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월19일 (경오) | | 타위 군사 5만을 채우게 하고, 백관에게 품종을 내게 하여 꺼린 자는 치죄하게 하다 | |
전교하기를, “ 청계산( 淸溪山)에서 사냥할 때에는 징집해 온 군사 3만 명 외에 2만 명을 더 뽑아서 5만 명을 채우라. 또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상은 품종(品從) 10인을, 통정(通政) 이하는 5인을 내게 하라. 대저 사천(私賤)은 비록 고·증조(高曾祖) 때부터 전해 왔다지마는 온 나라 백성은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은즉, 이것도 또한 공가(公家)의 물건이다. 만약 싫어한다거나 꺼리는 자가 있으면 사헌부(司憲府)는 규찰하여 치죄(治罪)하라.” 하였다. 【원전】 14 집 2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재정-역(役) / *신분-천인(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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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태서지 | 권수제 | 금릉집(원집)(金陵集(原集)) | 판심제 | 없음 | 간종 | 활자본(聚珍字) | 간행년 | 1815년 간행 | 권책 | 24권 12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2.6×16.2(cm) | 어미 | 上黑魚尾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 한46-가305 | 총간집수 | | | 권수제 | 영옹속고(속고)(潁翁續藁(續藁)) | 판심제 | 영옹고(潁翁藁) | 간종 | 활자본(全史字) | 간행년 | 1822년 간행 | 권책 | 5권 2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1.9×15.7(cm) | 어미 | 上黑魚尾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 한46-가116 | 총간집수 | | | 권수제 | 영옹재속고(재속고)(潁翁再續藁(再續藁)) | 판심제 | 영옹고(潁翁藁) | 간종 | 활자본(全史字) | 간행년 | 1830년경 간행 | 권책 | 3권 1책 | 행자 | 10행 20자 | 규격 | 21.9×15.7(cm) | 어미 | 上黑魚尾 |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 한46-가116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272 | |
| | | | 저자 | 성명 | 남공철(南公轍) | 생년 | 1760년(영조 36) | 몰년 | 1840년(헌종 6) | 자 | 원평(元平) | 호 | 금릉(金陵), 영옹(潁翁), 귀은당(歸恩堂), 사영(思潁), 사영거사(思潁居士), 의양자(宜陽子), 이아도인(爾雅道人), 이아당(爾雅堂), 고동각(古董閣), 서선각(書船閣), 전경재(篆經齋) | 본관 | 의령(宜寧) | 시호 | 문헌(文獻) | 특기사항 | 김재련(金載璉), 이덕무(李德懋) 등과 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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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전거 : 宜陽南氏譜圖ㆍ自碣銘ㆍ南有容墓碣(南公轍 撰), 南漢紀墓表(南有容 撰, 雷淵集 卷24), 宜寧南氏族譜(直提學公長子監察公派) 등에 의함 | | | | 행력 | 왕력 | 서기 | 간지 | 연호 | 연령 | 기사 | 영조 | 36 | 1760 | 경진 | 乾隆 | 25 | 1 | 11월 16일, 서울 明禮坊에서 태어나다. | 영조 | 39 | 1763 | 계미 | 乾隆 | 28 | 4 | 成川 府使로 나가는 부친을 따라가서 처음으로 학문을 배우다. | 영조 | 45 | 1769 | 기축 | 乾隆 | 34 | 10 | 모친에게 周南, 召南, 「論語」, 「孟子」 등을 諺解로 배우다. | 영조 | 48 | 1772 | 임진 | 乾隆 | 37 | 13 | 11월, 冠禮를 행하다. ○ 12월, 淸州韓氏 韓用和의 딸과 혼인하다. | 영조 | 49 | 1773 | 계사 | 乾隆 | 38 | 14 | 7월, 부친상을 당하다. | 영조 | 51 | 1775 | 을미 | 乾隆 | 40 | 16 | 처음으로 古文을 배우다. 이때 兪漢雋이 저자의 글을 읽고 ‘小韓愈’라고 평하다. | 정조 | 4 | 1780 | 경자 | 乾隆 | 45 | 21 | 陞補試에 합격하다. | 정조 | 6 | 1782 | 임인 | 乾隆 | 47 | 23 | 涵仁亭에서 왕명으로 〈探花宴賦〉를 지어 紙筆墨을 상으로 받다. | 정조 | 8 | 1784 | 갑진 | 乾隆 | 49 | 25 | 7월, 蔭職으로 翊衛司 洗馬가 되다. 6품에 올라 사옹원 주부가 되다. | 정조 | 9 | 1785 | 을사 | 乾隆 | 50 | 26 | 2월, 사헌부 감찰로 옮기다. | 정조 | 10 | 1786 | 병오 | 乾隆 | 51 | 27 | 2월, 의금부 도사가 되다. ○ 6월, 山淸 縣監이 되다. | 정조 | 12 | 1788 | 무신 | 乾隆 | 53 | 29 | 長興庫 主簿가 되다. | 정조 | 13 | 1789 | 기유 | 乾隆 | 54 | 30 | 장악원 주부를 거쳐 宗廟署 令이 되다. | 정조 | 14 | 1790 | 경술 | 乾隆 | 55 | 31 | 3월, 任實 縣監이 되다. ○ 여름, 산청 현감 때 糶糴을 축냈다는 의금부의 추고로 파직되었다가 大赦를 받아 서용되다. | 정조 | 15 | 1791 | 신해 | 乾隆 | 56 | 32 | 5월, 사복시 첨정이 되다. | 정조 | 16 | 1792 | 임자 | 乾隆 | 57 | 33 | 1월, 對策으로 人日製에서 장원하다. ○ 3월, 文科에 丙科로 급제하다. 兵曹 正郞, 別兼春秋가 되다. ○ 弘文錄에 들다. 사복시 정, 사간원 헌납을 거쳐 홍문관 응교, 의정부 사인, 규장각 직각이 되다. ○ 「奎章全韻」 편찬에 참여하다. | 정조 | 17 | 1793 | 계축 | 乾隆 | 58 | 34 |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가 되다. | 정조 | 18 | 1794 | 갑인 | 乾隆 | 59 | 35 | 병조 참의가 되다. ○ 4월, 江華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사면되다. ○ 6월, 大司成이 되다. | 정조 | 19 | 1795 | 을묘 | 乾隆 | 60 | 36 | 비변사 부제조에 차임되다. ○ 9월, 병조 참의가 되다. | 정조 | 20 | 1796 | 병진 | 嘉慶 | 1 | 37 | 5월, 형조 참의, 대사성이 되다. ○ 「小學集成」 편찬에 참여하다. | 정조 | 21 | 1797 | 정사 | 嘉慶 | 2 | 38 | 2월, 비변사 부제조가 되다. ○ 7월, 대사성이 되다. ○ 정조가 저자의 文稿를 보고 雅潔하고 古法이 있다고 칭찬하다. | 정조 | 22 | 1798 | 무오 | 嘉慶 | 3 | 39 | 4월, 대사성이 되다. ○ 8월, 가선대부로 승품되고 金帶를 하사받다. 한성부 우윤, 형조 참판이 되다. | 정조 | 23 | 1799 | 기미 | 嘉慶 | 4 | 40 | 1월, 예조 참판이 되다. ○ 6월, 강원도 관찰사가 되다. ○ 8월, 금강산에 가다. | 정조 | 24 | 1800 | 경신 | 嘉慶 | 5 | 41 | 4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 8월, 貞純王后의 명으로 순조에게 金載瓚 등과 번갈아 입시하여 勸講하다. 도승지, 대사성이 되다. ○ 12월, 규장각 직제학이 되어 「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다. | 순조 | 1 | 1801 | 신유 | 嘉慶 | 6 | 42 | 1월, 호조 참판, 부제학이 되다. ○ 6월, 대사성이 되다. ○ 12월, 도승지가 되다. | 순조 | 2 | 1802 | 임술 | 嘉慶 | 7 | 43 | 1월, 實錄纂修堂上에 차임되다. ○ 2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 순조 | 4 | 1804 | 갑자 | 嘉慶 | 9 | 45 | 2월, 관찰사에서 체차되어 선공감 제조가 되다. ○ 6월, 모친상을 당하다. | 순조 | 6 | 1806 | 병인 | 嘉慶 | 11 | 47 | 8월, 삼년상을 마치고 형조 참판이 되다. | 순조 | 7 | 1807 | 정묘 | 嘉慶 | 12 | 48 | 1월, 正卿이 되다. ○ 2월, 공조 판서, 祔廟都監 提調가 되다. ○ 4월, 예조 판서가 되다. ○ 7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 10월, 冬至正使로 燕京에 가다. 이곳에서 曹江, 陳希祖, 李林松 등 당대의 有名 文士들이 저자의 문장을 보고 序를 지어 주다. | 순조 | 8 | 1808 | 무진 | 嘉慶 | 13 | 49 | 3월, 귀국하여 이조 판서가 되다. ○ 10월, 한성부 판윤이 되다. ○ 12월, 이조 판서가 되다. | 순조 | 9 | 1809 | 기사 | 嘉慶 | 14 | 50 | 1월, 예문관 제학이 되다. ○ 2월, 都堂會圈을 행하다. ○ 4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 9월, 공조 판서가 되다. ○ 11월, 增廣會試 上試官이 되다. | 순조 | 10 | 1810 | 경오 | 嘉慶 | 15 | 51 | 1월, 도총관이 되다. ○ 4월, 병조 판서, 규장각 제학이 되다. ○ 6월, 開城府 留守가 되다. | 순조 | 11 | 1811 | 신미 | 嘉慶 | 16 | 52 | 2월, 穆淸殿과 敬德宮을 봉심하다. ○ 3월, 元子 左諭善이 되다. ○ 5월, 이조 판서가 되다. ○ 11월, 예문관 제학, 이조 판서가 되다. | 순조 | 12 | 1812 | 임신 | 嘉慶 | 17 | 53 | 3월, 판의금부사, 홍문관 제학이 되다. ○ 6월,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다. ○ 8월, 병조 판서가 되다. ○ 10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 11월, 館伴으로 차출되다. 호조 판서가 되다. ○ 12월, 홍문관 제학이 되다. | 순조 | 13 | 1813 | 계유 | 嘉慶 | 18 | 54 | 3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 4월, 우빈객이 되다. ○ 7월, 이조 판서, 규장각 제학이 되다. ○ 8월, 홍문관 제학, 예조 판서가 되다. ○ 11월, 예문관 제학, 이조 판서가 되다. | 순조 | 14 | 1814 | 갑술 | 嘉慶 | 19 | 55 | 1월, 선혜청 제조가 되다. ○ 3월, 우부빈객이 되다. ○ 4월, 좌참찬, 판의금부사가 되다. ○ 6월, 「弘齋全書」를 교정하고 監印한 공으로 崇祿大夫에 가자되다. ○ 8월, 예문관 제학이 되다. | 순조 | 15 | 1815 | 을해 | 嘉慶 | 20 | 56 | 1월, 홍문관 제학이 되다. ○ 2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 6월, 병조 판서, 좌빈객이 되다. ○ 9월, 홍문관 제학이 되다. ○ 「金陵集」 24권 12책을 聚珍字로 간행하다. | 순조 | 16 | 1816 | 병자 | 嘉慶 | 21 | 57 | 1월, 敬懿王后(惠慶宮)의 諡冊文을 지어 올린 공으로 輔國崇祿大夫에 가자되다. ○ 3월, 좌빈객이 되다. ○ 10월, 우빈객이 되다. | 순조 | 17 | 1817 | 정축 | 嘉慶 | 22 | 58 | 1월, 병조 판서가 되다. ○ 2월, 이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이 되다. ○ 4월, 이조 판서에서 체직된 뒤에 龍山으로 나가다. ○ 7월, 예조 판서, 우의정이 되다. ○ 11월, 三館의 직임에서 해면되다. | 순조 | 18 | 1818 | 무인 | 嘉慶 | 23 | 59 | 내의원 도제조가 되다. | 순조 | 19 | 1819 | 기묘 | 嘉慶 | 24 | 60 | 〈自碣銘〉을 짓다. | 순조 | 21 | 1821 | 신사 | 道光 | 1 | 62 | 3월, 왕대비가 승하하여 遷陵都監 摠護使가 되다. ○ 4월, 좌의정이 되다. ○ 9월, 병으로 총호사를 사직하다. | 순조 | 22 | 1822 | 임오 | 道光 | 2 | 63 | 3월, 판중추부사가 되다. ○ 「潁翁續藁」 5권 2책과 「高麗名臣傳」 12권 6책을 全史字로 간행하다. | 순조 | 23 | 1823 | 계미 | 道光 | 3 | 64 | 2월, 영의정이 되다. ○ 祔廟都監 都提調가 되다. | 순조 | 24 | 1824 | 갑신 | 道光 | 4 | 65 | 12월, 판중추부사가 되다. | 순조 | 25 | 1825 | 을유 | 道光 | 5 | 66 | 8월, 龍山으로 나가다. | 순조 | 26 | 1826 | 병술 | 道光 | 6 | 67 | 9월, 洛陽 耆英會 고사를 모방하여 金載瓚 등과 함께 貞社四老會를 만들어 貞陵坊 집에서 모이다. | 순조 | 27 | 1827 | 정해 | 道光 | 7 | 68 | 4월, 영의정이 되다. | 순조 | 28 | 1828 | 무자 | 道光 | 8 | 69 | 3월, 왕명으로 아들 南芝耈가 洗馬에 보임되다. | 순조 | 29 | 1829 | 기축 | 道光 | 9 | 70 | 耆社에 들다. ○ 6월, 영의정에서 解免되다. ○ 11월, 世孫冊禮都監 都提調가 되다. | 순조 | 30 | 1830 | 경인 | 道光 | 10 | 71 | 1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 5월, 三都監 都提調가 되다. ○ 9월, 영의정이 되다. ○ 「潁翁再續藁」 3권 1책을 全史字로 간행하다. | 순조 | 31 | 1831 | 신묘 | 道光 | 11 | 72 | 영의정에서 해면되고 영중추부사가 되다. | 순조 | 32 | 1832 | 임진 | 道光 | 12 | 73 | 아들 南芝耉가 慶州 判官이 되다. ○ 7월, 영의정이 되다. | 순조 | 33 | 1833 | 계사 | 道光 | 13 | 74 | 5월, 致仕하다. 堂號를 ‘歸恩’이라고 하다. | 순조 | 34 | 1834 | 갑오 | 道光 | 14 | 75 | 5월, 「歸恩堂集」 10권 5책을 聚珍字로 간행하다. | 헌종 | 6 | 1840 | 경자 | 道光 | 20 | 81 | 12월 29일, 졸하다. ○ 廣州 淸溪山에 장사 지내다. |
기사전거 : 自碣銘, 年譜(南公轍 撰, 歸恩堂集 卷10), 墓誌銘(鄭元容 撰, 經山集 卷17),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 | | | 편찬 및 간행 | 저자는 정조의 스승인 南有容의 아들로 태어나 젊어서는 정조의 知遇를 받고 순조 때에는 정승의 자리에서 국왕을 보필한 老論 집권층이다. 25세에 세자익위사 세마로 벼슬을 시작하여 74세에 영중추부사로 致仕할 때까지 거의 50년을 관직에 있었으며 「金陵集」 24권, 「潁翁續藁」 5권, 「潁翁再續藁」 3권, 「歸恩堂集」 10권의 시문집과 「高麗名臣傳」 12권의 저술을 남겼다. 저자는 자신의 시문을 생전에 직접 自編하여 爾雅堂本, 玉磬山房本, 西京本 세 종류의 稿本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 중 서경본을 바탕으로 刪削하여 1807년 저자가 冬至正使로 燕京에 갔을 때 받아 둔 淸人 曹江, 李林松, 陳希祖 등의 서문과 자신의 서문을 붙여 56세 때인 1815년에 聚珍字로 24권 12책의 「金陵集」을 간행하였는데, 標題紙에는 문집 이름을 ‘金陵居士文集’이라고 하였다.《元集》 이 원집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305), 규장각(奎1603), 장서각(4-5805)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22년에 저자는 「원집」이 간행된 1815년 이후부터 63세 때인 1822년까지의 시문을 모아 全史字로 5권 2책의 「潁翁續藁」를 간행하였다. 표제지에 문집 이름을 ‘潁翁續藁’라고 하였고, 저자가 쓴 자신의 〈詩藁小引〉과 〈文藁小引〉이 있다.《續藁》 이 속고는 「금릉집」의 續編으로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6), 규장각(奎1757), 장서각(4-6281)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30년경에 저자는 「속고」가 간행된 1822년부터 71세 때인 1830년경까지의 시문을 모아 全史字體로 3권 1책의 「潁翁再續藁」를 간행하였다.《再續藁》 이 재속고는 「금릉집」의 再續編으로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6), 규장각(奎1758)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저자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이미 간행된 「원집」, 「속고」, 「재속고」를 편집하여 일부를 산삭하고 1830년부터 1834년까지의 시문을 추가하여 1834년에 聚珍字로 10권 5책의 「歸恩堂集」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마지막으로 편집, 간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원집」, 「속고」, 「재속고」를 합한 분량 1082판에 비해 산삭된 작품의 분량이 689판이나 되고 추가된 분량은 119판에 불과하여, 저자 작품의 전모를 살피기 어렵다. 다만 이 책의 권10에는 저자의 연보인 宜陽子年譜가 추가되어 있어 행력을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16), 규장각(奎5286), 장서각(4-5789)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저자가 자신의 詩文을 自編하여 1815년에 聚珍字로 初刊한 24권 12책의 「金陵集」에, 이후의 시문을 모아 1822년에 全史字로 인행한 5권 2책의 「潁翁續藁」, 1830년경에 全史字로 인행한 3권 1책의 「潁翁再續藁」를 合附한 것으로, 모두 국립중앙도서관장본이다.
기사전거 : 自碣銘, 自識, 詩藁小引ㆍ文藁小引(南公轍 撰), 序(曹江ㆍ李林松 撰), 本集內容 등에 의함 | | | | 구성과 내용 | 본서는 원집 24권 12책, 속고 5권 2책, 재속고 3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집」은 권수에 1807년에 받아 온 淸人 曹江, 李林松의 序와 陳希祖의 引, 저자의 自識, 總目이 실려 있고, 각 권마다 目錄이 있다. 권1~4는 賦와 詩인데, 시는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1에는 賦 3편과 詩 72題가 실려 있다. 부는 〈琴賦〉, 〈樂器賦〉, 〈秋螢賦〉인데, 이 중 〈추형부〉는 가을밤에 반딧불로 독서하는 감회를 읊은 것이다. 시는 李德懋, 成大中 등을 전송하는 送別詩, 金載璉, 黃景源 등에 대한 輓詩, 〈爆竹〉 등의 風俗詩, 〈雙溪寺〉 등의 詠史詩가 실려 있다. 권2에는 시 82제가 실려 있다. 〈草書屛風行〉은 韓濩가 초서로 쓴 병풍을 읊으면서, 宣祖 때 世稱 三絶인 崔岦의 詞翰, 石陽正 李霆의 畫, 韓濩의 글씨를 언급한 내용이다. 〈次陶靖節飮酒詩〉 10수는 陶潛의 〈음주시〉에 차운한 것으로, 저자는 시인으로서는 도잠을, 시로서는 〈음주시〉를 가장 좋아한다는 自序가 붙어 있다. 그 밖에 御題에 酬應한 시, 摛文院, 銀臺 등에 直宿하면서 지은 시 등이 실려 있다. 권3에는 시 79제가 실려 있다. 柳得恭의 시에 차운한 시, 강원도 관찰사 재임시에 昭陽亭, 金剛山, 洛山寺를 유람하고 지은 紀行詩, 正祖의 輓詞 등이 실려 있다. 권4에는 시 106제가 실려 있다. 1802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 花山, 南海 등을 순행할 때 지은 시를 비롯하여, 1807년 10월 冬至正使에 차출되어 平壤, 鴨綠江을 거쳐 燕京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기행시 등이 많다. 권5는 內製集과 外製集으로 되어 있다. 내제집에는 祭文 22편, 敎旨 4편, 敎書 2편, 樂章文 1편, 頒敎文 4편, 竹冊文 1편이 실려 있다. 제문은 景慕宮, 宗廟, 眞殿 등에 지내는 親祭文과 林慶業, 黃一皓, 李秉模 등에 대한 致祭文이다. 교지는 徐鼎修, 金祖淳, 徐龍輔, 李存秀, 교서는 摠戎使 鄭民始, 守禦使 金載瓚에게 내린 것이다. 이 밖에 〈景慕宮祭享樂章文〉, 〈元子誕降陳賀頒敎文〉, 〈王世子冊封竹冊文〉이 실려 있다. 외제집에는 함경도 관찰사 金憙, 황해도 관찰사 李泰永, 평안도 관찰사 金載瓚과 金勉柱에게 내린 교서 4편이 실려 있다. 권6에는 箋狀 35편, 啓 3편이 실려 있다. 전장은 저자가 내각, 강원도 관찰사,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大殿과 大王大妃의 聖節, 冬至, 正朝, 正祖의 祔廟, 元子 誕降 때에 올린 箋이 대부분이며, 이 밖에 〈嶺南年分狀〉, 〈論船艙狀〉이 실려 있다. 권7~9는 疏箚 69편이다. 홍문관 부교리, 승정원 우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비변사 부제조, 강원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 예조 참판, 경상도 관찰사, 이조 판서, 지중추부사, 예문관 제학, 대제학, 병조 판서, 내의원 제조, 개성부 유수, 正使, 호조 판서, 선혜청 제조 등을 사양하는 사직소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자신을 탄핵하거나 자신을 인책하는 自劾疏, 自引疏, 숭록대부를 사양하는 乞暇疏 등이 있다. 권10에는 書 11편, 尺牘集에 편지 53편이 실려 있다. 서에는 朴南壽, 成大中, 金載璉, 沈象奎 등에게 준 편지가 실려 있는데, 문장에 대해 논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척독집에는 吳允常, 李顯綏, 李德懋, 성대중, 김재련, 심상규, 金祖淳, 徐有榘 등에게 준 편지들이 실려 있다. 권11에는 序 34편이 실려 있다. 李秉模, 柳義養, 徐美修 등이 연경에 사신으로 갈 때 지어 준 送序, 南有衡의 「苞甘集」, 金載璉의 詩集, 李德懋의 「雅亭集」, 朴師益의 문집 서문과 族譜 서문 등이 실려 있다. 권12에는 記 25편이 실려 있다. 이 중 〈又思潁亭記〉는 저자가 廣陵의 玉磬山 가운데에 정자를 구입하여 ‘又思潁亭’이라고 명명하고 기문을 쓴 것인데, 평소 歐陽脩의 인간됨과 文章, 道德을 사모하여 호를 思潁이라고 지었고, 항상 歸休의 뜻을 가지고 있었음을 기술하였다. 이 밖에 闇然齋, 夕陽樓 등의 樓亭에 대한 기문과 鄭夢周를 배향한 烏川書院의 기문, 淸州 皇廟碑를 중수하고 지은 기문 등이 있다. 권13에는 題跋 26편, 雜著 15편이 실려 있다. 제발에는 金壽恒, 宋時烈, 吳允常, 金載璉, 兪拓基 등의 筆蹟, 筆札, 簡帖, 簡牘에 대한 발문이 많다. 잡저에는 金壽恒과 李縡의 畫像에 붙인 贊, 金龍行, 權應銖에 대한 傳, 宋奎輝의 孝行을 논하여 旌閭해 줄 것을 청하는 장계, 權趾淵을 애도하는 哀詞 등이 실려 있다. 권14에는 잡저 15편, 祭文 11편이 실려 있다. 잡저 가운데 〈詩論〉, 〈書論〉, 〈春秋論〉, 〈易繫辭論〉 등은 저자의 문학론을 살필 수 있는 글이다. 〈四閣臣畫像贊〉은 좌의정 徐龍輔, 태학사 李晩秀, 직학사 李始源, 저자의 畫像에 대한 贊이고, 이 밖에 策題 등이 있다. 제문은 吳允常, 金載璉, 朴南壽, 黃景源, 吳載純, 金履素, 黃鍾五, 兪漢雋 등을 제사하는 글이다. 권15~19에는 碑銘 14편, 墓碣 8편, 墓誌 21편, 墓表 14편, 行狀 2편, 諡狀 3편이 실려 있다. 비명은 金士廉, 南銑, 黃景源, 李宜哲, 南泰耆, 兪彦民의 신도비명과 襄陽의 東海神廟, 定州의 忠義壇에 대한 것과 金剛山 乾鳳寺에서 泗溟大師가 僧兵을 일으킨 공적을 기리는 비문이다. 묘갈은 저자의 선친인 南有容을 비롯하여 許晊, 南振, 南孝溫, 鄭錫休, 南殷老, 南守一의 것이다. 묘지는 南褒, 蔡聖龜, 成僴, 韓尙箕, 南龍翼, 南有常과 先妣 安東金氏 등에 대한 것이고, 묘표는 南在, 吳健, 尹汲, 李德懋 등에 대한 것이다. 행장은 南有定, 韓養吾에 대한 것이며, 시장은 南泰會, 黃昇源, 洪樂命에 대한 것이다. 권20은 日得錄으로 文學 96則, 政事 53칙, 人物 13칙, 訓語 88칙이 실려 있다. 원래 「일득록」은 1783년부터 1799년까지의 正祖의 語錄인데 반해, 여기에 실린 「일득록」은 1792년에서 1798년 사이의 정조의 어록을 기록해 놓은 것에서 저자 나름대로 발췌한 것이다. 내용도 각 주제별로 정조의 독서관, 인물평, 문장론, 학술비평 등을 기록한 雜錄이다. 권21은 詩童子問으로, 저자가 젊었을 때 「詩經」을 읽으면서 考證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 鈔錄해 둔 것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동자와의 問答 형식을 통해 「시경」에 대한 저자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아울러 鄭玄, 王通, 孔穎達, 歐陽脩, 呂祖謙, 朱子, 程子, 馬端臨 등 諸家의 學說도 소개하였다. 권22는 讀禮錄으로 曲禮를 비롯하여 喪服四制까지 44편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1804년 모친상을 당하여 廣州 墳庵에서 시묘살이하는 동안 「禮記」를 읽으며 의심난 곳에 대해 李德懋가 지은 「禮記臆」의 說을 참조하고 자기 자신의 설을 첨부하여 만든 것이다. 권23~24는 書畫跋尾와 譜圖이다. 서화발미는 중국의 그림과 글씨 154편에 대해 작품의 眞僞 여부, 收藏 경위, 작가의 생애 등에 대해 저자가 品評한 내용을 題跋의 형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대체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보도는 宜陽南氏譜圖로, 시조 金忠이 景德王에게 南氏라는 姓을 하사받고 이름을 南敏이라고 한 내력부터 저자의 부친 南有容에 이르기까지의 족보와 간단한 이력이 실려 있다. 「속고」는 권수에 總目이 실려 있고, 각 권마다 目錄이 있다. 권1에는 1822년에 저자가 쓴 詩稿小引과 목록이 있고, 이어 시 37제가 실려 있다. 〈憶心遠亭〉, 〈江村遣興〉 등의 江湖의 생활을 동경하는 시를 비롯하여 敬懿王后와 正祖에 대한 輓詩 등이 실려 있다. 권2~3에는 1822년에 저자가 쓴 文稿小引과 목록이 있고, 이어 應製文 14편, 啓 12편, 疏箚 33편이 실려 있는데, 이 중 제목만 있고 본문 내용이 없는 글이 18편이다. 응제문은 頒敎文, 上諡玉冊文, 親祭文, 竹冊文 등으로 왕명에 따라 지은 글이다. 계는 科試의 폐단, 諸道의 量田 등에 대해 품의한 내용이다. 소차에는 판서, 우의정, 대제학, 좌의정을 사양하는 사직소, 賞典을 사양하는 차자, 冬雷 등을 이유로 修省 6조를 진달하고 면직을 청하는 차자 등이 실려 있다. 권4에는 議 9편, 序 3편, 記 3편, 祭文 2편, 言行錄 1편, 神道碑銘 2편이 실려 있다. 의에는 惠慶宮의 喪服制度 등 왕실의 儀禮에 대한 議論이 실려 있다. 서기는 부친 南有容의 문집 「著菴集」에 대한 서문, 저자가 편찬한 「高麗名臣傳」에 대한 서문 등이다. 언행록은 남유용에 대한 것이며, 신도비명은 尹心衡, 元仁孫에 대한 것이다. 권5에는 神道碑銘 1편, 誌碣 8편, 墓表 1편, 諡狀 4편이 실려 있다. 李敬一의 신도비명, 外舅 韓用和의 묘갈명 등과 저자 자신을 두고 지은 〈思潁居士自誌〉, 〈自碣銘〉이 실려 있다. 「재속고」는 권수에 總目이 있고, 각 권 앞에는 목록이 있다. 권1에는 시 53제가 실려 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했을 때 지은 시가 많다. 이 중 〈舟遊龍山〉은 龍山에 물러나 있을 때 지은 것이고, 〈擬古十九首〉는 江舍에서 지내면서 樂府體詩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며, 〈可歎〉은 일흔이 넘어 치아도 빠지고 눈도 침침한 것을 읊은 내용이다. 권2에는 應製文 1편, 啓 9편, 疏箚 12편, 議 1편, 序 6편, 記 1편, 跋 3편이 실려 있다. 이 중 〈論蔘包啓〉는 譯官들의 경제적 도움과 使行 경비의 염출을 위해 생긴 蔘包制의 폐단에 대해 논한 글이다. 소차는 영의정에서 해직시켜 주기를 청한 사직소, 災異로 인하여 정부에 陳戒하는 글, 致仕를 청하는 글인데, 사직소 중에는 본문 없이 제목만 실려 있는 것이 4편이다. 〈燕京筆談序〉는 1807년 冬至正使로 연경에 갔을 때 曹江, 李林松 등과 나눈 筆談에 쓴 서문이며, 〈貞社四老會序〉는 1826년 金思穆, 金載瓚, 韓用龜과 함께 貞社四老會를 결성한 것에 대해 쓴 서문이다. 이 밖에도 명나라가 멸망한 뒤에 李如松의 후손들이 조선에 오게 된 전말 등을 기록한 〈李提督畫像記〉 등이 실려 있다. 권3에는 祭文 3편, 誌碣 6편, 墓表 1편, 諡狀 1편이 실려 있다. 제문 중 〈文集印出後告先考畫像文〉은 본 문집의 편찬 간행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갈은 南景昌, 楚重燕, 李偁淵, 李顯綏, 徐有聞, 李益輔에 대한 것이고, 묘표는 南周獻, 시장은 柳孝源에 대한 것이다.
| 필자 : 김기빈(金圻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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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갈(墓碣) | | |
형조 정랑(刑曹正郞) 이공(李公) 묘갈명 병서(幷序) | |
내가 공의 얼굴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일찍이 자리를 함께하여 절차탁마(切磋啄磨)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사람 됨됨이를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41)에 나라 안의 풍물을 보려고 함께 서울에 갔다가 마침 환난(患難)을 당하여 장차 일망타진되려고 할 때에 많은 선비들이 두려워하면서 체신을 잃지 않은 자가 적었는데, 공만은 끝까지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공에게 진중(珍重)한 도량이 있는 것에 감복하였다. 그 뒤 7년이 지난 갑인년(1614)에 내가 시사(時事)를 말하다가 죄를 얻어서 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지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나를 죽이고자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공만은 유독 나를 보호하고 주선하여 불에서 구해 주고 물에서 건져 주듯이 하였다. 나는 그때 공에게 다급할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다행히 죽지 않고 제주(濟州)의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뒤 7년이 지난 경신년(1620)에 공이 문경호(文景虎)의 원통함을 바로잡고자 하여 도내(道內)에 통문(通文)을 내었다가 소인배들의 모함을 받아 해서(海西)의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우리 두 사람은 매번 같은 때에 환난을 만났는가. 공이 백령도에 있으면서 백령지(白翎誌) 한 편을 나에게 보내왔는데 그 글은 본도의 풍토(風土)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을 뿐이고 조금도 걱정하거나 곤액을 억울해하는 뜻이 문자 사이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공이 지키는 바가 과연 남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금상(今上)의 반정(反正)으로 나는 공과 함께 사면되었다. 나는 사간(司諫)이 되어 올라왔고, 공은 간성 군수(杆城郡守)에 제수되어 숙배하러 왔다가 여관에서 서로 만나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후에 나는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공도 남의 무함을 받아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7년이 지난 뒤에 공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또 7년이 지난 뒤에 공의 외손인 성창계(成昌季)가 공의 묘소에 비를 세우려 하면서 나에게 명을 받아다가 오랫동안 전하려 하였다. 아, 내가 차마 명을 쓸 수 있겠는가.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대기(大期)이며, 자는 임중(任重)인데, 그의 선대(先代)는 전의인(全義人)이다. 고려 태사 도(棹)의 후손으로 13세(世)가 지난 뒤에 휘 순전(純全)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는데, 공의 5세조이다. 증조(曾祖)인 휘 창윤(昌胤)은 장령을 지냈으며, 조(祖)인 휘 공보(公輔)는 현감을 지냈으며, 고(考)인 휘 득분(得蕡)은 벼슬하지 않았으나 정(正)에 추증되었다. 정은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해년(1551, 명종6) 2월 3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16, 7세에 문리를 크게 통하여 수우(守愚) 최공(崔公)에게 가서 글을 배웠고, 이어서 남명(南冥) 조 선생(曺先生)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남명 선생이 황강과 도의(道義)로 사귀었기에 자신의 손자처럼 여기고 특별히 끌어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 학자의 성리설(性理說)을 배우게 되었으니, 단지 과거 공부나 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경오년(1570)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은 그때 약관(弱冠)의 나이였으나 초상(初喪)을 치르면서 예를 어기는 일이 없었다. 신묘년(1591)에 부친상을 당하여 묘소 아래에서 여묘살이하였는데, 이듬해인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침입하여 연달아 삼경(三京)을 함락시키니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하여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람은 세 가지 즉 임금, 스승, 부모에 의하여 태어나는데 섬기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따라서 지금 종묘사직이 위태롭고 임금이 다급한 상황에서 평상시의 예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라고 여기고서, 연례(練禮)를 마치자마자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등과 함께 서로 호응하여 낙동강(洛東江)의 위와 아래에서 파수를 하면서 왕래하는 적선으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을 갖고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낙동강 오른쪽에 위치한 약간의 군현들이 그 덕분에 무사할 수가 있어서 훗날 중흥(中興)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는데 공 또한 큰 기여를 하였다. 선조(宣祖)가 의주(義州)에 머물고 있다가 본도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포상하고 이어서 차등을 두어 관직까지 제수하였는데, 이에 공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가 되었다. 계사년(1593)에 감사(監司)가 공에게 백성을 다스릴 만한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임시로 지례현(知禮縣)을 맡겼더니 비록 난리에 떠도는 중이었지만 그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정식으로 수령이 되기를 바랐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하였다. 갑오년(1594)에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 되었고 을미년(1595)에 의흥 현감(義興縣監)으로 승직되어 치성(治聲)이 있었다. 기해년(1599)에는 조정에 들어와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가 얼마 후 정랑(正郞)이 되었다. 경자년(1600)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고 무신년(1608)에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되었다가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임기가 만료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에 제수되고 갑인년(1614) 1월에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에 외임(外任)으로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었고, 또 얼마 후에 일로 인해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공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용감하였다. 친구가 어려운 일을 당하여 억울해 하는 것을 보고는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여기고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하며 서둘러 구원하다가 마침내 여기에 연좌되어 죄를 입고 백령도(白翎島)로 귀양 갔는데 이때 나이가 70세였다. 물귀신이 막고 있는 머나먼 바닷길을 다른 사람들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거늘 공은 그러한 기미를 조금도 말과 표정에 나타내지 않았다. 유배 생활을 4년 동안 하고 나니 머리털이 그전보다 훨씬 하얗게 되었다. 방환되어 곧바로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어떤 사람이 또 다시 방해하여 이때부터 강사(江舍)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오랫동안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지냈다. 무진년(1628, 인조6) 11월 14일에 병환으로 정침(正寢)에서 임종(臨終)하니, 향년 78세였다. 이듬해 1월 5일에 초계현(草溪縣)의 동쪽 부곡(釜谷)의 유좌묘향(酉坐卯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이 증 참의 진주(晉州) 강심(姜深)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모두 요절하고 방실(傍室)에서 아들 뇌(磊)를 두었다. 장녀는 정승선(鄭承先)에게 시집가고, 2녀는 참봉 이각(李瑴)에게 시집가고, 3녀는 성이침(成以忱)에게 시집가고, 4녀는 현감 신득자(申得滋)에게 시집가고, 5녀는 생원 이도(李蒤)에게 시집갔다. 정승선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욱(彧)이며, 딸은 곽희익(郭希益)에게 시집갔다. 이각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국(壽國)이며, 장녀는 진사 권극중(權克重)에게 시집가고, 2녀는 수찬 강대수(姜大遂)에게 시집가고, 3녀는 박동형(朴東衡)에게 시집가고, 4녀는 어리다. 성이침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창하(昌夏)와 창계(昌季)이고 장녀는 노원(盧洹)에게 시집가고, 2녀는 유회근(柳晦根)에게 시집갔다. 신득자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행(涬)이며, 장녀는 이광진(李光鎭)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도는 1남 7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요절하고 장녀는 곽경담(郭慶覃)에게 시집가고, 2녀는 진사 곽홍지(郭弘址)에게 시집가고, 3녀는 정금(鄭嶔)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뇌(磊)는 이윤식(李允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신체가 헌칠하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성품이 고결하여 남을 허여하는 일이 적었다. 젊어서부터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고 특히 시를 잘하여 향시(鄕試)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으나 마침내 진사시(進士試)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들은 모두 요절하고 가운(家運)을 단지 한 서자(庶子)에게 전할 뿐이었으니,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하는 것이 어쩌면 이렇게도 인색하단 말인가. 백령지(白翎誌)와 허와기(虛窩記) 등 약간의 글과 《설학수문(雪壑搜聞)》 한 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일찍이 명문에 귀의하여 / 早依名門 연원이 있었으니 / 來有淵源 학문의 정통함이요 / 學之正也 형제간에 우애하여 / 友于兄弟 화락함이 있었으니 / 存以愷悌 실천에 옮긴 게라 / 施諸行也 위험에 닥쳐도 끄떡없고 / 臨危無隕 곤궁함에 처해도 걱정 없음은 / 處窮不憫 성품이 그러했거니와 / 所其性也 벗의 어려움을 다급하게 여겨 / 急友之難 탄식만 하지 않고 일어났으니 / 不但永歎 어쩌면 그리도 굳세단 말가 / 何其勁也 재주가 있었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 有才不試 기량은 있어도 끝내 드러내지 못하였으니 / 有器終閟 애석한 운명을 어찌하랴 / 可惜命也 낭관의 자리와 / 郞署之儀 수령의 자리를 / 郡縣之施 어찌 성대하다고 할까 / 豈足盛也 청계산 동쪽 / 淸溪之東 부곡의 가운데에 / 釜谷之中 영원히 자리를 잡았기로 / 宅之永也 내가 그 사적을 뽑아서 / 我最其蹟 비석에다 새기노니 / 刻之墓石 후세의 경사라 하리로다 / 後之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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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명(墓誌銘) | | |
가의대부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권공의 묘지명[嘉義大夫刑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權公墓誌銘] 병서(幷序) | |
공의 휘는 첩(怗)이고 자는 정오(靜吾)이며 성은 권씨(權氏)로 안동인(安東人)이다. 권씨는 본디 신라의 국성(國姓)인 김씨였는데, 시조(始祖)인 고려의 태사(太師) 행(幸)이 신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여 고창군(古昌郡)을 가지고 고려에 귀부(歸附)하였다. 고려 태조가 그의 권도(權道)에 통달함을 가상히 여겨 권으로 사성(賜姓)하고 고창을 안동으로 고치고 이어 그의 식읍(食邑)으로 삼아주었으니, 이것이 실로 씨적(氏籍)이 되었다. 그 후 11대(代)를 내려와 문청공(文淸公) 휘 단(㫜)과 문청공의 아들인 문정공(文正公) 휘 보(溥)에 이르러서는 부자(父子)가 모두 명성과 덕행으로 사전(史傳)에 기재되었고, 문정공의 자손이 번창하여 대대로 고관 대작이 이어졌으므로, 세상에서 그 복을 칭도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찬성사(贊成事) 문충공(文忠公) 휘 근(近)이 유학(儒學)으로 크게 드러났으니, 바로 공의 7대조이다. 증조 휘 우(愚)는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대사헌에 증직되었고, 조 휘 굉(硡)은 화성군(花城君)에 습봉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고 휘 징(徵)은 병조 판서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판서공은 우리 선조조(宣祖朝)에 벼슬하면서 충직 강정(忠直剛正)하였고 청백(淸白)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비(妣)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효령대군(孝寧大君) 휘 보(俌)의 후예이며, 사헌부감찰로 좌승지에 증직된 휘 효언(孝彦)의 딸이다. 공은 바로 판서공의 넷째 아들로, 만력 계유년 10월 신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벼슬아치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가정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이미 엄연하여 설만하지 않았다. 병오년에는 사마시에 합격하고 상상(上庠 성균관을 이름)에 유학하면서 높은 품격을 스스로 지키니, 동류들이 공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임자년에는 천거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어 성심으로 가르쳐서 아이들에게 양성된 것이 있었다. 갑인년에는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가 되었고, 을묘년에는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옮겨 제수되었다가 이윽고 대흥 현감(大興縣監)에 제배되었다. 대흥현에 부임해서는 우선적으로 양로례(養老禮)를 거행하고, 고을의 자제(子弟)들을 불러다가 친히 가르쳤으며, 고아와 과부들의 생활을 돌봐주고 혼인과 초상 치르는 일들을 도와주어 모두 제 살 곳을 잃지 않게 해주었고, 정사를 엄하게 하여 간악한 폐단이 자취를 감추게 되니, 한 해 남짓 되는 동안에 치효(治效)가 크게 드러났다. 그런데 이때 정인홍(鄭仁弘)이 한창 유명(儒名)을 대단히 얻은 터라, 그의 풍(風)을 따르는 자들이 서로 뒤질까 걱정하여 영상(嶺上)으로부터 현중(縣中)까지 모두 그를 끼고서 유관(儒冠)을 갖춘 자가 매우 많았는데, 이들이 열읍(列邑)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기식(寄食)하는 바람에 관리들이 그들을 공대(供待)하는 일로 피폐해졌다. 그리하여 공은 즉시 그들을 거절하여 응하지 않고 또한 나가서 맞이하지도 않았으므로, 인홍이 크게 노하여 대관(臺官)을 사주해서 공을 탄핵하게 함으로써 공이 파직을 당하고 돌아왔으니, 이때가 병진년 봄이었다. 이 해 여름에 증광시(增廣試)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정사년에는 독운경차관(督運敬差官)에 임명되었다. 이어 공조 좌랑을 거쳐 형조 정랑에 옮겨져서 영건도감 낭청(營建都監郞廳)을 겸대하였다. 무오년에는 간신(姦臣) 이이첨(李爾瞻) 등이 위복(威福)을 손아귀에 쥐고 그물과 함정을 베풀어놓고서, 모후(母后 인목대비를 이름)를 폐하자는 설(說)을 제창해서 백관(百官)들을 정청(庭請)에 참여하도록 협박하여,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불측한 죄를 받을 것이라고 소리 높여 말하니, 온 조정 인심이 흉흉하였다. 그는 또 백관들로 하여금 춘첩시(春帖詩)를 궐하(闕下)에 직접 바치도록 하였는데, 그의 의도는 그 모임을 이용해서 참여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억압하여 몰아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은 이날 아침 일찍이 궐하에 나아가 춘첩시를 바치고는 즉시 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감(都監)으로 가버렸다. 그러자 이 상공 항복(李相公恒福)이 그 사실을 듣고 감탄하기를, “권모(權某)는 무서운 사람이다. 이미 친히 춘첩시를 바치고는 또 도감으로 나가서 정립(庭立)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 강개함이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하였다. 기미년에는 호조 정랑에 임명되었다가 이윽고 예조로 전직되었는데, 경신년에 병으로 체직되었다. 신유년에는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이해에 공이 영건(營建)의 일을 관장하였다. 이때에 교활한 하례(下隷) 정몽필(鄭夢弼)이라는 자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궁액(宮掖)과 통하여 높은 자급(資級)을 하사받아 능히 사람들의 화복(禍福)을 마음대로 작위하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를 오시(忤視)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감청(監廳)으로 공을 찾아와서 무례한 행위를 하자, 공이 큰 소리로 꾸짖으면서 그를 마당으로 끌어내리게 하여 옷을 벗기고 회초리로 매를 수십 대 쳤다. 그러자 그 좌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개중에는 일어나서 가버린 자도 있었다. 친구들은 그 사실을 듣고서 모두 공의 굽히지 않는 것을 감탄하면서도 또한 공에게 장차 화가 미칠 것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공은 끝내 그것을 개의하지 않았다. 임술년에는 예조의 관직에 제수되어 영건도감 도청(營建都監都廳)으로 승진되었다. 그런데 이때 광해군의 정사가 더욱 어지러워지므로, 공이 이에 병을 핑계로 사직소(辭職疏)를 올리면서 궁궐(宮闕) 건축하는 일을 정지할 것을 청하고, 이어 각도(各道)의 조도사(調度使)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권귀(權貴)들의 탐탁(貪濁)한 정상을 배척해서 말하였다. 상소가 들어갔는데도 궁중에 머물러두고 있자, 공은 마침내 본조(本曹) 및 도감에 정고(呈告)하고 기어코 물러나려고 하였다. 마침 이때에 건로(建虜 건주위의 오랑캐)의 잠복 군대가 명(明) 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습격하여 축출해 선천(宣川)의 임반역(林畔驛)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그리하여 중외(中外)가 크게 놀랐던 터라, 수상(首相) 박승종(朴承宗)이 묘당에서 말하기를, “권모는 담력이 커서 오랑캐를 방어할 만하다.” 하고는 마침내 공을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내보냈다. 선천은 바로 서도(西道)의 번화한 지역인데, 공이 이때 병이 한창 심했으나 조정의 명에 몰리어 아픈 몸으로 수레를 타고 길을 떠났다. 관에 부임하여서는 군정(軍政)을 닦고 부고(府庫)를 충족하게 하며,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들이고 학교(學校)를 수리하였다. 그 선정(善政)의 명성이 흘러 전해지자,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있던 박엽(朴燁)은 매우 포학하고 남을 경멸하는 위인이었는데도 오히려 자기 부하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선천을 지날 적에는 반드시 조심하도록 해라. 부사 권공은 나도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고 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하여 체직되어 조정에 돌아와서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이때는 신정(新政)을 당하여 백관(百官)이 잘 다스려졌다. 당시 완풍군(完豐君) 이서(李曙)가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공에게 맡기었는데, 공은 불필요한 비용을 없애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며, 자신을 단속하여 청렴하고 신중하게 하니, 이속(吏屬)들이 모두 복종하여 말하기를, “수십 년 이래로 호조에 재직한 사람 가운데 공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한창 공을 크게 쓸 뜻이 있었는데, 마침 광해군 때 과거 출신을 재차 시험보이는 일이 있어, 그 과거에 합격한 자가 훈적(勳籍)에 올라 있었던 관계로 이때 간관(諫官)에 발탁되자, 공이 그를 배척해서 말하였다가 요직에 있는 자의 미움을 받아 결국 쓰이지 못하였다. 갑자년에는 역적 이괄(李适)이 군대를 일으켰는데, 열읍(列邑)의 장수들이 모두 패하여 달아나자 적이 마침내 서울로 곧장 쳐들어왔다. 서도(西道)의 군대가 그들을 따르면서 감히 접근도 못하자 공이 분발하여 상소를 올려,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서 원수(元帥) 이하 여러 장수들을 목베어 군율(軍律)을 진작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보답이 없었다. 이어 어가(御駕)를 호송하여 천안(天安)에 이르렀을 때 적을 섬멸했다는 보고가 이르자, 공이 명을 받고 좌의정 윤방(尹昉) 등과 함께 먼저 입성(入城)하여 호조에 소속된 부장(府臧)들을 다 거두어들였다. 이는 앞서 어가가 서울을 떠나던 날에 공이 고중(庫中)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서 전맹(廛氓)들에게 주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장부에 의거해서 유실된 물건 하나 없이 다 거두어들였던 것으로, 의논하는 이들이 공의 유능함을 칭찬하였다. 호송한 공로로 가선대부에 올라, 조정의 의논이 공에게 북도의 관찰사를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공에게 원한을 품은 자가 그것을 저지하였다. 그해 5월에는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후한 녹봉을 받으면서 탐학하고 방종하는 읍재(邑宰)들을 내쫓고, 제생(諸生)들에게는 학업을 일과로 시키며, 창고의 저축을 덜어내서 병기(兵器)를 만들고, 감영의 이속(吏屬)들을 뽑아내서 군오(軍伍)에 입적시키어 그들의 납포(納布)를 면제해주고 때에 따라 그들을 훈련시키니, 1년 동안에 기예가 익숙해져서 군대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그 다음해 5월에는 명 나라 장수 모문룡의 모함을 받아 자리를 떠났다. 이에 앞서 모문룡이 자기 비장(裨將)인 왕만재(王萬才)라는 자를 시켜 도망간 군졸을 쇄환(刷還)한다는 명목으로 화물(貨物)을 가지고 부정한 이익을 취하여 서도(西道) 지역에 소요가 일었었다. 그런데 그가 한번은 어떤 일로 공에게 요구를 하자, 공이 큰 소리로 그를 꾸짖어 내쫓고 그의 요청을 거절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원한을 품고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서는, 장군의 명령을 받들고 가서 모욕을 받았다는 뜻으로 모문룡을 격동시키니, 모문룡이 노여움을 발하여 자문(咨文)을 보내서 공에게 죄주기를 청하였고, 대관(臺官)이 이로 인해 공의 죄를 논하여 파직했던 것이다. 이윽고 판결사로 서용되었으나, 그릇된 모함을 밝혔다가 당시 권귀의 노여움을 사서 사체(辭遞)되었다. 또 다음해에 모문룡이 다시 이전의 일로 자문을 보내오자, 조정에서 공을 죄주어 삭탈관직하였다. 정묘년 봄에 노병(虜兵)이 국경을 범하자, 공을 특별히 서용하여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부총관으로 삼았다. 공이 어가를 호종하여 강도(江都)로 갔는데, 노(虜)는 이미 화의(和議)를 맺고 물러갔었다. 조정에서 장차 그 사실을 갖추어 명 나라에 보고하기 위하여 상(上)이 묘당(廟堂)에 명해서 사신(使臣)을 가리게 한 결과, 공이 주문사(奏聞使)가 되었다. 그래서 공은 강도에서 배를 타고 연경으로 갔다. 이때 우리나라는 노와 막 맹약을 맺은 터라, 온 나라 사람이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을까 염려하여 일을 담당한 사람 중에 사신가기를 바라는 자가 없었다. 막 난리를 치른 뒤라서 주로(舟櫓) 등 모든 행자(行資)를 끝내 갖추지 못하였고, 종인(從人)과 역관(譯官) 무리들도 모두 피하여 나타나지 않다가 나추(拿推)하라는 상의 명이 있은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났다. 공이 홀로 명을 받고 개연한 심정으로 급히 여장을 정돈하여 길 떠날 채비를 하는데, 정 참판공 온(鄭參判公蘊)이 공이 곧 출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공의 우사(寓舍)로 달려와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는 여러 객들을 물리치고 앉아서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명을 받고도 아무런 기색도 얼굴에 나타나지 않으니, 우리 공 같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는 공의 얼굴을 알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하고, 인하여 술잔을 들어서 공에게 권하며 말하기를, “잘 가십시오. 충신(忠信)을 무기로 삼았으니, 신명(神明)이 부지해 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읍(揖)을 하고 나왔다. 정공은 본디 강개하고 꿋꿋한 장자(長者)로서 남을 허여하는 일이 드물었다. 평소에 공을 알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공의 의리에 감동하여 복종한 것이다. 공이 배를 타고 가도(椵島)에 당도하니, 모문룡이 주문(奏文)을 보고는 좋지 않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너의 나라 군신(君臣)들이 무슨 면목으로 이것을 가지고 천조(天朝)에 아뢴단 말인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추로(醜虜)가 우리의 방비가 허술함을 틈타 우리의 내지(內地)를 저돌적으로 침입하여 무리하게 강화(講和)를 강요하므로, 과군(寡君)이 우선 그들을 얽어매어 그 예봉(銳鋒)의 형세를 완화시킨 것이다. 우리 소국은 천조에 대하여 부자(父子)의 사이와 같은데, 부자의 사이에 어찌 사정을 숨기는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모문룡이 마침내 주문을 고쳐 노를 물리친 것을 자신의 공으로 하도록 강요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미 우리 조정에 아뢰었다.” 고 하였다. 그러자 공이 항거하여 말하기를, “나는 과군의 명을 받고 여기에 왔으니, 다만 표문(票文)을 받아서 앞으로 갈 뿐이다. 주본(奏本)을 고치는 일에 대해서는 사신이 감히 명을 들을 바가 아니다.” 하니, 모문룡이 이에 말하기를, “사신은 다만 이 뜻을 가지고 돌아가 보고하여 본국에 후회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코 앞으로 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공이 그와 강력히 다투었으나 되지 않았다. 마침내 그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 결국 그의 뜻을 따랐다. 모문룡이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비로소 길을 떠나게 되자, 모문룡이 잔치를 베풀어 공을 맞이하려 하였다. 공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사신이 명을 받을 적에 과군은 몽진중(蒙塵中)에 있었으니, 복명(復命)하기 전에는 절대로 감히 술마시며 즐기는 데에 참여할 수가 없다.” 하니, 모문룡 또한 공을 의롭게 여겨 강요하지 못하였다. 공이 연경(燕京)에 도착하니, 마침 천계 황제(天啓皇帝 명 희종을 이름)가 붕하고 새 황제가 즉위하였다. 공이 일을 마치고 출발하려 할 적에 예부(禮部)에서 역관을 불러 이르기를, “황상(皇上)으로부터 등극(登極)에 관한 조칙(詔敕)을 의당 너희 귀국하는 배신(陪臣)에게 부쳐 보내야 한다는 명이 있었으니, 우선 기다리라.” 하였다. 그러자 공이 예부에 정문(呈文)하여, “소국(小國)이 병화(兵禍)를 당한 나머지 한의(漢儀)를 더욱 생각하고 있다. 성천자(聖天子)의 등극에 관하여 경사를 반포하는 일이야말로 이 얼마나 큰 예절인데, 어찌 돌아가는 배신의 편에 부쳐서야 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예부 상서가 공을 앞에 불러놓고 이르기를, “황상께서 너희 나라가 병화를 당하여 민력(民力)이 퇴폐해져서 왕인(王人 천자국의 사신)을 접대하기가 반드시 어려울 것임을 굽어 진념하신 때문에 이런 특은(特恩)이 있게 된 것이요, 다른 뜻이 아니다.” 하였다. 공이 이에 명을 받들었으니, 11월에 공을 황극전(皇極殿)으로 불러들인 다음 등극에 관한 조칙을 내려주었다. 그리하여 숭정(崇禎) 원년 정월에 본국으로 돌아오니, 상이 길일(吉日)을 가려 조칙을 친히 맞이하고 공을 인견(引見)하였으며, 또 하교하여 공을 칭찬하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공에게 특별히 가의(嘉義)의 품계를 내리므로, 공이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윽고 판결사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 노(虜)가 우리에게 주회(走回)한 인민들을 쇄환할 것을 요구해오자, 상이 많은 관원들에게 의논하여 보고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의논드리기를, “살을 베어서 적인(賊人)에게 주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 형세가 그치지 않아서 장차 반드시 모든 명령을 다 따라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장구하게 생각하고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상국 정귀(李相國廷龜)는 이때 한창 쇄환하자는 의논을 주장하던 터였는데도, 공을 만나서 말하기를, “그대의 의논을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무릎이 굽혀진다.” 하였다. 또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이 일어나서 최 완성 명길(崔完城鳴吉)이 그것을 주장하므로, 공이 그에 대해서 변론하기를, “이미 왕호(王號)로 존숭하고서도 집에서 제사지내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최 완성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의당 별묘(別廟)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었소.”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의 본래의 견해가 아닙니다. 추숭하자는 의논이 방금 시작되었는데, 공이 언제 여기까지 언급할 겨를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최 완성은 말이 궁하여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앞서 공이 연경에 사신갈 적에 바다로, 육지로 만 리 길을 애써 가노라니, 종자(從者)가 가마에 오르기를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우리 임금은 초야에 계시는데, 내가 명을 받고 국경을 나가면서 편하게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은 차마 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몹시 노고를 겪었던 나머지, 이때에 과연 병이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경주로 나가서 몸을 조섭할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또 직무에 시달려 병이 마침내 위독해지자, 병든 몸을 부축받으며 앉아서 부료(府僚)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나는 곧 죽을 것인데, 나를 부인(婦人)의 손에서 죽게 하지 말라.” 하고는, 이윽고 운명하였으니, 이때가 기사년 7월 15일이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삼도(三道)의 관찰사에게 운상(運喪)을 잘 도와주도록 특별히 유시하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를 상고하여 부의(賻儀)하고 관원을 보내서 치제(致祭)하도록 하였다. 이해 10월 19일에 광주(廣州) 청계산( 淸溪山) 아래 둔퇴리(遁退里)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은 효우(孝友)하고 자상(慈詳)하여 행의(行義)로 칭송이 자자하였고, 청렴하고 정직하고 결백하여 바꿀 수 없는 지조가 있었으며, 모부인(母夫人)의 병환이 났을 적에는 손가락을 갈라 흐르는 피를 약에 타서 드리기도 했었다. 약관의 나이에는 의정공(議政公)을 시종하여 군막(軍幕)에 있으면서 이리저리 계책을 내는 데 있어 장경부(張敬夫)의 풍도가 있었다. 형제간에는 서로 화락하였고 족당(族黨)에 이르기까지 환심(歡心)을 얻지 않은 데가 없었다. 성품이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나이가 많아진 뒤에도 비단옷 등속을 한번도 몸에 걸친 적이 없었고,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을 장가들이는 데 있어서도 세속에 따라 혼수 비용을 성대하게 하지 않았으며, 항상 집안 사람에게 경계하기를, “옛사람이 사치(奢侈)로 인한 폐해가 천재(天災)보다 심하다고 하지 않았더냐.” 고 하였다. 그리하여 포의(布衣) 시절로부터 대관(大官)에 이르기까지 안천(鞍韉 말안장과 언치) 한 벌과 좌전(坐氈 깔고 앉는 털방석) 하나 외에 달리 남은 물건이 전혀 없었다. 공이 황해도관찰사로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언치가 몹시 해졌는데 왜 바꾸지 않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무엇하러 바꾼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사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고, 집이 매우 빈핍하여 때로는 밥을 짓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항상 태연하였다. 그리고 남이 주는 것을 사양하거나 받는 즈음에는 더욱 엄격하여, 비록 세시(歲時) 때에 친구들이 서로 문안하며 주는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사양한 것이 많고 받는 것은 적었으며, 사소한 것이라도 남에게 함부로 주는 일도 없었다. 수령이나 감사의 직에 있을 때의 속수(束脩)의 문안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지위 높은 조신(朝臣)에게는 미친 적이 없었다. 청렴하고 정직하며 청백하여 곤궁을 잘 견디는 것이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공은 항상 말하기를, “세상에는 대체로 옛날에는 가난했다가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에까지 경주에 자애(慈愛)를 남기니 경주 백성들 또한 공을 위해 비석을 세워서 청덕(淸德)을 칭송하였다.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는 오직 선(善)을 허여하여, 한번 사람을 허여하였으면 다시 간격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경개(耿介)하여 뜻이 맞는 이가 적었으므로, 비록 수레와 말이 문에 가득했어도 서로 왕래하는 예를 닦은 적이 없었다. 만년에는 도성 동쪽의 후미진 마을에 집을 짓고서 ‘심적 쌍청(心迹雙淸)’이란 네 글자를 편액으로 걸어놓고 늘 눈여겨 보았다. 공은 대체로 조정에서 논의할 적에는 강직한 태도로 몸을 곧게 하여 굽히지 않고, 일을 지적하면서 기휘(忌諱)를 저촉하여 권귀들과 마찰을 빚었고,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데는 또 청렴하고 엄정하게 하고 아첨하지 않아서 권력자의 청탁이나 친근한 이의 부탁도 모두 행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직무는 비록 잘 거행되었으나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았고, 행의(行誼)는 비록 드러났으나 명성과 지위는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대체로 뭇사람의 원한이 한데 모임으로써 틈을 엿보아 공격하는 자가 승리를 거둔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이 별세함에 미쳐서는 공에게 원한을 품었던 사람들도 서로 공을 위해 여러 힘을 합해서 상(喪)을 도와주었으니, 그것은 대개 그들 또한 공의 강직함에 감복한 때문이라고 하겠다. 공은 평생 교유(交遊)들을 부여잡지 않았고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벼슬길에 나아가는 데는 담담하였고, 평범하고 조용한 생활을 좋아하였다. 비록 곧은 도리를 따르다가 밀려나서 끝내 세상에 불우하였으나, 독실히 힘쓰는 것을 스스로 지켜 의리를 보면 반드시 용감하게 행하고 일찍이 원망하거나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아, 이런 분이 이른바 ‘개제(悌)한 군자는 신명이 위로하는 바이로다.’라는 데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위는 덕에 차지 못하였고 나이 또한 60세도 다 누리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하늘이 장차 그의 후손을 창성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부인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고려 시대 밀직 제학(密直提學) 도(濤)의 후손으로 부호군 즙(濈)의 딸이다. 만력 을해년 3월 22일에 태어나서 15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정숙하고 얌전하고 안온하고 화락하였으며, 절약하여 검소하고 인자하고 온순하였다. 규곤(閨壼)의 주인으로서 일찍이 조급한 말과 서두르는 기색을 한 적이 없었고, 곤궁한 데 처하여 가난하게 살면서도 근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자녀들을 의리로써 가르치고 비복들을 은혜로써 보살폈으니, 군자의 배필이 되기에 알맞았다. 공보다 24년 뒤인 임진년 8월 16일에 아들 준(儁)의 영현(嶺縣) 임소(任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78세였다. 이해 11월 28일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공은 4녀 1남을 두었다. 큰딸은 감찰 김후(金垕)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유발(兪橃)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박세면(朴世冕)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윤휴에게 시집갔다. 아들 준은 생원으로 처음 벼슬하여 평강 현감(平江縣監)이 되었다. 김후는 3남 4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석래(碩來)ㆍ석창(碩昌)ㆍ석건(碩健)이고, 딸 셋은 윤해거(尹海擧)ㆍ강세봉(姜世鳳)ㆍ박세량(朴世樑)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발의 아들은 명열(命說)이고, 박세면의 양자는 태정(泰定)이다. 윤휴는 5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준은 대사간 윤황(尹煌)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서(恕)ㆍ지(志)ㆍ민(慜)이고, 큰딸은 생원 박선(朴銑)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성수동(成壽童)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서는 현령 심총(沈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석래는 판관 박려(朴梠)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석창은 부솔(副率) 윤상거(尹商擧)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석건은 사인(士人) 유인배(柳仁培)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유명열은 현감 민여진(閔汝鎭)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이상은 모두 자녀가 있으나 다 어리다. 아, 윤휴는 공의 사위이다. 기억하건대, 내가 어려서 죽마(竹馬)를 타고 공의 집에 갔을 때 공이 나를 칭찬하여 이르기를, “너는 우리 집의 동상객(東牀客 사위를 칭함)이 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10여 년 뒤에 공의 딸이 마침내 나에게 시집왔다. 나는 아직도 공이 평온한 기색과 담박한 생활로, 방 하나를 깨끗이 닦고 종일토록 청정하게 앉았노라면 문정(門庭)의 쓸쓸한 것이 마치 한사(寒士)와 같았음을 기억하노니, 아, 이것이 본디 공이 도로 삼았던 것으로서 지금 세상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윽이 상고하건대, 공이 정인홍을 배척하고 이이첨에게 항거하며, 권귀들이 구차하게 벼슬하는 것을 논하고, 서도의 군사가 머뭇거린 것을 탄핵하며, 추숭(追崇)은 정당한 법전이 아님을 변론하고, 훈가(勳家)의 그릇된 모함을 밝히어서 세상과 스스로 멀리한 것은 대체로 모두가 욕심이 마음을 얽매이지 않은 데서 근본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찌 이른바 도라는 것이 진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공의 사자(嗣子) 준(儁) 씨가 공의 언행을 모아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는데, 생각해보면 휴는 비록 참람됨이 두렵기는 하나 지난 일들을 느끼어 생각한 결과 끝내 사양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더구나 공의 행실을 세우고 몸을 이루는 데 있어 그 견정(堅貞)한 성품과 충효(忠孝)로운 덕과 강방(剛方)한 행실과 청백(淸白)한 지조는 법칙상 응당 명이 있어야겠으니, 또 어찌 이것을 기술하여 전해져 후인들에게 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그 사실을 차례대로 기술하고 명으로써 이으니, 다음과 같이 명한다. 권씨가 일어난 것은 / 權氏之興 실로 고창에서 시작되었는데 / 寔自古昌 그 실마리가 계속 이어져 / 繩繩厥緖 공경이 줄을 이었었네 / 累公累卿 덕이 밝고 신실한 문정공은 / 顯允文正 이미 많은 복을 받았는데 / 旣多受祥 문충공에 이르러서도 / 至于文忠 또한 그 명성 드러났네 / 亦載其名 훌륭하기도 해라 상서는 / 猗歟尙書 오직 충신으로 칭송되는데 / 藎臣唯稱 그 명성이 다하지 않아서 / 不匱厥聲 우리 공이 이를 이어받았네 / 我公是承 사특하고 흉악한 자 배척할제 / 斥邪抗凶 그 마음 전일하기도 했어라 / 斷斷其衷 도에 어긋나면 벼슬하지 않았고 / 道違不穀 나가면 용납되지 않았지만 / 出而不容 용납 안 된게 무어 해로우랴 / 不容何病 이것을 지니고 나갈 뿐이네 / 持是而往 많은 일을 논하고 나오니 / 刺口而出 오직 나만 비분강개했다오 / 唯我慨慷 아첨도 꾸미지도 아니하여 / 不令不巧 뭇사람이 노하여 미워했지만 / 衆怒以咎 나의 도는 매우 바르고 / 我道孔直 내 마음은 가책됨이 없었네 / 我心不疚 몹시도 어려운 때 당하여 / 時哉孔艱 내가 일어나 명을 받고는 / 我興受命 모문룡의 말 받아주지 않고 / 而不受辭 사신의 임무 경건히 거행했네 / 使平無曠 분경하는 일 엿보지 않고 / 競馳不窺 남이 꺼린 걸 나는 했으니 / 人憚我爲 덕장이 여기에 있어 / 德將在斯 도의 규모를 실었도다 / 道規載之 강방한 것만 받아들일 뿐 / 剛方之受 남과 장단을 겨루지 않았고 / 匪軒匪輊 청렴 결백은 오직 기본이라 / 廉白維所 대체로 그 여사였었네 / 蓋其餘事 내가 이렇게 명을 적어서 / 我銘斯告 현택에 묻노니 / 納于玄宅 아, 자손들이여 / 嗟爾子孫 그 덕 잇기를 생각할지어다 / 尙思嗣德
[주D-001]상방검(尙方劍)을 …… 목베어 : 상방은 임금의 기물(器物)을 만드는 관서(官署)임. 한(漢)나라 때 주운(朱雲)이 임금에게, 상방참마검(尙方斬馬劍)을 빌려 영신(侫臣) 한 사람을 목베어서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시키는 것이 소원이라고 청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02]한의(漢儀) : 한(漢) 나라의 예제(禮制)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중국의 예법을 의미한다.[주D-003]의정공(議政公)을 …… 있었다 : 여기의 의정공은 곧 권첩(權怗)의 부친으로서 의정에 증직된 권징(權徵)을 이름. 장경부(張敬夫)는 송(宋) 나라 때의 학자 장식(張栻)을 말함. 경부는 그의 자이다. 장식의 부친인 장준(張浚)이 일찍이 군무(軍務)를 다스릴 적에 당시 소년이었던 장식이 군무에 관하여 부친을 위해 훌륭한 계책을 많이 내었던 데서 온 말이다. 《宋史 卷429》[주D-004]속수(束脩) : 일속(一束)의 간육(幹肉)으로, 옛날에 이것을 예물(禮物)로 썼었다.[주D-005]개제(愷悌)한 …… 바이로다 : 개제는 기상(氣象)이 단아하고 화락함을 이른 말인데, 이 말은 《시경(詩經)》 대아(大雅) 한록(旱麓)에서 나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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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람의 광대함을 좋아한 이가 있음이여 / 客有好玆觀覽之博大兮 끝없이 넓은 나의 소원을 품었도다 / 齎予志之瀁瀁 어찌 답답하게 내 이 한구석에 있으리요 / 夫豈鬱鬱予一隅兮 혼돈 상태와 광활한 공간을 뛰어넘어 / 超澒洞與空廣 사방 끝을 다하여라 어찌 끝이 있으랴 / 窮四際兮焉極 고금을 열력하며 함께 오르내리도다 / 閱古今而俯仰 갑자기 하토의 적소를 내려다봄이여 / 忽臨睨夫下土之積蘇兮 그 누가 나의 호탕함을 알겠는가 / 孰知予之浩蕩 한고에서 나의 수레를 멈추고 / 弭予節兮漢皐 압구정에 올라 이리저리 바라보니 / 登狎鷗兮騁目 건곤의 혼돈 상태를 열었음이여 / 開乾坤之混沌 우주의 광대함이 확 트이었도다 / 廓宇宙之盤辟 인간 세계로부터 운우 위에 치솟아 / 軼雲雨於下界 항해를 취하여 하늘에 다다르도다 / 挹沆瀣而上薄 줄줄이 서 있는 사방 산들을 마주하고 / 面四山之立立兮 세차게 흐르는 강물을 굽어보도다 / 俯江流兮湯湯 아스라이 만 리가 요원 광활함이여 / 渺萬里兮泱莽 광활함 속에 삼라만상을 포함했도다 / 涵衆象於淼茫 동으로 바라보면 산악들이 지극히 높아 / 東望則列岳峻極 위로 하늘 높이 치솟았고 / 上磨寥廓 겹겹의 등성이와 봉우리들은 / 重岡複嶺 용이 날고 범이 뛰는 듯하네 / 龍跳虎躍 금대는 지극히 높고 / 金臺兮嶔岑 화개는 우뚝하도다 / 華蓋兮崒嵂 여섯 자라는 힘을 크게 써서 / 六鼇奰屭 봉래 영주를 머리에 이었도다 / 頭戴蓬瀛하늘의 별들은 빛을 나눠주고 / 天星分曜 지축은 신령함을 나타내도다 / 地軸效靈 낙천정은 드높아 용마루가 화려하고 / 樂天崇兮畫棟 화양정은 우뚝해라 높다란 정자로다 / 華陽屹兮危亭 월악산은 첩첩으로 깊숙하여 / 月岳嶙峋 한강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 有江發源 여강으로 들어서 질펀히 흐르다가 / 納驪水兮汪汪 용진을 삼키어 더욱 광대해지도다 / 呑龍津兮沄沄 광나루를 구불구불 돌아서 / 逶迤廣津 삼전도를 질펀히 흐르다가 / 演漾三渡 세차게 흘러 백 번 꺾여져서 / 奔流百折 더욱 제멋대로 쏟아져 흐르도다 / 益肆以注 저자도는 희미하게 눈에 들오고 / 島楮子兮熹微 새매들의 늪은 빙 둘러 있도다 / 藪鷂兒兮回互 큰 들은 손바닥처럼 편평하고 / 鉅野掌平 살곶이 교외의 주위에는 / 箭郊周遭 말 목장이 빙 둘러 있는데 / 沙苑盤回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여 / 水草肥饒 검고 누런 준마의 떼가 / 驪黃騄駬 아침놀의 무늬를 이루어 / 雲錦成章바람을 따르고 번개를 쫓는 듯 / 追風逐電 매우 날래서 날아오를 듯하도다 / 天驕騰驤 고기 잡고 나무하고 말 치는 곳이 / 畋漁樵牧 번다하게 여기저기 널려 있고 / 紛紜布濩 짐꾼이며 실어나르는 수레는 / 擔負馱輦 앞뒤로 줄을 이어 달리도다 / 前鶩後續 남으로 바라보면 뭇 산들이 얽혀 있어 / 南望則群山糾紛 푸르른 초목들이 무성하고 / 薈蔚葱蘢 태수가 수시로 왕래할 적엔 / 五馬盤桓 대궐을 향해 공손히 읍을 하네 / 拱挹朝宗 오른쪽으론 관악산 청계산이 험준하고 / 右冠岳淸溪之崚嶒 왼쪽으론 대모산성이 불룩 솟아 있어 / 左大母山城之穹窿 도성의 경내로부터 / 曰自畿甸 사방의 요충으로 나누어졌고 / 區分四衝 관산과 하수가 아득하여라 / 關河綿邈 큰길은 숫돌처럼 평탄하도다 / 周道如砥 지방 고을들은 별처럼 나열하여 / 列郡星羅 경계를 나누어 각각 다스리고 / 界畫疆理 역관은 바둑알처럼 펼쳐 있어 / 驛館碁布 사마의 수레가 나란히 다니고 / 轍駟方軌 여염집은 사방에 가득하여 / 閭閻撲地 비늘처럼 빗살처럼 늘어서 있도다 / 鱗次櫛比 누런 벼논과 푸른 밭둑은 / 黃畦綠塍 시야 가득 구불구불 펼쳐 있고 / 彌望逶迤 심고 매고 거두고 방아 찧어 / 耕耘穫舂 농사일을 서로 다투어 힘쓰고 / 競效農功 누에 치고 실 켜고 명주베 짜서 / 蠶繰紡織 아낙의 일을 다투어 다스리니 / 爭脩女紅 농토와 상전의 천 리 벌판에 / 農桑千里 집집마다 자급자족하도다 / 家給人豐 서쪽으로 바라보면 해문이 탁 트여서 / 西望則海門唅呀 가득한 물이 용솟음쳐 흘러서 / 瀰漫汨潏 작은 물결과 큰 파도가 / 鰌濤鯨浪 밀물 썰물을 삼키고 뱉고 하도다 / 呑吐潮汐 한강은 웅장한 관문이 되어 / 漢江雄關 산천의 요해를 누르고 있는데 / 控扼襟帶 선박들이 줄을 이어 왕래하매 / 舸艦牽聯 돛 그림자가 하늘을 가리도다 / 檣帆掩靄 깎아지른 절벽들은 험준하고 / 絶壁巃嵷 높은 누각들은 우뚝 솟아서 / 傑閣岧嶢 아래로는 물가를 굽어 임하고 / 下臨芳渚 위로는 높은 하늘을 찌르도다 / 上揷層霄 고관 대작 공경 사대부 중에 / 縉紳卿士 장수나 지방관에 임명되어 / 杖鉞分符 혹 전송을 하거나 영접할 때면 / 或餞或迓 높은 수레들이 길에 그득하고 / 冠蓋塞途 수시로 왕래하는 장사꾼들은 / 來商往旅 서로 따라 앞서고 뒤서고 하여 / 攀援後先 분잡하게 서로 줄을 이어서 / 紛紜絲絡 시끄럽게 떠들며 늘어섰도다 / 喧鬧騈闐 초목이 무성한 성단에 접근함이여 / 近星壇之蓊鬱 아득한 데에 노량과도 연접하도다 / 控露梁於澶漫 율도엔 연기가 활짝 걷히고 / 栗島兮煙開 마포엔 물결이 차가운데 / 麻浦兮波寒 용산의 조운선들이 빽빽이 이어지고 / 龍山之漕舶織織 양화도의 바람 돛이 펄펄 나부끼거든 / 楊渡之風帆飛飛 가을 흥취의 호기를 들이마시고 / 吸秋興之灝氣 맑게 내리는 단비를 맞기도 하도다 / 來喜雨之淸霏 북으로 바라보면 도봉산은 험준하고 / 北望則道峯峭截 삼각산은 높고도 뾰족하며 / 三山巑岏 화산은 연꽃이 핀 것 같고 / 華岳蓮開 종남산은 용이 서린 듯하니 / 終南龍蟠 귀신이 아끼고 비장한 곳으로 / 神慳鬼祕 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乾轉坤旋 금성 탕지로 험고함 이루니 / 金城設險 대궐 광채가 하늘에 빛나도다 / 玉闕麗天 상서로운 해는 빛을 거듭하고 / 瑞日兮重光 상서로운 구름은 오색이 찬란하도다 / 祥雲兮五色 왕도는 하 넓고 넓음이여 / 王道兮蕩蕩 사문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四門兮穆穆 장수와 재상 공경들은 / 將相公卿 고요 기 위청 곽거병과 같고 / 皐夔衛霍 문인이며 재사들은 / 文人才士 반고 사마천 유향 순숙과 같아 / 班馬劉荀 뛰어난 영재가 줄을 이어서 / 翹英接武 날개에 붙고 비늘을 부여잡도다 / 附翼攀鱗 천문 만호는 / 千門萬戶 개밋둑 벌집처럼 널려 있어 / 綴蟻點蜂 구준과 춘대를 누리면서 / 衢樽春臺 격양가 부르며 화락하도다 / 擊壤熙雍 공장과 장사꾼 놀이꾼들은 / 工商遊冶 어지러이 서로 달려 왕래하니 / 紛紛駾駾 거수와 마룡은 / 車水馬龍 웅성웅성 많이도 다니어라 / 彭彭藹藹 사방이 모여드는 도회가 되어서 / 爲四方之都會 팔방의 창이 탁 트여 밖이 없으니 / 洞八窓兮無外 이는 바로 시야를 넓혀서 사방을 두루 보아 / 此所以豁雙眸騁四望 높은 데서 조망하여 스스로 유쾌해짐이로다 / 登眺自快者也 봄 경치가 화창함에 이르러서는 / 至如韶光駘蕩 만물을 발육시키는 가운데 / 萬物發毓 바람은 순주처럼 훈훈하고 / 風醇如酒 햇볕은 옥같이 온화한지라 / 日溫如玉 꽃나무는 서로 고운 꽃을 피워 / 花木喧姸 청홍의 채색들이 찬란하고 / 紅碧酣縟 맑은 강물은 새로 벌창하여 / 澄江新漲 포도처럼 푸르게 물들어서 / 葡萄染綠 움킬 만도 하고 마실 만도 하며 / 可掬可啜 거울처럼 맑고 환해지나니 / 宜鑑宜燭 이때엔 난간에 기대 배회하면서 / 當此時憑闌徙倚 술잔을 들어 정서를 즐긴다면 / 擧酒敍暢 난정의 풍류에다 / 有蘭亭風流 무우의 기상을 겸하게 되리로다 / 舞雩氣像者矣 남풍이 재물 풍부케 함에 미쳐서는 / 及其南薰阜財 만물을 기르는 여름날이라 / 恢台長嬴 보릿가을은 언뜻 지나가고 / 麥秋奄逝 초여름 장마가 쾌히 걷히고 / 梅霖快晴 뜨거운 더위가 발산하는지라 / 火傘旣張 무서운 태양이 한창 성하여 / 畏日方赫 산을 태우고 들을 태우며 / 焦山燎原 무쇠와 옥이 녹아 흐르고 / 金流玉鑠 소낙비는 강물을 쏟듯 내려서 / 急雨懸河 급한 여울에 눈발이 튀어오르고 / 驚湍湧雪 어룡들은 까불며 춤을 추고 / 魚龍簸舞 오리들은 물속을 출몰하나니 / 鳧鴨出沒 이때엔 옷깃을 풀고 두건을 벗고 / 當此時披襟露頂 읊조리고 술마시고 한다면 / 俯仰詠觴 무더위를 씻고 청량함을 취할 수 있으리로다 / 可以滌煩暑而賭淸涼者矣 하늘 높고 기후 맑은 때에 미쳐서는 / 迨至天高氣晶 바람은 나무 끝에 불어대고 / 風號樹杪 은하수는 영롱히 반짝거리고 / 明河耿熒 깨끗한 달은 하얗게 빛나며 / 皓月皦皎 난초 꽃의 향기는 농후하고 / 蘭香馥郁 국화의 향기는 그윽한 가운데 / 菊馨窈窕 구름 걸친 산은 푸르디푸르고 / 雲山蒼蒼 가을 기럭은 아득히 날아가며 / 霜鴻渺渺 도랑물은 마르고 못물은 맑아 / 潦盡潭淸 하늘과 물이 한 빛을 이룰 제 / 天水一色 티끌 하나 없는 옥호의 맑은 / 玉壺無塵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하나니 / 淨影沈璧이때엔 기둥 기대어 먼 데를 바라보면서 / 當此時倚柱遐矚 광막한 속에 정신으로 노닌다면 / 神遊沖漠 또 하필 등림 부하여 요락을 슬퍼할 것 있으랴 / 又何必賦登臨而悲搖落者乎 그리고 짙은 구름이 어두컴컴하고 / 若乃凝雲潑墨 매서운 바람에 솜이 부러지며 / 嚴風綿折 눈은 내려 우뚝하게 쌓이고 / 積雪嵯峨 얼음은 겹겹으로 꽁꽁 얼며 / 層氷沍結 참새들은 서로 짹짹거리고 / 冷雀査査 까마귀는 두려워 두리번거리며 / 寒鴉矍矍 얼음은 틈새 없이 꽁꽁 얼어 / 凍合無縫 배가 묶여 건너지 못하는지라 / 舟膠不涉 장사꾼들은 오가지도 못한 채 / 商旅踟躕 검은 살결에 소름이 일어나고 / 肌黧膚粟 어부들은 머뭇거리는 가운데 / 漁子逡巡 손이 트고 머리털이 솟구치거든 / 龜手蝟髮 이때엔 영서로 추위를 물리치고 / 當此時靈犀辟寒 술 마시고 갖옷을 껴입나니 / 醉擁貂貉 또한 어찌 나귀 타고 추위를 참거나 / 亦何數夫騎驢忍凍 드러눕고 맨발 벗은 걸 셀 것 있으랴 / 僵臥跣足者乎 이상은 바로 사시가 순환하는 가운데 / 此所以四時循環 즐거이 시절과 함께 자적하는 것이로다 / 樂與時適者也 곁에서 누가 힐난하길 물은 용 때문에 신령하고 / 傍有詰者曰水靈以龍 산은 신선 때문에 신령해지나니 / 山靈以仙 아무리 뛰어난 경계가 있더라도 / 有地雖勝 사람 없이는 전해지지 않고말고 / 非人不傳 그러기에 무창의 남루는 / 武昌南樓 원규를 인하여 드러났고 / 以元規而著顯 양양의 현수는 / 襄陽峴首 숙자를 인하여 알려졌거늘 / 以叔子而昭宣지금 그대는 주인의 덕업을 근본하지 않고 / 今子不本主人之德之業 정자 이름의 소이연도 추구하지 않았으니 / 不究之亭之名之所以然 주렴 모퉁이의 한 굽이만을 보고 / 得非覩簾隅之一曲 당실의 완전한 모양은 빼놓은 격이 아닌가 / 而遺堂室大全者乎 아 그 연원을 상고하건대 / 粤惟□源 성악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星岳孕靈 명문의 선인 음덕을 입어 / 名門食德 대대로 영재가 태어나서 / 世有俊英 고관 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 蟬貂聯奕 종정에 공훈이 새겨졌도다 / 鼎刻鐘銘 그중에 당당한 상당군은 / 堂堂上黨 창성한 시기에 태어나서 / 生膺昌期 잠저 시절의 광묘로부터 / 光廟龍潛 한번 만나서 알아줌을 받았으니 / 一見受知 풍운의 기이한 만남이요 / 風雲奇遇 어수가 서로 만난 것이로다 / 魚水相得 손으로 붉은 태양 붙들어서 / 手扶紅日 구오의 용이 날아오르니 / 龍飛九五천지가 조용하고 편안해지매 / 乾淸坤寧 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萬物咸覩 공은 이때에 / 公於是時 유악 안에 조용히 들앉아서 / 從容帷幄 소조의 논의를 하고 / 蕭曹論議 양평의 계책을 내니 / 良平籌策태산과 황하로 맹세하여 / 泰山黃河 운대와 기린각에 초상 걸렸네 / 雲臺麟閣 나가면 장수요 들오면 재상으로 / 出將入相 문모와 무략을 겸비했으니 / 文謨武略 재차 조정의 우두머리 되어선 / 再長巖廊 임금을 보좌하여 다스렸고 / 燮理黼黻 누차 부월 잡고 지방에 나가선 / 屢杖鐵鉞 온 강역을 진정시켰으니 / 鎭定疆域 공은 그와 같이 클 수 없고 / 功莫與京 덕은 그와 같이 높을 수 없도다 / 德莫與崇 지위가 높을수록 맘은 되레 작아지고 / 位尊而心轉小 은총이 높을수록 몸은 더욱 공손하여 / 寵極而身愈恭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 恒存挹損 늘 만족함을 알려고 경계해 / 每戒知足 묘당에 있으면서도 강호를 생각하고 / 處廟堂而思江湖 고량진미가 넘쳐도 담박함을 즐기도다 / 飫膏粱而嗜淡薄 정자를 여기에 얽어 세우니 / 有亭斯構 넓고도 한적하고 적막하여라 / 寬閑寂寞 위로는 녹야당을 뒤따르고 / 上追綠野 아래로는 독락원을 벗삼아서 / 下友獨樂 이에 아침엔 대궐로 달려가고 / 於是朝趨丹鳳 저녁엔 백구와 가까이하니 / 莫狎白鷗 깊은 맹약 맺어서 저버릴 수 없음이여 / 托深盟兮不可寒 기심을 잊고 서로 평화로이 지내도다 / 庶息機而相夷猶也 푸르고 깨끗한 물결 먹을 수는 없지만 / 波綠潔而不可飱兮 백설 같은 깃털을 깨끗이 씻어주도다 / 白雪羽毛之無塵也 때로 왕래하며 서로 가까이하거니 / 時往來而相近兮 누가 아득하여 길들이기 어렵다 했는고 / 孰曰浩蕩而難馴也 아 퇴청하여 먹으며 종용 자득하여라 / 羌退食而逶蛇兮 이리저리 배회하면서 자유자재하도다 / 聊逍遙以自由也 거북 물고기를 모아서 주인이 됨이여 / 會龜魚而作主兮 나날이 구렁을 찾고 언덕을 지나도다 / 日尋壑而經丘也 내 자취 이미 쓸모없는 재목 같음이여 / 跡已同於散木兮 마음 또한 이 때문에 빈 배가 되었으니 / 心亦以之虛舟也 이것이 어찌 세속 밖에 멀리 초월해서 / 此豈非超乎流俗之表 즐거이 조물주와 함께 노는 이가 아니겠는가 / 而樂與造物而同遊者乎 나아가서는 큰 띠 띠고 홀을 꽂고 / 進則垂紳正笏 왕궁을 보호하고 왕의 직무 보충하고 / 保王躬而補袞職 물러와서는 야인 복장의 차림으로 / 退則黃冠野服 물고기와 짝하고 사슴을 벗삼도다 / 侶魚蝦而友麋鹿 사직하고픈 생각은 비록 간절하나 / 掛冠之念雖切 만백성의 기대가 더욱 중해지고 / 而萬姓之望愈重 물러나 쉬려는 뜻 또한 급급했지만 / 退休之志亦勤 임금의 은총은 더욱 깊어만 갔으니 / 而一人之眷益寵 그래서 은하수 빛이 창벽에 도는 건 / 是以雲漢昭回於櫳壁者 하늘 문채가 초목에 입혀지는 것이요 / 天章之衣被草木也 규벽이 문지방 위에 찬란한 건 / 奎壁燦爛於楣宇者 신조로써 일월의 빛을 그려낸 것이라 / 宸藻之繪畫日月也산천이 이 때문에 닫히고 열리고 / 山川以之闔闢 귀신이 이 때문에 멀어졌거니와 / 鬼神以之扃鐍 천조의 큰 솜씨로 화려하게 꾸미고 / 賁飾天朝之大手 한 시대의 큰 문장으로 단장했으니 / 粧點一代之鉅筆 이 때문에 명성이 천지간에 가득 차서 / 此所以聲名滿於天地 태산북두처럼 우러르게 된 것이로다 / 而仰若山斗者也 그러나 압구는 해옹의 한가한 일이거늘 / 然狎鷗者海翁之閑事 이로써 정자를 명명함은 무엇을 취한 건가 / 而獨揭此名亭何取耶 아 한 위공은 / 猗韓魏公 바로 송 나라 현상으로서 / 是宋賢相 원훈 공신에 현량한 보필 되어 / 元勳碩輔 높은 덕과 큰 아량이 있었는데 / 宿德偉量 그 실명을 압구정이라 했으니 / 名亭狎鷗 고상한 풍류를 넉넉히 보겠도다 / 足見雅尙 아 먼 조상의 아름다운 모범을 / 繄鼻祖之懿範 먼 후손이 본받아야 하고말고 / 宜耳孫之取則 전세의 한공과 후세의 한공은 / 前韓後韓 행적이 아주 서로 똑같아서 / 同符合轍 문덕 무략으로 천하를 다스려 / 文武經緯 천지의 조화 육성을 참찬하여 / 參贊化育 충성은 일월을 꿰뚫을 만하고 / 忠貫日月 공은 사직을 보존하였거니와 / 功存社稷 국가의 안위를 한 몸에 지고서 / 佩國家之安危 민심을 산악처럼 진정시켰으니 / 鎭民心如山岳 공과 충헌은 / 公與忠獻 둘이면서 하나인 셈이로다 / 二而爲一 급류를 탄 날에 한가함을 구하고 / 求閑於急流之日 한창 강건할 때에 숨어 지내면서 / 佚處於强健之時 산수 속의 한가로운 낙을 다하고 / 盡山水優游之樂 물아간의 시기하는 사심을 없애서 / 無物我忌克之私 시종 한 가지 절조를 굳게 지키어 / 終始堅乎一節 진퇴 거취가 시의에 합당하였으니 / 進退合於時宜 공과 충헌 두 사람 가운데 / 公與忠獻 누가 더 낫고 못하다 할꼬 / 孰仲孰伯 모두 나는 백구를 잊고 백구는 날 잊었으니 / 皆能我忘鷗而鷗忘我 이 때문에 서로 친해질 수 있었던 걸세 / 是以能相熟而相狎也 나는 객과 함께 농서의 보리를 다 거두고 / 吾將與客窮隴西之麥 강남의 나락을 다 수확해서 / 殫江南之稻 감주를 만들고 술도 만들고 / 爲醴爲酒 동해의 물결에 소금을 치고 / 鹽東海之波 오창의 곡식을 곱게 빻아서 / 屑敖倉之粟 면을 만들고 건량도 만들어 / 爲麵爲糗 천지를 흘겨보아 여관으로 삼고 / 睥睨天地而籧廬 일월을 여닫아서 창문으로 삼고 / 開闔日月爲戶牖 남기를 부여잡고 올라가 / 攀南箕 북두로 술을 떠 마시고 / 酌北斗공을 따라 이 정자에 노닐면서 / 邁從公于斯亭 공의 백세 향수를 축복드리리 / 祝眉壽而黃耈 그리고는 다시 백구와의 맹약을 찾아 / 然後更與白鷗而尋盟 세한 불변의 굳은 우정을 맺고 / 結歲寒之耐友 푸른 절벽 위에 황견을 새겨서 / 鐫黃絹於蒼崖 만고에 전하도록 하겠다 하누나 / 傳萬古而不朽 이 말에 객은 깜짝 놀라 얼굴 고치고 / 客矍然改容 빗자루 휘두르듯 붓을 휘둘러 / 落筆揮帚 무지개를 뱉어내어 부를 써내리니 / 吐虹霓而作賦 어슴푸레 손에서 벼락을 치는 듯하구나 / 恍若霹靂之在手也
[주D-001]적소(積蘇) : 쌓아 놓은 땔나무를 말한다. 주 목왕(周穆王)이 일찍이 도사(道士)를 따라 천상(天上)에서 노닐 적에 인간세계(人間世界)를 내려다보니, 그 궁사(宮榭)들이 마치 포개 놓은 흙덩이나 쌓아 놓은 땔나무〔累塊積蘇〕처럼 보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周穆王》[주D-002]한고(漢皐) : 주(周) 나라 때 정교보(鄭交甫)란 사람이 한고대(漢皐臺) 아래서 두 여인(女人)을 만나 구슬 두 개를 얻었다는 고사가 있기는 하나, 여기서는 한강(漢江) 가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주D-003]항해(沆瀣) : 선인(仙人)이 마신다는 밤중의 기〔夜半氣〕를 말하는데, 《초사》 원유(遠遊)에, “육기를 먹고 항해를 마심이여, 정양으로 양치질하고 아침 놀을 머금는다.〔飡六氣而飮沆瀣兮 漱正陽而含朝霞〕” 하였다.[주D-004]금대(金臺) : 곤륜산(崑崙山)에 있다는, 신선(神仙)이 거처하는 곳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곧 압구정을 가리킨 것이다.[주D-005]화개(華蓋) : 귀인(貴人)들의 수레 위에 받치는 일산(日傘)을 말한다.[주D-006]여섯 …… 이었도다 : 발해(渤海)의 동쪽에는 대여(岱輿), 원교(員嶠), 방호(方壺), 영주(瀛洲), 봉래(蓬萊)의 다섯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 산들이 조수(潮水)에 표류(漂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천제(天帝)의 명에 따라 금색의 자라〔金鼇〕 15마리가 이 산들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列子 湯問》[주D-007]검고 …… 이루어 : 당 현종(唐玄宗) 때 감목사(監牧使) 왕모중(王毛仲)이 수만 필의 말을 잘 길러서 각 색깔별로 대열(隊列)을 나누어 놓으니, 바라보기에 마치 아침놀〔雲錦〕 빛과 같았다는 데서 온 말이다.[주D-008]천지가 전환하여 일신되었도다 : 새로운 임금이 등극(登極)하여 천하를 일신시키는 것을 의미한다.[주D-009]상서로운 …… 거듭하고 : 일월(日月)같이 밝은 덕을 전왕(前王), 후왕(後王)이 계속해서 펴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書經)》 고명(顧命)에, “옛 임금이신 문왕, 무왕이 빛난 덕을 거듭 베푸시어 백성들이 의지할 바를 정해 주고 가르침을 펴셨다.〔昔君文王武王 宣重光 奠麗陳敎〕” 하였다.[주D-010]왕도(王道)는 …… 넓음이여 : 《서경》 홍범(洪範)에, “비뚤어지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면 왕도가 넓고 넓으리라.〔無偏無黨 王道蕩蕩〕”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1]사문(四門)은 지극히 화목하도다 : 《서경》 순전(舜典)에, “사방의 문으로 손님을 맞이하게 하시니, 사방의 문이 화목하였다.〔賓于四門 四門穆穆〕”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2]고요(皐陶) …… 곽거병(霍去病) : 고요와 기(夔)는 순(舜) 임금의 두 현신(賢臣) 이름이고, 위청(衛靑)과 곽거병은 모두 한대(漢代)의 명장(名將) 이름이다.[주D-013]반고(班固) …… 순숙(荀淑) : 반고는 《한서(漢書)》의 저자이고,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의 저자이며, 유향(劉向)은 전한(前漢) 때의 학자(學者)이고, 순숙은 후한(後漢) 때의 학자이다.[주D-014]날개에 …… 부여잡도다 : 봉황(鳳凰)의 날개에 붙고 용(龍)의 비늘을 부여잡는다는 뜻으로, 전하여 영주(英主)를 섬겨서 공명(功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주D-015]구준(衢樽)과 춘대(春臺)를 누리면서 : 구준은 큰 길거리에 설치한 술동이를 말한 것으로, 《회남자(淮南子)》 무칭훈(繆稱訓)에, “성인의 도는 마치 큰 길거리 한가운데에 술동이를 두어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각 적당하게 떠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致樽邪 過者斟酌 多小不同 各得所宜〕”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임금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데에 비유한 것이고, 춘대는 《노자(老子)》 제 12 장에, “세속의 중인들은 화락하여 마치 푸짐한 잔칫상을 받은 듯, 다스운 봄날 높은 누대에 올라서 사방을 조망한 듯 즐거워한다.〔衆人熙 如享太牢 如登春臺〕” 한 데서 온 말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주D-016]격양가(擊壤歌) : 요(堯) 임금 때에 한 노인(老人)이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며 흙덩이를 치면서〔擊壤〕 노래하기를,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서 쉬도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 갈아서 밥을 먹거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何有於我哉〕” 했다는 데서 온 말로, 역시 태평성대를 의미한다.[주D-017]거수(車水)와 마룡(馬龍) : 이것은 “수레는 흐르는 물과 같고, 말은 헤엄치는 용과 같다.〔車如流水 馬如游龍〕”는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거마(車馬)의 왕래가 빈번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後漢書 卷10上 皇后紀 明德馬皇后紀》[주D-018]무우(舞雩)의 기상(氣像) : 공자(孔子)가 일찍이 자로(子路), 증점(曾點), 염유(冉有), 공서화(公西華) 등의 제자에게 각각 자기의 포부를 말해 보라고 했을 때, 증점이 말하기를, “저문 봄에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5, 6인, 동자 6, 7인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先進》[주D-019]남풍(南風)이 …… 함 : 옛날에 순(舜) 임금이 오현금(五絃琴)을 만들어 타면서 남풍시(南風詩)를 지어 노래했는데, 그 시에, “남풍의 훈훈함이여, 우리 백성의 노염을 풀어줄 만하도다. 남풍이 제때에 불어옴이여, 우리 백성의 재물을 풍부하게 하리로다.〔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慍兮 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0]무서운 태양 : 《춘추좌씨전》 문공(文公) 7년 조에, “조최는 겨울날의 태양이고, 조돈은 여름날의 태양이다.〔趙衰冬日之日也 趙盾夏日之日也〕” 하였는데, 그 주석에, “겨울날의 태양은 사랑스럽고, 여름날의 태양은 무서운 것이다.〔冬日可愛 夏日可畏〕”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1]티끌 …… 듯하나니 : 옥호(玉壺)는 밝은 달을 비유한 말이고, 구슬이 잠긴 듯하다는 것은 곧 밝은 달 그림자가 물속에 잠긴 것을 형용한 말이다.[주D-022]등림(登臨) …… 있으랴 : 요락(搖落)은 초목의 잎이 흔들려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송옥(宋玉)의 구변(九辯)에, “슬프다, 가을의 기후됨이여. 쓸쓸하여라, 초목은 낙엽이 져서 쇠하였도다. 구슬퍼라, 흡사 타향에 있는 듯하도다. 산에 올라 물을 굽어봄이여, 돌아갈 사람을 보내도다.〔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 草木搖落而變衰 憭慄兮 若在遠行 登山臨水兮 送將歸〕”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3]영서(靈犀)로 추위를 물리치고 : 영서는 곧 한기(寒氣)를 물리칠 수 있는 서각(犀角)을 말한다. 당 현종(唐玄宗) 초기에 교지국(交趾國)에서 황금빛의 서각 하나를 바쳐 왔는데, 그 사자(使者)의 청(請)에 따라 이것을 금반(金盤)에 담아 전중(殿中)에 놓아두자, 다스운 기운이 발산하므로, 상(上)이 그 까닭을 물으니, 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추위를 물리치는 서각입니다.〔此辟寒犀也〕”라고 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주D-024]나귀 …… 참거나 : 나귀를 탄다는 것은, 소식(蘇軾)의 증사진하충수재(贈寫眞何充秀才) 시에서 당(唐) 나라 시인 맹호연(孟浩然)의 눈 속에 나귀 타고 시 읊던 모습을 일러 “그대는 못 보았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눈썹 찌푸리고 시 읊느라 뫼산 자 어깨 으쓱인 것을.〔君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이라 한 데서 온 말이고, 추위를 참는다는 것은, 소식의 사인견화(謝人見和) 시에, “서생의 사업은 참으로 가소로워라, 추위 참고 외로이 읊자니 붓끝이 안 나가네.〔書生事業眞堪笑 忍凍孤吟筆退尖〕”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5]드러눕고 …… 걸 : 드러누웠는다는 것은, 후한(後漢)의 명상(名相) 원안(袁安)이 일찍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려서 낙양 영(洛陽令)이 친히 민가(民家)를 순행하다 보니,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가만히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던 데서 온 말이고, 맨발을 벗었다는 것은,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고사(高士) 초선(焦先)이 풀을 엮어서 옷을 만들어 입고, 두건도 쓰지 않고 맨발로 다녔다〔結草以爲裳 科頭跣足〕는 데서 온 말이다.[주D-026]물은 …… 신령해지나니 : 유우석(劉禹錫)의 누실명(陋室銘)에, “산은 높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나고, 물은 깊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이 있으면 신령해진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27]무창(武昌)의 …… 드러났고 : 원규(元規)는 진(晉) 나라 재상 유량(庾亮)의 자이다. 유량이 일찍이 정서장군(征西將軍)이 되어 무창에 있을 때, 장강(長江) 가에 누각(樓閣)을 세웠던바 이를 남루(南樓)라 하는데, 어느 가을날 밤 천기(天氣)가 아주 쾌청할 적에 유량이 이 남루에 올라가서 그의 좌리(佐吏)인 은호(殷浩), 왕호지(王胡之) 등과 함께 시를 읊조리며 고상한 풍류(風流)를 만끽했던 일로 인하여 이 남루가 세상에 널리 드러나게 되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주D-028]양양(襄陽)의 …… 알려졌거늘 : 현수(峴首)는 현산(峴山)의 다른 이름이고, 숙자(叔子)는 진(晉) 나라 명장(名將) 양호(羊祜)의 자이다. 양호가 일찍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관계로 그 지방 백성들이 양호의 덕을 사모하여 현산에 비(碑)를 세워서 그를 기렸는데, 이 비를 바라보는 이는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하여 두예(杜預)가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이름하기까지 했던 데서 온 말이다.[주D-029]성악(星岳)이 신령함을 잉태하여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신백과 여후는 산악에서 내려왔고, 부열은 죽은 뒤에 별이 되었다.〔申呂自嶽降 傅說爲列星〕” 하였는데, 부열은 은 고종(殷高宗)의 현상(賢相)으로 일찍이 은(殷) 나라를 중흥시키고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 데서 온 말이고, 신백(申伯)과 여후(呂侯)는 산신령이 내려와서 탄생했다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두 현상으로, 《시경》 대아(大雅) 숭고(崧高)에, “높디높은 산악이, 우뚝 하늘에 닿았도다. 이 산에서 신령을 내려, 보후와 신백을 내셨도다. 보후와 신백 두 사람은, 주 나라의 기둥이라, 사국의 번병이 되어, 사국에 덕을 베풀도다.〔崧高維嶽 駿極于天 維嶽降神 生甫及申 維申及甫 維周之翰 四國于蕃 四國于宣〕” 한 데서 온 말이다. 여후는 보후와 같다.[주D-030]상당군(上黨君) : 조선 세조(世祖)의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진 한명회(韓明澮)를 가리킨다.[주D-031]잠저(潛邸) 시절의 광묘(光廟) : 광묘는 능호(陵號)가 광릉(光陵)인 세조(世祖)를 가리킨 것으로, 세조가 왕위(王位)에 오르기 전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을 말한다.[주D-032]풍운(風雲)의 기이한 만남이요 : 용호(龍虎)가 풍운을 만나서 득세(得勢)하듯이, 명군(明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난 것을 의미한다.[주D-033]어수(魚水)가 …… 것이로다 : 이 또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잘 만난 것을 의미한 말로, 촉한(蜀漢)의 선주(先主)가 이르기를,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34]손으로 …… 날아오르니 : 붉은 태양은 임금을 상징한 말이고, 구오(九五)의 용(龍)이 날아오른다는 것은, 《주역(周易)》 건괘(乾卦)에, “구오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음이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한 데서 온 말로, 왕위(王位)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주D-035]만물이 모두 우러러보도다 : 《주역》 건괘 문언(文言)에,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는지라, 성인이 일어나매 만물이 우러러보도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36]소조(蕭曹)의 …… 내니 : 소조는 한 고조(漢高祖)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합칭한 말이고, 양평(良平)은 한 고조의 모신(謀臣)인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을 합칭한 말이다.[주D-037]태산(泰山)과 황하(黃河)로 맹세하여 : 한 고조의 공신에 대한 봉작(封爵)의 서사(誓辭)에,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가 영원히 편안한 그날까지 복록이 후손에게 미치리라.〔使河如帶 泰山如厲 國以永寧 爰及苗裔〕” 한 데서 온 말로, 공신에 책록(冊錄)된 것을 의미한다.[주D-038]운대(雲臺)와 …… 걸렸네 : 운대는 후한(後漢) 때에 공신의 초상(肖像)을 걸었던 곳이고, 기린각(麒麟閣)은 전한(前漢) 때에 공신의 초상을 걸었던 곳으로, 이 역시 공신에 책록된 것을 의미한다.[주D-039]녹야당(綠野堂) : 당(唐) 나라 때의 명상(名相) 배도(裴度)가 조정에서 은퇴하여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별장 이름이다.[주D-040]독락원(獨樂園) : 송(宋) 나라 때 사마광(司馬光)이 재상(宰相)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낙양현(洛陽縣) 남쪽에 세운 원명(園名)이다.[주D-041]누가 …… 했는고 : 두보(杜甫)의 증위좌승(贈韋左丞) 시에, “백구가 아득한 물결 속에 숨거든, 만 리 밖의 백구를 누가 능히 길들일꼬.〔白鷗沒浩蕩 萬里誰能馴〕”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42]아 …… 자득하여라 : 《시경》 소남(召南) 고양(羔羊)에, “크고 작은 양의 가죽이여, 흰 실로 다섯 줄을 꿰맸도다. 퇴청하여 집에서 먹으니, 종용하고 자득하도다.〔羔羊之皮 素絲五紽 退食自公 委蛇委蛇〕” 한 데서 온 말인데, 이 시는 남국(南國) 사람들이 문왕(文王)의 정사(政事)에 교화되어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검소하고 정직하므로, 한 시인(詩人)이 그것을 찬미하여 부른 노래이다.[주D-043]나날이 …… 지나도다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이미 깊숙하게 들어가 구렁을 찾고, 또한 험한 길을 따라 언덕을 지나도다.〔旣窈窕以尋壑 亦崎嶇而經丘〕”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44]마음 …… 되었으니 : 《장자》 산목(山木)에, “배를 나란히 하여 하수를 건널 때에 다른 빈 배가 와서 나의 배에 부딪쳤을 경우에는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일지라도 성을 내지 않는다.〔方舟而濟於河 有虛船來觸舟 雖有惼心之人不怒〕” 한 데서 온 말로, 빈 배란 곧 물욕(物欲)이 전혀 없어서 마음이 아주 넓고 평온한 것을 의미한다.[주D-045]은하수 …… 것이요 :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서쪽으로 함지에 노닐고 부상에 다다르니, 초목에까지 은하수 밝은 빛을 입히었도다.〔西游咸池略扶桑 草木衣被昭回光〕” 한 데서 온 말로, 이 묘비의 본뜻은 한유(韓愈)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초목에까지 문(文)과 도(道)의 은택을 입혔다는 것인데, 여기서는 압구정(狎鷗亭)의 주인 한명회(韓明澮) 또한 한씨(韓氏)이기 때문에 특별히 한유에 관한 글을 끌어댄 것이다.[주D-046]규벽(奎壁)이 …… 것이라 : 규와 벽 두 별은 문운(文運)을 주관한다는 데서, 전하여 문원(文苑), 또는 문장(文章)을 의미하고, 신조(宸藻)는 제왕(帝王)의 시문(詩文)을 가리키며, 일월의 빛을 그린다는 것은 한유(韓愈)의 진찬평회서비문표(進撰平淮西碑文表)에, “천지의 얼굴과 일월의 빛은 그려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두꺼운 낯으로 뻔뻔스레 글을 지어서 분부에 답하는 바입니다.〔乾坤之容 日月之光 知其不可繪畫 强顔爲之 以塞詔旨〕”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47]천조(天朝)의 …… 꾸미고 : 당시 중국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이 압구정(狎鷗亭)의 기문(記文)을 지은 것을 비롯하여 중국의 수많은 문사(文士)들이 시(詩)를 지어서 압구정을 찬미(讚美)한 것을 이른 말이다.[주D-048]한 위공(韓魏公) : 북송(北宋) 시대 현상(賢相)으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진 한기(韓琦)를 가리킨다. 그의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그의 실명(室名) 또한 압구정(狎鷗亭)이었다.[주D-049]급류(急流)를 …… 구하고 : 송(宋) 나라 때 한 도승(道僧)이 진단(陳摶)에게 전약수(錢若水)의 사람됨을 가지고 말하기를, “이는 급류 속에서 용감히 물러날 수 있는 사람이다.〔是急流中勇退人也〕”라고 했었는데, 뒤에 과연 전약수가 벼슬이 추밀 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을 때 40세도 채 안 된 나이로 용감하게 관직에서 물러났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관로(官路)가 한창 트인 때에 용감하게 은퇴하는 것을 말한다.[주D-050]오창(敖倉) : 진(秦) 나라 때의 창고(倉庫) 이름이다.[주D-051]남기(南箕)를 …… 마시고 : 남기는 남쪽에 있는 기성(箕星)을 말하는데, 이 별자리는 마치 키〔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북두성(北斗星) 자리 또한 말〔斗〕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므로, 술을 뜬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주D-052]황견(黃絹) : 후한(後漢) 때 채옹(蔡邕)이 조아비문(曹娥碑文)을 보고는 그 비석(碑石) 배면(背面)에다 은어(隱語)로 ‘황견유부외손자구(黃絹幼婦外孫齍臼)’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뒤에 양수(楊脩)가 이것을 해석하기를, “황견은 색사(色絲)이니 글자로는 절(絶) 자가 되고, 유부는 소녀(少女)이니 글자로는 묘(妙) 자가 되고, 외손은 여자(女子)이니 글자로는 호(好) 자가 되고, 자구는 매운 맛을 받는 것이니 글자로는 사(辭) 자가 되므로, 이른바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뛰어난 문장(文章)을 의미한다.[주D-053]무지개를 뱉어내어 : 시문(詩文) 짓는 재주가 풍부함을 이른 말이다.[주D-054]손에서 …… 듯하구나 : 재사(才思)나 문장(文章)이 매우 민첩하고 유창한 것을 형용한 말이다.
| | 묘지명(墓誌銘) 10수(十首) | | |
증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신공 암(申公黯)의 묘지명 병서 | |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된 신공이 80세의 나이로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8) 8월 20일에 졸하여 기내(畿內)의 과천현(果川縣)에 있는 청계산( 淸溪山) 아래 묘향(卯向)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 순천 김씨(順天金氏)를 합부하였다. 숭정(崇禎) 병술년(1646, 인조24)에 공의 아들인 참의 민일(敏一)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 나에게 극구 청하여 말하기를, “선인께서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나도록 묘석(墓石)을 새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개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였습니다. 바라건대 당신께서는 한마디 해 주어서 지하에서 중시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군에 대해서 대대로 맺어온 교분이 아주 도탑기에 감히 늙어 병들었다는 핑계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암(黯)이고, 자는 직유(直孺)이며, 평산인(平山人)으로 고려의 태사(太師) 숭겸(崇謙)의 후예이다. 태사는 으뜸가는 공훈과 큰 절개를 가지고서도 자신의 포부를 끝까지 다 펴지 못하였으므로 후예들에게서 발현되어 어진 명성과 아름다운 명망을 지닌 분이 대를 이어서 나왔다. 증조 휘 영석(永錫)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할아버지 휘 원(援)은 사직서 영(社稷署令)을 지냈다. 아버지 휘 정미(廷美)는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일찍 졸하였는데, 형인 준미(遵美)와 더불어 모두 중종조 기묘 연간에 이름이 드러났다. 어머니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종실 학성군(鶴城君) 이연정(李連丁)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 4월에 공을 낳았다. 공은 첫돌이 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민첩하였으며, 스스로 글 읽기에 힘써 드디어 경오년(1570, 선조3)의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그 뒤에도 부지런히 힘쓰기를 그치지 않아 재주와 학업이 정밀해지고 진보되어 대과(大科)에 응시하였다가 비록 급제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람들이 자못 칭찬하였다. 37세 때 선발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파직되고서 전설사 별제(典設司別提)에 제수되었다. 천거하는 사람이 있어 군적도감(軍籍都監)의 일을 겸임하였다가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로 옮겼다. 정축년(1577)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고서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에 제수되었다가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봉화 현감(奉化縣監)이 되었다. 4년 동안 재임하고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 문의 현령(文義縣令)에 제수되었다. 2년 동안 재임하고서 파직되어 돌아왔다. 임진년(1592)에 왜적이 쳐들어옴에 따라 승여(乘輿)가 파천(播遷)하였다. 공은 처자식을 버리고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의 군중으로 들어갔다. 도원수가 공을 재주가 있다고 여겨 군향(軍餉)을 주관하게 하였다. 행조(行朝)에서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을 제수하였다. 얼마 뒤에 군사가 궤멸되자, 다시 경기 순찰사(京畿巡察使) 권징(權徵)의 막하로 달려갔다. 호조 정랑으로 옮겨졌다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으로 승진하였는데, 군향의 관리는 그대로 맡았다. 천자가 대거 군사를 출동시켜 왜적을 정벌하였는데, 기근이 든 뒤여서 식량이 다 떨어지게 되었다. 공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해 적절하게 조달하여 결핍되지 않게 하였다. 갑오년(1594)에 조정에서 의논해 남양(南陽)의 목장에 둔전(屯田)을 설치해 군향을 보충하기로 하고는 공을 감목관(監牧官)으로 삼아서 그 일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파직되고서 돌아왔다. 무뢰배인 이탕(李簜)이란 자가 평소에 동릉(東陵)의 난폭함이 있었는데, 난리를 틈타 왜적들을 인도하면서 공공연히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는데도 관리들이 제대로 금하지 못하였다. 공은 계책을 세워 그를 체포해 참수하였다. 그 공으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였으나, 언관 가운데 예전의 원한을 갚고자 하는 자가 있어 가로막았다. 신천 군수(信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체차되고서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익위사 익위(翊衛司翊衛)로 고쳐졌다가 외직으로 나가 김포 현령(金浦縣令)이 되었다. 다음 해에 연한이 되어 체차되고서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이 되었다. 그때 마침 선무(宣武) 등 세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하였는데, 공은 낭청(郞廳)이 되었다.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무리들이 분분하게 참여되자 공은 도감의 장(長)에게 말하여 일체를 삭제해서 끝내 함부로 참여되는 자가 없게 하였다. 일이 완결되고서 서윤으로 되돌아왔다. 그 이후로 3, 4년 사이에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이 되었다. 공은 묘유(卯酉)에 싫증을 느껴 녹봉을 사양하고 스스로 편안히 지냈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나이가 80세가 됨에 따라 옛 전례에 의거해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으로 승진되었다. 가을에 이르러서 몸이 편치 않다가 경성에 있는 집의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전에 세 공신(功臣)의 종훈(從勳)에 참여됨으로 해서 좌찬성(左贊成)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추증되었다. 아들들이 빙 둘러 모시고 있으면서 의약(醫藥)을 부족함이 없이 대었으며, 염습을 하고 매장을 함에 있어서 정성스럽고 신중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길한 묘 자리를 점쳐 얻고 부인을 부장(祔葬)하였으며, 의례를 갖추고 물품을 구비하여 무덤 속에 편안히 모셨으니, 아, 복을 받은 것이다. 공은 천부적인 자질이 자애롭고 착하였으며, 겉으로는 약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지키는 것이 있었다. 전후로 백성을 다스리고 옥사를 결단함에 있어서 시비곡직이 어떠한가만을 묻고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비방과 중상을 당하였으면서도 끝내 고치지 않았다. 상란(喪亂)을 당하여 군량을 대는 즈음에는 사사로움을 잊고 공무를 우선으로 여겼으며, 깨끗하게 직무를 봉행하여 밝고 밝아서 하자가 없었으므로, 서리(胥吏)들이 저절로 움츠러들어 감히 농간을 부려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또 능히 생각을 정밀히 하고 일을 잘 헤아려서 대처해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조처를 취하였으므로, 비록 창졸간에 급박한 일을 당하여 다른 사람들은 모두 법도를 잃더라도, 공만은 편안하게 대처하면서 마치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병을 자주 앓았으나 욕심을 적게 하고 일을 줄여서 만년에 다시 건강해져 끝내 오랜 수명을 누렸다. 이에 동류의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한가로이 오가면서 편안하게 지냈는데, 오피(烏皮)와 구식(鳩飾)이 오고감에 광채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면서 구로회(九老會)라고 칭하였다. 공은 병세가 위독해져서도 정신과 기운이 어지럽지 않았으며, 붓을 가져오라고 명한 다음 유서(遺書)를 아주 자세하게 쓰고서 훌쩍하니 서거하였다. 부인은 절도사(節度使)를 지내고 특별히 병조 판서에 추증된 김지(金墀)의 따님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서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를 섬겼다. 판서공이 유배 가 있으면서 여역(癘疫)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불에 태운 재를 보내드렸으며, 때이른 감을 먹고 싶어 하다가 미처 맛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듣고는 늙을 때까지 차마 이른 감을 먹지 못하였다. 며느리가 되고 어머니가 됨에 있어서 모두 법도가 있어서 종족들이 취하여 부녀자의 법도로 삼았다. 70세가 되던 해인 정미년(1607, 선조40) 6월에 공보다 앞서 죽었다. 공은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공일(恭一)은 무과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지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 관일(寬一)은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김천도 찰방(金泉道察訪)으로 있다. 삼남 민일(敏一)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지로 있다가 지금은 공조 참의가 되었는데, 충성스럽고 질박하며 성실하고 곧아서 한때에 이름이 났다. 큰사위는 금오랑(金吾郞) 권온(權韞)이고, 작은 사위는 사직서 영(社稷署令) 한지(韓祉)이다. 경력 공일은 아들은 없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유두첨(柳斗瞻)에게 시집갔다. 찰방 관일은 3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빈( )과 흘(忔)과 황(愰)인데, 황은 경력의 양자가 되었으며, 딸은 참봉 안정현(安廷炫)에게 시집갔다. 참의 민일은 8남 6녀를 두었다. 장남 상(恦)은 문과에 급제하고 장령으로 있으며, 차남은 경(憬), 삼남은 성( ), 사남은 칭( ), 오남은 양(懹)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는 조익(曺瀷), 차녀는 이면(李冕), 삼녀는 현감 이징(李憕), 사녀는 조일호(趙一豪), 오녀는 김선(金墡)에게 시집갔다. 금오랑 권온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선(權僎)과 권찬(權儧)이고, 딸은 남일(南佾)과 신영탁(愼英倬)에게 시집갔다. 사직서 영 한지는 후사가 없다. 상은 2남을 두었는데, 장남 명규(命圭)는 진사이고, 차남은 어리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모두 백 수십 명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선대에서 크나큰 복 내려 받아서 / 受祉于先 후손에게 아름다움 끼쳐 줬거니 / 以詒厥后 길하여서 안 이로운 것이 없어라 / 吉無不利 강직하고 반듯했던 지조 지녔고 / 剛方之操 씻은 듯이 깨끗하게 경계했거니 / 澡雪之箴 어진 관원 되기 정말 마땅하였네 / 允哉良吏 오랜 수명 누린 뒤에 편안히 죽어 / 壽考令終 길한 묘 터 잘 잡아서 묻혔거니 / 歸于吉壤 영원토록 무너지는 일 없으리라 / 永世無圯
[주D-001]동릉(東陵)의 난폭함 : 도척(盜跖)과 같이 난폭한 것을 말한다. 도척은 춘추 시대에 있었던 몹시 흉악한 사람으로, 9천 명의 졸개를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고 하는데, 일찍이 동릉에서 사람의 간(肝)으로 회를 쳐서 점심 반찬으로 하였다는 고사가 있다.[주D-002]묘유(卯酉) : 관청에 출근하여 직무에 종사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 관리들이 묘시(卯時)에 출사하여 유시(酉時)에 퇴근하였다.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4년 4월 18일 기사에, “각사(各司)의 관원은 묘시에 출사하여 유시에 퇴근하고, 해가 짧을 때에는 진시에 출사하여 신시에 퇴근하는 것이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하였다.[주D-003]오피(烏皮)와 구식(鳩飾) : 오피는 검은 양의 가죽으로 싼 궤안(几案)으로, 앉을 때 기대어 앉는 물건이고, 구식은 손잡이 부분에 비둘기의 모양을 새긴 지팡이를 말하는데, 모두 나라에서 공로가 높은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던 물품이다.[주D-004]구로회(九老會) : 본디는 당(唐)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노년의 친구 9인과 더불어 향산(香山)에서 모여 결성한 모임인데, 나중에는 흔히 노인네들이 결성한 모임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 | 시(詩)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승문원사 겸 춘추관편수관(判承文院事兼春秋館編修官) 정척(鄭陟)이 편집하고, 중직대부(中直大夫) 집현전직제학 지제교 세자좌보덕 겸 춘추관기주관(集賢殿直提學知製敎世子左輔德兼春秋館記注官) 신 유의손(柳義孫)이 하교를 받들어 교정함 | | |
돌길은 첩첩 쌓인 절벽에서 끝이 나고 / 石路千崖盡 향연이 퍼지자 방안이 상쾌하네 / 香烟一室淸 나그네 찾아와서 차 한 잔을 달라는데 / 客來求煮茗 스님은 앉은 채로 불경만 읽는구나 / 僧坐自翻經 어느 해에 심었는지 나무는 늙었고 / 樹老何年種 종소리는 밤중에 여운을 남기었네 / 鍾殘半夜聲 이치를 깨우치자 인사가 끊겼는데 / 悟空人事絶 도도히 누워서 무생을 즐기는구나 / 高臥樂無生
| | 시(詩)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판승문원사 겸 춘추관편수관(判承文院事兼春秋館編修官) 정척(鄭陟)이 편집하고, 중직대부(中直大夫) 집현전직제학 지제교 세자좌보덕 겸 춘추관기주관(集賢殿直提學知製敎世子左輔德兼春秋館記注官) 신 유의손(柳義孫)이 하교를 받들어 교정함 | | |
관악산 남쪽에 청계산 뒤쪽에 / 冠岳之南淸溪陰 우뚝 솟은 사찰이 수풀을 짓눌렀네 / 梵宮突兀壓長林 밤비 오자 호랑이 으르렁 울어 대고 / 夜雨咆哮吼飢虎 해 뜨자 새들은 재잘재잘 노래하지 / 旭日啁哳鳴幽禽 창 밑에 나는 샘에 여라 덩굴 뒤덮였고 / 泉生窓底薛蘿合 돌비탈 감돈 길에 소나무 들어찼네 / 路轉石稜松檜深 멀리서 혜상인이 잘 있는지 궁금하여 / 遙念惠師應好在 밤마다 꿈 속에서 산중을 찾아갔소 / 山中夜夜夢相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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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詩) | | |
남쪽에 청계산이 터럭처럼 희미한데 / 南望淸溪一髮微 산중의 절들을 꿈 속에서 보았었지 / 山中蘭若夢依俙 원숭이와 학들이 원망하고 있을 텐데 / 曉猿野鶴應相怨 나그네는 지금도 돌아가지 않았구나 / 遊子如今未擬歸
택당선생 별집 제1권 | | |
| | 교서(敎書) | | |
병술년에 회맹제(會盟祭)를 거행하고 나서 중외에 사전(赦典)을 반포한 교서 | |
왕은 이르노라. 흉적을 제거하고 난리를 평정한 것이야말로 신하로서 큰 공훈을 세운 것이요, 그 충성심을 드러내고 공로에 보답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에서 행해야 할 아름다운 법도라 할 것이다. 이에 대려(帶礪)의 맹세를 거듭 다짐하면서 교서를 반포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나는 자질이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어둡기만 한데, 이렇듯 어렵고 힘든 시대의 운세를 만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역에 흔단이 많이도 발생하는 가운데 좀벌레같은 도적이 안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제어하고 안정시키는 방법이 잘못되어 흉맹스럽게 날뛰는 자들이 위에서 험난한 짓을 저지르게 되었다. 비록 변란의 씨앗이 싹트는 대로 곧장 잘라 버리기는 하였다마는, 나의 몸을 돌아보며 허물을 살피노라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장상(將相)의 반열에 효경(梟獍 부모를 잡아 먹는다는 금수(禽獸))과 같은 악한이 숨어 있을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계속 교만을 부리고 원망하면서 끝도 없는 욕심을 오래도록 키워 오더니, 틈을 살피고 기회를 엿보며 감히 넘보아서는 안 될 꾀를 꾸며내었다. 그리고는 성사(城社)에 몸을 의탁하고 사특(邪慝)한 마음을 숨겨 오다가, 간장(干將 예리한 명검(名劍)으로 병권(兵權)을 뜻함)을 거꾸로 잡고 군대를 희롱하였다. 그리하여 도성 안과 밖에서 지키는 군사들을 끌어들여 서로 접응하며 형세를 부추기게 하고, 조회하는 날 소 잡고 술 먹이는 잔치를 베풀 때에 난리를 일으키려고 준비하였으니, 모반(謨叛)의 일이 거의 성사될 단계에 와 있었다. 하지만 조아지사(爪牙之士 충성스러운 용사)가 간사한 꾀를 알려 준 덕분에 고굉지신(股肱之臣)이 공동으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렇듯 궁궐을 범하려는 음모가 낱낱이 누설되면서 충갑(衷甲)의 변이 저절로 해소되었다. 이렇게 해서 햇빛이 쏟아지고 바람이 부는 가운데 요망한 기운이 깨끗이 걷히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는 가운데 도깨비들이 숨을 곳을 찾지 못해, 괴수가 통쾌하게 섬멸되면서 패거리들도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그리하여 화살촉 하나 헛되이 소비하는 일이 없이 흉악 무도한 자들을 죽여 시체를 쌓아 놓음으로써 볼 만한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고, 머리털 하나에 천 근의 무게가 달려 있듯 하던 위기를 전환시켜 종묘사직을 반석(盤石)처럼 굳건히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니 진정 충성을 다 바쳐 공을 세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렇듯 보기 드문 봉작(封爵)의 영예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잇따라 환부(萑符 강도(强盜))의 무리가 일어났는데, 이는 실로 벌과 전갈처럼 은밀히 독기(毒氣)를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청계산( 靑谿山)에 소굴을 둔 이들 녹림당(綠林黨 화적 떼)이 어찌 한 지방의 마을만 약탈하려는 것이었겠는가. 호총 어복(狐叢魚腹)의 요망한 꾀를 내어 감히 경전(京甸)을 침략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환히 드러난 국가의 위신력(威信力)을 발휘해서 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토벌하여 죽여 없애었다. 당초에 고발한 것이 비록 한 사람에 그쳤다고는 하나, 국가의 법령으로 볼 때 3등(等)으로 봉(封)해 주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 이에 전후(前後)의 일과 관련하여 직질(職秩)을 내려 주고, 대소(大小)의 공로에 따라 공평하게 은전(恩典)을 베푸는 바이다. 전택(田宅)과 민인(民人)을 봉작(封爵)의 명목에 따라 하사하고, 상서(象犀)와 금옥(金玉)과 홍색 자색(紫色)의 관복에 운대(雲臺)의 고사처럼 빛나게 해 줄 것이며, 부모와 자손에게까지 적용하여 모두 봉증(封贈)의 은택을 입게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길일(吉日)을 택해 제사를 지내고, 천지 신령에게 고한 뒤 함께 피를 마시고 맹세를 하였으니, 이 모두는 떳떳한 국가의 전범(典範)에 따른 것으로서, 이제 성대한 예식이 빠짐없이 갖추어졌다고 하겠다. 아, 임금과 신하는 무엇보다도 한 몸이 되는 것이 귀중하니, 행복과 불행을 모두 함께 하여야만 마땅한 것이다. 단서철권(丹書鐵券)의 효력이 지금부터 바야흐로 시작되어, 황하(黃河)와 백수(白水)처럼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존속되리라. 그래서 이렇게 교시하는 바인데, 잘 알아들으리라 믿는다.
[주D-001]대려(帶礪)의 맹세 : 황하가 혁대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공신의 자손들에게 은혜를 베풀겠다는 임금의 서약을 말한다. 《史記 高祖功臣侯者年表序》[주D-002]성사(城社)에 몸을 의탁하고 :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보신책(保身策)을 꾀했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감히 허물 수 없는 성곽이나 사당 틈새에 여우와 쥐가 살면서 안전하게 지낸다는 성호사서(城狐社鼠)의 고사에게 나온 것이다. 《晉書 謝鯤傳》[주D-003]조아지사가 …… 되었고 : 인조 22년(1644) 3월에 심기원(沈器遠)이 먼저 장상(將相)을 없애고 나서 거사하려고 잔치를 벌여 여러 고관들을 초청할 계획이었는데, 그의 막하(幕下)인 황헌(黃瀗)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具仁垕)에게 고발하자, 구인후가 김류(金瑬)에게 급히 알려 지휘를 받고 군대를 출동시켰던 일을 말한다.[주D-004]충갑(衷甲)의 변 : 환대하는 척하면서 초청했다가 모조리 죽인 뒤 거사하는 것을 말한다. 충갑은 갑옷을 속에 입고 나서 다시 그 위에 평상복을 걸쳐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주D-005]호총 어복(狐叢魚腹) : 신령의 계시를 빙자하여 도당을 끌어모으고 거사(擧事)하는 것을 말한다. 진(秦) 나라 때 진승(陳勝)이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쓴 비단을 생선 뱃속[魚腹]에 미리 집어 넣어 군중을 현혹시킨 것과 밤에 총사(叢祠)에 사람을 보내 여우[狐]가 우는 흉내를 내며 ‘대초흥(大楚興) 진승왕(陳勝王)’이라고 외치게 한 고사에게 비롯된 것이다. 《史記 陳涉世家》[주D-006]운대(雲臺) : 공신각(功臣閣)의 이름이다.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을 기리기 위해 등우(鄧禹) 등 장수 28명의 초상화를 그려 이곳에 걸었다.
정렴(鄭) | |
정순붕(鄭順朋)의 아들인데, 호는 북창(北窓)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맑고 빼어났으며, 자라서는 통하지 못한 것이 없어서, 천문ㆍ지리ㆍ음악ㆍ의약ㆍ산류(算類)ㆍ화어(華語 중국어)를 모두 배우지 않고서도 능통하였고, 의술에 있어서는 유부(兪跗)나 편작(扁鵲)과 같고 수리(數理)에 있어서는 강절(康節 소옹(邵雍))과 같았으며,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경사(京師 중국의 서울을 가리킴)에 갔었는데 중국 사람과 이야기하면 모두 놀랍게 여겼다. 차례를 뛰어 넘어 육품에 서용되어 의학ㆍ산학(算學)ㆍ몽학(蒙學) 삼학 교수(敎授)를 겸하였고, 포주 현감(抱州縣監)을 지냈다. 그 아버지가 변고를 임금께 아뢸 때에, 힘써 간언했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크게 미움을 받아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외지에 소식을 끊고 물러나 살았는데, 과천(果川)의 청계산( 淸溪山)과 양주(楊州)의 괘라산(掛蘿山)에 많이 있었다. 늘 하인을 시켜 약을 지어서 맑은 아침 일찍 일어나기 전에 달여 먹고서야 비로소 말을 하더니, 얼마 안 되어 죽었는데 나이는 40 남짓이었다. 산에서 살 때엔 산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알았는데, 어떤 집에서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뒤에 실지로 알아보면 과연 그러하였다. 늘 청리(淸羸 특별한 병이 없이 마르는 병)의 병을 앓아서 아침이면 반드시 입을 다물고 반듯이 앉았다가 해가 돋아서야 비로소 이[齒]를 벌리고 기운을 토해 냈고, 밤이면 오뚝이 바로 앉아서 자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구름을 탄 원새[鵷] 같고 바람 탄 매미 같았다. 아마도 그 학술이 선가(禪家)의 진박(陳搏)의 방법에서 나온 듯하다. 〈행적〉○ 북창이 늘 이르기를, “의(醫)라는 것은 평가해서 결정하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과 객열(客熱)을 살펴서 병증에 대하여 약을 주어야 완전하다고 할 것인데, 세상의 의사들이 묵은 서적(書籍)에 국한되고 한 모퉁이에 교착(膠着)되어 변통할 줄 몰라 병증에 거슬려 약을 쓰니 어찌 효험을 볼 수 있으랴.”하였다. 동상○ 북창이 술을 잘 마셔서 두어 말을 마시더라도 어지럽지 않았는데, 만년에는 한 잔도 기울이지 못하였다. 동상
| | 제문(祭文) 3 | | |
원소를 옮겨 봉안할 때 지나는 명산대천에 베푸는 제사의 제문 | |
화악의 삼봉이여 / 華嶽三峯 우리나라의 진산(鎭山)이로다 / 鎭我邦國 고하는 의식을 먼저 드리니 / 告儀居先 실로 신의 힘으로 보살피소서 / 寔庇神力 이상은 삼각산(三角山)에 고한 것임. 향하고 대하여 / 爲朝爲對 일찍이 아름다운 은혜를 주길 빌었네 / 夙祈嘉貺 무엇으로 줄 것인가 / 曷以貺之 가는 곳에 이롭게 함일세 / 利于攸往 이상은 청량산(淸凉山)에 고한 것임. 옛적 배봉에 올라 / 昔登拜峯 높은 아차산을 바라보았네 / 以望嵯峨 신령의 응함이 처음과 같아 / 肸應如初 영령의 행차가 안온히 지나게 하소서 / 靷蹕穩過 이상은 아차산(峨嵯山)에 고한 것임. 큰 다리가 내에 걸쳤으니 / 巨橋跨川 그 곧기가 화살과 같네 / 其直如矢 엄숙히 받들어 호위하여 가니 / 肅奉廞衛 신이여 위로하길 바라나이다 / 神庶勞止 이상은 전교천(箭橋川)에 고한 것임. 무지개가 허공에 떴으니 / 虹梯浮空 큰 강이 신령함을 떨치네 / 大江揚靈 엄숙하게 경건한 정성을 받드니 / 穆將虔愉 상여가 가는 길 편안하소서 / 輤路以寧 이상은 독도(纛島)에 고한 것임. 청계산이여 / 淸溪之山 그 위에 신령한 우물이 있다네 / 上有靈井 이에 신의 보살핌을 바라노니 / 式徼神庇 상여 행차가 이 경계에 임하였네 / 旌翣莅境 여러 산의 으뜸이니 / 冠于衆岳 구슬처럼 아름다운 대가 높이 솟았네 / 珠臺矗矗 길을 나서는 처음에 / 戒道之初 희생과 술로써 고하노라 / 牲酒以告 이상은 관악산(冠岳山)에 고한 것임. 우면천이 크고 크니 / 牛川訏訏 그 공이 큰 강과 짝할 만하네 / 功配于瀆 이 신령을 건너가게 함에 / 濟斯靈斯 매우 일찍 정성스런 제사를 드리네 / 禋薦孔夙 이상은 우면천(牛眠川)에 고한 것임. 모락산이 사방으로 둘렀으니 / 洛山周遭 매우 높이 치솟았네 / 巖巖其峙 잡귀를 꾸짖어 보살피길 길이 비 오니 / 永祈呵護 이로써 밝은 제사를 드리네 / 用享明祀 이상은 모락산(慕洛山)에 고한 것임. 산의 이름 화충이니 / 山名華蟲 그 무늬가 매우 빛나네 / 其文炳蔚 제사를 드려 고하노니 / 以侑以告 이날 상여의 행차를 도우소서 / 是日相紼 이상은 치악산(雉岳山)에 고한 것임. 자라가 줄지어 다리를 이루니 / 鼇梁告成 임금의 상여가 길을 나서네 / 龍輴載啓 무사히 건너기를 빌어서 / 利涉之祝 대두의 술을 높이 받드네 / 大斗崇醴 이상은 오목천(鼇沐川)에 고한 것임. 길한 언덕을 자리 잡으니 / 迺卜吉岡 광교산이 주종일세 / 光敎爲宗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어 / 龍翥鳳舞 천 리에 한 번 만났다네 / 千里一逢 신이여 사람의 소원을 살펴서 / 神監人願 길이 무덤을 보살피소서 / 永衛玄封 이상은 광교산(光敎山)에 고한 것임. 하늘이 화산을 만들었으니 / 天作花山 대지의 복룡일세 / 大地福龍 용이 서리고 앉아 여의주를 희롱하는 듯 / 龍盤弄珠 원기가 겹겹이 서리었네 / 元氣重重 어느 하늘의 용이 / 何天之龍 이 신원을 점지했던가 / 卜玆新園 남은 복을 보살펴서 / 拱衛餘庥 자손만대에 이르게 하소서 / 維萬子孫 이상은 화산(花山)에 고한 것임. | | 잡저(雜著) 4 | | |
원침(園寢)을 옮긴 사실 1 기유년(1789) | |
원침(園寢)을 옮길 때의 계획이나 이유, 사례(事例)의 크고 작은 일은 교서나 상소문에 섞여 나와서 기록이 너무 많아, 상세히 정리할 수 없고, 의궤(儀軌)는 뒤섞여 차례가 없기에 그 요령을 얻기가 어렵다. 일에 앞서 미리 헤아려 정한 조치나 때에 당해서 구두로 내린 명령은 문적(文蹟) 이외의 것이 많아 지금 사실을 추려서 같은 유(類)대로 모으고 조목별로 나누어 원편(原編) 몇 권과 부록 몇 권을 만들었다. 원편의 목록이 다섯이니, 첫째는 정원(定園 원침을 정함)이다. 대개 신(神)이 아끼고 감춰 둔 길지(吉地)를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은 하늘이 하기 때문이고, 그것을 알고도 쓰지 못하는 것은 시운(時運)이 있기 때문이다. 화산(花山)이 서울에서 90리 안에 있고 식견이 있는 사람들에게 발견된 지 100여 년이나 되었는데 비로소 원침을 정한 땅이 되었는바, 진실로 하늘이 정한 것이며 시운도 기다린 바가 있었던 것이니, 어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형국(形局)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일과 사수(砂水)의 격(格)을 논한 것은 뜻 있는 사람들이 앞뒤에서 분명한 증거를 제시한 것이 문권을 가지고 대조하고 거북점과 시초점을 쳐서 맞추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니다. 이 책의 대강령(大綱領)은 곧 원침을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정원을 첫 편으로 삼았다. 둘째는 재혈(裁穴 묘혈의 위치를 재어서 정함)이다. 산을 점치는 데 있어 혈(穴)을 재는 일보다 더 신중하게 해야 할 일이 없다. 더구나 지금 봉표(封標)하는 처음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가 많아 정혈(正穴)을 잃을 뻔하였다가, 끝내는 진토(眞土)가 나오고 초점(焦點)이 드러났는데 그것 역시 보통 사람의 식견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며, 신명(神明)이 길한 조짐을 보호하려고 일부러 먼저 고생을 시키고 나서 얻게 하려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 재혈을 다음으로 하였다. 셋째는 상설(象設 석물(石物)을 설치함)이다. 진룡(眞龍)을 이미 점을 쳐서 찾았고 진혈(眞穴)을 찾아 살펴보고 정하였다. 참으로 천신(天神)의 도우심이 이미 진지하니, 거기에 설치할 석품(石品)을 다른 산에서 다듬는 일은 의당 인력의 경영을 기다려야 하였다. 앵봉(鶯峰)은 봉표와의 거리가 몇 개의 능선을 넘는 정도로 가깝고, 신령이 마련하여 정기가 서렸으며 뿌리가 깊어 정화(精華)를 간직하였다. 이를 발견하는 데는 귀신이 꿈에 도왔고 운반하는 데는 하늘이 비를 내려 길을 미끄럽게 하였으니, 일은 빠르고 효력은 배나 되며 물건은 좋고 의식(儀式)은 풍부하게 하여 소자(小子)가 유감없이 일을 이루고자 한 소원을 이루게 하였으니, 이는 어찌 기회가 마침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때문에 상설을 그다음으로 하였다. 넷째는 추일(諏日 날을 가리는 일)이다. 풍수(風水)에서 격(格)을 이루는 것은 땅에 속한 일이고, 연시(年時)가 길운을 맞춰 주는 일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때문에 장례를 치르는 집에서 신중하게 살피는 것은 첫째가 일진(日辰)이다. 이는 곽박(郭璞)이 말한, “일진이 살(煞)을 범하는 것이 산천의 작은 흠보다 중하다.”고 한 것이다. 새 원침을 의논하여 정한 연운(年運)이 저절로 맞았고 공사를 함에 있어 일을 마칠 때까지 오래도록 비와 눈이 방해를 하지 않아, 예양(禮襄 이장(移葬))하는 일을 겨울에 시작하였는데 길일이 물러갔다가 다시 나왔으니, 하늘이 스스로 도움을 주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때문에 추일을 다음으로 하였다. 다섯째는 천봉(遷奉 영구(靈柩)를 옮겨서 장사 지냄)이다. 원침을 옮길 계획을 한 지는 지금까지 16년이나 되었고, 구릉(舊陵)의 재환(災患)을 오늘날에 보았으며, 새 원침의 안길(安吉)은 해가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백공(百工)이 일을 하여 대례(大禮)를 성공리에 마쳤다. 때문에 천봉하는 조목으로 매듭을 지었다. 기타 응당 해야 할 일과 처음 행한 세세한 일은 부록으로 엮었으니, 곧 건축하는 일과 능원의 경계, 보토(補土)하는 일, 나무를 심는 일, 도로를 닦는 일, 읍(邑)을 옮기는 일로서, 이것이 의례(義例)의 대략이다. 군자(君子)가 어버이를 장사 지내는 데에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하여 후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 혹 처음에 정성과 성실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종신토록 한이 될 것이니, 후회하면서도 고치지 못한다면 어떤 불효가 이보다 심하겠는가. 그러나 길지(吉地)가 완전하게 생긴 곳은 반드시 기회와 인연의 합쳐짐이 있어야 하고, 국운이 하늘의 복을 크게 받아 번창하는 일 또한 하늘이 돕는 영응(靈應)을 기다려야 한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기산(岐山)을 만드심에 태왕(太王)께서 가꾸셨다.[天作高山 大王荒之]” 하였고, 또 이르기를, “상제(上帝)께서 권연(眷然)히 서쪽의 기산(岐山)을 돌아보시고 이곳을 주시어 거처하게 하셨다.[乃眷西顧 此維與宅]” 하였는바, 하늘이 길지를 만들고 주는 것이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 소자(小子)는 하늘에 닿는 아픔을 안고 꾹 참으며 구차히 목숨을 연명하면서 스스로 보통 사람과 같이 여기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선왕의 능침이 길지가 아님을 더욱 지극히 한스럽고 원통하게 생각하여, 매양 명절(名節)에 성묘를 하고 산마루와 기슭을 두루 살피면서 두렵고 불안하여 편히 쉬지 못하였다. 그러나 만약 원침을 옮기는 일에만 급급하여 만전(萬全)의 좋은 곳을 얻지 못한다면, 장차 후회가 더욱 심하여 끝내는 나의 정성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지사(地師)를 사방으로 나누어 보내어 선릉(先陵) 내의 봉표(封標)와 기호(畿湖)의 여러 산을 낱낱이 살피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혹은 역량이 모자라고 혹은 형국(形局)이 허술하여, 협곡에서 가까운 곳은 거개가 비탈진 곳이 많고 평평하고 넓은 곳은 제대로 결속된 곳이 없어, 만년토록 안길(安吉)할 택조(宅兆)가 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직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은 신통한 지사가 점찍은 곳이고 이름난 석학들이 일컫는 곳이다. 기해년(1779, 정조3) 인산(因山) 때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조정의 공론이 갈려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나 고집하는 자는 사세의 어려움만을 논하였고 풍수의 결함은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내(國內)의 진룡(眞龍)과 정혈(正穴)을 지금 조사하여 낱낱이 헤아려 보더라도 화산 외에는 다시 이만한 대지(大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지고 여러 술사(術士)들도 찬양하고 경대부(卿大夫)도 이 말에 따르며, 수레를 끄는 사람이나 잡부(雜夫)들까지도 모두 뛰면서 기뻐하고 나라를 위하여 축하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만이 좋은 길지로 여길 뿐이겠는가. 젖 먹이는 호랑이[乳虎]가 그 신령함을 나타내고 산 개구리[生蛙]가 상서로움을 알려 봉표(封標)를 옮기자 진토(眞土)가 드러났으니, 이는 땅이 감춰 둔 곳을 알리는 것이고, 거친 돌을 제거하자 옥돌이 나온 것은 신(神)이 길한 조짐을 선물하는 것이며, 운(運)과 때가 합하여 하늘에서 도와주심이 모두 이로우니 원침을 옮기는 대례(大禮)에 조금도 유감스러운 점이 없다. 이는 실로 조물주의 도우심에 힘입어 장차 하늘이 우리나라를 돌보시어 대명(大命)을 주시며 음복을 내리시려는 것이다. 불초한 나 소자가 어찌 감히 정성이 있어 상제(上帝)를 감동시켰다고 하겠는가. 기유년(1789, 정조13) 10월 기미일(己未日)에 원침을 옮기니, 그 일을 경영함에 있어 많은 사려(思慮)를 한 것과 일을 하는 도중에 영이(靈異)함이 나타난 일이라든지 의물 도수(儀物度數)에 크게 관계되는 일을 이에 차례대로 엮어 우리 후세 사람들에게 알린다. 나 소자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째인 기유년 겨울에 쓰다. 정원(定園) 제1경기(京畿) 수원부(水原府)의 치소(治所)는 서울과의 거리가 90리이고 치소의 북쪽 산을 화산(花山)이라고 한다. 화산의 왼쪽으로 뻗은 용(龍)이 을방(乙方)에서 엎드렸다가 건방(乾方)에서 봉우리가 솟고, 다시 계방(癸方)으로 오면서 축방(丑方)으로 내려가서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을 하면 병자(丙子)ㆍ병오(丙午)의 분금(分金)이 되고, 건방ㆍ을방ㆍ신방(申方) 득수(得水)에 오방(午方) 파문(破門)의 형국이 된다. 산이 을방에서 엎드렸다가 건방에서 봉우리가 솟은 것은 천지정위(天地定位)의 격이 되고, 축방으로 내려가 간방에서 입수한 것은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격이 되며, 간맥(艮脈)이 정방(丁方)을 향하여 천시성원(天市星垣)에 응하고 정방에 세 개의 작은 언덕이 있어 바른 안대[正案]가 되니, 평면금성(平面金星)의 체(體)에 합하고 남극노인(南極老人)이 일월이 행하는 도수(度數)를 점치게 된다. 건방에서 오는 물은 탐랑수(貪狼水)에 해당되고 을방에서 오는 물은 무곡수(武曲水)에 해당되니, 또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만나는 격(格)이 된다. 신방에서 오는 물은 생방수(生方水)가 되고 또 최관수(催官水)가 되니, 오방의 파문은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의 격이 된다. 외수(外水)는 병방(丙方)으로 돌아가 곤방(坤方)에 못이 있으니 율려상생(律呂相生)하는 격이 되고, 정방의 안산(案山)과 병방의 파문은 천간상생(天干相生)의 격이 된다. 이는 곧 신라 국사(新羅國師) 옥룡자(玉龍子) 도선(道詵)이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盤龍弄珠之形]”이고,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이른바 “용(龍)과 혈(穴)과 사(砂)와 수(水)가 모두 좋고 아름답다.”는 것이니, 진실로 천 리를 가도 없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길지(吉地)이다. 근래 방외사(方外士)가 논한 바가 있으니, 그 내룡(來龍)에 대하여 논하기를, “먼 곳은 다 말할 수 없고, 광교산(光敎山)이 용인(龍仁)ㆍ광주(廣州)ㆍ수원 세 고을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어서 한강 남쪽 여러 산의 뇌(腦)가 되고, 분맥(分脈)의 조종산(祖宗山)이 되며, 오른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 청계산( 靑溪山)ㆍ관악산(冠嶽山) 등이 되어 한강 남쪽 여러 능침의 땅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운데로 떨어진 맥이 백운산(白雲山)이 되어 미륵당 고개에 이르러 낮아졌다가 다시 솟아 오봉산(五峰山)이 되고, 미맥(微脈)으로 뻗은 내룡이 다시 솟아 수리악(修理嶽)이 되니, 곧 한강 서쪽의 안인산(安仁山)ㆍ금부산(金富山) 등 여러 산의 조종산이 된다. 왼쪽으로 떨어져 나간 것은 증악산(甑嶽山)이 되는데, 증악산은 들 가운데에 우뚝 솟아 수성(水星)의 체(體)가 되어 마치 소용돌이치면서 흐르는 물결 같기도 하고, 곧은 줄기와 당기는 맥이 혹 솟기도 하고 혹 엎드리기도 하여 고금산(鼓琴山)이 되고 홍범산(洪範山)이 되어 수십 리의 행룡(行龍)이 몸을 뒤틀며 물을 거슬러 올라가 수원부의 뒷산에 솟아 형국의 본신(本身)이 되었으며, 내룡이 외백호(外白虎)가 되어 청룡(靑龍)과 백호가 삼중으로 얽히고 본룡(本龍)이 여러 갈래를 나누어 퍼져 사방으로 둘러 호위하며, 두 손을 마주 잡고 읍(揖)을 하는 듯하여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 되었으니, 광교산이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오봉산이 중조산(中祖山)이 되며 증악산이 소조산(小祖山)이 되어, 참으로 100여 리에 전일한 기운이 결집되어 만들어진 곳이다. 만일 세속의 지사(地師)가 증악산 이후와 수원부산(水原府山) 이전에 맥기(脈氣)가 미약한 것으로 흠을 잡는다면, 이는 진룡(眞龍)의 변화하는 모습을 모르는 것이다. 태조산 아래의 진맥이 들을 지나는 곳은 반드시 연하고 가늘어 예쁘고 아름답기 때문에 요금정(廖金精)이 말하기를, ‘늙은 용이 연한 가지를 만들어 냄에 미끄러지고 끊어짐이 많음을 싫어하지 않는다.[老龍生出嫩枝柯 跌斷不嫌多]’고 하였으니, 이는 연할수록 더욱 아름답고 끊어진 곳이 많을수록 귀하다는 말이며, 성봉(星峰)이 가끔 수려하게 빼어나고 다투어 솟았는데 이는 바로 간성법(間星法)이다. 양균송(楊筠松)이 말하기를, ‘그대가 만일 간성법을 알려거든 시골의 도처마다 가서 찾으라. 10리 사이에 한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으니 작은 것이 큰 산이 되고 약한 봉우리가 큰 봉우리가 된다’고 하였다. 10리에 하나의 봉우리가 솟은 것도 오히려 큰 산이 되고 큰 봉우리가 되는 묘함이 있는데, 더구나 무수한 봉우리가 솟음에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호종(護從)하는 여러 산이 첩첩이 거듭 쌓여 구름이 생기고 안개가 일어나는 듯하니, 이미 지극히 귀한 기상(氣象)이다. 이뿐만이 아니고 15리의 긴 배룡(背龍)이 미륵당 고개로부터 끝없이 내려와서 큰 들에 가로로 뻗어 공허한 기운을 막아 주는바, 이는 분명 진룡이 지나는 곳에 먼저 호위(扈衛)를 베푸는 뜻이니 용 형국의 고귀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였다. 또 그 혈성(穴星 명당의 위치)에 대하여 논하기를 “감방(坎方)의 봉우리가 뇌(腦)가 되어 참된 기맥(氣脈)이 은은히 내려오다가 축방(丑方)에서 간방(艮方)으로 휘어 간방에서 입수(入首)하고,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안은 것이 은연중 활이 굽은 듯하면서 유방(乳房)의 모양이 되고, 유방 아래에는 평면의 작은 움집이 열린 듯이 태극의 둥근 모양을 하고, 남은 기운이 혈(穴)의 입술이 되니, 이는 이른바 양(陽)이 오면 음(陰)이 받아 조화를 이루는 묘함이다. 간혹 혈을 재는 일이 잘못되면 혈이 없는 것과 같으니, 진기(眞氣)가 와서 멈춘 곳에 혈을 재는 방법은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높더라도 살기(煞氣)와 싸우지 않고 낮더라도 냉(冷)한 데로 범하지 않아서 조금도 혈을 벗어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혈을 벗어나게 되면 진기의 감소가 너무 지나쳐 생기(生氣)를 타는 뜻을 잃고, 낮은 데로 범하게 되면 묘를 높이 써야 할 곳에 잘못 낮게 써서 수침(水浸)의 재난을 초래하고, 너무 높아서 살기와 싸우게 되면 용맥(龍脈)을 손상시켜 생기가 변해서 살기가 되니, 세 가지 중에 살기와 싸우는 것을 가장 꺼린다. 때문에 옛사람의 말에, ‘차라리 낮은 데로 범할지언정 높게 하여 살기와 싸우지 말라’는 경계가 있고, 범안(凡眼)으로 점칠 때는 더러 조금 높은 곳을 취하기 때문에 편안히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치는 것에 비유함이 있다. 그러나 평탄한 곳에서 구슬을 대하는 것[就坦對珠]이라는 말로 이미 앞사람들의 정론이 있으니, 여러 말을 하지 않고 다만 그 체(體)만 논하겠다. 대개 혈체(穴體)의 변화는 만 가지나 되지만 네 가지의 형상을 벗어나지 않으니, 곧 와(窩 움집처럼 깊고 아늑함)ㆍ겸(鉗 평탄하고 약간 긴 듯함)ㆍ유(乳 여자의 유방처럼 생김)ㆍ돌(突 돌출한 곳)인데, 이는 노양(老陽)ㆍ노음(老陰)ㆍ소양(少陽)ㆍ소음(少陰)의 상(象)이다. 그러나 음양의 명목(名目)은 옛사람의 말이 각각 다르니, 양균송(楊筠松)은 그 용(用)을 취하여 와(窩)와 겸(鉗)을 양이라 하고 유(乳)와 돌(突)을 음이라 하였으며, 요금정(廖金精)은 그 체(體)를 취하여 유와 돌을 양이라 하고 와와 겸을 음이라 하였으니, 그 이르는 말은 다르나 뜻은 한가지다. 이 혈은 유방처럼 생긴 둔덕 아래에 와형(窩形)으로 되어 있으니, 곧 음양이 교합[交媾]하는 이치이다. 때문에 양이 옮에 음이 받아들인다고 말을 하니, 혈법의 묘함은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만약 혹시라도 넓지 않고 크지 않다는 것으로 흠을 잡는다면, 유택(幽宅)과 양기(陽基 마을의 터)의 대소(大小)와 동이(同異)에 차이가 있는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양기는 위로는 도읍이 있고 중간에는 관청이 있으며 아래로는 촌락을 이루니, 많을 경우는 수만 가구, 적어도 수천 수백 가구를 배치하여 살 수 있게 한 연후에야 양기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평탄하고 넓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유택은 그렇지 않아서 천 리를 뻗은 용의 진맥(眞脈)을 접해야 하고 주변 사수(砂水)의 길기(吉氣)를 거두어 한자리의 혈구(穴口)로 집중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다만 형국이 만들어진 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만을 보아야 하고 형체의 대소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그 사법(砂法)에 대하여 논하기를, “좌우의 청룡과 백호가 높지도 않고 얕지도 않게 쌍산(雙山)을 이루고 상대(相對)를 이루어, 산의 입구를 열어 줌이 법수(法數)에 맞고 서로 사양함이 법도에 맞아 내당(內堂)에서 문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청룡과 백호 안에 또 기묘하게 숨겨진 혈의 격(格)이 있는 것이다. 곧 혈맥이 감방(坎方) 뇌(腦)의 왼쪽으로부터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미미하게 활처럼 돌아 오른쪽을 향하여 와형(窩形)을 만들었다. 때문에 감뇌(坎腦)의 오른쪽에는 작은 사(砂)가 있어 왼쪽을 향하여 내려오다가 혈의 입구에 와서 그쳤으니, 얼핏 보면 몸을 감싸 주는 사(砂)가 오른쪽은 있고 왼쪽은 없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좌맥(左脈)의 능선과 오른쪽의 작은 사(砂)가 은연중 대대(對待)를 이루어 진실로 면밀하게 조화를 이룬 신묘한 곳이다. 제2의 청룡과 백호 밖에 또 외청룡(外靑龍)이 조산(朝山)과 안산(案山) 등 여러 산들과 함께 3중으로 겹쳐 있고, 기타 장막의 뒤에서 보필해 주는 산과 품속에서 안산을 대하는 것과 원근(遠近)과 고저(高低)의 길사(吉砂)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다. 또 가장 좋은 격은 산성(山城)의 용이 조종산(祖宗山) 낙맥(落脈)으로부터 길을 나누어 와서 수구(水口)를 긴밀하게 지키며 혈(穴)을 돌아보는데, 산허리 이상의 봉우리는 특이하여 긴 능선의 용과 합하여 보면 큰 역량(力量)을 징험할 수 있다. - 산성(山城)이 손방(巽方)과 사방(巳方)에 있어 법가(法駕)의 기상이 있으니, 이는 윤선도(尹善道)가 놀란 것이다. -” 하였다. 또 수세(水勢)를 논하기를, “내당(內堂)은 둥글고 평평하며, 외당(外堂)은 가로로 굽어 있으며, 천관(天關)은 길고 지축(地軸)은 들리는 격이고, 국내(局內)의 물이 연모하는 뜻이 있고 용을 따르는 물이 외당의 밖에서 서로 합하니 참으로 물 가운데의 용이다. 지리에 어두운 사람은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고 한갓 편견만 고집하면서 간혹 순수(順水)의 형국에 산과 물이 함께 돌아간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는 몸을 뒤트는 용이 옷깃을 정제하는 형국으로, 이것은 하자가 되지 않는다.” 하였다. 또 그 용절(龍節)의 이기(理氣)를 논하기를, “임방(壬方), 감방(坎方), 계방(癸方)의 산형(山形)은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의 격이 되고, 축방(丑方), 간방(艮方)으로 돌아 입수(入首)하는 간방의 용절과 안산을 대한 정방(丁方)의 구슬은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격이 된다. 백 척(尺)의 안쪽 몇 용절 사이에 이렇게 세 가지의 대격(大格)에 합치되니, 진실로 아주 귀한 용이며 얻기 어려운 법수(法數)이다. 세속의 지사(地師)가 간혹 수(水)와 토(土)가 상생(相生)하지 못하는 것으로 흠을 잡는다면, 이는 오행(五行)과 이기(理氣)의 설을 모르는 것이다. 수토(水土)는 서로 상극(相剋)이라고 하나 본래 동궁(同宮)이기 때문에 포태법(胞胎法)에서 생(生), 왕(旺), 쇠(衰), 병(病)은 모두 같은 방위가 되니, 비유하건대 사람에 있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의(誼)와 같은 것으로, 이는 가깝고 화목하다고 하여도 가하다. 더구나 임계(壬癸)와 축간(丑艮)이 각각 격(格)을 이룬 데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수법(水法)의 이기(理氣)에 대하여 논하기를, “세속의 지사(地師)들은 외파(外破)의 수구(水口)만을 고집하고 내파(內破)의 수구는 말하지 않으며, 또 일설에는 내파만 고집하고 외파는 고집하지 않으니, 모두 잘못이 있다. 그러나 외파는 멀면서 완만하고 내파는 가까우면서 급하게 흐르니, 마땅히 먼저 내파의 격(格)을 합치시킨 뒤에 외파의 격을 합치시켜야 한다. 계방의 산과 오방(午方)의 물은 수화불상석의 격이 되고 또 정방의 안산(案山)과 병방(丙方)의 파문(破門)은 천간생성(天干生成)의 격이 되니, 윤선도의 헌의(獻議)에서 겉과 속이 모두 길격(吉格)으로 둘려 있다는 것이 이런 곳을 가리키는 말 같다.” 하였다. ○ 나는 본래 감여가(堪輿家)의 학문에 어두워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였다. 갑오년(1774, 영조50) 능원에 성묘를 한 뒤로부터 은근히 뉘우치는 뜻이 있어 처음에는 옛사람의 지리를 논한 여러 가지 책을 취하여 전심으로 연구하여 그 종지(宗旨)를 얻은 듯하였다. 그래서 선원(先園)의 용(龍), 혈(血), 사(砂), 수(水)를 가지고 옛날 방술(方術)과 참고하여 보았더니, 하자가 많고 길격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을 갖지 못하여 세속의 지사(地師)로서 안목이 있는 자를 널리 불러 그 사람의 조예(造詣)를 시험해 본바, 그들의 언론과 지식이 옛 방술에 어긋나지 않아 곧 앞뒤로 전날 능원을 논한 것을 찾아 살펴보았더니 그들의 논한 바가 상자에 넘칠 정도였다. 산의 외형(外形)은 형국(形局)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꺼렸고, 지하(地下)는 재환(災患)이 갖추어진 것으로 염려하여, 편안하다거나 겨우 괜찮다고 한 것도 없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곡장(曲墻)의 가에서부터 연못 앞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나침반을 놓고 자세히 살펴보니, 해파(亥破)가 분명하고 연못도 역시 해방(亥方)에 있으며, 임방(壬方)에는 작은 언덕이 앞을 가려 원래 서로 보이지 않고 해방은 다만 임방의 모퉁이만 보이니, 당초에 파문(破門)을 고집한 것은 3길[丈]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주장을 한 듯하다.”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국세(局勢)가 좁아 대혈(大穴)을 잃어 정(情)이 없고, 곤신방(坤申方)과 인간방(寅艮方)이 낮고 허하여 바람이 화기(火氣)를 보내고 화기가 수기(水氣)를 보내어 이치에 안정하지 못하고, 임감방(壬坎方)의 행룡(行龍)이 건해방(乾亥方)과 오정방(午丁方)에서 깎여 바뀌고, 정방(丁方)의 일절(一節)이 내려와 묘방(卯方)에서 입수하여 묘좌유향(卯坐酉向)을 하고, 곤술방(坤戌方) 득수(得水)에 임해방(壬亥方)이 파문이 되며, 신묘(辛卯)ㆍ신유(辛酉)의 분금(分金)이 되고, 태기(兌氣)는 진기(震氣)를 소멸하니 진(震)은 곧 묘방(卯方)이다. 매양 태(兌)의 정사축(丁巳丑) 연월(年月)을 만나면 매우 편안하지 못하니, 소멸법(消滅法)을 참고하여 보면 알 수 있다. 묘좌(卯坐)의 목산(木山)에서 물이 임해방으로 돌아가면 장생파(長生破)가 되고 겸하여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파국이 되며, 천관(天關)은 열리지 못하고 지축(地軸)이 빠져 이른바 독음국(獨陰局)이 된다.” 하였다. 만약 혈법(穴法)을 논해 보면, 길기(吉氣)를 모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앞에는 관인(官人)처럼 생긴 산이 있고 뒤에는 귀면(鬼面)처럼 생긴 산의 묘함이 있어야 하는데, 전연 증거가 없으니 어느 겨를에 조산(朝山)과 조수(朝水)의 좋고 그른 것을 논할 수 있겠는가. 땅속의 일에 있어서는 모재 모재(某災某災)가 척산경(尺山經)의 묘좌 임해파(卯坐壬亥破) 조항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감히 함부로 논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오른쪽에서 돌아온 정룡(丁龍)이 묘방에서 입수를 할 경우에는 갑좌경향(甲坐庚向)이고 정득 임파(丁得壬破)가 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갑방(甲方)에서 입수를 하면 갑좌경향이고 곤신득(坤辛得) 술건파(戌乾破)가 된다.” 하였는데, 대개 입수하는 맥이 오른쪽으로 밀렸으면 을방(乙方)이 되고 왼쪽으로 밀렸으면 을진방(乙辰方)이 되는데, 혈의 뒤에 귀면(鬼面)이 없으면 공허할 듯하다. 을이나 갑을 논할 것 없이 갑을방(甲乙方)의 아래에 갑좌(甲坐)를 하면 좌와 향이 서로 공박(攻駁)함이 되니, 법수(法數)에서 향살(向煞)이라고 한다. 곤신방(坤申方)이 낮아 바람이 오고 또 신술방(辛戌方)이 낮아 계곡을 지나게 되니, 법수에 이르기를, “계곡을 지나다가 만약 바람이 부는 곳을 만나 혈을 만들면 힘이 낮은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곤방에서 주봉(主峰)이 생겨 곤방의 아래 미방(未方)에서 와서 오방(午方)으로 굴러 내려 정방(丁方)으로 바꾸면, 용법(龍法)으로 볼 때 본래 귀기(貴氣)가 없는 것이고 나무가 무성하여 득수(得水)와 파문을 자세히 살필 수 없다. 그러나 왼쪽에는 유방(酉方)의 물이 있고 오른쪽에는 신방(辛方)의 물이 있는바, 신방의 물은 염정화(廉貞火)가 되고 유수(酉水)는 파군격(破軍格)이 되니 길성(吉星)이 되지 못한다. 경향(庚向)에서의 곤수(坤水)는 황천수(黃泉水)가 되니, 비록 가는 물을 꺼리고 오는 물은 꺼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길수(吉水)는 되지 못한다. 처음에 능원을 정하고 이르기를, “정득 임파(丁得壬破)이다.” 하였는데, 임방은 갑좌의 후천(後天)이 되고 정방은 갑좌의 복음(伏吟)이 된다. 또 뒤에 이르기를, “곤신득(坤辛得)이요 건술파(乾戌破)이다.” 하였으니, 파문을 논하는 법에서 본래 2위(位)가 없으니, 건파(乾破)를 가지고 말하면 비록 갑좌의 삼합(三合)이 되더라도 괘모(卦母)에서 파하였고 또 복음(伏吟)이 되니 또한 길파(吉破)가 되지 못한다. 또 자세히 살펴보면 수세(水勢)는 건방(乾方)을 지나 해파(亥破)가 되는 듯하니, 해파는 갑좌에서 꺼리는 파문(破門)이 된다. 대개 산이 일정한 도안(圖案)이 없고 긴 계곡이 있어 상충(相衝)이 되면 옛사람이 말한 ‘기(氣)가 바람을 타면 흩어진다[氣乘風則散]’는 것이니, 곤신방(坤辛方)에서 바람이 오고 신술방(辛戌方)에서 계곡을 지나 을진방(乙辰方)에서 입수(入首)하게 되면 봉분의 속이 만안(萬安)하지 못할 듯하지만 대단한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인(寅), 신(申), 사(巳), 해(亥)는 본래 음국(陰局)이나 양국(陽局)의 대장생향(大長生向)이라, 비록 다른 국(局)이라 하더라도 이 파문을 범하면 하자가 됨이 적지 않은데, 더구나 갑묘(甲卯)의 목룡(木龍)에서 본생방(本生方)의 해파를 범한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하였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독양(獨陽)은 살지 못하며 순음(純陰)은 자라지 못한다. 목국(木局) 갑묘(甲卯)의 용이 우선(右旋)하는 것을 합당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지가(地家)의 정론(正論)이니, 대체로 독양은 살지 못하고 순음은 자라지 못한다는 이치에서 연유한다. 그리고 주성(主星)과 혈, 좌 및 청룡과 백호가 마주 보는 안산이 모두 정격(正格)에 합당치 못함이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안락현(安樂峴)으로부터 건술방(乾戌方)의 낙맥(落脈)이 굴러서 신술방(辛戌方)이 되고 정미방(丁未方)에서 깎여 바뀌며, 오정방(午丁方)에서 다시 굴러 용맥을 이루어 을진방(乙辰方)에서 입수하니, 대개 신술ㆍ정미ㆍ을진의 용은 이미 불길한 맥이 되고, 을진의 용 아래에서 갑좌(甲坐)는 더욱 격에 맞지 않는다. 당초에 묘좌(卯坐)는 합당한지 모르겠고, 신술방(辛戌方)의 득수(得水)와 해방(亥方)의 파문(破門)은 모두 격에 맞지 않으니, 땅속에서 재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용신(龍身)이 시작되는 곳에 정면의 봉우리가 없으면 용의 형태가 약하고 음양의 충화(沖和)한 기운이 적어, 혈을 만든다 하여도 길기(吉氣)를 모으지 못하고 뒤에도 또한 보호해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국내의 물이 발원하는 곳에 구부러져 파문이 되려는 곳이 있는데, 은연중 곧게 나가면 남쪽의 화룡(火龍)이 북쪽 현무(玄武)의 너무 강한 기운을 받아 기제(旣濟)의 격에 합당치 못하니, 봉분 속이 혹 수화(水火)의 해가 있을 듯하나 심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혈성(穴星)은 정감이 있는 듯하나 입수(入首)하는 용맥이 너무 짧고 또 선익(蟬翼)이 없으며, 청룡과 백호는 비록 안은 듯하기는 하지만 기복(起伏)의 형세가 없고 백호 아래의 사(砂)는 기력이 없고 혈 뒤의 귀면(鬼面)은 무기력하니, 그 형국을 논하면 동(動)하기만 하고 정(靜)함이 없다.” 하였다. - 그 논한 바가 꼭 하나하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한 의심을 결단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방외사(方外士)의 말에, “포태법(胞胎法)은 좌우순역(左右順逆)의 구별이 있는데, 좌선 목국(左旋木局)은 포(胞)가 신(申)에서 시작하여 순수(順數)함에 생기방(生氣方)이 해(亥)에 있고, 우선 목국(右旋木局)은 포가 유(酉)에서 시작하여 역수(逆數)함에 생기방이 오(午)에 있다. 때문에 고방(古方)에 생방(生方)과 왕방(旺方)을 혼용한다는 말이 있고 술가(術家)에서는 혹 변통하여 쓰기도 한다. 그러나 정법(正法)이 아니므로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좌선(左旋)과 우선(右旋)은 산과 물의 오고 가는 것으로 국(局)을 정하니, 만약 산이 오른쪽에서 오고 물이 왼쪽을 향하여 가면 좌선수(左旋水)가 되고, 산이 왼쪽에서 오고 물이 오른쪽을 향하여 가면 우선수(右旋水)가 된다. 갑좌 해파(甲坐亥破)는 우선국(右旋局)이 되니 물이 생기방(生氣方)으로 가는 것을 꺼린다. 비록 좌선국(左旋局)보다는 조금 가벼우나 끝내 온당치 못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건술(乾戌), 신술(辛戌), 을진(乙辰)의 용은 모두 귀맥(貴脈)이 아니다. 만약 독행(獨行)하다가 변해서 귀맥이 되는 경우는 오히려 취할 것이 있거니와, 쌍행(雙行)을 한 경우라면 지가(地家)에서 가장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입수(入首)하는 용절(龍節)이 을진방(乙辰方)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쌍행하는 것을 용맥이라고 한 듯한데 행용하는 법도가 전혀 격에 맞지 않다. 그리고 묘좌 해파(卯坐亥破)가 과연 법도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고 한다면 수법(水法)에서는 또한 불리하다고 하겠다. 내가 이로부터 능원을 옮길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먼저 더없는 최고의 대지(大地)를 구해야 하고, 다음은 가장 좋은 길년(吉年)의 운을 만난 연후에 지극히 중대하고 공경하며 엄숙하고 신중히 해야 하는 예를 의논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서둘러 구하였지만 지연되어 지금까지 오게 된 까닭이다. 수원(水原)으로 계획을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이 밖에 열성조(列聖朝)께서 봉표(封標)한 곳이나 세상에서 대지라고 일컫는 곳을 여러 술사(術士)들의 말을 통해 그 대략을 살펴보니, 논의한 바가 일정하지 않고 산도 또한 우열이 있었다. 건원릉(健元陵)의 왼쪽 능선, 정릉(貞陵)의 화소(火巢) 바깥, 헌릉(獻陵)의 이수동(梨樹洞)ㆍ옹암동(甕巖洞)ㆍ화암동(花巖洞), 영릉(英陵)의 능 안과 소홍제동(小弘濟洞) 재실(齋室) 뒤의 능선, 장릉(長陵)의 네 번째 능선, 순릉(順陵)의 재실 뒤 두 능선, 옛 목릉(穆陵)의 오른쪽 능선, 숭릉(崇陵)의 오른쪽, 옛 영릉(寧陵)의 백호 능선 바깥과 청룡 능선 가의 유방(酉方) 기슭, 경릉(敬陵) 국내의 간방(艮方)과 묘방(卯方) 두 능선, 창릉(昌陵)의 왼쪽 능선, 홍릉(弘陵)의 오른쪽 능선, 연희궁(衍禧宮)의 간방(艮方) 기슭, 연서정(延曙亭) 터, 벌어현동(伐於峴洞)의 맞은편 국내(局內), 왕십리(往十里) 건방(乾方)의 능선, 독서당(讀書堂)의 서쪽 기슭, 양주(楊州)의 북쪽 30리 남쪽으로 향한 기슭ㆍ녹양역(綠楊驛) 터의 서쪽ㆍ청송면(靑松面) 유방(酉方)의 기슭ㆍ석우리(石隅里)의 윤씨산(尹氏山)ㆍ평구역(平丘驛) 동쪽 10리 서쪽으로 향한 기슭ㆍ불암산(佛巖山) 아래 화접동(花蝶洞), 광주(廣州)의 원적산(元積山)ㆍ향교 뒤의 기슭과, 양재(良才) 대로현(大路峴)의 북쪽에 있는 방하교(方河橋)의 서북향, 광교산(光敎山) 서쪽 기슭의 한 능선, 남양(南陽)의 객사(客舍) 뒤, 교하(交河)의 월롱산(月籠山)ㆍ와동(瓦洞)과 객사(客舍) 뒤, 고양(高陽)의 해구(海口), 영평(永平)의 근주산(近住山) 유방(酉方)의 기슭, 적성(積城) 감악산(紺嶽山) 아래 임좌(壬坐)의 기슭, 금천(衿川)의 남쪽 자하동(紫霞洞), 적성(積城)과 마전(麻田) 길의 경계가 되는 고개 건너 능선의 여러 곳 등등은 하나도 합당한 곳이 없고, 장단(長湍)의 백학산(白鶴山) 아래 세 곳은 국세(局勢)와 용맥(龍脈)이 혹 좁고 작으며 혹 조금 완만하기도 하였다. - 그 하나는 읍의 청사(廳舍) 뒤인데,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병간손방(丙艮巽方)이 득수(得水)이고 병방(丙方)이 파문(破門)이 되는 국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학산(白鶴山)이 여러 산 가운데 우뚝 솟아 중심에서 나온 맥이 유혈(乳穴)을 만드니, 혈체(穴體)가 단아하며 미묘하고 명당(明堂)이 평정하니 예부터 대지(大地)라고 일컬었다.” 하였다. 또 한 곳은 읍의 객사(客舍) 뒤 신좌을향(申坐乙向)으로, 해묘방(亥卯方)이 득수(得水)이고 손방(巽方)이 파문(破門)이 되는 국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요소에 모인 모양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니, 읍의 기지(基地)와 비교할 때 더욱 좋다.” 하였다. 또 한 곳은 송씨(宋氏)가 사는 집 뒤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룡과 국세(局勢)가 비록 가한 듯하지만, 혈을 이룬 곳이 나약하니 의논할 곳이 못 된다.” 하였다. 방외사(方外士)들은 말하기를, “해좌(亥坐)를 하면 행룡(行龍)이 매우 생기가 있고 혈성(穴星)도 잘 서려 몸을 감싼 듯하여, 백호(白虎)가 역수를 하여 안고 외백호(外白虎)가 거듭거듭 호위하고 가리어, 몸을 감싸는 청룡(靑龍)은 없지만 주봉(主峯)으로부터 내려온 맥이 청룡이 되어 너무 넓게 벌어지지 않고 안대(案對)의 봉우리가 모두 아름다우니, 입향(立向)을 하는 데 있어 모두 마땅하다. 그리고 신좌(辛坐)를 하면 혈성(穴星)이 풍만하고 크며 청룡과 백호가 적당하고 안대(案對) 또한 좋으니,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두 곳은 그 우열을 알지 못한다.” 하였다. - 광릉(光陵)의 왼쪽 능선 한 곳은 곧 달마동(達摩洞)이니, 문의(文義)와 함께 일컫는 지역이지만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한 곳은 곧 절터인데, 신당(神堂)의 앞이나 불전(佛殿)의 뒤, 그리고 폐옥(廢屋)과 고묘(古廟)는 옛사람들이 꺼리던 바라 결단코 의논을 할 수가 없다. - 달마동(達摩洞)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감(壬坎)의 용이 해방(亥方)으로 돌아 입수(入首)하니 해좌사향(亥坐巳向)이며, 병방(丙方)이 득수(得水)가 되고 손방(巽方)이 파문(破門)이 되는 형국이다. 왼쪽에는 몸을 도와주는 사(砂)가 있고 오른쪽에는 매미의 날개처럼 생긴 사(砂)가 있으며, 사방에서 기(氣)를 모아 38장(將)이 나란히 대치하여 있고 수세(水勢)의 현묘함은 옷깃을 여민 듯하고, 축방(丑方)이 약간 낮고 외산(外山)은 우뚝하게 빼어나 조금도 흠이 될 것이 없으니, 참으로 대길(大吉)의 지형이다.”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용의 뻗어 감이 정묘하고 혈성(穴星)이 풍만하며 청룡과 백호가 구불구불 서려 마음과 눈을 현혹시키기에 충분하며, 왼쪽은 계방(癸方)이 허하고 오른쪽은 신태방(辛兌方)이 낮아 어깨에 바람을 맞는 걱정은 요풍(凹風)과 같다. 임해방(壬亥方)의 용과 물이 사방(巳方)으로 돌아가니, 또한 산과 물이 한곳으로 돌아감을 모면하지 못한다.” 하였다. 방외사(方外士)가 말하기를, “경태방(庚兌方)에서 뻗은 용이 감방(坎方)에서 뇌(腦)를 이루고 임방(壬方)으로 돌아 해방(亥方)에서 입수(入首)하니, 해좌사향(亥坐巳向)이고 손방(巽方)이 파문(破門)이 되며 좌선(左旋)의 국(局)이 된다. 이기(理氣)로써 논하면 명당 뒤의 용절(龍節)은 금수(金水)가 상생(相生)하고 좌향과 파문(破門)은 뇌풍(雷風)이 격에 맞는데, 혈성(穴星)이 확실하지 못하고 왼쪽의 어깨가 얕고 허하니, 법수(法數)로는 길하나 대지라고 논할 수는 없다. 또 이곳은 본릉(本陵)이 모두 수구(水口)가 되니, 만일 성봉(星峯)을 다시 일으켜 거듭 문호를 정리하지 못하면, 비록 어렴풋이 국을 이루기는 하더라도 비유하건대 귀인이나 관부(官府)에서 하인이 꾸짖고 견제하는 것과 같으니, 바라보면 두려워하는 듯하나 끝내는 보호해 주지 못하고 주인으로 오인하게 된다.” 하였다. 사찰의 뒤에 대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용의 뻗음이 구불구불하고 형체가 여러 번 변하여 경태방(庚兌方)이 뒤편이 되고 감방으로 내려왔다가 해방에서 바꾸어, 긴 유방(乳房)의 형국에 작은 움집의 형상을 겸하고 뇌(腦)의 위와 입술의 아래에 돌이 있어 기운을 거두어 모았다. 청룡과 백호는 명당을 안고 안대(案對)는 존엄하니 임좌병향(壬坐丙向)이고, 곤방이 득수(得水)가 되며 진방이 파문(破門)이 되니 좌선룡(左旋龍)의 제일 좋은 귀격(貴格)으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국내(局內)에서 흐르는 물이 처음으로 오방에서 보이니, 만일 오방이 아니면 미방을 벗어나지 않으니 득수(得水)가 오방에 있는 것은 크게 꺼릴 것이 없으나 좌향과 파문(破門)이 격에 맞는 것으로 순길(純吉)하다고 할 수 없으니, 옛사람이 말한 ‘눈과 마음을 현혹시킨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였고, 방외사(方外士)가 말하기를, “용절(龍節)과 수법(水法)이 모두 길격(吉格)에 맞아 달마동(達摩洞)과 더불어 우열이 없으나, 혈체(穴體)가 둔하여 아름다운 형태가 없다. 용(龍), 혈(血), 사(砂), 수(水) 중에 용과 혈이 중하고, 이 두 가지 중에 혈이 더욱 중하니, 혈을 살피지 못하면 다른 것은 논할 것이 못 된다.” 하였다. - 후릉(厚陵)의 국내(局內) 두 곳과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한 곳은 곧 송악(松嶽)의 내룡(來龍)인데, 용의 형체가 아주 귀하고 거듭거듭 기복(起伏)이 있으며 존엄한 기상을 겸하여 어병(御屛)이 좌우에 벌려 있으니, 바로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리고 앉은 듯한 곳이다. 다만 뒤맥이 하자가 있어 혈이 뭉친 것이 분명하지 못하다. 또 한 곳은 곧 본릉(本陵)의 청룡(靑龍) 가인바, 뒤 계곡에서 돌아 들어왔는데 자좌오향(子坐午向)이고, 묘유방(卯酉方)이 득수(得水)가 되며 오방이 파문(破門)이 되는 국이니, 뒤의 용절이 격에 맞고 입구가 묶여 있어 혈을 만드는 데 단정하고 청룡과 백호가 싸고 안아 명당이 평탄하다. 하나의 귀한 맥이 소속리(小俗離)로부터 와서 밝게 안으면서 안대(案對)를 만들었으니 아주 귀한 곳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혈이 있는 곳이 약간 높으니 이것이 흠이다.” 하였다. - 강릉(康陵)의 오른쪽 능선과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주성(主星)이 아름답게 솟아 ‘팔(八)’ 자의 형태로 갈라져서 긴 유방(乳房)과 같은 혈을 만들고, 임감계방(壬坎癸方)에서 내려온 용이 감방에서 입수(入首)를 하니 임좌병향(壬坐丙向)이고, 곤신방(坤申方)이 득수(得水)가 되며 진방(辰方)이 파문이 되는 국이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 안고 명당이 평평하고 반듯하며, 조산(朝山)과 안산(案山)이 아미산(峨眉山)처럼 아름답고 문성(文星)의 전면이 모두가 길기(吉氣)뿐이다. 다만 혈성(穴星)이 생기가 없다.” 하였다. - 청량리(淸涼里)와 - 산 모양이 평평하면서 순하고 용세(龍勢)가 기복이 없으며, 계방(癸方) 아래에서 한 번 돌아 계축방(癸丑方)에서 쌍산이 되었는데, 그중에서 계방으로 뻗은 것이 용신을 돌려 감룡(坎龍)이 되고 손곤미방(巽坤未方) 득수(得水)에 정방(丁方) 파문(破門)이 되며, 청룡의 허리가 낮아 을진방(乙辰方)의 물이 산 너머로 보여 향(向)을 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삼각산 낙맥이 안락현(安樂峴)에서 뭉치고, 임감(壬坎)의 행룡(行龍)을 자좌(子坐)나 임좌(任坐)로 하면 왼쪽은 사방(巳方)과 병방(丙方)이 득수가 되고 오른쪽은 곤방(坤方)과 신방(申方)이 득수가 되며, 국내(局內)는 정방이 파문이 되고 국외(局外)는 오방이 파문이 되니, 실로 십전지지(十全之地)의 땅에 부합된다.” 하였다. - 가평(加平) 등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등산(懸燈山)이 100여 리를 뻗어 내려 아름답게 국(局)을 만들어 조산(朝山)과 안대(案對)가 아주 길한데, 정면(正面)이 없고 사방(巳方)의 파문(破門)이 흠이다.” 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국세(局勢)에서 조산과 안대는 극히 길하나, 주혈(主穴)이 없고 천관(天關)이 너무 허하며 지축(地軸)이 또 멀리 있으니, 대지라고 하기는 애당초 근사하지도 않다.” 하였다. - 여러 곳이 비록 조금 낫다고는 하나 하자가 많다. 문의(文義)의 양성산(兩星山) 해좌(亥坐)의 언덕은 예전부터 좋다고 많이 일컬어 왔는데, 조산(祖山)과의 거리가 조금 가까워 오히려 십전지지(十全之地)는 아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속리산(俗離山)의 한 맥이 묘방(卯方)과 간방(艮方)으로부터 100여 리를 뻗어 내려 읍의 뒤에 와서 양성산(兩星山)이 되니, 기복이 웅장하고 뒤에는 귀인성(貴人星)이 있으며, 평지의 능선이 땅속을 지나 임감룡(壬坎龍)으로 뻗어 와서 유혈(乳穴)을 만드니 해좌사향(亥坐巳向)이고, 간묘손방(艮卯巽方) 득수에 정방(丁方)이 파문이 된다. 사방의 둘러 있는 산이 모두 솟아 삼길 육수(三吉六秀)로 국세를 이루었으며, 조산과 안산의 봉우리들이 모두 귀하고 명당의 국세가 평평하며 반듯하고 밝으니, 참으로 쉽게 얻지 못할 땅이다.” 하였다. 방외사(方外士)가 말하기를, “용세(龍勢)가 웅장하고 주봉(主峯)이 솟았으며 땅속을 지날 적에 산세를 긴하게 묶고 혈성(穴星)이 단정하고 묘하여 본신(本身)의 물을 거슬러 국세를 만들었다. 조산의 용이 외청룡(外靑龍)을 만들었으니 이것은 보통 사람의 눈에도 들겠지만, 조산과 멀지 않아 몸의 때를 다 벗지 못한 염려가 있고 국세가 만들어진 것이 너무 넓어 내외의 명당을 분간할 수 없으며, 겸하여 청룡과 백호가 제대로 감싸 주지 못하며 안대(案對)도 제대로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범인의 눈에 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 여러 가지의 길격(吉格)이 아울러 한 국내(局內)로 모여 고금(古今)이나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한마디의 말로 더없는 대지라고 일컫는 곳은 수원(水原)만 한 곳이 없고, 연운(年運)의 길한 것도 대체로 기다리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기유년 7월 23일(정미)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기를, “신은 석양에 임박하여 천한 몸이 병만 깊고 만 가지의 생각이 재처럼 식어서 죽음만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은 단(丹)처럼 붉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리(地理)의 학설은 한진(漢晉) 시대의 술사(術士)에서 비롯되었고 당송(唐宋) 때에 성하였습니다. 세간의 화복(禍福)이 꼭 지리에 의거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의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일 모두가 허위라면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이처럼 신봉(信奉)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자(程子)는 지리의 학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승이 편안하다면 이승도 편안할 것이고 저승이 위태하다면 이승도 위태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었고, 또 이르기를, ‘모름지기 산이 돌아오고 물이 굽어 옷깃처럼 감싸 안아 흠이 없는 곳을 취할 것이니, 지가(地家)의 이른바 길지라는 것도 또한 이런 것을 취한 것이다’고 하였고, 주자(朱子)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그 설을 깊이 연구하여 아버지를 매장(埋葬)하는 곳을 법수(法數)에 의하여 구하였고, 또 산릉(山陵)의 잘되고 잘못된 것을 자세히 논하였으니, 지금 그 대략을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손이 조고(祖考)의 유체(遺體)를 매장함에 있어 반드시 삼가 정성과 경의를 다하여 안전하고 오래가는 계책을 세워, 그 형체는 온전하고 신령은 편안하게 하면 자손이 번성하고 제사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주자가 어찌 허황된 말로 군부(君父)에게 고하고 천하 후세에 전하였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원침(園寢)은 그 사체(事體)가 어떠하며 관계 또한 어떠합니까? 오늘의 신하 된 자로서 만세의 대계를 생각하면 마음을 끝까지 쓰지 않을 수가 없고 의리로 보아 감히 스스로 숨길 수 없기에, 감히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우러러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합니다. 신은 본래 감여(堪輿)의 학설에 어두워 귀머거리나 소경과 마찬가지이기에 다만 사람마다 쉽게 알고 볼 수 있는 것만을 가지고 논하겠습니다. 첫째는 잔디가 말라 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의 능선이 뚫린 것이며,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수세(水勢)가 심하게 부딪히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용절의 석축(石築)이 자연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풍기(風氣)가 순조롭지 못함과 토성(土性)이 완전하지 못함과 지세(地勢)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오히려 신민들의 지극한 애통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이 국내(局內)의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의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습니다. 이는 비록 옛 장릉(長陵)의 혈도(穴道)에 침범하였던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으니 지극히 공경해야 하고 지극히 존엄한 곳에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 놀라 뼈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갑오년(1774, 영조50)에 원(園)을 처음으로 참배하신 때로부터 병신년 왕위에 오른 뒤에 이르기까지 오직 원소의 안부를 걱정하시어, 새벽에 종소리를 듣고 밤에 촛불을 대하실 때 깊은 궁중에서 뿌리신 눈물이 얼마인지를 모르며 봄비가 오고 가을 서리가 내릴 때면 조회에 임해서도 자주 탄식하셨고 쌀밥도 달지 않고 잠자리도 편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신이 전후 등대(登對)할 때 이런 전교를 들은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가 어찌 듣고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하지만 관계된 일이 막중하여 감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곁에서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만 한 사람의 신하도 전하를 위하여 말을 꺼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할 뿐입니다. 목숨이 조석에 달린 신이 끝내 벼슬을 떠난 사람이라는 혐의로 아는 것을 숨김없이 아뢰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불충하는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이는 전하를 배반하는 것이고 밝은 신령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니, 신이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 초에 어떤 신하가 연석(筵席)에서 능원을 옮겨 모시는 일을 말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상께서도 아마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되오며 사람의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기에, 신은 또 구구하게 어리석은 정성으로 눈물을 흘리며 아룁니다. 아, 병오년(1786, 정조10)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떻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후산(緱山)의 학가(鶴駕)는 돌아오지 않고 북두성(北斗星)의 무지개 빛이 떨어졌습니다. 신은 지금 백두(白頭)가 되어서도 죽지 않아, 차마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지존의 자리에 계시면서 춘추는 점점 많아지는데 뒤를 이을 자손을 두는 일은 오히려 늦어져 만년(萬年)의 종사에 제사를 받들 사람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고 팔도의 백성들이 노래할 곳이 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신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밤이 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심장과 간장이 다 녹아내립니다. 시험 삼아 천도(天道)로써 말하면, 우리 성상께서 상제(上帝)에게 보답하여 삼가 농민들에게 농시(農時)를 주시니, 하늘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재해가 없고, 땅에는 초목이나 사람, 동물 등의 요괴(妖怪)가 없으며, 일기가 순조로워 태평세월 속에 풍년이 드니, 《서경(書經)》에 이른바 착한 일을 하여 하늘이 백 가지 상서로운 일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인사(人事)로써 말하면, 우리 성상께서는 몸소 주공(周公)의 달효(達孝)를 본받으시고 문왕(文王)의 뜻과 사업을 이어 나라의 기반을 태산과 반석 위에 올려놓고 백성들을 태평성대에서 살게 하셨으니, 아, 아름답습니다. 위로는 벼슬아치로부터 아래로는 필부에 이르기까지 집집마다 천보장(天保章)을 노래하고 사람마다 화봉인(華封人)의 축사(祝辭)를 올린 지 지금 14년이나 되었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화락한 군자여, 복록(福祿)이 내리는 바라[豈弟君子 福祿攸降]’ 하였으니, 신이 천도(天道)와 인사(人事)로써 반복하여 생각하여 보면 신(神)이나 사람들이 위로하는 바에 많은 경사가 있음은 역사에 이루 쓸 수가 없는데, 연전의 상변(喪變)은 어찌 이렇게 거듭되었단 말입니까. 자손의 탄생이 이처럼 지연되니 신은 진실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지리(地理)로써 말씀드리면, 신이 일찍이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술사(術士)의 의논을 참고하여 보건대, 형국의 감싸 안음과 대안(對案)의 분명함이 격에 맞지 않은 것은 아닌데 사수(砂水)의 법수로 논하면 크게 지가(地家)의 꺼리는 바라고 하니, 만일 그 말이 그릇되어 취할 것이 못 된다면 진실로 국가의 한없는 좋은 일이지만, 만의 하나라도 어렴풋이 방불한 점이 있다면 성체(聖體)에 어떠하며 종사와 국가에 어떠하겠습니까. 옛날 영종대왕 7년 신해(1731)에 장릉(長陵)을 옮길 때, 대신과 재상들이 무신년(1728, 영조4) 이후 중외(中外)에서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자(朱子)의 혈식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인용하여 어전에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遷葬)하여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先王朝)의 고사(故事)가 있으니,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아, 열조(列朝)의 전한 혈맥은 오직 우리 성상이시고, 400년 종사(宗社)의 의탁도 오직 우리 성상입니다. 원소(園所)가 편안한 뒤에 성체(聖體)가 편안하고, 성체가 편안한 뒤에 본손(本孫)과 지손(支孫)들이 백대를 이어 갈 것을 예측할 수 있으니, 옛사람이 말한 종묘의 제사에 흠향하며 자손들이 보존된다는 말이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이에 목욕재계하고 상소문을 갖추어 궐문에 나가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어 신의 이 소장을 묘당(廟堂)에 내려 널리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어보시고 널리 지사(地師)를 불러 좋고 나쁜 것을 물어서, 신도(神道)를 편하게 하고 성상의 효성을 펴서 백대 천대의 먼 대책(大策)으로 삼기를 천만번 비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사리에 어둡고 미련하여 지금까지 밤낮으로 가슴속에 담아 두고 답답해하기만 하였는데, 경(卿)의 요청이 이런 때에 이르렀으니 대신(大臣)과 여러 신료들에게 물어서 결정하겠다.” 하고, 이에 대신, 각신(閣臣), 유신(儒臣), 예관(禮官), 종친(宗親), 의빈(儀賓),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 2품 이상을 불러 소장을 보이니, 모두 이르기를, “도위(都尉)의 상소는 실로 종묘사직을 한없이 보존하는 대계(大計)인데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묏자리에 따라 재앙과 복이 생긴다는 이치가 있고 없는 것을 내가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선유(先儒)가 ‘이승이 편하면 저승도 편하리라.[此安彼安]’고 한 말에서 보건대, 이런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편벽되게 술객(術客)의 말만 믿고 경솔하게 묘를 옮기는 일은 서민들도 불가하게 여기는데, 하물며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예(禮)이겠는가. 나의 심정이 보통 사람으로 자처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나의 지극한 슬픔과 한이 아침저녁으로 가슴에 맺힌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어버이의 살이 흙에 직접 닿게 한다.[土親膚]’는 세 글자를 생각하면 차라리 무지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버이의 원소를 처음에는 건원릉(健元陵)의 오른쪽 능선에 가려 정하였는데, 곧 영릉(寧陵)의 옛 자리이고 지금의 원릉(元陵)이다. 나중에 배봉(拜峰) 아래의 기슭에 썼으니, 도위(都尉)의 상소문 속에 5조(條)를 논하여 열거한 것은 도위 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지금 다행히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지고 여러 신료들의 의견도 같으니, 빨리 이장하는 예(禮)를 도모하는 것이 합당할 뿐이다. 먼저 이해하기 쉬운 것으로 말하면 땅속의 불안한 것은 오렴(五廉) 운운한 것을 기다려 결정할 것이 아니다. 대저 혈성(穴星)은 바로 생기(生氣)가 없는 사토(死土)이다.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으니, 앞의 관성(官星)과 뒤의 귀성(鬼星)이 이미 격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는 더욱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안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밖에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방(辛方)과 술방(戌方)이 득수가 되고 해방(亥方)이 파문이 되며, 갑(甲)ㆍ묘(卯)가 모두 목(木)이다. 신방과 술방의 물은 이른바 황천득수(黃泉得水)이고 내당(內堂)에는 물이 없으니, 한쪽에 있는 물만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 갑오년 원침에 참배한 뒤로부터 마음속에 계획한 일은 오직 이 일뿐이었다. 그러나 새로 정한 곳이 지금의 원침보다 천배 만배 더 나은 연후에야 거의 유감이 없을 것이니, 진실로 옛사람의 구안(具眼)을 거치지 않고 지금 세속 지사(地師)의 좁은 안목을 어떻게 확실히 믿고 결정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예관(禮官)과 관상감(觀象監)의 신료들과 함께 먼저 영우원(永祐園 현륭원(顯隆園)의 처음 이름)을 살펴보기를 청하여 살펴보고 돌아와서 각자의 의견을 말하였는데, 도위(都尉)의 상소문과 꼭 합치되니 이는 하늘이 묵묵히 도와주는 것과 같았다. 봉조하(奉朝賀) 조돈(趙暾)이 말하기를, “옛 원침의 국세(局勢)와 사수(砂水)는 건(件)마다 격에 어긋나서 크게 지가(地家)의 꺼리는 바가 되어 백성들도 걱정을 한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신도 초야에서 근심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 상께 아뢰기를 소원하였는데, 지난번 도위가 아뢰어 청하고 조정의 의논도 함께 동의하니, 원침을 옮기는 대례(大禮)는 이제 완전히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진실로 우리 동방의 한없는 복이기에 노신(老臣)이 기뻐서 일어나 춤을 추고 싶습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원침을 옮기는 의논은 이미 결정되었다. 가장 좋은 대지(大地)를 구하려고 한다면 수원(水原)의 화산(花山)만 한 곳이 없다. 화산의 형국(形局)은 내가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였으나 몇 년 동안 경영하였으니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배(配), 향(向), 득(得), 파(破)가 모두 아름답지 않음이 없으니, 범용한 안목으로 보더라도 진룡(眞龍), 진혈(眞穴), 진사(眞砂), 진수(眞水)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대저 들 가운데의 용은 서린 것이 오이 덩굴이나 등나무 덩굴과 같고, 배꼽 사이의 맥은 유혈(乳穴)에 와형(窩形)이 되고, 좌우 사(砂)의 각(角)은 새가 공중에서 날개를 편 것과 같아 완연히 둥그스레하고 자리가 요연하게 빛나며, 청룡이 4중이고 백호가 3중으로 겹쳐졌다. 그리고 당내(堂內)의 물은 유유히 굽어 돌아가는 듯하지만 가지 않고 현저히 나를 돌아보고 머물고자 하는 뜻이 있으며, 겸하여 명당 내의 작은 언덕으로 진정한 안대를 이루고 청룡 밖의 비추는 산이 길상(吉祥)의 사(砂)가 있으니, 이것이 가장 좋은 대지가 아니겠는가. 땅이 한없이 아름답고 좋으니 앞으로 신중히 해야 할 일은 혈을 짚는 데 있다. 신해년 의궤(儀軌)와 옛사람의 문자에서 보면 이미 정론이 있으니, 혈은 조금 낮게 할 것이고 향(向)은 주안(珠案)을 대하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 주안은 곧 작은 둔덕이니, 이것은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형국인 것이다. 천 리를 내려온 용이란 말은 옛사람이 일컫는 바이고, 이 땅은 부아현(負兒峴)으로부터 혈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솟았다가 여러 번 엎드리면서 몇백 리를 지나 봉표(封票)한 곳에 올라 이곳을 에워싼 여러 봉우리가 지척 간에 있는 듯하니, 혈을 가늠하고 용을 찾는 일은 논할 것도 없다. 오늘날 지사(地師)의 말이 어찌 믿을 만하겠는가마는, 이 땅은 전하여 내려오는 문적에 충분히 믿고 증빙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하니, 어찌 천만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기유년’이라는 세 글자는 이미 병신년 경연(經筵)에서의 전교에서 나왔으니, 금년에 만약 수원에 옮겨 모신다면 연운(年運)과 산운(山運)이 현재 원침의 본명운(本命運)과 맞아 길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전에 이 같은 해가 없었고 이후에도 이 같은 해는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금년 이후로 나의 마음은 더욱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오늘에야 숙원(宿願)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수원의 한 구역을 하늘과 땅이 아껴 두었다가 오늘을 기다렸으니,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수원의 길조(吉兆)가 되는 것은 이미 옥룡자(玉龍子)의 신령한 감식(鑑識)이 있었다는 것이 옛사람들의 정론이고 또 국승(國乘)에도 있습니다. 길지(吉地)와 길운(吉運)이 모두 맞으니 더욱 경사스럽고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으며,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아뢰기를, “신이 옛 노인들에게 듣건대, 윤선도(尹善道)가 항상 말하기를, ‘수원 같은 길지를 나라에서 만약 능원으로 정한다면 옛사람이 말한 천 년의 대지란 말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니, 신은 감히 이것으로 하례드립니다.” 하였다. ○ 총호사(摠護使) 김익(金熤) 등에게 명하여 수원부(水原府)의 치소(治所)에 가서 화산(花山) 계좌(癸坐)의 둔덕 산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김익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지사(地師)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주 길하고 십전 만전(十全萬全)의 대지입니다. 화산은 왼쪽으로 돌아 건방(乾方)의 봉우리가 주봉(主峯)을 이루고, 건방에서 조금 내려와서 해방으로 돌아 계방으로 오고 축방으로 바꾸어 간방에서 입수(入首)하고, 앞에는 쌍봉이 있으며 두 봉우리의 사이는 공간입니다. 안에는 작은 둔덕이 있어 그 모양이 마치 구슬과 같습니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을 하면 구슬은 턱 아래의 구슬이라고 할 수 있고 공간은 공간을 대한다는 공이 됩니다. 오른쪽으로는 건방이 득수(得水)가 되고 왼쪽으로는 을방이 득수가 되며, 또 신방(申方)의 물이 있고 오방(午方)이 파문(破門)이 되어 물의 법수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리고 청룡은 4중으로 되어 있고 백호는 3중으로 되어 서로 감싸 국세를 이루고, 혈이 맺힌 곳에는 요와 자리를 끼고 있어 혈의 엉긴 것이 완연합니다. 내룡(來龍)의 형세는 700리를 지나왔고 용을 호위하는 물은 모두 뒤에서 모여 현무(玄武)에서 입수함이 되니, 이는 천지와 함께 오래 전할 더할 나위 없는 대지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13일(정유)에 김익 등이 수원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관(棺)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여러 신하와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위로는 주봉(主峯)으로부터 아래로는 혈(穴) 자리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위쪽에 있는 혈 자리의 약간 높은 곳에 앉아 둘러보니, 국세가 평탄하고 반듯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청룡 백호가 에워싸지 않은 것이 아니나, 평탄하고 반듯한 속에 너무 넓고 크다는 느낌이 없지 않고, 에워싼 속도 역시 견고하게 결속된 형세가 약간 모자랐으며, 안계(眼界)도 조밀하고 번잡한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 평탄한 곳에 내려와 앉아서 둘러보니, 앞서 본 곳과는 지척(咫尺) 사이에 불과하였지만 국세가 평온하고 청룡과 백호가 긴밀하며 또 혈의 좌우에는 매미가 날개를 양쪽으로 펼친 듯한 형국이 있으며, 안계도 충분히 여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야 속에 작은 둔덕이 혈 자리와 직선으로 대치해 있는데, 이곳이 본래부터 칭송되어 온 서린 용[盤龍]의 형상이고, 이 둔덕은 서린 용이 희롱하는 구슬[弄珠]의 형국이 됩니다. 안대(案對)는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데, 만약 봉우리로 향(向)을 놓아 안산(案山)으로 삼으면 두 봉우리의 기세를 모두 끌어들이지 못할 것 같고, 두 봉우리 사이의 빈 곳으로 향을 놓으면 두 봉우리의 기운이 합쳐 온전한 하나의 안대가 될 터이니, 예로부터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對珠向空]’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은 여러 지사의 말이 통일되었으니 진실로 나라의 무한한 복입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아뢰기를, “한마디로 총괄하여 말하면, ‘하늘이 높은 산을 만들어 오늘을 기다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아뢰기를, “산세를 두루 살펴보고 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으니, 옛사람이 말한 공중을 향한다는 것은 바로 양쪽의 끝을 잡아서 그 중도를 쓰면 편벽되지 않고 기울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산을 답사한 여러 신료가 마음으로 기뻐하고 신복(信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진선진미(盡善盡美)란 말은 요순(堯舜)만이 칭송을 받았는데 선인들이 이 산에 대하여 곧바로 이 네 글자를 썼으니, 극진한 뜻으로 공경하고 탄식한 것을 대략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김종수(金鍾秀)가 아뢰기를, “거듭 청룡 백호가 감싸 돌면서 정감이 있고 사방의 봉우리가 천백 개나 솟아 있어 이 형국을 위하여 교묘하게 설치한 것 같으니, 이른바 8백의 제후국이 주(周) 나라에 조회를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은 잘 형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내가 이르기를, “자나 깨나 걱정이 되어 항상 마음으로 헤아려 스스로 백전 만전(百全萬全)의 땅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여러 사람의 말을 옛사람이 논한 말과 비교하면 도리어 더 나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자, 김익 등이 대답하기를, “그림으로는 뜻을 다 설명할 수 없고 글로는 그 국세를 다 형용할 수 없으니, 대길(大吉)하고 극귀(極貴)한 격(格)에 대해 어떻게 감히 지나치게 미화하는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 15일(기해)에 재차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을 보내 산을 답사하게 하였다. ○ 16일(경자)에 세 번째로 대신 이하 여러 사람을 보내 산을 답사하게 하고 원침(園寢)을 화산에 정하였다.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는 호가 고산(孤山)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감여(堪輿)의 학문에 대하여 본래 신안(神眼)이 있었는데, 그가 화산(花山)을 논하여 이르기를, “겉과 속이 여러 겹으로 둘러 있으므로 길격(吉格)이라는 것은 여러 술관(術官)이 모두 갖추어 진달하였기에 신은 중복하여 상세하게 진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그 용국(龍局)은 영릉(英陵)의 용국 다음은 가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종묘의 혈식(血食)이 오래 유지될 계책’이라는 말이 진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 기해헌의(己亥獻議) -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산릉(山陵)이 법수에 합치되는 곳은 영릉이 가장 좋고 그다음은 수원만 한 데가 없으니, 먼 것을 구애하지 마시고 영릉으로 정하는 것이 제일 상책이고, 민폐(民弊)를 염려하지 마시고 수원으로 정하는 것이 그다음 계책입니다. 종묘의 혈식을 오래가게 하는 계책이오니 작은 일에 연연하여 큰 것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오히려 판단을 하지 못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니, 노신(老臣)은 지붕만 쳐다보고 기가 막혀 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 총호사(摠護使)에게 보낸 편지 -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국가에서 꼭 수원의 산을 쓴다면 모름지기 거기에 사는 이주민(移住民)으로 하여금 즐겁게 여기며 이주하는 괴로움을 잊도록 하여야 인심이 안정되고 음복(陰福)이 이를 것이니, 그 백성들로 하여금 즐겁게 여기며 이주하는 괴로움을 잊게 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거기에 있는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보상을 해 주어 그들의 생업을 넉넉하게 하고, 또 10년 동안 복호(復戶)해 주는 일뿐입니다.” - 총호사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 하였고, 또 이르기를, “성주(聖主)의 의관(衣冠)을 묻는 곳을 만일 진선진미(盡善盡美)한 곳으로 정하지 못한다면, 어찌 신자(臣子)가 전하에게 충성하고 선왕에게 보답하는 성의이겠습니까. 가는 곳마다 자세히 보아도 전혀 마음에 드는 곳이 없고, 오직 수원의 산이 눈을 들면 놀랄 지경이고 자세히 점검하고 반복해서 헤아려 보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상격(上格)이 됨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용이 크고 바람을 막으며 물을 얻는 것은 영릉에 비하여 조금 미치지 못할 뿐이고, 입수(入首)한 용절 뒤의 퇴사(退卸)는 아주 좋으며 지축(地軸)은 바깥으로 멀고 북신(北辰)이 매우 귀하니, 도선(道詵)과 무학(無學)이 다시 태어나도 이 말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윤강(尹絳), 이최만(李㝡晩)과 여러 지관(地官)들도 한 가지의 하자도 없다고 찬양하기를 마지않습니다.” - 추고(推考)할 때 문서로 답한 말이다. - 하였다. 그의 시장(諡狀)에 이르기를, “기해년의 국장(國葬)을 수원에다 정하고 혈(穴)을 가늠하는 일을 시작하니 총상(摠相) 이하 여러 신료들이 서로 길지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는데, 공이 홀로 이르기를, ‘이곳에 묘를 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기필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현궁(玄宮)을 내린 다음이라야 축하할 수 있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수원은 나라의 큰 진(鎭)이고 읍을 옮기고 거주민을 옮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니 원침의 공사를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면서 모두 일어나 다투었다. 상이 총상 이하 여러 신료들을 불러 의논하게 하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수원은 거주민을 옮기는 폐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단연코 쓸 만합니다’ 하니, 상이 드디어 수원에 쓸 것을 결심하였는데,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고집하므로 상이 노여워하여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자들이 더욱 일어나 함께 상의 앞으로 나아가 힘써 다투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상이 어쩔 수 없어 마침내 수원을 버리게 되었다.” - 홍우원(洪宇遠) 지음 - 하였다. ○ 윤강(尹絳)은 말하기를, “이 산의 국세는 매우 크며 멀고 가까운 여러 산이 감싸 안지 않음이 없어, 비록 풍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게 하더라도 큰 형국임을 알아서 진선진미(盡善盡美)하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계좌정향(癸坐丁向)의 혈(穴)은 상하와 좌우 사이에 여러 지관의 의견이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상세하게 살펴본 다음에는 한곳으로 귀결되었으니, 혈에 대한 정세는 정말로 명백합니다. 이미 살펴본 곳은 이곳과 방불한 곳이 없으니, 지난날 산을 살펴보았다고 하나 이와 비슷한 곳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하였다. 윤강과 이최만(李㝡晩) 등은 풍수에 숙달하였기 때문에 윤선도가 그들을 일컬은 것이다.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처음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한결같이 수원으로 귀결되었는데, 천신(賤臣)은 생각하기를, 이곳은 7천 병마(兵馬)가 크게 모인 곳으로 선왕께서 평소에 의지하였는데,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것은 기필코 선왕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힘써 다투었으니, 완남군(完南君 이후원(李厚源))이나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같은 사람도 이어 다툴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당시에 고집하여 다투는 논쟁은 단지 거주민과 읍을 옮기는 폐단에 구애된 것이고 그 산지(山地)를 좋다고 칭하는 일은 이미 한곳으로 귀결되었으니, 어찌 경사(卿士)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는 대동(大同)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홍여박(洪汝博), 박세욱(朴世煜), 반호의(潘好義), 기중윤(奇重胤), 이필(李苾), 이원진(李元鎭), 이유필(李幼弼), 김극만(金克晩), 윤흥경(尹興耕), 이최만(李㝡晩)은 이름난 지사(地師)들이다. 그들이 기해년(1779, 정조3) 산릉을 답사한 말에서 홍여박은 말하기를, “수원부의 뒷산은 처음에 광교산(光敎山), 치악산(鴟嶽山)으로부터 흩어지고 떨어져 나가 평판(平坂)을 이루며 장막에 드나들 듯 큰 들 가운데를 빙 두르고 구불구불 돌아 다시 활기를 띠고 돌면서 굽이굽이 용을 이루었는데, 주성(主星)은 높고 정중하며 여러 산이 다투어 달려 하자를 보충하는데 미처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며, 다시 달려서 약속 없이 만나는 듯한 것이 마치 8백의 제후국이 주(周) 나라에 조회를 하는 듯하고, 혈의 모양은 차분하고 단정하며 명당(明堂)은 너그럽게 대안(對案)의 밖까지 감싸 안았고, 밖의 조산(朝山)도 매우 빼어나고 기이하며, 내당(內堂)의 물이 오고 감에 모두 법수에 맞아, 여러 가지의 귀격(貴格)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고 계좌 병파(癸坐丙破)의 형국으로 재신(宰臣) 격인 물속의 바위는 우뚝 서서 화표(華表)가 되어 여러 살(煞)을 제거하니, 나라에서 쓸 만한 대지(大地)임이 분명합니다.” 하였으며, 박세욱은 말하기를, “용이 광교산에서 나뉘어 치악산에 이르러 장막을 열고 용맥(龍脈)이 출현하여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넓은 들 가운데서 서렸다가 몸을 뒤틀어 남쪽을 향함에 주산(主山)의 형세가 웅장하고 청룡과 백호가 겹겹이 감싸며, 안대(案對)가 정감이 있고 혈도(穴道)가 풍성하며, 수구(水口)가 치밀하고 내당이 평평하면서 둥그스레하며, 조회하는 여섯 개의 빼어난 봉우리가 앞에 나열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읍(揖)을 하니, 귀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진룡(眞龍)이 맺혀 만들어진 땅이니, 바로 나라에서 쓰기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반호의는 말하기를, “그 내려온 맥이 매우 멀어 모두 기록할 수 없지만, 우뚝 솟은 성봉(星峯)이 웅장하게 서려 조산(祖山)을 이룬 것은 바로 용인의 석성산(石城山)입니다. 이 산이 바뀌고 변하여 계곡을 지나 또 광교산(光敎山)이 생기고, 그 북쪽으로 달려간 것은 관악산(冠嶽山)과 삼각산(三角山)의 응룡(應龍)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달려간 것은 치악산(鴟嶽山)이 되었으니, 이것이 혈의 가까운 조산(祖山)이 됩니다. 긴 가지와 큰 잎이 좌우로 뻗어 내려 기이하게 빼어난 봉우리가 앞뒤에서 호응하여 누대(樓臺)와 전각(殿閣)을 내려옴에 기상이 깨끗하고 존귀하며 들을 뚫고 건넌 용맥은 그 자취를 알 수 없다가 허물을 벗은 용이 용골을 바꾸어 용절마다 기이하게 변하여 서쪽으로 가고 동쪽으로 가다가 큰 들 가운데서 서리고 다시 몸을 뒤틀어 남쪽을 향하여 서린 용의 형국이 되었습니다. 주성(珠星)이 앞에 있고 구름과 우레가 뒤에서 옹호하며, 사수(砂水)는 정감이 있고 내당(內堂)은 평평하고 반듯하며 외양(外陽)은 넓게 트여 만 마리의 말을 용납할 수 있으며, 재신(宰臣) 격의 영옹암(令翁巖)은 외수(外水)가 만나는 가운데 우뚝하게 서 있으니 방서(方書)에 이른바 북극성입니다. 그래서 큰 바다가 조회하러 오는 기상이 문밖의 병오방(丙午方)에서 드나들게 됩니다. 그리고 금비편(禁祕篇)에서 이른바, ‘물이 이방(离方 남방(南方))으로 돌아가니 천자(天子)가 환한 남쪽을 향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형상’이니, 참으로 국가에서 써야 할 대지(大地)입니다.” 하였으며, 기중윤은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광교산을 조산으로 하여 사근현(沙斤峴)의 큰 계곡을 지나 장막을 열고 중심을 뚫은 듯 용절마다 법에 합치되고, 성봉(星峰)이 우뚝 솟아 치악산이 되었으며, 치악산 가운데서 나온 한 맥(脈)이 구불구불 내려오는 형세가 아주 끊어져 계곡을 보호하여 영접하고 전송하며 겹겹이 둘러 활동을 하는데, 서쪽에서부터 동쪽으로 넓은 들 가운데 구불구불하게 내려오다가 몸을 회전시켜 남쪽으로 향하여 요해가 맺히고 혈(穴)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혈성(穴星)이 풍후(豐厚)하고 내당의 형국은 넓고 평평하며 좌우가 둘러싸이고 조안(朝案)도 정감이 있으며, 팔문(八門)이 견고하면서 치밀하고 오행(五行)이 완전히 갖추어져 기상(氣象)은 존엄(尊嚴)하고 국세(局勢)는 웅위(雄偉)합니다. 그리고 치악산, 광교산, 석성산, 부아산(負兒山) 등 여러 산이 뒤에서 호위하고, 건달산(乾達山)과 독성산(禿城山) 등 제반 길사(吉砂)가 멀리서부터 내려와 앞에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하는 듯하며, 내당의 물은 생기방(生氣方)에서 근원하여 파문(破門)으로 흘러 근원으로 돌아가며, 앞뒤의 명당에는 만 마리의 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이고, 재신 격인 영옹암(令翁巖)은 외수가 서로 만나는 곳을 진압하고 있으니, 이로써 관찰하면 진룡(眞龍)이 크게 결집되어 만들어진 곳이니, 바로 국가에서 쓰기에 합당합니다.” 하였고, 이필은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길고 멀어 누각(樓閣)을 내려오는 정(情)과 들을 뚫고 지나가는 기묘함은 모두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입국(入局)한 데에 이르러서는 큰 들 가운데 서려서 용과 혈이 중앙을 차지하여 좌우로 정감이 있고, 안대(案對)가 서로 믿음직하며 관성(官星)이 특출하고 귀봉(鬼峰)이 등 뒤에서 버티며 문호가 서로 맺혀 있어 내당의 기운이 새어 나가지 않으며, 삼양(三陽)이 구비되고 육건(六建)이 일제히 빼어나 먼 곳의 빽빽한 산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하지 않음이 없어 마치 여러 별이 북극성을 향하는 듯하고, 북신(北辰)의 바위는 내수(內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가운데를 진압하여 대지(大地)의 규모가 이보다 나을 수 없으니, 나라에서 쓰기에 적합합니다.” 하였으며, 이원진은 말하기를, “수원부의 큰 용은 광교산으로 조산(祖山)을 삼아 사근현(沙斤峴)을 지나 광주부곡(廣州部曲)에 이르러 크게 퇴사(退卸)를 끊고 곧 성봉(星峰)을 일으켜 수리악(修理嶽)을 나누어 보낸 뒤에 연하고 아름다운 맥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와 치악산(鴟嶽山)을 이루고, 또 퇴사가 솟아 남양(南陽)의 경내에 단정한 봉우리를 이루고, 장막을 열고 날개를 펴서 거듭거듭 계곡을 지나 북쪽의 들 가운데서 몸을 회전하며 낯을 돌려 달리는 말처럼 되어 세 번 뇌(腦)를 일으키고 이어 평평한 이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존귀한 주성(主星)과 내려온 정맥(正脈)은 화심혈(花心穴)을 만들어 교묘함이 극진하고 사진(四眞)과 삼의(三義)는 모두 법수에 맞아, 역량이 전일(專一)하고 풍기(風氣)가 모이며, 혈도(穴道)가 바르고 수토(水土)가 깊습니다. 국세로 말하면 사방이 역시 수십 리가 넘고 사신(四神)이 온전하고 팔국(八國)이 둘러 있으며, 사법(砂法)은 뒤에 청귀(淸貴)한 귀봉(鬼峯)이 있고 앞에는 귀한 관성(官星)이 있으며, 좌우에는 귀처럼 생긴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고 수구(水口)는 독성산(禿城山)이 화표(華表)가 되어 긴밀하게 막혔고, 영공암(令公巖)은 북신(北辰)이 되어 웅장하고 기묘하며 내포(內浦)는 근천(近川)을 범하여 직접 조회하는 물이 되고, 뒤의 산세는 태조산(太祖山)이 북쪽에서 바로 감싸 안으며 먼 조산(朝山)은 호서(湖西)에서 바다로 달리는 산이 남쪽으로 나열되었으니, 참으로 동방 풍수의 요지입니다.” 하였다. 이유필은 말하기를, “용이 광교산에서 출발하여 누전(樓殿)을 내려와서 큰 들 가운데에 서렸는데, 혹 장막을 열어 계곡 속을 지나기도 하고 혹 나는 나비에 갈대 채찍을 가하는 격(格)이 되기도 하며, 혹 금성(金星), 수성(水星)의 봉우리가 되어 30여 리를 날아 또 높고 큰 봉우리를 이루어 치악산(鴟嶽山)이 되었는데, 여기서부터 가는 가지의 용이 구불구불 지나는 사이에 여러 가지의 귀성(貴星)을 띤 격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가까운 조산(祖山)의 맥이 갑자기 돌아 서쪽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 해방(亥方)에 이르러서 특별히 큰 장막을 열어 다시 두 용절을 이루고 간방(艮方)을 타고 정기를 맺어 긴 유혈(乳穴)을 이루니, 혈을 맺은 곳이 풍후하고 국세가 주밀하며 안대(案對)가 정감이 있고 명당에 기운이 크게 모이고 수구(水口)가 잠겨 있습니다. 또 독성산(禿城山)이 60리 바깥으로부터 거듭거듭 절을 하고 엎드려 물을 막고 있어 담 밖에서 손을 모으고 선 것이 마치 시신(侍臣)과 같으니, 참으로 왕후(王侯)의 땅이고 나라에서 쓰기에 적합합니다.” 하였으며, 김극만은 말하기를, “형세가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내당의 국세가 평정하고 용(龍), 혈(穴), 사(砂), 수(水)가 법도에 맞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은 이른바 진룡(眞龍)의 대지입니다. 대체로 광교산이 우뚝하게 솟아 원조(遠祖)가 되고 구불구불 뻗어 수삼십여 리를 지나면서 기복(起伏)을 하다가 치악산에 이르러 갑자기 솟아 주필산(駐蹕山)이 되고, 주필산 뒤에 가는 가지의 맥을 빼내어 장막의 가장자리를 열고 한가운데로 대국(大局)을 만들어서 내외의 명당이 넓찍하고 수구가 긴밀하고 좁아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듯하니, 이것이 긴밀하기가 호로병의 입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산성이 손방(巽方)에 우뚝 솟아 내수구(內水口)의 화표주(華表柱)가 되고 남쪽으로 큰 들 가운데를 향하여 갑자기 하나의 큰 둔덕을 이루어 중당(中堂)의 기운을 막습니다. 그리고 외양(外陽)에 이르러서는 재신(宰臣) 격인 신령한 바위가 해구(海口)의 50리 밖에 서서 외당(外堂)의 설기(泄氣)를 막는 북신(北辰)이 되니, 역량이 웅장하고 혼후하여 사실상 한강 남쪽의 제일가는 용이 되며, 다른 능침의 정한 곳과 비교하더라도 중등이나 하등의 땅은 되지 않습니다.” 하였고, 윤흥경은 말하기를, “광교산의 바른 줄기가 북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서 수백 리의 나성(羅城)을 만들고 다시 돌고 기복하는 사이에 맥이 허리로부터 떨어졌으니, 치악산이 바로 가까운 조산(祖山)이 됩니다. 치악산의 남쪽 머리가 춤을 추듯 평지로 떨어져 내려와 크게 끊어지면서 조금 미끄러져 구불구불 용이 되어 수십 리를 가다가 동쪽으로 달려 장막을 열면서 큰 들 가운데 국(局)을 이루고, 미진한 기운이 또 50여 리를 가다가 대택(大澤)에서 그치고 허다한 가지와 발이 되어 혹 보호하는 사(砂)가 되고 혹은 수구산(水口山)이 되니, 옛사람이 이르기를, ‘대지(大地)란 허리에서 떨어져 이루어짐이 많으니, 돌면서 남은 땅이 성곽(城郭)이 된다’ 하였는데, 이런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혈도(穴道)가 풍후하고 청룡과 백호가 고르며 안대(案對)가 단정하고 오묘하며 국세가 완전하고 견고하며 외양(外陽)이 넓찍하고 탁 트여, 가까이는 새나 짐승들이 문을 막고 멀리는 북신(北辰)이 설기를 막아 주니, 진실로 한강 남쪽 풍수의 큰 도회(都會)가 됩니다. 양택(陽宅)으로 쓰면 관방(關防)의 거진(巨鎭)이 될 만하고 음택(陰宅)으로 쓰면 제왕의 능침(陵寢)이 될 만하니, 바로 중등이나 하등의 산천이 아닙니다. 대개 천하의 이치는 본체와 작용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본체가 선 다음에 작용이 행해질 수 있고 작용이 행해진 다음에 변화를 베풀 수 있습니다. 지리(地理)의 법도 역시 본체와 작용이 있으니, 이른바 형체는 바로 그 본체이고 방위는 바로 그 작용이 됩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행해져서 어긋나지 않으니 편벽되게 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금의 술사(術士) 가운데 이 본체와 작용을 겸하여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정도이고, 천하의 산천에도 본체와 작용을 겸비한 경우가 백 곳에 하나 정도이기 때문에, 혹 형체는 좋은데 방위가 좋지 않은 경우 형체(形體)를 숭상하는 자는 칭찬하고 방위를 숭상하는 자는 나쁘게 여겨 논의가 한결같지 않으니, 화복(禍福)의 징험이 없는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이 산의 경우는 용의 기운이 기이하고 국세가 확실할 뿐만이 아니라, 형체도 적절하고 방위도 합당하기 때문에 재주의 고하(高下)와 법술의 깊고 얕음을 가릴 것 없이 여러 사람의 입으로 함께 칭찬하면서 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이는 이른바 청천(靑天)의 해와 같아 노예(奴隸)들도 그 맑고 밝음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고, 이최만은 말하기를, “수원(水原)의 읍터는 예로부터 대지라고 일컬었습니다. 좋은 규모와 밝고 빼어난 기상은 비록 속인(俗人)의 눈으로도 아주 귀한 곳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치악산 이하를 논하면, 좌우로 큰 들을 20여 리나 끼고 있는 사이에 능선과 가지가 문득 깃들어 있고 구불구불한 일곱 곳이 굽이마다 음맥(陰脈)이 되며, 간방(艮方)과 해방(亥方) 사이의 다섯 굽이 뒤에 곧바로 봉우리가 솟고 혈이 떨어졌으니, 바로 이곳이 호장(戶長)의 집 뒤입니다. 간맥(艮脈)은 맑고 귀하며 혈성(穴星)은 풍만하고 크니, 바로 나라에서 크게 쓰기에 적합합니다.” 하였다. - 이상은 옛사람의 말이다.김양직(金養直)은 본부(本府) 사람이다. 대대로 화산(花山) 아래에 살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감여술(堪輿術)을 배워 대략 이해하였다. 이보다 앞서 그를 불러 물었더니, 김양직이 말하기를, “산세가 용인(龍仁)의 부아산(負兒山)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낀 것이 석성산(石城山)이 되어 앞으로 구흥(駒興)을 건너와서 크게 솟아 광교산(光敎山)이 되고 앞에 솟은 것이 백운산(白雲山)이고 가운데 떨어진 것이 오봉산(五峰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들을 뚫고 계곡을 지나 다시 일어서서 수리악(修理嶽)이 되고, 왼쪽으로 달려서 증악산(甑嶽山)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10여 리를 내려와서 고금산(鼓琴山)이 되고 왼쪽으로 가서 홍범산(洪範山)이 되고 또 몸을 돌려 물을 거슬러 10리를 올라가 봉표(封標)의 위쪽이 되었습니다. 내룡(來龍)이 을방(乙方)의 계곡을 지나 크게 솟아 뒤의 장막이 되어 연주맥(連珠脈)으로써 삼태성(三台星)처럼 기복(起伏)을 하고, 건방의 맥으로 주봉(主峰)을 이루어 건방에서 조금 내려와 해방(亥方)으로 돌고 계방(癸方)으로 돌아 축방(丑方)에서 홀로 행한 용이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였습니다. 그 태기(胎氣)가 서린 곳에 3층으로 왕(王) 자 모양과 같이 긴 유형(乳形)으로 조그마한 터가 생겨, 오른쪽으로는 건방의 샘이 있고 왼쪽으로는 을방의 계곡이 있으며, 안에는 백호(白虎) 끝 자락의 물이 신방(申方)에서 보이고 그 물이 오방(午方)으로 함께 돌아가니, 좌향을 정하는 법은 잘 미루어 쓰기에 달려 있습니다. 대저 간룡(艮龍)에서 곤향(坤向)이나 오향(午向)을 하면 용향(龍向)이 혼잡스러울 뿐만 아니라 곤방(坤方)에 바른 안대(案對)가 없으며, 오방이 왼쪽으로 비껴 미향(未向)을 하게 되면 건방의 물과 을방의 물이 오방의 파문(破門)과 더불어 모두 불길하고 또 간좌(艮坐)를 하여도 수법(水法)이 불길합니다. 오직 계좌(癸坐)를 하면 건방의 물은 탐랑성(貪狼星)에 해당되고 을방의 물은 무곡성(武曲星)에 해당되며 오방의 파문은 거문성(巨門星)에 해당되니, 세 가지의 길성이 모두 갖추어지고 내룡(內龍)과 망향(望向)이 모두 좋기 때문에 지리의 묘법(妙法)에서 간룡(艮龍)에 계좌(癸坐)를 놓으면 제일 귀격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저의 억측이 아니고 문서가 매우 분명하니 어찌 속이는 것이겠습니까. 또 고법(古法)에 이르기를, ‘서리와 눈이 충화(沖和)한 지역에서 먼저 녹는다’고 하였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봉표(封標)한 곳은 비록 엄동의 큰 추위에 눈이 산처럼 쌓여도 봉표(封標) 안에는 곧 녹아 한 점도 쌓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안산(案山)의 전면에 하나의 둔덕 모양이 둥근 구슬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전하기를 식양(息壤)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늘이 설치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때문에 계좌를 하면 주산(主山)이 모든 조화를 지는 국세(局勢)가 되고 작은 둔덕은 품속의 물건이 되며 안대의 두 봉우리는 향(向)이 그 중간에 있으니, 이는 바로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봉분 아래 조금 낮은 곳에는 형기(形氣)가 참으로 평평하고 둥글어 완연히 자리와 요가 구비되었으니 진실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청룡이 4중으로 되고 백호가 3중으로 되어 형체가 팔뚝 어깨와 같아 모두 몸을 감싸는 청룡 백호가 되었고, 안대(案對)가 수려한 모양은 귀인과 같고 물속에는 옥새와 같은 사(砂)가 있으며 화표(華表)는 문을 막고 창고가 문 앞에 배열되었으니, 십전대길(十全大吉)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부아산(負兒山)으로부터 혈이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 지나는 거리가 적어도 6, 7백 리가 되니, 천 리의 행룡(行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봉표(封標)의 위에서 보면 여러 봉우리가 모두 가까이 지척(咫尺)에 있는 듯하기 때문에 돌고 도는 가운데 여러 물이 모두 바깥 명당의 수구 안에서 모이니, 이른바 진룡(眞龍)이 머무는 곳에 물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산의 형세가 두루 돌아오면서 구불구불 뻗치니, 이른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삼반(三盤)의 아름다움과 성좌(星座) 도수(度數)의 길한 것을 모두 갖추었다면 어찌 대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글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그림으로는 진의를 다 그리지 못한다’고 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으로 성몽룡(成夢龍)이란 사람을 보내어 가서 살펴보도록 하였는데, 성몽룡도 이 땅에 대하여 앞서 여러 번 살펴보았던 사람이다. 이때에 성몽룡이 말하기를, “읍터의 뒤에 하나의 대국(大局)이 있는데, 읍 뒤의 능선이 청룡이 되고 뒤맥의 행룡이 도리어 백호가 되어, 혈의 밑에서 우러러 주성(主星)을 보면, 왼쪽로 내려온 기운이 임방(壬方)과 해방(亥方)으로 내려오는데 계방(癸方)과 축방(丑方) 쪽만 깎이고 바뀌어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를 하니, 축좌미향(丑坐未向)이 봉표(封標)한 곳입니다. 좌우의 손방(巽方)과 신방(辛方)이 득수(得水)가 되고 병방(丙方)이 파문(破門)이 되니, 바로 산과 못이 기운이 통하는[山澤通氣] 격이 됩니다. 용과 향으로 말하면 간룡(艮龍)과 미향(未向)은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배합하는 것이고, 좌(坐)와 득수(得水)로 말하면 소남(少男)과 소녀(少女)가 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둔덕이 있으니 간좌곤향(艮坐坤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손방과 신방이 득수가 되고 오방이 파문이 되니, 음양(陰陽)의 충화(沖和)에는 합당하기는 하지만 용과 향이 뒤섞입니다. 그리고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말하면 오방의 파문은 합당하나 득수의 방위가 서로 틀립니다. 대저 혈이 생긴 곳이 풍후하고 음이 양이 있는 곳으로 와서 유혈(乳穴)이 만들어지고, 주봉의 위로 올라가 보면 빙 둘러 있는 산세는 상서로운 구름이 물결치는 듯하고 용과 혈이 국(局)을 이루어 서린 용의 모양을 하고, 명당이 평평하며 바르고 국세가 유순하며 밝고 아름다운 덕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용을 찾기는 쉽고 혈을 점치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이 산은 유혈(乳穴)이 되었는데 조금 올라가면 청룡과 백호가 눈 아래로 낮게 보이니, 진혈(眞穴)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흠입니다. 만약 조금 아래로 평탄한 곳에 내려오면 청룡과 백호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며 좌우로 서로 균형이 맞는 국세가 됩니다. 그리고 혈 앞의 정방(丁方)에 한 둔덕이 있는데, 인가(人家)의 가운데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이른바 구슬입니다. 수구(水口)와 화표(華表)가 문을 막고 치밀하니, 이것이 십전(十全)의 대지입니다.” 하였다. 또 방외사(方外士)를 맞이하여 결정하려고 하였는데, 그가 말하기를, “증악산(甑嶽山)으로부터 수십 리를 뻗어 온 용이 기복(起伏)하면서 돌아 다른 곳으로 달려 나가 국을 이룬 곳이 없고, 수원읍의 뒤쪽 산이 끝나고 물이 돌아온 곳에 이르렀으니 국을 만드는 데 기운을 쏟은 것을 알겠으며, 주봉(主峯)과 능선이 풍후하고 깨끗하여 큰 산의 답답한 기운이 없고, 또 야룡(野龍)의 늘어지고 흩어지려는 뜻이 없어 혈체(穴體)가 확실하고 서린 기운이 분명하니, 기운이 크게 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고르게 생겨 하단(下端)이 열리고 안대(案對)가 두 손을 마주 잡고 읍을 하는 듯 다정하며, 내외의 명당(明堂)이 평온하고 멀고 가까운 곳의 사(砂)와 물이 수려하며, 또 뒷산은 일자(一字)처럼 서서 병풍과 장막을 두른 듯 완전하고 두터우며 수구(水口)가 거듭되어 자물쇠로 채운 듯이 굳게 싸여 있어, 산형(山形)과 국세(局勢)는 실로 그림으로 그려도 그릴 수 없는 땅이니, 범인의 눈으로 보더라도 길하고 흠이 없는 만전의 대지입니다. 이번에 간심(看審)하는 일은 혹시라도 전에 본 일이 착오가 있을까 염려하여 흠점(欠點)을 살펴 찾는 데 주안점을 두었지만 다만 좋은 곳이라는 생각만 들고 조금도 미심쩍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뒤의 장막이 완전하고 후하며, 보필(輔弼)하는 산봉우리와 내룡(來龍)이 길고 멀며, 호종하는 사수(砂水)의 기상이 존엄하고 역량(力量)이 큰 것에 이르러서는 전날에 본 것보다 더욱 좋았으니, 달마산(達摩山) 등 여러 곳과 같이 겉은 웅장하면서 안은 실제로 공허한 곳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중에 혈체(穴體)와 입향(立向)에 대해 자세히 관찰하였는바, 혈체의 긴 유방형(乳房形) 아래에 작은 둔덕이 생겨 양(陽)이 오면 음(陰)이 받아들이는 듯하니, 교합(交合)하고 생성(生成)하는 이치로 논하면 묘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리에 어두운 자가 유혈(乳穴)을 잘못 파면 매우 불가하니, 대개 생기(生氣)가 쏟아져 내려오는 형세가 끝나지 않았는데 만약 혹시라도 잘못 짚으면 마치 편안하게 흐르는 물이 돌에 부딪혀 노하여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아 생기가 변하여 괴기(乖氣)가 되니, 이는 옛사람이 경계한, 용을 상하게 하고 살기(煞氣)와 다투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유혈(乳穴) 아래 둔덕 가운데 태극(太極)처럼 뭉친 곳에서 유맥(乳脈)을 접하여 와혈(窩穴)을 뚫고 오른쪽의 기운을 왼쪽에서 받게 하는 것이 - 기운은 오른쪽을 향하여 오고 귀는 왼쪽으로부터 받는다. - 법에 맞을 듯합니다. 입향(立向)은 계좌정향(癸坐丁向) 이외에는 다른 방향이 없습니다. 그 이유로는 작은 둔덕의 안대가 정방(丁方)에 있으니 이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을 잃지 않아야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내파(內破)는 오파(午破)가 되어 계좌(癸坐)와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의 격이 되니, 곧 대격(大格) 중에서 제일 좋은 격입니다. 대개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교체할 때에도 방위가 바뀌지 않고 오래도록 쇠하지 않으며 부숴도 부서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 둘째입니다. 입수(入首)한 간방(艮方)의 용절(龍節)은 정방(丁方)과 산택통기(山澤通氣)의 격이 되는 것이 셋째입니다. 바깥의 파문(破門)은 병방(丙方)에 있고 정방에 사(砂)가 있으니, 만약 계좌(癸坐)를 하면 천간(天干)이 생성(生成)하는 격과 합치되는 것이 넷째입니다. 내당(內堂)의 득수(得水)는 정밀하게 잡지는 못하지만 곤방(坤方)에 있는 듯하니, 만약 그렇다면 율려(律呂)의 격에 합치되는데 이것이 다섯째입니다. 정향은 본명(本命)에 있고 또 《옥룡비결(玉龍祕訣)》에서 복덕(福德)의 향(向)과 합치되니 이것이 여섯째입니다. 계좌를 하면 모든 길기(吉氣)가 집중되고 다른 좌향을 하면 이와 반대가 됩니다.” 하였다. 대체로 옥룡자(玉龍子) 이후로 고금에서 서로 전하는 말이 모두 착착 근거가 있으며, 그 형국은 범속한 사람에게 보라고 하더라도 극히 좋고 길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혈이 있는 곳은 유두(乳頭) 아래 평탄한 곳이고, 좌향은 안대가 있는 곳의 작은 둔덕이니, 이것이 이른바 구슬을 안대하면 빈 곳으로 향을 놓는다는 것이다. 분금(分金)은 이 혈 이 좌향 이 안대로 마땅히 결정할 것이다. 대저 방외사(方外士)라는 자는 본래 안목이 있어 말을 하면 꼭 들어맞으니, 이 때문에 깊이 믿고 마음으로 인정하였다. ○ 총호사(摠護使) 김익(金熤)이 어버이를 위하여 묏자리를 찾은 지 10여 년이 되었다. 평소에 감여설(堪輿說)을 알아 매양 산에 대한 논의가 있으면 그의 말을 중요시하였고, 그가 떠날 때는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갔다. 승지 김이성(金履成)은 지리(地理)를 상당히 안다고 하여 자원하여 가서 살폈고,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지원(李祉源)도 대략은 안다는 말을 들었으며, 부사과(副司果) 박대량(朴大良)은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북관(北關)의 진사(進士) 주남술(朱南述)은 산을 보는 안목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진사 채윤전(蔡潤銓)은 좌상(左相)이 그의 유능함을 추천하였다. 김이성이 말하기를, “오른쪽의 용이 동쪽에서 시작하여 수향(水鄕)으로 들어와서 수백 리를 남쪽으로 달려오니 이것이 왕성한 물의 큰 줄기인데, 치악산(雉嶽山)에 이르러 껍질을 벗고 얼굴을 바꾸어 평지로 협곡을 건너 경태(庚兌) 방향으로 돌면서 주봉(主峯)이 우뚝 솟았으니 경태는 이미 수룡이 목욕하는 형국이 됩니다. 주봉의 앞에서 이미 잉태(孕胎)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상생(相生)하는 아름다운 의미뿐이겠습니까. 주봉으로부터 건방(乾方)으로 떨어져 해방(亥方)으로 돌아 한 번 변하여 계룡(癸龍)이 되고 두 번 변하여 축룡(丑龍)이 되고 세 번 변하여 간룡(艮龍)이 되었습니다. 혈의 뒤에서 축간(丑艮)의 배합이 굳게 묶인 것은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고, 또 《용결(龍訣)》에 이르기를, ‘왕수(旺水)가 간룡을 만나면 진토(眞土)로 혈을 맺는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간방 입수(入首)에 정향(丁向)을 하면 한편으로는 산택(山澤)의 배합이 되고 한편으로는 율려(律呂)의 상생(相生)이 되니, 역시 이른바 제일 좋은 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혈은 와체(窩體)이지만 오른쪽에 뭉친 곳은 기울어져 쏟아지는 듯하고 왼쪽에 뭉친 곳은 단정하고 후하여 와중(窩中)에서 왼쪽을 밀치니, 곧 빈 것을 놓고 가득 찬 것을 취하는 묘를 취한 것이고 혈 속에서 물을 소비하는 예입니다. 이미 전 사람들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마땅히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으로 근거를 삼아 패철(佩鐵)을 띄워 좌우의 안대가 바르지 않거든 중앙에서 왼쪽으로 밀친 곳에 내외의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하고, 금정(金井)을 정할 때 비록 상하 좌우의 논란이 있으나 다투는 바는 척촌에 지나지 않으니, 토색(土色)으로 분변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혈(穴) 속에 앉아 돌아보면 주봉이 단정하게 북쪽에 있으니 곧 계좌의 관록(官祿)이 있는 곳이고 수국(水局)의 제왕(帝旺) 향이니, 이 한 격이 이미 만세무강(萬世無疆)의 복을 차지합니다. 더구나 이 주성(主星)은 금기(金氣)를 머금고 수맥(水脈)을 뽑아내어 완연히 돌고 구불구불 움직여 자모(子母)가 상생(相生)하고, 수백 리를 오른쪽으로 돌아 입수(入首)하는 즈음에 몸을 뒤집어 좌선(左旋)의 정국(正局)을 만든 것은 극히 귀한 격이 아님이 없습니다. 진실로 지리(地理)가 있다면 어찌 영응(靈應)이 없겠습니까. 청룡과 백호는 좌우로 뻗은 음판(陰阪)이 고르게 거듭되어 혈의 입구를 번갈아 잠그는 듯하여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지 못하겠고, 사방의 산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 어느 면으로 보아도 정감이 있으며, 생방(生方)과 왕방(旺方)의 뭉친 기운과 천신(天神)과 태을(太乙)의 문명(文明)한 기상에 이르러서는 글이나 말로 모두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수세(水勢)로 말하면 이것은 숨은 용의 형체(形體)이기 때문에 내당(內堂)에서 물을 얻는 경우 적은 것을 혐의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크게 뭉쳤기 때문에 외당(外堂)은 용을 따른 큰 내가 주봉의 뒤에서 합수(合水)되는데, 용이 물을 따르는 것이 아니고 물이 저절로 용을 따르는 것이니, 역량이 큰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저 국세(局勢)가 지극히 단단하고 치밀하여 그것이 크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나, 《용결(龍訣)》에 이르기를, ‘장차 크게 맺힌 땅이 있으면 먼저 큰 명당을 그 밖에서 마련한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후평(後坪)과 세람평(細藍坪)의 열린 들이 증거가 될 만합니다.” 하였다. 이지원이 말하기를, “대개 내룡의 형세가 멀리서부터 광대하여 기맥(氣脈)이 깨끗하고 두터우며, 오성(五星)이 상생하고 팔방에서 옹호하며, 청룡은 화개(華蓋)처럼 생기고 백호는 구름이 이는 듯합니다. 진(辰), 손(巽), 사(巳), 병(丙)의 봉우리는 해와 달의 보필이며, 건(乾), 해(亥), 감(坎), 계(癸)의 봉우리는 현무(玄武)의 별자리입니다. 맨 마지막 용이 입수한 곳에 이르러서는 완만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으며 음기는 함축되고 양기는 평탄해서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아 삼분(三分)과 삼합(三合)이 맞아 당국(堂局)이 치밀하니, 옛사람이 이른바 ‘혈에 오르면 완연히 하나의 건곤(乾坤)을 이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理氣)로써 말하면 경태(庚兌)의 행룡(行龍)은 신방(辛方)에서 포(胞)를 일으키고, 계방(癸方)과 간방(艮方)에서 많은 변화를 일으켜 간룡으로 정방(丁方)을 향하니, 이는 용과 향이 산택통기(山澤通氣)에 합하는 것입니다. 계방으로 좌(坐)를 하면 곤방의 흐르는 물이 오방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좌와 물이 수화불상석(水火不相射)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대(案對)로 말하면 정방과 태방에 구슬의 형체가 고르게 둥글며 두 봉우리가 밝게 솟아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하게 되어 스스로 경태(庚兌)의 본상(本象)을 이루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정안(正案)입니다. 이기(理氣)와 형세(形勢)가 더없이 아름답고 좋아 한 가지의 결점도 없으니, 이는 진실로 억만년의 견고한 터입니다.” 하였고, 박대량은 말하기를, “내룡(來龍)이 멀리서 뻗어 와 현무(玄武)로 가면서 구불구불하고 오성(五星)이 위치를 얻어 광대하게 이어지며, 장막을 뚫고 가운데서 솟음에 기맥(氣脈)이 맑고 귀하고 봉우리가 솟아 유형(乳形)으로 늘어지니 혈성(穴星)은 존엄하며, 뒤가 높고 앞이 평탄하여 음양의 조화를 서로 받음이 명백하고, 사방이 두텁고 가운데가 평평하여 천륜(天輪)의 뭉친 형체가 깨끗하며, 팔방에서 첩첩이 옹호하여 형세가 범을 따르는 구름 같고, 삼문(三門)이 거듭거듭 잠겨 형체는 치아가 맞물린 듯하며, 축방(丑方)의 봉우리와 간방(艮方)의 봉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산택(山澤)의 기운을 통하고, 감방의 봉우리와 이방(離方)의 봉우리가 교합하여 마침내 기제(旣濟)의 아름다움을 이루었습니다. 신방(辛方)과 태방(兌方)에서 돌아 간방에서 입수(入首)하니 정향(丁向)은 마땅함을 얻었고, 원류(源流)가 오방(午方)으로 돌아가니 계좌(癸坐)가 격에 맞습니다. 둥근 구슬이 앞에 있고 솟은 두 봉우리가 서로 응하였으니, 쌍봉의 경우 그 중간의 빈 곳을 취하여 향을 정하는 것이 옛 법에 바꿀 수 없는 정한 법입니다. 용(龍), 혈(穴), 사(砂), 수(水)가 더없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만세토록 한없이 단단한 터입니다.” 하였으며, 주남술은 말하기를, “이 용세(龍勢)의 웅장하고 아름다움과 국세(局勢)의 기이함은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을 만큼 저절로 대단합니다. 계곡의 맥으로 논하면 왕(王) 자의 모양을 이루었고 신방(辛方)의 한 줄로 된 기맥(氣脈)이 우뚝 솟아 무곡금(武曲金)의 형체가 되어 봉요(蜂腰)와 학슬(鶴膝)이 용절마다 분명하고, 수성(水星)이 길고 멀며 앞에서 간토(艮土)로 뭉쳤으니 이는 바로 뒷룡의 귀격이고, 금성(金星)이 토성을 띠고 천마(天馬)가 누웠으니 분명 이는 더 좋을 수 없는 대지(大地)의 격이 됩니다. 그리고 또다시 해방(亥方)의 낙맥(落脈)이 임수(壬水)와 태(胎)를 이루고 돌아 계맥(癸脈)을 이루어서, 왼쪽 축방으로 한 번 돌고 간방으로 세 번 돌아 용절의 완전한 기운이 위로 천시원(天市垣)의 국세(局勢)와 응하고 남극(南極)의 수성(壽星)과 배합하니, 이것이 이른바 ‘하늘에서 상(象)을 이루고 땅에서 형(形)을 이룬다.[在天成象 在地成形]’는 것입니다. 간방의 입수가 나누어져 좌우로 두 유혈(乳穴)을 이루었는데 오른쪽의 유혈은 약간 작아서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왼쪽의 유혈을 도와 만들어 주는데 왼쪽의 유혈은 둥글고 두툼하여 간토(艮土)의 정신으로 뭉쳤으니, 이는 진실로 얻기 어려운 정혈(正穴)이고 양기(陽氣)를 받아 평탄하니 혈증(穴證)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또 사성(砂星)으로 논하면 손방(巽方)과 신방(辛方)이 서로 응하여 사문(赦文)이 높이 비추고 천병(天屛)이 우뚝하게 솟았으니, 이것이 또한 간룡(艮龍)의 귀격입니다. 수격(水格)으로 논하면 생방(生方)의 수신(水神)이 왕방(旺方)의 좌(坐)에 와서 응하고 오방(午方)으로 돌아가 세 개의 구슬이 점을 찍은 듯 산수의 성정(性情)을 껴안아 나열하였으니, 이는 실제로 용이 서린 형국이며 쉽게 만날 수 없는 대지(大地)입니다. 그리고 또 병방(丙方)과 손방(巽方)으로 논하면 20개월 뒤에 먼저 자손이 많은 경사를 축하함이 있고, 9년이 되면 청룡과 백호의 기운이 서로 응하고 비춰 순환됨이 무궁하여 일자천손(一子千孫)이 될 것이니, 만대의 무궁한 아름다운 일이 실제로 여기에서 기인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증악산(甑嶽山)에서 낙맥(落脈)을 한 뒤에 돌고 돌아 용절(龍節)마다 격에 맞고 입수(入首)한 봉우리에 이르러서는 해방(亥方)과 계방(癸方) 아래에서 잠깐 축절(丑節)로 들어왔다가 다시 간방과 계방으로 돌아 계방에서 다시 간방으로 오니, 이는 바로 대단한 길격이 됩니다. 입수의 봉우리의 뇌(腦)가 되는 곳에 해방은 자방의 기운을 싸고 있고 축방의 용절은 강렬한 빛을 띠고 있어 계판(癸坂)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입수한 봉우리와 뇌가 되는 곳으로 말하면, 해방은 이 자미성(紫微星)의 원국(垣局)이고 간방은 천시성(天市星)의 원국이니 자미성이 천시성을 감싸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계승하는 귀기(貴氣)가 되고, 양수(陽水)인 해수(亥水)가 자방(子方)과 축방(丑方)의 기운을 감싸서 음수(陰水)인 계수(癸水)와 배합하니 실로 부부(夫婦)가 서로 배합하는 오묘한 격이 됩니다. 청룡, 백호, 득수(得水), 파문(破門)으로 말하면, 청룡과 백호가 혈성(穴星)을 에워싼 것은 마치 자애(慈愛)로운 어머니가 자식을 껴안은 형상이고, 득수와 파문의 안팎이 합쳐진 것은 부부가 배합한 격이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명(壽命)이 무한하고 일자천손의 대길지(大吉地)가 됨을 알겠고, 혈이 왼쪽에 있는 것도 의심할 것 없이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하였으며, 채윤전은 말하기를, “대개 그 내룡이 누(樓)를 벗어나 기복(起伏)을 하면서 일보일보에 웅장한 형세로 바뀌고 굴곡을 이루면서 활동하여 용절마다 내려오면서 생기가 있어 휘장 밖으로 나왔다가 또 들어가서 스스로 기세의 존엄함을 이루었고, 둥글면서 굽고 굽으면서 둥글게 되어 서로 금산(金山)과 수산(水山)의 청귀(淸貴)함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주봉은 우뚝하게 솟은 모습이 학(鶴)이 서 있는 듯하고 혈과 봉우리는 단정하고 아담하여 형체가 신선(神仙)이 앉아 있는 듯하며, 맥(脈)은 뇌두(腦頭)를 이어 간산(艮山)의 기운이 엉기고 유혈(乳穴)이 가슴 앞에 늘어져 마침내 태택(兌澤)의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수로(水路)는 거슬러 돌아가는데 수맥은 하필 오른쪽으로 모였고 용세(龍勢)는 순하게 굴러 오는데 기운은 하필 왼쪽으로 모였습니다. 청룡과 백호가 감싸 안아 내당(內堂)의 기운을 수습하고, 여러 봉우리가 다투어 빼어나 모두 밖에서 드날리는 상서로운 기운을 바칩니다. 생방(生方)의 물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신임수국(辛壬水局)의 격을 이루고, 둥근 구슬이 앞에 있어 품 안으로 들어오는 안대가 되어 용, 혈, 사, 수가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진실로 만세 무궁한 터전입니다.” 하였다. - 이상은 여러 지사들의 설을 붙인 것이다.향교(鄕校)의 터는 윤선도(尹善道)의 기해헌의(己亥獻議)에 이르기를, “호장(戶長)의 집 뒷산 건너편에 또 새로 한 혈을 얻었으니, 이 또한 한 국내에 있고 사수(四獸)가 법수에 맞아 호장의 집 뒷산과 비교하면 우열은 비록 다르기는 하지만 쓸 만한 곳입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이 터 또한 옛사람이 논한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비로소 올라와 보았더니 과연 보통의 대지(大地)는 아니고 새로 잡은 원침(園寢)보다 조금 못할 뿐이다. 그러나 본집(本集)에 기록된 바는 매우 소략하니, 아마도 같은 국내(局內)에 아주 찬탄(讚歎)한 곳이 있어서 다른 곳은 자세히 논할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향교를 헐어 버리기 전에는 간심(看審)하기가 어려워 확실하게 말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가? 요컨대 결단코 만나기 어려운 땅이니 나를 위하여 유념해서 표지(標識)해 두었기에 신해년(1791, 정조15) 봄에 나무를 심고 봉(封)하였다. ○ 옛 향교(鄕校) 터는 헌의(獻議)에 또 이르기를, “이 원국(垣局) 안에도 성취시킬 만합니다.” 하였다. ○ 어목헌(禦牧軒) 뒤에도 또 한 둔덕이 있는데, 꽤 칭찬이 자자하다. 재혈(裁穴) 제2무릇 혈을 짚는 법은 반드시 먼저 합당한 곳을 정하여 봉표(封標)를 하고, 봉표한 뒤에 옹가(瓮家)를 세워 천중철(天中鐵)을 매달고 줄을 당겨 올리거나 내려 천중철이 닿는 곳이 곧 혈구(穴口)이다. 열 번을 반복하는 가운데에 이미 봉표를 하고 옹가를 세웠으면 혈을 짚는 것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혈장(穴場)이 넓고 좁고 길고 짧은 것은 각기 만 가지로 다르지만, 맥의 기운이 왕래하고 교합하는 것은 단지 한 선(線)뿐이다. 털끝만큼이라도 실수하게 되면 막대한 차이가 나므로 근엄하게 함이 이와 같다. 혈을 가늠하는 오묘함은 보통의 안목을 지닌 사람에게 책임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신원(新園)의 혈체(穴體)가 위는 유방(乳房)이 늘어진 형상이고 아래는 손바닥을 우러러보는 형체이니, 이것은 바로 옛사람들이 혹은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하고, 혹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는 의논이 있게 된 까닭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유두(乳頭)는 물이 내려오는 기운이 중단되지 않고 와면(窩面)은 머물러 쉬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높은 곳을 버려두고 평탄한 곳으로 나가는 쪽으로 정론이 내려진 까닭이다. 그러므로 방향을 살펴 찾아보면 정중(正中)의 혈이 명백하게 나타나니, 살(煞)과 싸우고 냉(冷)을 범하는 일은 처음부터 의심할 것이 아니다. 또 혈체는 왼쪽이 실(實)하고 오른쪽이 허(虛)한데, 이는 기(氣)가 왼쪽으로부터 오는 것이 분명하고 오른쪽으로부터 받는다는 증거이니 - 기운이 오른쪽으로부터 온다는 말이다. - 조금이라도 혈을 잃는 것은 더욱 논할 것이 없다. 때문에 내가 직접 살피지는 못하였더라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참의(參議) 윤선도(尹善道)가 총호사(摠護使)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 그 편지에 이르기를, “감여(堪輿)의 법에 비록 진룡(眞龍)의 대지라 하더라도 혹 혈을 짚는 데 착오가 있거나 혹 좌향에 착오가 있으면 길하고 흉함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니, 옛사람이 말한 바 이는 징험한 일에 관계된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수원(水原)의 산은 큰 풍수(風水)로서, 안목을 갖춘 사람이라면 감히 흠을 잡지는 못하겠지만 다만 혈을 짚을 때 보는 바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으니,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산세를 바라보고 용을 찾기는 쉽고 산에 올라 혈을 짚기는 어렵다’고 한 것이 맞습니다. 또 이르기를, ‘3년을 배워 용을 찾을 수는 있으나 10년을 배워도 혈을 짚지는 못한다’ 하였으니, 이 산이 입수(入首)하는 맥은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나, 맥 아래에 유두(乳頭)가 있고 유두 아래에 평탄한 곳이 있으며, 평탄한 곳 아래에 요[褥]가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면 그 유두는 달리고 희롱하는 기세가 그치지 않고 또 둥글게 뭉친 곳이 없으며, 청룡과 백호가 점점 낮아져서 흡족하지 못하니, 혈이 맺힌 곳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평탄한 곳은 형체가 구불구불하니 여기가 진실로 둥글게 뭉친 뜻이 있고, 청룡 백호가 흡족하여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으니 여기에 혈을 맺은 것이 분명한 듯합니다. 만약 좌향을 논한다면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정리(正理)입니다. 전설에 옥룡국사(玉龍國師)가 이 산을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격이 된다’고 하였는데, 이 용은 진실로 복룡(福龍)의 대지이고 국을 이룬 형세는 완연히 서린 용과 같고 하나의 둔덕은 앞에서 구슬이 되니, 이는 고격(古格)에서 말하는 품 안으로 들어온 안대(案對)이니, 전설의 말이 헛되지 않은 듯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둔덕은 낮고 작아 중시할 것이 못 된다고 하지만, 고격(古格)에 이르기를, ‘천 길이나 되는 높은 산이라도 평지의 한 둔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낮고 작다 하여 하찮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물건의 형상은 이치가 있으니, 지형(地形)이 물건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물건의 형상이 천지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 둔덕은 이미 용의 턱 아래 구슬을 형상한 것이니, 하필 커야만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작을수록 더욱 귀한 것입니다. 고격에서 안산(案山)을 논하기를, ‘세 봉우리는 중간의 봉우리를 대하여야 하고 두 봉우리는 공간을 대하여야 한다. 공간을 대하는 이유는 요컨대, 두 봉우리를 아울러 쓰자는 것이고 좌우가 고르고 바름을 요하는 것이다. 또 공간을 대하면 공간이 당면(當面)이 되어 해로울 것이 없고, 한 봉우리만을 치우치게 대하면 공간의 바람이 혈의 속으로 침범하여 쏠 것이니 해로움이 작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생각해 보면, 두 봉우리에서 공간을 대하는 법이 조화의 묘법에 맞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형국은 본체가 되고 음양은 작용이 됩니다, 진실로 참된 형국과 바른 좌향을 얻는다면 스스로 천연적인 자연의 묘용(妙用)에 합하므로 음양은 구구하게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 곳을 향으로 하여 좌우로 미루어 옮긴다면 어찌 음양에 맞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음양에 구애된다 하더라도 120분금(分金)이 이미 많아 참된 것을 얻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360분금에서 꼭 참된 것을 얻겠습니까.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산에 오르면서 반드시 나경(羅經)을 찰 필요는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다만 좋은 주인이 어진 손님을 대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감여가(堪輿家)에 있어 대중지정(大中至正)의 긴요한 의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평탄한 곳에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바꿀 수 없는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유두에 혈을 짚으면 평탄한 곳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구슬을 안대로 하고 공간을 향으로 하니 오히려 가하겠지만, 평탄한 곳의 진혈(眞穴)을 잃고 또 구슬을 안대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는 묘법을 잃어버린다면 대룡(大龍)의 대국(大局)이 한갓 겉치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당초 혈을 짚을 때에 힘써 다투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지 않아 말을 하더라도 유익함이 없고, 저 역시 이 산이 꼭 나라에 쓰일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다만 여러 번 소견을 진술하고 다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쩔 수 없이 꼭 이 산을 쓴다면 착오를 일으켜 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여러 술객(術客) 중에 이최만(李最晩)이 구슬을 안대로 하고 빈 곳으로 향을 놓는 것이 분명하다는 이치를 압니다. 대개 이최만은 자품과 식견이 무리에서 뛰어나고 그 아버지의 대사(大事)를 위하여 여기에 종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법술을 다 배웠고 또 큰 근본을 세워서 그 요령을 터득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하였다. - 그 뜻이 대략 평탄한 곳을 버려두고 유두(乳頭)를 취하며 구슬을 버리고 봉우리를 향하는 것을 염려하여, 앞뒤로 간곡하고 자세히 한 말이 위쪽이냐 아래쪽이냐 하는 것과 방위를 분변하는 데 있을 뿐이고 국(局)을 늘리고 줄이는 것이 적합함을 잃는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하나로 돌아간 뒤에 정혈(正穴)을 짚기 쉬움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훤할 것이다. 내가 원침(園寢)을 정할 처음에 혈증(穴證)이 분명하고 문자의 근거가 있으므로 반드시 혈은 약간 왼쪽 평탄한 곳에 정하라고 누누이 일을 감독하는 신료들에게 타일렀으니, 의당 이해하여 착오를 일으키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성몽룡(成夢龍)과 김양직(金養直)의 무리가 얕고 졸렬한 소견으로 감히 다투어 비교하는 말을 하여 듣는 자 중에 혹 그렇게 여기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성몽룡 등을 불러 꾸짖기를, “이런 길지(吉地)를 얻어 이런 대례(大禮)를 거행하는 데에는 오직 옛사람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근래에 들으니 너희 두 사람은 수원의 혈이 있는 곳에 대해 성몽룡은 축좌(丑坐)의 의논을 주장하고 김양직은 계좌(癸坐)의 의논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계좌정향(癸坐丁向)은 이미 기해의궤(己亥儀軌)에 실려 있다. 그 당시에 조금 올리느냐 내리느냐가 논란의 쟁점이 되었을 뿐인데 어찌 감히 계좌니 축좌니 하며 또 다른 의견을 내는가. 계좌는 빈 곳을 향으로 하고 구슬을 안대하는 것이니, 대저 빈 곳을 향으로 한다는 뜻은 곧 왕자(王者)는 대적(對敵)할 자가 없다는 뜻이다. 비록 다른 여러 능침에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능침을 점치는 자 중에 예부터 이런 격을 말하는 자가 많았다. 더구나 축좌를 하여 한 봉우리만을 대하게 한다면 수법(水法)으로 논할 적에 더욱 미안하게 된다. 김양직의 계좌로 하고 약간 낮게 해야 한다는 말은 그의 말이 아니고 곧 옛사람의 확정된 의논인데 너희들이 감히 다른 말을 하는가. 또 계좌의 산은 내당(內堂)은 오파(午破)가 되고 외당(外堂)은 병파(丙破)가 되는데 본래 구애될 것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조금 낮게 하면 병파에 대한 염려는 더욱 없다. 가령 성몽룡의 말과 같이 약간 올라가더라도 병파에 있어서는 불가할 것도 없다. 이 산의 원국(垣局)과 청룡, 백호는 거듭하여 문을 이루니, 내당이 오방에서 파문이 되고 외당이 병방에서 파문이 되는 것은 치우치게 폐할 수 없다. 앞으로의 응험(應驗)으로 말하면, 내파(內破)는 초운(初運)에 관계되고 외파(外破)는 다음의 운세에 관계된다. 비록 여염(閭閻)에서 이장(移葬)을 하더라도 이것은 막중하고 막대하여 매우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일이니, 마땅히 우선 초운이 길하고 이로움을 위주로 해야 한다. 초운이 길하고 이로우면 다음의 운세도 형통하여 잘될 것이다. 더구나 외파가 격에 맞음이 많음에 있어서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내당과 외당을 아울러 논하는 것은 나의 억측(臆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순풍(李淳風)의 삼분합설(三分合說)에서 근거한 것이다. 대개 용과 혈이 있으면 반드시 분수(分水)하고 합수(合水)하는 곳이 있는데, 혈 위의 물이 첫 번째 분합(分合)이 되고 내명당(內明堂)의 물이 두 번째 분합이 되며 외명당(外明堂)의 물이 세 번째 분합이 된다. 혈 위의 경계에 있는 물이 길흉의 관계가 가장 긴요하니, 지금 만약 내파(內破)를 논하지 않고 외파(外破)만을 논한다면 하나만 쓰고 둘은 버리는 탄식이 없겠는가?” 하자, 김양직이 말하기를, “약간 낮으면 계좌 오파(癸坐午破)가 분명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성몽룡이 계산 병파(癸山丙破)로 흠을 잡는 이유는 곧 구성론(九星論)을 치우치게 믿기 때문이다. 계좌의 산에 병방으로 흘러가는 물은 녹존(祿存)이 파멸되기 때문에 네가 논란하기는 하나, 만약 길격에 맞으면 파군(破軍)의 염정화(廉貞火)가 녹존보다 심하더라도 또한 꺼리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여기는 계좌에 정득 병파(丁得丙破)가 있으니, 바로 하도(河圖)의 천간(天干)이 상생하여 이루는 격에 부합된다. 비록 득수(得水)가 없다 하더라도 좋은 사(砂)가 있으면 또한 이런 격에 맞는다. 약간 위로 올려야 한다는 의논은 옛사람이 이미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땅히 낮은 곳을 써서 병파(丙破)가 스스로 오파(午破)로 돌아가게 해야 되니, 명일 평탄한 곳에 계좌정향의 오파로 놓고 살펴보아야 가하다.” 하였다. 김양직이 말하기를, “신이 60여 년 동안 혈의 아래 몇 발자국 되는 곳에서 살았으니 어찌 억측으로 우러러 대답하겠습니까. 계좌정향의 오파가 분명하고 평탄한 곳이 담요이니 곧 진혈(眞穴)입니다.” 하였는데, 내가 이르기를, “김양직의 말이 옳다.” 하였다. ○ 7월 20일(갑진)에 새 원침의 분금(分金)을 건을(乾乙)로 하고 신방(申方)의 득수에 오파(午破)로 혈을 짚어 표(標)의 중심목(中心木)을 세웠다. - 상지관(相地官)은 좌향을 써서 종이로 거듭 봉하고 도청(都廳)이 ‘신은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총호사(摠護使)는 인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사기 주발로 덮고 다음에는 도기(陶器)로 덮어 구주삼초석(九柱三草席)으로 안쪽을 두르고 삼끈으로 묶었으며, 또 십이주삼뉴바자(十二柱三杻笆子)로 겉을 싸고 왕골 끈으로 묶은 뒤 도청이 또 ‘신은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총호사가 인장을 찍었다.○ 봉표(封標)를 하려 할 때 총호사 김익(金熤) 등이 여러 지사(地師)를 거느리고 산 위로 가서 좌향과 득수(得水)와 파문(破門)을 살펴서 정하고 푯말을 세웠다. 어떤 사람이 계좌 오파(癸坐午破)를 꺼려 오방에 둑을 쌓아 막아서 정파(丁破)의 국세(局勢)를 만들려고 하니,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수법(水法)의 길상(吉相)은 하도(河圖)의 네 격(格)이 가장 좋고, 네 격 가운데에 감(坎), 리(离)가 서로 파문이 되는 것이 가장 좋다. 대개 건(乾), 곤(乾), 진(震), 손(巽), 간(艮), 태(兌)의 여섯 괘(卦)는 선천도(先天圖)에서는 서로 대(對)를 하고 후천도(後天圖)에서는 서로 어긋나 있으나, 감, 리 두 괘는 중정(中正)의 괘로서 선천도와 후천도에서 모두 상대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계(癸)와 자(子)는 동궁(同宮)이면서 감위(坎位)에 있으니, 이는 또한 계좌와 자좌가 모두 오파(午破)로 길함을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좌 오파는 참으로 아름답고 흠이 없으며 극히 귀하고 길한 격이니, 혹자가 운운(云云)한 것은 진실로 그 가리키는 바를 알 수 없다. 속방(俗方)에 자(子), 오(午), 묘(卯), 유(酉)는 천심(天心)의 파문(破門)이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이런 학설에 잘못되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건곤(乾坤)이 위치를 정하여 여섯의 자녀(子女)가 태어나고 여섯의 자녀가 배합하여 만물이 화육(化育)하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무엇이 이보다 더 길하겠는가. 분금(分金)으로 견제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본래 나경(羅經)에 대한 공부가 없으니 알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원래 꺼릴 만한 단서가 없으니 어찌 견제하는 방법을 구하겠는가. 더구나 매 방위마다 단지 다섯의 길로(吉路)가 있는데, 구갑(龜甲)과 기극(忌克)을 빼면 쓸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겸하여 나경(羅經)의 많은 반층(盤層)으로는 정미(精美)한 데까지 극진히 합치되게 할 수 없다. 설사 참으로 꺼릴 실마리가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조화를 마음대로 하고 뜻대로 손을 놀리는 신통(神通)한 술법을 가진 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꺼릴 것도 없고, 그런 사람도 없지 않은가. 오방의 파문에 건산(乾山)이면 팔요(八曜)가 되고, 진산(震山)이면 파군(破軍)이 되며, 손산(巽山)이면 염정(廉貞)이 되고, 태산(兌山)이면 녹존(祿存)이 되니 모두가 불리하고, 계좌(癸坐)로 하면 하나도 꺼릴 것이 없어 대격(大格)에 맞는다.” 하였으므로, 이에 세속 지사(地師)들의 말이 비로소 중지되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급히 총호사(摠護使) 등에게 하유하기를, “혈을 짚은 곳에 이미 봉표를 하였다고 하는데, 과연 왼쪽으로 밀어 약간 아래로 하라는 말을 적용하였는가? 앞으로는 혈의 깊이 한 가지만이 마음을 다해야 할 일이다. 일전에 김양직(金養直) 등에게 자세히 말하였고, 어제도 이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특별히 한 사람을 보냈다. 그러니 경들은 ‘영조척(營造尺) 10자는 우선 논할 것도 없고 토규(土圭) 10자 또한 너무 지나치다’는 말을 반드시 들었을 것이니, 경들은 얕게 파야 하고 깊게 파서는 안 되며, 아래로 내릴지언정 위로 올리지 말라는 뜻을 더욱 염두에 두어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미리 살펴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30일(계미)에 봉표(封標)를 걷어치우고 겉의 흙을 제거하여 옹가(瓮家)의 기지(基址)를 헤치고서 몇 자를 파도 진토(眞土)가 나오지 않았다. 대체로 처음 봉표를 할 때에 약간 오른쪽으로 밀어야 한다는 의논이 크게 제기되었다. 내가 비록 여러 번 전교를 내리면서 옛 설을 끌어다가 지금의 상황을 규명하였지만, 지사(地師)들은 오히려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여 말로는 왼쪽으로 밀었다고 하나 그 실제로는 정혈(正穴)과의 거리가 자리 하나의 넓이 정도 떨어졌던 것이다. 내가 미처 보고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인(匠人)을 감독하는 신하들도 깨달아 살피지 못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혈 앞의 둔덕이 오른쪽 가에 있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총호사는 서울에 있었으므로 도감 당상(都監堂上)이 그 상황을 대언(對言)하기를 청하기에, 내가 비로소 봉표가 오히려 오른쪽에 가까운 것을 알고 총호사 김익(金熤)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등에게 명하여 여러 당상관과 함께 다시 가서 살펴보고 약간 왼쪽 평탄한 곳에 가서 분금(分金)을 놓고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 ○ 9월 3일(병술)에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 박명원, 도감 도청(都監都廳) 이만수(李晩秀)가 치계(馳啓)하기를, “신 등이 듣건대 봉표하던 처음에 북관(北關) 사람 주남술(朱南述)이 혈이 있는 곳에 올라 위아래로 살펴 용을 찾고는 봉표가 오른쪽으로 치우쳤다고 하였는데 흙을 팔 때에 정혈이 약간 왼쪽의 조금 아래쪽임을 알았습니다. 주남술은 본래 산을 보는 안목을 갖춘 사람이고 특히 혈을 짚는 데 정밀하다고 하니, 그를 혈을 찾는 데 함께 참여하게 하소서.” 하여, 즉시 역마로 부르도록 명하였다. ○ 4일(정해)에 처음으로 정혈(正穴)을 찾았다. 총호사 김익 등이 치계하기를, “봉표 왼쪽 가에서 그대로 자리 한 닢 넓이 남짓한 곳인데, 겨우 겉의 흙을 두어 치가량 긁어내자 진토(眞土)가 나왔습니다. 빛은 순황색(純黃色)을 띠어 길한 기운이 흙에서 비쳐 오르고 토질은 가늘고 기름기가 있으며 차지니, 정말로 이른바 지방(脂肪)을 자른 듯 옥을 끊은 듯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토란(土卵) 모양과 같은 것이 있어 파기만 하면 나오는데 그 빛이 더욱 윤택하고 자황색(紫黃色)을 띠며 금색의 실 무늬가 확실하니, 이는 지가(地家)에서 말하는 상품의 토색입니다. 대저 용뇌로부터 아래로 혈순(穴脣)의 앞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런 흙의 맥(脈)인데, 차차 파 보자 용뇌 아래의 유두(乳頭)가 아래로 늘어져 인후(咽喉)가 생기고 앞을 향하여 점점 펼쳐져 혈이 맺힌 곳에 이르러 둥근 둔덕이 완연하니, 참으로 계란이 노른자위를 싼 것과 같았습니다. 옛사람이 말한 유두 아래 평탄한 곳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금에야 참된 정혈(正穴)을 얻었으니 감독하는 여러 신하로부터 역부(役夫)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춤을 추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척(咫尺)의 자리 한 닢 사이에서 사람들이 꿰뚫어 보지 못하고 처음에는 속된 안목으로 신중하게 여겼다가 이제야 진혈을 찾았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바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 5일(무자)에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 박명원 등이 주남술(朱南述), 이지원(李祉源), 박대량(朴大良), 김양직(金養直), 성몽룡(成夢龍), 채윤전(蔡潤銓) 등을 거느리고 다시 혈이 있는 곳을 살펴보고 치계(馳啓)하기를, “정혈(正穴)이 정해짐에 온 도감(都監)과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라고 하며 하늘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주위가 모두 이미 의결되었으며, 상하(上下), 광협(廣狹), 곡장(曲墻), 상설(象設)은 작작하게 여유가 있으니 너무나 기이한 일입니다. 주남술과 이지원 등은 낯선 사람끼리 서로 만나 의논이 똑같이 서로 부합되었으니, 앞으로 봉표를 하고 금정(金井)을 팔 때에 서로 어긋나는 논란이 없을 것입니다. 내일은 여러 지사(地師)로 하여금 주봉으로부터 용절마다 패철을 띄워서 내맥(來脈)의 분금(分金)을 정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신과 각신(閣臣), 경재(卿宰)를 불러 도감이 봉하여 올린 토색(土色)과 토란(土卵)을 보이면서 이르기를, “진토(眞土)를 얻은 뒤에 기뻐서 뛸 듯하였고 앉아서 아침을 기다렸다가 경들에게 꺼내어 보인다. 대저 처음에 약간 오른쪽으로 한 것은 사람이 한 일이고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며, 오늘 이 진혈을 얻은 것은 곧 하늘이 주신 것이고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 6일(기축)에 지방관(地方官) 조심태(趙心泰)가 치계하기를,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 박명원이 여러 지사들과 함께 주봉으로부터 분금(分金)을 놓아 중심의 표목에까지 이르렀고, 또 주봉과 과협(過峽)에 올라 인후(咽喉)의 용절을 찾고 30여 절을 지나서 두루 사방을 살피고, 이어 산의 사주(四柱)를 만들고 이르기를, ‘계해, 정사, 병자, 갑오다’ 하였으며, 금성위는 윤도(輪圖)를 가지고 총호사는 주남술(朱南述)과 같이 살펴 정하였는데 한결같은 말로 흡족해하며 백 가지가 순조롭게 이루어지니, 경사스럽고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 7일(경인) 진시(辰時)에 처음과 같이 봉표하고 총호사 김익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금성위 및 여러 지사와 함께 다시 살피고 의논하여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정혈(正穴)을 정한 뒤에 봉표를 하고 바자(笆子)를 쳤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역사를 시작한 날로부터 봉표 안에 3마리의 금색 개구리가 나왔으니, 술사(術士)들이 모두 말하기를, ‘땅속에 생물이 있으니 크게 길할 조짐이다’고 합니다.” 하였다. ○ 사용(司勇) 주남술(朱南述)이 분금론(分金論)을 올렸는데, 그 의논에 이르기를, “과협(過峽)이 있는 곳으로부터 보룡법(步龍法)으로 추보(推步)해 보니, 과협이 있는 곳은 신유좌(辛酉坐)의 신묘향(辛卯向)이고 - 미방, 임방, 계방이 득수(得水)가 된다. - 묘방으로부터 행한 기운이 정유(丁酉)가 되고 정유로부터 행한 기운이 주봉에 이릅니다. 그리고 경자와 경오의 행룡은 - 갑방과 손방이 득수가 된다. - 임자와 임오의 용절에 이르러 - 묘방과 경방이 득수가 된다. - 병인에서 인후(咽喉)를 만들고, 병신의 행한 기운이 - 을방과 신방(辛方)이 득수가 된다. - 몇 굽이의 용절을 지나 경자와 경오에서 맴돌다가 신사와 신해에서 봉우리를 이룹니다. 그리고 을해와 을사의 행룡은 - 간방, 유방, 곤방이 득수가 된다. - 봉우리 밑에서 태식(胎息)을 하고, 임방의 한 용절은 임방 밑에서 계방의 한 용절과 간방의 한 용절이 되고, 간룡이 후뇌(後腦)의 금성(金星)이 되어 간방의 머리로부터 2개로 나뉘어 - 오른쪽은 곤미(坤未)의 행기(行氣)가 되고, 왼쪽은 해자(亥子)의 식기(食氣)가 된다. - 계좌의 혈이 되었습니다. 금성(金星)의 뇌두(腦頭)로부터 금국(金局)의 4ㆍ9수(數)로 재서 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배를 더하여 18자[尺]가 됩니다. 이 18자를 기준하여 좌청룡과 우백호가 각각 18자이니, 이 청룡과 백호 사이의 각각 18자를 합친 36자 내에 3으로 나누는 법을 쓰면 왼쪽은 양기(陽氣)의 정혈이 되기 때문에 13자로 제하고 오른쪽은 음기(陰氣)의 허국(虛局)을 9자로 제하니, 요약하면 14자가 되어 그것으로 정혈을 짚어 정하게 되었습니다. 산을 파는 일은 간중(艮中)의 신축 정기(正氣)로는 무인(戊寅)의 정간(正榦)을 꿰뚫고 혈의 중심인 곳으로 들어가며, 무인의 간기(艮氣)로 혈의 왼쪽 귀 1자 6치에 들어가게 하고, 분금(分金)은 병자ㆍ병오로 하였습니다. - 임(壬)이 3푼이고 병(丙)이 7푼이다. - 임은 정과 배합하고 병은 신과 배합하니 임3 병7 하여 합계가 3에 7을 곱해서 21이 되는데, 임의 본수(本數)를 제하면 18이 됩니다.” 하였다. 김양직(金養直), 박대량(朴大良) 등이 말하기를, “주성(主星)의 건산(乾山)이 해방에서 와서 임계방으로 돌고 축방에서 받아 무인으로 바르게 하여 간방에서 입수(入首)하였으니, 괘(卦)의 예(例)에 있어서는 지산겸(地山謙)의 오효(五爻)가 됩니다. 해방은 자손이 세상을 유지하는 격인데 감(坎)과 이(离)가 교합하고 간(艮)과 태(兌)가 배합하는 이치를 취하여, 계좌정향으로 하고 봉침(縫針)으로 분금(分金)을 병자ㆍ병오로 하였습니다. 병은 간괘(艮卦)가 되고 자(子)는 생기방을 격(隔)하였으며, 계좌의 계는 계록(癸祿)이 자방에 있다는 의미로 명궁(命宮)에 이롭고 신방과 경방이 득수(得水)가 되고 오방이 파문이 되니 병자(丙子)의 삼합(三合)이 되고 천을귀인(天乙貴人)이 자방에 있습니다. 병자는 관(管) 3도(度)에서 여(女) 1도를 쓰니 현귀(顯貴)의 땅이고, 병오는 관 3도에서 유(柳) 4도를 쓰니 문창(文昌)의 위치입니다. 분금하여 중부괘(中孚卦)를 얻었으니, 경자년에 자손이 투출(透出)하는 일은 계좌의 생방(生方)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생문(生門)ㆍ역마(驛馬)ㆍ귀인(貴人)ㆍ은재(隱才)는 곤궁(坤宮)에 이르고, 휴문(休門)ㆍ병기(丙奇)ㆍ문서(文書)는 이궁(离宮)에 이르며, 개문(開門)ㆍ정록(正祿)은 손궁(巽宮)에 이르고, 을기(乙奇)는 감궁(坎宮)에 이르며, 금성(金星)ㆍ수성(水星)ㆍ일(日)ㆍ월(月)의 네 길성(吉星)은 진궁(震宮)에 이르고, 정기(丁奇)ㆍ귀인(貴人)ㆍ관성(官星)은 간궁(艮宮)에 이르며, 자손(子孫)은 태궁(兌宮)에 이르니 태궁은 곧 겸괘(謙卦)로 세상를 유지하는 방위이다.○ 8일(신묘)에 특별히 총호사와 금성위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형국과 음양은 서로 표리(表裏)가 되니 편벽되게 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두 가지에서 그 경중(輕重)을 논한다면 형국은 본체가 되고 근본이 되며 음양은 작용이 되고 끝이 되니, 어떻게 본체를 버리고 작용을 구하겠으며 근본을 버리고 끝을 잡을 수 있겠는가. 원소(園所)의 체세(體勢)는 서린 용이 구슬을 희롱하는 것으로 형국을 이루었으니, 만약 구슬을 안대(案對)로 하는 뜻을 잃지 않고 겸하여 분금(分金)의 법에 맞게 한다면 모두 진실로 좋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분금에만 구애하고 조금이라도 구슬의 안대에 대하여 실수를 한다면 하늘이 만든 형국을 어기게 되고 빈주(賓主)의 정의(情義)를 잃게 되는 것이니, 아무리 나경(羅經)의 묘용(妙用)을 얻는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더구나 안대를 취하는 법은 그 안대의 정중(正中)에만 맞추려고 할 것이 아니라 좌우로 참작하여 추이(推移)하여 써야 한다. 그리고 또 매 방위 위에는 각기 5자(字)가 있는데, 만약 구슬의 중앙이 분금의 길한 도수에 맞지 않는다면 구슬의 좌우 각(角)의 길자(吉字)와 만나는 곳으로 하여 마땅히 흉한 곳을 피하고 길한 곳으로 가야 한다. 만약 구슬이 작아 다만 한 글자만 만나고 또 길한 도수에는 맞지 않는다면, 차라리 분금을 폐하더라도 구슬의 확실한 안대를 잃게 해서는 안 된다. 대저 분금의 법은 지극히 미묘하여 지금 사람들 중에 이해하는 자가 드물다. 더구나 120의 간지(干支)와 360의 도수(度數)를 어떻게 일일이 맞게 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그렇다면 어찌 아득하여 보기 어려운 이치를 지나치게 믿어서 분명하여 보기 쉬운 안대의 구슬을 잃게 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십분 공경을 다하고 살피기를 다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또 혈의 깊이로 말하면, 지금 진토(眞土)를 얻은 것은 하늘이 준 것이다. 토색이나 토성으로 보더라도 더없이 좋은 품질이니, 칭찬하고 감탄하려고 하더라도 형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내맥(來脈)이 그다지 넓지 않고 혈이 있는 곳에 이르러 비로소 풍만하게 뭉쳐지고 혈이 있는 곳을 지나면 또다시 작아진다. 다만 겉의 흙을 파헤치면 혈의 모양이 저절로 드러나는데 이는 달걀이 노른자위를 싸고 있는 형상이다. 단지 진토(眞土)가 엉긴 곳을 짚어 중심으로 혈을 파면 상하 좌우는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으나, 깊이에 그 적당함을 얻기가 가장 어렵다. 7자쯤을 기준 삼기로 이미 약속을 정하였지만 그때에 가서 더 파거나 덜 파는 것은 요컨대 알맞도록 할 따름이다. 만약 혹시라도 7자에 이르지 않고도 황색이 옅어지려고 하면 곧 중지하여야 하니, 대개 누런 곳을 뚫고 지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일 중심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얕게 할지언정 깊게 할 것은 없으니, 한 번 파고 뚫을 적마다 항상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 치 한 치 파 내려가면서 솜씨만 믿고 방심하지 말도록 하라. 혹 토색이나 토성이 깊게 팔수록 더욱 단단하고 단단할수록 누런빛이면 7자가 지나더라도 또한 무방하니, 이 두 가지의 말은 내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이미 의논하여 정한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금정(金井)을 파는 길일이기에 초조한 가운데 있다. 촛불을 밝히고 거듭 유시하니 경들은 마땅히 내 뜻을 잘 알아서 시행하라.” 하였다. ○ 이보다 먼저 혈(穴)의 깊이를 서운관(書雲觀)에서 10자로 정하였는데, 논란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성요(星曜)의 법수와 촌백(寸白)의 법수를 적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혈의 깊이는 먼저 산 국세와 기맥(氣脈)으로 정해야 하고 다음으로 성요와 촌백의 법수로 그 길흉을 참작해야 하는데, 지세(地勢)를 버려두고 법수만을 따르는 것은 불가합니다. 지금 10자로 정한 것은 너무 깊을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옛사람들이 깊이를 참작하여 척수(尺數)를 정하는 법이 네 가지가 있으니, 양씨(楊氏)는 가까운 계곡으로 정하였고, 유씨(劉氏)는 경내의 수위(水位)로 정하였으며, 채목당(蔡牧堂)은 사방 산세의 고하로 정하였고, 요금정(廖金精)은 성훈(星暈)으로 헤아렸는데, 음양의 법이 비록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요컨대 생기(生氣)를 타는 것만은 동일합니다. 서시가(徐試可)가 말하기를, ‘양씨의 법은 가까운 과협(過峽)이 있는 농룡(隴龍)에 시행하면 합당하지만, 지룡(支龍)의 맥이 가까운 곳에 중지되거나 가까운 과협이 없는 높은 산에 이르러서는 또한 근거하기가 어렵다. 유씨의 법은 높은 산 위 험준한 형체에 사용하면 그르치게 되지만, 밭두둑처럼 작은 맥이 층층으로 나뉘고 농룡이 앉은 형체를 이룬 곳은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채목당의 법은 변괴가 심한 형국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정상의 산세에 사용하면 적당하다. 요금정의 법은 용의 입과 코가 있는 곳에 사용할 것이고, 혹시라도 경작(耕作)을 한 땅이라면 부합되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네 가지의 법과 서씨(徐氏)의 말을 근거로 하여 원침(園寢)의 산세와 지형에 적절하게 맞춘다면, 좌혈(坐穴)의 뒤는 곧 높은 산이고 가까운 과협이 없으며 또 밭두둑과 같은 작은 맥이나 농룡 형체가 아니므로 과협을 기준으로 정한다거나 계합(界合)을 기준으로 정하는 법은 지금 준용할 바가 아닙니다. 그리고 유맥(乳脈)은 거칠지도 않고 가늘지도 않으며 와면(窩面)은 볼록하지도 않고 오목하지도 않으며, 청룡과 백호의 높고 낮음이 극히 화평하여 서씨(徐氏)의 이른바 정세(正勢)와 반침 반부(半沈半浮)한다는 뜻에 합당하니, 마땅히 채목당의 법을 쓰고 요금정의 비결로 참작하여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게 중정(中正)의 혈을 파야 할 것입니다. 대저 8, 9자 이상은 깊은 데 속하고 5, 6자 이하는 얕은 데 속하니, 이것이 너무 깊게 파는 염려가 있는 까닭입니다. 대체로 마땅히 얕아야 하는데 깊게 파면 지기(地氣)가 위로 지나가고, 깊어야 하는데 얕게 파면 지기가 아래로 지나가니, 얕고 깊음을 적절하게 해야 풍수(風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꼭 맞는 법수를 잃고서 만약 저것이 이보다 낫다고 논하는 경우라면 차라리 얕게 하는 잘못을 범하는 편이 낫습니다. 한 가지 비유할 것이 있으니, 그릇에 물을 담아 그릇을 불 위에 두면 물은 곧 따뜻하게 됩니다. 반대로 불을 그릇 위에 두면 물은 차가울 것이니, 그 이치가 매우 분명합니다. 땅속의 기맥은 본래 살펴서 알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참되게 알고 확실히 보아 털끝만치도 틀리지 않고 한 푼 한 치를 찾아 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신중히 하고 또 신중히 하여 얕고 깊은 중간을 헤아려 취해야 ‘깊고 얕은 두 가지의 중간을 쓰면 꼭 맞지 않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뜻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성요(星曜)와 촌백(寸白)의 법수에 맞지 않는 것이 구애된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는바, 척수(尺數)는 기맥(氣脈)의 부침(浮沈)에 따라 헤아려 정하고 성요와 촌백은 치[寸]로 계산하여 길하게 맞출 것이니, 이것이 변통하는 활법(活法)이 됩니다. 그리고 채씨(蔡氏)의 사방으로 에워싼 산을 살피는 법은, 양혈(陽穴)은 건괘(乾卦)에 해당하는데 사방의 산이 혈의 본신과 높이가 같으니 이괘(離卦)의 형상입니다. 이괘의 중획(中畫)은 음혈(陰穴)이 되니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공(廖公)의 성훈법(星暈法)은, 곧 호굴(胍窟)은 당연히 깊어야 하고 식돌(息突)은 당연히 얕아야 하는 것인데, 원침(園寢)의 혈성(穴星)은 평탄하니 얕지도 않고 깊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이는 모두 옛사람의 지극한 법이고 중요한 의논이니, 이를 버려두고 달리 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또한 한결같이 고집만 하여도 안 되기 때문에 토색(土色)의 변하는 것을 보고 즉시 파기를 중지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직 그때에 가서 적절하게 하는 데 달려 있고 미리 척수의 한도를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겉의 흙도 지나치게 제거해서는 안 되며 풀뿌리만 제거하는 정도이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 9일(임진)에 새 원침(園寢)에 옹가(瓮家)를 만들고 봉표(封標)를 하였다. - 황토를 혈(穴)이 있는 곳에 평평하게 펴고 사면을 단단하게 쌓아, 곧게 다듬은 나무 6개를 옆으로 놓고 면포의 휘장으로 덮고 12곳을 단단히 봉하고 나서 봉표에 서사관(書寫官)이 ‘신은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도청(都廳)이 인장을 찍었다. 옹가(瓮家)의 춘연(春椽)이 안으로 모아진 곳에 전판(翦板) 두 끝을 매달고 전판 중앙에 둥근 고리를 붙이고 붉은 실을 세 겹으로 꼬아 가운데를 꿰어 끈의 끝에는 쇠를 달아 늘어뜨려 원침의 정중(正中)에다 봉하였다.○ 총호사 김익(金熤)이 치계하기를, “지가(地家)가 분금(分金)을 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대체로 흉기(凶氣)를 소멸시키고 길기(吉氣)를 받아들이며 인력으로 신의 조화(造化)를 빼앗는 묘용(妙用)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지사(地師)들의 얕은 지식으로 어찌 옛사람의 묘용을 꿰뚫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극히 조심스럽고 귀중한 곳의 주산과 안대를 살펴 좌향을 정할 때 이 법을 완전히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지사들이 충분히 검토하여 윤도(輪圖)의 방위를 고찰하고 옛 책의 법례를 원용하여, 간략하게나마 공허한 곳을 피하며 길한 곳으로 나가는 뜻에 맞추어 큰 둔덕의 구슬과 쌍봉(雙峯)의 공간이 저절로 정중(正中)의 방향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 지사들이 인력으로 돌려 옮기는 것이 아니고 실로 하늘이 좌향을 만든 것이니,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맞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혈(神穴)의 깊이에 대하여는 이미 전후의 연교(筵敎)를 받들었고 지금 또 이 특별한 유시(諭示)를 받들었으니, 신들은 삼가 마음을 다하여 지사들에게 신칙하여 한 번 팔 때라도 방심하여 지남이 없게 하고 한 치의 사이라도 다시 살펴 차라리 얕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너무 깊게는 파지 않아 우러러 성상의 심려를 끼치는 일은 없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 10일(계사)에 금정(金井)의 터를 다듬었다. ○ 11일(갑오)에 정광(正壙)에 금정기(金井機)를 안치하였다. - 안의 길이는 10자 6치이고, 퇴광(退壙)의 길이는 1자를 감하고, 내광(內壙)은 7자 2치 5푼이고, 나무의 넓이는 8치이고 두께는 6치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썼다. 혈의 깊이는 주척(周尺)으로 9자이니 금정기의 아래 모퉁이를 한계로 하였다. - 총호사 김익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금정의 정위치 중앙에 먼저 겉의 흙 한 자를 걷어 낸 뒤에 5치가량을 파니 토성(土性)이 가늘고 윤택하고 차지며 단단한데, 토색은 순황색으로 윤기가 나고 깊이 팔수록 더욱 기이하여 지사들이 모두 처음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12일(을미)에 금정의 바깥 4면(面)을 보토(補土)로 다듬었다. ○ 16일(기해)에 총호사 김익 등이 치계하기를, “광중을 파서 5자 8치쯤 이르니 토성(土性)이 더욱 차지고 윤기가 나며 토색은 순황색이면서 오색의 반문(斑文)을 머금고 금모래의 빛을 띠었습니다. 여러 지사들의 말이 주척으로 9자를 한계로 하고 파면 깊고 얕음이 적중하다고 하였는데, 신들이 보기에도 그렇게 여겨 혈의 깊이는 주척으로 9자로 하기로 정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틀 후에 김익이 서울에 올라와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혈의 깊이도 이미 정하였고 이어 다듬는 일도 시작하였습니다. 토색은 팔수록 좋고 4자 뒤에는 토색이 2자에 비하여 더욱 좋았으며, 광중의 밑에 이르니 오색을 구비하고 정황색(正黃色)이 가장 많았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구슬을 안대로 하여 빈 곳으로 향을 놓게 하니, 빈 곳으로 향을 놓은 밖에 또 몰래 읍(揖)을 하는 관성(官星)이 있다고 하던데 과연 그렇던가?” 하자, 김익이 아뢰기를, “과연 성상의 하교와 같았습니다. 또 청룡이 셋이 있고 백호가 셋이 있는데, 모두 원신(元身)에서 나왔고 거듭하여 감싸고 둘러 있으니, 이는 이미 골육(骨肉)의 청룡과 백호로, 달리 만들어진 청룡 백호의 좋은 것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하였다. 이상은 혈(穴)을 짚는 시말(始末)과 일을 감독하는 대개를 쓴 것이다. 새 원침(園寢)에 진혈(眞穴)과 진토(眞土)가 있음을 내가 어떻게 억측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멀리는 옥룡자(玉龍子)의 유기(遺記)가 있고 가까이는 윤고산(尹孤山)의 정론(定論)이 있었으니, 옥룡자는 신통한 지사이고 윤고산은 지혜로운 안목을 지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는 당(唐) 나라 일행(一行)의 상지법(相地法)에서 시작하고 채목당(蔡牧堂)의 금정을 여는 법을 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 취득함이 기이하고 다행하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함이 상세하고도 주밀하여 지극한 보배를 받들듯 실추시킬까 두려워하였고, 신령한 택조(宅兆)를 엶에 부응(符應)을 징험하였으니, 세속의 지사(地師)와 일반 사람들이 지나치게 조심하여 온 조정을 놀라게 하고 여러 사람을 놀라고 미혹되게 할 줄을 어떻게 헤아렸겠는가. 불씨(佛氏)가 말한 “일시에 제천(諸天)이 모두 놀라고 의심하였다.”라는 것이 바로 그날의 광경이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하늘이 나의 충정을 일깨워 굳게 고집하며 흔들리지 않게 하여 몇 발자국 사이에서 진정한 토색이 처음에는 숨겨졌다가 끝내 드러나서, 이틀 사이에 위아래 사람들이 먼저는 울다가 뒤에는 웃었으니, 이는 하늘이 한 일이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졌겠는가. 천천히 또 생각해 보건대, 조화가 참여하는 모든 천하의 일에는 원래 순하게 이루어지는 이치가 없다. 때문에 용광로의 쇠를 백 번 달구려면 바람과 불의 더욱 고도의 정밀함을 거쳐야 하고, 솥에 있는 단약(丹藥)을 아홉 번 달이려면 고난을 거쳐야 이루어진다. 지난번에 일을 맡은 신하들이 내가 직접 내린 뜻을 잃지 않고 처음부터 잘못 파는 일이 없었더라면, 시종 아끼고 감춰 두었다가 때를 기다려 드러내는 뜻을 어떻게 징험할 수 있었겠는가. 그 의심나고 염려됨은 악몽(噩夢)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 같고, 기쁘고 다행스럽기는 흐린 먼지를 완전히 씻은 것과 같다. 일을 꾀함에 있어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나 또한 조물주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니, 대지(大地)의 밝은 증거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 원침에 대한 점괘의 결과를 말하기를, “산수의 성정(性情)은 온전히 만두(巒頭)에 있는바, 금성(金星)의 만두로부터 아래로 18자에 이르기까지 왼쪽도 18자이고 오른쪽도 18자이니, 모두 합하면 36자입니다. 왼쪽에서 13자를 제하고 오른쪽에서 9자를 제하면 유두(乳頭)가 엉기고 간방의 기운이 아래로 늘어져 구슬의 정기가 턱 아래에서 정방(丁方)으로 매달려,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으니, 이는 실제로 정혈(正穴)의 이치입니다. 또 36은 천도(天度)에 응하고 18은 지지(地支)에 응하여 천지의 배합과 일월의 서로 비춤과 성신(星辰)이 정기를 모아 용기(龍氣)가 자수(子水)로 관통하는데, 자(子)는 바로 9의 수치이며 9는 양(陽)의 극치여서 밖으로 나타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9개월 안에 꼭 자손의 조짐이 있을 것인바 나라의 큰 경사입니다. 또 괘체(卦體)로 논하면 지산겸괘(地山謙卦)가 되는데, 겸괘의 5효는 바로 복덕(福德)으로 세상을 유지시키는 것이니, 이로 미루어 보면 나라의 경사를 반드시 불러올 것인바 실로 억만년의 끝없는 터전입니다. 또 미방(未方)의 내고(內庫)와 병방(丙方)의 손사수(巽巳水)는 비유컨대 일용의 그릇과 같으니, 하나는 노인성(老人星)이고 하나는 사문성(赦文星)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의 수명이 끝이 없고 대대로 요순(堯舜) 같은 정치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건방(乾方)에는 주봉이 높이 솟아 있고 손방의 봉우리가 뾰족하게 빼어나 병자(丙子)의 임기(壬氣)를 내조(內助)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30개월 내에 반드시 두 번 나라의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간룡(艮龍)이 금기(金氣)를 띠니 일자천손(一子千孫)의 땅이고, 여러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았으니 수복(壽福)이 함께 온전한 격입니다. 내당(內塘)의 금양(金羊)이 계갑(癸甲)의 영기(靈氣)를 받으니 수치가 19에 이르러 꼭 자손의 경사가 있을 것이며, 청룡이 몸을 도와 손방으로부터 안으로 병자혈(丙子穴)과 응하니 해(亥), 자(子) 두 해에 반드시 경복(慶福)의 상(象)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25일(무인)에 땅을 파는데 용이 병방과 자방에서 들어왔으니, 요금정(廖金精)의 의논에 3년에 발복(發福)한다는 말과 우연히 부합되고, 미고(未庫)의 물은 계자(癸字)와 더불어 탐랑(貪狼)과 식신(食神)이 상생(相生)하여 수성(壽星)으로 돌아가 조화의 육담(六談)을 이루었으니, 이달이 지나고 다음 달에는 자손의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산수의 성정은 온윤(溫潤)함이 크게 뚫려 사시(四時)와 함께 봄에 양기가 생기며, 두성(斗星)에 대한 설명은 일자천손이 계속 이어 만대에 이르고, 또 청룡이 몸을 돕고 손방의 봉우리가 밖에서 호위하여, 자손이 영특하고 문장이 뛰어나며 덕이 있는 군자가 대대로 이어질 것이니, 이는 지가(地家)의 큰 경사입니다. 그리고 산의 성품과 물의 정이 음과 양으로 배합하여 하늘과 함께 기운을 돌리고 기혈(氣血)이 풍만하니, 해묘미(亥卯未)가 국(局)을 이루는 해와 신자진(申子辰)의 기(氣)가 합하는 달에 반드시 먼저 효험이 있어 복을 더하는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혈을 만드는 괘(卦)의 예가 겸괘(謙卦) 의 육오(六五)이니, 복덕(福德)으로 세상을 유지하리라는 것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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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을 누가 정밀하게 구명할 수 있으랴 / 祕誰能考究精 청룡 줄기 산 빛이 꿈속에도 밝게 빛나네 / 靑龍山色夢中明 당시에 그 자리 잡은 뜻이 깊기도 하여라 / 當時卜築非無意 오늘 아침 당 북쪽에 분묘가 덩그렇구려 / 堂北今朝馬鬣橫 만고에 영웅치곤 포부를 다 펴지 못하나니 / 萬古英雄未了心 헤아리자면 강해도 그보다는 깊지 못하리 / 算來江海亦非深 시중은 칠십이요 아들은 황각에 들었고 / 侍中七十兒黃閣 또 온전히 돌아감은 고금에 드문 일일세 / 又得全歸罕古今세속 좇는 내 문장은 너무나도 광대 같은데 / 殉世文章太類俳 나이 겨우 오십 넘어서 이미 시들어버렸네 / 年過知命已摧頹 공연히 덕행 흠모해 애써 바라만 보았을 뿐 / 謾歆淸德勞瞻望 지척에 있는 신경을 왕래 한번 못 했네그려 / 咫尺新京莫往來
[주D-001]비록(祕錄) : 지리(地理)에 관한 도참서(圖讖書), 즉 도선(道詵)의 《비기(祕記)》를 말한다.[주D-002]시중(侍中)은 …… 일일세 : 황각(黃閣)은 재상(宰相)이 집무하는 관서(官署)를 말하고,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은 곧 《예기》 제의(祭義)에 “부모가 온전히 낳아주셨으니, 자식이 온전히 돌아가야만 효도라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육체를 훼손시키지 않고, 자기 몸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만 온전히 했다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다.[父母全而生之 子全而歸之 可謂孝矣 不虧其體 不辱其身 可謂全矣]”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말한 시중은 바로 위의 〈경 시중(慶侍中)에 대한 만시(挽詩)〉에 나온 경복흥(慶復興)을 가리킨다. 경복흥의 나이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가 우왕(禑王) 6년(1380), 좌시중(左侍中)으로 죽었을 때, 당시 신경(新京)이 있던 백악(白嶽)의 근처, 즉 장단군(長湍郡)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마을 뒷산에 그를 장사 지냈고, 또 그의 두 아들 경보(慶補), 경의(慶儀)가 당시에 모두 높은 관직에 있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목은시고 제17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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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韓山)의 숭정산(崇井山)은 내가 태어나서 2세 때에 부모(父母)가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8세 이후에 있었던 곳이고, 교동(喬桐)의 화개산(華蓋山)은 14세 때에 있었던 곳이며, 한양(漢陽)의 삼각산(三角山)은 17세 되던 해 봄에 있었던 곳이고, 견주(見州)의 감악산(紺嶽山)은 그해 가을에 있었던 곳이며, 청룡산( 靑龍山)은 그해 겨울에 있었던 곳이며, 서주(西州)의 대둔산(大芚山)은 18세 때에 있었던 곳이고, 평주(平州)의 모란산(牡丹山)은 19세 때에 있었던 곳이며, 중국의 국자감(國子監)은 무자년(1348, 충목왕4)부터 시작하여 신묘년(1351, 충정왕3)에 마쳤는바, 그 사이에 어버이를 뵈러 귀국한 적이 있었다. 일곱 산[七山]을 먼저 쓰고 태학(太學)을 나중에 쓴 것은 바로 일곱 산에서의 성공(成功)을 거두어 태학에 진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왜 하는고 하면 자손(子孫)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잠깐잠깐 붙여 있었던 승사(僧舍)도 또한 적지 않으나, 그 승사들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잊어서가 아니라, 학업(學業)을 이루고 못 이루는 데에 관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명산 승경(名山勝境)이 인물을 배양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고금의 사람들이 칭도(稱道)하여 마지않았으므로, 내가 그 때문에 이것을 노래하여 장차 악부(樂府)에 올려서 무궁한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니, 당세에 시(詩)를 잘하는 이는 따라서 감탄하는 일이 혹 있으리라. 한산의 숭정산엔 소나무에 구름 걸쳤고 / 韓山崇井松浮雲 교동의 작은 섬엔 속세의 들렘이 없었네 / 喬桐小島無塵喧 삼각산은 하늘에 꽂혀 암학이 우뚝하고 / 三峯揷天聳巖壑 감악산은 높이 솟아 장단을 내려다보네 / 紺嶽高壓長湍村 청룡산 얼음 절벽은 오두막을 썰렁케 하고 / 靑龍氷崖小屋冷 서림의 대둔산은 연기 낀 창이 어둑했지 / 西林大芚煙窓昏 모란산은 옛 전쟁터를 굽어보고 있는데 / 牡丹俯視涿鹿野 외론 구름 지는 해에 천원이 희미했었네 / 孤雲落日迷川原 함께 글 읽던 동료들은 모두가 호걸이라 / 同游儕輩盡豪傑 광대한 학문 세계에 근원을 궁구했는데 / 學海浩瀚窮淵源 서로 보아서 착하게 연마해도 부족하고 / 相觀而善尙不足 높이 날아 봤자 뱁새는 울을 넘을 뿐이었네 / 高飛斥鷃才踰藩 때마침 중국 천자가 학교를 중히 여겨 / 中朝天子重學校 태학의 선비들이 한창 경전을 토론할 제 / 璧水縉紳方討論 동인으로 취학한 이는 매우 적었는지라 / 東人鼓篋亦甚少 조관의 자제는 어찌 그리도 존귀했던고 / 朝官子弟何其尊 나는 선군이 봉훈의 반열에 오른 관계로 / 先君簉跡奉訓列 전례에 따라 태학에 유학할 수 있었는데 / 援例得以游橋門훌륭한 교화 받은 지 한 해도 안 지나서 / 螟蛉變化不閱歲 글 지으면 이따금 뛰어나단 칭찬 들었네 / 綴文往往稱高騫 고국에 돌아와 선군 상중에 있을 적엔 / 歸來東海居憂中 번쩍번쩍 흐르는 세월 번개처럼 빨랐어라 / 流光飄忽如電奔 현릉의 초과 때엔 마침 복을 마치고서 / 玄陵初科服適闋 응시한 게 우연히도 장원을 차지했는데 / 射策偶耳叨狀元중서당의 급제자 환영연엘 참여했더니 / 鹿鳴往會中書堂 관복과 한림 제수로 특별한 은총 입었고 / 賜緋玉署承殊恩 뒤이어 초천 발탁으로 삼중까지 이르러 / 因之超擢至三重 한가히 관록 먹으며 자손 행복케 하였네 / 閑居食祿榮子孫 당시 글 읽던 곳에 머리 돌려 회상하노니 / 回頭當日讀書處 지금도 푸른 이끼에 나막신 자국 남았으리 / 蒼苔至今留屐痕 산신령이 앎이 있다면 내 의당 감사하리 / 山靈有知我當謝 천지와 같이 인물을 배양했으니 말일세 / 養出人物同乾坤 후일 명성의 좋고 나쁜 평판은 차치하고 / 流芳遺臭且不問 우선 노래를 불러 후손에게 남겨 주노라 / 歌之直欲貽後昆 [주D-001]서로 …… 연마해도 :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서로 보아서 착해지도록 하는 것을 절차탁마라 한다.[相觀而善之謂摩]” 한 데서 온 말인데, 이는 여러 제자(弟子) 가운데 유능한 이 한 사람을 자문역으로 삼아 혼자서 스승에게 질문을 하게 하고 기타 사람들은 그의 문답(問答)만을 듣고서 각각 해득(解得)할 수 있게 했던 수업 방법을 말한다.[주D-002]높이 …… 뿐이었네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의하면, 붕새는 9만 리나 날아올라 가는데, 뱁새는 날아올라 보았자 고작 두어 길도 더 못 오르고 다시 내려와 쑥대밭에서 뱅뱅 돈다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여기서는 식견이나 안목의 협소함을 의미한다.[주D-003]나는 …… 있었는데 : 옛날 태학(太學)에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식까지만 유학(遊學)이 허용되었는데, 이때 저자의 부친 이곡(李穀)이 마침 원조(元朝)의 봉훈대부(奉訓大夫) 작위에 있었으므로 한 말이다. [주D-004]현릉(玄陵)의 …… 차지했는데 : 현릉은 공민왕(恭愍王)의 능호이다. 공민왕 2년인 계사년(1353)에 초과(初科)를 실시했던바, 이때 지공거(知貢擧) 이제현(李齊賢), 동지공거(同知貢擧) 홍언박(洪彦博)의 주관하에 저자가 을과 제일인(乙科第一人)으로 급제한 것을 이른 말이다.평생토록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였다.
[주D-001]사수(砂水) : 풍수지리학 용어로, 사(砂)는 묘혈(墓穴)의 전후(前後)와 좌우(左右)에 있는 산을 말하며, 수(水)는 묘혈에서 보이는 물을 이른다. 《地理人子須知 卷5上 砂法總論》[주D-002]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 : 풍수지리학 용어로, 묘혈에서 보아 간방(艮方)에서 산맥(山脈)이 들어온 것을 이른다.[주D-003]분금(分金) : 시체를 광중(壙中)에 묻을 때 위치를 똑바로 하는 일을 말한다. 지상학(地相學)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육십갑자를 오행에 분배한 뒤 다시 둘로 나누는 방식인데, 분수(分水)ㆍ분화(分火) 따위로 일컫지 않고 분금(分金)이라고 총칭하는 까닭은 금(金)이 오행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이다. 《葬經翼 難解24篇》[주D-004]득수(得水) : 묘에서 보아 처음 보이는 물을 이른다.[주D-005]파문(破門) : 묘에서 가장 나중에 보이는 물을 이른다. 득파(得破)라고도 한다.[주D-006]요금정(廖金精) :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자(字)는 백우(伯禹)이며, 이름은 우(瑀)이다. 나이 15세에 오경(五經)을 통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요오경(廖五經)이라고 하였다. 특히 풍수지리학에 정통하여 금정산(金精山)의 선지(善地)를 얻고는 스스로 금정산인(金精山人)이라 일컬었다. 저서에 《구성혈법(九星穴法)》이 있다. 《四庫提要 卷111》[주D-007]양균송(楊筠松) : 당(唐) 나라 때 사람으로, 자(字)는 숙무(叔茂)이며, 풍수지리학에 정통하였다. 희종조(僖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고 영대(靈臺) 지리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가,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켜 대궐에 침입하자, 삭발하고 곤륜산(崑崙山)으로 들어갔다. 뒤에 풍수지리설로 행세하였다. 저서에 《의룡경(疑龍經)》, 《감룡경(撼龍經)》 등이 있는데 감여서(堪輿書)의 종주가 된다.[주D-008]2위(位) : 곤신(坤辛)과 건술(乾戌)을 말한다.[주D-009]주성(主星) : 주산(主山)을 말한다.[주D-010]5월과 9월의 변고 : 당시 왕세자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5월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생모(生母)인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9월에 세상을 떠난 일을 가리킨다.[주D-011]후산(緱山)의 …… 않고 : 주(周) 나라 영왕(靈王)의 태자(太子)인 진(晉)이 일찍이 백학(白鶴)을 타고 후씨산(緱氏山) 꼭대기에 머물렀던 데서 온 고사(故事)로, 태자의 거가(車駕)를 이르기도 하며, 또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세상을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가리킨다.[주D-012]북두성(北斗星)의 …… 떨어졌습니다 : 아름다웠던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죽음을 가리킨다.[주D-013]천보장(天保章)을 …… 축사(祝辭) : 천보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인데, 모서(毛序)에,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보답한 시라고 하였다. 화봉인의 축사는 《장자(莊子)》 천지(天地)에 나오는 내용으로, 요(堯)임금이 화(華) 땅을 지날 때 그곳의 수봉인(守封人)이 요임금을 수(壽), 부(富), 다남자(多男子)로 축원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위의 두 가지는 모두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 축원하는 내용으로, 여기에서는 백성들이 정조(正祖)를 위해 축원함을 가리킨다.[주D-014]오렴(五廉) : 오국(五局)의 염정방(廉靜方)에서 득(得)이나 파(破)하는 것을 말한다. 오국은 금ㆍ목ㆍ수ㆍ화ㆍ토이고, 염정방은 사병방(死病方)을 이른다. 금국에는 건(乾)ㆍ해(亥)ㆍ임(壬)ㆍ자(子), 목국에는 손(巽)ㆍ사(巳)ㆍ병(丙)ㆍ오(午), 수국에는 계(癸)ㆍ축(丑)ㆍ간(艮)ㆍ인(寅), 화국에는 곤(坤)ㆍ신(申)ㆍ경(庚)ㆍ유(酉)가 염정방이고, 토국은 수국과 같다.[주D-015]식양(息壤) : 본래는 진(秦) 나라 때의 읍명(邑名)으로, 전국(戰國) 시대 진의 무왕(武王)이 장수 감무(甘茂)로 하여금 의양(宜陽)을 정벌토록 하였는데, 이때 감무는 왕이 도중에 후회할까 염려하여 식양에서 굳게 맹세하게 하였다. 후에 왕이 정벌에 대해 회의를 느끼자, 감무가 글을 올려 “식양이 저기에 있습니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여, 굳게 맹세한 약속의 뜻으로 쓰인다. 《戰國策 秦策》[주D-016]금정(金井) : 묘를 쓰려고 판 구덩이, 또는 무덤의 속 구덩이를 팔 때에 그 길이와 너비를 정하는 데 쓰는 기구인 금정틀[金井機]을 가리킨다.[주D-017]이순풍(李淳風) : 당(唐) 나라 때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많은 서적을 두루 읽어 천체(天體), 측산(測算)과 역산(曆算)에도 밝았다. 또 태종조(太宗朝)에 태사국의 관원으로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여 창락현남(昌樂縣男)에 봉하여지기도 하였다. 저서에 《법상서(法象書)》 7편, 《전장문물지(典章文物志)》, 《기사점(己巳占)》 등이 있다. 《新唐書 卷204 李淳風列傳》[주D-018]내명당(內明堂) : 묘 앞의 평평한 곳으로,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감싸고 있는 안쪽을 이른다.[주D-019]채목당(蔡牧堂) : 송(宋) 나라 때 사람으로, 자(字)는 신여(神與)이고 이름은 발(發)이며, 채원정(蔡元定)의 아버지이다. 만년에 호(號)를 목당노인(牧堂老人)이라고 하였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하였는데, 출입을 끊고 오로지 독서와 자녀 교육에 전념하였으며, 풍수지리학에도 정통하여 저서에 《발미론(發微論)》이 있다.
홍재전서 제58권 | | |
| | 잡저(雜著) 5 | | |
상설(象設) 제3
내가 원침(園寢)을 정한 뒤에 바야흐로 석상(石象)의 설치를 경영하게 되었다. 앵봉(鶯峯)의 석맥(石脈)은 유전(流傳)된 지 이미 오래이고 새 원침과는 10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공역(工役)도 편리하겠기에 처음에 앵봉에서 돌을 채취하라고 명하였더니, 석공(石工)들이 힘이 들 것을 꺼려하여 말하기를, “이 돌은 결이 거칠어서 쓰기에 적절하지 못하고 덩이도 작아 석물을 만드는 데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일을 감독하는 신하들도 마음을 다하여 살펴보지 않고 여러 번 석공의 말대로 아뢰기에 어쩔 수 없이 강화도(江華島)로 옮겨 역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조정 선조의 능침 중에 건원릉(健元陵)이나 영릉(英陵) 같은, 여러 곳에 설치한 돌은 모두 가까운 곳에서 채취하여 썼는바, 대개 하늘이 진정(眞正)한 형국을 마련하여 국장(國葬)의 장지로 만들었다면 석상을 설치할 돌도 반드시 정기를 저장하고 엉기게 하여 감추어졌다가 쓰이기를 기다리게 하였으니, 이것은 자연 조화의 묘함이다. 새 원침에 앵봉의 돌이 있었던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어서인데 지금 말하기를, “캘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나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저녁에 장용영(壯勇營)의 석공 수십 명을 뽑아서 기계를 마련해 주고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앵봉으로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먼저 산령(山靈)에게 기도하게 하고 이어서 채석하는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다. 신(神)에게 기도한 날 새벽의 꿈에 어떤 노인이 와서 고하기를, “돌 속에 돌이 있으니 너희들은 힘써라.” 하였다. 석공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백여 개의 퇴정(椎釘)을 일시(一時)에 들고 온 산의 돌을 뚫어 보았지만, 팔수록 더욱 거칠어 노력은 많았으나 쓰기에 합당한 돌을 얻지 못하였다. 그래도 나는 또 독려하여 이르기를, “이런 대지(大地)가 있는데 가까운 곳에 어찌 석상을 설치할 돌이 없겠는가. 또 꿈속에 신령이 감응하여 지시한 일은 비록 허황한 데 가깝기는 하지만, 또한 이런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니 돌이 포태(胞胎) 속에 있어 겉은 거칠지만 속은 정결하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 기해년(1779, 정조3) 석물 공사 때의 무인석(武人石) 한 쌍은 지금도 오히려 석질이 매우 좋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백 년도 안 되었는데 한 조각의 돌도 쓸 만한 것이 없단 말인가.” 하고, 인하여 세 사람이 매달려 작업
| | 4월4일 (정미) | | 하연 김종서 등이 수릉을 살펴보고 올린 상서문 | |
의정부 우의정 하연(河演)·예조 판서 김종서(金宗瑞)·우참찬 정인지(鄭麟趾)·중추원 부사 이진(李蓁), 호조 참판 강석덕(姜碩德)·이정녕(李正寧) 등이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 이영서(李永瑞)·예조 좌랑 이선로(李善老)·전농 주부(典農主簿) 안지귀(安知歸)·행 사정(行司正) 문맹검(文孟儉)과 더불어 헌릉(獻陵)의 서편 수릉(壽陵)을 살펴보고 와서 상서(上書)하기를, “신 등이 삼가 헌릉의 서혈(西穴)에 나아가 주봉(主峯)과 사방에 둘러 있는 여러 봉(峯)의 응대(應對)와 여러 물의 오고 가는 방위(方位)를 규형(窺衡)으로 측량하고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측량하였는데, 아울러 어떤 사람의 상서(上書) 조목을 상고하여 하나하나 차례대로 강론(講論)해 삼가 아래에 갖추 아뢰옵니다. 1. 《습유(拾遺)》에 이르기를, ‘지세(地勢)가 평탄하고 기맥(氣脈)을 간직한 곳은 혈(穴)이 그 가운데 있고 그 곁에 있지 않은 것이다. 가운데에는 복이 그 몸에 모이고, 곁에는 화(禍)가 그 집을 이긴다.’ 했고, 지현론(至玄論)에 이르기를, ‘길(吉)한 것은 가운데에 있고 곁에 있지 않다.’ 하였으며, 《습유(拾遺)》를 상고하건대, 그 다음 귀절[句]에서 이르기를, ‘〈산맥이〉 엎드렸다가 높이 일어나고 사방의 산이 내동(來同)하여 돌(突)가운데 와(窩)가 있는 것은 높은 곳에서 평평한 것이고, 「와」 가운에 돌이 있는 것은 낮은 곳에서 높은 것이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땅은 중(中)이 귀한 것이나, 「돌」 가운데 「와」가 있고, 「와」 가운데 「돌」이 있으며, 기운은 겉모양으로 인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헌릉(獻陵)의 주혈(主穴)에서 백호(白虎) 구룡 산록(九龍山麓)까지는 3천 2백 64척이옵고, 청룡(靑龍) 산록까지는 1천 8백 73척이온데, 서혈 명당(西穴明堂)에서 외백호(外白虎) 구룡 산록까지는 2천 3백 28척, 청룡 산록까지는 2천 8백 17척, 내안산(內案山)까지는 2천 7백 51척이오며, 동서 양혈(東西兩穴)의 거리는 9백 44척입니다. 따라서 이로써 보건대, 동서 두 혈(穴)이 모두 도국(圖局)의 한 가운데에 있고 곁에 있지 않습니다. 1. 《습유》에 이르기를, ‘기울어져 비스듬하고 고단(孤單)하게 쭈그러진 이런 따위는 모두 복을 이루지 못한다. 이러므로 팔방 조롱(八方朝隴)은 그 중(中)을 좇고 그 정(正)을 취하는 바이다.’ 하였는데, 그 본문을 상고하오면, 팔방대응편(八方對應篇)에 이르기를, ‘뒷산은 복(福)이 되고자 하고 앞산은 녹(祿)이 되고자 하며, 왼쪽 산은 굽고자 하고 오른쪽 산은 살찌고자 한다. 좌혈(坐穴)은 집과 같고, 명당(明堂)은 판[局]과 같은데, 삼양(三陽)이 촉급[促]하지 아니하고 육건(六建)이 모두 넉넉하면, 한 주먹 돌과 한 치의 흙이 저 금옥(金玉)보다 낫다. 그러므로 천일(天一)·태을(太乙)은 부귀(富貴)의 본원이고, 천록(天祿)·천마(天馬)는 부귀의 임용(任用)이다. 문관(文官)·무고(武庫)는 부귀의 응험(應驗)이고, 좌보(左輔)·우필(右弼)은 부귀를 유지함이며, 남창(男倉)·여고(女庫)는 부귀를 베품이다. 자손과 장정(壯丁)은 뒤에서 따르고, 노비(奴婢)와 가축[畜養]은 앞에서 나가나니, 모양[形]을 고칠 수 없고 자리를 바꿀 수 없다. 사방과 사우(四隅)를 유(類)로 미루어 묏자리를 찾는 요지는 온전하고 이지러지지 아니함이 귀하다. 경(經)에 이르기를, 「혈(穴)은 반드시 다 온전하여야 한다.」고 함은 이를 이른것이니, 마약에 산이 두터우면 힘이 넉넉하고, 산이 길면 힘이 오래가며, 형세[勢]가 멀면 패하기가 어렵고, 형세가 가까우면 쉽게 성공하니 자연의 응(應)함이다. 기울어지고 삐뚤어지며 고단(孤單)하고 쭈그러지며, 등져서 어긋나고 놀라 미친 것 같으며, 돌아서 거스리고 뾰족하여 쏘는 것과 같은 따위는 모두 복을 이루지 못하나니, 이것은 팔방조롱(八方朝隴)의 그 중앙을 따르고 바름을 취하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이 글의 뜻을 자세히 살피건대, 대개 팔방 응대(八方應對)의 길흉(吉凶)으로 혈을 정하는 법을 논한 것이오나, 이 혈은 치우침이 없고 삐뚤어짐도 없으며, 팔방응대가 온전하여 이지러짐이 없는데다 또한 산이 두텁고 길어서 힘이 넉넉하고 먼 형세가 있으며, 기울어지고 삐뚤어졌든가 고단하고 쭈그러진 모양이 없사오니 이는 이른바 중정(中正)한 땅입니다. 1. 《의룡단제수언(疑龍斷制粹言)》에 이르기를, ‘무릇 묏자리를 구하고자 하면 대세(大勢)를 볼 것이니, 백리 추회(百里周回)에 한 혈(穴)을 만든다.’ 했고, 명산론(明山論)에 이르기를, ‘백리(百里)의 땅이 펀펀하고 넓으며 천산(千山)이 많이 모였다 하나, 기운을 받은 땅은 단지 한 혈만 있으니, 호리(毫釐)라도 어긋나면 화복(禍福)이 천리(千里)만큼 틀린다.’ 하였으며, 《의룡(疑龍)》에는 이르기를, ‘천리를 오는 산이 다만 한 혈에 있으니 바른 것은 자리[位]가 되고 옆으로 된 것은 좋지 못하다.’ 했고, 착맥부(捉脈賦) 주(註)에 이르기를, ‘정룡(正龍)이 내려오지 아니하고 방룡(傍龍)이 일어나 내려오면 정룡이 끝나고 방룡은 끊어진다.’고 하였으니, 이는 가지 용[支龍]과 줄기 용[幹龍]을 구분하고자 하기 때문에 범연히 말한 것입니다. 만약 범연히 말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한 혈(穴)만 쓴다고 이른 것이라면 명도(明圖)에, ‘네 가지[四支]가 가지런히 내려온 것을 아울러 쓰되 의룡상취형(義龍相聚形)이라 이르고 백자천손(百子千孫)이 효의(孝義)가 갈라지지 아니하는 땅이다.’ 하였겠습니까. 또 삼유(三乳)와 이유(二乳)를 쓴 것도 있으니, 호순신(胡舜申) 기혈론(基穴論)에 이르기를, ‘서북족(西北族)은 장사하는 집에서 한 묘지(墓地)를 만들어 몇 대(代)를 소목(昭穆) 차례로 벌여서 묘를 쓰고, 동남방(東南方)은 장사하는 묏자리가 한두 광(壙)에 이르면 남자만 바른 자리에 쓰고 부인은 곁에 붙여 쓰는 것은 대개 서북은 평평한 언덕이 많아서 흙이 두텁고 물이 깊으며, 동남은 높은 산이 많아서 골맥(骨脈)이 얕고 드러나므로 각각 그 적당한 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펀펀한 언덕에 있어서도 가지 언덕[支阜]이 급하면 어찌 많이 장사할 수 있으며, 높은 산에 있어서도 산 언덕이 웅장하고 넉넉하면 어찌 작게 장사하는데 구애되겠는가.’ 했고, 《혈법비요(穴法秘要)》에는 이르기를, ‘산맥이 두 가지로 내려와서 모두 볼 만하면 모름지기 전안(前案)이 난간처럼 촘촘히 막혀야 한다.’ 했으며, 《동림조담(洞林照膽)》 재혈편(裁穴篇)에 이르기를, ‘무릇 산머리에서 두 갈래로 내려온 것은 두 머리가 혈이 된다.’ 하였고, 명당편(明堂篇)에는 이르기를, ‘가령 땅에 세 혈(穴)이 있으면 명당도 각각 임자[主]가 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어떤 자가 힘써 말한 ‘한 국(局)안에 두 혈을 쓸 수 없다.’고 한 말은 망령되옵니다. 대모산(大母山)의 바른 용이 몸을 헤치고 곧게 내려와서 두 혈을 나누어 만들었으니, 바른 자리와 곁 자리의 구분이 없사오매, 어찌 낫고 못함을 의논할 수 있사오리까. 1. 《호수경(狐首經)》이 이르기를, ‘모호(模糊)하여 맑지 못하면 그 기운이 굳세지 못하고 기대여 붙고 비스듬히 비끼면 그 기운이 바르지 못하다. 방불하게 배치(排置)되었으면 그 기운이 성(盛)하지 못하고, 머리를 들어 시체[尸]를 막으면 그 기운이 응하지 아니한다. 산세(山勢)가 이미 어긋났으니 오행(五行)을 정하기 어려워 중주(中主)가 어지럽고 잡되니 움직이면 병이 된다.’고 하였는데, 본문(本文) 주원편(主元篇)을 상고하건대, 이르기를, ‘산 뼈[山骨]가 역력(歷歷)하고, 오는 용[來龍]이 단적(端的)하며, 치우침이 없고 삐뚤어짐도 없으며, 되돌아감이 없고 빗나감이 없으며, 동북(東北)은 정간(正艮)이 되고, 서(西)는 정태(正兌)에 당하여, 순일(純一)하고 잡되지 아니하면 기운이 순수(純粹)하고, 간(艮)이 축(丑)·인(寅)을 띠[帶]고 태(兌)가 경(庚)·신(辛)을 띠면 내려온 산이 이미 잡되어 오행(五行)을 정하기 어려운데, 오행이 어지러우면 신(神)이 어찌 편함을 얻으리오. 산이 오는 것과 떨어짐이 일체가 되면, 전재(剪裁)하기가 극히 쉽고, 목교(目巧)와 심교(心巧)가 자연히 이치에 합한다. 걸음을 옮기어 산을 보면 문득 방위(方位)가 달라진다. 입산(立山)이 감(坎)에 있다가 계축(癸丑)으로 걸음을 옮겨서 머리를 숙여 간(艮)이 되어 물은 더욱 앞으로 가고 산은 더욱 뒤로 행하면, 먼저 목기(木氣)를 받고, 다음 토기(土氣)를 받고는 바야흐로 수기(水氣)를 받는다. 3년은 1보(步)이고 10보는 1세(世)가 된다. 자세히 살펴서 쓰면, 복록(福祿)이 스스로 이른다. 모호하여 맑지 아니하면, 그 기운이 굳세지 못하고, 기대여 붙고 비스듬히 비끼면 그 기운이 바르지 못하며, 방불하게 배치(排置)되었으면 그 기운이 성하지 못하고, 머리를 들어 시체를 막으면 그 기운이 응하지 아니하며, 산세가 이미 어긋나서 오행을 정하기 어려우면 중주(中主)가 어지럽고 잡되어 움직이면 병이 된다.’ 하였으니, 그 글뜻을 자세히 살피건대, 이른바, 모호하여 맑지 못하다고 한 것은 필시 산 뼈[山骨]가 역력하지 못하고 내려온 용[來龍]이 단적(端的)하지 못한 것을 이른 것이옵고, 이른바, 기대여 붙고 비스듬히 비낀다고 한 것은 다른 데 기대여 붙어서, 치우치고 삐둘어지며 되돌아가고 옆으로 기울어진 것을 이른 것입니다. 이제 이 혈을 보건대, 주산(主山)이 임(壬)에 있고 머리를 숙인 것도 임(壬)이 되어, 순일(純一)하고 잡되지 아니하며, 산 뼈[山骨]가 역력하고, 내려온 용이 단적(端的)하여 연하고 붙고 비껴서 나온 형상이 없으며, 좌우 안대(案對)가 알맞고 평평하고 바르며, 한 기운이 일어나고 엎드리면서 굼실굼실 내려와서 5천 3백여 척에 이르러 그쳤는데, 어떤 자가 이르기를, ‘모호하여 맑지 못하고, 기대어 붙고 비스듬히 비끼며, 방불하게 배치되었고, 머리를 들어 시체를 막았으니, 산 기운이 이미 어긋나서 오행(五行)을 정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어떤 형세를 가리켜서 말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인용한 원문의 뜻이 이 산세와는 전연 다릅니다. 1. 《감습(撼襲)》에 이르기를, ‘열 가지에서 아홉 가지는 어지럽고 어지러우나, 그 가운데 한 가지는 도리어 참되도다.’ 하였는데, 원문을 상고하건대, ‘혹은 큰 산에서 떨어져 낮고 작으며, 혹은 높은 봉에서 떨어져 평평하고 넓도다. 물러나고 돌고 바뀌어, 몇 단(段)을 이루었는데, 열 가지에 아홉 가지는 어지럽고 어지럽도다. 가운데 한 가지는 도리어 참되나니, 만약 이것이 참일 때에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도다. 어지러운 산이 껴안은 듯이 눈 앞에 있고, 한 가지라도 밖으로 나가서는 아니된다. 다만 참용(眞龍)은 좌혈(坐穴) 안에 있고 어지러운 산은 밖에 있어서 전산(纏山)이 된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이는 오로지 행룡(行龍)이 굴러 바뀌는 곳에 줄기 용[幹龍]을 찾아 얻는 법을 가리킨 것이옵고, 국(局)을 맺은 땅에 두 혈[兩穴]의 시비를 논한 것이 아닙니다. 1. 《의룡(疑龍)》에 이르기를, ‘대저 전산(纏山)은 반드시 굽게 돌았나니 명당(明堂)을 밖에서 구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그 본문(本文)을 상고하건대, ‘그대[君]를 위하여 이 의심을 깨뜨리노라. 가지와 줄기가 어지러울 때, 등과 면(面)을 분별할 것이다. 가령 두 물이 용을 끼고 올 때에, 문득 밖으로 도는 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라. 전산(纏山)과 전수(纏水)가 안고 도는 곳에 전산과 전수의 구석이 등[背]에 닿는다. 전호(纏護)도 스스로 크고 작음이 있으니, 크고 작음은 용(龍)의 길고 짧음에 따라 온다. 용이 길면 전호도 길고 멀며, 용이 짧으면 전산이 가까이 맞대인다. 대저 전산은 굽게 도니, 명당을 밖에서 구하지 말라. 굽게 도는 모양은 반드시 면(面)이 되나, 다만 조문(朝門)이 막히고 열리지 않을까 두렵다. 전호를 찾아 얻기를 분명히 하였거든, 다시 떨어진 머리[落頭]에 요묘(要妙)를 찾으라. 전산·전수(纏山纏水)는 병풍과 같은데, 전면의 너름이 얼마나 한가를 보라. 전산과 전수는 안산(案山)과 같으나, 다만 명당은 좁고 너르지 아니하다. 산이 돌고 물을 안아 비록 면(面)과 같으나, 바람 불고 물결 쳐서 벼량이 차[寒]도다. 그대는 여기 와서 등과 면(面)을 보라. 물이 돌 비탈을 가르[割]고 용이 등져서 돈다.’고 하였으니, 그 글 뜻을 자세히 살피건대, 이는 대저 전산이 반드시 굽게 돌아서 껴안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만 그 껴안은 것만 보고, 그릇 명당인줄 알고 혈을 잡기 때문에, ‘명당을 밖에서 잡지 말라.’고 이른 것입니다. 이제 서혈(西穴)은 단적(端的)하게 〈산맥이〉 일어나고 엎드리면서 동혈(東穴)과 가지런히 내려왔으니 전산이라고 이를 수 없으니, 어떤 자의 인용한 바가 잘못이옵니다. 1. 《의룡(疑龍)》에 이르기를, ‘양쪽 가에 다 혈이 설 수 없으니, 크고 작음에 따라 어찌 귀천이 없으랴.’ 하였는데, 본문을 상고하건대, ‘가지와 줄기 외에 등과 앞[面]을 알 것이니, 벼슬이 인신(人臣)에 극하고 대대로 벼슬을 받을 것이다. 마침내 능히 뒤와 앞을 분별하기를 깨닫자면, 앞은 너그럽고 펀펀하며, 뒤는 비탈과 언덕이다. 가령 두 물이 용을 끼고 와서 굽이치고 몸을 되쳐, 때로 크게 돌아서 한 번은 엎드리고 한 번은 솟구치며, 한 번은 돌아 바뀌고 한 번은 끊어진다. 양쪽에 모두 산과 물이 조회함이 있고, 양쪽에 모두 물이 언덕을 침이 있으며, 양쪽에 모두 참 형[眞形]의 모양이 있고 양쪽에 모두 산과 물의 안(案)이 있으며, 조회해 맞이하는 양쪽에 모두 다 볼만하고 두 곳의 명당이 모두 입선(入選)될 만하며, 양쪽의 전호(纏護)가 다 같이 오고 양쪽의 내려온 산이 모두 돌았으면, 이같은 산은 쉽게 분갈할 수 없으며, 마음에 의혹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양쪽에 모두 혈이 설 수 없으니 크고 작음에 따라 어찌 귀천이 없으랴. 다만 화용사군(花冗使君)의 의심으로 인연하여 다시 호신(護身)이 있고 다리에 꽃잎[瓣]이 많으니, 이곳에 와서 참 용이 둘이라 하지 말라. 옆의 용[夾龍]을 인정하는 곳에 용이 반드시 돈[轉]다.’고 하였습니다. 그 글의 뜻을 자세히 살피건대, 양쪽에 산이 있고 양쪽에 물이 있어 전산과 전수의 등과 면(面)을 분간하기 어려운 곳에 참 용을 찾아 아는 법이온데, 어떤 자가 글을 끊어서 인용하여, 대모산(大母山)에서 나누어 받은 두 혈을 가리켜 양쪽 가[邊]라고 함은, 양자(兩字)의 의미만 취하고 본 뜻에는 어두운 것입니다. 1. 《입식가(入式歌)》에 이르기를, ‘일천 산과 일만 물이 가장 형상하기 어려운데, 가운데 오는 용이 있어 주장(主將)이 되었도다. 앞 봉(峯)은 뇌락(磊落)하여 모두 손을 모아 읍하는데, 단정스러운 한 혈이 용 머리 위에 있도다.’ 하고, 또 입식가에 이르기를, ‘만약 깨어져서 일정한 모양이 없으면, 다투는 용과 다투는 주장을 찾지 말라.’고 하였는데, 원문을 상고하건대, ‘일천 산과 일만 물이 가장 형상하기 어려운데, 가운데 오는 용이 주장이 된다. 앞 봉이 뇌락하여 모두 손모아 읍하는데, 단정스러운 한 혈이 용 머리에 있도다.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으며, 하나는 돌아보는데, 두루 합하여 정(情)이 있고, 함께 들어와 돕는다. 만약 산이 깨어져서 일정한 모양이 없으면 다투는 용과 다투는 주인을 찾으려 말라.’ 하고, 주(註)에 이르기를, ‘뭇산[群山]이 비록 많으나, 반드시 한 산이 있어 주인이 되고, 한 산은 손님이 된다. 문득 두 산이 길[路]로 들어와서 주인과 손님의 정이 없는 것을, 주인을 다투고 용을 다툰다고 이른다.’ 하였습니다. 그 글 뜻을 자세히 상고하건대, 이는 여러 산 가운데 주인과 손님의 구분을 범연히 논한 것입니다. 이른바 ‘두 산이 길로 들어와서 주인과 손님의 정이 없다.’고 한 것은, 대개 주산(主山) 외에 따로 객산(客山)이 있어, 와 다달아서, 주산과 더불어 용을 다투고 주인을 다투는 형상이 있음을 주인과 손님의 정이 없다고 이른 것이오며, 한 산에 두 혈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청계산( 淸溪山) 한 맥이 동쪽으로 들어와서 구룡산(九龍山)이 되고, 돌아서 대모산(大母山) 주봉(主峯)이 되었으며, 다른 객산(客山)이 길로 들어와서 주인을 다투는 형상이 없고, 깨어진 모양이 절대로 없으니, 어떤 자의 말이 크게 그릇됩니다. 1. 《입식가(入式歌)》에 이르기를, ‘멀리 멀리 온 형세가 다만 한 혈인데, 나누어 두 셋이 되면 힘이 반드시 약하다.’고 하였는데, 원문을 상고하건대, 주해에 이르기를, ‘뱀과 쥐의 모양과 같은 것은 토맥(土脈)이 작아서 만약 두 세 혈을 두면 기운이 반드시 약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한 가지가 낮고 작아서 뱀과 쥐의 모양과 같은 곳에 만약 두 세 혈을 써서 장사하면 반드시 기운이 약한 데 이르는 것을 이름이오며, 한 국(局) 안에 두 혈이 있음을 이른 것이 아닙니다. 1. 《장중가(掌中歌)》에 이르기를, ‘중심의 한 혈이 천연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였는데, 원문을 상고하건대, 큰 산의 파(派)가 산[生] 것은 용과 같고, 어지러운 산은 높고 험하며, 달아나는 산[奔山]은 서로 따라서, 혹 갑자기 펀펀한 곳에서 높은 산이 중간이 끊어져 뒤에 오는 것은 잇대었고, 앞에 가는 것은 우뚝우뚝한데 중심에 한 혈이 천연적으로 자취를 감추어 굳기는 성과 같고, 혈은 천중(天中)과 같으며, 먼 산은 가까운 듯하고 가까운 산은 너그러워서, 그 혈에 장사하면 여러 대(代)에 삼공(三公)이 난다.’ 하였으니, 그 글 뜻을 자세히 살피건대, 이는 용을 찾고 혈을 정하는 법을 범연히 의논한 것이오며, 두 혈의 옳고 그름을 논한 것이 아니옵니다. 1. 《동림조담(洞林照膽)》에 이르기를, ‘한 산에서 머리가 떨어져서 혈이 두 길로 건넌 것은, 물이 길하면 먼저 그 길함을 받고, 물이 흉하면 먼저 흉함을 받는다. 만약 감산(坎山)이 내려와서 두 무덤이 되어 본디 모두 내려온 혈이 간좌(艮坐)이고, 곤방(坤方)에 물이 20보에 있으며, 그 왼쪽 혈은 온전히 간산(艮山)으로 되었고, 오른쪽 혈은 감산(坎山)인데 약간 간(艮)으로 되어 있는 것은, 처음에 맏아들이 해를 본다.’고 하였는데,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한 산에서 머리가 떨어져서 혈이 두 길로 건넌 것이란 물이 길하면 먼저 그 길함을 받고, 물이 흉하면 먼저 그 흉함을 받는다 함이니, 한 산에서 머리가 떨어진 곳이 두 혈이 있어 만약 묘를 쓰면 물의 길흉으로써 길흉의 선후를 정하는 것이오라, 또한 옛 사람이 두 혈을 쓰는 법입니다. 만약 감산(坎山)이 내려와서 두 무덤이 된 이하의 절목(節目)에 대하여, 이제 규형(窺衡)으로 명당에서 측정해 바라보오면, 대모산 주봉 및 좌혈(坐穴)이 모두 임(壬)에 속하였으니 어찌 자(子)·계(癸)·축(丑) 세 자리를 건너서 간(艮)과 가깝겠습니까. 또 곤방(坤方)에는 20보 안에 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비록 먼 곳에라도 절대로 물이 나는 곳이 없습니다. 또 호순신(胡舜申) 대오행법(大五行法)으로 추리하건대, 임산 화국(壬山火局)에는, 임산(壬山)이 높으면 녹존(祿存)이 흉하고, 자산(子山)이 높으면 녹존이 흉하며, 축산(丑山)이 약간 높으면 탐랑(貪狼)이 길하고, 간산(艮山)이 낮으면 탐랑이 반쯤 길하고 물이 있으면 길하며, 인산(寅山)이 낮으면 탐랑이 반쯤 길하고, 갑산(甲山)이 조금 높으면 탐랑이 길하며, 묘산(卯山)이 가장 낮으면 문곡(文曲)이 길하고, 을산(乙山)이 가장 낮으면 문곡이 길하고 수파(水波)가 길하며, 진산(辰山)이 낮으면 문곡이 길하고, 손산(巽山)이 높으면 문곡이 흉한 것이온데, 호순신이 이르기를, ‘문곡이 건(乾)·곤(坤)·손(巽)·간(艮)에 당하는 것은 음인(陰人)의 자리[位]가 되어, 그 산이 위가 높게 빼어나면 부녀가 어질고 귀하게 되며, 낮고 비[闕]면 이와 반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산(巳山)이 가장 높으면 무곡이 길하고, 물이 있으면 길하며, 병산(丙山)이 가장 높으면 무곡(武曲)이 길하고, 오산(午山)이 높으면 무수(武水)가 길하며, 정산(正山)이 높으면 우필(右弼)이 길하고, 물이 있으면 길하며, 미산(未山)이 높으면 거문(巨門)이 길하고, 곤산(坤山)이 높으면 좌필(左弼)이 길하며, 신산(申山)이 높으면 염정(廉貞)이 흉하고, 경산(庚山)이 낮으면 염정이 흉하고 물이 보이면 흉하며, 유산(酉山)이 가장 낮으면 염정이 길하고, 신산(辛山)이 높으면 염정이 흉하며, 신(申)·신(辛) 두 산이 염정이온데, 호순신이 이르기를, ‘염정이란 것은 홍기(紅旗)·혈요(血曜)·위담(威膽)의 신(神)이 있는 바로서 또한 없을 수 없다.’ 하고, 또 옛 말을 이끌어 말하기를, ‘독화(獨火)의 산은 친근함을 쓰지 않을 것이나, 만약 이 자리[位]가 없으면 정신(精神)이 적다.’ 하였으니, 이 두 산은 친근하지 아니하고, 또 다달아 누르지도 아니하였습니다. 술산(戌山)이 낮으면 파군(破軍)이 길하고, 건산(乾山)이 낮으면 파군에 물이 나와서 흉하다고 하였는데, 호순신이 이르기를, ‘네 묘[四幕]의 땅에는 물체가 이미 죽고 기운이 홀로 여기에 간직해 머물기 때문에 물이 오고 가서는 아니되는데, 가는 화(禍)가 오는 것보다 심하다. 오는 것은 간직해 머물음이 단단하지 못한데 불과하나, 가는 것은 부딪쳐 깨어져서 남음이 없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건·곤·간·손(乾坤艮巽)에 있어서는 범하여도 오히려 가하다.’ 하였으며, 해산(亥山)이 조금 낮으면 녹존(祿存)이 반쯤 길한 것이오매, 신 등이 어떤 자의 인용한 바의 여러 글을 그윽이 보건대, 혹은 장구(章句)를 뽑아 따고, 혹은 주각(註角)을 끊어 취하였는데, 원문을 찾아 보면 모두 용을 찾고 혈을 정하는 법으로써 한 혈과 한 산의 길흉을 범연히 논한 것이옵고, 한 산이 머리를 숙여서 두 혈로 나누어 받은 시비를 논한 것이 아니오니, 그 인용한 바의 여러 말이 본 뜻에 심히 어긋납니다. 글을 상고하오면, 한 산에 마땅히 두어 혈을 쓸 것이라는 정론(定論)이 있고, 도(圖)를 상고하건대, 이미 두어 혈을 쓴 밝은 증거가 있사온즉, 이는 다만 기운이 모인 형세만 살핀 것이옵고, 한 산에 한 혈만 쓰는 데 구애될 필요가 없음이 명백하옵니다. 호순신의 이론에서는, 한 지역 가운데 오히려 소목(昭穆)으로 몇 대(代)를 차례로 벌여 묘를 쓴다고 하였으며, 또 술사(術士)가 성하기로는 당(唐)나라와 같음이 없었으나, 〈당나라의〉 숙종(肅宗)은 소릉(昭陵)에 붙여서 장사하였고, 여러 신하를 붙여 장사하여 모시게 한것이 또한 촘촘히 잇대었으니, 이는 한 국(局) 안에 많이 장사하여도 불가함이 아니옵거늘, 하물며 바른 기운을 나누어 받은 두 혈(穴)은 의심할 이치가 없습니다. 대모산 정맥(正脈)이 임(壬)으로 떨어져 두 가지로 나누어서, 건해(乾亥)로 머물러서 헌릉(獻陵)의 주혈(主穴)이 되고, 한 가지는 임(壬)으로 머물러서 서혈(西穴)이 되었으며, 또 주봉(主峯)과 좌우의 안대(案對)의 여러 봉이 모두 토산(土山)인데, 돌이 있으니, 이는 임(壬)으로써 임을 응하고 돌로써 돌을 응한 것이오니, 이른바 자식이 어미를 떠나지 아니하여 기운이 온전한 땅이옵니다. 두 혈의 길고 짧음도 서로 멀지 아니하고, 한 기운을 나누어 받아 가지런히 내려와서 중앙에 닿아 함께 우뚝 솟았는데, 명당의 물이 그 오는 것은 근원이 없고, 그 가는 것은 흐름이 없으며, 사방이 합하여 두루 돌았으니 상(上)으로 좋은 땅입니다. 한 산의 큰 국[大局] 안에서 동·서 두 혈의 좌향(坐向)이 모두 바르니, 편(偏)과 정(正)의 구분을 감히 의논할 수 없습니다. 대저 산천은 하늘과 땅이 만들어 베푼 자연의 형세로서 기운의 모임이 많고 적음이 있으니 그 길흉을 분변하기 어려운 곳에는 사람이 각각 그 보는 바로 의논이 같지 아니하오나, 큰 마을의 좋은 땅은 비록 육안(肉眼)이라도 모두 같사온데, 어떤 자가 동쪽 혈은 바른 용[正龍]이라고 하고, 서쪽 혈은 곁 용[傍龍]이라 함은 크게 그릇된 것입니다. 또 호순신이 대오행(大五行)의 법을 옛 사람이 이미 그르다고 하오나, 세상의 술사(術士)들이 쓰기를 이미 오래 하였사온데, 이제 순신의 논수편(論水篇)을 보건대, 이르기를, ‘산을 말하면 방위(方位)의 길흉으로써 서로 절제(折除)한다. 길한 방위가 가장 높으면, 흉한 방위가 비록 있을지라도 그 길한 것을 능히 이기지 못하며, 흉한 방위가 가장 높으면 길한 방위가 비록 있을지라도 그 흉함을 능히 이기지 못하며, 높고 낮음과 있고 없음이 맞게 서로 당하면 길함과 흉함이 반드시 함께 있고 높고 낮음과 있고 없음이 조금 서로 이기면 길함과 흉함을 반드시 서로 가진다.’고 하였으니, 지금 서쪽 혈은 다만 녹존(祿存)과 염정(廉貞)의 방위가 흉하고, 그 나머지 여러 방위는 모두 길하오니 한 두 가지의 흉함이 어찌 여러 가지 길함을 이기오리까. 비록 대오행(大五行)의 술법으로 미루어 볼지라도 길함이 많고 흉함이 적을 뿐만 아니오라, 역시 온전히 길한 땅이옵니다. 또 《동림조담》의 논수(論水)에 이르기를, ‘물이 흉하되 명당이 보이지 아니한 것은 허물이 없고, 물이 높아서 들어오는 것도 그렇다.’고 하였는데, 주해에 이르기를, ‘물이 만약 좌우에서 곧게 와서 가로[橫]로 흐르면 길하다.’고 하였으니, 가사 물이 경방(庚方)에 보인다고 할지라도 을방(乙方)에 흘러 파(破)가 되고, 그 근원도 두 봉이 막혀서 보이지 아니하오니, 어찌 허물이 있사오리까.” 하니, 풍수학(風水學)에 내려 의논하게 하고, 드디어 서혈(西穴)로 정하였다. 【원전】 4 집 613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출판-서책(書冊) / *도량형(度量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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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쓰는 가래와 괭이, 삽 따위의 기계를 많이 만들어 백 바리를 내려 보내어서 그들로 하여금 석맥을 파헤치게 하였더니, 석공들이 각각 기력을 다하여 겨우 한 층을 파 내려가 한줄기의 석맥을 얻었는데 겨우 무인석은 만들 수 있는 정도였다. 마침내 그 맥을 따라 30여 길을 파 들어가니, 뭉쳐진 돌이 마치 계란의 노른자위를 싼 것과 같아 거친 덩어리 속에 연한 덩어리가 있고 연한 덩어리 속에 진품(眞品)이 있었다. 그 빛이 맑고 윤기가 나며 결은 단단하고 세밀하여 강화도의 애석(艾石)에 비하면 박(璞)과 옥(玉)의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돌 속에 돌이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크고 작은 석상의 설치는 모두 앵봉에서 채취하여 마련하기로 하고 즉시 강화도의 부역을 중지시켰다. 좋은 돌이 없다고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으나 나는 홀로 의심하였고 석공들이 물러가자 신령이 또 고하였으니, 진실로 숨겨 두었다가 쓸 때를 기다린 것인바, 반드시 돌을 떠서 쓴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돌을 구하고 다듬는 일에서 시작하여 설치하는 의식에 이르기까지 대략 듣고 기록하여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사물의 이치로 보아 명산 길지(名山吉地)에는 저절로 보장(寶藏)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 기유년(1789, 정조13) 7월 13일(정유)에 석상을 설치하는 일을 시작하여 병풍석(屛風石)과 와첨상석(瓦簷裳石)의 제도를 정하고 수원부의 앵봉(鶯峯)에서 구하였다. 내가 총호사(摠護使) 김익(金熤) 등에게 이르기를, “‘천하를 위하여 어버이에게 박하게 하지 않는다[不以天下儉其親]’는 말은 성인(聖人)의 교훈이니, 내가 어버이 상(喪)에 온 정성을 다하는 도리로 이 일에 극진한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는 정성을 들이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민력(民力)을 괴롭게 하고 경비를 많이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극진히 아름답게 하여 나의 영원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이 새 원침의 석상을 설치하면서 의식을 갖추려고 하는 까닭이다. - 만약 병풍석의 별례(別例)를 쓴다면 또 난간석(欄干石)이 있는데 난간석은 그만두게 하였다. -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에 원침을 봉할 적에 추봉(追封)한 원침의 석물은 새로 갖추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어서 내가 감히 의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천봉(遷封)할 때를 당하여 내가 마땅히 할 바를 하는 것이 가하지 않겠는가. 본부(本府) 앵봉의 석품(石品)이 쓰기에 합당하다는 것은 일찍이 마음속으로 헤아렸었다. 난간석과 병풍석은 그 제도가 매우 번거롭고 중대하여 줄이거나 없앤 지가 이미 오래이며, 근세의 석공들은 반드시 그 향방(向方)을 알지 못할 것이다. 또 병풍석은 이미 쓰기로 정하였고 와첨상석 같은 여러 석품은 이로부터 다른 여러 석물과 순서를 정하여 우선 석품을 구한 연후에야 나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혼유석(魂遊石)은 몸체가 크고 품질이 좋아야 하니, 어찌 인물석(人物石)과 쉽게 비교하여 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더욱 마음이 불안한 바이다.” 하였다. 도감(都監)에서 예에 따라 설치하는 크고 작은 부석소(浮石所 돌을 뜨는 곳)를 모두 앵봉(鶯峯)으로 정하였다. 연신(筵臣)이 말하기를, “돌의 품질은 가서 찾기를 기다렸다가 결정할 것이며, 비록 쓰기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역사(役事)를 감독할 사람으로 오늘날 최천약(崔天若) 같은 자를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인재(人材)란 진실로 다른 시대에서 빌려서 쓰는 것이 아니니, 정우태(丁遇泰) 한 사람으로도 넉넉히 최천약 몇 사람을 당해 낼 수 있다. 지금 앵봉에서 석맥을 구하여 얻었으니, 그 역사를 감독하는 일은 저절로 적당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15일(기해)에 도감(都監)이 말하기를, “석물은 혹 앵봉에서 채취하여 쓴다 하더라도 혼유석은 의당 강화(江華)의 애석(艾石)을 써야 합니다.” 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아무튼 석공을 앵봉에 보내어 얻는다면 강화의 돌을 꼭 채취할 것은 없다.” 하였다. 얼마 뒤에 앵봉의 석품을 쓸 수 없다 하여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17일(신축)에 도감이 말하기를, “석공이 앵봉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돌을 캘 만한 곳은 해마다 사가(私家)에서 캐내어 크고 작은 돌을 논할 것 없이 쓰기에 합당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니, 이제는 크고 작은 부석소(浮石所)를 강화에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내가 애당초 반대했던 데에는 선박으로 운반하기 어렵다는 염려까지 겸하였던 것이다. 수로가 험하고 먼데 더구나 큰 추위를 만난 상황이니, 강화의 돌을 쓰자는 의논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길일(吉日)이 점점 가까워 오니 공사는 늦출 수 없다. 내가 그 일을 중히 여기는 도리상 어찌 혹시라도 처음의 의견만을 고집하면서 따르라고 하겠는가.” 하고, 이어 일을 아는 정우태(丁遇泰)에게 명하여 석공과 옥공(玉工)을 거느리고 남양(南陽)의 조천사(鳥川寺)에 가서 돌을 캐게 하였는데, 남양의 석품이 강화보다 나아서 병풍석으로 쓰려고 해서였다. 20일(갑진)에 정우태 등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나라에서 쓰기에 적합한 것은 오직 보책(寶冊)이란 돌이 있기는 합니다만, 병풍석으로는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거듭 새 원침의 일을 감독하는 여러 신료들에게 유시하기를, “앵봉의 석근(石根)을 다시 자세히 살펴서 만약 쓰기에 적합하면 강화의 돌은 설혹 캐냈다 하더라도 운반할 것이 없고, 쓰기에 적합하지 않거든 수원 부사에게 주어 읍을 옮길 때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또 혹시라도 부득이하면 대소의 석물을 앵봉과 강화로 인력을 나누어 보내 캐게 하는 것도 또한 폐단를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전부를 캘 것인가 인력을 나누어 캘 것인가 하는 문제와 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막론하고 상의하여 아뢰라. 그리고 강화의 돌을 배로 운반하는 것이 불일간(不日間)에 순조롭게 도착한다 하더라도 지금부터 도착하기 전까지는 백성들을 위하여 마음을 쓰지 않아서는 안 되는 때이니, 경들은 이 뜻을 유념하여 특별히 석공들에게 당부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회계(回啓)하기를, “앵봉의 석맥을 상세히 살펴보았더니 한 덩어리의 큰 돌이 땅 위로 노출된 것이 있는데, 길이는 10자쯤 되고 너비는 4칸쯤 되며 겉의 거친 것을 벗기니 쓸 만한 것이 너비가 2칸이고 두께가 2길[丈]인데, 중간에 벌어진 틈이 있어 몇 자 파 들어가니 엉긴 근맥(根脈)이 있기는 한데 외면으로는 확실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또 혼유석은 실처럼 생긴 무늬가 있어 쓸 수가 없으며 병풍석은 소비되는 용량이 가장 많으니, 역시 일반 품질의 돌을 쓰는 것이 적당하겠습니다. 그리고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인물석(人物石), 곡장석(曲墻石), 계단석(階段石)의 돌도 쓸 것이 부족할 듯하니, 만일 섞어서 쓰려고 한다면 의논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내가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정성을 들이다가 새벽이 되기를 기다려 앵봉으로 정우태 등을 보내어 다른 갈래에서도 돌을 구하되 우선 기계를 갖추도록 하였다. 다음은 석공들을 불러 이르기를, “너희들은 느지막하게 출발하라. 앵봉에서 공사를 시작하는 것은 외정(外廷)에서는 모르는 일이니, 돌을 얻는다면 하늘이 도와주는 것이고 돌을 얻지 못한다면 나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해서이다. 너희들은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으나 또한 틀림없이 조가(朝家)에서 근래에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다는 말은 들었을 것이다. 만약 돌을 얻지 못한다면 너희들은 다시 돌아오지 말라.” 하였다. 그들이 동작진(銅雀津)을 건너면서 석공 중에 성이 최가(崔哥)란 자가 앞으로 불쑥 나와 말하기를, “만일 돌을 얻지 못하면 다시는 건너오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하였다. 나는 그들을 위로하고 타일러 보내면서 또 백금(百金)으로 행자(行資)를 주고 돌을 뜨는 곳에 상금을 걸어 돌을 먼저 캐는 자를 권장하였다. ○ 21일(을사)에 앵봉(鶯峯)에서 석맥을 얻어 앵봉을 대부석소(大浮石所)로 하고 기산(岐山)을 - 앵봉의 근처이다. - 소부석소(小浮石所)로 정하였다. 처음에 석공들이 그 노력이 배나 들어가는 것을 꺼리고 석맥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도 몰라 쓸 수 없다고 극력 말을 하였는데 이치로 깨우쳐 주기가 어려웠다. 조정의 신하들도 꼭 고집을 하며 일이 늦어지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자가 많아 우선 도감(都監)의 말을 따라 강화에서 채취하여 옮겨다 쓰기로 하였지만, 이곳에 이런 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 있으니 감독하는 사람이 급히 고하기를, “그날 밤에 제사를 지내고 우선 거기에 드러난 석품(石品)을 봉(封)하여 올립니다.” 하였다. 그 돌을 보자마자 벌써 좋은 품질임을 알 수 있었다. 이튿날 감독하는 사람이 또 급히 돌을 얻게 된 과정과 돌이 모두 태막(胎膜)에 싸여 있는 이유를 이뢰고 또 산령이 지시한 기이한 조짐을 말하였다. 이에 별도로 원소도감(園所都監)에 특별히 유시(諭示)하기를, “앵봉의 석질이 쓰기에 적합함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 같다. 당초에 석공들이 속여 고한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어제 새벽에 특별히 장인(匠人)과 기계를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한편으로는 돌을 캐게 하고 한편으로는 경들에게 가서 말을 하도록 하였는데, 그간에 일을 시작하였는가? 혼유석에 실 무늬가 있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병풍석에 그림을 넣는데도 실 무늬가 있는 것이 더욱 좋다. 계단석이나 사대석(莎臺石)으로 들어가는 돌도 다시 구하여 캔다면 어찌 얻지 못할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23일(정미)에 새 원침의 감조관(監造官) 한 사람을 장인(匠人)을 더 거느리고 앵봉의 부역장으로 보내 처음 서울에서 보낸 석공들을 함께 감독하도록 하여 먼저 고석(鼓石) 4개를 얻고, 25일(기유)에 양석(羊石)을 얻었으며, 26일(경술)에 또 병풍석을 얻었다. ○ 이날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앵봉의 돌을 얻은 뒤로부터 기쁘고 다행스러운데, 다시 염려스러운 것은 바로 돌을 운반하는 일이다. 앵봉과 화산(花山)이 비록 가깝다고는 하나 그 사이에 도랑과 논밭이 있으니, 수레가 지나기에는 험하지 않겠는가. 혼유석 등 몸집이 큰 돌은 돌을 뜨는 곳에서 잘 다듬어 길이 단단하게 얼어붙을 때에 운반하면 다소의 폐단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시 기다리기가 어려우면 곡식을 수확한 뒤에 운반하는 것도 좋겠다.” 하였으며, 이튿날 아침에 또 유시하기를, “병풍석에 들어가는 석재(石材) 중에 옆으로 걸치고 곧게 세우는 것은 돌의 품질이 병풍석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쓰는 데 합당할 듯하고, 길이와 너비의 척도로 말하더라도 꼭 다른 능침의 선례를 따를 것은 없다. 석품의 다소로써 간가(間架)의 넓고 좁은 것을 정하여 별간역(別看役)으로 하여금 이 뜻을 알아서 편리하고 좋은 쪽으로 따르도록 힘쓰게 하라.”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앵봉에서 또 하나의 큰 돌과 여러 석물을 얻었는데, 사용하기에 넉넉합니다. 캐서 운반하기에 편하고 가까워 일을 덜게 되었으니 진실로 매우 다행입니다. 그러니 강화에서 돌을 뜨는 일은 철수하여 돌아오게 하고 앵봉에서 함께 힘쓰도록 하소서.” 하였다. ○ 8월 8일(신유)에 또 혼유석을 얻었는데 그 색채가 푸른 옥과 같아 윤기가 있고 깨끗하여 부역장에서 보는 사람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일어나 춤추지 않는 자가 없었다. 돌 조각을 가지고 급히 말을 타고 달려와서 석품을 보이는데 과연 푸른 옥과 같았으니, 이는 하늘이 주신 것이다. ○ 12일(을축)부터 처음으로 밤에 일을 하였다. 도감 당상(都監堂上)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길일(吉日)은 가까워 오는데 공역(工役)은 아직 멀었으니, 신이 앵봉으로 가서 머물며 몸소 돌을 다듬는 일을 감독하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앵봉 아래에는 인가(人家)가 없고 밤낮으로 일을 감독한다는 것은 형세로 보아 강제로 할 수 없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는데, 정민시가 극력 청하여 수십 일이 지나서 공사를 완성하였다. ○ 16일(기사)에 수교(受敎)를 지어 능침의 난간석과 병풍석의 제도는 앞으로 이번 일의 예를 끌어다 쓰지 말도록 하였다. 유시(諭示)하기를, “병풍석과 난간석은 영릉조(寧陵朝 효종(孝宗)) 이후로 쓰지 말라고 명한 것은 검소한 성덕(聖德)을 밝힌 것이니,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신해년(1731, 영조7)에 능침을 옮긴 고사(故事)에 이미 옛날의 선례를 따른 일이 있으니, 옛 장릉(長陵)의 석물에 병풍석을 썼기 때문인 듯하다. 이번에는 성의를 다하는 뜻을 본받으려 함이고, 또 지난날 능침을 옮길 때 옛날의 선례를 따른 예에 근거하여 병풍석과 와첨상석은 모두 쓰기로 하고 난간석만은 그만두기로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수교(受敎)를 따라서 감히 의식대로 하지 않기 위함이다. 이후에 능침의 공역(工役)에서 만일 나의 본뜻을 모르고 잘못 이번의 예로 인하여 병풍석과 난간석 그리고 와첨상석을 능침에 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안다면, 이는 나로부터 수교를 어기는 것이다. 병풍석과 난간석에 관계되는 각종의 석물은 절대로 다시 쓰지 말도록 하고, 호조와 예조로 하여금 자세히 등록(謄錄)에 기재하게 하고 또 판에 써서 장생전(長生殿)의 동쪽 정고(正庫)에 달도록 하라.” 하였다. ○ 또 유시(諭示)하기를, “새 원침(園寢)은 합봉(合封)하는 원침의 제도로 설치하려고 하는바, 병풍석 이외의 석물은 한결같이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라 혼유석 1좌(坐), 장명등 1좌, 망주석 1쌍, 문무석 각 1쌍, 석양(石羊)ㆍ석마(石馬)ㆍ석호(石虎) 각 1쌍을 쓰도록 정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배열할 때에 조금 앞으로 내어 설치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 또 유시하기를, “광릉 석물의 선례가 매우 온편하고 좋다. 양마호석(羊馬虎石)을 각각 1쌍씩 쓴다면 배열할 때 협착한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와첨상석을 특별히 쓴 것은 정성을 다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또 특별히 감독하는 사람에게 일러 치수를 줄이되 절대로 와첨상석의 제도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였고, 뇌후(腦後)의 사토(莎土)만은 넓게 하려고 한다. 더구나 와첨상석은 각 능침에서도 드물게 있는 사례이고 지금 또 숫자대로 다 캐지도 못하였으니, 비록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불가한 것은 없다. 경들은 충분히 의논하여 각각 의견을 진술하라.”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원침의 원지름을 32자로 정하고 병풍석 등의 돌은 이것으로 헤아려 측량하면 뇌사(腦莎)를 개척하는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와첨상석은 지대석(地臺石)에 비하여 약간 작으니, 또한 차지하는 땅이 더 넓을 필요는 없습니다. 전례에 따라 아울러 쓰는 것이 사실상 편리하고 좋습니다. 양마호석은 각각 1쌍씩을 줄이면 곡장(曲墻) 안에 배설하여도 땅의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22일(을해)에 명하기를, “혼유석의 하박석(下博石)은 보편수교(補編受敎)를 따라 전석(全石)을 쓰지 말라. 일찍이 옛일을 고찰하여 보니, 헌릉조(獻陵朝 태종(太宗))에 하박석을 전석으로 쓰는 것이 민폐를 끼치는 일이라고 하여 친히 역사를 하는 장소에 이르러 두 조각으로 나누도록 하고 두 조각으로 하도록 제도를 정하였다. 지금의 역사에서 전석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성훈(聖訓)을 우러러 따라 특별히 두 조각으로 나누어 만들게 하여 운반하는 수고를 덜게 하라.” 하였다. ○ 30일(계미)에 혼유석(魂遊石)을 쉽게 운반하였다. 신원(新園)에서 감독하는 신하들이 치계(馳啓)하기를, “혼유석과 제반의 덩치가 큰 돌은 이미 운반하였습니다. 그런데 혼유석은 매우 커서 운반하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당초에 이틀이 걸릴 것으로 여겼는데 어제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워 수레를 끌기가 편리하여 묘시(卯時)에 앵봉을 출발해서 유시(酉時)에 원침에 도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고, 역부(役夫)나 석공들도 모두 무사히 이르렀기에 대소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치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여, 회유(回諭)하기를, “덩치가 큰 석물을 한 번에 운반하는 데 대한 근심으로 내 마음이 불안하여 머리가 셀 지경이었다. 혼유석은 사체(事體)가 자별(自別)하니 운반하고 나서 다듬지 않을 수 없다. 기타 운반하지 않은 석물 중에 덩치가 큰 것은 다듬은 뒤에 운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일의 형세가 어려울 것 같으면 매양 운반할 때 경들이나 혹은 본부의 부사(府使)가 나가 감독하여 털끝만치라도 소홀하게 함이 없게 하라. 혼유석의 하박석은 두 조각으로 나누어도 오히려 덩치가 큰데, 아래에 펴는 돌은 길이와 넓이의 대소에 관계될 것이 없으니, 전편(全片)을 두 조각으로 나누게 한 것은 바로 민폐를 근심하는 성덕(聖德)을 따르려는 것이다. 더구나 본 원침의 역사에는 반드시 민폐를 없게 하려고 하니 경들도 반드시 양찰하라. 이미 합봉(合封)하는 원침의 제도를 썼으니 또한 깊이 헤아려 시행하라. 그리고 하박석은 이번에 네 조각을 쓰게 하니, 조각을 나눈 뒤에 편한 대로 나누어 운반하는 것이 힘을 더는 일단(一端)이 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또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경들은 이 뜻을 헤아려 편한 대로 결정하여 의견을 갖추어 보고하라.” 하였는데, 회계(回啓)하기를, “석물을 깎아 무게를 던 뒤에 운반하는 것은 대개 수레로 운반할 때 부딪혀서 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현재 운반하지 않은 것 중에 덩치가 큰 것은 10개가 안 되니 모두 큰 수레에 실을 수 있으며, 혼유석의 하박석은 정지대석(正地臺石)에 비하여 너비는 더 넓으나 두께는 그보다 얇으니 운반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네 쪽으로 나누어 만들 것은 없고 종전과 같이 두 쪽으로 만들어 쓰는 것이 적합할 듯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 9월 4일(정해)에 돌을 뜨는 일이 끝났다. ○ 11일(갑오)에 신원(新園)의 역사를 감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이번 원침의 역사에서 가장 수고한 자는 석공들이다. 지금 도청(都廳)이 아뢴 바를 듣건대 밤에도 계속 일을 하였다고 하니, 저들도 사람인데 어찌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반달형으로 쓰는 난간석과 병풍석, 와첨상석 이외의 인물석은 모두 안원전(安園奠) 때에 차례로 배설할 것인데, 이와 같이 하면 다음 달 20일 전후를 지나 역사를 마칠 터이니 그간에 충분히 완공할 수 있다. 오늘 밤부터는 밤일은 하지 말게 하라.” 하였는데, 회계하기를, “비록 밤일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받들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돌의 품질이 배나 단단하고 일은 절반도 추진되지 않았으므로 특별히 독촉하여 밤낮없이 다듬더라도 오히려 군색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일체 정지시킨다면 일의 진도를 참작할 때 기일까지 해낼 가망이 없으니, 삼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번(番)을 나누어 시켜서 가끔 휴식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 12일(을미)에 돌을 운반하는 일이 끝났다. ○ 10월 7일(기미)에 내가 신원(新園)으로 가서 혼유석 다듬은 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앵봉(鶯峯)의 석품이 어찌 대뜸 남양(南陽)의 남포석(藍浦石)만 못하다고 하겠는가. 이 땅에 이런 돌이 있는 것은 어찌 하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인하여 옹가(瓮家)에 이르러 병풍석(屛風石), 인석(引石), 만석(滿石)을 두루 보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석물에 그림을 그리는 수법이 극히 정교하고 세밀하니, 최천약(崔天若)을 시켜서 하더라도 더 잘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비록 의식에 소요되는 물품이라 하더라도 능히 뜻대로 성의를 다할 수 있으니, 또한 하늘의 뜻입니다.” 하였다. ○ 14일(병인)에 석물에 대한 일을 끝냈다. - 병풍석 뒤의 8면과 석양(石羊), 석호(石虎)는 봉분 반월형의 앞에 함께 설치하고, 앞 4면과 혼유석, 망주석, 문무석, 석마(石馬), 장명등, 좌향석과 비(碑)는 아래 현궁(玄宮)의 뒤에 설치하였다.○ 앵봉의 돌을 개인이 캐는 것을 금지시키도록 명하고, 방백(方伯)과 지방관에게 전교하기를, “앵봉의 돌을 원침의 상설(象設)에 쓰는 것은 인력으로 된 바가 아니니, 어찌 사사로이 캐도록 맡겨 둘 수 있겠는가. 지방관은 이제부터 특별히 보살피고 보호하는 사람을 정하여 나라에서 쓰는 일이 아니면 캐지 못하도록 하라. 그리고 도백(道伯) 역시 봄과 가을에 봉심을 행할 때 편장(偏將)이나 비장(裨將)을 보내어 살피게 하고 그때그때 즉시 보고하는 것을 법으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 병오에 비(碑)를 세웠다. - 표석(表石)이다.정지대석(正地臺石)의 하박석(下博石)은 48개이다. 대개 한 조각의 외광(外廣)은 2자 4치이고 내광(內廣)은 1자 7치이며 높이는 1자 1치이고, 바깥의 주위는 12개의 모서리가 있다. 한 모서리에 네 조각을 기준으로 한다. 두 조각이 모서리에 해당하는데 좌우로 약간 길면서 치수가 같고, 두 조각은 안쪽에 있으면서 서로 나란한데 앞의 것에 비하여 약간 짧고 치수는 같다. 좌우의 두 조각은 모서리에 해당하는 변(邊)의 길이가 5자 3치이고, 속으로 향한 변의 길이는 5자 2치이다. 안에 있는 두 조각은 밖을 향하는 변의 길이가 같고 좌우의 조각이 속을 향하는 변은 두 조각이 서로 나란한데 변의 길이는 밖을 향하는 변에서 5푼을 감하고, 안의 끝을 깎아 한계를 지으니 - 속명(俗名)은 개탕(介湯)이다. - 길이가 2자 6치로 정지대석을 받는다. 정지대석은 12개이다. 대개 한 조각의 바깥 옆 길이는 8자 3치이고 안쪽의 옆 길이는 6자 8치이며 넓이는 2자 6치이다. 좌우의 모서리에 해당하는 변은 넓이가 2치가 더 길고 높이는 2자이고 상단은 약간 둥글게 깎고 조방운두(雕方雲頭) - 속명은 봉련(峯蓮)이다. - 는 양쪽 머리가 속을 향하여 약간 눕고 그 모양은 마제(馬蹄) - 속명은 연이(軟耳)이다. - 같고 밖을 향하여 약간 둥그스름하게 깎고 좌우의 곁 조각을 결합시키어 미구(微溝) - 속명은 번광(翻匡)이다. - 를 이루고 속의 상단으로부터 평평한 꼭대기를 향하여 비껴 깎아서 저계(低界) - 속명은 개탕(介湯)이다. -를 만드는데 넓이가 1자 5치이고 좌우는 각각 2자 2치 5푼이며 그 넓이가 3치가 더 많은데 중앙에서 면병석(面屛石)을 받고 좌우에서 우병석(隅屛石)의 반을 받으며, 하단으로부터 위를 향하여 비껴 깎아서 저계가 되는 것은 넓이가 2치인데 와첨구방(瓦簷溝防) - 속명은 단골막이(丹骨莫只)이다. - 의 반을 받는다. - 이상은 기산(岐山)의 돌이다.○ 우병풍석(隅屛風石)은 12개이다. 대개 한 조각은 모양이 모서리로 되어 있는데 모서리는 미구로 되어 정지대석(正地臺石)과 결합하는 부분에 해당된다. 바깥의 횡장(橫長)은 좌우가 각각 2자 2치 5푼이고 안쪽의 횡장은 좌우가 각각 1자 5치 5푼이다. 넓이는 모서리에 해당하는 곳이 2자이고 좌우의 변은 1치씩 줄었다. 높이는 2자이고 앞에는 네모를 그리고 그 네모 안에는 연꽃과 연잎을 조각하였으며, 네모 밖은 사방이 3치이고 좌우가 똑같이 양단으로부터 안쪽을 향하고 세로로 깎아 저계가 되니, 넓이가 1치인데 좌우로 각각 면병석의 좌우 끝을 받는다. 면병풍석(面屛風石)은 12개이다. 대개 한 조각의 횡장은 3자 7치 5푼이고 넓이는 우병풍석에 3치가 못 미치고 높이는 우병풍석과 같다. 앞쪽에 네모를 그리고 그 네모 안에는 모란(牡丹)을 조각하였다. 네모 밖은 사방이 3치이고 정지대석 안쪽의 횡계(橫界)의 허리에 세우는데 좌우의 끝이 횡계에 들어간다. 두 끝의 넓이는 각각 1치로 우병석(隅屛石)의 종계(縱界)와 결합된다. 횡가석(橫架石) - 속명은 만석(滿石)이다. - 은 12개이다. 몸체는 정지대석과 같고 두께는 7치가 모자라며 넓이는 1치가 모자란다. 병풍석 위에 가로로 걸치는데 위치는 정지대석에 준한다. 하단은 둥그스름하게 깎아 서련(瑞蓮) - 속명은 만모란(蔓牧丹)이다. - 을 조각하였다. 좌우 양단은 2치씩 깎아 줄이고 가운데는 4치를 남겨 어금니처럼 만들고, 좌우의 곁 조각과 이어 결합하고 두 어금니는 서로 연결되어 인석(引石)의 홈에 들어간다. 12면에는 소전(小篆)으로 12지(支)를 새겨 붉은색으로 채웠다.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使) 윤동섬(尹東暹)이 썼다. - 정지대석으로부터 횡가석에 이르기까지 안의 주위가 열두 모서리로 높다랗게 깎아지른 듯하다 인석은 12개이다. 대개 한 조각의 길이는 4자 5치이고 넓이는 1자 3치이며 두께는 8치 5푼이다. 전단(前耑)의 높이는 1자 7치이고 밑바닥의 허리에는 옆으로 파서 홈을 만들어 횡가석의 어금니가 물리게 하고, 좌우의 이는 홈을 동일하게 하며 내단(內耑)은 깎아서 규수(圭首)를 만들고 전단에는 연잎을 조각하였는데 연잎은 위로 연꽃의 유두(乳頭) - 속명은 반개련(半開蓮)이다. - 를 받치고 있다. 12개의 유두에 소전으로 8간(干)과 4괘(卦)를 새겨 붉은색으로 채웠다. - 판돈녕부사 윤동섬이 썼다. ○ 이상은 앵봉(鶯峯)의 돌이다.○ 우와첨상석(隅瓦簷裳石)은 12개이다. 대개 한 조각에 네 곳의 홈이 있고 네 곳의 두둑이 있다. 그 모양은 모서리로 되어 있는데 양쪽 머리가 안쪽을 향하여 약간 누운 것이 말굽 모양과 같다. 모서리에 해당하는 변의 길이는 2자 7치인데 면와(面瓦)와 나란하다. 변의 길이는 2자 6치이며 외광(外廣)은 4자 8치이며 내광(內廣)은 4자 2치이고 높이는 1자 3치 5푼이다. 원와단(鴛瓦耑)에는 화두와(花頭瓦) - 속명은 방초(防草)이다. - 를 조각하고 내단(內耑)에는 구방(溝防)의 반을 만들고, 나머지가 1치 5푼인데 깎아서 앙계(仰界) - 속명은 개탕이다. - 를 만들어 정지대석의 하단 저계(低界)와 접하게 하고, 와단(瓦耑)은 조금 낮게 하여 평대(平臺)가 되게 하는데 길이는 7치로 하박석(下博石)에 닿게 한다. 면와첨상석(面瓦簷裳石)은 24개이다. 대개 한 조각에 홈이 둘이고 두둑이 둘인데 면와와 나란하다. 변의 길이는 2자 5치 5푼이고, 우와(隅瓦)에 해당하는 변의 길이는 2자 6치이며 외광은 2자 4치이고, 내광은 2자 5푼이며 높이는 우와첨(隅瓦簷)과 우면와첨(隅面瓦簷)은 모두 동일한데 변에는 원와(鴛瓦)가 없고 곁 조각의 원와를 받아 서로 가려 틈이 없다. 와첨(瓦簷) 세 조각은 하박석에 준하는데 네 조각을 통계하면 모두 홈이 8이고 두둑이 9이다. - 이상은 앵봉의 돌이다.○ 혼유석(魂遊石)은 길이가 9자 9치이고 넓이가 5자 9치이며 두께가 1자 7치 8푼이고, 앞면에는 소전(小篆)으로 계좌(癸坐)라는 두 글자 - 판돈녕부사 윤동섬(尹東暹)이 썼다. - 를 조각하여 붉은 칠로 채웠다. 부석(跗石) - 속명은 북석[鼓石]이다. - 은 넷인데 높이가 1자 7치이고 위아래의 직경이 1자 1치이며, 가운데의 직경은 2자 5치이고 네 면에는 도철(饕餮)을 조각하였다. 대석(臺石) - 속명은 박석(博石)이다. - 은 2개인데, 길이가 4자 7치 5푼이고 넓이는 6자이며 두께는 1자 3치이다. - 앵봉의 돌이다.○ 장명등(長明燈)은, 개석(蓋石)의 높이는 3자 8치인데 위에는 연꽃 유두(乳頭)를 만들고 다음은 연꽃을 만들고, 다음은 2층의 연잎을 만들고 다음은 8각의 처마를 만들었다. 가운데의 직경은 4자이고 8면인데, 각면은 1자 5치 5푼이고, 개석으로부터 대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8면으로 그 밑을 파서 체석(體石)을 덮었다. 체석은 길이가 5자 1치로 위의 1치는 개석에 넣었다. 개석 아래에는 구멍 하나를 정(正) 4면으로 통하게 뚫어 작은 창을 만들고 간(間) 4면에는 소전(小篆)으로 수(壽) 자를 조각하였다. 다음은 격석(隔石)인데 위에는 연환(連環)과 꽃과 마름을 조각하고 각 2면에는 연꽃, 국화, 모란, 영지(靈芝)를 조각하였으며 다음 5치는 허리를 만들어 각면마다 연환을 조각하였다. 다음은 대석(臺石)이니 여덟 모퉁이에는 연주주(連珠柱)를 조각하고, 기둥 사이에는 구름을 조각하고, 머리 밑에도 구름을 조각하였으며, 발 아래는 1자 8치인데 지대석을 만들어 땅에 들어가게 하였다. - 앵봉의 돌이다.○ 망주석(望柱石)은 대(臺) 위의 높이가 7자 5치이고 상단에는 둥근 머리를 만들었다. 다음에는 연주(連柱)를 조각하였으며 다음은 8면의 운두(雲頭)를 만들고, 운두로부터 대석에 이르기까지 모두 8면이다. 다음은 1자 1치인데 모서리를 만들고, 다음은 4자 5치인데 기둥을 만들었다. 각면의 내면에는 가느다란 호랑이를 조각하여 왼쪽의 망주에는 오르게 하고 오른쪽의 망주에는 내려가게 하였다. 하단의 5치는 대석에 심었다. 대석의 높이는 2자이다. 위층의 높이는 1자인데 연꽃을 조각하였고, 다음의 5치는 가는 허리를 만들었으며 각면마다 연환동심결(連環同心結)을 조각하였다. 아래층의 높이는 1자인데 모란을 조각하였고, 다음은 대석 1자 3치인데 1자는 땅에 들어갔다. - 앵봉의 돌이다.○ 문관석(文官石)은 관(冠)을 쓰고 홀(笏)을 꽂은 상을 만들었다. 길이가 6자 8치이고 넓이가 2자 6치이며 두께가 2자 1치이고 대석(臺石)은 땅에 들어간 것이 2자이다. 무관석(武官石)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상을 만들었다. 길이가 7자 1치이고 넓이가 2자 8치이며 두께가 2자 2치 5푼이고 대석은 문관석과 같다. - 이상은 앵봉의 돌이다.○ 석양(石羊)은 서 있는 모양을 만들었다. 높이가 2자 7치이고 넓이가 1자 2치 5푼이며 길이는 4자 7치이고 네 다리의 사이는 통하게 하여 뚫지 않고 떨기로 된 난초를 조각하였으며, 대석은 땅에 들어간 것이 1자이다. - 앵봉의 돌이다. - 석호(石虎)는 걸터앉은 상을 만들었다. 높이가 2자 5치이고 넓이는 2자 2치 5푼이며 길이는 4자 8치이고 대석은 석양과 같다. 석마(石馬)는 서 있는 모양을 만들었다. 높이가 3자이고 넓이는 1자 6치 5푼이고 길이는 5자 3치이고 다리 사이의 조각한 그림과 대석은 석호와 같다. - 이상은 기산(岐山)의 돌이다.○ 좌향석(坐向石)은 길이가 2자이고 넓이가 1자이며 두께가 5치이다. 해서(楷書)로 ‘현륭원 좌선건해룡 계좌정향 병자병오분금 건을신득수 오파 혈심구척 용주척 병풍석원경삼십이척 용영조척 격회일척 방회삼척 지회삼촌 용예기척 천회한금정 정지대석하용박석 환포박석 하축회후일척칠촌 분금봉침(顯隆園 左旋乾亥龍 癸坐丁向 丙子丙午分金 乾乙申得水 午破 穴深九尺 用周尺 屛風石圓徑三十二尺 用營造尺 隔灰一尺 旁灰三尺 地灰三寸 用禮器尺 天灰限金井 正地臺石下用博石 環鋪博石 下築灰厚一尺七寸 分金縫針)’이라는 90자를 조각하고 붉은 칠을 하여 혼유석의 박석 좌측에 묻었다. - 도청(都廳) 서매수(徐邁修)가 썼다. - 개석(蓋石)의 길이와 넓이는 같다. 지석(誌石)의 함(函)은 전석(全石)으로 파서 만들었는데, 길이가 3자 4치이고 넓이가 2자 9치이며 높이는 1자 4치이고 두께는 4치이다. 개석의 길이와 넓이는 같다. 옥을 담는 함의 길이는 1자 2치 5푼이고 넓이는 4치 3푼이며 높이는 4치 5푼이고 두께는 3치이다. 개석의 길이와 넓이는 같다. 비단을 담는 함의 길이는 2자 5치 3푼이고 넓이는 9치 6푼이며 높이는 4치 8푼이고 두께는 3치이다. 개석의 길이와 넓이는 같으며 모두 6조각의 돌로 합하여 만들었다. - 이상은 앵봉의 돌이다.○ 비(碑) - 표석(表石)이다. - 의 길이는 8자 5치 - 영조척(營造尺)을 썼다. - 이고 넓이는 3자 2치 6푼이며 두께는 1자 7치 5푼이다. 전면에는 전자(篆字)로 쓰고 - 판돈녕부사 윤동섬(尹東暹)이 썼다. - 음기(陰記)는 해자(楷字)로 썼는데 - 봉조하(奉朝賀) 조돈(趙暾)이 썼다. - 모두 붉은 칠로 채웠다. 개석(蓋石) - 속명은 가첨(加簷)이다. - 은 집의 처마처럼 하고 길이는 4자 9치이며 넓이는 3자 4치이고 높이는 2자 5치이다. 밑바탕 돌[趺石] - 속명은 농대(籠臺)이다. - 은 길이가 5자 3치이고 넓이는 3자 5치이며 높이는 2자 7치이다. 박석(博石)은 2개인데, 총 길이가 6자 7치이고 총 넓이가 4자 9치이며 높이는 1자 2치이다. - 비(碑)는 남포(藍浦)의 돌이고, 개석(蓋石)과 부석(趺石)은 앵봉의 돌이다. ○ 상설(象設)은 도감(都監)에서 만들고, 비(碑)는 대농(大農)에서 만들어 해당 관청과 지방관과 본원관(本園官)이 추후에 세웠다. ○ 곡장(曲墻) 뒷면의 바깥 길이는 57자이고 모퉁이면의 길이는 36자 2치이다. 지석(枝石)은 속명으로는 활지(闊只)인데, 길이가 33자 3치이고 좌우의 길이는 57자 5치이며 뒷면의 높이는 3자 8치이고, 층장(層墻) 아래 좌우의 높이는 3자 8치이며 두께는 2자이다. 화계(花階)는 3층인데 높이는 3자 6치이고, 넓이는 4자이다. 병풍석의 뒷면에서 곡장까지는 12자 8치이다. 정지대석의 왼쪽에서 곡장까지는 17자 7치이고 오른쪽도 같다. 병풍석의 전면에서 혼유석까지는 5자 7치이고, 병풍석의 전면에서 초계(初階)까지는 11자 8치이며, 혼유석의 전면에서 장명등까지는 13자 7치이다. 초계에서 재계(再階)까지는 29자이고, 곡장의 왼쪽에서 오른쪽까지는 67자 4치이며, 와첨상석(瓦簷裳石)에서 곡장까지는 15자이고, 망주석에서 문관석(文官石)까지는 7자 5치이고 좌우는 같다. 문관석에서 무관석까지는 5자 5치이고 좌우는 같다. 무관석에서 석마(石馬)까지는 6자 5치이고 좌우는 같다. 초계에서 석양(石羊)까지는 29자 3치이고 좌우는 같다. 석양에서 석호(石虎)까지는 13자 8치이고 좌우는 같다. 곡장(曲墻) 아래의 석호는 좌우의 거리가 41자 8치이고, 곡장대(曲墻臺) 아래에서 석양과 석호까지는 각각 3자 9치이고 좌우는 같다. 망주석의 좌우 거리는 57자 6치이고, 문관석의 좌우 거리는 62자 6치이며, 무관석 좌우의 거리도 같다. 석마의 좌우 거리는 69자이고, 초계(初階)에서 문관석까지는 5자 6치이다. ○ 병풍석의 기지(基址)는 원경(圓徑)이 32자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써서 깊이를 7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삼물회(三物灰)로 다시 4자를 채우고 하박석(下博石)을 폈으며, 하박석 위에는 정지대석(正地臺石)을 설치하고 정지대석 위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며, 병풍석 위에는 만석(滿石)을 설치하고 만석의 열두 모퉁이에는 인석(引石)을 설치하였으며, 정지대석 4면에는 와첨상석 36개를 둥그렇게 설치하였다. 무릇 석물을 배설하고 결합하는 데는 유회(油灰)로 채우고 철익(鐵杙)을 넣어서 유동(遊動)을 막았다. 혼유석의 기지(基址)는 깊이를 7자 8치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지고 삼물회로 다시 4자를 채우며, 지석함(誌石函)을 묻을 곳은 도로 파서 석함을 안치하고 지석함 4부를 함께 넣었으며, 외목함(外木函)은 그대로 석함에 두고 고운 모래를 넣어 빈 곳을 채우고 이어 개석(蓋石)을 덮은 뒤 굵은 구리 철사로 십자형(十字形)으로 묶었다. 그리고 또 삼물회를 메로 다지고 나서 하박석을 펴고, 하박석 위에는 혼유석을 안치하고 혼유석의 아래는 4개의 부석(跗石)으로 받친다. 장명등(長明燈)의 기지는 깊이를 7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잡석으로 채운 다음 다시 메로 다지고, 삼물회로 다시 다지고 그대로 세워서 개석으로 덮었다. 망주석의 기지는 깊이를 5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지고 삼물회로 다시 다져 대(臺)를 만들고 망주를 세웠다. 문관석과 무관석의 기지는 각각 깊이를 7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잡석으로 채운 다음 다시 메로 다지고 삼물회로 채우고 배설하였다. 석양과 석호의 기지는 각각 깊이를 3자 5치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삼물회로 다시 다지고 배설하였다. 석마(石馬)의 기지는 깊이를 5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지고 잡석으로 채운 다음 다시 메로 다지고 삼물회로 다시 다져 배설하였다. 좌향석을 묻을 곳은 깊이를 4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삼물회로 다시 1자를 쌓고 묻은 다음 개석을 덮고 다시 삼물회로 다져서 평지(平地)에까지 이르렀다. 비(碑)의 기지는 깊이를 7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삼물회를 다시 채운 뒤 하박석을 펴고 하박석 위에 부석(趺石)을 놓았다. 곡장(曲墻)의 기지는 깊이를 4자로 파고 좌우로 서로 맞보이게 하였다. 좌우 장지석(長枝石)의 기지는 깊이를 5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삼물회를 다시 평지에까지 채우고 지대석과 화계(花階)를 설치하였다. 초계(初階)와 이계(二階)의 기지는 깊이를 5자로 파고 처음에는 메로 다져 다시 삼물회를 채워서 평지에까지 이르게 하고 계단을 설치하였다. 추일(諏日) 제4날을 가리는 자가 논하기를, “오천(五天)의 기운은 중요한 것이 상생(相生)하는 데 있으니, 연월일시(年月日時)가 선천(先天)의 가득 찬 기운을 얻은 경우가 크게 이롭다. 그래서 내룡(來龍)은 묻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꽂아 세운다.” 하였으니, 좋은 날을 가리는 법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원침(園寢)을 정한 처음에 가린 날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길한 날을 점치는 데 이르러서는 네 가지의 왕기(旺氣)가 모아지고 백 가지의 좋은 일이 합쳐져, 문득 진혈(眞穴)이 처음에는 감추었다가 곧 드러난 것과 그 기이함을 함께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그렇게 명한 것이다. 기유년(1789, 정조13) 8월 9일(임술)에 총호사(摠護使) 이하의 신료가 빈청(賓廳)에 모여 회의를 하면서 원침을 옮기는 길일을 다시 가렸다. 새 원침은 좌선룡(左旋龍) 건봉(乾峰) 아래에서 해방(亥方)으로 돌아 계방(癸方)으로 와서 축방(丑方)으로 돌아 간방(艮方)에서 입수(入首)하니, 계좌정향(癸坐丁向)이고 병자(丙子)ㆍ병오(丙午)의 분금(分金)이며, 건방(乾方), 을방(乙方), 신방(申方) 득수(得水)에 오방(午方)이 파문(破門)이 된다. 명궁(命宮)은 을묘생(乙卯生)이니 토일(土日)을 금기(禁忌)하고, 홍운(洪運)은 무진목(戊辰木)으로 금(金)을 금기한다. 연월일시는 소리(小利)하니 정운(正運)은 신미토운(辛未土運)으로 장생궁(長生宮)에 깃든다. 역사(役事)의 시작은 7월 갑진 - 20일이다. - 진시(辰時)에 하여 먼저 동쪽에서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내고, 동월 경술 - 26일이다. - 새벽에 풀을 베고 땅을 팠으며, 동일 사시(巳時)에 먼저 동쪽을 파고 옹가(瓮家)를 만들었다. 9월 경인 - 7일이다. - 진시에 금정(金井)을 파고 동월 갑오 - 11일이다. - 묘시(卯時)에 10자 깊이로 혈(穴)을 파서 - 주척(周尺)을 사용하였다. - 외재궁(外梓宮)을 모셔 왔으며, 동월 기해 - 16일이다. - 진시에 외재궁을 내리고, 동월 신축 - 18일이다. - 묘시에 빈(殯)을 만들었으며, 대여(大轝)가 원침에 도착한 뒤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궁(欑宮)을 열도록 하였다. 10월 기미 - 7일이다. - 신시(申時)에 먼저 서쪽의 상원(上園)을 파고, 동일에 찬궁을 연 다음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현궁을 내리도록 하였다. 동월 기미 - 7일이다.- 해시(亥時)에 길방(吉方)인 갑방(甲方)과 경방(庚方)의 흙을 취하였다. 원(園)을 축조하도록 명한 해가 기유년이니 토생(土生)이고, 완성된 달이 을해월이니 화태(火胎)이고, 완성된 날이 기미일이니 화대(火帶)이고, 시간이 을해시이니 화태(火胎)여서, 본명(本命)은 삼합(三合)이 되어 국(局)을 얻음에 보통(寶通)ㆍ천규(天竅)ㆍ주마(走馬)ㆍ육임(六任)에 모이니 귀인이 천문(天門)ㆍ개산(蓋山)에 오른다. 황도(黃道) 삼원(三元)에 자(紫)ㆍ백(白)ㆍ정(丁)ㆍ기(奇)가 중도천(中都天)에 이르러 운을 돌려서 두 개의 천간(天干)이 잡되지 않고, 칠군(七君)이 내려와 임함에 활록(活祿)ㆍ마귀(馬貴)이고, 진태음(眞太陰)이 와서 앉으니 존제(尊帝) 이성(二星)이다. 정자각(丁字閣)의 터를 닦았다. 7월 경술 - 26일이다. - 진시에 먼저 동쪽에서 시작하여 주춧돌을 정하였다. 8월 기묘 - 26일이다. - 묘시에 먼저 동쪽의 주춧돌을 정하여 기둥을 세우고 상량(上樑)하였다. 9월 갑신 - 1일이다. - 진시에 먼저 동쪽의 기둥을 세우고 구원침(舊園寢)에서 후토(后土)에 제사를 올려 사유를 고하였다. 8월 임술 - 9일이다. -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먼저 이안제(移安祭)를 지내고 동일 동시에 옹가(瓮家)를 만들었으며, 동일 신시에 원침을 파고, 동월 을축 - 12일이다. - 묘시에 먼저 동쪽의 흙을 파서 현궁(玄宮)을 꺼냈다. 10월 갑인(甲寅) - 2일이다. - 진시에 원상(園上)으로부터 향대청(香大廳)으로 나아가 원침을 파는 일을 마친 뒤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빈(殯)을 만들고, 대여(大轝)가 향대청에 도착한 뒤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궁(欑宮)을 열도록 하였다. 동월 병진 - 4일이다. - 신시에 먼저 서쪽의 문을 열어 발인(發靷)하여 동일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외재궁(外梓宮)을 뫼시는 의식을 연습하도록 하였다. 9월 신묘 - 8일이다. - 묘시에 발인하는 의식을 연습하고, 동월 계묘 - 20일이다. - 묘시에 구원침으로부터 향대청에 나아가는 의식을 연습하였으며 신원(新園)의 정자각에서 원침에 오르는 의식을 연습하였다. 동일 묘시에 - 제반 의식을 연습하는 날을 가리는 일은 그때마다 품지(稟旨)하도록 하였다. - 명정(銘旌)을 다시 쓰고, 동월 경술 - 27일이다. - 진시에 - 명정을 쓰는 일과 날을 가리는 일은 그때마다 품지하도록 하였다. - 구례(舊例)에 현궁을 꺼내는 데 시각을 가리지 않고 외재궁(外梓宮)을 내리는 일도 날에 구애받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현궁을 꺼내는 데 길시(吉時)를 가리고 외재궁을 내릴 때도 길일(吉日)을 가리도록 명하였다. - 이보다 먼저 7월 16일(경자)에 총호사(摠護使) 김익(金熤)이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빈청에 모여 원침을 옮기는 길일을 가렸는데, 10월 20일에서 그믐까지는 길일이 없고 11월 2일이 길합니다.” 하였는데, 내가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물었더니 박명원이 말하기를, “일관(日官)의 말을 듣건대, 11월에 삼덕(三德)이 함께 모이고 본명(本命)이 세(勢)를 얻으니 극히 귀한 격이라 하였습니다.” 하기에, 이날로 가려 정하라고 명하였다. 김익 등이 물러나 날을 가려 아뢰기를, “일을 처음 시작하는 날은 7월 갑진 20일 진시(辰時)인데, 먼저 동쪽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내고, 동월 경술 26일 새벽에 풀을 베고 흙을 파며, 동일 사시에 먼저 동쪽을 파서 옹가(瓮家)를 만들고, 9월 경자 17일 묘시에 금정(金井)을 파고, 10월 을묘 3일 오시(午時) 또는 동월 을축 13일 사시에 10자 깊이로 혈(穴)을 파되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며 외재궁(外梓宮)을 뫼시고, 10월 갑인 2일 진시나 동월 갑자 12일 묘시에 외재궁을 내리고, 10월 경신 8일 진시나 동월 경오 18일 오시에 빈(殯)을 만들고, 대여(大轝)가 원침에 도착한 뒤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궁을 열도록 합니다. 11월 갑신 2일 묘시에 먼저 서쪽의 상원(上園)을 파고 동일에 찬궁을 연 다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현궁(玄宮)을 내리며, 11월 갑신 2일 사시에 길방인 병방(丙方)과 임방(壬方)의 흙을 취하기로 합니다. 원(園)을 축조하도록 명한 해가 기유년이니 토(土)이고, 완성되는 달이 병자월이니 수(水)이고, 완성되는 날이 갑신일이니 수(水)이고, 시간이 기사시이니 목(木)이어서, 본명(本命)에 존귀(尊貴)함이 모였으니 성인(聖人)이 보전(寶殿)에 오르고, 좌향과 산이 세(勢)를 얻었으니 천지의 덕이 합하며, 개산(蓋山)ㆍ황도(黃道)ㆍ도천(都天)이 좋은 운세를 돌려주니 활록(活祿) 마귀(馬貴)이고 팔산(八山)의 역마(驛馬)가 음양을 고루 나누니 두 덕이 함께 모였으며, 정(丁)ㆍ기(奇)가 중앙에 들어오니 봉황(鳳凰)이 참여하고 금계(金鷄)가 울며 옥견(玉犬)이 짖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자각(丁字閣)의 터를 닦는 일은 7월 경술 26일 진시에 먼저 동쪽에서 시작하여 주춧돌을 정하고, 8월 기묘 26일 묘시에 먼저 동쪽의 주춧돌을 정하고 기둥을 세우고 상량(上梁)을 하며, 9월 갑신 1일 진시에 동쪽 기둥을 세우고 구원(舊園)에서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내 사유를 고하고, 10월 을축 13일 새벽에 이안제(移安祭)를 지내며, 동일 동시에 옹가(瓮家)를 만들고, 동일 오시에 원침을 파며, 10월 갑술 22일 사시에 먼저 서쪽의 흙을 파서 현궁을 꺼내어 원침을 연 다음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소(園所)로부터 향대청(香大廳)에 나아가 원침을 여는 일을 끝마친 뒤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빈(殯)을 만들게 하고, 대여(大轝)가 정자각에 도착한 다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찬궁(欑宮)을 열도록 하며, 동월 경진 28일 유시나 해시 또는 동월 신사 29일 진시 또는 동월 임오 30일 자시에 먼저 서쪽의 흙을 파고, 발인은 동일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였다.이보다 앞서 총호사 김익(金熤)이 아뢰기를, “원침을 옮길 길일을 가린 뒤에 방외인(方外人)들이 갑론을박하는 논란이 없지 않다는 말을 추후에 들었기 때문에, 신이 금성위(錦城尉)와 서운관 제조(書雲觀提調) 및 감독하는 여러 신료들과 함께 도감(都監)에 모여 방외인 진사 송중량(宋重亮), 유학 강필제(姜必齊)ㆍ김영위(金永暐), 일관(日官) 지일빈(池日賓)ㆍ지경철(池景喆)ㆍ김희경(金喜慶)을 불러 조목조목 분석하며 반복하여 논란하였습니다. 김영위는 말하기를, ‘2일은 곧 복단일(伏斷日)이니, 다른 살(煞)을 제압하여 굴복시키고 단절할 수 있으나 쓰지는 못합니다’ 하였고, 지일빈 등은 말하기를, ‘이날이 과연 복단일이기는 하지만, 《시용통서(時用通書)》에 이르기를, 「매장(埋葬)하는 데는 금기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천기대요(天機大要)》에서 말한 것을 가지고 도리어 《시용통서》에서 금기하지 않는 날을 금기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김영위가 말하기를, ‘《시용통서》는 미처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강필제는 말하기를, ‘복단일을 《시용통서》에서 비록 금기하지 않는다고 하나, 《조명결(造命訣)》에 이르기를, 「매장을 한다든가 우물을 파는 데는 더욱 금기한다.」고 하여, 두 가지의 말이 서로 모순되는데 하필이면 이날을 써야 하겠습니까’ 하였으며, 지일빈 등은 말하기를, ‘조명결’이라는 세 글자는 간혹 방서(方書)에는 나타나지만 별도로 세상에 유행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하였으니, 어떤 사람이 지은 것입니까?’ 하니, 강필제가 말하기를, ‘등본(謄本)만을 보았기 때문에 누가 지은 것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송중량이 말하기를, ‘복단일은 《시용통서》에 이미 「매장(埋葬)에는 금기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역서(曆書) 중에도 「안장일(安葬日)은 이 복단일이 많다.」고 하였는데, 2일이 그렇습니다’ 하였으며, 김영위가 말하기를, ‘《천기대요》에 이르기를, 「지격일(地隔日)은 안장(安葬)을 금기한다.」고 하였는데, 11월 신시는 곧 지격일입니다’ 하니, 지일빈 등은 말하기를, ‘지격일은 《시용통서》에 「다만 풀을 베고 흙을 파고 금정(金井)을 파는 일을 금기한다.」 하고, 제법(制法)에 삼기(三奇)와 녹마(祿馬)의 귀한 것이 함께 오고 또 성조(成造)의 날을 만났으니 피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며, 강필제와 송중량은 말하기를, ‘과연 이것으로 장일(葬日)에 구애받을 것은 없습니다’ 하니, 김영위가 말하기를, ‘《천기대요》에 논한 것만을 보고 말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강필제는 말하기를, ‘을(乙)의 양인(羊刃)은 갑(甲)에 있고, 갑은 또 을의 겁재(劫財)가 됩니다’ 하니, 지일빈이 말하기를, ‘을의 양인은 진(辰)이고 갑은 겁재가 되고 양인은 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강필제가 말하기를, ‘양(陽)은 순수(順數)로 하고 음(陰)은 역수(逆數)로 하니, 을이 음목(陰木)이면 갑이 어찌 양인이 되지 않습니까’ 하니, 지일빈 등은 말하기를, ‘녹(祿) 앞에 일위(一位)가 양인이 되고 산(山) 앞에 일위가 양인이 되는데, 역수를 하여 을이 갑을 만나 양인이 된다는 것은 원래 이런 법이 없으니, 이것을 어느 책에서 보았습니까?’ 하니, 강필제가 말하기를, ‘《조명결》에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송중량이 말하기를, ‘여러 일관(日官)의 말이 옳으며, 역수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강필제가 말하기를, ‘묘목(卯木)은 포(胞)를 신방(申方)에서 일으키면 신방은 겁살(劫煞)이 됩니다’ 하였는데, 지일빈 등이 말하기를, ‘이것은 장일(葬日)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고, 가령 이론이 있다고 하더라도 갑신은 납음(納音)에서 수(水)에 속하니, 묘목은 절처봉생(絶處逢生)이 되어 이는 길격이 됩니다’ 하였습니다. 강필제가 말하기를, ‘납음의 수(水)가 어떻게 목(木)의 패절(敗絶)을 구제할 수 있습니까?’ 하자, 지일빈 등이 말하기를, ‘ 원천강(袁天綱)의 오행(五行)에서 반생(反生)은 패절을 시키지 않으니, 예를 들어 말하면 목은 신(申)에서 패절하는데 갑신(甲申)의 경우는 패절하지 않습니다. 이는 바로 아래에서 생(生)을 만나서인데 납음(納音)의 수가 목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함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강필제가 말하기를, ‘오행 반생(五行反生)의 예와 당하 봉생(當下逢生)의 의논은 일관들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습니다. 강필제가 또 말하기를, ‘해묘미(亥卯未) 삼합(三合)은 겁재가 신(申)에 있으니 신은 겁살이 됩니다’ 하니, 지일빈 등이 말하기를, ‘여기에 대해서는 살을 변화시켜 권(權)을 만드는 법이 있습니다. 기유 납음(己酉納音) 토(土)로 갑신 납음(甲申納音) 수(水)를 제재하여 녹마귀(祿馬貴)로 변화시키면, 방서(方書)에서 말하는 납음으로 제재하여 길성(吉星)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자, 강필제가 말하기를, ‘기유 토(土)가 갑신의 수(水)를 제재한다고 하는데, 태세(太歲)의 토(土)가 시(時)의 기사 목(木)에게 극(剋)을 받는다면 무슨 남은 힘이 있어서 수(水)를 극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지일빈 등이 말하기를, ‘살을 변화시켜 권으로 만드는 것은 가장 상격(上格)이 되는 것이니 시의 목은 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였는데, 강필제가 말하기를, ‘묘(卯)와 신(申)은 원진살( 嗔煞)이 됩니다’ 하니, 지일빈 등이 말하기를, ‘이것은 여러 살 가운데 가장 가벼운 것이기 때문에 안장총기(安葬摠忌)에서는 원래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하므로, 강필제가 말하기를, ‘살이라고 이름하는데 어찌 장례를 지내는 일에 구애받지 않겠습니까?’ 하자, 지일빈 등이 말하기를, ‘택일하는 법이 비록 대길이라고 하나, 원래 살이 없는 날이 없기 때문에 삼흉(三凶)과 사길(四吉)의 설이 있습니다. 더구나 안장총기 외에 다른 부문에 소속된 살을 어떻게 주변에서 끌어들여 금기를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송중량이 말하기를, ‘대개 날을 가리는 사람들은 그 말이 천 가지 백 가지가 되어 사람들의 의견이 각각 다르니, 대동(大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이 술법을 쓰는 데 있어서 대체로 좋으면 작은 흠은 구애하지 않았는바, 지금의 이 병자월 갑신일은 비록 복단(伏斷) 등의 작은 살이 있으나 녹귀(祿貴)ㆍ삼기(三奇)ㆍ삼덕(三德) 등의 여러 길성과 합하였으니, 얻기 어려운 날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미 피차의 논란하는 말을 듣고 또 인용하는 방서(方書)를 보았더니, 일관(日官)의 말은 모두 근거가 있어서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었으나, 방외인(方外人)들의 말은 근거 없는 말이 많아 번번이 모두 스스로 굴복하였는데, 갑론을박하며 일치하지 않던 논의가 이제부터 한곳으로 귀착하게 되어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강필제가 이상한 말을 앞장서서 하고 김영위가 망녕되게 대사를 논의하였으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형률을 적용하여 엄하게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진실로 품은 바가 있다면 어찌 방외사(方外士)라 하여 말을 머뭇거리게 할 수 있겠는가. 조가(朝家)에서 또한 그가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가 이미 확실한 견해도 없고 또한 넓게 고찰하지도 않았으면서 함부로 대사를 논하면서 뜻대로 하고 어렵게 여기지 않으니 국가의 기강에도 관계가 된다. 더구나 다 낡아 떨어진, 손으로 베껴 쓴 책을 증거로 삼았으니 전날의 김엽(金曄)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일의 중대성으로 헤아리고 여러 사람들의 의혹을 깨우쳐 주는 도리로는 그대로 둘 수 없다. 처결하는 일은 공죄(公罪)로 결방(決放)하라. 그리고 《천기대요》와 《시용통서》 등의 책을 근거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별자리의 궤도에 대한 설명에 이르러서는 하늘을 도는 도수(度數)가 고금에 현격히 차이가 난다. 가령 방서 중에 이런 간지(干支)와 별자리가 있는 것도 지금 와서는 다른 간지로 바꾸어야 함은 술가(術家)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치로 미루어 알 만하니, 이것이 국(局)이나 방향을 가리는 사람이 헤아려서 가릴 때 격국(格局)을 중시하는 이유이다. 이 뒤로는 혹시라도 다시 기문법(奇門法)을 가지고 시비를 논란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경들은 절대로 귀를 기울여 믿거나 흔들려 굽히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김익(金熤)과 금성위 박명원(朴明源) 등이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일전에 방외인(方外人)과 일관(日官)을 모아 서로 함께 변론을 하였는데, 방외인이 대사를 함부로 논한 죄에 대해서는 이미 처분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막중 막대한 일에 대해 이미 시비의 말이 있으니, 이날을 그대로 쓰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또 들으니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의 아들 홍대영(洪大榮)이 자못 일가(日家)의 학술로 자처하는데, 그에게는 또 다른 의논이 있다고 합니다. 지난 병신년(1776, 정조 즉위년)에 김엽의 망언에 대한 죄를 처분하였으나 택일은 추후에 고쳤습니다. 다시 생각하여 날을 바꾸어 가림이 신중을 기하는 도리에 실로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11월 2일 이외에 합당한 길일이 있는가?” 하였더니, 박명원이 말하기를, “10월 7일은 더없는 길일인데 처음에 가려 정할 수 없었던 이유는, 10월 7일로 날을 정하면 구원(舊園)을 파는 날을 형편상 8월로 가리게 되니, 두 달 먼저 원침을 파는 일은 선례(先例)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감히 이날을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대례(大禮)에서 길일을 가리는 데 이론(異論)이 있으면 마땅히 원침을 편히 뫼시는 길일을 중시해야 하니, 구원을 파는 차이를 비교해 보면 두 달 먼저 하게 되므로 모든 일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대신들의 의논을 따르소서.” 하였므로, 이에 구원을 파는 날은 8월로 하고 신원에 뫼시는 날은 10월로 가려서 하되, 그날로 구원에 가서 원침을 파는 사유를 고하도록 명하였다. ○ 길일은 이미 가려 정하였으며 시(時)는 해시로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밤의 시각은 반드시 중성(中星)으로 미루어 계산하는데 서운관의 옛 법과 《누주통의(漏籌通義)》에 기록된 각 절기의 중성은 곧 영조(英祖) 갑자년(1744, 영조20)의 항성(恒星)과 적도(赤道) 경위(經緯)의 도수(度數)이다. 지금 기유년과의 거리가 46년이 되는데 항성의 세차(歲差)가 이미 반도(半度)를 넘었으니, 중성의 동쪽과 서쪽으로 치우침이 이치상 응당 차이가 있을 것이다. 또 옛 법은 기준이 서지 않아 새벽과 저녁이 나누어지고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대해 앞뒤로 가감하는 숫자를 대통력(大統曆)이나 시헌력(時憲曆)을 참고하여도 근거할 바가 없었다. 이에 서운관생(書雲館生) 이덕성(李德星)과 김영(金泳) 등에게 명하여 내가 즉위한 뒤 7년 계묘년(癸卯年)의 항성과 적도 경위의 도수를 기준으로 하여, 한양(漢陽) 북극(北極)의 높이 37도 39분 15초(秒)로 각 절후의 각 시각 중성을 계산해서 《신법중성기(新法中星紀)》를 편집하여 만들게 하고, 또 지평일구(地平日晷)와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를 만들게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이덕성과 김영 등을 시켜서 지평일구로 해의 그림자를 측정하고, 적도경위의로 중성을 측정하게 하여 《신법중성기》와 서로 맞추게 하였더니, 해의 자리가 인궁(寅宮)의 5도에 있는데 소설(小雪) 초후(初候) 해시(亥時) 초(初) 초각(初刻)에 규수(奎宿)의 제1성(星)이 오위(午位)에 바르게 해당되어 중성이 되었다. 천봉(遷奉) 제5거행하는 예가 이장(移葬)하는 일이고, 이장하기 때문에 더욱 삼가고 삼가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나의 슬픔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의식과 문물의 복잡한 일과 마음에 드는 기물(器物)의 이기(利器)라도 더러 마음속으로 조심하고 몹시 경계하여, 길에서 상여 줄을 잡을 때의 일체의 크고 작은 일을 감히 유사(有司)가 있다고 하여 혹시라도 안일하지 못하였으니, 후세의 군자(君子)는 나의 마음을 슬퍼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기유년 7월 11일(을미)에 두 곳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감독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 각신(閣臣)을 보내어 외규장각에 보관 중인 계축년(1673, 현종14)의 《천영릉의궤(遷寧陵儀軌)》와 신해년(1731, 영조7)의 《천장릉의궤(遷長陵儀軌)》를 가져다 도감에 명하여 참작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 7월 20일(갑진)에 신원(新園)의 일을 감독하는 여러 신료들이 명을 받아 일을 시작하였다. 26일(경술)에 관원을 보내어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내고 풀을 베고 흙을 팠다. ○ 8월 3일(병진)에 구원(舊園)을 참배하고 원침을 파는 공사를 계획하였다. ○ 7일(경신)에 신원(新園)의 호를 올려 현륭(顯隆)이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재신(宰臣) 유의양(柳義養)이 상소하여 원호(園號)를 고칠 것을 청하였는데, 당시에는 비록 그 일이 묵살되기는 하였으나 지금 신원을 점쳐 얻고 새 이름을 올리니 더욱 유감스러운 바가 없게 되었다. 대신, 관각신, 정부 서벽(政府西壁), 육조의 판서와 참판, 삼사 장관을 불러 현륭(顯隆) - 현(顯)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크게 드러났도다, 문왕의 모책(謨策)이여.” 하였고,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드러나지 않은 곳에도 임한 듯이 하시네.” 하였고, 두보(杜甫)의 시에 이르기를, “부지런히 애쓰는 뜻으로 힘들여 키워 주신 부모의 높은 은혜에 보답하려 하였다.”고 하였다. 융(隆)은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다. 《설문(說文)》에 이르기를, “푸짐하고 큰 것을 말한다. 물건의 가운데가 높고 또 성대한 것을 뜻한다.” 하였다. -, 덕륭(德隆) -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음악을 만들고 예법을 제정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덕(德)을 알게 함이 융이다.” 하였다. -, 헌륭(獻隆) - 헌(獻)은 자설(字說)에 이르기를, “큰 것이다.” 하였고, 시법(諡法)에 이르기를, “바탕을 알고 통달한 바가 있음을 헌이라고 한다.” 하였다. 융은 위에서 설명하였다. -, 희륭(煕隆) - 희(煕)는 《설문》에 이르기를, “흥성하고 화목하며 넓고 장구한 것이다.” 하였다. 융은 위에서 설명하였다. -, 계륭(啓隆) - 계(啓)는 《서경》에 이르기를, “우리 후세 사람을 깨우치고 도우셨다.” 하였다. 융은 위에서 설명하였다. -, 태륭(泰隆) -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근본을 귀하게 여김을 문(文)이라 하고, 친히 사용하는 것을 이(理)라 하는데, 이 두 가지가 합하여 문채를 이루어 태일(太一)로 돌아감을 곧 태륭이라 한다.” 하였다. - 으로 써서 빈청(賓廳)에 보이고 의논하게 하니, 빈청에서 현륭, 태륭, 덕륭으로 의계(擬啓)하여 올리자, 현륭으로 정하였다. ○ 9일(임술)에 구원(舊園)의 옹가(瓮家)가 이루어졌다. - 체제는 《오례의(五禮儀)》의 옛 제도에 나타나 있다. 서까래는 나무를 사용하였는데, 특별히 길고 가운데 쓸 것은 대나무로 대신하기가 어려워 신해년(1731, 영조7)의 예에 의하여 옹가와 수도각(隧道閣)에 들어가는 재목은 국내(局內)의 나무를 취하여다 써서 민폐를 덜게 하였다.- 분승지(分承旨)와 도감 당상, 낭청에게 명하여 번갈아 가며 숙직을 서게 하였다. ○ 구원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며 원침을 파는 사유를 고하고, 관원을 보내어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냈다. ○ 10일(계해)에 구원에서 상설(象設)을 철거하였다. - 먼저 문관석, 망주, 양석, 마석, 호석을 철거하였다.○ 11일(갑자)에 구원의 수도각(隧道閣)이 이루어졌다. - 체제는 《오례의》에 나타나 있다. ○ 옹가(瓮家)의 왼쪽에 길유궁(吉帷宮)을 설치하였는데 지방을 쓰는 곳이다. 오른쪽에는 작은 막차(幕次)를 설치하였는데 내가 나아가 일을 살피는 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원침 위에 서, 남, 북으로 각각 홍살문을 세우고 면포(綿布)로 휘장을 설치하였다. 내포성(內布城)은 남쪽의 홍살문 왼쪽에서부터 곡장(曲墻) 밖을 지나 남쪽 홍살문의 오른쪽에서 그치게 하고, 외포성(外布城)은 작문(作門)의 왼쪽에서부터 내청룡을 거쳐 주봉에 이르러 향대청을 돈 뒤에 외백호를 따라 작문의 오른쪽에서 그치게 하였다.○ 12일(을축)에 복(服)을 받고 원침을 팠다. 내가 시복(緦服)을 입고 수도각 안의 판위(版位)에 나아갔다. 대신(大臣)과 경재(卿宰)와 시종(侍從)의 구궁료(舊宮僚)는 유문(帷門) 안에 있었고, 문무백관들은 유문의 밖에 있었으며, 복을 받은 산직(散職)의 직함을 가진 관료는 작문(作門) 밖에 있으면서 망곡(望哭)을 하고, 유사들은 각각 물건을 가지고 대기하였다. 날이 밝자 대축(大祝) 이경오(李敬五)가 연도(羨道)의 남쪽에 꿇어앉아 북쪽을 향하여 기침을 세 번 하고 원침을 파는 일을 아뢰었다. 총호사 김익(金熤)은 역부를 거느리고 먼저 동쪽을 파고, - 삽으로 원침 위의 사방 잔디와 흙을 파니 깊이가 각각 1자였다. - 슬픔을 다하여 곡을 하고 찬배(贊拜)한 다음 장명등, 혼유석, 계단석을 철거하고 지석을 꺼내어 비각에 안치하였다. - 예조 절목(禮曹節目)에, “대전(大殿)의 시마복(媤麻服)은 연세포(練細布)로 하고, 시사복(視事服)은 백포(白袍), 익선관(翼善冠),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로 하며, 평상시에는 백조대(白絛帶)로 한다. 자전(慈殿)은 처음에는 시마복으로 의논하여 정하였다가 뒤에 천담복(淺淡服)으로 고쳤다. 자궁내전(慈宮內殿)은 연세포의 큰 소매 긴 치마와 개두(蓋頭), 두수(頭) 및 띠, 백피혜(白皮鞋)를 착용하고, 평상시에는 흰색의 의상과 검은색의 개두와 두수 및 띠를 한다. 내명부는 내전의 옷과 같다. 상궁 이하는 내전의 평상복과 같다. 종친, 문무백관과 사신(使臣), 외관(外官), 대전관(代奠官), 본원관(本園官), 양묘관(兩墓官), 액정관(掖庭官)은 시마복인데 연세포로 한다. 공복(公服)은 백포단령(白布團領)과 오사모(烏紗帽)와 흑각대(黑角帶)이고, 평상복은 흑립(黑笠)과 백의(白衣), 백대(白帶)이다. 묘사(廟社)와 각 능(陵)ㆍ전(殿)ㆍ원(園)ㆍ묘(墓)ㆍ본궁(本宮)에 입직하는 관료는 길복을 입고, 외방에 나간 관료는 백관의 복색과 같다. 녹사(錄事)와 서리는 검은 평정건(平頂巾), 백의, 백대를 한다. 그리고 서민은 흑립(黑笠)과 백의, 백대를 한다. 구원(舊園)에서 감독하는 신료와 수빈관(守殯官) 및 내시는 항상 제복(祭服)을 입고, 영악시위별감(靈幄侍衛別監)은 백두건, 백의, 백대로 한다. 구원을 파는 날로부터 석 달을 마치고 벗는다.” 하였다. ○ 대전과 자궁(慈宮)은 궁내로부터 옷을 받고 서울에 머무는 백관은 명정전(明政殿)의 뜰에서 옷을 받는다. ○ 태묘의 본궁에 전배(展拜)할 때는 흉배[揚]가 없는 흑단령포와 오서대를 착용하며, 백관들은 임금의 옷에 따른다. ○ 병조 절목(兵曹節目)에, “상복(喪服)을 받은 뒤 거둥할 때나 전좌(殿座)할 때 연여(輦輿)의 산선(繖扇)은 청색으로 하고, 여러 영문이나 진(陣)에서의 옷차림은 평상시와 같으며, 위내(衛內)에서는 흑립(黑笠)에 흰 철릭을 입고 검은 띠에 검은 가죽신을 신는다.” 하였다.○ 20일(계유)에 구원(舊園)에 나아가 지석을 묻은 구덩이의 흙을 조사해 보니 토성(土性)이 습기가 많고, 또 나무를 벤 뒤에 형국이 단박(單薄)하여 뒤에서 감싸 주는 능선이 전혀 없고 곧바로 땅속 차가운 물의 기운을 받는다는 것을 확연히 느꼈으니, 면봉(緬奉)의 일을 조금도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이어 발인하여 행할 때의 새로 정한 도로가 청룡의 아래 능선을 거쳐 동적창(東耤倉)을 지나 전관교(箭串橋)에 이르는 것을 살피고 돌아왔다. ○ 9월 7일(경인)에 총호사 김익(金熤)과 금성위 박명원(朴明源) 등을 보내어 신원(新園)의 정혈(正穴)에 봉표(封標)를 하였다. - 재혈편(裁穴編)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9일(임진)에 신원에 옹가(瓮家)와 수도각(隧道閣)이 이루어졌다. ○ 16일(기해)에 영구(靈柩)를 옮겨 뫼셨다. 도감 제조 윤숙(尹塾)이 외재궁(外梓宮)을 받들고 신원에 나아갔다. - 바깥의 길이가 7자 9치이고, 바깥의 넓이가 3자 6치 5푼이며, 바깥의 높이가 3자 5치 1푼이다.○ 신원(新園)의 광중(壙中)에 회(灰)를 다지고 상설(象設)의 일을 시작하였다. ○ 17일(경자)에 구원(舊園)에 찬궁(欑宮)을 설치하였다. 신해년에 능침을 옮길 때는 찬궁을 정자각에 설치하였으나 지금은 향대청(香大廳)에 설치하고 9개의 기둥을 보태어 청사를 만들었는데, 대체로 정자각이 재전(齋殿)과의 거리가 약간 멀고 아울러 여막(廬幕)의 제도를 모방하려고 한 것이다. - 찬궁의 제도는 《오례의(五禮儀)》에 나타나 있다. 향대청을 중앙에 설치하고 앞에는 영좌(靈座)를 설치하였으며, 첨보각(添補閣)은 9개의 기둥을 써서 3층으로 하였다. 제1층에는 반찬을 놓는 탁자를 설치하고, 제2층에는 준소(尊所)를 설치하며 좌우에는 빈 탁자를 설치하여 반찬을 올릴 때 임시로 놓게 하고, 제3층에는 판위(版位)를 설치하였으니, 과천(果川)의 찬궁과 첨보각도 같다.○ 18일(신축)에 구원에 나아가 찬궁을 살펴보고 다시 새로 정한 길을 경유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 신원에 외재궁(外梓宮)을 내렸다. 삼면의 곁에는 회로 다지고 정광(正壙)에는 천회(天灰)를 썼으며, 금정기(金井機)를 거두고 처음으로 솥을 엎은 모양처럼 만들었다. 27일(경술)에 이르러 후면에 정지대석(正地臺石), 병풍석(屛風石), 와첨석(瓦簷石), 만석(滿石), 인석(引石)을 모두 설치하였는데 반월형으로 만들었다. 국법에 합릉(合陵)을 할 경우 모두 같은 능선에 봉분만 다르게 하였는데, 나의 생각은 다르다. 본원에서는 왼쪽을 비게 하는 제도를 썼기 때문에 병풍석 안에 회로 다지는 것을 쓰지 않았고, 갑방과 경방의 길토(吉土)를 취하여 복부형(覆釜形) 위에 채워 다져서 만석(滿石) 위에 이르도록 하고, 모퉁이에 십자(十字)로 표지하는 돌도 쓰지 않았다. ○ 10월 2일(갑인)에 현궁(玄宮)을 꺼냈다. 하루 전날 구원에 나아가 해질 녘에 수도(隧道)를 철거하는 일부터 먼저 시작하였다. 퇴광(退壙)으로부터 파기 시작하여 순전(脣前)에 이르러 어둡기 시작할 때 반월형(半月形)을 깎아 내어 한 길쯤 파니 천회가 드러났다. 처음에는 톱으로 끊어 한 자쯤 깊이 파니 또 철목(鐵木)을 사용하였기에 기계들이 무뎌서 사용하기에 불편하였다. 총호사 채제공(蔡濟恭)이 신해년에 천봉(遷奉)한 예를 따르기를 청하여 도끼를 가지고 회를 잘라 세 구덩이로 파서 깊이 8자쯤 들어가 쐐기를 쳤다. 큰 밧줄을 사용하여 끌고 역부들이 힘을 합쳐 차례로 쪼개어 물리고 퇴광에 미치니 석함(石函) 하나가 노출되었는데, 그 속에 옻칠을 한 궤 하나가 있었으니 곧 옷과 완호물(玩好物) 등의 부장품이었다. 밤이 지나고 또 새벽이 되었는데도 일은 절반도 하지 못하였다. 자궁(慈宮)께서 여러 번 금성위(錦城尉)에게 언교(諺敎)를 내려 내가 환궁하기를 독촉하셨으며, 또 자궁의 건강이 이날부터 더욱 위태로웠으므로 신료들에게 명하여 일을 감독하게 하고 잠깐 돌아와 문안을 드렸다. 그리고 다시 어가를 재촉하여 구원에 나아갔는데, 동구(洞口) 가까이에 이르자 현화(玄和 현궁(玄宮))가 이미 드러났다고 하였다. 외재궁(外梓宮)의 앞면에 2개의 석함이 있고 그 속에는 각각 한 개의 옻칠을 한 함이 있었으니, 하나는 증옥함(贈玉函)이고 하나는 증백함(贈帛函)이었다. 영의정 이재협(李在協)과 개봉관(開封官) 집의 박성태(朴聖泰)가 봉표(封標)를 열고 회를 모두 깎아 내니 얇은 판(板)으로 막혀 있었다. 자귀로 깎아 내리니 외재궁(外梓宮)의 이은 틈에서 물이 진진(津津)하게 흘러내리므로, 후비며 파내자 광중(壙中)의 모퉁이 판자에 고인 물이 함께 붓듯이 쏟아지는데 몇 곡(斛)이나 되었다. 그리고 외재궁 위 모퉁이에는 얼음에서 떨어진 물이 엉겨 찬 기운이 밖에서 침입하여 재궁이 동쪽으로 3푼쯤 밀려 있었다. 긴 쇠갈고리로 삽선(翣扇)을 꺼내니 빛깔이 타고 그슬린 듯하여 불에 탄 흔적이 현저하게 있었다. 남쪽으로 머리를 돌린 평상(平床)을 퇴광 앞에 설치하고, - 제도는 《오례의(五禮儀)》에 보인다. - 퇴광 앞에 먼저 작은 말뚝 후두(厚頭) 하나 - 후두는 6푼이다. - 와 박두(薄頭) 하나를 준비하여 후두는 외재궁의 왼쪽 안으로 대고 박두는 내재궁의 왼쪽 바깥을 향하여 대어 바싹 밑에 붙이고 천근자(千斤子) - 노루의 가죽으로 가서목(哥舒木)을 싸서 만들었으니, 속명은 지렛대이다. - 를 가지고 내재궁의 오른쪽으로부터 힘을 써서 왼쪽을 향하게 하니, 말뚝의 박두가 내외 지판(地板)의 사이에 들어갔다. 이에 약간 두꺼운 다른 것 2개를 좌우에 들여 넣고 다시 천근자를 두 말뚝의 사이에 넣어 작은 침목(枕木)을 비껴서 천근자의 밑에 넣고 힘을 써서 아래 머리 부분을 드니 조금씩 들렸다. 다시 2치 5푼 되는 말뚝 2개로 바꾸어 가면서 넣고 산륜(散輪) 10여 개로 - 황동(黃銅)으로 만들기도 하고 나무로 만들기도 한다. - 굴려 지판(地板) 밑에 넣고 남북으로 좌우의 말뚝과 천근자를 반쯤 가게 하고, 다시 쇠로 2개의 긴 장대를 만들어 장대 머리에 괄탑(括搭)을 만들고 괄탑 사이에 붉고 굵은 끈을 매어 외재궁의 내광(內廣)에 닿게 하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장대와 끈을 아울러 쥐고 헝클어진 것을 모아 외재궁의 천판(天板) 밑을 향하여 긴밀하게 붙여 들여 보내어 좌우의 두 사람으로 하여금 뒤에서 잡는 것을 돕게 하고, 좌우에 있는 자가 완전하게 잡으면 손으로 점점 밀어 내려서 점차로 나아가게 하여 내재궁의 위 좌우 모서리에 걸리게 하였다. 이렇게 세 차례를 하자 섭상례(攝相禮) 이제만(李濟萬)이 무릎을 꿇고 꺼내어 막차(幕次)에 안치하기를 청하였다. 여재궁관(舁梓宮官) 채제공이 조여무신(助舁武臣) 이백연(李柏然)과 심녕(沈鑏)을 거느리고 붉은 밧줄로 - 별간역(別看役)과 봉출별감(奉出別監)이 일제히 힘을 썼다. - 재궁을 맞들어 윤대판(輪臺板)으로 받아 평상에 안치하고 머리를 정남향으로 하게 하였다. 금박으로 쓴 명정(銘旌)의 글씨 획은 새것과 같았고 관을 덮은 천이나 유품의 옷은 약간 바래 있었다. 식재궁관(拭梓宮官) 김종수(金鍾秀)가 향온(香醞)으로 재궁을 닦은 뒤 싸고 묶었다. - 칠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싸고 묶었는데, 그 의식은 생략하였다. - 현궁을 꺼냄에 미쳐 총호사와 지방 서사관(紙牓書寫官) 윤사국(尹師國)이 모두 길복(吉服)을 입고 길유궁(吉帷宮)에 나아가 지방(紙牓)을 써 가지고 - 옛 제도의 지방은 목판에다 종이를 붙여 지방을 썼는데, 지금은 《가례(家禮)》의 신백(神帛)하는 제도에 의하여 높이 1자 2치, 넓이 3치로 하였는데 예기척(禮器尺)을 사용하였다. - 나와서 막차에 안치시키고 전물(奠物)은 의식대로 하였다. - 제관과 집사는 길복을 입었다. - 순여(輴轝 영구를 싣는 수레)를 수도각(隧道閣)으로 나아가게 하여 길유궁에 상여를 안치하고 흰 의장을 설치하였다. - 대여(大轝) 앞의 의장과 뫼시고 따르는 자는 흰 의장을 사용하고 신여(神轝) 앞에 따르는 자는 길복을 입게 하였으니, 이후로는 이것을 모방하였다. - 화철 촉롱(火鐵燭籠)과 오색 촉롱(五色燭籠)은 순여 앞에 서고, 길복의 의장은 신여 앞에 서고, 향정(香亭)은 앞에 있었다. 섭상례(攝相禮) 박장설(朴長卨)이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여(轝)에 올리기를 청하고, 대축(大祝) 권유(權裕)는 토등방상(土藤方箱)에 지방함(紙牓函)을 봉안하고 파(帕)로 덮어 신여(神轝) 앞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행 섭상례 권유가 - 이제만(李濟萬)과 바꾸어 임명하였다. - 재궁 앞에 나아가 순여에 올리기를 청하였다. 여재궁관(舁梓宮官)이 조여무신(助舁武臣)을 거느리고 재궁을 순여에 안치하였다. - 고례(古例)에는 순여에 올릴 때 윤여(輪轝)를 사용하였는데, 유동(游動)이 있어 공경에 흠이 되었기 때문에 무예청에서 40인이 지고 뫼셨다.도청(都廳) 이만수(李晩秀)는 과일과 시접(匙楪)을 올리고, 운불삽(雲黻翣)을 받드는 자는 운불삽으로 재궁을 가리고, 나는 곡을 하면서 걸어서 따르니 근신들도 곡을 하면서 슬픔을 도왔다. 종친과 문무백관들은 정자각에 있으면서 동쪽을 향하여 망곡(望哭)을 하고, 장신(將臣)들은 진두(陣頭)에서 곡을 하며, 군교(軍校)들은 정해진 위치에서 곡을 하고, 뫼시는 장사들과 군졸, 백공, 서리, 복예들도 모두 곡을 하면서 따랐다. 신여가 향대청에 이르려 하자 섭상례가 먼저 순여(輴轝)에서 내리기를 청하고 여재궁관이 조여무신을 거느리고 재궁을 맞들어 찬궁(欑宮)에 안치하였다. 섭상례가 순여에서 내리기를 청하니, 대축 이제만(李濟萬)이 지방을 영좌에 안치하였다. 내시가 8개의 탁자를 앞에 설치하였는데, 향안(香案)은 탁자 앞에 두고 명정(銘旌)은 영좌의 오른쪽에 두며, 소선(素扇)과 소개(素蓋)는 좌우에 세우고 증옥함(贈玉函)과 증백함(贈帛函)은 찬궁의 동쪽에 두며, 옥등(玉燈) 하나는 향안의 남쪽에 두고 준소(尊所)는 동쪽의 기둥 밖에 두며, 연여(輦轝)의 의장은 유문(帷門)의 안쪽 줄에 물러가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는 빈전(殯殿)을 만들고 유사가 예선(禮膳)을 올렸으며 내시는 내선(內膳 궁중에서 차린 반찬)을 올렸다. 종척 집사(宗戚執事) 광은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 등이 진설도(陳設圖)를 살펴 진설하고 종신(宗臣) 안춘군(安春君) 융(烿)이 전물(奠物)을 대신 드렸으며, 나는 곡위(哭位)에 나아가 곡을 하면서 슬픔을 다하고 찬배(贊拜)하며 - 찬배는 각 제(祭)와 전(奠)이 같다. - 제사에 참여하여 대신 제수를 올리게 하였으니, 국전(國典)의 양암(亮陰)의 제도를 쓴 것이고, 또 예에 우제(虞祭)가 아니면 목욕을 하지 않는 뜻을 취한 것이다. - 우제 전의 각전(奠)을 올릴 때는 대전관(代奠官)이 술잔을 드리고, 향을 올릴 때는 진향관(進香官)이 잔을 드린다. 내가 제사에 참여할 때는 반찬을 살피는 예를 행하였으니, 뒤에도 이와 같다. ○ 현궁을 꺼낸 뒤에 도감 제조(都監提調) 정창순(鄭昌順)에게 명하여 구광중(舊壙中)에서 나온 옷이며 완호물의 명기궤(明器櫃)와 증백함(贈帛函), 구명정(舊銘旌), 구관의(舊棺衣), 유의(遺衣), 구외재궁(舊外梓宮), 하우판(下隅板)은 정자각의 동쪽 깨끗한 곳에 나아가 불사르도록 명하였다. 승지 조상진(趙尙鎭), 양주 목사 임시철(林蓍喆), 도감 낭청 이명걸(李命杰)ㆍ윤광석(尹光碩)ㆍ서유병(徐有秉) 등에게 명하여 묻고 태우는 여러 가지의 일을 나누어 맡도록 하였다. 원(園)에 나아간 뒤에 조상진이 아뢰기를, “구원의 퇴광 안에 있던 석함 1개 속에 벼룻집 하나, 붓 4자루, 먹 1개, 자방연적(甆方硯滴) 2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원 위의 왼쪽에서 표지석 2기를 얻었는데 길이가 1자 8치 7푼이고, 넓이는 1자 2치 5푼이었으며, 그 하나는 전면에 ‘우변정룡 묘입수 갑좌경향 경인경신분금 외즉묘좌유향 신묘신유 혈심팔척이촌 용지척 이금정하면위준 회격이척오촌 지회용삼촌 외재궁장칠척팔촌삼분 광삼척사촌육분 고삼척사촌사분 상용횡판후사촌 봉묘원경이십사척 묘후묘전 지세유하일척오촌 원경여허좌지원경 양간상거이일척오촌재정 용영조척(右邊丁龍 卯入首 甲坐庚向 庚寅庚申分金 外則卯坐酉向 辛卯辛酉 穴深八尺二寸 用地尺 以金井下面爲準 灰隔二尺五寸 地灰用三寸 外梓宮長七尺八寸三分 廣三尺四寸六分 高三尺四寸四分 上用橫板厚四寸 封墓圓徑二十四尺 墓後墓前 地勢流下一尺五寸 圓徑與虛左地圓徑 兩間相距以一尺五寸裁定 用營造尺)’이라는 128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하나는 윗면에 ‘좌변정룡 묘입수 갑좌경향(左邊丁龍 卯入首 甲坐庚向)’이라는 11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왼쪽에는 ‘정룡 묘입수(丁龍 卯入首)’라는 5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에는 ‘경인경신분금(庚寅庚申分金)’이라는 6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아랫면에는 ‘석면여우변지평상제 외즉묘좌유향 신묘신유분금(石面與右邊地平相齊 外則卯坐酉向 辛卯辛酉分金)’이라는 21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의 곁에는 ‘임오칠월일(壬午七月日)’이라는 5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석함을 얻었는데 그 속에는 칠을 한 궤 하나가 있었으며, 그 안에는 문안아패(問安牙牌) 5개와 통자아패(通字牙牌) 4개가 있고 또 장계통부(狀啓通符) 5개가 있는데, 한결같이 전면에는 일마(一馬), 이마(二馬), 삼마(三馬), 사마(四馬), 오마(五馬)라는 글자를 새겨 비단으로 쌌는데, 궤와 칠은 바래고 비단은 썩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곡장(曲牆) 안에서 석함 하나를 얻었는데 그 속에는 자기(甆器)로 푸른 글자를 넣어 구운 지석(誌石) 다섯 조각이 있었으며, 길이는 7치이고 높이는 3치인데 모두 퇴광(退壙) 아래에 묻었으며, 혼유석 아래에서 처음 지석함을 얻었는데 윗면에다 ‘영우원 구지석(永祐園舊誌石)’이라는 6자를 새겨 증옥궤(贈玉櫃)와 함께 구광(舊壙) 아래에 묻었습니다. 그리고 혼유석, 장명등, 문관석, 망주석, 석호, 석양, 석마는 모두 내청룡의 밖에 묻어 별도로 표시를 하고, 빈궁(殯宮)에서 철거한 여러 가지의 물건은 불에 태웠습니다.” 하였다. ○ 신원의 빈궁, 찬궁, 순여(輴轝) 등 제구(諸具)는 현궁을 뫼신 뒤에 도감 낭청으로 하여금 나누어 맡아 불에 태우도록 하였다.○ 3일(을묘)에 조곡(朝哭)과 조전(朝奠)을 행하고 겸하여 의정부에서 향을 올리는 예를 행하였다. 하루에 여러 번 제수(祭需)를 올리는 일은 신을 번독(煩瀆)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하여 모든 향을 올리는 일도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종척 집사, 도감 당상과 낭청, 진향관은 유문(帷門) 안에서 예를 행하고 백관은 유문 밖에서 열을 정하였다. - 뒤에는 이와 같이 하였다.○ 날이 새려 할 때에 찬궁(欑宮)에 들어가 살폈다. 처음에는 광내의 재환(災患)을 대비하기 위하여 관을 바꾸자는 의논까지 있었다. 그러다가 현궁을 꺼내어 보니 칠이 새것과 같고 나무의 결도 윤택하여 찬궁 안이 아주 깨끗하였다. 고(故) 상신(相臣) 정홍순(鄭弘淳)은 옛날에 감독하던 신하로서 관을 만들 때 절단한 끝을 보관하였다가 일찍이 나에게 보여 준 일이 있었는데, 지금에야 유감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예(禮)에 동원비기(東園秘器)는 19가지가 있다고 일컫는데, 모두 쓰지 않고 오히려 수기(水氣)가 안에 차는 것이 있는가 염려하여 아래의 평상을 위쪽의 평상보다 몇 푼(分) 낮게 하였더니, 앞의 합봉(合縫)한 곳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밤이 지나자 물이 몇 되 남짓하였다. 신해년의 예를 써서 대나무 꼬챙이를 만들어 칠성판(七星板)과 지판(地板)의 적당한 경계에 넣으니, 조금 있다가 꼬챙이를 따라 물이 떨어지므로 질동이로 받으면서 기다렸다. ○ 조상식(朝上食)을 행하고 종친부에서 향을 올렸다. ○ 총호사, 장생전 도제조, 도감 당상과 낭청, 종척 집사가 칠공(漆工)을 거느리고 빈궁(殯宮)에 나아가 처음 옻칠하기를 의식대로 하고 보(黼) 무늬를 그린 관의(棺衣)를 덮고 다시 소금저(素錦褚)로 더 덮었다. - 처음 옻칠을 할 때는 백관이 들어가 참여하고, 두 번 이후에는 2품 이상의 육조와 삼사의 장관이 들어가 참여하였다. ○ 현궁의 척도는 동원의궤(東園儀軌)에 실려 있으니, 위쪽의 넓이는 1자 7치 2푼이고 아래의 넓이는 1자 4치 3푼이며, 위의 높이는 1자 7치이고 아래의 높이는 1자 5치 2푼이며, 길이는 6자 1치 2푼이고 관을 덮은 천의 척도는 차이가 없다.○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충훈부(忠勳府)에서 향을 올렸다. ○ 이날 자궁(慈宮)의 하교로 인하여 궁궐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발인(發靷)하는 순여(輴轝)를 따라가려고 하였으나, 자궁께서 간절하게 만류하시므로 드디어 발인하는 날 한강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뒤따라가서 현궁(玄宮)을 내릴 때에 맞추어 신원으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우러러 자궁의 마음을 깨우쳐 드렸다. ○ 재차 옻칠을 더하였다. 돈녕부와 의빈부(義賓府)에서 향을 올렸다. ○ 4일(병진)에 세 번째로 옻칠을 더하였다. 경기 감사가 향을 올렸다. ○ 구원(舊園)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행하였다. 구광(舊壙)을 살펴보니 퇴광으로부터 정광(正壙)에 이르기까지 물의 깊이가 수촌(數寸)이 되고, 외재궁에는 불탄 흔적과 얼었다가 녹아내린 자취가 완연하였다. 이런 땅에 의관을 묻은 지 어느덧 두 기(紀)가 지났다. 그런데도 큰 집의 담요 위에서 편하게 살았으니,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늘이 나의 속마음을 인도하여 오래된 계획을 이루게 하였는바, 단지 길지를 점쳐 얻었을 뿐만 아니라, 의장과 물품이며 법식도 이로 인하여 질서 있게 갖추었으니, 소자(小子)의 하늘에 닿는 슬픔이 조금은 위로될 수가 있겠다. ○ 주다례(晝茶禮)를 행하였다. 분승지(分承旨)에게 명하여 동서의 곡반(哭班)과 호위하는 장졸을 주관하여 각각 자기의 위치에 서서 곡을 하게 하였다. - 발인(發靷)하는 행렬이 길에 있을 때도 그와 같이 하게 하였다. - 또 노부(鹵簿)를 명하여 진열(陳列)을 정돈하게 하고,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서 남은 음식으로 순여(輴轝)를 메는 사람들을 먹이게 하였다. ○ 계빈전(啓殯奠), 포곡(晡哭 저녁 무렵에 하는 곡),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 신원(新園)에 퇴광(退壙)을 팠다. - 금정기(金井機)는 정광(正壙)에 비하여 길이를 1자쯤 줄이고 지평(地平)도 정광에 준하였다. 정광을 다듬은 뒤에 외재궁의 하우판(下隅板)을 열고 가판(假板)으로 다시 닫았다.○ 지석(誌石)을 신원의 혼유석 아래에 묻었다. 글은 내가 손수 짓고 글씨도 내가 직접 썼다. - 제16권에 보인다. - 도감 당상 정창순(鄭昌順), 낭청 이창회(李昌會), 호조 정랑 김봉현(金鳳顯)으로 하여금 각공(刻工)들을 감독하도록 하여 일을 마쳤다. - 모두 40쪽인데 남포석(藍浦石)으로 하였다. 길이는 각각 1자 7푼이고 너비는 각각 8치 4푼이며 두께는 각각 5푼인데, 네 차례의 옻을 칠한 궤에 넣어 모래로 채우고 쇠로 봉하였다. - 도청(都廳) 이익운(李益運)을 시켜 신원에 뫼시고 와서 석함을 갖추어 미리 묻게 하였다. ○ 석전(夕奠)과 견전례(遣奠禮)를 행하고 현궁을 싸고 묶는 일을 행하였다. 총호사, 도감 당상과 낭청은 여러 기구를 정돈하여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자, 이조 참판 김희(金憙)가 홀기(笏記)를 읽고, 종척 집사 김기성(金箕性)과 홍수영(洪守榮), 별간역 정우태(丁遇泰) 등이 부책별감(扶策別監)을 거느리고 재궁을 평평한 평상 위에 안치하여 수건으로 닦고, 먼저 보(黼) 무늬를 그린 관의(棺衣)로 덮은 다음 겹으로 된 이불을 두 평상의 사이에 깐 뒤에 자색(紫色)의 실로 합쳐 꿰매었다. 다음 유둔지(油芚紙)를 재궁의 척도에 맞추어 정자(井字)의 모양으로 접어서 위아래 옆으로 접힌 곳의 중간은 그대로 두고 좌우를 열어 세로로 접힌 곳에서 멈추게 하여 두 평상의 사이에 깔고, 네 곳의 가장자리를 접어 위로 싸서 개판(蓋板)의 요 아래에 이르게 하며, 열어젖힌 네 모퉁이는 좌우의 양쪽 안으로 거두어들여 서로 가리게 하였다. 네 모서리가 엇갈리는 곳에는 종이로 끈을 만들어 묶고 또 유둔지로 말아 위에서 한 방법에 맞추어 덮어씌워 밑 판의 요 위에 이르게 하고, 빨간 융실로 상하의 유둔지의 서로 가린 끝을 꿰매었다. 다음은 빨간 담요를 말아 유둔지처럼 만들어 밖의 네 모퉁이를 잘라 버리고 십자(十字) 모양으로 만들어 두 평상의 사이에 깔고, 네 귀퉁이가 만나는 곳에 빨간 실로 매듭을 만들어 위로 당기게 하였다. 또 붉은 담요로 꿰매어 네 귀퉁이를 관의(棺衣)처럼 만들어 덮어씌웠으며, 또 붉은 융실로 이어 꿰매었다. 다음에는 흰 베로 두 끝과 양 다리를 이어 작은 끈 한 가닥을 만들어 옆으로 둘러 묶기를 일곱 번 하였다. 또 흰 베로 세 끝과 양 다리를 이어 큰 끈 한 가닥을 합쳐 만들고는 가로로 둘러 일곱 번 묶은 사이에 매기를 다섯 번 하고, 크고 작은 끈이 지나는 모서리에는 매번 종이 고리로 받았다. - 종이 고리는 모두 56개였다.다음은 두 평상 위에다 윤대판(輪臺板)을 안치하고 그 위에 재궁을 설치하여, 보(黼) 무늬를 그린 큰 관의(棺衣)로 덮고 다음에는 소금저(素錦褚)로 덮었다. - 들보[梁] 하나, 좌우의 서까래 각 넷, 상방(上枋) 넷, 앞뒤의 박풍(牔風) 각 하나, 뒷면의 창 문설주 넷, 문지방 하나, 세 면의 하방(下枋) 셋, 좌우의 창 문설주 각 여섯, 짧은 문지방 각 하나인데, 모두 대나무를 사용하였다. 좌우에 설치한 십자전창(十字箭牕)이 셋으로, 창마다 중간을 접어 가리면 편 것이 아래로 향하고, 걷으면 접은 것이 위로 향한다. 뒷면에는 두 개의 창을 만들고 전면에는 반 이하를 비도록 하여 흰 면포를 두르는 데 편리하게 하고, 두 곁의 창 아래 방(枋) 위의 사이로 1치쯤 끌고 나가 붉은 면포를 두르는 데 편리하도록 하며, 둥근 고리를 만들되 길이와 너비는 윤대판의 높이를 헤아려 나란히 묶고, 위에는 2, 3치 더 많게 하여 붉은 면포를 오가면서 두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다음은 붉은 면포의 띠 한 가닥을 만들어 먼저 한 끝으로 윤대판의 왼쪽 아래 고리에 매고 또 한 끝으로 소금저의 왼쪽 하방(下枋) 위에 넣어, 왼쪽 아래 창 안으로부터 끌어올려 옆으로 큰 관의(棺衣) 위를 지나게 하고, 또 오른쪽 아래 창 안으로부터 끌어내려 윤대판의 오른쪽 아래 고리에 꿰어 차례대로 가로로 묶는데, 위와 가운데의 둥근 고리는 위의 방법과 같고 좌우 양쪽의 끝은 편의대로 잡아매었다. 다음은 흰 면포로 세 가닥의 띠를 만들어 우선 한 가닥의 가운데를 접어 윤대판 하단의 위로부터 좌우로 끼고 얽어 상단의 위에까지 이르게 하고, 두 끝이 엇갈리게 지나 내려가서 소금저의 좌우 방(枋) 위를 따라 끌어내어 각기 윤대판의 위 고리에 꿰어 남은 끝으로 끄는 끈을 만들었다. 다음은 한 가닥의 가운데를 접어 반으로 나누고 또 윤대판 하단의 위에서부터 좌우로 끼고 얽어 올라가, 두 끝을 좌우의 방(枋) 위에서부터 끌어내어 각각 가운데의 고리를 꿰고 위의 고리를 이어서 꿰어 도로 접어 가운데의 고리에 꿰고 그 남은 끝으로 끄는 끈을 만들었다. 다음은 한 가닥의 가운데를 접어 반으로 나누고 또 윤대판 하단의 위로부터 좌우로 끼고 얽어 두 끝을 좌우의 방(枋) 위에서부터 끌어내어, 각각 아래 고리에 꿰고 가운데 고리로 이어서 꿰어 도로 접어서 아래 고리에 꿰고 그 남은 끝으로 끄는 줄을 만들며 백릉(白綾)으로 수건을 만들어 덮었다. - 소금저(素錦褚)의 제도에서 싸고 묶는 의식은 나의 생각으로 고안한 것이다.○ 5일(정사)에 영여(靈轝)가 신원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전날 밤 2경에 선전관이 찬궁(欑宮)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여러 영(營)에서 등을 단다고 아뢰었다. 병조 판서 윤숙(尹塾)이 무릎을 꿇고 군령(軍令)을 올렸다. 선전관이 무릎을 꿇고 초취(初吹)를 아뢰니, 우의정 김종수(金鍾秀)가 찬궁의 남쪽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우의정 신 김종수는 삼가 길한 시각에 찬궁을 엽니다.” 하였다. 선공감의 관원이 찬도(欑塗)를 철거하고 종척 집사는 탁자를 철거하였다. 선전관이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바라를 불고 솔발을 흔들겠습니다.” 하였다. 또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초요기(招搖旗)를 세 줄로 나누어 세우겠습니다.” 하였다. 또 무릎을 꿇고 이취(二吹)를 아뢰었다. 일각(一刻) 전에 내시가 증옥함(贈玉函), 증백함(贈帛函), 삼중관의(三重棺衣), 광중명정함(壙中銘旌函)을 집사에게 주어 채여(彩轝)에 넣고, 또 향로와 향합을 집사에게 주어 향정(香亭)에 넣고 종척 집사는 전기(奠器)를 받들고 나왔다. 선전관이 무릎을 꿇고 삼취(三吹)를 아뢰었다. 섭상례(攝相禮) 박장설(朴長卨)이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자리에서 내려 순여(輴轝)에 오르기를 청하였다. 대축 이제만(李濟萬)이 토등방상(土藤方箱)에 지방함을 안치하고 파(帕)로 덮어 신여(神轝)에 안치하였다. 홍살문에 이르니 섭상례가 무릎을 꿇고 순여에서 내려 연에 오르기를 청하였고, 대축은 지방 상자를 신련(神輦)에 안치하고 종척 집사는 전기(奠器)를 앞에 놓았다. 내시는 명정과 소선개(素扇蓋)를 철거하여 충찬위(忠贊衛)에게 주고 향로와 향합은 집사에게 주어 향정(香亭)에 넣었다. 섭상례 권유(權裕)가 재궁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대여(大轝)에 오르시기를 청하였다. - 예에 순여(輴轝)나 윤여(輪轝)에 오르는 절차가 있으나 온편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모두 임시로 생략하였다. - 여재궁관(舁梓宮官)이 조여무신(助舁武臣)을 거느리고 재궁을 맞들자 별군직(別軍職) 등이 부책별감(扶策別監)과 함께 메었고, 충찬위가 운불삽(雲黻翣)으로 가렸다. 홍살문 밖에 이르러 대여(大轝)에 오르니, 도청(都廳) 이익운(李益運)이 과일과 시접(匙楪)을 앞에 놓았고, 노부사(鹵簿使)가 진열도를 살펴 진열하였다. 경기 관찰사가 앞에서 인도하였고, 그다음은 당부관(當部官), 그다음은 돈체사(頓遞使)ㆍ예의사(禮儀使)ㆍ정리사(整理使)ㆍ대사헌(大司憲), 그다음은 의금부 도사가 좌우로 둘씩 나뉘어 잡인을 금하였고, 선상군(先廂軍) 400명이 홍호의(紅號衣) 차림으로 세 줄로 나누어 섰다. 홍개(紅蓋) 둘이 한가운데 마주 서고, 평교자(平轎子)가 홍개의 뒤에 있고, 사금(司禁)은 검은 막대기를 가지고 좌우에 각 여덟씩 서며, 선전관 둘은 내취(內吹) 18인을 거느리고 그 뒤에 섰다. 장마(仗馬) 여섯, 황룡기(黃龍旗) 하나, 벽봉기(碧鳳旗) 하나,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하나, 청개(靑蓋) 둘이 한가운데 마주 서고, 기린기(麒麟旗) 둘, 청룡기(靑龍旗) 하나, 백호기(白虎旗) 하나, 주작기(朱雀旗) 하나, 현무기(玄武旗) 하나, 백택기(白澤旗) 하나, 각단기(角端旗) 하나, 용마기(龍馬旗) 하나, 현학기(玄鶴旗) 하나, 백학기(白鶴旗) 하나, 영자기(令字旗) 둘, 고자기(鼓字旗) 하나, 금자기(金字旗) 하나, 웅골타(熊骨朶) 하나, 표골타(豹骨朶) 하나, 가서봉(哥舒棒) 넷, 은등자(銀鐙子) 둘, 금등자(金鐙子) 둘, 은장도(銀糚刀) 하나, 금장도(金糚刀) 하나, 은립과(銀立瓜) 하나, 금횡과(金橫瓜) 하나, 은작자(銀斫子) 하나, 금작자(金斫子) 하나, 한(罕) 하나, 필(畢) 하나, 정(旌) 하나, 모(旄) 하나, 절(節) 하나, 은월부(銀鉞斧) 둘, 금월부(金鉞斧) 둘, 작선(雀扇) 넷, 용선(龍扇) 하나, 봉선(鳳扇) 하나가 좌우로 서고, 전부 고취(前部鼓吹)는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았다. 신여(神轝)는 그 뒤에 있고, 삼색 촉롱(三色燭籠) 각 둘이 앞에 나누어 서고, 도감의 당상과 낭청 각 한 사람씩 뒤에서 따르며, 금려(禁旅) 100명은 고취(鼓吹)의 밖에서 배위(陪衛)하고, 청양산(靑陽繖)이 그다음에 있고, 향정이 그다음에 있으며, 신련(神輦)이 그 뒤에 있다. 시위 별감 26인은 좌우로 나뉘어 있고, 봉두(鳳頭) 두 사람은 앞에 있으며, 삼색 촉롱 각 둘이 앞에 나누어 서고, 무겸(武兼) 여덟, 선전관 넷, 별군직 넷과 배위 청선(陪衛靑扇) 둘이 신련의 뒤에 있다. 내시 한 명과 도감의 당상과 낭청 각 한 명, 대축 한 명과 섭사복정(攝司僕正), 파집사(帕執事), 상집사(床執事)가 따랐다. 방상시(方相氏) 넷, 죽산마(竹散馬) 둘, 죽안마(竹鞍馬) 여섯, 청수 안마(靑繡鞍馬) 넷, 자수 안마(紫繡鞍馬) 넷이 나누어 늘어서고, 옥백 채여(玉帛彩轝)가 그다음에 섰다. 봉증옥관(捧贈玉官), 봉증백관(捧贈帛官), 명정 집사(銘旌執事), 욕석 집사(褥席執事) 각 한 사람과 상을 든 사람 넷이 그다음에 따르고, 순여(輴轝)가 그 뒤에 있으며, 도감의 당상과 낭청 각 한 사람이 따랐다. 선공감의 관원이 우보(羽葆)를 받들고 중앙에 서며, 향정이 그다음에 선다. 소선(素扇)을 받든 사람 둘과 소개(素蓋)를 받든 사람 둘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충의위가 명정을 받들고 뒤에 선다. 섭상례(攝相禮) 한 사람과 섭전의(攝典儀) 한 사람과 별군직 둘은 그다음에 서고, 대여가 그 뒤에 있다. 부책별감(扶策別監) 20인이 좌우로 나누어 서고, 봉두(鳳頭) 두 사람이 그 앞에 있다. 오색 촉롱이 각 40점, 화철 촉롱(火鐵燭籠)이 40점, 방울을 든 호위군이 16명, 충찬위 6명은 운불삽을 받들고 각기 차례대로 좌우로 나누어 서고, 영여(靈轝)를 메고 가는 군사 200명이 겹줄로 서고, 만장(輓章) 100축(軸)에서 - 제술관(製述官)은 141명인데, 합하여 100축을 만들었다. - 50축은 순여의 앞에 있고 50축은 대여의 뒤에 있다. 배왕(陪往)한 사람은 대장(大將) 한 명, 종사관 두 명, 내시 두 명, 대전관(代奠官) 한 명, 도감 낭청 두 명, 도청 두 명, 제조 두명이고, 다음은 총호사(摠護使), 다음은 조여무신(助舁武臣) 둘, 다음은 분승지(分承旨) 둘, 분사관(分史官) 셋, 각신(閣臣) 둘, 분총관(分摠管)과 분병조(分兵曹)의 당상과 낭청 그리고 오위장 각 둘, 종척 집사(宗戚執事), 동서반 배종관(東西班陪從官)이 서고, 후상군(後廂軍) 300명은 백호의(白號衣) 차림으로 세 줄로 나누어 섰다. 신여가 노제소(路祭所)에 이르러 노제를 행하였다. 연에 오르고 내리는 일은 처음 의식과 같이 하였다. - 뒤에는 이대로 따랐다. - 이어 출발하였다. 나는 말을 타고 뒤를 따르면서 좌우에게 묻기를, “나는 정신이 혼미하여 살필 수 없는데 대여는 편안히 모시고 있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우러러 장막을 쳐다보니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소반에 물을 담은 것과 같습니다.”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이는 별계군(別契軍) 덕분이다.” 하였다. 대여가 둑도(纛島)의 악차(幄次)에 이르러 - 마장리(馬場里)와 차현(車峴)에서 두 번 교대하여 운구하였다. - 조곡(朝哭), 조전(朝奠), 조상식(朝上食), 주정전(晝停奠)을 행하니 날이 샜다. 선전관이 무릎을 꿇고 여러 영(營)의 불을 끄겠다고 아뢰었다. 영여(靈轝)가 부교(浮橋)를 건널 때 장용영, 용호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 총융청, 경기 관찰영의 여덟 영(營)의 장신(將臣)이 각각 기와 북을 거느리고 맞이하였다. 경기영과 수어청이 앞에 있고 어영청과 총융청이 다음이며, 훈련도감과 금위영 두 영이 또 다음이고, 장용영과 용호영이 뒤에 있었다. 여덟 영에서는 화전(火箭)을 쏘아 서로 신호하고 차례를 기다려 배에 올라 다리의 좌우를 끼고 건넜다. 대여가 다리를 지나 남쪽으로 가자 총호사가 잘 건넜다고 아뢰므로, 나는 강가에서부터 곡을 하며 하직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 이날 신시(申時)가 될 무렵에 대여가 과천현(果川縣)에 이르러 찬궁(欑宮)에 안치하였다. - 압구정(狎鷗亭), 사평(沙坪), 반초동(盤草洞), 도리정(闍梨井), 태봉(胎峯), 화락동(和樂洞)에서 여섯 번 교대하여 운구(運柩)하였다.○ 6일(무오)에 닭이 울자 대여(大轝)가 과천을 출발하여 진시(辰時)에 사천(沙川)에 이르렀다. - 은행정(銀杏亭), 독백리(禿白里), 자잔동(紫棧洞)에서 세 번 교대하여 운구하였다. - 대여를 멘 사람들을 먹이고 오시에 수원의 신읍(新邑)에 도착하였다. - 일용리(一用里)와 용연(龍淵)에서 두 번 교대하여 운구하였다. - 신시에 신원(新園)에 도착하여 - 상류천(上柳川), 하류천(下柳川), 독봉(禿峯), 학현(鶴峴), 세람교(細藍橋)에서 다섯 번 교대하여 운구하였다. - 재궁(梓宮)은 정자각에 안치하고 찬궁에는 영좌를 뫼셔 지방을 안치하고 찬을 놓는 탁자를 설치하였다. 명정, 소선(素扇), 소개(素蓋), 증옥함(贈玉函), 증백함(贈帛函)은 좌우로 나누어 열을 짓고 길복의 흰 의장은 물려서 머물게 하였으며, 유문(帷門) 안에 빈소를 만들고 묶은 끈을 풀고 네 번째로 옻칠을 하였다. ○ 이날 내가 새벽에 출발하여 수원부(水原府)에서 잤다. ○ 7일(기미) 새벽에 신원(新園)에 나아갔다. 총호사가 말하기를, “재궁의 하판 모퉁이에서 점점 떨어지던 물은 이미 모두 말라 깨끗하고 이불과 붉은 담요에 습기가 없기 때문에 다섯 번째로 옻칠을 바르고 칠에 숯가루를 개어 나무가 합친 틈을 발라 메웠으며, 다시 상하 사방의 나무가 합친 곳에 칠과 베를 바르고 어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였다. ○ 들어가서 재궁을 살피니 옻칠은 이미 굳어 윤기가 나고 판과 베는 어울려 한 색이 되었다. 조상식을 행하고 혈을 판 곳에 올라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날 안개가 많이 끼어 지척(咫尺)을 분간하지 못하였는데, 수도각(隧道閣) 안에는 개고 맑아 한 점의 침침한 기운도 없다고 하였다. ○ 퇴광(退壙)과 정광(正壙)에 지회(地灰)를 다졌는데 지회가 고르게 잘 다듬어졌다. ○ 주다례(晝茶禮), 포곡(晡哭), 석상식(夕上食)을 행하였다. 서울에 있는 여러 신하로서 이날 온 자는 모두 반열에 참여하게 하였다. ○ ‘상(上)’ 자를 재궁에 썼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썼다. - 생강즙에 금박가루를 조제하여 옻칠 위에 잘 부착되게 하였다.○ 계찬전(啓欑奠)을 행하였다. 찬궁을 열고 묶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 천전례(遷奠禮)를 행하였다. 천봉도감(遷奉都監)이 흰 의장을 진열하고 각색의 촉롱은 발인할 때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방상시(方相氏)가 퇴광 위에 이르러 창을 가지고 네 모퉁이에서 치는 모습을 하고 나왔다. 수도각(隧道閣) 안의 동남쪽에 증옥함과 증백함을 진열한 뒤 섭상례가 무릎을 꿇고 순여(輴轝)에 올리기를 청하였다. 여재궁관이 조여무신을 거느리고 재궁을 받들어 순여에 올려 수도각에 나아가 녹로차(轆轤車)에 올리고는 - 녹로차는 옛날에는 굴대를 돌리고 정지하는 갈고리와 막대기가 있었으니, 기계를 만드는 법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보인다. 이때에 이르러 별도로 한 제도를 창안하였다. 먼저 좌우의 받침대를 놓는데 길이가 9자, 너비가 9치, 두께가 6치이다. 좌우 받침대의 양쪽 머리 부분에 기둥을 세우는데 높이가 2자 6치이고, 받침대에 들어가는 부위는 너비가 5치 5푼, 두께가 2치 5푼이다. 기둥의 상단에는 세로와 가로로 두 개의 홈을 파내는데, 세로 홈은 깊이가 5치로서 그 밑을 둥글게 만들어 축(軸)이 들어가게 하고, 가로 홈은 깊이가 1치 5푼으로 가름대[橫架]가 들어가게 한다. 축은 길이가 9자, 둘레가 1자 2치로서 앞뒤의 기둥 끝을 관통한다. 세로 홈의 위쪽을 향하는 둥근 구멍은 축이 놓이는 구멍보다 2치 5푼을 깎아 줄이며, 가름대를 좌우 기둥 끝에 가로로 파인 홈에 올려놓는데 네 기둥과 두 받침대를 튼튼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갈고리 쇠[句鐵]는 모난 갈고리로서 속명(俗名)은 등자쇠[鐙子鐵]이다. 두 다리를 받침대에 꽂으며 다리와 다리 사이에는 밧줄이 들어가게 하는데, 그 수는 여덟 개로서 좌우로 서로 마주 향하게 한다. 하나의 받침대에는 네 개의 갈고리가 있는데 그 사이는 한 자이다. 쇠통[鐵筒]은 속명이 토시쇠[套手鐵]인데, 모진 갈고리의 위에 덮어씌우되, 그 안의 둘레를 헐렁하게 하여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한다. 좌우의 축에는 모두 쇠어금니[鐵牙]를 박는데 그 길이는 한 치쯤 되게 하고, 두 어금니가 나란하게 하며, 그 사이에도 밧줄이 들어갈 수 있게 한다. 하나의 축에는 여덟 개의 쇠어금니를 박는데, 그 위치는 네모난 갈고리를 보아 정한다. 밧줄은 베로 만드는데 네 끝을 세로로 주름을 잡아서 꿰매되 모두 여덟 겹으로 하며, 두 끝은 도로 꺾어서 갈고리를 만들고 나무비녀[木簪]로 가로질러 나머지 양 끝에 꿰어 왼쪽의 쇠어금니에 건 다음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쪽의 모난 갈고리와 오른쪽의 모난 갈고리에 꿰며 갈고리 위의 쇠통에 맞닿게 하고 위로 향하여 오른쪽의 쇠어금니에 건다. 나머지의 세 밧줄도 똑같이 한다. 축의 양 끝에는 두 개의 폭(輻)을 끼워 십자(十字) 모양의 바퀴폭[輪輻]을 만든 다음, 네 끝을 붉은 실띠로 연결시켜 물레[繅車]처럼 만든다. 두 받침대를 광중(壙中) 위의 좌우로 오가게 된 판(板)에 놓고, 판의 양 끝에는 나무못을 박아서 흔들거리거나 돌아가는 것을 방지한다. 십자형의 바퀴 네 개는 힘을 같이 받아, 느슨해지거나 팽팽해지거나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차이가 없도록 하는데, 바깥쪽을 향하여 돌리면 밧줄이 풀려서 아래로 늘어지고, 안쪽을 향하여 돌리면 밧줄이 감기면서 위로 올라가 거둬진다. 받침대의 안쪽 끊어진 부분에 해당하는 모난 갈고리가 놓이는 곳은 깎아 둥글게 하여 밧줄이 왕래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고, 기둥 끝의 둥근 홈에는 기름과 밀랍을 두껍게 바르는데, 미끄럽게 돌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 내려서 퇴광(退壙)의 윤대판(輪臺板)에 안치하고 싸고 묶은 것을 풀었다. 장생전 제조 이문원(李文源)이 가하우판(假下隅板)을 열고 외재궁의 안을 깨끗이 닦은 다음, 집사(執事)가 관의(棺衣)를 걷어치우자, 식재궁관(拭梓宮官) 김종수(金鍾秀)가 수건과 풀솜을 향온(香醞)에 적셔 닦았으며, 내시가 유의(遺衣)를 그 위에 놓았다. 집사가 세 겹으로 된 관의[三重棺衣]를 덮고 - 처음에는 초록빛으로 넓게 짠 것을 덮고, 두 번째는 남색으로 넓게 짠 것을 덮었으며, 세 번째는 빨간빛으로 짠 것을 덮었다. - 명정을 그 위에 놓았으며, 보삽(黼翣), 불삽(黻翣), 화삽(畵翣)을 황금과 벽옥(碧玉)으로 관의의 좌우에 그렸다. 때가 되자 의식에 따라 현궁을 내려놓았다. - 외재궁의 밑판에 세모난 방촌목(方寸木) 둘을 배설하여 산륜(散輪)을 대신하고, 윤대판 좌우에는 회룡기(回龍機)를 세워 붉은 끈으로 재궁을 실어 축을 돌려 밀었으니, 모두 《국조오례의》를 따른 것이었다. - 곡사례(哭辭禮)를 행하고 구슬과 비단을 전하는 위치로 나아갔다. 봉증옥관(捧贈玉官) 이만수(李晩秀)와 봉증백관(捧贈帛官) 서매수(徐邁修)가 각각 구슬과 비단을 무릎을 꿇고 올리기에 친히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에게 전하였는데, 이재협이 무릎을 꿇고 받아서 퇴광의 서쪽에 놓았다. - 예법에 의복과 평소 즐겨 지니던 물건이나 명기(明器) 따위를 놓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번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고 찬배(贊拜)하였다. 장생전 제조가 외재궁의 하우판(下隅板)을 닫고 옻칠한 베로 그 이음새 부분을 둘러쌌다. 영의정 이재협이 봉폐(封閉)하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봉폐관(封閉官) 박성태(朴聖泰)가 ‘신이 삼가 봉합니다[臣謹封]’라고 쓰고 관인을 찍었다. 우의정 김종수가 아홉 삽의 흙을 덮자, 총호사가 역부들을 거느리고 전면에다 회(灰)를 다지고 이어서 퇴광에 관보다 낮게 회를 다졌다. 관원을 보내어 후토(后土)에 사례하고 정자각(丁字閣)에 돌아와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 처음으로 헌작(獻爵)을 하였는데, 전(奠)을 바꾸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이재협이 아헌(亞獻)을 하고 좌의정 채제공이 종헌(終獻)을 하였으며, 대축 이제만(李濟萬)이 지방 상자를 받들고 신여(神轝)에 안치시켜 곡장(曲牆)의 - 10월 1일(계축)에 먼저 쌓아 두었다. - 안쪽 동쪽 가에 묻었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 그리고 본원관이 이날 밤부터 원침의 공역(工役)을 직접 살폈다. 새벽이 되어 사원례(辭園禮)를 행하고 총호사에게 명하여 머물러 공역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승지 이집두(李集斗)가 반월형의 땅이 평평하기를 기다려 돌아와 아뢰었다. 오시(午時)에 수원부에서 머물다가 저녁에 과천현에서 자고 이튿날 궁으로 돌아왔다. 광중을 파던 날로부터 이날까지 일기가 맑고 깨끗하며 겨울날이 풀려 따뜻하다가 어가를 돌린 날 저녁에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며 추위가 갑자기 심해졌으니, 어찌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 8일(경신)에 퇴광에 천회(天灰)를 다지고 금정기를 거두어 복부형(覆釜形)으로 쌓고, 13일(병인)에 이르러 전면의 정지대석(正地臺石)과 병풍석(屛風石), 와첨석(瓦簷石), 횡가석(橫架石), 인석(引石)을 설치하고 황토로 만석(滿石)의 위의 모퉁이까지 쌓았으며, 삼물회(三物灰)를 펴서 다지고 잔디를 덮었다. 수도각과 옹가(瓮家)를 철거하고 또 혼유석 등 여러 석물을 설치하였다. - 원형(圓形)은 전면의 높이가 11자 5치, 후면의 높이는 10자 5치, 좌우의 높이는 12자, 원의 직경은 32자, 둘레는 100자이다. 잔디는 모화관(慕華館)에서 채취하였다. ○ 정광의 천회(天灰)는 삼물회(三物灰)가 314석(石)이고, 복부형(覆釜形)에는 삼물회가 147석이며, 지회(地灰)는 삼물회가 57석이고, 삼면의 방회(旁灰)는 삼물회가 476석이며, 퇴광의 천회는 삼물회가 300석이고, 복부형에는 삼물회가 122석이며 지회는 삼물회가 55석이다. 그리고 전면의 방회는 삼물회가 199석이고 수회(水灰)가 80석이다. 회는 매석이 5두(斗)이고 삼물(三物)을 법대로 제조한 회는 15두이다. 세사(細沙)와 황토는 각각 5두이고, 삼물회와 합친 것이 1750석이다. 또 진흙의 회로 병풍석 내 주위를 발라 만석(滿石)의 위 모퉁이까지 이르게 하였다.○ 16일(무진)에 신원(新園)의 공역이 완성되어 안원전(安園奠)을 행하였는데, 헌관(獻官)인 김이소(金履素)가 대신 행하였다. - 궤전(饋奠)의 준비는 태상시(太常寺)에서 하였으니, 나라의 법이었다. 돌아보건대 내가 우러러 선왕을 본받는 생각과 어버이 상에 예를 다하는 정성으로 말한다면 품식(品式)에 있어서는 반드시 풍성하고 깨끗하게 하고 경비는 반드시 절약하고 줄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제사는 내선(內膳)을 중하게 여기고 유사(攸司)가 올리는 것은 열 가지에 한두 가지만을 남겼으니, 이는 그 예를 보존하는 은미한 뜻에서이다. 그래서 구원(舊園)을 팔 때부터 신원의 안원전에 이르기까지 40차례를 올렸다. 10월 2일(갑인)에 출안막차전(出安幕次奠)을 행하였는데, 봉상시(奉常寺)에서 올린 제물이 27품목이었고, 다음은 성빈전(成殯奠)과 조상식(朝上食)을 아울러 마련하였는데, 성빈전에는 내선이 110품목이고 봉상시에서 27품목이었으며, 조상식에는 내선이 30품목이었다. 다음 주다례(晝茶禮)에는 내선이 20품목이고, 다음 석상식에는 내선이 30품목이었으며, 다음 석전(夕奠)에는 봉상시에서 13품목이었다. 3일(을묘)에 조전(朝奠)을 행하였는데 내섬시(內贍寺)에서 13품목을 올렸다. 다음 주다례에는 내선이 20품목이었다. 다음 석상식에는 내선이 30품목이었고, 다음 석전에는 내섬시에서 13품목이었다. 4일(병진)에 조전을 행하는데 내자시(內資寺)에서 13품목이었고, 다음 조상식에 내선이 30품목이었고, 다음 주다례에 내선이 20품목이었다. 다음은 계빈전(啓殯奠)과 석상식을 아울러 마련하였는데, 계빈전에는 내선이 40품목이고 내자시에서 20품목이었다. 석상식에는 내선이 30품목이었고, 다음 석전(夕奠)과 견전(遣奠)을 아울러 마련하였는데, 석전에는 내자시에서 13품목이었고, 견전에는 내선이 70품목이며 봉상시에서 27품목이었다. 다음 노제(路祭)에는 예빈시에서 27품목이었다. 이상은 구원(舊園)에서 행한 것이다. ○ 5일(정사)에 조전(朝奠)을 행하고 조상식(朝上食)과 주정전(晝停奠)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조전은 내자시에서 13품목이었으며, 조상식은 내선이 20품목이었고, 주정전에는 내자시에서 27품목이었다. 이상은 강가의 주정소(晝停所)에서 행하였다. ○ 다음 주다례에 내선이 20품목이었고, 다음은 석상식과 석전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석상식에는 내선이 20품목이었고, 석전에는 봉상시에서 13품목이었다. 6일(무오)에 조전을 행하고 조상식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조전에는 봉상시에서 13품목이었고, 조상식에는 내선이 20품목이었다. 이상은 과천(果川)의 숙소(宿所)에서 행하였다. ○ 다음 주정전은 내섬시에서 27품목이었다. 이상은 수원의 신읍에서 행하였다. ○ 다음은 성빈전(成殯奠), 석상식(夕上食), 석전(夕奠)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성빈전에는 내선이 50품목이고 내선이 27품목이었으며, 석상식에는 내섬시에서 20품목이었고, 석전에는 내섬시에서 13품목이었다. 7일(기미)에 조전을 행하고 조상식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조전에는 내자시에서 13품목이었고, 조상식에는 내선이 20품목이었으며, 다음 주다례에는 내선이 20품목이었다. 다음은 계빈전과 석상식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계빈전에 내선이 50품목이고, 내자시에서 27품목이었으며, 석상식에는 내선이 20품목이었다. 다음은 석전과 천전(遷奠)을 함께 마련하였는데, 석전에는 내자시에서 13품목이었고, 천전에는 내선이 30품목이었으며 내섬시에서 27품목이었다. 다음 우제(虞祭)에는 봉상시에서 38품목이었고, 다음 사후토전(謝后土奠)에는 봉상시에서 27품목이었으며, 다음 안원전(安園奠)에는 봉상시에서 27품목이었다. 이상은 신원(新園)에서 행하였다. ○ 고유문(告由文)과 제문(祭文)은 원호(園號)를 따라 의논하여 정하고, 원침을 팔 때에는 날을 가려 경모궁(景慕宮)에 고유하고, 구원에서는 후토(后土)에 제사를 지냈다. 구원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수원의 옮긴 읍에서는 새로 향교를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였으며, 사직에 고유하여 날이 개기를 빌었다. 또 경과한 명산과 대천인 삼각산(三角山), 청량산(淸涼山), 아차산(峨嵯山), 전교천(箭橋川), 둑도(纛島), 청계산(淸溪山), 관악산(冠嶽山), 우면천(牛眠川), 모락산(慕洛山), 치악산(雉嶽山), 오목천(鼇沐川), 광교산(光敎山), 화산(花山)과 안원전(安園奠)의 고유문(告由文)은 친히 지었으니, 모두 제21권에 보인다. 아름다운 술 그릇은 궁중에서 보관하던 것을 썼으니 곧 은주발, 은시접, 은찻잔 둘, 은으로 양면에 도금한 술병이 각각 둘, 은잔과 잔대가 모두 여섯, 은숟가락이 2면(面), 은젓가락 두 쌍, 금향로 하나, 금향합 하나로, 의물(儀物)의 아름다움은 이미 옛날에 준비한 것이다. 영좌(靈座)ㆍ찬궁(欑宮)ㆍ외재궁(外梓宮)ㆍ지방(紙牓)ㆍ신련(神輦)ㆍ신여(神轝)ㆍ대여(大轝)ㆍ견여(肩轝)ㆍ명정(銘旌)ㆍ소금저(素錦褚)ㆍ평교자(平轎子)ㆍ증옥함(贈玉函)ㆍ증백함(贈帛函)ㆍ일산ㆍ양산ㆍ청선(靑扇)ㆍ청홍개(靑紅蓋)와 각색의 촉롱(燭籠)에 소용되는 대홍운문단(大紅雲紋緞)이 3필(匹) 6자, 초록운문단 1필, 대홍접문단(大紅楪紋緞) 3필 7자, 초록접문단 2필, 흑접문단(黑楪紋緞) 3필, 대홍공단(大紅貢緞) 19자, 흑장단(黑糚緞) 3필, 흑팽단(黑彭緞) 1필 13자, 홍이광단(紅二廣緞) 2필, 남이광단(藍二廣緞) 5자, 황이광단(黃二廣緞) 2필, 자적이광단(紫的二廣緞) 5자, 초록이광단(草綠二廣緞) 2필, 대홍대단(大紅大緞) 5치, 홍광적(紅廣的) 2필 8자, 흑모단(黑冒緞) 3필, 자적운문갑사(紫的雲紋甲紗) 1필 18자, 홍운문사(紅雲紋紗) 1필, 자릉(紫綾) 3필 12자, 홍릉(紅綾) 10필 12자, 백릉(白綾) 3필 9자, 자적화화주(紫的禾花紬) 8자, 백화화주(白禾花紬) 4필, 홍초(紅綃) 14필 4자, 초록초(草綠綃) 1필 13자, 남초(藍綃) 2필, 유청초(柳靑綃) 3필, 백초(白綃) 13자, 흑초(黑綃) 5필이었다. ○ 삼중(三重)으로 된 관의(棺衣) 1벌과 오색 촉롱(五色燭籠) 100쌍이었다.○ 17일(기사)에 일을 감독한 여러 신하가 복명(復命)하였는데, 사관(史官)을 강 밖까지 보내어 맞이하고 위로하였다. 이번 일에서 일을 감독하는 신료는 영의정 김익(金熤)을 총호사로 삼아 서울과 지방 도감(都監)의 사무를 통괄하게 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천봉도감(遷奉都監)은 서울과 구원(舊園)에 나누어 설치하고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 병조 판서 윤숙(尹塾)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서유린은 경비를 맡고, 정창순은 의물(儀物)을 맡았으며, 윤숙은 찬구(欑具)를 맡고, 도청 낭청 두 사람과 낭청 일곱 사람, 감조관(監造官) 다섯 사람, 분차관(分差官) 네 사람을 소속시켰다. - 도청(都廳) 규장각 직각 이만수(李晩秀)가 서울의 일을 맡고, 병조 정랑 이익운(李益運)이 구원의 일을 맡았다. 낭청 상의원 첨정 이항연(李恒演)과 부사과 윤광석(尹光碩)과 감조관(監造官) 제용감 직장 이시원(李始源)이 빈궁(殯宮)의 여러 일을 맡았다. 그리고 봉상시 정 서욱수(徐郁修)는 지방(紙牓)을 만드는 일을 맡고, 낭청 호조 정랑 홍이호(洪彝浩)와 부사과 윤희후(尹羲厚)와 감조관 부사용 박수형(朴壽亨)은 순여(輴轝)를 맡았으며, 낭청 예조 정랑 연동헌(延東憲)과 감조관 부사용 신광하(申光河)는 의장(儀仗)을 맡고, 낭청 부사과 이명걸(李命杰)ㆍ이창회(李昌會)와 감조관 부사용 박일원(朴日源)은 옥(玉), 백(帛), 명정(銘旌), 삽(翣), 비(碑), 지석(誌石), 만사(輓詞)를 맡았으며, 선공감 봉사 서유병(徐有秉)과 감역 송재위(宋載緯)는 공작(工作)을 맡고, 장흥고 봉사 홍낙정(洪樂正)과 전설사 별검 황인도(黃仁燾)는 휘장과 자리를 맡았다.원소도감(園所都監)을 수원에 설치하여 이조 판서 김이소(金履素)와 행 부사직 정민시(鄭民始), 이문원(李文源)을 제조로 삼아, 김이소와 이문원은 국내(局內) 원침의 공사를 맡고, 정민시는 재용(財用)을 맡았으며, 도청 낭청 두 사람, 낭청 일곱 사람, 감조관 네 사람, 분차관 세 사람을 소속시켰다. - 도청(都廳) 부사과 서매수(徐邁修)는 문서를 맡고, 유한모(兪漢謨)는 공사를 맡았다. 그리고 낭청 부사과 이정회(李廷恢)와 용인 현령 이지원(李祉源)은 수도(隧道)를 닦고 축대를 쌓는 일을 맡고, 부사과 오재문(吳在文)과 감조관(監造官) 부사정 여준영(呂駿永)은 봉분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낭청 부사과 서직수(徐直修)와 감조관 신문현(申文顯)은 상설(象設)의 돌을 파는 일을 맡고, 부사용 김상엄(金相儼)은 계단과 주추의 여러 돌을 다듬는 일을 맡았으며, 사재감 직장 송흠서(宋欽書)는 돌을 운반하는 일을 맡고, 낭청 장악원 첨정 정동협(鄭東協)은 흙을 보충하는 일을 맡았으며, 부사과 김반(金鎜)은 쇠를 제련하는 일을 맡고, 병조 정랑 유한인(兪漢人)은 서울에 있으면서 대소 보고하는 문서를 맡았으며, 선공감 감역 이단형(李端亨)은 공작(工作)을 맡고, 장흥고 직장 김이행(金彝行)은 휘장과 자리를 맡았으며, 와서 별제(瓦署別提) 최효민(崔孝閔)은 기와를 굽는 일을 맡았다.지석(誌石)을 새기는 장소는 내가 친히 임하여 감독하기에 편리하도록 명정전(明政殿)의 북쪽 행랑에 설치하고, 호조 판서 서유린(徐有隣)과 정랑 김봉현(金鳳顯), 공조 판서 정창순(鄭昌順)과 도감의 해당 관장 낭청 이창회(李昌會)가 지석의 조각을 나누어 각자(刻字)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 이상은 도감에서 감독하는 일이다. - 총호사 김익(金熤)과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은 지사(地師) - 부사과 박대량(朴大良)과 부사용 김양직(金養直)ㆍ주남술(朱南述)ㆍ채윤전(蔡潤銓), 전 오위장 성몽룡(成夢龍)이다. - 와 일관(日官) - 감목관(監牧官) 지일빈(池日賓), 별제 지경철(池景喆), 전 찰방 김희경(金喜慶)이다. - 등을 거느리고 땅을 살펴보고 날을 가리는 일을 주관하였다. 용인 현령 이지원(李祉源)과 전 승지 김이성(金履成)은 미리 땅을 살펴보는 일을 의논하고, 사과 홍대영(洪大榮)은 미리 날을 가리는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 이상은 땅을 살피고 날을 가리는 것을 감독하는 일이다. - 영의정 이재협(李在協)은 옥과 폐백을 전하고 - 이만수(李晩秀)는 옥을 받들고 오재문(吳在文)과 김반(金鎜)은 옥안(玉案)을 받들었으며, 서매수(徐邁修)는 폐백을 받들고 이정회(李廷恢)와 정동협(鄭東協)은 백안(帛案)을 받들었으며, 김상엄(金相儼)은 자리를 폈다. - 좌의정 채제공은 재궁을 맞들고 - 무신 이백연(李柏然)과 심녕(沈鑏)이 드는 것을 도왔다. - 우의정 김종수(金鍾秀)는 재궁을 닦고 흙을 덮었다. - 박수형(朴壽亨)과 박일원(朴日源)은 구원에서 수건을 들었고, 송흠서(宋欽書)와 신문현(申文顯)은 신원에서 수건을 들었으며, 이시원(李始源)은 명정과 관의함(棺衣函)을 구원과 신원에서 받들었다.안춘군(安春君) 융(烿)은 수빈관(守殯官)으로 대전관(代奠官)의 일을 겸하였고, 응교 이경오(李敬五)는 구원을 파는 데서 대축(大祝)이 되고, 부사과 이제만(李濟萬)은 지방을 출납하는 데서 대축이 되었다. - 이항연(李恒演)과 홍이호(洪彝浩)는 폐백 상자와 탁자를 나누어 맡고, 대여와 연에 오르고 내리는 데 드는 것을 도왔다. - 집의 박성태(朴聖泰)는 구원을 팔 때에 개봉관(開封官)이 되고 신원에 안치할 때는 폐봉관(閉封官)이 되었다. 종척 집사 금성위 박명원 등 -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 광은부위(光恩副尉) 김기성(金箕性), 돈녕부 직장 김재창(金在昌), 행 부사직 김노영(金魯永), 증산 현령(甑山縣令) 김노성(金魯成), 부사용 김노경(金魯敬), 돈녕부 판관 황기옥(黃基玉), 성주 목사(星州牧使) 홍수영(洪守榮), 돈녕부 주부 홍최영(洪㝡榮), 부사용 홍후영(洪後榮), 본원 참봉 홍취영(洪就榮), 종묘서 영 서정순(徐鼎淳), 동지중추부사 이인강(李仁康)이 찬궁(欑宮)을 지키고 옻칠을 하고 제수를 진설하는 등의 일을 나누어 맡았다. - 과 당상 집사 규장각 직제학 김희(金憙) 등 - 김희는 본직이 아전(亞銓)이라 하여 종백(宗伯)의 찬홀(贊笏)을 대신하였고, 직제학 김재찬(金載瓚), 검교직각 서정수(徐鼎修)ㆍ정대용(鄭大容), 대교 김조순(金祖淳)이 제전(祭奠)의 의식을 맡았으며, 검교직각 정동준(鄭東浚)이 싸고 묶는 일을 맡고, 승지 이민채(李敏采)와 홍인호(洪仁浩)가 전작(奠爵)을 맡았으며, 이집두(李集斗)가 발인 행렬의 절차와 신원에 안치한 뒤 회를 다지는 일을 맡고, 신기(申耆)는 의장과 호위의 진열을 맡았으며, 주서 서유문(徐有聞)은 기사(記事)하는 일을 맡았다. - 과 당하관 집사 섭상례 권유(權裕) 등 - 권유와 박장설(朴長卨)은 섭상례로 신련(神輦), 신여(神轝), 영여(靈轝), 순여(輴轝)에 찬청(贊請)하는 일을 맡고, 통례 박황(朴鎤), 여만영(呂萬永), 찬의 이형필(李衡弼), 전의(典儀) 김동람(金東覽), 인의(引儀) 신대복(申大復)은 행례할 때 찬청(贊請)과 찬홀(贊笏)하는 일을 맡았으며, 감역 송재위(宋載緯)와 봉우보(捧羽葆) 별군직(別軍職) 이유경(李儒敬)ㆍ박기풍(朴基豐)ㆍ오의상(吳毅常)ㆍ이석(李晳)이 현궁을 묶은 뒤 순여에 올리는 일과 맞드는 사람을 교체시켜 운구하는 등의 일을 맡았다. - 이 나누어 임하고, - 이상의 각 업무는 집사관이 감독하는 일이다. - 예의사(禮儀使) 정창순(鄭昌順), 정리사(整理使) 서유린(徐有隣), 노부사(鹵簿使) 윤숙(尹塾), 돈체사(頓遞使) 김문순(金文淳), 여사대장(轝士大將) 이주국(李柱國) - 처음에는 행 부호군 임률(任嵂)로 대장을 삼았다가 조금 뒤에 이주국으로 대신하였다. 종사관은 전 첨정 원영주(元永胄)와 전 도사 오철상(吳徹常)이 배종하였다. - 등이 발인례(發靷禮)의 여러 일을 다스렸다. - 이상은 발인하여 갈 때 감독하는 일이다. - 승지 신광리(申光履)ㆍ박종악(朴宗岳)과 가주서 유한우(兪漢㝢)ㆍ박윤수(朴崙壽), 한림 이상황(李相璜), 병조 참의 정존중(鄭存中), 좌랑 윤득부(尹得孚), 총관 한광계(韓光棨)ㆍ임률(任嵂)과 도사 신광로(申光輅)는 수위하는 일을 나누어 맡았다. - 이상은 분사관(分司官)이 감독하는 일이다.금성위 박명원(朴明源)이 재궁에 ‘상(上)’ 자를 쓰고, 행 부사직 윤사국(尹師國)은 지방을 썼으며, 좌의정 채제공은 광중의 명정을 쓰고, 판돈녕부사 이명식(李命植)은 길에 들고 가는 명정을 썼으며, 판돈녕부사 윤동섬(尹東暹)은 비문의 전자(篆字)를 쓰고, 봉조하 조돈(趙暾)은 음기(陰記)를 썼다.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이 정자각의 상량문을 짓고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이 썼다. 영중추부사 김치인(金致仁) - 정존겸(鄭存謙)ㆍ서명선(徐命善)ㆍ홍낙성(洪樂性)ㆍ이복원(李福源)ㆍ김익(金熤)ㆍ이재협(李在協)ㆍ이성원(李性源)ㆍ채제공(蔡濟恭)은 대신(大臣)이고, 김종수(金鍾秀)ㆍ정민시(鄭民始)ㆍ오재순(吳載純)ㆍ김희(金憙)ㆍ김재찬(金載瓚)ㆍ서정수(徐鼎修)ㆍ정동준(鄭東浚)ㆍ정대용(鄭大容)ㆍ이만수(李晩秀)ㆍ김조순(金祖淳)은 각신(閣臣)이며, 구윤명(具允明)ㆍ구윤옥(具允鈺)ㆍ윤동섬(尹東暹)ㆍ이명식(李命植)ㆍ김화진(金華鎭)ㆍ조돈(趙暾)ㆍ한광회(韓光會)ㆍ권도(權噵)ㆍ정창성(鄭昌聖)ㆍ서유린(徐有隣)ㆍ김이소(金履素)ㆍ이문원(李文源)ㆍ정창순(鄭昌順)ㆍ윤숙(尹塾)ㆍ김상집(金尙集)ㆍ이갑(李)ㆍ정호인(鄭好仁)ㆍ윤시동(尹蓍東)ㆍ이성규(李聖圭)ㆍ송재경(宋載經)ㆍ심풍지(沈豐之)ㆍ조환(趙瑍)ㆍ심이지(沈頤之)ㆍ김문순(金文淳)ㆍ윤방(尹坊)은 중신(重臣)이고, 민종현(閔鍾顯)ㆍ홍검(洪檢)ㆍ구상(具庠)ㆍ채홍리(蔡弘履)ㆍ조종현(趙宗鉉)ㆍ임희증(任希曾)ㆍ김사목(金思穆)ㆍ유의(柳誼)ㆍ김광묵(金光默)ㆍ김이주(金頤柱)ㆍ신대승(申大升)ㆍ정우순(鄭宇淳)ㆍ엄사만(嚴思晩)ㆍ이득신(李得臣)ㆍ김노영(金魯永)ㆍ이시수(李時秀)ㆍ서회수(徐晦修)ㆍ이치중(李致中)ㆍ이헌경(李獻慶)ㆍ변득양(邊得讓)ㆍ신익빈(申益彬)ㆍ김재순(金載順)ㆍ홍수보(洪秀輔)ㆍ정이환(鄭履煥)ㆍ남현로(南玄老)ㆍ윤사국(尹師國)ㆍ이육(李堉)ㆍ신사운(申思運)ㆍ이경옥(李敬玉)ㆍ최광벽(崔光璧)ㆍ원계영(元啓英)ㆍ김몽화(金夢華)ㆍ신응현(申應顯)ㆍ이병정(李秉鼎)ㆍ윤상동(尹尙東)ㆍ홍병찬(洪秉纘)ㆍ김노순(金魯淳)ㆍ조정진(趙鼎鎭)ㆍ이의행(李義行)ㆍ유당(柳戇)ㆍ홍억(洪檍)은 재신(宰臣)이며, 이조승(李祖承)ㆍ박종악(朴宗岳)ㆍ조윤대(曺允大)ㆍ신광리(申光履)ㆍ윤장렬(尹長烈)ㆍ한만유(韓晩裕)ㆍ윤확(尹㬦)ㆍ이가환(李家煥)ㆍ조영진(趙英鎭)ㆍ유강(柳焵)ㆍ신기(申耆)ㆍ김이정(金履正)ㆍ유한녕(兪漢寧)ㆍ이민채(李敏采)ㆍ이서구(李書九)ㆍ홍인호(洪仁浩)ㆍ남학문(南鶴聞)ㆍ조원진(曺遠振)ㆍ맹지대(孟至大)ㆍ김익휴(金翊休)ㆍ기언정(奇彦鼎)ㆍ홍성연(洪聖淵)ㆍ이정규(李鼎揆)ㆍ정범조(丁範祖)ㆍ정존중(鄭存中)ㆍ박천행(朴天行)ㆍ박천형(朴天衡)ㆍ이조원(李祖源)ㆍ심환지(沈煥之)ㆍ홍문영(洪文泳)ㆍ이면긍(李勉兢)ㆍ홍의호(洪義浩)ㆍ김이성(金履成)ㆍ이의강(李義綱)은 당상 시종신(堂上侍從臣)이고, 이경오(李敬五)ㆍ신헌조(申獻朝)ㆍ윤광안(尹光顔)ㆍ서영보(徐榮輔)ㆍ조림(曺霖)ㆍ이익운(李益運)ㆍ정동관(鄭東觀)ㆍ이동직(李東稷)ㆍ윤익동(尹翊東)ㆍ송상렴(宋祥濂)ㆍ서매수(徐邁修)ㆍ신광호(申光祜)ㆍ유한모(兪漢謨)ㆍ신대윤(申大尹)ㆍ박규순(朴奎淳)ㆍ김방행(金方行)ㆍ오태현(吳泰賢)ㆍ신복(申馥)ㆍ권유(權裕)ㆍ이면응(李冕膺)ㆍ이상황(李相璜)ㆍ윤득부(尹得孚)는 당하 시종신(堂下侍從臣)이다. - 등 141인이 만장을 짓고 부사과 성종인(成種仁) - 심흥영(沈興永)ㆍ이석하(李錫夏)ㆍ민창혁(閔昌爀)ㆍ김재익(金載翼)ㆍ이귀운(李龜雲)ㆍ이언호(李彦祜)ㆍ김희조(金煕朝) - 등 여덟 사람이 썼다. - 이상은 제술과 글씨 쓰는 일을 감독한 것이다.관찰사 서유방(徐有防)이 모든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고, 지방관 수원 부사(水原府使) 조심태(趙心泰)가 겸하여 신원의 일을 감독하고 양주 목사(楊州牧使) 임시철(林蓍喆)은 구원을 수위하였으며, 과천 현감(果川縣監) 윤행임(尹行恁)과 광주 부윤(廣州府尹) 민태혁(閔台爀)은 도로와 교량을 다듬었으며, 윤행임은 겸하여 과천의 숙참(宿站)에서 찬궁(欑宮)을 설치하는 일을 관장하였고, 양성 현감(陽城縣監) 위광익(魏光翼)은 잡무를 관장하였다. 양 도감(都監)의 별간역(別看役)은 여덟 사람이고, - 전 첨사 변세의(卞世義), 전 현감 이예보(李禮輔), 전 찰방 정여연(鄭汝淵), 전 별장 이대번(李大蕃)은 구원을 파고 신원에서 안원(安園)하는 일을 보살폈고, 독용 중군(禿用中軍) 유이주(柳爾胄), 전 현령 심관진(沈寬鎭), 전 첨사 정우태(丁遇泰)ㆍ정도홍(鄭道弘)은 신원의 일을 보살폈다. - 경향(京鄕)의 간역(看役)은 아홉 사람이며, - 경교(京校) 김명숙(金命淑)ㆍ정동인(鄭東仁)ㆍ이귀남(李貴男)ㆍ유효원(柳孝遠)ㆍ유혜근(柳惠根)ㆍ박진욱(朴珍彧), 향교(鄕校) 김태서(金泰瑞)ㆍ이원영(李元榮)ㆍ김지택(金之澤)은 신원에서 일을 보살폈다. - 관상감의 관원은 세 사람이다. - 박인소(朴仁素)는 취토(取土)를 하고, 박만억(朴萬億)과 윤도항(尹道恒)은 시간을 아뢰었는데, 이상은 일을 살피고 감독한 사람이다. - 교리(校吏)와 공장(工匠)과 군정(軍丁)은 천봉도감(遷奉都監)의 패장(牌將) 180명, 원역(員役) 102명, 공장(工匠) 260명이고, 원소도감(園所都監)의 패장 40명, 원역 94명, 공장 305명이다. 구원에서 품삯을 준 일꾼은 1550명이고, 신원에서 품삯을 준 일꾼은 3만 6723명이다. 발인하여 갈 때에 맡은 여러 군정은 도합 3931명이다. - 대여와 소여에 각각 14명, 정여사군(井轝士軍)과 각색군(各色軍) 408명, 대여를 지고 뫼시는 사람이 4운(運)인데, 매 운에 136명이니 합하면 544명이고, 예비군(豫備軍)이 16명, 우두머리가 8명이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90명, 뒤에서 끄는 사람이 45명, 예비군이 25명, 각차비(各差備)가 228명, 횃불을 든 사람이 91명이다. 견여(肩轝)를 메고 뫼시는 사람이 3운인데 매 운에 108명이니 합하여 324명이고, 예비군이 12명, 우두머리가 6명이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50명, 뒤에서 끄는 사람이 30명, 예비군이 12명, 각차비가 130명, 횃불을 든 사람이 52명이다. 그리고 외재궁여(外梓宮轝)를 메고 뫼시는 사람이 324명, 예비군이 12명, 우두머리가 6명이다. 앞에서 끄는 사람이 50명, 뒤에서 끄는 사람이 30명, 예비군이 10명, 각차비가 60명, 횃불을 든 사람이 31명이다. 대여 앞에 향정(香亭)을 든 사람이 10명, 예비군이 2명, 각차비가 5명이다. 신여군(神轝軍)은 32명, 예비군이 10명, 우비(雨備)를 맡은 사람이 2명이다. 신여 앞의 향정을 든 사람은 10명, 예비군이 2명, 각차비가 5명이다. 신여군은 15명, 예비군이 5명, 각차비가 3명이다. 평교자를 멘 사람은 10명, 예비군이 3명, 우비를 든 사람이 1명이다. 채여군(綵轝軍)은 15명, 예비군이 2명, 각차비가 3명이다. 방상시(方相氏)의 수레를 끄는 사람은 56명, 예비군이 17명, 횃불을 든 사람이 5명이다. 죽산마(竹散馬)를 끄는 사람은 108명, 예비군이 38명, 우비를 든 사람이 4명, 횃불을 든 사람이 11명이다. 만장군(輓章軍)이 100명, 예비군이 28명, 횃불을 든 사람이 5명이다. 안롱군(鞍籠軍)은 24명, 길의장군(吉儀仗軍)은 94명, 소의장군(素儀仗軍)은 16명, 삼색 촉롱군(三色燭籠軍)은 12명, 화철 촉롱군(火鐵燭籠軍)은 40명, 예비군이 10명, 우비를 든 사람이 3명이다. 오색 촉롱군(五色燭籠軍)이 200명, 예비군이 20명, 우비를 든 사람이 5명이다. 방등군(方燈軍)이 4명, 대등군(大燈軍)이 2명, 우산을 든 사람이 2명, 병풍군(屛風軍)이 26명, 예비군이 2명, 삽선 우비(翣扇雨備)가 2명이다. 명정군(銘旌軍)이 10명, 지방을 지고 가는 사람이 5명, 제주 탁자(題主卓子)를 받들고 가느 사람이 10명, 상과 탁자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26명, 내왕판(來往板)과 잡물의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이 60명, 장생전(長生殿)의 수레를 끌고 가는 사람이 120명, 예비군이 12명이다. 도감 잡물군이 30명, 도유군(都遊軍)이 100명, 횃불을 든 사람이 40명, 대장을 뫼시고 가는 도유군이 300명, 횃불을 든 사람이 31명, 지석 채여군(誌石綵轝軍)이 20명, 예비군이 6명, 각 차비가 6명이다.내가 원침을 옮기는 한 가지 일에 대해 많은 부분을 직접 계획을 세워 일을 지휘하고 설계를 한 것은, 경비를 번거롭게 소비하지 않고 민력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해서이다. 신련과 신여, 평교자, 등롱은 정련배(正輦陪)와 호련대(扈輦隊)를 쓰고, 의장은 법가군(法駕軍)을 쓰며, 구원을 파는 데는 자문군(紫門軍)을 쓰고, 대여를 메는 사람, 수레를 끄는 시민, 잔디를 뜨거나 각항의 짐을 져다 운반하는 군정(軍丁)에 이르기까지 모두 내탕고에 비축한 전화(錢貨)를 꺼내어 식량과 비용을 후하게 하고, 의복은 각자가 만드는 것을 금하고 내탕고와 호조의 경비로 제공하였는데, 여러 신료들이 모두 나라에서 정한 법도 이외의 것은 나라의 체모에 관계가 있다고 여러 번 말을 하였지만, 나의 구구한 본뜻은 오직 ‘우러러 선왕의 뜻을 계승한다[仰述]’는 두 자에 있었으므로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이 외에 순여(輴轝)를 메고 뫼시는 사람은 특별히 별계군(別契軍)을 썼고 자원하여 응모한 반호(班戶)의 솔정(率丁)도 일체 허락하지 않았다. 전날에는 대여의 강목(杠木)이 너무 무거웠고 정가(井架)는 너무 조밀하여, 대여를 메는 사람들이 힘은 약하고 어깨가 부딪쳐 걷는 데 불편하므로 강목을 깎게 하고 정가도 수를 감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의식을 연습하는 일은 세 번 하게 되어 있는데 모여 기다리는 폐단이 있으므로 줄여서 두 번으로 하였으며, 발인하는 날에 도청과 낭청 및 근시(近侍)와 무신에게 나누어 명하여 떡과 고기를 싸 가지고 10여 리마다 운구하는 이들을 먹이게 하였으며, 또 참(站)을 대는 곳에는 식량을 주어 초소를 설치하여 밥을 지어서 먹이게 하고, 신방제중단(新方濟衆丹)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몇 알씩 주어 추위를 막게 하였다. 구원에서 신원까지의 거리는 길이 100리에 가까워서 대여를 메는 사람들이 교대하여 운구한 것이 20차례였다. 첫날 강가에서 출발할 적에 이미 해가 떴지만 오시(午時)가 되지 않아 과천(果川)의 숙참(宿站)에 안치하였으며, 이튿날 새벽에 출발하여 신원으로 향하였는데, 신시(申時)가 되지 않아 정자각에 도착하였다. 구원을 파는 일에서부터 신원의 안원전(安園奠)에 이르기까지 일을 감독하는 신료와 호종하는 장사와 대여를 메는 사람, 공장(工匠), 역부에 이르기까지 편안히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없어 마치 돌봐 주는 자가 있는 듯하였으니, 기이하고 기이하였다. 장례를 지내고 나서 상을 주어 그 수고를 보답함에 있어서는 각각 차이가 있었다. - 상전(賞典)은 《일성록(日省錄)》에 보인다. - 고(故) 참의 윤선도(尹善道)에게는 그 후손을 녹용(錄用)하고 또 수원의 새로운 부치(府治)에 가대(家垈)를 사서 주도록 명하고, 금성위 박명원(朴明源)에게는 토지 10경(頃)과 사내 종 10구(口), 여자 종 10구와 백금 100냥, 안장을 갖춘 내구마(內廐馬) 1필을 주고, 왕패(王牌)에 어보(御寶)를 찍어 주어 영세토록 집안에 전하여 공신의 철권(鐵券)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고 고 영중추부사 정홍순(鄭弘淳)에게는 아름다운 시호를 주고 관리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니, 염려하고 수고한 공로가 고금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중추부사에 추증된 조돈(趙暾)과 같은 사람은 일찍이 원침을 속히 옮기는 것이 마땅함을 아뢰고 조정의 관료에게도 힘써 말하였으니, 또한 가상하게 여겨 포상한다. 선견의 지혜와 감식은 현궁을 다듬는 데 정성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을 때 앞장서서 논의를 제창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장인을 감독하는 수고만 못하겠는가. 이에 대략을 써서 후세에 보인다.
[주D-001]10월 병오 : 간지(干支)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1789년(정조13) 10월에는 병오라는 간지가 없고, 16일(무진)에 현륭원(顯隆園)의 공역이 완공되어 안원전(安園奠)을 거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주D-002]삼물회(三物灰) : 소석회를 모래와 여물을 섞어서 반죽한 것을 말한다. 속칭 ‘사몰’이라고도 한다.[주D-003]소리(小利) : 이장(移葬)하려는 신산(新山)의 좌향(坐向)을 가지고 연운(年運)의 길흉을 보는데, 육십갑자로 구분하여 극살(克殺)의 있고 없음을 보아 극살이 있으면 좌향에 의한 연운이 불길하고, 없으면 길한 것으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길한 것에도 소리(小利)와 대리(大利)의 구별이 있다. 《天機大要 2章 喪葬門》[주D-004]칠군(七君) : 북두칠성의 일곱 별인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을 이른다. 또는 대성군(大星君), 원성군(元星君), 진성군(眞星君), 무성군(繆星君), 사성군(四星君), 기성군(紀星君), 개성군(開星君)이라고도 한다. 《天機大要 2章 喪葬門》[주D-005]복단일(伏斷日) : 조장(造葬), 혼인(婚姻), 상관(上官), 출행(出行), 기복(祈福), 교역(交易), 동토(動土) 등의 일을 하면 흉(凶)하다고 하는 날을 이른다. 곧 자일(子日)에 허수(虛宿)가 닿는 것, 축일(丑日)에 두수(斗宿)가 닿는 것, 인일(寅日)에 실수(室宿)가 닿는 것을 혐의로 여기고, 묘일(卯日)에 여수(女宿)가 닿는 것, 진일(辰日)에 기수(箕宿)가 닿는 것, 사일(巳日)에 방수(房宿)가 닿는 것을 무섭게 여기며, 오일(午日)에 각수(角宿)가 닿는 것, 미일(未日)에 장수(張宿)가 닿는 것, 신일(申日)에 귀수(鬼宿)가 닿는 것을 두렵게 여기고, 유일(酉日)에 자수(觜宿)가 닿는 것, 술일(戌日)에 위수(胃宿)가 닿는 것, 해일(亥日)에 벽수(壁宿)가 닿는 것을 꺼리는 경우를 가리킨다. 《天機大要 2章 喪葬門》[주D-006]원천강(袁天綱) : 당(唐) 나라 때 사람으로, 관상술(觀相術)에 정통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곤궁하고 형통함을 관상을 통하여 번번이 신기하게 잘 맞췄다. 《新唐書 卷204 袁天綱列傳》[주D-007]《누주통의(漏籌通義)》 : 조선 정조(正祖) 때에 김영(金泳)이 편찬한 천문서(天文書)로서, 1783년(정조7)에 관상감(觀象監)에 명하여 편찬하였다. 《增補文獻備考 卷1 象緯考》
| | 시(詩) | | |
청룡산 아래엔 오래된 절이 있고 / 靑龍山下古招提 빙설 쌓인 절벽은 들 계곡을 임했는데 / 氷雪斷崖臨野谿 남창 아래 단정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니 / 端坐南窓讀周易 종소리 한 번 울리자 닭이 홰에 오르네 / 鐘聲一動欲雞棲 당시 강강하던 이들 다 이미 떠났는데 / 當日剛强盡冷灰 유약하던 내가 이젠 도리어 튼튼하여라 / 祇今柔弱却雄哉 하늘도 꼭 사사 뜻이 없는 건 아니로다 / 天工未必無私意 금경로 한 잔을 아낄 줄을 알았네그려 / 解惜金莖露一杯 潁翁續藁卷之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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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誌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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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公轍。字元平。宜寧之南。以新羅英毅伯諱敏爲始祖。入我朝。有諱在。議政府領議政。策開國功臣。諡忠景。配享廟庭。高祖諱龍翼。吏曹判書大提學。諡文憲。歷事四朝。以文章忠節爲名臣。曾祖諱正重。慶尙道觀察使。贈吏曹判書。祖諱漢紀。同知敦寧府事。贈議政府左贊成。考諱有容。刑曹判書大 提學。諡文淸。文章名德。有朝野山斗之仰。用公貴贈議政府領議政。妣安東金氏。封貞敬夫人。通德郞諱錫泰女。公以英宗三十六年庚辰十一月十六日子時生。母夫人方娠而夜夢拜上帝。公少孤。能自知讀書。年十六。始學爲古文。兪蒼厓漢雋題其卷曰小韓愈。醇菴吳文靖公載純見而評之曰韓法歐趣。弱冠。携文謁大學士江漢黃公景源。黃公曰古文絶於世久矣。子其勉之。赴國子試。連占高等發解。正宗八年甲辰。以蔭補洗馬。陞六品。由司饔主簿。屢轉爲山淸縣監。又監任實。坐前任糴逋罷。敍拜司僕僉 正。壬子對策魁人日製。應殿試擢丙科。上賜內皷吹。又命張盖乘內廐馬遊街。拜兵曹正郞。別兼春秋。賞花釣魚宴。特命公入參。上目屬之曰。此子風儀如鸞鳳。眞聖世瑞物也。選抄啓文臣。拜奎章閣直閣。兼校書館校理,知製敎。未經堂圈。直入內閣。自公始。召見便殿敎曰。爾乃故師傅文淸之子。一面如舊。當以家人禮待之矣。仍賜牙笏朝服一襲。除弘文館副校理。兼南學漢學敎授。移司諫院正言,獻納。禁衛營辟爲從事官。授文兼宣傳官。陞太僕正。遷應敎。與編奎章全韻。癸丑。以眞殿大祝陞通政。除承政 院右副承旨。後屢拜參議兵曹刑曹。因討逆事。同諸臣排閤。竄江華。翌日特宥。又以承旨忤旨。待罪金吾。上屢下不忍聞之嚴敎而不之罪也。兼大司成。乙卯。上謂諸閣臣曰。近日權妖出近列。朝紳多連累者。而獨南某皭然。泥而不滓。又敎曰。如玉其人也。差備邊司副提調。徵見文稿。下御札褒以雅潔有古法。戊午。擢嘉善。賜金帶。歷諸曹參判。提擧諸寺。復差籌司堂上。仍管有司。出爲江原道觀察使。旣行。賜詩以寵之。內遷弘文館副提學。命仍任。庚申。貞純王后垂簾同聽政。命選閣臣五人。自內入侍勸講。公與焉。旣 還。授都承旨。同知經筵。又移副提學。兼奎章閣直提學。與修正宗實錄。今上元年辛酉。用藥房勞陞嘉義。拜慶尙道觀察使。甲子。丁母憂歸廣陵。服闋還朝。丁卯。大臣筵白擢資憲。判工曹禮曹。貞純王后薨。以祔廟都監敦匠勞進正憲。旋加崇政。授判義禁知經筵事。充冬至正使。赴燕京。公在館。玉水曹江,玉方陳希祖,刑部主事李林松。俱以文詞擅名海內。見公文。皆作序以贈之。江則曰其文本之經術。老成有法度。其光黝然而味悠然。深而長。所宗尙尤在歐陽。而不屑屑求合於字句。此其所以善學歐 陽子者也。希祖謂淸廟之瑟。一唱而三歎。林松稱詩學中唐而不漓其眞。稱道甚盛。在道拜吏曹判書。其後凡九拜。或出或不出。大臣因微事奏罷。旣敍付知中樞。拜藝文館提學。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除兵曹判書。兼奎章閣提學。時公有不安于朝者。求外留守西京。兼元子諭善。命入對于資政殿。諭曰。卿今世之老師宿儒也。元良輔導之任。須盡心對揚。歷左參贊。北使至。充館伴使。遷戶曹判書。拜世子賓客。連兼宣惠廳舟橋司提調。甲戌。正廟御集成。加崇祿。丙子。撰進獻敬惠嬪上 諡玉冊文。進秩輔國。王世子入學。爲博士。禮成。受虎皮鞍馬之賞。丁丑。以特旨拜議政府右議政。仍帶大提學。諭以卿容儀愷悌。可以矜式百僚。志操恬雅。可以砥礪頹俗。公每欲於未老得致仕。顧主恩益隆。而身又當重任。未能遽上乞骸之章。置亭龍山廣陵之間。多植梅菊松竹。時以幅巾野服。出往逍遙。客至。焚香淸坐。討論經史。傍列古今法書名畫銅玉彝鼎。評品賞玩。泊然無榮利之慕。而愛君憂國之思。屢見於篇什。後之君子。必有讀其書而知其心者矣。己卯。公年六十。謂家人曰。吾事親處宗族。無一善行。立 朝三十年。徒竊高位厚祿。未有報答。此吾平生之恨也。撰自碣。只書生年官職。又取兩聖朝褒敎及前輩鉅公中州諸名士奬詡之語。爲若干言。餘皆不錄。仍命勿受禮葬。勿樹豐碑。公娶淸州韓氏。封貞敬夫人。監司用和女。公無嗣。取族子芝耉爲後。公嘗於廣州 淸溪山下。得一麓。將爲身後地。所著有金陵集十二卷,潁翁續藁,高麗名臣傳,讀禮錄,書畫跋尾幾卷。銘曰。 受恩兩朝。位躋台司。謂之遇也亦宜。才弱寡與。蘊而莫施。謂之不遇亦宜。嘗欲潁尾求田。未老歸休。翺 翔乎一壑一丘。遭時艱虞。未忍便訣。後欲知公。庶徵玆碣。 追記庚辰辛巳。公三上章乞致仕。敎以予之倚卿。如副手於千斛之舟。又諭以今日之所恃惟卿。卿其臥閤論道。皆不允。孝懿王后薨。公爲摠護使。陞左議政。兼世子傅。壬午。又屢疏力求退。始解相職。付判中樞府事。기록한 것이다.
[주D-001]금경로(金莖露) : 금경은 동주(銅柱)를 가리킨 것으로, 한 무제(漢武帝)가 일찍이 건장궁(建章宮)에다 동선인(銅仙人)을 세워서 동반(銅盤)을 받들어 감로(甘露)를 받도록 만든, 즉 승로반(承露盤)의 이슬을 가리키는데, 한 무제는 이것을 마시어 장수(長壽)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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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朝科擧試官。只有知貢擧同知貢擧二人而已。預以文臣有名望者爲之。恩門視門生如子弟。門生視恩門如父母。贅郞不許入內室。而門生則特許相見。所以重也。一榜聚宴恩門之第。則捧觴獻壽。如親子弟。或留宿焉。安文成公家豪富。新恩三十人。皆給貂毛衾。亦各設萬縷銀盞。余之外家安氏。故得傳聞之也。國朝雖罷知貢擧之制。然猶有門主座主之名。或設酌看訪。死則或於其家。或於祖道。皆設奠祭之。今者門生座主。視如胡越。反相擠擊。此亦可以觀世變也。太宗少時習擧子業。於辛禑壬戌年擢進士第二名。又於翌年癸亥擢文科。金漢老爲壯元。沈孝生居二。太宗居十。李來成傅尹珪尹思修朴習玄孟仁皆同榜也。及登寶位。漢老之女爲世子禔之夫人。每於進退之際。常呼壯元而不名。 太宗嘗作扇詩曰。風榻依時思朗月。月軒吟處想淸風。自從削竹成團扇。朗月淸風在掌中。以文士而成大業者。古所未有。帝王文章亦未有如此之奇巧者。其引物譬喩。涵畜意趣。非聖人不能也。 襄陽南數里。有石立路旁。諺傳。昔一按廉酷愛州妓。臨遞別妓。作詩題于石曰。汝石何時石。吾人今世人。不知離別苦。獨立幾經春。或云咸傅霖所作。 讓寧君禔。雖失德廢嗣。晩年能隨時自▣。世祖嘗問禔曰。我之威武何如漢祖。對曰。殿下縱威武。必不溺儒冠矣。又問曰我之好佛何如梁武。對曰殿下縱好佛。必不以麪爲犧牲。又問曰我之拒諫何如唐宗。對曰殿下縱拒諫。必不殺張蘊古。禔每以談諧寓諷。世祖亦樂其誕而戱之。 玄先生孟仁嘗以司諫爲親幸祭大祝。手持祝文。茫然不措一辭。太宗怒曰。孟仁以文臣不能讀祝。將奚用爲。遂差萬戶。 僉知任淑爲健元陵香使。而大祝則李維翰。僉知李長孫爲顯陵香使。而大祝則姜參。同熟齋室。維翰不詳問於人。誤以長孫爲淑。書長孫名於祝版。淑奠爵俯伏少退跪。維翰讀長孫名。淑高聲告神座前曰。非長孫乃任淑也。祭畢出曰。姜維翰誤事大敗。彼李參何以讀之。蓋維翰誤認。而僉知亦誤換也。 孫判院聚古人三休四休之說。稱七休居士。爲人純謹無他。每事徑情直行。若關風俗綱常。必先致意。醉則發豪語無已。時嘗爲江原道監司。適時大旱。禱雨無效。公曰。不得求雨者無他。守令不盡誠也。如或誠心感天。則天必應之。遂齋戒親出祈雨。半夜聞雨聲。喜雨起曰。我常謝天。被朝服立庭中。無數拜天。雨勢漸急。有吏持傘倚後。公曰壓尊處安用傘爲。命去之。衣裳盡濕又爲慶尙監司。若過孝子烈女門閭。必下馬再拜。雖雨不避。都事李緝。擁蓑坐田間。公拜畢謂都事曰。足下何以爲之。緝曰我先令拜矣。左右無不掩口。又嘗至平壤。見箕子墓。下馬膜拜曰。東人至今囿於禮義之場者。專是太師之敎。又嘗陪獵于穿嶺。猛虎被圍。公乘醉抽木箭彎弓。馳馬欲入射之。衆人力持而止。凡事多類此。每於上前。書忠恕二字。懇懇陳啓。成宗以爲忠直。遂至大用。公位高而操心愈約。每對客設酌。只用黑豆苦菜松芽爲蔌。專惡繁華之事。 世宗創內佛堂。公卿大夫臺諫儒生三館諸生。皆上書極諫。判院事李順蒙亦詣政院論啓。傳曰。文士闢佛宜矣。宰臣何知佛之是非而駁之。順蒙對曰。人皆以爲非。故臣亦非之。人皆論諫。故臣亦論諫。擧國所非之事。殿下何獨爲之。成宗將祔德宗于太廟。聚政院六曹臺諫弘文館議之。論議紛紜不一。驪城君閔發。亦以功臣與焉。問諸左右曰德宗何人。宗廟誰氏之宅。左右曰。德宗是今上之考。宗廟今上祖宗祭享之所。發曰此甚易耳。以子祭父。合於事軆。有何他議。其後竟祔廟。夫順蒙與發皆無知武士。發言中於理。是由本然善性初未嘗泯也。 李參判子野嘗赴京。有書狀官。適遊街市。見美人在紗窓裡刺繡。書狀目注不轉。美人開窓以水揮之。衣盡濕。參判聞而作詩曰。河水橋頭柳絮飛。酷探春色却忘歸。多情忽有窓間雨。飛洒分司御史衣。其後再赴京師。行至通州。無疾暴卒。人皆惜之。 有李斯文者。爲殷山縣監。京友投刺於門。久立無影響。枵腹不耐勞苦。日已高。忽聞衙中有吹角聲。門吏曰供盥頮也。日幾中天。又聞角聲。門吏曰整鞍粧也。日正中。又聞角聲。縣監出。其友進謁。縣監立與一語。卽歸官廳。竟不招友。友大失望。未幾縣監居殿而遞。又有白斯文者。爲牛縣令。監司成公巡行過縣北界。顧謂都事曰。今日已晩。自然思食。都事曰。前未五里有晝停之處。縣當作例來辦矣。馳至其處。寂無人聲。有麥笠老吏。肩掛網囊。出跪路旁曰。支應而來。遂解囊呈一瓦壜及一小封。壜是酒而封是雞也。監司大怒曰。我雖飢困。安食此物。未幾斯文亦遞。時人作詩戱之曰。縣官出入三吹角。使道迎逢一瓦甁。 有慈悲僧者。性直無曲節。雖公卿大相皆以名呼之。人有施與。則雖重物不讓而受。人有丐之者。盡數與之。只著破笠破衣而已。日日糊口於京中里閭。與之食則食。不與之則不食。腆饋不以爲美。觕飯亦不以爲歉。凡言物必稱主。言石則云石主。言木則云木主。其他物亦皆類此。儒生見僧向晩悤悤去。問曰向那裏去。僧曰往尼舍覓烏主家。蓋言覓袴具也。人皆笑之。僧腮有傷痕。人問其故。僧言曾入山採薪。有虎與熊相鬪。僧就前謂之曰。何故相害。宜各和解。虎主聽戒而去。熊主不聽僧戒。來咬僧面。適被山人來救而得免矣。予嘗與諸宰樞會一處。僧亦來到。座中人問云。僧不曾入山修道。何苦每在人間修橋樑路井小事。僧曰。少時師僧戒云。入山苦行十年。則可以悟道。僧入金剛山五年。臺山五年。勤苦繕性。竟無其效。師僧又云。讀蓮華經百遍。則可以悟道。僧依敎誦遍。亦無其效。自是始知佛氏虛妄難信也。然僧無他輔國。但欲修橋梁道井以施功德於人。人皆樂其眞率也。 陳高兩天使。所留題詠裒集。名曰皇華集。芹館儒士聚坐。吟諷而讚之。柳上舍正孫在旁乃言曰。此詩如此美。故吾祖參判公好觀之。滿座太噱曰。今時天使所製之詩。汝祖何由觀之。儒士又論饌物。偶及大饅頭之味。崔上舍八俊曰。吾祖母每作此物而食之。座中大噱曰。大饅頭惟於接天使大饗之禮設之。汝祖母雖甚豪富。豈得常常而食之。當時皆笑二人之嗤妄也。 余爲弘文提學。有館員奉使南方。愛光州妓。落節而還。同僚誹笑之。余戱作詩云。僧於聲色本無情。娼妓齋中尙發情。若作湖南乘馹客。玉堂學士摠多情。昔者有一娼妓。喪親設齋於寺。羣妓皆往。有僧硏菜。忽持刀倚壁而立。菴主僧問其故。僧曰見紅粧撩亂。情動不能止耳。庵主僧曰。汝勿雜言。今日娼妓之齋。誰不動情。詩句借此爲喩也。 余與同年元壽翁偕赴京。壽翁鼻楂赤。行至平壤。適侍房之妓鼻亦楂赤。余作詩戱之曰。箕都城內朔風寒。春色如何上鼻端。醉後一雙金橘爛。樽前兩葉晩楓丹。帳中光影偏相照。客裡風情慘不懽。我是直言吳可立。爲傳聲譽滿長安。甑山有老官吳可立。若見行客昵妓之事。每說於人。故詩語及之也。 余於辛未年間。在坡州別墅。一日余伯氏陪大夫人。往登珍巖巖枕洛河。其高千仞。上可坐百許人。西接海門。北與松都相對。松嶽五冠聖居諸山。如在咫尺。風景勝於蠶嶺。是時日斜。忽飛雨驟集。有虹自巖頭小井。入于江中。光輝所照。人面皆黃。腥穢之氣。人不敢近。眞天地之淫氣。而古人之言不虛也。伯氏作詩曰江波渺渺水如空。泛泛漁舟箇箇同。日暮顚風吹雨過。晩虹時起斷岡東。是歲余年十三。少子世淳年十。伯氏朝夕勤勤敎誨。或讀書或作詩。每夜同宿一房。敍文論懷。仲氏戲曰兩童能文章。吾輩他日閉門自縮。不幸世淳早逝。余之成立得至今日。皆伯氏之力也。 潮水之往來有常。朝曰潮。而夕曰汐。所謂信者不失其期也。自越閩齊東遼瀋之境。及我西南海。潮皆一樣。惟東海無潮。中朝不知。故先儒無議之者。或云。南方體柔用强。故有潮。北方體强用柔。故無潮。或云。潮之源出自中國。我之西海近。故潮所及。東海遠。故潮不及。或云。自東女眞之域。沮洳連陸。達于東倭。潮源出自扶桑。過倭國而西。潮至連陸之地迤回而南。我之東海在其內。故潮不及。此三說未知孰是。 雉之美者。北方爲最。今平安道江邊之雉。進其大如鶩。凝膏如琥珀。當冬捕而供進。謂之膏雉。其味甚美。自北而南。雉漸瘠。至湖嶺南陲則肉臊不可食。人言北方多草樹。得飮啄得所。故肥也。 物有相類者甚繁。雞與雉相類。鴨與雁相類。鵝與鵠相類。馬與驢相類。犬與狼相類。羊與羚相類。猪與豕相類。鼠與竹鼠相類。猫與狸相類。鴒與鵠相類。虎與豹相類。獐與鹿相類。鷹與鶻鳶相類。鯽與鯉相類。鮧與鰻鱺相類。蟹與蛛相類。蠅與蝱相類。蛟與醢雞相類。蛙與蟾相類。蔥與蒜相類。薑與鬱金相類。鶯與啄木相類。香薷與荊芥相類。牧丹與芍藥相類。梨與林檎相類。榛與栗相類。李與奈相類。茄與苽相類。柑與橘柚相類。桃與杏相類。松與柏檜相類。荔支與龍眼相類。海棠花與木瓜花相類。玫瑰與四季相類。金錢與石竹相類。薇與蕨相類。桔梗與人蔘相類。蒲與菖蒲相類。朱砂與雄黃相類。消腦與龍腦相類。其餘物之大小長短雖殊。而形軆相類者無限也。 祈雨之禮。先令五部。修溝瀆淨阡陌。次祭宗廟社稷。次祭四大門。次設五方龍祭。東郊靑龍。南郊赤龍。西郊白龍。北郊黑龍。中央鍾樓街作黃龍。命官致祭。三日而止。又設龍祭於楮子島中。令道流誦龍王經。又投虎頭於朴淵楊津等處。又於昌德宮後苑慶會樓慕華館池邊三處。泛蜥蜴於水瓮中。靑衣童子數十。以楊枝擊瓮鳴鑼大呼曰。蜥蜴蜥蜴。興雲吐霧。俾雨滂沱。放汝歸去。獻官與監察。整冠笏而立。三日而止。又於城內萬落。貯水甁揷楊枝焚香。坊坊曲曲設棚。兒曹群聚呼雨。又徙市於南路。閉南門開北門。旱甚則上避殿減膳。不鳴鼓審冤獄。赦中外。 圓覺寺是古大寺之基。初有大殿及東西禪堂而已。慣習都監寓大殿西禪堂。禮葬都監寓東禪堂。大殿之北。爲中部儒生所會。世祖皆命毀撤。更創大伽藍。名曰圓覺。以銀川君玉山君爲提調。兼大司憲。常於路上用憲官之儀。所由二人呵辟。又令騎士吹簫角前導。士女坌集聚觀。寺成設慶讚會。上屢臨幸焉。有天雨四花舍利分枚之異。屢加百官級。其後中部移於架閣庫之基。禮葬都監。寓松峴行廓。屬歸厚署。慣習都監合於奉常寺之樂學。而名曰樂學都監。未幾改爲掌樂院。洪仁山爲提調。以其地狹人衆。移今之地而大創之。宏堂傑搆。甲於諸廨。爲百官習儀之所。又爲科場取士之處矣。 世宗設諺文廳。命申高靈成三問等製諺文。初終聲八字。初聲八字。中聲十二字。其字軆依梵字爲之。本國及諸國語音文字。所不能記者。悉通無礙。洪武正韻諸字。亦皆以諺文書之。遂分五音而別之。曰牙舌唇齒喉。唇音。有輕重之殊。舌音有正反之別。字亦有全淸次淸全濁不淸不濁之差。雖無知婦人。無不瞭然曉之。聖人創物之智。有非凡力之所及也。 丁酉年琉球國王使臣到國。成宗接見乎慶會樓下。使臣退館謂通事曰。我到貴國見三壯觀。通事問其故。使臣曰。慶會樓石柱縱橫刻畫。飛龍倒影隱現於碧波紅蕖之間。此一壯觀也。領議政鄭公風標俊逸。玉色鬚髥。下垂過腹。輝映朝著。此二壯觀也。禮賓正每參晝盃之宴。快瀉無限大鍾。不曾有難色。此三壯觀也。時李淑文爲禮賓副正。朋友聞之絶倒。 太宗於永樂元年。謂左右曰。凡爲治。必須博觀典籍。吾東方在海外。中國之書罕至。板刻易以剜缺。且難盡刻天下之書。予欲範銅爲字隨所得而印之。以廣其傳。誠爲無窮之利。遂用古註詩書左氏傳字鑄之。此鑄字所由設也。名曰丁亥字。世宗又於庚子年。以所鑄之字大而不整改鑄之。其樣小而得正。由是無書不印。名曰庚子字。甲寅年又用爲善陰騭字鑄之。比庚子字。差大而字軆甚好。又命。世祖書綱目大字。世祖時爲首陽大君。遂範銅爲字。以印綱目。卽今所謂訓義也。壬申年間文宗更鎔庚子字。命安平書之。名曰壬子字。乙亥年世祖改鎔壬申字。命姜希顏書之。名曰乙亥字。至今用之。其後乙酉年。欲印圓覺經命鄭蘭宗書之。字軆不整。名曰乙酉字。成宗於辛卯年。用王荊公歐陽公集字鑄之。其軆小於庚子。而尤精。名曰辛卯字。又得中朝新板綱目字鑄之。名曰癸丑字。大抵鑄字之法。先用黃楊木刻諸字。以海蒲軟泥。平鋪印板。印着木刻字於泥中則所印處。凹而成字於是合兩印板。鎔銅從一穴瀉下。流液分入凹處。一一成字。遂刻剔重複而整之。刻木者曰刻字鑄成者曰鑄匠。遂分諸字。貯於藏樻。其守字者曰守藏。年少公奴爲之。其書草唱准者曰唱准。皆解文者爲之。守藏列字於書草上。移之於板。曰上板。用竹木破紙塡空而堅緻之。使不搖動者。曰均字匠。受而印之者。曰印出匠。其監印官則校書館員爲之。監校官則別命文臣爲之。始者不知列字之法。融蠟於板。以字着之。以是庚子字。尾皆如錐。其後始用竹木塡空之術。而無融蠟之費。始知人之用巧無窮也。 斯文柳休復與其從弟柳允謙亨叟。精熟杜詩。一時無比。皆受業於泰齋先生。先生雖以文章著名。而緣父之罪。禁錮終身。斯文亦不得赴試。世宗嘗命集賢殿諸儒。撰註杜詩。而斯文亦以白衣往參。人皆榮之。其後皆通仕途。斯文登庚辰科。官至校理。亨叟與余同年進士。而登壬午科。官至右副承旨。亦以文學名。我仲氏眞逸先生學杜。斯文日夜忘倦。讀至百遍。由是大悟。文理觸處皆通。我伯氏文安公常與仲氏論杜而作詩。多得杜軆。余亦少時受杜於伯氏。拘於擧業。半途而廢。至今恨其不全也。 尹淡叟先生性拙直。又精於詩表。專用科場規範。謂人曰崔勢遠讀樊川。如以蒿草裹泥。盧子伴讀東坡。文辭倔强。如以鈍鉅斷木。此豈可用。不如陽村陶隱之軟美易呑也。嘗與李放翁論文。淡叟曰。足下之文如陽村。放翁曰。先生之詩過陶隱。相讓未已。其後淡叟爲宣慰使。下嶺南。路逢故人上京者。謂之曰京友若問余之行止。汝必曰。釋伽如來遊南方也。徐達城作詩云。文章陶隱右。福德釋伽南。淡叟少時以儒生殿講。不脫靴幕而入。勢遠作詩云欲識老厖眞㥘處。白靴黑幕拜君王。淡叟每誇於人曰。吾兒理學如朱子。吾壻文章似昌黎。勢遠大書門扉曰。厖叟莫誇兒與壻。一門非是盡英明。一日宣城達城就淡叟第。時宣城兼判吏曹。淡叟爲軍職司勇。淡叟占句云。副司勇宅三台集。達城應聲對曰。兼判書隣九品存。世祖設援英試。取金守溫等二十餘人。盧宣城徐達城李韓山洪益城梁南原任西河皆中選。其餘皆一時名儒。其日未及赴者亦多。更命宣城西河益城爲試官。又取姜晉山成夏山李陽城芮金世蕃尹淡叟等數人。是日設場於思政殿庭。借紙於香室。遂付承旨朴子啓曰。吾之名紙。子可使人裁割而來。遂坐場中苦吟。顧謂曰。吾紙已裁乎。子啓曰。安心做作。紙當來矣。日暮篇成索紙。子啓曰。我躬不閱。遑恤我後。我已用之矣。淡叟大慍。遂取裹肉小紙而書呈之。是時天熱。淡叟脫靴而坐。又布亂帙書冊於前。宣城潛令人奪靴與書冊而去。淡叟呼丐不得。赤脚步出宮門。見者無不絶倒。及榜出。則淡叟居末。欲不遊街。宣城晉山夏山俱詣其家。恐動之曰。君若不出。我當啓之。加㡤於頭。披袍於身。扶擁而出。淡叟不得已應榜。每於同年禮會。呼淡叟爲末坐。侵困萬端矣。 金斯文宗蓮性戇直。博覽書史。少時居 淸溪山下。一日强盜數人。奄至其家。斯文開弓注矢。倚戶而立。盜疑畏不敢近。斯文發矢。盜雀躍曰。勇哉先輩之射矢。直不敢當也。遂入室盡偸財物而去。斯文僅以身免。世祖將祀山川。以犧牲瘦瘠。罷牲官之職。更命憲府。察視喂養。斯文爲監察。受任而往。日夜坐牛蚩傍。牛飽停食。斯文顧謂牛曰。牛乎牛乎。何不食草。旣食汝員。又欲食我乎。牛乎牛乎。黽勉食草。免我罪累。斯文以選與通鑑撰集廳。諸先生論食味。偶及河豚殺人之事。共坐廳中。晝飯案有新石首魚湯。同僚顧謂斯文曰。此魚甚美。試嘗之。斯文持湯鉢。置諸案下曰。先生誑我矣。欲殺人乎。滿堂大笑。 成廟升遐之日。城中士大夫巨族。多有婚媾者。或乘朝而往。或當午而往。或佯若不知而往。其後事覺皆抵罪。竹城君朴之蕃武人不解文字。前一日是醮子之夕。賓僚畢集。忽聞大內疾劇。乃曰。父不豫。臣子何忍私行婚禮。遂謝絶賓僚而返之。時有議者曰。儒林反不如武士。可嘆也已。 莫非山蔬而朮芽。名曰山菜。莫非水族而秀魚。謂之水魚。俗語然也。祁天使到國。食秀魚美之曰。此魚何名。通使答曰水魚也。天使笑曰鱗介萬族。而此魚何獨名水魚。魚在水中者皆名水乎。蓋秀與水。方音相似。而通使不能辨也。 昔有一守令。與邑戶長。相與占聯。守令皤腹。而戶長患眼。守令先唱曰。戶長之眼雖濕。能作渠而導之乎。衫袖之厄而蒼蠅之宴食。戶長但俯伏而已。守令曰上尊亦對之。戶長唱曰。大人之腹雖大。能載貢稅之米耶。馹騎之厄而猛虎之宴食。余與一庵陪伯氏。東遊關東。一庵每呼弟子。夜出遺矢。伯氏唱曰。一庵雖屢見馬。能給馬蒭乎。弟子之厄而厖狗之宴食。余又陪伯氏赴京。醫員金原謹嘗患獨脚。余唱曰。金判事之脚雖大。能作大葫蘆乎。房妓之厄而眞豆之宴食。眞豆蟲名。好黏狗脚者也。 凡菜菓。皆隨土宜而種之。以收其利。今東大門外往審坪。種蕪菁蘿葍白菜之類。靑坡蘆原兩驛。好種蹲鴟。南山之南李泰院村人。好種茶蓼作紅芽。京畿朔寧之人。好種蔥菜。忠淸右道之人。好種蒜。全羅之人。好種薑。如旌善之梨永春之棗密陽之粟順興海松子咸陽晉陽之柹。他處雖有。而不如此邑之多且美也。 學專上人號一庵。其爲人純謹無他。表裡如一。雖知作詩。而所占無警句。雖知內典。而不深究根本。雖不入山修道。而亦無浪跡。好與人棋。而常不勝。亦不爲慍。與人無貴賤。一與之語。卽成心交。至如申高靈李延城朴平陽成謹甫柳太初姜晉山徐達城洪益城李陽城成夏山昆弟任西河李平仲金福昌。皆其至交。而高靈尤愛護之。一日夏山設宴慰高靈。佳賓滿座。歌妓擁後。高靈愀然不樂曰。若有一庵。吾可罄歡。夏山伻人請邀。少焉一庵欣然入室。彎袖而舞。高靈與座客皆解頤。終日罄歡而散。及拜禪堂判事。入院之日。簪珥盈門。人皆榮之。雖無文名者。亦皆與之交。退老于文化具葉寺。使華往訪者不絶。至今年過九十而。身猶康强也。予嘗作句曰。棋無面象終難勝。詩失先聯不自由。高靈聞之曰。此正實錄也。謹甫嘗作一庵詩曰。上人學佛者。揭一名其庵。吾徒學孔子。還慚德二三。時人以爲善名狀也。一庵求詩於縉紳間。所藏詩卷。連床盈篋。而一時精抄之詩。皆萃於此矣。人之嗜好不同。性所然也。金宰樞淳好食實。一庵好食麵。徐后山好食大口湯。我伯氏好食蘆苔。此四物皆非至味。而篤好之。裴載之惡麵。見之則必置床下。人問其故。答曰。見人之食麵。滿口咄咄。則心神顫動矣。孫鷄城惡食西瓜。曰若一片入口。心先穢惡。崔提學惡大口魚。乃曰。若聞此魚之臭。頭痛如裂。申正郞惡蓴菜。曰。若去凝滑。可以下著。此四物皆至味。而惡之如此。人之嗜性本定。不可傳移也。 斯文丁子伋有子二人。奇斯文禶與其子壽崑。司仕承文院。禶曰子之嚴君有四昆弟是否。壽崑駭愕曰。獨一嚴君而已。何謂有四。禶曰子之嚴君居長。其次丁子舡其次丁子閣其次丁子藥也。丁子伋有子二人。曰壽崑壽崗。丁子舡無後。丁子閣有一子。曰丁紛。丁子藥有一子一女。子曰丁腫。女丁香。壽崑答曰。君有四男信否。人問其故。壽崑曰。君之長子特次異次凡次求。滿座大噱。 武官梁某。爲公州牧使。暑月多蠅。梁厭之。令州中吏胥。下至伶妓僕隷。每朝捕呈蠅一升。嚴設法而督之。上下爭務捕捉。皇皇不少休。至有抱布買蠅者。時人謂之蠅牧使。治邑如捕蠅。則令豈有不行者乎。 乙巳歲朴生隨我赴京。爲人純謹質直。容止麤俚。初到平壤。監司備萬隊紅粧。來迓舟中。生目眩不能仰視。潛於帽下窺之。奇態異常。有一妓坐船頭。生指之謂同伴成生曰。汝爲庶尹三寸。能成我事。則必厚報之。到館就房。未知某之來。凝神儼思。俄而捲帳而入。卽船頭坐者。生雀躍不已。私自語曰。若非成龍之力。何以至此。情意深篤。須臾不離側。雖於溷厠。亦必相隨。探囊中得小簡。乃妓私夫所送也。生不以爲嫌。反愈愛之。每晨脫妓短襖被之曰。亦是客中滋味。及行之日。欲與載歸。已備鞍馬。妓因隙逃走。至順安。惘然自失。又見湯酒女有色者。百計圖之。携入房中。因生之醉。其女逃去。生酒醒。有一女過房。以爲其人而執之。終夜講歡。到曉視之。則鼻大如盤。不類前見者。生遽呼曰。此非也。至肅寧館。邑中人物繁華。紅裳翠鬢羅擁酒樽者數十人。生以府使族弟。乘威得美者。昵愛尤甚。是日天陰。生撫女背曰。明日降雨。則一行當留。願天知我心。霈然注霖。仍歔欷太息。賓主朝飯于東軒。生持紙呈府使。願給女浣衣之暇。府使給數日。生曰四寸之間。何如是薄也。府使不得已給數朔。生借馬於人。載向安州。肅川人見之曰。朝天行次。一年三度往來。子弟軍官無數。吾輩閱人多矣。未見此人之淫急者。其奔馳正如狂犬耳。至安州留一日。愛之甚篤。臨發之際。還送女于肅川。女所率人失鞍子。女呼泣曰。所以隨汝而來者。欲蒙德蔭。今未蒙德蔭。反有此患。罵之不已。生茫然若無所措。至嘉平館。生見官婢有姿色者。謂館人曰。我是壬申年助戰軍官。嘗愛此婢。須喚率來。女信之至前熟視曰。壬申年從誰而來。我曾不識汝面也。拂袖而去。生得他人伴宿。至定州獺川橋。牧使來迓設酌。生見一妓。呼而進之曰。汝知李陸令公乎。曰否。汝知盧公弼令公乎。曰否。生遽前執手曰旣不識二公。則必來吾房。同伴誣之曰。有干於使。生遂放之。又聞妓碧洞仙有色。百計圖而得之。一行之人惡生淫慝。欲誑之。州有儒生明孝者。年少丰雋。塗粉靚粧。坐東軒群妓中。凝眸整襟。眞贗莫辨。生視之曰。天下無雙也。遽前執手。扶歸西室。明孝故拒。生或叱或誘。老妓執燭導前。謂生曰。此女未經人事。當徐徐馴之。毋遽侵辱也。生入室抱腰附耳語曰。汝若從我。汝之計活。我當遂之。成生來曰。牧使設酌。欲慰吾輩。君不可早休。不如携妓往參。生携手同歸。牧使叱明孝曰。汝以官物。不順於客。罪當大笞乎。吏取栲杖來。扶而下之。生出跪攢手哀乞曰。此兒無不順之事。傳之者誤也。若因我得罪。反咎我尤甚。牧使赦之。明孝奉觴而進歌曰。今日始相見。明日還相離。厥初若不逢。不知是阿誰。生撫背欣笑曰。何如是不遜而唱如是歌乎。我觀諸妓。無如汝之顏色。吾捨此何求。飮罷到房相持弄戲。區區狎昵。千態萬狀。碧洞仙在側。生謂成生曰。吾得美人。不顧此妓。汝速持去。生奴來窓外曰。此是妓乎。何迷而不悟。生叱之曰。汝何知吾事。俄而解衣同臥。始知男子。驚起無一言。翌日行至離亭。明孝男服隨生傳杯。生欲升馬。明孝攀衣止之曰。終夜團欒。欲成我計活。今何容易而去。大無情也。衆人皆笑。至義州。州素多人物。與箕城相甲乙。有一年少婢名末非者。生見而憐之。欲遂而未遂。謂裴官曰。君去此邑。能成我事。則當以死報之。裴官曰。此輩各有主。吾不能制之。不如告州官。生卽趨謁判官請之。判官呼末非敎之。末非猶未聽許。在上房前。生解玉葫蘆。繫末非衣。乃笑曰得我物。當從我言。是夜同宿。末非雖無愛生之志。欲獲後利。百態媚之。生心膽盡落。自以爲得佳偶。翌日末非謂生曰。官家繁擾。不如往吾家蔬糲共之。生携手同歸。早晨進粟飯葵羹。生甘食不遺。生離家已久。蓬頭垢面。末非煖水。親自洗面梳髮。生尤樂焉。來謂諸輩曰。其家殷富。其人慧黠。自吾平生未曾見也。至江上臨別。生抱末非。臥沙中涕泣。剖小石各書名而分之。生繫諸衣袖。如寶金玉未嘗失。留燕數月。言言每稱末非。不離於口。回至遼東。末非之娚末山。隨迎逢軍而去。末非送溫襖。生卽被於肩。謂諸輩曰。此吾兒所送物也。到義州。末非欲得唐物。務增媚態。生之憐愛。倍於多給▣▣遙末非家祀神。謂生曰。家無魚物。汝可乞來。生見判官得乾魚一束。親持而歸。跪受神賜酒快倒曰。我是大主翁。不可不飮也。至林畔館將別。生携末非手。來入上房索酒。各飮一盃。末非執生衣。生執末非手。相持痛哭。日已高。同伴力解之。生恐末非追來。踉蹡走出。誤得他人馬而倒騎。見者皆抵掌。馬上雙淚點滴如雨。至一溪曲朝飯。同伴勸飧專不顧。惟俯首向溪。同伴曰子無乃泣乎。生曰我非泣。乃翫水中魚耳。捲帽而視之。目盡腫。 慵齋叢話卷之七終
5월24일(병인) | |
| 빈궁에서 시원임 대신, 시원임 각신 및 간산도감 당상(看山都監堂上)을 소견하였다. ○ 이보다 앞서 시원임 대신, 도감의 당상과 낭관, 지사(地師)들이 고양(高陽) 율목동(栗木洞)의 산지(山地)를 간심(看審)하고 돌아왔다. 내가 묻기를, “경들의 소견이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은 아뢰기를, “지사와 신하들의 의견이 모두 완벽하게 갖추어져 매우 좋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은 아뢰기를, “비단 지사의 말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더라도 역시 매우 좋았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익(金熤)은 아뢰기를, “세속에서 이른바 ‘보통 사람의 안목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는데, 신들의 소견으로 논해 보더라도 십분 좋은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창릉(昌陵) 갑좌(甲坐)의 언덕과 비교해서 어떠한가?” 하니,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아뢰기를, “갑좌는 웅위(雄偉)하고, 이곳은 안온(安穩)하니, 모두 길지(吉地)입니다. 완전무결하여 한점 의심이 없는 것으로 논한다면, 이곳이 창릉 갑좌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내가 묻기를, “허전(許晪)의 소견은 어떠한가?” 하니, 병조 정랑 허전이 아뢰기를, “어제 아침에는 안개가 산허리를 가렸고 또 높은 곳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안대(案對)가 우뚝 높이 솟아나온 것이 아닐까 염려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니, 언덕 아래 담장 안이 정혈(正穴)이 뭉친 곳이기 때문에 드디어 담장을 헐고 내려다보니, 어제 아침에 앉아 보던 곳에 비하면 10보쯤 낮아 보였습니다. 사방의 형세가 평평하게 펼쳐졌고 양쪽 가장자리가 서로 어울리며, 후뇌(後腦)와 전첨(前簷)을 갖춘 증혈(證穴)이 분명하였으니, 과연 이는 큰 길지였습니다. 안대도 관악산(冠岳山)과 청계산( 靑溪山) 등이 모두 산봉우리를 드러낸 모습이 빼어나고 아름다워 외조(外朝)가 매우 기묘(奇妙)하였습니다. 그 앞에 가로로 걸쳐진 작은 산기슭이 내안(內案)이 되는데 단정하여 사랑스러우니, 이곳은 완전한 길지라고 하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지사들은 제각기 소견을 말하라.” 하니, 이명구(李命求)는 아뢰기를, “창릉 갑좌 언덕과는 비록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단정하고 기묘한 것은 이곳이 저곳보다 낫습니다.” 하고, 구성원(具聖元)은 아뢰기를, “안현(鞍峴)의 행룡(行龍)이 이리저리 구불구불 뻗어 나아가는 듯 물러나는 듯하고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하여, 혈전(穴田)이 고르고 적절하며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니, 경성에서 백 리 이내에는 여기에 비교할 만한 곳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정도홍(鄭道弘)은 아뢰기를, “비단 이번에 답사한 산 가운데 제일일 뿐만 아니라, 비록 천 사람이 본다고 해도 반드시 다른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께 다시 율목동을 살펴본 이후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매우 좋습니다. 형국(形局)이 완벽하고 혈세(穴勢)가 단정함은, 경성에서 백 리 이내에서는 다시 이와 같은 산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호조 판서 조시준(趙時俊)이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들으니, 율목동이 좋기는 좋은 듯합니다. 그러나 용산(龍山)의 큰길이 혈처(穴處)에 매우 가깝습니다. 비록 작은 언덕이 막히기는 했지만, 자연히 서로 보일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지극히 중대한 일인데, 신이 들은 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아룁니다.” 하자, 공조 판서 서호수(徐浩修)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이 산의 기슭을 왕래한 일이 있는데, 이제 그 지형을 상상해 보면, 이것은 아마 좌청룡 밖의 길인 듯합니다.” 하니, 조시준이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좌청룡을 끊고 나가는 길이니, 그 결점이 적지 않습니다. 다시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이처럼 중대한 일을 사람들의 말이라고 해서 버려 두고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되니, 시원임 대신이 함께 나가 간심(看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자, 조시준이 아뢰기를, “신도 대신들의 뒤를 따라가서 간심합니까?” 하고, 그대로 따랐다. 다음 날, 신하들이 간심하고 돌아왔다. 홍낙성은 아뢰기를, “호조 판서가 말한 곳은 혈처와 거리가 매우 멀고, 앉아서나 서서나 모두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좌청룡 우백호와도 관련이 없는 곳이니, 산의 이치로나 사람이 보기에 모두 구애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복원은 아뢰기를, “사람들에게 그곳을 왕래하게 하고, 신들이 혈처에 올라가 바라보았는데,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고, 김익은 아뢰기를, “이른바 구애된다는 곳은 보수(步數)로 말하자면 만여 보가 훨씬 넘고, 산의 기맥(氣脈)으로 말하자면 여섯 겹의 산으로 막혀 있으니, 애초부터 혈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지사들도 모두 구애되는 점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조시준은 아뢰기를, “애초에 사람들의 말을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아뢰었으나, 이제 와서 간심해 보니 직접 본 것이 들은 것과는 달랐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지사 차학모(車學模)와 박대량(朴大良)이 모두 율동(栗洞)을 완벽한 길지라고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율동에 대해서 사람들이 모두 좋은 곳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부족한 점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다시 다른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약 조금이나마 성상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다면, 결단코 가볍게 논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내가 마음에 맞지 않는 점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사체(事體)를 중시하는 도리에 있어 말망(末望)과 부망(副望)을 미리 갖추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뿐이다.” 하니, 김익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촌(江村)에 있었기 때문에 왕래할 때 큰길을 따라 다녀서 그곳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의 범상한 안목으로 보아서는 구애될 것이 없는 듯합니다.” 하고, 박명원(朴明源)이 아뢰기를, “신이 묘소도감(墓所都監)의 직책을 맡아 외람되이 묘소 자리를 간심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율동에 대해서 이처럼 자세히 살피지 못한 죄를 지었습니다. 성상의 뜻에 이곳으로 결정하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곧바로 버려 두고 다른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경은 이곳에 대해서 항상 혐의를 두고 말하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이곳을 쓰지 않게 하고자 하지만, 나는 이곳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예비할 곳을 찾는 것이다. 그 구애된다는 말에 대해서는 이미 오해가 풀린 지 오래되었다.” 하였다. 규장각 제학 김종수(金鍾秀)가 앞으로 나와 목이 메어 울면서 아뢰기를, “율목동을 취하느냐 버리느냐 하는 것은 성상의 결단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신하들이 결정해서 아뢸 수 없는 것입니다. 율목동을 쓰거나 쓰지 않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국사(國事)는 한심스럽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시골에 있을 때는 묘소가 이미 정해졌다는 말만 듣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와서 들으니, 다른 논의가 있어서 낭패스럽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돈녕부사 홍낙성에게 물으니, ‘호조 판서가 연석에서 아뢴 것 때문에 다시 나가 간심하였는데, 호조 판서가 말한 곳은 좌청룡에서 여섯 번째 산 밖으로 지세(地勢)나 산형(山形)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또한 화소(火巢)에도 들어 있지 않았으며, 호조 판서도 「본 것이 들은 것과 다르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국가의 모든 일은 체통(體統)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좌청룡 우백호와 혈처 가운데, 지리(地理)로 보아 문제가 있다는 의논이 지사(地師)의 입에서 나왔다면 해당 당상은 이 말을 듣고는 지사들에게 두루 묻고 대신들에게 널리 의논한 뒤에야, 비로소 입을 모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것은 얼마나 흉악하고 참혹한 말입니까. 그런데도 단 한 사람의 지사도 말하지 않은 것을 일개 연신(筵臣)이 눈으로 직접 보지도 않고 의논도 하지 않고서, 천만 관계도 없는 일을 제멋대로 바로 아뢰었으니, 어찌 이런 국가의 체통이 있겠습니까. 신은 본래 마음속에 슬픔과 노여움이 쌓여 있었는데, 이제 와서 차마 장황하게 추론(追論)하여 제기하지 못하겠으나, 어찌 감히 속에 있는 마음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대저 세자가 태어난 초기부터 나라 사람들의 말이 이미 분하고 답답함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중간에 만고(萬古)에 없었던 역적의 흉악한 말이 나온 뒤에는, 무릇 마음에 떳떳한 본성을 가진 자는 억장이 무너지고 뼛속이 아프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신은 명을 받들고 입진(入診)을 하게 되었으나, 이미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물러난 뒤에도 주위 사람들에게 약제를 올렸던 절도(節度)에 대해 자세히 물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약제를 의논함에 있어서 많은 잘못과 미진(未盡)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 시끄럽게 들끓었습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크고 작은 상이 났을 때 또한 어찌 의관들에게 허물을 돌리는 말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이번에 비교될 만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아녀자나 어린아이나 천인들까지도 손가락질하고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약제를 의논함에 있어서 참으로 미진한 점과 많은 잘못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통함과 노여움이 마음속에 울적하게 맺혀 있던 차에 갑자기 영돈녕부사가 전하는 말을 듣고 보니, 금방 한심스러웠습니다. 이것은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격발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록 국가의 체통으로 말하더라도 나라가 없다면 그만이지만, 나라가 있다면 일개 연신이 어찌 감히 이런 흉악하고 참혹한 말을 제멋대로 진달(陳達)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지나치다. 슬퍼서 경황이 없던 끝에 크고 작은 인정은 너나없이 신중히 살피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이런 말을 들었으면 인정으로 보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제각기 소견을 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또한 임금에게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에도 가까운 것이다. 어찌 깊이 책망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는 이러니저러니 말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김종수가 아뢴 말은 산지(山地)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체통을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비록 그의 말이 지나친 것 같지만, 역시 나라를 걱정하는 뜻입니다. 산의 이치에 대해서는, 신이 일전에 간심했을 때 지사들의 말을 들어 보고 신의 의견을 참고해 보건대, 실로 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 정존겸이 아뢰기를, “고부 재자관(告訃齎咨官)을 이제 보내야 하는데 공조의 낭관을 차견할 때와는 사체가 다르니, 고부 서장관(告訃書狀官)의 예에 의거하여 중국에 갈 노자를 지급하고, 기백(箕伯)으로 하여금 노자를 도와 보내게 하여야 할 듯합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 홍낙성이 아뢰기를, “묘소도감 낭청인 예조 정랑 이경명(李景溟)을 감하(減下)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아직 차임되지 않은 혼궁도감 낭청(魂宮都監郞廳)의 대임에 익찬(翊贊) 이만수(李晚秀)를 차하(差下)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예장도감(禮葬都監)이 아뢰기를, “다가올 발인(發靷) 때의 윤여(輪轝)를 미리 배설(排設)해야 하니, 도로와 출입문의 장단 광협(長短廣狹)을 반드시 자세히 살펴 측량한 뒤에야 윤여를 들여올 곳의 형편과 견여(肩轝)가 출입할 때의 편리 여부를 따져서 마련하여 만들 수가 있습니다. 도감의 당상과 낭청이 목수들을 거느리고 나아가서 간심(看審)하게 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간심한 뒤에 본 도감의 당상과 낭관이 등대(登對)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윤3월1일(병진) | |
| 생원(生員) 정동우(鄭東羽) 등 190인이 상소하여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에게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한 데 대해,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고 비답하였다. ○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두 신하가 세운 절의(節義)의 전말에 대해 진달하기를 청합니다. 남을진은 바로 개국 원훈(開國元勳) 남재(南在)의 숙부(叔父)로, 일찍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익혔으며, 벼슬이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使)에 이르렀습니다. 왕씨(王氏)의 정치가 어지럽게 되자 가재(家財)를 모두 털어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종족(宗族)을 모아 놓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 힘이 종사(宗社)를 부지하지 못하고 살아남아 차마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될 수 없으니, 오늘 이별을 고할까 한다.’ 하고서, 다음 날 벼슬을 버리고 양주(楊州)의 고사천현(故沙川縣)으로 돌아가 은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고려 왕조가 망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통곡하고서 감악산(紺嶽山) 석굴(石窟)로 들어가서 눈으로 하늘의 햇빛을 보지 않았습니다. 태조(太祖)께서 어찰(御札)로 조정에 나오도록 권면하였는데, 남을진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한 몸으로 두 성(姓)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내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이 굴 밖을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태조가 대단히 칭찬하시고 그가 살고 있는 주위를 봉(封)하여 주고는 ‘사천백(沙川伯)’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굴 안에서 죽었는데, 사인(土人)들이 그 굴을 ‘남선굴(南仙窟)’이라고 이름 지었고, 지나는 자는 모두 그곳을 방문하여 경의를 표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조견은 바로 개국 원훈 평양백(平壤伯)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초명(初名)은 ‘윤(胤)’인데 정몽주(鄭夢周)와 서로 친하게 지냈으며, 평소 명예와 절개로써 스스로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준이 태조를 도와 추대할 뜻이 있음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 우리 집안은 국가의 교목세가(喬木世家)로 국가가 보존되면 당연히 보존되고 국가가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그 뜻을 알고 내보내어 재차 영남(嶺南)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미처 돌아오기 전에 고려 왕조가 망하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에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으로 들어가 그대로 이름을 ‘견(狷)’으로 고치고 자(字)를 ‘종견(從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국가가 멸망하였는데 죽지 않는 것은 개와 유사함이 있고 또 개에게 옛 주인을 그리워하는 의리가 있음을 취한 것입니다. 그 후에 다시 청계산( 淸溪山)으로 가서 매양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송경(松京)을 바라보고 통곡하였는데, 그럴 때면 문득 검은 구름이 송악(松嶽)에서 일어나 청계산까지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충성에 감응한 것이라고 말하고 그 봉우리를 ‘망경대(望京臺)’라고 하였습니다. 태조께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제수하고 조서(詔書)로 그를 부르자 조견이 대답하기를, ‘송산(松山)에서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성인(聖人)의 백성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태조께서 탄식하면서 이르시기를, ‘조견은 뜻이 금석(金石)과 같아 빼앗을 수가 없다.’ 하시고, 청계산 일면(一面)을 봉해 주고 석실(石室)을 쌓아 정절(貞節)을 표시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조견은 ‘지금의 임금이 쌓도록 명한 것이다.’고 하고서 즉시 양주로 옮겨 머물면서 스스로 호(號)를 ‘송산(松山)’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소나무는 시들지 않고 산은 옮겨지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고 또 송악을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지금의 송산리(松山里)가 그곳입니다. 아, 저 두 신하는 충절을 지켜 신하가 되지 않는 뜻을 죽음에 이르도록 변치 않았습니다. 그 일이 혁혁하여 마치 어제 일과 같으며,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백대(百代)를 흥기시키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또 선대왕조(先大王朝) 때 어사(御史) 이정응(李廷膺)이 사실에 의거해 진계(陳啓)하여 시호(諡號)를 내려 주고 사액해 주시는 은전을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일을 해조에 내려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마침 조정에 일이 있었던 관계로 거행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두 신하의 우뚝한 절의를 굽어살피시어 속히 편액을 내려 주도록 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사적이 탁월하다고 하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6월1일(계유) | |
| 빈궁(殯宮)에 임(臨)하여 조상식(朝上食) 및 주다례(晝茶禮)를 행하고, 이어서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와 혼궁도감 당상(魂宮都監堂上)과 묘소도감 당상(墓所都監堂上),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소견(召見)하였다. ○ 도제조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정자각(丁字閣)에는 으레 상량문(上樑文)이 있는데, 무신년(1728, 영조4) 이후의 《등록(謄錄)》에는 모두 쓴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그만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명정(銘旌)을 고쳐 쓸 때의 상축(上軸)과 하축(下軸)은 무신년과 임신년(1752, 영조28)에는 모두 오매목(烏梅木)을 썼는데,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의 도설(圖說)에는 하축에 옥을 쓴다고 되어 있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오매목을 쓰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국조상례보편》의 명정식(銘旌式)에, 소상(小喪)에는 예자(隸字)로 쓴다고 되어 있는데, 이번 초상(初喪)의 명정에 전자(篆字)로 썼으니 명정을 고쳐 쓸 때에는 예자로 합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여사 대장(轝士大將)은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예겸(例兼)한 뒤에라야 거행할 수 있는데, 요즈음 마침 빈자리가 없어서 총융사(摠戎使) 이방일(李邦一)이 포도대장을 겸대하고 있으니 지금 우선 체차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만장 제술인(挽章製述人)의 수가 많으니, 서사관(書寫官) 10인으로는 부족할 염려가 있습니다. 10인을 더 뽑으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예장도감(禮葬都監) 각방(各房)의 공역이 머지않아 끝날 것인데 여러 가지 채색을 할 때 장맛비라도 닥친다면 필시 변하고 상할 우려가 있으니, 우선 정지하여 그만두고 그때 가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묘소도감 당상 구선복(具善復)이 아뢰기를, “화소(火巢)와 주맥(主脈)이 조금 가까워서, 걸음의 수로는 넓은 듯하지만 국내(局內)는 그리 넓지 않습니다. 내화소와 외화소로 정하였는데 외화소는 나무를 기르느라 새로 금지한 데에 불과할 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화소가 비록 더러 굽은 곳이 있지만 편의에 따라서 경계를 정한다면, 약간 정밀하지 않은 것은 절로 내화소 바깥과 외화소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도제조와 판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홍낙성은 아뢰기를, “조금 전에 훈련대장 및 판윤과 함께 그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내화소와 외화소를 분정(分定)한 뒤에 거리끼는 단서가 없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판윤 김상집(金尙集)도 그렇다고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노량 교장(露梁敎場)은 바로 지척의 거리에 있으니, 이제부터 동작진 대열 교장(銅雀津大閱敎場)에 옮겨 조련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국내의 가주(家主)와 석자(石子) 및 남은 재목에 대해 값을 치러 주고 가져다 쓰라고 해조(該曹)에 분부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하교하기를, “묘소에 있는 정자각(丁字閣)의 상탁(床卓)ㆍ향로(香爐)ㆍ향합(香盒)ㆍ축상(祝床)ㆍ축판(祝版)을 실어 가지 말라고 혼궁도감에 분부하고, 향좌아(香佐兒)ㆍ장족아(長足兒)ㆍ주렴(珠簾)은 모두 쓸 곳이 없으니 새로 만들지도 말고 실어 가지도 말라고 일체 예장도감에 분부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협련군(挾輦軍)은 노정(路程)이 이미 가까우니 비록 인원수를 늘려 마련하더라도 폐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발인(發靷)할 때의 청도(淸道)는 100명으로 마련하고, 중간에 세우는 포수(砲手)는 제외하고, 다만 살수(殺手)의 인원수에 준하여 배립(排立)하고, 창간(槍竿)에 일제히 등을 매달게 하고자 하니, 해영(該營)에 분부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소여(小轝)는 궐내(闕內)에서만 사용하니, 정자각에는 그대로 대여(大轝)로 진발(進發)하고 윤여(輪轝)로 이봉(移奉)하는 것은 근례(近例)에 따라 하라고 도감에 분부하라. 소여의 군인은 즉시 풀어 주라. 불에 태울 물건은 묘소로 수송하여 불에 태우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묘소 수호군(墓所守護軍)은 병조에서 반드시 30명으로 양보(兩保)를 갖추어 정해서 보냈으니, 이번에도 고례(古例)에 따라 정하여 보내라는 뜻으로 해조에 분부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여, 윤허하였다. ○ 병조가 아뢰기를, “묘소 수호군 30명을 전례에 따라 가까운 고을의 기병(騎兵)으로 정하여 보내고, 그 대임(代任)을 곧 해읍(該邑)으로 하여금 채워 넣으라는 뜻으로 아울러 경기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묘소도감이 아뢰기를, “묘소 홍살문(紅箭門)의 재목 및 돌을 나르는 기계목(機械木)은 서울에서 사들일 방도가 없습니다. 도성에서 아주 가까운 외남산(外南山)의 마른 소나무 중에 5년생에 한하여 베는 것은 예전에 정식(定式)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성에서 가까운 나무를 오가면서 가져다가 쓰고, 돌을 나르는 기계목은 임신년(1752, 영조28)의 전례에 따르며, 어영청의 자내(字內)와 혜화문(惠化門) 밖의 도성에서 가까이 있는 마른 소나무를 일체 가져다 쓰되, 양도(兩道)의 참군(參軍)과 양영(兩營)의 장교로 하여금 함께 베어 오게 하고, 해당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베는 것마다 낙인(烙印)을 찍게 해서, 벌목을 빙자하여 몰래 베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예조가 아뢰기를, “무신년의 《등록》에는 을유년(1765, 영조41)의 전례를 따라 금정(金井)을 열고 묘혈을 파는 날에 관상감 제조와 본조 당상과 좌승지가 함께 나갔으니, 이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어찌 좌승지가 할 필요 있겠는가. 정원에서 미품(微稟)하고 나가서 흙을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의 《등록》에는 발인할 때에 팔도의 도사(都事)가 올라와서 회장(會葬)하였습니다. 이대로 각도에 통지하소서.” 하여, 하교하기를,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신년의 《등록》에는 무릇 망궐례(望闕禮)의 습의(習儀)는 보통 때와 차이가 있어 잠시 정지하였습니다. 이대로 거행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발인할 때 지나는 각문(各門)과 명산대천(名山大川), 도로, 교량 등의 제사를 행하는 곳에 규례대로 병조와 한성부로 하여금 간심(看審)하고 서계(書啓)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 병조가, 발인할 때 묘소의 진(陣) 치는 곳, 지나는 각문과 명산대천, 도로, 교량의 제사를 설행하는 곳을 마련하는 절목(節目)을 도로 사지(道路事知) 김도인(金道仁)ㆍ김언식(金彦植) 등이 처음에 간심한 대로 마련하였다. 연희문(延喜門)ㆍ숭지문(崇智門)ㆍ집례문(集禮門)ㆍ경화문(景化門)의 소석교(小石橋) 북쪽 곧은길의 보수한 곳, 선인문(宣仁門)의 신석교(新石橋) 좌우에 다리를 보수한 곳, 이현(梨峴)에 있는 판전 병문(板前屛門)의 석교 좌우에 다리를 보수한 곳, 종묘(宗廟)의 동구 앞길, 창덕궁(昌德宮)의 동구 앞길, 통운교(通雲橋)의 종루(鐘樓) 앞길, 대광통 석교(大廣通石橋)와 소광통 석교의 구리 고개(九里古介)에 있는 병문(屛門) 앞길, 송현(松峴)에 있는 수각 석교(水閣石橋) 좌우에 다리를 보수한 곳, 숭례문(崇禮門) 밖 서쪽 길이 제사를 설행할 곳이다. 궐문(闕門)에서 5리 지점인 도저동(桃楮洞) 앞 청파천(靑波川)의 다리를 만든 곳은 제사를 설행해야 할 듯한 곳이다. 석우(石隅) 율동산현(栗東山峴)과 숭례문에서 5리를 나와 바라다보이는 청계산( 靑溪山)ㆍ관악산(冠嶽山)ㆍ노량(露梁)ㆍ용산강(龍山江)은 제사를 설행해야 할 듯한 곳이다. 그 사이에 있는 은구(隱溝) 1곳과 묘의 동구, 그 사이에 있는 길이 25척(尺) 너비 1척 되는 봉상시(奉常寺)의 위전(位田)과 길이 60척 너비 5척 되는 장원서(掌苑署)의 위전을 수치(修治)한 곳, 그 사이에 있는 은구 2곳과 묘소는 율동산현으로부터 3리, 궐문으로부터 13리 되는 지점에 있다. 1. 대여(大轝)의 횡강(橫杠)이 13척 5촌이므로 도로와 교량은 17척으로 수치한다. 1. 지나는 명산대천에 제사를 설행하는 곳은 예조로 하여금 상세히 살펴서 거행하게 한다. 1. 도로와 교량을 수치하는 것은 한성부 차지(漢城府次知)와 공조 차지, 선공감 차지(繕工監次知)가 거행한다. 1. 도로 사지가 지휘하는 데에 따라 수치한다. 1. 도로에는 5리마다 장승을 세워서 노정을 표시하고, 대여군을 교체하는 곳에는 다시 도로 사지를 보내 간심하게 한 뒤에 그 정한 바에 따라 장승을 세우라고 한성부에 공문을 보내어 통지하게 한다. 1. 도로와 교량을 수치한 뒤에 본조 낭청 및 색리(色吏)와 서리(書吏)를 내보내 적간(摘奸)하게 하여 만일 부지런히 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입계(入啓)하여 죄를 다스리게 한다.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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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0일(임진) | |
| 묘소도감이 개금정(開金井)의 택일 별단(擇日別單)을 올렸다. ○ 별단은 다음과 같다. 개금정은 7월 2일 오시(午時)에 하고, 정자각(丁字閣)의 정초(定礎)는 7월 2일 유시(酉時)에 하되 먼저 북쪽 초석(礎石)부터 놓으며, 입주(立柱)와 상량(上樑)은 7월 7일 사시(巳時)에 하되 먼저 북쪽 기둥부터 세운다. ○ 병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발인 때 대여(大轝)의 담배군(擔陪軍)이 체운(替運)할 곳을 사지(事知)인 우림위(羽林衛) 김도인(金道仁)과 김언식(金彦植) 등을 보내어 살펴서 마련하였습니다. 초운(初運)은 선인문(宣仁門) 밖에서 숭례문(崇禮門)까지, 재운(再運)은 숭례문 밖에서 묘소 밖까지로 하겠습니다. 재실(梓室)의 담배군이 체운할 곳은, 초운은 장생전(長生殿)에서 숭례문 밖까지, 재운은 숭례문 밖에서 묘소까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발인 때 초우(初虞)에서 졸곡제(卒哭祭)까지 및 묘소 영장궁(靈帳宮)에서 성빈(成殯)한 후의 조상식(朝上食)과 석상식(夕上食), 주다례전(晝茶禮奠), 반우(返虞)한 후의 혼궁과 묘소의 각 제전(祭奠)을 전례를 참고하여 마련하였습니다. 각 해당 관사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마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계찬실(啓欑室)은 윤7월 18일 사시(巳時)에 하고, 고유(告由)는 조전(朝奠)에 겸하여 행한다. - 봉상시(奉常寺)가 맡는다.1. 계찬실 뒤 별전(別奠)은 같은 날 사시에 행한다. - 내섬시(內贍寺)가 맡는다.1. 조전(祖奠)은 같은 날 해가 저물 때에 행한다. - 내자시(內資寺)가 맡는다.1. 조전(朝奠)은 같은 달 19일 축시(丑時)에 조상식(朝上食)에 겸하여 행한다. - 내섬시가 맡는다.1. 견전제(遣奠祭)는 같은 날 축시에 먼저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빈궁(殯宮)의 해사제(解謝祭)는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선인문제(宣仁門祭)는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교량제(橋梁祭)는 대광통석교(大廣通石橋)에서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숭례문제(崇禮門祭)는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노제(路祭)는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예빈시(禮賓寺)가 맡는다.1. 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는 청파천(靑坡川)과 용산강(龍山江) - 봉상시가 맡는다. -, 청계산( 靑溪山)과 관악산(冠岳山) - 경기(京畿)가 맡는다. - 에 행한다. 1. 영장궁의 성빈전(成殯奠)은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내자시가 맡는다.1. 주다례는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내섬시가 맡는다.1. 석상식(夕上食)과 석전(夕奠)을 행한다. - 묘소이다. 수라간(水刺間) 및 내섬시가 맡는다.1. 천전(遷奠)은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입주전(立主奠)은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내자시가 맡는다.1. 사후토제(謝后土祭)는 같은 날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안묘전(安墓奠)은 봉묘(封墓)의 일이 끝난 뒤 때가 되거든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초우제(初虞祭)는 같은 날 때에 맞추어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조상식은 같은 달 20일에 행한다. - 묘소이다. 수라간이 맡는다.1. 재우제(再虞祭)는 같은 날 혼궁에서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같은 날 주다례를 행한다. - 혼궁이다. 수라간이 맡는다.1. 같은 날 석상식을 행한다. - 혼궁이다. 수라간이 맡는다.1. 삼우제(三虞祭)는 같은 달 22일에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사우제(四虞祭)는 같은 달 24일에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오우제(五虞祭)는 같은 달 25일에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졸곡제는 같은 달 27일에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1. 반우 뒤 묘소에 석상식을 시작으로 삼년(三年) 안에 조상식과 석상식, 주다례를 행한다. - 묘소이다. 수라간이 맡는다.1. 반우 뒤 혼궁에 석상식을 시작으로 삼년 안에 조상식과 석상식, 주다례를 행한다. - 혼궁이다. 수라간이 맡는다.1. 혼궁과 묘소의 삭망(朔望), 속절(俗節), 사중월(四仲月)의 모든 별제(別祭)를 행한다. - 봉상시가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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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19일 (경오) | | 타위 군사 5만을 채우게 하고, 백관에게 품종을 내게 하여 꺼린 자는 치죄하게 하다 | |
전교하기를, “ 청계산( 淸溪山)에서 사냥할 때에는 징집해 온 군사 3만 명 외에 2만 명을 더 뽑아서 5만 명을 채우라. 또 가선 대부(嘉善大夫) 이상은 품종(品從) 10인을, 통정(通政) 이하는 5인을 내게 하라. 대저 사천(私賤)은 비록 고·증조(高曾祖) 때부터 전해 왔다지마는 온 나라 백성은 왕의 신하 아닌 자가 없은즉, 이것도 또한 공가(公家)의 물건이다. 만약 싫어한다거나 꺼리는 자가 있으면 사헌부(司憲府)는 규찰하여 치죄(治罪)하라.” 하였다. 【원전】 14 집 2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군사-병법(兵法) / *재정-역(役) / *신분-천인(賤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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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19일 (갑오) | |
경기 관찰사 윤금손(尹金孫)이 아뢰기를, “ 청계산( 淸溪山)은 산기슭에 나무가 빽빽하여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나무를 베어 소통시키소서.”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원전】 14 집 97 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농업-임업(林業)
| | 10월14일 (신유) | | 경기 유생들이 고려조 조견을 숭양 서원에서 제사지낼수 있도록 청하다 | |
경기 유생 김상목(金相穆) 등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고려조의 안렴사(按廉使) 조견(趙狷)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조준(趙浚)의 아우로서 아이 때부터 경학(經學)에 열중하였습니다. 고려조의 정치가 문란할 때를 당하여 벼슬이 지신(知申)에 이르렀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심력을 같이하여 왕실을 도왔습니다. 자기의 형인 조준이 새 왕조를 추대하려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이 나라의 교목세가로서 나라가 보존되면 같이 보존되고 나라가 망하면 같이 망할 것입니다. 또 달가(達可)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고 하자, 조은 그 뜻을 알고 다시 영남의 안렴사로 내보냈던 것입니다. 그러자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견[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 淸溪山)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습니다.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초빙하는 서신을 보내니, 답하기를 ‘송악산의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지언정 성인의 백성이 되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태조가 조과 더불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청계산으로 가서 조으로 하여금 나오도록 권고하게 하였는데, 조견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조준이 이불을 어루만지면서 이르기를 ‘내가 만나보지 못한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형제간의 정의에 어찌 그리운 생각이 없었겠는가.’고 하니, 조견이 이불 속에서 대답하기를 ‘나라도 없어지고 집도 망하여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데 형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고 하였습니다. 조준이 나와서 고하기를 ‘신의 아우의 성품이 편협해서 신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나와 옛 친분이 있으니 빈주의 예로 서로 만나볼 수 없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조견은 비로소 의관을 정제하고 나와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았습니다. 태조는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조견은 그 뜻이 금석 같아서 빼앗을 수 없다.’ 하고 청계 한 구역의 땅을 봉해주었습니다. 조견은 양주(楊州) 땅에 옮겨 살면서 자기의 호를 자칭 송산(松山)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송악(松嶽)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조견은 이따금 송도(松都)에 가서 월대(月臺)의 폐허에서 통곡하니, 옛 도성의 유민(遺民)들이 저마다 따라서 슬퍼하였습니다. 조견은 일찍이 철석(鐵石) 두 글자로 자기 두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죽을 때 임박하여 경계하기를 ‘나의 묘비에는 고려의 안렴사라고 쓰라.’ 하였으나 여러 아들들이 유언을 감히 따를 수 없어 조선조에서 내린 관직이름을 비석에 썼는데, 얼마 안 되어 비석이 갑자기 절반으로 꺾여져 ‘조공지묘(趙公之墓)’라는 네 글자만 남아 지금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 충절과 도학은 실로 정몽주와 서로 대등합니다. 이 두 신하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신명을 감동시키고 금석을 뚫을 만합니다. 비록 따로 서원을 짓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응당 한 사당에서 제사지내주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장순(張巡)·허원(許遠)처럼 해야 할 것인데,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야가 다같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명하여 조견을 숭양 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사람의 행적을 어찌 모르겠는가. 여기까지 미처 손을 쓰지 못한 형편이니 이 이외에도 반드시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닦으라.” 하였다. 【원전】 46 집 177 면 【분류】 *정론(政論) / *사상(思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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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 3월1일 (병진) | | 경기 유생 정동우가 고려 말 충신 남을진·조견의 사우에 화액을 원하니 시행케 하다 | |
경기(京畿)의 유생(儒生) 정동우(鄭東羽) 등이 상소하기를, “고려 말엽의 충절신(忠節臣) 남을진(南乙珍)과 조견(趙狷)의 사원(祠院)이 아직도 선액(宣額)하는 명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남을진은 곧 개국 원훈(開國元勳)인 남재(南在)의 숙부(叔父)로,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익혔으며, 만년에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벼슬이 문하 부사(門下府事)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왕씨(王氏)의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데 이르자, 벼슬을 버리고 양주(楊州)의 고사천현(故沙川縣)으로 돌아가 은거(隱居)하였으며, 고려 왕조의 운명이 끝났음을 듣고는 머리를 풀고 통곡(痛哭)하다가 감악산(紺岳山)의 석굴(石窟)로 들어 갔었습니다. 조선(朝鮮) 태조가 그를 불러들였지만 남을진은 거절하기를 더욱 굳게 하였으므로, 태조가 대단한 칭찬을 더하고 그가 살고 있는 주위를 봉(封)하여 주고는 사천 백(沙川伯)이라고 불렀습니다. 조견은 바로 개국 원훈인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정몽주(鄭夢周)와는 친하게 지냈으며 명예와 절개를 스스로 가다듬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준이 〈태조를〉 익대(翊戴)할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에 이르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국가의 교목 세가(喬木世家)로 국가가 보존되면 당연히 보존되고 국가가 멸망하면 당연히 멸망해야 합니다. 달가(達可)는 국가의 주석(柱石)같은 존재이니 만약 구하는 것이 달가와 다르면, 이는 국가를 해롭게 하는 것이며 국가가 멸망하도록 재촉하는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조준이 그의 뜻을 알고 영남(嶺南)으로 떠나게 하였는데, 미쳐 돌아오지 못해서 고려 왕조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으므로,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옮겨서 청계산( 淸溪山)에 머물었는데, 태조가 호조 전서(戶曹典書)로 발탁하여 임명하자 조견이 말하기를, ‘송산(松山)에서 고사리 캐기를 원할지언정 성세(聖世)의 백성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느날 태조가 조준과 10수 기(騎)를 따르도록 하여 청계산에 거둥하자, 조견이 굳게 누워 이불로 낯을 감추거늘, 태조가 이르기를, ‘손님과 주인 자격으로 서로 볼 수 없겠는가?’라고 하자. 그제야 나와서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지 않았는데, 청계산 일면(一面)을 봉(封)해 주고 석실(石室)을 쌓아 정절(貞節)을 표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조견은 지금의 임금이 〈석실을〉 쌓도록 명한 것이니, 구국(舊國)의 신하가 거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즉시 양주(楊州)로 옮겨 머물면서 스스로 호(號)를 송산(松山)이라고 하였습니다. 저 두 신하가 충절을 지켜 신하가 되지 않은 뜻은 은(殷)나라의 백이(伯夷)·숙제(叔齊)나 제(齊)나라의 왕촉(王躅)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많은 선비들이 재물을 모아 사천(沙川)의 옛 터에다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냈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빨리 화액(華額)을 내려 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예조에서 복주(覆奏)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원전】 45 집 437 면 【분류】 *역사(歷史) / *사상(思想) / *인물(人物)
| | 경기(京畿) | | |
동쪽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13리이고, 남쪽으로 수원부(水原府)까지 34리이며, 서쪽으로 금천현(衿川縣) 경계까지 20리이고, 안산군(安山郡) 경계까지 28리이며, 북쪽으로 노량(露梁)까지 20리이고, 서울까지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율목군(栗木郡)인데 하나는 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율진군(栗津郡)으로 고쳤고, 고려 초년에 과주(果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광주(廣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삼았으며, 14년에 금천(衿川)과 병합하여 금과(衿果)라고 일컬었다가 두어 달 뒤에 파하였다. 세조 때에 금천으로 와서 현에 합하였다가 얼마
연려실기술 제1권 | | |
| | 태조조 고사본말고사본말(故事本末)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太祖朝故事本末) | | |
연려실기술 제1권 | | |
| | 태조조 고사본말고사본말(故事本末)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太祖朝故事本末) | | |
정몽주(鄭夢周)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에 난초 화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공을 낳았다. 정축생 따라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흑룡이 동산의 배나무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다 놀라 깨어 나와 보니 바로 공이었다.그래서 이름을 또 몽룡(夢龍)이라 하였다. 관례(冠禮)하면서 지금의 이름 몽주로 고쳤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연달아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과에 뽑혀 벼슬이 시중 좌명공신 삼중대광 익양군 충의백(侍中佐命功臣三重大匡益陽君忠義伯)에 이르렀다. 이씨가 천명을 받자, 공은 절의에 죽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태종이 권근(權近)의 청에 따라 그의 절의를 포상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 처음에 공은 태조(太祖)의 인정을 가장 두텁게 받아 여러차례 태조의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갑진년(1364)에 태조가 병마사로서 삼선(三善)을 격퇴할 때에 공은 태조의 종사관이 되었고, 무오년(1378)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를 격퇴하였으며, 계해년(1383)에는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태조를 따라 정벌하는 데 나아갔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태조가 자기와 함께 승진케 하여 상(相)이 되었다. 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제공(諸公)과 함께 자신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고 하였다.이때 태조의 공업(功業)은 날로 성하여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려 그 형세가 태조가 끝까지 남의 신하 노릇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공은 그 세력을 꺾고자 하여 은밀히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였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혹 근거없는 모함을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음모가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공을 초청하였다.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城隍堂)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혹은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로 되어 있다.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하고 읊으니, 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읊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였다. 태종이 공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는 공이 태조에게 문병을 핑계로 기색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에 자주 가던 술친구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주인은 밖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며, 뜰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은 드디어 뜰 안으로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오늘 풍색(風色)이 매우 사납구나, 매우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나왔다. 그 집 사람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얼마 있다가 정 시중(鄭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태조의 집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활을 메고 그 앞을 가로질러 가는 무부(武夫)가 있었다.공은 수행하는 녹사(錄事 의정부의 관속)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 하였다. 녹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고, 재삼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가다가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화를 입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함께 죽었다. 《해동악부(海東樂府)》. 당시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 수행 녹사의 성명을 기억한 사람이 없어서 드디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한강(寒崗) 정구(鄭逑)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은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으니, 생각건대 그가 신우를 왕씨의 출생으로 알았더라면 곧 다른 날 신우를 추방하는 데 자신도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신하로서 섬기다가 일조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만일 왕씨의 출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呂政)이 제위에 오름에 영(嬴)씨는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녹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추방되고 살해될 때는 공신까지 되고 다시 후일 다른 임금을 위하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퇴계가 답하기를, “정자의 말씀에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 없기를 구하여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포은의 큰 절개는 천지에 경위(經緯)가 되고 우주에 동량(棟樑)이 된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남을 공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남의 미덕을 이루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기를 마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매양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 공의 사당(祠堂)은 옛적에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孫舜孝)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못하네. 오직 이익만을 좇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 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중종(中宗) 때, 조정에서 공의 문묘 종사(文廟從祀)가 허락되었다. 그런데 한 대신이 불가하다고 이의를 주장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신우가 왕씨냐 아니냐의 여부는 당시의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몽주는 본시 신우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하물며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는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어짊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唐) 나라 황실을 회복하였는데, 몽주가 적공(狄公)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려 5백년의 종묘 사직이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종묘사직이 망해 버렸으니, 어찌 이 사람을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송도(松都)에 공의 옛 집터가 있었다. 신미년과 임신년 사이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숭양(崧陽)’이라 하여 공을 주사하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배사하였다. 서원이 완성되자 유사가 공의 신주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아뢰었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몽주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을 받겠는가. 비록 영의정의 추증이 있었다고는 하나 다만 ‘포은 선생’이라고만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후정쇄어(侯鯖瑣語)》○ 선조 계묘년(1603)에 공에게 제사를 내리는 제문에 고려 문하시중 충의백 정공지묘(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之廟)라고 쓰려고 하였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추증한 직함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또한 정공(鄭公)이라 칭함은 국가사제(國家賜祭)의 의식이 아닐 것 같으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옛적에 제왕이 선대 학자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신하의 예로써 대접하지 아니하고, 또 비록 한때 국사를 맡았던 신하라도 진실로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곧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신들은 다만 전하께서 어진 이를 받드는 아름다운 뜻을 이룩해 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광해(光海) 경술년(1610)에 공자묘정(孔子廟廷)에 종사하였다. 《전고(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고려 말에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였다. 그런데 공은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고 슬픈 정과 예를 함께 다하니, 나라에서는 가상히 여겨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석유(碩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및 공을 선발해서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고,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강설(講說)이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하였다.그래서 청강생들이 자못 의심하였는데, 뒤에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학설을 얻어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합치되므로 제유(諸儒)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이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 《명신록(名臣錄)》이색(李穡)이색은,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원 나라에 가서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하던 중국 과거의 하나)에 급제하여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고, 고려에서는 공민왕 계사년(1353)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시중 한산군(侍中韓山君)에 이르렀다.공양왕 기사년(1389)에는 장단(長湍)에 귀양가고 경오년(1390)에는 함창(咸昌)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고 임신년(1392)에는 금양(衿陽)에 귀양 갔다가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는데, 태조의 혁명 후에는 장흥(長興)의 벽사(碧沙)에 귀양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다.을해년(1395) 11월에는 들어와 태조를 뵙고 병자년(1396)에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 아래 연자탄(燕子灘)에서 죽으니, 《송와잡기(松窩雜記)》 태조가 한산군(韓山君)을 봉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 고려말에 공이 명 나라에 가니 명 태조가 불러 보았는데, 공의 얼굴이 못났음을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 노인 얼굴은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신우가 폐위되어 강화에 있을 때, 공이 미복(微服)으로 몰래 가서 뵈었다. 《송와잡기》○ 길재(吉再)가 공에게 거취에 대한 의리를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하다” 하였다. 길재가 이로 인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공에게 돌아갈 것을 고하니, 공이 그때 장단의 별장에 있다가 그에게 시를 주어 말하기를,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공양왕 때 공이 임금의 소명을 받고 귀양 간 곳에서 서울로 돌아와 태조를 잠저에 찾아가 뵈니, 태조가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올려 공에게 마시기를 청하자, 공이 사양하지 않고 흠뻑 마시며 즐겼는데, 사람들은 공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비방하였다. 후에 이씨 조에 들어와서 태조가 불러 편전(便殿)에서 만나고 갈 적에는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공의 두 아들 종학(種學)과 종덕(種德)이 다 고려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혁명 후에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다 매를 맞아 죽었다. 그 뒤 공이 여주(驪州)의 자기 집에 물러가 있을 때, 하루는 문생(門生)이 와서 뵙거늘 공이 깊은 골짜기에 데리고 들어가니 문생이 그 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전연 인적없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 가슴이 시원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 두 아들이 죽은 것을 상심한 것일 것이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에 송헌(松軒)이 국정을 맡았는데 나는 유리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어찌 이럴 줄을 알았으랴 / 夢裡何曾此事知 더구나 이정(二鄭 정총(鄭摠)과 정도전(鄭道傳)이 국가대사에 참여하였다 하니 / 二鄭况聞參大議 우리 가족은 어느 때 다시 모일꼬 / 一家完聚更何時 하였다. 송헌은 태조의 당호(堂號)이다. 태조가 공과 더불어 가장 친하고 의가 두터워서 평일에 많이 추천하여 주었으므로 앞 시의 첫째 둘째 구절에 말한 것이다. 《해동악부(海東樂府)》정총과 정도전은 공의 문인이면서 도리어 공을 배척하는 데 힘을 다하여 종학과 종선(種善)이 모두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식소록(識小錄)》 ○ 공의 시에 말하기를, 연복사 종 소리는 아직 울리지 않는데 / 演福鍾聲尙未鳴 이불 안고 꿇어 앉아 이 추운 밤을 지내도다 / 擁衾危坐度寒更 세월은 흘러흘러 이 한몸 노쇠해 병들었고 / 一身衰病乾坤老 만상(萬象)이 삼라(森羅)한데 일월이 밝았도다 / 萬象森羅日月明 저구(杵臼)가 조씨(趙氏) 후사를 보전할 뜻을 어찌 옮기랴 / 杵臼肯移存趙志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 축하하는 정을 속절없이 품고 있더라 / 華封空抱祝堯情 유유한 고금의 무궁한 일이 / 悠悠古今無窮事 조심스런 마음을 끌어내어 불평하게 하는구나 / 惹起愁腸作不平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뜻을 말한 시이다. 《월정만필(月汀漫筆)》○ 고려말에 포은은 원찬(袁粲)과 같고, 목은은 양표(楊彪)와 같고, 이 이외에는 논할 것이 없다. 《서애집(西崖集)》○ 공의 시에 말하기를, 인정이 어찌 사물의 무정함과 같으랴 / 人情那似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 /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 / 偶向東籬羞滿面 꽃은 진짜 국화인데, 사람은 거짓 도연명이다 / 眞黃花對僞淵明 하였으니, 이옹의 심사가 이 시에 다 담겨 있으니 슬프다. 《서애집》○ 임신년(1392)으로부터 을해년(1395)까지 한산(韓山)ㆍ여주(驪州)ㆍ오대산(五臺山)에 출입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공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1396) 5월에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에 피서하러 갔다가 배에 오르자 갑자기 죽었다. 태조가 뒤에 공이 죽은 원인을 의심하여 당시의 안찰사를 죽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정도전이 우현보와 오랜 감정이 있어서 공과 우현보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는데, 태조가 듣지 않았다. 뒤에 공을 불러서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흡족하게 즐기고 과전(科田) 품계에 따라 전답을 주는 것을 과전이라 한다. 과 미두주육(米豆酒肉)을 주면서 말하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마땅히 다시 주육으로 기운을 보양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그때에 공이 불도를 닦아 주육을 금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또 재목과 기와를 주면서 거처할 집을 지으라 하고 얼마 있다가 한산군(韓山君)으로 삼았으며, 잇달아 명하여 의성(義城)ㆍ덕천(德泉) 등의 오고 도제조(五庫都提調)로 삼았다. 《용비어천가》 ○ 왕씨가 망한 뒤, 사람들이 다만 포은과 야은(冶隱)만 대절을 이룬 줄 알고 목은이 수절한 줄은 모르니, 애석하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을 불렀는데, 공이 태조를 만날 적에 길게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아니하거늘, 태조가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 대접하였다. 조금 있다가 시강관이 차례로 열지어 들어오거늘, 태조가 도로 그 자리에 오르니, 공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 하였다.태조가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노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 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망국의 대부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 하고, 드디어 나가 버렸다. 세상에 전해 오는 공의 사인(死因)이 애매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나, 포은에 부끄럽지 않다고들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태종조 때 명 나라의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돌아갈 적에, 공의 자손이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에 비명(碑銘)을 구했는데, 신묘년 태종 11년 에 맹헌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역에게 주어 보냈다. 그 글에, “공양왕이 즉위하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려서 탄핵하여 장단으로 귀양보냈다” 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태종이 이것을 보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진연이 어떻게 이색이 행한 일을 알아서 상세하게 이것을 서술했겠는가.옛날에 우리나라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중국과 틈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통역은 어째서 사사로이 맹헌과 내통했는가. 불러다가 문책하라.” 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이 공의 자손이 중국인과 사통한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태종이 좇지 않았다. 간원이 또 공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종선은 자기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였다. 간원에서 또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비명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렸다’고 썼으니,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까. 비명에 또 ‘경오년(1390) 5월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를 명 나라에 보냈다고 모함하여 공 등 30인을 청주에 가두고 장차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관사가 다 물에 가라앉고 문사관(問事官)이 나뭇가지에 올라가 간신히 화를 면하니,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썼으니, 윤이와 이초가 명 나라에 고자질한 것은 이미 명 나라로부터 분명히 전달된 말이 있는데 모함이라고 이를 수 있으며,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다 함은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이겠습니까. 수재는 이색이 과연 주공(周公) 같은 덕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또 비명에, ‘임신년 7월에 우리 상왕(태조)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을 모함하여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다’고 썼으니, 신들이 생각하건대, 태조가 본래 나라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라 고려의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거늘, 이색이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불칙한 화가 미칠 뻔 하였는데 어찌 이색에게 죄가 없는데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하륜은 심문하여 법에 의해서 죄를 다스리고, 권근은 관(棺)을 베고 집터는 못을 만들고 가산을 몰수하여 뒷사람들에게 징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이에 하륜이 무릇 네 번이나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비명의 소위 공을 꺼리는 자라는 것은 남은(南誾)과 정도전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만일 집권한 신하들이 음모한 일들이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 등 6, 7명을 매질하여 죽인 일을 아마도 태조가 알았을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숭인과 종학의 사건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태조의 강명(剛明)하심으로써 창업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곧 헌사(憲司)에 명하여 숭인과 종학을 죽인 실정을 캐내어 보고하라 하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좇아서, 흥종은 종학을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목매어 죽이고, 거정은 숭인의 허리를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말 위에 가로로 실은 뒤 이웃 고을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거정과 흥종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기를 명하고, 태종이 이르기를, “흥종과 거정이 태조의 명령을 좇지 않고 권신의 사주를 받고서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여 태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무거운 형벌로 논죄하라.” 하였다.순금사에서 그들에게 사람을 출입시킨 죄를 적용하려 하였는데, 태종이 다시 “모살인(謀殺人)한 죄를 적용하라.” 하였다. 정부 및 삼공신(三功臣) 조영무(趙英茂)ㆍ한상경(韓尙敬)ㆍ정탁(鄭擢) 등이 아뢰기를, “그들은 실상 남은과 정도전의 계책을 좇은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그들이 범한 일은 종묘와 사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숭인과 종학을 위하여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이다.도전과 거정과 흥종은 폐하여 서민을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되, 은은 공이 높으니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길재(吉再)길재는, 자는 재보(再父)이며, 호는 야은(冶隱)이고,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아버지 원진(元進) 벼슬이 지금주사(知錦州事)에 이르다. 이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었을 때, 공의 어머니 김씨(金氏) 본관은 토산(兔山)이며, 희적(希迪)의 딸이다. 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공을 외가에 맡겨 두고 갔다. 공은 그때 나이가 여덞 살이었는데,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으며 남계(南溪)에 놀면서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노래는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준다.[鱉兮鱉兮 汝亦失母乎 吾亦失母矣 吾知其烹汝食之 汝之失母猶我也 是以放汝]” 하고, 물에다 던져주고 울부짖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와서 끌어 안고 감동하여 울었다. 계해년(1383)에 사마(司馬)에 오르고, 병인년(1386)에 과거에 급제하여 폐주(廢主) 창왕 기사년(1389)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다가, 공양왕이 다시 들어선 경오년(1390)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의 효도를 칭찬하였다.꿈에 어떤 중이 글 한 구절을 읊조리기를, “예와 지금의 동료들이 몸이 새로 변하누나.[古今僚友身新變]” 하거늘, 공이 이에 화답하여, “천지와 강산은 나의 친구들이다.[天地江山是故人]” 하고, 꿈에서 깨어 다시 시 한 수를 짓기를, “태극진군이 응당 나를 허락하여 줄 것이니, 인심(仁心)이 늙지 않고 스스로 청춘이로다.[太極眞君應許我 人心不老自靑春]” 하였다. 공은 여흥(驪興)에서 우왕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고 소식(素食)으로 3년상을 지냈다. ○ 과거에 태종이 잠저에 있으면서 태학에서 글을 읽을 적에, 공이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따르고 강론하여 매우 친밀하였다. 경진년(1400)에 태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과 함께 벼슬하지 않고 남아 있는 선비들을 논평하다가 이르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했는데 못본 지가 오래되었구나.” 하니, 공과 동향인인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이 태종에게 공이 가정에서 한 효행의 아름다움을 상세히 아뢰었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송도(松都)에서 벼슬할 때 또 노씨(盧氏)에게 장가드니 공의 어머니가 원망하였다. 공이 간하기를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남편과 부모가 비록 불의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르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의 변고는 성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다만 정당하게 처신할 것입니다.” 하니,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감동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하직하고 말하기를, “아버지께 오래 문안하지 아니하면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곧 자기 스승 박분(朴蕡)을 따라 송도에 갔다. 노씨가 간혹 자애롭지 않은 말을 하여도 공이 공경과 효도를 극진히 하니, 노씨가 감동하여 자기 소생처럼 대접하였다.공이 선산(善山)에 돌아갈 때에 어머니 김씨의 나이가 60여 세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보살펴서 이부자리를 몸소 펴고 개고 하였다. 처자가 이를 대신하고자 하면 공이 “어머니께서 지금 늙으셨으니 훗날에 어머니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려한들 할 수 없다.”고 말하니, 부인 신씨(申氏)가 이것을 본받아 몰래 자기 옷을 팔아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되, 그의 시어머니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삼군부(三軍府)에 명을 내려 통첩하여 불렀는데, 공이 굳이 거부하고 가지 아니하니 주관(州官)이 재촉하여 빨리 가라고 했다.공이 역마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태종이 정종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로 제수하였다. 공이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않고 이어 태종에게 상서하여 말하기를 “길재가 옛날에 저하(邸下)와 더불어 반궁(泮宮 태학관(太學館))에서 같이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 정의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길재는 신조(辛朝)에 급제하여 첫 벼슬을 하였다가 왕씨(王氏 공양왕)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 몸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옛정으로 부르시니 길재가 뵙고자 왔을 뿐이요, 벼슬하는 것은 길재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바꿀 수 없는 도이니 그 뜻을 빼앗기가 어렵다.그러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지만,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공이 드디어 상소하기를, “신이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조(辛朝)에 급제하여 문하 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하니, 신을 시골에 돌려 보내 주시어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노모를 잘 봉양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정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 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뒤에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으로서 세종에게 이르기를,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으니 참된 의사(義士)다. 듣건대, 그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서 등용하여 길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니, 드디어 그의 아들 사순(師舜) 맏아들 사문(師文)은 일찍 죽었다. 을 불러서 종묘 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공이 죽자, 나이 67세 부의(賻儀)로 쌀과 콩을 주고 또 장사에 역군을 보내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증직하였다. 《동각잡기》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종이 관인(寬仁)하고 도량이 커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아름다움이 참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와 숙제를 놓아 주고,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엄자릉(嚴子陵)을 보내 주는 것과 비록 세대는 다르나 일은 똑 같으니, 이것은 다 절의를 높이고 그의 뜻을 이루게 하여 백세의 높은 풍절(風節)을 격려하고 만세의 기강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귀정(龜亭) 남재(南在)가 감사가 되어서 공에게 시를 증정하기를 고려 오백 년에 홀로 선생뿐이니 / 高麗五百獨先生 일대의 공명(功名)을 어찌 영화롭다 하리오 / 一代功名豈足榮 늠름한 청풍이 천지에 부니 / 凜凜淸風吹六合 조선 억만 년에 길이 아름다운 소리로다 / 朝鮮億載永嘉聲 하였다. 당시 여러 공들이 모두 이 시에 화답하였다. 《명신록(名臣錄)》○ 공의 아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공이 사순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신하가 되어서 너는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명신록》○ 공의 병이 위독할 때에 부인 신씨(申氏)가 아들 사순을 부르자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임금과 아비는 동일하다. 사순이 이미 임금에게 갔으니 내 부고를 들은 뒤에 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명신록》○ 공은 상산(商山) 사성(司成) 박분(朴蕡)에게 나아가서 성리학을 들었고, 뒤에 이색ㆍ정몽주ㆍ권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항상 도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일삼으니, 중들이 감오(感悟)하여 근본(유교)으로 돌아온 자가 수십인 뿐만이 아니었다. 동생 길구(吉具)가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또한 깨달아서 유교로 돌아왔고, 경학이 있는 선비로 공의 문하에서 나온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명신록》○ 문종조(文宗朝)에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공에게 증직과 시호를 주기를 청하니 문종이 이르기를, “증직과 시호는 실상 헛된 형식에 불과하다.” 하고, 드디어 그 자손에게 벼슬을 줄 것을 명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남효온(南孝溫)이 금오산(金烏山)을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신조(辛朝) 주서 길 야은은 서리보다 차고 물보다 맑다.[辛朝注書吉冶隱 秀於嚴霜淸於水]” 하고, 또 말하기를,
명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의는 산보다 무거우니 / 命輕鴻毛義重山 공과 달가(達可)가 이 이치를 알리라 / 公與達可知此理 달가는 몸소 두 성(姓) 임금을 섬겼으니 / 達可身經二姓王 좋은 재목에 한치가 썩었고 거울 가운데 티가 있다 / 杞梓寸朽鑑中疵 공의 몸 맡긴 곳은 한 임금뿐이니 / 公身所委惟一君 진실로 알고 독특히 행함은 비할 이가 없도다 / 眞知獨行難與比 하였다. 공이 급제한 것은 우왕(禑王) 병신년이고, 주서가 된 것은 창왕(昌王) 기사년인데, 이해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니 그 이듬해 경오년에 공이 어머니가 늙은 것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러면 효온의 뜻은 공이 신조(辛朝)를 섬기다가 공양왕 섬기는 것을 부끄럽다는 이유로 물러갔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우왕이 신돈의 소생임을 세상 사람들이 많이 의심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에 대하여 몰래 국운을 옮긴 역적인데, 공이 이에 신하로 섬기는 것을 달게 여기고 도리어 왕씨가 반정(反正)하는 초에 그만 물러 가서 신씨(辛氏)를 위하여 한평생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면 그 진퇴가 어찌 근거 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이제 공을 논평하는 자가 우왕과 창왕의 일은 한 구석에 제쳐 놓고, 다만 공이 고려조의 근신(近臣)으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가서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은 것이 분명하게 된 것이니, 어찌 광명하고 정대한 것이 아니겠는가.그런데 반드시 포은을 끌어들여 한 임금을 섬겼느니 두 임금을 섬겼느니 하여 우열을 따지니, 효온은 여기에서 포은을 비방할 뿐 아니라 이에 야은도 비방하는 것이다. 야은은 벼슬이 낮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같이 망할 의리가 없으므로 기미를 보아 물러 갔고, 포은은 대신이라 한 몸에 국가의 중책을 맡은 까닭에 위기에 다달아 목숨을 바치고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것이니 두 사람의 일이 다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의 처신에서 쉽고 어려운 것을 말한다면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가는 참으로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우복집(愚伏集》○ 공의 거취를 논평하고자 할진댄, 먼저 공의 마음 속에 우와 창을 신씨(辛氏)라 하였느냐, 왕씨(王氏)라 하였느냐를 알아야 공의 거취의 득실을 의논할 수 있다. 만약 공이 조금이라도 우가 신씨라는 의심을 하였다면 공양왕을 섬기지 않은 그 마음으로 볼 때 어찌 우의 조정에서 벼슬하였겠는가. 《청야만집(靑野漫輯)》○ 손순효(孫舜孝)가 금오산(金烏山) 밑에 있는 공의 옛 처소에 가서 글을 지어 치전(致奠)하여 말하기를, “사당 밑에서 절하고 우러러 보니 거동과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네. 금오산과 낙동강 물은 어제와 같은데 선생을 생각건대 어디 계신고. 초황(蕉黃)과 예단(荔丹)을 올리오니 바라건대 영령(英靈)은 돌보소서.”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공의 손자 인종(仁種)이 타던 검정말이 죽자 후원에다 묻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부의 유풍이 있다.” 하고, 김종직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청백한 것은 참으로 자손에게 물려 줄 수 있구나.[淸白眞能遺子孫]” 하였다. 《점필재집(佔畢齋集)》서견(徐甄)서견은,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초명(初名)은 반(攽)이다. 고려 충렬왕 경인년(1290)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에 이르고, 김진양(金震陽)의 당에 연루되어 금천(衿川)에 물러가 있었다. 시를 짓기를, 옛 서울 송경(松京)이 아득한데 / 千載神都隔渺茫(一作漢江) 많은 충량한 신하들 밝은 임금 도왔네 / 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 있는고 / 統三爲一功安在 한(恨)되도다, 전조(前朝 고려)의 왕업이 길지 않은 것이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태종 임진년(1412)에 대신과 대간들이 그를 잡아다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니, 태종이 성을 내어 이르기를, “고려의 신하가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지어 사모하니, 이것은 정리가 그러한 것이다. 우리 이씨인들 어찌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겠는가. 만일 우리 이씨의 신하에 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칭찬할 일이다. 그만 두고 묻지 말라” 하였다. 뒤에 다시 죄 줄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태종이 이르기를, “서견은 고려의 신하인데 우리 집을 섬기지 아니하고 저의 임금을 추모하니 바로 백이와 숙제같은 사람이다. 칭찬할 만한 일이지, 죄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세종의 일이라 되어 있다.○ 선조조에 수찬 허봉(許篈)이 경연에서 아뢰어 표창하고 장려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 묘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고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동각잡기》 윤근수(尹根壽)가 선조께 아뢰어 충신의 무덤이라고 봉하였는데, 묘는 금천읍(衿川邑)에서 십 리 되는 번당(燔塘)에 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원천석(元天錫)원천석은, 자는 자정(子正)이며, 호는 운곡(耘谷)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문장이 부섬(富贍)하고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고려말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치악산(雉岳山) 밑에 은거하면서 한결같이 몸을 감추고 몸소 농사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다가 이름이 군적(軍籍)에 등록되자 부득이해서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단번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 이색 등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자주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면서 시국을 개탄하였다.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일찍이 글을 배운 일이 있었는데, 그가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동쪽 지방에 나갔다가 그 집을 방문하니 공은 피하고 보이지 않았다. 태종이 계석(溪石) 위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그의 아들 원형(元泂)에게 벼슬을 주어 기천(基川) 지금의 풍기(豐基)이다. 감무(監務)를 삼았다. 후대 사람이 그 돌을 ‘태종대(太宗臺)’라 이름지었다. 그 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여사제강(麗史提綱)》 《미수기언》○ 태종이 상왕이 되었을 때 특명하여 공을 부르니, 공이 흰 옷을 입고 와서 뵈었다. 궁중에 불러 들여 옛정을 말한 다음 여러 왕자들을 불러서 나와 보게 하고는 묻기를, “우리 자손들이 어떠하오?” 하였더니, 공이 세조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조부를 몹시 닮았으니, 아아 모름지기 형제를 사랑하라.”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공이 일찍이 야사(野史)를 지어서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채워두었다가 운명할 때 유언하기를, “마땅히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하고, 그 상자 겉에 글을 써서 말하기를,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 어떤 기록에는 ‘성인이 아니면 열지 말라’고 되어 있다.” 하였다. 그집에서는 이와 같이하여 아들과 손자 대(代)에서는 자물쇠를 열지 않다가 증손에 이르러 명절 제사를 지낼 때 종족이 모두 모여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조께서 비록 유언이 있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혐의 될 바가 없다.지금은 열어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열어 보았다. 그것은 고려말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사실 그대로 써서 꺼리어 감춘 것이 없었으므로 내용이 대부분 국사와 같지 않았다. 이에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우리 종족을 멸하는 물건이니 이미 이것을 본 이상 소문나지 않기가 어렵다.” 하고, 드디어 이것을 태워 버렸다. 《축수편(逐睡篇)》ㆍ《해동악부(海東樂府)》○ 공의 유고(遺稿) 두 권 중에 당시 사적을 후세에서 잘 알 수 없는 것을 직필한 것이 있는데, 신우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그 직필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이다. 그 시에 ‘주상전하(主上殿下 우왕(禑王))를 강화도에 옮기고 맏아들 창(昌)이 즉위했다는 것을 듣고 느낌이 있다’ 하는 제목으로 된 시 두 수에, 성현(聖賢 어진 군신)이 서로 만나 교체되니 / 聖賢相遇遞當時 천운이 순환함을 이로부터 알겠네 / 天運循環自此知 초야에 있는 몸 어찌 우국(憂國)의 뜻이 없겠나 / 田畝豈無憂國意 다시 간절한 충성 다하여 국가 안위 염려한다 / 更殫忠墾念安危 새 임금은 임조(臨朝)하고 옛 임금은 옮겨가니 / 新主臨朝舊主遷 소조(蕭條)한 강화도는 바람 연기뿐이구나 / 蕭條海郡但風煙 하늘의 바른 길을 누가 닫으랴 / 天關正路誰開閉 밝고 밝게 거울 되어 앞에 있음 보아라 / 要見明明鑑在前 하였다. 또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이 형을 받다’ 하는 제목으로 된 시 세 수에, 거울이[水鏡]이 빛을 묻고 주석(柱石)이 무너지니 / 水鏡埋光柱石頺 사방의 백성들 뉘 아니 슬퍼하리 / 四方民俗盡悲哀 빛나는 공업이 마침내 허물어져도 / 赫然功業終歸朽 확고한 충성은 죽어도 삭지 않으리 / 確爾忠誠死不灰 청사(靑史)에 행적이 기록되어 질(帙)에 찼는데 / 紀事靑編曾滿帙 가엾도다 벌써 흙으로 되었네 / 可憐黃壤已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 아래 / 想應杳杳重泉下 눈을 동문에 걸어도 분이 풀리지 않으리. / 掛眼東門憤未開 홀로 조정에 설 제 뉘 감히 범하리 / 獨立朝端無敢干 언제나 충의로써 어려움을 겪었구나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六道) 백성 희망 따라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三韓) 사직 편하게 했네 / 能致三韓社稷安 동렬(同列)의 영웅들은 낯짝도 두텁다 / 同列英雄顔更厚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은 죽기 전에 벌써 뼈가 차리 / 未兦邪侫骨猶寒 다시금 난이 일면 꾀할 이 누구일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용사(用事)하는 간인들이여 / 可笑時人用事奸 내 이제 부고 듣고 애시(哀詩) 지으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을 위한 슬픔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이라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天運)의 비(否)와 태(泰)를 뉘 알리오 / 天運誰能知否泰 나라 터전 안위는 아직 정하지 못했네 / 邦基未了定安危 날랜 칼날 부러지니 슬퍼한들 어쩌랴 / 銛鋒已折嗟何及 외로운 충성으로 나라를 지탱하지 못함이 한이로다 / 忠膽常孤恨未支 홀로 산하를 대하여 이 곡을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모두가 한숨이로다 / 白雲流水摠噫噫 하였다. 또, ‘금월 15일에 이미 정창군(定昌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고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 세 수에, 전왕 부자 서로 갈려 / 前王父子各分離 멀고 먼 하늘 가에 동에 있고 서에 있네 / 萬里東西天一涯 한 몸은 서인되게 할 수 있어도 / 可使一身爲庶類 이 내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조왕(祖王 고려 태조)의 맹세가 하늘에 닿아 / 祖王信誓應于天 남은 은택 흘러흘러 수백 년을 내려왔네 / 餘澤流傳數百年 왜 일찍이 진가(眞假)를 분간하지 못했던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푸른 하늘 거울처럼 밝게 비쳐 주네 / 彼蒼之鑑昭昭然 하고, 또 ‘나라에서 전왕 부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라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에,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이 임금의 은혜인데 / 位高是君恩 반달 동안 수치품고 이미 가문을 멸했네 / 半月含羞已滅門 온 나라가 큰 복을 머무르게 할 수 있나 / 一國豈能留景祖 구원(九原)에 맺힌 원한 씻을 길이 어렵구나 / 九原難可雪幽寃 고풍(古風)이 없어지니 때는 도리어 평안하고 / 古風鍾鼎淪喪時還泰 새 법이 청평(淸平)하니 도가 더욱 높으리 / 新法淸平道益尊 궁궐 향해 만세를 부르노니 / 且向玉墀乎萬歲 후한 은택 산촌에까지 베풀어 다오 / 願施優渥及山村 하고, 또 ‘한산군(韓山君)이 장단(長湍)에 귀양가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 두 수에, 하늘 보배(이색을 말한다) 빛 감추고 정령(政令)이 가혹하니 / 天寶韜光政令苛 학문 갈고 닦을 이 누가 있으리 / 有誰如琢復如마 요사이 사흘 밤 꿈에 뵈옵고 / 邇來夢謁連三夜 혼이 서로 만나 놀던 일 기억하며 노래 짓네 / 記取魂遊作一歌 나라의 경륜(經綸)은 불구덩에 들어가고 / 邦國經綸歸火澤 강물에 뜬 배는 풍파에 지쳤구나 / 江河舟楫困風波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하지 않는다면 / 天如未喪斯文也 역인(逆人)인들 우리에게 어찌하리오 / 縱有逆人奈我何 옥은 스스로 티가 없으되 일은 이미 거짓되었으니 / 玉自無瑕事已訛 형인(荊人)의 두 번 발 벰이 다른 이유 아니다 / 荊人兩刖定非他 해동의 풍월마저 분통을 머금고 / 海東風月應含憤 천하의 영웅들이 슬픔을 같이하리 / 天下英雄所共嗟 백성 다 같이 새 세상을 보는데 / 萬姓同瞻新日月 강산은 옛 모습 변함이 없구나 / 三韓自固舊山河 곡직을 밝게 아는 푸른 하늘 있으니 / 明知枉直蒼蒼在 자나 깨나 몸 편안하심 비나이다 / 寤寐祈傾體氣和 하였다. 시가 비록 꾸밈없이 수수하여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많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직필로서 숨긴 것이 없으니,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에 비하면 일성(日星)과 체동(螮蝀 무지개)과의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니다. 이 시를 읽으니 눈물이 두어 줄기 내리더라. 《상촌집(象村集)》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원 관찰사가 되어서 공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제문에 말하기를, “산에 고사리가 있으니 굶주림이 없을 것이요, 집에 거문고와 책이 있으니 스스로 즐길 수가 있을 것이다. 예물로 은근히 불러도 처사성(處士星)은 안온하였네. 천고에 빈 산중에 한 줄기 맑은 바람이구나.” 하였다. 《축수편(逐壽篇)》 ○ 지금 원주읍(原州邑) 동쪽 십 리 석경촌(石鏡村)에 운곡(耘谷)의 묘가 있다. 김진양(金震陽)김진양은, 자는 자정(子靜)이며, 본관은 계림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 공은 고려조의 충신이다. 그가 정도전을 탄핵한 소에 말하기를,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하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한다는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를 말한 것이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는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를 말한다. 만일 공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더라면 고려의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소가 들어감에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복합(伏閤)을 한 뒤에 겨우 조정에 내 놓았다가 다시 들여 갔으니,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대목을 볼 때에 기가 막히게 한다. 《상촌집》이숭인(李崇仁)이숭인은, 자는 자안(子安)이며, 호는 도은(陶隱)이고,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 정도전이 공과 더불어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재명(才名)이 서로 비등하였으나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도전이 불평을 품고 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도전은 권신이 되어 자기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공이 귀양간 고을에 수령으로 보내 매질하여 죽이게 하였다. 《상촌집》공이 과거에 정몽주의 당파라 하여 영남에 귀양갔었는데, 거정이 사자(使者)로 영남에 가서 하루 안으로 공에게 곤장 수백 대를 때린 뒤 묶어서 말 위에 얹어 수백 리를 달리게 하여 드디어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이것은 정도전의 뜻에 영합하려고 한 것이었다. 태종 때 거정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이었는데, 이숭인을 죽였다는 말을 위에 고한 이가 있었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 온 터이다.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었구나.” 하고, 드디어 훈작(勳爵)을 삭제하고 멀리 귀양보내어 거기서 죽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 ○ 심하도다, 소인의 마음 씀이여. 얼마 안 있어 도전이 방석(芳碩)의 난에 가담하여 몸과 머리가 갈라졌고, 거정도 역시 도전의 문객으로 태종에게 거슬려서 공훈이 삭제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손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이 허락하지 않아 회복되지 못하였다. 도전이 입은 화는 숭인보다 더 참혹하고, 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났다. 천도는 헛됨이 없으니, 뒤에 오는 소인들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 《상촌집》조견(趙狷)조견은, 자는 종견(從犬)이며, 초명(初名)은 윤(胤)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고려조에서는 벼슬이 지신안렴사(知申按廉使)였고, 조선에서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개국공신(開國功臣)평간공(平簡公)이었다. ○ 공이 고려조 재상으로 고려의 국운이 장차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청량산(淸涼山)에 은거하니, 그 형 조준은 조선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데 공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개국공신의 명부에 이름을 기록했더니 공이 받지 않았다.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니,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견(狷)’ 자(字)의 뜻을 취한 것이다.태조가 친히 청량산을 방문하여 벼슬을 주었는데, 끝내 받지 않고 죽을 임시에 자손에게 말하기를, “내 묘표(墓表)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벼슬을 기록하고 자손들은 새 조정에 벼슬하지 말라.” 하였다. 죽은 뒤에 조정에서 준 벼슬을 가지고 묘표를 세웠더니 하루는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깨뜨렸다. 현손(玄孫) 조부(趙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에 응했다. 명종(明宗) 임자년(1552)에 급제하여 부윤이 되었다. ○ 《후촌만록(後村漫錄)》 《평양조보(平壤趙譜)》○ 공은 형인 조준이 혁명에 가담할 뜻이 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벼슬한 집이 아닙니까.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존망을 같이 해야 합니다.” 하니, 조준이 아우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공을 잇달아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를 시켰다. 공이 시를 짓기를, 삼년 동안 두 번 영남루를 지나니 / 三年再過嶺南樓 은은한 매화 향기 나를 머물라 권하는구나 / 細細梅香勸少留 술 마시며 근심씻고 노년을 보낼 만 하니 / 擧酒消憂堪送老 평생에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 平生此外求不須 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기 전에 고려가 망하니, 공은 통곡하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갔다. 태조가 발탁하여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하고 글을 보내 부르니, 공이 답하기를, “송산(松山)의 고사리 캐기를 원할 뿐이요,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 이름을 견이라 바꾸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개는 그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두류산에서 청계산( 淸溪山)으로 옮겨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망경봉(望京峯)’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의 절개를 칭찬하고 손님과 주인의 예로써 만나자고 청하니 공이 나가 만났는데, 손을 올려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며, 할 말을 기탄없이 해 버렸다. 태조가 이런 것을 모두 용납하고 돌아갈 때 명하여 청계의 한 지역을 봉하여 주고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하였다. 또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공은 끝내 거처하지 않고 양주(楊州) 송산(松山)으로 옮겨가서 살며 스스로 호를 ‘송산’이라 하였다. 《평양지(平壤志)》안원(安瑗)안원은, 본관이 순흥(順興)이다.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물러나 나오지 않았다. 태조가 구도(舊都) 송도에 유후(留後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게 하여 그의 고려를 잊지 않는 뜻을 이루어 주고 시호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 공은 성질이 호상(豪爽)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이첨(李詹)이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는 반드시 안옹(安翁)일 것이다.” 하고 가 보니, 과연 공이 나무에 기대어 왼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손으로 《강목(綱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김주(金澍)김주는, 자는 택부(澤夫)이며, 호는 농암(籠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에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망한 것을 듣고 본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고려말에 하절사(賀節使)로 명 나라에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태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듣고 종에게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다만 이것을 가지고 표적을 삼아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고, 또 내가 도로 명 나라에 들어가는 날을 기일로 삼아라.” 하였다. 드디어 돌아서서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기를 청하니, 명 태조가 말하기를, “제왕이 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이 있으니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이어 묻기를, “너는 본국에서 무슨 벼슬에 있었느냐.” 하였는데, 공이 대답하기를 “예의 판서(禮儀判書)로 있었습니다.” 하니, 드디어 종신토록 상서(尙書)의 녹을 주었다. 공은 형초(荊楚 지금의 호남(湖南)ㆍ호북성(湖北省) 일대) 지방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았다. 임진에 명 나라 군사가 왔을 때에 유격장군(游擊將軍) 허씨(許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칭 공의 외손이라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해동악부(海東樂附)》○ 공이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부인에게 글을 주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면 가서 몸을 둘 곳이 없다.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 나라에 돌아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고, 장사 지낸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 하였다. 그 자손은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으니, 이 날은 바로 압록강에서 글을 보낸 날이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 가을, 명 나라에서 일본에 간 책봉사(冊封使)의 일행 중에 막하관(幕下官) 허유성(許惟誠)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유성(惟誠)은 복건인(福建人)이다.” 하였다.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동래(東萊)에 들려 사람들에게 자칭 공의 후예라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은 형초지방에서 장가들어 세 딸을 낳았는데 허씨는 그 사위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신곡(新谷)의 김씨(金氏)들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김씨의 본관이 선산(善山)이라는 것만 알고 신곡이 공이 살던 동리임을 알지 못하여 답을 못해 주었다. 그래서 후손은 끝내 유성과 서로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농암전(籠岩傳)》에 말하기를 “정승(政丞) 김응기(金應箕)는 이름난 사람이나 조선(祖先)을 밝게 드러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공의 7대손 유엽(有曄)의 말을 채택하여 유사(遺事)를 찬술했다.” 하였다. ○ 부윤(府尹)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대략 이와 같다.우리 태조가 임신년(1392) 7월 16일에 개국하고 한상질(韓尙質)을 사신으로 명 나라에 보냈는데 그 주문(奏文)에 말하기를, “우리 신하 조림(趙琳)이 예부의 자문을 받아 왔는데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바꾸었느냐. 빨리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그러면 상질이 명 나라 서울에 가기 전에 이미 조선의 개국을 알았고, 상질이 돌아온 것도 바로 이해이다. 공이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돌아왔다면 어찌 연말에 압록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태조의 개국을 들었을 리가 있겠는가.이것은 온 우주에 뻗치는 큰 충절인데 어찌 수백 년간 묻혀서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으며, 문대공(文戴公) 김응기의 시호등 여러 자손이 비록 유명(遺命)을 따라 지문과 묘갈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을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엽(有曄)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까. 일본에 책봉사(冊封使)가 간 것이 을미년(1595) 겨울이었는데 유엽은 정유년(1597) 가을이라 하니, 십여 년 전의 일도 혼란하여 이같이 사실과 다른데 어찌 수백 년 전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우현보(禹玄寶)우현보는, 자는 원공(原功)이며,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 공민왕 때 그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나아가고, 우왕 12년에는 조민수(曹敏修)ㆍ장자온(張子溫)ㆍ하륜(河崙)과 함께 사은사(謝恩使)의 사명을 띠고 원 나라에 갔다. 창왕 2년에 김저(金佇)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여흥(驪興)에 가서 폐왕 신우를 만나고 몰래 정몽주와 더불어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하여 낭관들이 복합(伏閤)하여 죄주기 청했는데, 창왕은 듣지 않고 관직만을 파하였다가 얼마 뒤에 판삼사사로 삼았다.공양왕이 즉위함에 공이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사건에 관련이 있다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사면하여 지방에 마음 편하게 가 있게 하였는데, 대성(臺省)이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철원(鐵原)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그후 얼마 있다가 다시 불러서 그 관직에 도로 복직시켰다. 정몽주가 죽자 공은 경주(慶州)로 귀양갔고, 그 이듬해에 고려가 망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에 태조가 공신의 작호(爵號)를 주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조는 특별히 공에게 후사하고 옛친구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단양백(丹陽伯)에 특진시켰다. 그해에 공이 죽었는데,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묘는 고장단(古長湍) 동쪽 20리 금곡(金谷)에 있다.조신충(曹信忠)조신충은 본관이 창녕이다. 우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 이숭인(李崇仁)ㆍ이색ㆍ하륜과 친하게 사귀었다. 우왕과 창왕이 연달아 폐위되자, 공은 스스로 불안을 느껴 영천 창수면(永川滄水面)에 가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하륜이 수상으로 있을 때 공에게 장수의 재능이 있다 하여 천거하였는데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태조 5년에 강계도 병마사 겸 판희천군사(江界道兵馬使兼判熙川郡事)로 제수하였다. 한번 서울에 왔다가 잠깐 뒤에 물러갔으니, 이색과 거취(去就)를 같이 하였다. 아들 상치(尙治)가 정시(庭試)에서 장원하였는데, 태종이 눈여겨 보면서 이르기를, “네가 왕씨의 신하 조신충의 아들이냐?” 묻고, 곧 정언 벼슬을 주니 사대부가 영광스럽게 여겼다. 《취원당 조광원 수록(聚遠堂曹光遠手錄)》공이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전조(前朝) 재상의 아들로서 과거에 올라 녹을 먹었으니 마땅히 수절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절의를 지킬 것이나, 너는 나라가 바뀐 뒤에 났으므로 스스로 숨어 살 의리가 없으니, 힘쓰라.” 하였다. 상치가 뜻을 굽혀 상경하여 세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상치유사(曹尙治遺事)》 이고(李皐)이고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공민왕 갑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고려 말엽에 물러나 수원(水原)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스스로 망천(忘川)이라 호를 지었으니, 세념(世念)을 잊는다는 뜻이었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소락(所樂)이 무엇인가 물으니 공이 자기가 사는 산천의 훌륭한 경치를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가운데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태조가 즉위하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경기 안렴사(按廉使)로 제수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공이 거처한 곳을 그리게 하여 이것을 보고 이름을 ‘팔달산(八達山)’이라 지었다. 세종조에 석비(石碑)를 특별히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 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여덟 사람의 학사를 세상에서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공은 조견(趙狷)ㆍ이집(李集)과 함께 그 중의 삼학사(三學士)로서 서로 살던 곳이 가까워 때때로 소를 타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조견은 청계산(淸溪山)에 숨고 이집은 둔기리(遁機里)에 숨었다.이집(李集)이집은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신돈의 미움을 사게 되자, 자기 아버지를 업고 남쪽으로 피해 가서 천녕현(川寧縣)에 숨어 살며 나오지 않았다. 김자수(金自粹)김자수는 자는 순중(純仲)이며, 호는 상촌(桑村)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이 고려 도관찰사(都觀察使)였다. 안동(安東)에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있고 그의 효자비가 있다. ○ 태조가 왕위에 오른 당초에 공이 전부터 그와 친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등용하려고 헌장(憲長)으로써 불렀으나, 공은 아무 말없이 누워만 있었다. 태종이 또 형조 판서로 부르자, 공은 자기 집 사당에 영결(永訣)하고 아들에게 흉구(凶具)를 가지고 뒤따르라 명하고 바로 그날로 길을 떠났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 절명사(絶命詞) 두 구절을 지었는데 말하기를,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 하고, 드디어 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래 추령이라 하는 고장은 포은 정몽주를 장사한 땅이다. 《용재수선총기(慵齋搜善總記)》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우천(愚川) 정식(鄭侙)의 《상촌사적변(桑村事蹟辨)》에 말하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 관찰(金觀察)의 이름 아래 ‘사본조(仕本朝)’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여지승람》을 지은 것은 광릉(光陵) 즉 세조 때의 일이니, 국초(國初)로부터 시대가 그다지 멀지 아니하여 김 관찰이 자결하여 죽던 일이 비록 은미하였다 하더라도, 당시에 반드시 그 사실을 들어 안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에 다만 본조에서 벼슬했다고만 기록한 것은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태조가 처음 나라를 세우던 날부터 따르던 사람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던 때에, 기밀(機密)에 협찬했던 사람들은 모두 재주 있고 뛰어난 인물이었다.집현전과 예문관에서 붓을 잡은 이와 문청(文廳)의 총재(摠裁)된 자들이 모두 세조의 거사에 협력했던 무리들이 아니면 곧 태조에게 붙었던 이들의 자손들이다. 비록 정치 정세에 편승하여 공명(功名)을 세웠으나, 그들도 명분과 의리가 귀중한 것임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또한 어찌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전 시대의 절의 있는 선비에 대해서도 오히려 자신은 그보다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시대의 절의 있는 선비로서 이름이 숨겨진 분에 대하여 어찌 숨은 빛[幽光]을 빛나게 하고 잠긴 덕[潛德](《여지승람》에 김자수가 절의에 죽은 사실을 그대로 쓰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겠는가.” 하였다. 《경주김씨보》 송유(宋愉) 다음의 네 사람은 모두 경주 김씨 족보에 나타나 있는데, 그들을 모두 고려조의 충절(忠節)이라 기록하였다.송유는 자는 이숙(怡叔)이며, 호는 쌍청당(雙淸堂)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벼슬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이었는데, 고려가 망한 뒤 회덕(懷德)에 내려가 숨어 살았다. 허도(許棹)허도는 호는 경암(擎庵)이며, 고려조 때 진사였다. 허금(許錦)허금은 자는 재중(在中)이며, 호는 야당(埜堂)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고려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냈다. 이양중(李養中)이양중은 자는 자정(子精)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고려조 때 형부(刑部)의 좌참의(左參議)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숨어 살았다. ○ 태조가 잠저 때의 친한 벗이었던 까닭에 불렀더니, 야인(野人)의 옷차림으로 거문고를 들고 술잔을 바쳤다.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박유(朴愈)박유는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고려조 때 한림(翰林)으로 나아가서 남평 감무(南平監務)가 되었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임존(任存) 지금의 대흥(大興)이다. 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다. 그 자손은 양대(兩代)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사(府使) 규세(奎世)의 선조이다. 《후촌만록(後村漫錄)》윤충보(尹忠輔)윤충보는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안성군수(安城郡守)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죽음을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고 스스로 호하여 ‘고려 처사’라 하였다. 날마다 높은 산에 올라가 송도를 바라보며 향불을 피우고 꿇어 앉아 절하기를 종신토록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왕망현(王望峴)’이라 불렀다.처음 숨어 살기 시작할 때에, 황새 한 떼가 주위에 모여왔었기 때문에 ‘한곡 선생(鷳谷先生)’이라고 칭호하게 되었고, 집 가까이 있는 산 이름을 율리(栗里)라 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언으로 훈계하기를 비를 세우지 말고 무덤의 형식을 고려의 제도에 따라서 하도록 일렀다. 이택지(李擇之)ㆍ이식(李植)ㆍ신광한(申光漢)ㆍ이성중(李誠中)ㆍ김귀영(金貴榮)의 문집(文集). 여주(驪州) 인사들이 여러번 이존오(李存吾)의 서원(書院)에 배향하도록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부록 두문동(杜門洞)고려가 망한 때에 한 동네가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문을 닫고 절의를 지켰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두문동’이라 하였다. 이의(李倚)는 본관이 부평(富平)이다. 고려조의 세신(世臣)으로서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새 조정에서 그가 신하 노릇하지 않는다고 죄를 주어 부평 자연도(紫煙島)로 귀양 보내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부평이씨가승(富平李氏家乘)》 고려말의 여러 신하를 논함성조(聖祖 태조)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새 나라를 세울 때에 백성들이 귀의하고 시장과 가게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열렸으며 조정에는 벼슬의 반열이 여전하였다. 한양의 벼슬아치는 모두가 송도의 옛 신하들이었으니, 새 조정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찌 그들을 포용하는 큰 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왕씨로서 그들을 논평한다면, 그들은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들이었으니, 만일 《춘추(春秋)》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반역의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그 중에도 정상이 가증한 자는, 곧은 체하며 모략을 한 윤소종(尹紹宗), 임금을 협박하던 남은(南誾), 일을 만들어 낸 정도전(鄭道傳), 거짓 명성[僞名]의 권근(權近)등이며, 허옇게 머리털이 센 성석린(成石璘)은 간사한 소인에게 요리조리 붙고, 불량배인 조영규(趙英珪)는 충신인 재상[정몽주]을 쳐죽였으니, 왕씨 조상의 혼령이 있다면 명명(冥冥)한 가운데 그들에게 내리는 벌이 없을까. 과연 남은과 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 함께 극형을 받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보복이다. 《상촌휘언(象村彙言)》○ 신우 때에 윤소종이 간관이 되어 신우의 과실을 말할 적에, 바로 대고 배척하여 조금도 여지가 없어서 죄를 낱낱이 헤아리는 듯하였으니, 이 얼마나 곧은 말인가. 그러나 한(漢) 나라 곡영(谷永)이 권신의 죄는 덮어 주고 오로지 임금과 공격하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어 제 손바닥과 다리 사이에서 놀렸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참으로 충성으로 곧은 말을 한 자라면 어찌하여 버젓이 두 임금을 섬겼겠는가. 《상촌휘언》○ 고려말에 현자들이 화를 입게 된 것은 몇 가지 까닭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목은(牧隱)의 일(신우가 폐위될 때에 그 아들 신창을 세우기를 주장한 것)을 가리킬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명 나라에서 “왕씨가 아닌 이성(異姓 우(禑)ㆍ창(昌))을 세웠다고 말썽이 있었던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신창을 세운 것은 정당한 일이었으며, 참으로 대신이 할 도리였다. 또 명 나라에서 무슨 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은 명 나라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곧 그 당시 다른 딴 마음을 가진 자들이 꾸며서 저희가 선창하고 저희가 화답하여 무슨 귀신의 말처럼 된 것이다. 일이 왕위의 폐위에 관계되므로 사람들이 감히 입을 떼지 못하였으니, 이때보다 더 지독하고 심한 모략은 없었다 하겠다. 비록 천명이 이씨에게 돌아와 간사한 권신들의 손을 빌려 조선개국의 기운(機運)을 열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충성스런 현인들이 무함(誣陷)을 당한 일은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니, 지극히 개탄할 일이다.” 《상촌휘언》○ 개국한 후에 정부에서 여러 재상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전조(前朝)의 재상으로 신조(新朝)에서 벼슬 사는 자들이었다. 기생 설매(雪梅)는 재주와 용모가 남달리 뛰어나고 음행을 매우 즐겼다. 정승이 취하여 희롱하기를, “네가 아침은 동쪽 집에서 먹고, 저녁에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고 들었는데, 이제 나를 잠자리에 모셔라.” 했다.설매가 대답하기를,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이 천한 몸으로 왕씨(王氏)를 섬기다가 이씨(李氏)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어찌 꼭 합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정승은 낯이 붉어 머리를 숙이고,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였으며, 혹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한거만록(閑居漫錄)》 [주D-001]관례(冠禮) : 남자가 장성하여 관(冠) 을 쓰는, 즉 성인이 되는 예식.[주D-002]문묘종사(文廟從祀) : 공자묘에 배향하는 것.[주D-003]중도부처(中途付處) : 옛날 벼슬아치에게 준 형벌의 한 가지인데,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을 말함.[주D-004]저구(杵臼) 가 …… 뜻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의 귀족인 조씨(趙氏) 가 반대당에게 몰려 멸망을 당할 무렵, 조씨의 부하인 공손저구(公孫杵臼) 가 조씨의 유복자를 몰래 길러서 조씨의 후사를 이었다.[주D-005]화봉인(華封人) : 화(華)는 지명으로서 화에 봉함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요 임금 때에 화봉인이 요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를 축원하였다.[주D-006]원찬(袁粲) : 중국 남북조 시대 때 송(宋) 나라에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충신.[주D-007]양표(楊彪) : 한말(漢末)의 대신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비록 죽지는 못하였으나, 조조(曹操)에게 굽히지는 않았다. 그의 아들 양수(楊修)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고사에, 목은의 아들이 이성계의 당인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이에 비유하였다.[주D-008]금고(禁錮) : 벼슬의 길을 막아 등용하지 않는 것.[주D-009]초황(蕉黃) 과 예단(荔丹) : 당 나라의 한유(韓愈) 가 지은 유후 라지묘(柳侯 羅池廟) 의 비문에서 제물을 가리켜 한 말인데, 초황은 파초 열매[바나나]이고, 예단은 여지(荔支) 이다.[주D-010]청사(靑史) : 옛날 종이가 없었던 시대에 푸른 대나무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청사라고 함.[주D-011]눈을 …… 않으리 : 오(吳) 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임금에게 간하다가 임금이 듣지 않고 죽이자, 그가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눈을 빼서 동문에 걸어 두어라. 오 나라 망하는 꼴을 보리라”고 한 고사.[주D-012]형인(荊人) 의 …… 벰 : 옛날 초(楚 : 剕) 나라에 변화(卞和) 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박(璞 : 옥이 박힌 돌)을 얻어 초왕에게 드렸더니 옥이 박히지 않은 돌이라 하여 형벌로 발을 베었다. 변화는 다음 왕에게 또 드렸더니 또다시 발을 베는 형벌을 받았다는 고사.[주D-013]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이나 유생이 대궐 합문(閤門) 밖에서 엎드려 청하는 것.[주D-014]강목(綱目) : 주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인데, 춘추의 필법을 따라서 역사상의 인물을 포폄한 글이다.[주D-015]대성(臺省) : 고려 시대의 어사대(御史臺) 와 문하성(門下省) 또는 사헌부와 문하부(門下府)를 아울러 이르는 말.[주D-016]흉구(凶具) : 초상과 장사 때에 쓰는 기구.[주D-017]율리(栗里)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곳.[주D-018]춘추(春秋) : 공자가 엮은 노국(魯國) 의 역사인데, 대의명분(大義名分) 으로 포폄한 경전. 정몽주(鄭夢周)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에 난초 화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공을 낳았다. 정축생 따라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흑룡이 동산의 배나무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다 놀라 깨어 나와 보니 바로 공이었다.그래서 이름을 또 몽룡(夢龍)이라 하였다. 관례(冠禮)하면서 지금의 이름 몽주로 고쳤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연달아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과에 뽑혀 벼슬이 시중 좌명공신 삼중대광 익양군 충의백(侍中佐命功臣三重大匡益陽君忠義伯)에 이르렀다. 이씨가 천명을 받자, 공은 절의에 죽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태종이 권근(權近)의 청에 따라 그의 절의를 포상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 처음에 공은 태조(太祖)의 인정을 가장 두텁게 받아 여러차례 태조의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갑진년(1364)에 태조가 병마사로서 삼선(三善)을 격퇴할 때에 공은 태조의 종사관이 되었고, 무오년(1378)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를 격퇴하였으며, 계해년(1383)에는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태조를 따라 정벌하는 데 나아갔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태조가 자기와 함께 승진케 하여 상(相)이 되었다. 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제공(諸公)과 함께 자신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고 하였다.이때 태조의 공업(功業)은 날로 성하여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려 그 형세가 태조가 끝까지 남의 신하 노릇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공은 그 세력을 꺾고자 하여 은밀히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였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혹 근거없는 모함을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음모가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공을 초청하였다.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城隍堂)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혹은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로 되어 있다.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하고 읊으니, 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읊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였다. 태종이 공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는 공이 태조에게 문병을 핑계로 기색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에 자주 가던 술친구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주인은 밖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며, 뜰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은 드디어 뜰 안으로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오늘 풍색(風色)이 매우 사납구나, 매우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나왔다. 그 집 사람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얼마 있다가 정 시중(鄭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태조의 집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활을 메고 그 앞을 가로질러 가는 무부(武夫)가 있었다.공은 수행하는 녹사(錄事 의정부의 관속)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 하였다. 녹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고, 재삼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가다가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화를 입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함께 죽었다. 《해동악부(海東樂府)》. 당시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 수행 녹사의 성명을 기억한 사람이 없어서 드디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한강(寒崗) 정구(鄭逑)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은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으니, 생각건대 그가 신우를 왕씨의 출생으로 알았더라면 곧 다른 날 신우를 추방하는 데 자신도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신하로서 섬기다가 일조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만일 왕씨의 출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呂政)이 제위에 오름에 영(嬴)씨는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녹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추방되고 살해될 때는 공신까지 되고 다시 후일 다른 임금을 위하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퇴계가 답하기를, “정자의 말씀에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 없기를 구하여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포은의 큰 절개는 천지에 경위(經緯)가 되고 우주에 동량(棟樑)이 된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남을 공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남의 미덕을 이루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기를 마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매양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 공의 사당(祠堂)은 옛적에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孫舜孝)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못하네. 오직 이익만을 좇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 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중종(中宗) 때, 조정에서 공의 문묘 종사(文廟從祀)가 허락되었다. 그런데 한 대신이 불가하다고 이의를 주장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신우가 왕씨냐 아니냐의 여부는 당시의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몽주는 본시 신우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하물며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는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어짊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唐) 나라 황실을 회복하였는데, 몽주가 적공(狄公)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려 5백년의 종묘 사직이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종묘사직이 망해 버렸으니, 어찌 이 사람을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송도(松都)에 공의 옛 집터가 있었다. 신미년과 임신년 사이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숭양(崧陽)’이라 하여 공을 주사하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배사하였다. 서원이 완성되자 유사가 공의 신주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아뢰었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몽주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을 받겠는가. 비록 영의정의 추증이 있었다고는 하나 다만 ‘포은 선생’이라고만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후정쇄어(侯鯖瑣語)》○ 선조 계묘년(1603)에 공에게 제사를 내리는 제문에 고려 문하시중 충의백 정공지묘(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之廟)라고 쓰려고 하였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추증한 직함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또한 정공(鄭公)이라 칭함은 국가사제(國家賜祭)의 의식이 아닐 것 같으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옛적에 제왕이 선대 학자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신하의 예로써 대접하지 아니하고, 또 비록 한때 국사를 맡았던 신하라도 진실로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곧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신들은 다만 전하께서 어진 이를 받드는 아름다운 뜻을 이룩해 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광해(光海) 경술년(1610)에 공자묘정(孔子廟廷)에 종사하였다. 《전고(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고려 말에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였다. 그런데 공은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고 슬픈 정과 예를 함께 다하니, 나라에서는 가상히 여겨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석유(碩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및 공을 선발해서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고,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강설(講說)이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하였다.그래서 청강생들이 자못 의심하였는데, 뒤에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학설을 얻어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합치되므로 제유(諸儒)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이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 《명신록(名臣錄)》이색(李穡)이색은,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원 나라에 가서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하던 중국 과거의 하나)에 급제하여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고, 고려에서는 공민왕 계사년(1353)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시중 한산군(侍中韓山君)에 이르렀다.공양왕 기사년(1389)에는 장단(長湍)에 귀양가고 경오년(1390)에는 함창(咸昌)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고 임신년(1392)에는 금양(衿陽)에 귀양 갔다가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는데, 태조의 혁명 후에는 장흥(長興)의 벽사(碧沙)에 귀양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다.을해년(1395) 11월에는 들어와 태조를 뵙고 병자년(1396)에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 아래 연자탄(燕子灘)에서 죽으니, 《송와잡기(松窩雜記)》 태조가 한산군(韓山君)을 봉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 고려말에 공이 명 나라에 가니 명 태조가 불러 보았는데, 공의 얼굴이 못났음을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 노인 얼굴은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신우가 폐위되어 강화에 있을 때, 공이 미복(微服)으로 몰래 가서 뵈었다. 《송와잡기》○ 길재(吉再)가 공에게 거취에 대한 의리를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하다” 하였다. 길재가 이로 인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공에게 돌아갈 것을 고하니, 공이 그때 장단의 별장에 있다가 그에게 시를 주어 말하기를,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공양왕 때 공이 임금의 소명을 받고 귀양 간 곳에서 서울로 돌아와 태조를 잠저에 찾아가 뵈니, 태조가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올려 공에게 마시기를 청하자, 공이 사양하지 않고 흠뻑 마시며 즐겼는데, 사람들은 공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비방하였다. 후에 이씨 조에 들어와서 태조가 불러 편전(便殿)에서 만나고 갈 적에는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공의 두 아들 종학(種學)과 종덕(種德)이 다 고려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혁명 후에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다 매를 맞아 죽었다. 그 뒤 공이 여주(驪州)의 자기 집에 물러가 있을 때, 하루는 문생(門生)이 와서 뵙거늘 공이 깊은 골짜기에 데리고 들어가니 문생이 그 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전연 인적없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 가슴이 시원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 두 아들이 죽은 것을 상심한 것일 것이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에 송헌(松軒)이 국정을 맡았는데 나는 유리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어찌 이럴 줄을 알았으랴 / 夢裡何曾此事知 더구나 이정(二鄭 정총(鄭摠)과 정도전(鄭道傳)이 국가대사에 참여하였다 하니 / 二鄭况聞參大議 우리 가족은 어느 때 다시 모일꼬 / 一家完聚更何時 하였다. 송헌은 태조의 당호(堂號)이다. 태조가 공과 더불어 가장 친하고 의가 두터워서 평일에 많이 추천하여 주었으므로 앞 시의 첫째 둘째 구절에 말한 것이다. 《해동악부(海東樂府)》정총과 정도전은 공의 문인이면서 도리어 공을 배척하는 데 힘을 다하여 종학과 종선(種善)이 모두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식소록(識小錄)》 ○ 공의 시에 말하기를, 연복사 종 소리는 아직 울리지 않는데 / 演福鍾聲尙未鳴 이불 안고 꿇어 앉아 이 추운 밤을 지내도다 / 擁衾危坐度寒更 세월은 흘러흘러 이 한몸 노쇠해 병들었고 / 一身衰病乾坤老 만상(萬象)이 삼라(森羅)한데 일월이 밝았도다 / 萬象森羅日月明 저구(杵臼)가 조씨(趙氏) 후사를 보전할 뜻을 어찌 옮기랴 / 杵臼肯移存趙志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 축하하는 정을 속절없이 품고 있더라 / 華封空抱祝堯情 유유한 고금의 무궁한 일이 / 悠悠古今無窮事 조심스런 마음을 끌어내어 불평하게 하는구나 / 惹起愁腸作不平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뜻을 말한 시이다. 《월정만필(月汀漫筆)》○ 고려말에 포은은 원찬(袁粲)과 같고, 목은은 양표(楊彪)와 같고, 이 이외에는 논할 것이 없다. 《서애집(西崖集)》○ 공의 시에 말하기를, 인정이 어찌 사물의 무정함과 같으랴 / 人情那似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 /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 / 偶向東籬羞滿面 꽃은 진짜 국화인데, 사람은 거짓 도연명이다 / 眞黃花對僞淵明 하였으니, 이옹의 심사가 이 시에 다 담겨 있으니 슬프다. 《서애집》○ 임신년(1392)으로부터 을해년(1395)까지 한산(韓山)ㆍ여주(驪州)ㆍ오대산(五臺山)에 출입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공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1396) 5월에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에 피서하러 갔다가 배에 오르자 갑자기 죽었다. 태조가 뒤에 공이 죽은 원인을 의심하여 당시의 안찰사를 죽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정도전이 우현보와 오랜 감정이 있어서 공과 우현보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는데, 태조가 듣지 않았다. 뒤에 공을 불러서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흡족하게 즐기고 과전(科田) 품계에 따라 전답을 주는 것을 과전이라 한다. 과 미두주육(米豆酒肉)을 주면서 말하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마땅히 다시 주육으로 기운을 보양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그때에 공이 불도를 닦아 주육을 금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또 재목과 기와를 주면서 거처할 집을 지으라 하고 얼마 있다가 한산군(韓山君)으로 삼았으며, 잇달아 명하여 의성(義城)ㆍ덕천(德泉) 등의 오고 도제조(五庫都提調)로 삼았다. 《용비어천가》 ○ 왕씨가 망한 뒤, 사람들이 다만 포은과 야은(冶隱)만 대절을 이룬 줄 알고 목은이 수절한 줄은 모르니, 애석하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을 불렀는데, 공이 태조를 만날 적에 길게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아니하거늘, 태조가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 대접하였다. 조금 있다가 시강관이 차례로 열지어 들어오거늘, 태조가 도로 그 자리에 오르니, 공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 하였다.태조가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노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 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망국의 대부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 하고, 드디어 나가 버렸다. 세상에 전해 오는 공의 사인(死因)이 애매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나, 포은에 부끄럽지 않다고들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태종조 때 명 나라의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돌아갈 적에, 공의 자손이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에 비명(碑銘)을 구했는데, 신묘년 태종 11년 에 맹헌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역에게 주어 보냈다. 그 글에, “공양왕이 즉위하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려서 탄핵하여 장단으로 귀양보냈다” 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태종이 이것을 보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진연이 어떻게 이색이 행한 일을 알아서 상세하게 이것을 서술했겠는가.옛날에 우리나라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중국과 틈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통역은 어째서 사사로이 맹헌과 내통했는가. 불러다가 문책하라.” 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이 공의 자손이 중국인과 사통한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태종이 좇지 않았다. 간원이 또 공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종선은 자기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였다. 간원에서 또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비명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렸다’고 썼으니,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까. 비명에 또 ‘경오년(1390) 5월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를 명 나라에 보냈다고 모함하여 공 등 30인을 청주에 가두고 장차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관사가 다 물에 가라앉고 문사관(問事官)이 나뭇가지에 올라가 간신히 화를 면하니,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썼으니, 윤이와 이초가 명 나라에 고자질한 것은 이미 명 나라로부터 분명히 전달된 말이 있는데 모함이라고 이를 수 있으며,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다 함은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이겠습니까. 수재는 이색이 과연 주공(周公) 같은 덕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또 비명에, ‘임신년 7월에 우리 상왕(태조)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을 모함하여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다’고 썼으니, 신들이 생각하건대, 태조가 본래 나라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라 고려의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거늘, 이색이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불칙한 화가 미칠 뻔 하였는데 어찌 이색에게 죄가 없는데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하륜은 심문하여 법에 의해서 죄를 다스리고, 권근은 관(棺)을 베고 집터는 못을 만들고 가산을 몰수하여 뒷사람들에게 징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이에 하륜이 무릇 네 번이나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비명의 소위 공을 꺼리는 자라는 것은 남은(南誾)과 정도전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만일 집권한 신하들이 음모한 일들이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 등 6, 7명을 매질하여 죽인 일을 아마도 태조가 알았을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숭인과 종학의 사건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태조의 강명(剛明)하심으로써 창업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곧 헌사(憲司)에 명하여 숭인과 종학을 죽인 실정을 캐내어 보고하라 하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좇아서, 흥종은 종학을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목매어 죽이고, 거정은 숭인의 허리를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말 위에 가로로 실은 뒤 이웃 고을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거정과 흥종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기를 명하고, 태종이 이르기를, “흥종과 거정이 태조의 명령을 좇지 않고 권신의 사주를 받고서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여 태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무거운 형벌로 논죄하라.” 하였다.순금사에서 그들에게 사람을 출입시킨 죄를 적용하려 하였는데, 태종이 다시 “모살인(謀殺人)한 죄를 적용하라.” 하였다. 정부 및 삼공신(三功臣) 조영무(趙英茂)ㆍ한상경(韓尙敬)ㆍ정탁(鄭擢) 등이 아뢰기를, “그들은 실상 남은과 정도전의 계책을 좇은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그들이 범한 일은 종묘와 사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숭인과 종학을 위하여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이다.도전과 거정과 흥종은 폐하여 서민을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되, 은은 공이 높으니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길재(吉再)길재는, 자는 재보(再父)이며, 호는 야은(冶隱)이고,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아버지 원진(元進) 벼슬이 지금주사(知錦州事)에 이르다. 이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었을 때, 공의 어머니 김씨(金氏) 본관은 토산(兔山)이며, 희적(希迪)의 딸이다. 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공을 외가에 맡겨 두고 갔다. 공은 그때 나이가 여덞 살이었는데,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으며 남계(南溪)에 놀면서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노래는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준다.[鱉兮鱉兮 汝亦失母乎 吾亦失母矣 吾知其烹汝食之 汝之失母猶我也 是以放汝]” 하고, 물에다 던져주고 울부짖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와서 끌어 안고 감동하여 울었다. 계해년(1383)에 사마(司馬)에 오르고, 병인년(1386)에 과거에 급제하여 폐주(廢主) 창왕 기사년(1389)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다가, 공양왕이 다시 들어선 경오년(1390)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의 효도를 칭찬하였다.꿈에 어떤 중이 글 한 구절을 읊조리기를, “예와 지금의 동료들이 몸이 새로 변하누나.[古今僚友身新變]” 하거늘, 공이 이에 화답하여, “천지와 강산은 나의 친구들이다.[天地江山是故人]” 하고, 꿈에서 깨어 다시 시 한 수를 짓기를, “태극진군이 응당 나를 허락하여 줄 것이니, 인심(仁心)이 늙지 않고 스스로 청춘이로다.[太極眞君應許我 人心不老自靑春]” 하였다. 공은 여흥(驪興)에서 우왕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고 소식(素食)으로 3년상을 지냈다. ○ 과거에 태종이 잠저에 있으면서 태학에서 글을 읽을 적에, 공이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따르고 강론하여 매우 친밀하였다. 경진년(1400)에 태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과 함께 벼슬하지 않고 남아 있는 선비들을 논평하다가 이르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했는데 못본 지가 오래되었구나.” 하니, 공과 동향인인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이 태종에게 공이 가정에서 한 효행의 아름다움을 상세히 아뢰었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송도(松都)에서 벼슬할 때 또 노씨(盧氏)에게 장가드니 공의 어머니가 원망하였다. 공이 간하기를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남편과 부모가 비록 불의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르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의 변고는 성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다만 정당하게 처신할 것입니다.” 하니,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감동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하직하고 말하기를, “아버지께 오래 문안하지 아니하면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곧 자기 스승 박분(朴蕡)을 따라 송도에 갔다. 노씨가 간혹 자애롭지 않은 말을 하여도 공이 공경과 효도를 극진히 하니, 노씨가 감동하여 자기 소생처럼 대접하였다.공이 선산(善山)에 돌아갈 때에 어머니 김씨의 나이가 60여 세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보살펴서 이부자리를 몸소 펴고 개고 하였다. 처자가 이를 대신하고자 하면 공이 “어머니께서 지금 늙으셨으니 훗날에 어머니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려한들 할 수 없다.”고 말하니, 부인 신씨(申氏)가 이것을 본받아 몰래 자기 옷을 팔아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되, 그의 시어머니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삼군부(三軍府)에 명을 내려 통첩하여 불렀는데, 공이 굳이 거부하고 가지 아니하니 주관(州官)이 재촉하여 빨리 가라고 했다.공이 역마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태종이 정종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로 제수하였다. 공이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않고 이어 태종에게 상서하여 말하기를 “길재가 옛날에 저하(邸下)와 더불어 반궁(泮宮 태학관(太學館))에서 같이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 정의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길재는 신조(辛朝)에 급제하여 첫 벼슬을 하였다가 왕씨(王氏 공양왕)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 몸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옛정으로 부르시니 길재가 뵙고자 왔을 뿐이요, 벼슬하는 것은 길재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바꿀 수 없는 도이니 그 뜻을 빼앗기가 어렵다.그러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지만,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공이 드디어 상소하기를, “신이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조(辛朝)에 급제하여 문하 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하니, 신을 시골에 돌려 보내 주시어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노모를 잘 봉양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정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 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뒤에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으로서 세종에게 이르기를,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으니 참된 의사(義士)다. 듣건대, 그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서 등용하여 길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니, 드디어 그의 아들 사순(師舜) 맏아들 사문(師文)은 일찍 죽었다. 을 불러서 종묘 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공이 죽자, 나이 67세 부의(賻儀)로 쌀과 콩을 주고 또 장사에 역군을 보내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증직하였다. 《동각잡기》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종이 관인(寬仁)하고 도량이 커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아름다움이 참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와 숙제를 놓아 주고,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엄자릉(嚴子陵)을 보내 주는 것과 비록 세대는 다르나 일은 똑 같으니, 이것은 다 절의를 높이고 그의 뜻을 이루게 하여 백세의 높은 풍절(風節)을 격려하고 만세의 기강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귀정(龜亭) 남재(南在)가 감사가 되어서 공에게 시를 증정하기를 고려 오백 년에 홀로 선생뿐이니 / 高麗五百獨先生 일대의 공명(功名)을 어찌 영화롭다 하리오 / 一代功名豈足榮 늠름한 청풍이 천지에 부니 / 凜凜淸風吹六合 조선 억만 년에 길이 아름다운 소리로다 / 朝鮮億載永嘉聲 하였다. 당시 여러 공들이 모두 이 시에 화답하였다. 《명신록(名臣錄)》○ 공의 아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공이 사순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신하가 되어서 너는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명신록》○ 공의 병이 위독할 때에 부인 신씨(申氏)가 아들 사순을 부르자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임금과 아비는 동일하다. 사순이 이미 임금에게 갔으니 내 부고를 들은 뒤에 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명신록》○ 공은 상산(商山) 사성(司成) 박분(朴蕡)에게 나아가서 성리학을 들었고, 뒤에 이색ㆍ정몽주ㆍ권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항상 도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일삼으니, 중들이 감오(感悟)하여 근본(유교)으로 돌아온 자가 수십인 뿐만이 아니었다. 동생 길구(吉具)가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또한 깨달아서 유교로 돌아왔고, 경학이 있는 선비로 공의 문하에서 나온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명신록》○ 문종조(文宗朝)에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공에게 증직과 시호를 주기를 청하니 문종이 이르기를, “증직과 시호는 실상 헛된 형식에 불과하다.” 하고, 드디어 그 자손에게 벼슬을 줄 것을 명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남효온(南孝溫)이 금오산(金烏山)을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신조(辛朝) 주서 길 야은은 서리보다 차고 물보다 맑다.[辛朝注書吉冶隱 秀於嚴霜淸於水]” 하고, 또 말하기를,
명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의는 산보다 무거우니 / 命輕鴻毛義重山 공과 달가(達可)가 이 이치를 알리라 / 公與達可知此理 달가는 몸소 두 성(姓) 임금을 섬겼으니 / 達可身經二姓王 좋은 재목에 한치가 썩었고 거울 가운데 티가 있다 / 杞梓寸朽鑑中疵 공의 몸 맡긴 곳은 한 임금뿐이니 / 公身所委惟一君 진실로 알고 독특히 행함은 비할 이가 없도다 / 眞知獨行難與比 하였다. 공이 급제한 것은 우왕(禑王) 병신년이고, 주서가 된 것은 창왕(昌王) 기사년인데, 이해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니 그 이듬해 경오년에 공이 어머니가 늙은 것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러면 효온의 뜻은 공이 신조(辛朝)를 섬기다가 공양왕 섬기는 것을 부끄럽다는 이유로 물러갔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우왕이 신돈의 소생임을 세상 사람들이 많이 의심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에 대하여 몰래 국운을 옮긴 역적인데, 공이 이에 신하로 섬기는 것을 달게 여기고 도리어 왕씨가 반정(反正)하는 초에 그만 물러 가서 신씨(辛氏)를 위하여 한평생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면 그 진퇴가 어찌 근거 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이제 공을 논평하는 자가 우왕과 창왕의 일은 한 구석에 제쳐 놓고, 다만 공이 고려조의 근신(近臣)으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가서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은 것이 분명하게 된 것이니, 어찌 광명하고 정대한 것이 아니겠는가.그런데 반드시 포은을 끌어들여 한 임금을 섬겼느니 두 임금을 섬겼느니 하여 우열을 따지니, 효온은 여기에서 포은을 비방할 뿐 아니라 이에 야은도 비방하는 것이다. 야은은 벼슬이 낮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같이 망할 의리가 없으므로 기미를 보아 물러 갔고, 포은은 대신이라 한 몸에 국가의 중책을 맡은 까닭에 위기에 다달아 목숨을 바치고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것이니 두 사람의 일이 다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의 처신에서 쉽고 어려운 것을 말한다면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가는 참으로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우복집(愚伏集》○ 공의 거취를 논평하고자 할진댄, 먼저 공의 마음 속에 우와 창을 신씨(辛氏)라 하였느냐, 왕씨(王氏)라 하였느냐를 알아야 공의 거취의 득실을 의논할 수 있다. 만약 공이 조금이라도 우가 신씨라는 의심을 하였다면 공양왕을 섬기지 않은 그 마음으로 볼 때 어찌 우의 조정에서 벼슬하였겠는가. 《청야만집(靑野漫輯)》○ 손순효(孫舜孝)가 금오산(金烏山) 밑에 있는 공의 옛 처소에 가서 글을 지어 치전(致奠)하여 말하기를, “사당 밑에서 절하고 우러러 보니 거동과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네. 금오산과 낙동강 물은 어제와 같은데 선생을 생각건대 어디 계신고. 초황(蕉黃)과 예단(荔丹)을 올리오니 바라건대 영령(英靈)은 돌보소서.”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공의 손자 인종(仁種)이 타던 검정말이 죽자 후원에다 묻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부의 유풍이 있다.” 하고, 김종직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청백한 것은 참으로 자손에게 물려 줄 수 있구나.[淸白眞能遺子孫]” 하였다. 《점필재집(佔畢齋集)》서견(徐甄)서견은,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초명(初名)은 반(攽)이다. 고려 충렬왕 경인년(1290)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에 이르고, 김진양(金震陽)의 당에 연루되어 금천(衿川)에 물러가 있었다. 시를 짓기를, 옛 서울 송경(松京)이 아득한데 / 千載神都隔渺茫(一作漢江) 많은 충량한 신하들 밝은 임금 도왔네 / 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 있는고 / 統三爲一功安在 한(恨)되도다, 전조(前朝 고려)의 왕업이 길지 않은 것이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태종 임진년(1412)에 대신과 대간들이 그를 잡아다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니, 태종이 성을 내어 이르기를, “고려의 신하가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지어 사모하니, 이것은 정리가 그러한 것이다. 우리 이씨인들 어찌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겠는가. 만일 우리 이씨의 신하에 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칭찬할 일이다. 그만 두고 묻지 말라” 하였다. 뒤에 다시 죄 줄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태종이 이르기를, “서견은 고려의 신하인데 우리 집을 섬기지 아니하고 저의 임금을 추모하니 바로 백이와 숙제같은 사람이다. 칭찬할 만한 일이지, 죄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세종의 일이라 되어 있다.○ 선조조에 수찬 허봉(許篈)이 경연에서 아뢰어 표창하고 장려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 묘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고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동각잡기》 윤근수(尹根壽)가 선조께 아뢰어 충신의 무덤이라고 봉하였는데, 묘는 금천읍(衿川邑)에서 십 리 되는 번당(燔塘)에 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원천석(元天錫)원천석은, 자는 자정(子正)이며, 호는 운곡(耘谷)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문장이 부섬(富贍)하고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고려말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치악산(雉岳山) 밑에 은거하면서 한결같이 몸을 감추고 몸소 농사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다가 이름이 군적(軍籍)에 등록되자 부득이해서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단번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 이색 등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자주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면서 시국을 개탄하였다.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일찍이 글을 배운 일이 있었는데, 그가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동쪽 지방에 나갔다가 그 집을 방문하니 공은 피하고 보이지 않았다. 태종이 계석(溪石) 위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그의 아들 원형(元泂)에게 벼슬을 주어 기천(基川) 지금의 풍기(豐基)이다. 감무(監務)를 삼았다. 후대 사람이 그 돌을 ‘태종대(太宗臺)’라 이름지었다. 그 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여사제강(麗史提綱)》 《미수기언》○ 태종이 상왕이 되었을 때 특명하여 공을 부르니, 공이 흰 옷을 입고 와서 뵈었다. 궁중에 불러 들여 옛정을 말한 다음 여러 왕자들을 불러서 나와 보게 하고는 묻기를, “우리 자손들이 어떠하오?” 하였더니, 공이 세조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조부를 몹시 닮았으니, 아아 모름지기 형제를 사랑하라.”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공이 일찍이 야사(野史)를 지어서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채워두었다가 운명할 때 유언하기를, “마땅히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하고, 그 상자 겉에 글을 써서 말하기를,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 어떤 기록에는 ‘성인이 아니면 열지 말라’고 되어 있다.” 하였다. 그집에서는 이와 같이하여 아들과 손자 대(代)에서는 자물쇠를 열지 않다가 증손에 이르러 명절 제사를 지낼 때 종족이 모두 모여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조께서 비록 유언이 있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혐의 될 바가 없다.지금은 열어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열어 보았다. 그것은 고려말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사실 그대로 써서 꺼리어 감춘 것이 없었으므로 내용이 대부분 국사와 같지 않았다. 이에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우리 종족을 멸하는 물건이니 이미 이것을 본 이상 소문나지 않기가 어렵다.” 하고, 드디어 이것을 태워 버렸다. 《축수편(逐睡篇)》ㆍ《해동악부(海東樂府)》○ 공의 유고(遺稿) 두 권 중에 당시 사적을 후세에서 잘 알 수 없는 것을 직필한 것이 있는데, 신우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그 직필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이다. 그 시에 ‘주상전하(主上殿下 우왕(禑王))를 강화도에 옮기고 맏아들 창(昌)이 즉위했다는 것을 듣고 느낌이 있다’ 하는 제목으로 된 시 두 수에, 성현(聖賢 어진 군신)이 서로 만나 교체되니 / 聖賢相遇遞當時 천운이 순환함을 이로부터 알겠네 / 天運循環自此知 초야에 있는 몸 어찌 우국(憂國)의 뜻이 없겠나 / 田畝豈無憂國意 다시 간절한 충성 다하여 국가 안위 염려한다 / 更殫忠墾念安危 새 임금은 임조(臨朝)하고 옛 임금은 옮겨가니 / 新主臨朝舊主遷 소조(蕭條)한 강화도는 바람 연기뿐이구나 / 蕭條海郡但風煙 하늘의 바른 길을 누가 닫으랴 / 天關正路誰開閉 밝고 밝게 거울 되어 앞에 있음 보아라 / 要見明明鑑在前 하였다. 또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이 형을 받다’ 하는 제목으로 된 시 세 수에, 거울이[水鏡]이 빛을 묻고 주석(柱石)이 무너지니 / 水鏡埋光柱石頺 사방의 백성들 뉘 아니 슬퍼하리 / 四方民俗盡悲哀 빛나는 공업이 마침내 허물어져도 / 赫然功業終歸朽 확고한 충성은 죽어도 삭지 않으리 / 確爾忠誠死不灰 청사(靑史)에 행적이 기록되어 질(帙)에 찼는데 / 紀事靑編曾滿帙 가엾도다 벌써 흙으로 되었네 / 可憐黃壤已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 아래 / 想應杳杳重泉下 눈을 동문에 걸어도 분이 풀리지 않으리. / 掛眼東門憤未開 홀로 조정에 설 제 뉘 감히 범하리 / 獨立朝端無敢干 언제나 충의로써 어려움을 겪었구나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六道) 백성 희망 따라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三韓) 사직 편하게 했네 / 能致三韓社稷安 동렬(同列)의 영웅들은 낯짝도 두텁다 / 同列英雄顔更厚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은 죽기 전에 벌써 뼈가 차리 / 未兦邪侫骨猶寒 다시금 난이 일면 꾀할 이 누구일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용사(用事)하는 간인들이여 / 可笑時人用事奸 내 이제 부고 듣고 애시(哀詩) 지으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을 위한 슬픔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이라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天運)의 비(否)와 태(泰)를 뉘 알리오 / 天運誰能知否泰 나라 터전 안위는 아직 정하지 못했네 / 邦基未了定安危 날랜 칼날 부러지니 슬퍼한들 어쩌랴 / 銛鋒已折嗟何及 외로운 충성으로 나라를 지탱하지 못함이 한이로다 / 忠膽常孤恨未支 홀로 산하를 대하여 이 곡을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모두가 한숨이로다 / 白雲流水摠噫噫 하였다. 또, ‘금월 15일에 이미 정창군(定昌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고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 세 수에, 전왕 부자 서로 갈려 / 前王父子各分離 멀고 먼 하늘 가에 동에 있고 서에 있네 / 萬里東西天一涯 한 몸은 서인되게 할 수 있어도 / 可使一身爲庶類 이 내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조왕(祖王 고려 태조)의 맹세가 하늘에 닿아 / 祖王信誓應于天 남은 은택 흘러흘러 수백 년을 내려왔네 / 餘澤流傳數百年 왜 일찍이 진가(眞假)를 분간하지 못했던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푸른 하늘 거울처럼 밝게 비쳐 주네 / 彼蒼之鑑昭昭然 하고, 또 ‘나라에서 전왕 부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라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에,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이 임금의 은혜인데 / 位高是君恩 반달 동안 수치품고 이미 가문을 멸했네 / 半月含羞已滅門 온 나라가 큰 복을 머무르게 할 수 있나 / 一國豈能留景祖 구원(九原)에 맺힌 원한 씻을 길이 어렵구나 / 九原難可雪幽寃 고풍(古風)이 없어지니 때는 도리어 평안하고 / 古風鍾鼎淪喪時還泰 새 법이 청평(淸平)하니 도가 더욱 높으리 / 新法淸平道益尊 궁궐 향해 만세를 부르노니 / 且向玉墀乎萬歲 후한 은택 산촌에까지 베풀어 다오 / 願施優渥及山村 하고, 또 ‘한산군(韓山君)이 장단(長湍)에 귀양가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 두 수에, 하늘 보배(이색을 말한다) 빛 감추고 정령(政令)이 가혹하니 / 天寶韜光政令苛 학문 갈고 닦을 이 누가 있으리 / 有誰如琢復如마 요사이 사흘 밤 꿈에 뵈옵고 / 邇來夢謁連三夜 혼이 서로 만나 놀던 일 기억하며 노래 짓네 / 記取魂遊作一歌 나라의 경륜(經綸)은 불구덩에 들어가고 / 邦國經綸歸火澤 강물에 뜬 배는 풍파에 지쳤구나 / 江河舟楫困風波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하지 않는다면 / 天如未喪斯文也 역인(逆人)인들 우리에게 어찌하리오 / 縱有逆人奈我何 옥은 스스로 티가 없으되 일은 이미 거짓되었으니 / 玉自無瑕事已訛 형인(荊人)의 두 번 발 벰이 다른 이유 아니다 / 荊人兩刖定非他 해동의 풍월마저 분통을 머금고 / 海東風月應含憤 천하의 영웅들이 슬픔을 같이하리 / 天下英雄所共嗟 백성 다 같이 새 세상을 보는데 / 萬姓同瞻新日月 강산은 옛 모습 변함이 없구나 / 三韓自固舊山河 곡직을 밝게 아는 푸른 하늘 있으니 / 明知枉直蒼蒼在 자나 깨나 몸 편안하심 비나이다 / 寤寐祈傾體氣和 하였다. 시가 비록 꾸밈없이 수수하여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많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직필로서 숨긴 것이 없으니,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에 비하면 일성(日星)과 체동(螮蝀 무지개)과의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니다. 이 시를 읽으니 눈물이 두어 줄기 내리더라. 《상촌집(象村集)》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원 관찰사가 되어서 공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제문에 말하기를, “산에 고사리가 있으니 굶주림이 없을 것이요, 집에 거문고와 책이 있으니 스스로 즐길 수가 있을 것이다. 예물로 은근히 불러도 처사성(處士星)은 안온하였네. 천고에 빈 산중에 한 줄기 맑은 바람이구나.” 하였다. 《축수편(逐壽篇)》 ○ 지금 원주읍(原州邑) 동쪽 십 리 석경촌(石鏡村)에 운곡(耘谷)의 묘가 있다. 김진양(金震陽)김진양은, 자는 자정(子靜)이며, 본관은 계림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 공은 고려조의 충신이다. 그가 정도전을 탄핵한 소에 말하기를,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하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한다는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를 말한 것이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는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를 말한다. 만일 공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더라면 고려의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소가 들어감에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복합(伏閤)을 한 뒤에 겨우 조정에 내 놓았다가 다시 들여 갔으니,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대목을 볼 때에 기가 막히게 한다. 《상촌집》이숭인(李崇仁)이숭인은, 자는 자안(子安)이며, 호는 도은(陶隱)이고,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 정도전이 공과 더불어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재명(才名)이 서로 비등하였으나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도전이 불평을 품고 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도전은 권신이 되어 자기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공이 귀양간 고을에 수령으로 보내 매질하여 죽이게 하였다. 《상촌집》공이 과거에 정몽주의 당파라 하여 영남에 귀양갔었는데, 거정이 사자(使者)로 영남에 가서 하루 안으로 공에게 곤장 수백 대를 때린 뒤 묶어서 말 위에 얹어 수백 리를 달리게 하여 드디어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이것은 정도전의 뜻에 영합하려고 한 것이었다. 태종 때 거정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이었는데, 이숭인을 죽였다는 말을 위에 고한 이가 있었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 온 터이다.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었구나.” 하고, 드디어 훈작(勳爵)을 삭제하고 멀리 귀양보내어 거기서 죽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 ○ 심하도다, 소인의 마음 씀이여. 얼마 안 있어 도전이 방석(芳碩)의 난에 가담하여 몸과 머리가 갈라졌고, 거정도 역시 도전의 문객으로 태종에게 거슬려서 공훈이 삭제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손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이 허락하지 않아 회복되지 못하였다. 도전이 입은 화는 숭인보다 더 참혹하고, 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났다. 천도는 헛됨이 없으니, 뒤에 오는 소인들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 《상촌집》조견(趙狷)조견은, 자는 종견(從犬)이며, 초명(初名)은 윤(胤)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고려조에서는 벼슬이 지신안렴사(知申按廉使)였고, 조선에서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개국공신(開國功臣)평간공(平簡公)이었다. ○ 공이 고려조 재상으로 고려의 국운이 장차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청량산(淸涼山)에 은거하니, 그 형 조준은 조선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데 공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개국공신의 명부에 이름을 기록했더니 공이 받지 않았다.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니,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견(狷)’ 자(字)의 뜻을 취한 것이다.태조가 친히 청량산을 방문하여 벼슬을 주었는데, 끝내 받지 않고 죽을 임시에 자손에게 말하기를, “내 묘표(墓表)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벼슬을 기록하고 자손들은 새 조정에 벼슬하지 말라.” 하였다. 죽은 뒤에 조정에서 준 벼슬을 가지고 묘표를 세웠더니 하루는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깨뜨렸다. 현손(玄孫) 조부(趙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에 응했다. 명종(明宗) 임자년(1552)에 급제하여 부윤이 되었다. ○ 《후촌만록(後村漫錄)》 《평양조보(平壤趙譜)》○ 공은 형인 조준이 혁명에 가담할 뜻이 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벼슬한 집이 아닙니까.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존망을 같이 해야 합니다.” 하니, 조준이 아우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공을 잇달아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를 시켰다. 공이 시를 짓기를, 삼년 동안 두 번 영남루를 지나니 / 三年再過嶺南樓 은은한 매화 향기 나를 머물라 권하는구나 / 細細梅香勸少留 술 마시며 근심씻고 노년을 보낼 만 하니 / 擧酒消憂堪送老 평생에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 平生此外求不須 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기 전에 고려가 망하니, 공은 통곡하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갔다. 태조가 발탁하여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하고 글을 보내 부르니, 공이 답하기를, “송산(松山)의 고사리 캐기를 원할 뿐이요,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 이름을 견이라 바꾸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개는 그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두류산에서 청계산( 淸溪山)으로 옮겨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망경봉(望京峯)’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의 절개를 칭찬하고 손님과 주인의 예로써 만나자고 청하니 공이 나가 만났는데, 손을 올려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며, 할 말을 기탄없이 해 버렸다. 태조가 이런 것을 모두 용납하고 돌아갈 때 명하여 청계의 한 지역을 봉하여 주고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하였다. 또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공은 끝내 거처하지 않고 양주(楊州) 송산(松山)으로 옮겨가서 살며 스스로 호를 ‘송산’이라 하였다. 《평양지(平壤志)》안원(安瑗)안원은, 본관이 순흥(順興)이다.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물러나 나오지 않았다. 태조가 구도(舊都) 송도에 유후(留後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게 하여 그의 고려를 잊지 않는 뜻을 이루어 주고 시호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 공은 성질이 호상(豪爽)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이첨(李詹)이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는 반드시 안옹(安翁)일 것이다.” 하고 가 보니, 과연 공이 나무에 기대어 왼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손으로 《강목(綱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김주(金澍)김주는, 자는 택부(澤夫)이며, 호는 농암(籠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에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망한 것을 듣고 본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고려말에 하절사(賀節使)로 명 나라에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태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듣고 종에게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다만 이것을 가지고 표적을 삼아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고, 또 내가 도로 명 나라에 들어가는 날을 기일로 삼아라.” 하였다. 드디어 돌아서서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기를 청하니, 명 태조가 말하기를, “제왕이 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이 있으니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이어 묻기를, “너는 본국에서 무슨 벼슬에 있었느냐.” 하였는데, 공이 대답하기를 “예의 판서(禮儀判書)로 있었습니다.” 하니, 드디어 종신토록 상서(尙書)의 녹을 주었다. 공은 형초(荊楚 지금의 호남(湖南)ㆍ호북성(湖北省) 일대) 지방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았다. 임진에 명 나라 군사가 왔을 때에 유격장군(游擊將軍) 허씨(許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칭 공의 외손이라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해동악부(海東樂附)》○ 공이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부인에게 글을 주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면 가서 몸을 둘 곳이 없다.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 나라에 돌아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고, 장사 지낸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 하였다. 그 자손은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으니, 이 날은 바로 압록강에서 글을 보낸 날이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 가을, 명 나라에서 일본에 간 책봉사(冊封使)의 일행 중에 막하관(幕下官) 허유성(許惟誠)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유성(惟誠)은 복건인(福建人)이다.” 하였다.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동래(東萊)에 들려 사람들에게 자칭 공의 후예라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은 형초지방에서 장가들어 세 딸을 낳았는데 허씨는 그 사위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신곡(新谷)의 김씨(金氏)들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김씨의 본관이 선산(善山)이라는 것만 알고 신곡이 공이 살던 동리임을 알지 못하여 답을 못해 주었다. 그래서 후손은 끝내 유성과 서로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농암전(籠岩傳)》에 말하기를 “정승(政丞) 김응기(金應箕)는 이름난 사람이나 조선(祖先)을 밝게 드러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공의 7대손 유엽(有曄)의 말을 채택하여 유사(遺事)를 찬술했다.” 하였다. ○ 부윤(府尹)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대략 이와 같다.우리 태조가 임신년(1392) 7월 16일에 개국하고 한상질(韓尙質)을 사신으로 명 나라에 보냈는데 그 주문(奏文)에 말하기를, “우리 신하 조림(趙琳)이 예부의 자문을 받아 왔는데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바꾸었느냐. 빨리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그러면 상질이 명 나라 서울에 가기 전에 이미 조선의 개국을 알았고, 상질이 돌아온 것도 바로 이해이다. 공이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돌아왔다면 어찌 연말에 압록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태조의 개국을 들었을 리가 있겠는가.이것은 온 우주에 뻗치는 큰 충절인데 어찌 수백 년간 묻혀서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으며, 문대공(文戴公) 김응기의 시호등 여러 자손이 비록 유명(遺命)을 따라 지문과 묘갈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을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엽(有曄)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까. 일본에 책봉사(冊封使)가 간 것이 을미년(1595) 겨울이었는데 유엽은 정유년(1597) 가을이라 하니, 십여 년 전의 일도 혼란하여 이같이 사실과 다른데 어찌 수백 년 전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우현보(禹玄寶)우현보는, 자는 원공(原功)이며,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 공민왕 때 그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나아가고, 우왕 12년에는 조민수(曹敏修)ㆍ장자온(張子溫)ㆍ하륜(河崙)과 함께 사은사(謝恩使)의 사명을 띠고 원 나라에 갔다. 창왕 2년에 김저(金佇)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여흥(驪興)에 가서 폐왕 신우를 만나고 몰래 정몽주와 더불어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하여 낭관들이 복합(伏閤)하여 죄주기 청했는데, 창왕은 듣지 않고 관직만을 파하였다가 얼마 뒤에 판삼사사로 삼았다.공양왕이 즉위함에 공이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사건에 관련이 있다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사면하여 지방에 마음 편하게 가 있게 하였는데, 대성(臺省)이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철원(鐵原)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그후 얼마 있다가 다시 불러서 그 관직에 도로 복직시켰다. 정몽주가 죽자 공은 경주(慶州)로 귀양갔고, 그 이듬해에 고려가 망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에 태조가 공신의 작호(爵號)를 주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조는 특별히 공에게 후사하고 옛친구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단양백(丹陽伯)에 특진시켰다. 그해에 공이 죽었는데,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묘는 고장단(古長湍) 동쪽 20리 금곡(金谷)에 있다.조신충(曹信忠)조신충은 본관이 창녕이다. 우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 이숭인(李崇仁)ㆍ이색ㆍ하륜과 친하게 사귀었다. 우왕과 창왕이 연달아 폐위되자, 공은 스스로 불안을 느껴 영천 창수면(永川滄水面)에 가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하륜이 수상으로 있을 때 공에게 장수의 재능이 있다 하여 천거하였는데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태조 5년에 강계도 병마사 겸 판희천군사(江界道兵馬使兼判熙川郡事)로 제수하였다. 한번 서울에 왔다가 잠깐 뒤에 물러갔으니, 이색과 거취(去就)를 같이 하였다. 아들 상치(尙治)가 정시(庭試)에서 장원하였는데, 태종이 눈여겨 보면서 이르기를, “네가 왕씨의 신하 조신충의 아들이냐?” 묻고, 곧 정언 벼슬을 주니 사대부가 영광스럽게 여겼다. 《취원당 조광원 수록(聚遠堂曹光遠手錄)》공이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전조(前朝) 재상의 아들로서 과거에 올라 녹을 먹었으니 마땅히 수절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절의를 지킬 것이나, 너는 나라가 바뀐 뒤에 났으므로 스스로 숨어 살 의리가 없으니, 힘쓰라.” 하였다. 상치가 뜻을 굽혀 상경하여 세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상치유사(曹尙治遺事)》 이고(李皐)이고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공민왕 갑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고려 말엽에 물러나 수원(水原)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스스로 망천(忘川)이라 호를 지었으니, 세념(世念)을 잊는다는 뜻이었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소락(所樂)이 무엇인가 물으니 공이 자기가 사는 산천의 훌륭한 경치를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가운데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태조가 즉위하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경기 안렴사(按廉使)로 제수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공이 거처한 곳을 그리게 하여 이것을 보고 이름을 ‘팔달산(八達山)’이라 지었다. 세종조에 석비(石碑)를 특별히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 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여덟 사람의 학사를 세상에서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공은 조견(趙狷)ㆍ이집(李集)과 함께 그 중의 삼학사(三學士)로서 서로 살던 곳이 가까워 때때로 소를 타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조견은 청계산(淸溪山)에 숨고 이집은 둔기리(遁機里)에 숨었다.이집(李集)이집은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신돈의 미움을 사게 되자, 자기 아버지를 업고 남쪽으로 피해 가서 천녕현(川寧縣)에 숨어 살며 나오지 않았다. 김자수(金自粹)김자수는 자는 순중(純仲)이며, 호는 상촌(桑村)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이 고려 도관찰사(都觀察使)였다. 안동(安東)에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있고 그의 효자비가 있다. ○ 태조가 왕위에 오른 당초에 공이 전부터 그와 친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등용하려고 헌장(憲長)으로써 불렀으나, 공은 아무 말없이 누워만 있었다. 태종이 또 형조 판서로 부르자, 공은 자기 집 사당에 영결(永訣)하고 아들에게 흉구(凶具)를 가지고 뒤따르라 명하고 바로 그날로 길을 떠났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 절명사(絶命詞) 두 구절을 지었는데 말하기를,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 하고, 드디어 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래 추령이라 하는 고장은 포은 정몽주를 장사한 땅이다. 《용재수선총기(慵齋搜善總記)》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우천(愚川) 정식(鄭侙)의 《상촌사적변(桑村事蹟辨)》에 말하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 관찰(金觀察)의 이름 아래 ‘사본조(仕本朝)’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여지승람》을 지은 것은 광릉(光陵) 즉 세조 때의 일이니, 국초(國初)로부터 시대가 그다지 멀지 아니하여 김 관찰이 자결하여 죽던 일이 비록 은미하였다 하더라도, 당시에 반드시 그 사실을 들어 안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에 다만 본조에서 벼슬했다고만 기록한 것은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태조가 처음 나라를 세우던 날부터 따르던 사람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던 때에, 기밀(機密)에 협찬했던 사람들은 모두 재주 있고 뛰어난 인물이었다.집현전과 예문관에서 붓을 잡은 이와 문청(文廳)의 총재(摠裁)된 자들이 모두 세조의 거사에 협력했던 무리들이 아니면 곧 태조에게 붙었던 이들의 자손들이다. 비록 정치 정세에 편승하여 공명(功名)을 세웠으나, 그들도 명분과 의리가 귀중한 것임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또한 어찌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전 시대의 절의 있는 선비에 대해서도 오히려 자신은 그보다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시대의 절의 있는 선비로서 이름이 숨겨진 분에 대하여 어찌 숨은 빛[幽光]을 빛나게 하고 잠긴 덕[潛德](《여지승람》에 김자수가 절의에 죽은 사실을 그대로 쓰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겠는가.” 하였다. 《경주김씨보》 송유(宋愉) 다음의 네 사람은 모두 경주 김씨 족보에 나타나 있는데, 그들을 모두 고려조의 충절(忠節)이라 기록하였다.송유는 자는 이숙(怡叔)이며, 호는 쌍청당(雙淸堂)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벼슬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이었는데, 고려가 망한 뒤 회덕(懷德)에 내려가 숨어 살았다. 허도(許棹)허도는 호는 경암(擎庵)이며, 고려조 때 진사였다. 허금(許錦)허금은 자는 재중(在中)이며, 호는 야당(埜堂)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고려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냈다. 이양중(李養中)이양중은 자는 자정(子精)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고려조 때 형부(刑部)의 좌참의(左參議)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숨어 살았다. ○ 태조가 잠저 때의 친한 벗이었던 까닭에 불렀더니, 야인(野人)의 옷차림으로 거문고를 들고 술잔을 바쳤다.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박유(朴愈)박유는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고려조 때 한림(翰林)으로 나아가서 남평 감무(南平監務)가 되었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임존(任存) 지금의 대흥(大興)이다. 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다. 그 자손은 양대(兩代)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사(府使) 규세(奎世)의 선조이다. 《후촌만록(後村漫錄)》윤충보(尹忠輔)윤충보는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안성군수(安城郡守)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죽음을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고 스스로 호하여 ‘고려 처사’라 하였다. 날마다 높은 산에 올라가 송도를 바라보며 향불을 피우고 꿇어 앉아 절하기를 종신토록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왕망현(王望峴)’이라 불렀다.처음 숨어 살기 시작할 때에, 황새 한 떼가 주위에 모여왔었기 때문에 ‘한곡 선생(鷳谷先生)’이라고 칭호하게 되었고, 집 가까이 있는 산 이름을 율리(栗里)라 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언으로 훈계하기를 비를 세우지 말고 무덤의 형식을 고려의 제도에 따라서 하도록 일렀다. 이택지(李擇之)ㆍ이식(李植)ㆍ신광한(申光漢)ㆍ이성중(李誠中)ㆍ김귀영(金貴榮)의 문집(文集). 여주(驪州) 인사들이 여러번 이존오(李存吾)의 서원(書院)에 배향하도록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부록 두문동(杜門洞)고려가 망한 때에 한 동네가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문을 닫고 절의를 지켰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두문동’이라 하였다. 이의(李倚)는 본관이 부평(富平)이다. 고려조의 세신(世臣)으로서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새 조정에서 그가 신하 노릇하지 않는다고 죄를 주어 부평 자연도(紫煙島)로 귀양 보내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부평이씨가승(富平李氏家乘)》 고려말의 여러 신하를 논함성조(聖祖 태조)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새 나라를 세울 때에 백성들이 귀의하고 시장과 가게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열렸으며 조정에는 벼슬의 반열이 여전하였다. 한양의 벼슬아치는 모두가 송도의 옛 신하들이었으니, 새 조정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찌 그들을 포용하는 큰 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왕씨로서 그들을 논평한다면, 그들은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들이었으니, 만일 《춘추(春秋)》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반역의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그 중에도 정상이 가증한 자는, 곧은 체하며 모략을 한 윤소종(尹紹宗), 임금을 협박하던 남은(南誾), 일을 만들어 낸 정도전(鄭道傳), 거짓 명성[僞名]의 권근(權近)등이며, 허옇게 머리털이 센 성석린(成石璘)은 간사한 소인에게 요리조리 붙고, 불량배인 조영규(趙英珪)는 충신인 재상[정몽주]을 쳐죽였으니, 왕씨 조상의 혼령이 있다면 명명(冥冥)한 가운데 그들에게 내리는 벌이 없을까. 과연 남은과 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 함께 극형을 받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보복이다. 《상촌휘언(象村彙言)》○ 신우 때에 윤소종이 간관이 되어 신우의 과실을 말할 적에, 바로 대고 배척하여 조금도 여지가 없어서 죄를 낱낱이 헤아리는 듯하였으니, 이 얼마나 곧은 말인가. 그러나 한(漢) 나라 곡영(谷永)이 권신의 죄는 덮어 주고 오로지 임금과 공격하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어 제 손바닥과 다리 사이에서 놀렸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참으로 충성으로 곧은 말을 한 자라면 어찌하여 버젓이 두 임금을 섬겼겠는가. 《상촌휘언》○ 고려말에 현자들이 화를 입게 된 것은 몇 가지 까닭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목은(牧隱)의 일(신우가 폐위될 때에 그 아들 신창을 세우기를 주장한 것)을 가리킬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명 나라에서 “왕씨가 아닌 이성(異姓 우(禑)ㆍ창(昌))을 세웠다고 말썽이 있었던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신창을 세운 것은 정당한 일이었으며, 참으로 대신이 할 도리였다. 또 명 나라에서 무슨 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은 명 나라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곧 그 당시 다른 딴 마음을 가진 자들이 꾸며서 저희가 선창하고 저희가 화답하여 무슨 귀신의 말처럼 된 것이다. 일이 왕위의 폐위에 관계되므로 사람들이 감히 입을 떼지 못하였으니, 이때보다 더 지독하고 심한 모략은 없었다 하겠다. 비록 천명이 이씨에게 돌아와 간사한 권신들의 손을 빌려 조선개국의 기운(機運)을 열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충성스런 현인들이 무함(誣陷)을 당한 일은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니, 지극히 개탄할 일이다.” 《상촌휘언》○ 개국한 후에 정부에서 여러 재상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전조(前朝)의 재상으로 신조(新朝)에서 벼슬 사는 자들이었다. 기생 설매(雪梅)는 재주와 용모가 남달리 뛰어나고 음행을 매우 즐겼다. 정승이 취하여 희롱하기를, “네가 아침은 동쪽 집에서 먹고, 저녁에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고 들었는데, 이제 나를 잠자리에 모셔라.” 했다.설매가 대답하기를,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이 천한 몸으로 왕씨(王氏)를 섬기다가 이씨(李氏)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어찌 꼭 합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정승은 낯이 붉어 머리를 숙이고,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였으며, 혹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한거만록(閑居漫錄)》
[주D-001]관례(冠禮) : 남자가 장성하여 관(冠) 을 쓰는, 즉 성인이 되는 예식.[주D-002]문묘종사(文廟從祀) : 공자묘에 배향하는 것.[주D-003]중도부처(中途付處) : 옛날 벼슬아치에게 준 형벌의 한 가지인데,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을 말함.[주D-004]저구(杵臼) 가 …… 뜻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의 귀족인 조씨(趙氏) 가 반대당에게 몰려 멸망을 당할 무렵, 조씨의 부하인 공손저구(公孫杵臼) 가 조씨의 유복자를 몰래 길러서 조씨의 후사를 이었다.[주D-005]화봉인(華封人) : 화(華)는 지명으로서 화에 봉함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요 임금 때에 화봉인이 요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를 축원하였다.[주D-006]원찬(袁粲) : 중국 남북조 시대 때 송(宋) 나라에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충신.[주D-007]양표(楊彪) : 한말(漢末)의 대신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비록 죽지는 못하였으나, 조조(曹操)에게 굽히지는 않았다. 그의 아들 양수(楊修)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고사에, 목은의 아들이 이성계의 당인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이에 비유하였다.[주D-008]금고(禁錮) : 벼슬의 길을 막아 등용하지 않는 것.[주D-009]초황(蕉黃) 과 예단(荔丹) : 당 나라의 한유(韓愈) 가 지은 유후 라지묘(柳侯 羅池廟) 의 비문에서 제물을 가리켜 한 말인데, 초황은 파초 열매[바나나]이고, 예단은 여지(荔支) 이다.[주D-010]청사(靑史) : 옛날 종이가 없었던 시대에 푸른 대나무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청사라고 함.[주D-011]눈을 …… 않으리 : 오(吳) 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임금에게 간하다가 임금이 듣지 않고 죽이자, 그가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눈을 빼서 동문에 걸어 두어라. 오 나라 망하는 꼴을 보리라”고 한 고사.[주D-012]형인(荊人) 의 …… 벰 : 옛날 초(楚 : 剕) 나라에 변화(卞和) 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박(璞 : 옥이 박힌 돌)을 얻어 초왕에게 드렸더니 옥이 박히지 않은 돌이라 하여 형벌로 발을 베었다. 변화는 다음 왕에게 또 드렸더니 또다시 발을 베는 형벌을 받았다는 고사.[주D-013]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이나 유생이 대궐 합문(閤門) 밖에서 엎드려 청하는 것.[주D-014]강목(綱目) : 주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인데, 춘추의 필법을 따라서 역사상의 인물을 포폄한 글이다.[주D-015]대성(臺省) : 고려 시대의 어사대(御史臺) 와 문하성(門下省) 또는 사헌부와 문하부(門下府)를 아울러 이르는 말.[주D-016]흉구(凶具) : 초상과 장사 때에 쓰는 기구.[주D-017]율리(栗里)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곳. [주D-018]춘추(春秋) : 공자가 엮은 노국(魯國) 의 역사인데, 대의명분(大義名分) 으로 포폄한 경전.안 되어 각각 복구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율목(栗木)ㆍ동사힐(冬斯肹)ㆍ율진(栗津)ㆍ부림(富林)ㆍ부안(富安)ㆍ과주(果州). 【성씨】 본현 손(孫)ㆍ이(李)ㆍ전(田)ㆍ신(愼)ㆍ안(安)ㆍ변(邊)ㆍ최(崔). 【형승】 산은 관악(冠岳)과 연하고, 물은 청계(淸溪)로 흘러간다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산은 관악과 연하여 평야를 둘렀고, 물은 청계로 내리어 큰 하수로 들어간다.” 하였다.【산천】 관악산(冠岳山) 현 서쪽 5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 淸溪山) 현 동쪽 8리 지점에 있는데, 일명 청룡산(靑龍山)이다. 수리산(修理山)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노량진(露梁津)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한강(漢江)의 하류이다. 공수천(公需川) 현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다. 인덕원천(仁德院川) 현 남쪽 14리 지점에 있다. 학고개천(鶴古介川) 현 서쪽 19리 지점에 있다.【학교】 향교(鄕校)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다.【역원】 양재역(良才驛)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에는 양재(楊梓)라고 일컬었는데, 현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본도를 찰방(察訪)한다. 예속된 역참이 열 둘인데, 낙생(樂生)ㆍ구흥(駒興)ㆍ금령(金嶺)ㆍ좌찬(佐贊)ㆍ분행(分行)ㆍ무극(無極)ㆍ강복(康福)ㆍ가천(加川)ㆍ청호(菁好)ㆍ장족(長足)ㆍ동화(同化)ㆍ해문(海門)이다. ○ 찰방은 1명인데, 종 6품(從六品)이며 다른 도(道)도 같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한 길 석양에 말에 맡겨 돌아가니, 가을 바람이 홀연히 일어나, 초 나라 사람이 슬프도다. 푸른 산과 푸른 물은 처량한 땅이요, 붉은 잎과 누른 꽃은 쓸쓸한 때로다. 시구(詩句)를 생각하니, 다만 머리 위의 따오기를 더하고, 형상을 잊었으니 어찌 꿈속의 삵을 기억하랴. 흰 구름이 시야에 들어오니, 돌아가는 흥이 흔들리네. 머리를 하늘 가에 돌리니 느끼는 생각이 배나 되네.” 하였다. 흑석참(黑石站)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좌도(左道)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속한다. 노량원(露梁院) 노량진 남쪽 언덕에 있다. 인덕원(仁德院)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현 북쪽 15리 저점에 있다. 오금원(吾金院) 현 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불우】 청계사(淸溪寺) 청계산에 있는데, 이곡(李穀)이 지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인규(趙仁規)의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청룡산(靑龍山) 밑 오래된 절 얼음과 눈에 끊어진 언덕이 들 계곡에 임하였도다. 단정히 남창(南窓)에 앉아 《주역(周易)》을 읽노라니, 종소리는 처음으로 움직이고 닭은 깃들이려 하네.”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돌 길은 1천 언덕에 궁진하였고, 향 연기는 한 방이 맑도다. 손은 와서 차 끓이기를 구하고, 중은 앉아 스스로 불경을 뒤적이네. 나무는 늙었으니 어느 해에 심었으며, 종은 쇠잔하니 밤 중의 소리로다. 공(空)을 깨달아 인사가 끊어졌으니, 높이 누워서 생이 없는 것을 즐거워하네.” 하였다. 백화사(百華寺) 청계산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절 방에 일찍이 속사(俗士) 오는 이가 없으니, 객중(客中)에 이것을 힘입어 오래 배회하네. 푸르고 푸른 묵은 잣나무는 창 앞에 곧게 서 있고, 희고 희게 갠 구름은 산 얼굴에 쌓였도다. 한 줌의 묘한 향기 사람의 참선 가운데 있고, 반(半) 처마 비낀 날에 학(鶴)이 날아 돌아오네. 살고 있는 중 본래 정회(情懷)가 게을러, 이끼가 쌍 사립에 껴도 낮에도 열지 않네.” 하였다. 관악사(冠岳寺) 관악산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절 집을 한가히 찾으니 해질 무렵이로구나. 중중한 바위 사이로 이끼 낀 사립이 멀리 보이네. 길은 묵은 산벽(山壁)에 둘렀으니 공중을 서려 오르고, 등 덩굴은 새 가지에 길었으니, 자리에 들어와 늘어졌도다. 뜰 나무는 고요하게 외로운 학의 꿈을 흔들고, 병풍 같은 구름은 나직하게 참선하는 중 옷 떨치네. 10년의 형설(螢雪)이 마침내 무슨 일인가. 산이 좋아도 일찍이 한 수(首)의 시가 없네.” 하였다. ○ 성간(成侃)의 유북암기(遊北岩記)에, “여름 6월에 나는 관악사에 더위를 피하여, 날마다 중들과 같이 산의 깊은 숲과 기기한 돌을 모조리 구경하고, 이 산의 기절하고 이상한 것은 모두 나의 소유라 하였다. 하루는 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산수를 싫도록 보았으나, 산의 북쪽을 연기가 가리켜 이상하게만 여기고, 실지로 구경하지 못하였는데, 왜 앞장서서 인도하지 않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산 북쪽은 숲이 더욱 깊고 돌이 더욱 높아, 길이 막혀서 끝까지 찾을 수 없네. 그러나 시험삼아 인도하리다.’ 하고 드디어 얽힌 덤불을 베고 먼저 서쪽 언덕에서 올라, 숲 사이로 행하여 들어가 꺾어져 북쪽으로 향하니 산 형세가 가파르게 솟았다. 더위잡고 기어오르다가 지치면, 손으로 칡덩굴을 붙잡고 쉬면서 가까스로 올라가니, 바위가 집 천장같이 되어 있고, 그 아래는 빙 둘려서 천 길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정신이 아찔하였다. 드디어 함께 두 다리를 뻗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조금 있다가 솔 바람 소리가 소슬하게 1만 구렁으로부터 불어오니, 무더운 더위는 머물지 못하였고, 아래에는 고기ㆍ새ㆍ풀ㆍ나무 따위 무성한 것과, 놀고 헤엄치는 것이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또 서쪽을 가리켜 바라보니, 큰 바다가 하늘에 닿아 구름과 안개가 희미하고 아득하며, 해가 바다에 들어가려 하니, 광선이 환하게 반사하여 붉은 것도 같고 푸른 것도 같으며 검은 것도 같고 흰 것도 같아서 형세가 기괴하였다. 아, 이 산에서 노닌 선비가 얼마며, 중은 얼마인데, 이 바위를 칭찬하여 말한 자가 없고, 다행히 나에게 스스로 드러나게 되었으니, 조물주가 나를 위하여 베풀어 놓은 것이 아닌가. 장주씨(莊周氏)의 말에, ‘큰 숲과 높은 산이 사람에게 좋은 것은 신(神)한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장주(莊周)가 한 이 말은 반드시 잘 안 말이 못 된다. 대개 사람이 세상에 처하니, 밖으로는 만가지 일이 모이고 안으로는 백 가지 생각을 경영하여, 기운이 막히고 뜻이 통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가, 산림의 큼과 시내의 좋음을 본 뒤에 솟은 산이 눈과 꾀하고, 샘 소리가 귀와 꾀하면, 지난번 가슴속의 막히고 뭉클하여 퍼지지 못하던 것이 사라지고 풀리어 남은 것이 없게 된다. 옛날의 산수의 도움을 얻은 자가, 어찌 장주의 말을 족히 믿으랴.” 하였다.관음사(觀音寺) 관악산에 있다. ○ 변계량의 시에, “관악산 남쪽, 청계산 북쪽에 절집이 우뚝하여 긴 숲을 눌렀네. 밤비에 고함 지르니 주린 호랑이가 부르짖는 듯하고, 해돋이에 조잘거리니 그윽한 새가 우는 듯하네. 구름이 창밑에서 나니 담장이 덩굴이 얽히고, 길이 돌 모퉁이로 도니 소나무 회(檜)나무가 우거졌도다. 멀리 생각하건대, 혜사(惠師)는 응당 잘 있을 것이고, 산 가운데서 밤마다 꿈에 서로 찾네.” 하였다. 송천사(松泉寺) 수리산(修理山)에 있다.【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성황사(城隍祠) 현 서쪽 3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의 북쪽에 있다.【총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묘(墓) 현 북쪽 동적리(同積里)에 있다.유정현(柳廷顯)의 묘 현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정역(鄭易)의 묘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성석인(成石因)의 묘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이승소(李承召)의 묘 현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열녀】 본조 봉금(奉今) 일수(日守) 예명(芮命)의 아내이다. 그의 남편이 나쁜 병을 앓으니, 손가락을 잘라 먹이어 병이 나았다. 일이 조정에 들리자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였다.《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뱅어[白魚]ㆍ게[蟹]ㆍ밤[栗]ㆍ백토(白土)ㆍ 잉어[鯉魚]. 【궁실】 행궁(行宮) 노량도(露梁渡)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이라 불렀으며, 나루 건너 행차할 때 여러 임금들이 멈추고 잠시 머물렀으므로 좌우에 배다리[舟橋]와 별장소(別將所)가 있었다.【방면】 현내(縣內) 끝이 5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남면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하서(下西) 서남쪽으로 끝이 25리이다. 상북(上北) 끝이 20리이다. 하북(下北)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진도】 동작진(銅雀津) 북으로 18리인데, 나루[渡] 위에는 모노리탄(毛老里灘)과 기도(棋島)가 있다. 노량도(露梁渡) 북쪽으로 20리인데 전에는 흑석진(黑石津)이라 칭했다.【사원】 민절서원(愍節書院) 숙종 신유년에 세웠고, 임신년에 사액하였다. 백팽년(朴彭年) 자는 인수(仁叟), 본관은 순천(順天)이며, 벼슬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성삼문(成三問)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승지(承旨)였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개(李塏) 자는 청보(淸甫), 호는 백옥(白玉)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벼슬은 직제학(直提學)이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유성원(柳誠源) 자는 태초(太初),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벼슬은 사예(司藝)였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하위지(河緯地) 자는 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벼슬은 예조 참판(禮曹參判)이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유응부(兪應孚) 자는 신지(信之), 본관은 기계(杞溪), 벼슬은 총관(摠管)이었으며,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이상 여섯 선비는 세조(世祖) 병자년에 화를 당하였는데, 숙종 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하였다. 노강서원(鷺江書院)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정축년에 사액하였다. 박태보(朴泰輔) 파주 편에 붙였다.○ 사충서원(四忠書院) 영조 을사년에 세웠고, 병오년에 사액하였다. 김창집(金昌集) 경도묘정(京都廟庭) 편에 보라. 이희명(李熙命) 자는 양숙(養叔), 호는 소재(疎齋),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벼슬은 좌의정,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조태채(趙泰采) 자는 유량(幼亮), 호는 이우당(二憂堂), 본관은 양주(楊州), 벼슬은 우의정이었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건명(李健命) 자는 강중(剛仲), 호는 한포재(寒圃齋), 본관은 완산(完山)인데, 벼슬은 좌의정이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묘소 창빈묘(昌嬪墓) 상북면(上北面)에 있다. 중종(中宗)조 때 창빈(昌嬪) 안씨(安氏)의 묘인데,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낳았다.
[주D-001]꿈속의 삵 : 증자(曾子)가 죽을 임시에 꿈을 꾸었는데, 살쾡이가 머리도 없이 뛰노는 것을 보고서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노래를 지은 일이 있는데, 그것을 잔형조(殘形操)라고 한다.[주D-002]형설(螢雪) : 진(晉) 나라의 차윤(車胤)이라는 사람은, 어렸을 때에 집이 가난하여 여름이면 반딧불을 수십 개 모아서 그 불빛에 비추어서 글을 읽었다 한다. 그 후에 손강(孫康)이라는 사람은 겨울밤에는 눈을 창가에 쌓아 놓고, 그 눈에 비추어 글을 읽어서 모두 후일에 영귀하게 되었으므로, 공부하는 것을 형설(螢雪)의 공(功)이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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