 / 鄕人盡識乘軺使
압록강 머리에서 예전에 기수한 그분임을
 / 鴨綠江頭舊棄繻

얘기 듣건대 삼한은 당나라를 본받아서 / 聞說三韓學李唐
백포를 입고 해마다 과장으로 모인다고
 / 白袍歲歲集科場
중조에서 고선하고 귀가하는 분을 보면 / 中朝高選歸家看
섬궁의 계자 향기가 특별히 풍긴다네요
 / 別樣蟾宮桂子香

동국 출신으로 등과한 여섯 번째 인사 / 東國登科第六人
아름다운 그 자취 금림의 봄을 독점했네 / 芳蹤獨占禁林春
모쪼록 원통의 임금님 은혜가 막중하다고 / 好將元統君恩重
고당에 계신 학발의 모친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 說向高堂鶴髮親

오성의 문생이 비단옷 입고 돌아감에 / 鰲省門生衣錦還
백발의 좌주가 떠나는 말을 전송하네 / 白頭座主送征鞍
내가 지은 시는 한 푼의 가치도 없으니 / 新詩價不一錢直
계림의 상인에게 부디 보이지 마시기를 / 莫遣雞林賈客看
송본(宋本) 지음

원방의 귀한 황곡 한 마리가 / 黃鵠遠見珍
동쪽 바닷가에서 날아왔다네 / 飛來東海濱
붉은 해 떠오르는 상림원의 새벽이요 / 上林紅日曉
푸른 물결 넘실대는 태액지의 봄이었다오 / 太液碧波春
나래 떨치는 것이 어쩌면 그리도 빨랐던지 / 振翮一何迅
은혜를 받드는 것이 이로부터 새로우리라 / 承恩從此新
우의는 하늘의 길에 가까운 한림원이요 / 羽儀近天路
가송은 천자의 신하들을 뒤흔들었다네 / 歌頌動王臣

과거 급제 늦었다고 걱정할 것 뭐 있으랴 / 中擧寧愁晩
높이 뛰어올라 이미 티끌세상 벗어난걸 / 孤騫已絶塵
공작과 난새도 문채를 빌리려 할 것이요 / 孔鸞應借彩
봉황도 이웃 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리 / 鸑鷟許爲隣
역마 타고 어버이 뵈러 돌아가면서 / 省覲歸乘傳
조칙 받들고 높이 날아가누나 / 翶翔出捧綸
중국의 상서로움이 이미 되었으니 / 已爲中國瑞
이제는 고향 사람을 빛내 주셔야지 / 宜耀故鄕人
기군(冀郡) 구양현(歐陽玄) 지음

상국에 건너온 바다 동쪽 진사에게 / 海東進士來上國
선홍색 물들인 옷 누가 내려 주셨던가 / 何人賜袍染猩紅
재화는 한림원에 입직함이 적격이요 / 才華正宜鰲禁直
언어는 통역관과 대화해도 무방하리 / 話言何妨象胥通
그대 지금 역마 타고 고향에 돌아가면 / 君今乘軺故鄕去
아마도 길 양쪽에서 곡포가 영접하리라 / 想見鵠袍迎夾路
황명이 문교를 숭상하여 조서를 내렸으니 / 皇明右文開詔書
명년에 녹명을 부르며 충부할 수 있으리라 / 明年鹿鳴早充賦
사단(謝端) 지음

교문에 흐르는 물 넘실거리는 늦은 봄날 / 橋門流水漾餘春
휘황하게 석진을 비춘 계수나무 달빛이여
 / 桂月輝輝照析津
하늘 밖에 승사해도 이 또한 나그네 길 / 天外乘槎還是客
조정 안에 증책할 사람이 어찌 없으리오 / 朝中贈策豈無人
기북의 말을 텅 비게 한 글이 아직 마르지 않고 / 馬空冀北文猶濕
요동의 학이 떠나고서 바다에 먼지가 일지 않은 때 / 鶴去遼東海未塵
몸을 보중해 돌아와 밝은 임금님에게 보고하고 / 珍重歸來報明主
섣불리 하얀 귀밑머리 돋아나지 않게 하기만을 / 莫敎容易鬢毛新
선보(單父) 초정(焦鼎) 지음

이군이 조서 받들고 역마 달려 돌아가니 / 李君捧制馳馹歸
바다 어구에는 유월의 구름이 뭉게뭉게 / 海門六月雲霏霏
채찍 날려 고삐 들고 사천 리 길 치달려 / 揚鞭擧鞚四千里
동쪽 압록강 건너가면 광휘가 뻗치리라 / 東過鴨綠生光輝
지난해 금문 과거에 응시했을 적에 / 去年射策金門裏
문장으로 중조의 인사를 경악하게 했지 / 文章驚起中朝士
붉은 조복 상아홀을 영광스럽게 내려 받고 / 緋衣象笏錫恩光
한림에서 붓 쥐고서 국사를 닦게 되었다오 / 執筆翰林修國史
군은 송골매처럼 날개 떨치고 뛰어올라 / 君如海鶻騰羽翰
일거에 분연히 구름 위로 솟구쳤다네 / 奮然一擧凌雲端
변방에서 명인이 나왔다 이상하게 보지 마오 / 勿訝邊州有奇士
예로부터 군자는 계속 삼한에서 나왔느니 / 古來君子出三韓
동평(東平) 악지(岳至) 지음

작별하는 자리에 아침 해 밝게 비치는데 / 朝暾明祖幄
기쁘게 보내면서 시 한 수 길게 읊조리네 / 芳餞賦長吟
채색 깃발 휘날리며 역마를 치달리면 / 騎置虹旌下
조서가 임했다고 사람들이 전하리라 / 人傳鳳詔臨
안탑에 남겨질 향기로운 이름이요 / 香名留雁塔
계림을 지나갈 수놓은 비단옷이로세 / 繡服過鷄林
성교가 동쪽으로 바다에까지 번졌으니 / 聲敎東漸海
이제는 해마다 구목의 금이 올라오리라 / 年登九牧金
사관(史官) 왕사점(王士點) 지음

원통은 천년토록 이어질 운세라면 / 元統千年運
삼한은 만고토록 전해질 풍교로세 / 三韓萬古風
강은 압록이라 흐름이 맑기도 한데 / 江流明鴨綠
옷은 선홍빛 조복을 하사받았다네 / 袍色賜猩紅
쇠뇌를 지닌 향인이 나와서 구경하고 / 負弩鄕人出
수레를 타면 역로가 곧바로 뚫리리라 / 乘軺驛路通
새로운 시 짓거들랑 측리에 부디 써서 / 新詩書側理
나를 위해 기러기 편에 부쳐 주시기를
 / 爲我寄飛鴻
양음(襄陰) 왕기(王沂) 지음

모래 더미 헤치고 찾은 자금이라고나 할까 / 披盡叢沙見紫金
거편을 보고 주사가 외경심을 일으켰다오 / 鉅篇曾動主司欽
동방이 은총 받음에 산천도 함께 빛이 나나니 / 東方寵耀山川麗
조정이 적셔 준 은혜가 우로처럼 깊기만 해라 / 西掖恩霑雨露深
하직하는 연저의 황화요 / 輦底皇華辭鳳闕
계림에 내려가는 일변의 단조로다 / 日邊丹詔下鷄林
고향에 가거든 향인들에게 자세히 말해 주오 / 還家細向鄕人說
문명이 지금보다 성한 때는 과거에 없었다고 / 亘古文明莫盛今
대명(大名) 반적(潘迪) 지음

이군이 해동에서 몸을 일으켜 / 李君起海東
천자의 뜰에서 책문에 응했나니 / 射策天子廷
그 글은 곤륜에서 발원한 물이 / 文如崑崙源
지붕 위에서 거꾸로 쏟아지는 듯하였고
 / 倒建高屋瓴
그런가 하면 상산의 뱀과 같아서 / 又如常山蛇
수미를 감히 멈추게 할 수가 없었다네
 / 首尾不敢停
을과로 낮춰서 배치하긴 하였지만 / 乙科已屈置
첫째로 뽑는 것이 바로 해당하는 바
 / 首擢乃所丁
천자가 보고서 놀라워하였음은 물론 / 天子見之駭
동렬의 안색 역시 빨갛게 변했나니 / 同列顔亦赬
이에 백옥의 당으로 올려 보내고 / 進之白玉堂
봉황의 날개로 감싸게 하였다오
 / 翳以鳳皇翎
북신이 드높이 제자리를 지키매 / 巍巍北辰居
별들이 에워싸고서 향한다 할까
 / 奕奕環衆星
적임자는 본래 출신을 따지지 않고 / 立賢本無方
인재를 뽑는 것도 법도가 서 있나니 / 取士亦有經
중국의 위대함을 이를 통해 알고서 / 始識中國大
만방이 이를 본받으려고 하는도다 / 萬邦此儀刑
성인이 학교를 일으킬 마음으로 / 聖人興學心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틈이 없으시다 / 夙夜靡遑寧
하루아침에 천하에 조서를 내려 / 一日詔天下
원방에 날랜 수레를 달리게 하였는데 / 萬里馳飛軨
이군 역시 사신의 대열에 끼었으므로 / 李君亦在行
이 기회에 어버이도 뵐 수 있게 되었어라 / 因之拜親庭
멀리서 그리워했던 압록강 동쪽의 땅 / 遙憐鴨綠東
갈수록 눈에 보이리 고향의 푸르른 산 / 冉冉鄕山靑
조서가 왔다는 말을 국왕이 들으면 / 其王聞詔來
예의를 갖추어 교외에서 맞을 것이요 / 旂旄擁郊坰
하늘은 맑고 바다엔 해일이 없는지라 / 天淸海無波
부로들도 지팡이 짚고 경청하리니 / 父老扶杖聽
덕화가 성함을 거듭 보고서는 / 再覩德化盛
온 천하가 황령을 우러르리라 / 普天仰皇靈
그대의 나라는 절친한 사위의 나라 / 爾國甥舅親
우리의 동쪽을 지키는 관문으로서 / 爲我東戶扃
사천 리의 거리가 떨어져 있긴 하지만 / 相距四千里
몸과 그림자처럼 뗄 수 없는 관계로다 / 不異影與形
그대여 돌아가 오래도록 체류하여 / 爾歸勿久留
나의 마음을 애태우게 하지 말라 / 使我心熒熒
영양도 원래 안 될 것이 없나니 / 迎養固不惡
어찌 치병이 없다고 말하리오
 / 豈曰無輜輧
나의 노래를 그대여 시험 삼아 듣고서 / 我歌爾試聽
상로 내릴 때까지 기다리지 말지어다 / 莫待霜露零
게혜사(揭傒斯) 지음

기자가 끼친 풍교(風敎) 어언 이천 년 / 箕子餘風二千載
책구루 아래에 글 읽는 소리 이어졌네 / 幘溝漊下有書聲
공사의 신분으로 압록강 멀리 건너와서 / 貢士來經鴨綠遠
등과하여 아비의 영광을 안고 가는구나
 / 登科去被牙緋榮
중조가 명을 나눠 보내는 새 조사요 / 中朝分命新詔使
동인이 다투어 영접할 옛 서생이라 / 東人爭迎舊書生
덕음을 선포하여 성교를 넓힌 뒤에는 / 德音宣布聲敎廣
아들을 데리고 와 태학에 들여보내시기를 / 遣子入學同趨京
한림 수찬(翰林修撰) 송경(宋褧) 지음

중보로 말하면 동방의 현인이라 / 中父東方彦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벌써 수그러지네 / 聞名心已降
과장에서 으뜸으로 추대되신 분 / 科場推第一
그 재기 본래 겨룰 자가 없는지라 / 才氣本無雙
기쁨이 아래로 탐라국까지 넘쳐나고 / 喜溢耽羅國
은혜가 위로 압록강까지 입혀졌다오 / 恩浮鴨綠江
백운이 집에 비록 가득 찼다고 하더라도 / 白雲雖滿舍
그 좋은 계책으로 경륜해 보지 못하다니
 / 長策未經邦
그런 분과 동년으로 함께 근무하는 것은 / 同年復同仕
천 년에 한 번 있을 기이한 인연이라 하리 / 千載一奇逢
그대야 고향을 생각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 君念故鄕去
사람들은 말하리 우리 역이 동으로 간다고 / 人言吾易東
교화를 멀리 펴는 임금님의 덕음이요 / 綸音宣化遠
얼굴을 붉게 비치는 사신의 복색이라 / 袍色映顔紅
시험 삼아 명정의 대책문 읽어 보시게 / 試讀明廷策
격양하는 늙은이의 모습 잊을 수 없으리니
 / 難忘擊壤翁
역산(歷山) 정익(程益) 지음

바다 물결이 해님을 씻기는 부상의 동쪽 / 海波浴日扶桑東
삼한을 밝게 비춰 주는 수많은 도서들 / 三韓照耀圖書叢
대지 어디이든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 始知輿地無遠邇
인풍과 화우가 똑같이 적셔 줌을 알겠도다 / 仁風化雨沾濡同
지난번 과거에 공을 따라 나도 응시하였는데 / 憶昨射策來趨風
황상이 친히 유리궁에 거둥하신 자리에서 / 袞衣親御琉璃宮
운연처럼 떨어지고 용사처럼 달아난 글로 / 雲煙落紙龍蛇走
성성이 핏빛처럼 붉은 조복을 하사받았지요
 / 猩猩血染恩袍紅
황궁에서 조서를 삼가 받들고 나와 / 紫泥擎出蓬萊裏
진사의 신분으로 금의환향하시는 분 / 進士榮歸耀鄕里
자개 상에 맛있는 해물 한껏 차려 올리면 / 雕盤海錯隨意陳
백발의 자친도 안색이 기쁘게 펴지시리라 / 白髮慈親顔色喜
성명한 천자께서 바야흐로 유자를 중히 여기시니 / 聖明天子方嚮儒
산에 돌아가 불러도 오지 않는 일은 없으시기를 / 愼勿還山呼不起
뒷날 도성 문에 명추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 都門他日候鳴騶
수정 술잔에 장밋빛 술 가득 따라 올리리다 / 玻瓈杯灩薔薇水
정겸(程謙) 지음

아름다운 풍속이 기자 덕분이라면 / 俗美以箕子
문교가 일어남은 황상의 은덕이라 / 敎興維聖明
이역에서 그 누가 배우지 않았으랴만 / 殊方誰不學
우리 그대가 홀로 이름을 이루었도다 / 吾子獨成名
성은이 우악해서 빛나는 붉은 조복이요 / 恩渥緋衣潤
바람이 맑게 개어 잠잠한 푸른 바다로다 / 風淸碧海平
조서 받들고서 비단옷 입고 돌아가면 / 錦還擎鳳詔
환영하는 소리가 도성을 진동하리라 / 歡迓定傾城
대명(大名) 곽가(郭嘉) 지음

[주D-001]황경(皇慶) : 원나라 인종(仁宗)의 첫 번째 연호(1311〜1313)이다.
[주D-002]염내(簾內) : 과거 고시의 성적을 매기는 관원을 말한다. 시험장에서 감독하는 관원은 염외(簾外)라고 한다.
[주D-003]문명(文明) : 《서경》〈순전(舜典)〉에 “깊고 지혜롭고 문채가 나고 환하게 밝다.〔濬哲文明〕”라는 말로 순 임금의 덕을 표현한 대목이 있다.
[주D-004]유능한……때문에 : 《맹자》〈이루 하(離婁下)〉에 “탕왕은 중도를 잡고 행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였다.〔湯 執中 立賢無方〕”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증청(曾靑)과……같다 : 《순자(荀子)》〈왕제(王制)〉에 “남해에서는 우핵과 치혁과 증청과 단간이 나오는데, 이것을 중국에서 얻어서 재화로 삼고 있다.〔南海則有羽翮齒革曾靑丹干焉 然而中國得而財之〕”라는 말이 나온다. 증청은 청색 안료(顔料)이고, 단간(丹干)은 단안(丹矸)이라고도 하는데, 주사(朱砂)이다.
[주D-006]기러기가……길하다 :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이다.
[주D-007]진도(珍島) : 중국 서호(西湖) 속의 섬 이름이다.
[주D-008]백암성(白巖城) : 요동(遼東)의 양수(梁水) 서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안시성(安市城)이 그 근처에 있으며, 암주(巖州)라고도 한다.
[주D-009]수레……그분임을 : 옛날에 가정이 일개 서생의 신분으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가 이제는 중국 사신의 신분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기수(棄繻)는 비단 종이를 둘로 나눠 만든 증명서를 버렸다는 뜻으로, 한나라 종군(終軍)의 고사이다. 종군이 젊어서 장안(長安)으로 갈 적에 걸어서 관문에 들어서니, 그곳을 지키는 관리가 수(繻)를 지급하면서 다시 돌아올 때 맞춰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종군이 앞으로 그런 증명서는 필요 없을 것이라면서 버리고 떠났는데, 뒤에 종군이 알자(謁者)가 되어 사신의 신분으로 부절(符節)을 세우고 군국(郡國)을 돌아다닐 적에 그 관문을 지나가자, 옛날의 관리가 알아보고는 “이 사자는 바로 예전에 증명서를 버린 서생이다.〔此使者乃前棄繻生也〕”라고 말했다 한다. 《漢書 卷64下 終軍傳》
[주D-010]얘기……모인다고 : 당나라 때에는 관직을 지닌 자는 조포(皁袍)를 입고, 관직이 없는 유생은 백포(白袍)를 입고, 서민은 포포(布袍)를 입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하여 백포가 거인(擧人) 즉 입시생(入試生)의 복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說郛 卷44上 臣庶許服紫袍》
[주D-011]중조(中朝)에서……풍긴다네요 : 가정이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고서 영광스럽게 귀향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중조는 중국 조정을 가리키고, 고선(高選)은 높은 성적으로 합격한 것을 말하고, 섬궁(蟾宮)은 두꺼비가 산다는 월궁(月宮)이고, 계자(桂子)는 계수나무 꽃을 말한다.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을 한 극선(郤詵)에게 진 무제(晉武帝)가 소감을 묻자, 극선이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를 꺾고, 곤륜산(崑崙山)의 옥돌 한 조각을 쥐었다.”라고 답변하였는데, 섬궁 즉 월궁에 계수나무가 있다는 전설을 여기에 덧붙여서, 과거 급제를 ‘섬궁절계(蟾宮折桂)’로 비유하곤 한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12]금림(禁林) : 금원(禁苑)의 숲이라는 뜻으로 상림(上林)과 같은데,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인다.
[주D-013]원통(元統)의 임금님 : 연호가 원통인 원나라 순제(順帝)를 가리킨다.
[주D-014]오성(鰲省) : 한림원의 별칭이다.
[주D-015]송본(宋本) : 1281~1344. 가정의 좌주(座主)이다. 지치(至治) 원년(1321) 고려의 최해(崔瀣)가 제과(制科)에 급제할 때, 40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였다.
[주D-016]구양현(歐陽玄) : 1273~1358. 허겸(許謙)의 제자로, 게혜사(揭傒斯)와 함께 허문사걸(許門四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목은이 20세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3년 동안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으로 있을 당시에 그를 종유하면서 학업을 닦았고, 또 제과(制科)에 응시했을 때에는 좌주(座主)가 된 인연이 있다.
[주D-017]곡포(鵠袍) : 흰 도포라는 뜻으로 과거 응시생이 입던 옷인데, 여기서는 유생(儒生)을 뜻한다.
[주D-018]명년에……있으리라 : 다음 해부터 벌써 고려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어 원나라 조정에 천거되는 등 순제(順帝)의 흥학(興學) 정책의 효과가 일찌감치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녹명(鹿鳴)〉은 《시경》〈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본래는 임금이 신하를 위해 연회를 베풀며 연주하던 악가(樂歌)인데, 후대에는 군현의 장리(長吏)가 향시(鄕試)에 급제한 거인들을 초치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어 주며 그들의 전도(前途)를 축복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참고로 한유(韓愈)의 〈송양소윤서(送楊少尹序)〉에 “양후(楊侯)가 향리에서 과거에 급제한 뒤에 녹명을 부르면서 올라왔다.〔擧於其鄕 歌鹿鳴而來〕”라는 대목이 나온다. 충부(充賦)는 관원의 천거를 받고 조정에 진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9]교문(橋門)에……달빛이여 : 동방의 고려 출신인 가정이 황제가 임석한 제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을 말한다. 교문은 주위에 물이 흐르고 다리를 통해 네 개의 문으로 들어가는 태학을 가리킨다. “향사례가 끝나고 천자가 정좌하여 직접 강을 하면 제유가 경서를 지니고 그 앞에서 토론을 벌이는데, 관디를 한 진신들을 비롯해서 교문을 에워싸고 구경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饗射禮畢 帝正坐自講 諸儒執經問難於前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蓋億萬計〕”라는 말이 《후한서》 권79상 〈유림열전(儒林列傳)〉 서문에 보인다. 계수나무는 진(晉)나라 극선(郤詵)이 장원급제한 뒤에 ‘계림의 가지 하나〔桂林一枝〕’를 꺾었다고 한 고사를 암시한 것이고, 석진(析津)은 석목진(析木津)의 준말로 고려를 가리킨다. 석목은 12성차(星次) 중의 하나인데, 십이지(十二支)의 인(寅)에 해당하여 동방인 우리나라와 요동 일대를 비춰 준다고 여겨졌다.
[주D-020]승사(乘槎) : 천자의 명을 받들고 해외에 사신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장건(張騫)이 한 무제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 황하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배를 타고〔乘槎〕’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전설이 남조(南朝) 양(梁)의 송름(宋懍)이 지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나온다.
[주D-021]조정……없으리오 : 가정이 표면상으로는 사신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가지만, 실제로는 고향에 돌아가서 어버이를 뵙고자 하는 평소의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 아니냐는 해학의 뜻이 섞여 있다. 증책(贈策)은 선물로 준다는 말로, 전송하면서 한마디 말을 해 주는 것을 뜻한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 사회(士會)가 진(秦)나라에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할 적에, 진(秦)나라 요조(繞朝)가 채찍을 증정하면서 사회의 진짜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대는 진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나의 계책이 마침 채용되지 않았을 뿐이다.〔子無謂秦無人 吾謀適不用也〕”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주D-022]기북(冀北)의……않고 : 가정이 제과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라는 말이다. 기북은 준마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인데, 한유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이 기북의 들판을 한번 지나가자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여기서 백락은 시관(試官)을 뜻한다.
[주D-023]요동의……때 :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천자의 사신으로 다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요동 사람 정 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1천 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華表柱) 위에 내려앉았다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고 하자 허공으로 날아올라 배회하다가 탄식하면서 떠나갔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또 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 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바다 속에서 또 먼지가 날리게 될 것이라고 성인들이 모두 말하고 있다.〔聖人皆言 海中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전한다. 《神仙傳 卷7 麻姑》 먼지가 아직 날리지 않았다는 말은 시간이 아직 많이 흐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주D-024]금문(金門) : 한나라 궁문인 금마문(金馬門)의 약칭으로 보통 대궐이나 조정을 가리킨다.
[주D-025]안탑(雁塔)에……이름이요 : 가정이 원나라의 제과에 급제한 것을 말한다. 당나라 때 진사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자은사(慈恩寺)의 대안탑(大雁塔) 아래에다 이름을 기록해 넣은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唐摭言 慈恩寺題名游賞賦詠雜記》
[주D-026]성교(聲敎)가……번졌으니 : 중국의 문교 정책이 고려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우공(禹貢)〉 맨 마지막의 “동쪽으로는 바다에까지 번져 갔고, 서쪽으로는 유사 지역에까지 입혀졌으며, 북쪽과 남쪽의 끝까지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의 풍성(風聲)과 교화가 사해에 다 미치자, 우가 검은 규를 폐백으로 올리면서 순(舜) 임금에게 그의 일이 완성되었다고 아뢰었다.〔東漸于海 西被于流沙 朔南曁 聲敎訖于四海 禹錫玄圭 告厥成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27]구목(九牧)의 금(金) : 구주(九州)의 지방 장관이 중앙 조정에 올리는 금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원나라 조정에 진출하기 위해 올라오는 고려의 인재라는 의미로 쓰였다. “옛날 하(夏)나라의 덕이 한창 성대할 적에는 먼 지방에서 기이한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리고 구주의 지방에서 금을 바쳤다.〔昔夏之方有德也 遠方圖物 貢金九牧〕”라는 말이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3년 기사에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금은 구리와 같은 금속을 가리킨다.
[주D-028]쇠뇌를……구경하고 : 가정이 고향에서 환영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다.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고향인 파촉(巴蜀) 땅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 촉군 태수(蜀郡太守) 이하가 모두 교영(郊迎)하였으며, 현령(縣令)은 ‘몸소 쇠뇌를 등에 지고 앞장서서 달림으로써〔負弩矢先驅〕’ 존경하는 뜻을 보였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29]수레를……뚫리리라 : 가정의 수레를 맞기 위해 길이 뚫릴 것이라는 말이다. 한나라 주매신이 만년에 영달하여 회계 태수(會稽太守)로 부임할 때 누더기 차림에 인수(印綬)를 허리에 차고 군저(郡邸)에 가자 아전이 인수를 발견하고는 경악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영접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치우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주매신을 경멸하며 버렸던 옛날의 아내와 그 남편도 끼어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64上 朱買臣傳》
[주D-030]새로운……주시기를 : 참고로 왕기(王沂)의 문집인 《이빈집(伊濱集)》 권7〈고려에 돌아가는 식 스님을 전송하며〔送式上人還高麗〕〉라는 칠언율시 미련(尾聯)에 “새로운 시 짓거들랑 부디 측리에 써서, 벽운의 멋진 시구 사람이 전하게 하시기를.〔好把新詩書側理 碧雲佳句要人傳〕”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측리(側理)는 측리지(側理紙)라는 종이를 가리킨다. 남쪽 지방에서 해태(海苔)를 재료로 해서 만드는데, 그 결이 종횡으로 이루어져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벽운(碧雲)의 멋진 시구란, 남조(南朝) 송의 시승(詩僧)인 탕혜휴(湯惠休)의 “해가 지면 푸른 구름도 서로 만나는데, 가인은 왜 이렇게 오지 않는지.〔日暮碧雲合 佳人殊未來〕”라는 구절을 말한다.
[주D-031]자금(紫金) : 적동(赤銅)과 황금을 배합한 것과 같은 진귀한 광물이라고 한다.
[주D-032]주사(主司) : 고시(考試)를 주관하는 사람, 즉 시관을 말한다.
[주D-033]연저(輦底)의 황화(皇華) : 중국의 사신이라는 말이다. 연저는 연곡하(輦轂下)의 준말인 연하(輦下)와 같은 말로, 황제의 도성을 가리킨다. 황화는 황화사(皇華使)의 준말로, 임금의 명을 받들고 멀리 사방으로 가서 아름다움을 선양하는 사신이라는 뜻인데, 《시경》〈소아(小雅) 황황자화(皇皇者華)〉에서 나온 말이다.
[주D-034]일변(日邊)의 단조(丹詔) : 황제의 조서라는 말이다. 일변은 동진(東晉)의 명제(明帝)가 어렸을 적에 부왕인 원제(元帝)에게 장안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답변한 고사에서 나온 말로, 도성의 별칭이다. 《世說新語 夙惠》 단조는 주필(朱筆)로 쓴 황제의 조서를 말한다.
[주D-035]그……듯하였고 : 가정이 책문에 답한 문장을 비유하자면, 서쪽 끝의 곤륜산(崑崙山)에서 발원한 황하가 마치 물병을 들고 지붕 위에 올라가 쏟아 붓는 것처럼 막힘없이 힘차게 흘러내리는 것과 같았다는 말이다. 한나라 전긍(田肯)이 고조에게 용병의 유리한 형세에 대해 진언을 하면서, 마치 ‘지붕 꼭대기에 앉아 물병을 거꾸로 들고 아래로 쏟을 때처럼〔居高屋之上建瓴水〕’ 막힘이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비유한 고사가 《사기》 권8〈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온다.
[주D-036]그런가……없었다네 : 전후좌우의 글이 서로 응하여 지적할 만한 허점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상산(常山)의 뱀은 수미(首尾)가 상응한다는 전설상의 뱀으로,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원하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원하며, 중앙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응원한다.〔擊其首則尾至 擊其尾則首至 擊其中則首尾俱至〕”라는 말이 《손자(孫子)》〈구지(九地)〉에 나온다. 제갈량의 팔진도(八陣圖) 역시 이 뱀으로부터 암시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주D-037]을과(乙科)로……바 :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서 제2갑(第二甲)으로 급제시키긴 하였지만, 사실은 장원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주D-038]이에……하였다오 : 가정이 한림국사원 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을 제수받은 것을 말한다. 백옥당(白玉堂)은 한림원의 별칭이다.
[주D-039]북신(北辰)이……할까 : 원나라 황제가 덕정을 펴고 있다는 말이다. 《논어》〈위정(爲政)〉에 “임금이 덕정을 펴게 되면,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북극성 주위로 뭇별들이 향해 오는 것처럼 될 것이다.〔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 而衆星共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0]적임자는……않고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탕왕은 중도를 잡고 행하였으며, 유능한 인재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였다.〔湯 執中 立賢無方〕”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1]바다엔 해일이 없는지라 : 중국의 황제가 성덕(聖德)을 발휘하여 태평한 정치를 펴고 있다는 말이다. 주(周)나라 성왕(成王) 때에 주공(周公)이 섭정하여 천하가 태평해지자, 월상씨(越裳氏)가 와서 주공에게 ‘흰 꿩〔白雉〕’을 바치며 “우리나라 노인들이 말하기를 ‘하늘에 풍우가 거세지 않고 바다에 해일이 일지 않은 지 지금 3년이 되었다. 아마도 중국에 성인이 계신 듯한데, 어찌하여 가서 조회하지 않는가.〔天之不迅風疾雨也 海不波溢也 三年於玆矣 意者中國殆有聖人 盍往朝之〕’라고 하기에 조공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였다는 말이 《한시외전(韓詩外傳)》 권5에 나온다. 월상씨는 교지(交趾)의 남쪽에 있던 고국(古國)의 이름이다.
[주D-042]영양(迎養)도……말하리오 : 고향에 계신 노모를 아예 안락한 수레에 모시고 연경에 와서 편히 봉양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영양은 관원이 자기가 벼슬하는 곳에 어버이를 모시고 와서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치병(輜軿)은 치거(輜車)와 병거(軿車)의 병칭으로, 비바람이나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의거(衣車)처럼 사방을 병풍처럼 막고, 또 누워서 쉴 수 있도록 안락하게 꾸민 수레를 말하는데, 보통 귀족의 부녀자들이 탑승한다. 참고로 《목은시고(牧隱詩藁)》 권3〈귀래(歸來)〉에 “그래서 우강 게 문안 선생이, 영양이라는 한마디 말로 의관을 놀라게 한 것이라오.〔所以盱江揭文安 迎養一語驚衣冠〕”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이 시의 구절을 두고 한 말이다. 문안(文安)은 원나라에서 시의 4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게혜사(揭傒斯 : 1274~1344)의 시호이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이문(理問)으로 고려에 나와 가정과 친하게 지냈던 게이충(揭以忠)이 그의 아우이다.
[주D-043]책구루(幘溝漊) : 고구려의 성(城) 이름이다. 고구려는 성을 구루라고 하는데, 이 성에서 한나라의 의책(衣幘)과 조복(朝服) 등을 받은 뒤에 이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세시(歲時)에 와서 가져다 썼기 때문에 책구루라고 했다는 기록이 《삼국지》 권30〈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루(漊)’는 ‘루(婁)’로 쓰기도 한다.
[주D-044]공사(貢士)의……가는구나 : 고려에서 응시생의 신분으로 연경에 와서 제과에 급제한 뒤에 당당히 중국 조정의 관원이 되어 금의환향한다는 말이다. 공사는 지방이나 외국에서 중국 조정에 인재를 천거하는 것, 혹은 천거된 인재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고려의 향시에 합격하고 나서 원나라의 전시(殿試)에 응시하기 위해 올라온 수험생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아비(牙緋)는 상아홀(象牙笏)과 홍포(紅袍)의 합칭으로, 조관(朝官)을 뜻한다.
[주D-045]송경(宋褧) : 송본(宋本)의 아우이다. 형제가 이송(二宋)으로 이름을 떨쳤다.
[주D-046]탐라국(耽羅國) : 제주도를 말하는데, 《원사(元史)》 권208〈외이열전(外夷列傳)〉에 고려의 속국으로 하나의 전(傳)을 별도로 가지고 있다.
[주D-047]백운(白雲)이……못하다니 : 가정이 고려에서 흰 구름만 집에 가득 내려앉을 정도로 고독한 상태에서 칩거한 채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좋은 계책을 발휘하여 국가를 경영할 기회를 가져 보지 못하게 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는 말이다.
[주D-048]우리……간다고 : 한나라 정관(丁寬)이 전하(田何)에게 《주역》을 다 배우고 나서 동으로 낙양에 돌아갈 적에, 전하가 문인에게 “우리 역이 그를 따라 동으로 간다.〔易以東矣〕”라며 탄식한 고사가 있다. 《漢書 卷88 儒林傳 丁寬》
[주D-049]시험……없으리니 : 요 임금 때와 같은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방책이 가정의 책문 답안지 속에 모두 들어 있다는 말이다. 격양(擊壤)은 땅을 두드린다는 뜻인데 요 임금 시대에 어느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가 전한다. 《논형(論衡)》 〈예증(藝增)〉에, “나이 50이 된 어떤 사람이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를 본 사람이 말하기를, ‘위대하도다, 요 임금의 덕이여.’ 하자, 땅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하고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 지면 쉬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밥 먹을 뿐이니, 임금님의 힘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상관이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하였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0]화우(化雨) : 제때에 내려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비라는 뜻으로, 《맹자》〈진심 상(盡心上)〉의 ‘시우화지(時雨化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유리궁(琉璃宮) : 방장산(方丈山) 위에 있다는 신선의 궁전으로,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십주기(十洲記)》에 그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전시(殿試)가 행해진 궁전을 말한다.
[주D-052]운연(雲煙)처럼……하사받았지요 : 가정이 웅건한 필세로 막힘없이 답안지를 작성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뒤에 한림원의 관직을 제수받았다는 말이다. 참고로 ‘초성(草聖)’으로 전해지는 장욱(張旭)의 글씨에 대해서 두보가 “한번 붓을 휘갈겨 종이 위에 쓰면 마치 구름이나 연기와 같다오.〔揮毫落紙如雲煙〕”라고 묘사한 구절이 나오고, 초서(草書)를 노래한 이백의 시에 “때때로 용과 뱀이 달아나는 것만 보인다.〔時時只見龍蛇走〕”라고 표현한 구절이 나온다. 《杜少陵詩集 卷2 飮中八仙歌》《李太白集 卷7 草書歌行》
[주D-053]명추(鳴騶) : 귀인(貴人)의 수레 앞에서 잡인(雜人)의 통행을 소리쳐서 금하는 기졸(騎卒)을 말한다.



 해동잡록 2 본조(本朝)

김종직(金宗直)

○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계온(季昷)이요, 숙자(淑滋)의 아들로, 스스로 호를 점필재(佔畢齋)라 하였다.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몸가짐이 단정 성실하고 학문이 정밀 심오하며, 문장이 고고(高古)하여 당대 유종(儒宗)이 되었다.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전후(前後)의 명사들이 많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성종이 중히 여겨 발탁하여 경연에 두었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벼슬에 있게 하면서 쌀과 곡식을 특사하였으며, 죽으매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연산군 무오사화(戊午士禍)가 구천에까지 미쳐 유문(遺文)을 불태워 없앴는데 뒤에 잿더미에서 주워모아 세상에 간행하였다.
○ 공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총각 때에 벌써 시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매일 수천 마디를 기억하였고, 나이가 약관(弱冠)도 못 되어 문명(文名)이 크게 떨쳤다. 〈지서(志序)〉
○ 친상을 당하여 복상을 마치자 금산(金山) 황악(黃岳) 밑에 서당을 짓고 그 옆에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 놓고 서재의 이름을 경렴당(景濂堂)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무극옹(無極翁 주염계)을 사모하였기 때문이다. 매일 그 안에서 시만 읊고 세상일에는 뜻이 없는 것 같았다. 〈비서(碑序)〉
○ 공이 일찍이 승무원에 들어갔는데 함종군(咸從君) 자익(子益) 어세겸(魚世謙)이 본원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 크게 탄식하기를, “가사 나로 하여금 채찍을 잡고 그의 종이 되게 하더라도 달게 받았을 것이다.” 하였다. 〈비서(啤序)〉
○ 공이 경연에 들어가 임금을 모시는데, 말이 길지 않으나 뜻이 통하여 강독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임금의 사랑이 그에게로 쏠렸다. 〈비서(碑序)〉
○ 공은 몸집이 작았으므로 어자경(魚子敬 어세공(魚世恭))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 만약 그에게서 누가 재주를 빼앗아 간다면 한 어린아이만 남을 것이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깔깔 웃었다. 상동
○ 공은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들어 야위매 공이 상심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지었다. 상동
○ 공의 아버지는 길재(吉再)에게서 배웠으며, 한때의 선비들이 모두 종직(宗直)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모아 끼리끼리 서로 따랐다. 이승건(李承健)이 그때 한림(翰林)이었는데 사기(史記)에 쓰기를, “남인(南人)이 서로 도와서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스승을 기리어 스스로 한 당을 만들었다.” 하였더니, 그 후 이극돈(李克墩)이 승건(承健)의 사초(史草)를 보고 매양 직필(直筆)이라 칭찬하였다. 《유선록(儒先錄)》
○ 점필재(佔畢齋)가 답계역(踏溪驛)에 이르렀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스스로 초회왕(楚懷王)이라고 하면서,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죽음을 당하여 침강(郴江 호남성에 있음)에 잠겨 있다.” 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아니하였다. 내가 깜짝 놀라 깨어서 말하기를, “ 회왕은 남초(南楚) 사람이요, 나는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만여 리나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시대의 차이가 또한 천여 년이나 되는데 내 꿈에 와서 나타나니 이 무슨 징조일까.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그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이다.” 하고, 드디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슬퍼하였다.
홍치(弘治) 무오년(연산군 4년) 7월 17일의 전교(傳敎)에 이르기를, “한 비천한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임금의 총애가 조정의 으뜸이었다. 지금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편수한 사초(史草) 속에 부도(不道)한 말로 선왕조(先王朝)의 사실을 거짓으로 기록하고, 또 그의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기재하고 말하기를, ‘충성과 의분의 뜻이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종직이 속으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 있음이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니, 해당하는 죄명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7월 27일에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하여 죽이고 종묘에 아뢰었다. 본전(本傳)
○ 유자광(柳子光)이 함양(咸陽)에 노닐면서 시를 지어 그 고을 원에게 현판에 새겨 붙이게 하였는데, 점필재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작자인데 감히 현판을 한단 말이냐.” 하고, 떼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무오년의 화가 일어나매 선생이 무덤 속에서 극형을 받고 아울러 〈환취정기(環翠亭記)〉도 철거되었으니, 세상 사람이 함양에서 현판의 원한을 보복한 것이라 하였다. 본전(本傳)
○ 함양군에서 해마다 임금에게 차[茶]를 바쳤으나 이 고을에서는 차가 나지 않으므로 매양 백성에게 부과하니, 백성들은 돈을 주고 비싸게 사서 바쳤다. 점필재가 처음 이 고을에 와서 그 폐단을 알고 손수 《삼국사(三國史)》를 열람하다가 신라 때에 당 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얻어다가 지리산(智異山)에 심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말하기를, “고을 함양 이 산 밑에 있으니 어찌 신라 때에 남긴 종자가 없겠는가.” 하고는, 여러 늙은이들에게 찾아 가서 물어 보았더니 과연 암천(巖川) 북쪽 대밭 속에서 몇 떨기를 얻었으므로 차밭[茶園]을 그 고장에 마련하게 하였더니, 몇 해가 안 되어 원내(園內)에 두루 번식하였다. 선생이 다원(茶園) 시 두 수를 지어 기록하였다. 본집(本集)
○ 함양 고을에 학사루(學士樓)가 있다. 학사 최치원(崔致遠)이 군수로 있을 때에 올라가 즐겼던 곳인데, 훗날 사람들이 이름 지어 학사루라 불렀다. 누각 아래에 매화 한 그루가 있는데 반은 마르고 썩었으나 가지는 아직도 정정하여 해마다 맨 먼저 꽃이 피었다. 점필재가 이 고을에 와서 보고 사랑하여 드디어 시를 지었는데,
학사루 앞에 홀로 섰는 신선이여 / 學士樓前獨立仙
만나보고 한 번 웃으매 옛모습이 의연하구나 / 相逢一笑故依然
가마 타고 지나다가 부여잡고 위로하노니 / 肩輿欲過還攀慰
올해는 봄바람이 너무 심하구나 / 今歲春風太劇顚
하였으니 이는 바람에 넘어질까 두려워해서이다. 상동
○ 황산강(黃山江) 상류에 도요저(都要渚)가 있다. 강가에 사는 백성이 거의 백 호나 되어 집들이 빽빽이 들어섰고 울타리가 서로 이어 있는데, 농사를 하지 않고 오로지 배를 부려 고기를 잡아 팔아서 재산으로 삼는다. 그 풍속이 순박하여 한 집에 손님이 오면 여러 집에서 술과 찬을 준비하기를 예의로 삼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있어서도 모두 다 그러하였다. 만일 음란한 행동을 한 계집이 있으면 물가에 모여 의논하여 그 아낙을 배에 실어 물에 띄워 내쫓았다. 상동
○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를 지었는데, 1, 회소곡(會蘇曲), 2, 우식곡(憂息曲), 3, 치술령(鵄述嶺), 4, 달도가(怛忉歌), 5, 양산가(陽山歌), 6, 대악[碓樂 방아타령], 7, 황창랑(黃昌郞)이다. 상동
○ 〈일본에 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시[送人日本詩]〉에 이르기를,
오랑캐 네 길거리가 정연히 세 거리로 갈라져 있도다 / 蠻衢井井分三町
하였고, 주(註)에, 일본 도시의 도로가 모두 사방으로 통하는데, 정정(丁町)마다 중로(中路)가 있고 세 정(町)이 한 조(條)가 되고, 조 가운데는 큰 길이 정연하며 모두 9조가 있다. 상동
○ 점필재 시의 〈오매유장진(烏昧劉將盡)〉의 주(註)에, 오매초(烏昧草)는 동인(東人)이 오을배(烏乙背)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하전(下田 토질이 좋지 못한 밭)에 나는데, 어떤 것은 손가락 크기만 하기도 하고 혹은 탄환같이 생긴 것도 있어 삶아서도 먹고 날로도 먹을 수 있다. 가뭄이 심하여 백성이 굶주리면 캐어다 먹는데, 이것은 범문정공(范文正公)이 진상한 오매초가 아닌가 한다. 매(昧)와 배(背)는 같은 음이니 동인의 말이 전하여 오을배(烏乙背 을방개를 말하는 듯)라고 한다. 상동
○ 공에게 〈일본 벼루〉라는 시가 있는데,
구리에 새긴 옥골(매화의 별칭)이 추호 같이 미묘하니 / 銅鑴玉骨妙秋毫
배에 싣고 들어와 해마다 부르는 값 비싸도다 / 海舶年年索價高
빛깔은 마간홍(짙붉은 빛) 같아 발묵을 잘하고 / 色似馬肝能潑墨
용미보다 미끄러우니 날아 올라갈까 두렵도다 / 滑勝龍尾恐飛騰
하였다. 그 주에, 벼루의 네 모퉁이에 밤나무 잎을 새겼는데 그 가장자리와 밤나무 잎이 극히 기교적이다. 상동
○ 귤(橘)과 유자[柚]는 제주에서 나는 것인데, 해마다 서울에 와서 바쳤다. 공이 〈탁라가(乇羅歌 탁라는 제주의 옛이름)〉를 지었는데,
집집이 열린 귤 흰 서리가 겨운데 / 萬家橘柚飽淸霜
대바구니에 따 담아 바다 건너 왔구나 / 採著筠籠渡海洋
대관이 받들어 대궐에 올리니 / 大官擎向彤墀進
소담스레 빛깔과 맛과 향기를 보전하도다 / 宛宛猶全色味香
하였다. 상동
○ 오매(烏梅)ㆍ대모(玳瑁)ㆍ흑산호(黑珊瑚)와 부자(附子)ㆍ청피(靑皮)는 세상에 이름난 물건인데, 물산(物産)으로 동국의 곳간일 뿐 아니라 정기(精氣)가 모두 사람을 살리도다. 점필재가 탐라 노래 14편을 지어 풍토와 물산을 대강 기록하였다. 상동
○ 나월상인(羅月上人)이 늘 소라 한 개를 품고 다니면서 혹은 산속에서 혹
은 성읍(城邑)에서 문득 불곤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곧 상인(上人)이 온 것을 알았으므로 스스로 나승(螺僧)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다음날 홍류동에 들어가게 하면 / 他年許入紅流洞
소라 소리 울리며 푸른 산에서 나오리라 / 須遺螺音出翠嵐
하였다. 상동
○ 강인재(姜仁齋 강희안(姜希顔))의 《양화록(養花錄)》에 이르기를, “서울 지방에서 매화를 접붙이는 것은 모두 천엽(千葉) 홍백 매화로서 짝이 많은 열매를 맺는데, 곧 화보(花譜)에서 이른바 중엽매(重葉梅)라는 것이다.” 하였는데, 점필재가 말하기를, “담 밑에 한 꽃이 있는데 천엽도(千葉桃)와 같다. 빛깔은 연하고 짙은 것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곧 천엽홍매(千葉紅梅)라고 말하나 매화와는 같지 않다.” 하였다. 상동
○ 지리산(智異山) 서북쪽에 저연(猪淵)이 있어 고기가 여기에서 나는데, 매년 가을에는 용유담(龍游潭)으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도로 저연으로 올라온다. 고기잡는 이가 바위와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두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안으로 떨어지는데, 등의 무늬가 가사(袈裟)와 같으므로 가사어라고 부른다. 점필재의 〈가사어〉라는 시가 있다. 상동
○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손자 인종(仁種)이 타던 말이 죽자 후원에 묻었다. 사람들이 그 조부의 풍도가 있다고들 하였다. 점필재 시에,
청백한 것을 참으로 그 자손에게 물려주었구나 / 淸白眞能遺子孫
하였다. 상동
○ 남을 위한 〈전원사시영(〈田園四時詠)〉이 있는데, 1, 매파춘색(梅坡春色), 2, 죽창하풍(竹窓夏風), 3, 국정추월(菊庭秋月), 4, 송대동설(松臺冬雪)이 그것이다. 상동
○ 금강산은 동쪽의 으뜸이고,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의 으뜸이요, 구월산(九月山)은 서남쪽의 으뜸인데,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에 오르면 눈 안에 이상의 으뜸가는 세 산이 오히려 작은 언덕 같이 보인다. 《유산록(游山錄)》
○ 〈도연명(陶淵明)의 술주(述酒)에 화답하다.〉라는 시에,
유유의 찬시(임금을 죽이고 왕위를 뺏음)의 죄를 치고 / 誅劉裕纂弑之罪
연명의 충분의 뜻을 펴도다 / 發淵明忠憤之志
하였다. 본집(本集)
○ 유면(兪勉)ㆍ전가식(田可植)ㆍ정지담(鄭之澹)등과 선산부(善山府) 연봉리(延鳳理)에 살면서 모두 장원에 뽑히었으므로 그 동네를 장원방(壯元坊)이라고 불렀는데 점필재 시에,
마을 사람이 예부터 교육을 중히 여기어 / 鄕人從古重膠厗
뛰어난 인재를 해마다 조정에 바치네 / 翹楚年年貢舜廊
한낱 성서의 연봉 마을을 / 一片城西廷鳳里
오가는 이들이 장원방이라 가리키네 / 行人指點壯元坊
하였다. 상동
○ 최 선생 한공(漢公) 태보(台甫)가 점필재 계온(季昷)과 함께 회시(會試)에 갔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그대는 재주가 비상하니 반드시 과거에 급제할 것이나 나는 부기(附驥 후배가 선배의 뒤에 붙어 명성을 얻음)의 가망이 없다.” 하니, 점필재가 말하기를, “옛날 손근(孫僅)과 그 아우 하(何)가 같이 시험을 보아 형은 장원이 되고 아우는 둘째를 하였는데, 우리 두 사람도 어찌 근과 하가 안 될지 알겠는가.” 하고,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못가의 봄 풀은 비 흔적도 많은데 / 池塘春草雨痕多
남들은 우리를 손근과 손하 같다고 말하네 / 人逭吾行是僅何
문 앞을 지나며 봄빛이 늦었다 말하지 말라 / 莫道過門春色晩
성안의 도리는 아직 피지도 않은 것을 / 滿城桃李未開花
하였는데, 이해에 모두 급제하였다. 《소문쇄록》
○ 점필재가 비로 말미암아 증약역(增若驛)에 머물면서 시를 지었는데,
증약역에서 큰 비를 만났으니 / 增若驛中三日雨
무술날 밤중에 천둥소리 요란하고나 / 戊戌夜半一聲雷
의관도 벗지 않고 앉았으니 / 不辭衣服冠而坐
기한과 갈증이 한꺼번에 찾아드네 / 其奈飢寒渴幷來
하였다. 또 한식날 비오다[寒食日雨]는 시에,
고향에 벼슬한 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 / 休誇故里印纍纍
작서(하찮은 벼슬아치들)가 설치니 감히 헤아릴 수 없도다 / 雀鼠紛紜莫敢窺
마흔 일곱 해에 머리는 세려는데 / 四十七年頭欲雪
동지 뒤 1백 5일 날 [한식] 보슬비 내리네 / 一白五日雨如絲
하였는데, 앞에 시는 기련(起聯)이고 뒤에 것은 영련(領聯)인데 모두 측자[仄字]를 놓았으나 시어(詩語)는 타당하다. 상동
○ 성화(成化) 임인년 무렵에 개령(開寧) 사람이 밭을 갈다가 돌부처를 얻었는데, 귀ㆍ눈ㆍ입ㆍ코가 다 없어진 채 밭두렁에 놓여 있었다. 우연히 천식(喘息)을 앓는 사람이 절을 하였더니 병이 약간 덜한 것 같았다. 이에 영험하다 하여 남녀가 좋은 천과 향촉(香燭)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밤낮으로 끊임이 없었고, 중도 내왕하였으므로 금산 태수(金山太守) 이인형(李仁亨)이 그 말을 듣고 포졸을 보내어 잡아다가 쫓아버렸다. 점필재가 시로써 태수를 치하하기를,
풀밭에 버려져 세월도 모르는 / 抛擲田萊不記春
미욱한 돌덩이에 무슨 신이 있단말고 / 頑然拳石有何神
처음에는 밥이나 얻으려던 목거사가 / 初如求食水居士
차츰 돈을 긁어모으는 토사인이 되었구나 / 漸作撞錢土舍人
남녀 몇 집이나 전하여 물들었던고 / 男女幾家傳汚染
향등 켠 한 마을이 우물쭈물하는데 / 香燈一里欲因循
바로 우리 원이 빈주의 태수인 양 / 我侯直是邠州守
요사를 쳐부셔 사방을 진동시켰네 / 擊破妖邪震四隣
하고, 스스로 주석하기를, “옛날 왕사종(王嗣宗)에 빈주(邠州) 태수가 되어 귀신의 사당 밑에 있는 요사스런 여우를 잡아 죽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훌륭히 여겨, ‘성조(聖朝)에 바야흐로 영웅이 있음을 믿겠네[聖朝方信有英雄]’라는 시구까지 있었다. 이번의 돌부처는 그 괴이함이 요사스런 여우보다 더하거늘 요골(妖骨)을 잡아 내쫓고 지전(紙錢)을 불살라 버려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밝게 그 잘못을 알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기특한 일이다.” 하였다. 상동
○ 점필재가 어버이가 늙었으므로 함양(咸陽)의 원이 되었는데, 강진산(姜晉山)이 시로써 전송하기를,
가상타 그대 청반을 마다하고 군수를 바라니 / 多君乞郡阻淸班
기쁘게 어버이 계신 곳에서 즐거움 다하리 / 好向庭闈罄一歡
오정이 예로부터 짝을 앎을 어이할꼬 / 五鼎從來知匹奈
영원토록 사모하여 추반이 울 것일세 / 終天永慕泣錘瘢
하였는데, 추흔(錘痕)에 울었다는 옛일을 빌려다 쓴 것이다. 《진산세고(晉山世穚)》
○ 대궐 안의 흰 따오기를 보고 시를 지었는데,
붉은 여귀 푸른 이끼 하얀 옷에 비치니 / 紅蓼蒼苔映雪衣
대궐 개천 맑고 얕아 위험치 않구나 / 御溝淸淺欠危機
가을 바람에 살며시 은하수를 살펴보니 / 秋風偸眼省雲漢
옛 짝은 아스라이 어디 메를 나는고 / 舊侶微茫何處飛
하였는데, 주에, “사물을 인하여 자기를 비유한 것이라.’ 하였다. 《시격(詩格)》
○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고 시를 더욱 잘하였는데, 정심하고 넉넉하며 세속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아 근대의 시조(詩祖)로 추앙된다. 성종이 친서로 칭찬하기를, “문장과 경제(經濟)가 아울러 훌륭하다 하겠다.” 하였다. 상동
○ 〈수오(睡晤)〉시에,
오늘 벼슬 없어 내 처음으로 되돌아오니 / 今日無官返我初
창 안 그윽한 꿈에 화서국에 이르렀도다 / 小窓幽夢到華胥
화로에 창출을 피워 글자를 쏘이며 / 一爐蒼術薰書字
바람에게 부탁하여 책을 덮었다 폈다 하게 하네 / 分付淸風自卷舒
하였는데, 그때 병으로 벼슬을 물러나고 마음이 한가로웠었다. 동상
○ 두류산(頭流山)에 해유령선암(蟹踰嶺船岩)이 있는데 전해 오기를, “상고(上古) 적에 바닷물이 넘었을 때 배를 이 바위에 매었는데 방게[蚄蟹]가 지나갔으므로 이 이름이 생긴 것이라.”고 하는데, 물가의 산과 바다의 섬이 어떤 것은 전부 드러나고 어떤 것은 반쯤 드러나 있어 마치 사람이 장막 안에 있으면서 그 상투만 드러내 보이는 것 같다. 《유두류산록(游頭流山錄)》
○ 판원(判院) 이변(李邊)이 늘 강직하다고 자부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에 남을 속인 일도 없거니와 벼슬한 뒤로부터 한 번이라도 거짓 병으로 결근한 일도 없었다.” 하였다. 점필재가 말하기를, “옛날 벼슬하는 이로서 병이라고 임금께 핑계한 사람도 전과 후에 수두룩하였는데 이 말은 좀 지나친 말인가 한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공은 문장과 도덕이 당대 진신(搢紳)의 영수였으므로 조정에 일이 있을 때에도 그에게 물었고, 학자로서 의문이 생겼을 때에도 그에게 질문하였었다. 《추강집(秋江集)》
○ 김종직은 후배 학도들을 권장하여 학문을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은 도학(道學)으로 이름이 높았고, 김일손(金馹孫)ㆍ권오복(權五福)ㆍ조위(曹偉)ㆍ유호인(兪好仁) 등은 문장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그 밖에도 길을 열어 주어 이름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무오사적(戊午事蹟)》
○ 공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여 한 책을 지었는데, 먼저 족보의 도표[譜圖]를 싣고, 다음에 기년(紀年)을, 또 그 다음에는 스승과 벗 및 평소 벼슬에 임하여 행한 일과 그 훈계의 말이 가묘(家廟) 제사 의식의 법도로 삼을 만한 것을 실어, 제목하여 《이준록(彝尊錄)》이라 하였으니, 이는 《예기》의 ‘겨울 제사 때 이정(彛鼎)에다 명문을 새긴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본서(本序)
○ 점필재는 우애(友愛)의 천성이 지극하였다. 맏형이 종기를 앓는데 의사가 지렁이의 즙이 가장 좋다고 하므로 공이 먼저 맛을 보고 먹였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묘지(墓誌)〉
○ 견우의 사는 곳 은하가 관문이 되니 / 河皷之居河爲關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바라만 보는구나 / 相望脈脈一水間
1년 3백 60일 중에 / 一年三百六十日
이 밤을 제외하고는 길이 홀아비로다 / 除却此宵長爲鰥
〈칠석(七夕)〉
○ 우리 나라 사람은 시의 격률(格律)이 신라 말기에서 고려 말엽에 이르는 동안에 무려 세 번이나 변하였다. 그 동안에 풍교(風敎)를 기록하고 미자(美刺 선을 칭찬하고 악을 비난함)를 나타내어, 개폐(開閉) 억양(抑揚)이 깊이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어, 당송(唐宋)과 견줄만하고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것이 또한 적지 아니하다. 쾌헌(快軒) 김태현(金台鉉)ㆍ괴산(槐山) 최해(崔瀣)ㆍ석간(石澗) 조운흘(趙云仡)이 각각 선집(選集)이 있는데, 석간은 간략하고, 쾌헌은 잡박(雜駁)하며, 오직 괴산의 편저(編著)만이 자못 체재를 얻었다고 하겠다. 〈풍아서(風雅序)〉
○ 우리 나라 병신년에 홍문관과 예문관의 여러 선비들이 건의하여 문신으로서 나이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였는데, 채수(蔡壽)와 권건(權健) 등 여섯 사람이 뽑혔다. 늘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하였다. 본집주(本集註)
○ 영일현(迎日縣) 동쪽 10리에 도기야(都祈野)가 있고, 그 들에 해와 달의 못이 있는데, 사람들이 신라 때에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고 일컫는다. 〈영일현기(迎日縣記)〉
○ 고려의 혜종(惠宗)이 얼굴에 방석 무늬가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추왕(皺王)이라 불렀는데, 점필재 시에,
탁금강변은 외숙의 마을인데 / 濯錦江邊舅氏鄕
흥룡사 안에는 상서로운 빛이 피어오르네 / 興龍寺裏藹祥光
지금 어른들은 유덕을 품고 / 至今父老懷遺德
퉁소 불고 북 치며 추대왕을 즐기네 / 簫皷歡娛皺大王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주D-001]유유 : 남송(南宋)의 초대 왕인 무제(武帝)의 이름인데, 그가 일찍이 도연명과 사귀었으며, 진(晉) 나라의 환현(桓玄)을 치고 공제(恭帝) 때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
[주D-002]오정 : 옛 제도에 사(士) 벼슬을 한 자는 삼정(三鼎)의 음식을 먹고 대부(大夫)는 오정(五鼎)의 음식을 먹는다고 하였다.
[주D-003]화서국 :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화서국에 가서 그 나라의 태평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화서국은 태평한 나라를 말하고, 낮잠을 화서지몽(華胥之夢)이라고 한다.

가정집 제18권
 율시(律詩)
평생에 종유(從游)한 이들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는데, 그중에서 졸재(拙齋)와 춘헌(春軒)이 서로 잇따라 세상을 떠난 뒤를 이어 중부(仲孚) 사의(司議)가 또 황천객이 되었다. 이에 삼애시(三哀詩)를 지어서 치암(恥菴)과 급고당(汲古堂)에게 부쳐 드리다.

세리의 교제는 예로부터 궁해지기 쉬운 것 / 勢利從來道易窮
시종일관 담담하게 사귀는 이들이 또 있으랴 / 淡交誰復有初終
한 시대의 모범 생각나네 춘헌 어르신 / 一時模楷懷春叟
천 수의 문장 그리워라 졸재 노인장 / 千首文章憶拙翁
문정도 옛날과 달리 적적하기만 한데 / 寂寂門庭非舊日
천지에 또 망망하게 가을바람 불어오네 / 茫茫天地又秋風
그중에서 정자가 가장 나이 어리니 / 箇中鄭子最年少
이 한은 우리가 모두 품을 수밖에요 / 此恨知公與我同

[주C-001]평생에……부쳐 드리다 : 졸재(拙齋)는 최해(崔瀣 : 1287~1340)의 호이고, 춘헌(春軒)은 최문도(崔文度 : ?~1345)의 호이고, 치암(恥菴)은 박충좌(朴忠佐 : 1287~1349)의 호이다. 급고당(汲古堂)은 미상이다.
[주D-001]시종일관……있으랴 : 참고로 《장자》〈산목(山木)〉에 “군자의 사귐은 담담하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라는 말이 나온다.

가정집 제15권
 율시(律詩)
대신 지어서 전라도 민 안렴(閔按廉)에게 부치다


소매 속에 부질없이 전송하는 시를 넣고 / 袖中空有送行詩
교정으로 말 달렸으나 미치지 못하였소 / 騎發郊亭未可追
그래도 나에게 소식을 주니 부끄러워라 / 深愧信音猶到我
관풍이 당시와는 전연 같지 않소그려 / 觀風全不似當時

생사를 몰라 부르짖으며 그저 애만 태웠나니 / 存沒驚呼便熱中
오래 떠돈 세상살이 더 어떻게 견디리오 / 更堪世事久西東
돌아와서 그림 보니 더욱 슬퍼지는 마음 / 歸來見畫增惆悵
예산으로 졸옹을 다시 찾을 수도 없으니 / 無復猊山訪拙翁


가정집 제15권
 율시(律詩)
경상도 박 안렴(朴按廉)의 글을 얻고 나서 시를 지어 감사하는 뜻을 표하다

서신을 나에게 보내 주어 얼마나 놀랐는지 / 尺素方驚及弊廬
슬픔과 기쁨이 교차함이 또 어떠하였겠소 / 悲歡交集復何如
정녕 일본 사신을 일찍 돌아가게 하여 / 丁寧來使早歸去
예산에게 답서를 짓게 하지 않았으면 / 莫向猊山索報書

[주D-001]예산(猊山) : 개성(開城) 남쪽 사자산(獅子山) 밑에 은거하면서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 자호한 최해(崔瀣 : 1287〜1340)를 가리킨다.

견한잡록(遣閑雜錄)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 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
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하였다.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 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忠惠王)
경진 후(後) 원년(1340), 원 지원 6년

○ 봄 정월에 순천군(順天君) 채홍철(蔡洪哲)이 졸하였다. 홍철은 일찍이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한가로이 은거한 것이 무려 14년 동안이었는데,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약을 조제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충선왕(忠宣王)이 평소부터 그 이름을 알고 불러서 등용하여, 드디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사람됨이 재주가 있어서 문장과 기예에 모두 능하였으며, 더욱 불교를 좋아하여 일찍이 자기 집의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짓고, 온 나라에 약을 보시(布施)하니, 사람들이 많이 덕을 입었다. 또한 집의 남쪽에는 중화당(中和堂)을 지어서 국가의 원로 8명을 맞이하여 기영회(耆英會)라 하고, 자하동 신곡(紫霞洞新曲)을 지었는데, 지금도 악부(樂府)에 그 악보가 있다.
○ 정천기ㆍ인승단(印承旦)이 덕녕부(德寧府)에 나아가 전왕의 탄일을 하례하는데, 백관 중에서는 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 원 나라에서 전왕을 형부에 가두고, 또한 김인연(金仁沇)ㆍ김륜(金倫)ㆍ한종유(韓宗愈)ㆍ홍빈(洪彬)ㆍ이몽가(李蒙哥)ㆍ이엄(李儼)ㆍ노영서(盧英瑞)ㆍ안천길(安千吉)ㆍ손수경(孫守卿)ㆍ윤원우(尹元佑)ㆍ남궁신(南宮信)을 옥에 가두고, 중서성(中書省)ㆍ추밀원(樞密院)ㆍ어사대(御史臺)ㆍ한림원(翰林院)ㆍ종정부(宗正府) 등 5부(府)의 관원을 시켜 여러 가지로 이들을 심문했는데, 적(頔)의 무리에 말 잘하는 자가 많았지만 김륜은 이것을 한마디로 잘라 버렸고, 말이 간단하면서도 곧으니 5부의 관원들이 태도를 바꿔 그를 대하였다.
○ 2월에 원 나라에서 발란해대왕(孛蘭奚大王)을 탐라(耽羅)에 귀양보냈다. 경술에 혜성(彗星)이 동방에 나타났고, 갑인에 또 나타났다.
○ 3월에 채하중(蔡河中)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탈탈대부(脫脫大夫)가 황제에게 아뢰어 전왕을 석방하고, 왕위에 복위하게 하여 주었다." 하였다. 이때에 백안(伯顔)이 전부터 감정을 품고 왕으로 하여금 적(頔)의 무리와 사실을 따지게 하였는데, 이조년(李兆年)은 격분하여 이제현(李齊賢)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의 앞에 나아가서 직접 하소연하면 그 뜻을 가히 돌이킬 수 있을 것이며, 문지기가 무기를 들고 막고 있기 때문에 들어가서 호소할 수가 없으나, 다행히 그가 성남(城南)으로 사냥을 나가게 되면, 내가 길 옆에서 글월을 올리고 그 말발굽 아래에서 머리를 깨뜨려 죽음으로써 우리 임금의 억울함을 발명할 터이니, 그대는 붓을 잡아 나의 글을 써 주시오." 하고, 밤에 일어나 목욕하고, 닭이 우니 떠나려고 하였다. 백안이 마침 이날 실각하여 글은 마침내 올리지 못하였으나, 듣는 사람이 모두들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담이 몸보다 크다." 하였다. ○ 기철(奇轍)과 권적(權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한악(韓渥)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윤석(尹碩)을 좌정승(左政丞)으로 삼았다. ○ 계사일에 왕이 원 나라에서 돌아왔다. ○ 원 나라에서 기씨(奇氏)를 책봉하여 제2 황후로 삼았다. 황후는 본국 행주(幸州) 출신으로 총부산랑(摠部散郞) 자오(子敖)의 딸인데, 황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식(軾)ㆍ철(轍)ㆍ윤(輪)ㆍ원(轅)은 모두 황후의 오빠이다. ○ 이조년을 정당문학으로 삼았다.
○ 6월에 검교 성균관대사성(檢校成均館大司成) 최해(崔瀣)가 졸하였다. 해는 평생 집안 살림에 관심이 없었고, 스스로 호를 졸옹(拙翁)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어 문장(文章)이 되었으나 시속(時俗)에서 벗어나기를 힘썼으며,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성품이 고상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일이 적고, 속세와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이단(異端)을 배척하였다. 또 남의 잘잘못을 말하기를 좋아하여, 그 때문에 등용되었다가는 곧 또 물러나고 하였다. 죽은 뒤에 아들이 없고 집이 몹시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서, 친구들이 부의(賻儀)하여 장사를 지내었다.

고려사절요 제24권
 충숙왕(忠肅王)
경신 7년, 원 연우 7년

○ 봄 정월 초하루 신사일에 원 나라에서 와서 고하기를, “일식(日蝕)이 있을 것이니 신정 축하의 예를 중지하고, 모든 관원들이 소복 차림으로 일식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계미일에야 하례(賀禮)를 거행하였다. ○ 총부전서(摠部典書) 윤석(尹碩)을 원 나라에 보내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고, 길창군(吉昌君) 권준(權準)에게는 성절(聖節)을 축하하게 하였다.
○ 2월에 낭장 옥순(玉純)이 원 나라에서 와서 황제가 붕(崩)한 것을 고하였다. 조정의 모든 관원들이 자문(紫門)에서 회곡(會哭)하고, 검교평리 진양필(陳良弼)을 원 나라에 보내어 조위(弔慰)하게 하였다.
○ 왕이 미행(微行)으로 교외에서 사냥하였다.
○ 3월에 상왕이 황태후의 전지를 받아 환자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 등 6명이 탈취한 토지와 노비를 모두 찾아 내어 그 본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백안독고사는 스스로 거세(去勢)하고 엄인(閹人)이 되어서 기회를 얻어 인종황제(仁宗皇帝) 잠저(潛邸)에서 섬기었다. 아첨하고 음험하여 불법이 많으므로, 상왕이 매우 미워하였다. 백안독고사가 그것을 알고서 중상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인종과 황태후가 상왕을 후대하고 있으므로 말을 내지 못하였다. 일찍이 상왕에게 무례하므로, 상왕이 태후에게 청하여 장형을 가하였더니 원한이 더욱 깊어져서 인종이 붕하고 태후도 또한 물러나와 별궁에 살게 되자, 독고사(禿古思)는 더욱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팔사길(八思吉)에게 후하게 뇌물을 주고 온갖 모략으로 상왕을 무고하고 참소하였다.
○ 평리 김정미(金廷美)를 원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권부(權溥)를 첨의정승으로, 김이용(金利用)을 찬성사로, 조운경(趙雲卿)ㆍ이광봉(李光逢)을 평리로 임명하였다. ○ 원 나라에서 예부낭중(禮部郞中) 홀라출(忽刺出)을 보내와서 즉위 조서를 반포하였다.
○ 5월에 상왕이 다시 황제에게 주청하여 강남(江南)에 향(香)을 내리게 하였다. 대체로 시사가 장차 변할 것을 알고 환(患)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사자를 보내어 급히 소환하고 기사(騎士)로 하여금 다그쳐서 몰아오게 하니 시종하던 신료들은 모두 달아나 숨고, 흥례군(興禮君) 박경량(朴景亮)과 수안군(遂安君) 이연송(李連松)은 독약을 먹고 죽었다.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가 권세를 부리므로, 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 6월에 대호군 윤길보(尹吉甫)를 원 나라에 보내어 매를 바치게 하였다.
○ 가을 7월에 채홍철(蔡洪哲)을 평강군(平康君)으로 봉하고, 최성지를 판민부(判民部)로, 김정미(金廷美)ㆍ조연수(趙延壽)를 찬성사로 임명하고, 원충(元忠)을 평리로, 김원상(金元祥)을 삼사사로, 윤신걸(尹莘傑)ㆍ유돈(柳墩)을 밀직사로, 이제현을 지밀직사사로, 정윤흥(鄭允興)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 찬성사 김정미를 원 나라에 보내어 상왕께 문안드렸다.
○ 8월에 원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백안독고사에게 전지와 노비를 다시 주라고 명하고, 또 동녀와 고자를 요구하였다. ○ 감시를 고쳐 거자시(擧子試)로 하였다. 우대언(右代言) 허부(許富)가 이 과시(科試)를 관장하고 정을보(鄭乙輔) 등 80여 명을 뽑았다. 부는 글자를 잘 알지 못하였으므로 오직 방두(榜頭) 한 사람만 뽑고, 그 나머지는 우열(優劣)을 가리지 않고 봉미에 쓰인 이름을 열어 보는 차례대로 이름을 쓰니, 사람들이 모두 조소하였다. ○ 왕이 미행(微行)하여 근교(近郊)에서 사냥하였다.
○ 9월에 문선왕(文宣王)의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왕이 은병(銀甁) 30개를 내주어 그 비용을 보조하였다. 재신ㆍ추신들도 모두 재물을 내어 보조하였다. ○ 상왕이 대도(大都)로 돌아오니, 황제가 중서성에 명하여, “관원을 시켜서 본국에 호송하여 안치하라." 하였다. 왕이 머뭇거리며 즉시 떠나지 않았다. ○ 최용갑(崔龍甲) 등 33명에게 급제를 주었는데 이제현ㆍ박효수(朴孝修)가 뽑은 사람들이다. 왕이 효수의 청백함을 가상하게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백미 1백 석을 주어서 학사연(學士宴)을 마련하게 하였다.
○ 정해일에 평주(平州) 온정(溫井)에 거둥하였다. 무술일에 조정의 모든 관원이 중문(中門)에서 영알(迎謁)하였는데, 판관(判官) 조문근(趙文瑾)이 거가(車駕) 앞에서 소리를 치니 말이 놀랐다. 왕이 화가 나서, 잡으라고 명하니, 모든 관원들이 다 달아났다. 그 뒤부터는 미행(微行)하다가 사람을 만나면 모조리 매질을 하였다.
○ 겨울 10월에 단양부주부(丹陽府主簿) 안축(安軸), 장흥고사(長興庫使) 최해(崔瀣), 사헌규정(司憲糾正) 이연종(李衍宗)을 원 나라에 보내어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다. 해가 드디어 제과에 합격하였다. ○ 원 나라에서 상왕을 형부(刑部)에 회부하였다가 조금 뒤에 머리를 깎고 석불사(石佛寺)에 유치하였다.
○ 11월에 김이용(金利用)을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으로, 오잠(吳潛)을 찬성사로, 윤석(尹碩)을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 대호군 정적(鄭績)을 원 나라에 보내어 동녀를 바치고, 윤석ㆍ곽유견(郭惟堅)을 시켜 상왕께 문안드리게 하였다.
○ 12월에 원 나라에서 상왕을 토번 살사결(撒思結)의 땅으로 귀양보냈다. 경사(京師)와의 거리가 1만 5천 리였다. 수종하던 재상 최성지 등은 모두 도망하여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데, 오직 직보문각(直寶文閣) 박인간(朴仁幹)과 전 대호군 장원지(張元祉) 등 18명이 호종하여 귀양간 곳에 이르렀다. 백안독고사가 끊임없이 참소하여 화(禍)를 예측할 수 없더니, 승상(丞相) 배주(拜住)의 구해(救解)에 힘입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 정승 김이용을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또 장항(張沆)ㆍ윤신계(尹莘係)를 보내어 상왕에게 노자(路資)를 올리게 하였다. ○ 전영보(全英甫)를 밀직부사로 임명하였다. ○ 조정의 모든 관원이 중서성에 글을 올려 상왕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 중들을 민천사에 많이 모이게 하여 상왕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 다시 정방(政房)을 두어 대언(代言) 안규(安珪)에게 전주(銓注)를 관장(管掌)시키게 하고, 우상시(右常侍) 임중연(林仲沇),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 등을 참여하게 하였다.


동문선 제68권
 기(記)
두타산 간장암 중영 기(頭陀山看藏庵重營記)

최해(崔瀣)

지치(至治) 3년 가을에 이군(李君) 덕유(德孺)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선인 동안(動安) 선생이 지원(至元) 연간에 충렬왕(忠烈王)을 섬겨 간관(諫官)이 되었는데, 일을 말하여도 듣지 않아 그 직책을 버리고, 본래 외가(外家)인 삼척현(三陟縣)의 풍토를 사랑하여 드디어 두타산 밑에 가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유학(儒學)을 전공하였는데, 학문에 있어서는 대개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성품이 부처를 좋아하여 만년에는 섬기기를 더욱 삼갔다. 이에 별장을 지어 용안당(容安堂)이라 이름짓고 거처하며, 이 산에 있는 삼화사(三和寺)에 가서 절에 간직되어 있는 경문을 빌려다 날마다 그것들을 열람하여 10년 만에 끝내었다. 뒤에 별장을 중에게 희사하고 편액(扁額)을 간장암(看藏庵)이라 바꾸고는 가까이에 있는 밭 약간을 희사하여 상주(常住)의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가 이제 24년인데, 내가 낮은 벼슬로 수도에 붙어 있으면서 선인의 유촉(遺躅)을 생각하니 어찌 자나깨나 잊을 수 있으랴. 나의 중형(仲兄)이 출가(出家)하여 불도를 배우다가 지난해에 어머니를 뵈오려 고향에 갔다가, 암자가 많은 세월이 지나 썩고 허물어진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이것은 우리 선인께서 뜻을 두어 지은 것인데, 다행히 내가 중이 되었으니 허물어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하고, 이어 맏형에게 중수하기를 청하고, 그 제자들을 거느리고 직접 경영하였다. 예문관 신후천(辛侯蕆)은 본래 일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평이 있었는데 마침 관동(關東)을 진무하고 있었다. 역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부서(符書)를 본 고을에 내려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와 1년도 못 되어서 공사가 끝났다. 처음에 선생의 뜻이 돈독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여 수식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구조(構造)도 대충 비바람을 막게 하고 도연명(陶淵明)의 용슬이안(容膝易安)이라는 뜻을 취하여 이름지었다. 이때에 이르러 두 형이 말하기를, “선인께서 비록 검소한 덕으로 자처하였으나 지금은 이미 인사(仁祠)가 되었으니 어찌 중축하여 높이지 않으랴.” 하고, 마침내 서로 같이 제도를 확장하여 마루와 기둥을 크게 넓히고 단청도 영롱하게 하여 예전보다 사치스러워졌다. 낙성하는 날에 두 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암자가 이미 새로워졌으니 마땅히 글을 기록하여 걸어야 하겠다.” 하고, 편지로 나에게 부탁하기를, “너는 이미 멀리 떠돌아 다니느라 우리 두 사람과 이 일에 종사하지는 못하였으나, 네가 당대의 문인(文人)에게 청하여 한 글귀를 얻어서 선인께서 지은 까닭과 우리들이 계승한 뜻을 밝혀서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것은 네가 부형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니, 너는 이것을 도모하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선인의 일을 찬술(撰述)하지 않을 수도 없고 또 형의 명령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와 함께 사귀어 선인의 일을 자세히 알고 있으니 한번 나를 위하여 기록하라.’ 하였다. 내가 보건대, 천하 사람들이 부처를 받드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배와 수레가 닿는 곳마다 탑과 사당이 서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 무리들이 모두 권문(權門)에 붙어서 부(富)를 독차지하여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사대부(士大夫)를 종처럼 보기 때문에 우리 선비들이 취하지 못할 바이지만 이것이 어찌 부처의 허물이겠는가. 대개 부처는 선을 하기를 좋아하고 악을 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맑게 하고 성품을 본다는 말에서 본다. 또한 우리 유도(儒道)를 본받아 말한 것 같으니, 달인(達人)과 군자가 그 도(道)에 맛을 들여서 즐거워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이 또한 까닭이 있도다. 생각하건대, 선생의 행실과 업적에 있어서 집에는 전기(傳記)가 있고 나라에는 사기(史記)가 있으며 또 사람들의 입에 퍼져 있으니, 그 출처(出處)의 큰 절개를 이미 자세히 알 수 있다. 은퇴하여 암혈(岩穴)에 살면서는 한순간도 임금을 잊지 못하고 불리어 조정에 들어가서는 잠깐 동안도 직위에 안주함이 없었으며, 향하는 바가 진실로 의리라면 용감하여 대적할 이가 없고, 본 것이 이(利)라고 생각하면 물러나 겁내어 능하지 못한 것같이 하였으며, 독실히 실천함이 끝내 변하지 않았으니, 또 꾸미고 가식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며, 명예를 구하고 대중을 현혹시키는 자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 그로 하여금 쓰여지게 했다면 우리 백성의 해독을 제거하여 그 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고, 가령 쓰여지지 못했더라도 그의 유풍과 여운이 오히려 야박한 사람을 돈독하게 하고 나약한 사람을 일으킬 수 있었으니, 그 명교(名敎)에 공이 있음이 어찌 얕다고만 하랴. 이것으로써 논한다면 지금 들어 말한 것은 다만 한가한 가운데서 한때의 나머지 일이니, 대단할 것도 못 된다. 비록 그러나 군자가 어버이를 생각함에 있어서 가을 서리와 봄 이슬을 밟고도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거늘, 하물며 오래 거처하여 마음으로 편히 여기던 것을 없어지게 하고 폐해지게 하여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아들이 수리하고 경영하는 데 부지런하고 그 아우가 글을 청하기를 간절히 함이 당연하니, 이것이 글을 쓸 만한 것이다. 선생의 휘는 승휴(承休)이고, 자는 휴휴(休休)이며, 동안(動安)은 그의 호이다. 대덕(大德) 초기에 불러 이르렀는데, 간절히 산으로 돌아가기를 원해서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하였다. 맏아들은 임종(林宗)인데 과거에 올라 벼슬을 시작하여 가는 곳마다 청렴하고 능하다고 일컬었는데, 벼슬이 헌부산랑(讞部散郞)에 이르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다음 아들은 출가하여 이름이 담욱(曇昱)인데, 조계(曹溪)의 승선(僧選)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여 드디어 선문(禪門)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덕유는 막내 아들인데, 일찍이 나와 함께 계묘년 과거에 올라 지금 좌사보 지제교(左思補知製敎)로 있다. 사람들이 그 가정과 학문에 탄복한다고 한다.


동문선 제68권
 기(記)
선원사 재승 기(禪源寺齋僧記)

최해(崔瀣)

대개 천지 사이에 태어나서 혈기(血氣)가 있는 자는 모두 먹는 것을 우러러서 삶을 유지하나니, 비록 성현(聖賢)이라도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는 것이다. 먹는 것이 진실로 농사에서 나오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 먹는 자도 각각 그 마음과 힘을 수고하여 서로 길러주고 서로 악하게 함이 없는 것이다. 불씨(佛氏)의 법이 중국에 행해진 지가 이미 1천 2백 64년이 된다. 그 무리가 대개 사민(四民)보다 배가 되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투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모이는 까닭으로, 능히 무리를 지어 살고 편안히 먹는 것이다. 참으로 천하에 크게 음덕(陰德)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누가 능히 이러하겠는가. 선원사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둘째 가는 절인데, 식구가 항상 수천ㆍ수만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근자에 송파(松坡)의 재상이 멥쌀 1백 50석을 희사하여 영구히 상주(常住)하는 데 충당하고, 해마다 그 이익을 불려 셋으로 나누어 매양 7월 3일 왕비 변한부인(卞韓夫人) 김씨(金氏)의 제삿날과 정월 초하루의 죽은 아들 헌부의랑(讞部議郞) 문진(文進)의 제삿날에 오로지 한 재(齋)를 올려 명복(冥福)을 빛나게 하고, 또 정월 19일에 공(公)의 일생을 위하여 중들에게 밥을 대접하여 복을 빈다. 나의 글을 받아서 뒷사람에게 보여 오래도록 폐추(廢墜)되지 않게 하려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불교는 아득하여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이나, 참으로 성심껏 기꺼이 보시한다면 아름다운 과보(果報)를 명명(冥冥)한 가운데서 얻게 되는 이치가 의심이 없는 것이다. 송파는 추성량절공신 중대광 광야군(推誠亮節功臣重大匡光陽君)이 스스로 지은 호(號)로, 이름은 성지(誠之)이고, 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또한 일찍이 돌아간 부모를 위하여 천화선사(天和禪寺)를 수리하고 큰 도량을 지었으니, 그 근본에 부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데에 있어서 정성껏 하지 않음이 없다. 만일 부처의 말로 본다면 이른바 재궁(宰宮)을 나타내고 몸소 보살도(菩薩道)를 행한다는 것이다.
 동문선 제68권
 기(記)
춘헌호 기(春軒壺記)

최해(崔瀣)

내가 젊었을 때 경전(經傳)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투호(投壺)의 예(禮)는 군자(君子)가 객과 주인(主人)의 즐거움을 절도 있게 하기 위하여 만든 것임은 알았으나 그 제도는 연구하지 못하였다. 사마문정공(司馬文正公)의 도서(圖序)를 보고 나서 그 대강은 알았으나, 또 더 물어서 질정(質正)할 만한 사우(師友)가 없었으므로, 바닷가에서 생장하면서 중국의 사대부들과 서로 만나 화살을 끼고서 배우기를 청하여 몸소 익히지 못하는 것을 매양 한탄하였다. 지치(至治) 신유년 봄에 내가 외람되게 계해(計偕)에 참여하여 중국 수도에 조회하려고 명 나라 조정에 입대(入對)하였는데, 조칙(詔勅)이 아직 내리지 않았다. 이때 요양(遼陽) 홍중의(洪仲宜) 등과 함께 문명(文明)의 동쪽 집에 붙어살면서 한가로워 소일할 것이 없으면 중의의 족부(族父) 집에서 병과 화살을 빌려다가 시험삼아 해 보고 나는 마음으로 매우 즐겁게 여겼다. 조칙을 받아 가지고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개모(蓋牟)의 관원으로 부임한 뒤로는 자질구레한 일에 분주하여 투호에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내가 병으로 집으로 물러 온 것이 10여 년이나 오래되었다. 성품이 장기나 바둑을 좋아하지 않고, 또 거문고나 비파도 알지 못하여 글을 읽는 여가에 가만히 다른 기예를 공부하여 보았으나 족히 기뻐할 것이 없고, 오직 이 투호의 일만이 날마다 마음속에 어른거리지 않는 때가 없었다. 어찌 그것이 마음을 다스리고 덕을 관찰하는 것에 가까워서 폐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집에는 호(壺)도 없고 나라 안에도 가지고 있는 선비가 없으니, 내가 비록 좋아하나 할 수가 없었다. 춘헌(春軒) 최후(崔侯)는 옛것을 배워 효제(孝悌)하는 사람으로, 자제들이 널리 배워 스승이 없어 교정해 줄 사람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널리 정씨(程氏)와 주씨(朱氏)의 글을 취하여 함께 강습하고, 또 긴장만 하고 풀지 않아 휴식이 없음을 두려워하여 호(壺)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멀리서 구입하여 두고 때때로 배우기를 원하나 능치 못한 자들을 불러서 그림을 보아가며 가르치니, 정원(庭院)에는 성하게 봄바람이 불고 기수(沂水)위의 기상이 서렸다. 좋아하기를 독실히 하고 구하기를 부지런히 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될 수가 있었는가. 훗날 동방의 후진들이 장수(藏修)하고 유식(遊息)하여 날마다 익히지 못한 것을 익히고, 성대하게 갑자기 변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우리 최후로 말미암아 감화되지 않음이 없음을 알 것이다. 아, 어찌 아름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익재(益齋) 이상(李相)과 근재(謹齋) 안군(安君)이 이미 명(銘)과 부(賦)를 지었으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그 사이에 더하겠는가. 그런 대로 내가 투호를 좋아하는 뜻과 최후가 투호를 설치한 이유를 써서 기록으로 삼는다.



 기(記)
군부사 중신청사 기(軍簿司重新廳事記)

최해(崔瀣)

본국이 옛날부터 중국을 높일 줄 알았으므로 관청 부서(府署)의 액자(額子)에 중국을 많이 모방하였던 것은 일찍이 혐의쩍게 여긴 것이 아니었다. 지금 저 군부사(軍簿司)라는 것은 실상은 상서병부(尙書兵部)이고 주관(周官) 태사마(太司馬)의 직책이니 그 역시 모방하여 설치한 것이다. 원(元) 나라 때에 미쳐서 천명을 받고 첫머리로 나와서 신하 노릇하다가 지원(至元) 12년에 비로소 원 나라 조정의 제도를 피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으며, 지대(至大) 10년에 총부(摠部)로 고쳤다가 태정(泰定) 3년에 회복하였으니, 이른바 판서ㆍ총랑(摠郞)ㆍ정랑ㆍ좌랑이니 하는 등의 벼슬도 상서(尙書)ㆍ시랑(侍郞)ㆍ낭중(郞中)ㆍ원외랑(員外郞)으로 인하여 바뀐 것이다. 옛날에 국상은 육조(六曹)를 나누어 겸임하여 태재(太宰)는 동조(東曹)를 주관하고 아상(亞相)은 서조(西曹)를 주관하였는데, 서조는 실상 무관을 선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뒤에 와서 무인(武人)을 높여 써서 반드시 그 장(長)을 이관(貳官)으로 삼아 거느리게 하여 지금까지도 폐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권세를 중하게 하려는 것이다. 대개 군교(軍校)의 명부와 병위(兵衛)의 기장(器仗)과 장수를 임명하고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이 모두 여기에 예속되어 3군(軍), 6위(衛), 42도부(都府)가 날마다 와서 명령을 듣게 되니, 그 공청(公廳)도 굉장(宏壯)하지 않으면 진압할 수 없는 것이다. 옛날에는 청사가 왕궁 동쪽에 있었는데, 권신(權臣)이 임금을 옹위하여 강화(江華)로 들어 가버린 후부터 궁실과 관사가 자갈 더미와 풀숲의 빈 터로 된 것이 39년이었다. 지원(至元) 경오년에 황제의 위령(威靈)에 의거하여 옛 서울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부(部)의 이관(貳官)인 기홍석(奇洪碩) 공이 그 옛터를 다스려서 중건하였다. 이때부터 천력(天曆) 기사년에 이르기까지 또 60년의 오랜 기간을 지냈는데, 그 사이에 계속해서 수리한 자가 없었으니, 기둥ㆍ서까래ㆍ처마ㆍ도리 같은 것이 어찌 썩고 꺾여져서 날마다 기울어지고 허물어지지 않았겠는가. 응양상장(鷹揚上將) 김취기(金就起) 후(侯)가 마침 군부사의 이관(貳官)이 되어서 처음 부임하는 날에 낭서(郞署)의 관리와 군위(軍衛)의 장사(將士)가 차례로 나와 하례하고 물러나니, 김후가 다시 나오게 하여 청사(廳事)를 돌아다보고 탄식하며 낭서에게 말하기를, “제군들이 여기에 와서 각각 몇 해가 되었는가? 공청은 책임자가 있는데 누가 맡았는가.” 하고, 또 군위에게 이르기를, “이곳은 너희들이 날마다 모여서 호령을 여쭙는 곳이 아닌가? 쓰러지고 무너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희들은 어찌 부끄럽지도 않는가? 여러 사람들이 참으로 거부하지 않는다면 왜 철거하고 다시 짓지 않는가?”하였다. 낭관과 장사들이 모두 얼굴이 붉어지고 등에 땀이 나서 말하기를, “후의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명령을 내려 중창하게 하고, 이어 좌랑 김완(玩)에게 위임하여 그 역사를 강독하게 하였다. 김군이 이에 공고(公庫)의 남은 재물을 내어 먼저 목재와 기와를 사들였다. 모든 기획이 지성에서 나왔으므로 군졸들이 즐겁게 달려들어 독려하지 않아도 저절로 갖추어졌다. 이듬해 경오년 2월에 시작하여 5월에 준공하였는데, 당우(堂宇)가 전에 비해서 상당히 널찍하고, 높이고 낮추고 덜고 보태고 한 것이 모두 제도가 있어서 영구히 보존할 만하였다. 김군이 나의 글을 청하여 기록하려 하였으나, 내가 게을러 이럭저럭 미루다가 선뜻 응락하지 못하였더니 김군이 얼마 뒤에 파직되어 떠났다. 그 뒤 2년 만에 김군이 다시 들어와 정랑이 되었다. 전의 일이 기록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또 와서 청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으므로, 내가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고하기를, “지금 명망(名望)을 얻는 데에 감안하여 그 벼슬을 벼슬로 여기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의 경대부(卿大夫)가 모두 그러하여 전에 군부(軍簿)의 한 사(司)를 맡았던 자뿐만이 아니다. 김후와 김군은 부름이 있으면 곧 화답하여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하여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을 지어 면목이 일신되게 하였으니, 능하다 할 수 있다. 관청이 중간에 폐해져서 중건되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닌데, 김군은 이미 닦고 고친 자이다. 또 마땅히 차례차례로 고쳐야 될 것을 생각해 내어 허물어지면 곧장 고치기를 이 관청을 경영한 것처럼 한다면 사람들이 어찌 직분을 게을리 한다고 꾸짖겠는가.”고 한 뒤에 “돌아가게 하고 이것을 써서 보는 자의 법규로 삼는다. 공사 비용이 얼마였는지는 사(司)에 반드시 장부가 있을 것이니 여기는 갖추어 기술하지 않는다.” 하였다.




동문선 제84권
 서(序)
송 안양주서(送安梁州序)

최해(崔瀣)

양주(梁州)는 나의 고향 계림(鷄林 경주)과 백여 리 떨어져 있다. 금년 여름에 나는 복(服)을 벗고 고향에서 돌아오는데, 마침 죽옥(竹屋) 상공(相公)이 외직으로 나와서 합포(合浦)를 지키고 있으므로 공을 뵙고 가기 위하여 드디어 길이 헌양(巘陽)을 경유하게 되어 양주에 들려 유숙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마침 더위가 성하고 비가 내리는지라 길가는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비가 하룻밤이라도 더 오면 양하(梁河)가 넘어서 여러 날을 두고 건너지 못하게 된다.” 한다. 나는 가는 기한이 박두하였음을 생각하고 행리(行李)를 늦출 수가 없어 양주에 들어가 유숙하지 못하고 곧장 양하를 지나서 서쪽을 향하여 멀리 바라보니 관사와 민가가 죽림(竹林)의 우거진 사이에 어른거리는데, 사람들이 가리키며 양주라고 한다. 그 풍속을 물어서 한두 가지를 알았었다.
그 지역은 좁고 그 백성은 경박하게 날뛰며 그 전토(田土)는 다 낮고 습하여 해[歲]가 가물면 벼가 익고 비가 많으면 수해가 심하니 그 풍흉(豐凶)이 다른 고을과는 정반대되고 있다. 대개 가뭄이란 해마다 있는 것이 아닌데, 하늘이 어찌 양주 한 고을 백성만을 위하여 항시 비를 아니 주겠는가. 이 때문에 풍년은 유독 적고 흉년이 노상 따르니, 지역이 그러한 때문이다. 집집마다 사내 계집을 막론하고 모두 대를 다루어 용구를 만들어서 다른 물건과 무역하므로 의식(衣食)ㆍ부세(賦稅)를 오직 대에 의뢰할 뿐이며, 또한 빌리고 갚는 데에 도움을 줄 만한 거상(鉅商)이나 부민(富民)도 없으니, 사행(使行)의 왕래에 있어서도 공관의 대우 역시 초라하며 일이 지공(支供)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곧 다 대숲 속으로 피신하여 마치 놀란 노루나 사슴과 같은 실정이다. 동남의 여러 주 가운데 오직 이 주가 가장 가난하여 본래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이 났었다.
그런데 이 원윤(李元尹)이 이곳으로 좌천되자, 공은 그 폐단을 알고 먼저 상답(上畓)을 가려서 그 물길을 깊이 단속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묵은 밭 몇 두락씩을 경작하게 하고, 따라서 역량(力糧)을 내어 보상해 주었다. 또 오랜 습속이 농사에 익숙하지 못하여 다 늦게 나가고 일찍 파하므로 그 지분(地分)에 따라 사람을 정해 보내어 일을 권장하였는데, 늘 사람 10명으로 보(保)를 만들고, 보마다 대쪽[簡] 하나씩을 만들어 먼저 온 자가 그 대쪽을 받아 가지고 다음 온 자에게 넘겨주어 차례차례로 서로 주며 최후에 온 자는 줄 데가 없으니, 그 대쪽을 지니고 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파하게 되면 대쪽을 가진 자를 나오게 하여 뒤에 온 죄를 벌주게 되는 것이다.
당시에 공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이미 밭둑 사이에 와서 있으니 이렇게 하기를 10일이 넘으니, 사람들이 다투어 먼저 오려고 하며, 양주(梁州)의 묵은 밭은 거의 다 개간되고 대쪽도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반 년이 되지 못해서 공이 소환되니 이때에 공의 혜택은 흡족히 나타나지 못하고, 사람은 구습에 젖어서 전에 개간된 것은 파종도 못했고, 혹시 파종한 것도 또한 가꾸지 못한 채로 있었다. 내가 양주를 지날 적에 이공이 출발한 지는 겨우 한 달 남짓 되었다. 나는 이에서 인인(仁人)ㆍ군자(君子)는 작은 벼슬이라도 얕잡아보지 아니하고 몸으로 백성의 일에 솔선하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양주 백성이 가난한 것은 단지 양주 백성의 허물만이 아니라 위정자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에도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죽옥(竹屋)의 아들 익지(益之)가 양주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내가 양주에서 들은 말을 기록하여 일러주고 또 당부하기를, “그대가 장차 이공의 정사를 들어서 양주를 작다고 여기지 아니하면 어찌 양주 백성은 다스릴 수 없는 백성이라고 걱정할 것이 있으며 양주 백성의 가난도 어찌 부유하게 못 만든다 하랴. 부유하게 만들고 또 가르치는 수단에 있어서는 그대가 이미 사학(斯學)에 종사한 나머지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소년의 글 읽는 효력은 장차 양주 백성이 그대의 손에 변화되는 데서 보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하였다.


 동문선 제84권
 서(序)
송 승선지 유금강산서(送僧禪智遊金剛山序)

최해(崔瀣)

심산궁곡(深山窮谷)으로서 인적의 내왕이 드물게 되면 진실로 이상한 물건이 거기에 모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도릉(張道陵)의 학(學)을 하는 자가 어떤 산을 제 몇 동천(洞天)이라 칭하고, “이곳은 어떤 진군(眞君)이 다스리는 곳이라.”하니, 이에 도를 사모하고 세속을 싫어하여 단련하고 수양하며 곡물을 먹지 않는 자들이 왕왕 그 가운데 깃들어 돌아갈 줄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비록 그들의 인정에 가깝지 못한 행위를 미워하기는 하나 나와 저들과 도가 다르기로 또한 심히 따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늘이 맞닿은 동녘 바닷가에 산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풍악산(楓岳山)이라 이르는데 승도(僧走)들은 금강산(金剛山)이라 한다. 그 설은 화엄경에 근본하였다는데, 경에, “해동(海東) 보살이 머물던 곳은 이름이 금강산이다.” 하는 문구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그 글을 읽지 아니하였으니 모르겠지만 그 산이 과연 이 산이었던가. 근일에 보덕암(普德庵) 중이 지었다는 〈금강산기〉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는 자가 있기에 읽어보니, 모두 근거 없는 황량한 이야기로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그 중에는, “부처 금상(金像) 53구가 서역으로부터 바다에 떠서 한 나라 평제(平帝) 원시(元始) 4년 갑자에 산에 왔기로 인하여 절을 세웠다.” 하였다. 무릇 불교(佛敎)가 동으로 유입된 것은 한 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 을축에 시작되었으며,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또 양 무제(粱武帝) 대통(大通) 원년 정미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을축년보다도 4백 1년이란 오랜 세월이 뒤졌는데, 진실로 그 기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이는 중원에서도 깜깜하여 부처가 있는지도 모르던 62년 전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미 부처를 위하여 절을 세운 것이 되니, 그것이 가장 웃음거리요, 다른 것도 이와 같은 따위였다.
비록 그러나 옛날에 부처를 배우려는 사람으로서 이 산중에 들어가서 뜻을 가다듬고 행실을 부지런히 하여 그 도를 증명한 자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대개 시초에는 이 산이 인간의 경계와 거리가 수백 리나 멀 뿐 아니라 산들이 벽처럼 서서 가는 곳마다 모두 천길 절벽뿐이요, 암자 하나도 몸을 의지할 만한 것이 없으며 한 뙈기 밭도 채소를 심어 먹을 만한 것이 없으니, 그곳에 살자면 아늑한 구멍에 엎드리거나 나무 끝에 깃들어서 짐승과 더불어 섞여서 살고, 초근(草根) 목피(木皮)로 배를 채우는 자가 아니면 능히 하루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형편이다. 그렇지만 불씨의 법은 그 도를 닦게 하려면 반드시 노고를 인내하는 것으로 시험하며 그런 연후에야 소득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스님이 설산(雪山)에서 6년의 고행(苦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그 법을 배우기 위하여 근고한 수련에 뜻을 둔 자는 산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역시 소득이 있을 수가 없다.
근래에 와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산중의 암자도 해마다 백이나 불어나며 그 큰 절로 말하면, 보덕사(報德寺)ㆍ표훈사(表訓寺)ㆍ장안사(長安寺) 등이 있는데다 관(官)의 힘을 얻어 건립하여 웅장한 전각(殿閣)이 산골짜기에 가득차고 금벽(金碧)이 휘황하여 사람의 이목을 현란하게 하며, 상주(常住)의 경비에 이르러서도 재물을 맡은 창고가 있으며, 보물 맡은 관이 있고, 소속된 문전옥답(門前沃畓)이 주ㆍ군에 널려 있으며, 또 강릉(江陵)ㆍ회양(淮陽) 두 도의 연조(年祖)가 관에 들어올 것을 다 산으로 수송하게 하여 비록 흉년을 당하여도 조금도 감해 주는 일이 없으며, 매양 사람을 보내어 해마다 의량(衣糧)과 유염(油鹽) 등속을 지급하여 반드시 빠짐없게 감시하고, 그 중은 역사(役事)에도 참여하지 아니하며, 항상 수천 명이 편안히 앉아서 먹여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요, 한 사람도 설산(雪山)의 고행(苦行)을 같이 하며 도를 얻었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더구나 심한 것은, “사람이 61번 이 산을 보면 죽어서도 지옥(地獄)에 가지 않는다.” 속이고 꼬여서 위로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처자들과 더불어 다투어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겨울철의 눈보라나 여름철의 장마로 길이 막힐 때를 제외하고는 구경꾼이 줄지었으며, 겸하여 과부와 처녀가 따라가서 산중에 묵는 일도 있어 추한 소문이 가끔 들리지만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간혹 근시(近侍)가 명령을 받들고 역마(驛馬)를 달리어 강향(降香)하는 일이 있어, 세시(歲時)를 두고 끊어지지 아니하니, 관리들은 그 서슬에 두려워서 분주하여 명을 기다리며 지공하는 비용도 만의 숫자가 되고, 아울러 산 근처에 사는 백성들도 응접하기에 지쳐서 심지어 성내며 하는 말이, “이 산은 어째서 다른 지경에 있지 아니했는가.” 하는 자까지도 있다.
아, 사람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보살이 머물렀기 때문이요, 보살을 공경하는 것은 능히 사람을 모르는 속에서 복되게 해준다는 때문인데, 그 모르게 주는 복은 이미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머리 깎은 자들이 이 산을 팔아서 제 배를 불리기만 생각하고, 백성은 그 해를 입게 되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러므로 나는 사대부가 산 구경 가는 것을 보면 비록 힘써 말리지는 아니하나 마음속으로는 그윽이 더럽게 여기는 바다. 지금 불자(佛者) 선지사(禪智師)가 이 산에 가게 되므로 인하여 나의 가슴속에 품고 뱉지 못하던 말을 써서 주는 것이다. 스님은 이미 부도(浮屠)가 되었는데, 왜 산에 들어가는 일이 늦었는가. 산중에 만약 구경하는 사람이 있거든 나를 위하여 말해 주기 바란다. 반드시 내 말을 옳게 여기는 자가 있을 것이다.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차운답 정재물(次韻答鄭載物) 자후(子厚)

최해(崔瀣)

지금 사람은 옛 사람을 천히 여기고 / 今人賤古人
아이들은 늙은이를 업신여기네 / 兒子欺老翁
옛날 선비 돌아간 지 오래이거니 / 先儒去逾遠
누구 있어 순박한 풍속 들리랴 / 誰復回淳風
남의 허물 드러냄으로 곧음을 삼고 / 訐人以爲直
좋은 것은 혼자 하고 공된 것을 독차지하네 / 專美而擅公
멀고 먼 백 년 뒤 / 悠悠百歲下
까마귀 암수 분별치 못하리 / 莫辨烏雌雄
내 말세에 난 것이 한스러워 옛 것을 좋아해 / 我生生苦晩
지금 사람을 계몽할까 생각하네 / 好古思擊蒙
사람을 향해 심중의 말을 하나 / 向人說肝膽
어찌 다만 초월과 같을 뿐인가 / 奚啻楚越同
이 세상과 너무나 맞지 않아서 / 所以與時迂
가는 곳마다 길이 막혀 우노라 / 到處哭途窮
어찌 권세에 아첨하고 싶지 않으랴만 / 豈不欲媚竈
본뜻을 끝까지 지키려네 / 素志庶有終
왕후들의 훌륭한 저택 사이에 / 王侯第宅閒
도리어 한 묘 집을 닫고 있노라 / 却掃一畝宮
지난해엔 가을바람 만나 / 去歲遇秋風
높은 흥 강동에 기탁하였더니 / 高興寄江東
갑자기 멀리 떠나 혼과 꿈이 기러기보다 먼저 날았네 / 駕焉忽遠適魂夢先飛鴻
좋은 호수와 산을 두루 즐길 때 / 賞遍好湖山
마음 속의 근심을 풀 만도 하였네 / 足寫心有忡
이내 좋은 곳에 가 / 卽欲往佳處
신세의 궁하고 통한 것 제대로 맡겨 두렸더니 / 便自任窮通
세상에 노닐 생각 안고서 / 迺抱遊方念
돌아오니 다시금 총총하여라 / 歸來復悤悤
선생은 옛 군자 / 先生古君子
사물을 대하는 그 속에 도가 있어 / 道在接物中
스스로 오경 상자 지녔으니 / 自有五經笥
가난하여 네 벽의 비었음을 근심하지 않으리 / 不憂四壁空

[주C-001]차운(次韻) : 남의 시를 화답하면서 운을 차례 그대로 하는 것을 차운이라 하고, 그 운을 쓰되 차례를 바꾸는 것을 용운(用韻)이라 한다.
[주C-002]자후(子厚) : 정재물의 호(號)이다.
[주D-001]초월(楚越) : 초(楚) 나라와 월(越) 나라는 서로 상관없는 나라이다.
[주D-002]한 묘(畝) 집 : 선비는 일묘(一畝)의 집이 있다는 말이 옛글에 있다.
[주D-003]강동(江東) : 진양(晉陽)인데, 정재물의 고향.
[주D-004]오경(五經) 상자 : 한(漢)나라 변소(邊韶)가 제자 수백 명을 교수(敎授)하였는데,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으니 제자들이, “배가 뚱뚱하여 낮잠만 잔다.”고 조롱하는 글을 지었다. 변소는 그 글을 보고 글을 짓기를, “뚱뚱한 배는 오경 상자[五經笥]다.” 하였다. ‘오경’은 시(詩)ㆍ서(書)ㆍ예(禮)ㆍ역(易)ㆍ춘추(春秋)이다.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오덕인 생일(吳德仁生日)


최해(崔瀣)

도는 본성을 따르는 데 있나니 / 夫道在率性
잠깐도 그것을 떠날 수 없네 / 不可離斯須
도 아닌 게 오랫동안 나라 어지럽히어 / 非道久猾夏
세상을 지도할 큰 현인 없었네 / 命世大賢無
우리 나라 옛 조선 때에는 / 吾邦古朝鮮
영웅과 준걸이 한때에 달렸더니 / 英俊時竝驅
그 뒤로 지금은 도도 쇠하여 / 邇來道亦衰
쓸쓸하고 적막하기 오랜 세월이었네 / 寥寥歲月逾
하늘은 어이 진정 같이 / 天豈似秦政
차마 이 백성을 어리석게 하였던가
 / 忍使斯民愚
우산에는 청수한 기운 모이어 / 牛山鍾秀氣
우리 늙은 오공 내었네 / 降神生老吳
타고난 자질은 스스로 순수하고 / 天資自淳粹
도와 의가 함께 갖추었나니 / 道義與之俱
밝은 세대 촉망을 혼자서 받고 / 獨專明代望
일찍부터 경제의 계획을 떨치었네 / 早奮經濟圖
작은 오공의 자는 덕인 / 小吳字德仁
단혈에는 봉의 새끼있구나 / 丹穴有鳳雛
포대기에 싸여 기구(세업(世業))를 이었으니 / 褓褓襲箕裘
늙은 오공의 덕은 외롭지 않네 / 老吳德不孤
뚱뚱한 오경 상자에 너는 / 便便五經笥
군자의 선비가 되라 / 汝爲君子儒
생일날에 아름다운 벗을 모아 / 生日會佳友
자리에 앉아 금술병을 기울이며 / 筵秩開金壺
자리 손님 술 마시며 / 座客皆飮酒
모두 진정으로 그대를 축원하니 / 肝膽向君輸
수명이 오래오래 / 皆云享眉壽
금 같은 그 몸을 끝내 보전하소 / 終始保金軀
내 성질이 급하고 곧아 / 而我本狷直
손 뒤에서 성가시게 외치노니 / 客後煩相呼
원컨대 그대 늙은 오공 받들어 / 願君奉老吳
사업이 삼소 같이 되어라 / 事業同三蘇

[주D-001]하늘은 …… 하였던가 : 진시황(秦始皇)의 이름은 정(政)인데, 책을 모두 불살라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주D-002]군자의 선비가 되라 : 《논어》에,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라.” 하였다.
[주D-003]삼소(三蘇) : 송나라 소순(蘇洵)과 그의 두 아들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이 모두 글을 잘 하므로 세상에서 삼소(三蘇)라 한다.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五言古詩)
스물 한 살의 섣달 그믐날 밤에[二十一除夜]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五言古詩)
북으로 가는 악정 윤신걸을 보내면서[送尹樂正莘傑北上]

최해(崔瀣)

인생의 한평생 / 人生一世間
명은 하늘에 달리어 있네 / 有命懸在天
궁하고 달하기는 오직 그 분이거니 / 窮達各其分
오직 도가 줄과 같이 곧은 것이 귀하네 / 惟道貴如絃
어떻게 심에 굽히는 사람 / 奈何枉尋者
어름어름 백도 되고 천도 되나 / 悠悠動百千
선생은 마음 속에 믿는 것 있으니 / 先生中有恃
그 어떤 바깥 물도 흔들지 못하나니 / 物莫外相牽
원하건대 끝과 처음 한결같음을 / 願言一終始
이름과 절개 다 함께 완전하리 / 名節兩俱全

[주D-001]심(尋)에 굽히는 사람 : 진대(陳代)가 맹자(孟子)에게 말하기를, “한 자[尺]를 굽혀서 심(尋)을 곧게 할 수 있다면 하여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당신은 왜 몸을 굽혀서 제후(諸侯)를 보지 않습니까.” 하니, 맹자가 답하기를, “내가 몸을 굽혀서 제후를 본다면, 그것은 심(尋)을 굽혀서 자[尺]를 곧게 하는 것이니, 그짓을 한다는 말인가.” 하였다. 심은 10척(尺)으로 여기서는 자기의 몸을 굽혀서 부귀(富貴)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최해(崔瀣)

스물 한 살의 섣달 그믐날 밤 / 二十一除夜
등불 앞에 글 읽는 책상 / 燈火一書帷
오늘 저녁이 어떤 날 저녁인가 / 今夕是何夕
제야시를 또 짓네 / 又作除夜詩
시의 뜻은 어이 괴롭나 / 詩意一何苦
옛 일을 돌아보며 내 생각 괴롭구나 / 念昔勞我思
열 살 때엔 마음 아직 어렸거니 / 十歲心尙孩
기뻐하고 성내기 옳게 몰랐네 / 喜愠安得知
내 나이 바야흐로 열 한 살 되어 / 我年方十一
글자 물어 비로소 스승 따랐네 / 問字始從師
열 한 살에서 열 다섯까지 / 自一至於五
학해에서 길 몰라 헤매었네 / 學海迷津涯
열 여섯 살에 과거꾼에 섞이어 / 十六充擧子
선비들 판에 들어 서로 따르게 되었네 / 士版得相隨
열 일곱에 시험 치러 춘관(예부(禮部))에 합격하고 / 十七戰春官
기꺼이 눈썹 치뜨네 / 中策欣揚眉
스스로 생각하기를 부모 계시거니 / 自謂有怙恃
즐기지 않고 시름해 무엇하리 / 不樂愁何爲
이때부터는 몸 단속 적어지고 / 是時少檢束
방랑하면서 날마다 술 마셨네 / 放浪日舍巵
다만 나이 젊음을 스스로 믿었거니 / 但倚富年華
이름과 벼슬이 더딜 줄 알았으리 / 豈慮名宦遲
세상 일 어그러짐 많아서 괴로워라 / 世事苦多乖
하늘이여 사람의 마음대로 안 되었네 / 天也非人私
어이 생각했으리 나이 겨우 스물에 / 何圖纔及冠
갑자기 어머님 여윌 줄을 / 倏忽悶母慈
도독(괴로움)이 창자 속에 들어갔거니 / 荼毒入中腸
통곡한들 어이 미칠 것인가 / 痛哭何可追
거기에다 늙으신 아버지 마저 / 況今老夫子
첫여름에 나라의 부름을 받아 / 夏孟承疇咨
이내 동남쪽으로 말고삐 잡았거니 / 仍按東南轡
뵈옵지 못한 지 일 년 되었네 / 違顔一歲彌
동생이 있었으나 멀리 노닐어 / 有弟亦遠遊
속절없이 할미새 노래를 읊조리네 / 空詠鶺鴒辭
외로이 서 잠자코 사방을 돌아보매 / 孑立默四顧
말하려나 뉘라서 들어 줄건가 / 欲言聽者誰
그래서 내 마음 외롭고 슬퍼 / 所以傷我神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리네 / 泣涕謾漣洏
진상은 어릴 때에 허리에 / 秦相方乳臭
인끈이 주렁주렁 하였다네 / 斗印纍纍垂
공명이란 나이에 있지 않는 것 / 功名不在大
다만 때를 만나기에 달렸구나 / 只在遭其時
나이 스물에 이름 없으니 / 二十寂無聞
뉘라서 대장부라 일컬을 건가 / 誰稱丈夫兒
나는 이미 그(진상) 나이 지났는데도 / 我今旣云過
일찍이 일명의 벼슬도 못 얻었구나 / 一命未曾縻
스물 한 살의 섣달 그믐 밤에 / 二十一除夜
동문선 제84권
 서(序)
동인문서(東人文序)

최해(崔瀣)

동방이 멀리 기자(箕子)로부터 비로소 주(周)나라의 봉함을 받아서 사람들이 높은 중국이 있음을 알았다. 옛날 신라 전성기에 항상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어 숙위원(宿衛院)에 두어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당의 진사(進士)에 빈공과(賓貢科)가 있어 방(牓)에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신성(神聖)이 국가를 열어 삼한이 통일됨에 미쳐서도 의관과 전례(典禮)는 진실로 신라의 구습을 이어받았으며 16, 7의 왕을 전하도록 대대로 인의를 닦고 더욱 중화의 풍교를 사모하여 서쪽으로 송 나라에 조회하며 북으로 요금(遼金)을 섬기어 그 훈김을 쬐고, 그 물에 젖어 인재가 날로 창성하고 문장이 찬란하여 모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풍속이 순박하여 무릇 가집(家集)에 있어서는 손수 등사한 것이 많고 판본으로 행세한 것이 적었다. 그래서 더욱 오래일수록 더욱 유실되어 널리 전하기 어려웠다. 또 중엽에 이르러서는 무인(武人)에게 실어(失御)하여 변란이 소홀한 데서 일어나니, 곤강(崑岡)의 옥과 돌이 갑자기 모두 불에 타는 화를 입게 되었다. 그후 3, 4세에 비록 중흥되었다고 칭하지만 예문(禮文)이 부족하고 그대로 계속하여 권신(權臣)이 국사를 처단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을 기망하니, 서울을 포기하고 도서(島嶼)에 은닉하여, 서로 안보할 겨를이 없었고, 국가의 서적은 흙탕에 내던져져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 화를 겪은 이래로 학자는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을 잃게 되고, 또 중국과 더불어 단절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므로 다 과문(寡聞)한 데에 빠지고 부망(浮妄)한 곳으로 흐르게 되었다. 당시에도 어찌 병필(秉筆)하는 자가 없으리오만 그 승평 시대의 작자에 견주어보면 대개 규모가 서로 짝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하늘이 황원(皇元)을 열어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천하를 문명으로 이끌었고, 과거를 마련하여 선비를 뽑은 것도 벌써 7회나 거쳤다. 덕화가 크게 미치고 문궤(文軌)가 다르지 않은지라 비록 나같은 소천(疏賤)으로도 역시 일찍이 실력 없이 합격되어 이름을 금방(金牓)에 걸고 중국의 재자(才子)와 더불어 서로 접촉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간혹 동인의 문자를 보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다만 아직 이루어진 책이 없다고 대답할 뿐이니, 물러나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므로 이에 비로소 유서(類書)를 편찬할 뜻을 두고 동으로 돌아와서 10년을 두고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집안에 간직된 문집을 찾아내고, 본가에 없는 것은 두루 남에게 빌리어 모두 모아서 채집하여 그 다르고 같음을 교정하고 신라 최고운(崔孤雲)에서 시작하여, 충렬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명가라 칭하는 이는 시 몇 편씩을 뽑아서 제(題)를 〈오칠(五七)〉이라 하고, 문 몇 편을 뽑아서 제를 〈천백(千百)〉이라 하고, 변려(倂儷)문 몇 편을 뽑아서 제를 〈사륙(四六)〉이라 하고, 총괄하여 제목을 《동인(東人)》의 문이라 하였다.
아, 이 편집은 본시 병란에 불타다 남은 것과 좀먹은 초지(抄紙)의 조각에서 얻은 것이니, 감히 집성된 서적이라 이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동방의 작문 체제를 보고자 할진대,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할 길은 없다. 또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말이 입에서 나와 글이 이루어지는데 중국 사람의 배움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배워 나가므로 정신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뛰어난 인재는 앉아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 동인은 언어가 이미 화이(華夷)의 구별이 있으니, 타고난 자질이 진실로 명민한 데다가 힘을 천백 배나 더 쓰지 아니하면 그 학에 있어 어찌 성공이 있을 수 있으랴. 다만 일심(一心)의 묘(妙)는 천지 사방을 통하여 털끌만큼도 차이가 없으니, 그 득의(得意)한 작품에 이르러서는 어찌 스스로 굴하여 그네들에게 많이 양보하겠는가. 이 책을 보는 자는 먼저 이와 같은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84권
 서(序)
동인문서(東人文序)

최해(崔瀣)

동방이 멀리 기자(箕子)로부터 비로소 주(周)나라의 봉함을 받아서 사람들이 높은 중국이 있음을 알았다. 옛날 신라 전성기에 항상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어 숙위원(宿衛院)에 두어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당의 진사(進士)에 빈공과(賓貢科)가 있어 방(牓)에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신성(神聖)이 국가를 열어 삼한이 통일됨에 미쳐서도 의관과 전례(典禮)는 진실로 신라의 구습을 이어받았으며 16, 7의 왕을 전하도록 대대로 인의를 닦고 더욱 중화의 풍교를 사모하여 서쪽으로 송 나라에 조회하며 북으로 요금(遼金)을 섬기어 그 훈김을 쬐고, 그 물에 젖어 인재가 날로 창성하고 문장이 찬란하여 모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풍속이 순박하여 무릇 가집(家集)에 있어서는 손수 등사한 것이 많고 판본으로 행세한 것이 적었다. 그래서 더욱 오래일수록 더욱 유실되어 널리 전하기 어려웠다. 또 중엽에 이르러서는 무인(武人)에게 실어(失御)하여 변란이 소홀한 데서 일어나니, 곤강(崑岡)의 옥과 돌이 갑자기 모두 불에 타는 화를 입게 되었다. 그후 3, 4세에 비록 중흥되었다고 칭하지만 예문(禮文)이 부족하고 그대로 계속하여 권신(權臣)이 국사를 처단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을 기망하니, 서울을 포기하고 도서(島嶼)에 은닉하여, 서로 안보할 겨를이 없었고, 국가의 서적은 흙탕에 내




동문선 제84권

 서(序)
동인문서(東人文序)

최해(崔瀣)

동방이 멀리 기자(箕子)로부터 비로소 주(周)나라의 봉함을 받아서 사람들이 높은 중국이 있음을 알았다. 옛날 신라 전성기에 항상 자제들을 당 나라에 보내어 숙위원(宿衛院)에 두어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므로 당의 진사(進士)에 빈공과(賓貢科)가 있어 방(牓)에 이름이 빠진 적이 없었다. 신성(神聖)이 국가를 열어 삼한이 통일됨에 미쳐서도 의관과 전례(典禮)는 진실로 신라의 구습을 이어받았으며 16, 7의 왕을 전하도록 대대로 인의를 닦고 더욱 중화의 풍교를 사모하여 서쪽으로 송 나라에 조회하며 북으로 요금(遼金)을 섬기어 그 훈김을 쬐고, 그 물에 젖어 인재가 날로 창성하고 문장이 찬란하여 모두 볼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풍속이 순박하여 무릇 가집(家集)에 있어서는 손수 등사한 것이 많고 판본으로 행세한 것이 적었다. 그래서 더욱 오래일수록 더욱 유실되어 널리 전하기 어려웠다. 또 중엽에 이르러서는 무인(武人)에게 실어(失御)하여 변란이 소홀한 데서 일어나니, 곤강(崑岡)의 옥과 돌이 갑자기 모두 불에 타는 화를 입게 되었다. 그후 3, 4세에 비록 중흥되었다고 칭하지만 예문(禮文)이 부족하고 그대로 계속하여 권신(權臣)이 국사를 처단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백성을 기망하니, 서울을 포기하고 도서(島嶼)에 은닉하여, 서로 안보할 겨를이 없었고, 국가의 서적은 흙탕에 내던져져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 화를 겪은 이래로 학자는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을 잃게 되고, 또 중국과 더불어 단절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므로 다 과문(寡聞)한 데에 빠지고 부망(浮妄)한 곳으로 흐르게 되었다. 당시에도 어찌 병필(秉筆)하는 자가 없으리오만 그 승평 시대의 작자에 견주어보면 대개 규모가 서로 짝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하늘이 황원(皇元)을 열어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천하를 문명으로 이끌었고, 과거를 마련하여 선비를 뽑은 것도 벌써 7회나 거쳤다. 덕화가 크게 미치고 문궤(文軌)가 다르지 않은지라 비록 나같은 소천(疏賤)으로도 역시 일찍이 실력 없이 합격되어 이름을 금방(金牓)에 걸고 중국의 재자(才子)와 더불어 서로 접촉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간혹 동인의 문자를 보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다만 아직 이루어진 책이 없다고 대답할 뿐이니, 물러나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므로 이에 비로소 유서(類書)를 편찬할 뜻을 두고 동으로 돌아와서 10년을 두고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집안에 간직된 문집을 찾아내고, 본가에 없는 것은 두루 남에게 빌리어 모두 모아서 채집하여 그 다르고 같음을 교정하고 신라 최고운(崔孤雲)에서 시작하여, 충렬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명가라 칭하는 이는 시 몇 편씩을 뽑아서 제(題)를 〈오칠(五七)〉이라 하고, 문 몇 편을 뽑아서 제를 〈천백(千百)〉이라 하고, 변려(倂儷)문 몇 편을 뽑아서 제를 〈사륙(四六)〉이라 하고, 총괄하여 제목을 《동인(東人)》의 문이라 하였다.
아, 이 편집은 본시 병란에 불타다 남은 것과 좀먹은 초지(抄紙)의 조각에서 얻은 것이니, 감히 집성된 서적이라 이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동방의 작문 체제를 보고자 할진대,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할 길은 없다. 또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말이 입에서 나와 글이 이루어지는데 중국 사람의 배움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배워 나가므로 정신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뛰어난 인재는 앉아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 동인은 언어가 이미 화이(華夷)의 구별이 있으니, 타고난 자질이 진실로 명민한 데다가 힘을 천백 배나 더 쓰지 아니하면 그 학에 있어 어찌 성공이 있을 수 있으랴. 다만 일심(一心)의 묘(妙)는 천지 사방을 통하여 털끌만큼도 차이가 없으니, 그 득의(得意)한 작품에 이르러서는 어찌 스스로 굴하여 그네들에게 많이 양보하겠는가. 이 책을 보는 자는 먼저 이와 같은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던져져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 화를 겪은 이래로 학자는 사우(師友)의 연원(淵源)을 잃게 되고, 또 중국과 더불어 단절되어 서로 통하지 못하므로 다 과문(寡聞)한 데에 빠지고 부망(浮妄)한 곳으로 흐르게 되었다. 당시에도 어찌 병필(秉筆)하는 자가 없으리오만 그 승평 시대의 작자에 견주어보면 대개 규모가 서로 짝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하늘이 황원(皇元)을 열어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천하를 문명으로 이끌었고, 과거를 마련하여 선비를 뽑은 것도 벌써 7회나 거쳤다. 덕화가 크게 미치고 문궤(文軌)가 다르지 않은지라 비록 나같은 소천(疏賤)으로도 역시 일찍이 실력 없이 합격되어 이름을 금방(金牓)에 걸고 중국의 재자(才子)와 더불어 서로 접촉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간혹 동인의 문자를 보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다만 아직 이루어진 책이 없다고 대답할 뿐이니, 물러나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므로 이에 비로소 유서(類書)를 편찬할 뜻을 두고 동으로 돌아와서 10년을 두고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집안에 간직된 문집을 찾아내고, 본가에 없는 것은 두루 남에게 빌리어 모두 모아서 채집하여 그 다르고 같음을 교정하고 신라 최고운(崔孤雲)에서 시작하여, 충렬왕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명가라 칭하는 이는 시 몇 편씩을 뽑아서 제(題)를 〈오칠(五七)〉이라 하고, 문 몇 편을 뽑아서 제를 〈천백(千百)〉이라 하고, 변려(倂儷)문 몇 편을 뽑아서 제를 〈사륙(四六)〉이라 하고, 총괄하여 제목을 《동인(東人)》의 문이라 하였다.
아, 이 편집은 본시 병란에 불타다 남은 것과 좀먹은 초지(抄紙)의 조각에서 얻은 것이니, 감히 집성된 서적이라 이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동방의 작문 체제를 보고자 할진대, 이것을 버리고 달리 구할 길은 없다. 또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말이 입에서 나와 글이 이루어지는데 중국 사람의 배움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바탕으로 하여 배워 나가므로 정신을 많이 허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뛰어난 인재는 앉아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 동인은 언어가 이미 화이(華夷)의 구별이 있으니, 타고난 자질이 진실로 명민한 데다가 힘을 천백 배나 더 쓰지 아니하면 그 학에 있어 어찌 성공이 있을 수 있으랴. 다만 일심(一心)의 묘(妙)는 천지 사방을 통하여 털끌만큼도 차이가 없으니, 그 득의(得意)한 작품에 이르러서는 어찌 스스로 굴하여 그네들에게 많이 양보하겠는가. 이 책을 보는 자는 먼저 이와 같은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목은시고 제13권
 시(詩)
원재(圓齋)에게 부치다.

억지로 끌어맞춰 겨우 시 다섯 수를 짓느라 / 捏合纔成五首詩
새벽 창 아래 앉아 공연히 애써 생각하였네 / 曉窓危坐謾沈思
옥쟁반에 분명 밝은 구슬이 달리는 듯해라 / 玉盤的的明珠走
뛰어난 시풍 원재가 바로 나의 스승이로세 / 洒落圓齋是我師

스스로 한하건대 당년에 시를 안 배웠으니 / 自恨當年不學詩
풍화 월로 계절의 경치를 연구하려 했으랴 / 風花月露肯尋思
설옹이 홀로 예산의 학파를 계승하였거니 / 雪翁獨繼猊山派
원재는 집안에 스승 있는 게 가장 기쁘구려 / 最喜圓齋家有師


늘그막에 뜻을 말하면 절로 시를 이루니 / 老年言志自成詩
붓 가는 대로 쓸 뿐 어찌 깊이 생각하랴 / 信手何曾更三思
원경에 백속까지 겸했다고 비웃지 마소 / 莫笑元輕幷白俗
종사의 시처럼 간삽함을 몹시 꺼린다오 / 苦嫌艱澁似宗師

[주D-001]설옹(雪翁)이 …… 기쁘구려 : 설옹은 원재(圓齋) 정공권(鄭公權)의 아버지로 호가 설곡(雪谷)인 정포(鄭誧)를 가리키고, 예산(猊山)은 고려 시대의 대문장가로서 호가 예산농은(猊山農隱)인 최해(崔瀣)를 가리키는데, 즉 정포의 시문(詩文)은 최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정공권은 또한 자기 아버지인 정포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주D-002]원경(元輕)에 백속(白俗) : 당인(唐人)들이 시풍(詩風)을 비평한 말로, 소식(蘇軾)의 〈제유자옥문(祭柳子玉文)〉에, “원진의 시는 경박하고, 백거이의 시는 비속하며, 맹교의 시는 한빈하고, 가도의 시는 수척하다.[元輕白俗 郊寒島瘦]”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3]종사(宗師)의 시처럼 간삽(艱澁)함 : 종사는 당 헌종(唐憲宗) 연간의 시인 번종사(樊宗師)를 가리키는데, 그의 시문은 특히 기괴하고 껄끄러워 유창하지 못했으므로, 그 당시에 그의 시체(詩體)를 삽체(澁體)라고 일컬었던 데서 온 

말이다.속절없이 해를 보내며 슬퍼하노라 / 空作徂年悲

[주D-001]동남쪽으로 말고삐 잡았거니 : 한(漢)나라 범방(范滂)이 지방의 탐관오리를 숙청하는 안찰사(按察使)로 임명되자, 수레에 올라 말고삐를 잡으면서 개연(慨然)히 천하를 밝힐 뜻이 있었다. 여기서는 동남에 안찰사로 갔다는 말이다.
[주D-002]할미새 노래 : 《시경(詩經)》에 〈칙령편(鶺鴒篇)〉이 있는데, 형제의 우애를 읊은 것이다.

추강집 제7권
 잡저(雜著)
냉화(冷話)

〇 병술년(1466, 세조12), 정해년(1467) 사이에 향생(鄕生) 조기종(趙起宗)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낙선방(樂善坊) 제이리(第二里)에 우거(寓居)하였고 나와 함께 남학(南學)에 소속된 생도(生徒)였다. 조기종은 당시 나이가 어려서 겨우 시문(詩文)의 구두를 이해할 뿐 시율(詩律)은 알지 못했다. 하루는 꿈에 어떤 빈집에 들어갔더니 널찍하고 적막하였다. 대추 꽃이 새로 핀 걸로 보아서는 초여름 같았으나 뜰의 풀이 막 돋아나고 봄바람이 솔솔 부는 것은 늦은 봄이었다. 거기에 있는 두세 명의 서생(書生)은 모두 평소에 아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조기종에게 권하여 시를 짓도록 하니, 조기종이 즉시 시를 읊기를,
나무 위엔 대추 꽃 만개했고 / 樹上棗滿開
빈집에는 쓸쓸히 사람 없구나 / 空家寂無人
봄바람이 불어 다하지 않으니 / 春風吹不盡
만리에는 풀빛 온통 새롭도다 / 萬里草多新
하였다.
꿈을 깨고서도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그 시를 잘 기억하여 같이 공부하는 벗들에게 말해 주었고, 벽에 적어 깊이 감상하였다. 다음 달에 조기종이 죽었다.
〇《호산노반(湖山老伴)》1부(部) 114편은 바로 고인이 된 나의 벗 자정(子挺)이 편찬한 것이다. 자정은 세상에 드문 큰 재주를 가졌으나 태어난 지 26년 만에 백의(白衣)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장과 행실은 내가 지문(誌文)에서 상세히 말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산야에 처하기를 즐기고 세상의 번잡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옛사람의 고율가사(古律歌詞) 중에서 한적하여 감상하기에 매우 좋은 것을 뽑아 《호산노반》이라 이름하고 강산에서 노년을 마치려는 계획과 천고의 옛사람과 벗하려는 뜻으로 삼았다.
오호라! 자정은 평소에 성정이 준엄했기 때문에 비록 세속을 백안시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에 대해 허여함이 적었다. 그러나 유독 나와 더불어 교분이 몹시 깊었다. 일찍이 내가 풍(風)을 앓고 기력이 약해져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하더니, 하루는 내게 와서 시를 얘기하고 밤중에 돌아갔다가 아침이 밝았을 때에 또 와서 내게 이르기를 “어제 얘기를 나눌 때에 내 마음이 매우 평온했소. 길 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대의 묵은 병이 생각나 혼자 말하기를 ‘모(某)가 만약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회포를 말할까.’ 하고,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돌아갔소.” 하였다. 자정의 이 말이 낭랑히 오늘 귀에 들리는 듯하거늘 어찌 병든 사람은 살아 있고 강건했던 사람이 죽음으로써 자정의 슬픔이 나에게 옮겨 와 자정의 죽음을 슬퍼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되는 겨울 10월에 상자 속에서 이 책을 찾아 펼쳐 보고 슬퍼해 마지않는다.
〇 고려 한림(翰林) 최누백(崔婁伯)은 나이 13세에 아버지 상자(尙煮)를 여의자, 친히 스스로 흙을 져다가 무덤을 만들고 3년 동안 여막(廬幕)을 지켰다. 상자가 꿈속에서 시 한 수를 주기를,
가시나무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 披荊到孝子廬
정감이 많이 일어 눈물이 끝이 없네 / 多情感淚無窮
흙을 져다가 날마다 무덤 위에 더하니 / 負土日加塚上
명월과 청풍만이 그 마음을 알아주네 / 知音明月淸風
하였다. 400여 년 뒤에 고생(高生)이 꿈속에서 얻은 시가 이것을 이을 만하다.
〇 고순(高淳)은 자(字)가 희지(熙之)이다. 일찍이 귀머거리 병이 있었었으나 독실하게 믿으며 배우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시를 읊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의 선고(先考) 중추공(中樞公)이 꿈속에서 시 한 수를 주기를,
백발이 성성하여 옛 모습 줄었건만 / 華髮蒼蒼減昔年
외로운 몸 적적하게 산 앞을 지키네 / 孤身寂寂守山前
백골이 느낌 없다고 말하지 말거라 / 莫言白骨無知感
네가 읊는 시를 듣느라 잠 못 이루니 / 聞汝吟詩我不眠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그 시에 서문을 적었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서 응결되면 삶이 펼쳐지고 흩어지면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 실상은 하나의 물건이다. 사람이 죽은 뒤의 남은 기운이 각각 자손의 몸에 나뉘어 있으니, 자손에게 움직임이 있으면 신명에게 감동이 있음은 분명한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사람이 반드시 내면을 곧게 하여 마음이 깨끗하고 맑아져서〔直哉惟淸〕 초연(愀然)히 부모를 다시 뵙는 듯한 연후에야 부모의 오르내리는 영령이 항상 좌우에 있게 될 것이니, 고희지 같은 사람은 이른바 깨끗하고 맑다는 것이다.”
〇 자정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되는 임인년(1482, 성종13)에 고생(高生)이 일찍이 꿈에 광막(曠漠)한 들판에서 자정을 만나 평소처럼 함께 수창(酬唱)하였다. 자정이 묻기를 “백공(伯恭)과 종지(宗之)는 어디에 있소?” 하니, 고생이 말하기를 “이미 절에 올라가서 학업을 익히고 있소.” 하였다. 자정이 기뻐하지 않으며 즉시 시 한 수를 지어 고생에게 주어 두 사람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그 시에,
문장과 부귀란 모두 뜬구름 같거늘 / 文章富貴摠如雲
어찌 수고롭게 글 읽기에 부지런한가 / 何須勞苦讀書勤
돈을 얻거든 술이나 사서 마실 뿐이니 / 但當得錢沽酒飮
세간의 인간 일이란 말할 것이 못 되네 / 世間人事不須云
하였다. 고생이 꿈을 깨고 이를 기록하여 나에게 보내주었다.
〇 적성(積城)의 청학동(靑鶴洞)은 감악산(紺岳山)에 있는데, 동구(洞口)에 꼬불꼬불 굽이도는 시내 하나가 있다. 내가 일찍이 운계사(雲溪寺)로 시승(詩僧)을 방문하느라 필마를 타고 시낭(詩囊) 하나 차고서 물길을 거슬러 오르고 그윽한 곳을 찾아 바야흐로 하나의 시내를 열두 번 건넌 연후에 그 기슭에 이르렀다.
뒷날 두보(杜甫) 시를 읽을 때에 “산길 가다 만난 한 줄기 시냇물, 굽이돌아 바야흐로 여러 번 건넜네.〔山行一溪水 曲折方屢渡〕”라는 구절이 정히 지난번에 보았던 것과 다름이 없어, 바람 부는 처마 아래에서 책을 펼치고 푸른 학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유수계(劉須溪)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거니와 시 구절의 ‘일(一)’ 자를 가소롭게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내가 가만히 의심하건대, 반드시 ‘일’ 자를 사용한 뒤라야 아래 구절 ‘누도(屢渡)’라는 글자에 더욱 맛이 있게 된다.
〇 홍유손(洪裕孫)은 자가 여경(餘慶)이고, 본관이 남양(南陽)이다. 겉으로는 미쳐서 실성한 듯하지만 안으로는 석가의 ‘무(無)’ 자 화두를 잡아 10여 년 만에 바야흐로 깨우쳤다. 유가로 돌아와서 우리 유서(儒書)를 읽고 크게 기뻐하기를 “이른바 천리 타향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듯하다는 그런 기분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논어》 첫머리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라는 한 구절을 읽으면 《논어》20편 전체의 종지(宗旨)를 알 수 있으니, 이는 마치 사람이 처음 앉았을 때에 그 헛기침 소리를 듣고서도 그 사람 언어의 아름다움을 미리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성광(醒狂) 백연(伯淵)이 홀로 믿지 않으며 말하기를 “여경이 ‘무’ 자 화두를 잡은 것은 이른바 겉으로 하는 말이다.” 하였다.
〇 자정(子挺)이 일찍이 이태백(李太白), 소동파(蘇東坡) 및 고려 상국(相國) 이규보(李奎報)의 시를 상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중균 종준(李仲鈞宗準)이 그의 문에 장난삼아 쓰기를 “자정은 태백을 주먹으로 때린다. 자정은 동파와 평소에 잘 알지 못한다. 자정은 상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하였다. 자정이 이를 읽고 붓을 들어 유독 ‘동파와 평소에 잘 알지 못한다.’는 구절만 지워 버렸다. 내가 묻기를 “상국은 우리나라 사람이라서 그 문장이 진실로 변변찮다고 하더라도 청련거사(靑蓮居士) 같은 이는 《시경》 이후의 오직 한 사람뿐이거늘 족하가 중균의 ‘주먹으로 때린다’는 글을 달갑게 받아들이니, 이는 청련거사가 동파보다 못하다 여기는 것이오?” 하니, 자정이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〇 문종(文宗)이 고려 왕 태조를 위하여 마전현(麻田縣)에 숭의전(崇義殿)을 짓고, 사람을 시켜 왕씨의 후손을 찾게 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왕숭례(王崇禮)라는 사람이 성명을 바꾸고 서민이 되었는데, 이웃 사람과 밭을 갈다가 밭두둑을 다투게 되어 이웃 사람이 그를 고발하였다. 문종이 즉시 벼슬하게 하고 3품으로 품계를 올려서 숭의전사(崇義殿使)로 삼고 그로 하여금 왕 태조의 제사를 맡게 하니, 이는 우(虞)나라가 단주(丹朱)를 천자의 빈객으로 대접하고 주(周)나라가 미자(微子)를 천자의 빈객으로 대접한 것과 같다.
계유년(1453, 단종1)의 감시(監試)에 숭의전 시를 출제하여 시제(試題)로 삼았다. 김시습(金時習)의 시에 이르기를,
숭의전이 마전현에 있으니 / 崇義殿在麻
대대로 그 집을 복호하네 / 世世復其家
하였다.
〇 고려 왕씨가 망했을 때에 여러 왕씨를 섬으로 추방하였더니, 모신(謀臣)이 모두 말하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에 명분 없이 죽이기를 싫어하여 물에 익숙한 사람을 시켜서 배를 준비하게 하고 여러 왕씨를 꾀어 말하기를 “교서가 지금 내려왔는데, 여러분을 섬 안에 배치하여 서인을 삼는다고 하였다.” 하니, 여러 왕씨가 매우 기뻐하며 다투어 배에 올랐다. 배가 해안을 떠나자 뱃사람이 배에 구멍을 뚫고 바다 밑으로 잠입하였다. 물이 배의 반쯤 찼을 때에 왕씨와 평소에 잘 알던 승려가 해안에서 손을 들어 부르니, 왕씨가 즉시 한 구절을 읊어 승려에게 말하기를,
푸른 물결 밖엔 노 젓는 소리 들리거늘 / 一聲柔櫓滄波外
물어보노라 산승이여 어이해야 할까나 / 借問山僧柰爾何
하니, 승려가 통곡하고 돌아갔다.
〇 세조가 괴애(乖崖) 김수온(金守溫)으로 하여금 명나라 서울로 가서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은 불경을 구해 오게 하였다. 괴애가 명나라에 들어가 감로사(甘露寺)에 이르니, 그 주지는 중국에서 이름난 승려였다. 괴애가 조선의 큰선비라는 소문을 듣고서 미리 의자와 탁자를 설치하고 그를 위하여 붓과 벼루와 아계지(鵝溪紙)를 그 위에 놓아두었다. 괴애가 문에 들어섰을 때에 벽에 묵매(墨梅)가 있기에 즉시 붓을 적시어 기둥에 적기를,
조계에는 황매요 / 曹溪黃梅
감로에는 묵매로다 / 甘露墨梅
만약 빛깔로 본다면 / 若以色見
반야가 아닐 터일세 / 不是般若
하니, 주지가 뜰 아래로 내려와서 머리를 조아렸고, 대뢰(大牢)로써 대접하며 술과 고기를 극진히 갖추었다.
〇 내가 젊었을 때에 시를 지어서 괴애 선생에게 교정해 주기를 청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젊은이에게 글 짓는 법은 가르칠 만하지만 글씨 쓰는 법은 자못 그와 같지 않네. 글 짓는 기술은 먼저 기(氣)를 확충해야 하고, 글씨 쓰는 법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네.” 하였다.
〇 처사 권안(權晏)은 선정(禪定)을 닦으면서 유학을 좋아하였다. 살고 있는 집이 수십 군데 구멍이 뚫려서 비가 새고 바람이 들어와도 손보지 않았다. 그 아들이 장단(長湍)에 내려가서 종들을 부려 농사를 지어 벼를 매우 많이 거두어들였으나, 권 처사는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이렇게 농사를 지으려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혀야 했을 것이다.” 하였다.
〇 나의 증조부 제학공(提學公)은 어머니를 섬길 때에 온화한 얼굴빛을 지녔고, 임금을 섬길 때에 바른 도리를 지켰고, 붕우를 대할 때에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했다. 일찍이 충의위(忠義衛)로서 입직할 적에 준비된 저녁 식사가 부족하였다. 그러자 평소에 알던 궐내의 찬인(餐人)이 저녁상을 갖추어 올렸으나 공이 받지 않았다. 족형 남경우(南景祐)가 대신 먹고는 공에게 너스레를 떠니, 공이 말하기를 “대형(大兄)은 그러지 마시오. 목이 말라도 도천(盜泉)의 물은 마시지 않는 법입니다.” 하였으니, 그 바른 도리를 지키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선군(先君)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그대의 조부는 남의 급함을 구해 주고 남의 어려움을 근심함으로써 청년 시절에 명성을 떨쳤다오.” 하였다.
〇 현산(玄山) 이계기(李啓基)가 일찍이 고인(古人)을 언급할 때면 언제나 제학공을 으뜸으로 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스스로 공에게 칭찬을 받는 것을 천금을 얻는 것 이상으로 여겼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채신보(蔡申甫)가 외손 이심원(李深源)에게 말하기를 “세종조의 인물로는 공이 제일이다.” 하였다.
〇 이현산(李玄山)이 젊었을 때에 모부인의 사랑을 몹시 받았다. 모부인이 금은(金銀)과 보기(寶器)를 주는 날이면 공이 받아서 상자 속에 갈무리하며 반드시 모년 모월 모일에 어떤 물건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보물을 모두 정리하여 여러 형들에게 고르게 나누어 보내주었다.
현산이 교하 현감(交河縣監)을 사임한 뒤에 소를 타고 술을 차고서 산곡(山谷)을 오르내리며 여종으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고 사내종으로 하여금 징을 두드리게 하며 말하기를 “병 때문에 저절로 이렇게 된다.” 하였다. 기축년ㆍ경인년 이후로는 뜻을 전일하게 하여 고치고 말하기를 “병이 이미 나았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여러 해에 걸친 병이 늘그막에 문득 나은 것을 감탄하였다.
〇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이 여막에 거처하는 3년 동안에 상식(上食)하고 곡읍(哭泣)할 때면 길 가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여경(餘慶)이 말하기를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킨다더니, 참으로 빈말이 아니로다.” 하였다.
〇 2월 17일에 증조모가 내 꿈에 나타났다. 내가 묻기를 “제가 급제하겠습니까?” 하니,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묻자 “너는 급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더니, 조금 있다가 나에게 이르기를 “금년 5월에 네가 분명 급제할 것이다. 지은 글이 반드시 여러 선비 중에 으뜸일 것이지만, 원수진 자가 들어와서 시관(試官)이 된다면 반드시 너의 글을 빼내어 낙제(落第)에 둘 것이니, 이것이 네가 급제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지신명이 위에서 굽어보시고 곁에서 질정(質正)하시니, 비록 원수진 사람이 있을지라도 어찌 사사로운 뜻을 그 사이에 부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증조모가 “네 말이 옳다.” 하였다.
〇 대교(待敎) 표연말(表沿沫)은 자가 소유(少游)이다. 예문관에 있을 때에 한림(翰林)의 여러 선생들이 새로 임명된 관원에게 사납게 구느라 금육(禁肉)을 차리고 여악(女樂)을 마련하게 하여 음주를 즐기다가 임금에게 발각되었다. 표연말도 연회에 참석했기 때문에 규례에 따라 파직되어 고향에 돌아갔다. 이 일이 있은 뒤로 고을의 모임에 금육을 내놓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머물지 않고 떠나며 말하기를 “차마 다시 성상의 법을 범할 수 없다.” 하였다.
부모상을 치를 때는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따랐다. 점필재 선생이 그때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있으면서 장계를 올려 그의 행실을 천거하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〇 경 징군(慶徵君)은 휘가 연(延)이고, 자가 대유(大有)이고, 본관이 청주(淸州)이다. 겨울철에 아버지가 병들어 생선회를 먹고 싶어 하였다. 징군이 얼음을 깨고 그물을 쳤으나 고기를 잡지 못하자, 울며 말하기를 “옛사람은 얼음을 두드려 고기를 얻었거늘 지금 나는 그물을 쳐놓고도 잡지 못하니,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고, 두건과 버선을 모두 벗고 얼음 구멍에 서 있었더니, 하룻밤을 지나 검은 잉어를 잡게 되었다.
아버지가 또 승검초를 먹고 싶어 하였다. 징군이 울자 승검초가 갑자기 돋아나서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께 드시게 했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하는 3년 동안에 죽, 채소, 과일 등의 음식을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어머니를 섬기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일은 50세가 넘도록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또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와 같이 하였다.
세조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더니, 주상(主上) 9년에 부름에 응하여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가 되었다. 임금이 내전으로 불러들여 묻기를 “경이 고향에 있을 때에 얼음을 두드리자 물고기가 뛰어나왔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겨울철 물고기가 없을 때라서 아버지가 반드시 얻지 못할 것이라 여기기에 그물을 치고서 매우 치밀하게 구하여 다행히 얻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기뻐하여 ‘효성에 감동된 것이다.’ 하니, 향리에서 듣고는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또한 ‘효성에 감동된 것이다.’ 하였을 뿐이고, 신은 실로 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경은 몇 가지 책을 읽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이경(四書二經)을 읽었습니다.” 하였다. 주상이 말하기를 “사서이경 중에 어떤 말이 제일의(第一義)이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서이경 중에 순(舜) 임금의 지극한 효를 칭송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하고 싶은 바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주공(周公)의 충성을 칭송하였으니 이것도 신이 하고 싶은 바이지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오래도록 아름답게 여기며 감탄하였다.
〇 청주(淸州)에 사는 양수척(楊水尺) 삼형제는 소행이 좋지 못하였다. 경 징군(慶徵君)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도리를 다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예전의 잘못을 버리고 성실하게 자식의 도리를 지켜서 또한 혼정신성을 행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당한 날에 한 잔의 물도 입에 대지 않았고, 여막에서 지내는 3년 동안 술이나 과일을 먹지 않았다. 상이 끝난 뒤에는 삼형제가 함께 살면서 모두 다 기뻐하였고, 서로 경계하기를 “행여 좋지 못한 행실이 있어 경 생원(慶生員)이 듣게 된다면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〇 신축년(1481, 성종12)의 가뭄 때에 이천(利川)에서 한 강도(强盜)를 처단하였다. 강도가 처형당하기 직전 하늘에 맹세하기를 “나는 어릴 때부터 도둑질을 배운 일은 진실로 있었지만, 강도질은 한 적이 없습니다. 내 말이 만약 진실하다면 하늘이 반드시 변고를 내릴 것입니다.” 하였다. 막 몸에서 머리가 잘려 나간 순간 하늘이 과연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려서 한 동네의 밭이 모두 모래 물에 뒤덮였다.
〇 경자년(1480)에 사족(士族)의 여인 어우동(於宇同)이라는 자가 사인(士人)들과 간음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공사(供辭)에 생원 이승언(李承彦)이 연루되어 이승언이 형장(刑杖)을 맞다 못해 자백하게 되었다. 꿇어앉아 하늘에 고하기를 “옛날에 한 사나이의 원한이 6월에 서리를 날리게 했으니, 지금 하늘이나 옛날 하늘이나 동일한 하늘입니다. 나의 옥사에 원통함이 있거늘 하늘은 어찌 변괴를 내리지 않습니까.” 하니, 이윽고 검은 구름이 화악(華嶽)에서 일어나 폭우가 갑자기 쏟아지고, 날리는 우박이 뜰에 가득하고, 우레와 번개가 진동하였다. 옥관(獄官)이 괴이하게 여겼으나 공사에 이미 자백했기 때문에 다시 밝힐 수 없었다.
〇 자정(子挺)은 의(義)가 아닌 음식을 일찍이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그가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안을 돕는 데에 그치는 것이니 그 더러움은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을 돕는 것이니 부모가 주신 몸을 더욱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자정은 천신(薦新)하기 전에는 채소와 과일 등을 일찍이 입에 대지 않았다.
〇 괴애 김수온이 좌화(坐化)하였다. 동봉(東峰) 김열경(金悅卿)이 웃으며 말하기를 “괴애는 평생에 욕심이 많았으니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다지 귀한 일이 못 된다. 증자(曾子)의 역책(易簀)한 임종과 자로(子路)의 결영(結纓)한 죽음을 나는 알 뿐이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였다.
〇 열경이 크게 취하여 길에서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을 만나자 큰 소리로 외치기를 “네 이놈, 그만두어라.” 하였다. 정창손이 못 들은 척하니, 사람들이 재상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〇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우리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간 임산부 하나가 있었다. 문충공이 돌아오면서 비단을 주고 그 여자를 샀다. 배가 돌아오는 날 큰바람에 돛대가 꺾여 거의 건널 수가 없게 되었다. 배 안의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임산부는 신룡(神龍)이 좋아하는 바이다.” 하고, 다투어 임산부를 데려다 바다에 던지려고 하였다. 문충공이 몸으로 감싸며 말하기를 “차라리 함께 고기밥이 될지언정 차마 하지 못할 일이다.” 하였다. 조금 뒤에 건장한 사내가 돛을 매어 나아갈 수 있었다.
〇 성화(成化) 연간에 강릉(江陵)에 한 남자가 있었다. 생긴 모습이 추하고 이지러져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나이 60세에 배우자도 없이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탄식하기를 “온 강릉 부(府)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나처럼 추하게 생기게 했다면 내가 부처(夫妻)의 교합(交合)하는 도리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〇 영락(永樂) 연간에 고봉(高峰)에 한 사족(士族)의 비구니가 집에 살고 있었는데, 깨끗함을 좋아하는 정도가 사람의 정리에 가깝지 않았다. 일찍이 측간의 물을 사용할 때에 깨끗한 그릇이 측간 그릇 가까이 닿음을 싫어하여 내정(內庭)으로부터 측간에 이르기까지 물그릇을 벌여놓고 서로 연속하여 옮겨 붓게 하였다. 간혹 밤중에 잠이 오지 않으면 뜰 가운데에 횃불을 마련해 두고 노비를 모두 불러다 묶어 놓고 말하기를 “정결한 불당에서 너희 부처(夫妻)가 서로 난잡한 짓을 하여 잠이 오지 않는 재앙을 초래했다.” 하고, 비록 엄동의 혹한일지라도 반드시 노비 부처를 발가벗겨서 찬물로 그 몸을 씻게 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〇 이종준(李宗準)은 자가 중균(仲鈞)이고, 호가 부휴거사(浮休居士)이다. 성품이 풍류스럽고 대범하여 젊은 시절에 명성이 있었다. 을사년(1485, 성종16) 과거시험에 2등으로 급제하였고, 정미년(1487) 가을에 일본호송관(日本護送官)에 차임(差任)되었다. 동래현(東萊縣)에 이르렀을 때에 나이 열두셋가량의 기녀가 있었다. 이종준이 매우 사랑하여 개명(改名)하며 말하기를 “방안아(榜眼兒)는 네가 시집가기 전에 다시 사명(使命)을 받아서 꼭 인연을 맺을 것이다.” 하였다.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합하는 것을 개명이라 하니, 이것은 기념의 표시였다. 이해 겨울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의 명을 받으니, 남북의 거리가 아득하여 다시 올 길이 없었다.
〇 전석(田錫)이라는 사람은 본관이 청주(淸州)로, 경대유(慶大有)와 친하게 지냈다. 세조가 승하하자 3년 동안 심상(心喪)을 치르니, 향리에서 충성스럽게 여겼다. 또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일찍이 향교에서 놀다가 깊이 잠들어 일어나지 못했다. 나이 어린 교생(校生)이 기녀와 짜고서 옷을 발가벗고 전석과 몰래 교합하게 하니, 전석이 잠을 깨고는 황급히 일어나서 음경을 드러내고 달려 나가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사람들이 묻기를 “그대는 벼슬하지 않은 서민이거늘 임금의 상에 복을 입음이 예법을 넘었고, 남녀가 교합하는 것은 하늘의 도이거늘 부르짖으며 달아나다 목이 쇠니, 그대가 어떤 공부를 하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전석이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면서 복을 누릴 만한 재능이 없기에 적선(積善)의 공부를 하여 자손의 복을 구하려고 합니다.” 하니, 사림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〇 권경유(權景裕)는 자가 군요(君饒)이고, 유순정(柳順汀)은 자가 지옹(智翁)이니, 젊은 시절에 재명(才名)이 있었다. 일찍이 산방(山房)에서 학업을 익힐 때에 어떤 소년이 또한 산승(山僧)에게 글자를 배우고 있었다. 권경유와 유순정이 묻기를 “너는 누구냐?” 하고, 또 말하기를 “너를 보니 얼굴이 예쁘구나. 또한 너의 누이가 있겠지?” 하니, 대답하기를 “누이 하나가 있으니, 본래 나주(羅州)의 기적(妓籍)에 든 기녀입니다. 기명은 옥부향(玉膚香)이고 아명(兒名)은 덕도(德島)인데, 용모와 기예가 고을에서 으뜸이었습니다. 전년에 서울의 교방(敎坊)으로 뽑혀 들어가서 또한 명성이 있습니다.” 하였다. 두 사람은 연정(戀情)을 견디지 못하며 약속하기를 “우리 둘 중에 먼저 급제하는 사람이 반드시 옥부향을 차지하기로 하자.” 하고, 또 소년에게 나주 고향집의 마을 거리와 꽃, 나무, 냇물, 돌 등을 물어 마음속에 기억하였다.
2, 3년 뒤에 두 사람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유순정은 영안도 평사(永安道評事)가 되고, 권경유는 한림(翰林)이 되었다. 한림의 연회에서 노래하는 기생 중에 옥부향을 발견하고 말하기를 “네가 나를 알겠느냐?” 하니, 옥부향이 말하기를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권경유가 즉시 속여 말하기를 “네가 나주에 예속되어 있을 때에 내가 벼슬하지 못한 선비로서 그곳을 지나갔다. 통판(通判) 아무개가 너로 하여금 내 잠자리의 시중을 들게 하여 내가 너의 집에 유숙하다가 며칠 뒤에 떠나갔다. 네 어머니의 이름은 아무개이고, 조모의 이름은 아무개이고, 오라버니의 이름은 아무개이고, 동생의 이름은 아무개이다. 문 앞의 나무는 어떠하고, 꽃은 어떠하고, 시내는 어떠하고, 돌은 어떠한지를 내가 모두 잊지 않고 있다. 또 네가 나와 작별할 때에 말하기를 ‘첩이 행여 경기(京妓)에 예속되고 낭군 또한 다시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면, 이는 일생에 다시 결합하는 때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너는 잊었느냐?” 하였다. 옥부향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한참 동안 얼굴을 쳐다보다가 탄식하기를 “한림의 말씀이 진실로 옳습니다만 모습이 지난번에 보았던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저는 이집 저집 옮겨 다니며 장(張) 서방과 이(李) 서방을 섬기는 사이에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하고, 흐느껴 울며 그치지 않았다. 이날 밤에 평소에 기약한 일이 이루어지니, 사림에 얘기가 전파되어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〇 성화(成化)ㆍ홍치(弘治) 연간에 한씨(韓氏) 성을 가진 한 서생이 영안도(永安道)의 산사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남색 옷을 입은 늙은이가 촌야(村野)에서 쌀을 구걸하다가 서생을 만나 말하기를 “선비는 무슨 책을 괴롭게 읽고 있소? 나는 평생 걸식으로 만족하오.” 하고, 이어 절구 한 수를 적어 주기를,
나른하게 사창에 기대니 봄날이 더딘데 / 懶倚紗窓春日遲
홍안은 꽃 지는 시절에 부질없이 늙네 / 紅顔空老落花時
세상의 만 가지 일이 모두 이와 같으니 / 世間萬事皆如此
뿔 두드리며 노래한들 뉘라서 알아줄까 / 叩角謳歌誰得知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좁고 작아서 재능이 있는 사람이면 반드시 영달하게 되니, 어찌 창해(滄海)의 버려진 진주처럼 인재가 등용되지 않는다는 탄식이 있겠는가.” 하였다. 지금 내가 들은 것이 이와 같으니 그렇다면 이 늙은 걸인처럼 내가 듣지 못한 자가 몇 사람이나 초야에 묻혀 있으며 몇 사람이나 시장에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한씨는 학문하여 논의가 독실한 군자이므로 반드시 망녕된 말을 하지 않을 자이다. 나에게 이러한 얘기를 해 주었다.
〇 겸지(兼之)가 일찍이 꿈을 꾸었다. 한 기이한 모습의 사인(士人)이 겸지에게 시를 주기를,
세상엔 홍진이 가득하고 / 世上紅塵滿
하늘 누각엔 자옥이 차갑네 / 天樓紫玉寒
동황이 팔폐를 구하지만 / 東皇求八狴
끝내 그 집을 알지 못하네 / 終不憶家山
하였다. 겸지는 그 꿈이 바로 저승의 소환장이라 의심했고, 여러 사람들도 모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이듬해에 과거에 응시하여 탐화랑(探花郞)이 되었다. 내가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하였다. 시의 뜻을 말하자면, 동황(東皇)은 우리 임금을 가리킨 것으로, 반드시 겸지에게 보좌(輔佐)의 지위를 얻기를 기약한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 홍문관에 들어가서 총애를 많이 받았다.
〇 내가 일찍이 관서(關西)의 상원군(祥原郡)에서 나그네로 묵을 때에 침소 병풍에 삼소도(三笑圖)에 적은 시가 있었으니,
혜원공은 세밀하고 영리하여 / 遠公細而黠
계율 깨뜨린 줄 모를 리 없네 / 破戒非不知
잠시 호계의 흥취에 기탁하여 / 暫寄虎溪興
어리석은 서생을 속인 것이라 / 欺謾措大癡
하였다.
내가 크게 놀라고 또 기뻐하니, 군수가 말하기를 “손님이 놀라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관서 200일 동안의 여행에서 처음으로 좋은 시를 보았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소. 또 유생(儒生)이 좋은 시구를 보는 것은 백금(百金)을 얻은 것보다 나으니 어찌 뛸 듯이 기쁘지 않겠소.” 하였다. 곧 그 시를 번안(飜案)하여 차운하기를,
소년은 대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 小年昧大年
소지는 대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법
 / 小知迷大知
시를 지은 사람 또한 서생일 뿐이니 / 題詩亦措大
어찌 도연명 육수정의 어리석음을 알랴 / 安知陶陸癡
하였다.
이어서 군수에게 이르기를 “이 시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나의 친구일 것이오.” 하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널리 물어보았더니, 바로 중균(仲鈞)의 솜씨였다.
〇 사암(思庵) 유숙(柳淑)의 〈벽란도(碧瀾渡)〉 시에,
오랫동안 강호의 언약 저버리고 / 久負江湖約
티끌 세상에 이십 년을 살았구나 / 紅塵二十年
흰 갈매기가 나를 비웃으려는 듯 / 白鷗如欲笑
짐짓 누각 앞으로 가까이 오도다 / 故故近樓前
하였다.
사암은 결국 홍진 세상의 화액(禍厄)을 면하지 못하여 그 충성스럽고 청렴한 절개가 끝내 대의명분 아래에 밝혀지지 못한 채 역적 신돈(辛旽)의 무함을 받아 남모르게 피살되었으니, 슬프도다. 내 나이 36세 때에 벽란도를 지나다가 차운하기를,
청운의 벼슬길 알지 못하여 / 未識靑雲路
강호에서 사십 년을 보냈네 / 江湖四十年
사암은 적의 손에 죽었지만 / 思庵終賊手
나는 흰 갈매기 앞에 서 있네 / 余在白鷗前
하였으니, 이것은 사암의 시를 번안한 것이다.
〇 구중인(丘仲仁)은 호가 호은(壺隱)이다. 신선술을 즐기면서 명리를 좋아하다가 고죽(孤竹)에서 객사하였다. 내가 관서 지방을 잠깐 유람하다가 성천(成川)의 비류강(沸流江) 가에 이르러 그의 부고를 듣고 즉시 4장(章)의 만사(輓詞)를 지어 애도하였다. 첫째 장에 이르기를,
호은 선생 구중인은 내 오랜 친구니 / 壺隱先生我故人
사십일 년 생애 동안 명성을 떨쳤소 / 聲名四十一年春
납과 수은이 매몰되고 태광이 죽으니 / 鉛埋汞沒胎光斃
무덤 나무만 쓸쓸히 동빈을 가렸구려
 / 墓木蕭蕭掩洞賓
하였고, 둘째 장에 이르기를,
하였으니, 자못 호사가들 사이에 웃음거리로 전해지게 되었다.
〇 백원(百源)은 타고난 자질이 세상에 으뜸이어서 서사(書史)를 읽지 않았으나 시문을 지은 것이 크게 기이했다. 일찍이 보제원(普濟院)에서 나를 전별할 때에 빈객이 모두 스스로 노래하고 춤추었다. 백원이 나의 부채에 시를 적기를,
서로 안 지 팔 년 사이에 / 相知八年內
만남은 적고 이별은 많네 / 會少別離多
천리 멀리 헤어지는 자리 / 臨分千里手
눈물 흘리며 맑은 노래 듣네 / 掩泣聞淸歌
하니, 좌중이 자리를 피하며 붓을 던졌다. 중균(仲鈞)이 이 시를 보고 탄복하기를 “매우 좋다. 출중하다.” 하였다.
〇 내가 일찍이 관서(關西)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가 근 100여 편이다. 이중균(李仲鈞)이 유독 기자전(箕子殿) 시의 첫머리인
무왕이 수를 미워하지 않았으니 / 武王不憎受
성탕이 어찌 주를 노여워했으랴
 / 成湯豈怒周
상나라 주나라 혁명할 즈음에 / 二家革命間
성인은 원망도 탓함도 없었다네 / 聖人無怨尤
하는 두 연(聯)만 취하고, 말하기를 “이 시구는 옛사람의 작품을 능가할 만하고 나머지는 취할 것이 없다.” 하였다. 벗들은 그의 논평이 너무 지나친 듯하다 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현(李齊賢)의 시를 졸옹(拙翁) 최해(崔瀣)가 전체 원고를 지워 버리고, 단지 「응당 성내리라, 유숙하는 손님이 일찍 문을 열어 뜰 앞에 눈이 소나무를 누른 것을 보려는 것을.〔應嗔宿客開門早 要看庭前雪壓松〕」이라는 구절만 남겨 놓았다. 이제현의 시재(詩才)는 원나라에서도 활보할 수 있었고, 시집에 실린 시는 천만 편도 넘는다. 내가 시를 배운 것은 시일이 얼마 안 되고, 관서를 유람하면서 지은 시는 편수가 지극히 적으며, 또 중균의 시를 보는 안목은 졸옹보다 높으니, 나의 네 구절을 뽑아 준 것만도 분수에 넘는 일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중균의 논평이 매우 온당하였다.
〇 무풍부정(茂豐副正) 이총(李摠)은 자가 백원(百源)이다. 양화도(楊花渡) 가에 별장을 짓고서 작은 배와 물고기 그물을 마련해 놓고 시인 소객(騷客)을 맞아들여 날마다 좋은 시를 지으니, 무려 천백 편이나 되었다. 신용개 개지(申用漑漑之)의 시에,
모래 따뜻하여 뭇 새들 모이고 / 沙暖集群鳥
강물 평평하여 큰 달이 비쳤네 / 江平浮大陰
라는 두 구절이 여러 시 중의 으뜸이었다. 여경(餘慶)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의 이 시는 성당(盛唐)의 운치가 있다.” 하였다.
〇 국조(國朝)의 아악(雅樂)은 박연(朴堧) 이후로 사족 중에 일컬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성화(成化) 연간에 유추(有秋)가 비로소 드러났고, 정중(正中), 백원(百源), 국문(國聞)이 일어나서 예전의 습속을 한번 씻어내니, 교방(敎坊)에서 네 사람을 추중(推重)하여 으뜸으로 여겼다.
나는 일찍이 음률을 알지 못했으나 날마다 네 사람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겼고, 악공들의 논평도 익숙히 들었다. 그들이 논평하기를 “유추는 마음이 평온하나 솜씨가 떨어지고, 국문은 솜씨가 묘하나 마음이 혹독하고, 백원은 웅혼(雄渾)하나 솜씨가 난잡하고, 정중은 격조가 높으나 기운이 편벽되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정중이 송도(松都)를 유람하며 거문고를 탈 때에 사인(士人)과 기녀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성거산(聖居山) 승려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던 것을 친히 보았으며, 도성으로 돌아오던 날에 말을 타고 서성거리며 연주하자 길 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들었으니, 백아(伯牙)가 세상을 떠난 천 년 뒤에 이 사람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기운이 편벽되다는 말은 지나친 논평이 아니겠는가. 백원과 유추는 일찍이 악기를 갖추고서 밤낮으로 익혔지만, 정중은 집안에 악기가 없어 오가다가 이르는 곳에서 우연히 남의 악기를 잡아도 그 음률이 온화하고 진솔하였으니, 나는 일찍이 그의 손재주가 매우 뛰어난 것을 탄복하였다. 그러나 음악을 아는 사람이 간혹 “정중의 거문고 재주는 백이(伯夷)와 같으나 시중(時中)은 백원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하니, 이는 어찌 세상을 구제하고 경영할 재주가 내면에 쌓였으나 이를 작은 기예로 돌렸기 때문에 발현됨이 편벽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흐르는 눈물을 견디지 못하며 끝없이 오열하노라.
〇 선군(先君)이 만년에 최국화(崔國華) 선생을 벗하여 친애하였다. 임오년(1462, 세조8)의 과거 시험에 최국화가 〈삼전정천산부(三箭定天山賦)〉를 지어 중장(中場)에 첫째로 뽑혀 대과에 급제하였다. 선군이 시를 지어 축하하기를,
장군은 본래 대적할 자 없어서 / 將軍本無敵
화살 세 개로 천산을 평정했네 / 三箭定天山
개선할 때에 조야가 기뻐하고 / 凱旋朝野喜
대궐에서 성상을 가까이 했네 / 丹墀近天顔
하였다. 이 시는 장편의 대작으로, 이 두 연(聯)은 곧 첫머리의 구절이다. 사론(士論)이 모두 칭찬하였고, 혹 시를 배우는 사람이 있으면 찬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선군이 32세에 세상을 떠나 좋은 시구가 많이 없고, 다만 이 시만 남아 회자된다. 당나라 사람이 말한 “시는 멀리 전해짐을 귀하게 여기고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〇 선조(先祖) 구정(龜亭)은 술을 좋아하고 큰 지략이 많았으나, 말을 삼가서 일찍이 조금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손님과 더불어 바둑 두기를 좋아하여 종일토록 쉬지 않았다. 손님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살아 있는 사람은 기운이 있어 반드시 말하게 되고, 말하게 되면 조정의 일을 언급하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오. 종일토록 바둑을 두면 말로써 기휘(忌諱)를 범함을 피할 수 있을 것이오.” 하니, 사람들이 그 근신(謹愼)함을 탄복하였다.
〇 선조 구정은 마음가짐은 매우 삼갔으나 외형을 검속하지 않았다. 하루는 나라에서 금하는 의복을 입고 대궐에 조회하였다. 어떤 사람이 집에 와서 간하기를 “대신들도 금하는 의복을 입습니까?” 하였다. 구정이 놀라며 계집종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조회할 때에 어떤 옷을 입었더냐?”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의 아량이 넓어 의복에 신경 쓰지 않음을 탄복하였다.
윤경회(尹慶會)가 장흥(長興)에 귀양살이한 5, 6년 동안에 두 아들을 낳았다. 내가 손님으로 그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경회가 그의 첩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줌 누러 갈 때 중문에 문짝이 있더냐, 없더냐?” 하였다. 내가 구정으로써 그의 재주를 견주어 본다.
〇 아무개가 한양 부윤(漢陽府尹)으로 있을 때에 어떤 선승(禪僧)이 부윤이 도를 터득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관가의 뜰에 가서 소송하기를 “소승이 서강(西江)을 지나다가 삿갓이 회오리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니, 바라건대 사또께서는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부윤이 명하기를 “강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니, 동쪽 바람은 떠나는 배의 상인 아내가 원하는 바이고, 서쪽 바람은 오는 배의 상인 아내가 원하는 바이다. 두 가지 소원이 서로 충돌하면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것이니, 저 두 상인의 아내를 네가 잡아 온다면 너의 삿갓을 돌려주겠노라.” 하니, 선승이 탄복하고 떠나갔다.
〇 선승 육행(陸行)이 근간에 도를 터득했다고 일컬어졌다. 중균(仲鈞)의 부친 시민(時敏)이 일찍이 육행을 맞이하여 죽은 아버지를 위하여 재(齋)를 지냈다. 시민이 묻기를 “지옥은 참으로 있소?” 하니, 육행이 말하기를 “선비께서는 참으로 모른단 말이오. 만약 저 상교(象敎)라는 두 글자를 체득한다면 알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〇 유승탄(兪承坦)은 관향이 면천(沔川)이다. 책을 끼고 대궐에 이르러서 그가 배운 수천여 글자를 진언하니, 모두 조정의 병폐에 들어맞았으나 사림들이 모여 소리 내며 비웃었다. 유생(兪生)은 일찍이 자신의 정자를 청풍(淸風)이라 이름하였고, 그의 벗 박생(朴生)은 자신의 서재를 명월(明月)이라 편액하였다. 고관들 사이에 웃을 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유 청풍(兪淸風), 박 명월(朴明月)’이라고 하여 비웃고 헐뜯었다. 두 사람은 불우하여 등용되지 못했고, 또한 일찍이 벼슬을 구할 마음을 두지도 않았다.
〇 홍균(洪鈞)이라는 사람은 사족(士族) 출신으로, 젊었을 때 무사로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 경태(景泰)ㆍ천순(天順) 연간에 미친병을 얻어 저자에서 구걸하였다. 날마다 아침저녁 밥 지을 쌀과 술 한 병을 얻어 베주머니에 쌓아 모으되 가득 차면 돌아가고 차지 않으면 반드시 저자의 부녀를 위협하여 취하지만 받는 것은 한 움큼에 지나지 않았다. 한 술집과 약속하고 날마다 반드시 한 번씩 가서 노래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와 같이 한 지 10여 년에 짧은 누더기가 목을 가리지 못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단정하지 못한 사람을 부를 때면 반드시 홍균이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홍균이 매우 이상한 일을 하는 것은 아마 또한 미치광이에 의탁하여 양생(養生)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〇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은 독서할 때에 글 뜻에 구애되지 않고 요지만 보고 대의만 음미할 뿐이었다. 내가 〈출정한 군인의 원망하는 노래〔征夫怨〕〉10수를 지어 원유산(元遺山)의 시에 화운(和韻)하였다. 그 한 편에,
온갖 풀 서리에 시들고 달빛 하늘에 가득한데 / 百草凋霜月滿空
해마다 군마 타고서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네 / 年年鞍馬任西東
밤중 사막의 온 군막에는 군령이 지엄하여 / 令嚴萬幕平沙夜
북과 피리 울리는 속에 대오가 서로 부르네 / 部伍相招鼓角中
하였더니, 동봉이 보고 실소하며 말하기를 “선비께서 잘못하였소. 어찌 군령이 엄한 때에 다시 서로 부르는 일이 있겠소.” 하고, 《시경》〈소아(小雅) 거공(車攻)〉을 펴서 내게 보여 주었다. 그 시에 “이 사람이 정벌하러 가니, 소문만 있고 소리는 없도다. 진실로 군자여, 참으로 대성하리라.〔之子于征 有聞無聲 允矣君子 展也大成〕” 하였다. 내가 깊이 그 말에 감복하고 돌아와서 여경(餘慶)에게 말하였더니, 여경이 찬탄하기를 “동봉의 독서가 가장 좋고 가장 좋구나.” 하였다.
〇 경진년(1460, 세조6)에 북방을 정벌할 때에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상장(上將)이 되었다. 하루는 막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문충공이 군중(軍中)에 명령하기를 “많은 사람 중에 시를 지어 오늘의 뜻을 묘사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를 뽑아 상객(上客)으로 삼겠노라.” 하였다. 별시위(別侍衛) 박휘겸(朴撝謙)이란 사람이 즉석에서 읊기를,
십만의 용맹한 군사 수루를 에워쌌는데 / 十萬貔貅擁戍樓
밤 깊은 변방 달빛 여우 갖옷에 싸늘하네 / 夜深邊月冷狐裘
한 줄기 긴 피리 소리 어디서 들려오는가 / 一聲長笛來何處
정부의 만리 시름을 불어서 다 없애주네 / 吹盡征夫萬里愁
하니, 문충공이 기뻐하여 그를 뽑아 상객으로 삼았다. 박휘겸이 이로 인해 시명(詩名)을 얻게 되었다.
〇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한강의 남쪽에 정자를 짓고 압구정(狎鷗亭)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임금을 세운 공로를 한 충헌(韓忠獻)에게 비기며 염퇴(恬退)했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나이가 많아 사직하며 강호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말을 삼은 것이지만 벼슬과 봉록에 연연하여 떠나지 못하였다. 주상이 시를 지어 송별하니, 조정의 문사들이 서로 다투어 화운한 것이 수백 편이었다. 그중에 판사(判事) 최경지(崔敬止)의 시가 제일이었다. 그 시에,
밤낮 은근히 접견하여 총애가 극진하니 / 三接慇懃寵渥優
정자가 있어도 와서 노닐 계책 없었네 / 有亭無計得來遊
가슴속에 참으로 기심이 고요해진다면 / 胸中政使機心靜
벼슬살이 동안에도 갈매기와 친하리라 / 宦海前頭可狎鷗
하였다. 한명회가 이를 싫어하여 현판에 넣어 주지 않았다. 뒤에 포의(布衣) 이윤종(李尹宗)이란 사람이 그 아래를 지나가다가 정자 위에서 쉬며 장편의 대작을 남겼다. 그 마지막 구절에 이르기를,
정자는 있어도 돌아가지 않으니 / 有亭不歸去
인간 중에 참으로 목후로구나 / 人間眞沐猴
하였다. 이윤종의 시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최경지의 시가 의사를 함축하고 온후하며 점잖은 것만 못하다.
〇 내가 일찍이 ‘기심(機心)을 잊고 갈매기와 친한다.’는 고사를 보고 반신반의하였다. 갑진년(1484, 성종15)에 행주(幸州)에서 농사지을 때에 밭을 가는 여가에 남포(南浦)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갈대밭 사이의 조수가 물러난 흔적이 있는 곳에서 그물을 손질하다가 흰 해를 쳐다보니 환하게 매우 밝았다.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살아가면서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이 밝은 해는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하며, 설핏 내 곁을 보니 물새가 울며 매우 가까이 날아왔다. 내가 홀연히 ‘내가 기심을 잊었다’고 믿었을 때에 갈매기는 날아갔으니, 내가 기심을 잊었다고 믿은 것이 바로 기심이 되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뒤에 이러한 생각으로 인하여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밝고, 귀신은 좌우에 임하여 보고 있다.〔日月昭昭於頭上 鬼神監臨於左右〕”라는 14자를 얻어 〈경지재명(敬止齋銘)〉의 제3연으로 삼았다.
〇 국오(菊塢) 강경순(姜景醇)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한 것을 두고 참판 김수령(金壽寧)이 “선대의 글을 정리하고 다듬어 사람들의 눈을 시원스럽게 함으로써 부조(父祖)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하였다.”라고 한 것처럼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사(上舍) 신영희(辛永禧)는 집안에 조부 문희공(文禧公)의 시집이 있다. 친구들이 묻기를 “자네 집안의 문집은 간행할 만한가?” 하니, 신영희가 말하기를 “우리 조부는 비록 문명(文名)이 세상에 으뜸이긴 했지만, 집안 문집에 실려 있는 글은 전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소. 일찍이 한 문하생을 애도하는 만시(輓詩)에 이르기를 ‘서른둘에 세상을 떠나니, 불행히도 안회와 같도다.〔三十二而卒 不幸同顔回〕’ 하였소. 이 시구 외에는 아름다운 시가 없으니, 어찌 간행할 수 있겠소.” 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효도라고 생각한다. 어째서인가? 조부의 행실과 기예를 정직하게 기술하는 것이 효도이기 때문이다. 설사 말을 꾸미고 글을 장식하여 부모를 기리더라도 부모의 귀신이 어찌 어두운 저승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〇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이 젊어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만년에 양주(楊州)의 누원(樓院)에 올라 짧은 시 3편을 남겼다. 그 첫 편에,
산이 있으면 어디나 여산이 아닐까 / 有山何處不爲廬
앉아 청산을 대하고 한번 탄식하노라 / 坐對靑山試一噓
벼슬살이 십 년에 늙은이 되었으니 / 簪笏十年成老大
노경에 〈귀거래사〉를 읊게 하지 말라 / 莫敎霜鬢賦歸歟
하였다. 영천군(永川君) 이정(李定)은 자가 안지(安之)인데, 이 시를 보고 절하고, 또 비평하기를 “이 시는 매우 핍진하니, 서(徐)의 시가 아니면 이(李)의 시일 것이다.” 하였다. 그 당시 서거정(徐居正)과 이승소(李承召)가 시명을 독차지하여 이정이 감복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정이 다시 누각 아래를 지나가다가 전날 썼던 비평을 다시 읽어 보니, 그 아래에 글이 쓰여 있기를 “이 시에는 강산의 아취(雅趣)가 있어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이는 반드시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선비가 지은 것이 아니다. 또 천지가 크고 강산이 깊은데 어찌 인재가 없어서 반드시 서(徐)와 이(李)라고 추측하는가. 인재를 저버리고 사람을 멸시함이 어찌 이리도 심하단 말인가.” 하였다. 이정이 이 글을 보고 크게 뉘우쳐서 전날 비평했던 글을 지워 버렸다. 지금의 《진산세고》에는 3편이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경순(景醇)의 편집이 넓지 못함이 이와 같다.
〇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하니,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아 있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이에 대해 처음에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함에 따라 재앙과 경사가 종류대로 이르는 법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무리들은 요행으로 면할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 하고 의심하였다. 뒷날 시골집에 정자를 지었더니, 정자 가운데에 무논의 벼가 싹이 돋아 석 달이 지나도 죽지 않고 가지와 잎이 오히려 무성하였다. 그러한 뒤에야 성인의 말씀이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오호라! 오늘날 이익을 관장하는 신하가 위로는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착취하지만, 천지간에 함께 살아서 죽지 않고 자손을 길러 쇠퇴하지 않는 것은 또한 정자 가운데의 벼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〇 정여창 자욱(鄭汝昌自勖)이 주자(朱子) 《중용장구(中庸章句)》의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한다.”는 것만 취하고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하였다.”는 것은 취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어찌 기에 뒤지는 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듣고서 매우 훌륭하게 여기지만, 그러나 병통이 없지 못하다. 이른바 이가 기에 앞선다는 것은 이의 체(體)이고, 이른바 기가 이에 앞선다는 것은 이의 용(用)이다. 만약 사람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총괄하여 성(性)이라 하고 인의예지의 단서가 발하여 나뉜 것을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옳겠는가.
〇 안시숙(安時叔)이 묵재(默齋) 선생 백연(伯淵)에게 묻기를 “백이(伯夷)를 두고 혹은 성인이라고 하며, 혹은 좁다고 하며, 혹은 인(仁)하다고 함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백연이 말하기를 “군신이 지위가 바뀔 즈음에 대의를 아는 것은 성인이고, 천명이 떠나가면 임금도 필부가 되는 이치를 모른 것은 좁은 것이고, 생사를 하나로 보아 의심함이 없으며 대의를 알아 편안하게 여긴 것은 인(仁)이라오.” 하였다.
〇 시숙(時叔)이 또 묻기를 “기(氣)에 이(理)가 있는 것은 알에 노른자위가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까?” 하니, 백연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알의 노른자위에는 진실로 이와 기가 있거니와 알의 흰자위에도 이와 기가 있소. 형상이 있는 것은 기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이이니, 나눌 것 같으면 이기(理氣)가 아니라오.” 하였다.
〇 시숙이 또 묻기를 “불법은 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습니까?” 하니, 백연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있소.” 하였다. 시숙이 말하기를 “만일 안다면 그들의 설교가 어째서 성인과 어긋납니까?” 하니, 말하기를 “그 마음이 바르지 않고 그 도가 사사롭기 때문이지만, 그 대체는 일찍이 사람으로 하여금 선에 나아가게 함에 있지 않은 것이 없소.” 하였다. 시숙이 크게 의심하였다.
〇 백연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예법이 없었으니, 혼인하면서 소원(疎遠)한 사람을 가깝게 하는 것은 의심컨대 또한 후세에 와서 만들어낸 것인 듯하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 말이 일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이 듣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오.” 하니, 백원이 말하기를 “참으로 옳고 참으로 옳소이다.” 하였다.
〇 자욱(自勖)은 “귀신이 없다.” 하고, 열경(悅卿)은 “귀신이 있다.” 하였다.
〇 이관의(李寬義)가 말하기를 “귀신과 여귀(厲鬼)는 천지 사이에 반드시 없는 물건이고, 또한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도 없는 것이다. 성인이 제사 지내도록 가르친 것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다.” 하였다.
〇 대유(大猷)가 《소학(小學)》으로 몸을 다스리고 옛 성인을 표준으로 삼아 후학을 불러 차근차근 잘 이끌어가니, 쇄소(灑掃)의 예(禮)를 행하고 육예(六藝)의 학문을 닦는 사람이 앞뒤로 가득하였다. 그를 비방하는 논의가 장차 비등하려 하자, 자욱이 그만두도록 권하였으나 대유가 듣지 않았다.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승려 육행(陸行)이 선교(禪敎)를 펼치니, 수업하는 제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그 벗이 그만두라면서 말하기를 ‘화가 생길까 두렵다.’ 하니, 육행이 말하기를 ‘먼저 안 사람으로 하여금 뒤늦게 안 사람을 깨우치게 하고,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뒤늦게 깨달은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니,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릴 뿐이다. 화복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관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육행은 중이라서 취할 것이 없지만, 그의 말은 지극히 공정하다.” 하였다.
〇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가 황음(荒淫)으로 인해 세자의 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타고난 자질이 대범하여 구속됨이 없었고 평소에 자신을 보양함이 매우 두터워서 주색과 사냥 이외에는 한 가지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의 아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가 불교를 좋아하여 일찍이 불사(佛事)를 행하면서 이제를 초청하였다. 이제가 사냥꾼과 사수(射手)를 거느리고 누른 개를 끌며 사냥도구를 싣고는 몰래 토끼를 쏘고 여우를 잡게 한 뒤에 가서 불사에 참석하였다. 조금 있다가 사냥꾼은 짐승을 올리고 요리사는 구운 고기를 올리고 모시는 사람은 술을 올렸다.
이보가 막 부처에게 절하며 머리를 조아릴 때에 이제가 고기를 들고 술을 마시며 태연자약하니, 이보가 정색하고 청하기를 “큰 형님, 오늘은 술을 참으시지요.” 하니, 이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평소에 하늘이 복을 준 것이 매우 두터워서 고생할 일이라곤 없네. 살아서는 왕의 형이 되고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 될 것이네.” 하였다. 부처는 이보를 가리킨 것이니, 사론(士論)이 통쾌하게 여겼다.
〇 판원(判院) 이변(李邊)은 표리가 한결같고 강직함을 자부하였다. 일찍이 남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평생 남을 속인 적이 없고, 벼슬길에 오른 이래로 병들었다는 핑계로 일을 폐한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 선생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상공(相公)의 덕은 진실하고 돈후하며 공손하다. 그러나 벼슬한 옛사람이 임금에게 병을 핑계한 것은 전후로 흔했으니, 이 말이 지나친 듯하다.” 하였다.
〇 우리나라 사람들이 올량합(兀良哈)의 춤을 본받아 머리를 흔들고 눈을 쳐들며, 어깨를 솟구치고 등을 굽히며,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동시에 굴신하면서 혹 활을 당기는 모양을 짓고 혹 개가 걷는 모양을 지으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고 새가 다리를 뻗는 듯이 하며, 나아가고 물러날 때에 바람이 일어나게 하니,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사서인(士庶人)과 광대, 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알거나 몸이 가벼운 사람이면 추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을 호무(胡舞)라고 부르며 관현악에다 올렸다.
의정부 우찬성 어유소(魚有沼)가 이 춤을 매우 잘 추었다. 나도 처음에는 풍류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는데, 고인이 된 벗 자정(子挺)이 극언으로 비판하기를 “남에게 아첨하는 행동과 유약하고 굽실거리는 태도는 사람이 행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오랑캐는 비유하자면 금수와 같은 것이니, 어찌 내 몸에다 금수의 일을 더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자못 옳지 않다고 여겼다. 나중에 《한서(漢書)》에서 개차공(蓋次公)이 단장경(檀長卿)의 목후무(沐猴舞)를 탄핵한 것을 읽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자정의 논평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으니, 전대의 현인과 후대의 현인이 동일하게 헤아렸던 것이다.
〇 천지의 정기(正氣)를 얻은 것이 사람이고, 한 사람의 몸을 주재하는 것이 마음이고, 사람의 마음이 밖으로 발로된 것이 말이고, 사람의 말 중에 가장 정밀하고 맑은 것이 시이다. 마음이 바른 사람은 시가 바르고 마음이 바르지 않은 사람은 시가 바르지 않으니, 《시경》의 〈상송(商頌)〉, 〈주송(周頌)〉과 상간(桑間)의 국풍(國風)이 이것이다. 그러나 태고의 시대에는 사악(四岳)의 기운이 완전하고 인물의 품성이 온전하였기 때문에 나무하면서 노래 부른 것이 표지(標枝)와 격양(擊壤)의 노래가 되었고, 규방을 지키며 읊조린 것이 〈한광(漢廣)〉과 〈표유매(摽有梅)〉의 시가 되어 애당초 시에 공력을 들이지 않아도 시는 저절로 정밀하고 완전하였다. 이 이후로는 인심(人心)이 그릇되고 엷어지며 풍기(風氣)가 완전하지 못해서 풍(風)이 변하여 원망하는 소(騷)가 되었고, 소가 변하여 지리(支離)한 오언시가 되었고, 오언시가 변하여 구속이 많은 율시가 되었으니, 한(漢)나라에서 위(魏)나라로, 진(晉)나라에서 당(唐)나라로 내려오면서 점점 옛날과 같지 못하게 되었다.
비록 이태백(李太白)과 유종원(柳宗元)을 당나라의 시백(詩伯)으로 여기지만, 이태백이 사언시를 지은 것과 유종원이 〈평회아(平淮雅)〉를 지은 것은 오히려 당시의 습속을 면하지 못하여 옛날의 어린아이와 부녀자에 견주어 보더라도 또한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사군자가 시에 공력을 들이지 않음이 없었으니, 예컨대 두보(杜甫)의 시에 “글을 읽어 만 권을 독파하니, 붓을 대면 신이 있는 듯하다.〔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 한 것과 구양수(歐陽脩)가 삼상(三上)에서 시구를 찾았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만당(晩唐)의 선비들은 공부를 시작한 지 혹 2, 3십 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경》의 풍(風), 아(雅)와 비슷한 것이 간혹 있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우연히 그러한 것이겠는가.
〇 정자욱(鄭自勖)은 주(周), 정(程), 장(張), 주(朱)의 견해가 있고 오경을 깊이 통달했으나, 유독 시를 전공하는 선비를 취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시는 성정(性情)의 발현이니, 어찌 번거롭게 억지로 공부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의 뜻은 비록 시를 짓지 않더라도 덕이 갖추어지고 경서에 통하면 또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도무지 이와 같다면 썩은 선비의 소견과 다를 것이 없다.
옛날의 십이율(十二律), 팔음(八音), 오성(五聲) 같은 것은 마음의 찌꺼기를 깨끗이 녹여 주고 혈맥을 시원히 소통시켜 주기 때문에 성인과 현인도 알지 못하는 이가 없고 익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공자도 장홍(萇弘)에게 음악을 배웠던 것이다. 시의 공효도 사람에게 있어 또한 그러하여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고, 회포를 비우게 하고, 사심(邪心)이 없게 하고, 호연지기를 기르게 한다. 온갖 형태를 포괄하여 천지 사이에 가득 넘치는 것은 옛사람처럼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를 수 없더라도 시는 반드시 애써 생각하고 공부를 쌓은 뒤라야 그 만분의 일에라도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자(邵子)와 주자(周子) 또한 시를 좋아함을 면하지 못하였고, 주 문공(朱文公)이 만년에 두시(杜詩)와 후산(后山)의 시를 즐겨 읽고 초나라 소(騷)를 주해하고 혹은 승려와 서로 수창하여 형산(衡山)에서 지은 시가 5일 동안에 100여 편이나 되었던 것이다. 자욱이 시를 이단으로 여긴다면, 주자와 소자를 이단시한다는 것이며 회암(晦庵)을 이단시한다는 것인가. 점필재 김 선생이 말하기를 “시는 성정을 도야한다.” 했으니, 나는 스승의 설을 따른다.

[주D-001]자정(子挺) : 안응세(安應世)의 자(字)이다.
[주D-002]고생(高生) : 바로 아래에 보이는 고순(高淳)을 가리킨다.
[주D-003]내면을……맑아져서 : 사람이 내면을 곧게 하여 조금의 사곡(私曲)도 있게 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깨끗하고 맑아져서 신명(神明)과 사귈 수 있다는 것이다. 《書經集註 舜典》
[주D-004]백공(伯恭) : 남효온의 자이다.
[주D-005]종지(宗之) : 남효온과 교유한 이씨(李氏) 성을 가진 시인으로, 자가 종지이고 이름은 미상이다.
[주D-006]유수계(劉須溪)는……어째서인가 : 유수계는 송나라 유진옹(劉辰翁)을 가리킨다. 수계는 그의 호이다. 유진옹은 두보(杜甫)의 이 시구에 대해 앞 구절의 ‘세(細)’ 자까지 함께 언급하며, “‘세’ 자와 ‘일’ 자는 모두 가소롭다.〔細字一字皆可笑〕”라고 평하였다. 《集千家註杜工部詩集 卷6 西枝村尋置草堂地夜宿贊公土室》
[주D-007]성광(醒狂) 백연(伯淵) : 이심원(李深源)을 가리킨다. 성광은 호이고, 백연은 자이다.
[주D-008]청련거사(靑蓮居士) : 이백(李白)의 호이다.
[주D-009]우(虞)나라가……같다 : 단주(丹朱)는 요(堯) 임금의 아들이고, 미자(微子)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이다. 우나라와 주나라에서 이들에게 땅을 봉해 주어 종사(宗祀)를 보존하게 한 것을 말한다.
[주D-010]복호(復戶) : 호세(戶稅)나 그 밖의 국가적 부담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주D-011]대뢰(大牢) : 나라 제사에 소ㆍ양ㆍ돼지를 한 마리씩 바치는 것이다. 여기서는 훌륭한 요리를 이른다.
[주D-012]제학공(提學公) : 남간(南簡)을 가리킨다.
[주D-013]받지 않았다 : 원문은 ‘不愛’로 되어 있는데, 초간본(初刊本)에 근거하여 ‘愛’를 ‘受’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도천(盜泉) : 산동성(山東省) 사수현(泗水縣)에 있는 샘 이름이다. 《회남자(淮南子)》〈설림훈(說林訓)〉에 이르기를 “공자가 도천을 지나가면서 목이 말라도 마시지 않았으니, 그 이름을 싫어한 것이다.〔孔子過於盜泉 渴矣而不飮 惡其名也〕” 하였다.
[주D-015]금육(禁肉) : 쇠고기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나라에서 소 잡는 것을 법으로 금하였기 때문에 연유한 말이다.
[주D-016]옛사람은……얻었거늘 : 진(晉)나라 효자 왕상(王祥)의 고사이다. 왕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계모가 얼음이 언 한겨울에 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하였다. 왕상이 옷을 벗고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으려 하니, 얼음이 갑자기 저절로 풀리어 두 마리 잉어가 뛰어나왔다고 한다. 《小學 善行》
[주D-017]주상(主上) : 성종을 가리킨다.
[주D-018]양수척(楊水尺) : 일정한 거주지 없이 떠돌아다니며 천업(賤業)에 종사하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주D-019]천신(薦新) : 계절에 따라 새로 나온 곡식이나 과일을 먼저 사당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주D-020]좌화(坐化) : 불교에서 앉은 자세로 입적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1]동봉(東峰) 김열경(金悅卿) : 김시습(金時習)을 가리킨다. 동봉은 호이고, 열경은 자이다.
[주D-022]증자(曾子)의 역책(易簀) : 증자는 공자의 제자이고, 역책은 대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증자가 운명할 때에 계손(季孫)에게서 받은 대자리에 누워 있었다. 동자(童子)가 그것이 대부가 사용하는 대자리라서 신분에 맞지 않다고 지적하자, 증자가 말하기를 “내가 정도를 얻고서 죽으면 그만이다.” 하고 다른 자리로 바꾸게 한 뒤에 곧 운명하였다. 《禮記 檀弓上》
[주D-023]자로(子路)의 결영(結纓) : 자로는 공자의 제자이고, 결영은 갓끈을 매는 것이다. 자로가 위(衛)나라 난리에 싸우다가 적의 창에 찔려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죽을 때에 갓을 벗지 않는다.” 하고 갓끈을 매고서 죽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24]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이다.
[주D-025]영락(永樂) :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이다.
[주D-026]방안아(榜眼兒) : 과거에서 갑과(甲科)의 2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주D-027]홍치(弘治) : 명나라 효종(孝宗)의 연호이다.
[주D-028]뿔……알아줄까 : 재상이 될 만한 재능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말이다. 한나라 채옹(蔡邕)의 《금조(琴操)》에 “영척(甯戚)이 수레 아래에서 소를 먹이면서 소뿔을 두드리며 상가(商歌)를 노래하니, 제 환공(齊桓公)이 소문을 듣고 재상으로 기용했다.” 하였다. 《藝文類聚 卷94》
[주D-029]겸지(兼之) : 이달선(李達善)의 자이다.
[주D-030]동황(東皇)이 팔폐(八狴)를 구하지만 : 동황은 동황태일(東皇太一)로 천신(天神)의 이름이고, 팔폐는 여덟 마리의 사나운 짐승으로 임금을 보좌할 신하를 가리킨다.
[주D-031]탐화랑(探花郞) : 과거에서 갑과(甲科)의 3등으로 급제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주D-032]도성의……가을이라 : 과거에 급제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도성에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걷히지 않고, 달 속의 광한루에 계수나무 꽃이 피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수나무는 과거 급제를 뜻한다.
[주D-033]부열(傅說)의……뿐이니 : 부열은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이다. 조금정(調金鼎)은 금정 속의 국을 조리한다는 뜻으로, 고종이 부열에게 “내가 만약 간을 맞추는 국을 만들거든 그대는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若作和羹 爾惟鹽梅〕” 한 데서 유래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역할을 의미한다. 《書經 說命下》
[주D-034]이것이……뜻이리라 : 이것이 바로 꿈속에서 ‘임금이 보좌할 신하를 구함’을 예시한 뜻이라는 것이다.
[주D-035]삼소도(三笑圖) : 혜원(慧遠),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 세 사람이 호계(虎溪)에서 크게 웃었던 고사를 그린 그림이다. 호계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앞에 있는 시내이다. 진(晉)나라 때 혜원법사가 동림사에 있으면서 손님을 보낼 때 이 시내를 건너지 않았는데, 여기를 지나기만 하면 문득 호랑이가 울었다. 하루는 도연명, 육수정과 함께 이야기를 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를 넘자 호랑이가 우니, 세 사람은 크게 웃고 헤어졌다고 한다. 《廬山記》
[주D-036]소년은……법 :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소년은 대년에 미치지 못한다.〔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하였다. 소년은 초하루와 그믐이 있는 줄도 모르는 조균(朝菌) 같은 것이고, 대년은 8천 년을 한 계절로 삼는 대춘(大椿) 같은 것이다. 《莊子 逍遙遊》
[주D-037]납과……가렸구려 : 단약(丹藥)이 다하여 생명이 사라지자 쓸쓸히 무덤에 묻히게 되었다는 말이다. 납과 수은은 단약을 만드는 재료이다. 태광(胎光)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혼(魂)이다. 《태미영서(太微靈書)》에 “사람에게 삼혼(三魂)이 있다. 첫째는 상령(爽靈)이고, 둘째는 태광이고, 셋째는 유정(幽精)이니, 항상 그 이름을 부르고 생각하면 혼이 사람의 몸을 편안하게 한다.” 하였다. 동빈(洞賓)은 당나라 때 선인(仙人)인 여암(呂巖)의 자이다.
[주D-038]묘리 이미 알았으니 :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 상편(上篇)에 “음양의 도를 잘 통괄하여 단(丹)을 완성하는 것은 마치 말을 잘 모는 사람이 재갈과 고삐를 잡고 법도를 지켜 수레바퀴 자국을 따르는 것과 같다.〔覆冒陰陽之道 猶工御者 執銜轡 準繩墨 隨軌轍〕” 하였다.
[주D-039]천태산(天台山)……기약했소 :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유신(劉晨)과 완조(阮肇)가 함께 천태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었다. 선계(仙界)의 여인들을 만나 반년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이미 수백 년 세월이 흘러 자기 7대손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1》
[주D-040]과거……비웃네 : 신선술을 추구하면서 세상의 명리를 좇다가 죽게 된 것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는다는 말이다. 《홍보(鴻寶)》는 한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베갯속에 비장(秘藏)하였던 도술 서적이다.
[주D-041]기자전(箕子殿) 시 : 《추강집》 권1에 〈기자 묘정을 배알하고〔謁箕子廟庭〕〉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주D-042]무왕이……노여워했으랴 : 무왕이 수(受)를 미워하여 정벌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혁명한 것이므로, 성탕(成湯)이 주(周)나라 건국에 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성탕은 상(商)나라를 세운 탕 임금이고, 수는 상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의 이름이다.
[주D-043]강물……비쳤네 : 강물이 거울처럼 고요하여 수면에 비친 달이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주D-044]여경(餘慶) : 홍유손(洪裕孫)의 자이다.
[주D-045]백아(伯牙) : 춘추 시대에 거문고를 잘 탔던 사람이다.
[주D-046]시중(時中) : 항시 중도(中道)에 들어맞는 것을 말한다.
[주D-047]최국화(崔國華) : 최숙정(崔淑精 : 1432~1479)을 가리킨다. 국화는 자이다.
[주D-048]임오년 : 원문은 ‘壬子年’으로 되어 있는데, 임자년은 최숙정이 태어난 1432년이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근거하여 ‘壬午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중장(中場) : 사흘에 나누어 보는 과거에 있어 둘째 날의 시험장이다.
[주D-050]구정(龜亭) : 남효온의 5대조인 남재(南在 : 1351~1419)의 호이다.
[주D-051]윤경회(尹慶會) : 윤구(尹遘)의 자이다.
[주D-052]상교(象敎) : 불교를 가리킨다.
[주D-053]경태(景泰)ㆍ천순(天順) : 경태는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이고, 천순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이다.
[주D-054]원유산(元遺山) : 유산(遺山)은 금나라 원호문(元好問)의 호이다.
[주D-055]온갖 풀 : 원문은 ‘白草’로 되어 있는데, 《추강냉화(秋江冷話)》에 근거하여 ‘百草’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6]한 충헌(韓忠獻) : 충헌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한기(韓琦)의 시호이다.
[주D-057]목후(沐猴) : 원숭이의 일종이다. ‘원숭이가 갓을 쓴다’는 뜻으로, 옷만 훌륭하고 마음은 사람답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관중(關中)에서 패업을 도모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한생(韓生)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이면서 갓을 쓴 것이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楚人沐猴而冠耳 果然〕” 하였다. 《史記 卷7 項羽本記》
[주D-058]기심(機心)을……고사 : 기심은 교묘히 속이는 마음이다. 갈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매일 아침 바닷가에서 갈매기와 친하게 놀았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가 갈매기를 잡아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듣고 이튿날 바닷가로 갔더니 갈매기는 공중에서 날 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列子 黃帝》
[주D-059]국오(菊塢) 강경순(姜景醇) : 강희맹(姜希孟 : 1424~1483)을 가리킨다. 국오는 호이고, 경순은 자이다.
[주D-060]진산세고(晉山世稿) : 강희맹이 편집한 선대의 시문집으로, 그의 조부 강회백(姜淮伯), 부친 강석덕(姜碩德), 형 강희안(姜希顔)의 글이 실렸다.
[주D-061]문희공(文禧公) : 신석조(辛碩祖 : 1407~1459)를 가리킨다. 문희는 시호이다.
[주D-062]안회(顔回) : 공자의 뛰어난 제자로,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공자가 안연을 두고 말하기를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다.〔不幸短命死〕” 하였다. 《論語 雍也》
[주D-063]산이……아닐까 : 산이 있으면 어디나 여산(廬山)처럼 은둔할 곳이라는 말이다. 여산은 강서성 구강현(九江縣)에 있는 산인데, 한나라 방덕공(龐德公)이 이 산에 은둔하였고 진(晉)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가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였으며 도연명과 백거이 등이 은거함으로써 은둔의 정조가 강한 산이다. 소식의 명구 “여산의 진면목 알 수 없으니, 이 몸이 이 산중에 있기 때문이지.〔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역시 여산에서 지어진 것이다.
[주D-064]사람의……것이다 : 《논어》〈옹야〉에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65]정여창 자욱(鄭汝昌自勖) : 자욱은 정여창의 자이다. 한국문집총간 15집에 수록된 정여창의 문집 《일두집(一蠹集)》에는 자가 백욱(伯勖)으로 되어 있다.
[주D-066]안시숙(安時叔) : 안우(安遇)를 가리킨다. 시숙은 자이다.
[주D-067]묵재(默齋) 선생 백연(伯淵) : 이심원(李深源)을 가리킨다. 묵재는 호이고, 백연은 자이다.
[주D-068]백이(伯夷)를……함 : 백이는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할 때에 동생 숙제(叔齊)와 함께 무왕의 말고삐를 잡고서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주나라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 《맹자》〈만장 하(萬章下)〉에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는 성인으로서 맑은 분이다.〔伯夷 聖之淸子也〕” 하였고,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맹자가 말하기를 “백이는 좁다.〔伯夷 隘〕” 하였고, 《논어》〈술이(述而)〉에 공자가 말하기를 “백이ㆍ숙제는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求仁而得仁〕” 하였다.
[주D-069]혼인하면서……것 : 《예기》〈교특생(郊特生)〉에 이르기를 “대저 혼례는 만대의 시초이다. 이성(異姓)에게 장가듦은 소원한 사람을 가깝게 하고 분별을 후하게 하는 것이다.〔昏禮萬世之始也 取於異姓 所以附遠厚別也〕” 하였다.
[주D-070]대유(大猷)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 1454~1504)의 자이다.
[주D-071]쇄소(灑掃)의……학문 : 쇄소는 물 뿌리고 소제하는 것이고,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니, 소학(小學)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여덟 살이 되면 왕공(王公)으로부터 서인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가서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예절과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의 글을 배운다.” 하였다. 《大學章句 序》
[주D-072]올량합(兀良哈) : 오랑캐로, 올량개(兀良介)라고도 한다. 옛날 몽고 동부와 조선의 두만강 일대에 살던 여진족을 일컫는다.
[주D-073]개차공(蓋次公)이……것 : 차공(次公)은 한나라 개관요(蓋寬饒)의 자(字)이다. 평은후(平恩侯) 허백(許伯)이 새집을 짓고 축하연을 열어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에 장신 소부(長信少府) 단장경(檀長卿)이 일어나 춤추면서 목후(沐猴)가 개와 싸우는 시늉을 하니, 좌중이 모두 크게 웃었다. 관요는 기뻐하지 않으며 일어나 달려 나가서 장신소부가 열경(列卿)의 신분으로 목후무를 춘 것은 예(禮)를 잃었고 불경한 행동이라고 탄핵하였다. 원문은 ‘蓋次公效檀長卿沐猴舞’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效’를 ‘劾’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漢書 卷77 蓋寬饒傳》
[주D-074]상간(桑間)의 국풍(國風) : 음분(淫奔)을 풍자한 시인 《시경》〈용풍(鄘風) 상중(桑中)〉을 말한다. 상간은 위(衛)나라 땅으로, 음란한 풍속이 유행하던 곳이다.
[주D-075]사악(四岳) : 중국의 태산(泰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항산(恒山)의 총칭이다.
[주D-076]표지(標枝) : 마른나무 가지이다. 장자(莊子)가 말하기를 “지극히 잘 다스려진 시대는 어진 사람을 숭상하지 않고 능한 사람을 부리지 않으니, 위의 임금은 마른나무 가지처럼 무정(無情)하고 아래의 백성들은 들판의 사슴처럼 무욕(無欲)하다.〔至治之世 不尙賢 不使能 上如標枝 下如野鹿〕” 하였다. 《莊子 天地》
[주D-077]격양(擊壤) : 요(堯) 임금 때에 8, 9십 세의 노인이 땅을 두드리며 부른 노래이다. 그 노래에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서 쉬네.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으니, 황제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하였다. 《帝王世紀》
[주D-078]한광(漢廣)과 표유매(摽有梅) : 《시경》〈주남(周南)〉, 〈소남(召南)〉의 편명이다. 문왕의 교화를 입은 남국의 여인들이 정조와 신의로 자신을 지켜 예의가 바른 규방의 노래이다.
[주D-079]구양수(歐陽脩)가……것 : 삼상(三上)은 마상(馬上), 침상(枕上), 측상(厠上)으로, 곧 말 위, 베개 위, 측간 위를 말한다. 구양수의 《귀전록(歸田錄)》에 이르기를 “내가 평소에 글을 지은 것은 대부분 삼상에 있을 때이니, 바로 마상, 침상, 측상이다. 여기서는 더욱 생각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D-080]주(周), 정(程), 장(張), 주(朱) : 송나라 유학자인 주돈이(周敦頤),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장재(張載), 주희(朱熹)를 가리킨다.
[주D-081]소자(邵子)와 주자(周子) : 북송의 유학자인 소옹(邵雍)과 주돈이이다.
[주D-082]주 문공(朱文公) : 문공은 남송의 유학자인 주희의 시호이다. 호는 회암(晦庵)이다.
[주D-083]후산(后山) : 북송의 시인인 진사도(陳師道)의 호이다.
[주D-084]초나라 소(騷)를 주해하고 : 주자(朱子)가 《초사(楚辭)》를 주해하여 《초사집주(楚辭集註)》를 엮은 것을 말한다.



 목은문고 제20권
 전(傳)
최씨전(崔氏傳)

신사년의 십운과(十韻科)에 급제한 최림(崔霖)의 부친은 휘(諱)가 성고(成固)로 낭장(郞將)이요, 모친 장씨(蔣氏)는 모관(某官) 모(某)의 딸이다.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시를 흥얼대곤 하였는데, 절간에 놀러 다니기를 좋아하면서도 술을 사 주지 않으면 곧장 떠나곤 하였다. 그런데 그가 한계(寒溪)라는 승려와 서로 의기투합하여 술에 흠뻑 취한 채 어울려 노닐곤 하였으므로, 예법(禮法)을 고수하는 인사들은 자못 못마땅하게 그를 보기도 하였으나, 그의 재질이 워낙 뛰어난 까닭에 겉으로는 약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계사년(1353, 공민왕2) 가을에 행한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鄕試)에서 내가 다행히도 최씨와 함께 나란히 급제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중서당(中書堂)에서 회시(會試)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최씨가 눈병에 걸리는 바람에 글자를 보기도 힘들었다. 이에 최씨가 탄식하기를 “내가 그동안 급제한 것은 다만 요행일 뿐이다. 지금 나보다 재질이 뛰어난 인물이 두 사람이나 있는데, 내가 그 두 사람을 누르고 이번에 꼭 급제하려고 하는 것은 당초에 내가 바랐던 바가 아니다. 지금 내 눈이 이렇게 된 것도 필시 하늘의 뜻일 것이니, 나는 앞으로 기거(寄擧)나 해 볼까 한다.” 하고는, 마침내 회시에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귀국하고 나서 관직을 역임한 끝에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에 이르렀는데, 병신년(1356, 공민왕5)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신정(新正)을 축하하기 위해 경사(京師)에 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요하(遼河)에서 도적을 만나는 바람에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비롯해서 삼절(三節)과 그 밖의 인원 모두가 살해되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다.
기주(蘄州)의 진중길(秦中吉)은 나의 선군(先君 이곡(李穀))과 소싯적에 친하게 지내던 분으로, 학식이 넓고 글을 또 잘하였다. 그래서 그분에게 수업을 받은 자들 중에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서 현달한 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정작 진공(秦公) 자신은 급제를 하지 못한 채 노년에 접어든 나이에도 과거 시험장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선군이 정해년(1347, 충목왕3)에 지공거(知貢擧)를 맡게 되자, 진공이 이르기를 “나는 가정(稼亭 이곡)과 어려서부터 함께 배운 처지이다. 따라서 내가 다행히 급제를 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필시 가정이 나에게 사정을 봐주었다고 말할 것이다. 나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이는 내가 우리 가정에게 죄를 짓는 일이니, 어찌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 5품의 관직을 역임하고 어사(御史)의 반열(班列)에까지 서게 되었는데, 물러나서는 제생(諸生)과 경사(經史)를 강론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씨는 바로 그의 사위이다. 최씨의 문장으로 말하면 또 진씨(秦氏)가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니었는데, 벼슬길에서 현달하지 못한 채 불행히도 죽고 말았으니, 아, 이것을 최씨의 불운(不運)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진씨의 불운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진씨는 오래 살았고 최씨는 일찍 죽었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말하면, 최씨나 진씨나 모두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점에서는 저 구천(九泉) 아래에서 그런대로 그들이 자위(自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씨는 기개(氣槪)가 있어서 과감하게 발언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가 만약 일찍 죽지 않고 문사(文辭)를 더욱 발전시켰더라면, 응당 졸옹(拙翁 최해(崔瀣))에게도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벼슬자리에 오래 있지 못해서 뜻을 미처 펴 보지 못하였고, 글을 지은 것도 적어서 재질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기(精氣)는 요하(遼河)의 하늘 가로 흩어져 버리고, 체백(體魄)은 요하의 들판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어쩌면 화표주(華表柱)를 찾아와서 탄식한 학(鶴)처럼 그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쯤의 세월이 지난 뒤에 최씨전을 읽은 사람이 그의 말소리를 또 듣게 된다면, 어찌 비감(悲感)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그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적어서 이렇게 최씨전을 짓는 바이다.

[주D-001]기거(寄擧) : 천거(薦擧)를 통해서 벼슬하는 것을 말한다. 《설부(說郛)》 권44상(上) 진사시 예부 급공권(進士試禮部給公券) 조에 “먼 지방의 빈한한 선비가 향시에 합격하고 나서 예부의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되었는데도, 이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려 해도 안 될 경우에는 차라리 천거를 통해서 벼슬하려고만 할 뿐 아예 응시를 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염려스러운 일이다.[遠方寒士 預鄕薦欲試禮部 假丐不可得則寧寄擧不試 良爲可念]”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D-002]삼절(三節) : 상절(上節)ㆍ중절(中節)ㆍ하절(下節)의 병칭으로, 외교 사절을 수행하는 관원들을 가리킨다.
[주D-003]화표주(華表柱)를 …… 학(鶴) :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이 되고 나서 천년 만에 학으로 변해 다시 고향을 찾아와서는 요동 성문의 화표주 위에 내려앉았는데, 소년 하나가 활을 쏘려 하자 허공으로 날아올라가 배회하면서 “옛날 정영위가 한 마리 새가 되어,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이제 처음 돌아왔소.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은 모두 바뀌었나니, 신선술 왜 안 배우고 무덤만 이리도 즐비한고.[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年今始歸 城郭如故人民非 何不學仙冢纍纍]”라고 탄식하고는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搜神後記 卷1》

양촌선생문집 제35권
 동현사략(東賢事略)
대제(待制) 최해(崔瀣)

공은 자는 언명보(彦明父) 또는 수옹(壽翁)이며, 호는 졸재(拙齋)로 본관은 계림(鷄林)이다. 아버지 백륜(伯倫)은 충렬왕 임오년에 이존비(李尊庇)의 방에 둘째로 급제하여, 여러 번 승진해서 민부의랑(民部議郞)을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9세에 시(詩)를 지었으며, 충렬왕 계묘년(1303)에 박리(朴理)의 방에 합격하였고, 예문검열(藝文檢閱)로 장사감무(長沙監務)에 좌천되었다. 뒤에 원(元)의 신유년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개주판관(盖蓋州判官)에 임명되었으며, 우리나라로 돌아와서는 여러 번 승진되어 전교(典校)ㆍ전의(典儀)의 부령(副令)과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임하였다. 이단(異端)에 현혹되지 않았고 습속(習俗)에 빠지지 않았으며, 글을 지음에는 옛사람과 합치되기를 힘썼으며, 같고 다른 것을 의논함에 있어서는 진실로 그 바른 것을 알면 노사(老師)나 숙유(宿儒)로서 당시에 존대받는 사람이 힐난하고 논박하여도 확고하여 변하지 않았다. 사후(伺候 권세있는 자의 집에 드나듦)와 방탕을 옳게 여기지 않았고, 맞대놓고 과감하게 말하여 따지며 사람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자가 더욱 좋아하지 않고 배척하였으므로, 천거되었다가 곧 쫓겨나서 마침내 크게 쓰이지 못하고 검교 성균대사성(檢校成均大司成)을 지냈다.
그러나 벼슬하고 쫓겨나는 것으로 기쁨과 노여움을 삼지 않았고, 치산(治産)에 힘쓰지 않았으며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명현의 저술을 모아《동인지문(東人之文)》이라 이름하였는데, 모두 25권이었다. 노년에는 성남(城南) 사자산(獅子山) 아래에서 살았으므로 예산 농은(猊山農隱)이라 일컬었다. 지원(至元)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1)에 54세로 죽었다.

동문선 제84권
 서(序)
최어사 위대인경팔십시서(崔御史爲大人慶八十詩序)

최해(崔瀣)

지금 동방의 출생으로 천자의 조정에 벼슬하여 청화(淸華)한 자리를 지내고 염근(廉謹)으로 몸을 지녀 시론(時論)의 으뜸으로 칭찬받는 이는 감찰어사(監察御使) 최대중(崔大中)이다. 공의 아버지가 일찍이 왕국에 벼슬하여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는데, 아들의 귀(貴)로 인하여 다시 동릉군후(東陵郡侯)의 봉함을 받았는데 춘추는 80에 올랐다. 공이 요동에 사신 가게 되어 알현(謁見)한 끝에 근친(覲親)을 고하고, 금월 17일에 술잔을 올려 헌수(獻壽)하고, 경축의 잔치를 베푸니 친인(親婣)이 모두 오고, 국족(國族)이 서로 구경하여 일찍이 보지 못한 경사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 없었다. 그리고 국중의 유관(儒冠)을 쓴 자는 다 시를 지었는데, 내가 공의 집안과 동종(同宗)의 의가 있다 하여 제사(題辭)를 부탁하므로 나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르기를, “선비가 나서 때를 잘 만나 벼슬이 드러나고 녹이 어버이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이야말로 천하가 다 하고픈 소원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집을 떠나서 멀리 사방 만리에 노닐어 어버이는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는데 소식조차 서로 듣지 못하다가 늦게야 설령 한 번 왕명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 평생의 저버린 바를 면할 수 있겠는가. 숙수(菽水)의 낙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데, 오히려 자랑하며 스스로 영화롭게 여기니, 아, 홀로 내심에 부끄럼이 없으랴.
우리 종씨는 그렇지 않다. 군후(郡侯)가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공이 둘째요, 나머지 4사람도 역시 본국에 벼슬하여 품직이 다 대부로서 금대(金帶)를 띠고 자포(紫袍)를 입었다. 공은 이미 형제들이 어버이 곁에 있어 좌우가 어김이 없으니 처음 나가서 벼슬하게 된 것도 친명(親命)에 의거한 것이요 자의가 아니었으며, 중국에 나그네 된 적이 비록 오래지만 역인(驛人)이 왕래하여 문안 편지가 매달에 두 번씩 오고, 그 사이 또 사명을 받들고 와서 여러번 영광스러운 근친(覲親)을 하였으니, 저 족적(足跡)이 대문 밖을 나가지 아니하고, 다만 때마다 차고 더운 것을 살핌으로써 어버이를 즐겁게 하기만 한 자와는 더불어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옛 사람이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그 뜻[志]을 봉양하는 것을 제일로 하였으니, 공은 능히 그에 해당된다 이를 수 있으며, 더구나 군후(郡侯)의 기력은 장년(壯年)과 같아 식사하는 것이 조금도 줄지 아니하였으니, 하늘이 준 강녕한 복이라 하겠다. 이로부터 공의 벼슬은 더욱 높아지고 지위는 더욱 중해지며 다시 와서 90을 경축하고 백세를 경축하게 될 것이니 참으로 한없는 복이다.
우리 종씨(宗氏)의 선세(先世) 때에 덕을 쌓기를 반드시 고후(高厚)하고 구원(久遠)하게 하여 이 부자(父子)로 하여금 비로소 복을 누리게 한 것이다. 세상에서 일부러 객지로 떠나서 요행으로 어버이를 현달하게 한 자와 비겨볼 때 어떻다 하랴. 여러분들이 칭도하고 노래하고 읊은 것은 어찌 이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당연하다.” 하므로, 드디어 이와 같이 쓴다.

[주D-001]숙수(菽水)의 낙 : 콩과 물로 차린 음식을 먹으며 안빈낙도하는 즐거움.


동문선 제84권
 서(序)
동인사륙서(東人四六序)

최해(崔瀣)

후지원(後至元, 1335~1340) 무인년 여름에 나는 동인사륙(東人四六)의 편집을 끝마쳤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국조(國祖)가 이미 중국의 책봉을 받아 대대로 계승하여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국을 섬기어 충성하고 겸손하는 예를 극진히 아니한 일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표장(表章)의 체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신(陪臣)이 자기 왕을 성상(聖上)이라, 황상(皇上)이라 이르며, 위로 요순(堯舜)에 비기고, 아래로 한당(漢唐)에 비기며, 왕도 간혹 짐(朕)이나 여일인(予一人)이라 자칭하고 명령을 조(詔)ㆍ제(制)라 하며, 국내의 죄수들을 풀어주는 것을 ‘대사천하(大赦天下)’라 하고 서치(署置)와 관속도 다 중국을 본떴으니, 이와 같은 등속은 크게 참람되어 실로 듣고 보는 자를 놀라게 한다. 중국에 있어서는 진실로 도외시하는 처지니, 무슨 혐의를 두었겠는가. 황원(皇元)에 부속됨으로부터는 한 집안같이 보아주어 성(省)ㆍ원(院)ㆍ대(臺)ㆍ부(部) 등속의 명칭은 진작 버렸으나 풍속이 구습에 젖어서 그 폐단이 아직도 있었는데, 대덕(大德) 연간에 중국 조정에서 평장(平章) 활리길사(闊里吉思)를 보내어 정리한 뒤로 개운하게 고쳐져서 감히 인습하는 자가 없었다. 지금 집정(集定)한 것이 신복(臣服)하기 이전의 문자를 많이 취택하였기로 처음 보는 자는 놀라 의심하게 될까 걱정되어 머리에 써서 인증하는 바다.

동문선 제84권
 서(序)
해동후기로회서(海東後耆老會序)

최해(崔瀣)

당(唐) 회창(會昌) 연간에 백락천(白樂天)이 태자 소부(太子少傅)로 치사(致仕)하고 낙양(洛陽)에 살 적에, 어질고 수(壽)한 자 6명과 함께 이도리(履道里) 저택에서 잔치를 베풀고 치덕(齒德)을 높이는 회합을 가졌다. 이를테면 호고(胡杲)는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로 춘추는 89세요, 길문(吉旼)은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했는데 춘추는 86세요, 정거(鄭據)는 전 용호군 장사(龍虎軍長史)로 춘추는 84세요, 유정(劉貞)은 전 자주 자사(慈州刺史)요, 노진(盧眞)은 전 시어사(侍御史)로 춘추는 다 82세요, 장혼(張渾)은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로 백낙천과 더불어 춘추가 다 74세요, 비서감(祕書監) 적겸모(狄兼謨)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70세가 못 되어 모임에는 참여하였으나 열(列)에는 못 들어갔다. 백낙천이 시를 지어 기술하니, 후세에 전하여 낙중 구로회洛中九老會)라 하였다.
송(宋) 원풍(元豐) 연간에 문로공(文潞公)이 낙양의 유수(留守)가 되자, 역시 기영(耆英)과 더불어 진솔회(眞率會)를 만들기로 약속하고, 묘각사(妙覺寺)에 형상(形像)을 그리게 하였는데 무릇 13명이나 되었다. 부한공(富韓公) 필(弼)은 79세요, 문노공 언박(彥博) 및 석낭중(席郞中) 여언(汝言)은 77세요, 왕조의(王朝議) 상공(尙恭)은 76세요, 조태상(趙太常) 병(丙)ㆍ유비감(劉祕監) 궤(几)ㆍ풍방어(馮防禦) 행기(行己) 등 13명은 다 75세요, 초대제(楚待制) 건중(建中)은 73세요, 왕조의(王朝議) 전언(塡言)은 72세요, 왕선휘(王宣徽) 공신(拱辰)은 71세요, 장태중(張太中) 문(問)ㆍ장용학(張龍學) 수(壽)는 다 70세요, 유독 사마온공(司馬溫公)만은 바야흐로 64세였는데, 노정(盧貞)ㆍ적겸모(狄兼謨)와 예를 들어 참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온공(溫公)이 서(序)를 지었던 것이다.
고려가 4백 년을 태평하여 인물과 풍류가 대개 중화(中華)를 짝할 만하였다. 신왕(神王) 무오년에 최 정안공(崔靖安公)이 비로소 관직을 해임하자 쌍명재(雙明齋)를 영창리(靈昌里)에 짓고, 계해년에 사대부로 늙어서 자퇴한 이들을 집합하여 날마다 시ㆍ술ㆍ거문고ㆍ바둑으로써 서로 즐기니, 호사자(好事者)들이 그림을 그려서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를 만들었다. 조통(趙通)이 또한 흔연히 지(誌)를 하였고, 병인년에 이르러 정안공(靖安公)의 아우 문의공(文懿公)이 나이가 70에 접어들자 소장을 올리어 사직하고 이해에 참여하니, 곧 그 상을 기로회도(耆老會圖) 가운데 가입(加入)하고, 박소경(朴小卿) 인석(仁碩)이 지(誌)를 하였다. 그래서 첫째는 태복경(太僕卿) 보문각 직학사(寶文閣直學士)로 치사(致仕)한 장자목(張自牧)인데 나이는 78세요, 둘째는 태위평장(太尉平章)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로 치사(致仕)한 최당(崔讜)인데 나이는 77세며, 셋째는 사공좌복야(司空左僕射)로 치사한 이준창(李俊昌)인데, 최태위와 더불어 동년(同年)이요, 넷째는 판비성 한림학사(判祕省翰林學士)로 치사(致仕)한 백광신(白光臣)인데, 나이는 74세요, 다섯째는 예빈경(禮賓卿) 춘궁 시독학사(春宮侍讀學士)로 치사(致仕)한 고형중(高瑩中)인데 백광신과 더불어 동년이요, 여섯째는 사공좌복야(司空左僕射)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로 치사한 이세장(李世長)인데, 나이는 71세요, 일곱째는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치사한 현덕수(玄德秀)인데, 이세장과 더불어 동년이요, 여덟째는 태사평장(太師平章) 수문전 대학사(修文殿大學士)로 치사한 최선(崔詵)인데 나이는 69세요, 아홉째는 군기감(軍器監) 조통(趙通)인데 나이는 64세다. 모두 합계하면 9명이다. 그때에 이미수(李眉受)가 노정(盧貞)ㆍ적겸모(狄兼謨)ㆍ사마온공(司馬溫公)의 고사에 의하여 일찍이 여러 늙은이 사이에 끼어서 시문 백여 수를 저술하여 이 모임의 아름다운 일을 자상히 형용하였다. 그리하여 《쌍명재집(雙明齋集)》이 있어 사림(士林)에게 전파되었다.
지금은 황원(皇元)이 위에 있어 지극한 인(仁)과 거룩한 덕으로 온 천하를 함양(涵養)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는 으뜸으로 귀부(歸附)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혼인의 영광을 입었고, 제후(諸侯)의 법도를 정성껏 지키어 위아래가 서로 즐거워하여 삼변(三邊)에는 조그마한 경계도 없고 해마다 풍년이 드니, 정치가 휴명(休明)하여 천재일시(千載一時)라 이를 만하다. 이때에 주상께서 바야흐로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쓰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즐기며 대령군(大領君) 이하 방신(庬臣) 석보(碩輔)들이 국가의 원구(元龜)로서 모두 나이가 상수(上壽)에 이르러 세상일을 사절하고 한가히 살며 함께 단락을 누리고 있으니, 비록 그 우연한 회합이라도 청아한 환담은 일대의 모범이 아닐 수 없다. 어찌 그 평생에 완전한 절개와 큰 명망을 삼한 사람만이 사모할 따름이랴.
어느날 동암(東庵) 노선생이 신진(新進) 소생 최해를 불러서 말씀하기를, “근자에 여러 늙은 이가 모이어 낙사(洛社) 쌍명(雙明)의 고사(故事)를 익히고자 하니, 너는 여러 늙은이를 위해서 서를 지으라.” 하므로, 최해는 나이도 아직 젊고 또 천한 놈이니, 족히 여러 상공의 의향을 받들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선생은 웃으며, “옛날 이미수가 쌍명의 여러분들 틈에 끼이게 된 것은 어찌 연령이나 지위로 따졌겠느냐. 너는 사양해서는 안된다.” 하므로, 최해는 거역을 못하고 물러나와 생각하기를, “아, 여러 상공의 거룩한 공덕이 사직(社稷)에 남고 공론에 퍼져 있으니, 최해의 고루한 학식으로 감히 발양할 바 아니나 고금의 기로회의 전말에 대하여는 기술하지 아니할 수 없기로 이를 들어 삼가 쓰는 바이다.” 하였다.

동문선 제100권
 전(傳)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

최해(崔瀣)

은자(隱者)의 이름은 하계(下屆), 혹은 하체(下逮)라 하며 창괴(蒼槐)는 그의 성이다. 대대로 용백국(龍伯國)의 사람이다. 본시는 두 자의 성[覆姓]이 아닌데, 우리 나라의 음이 느리기 때문에 그 이름과 함께 이렇게 바꾸었다. 은자는 어릴 적에 벌써 하늘의 이치를 아는 듯하였으며, 공부를 하게 되면서부터는 한 방면에만 얽매어 있지 아니하였으며, 겨우 그 취지와 방향 만을 아는 정도에 그치고, 한 가지도 공부를 완전히 마친 것이 없었으니, 그것은 넓게 보기만하고 깊이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츰 자라나게 되자 비장한 각오로 출세하는 데 뜻을 두었으나, 세상에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고, 또 술을 좋아하여 두어 잔만 마시면 남의 좋은 점 나쁜 점을 얘기하기를 좋아하여, 도대체 귀로 들은 것이면 입이 그것을 간직할 줄을 몰랐다. 그러므로 남에게 아끼며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다. 벼슬을 할 뻔하다가는 또 곧 배척을 당하여 쫓겨나게 되었다. 비록 친구들이 애석히 여겨서 그의 성격을 고쳐주려 하여, 더러 권하기도 하며 더러 책망도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스스로 뉘우쳤다. 그러나 이미 그는 얽매어 있을 사람이 못된다고 사람들이 인정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쓰이지 못하였다. 은자도 또한 이 세상에 대하여 다시 생각을 갖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서로 내왕하던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많았으니, 여러 사람에게 미더움을 얻기란 과연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이것은 그의 단점인 동시에 그의 장점도 되는 것이 있다. 만년에 갑사(岬寺)의 중을 따라가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는데, 농원을 개척하여 취족(取足)이라 이름하고, 스스로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고 호를 지었다. 그는 좌석 위에 명(銘)을 지어 붙였는데 이르기를, “너의 땅과 너의 농원은(爾田爾園) 삼보(三寶)로부터 받은 무거운 은혜로다.(三寶重恩) 만족함을 가지는 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取足奚自) 부디 잊지 말지어다.(愼勿可諼)” 하였는데, 은자는 평소에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그들의 소작농이 되었으므로 대저 평소의 뜻이 틀어진 것을 하소연하며 스스로를 조롱한 것이다

동문선 제101권
 전(傳)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

정이오(鄭以吾)

탐라(耽羅)의 경내에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 기이하게 빼어난 산이 있는데, 한라산(漢拏山)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완연히 있는데 그의 신령한 화기를 내리어 신인(神人)을 산의 북쪽인 모흥혈(毛興穴)에 탄강시켰다. 세 사람이 한꺼번에 솟아났는데 고을나(高乙那)ㆍ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라 한다. 그런데 고을나는 곧 고씨의 시조다. 모두 고기잡이와 사냥으로 먹고 지냈다. 족보(族譜)에 이르기를, “일본국의 임금이 딸 일곱을 낳았는데, 딸 넷은 단적국(丹狄國)으로 보냈다. 단적은 곧 이른바 적적(赤狄)의 종족이다. 그 딸 셋에게 명령하기를, ‘서남쪽 바다에 산이 있어서 그 산이 잉태하여 신인 3형제를 낳았는데, 국가를 세우려 하는 배필이 없으니 너희들은 가서 그를 섬기라. 후세에 자손이 반드시 번성하여 많아질 것이다.’ 하고 그들을 배에다 태우고 오곡(五穀)의 씨앗과 마소[牛馬]까지 갖추고 또한 신인으로 하여금 보호하여 그들을 보냈다. 탐라의 동쪽 바닷가에 이르렀다. 신인의 아들 세 사람이 사냥하러 나왔다가, 그들과 만났는데, 그를 보호하고 온 신인은 곧 붉은 가죽 띠를 띠고 자줏빛 장삼을 입었는데 공중으로 날아서 가버렸다. 세 사람은 나누어서 그들에게 장가를 들어가지고 모흥굴(毛興窟)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수년을 지내는 동안 살림이 모두 이루어졌고 그 후손이 차츰 커졌다. 고을나의 15세손인 고후(高厚)에 이르러 그의 아우인 고청(高淸)과 장차 신라에 조회하려 하는데, 객성(客星)이 먼저 나타났다. 관대(觀臺)에서 아뢰기를, ‘다른 나라에서 신인이 조회하러 올 징조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고후의 형제가 바다를 건너서 처음으로 탐진(眈津)에 닿아서 드디어 신라에 이르렀다. 임금은 그들을 반가이 대접하고 객성이 먼저 나타났기 때문에 고후에게 성주(星主)라는 작위를 주고, 또한 고청은 임금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오게 하고 그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여 왕자를 삼고, 고을의 칭호를 ‘탐라’라 하였다. 대개 탐진에서 신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였다. 신라의 역사에 이것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전 왕조의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성주는 고자견(高自堅)이요, 왕자(王子)는 양차미(梁且美)였으니 곧 양을나(梁乙那)의 후손인데, 양(梁)으로 고친 것은 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한 세대에 한 번씩 조회하기로 하였는데, 태조는 그들을 특별히 대우하여 낮에 세 번씩 접견하며 음식과 접대하는 범절이 거의 임금과 비슷하게 하였고, 데리고 온 사람과 사공에 이르기까지 물품을 중첩으로 내렸다. 대체로 그를 특별히 총애한 것이다. 그러나 성주와 왕자를 세습하였을 뿐이요, 왕국(王國)에서 벼슬에 올라 크게 드러난 것은 아직 없었다. 고유(高維)가 처음 빈공(賓貢)에 합격하여 정왕(靖王) 을유년에 남성시(南省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병술년에 이작정(李作梃)의 방(牓)에서 제3인으로 합격하여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고, 아들인 조기(兆基)는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였는데, 예왕(睿王)의 정해년에 한직유(韓即由)의 방에서 과거에 올라, 인왕(仁王)의 조정에서 대각(臺閣)에 출입하였다. 바른 말을 좋아하여 용감히 간하였고, 의왕(毅王)을 도와서 무진년의 과거를 맡아 보았고, 지위가 평장판리부사(平章判吏部事)에 이르렀다. 명망과 행적이 뚜렷하였으며 시집(詩集) 두 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평장의 아들인 정익(廷益)의 아들 고적(高適)이 그 책 끝에 서술하기를, “아들 정호(廷琥)는 벼슬이 3 품에 오르고 총명한 재질을 가졌으나 일찍 죽고, 다만 정익(廷益)은 원왕(元王)의 계사년 봄에 은퇴하기를 청하여 시골에 돌아왔다.” 하였고, 과거의 학자인 최해(崔瀣)는 《동인문(東人文)》에 주석을 붙이기를,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 있었다.” 하였으니 아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고적은 원왕[元宗]때에 과거에 올라, 바로 금규(金閨)에 들어왔고, 근친하기 위하여 고향에 돌아왔다가 지원(至元) 8년인 신미년 여름에 이르러 신의군(神義軍)과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탐라에 들어와서, 20년인 계유년 여름 4월에 나라에서 군대를 물을 건너보내어 그들을 토벌하여 모조리 없애버리는데, 고적으로 유총관(留摠管)을 삼아 특히 남은 백성을 위안하여 모아들이게 하였다. 무인년 여름에 조정에 들어왔으므로 임금은 친히 금패(金牌)를 내려주었다. 갑신년에 총관부(摠管府)를 군민안무사사(軍民安撫使事)로 고쳤다. 이리하여 세대를 이어가면서 드디어 나타나게 되었다. 5세손인 인탄(仁坦)은 작위를 세습하였는데, 지원 신사년에 원(元)에서 일본을 토벌하려 하여 전 왕조에게 명하여 전투용 함정 9백 척과 군수물자와 무기 일체를 준비하게 하였다. 명령을 탐라에 내려서 배 1백 척을 만들게 하고 물자도 여기에 맞추어서 모자라는 것이 없게 하였는데, 그 계획이 모두 인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원 21년에 또 임금의 명령으로 금패에 명위장군(明威將軍) 안무사사(安撫使事)의 발령을 받았다. 29년에는 정동행(征東行) 중서성(中書省)의 명령에 의하여 탐라 지휘사(指揮使)에 보충되였다.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부사인 문창우(文昌祐)와 동지(同知)인 김선(金瑄)과 계책을 정하고, 원나라에 아뢰어 본국에 소속되게 하였다. 충렬왕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역어 낭장(譯語郞將)인 정공(鄭恭)과 임양필(任良弼)을 시켜서 왕명으로 불러들여 성주운휘(星主雲麾) 상장군(上將軍)을 삼고 붉은 가죽 띠와 자주빛 옷과 보개(寶蓋)를 내리고 물품을 준 것이 적지 않았다. 붉은 가죽 띠와 보개를 내린 것은 신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충렬왕이 이르기를, “신라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지극한 정성이 가상하다. 성주(星主)의 직을 영원한 세대까지 떨어뜨리지 말라.” 하였다. 인탄이 이를 동복(同腹) 아우인 수좌(守佐)에게 전하고 후계자가 없었다. 인탄의 아들인 고석(高碩)이란 사람이 서도 부천호(西道副千戶)가 되었는데, 뒤에 석의 맏아들인 순량(順良)이 성주의 직을 이어 받았고, 아우인 순원(順元)이 이를 계승하였다. 그의 아들인 호조전서(戶曹典書) 고신걸(高信傑)이 홍무(洪武) 기유년에 서해도 부천호(西海道副千戶)가 되었는데, 그후 7년에 현릉(玄陵공민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합적(哈赤)을 토벌하고 뒤에 그대로 신걸을 부천호(副千戶)로 삼았다. 이듬해인 을묘년에 차현유(車玄有)와 내성(內城)의 무리가 역적을 도모하여 □난을 일으키고 본국의 만호를 죽였다. 신걸은 곧 왕자(王子)인 문충걸(文忠傑)과 더불어 나라에 청하여 그를 토벌하여 평정하려 했더니, 차현유의 무리가 그것을 알고 3 일 동안이나 고씨와 문씨의 두 집을 포위하고 가축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고와 문 두 사람은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서 화를 면하고 나라의 권위를 힘입어 그들의 죄를 바로잡았다. 병진ㆍ정사년에는 왜적의 배 6백 척 가량이 둘러싸고 들어왔는데 신걸이 화살에 맞으면서도 마음을 다하여 이를 막아내어 관직과 상을 받았다. 갑자년에 성주의 칭호를 더해주고 그리하여 붉은 가죽 띠와 자주빛 옷과 보개 및 활과 화살을 내려주고 안팎에서 술을 베풀어 주었다. 신걸이 아들 넷을 두었는데 봉인(鳳仁)ㆍ봉의(鳳義)ㆍ봉례(鳳禮)ㆍ봉지(鳳智)였다. 인(仁)과 의(義)는 모두 일찍 죽었다. 봉례는 자가 백공(伯恭)이요, 봉지는 중명(仲明)인데,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을 섬기어 봉례는 벼슬이 총제(摠制)에 이르렀고, 봉지는 절충상장군(折衝上將軍)이었다. 봉례는 맏으로 성주를 습작하였고 봉지는 먼저 죽었다. 아들은 지금 사온서령(四醞署令)인 득종(得宗)인데, 여묘(盧墓)를 살면서 예를 극진히 하여 지방 사람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았다. 조정에 보고하여 그 마을 문에 정표하였다. 지금의 임금 갑오년에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이 되어 탐라의 사정과 그에 대한 적의한 시책을 조항별로 나열하여 글을 대궐에 올리어 모두 커다란 폐단을 없앴다. 이해 가을에 임금께서 대궐에 나앉으시어 친히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득종이 대책을 지어 을과(乙科)에 제13번째로 합격하고, 이듬해에 성주의 작을 세습받고 여러 번 옮기어 사헌 감찰ㆍ형조 도관좌랑(刑曹都官佐郞)ㆍ예조 좌랑이 되었다. 무술년 가을 7월에 사명을 받들고 고향에 돌아가니 인사들이 모두 그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득종이 이오(以吾)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이 모흥혈(毛興穴)에서 기초를 세운 이후로 신라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성주(星主)의 작위를 세습하였고, 국가를 섬기어 충성심이 그치지 아니하였으나 잠깐 동안에 옛 일이 되고 말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아니하면 그것이 모두 없어져서 장래의 후손들에게 보여줄 것이 없을까 두렵다. 그러나 세대의 차서라든가 족보의 기록이 완전하지 못하여 우선 대략을 적어서 부탁한다.” 하였다. 이오는 들으니 이윤(伊尹)은 공상(空桑)에서 낳았고, 부열(傅說)은 부암(傅巖)에서 낳았다 하기에 일찍이 괴상스럽게 여기고 이를 의심하였다. 그러다가 〈생민편(生民篇)〉의 시(詩)의 전(傳)을 읽어보니 옛 학자가 이르기를, “천지가 시작될 때에는 본시 인간이 없었다. 곧 인간은 조화에 의하여 생겨난 것으로 대개 천지의 기운이 이것을 낳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한 득종(得宗)의 선대의 사적이 이러한 것을 보고나서 신인의 출생이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몸이 석대(碩大)하여 업적이 뚜렷한 인물이 두드러지게 서로 계속되어 그의 세습적인 관직을 떨어뜨리지 아니함이 마땅하도다. 하물며 득종은 나이가 아직 30도 못되었는데 뜻이 더욱 겸손하며 빛나고 그 기이한 기운과 위대한 기절이 씩씩하게 평장(平章)의 기풍과 자취가 남아 있으니, 아, 고씨(高氏)의 운수는 그 끝이 없으리로다.

동문선 제123권
 묘지(墓誌)
황원고려 고 통헌대부 지밀직사사 우상시 상호군 최공 묘지명(皇元高麗故通憲大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崔公墓誌銘)

최해(崔瀣)

공의 휘는 운(雲)이요, 자는 몽수(蒙叟)인데, 그 선대는 동주(東州) 창원현(昌原縣)이 본향이다. 10대조 위 준옹(俊邕)은 개국 초기에 벼슬하였는데, 공이 있어 대사삼중대광(大師三重大匡)이 되었으며, 전하여 증손 휘(諱) 석(奭)에 이르러서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고 시호는 예숙(譽肅)이라 하였다. 예숙이 금자광록대부 휘 유청(惟淸)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숙(文淑)이라 하였으며, 문숙이 문하평장(門下平章) 휘 선(詵)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의(文懿)라 하였다. 문의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휘 종자(宗梓)를 낳고, 복야가 중서평장(中書平章) 휘 온(昷)을 낳으니 시호는 문신(文信)이라 하였으며, 문신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휘 문립(文立)을 낳았으며, 봉익공은 추밀원 부사[樞副] 홍공(洪公) 휘 진(縉)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대대로 충성으로 알려졌으며 귀한 벼슬이 연속되고 가문의 명망이 성대하였다. 공이 나이 15세에 사마시를 보아 합격하니, 이는 지원(至元) 기축년(고려 충렬왕 5년)이었다. 원정(元貞) 병신년(충렬왕 22년)에 도재고 판관(都齋庫判官)에 보직되어 적(籍)이 내시에 속하였으며, 대덕(大德) 기해년(충렬왕 25년)에 무관직으로 바꾸어 신호위 별장(神虎衛別將)으로 따로 견룡행수(牽龍行首)에 임명되었다. 경자년에 좌우위 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임인년에 다시 문관직으로 회복하여 조현대부(朝顯大夫) 군부 총랑(軍簿摠郞)의 벼슬을 주고 금자(金紫)를 하사하였다. 좀 있다 전리총랑 판사영서사(典理摠郞判司盈署事)로 옮겼다. 지대(至大) 무신년[충렬왕 34년]에 또 무관직으로 바꾸어 좌우위 대호군(左右衛大護軍)이 되었으며 기유년에 지방으로 나가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忠宣王) 4년)에 지철원부(知鐵原府)로 옮겼으며,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忠肅王) 1년)에는 지공주(知公州)로 옮겼다가 가을에 다시 지철원부로 되었다가 마침내 면직되었다. 병진년에, 관직에 회복되어 정윤(正尹)에 임명되고, 원윤(元尹)에 승직되었으며, 지치(至治) 신유년(충숙왕 8년)에 필요 없는 관직을 없앨 때에, 격례에 의하여 파면되었다. 태정(泰定) 을축년(숙충왕 12년) 4월에 다시 등용되어, 통헌대부(通憲大夫) 지밀직사사 우상시상호군(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에 임명되었는데, 7월 경오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춘추가 51세였다. 공은 의표(儀表)가 매우 거룩하고 천성은 정직하고 또 진실하였다. 일평생 부처 섬기기를 정성스럽게 하며 불경과 불보살(佛菩薩)의 이름과 칭호 외우기를 날마다 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다른 연고로 인하여 잠시라도 폐하는 일이 없었다. 집에 거처하는데 엄숙하여 사람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으며, 벼슬에 있으면서 백성을 대하는 데에도 집에 거처하듯이 하였다. 대덕(大德) 계묘년(충렬왕 29년)에 대대로 벼슬하는 집 자손으로서 왕전(王琠)을 따라 황제 궁궐에 들어가 숙위하니, 이름하여 도로화(都魯花)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琠)이 태위왕(太衛王)이 오래 참소는 만나고 틈이 벌어짐으로 인하여 왕위를 엿보는 마음이 있었는데, 정미년 봄에 일이 발각되어 그 무리들이 모두 죽고 도망갔다. 그런데 공만은 거기에 따르지 않았으므로 대호군에 임명되었다. 지치(至治) 연간에 환란을 일삼는 무리가 우리 나라를 소란시키려 하니, 공경 사대부들이 그 세력을 무서워 따라갔지만 공만은 또 참여하지 않았다. 밀직(密直)에 임명하라는 명이 있자 사람들이 모두 그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임명된 지 두어 달 만에 병이 나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아, 어찌 명이 아니랴. 공은 작고한 첨의(僉議) 재상 송공 휘 분(玢)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일찍 죽었으므로 대호군 임공(任公) 휘 수(綏)의 딸에게 장가드니, 진양군부인(晉陽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이해 8월 갑신일에 성 동쪽 대덕산(大德山) 간좌(艮坐) 땅에 장사 지냈다. 공이 아들이 없는데 임(任) 부인은 나에게 이모가 되어 일찍부터 은혜를 입었다. 장사에 명문이 없어서 안 되겠으므로 드디어 공적을 가려서 명문을 짓는다. 명에 이르기를,

선한 일 쌓으면 복이 두텁고 / 善積福厚
근원이 깊으면 흐르는 물 길다네 / 源深流長
우뚝할손 거룩한 모습 / 魁然而偉
꽃다운 이름 길이 전하리 / 克傳芳兮
어찌타 그 소임 오래지 않아 / 何任不久
그 공업 빛내지 못했는고 / 厥施未光
어찌타 그 덕이 오래지 않아 / 何德不紹
그 복록 창성하지 못했는고 / 祚不昌兮
누가 있어 이 일을 주장하리 / 孰尸此貴
유유한 저 하늘이여 / 悠悠上蒼
붓을 적셔 전별하는 길에 / 漬筆臨窆
눈물만이 한량없네 / 涕滂滂兮


[주D-001]태위왕(太衛王) : 고려의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을 말한다. 충선왕은 천성이 어질고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당시 궁중의 복잡한 환경으로 하여, 왕위에 있는 5년간에도 대부분의 기간을 원나라에 가 있으면서 정치보다는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5년에 왕위를 세자 충숙왕(忠肅王)에게 전한 다음에는 원나라에서 심왕(瀋王)의 작위를 받기도 하였지만, 나중에는 그것마저 세자 고(暠)에게 전하여 주고 태위왕이라 자칭하며 한가한 세월을 보냈다.
[주D-002]왕위를 엿보는 마음 : 왕족인 서흥후(瑞興侯) 전이 원나라 서울에 가서 있는 동안, 간신 왕유소(王維紹). 송방영(宋邦英) 등이 본국과 원 나라에 이간질하여 당시 세자이던 충선왕을 폐하고, 전으로 대신 세자를 삼아서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가 충렬왕 33년에 모두 참형과 찬축(竄逐)을 당하였다.

동문선 제123권
 묘지(墓誌)
수령옹주 김씨 묘지(壽寧翁主金氏墓誌)

최해(崔瀣)

김씨가 귀족이 된 것은 신라 초기에서 시작되었다. 시속에서 전하여 오기를, 금궤(金櫃)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것으로 성을 삼았다고 하며 또, 소호금천(小昊金天)의 후손이기 때문에 거기에 의하여 성씨를 삼았다고도 한다. 그 자손들이 임금으로 있은 지 오래었는데, 경순왕(敬順王) 부(傅)에 이르러서는 본국(本國 고려) 신성왕(神聖王 태조왕)이 흥왕할 때를 만나, 천명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 국토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여 붙으니, 그 집안들도 많이 와서 살았다. 그래서 은혜를 입고 벼슬을 하였으며 대대로 충성 근면하기로 알려졌는데, 오래되자 더욱 크게 성하였다. 이즈음, 정승 휘 봉모(鳳毛)라는 이가 있으니 문하평장이며, 문하평장 휘 태서(台瑞)를 낳고, 평장이 추밀부사 휘 경손(慶孫)을 낳고, 추밀부사가 밀직승지(密直承旨) 휘 신(信)을 낳았다. 승지가 윤씨 딸을 들였으며 그 아버지 휘(諱) 번(璠)은 판대부감(判大府監)이었는데, 작고한 수녕옹주는 그 막내딸이었다. 나이 14세에, 귀성으로서 어질다고 하여 왕씨(王氏)에게 배필하게 되니, 그 휘는 온(昷)으로서 작고한 예성부원대군(蘂城府院大君)인데, 그는 현왕(顯王 현종)의 제4자요, 문왕(文王 문종)의 동모제인 평양공(平壤公) 휘 기(基)의 10대손이다. 대대로 왕실의 가까운 친속으로서 공후(公侯)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백부 대방공(带方公) 휘 징(澂)은 세조 황제(世祖皇帝 원 나라 임금) 때에, 국가의 자제들을 거느리고 들어가 숙위(宿衛)를 하였는데, 천자가 그 수고를 가상히 여기고 총애하여 물건 준 것이 1년에 수백에 이르렀다. 옹주는 나이 30이 못 되어 혼자가 되었는데, 어린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모두 가르치고 길러서 성인이 되게 하였으며, 손자를 보게까지 되었다. 맏아들 순(珣)은 회안부원군(淮安府院君)이요, 다음의 우(瑀)는 창원부원군(昌原府院君)이며, 다음 수(琇)는 낙랑군(樂浪君)이다. 손자가 8명이 있는데 증(証)은 보녕군(保寧君)이요, 당(讜)과 서(諝)는 정윤(正尹)이 되었고, 형(詗)과 정(頲)이 있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연우(延祐) 지치(至治) 연간에 황제의 명령이 있어 왕씨의 딸을 찾았는데, 그 딸이 뽑히는 축에 들어 지금 하남등처 행중서성좌승(河南等處行中書省左丞) 실열문(室烈問)에게 출가했으며, 정안옹주(靖安翁主)를 봉하였다. 사랑하던 딸이 멀리 가게 되자 근심하고 번민하여 병이 낫는데, 그후에 때로 더했다 덜했다 하다가, 원통(元統) 3년(충숙왕 복위(復位) 4년)에 이르러서는 병이 더하고 약이 효험이 없어 9월 을유일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55세였다. 이보다 앞서 우리 나라의 자녀들이 뽑혀서 원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건너는 해가 없으며 왕실 친근의 귀한 집이라도 숨기지 못하고, 모자가 한 번 이별하면 아득하게 만날 기약이 없으니, 슬픔이 뼈에 사무치고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나게까지 되는 자도 한두 명에 그치지 않았다. 천하에서 지극히 원통한 일이 이보다 더한 것이 어디 있으랴. 지금 천자는 어사의 말을 받아들여서 이를 제재 금지하니, 온 나라의 늙은이 어린이가 어질고 밝은 천자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부지중에 춤추고 뛰놀게 되었다. 다만, 옹주만은 혜택을 입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으니, 아, 슬픈 일이다. 이달 갑진일에 대덕원(大德原)에 장사 지내고 대군에 부묘(祔廟)하였다. 그 상사를 왕이 유사를 명하여 주관하게 하였는데, 회안군과 창원군이 상사의 절차를 집행하기를 예법으로 하였으며, 아우들은 도성에 있어 미처 오지 못하였다. 두 군(君)은 글을 좋아하고 손님을 사랑하여 태평시대의 귀공자의 풍도가 있으며, 또 가정이나 국가의 예문과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때문에 왕씨들 가운데 집안의 법을 따르려는 자가 모여들었다. 이것이 어찌 어머니의 교훈이 방도가 있는 데에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황경(皇慶) 2년 충숙왕이 처음 봉작(封爵)을 받고 즉위하던 날에 회안군이 좌우에 모시고 예법을 어기는 것이 없으니, 큰 은혜가 어버이에게 미쳐서, 이때에 수녕(壽寧)의 칭호를 준 것이었다. 이어 명하여 달마다 공급을 지대하게 하여 맏공주처럼 하게 하니, 역시 특별한 은혜였다. 선비들의 의논이, “김씨는 대군의 배필이었은즉 그 칭호를 종실(宗室)의 딸과 같이 할 수 없으니, 반드시 옳지 않다고 말할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맏군(君)에게 손으로 있은 지도 오래였고, 성질이 또 노둔하지만 명문을 청구하는데에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바로 그 씨족의 전말(顚末)을 적고 선비들의 의논에까지 미치니 숨김이 없는 것이다. 명문에 이르기를,

산도 장한 그 터요 / 山壯其址
물도 아름다운 그 물가로다 / 水美其濆
길한 조짐 있는 터에 / 有吉者兆
무덤을 편안히 모셨으니 / 有安者墳
뉘 무덤에 누구의 부묘인가 / 孰藏孰柎
옹주요, 대군이라네 / 維主維君
천년 지난 뒷날에도 / 千載之下
이 글 상고하는 이 있으리 / 尙考斯文

하였다.


동문선 제123권
 묘지(墓誌)
당성군부인 홍씨 묘지(唐城郡夫人洪氏墓誌)

최해(崔瀣)

작고한 연흥군(延興君) 행산 노선생(杏山老先生)이 손자가 있는데 이름은 문보(文珤)이다. 그 문객인 서원(西原) 정포(鄭誧)를 통하여, 선부인의 행적을 적어 가지고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우리 아버지와 우리 외숙과 모두 친분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무덤에 명문이 없을 수 없는데 선생이 아니고 누구에게 가서 청하겠습니까.” 하여, 나는 말하기를, “아, 그런가. 나의 보잘것없는 글을 어찌 아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생각하건대, 당성 홍씨(唐城洪氏)는 우리 나라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조부 휘 자번(子藩)은 충렬왕을 도와 국태재(國太宰)가 된 지 15년간에 지위가 첨의중찬(僉議中贊)이었으며, 아버지 휘 경(敬)은 그 선친의 대를 이어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부인은 나이 13세에 뽑혀서 박씨(朴氏) 집으로 들어가서 행산 선생 집 며느리가 되니, 실로 광정대부(匡靖大夫) 전 정당문학 원(遠)의 아내로, 당성군부인(唐城郡夫人)으로 봉하였다. 장자 인룡(仁龍)은 작고하였는데 판도 정랑(版圖正郞)이었고, 차자는 곧 문보인데 전의시 승(典儀寺丞)이 되었다. 다음 덕룡(德龍)은 동부 부령(東部副令)이요, 다음 수룡(壽龍)은 천우위 별장(天牛衛別將)이요, 다음 천룡(天龍)은 유릉 직(綏陵直)이다. 딸은 왕씨 연(璉)의 배필이 되어 익흥군부인(益興君夫人)이 되었으며, 차녀는 선비 집안에 출가하여 산원(散員) 허령(許齡)의 처가 되었다. 부인의 출생은 지원(至元) 무자년(충렬왕 14년)인데, 후에 지원 병자년(충숙왕 복위(復位) 5년)에 이르러 춘추 49세에 병이 나서 7월 신유일에 세상을 떠났고, 11월 갑술일에 아무 산 언덕에 묘를 정하게 되었다. 장사 지낼 때, 인룡은 이미 작고하였고, 정당공은 대궐에 가서 미처 오지 못하였으니, 아, 슬픈 일이다. 명문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홍씨 집안 / 粤若洪宗
귀한 명성이 하늘 동쪽에 퍼졌네 / 貴擅天東
적공 아니고 후덕 아니면 / 匪積匪厚
어찌 이리 성하고 풍만할까 / 曷殷而豐
문관에 무관에 / 維文維武
덕도 있고 공도 있어 / 有德有功
이 나라 힘써 도와 / 力贊靑社
대대로 충성하였네 / 世濟以忠
태재의 손녀로 / 大宰之孫
아름다운 부인 태어났는데 / 有夫人美
어려서 부모 봉양하니 / 幼奉迺親
형제 중에 제일 귀염 받았네 / 愛鐘衆子
여자의 갈 길 택하여 / 爰擇所從
박씨 집에 출가하니 / 適于朴氏
문안에 들어가자 / 自其入門
시부모 기뻐하였네 / 舅姑以喜
여자 예절에 돈독하고 / 旣敦女範
아내의 일 잘도 하였도다 / 又婉婦儀
남편을 받들어 섬기되 / 承事夫子
바른 말 바른 예법이요 / 以箴以規
법도로 집안일 맡아 보니 / 董治家政
준비 있고 빠짐 없네 / 有備無虧
경사도 많은지고 / 亦克多慶
두 딸에 다섯 아들일세 / 二女五兒
모두들 하는 말, 부인은 / 謂言夫人
향수 복록 멀었다더니 / 享祿未艾
어찌 그 몸은 현철하시고 / 胡哲其身
향수하지 못하였는고 / 年則不逮
남편께서 멀리 가 계신데 / 夫子出游
돌아와도 뫼실 이 없고 / 歸也無侍
황천길 멀고 머니 / 泉路幽幽
두고 두고 한만 남았네 / 留恨千載
아, 슬픈지고 / 嗚呼哀哉

하였다.



동문선 제123권
 묘지(墓誌)
최태감 묘지(崔太監墓誌)

최해(崔瀣)

나의 천성은 게으르고도 싸우는 데 겁이 많다. 생각하면 지금부터 10년 전에 왕에게 사랑받는 한 내시의 무고를 당하여, 나같이 게으른 몸으로도 한 번 가서 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이름 있는 사대부들이 모두 손님 자리에 있고, 그 문전이 저자 같았다. 좀 있다가 
목은시고 제24권
 시(詩)
6월 10일이 졸옹(拙翁)의 기일(忌日)인데, 그의 사위인 권 판서(權判書)가 승려들을 시켜 재(齋)를 올렸으니, 이것은 향속(鄕俗)이다. 나는 약간의 조의(助儀)를 가지고 가서 제사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기록하다.

예산은 적막해라 풀밭에 연기만 뿌옇고 / 猊山寂寞草浮煙
전배의 풍류는 이미 아득한 옛날이로세 / 前輩風流已渺然
가의 재주는 임금이 중용했다 말들 하지만 / 謾說誼才爲帝重
사마천 사기는 사위가 전한 게 가련하여라 / 可憐遷史有甥傳
여기저기 먼 봉우리들은 병풍을 둘러친 듯 / 遙岑點點如橫嶂
드문드문 가랑비는 자리를 씻으려 하는데 / 細雨疏疏欲洒筵
백발의 후생이 와서 전 드리는 걸 돕노라니 / 白髮後生來助奠
고금의 감회에 젖어 마음만 졸일 뿐이로다 / 感今懷古只心煎

[주C-001]졸옹(拙翁) : 고려 후기의 문장가로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던 최해(崔瀣)의 호이다. 그는 성품이 워낙 강직하여 벼슬길이 순탄치 못했고, 만년에는 사자갑사(獅子甲寺)의 땅을 빌려 손수 농사를 짓고 살면서 예산농은(猊山農隱)이라 자호하였다.
[주D-001]가의(賈誼) …… 하지만 : 한 문제(漢文帝) 때 가의가 소년으로 중용(重用)되어 한 해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까지 올랐고, 심지어는 천자(天子)가 그를 공경(公卿)의 지위에까지 올리려고 했었으나, 끝내 훈구(勳舊)들의 참소에 의해 장사 태부(長沙太傅)로 쫓겨나는 등 소외를 받다가 마침내 33세의 나이로 요절했는데, 여기서는 최해 또한 재학(才學)은 뛰어났으나 중용되지 못했음을 안타깝게 여겨 한 말이다.
[주D-002]사마천(司馬遷) …… 가련하여라 :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가 한 선제(漢宣帝) 때에 이르러 그의 외손인 평통후(平通侯) 양운(楊惲)에 의해서 비로소 세상에 선포(宣布)된 것을 이른 말인데, 여기서는 최해 또한 사위가 그의 재(齋)를 올린 것을 두고 사마천에 비유한 것이다.내시가 나오니 손님들이 맞아 절하여 무릎을 굽히는데, 혹시라도 뒤질세라 하였다. 나는 선비로서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고 하고, 예절에 의하여 서로 인사하려 하니 내시가 거만하게 보며 그만 말을 타고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것이었다.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한스럽기도 하여 물러나서 말하기를, “그런 일로 하여 왔던 것이 원래 틀린 생각이었으니, 변별이 없다 하여도 무엇이 안 될 것이랴. 들으니 최 밀직(崔密直)이 날마다 왕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어, 세상에 칭찬을 듣고 있다 하니, 혹 권고하여 왕께 뵈옵고, 분별하여 아뢰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가서 문간 옆에서 기다렸다. 밀직이 곧 나를 여러 사람 가운데서 바라보고, 특별히 좌석 차례를 건너서 먼저 인사하고 와서 찾은 사연을 묻기에 여기서 사실을 다 말하였다. 이때 그 내시의 세력이 한창 성하여 억압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일은 불문에 부치고 말았지만, 밀직의 그 특별히 먼저 받아들이고 선비를 면대하여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이 옛날 의협(義俠)과 같은 기풍이 있는데 감동하여, 이후로는 늘 가서 만나고 만날 때마다 특별한 예우(禮遇)를 받았다. 밀직은 우리 나라 벼슬이요, 천자의 조정에서 벼슬한다면 지위가 3품관이다. 지금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나라고 어찌 생각이 없을 것인가. 마땅히 그 아들의 부탁을 받아들여서 그의 행적을 차례로 적어 글을 지어서 나의 슬픈 생각을 표하려고 한다. 공의 휘는 안도(安道)요 성은 최씨이며, 어릴 때 이름은 나해(那海)이다. 선대는 해주(海州)가 본향인데 후에 용주(龍州)에 옮겨 그대로 본적을 삼았다. 그 선조들을 멀리까지는 상고할 수 없지만, 증조부 휘(諱) 광(光)은 주의 부호장(副戶長)이었으며, 조부 휘 대부(大富)는 처음으로 벼슬하여 검교대장군이 되었고, 아버지 휘 현(玄)은 광정대부 검교첨의평리 상호군이었는데, 공이 귀하여지므로 조정에서 조청대부(朝請大夫) 대도로 동지효기위(大都路同知驍騎尉)를 증직하고 대흥현남(大興縣男)을 추후 봉작하였으며, 어머니 김씨는 추후로 대흥현군(大興縣君)에 봉하였다. 지대(至大) 원년(충렬왕 34년) 공의 나이 15세에 산원(散員)으로 뽑혀 낭장(郞將)이 되었으며, 연우(延祐) 4년(충숙왕 14년)에 호군에 임명되니, 관품은 봉상대부(奉常大夫)였으며 금자(金紫)를 하사받았다.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 상호군의 직품에 올랐으며, 세 번 전임하여 정순대부에 이르렀다. 태정(泰定) 4년(충숙왕 14년)에 응양군(鷹揚軍)을 주장하고 판군부서가 되었으며, 지순(至順) 9년에는 부밀직사에 승진되어 관품이 봉익(奉翊)이었다. 마침내, 감찰대부 동지밀직사사로 고쳐졌으며, 협모동덕(協謀同德)의 공신 칭호를 받았고, 또 중국 조정의 칙명을 받아 정동행성 좌우사원외랑(征東行省左右司員外郞)이 되었다. 2년에는 어명을 받들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숙위(宿衛)를 하였으며, 원통(元統) 원년(충숙왕 복위 2년)에는 특별히 중상감승관(中尙監丞官) 봉의대부(奉議大夫)에 제수되었다. 지대(至大) 2년에는 태부감 소감 관조청(太府監少監官朝請)에 전임되었으며, 6년에는 또 본감태감관(本監太監官) 중의대부(中議大夫)에 전임되었다. 경사(京師)에 벼슬한 9년에 세 번 관직이 전임되고 두 번 조서를 받들어서 본국이 영광이 되었는데, 먼저는 지순 3년(충혜왕 3년)이요, 나중은 지원(至元) 5년(충숙왕 복위 8년)이었다. 다음해 봄에, 사신일을 마치고 환조(還朝)하려다 병이 나서 7일 만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 47세이며, 경진년 3월 27일의 일이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 조청공(朝請公)을 따라 태위심왕(太尉瀋王 충선왕)을 경도(京都) 집에 섬기면서 드디어 3국 말을 통하였다. 등용되어 선왕의 관속이 되었으며 복종하여 섬기기를 오래하였는데, 그 수고에 대하여 밭 100결(結)과 노비 10명을 하사하였다. 지치(至治) 연간에는 선왕이 역신들에게 모함을 입어 경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이 시종하면서 두 마음이 없었으므로 밭 200결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으며, 태정(泰定) 초년에는 원 나라 조정에서 배반한 사람의 말을 듣고 정동성(征東省)을 두어 다른 곳의 예와 같이 하려 하므로, 공이 작고한 정승 김이(金怡) 등과 함께 힘써 변론하여 그만두게 되자, 그 공으로 밭 100결과 노비 10명을 하사하였다. 후사왕(後嗣王 충혜왕)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서는 갑자기 밀직에 임명되어, 의지하고 맡김이 그 위에 더할 수가 없었다. 또 지순(至順) 연간에 금상(今上)이 해상(海上)에 있을 때에는, 공급하고 시종하는 준비가 그의 사력(私力)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므로 후에 왕위를 바로하면서 물건 주심이 매우 후하고, 친서를 내려주어서 모든 전지나 산업을 다른 사람이 침노하고 빼앗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가 조정에 벼슬한 것이 실은 여기에 근본한 것이었다. 아, 이것을 보면 대략 그 사람됨을 볼 수 있는 것이니, 다른 것은 의논할 것이 없는 일이다. 아내 구씨(具氏)는 고 봉익대부 휘(諱) 예(藝)의 딸인데 역시 공으로 하여 귀하게 되어 박릉군군(愽陵郡君)을 봉하였으며, 4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유(濡)인데 지금 상호군이요, 다음은 원(源)인데 지금 호군이며, 다음은 숙신(淑臣)이며, 다음은 문구(文丘)인데, 모두 아직 벼슬하지 못하였다. 큰딸은 전 호군 인당(印璫)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전 낭장 김유온(金有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전 별장 임희재(林熙載)에게 시집가고, 막내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이해 5월에 공을 아무곳에 장사 지냈으니 예법에 의한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본국에 벼슬하여 본국 신하되고 / 仕王國爲王之臣
천자 조정에 벼슬하여 천자의 신하되는 것 / 仕天子之朝爲天子之巨
피차간의 경중을 / 彼輕此重
어찌 이몸에 계교할 것 있겠는가 / 曾何足計乎吾身
옛말에 한 나라의 선비도 되고 / 古語云有一國之士
천하의 선비도 된다 하였으니 / 有天下之士
모든 것 겸한 그 재주 아니면 / 才非有兼人
뉘라서 이러하오리 / 其孰能如此
애석하다 / 惜也
지혜는 길기도 긴데 나이는 어이 길지 못한고 / 慮甚長而年則不長
못 믿을 세상 일 / 所未可恃者
이것이 하늘이 아닌가 / 其曰不在於蒼蒼
이것이 하늘이 아닌가 / 其曰不在於蒼蒼

하였다.

[주D-001]지순(至順) 9년 : 지순(至順)은 원(元)나라 문종(文宗)의 연호인데, 그 기간이 3년까지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의 지순 9년은 잘못 적은 것이다. 또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최안도는 충혜왕(忠惠王)초에 감찰어사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충혜왕 원년이 지순 2년에 해당하는 것인 즉, 여기의 지순 9년은 실은 지순 원년이며 충숙왕 17년으로 보여진다.






동문선 제18권
 칠언배율(七言排律)
졸시 육운을 장원 수찬 송본(宋本) 성부(成夫) 선생에게 드리며, 겸하여 동년급제 제공(諸公)에게 보이노니 웃어주기를 바라며[拙詩六韻呈狀元修撰宋本誠夫先生兼奉示同年諸公共爲一笑]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태공이 주나라를 낚음[太公釣周]

최해(崔瀣)

그 때에 낚시대를 잡았으나 낚시에는 미늘이 없었나니 /當年把釣釣無鉤
그 뜻이 고기를 낚는 데 있지 않았거늘 하물며 주나라에 있었겠는가 / 意不求魚況在周
마침 문왕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인 것을 / 終遇文王眞偶爾
내 이 말을 옛사람 위해 부끄러워하노라 / 此言吾爲古人羞

[주C-001]태공이 주 나라를 낚음[太公釣周] : 강태공(姜太公)이 주(周) 나라에 가서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할 때 곧은 낚시[直釣]를 썼다 하는데, 후인(後人)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기를 잡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문왕(周文王)을 낚은 것이다.” 하였다. 주문왕이 위수 부근에 사냥하러 나왔다가 강태공을 만나서 데리고 간 까닭이었다.최해(崔瀣)

나는 당조 시어(최치원)의 후손으로 / 我是唐朝侍御孫
필경의 유업을 전문으로 이은 사람 / 筆耕遺業繼專門
감히 성역의 깊은 조예 논하랴만 / 敢從聖域論超詣
과장에 여러 번 분주는 면하였네 / 粗向科場免數奔
분수론 국거에 참예한 것 부끄러우나 / 揣分始慙充國擧
관광하여 천은을 다행히도 받자왔네 / 觀光何幸拜天恩
쭉 모여 앉은 벗들 위의도 성할씨고 / 簪因朋蓋威儀盛
같은 수레 같은 글에 교화가 두터웠네 / 軌與文同敎化敦
중한 조서 받자오매 길이 덕을 감격하고 / 重詔每承深感德
천한 회포 말하려 하나 담담히 말을 잊곤하네 / 卑懷欲敍澹忘言
여러분이 시를 지어 내게 선물하면 / 諸公若賜詩爲寵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민중옥 선이 동에 가서 근친하고 서쪽으로 돌아오므로 되는 대로 시를 지어 작별하며[閔仲玉璿東覲西回亂道爲別]

최해(崔瀣)

평생의 사업이 변변찮음을 부끄러워하는데 / 平生事業愧空疏
황송하게도 태평 정치의 처음에 과거에 올랐네 / 也忝科名至治初
사람이 돌아올 때마다 자주 문안 소식 부쳐 주니 / 人使歸來煩見問
인편에 송상서께 사례하노라 / 因風寄謝宋尙書
사람이 왕래할 때마다 여러 번 동년 송예부(宋禮部)의 문안을 받았기에 이로써 겸해서 사례한다.

東文選卷之一百二十三
 墓誌
皇元高麗故通憲大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崔公墓誌銘[崔瀣]

公諱雲字蒙叟。其先東州昌原縣人也。十世祖諱俊邕。仕國初有功。爲大師三重大匡。傳至曾孫諱奭。爲開府儀同三司。謚曰譽肅。譽肅生金紫光錄大夫諱惟淸。謚曰文淑。文淑生門下平章諱詵。謚曰文懿。文懿生尙書左僕射諱宗梓。僕射生中書平章諱昷。謚曰文信。文信生奉翊大夫諱文立。奉翊公娵樞副洪公諱縉之女。是生公。世以忠顯。珪組蟬聯。門望藹然。公生十五歲。擧中司馬試。實至元己丑也。元貞丙申。補都齋庫判官。屬籍內侍。大德己亥。換武資。以神虎衛別將。別差牽龍行首。庚子拜左右衛將軍。壬寅復文資授朝顯大夫軍簿揔郞賜金紫。俄改典理揔郞判司盈署事。至大戊申又換武拜左右衛大護軍。己酉出爲羅州牧使。皇慶壬子。徙知鐵原府。延祐甲寅。移知公州。秋復知鐵原府。尋免。丙辰復官拜正尹。陞元尹。至治辛酉。省冗官。隨例罷。泰定乙丑四月。起授通憲大夫。知密直司事右常侍上護軍。至七月庚午以疾卒。春秋五十一。公儀表甚偉。性直且愿。平生事佛。謹念佛經。佛菩薩名號。日有常課。未甞以他故蹔廢。處家嚴肅。人莫有敢犯。及其居官臨民。若處家然。大德癸卯。以世家子隨王琠。宿衛闕庭。號都魯花。而琠因太尉王久遭讒舋。有非覬心。至丁未春事發。琠及黨與皆誅竄。而公獨以不附。拜大護軍。至治中樂旤之徒。謀擾東社。卿士畏勢。從風而靡。公又不與焉。及下密直之命。人咸以擧得其人。然拜官數月。病不能興。嗚呼豈非命也哉。公娶故僉議宰相宋公諱玢之女早卒。後娵大護軍任公諱綬之女。封晉陽郡夫人。以是年八月甲申。葬于城東大德山之艮原。公無子。任夫人於予爲姨母。因甞受恩。葬不可闕文。遂最績而銘之。銘曰。
善積福厚。源深流長。魁然而偉。克傳芳兮。何任不久。厥施未光。何德不紹。祚不昌兮。孰尸此貴。悠悠上蒼。漬筆臨窆。涕滂滂兮。

人事篇 / 治道類
 科擧
[0412]東人參中國榜眼辨證說

以外國人得參中原榜眼。不是異事。乃同之化及於覆載也。人傑地靈。豈有中外之別。自唐訖元。東人之以賓貢參中國榜眼者不知其幾。一自皇明之世。以洪倫弑王。金義殺使。擯不與焉。如我右文之邦。彙征之士。仍爲停擧。可不寒心哉。弑逆之變。何代無之。而獨於東國苛責無恕。然則因噎廢食。共浴譏裸。可乎。此足見中國士風之不競。皇綱之不恢矣。惜哉。雖然。當此之世。其見枳者。豈不幸也歟。
李厚菴萬運嘗纂《東國榜眼》。而首揭制科。高麗崔瀣文曰。金雲卿始以新羅賓貢題名杜師禮榜。至唐末。凡登賓貢科五十八人。五代梁、唐。又三十二人。又曰。賓貢科。每自別試。附名榜尾。至元朝。與中原俊秀竝擧。列名金榜云。愚按以文觀之。自唐至五代賓貢科者。洽滿九十人。而李芝峯睟光《類說》。入唐登第。其姓名可考者。只五人云。五代則初不槪見。今廣加搜輯。於唐得九人。於宋得八人。於元得十九人。至於皇明。初次貢士三人。金濤登殿試。再次亦貢士三人。而二人遭風沒于海中。一人未及會試送還。其後以洪倫恭愍王金義殺天使蔡斌。以爲無道之國。不許貢士。安南、琉球則登制科爲膴仕者。代不乏人。而朝鮮則終明之世。不得貢士焉。【新羅。金雲卿崔致遠崔彦撝崔承祐金夷魚金可紀朴仁範金文蔚金渥。高麗。康戩金行成王琳崔罕金成績康熙民權適趙錫金端金祿賓于光趙天赫安震崔瀣安?趙廉李穀辛裔李承慶李仁復安輔尹安之李穡辛蕆李球李天驥金升彦崔彪金濤。總爲二十九人。其湮滅無傳者。一何多耶。柳得恭《渤海國考》烏炤度。渤海國王大諲譔時宰相也。新羅人崔彦撝入唐。禮部侍郞薛廷珪下及第。炤度光贊名在彦撝下。炤度時以使在唐見之。表請云。臣昔年入朝登第。名在李同之上。今臣子光贊宜居彦撝上。唐朝以彦撝才學優贍不論。視其文勢。則李同似是新羅人登第者也。】余更得崔光胤彦撝子。賓貢進士入晉。爲契丹所虜。以才見用。受官爵。奉侍龜城。高麗定宗二年丁未。卽後晉開運四年。後漢高祖天福一年也편001。知契丹將侵我。爲書以報。於是命有司選軍三十萬。號光軍云云。】朴充【唐張喬有《送朴充侍御歸海東》詩。登唐制科편002。學唐音。卽登第者。】全元發【號菊坡。登文科。又登制科第三人。官翰林學士。壽城人。在于光下。】白彌堅【字介夫。至正中。中元制科。東還累官。至右獻納。】張良素【素一作守。關東蔚珍人。《蔚珍邑志》。宋理宗時入金。登進士第。黃牒至今猶存其後裔張萬始家。還國。宗理判書。此條又詳于成靑城大中《靑城集》中。可補別科一榜眼者也。凡五人。】李厚菴所記二十九人及愚所得五人。合爲三十四人。文獻無徵。良可歎矣。星湖李瀷有言曰。麗末洪倫弑君편003金義殺使。遂廢赴擧之規。自是文學之士。心志局於內而才思縮矣。然上國之使於東者。必擇望崇者。用示懷柔之義。我國之接伴。亦必妙選髦士爲從事。凡唱酬爲文。輒裒成皇華集。以張大之。一時操觚之類。無不揚眉吐氣。冀幸其執鞭。而此路之絶。亦百有餘年矣。今之士大夫日夜所謀爲。不越乎占科獲官。至於詞翰之技。亦揮手戒之。爲其或妨於試場也。是以儒術經學置不論。雖詩律末藝。又駸駸無其人矣。可勝惜哉。此言切中時病也。

[편-001]後漢高祖天福一年也 : 『後漢高祖仍稱晉天福十二年也』로 되어 있는데, 文義에 따라『仍稱晉』은 삭제하고, 『十二年』은 『一』로 고쳤다.
[편-002]登唐制科 : 『登唐科制』로 되어 있는데, 文義에 따라 고쳤다.
[편-003]麗末洪倫弑君 : 『麗末洪倫弑君』부터 『可勝惜哉』까지는 李瀷 撰 《星湖僿說 卷30·韓山八景》에 보인다.돌아가 본국에 자랑하고 길이 잊지 않으리 / 歸詫鄕人永不諼

[주D-001]필경(筆耕) : 최치원(崔致遠)의 저술에 《계원필경(桂苑筆耕)》이란 책이 있다.
[주D-002]관광(觀光) : 여기서는 과거에 응시한다는 말인데, 《주역》에, “나라의 빛을 보아 임금에게 손[客]이 된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3]같은 수레 같은 글 : 천하가 통일되어 수레는 바퀴가 동일하고 글은 문자가 같다는 말이다.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태공이 주나라를 낚음[太公釣周]

최해(崔瀣)

그 때에 낚시대를 잡았으나 낚시에는 미늘이 없었나니 /當年把釣釣無鉤
그 뜻이 고기를 낚는 데 있지 않았거늘 하물며 주나라에 있었겠는가 / 意不求魚況在周
마침 문왕을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인 것을 / 終遇文王眞偶爾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현재 설야(縣齋雪夜)

최해(崔瀣)

3년을 쫓겨 다니면서 병이 서로 겹쳤는데 / 三年竄逐病相仍
한 방의 생애는 마치 중과 같구나 / 一室生涯轉似僧
온 산에 눈은 가득하고 사람은 오지 않는데 / 雪滿四山人不到
바다 물결 소리 속에 앉아 등불을 돋운다 / 海濤聲裏坐挑燈

내 이 말을 옛사람 위해 부끄러워하노라 / 此言吾爲古人羞

[주C-001]태공이 주 나라를 낚음[太公釣周] : 강태공(姜太公)이 주(周) 나라에 가서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할 때 곧은 낚시[直釣]를 썼다 하는데, 후인(後人)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기를 잡으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문왕(周文王)을 낚은 것이다.” 하였다. 주문왕이 위수 부근에 사냥하러 나왔다가 강태공을 만나서 데리고 간 까닭이었다.



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벌을 받아 장사감무에 임명되다[責任長沙監務]

최해(崔瀣)

썩은 선비가 주착 없이 스스로 화를 불러 왔거니 / 腐儒無狀自招尤
어찌 감히 곁 사람들에게 까닭을 변명하리 / 敢向傍人說所由
몸으로 나라 은혜 지고도 조그마한 갚음도 없었으니 / 身負國恩微一報
내 이 걸음은 그리 시원한 것이 아니네 / 未應此去便休休








동문선 제20권
 칠언절구(七言絶句)
민중옥 선이 동에 가서 근친하고 서쪽으로 돌아오므로 되는 대로 시를 지어 작별하며[閔仲玉璿東覲西回亂道爲別]

최해(崔瀣)

평생의 사업이 변변찮음을 부끄러워하는데 / 平生事業愧空疏
황송하게도 태평 정치의 처음에 과거에 올랐네 / 也忝科名至治初
사람이 돌아올 때마다 자주 문안 소식 부쳐 주니 / 人使歸來煩見問
인편에 송상서께 사례하노라 / 因風寄謝宋尙書
사람이 왕래할 때마다 여러 번 동년 송예부(宋禮部)의 문안을 받았기에 이로써 겸해서 사례한다.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필세설(筆洗說)

오래된 그릇을 팔려고 하나 3년 동안이나 팔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그릇의 재질은 투박스러운 돌이었다. 술잔이라고 보기에는 겉이 틀어지고 안으로 말려들었으며, 기름때가 끼어 광택을 가리고 있었다. 온 장안을 다 돌아다녀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다시 부귀한 집안을 다 찾아갔지만 값이 더욱 떨어져 수백에 이르고 말았다.
하루는 누군가가 이것을 가지고서 서군 여오(徐君汝五)에게 보였다. 그러자 여오가 말하기를,
“이것은 필세(筆洗 붓 씻는 그릇)이다. 이 돌은 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에서 나는 것인데, 옥에 버금가는 것으로 옥돌과도 같다.”
하며, 값의 고하를 따지지 아니하고 즉석에서 8000냥을 내주었다. 그러고는 때를 긁어내니, 예전에 투박스럽게 보였던 것은 바로 물결 모양의 무늬가 있고 쑥잎처럼 새파란 돌이었다. 비틀어지고 끝이 말려든 모양은 마치 말라서 그 잎이 또르르 말린 가을의 연꽃과 같았다. 그래서 마침내 장안의 이름난 그릇이 되었다.
여오는 말하기를,
“천하의 물건치고 하나의 그릇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꼭 맞는 곳에 사용할 따름이다. 붓은 먹을 머금은 채 딴딴히 굳어지면 모지라지기 쉽기 때문에, 항상 그 먹을 씻어서 부드럽게 해 둔다. 그러므로 이 그릇이 필세가 된 것이다.”
하였다.
무릇 서화나 골동품에는 수장가가 있고 감상가가 있다. 감상하는 안목이 없으면서 한갓 수장만 하는 자는 돈은 많아도 단지 제 귀만을 믿는 자요, 감상은 잘하면서도 수장을 못 하는 자는 가난해도 제 눈만은 배신하지 않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는 더러 수장가가 있기는 하지만, 서적은 건양(建陽)의 방각(坊刻)이고 서화는 금창(金閶 소주(蘇州))의 안본(贋本 위조품)뿐이다. 율피색(栗皮色) 화로를 곰팡이가 피었다고 여겨 긁어내려 하고, 장경지(藏經紙)를 더럽혀졌다고 여겨 씻어서 깨끗이 만들려고 한다. 조잡한 물건을 만나면 높은 값을 쳐주고, 진귀한 물건은 버리고 간직할 줄 모르니, 그 또한 슬픈 일일 따름이다.
신라의 선비들은 당 나라에 가서 국학(國學)에 들어갔으며, 고려의 선비들은 원(元) 나라에 유학하여 제과(制科)에 급제했으므로 안목이 트이고 흉금을 넓힐 수 있었으니, 그들은 감상학(鑑賞學)에 있어서도 아마 그 시대에 출중했을 터이다. 우리 왕조 이래로 3, 4백 년 동안에 풍속이 갈수록 촌스러워졌으니, 비록 해마다 북경을 내왕하였으나 부패한 약재나 저질의 비단 따위나 사올 뿐이었다. 우하(虞夏) · 은(殷) · 주(周)의 옛날 그릇이나 종요(鍾繇) · 왕희지(王羲之) · 고개지(顧愷之) · 오도자(吳道子)의 친필이 어찌 한 번이라도 압록강을 건너온 적이 있었으랴.
근세의 감상가로는 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를 일컫는다. 그러나 재사(才思 재기)가 없으니 완미(完美)하다고는 못 할 것이다. 대개 김씨는 감상학을 개창한 공이 있으나, 여오(汝五)는 꿰뚫어보는 식견이 있어 눈에 닿는 모든 사물의 진위를 판별해 내는 데다가, 재사까지 겸비하여 감상을 잘하는 자라 하겠다.
여오는 성품이 총명하고 슬기로웠다. 문장을 잘 짓고 해서(楷書)로 소자(小字)를 잘 쓰며, 아울러 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에도 능숙하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봄가을로 틈나는 날에는 정원을 깨끗이 청소한 다음 그곳에서 향을 피우고 차를 음미하였다. 일찍이 집이 가난하여 수장하지 못하는 것을 못내 한탄했고, 또 시속의 무리들이 그로 인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할까 걱정하곤 하였다. 그 때문에 답답해하면서 내게 말하기를,
“나더러 좋아하는 물건에 팔려 큰 뜻을 상실했다〔玩物喪志〕고 나무라는 자는 어찌 진정 나를 아는 자이겠는가. 무릇 감상이란 것은 바로 《시경(詩經)》의 가르침과 같네. 곡부(曲阜)의 신발을 보고서 어찌 감동하여 분발하지 않을 자가 있겠으며, 점대(漸臺)의 위두(威斗)를 보고서 어찌 반성하여 경계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그를 위로하기를,
“감상이란 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일세. 옛날 허소(許劭)는 인품이 좋고 나쁜 것을 탁한 경수(涇水)와 맑은 위수(渭水)처럼 분명히 판별했으나 당세에 허소를 알아주는 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네.”
하였다.
지금 여오는 감상에 뛰어나서, 뭇사람들이 버려둔 가운데서 이 그릇을 능히 알아보았다. 아아, 그러나 여오를 알아주는 자는 그 누구이랴?

졸고천백 제2권
최 어사(崔御史)가 부친의 80세 장수를 경하드리기 위해 연 잔치에서 지은 시의 서문

지금 동방 출신으로 천자의 조정에 벼슬하여 청화직(淸華職)을 두루 역임하고 청렴함과 신중함으로 몸가짐을 지켜 당시 사람들로부터 최고로 칭송받는 인물로는 감찰어사(監察御史) 최대중(崔大中) 공이 있다. 공의 부친은 일찍이 고려에 벼슬하여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아들이 존귀해짐에 따라 다시 동릉군후(東陵郡侯)에 봉해졌으며 춘추 80이 되었다. 공이 요양(遼陽)으로 사신을 오는 차에 고려에 들러 부친을 배알하고는 이달 17일에 술잔을 들고 축수를 올려 경하드리는 잔치를 열자 친인척들이 모두 참석하고 나라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면서 모두들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리고 나라 안에 유관(儒冠)을 쓴 자들은 모두 시를 지어 올렸는데, 내가 공의 집안과 같은 성씨의 친분이 있다 하여 제사(題辭)를 써줄 것을 부탁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비가 세상에 나서 때를 만나 높은 벼슬을 하고 봉록이 어버이에게 미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천하 사람들이 누구나 다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현재는 집을 떠나 멀리 사방 만 리를 떠도느라 부모는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고 소식조차 서로 전하지 못하다가 늘그막에 혹 미관말직을 받아본다 한들 평생 저버린 바를 어찌 보상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숙수지락(菽水之樂)에 비한다면 대등하게 놓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자신을 과시하며 스스로 이를 영예로 여기니, 아, 도대체 마음속에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 종가(宗家)는 그렇지 않다. 군후(郡侯)는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공은 그 가운데 둘째 아들이요 나머지 네 아들 또한 본국(本國)에서 벼슬하여 관질(官秩)이 모두 대부(大夫)에 올라 금자(金紫)를 입었다. 공은 이미 형제들이 부모님 곁에 있어 좌우에서 모시는 데 어김이 없었고, 처음에 벼슬에 나아간 것도 부모님의 명에 따라 한 것이지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경사(京師 연경(燕京))에 나가 있은 지가 비록 오래되기는 하였으나 역로(驛路)를 통해 집에 편지를 한 달에 두 번씩은 보내고, 간간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와서 누차 영화로운 근친(覲親)을 하였으니, 집안에 들어앉아 단지 계절에 따라 기거를 살피는 것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다. 옛사람들은 부모를 섬길 때 뜻을 봉양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는데, 공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고 말할 만하다. 게다가 군후(郡侯)의 건강이 장년(壯年) 때나 다름없어 식사량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하늘이 화락(和樂)하고 강녕(康寧)한 복을 내리신 것이다. 지금 이후로 공의 벼슬이 갈수록 높아지고 지위가 갈수록 막중해져서 또다시 귀국하여 구순(九旬)을 경하하고 백세(百歲)를 경하하는 잔치를 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끝이 없는 복이로다. 우리 문중이 선대(先代)에 인재를 배양한 것이 필시 두텁고 오래되어서 이 두 분의 부자(父子)로 하여금 이러한 영화를 누리게 한 것이니, 세상에서 일부러 객지를 싫증이 나도록 떠돌아다니면서 요행으로 부모를 현달하게 하는 자와 비교해 볼 때 어떻다 하겠는가. 여러분들이 칭송하고 노래한 것이 어찌 이 정도에 그칠 뿐이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맞다.”
하기에, 마침내 이렇게 쓰는 바이다.
후지원 기묘년(1339, 충숙왕 복위 8) 12월 모일에 지치 진사(至治進士) 전(前) 요양로 개모별가(遼陽路盖牟別駕) 계림(雞林) 최모(崔某)는 서(序)하노라.

[주C-001]최 어사(崔御史)가 …… 서문 : 원문은 ‘崔御史爲大人慶八十序’인데, 《동문선》에는 ‘崔御史爲大人慶八十詩序’로 되어 있다. ‘詩’ 자가 빠진 것으로 판단되어 이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01]최대중(崔大中) :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대중이 자인지 이름인지도 자세히 알 수 없다.
[주D-002]숙수지락(菽水之樂) : 숙수는 콩죽과 물을 가리키며 가난한 삶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 《예기(禮記)》 단궁 하(檀弓下)에, 자로(子路)가 가난으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함을 한탄하자, 공자(孔子)가 이 말을 듣고 “콩죽을 마시고 물을 마셔도 그 즐거움을 다하면 이를 효라고 한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즉 가난 속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부모를 모시는 것을 이른다.
[주D-003]관질(官秩)이 …… 올라 : 국역 대본에는 ‘帙皆大夫’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에는 ‘帙’ 자가 ‘秩’ 자로 되어 있다. 판각상의 오자로 판단되어 ‘秩’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뜻을 봉양하는 것 : 부모의 뜻을 받들어 따르는 것을 말한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의하면, 증자(曾子)가 그의 아버지 증점(曾點)을 봉양할 적에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리고는 식사를 마치면 상을 치우기에 앞서 반드시 누구에게 줄 것인지를 물었고, 남은 것이 있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다고 대답하였다. 증자가 이렇게 대답한 것은 남에게 음식을 베풀려는 부친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봉양을 맹자는 뜻을 봉양하는 것, 즉 양지(養志)라 하였으며, 부모 섬기기를 증자와 같이 해야 한다고 칭송하였다.
[주D-005]지치 진사(至治進士) 전(前) 요양로 개모별가(遼陽路盖牟別駕) : 중국에서는 과거 전시(殿試)에 합격한 자를 진사라 부른다. 최해가 1321년(지치 1)에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요양로 개모별가에 제수되었으므로 자신을 이렇게 부른 것이다.필세를 빌려서 자신의 문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스스로 슬퍼한 것이다.

[주D-001]수백 : 화폐 단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당시의 물가로 미루어 보면 수백 문(文), 즉 너덧 냥이 아닌가 한다. 뒤에 나오는 ‘8000’ 역시 8000문, 즉 80냥이 아닌가 한다.
[주D-002]서군 여오(徐君汝五) : 서상수(徐常修 : 1735 ~ 1793)로, 여오는 그의 자의 하나이다. 호는 관재(觀齋) · 관헌(觀軒) 등이다. 서얼 출신으로,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광흥창 봉사(廣興倉奉事)에 그쳤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백탑(白塔) 서쪽의 관재(觀齋)와 도봉산 서쪽의 별장인 동장(東庄)을 소유하였으며, 이덕무에게도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주D-003]복주(福州) 수산(壽山)의 오화석갱(五花石坑) : 복주는 중국의 복건성(福建省)에 속한 부(府)로, 그 동북쪽에 있는 수산은 아름다운 옥돌이 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수산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오화석갱이 있는데, 돌이 다섯 가지 색을 띠어 그렇게 명명되었다고 한다.
[주D-004]값의 …… 아니하고 : 원문은 ‘不問値高下’인데, 국립중앙도서관 승계문고 필사본에는 ‘値’ 자가 ‘價’ 자로 되어 있다.
[주D-005]건양(建陽)의 방각(坊刻) : 방각은 방본(坊本)과 같은 말로, 민간의 서점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인쇄한 조잡한 서적을 말한다. 송 나라 때 복건성 건양현에서 인쇄한 방각본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6]율피색(栗皮色) …… 한다 : 명(明) 나라 선덕(宣德) 연간에 강서성(江西省) 경덕진(景德鎭)의 관요(官窯)에서 만든 유명한 향로인 선덕로(宣德爐)의 빛깔은 밤색〔栗色〕, 가지 껍질색〔茄皮色〕, 팥배나무색〔棠梨色〕, 갈색(褐色), 장경지색(藏經紙色)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는데, 그중 장경지색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장경지(藏經紙)는 밀납을 먹여 광택이 나는 짙은 황색(黃色)의 견지(繭紙)인데, 장경(藏經)이 많기로 유명한 절강성(浙江省) 금속사(金粟寺)의 장경이 이 종이에 쓰여졌기 때문에 장경지라 부른다.
[주D-007]제과(制科) : 제거(制擧)라고도 하며, 황제가 임시로 조령(詔令)을 내려 실시하는 부정기적인 과거(科擧)를 말한다. 고려 말에 최해(崔瀣) · 안축(安軸) · 이곡(李穀) · 이색(李穡) 등이 제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주D-008]우하(虞夏) : 순(舜) 임금의 치세와 하(夏) 나라 왕조를 함께 묶어서 부른 말이다.
[주D-009]상고당(尙古堂) 김씨(金氏) : 김광수(金光遂 : 1696 ~ ?)로, 상고당은 그의 호이다. 조선후기의 화가이자 서화고동(書畫古董) 감식가 및 수장가이다. 그의 자는 성중(成仲)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이조 판서 김동필(金東弼)의 아들이다. 진사 급제 후 벼슬은 인제 군수를 지냈다. 《연암집》 권7 ‘관재가 소장한 청명상하도 발문〔觀齋所藏淸明上河圖跋〕’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주D-010]소미(小米)의 발묵법(潑墨法) : 소미는 북송 때의 유명한 서화가 미불(米芾)의 아들로서 그 역시 뛰어난 서화가였던 미우인(米友仁 : 1086 ~ 1165)을 가리킨다. 발묵법은 선을 사용하지 않고 먹을 뿌리듯이 하여 번져나간 먹 자국만으로 산수를 표현하는 수법을 말한다. 미불과 미우인 부자는 화면에 이른바 미점(米點)이라는 횡으로 길고 큰 먹점을 겹쳐 찍는 기법으로 안개 짙은 산수를 표현하는 독특한 화풍을 창시했는데, 이후 문인 화가들이 수묵 산수화를 그릴 때 이 기법을 즐겨 따랐다.
[주D-011]《시경(詩經)》의 가르침 : 《시경》을 배우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효과가 있음을 말한다. 주자(朱子)는 《시집전(詩集傳)》의 서문에서, 《시경》의 시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인데 감정에는 사(邪)도 있고 정(正)도 있어 시에도 좋은 시가 있고 나쁜 시가 있으나, 좋은 시를 읽고서 선을 행하고 나쁜 시를 읽고서 악을 경계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주D-012]곡부(曲阜)의 신발 :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에는 후손들이 간직해 온 공자의 신발 등 유품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관한기(東觀漢記)》 동평헌왕창(東平憲王蒼)에 “노(魯) 나라 공씨(孔氏)들이 아직까지도 중니의 수레, 가마, 관(冠), 신발을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한 덕을 지녔던 사람은 그 영광이 멀리까지 미침을 밝힌 것이다.” 하였다.
[주D-013]점대(漸臺)의 위두(威斗) : 점대는 중국 섬서성(陝西省) 장안현(長安縣)에 있는 대(臺) 이름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건장궁(建章宮)을 짓고는 태액지(太液池) 안에 점대를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0여 장(丈)이었다. 《漢書 卷25 郊祀志下》 왕망(王莽)이 유현(劉玄)의 군사에게 쫓겨서 점대에 이르러 살해되었는데, 왕망은 쫓기는 와중에도 부명(符命)과 위두(威斗)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위두는 왕망이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 만든 기물(器物)로, 동(銅) 5석(石)으로 만들었고 길이는 2척 5촌이었으며, 모양이 북두칠성과 유사했다고 한다. 《漢書 卷99 王莽傳》
[주D-014]구품중정(九品中正)의 학문 : 구품중정은 위진 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의 관리 선발제도로서, 각 고을에 중정관(中正官)을 두어 그 고을 인사들을 재능에 따라 9품으로 나누어 평가해서 조정에 천거하게 하였다. 여기서는 인재를 엄격히 품평하듯이 골동품과 서화를 품평하는 것도 전문 분야라는 뜻으로 썼다.
[주D-015]허소(許劭)는 …… 판별했으나 : 허소는 후한 때 사람으로, 종형(從兄) 허정(許靖)과 함께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특히 향리(鄕里)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해서 달마다 사람들을 품평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월단평(月旦評)이라 했다 한다. 《後漢書 卷68 許劭列傳》 경수(涇水)는 위수(渭水)의 지류로 모두 섬서성에 있다. 경수가 맑고 위수가 탁하다는 설도 있다.



































 해동역사 제48권
 예문지(藝文志) 7
우리나라 시(詩) 2 본조(本朝) 상(上)

○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에 오명제(吳明濟)가 사마공(司馬公)이 조선을 구원할 때 따라 나갔다가 여러 동방 명사(名士)들의 문집을 구해 보았는데, 모두 200여 편이었으며, 허씨(許氏) 형제 세 사람이 동국의 시 수백 편을 외우고 있었고, 또 그의 여동생이 지은 시 200편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뒤 기해년(1599, 선조32)에 다시 조선으로 가서 여러 명사들의 시 몇 편을 더 구하였는데, 이들을 종류별로 모아서 기록하였다. 《열조시집(列朝詩集)》
○ 고려의 시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겨우 회계(會稽) 사람 오명제가 지은 《조선시선(朝鮮詩選)》이 있을 뿐이다. 《명시종(明詩綜)》
○ 강희(康煕) 17년(1678, 숙종4)에 손치미(孫致彌)가 조선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의 시를 채집하여 《조선채풍록(朝鮮採風錄)》을 찬하였는데, 모두 근체시(近體詩)였다. 이제 그 가운데서 읊을 만한 것을 가려 뽑아 여기에 대충 실었는데, 임제(林悌)의 시 1수, 백광훈(白光勳)의 시 2수, 오시봉(吳時鳳)ㆍ김굉필(金宏弼)ㆍ조욱(趙昱)ㆍ정작(鄭碏)ㆍ성운(成運)ㆍ백광면(白光勉)의 시 각 1수, 김종직(金宗直)의 시 2수, 기매(奇邁)ㆍ정도전(鄭道傳)ㆍ어무적(魚無迹)ㆍ권응인(權應仁)의 시 각 1수, 조희일(趙希逸)의 시 2수, 김류(金瑬)ㆍ이달(李達)ㆍ정사룡(鄭士龍)ㆍ정지승(鄭之升)의 시 각 1수, 최경창(崔慶昌)의 시 2수, 유영길(柳永吉)ㆍ김질충(金質忠)ㆍ임억령(林億齡)ㆍ최수성(崔壽峸)ㆍ김정(金淨)ㆍ정지상(鄭知常)ㆍ설손(偰遜)ㆍ이식(李植)ㆍ권우(權遇)ㆍ허균(許筠)의 시 각 1수, 박미(朴瀰)의 시6수 가 그것이다. 《지북우담(池北偶談)》
○ 강희 기미년(1679, 숙종5)에 손개사(孫愷似)가 조선[高麗]에 가서 풍속을 채집하면서 시집 1책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대부분이 절구(絶句)로, 외울 만한 것이 있었다. 이에 내가 우연히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해지게 하였는데, 강극성(姜克誠)의 시 1수, 성간(成侃)의 시 2수, 임제(林悌)ㆍ설손(偰遜)ㆍ최해(崔瀣)ㆍ정지승(鄭之升)ㆍ최숙생(崔叔生)ㆍ강혼(姜渾)ㆍ신종호(申從濩)ㆍ정지상(鄭知常)ㆍ김정(金淨)ㆍ이인로(李仁老)의 시 각 1수 가 그것이다. 《간재잡설(艮齋雜說)》
○ 《조선시집》의 하권에는 임제에서부터 이인로의 시까지가 실려 있는데, 살펴보건대, 임제, 백광훈, 최수성, 조희일, 임억령, 기매, 김류, 신흠(申欽), 권필(權鞸), 조욱, 이효측(李孝則), 유영길, 정작, 박문창(朴文昌), 이달, 이식, 박미, 강극성, 정지승, 강혼, 김정, 정지상, 이인로의 시가 각 1수이다. 《조선채풍록》을 보니 그들의 관작과 세차(世次)가 상세하지 않으므로 우선 여기에 기록한다. 《명시종》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본조의 시 가운데 중국의 시집에 실려 있는 것은 전우산(錢虞山)의 《열조시집(列朝詩集)》, 주죽타(朱竹坨)의 《명시종(明詩綜)》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데, 두 책에 실려 있는 것이 합하여 50여 인으로, 이것은 오명제의 《조선시선》에서 뽑아서 인용하여 기록한 것이다. 《명시종》 가운데 조선시 하편 및 왕어양(王漁洋)의 《지북우담(池北偶談)》과 우서당(尤西堂)의 《간재잡설(艮齋雜說)》에 기록된 여러 시들은 손치미의 《조선채풍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 《감구집(感舊集)》, 《양조평양록(兩朝平壤錄)》 등의 책에 기록된 것이 몇 편 있다. 지금 여러 문집 가운데 실려 있는 것들을 한데 아울러서 세대별로 순서를 정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관작과 향리는 이미 인물고에 모두 실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중첩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중구일(重九日) [정도전(鄭道傳)]

고향 땅에 가는 길 아득하여 끝없으니 / 故園歸路渺無窮
물 돌고 산 돌아서 다시 또 몇 겹인가 / 水繞山圍第幾重
먼 데를 바라보면 시름 더욱 깊어지니 / 望欲遠時愁更遠
높은 데 올라가도 최고봉엔 가지 마소 / 登高莫上最高峯
《열조시집 및 명시종》

오호도(嗚呼島)에서 전횡(田橫)을 조문하다 [정도전]

새벽 해가 바다에서 솟아올라서 / 曉日出海
외로운 섬을 곧장 내리 비추네 / 直孤島中
당신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은 / 夫子一片心
틀림없이 저 해와 같을 것이리 / 正與此日同
시대야 천년 멀리 떨어졌어도 / 相去曠千載
오호라 마음속에 느껴지누나 / 嗚呼感予衷
머리카락 대와 같이 곤두서나니 / 毛髮竪如竹
늠름하게 영풍이 불어오누나 / 凜凜吹英風
《지북우담》

오령묘(五靈廟) 《명시종》에 이르기를, “조서가 일찍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어 가던 중 오령묘를 지나면서 제시(題詩)하였다.” 하였다. [조서(曺庶)]

마을의 남쪽 북쪽 서글프게 비 오는데 / 村南村北雨凄凄
옛 묘에 바람 불어 버들은 나직하네 / 古廟靈風楊柳低
십 리의 강산에 졸면서 지나갈 제 / 十里江山和睡過
-《명시종》에는 ‘和睡過’가 ‘看枕上’으로 되어 있다.
깊숙한 대숲에서 낮닭이 우는구나 / 竹林深處午鷄啼
《열조시집 및 명시종》

회포가 있어서[有懷] 《명시종》에 이르기를, “정희량의 관작과 향리는 미상이다.” 하였다. [정희량(鄭希良)]

내가 권씨 아들들을 좋아하여서 / 我愛權氏子
어려서부터 서로 종유하였네 / 相從自結髮
큰형님은 의기를 품고 있었고 / 伯也負意氣
둘째 형은 기골이 호협하였지 / 仲也俠奇骨
나는 항상 그 사이에 의지하고서 / 吾常倚其間
세 발 달린 솥같이 우뚝 섰었지 / 屹立而鼎足
지난날에 서로 간에 호기 다투며 / 宿昔互爭霸
시와 술 자랑하며 서로 맞섰지 / 詩酒作勍敵
뜻 온전히 지키기가 어려웁기에 / 決志恐難全
칼날 갈며 서로 굳게 지키었었지 / 斂刃各堅壁
지금에는 셋이 각자 떨어져 있어 / 今也吳蜀魏
긴 강물이 우리 사이 갈라놓았네 / 長江限南北
형체 모습 이미 모두 적막해져서 / 形影已寂寞
꿈속서도 서로 멀어 아득만 하네 / 魂夢亦緬邈
그리우나 그 모습을 볼 수 없기에 / 思之不可見
홀로 서서 벌목편을 노래 부르네 / 獨立歌伐木
《열조시집》

만가(輓歌) [정희량]

뜬 인생은 한 차례의 헛된 꿈인데 / 浮生一虛夢
온 세상 사람 모두 그걸 모르네 / 擧世皆未覺
허공 중에 흩날리는 저 버들개지 / 靡靡空中絮
이리저리 따로따로 흩어지누나 / 東西互飄泊
마치 산에 깔리는 저 구름 같아 / 譬如歸山雲
늦고 빠름 분분하여 서로 틀리나 / 徐疾紛相錯
해 저물면 깨끗하여 자취가 없고 / 日暮澹無踨
새들 모두 돌아가면 하늘 텅 비네 / 鳥沒天寥廓
내 알겠네 몽매한 자 맘 슬퍼하고 / 乃知昧者悲
지인은 속박 굴레 벗어나는 걸 / 至人脫羈縛
솔숲 사이 잣나무들 무성도 하니 / 深松間茂柏
지하에서 틀림없이 서로 즐기리 / 地下正相樂
버려둔 채 다시는 말하지 말라 / 捐棄勿復道
하늘과 땅도 끝낸 녹는 거라네 / 天地會銷鑠
《상동》

밤비[夜雨] [정희량]

구의산 아득하고 초 땅 구름 푸르른데 / 九嶷嵯峨楚雲碧
빗속에서 새가 우는 상강의 저녁이네 / 鷓鴣啼雨湘江夕
우수수수 찬 소리는 어쩜 저리 처량한가 / 寒聲浙瀝何凄凄
대나무 숲 사이엔 슬픈 눈물 맺혀 있네 / 竹間哀淚懸餘滴
초사 노래 불러서 제자의 혼 부르니 / 楚些爲招帝子魂
달과 바람 한스러워 하늘 역시 우누나 / 月恨風愁天亦泣
돌아가지 못한 채 외론 배서 보내는 밤 / 孤帆一夜滯未歸
먼 곳서 온 나그네 흰 머리털 자라나네 / 遠客蕭蕭生白髮
《상동》

가을날에 바라보다[秋望] 2수(二首) [정희량]

비 내리다 날 개이자 가을빛 짙은데 / 秋光濃淡雨復晴
짙푸른 바다에는 파도조차 일지 않네 / 海波不動含深綠
모래밭은 평평한데 구름은 높고 낮고 / 平沙若剪雲嵯峨
기러기 등 비친 석양 끊어졌다 이어지네 / 鴈背斜光斷復續
서풍 불어 기러기들 물가 돌에 내리자 / 西風吹影落魚磯
묵지에서 글자가 새로이 생겨나네 / 字字新出臨池墨
벼와 기장 익은 곳에 새그물이 많은 탓에 / 稻粱離離網弋多
갈대꽃 향해 가서 깊숙한 곳 깃드누나 / 急向蘆花深處宿

나루 머리 단풍나무 서리 처음 내리더니 / 渡頭楓樹霜初結
바닷바람 불어와서 붉은 피가 맺히었네 / 海風吹滴猩猩血
가을빛은 아래위에 거울처럼 평평하고 / 秋光上下鏡面平
푸른 광채 한 조각 유리알처럼 맑네 / 淸光一片琉璃徹
모래밭서 졸던 새는 홀연 놀라 날아가고 / 沙頭眠鷗忽驚起
돛단배는 빨리 가 흰 물결이 빤짝이네 / 客帆飛去波明滅
안개와 물 창망한데 목동들은 돌아가고 / 煙水蒼茫野牧歸
몇 가닥 피리 소리 달 뜰 무렵에 울려오네 / 數聲短笛吹新月
《상동》

강마을[江村] [정희량]

푸른 산 텅 비고 물가 바위 차가운데 / 靑山影空釣石寒
바다 어귀 가을빛 움킬 만큼 짙푸르네 / 海門秋色濃可掬
도롱이 걸친 어부 누운 채 안 놀라니 / 漁人帶簑臥不驚
모래밭 새 날려다간 되레 서로 뒤쫓누나 / 沙鳥欲起還相逐
뱃노래 부르면서 저녁 나절 돌아와 / 一聲欸乃及暮歸
마을에서 술 청하니 술이 막 익을 때네 / 南隣喚酒酒初熟
보슬보슬 가을비에 급히 그물 거둘 제 / 絲絲細雨急收網
한줄기 석양빛이 고목나무 걸려 있네 / 一抹斜陽掛枯木
《상동》

우연히 제하다 [정희량]

십 년 동안 칼 갈아서 되놈 평정하였건만 / 十年磨劍遠平戎
-《명시종》에는 ‘磨劍’이 ‘一劍’으로 되어 있다.
공훈 업적 쓸쓸하여 유랑 신세 탄식누나 / 勳業蕭條歎轉蓬
나쁜 기운 공중 쌓여 먹과 같이 구름 검고 / 瘴氣橫空雲似墨
-《명시종》에는 ‘橫空’이 ‘曉來’로 되어 있다.
깎아지른 듯한 산엔 눈이 쌓여 하얗구나 / 湖山如削雪爲峯
-《명시종》에는 ‘湖山如削’이 ‘山容霽後’로 되어 있다.
땅은 용혈 맞닿아서 비가 자주 내리고 / 地連龍穴天多雨
문은 바다 마주해 한낮에도 바람 부네 / 門對鯨波晝亦風
몇 번이나 친구들이 계수음을 읊었던가 / 幾被故人吟桂樹
객창에서 쓸쓸하게 돌아가는 기럭 보네 / 客牕落莫傲歸鴻
《열조시집 및 명시종》

변경에서 [정희량]

객창이라 유독히도 가는 세월 아깝나니 / 客牕偏惜歲華殘
갈대꽃 쓸쓸하고 산에는 눈 가득하네 / 蘆荻蕭蕭雪滿山
변방 밖엔 바람 거세 새매 깃은 굳건하고 / 塞外風高鷹翮健
진영 앞엔 구름 일어 피리 소리 차가웁네 / 陣前雲起角聲寒
《열조시집》

부질없이 쓰다[漫書] [정희량]

압록강은 띠와 같아 유유히 흐르는데 / 鴨江如帶去悠悠
세월은 소리 없이 강물 따라 흘러가네 / 歲月無聲暗逐流
변방 하늘 아득하여 보루에선 구름 일고 / 萬里胡天雲出塞
젓대 소리 한 소리에 나그네 누 오르네 / 一聲羌笛客登樓
긴 바람 불어오자 연산에는 비 내리고 / 長風吹送燕山雨
외론 기럭 돌아오자 들판에는 가을 드네 / 斷鴈歸來鶴野秋
술잔 놓고 낯설은 타향 땅을 노래하다 / 對酒却歌鄕國異
외로운 성 지는 해에 홀로 머리 긁적이네 / 孤城落日獨搔頭
《상동》

한강루에 올라서[登漢江樓]. 장 황문(張黃門)의 운을 차운하다. 2수(二首) [박원형(朴元亨)]

먼 산은 눈썹처럼 가로누웠고 / 遠岫橫如黛
들판은 푸르른 풀 평평하구나 / 芳郊綠漸平
돌아가는 까마귀는 석양빛 받고 / 歸鴉飜夕照
우는 새는 맑은 봄날 조잘대누나 / 啼鳥哢春晴
잠시 동안 사귀는 게 즐거웁건만 / 暫得新知樂
도리어 이별의 한 생기게 하네 / 還敎別恨生
관산 멀어 만리 길을 가야 하나니 / 關山逾萬里
어디에서 연경 쪽을 바라보려나 / 何處望燕京

봄빛은 이제 한창 흐드러진데 / 春光方浩蕩
푸른 기운 도는 산엔 부슬비 오네 / 嵐翠轉霏微
하얀 물결 부채에 어른거리고 / 雪浪搖歌扇
물가 난초 향내음 옷에 스미네 / 汀蘭襲舞衣
물고기는 때때로 뛰어오르고 / 素鱗時潑潑
날랜 제비 여기저기 날아다니네 / 輕燕已飛飛
경치 물색 보면은 이와 같으니 / 景物看如此
되도록 천천히 돌아가소서 / 從敎緩緩歸
《열조시집 및 명시종》

대동강을 건너면서[渡大同江]. 차운하여 짓다. [박원형]

황제 조서 전하고서 가는 길 재촉타가 / 遠傳丹詔促行裝
잠시 동안 사신 행차 대동강 가 머물렀네 / 暫星槎浿水陽
강 포구엔 눈 녹아서 봄기운이 동하는데 / 江浦雪消春意動
역참에는 해 따뜻해 나그네 회포 기네 / 郵亭日暖客懷長
한 잔 술로 좋은 시절 보낼 수가 있으니 / 一杯且可酬佳節
만리 길에 고향 생각 애써서 하지 마소 / 萬里無憶故鄕
들 넓어 하늘 낮고 산은 그림 같아서 / 野闊天低山似畫
시상 잠겨 저절로 아득한 데 빠져드네 / 不禁詩思入蒼茫
《상동》

양덕역(陽德驛) [신숙주(申叔舟)]

머나먼 북새에서 돌아오느라 / 北塞歸遠途
천리 길에 언덕과 골짝 건넜네 / 千里度陵谷
날 저물어 양덕역에 투숙해 보니 / 日暮投陽德
역의 집들 반쯤은 초가집이네 / 館宇半茅屋
살랑바람 마른 나무 가지에 불고 / 輕風吹枯枝
짤막한 담 산기슭을 의지해 있네 / 短垣依斷麓
비 그치자 나직하게 구름 깔리고 / 雨歇行雲低
산 깊어서 노루 우는 소리 들리네 / 山深聽鳴鹿
오랫동안 앉았자니 맘 쓸쓸한데 / 坐久正蕭然
시내에는 차가운 옥 달려가누나 / 淸溪走寒玉
멀리 온 나그네라 잠 못 이루고 / 遠客自無寐
종놈 불러 꺼져 가는 촛불 돋우네 / 呼童剪殘燭
《열조시집 및 명시종》

권 정경(權正卿)에게 부치다 [신숙주]

동쪽 끝 천리 멀리 와 있는 사이 / 東極來千里
변방 성에 달이 두 번 둥그러졌네 / 邊城月再盈
강 건너엔 모두 되놈 부락들이고 / 隔江皆虜聚
땅 물으니 오랑캐의 이름 반이네 / 問地半胡名
북소리에 연이어진 산이 울리고 / 鼙鼓連山動
모래 바람 얼굴을 스치며 부네 / 風沙拂面生
오랑캐를 달랠 계책 글러졌는데 / 和戎謀已拙
귀밑머리 희어져서 눈꽃이 폈네 / 兩鬢雪花明
《열조시집》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시를 차운하다. [신숙주]

잔치 열린 누 오르자 멀리 보이고 / 綺席登樓迥
봄 강에는 푸르른 물 흘러가누나 / 春江碧玉流
이른 매화 물굽이서 향기 풍기고 / 早梅香澗曲
꽃다운 풀 물가에 가득 자랐네 / 芳草滿汀洲
손님과 주인 모두 즐거웁기에 / 賓主歡情洽
강과 산에 기쁜 기운 떠오르누나 / 江山喜氣浮
좋은 봄날 모름지기 술에 취하고 / 良辰須酩酊
다시 지체하는 것을 애석해 마소 / 莫惜更遲留
《명시종》

한강루에 오르다 2수(二首) [권남(權擥)]

남쪽 누각 올라 멀리 바라보다가 / 南樓初縱目
난간 아래 긴 강물을 바라보누나 / 檻外俯長流
매화꽃 진 언덕에는 눈 다 녹았고 / 雪盡落梅塢
봄풀 자란 물가에는 봄이 깊구나 / 春深芳草洲
호수 빛은 맑아서 일렁거리고 / 湖光晴灎灎
산기운은 따스해서 피어오르네 / 山氣暖浮浮
사신 따라 올라와서 바라다보니 / 使節陪登眺
석양빛이 다시금 나를 붙잡네 / 斜陽更挽留

성 남쪽서 한 동이 술을 마시고 / 城南一樽酒
마주 보니 저녁 산이 푸르르구나 / 相對暮山靑
작은 배는 앞 나루에 비끼어 있고 / 小艇橫前渡
외론 돛배 먼 물가에 멀어져 가네 / 孤帆落遠汀
강과 구름 끊어졌다 또 이어지고 / 江雲連復斷
주인과 손 취하였다 다시 술 깨네 / 主客醉還醒
붓 들자 용과 뱀이 꿈틀거리고 / 落筆龍蛇動
높은 흥취 아득한 데 빠져드누나 / 高懷入
《상동》

양화도(楊花渡). 진 급사(陳給事)의 운을 차운하다. [권남]

산정에다 술상 놓자 강가가 가까운데 / 山亭置酒近江湄
흥이 올라 옥 술잔을 자꾸만 기울이네 / 興至頻傾白玉巵
만리 길 돌아가는 나그네 한 많은데 / 萬里歸來多客恨
한때에 올라 보니 마음이 펴지누나 / 一時登眺得神怡
높은 이름 얼음 같은 지조인 줄 알았고 / 高標已覺氷霜操
새 곡조는 도리어 백설사를 듣누나 / 新調還聞白雪詞
떠나간 뒤 이 뒷날에 이곳 기억 떠오르면 / 北去他年如記憶
꿈속에서 응당히 먼 이곳 변방 날아오리 / 也應飛夢到遐陲
《상동》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차운하여 짓다. 3수(三首) ○ 《명시종》에 이르기를, “윤자운의 관직은 도승지이다.” 하였다. [윤자운(尹子雲)]

고헌께서 잠시 동안 머물러서는 / 高軒時暫駐
좋은 경치 함께 와서 보라고 하네 / 勝地許相招
시 가락은 읊조리는 사이 바뀌고 / 詩律吟邊改
시름 생각 술 취한 뒤 사라지누나 / 愁懷醉後銷
물가 핀 꽃 비 지나자 생기가 돌고 / 汀花經雨動
언덕 버들 바람 맞아 흔들리누나 / 岸柳受風搖
홀연히 중류에서 흥취가 일어 / 忽起中流興
봄 마음을 짧은 노에 부치었어라 / 春心付短橈

어느 곳서 먼 눈길이 다 끝나려나 / 何處窮遐矚
구름 속 산 백층이나 아득히 높네 / 丹梯近百層
양지쪽 언덕에는 봄풀 돋았고 / 陽陂先有草
음지쪽 골짝에도 얼음 녹았네 / 陰壑已無
좋은 경치 때때로 서로 이끄니 / 美景時相引
시 회포는 저녁 돼도 그대로이네 / 風懷晩向仍
손님 주인 좋은 우호 이루려면은 / 欲成賓主好
술 마시고 시 읊어야 그렇게 되리 / 觴詠正堪憑

보이는 곳 어디에고 풍광 좋은데 / 風光觸處好
봄기운은 바라보는 속에 흐리네 / 春氣望中微
산 깨끗해 그림같이 색깔 진하고 / 山淨濃如畫
강 깊어서 푸르름이 옷에 물드네 / 江深綠染衣
꿈길은 나비 따라 어지러웁고 / 夢隨蝴蝶亂
마음은 구름 따라 날아가누나 / 心逐野雲飛
인간 세상일 말하기 어려웁거니 / 人世難開口
술에 흠뻑 취하여서 돌아가리라 / 惟須倒載歸
《상동》

종릉(鍾陵) -《명시종》에는 ‘종령(鍾靈)’으로 되어 있다.- 의 산거시(山居詩)에 화답하다 2수(二首) ○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조선의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 2권은 어느 사람이 지었는지 모르는데, 시가 몹시 천박하여 볼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매월당은 김시습의 호이다. [김시습(金時習)]

인간들의 변하는 꼴 비단보다 얇거니 / 人間變態薄於紗
돌아와서 푸른 놀 속 눕는 것이 맞도다 / 端合歸來臥□□
병든 매미처럼 늙어 이파리 속 숨어들고 / □□病蟬藏翳葉
가을 나비 인생이라 뜬 배에 몸 부치네 / 人生秋蝶寄浮槎
바람 앞엔 후두둑 솔방울 떨어지고 / 風前細細飛松子
구름 밖엔 우수수 계수 꽃이 지누나 / 雲外毶毶落柳花
도인은 이슬 먹고 산다고 말을 마라 / □□道人嚥沆瀣
봄비 오자 바위 곁에 참깨를 심는다네 / 巖邊春雨種胡麻
《열조시집》

호랑나비 쌍쌍이 약초밭 위 나르고 / 蛺蝶雙雙飛藥畦
-《명시종》에는 ‘飛’가 ‘舞’로 되어 있다.
산새들은 대 울타리 서쪽에서 지저귀네 / 山禽饒語竹籬西
-《명시종》에는 ‘薔薇架架采登梯’로 되어 있다.
한 떨기 구기자는 이제 막 꽃 활짝 피고 / 一叢枸杞花初遍
다섯 잎새 인삼은 이제 막 잎 벌어졌네 / 五椏人參葉初齊
푸르른 대숲 속선 사슴이 졸고 있고 / 翠竹林中香麝睡
가시나무 가지 위선 두루미 울고 있네 / 紫荊枝上畫眉啼
천 산에 지난밤에 소리없이 비 오더니 / 千峯昨夜疏疏雨
남쪽 시내 범람하고 작은 시내 물 불었네 / 泛濫南溪漲小溪
-《명시종》에는 ‘不分南溪漲入溪’로 되어 있다.
《상동 및 명시종》

회소곡(會蘇曲)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7월 보름에 신라의 유리왕(儒理王)이 왕녀(王女)들에게 각자 6부(部)의 아녀자들을 거느리고 너른 뜰에서 길쌈을 하게 하고는, 8월 보름에 짠 것을 조사해서 진 편이 술상을 차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서로 더불어서 가무(歌舞)를 즐기고 백희(百戱)를 베풀었는데, 이를 가배(嘉俳)라고 하였다. 이때 진 편의 여자들이 일어나 춤을 추면서 ‘회소(會蘇)’라고 노래 불렀다. 그 뒤에 사람들이 그 소리를 인하여 노래를 지었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

회소회소 하면서 회소곡을 부르니 / 會蘇曲會蘇曲
서녘 바람 널따란 마당으로 불어오고 / 西風吹廣庭
밝은 달은 화려한 집에 가득 비치네 / 明月滿華屋
왕녀가 윗자리에 앉아 물레 돌리자 / 王姬壓坐理繅車
여섯 마을 아녀자들 많이도 모이었네 / 六部女兒多如簇
네 광주린 찼는데 내 광주린 비었다고 / 爾筐旣盈我筐空
술 거르고 야유하며 서로 웃고 즐기누나 / 釃酒椰楡歌相逐
한 여자가 탄식하매 일천 집이 기쁘거니 / 一婦歎千室歡
사방 사람 부지런히 길쌈을 하게 하네 / 坐令四方勤杼軸
《열조시집》

황창랑(黃昌郞)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황창랑은 바로 비청랑(非淸郞)이다. 8세 때 신라의 왕이 백제 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백제로 가서 시장에서 칼춤을 추자, 이를 보기 위하여 시장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쌌다. 백제 왕이 그 말을 듣고는 기이하게 여겨 궁중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칼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를 인하여 백제 왕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러자 후대 사람들이 가면을 만들어 쓰고 그 춤을 형상하였는데, 이 사실을 사전(史傳)에서 상고해 보면 그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지금 그 춤을 추는 것을 보면 빙빙 돌면서 힐끗힐끗 노려보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 늠름하다.” 하였다. [김종직]

이 어떤 사람인가 이제 나이 칠팔세라 / 若有人兮方離齠
키는 석 자 못 되는데 어쩜 그리 웅걸찬가 / 身不三尺一何驍
평생토록 왕기를 스승으로 삼아서는 / 平生汪錡我所師
나라 위해 수치 씻어 마음 여한 없었다네 / 爲國雪恥心無憀
칼날이 목 겨누어도 다리를 떨지 않고 / 劍鐔向頸股不栗
칼날 심장 겨누어도 눈도 깜짝 안 하여 / 劍鐔指心目不搖
아아 임금 보기를 초개처럼 보았다네 / 嗟爾千乘如蓬蒿
《상동》

성모사(聖母祠)에서 비를 빌다 [김종직]

앞봉우리 사라지고 뒷봉우리 푸르르니 / 前峯已失後峯靑
병예가 비 바라는 백성 감동시키누나 / 屛翳掠人不解晴
그 누가 그리었나 오두가 삿갓 쓰고 / 誰畫遨頭一簑笠
비 가득한 마을에서 움트는 싹 보는 것을 / 滿村風雨看苗生
《상동》

화산기(華山畿) [김종직]

무덤가에 연리지 푸르고 푸르른데 / 塚上靑靑連理枝
행인들은 앞 다투어 화산기를 노래하네 / 行人爭唱華山畿
팥배나무 꽃이 피는 한식날이 왔는데 / 野棠花發當寒食
봄 혼은 몇 차례나 나비 되어 날아갔나 / 幾度春魂化蝶飛
《상동》

진산 상공(晉山相公)에게 답하다 [김종직]

마을 남쪽 북쪽에서 풍년 들기 비는데 / 村南村北祝㹠蹄
우거진 버들 숲엔 새들이 지저귀네 / 楡柳陰陰烏雀啼
태평성대 만나서 생활이 풍족하매 / 身遇太平生事足
석양녘에 단교에서 술 취한 이 부축하네 / 日斜扶醉斷橋西
《상동》

이 절도사(李節度使)가 진(鎭)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 [김종직]

큰 바닷가 누대에 올라 한번 굽어보니 / 鰲背樓臺一俯憑
만리 먼 바다 파도 푸르르고 맑구나 / 海波萬里碧千澄
태평스런 시절이라 용도책을 못 펼치고 / 太平未試龍韜策
가끔씩 꿩 쏘면서 죽원의 중 찾아가네 / 射雉還過竹院僧
《상동》

불국사(佛國寺) [김종직]

절집의 경내로 찾아와 보니 / 爲訪招提境
솔숲 사이 산빛이 무거웁구나 / 松間紫翠重
푸르른 산 한쪽에는 비 내리는데 / 靑山半邊雨
저물녘에 산사에선 종이 울리네 / 落日上方鍾
산승과의 이야기는 부드러웁고 / 語共居僧軟
나그네의 정취 따라 술잔 진하네 / 杯隨客意濃

술에 취해 대마루 위 쓰러진 채로 / 頹然一榻上
마주 보니 머리털이 듬성하구려 / 相對鬢髼鬆
《명시종 및 지북우담》

선사사(仙槎寺) [김종직]

내 우연히 선사사에 찾아 들르니 / 偶到仙槎寺
돌은 쓸쓸 나무들은 가을빛인데 / 巖空松桂秋
두루미는 신라 때의 일산을 펴고 / 鸜飜羅代蓋
용은 부처 하늘의 공 발로 차누나 / 龍蹴佛天幽
보슬비 속에 중은 장삼을 깁고 / 細雨僧縫衲
찬 강에 나그네는 배 저어 가네 / 寒江客艤舟
외로운 구름 서대초에 걸리어 있고 / 孤雲書帶草
바람 소리 못 머리에 가득도 하네 / 獵獵滿地頭
《지북우담》

기생에게 주다 [강혼(姜渾)]

구름 같은 머리 빗고 높은 누각 기대어 / 雲鬟梳罷倚高樓
쇠젓대를 비껴 들고 부는 손 가녀리네 / 鐵笛橫吹玉指柔
만리의 관산에 둥그런 달 떠오르자 / 萬里關山一
맑은 눈물 떨구면서 이주령을 부누나 / 數行淸淚落伊
《명시종 및 간재잡설》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차운하여 짓다. [이극감(李克堪)]

더딘 해 날 맑아서 한창 좋은데 / 遲日晴方好
따스한 봄바람은 살랑거리네 / 和風暖更微
산음의 계사를 쫓아서 하고 / 山陰追禊事
기수 가서 봄옷으로 갈아입누나 / 沂上換春衣
금 술잔에 가득 찬 술 맘껏 마시며 / 劇飮金巵滿
옥가루를 흩날리며 담소 나눌 제 / 淸譚玉屑飛
날랜 제비 뱃머리서 춤추며 날아 / 檣頭輕燕舞
고향으로 가고픈 맘 나게 하누나 / 有意惱人歸
《명시종》

고의(古意) [서거정(徐居正)]

바다 밑의 산호는 높이가 몇 길인가 / 海底珊瑚高幾丈
천년 동안 시험 삼아 천 길 그물 만들어서 / 千年試作千尋網
만 마리의 소에 매어 바다 속서 끌어 오니 / 萬牛挽出滄溟深
교룡들은 노호하고 천둥 벼락 내리치네 / 蛟龍怒號霹靂響
부상에는 해 잠겨서 큰 파도가 들끓고 / 扶桑日沈洪濤熱
광채 빛나 황금 대궐 찬란하게 비치누나 / 光華照耀黃金闕
계륜이야 본디가 거치른 사내여서 / 季倫本是麤男兒
금 철퇴로 내리치자 가루되어 눈과 같네 / 金椎一擊紛如雪
《열조시집》

춘일(春日) [서거정]

수양버들 움 돋고 매화꽃은 지는데 / 金入垂楊玉謝梅
작은 연못 봄물은 이끼보다 더 푸르네 / 小池新水碧
봄 시름과 봄 흥취 중 어느 것이 더 깊은가 / 春愁春興誰深淺
제비도 아니 오고 꽃도 피지 아니하네 / 燕子不來花未開
《상동》

즉사(卽事) [서거정]

작은 연못 동이 같아 물은 얕고 맑은데 / 小沼如盤水淺淸
부들풀은 자라나고 갈대는 싹 돋았네 / 菰蒲新荻芽生
물통을 이어 대어 냇물 끌어오는 거는 / 連筒引却前溪水
파초 길러 비 오는 소리 듣기 위해서네 / 養得芭蕉聽雨聲
《상동 및 명시종》

봄날을 상심하다 [신종호(申從濩)]

차 한 잔 마시자 졸음이 깨었는데 / 茶甌飮罷睡初
담 너머서 누가 부는 피리 소리 들려오네 / 隔屋聞吹紫玉笙
제비는 오지 않고 꾀꼬리도 떠나는데 / 燕子不來鸎又去
온 뜰 가득 붉은 꽃이 소리 없이 지누나 / 滿庭紅雨落無聲
《명시종 및 간재잡설》

부벽루에 오르다.[登浮碧樓] 차운하여 짓다. [허종(許琮)]

물가 풀은 깎은 듯이 평평도 하고 / 渚草平如剪
강 구름은 축축해서 날지도 않네 / 江雲濕不飛
저녁 노을 자리 위로 비치어 오고 / 餘霞飄綺席
새 물결은 이끼가 낀 바위 부딪네 / 新浪濺苔磯
옛 절에는 담쟁이가 벽에 붙었고 / 古寺蘿垂壁
어부 집은 사립문이 물가 가깝네 / 漁家水浸扉
눈앞에 펼쳐지는 몇몇 경치에 / 眼前多少景
마음 슬퍼 나그네는 떠나려 하네 / 惆悵客將歸
《명시종》

왕 황문(王黃門)의 ‘안흥으로 가는 도중에[安興道中]’ 시를 차운하다 [허종]

봄 경치 술과 같아 사람 정신 흐리는데 / 韶光如酒著人迷
부질없이 붓대 잡고 시를 지어 볼 제에 / 謾把霜毫取次題
산 남쪽과 산 북쪽에 봄비 잠시 그치니 / 山北山南春雨歇
숲 너머에 해 붉은데 산비둘기 우누나 / 隔林紅日鵓鳩啼
《상동》

봉산루에 오르다.[登鳳山樓] 차운하여 짓다. [허종]

홀로 난간 기대이자 쓴 모자 삐뚜른데 / 獨倚彫欄帽影斜
객중에 귀밑머리 이미 쇠해 하얘졌네 / 客中衰鬢已非鴉
두견새 울음소리 소리마다 애닯나니 / 不禁杜宇聲聲苦
동풍 속에 먼저 핀 꽃 다 지도록 울어 대네 / 啼盡東風第一花
《상동》

송림(松林)의 만조(晩照). 차운하여 짓다. [허종]

뽕나무 속 한 마을에 석양빛 희미한데 / 一村桑柘夕陽微
봄풀은 자라났고 버들개지 흩날리네 / 芳草叢生柳絮飛
난정에서 수계할 때 이미 지난 뒤인데도 / 已過蘭亭修禊後
바람 차서 봄옷으로 갈아입지 못하였네 / 風寒猶未着春衣
《상동》

소곶관(所串館)으로 가는 도중에 즉사(卽事)로 읊다. 차운하여 짓다. 2수(二首) [허종]

몇 그루 버드나무 다리 곁에 서 있어서 / 數株官柳野橋傍
날리는 버들개지 말발굽을 스치누나 / 飛絮紛紛撲馬香
강에 비 내리려 해 구름은 어둑한데 / 江雨欲來龍氣黑
강바람 불어와서 서늘하기 그지없네 / 水風吹作十分涼

강남 땅 대숲 속에 내 집이 있건마는 / 家在江南水竹村
새 울고 꽃 지는데 사립문 닫혀 있네 / 鳥啼花落掩柴門
해마다 이쪽저쪽 분주하게 떠도나니 / 年年奔走東西路
어찌하면 잠시나마 한곳에 머물려나 / 坐席何由得暫溫
《상동》

시구[句] [허종]

나는 새 저 너머로 봄은 져가고 / 春歸飛鳥外
멀어지는 돛배 안에 하늘은 넓네 / 天闊落帆中

보슬비에 나무는 온통 젖는데 / 細雨全沈樹
외론 성에 연기가 반쯤 걸렸네 / 孤城半帶煙

동풍 불자 과만수 불어오르고 / 東風瓜蔓水
석양 속에 죽지가의 노래 들리네 / 斜日竹枝歌

바람 급해 양의 뿔을 후려 때리고 / 風急搏羊角
물결 쳐서 기러기 떼 놀라 나누나 / 波飜起鴈群

다리에는 날 맑아서 그물 말리고 / 官橋晴曬網
나루터엔 날 저물어 배 매여 있네 / 野渡晩維舟
《이상 모두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의고(擬古) [성현(成俔)]

오늘 벌인 이 좋은 잔치 모임에 / 今日良宴會
훌륭한 손님 모여 대청이 찼네 / 嘉賓滿高堂
맛난 안주 자개상 위에 넘치고 / 綺肴溢彫俎
좋은 술은 금 술잔에 철철 넘치네 / 美酒盈金觴
좌우에 늘어선 예쁜 기생들 / 左右燕趙姬
아리따운 눈썹에다 맑은 눈이네 / 眉目婉淸揚
붉은 현줄 흰 팔뚝에 비치이는데 / 朱絃映皓腕
줄지어 앉아서는 곡을 타누나 / 列坐彈宮商
수레바퀴 돌듯 세월 흘러가면은 / 流年雙轉轂
어느덧 머리카락 희어지리니 / 倏忽鬢已霜
서로 간에 만났으니 즐기면 그만 / 相逢且爲樂
비분강개할 필요가 뭐가 있으리 / 何用苦慨慷
김씨 장씨 마침내 어떻게 됐나 / 金張竟何許
꾸역꾸역 북망산에 가지 않던가 / 纍纍歸北邙
《열조시집 및 명시종》

목면사(木綿詞) [성현]

강남 땅의 목화라서 빛깔 더욱 하얀 탓에 / 江南木綿色逾白
자리 위에 펼쳐 놓자 눈처럼 눈부시네 / 晴雪紛紛鋪簟席
삐걱삐걱 소리 내며 씨아를 돌린 다음 / 小機搖作鴉櫓聲
활로 곱게 타내니 가을 구름 쌓이네 / 軟弧彈罷秋雲積
아리따운 새악시 밤에 앉아 매만지니 / 殷勤小婦坐夜闌
바람에 날리는 솜 머리 위에 내려앉네 / 風吹紛絮縈烏鬟
뻣뻣한 실 물 축이며 길쌈질 재촉할 제 / 絲僵水澁機杼促
찰칵찰칵 북 보내는 손가락 시려오네 / 軋軋輕梭玉指寒
애간장이 끊어져서 수심 금키 어려운데 / 肝腸欲絶愁難絶
외로운 등 깜빡대며 가물가물 조는구나 / 孤燈閃閃光明滅
반은 잘라 애기 옷을 만들어서 입히고 / 半將裁剪小兒衣
반은 잘라 금미에 간 낭군에게 부치리 / 半將裁剪寄金微
새벽 밝아 오건마는 잠을 못 이루는데 / 銅壺催曉眠不得
시간은 점점 흘러 비단 장막 밝아 오네 / 淚水點點明羅幃
《열조시집》

옛곡[古曲] 《명시종》에 이르기를, “성간의 관작과 향리는 미상이다.” 하였다. [성간(成侃)]

용문의 백 년 묵은 저 오동나무 / 龍門百年桐
몇 날이나 뇌성벽력 깔보았던가 / 幾日凌霹靂
이를 켜서 거문고를 하나 만들어 / 裁爲膝上琴
끌어앉고 함지곡을 내 뜯어보리 / 宛抱咸池曲
큰소리로 노래하며 한번 튕기자 / 高歌試一彈
한밤중에 산 귀신이 눈물 흘리네 / 中夜山鬼泣
군자의 행실 역시 이와 같나니 / 君子亦如此
관 덮으면 그제야 일 끝나는 거네 / 蓋棺事
《상동》

전부행(田父行) [성간]

꿩은 짝을 지어 날고 풀은 몹시 푸르른데 / 隴雉雙飛草深碧
언덕 위에 앉은 노인 길게 탄식 내뱉누나 / 隴上老人長歎息
나의 나이 금년이면 얼추 일흔 되는데 / 我生今年七十餘
손과 발엔 못박히고 얼굴에는 주름졌네 / 手脚腁胝面黧黑
아들딸 시집 장가 어느 때나 보내려나 / 男婚女嫁知幾時
짧은 옷 해진 적삼 무릎 겨우 가리우네 / 短衣襤衫纔掩膝
지난날에 징집되어 변방 지역 떠돌다가 / 昔年召募度流沙
만리에서 돌아오니 살쩍 쇠해 눈과 같네 / 萬里歸來鬢如雪
창을 잡던 손으로 농사 다시 지으려니 / 殷勤荷戟還荷鋤
자갈밭 자갈돌에 소발굽 다 빠졌다네 / 石田磽确牛蹄脫
소발굽 다 빠져서 괜히 땀만 흘려대니 / 牛蹄脫兮空汗流
홀로 앉아 망연자실 이내 가슴 미어지네 / 獨坐茫然心斷絶
《상동》

나홍곡(囉嗊曲) [성간]

낭군이여 낭군이여 내 낭군이여 / 爲報郞君道
금년에는 오시려나 안 오시려나 / 今年歸未歸
강가에 봄풀 자라 푸르러갈 때 / 江頭春草綠
이 소첩의 애간장은 다 녹는다오 / 是妾斷腸時
《명시종 및 간재잡설》

어부(漁父) [성간]

몇 겹의 푸른 산에 몇 골짜기 안개인가 / 數疊靑山數谷煙
흰 갈매기 나는 물가 티끌조차 닿지 않네 / 紅塵不到白鷗邊
고기 잡는 늙은이는 무심한 이 아니어서 / 漁翁不是無心者
온 배 안에 서강 달을 그득하니 담고 있네 / 管領西江月一船
《간재잡설》

가을밤[秋夜] [백원항(白元恒)]

맑은 밤 초당에 비 이제 막 개었는데 / 草堂淸夜雨初收
반딧불은 부슬비에 젖어 날지 않누나 / 小雨寒螢濕不流
책상머리 홀로 누워 지난 일 생각는데 / 獨臥床頭思往事
풀벌레들 울어 대어 발 가득 가을이네 / 砌蟲啼一簾秋
《열조시집》

경주(慶州) 벽상(壁上)에 있는 시를 차운하다 [최응현(崔應賢)]

풍진 세상 돌아보니 몇 번이나 봄이었나 / 風塵回首幾番春
공문서 쌓인 앞에 백발이 새롭구나 / 案牘堆前白髮新
밤마다 숲 속 사는 꿈 자주 꾸건마는 / 夜半慣成林下夢
아침이면 또 그대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 明朝依舊未歸人
《상동》

대마도(對馬島)로 가는 배 안에서 밤중에 짓다 [김흔(金訢)]

외론 배에 홀로 눕자 자리 편치 않은데 / 獨泛孤篷臥未安
서녘 바람 불어 대어 저녁 조수 차가웁네 / 西風一夕晩潮寒
하늘에는 가을빛을 찾아봐도 아니 뵈고 / 海天秋色尋無處
도리어 반랑의 살쩍 위에 보이누나 / 却向潘郞鬢上看
《상동》

서강(西江)의 한식(寒食) [남효온(南孝溫)]

하늘 흐려 울 밖에는 저녁 한기 생기는데 / 天陰籬外夕寒生
한식철 샛바람에 들 물이 빛나누나 / 寒食東風野水明
배 안의 장사꾼들 끝없는 얘기 소린 / 無限滿船商客語
버들꽃의 시절이니 고향의 정일 거리 / 柳花時節故鄕情
《상동》

봉산루(鳳山樓). 동 내한(董內翰)의 시를 차운하다. [노공필(盧公弼)]

누각 올라 바라보자 모자 차양 삐뚤고 / 畫樓登眺帽簷斜
이끼 낀 벽 시 쓰자 군데군데 점 생기네 / 苔壁詩成字點鴉
그윽한 흥 막 이는데 하늘은 저물어서 / 幽興未闌天欲暮
드린 발에 비 뿌리고 오동꽃은 지누나 / 一簾疎雨落桐花
《명시종》

개성(開城) 태평관(太平館). 애 병부(艾兵部)의 시를 차운하다. [노공필]

석양질 때 말을 몰아 외로운 성 지나면서 / 斜陽策馬過孤城
그 당시에 화려했던 개경을 생각누나 / 想像當年玉作京
나라야 망했지만 산하는 그대론데 / 國破山河渾似舊
태평 와서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누나 / 時平民物不知兵
봄 깊은 옛 객관엔 기장이 자라나고 / 春深古館生禾黍
물 마른 연못에는 밭벼가 자라 있네 / 水涸荒池揷稻秔
지난 일들 유유하니 어디에다 물어보리 / 往事悠悠何處問
학 돌아간 화표에는 달빛만이 밝구나 / 鶴歸華表月空明
《상동》

개성관(開城館). 동규봉(董圭峯)의 시를 차운하다. [이행(李荇)]

끝없이 이어진 길 가고 또 갈 제 / 行行綿道路
날마다 바람 불어 곤혹스럽네 / 日日困風沙
골짝 뜨자 흐르는 물 마음 슬프고 / 壑悲流水
숲에 들자 저녁 새가 부러웁구나 / 投林羨暮鴉
겨울 다 가 봄날 오길 재촉하여서 / 窮冬催暖律
묵은 풀에 새싹이 막 돋으려 하네 / 宿草欲新芽
다시금 생각노니 내 고향 집에 / 更憶吾廬好
찬 매화꽃 몇 가지나 피었으려나 / 寒梅幾樹花
《상동》

임진강(臨津江)을 지나다 [이행]

임진에서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 臨津催早發
나루터를 물어 맑은 강으로 가네 / 問渡卽淸江
강 복판선 배의 노를 느리게 젓고 / 緩擊中流
올라갈 땐 배 천천히 끌고서 가네 / 徐牽上水艭
강물 차서 물속 고기 바위 틈 숨고 / 寒魚依石竇
아침 해가 뱃전을 내리 비출 제 / 曉日照篷窓
나그네가 기심 잊고 앉아 있음에 / 有客忘機坐
흰 물새들 짝을 지어 날아오누나 / 飛來白鳥雙
《상동》

녹봉 급사(鹿峯給事)에게 답하다 [이행]

총총히 돌아가는 옷소매 못 당기고 / 歸袂悤悤不可攀
이별하는 사이에 이내 혼만 녹누나 / 銷魂祗是黯然間
녹봉은 천 개의 산 저 너머 거기 있고 / 鹿峯正在千山外
사신 행차 반나절도 한가한 틈이 없네 / 鳳節全無半日閑
오늘 지금 시를 지어 이별하게 되었으니 / 今日預將詩作別
이 뒷날에 어찌 차마 달과 함께 돌아가나 / 他宵何忍月同還
이내 생에 다시금 모시기가 어렵거니 / 此生難復陪淸賞
하늘 속의 옥순 반열 창망히 바라보리 / 悵望雲霄玉筍班
《상동》

총수산(蔥秀山). 당 선생(唐先生)의 시를 차운하다. [이희보(李希輔)]

나그네 길 섣달에 떠나노라니 / 客行値殘臘
긴 길을 짧은 해가 재촉하누나 / 長程催短景
날 추워서 턱수염은 쉽게도 얼고 / 天寒鬚易氷
잎 떨어져 나무에는 그림자 없네 / 葉脫木無影
채찍 치며 안성역을 출발할 적에 / 揮鞭發安城
이슬 젖어 옷소매가 차가웁구나 / 露濕衣袖冷
구불구불 구름 시내 건너고 나니 / 迤邐度雲漢
높다란 고갯마루 만나게 됐네 / 邂逅逢峻嶺
생각노니 동 학사 그분께서는 / 緬懷董學士
전에 예서 조용하게 쉬었었다네 / 曾此憩敻靜
오뚝하니 서 있는 몇 자의 비석 / 突兀數尺碑
그 글 참말 아름답고 환히 빛나네 / 其文信蔚炳
지난 일들 부질없긴 뜬구름이니 / 往事浮雲空
몇 년 동안 이 경치를 버려두었나 / 幾年孤此境
이내 생은 참으로 다행스러워 / 此生眞自幸
사신의 행차가 또 오게 되었네 / 四牡又來騁
전현들의 뒤를 이어 시를 남기니 / 留詩繼前賢
신선과 속세 먼 걸 깨닫겠구나 / 頓覺仙凡迥
이내 재주 노둔한 게 괴로웁거니 / 而我苦駑緩
옛 훈계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네 / 古訓蒙不省
다행히도 시의 근원 접하여서는 / 何幸接詩源
사나운 물살 빨리 건너느라고 / 飛渡激奔猛
물가조차 엿보지를 못하였는데 / 涯涘不能窺
하물며 그 요령을 얻었으리오 / 況復得要領
무심히 양춘곡에 화답노라니 / 無心和陽春
마음만 한갓 절로 경경하구나 / 有懷徒耿耿
원컨대 남은 빛을 빌려 주어서 / 願言借餘光
내 마음의 어둑함을 깨뜨려 주소 / 破我心昏瞑
《상동》

당 수찬(唐修撰)의 ‘태평관에서 묵다가 술에 취해 밤에 일어나다.[夜宿太平館醉起]’ 시를 차운하다. [이희보]

시 웅대해 바다에는 파도가 일고 / 雄辭海生波
먹 술 취해 벽 위에는 까마귀 나네 / 醉墨鴉飜壁
우리 공 돌아가지 못하게 해서 / 無使我公歸
이 곳에서 좋은 손님 되게 하소서 / 於焉作佳客
《상동》

기자조(箕子操) [소세양(蘇世讓)]

하늘 몹시 포악하여 우리나라 돕지 않아 / 天疾威兮不祚我商
나의 두 눈 침침해져 햇빛을 볼 수 없네 / 目窅窅兮未見日光
왕께서는 착한데도 나는 좋은 재주 없어 / 王聖善兮我無良
나의 두 눈 감고파라 선왕께 부끄럽네 / 欲瞑我目兮羞我先王
아아 내 차라리 노예가 될지언정 / 吁嗟兮我寧爲奴兮
어찌 차마 거짓으로 미친 척이야 하겠나 / 寧忍發出狂
《상동》

동방오장(東方五章). 설 급사(薛給事)에게 답하다. [소세양]

아아 우리나라 동방 나라는 / 維我東方
산 있어서 푸르고 푸르른 데다 / 有山蒼蒼
물 있어서 드넓고도 깊기도 하네 / 有水泱泱
군자께서 이곳에 이르러 오니 / 君子戾止
빛나는 문장을 지니셨도다 / 維其有章

우리에게 좋은 손님 오시었으니 / 我有嘉賓
나의 마음 기쁘고도 즐거운 터에 / 我心則愉
나에게 옥으로 된 패를 주시네 / 我以佩琚

우리에게 좋은 손님 오시었음에 / 我有嘉賓
이미 공경하는 데다 오래 머물며 / 旣敬且久
나에게 옥으로 된 패를 주시네 / 我以佩玖

무엇으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나 / 何以報之
산초와 난초로다 보답하리라 / 報之以椒蘭
덕 있어서 향내음을 폴폴 풍기매 / 有德斯馨
오로지 길게 길게 영탄하누나 / 唯以永嘆

무엇으로 그에 대한 보답을 하나 / 何以報之
마름풀과 연잎으로 보답하리라 / 報之以芰荷
옷 만들어 입음에 싫지 않으니 / 服之無斁
그 즐거움 참으로 어떠하리오 / 其樂如何
《이상 모두 상동》

총수산(蔥秀山). 당 선생(唐先生)의 시를 차운하다 [소세양]

내 나란히 푸른 산 향해 가노니 / 我竝靑山行
산길 갈 제 좋은 경치 참으로 많네 / 山行信多景
계곡 연못 맑아서 밑 다 보이고 / 淵潭淸見底
숲 나무들 푸르른 빛 교차하누나 / 杉檜翠交影
더구나 강 위에는 하늘 흐려서 / 況當江陰天
바람과 해 쓸쓸하고 싸늘한 데랴 / 風日凄以冷
쓸쓸하니 저녁 나절 비가 걷히자 / 蕭蕭晩雨霽
높다란 이 고개가 보이는구나 / 突兀見斯嶺
바위와 산 서로 끼고 합해져 있고 / 巖巒互迴合
산골짜긴 텅 비어서 고요만 하네 / 洞壑極沖靜
마치도 그림 병풍 편 것 같으니 / 有如畫圖開
단청 칠해 환하게 할 필요 없으리 / 不用丹靑炳
지난날에 동 학사 그분께서는 / 曩時董學士
좋은 경치 유람하며 진경 보았네 / 探情得眞境
이 곳 경치 보고서는 마음 즐거워 / 眷玆心賞諧
줄줄이 시구 지어 읊어대었네 / 更將文字騁
지금에도 맑은 풍채 늠름하여서 / 至今凜淸風
세월 오래 지난 것을 못 깨닫겠네 / 不覺歲月迥
그분 마음 아는 사람 마침 있어서 / 賞音會有人
두 분 사신 다시 와서 유람하시네 / 二妙復來省
양춘곡을 뒤 이어서 화답을 하니 / 陽春一繼和
필력이 굳세고도 웅걸차다네 / 筆力肆豪猛
못난 내가 그 뒤에 끼이게 되어 / 小子忝後塵
성대한 일 맘속으로 이미 알았네 / 盛事心已領
지난 일을 생각하면 느꺼웁나니 / 攬舊又感今
마음속의 회포 더욱 경경해지네 / 中懷益耿耿
읊조리며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 沈吟久佇立
앞 봉우리 어둑어둑해지려 하네 / 前峯欲含瞑
《상동》

한강(漢江)에서 사신을 모시고서 잔치하다 [소세양]

끊어진 길 강언덕을 끼고 돌았고 / 斷徑連崖轉
높은 누각 강물 향해 세워져 있네 / 高樓面水開
술과 안주 잔치 위해 차려져 있고 / 杯盤供宴賞
풍악 소리에 맑은 하늘 우레 울리네 / 歌鼓隱晴雷
강가 멀어 안개 낀 숲 아득도 한데 / 沙遠迷煙樹
조수 올라 물가 바위 파묻히었네 / 潮廻沒釣臺
강산 경치 이와 같이 빼어나기에 / 江山如許勝
사신께서 응당 여기 온 것이리라 / 應爲使星來
《상동》

녹봉 급사(鹿峯給事)에게 답하다 [소세양]

진중한 용문에 어찌 쉽게 오르리오 / 珍重龍門豈易攀
담소하는 사이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네 / 屢承淸誨笑談間
이 뒷날에 다시 만날 길 없음을 알겠고 / 極知後會終無地
가시는 길 한가롭지 않으리니 어쩔거나 / 其奈前程苦未閒
좋은 경치 바쁜 속에 지나쳐 버리고는 / 佳境摠爲忙裏過
좋은 시구 시낭 속에 담아서 돌아가리 / 好詩空貯槖中還
내일 아침 바라보면 구름과 산 멀어서 / 明朝悵望雲山遠
아득해진 신선 자취 노반에 있으리라 / 杳杳仙蹤隔鷺班
《상동》

양책관으로 가는 도중에[良策道中]. 차운하여 짓다. [소세양]

봄 구름 비 머금어 서늘해지려 하니 / 春陰釀欲凄迷
먼 길에 진흙 길을 갈 일이 걱정되네 / 長路愁衝滑滑泥
닫는 안개 좇는 바람 먼 산으로 돌아가고 / 奔霧追風歸遠岫
흐르는 물 들판 지나 앞 시내로 내닫누나 / 亂流經野赴前溪
작은 포구 드는 조수 평시처럼 올라오고 / 潮從小浦平時上
들판 나는 제비들 곳곳마다 낮게 나네 / 燕掠平蕪盡處低
발을 높이 거두고 산기운 바라보니 / 高捲緗簾望山氣
석양빛은 아직도 서쪽 산에 남아 있네 / 夕陽猶在短峯西
《상동》

태평관(太平館). 차운하여 짓다. [소세양]

눈길은 산을 따라 북쪽으로 이어지고 / 望眼山連北
마음은 달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누나 / 歸心月向西
나그네 혼에다가 이별의 한 있음에 / 覊魂與別恨
닭이 우는 오경에는 더욱더 수심 깊네 / 愁殺五更鷄
《상동》

처음 진달래꽃을 보고. 운강 수찬(雲崗修撰)의 시를 차운하다. [소세양]

새벽녘 바닷가에 노을 붉게 타는데 / 際曉紅蒸海上霞
모래 언덕 돌 절벽은 제멋대로 기울었네 / 石崖沙岸任欹斜
진달래꽃 봄소식을 전하고 싶은 맘에 / 杜鵑也報春消息
봄바람 속에 먼저 한 나무 꽃 피웠네 / 先放東風一樹花
《상동》

채지(採芝)에게 주다 [최숙생(崔淑生)]

푸른 산만 보이고 마을은 안 보이니 / 只見靑山不見村
어부가 무릉도원 찾을 길이 없구나 / 漁郞無路覓桃源
동풍에게 내 정녕히 부탁하여 말하노니 / 丁寧爲報東風道
날리는 꽃 따라서 동구문 밖 가지 마소 / 莫逐飛花出洞門
《간재잡설》

눈을 만나다[逢雪] [어무적(魚無跡)]

말 위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니 / 馬逢新雪
외로운 성 문 닫으려 하는 때이네 / 孤城欲閉時
차츰차츰 술기운이 사라져 가서 / 漸能銷酒力
시 읊는 나의 수염 얼려고 하네 / 渾欲凍吟髭
지는 해는 석양빛을 못 남기었고 / 落日無留景
깃든 새는 편안하게 가지 못 앉네 / 棲禽不定枝
파교에서 나귀 타고 가는 흥취를 / 灞橋驢背興
내 응당 옛사람과 기약하리라 / 與故人期
《명시종 및 지북우담》

조령(鳥嶺) [이효칙(李孝則)]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 秋風黃葉落紛紛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 / 主屹山高半沒雲
이십사교 다리 아래 오열하는 물소리를 / 二十四橋嗚咽水
일 년 새에 세 차례나 객중에서 듣누나 / 一年三度客中聞
《명시종》

긴 무지개 [정사룡(鄭士龍)]

둥그런 무지개가 맑은 물 위 걸렸는데 / 垂虹屈曲跨淸波
물풀의 향기 속을 도란대며 지나가니 / 藻荇香中笑語過
흡사하긴 삼백 척 길고 긴 송강에서 / 恰似松江三百尺
배를 대고 채릉가를 듣는 것 같네 / 檥船聞唱採菱歌
《상동》

답답함을 풀다 [정사룡]

뜻 내키어 책을 편 채 앉아 있다가 / 隨意攤書坐
외로이 읊조리며 석양빛 보네 / 孤吟對晩暉
강바람에 배 돛은 잔뜩 부풀고 / 岸風帆腹飽
강가 비에 갈대 싹은 오동통하네 / 洲雨荻芽肥
울 뚫어져 강 풍경 훤히 보이고 / 籬缺通江色
발 내려져 제비 날 때 걸리적대네 / 簾垂礙燕飛
누가 알리 봄나물 뜯는 계절에 / 誰知采蘭節
병중에 봄옷으로 갈아입는 걸 / 和病試春衣
《지북우담》

시구[句] [정사룡]

즐기는 곳이라고 말하지 말라 / 不謂交
뒤바뀌어 송별하는 정자 되리라 / 飜成送別亭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망원정(望遠亭). 차운하여 짓다. [김안로(金安老)]

그윽한 흥 사람 정신 끌리게 하니 / 幽興牽人惱
유람 길 먼 걸 어찌 애석해하리 / 遊蹄豈惜遙
옅은 구름 포구에 걸리어 있고 / 殘雲橫浦口
백로는 산허리를 비껴 나누나 / 飛鷺割山腰
강 잔잔해 배 닻줄은 풀어져 있고 / 江穩開輕纜
조수 올라 끊긴 다리 파묻혔는데 / 潮生沒斷橋
이국 땅서 돌아갈 생각 간절해 / 異鄕歸思促
마음은 대궐 향해 달리어 가네 / 心趁紫宸朝
《명시종》

한강에서 사신을 모시고 잔치하다.[漢江陪宴] 차운하여 짓다. [김안로]

인간 세상 단구 있다 믿지를 않았다가 / 人間不信有丹邱
한강에서 배를 타고 십주로 나아가네 / 漢水仙舟卽十洲
저녁 해 물에 잠겨 붉은 기운 출렁대고 / 夕日蘸波紅漾漾
강 안개 나무 닿아 푸른 기운 서리누나 / 江煙連樹翠浮浮
맑은 내에 시 떠올라 벽에다가 시를 쓰고 / 晴川有句還題壁
긴 피리는 누가 부나 다시 누에 기대네 / 長笛何人更倚樓
내일 아침 천상에서 먼 곳을 바라보면 / 天上明朝遙悵望
먼 변방 땅 이곳 유람 다시금 기억나리 / 遐陬能復記玆遊
《상동》

태평관(太平館). 차운하여 짓다. [윤인경(尹仁鏡)]

붉은 꽃잎 강언덕에 표표히 날리우고 / 紅惜花飄岸
푸른 버들 다리 위를 쓸면서 스치는데 / 靑憐柳拂橋
강바람은 삽상하게 멀리서 불어오고 / 江風吹颯颯
내리는 비 선창을 쓸쓸하게 때리누나 / 篷雨打蕭蕭
주렴 걷힌 누대에선 젓대 소리 들려오고 / 簾捲樓橫笛
산은 비어 골짝에선 나무하는 소리나네 / 山空谷響樵
사신이 이곳 경치 버려두고 떠나간 뒤 / 雙旌賞去
고개 돌려 바라보니 바다 하늘 아득하네 / 回首海天遙
《상동》

한강루에 오르다.[登漢江樓] 차운하여 짓다. [윤인경]

성 밖의 맑은 강 그 강가의 누대에 / 郭外澄江江上臺
올라보니 티끌 기운 벗어난 걸 알겠는데 / 登臨頓覺隔氛埃
먼 산에 구름 걷혀 비는 막 개이었고 / 遙山雲斂雨初霽
먼 포구 잔잔하여 조숫물 또 올라오네 / 極浦波平潮又來
밝은 달 사신들을 마중하는 듯하고 / 明月似迎星槎出
가벼운 돛 저녁 바람 맞으면서 내달리네 / 輕帆須趁晩風開
시절 좋고 경개 좋고 손님마저 훌륭하매 / 佳辰佳景兼佳客
흥취 타고 숲 정자서 술잔을 기울이네 / 乘興林亭倒手盃
《상동》

차운하여 오 부사(吳副使)와 작별하다 [김인손(金麟孫)]

이별할 제 모두 취해 오사모는 삐딱하고 / 臨分盡醉側烏紗
긴 길은 구불구불 해는 이미 기울었네 / 長路高低日已斜
봄비는 정이 많아 가는 길 질게 하고 / 好雨多情知滑道
봄바람은 이별 슬퍼 꽃잎을 흐트리네 / 輕風惜別解飛花
가는 봄 가는 손님 멈추게 하려 하나 / 留春縱欲兼留客
대궐과 집 그립다니 어쩌면 좋으리오 / 戀闕其如又戀家
한번 가면 중국 땅 멀어서 아득하니 / 一去茫茫遼薊遠
은하수 어느 곳서 신선 뗏목 물어보나 / 銀河何處問仙槎
《상동》

태평관(太平館). 차운하여 짓다. [심언광(沈彦光)]

봄새는 꽃가에서 지저귀구요 / 春鳥花邊啼
까마귀는 나무 끝서 밤을 묵는데 / 暮鴉樹頭宿
무슨 일로 멀리 와서 노니는 사람 / 何事遊遠人
이 좋은 밤 촛불 잡고 즐기지 않나 / 不秉良宵燭
《상동》

망원정시(望遠亭詩) [심언광]

흰 물새는 찬 물가에 기대어 있고 / 白雁依寒渚
푸른 나귀 작은 다리 건너가누나 / 靑驢度小橋
《정지거시화》

한강에서 사신을 모시고 잔치하다.[漢江陪宴] 차운하여 짓다. [허흡(許洽)]

푸르른 강 그 근원은 오대산 거기인데 / 綠水靈源自五臺
봄비가 강물 더해 티끌 기운 없어졌네 / 新添好雨絶塵埃
봄풀 자란 긴 강가로 배를 타고 다가가니 / 長洲芳草移船近
먼 물가의 갈매기들 노를 피해 날아오네 / 遠渚輕鷗避棹來
이 경치들 오늘의 흥 돋우기 위한 거니 / 景物盡供今日興
모름지기 회포를 이 속에서 펴소서 / 襟懷須向此中開
외람되이 끼는 거는 내 분수가 아니거니 / 猥參勝引非吾分
바위 앞 향해 가서 옥 술잔을 기우리리 -그 나라에 주암(酒巖)이 있는데, 그 아래에서 술이 흘러나온다. / 擬向巖前倒玉杯
《명시종》

시구[句] [허흡]

어촌 객점 해 기울자 먼 데서 피리 울고 / 漁店日斜遙笛起
바다 어귀 바람 급해 새벽 돛 펼쳐졌네 / 海門風急曉帆開
《정지거시화》

오 부사(吳副使)와 작별하면서. 차운하여 짓다. [김근사(金謹思)]

방공에는 해마다 얇은 비단 축나는데 / 方空歲歲蹙輕紗
책상 맡엔 향연이 한줄기 피어나네 / 半榻香煙一穗斜
만리 먼 길 오고 가는 나비의 꿈이고 / 萬里往來蝴蝶夢
온 봄 내내 피고 지는 진달래꽃이네 / 三春開落杜鵑花
먼 곳에서 피리 불 때 누가 고향 그리는가 / 吹殘遠笛誰懷土
좋은 시절 다 가는데 고향 집을 떠나 있네 / 過盡良辰不在家
해 저문 관산에는 구름이 격했는데 / 日暮關山雲樹隔
은하수 어느 곳에 신선이 탄 뗏목 대나 / 天津何處泊靈査
《명시종》

한강에서 놀다.[游漢江] 차운하여 짓다. [윤은보(尹殷輔)]

강가는 저절로 백 척 누대 이루었고 / 江上天然百尺臺
맑은 물결 맑아서 티끌 없는 거울이네 / 澄波無綠鏡無埃
아득히 먼 포구에는 배들이 오고 가고 / 茫茫極浦舟南北
까마득한 하늘에는 새들이 오고 가네 / 渺渺長空鳥去來
강가 풀은 정이 있어 읊는 밖에 푸르르고 / 汀草有情吟外碧
강언덕 꽃 뜻에 따라 바라보는 속에 폈네 / 岸花隨望中開
모시고서 잔치함은 내 분수에 넘친 거니 / 叨陪高會誠
흥을 타고 일백 잔의 술이나 마시려네 / 乘興還須倒百杯
《상동》

개성(開城) [황기(黃琦)]

흰 망아지 묶어 두기 어려운 탓에 / 白駒難自縶
푸른 눈이 다시금 자리 떠나네 / 靑眼更離筵
강과 바다 서로 간에 잊고 사는 곳 / 江海相忘處
연기와 물결 속에 해가 저무네 / 煙波欲暮天
지는 꽃잎 취한 소매 끝에 날리고 / 落花飄醉袖
꽃다운 풀 읊조리는 채찍에 드네 / 芳草入吟鞭
시 짓는 거야 참말 여사인 거고 / 翰墨眞餘事
공명이야 젊었을 때 바라는 거네 / 功名正妙年
《상동》

개성의 태평관. 차운하여 짓다. [김안국(金安國)]

온혜릉 황폐한데 우물물만 괜히 맑고 / 溫鞵陵廢井空
종제전 황량한데 이름만 남아 있네 / 種穄田荒但記名
옛 자취는 시대 따라 없어지지 아니하니 / 舊跡不隨時代滅
지는 해에 말 멈추고 마음 상해 하누나 / 停驂落日傷情
《상동》

중국 사신 장승헌(張承憲)의 ‘한강에서 놀다.[游漢江]’ 시를 차운하다. [신광한(申光漢)]

하늘 위 은하 근원 오대산에 떨어짐에 / 天上河源落五臺
누 앞의 맑은 모습 티끌 세상 격해 있네 / 樓前澄影隔塵埃
봄 다 지난 양화도엔 멀리서 배 돌아오고 / 楊花春盡帆歸遠
안개 걷힌 저도에는 물새들 날아오네 / 楮島煙消鴈影來
물색은 나그네를 따라 가지 않았는데 / 物色不隨遊子去
향기론 술 그대 위해 지금 막 열었노라 / 芳樽今爲使君開
삼한 땅의 좋은 경치 그 모두가 방장이니 / 三韓勝地皆方丈
다시금 선풍 빌려 술 한 잔 기울이네 / 更借仙風傾一杯
《열조시집》

계사년 삼월에 모동(茅洞)과 서산(瑞山)에게 부치다 2수(二首) [신광한]

지난해 봄 삼월달 초삼일 삼짇날에 / 去年三月初三日
제비 이미 돌아오고 꽃은 벌써 피었었지 / 燕已歸巢花已開
인사와 천시는 변하는 게 많거니와 / 人事天時多異態
이별 정과 봄 생각이 서로서로 재촉하네 / 別情春思重相催
앞마을과 뒷마을 다 별고가 없을 건데 / 前村後谷應無恙
함께 놀자 약속하고 어째서 아니 오나 / 舊約同游不來
모동의 풍류를 이을 수가 있을 거로 / 茅洞風流還可繼
선산이야 떠났지만 서산이 돌아오네 / 善山雖去瑞山回

삼짇날과 중구일은 해마다 오건마는 / 三三九九年年會
옛 약속은 남았는데 일은 홀로 글러졌네 / 舊約猶存事獨
꽃다운 풀 답청하는 날이 바로 오늘인데 / 芳草踏靑今日是
맑은 동이 흰 술을 옛 친구가 저버렸네 / 淸罇浮白故人
바람 앞의 제비 소리 가녀리게 들리고 / 風前燕語聞初嫩
비 내린 뒤 꽃가지 또한 보기 어렵네 / 雨後花枝看亦稀
모동의 장인이야 속되지가 않거니와 / 茅洞丈人多不俗
봄옷을 전당잡힐 뜻이 능히 없겠는가 / 可能無意典春衣
《상동》

직산(稷山)의 수령 민군(閔君)에게 부치다 [신광한]

찾아가서 고을 서쪽 언덕에서 마주하니 / 招尋相對縣西陵
하얀 해 영롱한데 얼음을 들이누나 / 白日玲瓏看納氷
술에 취해 돌아오니 모두가 꿈 같은데 / 被酒夜歸渾似夢
촌 마을에 때때로 베 짜는 불 켜지네 / 小村時點績麻燈
《상동》

삼각산(三角山)을 바라보다가 느낌이 있어서 짓다 [신광한]

외로운 배 올라타고 광릉 나루 떠나니 / 孤舟一出廣陵津
열다섯 해 동안이나 죽지 못한 몸이라오 / 十五年來未死身
나는야 정이 있어 청산 얼굴 알 듯하나 / 我自有情如識面
청산이야 그 어찌 예전 사람 기억하리 / 靑山寧憶舊遊人
《상동》

서사(書事) [신광한]

돌아갈 마음 들어 꿈은 절로 아득한데 / 歸思無端夢自迷
선생께선 지금 마을 서쪽에서 늙어 가네 / 先生今老小村西
집 둘러 핀 살구꽃 활짝 펴서 눈 같은데 / 杏花繞屋繁如雪
부슬부슬 봄비 속에 산새가 우짖누나 / 春雨霏霏山鳥啼
《상동》

저물녘의 풍경[暮景] [신광한]

숲나무는 빽빽하여 짙게 푸르고 / 樹密深濃翠
외론 연기 담박하여 구름 되누나 / 孤煙淡作雲
앞마을선 개 짖는 소리 들리고 / 前村聞犬吠
어둔 길은 풀밭을 갈라놓았네 / 暗路草中分
《상동 및 명시종》

한강에서 놀다.[游漢江] 차운하여 짓다. [임백령(林百齡)]

왕실은 천년토록 울타리가 되었거니 / 王室千年作翰藩
기쁘게도 사신 와서 칭송하는 소리 듣네 / 欣聞使節頌聲喧
누 오르자 모시고서 즐기도록 허락하고 / 登樓未捲陪歡賞
배를 타자 마음대로 떠들도록 버려두네 / 汎水還容接笑言
그물 걷는 어부는 욕심 많기 수달이고 / 擧網漁人貪似獺
배를 모는 어린놈은 재빠르기 원숭인데 / 操舟穉子捷於猿
머물러서 창주의 정취 느껴 보다가는 / 夷猶領得滄洲趣
되레 춘풍 맞으면서 고향쪽을 바라보네 / 還向春風望故園
《명시종》

한강(漢江). 차운하여 짓다. [이윤경(李潤慶)]

한강의 형승이야 동쪽 나라 으뜸인데 / 漢江形勝表東藩
사신이 누 오르자 풍악 소리 시끄럽네 / 使節登臨鼓吹喧
경치 대해 번번이 시 지어서 흥 부치고 / 對景每憑詩遣興
맘 통함엔 도리어 통역관 말 빌리누나 / 通情猶借傳言
기심 생각 잊으면 물가 노는 새인 거고 / 忘機自幸參沙鳥
세상 부침 따르면 울에 갇힌 원숭이네 / 隨世何殊束檻猿
고개 돌려 저 멀리 풍광을 바라보니 / 回首風光堪遠矚
봄비 와서 신록이 온 들판에 펼쳐졌네 / 雨催新綠遍郊園
《상동》

임진강(臨津江)에 배를 띄우다 [이찬(李澯)]

임진 나루 좋은 일이 전해 오거니 / 臨津傳勝事
멈춘 부절 신선 배와 비슷하구나 / 駐節似仙舟
연기는 모래밭 가 나무 가렸고 / 煙羃沙邊樹
바람은 물 위 나는 갈매기 도네 / 風廻水面鷗
담소하는 그 가운데 정 깊어지고 / 笑談情不淺
시와 술에 흥 거두기 어려웁나니 / 詩酒興難收
이역 땅서 어쩌다가 만났지마는 / 絶域萍蓬會
오늘의 이 유람을 잊지 마소서 / 無忘此日遊
《상동》

정몽주(鄭夢周)가 사절(死節)한 데 대한 시 2수(二首) [남곤(南袞)]

고려 말기 쇠하여서 태운이 성하자 / 麗季衰微泰運升
뭇 현인들 거기 붙어 모두 날아올랐네 / 群賢攀附總飛騰
오천자 그분께선 조용히 죽음 임해 / 從容就死烏川子
우리 조선 절의가 흥성해지게 했네 / 啓我朝鮮節義興

충성 의리 본디부터 민멸할 수 없는 건데 / 忠義由來不可湮
평상시에 이를 힘써 갈고 닦는 사람 없네 / 平時砥礪且無人
질풍 속에 꼿꼿한 풀 보기 더욱 어렵나니 / 疾風勁草尤難見
고려조의 충신 한 분 알아야만 하는 거네 / 須識高麗一介臣
《열조시집》

산속에 살다 [서경덕(徐敬德)]

화담 연못 가에 있는 초가집 한 채 / 花潭一草廬
깨끗해서 마치 신선 사는 데 같아 / 蕭洒類仙居
산빛은 마루 바짝 펼쳐져 있고 / 山色開軒近
냇물 소리 침상맡에 들려 온다네 / 泉聲到枕虛
동 그윽해 바람은 조용히 불고 / 洞幽風澹蕩
땅 궁벽져 나무들은 우거졌는데 / 境僻樹扶疎
그 가운데 소요하는 사람 있어서 / 中有逍遙子
첫새벽에 글을 읽는 소리 들리네 / 晨朝聞讀書
《명시종》

영통사(靈通寺)에서. 벽에 제한 시를 차운하다. [서경덕]

송계의 외길은 푸른 숲 속 뻗어 있고 / 松溪一路入靑林
구름 아래 절간은 한낮에도 어둑하네 / 陰下禪居晝亦陰
돌 부딪친 시냇물은 삼면을 감돌고 / 觸石泉流三面轉
하늘 기댄 산빛은 만 겹이나 깊숙하네 / 倚天山色萬重深
맑은 기쁨 아침부터 밤중까지 하고 싶고 / 淸歡眞欲朝連夜
좋은 시는 뒷날에 다시 잇기 어려우리 / 勝引應難後繼今
몇 판의 바둑 두며 담소하는 그 가운데 / 數局枯碁談笑裏
구름과 해 이미 서쪽 넘어간 줄 몰랐어라 / 不知雲日已西沈
《상동》

구 대행(歐大行)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신응시(辛應時)]

압록강 강가에서 떠나는 배 보내나니 / 鴨綠江頭送棹聲
동풍 속에 눈물 나는 이 정을 어찌하나 / 東風吹淚若爲情
인간 세상 이별 정에 오늘은 맘 상하거니 / 人間離別傷今日
천상의 그 모습은 이생에선 아득하리 / 天上音容隔此生
기럭 떠난 형포에서 먼 꿈은 놀라 깨고 / 衡浦鴈驚遠夢
봄 다 지난 동정에서 돌아갈 길 아득하네 / 洞庭春盡渺歸程
내 알겠네 먼 곳에서 서로 간에 그릴 적에 / 遙知萬里相思處
남두성은 기울고 조각달 밝을 것을 / 南斗橫斜片月明
《상동》

태평관. 구공(歐公)의 시를 차운하다. [박순(朴淳)]

만리 먼 곳 와서 노니 혼은 응당 끊어지고 / 來遊萬里魂應斷
홀로 푸른 하늘 보니 생각은 멀어지네 / 獨寄靑冥思更賖
하늘 넓어 초향으로 나그네 꿈 날아가고 / 天闊楚鄕飛客夢
길 다하여 봉해에다 신선 배를 머물렀네 / 路窮蓬海駐仙査
산에 닿은 성첩에는 구름 짙어 어둑하고 / 山連睥睨雲長瞑
봄 한창인 연못에는 꽃들이 피려 하네 / 春半池塘草欲花
발 밖의 석양빛 점점 사라져 가는데 / 簾外夕陽看漸沒
수심을 삭이려고 술 마시어 취하누나 / 消愁惟有醉流霞
《상동》

편수관(編修官) 황공(黃公)이 연도(沿道)에서 지은 시를 보여 주기에 시를 지어 바치다 [이이(李珥)]

한창 때의 사행 길을 내 일찍이 기억커니 / 丁年行役記吾曾
요동 계주 길고 긴 길 나그네가 되었었지 / 遼薊修客念憑
지나는 길가 있는 외론 객점 달 밝았고 / 歷歷道邊孤店月
흐릿한 하늘가서 이른 아침 등불 켰지 / 依依天上早朝燈
좁은 구석 처했으니 무슨 수로 벗어나나 / 身回蝸殼何由轉
아미 반열 다시는 들어갈 수가 없네 / 班入蛾眉不再能
옥서의 새 시에는 물색이 나눠짐에 / 玉署新詩分物色
먼 누대를 한 층 한 층 손으로 가리키네 / 遙臺指點一層層
《상동》

황공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이이]

긴 시내의 눈과 얼음 찬 모래 덮고 있는 / 長川氷雪覆寒沙
이런 날 수심 속에 변방 피리 소리 듣네 / 此日愁聞入塞笳
구름과 진흙 양쪽 이 자리서 나눠지니 / 兩地雲泥分席上
한 강의 남쪽 북쪽 거긴 바로 하늘가네 / 一江南北卽天涯
밤새도록 꾸었던 신선 꿈은 부질없어 / 徒勞永夜游仙夢
은하수의 관월사는 점점 더 멀어지네 / 漸遠明河貫月槎
보배로운 시편 지어 보내 주신 분에게 / 珍重詩篇兼贈處
부끄럽게 연석으로 좋은 시에 보답하네 / 媿將燕石報瓊華
《상동》

정사(正使) 황공(黃公)이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김첨(金瞻)]

달 지는 변방 성에 뿔피리 울리는데 / 月落關城鼓角鳴
사신 수레 새벽에 북경 향해 달려가네 / 星軺夙駕向神京
긴 강물은 예로부터 남과 북 나눴으니 / 長江自昔分南北
양쪽 땅에 지금까지 삶과 죽음 격했다네 / 兩地從今隔死生
변방 땅의 구름 얼어 가는 길 흐릿하고 / 接塞凍雲迷別路
겹겹 산에 쌓인 눈 가는 깃발 비추네 / 亂山晴雪照行旌
어떻게 견디려나 용만 객관 홀로 자며 / 那堪獨夜龍灣館
시름 속에 등불 대해 잠 못 드는 그런 밤을 / 愁對寒燈夢不成
《상동》

정사 황공과 이별하다 [고경명(高敬命)]

좋은 소식 서쪽으로 부쳐보낼 길 없는데 / 好音無路托西歸
마음은 신선 탄 배 뒤쫓아서 날아가네 / 心仙槎自奮飛
압록강 찬 물은 이별 눈물 보태지고 / 鴨水寒波添別淚
골악에 내리는 눈 옷 위에 점을 찍네 / 鶻岑晴雪點征衣
부질없이 부채를 소매 속에 간직하니 / 謾將便面藏懷袖
무슨 수로 모시면서 말고삐를 잡으리오 / 何計承顔御靮鞿
바닷가 못 벗어난 채 몸은 벌써 늙었으니 / 匏繫海濱身已老
한 백년의 외로운 몸 그 누구를 의지하나 / 百年形影欲誰依
《상동》

회포를 적다 [김굉필(金宏弼)]

한가로이 홀로 살며 오고 감을 끊은 채 / 處獨居閑絶往還
명월 불러 내 청빈함 비치게 할 뿐이네 / 只呼明月照淸寒
부탁노니 그대는 생애의 일 말을 말라 / 憑君莫話生涯事
만 이랑 흰 물결에 몇 겹의 산이로다 / 萬頃煙波數疊山
《지북우담》

연잎에 내리는 비 [최해(崔瀣)]

팔백 섬의 후추를 쌓아 둔 것을 / 胡椒八百斛
천고토록 어리석다 비웃는데도 / 千古笑其愚
어찌하여 녹옥으로 됫박 만들어 / 如何綠玉斗
종일토록 명주알을 헤아리는가 / 竟日量明珠
《간재잡설》

호당(湖堂)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다 [강극성(姜克誠)]

강에 해는 늦도록 뜨지를 않고 / 江日晩末生
아득하니 십리에 안개 깔렸네 / 蒼茫十里霧
노를 젓는 소리만이 들리어 올 뿐 / 但聞柔櫓聲
가는 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 / 不見舟行處
《상동 및 명시종》 ○ 《명시별재(明詩別裁)》에 이르기를, “심덕잠(沈德潛)이 말하기를, ‘당나라 무명씨(無名氏)의 「안개 짙어 사람은 아니 보이고, 은은하게 노젓는 소리 들리네.[煙昏不見人 隱隱數聲櫓]」라는 시구가 있는데, 새벽 풍경을 표현한 것이 모두 그림으로는 능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하였다.” 하였다.

옛 절에서 꽃을 보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 이르기를, “《조선시선(朝鮮詩選)》에는 정(婷)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이는 조선의 여자이다.” 하였고,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이르기를, “정의 시 한 수가 오자어(吳子魚)의 《조선시선》에 나오는데, 이에 대해 전수지(錢受之)가 말하기를, ‘이는 응당 조선의 여자이다.’ 하였다. 그러나 《조선채풍집(朝鮮采風集)》에도 정의 시를 수집해 기록하면서 정이란 이름 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라고 썼는데, 이는 동국(東國)의 존칭이니, 아마도 민간의 여자는 아닌 듯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월산대군은 덕종대왕(德宗大王)의 왕자(王子)이다. 그런데도 목재(牧齋)와 죽타(竹坨)가 모두 조선의 여자로 의심한 것은 그의 이름이 여자 이름 같아서이다.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

봄 깊은 옛 절에 제비들은 훨훨 날고 / 春深古寺燕飛飛
깊숙한 집 겹대문에 찾아오는 사람 적네 / 深院重門客到稀
내가 꽃을 보러 갈 땐 꽃이 한창 지는 때라 / 我正尋花花正落
꽃을 보러 갔다 되레 꽃 애석해 돌아오네 / 尋花還爲惜花歸
-《명시종》에는 ‘還’이 ‘飜’으로 되어 있다.
《열조시집 및 명시종》

소설당(小雪堂) [오시봉(吳時鳳)]

땅은 바로 경치 좋은 황강 땅이고 / 地卽黃崗勝
관직은 옥국처럼 한가한 데네 / 官如玉局閑
어언간에 소설날이 돌아왔기에 / 居然小雪日
소설 자로 편액을 내어 걸었네 / 喚作此堂顔
《지북우담》

정씨(鄭氏)의 연못 정자에서 놀다 [김정(金淨)]

주인께서 하늘 비밀 드러내어서 / 主人發天祕
창랑수 가에다가 마을 이뤘네 / 籬落成滄浪
외론 정자 물오리나 갈매기 같아 / 孤亭如鳧鷖
나를 싣고 물 가운데 떠서 있구나 / 載我浮中央
맑은 바람 모자 위에 불어서 오고 / 淸飆扇巾幘
푸르른 산 술잔에 비치이는데 / 山翠滴壺觴
물고기들 처마 그늘 아래 모이고 / 游魚聚簷影
버들개지 해당화 가지 걸리네 / 飛絮骨海棠
애오라지 느긋하게 노는 나그네 / 聊將倦遊客
한번 웃어 가는 세월 떠나보낼 제 / 一笑酬年光
우거진 만 줄기의 대나무들이 / 森森萬竿竹
으스스 상양을 몰고 오누나 / 颯畓驅商羊
물 위에는 어지러이 물거품 뜨고 / 鏡面亂浮沫
마름과 연 서로서로 기대어 있네 / 藻荇相扶將
조용하게 잔 물결은 찰랑거리고 / 須臾動漣漪
초목들은 석양 받아 빛을 내누나 / 草木耿斜陽
《열조시집》

용담(龍潭)에서 기도하다 [김정]

원숭이는 울고 새는 지저귀는데 / 猿號鳥復噪
사방 산에 어느새 날 저물었네 / 四山忽已暮
물가로 돌아와서 풀들을 보니 / 回汀搴杜若
잎새마다 차가운 이슬 맺혔네 / 葉葉霑涼露
그럭저럭 호숫가서 눈 붙이자니 / 聊就菰蒲眠
가을 소리 높은 나무 거기에 있네 / 秋聲在高樹
《상동》

시골집 [김정]

물이 많은 고을 이름 풍덕군인데 / 水鄕豐德郡
쓸쓸한 절 멀리 연기 속에 떠 있네 / 蕭寺遠浮煙
땅 평평해 마을 등불 가깝게 있고 / 地□村燈近
하늘은 물기운과 잇닿아 있네 / 天垂水氣連
《상동》

규중의 가을날[秋閨] [김정]

천산에는 낙엽지고 강물은 아득한데 / 木落千山江杳杳
기럭 나는 가을 하늘 구름은 아스랗네 / 秋空一鴈秦雲渺
빈 뜨락엔 달 밝아서 귀뚜리 소리 길고 / 空堦月皎蛩音長
풀은 이슬 젖어서 반딧불 빛이 적네 / 蔓草露滴螢光小
한밤중이 지나서 등불은 가물대고 / 耿耿殘燈夜半過
붉은 누각 서쪽으로 은하수 기우는데 / 紅樓西畔落星河
변방 보낼 옷 다 짓고 추워 잠 못 이룰 제 / 邊衣剪罷寒不寐
쌀쌀한 서풍 불어 시든 연잎 우누나 / 颯颯西風鳴敗荷
《상동》

나그네의 회포[旅懷] 《간재잡설(艮齋雜說)》에는 ‘강남(江南)’으로 되어 있고, 《지북우담(池北偶談)》에는 ‘강남춘사(江南春思)’로 되어 있다. [김정]

강남의 남은 꿈에 한낮에도 시름하니 / 江南殘夢晝懨懨
수심은 세월 따라 날로 날로 더해지네 / 愁逐年華日日添
제비들은 아니 오고 봄은 또 저무는데 / 鶯燕不來春又去
-《지북우담》에는 ‘雙燕來時春欲暮’로 되어 있다.
가랑비에 살구꽃은 아래로 축 처졌네 / 杏花微雨下重簾
《상동 및 명시종, 간재잡설, 지북우담》

여강(驪江) [최수성(崔壽城)]

해 저무는 푸르른 강물 위에는 / 日暮滄江上
날씨 차서 물결이 절로 이누나 / 天寒水自波
외로운 배 일찌감치 대어야 하리 / 孤舟宜早泊
밤이 오면 풍랑 응당 높아지리라 / 風浪夜應多
《명시종》

그림에 제하다 [최수성]

늙어 빠진 원숭이가 무리를 잃고 / 老猿失其群
저물녘에 마른 나무 등걸 올라가 / 落日古槎上
우두커니 앉아서는 꼼짝 안 하니 / 兀坐首不回
일천 산의 메아리를 듣는 것이라 / 想聽千山響
《지북우담》

이별하면서 남기다 [정지승(鄭之升)]

풀 가늘고 꽃 한가한 물가의 정자인데 / 細草閑花水上亭
-《명시별재》에는 ‘悵望溪亭夕照明’으로 되어 있다.
푸른 버들 그림 같아 봄 성을 가리웠네 / 綠楊如畫掩春城
나를 위해 양관곡을 부르는 이 하나 없고 / 無人爲唱陽關曲
오로지 푸른 산만 떠나는 걸 전송하네 / 惟有靑山送我行
《명시종 및 지북우담, 간재잡설》 ○ 《명시별재》에 이르기를, “심덕잠(沈德潛)이 말하기를, ‘정취가 어리어서 당나라 시인들의 작품과는 다른 맛이 있어 구별된다.’ 하였다.” 하였다.

젓대 소리를 듣다 [정작(鄭碏)]

멀리 있는 모래밭 가 사람을 보고 / 遠遠沙上人
-《명시종》에는 ‘遠遠’이 ‘迢迢’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백로인 줄만 알았네 / 初疑雙白鷺
바람을 맞으면서 젓대 불 적에 / 臨風忽橫笛
쓸쓸하니 맑은 강에 날이 저무네 / 廖亮江天暮
《지북우담 및 명시종》

벗이 산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임억령(林億齡)]

적막한 시골에 소미가 숨었는데 / 寂寞荒村隱少微
쓸쓸한 돌길이 사립문에 닿아 있네 / 蕭條石逕接柴扉
몸은 유수 같아서 세상에 나갔건만 / 身同流水世間出
꿈속에선 백구 되어 강가를 나네 / 夢作白鷗江上飛
산은 창문 에워싸고 구름은 스며들며 / 山擁客牕雲入座
비는 책상 들이치고 나뭇잎은 휘장 치네 / 雨侵書榻葉投幃
표연히 또 관직에서 물러날 계획하나 / 飄然又作簪計
진토가 무슨 수로 흰옷으로 변할까 / 塵土何由化素衣
《지북우담》 ○ 또 《명시종》에도 들어 있는데, 거기에는 일부를 잘라 내고 절구(絶句)로 만들었다.

만력(萬曆) 병오년 5월에 태사(太史) 주난우(朱蘭嵎)가 중국 조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유근(柳根)]

사신 행차 동쪽 와서 조서를 반포할 제 / 玉節東來鳳詔頒
저문 봄날 강가에서 잠시 얼굴 뵈었네 / 暮春江乍承顔
높은 흉금 형해 밖에 홀로 빼어나고 / 高懷獨出形骸外
고상한 감상 길이 수석 사이 남으리라 / 雅賞長存水石間
눈길 끊겨 혼 꿈이 먼 걸 감당 못하고 / 目斷未堪魂夢遠
형체 남아 희끗한 귀밑머리만 보이네 / 形留只得鬚毛班
이별한 뒤 그리는 맘 밝은 달과 같을 거나 / 相思別後如明月
만리 멀어 맑은 풍채 잡을 길이 없을 거리 / 萬里淸光不可攀
《명시종》

교외 역원(驛院)의 이별하는 자리에서 [이호민(李好閔)]

서쪽 교외 연못에 푸른 연 가득하매 / 西郊菡萏綠盈池
이별하는 정표로 그 연꽃 꺾어 주네 / 折得芳華贈別離
금대로 떠나가도 정만은 안 끊어져 / 此去金臺情不斷
이내 마음 진정코 연뿌리 속 실 같으리 / 寸心眞似藕中絲
《상동》

규중(閨中)의 원망 [임제(林悌)]

열다섯 살 시냇가의 저 아가씨는 / 十五越溪女
남부끄러 말 못하고 헤어지고선 / 羞人無語別
돌아와서 겹대문을 닫아건 뒤에 / 歸來掩重門
배꽃 비친 달 보면서 눈물 흘리네 / 泣向梨花月
《간재잡설》 ○ 《명시별재》에 이르기를, “심덕잠이 말하기를, ‘마치 최국보(崔國輔)의 소시(小詩)를 읽는 것 같다.’ 하였다.” 하였다.

중화(中和)로 가는 도중에 [임제]

파리한 말 나른한 객 등에 태우고 / 羸驂駄倦客
해 저무는 황주 땅을 떠나는구나 / 日暮發黃州
애석할사 답청절 이 좋은 날에 / 可惜踏靑節
부벽루에 올라 보지 못하는구나 / 未登浮碧樓
미인들은 금루곡을 노래 부르고 / 佳人金縷曲
강 위에는 목란주가 떠 있을 건데 / 江水木蘭舟
적적한 여기 이곳 생양관에는 / 寂寂生陽館
밤 되자 등 외로워 가을과 같네 / 孤燈夜似秋
《명시종 및 지북우담》

무너진 홍경사(弘景寺)에서 [백광훈(白光勳)]

가을풀 황량한 고려 때의 절 / 秋草前朝寺
깨진 비엔 학사의 글 남아 있구나 / 殘碑學士文
천년토록 물은 절로 흘러가는데 / 千年自流水
해질녘에 외로이 뜬 구름을 보네 / 落日見孤雲

《지북우담》

봉은사(奉恩寺) [백광훈]

우연히도 말미 받아 절간에 찾아드니 / 偶因休浣到沙門
술 마시고 시 지을 옛 절이 남아 있네 / 把酒題詩古寺存
붉은 연꽃 한 연못에 바람은 절 안 가득하고 / 紅藕一池風滿院
많은 나무 매미 울고 비는 마을 잇닿았네 / 亂蟬千樹雨連村
흰머리로 벼슬에 매인 것이 부끄럽고 / 深慚皓首從羈宦
푸른 산이 옛 고향과 비슷한 게 기쁘구나 / 猶喜靑山似故園
듣건대 금호의 안개 경치 기이타니 / 聞說錦湖煙景異
어느 때나 돌아가서 참 근원을 물어보나 / 何時歸棹問眞源
《상동》

현진(縣津)에 저녁 나절 배를 대다 《명시종(明詩綜)》에는 백광훈(白光勳)의 시로 되어 있다. [백광면(白光勉)]

객선을 촌마을에 대던 그날은 / 旅泊依村
늘그막에 다시 유람하는 때였네 / 重遊屬暮年
강 건너 절에서는 종소리 울고 / 鍾聲隔岸寺
물 건너는 배 안에선 사람 떠드네 / 人語渡湖船
달 오르자 갈대밭은 아득히 멀고 / 月上蒹葭遠
연기 끼어 섬들은 이어져 있네 / 煙橫島嶼連
밤 깊자 바람 다시 급해지거니 / 夜深風更急
기러기 떼 내려오고 잠은 안 오네 / 落鴈不成
《지북우담 및 명시종》

유배 가는 도중에 [조희일(趙希逸)]

가고픈 맘은 항상 관동으로 향하는데 / 歸心日夜關以東
돌아갈 계획 이젠 헛것 되고 말았네 / 歸計卽今還墮空
한 해 봄은 만리 밖서 동하기 시작했고 / 一年春動萬里外
외로운 산 숲 속에는 둥근달 떠오르네 / 孤山月出千林中
수심 속에 이내 몸 멀다는 것 깨닫겠고 / 愁來但覺此身遠
취한 뒤에 나의 길 궁하단 걸 모르겠네 / 醉後不知吾道窮
-삼가 살펴보건대, 《사조시선(四朝詩選)》에는 ‘吾’가 ‘我’로 되어 있다.
경주와 뇌주는 그 어떠한 곳이며 / 瓊州雷州何許地
옛사람과 지금 사람 같은가 다른가 / 古人今人同不同
《명시종》 ○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 이르기를, “장한첨(張漢瞻)이 말하기를, ‘뜻과 정취가 시원시원하다.’ 하였다.” 하였다.

‘연서도우(延曙都郵)’ 시를 차운하다 [조희일]

봄추위 싸늘해서 술 조금 깨이는데 / 春寒料峭酒
해 이은 벼슬살이 마음이 한스럽네 / 羈宦連年恨不平
등 어두운 창 밖에 말은 여물 먹고 있고 / 燈暗小牕聞馬齕
꿈 깨인 외론 베개 새벽닭 울음 잦네 / 夢回孤枕數鷄
나의 벗과 더불어서 사귀는 도 논할 뿐 / 祗憑吾友論交道
누굴 향해 세속 정을 말하려고 하는가 / 欲向何人說世情
나라에 몸 바치기로 이미 마음 먹었으니 / 已判此身同許國
그대와 종시토록 이내 마음 밝으리라 / 與君終始寸心明
《지북우담》

용만(龍灣)에서 우연히 짓다 [조희일]

압록강 서쪽은 바로 중국 땅이거니 / 鴨水西邊是漢關
하늘과 땅이 잠가 물굽이로 갈라놨네 / 天扃地鐍限重灣
연기 끼고 모래 쌓인 인주성의 보루이고 / 荒煙野磧麟州戍
지는 해에 외론 구름 마이산 그곳이네 / 落日孤雲馬耳山
바람 자는 빈 강에는 잔잔하게 물결 일고 / 風定空江波瀲瀲
눈 녹는 봄 성곽엔 물방울 방울지네 / 雪消春郭溜潺潺
고향 집이 그리우나 소식 들을 길 없어서 / 思家未得平安字
돌아갈 생각 오직 꿈에서나 오고가네 / 歸思惟應夢往還
《상동》

강호주인(江湖主人)에게 주다 [조욱(趙昱)]

십년 동안 고향 집 삽작 닫아걸었으니 / 十年長掩故山扉
진토의 동화문을 몇 번이나 갔었겠나 / 塵土東華幾染衣
생각건대 감호에 봄 달이 뜨는 밤엔 / 想得鑑湖春月夜
자규 응당 처절하게 불여귀라 울리라 / 子規應喚不如歸
《명시종 및 지북우담》

죽서루(竹西樓) [성운(成運)]

강물은 봄 누각을 스쳐 흐르고 / 江觸春樓走
하늘은 눈 덮인 고개 감쌌네 / 天和雪嶺圍
구름은 붓을 따라 물들어 가고 / 雲從詩筆染
새들은 술자리를 스치고 나네 / 鳥拂酒筵飛
바다에 뜬 지금이 옳은 것이고 / 浮海知今是
명리 쫓던 지난날이 잘못인 거네 / 趨名悟昨非
저녁 되자 솔바람 살살 일더니 / 松風當夕起
소슬하게 하의에 불어 오누나 / 蕭颯動荷衣
《지북우담》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회포를 읊다 [기매(奇邁)]

남산에는 솔과 잣 울창도 하고 / 南山松柏幽
북산에는 연기 안개 짙게 끼었네 / 北山煙霧深
나그네는 다 저물어 어디로 가나 / 遊子暮何之
뜰 나무엔 가을 구름 피어오르네 / 庭樹生秋陰
구름은 먼 봉우리 향해서 가고 / 歸雲向遙岑
저녁 새는 앞 숲에 깃들일 적에 / 宿鳥棲前林
깊은 회포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 幽懷杳不極
맑은 바람 내 옷깃에 불어오누나 / 淸風吹我襟
《명시종 및 지북우담》 ○ 손개사(孫愷似)가 이르기를, “위유(韋柳) 의 시체(詩體)를 본떴다.” 하였다.

종군행(從軍行) [안수(安璲)]

변방 구름 막막하고 관문에 눈 쌓였는데 / 關雲漠漠關雪堆
북녘 바람 사나워서 산 위 나무 꺾여지네 / 北風慘慘山木
긴 강물 얼어붙어 말은 자주 넘어지고 / 長河氷合馬蹄滑
변경에 해 넘어가자 되놈 피리 슬피 우네 / 沙塞日落胡笳悲
한스런 건 나이 어려 군적에 오른 거고 / 自恨少小係軍籍
수심 속에 창을 베고 누워도 잠 아니 오니 / 愁枕金戈眠不得
추운 것과 배고픈 걸 어찌 감히 다 말하리 / 苦寒苦饑不敢言
그 누가 장군 군율 겁내지 않으리오 / 誰人不畏將軍律
중천(中天)에는 수심 섞인 소리가 분분한데 / 中霄愁嘆何紛紜
백성 고혈 실어다가 장군에게 바치누나 / 猶將膏血輸將軍
장군은 흑초피로 만든 옷 즐겨 입어 / 將軍好服黑貂服
열 벌의 초피 값이 금으로 열 근이고 / 十貂皮當十斤
장군은 유난히도 태뢰의 맛 좋아해서 / 將軍獨嗜太牢味
군중에서 하루에 아홉 마리 소가 죽네 / 一日軍中九牛斃
산에는 담비 없고 들판에는 소 없는데 / 山無餘貂野無牛
가렴주구 끝없어서 매질로 닥달하네 / 誅斂無窮箠楚至
솥 안에 있는 쌀과 베틀에 걸린 베를 / 鼎中粒機中布
날마다 장군의 창고로 실어가네 / 日日輸入將軍庫
장군 날로 부자 되고 군사들은 마르는데 / 將軍日富士日瘠
하소연을 하고프나 화를 낼까 겁이 나네 / 欲往訴之逢彼怒
임금께선 군사들이 추울까 걱정하여 / 君王每憂軍士寒
털옷에다 베옷을 세모에 보내지만 / 毛衣布衲輸歲闌
장군이 골고루 나눠 주지 않는 탓에 / 將軍分給苦不遍
살갗은 터지고 손가락은 곱아드네 / 肌膚凍裂手拘攣
충해에다 가뭄이 해마다 들건마는 / 蝗蠱歲旱無歲無
진휼한단 말은 없고 조세만 독촉하네 / 不聞賑恤聞催租
아비와 아들 각각 처자식들 버려두고 / 阿翁棄姑兒棄婦
되놈들의 땅으로 도망쳐서 들어가네 / 過半相携逃入胡
되놈 땅서 겪는 고생 이루 말로 못하건만 / 胡中艱辛不可說
장군에게 고혈을 빨리는 것보단 낫네 / 猶勝將軍浚膏血
장군이여 장군이여 어째서 가지 않나 / 將軍將軍胡不去
떠나가서 공경 돼도 온 군사들 기뻐하리 / 去作公卿一軍悅
대궐은 아득하여 아홉 대문 엄중하고 / 天門杳杳嚴九關
어사들 자주 오나 입을 굳게 다무네 / 御史紛紛深閉舌
염파와 이목이 다시 나지 않음에 / 廉頗李牧不復生
슬픈 노래 격렬하여 내장이 다 타누나 / 激烈悲歌腸內熱
《열조시집》

이소부사(李少婦詞) 《열조시집》에 이르기를, “철원 이씨(鐵原李氏) 숙경(淑卿)이 양 문학(梁文學)에게 시집갔는데, 얼마 안 되어 양 문학이 한성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다가 급제하고,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발탁되어 돌아오지 않자, 숙경이 그를 그리워하다가 가슴이 막혀 죽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슬퍼하면서 애도하여 노래를 지어 그의 한결같은 정절을 기렸다고 한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열조시집》을 보면 ‘선계곡제월아첩(仙桂曲題月娥帖)’ 시에 최고죽(崔孤竹)이라고 칭하고서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고죽은 최경창의 호이므로 아래에다 붙였다. [최경창(崔慶昌)]

상공의 후손인 철원 이씨 숙경은 / 相公之孫鐵城李
규중에서 자라나 자질이 뛰어났네 / 養得幽閨天質美
십칠 년간 규방에서 벗어나지 않다가 / 幽閨不出十七年
어느 날 양씨 집의 아들에게 시집갔네 / 一朝嫁與梁家子
양씨 집의 아들은 난새 봉새 새끼라서 / 梁家之子鸞鳳雛
자질 몹시 뛰어난 훌륭한 인재였네 / 珊瑚玉樹交枝株
연못의 원앙새는 본디 서로 짝 이루고 / 池上鴛鴦本成匹
화단의 나비들은 외로운 적 없는데 / 園中蛺蝶何曾孤
대장부의 장한 뜻에 멀리 가서 벼슬하니 / 丈夫壯志仕遠方
산과 시내 가로막혀 가는 길 멀었네 / 山川阻絶道路長
아녀자는 정 머금고 차마 이별 못하다가 / 兒女含情不忍別
이별한 뒤 못 견디고 애간장이 끊어지네 / 一別那堪腸斷絶
오동나무 잎새 지고 국화꽃 향 풍길 때 / 高梧葉落黃花香
중양절이 오늘인 줄 알고 홀연 놀랐네 / 忽驚今日重陽節
좋은 날은 그대론데 내 님은 곁에 없어 / 佳辰依舊復誰在
뜰 가득한 수유를 따지도 못하였네 / 滿苑茱萸不堪採
높다란 누에 올라 먼 하늘을 바라보니 / 更上高樓望遠天
하늘 끝 눈 닿는 곳 구름 안개 끼어 있네 / 天涯極目空雲煙
곁에 사람 향하여서 속마음 말 안 하고 / 不向旁人道心事
고개 돌려 눈물만 줄줄이 흘리었네 / 回頭滴淚空潸潸
소 떼들 다 돌아가고 산엔 날이 저무는데 / 牛羊歸盡山欲夕
문밖에는 끝끝내 찾아오는 사람 없네 / 門外終無北來客
이내 몸 황천으로 돌아가길 원하노니 / 此身願得歸泉土
죽은 뒤에 그 어찌 이별 고통 있으리오 / 死後那知離別苦
봄꽃 쉬이 떨어지고 난초 일찍 부러지니 / 春花易落蘭早摧
봉대의 휘장에는 거미줄이 드리웠네 / 鳳臺翠帷垂蛛絲
꽃다운 혼 무창의 돌 되지 않았고 / 芳魂不作武昌石
상강의 반죽에다 부쳐서 메말랐네 / 定寄湘江斑竹枯
반죽의 가지 끝에 두견새 피 토하니 / 斑竹枝頭杜鵑血
토한 피와 흘린 눈물 흔적이 안 없어졌네 / 血點淚痕俱不滅
푸른 산의 푸른 풀은 밤이라서 망망한데 / 靑山碧草夜茫茫
천고토록 꽃다운 혼 무덤 위로 달이 뜨네 / 千古芳魂墳上月
《상동》

무릉계(武陵溪) [최경창]

험한 돌 얽힌 새로 한 가닥 길 통해 있고 / 危石纔一徑通
흰구름은 천고토록 신선 자취 감추었네 / 白雲千古祕仙踨
다리 남쪽 다리 북쪽 물어볼 사람 없고 / 橋南橋北無人問
낙엽지고 물이 차긴 만 골짝 다 똑같네 / 落木寒流萬壑同
《지북우담》

채련곡(采蓮曲) [최경창]

강 언덕 길고 긴데 능수버들 늘어졌고 / 水岸依依楊柳多
연 따는 노랫가락 조각배에 들려오네 / 小船遙聽采蓮歌
붉던 꽃 다 져서 서녘 바람 차가운데 / 紅衣落盡秋風起
해 저문 물가에는 흰 물결만 이누나 / 日暮芳洲生白波
《상동》

선계곡제월아첩(仙桂曲題月娥帖). 손곡(蓀谷)의 시에 화답하다. [최경창]

푸른 하늘 아득하고 난로는 길고 긴데 / 碧落迢迢鸞路長
바람은 계수나무 꽃 향기를 불어오네 / 天風吹送桂花香
옥퉁소를 불면서 요단 위로 돌아갈 제 / 玉簫歸去瑤壇上
비단 버선 신은 발 서리 속에 차가웁네 / 羅襪寒深一寸霜
《열조시집》

병들어서 호당(湖堂)을 나가다 [김질충(金質忠)]

수심 깊어 하루에 장 아홉 번 꼬이는데 / 常苦愁腸日九廻
우는 새 봄 알림에 홀연히 맘 놀랐네 / 忽驚啼鳥報春來
삼 년 동안 약 먹어도 사람은 병 그대론데 / 三年藥物人猶病
하룻밤 빗소리에 꽃들은 모두 폈네 / 一夜雨聲花盡開
세상일 분분하여 끝날 날이 없는데 / 世事紛紛難自了
하늘 기틀 잘도 돌아 서로 재촉하는구나 / 天機滾滾遙相催
평생에 오래도록 능운 기개 저버린 채 / 平生久負凌雲氣
슬프게도 지금 와선 이미 절반 꺾여졌네 / 怊悵如今半已摧
《지북우담》

복천사(福泉寺) [유영길(柳永吉)]

낙엽 뜨락 구르고 밤비는 내리는데 / 落葉鳴廊夜雨懸
절 등불 깜빡이고 나그네는 잠 못 드네 / 佛燈明滅客無眠
신선 산 한번 오자 지는 봄에 맘 상하니 / 仙山一到傷春暮
-《지북우담》에는 ‘到’가 ‘躡’으로 되어 있고, ‘春’이 ‘遲’로 되어 있다.
오사모가 날 속인 게 이십 년이로구나 / 烏帽欺人二十年
《명시종 및 지북우담》

중의 시축(詩軸)에 제하다 [이영(李嶸)]

구름 끼인 산 어귀엔 풀들이 무성한데 / 流雲山口草凄凄
한밤중에 향연 좇아 물가에 다다랐네 / 夜逐香煙到水西
술 취한 뒤 큰 노래로 밝은 달에 화답하니 / 醉後高歌答明月
강가의 꽃은 지고 두견새는 슬피 우네 / 江花落盡子規啼
《명시종》

제비를 읊다 [이승소(李承召)]

깊숙한 누각 지붕 나직한 처마 아래 / 畫閣深深簾額低
짝을 지어 날다 울다 쌍쌍이 깃들었네 / 雙飛雙語復雙棲
버들 푸른 골목에 봄은 이미 저물었고 / 綠楊門巷春風晩
풀 푸른 못가에 부슬부슬 봄비 오네 / 靑草池塘細雨迷
나비 쫓아 때때로 대숲 속 들어가고 / 趁蝶有時穿竹塢
집 짓느라 종일토록 진흙을 물어 오네 / 壘巢終日啄芹泥
알맞은 곳 집 지으니 그 누가 멸시하리 / 托身得所誰相侮
해마다 새끼 길러 나란히 날아가네 / 養子年年羽翼齊
《상동》


[주D-001]第幾重 : 《삼봉집(三峯集)》 권2에는 ‘復幾遠’으로 되어 있다.
[주D-002]전횡(田橫) :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동생으로, 한(漢)나라 때 한신(韓信)이 제왕을 쳐부수자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가, 한나라가 항우(項羽)를 쳐 없애자, 자기를 따르는 무리 500명을 거느리고 오호도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에 한나라 고조가 사람을 시켜 부르자 낙양(洛陽)으로 가다가 자살하였는데, 그를 따르던 무리 500명도 모두 자살하였다.《史記 卷94 田儋列傳》
[주D-003] : 《동문선(東文選)》 권5 및 《삼봉집》 권1에는 ‘赤’으로 되어 있다.
[주D-004] : 《동문선》에는 ‘昭’로 되어 있다.
[주D-005]금치국(金齒國) :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오랑캐 나라의 이름이다.
[주D-006]古廟靈風楊柳低 : 《동문선》 권22에는 ‘五靈廟宮楊柳低’로 되어 있다.
[주D-007]회포가 있어서[有懷] : ‘我愛’에서 ‘伐木’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虛庵遺集)》 권1에는 ‘我愛權氏子 相從自結髮 伯也負異氣 仲也俠奇骨 吾常倚其間 屹立分鼎足 憶昔同爭覇 詩酒作勍敵 決鬪恐難全 斂刃各堅壁 如今吳蜀魏 長江限南北 影響已寂寞 夢魂亦緬邈 思之不可見 獨坐歌伐木’으로 되어 있다.
[주D-008]벌목편(伐木篇) :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으로, 친구들과 모여 잔치를 하면서 깊은 정과 우의를 나누는 것을 노래한 시인데, 그 시에, “나무 찍는 소리 정정하거늘, 새 울음소리 앵앵하도다.[伐木丁丁 鳥鳴嚶嚶]” 하였다.
[주D-009]밤비[夜雨] : ‘九嶷’에서 ‘白髮’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九疑嵯峨雲似黑 鷓鴣啼雨湘江夕 寒聲浙瀝助凄切 竹間餘淚哀欲滴 楚些爲招帝子魂 月恨雲愁天亦泣 孤舟一夜滯未歸 遠客蕭條生白髮’로 되어 있다.
[주D-010]구의산(九嶷山) :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아홉 개의 산봉우리가 서로 비슷하게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주D-011]초사(楚些) : 초 지방에서 유행하는 혼을 부르는 내용의 노래로, 흔히 초혼가(招魂歌)를 가리킨다.
[주D-012]가을날에 바라보다[秋望] 2수(二首) : 첫째 수인 ‘秋光’에서 ‘處宿’까지의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秋容濃淡雨還晴 海波不動含淨綠 沙平若剪雪嵯峨 鴈背寒光斜欲滴 西風吹影落漁磯 字字新出臨池墨 何處稻粱驚網弋 急向蘆花深處宿’으로 되어 있고, 둘째 수인 ‘渡頭’에서 ‘新月’까지의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渡頭楓林霜半破 海風吹滴猩猩血 秋光上下鏡面平 一片鑄出琉璃碧 隔岸眠鷗忽驚起 客帆飛來隨鳥沒 落日蒼茫何處宿 短笛數聲山水綠’으로 되어 있다.
[주D-013]묵지(墨池)에서 …… 생겨나네 : 기러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묵지는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연못으로,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영가현 수(永嘉縣守)로 있으면서 항상 이 연못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 물에 붓을 씻었으므로 연못 물이 까맣게 되었다고 한다.
[주D-014]강마을[江村] : ‘靑山’에서 ‘枯木’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靑山影空釣磯寒 海門秋色濃可掬 漁翁臥簑睡不驚 鷗鳥欲散還相逐 織柳穿魚及暮歸 南隣喚酒東隣答 疎疎晩雨急取綱 一抹斜陽掛枯木’으로 되어 있다.
[주D-015]용혈(龍穴) : 전설 속에 나오는, 용이 산다고 하는 굴을 말한다.
[주D-016]계수음(桂樹吟) : 한나라 때 회남소산(淮南小山)의 무리들이 강물에 빠져 죽은 굴원(屈原)을 슬퍼하여 부른 노래로,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뜻의 노래이다.
[주D-017]변경에서 : ‘客牕’에서 ‘聲寒’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客牕偏惜歲將殘 蘆荻蕭疎雪滿山 塞外風高鷹翅健 陣前雲起箭聲寒 不妨夜月相乘興 何事詩人獨閉關 擁褐煎茶淸味永 況論盃酒作春顔’으로 되어 있다.
[주D-018]부질없이 쓰다[漫書] : ‘鴨江’에서 ‘搔頭’까지의 이 부분은 《허암유집》 권1에는 ‘鴨江如帶去悠悠 歲月無情共逐流 萬里胡天雲出塞 一聲羌笛客登樓 長風吹送燕山雨 斷鴈含來鶴野秋 覽物懷鄕偏有感 孤城落日獨搔頭’로 되어 있다.
[주D-019]장 황문(張黃門) : 세조 6년(1460)에 사신으로 나온 예과 급사중(禮科給事中) 장영(張寧)을 가리킨다.
[주D-020]박원형(朴元亨) : 원문에는 ‘朴原亨’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박원형은 장영이 사신으로 나왔을 적에 접반사(接伴使)의 임무를 맡았다.
[주D-021] : 《명시종》 권94에는 ‘駐’로 되어 있다.
[주D-022] : 《명시종》에는 ‘勞’로 되어 있다.
[주D-023]行雲低 : 《명시종》 권94에는 ‘低行雲’으로 되어 있다.
[주D-024]권 정경(權正卿)에게 부치다 : ‘東極’에서 ‘花明’까지의 이 부분은 《보한재집(保閑齋集)》 권8에는 ‘東極來千里 邊城月再盈 隔江皆虜聚 問地半胡名 氈羯薰人苦 風沙拍面輕 和戎才正拙 兩鬢雪花明’으로 되어 있다.
[주D-025] : 《명시종》 권94에는 ‘窈’로 되어 있다.
[주D-026]진 급사(陳給事) : 세조 5년(1459)에 사신으로 나온 형과 급사중(刑科給事中) 진가유(陳嘉猷)를 가리킨다.
[주D-027]백설사(白雪詞) : 양춘백설(陽春白雪)의 곡(曲)으로, 전국 시대 때 초(楚)나라의 고아(高雅)한 가곡의 이름인데, 뛰어난 시문(詩文)을 가리킨다.
[주D-028]고헌(高軒) : 존귀한 자가 타는 높은 수레로, 존귀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주D-029] : 원문에는 ‘水’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30]종릉(鍾陵) …… 화답하다 2수(二首) : 첫째 수인 ‘人間’에서 ‘胡麻’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續東文選)》 권7과 《매월당집(梅月堂集)》 권13에는 ‘人間變態薄於紗 端合歸來臥碧霞 老境病蟬藏翳葉 人生秋蠛寄浮槎 風前細細飛松子 雲外毶毶落桂花 莫道道人嚥沆瀣 巖邊春雨種胡麻’로 되어 있는데, 번역하면서는 《속동문선》을 따랐다. 둘째 수인 ‘蛺蝶’에서 ‘小溪’까지의 이 부분은 《매월당집》 권13에는 ‘蛺蝶雙雙飛藥畦 山禽饒語竹籬西 一叢枸杞花初遍 五椏人蔘葉已齊 翠竹林中香麝睡 紫荊枝上畵眉啼 千峯昨夜疎疎雨 泛濫南池漲小溪’로 되어 있으며, 《속동문선》에는 이 시 대신 ‘四美年年到處無 溪光山色映蓬簾 藥園鹿戱何曾慍 多竃菌生亦不嫵 萬事省來貧是樂 一身閑了老非厭 笑看塵世悠悠者 無太麤踈便太纖’이란 시가 들어 있다.
[주D-031]회소곡(會蘇曲) : ‘會蘇’에서 ‘杼軸’까지의 이 부분은 《점필재집(佔畢齋集)》 권3에는 ‘會蘇曲會蘇曲 西風吹廣庭明月滿華屋 王姬壓坐理繅車 六部女兒多如簇 爾筥旣盈我筐空 釃酒椰揄笑相謔 一婦嘆千室勤 坐令四方勤杼軸 嘉俳縱失閨中儀 猶勝拔河爭嗃嗃’로 되어 있다. 원문에 없는 마지막 두 구의 번역은 “가배놀이 그게 비록 규중 예의 아니지만, 서로 다퉈 소리치는 발하보단 되레 낫네.”이다. 발하(拔河)는 당나라 때 유행하였던 궁녀들이 하는 놀이로, 줄다리기와 비슷한 놀이이다.
[주D-032]황창랑(黃昌郞) : ‘若有’에서 ‘蓬蒿’까지의 이 부분은 《점필재집》 권3에는 ‘若有人兮纔離齠 身未三尺何雄驍 平生汪錡我所師 爲國雪恥心無憀 劍鐔擬頸股不戰 劍鍔指心目不搖 功成脫然罷舞去 挾山北海猶可超’로 되어 있다. 원문에 없는 두 구의 번역은 “공 이루자 훌쩍하니 춤 파하고 떠나가니, 겨드랑에 태산 끼고 북해도 뛰넘겠네.”이다.
[주D-033]왕기(汪錡) : 춘추 시대 때 노(魯)나라의 어린아이로, 제(齊)나라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죽었는데, 나라에서 성년(成年)의 예로 장사 지내 주었다. 어린 나이로 나라를 구한 사람의 전형(典型)으로 쓰인다.《春秋左氏傳 哀公11年》
[주D-034]병예(屛翳) : 전설 속에 나오는 신의 이름으로, 풍신(風神), 뇌신(雷神), 우신(雨神)의 총칭이다.
[주D-035]오두(遨頭) : 고을 수령을 가리킨다. 송(宋)나라 때 성도(成都)에서는 4월 19일을 완화(浣花)라고 하면서 두자미(杜子美)의 초당(草堂)에 있는 창랑정(滄浪亭)에서 태수(太守)가 잔치를 벌였는데, 이때 온 고을 사람들이 나와 보면서 태수를 오두라고 하였다.
[주D-036]화산기(華山畿) : 중국 오(吳) 지방의 악부(樂府) 이름으로, 어떤 선비가 여인을 그리워하다가 죽었는데, 상여가 그 여인의 집 앞을 지날 때 움직이지 않자, 그 여인이 단장을 하고 나와서 부른 노래이다. 그 여인이 이 노래를 부르고는 관 속으로 들어가 죽자, 사람들이 합장(合葬)한 다음 신녀총(神女冢)이라고 했다 한다.
[주D-037]연리지(連理枝) : 줄기가 다른 두 나무가 가지결이 서로 이어진 것으로, 애정이 깊은 부부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38]용도책(龍韜策) : 태공망(太公望)의 병법 가운데 하나로, 대개 병법이나 전략(戰略)의 의미로 쓰인다.
[주D-039]산승과의 …… 진하네 : 이 부분의 원문이 《점필재집》 권3에는 ‘語與居僧軟 杯隨古意濃’으로 되어 있다.
[주D-040]선사사(仙槎寺) : ‘偶到에서 ‘地頭’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6에는 ‘偶到仙槎寺 巖空松桂秋 鶴翻羅代蓋 龍蹴佛天毬 細雨僧縫衲 寒江客棹舟 孤雲書帶草 獵獵滿池頭’로 되어 있다. 번역은 《속동문선》을 따랐다.
[주D-041]서대초(書帶草) : 줄기가 질긴 풀이름으로, 한나라 때 정현(鄭玄)의 문하생들이 이 풀을 가지고 책을 묶었으므로 이렇게 이름하였다고 한다.
[주D-042] : 《목계일고(木溪逸稿)》 권1에는 ‘片’으로 되어 있다.
[주D-043]이주령(伊州令) : 악곡 이름으로, 당나라 때 어떤 여인이 멀리 벼슬살이를 떠나간 뒤 소식조차 없는 님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주D-044] : 원문에는 ‘川’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목계일고》에는 ‘州’로 되어 있다.
[주D-045]산음(山陰)의 계사(禊事) : 진(晉)나라 때 왕희지(王羲之)가 회계산(會稽山)의 산음에서 계사를 한 고사를 가리킨다. 산음은 산의 북쪽이란 뜻이다.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永和) 9년 계축 늦은 봄 초승에 회계산의 산음에 모였다.” 하였다.
[주D-046]기수(沂水) …… 갈아입누나 : 소요하면서 노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뜻을 묻자, 증점(曾點)이 말하기를, “늦은 봄에 봄옷이 이미 만들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5, 6명과 어린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論語 先進》
[주D-047]고의(古意) : ‘海底’에서 ‘如雪’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4에는 ‘海底珊瑚高幾丈 千年試作千尋網 萬牛挽出滄溟深 蛟龍贔奰霹靂響 扶桑日沈洪濤熱 光芒照耀黃金闕 平生季倫麤男兒 一擊破碎紛如雪 紛紛似雪不足惜 從此至寶無顔色’으로 되어 있다. 원문에 없는 두 구의 번역은 “부서져서 눈 된 거야 아까울 것 없다마는, 이로부터 좋은 보배 모양 없게 되었구나.”이다.
[주D-048]계륜(季倫) : 진(晉)나라 때 부호(富豪)로 이름난 석숭(石崇)의 자이다. 석숭은 위위(衛尉)로 있으면서 남을 시켜 바다에서 무역을 해서 거부가 되어 왕개(王愷), 양수(羊琇)와 함께 호사를 다투었다.
[주D-049] : 《속동문선》 권9에는 ‘於’로 되어 있다.
[주D-050] : 《속동문선》 권9에는 ‘長’으로 되어 있다.
[주D-051]連筒引却前溪水 : 《속동문선》에는 ‘呼兒爲引連筒去’로 되어 있다.
[주D-052] :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부록 1에는 ‘醒’으로 되어 있다.
[주D-053]왕 황문(王黃門) : 성종 19년(1488)에 사신으로 나온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을 가리킨다.
[주D-054]난정(蘭亭)에서 수계(修禊)할 때 : 늦은 봄을 말한다.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영화(永和) 9년 계축 늦은 봄 초승에 회계산의 산음에 모였다.” 하였다.
[주D-055]과만수(瓜蔓水) : 음력 5월에 불어나는 황하의 물을 말한다.
[주D-056]죽지가(竹枝歌) : 악부(樂府) 가운데 하나로, 본디는 사천(泗川) 일대의 민가(民歌)인데, 당나라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새 가사로 개작하였다. 주로 삼협(三峽)의 풍광과 남녀 간의 연정(戀情)을 읊었다.
[주D-057]의고(擬古) : ‘今日’에서 ‘北邙’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3에는 ‘今日良宴會 嘉賓滿高堂 綺肴映彫俎 綠酒盈金觴 左右燕趙姬 眉目婉淸揚 徐徐攘皓腕 操瑟理宮商 流年雙轉轂 倏忽兩鬢霜 相逢且爲樂 何用苦慨慷 金章竟何許 畢竟歸北邙’으로 되어 있으며,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에는 ‘今日良宴會 嘉賓滿高堂 綺肴映彫俎 綠酒盈金觴 左右燕趙妓 眉目婉淸揚 徐徐攘皓腕 操瑟理宮商 流年雙轉轂 倏忽兩鬢霜 相逢且爲樂 何用苦慨慷 金章滿朝貴 畢竟歸北邙’으로 되어 있다.
[주D-058]김씨 장씨 : 한(漢)나라 때의 김일제(金日磾)와 장안세(張安世)를 가리킨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당대에 현달하였으며, 7대의 후손들까지 현달하였으므로, 흔히 현달한 관원의 대명사로 쓰인다.
[주D-059]목면사(木綿詞) : ‘江南’에서 ‘羅幃’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5와 《허백당집》 권1에는 ‘江南木綿色逾白 晴雪紛紛鋪簟席 小機搖作鴉櫓聲 軟弧彈罷秋雲薄 東隣有婦坐夜闌 風回紛絮縈烏鬟 織成新布機杼促 扎扎輕梭玉指寒 半擬新袴與小兒 半作寒衣寄邊陲 心酸意苦眠不得 孤燈閃閃明維幃’로 되어 있다.
[주D-060]금미(金微) : 중국 변경 지역에 있는 산 이름인데, 당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경기(耿夔)가 대장군이 되어 개척한 곳이다. 여기서는 변경 지역을 뜻한다.
[주D-061]함지곡(咸池曲) : 황제(黃帝)가 지었다고 하는 성대한 음악을 말한다. 《장자(莊子)》 천운(天運)에, “북문성(北門成)이 황제에게 말하기를, ‘임금께서 함지의 음악을 동정(洞庭)의 뜰에서 연주하자, 저는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꼈고, 다시 듣고서는 권태로움을 느꼈고, 마지막으로 듣고서는 미혹되어 버렸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주D-062] : 《진일유고(眞逸遺稿)》 권1에는 ‘乃’로 되어 있다.
[주D-063]전부행(田父行) : ‘隴雉’에서 ‘斷絶’까지의 이 부분은 《진일유고》 권2에는 ‘隴草萋萋雉雙飛 隴邊老人長歎息 自道余生年七十 手脚凍皴面深黑 男婚女嫁知幾時 短衣襤衫纔過膝 前年召募度黃沙 萬死歸來鬢如雪 今年把鋤事耕耨 石田䂽确牛蹄脫 牛蹄脫兮可奈何 獨坐茫然心斷絶’로 되어 있다.
[주D-064]나홍곡(囉嗊曲) : 가곡(歌曲)의 이름으로, 진(陳)나라 유채춘(劉采春)이 읊은 망부가(望夫歌)이다. 《진일유고》 권2에는 ‘羅嗔曲’으로 되어 있다. ‘爲報’에서 ‘腸時’까지의 원문이 《진일유고》에는 ‘爲報郞君道 今年歸不歸 江汀春草綠 是妾斷腸時’로 되어 있다.
[주D-065]雨初收 : 《동문선》 권20에는 ‘暑情收’로 되어 있다.
[주D-066] : 《동문선》에는 ‘獻’으로 되어 있다.
[주D-067]경주(慶州) …… 차운하다 : ‘風塵’에서 ‘歸人’까지의 이 부분은 《속동문선》 권9에는 ‘塵間榮辱幾番春 案牘堆邊白髮新 夜半慣成林下計 明朝又作未歸人’으로 되어 있다.
[주D-068]獨泛孤篷臥未安 : 《속동문선》 권9와 《안락당집(安樂堂集)》 권1에는 ‘獨揭孤篷枕不安’으로 되어 있다.
[주D-069]반랑(潘郞)의 살쩍 : 근심이 많아 중년의 나이에 살쩍이 희끗희끗해진 것을 말한다. 반랑은 진(晉)나라 반악(潘岳)으로, 그는 젊어서는 용모가 아주 준수하였는데, 서른두 살의 나이에 살쩍이 하얗게 세자 느낀 바가 있어서 추흥부(秋興賦)를 읊었다.
[주D-070]동 내한(董內翰) : 성종 19년(1488)에 사신으로 나온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 동월(董越)을 가리킨다.
[주D-071]애 병부(艾兵部) : 성종 23년(1492)에 사신으로 나온 애박(艾璞)을 가리킨다. 이때 노공필이 원접사였다.
[주D-072]화표(華表) : 무덤 앞에 있는 망주석으로, 요동 사람 정령위(丁令威)가 학이 되어 날아와서 앉았던 곳이다.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 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 하였다.《搜神後記》
[주D-073]동규봉(董圭峯) : 규봉은 성종 19년에 사신으로 나온 동월(董越)의 호이다.
[주D-074] : 《용재집(容齋集)》 권8에는 ‘出’로 되어 있다.
[주D-075] : 《명시종》 권94에는 ‘節’로 되어 있다.
[주D-076]녹봉 급사(鹿峯給事) : 중종 17년(1522)에 한림 수찬(翰林修撰) 당고(唐皐)와 함께 사신으로 나온 병과 급사중 사도(史道)를 가리킨다. 이때 이행이 원접사로 있었다.
[주D-077]옥순(玉筍) 반열 : 뛰어난 영재들이 많이 있는 조정의 반열이란 뜻으로,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주D-078]안성역(安城驛) : 황주(黃州) 경내에 있는 역참으로, 사신들이 오갈 때 들르는 곳이다.
[주D-079]양춘곡(陽春曲) : 옛 가곡의 이름인데, 일반적으로 고상하고 아취 있는 곡조를 말한다.
[주D-080]설 급사(薛給事) : 원문에는 ‘陳給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 설 급사는 중종 34년(1539)에 한림원 시독 화찰(華察)과 함께 사신으로 나온 공과 좌급사중 설정총(薛廷寵)을 가리킨다. 이때 소세양이 원접사로 있었다.
[주D-081] : 원문에는 ‘怡’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82] : 원문에는 ‘怡’로 되어 있는데,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83]노반(鷺班) : 백로가 날 때 줄지어 나는 것처럼 줄지어 서 있는 조정의 반열을 말한다. 여기서는 중국 조정을 가리킨다.
[주D-084] : 원문에는 ‘酒’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85]최숙생(崔淑生) : 원문에는 ‘崔叔生’으로 되어 있는데, ‘崔淑生’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86] : 원문에는 ‘山’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속동문선》 권6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참고로 이 시는 사고전서본 《명시종》에는 들어 있지 않다.
[주D-087]파교(灞橋)에서 …… 흥취 : 눈을 맞으면서 시를 짓는 흥취를 말한다. 파교는 장안(長安)의 동쪽에 있는 다리이다. 《시본사(詩本事)》에, “맹호연(孟浩然)의 시사(詩思)는 파교에 풍설이 부는 가운데 나귀의 등 위에 있다.” 하였다.
[주D-088] : 《속동문선》 권6에는 ‘吾’로 되어 있다.
[주D-089]이십사교(二十四橋) :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 강도현(江都縣) 서쪽에 있는 다리로,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시에, “이십사교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옥인은 어느 곳서 퉁소를 부나.[二十四橋明月夜 玉人何處敎吹簫]” 하였다. 여기서는 주흘산 아래에 있는 다리를 형용하는 말로 쓰였다.
[주D-090]垂虹 : 《호음잡고(湖陰雜稿)》 권6에는 ‘秋霓’로 되어 있다.
[주D-091]채릉가(採菱歌) :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이다.
[주D-092]답답함을 풀다 : ‘隨意’에서 ‘春衣’까지의 이 부분은 《호음잡고》 권1에는 ‘隨意攤書坐 孤吟對晩暉 岸風帆腹飽 沙雨荻芽肥 籬缺通江色 簾垂礙蝶飛 誰知浴沂節 和病試春衣’로 되어 있다.
[주D-093] : 원문에는 ‘觀’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094]단구(丹邱) : 신선이 사는 곳으로, 밤에도 낮처럼 환하다고 한다.
[주D-095]십주(十洲) : 도가(道家)에서 신선들이 산다고 하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열 개의 산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선경(仙境)을 가리킨다.
[주D-096]오 부사(吳副使) : 중종 32년(1537)에 한림원 수찬 공용경(龔用卿)과 함께 사신으로 나온 오희맹(吳希孟)을 가리킨다.
[주D-097]신선 뗏목[仙槎] : 은하수를 오가는 뗏목으로, 사신이 타고 가는 배를 가리킨다. 옛날에 은하수와 바다가 서로 통해 있어서 해마다 8월이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뗏목을 타고 올라갔는데, 어떤 사람이 10여 일을 뗏목을 타고 가다가 한 성(城)에 이르러서 어떤 장부(丈夫)가 물가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는 것을 보았다. 이에 여기가 어딘지를 물으니, 그 장부가 답하기를, “그대가 촉군(蜀郡)에 가서 엄군평(嚴君平)을 찾아가 물어보면 알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촉군에 가서 엄군평에게 물으니, 답하기를,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수(牽牛宿)를 범하였다.” 하였는데, 그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그 사람이 은하수에 도착한 때였다고 한다.《博物志 卷10》
[주D-098]심언광(沈彦光) : 원문에는 ‘沈産光’으로 되어 있는데, ‘沈彦光’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았다.
[주D-099]鴉樹 : 《어촌집(漁村集)》 권7에는 ‘鶴枝’로 되어 있다.
[주D-100]망원정시(望遠亭詩) : ‘白雁’에서 ‘小橋’까지의 이 부분은 《어촌집》 권7에는 ‘亭控長江遠 天啣濶岸遙 玻瓈開水面 桃李匜山腰 白雁依寒渚 靑驢渡小橋 肝腸托樽酒 雲樹隔明朝’로 되어 있다.
[주D-101] : 원문에는 ‘竟’으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02] : 원문에는 ‘諭’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03]흰 망아지[白駒] : 숨어 사는 어진 이를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백구(白駒)에, “깨끗하고 깨끗한 흰 망아지, 저 빈 골짜기 안에 있도다.[皎皎白駒 在彼空谷]” 하였다.
[주D-104]푸른 눈[靑眼] : 마음이 통하는 지기지우(知己之友)를 말한다.
[주D-105]온혜릉(溫鞵陵) : 개성 광명사(廣明寺) 북쪽에 있는 능으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할아버지인 작제건(作帝建)이 당나라로 들어가다가 바다에서 용녀(龍女)를 만나 그와 부부가 되었는데, 그 뒤에 용녀가 서해 바다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용녀가 남겨 두고 간 신발만으로 장사 지내고는 그 무덤을 온혜릉이라 했다 한다.
[주D-106] : 《모재집(慕齋集)》 권8에는 ‘淸’으로 되어 있다.
[주D-107]종제전(種穄田) : 기장을 심은 밭이라는 뜻으로, 신라 시대의 승려 도선(道詵)이 고려 태조 왕건이 살고 있던 터를 가리켜 이른 말이다. 당시에 기장의 속음(俗音)이 ‘니금(尼今)’으로, 임금을 가리키는 말인 ‘니금(尼今)’과 음이 같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星湖僿說 萬物門 種穄》
[주D-108] : 《모재집》에는 ‘爲’로 되어 있다.
[주D-109]중국 사신 …… 차운하다 : 장승헌(張承憲)이 인종 1년(1545)에 사신으로 왔는데, 이때 신광한이 원접사였다. 이 시의 원문이 《기재집(企齋集)》 권8에는 ‘天上河源落五臺 樓前澄景絶纖埃 楊花春盡帆歸遠 楮島煙消鴈影來 物色不隨騷客去 芳罇今爲使華開 三韓勝地皆方丈 更借仙風進一杯’로 되어 있다.
[주D-110]방장(方丈) : 발해(渤海) 가운데에 있다고 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로, 여기에는 신선들이 살며 불사약(不死藥)이 있고 새와 짐승이 모두 희며,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주D-111] : 《기재집》 별집(別集) 권4에는 ‘抵’로 되어 있다.
[주D-112]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는 ‘違’로 되어 있다.
[주D-113] : 《성소부부고》에는 ‘非’로 되어 있다.
[주D-114]모동(茅洞)의 장인(丈人) : 《기재집》 별집 권5의 이 시 제목에 ‘삼월 삼일에 모동의 박 대구 덕장(朴大丘德璋)에게 부치다’라고 하였다.
[주D-115]靑山寧憶舊遊人 : 《성소부부고》 권25와 《기재집》 별집 권4에는 ‘靑山能記舊時人’으로 되어 있다.
[주D-116]저물녘의 풍경[暮景] : ‘樹密’에서 ‘中分’까지의 이 부분은 《기재집》 권5에는 ‘密樹深濃翠 孤煙淡作雲 厖應誤吠主 暗路草中分’으로 되어 있다.
[주D-117] : 원문에는 ‘驛’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118]오천자(烏川子) : 오천은 연일(延日)의 고호(古號)로, 연일 정씨인 정몽주를 가리킨다.
[주D-119]산속에 살다 : ‘花潭’에서 ‘讀書’까지의 이 부분은 《화담집(花潭集)》 권1에는 ‘花潭一草廬 瀟灑類僊居 山簇開軒面 泉絃咽枕虛 洞幽風淡蕩 境僻樹扶疎 中有逍遙子 淸朝聞讀書’로 되어 있다.
[주D-120]영통사(靈通寺)에서 …… 차운하다 : ‘松溪’에서 ‘西沈’까지의 이 부분은 《화담집》 권1에는 ‘沿溪一路入靑林 林下禪居晝亦陰 觸石泉絃千曲咽 倚天山簇萬重深 淸歡直欲朝連夜 勝會應難後繼今 數局閒棋談笑裏 不知雲日已西沈’으로 되어 있다.
[주D-121]구 대행(歐大行) : 선조 1년(1568)에 사신으로 나온 행인사 행인 구희직(歐希稷)을 가리킨다.
[주D-122] :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는 ‘廻’로 되어 있다.
[주D-123]태평관 …… 차운하다 : 구공(歐公)은 구희직(歐希稷)을 가리킨다. 이때 박순이 원접사였다. 이 시의 원문이 《사암집(思菴集)》 권3에는 ‘來遊萬里魂堪斷 獨倚靑冥思更賖 天闊楚鄕飛客夢 路窮蓬海駐仙査 山連睥睨雲常暝 春半池臺草欲華 簾外夕陽看漸沒 消愁惟有酒如霞’로 되어 있다.
[주D-124]황공(黃公) : 선조 15년(1582)에 사신으로 나온 한림원 편수 황홍헌(黃洪憲)을 가리킨다. 이때 이이가 원접사였다.
[주D-125]연도(沿道) : 원문에는 ‘沾塗’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26]한창 때의 사행 길 : 이이가 33세 때 사신으로 갔던 일을 가리킨다. 이이는 선조 1년(1568)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었다.
[주D-127] : 원문에는 ‘道’로 되어 있는데,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28]아미(蛾眉) 반열 : 중국 조정의 반열을 말한다. 당(唐)나라의 제도에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 어사대(御史臺)의 관원들이 황제를 조현(朝見)할 때에 좌우로 나뉘어 서서 조현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아미(蛾眉)와 같으므로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주D-129]옥서(玉署) : 한림원(翰林院)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한림원 편수로 있는 황홍헌을 가리킨다.
[주D-130]황공이 …… 전송하다 : ‘長川’에서 ‘瓊華’까지의 이 부분은 《율곡전서(栗谷全書)》 권2에는 ‘長川氷雪覆寒沙 此日愁聞出塞笳 兩地雲泥分席上 一江南北卽天涯 情勞永夜應飛夢 路絶何時更依麻 珍重曾言歸橐富 愧將燕石報瓊華’로 되어 있다.
[주D-131]구름과 진흙 : 하늘 위에 떠 있는 구름과 땅 아래에 있는 진흙이라는 말로, 둘 사이의 차이가 아주 큰 것을 뜻한다.
[주D-132]관월사(貫月槎) : 요 임금 때 서해 바다에 떠 있었다고 하는 빛을 내는 나무 등걸로, 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습유기(拾遺記)》 당요(唐堯)에, “요 임금이 황제 자리에 오른 지 30년 되는 해에 큰 나무 등걸이 서해 바다에 떠 있었는데, 등걸 위에서 빛이 발하여 낮에는 밝다가 밤에는 사라졌다. 그 등걸은 항상 사해(四海)를 떠돌아다녔는데,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돌았다.” 하였다.
[주D-133]연석(燕石) : 연산(燕山)에서 나는 돌로, 옥 같으나 옥이 아닌 돌인데, 전하여 보잘것없는 물품을 뜻한다. 여기서는 자신의 시를 뜻한다.
[주D-134] : 원문에는 ‘追’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35]便 : 원문에는 ‘使’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36]팔백 …… 둔 것 : 당나라 때 원재(元載)가 매우 탐학스러워 뇌물을 받아 축재하였는데, 그를 처형할 때 그의 재산을 몰수하니 후추가 팔백 섬이나 나왔다고 한다.《新唐書 卷145 元載列傳》
[주D-137]오자어(吳子魚) : 선조 30년(1597)에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나왔다가 우리나라의 시를 모아 《조선시선》을 편집한 오명제(吳明濟)를 가리킨다.
[주D-138]옥국(玉局) :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 있는 도관(道觀)의 이름으로, 후한(後漢) 때 이노군(李老君)이 이곳에서 장도릉(張道陵)에게 《남북두경(南北斗經)》을 강론하였다고 한다.
[주D-139]상양(商羊) : 전설 속에 나오는 새 이름으로, 이 새는 배가 오기 전에 한쪽 다리를 구부리고서 일어나 춤을 춘다고 한다.
[주D-140]시골집 : ‘水鄕’에서 ‘氣連’까지의 이 부분은 《충암집(冲庵集)》 권1에는 ‘水鄕豐德郡 蕭寺古興天 地盡村燈近 天垂海氣連’으로 되어 있다.
[주D-141]규중의 가을날[秋閨] : ‘木落’에서 ‘敗荷’까지의 이 부분은 《충암집》 권1에는 ‘木落千山江杳杳 秋天一鴈秦雲曉 空階月皎蛩音長 蔓草露溥螢影小 耿耿蘭燈夜半過 紅樓西面落星河 邊衣剪罷涼無睡 一夜雨聲鳴敗荷’로 되어 있다.
[주D-142]나그네의 회포[旅懷] : ‘江南’에서 ‘重簾’까지의 이 부분은 《충암집》 권2에는 ‘江南殘夢晝厭厭 愁逐年芳日日添 雙燕來時春欲暮 杏花微雨下重簾’으로 되어 있다.
[주D-143]양관곡(陽關曲) : 악부(樂府)의 곡 이름으로, 옛날에 이별하면서 부르던 노래이다. 위성곡(渭城曲)이라고도 한다.
[주D-144]소미(少微) : 성좌(星座)의 이름인데, 일명 처사성(處士星)이라고도 하여 처사(處士)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진서(晉書)》 은일열전(隱逸列傳) 사부(謝敷)에, “달이 소미성을 침범하였다. 소미성은 일명 처사성이라고도 하여 점치는 사람들이 은사(隱士)를 거기에 해당시킨다.” 하였다.
[주D-145] : 《석천시집(石川詩集)》 권6에는 ‘投’로 되어 있다.
[주D-146]塵土何由化素衣 : 《석천시집》에는 ‘塵土無由染素衣’로 되어 있다.
[주D-147]만력(萬曆) …… 전송하다 : 이 부분의 원문이 《서경집(西坰集)》 권4에는 ‘玉節東來鳳詔頒 暮春江上始承顔 每稱四海皆兄弟 況此長程共往還 浮碧樓前俯羅島 三淸閣上對香山 高懷獨出形骸外 雅賞常存水石間 玉溜爲池增地勝 銀鉤鑱壁發天慳 雲泥此日分霄漢 雨露千秋滿海寰 目斷未勘魂夢遠 形留只得鬚毛斑 相思別後如明月 萬里淸光不可攀’으로 되어 있다. 주난우(朱蘭嵎)는 선조 39년(1606)에 사신으로 나온 한림원 수찬 주지번(朱之蕃)을 가리킨다. 이때 유근이 원접사였다.
[주D-148] : 원문에는 ‘山’으로 되어 있는데, 사고전서본 《명시종》 권94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149]금대(金臺) : 북경(北京)을 가리킨다.
[주D-150]연뿌리 속 실[藕中絲] : 연뿌리를 절단하여도 그 가운데에 있는 실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서로 간의 관계는 끊어졌으나, 서로 간에 그리는 마음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D-151]최국보(崔國輔) : 당나라 때의 시인이다.
[주D-152]중화(中和)로 가는 도중에 : ‘羸驂’에서 ‘似秋’까지의 이 부분은 《임백호집(林白湖集)》 권1에는 ‘羸驂載倦客 日晩發黃州 堪恨踏淸節 未登浮碧樓 佳人金縷曲 江水木蘭舟 寂寂生陽館 相思夜似秋’로 되어 있다.
[주D-153]금루곡(金縷曲) : 악곡의 이름으로, 하신랑(賀新郞), 유연비(乳燕飛)라고도 한다.
[주D-154]목란주(木蘭舟) : 심양강(潯陽江)의 목란주(木蘭洲)에서 자라는 목란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는 배인데, 일반적으로 배의 미칭(美稱)으로 쓰인다.
[주D-155]천년토록…… 보네 : ‘千年’에서 ‘孤雲’까지의 이 부분은 《성소부부고》 부록 1에는 ‘千年有流水 落日見歸雲’으로 되어 있다. ‘千年自流水’의 ‘自’는 《옥봉집(玉峯集)》 상권(上卷)에는 ‘有’로 되어 있다.
[주D-156]봉은사(奉恩寺) : ‘偶因’에서 ‘眞源’까지의 이 부분은 《옥봉집》 중권(中卷)에는 ‘偶因休浣到雲門 把酒題詩勝事存 紅藕一池風滿院 晩蟬千樹雨歸村 深慚皓首從覊宦 猶喜靑山似故園 聞說錦湖煙景異 會客孤棹問眞源’으로 되어 있다.
[주D-157]백광면(白光勉) : 이 시가 백광훈의 《옥봉집》 중권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백광훈의 잘못인 듯하다.
[주D-158] : 《옥봉집》 중권에는 ‘口’로 되어 있다.
[주D-159] : 《옥봉집》에는 ‘聯’으로 되어 있다.
[주D-160]孤山月出千林中 : 《죽음집(竹陰集)》 권6에는 ‘孤城月出千山中’으로 되어 있다.
[주D-161]경주(瓊州)와 뇌주(雷州) : 지금의 중국 해남도(海南島)와 뇌주반도(雷州半島)로, 송나라 신종(神宗) 때 소식(蘇軾)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왕안석의 뜻을 거슬러서 유배되었던 곳이다.
[주D-162] : 《죽음집》 권6에는 ‘未’로 되어 있다.
[주D-163] : 《죽음집》에는 ‘聲’으로 되어 있다.
[주D-164]용만(龍灣)에서 우연히 짓다 : ‘鴨水’에서 ‘往還’까지의 이 부분은 《죽음집》 권6에는 ‘鴨水西邊是漢關 天扃地鐍限重灣 荒原亂磧麟州戍 落日孤雲馬耳山 風定空江波瀲瀲 雲消春郭溜潺潺 思家未得平安報 歸思唯憑夢往還’으로 되어 있다.
[주D-165]동화문(東華門) : 궁성(宮城)의 동쪽 문 이름으로, 이곳에 중앙 관서가 모여 있다. 전하여 조정을 말한다.
[주D-166]月夜 : 《용문집(龍門集)》 권4에는 ‘夜月’로 되어 있다.
[주D-167]자규(子規) …… 울리라 : 자규는 두견새의 별칭이다. 전설에 의하면 촉(蜀)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혼백이 화하여 두견새가 되었는데, 항상 한밤중에 ‘불여귀(不如歸)’라고 하는 듯한 소리로 몹시 처절하게 운다고 한다.
[주D-168]하의(荷衣) : 연잎으로 만든 옷으로, 신선이나 도사, 은자가 입는 옷을 가리킨다.
[주D-169]위유(韋柳) : 당나라 시인인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을 가리킨다.
[주D-170]종군행(從軍行) : ‘關雲’에서 ‘內熱’까지의 이 부분이 어떤 데에는 ‘關雲漠漠關雪堆 北風慘慘山木摧 長河氷合馬蹄滑 沙塞日夜胡笳哀 此時疲軍長歎息 愁枕干戈眠不得 兜鍪零落鐵衣寒 擊柝中宵十指直 枵腸不得一飽飯 垢面常帶三年土 自言少小繫軍籍 傷心幾度關山苦 關山之苦豈徒云 苦將膏血輸將軍 將軍好擁黑貂裘 一貂皮當金十斤 將軍好食太牢味 一日軍中九牛死 山無餘貂野無牛 誅斂無窮捶楚至 鼎中粒機中布 一一輸入將軍庫 將軍日富士日瘠 欲往訴之逢彼怒 至尊每憂軍士凍 毛衣衲衣年年送 將軍分給亦不均 煖者無多寒者衆 蟲蝗水旱無歲無 不聞賑恤聞催租 一家丁壯十餘口 過半相携逃入胡 胡中艱苦不可說 猶勝將軍浚膏血 將軍將軍胡不去 去爲公卿軍則悅 君門杳杳但回首 御史紛紛猶閉舌 廉頗李牧難再見 激烈中宵腸內熱’로 되어 있다.
[주D-171] : 원문에는 ‘催’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172] : 원문에는 ‘今’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았다.
[주D-173]태뢰(太牢) : 일반적으로 제사를 지낼 때 소, 양, 돼지의 세 가지 희생을 모두 갖추는 것을 가리키는데, 쇠고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쇠고기를 가리킨다.
[주D-174]염파(廉頗)와 이목(李牧) :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명장들로, 사졸을 몹시 사랑하였다.
[주D-175]이소부사(李少婦詞) : ‘相公’에서 ‘上月’까지의 이 부분은 《고죽유고(孤竹遺稿)》에는 ‘相公之孫鐵城李 養得幽閨天質美 幽閨不出十七年 一朝嫁與梁氏子 梁氏之子鳳鸞雛 珊瑚玉樹交枝株 池上鴛鴦本作雙 園中蛺蝶何曾孤 梁家嚴君仕遠方 千里將行拜高堂 出門恩愛從此辭 山川阻絶道路長 不是征戍向邊州 不是歌舞宿娼樓 心知此去唯爲親 好着斑衣膝下遊 兒女私情不忍別 別來幾時腸斷絶 秋梧葉落黃菊香 忽驚今朝是九日 佳辰依舊人不在 滿園茱萸誰共採 獨上高樓望北天 天涯極目空雲海 不向旁人道心事 回身暗裏潸下淚 牛羊歸盡山日夕 門外終無北來使 此身願得歸泉土 死後那知別離苦 一聲長吁掩玉顔 芳魂已逐郞行處 當時未生在腹兒 母兒同死最堪悲 芳魂不作武昌石 定化湘江斑竹枝 斑竹枝頭杜鵑血 血點淚痕俱不滅 千秋萬古何終極 一片靑山墳上月’로 되어 있다.
[주D-176]수유(茱萸) : 9월 9일 중양절에 이 수유나무 열매를 머리에 꽂으면 삿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주D-177]봉대(鳳臺) : 진(秦)나라 목공(穆公) 때 소사(蕭史)라는 사람이 있어서 퉁소를 잘 불었는데, 목공이 그의 딸 농옥(弄玉)을 그에게 시집보낸 다음 봉대를 짓고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주D-178]무창(武昌)의 돌 : 무창의 북쪽 산 위에 있는 망부석(望夫石)을 말한다. 옛날에 어떤 정절이 높은 부인이 멀리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을 전송한 다음, 이 산 꼭대기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몸이 굳어져 돌이 되었다고 한다.
[주D-179]상강(湘江)의 반죽(斑竹) : 요(堯) 임금의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 임금에게 시집가 비(妃)가 되었는데, 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창오(蒼梧)의 들에 묻혔다. 그러자 두 비가 순 임금을 그리워하여 통곡하면서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떨어졌는데, 대나무에 반점이 생겼다고 한다. 두 비가 그 뒤에 상강에서 죽으니, 사람들이 상부인(湘夫人)이라고 칭하였다.《列女傳》
[주D-180] : 《고죽유고》에는 ‘敎’로 되어 있다.
[주D-181]채련곡(采蓮曲) : ‘水岸’에서 ‘白波’까지의 이 부분은 《고죽유고》에는 ‘水岸悠悠楊柳多 小舡遙唱采蓮歌 紅衣落盡秋風起 日暮芳洲生白波’로 되어 있다.
[주D-182]依依 : 《성소부부고》 권25에는 ‘悠悠’로 되어 있다.
[주D-183]난로(鸞路) : 난로(鸞輅)로, 천자나 왕후가 타는 수레를 말한다.
[주D-184]요단(瑤壇) : 아름다운 옥을 깎아서 만든 누대로, 신선들이 사는 곳을 가리킨다.
[주D-185]능운(凌雲) 기개 : 높이 세상 밖으로 초탈하려는 뜻을 말한다.
[주D-186]오사모(烏紗帽) : 사모(紗帽)로, 벼슬아치들이 평상시에 쓰는 모자인데, 여기서는 벼슬살이하는 것을 말한다.





해동역사 제18권
 예지(禮志) 1
학례(學禮)


국학(國學)

○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태학(太學)을 세워 자제들을 가르쳤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고려 사람들은 길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扃堂)’이라고 부르면서 혼인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경서를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신당서》 ○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는 바로 고구려이다.
○ 신라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국학(國學)을 세웠다. 《화한삼재도회》 ○ 《요사》에는, “요 개태(開泰) 원년(1012, 현종3)에 귀주(歸州)에서 ‘귀주의 백성들은 본디 신라에 살던 사람들로 글자를 읽을 줄 모르니 학교를 설립해서 가르쳐 달라.’고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요청한 대로 하게 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라는 문무왕(文武王)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태학(太學)에 나아가 석전제(釋奠祭)를 올리는 것을 보고 강론(講論)하고서 돌아와 《당서》에 보인다. 학교를 세울 뜻이 있었으나, 미처 세우지 못하고 훙하였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국학(國學)을 세웠으나, 제도가 아주 엉성하였다. 성덕왕(聖德王) 16년에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10철(哲), 72제자(弟子)의 상(像)을 바치니, 국학에 놓아두도록 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 또 박사(博士)ㆍ조교(助敎)를 두어서 학례(學禮)와 학의(學儀)가 점차 갖추어졌다. 혜공왕(惠恭王) 때 및 경문왕(景文王)ㆍ헌강왕(憲康王) 때에 이르러서는 모두 국학에 행행하여 경전의 뜻을 강론하여 문물(文物)의 빛남이 중국과 짝하였다.
○ 고려에는 국자감(國子監)과 사문학(四門學)이 있으며, 배우는 자가 6천 명이나 된다. 《송사》
○ 고려의 국자감은 전에는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었다. 앞에 대문이 있는데 ‘국자감(國子監)’이라고 편액을 달았다.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세우고 양쪽 행랑(行廊)에 재사(齋舍)를 설치하여 제생(諸生)들을 거처하게 했다. 전에 지은 것은 아주 좁았는데, 지금은 예현방(禮賢坊)으로 옮겼는바, 학도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지은 것이다. 《고려도경》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성종(成宗) 11년(992) 12월에 국자감을 창설하고, 예종(睿宗)이 또 학사(學舍)를 크게 키워 설립하여 문교(文敎)가 점차 떨쳐졌다. 그러다가 원나라를 섬긴 이후로개체(開剃)와 변발(辮髮) 제도를 시행해 상서(庠序)의 가르침이 모두 없어졌다. 충렬왕(忠烈王) 때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국학(國學)을 설립하기를 청하면서 노비(奴婢)를 바쳐 설립을 도왔으며, 또 가재(家財)를 내어 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중국에 보내어서 선성(先聖) 및 그 제자들의 상(像)을 그려오게 하고, 제기(祭器)ㆍ악기(樂器) 및 육경(六經)과 그 외의 여러 책을 사오게 하였으니, 안공(安公)이 우리 유학(儒學)에 공을 끼친 것이 크다.
○ 조선의 성균국학(成均國學)은, 성전(聖殿)이 앞에 있고, 명륜당(明倫堂)이 뒤에 있다. 사학(四學)은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조선부》 본주(本注)에는 또 이르기를, “남ㆍ중ㆍ동ㆍ서의 사학에서 올라온 자를 일러 승학(升學)이라고 한다. 북쪽을 피하여 감히 학교의 이름으로 하지 못한 것은 조정(朝廷)을 존중해서이다.” 하였다.
생원ㆍ진사로서 거재(居齋)하는 자를 상재(上齋)라 하고, 사학에서 올라와 거처하는 자를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 뽑은 자이며, 진사는 시부(詩賦)로 뽑은 자이며, 승학(升學)은 백성들 가운데서 준수한 자이다. 또 그것을 일러 기재(寄齋)라 한다. 《조선부 주》
살펴보건대, 태조(太祖) 6년(1397)에 비로소 성균관을 건립하였으며, 태종(太宗) 12년(1412)에 또 사부(四部)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사학(四學)의 설립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는데, 유독 북부(北部)의 학교에 대해서만은 창설하고 폐지한 연대를 상고할 수가 없다.
○ 조선의 선성묘(宣聖廟)에는 대성전(大成殿)이라고 편액하였다. 묘제(廟制)는 영성문(靈星門)ㆍ의문(儀門)ㆍ정전(正殿)ㆍ양무(兩廡)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현들은 모두 소상(塑像)으로 모셔져 있어서 중국의 제도와 같다. 춘추(春秋)로 지내는 정제(丁祭)에는 모두 조정에서 내린 아악(雅樂)을 쓴다. 관원은 대사성(大司成)ㆍ소사성(少司成)이 있으며, 관생(館生)을 생원(生員)이라 하고, 부ㆍ주ㆍ군ㆍ현의 학생은 생도(生徒)라 한다. 이들은 모두 유건(儒巾)을 착용하는데, 부드러운 비단을 써서 만든다. 《조선기사(朝鮮紀事)》
○ 조선의 개성(開城)에 있는 지금의 군학(郡學)은 바로 왕씨(王氏) 때의 성균관이다. 성현들이 모두 소상으로 모셔져 있는 것이 평양(平壤)과 같다. 《조선부 주》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충숙왕(忠肅王) 7년(1320) 9월 무인에 문선왕(文宣王)의 상(像)을 만들기 위해 왕이 은병(銀甁) 30개를 내었으며,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이 모두 재물을 내어 그 비용을 도왔다. 공민왕(恭愍王) 16년(1367) 7월 경자에 문선왕의 소상을 숭문관(崇文館)으로 옮겼다. 본조 선묘(宣廟) 7년(1574)에 개성ㆍ평양 두 부(府)에 있는 선성과 10철의 소상을 철거하고 위판(位板)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과시(科試)

○ 고려의 공사(貢士)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왕성(王城)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하고, 다른 나라 사람은 빈공(賓貢)이라 한다. ○ 곽원(郭元)이 말하기를, “본국에서는 3년마다 한 차례씩 거인(擧人)들을 시험 보이는데, 진사과(進士科)ㆍ제과(諸科)ㆍ산학과(算學科)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번 1백여 명이 시험 보는데, 그 가운데서 합격하는 자는 1, 2십 명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이상 모두 송사》
○ 당(唐) 정관(貞觀) 초에 태종(太宗)이 학교를 넓히고 학자들을 숭상하였는데, 고려에서 이에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에서 교육시키기를 청했다. 그 뒤 장경(長慶) 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가 가행(歌行)을 잘 지었는데, 계림(鷄林) 사람들이 옷깃을 여민 채 감탄하고 흠모하였다. 근자에 사신이 고려에 가서 국자감이 세워진 것을 알았는데, 유관(儒官)을 가려뽑고, 학교를 새로 열었으며, 자못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의 제도를 준행하여서 제생(諸生)들의 등급을 매긴다. 고려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 송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였지만, 전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 데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고려에서는 학생(學生)들에 대해서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와 대등하다. 고려의 거진사(擧進士)는 한 해 건너 한 차례씩 그 소속 고을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뽑는데, 여기에 합격하면 중국의 공자(貢者)와 대등해지며, 도합 3백 50여 명을 뽑는다. 이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르게 하여 3, 4십 인을 뽑아, 갑ㆍ을ㆍ병ㆍ정ㆍ무의 5등급으로 나누어서 급제(及第)를 내리는바, 대략 본조(本朝)에서 시행하는 성위(省闈)의 제도와 비슷하다. 왕이 친히 시험을 실시해 관원을 뽑는 것으로 말하면 시(詩)ㆍ부(賦)ㆍ논(論) 3제(題)를 쓰고 살펴보건대, 《송사》에서는 그것을 염전중시(簾前重試)라고 이른다.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 이외에 또 제과(制科)와 굉사(宏辭)의 명목이 있는데, 비록 형식은 갖추어져 있으나 항상 실시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를 못하는바, 그들의 문장은 당(唐)나라의 여폐(餘弊)를 방불케 했다. ○ 진사(進士)의 이름도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이들을 국자감(國子監)에 모아서 합시(合試)하는데, 거의 4백 명이나 된다. 그 뒤에 왕이 친히 시험 보여, 여기에서 합격하는 자에게 벼슬을 준다. 정화(政和) 연간부터 학생(學生)들을 중국으로 파견하였는데, 김단(金端) 등이 입조(入朝)하여 은사과(恩賜科)에 합격하였다. 이 뒤로는 선비를 뽑을 때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공부의 우열(優劣)을 비교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유(儒)를 업(業)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이는 대개 중국을 향모(向慕)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중(城中)에서 크게 놀아 영관(榮觀)으로 삼게 한다. 《이상 모두 고려도경》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과거 시험의 법은, 삼국 시대 때에는 무력(武力)만을 전적으로 숭상해서 정해진 제도가 없었다. 신라에서는 신문왕(神文王) 2년(682)에 처음으로 위화부(位和府)를 두고서 영(令) 2명이 선거(選擧)에 관한 일을 주관하게 하였으며, 원성왕(元聖王) 4년(788)에 비로소 독서삼품출신과(讀書三品出身科)의 제도를 만들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는 문헌(文獻)에서 상고할 수가 없다. 고려의 경우는 광종(光宗) 7년(956)에 후주(後周) 사람 쌍기(雙冀)가 책사(冊使)를 따라 나왔다가 9년간 머물러 있으면서 비로소 건의하여 과거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드디어 지공거(知貢擧)가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으로 진사과(進士科)ㆍ명경과(明經科) 및 제과(諸科)를 뽑았으니,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과거 시험을 실시한 처음이다.
○ 조선에서는 중국 조정의 정삭(正朔)을 받아서 향시(鄕試)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간지가 들어간 해에 실시하고, 회시(會試)ㆍ전시(殿試)는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의 간지가 들어간 해에 실시한다. 성균관에는 항상 5백 명의 선비를 기르는데, 3년마다 명경(明經)으로 시취(試取)하는 자를 생원(生員)이라 하고, 시부(詩賦)로 시취하는 자를 진사(進士)라고 하며, 또 남ㆍ중ㆍ동ㆍ서 사학(四學)에서 올라온 자를 승학(升學)이라고 한다. 생원ㆍ진사로서 전시(殿試)에 합격한 자를 식년(式年)이라 하는데, 여기에 합격하여야만 관원이 되며, 합격하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공부한다. 식년시는 3년마다 실시하며, 33명만 뽑는다. 《조선부 주》

빈공(賓貢)

○ 당 정관(貞觀) 13년(639)에 학사(學舍)를 증축하였는데, 1천 2백 구(區)나 되었다. 사이(四夷) 가운데 고구려ㆍ백제ㆍ신라와 같은 나라에서는 서로 잇달아 자제(子弟)를 보내어 입학시켰으므로, 드디어 8천여 명이나 되었다. ○ 개원(開元) 연간에 신라 왕 김흥광(金興光)이 자제를 파견하여 태학(太學)에 입학시켜 경술(經術)을 배우게 하였다. 《이상 모두 신당서》
○ 당 태종(唐太宗)이 학교(學校)의 제도를 일으키자 신라ㆍ백제에서 모두 자제를 파견하여 와서 배웠는데, 그때 식량만을 주었다. 《명사》
○ 장경(長慶) 원년(821) 신축에 빈공(賓貢)은 1인으로, 김운경(金雲卿)이다. 《등과기(登科記)》 ○ 살펴보건대, 김운경은 신라 사람이다. 인물고(人物考)에 나온다.
○ 김가기(金可記)는 신라 사람으로 빈공진사(賓貢進士)이다. 《태평광기(太平廣記)》
○ 보력(寶曆) 원년(825)에 신라 왕이 상주(上奏)하여, 먼저 태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는 최이정(崔利貞)ㆍ김숙정(金叔貞)ㆍ박계업(朴季業) 등 네 사람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청하고, 또 새로 조공하는 데 따라간 김윤부(金允夫)ㆍ김입지(金立之)ㆍ박양지(朴亮之) 등 12명을 국자감(國子監)에 들여보내 학업을 익히게 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따랐다. 《책부원귀(冊府元龜)》
○ 최치원(崔致遠)은 고려 사람으로 빈공(賓貢)에 급제하였다. 《신당서》 ○ 살펴보건대, 최치원은 바로 신라 사람이다.
○ 최광유(崔匡裕)는 신라 사람이다. 당나라에서 신라의 사자(士子)들에게 현과(賢科)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자, 최광유와 최치원이 잇달아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광여기(廣輿記)》
○ 김이오(金夷吾)는 살펴보건대, 김이오의 오(吾)는 어(魚)로 되어 있는 데도 있다. 신라 사람으로 빈공에 합격하였다. 《전당시(全唐詩)》
○ 김문울(金文蔚)은 신라의 학생으로 빈공(賓貢)에 응시해서 급제하였다. 《책부원귀》
○ 고원고(高元固)는 발해국 사람으로 빈공에 합격하였다. 《전당시》
○ 당 태화(太和) 7년(833)에 발해 국왕이 상주하기를,
“학생 해초경(解楚卿)ㆍ조효명(趙孝明)ㆍ유보준(劉寶俊) 세 사람을 상도(上都)에 보내어 학문을 닦도록 하였습니다. 앞서 파견한 학생 이거정(李居正)ㆍ주승조(朱承朝)ㆍ고수해(高壽海) 등 세 사람은 학업이 대충은 성취되었을 것이니, 전례대로 이들과 바꾸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 주기 바랍니다.”
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책부원귀》
○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924)에 발해 국왕이 그의 친족인 학당친위(學堂親衞) 대원겸(大元兼)을 파견하여 입조(入朝)하게 하면서 국자감승(國子監丞)을 시험치르게 하였다. 당나라 때부터 해마다 자주 제생(諸生)을 파견하여 경사(京師)의 태학(太學)에 나아가서 고금의 제도에 대해 익히게 하였으므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칭해졌다. 주량(朱梁)과 후당(後唐) 30년 동안에는 공사(貢士)로 과거에 급제한 자가 10여 명이었으며, 학사(學士)가 아주 많았다. 《오대사》
○ 사승찬(沙丞贊)은 발해국 사람으로, 오대 시대 정명(貞明) 연간에 등과(登科)하였다. 《통지략(通志略)》
○ 송(宋) 개보(開寶) 9년(970, 광종21)에 고려 왕이 김행성(金行成)을 파견하여 국자감에 취학하게 하였는데,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 5년에 고려 사람 강전(康戩)이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 옹희(雍煕) 3년(986, 성종5)에 고려가 본국의 학사(學士) 최한(崔罕)ㆍ왕빈(王彬)을 파견하여 국자감에 나아가서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 순화(淳化) 3년(992, 성종11)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의 빈공진사(賓貢進士) 왕빈ㆍ최한 등 40인에게 급제를 내렸으며, 모두 비서성 비서(祕書省祕書)로 삼은 다음 즉시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 함평(咸平) 원년(998, 목종1) 2월에 조서를 내려 예부(禮部)의 방방(放榜)에서 고려의 빈공진사(賓貢進士) 김성적(金成績)에게 급제를 하사하고, 춘방(春榜)에 붙이게 하였다. ○ 경우(景祐) 원년(1034, 덕종3)에 고려의 빈공진사 강무민(康撫民)을 사인원(舍人院)에서 소시(召試)하였다. 4월 3일에 출신(出身)을 하사하였다. ○ 원부(元符) 2년(1099, 숙종4)에 조서를 내려 고려국왕이 선비를 빈공(賓貢)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였다. ○ 숭녕(崇寧) 5년(1106, 예종1)에 고려 왕이 사자(士子) 김단(金端) 등 5명으로 하여금 태학에 들어가게 하니, 중국 조정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박사(博士)를 두었다. ○ 정화(政和) 7년(1117, 예종12) 2월 정묘에 집현전(集賢殿)에 나아가 고려의 진사(進士)들에게 책문(策問)을 시험보였다. 3월 경인에 고려의 진사 권적(權適) 살펴보건대, 《고려사》에는 권적(權迪)으로 되어 있다. 등 4명에게 상사급제(上舍及第)를 하사하였다. 《이상 모두 송사(宋史) 및 옥해(玉海)》
고려에서는 자제들을 태학에 입학시켰는데, 과거에 급제하고서 돌아간 자가 아주 많다. 일찍이 선인(先人)들의 《동년소록(同年小錄)》을 보니, 그 가운데 빈공(賓貢)이란 것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에서 보내온 선비들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
○ 고려의 이색(李穡)은 정동성(征東省)의 향시(鄕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며, 다음 해 원나라의 정시(廷試)에 응시하여 이갑진사(二甲進士)에 뽑혔다. 《명시종(明詩綜)》
○ 국초(國初)에 살펴보건대, 홍무(洪武) 초이다. 고려에서 김도(金濤) 등 3인을 보내어 태학에 입학하게 하였다. 《장안객화(長安客話)》
홍무(洪武) 3년(1370, 공민왕19) 5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 짐이 중국과 사방 오랑캐를 통일하였기에 현인 군자를 얻어 등용하고자 한다. 금년 8월부터는 특별히 과거를 베풀되, 오경의(五經義)는 5백 자(字) 이상, 사서의(四書義)는 3백 자 이상으로 하며, 논(論) 역시 이와 같이 하고, 책(策)을 지음에 있어서는 오로지 사실대로 곧바로 서술하기를 힘쓰고 문장을 꾸미는 것을 숭상하지 말도록 하며 1천 자 이상으로 하라. 고려ㆍ안남(安南)ㆍ점성(占城) 등의 나라에서도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가 있으면 각각 본국의 향시(鄕試)에 나아가 합격한 다음 경사(京師)의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되, 인원수에는 구애받지 말고 선발하라. 이상의 내용을 사신을 보내어 조서를 반포해서 알리라.”
하였다. 《속문헌통고》
○ 4년 3월에 봉천전(奉天殿)에서 회시(會試)에 합격한 거인(擧人)들에게 친히 책문(策問)을 시험보였으며, 오백종(吳伯宗) 등 1백 22명에게 진사급제(進士及第)와 진사출신(進士出身)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이 과거에 고려의 김도(金濤)가 삼갑(三甲)에 합격하였다. 김도에게 동창부(東昌府) 안구현승(安邱縣丞)을 제수하였는데, 김도가 중국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조서를 내려서 노자를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상동》 ○ 《엄주별집(弇州別集)》에는, “홍무 4년에 고려의 유생 가운데 들어와 응시한 자가 3인이었는데, 그 가운데 오직 김도(金濤)만이 삼갑(三甲) 제5등에 합격하였으므로 현승(縣丞)을 제수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모두 낙방하였다. 3인은 모두 중국 말이 통하지 않아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하였다. ○ 《위숙자집(魏叔子集)》에는, “홍무 4년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은 송렴(宋濂)이었다. 그 제목은, 먼저 오경의(五經疑) 2수(首)와 다음 사서의(四書疑) 2수로 제1장(場)을 삼고, 논(論)ㆍ조(詔)ㆍ표(表) 각 1수로 제1장을 삼고, 책(策) 1수로 제3장을 삼았다. 이 과거에서 합격한 자는 1백 20인으로, 그 가운데 97번째인 김도는 고려 사람이다.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뽑는 방법을 여기에서 알 수가 있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본국의 향시(鄕試) 거인(擧人) 가운데 한 사람인 김도가 삼갑(三甲)에 합격하여 진사출신(進士出身)을 하사받았고, 또 박실(朴實)ㆍ유백유(柳伯濡) 두 사람은 낙방하였다.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자, 황제의 분부를 받들어서 노자를 주어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 5년에 고려 왕이 자제를 파견해서 태학에 입학시키게 해 주기를 요청하자, 황제가 이르기를,
“태학에 입학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나, 멀리 바다를 건너와야 하니, 원하지 않는 자는 억지로 입학시키지 말라.”
하였다. 《명사》
살펴보건대,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중국의 과거 시험에 합격한 자는 신라의 김운경(金雲卿)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 장경(長慶) 초에 두사례(杜師禮)의 방(榜)에 합격하였다. 그후에 당나라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자는 58명이다. 오대 시대의 주량(朱梁)과 후당(後唐)의 과거에 합격한 자는 31명인데, 그 가운데 이름을 상고할 수 있는 자는 김이어(金夷魚)ㆍ김가기(金可紀)ㆍ최치원(崔致遠)ㆍ최광유(崔匡裕)ㆍ김문울(金文蔚)ㆍ이동(李同) 함통(咸通) 연간에 합격하였다.ㆍ최승우(崔承佑) 당 소종(昭宗) 경복(景福) 연간에 당나라에 들어가 급제하였다.ㆍ최언위(崔彦撝) 《고려사》의 최언위전에 이르기를, “최언위는 신라 사람이다. 나이 18세 때 당나라에 들어가서 유학하여 당나라 예부 시랑 설정규(薛廷珪)의 방(榜)에 급제하였다. 이때 발해의 재상(宰相)인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이 같은 해에 급제하였는데, 오소도가 당나라에 조회하면서 그의 아들 이름이 최언위의 이름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는 표문을 올려서 청하기를, ‘신이 지난날에 입조(入朝)하여 급제하였을 적에는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으니, 지금 신의 아들 오광찬의 이름이 최언위의 이름 위에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더 뛰어나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하였다.ㆍ최광윤(崔光允) 최언위의 아들로 진(晉)나라 때 빈공진사(賓貢進士)에 급제하였다. 역시 최언위전에 보인다.ㆍ박인범(朴仁範) 빈공진사에 급제하여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ㆍ김악(金渥) 이상은 모두 신라 사람이다.ㆍ고원고(高元固)ㆍ오소도(烏炤度) 이동(李同)과 같은 방에 합격하였다.ㆍ오광찬(烏光贊) 오소도의 아들로, 최언위와 같은 방에 합격하였다.ㆍ사승찬(沙丞贊) 이상은 모두 발해 사람이다. 고려에 들어와서 송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자는 김행성(金行成)ㆍ강전(康戩)ㆍ최한(崔罕)ㆍ왕빈(王彬)ㆍ김성적(金成績)ㆍ강무민(康撫民)ㆍ권적(權適)ㆍ조석(趙奭)ㆍ김단(金端)ㆍ강취정(康就正)이 있다. 그러나 송나라 때의 빈공과(賓貢科)라는 것은 매번 별도로 시험을 보여 방(榜)의 끝에다가 붙이는 것이었다. 원나라 연우(延祐) 4년(1317, 충숙왕4)에 비로소 과거에 관한 조서를 반포하여, 정동성(征東省)으로 하여금 합격자 3인을 뽑아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게 해 중원(中原)의 뛰어난 자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금방(金榜)에 이름을 걸게 하였다. 이에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자에는 안진(安震) 연우 5년에 제과(制科)의 제 삼갑(三甲) 15등에 합격하였다.최해(崔瀣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1321, 충숙왕8)에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ㆍ안축(安軸) 태정(泰定) 원년(1324, 충숙왕11)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이곡(李穀)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1333, 충숙왕 복위 2)에 제과의 제 이갑(二甲)에 합격하였다.ㆍ이인복(李仁復) 지정(至正) 원년(1341, 충혜왕 복위 2)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안보(安輔) 지정 6년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윤안지(尹安之) 지정 7년에 제과에 합격하였다.ㆍ이색(李穡) 지정 13년(1353, 공민왕2)에 한림학사(翰林學士) 구양현(歐陽玄)이 고시(考試)할 때 삼갑(三甲) 제2등에 합격하였다.ㆍ김승언(金升彦) 어느 해에 합격하였는지 상고할 수가 없다. 《동국여지승람》 안변부(安邊府) 인물조(人物條)에 김승언은 원나라의 제과에 합격하였으며, 재행(才行)이 있었다고 실려 있다. 등 9명이 있다. 명나라 조정에서 합격한 자는 오직 김도(金濤) 한 사람뿐이다.


[주D-001]경당(扃堂) : 고구려 때 세운 사학기관(私學機關)이다. 태학(太學)이 상류층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관학(官學)인데 비하여, 경당은 문무일치(文武一致)의 이념으로 평민층의 자제에게 경전(經典)과 무예를 교육시키던 곳이다.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전국의 각 곳에 설치하였다.
[주D-002]문선왕(文宣王) :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주D-003]10철(哲) : 공자의 제자 가운데 10명의 뛰어난 현인으로, 안회(顔回)ㆍ민자건(閔子騫)ㆍ염백우(冉伯牛)ㆍ중궁(仲弓)ㆍ재아(宰我)ㆍ자공(子貢)ㆍ염유(冉有)ㆍ계로(季路)ㆍ자유(子游)ㆍ자하(子夏)를 가리킨다.
[주D-004]사문학(四門學) : 국자감 사방의 대문 곁에 일반 서민을 위하여 세웠던 학교를 말한다.
[주D-005]개체(開剃) : 머리의 가장자리를 모두 깎고 정수리 부분의 머리털만 남겨서 길게 땋아 늘이는 것을 말한다. 몽고에서 들어온 풍습으로, 고려 말기에 유행하였다.
[주D-006]정제(丁祭) : 선성(先聖)ㆍ선사(先師)를 모시는 제사로, 석전제(釋奠祭)를 말한다. 중춘(仲春)인 2월과 중추(仲秋)인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행한다.
[주D-007]가행(歌行) : 성률이 덜 근엄한 고체시(古體詩)의 일종으로 악부시(樂府詩)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
[주D-008]월서계고(月書季考)의 제도 : 매월 한 차례씩 배운 것을 써 보게 하고, 사계절에 한 차례씩 배운 내용이나 시문(詩文)을 시험 보이는 제도이다.
[주D-009]성위(省闈)의 제도 : 궁중(宮中)에서 실시하는 중앙고시(中央考試)를 말한다.
[주D-010]제과(制科) : 임시로 시험을 실시하여 특출한 인재를 발탁하는 과거로, 국왕이 직접 출제하여 시험하는 과거이다.
[주D-011]굉사(宏辭) : 박학굉사(博學宏辭)를 말하는바, 관리를 뽑는 과거의 이름이다. 문장 3편으로 시험하였다.《文獻通考 選擧考 賢良方正》
[주D-012]위화부(位和府) : 신라 진평왕(眞平王) 3년(581)에 설치한 관아. 후세의 이조(吏曹)와 같은 구실을 하던 관아로, 경덕왕(景德王) 때 사위부(司位府)라고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때 다시 본 이름으로 고쳤다.
[주D-013]독서삼품출신과(讀書三品出身科) : 신라 원성왕(元聖王) 4년(788)에 설치한 관리 채용 시험 제도이다. 국학(國學)에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마련하고 독서의 성적에 따라서 3등급으로 나누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이 독서삼품과의 설치는 종래 골품(骨品) 위주의 관리 등용을 지양하고 유학(儒學)의 교양에 따른 능력 위주의 제도를 마련하려고 한 것이었지만 골품 제도가 강고하게 유지되었던 까닭에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주D-014]주량(朱梁) : 오대 시대 때의 양(梁)나라를 말한다. 주씨(朱氏)가 창건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하며, 대개 남조(南朝)의 숙량(肅梁)과 구별하기 위해 주량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주D-015]소시(召試) : 임금이 앞에 불러다 놓고 물어서 시험하는 것으로, 선비를 채용하는 특별 방법이다.


















東文選卷之十一
 五言排律
高巒感興十二韻[崔瀣]

朅來孤嶼上。旅食度朝昏。婦矮行如鼈。民窮貌似猿。俗雖乖習尙。禮或識卑尊。日落腥煙合。秋深瘴氣溫。峯巒同翼翼。浦溆轉蜿蜿。帆截分天影。沙堆認水㾗。海經將古驗。潮曆問今煩。老樹嫌風亞。驚濤得石喧。將僧同止息。與世隔囂喧。把釣時堪待。乘桴興又存。長歌誰見和。大息只無言。須信煙波樂。猶爲聖主恩。





芝峯類說卷十二
 文章部五
宋詩

魏野詩曰。燒葉爐中無宿火。讀書牕下有殘燈。或以葉爲藥非矣。又曰有名閑富實。無事小神仙。洗硯魚呑墨。烹茶鶴避烟。後人於下聯。添却池邊松下字。可謂畫蛇添足爾。
王欽若未第時有詩曰。龍帶晩煙歸洞府。鴈拖秋色入衡陽。眞宗大加賞愛。其後致位上相。實由於此云。然以今觀之。別非奇語矣。
王禹稱詠鶴詩曰。埋瘞肯同鸚鵡冢。飛鳴不到鳳凰池。張虞登第詩曰。一擧首登龍虎榜。十年身到鳳凰池。後皆卒於小官。竟不到其地云。今觀王語餒張語夸。俱非遠大氣象耳。
王曾布衣時有早梅詩云雪中未說調羹事。且向百花頭上開。呂蒙正曰。此生作狀元宰相矣。後與李迪連榜取魁。又相繼秉鈞。以詩寄之曰。錦標得雋曾相繼。金鼎調元亦薦更。
宋眞宗賞花釣魚宴詩。唯丁謂鶯驚鳳輦穿花去。魚畏龍顔上釣遲一聯最佳。但上句不及下句。
楊大年詠芙蓉詩曰。昨夜三更裡。姮娥墮玉簪。馮夷不敢受。捧出碧波心。高麗崔瀣詠兩荷詩曰。貯椒八百斛。千載笑其愚。何如綠玉斗。竟日量明珠。兩作相等矣。
寇萊公詩云野水無人渡。孤舟盡日橫。全襲韋蘇州野渡無人舟自橫之句。而後人獨稱萊公爲有相業何歟。
晏元獻詩。有曰梨花院落溶溶月。柳絮池塘淡淡風。又樓臺冷落收燈夜。門巷蕭條掃雪天。又已定復搖春水色。似紅如白野棠花。此等句語。不似崑體。可誦。
宋楊徽之。太宗時人。以能詩聞。其警聯曰犬吠竹籬沽酒客。鶴隨苔岸洗衣僧。浮花水入瞿塘峽。帶雨雲歸越嶲州。戍樓煙自直。戰地雨長腥。新霜染楓葉。皓月借蘆花。
陳亞有藥名詩百餘首。如風月前湖近。軒窓半夏凉。碁怕臘寒呵子下。衣嫌春暖縮紗裁。巧矣。
石曼卿籌筆驛詩云意中流水遠。愁外舊山靑。又樂意相關禽對語。生香不斷樹交花。朱子以爲極佳。
包拯詩曰。直幹終爲棟。眞剛不作鉤。可見其氣象矣。
歐陽詩話曰。西南夷人所賣蠻布弓衣。織成梅聖兪春雪詩。詩曰朔風三日暗吹沙。蛟龍卷起皆成花。花飛萬里奪皓月。白石爛旺愁女媧。大明廣庭踏朝賀。雉尾不掃粘宮靴。宮中才人承聖顔。捧觴獻壽呼南山。三公免責百姓喜。斗酒十千誰復慳。此詩在聖兪集中。未爲絶唱。蓋其名重天下。一篇一詠。傳落夷狄而貴重如此云。余謂此詩語意乃賀雪。不似春雪詩矣。蓋夷人之所重。以其名也。非眞知其可好者也。故能知而好之者。天下鮮矣。
歐陽公詩銀蒜鉤簾宛地垂。又小詞云早是東風作惡。旋安排一雙銀蒜。鎭羅幕。按銀蒜。鑄銀爲蒜形以押簾也。
歐陽公詩曰三月春陰正養花。又曰鎖日春陰養花魄。東坡詩曰養花須晏陰。又無名氏詩曰淡雲微雨養花天。蓋以天陰小雨。爲養花也。詩學大成。有詩曰天養梅花日日晴。此則未知誰作。而恐誤用養字爾。
歐陽公詩曰禦寒低便面。便去聲。以此觀之。古人寒節。亦以扇障耳。按韻府群玉。便面以障面者。不欲見人則得其便。今沙門所持竹扇是也。
梅聖兪四禽言詩。謂泥滑滑,婆餠焦,提壺盧,歸去樂也。東坡五禽言。謂蘄州,鬼脫,布袴,鷓鴣,姑惡,黃鸝也。我國高敬命禽言詩曰。欲死緣何事。知渠悔有生。又無名氏詩曰。人間苟活知無數。胡乃曾輕一片身。此指俗所謂呼死鳥也。此鳥每於春時鳴。聲甚哀楚。蓋怨禽也。
宋王珪觀燈應制詩尾句曰。一曲昇平人共樂。君王又進紫霞杯。按小說。高麗賀正朝禮物中。有紫霞杯,五色琉璃盞。是夕用以進酒故云。堯山堂外紀曰。高麗紫霞杯。五色玻瓈也。昇平曲名。
東坡詩云人皆養子望聰明。我被聰明誤一生。但願生兒愚且魯。無災無難到公卿。又瞿宗吉詩曰。自古文章厄命窮。聰明未必勝愚蒙。此蓋用坡語也。
王安石詩曰。今人未可非商鞅。商鞅能令令必行。觀此則知安石口談先王而祖述商鞅。其得免小人誅難矣。
半山詩紫磨月輪升靄靄。帝靑雲幕卷寥寥。按金之優者名紫磨。帝靑珠名。見華嚴經。又事始曰。歸藏易云女媧張雲幕而占神明。卽幕之始也。
東坡詩曰快瀉錢塘藥玉船。按玉堂詩選註。藥玉船。以藥合成酒杯。飮之以求長生。卽今紫霞盃也。韻府曰。以藥煑石似玉。可作酒盃。
王半山題畫詩云方諸承水調幻藥。洒落生綃變寒暑。按方諸鑑也。周禮司烜氏以鑑取明水於月。楞嚴經。諸大幻師求大陰精。用和幻藥云。幻師蓋謂畫師。幻藥蓋謂采色。大陰精蓋謂水也。
王半山初夏詩曰。晴日暖風生麥氣。綠陰幽草勝花時。我朝富林君湜詩。乃曰綠陰芳草勝花時。此句全用半山。而但改作芳草似勝。
半山詩云朶頤羊鼎方垂涎。按羊鼎牛鼎皆鼎名。取其象而名之。陳震曰。禹鼎三代相傳。號稱神器。迨七雄僭王。私計得鼎者可以有天下。若後世傳國璽云。班彪王命論曰神器有命。文中子曰神器有歸。所謂神器。皆指九鼎也。
半山詩曰。志士無時亦小成。中才隨世就功名。蓋自古有志而不偶於時者眾矣。唐詩所謂時來天地皆同力。運去英雄不自由。亦此意也。
荊公退去鍾山。有詩云穰侯老擅關中事。長恐諸侯客子來。我亦暮年專一壑。每逢車馬便驚猜。其專擅忌克之意可見。夫患得患失於山水。與患得患失於軒裳圭組者。何以異哉。
侯鯖錄曰。王介甫小時作石榴花詩曰。濃綠萬枝紅一點。動人春色不須多。按葉夢得曰。此乃唐人詩。非荊公所作。惜不見其全篇耳。余謂此句法。似是荊公手段。堯山堂外紀。亦以爲荊公所作。而夢得以爲唐詩。未知何所據耶。
王半山詩曰。細書妨老讀。長簟愜昏眠。取簟且一息。拋書還少年。陸放翁詩曰。相對蒲團睡味長。主人與客兩相忘。須臾客去主人覺。一半西窓無夕陽。兩詩相似。而陸尤豪矣。
王半山擬樂天詩曰。何處難忘酒。英雄失志秋。廟堂生莽卓。巖谷死伊周。賦斂中原困。干戈四海愁。此時無一盞。難遣壯圖休。余謂半山力行新法。流毒四海。此詩眞自道也。又樂天詩曰。周公恐懼流言日。王莽謙恭下士時。若使當年身便死。一生眞僞有誰知。半山常喜誦之云。蓋亦有所感會而然歟。
王介甫江行詩曰。眠分黃犢草。坐占白鷗沙。占去聲。蓋謂眠則分得黃犢所眠之草。坐則占取白鷗所坐之沙。以江行爲題。故詩語如此。有與物忘機之意。或者以分與占爲分辨識認之義。則占當作平聲。誤矣。
王安石詩臥占寬閑五百弓。按西域度地。以肘四爲一弓。以唐尺計之。五百弓爲二里許也。
邵康節詩曰。何處是仙鄕。仙鄕不離房。眼前無俗事。心下自淸凉。李宗易詩曰。大都心足身還足。秪恐身閑心未閑。但得心閑隨處樂。不須朝市與雲山。
邵康節詩曰。平生不作皺眉事。擧世應無切齒人。又風花雪月千金子。水竹雲山萬戶侯。又唐虞揖遜三杯酒。湯武交爭一局碁。想其胸懷樂易跌蕩。千載之下。誦其詩。如見其人。
舒亶詩曰。香泛釣筒萍雨夜。綠搖花塢柳風春。又空外水光風動月。暗中花氣雪藏梅。又萬壑水澄知月白。千林霜重見松高。舒在宋無詩名。而其工如此。
東坡詞曰。眞態生香誰盡得。玉奴纖手嗅梅花。墨莊謾錄曰。甞見東坡手書本。作玉如纖才楊用脩。亦以爲是。然東坡詩玉奴終不負東昏。指潘淑妃也。又曰玉奴絃索花奴手。玉奴謂楊妃。花奴謂汝陽王璡。此玉奴蓋亦一意耳。謾錄之言恐誤。
東坡詩曰夏旱麥人臞。按麥之心曰人。本草云蕎麥取人。食之下氣。坡詩又曰曉來梅子已生人。
蘇子瞻以世間惟有蟄龍知爲罪案。而王介甫殿前栢詩云根通御水龍應蟄。子瞻若引此爲證。則王珪輩宜有遁辭。余直欲追訟而不得也。
東坡牧丹詩曰一朶妖紅翠欲流。按蜀語。鮮翠猶言鮮明也。蜀人又謂糊窓爲泥窓。故花蘂夫人宮詞曰紅錦泥窓遶四廊。
東坡詩山憶喜歡勞遠夢。地名惶恐泣孤臣。按宋邢凱曰。蜀大散關。有喜歡鋪。萬安縣有皇公灘。而改爲惶恐以作對。又廬陵有二十四灘。而坡詩乃云十八灘頭一葉身非也。按仇池有九十九泉。而杜詩長思十九泉。亦省文耳。
蘇詩云詞頭夜下攬衣忙。按凡有辭命。書其題目。下于詞臣。使製進曰詞頭。又唐明皇喜唱水調歌頭。按歌頭猶言首章也。
東坡詩云宿麥連雲有幾家。麥隔歲而熟。故曰宿。按淮南子曰虛中則種宿麥是也。
東坡詩曰。無事此靜坐。一日是兩日。若活七十年。便是百四十。此與日長如少年同意。
東坡送黃師憲詩曰。白首沈下吏。綠衣有公言。按東坡云吾家朝雲。每見師憲。怪其官職不遷。綠衣指朝雲。乃坡侍妾名。
東坡贈人詩云聖善方當而立歲。頑尊已及古稀年。以其父年七十。而其母方三十歲故戲之。盧守愼詩云寄也歸而免。居然到古稀。亦此也。
東坡詩曰。贏得兒童語音好。一年强半在城中。蓋言靑苗之法。使民不得休息。故村童久在城中。學得官話而語音好耳。
黃山谷讀謝安傳詩曰。傾敗秦師琰與玄。矯情不顧驛書傳。持危又幸桓溫死。太傅功名亦偶然。此詩工拙不可知。而議論則好矣。
黃山谷詩曰美酒玉東西。又曾茶山詩曰酒酣金盞照東西。玉東西酒器也。今漢語謂家中器物爲東西。猶俗言家事也。按呂東萊性麁暴。嫌飮食不如意。便打破家事。
郭功父老人詩云不記近事記遠事。不能近視能遠視。哭無淚笑有淚。夜不睡晝多睡。兒子不惜惜孫子。大事不問問碎細。又曰夜雨稀聞聞耳雨。春花微見見空花。盖老人耳中常作風雨聲。而不得聞實雨故云。
馬子才詩曰李白騎鯨飛上天。按韓退之甞言太白得仙去。元和初。有人自北海來。見太白與一道士跨赤虬而去。此云騎鯨。恐別有出處。或誤用事耳。
漢書不載虞美人事結末。宋人詩曰。香魂夜逐劍光飛。靑血化爲原上草。註云項王亡滅。虞姬自刎。按賈氏談錄曰。褒斜山谷。有虞美人草。狀如鷄冠。行路見者唱虞美人則葉搖動。如人撫掌之狀。或唱他詞。寂然不動云。
宋人有長城詩曰。祖舜宗堯自太平。秦皇何事苦蒼生。不知禍起蕭墻內。虛築防胡萬里城。有東人和之曰。粉堞縱橫萬里平。黎民賴此得安生。當時若數秦皇罪。只在坑儒不在城。其意好。
宋蔡承禧製皇后挽詞曰。天上玉欄花已折。人間方士術何施。按宋姜識有神術。使死者復生。皇后之薨。試其術不驗。乃曰后與仁宗臨白玉欄干賞牡丹。無復來人間。詩語以此。
山谷詩喜用白鷗字。有曰江南野水碧於天。中有白鷗閑似我。又曰夢作白鷗去。江湖水貼天。世謂黃山谷夢作白鷗者以此。
張乖厓致仕詩曰。兒童不慣錦衣榮。見我歸來夾道迎。不免隔溪高士笑。天機喪盡得虛名。人謂此詩爲後世公卿致仕者供狀云。余謂致仕者猶不免人笑。則漏盡而不知休者。又當何如也。
柳如京塞上詩曰。鳴骹直上一千丈。天靜無風聲正乾。碧眼胡兒三百騎。盡提金勒向雲看。一時盛稱其詩。好事者多圖於屛障。卒有金元之禍。
李師中贈官妓賈愛卿詩云願得豼貅千萬兵。犬羊巢穴一時平。歸來不用封侯印。只向君王覔愛卿。
宋人詩曰。柳外雕鞍公子醉。花邊團扇麗人行。時謂絶唱。見此則古者婦人用扇自蔽者可知矣。今我國士大夫雖冬月。亦以扇掩面。中朝人大笑之。豈以爲近婦人故歟。
后山詩曰。秋盤堆鴨脚。春味薦猫頭。猫頭笋也。山谷詩曰。霜林收鴨脚。春網薦琴高。語意相似。而琴高古仙人乘鯉者。今曰薦琴高則未穩。
莊孔易詩曰。詩卷袖寒携海岳。夜舡江隱坐星河。按東坡云我携此石歸。袖中有東海。又沈佺期云舡如天上坐。蓋用此也。隱疑作穩。
世傳岳武穆手書送張紫岩北伐詩曰。號令雷霆迅。天聲動北陬。長驅渡河洛。直擣向燕幽。馬蹀閼支血。旗梟克汗頭。歸來報明主。恢復舊神州。按稗史言此詩雄渾悲壯。卽唐名家。不是過也。今見筆勢尤雄健。人謂辟邪。而稗史平並擧。蓋其書流傳於我國。而中朝人未之見也。按紫巖張浚號也。
晁載之有昭靈夫人祠詩曰。安得生兒作劉季。暮年無骨葬昭靈。按漢高祖起兵野戰。喪妣於黃鄕。天下平定。使以梓宮招魂于野。有丹蛇出水躍入于梓宮。諡爲昭靈夫人。事見漢書註。
謝逸字無逸。有咏蝶詩三百首。如云身似何郞全傅粉。心如韓壽愛偸香。飛隨柳絮有時見。舞入梨花無處尋。時稱謝蝴蝶。然其所膾炙止此。則他可知矣。
郭浩詩曰。隴口山深草木荒。行人到此斷肝腸。耳中不忍聽鸚鵡。猶在枝頭說上皇。按小說。隴州歲貢鸚鵡。徽宗敎以詩文後發還本土。後郭浩按邊至隴口。見紅白二鸚鵡於枝間。問上皇安否。浩曰上皇崩矣。鸚鵡悲鳴不已云。
宋詩蒲牢百八吼禪林。又曰聲殘一百八。按蒲牢獸名。畏鯨魚輒鳴吼。故凡鐘作蒲牢形。以所擊者爲鯨魚。黃山谷云催粥華鯨吼。夜闌又風冽。僧魚響謂之蒲牢吼則可矣。今曰華鯨吼。恐誤用事。如東坡云木魚曉動隨僧粥爲是。
胡澹庵謫中聞秦檜死。有詩云夢入瓊崖身益壯。烟銷金塢臭空傳。後孟珙滅金回。屯軍於檜墓所。令軍士糞溺墓上。人謂穢塚。澹庵之言蓋驗矣。烟銷金塢。本以郿塢比檜。而亦爲金亡之讖焉。
朱文公詩孤燈耿寒焰。照此一窓幽。臥聽簷前雨。浪浪殊未休。張南軒詩坡頭望西山。秋意已如許。雲影渡江來。霏霏半空雨。又散策下舸亭。水淸魚可數。却上采菱舟。乘風過南浦。楊愼以此爲有唐調云。
堯山堂外紀。晦翁甞訪婿蔡沈不遇。蔡妻葱湯麥飯。辭以簡褻。晦翁留詩曰葱湯麥飯兩相宜。葱養丹田麥療飢。莫謂此中滋味薄。前村猶有未炊時。余謂當食而先念未炊之人。可見仁人君子之用心也。
韓子蒼詩曰。推愁不去還相覓。與老無期稍見侵。按王荊公詩。閉戶欲推愁。愁終不肯去。劉賓客詩與老無期約。到來如等閑。蓋用此也。
陸放翁詩澆書滿挹浮蛆甕。攤飯橫眠夢蝶床。按宋人謂晨飮爲澆書。午睡爲攤飯。蓋俗語也。蓋古人晨起必讀書。故曰澆書。
放翁詩云靑羅包髻白行纏。不是凡人不是仙。家在洛陽城裡住。臥吹銅笛過伊川。可見其豪放矣。但臥吹之臥字。未知如何。堯山堂紀。以此爲朱希眞詩也。
楊誠齋詩老讀文書興易闌。從知養病不如閑。竹床瓦枕西堂上。臥見江南雨後山。其風流意趣可玩。不宜以晩宋少之。按癸辛雜識。以此爲呂滎陽作。未知孰是。
楊誠齋絶句云梅子流酸濺齒牙。芭蕉分綠上牕紗。日長睡起無情緖。閑看兒童捉柳花。張紫巖見之曰。廷秀胸襟透脫矣。余謂紫岩評品似過。且捉字不雅。改以趁字如何。
宋詩有云荷因有熱先擎蓋。柳爲無寒漸脫綿。小說中稱爲佳句。然似巧而拙。不足傳也。
宋詩曰。勸君休鑷鬢毛斑。鬢到斑時亦自難。多少朱門少年子。業風吹上北邙山。語亦達矣。盧蘇齋晩年鑷白不休。客問之。公曰殺人者死。白髮能殺人故去之。客大笑。
稗史。載鄧中甫贈文山詩。尾句云餘生諒須臾。孤憤橫九縣。庶幾太尉事。萬一中丞傳。文山在燕獄。寄中甫云久要何落落。末路重依依。死矣煩公傳。北方人是非。余謂此言果是。則文山亦有意於名者也。無乃好事者爲之歟。
金主璟遊仰山詩云金色界中兜率景。碧蓮花裡梵王宮。鶴驚淸露三更月。虎嘯疎林萬壑風。又甞得句云二人土上坐。其妃李氏對曰一月日邊明。時稱警妙。
金主亮詠竹詩曰。我心正與君相似。只待雲梢拂碧空。又閱柳耆卿詞三秋桂子十里荷花之語。遂萌飮江之志。題詩曰提兵百萬西湖上。立馬吳山第一峰。其桀驁之氣可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