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18현 두문 72현 /고려에 절개를 지킨 신하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아베베1 2012. 10. 23. 17:33

 

 








  이미지 사진은 도봉산 정상부의 사진 2012.10. 19. 도봉산 산행시 담은 사진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고려에 절개를 지킨 여러 신하




정몽주(鄭夢周)


정몽주는,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고,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하였을 때에 난초 화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서 깨어나 공을 낳았다. 정축생 따라서 이름을 몽란(夢蘭)이라 하였다. 어깨 위에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가 흑룡이 동산의 배나무 위에 올라가는 꿈을 꾸다 놀라 깨어 나와 보니 바로 공이었다.그래서 이름을 또 몽룡(夢龍)이라 하였다. 관례(冠禮)하면서 지금의 이름 몽주로 고쳤다. 공민왕 경자년(1360)에 연달아 삼장(三場)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과에 뽑혀 벼슬이 시중 좌명공신 삼중대광 익양군 충의백(侍中佐命功臣三重大匡益陽君忠義伯)에 이르렀다. 이씨가 천명을 받자, 공은 절의에 죽었다. 그때 나이 56세였다. 태종이 권근(權近)의 청에 따라 그의 절의를 포상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리고 자손들을 등용하였다.
○ 처음에 공은 태조(太祖)의 인정을 가장 두텁게 받아 여러차례 태조의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갑진년(1364)에 태조가 병마사로서 삼선(三善)을 격퇴할 때에 공은 태조의 종사관이 되었고, 무오년(1378)에는 판도판서(版圖判書)로서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를 격퇴하였으며, 계해년(1383)에는 동북면 조전원수(東北面助戰元帥)로서 태조를 따라 정벌하는 데 나아갔다. 위화도 회군 후에는 태조가 자기와 함께 승진케 하여 상(相)이 되었다. 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제공(諸公)과 함께 자신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을 붙들려고 하였다.이때 태조의 공업(功業)은 날로 성하여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려 그 형세가 태조가 끝까지 남의 신하 노릇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공은 그 세력을 꺾고자 하여 은밀히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고하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배반하겠습니까.” 하였을 때,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혹 근거없는 모함을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의 음모가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공을 초청하였다.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城隍堂) 뒷담이 무너진들 또 어떠리. 혹은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또 어떠리’로 되어 있다. 우리도 이와같이 하여 안 죽으면 또 어떠리.” 하고 읊으니, 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읊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였다. 태종이 공의 뜻이 변할 수 없음을 알고 드디어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루는 공이 태조에게 문병을 핑계로 기색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에 전에 자주 가던 술친구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다.주인은 밖에 나가고 집에 없었으며, 뜰에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은 드디어 뜰 안으로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말하기를, “오늘 풍색(風色)이 매우 사납구나, 매우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마시고는 나왔다. 그 집 사람이 괴이쩍게 여겼더니, 얼마 있다가 정 시중(鄭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을 들었다. 공이 태조의 집으로부터 돌아올 때에 활을 메고 그 앞을 가로질러 가는 무부(武夫)가 있었다.공은 수행하는 녹사(錄事 의정부의 관속)에게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지거라.” 하였다. 녹사가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고, 재삼 따라오지 말라고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가다가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러 화를 입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함께 죽었다. 《해동악부(海東樂府)》. 당시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그 수행 녹사의 성명을 기억한 사람이 없어서 드디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
한강(寒崗) 정구(鄭逑)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묻기를, “조남명(曺南冥)이 일찍이 정포은(鄭圃隱)의 진퇴에 관하여 의심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에도 포은의 죽음은 자못 가소롭습니다. 공민왕조에 대신 노릇을 13년이나 하였으니 벌써 ‘불가하면 벼슬을 그만 둔다’는 옛 성현의 의리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으니, 생각건대 그가 신우를 왕씨의 출생으로 알았더라면 곧 다른 날 신우를 추방하는 데 자신도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신하로서 섬기다가 일조에 추방하고 살해하였으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입니까.만일 왕씨의 출생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여정(呂政)이 제위에 오름에 영(嬴)씨는 이미 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포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녹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추방되고 살해될 때는 공신까지 되고 다시 후일 다른 임금을 위하여 죽었으니, 저로서는 깊이 알지 못할 바가 있습니다.” 하였다. 퇴계가 답하기를, “정자의 말씀에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 없기를 구하여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 있기를 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였다.포은의 큰 절개는 천지에 경위(經緯)가 되고 우주에 동량(棟樑)이 된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서 말하기 좋아하고 남을 공박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남의 미덕을 이루어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이러니 저러니 하기를 마지 않으니, 그런 말은 매양 귀를 가리고 듣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퇴계집(退溪集)》
○ 공의 사당(祠堂)은 옛적에 영천현(永川縣)에 있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孫舜孝)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못하네. 오직 이익만을 좇아 고금의 사람들이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 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중종(中宗) 때, 조정에서 공의 문묘 종사(文廟從祀)가 허락되었다. 그런데 한 대신이 불가하다고 이의를 주장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신우가 왕씨냐 아니냐의 여부는 당시의 사람들도 또한 분명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몽주는 본시 신우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한 사람이 아닙니다.하물며 공양왕을 세우고 뒤에는 곧 죽음으로써 충절을 다하였으니, 그 어짊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를 섬기다가 마침내 당(唐) 나라 황실을 회복하였는데, 몽주가 적공(狄公)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지 않았는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고려 5백년의 종묘 사직이 한 사람의 몸에 달렸는데, 그 한 사람이 죽자 곧 종묘사직이 망해 버렸으니, 어찌 이 사람을 경솔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송도(松都)에 공의 옛 집터가 있었다. 신미년과 임신년 사이에 서원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숭양(崧陽)’이라 하여 공을 주사하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배사하였다. 서원이 완성되자 유사가 공의 신주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아뢰었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몽주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을 받겠는가. 비록 영의정의 추증이 있었다고는 하나 다만 ‘포은 선생’이라고만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후정쇄어(侯鯖瑣語)》
○ 선조 계묘년(1603)에 공에게 제사를 내리는 제문에 고려 문하시중 충의백 정공지묘(高麗門下侍中忠義伯鄭公之廟)라고 쓰려고 하였더니, 선조가 이르기를, “추증한 직함을 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또한 정공(鄭公)이라 칭함은 국가사제(國家賜祭)의 의식이 아닐 것 같으니, 참작해서 시행하라.” 하였다.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옛적에 제왕이 선대 학자를 대우함에 있어서는 신하의 예로써 대접하지 아니하고, 또 비록 한때 국사를 맡았던 신하라도 진실로 마음 속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라면 곧 이름을 부르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신들은 다만 전하께서 어진 이를 받드는 아름다운 뜻을 이룩해 드리고자 할 뿐입니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 광해(光海) 경술년(1610)에 공자묘정(孔子廟廷)에 종사하였다. 《전고(典故)》에 상세히 쓰여 있다.
○ 고려 말에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상을 당하면 모두 백일만에 탈상하였다. 그런데 공은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고 슬픈 정과 예를 함께 다하니, 나라에서는 가상히 여겨 공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축년(1361) 병란 거란의 난[契丹之亂] 이래로 학교가 황폐해졌는데, 공민왕이 새로 성균관(成均館)을 창건하고 석유(碩儒)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및 공을 선발해서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고, 이색(李穡)으로 대사성(大司成)을 겸하게 하였다. 공의 강설(講說)이 활발해서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월등하였다.그래서 청강생들이 자못 의심하였는데, 뒤에 운봉 호씨(雲峯胡氏)의 학설을 얻어보게 되자 공의 이론과 합치되므로 제유(諸儒)들이 탄복하였다. 이색이 칭찬하기를, “달가(達可)의 논리는 이치에 마땅하지 않음이 없도다.” 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 하였다. 《명신록(名臣錄)》


이색(李穡)


이색은,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이고,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원 나라에 가서 제과(制科 임금이 친히 문제를 내어 시험하던 중국 과거의 하나)에 급제하여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고, 고려에서는 공민왕 계사년(1353)에 급제하여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시중 한산군(侍中韓山君)에 이르렀다.공양왕 기사년(1389)에는 장단(長湍)에 귀양가고 경오년(1390)에는 함창(咸昌)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옥(淸州獄)에 갇히고 임신년(1392)에는 금양(衿陽)에 귀양 갔다가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는데, 태조의 혁명 후에는 장흥(長興)의 벽사(碧沙)에 귀양 갔다가 겨울에 돌아왔다.을해년(1395) 11월에는 들어와 태조를 뵙고 병자년(1396)에 여주(驪州)의 청심루(淸心樓) 아래 연자탄(燕子灘)에서 죽으니, 《송와잡기(松窩雜記)》 태조가 한산군(韓山君)을 봉하고 시호를 문정(文靖)이라 하였다.
○ 고려말에 공이 명 나라에 가니 명 태조가 불러 보았는데, 공의 얼굴이 못났음을 보고 희롱하여 말하기를, “이 노인 얼굴은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필원잡기》
○ 신우가 폐위되어 강화에 있을 때, 공이 미복(微服)으로 몰래 가서 뵈었다. 《송와잡기》
○ 길재(吉再)가 공에게 거취에 대한 의리를 물었더니 공이 말하기를,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만하다” 하였다. 길재가 이로 인하여 거취를 결정하고 공에게 돌아갈 것을 고하니, 공이 그때 장단의 별장에 있다가 그에게 시를 주어 말하기를, “나는 기러기 한 마리 하늘 높이 떠 있다.[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공양왕 때 공이 임금의 소명을 받고 귀양 간 곳에서 서울로 돌아와 태조를 잠저에 찾아가 뵈니, 태조가 기뻐하여 윗자리에 맞이하고 꿇어 앉아 술을 올려 공에게 마시기를 청하자, 공이 사양하지 않고 흠뻑 마시며 즐겼는데, 사람들은 공이 사양하지 않은 것을 비방하였다. 후에 이씨 조에 들어와서 태조가 불러 편전(便殿)에서 만나고 갈 적에는 태조가 반드시 중문까지 전송하였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공의 두 아들 종학(種學)과 종덕(種德)이 다 고려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혁명 후에 두 마음을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다 매를 맞아 죽었다. 그 뒤 공이 여주(驪州)의 자기 집에 물러가 있을 때, 하루는 문생(門生)이 와서 뵙거늘 공이 깊은 골짜기에 데리고 들어가니 문생이 그 사유를 알지 못하였는데, 전연 인적없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종일토록 통곡하고는 함께 나오면서 말하기를, “오늘에야 조금 내 가슴이 시원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아마 두 아들이 죽은 것을 상심한 것일 것이다. 공이 일찍이 지은 시에

송헌(松軒)이 국정을 맡았는데 나는 유리되니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어찌 이럴 줄을 알았으랴 / 夢裡何曾此事知
더구나 이정(二鄭 정총(鄭摠)과 정도전(鄭道傳)이 국가대사에 참여하였다 하니 / 二鄭况聞參大議
우리 가족은 어느 때 다시 모일꼬 / 一家完聚更何時
하였다.
송헌은 태조의 당호(堂號)이다. 태조가 공과 더불어 가장 친하고 의가 두터워서 평일에 많이 추천하여 주었으므로 앞 시의 첫째 둘째 구절에 말한 것이다. 《해동악부(海東樂府)》
정총과 정도전은 공의 문인이면서 도리어 공을 배척하는 데 힘을 다하여 종학과 종선(種善)이 모두 멀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식소록(識小錄)》
○ 공의 시에 말하기를,
연복사 종 소리는 아직 울리지 않는데 / 演福鍾聲尙未鳴
이불 안고 꿇어 앉아 이 추운 밤을 지내도다 / 擁衾危坐度寒更
세월은 흘러흘러 이 한몸 노쇠해 병들었고 / 一身衰病乾坤老
만상(萬象)이 삼라(森羅)한데 일월이 밝았도다 / 萬象森羅日月明
저구(杵臼)가 조씨(趙氏) 후사를 보전할 뜻을 어찌 옮기랴 / 杵臼肯移存趙志
화봉인(華封人)이 요(堯) 임금 축하하는 정을 속절없이 품고 있더라 / 華封空抱祝堯情
유유한 고금의 무궁한 일이 / 悠悠古今無窮事
조심스런 마음을 끌어내어 불평하게 하는구나 / 惹起愁腸作不平
하였으니,
이것은 공의 뜻을 말한 시이다. 《월정만필(月汀漫筆)》
○ 고려말에 포은은 원찬(袁粲)과 같고, 목은은 양표(楊彪)와 같고, 이 이외에는 논할 것이 없다. 《서애집(西崖集)》
○ 공의 시에 말하기를,

인정이 어찌 사물의 무정함과 같으랴 / 人情那似物無情
근래에는 닥치는 일마다 점점 더 불평이네 /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향함에 부끄러움이 낯에 가득 차니 / 偶向東籬羞滿面
꽃은 진짜 국화인데, 사람은 거짓 도연명이다 / 眞黃花對僞淵明

하였으니, 이옹의 심사가 이 시에 다 담겨 있으니 슬프다. 《서애집》
○ 임신년(1392)으로부터 을해년(1395)까지 한산(韓山)ㆍ여주(驪州)ㆍ오대산(五臺山)에 출입했는데, 태조가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여 공이 가고 싶은 곳에 가도록 맡겨 두었다. 병자년(1396) 5월에 태조에게 청하여 여강(驪江)에 피서하러 갔다가 배에 오르자 갑자기 죽었다. 태조가 뒤에 공이 죽은 원인을 의심하여 당시의 안찰사를 죽였다. 《기재잡기(寄齋雜記)》
정도전이 우현보와 오랜 감정이 있어서 공과 우현보 등을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는데, 태조가 듣지 않았다. 뒤에 공을 불러서 옛 친구의 예로 대접하고 술자리를 베풀어 흡족하게 즐기고 과전(科田) 품계에 따라 전답을 주는 것을 과전이라 한다. 과 미두주육(米豆酒肉)을 주면서 말하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마땅히 다시 주육으로 기운을 보양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그때에 공이 불도를 닦아 주육을 금하였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또 재목과 기와를 주면서 거처할 집을 지으라 하고 얼마 있다가 한산군(韓山君)으로 삼았으며, 잇달아 명하여 의성(義城)ㆍ덕천(德泉) 등의 오고 도제조(五庫都提調)로 삼았다. 《용비어천가》
○ 왕씨가 망한 뒤, 사람들이 다만 포은과 야은(冶隱)만 대절을 이룬 줄 알고 목은이 수절한 줄은 모르니, 애석하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공을 불렀는데, 공이 태조를 만날 적에 길게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아니하거늘, 태조가 자리에서 내려와 손님의 예로 대접하였다. 조금 있다가 시강관이 차례로 열지어 들어오거늘, 태조가 도로 그 자리에 오르니, 공이 벌떡 일어서면서 말하기를, “나는 앉을 곳이 없다.” 하였다.태조가 말하기를,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노니, 덕이 적고 우매하다고 해서 버리지 마오.” 하거늘 공이 말하기를, “망국의 대부는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못하오. 다만 마땅히 나의 해골을 가져다가 고산(故山)에 묻을 뿐이요.” 하고, 드디어 나가 버렸다. 세상에 전해 오는 공의 사인(死因)이 애매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나, 포은에 부끄럽지 않다고들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 태종조 때 명 나라의 태복 소경(太僕少卿) 축맹헌(祝孟獻)이 돌아갈 적에, 공의 자손이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이 지은 행장을 가지고 맹헌에게 부탁하여 중국에 비명(碑銘)을 구했는데, 신묘년 태종 11년 에 맹헌이 국자 조교(國子助敎) 진연(陳璉)이 지은 비명을 통역에게 주어 보냈다. 그 글에, “공양왕이 즉위하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려서 탄핵하여 장단으로 귀양보냈다” 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태종이 이것을 보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진연이 어떻게 이색이 행한 일을 알아서 상세하게 이것을 서술했겠는가.옛날에 우리나라 사신이 복서(卜筮)로 인하여 중국과 틈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통역은 어째서 사사로이 맹헌과 내통했는가. 불러다가 문책하라.” 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이 공의 자손이 중국인과 사통한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태종이 좇지 않았다. 간원이 또 공의 아들 종선(種善)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태종이 이르기를, “종선은 자기 어버이를 드러내고자 했을 뿐이니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였다. 간원에서 또 하륜(河崙)과 권근(權近)에게 죄 주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비명에 ‘집권자들이 공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것을 꺼렸다’고 썼으니,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입니까. 비명에 또 ‘경오년(1390) 5월에 윤이(尹彝)와 이초(李初)를 명 나라에 보냈다고 모함하여 공 등 30인을 청주에 가두고 장차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비가 내려 관사가 다 물에 가라앉고 문사관(問事官)이 나뭇가지에 올라가 간신히 화를 면하니, 청주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충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썼으니, 윤이와 이초가 명 나라에 고자질한 것은 이미 명 나라로부터 분명히 전달된 말이 있는데 모함이라고 이를 수 있으며, 준엄한 법으로 고문하여 죄를 만들려 하였다 함은 누구를 가리켜서 한 말이겠습니까. 수재는 이색이 과연 주공(周公) 같은 덕이 있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또 비명에, ‘임신년 7월에 우리 상왕(태조)이 즉위하자, 공을 꺼리는 자들이 공을 모함하여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다’고 썼으니, 신들이 생각하건대, 태조가 본래 나라를 차지하는 데 뜻을 둔 것이 아니라 고려의 왕실에 충성을 다하였거늘, 이색이 그 무리들과 더불어 태조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여 불칙한 화가 미칠 뻔 하였는데 어찌 이색에게 죄가 없는데 극형에 처하고자 하였겠습니까. 청컨대 하륜은 심문하여 법에 의해서 죄를 다스리고, 권근은 관(棺)을 베고 집터는 못을 만들고 가산을 몰수하여 뒷사람들에게 징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이에 하륜이 무릇 네 번이나 상서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비명의 소위 공을 꺼리는 자라는 것은 남은(南誾)과 정도전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만일 집권한 신하들이 음모한 일들이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고 하면,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 등 6, 7명을 매질하여 죽인 일을 아마도 태조가 알았을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숭인과 종학의 사건은 나도 모르는 일이다. 태조의 강명(剛明)하심으로써 창업한 초기에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곧 헌사(憲司)에 명하여 숭인과 종학을 죽인 실정을 캐내어 보고하라 하니, 과연 교서사(敎書使) 손흥종(孫興宗)과 체복사(體覆使) 황거정(黃居正)이 정도전과 남은의 지시를 좇아서, 흥종은 종학을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목매어 죽이고, 거정은 숭인의 허리를 매질하여 죽지 않으므로 말 위에 가로로 실은 뒤 이웃 고을로 말을 달려가게 해서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거정과 흥종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기를 명하고, 태종이 이르기를, “흥종과 거정이 태조의 명령을 좇지 않고 권신의 사주를 받고서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여 태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더럽혔으니, 마땅히 무거운 형벌로 논죄하라.” 하였다.순금사에서 그들에게 사람을 출입시킨 죄를 적용하려 하였는데, 태종이 다시 “모살인(謀殺人)한 죄를 적용하라.” 하였다. 정부 및 삼공신(三功臣) 조영무(趙英茂)ㆍ한상경(韓尙敬)ㆍ정탁(鄭擢) 등이 아뢰기를, “그들은 실상 남은과 정도전의 계책을 좇은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그들이 범한 일은 종묘와 사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숭인과 종학을 위하여 원수를 갚자는 것이 아니라, 천하 만세를 위한 계책이다.도전과 거정과 흥종은 폐하여 서민을 만들고 그 자손은 금고(禁錮)하되, 은은 공이 높으니 논죄하지 말라.” 하였다. 《국조보감》 《동각잡기》


길재(吉再)


길재는, 자는 재보(再父)이며, 호는 야은(冶隱)이고,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아버지 원진(元進) 벼슬이 지금주사(知錦州事)에 이르다. 이 보성대판(寶城大判)이 되었을 때, 공의 어머니 김씨(金氏) 본관은 토산(兔山)이며, 희적(希迪)의 딸이다. 가 따라가면서 박봉으로 생활이 어려우므로 공을 외가에 맡겨 두고 갔다. 공은 그때 나이가 여덞 살이었는데, 어머니를 사모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으며 남계(南溪)에 놀면서 석별가(石鱉歌)를 지었다. 노래는 “자라야 자라야 너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냐. 나도 역시 어머니를 잃었도다. 내가 너를 삶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 잃은 것이 나와 같으므로 너를 놓아준다.[鱉兮鱉兮 汝亦失母乎 吾亦失母矣 吾知其烹汝食之 汝之失母猶我也 是以放汝]” 하고, 물에다 던져주고 울부짖으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와서 끌어 안고 감동하여 울었다. 계해년(1383)에 사마(司馬)에 오르고, 병인년(1386)에 과거에 급제하여 폐주(廢主) 창왕 기사년(1389)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다가, 공양왕이 다시 들어선 경오년(1390)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의 효도를 칭찬하였다.꿈에 어떤 중이 글 한 구절을 읊조리기를, “예와 지금의 동료들이 몸이 새로 변하누나.[古今僚友身新變]” 하거늘, 공이 이에 화답하여, “천지와 강산은 나의 친구들이다.[天地江山是故人]” 하고, 꿈에서 깨어 다시 시 한 수를 짓기를, “태극진군이 응당 나를 허락하여 줄 것이니, 인심(仁心)이 늙지 않고 스스로 청춘이로다.[太極眞君應許我 人心不老自靑春]” 하였다. 공은 여흥(驪興)에서 우왕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듣고 소식(素食)으로 3년상을 지냈다.
○ 과거에 태종이 잠저에 있으면서 태학에서 글을 읽을 적에, 공이 한 마을에 살면서 서로 따르고 강론하여 매우 친밀하였다. 경진년(1400)에 태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과 함께 벼슬하지 않고 남아 있는 선비들을 논평하다가 이르기를, “길재는 강직한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같이 공부했는데 못본 지가 오래되었구나.” 하니, 공과 동향인인 정자(正字) 전가식(田可植)이 태종에게 공이 가정에서 한 효행의 아름다움을 상세히 아뢰었다. 아버지 원진(元進)이 송도(松都)에서 벼슬할 때 또 노씨(盧氏)에게 장가드니 공의 어머니가 원망하였다. 공이 간하기를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자식이 부모에 대하여 남편과 부모가 비록 불의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르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의 변고는 성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다만 정당하게 처신할 것입니다.” 하니,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 감동했다. 하루는 어머니에게 하직하고 말하기를, “아버지께 오래 문안하지 아니하면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곧 자기 스승 박분(朴蕡)을 따라 송도에 갔다. 노씨가 간혹 자애롭지 않은 말을 하여도 공이 공경과 효도를 극진히 하니, 노씨가 감동하여 자기 소생처럼 대접하였다.공이 선산(善山)에 돌아갈 때에 어머니 김씨의 나이가 60여 세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보살펴서 이부자리를 몸소 펴고 개고 하였다. 처자가 이를 대신하고자 하면 공이 “어머니께서 지금 늙으셨으니 훗날에 어머니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려한들 할 수 없다.”고 말하니, 부인 신씨(申氏)가 이것을 본받아 몰래 자기 옷을 팔아서 시어머니를 봉양하되, 그의 시어머니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하였다. 태종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삼군부(三軍府)에 명을 내려 통첩하여 불렀는데, 공이 굳이 거부하고 가지 아니하니 주관(州官)이 재촉하여 빨리 가라고 했다.공이 역마를 타고 서울에 이르니, 태종이 정종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로 제수하였다. 공이 대궐에 들어가 사은(謝恩)하지 않고 이어 태종에게 상서하여 말하기를 “길재가 옛날에 저하(邸下)와 더불어 반궁(泮宮 태학관(太學館))에서 같이 《시경》을 읽었는데, 지금 신을 부른 것은 옛 정의를 잊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길재는 신조(辛朝)에 급제하여 첫 벼슬을 하였다가 왕씨(王氏 공양왕)가 복위하자 곧 고향에 돌아가 몸을 마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옛정으로 부르시니 길재가 뵙고자 왔을 뿐이요, 벼슬하는 것은 길재의 뜻이 아닙니다.” 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바꿀 수 없는 도이니 그 뜻을 빼앗기가 어렵다.그러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지만, 자네에게 벼슬을 준 분은 상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공이 드디어 상소하기를, “신이 본래 한미(寒微)한 사람으로 신조(辛朝)에 급제하여 문하 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듣건대 여자는 두 남편이 없고 신하는 두 임금이 없다고 하니, 신을 시골에 돌려 보내 주시어 두 왕조를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게 하고 노모를 잘 봉양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정종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 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다.뒤에 세종이 즉위하자, 태종이 상왕으로서 세종에게 이르기를,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으니 참된 의사(義士)다. 듣건대, 그에게 아들이 있다 하니 마땅히 불러서 등용하여 길재의 충성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니, 드디어 그의 아들 사순(師舜) 맏아들 사문(師文)은 일찍 죽었다. 을 불러서 종묘 부승(宗廟副丞)에 제수하였다. 공이 죽자, 나이 67세 부의(賻儀)로 쌀과 콩을 주고 또 장사에 역군을 보내 주었으며, 뒤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증직하였다. 《동각잡기》
권근이 말하기를, “우리 태종이 관인(寬仁)하고 도량이 커서 절의를 포창하고 장려하는 아름다움이 참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백이와 숙제를 놓아 주고, 한 광무제(漢光武帝)가 엄자릉(嚴子陵)을 보내 주는 것과 비록 세대는 다르나 일은 똑 같으니, 이것은 다 절의를 높이고 그의 뜻을 이루게 하여 백세의 높은 풍절(風節)을 격려하고 만세의 기강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귀정(龜亭) 남재(南在)가 감사가 되어서 공에게 시를 증정하기를

고려 오백 년에 홀로 선생뿐이니 / 高麗五百獨先生
일대의 공명(功名)을 어찌 영화롭다 하리오 / 一代功名豈足榮
늠름한 청풍이 천지에 부니 / 凜凜淸風吹六合
조선 억만 년에 길이 아름다운 소리로다 / 朝鮮億載永嘉聲

하였다. 당시 여러 공들이 모두 이 시에 화답하였다. 《명신록(名臣錄)》
○ 공의 아들 사순이 조정에 불려갈 적에 공이 사순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에게 먼저 예의를 베푸는 것은 삼대(三代) 이후에 드문 일이다. 네가 초야에 있는데 임금이 먼저 부르니, 그 은의(恩義)가 범연(泛然)한데 비할 것이 아니다. 신하가 되어서 너는 마땅히 나의 고려에 향하는 마음을 본받아 너의 조선 임금을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명신록》
○ 공의 병이 위독할 때에 부인 신씨(申氏)가 아들 사순을 부르자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임금과 아비는 동일하다. 사순이 이미 임금에게 갔으니 내 부고를 들은 뒤에 오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명신록》
○ 공은 상산(商山) 사성(司成) 박분(朴蕡)에게 나아가서 성리학을 들었고, 뒤에 이색ㆍ정몽주ㆍ권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항상 도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을 일삼으니, 중들이 감오(感悟)하여 근본(유교)으로 돌아온 자가 수십인 뿐만이 아니었다. 동생 길구(吉具)가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또한 깨달아서 유교로 돌아왔고, 경학이 있는 선비로 공의 문하에서 나온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명신록》
○ 문종조(文宗朝)에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공에게 증직과 시호를 주기를 청하니 문종이 이르기를, “증직과 시호는 실상 헛된 형식에 불과하다.” 하고, 드디어 그 자손에게 벼슬을 줄 것을 명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남효온(南孝溫)이 금오산(金烏山)을 지나다가 시를 짓기를, “신조(辛朝) 주서 길 야은은 서리보다 차고 물보다 맑다.[辛朝注書吉冶隱 秀於嚴霜淸於水]” 하고, 또 말하기를,

명은 기러기 털보다 가볍고, 의는 산보다 무거우니 / 命輕鴻毛義重山
공과 달가(達可)가 이 이치를 알리라 / 公與達可知此理
달가는 몸소 두 성(姓) 임금을 섬겼으니 / 達可身經二姓王
좋은 재목에 한치가 썩었고 거울 가운데 티가 있다 / 杞梓寸朽鑑中疵
공의 몸 맡긴 곳은 한 임금뿐이니 / 公身所委惟一君
진실로 알고 독특히 행함은 비할 이가 없도다 / 眞知獨行難與比

하였다. 공이 급제한 것은 우왕(禑王) 병신년이고, 주서가 된 것은 창왕(昌王) 기사년인데, 이해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즉위하니 그 이듬해 경오년에 공이 어머니가 늙은 것을 이유로 하여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러면 효온의 뜻은 공이 신조(辛朝)를 섬기다가 공양왕 섬기는 것을 부끄럽다는 이유로 물러갔음을 말한 것이다. 대개 우왕이 신돈의 소생임을 세상 사람들이 많이 의심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려에 대하여 몰래 국운을 옮긴 역적인데, 공이 이에 신하로 섬기는 것을 달게 여기고 도리어 왕씨가 반정(反正)하는 초에 그만 물러 가서 신씨(辛氏)를 위하여 한평생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면 그 진퇴가 어찌 근거 없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이제 공을 논평하는 자가 우왕과 창왕의 일은 한 구석에 제쳐 놓고, 다만 공이 고려조의 근신(近臣)으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가서 종신토록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면 이는 두 성의 임금을 섬기지 않은 것이 분명하게 된 것이니, 어찌 광명하고 정대한 것이 아니겠는가.그런데 반드시 포은을 끌어들여 한 임금을 섬겼느니 두 임금을 섬겼느니 하여 우열을 따지니, 효온은 여기에서 포은을 비방할 뿐 아니라 이에 야은도 비방하는 것이다. 야은은 벼슬이 낮으니, 나라가 망한다고 같이 망할 의리가 없으므로 기미를 보아 물러 갔고, 포은은 대신이라 한 몸에 국가의 중책을 맡은 까닭에 위기에 다달아 목숨을 바치고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것이니 두 사람의 일이 다 중도(中道)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두 분의 처신에서 쉽고 어려운 것을 말한다면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가는 참으로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우복집(愚伏集》
○ 공의 거취를 논평하고자 할진댄, 먼저 공의 마음 속에 우와 창을 신씨(辛氏)라 하였느냐, 왕씨(王氏)라 하였느냐를 알아야 공의 거취의 득실을 의논할 수 있다. 만약 공이 조금이라도 우가 신씨라는 의심을 하였다면 공양왕을 섬기지 않은 그 마음으로 볼 때 어찌 우의 조정에서 벼슬하였겠는가. 《청야만집(靑野漫輯)》
○ 손순효(孫舜孝)가 금오산(金烏山) 밑에 있는 공의 옛 처소에 가서 글을 지어 치전(致奠)하여 말하기를, “사당 밑에서 절하고 우러러 보니 거동과 형상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네. 금오산과 낙동강 물은 어제와 같은데 선생을 생각건대 어디 계신고. 초황(蕉黃)과 예단(荔丹)을 올리오니 바라건대 영령(英靈)은 돌보소서.” 하였다.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공의 손자 인종(仁種)이 타던 검정말이 죽자 후원에다 묻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부의 유풍이 있다.” 하고, 김종직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청백한 것은 참으로 자손에게 물려 줄 수 있구나.[淸白眞能遺子孫]” 하였다. 《점필재집(佔畢齋集)》


서견(徐甄)


서견은, 본관은 이천(利川)이고, 초명(初名)은 반(攽)이다. 고려 충렬왕 경인년(1290)에 급제하여 벼슬이 장령에 이르고, 김진양(金震陽)의 당에 연루되어 금천(衿川)에 물러가 있었다. 시를 짓기를,

옛 서울 송경(松京)이 아득한데 / 千載神都隔渺茫(一作漢江)
많은 충량한 신하들 밝은 임금 도왔네 / 忠良濟濟佐明王
삼한을 통일한 공 어디 있는고 / 統三爲一功安在
한(恨)되도다, 전조(前朝 고려)의 왕업이 길지 않은 것이 / 却恨前朝業不長

하였다. 태종 임진년(1412)에 대신과 대간들이 그를 잡아다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니, 태종이 성을 내어 이르기를, “고려의 신하가 그 임금을 잊지 않고 시를 지어 사모하니, 이것은 정리가 그러한 것이다. 우리 이씨인들 어찌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겠는가. 만일 우리 이씨의 신하에 이 같은 사람이 있다면 칭찬할 일이다. 그만 두고 묻지 말라” 하였다. 뒤에 다시 죄 줄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태종이 이르기를, “서견은 고려의 신하인데 우리 집을 섬기지 아니하고 저의 임금을 추모하니 바로 백이와 숙제같은 사람이다. 칭찬할 만한 일이지, 죄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였다. 《동각잡기》 ○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세종의 일이라 되어 있다.
○ 선조조에 수찬 허봉(許篈)이 경연에서 아뢰어 표창하고 장려할 것을 청하니, 선조가 그 묘에 제사 지낼 것을 명하고 대사간을 증직하였다. 《동각잡기》
윤근수(尹根壽)가 선조께 아뢰어 충신의 무덤이라고 봉하였는데, 묘는 금천읍(衿川邑)에서 십 리 되는 번당(燔塘)에 있다. 《미수기언(眉叟記言)》


원천석(元天錫)


원천석은, 자는 자정(子正)이며, 호는 운곡(耘谷)이고,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문장이 부섬(富贍)하고 학문이 해박하였는데, 고려말의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치악산(雉岳山) 밑에 은거하면서 한결같이 몸을 감추고 몸소 농사지어 어버이를 봉양하다가 이름이 군적(軍籍)에 등록되자 부득이해서 과거를 보러 갔는데 단번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물러나 향리에 돌아와서 이색 등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자주 시를 지어 주고 받으면서 시국을 개탄하였다.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일찍이 글을 배운 일이 있었는데, 그가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이 동쪽 지방에 나갔다가 그 집을 방문하니 공은 피하고 보이지 않았다. 태종이 계석(溪石) 위에 내려와서 그 집 여종을 불러 음식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그의 아들 원형(元泂)에게 벼슬을 주어 기천(基川) 지금의 풍기(豐基)이다. 감무(監務)를 삼았다. 후대 사람이 그 돌을 ‘태종대(太宗臺)’라 이름지었다. 그 대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여사제강(麗史提綱)》 《미수기언》
○ 태종이 상왕이 되었을 때 특명하여 공을 부르니, 공이 흰 옷을 입고 와서 뵈었다. 궁중에 불러 들여 옛정을 말한 다음 여러 왕자들을 불러서 나와 보게 하고는 묻기를, “우리 자손들이 어떠하오?” 하였더니, 공이 세조를 가리켜 말하기를, “이 아이가 조부를 몹시 닮았으니, 아아 모름지기 형제를 사랑하라.” 하였다. 《해동악부(海東樂府)》
○ 공이 일찍이 야사(野史)를 지어서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굳게 채워두었다가 운명할 때 유언하기를, “마땅히 가묘(家廟)에다 감추어 놓고 조심조심 지켜라.” 하고, 그 상자 겉에 글을 써서 말하기를, “내 자손이 만일 나와 같지 않으면 열어 보지 말라. 어떤 기록에는 ‘성인이 아니면 열지 말라’고 되어 있다.” 하였다. 그집에서는 이와 같이하여 아들과 손자 대(代)에서는 자물쇠를 열지 않다가 증손에 이르러 명절 제사를 지낼 때 종족이 모두 모여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선조께서 비록 유언이 있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반드시 혐의 될 바가 없다.지금은 열어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열어 보았다. 그것은 고려말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사실 그대로 써서 꺼리어 감춘 것이 없었으므로 내용이 대부분 국사와 같지 않았다. 이에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우리 종족을 멸하는 물건이니 이미 이것을 본 이상 소문나지 않기가 어렵다.” 하고, 드디어 이것을 태워 버렸다. 《축수편(逐睡篇)》ㆍ《해동악부(海東樂府)》
○ 공의 유고(遺稿) 두 권 중에 당시 사적을 후세에서 잘 알 수 없는 것을 직필한 것이 있는데, 신우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그 직필 중에 가장 뚜렷한 것이다. 그 시에 ‘주상전하(主上殿下 우왕(禑王))를 강화도에 옮기고 맏아들 창(昌)이 즉위했다는 것을 듣고 느낌이 있다’ 하는 제목으로 된 시 두 수에,

성현(聖賢 어진 군신)이 서로 만나 교체되니 / 聖賢相遇遞當時
천운이 순환함을 이로부터 알겠네 / 天運循環自此知
초야에 있는 몸 어찌 우국(憂國)의 뜻이 없겠나 / 田畝豈無憂國意
다시 간절한 충성 다하여 국가 안위 염려한다 / 更殫忠墾念安危

새 임금은 임조(臨朝)하고 옛 임금은 옮겨가니 / 新主臨朝舊主遷
소조(蕭條)한 강화도는 바람 연기뿐이구나 / 蕭條海郡但風煙
하늘의 바른 길을 누가 닫으랴 / 天關正路誰開閉
밝고 밝게 거울 되어 앞에 있음 보아라 / 要見明明鑑在前

하였다. 또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이 형을 받다’ 하는 제목으로 된 시 세 수에,

거울이[水鏡]이 빛을 묻고 주석(柱石)이 무너지니 / 水鏡埋光柱石頺
사방의 백성들 뉘 아니 슬퍼하리 / 四方民俗盡悲哀
빛나는 공업이 마침내 허물어져도 / 赫然功業終歸朽
확고한 충성은 죽어도 삭지 않으리 / 確爾忠誠死不灰
청사(靑史)에 행적이 기록되어 질(帙)에 찼는데 / 紀事靑編曾滿帙
가엾도다 벌써 흙으로 되었네 / 可憐黃壤已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 아래 / 想應杳杳重泉下
눈을 동문에 걸어도 분이 풀리지 않으리. / 掛眼東門憤未開

홀로 조정에 설 제 뉘 감히 범하리 / 獨立朝端無敢干
언제나 충의로써 어려움을 겪었구나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六道) 백성 희망 따라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三韓) 사직 편하게 했네 / 能致三韓社稷安
동렬(同列)의 영웅들은 낯짝도 두텁다 / 同列英雄顔更厚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은 죽기 전에 벌써 뼈가 차리 / 未兦邪侫骨猶寒
다시금 난이 일면 꾀할 이 누구일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용사(用事)하는 간인들이여 / 可笑時人用事奸

내 이제 부고 듣고 애시(哀詩) 지으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을 위한 슬픔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이라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天運)의 비(否)와 태(泰)를 뉘 알리오 / 天運誰能知否泰
나라 터전 안위는 아직 정하지 못했네 / 邦基未了定安危
날랜 칼날 부러지니 슬퍼한들 어쩌랴 / 銛鋒已折嗟何及
외로운 충성으로 나라를 지탱하지 못함이 한이로다 / 忠膽常孤恨未支
홀로 산하를 대하여 이 곡을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모두가 한숨이로다 / 白雲流水摠噫噫

하였다. 또, ‘금월 15일에 이미 정창군(定昌君)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의 자손이라고 폐하여 서인을 만들었다’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 세 수에,

전왕 부자 서로 갈려 / 前王父子各分離
멀고 먼 하늘 가에 동에 있고 서에 있네 / 萬里東西天一涯
한 몸은 서인되게 할 수 있어도 / 可使一身爲庶類
이 내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조왕(祖王 고려 태조)의 맹세가 하늘에 닿아 / 祖王信誓應于天
남은 은택 흘러흘러 수백 년을 내려왔네 / 餘澤流傳數百年
왜 일찍이 진가(眞假)를 분간하지 못했던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푸른 하늘 거울처럼 밝게 비쳐 주네 / 彼蒼之鑑昭昭然

하고, 또 ‘나라에서 전왕 부자를 죽이라는 명령이 있다’ 라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에,

높은 벼슬에 오른 것이 임금의 은혜인데 / 位高是君恩
반달 동안 수치품고 이미 가문을 멸했네 / 半月含羞已滅門
온 나라가 큰 복을 머무르게 할 수 있나 / 一國豈能留景祖
구원(九原)에 맺힌 원한 씻을 길이 어렵구나 / 九原難可雪幽寃
고풍(古風)이 없어지니 때는 도리어 평안하고 / 古風鍾鼎淪喪時還泰
새 법이 청평(淸平)하니 도가 더욱 높으리 / 新法淸平道益尊
궁궐 향해 만세를 부르노니 / 且向玉墀乎萬歲
후한 은택 산촌에까지 베풀어 다오 / 願施優渥及山村

하고, 또 ‘한산군(韓山君)이 장단(長湍)에 귀양가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지은 시 두 수에,

하늘 보배(이색을 말한다) 빛 감추고 정령(政令)이 가혹하니 / 天寶韜光政令苛
학문 갈고 닦을 이 누가 있으리 / 有誰如琢復如마
요사이 사흘 밤 꿈에 뵈옵고 / 邇來夢謁連三夜
혼이 서로 만나 놀던 일 기억하며 노래 짓네 / 記取魂遊作一歌
나라의 경륜(經綸)은 불구덩에 들어가고 / 邦國經綸歸火澤
강물에 뜬 배는 풍파에 지쳤구나 / 江河舟楫困風波
하늘이 사문(斯文)을 없애려하지 않는다면 / 天如未喪斯文也
역인(逆人)인들 우리에게 어찌하리오 / 縱有逆人奈我何

옥은 스스로 티가 없으되 일은 이미 거짓되었으니 / 玉自無瑕事已訛
형인(荊人)의 두 번 발 벰이 다른 이유 아니다 / 荊人兩刖定非他
해동의 풍월마저 분통을 머금고 / 海東風月應含憤
천하의 영웅들이 슬픔을 같이하리 / 天下英雄所共嗟
백성 다 같이 새 세상을 보는데 / 萬姓同瞻新日月
강산은 옛 모습 변함이 없구나 / 三韓自固舊山河
곡직을 밝게 아는 푸른 하늘 있으니 / 明知枉直蒼蒼在
자나 깨나 몸 편안하심 비나이다 / 寤寐祈傾體氣和

하였다. 시가 비록 꾸밈없이 수수하여 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많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직필로서 숨긴 것이 없으니,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에 비하면 일성(日星)과 체동(螮蝀 무지개)과의 차이가 있을 뿐만이 아니다. 이 시를 읽으니 눈물이 두어 줄기 내리더라. 《상촌집(象村集)》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강원 관찰사가 되어서 공의 묘에 제사하였는데, 그 제문에 말하기를, “산에 고사리가 있으니 굶주림이 없을 것이요, 집에 거문고와 책이 있으니 스스로 즐길 수가 있을 것이다. 예물로 은근히 불러도 처사성(處士星)은 안온하였네. 천고에 빈 산중에 한 줄기 맑은 바람이구나.” 하였다. 《축수편(逐壽篇)》 ○ 지금 원주읍(原州邑) 동쪽 십 리 석경촌(石鏡村)에 운곡(耘谷)의 묘가 있다.


김진양(金震陽)


김진양은, 자는 자정(子靜)이며, 본관은 계림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 공은 고려조의 충신이다. 그가 정도전을 탄핵한 소에 말하기를,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하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형벌할 수 없는 사람에게 형벌한다는 것은 우왕과 창왕 부자를 말한 것이고, 본래 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씌운다는 것은 이색 등 여러 대부를 말한다. 만일 공의 말대로 정도전에게 죄를 주어 죽였더라면 고려의 멸망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소가 들어감에 이것을 그냥 두었다가 복합(伏閤)을 한 뒤에 겨우 조정에 내 놓았다가 다시 들여 갔으니,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이 대목을 볼 때에 기가 막히게 한다. 《상촌집》


이숭인(李崇仁)


이숭인은, 자는 자안(子安)이며, 호는 도은(陶隱)이고,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벼슬이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다.
○ 정도전이 공과 더불어 이색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재명(才名)이 서로 비등하였으나 서로 가는 길이 달랐다. 도전이 불평을 품고 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도전은 권신이 되어 자기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을 공이 귀양간 고을에 수령으로 보내 매질하여 죽이게 하였다. 《상촌집》
공이 과거에 정몽주의 당파라 하여 영남에 귀양갔었는데, 거정이 사자(使者)로 영남에 가서 하루 안으로 공에게 곤장 수백 대를 때린 뒤 묶어서 말 위에 얹어 수백 리를 달리게 하여 드디어 상처가 짓물러 죽게 하였다. 이것은 정도전의 뜻에 영합하려고 한 것이었다. 태종 때 거정이 공훈에 책정되어 직위가 재상의 서열이었는데, 이숭인을 죽였다는 말을 위에 고한 이가 있었다. 태종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숭인의 문장과 덕망은 내가 사모해 온 터이다. 그가 일찍 죽은 것을 한탄하였더니, 과연 이놈의 소행이었구나.” 하고, 드디어 훈작(勳爵)을 삭제하고 멀리 귀양보내어 거기서 죽었다. 《기재잡기(寄齋雜記)》
○ 심하도다, 소인의 마음 씀이여. 얼마 안 있어 도전이 방석(芳碩)의 난에 가담하여 몸과 머리가 갈라졌고, 거정도 역시 도전의 문객으로 태종에게 거슬려서 공훈이 삭제되어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손이 글을 올려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선비들이 허락하지 않아 회복되지 못하였다. 도전이 입은 화는 숭인보다 더 참혹하고, 숭인의 이름은 후세에 빛났다. 천도는 헛됨이 없으니, 뒤에 오는 소인들을 경계하기에 충분하다. 《상촌집》


조견(趙狷)


조견은, 자는 종견(從犬)이며, 초명(初名)은 윤(胤)이고,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조준(趙浚)의 동생으로 고려조에서는 벼슬이 지신안렴사(知申按廉使)였고, 조선에서는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개국공신(開國功臣)평간공(平簡公)이었다.
○ 공이 고려조 재상으로 고려의 국운이 장차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청량산(淸涼山)에 은거하니, 그 형 조준은 조선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데 공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개국공신의 명부에 이름을 기록했더니 공이 받지 않았다. 이름을 고쳐 조견(趙狷)이라 하니,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견(狷)’ 자(字)의 뜻을 취한 것이다.태조가 친히 청량산을 방문하여 벼슬을 주었는데, 끝내 받지 않고 죽을 임시에 자손에게 말하기를, “내 묘표(墓表)에는 반드시 고려조의 벼슬을 기록하고 자손들은 새 조정에 벼슬하지 말라.” 하였다. 죽은 뒤에 조정에서 준 벼슬을 가지고 묘표를 세웠더니 하루는 벼락이 떨어져 비석을 깨뜨렸다. 현손(玄孫) 조부(趙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에 응했다. 명종(明宗) 임자년(1552)에 급제하여 부윤이 되었다. ○ 《후촌만록(後村漫錄)》 《평양조보(平壤趙譜)》
○ 공은 형인 조준이 혁명에 가담할 뜻이 있음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벼슬한 집이 아닙니까.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존망을 같이 해야 합니다.” 하니, 조준이 아우의 뜻을 빼앗을 수 없음을 알고 공을 잇달아 영남안찰사(嶺南按察使)를 시켰다. 공이 시를 짓기를,

삼년 동안 두 번 영남루를 지나니 / 三年再過嶺南樓
은은한 매화 향기 나를 머물라 권하는구나 / 細細梅香勸少留
술 마시며 근심씻고 노년을 보낼 만 하니 / 擧酒消憂堪送老
평생에 이 밖에 또 무엇을 구하리 / 平生此外求不須

하였다. 임기가 차서 돌아오기 전에 고려가 망하니, 공은 통곡하고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갔다. 태조가 발탁하여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하고 글을 보내 부르니, 공이 답하기를, “송산(松山)의 고사리 캐기를 원할 뿐이요, 성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 이름을 견이라 바꾸고 자를 종견(從犬)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나라가 망했는데 죽지 않음은 개와 같고, 개는 그 주인을 연모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두류산에서 청계산(淸溪山)으로 옮겨가 날마다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송도(松都)를 바라보고 통곡하였다.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가리켜 ‘망경봉(望京峯)’이라 하였다. 태조가 그의 절개를 칭찬하고 손님과 주인의 예로써 만나자고 청하니 공이 나가 만났는데, 손을 올려 읍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며, 할 말을 기탄없이 해 버렸다. 태조가 이런 것을 모두 용납하고 돌아갈 때 명하여 청계의 한 지역을 봉하여 주고 마음 편하게 살도록 하였다. 또 돌집을 지어 주었는데 공은 끝내 거처하지 않고 양주(楊州) 송산(松山)으로 옮겨가서 살며 스스로 호를 ‘송산’이라 하였다. 《평양지(平壤志)》


안원(安瑗)


안원은, 본관이 순흥(順興)이다. 형조 전서(刑曹典書)로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물러나 나오지 않았다. 태조가 구도(舊都) 송도에 유후(留後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게 하여 그의 고려를 잊지 않는 뜻을 이루어 주고 시호를 경질(景質)이라 하였다.
○ 공은 성질이 호상(豪爽)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이첨(李詹)이 산골짜기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는 반드시 안옹(安翁)일 것이다.” 하고 가 보니, 과연 공이 나무에 기대어 왼팔에 매를 얹어 놓고 오른손으로 《강목(綱目)》의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김주(金澍)


김주는, 자는 택부(澤夫)이며, 호는 농암(籠巖)이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4년에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려가 망한 것을 듣고 본국에 돌아오지 않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고려말에 하절사(賀節使)로 명 나라에 갔다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태조가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말을 듣고 종에게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다만 이것을 가지고 표적을 삼아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합장하여 우리 부부의 묘를 만들고, 또 내가 도로 명 나라에 들어가는 날을 기일로 삼아라.” 하였다. 드디어 돌아서서 명 나라에 들어가 명 태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고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기를 청하니, 명 태조가 말하기를, “제왕이 되는 것은 스스로 천명이 있으니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이어 묻기를, “너는 본국에서 무슨 벼슬에 있었느냐.” 하였는데, 공이 대답하기를 “예의 판서(禮儀判書)로 있었습니다.” 하니, 드디어 종신토록 상서(尙書)의 녹을 주었다. 공은 형초(荊楚 지금의 호남(湖南)ㆍ호북성(湖北省) 일대) 지방에 살면서 두 딸을 낳았다. 임진에 명 나라 군사가 왔을 때에 유격장군(游擊將軍) 허씨(許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칭 공의 외손이라 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 《해동악부(海東樂附)》
○ 공이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부인에게 글을 주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내가 강을 건너면 가서 몸을 둘 곳이 없다.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 나라에 돌아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고, 장사 지낸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 하였다. 그 자손은 대대로 전하여 12월 22일을 기일로 삼으니, 이 날은 바로 압록강에서 글을 보낸 날이다. 만력(萬曆) 정유년(1597) 가을, 명 나라에서 일본에 간 책봉사(冊封使)의 일행 중에 막하관(幕下官) 허유성(許惟誠)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유성(惟誠)은 복건인(福建人)이다.” 하였다.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그는 동래(東萊)에 들려 사람들에게 자칭 공의 후예라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은 형초지방에서 장가들어 세 딸을 낳았는데 허씨는 그 사위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신곡(新谷)의 김씨(金氏)들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김씨의 본관이 선산(善山)이라는 것만 알고 신곡이 공이 살던 동리임을 알지 못하여 답을 못해 주었다. 그래서 후손은 끝내 유성과 서로 만나 보지 못했다고 한다. 윤근수(尹根壽)가 지은 《농암전(籠岩傳)》에 말하기를 “정승(政丞) 김응기(金應箕)는 이름난 사람이나 조선(祖先)을 밝게 드러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공의 7대손 유엽(有曄)의 말을 채택하여 유사(遺事)를 찬술했다.” 하였다. ○ 부윤(府尹) 오운(吳澐)의 《동사찬요(東史纂要)》에도 대략 이와 같다.
우리 태조가 임신년(1392) 7월 16일에 개국하고 한상질(韓尙質)을 사신으로 명 나라에 보냈는데 그 주문(奏文)에 말하기를, “우리 신하 조림(趙琳)이 예부의 자문을 받아 왔는데 ‘나라는 무슨 이름으로 바꾸었느냐. 빨리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으니, 그러면 상질이 명 나라 서울에 가기 전에 이미 조선의 개국을 알았고, 상질이 돌아온 것도 바로 이해이다. 공이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돌아왔다면 어찌 연말에 압록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태조의 개국을 들었을 리가 있겠는가.이것은 온 우주에 뻗치는 큰 충절인데 어찌 수백 년간 묻혀서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으며, 문대공(文戴公) 김응기의 시호 등 여러 자손이 비록 유명(遺命)을 따라 지문과 묘갈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사실을 숨기고 발표하지 않을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엽(有曄)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을까. 일본에 책봉사(冊封使)가 간 것이 을미년(1595) 겨울이었는데 유엽은 정유년(1597) 가을이라 하니, 십여 년 전의 일도 혼란하여 이같이 사실과 다른데 어찌 수백 년 전의 일에 대해서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겠는가.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우현보(禹玄寶)


우현보는, 자는 원공(原功)이며,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 공민왕 때 그는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나아가고, 우왕 12년에는 조민수(曹敏修)ㆍ장자온(張子溫)ㆍ하륜(河崙)과 함께 사은사(謝恩使)의 사명을 띠고 원 나라에 갔다. 창왕 2년에 김저(金佇)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공이 여흥(驪興)에 가서 폐왕 신우를 만나고 몰래 정몽주와 더불어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하여 낭관들이 복합(伏閤)하여 죄주기 청했는데, 창왕은 듣지 않고 관직만을 파하였다가 얼마 뒤에 판삼사사로 삼았다.공양왕이 즉위함에 공이 윤이(尹彝)와 이초(李初)의 사건에 관련이 있다 하여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 사면하여 지방에 마음 편하게 가 있게 하였는데, 대성(臺省)이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철원(鐵原)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였다.그후 얼마 있다가 다시 불러서 그 관직에 도로 복직시켰다. 정몽주가 죽자 공은 경주(慶州)로 귀양갔고, 그 이듬해에 고려가 망하였다. 조선이 개국된 뒤에 태조가 공신의 작호(爵號)를 주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태조는 특별히 공에게 후사하고 옛친구의 예로 대접하였는데,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므로 단양백(丹陽伯)에 특진시켰다. 그해에 공이 죽었는데, 영의정을 증직하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라 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묘는 고장단(古長湍) 동쪽 20리 금곡(金谷)에 있다.


조신충(曹信忠)


조신충은 본관이 창녕이다. 우왕 9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 이숭인(李崇仁)ㆍ이색ㆍ하륜과 친하게 사귀었다. 우왕과 창왕이 연달아 폐위되자, 공은 스스로 불안을 느껴 영천 창수면(永川滄水面)에 가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하륜이 수상으로 있을 때 공에게 장수의 재능이 있다 하여 천거하였는데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태조 5년에 강계도 병마사 겸 판희천군사(江界道兵馬使兼判熙川郡事)로 제수하였다. 한번 서울에 왔다가 잠깐 뒤에 물러갔으니, 이색과 거취(去就)를 같이 하였다. 아들 상치(尙治)가 정시(庭試)에서 장원하였는데, 태종이 눈여겨 보면서 이르기를, “네가 왕씨의 신하 조신충의 아들이냐?” 묻고, 곧 정언 벼슬을 주니 사대부가 영광스럽게 여겼다. 《취원당 조광원 수록(聚遠堂曹光遠手錄)》
공이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전조(前朝) 재상의 아들로서 과거에 올라 녹을 먹었으니 마땅히 수절하여 도연명(陶淵明)의 절의를 지킬 것이나, 너는 나라가 바뀐 뒤에 났으므로 스스로 숨어 살 의리가 없으니, 힘쓰라.” 하였다. 상치가 뜻을 굽혀 상경하여 세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조상치유사(曹尙治遺事)》


이고(李皐)


이고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공민왕 갑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고려 말엽에 물러나 수원(水原)의 광교남탑산(光敎南塔山)에서 살았다. 스스로 망천(忘川)이라 호를 지었으니, 세념(世念)을 잊는다는 뜻이었다. 공양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소락(所樂)이 무엇인가 물으니 공이 자기가 사는 산천의 훌륭한 경치를 극구 칭찬하였는데, 그 말 가운데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하여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있었다.태조가 즉위하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고, 경기 안렴사(按廉使)로 제수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태조가 화공(畫工)에게 명하여 공이 거처한 곳을 그리게 하여 이것을 보고 이름을 ‘팔달산(八達山)’이라 지었다. 세종조에 석비(石碑)를 특별히 그 마을 입구에 세워 ‘고려 효자 한림학사 이고(高麗孝子翰林學士李皐)의 비’라고 하였다. 조선에 벼슬하지 않은 여덟 사람의 학사를 세상에서 ‘팔학사(八學士)’라고 칭하는데, 공은 조견(趙狷)ㆍ이집(李集)과 함께 그 중의 삼학사(三學士)로서 서로 살던 곳이 가까워 때때로 소를 타고 왕래하였다고 한다. 조견은 청계산(淸溪山)에 숨고 이집은 둔기리(遁機里)에 숨었다.


이집(李集)


이집은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학문에 힘써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신돈의 미움을 사게 되자, 자기 아버지를 업고 남쪽으로 피해 가서 천녕현(川寧縣)에 숨어 살며 나오지 않았다.


김자수(金自粹)


김자수는 자는 순중(純仲)이며, 호는 상촌(桑村)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벼슬이 고려 도관찰사(都觀察使)였다. 안동(安東)에 그가 살던 옛 집터가 있고 그의 효자비가 있다.
○ 태조가 왕위에 오른 당초에 공이 전부터 그와 친했기 때문에 제일 먼저 등용하려고 헌장(憲長)으로써 불렀으나, 공은 아무 말없이 누워만 있었다. 태종이 또 형조 판서로 부르자, 공은 자기 집 사당에 영결(永訣)하고 아들에게 흉구(凶具)를 가지고 뒤따르라 명하고 바로 그날로 길을 떠났다. 광주의 추령(秋嶺)에 이르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 땅은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비록 여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두 성(姓)의 임금을 섬길 수가 있겠는가.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너는 반드시 추령 근방에 나를 매장하되, 절대로 비를 세우지 말고 초목과 함께 썩게 하라.” 하였다. 절명사(絶命詞) 두 구절을 지었는데 말하기를, “내 평생토록 충성하고 효도하는 뜻을 오늘날 그 누가 알리오.” 하고, 드디어 약을 마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본래 추령이라 하는 고장은 포은 정몽주를 장사한 땅이다. 《용재수선총기(慵齋搜善總記)》 《경주김씨보(慶州金氏譜)》
우천(愚川) 정식(鄭侙)의 《상촌사적변(桑村事蹟辨)》에 말하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김 관찰(金觀察)의 이름 아래 ‘사본조(仕本朝)’ 세 글자가 쓰여 있다. 《여지승람》을 지은 것은 광릉(光陵) 즉 세조 때의 일이니, 국초(國初)로부터 시대가 그다지 멀지 아니하여 김 관찰이 자결하여 죽던 일이 비록 은미하였다 하더라도, 당시에 반드시 그 사실을 들어 안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에 다만 본조에서 벼슬했다고만 기록한 것은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태조가 처음 나라를 세우던 날부터 따르던 사람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던 때에, 기밀(機密)에 협찬했던 사람들은 모두 재주 있고 뛰어난 인물이었다.집현전과 예문관에서 붓을 잡은 이와 문청(文廳)의 총재(摠裁)된 자들이 모두 세조의 거사에 협력했던 무리들이 아니면 곧 태조에게 붙었던 이들의 자손들이다. 비록 정치 정세에 편승하여 공명(功名)을 세웠으나, 그들도 명분과 의리가 귀중한 것임을 돌이켜 생각한다면, 또한 어찌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전 시대의 절의 있는 선비에 대해서도 오히려 자신은 그보다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시대의 절의 있는 선비로서 이름이 숨겨진 분에 대하여 어찌 숨은 빛[幽光]을 빛나게 하고 잠긴 덕[潛德](《여지승람》에 김자수가 절의에 죽은 사실을 그대로 쓰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겠는가.” 하였다. 《경주김씨보》


송유(宋愉) 다음의 네 사람은 모두 경주 김씨 족보에 나타나 있는데, 그들을 모두 고려조의 충절(忠節)이라 기록하였다.


송유는 자는 이숙(怡叔)이며, 호는 쌍청당(雙淸堂)이고,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벼슬이 사복시정(司僕寺正)이었는데, 고려가 망한 뒤 회덕(懷德)에 내려가 숨어 살았다.


허도(許棹)


허도는 호는 경암(擎庵)이며, 고려조 때 진사였다.


허금(許錦)


허금은 자는 재중(在中)이며, 호는 야당(埜堂)이고,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고려조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냈다.


이양중(李養中)


이양중은 자는 자정(子精)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고려조 때 형부(刑部)의 좌참의(左參議) 벼슬을 지내다가 조선이 건국되자 고향으로 내려가 숨어 살았다.
○ 태조가 잠저 때의 친한 벗이었던 까닭에 불렀더니, 야인(野人)의 옷차림으로 거문고를 들고 술잔을 바쳤다.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박유(朴愈)


박유는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고려조 때 한림(翰林)으로 나아가서 남평 감무(南平監務)가 되었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임존(任存) 지금의 대흥(大興)이다. 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다. 그 자손은 양대(兩代)까지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사(府使) 규세(奎世)의 선조이다. 《후촌만록(後村漫錄)》


윤충보(尹忠輔)


윤충보는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안성군수(安城郡守)로 있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여강(驪江)으로 돌아가 숨어 살았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죽음을 맹세하고 나오지 않았고 스스로 호하여 ‘고려 처사’라 하였다. 날마다 높은 산에 올라가 송도를 바라보며 향불을 피우고 꿇어 앉아 절하기를 종신토록 하였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왕망현(王望峴)’이라 불렀다.처음 숨어 살기 시작할 때에, 황새 한 떼가 주위에 모여왔었기 때문에 ‘한곡 선생(鷳谷先生)’이라고 칭호하게 되었고, 집 가까이 있는 산 이름을 율리(栗里)라 하였다. 임종할 때에 유언으로 훈계하기를 비를 세우지 말고 무덤의 형식을 고려의 제도에 따라서 하도록 일렀다. 이택지(李擇之)ㆍ이식(李植)ㆍ신광한(申光漢)ㆍ이성중(李誠中)ㆍ김귀영(金貴榮)의 문집(文集). 여주(驪州) 인사들이 여러번 이존오(李存吾)의 서원(書院)에 배향하도록 청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록 두문동(杜門洞)


고려가 망한 때에 한 동네가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이 문을 닫고 절의를 지켰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두문동’이라 하였다.
이의(李倚)는 본관이 부평(富平)이다. 고려조의 세신(世臣)으로서 새 조정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여러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새 조정에서 그가 신하 노릇하지 않는다고 죄를 주어 부평 자연도(紫煙島)로 귀양 보내고 가산을 몰수하였다. 《부평이씨가승(富平李氏家乘)》


고려말의 여러 신하를 논함


성조(聖祖 태조)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새 나라를 세울 때에 백성들이 귀의하고 시장과 가게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열렸으며 조정에는 벼슬의 반열이 여전하였다. 한양의 벼슬아치는 모두가 송도의 옛 신하들이었으니, 새 조정의 입장에서 말하면 어찌 그들을 포용하는 큰 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왕씨로서 그들을 논평한다면, 그들은 모두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무리들이었으니, 만일 《춘추(春秋)》의 법으로 다스린다면 반역의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그 중에도 정상이 가증한 자는, 곧은 체하며 모략을 한 윤소종(尹紹宗), 임금을 협박하던 남은(南誾), 일을 만들어 낸 정도전(鄭道傳), 거짓 명성[僞名]의 권근(權近)등이며, 허옇게 머리털이 센 성석린(成石璘)은 간사한 소인에게 요리조리 붙고, 불량배인 조영규(趙英珪)는 충신인 재상[정몽주]을 쳐죽였으니, 왕씨 조상의 혼령이 있다면 명명(冥冥)한 가운데 그들에게 내리는 벌이 없을까. 과연 남은과 도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 함께 극형을 받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보복이다. 《상촌휘언(象村彙言)》
○ 신우 때에 윤소종이 간관이 되어 신우의 과실을 말할 적에, 바로 대고 배척하여 조금도 여지가 없어서 죄를 낱낱이 헤아리는 듯하였으니, 이 얼마나 곧은 말인가. 그러나 한(漢) 나라 곡영(谷永)이 권신의 죄는 덮어 주고 오로지 임금과 공격하던 것에 불과할 뿐이니,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어 제 손바닥과 다리 사이에서 놀렸던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참으로 충성으로 곧은 말을 한 자라면 어찌하여 버젓이 두 임금을 섬겼겠는가. 《상촌휘언》
○ 고려말에 현자들이 화를 입게 된 것은 몇 가지 까닭이 있었으니, 그 하나는 목은(牧隱)의 일(신우가 폐위될 때에 그 아들 신창을 세우기를 주장한 것)을 가리킬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명 나라에서 “왕씨가 아닌 이성(異姓 우(禑)ㆍ창(昌))을 세웠다고 말썽이 있었던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러나, 신창을 세운 것은 정당한 일이었으며, 참으로 대신이 할 도리였다. 또 명 나라에서 무슨 말이 있었다는 것도 사실은 명 나라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곧 그 당시 다른 딴 마음을 가진 자들이 꾸며서 저희가 선창하고 저희가 화답하여 무슨 귀신의 말처럼 된 것이다. 일이 왕위의 폐위에 관계되므로 사람들이 감히 입을 떼지 못하였으니, 이때보다 더 지독하고 심한 모략은 없었다 하겠다. 비록 천명이 이씨에게 돌아와 간사한 권신들의 손을 빌려 조선개국의 기운(機運)을 열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충성스런 현인들이 무함(誣陷)을 당한 일은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니, 지극히 개탄할 일이다.” 《상촌휘언》
○ 개국한 후에 정부에서 여러 재상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전조(前朝)의 재상으로 신조(新朝)에서 벼슬 사는 자들이었다. 기생 설매(雪梅)는 재주와 용모가 남달리 뛰어나고 음행을 매우 즐겼다. 정승이 취하여 희롱하기를, “네가 아침은 동쪽 집에서 먹고, 저녁에 잠은 서쪽 집에서 잔다고 들었는데, 이제 나를 잠자리에 모셔라.” 했다.설매가 대답하기를,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이 천한 몸으로 왕씨(王氏)를 섬기다가 이씨(李氏)를 섬기는 정승을 모시는 것이 어찌 꼭 합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정승은 낯이 붉어 머리를 숙이고, 좌중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탄식하였으며, 혹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한거만록(閑居漫錄)》


 

[주B-001]고사본말(故事本末) : 옛날에 일어났던 일의 시초와 결말이라는 뜻인데, 이 책에서는 편자가 의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기사본말체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순수한 기사본말체가 아니고 각 왕조 때 일어난 중요한 사실의 시초와 결말을 시대에 따라 체계적으로 엮어, 각 왕조마다 ‘고사본말’이라고 붙였다.
[주D-001]관례(冠禮) : 남자가 장성하여 관(冠) 을 쓰는, 즉 성인이 되는 예식.
[주D-002]문묘종사(文廟從祀) : 공자묘에 배향하는 것.
[주D-003]중도부처(中途付處) : 옛날 벼슬아치에게 준 형벌의 한 가지인데,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것을 말함.
[주D-004]저구(杵臼) 가 …… 뜻 : 춘추 시대에, 진(晉) 나라의 귀족인 조씨(趙氏) 가 반대당에게 몰려 멸망을 당할 무렵, 조씨의 부하인 공손저구(公孫杵臼) 가 조씨의 유복자를 몰래 길러서 조씨의 후사를 이었다.
[주D-005]화봉인(華封人) : 화(華)는 지명으로서 화에 봉함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데, 요 임금 때에 화봉인이 요에게 수(壽)ㆍ부(富)ㆍ다남자(多男子)를 축원하였다.
[주D-006]원찬(袁粲) : 중국 남북조 시대 때 송(宋) 나라에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충신.
[주D-007]양표(楊彪) : 한말(漢末)의 대신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비록 죽지는 못하였으나, 조조(曹操)에게 굽히지는 않았다. 그의 아들 양수(楊修)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고사에, 목은의 아들이 이성계의 당인 정도전에게 죽임을 당했으므로 이에 비유하였다.
[주D-008]금고(禁錮) : 벼슬의 길을 막아 등용하지 않는 것.
[주D-009]초황(蕉黃) 과 예단(荔丹) : 당 나라의 한유(韓愈) 가 지은 유후 라지묘(柳侯 羅池廟) 의 비문에서 제물을 가리켜 한 말인데, 초황은 파초 열매[바나나]이고, 예단은 여지(荔支) 이다.
[주D-010]청사(靑史) : 옛날 종이가 없었던 시대에 푸른 대나무에 기록하였기 때문에 청사라고 함.
[주D-011]눈을 …… 않으리 : 오(吳) 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임금에게 간하다가 임금이 듣지 않고 죽이자, 그가 죽으면서, “내가 죽거든 눈을 빼서 동문에 걸어 두어라. 오 나라 망하는 꼴을 보리라”고 한 고사.
[주D-012]형인(荊人) 의 …… 벰 : 옛날 초(楚 : 剕) 나라에 변화(卞和) 란 사람이 형산(荊山)에서 박(璞 : 옥이 박힌 돌)을 얻어 초왕에게 드렸더니 옥이 박히지 않은 돌이라 하여 형벌로 발을 베었다. 변화는 다음 왕에게 또 드렸더니 또다시 발을 베는 형벌을 받았다는 고사.
[주D-013]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이나 유생이 대궐 합문(閤門) 밖에서 엎드려 청하는 것.
[주D-014]강목(綱目) : 주자가 지은 《통감강목(通鑑綱目)》인데, 춘추의 필법을 따라서 역사상의 인물을 포폄한 글이다.
[주D-015]대성(臺省) : 고려 시대의 어사대(御史臺) 와 문하성(門下省) 또는 사헌부와 문하부(門下府)를 아울러 이르는 말.
[주D-016]흉구(凶具) : 초상과 장사 때에 쓰는 기구.
[주D-017]율리(栗里) : 도연명(陶淵明)이 살던 곳.
[주D-018]춘추(春秋) : 공자가 엮은 노국(魯國) 의 역사인데, 대의명분(大義名分) 으로 포폄한 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