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한 형상(바위 나무등)/2.도봉의 거북바위

2012 .10.24. 삼각산 단풍 산행

아베베1 2012. 10. 26. 11:37

         삼각산 단풍  산행

  ▶ 삼각산 산행  

      출발 : 12 :00 - 16:30  삼각산 산행 

      산행 코스 

      백화사 입구 -내시묘역길 - 계곡 -가사동암문 -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 715봉 - 남장대지 - 행궁지 -중흥사지 -

      산영루지 - 보리사 입구 - 중성문 -산성입구 

   ▶ 뒷풀이 만석정   두부 지께

 

   ▶ 예정된 시간 11 :00경 으로 되어 있었으나 의정부 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곳으로

      백화사 입구에 도착하이 11:50분이었다

     일행과  만나기로 약속시간은  50분을 초과 하였다  둘레길 이정목을 사진으로 남기고 바쁜 걸음으로 발길을 옮기니 

    입구에 단풍나무가 노랗게 물들고 걸음을 재촉하니 내시 묘역길 입구에 도착 하였다  철조망을 따라

     계곡으로 접근한다  가사동암문을 향하여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중간 지점에서 바라본 모습은 어느듯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가사 동암 문에 도착하니 약 50분이 지난 시간 이었다 

    이마엔 땀이 흐른다 일행을 만나기로 하고 찾아서나 연락이 되지 않는 다 

    가사동암문에서 용출봉 방향으로 오른다 자주로 가는 길이기에 그침이 없었다 용혈봉 으로 증취봉을 지나고 나서도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715봉 으로 발길을 돌리니 군데 군데 단풍이 이브게 물들고 있었다 

    715봉에서 가다려도 보이지 않고 준비해산 점심에 사과 하나를 먹고  커피 한잔을 먹고 기다려도  의상능선 용혈지능선을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다는 곳으로 혼자서 갈려고 하는 찰라 나월봉 으로 올라오시는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715아래로 나월봉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고 715봉에서 잠시 휴식을 하시는 시간을 이용하여 

   보니 아시는 분이 40여분중에 10여분이 되는 듯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남장대지 , 행궁지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에 행궁지에 도착하니 행궁지에는 지난번 신문에 문화재 발굴 작업을 하느랴 출입금지 표시를 하여두고 

  작업이 진행 되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쁜 단풍이 아름다움을 다하고 일행의 추억을 사진으로 담아 드린다 .

  행궁지, 증흥사지, 산영루 등 문화재적 가치가 많음에도  관리가 되지않아서 훼손되고 망실 되니 아쉬운 마음 이었다

 행궁지는 조선 숙종때에 북한 산성을 축성 할때에 국왕이 전시에  국정을 볼수 있도록 건축한 것이다 

 당시에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이 고전에 전한다 

  전쟁이 오래되면 겨울철에는 햇볕이 들지않아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가뭄에는 물이 부족하고 중성문 쪽으로 적이 오면 

 방어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는 문헌이 왕조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계곡에 흐르는 물위에 떠있는 이쁜 단풍잎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수 같이 흐르는 인생은 한번가면 다시 오지 않고 계절의 변화는 계속되는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

 이쁜 단풍잎은 물위에 둥둥 전일 내린 비로 계곡의 물소리는 졸졸 군데 군데 이름다움을 더하는 단풍은 산을 걷는 

 나그네의 마음속에 즐거움을 더하는 시간이었다

 하산 하여 간단하게 맥주.소주 한잔을 마시고 식당에서 준비해준 차량에 승차하여 구파발로 해서 귀가하였다 .

 

       삼각의 여러봉우리 이곳저곳 어디를 보아도

       아름다운 절경이구나 

 

       나뭇잎의 푸른잎은 어느새 이쁜 색으로 변하여 

       아름다운  단풍 색으로 물들이고

 

       계곡물 졸졸 흘러 산을 걷는 나그네의 

       귓속까지 들러오는 구나 

 

      수천년 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북한산성 증흥사지 산영루  국령사 문수봉 , 

 

 

      산모퉁이 돌아서 구석 구석을 걸었던 

      그 시간이  아름답고 즐거운 삼각에서의 하루 였구나 .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경기 / 양주 도호부

⊙ 양주 도호부(楊州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남평양성(南平壤城)인데,【또는 북한산(北漢山)이라 한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취하여, 그 25년 신미에【곧 동진(東晉) 간문제(簡文帝) 함안(咸安) 원년.】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도읍을 옮기어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20년 을묘에【곧 송나라 폐제(廢帝) 원휘(元徽) 3년.】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싸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되매, 이 해에 그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기었다. 그 뒤 79년, 신라 진흥왕(眞興王) 13년 계유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취하고, 15년 을해에 왕(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 이르러 국경[封彊]을 정하였며, 17년 정축에【곧 진(陳)나라 고조(高朝) 영정(永貞) 원년.】 북한산주(北漢山州)를 두었고, 경덕왕(景德王) 14년 병신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다. 고려가 양주(楊州)로 고치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는데, 양주 좌신책군(楊州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 우신책군 절도사(海州右神策軍節度使)와 더불어 이보(二輔)를 삼았다. 현종(顯宗) 3년 임자에 이보(二輔)와 십이절도사(十二節度使)를 폐하여 안무사(按撫使)로 고치고, 9년 무오에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숙종(肅宗) 9년 갑신에【곧 송나라 휘종(徽宗) 숭녕(崇寧) 3년.】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격시켰으며,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곧 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도읍을 한양에 정하고 부치(府治)를 동촌(東村) 한골[大洞里]에 옮겨, 다시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가, 4년 을해에 부(府)로 승격시켜 부사(府使)를 두었고, 정축에 또 부치(府治)를 견주(見州) 옛터로 옮겼으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속현(屬縣)이 3이다. 견주(見州)는 본래 고구려의 매초현(賣肖縣)인데, 신라가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견주(見州)로 고치어,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별호(別號)는 창화(昌化)이니,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사천현(沙川縣)은 본래 고구려의 내을매현(內乙買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견성군(堅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풍양현(豊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골의노현(骨衣奴縣)인데, 신라가 황양(荒壤)으로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풍양현(豐壤縣)으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포천(抱川)에 옮겨 붙였으며, 금상(今上) 원년(元年) 기해에 다시 본부(本府)에 붙였다.
삼각산(三角山)【부(府) 남쪽에 있다. 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니, 3봉우리가 우뚝 빼어나서 높이 하늘에 들어가 있다.】 오봉산(五峯山)【부(府) 남쪽에 있다.】 천보산(天寶山)【부(府) 동쪽에 있다.】 소요산(消遙山)【부(府) 북쪽에 있다.】양진(楊津)【부(府) 남쪽에 있으니, 곧 한강[漢水]의 남쪽이다. 단(壇)을 쌓고 용왕(龍王)에게 제사지내는데, 봄·가을의 가운뎃달[仲月]에 〈나라에서〉 향(香)·축(祝)을 내리어 제사지낸다. 신라 때에는 북독 한산하(北瀆漢山河)라 칭하고 중사(中祀)에 올렸으나, 지금은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포천에 이르기 18리, 서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22리, 남쪽으로 광주에 이르기 47리, 북쪽으로 적성(積城)에 이르기 83리이다.
건원릉(健元陵)은 우리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을 장사지냈다.【부(府) 남쪽 검암산(儉岩山)의 기슭에 있으니, 자룡[坎山]에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다. 능 남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능지기[陵直]·권무(權務) 2인과 수호군(守護軍) 1백 호(戶)를 두고, 매호(每戶)마다 밭 2결(結)을 주었으며, 동리에 재궁(齋宮)을 짓고 개경사(開慶寺)라 하여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4백 결을 주었다.】 낙천정(樂天亭)【부(府) 남쪽 황대산(皇臺山) 언덕에 있으니,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다. 우리 태종(太宗)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풍양 이궁(豐壤離宮)【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곧 풍양현(豐壤縣)의 옛터이며, 또한 태종이 거둥하여 계시던 곳이다.】
호수(戶數)가 1천 4백 81호, 인구가 2천 7백 26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33명, 선군(船軍)이 1백 32명이다.
본부(本府)의 토성(土姓)이 4이니, 한(韓)·조(趙)·민(閔)·신(申)이요, 내성(來姓)이 5이니, 함(咸)【양근(楊根)에서 왔다.】·박(朴)【춘천(春川)에서 왔다.】·홍(洪)【남양(南陽)에서 왔다.】·최(崔)【수원(水原)에서 왔다.】·부(夫)【과천(果川)에서 왔다.】요, 망성(亡姓)이 2이니, 정(鄭)·예(艾)이다. 견주(見州)의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김(金)·송(宋)·신(申)·백(白)·윤(尹)·피(皮)요, 사천현(沙川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경(耿)이며,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임(任)·송(宋)·허(許)이다. 풍양현(豐壤縣)의 토성(土姓)이 1이니, 조(趙)요, 망성(亡姓)이 4이니, 이(李)·강(姜)·윤(尹)·유(劉)이다. 인물(人物)은 중추원사 한산군 충정공(中樞院使漢山君忠靖公) 조인옥(趙仁沃)이다.【본조(本朝)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 태조 묘정(太祖廟庭)에 배향되었다.】
땅이 기름지고, 간전(墾田)이 1만 5천 1백 90결(結)이다.【논이 10분의 3이 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메밀·뽕나무요, 토공(土貢)은 느타리[眞茸]와 지초(芝草)이며,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와 잣[松子]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부 북쪽 사천현(沙川縣) 한탄리[大灘里]에 있으니, 하품(下品)이다.】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 북쪽 소요산(消遙山) 아래에 있고,【중품이다.】 하나는 부(府) 동쪽 도혈리(陶穴里)에 있다.【하품이다.】
역(驛)이 6이니, 청파(靑坡)·노원(蘆原)·영서(迎曙)·평구(平丘)·구곡(仇谷)·쌍수(雙樹)요, 목장(牧場)이 2이니, 하나는 살고지들[箭串坪]이요,【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7리요, 남북이 15리이다. 나라의 말을 놓아 먹인다.】 둘째는 녹양벌[綠楊坪]]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동서가 5리요, 남북이 12리이다. 중군(中軍)과 좌군(左軍)의 말을 함께 놓아 먹인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대이산(大伊山)과【부(府) 동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포천(抱川) 잉읍점(仍邑岾)에 응하고, 남쪽으로 가구산(加仇山)에 응한다.】 가구산(加仇山)이다.【부(府) 남쪽에 있으니, 북쪽으로 대이산(大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서울 목멱산에 응한다.】 회암사(檜巖寺)【천보산(天寶山) 아래에 있다. 불전(佛殿)과 승료(僧寮)가 수백 기둥이 되며, 승도(僧徒)들이 가리어 대가람(大迦藍)을 삼았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5백 결(結)을 주었다. 절에다 서번(西蕃)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의 부도(浮屠)를 안치(安置)하였고, 비(碑)가 있다.】 소요사(逍遙寺)【소요산(消遙山) 허리에 있다. 태종(太宗) 3년 임오에 태조(太祖)가 절 남쪽 행전(行殿)에 머물러, 여러 달을 두고 〈절의〉 온갖 그림을 새롭게 하였으며, 금상(今上) 6년 갑진에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하여 교종(敎宗)에 붙이고, 밭 1백 50결(結)을 주었다.】 진관사(眞觀寺)【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다. 나라에서 수륙재(水陸祭)를 지내며,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50결(結)을 주었다.】 승가사(僧伽寺)【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1백 45결(結)을 주었다.】 중흥사(重興寺)【삼각산(三角山) 아래에 있다. 선종(禪宗)에 붙이고 밭 2백 결(結)을 주었다.】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1이니, 원평(原平)이요, 현(縣)이 6이니, 고양(高陽)·교하(交河)·임진(臨津)·적성(積城)·포천(抱川)·가평(加平)이다.
【원전】 5 집 617 면



                             

   

국조보감 제64권
 영조조 8
29년(계유, 1753)



○ 1월. 초하룻날 상이 태묘에 나가 전배례(展拜禮)를 행하였다.
○ 이에 앞서 상이 궐문에 임하여 공시민(貢市民)들을 불러 고질적인 폐단에 대해 묻고 나서 박문수(朴文秀) 등에게 명하여 절목을 정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이르러 공시 당상(貢市堂上) 2인을 차출하여 구관(句管)하도록 하였는데, 비국에 공시 당상이 있게 된 것이 이때 시작된 것이다.
○ 균역청을 선혜청에 소속시키고, 두 낭청을 더 차출하여 균역청과 상진청(常賑廳) 두 관청을 겸하여 살피도록 명하였다.
○ 적전(耤田)을 친경(親耕)하였다. 술을 내려주고 과거를 설행하고 상을 베풀어주는 것은 하지 않고, 오직 서민(庶民)과 기민(耆民)에게 노주례(勞酒禮)만 베풀었다. 이는 정묘년의 관예(觀刈) 규례에 의거하여 거행한 것이었다.
○ 선천(宣川) 동림산성(東林山城)을 수축하였다. 동림은 곧 고려 때의 옛 성지(城址)로서 관서(關西)의 직로(直路)에 자리한 관방(關防)이었다.
○ 5월. 크게 가물자, 상이 북교(北郊)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초헌(初獻)을 하고 나자 쏴하고 바람 소리가 나니, 장막을 거두도록 명하였다. 비가 내렸는데도 끝까지 서서 일을 마쳐 면불(冕黻)이 다 젖었다. 3일이 지난 뒤 비가 충분하지 못하다 하여 다시 선농단(先農壇)에 친히 기우제를 지냈는데, 시원스럽게 내리게 된 뒤에야 중지하였다.
○ 6월. 숙빈 최씨(淑嬪崔氏)에게 시호 ‘화경(和敬)’을 추상(追上)하고, 소녕묘(昭寧廟)를 소녕원(昭寧園)으로, 육상묘(毓祥廟)를 육상궁(毓祥宮)으로 고쳤다. 수위관(守衛官), 수복(守僕), 수호군(守護軍)을 두고 제향을 한결같이 궁원(宮園)의 예대로 하도록 하였다. 이는 숙빈을 봉작한 지 60년이 되어서였다. 상이 예조 판서에게 이르기를,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 이후 중국 조정에서는 모두 낳아준 부모를 추숭(追崇)하였는데, 아조(我朝)는 가법이 엄한 데다가 성고(聖考)의 하교까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이 추숭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이 한 가지 일은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 알맞게 하려 한 것인데, 바깥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필시 아직까지 남은 일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 7월. 상이 강민(江民)의 폐단을 정리하도록 명하였는데, 일을 맡은 자가 절목을 만들어 올린 가운데 ‘촘촘한 그물’이란 말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성탕(成湯)은 그물을 터주었고, 맹자(孟子)도,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집어넣지 않는다.’고 하였다. 촘촘한 그물을 쳐서 강을 가로막는다면《예기》의 둥우리를 엎지 말라는 뜻에 어긋난다. 예전에《예기》월령편(月令篇)을 인하여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청둥오리[靑頭鴨]를 받들어 들이지 말도록 하였으니, 이는 바로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엄히 금하도록 신칙하고, 이후로 이러한 그물을 만드는 자는 도배(徒配)에 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 8월. 장악원에 명하여 이원(梨園)을 칭하지 말도록 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원은 바로 당 나라 때의 바르지 못한 이름이다.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옛 강서원(講書院)에 능엄경(楞嚴經)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는 후손들을 가르칠 도리에 어긋나니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중흥사(重興寺)로 보내 보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상이 일찍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처음 춘궁(春宮)에 들어갈 때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설서(說書)였는데, 사약(司鑰)에게 말하기를, ‘송 영종(宋英宗)은 번저(藩邸)에서 올 때 행장은 단출하고 오직 책이 몇 상자였는데 지금 저하(邸下)는 행장이 어찌 이렇게 많은가.’ 하였다. 나는 그 충심에 감동하여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 선혜청이 아뢰기를,
“홍부미(紅腐米)를 너무 오랫동안 쌓아두어 도리어 새 쌀을 상하게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 값을 싸게 매겨 경기 백성들에게 팔아 쓸모없는 것을 유용하게 만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다. 그러나 먹을 수 없는 것이라면 어찌 백성을 속여서야 되겠는가. 내가 백성들을 위하여 먼저 맛볼 것이니, 속히 홍부미를 가져오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숙종대왕에게 시호 ‘유모영운 홍인준덕(裕謨永運洪仁峻德)’을, 인경왕후(仁敬王后)에게 ‘선목(宣穆)’을,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숙성(淑聖)’을, 대왕대비에게 존호 ‘영복(永福)’을 가상(加上)하였다. 진하(陳賀)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이는 내년이 인현왕후가 중전의 지위를 다시 바룬 해이자, 상이 주갑(周甲)을 맞이하는 때여서였다.


동사강목 제3상
계해년 신라 진평왕 25년, 고구려 영양왕 14년, 백제 무왕 4년(수 문제 인수 3, 603)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침략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북한산성이 신라의 소유가 되면서부터 고구려인들이 기어코 이를 취하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당시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취하려 하니, 신라 왕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지나매, 북한산 성중에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니, 고승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안】 열국(列國)이 분할하여 다스릴 적에는 경계가 있게 마련인데, 그 지형이 험준한 땅[形勝]을 내가 지키게 되면 요지가 될 것이요, 적이 웅거하면 해가 될 것이니, 그러므로 나라를 가진 자는 반드시 이런 것을 다투어 차지하여 나라를 굳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임진강(臨津江)에 미치고, 동으로는 태산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굽어보아 사방의 거리가 쪽 고르니, 이것은 해동 제일의 요새(要塞)이다.
그러므로 삼국 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차지하면 신라와 백제가 싸움에 어렵고, 신라가 차지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패배시키니, 진실로 지리(地理)가 좋은 곳이다.


 

 동사강목 제4상
신유년 신라 태종 8년, 문무왕 원년, 고구려 왕 장(藏) 20년, 백제 왕 풍(豊) 원년(당고종 용삭(龍朔) 원년, 661)



춘정월 백제의 종실(宗室)인 복신(福信)이, 옛 왕자인 풍(豊)을 주류성(周留城)에서 왕으로 세우고 나아가 웅진(熊津)을 포위하였다.
풍은 일찍이 왜(倭)에 인질(人質)로 가 있었는데 무왕(武王)의 종자(從子) 복신이,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 지금은 미상 을 점거하고 풍을 맞아 세우니,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고, 또 부성(府城) 근처 네 곳에 성을 만들어 포위하여 지키면서, 유인원의 군사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2월 신라가 군사를 보내 웅진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백제 사람들이 사자성을 공격하므로 신라 왕이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명하여 대당 장군(大幢將軍)을 삼고 문왕(文王) 양도(良圖)로 부장을 삼았으며, 문충(文忠)으로 상주 장군(上州將軍)을 삼고 진왕(眞王)으로 부장을 삼았으며, 의복(義服)으로 하주 장군(下州將軍)을 삼고, 무염 욱천(武欻旭川)으로 남천 대감(南川大監)을 삼고, 문품(文品)으로 서당 장군(誓幢將軍)을 삼고, 의광(義光)으로 낭당 장군(郞幢將軍)을 삼아서, 사자성을 구하게 하였다. 품일이 먼저 두량윤성(豆良尹城)지금은 정산(定山) 의 남쪽에 이르러 진영 설치할 땅을 살펴볼 때 백제 사람들이 신라군의 진영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급히 나와 공격하니, 신라의 군사들은 놀라 무너졌다. 대군(大軍)이 계속 와서 고사비성(古沙比城 지금은 미상 바깥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1개월 6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돌려 빈골양(賓骨壤)지금은 미상 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백제 군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였다. 그리하여 무기와 치중(輜重)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오직 문충ㆍ의광만이 백제의 군사를 각산(角山)지금은 미상 에서 격파하고 그들의 둔보(屯堡)로 들어가서 2천여 급(級)을 베었다. 왕은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金純)ㆍ천존(千存)ㆍ죽지(竹旨) 등를 보내어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 지금은 미상 에 이르러 군사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패전했기 때문에 벌을 논하였는데 차등이 있게 하였다.
○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군사를 일으켜 복신에 호응하였다.
상지(常之)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 키가 7척이며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어 벼슬이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풍달(風達)지금은 미상 군장(郡將)을 겸하였다. 정방이 백제를 멸할 때에 상지가 전부(前部)로써 항복하였으나 정방이 왕 의자(義慈)를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므로 상지는 두려워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를 모으니, 한달 만에 귀부(歸附)한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정방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고 별부(別部) 사타상여(沙咤相如)와 함께 각각 요험지(要險地)에 웅거하니, 여러 성이 많이 귀부하였다. 이때에 군사를 이끌고 복신에 호응한 것이다.

3월 당의 유인궤(劉仁軌) 및 신라의 군사들이 웅진을 구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복신은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였다.
그때 낭장 유인궤는 죄에 연좌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 민간의 자격으로 종군하는 것)하였는데, 조칙(詔勅)으로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 대방주는 《지리고(地理考)》에 보인다 를 삼아 왕문도(王文度)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신라의 군사를 내어 유인원(劉仁願)을 구하게 하니, 인궤는 기뻐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에게 부귀를 누리게 한다.”
하고, 당력(唐曆)과 묘휘(廟諱)를 청해 가지고 가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이(東夷)를 깨끗이 평정하고 정삭(正朔)을 해표(海表 바다 바깥이라는 뜻)에 반포하리라.”
하였다. 인궤는 군사를 엄정히 제어(制御)하여 신라의 군사와 함께 옮겨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복신 등은 웅진 입구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막았으나 인궤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하여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는 도망하여 목책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서로 다투다가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1만여 인이나 되었다. 복신 등은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에 웅거하였다. 신라의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서 돌아갔고, 또 부성(府城)이 곤핍(困乏)하였기 때문에 다시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여 주니, 웅진은 이로 인하여 모두 살아났다.
○ 백제 장수 복신이 신라의 구원병을 요격(邀擊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하는 것)하여 패배시켰다.
그때 도침(道琛)은 스스로 영군 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상잠 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유민(遺民)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사자를 인궤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들으니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을 모두 섬멸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어찌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인궤도 사자를 보내어 글을 지어 화복(禍福)을 갖추어 말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그 사자를 외관(外館)에 가두어 두고 교만한 말로 이르기를,
“너는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니 함께 논의할 수 없다.”
하고, 답서(答書)도 없이 돌려보냈다.
당이 군사 1천 명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인궤는 무리가 적었기 때문에 인원(仁願)의 군사와 합하고 사졸을 쉬게 하고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신라 군사와 합하여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은 그의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원케 하였다. 그리하여 고사(古泗)에 이르러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복신이 군사적은 것을 알고 요격하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葛嶺)지금은 미상 에서 도망하여 오니, 신라의 군사들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신에게 항복하였다. 복신은 승세(勝勢)를 타고 다시 부성(府城)을 포위하니 웅진의 길이 끊기고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건장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몰래 식량을 보내어 그들의 곤핍(困乏)을 구제하였다. 이때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하였으나 풍(豊)은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주제(主祭)만 할 뿐이었다. 복신은 인원이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음을 알고는 사자를 보내어 타일러 말하기를,
“대사(大使)는 어느 때에 서쪽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갈 때는 사람을 보내 송별(送別)하겠소.”
하였는데,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하4월 당이 임아상(任雅相) 등을 보내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쳤다.
당이 다시 아상(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와 행군총관(行軍摠管)을 삼고 계필 하력(契苾何力)으로 요동도(遼東道)의 행군총관을 삼고, 소정방으로 평양도(平壤道)의 행군총관을 삼아 소사업(蘇嗣業) 및 여러 호병(胡兵)과 함께 모두 35군(軍)을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제(帝)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니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이를 도모하기에 이릅니까? 만일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게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동원하면 국내의 인심이 편치 못할 것이니 이는 천하가 수비하는 것 때문에 피폐될 것입니다. 신은, 정벌(征伐)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滅)하는 것이 멸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무후(武后)가 또한 간하므로, 조칙하여 군사를 돌아오게 하였다.

5월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생각하기를, 신라의 정예병(精銳兵)은 모두 백제에 가 있고 내지(內地)는 비어 있으니 칠 수 있으리라 하고, 뇌음신(惱音信)을 보내어 말갈의 장수 생해(生偕)와 함께 수륙(水陸)으로 나아가 합군(合軍)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여주(驪州) 오포(梧浦)이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을 공격하는데, 고구려 군사는 서쪽에 진영을 설치하고 말갈은 동쪽에 둔진(屯陣)하여 포거(砲車)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대니 성과 집들이 마구 무너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陀川)은 성 바깥에 질려(蒺藜 적을 막는데 쓰는 마름쇠)를 던져서 성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뜯어다가 성의 파괴된 곳에 망루(望樓)를 만들어 굵은 밧줄로 얽고 마소의 가죽과 비단옷을 매달고 안에 노포(弩砲 쇠뇌)를 설치하여 놓고 지켰다. 그때 성내의 남녀는 2천 8백 인밖에 없었는데 이들을 격려하여 사수(死守)한 지 20여 일이 경과되자 식량은 떨어지고 힘도 지쳐 있었다. 그러나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고구려의 진영에 떨어졌고, 또 우레의 변괴가 있었다. 마침내 뇌음신은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고 왕은 동타천을 발탁하여 대내마를 삼았다.
그때 신라는 바깥으로는 당의 군사와 호응하고 안으로는 백제의 땅을 경략(經略)하면서, 또 남은 힘으로 고구려와 말갈을 막은 것은 모두 김유신의 힘이었다. 유신이 어느날 남문 밖에 서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오니 유신이 고구려의 첩자(諜者)임을 알고 묻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첩자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유신이 또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왕은 위로는 하늘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들은 생업(生業)을 즐기고 있다. 너는 돌아가 너의 나라에 알려라.”
하고, 드디어 놓아 돌려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라가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김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하였다.
○ 신라는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 지금의 합천(陜川)에 옮겼다.
아찬 종정(宗貞)으로 도독을 삼았다.

6월 신라의 대관사(大官寺) 샘물이 피로 변하였다.
또 금마군(金馬郡)에는 땅에 피가 흘러 5보(步)의 넓이에 번졌다.
○ 신라 왕 춘추(春秋)가 훙(薨)하고 태자 법민(法敏)이 즉위하였다.
신라의 제도에, 왕에게 하루 반미(飯米) 서 말과 수꿩 아홉 마리를 바쳤는데, 왕이 백제를 멸하고는 주선(晝膳 점심)을 없앴다. 이때에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어 베 한 필이 벼 30석, 혹은 50석과 맞먹어서 백성들이 성대(聖代)라 일컬었다. 왕은 군사를 조련(操鍊)하고 무사(武士)를 기르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이 있는 자를 부려서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할 운(運)을 열어 놓았다. 훙(薨)할 적에 나이는 59세였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 지금의 경주부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이가 문 무왕(文武王)이다. 왕비 김씨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니, 이가 자의 왕후(慈儀王后)이다.

추8월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크게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마읍은 《일통지(一統志)》에 평양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미상
○ 신라 왕이 당의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쳤다.
김인문(金仁間)ㆍ김유돈(金儒敦) 등이 당에서 돌아와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이르기를,
“짐(朕)이 이미 백제를 멸하여 그대 나라의 환란을 없앴다. 그런데 지금 고구려가 험고함을 믿고 예맥(濊貊)과 같이 악행을 하니, 짐이 그대와 함께 망해가는 오랑캐를 섬멸하려 한다.”
하였다. 왕이 우복(憂服 부모의 상(喪)) 중에 있었으나 제의 칙령 어기기를 어렵게 여겨 김유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진주(眞珠)ㆍ흠돌(欽突)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천존(天存)ㆍ죽지(竹旨)ㆍ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품일(品日)ㆍ충상(忠常)ㆍ의복(義服)을 상주 총관(上州摠管)으로, 진흠(眞欽)ㆍ중신(衆臣)ㆍ자간(自簡)을 하주 총관(下州摠管)으로, 군관(軍官)ㆍ수세(藪世)ㆍ고순(高純)을 남천주 총관(南川州摠管)으로, 술실(述實)ㆍ달관(達官)ㆍ문영(文穎)을 수약주 총관(首若州摠管)으로, 문훈(文訓)ㆍ진순(眞純)을 하서주 총관(河西州摠管)으로, 진복(眞福)을 서당 총관(誓幢摠管)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총관(郞幢摠管)으로,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矜大監)으로 삼고, 상이 스스로 23총관을 거느리고 행군(行軍)하였다.

9월 신라 왕이 웅현(熊峴)에 주둔하여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그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하였다.
그때에 당의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칙령을 받들고 신라 왕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軍糧)을 운반하게 하였다. 그때 또 웅진도 독부에서 사자를 보내 급박함을 알리니, 왕이 덕민(德敏)에게 이르기를,
“평양에 먼저 군량을 공급한다면 웅진의 길이 끊어져서 그곳을 지키는 한병(漢兵)이 적의 손에 떨어질까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덕민과 함께 행군하여 이곡정(飴谷停)지금은 미상 에 이르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제의 잔적(殘賊)이 옹산성(甕山城) 지금은 미상 에 웅거하고 있다.”
하니,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효유(曉諭)하였으나 성장(城將)이 따르지 않았다. 왕이 웅현정(熊峴停) 지금은 미상 에 도착하여 여러 군사들에게 서약하고 진군(進軍)하여 이들을 포위하였다. 김유신이 사람을 시켜 성장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죄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 명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니 무엇 하러 외로운 성을 혼자 지키는가? 빨리 항복하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성은 작으나 군사와 식량이 넉넉하고 사졸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니, 유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곤핍한 짐승이 오히려 싸우려 한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하고,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공격하여 먼저 큰 성책(城柵)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이 친히 싸움을 독려하니 사졸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3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으며 그 장수를 잡아 죽였고, 품일이 또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천 급을 베었다. 마침내 백제의 달솔(達率)인 조복(助服)과 은솔(恩率)인 파가(波加)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왕은 두 사람을 급찬(級飡)으로 삼았고, 또 조복에게는 고타야군(古陀耶郡)의 태수(太守)로 제수하고 전택(田宅)과 의물(衣物)도 겸하여 하사하였다. 왕이 여러 군사에게 영(令)을 내려, 웅진에 성을 쌓아 도로를 개통시키게 하였다.
【안】 신자(臣子)가 되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나라가 망함에 회복하기를 도모하는 것은 신자의 직분(職分)이다. 옹산성을 지키던 장수가 임금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된 뒤를 당하여,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 당과 신라의 군사에 항거하고, 김유신에게 답하는 말에,
“성은 작으나 사졸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니, 그 충과 용은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서(史書)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 성이 함락된 뒤에 유신이 마땅히 예로 초치(招致)할 것이요, 만일 그래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죽기로써 맹세하거든 마땅히 그의 충절을 이루어 주어 죽게 하고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 주며 그 묘에 비석을 세워서 기리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그의 처자에게도 생업(生業)을 주어야 인자(仁者)의 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유신은 성내어 죽였으니 무엇으로 인신(人臣)된 자를 권장하겠는가?
○ 당(唐)의 계필 하력(契苾何力)이 고구려의 군사를 압록강에서 격파하고 돌아갔다.
개소문(蓋蘇文)이 그의 아들 남생(男生)을 시켜 정병(精兵)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건너지 못하였다. 마침 계필 하력이 얼음이 언 때를 만나서 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강을 건너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하력이 수십 리를 쫓아가 죽이니 죽은 자가 3만 명이었고, 남은 무리들은 항복하였으며, 남생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그때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칙이 있어 돌아갔다.

동10월 신라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왕이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정방을 만나보게 하니, 정방이 회답하기를,
“내가 명을 받고 적을 토벌하기 위해 만 리 바다를 건너와서 한 달이 넘도록 배회(俳徊)하였는데도 왕(신라의 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고, 양곡도 대어 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였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와 의논하니, 모두 적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에게 중책을 주시면 죽어도 어려움을 사양치 않겠습니다. 오늘은 이 노신(老臣)이 충절을 다하는 날이니, 적전 속으로 달려가 소 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왕은 기뻐서 이르기를,
“국경을 넘은 뒤에는 상벌(賞罰)을 자의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왕이, 당의 조제사(吊祭使)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유신에게 맡기고 돌아오니,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을 기다렸다.

12월 신라가 군량을 웅진에 운반하여 주었다.
그때 유덕민(劉德敏)이 평양에 군량 수송할 것을 독촉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웅진의 양곡이 다하였는데 먼저 웅진으로 운반하면 칙지(勅旨)를 어기는 것이 되고, 만약 평양으로 운반하면 또한 웅진의 양곡이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하고, 이에 노약자(老弱者)를 뽑아 웅진으로 양곡을 운반케 하고, 정병(精兵)들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웅진이 백제의 핍박을 받음에 있어, 신라가 군량 수만 곡(斛)을 남으로 웅진에, 북으로 평양에 전후 공급했고, 또 머물러 진수(鎭守)하는 한병(漢兵)의 의복까지도 모두 신라에서 공급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신라의 백성은 공급에 피폐되어 풀뿌리를 캐어 먹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였다.


 

[주D-001]당력(唐曆)과 묘휘(廟諱) : 당의 달력과 임금이 죽으면 올리는 휘(諱)인데, 제후의 나라에 내리는 것임. 여기에서는 항복을 받아 달력과 묘휘를 내리겠다는 뜻.

 

 

군정편 3
 총융청(摠戎廳)
북한산성(北漢山城)



〈설치 연혁(設置沿革)〉 북한산성은 삼각산(三角山)의 온조(溫祚)의 옛터에 있다. 숙종 37년 신묘(1711년)에 대신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산성을 쌓고 행궁(行宮)을 세우고 향곡(餉穀)ㆍ군기를 저장하여, 방위하는 곳을 만들었다. 성의 둘레 7,620보, 성랑(城廊) 121, 장대(將臺) 3, 못[池] 26, 우물 99, 대문 4, 암문(暗門) 10,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 관성소(管城所)를 설치하였다. 성의 향곡은 선혜청에서 책정하여 보낸다. 성첩ㆍ군기는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개 영에서 창고를 설치하고 구역을 나누어서 지키며, 경리청(經理廳)을 설치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하여 관리하였다. 영종 23년 정묘(1747년)에 북한이 당연히 총융청의 근거지가 되어야 하므로 왕의 특명으로 경리청을 폐지하고, 합쳐서 본청에 붙이게 하고 전적으로 북한을 주관하게 하였다. 교련관 3명을 증설하여 그대로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창고의 감관으로 삼았다. ○ 정종 6년 임인(1782년)에 총융사(摠戎使) 이창운(李昌運)이 감원 대조규[減額大節目]를 작성하여, 경리군관 4명을 감원하고 본청 군관 3명만 남겨 두었다. 〈관제(官制)〉 정종(正宗) 17년 계축에 총융사 이방일(李邦一)이 본청의 재정이 피폐하므로 성첩을 수축하는 일을 삼군문(三軍門)에 환속시키기를 계청하였다. 관성소의 재목대금이 200냥인데 이식을 받아서 해마다 북한의 도로 수선에 보충 사용한다. ○ 청사ㆍ사찰(寺刹)을 수리할 때에는 군량증액조[添餉條]ㆍ월정고시조[月課條]ㆍ또는 공명첩(空名帖)ㆍ보토소(補土所) 등의 돈은 청구하여 사용한다. 별아병천총 관성장(別牙兵千摠管城將) 1명 정종 6년 임인에 관계의 차서에 구애됨이 없이 사람을 선택, 자의 임용하여 전적으로 곡물의 출납을 관리하고, 1주년마다 교체(交遞)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숙종 37년 신묘에 성을 쌓은 뒤에 병사나 수사의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계청 임명하여 처음에는 행궁소 위장(行宮所衛將)이라 하였고, 뒤에는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으며, 경종 2년 임인(1722년)에는 관성장이라 개칭하였다. 영묘(英廟) 23년 정묘(1747년)에는 경리청을 폐지하여 본청에 합속(合屬)한 뒤에 중군이 정례로 겸임하였고, 40년 갑신에 군제를 고치어 5개 영으로 만들 때[時]에 방어사(防禦使)의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 선임[擇差]하여 중부천총(中部千摠)을 겸임하여 항시 본성에 머물게 하였다. 47년 신묘에 총융사 김효대(金孝大)의 계청에 의하여 관성장은 종전대로 중군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정종 16년 임자(1792년)에 군제를 고치어 3개 영으로 만들 때에 아병천총겸관성장(牙兵千摠兼管城將)으로 명칭을 고쳤다. 파총 1명, 초관 5명, 별파진초관 1명, 수첩총(守堞摠) 2명, 교련관 4명, 기패관 5명, 군기감관 1명, 군관 3명, 부료군관 20명 매월에 궁술을 고시하여 성적을 봐서 유급으로 한다. 그 가운데 산직감관(山直監官) 3명도 들어간다. 문부장(門部將) 3명, 수첩군관 200명 경기의 각읍에 산재한다. 산성의 원역 46명. 서원 5명 고지기 11명, 대청지기 2명, 사령 5명, 군사 12명, 문군사 11명이다. 군제(軍制) 1사(司) 5초, 파하군(把下軍) 30명, 별파군 200명, 아병 5초 경기의 각 읍에 산재. 표하군 109명. 19명은 유급. 〈치영(緇營)〉 승병(僧兵)을 설치하고 치영이라 하였다. 중흥사(重興寺)에 있다. 총섭(摠攝) 1명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중으로 임명하였는데 정종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중으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중군승(中軍僧) 1명, 장교승(將校僧) 47명 유급. 승군 372명 73명은 유급. 태고사(太古寺)는 태고대(太古臺) 아래에 있다. 136칸이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고문(古文)ㆍ당시(唐詩)의 판목을 저장하였다. 중흥사는 등안봉(登岸峰) 아래에 있다. 149칸이다. ○ 치영이 있는 곳이다. 보국사(輔國寺)는 금위영의 창고 아래에 있다. 76칸 진국사(鎭國寺)는 노적봉(露積峰)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104칸. 부왕사(扶旺寺)는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111칸. 국녕사(國寧寺)는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70칸. 보광사(普光寺)는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75칸. 원각사(元覺寺)는 증봉(甑峰) 아래에 있다. 81칸. 용암사(龍巖寺)는 일출봉(日出峰) 아래에 있다. 88칸. 상운사(祥雲寺)는 영취봉(靈鷲峰) 아래에 있다. 89칸. 서암사(西巖寺)는 수구문(水口門) 안에 있다. 민지암(閔漬菴)의 옛 터. ○ 107칸. 이상의 11개 사찰에는 각각 승장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을 둔다. 봉성암(奉聖菴)은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25칸. 원효암(元曉菴)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10칸. 문수암(文殊菴)은 문수봉 아래에 있다. 행궁(行宮) 상원봉(上元峯) 아래에 있다. 내정전(內正殿) 28칸, 행각(行閣) 15칸, 수라간(水剌間) 6칸, 변소 3칸, 내문(內門) 3칸, 외정전 28칸, 행각 18칸, 중문(中門) 3칸, 월랑(月廊) 20칸, 외문 4칸, 산정문(山亭門) 1칸. 〈제창(諸倉)〉 관성소는 상창(上倉)에 있다. 대청 18칸, 내아(內面) 12칸, 향미고(餉米庫) 63칸, 군기고 3칸, 집사청(執事廳) 3칸, 군관청(軍官廳) 4칸, 서원청(書員廳) 4칸, 고지기 집[庫直家] 5칸, 월랑 2칸, 각문(各門)이 7. 중창(中倉) 대청 6칸, 향미고 78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하창(下倉) 대청 6칸, 향미고 34칸, 고지기 집 8칸, 대문 2칸. 별고(別庫) 행궁 옆에 있다. ○ 대청 3칸, 향미고 12칸, 고지기 집 5칸, 대문 2칸. 이상의 상창ㆍ중창ㆍ하창ㆍ별고를 ‘관성 4창(管城四倉)’이라 한다. ○ 별관(別館)이 4개처 산영루(山英樓) 10칸, 사정(射亭) 6칸, 동장대(東將臺) 3칸. 어제비각(御製碑閣) 1칸. ○ 동장대는 숙종 18년 임진에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세웠다. 훈련도감창[訓倉] 대청 18칸, 내아 8칸, 향미고 60칸, 군기고 16칸, 중군소 4칸, 낭청소(郞廳所) 5칸, 서원청 5칸, 구류간(拘留間) 3칸, 행각 11칸. 금위영창[禁倉] 대청 18칸, 내아 6칸, 향미고 54칸, 군기고 13칸, 중군소 5칸, 서원청 4칸, 월랑 8칸. 어영청창[御倉] 대청 18칸, 내아 7칸, 향미고 48칸, 군기고 10칸, 중군소 4칸, 서원청 2칸, 월랑 12칸. ○ 산성 부근의 토지는 구역을 나누어 획정한다. 신둔(新屯)ㆍ청담(淸潭)ㆍ서문하(西門下)ㆍ교현하(橋峴下)는 훈련도감창의 구역이며, 미아리(彌阿里)청수동(靑水洞)ㆍ가오리(加五里)ㆍ우이동(牛耳洞)은 금위영창의 구역이며, 진관리(津寬里)ㆍ소흥동(小興洞)ㆍ여기소(女妓所)ㆍ삼천동(三千洞)은 어영청의 구역이다. 속둔(屬屯) 4개소 : 갑사둔(甲士屯) 양주의 누원(樓院)에 있다. ○ 본시 병조의 목장이었는데 숙종 40년 갑오(1714년)에 본둔이 북한산성과 상호 보장(保障)해야 될 지점이라 하여, 연품하여 북한에 속하게 하고 토지를 개간하는대로 세를 징수하며, 환미(還米)를 두어서 모두 모곡을 받아서 둔속의 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액수는 원환곡(元還穀)에 보태게 하였다. 수유둔(水逾屯) 양주에 있다. 갑사둔에 속한다. ○ 본시 양향청(糧餉廳)의 둔이었는데 경종 원년 신축(1721년)에 경리청당상 민진후(閔鎭厚)가 요청하여 이를 북한에 속하게 하고 환조(還租)를 설치하였다. 금암둔(黔巖屯) 양주 금암에 있다. ○ 숙종 45년 기해(1719년)에 매입 설치하였다. 환조를 설치하고 모두 나누어서 모곡을 거두어 둔속의 경비에 충당한다. 신둔(新屯) 북한산성의 서문 밖에 있다. 금암둔에 속한다. ○ 숙종 46년 경자에 경리청 당상 민진원(閔鎭遠)이 매입 설치하였다. ○ 갑사ㆍ금암 2둔에는 모두 별장이 있다. 금암별장은 영종 37년 신사(1761년)에 고 별장 이성신(李聖臣)의 아들 인량(寅亮)을 영구히 별장에 임명하고 대대로 승전하도록 왕명을 받았다.


 

[주D-001]온조(溫祚)의 옛터 : 백제의 서울을 뜻함. 온조는 백제의 시조.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 재위 B.C. 18년~A.D. 28년. 처음 위례성(尉禮城 :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가 백제로 고쳤으며, 말갈(靺鞨)의 침입이 잦아 타격을 받았다. B.C. 5년 서울을 남한산(南漢山)으로 옮겼음.
[주D-002]이유(李濡) : 1645년(인조 23)~1721년(경종 1). 자는 자우(子雨),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전주(全州). 좌의정을 거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음.
[주D-003]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아니한 서임서(叙任書).
[주D-004]김효대(金孝大) : 1721년(경종 1)~1781년(정조 5). 자는 여원(汝原), 본관은 경주(慶州). 영조 때 총융사를 지내고, 나중에 형조 판서에까지 이르렀음.
[주D-005]민지암(閔漬菴) : 암자(菴子)의 이름. 민지는 인명(人名). 1248년(고려 고종 35)~1326년(충숙왕 13).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黙軒). 정승을 지냄.
[주D-006]수라간(水剌間) : 궐내의 진지를 짓는 곳.
[주D-007]월랑(月廊) : 행랑의 별칭.
[주D-008]민진후(閔鎭厚) : 1659년(효종 10)~1720년(숙종 46). 자는 정순(靜純), 호는 지재(趾齋), 예조판서ㆍ한성부판윤을 거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오름.
[주D-009]민진원(閔鎭遠) : 1664년(현종 5)~1736년(영조 12). 자는 성유(聖猷), 호는 단암(丹巖), 본관은 여흥(驪興). 좌의정에 이름.
[주D1-001]관성소(管城所) : ‘관성소(管城所)’의 ‘所’가 어느 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음.
[주D1-002]정종(正宗) : ‘정종(正宗)’의 ‘正’이 어느 본에는 ‘英’으로 되어 있음.
[주D1-003]공명첩(空名帖) : ‘공명첩(空名帖)’의 ‘名’가 어느 본에는 ‘亡’으로 되어 있음.
[주D1-004]교체(交遞) : ‘교체(交遞)’의 ‘遞’가 어느 본에는 ‘替’로 되어 있음.
[주D1-005]영묘(英廟) : ‘영묘(英廟)’의 ‘廟’가 어느 본에는 ‘宗’으로 되어 있음.
[주D1-006]때[時] : ‘때[時]’가 어느 본에는 ‘則’으로 되어 있음.
[주D1-007]선임[擇差] : ‘선임[擇差]’의 ‘差’가 어느 본에는 ‘定’으로 되어 있음.
[주D1-008]파하군(把下軍) : ‘파하군(把下軍)’의 ‘把’가 어느 본에는 ‘標’로 되어 있음.
[주D1-009]고문(古文) : ‘고문(古文)’의 ‘文’이 어느 본에는 ‘今’으로 되어 있음.
[주D1-010]104 : ‘104’가 어느 본에는 ‘百單四’로 되어 있음.
[주D1-011]향미고(餉米庫) : ‘향미고(餉米庫)’의 ‘餉’이 어느 본에는 ‘納’으로 되어 있음.
[주D1-012]5 : ‘5’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3]60 : ‘60’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4]6 : ‘6’이 어느 본에는 ‘7’로 되어 있음.
[주D1-015]54 : ‘54’가 어느 본에는 ‘48’로 되어 있음.
[주D1-016]13 : ‘13’이 어느 본에는 ‘16’으로 되어 있음.
[주D1-017]2 : ‘2’가 어느 본에는 ‘4’로 되어 있음.
[주D1-018]12 : ‘12’가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9]서문하(西門下) : ‘서문하(西門下)’의 ‘門’이 어느 본에는 ‘閘’으로 되어 있음.
[주D1-020]미아리(彌阿里) : ‘미아리(彌阿里)’의 ‘阿’가 어느 본에는 ‘河’로 되어 있음.
[주D1-021]청수동(靑水洞) : ‘청수동(靑水洞)’의 ‘靑’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주D1-022]삼천동(三千洞) : ‘삼천동(三千洞)’의 ‘千’이 어느 본에는 ‘淸’으로 되어 있음.

 

 

   

사가시집보유 제3권
 시류(詩類)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시
〈직산제원루시(稷山濟源樓詩)〉 서(序)



내가 사명을 받들고 영남(嶺南)에 갈 적에 직산(稷山)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의 객관(客館)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 잠깐 쉬면서 주인에게 “이 누각의 이름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나, 주인이 알지 못하므로, 좌우(左右)에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濟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손들은 제원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거정(居正)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이라 한 것은 바로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東明王) 주몽(朱蒙)의 아들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사서(史書)에 이르기를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펴보아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했으니, 세상에서 이곳을 직산이라 한다.[溫祚登負兒岳 相其可居之地 而都于河南之慰禮城 世傳爲稷山]”라고 하였다. 그래서 거정은 항상, 부아악은 여기서 200리나 떨어진 곳인데 어찌 그곳을 살 만한 곳이라고 여길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했었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의 하(河)는 어느 물을 가리킨 것일까? 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갈 길이 바빠서 한 번도 들어가 볼 겨를이 없었다. 다만 바라보건대, 지세(地勢)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어 도읍을 세울 만한 곳이 아니기에 마음속으로 의심했었다. 그러다가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서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처음 도읍지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온조왕(溫祚王) 이후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뒤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며, 또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공주(公州)이고, 또 뒤에 사자하(泗泚河)로 옮겼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부여(扶餘)인 것이다.
백제는 한 성제(漢成帝) 때부터 시작하여 당 고종(唐高宗) 때를 지나도록 시종 500여 년을 지탱해 온 나라로서, 특히 온조왕은 이리저리 떠돌아 파천(播遷)하는 중에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하여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솥발처럼 삼국의 형세를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위대한 인물이 아니면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후대(後代)에 이르러서는 누차 그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강함을 믿고 전쟁하기를 좋아하여 순치보거(脣齒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전쟁을 하다가 국세(國勢)가 날로 쭈그러들었고, 게다가 의자왕(義慈王)은 혼암하고 음탕하여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成忠)의 간하는 말은 거절했다가, 당(唐)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자마자 나라가 곧 멸망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에 이 누각에 오르니, 감개(感慨)함을 감당할 수 없어 시로써 위문하노라.

백제의 옛터에 잡초만 절로 우거졌어라 / 百濟遺墟草自平
내 와서 보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누나 / 我來感慨一傷情
오룡은 천안부에서 다툼을 그쳤는데 / 五龍爭罷天安府
쌍봉은 위례성에서 울며 사라졌네
/ 雙鳳鳴殘慰禮城
시조 사당 깊은 곳엔 단풍나무 어우러졌고 / 始祖祠深紅樹合
성거산이 둘러싼 곳엔 푸른 구름 비꼈구나 / 聖居山擁碧雲橫
누에 오르니 추풍에 슬픈 생각 하 많은데 / 登樓多少秋風思
어드메서 부는지 철적 소리가 들려오누나 / 何處吹殘鐵笛聲


 

[주D-001]또 뒤에 …… 한도(漢都)이며 : 이 부분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거하여 ‘又遷北漢山城卽今漢都也’ 11자를 보충하여 번역한 것이다.
[주D-002]순치보거(脣齒輔車)의 형세 : 순치는 입술과 이를 말하고, 보거는 광대뼈와 잇몸을 말한 것으로, 전하여 피차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여 서로서로 의지하는 사물에 비유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보거는 수레의 덧방나무와 수레의 몸통을 가리킨다고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5년 조에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輔車相依 脣亡齒寒]”라고 하였다.
[주D-003]오룡은 …… 사라졌네 : 오룡은 《세종실록》 〈지리지 천안군〉조에 “고려 태조(太祖) 13년 경인에 동·서도솔(東西兜率)을 합하여 천안부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전설에 의하면, 술사(術師) 예방(藝邦)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三國)의 중심(中心)으로서 오룡(五龍)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이오니[五龍爭珠之勢], 만일 이곳에 큰 고을[大官]을 두면, 백제(百濟)가 스스로 와서 항복하오리다.’ 하므로 태조가 산(山)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한다.”고 하여 왕건이 천안도독부를 설치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것을 비유한 표현이고 쌍룡은 동명왕의 두 아들로, 백제의 건국시조인 비류와 온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앞구와 대구를 이루어 삼국을 통일한 왕건과 대비를 이루는 표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한성부(漢城府)
한성부(漢城府)



동쪽은 양주(楊州) 경계까지 10리, 남쪽은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은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양주 경계까지 10리.
【건치연혁】 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이 빼앗아 성을 쌓았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盖鹵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都城)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달아나다가 피살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封疆]을 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漢山州)의 군주(軍主)를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이 한양군(漢陽郡)이라 고쳤다. 《삼국사》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고,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다.”하였는데, 지금 〈본기(本紀)〉를 상고하여 보니, “백제 시조 14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도읍을 한성으로 옮겼고, 성을 한강(漢江) 서북쪽에 쌓고, 한성 백성들을 나누어 살게 하였으며, 38년에는 경내(境內)를 순찰ㆍ안무(按撫)하였는데, 북쪽으로 패하(浿河)에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그렇다면, 북한산은 온조왕 때부터 이미 백제 땅이었으며, 근초고왕이 남한산으로부터 옮겨 도읍한 것인데, 어찌 근초고왕이 빼앗았다고 할 것이겠는가.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다만 《삼국사》에 의하여 적고, 그 본말(本末)을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으며, 또 장수왕을 자비왕(慈悲王)이라고 잘못 적었기 때문에, 여기서 위와 같이 분변하여 바로잡은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또 양주라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처음으로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는,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이름하여 해주(海州)와 함께 왕도(王都)의 좌우 2보(輔)로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치고,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降等)하여 양광도(楊廣道)에 속하게 하였으며, 문종(文宗) 때에는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승진시키고, 이웃 고을의 백성들을 옮겨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는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 밀기(密記)에 의하면,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으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옮겨 도읍하기를 청하고, 일지[日者] 문상(文象)이 거기에 따라서 함께 주장하니, 왕이 친히 와서 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에 도성을 경영하는 그 역사[役]를 감독하게 하여 5년 만에 완성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한양부(漢陽府)라 고치고, 공양왕(恭讓王)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속하게 하였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라 고쳤으며, 판부사(判府事)ㆍ윤(尹)ㆍ소윤(小尹)ㆍ판관(判官)ㆍ참군(參軍)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예종조(睿宗朝)에는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으로 불렀으며 소윤을 서윤(庶尹)으로 고쳤다. 판윤 1명은 정2품(正二品), 좌ㆍ우윤 각 1명은 종2품(從二品), 서윤 1명은 종4품, 판관 2명은 종5품, 참군 3명은 정7품인데, 그 중 1명은 다른 관직에서 겸하게 하였다. 경도(京都)의 호적[口帳]ㆍ시전(市廛)ㆍ가옥ㆍ전답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橋梁)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쟁투 구타[鬪歐]ㆍ 낮순찰[晝巡]ㆍ 검시(檢屍)ㆍ차량(車輛)ㆍ사고ㆍ잃어버린 마소의 낙계(烙契 낙인(烙印)) 등의 일을 맡아 하였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성씨】 본부(本府) 한(韓)ㆍ조(趙)ㆍ민(閔)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성씨는 모두 주관 육익(周官六翼)ㆍ윤회(尹淮)의 《지리지(地理志)》ㆍ 경상ㆍ전라 두 도의 관풍안(觀風案 감사의 전임자 명부)에 의거하였다. ○ 무릇 다른 고을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 다만 본적(本籍)만을 주(註)달아 둔다. 다음에도 이에 따른다.

【형승】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漢水]에 임하였다 《고려사》에, “북쪽으로 화산을 의지하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평하게 펼쳐졌으며,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번화(繁華)하다.” 하였다. 산하가 겹겹이 둘러 싸이고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바르고 고르다.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있다. 북악(北岳)이 뒤에 솟았으니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봉(南峯)이 앞에 높이 솟았는데 성곽이 사면으로 둘렀다. 모두 예겸(倪謙)의 〈등루부(登樓賦)〉에 있다. 범이 걸터 앉고 용이 서렸으니, 금성 천부(金城天府)로다. 모두 권우(權遇)의 시에 있다. 8도가 관활되고 겹으로 된 문[重門]에 딱다기[柝]를 치네. 장영(張寧)의 〈대평관(大平館)〉이란 시에 있다. 하늘이 만든 견고(堅固)함이로다. 권근(權近)의 시에,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漢水]는 철철 흐르니, 하늘이 만든 견고함이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장대하도다. 우리나라 일어나 천명 받고 한양에 도읍 정하자, 점쳐 보니 길(吉)하여 길이 좋으리로다. 화산은 높이 솟고 한강수 세차게 흐르는데, 하늘이 만든 땅 평탄하게 펼쳐 넓도다. 도로와 거리 고른데 배와 수레 모두 이르니, 도읍을 여기에 정하자 원근에서 모두 기뻐하네. 흐르고 흐르는 한강수 나라 도읍 둘렀는데, 지기[風氣]가 모인 곳에 둘러 싸여 완전하도다. 왕이 와서 자리 잡자 신민들 안정되었으니, 천만 년에 길이길이 삼한(三韓) 땅 진압[鎭]하리.” 하였다. 한 물은 남쪽을 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였네 권근의 시에, “한 물은 남쪽을 둘러 출렁거리며 흐르고, 세 산은 북쪽을 진압하여 우뚝 솟았다. 중국의 번방(藩邦)이다 〈함허자(涵虛子)〉에, “이웃 나라가 모두 그 의(義)를 사모하여 서로 친해서 중국의 번방이 되었다.” 하였다.
【풍속】 신의(信義)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에, “사람들이 모두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에 돈독하여, 중국의 풍속을 양성(釀成)하였다.” 하였다.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다 위와 같은 글에, “의관 제도는 모두 중국과 같기 때문에, 시서 예악(詩書禮樂)의 고장이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한다.” 하였다. 천성이 유순하다 《후한서(後漢書)》에, “천성이 유순하여 삼방(三方)과 다르므로 공자가 가서 살려고 하였다.” 하였다. 백성과 물산이 크게 이루어졌다 예겸의 〈등루부〉에 있다. 노(魯) 나라처럼 어진 이가 많다 장영의 〈대평관〉이 시에 있다. 집집마다 순후[淳厖]하다 김식(金湜)의 시에, “중화(中華)를 사모하여 점점 중화와 같아지니, 집집마다 순후하여 모두 봉해 줄 만하다.” 하였다. 시서(詩書)로 선비를 가르친다 김식의 시에, “폐백[玉帛]으로 천자(天子)에게 조회하니 마음이 간절하고, 시서로 선비를 가르치니 뜻이 화평하다.” 하였다. 의관으로 예양(禮讓)한다 김식의 시에, “집집마다 농사 짓고 누에[桑]치는 직업이며, 곳곳마다 의관으로 예양하는 모습이네.” 하였다. 시서(詩書)의 숲[藪]이다 진감(陳鑑)의 〈희청부(喜晴賦)〉에, “조선은 동번(東藩) 중의 한 나라가 되었는데, 예의의 구역이요, 시서의 숲이므로, 특별히 첫째로 꼽는다.” 하였다.
【산천】 삼각산(三角山) 양주(楊州) 지경에 있다.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잇닿은 봉우리와 겹겹한 산봉우리가 높고 낮음이 있다. 빙빙 둘러서 양주 서남쪽에 이르러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삼각산이 되니, 실은 경성(京城)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沸流)ㆍ온조(溫祚)가 남쪽으로 나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으니, 바로 이 산이다.
○ 고려 오순(吳洵)의 시에, “공중에 높이 솟은 세 송이의 푸른 연꽃, 아득한 구름 안개 몇만 겹인고. 전녀에 누대(樓臺)에 올랐던 곳 추억(追憶)하니, 날 저문 절간에 종 소리 두어 번 울리네.” 하였다.
○ 고려 이존오(李存吾)의 시에, “세 송이의 기이한 봉우리 멀리 하늘에 닿았는데, 아득한 대기(大氣)에 구름 연기 쌓였네. 쳐다보니 날카로운 모습 장검(長劒)이 꽂혔는데, 가로 보니 들쭉날쭉 푸른 연꽃 솟았네. 언젠가 두어해 동안 절간에서 글 읽을 제, 2년간 한강 가에 머물렀네. 누가 있어 산천이 무정타고 말하던가. 이제 와서 서로 보니 피차에 처량하네.” 하였다.
○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소년 시절 책을 끼고 절간에 머무를 제, 돌다리에 뿌려지는 샘물 소리 고요히 들었네. 멀리 보이는 서쪽 벼랑에 밝은 빛 반짝반짝, 두어 마디 종소리 저녁 햇빛 향해 치네.” 하였다.
○ “세 봉우리 깎아 내민 것 아득한 태고적이니, 신선의 손바닥이 하늘 가리키는 그 모습 천하에도 드물리. 소년 시절에 벌써부터 이 산의 참모습 알았거니, 사람들 하는 말이 등 뒤엔 옥환(玉環 양귀비) 살쪘다고 하네.” 하였다.

백악(白嶽) 도성(都城) 안, 궁성(宮城) 북쪽에 있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다. 타락산(酡酪山) 도성 안 동쪽에 있다. 무악(毋嶽) 도성 서쪽에 있다. 사현(沙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다. 녹반현(綠礬峴) 사현 북쪽에 있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인데, 인경산(引慶山)이라고도 한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 남쪽에 있는 것을 큰 설마라 하고, 산 동쪽에 있는 것을 작은 설마라고 한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水口)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지기(地氣)를 함축시키기 위하여서인 것 같다.
잠두봉(蠶頭峯) 시속에서는 가을두(加乙頭)라 부르고, 또 용두봉(龍頭峯)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용산(龍山)이라 하였는데,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 강희맹(姜希孟)의 서술(敍述)에, “서호(西湖)는 도성과의 거리가 10리도 못 되는데, 산이 푸르고 물이 푸르러 형승(形勝)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간다. 호수의 북쪽에 끊어진 언덕이 있는데, 형상이 큰 자라 머리[鰲頭]같으며 혹은 잠두(蠶頭)라고 한다. 언덕이 호수 가운데 뾰족하게 바늘처럼 나왔는데, 형세가 또 높아서 호수 가운데의 승경(勝景)을 모두 볼 수 있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용두(龍頭) 제일봉에 걸어서 오르니, 풍광이 한이 없는데 흥인들 다 할 수 있으리. 사방의 산과 물은 시정(詩情) 밖인데, 만리 건곤(乾坤)은 한 눈에 들어오네. 마을 집들은 북쪽으로 연이어 성곽에 가깝고, 고깃배는 서쪽으로 가매 바다 어귀 통했네. 주인이 술자리 마련하고 손을 자주 만류하니, 저녁 해가 어느덧 붉은 빛 사라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닻줄을 내리고 나룻가 산봉우리에 올라가니, 기이한 풍경 더욱더 많고 생각은 끝이 없네. 평생의 버릇[氣習]은 삼상(三上)에서 시 지었는데, 오늘 다시 호탕한 마음[豪狂] 술 한 번 취하게 마셨네.[酒一中] 산세(山勢)가 두루 감쌌는데 하늘은 저 멀리 높고, 강물 소리 컸다 작았다 바다의 조수와 통하였네. 자리에 앉은 이들 모두 다 신선 손인데, 지척간의 동화(東華)가 연홍(軟紅 홍진(紅塵))에 가려 있네.” 하였다.
○ 장근(張瑾)의 시에, “양화도 한 물굽이 겨우 지나서, 용두봉 저 위로 다시 올라가네. 높은 데 올라 장안(長安)길 바라보니, 가는 저 구름 빌려 이내 몸 싣고 돌아갈거나.” 하였다.
○ “용산에 함께 올라 저물녘 갠 풍경 바라보니, 백구(白鷗) 날아드는 저 물가에 배들 많이 매여 있네. 멀리 포구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열 두 봉우리에 저 머리에 달이 마침 밝아 오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도성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인데, 혹시나 기심(機心 술책(術策)을 부리는 마음)있어 갈매기를 친할 수 없으려나. 비가 오려는지 구름은 희묽게 번져 가고, 바람 소리 세찬데 물은 길게길게 흐르네. 산 위에 취해 누우니, 닭의 울음 정오를 알리고, 시 짓느라 세월도 잊었는데 또 보리가을[麥秋] 닥쳐 왔네. 반월(半月) 한가로움 오히려 즐거운데, 하물며 신세를 창주(滄洲 강호(江湖)와 같은 말)에 붙였음에랴.” 하였다.
○ 권건(權健)의 시에, “배 안에서 잠이 깨니 술기운 가시는데, 서늘한 밤 바람 이슬 옷에 스며 차구나. 우연히 흥이 나서 곤한 줄 모르고서, 달지고 연기 비낄 제, 느릿느릿 배 저어 돌아오네.” 하였다.
○ 박은(朴誾)의 시에, “사해(四海) 문장 소자첨(蘇子瞻)은, 우주(宇宙)간에 그 기개 다 용납하지 못하였네. 이름이 높으면 화(禍)가 되나니, 시구(詩句)를 헐뜯어서 모두 죄안(罪案)에 넣었네. 3년간이나 동파(東坡)에서 와력(瓦礫)을 주었는데, 그림자뿐인 외로운 신세 누가 이 몸 머물게 하려나. 촌야(村野)의 할머니가 만나서 하는 말이, 옛날의 부귀(富貴)는 봄꿈이 깨었다네. 선생은 아무 것도 개의(介意)치 않고, 높이 누워 문장만을 즐겼다네. 때로 가다 산수(山水)에 흥이 나면, 집을 나가 놀기도 자주 했네. 적벽강(赤壁江) 가을 칠월, 기망(旣望 16일) 달빛 더욱 맑았네. 일엽 편주에 흰 이슬 비꼈는데, 나는[飛] 신선을 끼고 먼 공중에 노닐꺼나. 뱃전 두드리며 노래 불러 조공(曹公 조조(曹操))에게 화답하는데, 퉁소 소리 애원(哀怨)하여 곡조가 되지 않네. 바가지 술잔 기울이며 손과 주고 받거니, 취해 누워 동방이 밝은 줄 몰랐네. 당시의 강신(江神)이 호방한 문장 도와주어, 몇 글자 우연히도 인간 세상에 남았네. 지금껏 펄펄 날아 구름 위에 오를 듯, 내 전날 읽어 보고 다시금 세 번 탄식했다네. 금년은 다행히도 같은 임술(壬戌), 좋은 놀이 고금(古今)이 일반이네. 서호(西湖)에서도 매우 기이한 누에 머리[蠶頭] 그 봉우리, 친구들아 가보지 않으려나. 우리 친구 세 사람 함께 웃는데, 따라온 두 손은 와서 같이 웃네. 마포(麻浦)로 나가서 작은 배 띄우니, 봄 강물이 처음 불어 한창일세. 가벼운 물결 일지 않고 바람 잔잔하니, 어느덧 좋은 경치 맑은 놀이 알맞았네. 사화(士華 남곤(南袞)의 자(字))의 얼굴에는 흥이 넘치는데, 좌중(座中)에 다리 뻗고 앉아[槃礴] 그 자리엔 관도 쓰지 않았네. 술 한 말 마시며 글 5백 자 쓰는데, 글자마다 용사(龍蛇)처럼 꿈틀거리니 그 누가 있어 붙들어 매리. 천 년 후에 알아주는 이 있는 줄 알면, 하늘 위의 소선(蘇仙 소동파) 응당 감탄하리. 황혼에 배를 띄워 흐르는 물빛 치며 가니, 서쪽으로 보이는 넓은 물결 끝이 없네. 사공이 돛대 멈추고 나에게 하는 말이, 잠두봉 지나면 물결 다시 사납다네. 어촌에 닻을 매고 장사배[商船]에 의지하니,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네. 저 달이 너무 밝아서 하늘이 밝은 달 아끼는 듯, 일부러 엷은 구름[微雲] 보내어 은하수에 점을 찍네. 버드나무들 저 멀리 깃발[旌纛]인 양 서 있고, 등불은 점점이 별처럼 빛나네. 시원한 비 서쪽에서 소리 내며 뿌리니, 큰 고기들 물결 가르며 모두들 도망해 숨누나. 이때에 옷을 여미고[擁褐] 술잔 돌리기 재촉하니, 그대의 좋은 글귀 폭탄 터지듯 사람을 놀라게 하네. 시령(詩令)을 지금 다시 내는데, 명은 엄하고 재주 모자라니 나는 도망치려네. 술잔 들고 달에게 물으며 소선(蘇仙)을 불러 보니, 공중에서 바람 타고 날개 돋칠 듯. 동방은 밝으려 하고 물기운 넘치니, 천지가 혼돈(混沌)해 개벽(開闢)하는 처음 같네. 돛대를 치며 다시 저어 연무(煙霧)를 뚫고 가니, 풀빛은 멀고 모래판은 긴데 까마귀 황새 어지러이 날아가네. 양화도 나룻가에 종일토록 비오니, 배 밑에서 맑은 시가 구슬처럼 빛나고 많네. 돌아와선 10일간이나 문 닫고 누웠는데, 머리 돌려 놀던 곳 생각하며 부질없이 팔을 걷네. 영웅들 흘러가고 천지는 늙었는데, 소선(蘇仙) 죽은 뒤에 해가 몇 번 바뀌었나. 옛부터 인간사가 매양 이러한 것인데, 우리 친구 벌써 백 년을 반이나 살았네. 오늘의 이 즐거움 헛되이 하지 말아, 흥이 나면 술 가지고 다시 한 번 찾아보세.” 하였다.
○ “성긴 비 강을 지나매 급한 소리 나는데, 작은 등불 달 대신 외로이 밝아 있네. 스스로 우습구나 천지간 하루살이[蜉蝣] 사는 듯, 만경창파에 갈대 하나[一葦] 비꼈는 듯. 이날 우연히 만나 애오라지 술을 마시나니, 옛 사람 보지 못하고 이름만 들었거니, 풍류(風流)는 천 년 만에 우리들에게 돌아왔는데, 비루하고 추솔(麤率)한 말 두서도 없어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강머리에 달 솟아 오르자 물결은 밤에도 희어, 우리들로 하여금 공명(空明 고요한 물에 비치는 명월(明月)의 경치)을 치게 하네. 시를 지으니 퉁소 화답 필요 없고, 꿈을 깨니 외로운 학이 강을 질러 지나는 데 놀랬네. 세상일 지금에 우리들 늙으려고 하는데, 강물은 예로부터 소리만 남았구나. 내 어찌 짧은 글로 신선의 붓을 따르리, 응당 저 하늘 구만 리 밖에 있으리라.” 하였다.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國都)의 동쪽 들[東郊]이다. 그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 물과 풀이 매우 넉넉하므로 울타리를 둘러쳐서 나라 말[國馬]을 기른다. 넓이가 34리이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지(蓮地)라고 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남쪽에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개천(開川) 백악산(白岳山)ㆍ인왕산(仁王山)ㆍ목멱산(木覓山)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 지나서 세 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세종 26년에 이현로(李賢老)가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도성 안 개천에 더러운 물건을 던지는 것을 금하여, 명당(明堂)의 물을 맑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기를, “신이 살피건대, 《동림조담(洞林照膽)》이란 책은 범월봉(范越鳳)이 지은 것인데, 월봉은 오계(五季 오대(五代)) 때의 한 술사(術士)였습니다. 그 중에서 말한 바, ‘명당(明堂)에 냄새 나고 더러우며, 불결한 물이 있으면 패역 흉잔(悖逆凶殘)의 징조이다.’한 것은 장지(葬地)의 길흉을 말한 것이요, 도읍지의 형세에 대해서는 말한 것이 없습니다. 대개 월봉의 의견으로는, 신도(神道)는 정결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물이 불결하면 신령(神靈)이 불안하여 그러한 징조가 있다는 것이요, 국가 도읍지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도읍하는 곳을 말씀드리면, 인가(人家)가 번성해지니 이미 인가가 번성해지면 자연히 냄새나고 더러운 것이 쌓이니, 반드시 통하는 개천과 넓은 내가 있어, 그 사이를 가로 세로 흘러 그 나쁜 것을 떠내려 보낸 후에라야만 맑게 할 수 있는 것이니, 도성에는 그 물이 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일 도읍지의 물을 한결같이 산간의 청정(淸淨)한 물과 같이 하려 한다면, 이것은 사세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치로 말하더라도 사생(死生)이 길이 다르고 신(神)과 사람이 처지가 다른데, 무덤[塜地]에 대한 일을 어찌 국가 도읍지에 해당시키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상소를 보고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효첨의 의논이 정직하다.” 하고, 드디어 이현로의 말을 쓰지 않았다.

중량포(中梁浦) 도성 동쪽 15리에 있는데, 물이 양주(楊州)에서 남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豆毛浦) 상류에 있다. 도요연(桃夭淵) 살곶이[箭串]에 있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5리쯤에 있다.
한강(漢江) 목멱산 남쪽에 있는데,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는 북독(北瀆)이라 하여 사전(祀典)에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사평도(沙平渡)라 칭하고,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昌水)와 합하며, 양근(楊根)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한다. 광주(廣州) 땅에 이르러 도미진(度迷津)이 되고, 광나루[廣津]가 되며,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 나루가 된다. 여기서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 노돌)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나가 서강(西江)이 되고,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고, 교하(交河) 서쪽에 이르러서는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도승(渡丞) 한 명을 두어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검문하게 하였다.
○ 고려조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강이 머니 하늘이 나직이 붙었고, 배가 가니 언덕이 따라 옮기네. 엷은 구름은 흰 비단처럼 가로 질렀고, 성긴 비는 실처럼 휘날리누나. 여울이 험하니 흐르는 물 빠르고, 봉우리 많으니 산은 끝나 더디구나.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자주 머리 돌리는 것은, 바로 멀리 고향을 바라봄일세.” 하였다.
○ 고려조 중 선탄(禪坦)의 시에, “혼자 강루(江樓)에 오르니 조망(眺望)도 좋아, 모래터에서 배 기다리는데 저녁 조수[晩潮] 돌아 오누나. 외로운 돛대 지나는 밖에 청산이 끝나고, 한 쌍의 새 돌아가는 가에 흰 빗발이 오누나.” 하였다.
○ 고려조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멀리 월악(月嶽)이 중원(中原 충주(忠州))에 비꼈는데, 한강(漢江)물이 거기서 발원(發源)되었네. 도도히 흘러 남국의 강기(綱紀)로 중요한 나루터인데, 푸른 물결 천길 속에 이무기와 자라[蛟龜]도 잠겨 있다네. 오는 소 가는 말 날마다 다함 없으니, 나루터에서 간간이 사공을 걱정시키네. 내 옛날 강정(江亭)에 올랐을 때, 기둥에 기대 서서 가을 바람 읊었다네. 광성(廣城)은 동쪽에 둘러있고, 화산(華山)은 서쪽에 솟았네. 바다와의 거리 수백 리이니, 썰물ㆍ밀물 어찌 통하리. 어찌하여 섬 오랑캐[島夷 왜구[倭]]는, 나는[飛] 저 기러기처럼 빠르게도 다니나. 날뛰며 이곳 지날 땐, 지키는 군사들 긴 활 버렸다네. 지금도 부로(父老)들 눈물 길게 흘리며, 사람 만나면 태평시절 즐겁던 일 이야기하네. 예성(禮成) 항구 여기가 해문(海門)인데, 고기잡이배 장사배들 베짜는 듯 드나들었네. 아, 언제나 그 옛날이 다시 올까.” 하였다.
○ 고려조 이곡(李穀)의 〈얼음 위로 한강을 건너며〉 라는 시에, “모래판에 지나는 길손 행색이 쓸쓸하니, 몇 번이고 빈 처마 밑에서 북두성 쳐다보았는고. 한밤중 세찬 바람 불어서 집 무너뜨리고, 흐르던 그 강물 얼어서 다리가 되었네. 잠깐 사이에 사람들 조심하니, 짧은 거리에도 말 잘 걷는다 자랑 말게. 위태한 길 지나고서 도리어 스스로 웃기를, 돌아가서 고기잡고 나무하면서 늙은 것만 못하리.” 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시에, “말 타고 성곽을 나가, 고삐 멈추고 낚시터로 내려가네. 긴 강엔 새 한 마리 나는데, 석양에 돛대 두어 개 오누나. 촌가 나무꾼들은 여울에 의지해 모이는데, 초가집들은 언덕 곁에 벌였네. 한평생 호해(湖海)의 마음, 물 건너고서 도리어 배회(徘徊)하네.” 하였다.
○ 예겸(倪謙)의 기문에, “조선 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거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금강(金剛)ㆍ오대(五臺) 두 산에서부터 발원(發源)한 물이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에 임하여 누(樓)가 있는데 한강루(漢江樓)이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14일인데, 공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와 한성부윤(漢城府尹) 김하(金何)가 나와, 황문(黃門) 사마(司馬 사마순(司馬恂)) 선생을 청하여 가서 놀았다. 이에 말을 타고 남대문으로부터 나갔는데, 지원(知院) 신숙주(申叔舟)와 성삼문(成三問) 및 도감(都監)의 여러 분들이 함께 갔다. 구불구불 산길과 들길 사이를 지나, 날이 정오가 거의 되어서야 누 위에 이르렀는데, 국왕이 미리 보낸 좌부승지(左副承旨) 이계전(李季甸)과 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잔치를 벌이고 맞이하였다.
난간에 의지하여 둘러보니 강산의 좋은 경치가 모두 자리 사이에 들어왔다. 술이 돌아가기 시작한 다음, 내가 즉석에서 시 3장(章)을 지었는데, 도감에서 먼저 화려한 현판[華扁]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기다리다가, 나에게 지은 시를 써서 누 위에 걸라 하기에, 내가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술이 반쯤 취하였는데 한성부윤이 일어나서 말하기를, ‘작은 배가 누 아래 메여있으니 한 번 타고 놀아보지 않겠소.’ 하기에, 내가 곧 자리를 치우게 하고 걸어서 배 가운데로 올라갔다. 배는 3척을 연결하였고, 가운데에 작은 집[小軒]을 세우고 띠풀로 덮었는데, 아래는 6, 7명이 앉을 만하며, 걸상을 만들었는데 자못 높았다. 내가 말하기를, ‘강산이 이러한데 도리어 처마뿔[簷角]에 가리어지니, 어찌 나의 바라봄을 넓게 하지 않겠는가.’ 하며, 명하여 낮은 걸상으로 바꾸게 하고, 술잔을 씻고 다시 마시기 시작하였다. 언덕을 따라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몇 리를 못 가서 다시 누 아래로 돌아왔는데, 호군(護軍) 매우(梅佑)가, ‘달이 벌써 떴습니다.’ 하기에, 그만 언덕 위로 올라와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
이틀이 지나서 공조 판서와 한성부윤이 다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도성에서 서남쪽으로 15리쯤 가면 멀리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楊花渡)라고 하는데, 대개 각도에서 오는 양곡[餫餉]이 와 닿는 곳입니다. 나루 어귀에 몇 묘(畝)나 되는 푸른 돌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뒤섞여 서서 서로 마주 향한 것 같으며,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眺望)이 좋으니, 한 번 가서 놀지 않겠소.’ 하기에, 나는 다시 황문(黃門)과 함께 갔다. 거기에 도착하니, 국왕이 미리 보낸 도승지 이사철(李思哲)과 병조 판서 민신(閔伸)이 장막을 설치하고 길가에서 맞이하였다.
말에서 내려 장막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고, 걸어서 돌 깔린 산마루로 올라가 험한 곳에서 소나무를 의지하니, 모두 나무를 얽어 난간을 만들어 기울어지고 엎어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그 가운데에는 차려 놓은 것이 매우 성대하였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멀고 가까운 곳에 있는 돛단배들이 섬 사이에 나고 들며, 언덕 너머에는 좋은 전지(田地)가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 먼 산이 중첩되어 푸른 병풍이 둘러 벌인 것 같은데, 긴 바람은 바다 쪽에서 불어와서 선들선들 옷에 부니, 호연(浩然)한 마음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뜻이 있으니, 참으로 장쾌한 구경이다. 조금 있다가 자리에 앉아, 술이 몇 순배 돌아 갔는데, 공조 판서가 말하기를, “애석한 일은 퉁소 부는 손[客]이 없어 술을 권함이 없는 것이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풍악은 없지만 술 한 번 들고 시 한 번 읊는 것으로 넉넉히 그득한 정회를 풀 수 있소.’ 하니, 모두들 한 번 웃었다. 어부가 있어 그물질하여 비늘이 번쩍번쩍하는 고기를 잡아다 바치니, 꼬리가 퍼덕퍼덕하며 소반 위에서 움직였는데 빨리 삶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한성부윤이 다시 배에 오르자고 하기에, 걸어서 평탄한 산록으로 내려와 교자를 타고 물가에 이르니, 여러 사람들이 벌써 언덕을 따라 내려와서 먼저 배에 이르렀다. 배에 올라 도사려 앉아[趺坐] 술을 얼마쯤 마신 후에 물결을 따라 내려가니, 두 겨드랑이로 삿대를 젓느라 때때로 얼굴에 물이 뿌려지는데, 분주히 언덕 위에 모여 구경하는 여자들이 천 명은 되어 보였다. 황문이 ‘어째서 저렇게 모였느냐.’고 물으니 한성부윤이 말하기를, ‘먼 지방 사람이 한 번 풍경을 보고자 하여 그러는 것 뿐이요.’ 하였다.
한성부윤이 멀리 송림(松林)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안에 있는 정자를 ‘희우정(喜雨亭)’이라 하는데, 효령군(孝寧君)의 별장으로서 역시 한 번 놀 만하오.’ 하였다. 또 서로들 배에서 내려 육지로 걸어서 정자 아래에 이르니, 국왕이 벌써 술을 보내어 와 있었다. 다시 자리를 마련하고 술을 마시는데, 갑자기 바람이 세차고 구름이 어두워지며, 물결이 출렁거리고 솔바람[松風]이 물결처럼 소리가 났다. 내가 말하기를, ‘날이 벌써 저녁 때가 되고 비가 오겠으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만 일어나서 교자를 타고 돌아왔는데, 관(館)에 이르니 밤 누수(漏水)가 두어 각[數刻]이 되었다.
아, 땅이란 반드시 사람이 있음으로써 승지(勝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산음(山陰)의 난정(蘭亭)으로도 우군(右軍 왕희지)이 없었다면, 무성한 숲 긴 대나무에 불과하였을 것이며, 황주(黃州)의 적벽(赤壁)으로도 동파(東坡 소동파)가 없었다면, 높은 산 큰 강에 불과하였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날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면 내가 어찌 감히 왕희지와 소동파에 비하리요마는, 시대가 다르고 지역이 다르나 흥취는 한 가지이니, 어찌 글로써 기록함이 없겠는가. 또 인생의 회합(會合)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요, 아름다운 지경[佳境]도 역시 많이 만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조선은 바다 밖에 있으니, 비록 이 사람과 이 경치가 있다 하더라도 중국 사람이 누가 능히 더불어 회합하고 만날 수 있겠는가.
이번에 내가 욕되게도 조정의 사명을 받고 나와서, 잠시나마 여러 군자들과 여기서 놀고 노래하게 되었는데, 며칠이 안 되어 이별하고 가게 되니, 이런 놀이를 계속하려 하여도 원래 될 수 없는 일인데, 이 곳을 다시 우리들이 한 번 구경하고자 한들 또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래서 내가 붓으로 적어 잊지 않으려 하며, 때로 한 번 펼쳐 본다면 만나 놀던 즐거움이 완연하게 항상 눈에 있을 것이니, 역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나, 산천을 구경하고 그 고장의 풍토(風土)를 기록하는 것은, 역시 사신 직책의 당연한 일이니 만일 잔치하여 노는 것만 일삼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아닐 것이다. 놀이가 있은 다음날 17일에 적는다.” 하였다.
○ 예겸의 시에, “높은 누각에 올라서 기이한 경치 마음대로 보고, 누선(樓船)을 저어 푸른 강물에 떠 있네. 비단 닻줄 천천히 매어 푸른 석벽에 배 대었는데, 아로새긴 난간 사이에 옥술병[玉壺] 자주 전해 오네. 강산은 천년토록 그 옛빛 고치지 않는데, 손님과 주인 한때에 마음껏 즐기네. 저 멀리 달 밝고 사람 간 후엔, 백구만이 날아들어 거울 같은 맑은 물결 차지하리.” 하였다.
○ 기순(祁順)의 기문에, “조선국 성 남쪽 10리쯤 되는 곳에 물이 있어 한강이라 하는데, 근원이 오대(五臺)ㆍ금강(金剛) 두 산에서 나와 합류(合流)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그 경치가 그윽하고 좋기로 유명하였으며, 강에 임하여 누대가 있는데 올라가 조망(眺望)할 만하기 때문에, 전인(前人)들 중 중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모두 가서 놀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성종 7년) 2월에, 내가 행인사부(行人司副) 장정옥(張廷玉)과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곳에 와서 겨우 일을 마치자, 한강에서 놀자고 청하는 이가 있으므로 응낙하였다. 이달 26일에, 관반사(館伴使) 찬성(贊成) 노사신(盧思愼), 참찬(叅贊)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숭례문(崇禮門)으로 나가 산길ㆍ마을 길을 지나 강가에 이르니, 임금이 미리 도승지 유지(柳輊)와 부승지 임사홍(任士洪)을 보내어 잔치를 누대 위에 배설하였는데, 의정(議政) 윤자운(尹子雲), 의정 김수온(金守溫), 중추(中樞) 임원준(任元濬), 중추(中樞) 성임(成任), 판서(判書) 이승소(李承召)가 모두 있었다.
이때 오랜 비가 새로 개어서 산천이 맑고 아름다우며 하늘 빛과 물빛이 서로 연하여 이난(二難)사미(四美)를 겸하였다. 여기서 누대에 올라 마음대로 조망하며 술잔 들어 서로 권하는데, 참찬 서거정이 율시 두 수를 지었으므로 내가 곧 화답하고, 다시 만강홍(滿江紅 사(詞)의 이름) 한 절[一闋]을 뒤에 붙였다. 얼마 있다가 서로 잡고 배에 올라가 강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니, 주민들이 와서 구경하는 자가 앞을 다투는데, 물새ㆍ들새가 날아들어 고기잡이배와 안개 낀 수면 사이에 춤추니, 역시 호화찬란한 모습을 보기를 즐거워하여 배회하면서 차마 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잔치를 배 가운데 벌이고 생선을 삶고 사슴 고기를 구우며, 호탕하게 마시기를 한정 없이 하였다. 술이 취하여 내가 다시 가사[辭]두 장(章)과 율시 한 수를 짓고, 장정옥도 지은 것이 있기에 또 화답하였다.
몇 리쯤 가서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니 이곳은 각 도의 양곡이 모이는 곳으로서, 창고(倉庫)가 층층이 솟아 산 형세와 서로 같다. 또 몇 리쯤 가서 용두산(龍頭山)에 오르니, 산이 물가를 내려다보는데, 여러 산봉우리 중에서 특출하여 맞은편 인가와 원근 도서(島嶼)간에 나고 드는 배들의 출몰하는 것이 모두 눈앞에 들어온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산 위에는 먼저 장막을 치고 술자리를 벌였음으로, 뜻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다시 술 두어 순배를 마시고 율시 한 수를 짓고 돌아왔는데, 성중에 들어오니 누수가 초경을 알렸다.
대개 조선은 중국과의 거리가 수천 리이므로 국가[王事]가 아니면 올 수 없으니, 한강의 놀이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의 놀이가 어찌 특별히 기이한 것을 찾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시와 술로 즐기고 노는 것뿐이겠는가. 강의 남쪽은 옛날 백제요 백제의 동쪽은 옛날 신라인데,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는 또 당(唐) 나라의 유적이다. 그 자취를 찾으며 그 시절을 생각하니, 회고(懷古)의 생각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내 이번 놀이가 항상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혹시라도 잊을까 하여 여기에 적어 둔다.” 하였다.
○ 기순의 가사[辭]에, “저 강물이여 유유(悠悠)히 흐르는데, 거마(車馬)들 강 머리로 몰려드누나. 누선(樓船)을 타고 물결 가로질러, 잔잔한 흐름을 건너누나. 풍륭(豐隆 구름신)으로 뒤따르게 하고, 비렴(飛廉 바람신)으로 앞서 인도하게 하였네. 산은 분분(紛紛)히 와서 맞이하고, 구름은 나부끼어 나를 호위하누나. 회포를 풀어 놓고 크게 노래 부르고, 술잔을 들어 지체하네. 사람 그림자 물 가운데 감도는데, 새가 하늘가에서 나네. 동쪽 언덕에서 그윽한 난초 캐고, 남쪽 물가에서 꽃다운 지초(芷草)를 캐네. 미인을 생각함이여 오지 않으니, 패물 끈을 맺으며 멈칫거리네.” 하였다.
○ 옛 나루터 웅진(熊津)인데, 봄 물결 푸름이여 맑고 맑도다. 갓 쓰고 일산 받은 이 와서 노는데, 깃발들이 구름 같도다. 고기와 용을 불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이무기와 자라를 좌우(左右)로 모누나. 물 신령 놀라 빨리 달리는데, 하백[川伯]이 읍(揖)하고 맞이해 기다리네. 신선의 술을 잔에 따르고, 기린포[麟脯]에 문어회(文魚膾)라네. 하늘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데, 황홀하게 나는 신선세계에 오르는 듯. 저 멀리 하늘가 바라보니 아득도 하여라, 어즈버 노래 부르고 한 번 웃어보세. 날이 저물어 오래 머물 수 없으니, 배를 멈추고 길에 올라야겠네. 흰 갈매기 쌍쌍이 나누나, 어찌하면 너와 함께 세상 일 잊을꼬.” 하였다.
○ 기순의 시에, “강머리 풍경이 누선에 가득 차니, 꽃과 버들 고움을 다투는 2월 봄철일세. 돛 그림자는 나는 새와 함께 지나가고, 피리 소리 늙은 용의 잠을 깨우네. 산이 두 언덕에 잇닿으니 구름과 숲이 합쳤고, 돌이 중류에 섰으니 흰 물결 뿌리네. 동국(東國)에 와서 높이 즐긴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예사로이 시와 술에 서로 끌렸다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양화도(楊花渡) 어귀에 놀잇배 대니, 인간 세계에 별천지 있는 줄 이제야 알겠다. 하필 신선과 함께 학을 타고 놀아야 하나, 그림 그릴 것 용면(龍眠 송 나라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호)에게 부탁할까. 해가 자라 등에 밝으니 황금빛 물결 치는데, 바람이 용의 머리 흔드니 푸른 구슬 뿌리네. 서호(西湖)를 서자(西子)에 비하겠는데, 이 좋은 강산에 흥이 일어나는 것 어찌하리.”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명승지 찾아와 놀며 놀잇배 띄우니, 봄철 강물 새로 불어 물결이 하늘 같네. 마음껏 시 읊으며 병 가운데 경치[壺中景]인가 하였고, 몹시 취하니 물 속에서 조는 것 같네. 해 지자 산에서 내려오니 도리어 담담(淡淡)한데, 회오리 바람[橫飆] 물결을 치니 다시 옷에 뿌리네. 소동파(蘇東坡)의 풍류 이제라서 없으리. 가려다가 도리어 늦은 흥에 끌리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한강에 엷은 안개 끼어 쪽빛보다 푸른데, 그림배[畫船] 맑은 놀이 운치 있구나. 아름다운 경치 좋은 철에 해외(海外)에 머무니, 좋은 산 좋은 물이 강남(江南)에 못지 않네. 갈매기 나루 어귀에 나는데 조수는 처음 부풀고, 시가 붓 끝에 들어오니 술이 반쯤 취했네. 깊은 언덕 숲 속으로 배 저어 들어가니, 공중에 가득한 푸른 산 기운이 부슬부슬 떨어지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긴 강이 아득하여 고요히 쪽빛 오르고, 양쪽 언덕에 물결 잔잔하여 거울[一鏡] 맑았네. 하늘 밖 봉우리들은 북쪽 끝까지[朔漠] 잇닿았는데, 눈앞의 그림 같은 경치 소상강 남쪽[湘南]을 상상케 하네. 미친 바람 거친 비에 배 비껴 띄워놓고, 자리를 다가앉아 술잔 권하니 손님 모두 취하였네. 희미하고 아득하니 어느 곳에 배를 댈까, 나루터의 버드나무 실처럼 드리웠네.” 하였다.
○ 고려 배중부(裵仲孚)의 시에, “산야의 정취[野情] 나그네 생각이 함께 아득하니, 마을 다리에 말 멈췄는데 해는 저물어가네. 자주 왕래한다고 저 강물도 싫어하는 듯, 일부러 풍랑(風浪) 몰아다 나그네 옷[征衣] 적시네.” 하였다.
○ 이석형(李石亨)의 시에, “침침한 천지에 바람 비 몰려오니, 천산(千山) 만학(萬壑)에 파도가 솟아나네. 강물이 넘쳐서 가도 끝도 없으니, 사공들 나루 아전[津吏] 서로 보며 놀라네. 저기 저 작은 배 빈 언덕에 매어 있으니, 부러진 돛대 썩은 노로 어찌 의지할 것인가. 아 어찌하면 만 섬을 싣는 큰 배를 얻어, 저 풍랑 뚫고 넘어 화살처럼 빨리 달려 별안간에 건널꼬.”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강물이 깊어 굴을 이루었는데, 고기잡이 노랫소리에 탁영곡(濯纓曲) 섞였네. 해가 멈추니 고기 비늘 유난히 번쩍이는데, 바람이 스쳐가자 가는 물결 일어나네. 배는 끊어졌는데 쪽빛 물 멀리 아득하고, 조수가 돌아가니 거울처럼 맑고 반듯하네. 내 어찌 늘그막에 작은 배 얻어 타고, 흰 갈매기 벗삼아 한평생 지내 볼거나.” 하였다.
노량(露梁 노돌) 도성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도승(渡丞) 한 사람이 있다. 또 과천현(果川縣)에도 있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곧 고양(高陽)의 부원현(富源縣) 땅이었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上流) 지방의 세곡(稅穀)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용산 한언국(韓彦國)의 서재에서 유숙하다〉라는 시에, “두 물은 용용(溶溶)하게 흘러 제비 꼬리처럼 갈라졌는데, 세 산은 아득하게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다른 해에 만일 구장(鳩杖)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하였다. 그 시 서(序)에 이르기를, “산봉우리가 굽이굽이 서려서[屈盤] 형상이 푸른 이무기 같은데, 서재(書齋)가 바로 그 이마[額]에 있으며,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 두 갈래가 되고, 강 밖에는 멀리 산이 있는데 바라보면 산자(山字) 같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용산이 반쯤 한강수(漢江水)를 베개삼았는데, 푸른 솔은 산에 가득하고 마을에는 뽕나무라네. 동네엔 닭ㆍ개 소리 나는 수십 집, 초가 지붕 기울어진 데 점심 연기 일어나네.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찬 여울 건너가, 낙화(落花) 속 빈 대청에 들어 쉬누나. 아전이 와서 밥을 올리는데 들나물 섞였더니, 뒤따라 가져오는 강의 잉어가 별미(別味)로세.” 하였다.
삼전도(三田渡) 광주(廣州) 땅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요, 도승(渡丞) 1명이 있다. 마포(麻浦 삼개) 도성 서쪽에 있는데 곧 용산강의 하류이다.
○ 성간(成侃)의 시에, “검은 구름 한 조각 푸른 하늘 나직한데, 때때로 들리는 먼 물가의 외로운 학의 울음. 밤 사이 나루터에 남풍이 세차더니, 서강(西江) 물결 걷어다 빗발을 날리네. 고기 새끼들 나고 들며 다투어 거품 뿜는데, 풍이(馮夷 물귀신)는 물결치고 신령은 춤추네. 섬들[島嶼]을 휘어 싸서 홍몽(洪濛)으로 돌아가는데, 창에는 서늘한 기운 남은 더위 다 가시네. 강 기러기 어지러이 날며 끼룩끼룩 우는 소리, 마름과 연 이리저리 바람과 물결 따르네. 어옹(漁翁)이 닻줄 잃고 강에서 소리 치는데, 큰 배는 옆으로 기울고 작은 배 떠내려가네. 인간 세상 어느 곳이 지극히도 험하지 않으리, 별안간에 생애가 어찌 될지 모른다네. 낭간군자(琅玕君子 작자의 호) 한바탕 웃고 나서, 밤중에 잠 못 이루고 머리가 학(鶴)처럼 기울어지네.” 하였다.
『신증』 김수동(金壽童)의 시에, “우뚝하게 높도다, 범바위[虎巖] 깎아선 모습 몇 천 길인고. 뭇 봉우리 높이 솟음이여, 용이 나는 듯 봉새가 춤추는 듯 다투어 솟아오르네. 아래는 긴 강 있어 쉬지 않고 흐름이여, 밤낮으로 성난 조수 바다 어귀[海門]에 통한다네. 강 머리에 뭉게뭉게 잇닿은 구름은 먹을 끼얹은 듯, 강루(江樓)에 주룩주룩 뿌리는 비는 물동이를 뒤엎은 듯. 모인 물 몇 삿대[篙]나 더 깊은고, 홍수(洪水)가 세차게 흘러 하늘 땅을 뒤덮네. 얼마 안 되어 바람 불고 빗소리 끊기니, 물결 무늬 주름잡고 거울처럼 고요해, 보이는 건 외로운 안개와 지는 노을이 얼기설기 얽히는 것뿐. 좋은 시절의 즐거운 일 저버릴 수 없어, 사공을 급히 불러 중류에 배 띄우네. 배다락[柂樓]에 의지하여 밤 깊도록 혼자 수심하는데, 저 하늘에 두둥실 찬 달이 떠오르네.
한 조각 흰 그림자에 강촌 밝아지니, 희고 흰 그 빛이 물에도 숲에도 흩어지네. 물 속에 이무기 뛰놀고, 깃들었던 갈가마귀 나누나. 생선 잡아 서리 같은 칼날로 가늘게 회를 치매, 은실이 날리는 듯 뱃노래 소리 속에 맑은 술병 열었구나. 미인이 있어 검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칼인데, 맑고 시원한 선궁(仙宮)으로 나를 맞이하고, 자하주(紫霞酒) 부어 나를 권하려 하니, 이 내 몸 어느 사이 신혼(神魂)이 아득하네, 신령스런 자라 부르고 푸른 용 불러서, 흥(興)을 타고 신선 나라 바로 찾으려니, 천풍(天風)이 나를 끼고 소요(逍遙)하며 노네. 인간 세상 내려다보니 몇 겹의 티끌로 막혔으니, 소상강ㆍ동정호 좋다한들 이 경치 비길쏘냐. 소동파[蘇仙]의 적벽(赤壁)놀이 말할 것은 무엇인가. 영주(瀛洲)와 단구(丹丘) 신선의 짝이 아니면, 이런 놀이 얻을 수 없을 것을, 나같은 용렬한 인물 어찌하다 이런 은혜 입었나. 산사(山寺)에서 꿈깨자 술도 처음 깨니, 달은 지고 조수 나갔는데, 저 멀리 긴 물가에 배댔던 자리만이 보이누나.” 하였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세곡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인데 도승(渡丞) 1명이 있다.
○ 예겸(倪謙)의 시에, “한강의 옛 나루터 양화라고 하는데, 좋은 경치 골라 정자 지으니 물가에 가깝네. 멀리 보면 돛단배 먼 포구(浦口)로 떠나는데, 문득 들으니 우는 기러기 모래판에서 일어나네. 숲에 가린 부엌에서 솔잎을 불때고, 자리 위 봄 소반엔 여뀌 싹이 새로 났네. 황성[神京]을 떠나매 여기서 4천 리인데, 이곳에 와서 사신(使臣)의 성사(星槎) 멈출 줄 생각지도 못했네.” 하였다.
○ 얼음 풀린 봄 강에 물이 이끼 같은데, 놀잇배 천천히 저으며 술잔 함께 드누나. 적벽(赤壁)의 황니판(黃泥坂) 겨우 지나자, 또 구당(瞿塘)의 염예퇴(灩澦堆)를 지나게 되누나. 관서(官署)에서는 쉴새 없이 좋은 술 가져오는데, 고깃배에선 다투어 생선을 보내오누나. 인생의 즐거운 놀이 많이 있기 어려우니, 입을 크게 벌려 웃지 않으리. 하였다.
○ 고윤(高閏)의 시에, “물결이 출렁출렁 큰 자라 떠 있는 듯, 비에 젖은 이끼 흔적 푸른 빛 흐를 것 같네. 눈에 가득한 좋은 경치 지금이 6월인데, 하늘 가득 바람 비에 외로운 배 위에 있네. 고래처럼 술마시니 강해(江海)도 작은 것, 용처럼 읊으니 귀신도 수심하게 하네.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하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아침저녁 바다쪽에 정운(停雲)이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양화도 옛 나루터 맑고도 그윽한데, 불쑥 나온 기이한 산봉우리 푸른 강물 베개 삼았네. 술이 취하니 몸 밖의 일 다 잊는데, 빗소리는 객의 수심 씻지 못하네. 푸른 나무에 연기 엉기니 넓은 들이 희미하고, 바람은 돛을 보내어 먼 물가로 들어가네. 이별한 후엔들 좋은 모임 잊을건가. 저 바다 동쪽 머리에 이 내 꿈 항상 왕래하리.”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경치 맑은 연기 떠 있는데, 산색은 창창(蒼蒼)하고 푸른 물 흐르네. 하늘 위의 사신 행차[使華] 옥절(玉節)이 빛나는데, 인간 세계 명승지에 놀잇배 띄웠네. 백 편의 시로 주고 받으니 재주 겨루기 어려운데, 실컷 마시매 천고의 수심을 술이 씻노라. 하늘이 뜻이 있어 시 쓰기 재촉하여, 조각 구름 비를 머금고 머리 위에 벌써 다다랐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높은 누대에서 내려와도 정(情)은 끝이 없어, 또 다시 봄빛을 이끌고 강물에 배를 띄우네. 사람은 죽엽배(竹葉盃) 속에 취하는데, 배는 양화도 향해 가누나. 동해 저 멀리 외로운 섬 보일락말락, 남산 푸른 곳에 가벼운 구름 일어나네. 강호의 노는 운치 전부터 알았지만, 오늘의 이내 마음 백 배나 맑아지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강해(江海)의 풍류는 10년의 정인데, 앉아서 강물 대하니 눈 다시 밝아지네. 산은 높은 선비 모습인양 언제나 거만하고, 물은 잘 쓰이는 붓[筆] 같아서 다시 이리저리 달리네. 배 다락[柂樓]에서 술을 드니 날이 방금 저물려는데, 나루터에서 시를 읊으니 조수 벌써 들어오네. 달 밝기 기다려 취한 몸으로 돌아가니, 살구꽃 성긴 그림자 맑기도 하구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만겹의 산은 만고의 정을 머금었는데, 봄 바람에 먼 곳 나그네 두 눈이 밝아지누나. 마을에 잇닿은 버들은 천 가지가 고운데, 섬을 덮은 운연(雲煙)은 한 줄기로 비꼈네. 갈가마귀 석양에 날아드니 등에 금빛 번쩍이는데, 고기가 잔잔한 물결을 부니 푸른 무늬 생기누나. 온 세상 강호가 땅에 가득하니 이내 가슴 한껏 넓어지는데, 신선의 뗏목 타고서 하늘 나라 올라갈거나.” 하였다.
『신증』 어세겸(魚世謙)의 시에, “동쪽으로 오는 붉은 기운 강가에 뻗쳤으니, 도성[神京]이 지척인데 처소가 희미하네. 버들꽃 날아가고 실버들만 늘어졌는데, 연파(煙波) 위에 비 내리고 어부들 배 저어 가누나. 햇발이 구름 속에서 새[漏]니 붉은 빛 줄줄 나오고, 조수 휘몰아 언덕을 휘감으니 넓은 들 어딘지 모르겠네. 물결 치며 뛰놀고 노래하는 나루터 아이들이요, 언덕 위에서 그물 말리는 강변 집 딸이네. 푸른 창 붉은 난간이 누구네 집인가. 강 가까이 어른거리는 기장(奇章)의 별장이라네. 오는 소 가는 말 어느 때 끝날꼬, 배 돛대 총총한데 장사꾼 나그네들 분주하네. 해 지고 연기 잠겨 조망은 가이 없는데, 한 곡조[一聲] 뱃노래 어디서 들려오누나. 멀리 보이는 한강가에 나라의 창고인데, 조운선(漕運船) 해마다 바다에서 들어온다네. 강에 비낀 만 척 배 앞뒤 잇닿았는데, 사공이 노래하고 춤추니 용도 응당 말하리. 도읍지[神都]를 감싸서 억만 년에, 조종(朝宗 여러 강물이 바다에 흘러들어가 모임)하는 물결을 누가 막으리. 절월(節鉞)을 받들어 이곳을 지나가니, 강 건너는 친구들에게 주즙(舟楫 천자를 보좌하는 신하)의 재주 부끄럽네. 큰 소원은 이 물 기울여 기름진 은택을 이루어서, 억조 창생에게 고루 적셔 모두들 편안히 사는 것일세.”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서호(西湖) 가에서 술 들고, 시 읊으니 해[日]가 일 년만큼이나 길구나. 하늘가 저 멀리 새들 날아 지나고, 수풀 끝에 어렴풋이 밥짓는 연기 보이누나. 이 고장 신선 지경인데, 사람들은 이곽(李郭)의 신선을 그리워하네. 새벽녘 짙은 경치야, 서시(西施)인들 이보다 더 고우리.” 하였다.

저자도(楮子島)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는데,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이곳에 두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는데,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전하여 차지하였다.
○ 한종유의 시에, “10리 평평한 호수에 가랑비 지나갔는데, 갈대꽃 너머에 긴 피리 한 소리. 금솥의 국에 간을 맞추던 그 손으로, 지금은 낚싯대 메고 저물녘에 모래사장으로 내려온다네.” 하였다.
○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가에 앉으니, 언덕 저 건너 수양버들이 저물녘 서늘함을 불어 보내네. 산보하고 돌아오니 저 산에 달 떠오르는데, 지팡이 머리엔 아직도 연꽃 향기 남아 있구나.”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대략 이르기를, “경도(京都)는 뒤에 화산(華山)을 지고, 앞으로 한강(漢江)을 마주하여 형승(形勝)이 천하에 제일간다. 중국의 사군자(士君子)들이 사신(使臣)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시를 지으면서 놀며 구경하다 돌아가는데, 동쪽 제천정(濟川亭)에서부터 서쪽으로 희우정(喜雨亭)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리 사이에는, 공후귀척(公侯貴戚)들이 많이 정자를 마련하여 두어 풍경을 거두어 들였다. 동쪽 교외에는 또 토질이 좋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적당한데, 준마가 만 필은 되는 듯 바라보매 구름이 뭉친 것 같았다.
그 가운데의 높은 언덕은 형상이 가마[釜]를 엎어 놓은 것 같으며, 그 위에 낙천정(樂天亭)이 있는데, 우리 태종이 선위(禪位)하신 후 편히 쉬시던 곳이다. 남쪽으로 큰 장에 임하였으며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에 있는데, 물굽이 언덕이 둘러쌌고, 흰 모래 갈대 숲에 경치가 특별히 좋다. 세종이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또 작은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주었다. 이에 정자를 수리하고 한가할 때 왕래하며, 화공(畫工)을 시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니, 대개 조종(祖宗)이 전하여 준 것을 빛내고 또 속세 밖에서 지내려는 본래의 뜻을 보이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니, 봄철이 되어 초목은 꽃다움을 다투고 푸른 안개 공중에 비꼈는데, 중류에서 사방으로 바라보면 돛단배 오르내리니, 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이 증점(曾點)이나 맹자(孟子)와 자리를 맞대고 함께 즐기는 것 같다. 혹 하늘과 땅이 화로처럼 더울 때에, 맑은 바람이 낯을 스쳐 오면 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이나, 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와도 같이 역시 옷깃을 헤치고 돌아가기를 잊을 것이다. 또 누각이 맑고 별과 달은 강물에 잠겼을 제, 때마침 거문고를 타면 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그 묘함을 알 자 없을 것이며, 다시 눈꽃이 하늘에 비껴 날며 백제(白帝)와 옥비(玉妃)가 뛰어 오르고 제압할 제는, 설령 옛날의 눈을 읊던 한퇴지(韓退之)나 나귀를 타고 가던 대씨(戴氏)도 고삐를 나란히 하여 와서 재주를 뽐내고 흥을 타고 서로 즐길 것이다. 대개 사시(四時)의 경치는 이렇게 같지 않지만 공의 즐거움은 한 가지인 것이다.
아, 누대(樓臺)와 산천의 아름다운 경치가, 천하 고금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악양루(岳陽樓)와 등왕각(滕王閣)뿐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하늘가 수천 리 밖에 있어서 귀로만 들을 수 있을 뿐 눈으로 보지는 못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가까이 도성 근처에 있어서 조석으로 가서 놀며 지극한 즐거움을 펼 수 있는 것만 같겠는가.” 하였다.

잉화도(仍火島) 서강(西江) 남쪽에 있으며 목축장이 있는데, 사축서(司畜署)와 전생서(典牲署)의 관원 각각 1명씩을 보내어 목축(牧畜)을 감독하였다. 율도(栗島 밤섬) 마포(麻浦) 남쪽에 있는데 약초를 심고 뽕나무를 심는다.
『신증』 백운동(白雲洞) 인왕산(仁王山) 기슭에 있는데, 추부(樞府) 이염의(李念義)가 살던 곳이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길 가는 사람은 다만 뭇 산봉우리 푸른 것만 보니, 이곳에 공후(公侯)의 집이 있는 줄 어찌 알겠는가. 등나무 덩굴 굽어져서 뱀과 구렁이 숨었고, 돌문은 높아서 지나가는 우마(牛馬) 가리울 만하네. 풍악 소리 누대엔 높은 귀인들 많이 모였는데,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성정(性情)을 수양했네. 잔치 파하고 손들 돌아가는데 저 산 위에 달 뜨니, 한 누각 아름다운 경치 무엇이라 형용하리.” 하였다.
○ “일찍이 운종가(雲從街 종로거리) 옛 집에서 뵈었는데, 일만 인가(人家) 비늘처럼 다닥다닥 소란하기도 하였네. 어느 해에 집을 옮겨 한가한 데로 돌아왔나. 오늘 와서 그대 만나니 웃음과 이야기 향기롭네. 두어 이랑 아름다운 꽃 봄 지나서 늙었는데, 연못가에 가득 늘어진 버들 비 온 뒤 길어졌네. 산야의 운치 즐겨서 조회에 참여하기 게으르나, 사람들은 장차 묘당(廟堂)에 들어갈 것이라 말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백운동(白雲洞) 저 속엔 흰 구름이 그늘졌는데, 백운동 밖엔 홍진(紅塵)이 깊었네. 한 길이 돌고 돌아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문득 도시(都市)에 산림(山林)을 감췄는데 놀랬네. 시냇물 졸졸 뜰을 따라 소리나고, 긴 솔이 반쯤 가리웠는데 바람이 읊조리네. 내겐 칡덩굴 사이에 고릉(觚棱 전당(殿堂)의 가장 높고 뾰족히 나온 모서리) 드러나는데, 화려한 집 그윽하여 언제나 침침하네. 묻노니, 그 누가 주인옹이 되었나, 전일에 높고 귀하던 장씨(張氏)나 김씨라네. 산수를 몹시 사랑하여, 비단옷 입은 몸으로 연하(煙霞)의 마음 가졌네. 봄철이면 바위 골짜기에 산 꽃이 밝은데, 공중에 메아리치고 짹짹 산새가 우네. 황매우(黃梅雨 매실(梅實)이 익을 무렵에 오는 긴 장마) 가늘게 뿌릴 제 인가가 희미한데, 동문(洞門) 이끼 빛 푸르러 깊숙하네. 가을빛은 목욕한 듯 수풀 언덕 맑은데, 달 밝은 밤 일만 집에 다듬이 소리 맑게 들려오네. 나뭇가지에 흰 눈 쌓여 찾아오는 거마(車馬)가 끊어졌는데, 장작 불땐 따스한 기운 주단 이불 속에 생기누나. 골 가운데 풍경은 사시(四時)에 제각각인데, 물에서 갓끈 씻고 산에 오르누나. 기영(耆英 덕망이 있는 노인)들 맞이하여 높은 회합 가질 때면, 수레 타고 동구에 들어와 친구들 모이네. 아담한 노래 투호(投壺) 놀이 즐거움 다함 없는데, 몇 날 남은 기우는 해 푸른 산에 낮아지네. 제공(諸公)의 높은 기개 구름보다 높은데, 해마다 관개(冠盖)들 서로 와서 찾네. 태평풍월(太平風月)에 동부(洞府)도 넓으니, 좋은 땅과 좋은 사람 서로 만나매 사람들 부러워하네. 내가 들으니 송악산 왼쪽에 신선의 고장 있는데, 자하곡(紫霞曲) 그 노래 지금도 전해진다네. 풍류와 문아(文雅) 그 옛날 상상하니, 서로 위 될 듯 아래 될 듯, 천 년의 지음(知音)일세. 내 시가 거칠고 졸하여 곡조 이루지 못하는데, 혹시라도 거문고 곡조에 들어갈 수 있을런가. 유전(流傳)하여 한양(漢陽) 가요가 된다면, 옛 사람과 함께 회포 같이할 것을.” 하였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송악산 5백 년에 왕기(王氣)가 다하였으니, 자하선인(紫霞仙人)이 의지할 곳 없었네. 화악(華嶽)의 태평 시대 만만세(萬萬歲)나 기약하는데, 백운동의 주인공이 자하선인의 꽃다운 자취 따르네. 왕성의 서북쪽 금잔지(金盞地)에, 소나무ㆍ상수리나무 그늘진데 좁은 길 희미하다. 바위에 걸치고 골짜기에 자리잡아 정사(精舍)를 지으니, 중화당(中華堂) 그 모습 저 멀리 보이누나. 물소리 냉랭(冷冷)하여 거문고ㆍ비파 울리는 듯, 시내 안개는 옹기종기 병풍 장막되었네. 아침에 나올 때엔 수 놓은 수레 휘장에 금어(金魚) 비치고, 저녁에 돌아와선 학창의(鶴氅衣) 긴 옷 입네. 여의(如意)를 가지고서 산호(珊瑚)를 부수지 않으며, 매[鷹] 부르며 눈 가운데 사냥도 아니하네. 가다가 좋은 날 만나 궁중에서 외척들 초대할 때엔, 특별한 은총 받아 왕궁으로 나아간다네. 기영(耆英)들 이따금 수레가 잇닿았는데, 방 휘장 열어 놓고 숲 기운 거두어 들이네. 화제(話題) 바뀌어질 땐 주미(麈尾)가 떨어지고, 술 기운 훈훈하니 초엽배(蕉葉盃 납작한 작은 술잔) 날리네. 바둑 놓고[彈碁] 장구 치며 못하는 것 없는데, 하물며 미인의 섬섬옥수로 악기를 다루는 것이랴. 마부는 말에 기대 서서 서쪽 성곽을 바라보는데, 흩어진 저녁 노을이 아침 햇빛 같네. 그윽한 사람의 이런 즐거움, 봄이고 또 가을이니, 운림(雲林)이 세상과 멀다고 누가 말하더냐. 나이 많고 지위 높은데 몸 또한 건강하니, 왜 다시 평지에서 위태로움 근심하리. 자손들 가진 홀(笏) 상 위에 가득하니, 집안의 번영 한평생에 족하네. 자하선인(紫霞仙人) 다시 올 수 있다면 응당 무릎을 꿇으리라. 아 백운동 주인 아니면 누구와 의지하리.” 하였다.

대은암(大隱巖)ㆍ만리뢰(萬里瀨) 모두 백악산(白嶽山) 기슭에 있는데, 곧 영의정 남곤(南袞)의 집 뒤이다. 박은(朴誾)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짓기를, “주인이 산봉우리에 있는데, 우리 집 향 피우는 화로라네. 주인이 계곡에 있는데, 우리 집 낙숫물이라네. 주인이 벼슬 높아 세력이 불꽃 같으니, 문 앞에 거마(車馬)들 많이도 문안 왔네. 3년 가야 하루도 동산은 들여다보지 않으니, 만일에 산신령 있다면 응당 꾸지람을 받았으리. 손이 왔는데 다른 사람 아니고, 주인의 친구로세. 문 앞을 지나며 들어가지 않는 것도 차마 할 수 없고, 발걸음 당장 돌리는 것도 도리 아니라. 바위 사이에서 잠시 쉬니, 풍경은 참으로 뜻밖에 만났네. 물결이 감추어져 안개로 쌌다가 나를 위하여 열리니, 울던 학과 우는 원숭이 놀라지도 않누나. 주인이 금옥(金玉) 있으면, 열 겹으로 싸 두어 누구에게 함부로 주리오. 자물쇠 굳게 봉하여 밤중에도 지키나, 시내와 산에 한낮이 옮아간 줄을 모르네. 앉아 있은 지 오래매 날 저무는데, 흰 구름 먼 산에서 일어나네. 무심하기는 내가 저 구름보다 못하고, 자취 있으니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대은암 앞에 쌓인 눈은, 봄들어 또 한 경치일세. 우연히 흥이 나서 놀러 왔고, 주인과는 기약도 없었네. 혼자 서 있으니 우는 새 가까이 오고, 길게 읊자니 붓 들기 더디어지네. 그대 집에서는 나의 방광(放曠)함을 용납하겠지만, 지금 사람들 해괴하게 여길까 두렵네.” 하였다.

청학동(靑鶴洞) 목멱산(木覓山)에 있다. 명(明) 나라 당고(唐皐)가 우의정 이행(李荇)의 서재에 쓴 시에, “조선(朝鮮) 성 안 청학동에, 누가 이곳 찾아 높은 집 지었나. 내 지금 사절(使節) 따라 와서 처음으로 들으니, 청학선인(靑鶴仙人)의 글독[書甕]이라네. 선인이 우연히 시전(市廛)에도 나오지만, 때로 학을 타고 저 하늘 가에 논다네. 그의 의복 음식 무엇인가 물었더니, 자색 구름 의상(衣裳)에 옥처럼 맑은 산골 샘물 마신다네. 동문(洞門)이 바로 저기 구름 깊은 곳에 있으니, 책상 위 신선의 책 몇 권인지 모르겠네. 근래에 종적을 아는 사람 있어, 왕문(王門)에 데리고 들어가 수양한다네. 신선 사는 그곳이 인간 세상 같으랴, 청학이 소리내어 공중에서 울고 있다네. 밤 깊어도 저 산에 달 밝아 있고, 봄은 가도 바위 밑의 꽃은 전과 같이 붉다네. 선동(仙洞)을 그리워하며 가지는 못하니, 새 시[新詩]나 지어 마음을 표시하네. 저 멀리 황산(黃山) 66봉으로 머리 돌리니, 흰 학과 푸른 소나무가 초연한 먼 생각 일으키누나.” 하였다.
○ 명 나라 사도(史道)의 시에, “푸른 학 어느 해에 동문(洞門) 열었나, 도인이 이 곳 찾아 좋은 집 지었네. 자줏빛 언덕 붉은 절벽에 샘물 소리 섞였고, 푸른 전나무와 소나무에 새소리 끊기지 않네. 마음은 성현을 짝지어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손으로 고금의 책 뒤지며 근원을 연구한다. 동국(東國)에 좋은 경치 많은 줄 내 알고 있지만, 한 번 가서 옥 술병 기울여 볼 길 없네.” 하였다.
○ 남곤의 시에, “일부러 그윽한 곳 찾아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주인이 손을 사랑하매 손은 돌아갈 줄 모르네. 그대 집에 술 떨어지면 내 집에서 가져 오세나, 남산에는 꽃이 피고 북악에는 꽃이 진다네. 청학은 벌써 신선의 골격(骨格) 알아보는데, 홍도(紅桃)는 어찌타 굳은 마음 괴롭히나. 풍류 있는 두 늙은이 조용히 노는 곳에, 아이들 보내 우리 즐거움 방해하지 말라.” 하였다.

【봉수】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첫째 것은 양주(楊州) 아차산(峩嵯山)과 응하니, 이것은 함경도와 강원도의 봉화[烽]요, 둘째 것은 광주(廣州) 천천현(穿川峴)과 응하니, 이것은 경상도의 봉화요, 셋째 것은 무악(毋岳) 동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육로(陸路) 봉화요, 넷째 것은 무악 서쪽 봉우리와 응하니,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海路) 봉화요, 다섯째 것은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과 응하니, 이것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해로 봉화이다.
무악 봉수(毋岳 烽燧) 동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소질달산(所叱達山)과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세 번째 봉화에 응하며, 서쪽 봉우리에서는 서쪽으로 고양군 봉현(蜂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네 번째 봉화에 응한다.
【궁실】 종루(鍾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집을 짓고, 세종조에 고쳐 층루(層樓)를 지었는데, 동서가 5칸이고 남북이 4칸인데, 종과 북을 달아 새벽과 저녁을 알렸다.
○ 권근(權近)의 종명(鍾銘) 서문에, “조선조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운 지 3년에, 도읍을 한강 북쪽에 정하고, 그 이듬해에 비로소 궁전을 지었다. 그해 여름에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게 하고, 완성된 다음 집을 큰 시가에 짓고 종을 달았는데, 성공한 사실을 기록하여 큰 사업을 후세에 전하려 함이었다. 옛날부터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큰 공을 세우고 큰 사업을 정하면 반드시 종과 솥에 명(銘)을 지어 새기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소리가 땡땡ㆍ둥둥[鏗鍧]하여 후세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깨우치게 하며, 또 넓은 도시[通都]의 큰 고을에서 새벽과 저녁에 두드리고 쳐서, 백성들의 일하고 쉬는 시간을 엄하게 하니, 종의 용도가 큰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시기 전부터 덕망이 날로 높아져 천명과 인심이 귀의하매 절로 그만둘 수 없는 점이 있었으며, 여러 어진 이들이 힘써 도와서 모두 그 지혜와 힘을 다하였다. 하루 아침에 고려조를 대신하여 나라를 세우시고서는 밤낮으로 염려하시며 법을 세우고 질서를 마련하여 자손 만대의 태평을 터 닦았으니, 공을 세웠다 할 만하고 사업을 정하였다 할 만하다. 이것을 명(銘)으로 새겨 소상하게 후세에 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성인(聖人)의 큰 보배를 위(位)라 하는데, 무엇으로써 위(位)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인(仁)이라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은 천지의 만물을 살게 하는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서 확충(擴充)하기 때문에 그 위(位)를 보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하늘과 사람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한 가지인 것이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날에,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도 중외(中外 중앙과 지방)가 편안하여, 포학한 정사(政事)에 고통받던 백성들이 모두 생생(生生)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저 순임금이라도 여기서 더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더구나 명(銘)을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명(銘)에, ‘거룩할손 우리 임금, 명(命)을 받음이 크셨도다. 새 도읍 찾아오시니, 한강수 북쪽이었네. 옛날 송도(松都)에 있을 땐, 국운도 기구(崎嶇)하였지. 우리 임금 대신하시니, 포학(暴虐)을 덕으로 제거했네. 백성은 병기를 보지 않았는데, 하루 아침에 청명해졌네.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 힘 모으니 태평성대에 이르렀네. 원근(遠近)의 사람들 비로소 오니, 이미 많고도 번성해졌네. 이에 그 종(鍾)을 만들어서, 새벽과 저녁 알리게 했네. 우리의 공열(功烈)을, 이에 새기네. 신도(神都)를 진정하여, 천만 년 전하리라.’ 했다.” 하였다.

종각(鍾閣) 경복궁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세조가 큰 종을 만들어 처음에는 사정전(思政殿)에 둘려 하다가 후에 종각을 여기에 짓고 달았다.
○ 신숙주(申叔舟)의 종명 서문에, “거룩하신 우리 주상전하께서, 태평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군비에 관한 일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생각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큰 종을 만들어 사정전 앞 행랑에 설치하여 금군(禁軍)을 호령하여 정제하게 하였다. 우리 조정의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창업 개국하신 후로,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이 윗 대의 공업을 빛나게 이었으며, 세종 장헌대왕(世宗莊獻大王)에 이르러서는 가득 찬 것을 보전하고 이룬 것을 지키되 문화로써 정치를 하니, 나라 안이 편안하여 백성이 병란을 보지 못한 지 30여 년이었다.
문종(文宗)께서 왕위에 계신 지 오래지 못하고 뒤를 이은 임금이 어렸는데, 권신(權臣)과 간신이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여, 조정 정사를 흐려 어지럽게 하고 종묘와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영특한 무력(武力)을 분발시키고, 충과 의를 격려하여 대란(大亂)을 평정하고 대업을 정하시니, 중흥 시기에 당하는 것이었다. 정사와 형법을 닦아서 밝히며 기강을 고치고 폐단을 제거하여 조종조의 옛 모습을 모두 회복하였는데, 먼저 군사에 관한 정치를 힘써서 이끌고 격려하기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1년이 되지 않아서 조정과 민간이 깨끗하고 편안해졌다. 궁중의 호위가 정제ㆍ엄숙하여 중외가 편안하고 북쪽 오랑캐와 해적이 와서 알현하고 정성을 바치며 잇달아 앞을 다투니,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되 생각하는 것이 깊고 계획하는 것이 멀어서, 중흥의 사업을 이룬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대개 큰 공업을 세운 자가 반드시 그 사실을 종(鍾)과 솥에 새겨 공덕을 밝히고 충훈(忠勳)을 기록하는 것은, 큰 사업을 전해서 후세에 보여 주려 하기 때문이다. 지금 큰 그릇이 이루어지는데 어찌 명을 지어 새겨서 후세에 밝게 보여 주지 않을 것인가. 신(臣) 숙주는 삼가 손을 모아 절하고 머리를 숙입니다. 다음에 명을 붙입니다. 명에 말하기를, ‘거룩하신 우리 태조, 동쪽 나라 세우셨네. 성인과 성인 서로 계승하여, 교화 정치 더욱 높았네. 다스려도 항상 편안하지 못하니, 상제께서 경계를 보였네. 큰 운수 중간에 막혀, 나라가 편안치 못했네. 권신과 간신이 어지럽혀, 나라 정치 마음대로 하였네. 독한 연기 사나운 불길, 활활 번져 갔네. 하늘이 우리 임금 돌보아 용맹과 지혜 주었네. 신성한 위무(威武) 분발하여, 종묘와 사직 안정시켰네. 충성스럽고 어진 이 힘 다하여, 나비들이 밤 촛불에 날아들 듯 하였네. 큰 난리 평정하기를, 하루도 안 걸렸네. 나라 안이 편안하고, 노래 소리 즐겁기도 하네. 이때 우리 임금, 기강을 정돈하셨네. 우리 옛 법 회복하여, 모두 다 펼쳐 놓았네. 편안하다 맘 놓을세라, 위태로움 잊을세라. 나라 중흥 보전하려, 무비(武備)를 먼저 힘쓰셨다. 여기서 큰 종 만들어, 궁중에 달았네. 뗑뗑 둥둥 치는 소리에, 무사(武士) 벌여 섰네. 정정하고 당당한 모습, 장할손 우리 큰 사업이네. 위풍이 떨치고 빛나, 끝없이 멀리 퍼지네. 산융(山戎)과 도이(島夷)들, 위엄에 눌리고 덕에 감복하였네. 폐백 가지고 보물 바치며, 관문 밖에서 뵙네. 요사한 공기 깨끗이 가시고, 온 나라에 근심 없어졌네. 백성들 즐거워서, 아름답고 어젓하구나. 거룩하신 우리 임금, 순(舜)임금ㆍ우(禹)임금 짝 되시네. 선왕 사업이었지만, 임금의 의사로 창작하신 것일세. 충훈(忠勳)들 함께 따라 영특하신 무력 협찬하여, 큰 공적 세우니 우리 동방 은혜로세. 여기 큰 종에 명문 새기니, 협욕(陜鄏) 땅 함께 짝하네. 몇 천억 년 지내도록, 길이 전해 썩지 않으리.’ 했다.” 하였다.

대평관(大平館)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중국[中朝] 사신을 대접하던 곳. 관 뒤에 누(樓)가 있다.
○ 예겸(倪謙)의 〈눈[雪] 갠 뒤 누에 오르다〉라는 부(賦)에, “내가 황문(黃門) 사마(司馬) 선생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대평관에 멈추었는데, 관 뒤에 누가 있어 전망이 좋다. 때는 경태(景泰) 원년(세종 32년) 정월 초이레이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산보하니, 쌓인 눈이 처음 개였다. 선생이 나와 함께 올라, 경치를 바라보다가 붓을 가져 오라 하여, 일시의 좋은 풍경을 적으니, 감히 상림(上林)과 자허(子虛)를 따를 수는 없지만, 또한 남루(南樓)의 방일(放逸)을 모방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남국(南國)의 제후(諸侯)들이 문왕(文王)의 교화를 입어서 백성을 덕으로 다스린 남은 은혜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치니, 시인(詩人)이 추우(騶虞 신령한 짐승의 이름) 시를 지어 칭찬하였다. 내가 여기서 반드시 은혜를 조정으로 돌리는 것은 옛날 시인의 끼친 뜻이니, 보는 이는 이전 뜻에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다음에 부(賦)를 붙인다.
부에 말하기를, 성인은 임금 위에 계시며, 새 책력을 사방에 반포하였네, 동쪽나라 돌아보고 허리띠 같은 물 한하여 서로 바라보니, 어찌 충성ㆍ예절 다 하지 않으리. 때로 와서 조회하니, 특별 우대 더하는 것 마땅하여, 황실[九重]의 조서(詔書) 내리셨네. 이에 글하는 신하에게 명하여 사신[皇華]으로 보내니, 마자(馬訾 압록강)를 건너고 낙랑(樂浪 평양)을 지났도다. 사신배 창해(蒼海)에 띄워 한양에 사절(使節)을 멈추었다. 황제 조서 선포한 다음 공당(公堂)에서 잠시 쉬노라니, 누(樓)가 있어 높기도 한데, 규모ㆍ제도 날아갈 듯, 그린 기둥 꿩 나는가. 새긴 난간 가시나무 화살 마귀도 쫓겠네. 밝은 산은 구슬 서까래에 비치고, 봄 구름 붉은 벽에 스치는 듯. 선선한 바람 거침 없이 들어오고, 높은 하늘에 도듬 놓고 홀로 섰네. 믿을 만하도다. 황학(黃鶴)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생각하면 취미(翠微 푸른 하늘)도 움키리라. 넓은 희포 시원스레 풀어놓고, 큰 물결(洪濤 높은 곳의 공기)도 깨끗하게 씻어 내네. 삼춘(三春)이 처음 오고 육화(六花 눈)가 방금 개었다데. 흐렸던 것 걷어 버리고 얼굴 드러내어 밝은 햇빛 비쳐오네. 사마(司馬) 선생 나를 이끌어 층층 섬돌 밟고 여러 기둥 붙잡고 올라가, 굽은 난간 의지하여 높은 지붕 굽어보니, 온 누리가 얼음병[氷壺]인양 바라보이고, 구슬섬[瓊島] 신선 나라[蓬瀛] 여기인 듯 여겨지네. 삼한(三韓)의 거룩한 모습 장하기도 하여, 만고의 깊은 정 활짝 열리는도다. 자리 가까이 보면 소나무 푸른 수염 늘이고, 늙은 몸 꿈틀거려 옥룡이 다투어 날아가며, 검은 여의주 잡으려 싸우는 듯. 멀리 둘린 방문과 대문들 흰 벽돌 어슷비슷, 구슬 수풀 엇갈렸는데, 맑은 일만 기와 가득 쌓이고, 하얀 일천 문은 백회가 엉겨 있다. 산을 말하면 북악이 뒤에 솟은 데다 궁전이 빛을 더하고, 남산이 앞에 높은 데다 성곽이 사면으로 둘렸으며, 높은 성벽 구불구불 서쪽으로 둘려 있고, 잇닿아 연이어서 높고 낮게 동쪽으로 뻗어 갔네. 물을 말한다면, 개천(開川)이 둘러 가는데, 은하수 내리 꽂은 것 같고, 한강수 넓게 흘러 발해(渤澥)로 들어간다. 고기들 편안하게 키워 주고, 논밭을 참으로 윤택하게 하여 준다. 그 중의 5감(監) 6시(寺) 등 여러 관청들은 종ㆍ북 소리 은은하고, 서로 다투어 높고 기이하네. 닭ㆍ개 소리 서로 들리니, 정교(政敎)의 시행 알 수 있는데, 읊조리고 감상함 끝없으니, 이내 몸 구이(九夷)에 있는 줄 모르겠어라. 선생이 웃으며 하는 말이, 경치 구경할 줄 그대 알면, 이 눈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풍년의 좋은 징조 상천(上天)이 주신 것이라네. 아, 우리 황제, 덕이 천지와 합하시고, 화기(和氣)로 평화를 이룩하시니, 맑은 기운 대지에 서리어 비 오고 개는 것 때 맞추어 만 백성 모두 기르나니, 신령한 기운 우내(宇內)에 퍼지고, 남은 물결 먼 나라에도 넘치나니, 기자(箕子)의 옛나라 백성들 많고 잘 되는 것 어느 것이 황제 은혜 아니겠는가. 내 이 말 듣고서 무릎 치며 노래하네. 층루(層樓)의 높음이여, 구조가 정밀하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올라가니 눈에 가득 은세계일세. 남은 은택 점점 퍼짐이여, 우리 황제 서울부터라네. 즐거운 이 밝고 밝은 낙토로세. 백성과 물건 풍성하다 동쪽 나라의 신하됨이여, 태평 시대 이루었다 천추 만대 가도록. 황제(명황(明皇))의 변방[屛翰] 굳건히 하리라.” 하였다.
○ 기순(祁順)의 〈등루부(登樓賦)〉에,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영락(零落)함이여, 고루하여 벗 적은 것 부끄럽다. 전철(前哲)의 규범 따름이여, 아름다움을 믿고 좋아하였도다. 영해(嶺海)의 먼 지역 싫어하여, 일찍부터 중원[中州]에 노닐었다. 견문이 넓지 못하다 함이여, 멀리 나아가서 두루 놀기 소원이었도다. 이 세상 좁고 험함을 슬퍼함이여, 인생 일생[浮生]이 얼마 안 됨을 탄식했도다. 뽕나무로 만든 화살 들고 사방으로 쏘는 것이여. 어찌 남아의 처음 뜻이 아니었던가. 혼자 좋아하며 만족해 함이여, 한평생 그르치지 않을런가. 우물 안 개구리와 하루살이도 제딴은 잘난 체 한다네. 옛날 굴원(屈原)의 멀리 놂이여, 말뿐이고 실제는 아니었도다. 어찌하여 사마공(司馬公)의 많은 지식도 중국에만 그쳤는가. 생각하면 구주(九州 중국)땅이 적막하고도 넓었건만, 내 발자취 절반이나 미쳤네. 봉호(蓬壺)의 좋은 경치 들음이여, 한 번 와서 숙원(宿願)을 풀려 했도다. 천자의 은명을 받음이여, 수레 달려 동한(東韓)으로 떠났도다. 천애(天涯)를 향해 달림이여, 아득한 길 멀고 멀도다. 아침에 도성[大都]에서 떠남이여, 계문(薊門)을 지나 잠시 쉬도다. 난하(灤河) 맑은 물에 씻음이여, 갈석(碣石)의 옛 자취 찾도다. 겹겹한 관문 산해(山海)가 높음이여, 높은 누대 작은 여염에 솟았도다. 요택(遼澤)이 얼고 흐리지 않음이여, 학야(鶴野)는 멀고도 황폐하도다. 압록강을 건너 동쪽으로 옴이여, 현도(玄菟)ㆍ낙랑(樂浪) 향하도다. 신세웅(辛世雄)을 살수(薩水)에 조상함이여, 기자(箕子)를 평양에서 뵈옵도다. 황주(黃州)의 좋은 대숲[脩竹] 찾음이여, 봉산(鳳山)의 아침 볕[朝陽] 구경하도다. 개성을 지나며 숭악(嵩岳) 쳐다봄이여, 어느 사이 새 서울에 왔도다. 넓고 깊은 황제의 은혜 선포함이여, 나라 사람들의 시청[觀聽]을 놀라게 하는도다. 물러나와 대평관에 머무름이여, 맑은 흥 끝이 없구나. 누(樓)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일만 경치 한곳에 모였도다. 왕궁은 울울(鬱鬱)하고도 빛남이여, 성곽이 저 멀리 에워쌌도다. 앞에는 남산 뾰족하게 솟았고, 뒤에는 북악산이 높도다. 긴 행장은 아홉 거리에 잇닿았고, 크고 작은 집들 사방에 벌여 있도다. 창해(蒼海)가 그 어디메뇨, 동쪽을 바라보니 물결이 하늘에 닿아 끝이 없도다. 신산(神山)이 여기 있다더니, 아, 신선들 사는 곳이로다. 불현듯 마음 동하고, 뜻이 향함이여, 수레 차려 따라가는도다. 신령이 나에게 길한 점괘 알려 줌이여, 신관(神官)이 나를 도와 의심 없게 하도다. 비렴(飛廉 풍백(風伯))을 명하여 맑은 티끌 일게 함이여, 금영(黔嬴)이 앞길 인도하도다. 봉황새 어지럽게 날아들어 모임이여, 학이 훨훨 날며 그 아래 있도다. 여덟 용[八虯]의 꿈틀거리는 것 타고서 무지개 깃발 펄렁거리도다. 보배 검[寶劍]을 함지(咸池)에 담금이여, 큰 활을 부상(扶桑)에 걸도다. 좋은 음찬 가져 서로 맞이하여 구슬가지로 음식 장만하여 드리도다. 맑은 이슬의 정액(精液)을 마심이여, 화려한 꽃을 구슬에서 캐도다. 뭇 신선들의 아름다운 모습[妁約] 모임이여, 은근한 정으로 나를 맞아 주도다. 하늘의 별들처럼 빽빽하게 빛남이여, 구름 우레처럼 빠르게 달리도다. 망서(望舒)를 시켜 서로 잇닿게 함이여, 구망(勾芒 귀신 이름)을 불러 짝하도다. 두 의사의 깊은 속[綢繆]을 통함이여, 은밀한 분부를 하녀(下女)에게 주도다. 내 마음의 고요하고 맑음을 아름답게 여김이여, 나의 모습[余骨] 비범하다 하도다. 청허(淸虛)한 마을[府]에 나를 앉힘이여, 나를 백옥(白玉) 자리에 손님으로 모시도다. 얼음 복사, 푸른 연근 모두 다 진설함이여, 용고(龍膏)를 불러 앞에 오도다. 운하(雲和) 곡조 멀리 예상(霓裳) 춤 잘도 추네. 좋은 모임 아직도 흡족하지 못한데, 저 해는 빨리도 새벽을 재촉한다. 취하여 옷을 떨치고 크게 노래 부름이여, 여러 사람 칭찬이 놀랍도다. 옛날 놀던 일 생각하며 도성을 바라봄이여, 아홉 층 저 하늘 위에 있도다. 이곳이 즐겁지만 내 나라 아니니 어쩌면 머물러 놀까. 길게 읍하고 짐짓 이별함이여, 다시 사방 돌아보며 어물어물 떠나지 못하도다. 신선 수레 앞뒤로 달림이여, 온갖 신령들 옹위하고 나가도다. 구슬같은 새 글[新篇]을 줌이여, 장생(長生)하는 진결(眞訣)도 주도다. 큰 기운[一氣]의 매우 신령함이여, 맑고 깨끗하여 모자람이 없네. 천천히 절월(節鉞) 놓고 즐거워함이여, 불현듯 옛 고향 생각나네. 이 놀이 특별도 하여, 마음속에 또렷하여 잊기 어렵네. 신선되는 그 길이 있는지, 옛 사람의 애써 찾으려던 것이었네. 이내 몸이라고 못하랴 어디 한 번 만났으면. 제일 높은 것은 덕을 세움이요, 그 다음은 공을 세움이요, 또 말[言]을 세움이라. 명성과 광채[聲光]를 온 누리에 전하여, 영원한 세대에 언제나 남으리니. 이것이 나의 마음에 바라는 일이니, 또 어찌 신선의 집을 부러워 하리오.” 하였다.
○ 고윤(高潤)의 〈등루시(登樓詩)〉에, “새벽에 홀로 조선루(朝鮮樓)에 오르니, 누대 앞 경치 어찌 그리 유유한가. 손으로 황학(黃鶴)을 불러도 오래토록 오지 않고, 여러 층의 처마, 겹겹이 포개진 집에 바람만 솔솔[颼颼] 부누나. 시 잘 짓던 이적선(李謫仙),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 내 문득 새로 지은 시 가져다 첫 머리에 쓴다네. 꽃 구경 좋다지만 얼마 안 가서 꽃 질까 애석해 하고, 그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수심 먼저 생긴다네. 악양루(岳陽樓) 또렷이 갠 날 냇가의 수림(樹林), 이 누의 그림 그대로보다는 못하리. 난간 밖의 저 산은 무한히도 푸른데, 흰 구름 들보에 가득 차고, 푸른 소나무 외롭다. 궁전이 서로 빛나 단청도 휘황찬란한데, 그 중에 사는 이는 정녕 신선이리라. 태양(太陽)이 내리 비치고 붉은 대문 열어 놓으면, 비단옷, 검은 모자 어지러이 서로들 들어간다네. 뉘 집의 새댁[小婦] 짙은 단장 다했는가, 구름 같은 머리, 검은 상투[鴉髻]에 황금 빛 곁들였네. 붉은 빛[血色] 비단 치마에 난초 사향 풍기는데, 주렴을 반만 걷고 술을 드리웠네. 여섯 거리 세 저자[市]에 노는 한량 많아, 푸른 실 끝 다투어 잡고 옥병을 끄네. 높고 낮은 풍악 소리 종일토록 들리니, 천금을 다 흩으면서 갑오(놀음) 빼기 안 구하네. 머리 돌리면 저기 저 한강물 부럽기도 하니, 도도(滔滔)하게 흘러가서 넓은 바다와 통한다네. 어저께는 놀잇배 타고 놀았는데, 가벼운 돛 조용히 연파(煙波) 중에 걸려 있었네. 은실같이 가늘게 썬 것, 양화도의 생선회인데, 실버들 저 사이에선 희우정(喜雨亭) 꾀꼬리 소리 들려온다. 즐거운 놀이 마치기 전에 궂은 비 내리고, 누로 돌아오자 하늘 벌써 개였네. 엄자릉(嚴子陵)이 창주(滄洲)의 나그네인 줄 그대 알지 못하나, 어찌 일찍이 배 삼킨 고래를 낚았던가. 천자가 불러도 가려 하지 않았는데, 밤중에 자다 보니 하늘의 별이 움직였다. 맑은 기풍, 높은 절개 사치하고 화려한 사람들 압도(壓倒)했는데, 지금도 역사에서 그 이름 전해 온다네. 높은 난간에 그저 기대어 길게 웃으려 하지만, 웃으면 하늘 사람들 놀라지 않을는지. 중산(中山)의 붓과 강주(絳州)의 먹으로, 종이[楮先生] 위에 한바탕 풍운 일으킬까. 만고의 모든 일 일소(一掃)하려 하나니, 중선(仲宣)의 울울한 것이야 말할 것 무엇 있으리. 안중에 보이는 것 천지가 넓을 뿐인데, 한 쌍의 날랜 새매 가을철이라 날아드네. 내일 아침 말을 타고 조정으로 돌아가면, 이곳의 풍광은 어느 호걸이 차지할꼬.”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화려한 집 층층 누대 구조도 깊은데, 3천 리 밖 외지에서 여기 한 번 올라 보네. 웃고 말할 때, 난간에 기댄 흥취 있었지만, 느낀 회포는 임 그리운 마음이니 어이하리. 바람은 소나무 물결 몰아 만학(萬壑)에서 불어오고, 하늘은 그림 펼쳐 외로운 흥 돋우누나. 흰 구름 땅 위에 가득하고 황학(黃鶴)이 나니, 사람은 요대(瑤臺)에 있고 자리엔 녹음(綠蔭)일세.” 하였다.
○ 명 나라 장영(張寧)의 시에, “높은 다락 아득하게 푸른 공중에 솟았는데,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바라보니 내 마음 이미 통하였다. 하늘과 땅이 은혜 있어 같이 덮고 실었는데, 중국과 오랑캐들 모두 다 한곳으로 모이네. 요양(遼陽)에서 동쪽으로 3천 리를 내려오니, 화악(華岳)이 서쪽으로 백이(百二) 겹이나 잇닿았네. 금 궁궐 옥 대문엔 수위(守衛)도 엄하고, 흰 깃발 누런 부월(斧鉞)로 장군들 정해졌네. 국경 남쪽 먼길엔 봉화 연기 끊어졌고, 북쪽 지역 여러 진영엔 방위도 웅장하도다. 온 누리 모든 제도 주(周) 나라 법칙인데, 강역은 모두 다 한(漢) 나라 봉역(封域)에 속하였다. 구성(九成)의 풍악 아뢰니 봉새들 모여 오고, 5색 상서 구름에 6룡이 달리누나. 상원(上苑)의 봄빛은 바다처럼 넓은데, 귀족들의 비단옷 무지개처럼 찬란하네. 옛부터 없었던 데에서 엮어 만들었고, 생민(生民)으로 아직 없었던 공업 잇달아 세웠네. 일만 나라들 수레로 배로 폐백 보내 오는데, 일천 집 가가호호 노래 소리와 악기 소리 들려온다. 교화는 구주[九服] 담장 밖까지 행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삼왕(三王) 예악 속에서 살고 있는 것, 억 년을 두고 변함 없으리. 고황제(高皇帝 명 나라를 건국한 임금) 공업 두 서울 함께 있으니, 신령의 조화로다. 황당한 말 도리어 장몽수(莊蒙叟 장자(莊子))를 웃게 하고, 부(賦)를 지으려니 좌대충(左大沖)을 기다려야겠네. 이 몸 이역(異域)에 사신 와서 생각해도 끝이 없는데, 마음은 서울에 있으나 바라보아도 다하기 어려워라. 전부터 동쪽 나라에 문화 풍속 좋으므로, 옛날부터 중국에서 대우도 융숭했네. 황실에 번병(藩屛)되어 절도(節度)를 숭상하고, 성인의 모범 형용하여 피폐한 백성 구휼하네. 안으로 경기에 접하니 백성들 편안하고, 밖으로 변방을 제어하니 요충지일세. 팔도에 병부(兵符)를 나누니 지방 풍속 좇았고, 겹문에서 딱딱이[折]를 쳐 흉한 일 있을까 방비했네. 수륙(水陸) 길 멀리 오니 시골 말씨 다르건만, 천지간에 봄 가득 차니, 풍경이야 어디나 같으리. 닭ㆍ개 소리 들리니 민가는 사방 들에 잇닿았는데, 연하(煙霞) 속의 산성(山城) 천 봉우리나 뻗었네. 흐르는 세월 또 한 번 봄철 따라 바뀌니, 미물(微物)들 모두 다 조물주(造物主)의 은택 입었네. 높고 낮은 곳 뽕나무 푸른 잎 퍼져 나니, 지정(池亭) 가의 살구나무 벌써 붉은 꽃 피었네. 빈 수풀에 땅이 좋으니 인삼(人蔘)이 자랐고, 먼 섬에 모래가 평평하니 큰 조개 많이 나네. 꽃다운 풀 돌아가는 나그네, 생각 흐리게 하는데, 푸른 이끼는 전에 놀던 자리 메꾸지 않았네. 시냇가의 남은 흰 점은 봄 오기 전 눈인데, 버들가지에 새로 난 누른 빛, 밤 사이 바람에 터졌네. 대숲 밖 서늘한 그늘에 갠 풍경 맑은데, 매화나무 곁 향기로운 아지랑이 새벽 들어 몽롱(朦朧)하네. 동산에 복사ㆍ오얏꽃 피니, 벌은 꿀을 빚고. 들판에 마른 쑥대 많으니, 사슴이 용(茸)을 기르도다. 꽃 떨어지고 피는 것 비단 오린 것 같은데, 사람이 오고 가는 것은 날으는 쑥대같네. 흥이 오면 난간 의지하여 긴 피리 불고, 앉은 지 오래면 처마 끝 돌며 짧은 지팡이 짚는다네. 고절(高絶)한 행동은 서시(徐市) 나라 엿보려 하는데, 청허(淸虛)한 그 마음 무이궁(武夷宮)에 쉬는 것 같네. 부상(扶桑)과 석목(析木)이 가까운 듯하여, 방장(方丈)과 영주(瀛州)도 찾기 쉬운 줄 알겠네. 용처럼 뛰는 말 타고서 멀고 먼 길 가볼거나. 학처럼 늙은 나이 공동산(崆峒山)에 놀아 볼까. 향기로 둘러싸인 장막은 술로 돌려 있고, 구슬처럼 푸른 난간 비단 줄로 얽혀 있다. 좌석에 들어와 정이 있는 듯 제비는 춤추는데, 창을 지나도 말이 없으니 꾀꼬리 어찌 저리도 게으른가. 전각에 빛이 나니 황제의 필적 여기 있고, 거리에 기쁨 넘치니 채색 비단을 묶었어라. 어느 곳 시골에는 농악소리[社鼓] 들리는데, 여기저기 정원(庭院)에는 새긴 기둥 높이 섰네. 맑은 샘물 동리에는 조용한 집 아담한데, 흰 돌 세운 산문(山門)에는 옛 절이 높이 솟았어라. 있는 듯 다시 없어지는 아지랑이 들어오고, 차갑다가 잠시 더워지니 봄볕 푸근하다. 여러 층의 얼음 절벽 아래 언제나 여름철이 좋고, 높은 고개의 외로운 나무는 올해도 겨울을 견디어 내네. 사냥하러 나가면 꿩ㆍ토끼도 많고, 나무하고 풀 베는 데는 원래 아이들 금하지 않는다. 내와 언덕 둘러 싸였으니, 멀리 바라볼 만하다. 인물도 기특하고 많으니, 수려한 기운 모인 탓이리. 가죽 신 긴 소매는 일하러 나온 부인이요, 풀옷의 헌 패랭이는 관청에 매어 있는 품꾼일세. 부중(府中)에서 북을 치니 뭇 아전들 들어가고, 원외(苑外)에서 피리 불며 적은 군사[小戎] 훈련하네. 시골 할머니 성 안 들어 올 땐, 토산(土産) 포목 가져 오고, 흙화로에 불을 때어 동철을 주조(鑄造)하네. 월상(越裳)인양 거듭 통역하니 왕래에 편리하고, 노(魯) 나라인 양 어진 이가 많으니 선비들로 가득 찼네. 저 멀리 누선(樓船)은 바다 인 오게 하고, 비 개자 들판엔 농사짓는 이들 나가네. 바다 어귀 조수 나가니, 천마(天馬) 오르는 듯, 모래톱에 티끌 맑으니 외기러기 보이도다. 마읍(馬邑) 땅의 구릉(丘陵)은 얼마나 멀고 가깝나. 봉산(鳳山)의 풀 숲[榛莽]도 함께 아득하기만 하네. 그 옛날 임둔(臨屯)은 진번(眞番) 경계 연접했는데, 평양성 저 멀리 패수(浿水) 동쪽에 잇닿았네. 기자묘(箕子廟) 황량한 사당에 비석이 높이 섰고, 고려 시대 수자리 터엔 돌만이 험상궂네. 올라와 구경하는 이들 예나 이제나 그치지 않는데, 좋은 경치 모두 다 뇌락한 가슴속에 들어오네. 풍속을 묻는 옛일 오계자(吳季子)를 찾아볼까, 재주 없는 이내 몸 정승 주공(周公)이 부끄럽다. 묘금(卯金)을 마음대로 열람하려 천록(天祿)에 올랐고, 백옥에 글을 간직하니 사홍(射洪)에 가득 찼네. 일을 의논하다가는 스스로 양자(楊子 양웅(楊雄))의 말더듬이 부끄럽고, 시기에 통함은 중거(仲車)의 귀머거리가 부럽네. 묻혀 있는 이내 몸 개천 속의 나무가 우스운데, 세상에 드러나고 보면 뉘라서 부엌에 때는 오동[爨下桐]을 꺼리겠는가. 승지의 구경은 깊은 지경(地境) 탐하지만, 높이 올라가도 하늘엔 미치지 못한다네. 지경이 묘한 곳 당도하면 공교롭게도 서로 모이는데, 정이 극진한 곳에 이르면 짙어지기만 하여라. 이슬 묻혀 시를 쓰니 은붓대 젖는데, 석양녘에 술을 재촉하니 옥병이 다 비었네. 시 읊기를 다하니 외로운 회포 상쾌해지는데, 취한 뒤에 두 귀밑을 혐의하네. 난간을 의지해 거듭 바라본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이 좋은 풍경 좋아 시절이 태평함을 즐기노라.” 하였다.
○ 명 나라 장성(張珹)의 시에, “황명(皇明)의 기풍 한 번 떨쳐 호원(胡元) 풍속 쓸어내니, 옥이며 비단이며 육지로 해로(海路)로 만 나라들 와서 조회하네. 밝고 밝아 화락하기 반 년 동안, 곳곳에서 사람들 태평곡 노래하누나. 태평곡 들어온 지 오래니, 이 이름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하루 아침 명을 받들어 조선성(朝鮮城)에 나오니, 공관(公館)의 그 이름이 분명히 태평(太平)이네. 그 옛날 이 이름 지은 것 어찌 뜻없이 했으리, 길이길이 태평 세대 누리기 위해서리라. 내가 들으니 이 고장은 기자(箕子)의 옛 봉역(封域)인데, 순후한 그 풍속이 여러 변방 나라와 다르다네.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짜며 선비는 학문에 부지런한데, 의관도 점잖은 모습 중화(中華)의 풍속이네. 정성을 다하고 힘써서 신하 직분 다하니, 천자께서 보통으로 보지 않아 기쁜 일 지으시네. 새 황제 즉위하사 정사도 새로우니, 경하(慶賀) 예식 드렸다고 사신 보내 은총 베푸시네. 황제 말씀 선포하고 비단 폐백 나눠주느라, 몇 달 동안 분주하고 이제야 비로소 한가하네. 동행의 김태복(金太僕)이 나를 이끌어 태평관의 누(樓)에 올랐는데, 누가 높고 서늘한 기운 많아 5월이지만 가을 같네. 눈앞에 펼쳐진 풍경 모두가 구경할 만한데, 게다가 어진 임금 있어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빛난 잔치 크게 벌이고 멀리 온 수고 위로하는데, 취중에 올라 보니 이내 생각 끝간 데 없네. 그림 문지방 깊은 곳에 점심 연기 희미한데, 들말[野馬]은 오지 않고 발 아래에서 울음 우네. 물결 소리인양 저 메아리 노송 있는 고개에서 들리고, 꾀꼬리 북인양 수양버들 동쪽에 드나드네. 남산ㆍ북악이 진하게도 푸른데, 비 뒤의 뽕나무ㆍ삼이 푸른 띠를 둘렀어라. 천왕(天王)은 은총 내리고 나라는 근심 없는데, 또 한 번 새로운 기개 보겠노라. 태평관에 이제 와서, 높은 누에 다시 올라 크게 한 번 웃어보노라. 황명(皇明)이 천명받아 억만 년 전하리니, 다음 날에도 다시 와서 함께 읊고 구경하오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아로새긴 문지방, 비단 난간에 하늘 빛도 깊은데, 저 멀리 천상(天上)에서 사신은 부절 가지고 지금 왔네. 성주(聖主)가 은혜 베풀어 옥새 조칙 반포하는데, 국왕이 은혜 보답하여 단심(丹心)을 기울이네. 구름ㆍ연기 자리를 두르니 거문고ㆍ서책 윤(潤)이 나고, 소나무ㆍ전나무에 바람이 이니 새들 와서 지저귀네. 정원에 말 소리 없으니 봄빛이 고요한데, 발 가득 꽃 그림자 대낮에도 그늘이 생기누나.”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달빛 따라 누대에 오르니, 생각이 호연(浩然)하다. 문지방 의지하여 서 있으니, 졸음 오는 줄 모르겠네. 담장 저 건너로 등잔불 희미한데, 성곽 주위의 인가들 멀고 가깝게 잇닿았다. 전나무ㆍ잣나무 바람받아 그림자 움직이는데, 봉우리들 머리 들고 하늘을 맞이하는 것 같네. 돌아가기 재촉하는 북 소리 기다리지 말고, 술기운 어한(御寒)은 됐으니 잔 더 돌리지 말라 일렀노라.” 하였다.
○ “누에 오르니 밤 깊은 줄 모르니, 구경하려고 멀리서 온 데 참으로 비하겠네. 꽃은 아직 맺지 않았는데 봄은 벌써 눈에 가득하고, 나무에 그림자 생기니 달이 내 마음 알아주네. 경치는 보아도 다함 없으니 맑은 구경 외롭고, 시흥(詩興)은 처음 온 것을 써서 짧은 시에 붙이노라. 이 보소 이 나라 사람들 웃지를 마소, 산음(山陰)에 배질하던 옛 그림 다시 이으려네.” 하였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世宗) 12년에 고쳐서 관(館)으로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봄 성에 치장한 말[珂馬] 새벽부터 들끓는데, 저 멀리 청산에 멈추고 특별한 자리 벌였네. 시와 예(禮) 오랫동안 이어받아 사람들은 학문 좋아하고, 문(文)과 무(武) 서로 함께 해서 나라에 어진 이 많다. 돌아가려는 마음 밤마다 난하(灤河) 달빛에 오가는데, 객지 생각은 새벽에 한강물 위 연기와 같이 일어나누나. 떠난 뒤의 깊은 정 추억도 많을 것인데, 비단 주머니 주옥같은 시(詩) 더구나 많다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온 뒤에 총총히 한성(漢城)을 나갔는데, 가다가 말 세우고 돌아가는 이정(里程) 계산하네. 모화루 저 위에 쌍 술 두루미 술인데, 숭례문 그 앞엔 10대(隊)의 군사 있었네. 세자는 마음 깊이 이별하기 어려운 생각인데, 이 나라 신하들 아직도 떠나지 않으려 하네. 재삼 손들어 저으며 훈훈한 바람 따라 가는데, 저 소리 노래소리 가는 행렬 호위하네.” 하였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일본 등 여러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와서 조회하는 야인(野人)들을 접대하던 곳이다. 독서당(讀書堂) 옛 용산(龍山)의 폐지한 절인데, 강 북쪽 언덕에 있다. 성종이 고쳐 지어 당(堂)을 만들고, 홍문관(弘文館)의 글읽는 곳으로 삼았으며, 일찍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수정배(水精杯)에 부어 권하고 관원에게 맡겨 두었다. 도금(鍍金)하여 받침[臺]을 만들고 거기에 새기기를, “맑으면 흐리지 않고 비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물건을 덕으로 여겨 저버리지 말기를 생각하라.” 하였다.
『신증』 지금 임금 10년에 옮겨 지었는데,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있다.
○ 조위(曹偉)의 〈용산독서당기〉에, 큰 집을 짓는 자는 미리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의 재목을 수십ㆍ백 년 전에 길러서 반드시 하늘에 높이 뻗치고 골짜기에 우뚝 솟아나기를 기다린 후에야만 취하여 기둥ㆍ들보의 재목으로 쓸 수 있으며, 만리 길을 가는 자는 미리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그 꼴[蒭]과 콩을 풍부하게 주고 안장과 안갑[鞍鞁]을 정비한 후에야만 연(燕) 나라ㆍ초(楚) 나라의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니, 국가를 다스리는 이가 미리 어진 인재를 기르는 것 또한 무엇이 이와 다르랴. 이것이 독서당을 지은 까닭이다.
삼가 생각건대, 본조(本朝)에서는 열성(列聖)께서 서로 계승(繼承)하여 문교의 정치가 날로 성하였으며, 세종대왕께서는 신명(神明)한 생각과 밝은 지혜가 어느 임금보다도 뛰어났으며, 제작(制作)의 기묘함이 모두 신명에 합치하였다. 제도와 문화는 선비가 아니면 함께 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널리 글하는 선비를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치도(治道)를 강습하게 하였으며, 또 의리(義理)의 오묘함을 자세히 연구하고 여러 서책의 많고 큰 것을 널리 종합하려면 전적으로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고 하여, 처음으로 집현전의 문신(文臣) 권채(權採) 등 세 명을 보내어, 특별히 장기 휴가를 주어 산간의 절에서 편할 대로 글을 읽게 하였으며, 만년에는 또 신숙주(申叔舟) 등 여섯 명을 보내어, 천천히 공부하고 편히 쉬면서 크게 그 힘을 기를 수 있게 하였다.
문종이 왕위를 계승한 뒤로는 크게 선비의 일에 뜻을 두고, 또 홍응(洪應) 등 여섯 명에게 휴가를 주어 보내니, 여기서 인재의 성함이 일시에 극진하여서 저술 제작의 공이 중국을 짝하게 되었다. 지금 임금께서 즉위하여서는 먼저 예문관(藝文館)을 개설하여 옛 집현전 제도를 회복하고,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크게 문적(文籍)에 정통하고 유술(儒術)을 높여 숭상하니, 인재의 육성(育成)이 옛보다도 더함이 있었다. 병신년에는 다시 조종조의 고사(故事)를 써서 채수(蔡壽) 등 6명에게 휴가를 주었으며, 금년 봄에는 또 김감(金勘) 등 8명에게 휴가를 주어 장의사(藏義寺)에 가서 글을 읽게 하였으며, 음식 맡는 관리는 음식을 대고 술 맡은 관리는 술자리를 마련하며,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물건 하사하기를 자주하였다.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성 밖에 땅을 선택하여 집을 지어 독서하는 장소로 삼게 하라.” 하니, 정원에서 회보하기를, “용산의 작은 암자가 지금 공청[公廨]에 속하여 폐기되었는데, 수리하면 앞이 틔어 밝으며 그윽하고도 넓어서, 공부하고 쉬는 데에는 여기가 제일 적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청원을 옳게 여기고, 관원을 보내어 공사를 감독하여 두 달이 걸려 낙성되니, 집이 합하여 겨우 20칸이었다.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스하여 모두 알맞았다. 이에 ‘독서당’이라고 사액(賜額)하고, 신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시경》 〈한록장(旱麓章)〉에, “개제(愷悌)한 군자여 어찌 사람을 진작시키지 않는가.” 하였는데, 인재가 일어나는 것은 윗사람이 어떻게 작성(作成)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잘 양성한다면 선비들이 많이 있어 임금과 나라가 살 수 있지만, 잘 양성하지 못한다면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리요. 만일 선비 기른다는 이름만 좋게 여겨서 구차히 취한다면, 닭의 울음 소리를 내고 개 도둑질하는 무리들이 그 사이에서 가만히 움직일 것이니, 조심하지 않을 것인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三代)에는 인재가 모두 상서(庠序)를 통하여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도 주 나라의 선비 양성하는[造士] 법은 제일 자세하고 주밀하였다. 저 한(漢) 나라의 요재(翹材)와 당(唐) 나라의 등영(登瀛)은, 모두 구차스럽게 한때의 이름을 얻은 것뿐이니, 어찌 의논할 것이랴.
우리 국가에서 백 년 간 길러 오며 교화하여 열어 인도하는 방법과 장려하여 양성하는 규정이, 사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선비 양성하는 법과 서로 안팎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궁(泮宮)ㆍ옥당(玉堂) 이외에 또 어진 이 양성하는 장소를 두어서, 선택하기를 정밀히 하고 대우하기를 후히 하니, 이것이 저 《시경》 〈권여장(權輿章)〉에, “밥 먹을 때마다 남음이 없고 권여(權輿)를 잊지 못한다.”는 것과 어떠한가. 《주역》에 이르기를, “성인이 어진 이를 양성하여 만 백성에게 미친다.” 하였는데, 전하는 이의 말이, “어진이를 양성하는 것은 만 백성을 양성하기 위하여서이다.”고 한다. 지금 집을 주고 음식을 보내는 것이 직접 다스리는 일[治道]에는 관계가 없다. 나라 정사가 번거로운데 특별히 성상의 생각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사리에 적절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날 다스리는 일을 경륜하고 왕법을 빛내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들에 의하여 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태평성대를 장식하고 은택을 백성들에게 입혀서, 그 공과 이익이 멀리까지 미치게 함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편(梗)ㆍ남(楠)ㆍ기(杞)ㆍ자(梓) 등의 좋은 재목과 화(驊)ㆍ유(騮)ㆍ녹(騄)ㆍ이(駬) 등의 좋은 말을 미리 길렀다가 일시에 거두어 쓰는 것과 같은 것이니, 어찌 만 번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또 이것은 전하께서 급선무로 여기는 일이고, 멀리 전(前)의 군왕들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발에 응하는 이는 성상의 기르기 좋아하는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성인의 도리는 모두 서책 중에 퍼져 있다. 6경(經)의 깊은 뜻과, 여러 사기(史記)의 다르고 같음과, 백가서(百家書)의 넓고 많음을 반드시 다 거두고 넓게 찾아내어, 그 흐름을 지나서 정밀한 것을 모으고 그 모임을 보아서 요긴한 것을 찾으며, 그 넓은 것을 다하여 요약한 데로 돌아오게 한 후에야 깊이 나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황(皇)ㆍ왕(王)ㆍ제(帝)ㆍ패(霸)의 도리와 예(禮)ㆍ악(樂)ㆍ형(刑)ㆍ정(政)의 근본, 수신ㆍ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요지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사업에 시행하는 것은 힘써 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동자(董子 한 나라의 동중서)의 이른바, “학문을 힘써 하면 문견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지며, 도를 행하는 데 힘쓰면 덕이 날로 일어나고 크게 공이 있다.”는 것으로서, 그 효험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옛 사람이 남긴 글의 찌꺼기만을 가져다 기록하고 외우는 자료로 삼으며, 비단같이 화려하게 이리저리 얽어 운(韻)을 달고 곡조를 맞추는 글만 지어서, 세상에 자랑하고 풍속을 현혹시킨다면 조정에서 선비들을 미리 양성(養成)한 본뜻이 아닌 것이다. 아! 학문의 공은 변화하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오늘 한 문장을 읽고도 그대로 그 사람이고 내일 한 문장을 읽고도 역시 그대로 그 사람이라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무엇을 하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고 하였다. 또 자하(子夏)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는 군자다운 선비가 되고 소인다운 선비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정】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 예겸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한강 가에 섰는데, 시간을 내어 와 보니 정신이 상쾌해지네. 산 그림자 물 속에 잠기니 부용(芙蓉)이 푸르고, 옥 항아리에 향기 뜨니 호박(琥珀)이 봄빛이네. 날이 따스하니 일엽편주(一葉片舟) 가볍게 뜨고, 바람이 잔잔하니 봄 물결 가늘게 줄 짓네. 바다 어귀 저 물결 은하수에 닿은 듯, 신선 뗏목 타고서 하늘 나루터 찾아갈거나. ○ 도성 남쪽에 경치 제일 좋다더니, 한강 저 위에 높은 누대 서 있네. 멀리 나온 여러 재상들 좋은 잔치 마련하였는데, 가까이 내려다보니 한가한 어부 작은 배 저어가네. 만 겹이나 되는 봉우리들 여기저기서 읍하는데, 몇 쌍의 비오리 제멋대로 뜨고 잠기네. 적벽강의 옛 글이야 어찌 감히 따르랴만, 새 시(詩)나 지어서 이 좋은 놀이 적어 두려네.” 하였다.
○ 고윤(高潤)의 시에, “청신(淸新)한 시구는 먹 흔적 남겼는데, 여기 올랐던 사람들 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네. 누대에서 보는 좋은 경치 어제와 같지 않은데, 난간 밖의 긴 강물만 속절없이 절로 흘러 가네. 붉은 조서 내릴 때는 봉새 여기 멈췄는데, 놀잇배 지나가자 갈매기들 놀라네.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며 옛일 생각하는데, 바람이 흰 구름 보내 나무 위에 와 있구나.” 하였다.
○ “여름 날 누대에 오르니 비 지나 날씨 서늘한데, 앉으라 재촉하더니만 잔은 느리게 돌리네. 재주 없는 몸 사신으로 온 것 무어라 부끄러워하리, 글하는 이들의 이 모임 기쁘기만 하다네. 새 몇 마리 울며 오니 산은 적적하기만 한데, 외로운 돛 멀리 가니 물은 더욱더 망망하구나. 난간에 의지한 흐뭇한 흥 시(詩)로 다 거둘 수 없는데, 머리 돌리니 저 하늘가에 해 벌써 석양이네.” 하였다.
○ 진감(陳鑑)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넓은 나루 내려다 보는데, 점점이 보이는 저 청산들 하나하나 참 모습이네. 화원에 향기 풍기니 춤추는 나비 날아들고, 고깃배에서 그물 드니 생선이 번득이네. 눈앞의 저 좋은 경치 누가 먼저 차지하였나. 주머니 속에서 시를 찾으니 내가 제일 가난하네. 오늘의 이 풍광이 어제 그것 아니니, 잠시 동안 서로 구경하는데 자주한들 어떠리.” 하였다.
○ 장영(張寧)의 시에, “동쪽 나라에 높은 누대있는데, 누대 앞엔 한강 물 흐르네. 광채 흔들림은 청작(靑雀) 배요, 그림자 떨어짐은 백구의 물가로다. 멀리 바라보니 저 하늘이 다한 듯하고, 공중에 솟았으니 땅이 떠 있는 것 같네. 여덟 창 열었는데 풍경ㆍ날씨 좋으니, 걸상에서 내려와서도 그대로 주춤거린다.”
○ “봄물이 오리 머리처럼 새파란데, 새벽 산은 소라뿔같이 푸르네. 조각 구름 먼 산에 걸치고, 외기러기 긴 물가로 내려오누나. 이역(異域)에서 일 아직 끝나지 않고 태평 시대에 혼자 깨어 무엇하나, 이곳에 오고 보니 시사(詩思)가 끝이 없네.”
○ “길이 머니 거마(車馬)가 적은데, 봄이 깊으니 풍경도 좋구나. 안개가 걷히니 산은 그림 같고, 바람이 맑으니 물결은 비단 같구나. 즐거운 일 좋은 철 만나니, 맑은 술 항아리에 노래도 호방(豪放)하네. 옛부터 문화[文物]의 지방이라, 가는 곳마다 잘도 지내네.”
○ “아득히 폭포가 급히 흐르는데, 저 멀리 돌 층계 평평하네. 산새는 울다 다시 멈추고, 강 포구는 흐리다가 개누나. 흥은 구름과 함께 가고, 정은 풀을 따라 함께 자라네. 양친을 볼 수 없으니, 다시금 신경(神京)을 생각하네.”
○ “좋은 구경 언제나 같으니, 아름다운 기약은 부를 것도 없다네. 올 때는 시골이 가깝다 여겼더니, 앉으니 객(客)의 회포 사라지네. 골짜기의 새 소리 서로 응하는데, 시냇가 꽃은 그림자 마주 흔들린다. 봄바람이 뜻이 있는 양, 목란(木蘭) 노를 불어 보내누나.
○ 물가는 바라봐도 끝없는데, 봉우리는 몇 층이나 되는지. 병들었을 땐 금귀약(金匱藥)을 생각하고, 목마를 땐 옥호빙(玉壺氷)을 마시고자 하네. 요해(瑤海 신선이 있는 곳)를 배질하여 건널 듯, 단구(丹丘 신선이 있는 곳)를 날아갈 것 같네. 문지방 의지하여 오래 섰으니, 고향 생각 문득 멀어지네.”
○ “흰 구름은 일지만, 황학(黃鶴)만은 오지 않네. 지경 깊으니 신선 고장 같고, 좋은 경치는 봉래산(蓬萊山) 생각나네. 취미는 원룡(元龍)의 호기인데, 시는 이태백의 재주 부끄럽네. 금곡(金谷)의 주름은 주거니 받거니, 취하여 쓰러짐을 비웃지 마라.”
○ 철은 바뀌지만, 강산은 고금에 같네. 점잖은 이들 몇 번이나 유람했나, 시와 술로 지금 다시 올라왔네. 경치 대하니 지난 일 생각나고, 풍속을 보니 내 마음에 맞네. 태평의 교화 멀리 퍼지니, 가는 곳마다 친구들 있네. ○ 네 필 말 끊임없이 달려가, 초연(超然)히 산에 앉았네. 술 향기는 춤추는 소매에 풍기고, 봄 기운 비단옷에 스미네. 돌길엔 솔꽃이 지는데, 성긴 발에 제비 나누나. 좌중이 모두 좋은 모임이라, 저물녘에도 돌아가자는 말 없네.
○ 옮기고 의지하며 아름다운 경치 다 보고, 이리저리 오가며 좋은 놀이 다 했네. 어진 임금 빈객을 좋아하고, 여러 정승 풍류에 바쁘다네. 취하고서도 그대로 마시고, 돌아가려다 다시 머무네. 내일 아침 태평관에서도, 머리 돌려 생각 끝없으리.”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손님과 함께 누대에 올라 잠시 쉬려 하니, 벼슬살이 하려는 마음, 고향 생각 모두 다 아득하구나. 산에 오랜 비 지나니 구름 안개 모이고, 강은 봄 조수 곁들여 밤낮으로 흐르네.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 조는 학을 놀라게 하고, 저물녘 고기잡이 북 소리 한가로운 갈매기 날아가게 하네. 심상하게 발 밑에서 산 안개 일어나니, 아마도 이내 몸 푸른 하늘 제일 위에 있는가 싶네.” 하였다.
○ 김식의 시에, “누대 가의 풍악 소리 훈훈한 바람 풍기는데, 누대 밖의 꽃가지는 술에 비쳐 붉구나. 구름 그림자 물결 빛 하늘 위 아래요, 흰 모래 푸른 풀 언덕의 동쪽 서쪽이네. 오대산(五臺山) 옛길에 봄 언제나 있는데, 백제(百濟) 끼친 터엔 나무도 없구나. 취한 뒤 난간에 기대서서 햇빛 바라보니, 이내 몸 수정궁에 있는 듯하네.” 하였다.
○ 장성(張珹)의 시에, “한강루 위에 올라 남풍에 의지하니, 눈 아래 산꽃 몇 점이 붉구나. 빛나는 오색 구름 언제나 북극성을 향하고, 넓은 강물은 절로 동쪽으로 흐르네. 안개 부슬비 자리를 스치니 시를 이루기 어렵고, 풍악이 어울리니 술잔이 잘도 비네. 취해지니 이내 몸 객지에 있는 줄 모르고, 도리어 아침 일찍 대명궁(大明宮)에 찾아뵙길 생각하네.”
○ “한강수에 배 띄우고서, 한강루에 다시 오르네. 강 꽃을 캐고 캐니 어느 새 한줌이 차고, 강 풀이 가느니 객의 수심 절로 나네. 강물 한 방울 길어다 벼루에 부으니, 먹물 구름처럼 넓게 깊게 번득이네. 검은 여의주 빛을 발하며 멀리 번져 나가니, 물 속의 용 두 마리 한낮에 굼틀거리는 듯. 한평생 별 따는 솜씨, 몇 번이나 약양루(岳陽樓)에 올랐던가. 동정호(洞庭湖) 물결 3만 8천 이랑, 푸른 산 한 점이 그 중앙에 있다네. 이 누대 역시 좋은 것이, 임 계신 서울 바라볼 수 있네. 오색 구름 저렇게 아득하니, 여기서 술이나 같이 할까. 취하여 난간 치며 황학에게 물으니, 황학은 보이지 않고 물 위에 원앙새만 나네. 나는 들었노라, 물은 깊어서만 좋지 않고, 누대는 높아서만 좋지 않다는 것을. 바다로 모여 가는 그것이 만고에 흘러 좋은 것이라네. 천하의 근심 먼저 하고 천하의 즐거움 나중한 이 범가(范哥) 늙은이 한 명뿐이랴, 후세의 사람인들 어질고 호방한 이 없을 건가. 짧은 노래 다 부르고 또 길게 휘파람 부니, 누대의 달은 밤에 찬데 강 기러기만 울고 가누나. 거듭 와서 절월(節鉞) 멈추는 일 어느 해쯤 될는지, 성주(聖主)의 은혜 깊어 하늘같이 덮여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누대 앞에 바람 걷히니 흰 구름 퍼지는데, 여러 산의 붉고 푸른 빛 한 자리에서 보게 되네. 백제의 지형은 강물에 와서 끝나고, 오대산 흐르는 샘물 하늘에서 오네. 시를 쓰자니 최랑(崔郞 최호(崔顆))의 글귀 못 따른 것 부끄러우나, 술을 대하여는 이태백의 잔 사양하기 어려워라. 꽃과 새 앞에 가득하고 봄 경치 좋으니, 웃고 이야기하며 더디 돌아간들 어떠리.” 하였다.
○ 봄비 처음 개고 하늘도 높은데, 한강의 새 봄물 푸른 것이 삿대로 한 길일세. 구름 가의 붉은 조서(詔書)는 한 쌍 봉새가 날아오고, 바다 위의 푸른 산은 여섯 자라 타고 있네. 성곽을 둘러싼 갠 빛은 보리 물결 흔들리고, 발 너머 은은한 메아리 소나무 파도 흩어지네. 글하는 이들 모두 모여 수창하매, 시중(詩中)의 제일 호걸은 저버리지 마세.”
○ “만강홍(滿江紅 중국 노래 곡조의 이름) 한강의 풍광(風光) 좋을시고, 사람들 모두 다 해동에서 드물다 하네. 하늘이 준 기이한 경치요, 땅이 나눠 준 신령하고 수려한 기상이네. 금마군(金馬郡) 그 성(城)인들 옛날과 같으리, 신라의 인물들 모두 다 옛 사람 아니어라. 당 나라 도독부(都督府)를 기억하노니, 그 이름 곰나루터[熊津口]에 남기기도 했다네. 갈매기 친해지고 어룡(魚龍)은 소리치며, 산은 그림 같고 강은 술 같네. 노는 사람들 여기 와서 즐기느라, 오래된 것 잊었다네. 아름다운 모임은 등왕각(滕王閣)보다 뛰어나고, 그윽한 풍경은 난정(蘭亭)보다 못지 않네. 내일 아침 한 번 이별하면, 저 구름 바라보며 고개만 돌리리라.”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오랜 비 처음 개니 갠 빛도 좋을시고, 누대 앞의 봄 물결 푸른 구름 뭉쳐 있다. 강 안개 막막하더니 바람 불어 걷히고, 산 안개[山翠] 부슬부슬 새가 가지고 오네. 배는 비단 닻줄 끌며 꽃 핀 나루터로 돌아가고, 술은 은하수 기울이듯 옥잔에 떨어지누나. 즐거운 모임 얼마인데 어찌 이별하기 쉬운가, 풍겨 다시 보려 하여 배회하고 또 배회하네.” 하였다.
○ “봄 강에 밤 비 와서 포도주처럼 넘치니, 새벽에 띄운 작은 배 절반이나 뱃전이 묻히네. 천상의 높은 모습[羽儀] 채색 봉황이 날아들고, 공중에 선 누각 신령한 자리 걸터 앉았네. 주렴을 잠깐 걷으니 산은 그림처럼 펼쳐지고, 채색 붓 한가로이 휘두르니 바다도 물결 움추리네. 웃으며 난간 의지해 마음놓고 한 번 취하니, 원룡(元龍)이 백 척인양 기개 더욱 호탕하여라.” 하였다.
○ 김수온(金守溫)의 시에, “서호(西湖)에 봄이 들어 꽃 늦게 피려는데, 좋은 술 천 병에 고기는 백 그릇[百堆]이나 되네. 한 장의 조서[璽書] 햇빛 따라 내리는데, 아홉 겹 하늘에서 사신이 오셨네. 산하(山河)가 안팎되니 위문후(魏文侯)의 나라인데, 주빈(主賓)이 마음껏 즐기니 이태백의 술잔이로다. 높은 누각에서 잠시 떠나 서로들 읍하고서, 놀잇배 강 위에 띄우고 다시 배회하였어라.”
○ “봄물이 새로 불어 한길[一丈]은 높았는데, 고기 잡는 늙은이 지난 해의 삿대 저어 보네. 연경[燕都]의 저 손님은 두 봉새 왔는데, 용백(龍伯)은 그 누가 큰 자라 낚을 것인가. 작은 나라에 높은 손님 천 년의 경사인데, 흰 갈매기 누런 학 한 강 물결 위에 있네. 좋은 경치 가득 안고 읊조리기 오래하니, 시단(詩壇)의 제일 호걸 그대인가 하노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누대 가운데 아름다운 모임[佳麗] 비단자리 펼쳤는데, 누대 밖의 푸른 산엔 비취빛 쌓이는 듯. 풍월은 옛날 황학 따라 가지 않았고, 연파(煙波)는 지금도 백구(白鷗)를 보내 오누나. 올라와서 주거니 받거니 지은 시 삼천 수요, 빈주(賓主)의 풍류는 백 잔 술이로다. 밤 깊어지기 다시 기다려 옥피리 부니, 달 떠서 두우(斗牛 북두와 견우성) 사이에 밝은데 우리도 함께 배회하네.”
○ “한강의 봄물이 푸른 포도 같은데, 비 와서 새로 불으니 몇 삿대나 더 높아졌나. 한 뱃줄 천천히 당기는데 갈매기 놀라고, 세 산이 높이 솟았는데 금자라 걸터앉았네. 은소반의 가는 회는 붉은 실이 날고, 옥잔의 향기로운 술 푸른 물결 주름지네. 사신의 문장이 자리 가득한 이 놀라게 하는데, 나 같은 사람 지은 시 다시 더 거칠기만 하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청산이 하나하나 비단 병풍 펼쳤는데, 봄물이 새로 불어 흰 물결 넘치네. 오랜 비 우연히도 오늘에야 개니, 하늘이 응당 사신 옴을 위함이리라. 읊다 바라보니 냇가 버들은 황금 실인데, 어사주 백옥 술잔에 취해서 거꾸러지네. 푸른 벽 저 아래로 긴 뱃줄 천천히 끌어 갈 제, 하늘빛 구름 그림자 다 함께 배회하누나.”
○ “금 술단지에 출렁출렁 포도주 넘치는데, 누선(樓船)으로 옮겨 타니 물결이 한 삿대나 높네. 취해가니 한 말 술을 어찌 사양하리, 흥 겨우니 삼산(三山)의 큰 자라 낚으려 하네. 뱃사람 노 저어 안개 낀 물가로 돌아오고, 아이들 그물 끌어 푸른 물결 흥청이네. 십 리 강산을 저멀리 바라보니, 봄빛이 넓고 넓어 호방한 시흥 돕누나.”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누대 앞의 봄물이 거울처럼 열렸는데, 누대 밖의 청산은 푸른 것이 몇 더미냐. 주방[廚子]에서는 어느 새 금과일 보내 왔는데, 어부들 다투어 가며 번득이는 생선 가져 오네. 좋은 풍경 오래 봄은 시구에 의지하고, 정회를 푸는 데는 술잔이 있다네. 석양의 강가 풍경 무한히 좋아, 배 위에서 취하여 또다시 배회하네.” 하였다.
○ “비 온 뒤 저 강물 몇 자나 불었나. 삿대 깊이 들어가는 줄 아침에야 알았네. 인간 세상의 세월 나는 새 같은데, 바다 위의 구름과 안개는 큰 자라 너머에 있네. 봄철이 오니 점점 꽃이 바다 같은데, 잔을 기울이니 술에도 물결이네. 배 가운데서 한없이 담소가 길어지는데, 취중에 시를 지으니 말이 더욱 호방하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우뚝한 한 이층 누대 한강을 의지했는데, 동쪽 나라의 형승(形勝)이 어찌 이리도 좋은가. 갠 날씨 신기루 잇달아 세 섬이 희미하고, 찬 기운 조수 소리 보내 여덟 창에 들어오네. 나계(螺髻)에 구름 걷히니 산이 겹겹이 푸르고, 곤새[鵾 큰 새] 줄이 밤에 울리니 돌 위에 물 흐르네. 높은 누대 오르면 옛부터 시 지었는데, 오늘에사 필력(筆力)이 작대[杠]같지 못함이 부끄럽네.” 하였다.
○ 명(明) 나라 왕창(王敞)의 시에, “끊어진 언덕에서 백 척 누대로 천천히 오르고, 푸른 발 놀잇배로 한강에도 떠 놀았다. 술잔은 폭포 기울이듯 앵무(鸚鵡 술잔 이름)가 날고, 새가 노래 소리 보내니 꾀꼬리 소리를 듣겠네. 소동파[蘇老]의 퉁소 소리 적벽(赤壁)에서 들리고, 안기생(安期生 옛 신선)의 학 수레 단구(丹丘)로 지나가네. 모쪼록 돌을 채찍질하여 동해를 보려 하지 않으나, 운수(雲樹) 저 사이로 십주(十洲)가 희미하게 보이네.”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백 척 높은 누대 푸른 물가 내려다 보는데, 견여(肩輿)로 성을 나가 함께 올라 구경하네. 먼 포구에 노을 밝으니 비단인양 얼기설기, 급한 여울에 석양 비치니 가늘게 금이 부서지네. 관악산이 푸른 빛 보내와서 자리 위에 들어오고, 양화(楊花)가 빛 물결 띄어 성 저쪽에 떨어진다. 함께 노는 여러 재상들 손님 대접 잘도 하네. 배 잇고 술 두루미 옮기니 흥 다시 깊어지누나.” 하였다.
○ “높은 누대 강에 임하여 청계산(淸溪山 과천(果川)에 있음) 마주 앉으니, 이 하루 함께 노는데 술 아니 가져오리. 어부들의 즐거운 마음 드리는 것 보아 알 수 있고, 시인의 호방한 흥은 써 놓은 것에서 볼 수 있다. 횃불이 환하니 돌아가는 길 늦었는데, 밤 피리 저 메아리 여관에 들자 희미해지네. 취하여 누으니 미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여, 바로 독록(獨鹿 술 그릇)으로 가서 선이주[仙梨] 찾아보네.”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큰 밧줄로 배를 끌어 얕은 물가 가르고 나가, 고관들 자리 정하고 거울 속에 앉았네. 노는 고기 물 위에 나오니 옥이 뛰는 듯, 밝은 달[好月] 산에서 엿보니 금이 솟아오르네. 술기운 넘치니 남은 추위 몸에 배어오는데, 횃불 연기 가로지르니 산이 반쯤 그늘지누나. 갠 날 보면 한강수 천 길은 깊은데, 오늘의 즐거운 마음 얼마나 깊을런지.
○ “동쪽으로 나오는 그 동안 많은 산천 지났는데, 가는 곳마다 필연(筆硯)이 소용됐네. 먼 곳 노니니 글 건장해야 하고, 좋은 곳에서 흥 나면 적어 남겨야 하는 법. 짐승 모양 화로에 향내[香煙] 풍기니 옷도 함께 향기롭고, 깊은 대문에 푸른 기운 엉기니 바라보아도 희미하네. 이 세상과 저 영주(瀛洲)는 원래 다른 것, 날아 오르매 교리(交梨 신선이 먹는 과실)를 물을 필요없네.” 하였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소나무가 서리고 굽으며 둘러 그늘져서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왕이 일찍이 남경(南京)에 거둥하다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한다. 본조(本朝 이조) 초기까지 있었다.
○ 고려조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푸른 솔 저 푸른 솔 길가에 났는데, 두어 그루 그늘 서로 이으니 덕있는 이에게 이웃이 있는 듯하네. 큰 줄기 올라가서 서린 모양 용인 듯, 꿈틀꿈틀 달아나고 굽혔다 다시 폈네. 가는 가지 멀리 뻗어 푸른 장막 펼쳤는데, 햇볕을 가로막아 서로 의지했네. 속에는 벽력(霹靂)을 감춘 듯 태음(太陰)을 기르고, 겉 껍질[莓蘢] 벗겨지고 떨어져 쭈글쭈글 비늘 생겼네. 태고 옛적 나고 자라 연대(年代)를 알 수 없는데, 도끼에 찍히지 않고 꺾여서 섶이 되지도 않았네. 심고 자란 것 응당 조화에 의지하였을 터이니, 지키고 보호하는데 지금은 신이 있는 줄 알겠다네. 내 지금 여기 오니 때마침 더운 날인데, 남풍이 낯을 스치고 티끌 불어 날리네. 말 안장에 기대어 맑은 그늘 아래 누우니, 어느새 찬 기운 생겨 온몸에 가득하네. 함께 앉은 나무꾼 4ㆍ5명 있는데, 그 중에는 우스개 소리하고 많이 아는 사람도 있네. 그 사람 하는 말이 먼 옛날 그 언젠가, 임금님 비 피하기 진(秦) 나라 황제 같이 했다네. 그래서 이 나무 봉(封)하여 장군으로 삼고, 지키는 이 대대로 녹봉 받아 임금 은혜 입었다네. 내 이 말 듣고서 근거 없는 일이라 웃었더니, 돌이켜 생각하면 속으로 슬프기도 하구나. 우연히도 저 곳에서 소나기를 만난 탓에, 수목이지만 오히려 특별한 대우 받았네. 그대들 부질없이 맹랑한 말 하지 마소. 이내 몸 여러 대 두고 이 왕조의 신하라네.” 하였다

화양정(華陽亭)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에, “화산(華山)의 동쪽 한수(漢水)의 북쪽에 들이 있는데, 토지가 평평하고 넓으며 길이와 넓이가 10여 리는 된다. 뭇 산이 둘러싸고 내와 못이 둘렀다. 태조께서 한양에 도읍을 정하신 처음, 이곳을 목장(牧場)으로 삼았다. 임자년에 주상전하께서 사복제조 판중추원사(司僕提調判中樞院事) 최윤덕(崔潤德)과 이조 참판 정연(鄭淵) 등을 명하여 정자를 낙천정(樂天亭) 북쪽 언덕에 짓게 하였는데, 주부(主簿) 조순생(趙順生)이 그 일을 모두 주관하고 와서, 그 자세한 것을 나에게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천하의 누대와 정사(亭榭)는 모두 그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정자에만 이름이 없어서 되겠는가 하고 인하여 주서(周書) 중의 말을 화산 남쪽에 돌려보낸다는 뜻을 취하여 ‘화양(華陽)’이라 이름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태조께서 하늘에 응하고 사람에 순하여, 집을 미루어 나라를 삼았으며, 열성조께서 서로 계승하여 무(武)를 쉬고 문을 닦으며, 말을 목장으로 돌려보내고 소를 놓아 먹이니, 그때에 맞게 한 것이다.” 하였다.
○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한가할 제 말이 가는 대로 홍진(紅塵) 밖에 나오니, 저 멀리 들판에 풍경이 새롭네. 하늘에 닿은 먼 산은 푸른 것이 그린 눈썹 같고, 비 온 뒤 방초(芳草)는 푸르름이 이부자리 같네. 꾀꼬리 오르락 내리락 아침 햇볕에 울고, 소와 말 부산하게 사방[四垠]으로 흩어지네. 호탕한 봄바람에 3월도 저무니, 술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경치 구경하세.” 하였다.

낙천정(樂天亭) 살곶이[箭串]에 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에, “낙천정은 우리 주상전하가 때로 구경하고 놀던 곳이다. 전하(태종)께서 왕위에 있은 지 19년 가을 8월에 우리 주상전하께 선위(禪位)하고 다음 농한기를 이용하여 나와서 동교(東郊)에 유람하였다. 한 언덕이 있는데 높은 곳이 불쑥 솟아 형상이 가마 엎은 것 같으니, 대산(臺山)이라 명명하였다. 올라가 사면을 돌아보면 큰 강이 둘러 소(沼)가 되어 푸르게 물결치며 잇따른다. 연이은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가 서로 나타나고 겹겹이 나와서 언덕을 둘러싸고 마주보는데, 형세가 별들이 향하는 것 같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경치 좋은 곳이다.
전하께서 명하여 이궁(離宮)을 언덕 동북쪽 모퉁이에 짓게 하고, 풍우를 가리게 한 다음 드디어 정자를 언덕 위에 짓고, 좌의정 박은(朴誾)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박은이 《주역》 〈계사(繫辭)〉의 ‘낙천(樂天)’이란 두 글자를 취하여 드리니, 대개 전하의 한 일을 총괄하여 이것을 정자 이름에 붙이고, 또 지금의 즐거움을 뜻한 것이다.
신(臣) 계량(季良)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기록하게 하였다. 신 계량이 가만히 생각건대, 하늘이라는 것은 이치 뿐이요, 낙이라는 것은 애써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이치에 맞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개 태극의 진리와 이기(二氣)와 오행(五行)의 정기가 묘하게 합하고 엉기어 사람이 태어나게 되니, 천리가 사람에게 부여된 것은 같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뭇사람들이 태어나매 기품이 박잡하고 물욕이 가리는 것이니, 힘써서 천리를 따르려 하여도 또한 될 수 없거든 하물며 자연히 이치에 맞기를 바라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바탕으로 만물에서 으뜸으로 태어났으며, 청명하신 몸으로 덕성(德性)을 항상 활용하시니, 이래서 그 행하시는 일은 어느 것이나 천리의 유행(流行)이 아님이 없는 것이다. 일찍이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는, 신의모후(神懿母后)가 돌아가심을 슬퍼하여 인사를 모두 물리치고 제릉(齊陵 신의왕후의 능) 곁에 시묘 살았으며, 전 왕조의 말년에 임금은 혼암(昏暗)하고 신하들은 서로 해치며 우리 태조를 모해하여, 화가 매우 급박하였을 때에는, 의를 주창하여 나라를 세우고 태조를 천승(千乘)의 높은 자리에 추대(推戴)하였다. 무인년에 권신(權臣)이 우리 태조의 편치 않음을 틈타서 어린이를 끼고 난을 꾸밀 때에는, 기미를 알아 섬멸하고 제거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히 하였으며, 여론이 전하를 추대하여 세우게 되었지만 상왕(上王 정종(定宗))에게 양보하였으니, 맏이를 높인 것이다.
즉위한 후로는 항상 태조를 조석으로 모시지 못함을 근심하였으며, 병술년(태종 6년)에는 왕위를 사퇴하려 하니, 어버이를 곁에서 모시려는 뜻을 이루려 함이었다. 군신(群臣)이 죽기를 불사하고 고집하고 태조도 힘써 중지시켰다. 그 후 3년 되는 무자(태종 8년)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니,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초상 중에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부묘(祔廟)할 때에는 장마비가 내려서 전하께서 염려하였는데 전날 저녁에 천지가 깨끗이 개었으며, 일을 끝낸 3일 만에 비가 다시 왔으니, 하늘이 전하의 효성을 도와준 것이다. 상왕께 우애와 공경을 다하되 오래도록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은, 서책 중에 실린 옛날 사실에도 일찍이 없는 일이며, 회안군(懷安君)을 석방하고 법으로 다스리지 않으니, 이것은 대개 순임금이 그 아우 상(象)을 살린 일을 따르고, 주공(周公)이 법대로 행한 것을 본받지 않으려 한 것이었다. 왕씨의 후손을 남겨 두어서 편안히 생활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천하와 국가를 공(公)으로 삼는 천지 같은 도량으로서, 곧 탕왕(湯王)이나 무왕(武王)이 혁명하고서도 기(杞) 나라와 송(宋) 나라를 남겨둔 의리이며, 대국을 예절로 섬겨서 두 번이나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았으며, 천자가 매양 전하의 지극한 정성을 칭찬하였다. 또 작은 나라를 사랑하되 인(仁)으로 하니 50년 간이나 큰 해가 되던 왜구[海寇]가 이마를 조아리고 예물을 바치며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또 궁정에 계실 때는 좋은 얼굴로 화목하고, 제사를 받들 때는 엄숙하게 공경을 다하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며, 간하는 말을 좇고 학문을 좋아하며, 검박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되,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고 백성의 고통을 불쌍히 여겼다. 무릇 심신에 있어 행사에 나타나는 것이 순수하여 한결같이 이치를 따르니, 역시 노력하여서 된 것이 아니요, 대개 우리 전하의 천성이 그러한 것이었다. 왕위에 계신 20년 간에 사방이 한결같이 평안하고 창고가 부유하고 충실하며, 백성은 전란을 당하지 않고 하늘은 감로(甘露)를 내려서 지극히 태평스러운 것이 전고에도 보기 드문 일이었으니,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천리를 따르면 자연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선위 하실 때에는 춘추 아직 늘그막에 이르지 않았고, 건강이 일을 폐지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으며, 또 형세에 의하여 부득이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소 신하들이 궁정에 서서 통곡한 것이 수일간이었지만, 마침내 마음을 돌리는 효과를 보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왕위를 사양하기를 헌신짝 벗어 버리듯 하니, 역시 고금 제왕(帝王)에 아직 있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총명ㆍ효제하고 온인(溫仁)ㆍ근검하여 모든 일에 명을 받아 부탁하신 중임을 이어 받드니, 전하의 근심을 덜 만하며, 낙천정을 짓게 된 까닭이다.
신이 이 정자의 경치를 보니, 봄바람이 화기를 불어오면 아름다운 초목이 다투어 자라서 붉고 푸른 색이 깔리고 덮이며, 여름철 복중이 되어 대지가 화롯불처럼 뜨거울 때는 맑은 바람이 자리에 가득 차며, 가을이 강산에 찾아오면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 좌우에 비치고 어울리며, 퍼붓던 눈이 처음으로 개는데, 난간에 의지하여 바라보면 천 리가 한 빛이다. 우리 전하께서 상왕(정종(定宗))을 모시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서로 부탁하는데, 주상전하께서 그 사이에 주선하여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며 아버지는 사랑하고 아들은 효도하여 즐거워하니,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보다 더할 것이 있겠는가.
대개 우리 주상전하께서 즐거워하는 것은 천리(天理)요, 즐거워하지 않는 것은 천위(天位)니, 저 순(舜)이나 우(禹)가 거기에 관계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 관한 큰 계책이야 어찌 잠시인들 마음에 잊으랴. 그리고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 뛰논다는 것은 도의 큰 것이요, 《주역》 대축괘(大畜卦)에서 말한 산이나 감괘(坎卦)에서 말한 물은, 어진 이와 지혜 있는 이가 좋아하는 바이며, 하늘이 위에서 운행하는 것은 쉼 없는 기상이 나타남이고, 대지가 아래에서 고요한 것은 후덕한 형상이 현저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전하께서는 화평한 모습으로 등람하여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잘 합하여 스스로 그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이것을 어찌 글이나 말로 그 만분의 1이나 형용할 수 있겠는가.
신이 글로 쓰는 것은 전하께서 천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여러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인데, 이러한 행사의 사실에 드러나는 것은 신하와 백성들도 함께 아는 것이다. 그러면 그 천성의 참됨을 보고 느껴 흥기하여 각기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여기고, 각기 그 어른을 어른으로 여겨서 인륜의 도를 다하여, 전하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은 풍속 교화의 아름다움이 저 우순(虞舜)이나 주(周) 나라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왕업(王業)의 영원함이 곧 높은 산 깊은 강물과 더불어 함께 하여 오래도록 다함이 없을 것이니, 아! 성대하도다.” 하였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의 하류 백사정(白沙汀)에 있는데, 세조가 자주 거둥하여서 군대를 사열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 지었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정자는 원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희우정(喜雨亭)이었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하였는데, 매해 농사를 살필 때 및 수전 연습[水戰]을 볼 때에 항상 이 정자에 거둥한다. 변계량(卞季良)의 〈희우정기(喜雨亭記)〉에, “용산의 입석(立石) 마을은 세상에서 놀기 좋은 강산이라고 말한다. 도성에서 겨우 몇 리쯤 되는데, 효령대군이 별장을 두었던 곳이다. 뒤에 한 언덕이 있으니 높고 꿈틀꿈틀하여 형상이 용이 서린 것 같은데, 그 위에 정자를 지으니 휴식하는 장소로 삼기 위하여서이다. 군후(君侯)가 계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주상전하께서 일찍 수레를 타고 농사일을 순시하며, 이 정자에 올라 신에게 주식(酒食)과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 그때 한창 파종할 철에 비가 흡족하지 못하였는데, 술을 반쯤 들자 비가 와서 종일토록 좍좍 내리니, 정자 이름을 희우(喜雨)라고 하사하였다. 신이 감격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우리 성상께서 하사한 것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신 부제학 장(檣)으로 하여금 희우정이라는 세 글자를 크게 쓰게 하여 집 벽에 걸었는데, 그대가 글을 지어 기록하라.’ 하였다.
하루는 군후를 모시고 가서 오르니, 정자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데, 화악(華岳 백악산)이 뒤를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 흐르며, 서남쪽의 여러 산이 창망(蒼茫)하고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안개와 물 밖에 저 멀리 보일락말락하였다. 굽어보면 고기와 새우를 또렷이 셀 수 있는데, 바람 실은 돛과 모래 위에 새들은 바로 자리 아래서 왕래하며, 천여 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잔과 노반에 어른거린다. 여기에 풍악 소리 요란하고 맑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니, 황홀하기가 날개를 끼고 푸른 바다에 오르는 것 같으며, 호연하기가 바람을 모아 신선 경지에 노는 것 같아서, 눈이 아찔하고 모발이 곤두서는데 모든 생각 잊고 말없이 오래도록 있다가 돌아왔다.
일찍이 생각건대 사람과 천지는 원래 일체(一體)이다. 그러기 때문에 말하기를, ‘중(中)과 화(和)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될 것이다.’ 하였으니, 한 마디 말 한 가지 생각의 미세한 데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사람이 서로 느끼는 기틀이 분명하여 속일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덕은 대소가 있고 지위는 고하가 있으며, 감통(感通)하는 효험의 넓고 좁음과 더디고 빠름이 따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감통의 묘함을 다할 수 있는 것은 제왕의 직책이요 성인(聖人)의 사업인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세상에 다시 없는 자질로 성인의 학문을 계속하여 밝혀서, 중과 화의 덕을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하는 효험을 극진히 한 것이니, 이야말로 넓고 커서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이 일은 특히 그 중에 한가지를 나타낸 것뿐이다.
대개 우리 전하의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은 안에 깊이 쌓여 있는 것으로서, 하루 아침 교외에 나가서 농사짓는 것을 보고 비가 오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 생각이 일어나서 그칠 줄을 모르게 된 것이니, 하늘의 감응이 시각을 어기지 않음도 여기서 온 것이다. 전하의 지극한 어짊과 후한 은택은 바로 이 비와 함께 흘러 퍼지고 널리 넘쳐서 천지간에 충만하여 근심하던 자가 기뻐하고 병든 자가 낫는 것이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이르기까지 어찌 그 생생하는 본 성품을 이루지 못함이 있겠는가. 희우로 정자를 이름 지은 것은 하늘이 비를 내려줌을 감사하여 잊지 않으려 하는 까닭이다.
아! 저 진(秦) 나라 한(漢) 나라 이후로 중화의 도에 병든 자가 많아서 민물(民物)이 시들고 천지가 거칠어졌으니, 슬퍼할 만하도다. 지금 세상에 태어나서 은택을 입는 자는 금수나 초목의 미물(微物)까지도 어찌 영광이요 다행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푸른 띠를 띠고 붉은 자락을 끌면서 조정 위에 몸을 두어서 특별히 돌보아 주심을 받은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참으로 천 년에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인 것이다. 군후는 또 왕실의 지친(至親)으로 높은 지위와 부귀하기가 비할 데 없고 깊이 전하의 우애를 받음에 있어서이겠는가. 더구나 전하께서 제후의 자리에 계시면서 군후에게 이 정자에서 술을 주어 조용히 주고 받기를 잠저(潛邸)에 계실 때나 다름없이 하니, 군후의 영광이야말로 붓이나 글로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 전하의 우애하는 덕이 천성에 근거하고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으로, 대개 자신이 억조 신민의 주인이 됨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 아! 지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후는 겸공(謙恭)하고 온후하여 부귀한 자리에 잘 거처하면서 거의 교만하고 자랑하는 기운이 없으니, 종실(宗室)에 모범이 되고 왕가(王家)를 호위하여 전하의 우애가 이렇게 지극하게 되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명승은 이것이 천지 개벽 때부터 있은 것인데, 어찌 오랜 동안을 감추어져 있다가 오늘에 와서야 알려지고 빛이 나는 것인가. 이것은 군후가 몸은 비록 명예와 부귀 중에 처해 있지만, 그 높이 세속에서 벗어난 생각이 일찍이 구학(丘壑)과 강호(江湖)의 사이를 왕래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천지의 주인이 이것을 주어서 위로하는 것이다.
산천 풍경의 아름다운 것으로 말한다면 아침 저녁과 4계절의 변화하는 모양이 병든 몸이기는 하지만 다른 날 다시 군후를 모시고 이 정자에 놀면서도 군후를 위하여 적을 수 있겠기에, 여기서는 조잡한 글로 군후께서 비루하게 여기지 않음에 대해 우러러 보답한다. 다만, 성상께서 정자에 이름을 붙인 본의에 대하여는 발명한 것이 없는데, 이것은 소라 껍데기로 바닷물을 헤아리고 털끝으로 천지를 그리려 하는 일과 같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문자를 빙자하여 성명을 그 사이에 붙이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신을 알아줌이 아니겠는가. 반딧불의 작은 불빛이 해나 달의 빛을 의지하여 오래 있고 초목의 미미한 것이 천지에 붙어서 썩지 않음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드디어 흔연히 글을 쓰고 또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날아갈 듯한 새 정자, 붕새처럼 높이 앉았네. 누가 지었나, 어진 군후라. 임금이 서교(西郊)에 나가시니, 놀려함도 아니요 사냥함도 아니었네. 백성들 바야흐로 파종할새 밭에 가뭄 들어 염려하였네. 우리 임금 정자에 계시니, 때마침 단비 잘도 내렸네. 우리 임금 군후(君侯)에게 잔치 베푸니, 북소리도 은은하네. 정자(亭子) 이름 하사하니, 그 영광 전에 없던 일. 군후 머리 조아리며, 성덕을 하늘처럼 여기네. 군후 머리 조아리며 우리 임금 만년 살기 바라네. 문인에게 부탁하여, 영구히 전하려 하였네. 신이 절하고 글 지으니, 여러 선비들보다 앞섰네. 화악(華嶽)을 쳐다보니, 돌에 새길 만하네. 이 칭송하는 글 새겨, 천고에 밝게 전하리라.” 하였다.
○ 예겸(倪謙)의 시에, “푸른 솔 깊은 곳에 정자 그윽한데, 배 대고 올라오니 취한 눈 밝아지네. 나루터의 풍파는 언제나 진정되려나, 바다 어귀의 집 같은 저 물결 언제 거두려나. 일만 집 촌락은 남쪽 포구에 잇닿았고, 일백 치첩(雉堞) 산성은 강 위에 버티고 있네. 이 경치에 넓은 회포 마음 놓고 한 번 취하리니, 덩굴 사이 밝은 달 물가에 비쳐도 좋으리라.” 하였다.
○ 동월(董越)의 시에, “저물녘에 높은 누대에 오르니, 좋은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언덕 위의 새 버들잎 강 나무와 함께 그늘지고, 물가 안개 가볍게 날아 들 구름 따라 뜨네. 난간에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잡으니 이 밤의 놀이 참으로 좋구나. 돌아오는 길 도성 불빛이 점점 가까운데, 바다 저 동쪽엔 은빛 달 떠오르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응당 응거(應璩)ㆍ유정(劉楨)과 같이 즐거운 놀이 마련하고, 윤건(綸巾)과 우선(羽扇)으로 고운 물가 내려다보네. 유리빛 그림자 움직이니, 고기와 용이 희롱하고, 논이 비었으니 기러기와 따오기 도모하네. 두 언덕의 행인들은 나루터 가느라 바쁘고, 몇 척의 상선(商船)은 가을 바다에 떠 있네. 달 밝으면 소상강 신(神)의 비파 들을 것 같으니, 술집에 막수(莫愁 기생 이름) 있는 것 무엇이 부러우리.” 하였다.
○ “자라 머리에 집을 지으니 먼 형승(形勝) 들어오는데, 창에서 보이는 것 새 병풍 둘러친 듯 하여라. 난간 앞에 바다로 가는 물 양화(楊花)의 흰 물결인데, 성 밖의 하늘에 닿은 듯 모악(母嶽)의 푸른 봉우리라. 작은 저자에 사람 돌아가니 채색 배 매여 있고, 먼 하늘에서 학 내려와 굽은 물가에서 퍼덕이네. 푸른 일산(임금의 일산) 옛날에 농사일 구경하였는데, 여기가 서교(西郊)의 희우정 그곳이라네.”
○ “천지가 넓고 넓어 아득히 끝이 없는데, 한 조각 누대에 취한 늙은이 누웠네. 지경이 봉성(鳳城 서울)에 연접하였는데 연수(煙樹)가 합하였고, 강이 큰 구렁으로 들어가 바닷길 통하네. 고기 잡는 노래 처량하니 귀한 손님 슬퍼하고, 임금 글씨 휘황하니 공장이들 수고했네, 어디선가 한가한 사람 노 저어 오니, 악군(鄂君)이 향기로운 이불 달밤에 펼치네.”
○ “이내 몸 동정호(洞庭湖) 사이에서, 천원(川原)의 좋은 풍경 구경하네, 거마는 옛 나루터에 헤매고, 높이 뜬 따오기 먼 산에 닿았네. 풍경은 봄ㆍ가을이 다르고, 하늘 모습 밤낮으로 좋아라. 한공(韓公)은 옹졸한 사람, 온수(溫水)에서 속절없이 낚시만 하네.”
○ “성문 밖 지척인데, 일 없이 놀려는 것 아니네. 강물은 참으로 도도히 흐르고, 인사는 진실로 아득하구나. 날이 맑으니 소ㆍ양도 저녁 알고, 서리 내리니 초목이 가을 되었네. 굽은 난간에서 풍악 소리 나더니, 갈대꽃 물가로 퍼져가네.”
○ “서호의 유람하던 곳, 형승(形勝)은 이 정자가 제일이네. 구름은 사곡(賜谷)을 이웃했고, 풍류는 영화(永和)와 같네. 도성 사람들 절경이라 말하는데, 왕자가 별장 지었네. 이 세상의 그림 그리는 이, 저 모습 그릴 수 있는가.” 하였다.

영복정(榮福亭) 서강(西江) 북쪽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거둥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란 두 글자를 써서 정자의 편액으로 하고 이어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 한 세상에 영화롭고 백 년에 복 받는다는 뜻)이란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해석하여 하사하였다.
풍월정(風月亭)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안국방(安國坊) 집 서쪽 동산에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왕림하여 ‘풍월(風月)’이란 두 글자를 하사하여 편액으로 하게 하고, 시 여섯 수를 지어 문신들에게 명하여 화답하게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문물이 태평한 세월 백 년 가운데, 공후(公侯)의 집 연못 정자에 또 봄바람 불어오네. 임금 글 하사하니 성신(星辰)인양 빛나고, 어사주 자주 내리니 우로(雨露)인양 풍성하네. 작은 물결 무늬져 오리처럼 푸르렀고, 온갖 꽃 점점이 단장하여 원숭이 같이 붉게 물들었네. 누대 앞 꽃봉오리도 은혜 받아 취한 것, 조회에서 물러나 소나무와 대나무의 주인옹(主人翁) 되네.” 하였다.
○ “열두 난간이 푸른 못 대하였는데, 높이 달린 금빛 편액에서 용의 광채 움직이네.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긴 천 년 승지(勝地)에, 버들 푸르고 꽃 피니 온갖 봄빛 향기롭네. 염막(簾幕)에 바람 풍기니 더위란 간 곳 없고, 지대(地臺)에 달 뜨니 은근히 서늘한 기운 생기네. 동평왕(東平王)의 선을 즐기는 일 어느 누가 허물 하리, 보잘것없는 식객 둔 맹상군(孟嘗君)을 어찌 일찍이 헤아리리요.”
○ “유리 같은 맑은 물 정자를 서늘케 하는데, 햇빛 반짝반짝 푸른 마름 뒤척이네. 쇠채로 줄을 골라서 비단 비파 울리고, 금구(金龜)로 술을 바꾸어 은병으로 보내오네. 밤 기운 서늘하니 연꽃에 달 비쳐 차고, 하늘이 맑으니 계수나무에 바람 풍겨 향기롭네. 일대의 이름난 왕자[維城] 그 모습 옥 같은데, 하간(河澗)의 예약으로 길이길이 강녕(康寧)을 누리길.”
○ “못 위에 줄줄이 잔무늬 물결지는데, 푸른 하늘 물 같고 구름 한 점 없네. 금 술 두루미 가는 그림자는 꽃 사이로 보이고, 옥 바둑알 울리는 소리 대 숲 너머로 들려오네. 동산 안 풍류 소리에 봄놀이 흥겹고, 귀한 손님 패물에 달빛이 아롱지네. 눈썹 사이엔 누른 햇무리 보이기도 하는데, 좋은 잔치 새로 베푸니 뺨 먼저 붉어지네.”
○ “당당한 저 시절 가고 찾고 하는 동안, 아름다운 경치 좋은 날에 구경할 마음 다시 생기네. 좋은 자리 골라 잡아 자리 펴니 꽃 기운 풍기고, 서늘한데 찾아내어 자리 옮기면 버들 그늘이 깊네. 악보 새로 편성하니 청탁음(淸濁音)이 나뉘는데, 전에 사들인 도서(圖書)엔 고금(古今) 일이 섞여 있네. 맑은 흥은 풍류가 담박(淡泊)을 겸하였으니, 작은 난간에 달 뜨면 외로운 술잔 벗 삼으리.”
○ “봄을 감춘 깊은 담에 따뜻한 연기 일어나니, 중국 사신이 하사품 가져 온 것 절하고 보내네. 비단 안장 철총(鐵驄)말은 버들 사이로 지나가고, 금방울 고운 비둘기는 꽃 흔들며 우네. 구중 궁궐 은혜도 중한데, 천상의 성신(星辰)은 지척간에 벌여 있다. 진중(珍重)한 성은(聖恩)에 응당 감격하여, 남산같이 만수무강하기를 마음속 깊이 축원하노라.”

『신증』 황화정(皇華亭) 두뭇개[豆毛浦] 북쪽 언덕 위에 있다. 연산군(燕山君)이 이 정자를 지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지금 임금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다.
침류당(枕流堂) 한강 언덕에 있는데 경력(經歷)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 강혼(姜渾)의 시에, “인간 세상에 크게 숨은 한강 남쪽 늙은이, 조용히 거처하는 곳 성 밖의 침류당이네. 강산은 길이 돌아오지 않는 손을 짝하는데, 풍월은 참으로 무진장하구나. 솔 언덕에 새벽 일찍 학 앉은 나무 보겠고, 단풍 숲엔 저녁 늦게 낚시 배 매어두네. 오직 한 번 취한 그것으로 조물주에 보답하니, 풍당(馮唐)의 늙은 낭관 뉘라서 부러워하리.”
○ “한강 남쪽의 형승은 동방에서 이름났는데, 낚시질하는 저 늙은이 그 옆에 살며 주인 노릇하네. 강에 비 내릴 때는 붉은 잉어 뛰놀고, 산바람 지나면 흰 마름이 향기롭네. 문에는 속객(俗客) 없으니 그윽한 지경 이루었고, 술이 신이(神異)한 공 있어 취한 마을 들어가게 하네. 조물주 아마도 이 늙은이 편안케 하리니, 귀밑털 흩날리며 창랑에 노닌들 어떠리.”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한강 저 강 위 제천정(濟川亭) 곁에, 그대가 지은 집 이 당(堂) 있네. 갈매기ㆍ해오라기 시름 잊고 함께 이웃하는데, 구름ㆍ노을 서로 벗하여 같이 숨어 사노매라. 동ㆍ서문 밖엔 사람들 길 다투는데, 서쪽 변방 산 앞에 손이 배 띄우네. 헛된 명성에 분주하는 것 무엇에 소용되리, 백 년의 생애를 늙은 어부와 함께 하리라.” 하였다.
○ 남곤(南袞)의 시에, “그대 경치 좋은 곳 찾아 푸른 강가 정했는데, 좋은 집 새로 지으니 조망(眺望)이 탁 틔었다. 벌린 멧부리 평평한 모래사장은 진정 생동하는 그림인데, 물오리 나는 해오라기 이 역시 풍류스럽도다. 주인은 높이 누웠으니 실컷도록 볼 것이고, 지나는 손 와서 놀 제 말이 그치지 않네. 언제나 벼슬 버리고 그대 따라가서, 반 삿대 맑은 강물에 가벼운 배나 띄워 볼까.” 하였다.

【역원】 노원역(盧原驛) 흥인문(興仁門) 밖 4리 지점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崇禮門) 밖 3리에 있다. 이상의 두 역은 바로 병조(兵曹)에 예속되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기로(耆老)들이 여기서 모여 술 마셨으며, 조말생(趙末生)이 서문(序文)을 지었다. 홍제원(洪濟院) 사현(沙峴) 북쪽에 있다. 누대가 있는데, 중국 사신이 옷을 고쳐 입던 곳이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木覓山 남산) 남쪽에 있다. 전관원(箭串院) 살곶이 다리 서북쪽에 있다.
【교량】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대(仰釜日晷臺)가 있다.
○ 김돈(金暾)의 명(銘)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형상이 가마솥 같다. 바르게 둥근 테를 설치하였는데, 자(子)와 오(午)가 마주 선 것이다. 공간이 꺾인 데를 따라 돌아오니, 분각(分刻)을 기록한 것이다. 도수(度數)를 안에 새겼는데, 주천(周天)을 절반한 것이다. 신(神)의 몸을 그렸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이다. 각(刻)과 분(分)이 소상한데, 햇빛에 비친 것이다. 길가에 설치함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하였다.

대광통교(大廣通橋)ㆍ소광통교(小廣通橋) 모두 종루(鍾樓)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종루 동쪽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통운교 동쪽에 있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다. 장통교(長通橋) 광제교 동쪽에 있다. 수표교(水標橋)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척촌(尺村)의 수를 새겼는데, 빗물이 나면 거기에 의하여 깊고 얕음을 안다. 신교(新橋) 수표교 동쪽에 있다. 영풍교(永豐橋) 신교 동쪽에 있다. 대평교(大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磐橋) 살곶이에 있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洪濟院) 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 서쪽 시가이다.
【불우】 흥천사(興天寺)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있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조 6년)에 우리 태조께서 명하여 신덕왕후(神德王后)를 정릉(貞陵)에 장사지내고 절을 그 동쪽에 지으니, 선종(禪宗 참선을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의 절이 되었다. 권근(權近)의 기문(記文)이 있다. 후에 능은 다른 곳으로 옮기고 절은 그대로 두었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에, “성신(聖神)하신 우리 임금, 일찍부터 불법(佛法)을 받들었네. 손으로 금륜(金輪)을 잡고, 하늘 받들어 정치하셨네. 근엄하고 조심하여, 잠잘 겨를도 없으셨네. 신인(神人)이 협력하고 화합하여, 영험ㆍ은혜 함께 이르렀네. 크게 깨달음 있어, 부처 인연 널리 퍼졌네, 사리(舍利) 분신(分身) 설치하니, 희한한 사실 나타났네. 세상 이목 경동(驚動)하고, 천지에 광채 빛나네. 신령한 상서 진동하니, 억천 겁에 없는 일이네. 임금 마음 기뻐하사, 큰 맹세로 발원하였네. 높은 화상[睟容] 그려 모시고, 불경 뜻 풀이하셨네. 열성조에 복 주시고, 만백성에 미쳤네. 국사 사업 영원하여, 억만 년 가리라. 부처님의 도가 넓어서, 막힌 것 모두 뽑아주네. 우리 임금 본받으사, 큰 자비(慈悲)로 널리 구제하네. 금을 부어 종 만드니, 일체 중생 깨우쳐 주려함일세. 고생 멈추고 혼미한 것 깨우침이, 오고 오는 영원한 세상까지.” 하였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 교종(敎宗 교리를 위주로 하는 불교의 종파)이다.
○ 권근(權近)의 〈덕안전기(德安殿記)〉에 “건문(建文) 3년(태종 1년)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이 명하여 터를 예전 사시던 집 동쪽에 정하고, 따로 이 새집을 짓게 하였다.
가을에 공사가 끝나니 신 근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고려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그 사가(私家)를 광명(廣明)ㆍ봉선(奉先) 두 절로 만들었으니 나라를 이롭게 하려 함이었다. 내가 부덕한 몸으로 국가를 대신 통치하게 되어 전대(前代)의 일을 생각하여 장차 이 집으로 절을 만들어서 영원히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는 장소를 삼으려 하니, 위로는 선조(先祖)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 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을 그지없도록 전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정전에는 석가모니의 출산(出山)하는 그림을 걸고, 또 북쪽 문미에는 그 위에 시렁을 만들어 가운데는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한 부를 봉안하고 동쪽에는 새로 새긴 대자능엄경(大字楞嚴經) 판본을 두며, 서쪽에는 새로 새긴 수륙의문(水陸儀文) 판본을 간직하였다. 좌우로 곁채를 지어 참선하고 강론하기에 편리하게 하며 곁에 작은 집을 지으니 네모진 못을 내려다 보게 되고 주방ㆍ곳간ㆍ문간ㆍ행랑 등이 모두 제자리에 놓여졌다. 공(功)은 금장식[側金]보다 못하지만 발원은 온 누리[轉輪]에 두루하여 모르는 가운데 보탬이 되고 분명하게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은택을 한정 없이 펴고 국가를 무궁하게 전하며 마침내는 티끌 세상을 벗어나고 바른 깨달음[正覺]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 소원이다. 그대가 기문을 지어 후세에 전하여 만세의 자손들로 하여금 지켜서 변함이 없게 하라.’ 하셨다. 그러므로 신 근이 물러나서 명을 받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삼가 적는다.” 하였다.
○ 서거정의 〈연당시(蓮塘詩)〉에, “작은 목 찰랑찰랑 잔 물결 푸른데, 연꽃 새로 피어 깨끗도 하구나. 천손(天孫)이 운금(雲錦) 베틀에서 짜낸 듯, 붉고 붉고 희고 흰 것 서로 비쳐 빛나네. 깨끗하고 높은 모습 진흙의 더러움 받지 않으니, 좋은 꽃들 마냥 풍류롭고 아름답다. 백발의 세속 늙으니 강남(江南)을 꿈꾸다가, 여기서 언뜻 이 꽃 보고 맑은 흥에 취하였네. 향기로운 바람 불고 불어 향기로운 안개 젖었는데, 난간을 의지한 저문 날에 두 소매도 젖었어라. 내 평생 꽃과 운치 죽도록 좋아하여, 사가(四佳)와 인연을 맺은 지 어느새 10년이라네. 서로 만나매 상긋 웃으며 친구라 이름 부르니, 내가 꽃을 저버리지 않는데 꽃 어찌 나를 저버리리. 산중의 새로 판 못이 독보다 작은데, 화신(花神)이 벌써 신령한 종자 옮겨주기 허락했네. 내년 5월에 저 꽃들 만발하면, 벽통(碧筒)에 술 따라 3백 잔 마셔보려네. 그때 그대 술병 가지고 한 번 찾아오면, 노래 부르며 두 다리로 뱃전 두드려 보세나.” 하였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仁王山)에 있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曹溪宗) 본사(本社)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公廨]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는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한 구비 임천(林泉)이 좋은데, 천 그루 수목도 맑구나. 끊어진 암벽(巖壁)에 이끼 끼어 푸르고, 그윽한 시내엔 절로 난 꽃 환하여라. 겹겹의 봉우리에 구름 엉겨 그림자 지고, 절반쯤 저 고개 위에 소나무 서서 소리나네. 세상 공명 꿈인양 생각 없는데, 게으른 습성 이래서 이뤄졌네.” 하였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는데 세조조에 지었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다. 신라가 황산벌에서 백제 군사와 더불어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ㆍ파랑(罷郞)이 진중에서 죽으니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지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시냇물 끊어졌는데 층층이 얼음만 쌓이고, 바람소리 요란하니 일만 구멍 울리네. 산 모습 겨울 되자 더 여위고, 눈빛은 밤에도 밝구나. 외로운 탑 달빛에 그림자 지고, 성긴 종소리 구름 밖에서 들리네. 분향하자 선실(禪室)도 따스한데, 단정하게 앉으니 마음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 “범궁(梵宮)이 계곡에 빛나는데, 목탁소리 공중에서 높이 들리네. 탑[榻]을 둘러 향연(香煙)이 푸르고, 창에 비쳐 햇빛 밝다. 눈 쌓여도 소나무 절개 안 변하고, 얼음이 합하니 물은 소리 없네. 제호(醍醐) 맛 하도 좋아서, 입안[齒頰] 절로 맑아지네.” 하였다.

연굴(演窟)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三角山)에 있다.
○ 고려조 현종(顯宗) 경술년 난리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이 절로 옮겼다가, 7년 병진에 현릉(顯陵)으로 환장(還葬)하였으며, 9년에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다시 여기에 이안(移安)하였다가, 10년에 다시 현릉으로 모셨다.

석적사(石積寺) 삼각산에 있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자현(李資玄)이 춘천(春川) 청평산(淸平山)에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남경(南京 지금 서울)에 순행하여 그 아우 자덕(資德)을 보내어 행재(行在)에 나오게 하여, 청량사에 머물게 하였다. 일찍이 불러 보고 양성(養性)하는 요결(要訣)을 물었는데, 심요(心要) 한 편을 드리니 왕이 감탄 칭찬하며 대우가 매우 후하였다.

중흥사(重興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중 보우(普愚)가 일찍이 절 동쪽 봉우리에 집 짓고 살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하고, 영가체(永嘉體)를 모방하여 노래 한 편을 지었다. 보우가 죽자 이색(李穡)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오(李䫨)의 중수기에 이런 말이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의 낭적사(狼跡寺)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 남쪽에 좋은 자리를 정하여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쪼아 형상을 그리니 대사의 어진 모습이 더욱 우리나라에 비쳤다. 국가에서 천지의 재변과 수재ㆍ한재의 재난이 있으면 기도를 드려 물리치게 하였는데, 언제나 즉석에서 영험이 있었다.” 하였다.
○ 고려조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구불구불한 돌다리에 구름을 밟고 올라가니, 좋은 집 높이 있어 조화의 고장 같아라. 가을 이슬 가늘게 떨어지니 천 리 안계(眼界) 상쾌하고, 석양이 멀리 잠기니 저 강물 밝게 빛이 난다. 공중에 오락가락 가는 아지랑이 향불 연기[香穗]에 잇닿았고, 골짜기에서 우는 한가한 새 소리 경뇌 소리 대신하네. 그보다 부러운 일은 고승(高僧)의 마음, 인간 세상의 명리(名利)란 도무지 마음에 없다네.” 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높은 바위 산길은 험한데, 지팡이 짚고 또 덩굴 더위잡네. 처마 가엔 가던 구름 머물고, 창 앞엔 쏟아지는 폭포 많을세라. 차를 끓이니 병에서 가는 소리나고, 물을 길으니 우물에 작은 물결지네. 두어 명 고승(高僧) 있어, 관공(觀公)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네.” 하였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승가의 법당 높은 데 의지했는데, 예전 놀던 일 계산하니 오랜 세월 지났네. 어느 날 또다시 그 선탑(禪榻) 가에서, 등잔불 돋우고 조용히 앉아 찬 밤을 지내 볼꼬.” 하였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의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다.

문수사(文殊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 이장용(李藏用)의 시에, “성 남쪽 10리에 평평한 모래 희기도 한데, 성 북쪽엔 두어 줄기 중첩된 봉우리 푸르구나. 늙은 원님 거칠고 게을러[疏慵] 공사 일찍 파하고, 마음대로 나가 놀며 그윽한 자취 찾네. 양주(楊州) 하늘에 학을 타고 날기도 하는데, 가다가는 나귀 타고 화산(華山) 길을 지나기도 한다네. 벼슬길 그만두려 하나 어리석어 어찌 하리, 좋은 일 가시기 쉬우니 더구나 애석하도다. 누른 소매 호통치며 인도하나 너무나 속되고, 반가운 눈빛으로 대하니 높은 격조 있는 듯하여라. 구불구불한 비탈길 더위잡고 올라가니, 으슥한 수풀 고개 차츰 막혀지네. 절벽 저 골짜기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한데, 높은 산마루에 올라가니 더욱더 움추려지도다. 긴 해는 높은 봉우리에서 겨우 두어 길인데, 구름다리 공중에 건너질러 몇 천 자나 되나. 나는 새 까마득 초(楚) 나라 하늘에 닿았는 듯, 넓은 들 분명하여 한강의 그림이네. 안개 끼지 않은 저 서쪽에 신선 마을 보이는데, 큰 강물 남쪽은 나루터로 통해 있다. 한 번 돌아 옮겨 서서 혼자서 탄식하노니, 팔방 잠시간에 둘러 볼 수 있는 듯하여라. 매달린 돌층계 들죽날쭉 90층 되는데, 옛날의 그 자취 어슴푸레 오르내린 신 자국이런가. 기이하다 세상엔 없는 청련궁(靑蓮宮)인데, 크게 슬기로운 진인(眞人)의 집이 여기라네. 석굴(石窟)이 크게 열렸는데 돌이끼 아롱지고, 수풀 속의 감실[林龕] 빛나는데 단청이 눈부시네. 그린 모습 완연히 복성(福城) 동쪽 같은데, 보배로운 앉음 금사자 등에 높이 있다. 바라보면 길한 지역 장자(長者)의 거처인데, 법계(法界)의 현관(玄關 불법으로 들어가는 입구) 열려 있는 줄 뉘라서 알았으리. 큰 자비는 분명 세상 번뇌 제거하는데, 한 움큼 샘물 흘러 내려 영액(靈液)이 피어 있다. 노는 사람 천룡(天龍)의 꾸지람 혹시라도 두려워서, 마실까 주문 외며 물그릇 한 번 던져 본다네. 연하(煙霞) 그림자 속에 외로운 탑이 푸른데, 종소리ㆍ불경 소리에 등잔불 밝게 비치네. 의연한 좋은 모임 보광(普光)을 옮기니, 응당 묘한 공양 있어 향적(香積)으로 오리라. 옛날 선왕이 어향(御香)을 올렸다는데, 지금도 중국 사신 와서 종사(宗社 나라의 종묘와 사직단)의 안녕 기원한다네. 가을 풍경 찾아내 마침 찾아드니, 중 있어 만류하며 저녁 산색(山色) 구경하라네. 처마 의지한 여러 산봉우리 옥인 양 높이 서 있고, 난간에 닿아 있는 먼 수풀들 비단같이 펼쳐 있네. 채소 음식 즐거이 들며 맑은 향기 배불리고, 다시금 부들 자리 빌려 앉아 편한 것 찾았노라. 이야기가 길어지니 조각달 깊은 문에 들어오고, 밤이 오래니 은은한 바람 잣나무를 울어 스치네. 하도 좋을사, 선탑(禪榻)의 고요하고 적막함이여, 불현듯 웃음 나네. 인생들 무어라 허덕이나. 쉽사리 의관 벗지 못함은, 혹시라도 죽백(竹帛)에 공명 정하려는 것이어라. 맑은 잠 왼통 동자의 깨우는 대로 맡기니, 붉으스레 아침 해가 떠오르네. 천태산[台崖]에 손 흔들어 부르는 사람 따라가려 하나, 여산[盧嶽]의 눈썹 찡그리던 사람이 부끄럽네. 진세의 속된 말이 청산을 더럽히니 그대여 싫어 마소, 일찍이 임금 말씀 쓰며 궁중에 들어섰다네.” 하였다.
○ 고려조 탄연(坦然)의 시에, “한 칸 방 어찌 그리 너무도 고요한가, 일만 인연 모두 적막하네. 길은 돌 틈으로 뚫고 가고, 샘은 구름 속에서 새어나네. 밝은 달 처마 끝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 숲 속에서 일어나네. 누가 저 스님[上人]따라, 고요히 앉아 참 즐거움 배우려나.” 하였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에 있다.
○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왕도 정치의 먼저 할 바이요, 물건을 이롭게 하고 창생을 구제하는 것은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니, 두 가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인(仁)한 마음의 발동으로써 사랑하고 효도하는 정성이 자연 그러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전의 덕이 높은 황제와 명철한 군왕의 도는 조(祖)를 높이고 종(宗 조상(祖上))을 공경하여 그 효도를 넓히며,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인을 넓혀서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고, 물건을 이롭게 하는 것이 넓다고 할 것이다.
불가[佛氏]의 말에는,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그가 한 일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바퀴처럼 돌아 태어나게 되는데, 부처님은 자비를 베풀어서 고생을 없애고 기쁨을 주며 그 빠지는 것을 건져줄 수 있으니, 살아있는 이가 만일 부처님을 섬기고 중을 대접하여 죽은 이를 좋은 길로 인도한다면 죽은 이의 혼이 아귀(餓鬼)가 되었다가도 배부를 수 있고 괴롭다가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부처가 되어 길이 돌고 도는 보응(報應)을 면하며 살아 있는 이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여기서 효자 자손(慈孫)에서 우부(愚夫) 우부(愚婦)에 이르기까지 휩쓸려서 불도로 돌아가지 않는 이가 없고, 혹시라도 미치지 못할까 하여 온 세상이 물결처럼[滔滔] 불도를 높이고 이것을 받드는데 수륙 무차평등(水陸無遮平等)의 모임은 그 법 중에서도 제일 성대한 것이다.
홍무(洪武) 정축년(태종 6년) 정월 을묘일에 주상께서 내신(內臣) 이득분(李得芬)과 중[沙門] 신(臣) 조선(祖禪) 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내가 국가를 맡아 다스리게 된 것은 오르지 조종(祖宗)의 적선[積慶]에 의하여서이니, 조상에 대한 보답을 위하는 일이라면 힘쓰지 않는 것이 없다. 또 생각하니, 신하와 백성들이 혹은 나라 일에 죽고 혹은 스스로 운명하였는데, 주관하여 제사드릴 이가 없어 저승길에서 굶주리고 쓰러져도 구원하지 못하니, 내가 매우 민망스럽게 여긴다. 옛 절에 수륙도량(水陸道場)을 마련하고 해마다 베풀어서 조종의 명복을 빌고 또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니, 너희들이 가서 자리를 찾아 보라.’ 하였다. 사흘째 되는 정축일에 득분 등이 서운관(書雲觀) 신(臣) 상충(尙忠)ㆍ양달(陽達), 중 지상(志祥) 등과 함께 삼각산에서부터 도봉산(道峯山)까지 보고 복명(復命)하여 아뢰기를, ‘여러 절들이 있지만 진관사(津寬寺)만큼 좋은 데가 없습니다.’ 하니, 이에 주상께서 도량을 이 절에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대선사(大禪師) 덕혜(德惠)ㆍ지상(志祥) 등에게 명하여, 중들을 소집해서 공사를 시행하게 하였는데, 내신 김사행(金師幸)이 더욱 힘을 들였다. 그달 경진일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2월 신묘일에 주상이 친히 왕림하여 세단(壇)의 위치와 차례를 정하였으며, 3월 무오일에 또 행차하여 보았다. 가을 9월에 공사가 끝났는데 세 단은 모두 집을 3칸씩 지었으며, 중단과 하단 좌우에는 또 각각 목욕실 3칸 있고, 하단 좌우에는 따로 조종의 영실(靈室) 8칸씩을 설치하였다. 대문ㆍ행랑ㆍ부엌ㆍ곳간이 갖추어져 시설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모두 합하여 59칸이며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아 그 제도에 맞았다. 이달 24일 계유에 주상이 또 친히 보시고, 정축일에 명하여 신 근(近)을 불러, ‘그 시종을 적어서 후세에 보여 주게 하라.’ 하였다.
신 근이 가만히 들으니, 인륜의 도는 효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며, 군왕의 덕도 효보다 큰 것이 없다 하니, 조종 제사의 예의와 추모 숭봉하는 법전은, 군왕으로서 근본을 보답하는데 무엇이 효보다 더하리요. 그런데 성인의 마음은 오히려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늘을 짝하여 교(郊)에서 제사드리고 상제를 짝하여 명당(明堂)에 임하시니, 높여 받드는 일이 극진하다 할 것이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는 신무(神武)하신 자질과 인효(仁孝)하신 덕으로 천명을 받들어 국가를 창건하시니, 공은 조종조에 빛나고 은택은 만물에 덮였으며, 선조를 받드는 마음이 주야로 더욱 정성스러웠다. 하늘을 짝하는 제사가 이미 극진하고 부처에 귀의(歸依)하는 마음이 또한 간절하여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영혼으로 불기(佛記)를 받고 묘과(妙果)를 깨달아 얻을 수 있게 하며, 그 은택이 주인 없는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로운 은택을 입게 하시니, 성효(誠孝)의 감동하는 바가 지극하다고 할 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 물건에도 미치며 친근한 데에서 소원한 데에 이르고, 어두운 데에서 밝은 데에 나아간다면, 금일부터 무궁한 후일에 이르기까지 그 공덕의 큼과 이택(利澤)의 영원함을 어찌 쉽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푸르고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 연못가의 누대 둘러쌌는데, 땅 궁벽하고 하늘 깊은 곳에 동부(洞府) 열려 있다. 시내는 옥이 둘린 것같이 굽이치고, 산은 구름 솟은 것같이 형세가 높기도 하네. 중을 도태(陶汰)한 원위(元魏)는 오히려 웃음만 자아내고, 불도에 혹한 소량(蕭梁)은 슬플 것도 못 된다네.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김이 없으면 마음 자연 바르게 되는 법, 누가 인연 깨달은 이고 누가 여래(如來)이더냐.” 하였다.

도성암(道成菴)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이다.
【사묘】 백악신사(白嶽神祠) 백악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낸다.
○ 중악(中嶽) 삼각산을 여기 와서 제사 드리는데 삼각산 신은 북쪽에 있어 남향이고, 백악산 신은 동쪽에 있어 서향이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마루에 있는데 매해 봄ㆍ가을에 초제를 지낸다.
한강단(漢江壇)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매해 봄ㆍ가을에 제사를 드린다.
【고적】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에 있는데 신라 때 중요한 진영(鎭營)을 설치하였다. 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것을 신라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회복하고 장한성 노래를 지어서 그 공적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원년(신라 문무왕 1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靺鞨)이 신라의 정병이 모두 백제 가까이에 있어 안이 비었으니 공격할 만하다고 하면서, 군사를 출동하여 수륙으로 함께 나아와서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서쪽에 진치고, 말갈은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하기 열흘이 넘으니 성안에서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는데, 문득 큰 별이 적진에 떨어지고 또 뇌우(雷雨)가 오며 번개 치니 적들이 겁내고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조에 현종(顯宗)이 중이 되어 이 절에 거처하였는데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해치려 하였다. 절에 늙은 중이 있어 방 안에 굴을 파고 숨긴 다음, 그 위에 평상을 두어서 불측한 변을 방지하였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시냇물 흐르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한 줄기 시냇물 백운봉(白雲峯)에서 나오니 만 리 먼 바다에 길이 절로 통하네.” 하였다. 잔잔하여 바위 아래 있단 말을 마소. 많은 시일 안 가서 용궁(龍宮)에 이른다네.” 하였다.

면악(面嶽) 고려조 숙종(肅宗) 9년에 최사취(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명하여 남경(南京)으로 삼을 장소를 찾아보게 하였다. 사취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노원역(盧原驛)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지에 가서 산수의 형편을 살펴 보았는데 도읍지를 삼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오직 삼각산 면악 남쪽에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符合)하니, 그 주간(主幹) 중심지 임좌병향(壬坐丙向)되는 곳에 형세를 따라 도읍을 삼고, 지형에 의하여 동쪽은 대봉(大峯)에 이르고 남쪽은 사리(沙里)에 이르며, 서쪽은 기봉(岐峯)에 이르고 북쪽은 면악에 이르게 경계를 정하기 바랍니다.” 하였다.
○ 지금 생각하면 면악은 백악인 것 같다.

추흥정(秋興亭) 옛 터가 용산강(龍山江) 가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에 “용산(龍山)은 원래부터 강산의 좋은 곳으로 알려졌다. 또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며, 강에는 배가 운행하고 육지에는 수레가 통행하여 이틀 밤낮이면 경도(京都)에 이를 수 있으므로 귀인들이 많이 별장을 마련하여 두었다. 전(前) 봉익(奉翊) 김공(金公)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곳에서 휴양한 지 오래였는데, 우연히 사는 집 동쪽에서 한 언덕을 발견하니 높고 바르며 등이 굽어서 형상이 배를 엎어놓은 것 같았다. 드디어 정자를 그 위에 지었는데 솔 베어 서까래를 걸고 속새 베어 지붕을 덮었다. 땅이 높고 모진 것은 평평하게 하고 수목이 빽빽하고 가리운 것은 베어내니, 두루 다니며 사면으로 바라보아도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이에 정자 이름 지어 주기를 김비감(金秘監)에게 청하여 추흥정(秋興亭) 세 글자를 써서 현판을 달고,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므로 내가 그 한두 가지 그럴 듯한 것을 찾아서 이렇게 적는다.
천지의 운행은 다함이 없고 사시의 경치는 같지 않은데, 우리의 즐거움도 한 가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다. 내가 이 정자를 생각해보니 봄날이 따스하고 동풍이 화창하게 불어오면 숲 속의 꽃과 들판의 풀이 붉게 새로 피고 푸르게 깔리는데, 이때에 큰 소리로 노래 부르며 서성거리면 유연(悠然)히 공자가 ‘나는 증점(曾點)의 기상을 허여(許與)한다.’는 마음이 있으며 뜨거운 볕이 하늘에서 내려오면 쇠라도 녹이고 돌이라도 녹일 것 같으며, 천지가 이글이글 타는 화로 같아지는데, 이때에는 나무 그늘을 찾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옷깃을 풀어 헤치고 산보하면 한만(汗漫)하기가 열어구(列禦寇)의 신선놀이와도 같다. 또한 찬 기운이 엉겨서 얼고 외로운 기러기 구름 속에서 울고 가면 등륙(滕六)이 재주를 피워 강과 하늘이 한 빛이 되는데, 이때에 일엽 편주 저어 오가면 높은 생각 맑은 운치가 섬중(剡中)에 가는 것과도 방불하다. 그런데 비감(秘監)은 어찌하여 가을의 흥치[秋興]만을 취한 것인가.
대개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는 사람들이 모두 괴로워하는데, 오직 봄철의 화창함과 가을철의 맑음이 사람에게 적합하다. 그렇지만 봄철의 화창한 기운은 사람들을 게을러지게 하기 쉬운데, 무더위가 명령을 거두고 맑은 가을 소리가 음률을 맞추어 들려오게 되면 하늘 끝 땅 다한 데까지 청명하고 환하게 트이니, 그 기운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비록 공명과 부귀 같은 사람의 마음을 태우는 것이라도 변하여 청량하게 되는 것이다. 사시의 경치가 가을처럼 좋은 것이 없고, 가을 경치가 이 정자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비감의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김공은 나이 장성해서 중국에 벼슬하였으며, 교제한 이들은 모두 부하고 귀한 친구들이요, 놀고 본 곳은 모두 매우 굉장하고 사치스럽고 넓고 큰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아무런 생각 없이 마음속에 거두어 가지고 나와서 쇄락(洒落)하여 한 점의 티끌도 없으니 대개 맑은 자이다. ‘추흥’이라는 현판을 거는 것이 역시 마땅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봄ㆍ여름ㆍ겨울철의 이 정자에서의 좋은 일은 그대가 곡진하게 말하여 숨김이 없으면서 가을 흥치의 좋은 것은 말만 하고 드러내지는 않으니 어쩐 일인가.’ 하였다. 다른 날 김비감과 함께 복건(福巾)과 청려장(靑藜杖)으로 공을 따라 이 정자에 올라서, 무릉(茂陵)의 가사를 노래하고, 안인(安仁)의 부(賦)를 화답하게 된다면, 가을 흥치의 설명은 그 좌우에서 취하여 쓰매 그 근원을 알게될 것이다.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농가에서 고생 고생 쉬는 일 없더니, 곡식이 익게 되면 풍년을 기뻐하네. 정자 위에서 내가 이 즐거움 같이 하는데, 산 속의 사람들도 서로 함께 놀 수 있네. 들바람 쌀쌀하게 검은 모자에 불고, 강비는 부슬부슬 낚싯배에 뿌리네. 어찌하면 그대 따라 한 번 돌아가서, 정자에 올라 구경하며 10년 수심 삭여보나.” 하였다.

담담정(淡淡亭) 옛터가 삼개[麻浦] 북쪽 언덕에 있는데,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었다.
○ 이극감(李克堪)의 시에 “저녁해 서쪽으로 떨어지고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아득한 강산에 한없는 수심이어라. 천지가 다함이 있어 나도 늙었으니, 이 몸도 나중에는 백구 뜬 물가에서 지내려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찬 구름 막막하고 강물은 유유한데, 양쪽 언덕의 푸른 단풍[楓]나무 끝없는 수심일세. 외로운 등잔 마주 대한 채 밤중이 지났는데, 강에 가득한 비바람에 푸른 물가 어두워지네.” 하였다.

중흥동석성(重興洞石城)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자이다. 성 안에 산이 있어 높이 솟은 것이 노적 같으므로 세상에서들 노적산(露積山)이라 한다.
『신증』 쌍계재(雙溪齋) 옛터가 성균관 반수(泮水) 동쪽에 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姜希孟)의 부(賦)에, “서울 왼쪽 경계요, 반궁(泮宮)의 북쪽 언덕이네. 풍운은 모여 흩어지지 않고, 동학(洞壑)은 아늑하고도 넓도다. 울창하게 많은 가지 아름다운 수목이요, 아롱지게 덮인 돌은 검푸른 이끼일세. 냇물이 갈려 흐르니 비녀 다리 인 듯, 돌에 고여 서려 있는 빗물 받으니 도는 듯. 잔잔한 소리 옥가락지 울리는 듯, 콸콸 흐를 제는 여러 사람 들레는 듯. 골 안에서 나온 지 얼마드냐. 글의 물결 윤색하여 인재를 기르도다. 범상하고 용렬한 자 흘겨보고 알지 못하여, 이 좋은 지역 풀 속에 묻혀 있게 하였네. 진정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겼음은, 어질고 준수한 이 기다려서 열어 주려 함이로세. 여기에 금헌(琴軒) 선생은, 높은 관원의 자손이요 화려한 집안의 맏이로세. 어지러운 세상 싫어하고 도를 즐기며, 정신이 명랑하고 기상이 빼어났다. 옛 책 읽기 즐겨하고, 역사를 섭렵하였네. 어찌 나이는 젊지만 그릇은 노성한가, 정말 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풍부하다. 흉금이 트였으니 개인 밤 달과 같고, 호방한 기운 뻗어나서 우주에 찼다네, 비단옷 옛 기습(氣習) 벗어나서, 천석(泉石)에 고질병 들었네, 관복을 두르고도 먼 것을 생각하며, 조시(朝市)에 젖어 있어 발길이 막혔어라. 그러므로 성중에서 살 곳을 찾아, 멀다고 여겨 찾지 않은 곳 없었다네. 반수(泮水)에 찾아보다가, 물 근원 다 가서야 이 자리 얻었다네. 남쪽을 앞으로 하고 북쪽을 등졌으니, 군자의 거처할 곳이로다. 이에 가시덤불 처 버리고 깊고 좁은 것 개척했네. 띠풀을 베고 재목을 모아, 설계하고 건축하기 시작했네. 따뜻한 방을 만드는데 밝고 맑게 하고, 바람 불어오는 격자창 성글게 사면으로 열었도다. 선생이 그 안에서 눕고 쉬며, 아침저녁 휘바람 불고 노래하네. 하늘 조화 자세히 관찰하며, 사시 변하고 바뀌는 경치 보노라. 봄철이 와서 화창한 볕이 공중에 가득하면, 언덕의 풀은 돋아나려 하고 땅은 처음으로 풀리며, 시냇가 누른 버들가지 흔들리고 동산의 복사꽃 붉게 타오른다. 풍연(風煙) 어두운 건 푸른 솔이로세. 글 읽는 소리[絃誦] 공자묘에서 들리는데 쌍계수(雙溪水) 깊고 맑게 흐름이여, 돌 여울로 내려오면서 영롱(玲瓏)하도다. 선생은 이때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예닐곱의 관(冠)을 쓴 어른과 동자를 데리고 스르릉 비파 울리어 정회를 펴면서, 기수(沂水)에 목욕하던 높은 자취를 사모하도다. 맑고 훈훈한 그 절기 되면 녹음 더욱 좋은데, 자색 제비 가벼운 바람에 날아들고, 누런 꾀꼬리 높은 언덕에서 노래한다. 어느 사이 뜨거운 햇볕 하늘에 있으면 붉은 구름 멈추고 가지 않는데, 쌍계수 맑고 차고 푸르며 구비 돌아 웅덩이지고 다시 흘러 버리도다. 선생은 이때 가는 베옷 풀어헤치고 바람을 쏘이며 서늘한 그늘 찾아 편안히 쉴 것이다. 매우(梅雨) 부슬부슬 내리고 그늘진 구름 덮여 있을 때면, 산앵도 타는 듯 붉게 익고 젖은 새는 갈 곳 없어 헤매는데, 쌍계수는 여러 골 물 받아 모아 형세 더욱 커져 공(空) 산에 메아리 치며 세차게 흐르도다. 선생은 이때면 청려장 손에 들고 짚신 발에 신고, 근본이 있으면 멈추지 않고 근원이 없으면 마르기 쉬운 이치 생각하도다. 쇠소리 나는 바람 슬슬 불고 비취 같은 하늘 맑게 개였는데, 무서리 수풀에 뿌리면 진홍빛 현란하니 취한 듯하여라. 꽃다운 국화 언덕 위에 피어 있고, 연잎은 쓰러져서 찬 못에 덮여 있다. 상쾌하고도 쓸쓸함이여, 마음대로 멀리 찾고 그윽한 경치 더듬게 하도다. 쌍계수는 맑고 밝아 거울 같으며, 푸르고 깨끗하여 쪽[藍] 같도다. 선생은 이때 향기로운 두루미 열어 놓고 흐르는 물 보며 좋은 손님 맞아 즐기도다. 그러다가 매미소리 그치고 흰 달이 광채를 더하게 되면, 밤들어 산은 적적 사람 없는 것 같은데, 귀뚜라미 울음소리 뜰 안에서 목 매인 듯 들려온다. 쌍계수는 차고 찬데 달은 더욱 빛이 밝아 은물결 사방에 흩어졌도다. 선생은 이때 거문고 어루만지며 한 곡조 연주하니 산과 물의 깊은 뜻을 줄줄이 엮어낸다. 삭풍(朔風)이 울부짖으면 긴 수풀 모두 비는데 찬 기운 몸에 해로울까 걱정하여, 나무등걸 지펴니 따뜻하게 한다. 쌍계수 얼음 얼어 새겨놓은 듯 깎아놓은 듯 거문고 소리 딩둥댕둥 울리도다. 선생은 이때 석양 주흥(酒興) 얼큰하여 붉은 털옷 걸치고서 남쪽 언덕에 서서 돌아갈 줄 모르니, 얼굴을 깎아내는 듯한 찬바람인들 아랑곳하리. 그리고 빽빽한 구름 잎사귀처럼 뭉치고 퍼붓는 눈 낙화처럼 날리는데, 공중에 흩어져서 노송나무를 덮고, 구렁을 메우고 언덕에 가득하다. 쌍계수 얼어붙어 소리는 없는데, 움틀꿈틀 은빛 뱀이 달리는 것 같아라. 선생은 이때 비단 휘장을 걷어올리며 창의 깁을 열고, 양고주(羊羖酒) 좋은 술 부어 가며 미인 시켜 거문고 뜯어 현묘(玄妙)한 곡조 들으며 즐기도다. 집안엔 봄철처럼 화창한 기운 덮이고, 사시의 차례 어지럽게 오고 가도다. 정말로 광경은 한이 없는데 세상 티끌 반걸음 저 밖이로다. 완연히 한 번 병 속에 들어간 것 같아라. 이야말로 땅의 영기가 기다렸다가 비장(祕藏)한 것 내어 준 것이냐. 가시덤불 베어내니 흙이 조강(燥剛)하도다. 뜰 안에서 말을 돌릴 만하니 객이 당에 오르도다. 집을 지어 안락하니 군자 여기서 편안하다. 군자 여기서 편안하여 천 년을 누리리라. 거듭 노래로 고하나니, 물소리 산을 두르고 산은 작은 집[蓬蓽] 가리웠네. 마음 편히 떨쳐가서 그윽하고 고독함 즐기노라. 무엇이 즐거운가, 성조(聖朝) 벗어나서, 어하(魚蝦)와 짝이 되고 미록(麋鹿)과 친구 되네. 내가 쌍계를 사랑함이여 강호도 산림도 아님일세. 몸은 비록 벼슬해도 마음만은 연하(煙霞)에 있네. 가서 따르고자 하였으나, 동부(洞府)가 깊고 깊었어라. 무엇으로 그대에게 주리오, 쌍남금(雙南金)이로다.” 하였다.

【명환】 신라 총명(聰明) 헌덕왕(憲德王) 17년에 북한산 도독(北漢山都督)이 되었다. 헌창(憲昌)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백여 명과 더불어 반란을 도모하여, 도읍을 북한산주(北漢山州)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잡아 죽였다. 김대문(金大問) 성덕왕(聖德王) 3년에 도독이 되었다. 변품(邊品) 도둑이 되었다. 찬덕(讚德)의 아들 해론(奚論)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椵岑城)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고려 한문준(韓文俊) 인종조에 부유수(副留守)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유응규(庾應圭) 나가서 남경의 수령이 되었는데 정사를 하는 데 있어 맑고 간략함을 숭상하며 한 가지도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 아내가 젖을 앓는데도 채소국만을 먹으므로 아전 한 사람이 가만히 닭 한 마리를 가져다 바쳤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그분이 평생에 선물을 받아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어찌 잘 먹고자 하여 그 분의 맑은 덕에 누가 되게 할 것인가.” 하니, 아전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유원순(兪元淳) 희종조(熙宗朝)에 사록참군(司錄參軍)이 되었다. 오형(吳詗) 원종조(元宗朝)에 사록(司錄)이 되었다. 왕규(王珪) 유수가 되어 은혜로운 정사가 있었다. 홍자번(洪子藩) 유수판관(留守判官)이 되어 끼친 은혜가 있었다. 윤선좌(尹宣佐) 충숙왕조(忠肅王朝)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나가서 한양윤(漢陽尹)이 되었다. 조금 있다가 왕과 공주가 용산(龍山)에 갔는데 좌우 사람에게, “윤윤(尹尹)은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을 돌보아 주게 한 것이다. 너희들은 조심해서 아예 소란 피우지 말라.” 하였다. 박인헌(朴仁軒) 한양윤이 되었다. 정해(鄭瑎) 충선왕조(忠宣王朝)에 남경 유수(南京留守)가 되었다. 조문발(趙文拔) 남경 사록(南京司錄)이다. 박달상(朴達祥) 공민왕조(恭愍王朝)의 한양윤이다. 민제(閔霽) 한양윤이다.
【인물】 고려 한종유(韓宗愈) 충렬왕조(忠烈王朝)에 급제하고, 아홉 번째 승진하여 삼중대광 좌정승 한양부원군(三重大匡左政丞漢陽府院君)이 되었다가 그 고장으로 연로하여 물러났다. 젊었을 때, 당시의 명사들과 오가며 모여서 술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이름하여 양화도(楊花徒)라 하였다. 종유가 취하면 문득 일어나 춤추며 양화사(楊花辭)를 노래하기를, “그믐의 맑은 바람 기다려서 날아 올라 황각(黃閣 의정부(議政府)의 딴 이름) 가운데 이르리라.” 하니, 아는 이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조돈(趙暾) 처음 이름은 우(祐)이다. 쌍성총관(雙城摠管) 휘(暉)의 손자인데 대대로 동쪽 경계의 용진(龍津)에 살았으며, 약관(弱冠) 전에 충숙왕(忠蕭王)을 섬겼다. 그때 이속과 백성들이 도망하여 여진(女眞)으로 들어갔는데, 임금이 돈을 보냈는데, 해양(海陽)에 가서 백여 호를 데려오니,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여러 번 승진하여 예의 판서(禮儀判書)가 되었으며, 지병마사(知兵馬事)로 홍적(紅賊)을 쳐서 패주시키고 용성군(龍城君)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용진에서 죽었다.
【본조】 조인벽(趙仁璧) 돈의 아들이다.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벼슬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이르렀다. 조인옥(趙仁沃) 인벽의 아우이다. 우리 태조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니, 윤소종(尹紹宗)이 군전(軍前)에 나가 곽광전(霍光傳)을 드렸는데, 태조가 인옥에게 읽게 하고 들었다. 여기서 왕씨(王氏)를 복위(復位)하는 의논을 극구 진술하였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지위가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이르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조온(趙溫) 인벽의 아들이다. 개국 정사 좌명공신(開國定社佐命功臣)에 참여하였으며,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절(良節)이다. 조연(趙涓) 인벽의 아들이다. 태조조의 개국공신이며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조영무(趙英茂) 개국공신으로,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며, 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계생(趙啓生)ㆍ조말생(趙末生) 건문(建文) 신사년(태종 1년)과거에 장원하고 벼슬이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강(文剛)이다. 조혜(趙惠) 연(涓)의 아들이다. 형조ㆍ호조 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옮겼으며,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효자】 본조 홍계산(洪戒山) 어머니가 복병(腹病)을 얻어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계산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성종(成宗) 무신년에 사실이 알려지니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한계련(韓繼璉) 외조모가 오래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왕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이식(李植) 어머니가 오래도록 앓았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견(金壽堅) 어머니가 광질(狂疾)을 앓았는데 수견이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을 지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석련(金石連)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석련이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서 드리니 병이 나았다. 후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복(服)이 끝나도 오히려 아침 저녁 상식을 폐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귀손(朴貴孫)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아버지가 병이 났는데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어머니 병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지금 임금 8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맹감(金孟監) 다섯 살에 어머니가 돌아갔는데 장성하여 계모의 상에 복을 다 입은 다음에는, 이어 생모를 위하여 추후로 3년복을 입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에 살며 조석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전호손(田好孫) 갑사(甲士 군인)이다.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지성스럽게 전 올리고 제사지냈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손수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지냈다. 일찍이 상중에 종군하게 되었는데 돌아와서는 다시 3년상을 다하였다. 국기일(國忌日)을 만나도 역시 술ㆍ고기를 먹지 않았다. 지금 왕 10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희(柳熙) 어머니가 악질(惡疾)을 앓았는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수(金粹)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는데 삭망(朔望)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제물을 많이 차리고, 이웃 사람들을 청하여 즐겁게 하였다. 전후 시묘 살기 각각 백 일이었는데, 한 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상사가 끝난 다음에도 소복으로 3년을 마쳤으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조석으로 전 올리는 일을 폐지하지 않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붕이(朋伊) 사가(私家)의 천인이다. 나이 12세에 아버지가 악질을 앓으니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로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조어정(趙於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그 누이 막금(莫今)과 함께 어버이를 효도로 섬겼다. 부모가 잇따라 별세하니 3년 간을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고, 나무 형상을 만들어서 조석으로 전 올리며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새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올리며, 초하루마다 묘소에 올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함께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소비(少非)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연산조(燕山朝) 때에, 죄인에 연루되어 길성(吉城)으로 귀양가고 어머니는 명천(明川)으로 귀양 갔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60리나 되었다. 소비가 낮에 관청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서 어머니를 모셨다. 풀려 돌아오게 되자, 밥을 빌어서 봉양하며 따뜻하고 서늘한 데에 맞추어 마음을 다하였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숙미(淑美) 관청에 매인 천인이다. 나이 14세에 어머니가 악질을 앓으니 다리 살을 베어 약에 섞어 드렸는데 병이 나았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말금(末今) 사가의 천인이다. 나이 15세에 아버지의 병이 위중하자 손가락을 잘라서 그 피를 약에 섞어 드리니 병이 드디어 나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련(朴連) 사가의 천인이다. 부모가 일찍이 불교를 진심으로 믿었으므로 죽게 되니 집안이 모여서 화장하였다. 박련이 어릴 때 상사를 당하였으나, 장성하게 되어 슬퍼하고 사모함을 마지 못하여 화상을 그려 벽에 걸어두고, 날마다 상식(上食)드리며 남긴 의복을 가져다 시신을 불 태운 곳에 합장하고 6년 간을 시묘 살며 한 번도 집에 와 보지 않았고 또 소금ㆍ장ㆍ채소ㆍ과일을 먹지 않았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충의】 본조 심원(深源) 종실(宗室)인데 주계군(朱溪君)에 봉해졌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일찍이 그 외숙 임사홍(任士洪)의 간사함을 힘써 말하니, 성종이 사홍을 외지로 귀양보냈는데 연산군 말년에 와서 사홍이 세력을 얻으면서 마침내 심원을 죽였다. 지금 임금 초기에 작위를 추증하고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아들 유령(幼寧)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이 장령(掌令)에 이르렀는데 함께 살해되었다.
김동(金同) 종실 강녕부정(江寧副正) 기(祺)의 종이다. 연산군의 사랑하는 기생이 기(祺)의 집을 빼앗고, 기가 종을 시켜 자기를 욕한다고 호소하니, 연산군이 노하여 기 및 김동을 가두고 불로 지지며 심문하였는데, 동(同)이 말하기를, “죄는 나에게 있지, 주인은 모른다.” 하여 기는 벗어났지만, 동은 형벌을 받았다. 지금 임금 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공신옹주(恭愼翁主) 성종대왕의 딸인데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에게 출가하였다.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연산군이 갑자년에 아산(牙山)으로 귀양가게 되니 신주를 안고 가서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유씨(柳氏) 좌의정 허침(許琛)의 아내이다. 침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친히 재물을 장만하였다. 연산조 때에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법이 엄하였지만, 그래도 예절을 지켜서 3년상을 마쳤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박씨(朴氏) 승지 강경서(姜景敍)의 아내이다. 연산조 무오년에 경서가 곤장을 맞고 귀양가게 되니, 박씨가 걱정하고 상심하여 제대로 먹지 않은 채 해를 넘겨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민씨(閔氏) 조성벽(趙成璧)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시묘살며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렸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김씨(金氏) 대사간 강형(姜詗)의 아내이다. 연산조 갑자년에 형이 살해되니 김씨는 제대로 먹지 않고 울부짖어 곡하다가 한 달이 넘어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동질비(同叱非) 관청에 매인 천인 범산(凡山)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으니 3년간 복상(服喪)하며, 화상을 그려 벽에 걸고, 하루 세 번씩 상식을 드리며 시어머니 섬기기를 매우 삼갔다. 지금 임금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남씨(南氏) 부사(府使) 최계사(崔季思)의 아내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침ㆍ저녁으로 곡하고 전 올리고, 죽을 먹으며 상기를 마쳤다. 지금 임금 2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도리정균통조만(道理正均通漕輓) 박의중(朴宜中)의 시에, 도리(道理)가 바르고 고른데 배와 수레[漕輓]가 통한다 “강산이 겹겹으로 막히니 금성탕지(金城湯池)보다 낫다.” 하였다. 화악최괴압한강(華嶽崔嵬壓漢江) 권우(權遇)의 시에, “화악(華嶽)이 높이 솟아 한강을 누른다 “금성(金城) 천부(天府)의 요해지는 이 이상 없는 것이다.” 하였다. 호거용반천고지(虎踞龍蟠千古地) 전인(前人)의 시에, 호랑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 천고의 지역이다. “꿩의 문채요 새 나는 듯 구중궁궐이네.” 하였다.
팔영(八詠) 기전산하(畿甸山河) 정도전(鄭道傳)의 시에 “기름지고 풍요한 기전(畿甸) 천리 땅에, 안팎의 산하(山河)는 백두 겹일세. 덕과 교화로 땅의 형세까지 겸하니, 역년(歷年)이 천 년을 가리라.”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첩첩한 멧부리 기전(畿甸)을 둘렀고, 길게 흐르는 강물 도성을 둘렀네. 아름다운 이 형승(形勝) 하늘이 내린 것, 임금 도읍터 참으로 좋구나. 사방으로 거리 모두 비슷하고, 기름진 전원(田原) 농사 지을 만하네. 주민들 부유하고 많아 태평 세월 즐기니, 곳곳에 노래소리 들려오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사방으로 나라 터도 멀고, 천년 왕조에 지리도 웅장하구나. 강산에 험요(險要)한 곳 조물주의 조화인데, 나라 세우고 여기에 경영하였네. 범이 걸터앉고 용이 서린 듯한 그 고장에 닭의 울음개 짖는 소리 들리누나. 우리 임금 덕을 닦아 시종 여일 조심하니, 크나큰 왕업(王業) 길이 무궁하리라.” 하였다.

도성궁원(都城宮苑) 정도전의 시에, “성은 높아 철옹(鐵瓮)인데 천 길이요, 구름은 봉래산 둘렀는데 오색일세. 해마다 상원(上苑 어원(御苑))에는 꾀꼬리와 꽃인데, 해마다 서울 사람들 놀며 즐기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하늘이 주신 큰 도읍지 장하기도 한데, 구름 걸친 저 사이로 성첩이 열렸네. 금벽(金碧)으로 단청한 추녀 성대하고 높은데, 검(劍)과 노리개 찬 이들 이 사이에 배회하누나. 상원(上苑)에서 봄을 즐기는데, 깊은 궁중엔 만수 축원 술잔 도네. 우리 임금 정사에 근면하여 조회보고, 꽃 그림자 사이 돌아 누대로 돌아가누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날아갈 듯 저 도성 웅장한데, 크고 높음 존엄함을 상징하였네. 오색 구름 좋은 기운 참으로 천지에 가득하여, 그 기운 엉겨서 태평세월 이루네. 검(劍)과 노리개 찬 이 단궐(丹闕)로 달려나가고, 큰 깃발 작은 깃대는 자문(紫門)에 번득이네. 임금 얼굴 지척간에서 온화한 말씀 하사하시는데, 머리 조아리며 성은(聖恩)에 감사하누나.” 하였다.

열서성공(列署星拱) 정도전의 시에, “여러 관청들 높이 서서 서로 향하는 것, 별들이 북두칠성[北辰] 향하듯 했네. 달 밝은 새벽 거리는 물같이 고요한데, 굴레장식 울려도 작은 티끌 일지 않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줄같이 곧은 긴 거리 넓기도 한데, 별 두른 여러 관청 나뉘었네.” 하였다. 궁문 향해 관원들 구름처럼 모여드는데, 많은 사람들 밝은 임금 보좌한다네. 여러 정사 공적을 이루었고, 뛰어난 인재들 모두 특출하구나. 거리에 가득[籠街] 갈도(喝道 길 비키라는 소리) 소리 쉴 새 없이 들리니, 관리들 퇴청하느라 한창 분주하구나.” 하였다.
○ 권우의 시에, “하늘에 가까운 저 궁궐 깊숙도 한데, 별처럼 벌여 있는 관청들 많기도 하구나. 높은 오대(烏臺 사헌부)ㆍ봉각(鳳閣 의정부) 가장 맑고 화려한데, 마주 대하여 성대하고도 높다랗다. 밤 숙직땐 촛불 켜고, 새벽 조회 길엔 굴레장식 울리누나. 빛나는 우리 임금의 교화 덕에 티 없으니, 이 백성들 은혜의 물결에 젖었어라.”하였다.

제방기포(諸坊碁布) 정도전의 시에, “큰 집들[第室] 구름 위에 높이 섰고 여염집 땅에 가득 연이었네. 아침저녁으로 연화(煙火) 끊기지 않으니, 일대의 번화한 것 태평도 하여라.” 하였다.
○ 권근의 시에, “새 서울에 하늘 관청 열었는데, 여러 동리 판 위의 바둑처럼 펄쳐 있네. 천문 만호 어슷비슷한데, 관원들 날마다 상종하누나. 저자 가게 집집마다 풍요하고, 동산 정자 곳곳마다 기이하네. 멀리 저 달 아래 노래 소리 들려 오니, 태평 시기 이때이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얼기설기 여염집 조밀하고, 이리저리 도로가 나뉘었네. 천만 수레와 말들 스스로 떼지어, 오고가기 어찌 그리도 분분한가. 저자의 장사치 온종일 모이니, 거리의 종소리 바람 속에 번화한 것 알려주네. 이 시대는 문화를 펴는 때라, 대궐에 상서로운 구름 항상 엉기누나.” 하였다.

동문교장(東門敎場) 정도전의 시에, “종고(鍾鼓) 소리 쾅쾅 땅을 흔들고, 깃발 펄럭펄럭 공중에 휘날리네.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주선함이 한결 같으니, 몰아가서 싸움 할 수 있겠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다섯 장교[五校] 그 모습 장엄한데, 세 군영엔 호령도 잘 듣는다. 동문에서 징과 북소리 울려올 제, 일만 기병들 무기를 번득이네. 햇빛이 비치니 금빛 갑옷 선명하고, 바람이 이니 그림 그려 놓은 깃발 펄럭이네. 포로를 바치고 개가(凱歌) 불러 많은 공 이루어, 사방 나라에 웅장한 이름 떨치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지세는 평평하여 손바닥 같은데, 군용(軍容)의 신속함 우레 같네. 북치면 나가고 징치면 그치기 몇 번이나 되풀이했나, 일만 기병 다시 돌아오네. 진치는 것은 정명(精明)한 기술이고, 적의 기세 꺾는 것은 용결(勇決)한 재주일세. 이만하면 적국들 스스로 항복해 오게 할 것이니, 미리 병사를 양성함 어찌 부질없다 하리.” 하였다.

서강조박(西江漕泊) 정도전의 시에, “사방의 선박들 서강으로 몰려들어, 용 그린 배 앞서 끌어 1만 섬[斛] 풀어놓네. 그대여 저 창고의 썩는 쌀 보았는가, 정사 잘하는 일은 식량 넉넉하게 하는 데 있다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남해에 풍랑 고요하니, 서강에 선박들 모여드네. 검은 돛대 총총히 서서 구름 하늘 가리웠는데, 쌓인 노적 산과 가지런하네. 일천 창고의 썩고 남는 곡식, 창생 일만 집의 밥 짓는 연기이네. 공사간에 부유하고 저마다 편안하니, 왕실의 큰 사업 길이 길이 이어지리.” 하였다.
○ 권우의 시에, “조운(漕運)은 천리 길에 통하고, 누선(樓船)은 만 척이나 겹겹이 대었네. 긴 강에 물결 넓어 물가를 감싸는데, 조수 들어오니 많은 배 돛을 내리네. 공물과 부세(賦稅) 해마다 들어오고, 창고는 날마다 받아들이네. 백성의 양식 나라의 수요 모두 다 충족하니, 춤추며 성은에 보답하자.” 하였다.

남도행인(南渡行人) 정도전의 시에, “남쪽 나루터에 물결 도도(滔滔)한데 행인들 사방에서 모여들어 분주하네. 늙은이 쉬고 젊은이 짐 지고서, 즐거운 노래 앞뒤에서 주고받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관가 나루터 잡다하게 건너려니, 번화한 서울의 문턱이라 그러하다. 거리 정자 날마다 높은 수레에 맞이하여, 오가는 술잔 향기롭게 기울이네. 들길은 강 언덕에 잇닿았고, 물가 모래엔 물 흔적 남아있네. 오가는 사람들 모두 이 속에서 분주하니, 물 건너는 은혜 뉘라서 알 것인지.”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멀리 보이느니 아득한 저 길인데, 가로 흐르는 강물 여기저기 나루터일세. 남쪽에서 오고 북쪽으로 가는 사람 몇천 명 될는지, 끊이지 않고 날마다 들어온다네. 바람이 자니 배는 조용히 건너가고, 연기 개니 물 기운 새롭구나. 제천정(濟川亭) 그 위엔 송별ㆍ영접도 잦아, 흐뭇하게 화려한 자리 베풀었네.” 하였다.

북교목마(北郊牧馬) 정도전의 시에, “저 북쪽 들 평평하기 숫돌 같은데, 봄철 되면 풀 무성하고 샘물 좋다네. 일만 말 구름처럼 몰리고 까치처럼 뛰는데, 말 기르는 사람들 마음대로 서쪽 남쪽에 서성이네.” 하였다.
○ 권근의 시에, “무성한 풀은 긴 들 저 밖에 있고, 맑은 냇물은 끊어진 언덕 가로 흐르네. 용마[龍媒] 일만 필 다투어 높이 뛰는데, 저 멀리 오색 꽃 잇닿았네. 언덕에서 뛰놀 적에 발굽에서 번개가 생기고, 바람결에 울음 우니 갈기에서 연기 출렁이네. 사특함 없는 그 생각 앞으로 나갈 수 있나니, 《시전》의 경시(駉詩) 한 편 우리 님께 드리려네.” 하였다.
○ 권우의 시에, “들이 넓으니 푸른 연기 덮여 있고, 봄이 깊으니 푸른 풀 가지런히 자랐네. 달리고 뛰는 말떼들 동쪽으로 서쪽으로, 번갯불 번쩍이며 가볍게 굽놀리네. 물을 건너며 무리지어 마시고 바람 향해 서서 짝을 찾아 울음 우네. 말 기르는 사람들 하루종일 긴 언덕 오르내리니, 도롱이 삿갓에 비 젖어 쓸쓸하여라.” 하였다.

십영(十詠) 장의심승(藏義尋僧) 풍월정(風月亭) 시에, “푸른 언덕 일만 겹이 푸른 옥 같은데, 그 안에 있는 절 거의 3백 곳. 나는 샘물 폭포 되어 절벽에 걸렸는데, 바위 가에 큰소리 옷감이 찢기는 듯. 노는 사람 이 좋은 경치 두고 혼자서 돌아가리, 종일토록 중을 찾아 마주앉아 말하네. 머리 돌리니 인간 세상은 꿈만 같으니, 이곳은 정녕 노닐 만한 곳이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산 아래 찬 물결 옥 같은 시냇물인데, 동구 나가선 웅덩이 이루어 몇 백이더냐. 구름 깊은 곳 저 멀리 보배로운 당간(幢竿) 보이는데, 목탁 소리 떨쳐나서 산이 찢어지는 듯. 승려와 짝하기 좋아하여 머물고 가지 않는데, 현묘(玄妙)한 말 하다가는 문득 세상 말씨[侵綺] 부끄럽네. 백발 늙은이 돌아와서 우리들 찾으니, 이곳이 저 광산(匡山)의 글 읽던 곳인줄 알겠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세 봉오리 우뚝우뚝 옥을 깎아 세웠는듯, 전조(前朝) 시대의 옛 절이 8백 곳이나 된다네. 고목이 바위를 둘렀는데 누각(樓閣)이 겹겹이고, 우는 냇물 부딪히니 산 돌이 찢어지네. 내 옛날 중을 찾아 한 번 돌아가서, 밤늦도록 밝은 달 아래서 정담을 나누었지. 새벽 종 한 소리에 깊은 반성 생기지만, 백운이 땅에 가득하여 방향을 알지 못하겠구나.”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절 아래 맑은 냇물 푸른 구슬 흐르는 듯, 절 안에 사는 중은 수없이 많구나. 때로 뇌성소리인양 새벽 종이 울리는데, 높은 봉 무너질 듯 푸른 언덕 찢기는 듯. 한가한 틈타 성 밖 나와 중을 찾아가, 전의 셋과 후의 셋이 어떠한가 한 번 물어봤네. 동문이 깊숙하여 연하(煙霞)도 늙었으니, 멍하니 이 몸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를레라.” 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절 뒤의 산봉우리 옥처럼 모였는데, 문 앞의 높은 나무 백 년도 지났으리. 임학(林壑)이 굽이굽이 돌아 깊고도 깊은데, 범종(梵鍾) 두어 소리 산이 찢어질 듯 울려 오네. 마른 여장(藜杖) 휘두르며 연기와 덩굴 헤쳐 들어가서, 한가로이 승방 찾아 중과 이야기하네. 오손도손 주고 받는 말 해가 지는 줄도 모르니, 세상 티끌 씻을 곳 여기가 아니던가.” 하였다.

제천완월(濟川翫月) 풍월정 시에, “은하수에 바람 없어 흰 물결 고요하니, 늙은 두꺼비 저 못 속의 그림자 들이마시고 있구나. 강 머리에는 백옥 소반 굴리는 것 같은데, 구름 저 사이에는, 벌써 황금 떡이 솟아났네. 높은 다락에 한 잔 술 차갑고 깨끗도 한데, 이 맑은 광경 대하니 백발도 모르겠네. 머리 돌리니 젓대 소리 어디서 들려오나, 밤 깊으니 예상곡(霓裳曲) 듣는 것 같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밤은 차고 강도 비어서 모든 소리 고요한데, 가는 발 반만 걷고 흰 달빛 맞이하네. 자색 연기 날아 흩어지니 하늘은 넓기만 한데, 얼음 바퀴 반쯤 나오니 금으로 떡을 만들었네. 비고 밝은 이 마음도 함께 맑고 깨끗하니, 밤 늦도록 학과 함께 흰 털을 흩날리네. 강 다락 어느 곳에서 쇠젓대 소리 들려오나, 맑은 흥 유유(悠悠)하게 강 구비에 퍼져가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가을 빛 일만 이랑 유리처럼 고요한데, 그림 기둥 구슬 발에 찬 그림자 어른거리네. 먼 하늘 구름 없어 쓸어버린 것 같은데, 앉아서 밝은 달 황금 떡 모양 나오기만 기다리네. 천지의 맑은 기운 뼈 속까지 스미는데, 밝은 광채 비쳐 털끝도 하나하나 세겠네. 밤은 깊고 깊은데 광경 더욱 기이하여서, 열두 구비 난간 모두 옮겨 의지하였다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달이 가을 강에 드니 강물이 고요한데, 백 척 다락 한가로이 누운 모습 돌탑[浮圖]과도 같구나. 달을 마주 앉으면 열 말[斗] 천 말 술 기울일 것을, 달처럼 둥근 3백 개의 떡은 해서 무얼 하나. 맑은 빛 찬 기운 위아래로 들어오니, 이 내 귀밑털 수풀처럼 일어서네. 다만 바라는 건 언제나 술 그릇 속의 술 비치는 것. 거울같이 둥글거나 갈구리 모양 굽은 것 무어라 생각하리.”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 위에 바람 없고 가을 밤 고요한데, 가는 구름 움직이지 않으니 그림자도 없구나. 난간 의지해 수정 발 걷어올리니, 바다의 용이 금색 둥근 떡 받들고 나오네. 하늘 빛 물빛 둘 다 맑고 깨끗하니, 한끝 맑은 그 빛에 흰 머리털 더욱 밝아지네. 문득 이 내 몸 광한궁(廣寒宮)에 있는가 의심하나니, 귓가에 예상곡(霓裳曲) 들려오는 것 같구나.” 하였다.

반송송객(盤松送客) 풍월정 시에, “오늘 아침 천리 길 떠나는 손 전송하니, 나를 대해 앉아 황금 술잔 사양마소. 떠나는 길에 술을 부으니 눈물자국 젖었는데, 이별하는 마음 얼마인가 수심도 그지없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삼상(參商)과도 같아, 가고 오는 저나 내나 모두 애끊는 일이로세. 바람을 당해 서서 세 번 탄식하고 다시 슬퍼하는 것은, 그리운 그대 볼 수 없고 마음만 망연하여서라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수레 일산 구름처럼 모여 먼길 손 전송하니, 술잔 소반 흩어진 데 황금 술병 곁들였네. 버들 푸른 머나먼 길 술도 다했는데, 가고 남는 일 한탄한들 어이하리. 슬픈 노래 한 곡조에 맑은 음률 울려 나니, 소리소리 귀에 들어 창자라도 끊게 하네. 별안간에 이별하면 천리 길 떨어지는데, 외로운 연기 저문 날이 창망(蒼茫)하기만 하구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옛 친구 나를 이별하며 원유가(遠遊歌) 부르는데, 무엇으로 전송할까나 한 쌍 은 항아리 기울여보세. 성문 밖에 버들가지 어찌 차마 꺾을쏘냐, 방초에 남은 한 끊길 날이 있으리. 지난해에도 금년에도 길이 삼상(參商)처럼 떨어졌으니, 부자로 이별하나 가난으로 이별하나 애태우긴 한 가지라네. 양관곡(陽關曲) 세 곡조 노래 이미 끝났으니, 동쪽 구름 북쪽 나무 모두 함께 망망(茫茫)하여라.”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도성 정자에 만리 길 유람하는 저 손 보낼 적에, 취한 뒤 노래 길게 부르며 옥 항아리 두드리네. 사람이 이 세상에 삶은 구르는 쑥대 같으니, 백 년간 허덕이다 언제나 그만두나. 미인은 비파를 타서 청상곡(淸商曲) 연주하니, 좌중이 침울하여 창자까지 수심일세. 이별은 많고 모임은 적으니 어이할까나, 내일 아침 서로 생각하면 길만 망망하리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내 옛 친구 관문 밖으로 유람 보낼 제, 손에 한 쌍 꽃 그린 사기 항아리 들고 왔네. 단번에 수십 잔 들어도 술 아니 취하니, 이별의 한(恨) 길고 길어 끝없어라. 잦은 가락 급한 피리 궁상(宮商) 곡조 곁들이니, 가는 말 떠나지도 않아 창자 먼저 끊기노라. 슬프게도 이별하고 동서로 헤어지니, 만 겹 구름 낀 산 앞에 놓여 아득하네.” 하였다.

양화답설(楊花踏雪) 풍월정 시에, “북풍의 성낸 소리 밤새도록 메아리치더니, 아침에 내리는 눈 크기가 손바닥만하네. 넓고 넓은 천지 끝이 없는데, 언덕과 골짜기 평평해졌으니 깊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강촌 어가(漁家) 두어 채 초가집, 울타리 아래에 수북수북 은대[銀竹]로 가득 찼네. 이곳에 오면 흥이 절로 나, 시도 읊고 술도 들며 쉴 사이 없구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강 머리에 바람 세차니 마른 나뭇잎 소리 내는데, 얼은 구름 땅에 붙으니 평평하기 손바닥 같아라. 잠시간에 눈 되어 바다를 덮어 오니, 언덕은 평평하고 골짜기 가득 차서 한 길이나 깊어졌네. 언덕에 의지한 어가(漁家) 여덟 아홉집에 술 판다는 푸른 깃발 대 끝에 휘날리니, 삼백 닢 청동전(靑銅錢) 가지고서, 바로 술청[壚頭]으로 나아가서 이내 몸 쉬어보리.”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북풍이 땅을 휩쓸고 모든 소리 메아리치는데, 강 머리의 눈조각 손바닥보다 더 크네. 망망한 은세계엔 인적 볼 수 없는데, 옥산(玉山)은 공중에 기대서서 천만 길 높았어라. 내가 이때 나귀 타고 가니 모자가 집 같은데, 은꽃은 눈을 어지럽히고 머리털 대처럼 곤두선다. 돌아오다 술 사서 청루(靑樓)에서 마시고, 취한 뒤 매화등걸 찾아가서 꽃 소식 찾아 보자.”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쌓인 눈 하얗고 북풍은 소리내니, 한(漢) 나라 궁중엔 선인(仙人)의 손바닥 얼어 부러졌네. 나귀 타고 강산에 취하여 시 읊으니, 흉중에 큰 기개 천 길 무지개처럼 펼쳐지네. 원안(袁安)이 흰 집에 누워 있던 일 우습고, 희만(姬滿)의 황죽(黃竹) 노래도 우습구나. 바로 시율(詩律)을 가지고 매우 엄함을 겨루었으니 설당(雪堂)에 높은 기풍 우러러 탄식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강변의 갈매기 해오라기 그림자 볼 수 없는데, 하늘 위의 옥가루 신선의 손바닥에서 뿌려지네. 공중에 어지러이 흩어지며 바람따라 날리더니, 평지에 가득 차 어느 사이 한 길이나 되었네. 열 말[斗] 천 말 술집마다 가득한데, 눈에 가득한 구슬꽃 대숲을 눌렀네. 옷을 잡혀 술을 사니 흥이 팔방에 비껴있어, 백 년의 인생사가 한순간에 식어졌다.”

목멱상화(木覓賞花) 풍월정 시에, “구름 한가롭고 봄 산은 높은데, 아지랑이 은은히 시내 다리에 잇닿았네. 산에 올라 꽃을 구경하고 취하기도 하였으니, 그대와 함께 종일토록 포도주 따랐지. 벌의 소리 새 울음은 촌가 담장에서 들려오고, 꽃 기운은 늦는 봄비 빚어낸다. 돌아오니 석양은 거리에 비쳐 기우는데, 운종가(雲鍾街 종로) 큰 거리에 인경[鍾鼓]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종남산 푸른 기운 구름 위에 높은데, 서울 장안 24개 다리 굽어본다. 앵무새와 꽃 한창 좋고 궁원(宮苑)도 깊으니, 옥술잔에 포도주 붓는 모임 상상한다. 구름 비단 단장하여 일만 집 담장을 이뤘는데, 한 쟁기 향기로운 비 거두네. 노끈 길다 해도 서쪽으로 지는 해 매지 못하는 법, 높은 다락 뗑뗑뗑 종고(鍾鼓)소리 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성 남쪽 지척에 산이 정히 높은데, 푸른 구름 열두 다리 더위잡고 올라가네. 화산(華山 북악산)은 옥부용(玉芙蓉)인 양 깎아 섰고 한강수 깊고 깊어 금포도(金葡萄) 물들었네. 장안 일만 집 온갖 꽃 핀 언덕 누대에 은은히 비쳐 붉은 비 같아라. 청춘(靑春) 제철에 와서 구경하는 이 얼마나 될는지, 낮이 길고 긴데 갈고(羯鼓)로 재촉하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남산에 앉아 보니 증성(曾城)도 높아, 어구(御溝)의 버들 무지개 다리에 스치네. 상원(上苑)에 꽃이 피니 붉은 노을 무르익고, 태액(太液 비원의 못)에 물결 따스하니 포도주 넘치는 듯, 큰 집[甲第]들 구름에 닿고 봄은 언덕에 가득한데, 동풍이 우유 같은 비를 불어 보내네. 천만 가지 붉은 꽃 고운 자태 머금어, 서로 재촉하여 마루 앞의 북 치지 않게 하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인경산(引慶山 남산의 딴이름) 층층의 구름 속에 들어 높고, 공중에 백 자는 되게 무지개 다리 걸려있네.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흥이 다함 없고, 푸른 술 처음 익어 포도 빛이 진하여라. 천만가지 꽃핀 언덕이 어두운데, 어찌 즐기지 않고 풍우에 맡기리. 한강수 기울여 금빛 술동이에 더하고 일백 개 방망이로 뇌문고(雷門鼓) 마음껏 두드려 보려네.” 하였다.

전교심방(箭郊尋芳) 풍월정 시에, “봄철 교외에 가는 풀 비단자리 같은데, 봄바람에 술을 싣고 노는 사람 찾아가네. 아침엔 준마 타고 푸른 풀 밟고 나갔다가, 저물녘 취해 돌아오며 공연히 봄을 애석해 하는구나. 푸른 옷 저 소년들 누대 모퉁이 오르더니, 높은 누각의 젓대와 퉁소 소리 정히 들리네. 버들가지 한들한들 녹음도 깊었는데 명일엔 그네가 담장 가에 걸렸으리.”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따스한 기운 평야[平蕪]에 들어 푸름이 자리 같은데, 풍광이 담탕(淡蕩)하여 사람에게 좋기도 하구나. 옷을 걷고 창포 물가에 꽃을 따니, 눈에 가득 밝은 빛 온 누리가 봄이로세. 장수하고 단명함 다 같은 회계곡(會稽曲)인데, 하루살이 같은 인간 바삐도 호흡하누나. 술잔 받으면 무어라 흠뻑 취함을 사양하리, 꽃 밖에 저 멀리 석양 벌써 지려 하누나.”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평평한 들판이 손바닥 같고 풀은 자리 같은데, 개인 날 따스한 바람이 진정코 사람 죽이네. 오늘 아침 술 사려고 푸른 옷 잡히고서, 삼삼오오 떼를 지어 좋은 봄 찾아갔네. 날으는[飛] 술잔 물굽이 도는 것보다도 급하여, 맑은 술동이 쉽게도 마르니 고래처럼 마심일세. 돌아올 때 준마 타고 달빛을 밟으니, 옥피리 남은 소리 살구꽃 떨어진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방초가 온전히 비단 자리보다 좋아, 날리는 꽃 퍼지는 녹음 사람을 수심하게 하네. 사녀(士女)들 서로서로 광음을 다투는 양, 비단 휘장 수놓은 장막 청춘을 비치네. 누런 수탉 대낮에 영롱한 노래 곡조, 흐르는 세월 한 호흡 같기도 하였어라. 급히 좋은 술 불러 좋은 계절 즐기고서, 거꾸로 실려 돌아올 때 검은 모자 떨어진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동교(東郊)의 푸른 풀 겹자리 깔렸는데 성을 나가니 상춘객 여기저기 보이네. 풍광이 얼핏 지나니 헛되이 보낼 수 있겠는가, 1년 중 행락은 봄에 해야 한다네. 술동이 열고 또 다시 계곡(溪曲)에 앉으니, 백 병 술을 한 입으로 마시는 것 마다하리. 마음껏 놀다가 달 밝아 돌아가려니, 석양이야 지고말고 관여하지 마세나.” 하였다.

마포범주(麻浦泛舟) 풍월정 시에, “개포에 가득 연광(煙光)이 푸르게 퍼지는데, 은은한 바람 솔솔[嫋嫋] 찬 물결에 불어가네. 강가의 작은 풀들 물들인 것보다 푸르르고, 언덕의 버들 황금 가지 이루었네. 놀잇배에 퉁소랑 북 싣고 나루터를 건너면, 푸른 향초, 붉은 향초 꽃다운 물가에 났으리라. 이리저리 저어 석양에 돌아올 제 고개 돌리니 모래판에 갈매기 날아드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소선(蘇仙)은 영수(穎水)에 배 띄워 무엇을 하였던고, 나도 이 놀이 좋아서 물결 위에 흥청이네. 봉창을 옮겨 어기여차 연파(煙波)를 거슬러 올라가니, 배 묶을 곳에 도리어 단풍든 가지 구나. 푸른 소라 천 점은 바다 서쪽 머리인데, 갈대꽃 한 언덕은 강 가운데 모래톱일세. 물 속에 비친 달 그림자를 치면서 가는 대로 흘러가니, 넓고 넓은 만 리 물결에 갈매기 따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서호(西湖)의 짙은 화장[濃抹] 서시(西施 중국의 미인)와도 같은데, 복사꽃 가는 비에 푸른 물결 일어나네. 흥청이며 돌아오니 물이 반 삿대나 불었는데, 날 저무니 죽지사(竹枝詞) 부를 사람 없네. 삼산(三山)은 금 자라 머리에 은은(隱隱)하고, 한강은 앵무주(鸚鵡洲)에 역력하네. 머뭇머뭇 기다려도 황학은 보이지 않는데, 날아드느니 한 쌍의 백구일세.”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호(濠)에 노는 데 반드시 혜시(惠施) 같아야 할까, 박달나무 베어서는 반드시 잔잔한 물에 두어야 할까. 아직은 서호(西湖) 향해 술을 싣고 노니는데 취해선 화정(和靖)의 매화 가지 꺾는다네. 청산은 수없이 강 머리로 나왔는데, 나무 빛은 저 멀리 창포 물가에 잇닿았네. 피리 불며 노래하기 마치지 못했는데 날 저물려 하니, 돌아와서 불현듯 한가히 조는 갈매기가 부러워라.” 하였다.
○ 성임의 시에 “가슴 가득 청광(淸狂)한 마음 어디에 풀어보리, 놀잇배 이리저리 저어 잔잔한 물결따라 가네. 중류에서 용의 읊는 소리 들어 보는데, 언덕 저 너머로 어부의 피리 소리 한 가락 들려 오누나. 외로운 돛단배 하늘 저 끝에 가물가물, 오호(五湖)의 연파(煙波)가 창주(滄洲) 신선 있는 곳에 잇닿았네. 표연(飄然)한 이내 종적 어데다 비길꼬, 흐르는 물따라 정처없이 가는 몸 갈매기와 같구나.” 하였다.

흥덕상화(興德賞花) 풍월정 시에, “누대 그림자 겹겹이 물 속에 비치는데 누대 앞 연꽃 아침 이슬에 씻겼어라. 난간에 옮겨 의지하여 풍경을 구경하니, 6월의 맑은 향기가 모시옷에 풍겨난다. 붉은 깃대 푸른 일산 수없이 많은데, 마주앉아 때로는 총채를 휘두르네. 서늘한 기운이 뼈에 스며 구슬 자리 차가운데, 날 저물자 가벼운 바람 비를 불어오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누대 아래 모난 연못 맑기도 하여, 물 위에 뜬 붉은 연꽃 바람 이슬에 씻겼네. 난간 의지하여 구경하다가 달 밝을 때까지 이르니, 서늘한 밤 기운에 가는 모시 가벼운 옷 걸쳤어라. 묘련(妙蓮)의 꽃 열매 많기도 한데, 이내 몸 부끄러워 꼬리 아끼는 사슴 같네. 하늘 향기 찾으려해도 그곳을 알지 못하는데, 물 기운 서려서 개인 날에도 비 되어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절집의 단청이 물 속에 비치는데, 연꽃 처음 피어 깨끗하게 씻은 것 같구나. 부슬부슬 붉은 안개 구슬 난간에 뿌리는데, 향기로운 바람이 불려 하여 모시 소매 나부끼네. 때로 벽통주(碧筒酒) 수없이 마시는데 대낮에 큰 소리 하다가는 파리채도 휘두르네. 중이 손을 붙들며 밝은 달 기다리자는데, 작은 누대 한밤에 서늘하기 비올 때 같네.”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연꽃 수없이 누대 아래 가득한데, 연줄기 무어라 미인 시켜 씻나. 맑은 향기 그윽하고 바람 살짝 이는데, 한 가닥 가을 기운 흰 모시인 양 시원하네. 술 취한데 술잔 계산 어찌 셈하리, 팔 잡고 글 논란할 제 파리채 휘두르는 것 잊었더라. 붉은 옷 떨어지기 전에 참으로 구경할 만한데, 내일 아침에 미친 비바람 어찌 할까나.”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한 못의 가을 물 맑아서 밑이 없는데, 만 줄기 부용화 이슬에 새로 씻겼네. 구름 비단인 양 널리 흩어져 눈앞에 있는데, 맑은 향기 은은히 모시옷에 풍기네. 늙은 중 재치 있어 오묘함 헤아리기 어려운데, 조용히 말하다가 흰털 총채 때로 짚네. 《연화경(蓮華經)》깊은 뜻 설명 아직 마치지 못했는데 만곡(萬斛)의 구슬알 한 번 비에 떨어지네.” 하였다.

종가관등(鍾街觀燈) 풍월정 시에, “서울 10리 천만 집에 거리 등불 곳곳마다 붉은 안개 감도네. 향 수레 보배 말 길 가득 지나가니, 취한 노래 노는 여자 얼굴이 꽃 같아라. 밝은 달 휘황하여 맑기가 대낮 같은데, 옆사람 오가는 것 작은 원숭이처럼 여기네. 인간 세상 즐거운 일 여기에 많나니, 음악 소리 끝나는 곳에 새벽녘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리누나.”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하늘 위의 항성(恒星)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황혼에 가는 곳마다 붉은 노을 감도누나. 긴 장대에 펄럭펄럭 채색 노끈 날리고, 구슬 나무에 번화하게 금속화(金粟花) 피었네. 산하(山河) 대지가 대낮으로 변했는데, 노랫소리 북소리 들끓으니 사람도 원숭이 같네. 소리 모아 다투어가며 부처 탄신 노래하니, 물결처럼 밀려 다니며 물시계의 물 다 떨어진 줄도 모르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장안 성중 백만 집에, 하룻밤 연등 밝기가 노을 같구나. 3천 세계의 산호수(珊瑚樹)요, 24다리에 부용꽃이네. 동쪽 거리 서쪽 저자에 밝기가 대낮 같으니 아이들 놀라 달림이 원숭이보다 빠르네. 별들마냥 난간에 흩어져 그대로 있는데, 황금 누대 앞에 새벽 물시계의 물 떨어지는 소리 재촉한다.”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수없는 등불 수없는 집에 밝혔는데 붉은 빛 서로 비쳐 흐르는 노을 같구나. 옥 노끈엔 나직하게 명월주(明月珠)가 드리웠고, 구슬 가지엔 번화하여 영롱한 꽃 피어 있네. 어둔 거리 다 비쳐 밝은 낮 이루니, 구경하는 이들 기뻐 뛰며 조급하기 원숭일세. 아홉 거리의 풍악소리 태평세월 즐기는데, 어느 사이 종소리 오경 누수를 알려온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태평한 기상 일천 집에 넘치는데, 일천 집 성곽이 붉은 노을보다 밝았어라. 거리 메운 대말[竹馬] 달리며 호령하는데, 일만의 금련화 늘어진 꽃송이 다투어 구경하네. 밝은 별인양 찬란하니 밤이 대낮 같고, 높은 장대 구름 속에 드니 원숭이도 못 오르리. 좋은 말안장을 맞대고 구경하기 절반도 못 되는데, 새벽 화살이 금문(金門)의 누수 끝내기 재촉하네.” 하였다.

입석조어(立石釣魚) 풍월정 시에, “낚싯대 들고 한가로이 와서 혼자 기대섰는데, 비온 뒤 더한 물 아직도 푸르게 담겨 있네. 부령초 움직이는 곳에 물결무늬 흩어지고, 고기들 때로 뛰고 다시 잠긴다. 잠깐 동안 낚은 고기 회도 치고 국도 끓이니, 사오는 술병에 가득 차 있어라. 인생을 마음가는 대로 사는 일 옛날부터 중히 여겼으니, 엄광(嚴光)이 어찌 공후(公侯)를 부러워했겠는가.”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긴 냇물 언덕을 씻으니 돌만이 우뚝 섰는데, 벼랑 아래 맑은 소에 마름풀 푸르렀다. 깃은 가볍고 줄은 가는데, 미끼 향기로워, 큰 고기 깊숙히 잠기고 작은 고기 뛰노네. 살찐 고기 잡아 아이들 불러 빨리 국 끓이라 재촉하고, 좋은 술 따라내니 봄기운 병에 가득하여라. 비낀 바람 가는 비에 취해서 돌아오지 않고, 강호에 내 성명 모두 다 맡겼노라.”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시냇가 괴이한 돌 사람처럼 섰는데, 가을물 영롱하여 차고 푸르게 비친다. 낚싯대 들고 찾아가서 푸른 풀 위에 앉으니, 백 척 은실에 금 잉어 번뜩이네. 가늘게 썰어 회를 치고 불에 익혀 국을 끓이니, 모래사장 위에 쌍옥병(雙玉甁) 자주 넘어지네. 취하자 다리 두드리며 창랑가(滄浪歌) 노래하니, 만고에 빛나는 이름은 있어 무엇하리.” 하였다.
○ 이승소의 시에, “큰 바위 우뚝우뚝 물 굽어보며 섰는데, 맑은 못물 백 이랑 유리처럼 푸르구나. 한가로이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싯터에 앉으니, 노는 고기 미끼를 희롱하여 잠겼다 뛰어 오른다. 금빛 양념 가는 회가 쌀가루 국보다 나으니, 좋은 술 가득가득 은술병 기울어지네. 흠뻑 취하여 머리 밝은 달빛 아래 누웠으니, 유령(劉伶)의 주성(酒聖) 이름 내가 아닐런가.
○ 성임의 시에, “천 년의 우뚝한 돌 언덕 곁에 섰는데, 일만 길 맑은 못물 푸르기도 하구나. 노는 사람 낚싯대 들고 이끼 낀 낚시터에 앉으니, 수없는 고기들 거울 속에 뛰노네. 금빛 양념 옥같은 회에 향기로운 국물 곁들이니, 죽엽주(竹葉酒) 봄 향기를 몇 병이나 기울였나. 인생이란 마음대로 지내는 그것이 즐거운 일, 삼공(三公)으로도 어초(漁樵)의 이름 바꾸지 않으리라.” 하였다.

남산팔영(南山八詠) 정이오(鄭以吾)의 시.
운횡북궐(雲橫北闕) “옥엽(玉葉)은 금궐(金闕)에 비끼고, 붉은 기와 푸른 하늘에 비치네. 뗑뗑 누수 재촉하는데, 북쪽에 상서로운 구름 일어나누나. 아름다운 기운 개인 날 서로 둘렀는데, 높은 기상 바라보니 다시 잇닿았네. 남산 같은 높은 복을 우리 임금께 드리려니, 조심조심 일만 년을 누리소서.” 하였다.
수창남강(水漲南江) “장마물 들판을 덮었는데, 저 강의 흰 기운 성곽에 잇닿았네. 모래판[平沙] 휩쓸어 가고 온갖 냇물 다 모았네. 나루터에서 언덕이 묻힌 줄 알겠는데, 저 하늘 가 가는 배 아득하게 바라본다. 저녁 때 비 개이고 둥근 달 떠오르니, 용용(溶溶)한 그 모습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암저유화(巖底幽花) “봄은 가고 꽃 이미 졌는데, 산중에 빽빽하게 녹음 무성하네. 물 건너니 그윽한 향기 풍기고, 가까운데 언덕 위 바위틈에 기이한 풀 있구나. 늦은 떨기 은일(隱逸)인 양 가련하고, 부질없는 꽃 흥망성쇠 애석하네. 이로부터 정(貞)하고 길(吉)하나니 하늘이 어찌 소나무 두었는가.” 하였다.
영상장송(嶺上長松) “집을 둘러 층층의 묏부리 솟아, 공중에 버텨 푸른 일산 되었네. 비가 개이니 구름 와서 희게 걸치고, 밤이 고요하니 달이 맑게 흥청 이네. 벽이 서 있은 지 천 년은 되어, 바람 따라 10리에 소리 들리누나. 이 모습 돌아보는 이 없고, 떠들썩 명예만 따라 경쟁하네.” 하였다.
삼춘답청(三春踏靑) 북쪽 바라보면 비록 성시(城市)이지만, 남쪽으로 오면 곧 동천(洞天)이라네. 꽃을 찾으니 바람이 맑게 불어오고, 풀은 밟으니 날씨가 따사롭다. 이런 모임 많은 사람 있으리, 고상한 정희 열선(列仙)보다 낫구나. □□□
구일등고(九日登高) 술병 차고 높은 데 오르는 날, 하늘도 맑은 9월초일세. 단풍 숲 먼 골짜기에 한창이고, 푸른 소나무 층층의 언덕 둘러쌌네. 남동(藍洞)은 시 짓던 곳이고, 용산(龍山)에 모자 떨어지던 때로다. 예나 이제나 취함은 같은 것, 마음에 맞으면 그 밖에 다른 무엇 구하리.
척헌관등(陟巘觀燈) 4월 8일 관등놀이 성대한데, 승평세월 이 얼마인가. 일만 초롱불 대낮같이 밝으니, 사방이 고요하고 티끌 하나 없네. 붉은 불길 천 길이나 서린 듯, 별 광채 북두칠성[北辰]으로 향했네. 밤을 새워도 구경 부족하여, 닭 우는 새벽에 이른 줄도 모른다네.
연계탁영(沿溪濯纓) 정절(靖節 도연명의 시호) 선생은 다만 물에 다다랐고, 종군(終軍)은 일찍이 긴 노끈 청했네. 냇물 맑으니 발 어이 씻으리, 티끌 떨고 세상 물정 잊겠네. 천천히 흐르니 시내에 이끼 끼어 미끄럽고, 굽이쳐 돌아오니 옥 물결 감도네. 떨어진 붉은 꽃 물에 떠 동구 밖으로 나가니, 봉래(蓬萊) 영주(瀛洲) 여긴가 하노라.”


 

[주D-001]손바닥이……그 모습 : 중국의 화산(華山)에는 선인장[掌]이 높이 솟았으므로, 시인이, “선인장 위에 비가 처음 개었네.” 하였다.
[주D-002]삼상(三上) : 마상(馬上)ㆍ침상(枕上)ㆍ측상(廁上)을 말한다. 송 나라 구양수(歐陽脩)의 귀전록(歸田錄)에 있는 말인데, 시를 생각하는 데에는 말 위, 베개 위, 측간 위의 세 가지가 가장 좋다는 말이다.
[주D-003]술……마셨네 : 술을 한 번 잘 마셨다는 뜻이다. 중국 송(宋)대의 문장가 소동파(蘇東坡)의 시 가운데 ‘신금시부일중지(臣今時復一中之)’라는 구가 보이는데, 그것은 옛날 조조(曹操)가 서막(徐邈)을 부르니, 서막이 술에 취하여, “지금 성인(聖人)에 맞았다.”[중(中)은 중독(中毒)이란 뜻] 하였다. 당시에 금주(禁酒)하였으므로 술꾼들이 청주를 성인이라 하고, 탁주는 현인이라는 은어(隱語)를 썼다는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4]동화(東華) : 당(唐) 나라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동화문(東華門)으로 들어갔다.
[주D-005]시구(詩句)를……넣었네 : 장돈(章惇)ㆍ채경(蔡京) 등이 소동파(蘇東坡)를 모함하되, 그가 지은 시(詩)를 지적하여 이것은 국가의 어느 일을 비방한 시요, 저것은 어느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일일이 지적하여 죄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오대시안(烏臺詩案)이라 한다.
[주D-006]그림자뿐인……하려나 : 소동파가 귀양갔을 때에 장돈(章惇)이 그곳의 주민에게, 소동파에게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였다.
[주D-007]옛날의……깨었다네 : 소동파가 귀양가 있는데, 이웃에 사는 어떤 노파가 보고 말하기를, “내한(內翰)의 어젯날 부귀가 일장춘몽이요.” 하였으므로, 동파는 그 노파를 춘몽파(春夢婆)라 하였다.
[주D-008]적벽강(赤壁江)……노닐꺼나 : 이상은 〈적벽부〉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주D-009]지금껏……오를 듯 :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지은 글을 보고 감탄하여 한 말인데, 여기서는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를 말한 것이다.
[주D-010]시령(詩令) : 여러 사람이 시를 지으면서 시간이라든지 기타 특수한 조건으로 제한하고 재촉하는 것을 말한다.
[주D-011]명당(明堂) : 풍수(風水)의 용어인데, 양택(陽宅)의 앞을 말한다.
[주D-012]남국의 강기(綱紀) : 《시경》 소아(小雅) 〈사월(四月)〉에, “도도한 강한이 남국의 강기가 되느니라.[滔滔江漢 南國之紀]” 하였다.
[주D-013]어찌하여……버렸다네 : 고려조 말기에는 왜구(倭寇)의 침략이 심하여, 서울에서 멀지 않은 강화도 해상에까지 자주 들어왔으며, 고려 공민왕 22년 6월에는 왜선(倭船)이 양천(陽川)을 지나 한양부(漢陽府) 즉 서울에도 들어와서 약탈하였는데, 시중에 보이는 왜구의 사실은 이 일을 말한다.
[주D-014]호연(浩然)한……뜻 : 육조(六朝) 시대의 종각(宗慤)이 소원을 말하기를, “긴 바람을 타고 만리의 물결을 헤치는 것이 소원이다.” 하였다.
[주D-015]풍악은……있소 : 이 구절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보인다.
[주D-016]무성한 숲……것이며 : 〈난정기〉에, “무성한 숲 긴 대나무[茂林脩竹]”라는 구절이 있다.
[주D-017]이난(二難) : 두 가지 얻기 어려운 것. 즉 어진 주인과 아름다운 손님을 말한다.
[주D-018]사미(四美) :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완상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을 말한다.
[주D-019]서호(西湖)를……비하겠는데 : 소동파의 〈서호시(西湖詩)〉에, “만일 서호를 서자(西子)에 비하면 넓은 화장과 진한 화장이[淡粧濃抹] 모두 서로 마땅하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서자(西子)는 옛날의 미인 서시(西施)를 말한 것이다.
[주D-020]병 가운데 경치[壺中景] : 한(漢) 나라 여남(汝南)에 한 노인이 약방[藥肆]을 내고 있었는데, 해가 저물면 병 속으로 들어갔다. 비장방(費長旁)이 몰래 그것을 보고 그에게 간청하여 함께 병 속에 들어가니, 별천지였다고 한다.
[주D-021]물 속에서 조는 것 :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하지장(賀知章)을 두고, “취해서 우물에 빠져 물 속에서 조네.” 하였다.
[주D-022]구장(鳩杖) : 비둘기 형상을 머리에 새긴 노인의 지팡이. 나라에서 공로 있는 늙은 신하에게 하사하였다. 여기에서는 한언국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23]성사(星槎) : 한(漢) 나라 때, 장건(張騫)이 황하(黃河)의 근원을 탐사(探査)하려고 뗏목에서 자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 견우(牽牛)ㆍ직녀(織女)를 보았다는 고사.
[주D-024]염예퇴(灩澦堆) : 사천성(四川省)의 구당협(瞿唐峽) 상류의 큰 암석이 있는 곳. 초(楚)ㆍ촉(蜀)의 문호이다.
[주D-025]정운(停雲) :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晉)의 도연명(陶淵明)이 〈정운〉이란 시의 자서(自序)에서 “정운은 친우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6]조각 구름 : 두보(杜甫)가 여러 사람과 야외(野外)에서 술을 마시고 놀다가 지은 시에, “머리 위에 한 조각 구름이 검으니, 응당 비[雨]가 시 쓰기를 재촉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27]기장(奇章) : 당(唐) 나라 정승 우승유(牛僧孺)를 기장공(奇章公)이라 하였는데, 그는 특히 돌을 좋아하여 많은 기암괴석을 모았다.
[주D-028]절월(節鉞) : 지방에 병권(兵權)을 맡아 나가는 신하에게 임금이 절(節)과 도끼[鉞]를 주어서 보낸다.
[주D-029]이곽(李郭) : 한(漢) 나라 때에 명사(名士)인 이응(李膺)과 곽태(郭泰)가 낙양에서 지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 전송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배를 타고 건너가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신선이라고 하였다. 《後漢書 高士傳》
[주D-030]금솥의……손 :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을 정승으로 삼으면서 “국에 간을 맞추는 데에 비유하면 너를 소금과 매실로 삼으리라.”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정에서 재상으로 정치하던 솜씨란 말이다.
[주D-031]무우(舞雩)와 호연(浩然)한 기운 : 증점(曾點)이 무우에 나가 바람 쏘이겠다 한 것은 《논어(論語)》에 있고, 호연한 기운을 길러야 한다는 말은 《맹자》에 보인다.
[주D-032]쾌재(快哉)를 부르던 초양왕(楚襄王)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초양왕(楚襄王)이 높은 대(臺)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여 ‘쾌하다[快哉]’ 하였다.” 한다.
[주D-033]냉연(冷然)하던 열자(列子) : 《장자(莊子)》에, “열자가 바람을 타고 공중에 노니니 냉연(冷然)히 좋았다.” 하였다.
[주D-034]아아(峩峩)하고 양양(洋洋)한 곡조 : 지음(知音)을 뜻하는 아양곡(峩洋曲)으로 춘추 시대 백아(백아)가 타고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의 곡조이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고산(高山)에 뜻을 두자 종자기가 “높고 높기가 마치 태산과 같도다![峩峩兮若泰山]” 하였고, 또 유수(流水)에 뜻을 두자 “넓고 넓기가 강하와 같도다.[洋洋兮若江河]”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列子 湯問》
[주D-035]백제(白帝)와 옥비(玉妃) : 백제와 옥비는 여기서는 눈[雪]의 신(神)을 지칭하는 듯하다.
[주D-036]악양루(岳陽樓 남창에 있는 누각)와 등왕각(滕王閣) : 강서성(江西省)에 있으며 당(唐) 나라 고조의 아들 원영(元嬰)이 세웠다.
[주D-037]금어(金魚) : 당 나라 때에 3품 이상의 벼슬아치와 특사(特賜)를 받은 사람만이 금어(金魚)를 찼다.
[주D-038]학창의(鶴氅衣 학의 털로 만든 옷) : 학의 털로 만든 것인데 도사(道士)가 입는 옷이다.
[주D-039]여의(如意) : 진(晉) 나라 왕개(王愷)와 석숭(石崇)이 서로 부유함을 자랑하는데, 하루는 왕개가 두어 자[尺]나 되는 산호수(珊瑚樹)를 석숭에게 자랑하자, 석숭이 방망이를 들고 때려부수고는 제 집에 있는 것을 가져다 보이는데 5, 6척이나 되는 것이 여러 나무였다.
[주D-040]주미(麈尾) : 육조(六朝) 시대에 명사(名士)들이 청담(淸談)을 할 때에 주미를 손에 들고 휘두르며 이야기하였으므로 주미의 털이 떨어졌다.
[주D-041]협욕(陜鄏) : 중국 주(周) 나라 떄의 지명인데,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있었다. 주 나라 성왕(成王)이 보정(寶鼎)을 두어 두고 장래를 점치던 곳이다.
[주D-042]상림(上林)과 자허(子虛) : 상림과 자허는 모두 한(漢) 나라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부(賦) 이름이다. 처음 상여가 〈자허부〉를 지어 제후들이 유렵(遊獵)하는 모습을 말하였는데, 뒤에 한 나라 무제(武帝)의 칭찬을 받고서는, 다시 〈상림부〉를 지어 천자의 유렵하는 모습을 글로 옮겼다. 두 글이 모두 명문(名文)으로 알려졌다.
[주D-043]방일(放逸) : 옛날 진(晉) 나라의 유량(庾亮)이 은호(殷浩) 등 친구들과 함께, 가을밤에 남루에 올라가 호탕ㆍ방일(放逸)한 회포를 말하고, 글로도 읊은 것을 말한다.
[주D-044]가시나무 화살 :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은 복숭아나무 활과 함께 마귀 쫓는 데에 사용하였다.
[주D-045]뽕나무로 만든 화살 :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뽕나무로 만든 활[桑弧]과 쑥대로 만든 화살[蓬矢]로 천지사방을 향하여 쏘았는데, 이는 장차 원대한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의미였다. 《禮記 內則》
[주D-046]봉호(蓬壺) : 봉래(蓬萊)와 방호(方壺)를 의미한 것으로 모두 신선이 산다는 곳이다.
[주D-047]금영(黔嬴) : 수신(水神)의 이름이다. 금뢰(黔雷)라고도 한다.
[주D-048]망서(望舒) : 달을 둥근 바퀴로 생각하고 그 바퀴를 몰고 가는 신(神)을 망서(望舒)라고 한다.
[주D-049]용고(龍膏) : 용의 기름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등유로 하면 특히 밝아 서광(瑞光)이라 이름한다.
[주D-050]신선의 집 : 옛날 중국에서 불도 불사의 신선으로 전하여 오는 왕자교(王子喬)와 적송자(赤松子)를 말하는데, 장수(長壽)하는 것을 교송지수(喬松之壽)라고도 한다.
[주D-051]중선(仲宣) : 위(魏) 나라 문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지금 호북성(湖北城) 당양현(當陽縣) 동남쪽 장수(漳水) 위에 중선루(仲宣樓)가 있는데, 왕찬이 여기에 올라서 〈중선루부〉를 지어 유명하다.
[주D-052]좌대충(左大沖) : 진(晉) 나라 문인 좌사(左思). 그는 학문이 높고, 글을 잘 지었는데, 또한 부(賦)에도 능하였다. 〈제도부(齊都賦)〉ㆍ〈삼도부(三都賦)〉 등은 모두 그가 지은 명문장이다.
[주D-053]서시(徐市) : 진시황(秦始皇) 때의 도사(道士)로서, 삼신산(三神山)에 가서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려면 동남(童男 순결한 남자아이) 5백 명과 동녀(童女 순결한 처녀) 5백 명을 데리고 가야 된다고 말하여, 진시황이 그대로 하여 주었는데, 그는 배를 타고 동해(지금의 발해)로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나라로 와서 영주하였다고도 한다.
[주D-054]무이궁(武夷宮) : 중국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산. 무이산은 옛부터 신선이 있는 곳이라 한다. 무이궁은 그 신선이 있는 궁이란 말이다.
[주D-055]석목(析木) : 석목은 하늘의 별의 위치이다. 그 위치는 중국 북경으로부터 우리나라까지에 해당된다.
[주D-056]월상(越裳) : 옛날 주(周) 나라 성왕(成王) 때에 남서방에 있는 월상국에서 이중 통역을 앞세우고 와서 조회하였다 한다.
[주D-057]마읍(馬邑) : 중국 산서성 북방 가에 있는 땅이다. 여기서는 단지 봉산(鳳山)과 상대해서 말한 것뿐이다.
[주D-058]봉산(鳳山) : 황해도 봉산인데, 중국 사신이 서울 오는 도중에 지난 길의 역정 중에서 기억나는 대로 쓴 것 같다.
[주D-059]오계자(吳季子) : 춘추 시대 오 나라의 제후 수몽(壽夢)이라는 사람의 넷째 아들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었다. 북방에 와서 여러 나라의 민요와 음악을 듣고서 각기 그 나라의 풍속과 국민성을 알았다고 한다.
[주D-060]천록(天祿) : 한(漢) 나라 시대에 서적을 모아서 쌓은 곳이었다. 양웅이 이 천록각에서 서적을 읽다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하려고 하자,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주D-061]중거(仲車) : 송(宋) 나라 사람이다. 시골에 들어앉아 있었던 선비로, 귀가 절벽이어서 남의 말을 듣지 못하므로 붓으로 써서 의사를 통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난 일은 가장 빨리 알았기 때문에 하나의 기적으로 여겼다.
[주D-062]선비 양성하는[造士] : 주 나라 학제(學制)의 하나인데, 학문이 우수한 이를 조사 또는 준사(俊士)로 하였으니, 대개 학문의 성취를 의미하는 말이다.
[주D-063]요재(翹材) : 수재(秀才)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漢) 나라에서 요재관(翹材館)을 짓고, 어진 이들을 초청하여 거처하게 한 일이 있었다.
[주D-064]등영(登瀛) :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올라간다는 의미의 말이다. 당(唐) 나라의 태종(太宗)이 글하는 이들을 좋아하여 문학관(文學館)을 짓고, 문장이 뛰어나고 어진 선비인 방현령(傍玄齡) 등 18학사를 초청하여 거처하게 하며 극진히 대우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등영주’라 하였다.
[주D-065]범가(范哥) 늙은이 : 송(宋) 나라 범중엄(范仲淹)을 말한다. 그는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선비는 마땅히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할 것이다.” 하였다.
[주D-066]등왕각(滕王閣) : 중국 강서성의 수부인 남창(南昌)에 있는 정자. 당(唐) 나라 고종(高宗)의 아들 원영(元嬰)이 강주 자사(江州刺史)로 있으면서 이 누각을 세웠는데 당시에 등왕에 봉해졌던 까닭으로 등왕각이라고 일컬음. 왕발(王勃)이 이곳에 이르러 〈등왕각서(滕王閣序)〉라는 글을 지어 문명을 떨쳤다.
[주D-067]나계(螺髻) : 나환(螺鬟). 머리를 묶어 올린 모습으로 산봉우리를 형용하는 말이다.
[주D-068]돌을 채찍질하여 : 진(秦) 나라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을 때에 진시황이 채찍으로 돌을 치면 그 돌이 날아가서 쌓을 자리에 놓였다 한다.
[주D-069]임금님……했다네 :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러 갔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만나 큰 소나무 아래로 몸을 피하고, 그 소나무가 공이 있다고 하여 대부(大夫)로 봉(封)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주D-070]치첩(雉堞) : 성(城) 쌓는 데 몇십 걸음 씩 가다가 직선 밖으로 조금씩 내어 쌓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치첩이라고 한다. 원래 성을 공격하는 사람이 성 밑에 바짝 들어오면 성 위에서 방어할 수 없으므로 이런 치첩을 만들어서 방어한 것이다.
[주D-071]악군(鄂君) : 춘추 시대 초왕(楚王)의 이종 아우 자석(子晳). 악군이 배를 타고 가는데, 월(越) 나라 여인이 노래로 애모하는 정을 전달하였다. 악군이 이에 비단 이불로 덮고 자리를 같이하였다고 한다.
[주D-072]영화(永和) : 진(晉) 나라 목제(穆帝)의 연호(年號)이다. 그 영화 9년 3월 3일에 왕희지(王羲之)가 당시의 명사(名士) 41명과 회계산 아래 난정(蘭亭)에 모여 놀았던 고사가 있고 아울러 〈난정기(蘭亭記)〉라는 글을 남겼다.
[주D-073]동평왕(東平王) : 한(漢) 나라 광무제의 여덟째 아들 유창(劉蒼)인데, 광무제가 집에 거처할 때에 무엇을 즐기느냐고 물으니,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제일 즐겁다고 대답하였다.
[주D-074]금구(金龜) : 옛날 중국인들의 패물의 하나이다. 당(唐) 나라의 문장가 하지장(賀之章)이 이 금구로 술을 바꾸어 이태백과 함께 술을 마신 사실이 있다.
[주D-075]하간(河澗) : 중국의 한 지방인데, 이 지방의 음악은 중국의 바른 음악으로 알려졌다. 여기서는 왕국의 정악(正樂)을 의미한다.
[주D-076]벽통(碧筒) :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정공이 연잎에다 술을 빚어 넣어 그 술이 익은 뒤에 연잎 줄기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으로 술을 빨아먹으며 그것을 벽통주라고 이름지었다.
[주D-077]양주(楊州) : 예전에 네 사람이 모여서 소원을 말하는데 한 사람은 10만 관(貫)의 돈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학(鶴)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고, 한 사람은 양주 자사(楊州刺史)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는데, 한 사람은 허리에 10만 관(貫)의 돈을 차고 학을 타고 양주 공중에 날아오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으니, 다른 세 사람의 것을 모두 겸한 것이다.
[주D-078]화산(華山) : 송(宋) 나라 반낭(潘閬)이 화산(華山)에 가서 시를 짓기를, “삼봉(三峯)이 하늘에 높이 솟은 것을 사랑하여 처들고 읊조리며 바라보느라고 나귀를 거꾸로 탔네.” 하였더니, 다른 이가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위야(魏野)가 시를 지어 주기를, “지금부터 화산의 도적(圖籍) 위에 반낭의 나귀 거꾸로 탄 것을 보태겠다.” 하였다.
[주D-079]교(郊)에서……제사드리고 : 예전에는 오직 천자라야만 교(郊)에서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다.
[주D-080]원위(元魏) : 중국 남북조(南北朝) 시대 북조(北朝)의 한 나라이다. 나라 이름은 위(魏)인데 황제의 성이 선비족(鮮卑族)의 척발씨(拓跋氏)였으므로 흔히들 척발위(拓跋魏)로 불렀는데 후에 성을 원(元)으로 고쳤으므로 원위라고도 한다.
[주D-081]소량(蕭梁) : 중국 남북조 시대 남조(南朝)의 한 나라인데 황제의 성이 소씨(蕭氏)였으므로 소량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D-082]등륙(滕六) : 눈을 내리게 하는 신이다. 등륙이 재주를 피운다는 말은 곧 눈이 왔다는 의미의 말이다.
[주D-083]섬중(剡中)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한 지명이다. 옛날 이곳에 대안도(戴安道)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의 친구인 왕자유(王子猶)가 눈오는 날 밤에 방문한 일이 있어 유명하다.
[주D-084]무릉(茂陵)의 가사 : 무릉(茂陵)은 한 나라 무제(武帝)의 능이다. 여기에서는 그의 능으로 그(무제)의 대명사로 쓴 것이다. 그는 〈추풍사(秋風詞)〉라는 노래를 지러 불렀다.
[주D-085]안인(安仁)의 부(賦) : 안인(安仁)은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자(字)이다. 그는 〈추회부(秋懷賦)〉를 지었다.
[주D-086]병 속에 들어간 것 : 한(漢) 나라 때 호공(壺公)이라는 신선이 병 하나를 벽에 걸어두고 밤이면 그 병 속으로 들어가는데 그 속에는 사람 생활에 필요한 것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D-087]쌍남금(雙南金) : 중국에서는 예전에 남쪽 지방에서 나는 금(金)이 품질이 좋아서 북방에서 나는 금보다 값이 배나 되었다. 그래서 보통금 두 몫 되는 남쪽 금이라고 하여 쌍남금이라고 말한다.
[주D-088]광산(匡山) : 중국 여산(廬山)을 말하는데, 옛날 은자(殷者) 광유(匡裕)선생이 이 여산에 숨어서 글을 읽으며 지냈기 때문에 여산을 광려산(匡廬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주D-089]예상곡(霓裳曲)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꿈에 월궁(月宮)에 올라가서 들은 음악을 기억하여, 그 곡조를 인간 세상에 전했다는데, 그것을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이라 한다.
[주D-090]삼상(參商) : 두 별의 이름이다. 삼성(參星)의 위치는 서쪽이요, 상성(商星)의 위치는 그와 반대쪽에 있으므로 이 두 별은 함께 보지 못하다. 따라서 사람이 떨어져 서로 만나지 못함을 비겨 말한다.
[주D-091]양관곡(陽關曲) : 예전 중국 사람들은 이별하는 자리에서 양관곡(陽關曲)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한다. 그 노래는 세 편(篇)으로 되었다.
[주D-092]원안(袁安) : 동한(東漢) 때에 어느 겨울날 눈이 많이 왔는데, 원안이라는 사람이 먹을 것도 없으면서 3일 동안이나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는 고사.
[주D-093]설당(雪堂) : 소동파(蘇東坡)가 황주(黃州)에서 조그만 당(堂)을 짓고 그 네 벽에다 설경(雪景)을 그렸으므로 설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소동파는 눈오는 날 여러 친구와 눈을 제목으로 한시를 짓는데 보통 눈에 대해서 쓰는 문자나 글자는 통 쓰지 아니하고 짓는다는 법칙을 세우고 지은 일이 있다.
[주D-094]갈고(羯鼓) : 당(唐) 나라 현종(玄宗)이 갈고라는 서방 민족 갈족의 악기를 잘 쳤다. 어느 이른 봄 아직도 꽃이 활짝 피지 아니한 때에 후원 화악루(花萼樓)에서 갈고로 한 곡조 쳤더니 후원의 꽃들이 일시에 활짝 피었다 한다.
[주D-095]뇌문고(雷門鼓) : 춘추 시대 월(越) 나라에 있던 북인데, 그 소리가 1백 리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주D-096]화정(和靖) : 화정은 송(宋) 나라의 처사 임포(林逋)의 시호이다. 그는 항주(杭州) 서호에 살면서 황제가 벼슬시키려 하여도 거절하고 일생을 깨끗하게 살았는데, 그는 매화를 매우 사랑하여 자기의 아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의 매화시는 유명하다.
[주D-097]유령(劉伶) : 진(晉) 나라 사람으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그는 술을 잘 마셔 한 자리에서 한 섬 술을 마시고 다섯 말[斗]로 해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덕송(酒德頌)〉을 지어서 술을 찬미하였다.
[주D-098]종군(終軍) : 한(漢) 나라 사람이다. 18세 때에 남월(南越 지금의 광동)왕이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나라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라고 하였는데, 종군(從軍)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긴 노끈 하나를 주면 가지고 가서 남월왕의 목을 얽어 가지고 오겠다.”고 청하였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
 비고편 - 동국여지비고 제2편
한성부(漢城府)



【건치연혁】원래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는데,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취하여 성을 쌓고,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남한산(南漢山)으로부터 옮겨 도읍하였다. 1백 5년을 지나 개로왕(蓋鹵王)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이 와서 도성을 포위하니 개로왕이 성을 나가 달아나다가 해를 당하고, 아들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후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한산에 이르러 국경을 설정하고, 18년에 북한산주(北韓山州) 군주(軍主)를 임명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치고, 고려조 초기에 또 양주(楊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초에 10도(道)를 정하고 12주(州)의 절도사(節度使)를 둘 때에, 좌신책군(左神策軍)이라 하여, 해주(海州)와 더불어 좌우 2보(輔)를 삼아서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으며, 현종(顯宗) 때에는 안무사(安撫使)로 고쳤다가, 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여 양광도(楊廣島)에 예속시켰다. 문종(文宗) 때에 승격시켜 남경 유수관(南京留守官)으로 삼아, 유수 1명ㆍ부유수 1명ㆍ판관(判官) 1명을 두고 이웃 고을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숙종(肅宗) 때에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의하여,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도성(都城)을 건립할 만하다.”고 하면서 남경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고, 일자(日者 천문관)ㆍ문상(文象)이 따라서 주장하니, 임금이 친히 와서 살펴보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을 명하여 그 공사를 감독하게 해서 5년 만에 준공하였다. 충렬왕 때는 한양부(漢陽府)로 고치고 윤(尹)을 두었으며, 공양왕 때에는 경기좌도(京畿左道)에 예속시켰다. 우리 태조(太祖) 3년에, 도읍을 이곳에 정하고 한성부(漢城府)로 고쳐서, 경도(京都)의 구장(口帳 호구장부)ㆍ시전(市廛)ㆍ가사(家舍)ㆍ전토ㆍ사산(四山)ㆍ도로ㆍ교량ㆍ구거(溝渠)ㆍ포흠(逋欠)ㆍ부채(負債)ㆍ투구(鬪毆 쟁투와 구타 상해)ㆍ주순(晝巡)ㆍ검시(檢屍)ㆍ거량고실(車輛故失)ㆍ우마낙계(牛馬烙契) 등의 일을 맡게 하여, 판부사(判府事)ㆍ윤ㆍ소윤(小尹)ㆍ판관ㆍ참사(參事) 등의 관직을 두었다. 예종조(睿宗朝)에 판부사를 판윤(判尹)으로 고치고, 윤을 좌ㆍ우윤이라 하고 소윤을 서윤(庶尹)이라고 하였다. 영종 조(英宗朝)에 참군을 고쳐 주부(主簿)로 하였는데 그 밑에 5부(部)가 있었다.
【관원】 판윤 1인, 정2품. 좌윤ㆍ우윤 각 1인, 모두 종2품. 서윤 1인, 종4품. 판관 1인, 종 5품. 주1부 2인, 종6품.
【이속】 서리(書吏) 52인. 서사(書寫) 1명. 서원(書員) 11인. 사령(使令) 30인.
【속사오부】 중부(中部) 정사가 예전에는 본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는데, 후에 서부(西部) 양생방(養生坊)으로 옮겼다. 개국 초기에 5부를 설치하여 관내 방리(坊里) 거주인들의 불법(不法) 및 교량ㆍ도로ㆍ반화(頒火)ㆍ금화(禁火)ㆍ이문경수(里門警守)ㆍ집터 측량[家址打量]ㆍ인시 검험(人屍檢驗) 등의 일을 맡게 하였다. ○ 영(令) 종5품 1인ㆍ도사(都事) 종9품 1인과 이속으로 서원 4인ㆍ사령 8인ㆍ대청직(大廳直) 1인ㆍ군사 2인을 두었다. 관장(管掌)하는 일 및 관원은 다른 부도 같으며 관할하는 구역은 8방(坊)인데, 부방조(部坊條)에 자세하다.
동부(東部) 본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남부(南部) 예전에는 본부의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는데, 후에 그 본부 훈도방(薰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1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서부(西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여경방(餘慶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8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북부(北部) 예전에는 중부 징청방에 있었는데 후에 본부의 관광방(觀光坊)으로 옮겼으며, 또 그 본부의 안국방(安國坊)으로 옮겼다. 관할하는 구역은 10방인데 부방조에 자세하다.
【관부】중부 징청방은 이조(吏曹) 아래 남쪽에 있는데 개국 초기에 세웠다.
【강역】동쪽으로 양주목(楊州牧)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과천현(果川縣) 경계까지 10리,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경계까지 10리, 북쪽으로 양주목 경계까지 10리이다.
【군명】 남경ㆍ한양ㆍ남평양(南平壤)ㆍ북한산ㆍ양주ㆍ광릉(廣陵).
【부방】무릇 경외(京外)에는 5호(戶)로 1통(統)을 삼아서 통마다 통주(統主)가 있으며, 외방에는 5통마다 이정(里正)이 있고, 면(面)마다 권농관(勸農官)이 있는데, 같은 한 구역이라도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면 적당히 증가한다. 서울에는 방리(坊里)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 이조 내계(吏曹內契)ㆍ한성부 내계ㆍ한성부 후동계(後洞契)ㆍ호조 내계ㆍ호조 후문계(後門契)ㆍ고례조계(古禮曹契)ㆍ판정동계(板井洞契)ㆍ전함사계(典艦司契)ㆍ변종견계(卞宗堅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비변사계(備邊司契) ○ 이상은 훈국 우영(訓局右營)에 속한다. 수진방(壽進坊) 수진궁 내계(壽進宮內契)ㆍ수진궁 행랑계(行廊契)ㆍ간동계(磵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제용감 하계(濟用監下契)ㆍ사복시 전계(司僕寺前契)ㆍ사복시 천변계(川邊契)ㆍ개정동계(蓋井洞契)ㆍ상사동계(相思洞契)ㆍ청성군계(淸城君契)ㆍ종현병문계(鍾縣屛門契)ㆍ상어물전계(上魚物廛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상미전계(上米廛契). ○ 훈국 후영(後營)에 속한다.
견평방(堅平坊) 의금부 내계ㆍ의금부 후동계(後洞契)ㆍ전의감 동계(典醫監洞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중어물전 일패계(中魚物廛一牌契)ㆍ중어물전 이패계. ○ 이상은 어영청중영(御營廳中營)에 속한다.
장통방(長通坊) 수표교 동변계(水標橋東邊契)ㆍ비파동계(琵琶洞契)ㆍ함평 주인계(咸平主人契)ㆍ광주(廣州) 주인계ㆍ석정동계(石井洞契)ㆍ조세홍계(曹世弘契)ㆍ박계손계(朴戒孫契)ㆍ방종계(方宗契)ㆍ입전계(笠廛契)ㆍ창전계(昌廛契)ㆍ창전 행랑계ㆍ중로계(中路契)ㆍ의성정계(義城正契)ㆍ분전(粉廛) 중로계ㆍ하순원계(河順元契)ㆍ내종계(乃宗契)ㆍ이전계(履廛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禁衛營前營)에 속한다. ○ 백립전계(百笠廛契)ㆍ정만석계(丁萬石契)ㆍ지전계(紙廛契)ㆍ장만호계(張萬戶契)ㆍ장구담계(張九淡契)ㆍ청주 주인계(淸州主人契)ㆍ서천수계(徐千守契)ㆍ염전계(鹽廛契)ㆍ신형손계(辛亨孫契)ㆍ박기수계(朴己守契)ㆍ관자동계(貫子洞契)ㆍ유사익계(兪士益契)ㆍ원주 주인계(原州主人契)ㆍ흑립전계(黑笠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서린방(瑞麟坊) 포도청계(捕盜廳契)ㆍ일영대계(日影臺契)ㆍ고색정계(古索井契)ㆍ계아전계(鷄兒廛契)ㆍ사기전계(砂器廛契)ㆍ박정계(朴井契)ㆍ전옥내계(典獄內契)ㆍ전옥후동계(典獄後同契)ㆍ종루서변계(鐘樓西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관인방(寬仁坊) 대사동 일패계(大寺洞一牌契)ㆍ대사동 이패계ㆍ대사동 삼패계ㆍ대사동 사패계ㆍ충훈부(忠勳府) 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경행방(慶幸坊) 시전계(市廛契)ㆍ한원서변계(漢源西邊契)ㆍ한원동변계ㆍ궁내계(宮內契)ㆍ오순덕계(吳順德契)ㆍ사거리계(四巨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정선방(貞善坊) 비로전계(非老廛契)ㆍ임기손계(林己孫契)ㆍ김만년계(金萬年契)ㆍ수문동계(水門洞契)ㆍ고병조계(古兵曹契)ㆍ돈녕부 상계(敦寧府上契)ㆍ돈녕부 하계ㆍ파자전계(把子廛契)ㆍ하미전계(下米廛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대묘동계(大廟洞契)ㆍ의전일계(衣廛一契)ㆍ의전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하는데,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는 소의 먹이 쌀겨[糟糠] 18석을 거두게 하였다. 숙종조(肅宗朝)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고, 돈으로 대신내면 4냥 2전 7푼이 되는데, 매 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東部)
숭교방(崇敎坊) 성균관계(成均館契)ㆍ숭교 일계(崇敎一契).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현관(賢關)을 우대하기 때문에, 순라졸과 금부 이속이 감히 반촌(泮村 성균관이 있는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연화방(蓮花坊) 연화동계ㆍ북 이계(北二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종묘동계(宗廟洞契)ㆍ연 일계(連一契)ㆍ연 삼계ㆍ금중계(金衆契)ㆍ중로계(中路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천변계(川邊契)ㆍ분륙계(分六契)ㆍ연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건덕방(建德坊) 어의동계(於義洞契)ㆍ건덕방계.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창선방(彰善坊) 창선방계ㆍ동학동계(東學洞契). ○ 이상은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창선 이리계(彰善二里契)ㆍ동학내계(東學內契)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방내(坊內)에 오사인동(五舍人洞)이 있으니, 곧 유자빈(柳自濱)이 살던 곳이다. 자빈의 아우 자한(自漢)ㆍ자분(自汾)과 그 손아래 매부 김겸광(金謙光)ㆍ신중거(辛仲琚)가 모두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었기 때문에 인하여 동명(洞名)이 된 것이다.
숭신방(崇信坊) 숭신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이하는 성 밖에 속한다.
인창방(仁昌坊) 인창방계. ○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제기리계(祭基里契)ㆍ전농리계(典農里契)ㆍ벌리계(伐里契)ㆍ중량동계(中梁洞契)ㆍ능동계(陵洞契)ㆍ가오리계(加五里契)ㆍ장위리계(長位里契)ㆍ안암동계(安岩洞契)ㆍ우이계(牛耳契)ㆍ미아리계(彌阿里契)ㆍ청량리계(淸涼里契)ㆍ수유촌계(水踰村契). ○ 이상은 어영청 전영에 속한다. ○ 왕십리역계(往十里驛契). ○ 어영청 좌영에 속한다. ○ 신설계(新設契)ㆍ답십리계(踏十里契)ㆍ마장리계(馬場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왕십리 사계(私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예전 사축서(司畜署)에서 기르던 고양(羔羊)의 먹이 쌀겨[糟糠] 값 6냥을 거둔다.
남부(南部)
낙선방(樂善坊) 금위영창계(禁衛營倉契). ○ 금위영 전영(前營)에 속한다. ○ 와유두리계(瓦有豆里契). ○ 어영청 우영(右營)에 속한다. 진소리계(眞梳里契)ㆍ왜관동계(倭館洞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성명방(誠明坊) 석교 상계(石橋上契)ㆍ석교 하계.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연성위계(蓮城尉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훈도방(薰陶坊) 주자동계(鑄字洞契)ㆍ정승계(政丞契)ㆍ박정계(朴井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죽전동계(竹廛洞契)ㆍ혜민서계(惠民署契)ㆍ하돌지방계(下乭之坊契)ㆍ묵정동계(墨井洞契)ㆍ이현계(泥峴契)ㆍ저전동계(苧廛洞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태평방(太平坊) 한수견계(韓守堅契)ㆍ보십내계(甫十內契)ㆍ보십외계ㆍ구리현계(仇里峴契)ㆍ선산계(善山契)ㆍ하홍문계(下紅門契)ㆍ수하동 허허병문계(水下洞虛虛屛門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광통방(廣通坊) 동행랑계(東行廊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군기시 월변계(軍器寺越邊契). ○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모전계(毛廛契)ㆍ손복동계(孫福洞契)ㆍ대다방 북변계(大多坊北邊契)ㆍ소다방 남변계(小多坊南邊契)ㆍ소다방 북변계ㆍ옹대리문계(瓮垈里門契)ㆍ성천계(成川契)ㆍ서행랑 상계(西行廊上契)ㆍ서행랑 하계ㆍ소천변계(小川邊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방 안에 보은단동(報恩緞洞)이 있으니 곧 역관(譯官) 홍순언(洪純彦)이 살던 곳이다. 순언은 호협(豪俠)하고 의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명(明) 나라 서울에 가서 일세의 미인을 보고자 하여 수백 냥의 은을 가지고 기생촌[花房]으로 가서 제일가는 명기(名妓)를 찾았는데, 한 여자가 있어 생김생김이 절세가인인데 소복(素服)을 입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였다. 괴이하게 여겨서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첩은 원래 사천(四川) 사람이며 아버지가 서울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주사(主事)에 이르렀는데 객중(客中)에 연이어 부모님을 여의고, 또 한 형 마저 잃어서 세 상사를 지금 권장(權葬 임시 매장)하여 두었는데, 고향으로 모셔다 장사를 치를 길이 없어서 부득이 화류계에 나와 몸을 팔아서라도 장사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순언이 묻기를, “일찍이 다른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하니, 대답하기를, “오늘 처음 나왔기 때문에 아직 몸을 더럽히지는 않았습니다.” 하였다. 순언이 가엾게 여겨서 곧 가지고 갔던 은 천 냥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이면 영구를 모시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몸을 깨끗이 가지고 돌아가 장사를 지낸 다음 사족(士族) 가문으로 잘 시집가거라. 내가 만일 네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것을 준다면 의사(義士)가 아니다.” 하고 드디어 결의(結義)하여 누이동생을 삼고 돌아오니, 그 여인이 은혜에 감명하여 뼛속 깊이 새기며 순언의 성명을 물어서 알고 인하여 은을 팔아서 반구(返柩)하여 장사지냈다.
그 후 시집가서 상서(尙書) 석성(石星)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은혜를 갚고자 하여 해마다 자신이 누에치고 손수 비단을 짰는데, 비단 첫 머리에는 보은단(報恩緞)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았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하고 우리나라 사신이 갈 때마다 반드시 순언이 오는가를 탐문하였다. 순언이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를 따라 명 나라 서울에 가게 되었을 때, 석 상서가 그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이었는데 곧 그가 맡아하는 일이었으므로 쉽게 일을 다하였다. 하루는 석 상서가 순언을 초청하여 집으로 가서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 대접하였는데, 한 성장(盛粧)한 부인이 뜰 아래에 나와서 배례하고 이어 당 위로 올라와서 잔을 드리는 것이었다. 순언이 깜짝 놀라서 달아나 피하려 하니, 시랑이 말리며 잔을 받게 하고 이어 자세하게 사실의 전말을 말하여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강을 건너려 하는데 사람이 와서 시랑 부인의 친필 서신과 예단(禮單)ㆍ보은단 수십 필 및 기타 진귀한 물품을 수없이 받들어 드리며, 순언이 안 받을까 염려하여 강가에 두고서 가니 순언이 부득이 가지고 돌아왔으며, 일을 성공한 공으로 광국훈공(光國勳功)에 책정되어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지중추(知中樞) 벼슬을 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사실로 인하여 순언이 살던 마을을 이름해서 보은단동(報恩緞洞)이라 하였다.
후에 임진왜란 때에는 석성이 병부상서[本兵]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전후 주청(奏請)하는 병기와 군량 등을 힘써 주장하여 극진히 돌보아주어서 우리나라의 재조(再造)의 공적을 이루게 하였는데, 이것은 그 부인의 내조(內助)의 공에 힘입은 바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잘못 전하여 미장동(美墻洞)이라 한다.

명례방(明禮坊) 장악원 내계(掌樂院內契). ○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명례동계ㆍ부계(部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남산동(南山洞)에는 훈국(訓局) 마병(馬兵)이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호현방(好賢坊) 호현동계ㆍ장흥동계(長興洞契)ㆍ송현계(松峴契)ㆍ의산위계(宜山尉契)ㆍ본궁내계(本宮內契)ㆍ소공동계(小公洞契)ㆍ부월변계(部越邊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서소문 월변계.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이간병문계(二間屛門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명철방(明哲坊) 수구문내계(水口門內契)ㆍ어영창계(御營倉契).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남소문동계(南小門洞契)ㆍ쌍이문계(雙里門契)ㆍ청녕위계(靑寧尉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둔지방(屯之坊) 서빙고 일계ㆍ서빙고 이계ㆍ지어둔계(之於屯契)ㆍ미서계(尾署契)ㆍ이태원계(梨泰院契)ㆍ동파계(東坡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전생서 내계(典牲署內契)ㆍ전생서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두모방(豆毛坊) 중촌리계(中村里契)ㆍ신당리계(新堂里契). ○ 이상은 어영청 중영에 속한다. ○ 전관(箭串) 일계 ㆍ전관 이계. ○ 이상은 어영청 우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수철리계(水鐵里契) ㆍ두모포계(豆毛浦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한강방(漢江坊) 몽뢰정계(夢賚亭契)ㆍ한강계ㆍ주성리계(鑄成里契). ○ 이상은 어영청 후영에 속한다. ○ 방내 백성들에게서 전생서(典牲署)의 쌀겨 25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西部)
여경방(餘慶坊) 신문내계(新門內契). ○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장생동계(長生洞契)ㆍ두석동계(豆錫洞契)ㆍ선공감 내계(繕工監內契)ㆍ해풍군계(海豐君契)ㆍ동령동계(東嶺洞契)ㆍ서학동계(西學洞契)ㆍ서학 내계ㆍ모전계(毛廛契)ㆍ도자동계(刀子洞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적선방(積善坊) 야주현계(夜珠峴契)ㆍ당피동계(唐皮洞契)ㆍ필전계(筆廛契)ㆍ공조후동계(工曹後洞契)ㆍ사역원계(司譯院契)ㆍ율학청계(律學廳契)ㆍ도렴동계(都染洞契)ㆍ사헌부 내계(司憲府內契)ㆍ병조 내계(兵曹內契)ㆍ형조 내계(刑曹內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수성궁월변계(壽城宮越邊契)ㆍ사온동계(司醞洞契)ㆍ중추부 내계(中樞府內契)ㆍ예조 내계(禮曹內契)ㆍ종각계(鐘閣契)ㆍ십자각계(十字閣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인달방(仁達坊) 분선공감 내계(分繕工監內契)ㆍ사직동계(社稷洞契)ㆍ내수사계(內需司契)ㆍ내행랑계(內行廊契)ㆍ내섬시 내계(內贍寺內契)ㆍ봉상시계(奉常寺契). ○ 이상은 훈국(訓局) 전영(前營)에 속한다. ○ 수성궁 내계(壽城宮內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남사고(南師古)가 일찍이,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태평의 군왕이 그 방에서 나리라.” 하더니, 선조가 사직동 잠저(潛邸)에서부터 들어가 대통(大統 왕실의 종통)을 계승(繼承)하였다.
양생방(養生坊) 창동계(倉洞契)ㆍ송현계(松峴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태평관계(太平館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황화방(皇華坊) 서소문 내계(西小門內契)ㆍ취현동계(聚賢洞契)ㆍ소정동계(小貞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처음에는 황화방 북쪽 언덕에 있었다. ○ 태종 9년에 양주(楊州)로 옮겨 모셨는데, 지금도 이곳을 정릉동이라고 한다.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ㆍ경영고계(京營庫契). ○ 이상은 훈국 전영에 속한다. ○ 조판부사계(曹判府事契)ㆍ수근전계(水芹田契)ㆍ노첨정계(盧僉正契)ㆍ권정승계(權政丞契)ㆍ청성군계(靑城君契 ).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 ○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인장리계(茵匠里契). ○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차자리계(車子里契). ○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하는 모두 성 밖이다.
반석방(盤石坊) 사거리계(四巨里契)ㆍ도저동계(桃楮洞契)ㆍ석교리계(石橋里契)ㆍ조전계(租廛契)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연지계(蓮池契)ㆍ약전계(藥田契). ○ 이상은 금위영 중영에 속한다. ○ 고순청계(古巡廳契)ㆍ서소문 외계.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미전 상계(米廛上契)ㆍ미전 하계ㆍ성삭주계(成朔州契)ㆍ유판부사계(兪判府事契). ○ 이상은 금위영 후영에 속한다. ○ 이정암(李廷馣)ㆍ정향(廷馨)ㆍ정유(廷)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을 지냈으므로 그들이 거주하던 곳을 한림동이라 한다.
용산방(龍山坊) 마포계(麻浦契). ○ 훈국 우영에 속한다. ○ 공덕리계(孔德里契)ㆍ토정리계(土亭里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옹리 상계(瓮里上契)ㆍ옹리 하계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촌리계(新村里契)ㆍ사촌리계(沙村里契). ○ 이상은 금위영 전영에 속한다. ○ 청파 일계(靑坡一契)ㆍ청파 이계ㆍ청파 삼계ㆍ청파 사계ㆍ청파 오계. ○ 이상은 금위영 좌영에 속한다. ○ 만리창계(萬里倉契)ㆍ동문외계(東門外契)ㆍ어영청창계(御營廳倉契)ㆍ진휼청계(賑恤廳契)ㆍ신창계(新倉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탄항계(灘項契)ㆍ곽계(槨契)ㆍ도화동계(桃花洞契). ○ 이상은 금위영 우영에 속한다. ○ 윤민신(尹民新)의 집이 청파 작작동(灼灼洞)에 있었는데, 다섯 아들을 공부시켜서 5년 만에 모두 대과 급제(大科及第)하였으므로, 지금도 오자등과(五子登科) 터로 부른다. ○ 곽계는 귀후서(歸厚署)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지금도 신당(神堂)이 있으며, 지금 훈국의 별영(別營)이 역시 곽계 안에 있다. ○ 정종(正宗)이 읍청루(挹淸樓)에 나아가 마을 이름을 물으므로 사실대로 아뢰니, 하교하기를, “산 사람이 사는데, 어찌 관곽(棺槨)으로 이름을 하겠느냐.” 하면서, 도화동 외계로 고쳤다.
서강방(西江坊) 흑석리계(黑石里契)ㆍ율도계(栗島契).ㆍ신정리계(新井里契) ○ 이상은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ㆍ구수철리계ㆍ창전리계(倉前里契)ㆍ하중리계(下中里契)ㆍ수일리계(水溢里契)ㆍ당인리계(唐人里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서 전생서 쌀겨 56석을 거두었는데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3두로 하고 돈으로 수봉(收捧)한다.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사재감계(司宰監契). ○ 훈국 좌영에 속한다.
의통방(義通坊) 옥정리계(玉井里契)ㆍ후동계(後洞契). ○ 이상은 훈국 좌영에 속한다. ○ 영추문계(迎秋門契). ○ 훈국 중영에 속한다.
준수방(俊秀坊) 준수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관광방(觀光坊) 관광방계. ○ 훈국 중영에 속한다. ○ 중학 내계(中學內契)ㆍ의정부 내계(議政府內契). ○ 이상은 훈국 우영에 속한다.
진장방(鎭長坊) 진장방계. ○ 훈국 우영에 속한다.
광화방(廣化坊) 광화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양덕방(陽德坊) 양덕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가회방(嘉會坊) 가회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안국방(安國坊) 안국방계. ○ 훈국 후영에 속한다.
성외(城外) 합정리계(合井里契)ㆍ망원정 일계(望遠亭一契)ㆍ망원정 이계ㆍ여의도계(汝矣島契)ㆍ세교리계(細橋里契). ○ 이상은 훈국(訓局) 우영(右營)에 속한다. ○ 아현계(阿峴契)ㆍ연희궁계(延禧宮契)ㆍ성산리계(城山里契)ㆍ가좌동계(加佐洞契)ㆍ견산리계(甄山里契)ㆍ신사동계(新寺洞契)ㆍ갈고개계(葛古介契)ㆍ역계(驛契)ㆍ사계(私契)ㆍ불광리계(佛光里契)ㆍ수암리계(水巖里契)ㆍ수생리계(水生里契)ㆍ지서계(紙署契)ㆍ경리청계(經理廳契)ㆍ선혜청계(宣惠廳契)ㆍ양철리계(梁哲里契)ㆍ구리계(舊里契)ㆍ말흘산계(末訖山契)ㆍ홍제원계(弘濟院契). ○ 이상은 훈국 후영에 속한다. ○ 가좌동에 훈국 장막이 있으니 군사들의 무예 시험하던 곳이다. ○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이 수생리에 살았는데, 서재를 넓히고 학문을 강의하였다. 드디어 마을이름을 고쳐서, 물이촌(勿移村)이라 하고, 기문을 지어서 생각하는 바를 표시하였다. ○ 삼남약환계(三南藥丸契)ㆍ해서총약계(海西銃藥契)ㆍ폭백계(曝白契)ㆍ훈조계(燻造契)는 총융청(摠戎廳) 군영 밑으로 옮겨 설치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이 의지하여 사는 바탕을 삼게 하였다. ○ 방내의 백성들에게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의 쌀겨 값이 3냥 3전 3푼이다.
【성씨】 본부 한(韓) 시조는 고려조 고종(高宗) 때의 검교 태자첨사(檢校 太子詹事) 원서(元諝)이다. ○ 또 한 파는 고려조 고종 때의 판사복사(判司僕事) 균(均)이다. ○ 조(趙) 시조는 첨의중서(僉議中書) 지수(之壽)이다. ○ 또 한 파는 전중내급사동정(殿中內給事同正) 원경(元卿)이다. 민ㆍ신(申), 애(艾) 촌성(村姓)이다. 함(咸)ㆍ박(朴)ㆍ홍(洪)ㆍ부(夫)ㆍ최(崔)ㆍ정(鄭) 모두 내성(來姓)이다. ○ 무릇 다른 주에서 와서 사는 자는 성 아래에 그 본적만을 주로 적어둔다. 이(李)ㆍ김(金)ㆍ윤(尹)ㆍ권(權)ㆍ오(吳)ㆍ강(姜)ㆍ허(許)ㆍ장(張)ㆍ임(任)ㆍ서(徐)ㆍ유(兪)ㆍ원(元)ㆍ황(黃)ㆍ조(曹)ㆍ임(林)ㆍ우(禹)ㆍ노(盧)ㆍ정(丁)ㆍ배(裵)ㆍ맹(孟)ㆍ변(卞)ㆍ백(白)ㆍ전(全)ㆍ엄(嚴)ㆍ전(田)ㆍ문(文)ㆍ진(陳)ㆍ길(吉)ㆍ주(周)ㆍ염(廉)ㆍ유(劉)ㆍ양(楊)ㆍ차(車)ㆍ명(明)ㆍ석(石)ㆍ기(起)ㆍ천(千)ㆍ영(靈) 속성(續姓)이다.
【호구】세종(世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천 9백 21호에, 인구가 10만 3천 3백 28명이고, 관령(管領)이 46명이며, 성 밑 10리 둘레의 호수는 1천 6백 1호에, 인구가 6천 44명이고, 관령이 15명이었다. 선조(宣祖) 39년에는 5부의 원래 호수가 1만 2천 9백 65호였다, 인조 26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66호에 인구는 9만 5천 5백 69명이었다. 효종(孝宗) 8년에는 5부의 호수가 1만 5천 7백 60호에 인구가 8만 5백 72명이었다. 현종(顯宗) 10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3천 8백 99호에 인구가 19만 4천 30명이었다. 숙종(肅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2천 7백 40호에 인구가 16만 7천 4백 6명이었다. ○ 43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8천 3백 56호에, 인구가 18만 5천 8백 72명이었다. 경종(景宗) 4년에는 5부의 호수가 2만 5천 8백 44호에 인구가 14만 7천 7백 72명이었다. 영종(英宗) 2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2천 7백 47호에, 인구가 18만 8천 5백 97명이었다. ○ 29년에는 5부의 호수가 3만 4천 9백 53호에 인구가 17만 4천 2백 3명이었다. ○ 44년에는 경성ㆍ외방의 도합 호수가 1백 67만 9천 8백 65호에 인구가 7백만 6천 2백 48명이었다. 정종(正宗) 원년에 5부의 호수가 3만 8천 5백 93호에 인구가 19만 7천 9백 57명이었다. ○ 10년에 5부의 호부가 4만 2천 7백 86호에 인구가 19만 9천 1백 27명이었다. ○ 태종조(太宗朝)에 연호법(煙戶法 호별 등급)을 정하였는데, 서울 안 현재 관직의 1ㆍ2품이 상호(上戶)가 되고, 3ㆍ4품이 중호가 되고 5ㆍ6품이 하호가 되며, 그 아래의 참외(參外 6품 이하)가 하하호가 되고, 서민 및 전직 각 품의 사람들은 각각 그 품계에 따라 차별하였다. 외방은 남녀 15명 이상의 집이 상호가 되고, 10명 이상이 중호가 되고, 5명 이상이 하호가 되며, 1ㆍ2명의 식구로 호(戶)를 이루지 못한 자는 3호를 합하여 1호를 삼았다. ○ 경성 외방에 모두 5호로 1통(統)을 삼고, 통마다 통수(統首)가 있어서 통내의 일을 맡아보며, 방(坊)마다 관령(管領)이 있다. ○ 호적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 마다 정한 해에 고쳐 정리하여 한성부에 보관한다. ○ 남자 장정은 16세 이상이면 호패(號牌)를 차는데, 동ㆍ서반의 관원 및 내간(內官 궁중관원)의 2품 이상은 아패(牙牌)를 차고, 3품관 이하 및 삼의사(三醫司)와 잡과(雜科)에 합격한 사람은 각패(角牌)를 차고, 생원ㆍ진사는 황양목패(黃楊木牌), 유품잡직(流品雜職)과 사서인(士庶人)ㆍ서리(書吏)ㆍ향리(鄕吏)는 소목방패(小木方牌)를 차고, 공사천인가리(公私賤人假吏)는 대목방패(大木方牌)를 차고, 군사들은 그대로 요패(腰牌)를 찬다.
【풍속】 신의를 숭상하고, 유술(儒術)에 돈독하다 《함허자(涵虛子)》. 천성이 유순(柔順)하다 《후한서(後漢書)》.
【관제】 내명부 빈(內命婦嬪) 정1품. 교명(敎命)이 있는 자는 품계가 없다.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媛)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상궁(尙宮)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상의(尙儀) 모두 정5품. 상복(尙服)ㆍ상식(尙食) 종5품. 상침(尙寢)ㆍ상공(尙功) 정 6품. 상정(尙正)ㆍ상기(尙記) 종6품. 전빈(典賓)ㆍ전의(典儀)ㆍ전선(典膳) 정7품. 전설(典設)ㆍ전제(典製)ㆍ전언(典言) 종7품. 전찬(典贊)ㆍ전식(典飾)ㆍ전약(典藥) 정8품. 전등(典燈)ㆍ전채(典彩)ㆍ전정(典正) 종8품. 주궁(奏宮)ㆍ주상(奏商)ㆍ주각(奏角) 정9품. 주변치(奏變徵)ㆍ주우(奏羽)ㆍ주치(奏徵)ㆍ주변궁(奏變宮) 종9품. ○ 세자궁의 양제(良娣) 종2품. 양원(良媛) 종3품. 승휘(承徽) 종4품. 소훈(昭訓) 종5품. 수규(守閨) 이하는 궁인(宮人)의 관직에 속한다. 수칙(守則) 모두 종6품. 장찬(掌饌)ㆍ장정(掌正) 종7품. 장서(掌書)ㆍ장봉(掌縫) 종8품. 장장(掌藏)ㆍ장식(掌食)ㆍ장의(掌醫) 종9품. ○ 외명부(外命婦)ㆍ공주(公主) 왕녀 중 적실(嫡室) 소생. 옹주(翁主) 왕녀 중 서생(庶生). 부부인(府夫人) 왕비의 어머니, 정1품. 봉보부인(奉保夫人) 대전(大殿)의 유모, 종1품. 군주(郡主) 세자의 딸, 적실 소생. 정2품. 현주(縣主) 세자의 딸, 서생. 정3품. ○ 종친 처(宗親妻)ㆍ부부인(府夫人) 정1품, 대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정1품, 왕자 군의 아내. 군부인(郡夫人) 종1품의 아내. 현부인(縣夫人) 정ㆍ종2품의 아내. 신부인(愼夫人) 당상관 정3품의 아내. 신인(愼人) 정ㆍ종3품의 아내. 혜인(惠人) 정ㆍ종4품의 아내. 온인(溫人) 정ㆍ종5품의 아내. 순인(順人) 정6품의 아내. ○ 문무 관원 명부(命婦)의 예에 따라 작(爵)을 봉한다. ○ 문무관 처(文武官妻)ㆍ정경부인(貞敬夫人) 정ㆍ종1품. 정부인(貞夫人) 정ㆍ종2품. 숙부인(淑夫人) 당상관 정3품. 숙인(淑人) 정ㆍ종3품. 영인(令人) 정ㆍ종4품. 공인(恭人) 정ㆍ종5품. 의인(宜人) 정ㆍ종6품. 안인(安人) 정ㆍ종7품. 단인(端人) 정ㆍ종8품. 유인(嬬人) 정ㆍ종9품.
【동서반관계】무릇 직함(職啣)은, 먼저 품계요 다음이 관청이요 다음이 직위이다. 품계가 높고 직위가 낮으면 행(行)이라 하고, 품계가 낮고 직위가 높으면 수(守)라고 하는데, 행ㆍ수라는 글자는 관청 이름 위에 놓는다.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議政).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국구(國舅)ㆍ종친(宗親)ㆍ의빈(儀賓). ○ 종친은 현록대부(顯祿大夫)ㆍ흥록대부(興祿大夫)요, 의빈은 유록대부(綏祿大夫)ㆍ성록대부(成祿大夫)이다. 보국숭록대부 종1품 숭록대부ㆍ숭정(崇政)대부 종친은 의덕(宜德)ㆍ가덕(嘉德)이요, 의빈은 정덕(靖德)ㆍ명덕(明德)이다. 정2품 정헌(正憲)대부ㆍ자헌(資憲)대부 종친은 숭헌(崇憲)ㆍ승헌(承憲)이요. 의빈은 봉헌(奉憲)ㆍ통헌(通憲)이다. 종2품 가의(嘉義)대부ㆍ가선(嘉善)대부 종친은 중의(中義)ㆍ소의(昭義)요, 의빈은 자의(資義)ㆍ순의(順義)이다. 당상 정3품 통정(通政) 대부 동반(東班). 절충장군(折衝將軍) 서반(西班). 종친은 명선(明善)이요, 의빈은 봉순(奉順)이다.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 동반(東班). 어모장군(禦侮將軍) 서반. 종친은 창선(彰善)이요, 의빈은 정순(正順)이다. 종3품 중직(中直)대부ㆍ중훈(中訓) 대부 동반. 건공장군(建功將軍)ㆍ보공장군(保功將軍) 서반. 종친은 보신(保信)ㆍ자신(資信)이요, 의빈은 명신(明信)ㆍ돈신(敦信)이다. 정4품 봉정(奉正)대부ㆍ봉렬(奉列)대부 동반. 진위(振威)장군ㆍ소위(昭威)장군 서반. 종친은 선휘(宣徽)ㆍ광휘(廣徽)이다. 종4품 조산(朝散)대부ㆍ조봉(朝奉)대부 동반. 정략(定略)장군ㆍ선략(宣略)장군 서반. 종친은 봉성(奉成)ㆍ광성(光成)이다. 정5품 통덕랑(通德郞)ㆍ통선랑(通善郞) 동반. 과의교위(果毅校尉)ㆍ충의교위(忠毅校尉) 서반. 종친은 통직랑(通直郞)ㆍ병직랑(秉直郞)이다. 종5품 봉직랑(奉直郞)ㆍ봉훈랑(奉訓郞) 동반. 현신교위(顯信校尉)ㆍ창선교위(彰善校尉) 서반. 종친은 근절랑(謹節郞)ㆍ신절랑(愼節郞)이다. 정6품 승의랑(承議郞)ㆍ승훈랑(承訓郞) 동반. 돈용교위(敦勇校尉)ㆍ진용교위(進勇校尉) 서반. 종친은 집순랑(執順郞)ㆍ종순랑(從順郞)이다. 종6품 선교랑(宣敎郞)ㆍ선무랑(宣務郞) 동반. 여절교위(勵節校尉)ㆍ병절교위(秉節校尉) 서반. 정7품 무공랑(務功郞) 동반. 적순부위(迪順副尉) 서반. 종7품 계공랑(啓功郞) 동반. 분순부위(奮順副尉) 서반. 정8품 통사랑(通仕郞) 동반. 승의부위(承義副尉) 서반. 종8품 승사랑(承仕郞) 동반. 수의부위(修義副尉) 서반. 정9품 종사랑(從仕郞) 동반. 효력부위(効力副尉) 서반. 종9품 장사랑(將仕郞) 동반. 전력부위(展力副尉) 서반. ○ 종2품 이상은 동ㆍ서반의 품계가 같다. ○ 지금 임금 2년에 종친ㆍ의빈은 모두 동반의 품계를 따르게 하였다.
【잡직계】 정6품 공직랑(供職郞)ㆍ여직랑(勵職郞). 종7품 근임랑(謹任郞)ㆍ효임랑(効任郞). 정7품 봉무랑(奉務郞). 종7품 승무랑(承務郞). 정8품 면공랑(勉功郞). 종8품 부공랑(赴功郞). 정9품 복근랑(服勤郞). 종9품 전근랑(展勤郞).
【사관계】 정5품 통의랑 도무(通議郞都務). 종5품 봉의랑 장부(奉議郞掌簿). 정6품 선직랑 교부(宣職郞校簿). 종6품 봉직랑 감부(奉職郞勘簿). 정7품 희공랑 전사(熙功郞典事). 종7품 주공랑 장사(注功郞掌事). 정8품 공무랑 관사(供務郞管事). 종8품 직무랑 급사(直務郞給事). 정9품 계랑 참사(啓郞參事). 종9품 시사랑 섭사(試仕郞攝事). ○ 붙임. 녹과(祿科) 매달 요미[散料]를 전달에 나누어 준다. 제1과(科) 정1품. ○ 쌀 2석 8두, 콩 1석 5두. ○ 대군(大君)은 봄 석 달에 한 섬씩을 더 준다. 제2과 종1품. ○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3과 정2품.○ 쌀 2석 2두, 콩 1석 5두. 제4과 종2품 . 쌀 1석 11두, 콩 1석 5두. 제5과 당상관 정3품. ○ 쌀ㆍ콩 1석 5두. ○ 이상은 25일에 나누어 준다. 제5과 당하관 정3품. ○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6과 종3품. 쌀 1석 5두, 콩 1석 2두. 제7과 정ㆍ종4품. ○ 쌀 1석 2두, 콩 13두. 제8과 정ㆍ종5품. ○ 쌀 1석 1두, 콩 10두. ○ 이상은 26일에 나누어 준다. 제9과 정ㆍ종6품. 쌀 1석 1두, 콩10두. 제10과 정ㆍ종7품. ○ 쌀 13두, 콩 6두. ○ 이상은 27일에 나누어 준다. 제11과 정ㆍ종8품. ○ 쌀12두, 콩 5두. ○ 28일에 나누어 준다. 제12과 정9품. ○ 쌀 10두, 콩 5두. 제13과 종9품. ○ 쌀 10두, 콩 5두. ○ 이상은 29일에 녹을 나누어준다.
【과제】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보는데, 전해 가을에 초시(初試)를 보고 이듬해 첫봄에 복시(覆試)를 본다. 전시(殿試)ㆍ문과(文科)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가 보며 무과도 같다.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시험은 통덕랑(通德郞) 이하가 보게 하고, 6품 이상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한다. ○ 영물서용(永勿敍用 종신토록 벼슬하지 못함)의 죄를 범한 자가 아니라도, 탐관오리[臟吏]의 아들이나, 재가하고 행실 부정한 여자의 아들 및 손자, 서얼(庶孼)의 자손은 문과와 생원ㆍ진사 시험을 보지 못하며, 본도에 거주하지 않는 자나 조정 관원으로서 현재 직위에 있는 자는 향시(鄕試)를 보지 못하는데, 지방에 파견되었거나 휴가를 얻은 자는 여기에 구애되지 않으며 무과도 같다. 시험 장소는 한두 곳을 설치하여, 시험 보는 이가 시관(試官)과 서로 피하여야 할 경우는 다른 곳에서 보며, 아버지가 복시에 응시한 경우에는 아들이 피하는데 무과도 같다. ○ 음양과(陰陽科) 천문학 시험은 그 학교의 생도 외에는 보지 못한다. ○ 문과는 10년에 한 번씩 중시(重試 급제자의 재시험)가 있는데 당하관이 보며, 인원수 및 시험 방법은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정한다. 무과도 같다.
식년(式年) 3년에 한 번씩 시험보는 것이 대비지과(大比之科 대과)가 되는데, 지금은 자ㆍ오ㆍ묘ㆍ유년에 시행하니, 이것을 식년이라 한다.
문과 초시(初試) 인원수는 성균관 시험이 50명인데 두 곳으로 나누어 소속시키며, 한성부 시험이 40명이요, 경기(京圻) 시험의 20명은 한성부 시험에 나누어 보게 한다.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경상도 30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15명, 황해도 10명, 함경도 13명이다. 제술(製述) 시험은 초장(初場)에 사서의(四書疑) 1편, 논문 1편이요, 중장에는 부(賦) 1편, 표(表)ㆍ전(箋) 중 1편이며, 종장에는 대책문(對策文) 1편이다. 지은 것은 모두 바꾸어서 썼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명경(明經) 시험은 삼경 사서(三經四書) 중에서 조(粗)ㆍ약(略 강독하는 시험 성적의 등급인데, 조의 위, 순(純)의 다음이다.) 이상을 뽑는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33명인데 칠서(七書)로 배강(背講 책을 보지 않고 돌아앉아서 읽는 것)하고 그 성적의 통(通)ㆍ약(略)을 계산하여 14분 반이면 뽑는다. ○ 두 시험 장소에서 16명씩 뽑는다.
생획(栍劃) 명경과의 시험 성적 14분 이하의 사람에게 보게 하여 1명씩 뽑는데, 모두 33명을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並赴)를 합하여 정한 수효가 없으며, 제술 시험으로 뽑는다.
생원초시(生員初試) 인원수는 한성부 2백 명인데, 경기 60명이 나누어 한성부 시험을 보며, 충청도ㆍ전라도 각 90명, 경상도 1백 명, 강원도ㆍ평안도 각 45명, 황해도ㆍ평안도 각 35명이다. 제술 시험은 사경의(四經義) 1편과 사서의(四書疑) 1편이다.
복시(覆試) 인원수는 1백 명인데, 제술 과목은 초시와 같다.
진사 초시(進士初試) 인원수는 생원 시험과 같은데, 부 1편ㆍ시 1편을 제술한다.
복시 인원수는 생원 시험 복시의 인원수와 같으며, 제술은 초시와 같다.
증광(增廣)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혹은 여러 경사가 겹치면 특별히 증광 시험을 설치하되, 경사가 겹친 것이 제일 많은 경우에는 대증광(大增廣)이라고 이름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식년 시험과 같으며, 제술 3장(場)도 같은데 강경(講經) 시험은 없다.
복시 인원수는 33명이며 강경은 삼경(三經) 중에서 원하는 한 경으로 하며 조(粗) 이상을 뽑는다. 제술은 초시 시험의 중(中)ㆍ종장(終場)과 같다.
전시 식년 시험과 같다.
생원시ㆍ진사시 초시ㆍ복시의 인원수 및 제술은 식년 시험과 같다.
별시(別試) 중시(重試)의 준례에 의하여 거행하는데, 병년(丙年) 및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한다. 정시(庭試)도 같다.
문과초시 인원수는 병년 별과면 3백 명이요, 기타는 혹 천 명에도 이르는데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서 시행한다. 제술 시험 초장(初場)은 논(論) 1편, 표ㆍ전 중의 1편, 부 1편인데 번갈아 가며 두 제목을 낸다. 종장은 대책(對策) 1편이요, 강경은 삼경(三經) 중 원하는 한 경으로 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회시 겸 전시(會試兼殿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하며 제술은 증광전시(增廣殿試)와 같다.
광시(廣試) 국가 경사로 인하여 시행한다.
문과 초시(文科初試) 인원수는 임시로 임금께 아뢰어 명을 받아 정한다. 제술(製述)은 부 1편, 표ㆍ전 중 1편이다.
회시 겸 전기(會試兼殿試)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알성시(謁聖試)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거행하고, 이어 선비를 시험하는 것인데, 초시가 없고 그 날로 발표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은 별시ㆍ전시(殿試)와 같다.
중시(重試) 문ㆍ무과가 함께 10년에 한 번씩 보이는데, 당하관이 나가 보며 병년(丙年)마다 시행한다.
문과 인원수 및 제술(製述)은 별시ㆍ전시와 같다.
절일제(節日製) 성균관 서재에 거처하는 유생(儒生)들이 원점(圓點 출석 여부를 표시하는 점)을 찍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두 번 식사한 것을 1점으로 잡아서, 유생들간의 제술[泮製]에는 50점, 성균관 시험에는 3백 점에 이르는 사람을 나가 시험보게 한다. ○ 정월 7일 곧 인일(人日)과, 3월 3일, 7월 7일, 9월 9일의 제술을 황감제(黃柑製)라고 하는데, 인원수는 원래 정해 있지 않으며,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거나 바로 회시에 나가게 하되, 2분(分) 또는 1분의 점수를 주며, 서책ㆍ필묵(筆墨) 등도 상으로 나누어 준다.
도기(到記) 관학(館學 성균관에 설치한 학당)의 유생이나 생원ㆍ진사들이 나가 보며 제술은 절일제의 시험과 같고 강경(講經)은 3경 중 통(通)에 낙점된 이하 중에서 시험하여 뽑는다. 제술에 수석한 사람 및 강경에 수석한 사람은 바로 전시(殿試)에 나가게 하며 봄ㆍ가을로 시행한다.
통독(通讀) 매해 대사성(大司成)이 경향의 유생들을 시험보여 뽑는데, 제술ㆍ강서(講書)를 각 11차로 하며 통한 것을 계산하여, 식년 문과 복시(覆試)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0명이다. 제술은 부 1편과 표ㆍ전ㆍ논 중의 1편을 보며, 강경은 7서 중에서 자원하는 것으로, 1서를 배송하여 조(粗) 이상의 성적을 뽑는다. ○ 무릇 모든 강경은 모두 배송(背誦)한다.
승보(陞補) 매해 대사성이 사학(四學) 및 지방 유생들을 공부시키고, 시험보는 것을 합하여 12차례 한다. 세초(歲抄 6월ㆍ12월)에 계산하여 식년 생원ㆍ진사 복시를 보게 하는데, 인원수는 12명이며, 제술은 부 1편, 시 1편이다.
사학합제(四學合製) 제술은 승보와 같으며 인원수는 16명인데 그 중 사서(四書)에서 4명, 《소학(小學)》에서 4명이다.
무과 식년ㆍ증광ㆍ초시 시험 장소는 훈련원(訓練院)의 한 곳과 모화관(慕華館)의 두 곳이다. 시험보여 뽑는 인원수는 70명인데, 경상도 30명, 충청도ㆍ전라도 각 25명, 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함경도 각 10명이다. 목전(木箭)ㆍ철전(鐵箭)ㆍ기추(騎蒭)ㆍ관혁(貫革)ㆍ기창(騎槍)ㆍ격구(擊毬)ㆍ유엽전(柳葉箭)ㆍ조총(鳥銃)ㆍ편추(鞭芻)ㆍ강서(講書)의 기예(技藝)를 죽 써 놓고 점찍어서 그 중 몇 기예를 시험보여 뽑는다.
복시 인원수는 28명이며 시험보는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전시(殿試) 인원수는 직부(直赴)ㆍ병부(幷赴) 합하여 정한 수가 없으며, 기예는 초시와 같다.
제과(諸科) 시험보여 뽑는 여러 규정이 대략 같다.
잡과 식년 증광ㆍ역과(譯科) 초시 한학(漢學 중국어 통역) 23명, 몽학(蒙學)ㆍ청학(淸學)ㆍ왜학(倭學) 각 4명이다.
복시 한학 13명, 몽학ㆍ왜학 각 2명이다.
의과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음양과(陰陽科) 초시 천문학 10명, 지리학 4명, 명과학(命課學 운명 길흉 화복을 판단 하는 학문) 8명이다.
복시 천문학 5명, 지리학 2명, 명과학 4명이다.
율과(律科) 초시 18명이다.
복시 9명이다.
【의장】 조참(朝參)ㆍ상참(常參)ㆍ조계(朝啓) 모두 흑의(黑衣)를 입는다 종1품 이상 및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은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종2품 이상은 초헌(軺軒)을 타며, 당상관은 호상(胡床 걸상) 안롱(鞍籠)을 가진 자가 앞에서 인도하고, 정3품 당하관은 안롱만을 가지게 한다.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관원은 갓에 옥정자(玉頂子)로 장식하고, 감찰(監察)은 수정 정자를 장식하며, 한산직(閑散職)의 당상관은 공석 회합이면 사모(紗帽)를 쓴다. 사헌부의 서리(書吏)나 통례원(通禮院)의 서원(書員)이 감찰 및 조하(朝賀 조정 하례) 할 때에는 공복(公服)을 입는다. ○ 무릇 어가(御駕)를 시종하고 조하하는 여러 신하들의 복색은 상복(上服)을 따르며, 임금이 나가 행차할 때에는 모두 공복을 입는다. ○ 시임대신(時任大臣)과 원임대신(原任大臣)ㆍ장신(將臣)이 융복(戎服)과 군복을 입을 때에는 갓에 옥로(玉鷺)를 장식한다.
관(冠) 1품관의 조복(朝服)은 오량목잠(五梁木箴)인데 제복도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평상복에는 사모를 쓴다. 관자(貫子)ㆍ갓끈은 금ㆍ옥을 쓰고, 갓의 장식은 은으로 하는데 대군(大君)도 같으며, 이엄(耳掩)은 주단 초피(貂皮)를 사용한다. 2품관의 조복은 4량(粱)이요, 대사헌(大司憲)은 해태[獬豸] 모양을 붙이고, 집의(執義) 이하는 모두 목잠을 사용한다. 이하도 위와 같음. 당상 3품관은 3량이며, 종친은 6품관에 이르기까지는 생초 초피 이엄(耳掩)을 사용한다. 당하관 정3품 이하로부터 9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생초 서피(鼠皮) 이엄을 사용하며, 4품에서 6품까지는 2량이요, 7품에서 9품까지는 1량인데, 모두 목잠이다. 제복도 같고 공복엔 복두, 평상복엔 사모이다. 녹사(錄事)는 뿔 있는 평정건(平頂巾)이요, 여러 학당의 생도들은 검은 베 건(巾)을 쓰며, 서리(書吏)는 뿔 없는 평정건, 별감(別監)은 자색 건, 세자궁(世子宮) 하인은 푸른 건을 쓰며, 평상복엔 주황 초립(朱黃草笠)을 쓴다. 궁궐 안의 각 차비(差備 하인)는 푸른 모자, 길 인도하는 자는 자색 건, 나장(羅將)과 조예(皂隸)는 검은 건을 쓴다. ○ 당상관 3품 이상은 오사모(烏紗帽 검은 사모)에 문사각(紋紗角 무늬 있는 사각)이며, 융복(戎服)엔 자립(紫笠)이었는데, 칠사립(漆紗笠)으로 고쳤다. 당하관 3품 이하는 오사모이며, 융복에는 흑립(黑笠)에 수정 갓끈이다. 녹사는 오사모, 수복(守僕)은 검은 건이다.
복(服) 1품관은 붉은 생초의 의상(衣裳)과 폐슬(蔽膝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가슴에 늘이는 헝겊)이며, 백사(白紗) 중단(中單 웃옷 속에 있는 소매 넓은 두루마기)에 구름과 학을 수놓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雲鶴金環綬)를 사용한다. 제복(祭服)은 푸른 생초 옷에 붉은 생초 하의와 폐슬이고, 중단은 금고리에 술 있는 띠[金環綬] 위와 같음 이며 방심 곡령(方心曲領)이고, 공복은 홍포(紅袍)요, 평상복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으로 한다. 흉배(胸背)는 대군은 기린(麒麟)이고, 왕자군(王子君)은 자연 광택 있는 문채의 공작(孔雀)이며, 무관은 호표(虎豹) 모양이다. 2품관의 조복ㆍ제복(祭服)ㆍ공복ㆍ상복(常服)은 위와 같은데 흉배는 운안(雲雁)을 수놓았고 대사헌은 해태이며, 무관은 위와 같다. 3품관의 폐슬 이상은 위와 같고, 중단은 수리가 앉아 있는 것을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盤雕銀環綬]이며, 제복은 의상 폐슬이 1품과 같고, 중단은 위와 같으며 백초(白綃)의 방심 곡령은 위의 1품관과 같다. 공복은 정3품은 홍포(紅袍)요, 종3품은 청포(靑袍)이며, 상복(常服)은 당상관은 위와 같다. 흉배는 백한(白鷳)을 수놓았는데 무관은 웅비(熊羆)이다. 4품관의 조복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를 수놓은 은고리에 술 있는 띠[鍊鵲銀環綬]이다. 제복도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령(白綃方心領)이요, 공복은 청포이다. 5ㆍ6품은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까치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練鵲銅環綬]요, 제복(祭服)은 같고 조복은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청포이다. 7품에서 9품까지는 폐슬 이상은 위와 같으며, 중단은 접동새를 수놓은 구리고리에 술 있는 띠[鸂鶆銅環綬]이고 백초 방심 곡령이며 공복은 녹포(綠袍)이다. 녹사는 단령(團領 깃을 둥글게 만든 공복)이고 여러 학당의 생도도 단령이고 유학(儒學)은 청금(靑衿)이고 서리는 단령이며, 별감은 푸른 단령인데 평상복은 직령(直領)이다. 궁궐 안의 각 차비는 직령이며 인로(引路)는 푸른 단령, 나장은 푸른 반비의(半臂衣)이다. 형조와 사헌부의 전옥(典獄)은 검은 단령이며 사간원의 사(士)는 누런 단령이며, 조예(皂隸)는 푸른 단령이다. 공주와 옹주(翁主)의 시종은 초록색을 사용한다. ○ 당상관 이상은 담홍포(淡紅袍)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玄綠色) 사단(紗緞)이며 흉배는 운학(雲鶴)을 수놓았는데 무관도 위와 같고, 융복엔 남색 첩리(帖裏)를 입는다. 당하관 3품 이하는 홍포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으며, 대소 조정 의식에는 현록색 저견(紵絹)이고 흉배는 백한이다. 무관도 위와 같은데 융복에는 청현색(靑玄色) 첨리를 입는다. 녹사의 홍단령은 지금 폐지되고 청현색 단령이며, 별감은 홍직령인데, 대소 조정 의식에는 녹색 직령을 입는다. 수복(守僕)은 홍직령이다. ○ 문ㆍ무사ㆍ서인이 모두 푸른 색을 숭상하게 하는데, 대소 인원은 문ㆍ무 직위를 물론하고 표의(表衣)가 앞은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며 뒤는 땅 위에서 2촌 떨어지게 한다. 소매는 길이가 손을 지나고 다시 돌아서 팔목에 이르며 소매통은 넓이가 1척이고 소맷 부리는 7촌이다. 서민(庶民)은 표의가 앞에는 땅 위에서 4촌 떨어지게 하며 뒤에는 땅 위에서 3촌 떨어지게 하고, 소매 길이는 손을 지나며 소매통 넓이는 8촌, 소맷부리는 5촌이다.
대(帶) 1품관의 조복에는 서대(犀帶)요, 제복ㆍ공복ㆍ상복(常服)에도 같으며, 사복엔 붉은실 띠(紅條兒)이다. 정2품관의 조복에는 정삽금(正鈒金)이며 종2품은 소금(素金)인데 제복ㆍ상복도 같다. 공복엔 여지금(荔枝金)이며 사복엔 붉은실 띠이다. 3품관의 조복에는 정삽은(正鈒銀). 종3품은 소은(素銀)이며, 제복과 평상복도 같고, 정3품의 공복에는 여지금, 종3품은 흑각(黑角)이고, 사복에는 붉은실 띠이다. 4품관의 조복에는 소은이며, 평상복도 같고, 공복엔 흑각이다. 5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에는 흑각이며, 제복ㆍ공복ㆍ평상복도 같다. 녹사와 여러 학당의 생도들과 서리(書吏)는 실 띠이며 별감과 궁궐 안 각 차비도 실 띠이고, 인로(引路)는 자색 난삼[紫襴]이요, 나장ㆍ조예(皂隸)도 실 띠이다. ○ 왕자가 데리고 다니는 자는 자색 난삼에 놋쇠 패[豆錫牌]를 차고, 의정부(議政府)와 승정원(承政院)의 경연(經筵)에서는 납패(鑞牌)이며, 내각의 인로는 금패(金牌)이다.
홀(笏) 1품에서 4품까지는 조복에 아홀(牙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고, 5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목홀(木笏)이며 제복과 공복에도 같다.
패옥(佩玉) 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반청옥(燔靑玉)이며 제복에도 같고, 4품에서 9품까지는 조복에 반백옥(燔白玉)이며 제복에도 같다.
말(襪) 1품에서 9품까지 조복에 백포(白布)인데 제복에도 같다.
화혜(靴鞋)1품에서 3품까지는 조복에 흑피혜(黑皮鞋)이며 제복에도 같고 공복엔 흑피화(黑皮靴)이다. 당상관은 평상복에는 금화(金靴)를 신는다. 4품에서 9품까지의 조복과 제복에는 위와 같으며 공복(公服)에는 흑피화를 신는다.
안구(鞍具) 1품에서 9품까지는 대랑피변안(大浪皮邊鞍)에 녹색 언치[䩞]와 단첨보로(段韂甫老)이며 골추륵 삼조수아(骨鞦勒三條垂兒)를 장식한다. 3품관 당상관은 대랑피변안에 녹색 언치이며 종친(宗親)의 3품 이하는 유청색(柳靑色)을 사용하여 골추륵 삼조수아를 장식하고, 기타의 3ㆍ4품은 백록각변안(白鹿角邊鞍)에 이조수아이며, 5ㆍ6품은 백록각 변안에 일조수아이고, 7ㆍ8ㆍ9품은 백록각변안이다. 사족의 의복은 첨리(帖裏) 및 치마[裳]가 13폭을 지나는 일이 없으며, 서인(庶人)의 의복은 9승(升) 포목에 첨리와 치마가 12폭이다. 사족의 초립(草笠)은 50죽(竹)이며, 또 마미립(馬尾笠)에 죽립(竹笠)을 붙인다. 서인은 초립이 30죽이며, 또 죽직립(竹織笠)과 승결립(繩結笠)이 있다.
【공헌】전부고(田賦考) 공제조(貢制條) 끝에 보인다. ○ 경기ㆍ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에는 대동법(大同法)을 행하는데, 무릇 서울 관청에 모든 공물(貢物)이 공안(貢案)에 기재되어 있고, 5도(道)에 나누어 배정된 것은, 5도 각 영읍(營邑)의 준비가 백성의 노력에서 나는 것으로 모두 쌀로 만들며, 양서(兩西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공물 값인 쌀은 호조에서 주관하여 내어주고, 북도(北道)의 공물 값인 마포(麻布)는 각 해당 관청에서 내어준다. ○ 해서(海西 황해도)에서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니 대동법의 규정을 의방(依倣)한 것이다. ○ 종친과 동반(東班)의 6품, 서반의 4품 이상의 품계에 해당하는 자는 포목이 각각 백저포(白苧布) 3필이며, 동반의 7품 이하와 서반의 6품 이상은 각각 흑마포(黑麻布) 1필씩이다. 서울 안의 무녀(巫女)는 상등은 백저포ㆍ흑저포 각 3필, 중등은 각 2필, 하등은 각 1필이며, 서울 안에 사는 부유한 사람은 각기 백저포ㆍ흑마포 1필씩이다. ○ 석자(席子)ㆍ인삼ㆍ초피(貂皮)ㆍ수달피(水獺皮) 등의 공물이 있다. ○ 무릇 세납이나 공물로 받아들이는 물건은 이듬해 6월까지 상납(上納)하며 제향(祭享)에 진상하는 것 및 제철에 나는 산물(産物)은 모두 그때에 미쳐야 한다. ○ 여러 도의 공물을 지금은 쌀이나 포목으로 상납(上納)하며, 평안도의 공물은 지금 상납이 없는데, 그 값을 호조(戶曹)에서 쌀과 돈과 포목으로 공인(貢人 공물 바치는 계(契)의 계원)에 내어 주어서 방내 백성 중에서 정하여 주인을 삼고, 그 값을 넉넉히 정하여 주어서 예비하였다가 바치게 하며, 원 물건으로 상납하는 것은 제때에 미쳐야 한다. ○ 북도에서 바치는 인삼은 도합 수량이 1백 10근인데 5승(升) 생포(生布)로 대납(代納)한다. ○ 진상하는 포목은 15승에서 10승까지의 물품으로 하는데, 그 중 백저포ㆍ흑마포ㆍ저마교직포(苧麻交織布)는 12승에서 9승까지이며, 면포(綿布)ㆍ백면포(白綿布)는 15승에서 13승까지이다. ○ 별마(別馬)는 상ㆍ중ㆍ하등으로 나누며, 종마(種馬)는 웅마(雄馬)와 자마(雌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왜(倭)와 야인(野人)의 진상하는 것은 대마(大馬)의 상ㆍ중ㆍ하로 나누고 중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누며, 하마의 상ㆍ중ㆍ하로 나눈다. ○ 제주(濟州)의 자제들은 웅마의 상ㆍ중ㆍ하와 자마의 상ㆍ중ㆍ하를 진상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선상(選上) 여기(女妓) 1백 50명, 연화대(蓮花臺 나라 잔치 때 추는 춤의 한 가지) 10명, 의녀(醫女)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 여종 중에서 연소한 자로 뽑아 올리며, 진연(進宴 국가 경사 때에 궁중에서 열던 잔치)이 있을 때에도 52명을 뽑아 올린다. 의녀는 공부를 마친 후에는 본읍으로 돌려 보내는데 서울 안 각 관청의 여종들 중에서도 뽑는다.
【금제】분경(奔競)하는 자를 금하니, 도목 정사(都目政事 매 해 6월과 12월에,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하여 승직과 강등을 결정하는 일) 시행하는 날을 정한 후에,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당상관의 집과 도목 정사 후 서경(署經 관리의 임명이 있은 다음 대간(臺諫)이 다시 인정 서명하는 일)이 있기 전에 양사(兩司 사헌부ㆍ사간원) 관원의 집에는 동성(同姓) 6촌이나 이성 4촌 및 혼가(婚家)가 아닌데 출입하는 자를 금단(禁斷)하며, 이조ㆍ병조의 여러 장수나 당상 관리(堂上官吏)ㆍ병방 승지(兵房承旨)ㆍ사헌부ㆍ사간원의 판결사(判決事)의 집에는 동성 8촌이나 이성 처가 친척 6촌과 이웃 마을의 사람이 아닌데 출입하는 자는 장(杖) 80을 쳐서 3천 리 밖으로 유배 보낸다. 잡문서를 가지고 다니는 자는 장 1백을 치며, 판매를 금지하는 물건인 활세포(濶細布)ㆍ채문석(彩紋席)ㆍ후지(厚紙)ㆍ초피(貂皮)ㆍ토초피(土貂皮)ㆍ해달피(海懶皮) 등을 몰래 파는 자는 장 1백을 치고 도형(徒刑) 3년에 처하며, 귀중한 철물(鐵物)ㆍ우마(牛馬)ㆍ금은ㆍ주옥ㆍ보석ㆍ염초(焰硝)ㆍ군기(軍器)를 파는 자는 교형(絞刑)에 처한다. 과장(科場)에서 과거 보는 이가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모두 장 1백을 치고 도형 3년에 처한다. 일설에는 과거보는 이가 과장에서 책을 가지거나 남의 손을 빌려 짓거나 대신 지어주는 자는 2회의 과거를 못 보게 한다고도 한다. 유생과 부녀자로서 절간에 올라가는 자나 여중이 되는 것도 같다. 조정 관원으로서 내어보낸 궁녀나 수사(水賜 무수리)에게 장가드는 자와 문서를 뜯어서 다시 종이를 만드는 자나 도성 안에서 야제(野祭)를 거행하는 자와 사족(士族)의 부녀자로서 산 속의 물가에서 잔치를 벌여 놀거나 친히 야제(野祭)ㆍ산천ㆍ성황사(城隍祠)ㆍ묘제(廟祭)를 거행하는 자와 과장의 이전(吏典)ㆍ복예(僕隸)로서 사실을 누설하고 연락[交通]하는 자나 이런 일을 보고서도 짐짓 단속[檢飭]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장 50대를 친다. 대소 인원(人員)으로서 홍ㆍ회ㆍ백색의 표의(表衣)와 흰 갓이나 붉은 언치를 사용하는 자거나 술그릇 외에 금은 청화 백자기(金銀靑畫白磁器)를 쓰는 자는 금하며 서인(庶人)의 남녀는 홍자의(紅紫衣)ㆍ자대(紫帶)ㆍ금은 청화 주기(金銀靑畫酒器)ㆍ비단실로 섞어 짠 옷감[交綺]ㆍ옥 마노[瑪瑙]ㆍ호박(琥珀)ㆍ명박(明珀)ㆍ청금의(靑金衣) 및 황동(黃銅)의 말안장 장식(粧飾)ㆍ삽등자(鈒鐙子)ㆍ사피(斜皮)도 함께 금한다. 그러나 수건ㆍ수파(手帕)ㆍ비뉴(轡紐) 같은 종류의 자잘한 물건들은 사라 능단(紗羅綾緞)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금하지 않으며, 혜사피(鞋絲皮)의 종류나 자잘한 장식물 같은 것은 금하지 않는다. 심염회색(深染灰色)의 옷이나 양구(兩具) 백색의 옷이거나 사족의 부녀자ㆍ아동과 서울 기생의 잡종 장식인 금은 주옥이나 정병(正兵)ㆍ서인의 백색 옷은 금하지 않는다. ○ 종친 집의 아내와 딸이나 당상관 집의 어머니ㆍ아내ㆍ딸ㆍ며느리와 음관(蔭官) 집 신부 외에, 방처럼 된 교자를 타는 자거나 사찰(寺刹) 외에 진채(眞彩)를 사용하는 자나 화석(花席)을 사용하는 자와, 주렴 칠기(朱染漆器)를 사용하는 자나 사화봉(絲花鳳) 금은노포화(金銀露布花)를 사용하는 자거나 염초를 사용하는 자와 관사(官舍) 및 당하관 이하 집에서 혼인하는 사람으로서 사라(紗羅)ㆍ능단(綾緞)ㆍ계담(罽毯)을 사용하는 자와 사족의 부녀ㆍ아동이나 서울 기생은 금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사채(私債)를 받는 자는 모두 장 60을 친다. ○ 선비로서 윤리를 문란하게[敗喪]하거나 탐장죄(貪贓罪)를 범한 자나, 사족집 부녀로서 실행(失行)한 자와 다시 세 번 시집간 자는 함께 녹안(錄案)을 만들어서 이조ㆍ병조 및 사헌부와 사간원으로 공문을 보내도록 한다. ○ 경성 안에 무격(巫覡)이 거주하는 자와 여염집에 승니(僧尼)가 유숙하는 자는 논죄(論罪)한다. ○ 이미 혼서(婚書)를 받고서 두 번 다른 사람에게 허락하여 성혼(成婚)한 자는, 그 주혼자(主婚者)를 논죄하여 따로 살게 한다. ○ 경성 10리 안에 동쪽은 대보동(大菩洞)ㆍ수유현(水踰峴)ㆍ우이천(牛耳川)ㆍ상하벌리(上下伐里)ㆍ장위송계교(長位松溪橋)에서 중량포(中梁浦)에 이르기까지 하천으로 한계를 삼으며, 남쪽은 중량포 전관교(箭串橋)ㆍ신촌(新村)ㆍ두모포(豆毛浦)에서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으며, 북쪽은 대보동ㆍ보현봉(普賢峯)ㆍ저서현(猪噬峴)ㆍ아미현(峨嵋峴)ㆍ연서구관기(延曙舊館基)ㆍ대조리(大棗里)에서 석관현(石串峴) 서남쪽 물이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 등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석관현ㆍ시위동(時威洞)ㆍ사천도관(沙川渡串)ㆍ성산(城山)ㆍ망원정(望遠亭)에서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하천과 강으로 한계를 삼아서 그 안에 입장(入葬)하는 자는 원릉(園陵)의 수목을 도벌(盜伐)한 형률과 같이 논죄하며, 강제로 시일을 정하여 파 옮기고 능침(陵寢)의 화소(火巢 불의 연소를 방지하기 위하여 미리 불을 놓아 경계를 삼게 한 곳)나 외안 금표(外案禁標) 안에 투장(偸葬)한 자는 사형을 감하여 정배한다. ○ 빈 대궐의 소나무를 몰래 찍은 자는 연한 없이 변방 먼 곳에 정배한다. ○ 경성 10리 안에 소나무를 찍는 죄를 범한 자는 형률에 의하여 죄를 정하며 사산금표(四山禁標) 안에서 나무 뿌리나 잔디 뿌리를 채취한 자나 토석(土石)을 채취한 자는 모두 산 소나무를 벤 준례에 의하여 논죄하며, 함부로 밭갈이한 자는 궁(宮)이나 민가의 언덕을 강제로 차지한 자와 같이 논죄한다. 신무문(神武門) 밖과 면악(面岳) 아래의 흙 파는 곳을 조사[擲奸]하여 엄금한다. ○ 마소의 밀도살 죄를 범하는 자나 경성 안에서 서민이 말을 타는 자는 금하되, 삼의사(三醫司)나 역관(譯官)ㆍ일관(日官)ㆍ사자관(寫字官)ㆍ산원(算員)ㆍ화원(畫員) 등 잡과 출신의 사람 및 아전(衙前)은 금하지 않으며, 녹사와 금군도 금하지 않는다. 성 안에서 구치(驅馳 거마를 빨리 몰고 다니는 일)하는 자는 병조(兵曹)로 잡아다가 곤장을 친다. 잡귀신에 제사지내는 자와 경성 내외의 대소 음사(淫祀)나, 성 밖 10리에서 모여 술마시는 자거나 3인 이상이 안주와 술을 준비하여 가지고 모여 마시는 자는, 맡아 차린 자만을 치죄(治罪)하되, 금군(禁軍)인 경우에는 금하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술주정하는 사람이나 승니(僧尼)로서 함부로 도성 안에 들어오는 자나 처녀[童女]로서 여중이 되는 자는 치죄(治罪)하여 환속(還俗)하게 하되, 모두 금단(禁斷)한다. ○ 위로 궁궐 안에서부터 아래로 여염집에 이르기까지 장복(章服 관대를 갖춘 의복)이나 융복(戎服 군복) 외에는 토산(土産 국산)이 아니면 입지 못하는데, 금군이나 호위군관(扈衛軍官)이나 의녀(醫女)와 침선비(針線婢)는 지나친 의복을 금하지 않으며. 사족집 부녀들의 의복은 모두 그 남편의 작품(爵品)에 따라서 하게 한다. 겉에 대단금(大緞錦)을 사용하거나, 수봉차(繡鳳釵)ㆍ금옥차(金玉釵)ㆍ주전가환(珠鈿假鬟)을 사용하는 자는 신부에 한하여서만 금하지 않으며, 사단(紗緞)ㆍ능주(綾紬)는 물론하고 무엇이나 무늬 있는 것은 일체 엄금하는데, 범한 자는 시민(市民)도 모두 같은 형률로 시행한다. 역관이나 장사치는 의주[灣府]에서부터 먼저 목베어 매단 후에 장계하여 알리며, 물건은 목책(木柵) 밖에서 불태운다. ○ 당하관의 말안장에 은실로 새겨 장식한 자나 당하관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남기률(濫騎律)로 처벌하며, 중관(中官 내시부의 관원들)으로서 교자를 탄 자는 그 관품의 당상ㆍ당하를 막론하고 당하승교(堂下乘轎)의 준례에 의하여 처벌한다. 국상(國喪) 때 풍악치고 기생 데리고 노는 자나 국기정일(國忌正日) 및 치재일(致齋日)에 풍악을 울리는 자를 모두 엄금하고 죄를 다스린다. ○ 시중 가격을 농간질하여 올리는 자와 두승(斗升)을 정한 규격대로 만들지 않는 자나 나무공이로 찧은 나쁜 쌀을 외상(外上)이라고 하며, 억지로 전(廛)보는 사람들에게 파는 자는 평시서(平市署)에서 주관하되, 시정이나 마을의 범금인(犯禁人)을 본서에서 물건을 거두어 놓아주지 말고 형조에 보고하여 죄를 주게 하며, 도고 계방(都庫契房 도매 가게)인 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한다. 전안(廛案 시전 명부)에 매어 있지 않고 난전(亂廛 노점)을 보는 자는 경조(京兆)에서 주관한다. ○ 여러 군문(軍門)에 속한 군병들의 제조 물품은 난전에 관한 처벌로 시행하지 않는다. ○ 호위청(扈衛廳)에 소속된 난전은 법사(法司 형조와 한성부)에서 바로 처벌을 시행한다. ○ 점포를 잠그고 철시(撤市)하는 자는 그 주모자는 형장을 쳐서 정배하고 모두 금단(禁斷)한다. ○ 삼법사(三法司)인 형조ㆍ사헌부ㆍ한성부에서는 관원이 집에서 금단하지 못하며, 또 어두운 밤에 금단하지 못하며 경성 금표(禁標) 밖에 대하여 금단하지 못하며 난전과 같은 금지 조례 외에는 다른 금지 조례를 지어 내지 못한다. 시각을 생각해서 정하여 넘는 일이 없게 하며 먼저 금지 조례로 거듭 엄중히 당부하여 알려 준 후에 금단하는데 매달 6차례씩 한다. 사시 명절에는 모두 금령중 장 1백을 치는 것은 늦추어준다. 법사의 목패(木牌) 외에 추가로 지패(紙牌)를 내는 일은 일체 엄금하며 감찰이 출패하는 일도 일체 금단한다. ○ 여염집을 빼앗아 드는 자는 도형(徒刑)으로 3년 정배한다. ○ 자기가 제 몸을 판 자도 아내를 판 형률과 같이하며 산 자도 같은 죄로 본다. ○ 화랑 유녀(花郞遊女) 및 무녀(巫女)로서 경성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적발하여 논죄(論罪)한다. ○ 여자 복색으로 변장하고 남의 집에 출입하는 자는 장(杖) 1백을 쳐서 섬에 정배한다. ○ 집을 헐어버리고 시골로 가는 자를 일체 엄단한다. ○ 각 관청의 관원 및 하인들이 면신(免新)ㆍ벌례(罰禮)ㆍ허참(許參) 등의 일로 재물을 거두는 자는 관리가 재물을 받았으되, 법률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받은 재물을 계산하여 논죄하며, 여러 군문의 장교 및 군교(軍校)가 면신례(免新禮)라 하며 거두어들이는 자는 중한 죄목에 의하여 곤장을 친다. ○ 능원(陵園) 묘소의 나무를 찍었는데도 적발하지 못하면 범인이나 능관(陵官)을 경중을 구분하여 논죄한다.
금화(禁火) 병조ㆍ의금부ㆍ형조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와 5부(部)의 당직 숙직하는 관원들이 순행하면서 금화한다. 궁궐 안에 화재가 나면 큰 종을 치든가 대신 호각[螺]을 부는데 궁궐에 있는 자는 뛰어가서 구원하되, 장병[將卒]은 당직 장소를 떠나지 않으며, 번에 나간 장병들은 각기 본위(本衛)에, 여러 관청의 관원들은 각각 그 조방(朝房)에 모이며 여러 관청의 인원과 공장(工匠)들과 5부 방리의 사람들과 번에 나간 별감과 각 차비인(差備人)들은 모두 궐문 밖으로 가서 대령한다. ○ 여러 관청을 모두 5부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구화패(救火牌)를 주는데, 그 부 안에서 불이 나면,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의금부ㆍ금화사의 관원들이 부속(部屬)의 여러 사람들을 거느리고 달려가서 구원한다. ○ 의금부에서는 망화인 나장(望火人羅將)을 정하며, 사복시(司僕寺)ㆍ군기시(軍器寺)의 종은 항상 종루에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이궁(離宮)이나 관청에서 불이 나면 종을 치며 사가(私家)가 연소(延燒)되어도 종을 친다. ○ 바람이 어지럽게 불면 금화사에서 방리(坊里) 각 호에 목탁을 흔들면서 순찰 경계한다. ○ 금화하는 공사 각처에는 모두 저수하는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방목토가(防木土架)와 구화기계(救火器械)를 준비하여 둔다. ○ 궁성과 궁장(宮墻)에서 사면으로 백 자 안에는 인가를 짓지 못하게 하며 창고는 30자로 한정한다. ○ 모든 조문의 금령은 경조ㆍ한성부 이외의 제읍(諸邑)에도 방을 붙여서 널리 알린다.
【요역좌경】종사 묘궁(宗社廟宮) 등 중요한 여러 곳 및 궁방(宮房)이나 전곡(錢穀) 있는 곳과 관청[衙門]이나 큰 거리 복처(伏處 순라군이 지키는 곳)에 좌경군(坐更軍 밤에 파수 서는 군사)이 두 명씩 있는데, 하나는 인가에서 나와 지키며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대군ㆍ왕자ㆍ공주ㆍ옹주ㆍ대신ㆍ국구(國舅) 및 맹인(盲人)ㆍ독녀로서 장정 없는 자 외에는, 종실 신하의 정1품이라 하더라도 경재(卿宰 재상)의 보국(輔國)ㆍ판서 이하는 모두 부역으로 나온다. 중부에 15처, 동부에 7처, 서부에 26처, 남부에 36처, 북부에 17처이다. 조강가(糟糠價) 중부 방내 백성들에게서 매달 거두는 전생서(典牲署) 가축[牲口]의 먹는 조강이 18석인데, 숙종 무인년에 감하여 8석 11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4냥(兩) 2전(錢) 7푼[分]이니 매석의 값이 5전이다. 동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司畜署) 양과 염소가 먹는 조강은 돈으로 6냥이다. 남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25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4석 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7냥 7푼이다. 서부에서 거두는 전생서의 조강은 56석인데 무인년에 감하여 18석 13두로 하였으며, 돈으로 대납하면 9냥 3전 2푼이다. 북부에서 거두는 예전 사축서의 조강은 돈으로 대납하면 3냥 3전 3푼이다.
【영선】궁궐은 전연사(典涓司)에서, 공해(公廨 관청 청사)는 각각 그 관청 관원들이 나누어 맡아 간수(看守)하는데, 비가 새거나 헐린 곳이 있으면 공조(工曹)에 보고하여 수리하며, 매해 봄과 가을에 공조에서 순찰하여 그 상황을 위에 아뢴다. 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은 공조의 당하관 각 2명이 나누어 맡아 검찰(檢察)하며 건물ㆍ잡물 등에 대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한다. ○ 대궐 안 건물로 관청이 된 곳은 그 관청의 관리가 군사들의 입직(入直)하는 곳과 체번(遞番)하는 날을 간수하며, 전연사(典涓司)의 관원과 그 부장(部將)이 간심(看審)하며, 만일 파손 훼상하였다든가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공문을 형조로 보내어 심문 조사해서 징수하게 한다. ○ 도성 각 문과 각처 군영(軍營) 경수소(警守所)는 소재지 부(部)의 관리가 인근 거주민들의 간수(看守)를 정한 문서를 교체할 때에 인계 인수하는데, 파손ㆍ훼상 또는 유실한 물건이 있으면 숙직(宿直)한 군사들에게 나누어 받아내며, 간수인은 군사들이 체번하는 날에 번갈아 서로 간심하여 주고받게 한다.
자문감(紫門監)의 9영선(營繕)이 궐내ㆍ궐외 각처의 수리하는 일을 나누어 맡아 한다 시어소(時御所)와 각 전(殿)과 각 당(堂) 안의 각 관청 청사의 수보(修補)와 차비문(差備門) 안의 각종 기구의 제조와 내빙고(內氷庫)의 공상(供上)을 맡아 한다. ○ 9영선은 지금 5소장(所掌)으로 되었다. 1소장은 종묘ㆍ육상궁(毓祥宮)ㆍ연우궁(延祐宮)ㆍ장생전(長生殿)ㆍ독소(纛所)ㆍ종친부(宗親府)ㆍ중학ㆍ돈녕부 조방(敦寧府朝房)ㆍ의빈부(儀賓府)ㆍ홍문관 조방(弘文館朝房)ㆍ정업원(淨業院)ㆍ선잠단(先蠶壇)ㆍ첨성대(瞻星臺)ㆍ목멱당(木覓堂)ㆍ마조단(馬祖壇)ㆍ하순청(下巡廳)이며, 2소장은 사직ㆍ덕흥대원군궁(德興大院君宮)ㆍ광명전 시어소ㆍ요령막(搖鈴幕)ㆍ경복궁ㆍ기로소(耆老所)ㆍ의정부 조방ㆍ돈녕부(敦寧府)ㆍ이조ㆍ동학ㆍ유하정(流霞亭)ㆍ종각ㆍ선농단(先農壇)ㆍ양정재(養正齋)ㆍ하함춘원(下含春苑)ㆍ좌순청(左巡廳)이며, 3소장은 영희전(永禧殿)ㆍ저경궁(儲慶宮)ㆍ선원록청(璿源錄廳)ㆍ대빈궁(大嬪宮)ㆍ남별궁ㆍ봉상시(奉常寺)ㆍ신당(神堂)ㆍ북단(北壇)ㆍ여단(厲壇)ㆍ내자시(內資寺)ㆍ권초각(捲草閣)ㆍ상함춘원(上含春苑)ㆍ중추부(中樞府)ㆍ예조ㆍ서학ㆍ내섬시(內贍寺)ㆍ우모가가(牛毛假家)ㆍ상하당직(上下當直)이며, 4소장은 경모궁(景慕宮)ㆍ경우궁(景祐宮)ㆍ동관왕묘ㆍ경희궁ㆍ12별당ㆍ어의본궁(於義本宮)ㆍ의금부ㆍ의정부 반열조방(議政府班列朝房)ㆍ사간원 조방ㆍ모화관(慕華館)ㆍ남학ㆍ상림원(上林苑)ㆍ승문원(承文院)ㆍ우사단(雩祀壇)ㆍ한강단(漢江壇)이며, 5소장은 성균관ㆍ창의궁(彰義宮)ㆍ융례전(隆禮殿)ㆍ문희묘(文禧廟)ㆍ남관왕묘ㆍ전계대원군궁(全溪大院君宮)ㆍ선무사(宣武祠)ㆍ연서비각(延曙碑閣)ㆍ차동비각(車洞碑閣)ㆍ남단(南壇)ㆍ사한단(司寒壇)ㆍ의정부 중추부 조방ㆍ사헌부ㆍ내각 조방(內閣朝房)ㆍ방마원(放馬苑)ㆍ전생서(典牲署)이다. ○ 무릇 영선하는 곳은 맡은 관원이 본사(本司)의 관원과 함께 나가 검거(檢擧)한다. ○ 궁장(宮墻)은 도성의 준례에 따라 3군문에 나뉘어 속하여 허물어진 곳을 돌로 쌓는다.
【형세】 삼각산이 진산(鎭山)이 되었는데 낙산(駱山)이 왼쪽에 높이 솟고, 모악(母岳)이 오른쪽에 자리잡았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 읍하고 한강[漢水]이 그 앞에 흐른다. ○ 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고, 동쪽은 동해[桑暾]에 접하였다. 천지(天池)가 남호(南戶)에 미쳤고 말갈(靺鞨)이 북문이 되었다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있다. ○ 북쪽으로 화산(華山 삼각산)을 의지하여 자리잡고 남쪽으로 한강에 임하였는데 토지가 평탄하고 넓으며 백성이 많고 부유하여 번화하다 《고려사(高麗史)》에 있다.
【산천】한성부의 낭관이 사산(四山)을 나누어 맡아 긴관 금기처(緊關禁忌處)를 검거(檢擧)하며, 성 안의 전수 및 성 밖의 현무(玄武 북방) 주산(主山)에 표(標)를 세운다. 동지긴관(東指緊關)의 외청룡(外靑龍)인 석가호(釋迦岵) 안 사을한(沙乙閑) 남쪽 가에서부터 적유현(狄踰峴)을 지나 광평대군(廣平大君) 집 북호(北岵) 선잠제단(先蠶祭壇)에 이르기까지 선제원(善濟院) 서쪽 건너편 가에서 안암동(安岩洞)ㆍ저방동(猪房洞)ㆍ동대문에 이르기까지에는 모두 산 등 안팎에, 서지긴관(西指緊關)의 외백호(外白虎)인 모화관(慕華館) 뒤에서 사현(沙峴) 사축서호(司畜署岵)를 지나 청파(靑坡) 뒤에 이르기까지에는 산 등 내면(內面)에, 주작(朱雀 남방) 안산(案山)인 남산의 외면과 남대문 성 밖에서부터 전생서(典牲署) 뒤를 지나 벌아현(伐兒峴)에 이르고, 동쪽으로 두모포(豆毛浦) 후산(後山)ㆍ왕십리(往十里) 후산으로 나가고 돌아서 수구(水口)에 이르기까지는 산 등 내외면에 모두 표를 세운다.
삼각산(三角山) 도성 북쪽 30리 양주(楊州) 땅에 있는데 일명은 화산(華山)이요, 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평강현(平康縣)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연이어진 봉우리와 첩첩한 묏부리가 잇따라 뻗어와서 서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러 서남쪽에서 도봉산(道峯山)이 되고 또 북산(北山)이 되니, 사실 경성의 진산(鎭山)이다.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니 곧 이 북산이다. 백운(白雲)ㆍ만경(萬景)을 국망(國望)이라고도 하고, 인수(仁壽)의 세 봉우리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할 때에, 세조 및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다른 유신(儒臣)들을 시켜서 이 산의 보현봉(普賢峯)에 올라가 해의 출입하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고 그 아래가 한량없이 깊으니 안평대군 이하는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걸어가기를 나는 듯이 하며,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절찬 탄복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 만경봉이 동쪽으로 굽어 돌아서 석가(釋迦)ㆍ보현ㆍ문수(文殊) 등의 여러 봉우리가 되었는데, 보현봉의 갈라진 산기슭이 곧 도성의 주맥(主脈)이기 때문에 총융청(摠戎廳)에서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주관하여 보축(補築)하였다. 문수봉의 동쪽 가지가 형제의 두봉이 되고 또 남쪽으로는 구준봉(狗蹲峯)ㆍ백악산(白岳山)이 되며, 문수봉의 서쪽 가지가 칠성봉(七星峯)이 되고, 거기서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져서 나한(羅漢)ㆍ증봉(甑峯)ㆍ혈망(穴望)ㆍ의상(義相)의 여러 봉이 되어 중흥 수구(重興水口)에 이르며, 한 가지가 서쪽으로 달려서 승가사(僧伽寺)의 비봉(碑峯)과 불암 향림사(佛巖香林寺)의 후봉인 백운봉(白雲峯)이 되며, 서쪽으로 돌아서는 영취(靈鷲)ㆍ원효(元曉)의 두 봉이 되어 중흥 수구에 와서 멈춘다. ○ 우리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일찍이 이 산에 올라 시를 짓기를, “손 내밀어 덩굴 붙들며 푸른 봉우리 올라가니, 한 암자 높게도 백운 중에 누워 있네, 눈앞의 보이는 곳 다 우리 땅이라면, 오월(吳越) 강남(江南)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리.” 하니, 그 넓은 마음 큰 도량을 언어로 형용할 수 없다. ○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이 있다. ○ 고려 정종(靖宗) 원년에 적석정(積石頂)에 운석(隕石)이 있었다. 예종(睿宗) 원년에 이 산의 부아봉(負兒峯)이 무너졌으며 2년에도 무너졌다. 희종(熙宗) 6년에 산의 중봉(中峯)이 무너졌으며, 공민왕(恭愍王) 23년에도 중봉이 무너졌다. 신우(辛禑) 원년 6월에 크게 비가 와서 국망봉이 무너졌으며, 우리 조정 선조 30년에 산중에서 소리가 우레처럼 났다. ○ 기우제(祈雨祭)에는 초차(初次)에 당상 3품관이, 6차에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에는 근시관이 드린다.
백악(白嶽) 경복궁성 북쪽에 있는데 도성(都城)이 그 위로 지난다.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한다.
응봉(鷹峯) 백악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봉 아래 후원주맥(後苑主脈) 보토처(補土處)에는 매해 봄가을로 병조ㆍ공조ㆍ한성부의 당랑관(堂郞官)이 어영대장과 더불어 간심(看審)한다.
인왕산(仁王山) 백악 서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니 명(明) 나라 사신이 고쳐 이름지은 것이다. ○ 영천(靈泉)이 산허리 바위 아래에서 나는데 돌 짬에서 솟아나며 맛이 달고 맵지 않고 또 매우 차지도 않다. ○ 현종(顯宗) 임자년에 성매죽(成梅竹 삼문)의 신주를 인왕산 무너진 언덕 사이에서 얻었는데, 분칠한 쪽에는 성삼문 신주(成三問神主) 다섯 자만을 썼으며 움푹한 곳에는 무술생 외손 박호(戊戌生外孫朴壕) 일곱 자가 쓰여져 있었다. 봄에 홍주(洪州)에 있는 공의 구기(舊基)로 보내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게 하였다.
타락산(酡酪山) 도성(都城) 안 동쪽에 있는데 도성이 그 위로 지난다. 응봉(鷹峯) 동쪽에서 뻗어 돌아 이 산이 되었는데 동쪽으로 안암(安巖)ㆍ고암(鼓巖)에 이른다.
목멱산(木覓山) 곧 도성의 남산이며 열경산(列慶山)이라고도 하는데 도성이 그 위를 지난다. 인왕산에서부터 낮게 평평해지며 남쪽으로 뻗어 오다가 동쪽으로 휘어지며 솟아올라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동쪽에서 대소(大小)ㆍ설마(雪馬)의 두 고개가 되고, 왕십리현(往十里峴)ㆍ동현(東峴)에 이른다. ○ 본조 개국 초기에 동요(童謠)가 있어 이르기를, “저 남산(南山)에 가서 돌을 떼내는데 정(釘) 남은 것 없다.” 하더니, 얼마 안가서 남은(南誾)ㆍ정도전(鄭道傳)이 사변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다. 남(南)은 남은을 말함이요, 정(釘)은 정(鄭)과 음이 같으니 도전(道傳)을 말한 것이며, 여(餘) 자의 해석이 남은의 음과 서로 같으니 남(南)ㆍ정(鄭)이 모두 없어진다는 말인 것이다. ○ 기우제(祈雨祭)의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선암(禪巖)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한양 도성(漢陽都城)을 쌓을 때에 바위가 중이 장삼 입은 모양 같은 것이 인왕산 모퉁이에 서있어 선암(禪巖)이라 불렀다.” 한다. 무학(無學)은 성 안으로 들여보내려 하고 정도전은 성 밖으로 내 보내려 하였는데, 태조가 그 이유를 물었다. 도전이 아뢰기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면 불교(佛敎)가 성하고 성 밖으로 내보내면 유교가 흥합니다.” 하니, 명하여 도전의 말을 좇게 하였는데, 무학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후로는 중들이 선비의 책보를 지고 따르게 되었다.” 하였다.
비봉(碑峯) 《택리지(擇里志)》에 이르기를, “우리 태조가 도읍터를 정할 때에 무학이 백운대(白雲臺)에서 맥을 찾아 만경대(萬景臺)에 이르고 서남쪽으로 가서 비봉에 이르러 보니, 한 비석에 크게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 무학이 잘못 찾아 여기에 이른다)’라는 여섯 글자가 있으니, 이것은 곧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다.” 하였다.
모악(母嶽) 도성 서쪽에 있는데, 안현(鞍峴)이라 하기도 하고 기봉(岐峯)이라 하기도 한다. ○ 인왕산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 추모현(追慕峴)이 되고, 이 산이 된다. 한 기슭이 남쪽으로 나가 약현(藥峴)ㆍ만리현(萬里峴)이 되고, 용산(龍山)에 이르러, 한 기슭이 서남쪽에서 계당치(鷄堂峙)가 되고, 와우산(臥牛山)에 이르러 잠두봉(蠶豆峯)이 된다. ○ 지봉(芝峯 이수광)이 말하기를, “민간에서들 이르기를, ‘부아암(負兒巖)이 집을 나가는[出世]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이 산을 모악(母岳)이라 이름하였으며, 남쪽을 벌아령(伐兒嶺)이라 하니 대개 막으려 하다가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벌아라 한 것이다.’ 하였는데, 서쪽을 병시현(餠市峴)이라고 하니 이것은 나가려는 아이를 떡을 주어 달래어 멈추려 한 것이다. 옛날 이름지은 것이 모두 깊은 뜻이 있다.” 하였다. ○ 인조 갑자년 2월에 역적 이괄(李适)이 도성을 차지하였는데, 도원수 장만(張晩)과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방어사 정충신(鄭忠信) 등이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 힘써 싸워 적을 물리쳤다.
추모현(追慕峴) 모화관(慕華館) 서북쪽에 있는데 본래 이름은 사현(沙峴)이다. 영종(英宗) 45년에 명릉(明陵)에 역사가 있으니 왕이 친히 이 고개에 와서 바라보고,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녹반현(綠礬峴) 추모현 북쪽에 있다. 석벽(石壁)에서 자연동(自然銅)이 나는데, 뼈 부러진 이들이 많이 캐어다 사용한다. ○ 당 나라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한 사람이 지키면 일만 사람이 이기지 못할 곳이다.” 하였다.
동망봉(東望峯)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영종 47년에 어필로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 불우(佛宇) 정업원조(淨業院條)에 자세하다.
계당치(鷄堂峙) 서부(西部)의 기봉(岐峯) 서쪽 기슭에 있다.
와우산(臥牛山) 도성 밖 서쪽 13리에 있는데, 산 남쪽에 광흥창(廣興倉)이 있다.
용산(龍山) 도성 밖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군자감(軍資監)과 훈국(訓局)의 별영(別營)이 있다. ○ 위의 두 산은 모두 한강 가에 있다.
잠두봉(蠶頭峯) 도성 밖 서쪽 10리,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는데, 민간에서 가을두(加乙頭)라고 부르며, 또 용두봉(龍頭峯)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 강희맹(姜希孟)이 서술한 기문이 있다.
설마현(雪馬峴) 둘이 있는데, 목멱산(木覓山) 남쪽에 있는 것을 대설마(大雪馬)라 하고, 동쪽에 있는 것을 소설마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부어현(夫於峴)이라고 부른다.
가산(假山) 도성 수구 안, 훈련원(訓練院) 동북쪽에 있다. 하나는 물[水] 남쪽에 있고 하나는 물 북쪽에 있는데,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서 지기(地氣)를 기르는 것이다. 영종 경진년에 버들을 양쪽 언덕에 심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는데, 지금은 식목소(植木所)라고 하며 어영청(御營廳)이 관할한다. 경모궁(景慕宮) 안산(案山) 및 관현(館峴)과 흥인산(興仁山) 내외의 3곳에 각각 장졸을 배정하여 수호 금양(守護禁養)하는데, 경모궁 패장(牌將)으로 오래 벼슬한 사람이 전임(轉任)한다.
개천(開川) 제소남(齊召南 청(淸) 나라 사람)의 《수도제강(水道提綱 천하의 수도를 총론하였음)》에 이르기를, “왕경(王京) 한양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는데, 동(東) 12도 6분에 극(極) 37도 5분이며, 서쪽으로 강화도(江華道)에 이르는데, 동 9도에 극 37도 4분이다.” 하였다. ○ 백악(白岳)ㆍ인왕ㆍ목멱(木覓)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 도성(都城) 안을 가로 질러서 3수구(水口)로 나가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간다. ○ 수원(水源)이 인왕산 백운동(白雲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자수궁교(慈壽宮橋)를 지나서 옥류동(玉流洞) 누각동수(樓閣洞水) 수원이 인왕산 동쪽에서 나와 모여 남쪽으로 흘러 창의궁(彰義宮) 서쪽에 있는 금청교(禁淸橋)와 사직동(社稷洞)에 있는 종침교(琮琛橋)를 지난다. 오른쪽으로 큰 물이 지나 작은 물과 합하는 것을 ‘과(過)’라 하며, 후에도 이와 같다. 수원이 사직 남쪽 경희궁(慶熙宮) 북쪽에서 나오는 승전색교(承傳色橋)를 지나 적선방(積善坊)에 있는 송기교(松杞橋)에 이르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대은암(大隱巖)에서 나와서 경복궁 서쪽으로 들어가 경령지(慶令池)의 물을 합하고, 금청교(禁淸橋) 동남쪽을 지나고, 남금교(南禁僑)를 경유하는 북어수교(北御水橋)를 지나서 꺾여 삼청동(三淸洞) 물 수원이 사동(寺洞)ㆍ수침동(水砧洞) 두 곳에서 나와서 백련봉(白蓮峯) 남쪽에 이르러 합류하며, 장원서(掌苑署) 앞 장생전(長生殿) 다리와 관광방(觀光坊)에 있는 십자각(十字閣) 앞 다리를 지나서 경복궁성 안 동쪽 가의 물과 합하여 중학 앞에 있는 중학교(中學橋)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혜정교(惠政橋)를 지나는데, 민간에서 말하기를, “관으로 재물 많이 탐한 자를 이 다리 위에서 삶는다.” 한다. 운종가 남교(雲從街南橋)는 민간에서 모전교(毛廛橋)라고 하는데 서린방(瑞麟坊)에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곡교(曲橋)의 물을 지난다. 하나는 목멱산(木覓山) 아래 북창동(北倉洞)에서 나와서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는 수각교(水閣橋)ㆍ황화방(皇華坊)에 있는 전도감교(錢都監橋)ㆍ미장동 동교(美墻洞東橋)를 지나서 동쪽으로 흐른다. 하나는 정릉동(貞陵洞)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군기시(軍器寺) 다리가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수각교 물과 합하여 소광통교(小廣通橋)가 되어 온다. 하나는 회현동(會賢洞)에서 나와서 동현동(銅峴洞)을 지나 소광통교의 물과 합하여, 태평방(太平坊)에 있는 곡교(曲橋)가 된다. 하나는 명례동(明禮洞)에서 나와서 곡교로 들어가고 동쪽으로 장통교(長通橋)가 되니, 송기교(松杞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7백 68척, 넓이가 10여 보(步)이며, 훈련도감(訓鍊都監) 관내가 된다. 왼쪽으로 수원이 대소안국동(大小安國洞)에서 나오는 통운교(通雲橋)를 지나고, 수표교(水標橋)ㆍ하량교(河良橋)를 지나며,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木覓山) 북쪽에서 나와서 주자동(鑄字洞)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초전동(草廛洞)을 지나고, 또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중부동 다리를 경유하여 오는 중부동(中部洞)을 지나서 영풍교(永豐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왼쪽으로 이교(二橋) 물을 지난다. 하나는 응봉(鷹峯) 동쪽에서 나와서 북영(北營) 요금문(曜金門) 곁의 수구(水口)를 경유하여 창덕궁 금청교(禁淸橋)로 들어갔다가, 단봉문(丹鳳門) 곁의 수구로 나와서 창경궁 후원으로 들어가며, 금청교의 선인문(宣仁門) 밖 수구를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연화방(蓮花坊)에 있는 황참의교(黃參議橋)를 경유하여 와서 단봉문 수구의 물과 합한다.
하나는 회동(灰洞)ㆍ제생동(濟生洞)에서 나와서 향교동(鄕校洞)을 경유하여 돈화문(敦化門) 밖 병문(屛門)에 있는 기자교(杞子橋)가 되고, 대묘동(大廟洞)에 이르러 단봉문(丹鳳門) 수구물과 합하여 함께 이교(二橋)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청녕교(靑寧橋) 물의 근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南別營)을 경유하여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무침(無沈)ㆍ청녕(靑寧)의 두 다리를 지나와서 태평교(太平橋)가 되는데,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하며 영종조에 옛 이름으로 회복하였다. 장통교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81보, 넓이가 20여 보이며, 금위영 관내이다. 다시 오른쪽으로 수원이 목멱산 북쪽에서 나와서 쌍리문동(雙里門洞)을 경유하는 청교(靑橋)를 지나서 명철방(明哲坊)에 있는 어청교(於靑橋)를 지나며, 또 동쪽으로 흐르는 초교(初橋) 물은 수원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나오는데, 동반수(東泮水)는 성균관 앞 다리와 식당교(食堂橋)와 비각교(碑閣橋)를 경유하고, 서반수(西泮水)는 집춘문(集春門) 앞 다리를 경유하여 대성전(大成殿) 남문 밖에서 합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관기교(觀旗橋)가 되고, 동쪽으로 흘러서 충락교(忠樂橋)가 되며, 광례교(廣禮橋)에 이르러 흥덕동(興德洞) 물과 합하고, 또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 응란교(凝鸞橋) 물을 지나서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 장경교(長慶橋)가 되고,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 앞을 지나고 신교(新橋)를 지나와서 오칸 수문(五間水門)으로 들어간다. 성 밖에 나가서는 수원이 남소문동(南小門洞) 남쪽 가에서 나오는 이칸 수문(二間水門) 물을 지나서 영도교(永渡橋)를 거치는데, 태평교(太平橋)에서 여기까지 길이가 1천 1백 73보, 넓이가 30여 보이고, 장경교(長慶橋)에서 큰 개천 골목에 이르기까지는 길이가 1천 4백 7보, 넓이가 10여 보이며, 모두 어영청(御營廳) 관내에 속한다. 차현(車峴) 동쪽에서 수원이 양주(楊州) 불곡산(佛谷山) 및 벽석현(碧石峴)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녹양역(綠楊驛)ㆍ송계교(松溪橋)로 흘러서 남쪽으로 와서 모이는 중량포(中梁浦)와 모이며, 남쪽으로 흘러 전관교(箭串橋)를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 영종 경진년에 오래도록 쳐내지 않았으므로 개천 길이 막혀서 모래가 덮이고 다리가 묻혀, 장마 때가 되기만 하면 그만 넘쳐흐르게 되니 백성을 모집하여 개천을 쳐내게 하였다. 그리고 완공된 다음에는 준천사(濬川司)를 수표교 북쪽 냇가에 설치하고, 양쪽 언덕에 버들을 심고 얽어매어서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계사년에는 고쳐서 돌로 쌓았다.

한강(漢江)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목멱산 남쪽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고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이라 하여 중사(中祀)로 적혀 있으며,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 우통(五臺山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忠州) 서북쪽에 이르러 달천(達川)과 합하고, 원주(原州) 서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廣州)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 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고, 두모포(豆毛浦 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露梁)이 되고, 용산강(龍山江)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며, 시흥현(始興縣)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陽川縣)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交河郡)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며, 통진부(通津府)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들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別將)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字內]는 광주의 압구정(押鷗亭)과 두모포, 독도(纛島 뚝섬)의 몽뢰정(夢賚亭), 한강의 서빙고(西氷庫)이다. ○ 속한 선박은 훈국(訓局)의 배 10척이 있는데 관방조(關防條)에도 보인다. ○ 명(明) 나라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의 기문(記文)이 있다. ○ 선조 21년에 강물이 5ㆍ6일간 핏빛 같았다. ○ 기우제에 초차(初次)는 당하 3품관이, 6차는 근시관(近侍官)이 드리는데 호두(虎頭)를 물 속에 넣으며, 기설제(祈雪祭) 재차는 근시관이 드린다.
노량(露梁 노들) 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 처음에는 도승을 배치하여 출입하는 사람을 기찰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과천(果川)의 신촌리(新村里)ㆍ사촌리(沙村里)ㆍ곽계(槨契)ㆍ형제정계(兄弟井契)ㆍ마포강(麻浦江)이다. ○ 속한 선박은 금위영(禁衛營)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 강 북쪽 모래사장에 용호영(龍虎營) 및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습진(習陣)하는 곳이 있다. ○ 선조 36년에 큰 돌이 물 속에서 언덕 가의 다른 돌 위에 일어섰다.
용산강(龍山江) 도성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고양군(高陽郡) 부원현(富原縣) 땅이다. 경상ㆍ강원ㆍ충청ㆍ경기도 상류의 조운(漕運)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서강(西江)의 한 갈래가 바로 시흥현(始興縣)에서부터 방학동(放鶴洞)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서 양화도에 이르러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니, 이것이 용산포(龍山浦)이다. ○ 예전에는 10리 장호(長湖)가 되었는데 서쪽으로 염창(鹽倉)이 막히고 모래 언덕이 새지 않으며, 연이 그 가운데에 나서 이름을 용산(蓉山)이라고 하였다. ○ 기우제(祈雨祭)에 재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삼전도(三田渡) 광주 지경에 있는데 도성에서 30리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으며 속한 관청은 어영청(御營廳)이요, 녹안(錄案)에는 관선(官船)이 3척이다. ○ 삼전도와 신포(新浦) 사이에 상전(桑田)이 있다.
마포(麻浦) 도성 서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용산강 하류이다.
서강(西江) 도성 서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마포에서 여기까지를 통틀어 서호(西湖)라고 한다. 황해ㆍ전라ㆍ충청ㆍ경기도 하류의 조운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
양화도(楊花渡) 곧 서강의 하류이다. ○ 처음에는 도승(渡丞)을 배치하였는데 후에 별장으로 고쳤다. 세금을 거두는 관내는 토정리(土亭里)ㆍ옹리 상하계(甕里上下契)ㆍ현석리(玄石里)ㆍ율도(栗島)ㆍ다인리(多人里)ㆍ하중리(下中里)ㆍ합정리(合井里)ㆍ수파리(水波里)ㆍ망원정 일이계(望遠亭一二契)ㆍ시흥 신정리(始興新井里)이다. ○ 호조(戶曹)의 점검청(點檢廳)이 있다. ○ 선조 24년에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고, 인조 14년에 또 물이 얕아져서 배가 통행하지 못하였다. 속한 선박은 어영청(御營廳)의 배 10척인데 관방조에도 보인다.
독도(纛島) 혹은 독백(禿白)이라고 하는데 두모포의 상류이다. ○ 강변에 예전에는 호조(戶曹)의 수세소(收稅所)가 있었다. 효종 병신년에 설치하였는데 무릇 각종 목물(木物)이 물 상류에서 내려오는 것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10분의 1의 세를 받았다.
저자도(楮子島) 도성 동쪽 25리, 삼전도(三田渡) 서쪽에 있다. 고려의 한종유(韓宗愈)가 여기에 별장을 두었는데, 우리 조정의 세종(世宗)이 섬을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의 아들 안빈(安貧) 이후로 대대로 전하여 소유하였다. ○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이 있다. ○ 기우제에 초차는 종2품관이, 7차는 정2품관이 드린다.
두모포(豆毛浦) 도성 동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동호(東湖)라고 한다. 명종(明宗) 을축년에 두모포 어부가 한 마리 흰 고기를 얻으니 그 크기가 배[船] 같았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고기가 바다에서 멀리 와서 강에 이르러 죽었는데, 윤원형(尹元衡)의 형(衡)자가 행(行) 자와 어(魚) 자로 되었으므로 고기가 죽은 것은 곧 원형이 죽을 징조였다.” 하였다.
입석포(立石浦) 두모포 상류에 있다.
신포(新浦) 광주 지경에 있으며, 도성에서 거리가 27리이다. 한강 물이 넘쳐서 기류(岐流)가 되었는데, 그 정파(正派)가 기류로 옮겨져서 신포(新浦)라고 한다. 가물면 그대로 건너고, 물이 넘치면 두 강이 되며, 저자도(楮子島) 아래에 이르러서는 합하여 하나가 된다.
중종조(中宗朝)에 그 물 형세가 바로 선릉(宣陵)에 부딪히므로, 군사들을 출동시켜 돌을 운반하여 언덕이 무너져 들어간 곳을 막다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도요연(桃夭淵) 전관교(箭串橋)에 있다.
만초천(蔓草川) 수원이 경성 서쪽 모악(母岳)에서 나와서 성을 돌며 남쪽으로 흐르는데, 반송방(盤松坊)에 있는 혁교(革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 경영교(京營橋), 소의문(昭義門) 밖에 있는 신교(新橋)ㆍ비교(圮橋),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 염초청(焰硝廳),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 주교(舟橋)를 지나 만초천(蔓草川)이 되고, 서남으로 흘러 용산강(龍山江)에 들어간다.
창천(倉川) 도성 서쪽 10리 되는 광흥창(廣興倉) 근처에 있다. 동남쪽으로 흘러서 서강으로 들어간다.
사천(沙川) 수원이 문수봉(文殊峯)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탕춘대(蕩春臺)ㆍ홍제원(弘濟院)을 지나며, 모악을 돌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강으로 들어간다.
중량포(中梁浦) 일명 속계(涑溪)라고도 하는데, 도성 동쪽 13리 지점에 있으며, 양주(楊州) 독두천(獨豆川)의 하류이다.
율주(栗洲) 일명 율도(栗島)라고도 하고, 일명 가산(駕山)이라고도 한다. 길이가 7리인데, 경성의 서남쪽 10리 지점에 있으니, 곧 마포(麻浦) 남쪽이다. ○ 상림(桑林)이 있는데 곧 공상(公桑)이며, 약전(藥田)은 지금 내의원(內醫院)에 속하였다.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고도 한다. 모래 섬 중에 늙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고려의 김주(金澍)가 손수 심은 것이라 한다.
【정지】 종묘서(宗廟署)의 우물 하나는 서(署) 안에 있고, 하나는 서 밖에 있다.
성제정(星祭井) 소격서(昭格署) 곁에 있는데, 물이 돌 사이에서 나오며 맛이 매우 맑고 차다. 옛날 초제(醮祭 별에 제사 드리는 것) 드릴 때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제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의성위정(宜城尉井) 타락산(駝駱山) 아래 어의동(於義洞)에 있다. 성종조(成宗朝)에 그 우물을 봉(封)하고 길어다가 임금께 진상하였으므로 어정(御井)이라고 하였으며, 후에 의성위에게 하사하였기 때문에 사정(賜井)이라는 두 글자를 우물 돌 위에 새겼다.
미정(尾井)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매우 좋다.
통정(桶井) 훈련원(訓鍊院) 서남쪽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가장 좋아서 성 안에 제일이다. 맛이 매우 달고 차며 겨울에는 따스하고 여름에는 차다. 가뭄과 장마에 늘고 줄지 않으며 조정에서 봉하여 어정으로 삼았다.
초정(椒井)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목욕하면 병이 나았다. 효종조(孝宗朝)ㆍ현종조(顯宗朝)에 모두 여기에 행차하였다.
잠룡지(潛龍池) 이문(里門) 안에 인조의 잠저(潛邸)가 있었는데, 당(堂) 안에 영종(英宗)의 어필 사액(賜額)을 걸어 잠룡지(潛龍池)라고 하였다.
동지(東池)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하나는 경모궁(景慕宮) 앞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다.
남지(南池)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으며, 연지(蓮池)라고 한다. 민간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집터라고 말한다.
서지(西池)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큰 가뭄에 비를 빌면 영험이 있으며 연꽃을 심었다. ○ 못 가에 옛날에는 반송(盤松)이 있어 수십 보(步)를 덮었는데, 고려 임금이 일찍이 남경(南京 서울)에 행차하였다가 여기서 비를 피하였다. 본조(本朝) 초기에도 그 소나무가 그대로 있어서 반송지(盤松池)라고 하였다. 태종(太宗) 8년에 모화관을 남지(南池)에 닿게 하려다가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니, 사헌부에서 제조관(提調官) 박자청(朴子靑)을 탄핵하였다. ○ 못 서쪽 언덕 위에 경기도 중군영이 있다. 천연정(天然亭)을 지었으며 또 원관정(遠觀亭)이 있다.
와암천(臥巖泉) 모화관(慕華館) 곁에 있는데 맛이 매우 상쾌하고 차다.
휴암천(鵂巖泉) 목멱산(木覓山) 아래 삼아동(三丫洞) 위에 있는데, 물의 품질이 달고 차다. 양어소(養魚所) 훈국(訓局)의 양어소는 보제원(普濟院)에 있는데, 착어군(捉魚軍)이 보살펴 기른다. 금위영(禁衛營)의 양어소는 왕십리에 있는데, 군병(軍兵)을 정하여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어영청(御營廳)의 양어소는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는데 붕어를 사다가 기른다.
종목소(種木所) 가산(假山) 주(註)에 보인다.
【명승】중흥동(重興洞) 삼각산(三角山) 서남쪽에 있는데 위에 중흥사(重興寺)가 있고 천석(泉石)이 유수(幽邃)ㆍ청절(淸絶)하여 도성 사람들이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된다. 또 산영루(山映樓)가 있다.
조계동(漕溪洞) 북한산성(北漢山城) 동문 밖에 있는데 7층 폭포가 있다. ○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헐렸다.
탕춘대(蕩春臺)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三角)ㆍ백운(白雲) 두 산 사이에 있어, 수석(水石)의 좋은 경치가 있으며 장의사(藏義寺) 옛 터가 있다. 연산군(燕山君) 때에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놀며 잔치하였다. 또 돌 구유를 만들고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였다. 그 후에 이궁은 헐리고 조지소(造紙所)를 개천 동쪽에 설치하였다.
북저동(北渚洞) 혜화문 밖 북쪽에 있는데, 동(洞) 가운데 복숭아나무를 벌여 심어서 봄철에 복사꽃이 한창 피면, 도성 사람들이 다투어 나가서 놀며 구경한다. 민간에서는 도화동(桃花洞)이라 부르며, 어영청의 성북둔(城北屯)이 있다. ○ 북사동(北寺洞)이라고도 하며 옛날에 묵사(墨寺)가 있었기 때문에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한다. 맑은 시내의 언덕을 따라 주민들이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생활을 한다. 늦은 봄철마다 노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가득 찬다.
안암동(安岩洞) 혜화문 밖에 있는데, 훈국(訓局)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연미정동(燕尾亭洞) 흥인문 밖에 있는데, 훈국 군마의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 영풍정(映楓亭)이 있다.
세마평(洗馬坪) 노량(露梁) 북쪽에 있는데 훈국 보군(步軍)이 중순(中旬)마다 기예를 시험하는 곳이 되었다.
산단(山壇) 바깥 남산에 있는데 곧 남단 곁이요, 녹사장(綠莎場) 동쪽이다. 민간에서 단오절마다 나이 젊고 건장한 이들이 편을 나누어, 이곳에서 씨름을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삼청동(三淸洞) 인왕산 기슭에 있다. (주ㆍ오기(誤記)임) 냇물이 석벽으로 흐르고, 석벽 위에는 삼청동문(三淸洞門) 네 글자를 새겼는데, 감사 이상겸(李尙謙)의 글씨이다. ○ 동문 곁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의 옛 집이 있으며 동(洞) 가운데 또 팔판동(八判洞)이 있으니, 옛날 8판서(判書)가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산청(山淸)ㆍ수청(水淸)ㆍ인청(人淸)하기 때문에 삼청(三淸)이라 하였다.” 한다.
필운대(弼雲臺)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소시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하였으므로 인하여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弼雲臺)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이다. 대 곁 인가에서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의 봄철 꽃구경은 반드시 먼저 이곳을 손꼽게 되었다.
육각현(六角峴) 필운대 곁에 있는데 대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 인가가 있는데 담장 둘레가 매우 길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리장성(萬里長城) 집이라고 한다.
옥류동(玉流洞) 인왕산 아래에 있는데 수석의 좋은 경치가 있다. 계겹란(鸂鵊瀾)ㆍ청휘각(淸暉閣)이 있는데, 모두 사암(思巖) 김창협(金昌協)이 이름지은 것이다. 물이 석벽 사이에서 나오며 석벽 위에는 옥류동(玉流洞)이란 세 글자를 새겼다.
전대(殿臺) 삼청동에 있는데, 훈국(訓局)에서 큰 기치(旗幟)를 새로 만들 때 제사드리는 곳이다.
세심대(洗心臺) 인왕산 아래 육상궁(毓祥宮) 뒤에 있는데, 석벽에 세심대(洗心臺)란 세 글자를 새겼다. 꽃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구경하기에 적당하다. 영종 을묘년에 장헌세자가 탄생하였는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를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노래하고 나는 웃으며 동대(東臺)에 올라가니, 오얏꽃 희고 복사꽃 붉게 일만 나무 피었네. 이런 풍광 이런 즐거움에, 해마다 태평 술잔에 크게 취한다네.” 하였다. ○ 정종(正宗)이 일찍이 임어(臨御 임금이 행차함)하였는데, 그 후에 순조(純祖)ㆍ익종(翼宗) 열성조(列聖朝)도 많이 거둥하였다. 사정(射亭)이 있다.
청풍계(淸楓溪) 인왕산 기슭에 있는데, 동부(洞府)가 그윽하고 깊으며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조용하여[窈窕] 놀며 구경할 만하다.
도화동(桃花洞) 북악(北岳) 아래에 있는데 복사꽃이 많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회맹단(會盟壇)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있다.
화개동(花開洞)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지역이 치우쳐서 술마시며 시 읊기에 적합하다. 이 동리에 옛날 토기도감(土器都監)이 있었기 때문에 변하여 화개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포곡(浦谷) 성균관(成均館) 북쪽 산기슭 아래에 있다.
쌍회정(雙檜亭) 창동 앞에 있는데, 석간수(石澗水)를 내려다보고, 단풍나무와 측백나무가 많아서, 가을에 놀며 구경하기에 적합하다.
칠송정(七松亭) 남산 기슭에 있는데, 정자는 없지만 일곱 그루의 소나무가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올라가서 먼 곳을 바라보기에 적합하다.
【관방】 탕춘대성(蕩春臺城) 탕춘대 서쪽 수구(水口)에 있다. 숙종(肅宗) 계사년에, “평창(平倉)을 방비ㆍ수호함이 있어야 하겠다.” 하면서 처음으로 한북문(漢北門) [한(漢)은 한(捍)으로도 씀]을 설치하고, 좌우익(左右翼)의 성을 쌓았다. 주위가 1천 1백 10보이며 높이는 10척인데, 좌상 이유(李濡)가 감독하여 쌓았다. 그 안에 총융청(摠戎廳)의 군창(軍倉)과 혜청(惠廳)의 별창(別倉)이 있다. ○ 수문부장(守門部將)은 춘방(春坊) 서리(書吏) 강효원(姜孝元)의 자손이 전교에 의하여 정해 두고 임명된다.
북한산성(北漢山城) 경성 북쪽 30리 삼각산의 온조왕(溫祚王) 옛 터에 있다. 숙종 37년에 성을 쌓았는데, 행궁(行宮)을 짓고 군량과 군기를 저장하여 유사시에 보장(保障)하는 장소로 삼았다. 성은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7천 6백 20보, 여첩(女堞)이 2천 7백 97, 성곽이 1백 21에, 장대 3, 못 26, 우물 99개 소이다. 대문 4, 암문(暗門 누가 없는 성문) 10이며, 안에는 군창(軍倉)과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 3영의 창고가 있다. ○ 창고 7, 큰 절 11, 작은 절 3곳이 있으며, 관성장(管城將)을 배치하고, 숯 1천 1백 석은 동문 안에 묻고, 1천 20석은 용암사(龍巖寺) 앞에 묻어 두었다. 영종 경진년에 대성문(大城門) 길이 도성 주맥(主脈)에 방해된다고 하여 폐쇄하고, 또 3곳의 대남문(大南門)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중흥동 중성(重興洞中城) 중흥사(重興寺) 북쪽 옛 성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4백 17척이며, 내성ㆍ외성ㆍ석문(石門)ㆍ석비(石扉)가 있는데,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백제 중엽에 여기에 도읍하였는데, 석문이 곧 그때 궁문이었다.”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중에 산이 있는데, 우뚝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노적 같으므로 민간에서 노적봉(露積峯)이라고 한다. ○ 산성의 수구(水口)가 낮고 넓으므로 돌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척이다.
성북둔(城北屯) 혜화문 밖에 있다. 영종 을유년에 창건하였으며 둔감(屯監)이 있고, 또 환곡미(還穀米) 4백 섬과 돈 2천 냥 가량, 둔의 소 33쌍이 있다.
한강진(漢江鎭) 영종 계유년에 설치하여 훈국(訓局)의 진(鎭)으로 삼았다.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으로 이속(移屬)하였다가 순조(純祖) 2년에 다시 훈국에 소속시켰다. 별장이 있는데 본영(本營)의 지구관(知彀官)과 기패관(旗牌官)을 돌아가며 30삭(朔)씩 교대 임명한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에 본진의 것이 8척이요, 동작진(銅雀津)의 것이 1척 이요, 서빙고(西氷庫)의 것이 6척인데, 산천조(山川條)에 보인다.
노량진(露梁津) 숙종 계미년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숙종조에는 금위영(禁衛營) 소속이었으며, 정종 14년에 장용영(壯勇營) 주교소(舟橋所)에 이속하고, 주교소에서 별아별장(別牙別將)을 겸하였는데, 파영(罷營)한 후에는 금영(禁營)으로 환속(還屬)하였다. 별장이 있고 초관(哨官) 2명, 기패관(旗牌官) 1명, 명원(名員) 8명이 있다. 아병(牙兵) 1백 24명은 매삭(每朔)마다 10명씩 돌아가며 당직하고, 취고수(吹鼓手) 30명ㆍ기수(旗手) 8명ㆍ취고수(吹鼓手) 10명인데, 환곡미 2천 석과 돈 5천 냥이 있다. ○ 진선(鎭船)이 15척인데, 그 중 본진의 것이 9척이요, 동작진의 것이 6척이다. 또 급수선(汲水船) 2척, 향축배행선(香祝陪行船) 1척이 있는데, 산천조에 보인다.
양화진(楊花鎭) 영종 갑술년에 설치하였는데 어영청(御營廳)에 속하였다. 별장이 있고 아병(牙兵)이 1백 명이며, 환곡미가 2천 석, 전세전(田稅錢)이 8백 20냥, 돈이 3천 냥, 둔우(屯牛)가 33짝인데, 산천조에 있다.
【도로】 도성 안 대로(大路)는 넓이 46척인데, 영조척(營造尺)을 사용하며,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이며, 양쪽의 도랑은 넓이 2척인데, 만일 침범하여 차지하고 파낸다든가, 혹 더러운 물건을 버려두는 자는 모두 처벌한다. 본부의 관리 및 관령(管領)이 천(川)ㆍ지(池)ㆍ성(城)ㆍ장(場)을 그 근처 사람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장부를 만들어 두어 간수(看守)하게 한다. ○ 8도의 도로는 명(明) 나라 준례에 의하여,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측량하는데, 자 여섯 치가 한 보(步)가 되고, 3백 60보가 한 리(里)가 되며, 30리가 한 참[息]이 된다. 무릇 제향(祭香)이나 수향(受香)이 있을 때는, 한성부의 관원이 미리 길을 청소한다. ○ 서로(西路)에 기발(騎撥)을 두니 의주(義州)까지 45참(站)이요, 남북로(南北路)에 보발(步撥)을 두니 동래(東萊)까지 35참, 경성(鏡城)까지 59참이다. ○ 서울에서 개성부(開城府)ㆍ죽산(竹山)ㆍ직산(稷山)ㆍ포천(抱川)까지 대로인데, 한 참에 5호(戶) 씩을 배정하며, 서울에서 양근(楊根)까지, 죽산에서 상주(尙州)까지,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까지, 직산에서 전주(全州)까지, 개성부에서 중화(中和)까지, 포천에서 회양(淮陽)까지가 중로인데, 3호씩을 배정하고, 기타 소로에는 2호씩을 배정하는데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한다.
서북으로 의주(義州)에 가는 것이 제1로가 된다 홍제원(弘濟院)과 양철평(梁鐵坪)을 경유한다.

동북으로 경흥부 서수라진(慶興府西水羅鎭)에 가는 것이 제2로가 된다 흥인문(興仁門)과 수유치(水諭峙)를 경유한다.
동으로 평해군(平海郡)에 가는 것이 제3로가 된다 흥인문과 중량포(中梁浦)를 경유한다.
동남으로 동래부ㆍ부산진(釜山鎭)에 가는 것이 제4로가 된다 숭례문과 한강진(漢江津)을 경유한다.
남으로 고성현(固城縣)과 통제사영(統制使營)에 가는 것이 제5ㆍ6로가 된다 두 길로 나뉘는데 한강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5로가 되고, 노량진을 경유하는 것이 제6로가 된다. 남으로 제주(濟州)에 가는 것이 제7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남으로 보령현(保寧峴)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에 가는 것이 제8로가 된다 노량진을 경유한다.
서쪽으로 강화부(江華府)에 가는 것이 제9로가 된다 양화진(楊花津)을 경유한다.
행행진로(幸行津路) 선릉(宣陵)ㆍ정릉(靖陵)ㆍ장릉(章陵)ㆍ건릉(健陵)ㆍ현륭원(顯隆園)은 모두 노량진을 경유하며, 헌릉(獻陵)ㆍ영릉(英陵)ㆍ영릉(寧陵)ㆍ인릉(仁陵)은 모두 광진(廣津 광나루)을 경유한다.
【교량】구거 교량(溝渠橋梁)은 공조와 한성부에서 조사ㆍ검찰하고 수리ㆍ정리하였는데, 지금은 준천사(濬川司)에 속하였다. 송기교(松杞橋)에서 장통교(長通橋)에 이르기까지는 훈련도감에서, 장통교에서 태평교(太平橋)에 이르기까지는 금위영에서, 태평교에서 영도교(永渡橋)에 이르기까지는 어영청에서, 사산(四山)의 참군(參軍)과 함께 나누어 맡아서 순시(巡視)하며, 모래가 뭉치고 돌이 무너진 곳은 해당 관청에 보고하여 수축하게 한다.
혜정교(惠政橋)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편에 앙부일영대(仰釜日影臺)가 있다. 《원사(元史)》에 기록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하여 만들었는데, 안에 시각을 새겼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여다보고 시간을 알게 하려한 것이다. 둘이 있는데, 세종 14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하나는 여기 두고 하나는 종묘 앞 거리에 두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대광통교(大廣通橋) 종루(鐘樓) 남쪽에 있는데 돌난간이 있다.
소광통교 대광통교 남쪽에 있다.
통운교(通雲橋) 민간에서들 철물전(鐵物廛) 다리라고 하는데, 종루 동쪽 대사동(大寺洞) 어귀에 있다.
연지동교(蓮池洞橋) 연근동(蓮根洞)에 있다. 또 통운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이교(二橋)라고 한다.
동교(東橋) 연지동교 동쪽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초교(初橋)라고 한다.
광제교(廣濟橋) 광통교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장통교(長通橋) 중부 장통방에 있는데 곧 광제교 동쪽이다. ○ 민간에서는 장창교(長倉橋)라고 한다.
수표교(水標橋) 중부 장통방(長通坊), 장통교 동쪽에 있다. 다리 서쪽 물 가운데 석표(石標)를 세우고,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고, 또 척촌(尺寸)의 수효를 새겨서 빗물의 얕고 깊음을 알게 하였는데, 높이가 10척이다.
하량교(河良橋) 옛날에는 신교(新橋)라고 하였는데 영표교 동쪽 장통방에 있다. 민간에서들 하량교(河梁橋)라고 하니, 옛날 하남위(河南尉)의 집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영풍교(永豐橋) 하량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효경교(孝經橋)라고 한다.
태평교(太平橋) 영풍교 동쪽에 있다. 민간에서들 마전교(馬廛橋)라고 한다.
송첨교(松簷橋) 사헌부(司憲府) 서쪽에 있는데, 곧 서부의 적선방(積善坊)이다.
영도교(永渡橋) 흥인문 밖에 있는데, 곧 개천(開川)의 하류이다.
제반교(濟盤橋) 전관(箭串)에 있는데, 다리가 3백여 보 이상에 걸쳐있다. 두 다리는 모두 중종(中宗)이 어필로 글씨를 써서 정한 것이다.
청파신교(靑坡新橋) 숭례문 밖에 있는데, 민간에서들 주교(舟橋 배다리)라고 한다.
경고교(京庫橋) 돈의문(敦義門) 밖에 있다.
홍제교(洪濟橋) 홍제원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 임금이 능에 거둥할 때에는 도성 안팎의 교량을 호조(戶曹)에서 수리 개선하는데, 동쪽은 안암천(安巖川)을 한계로 하고 서쪽은 홍제원을 한계로 하고 남쪽은 노량강 가를 한계로 한다.
【전야】 동적전(東籍田) 동교 10리 전농리(典農里)에 있는데, 곧 선농단(先農壇) 곁이다. 왕이 친히 밭 가는 땅이 있고 친경대(親耕臺)가 있다. 또 분필각(芬苾閣)이 있고, 또 창고가 있다. ○ 수전(水田 논)과 한전(旱田 밭)을 총합하여 37결(結) 59부(負) 6속(束)인데, 친경전(親耕田)은 8일 갈이이다. ○ 열성조(列聖朝)에서 친히 밭 가는 예절을 많이 거행하였으며, 영묘(英廟)에도 행차하여 추수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 제사에 쓰는 여러 가지 곡식을 심어서, 별제(別祭)의 자성(粢盛) 및 천신(薦新)하는 6종의 곡물로 바친다.
친경대(親耕臺) 선농단(先農壇) 곁에 있다.
성경대(省耕臺) 숭례문 밖 청파(靑坡) 남쪽에 있는데, 관가대(觀稼臺)라고도 한다. ○ 영종조에 해마다 친히 행차하여 농사짓는 것을 권장하였으며, 가을 성숙기에도 행차하여 보았다. 43년에는, 임금이 왕세손(王世孫 뒷날의 정조)과 함께 거둥하였는데, 정종 정사년에 단을 쌓아 그 일을 기념하고 성경대(省耕臺)라고 이름하였다. 채제공(蔡濟恭)의 기문이 있다.
고암전(鼓巖田) 태종이 하루는 미행(微行)으로, 박은(朴訔)의 집에 갔다. 그때 은의 지위는 높고 이름났지만 가세는 매우 가난하였다. 마침 조밥을 먹다가 재채기가 나서 곧 맞이하여 절하지 못하고, 문 밖에 조금 오래 서 있으니 임금이 매우 노하였다. 은이 황공하여 사실대로 아뢰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재상인데 조밥을 먹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들어가 보게 하였는데 과연 사실이었다. 임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특별히 청문(靑門 동대문) 밖 고암전의 땅을 약간 하사하였다.
홍덕전(弘德田) 나인(內人 궁중의 여관) 홍덕(弘德)이 병자란(丙子亂)에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 봉천(奉川))에 들어갔는데, 김치를 잘 담가서 때때로 효종(孝宗)이 인질로 있는 집에 드렸다. 효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 홍덕도 이어서 돌아왔는데, 다시 김치를 담가서 나인을 통하여 드렸다. 임금이 맛을 보고 이상히 여겨 그 출처를 물으니 나인이 사실대로 아뢰었다. 임금이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곧 홍덕을 불러 들여서 후하게 상을 주려고 하니, 홍덕이 굳이 사양하면서 감히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에 명하여 낙산(駱山) 아래 밭 몇 경(頃)을 하사하여 그 수고를 갚아 주었다. 지금도 그 밭을 홍덕전(弘德田)이라고 한다.
왕십리평(往十里坪) 흥인문 밖 5리쯤에 있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무와 배추 등 채소류를 심어 생활한다.
동잠실(東蠶室) 구잠실(舊蠶室)은 성 동쪽 아차산(峨嵯山) 아래에 있고, 신잠실(新蠶室)은 한강 원단동(圓壇洞)에 있는데, 모두 환관(宦官)들이 주관한다.
서잠실(西蠶室) 성에서 10리 서쪽 연희궁(延禧宮)에 있는데, 상의원(尙衣院)에 속하였다. 서잠실에서는 2년씩 간격으로 뽕나무를 심었는데, 훈국(訓局)에서 적간(摘奸)한다.
내농포(內農圃) 돈화문(敦化門) 밖 동쪽 가에 있다. 포전(圃田)이 있는데 내관(內官)이 주관하고, 채소를 세납으로 받아서 임금의 찬거리에 충당한다.
약전(藥田) 율주(栗洲)에 있는데, 지금 전의감(典醫監)에 속하였다.
고초전(苦草田) 서쪽 연희궁 앞 들에 있다.
남전(藍田) □□□에 있다.
상전(桑田) 삼전도(三田渡)에 있다.
상림(桑林) 율주(栗洲)에 있는데 공상(公桑)이다.
【목장】 전관(箭串 살곶이) 곧 국도의 동교(東郊)인데, 그 지역이 평탄하고 넓으며 수초(水草)가 매우 풍요하다. 둘러서 우리를 만들고 국마(國馬)를 기르는데 넓이가 34리나 된다. 처음에는 목책을 만들었다가 해마다 개수(改修)하니, 백성은 이속들의 농간질에 피폐하고, 말도 도둑맞아 도망갔다. 명종조(明宗朝)에 이르러서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상진(尙震)이 정부에 건의ㆍ요청하여, 돌을 쌓아 제방을 만들고 냇물이 흐르는 곳에는 철삭(鐵索)으로 열고 닫게 하니, 그 후로 폐단이 제거되었다고 한다.
나의주(羅衣洲) 또 잉화도(仍火島)라고도 하며 도성 서쪽 15리에 있는데, 곧 서강 남쪽이다. 율주와 서로 잇닿았는데, 장마로 인하여 끊어져 둘이 되었다. ○ 옛날에는 축목장(畜牧場)이 있어, 사축서(司蓄署)ㆍ전생서(典牲署)의 관원을 나누어 보내 기르는 것을 감독하게 했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지금은 옛 사축서의 양 50마리, 염소 6마리만을 놓아 기른다. 위토전(位土田) 경중(京中)에 92일 갈이가 있어, 1년의 세금이 2백 22냥이다.
【봉수】평시에는 한 홰[炬]요, 적이 보이면 두 홰, 지경에 가까이 오면 세 홰, 지경을 침범하면 네 홰, 접전하면 다섯 홰이다. 수직하는 금군(禁軍)이 5명이며, 병조(兵曹)의 봉수장(烽燧將)에게 보고한다. 충순위(忠順衛)를 혁파(革罷)한 후에는, 금군 중에서 녹을 많이 받는 사람들이 번 차례로 돌아가며 수직한다. ○ 봉대(烽臺)에는 표(標)를 설치하고 경계를 정하는데, 위봉(僞烽)ㆍ방화(放火) 등의 일을 막론하고, 백 보(步) 안에 있는 것은 병조에서 맡아 처리하고, 백보 외의 것은 금위영에서 맡는다. ○ 봉대 근처에는 음사(淫祀) 기도를 금한다.
목멱산 봉수(木覓山烽燧) 동쪽의 제1봉(烽)은 양주(楊州) 아차산(峨嵯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함경ㆍ강원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烽火)요, 제2는 광주(廣州) 천천령(穿川嶺 천림산(天臨山)이라고도 함)에 응하는데 이것은 경상ㆍ충청ㆍ경기도에서 오는 봉화요, 제3은 무악(毋岳) 동봉(東烽)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육로로 오는 봉화요, 제4는 무악 서봉에 응하는데 이것은 평안ㆍ황해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요, 제5는 양천현(陽川縣) 개화산(開花山)에 응하는데 이것은 전라ㆍ충청ㆍ경기도의 해로로 오는 봉화이다. 제1봉화는 직봉(直烽)이 1백 20곳, 간봉(間烽)이 60곳이며, 제2봉화는 직봉이 40곳, 간봉이 1백 23곳이며, 제3봉화는 직봉이 78곳, 간봉이 22곳이며, 제4봉화는 직봉이 71곳, 간봉이 35곳이며, 제5봉화는 직봉이 60곳, 간봉이 35곳이다. ○ 매일 초저녁에는 반드시 다섯 자루를 든다. 그런데 동쪽 제1봉화는 혹 때로 들지 않으니, 북도의 봉화가 구름이 끼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매일 초저녁에 봉수군(烽燧軍) 1명이 단봉문(丹鳳門) 밖에 나가서 본산의 봉화 다섯 자루를 드는데, 혹 한 자루를 들지 못하게 되면 부장(部長)이 남소(南所)에 보고하며, 남소의 부장은 그 길로 병조에 보고하고, 이튿날 아침에 들어가서 아뢴다. ○ 봉수ㆍ연대(煙臺)의 봉군(烽軍) 등은 정한 다른 부역이 없고, 오로지 후망(候望)만을 한다. ○ 혹 구름이 어둡고 바람이 어지러워서 연화(煙火)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차례로 달려가 보고한다. ○ 목멱ㆍ무악 두 산 봉수군의 호(戶)는 30씩인데, 매호에 보솔(保率) 3명을 둔다. 각 1백 20명이 나누어 24번을 만들고, 매번 5명이 6일마다 교체한다.
무악봉수(毋岳烽燧) 동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高陽郡) 염포(鹽浦)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3봉화에 보고하며, 서쪽 봉화는 서쪽으로 고양군 고봉(高烽)에 응하고, 남쪽으로 목멱산 제4봉화에 보고한다.
붙임 척후(斥候) 백악척후(白岳斥候)ㆍ목멱산 척후ㆍ무악 척후.
【행순】 궐내(闕內)는 위장(衛將)이나 부장(部長)이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시간을 나누어 다니면서 순찰한 후에, 무사한지의 여부를 바로 아뢴다. 도성(都城) 내외의 행순(行巡)을 병조에서 당직한다 충의(忠義)ㆍ충찬(忠贊)ㆍ충순(忠順)ㆍ족친(族親)ㆍ내금위(內禁衛)ㆍ외오위(外五衛)의 각 1부를 2소(所)로 나누어 행순을 배정하며, 또 점고(點考) 받는 순장(巡將)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첨지(僉知)에 이르기까지는 망(望)에 올려 정하는데, 부족하면 당직 당상관을 망에 올려 정한다. 및 감군(監軍) 선전관과 병조, 도총부(都摠府)의 당하관 중에서 망에 올려 정한다. 각 운영관(運領官)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大護軍)ㆍ호군(護軍)으로 정하되, 부족하면 그 다음의 별시위(別侍衛)로 정한다. 출입번(出入番)의 장수는 대궐에 나가 숙배(肅拜)하고, 대내(大內)에서 납패수패(納牌受牌)한다. 각 부대의 영관이 받는 패(牌)는 순장(巡將)이 모두 받아서 나누어준다. 병조(兵曹)에서 사무를 맡기는데, 궁성(宮城) 4문 밖의 숙직은 각 상호군(上護軍)ㆍ대호군ㆍ호군 중 1명과, 정병(正兵) 5명이며, 도성 안팎 여러 경수소(警守所)에는 보병(步兵) 2명이 부근 동리 사람 5명을 거느리고 하는데, 소(所)에 따라서는 활ㆍ검ㆍ지팡이 등을 가지고 경첨(更籤)을 받아 가지고서 숙직한다 신표[籤]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아무 경수소 신표라고 썼다. 광화문(光化門) 호군은 초저녁에 요령[鐸]을 병조에서 받는데 군호도 함께 받는다. 민간에서는 언적(言的)이라고 한다. 인정(人定) 후에는 정병(正兵) 2명이 요령을 흔들면서 궁성을 순찰하는데, 4면 경수소(警守所) 및 각 문을 차례로 전하고 받으면서, 돌기를 말지 않으며, 파루(罷漏) 때가 되어서야 그친다. 운영관(運領官)은 매 시간마다 궁성을 돌고, 4면 경수소 및 각 문에 가서 경첨(更籤)을 거두며, 밝으면 병조에 바친다. 여러 경수소에는 순장이나 순관(巡官)이 불시에 가서 신표를 거두어 병조에 바친다. 2경(更) 후, 5경 전에는 대소 인원이 나다니지 못하는데, 불을 낸 자가 있으면 순관이 쫓아가서 도둑을 살핀다. ○ 병조ㆍ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ㆍ수성금화사(守城禁火司) 5부의 숙직하는 관원은 표신(標信) 몸체가 둥근데 1면에는 통행(通行)이라 쓰고 1면에는 전자로 통행이란 화인을 찍었다. 밤에 다닐 때 및 군중(軍中)에서 사용한다. 을 정원(政院)에서 받는다. 이튿날 아침에 환납(還納)한다. 군호(軍號)를 병조에서 받고 각각 그 관청의 아전(衙前)ㆍ사령을 통솔하는데 행순은 없다. 형조 이하의 여러 관청은 5부 외에는 지금 폐지되었다. ○ 군호는 병조에 입직(入直)한 당상관이 친히 써서 봉함하는데, 매일 신시(申時)가 되면 낭관(郎官)이 직접 가서 정원에 드리게 한다.
○ 두 포청(捕廳)에서는 각기 패장(牌將) 8명, 군사 64명을 정하여, 도성 안팎을 밤새워 행순 하며, 훈련도감ㆍ금위영ㆍ어영청의 3군문에서는 날을 나누어 돌아가면서 한다. 도감은 첫날인데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일이고, 금영(禁營)은 중간 날인데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일이며, 어청(御廳)은 마지막 날인데 인(寅)ㆍ술(戌)ㆍ축(丑)ㆍ미(未)일이다. 각기 패장(牌將) 9명을 정한다. 군사는 도감이 83명, 금영이 84명, 어청이 67명이다. 도성 안팎을 야순(夜巡)하며, 또 각 군문에서는 그 외영(外營)에서 입직한 장교 1명으로 입직한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 밖을 시간을 정하여 야순한다 도감은 초경ㆍ3경, 금위영은 2경, 어영청은 5경이다. 또 3군영에서는 각기 장교 1명을 정하여, 입직한 군사 5명을 거느리고 궁장(宮墻) 밖을 밤새워 순행한다. 모두 땅거미질 때[日晡時]부터, 날이 밝기까지 하되, 별순라패(別巡邏牌)를 만들어 준다. ○ 금령을 범하고 밤에 다니는 사람은 잡아서 인근 경수소(警守所)에 보내며, 이튿날 각기 그 군영에서 곤장(棍杖)을 쳐서 처벌한다 초경(初更)에 다닌 사람은 곤장 10도를 때리고, 2경은 20도, 3경은 30도, 4경은 25도, 5경은 10도이다. 무릇 행순(行巡)하는 사람은 모두 군호(軍號)를 받는데, 대궐 안의 사람이나 담장 밖의 사람이 다른 군인과 신지(信地)를 만나면, 그때 그때 문득 서로 응하면서 돌아서 멈추지 않고 파루(罷漏) 때 가서야 그친다. ○ 외삼영(外三營) 북영(北營)ㆍ신영(新營)ㆍ동영(東營)이다. 입직 중에는 원 순라(巡邏) 외의 장관(將官)을 매일 밤 파루 후에 내보내어, 날이 밝기까지 각 해당 영관 내의 궁성(宮城)을 살펴본다.
붙임
파수(把守) 궁성 문은 병조에서 정병(正兵)ㆍ갑사(甲士)를 정하여 나누어 여러 소(所)에 소속시켜 파수하게 하며, 또 대졸(隊卒) 10명을 정하여 광화문(光化門)을 지키며, 종묘문(宗廟門)ㆍ도성문은 출직(出直)한 보병으로 파수하고, 흥화(興化)ㆍ숭례(崇禮)ㆍ돈의(敦義)ㆍ혜화문(惠化門)은 호군(護軍)으로 정하며, 그 밖의 문은 5명씩을 정한다. 사직(司直) 이하로 칭호되는 사람이 통솔하게 한다. 각 대문에 30명이며 그 좌우 협문(夾門)도 같다. 중문은 20명인데 그 좌우 협문도 같으며, 소문(小門)은 20명이고 종묘문은 4명이다.
○ 궁성문은 초혼(初昏)에 닫고, 명평(明平)에 열며, 도성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연다. 궁성문은 주서(注書)가 총부(摠部)의 낭관(郎官)과 선전관으로 더불어 자물쇠를 맡아서 열고 닫고 하는데, 열쇠를 정원(政院)에서 받으며, 도성문은 호군(護軍) 5명이 열고 닫고 하는데 교대할 때에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제때[及期]에 아뢸 일이 생기면, 호군 5명이 문틈에서 받아 가지고 급히 대궐문으로 가서 아뢴다. 정한 시간 외에 도성문을 열게 되면 대내(大內)에서 개문좌부(開門左符)를 내린다. 몸체가 둥근데 한 쪽에는 전자로 신부(信符)라 쓰고, 한쪽에는 전자로 신부라 쓴 것을 찍었으며, 가운데가 나누어졌다. 호군 5명이 좌부(左符)를 받으며 교대할 때에는 병조에서 받고 바치고 한다. 궁성문은 표신(標信)을 사용하여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표신은 몸체가 모가 났는데, 한 쪽에는 개문(開門)이라 쓰고 한 쪽에는 어압(御押 임금의 수결을 새긴 도장)이 있다. 폐문(閉門) 표신도 같은데, 한 쪽에 폐문이라 썼다. 긴급한 때는 도성문에도 통용한다. ○ 개국 초기부터 파루(罷漏)가 되면 궁성문 및 외성(外城)문을 모두 열었는데, 예종조(睿宗朝)부터는 평명에야 궁문을 열게 하였다.
【복처】 1패(牌)의 복처(伏處 순라군이 잠복 근무하던 요긴한 곳). 회현동(會賢洞) 동구에 있는데, 구역 안은 숭례문에서 타락동(駝駱洞)까지이다. 상(上) 2패의 복처. 남산동(南山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타락동 동쪽에서 영희전(永禧殿) 서쪽까지이다. 하(下) 2패의 복처. 필동교(筆洞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주자동(鑄字洞)에서 생민동(生民洞)까지이다. 3패의 복처. 청량교(淸梁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생민동 동쪽에서 수구문(水口門)까지이다. 4패의 복처. 어의동(於義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把子橋) 동쪽에서 동대문 북쪽까지이다. 5패의 복처. 재동(齋洞)에 있는데, 구역 안은 파자교 서쪽에서 전의감동(典醫監洞) 동쪽에 이르기까지이다. 6패의 복처. 수표교(水標橋)에 있는데, 구역 안은 종루(鐘樓)에서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이르기까지이다. 7패의 복처. 동대문 밖에 있는데, 구역 안은 동대문 밖에서 관왕묘(關王廟)까지이다. 좌변 포도청(左邊捕盜廳)에 속한다.
【궁실】 북한행궁(北漢行宮) 산성 안 상원봉(上元峯) 아래 있다. 숙종(肅宗) 37년에 내정전(內正殿) 28칸, 외정전 28칸과 그 외의 행각(行閣)ㆍ월랑(月廊) 등 73칸을 지으니, 합하여 1백 29칸이다.
종루(鐘樓)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다. 태조 4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권근(權近)이 명(銘)을 지었는데, 각(閣)을 큰 거리[通衢]에 짓고 종을 달아서 새벽과 어두울 때 치게 하였다. 세조조에 고쳐 층루(層樓)로 지으니, 동서의 넓이가 5칸, 남북이 4칸인데, 십자가(十字街)를 만들고 종을 누 위에 달고, 인마(人馬)는 누 아래로 통행하게 하였다. 세조 13년에 명하여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아서 새벽과 밤을 알리게 하였는데, 1경(更) 3점(點)에 비로소 징과 북을 치니, 북으로 경(更)을 알리고 징으로 점을 알리는 것이며, 큰 종을 28번 치니, 이것을 인정(人定)이라 하며, 5경 3점에는 징과 북을 치우고, 큰 종 33번을 치니, 이것을 파루(罷漏)라고 한다. 선조 임진년 병란 때에 광화문의 종과 함께 모두 녹아버렸으며, 환도한 후인 갑오년 가을에 숭례문의 종을 옮겨다가 달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니, 도성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정유년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 경리(經理)가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로 옮겨 달았다. ○ 《추관지(秋官志)》를 보면 간고(諫鼓)를 남현(南峴)에 달고, 방목(謗木)을 서교(西橋)에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지금도 종현(鍾峴), 방목교(謗木橋)라고 부르니, 국조(國朝)에서 옛날 삼대(三代 옛날 중국의 하(夏)ㆍ은(殷)ㆍ주(周)시대)를 모방하던 성대한 의사를 알 수 있는 일이다. ○ 또 살펴보면, 중종조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흥천사(興天寺)의 종을 흥인문(興仁門)에, 원각사(圓覺寺)의 종을 숭례문(崇禮門)에 옮겨 놓고, 새벽과 밤을 알려주려 하였는데 미처 달지 못하고 안로가 실패하여, 그만 풀숲 속에 버려둔 지 오래였다. 선조 갑오년에 명하여 숭례문의 종을 종루로 옮겨 달게 하였다.
종각(鐘閣) 세조 2년에 큰 종을 주조하고, 신숙주(申叔舟)가 명을 지었으며, 사정전(思政殿) 앞 행랑에 두었는데, 지금은 광화문 밖 서쪽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종각을 지었다.
태평관(太平館) 숭례문 안 양생방(養生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관 뒤에 누(樓)가 있는데 명 나라 사신 예겸(倪謙)ㆍ기순(祈順)이 모두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다. 지금은 칙사(勅使)를 영접할 때에 나례(儺禮 가면극(假面劇))를 준비하여 거행하는 곳이 되었으며, 여기에서 칙사를 접대하는 규정은 없다. ○ 상고해 보면 문정왕후(文定王后)ㆍ인목왕후(仁穆王后)의 가례(嘉禮)를 모두 이 관에서 거행하였다.
남별궁(南別宮)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명설루(明雪樓)가 있다. ○ 상고해 보건대, 조사(詔使)가 오면 반드시 태평관에 거처하였는데, 선조 임진년 병란에 태평관이 불탔으며, 계사년에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경성을 수복하고 여기에 거처하여 그대로 조사가 거처하는 곳이 되었으며, 그 후로 남별궁이라 하였다. ○ 세상에서들 전하기를, 조대림(趙大臨)의 집이라 하는데 상고하여 경험할 데가 없으니 믿을 수 없을 것 같다. 의안군(義安君)의 새 궁이라고도 한다.
모화관(慕華館) 돈의문(敦義門) 밖 서북쪽에 있다. 본래는 모화루(慕華樓)였는데, 세종 12년에 관(館)으로 고쳐서, 무과(武科) 시험장으로 삼고 무이소관(武二所館)이라 하였다. 앞 길 위에 옛날에는 홍전문(紅箭門)이 있고, 중종 30년에 사신[王人]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곳인데, 사체에 온당하지 못하다 하여 김안로의 건의로 고쳐서 두 기둥의 한 칸 집을 짓고, 푸른 기와로 덮은 다음 영조(迎詔)라는 현판을 걸었다. 33년에 중국 사신 설정총(薛廷寵)이, “맞이하는 것은 조(詔)ㆍ칙(勅)ㆍ뇌(賚) 등이 있는데, ‘조’라고만 이름하는 것은 치우친 것 같다.” 하면서, 고쳐 현판을 써서 영은(迎恩)이라고 걸었다. 후에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고쳐 현판 글씨를 썼다. 영종 갑신년 가을에 명릉(明陵)에 전알(展謁)하고 늦게 돌아오는데, 정종이 세손(世孫)으로서 영은문 밖에 나와 맞이하니, 임금이 친히 장막에 들어가서 사언시(四言詩) 4구를 써서 기쁜 뜻을 표시하였으며, 세손이 화답하여 지어 올렸다. ○ 관 동쪽 건너 산기슭에 연향대(燕享臺)가 있으며, 대의 동북쪽에 양호(楊鎬) 경리(經理)의 공덕비(功德碑)가 있다. ○ 못이 있으며 못 가에서 석척동자(蜥蜴童子)로 기우제 9차를 드리는데, 무관 종2품관이 연 3일간 거행하고 그친다.
동평관(東平館) 남부 낙선방(樂善坊)에 있다. 개국 초기에 설치하였으며, 일본 등 제국(諸國)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데, 임진년 병란에 불타고 그만 폐지되었다. 지금은 그곳을 왜관동(倭館洞)이라 한다. 선조 24년에 왜사(倭使)가 관에 와서 머물며 벽 위에 시를 써서 이르기를, “매미 시끄럽게 우느라 당랑이 잡을 줄 모르고, 고기 노닒은 해오라기 졺을 기뻐함일세. 이곳이 어느 곳이냐, 다른 해에 다시 잔치 벌여 보세나.” 하였다.
북평관(北平館) 동부 흥성방(興盛坊)에 있다. 야인(野人 여진)으로 와서 조회하는 자들을 접대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독서당(讀書堂) 옛날에 용산에 폐지한 절간이 강 북쪽 언덕에 있었는데, 성종조에 고쳐 짓고 당(堂)을 만들어서 홍문관(弘文館)의 연소한 학자들의 글 읽는 곳을 만들었다. 연산군 때에 혁파하고 당은 궁인(宮人)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10년에 다시 독서당을 옛날 정업원(淨業院)에 설치하였는데, 여염집 사이여서 공부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하여 다시 좋은 자리를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 월송암(月松庵) 서쪽 산기슭을 선택하여 창건하였으며, 호당(湖堂)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다시 임진년의 병란으로 인하여 폐지되었는데, 광해군 무신년에 고쳐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소로 삼았다. 옛날에 절간[僧舍]이 남문 밖 귀후서(歸厚署) 뒷산 기슭에 있었는데, 세상에서들 말하기를, “16나한(羅漢)이 영험(靈驗)이 있다.”고 해서, 불공[香火]이 끊기지 않았다. 중 상운(尙雲)이 그 집에 살면서 아내를 얻어 아들을 낳으니,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중을 처벌해서 속인이 되게 하고, 불상을 흥천사(興天寺)로 옮겼다. 드디어 그 집을 홍문관에 주어서 번갈아 가서 글을 읽게 하고, 이름을 독서당이라고 하였다. ○ 조위(曹僞)의 〈용산독서당기(龍山讀書堂記)〉와 이식(李植)의 〈독서당기〉가 있고, 또 호당고사(湖堂故事)를 지었으며, 윤현(尹鉉)의 〈문회당기(文會堂記)〉가 있다.
【누정】 황화정(黃華亭) 두모포 북쪽 산기슭에 있는데, 연산군이 짓고서 나와 노는 곳으로 삼았다. 중종조 초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유하정(流霞亭) 두모포에 있다. 원래는 제안대군의 정자이며 수진궁(壽進宮)에 속한 공청이었는데, 정종(正宗) 5년에 명하여 규장각(奎章閣) 신하들에게 하사하여, 여러 각신(閣臣)들의 승경지를 가려 놀며 구경하는 장소로 삼았다. ○ 혹은 말하기를, 본래 제안대군의 집으로 효종의 잠저(潛邸) 때 정자가 되었다고 한다.
제천정(濟川亭) 한강 북쪽 언덕에 있다. 풍경이 매우 좋으며, 중국 사신들의 놀며 구경하는 곳이 되었다. 성종이 일찍이 행차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한강 도승(漢江渡丞)이 검찰하고 간수(看守)한다.
칠덕정(七德亭) 곧 한강 하류의 백사정(白沙亭)이다. 세조가 여러 번 행차하여 무예(武藝)를 사열하고, 인하여 이름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읍청루(挹淸樓) 용산 별영 앞에 있는데, 긴 강류에 임하여 풍경이 매우 좋다.
영복정(榮福亭) 강 서북 언덕에 있는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별장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여 손수 영복(榮福)이라는 두 글자를 써서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고, 인하여 영일세 복백년(榮一世福百年)이라는 여섯 글자로 그 뜻을 풀이하였다.
망원정(望遠亭) 양화도(楊花渡) 동쪽 언덕에 있다. 정자는 본래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이었는데, 세종이 행차하여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성종 갑진년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고쳐 짓고, 지금 이름으로 현판을 걸었다. 성종이 매년 농사를 살피거나 세납선(稅納船)을 집합시켜 수전(水戰)을 연습할 때 언제나 이 정자에 행차하였으며, 어제시(御製詩)가 있다. 대군이 졸한 후에는 다시 행차하지 않았다. ○ 변계량의 〈희우정기(喜雨亭記)〉가 있으며, 신장(申檣)이 현판을 썼다.
낙천정(樂天亭) 전관(箭串)에 있다. 태종이 선위(禪位)한 후에 이궁(離宮)을 동교대산(東郊臺山)에 창건하여, 정자를 그 위에 짓고 박은(朴訔)에게 명하여 정자 이름을 짓게 하였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 변계량(卞季良)의 기문이 있다.
화양정(華陽亭) 낙천정 북쪽 언덕에 있다. 본래 태복시(太僕寺)의 목장이었는데, 세종 14년에 그곳에 이 정자를 지었다. ○ 유사눌(柳思訥)의 기문이 있다.
세검정(洗劍亭)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 앞에 있는데, 차일암(遮日巖)이 있다. ○ 열조(列朝)의 실록(實錄)이 이루어진 후에, 반드시 여기서 세초(洗草 원고 정리)하였다. ○ 정자가 돌 위에 있는데, 폭포수가 그 앞을 지난다. 매년 장마 때 도성 사람들이 나가서 넘쳐흐르는 물을 구경한다.
산영루(山映樓) 북한산 성 안에 있다.
반송정(盤松亭) 모화관(慕華館) 북쪽에 있는데, 소나무가 구불구불 우뚝 서있음으로 인하여 이름한 것이다. 서지조(西池條)에 자세하다.
천연정(天然亭) 서지 가에 있다. 본래 이해중(李海重)의 서재였는데, 지금은 경기 중영(京圻中營)이 되었다. ○ 여름철 연꽃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데, 서지조에 자세하다.
풍월정(風月亭)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있다.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정자를 지었는데, 성종이 친히 집 서쪽 동산에 행차하여, 풍월(風月)이라는 두 글자를 하사하여 정자 현판으로 삼게 하고, 시 6수를 짓고 문신들에게 화답하게 하였다.
몽답정(夢踏亭) 훈국북영(訓局北營) 안에 있는데 천석(泉石)의 승경(勝景)이 있다. 숙종이 일찍이 꿈에 이 정자에 행차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또 사정(射亭)이 있는데 괘궁정(掛弓亭)이라 하며, 연꽃 구경하는 정자를 군자정(君子亭)이라 한다.
쌍회정(雙檜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칠송정(七松亭) 명승조에 자세하다.
천우각(泉雨閣)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있는데, 시내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 석벽에 아계(丫溪) 두 글자를 새겼다.
협간정(夾澗亭)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다. 앞으로 시내와 폭포에 임하여 있어 동촌(東村) 사람들의 놀고 구경하는 장소가 되었다.
백림정(柏林亭) 타락산 아래에 있는데 박은의 옛 집이다. 이 정자 이름으로 하여 동리를 백동(柏洞)이라고 한다.
【제택】《조가지(造家志)》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사람들의 청원에 의하여 공지(空地)로서 만 2년간 비워두고 짓지 않은 땅을 나누어주어 공대(空垈) 및 포전(圃田 채마밭)을 물론하고 백성들에게 집짓는 것을 허가하되, 본 주인이 이것을 막고 방해하는 경우에는 제서유위(制書有違)의 법률로 논죄한다. 무릇 가대(家垈)가 산을 의지한 곳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산기슭과 산등성이가 도성ㆍ궁궐에 임압 금기(臨壓禁忌)되는 곳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서 나누어주지 말게 하며, 함부로 받아서 집을 짓는 자는 죄주고 철거한다. ○ 집터의 면적은 대군ㆍ공주는 30부(負), 왕자ㆍ군ㆍ옹주(翁主)는 25부, 1ㆍ2품관은 15부, 3ㆍ4품관은 10부, 5ㆍ6품관은 8부, 7품관 이하 및 음관(蔭官)의 자손은 4부, 서인은 2부인데, 3등 전척(田尺)을 사용하여 측량한다. 집의 규모는 대군은 60칸, 왕자ㆍ군ㆍ공주는 50칸, 옹주 및 종친(宗親), 문ㆍ무관의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서인은 10칸으로 하되, 숙석(熟石 다듬은 돌)ㆍ화공(花供)ㆍ초공(草供)은 사용하지 못한다.
중부(中部)
구수영(具壽永)의 집 견평방(堅平坊) 이문(里門) 안에 있다. 태화정(太華亭)ㆍ부용당(芙蓉堂)이 있고, 당 앞에 잠룡지(潛龍池)가 있으니 인묘가 예전에 공부하던 곳이다. ○ 문학(文學) 이정(李挺)이 기문을 지었다.
조광조(趙光祖)의 집 경행방 향교동(鄕校洞)에 있다. 예전 한양현(漢陽縣) 향교가 이 동리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동명(洞名)을 한 것이다.
동부(東部)
이석형(李石亨)의 집 연화방(蓮花坊)에 있다. 지금 자손들이 그 근방에 사는데, 동촌 이씨라고 한다.
이정귀(李廷龜)의 집 연화방에 있다. 사당 앞에 단엽 홍매(單葉紅梅)가 있는데, 곧 중국인이 공에게 선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홍매화가 단엽인 것은 이 한 그루뿐이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집 건덕방(建德坊) 타락산(駝駱山) 아래에 있는데, 용흥궁(龍興宮)과 동ㆍ서쪽으로 마주 서 있다. 석양루(夕陽樓)가 있는데 기와 벽돌에 모두 그림을 새겼으며, 규모의 넓고 화려하기가 여러 제택(第宅) 중에 제일이다. ○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신광한(申光漢)의 집 타락산 아래 있는데, 세상에서 신대명승지지(申臺名勝之地)라고 한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다.
송시열(宋時烈)의 집 성균관(成均館) 서쪽 산기슭에 있는데, 우암(尤菴)이 예전에 기거하였기 때문에 동명(洞名)을 송동(宋洞)이라고 한다. 동리의 골이 깊으며 석벽에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새겼는데, 우암의 글씨이다. 동리 가운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놀이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남부(南部)
조말생(趙末生)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중 무학(無學)이 터를 잡은 곳으로 낙양(洛陽)의 명원(名園)이라고들 한다. 남산의 바른 줄기가 바로 낙동(駱洞)에 닿았기 때문에 복귀형(伏龜形)이라 일컫는다. 서쪽이 조말생의 집이고, 동쪽은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집이 되어 좌우의 거북 눈을 이루었다. 그 꼬리가 공북헌(拱北軒)이 되니, 곧 지금 박제헌(朴齊憲)의 집이다.
권람(權擥)의 집 목멱산(木覓山) 산기슭의 비서감(祕書監) 동쪽에 있으니, 곧 무학이 정한 암석(巖石)으로 된 터이다. 세조가 일찍이 행차하였으며, 그 서쪽 언덕에 석천(石泉)이 있는데 이름하여 어정(御井)이라 한다. 그 위에 소조당(素凋堂) 옛 터가 있는데, 후에 후조당(後凋堂)이라 하였다. 지금은 녹천정(鹿川亭)이 되었는데, 박영원(朴永元)이 차지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의 집 낙선방(樂善坊) 생민동(生民洞)에 있다. 반송(盤松)이 있어 육신송(六臣松)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말라 죽었다.
상진(尙震)의 집 숭례문(崇禮門) 안에 있다. 예전 전례에 대가(大駕)가 이곳을 지날 때에는 액례(掖隷)들이 동명(洞名)을 불러 고하면 임금이 반드시 수레 위에서 허리를 굽혔으며, 그 동리를 이름하여 상정승동(尙政丞洞)이라 하였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회현방(會賢坊)에 있다. 은행나무[鴨脚樹]가 있는데, 신인(神人)이 서대(犀帶 정1품ㆍ종1품관이 띠던 띠) 열두 개를 이 나무에 걸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동리 가운데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회현동(會賢洞)이라고 부른다. 정씨들은 또 남문 밖에도 산다.
이안눌(李安訥)의 집 낙선방 묵사동(墨寺洞)에 있는데, 비파정(琵琶亭) 위에 시단(詩壇)이 있다. ○ 위에 훈국(訓局) 군병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곳이 있다.
정숙옹주(貞淑翁主)의 집 명례방(明禮坊)에 있는데, 장악원(掌樂院)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다. 뜰이 좁고 이웃집이 곁에 붙어 있어 말소리가 서로 들리며, 처마가 낮고 짧아 막히고 가리운 데가 없었다. 옹주가 조용히 임금에게 아뢰기를, “땅을 사서 넓게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선묘가 하교하여 이르기를, “소리가 낮으면 들리지 않고, 처마를 가리면 보이지 않을 것이니, 뜰을 어찌 반드시 넓게 하겠는가.” 하며, 발 두 부(部)를 하사하면서, “이것으로 가려라.” 하였다. 그 후로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발을 내려 보냈다. ○ 지금은 윤치의(尹致義)의 집이 되었다.
한준겸(韓俊謙)의 집 □□방에 있다. 같은 종문의 여러 한씨 집이 많이 동리 가운데 있기 때문에 종종 사람들이 자주 난정 수계회(蘭亭修禊會)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동명을 난정동(蘭亭洞)이라 하였다.
박승종(朴承宗)의 집 낙선방에 있다. 별원(別園)은 후조당(後凋堂) 동편 산기슭에 있다. ○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가 폐위되어 서궁(西宮)에 있었는데, 서궁은 성 서쪽 백악산(白岳山) 아래 있다. 그러므로 당(堂)을 짓고 백악을 바라보며 읍백(挹白)이라 현판하였으니, 대개 서궁에 공읍(拱挹)한다는 의미이다.
조형(趙珩)의 집 명철방(明哲坊)에 있는데, 일감정(一鑑亭)이 있다. 후손들이 근방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들 청녕교 조씨(淸寧橋趙氏)라고 부른다 한다.
윤선도(尹善道)의 집 명례방 종현(鐘峴)에 있다. 지금도 주춧돌에 먹으로 쓴 여산부동(如山不動)이라는 네 글자가 있어, 바람과 비에 씻기지 않았다. 혹은 허목(許穆)의 글씨라고도 하며 집터는 연소형(燕巢形)이라고 한다.
김석주(金錫冑)의 집 회현방(會賢坊) 회현동 남산 기슭에 있는데, 청성군(淸城君) 김석주가 지은 것이다. 청성이 어렸을 때 얼굴의 생김새가 범 같았는데, 범은 의당 산에 있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거처하는 누대를 재산(在山)이라고 이름하였다. 담장 밖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으니, 곧 손수 심은 소나무이다. 19번 꺾어진 폭포가 있고 그 아래 우물이 있는데, 맛이 매우 향기롭고 차다. 우물이 푸른 석벽 위에 있는데, 창벽(蒼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문명(趙文命)의 집 낙선방(樂善坊) 묵사동(墨寺洞)에 있다. 귀록정(歸鹿亭)이 있는데, 일찍이 푸른 실로 사슴을 정자 아래에 매어 두었다.
심강(沈鋼)의 집 회현방 분호조(分戶曹) 앞에 있는데, 지금도 심본금(沈本衿)이라고 한다. 선묘조 계사년에 환도(還都)한 후에 궁궐과 종묘가 새로 병화[兵燹]를 겪었으므로 부득이 종묘 신주를 이 집에 봉안하였다.
홍현주(洪顯周)의 집 □□방 이전동(履廛洞)에 있는데, 외당(外堂)에 금옥당(金玉堂)이라고 전자로 현판을 써서 걸었다. ○ 순조의 어필로 원정(園亭)이라 썼으며, 시림정(市林亭)은 익종(翼宗)의 어필이다.
서부(西部)
이숙번(李叔蕃)의 집 □□방에 있다. 숙번이 공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크게 전장과 집을 만들었는데, 인마(人馬)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싫어하여 문(門)을 막고 사람들이 통행을 금하였다.
신개(申槪)의 집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중 무학이 터를 잡은 곳이다. 양체당(養棣堂)이 있다.
이황(李滉)의 집 □□방 학교(鶴橋)에 있다. 선생이 이 동리에 살았으므로, 승지(勝地)라고 한다. 뜰에 노송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다. 병란 후에 도성 안의 교목(喬木)이 모두 없어졌지만 이 나무만이 그대로 푸르러서 하늘에 닿았다. 신해년 봄에 홀연히 부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괴이하고 의아(疑訝)하게 여겼더니, 그 해 여름에 인홍(仁弘)이 박여량(朴汝樑)의 무리를 사주하여, 상소하여 퇴계(退溪)를 훼방하기를 못할 일이 없이 하니 나무 부러진 변고가 여기서 과연 징험이 되었다.
최규서(崔奎瑞)의 집 황화방 소정동(小貞洞)에 있다. 영종 4년에 역적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모의하였는데, 공이 봉조하(奉朝賀)로 물러나 용인(龍仁)에 거주하다가 기미를 알고 달려와 고하였다. 난리가 평정되자 임금이 하교하기를, “공훈의 명칭을 치사(致仕)한 원로에게 더하는 것은 경례(敬禮)하는 뜻이 아니다.” 하면서, 손수 일사부정(一絲扶鼎)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각(閣)을 지어서 그 집에 간직하게 하니 이름을 어서각(御書閣)이라 한다.
신수근(愼守勤)의 집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는데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북부(北部)
허종(許琮)의 집 인달방(仁達坊) 사직단(社稷壇) 앞 길가에 있다. ○ 종(琮)이 일찍이 상중(喪中)에 있었는데 성종(成宗)이 사직에 일이 있어서 갔다가 돌아올 때에 종의 집에 들러서 그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당시에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감격하고 분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종이 그때 아우 침(琛)과 함께 살았으므로 그 집 앞의 다리를 종침교(琮琛橋)라고 부른다.
성수침(成守琛)의 집 백악산(白岳山) 아래 유란동(幽蘭洞)에 있다. 소나무 숲 속에 서당 몇 칸을 지어서, 청송당(聽松堂)이라고 편액하였다. ○ □□가 그때의 일이 크게 그릇되었음을 보고 고향에 돌아가려 할 때, 수침과 작별하려고 청송당에 이르렀더니, 수침이 없었다. 이에 벽에 한 수 절구(絶句)를 적었는데, 그 첫 구에 이르기를, “은근하게 잘 있구나 두 그루 소나무, 저무는 해 풍상에도 그 모습 바꾸지 않았네.” 하였다. 대개 소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수침에게 비유한 것이다. ○ 동산 중턱에 금오(金吾 의금부(義禁府)) 나장(羅將)들이 기예를 익히는 곳이 있다.
이기설(李基卨)의 집 삼청동(三淸洞)의 평지가 다한 끝 바로 북악(北岳)이 내려와서 밑에서 뭉친 백련봉(白蓮峯) 아래에 있다. ○ 석벽(石壁)에 영월암(影月巖)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집 인왕산(仁王山)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호))의 옛 집터이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고 구경할 만하고,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조희신(趙希臣)의 집 순화방에 있다. 아우 희철(希哲)과 더불어 모두 그 효행이 정표(旌表 사람의 선행을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 표창함)된 까닭에 지금 쌍효자(雙孝子) 거리라고 일컫는다.
성삼문(成三問)의 집 진장방(鎭長坊)에 있다. 바로 장원서(掌苑署) 뜰 앞이다. 예전에 손수 심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베어서 거문고를 만드는 재목으로 삼았다.
유관(柳灌)의 집 진장방 소격서동(昭格署洞)에 있다. ○ 하의(荷衣 별호) 홍적(洪迪)의 〈유정승의 옛집 잣나무를 보고 느낌이 있어〉 라는 시에 이르기를, “옛 잣나무 푸르고 푸르러 그림 처마 덮었으니, 겹겹한 그 그늘에 석양 햇빛 얼마나 더했던가. 서리 내린 뿌리에 궂은 비 다시 뿌리니, 지나는 나그네 무정하지만 눈물 저절로 적시네.” 라고 하였다.
이염의(李念義)의 집 인왕산 기슭 백운동(白雲洞)에 있다.
소세양(蘇世讓)의 집 인왕산 아래 인왕동에 있다. 청심당(淸心堂)ㆍ풍천각(風泉閣)ㆍ수운헌(水雲軒)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헐어졌다.
김상용(金尙容)의 집 순화방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에 있다. 태고정(太古亭)ㆍ늠연당(凜然堂)이 있고 선원(仙源 김상용의 별호)의 화상을 봉안했다. 후손들이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창의동 김씨라고 일컫는다. 시내 위의 돌에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百世淸風)’이라는 8자를 새겼다. ○ 순조(純祖)와 익종(翼宗)이 일찍이 봄날에 들린 일이 있다.
김수항(金壽恒)의 집 백악산 아래에 있는데, 육상궁(毓祥宮)과 담이 붙었다. 무속헌(無俗軒)이 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안국방(安國坊)에 있는데,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 숙종의 비 민씨)가 왕후 자리에서 물러나서 살던 사제(私第)가 있던 곳이다. 감고당(感古堂)이 있다. ○ 또 아래에 보인다.
김주신(金柱臣)의 집 순화방 대은암동(大隱巖洞) 연우궁(延祐宮) 곁에 있다. ○ 양정재(養正齋)가 있는데 인원왕후(仁元王后 숙종의 계비(繼妃) 김씨)가 난 곳이다.
연령군(延齡君)의 집 북부 안국방에 있는데, 바로 영안군(永安君) 홍주원(洪柱元)의 옛집이다. 인목왕후(仁穆王后 선조의 계비 김씨)가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지어 주었는데, 궁실과 정원이 매우 넓고 뛰어나서 성 안에서 제일가는 집이다. 지금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철종의 생부)의 사당이 되었다.
이완(李浣)의 집 관인방(寬仁坊) 대사동(大寺洞)에 있다. 이완이 죽은 지 20년 뒤에 민종도(閔宗道)가 빼앗아 살았다. 뜰에 상공이 손수 심은 배나무가 있는데, 민가가 들어가 사니 열매를 맺지 않더니, 갑술년 뒤에 이정승의 서손(庶孫)이 억울함을 호소하여 되찾아 들어가니 뜰의 배가 다시 열매를 맺었다.
박명원(朴明源)의 집 □□방 제생동(濟生洞)에 있다. 정종(正宗)이 일찍이 여기 거둥하여 편액을 하사하여 만보정(晩葆亭)이라고 했다.
동문(東門) 밖 유관(柳寬)의 집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다. 집 몇 칸에 울타리가 없었는데,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그 집에 가서 대울타리를 만들어 주고 알리지 않게 했다. ○ 일찍이 장마비가 달이 지나도록 내려서 집이 마치 삼대 같이 새는데, 공이 우산을 들고 비를 가리면서 부인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까.” 하자,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은 반드시 대비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었다.
영순군(永順君) 부(溥)의 집 안암동(安巖洞)에 있다. 성종 14년에 정희왕후(貞熹王后 세조비 윤씨)가 온천에 갔다가 행궁(行宮)에서 돌아가시어 찬궁(欑宮)으로 봉환할 때 이 집에 임시로 봉안했다. 후손들이 지금까지 전하여 지킨다.
서남문(西南門) 밖 이정보(李廷俌)의 집 □□방 만리현(萬里峴)에 있다. 한양에 서울을 정할 때에 무학(無學)의 말에 따라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뒤에 6세손 정암(廷馣)의 3형제가 모두 한림(翰林)이 되어 드디어 한림동이라 부르게 됐다.
홍윤성(洪允成)의 집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세조가 일찍이 다녀간 일이 있다.
강희맹(姜希盟)의 집 숭례문 밖에 있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일찍이 잠시 그곳에 머물러 우거하였다. 매양 그 동산 안의 소나무 밑에서 놀았는데, 뒤에 즉위하게 되자, 그 소나무에 관작을 내리고 금띠를 두르게 하고, 또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말에서 내리게 했다. 지금의 순청동(巡廳洞)이다.
윤두수(尹斗壽)의 집 하나는 청파리(靑坡里)에 있었는데, 선지당(先志堂)이 있고, 또 애산당(愛山堂)이 있어, 최립(崔岦)이 기문을 지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하나는 반송방 동자동에 있었는데, 공이 죽은 뒤에 중국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나와서 공의 큰 아들 방(昉)을 찾아와 말하기를, “선공(先公)의 충효가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내가 마땅히 편액을 써서 늘 마음에 두고 사모하던 뜻을 붙이겠습니다.” 하고, 충효당(忠孝堂)이란 세 글자를 벽 위에 특별히 쓰고 돌아갔다.
기건(奇虔)의 집 만리현에 있다. 건이 일찍이 걸어서 반궁(泮宮 성균관)에 왕래하면서 반드시 《중용》과 《대학》을 외웠다.
정광필(鄭光弼)의 집 숭례문 밖 전생서(典牲署) 앞에 있다. 수풀이 빽빽해서 단오에 서울 사람들이 그네 타는 곳이 되었다. 또 남부에도 있다.
이지남(李至男)의 집 숭례문 밖 자연암(紫煙巖)에 있다. 지남이 효행으로 정표 받고, 아내 정(鄭)씨가 정렬(貞烈)로 정표 받고, 큰아들 기직(基稷)ㆍ둘째 아들 기설(基卨)ㆍ딸 처녀가 모두 효행으로 정표 받고,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가 충성으로 정표 받고, 돈오의 아내 김씨가 정절(貞節)로 정표 받고, 돈서(惇敍)가 충성으로 정표 받았으니, 한 가문에서 8정표를 받은 것이 된다. 영종 21년에 전교를 내려 이르기를, “지금 능행(陵幸 임금이 능에 참배하는 것)하는 길에 이지남의 3대가 충ㆍ효ㆍ열 정려(旌閭)로 삼강(三綱)이 모두 한 집안에 빛난 것을 보았으니, 마땅히 상을 주어 칭찬하는 법전을 시행하여야겠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제사 받드는 자손에게 녹을 주어 등용하게 하였다.
정연(鄭淵)의 집 반송방 미정동(尾井洞)에 있는데, 지금껏 대대로 전하여 오는 집이다.
서성(徐渻)의 집 숭례문 밖 약현(藥峴)에 있다. 공의 어머니인 이씨는 두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일에 익숙해서, 일찍이 집을 짓는데 공장들을 감독하여 거짓을 부리지 못하게 했다. 목수가 원한을 품고 일을 함부로 해서 손해를 끼치려고 대청의 첫 기둥을 거꾸로 세웠는데, 부인이 나뭇결을 만져보고 목수를 불러서 꾸짖었더니, 목수가 놀라고 감복해서 감히 다시는 속이지 못했다.
민유중(閔維重)의 집 반송방의 고거자동(古車子洞)에 있다. 인현왕후가 탄생한 옛집으로서 영종 37년에 누각을 세우게 하고 임금이 손수 글씨를 써서 비를 세우고, 그 동리를 추모동(追慕洞)이라고 명명했다.
무슨 동리인지 알 수 없는 것.
이득분(李得芬)의 집 태조 5년에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비 강씨)가 옮겨 살다가 돌아가신 곳이다.
안기지(安耆之)의 집 세조 5년에 장순왕후(章順王后 예종의 비 한씨)가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기지】 연서별서(延曙別墅) 북부 연서역촌에 있었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의 별서(別墅 별장)였으며, 숙종 을해년에 임금이 글을 지어 비를 세웠다.
추흥정(秋興亭) 용산강에 있으며, 이숭인(李崇仁)의 기문이 있다.
담담정(淡淡亭) 마포 북쪽 기슭에 있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지은 것인데, 서적 만 권을 저장했고, 선비들을 불러모아서 십이경시문(十二景詩文)을 짓고 사십인영(四十人詠)을 지었다. 신숙주(申叔舟)의 별장이다.
무계정사(武溪精舍)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에 있다. 안평대군이 꿈에 도원(桃源)에서 놀고 이윽고 이 집을 지었다. ○ 이식(李埴)의 기문이 있다.
쌍계재(雙溪齋) 성균관(成均館)의 반수(泮水) 동쪽에 있었는데, 참판 김뉴(金紐)의 옛집이다. ○ 강희맹의 부(賦)가 있다.
침류당(枕流堂) 한강에 있었는데, 경력(經歷 관직명) 이사준(李師準)의 별장이다.
무풍정(茂豐正)의 별서 양화도(楊花渡)에 있었다.
성현(成俔)의 집 약전현(藥田峴)에 있었는데, 언덕을 뒤에 두고 집을 지었다. 개국 초에 중 무학이 터를 잡아서 성씨에게 주었다. ○ 허백당(虛白堂 성현의 별호)이 밤 경치를 감상하며 홀로 뒷동산에 올라 시를 낭송하는데, 때마침 밤 닭이 울려하고 달빛은 희미하게 밝았다. 손이 와서 자고있다가 잠을 깨서 창문 틈으로 엿보고는, 신선이 내려왔다고 여겨 황망히 일어나 뒤쫓아갔는데, 서로 보고서는 크게 웃었다고 한다. 성씨가 서로 전한 지 또 2백여 년이었고, 그 뒤로는 더 지키지 못하였다. 뒤에 약산(藥山) 오광운(吳光運)의 집이 되었다.
남재(南在)의 집 남부 명철방(明哲坊) 제이리(第二里)에 있었는데, 바로 나라에서 내려준 집이다. 집 근처에 한 바위가 있어서 그 모양이 거북을 닮았으므로 드디어 귀정(龜亭)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 남소동(南小洞) 안에 구유바위[槽巖]가 있는데 귀정의 옛 터라고 한다. 아마도 구유바위의 말소리가 바뀌어 귀정이 된 것 같다.
남이(南怡)의 집 동부 □방에 있었는데, 사람이 감히 살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없어져서 채소밭이 되었다. ○ 뜰에 반송(盤松)이 있는데 비길 데 없이 커서, 32 개의 기둥으로 떠 받쳤다. 애송(愛松)이라 부른다. 이 소나무는 바로 영종 정해년에 부사(府使) 조진세(趙鎭世)가 심은 것이라 한다.
손순효(孫舜孝)의 집 남부 명례방(明禮坊) 상층(上層)에 있었다. 성종이 어느 날 저물녘에 두세 명의 내시와 함께 경회루(慶會樓) 올라 남산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몇 사람이 숲이 드문 곳에 둘러 앉아 있었다. 성종이 그것이 순효인줄 알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가 두 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에는 오이뿐이었다. 임금이 술과 안주를 하사하니 순효가 손들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 이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이행(李荇)의 서옥(書屋 서재) 목멱산(木覓山) 기슭의 청학동(靑鶴洞)에 있었다. 집 뒤에 병풍 바위[屛巖]와 반석이 있어서 그윽하고 고요하기가 사랑할 만하였다. 중국 사신 당고(唐皐)와 사도(史道)가 모두 시를 읊은 것이 있다. ○ 길 양쪽에 소나무ㆍ노송나무ㆍ복숭아나무ㆍ버드나무를 심었다. 공이 관직에서 물러나서 여기에서 지팡이를 짚고 소요하며 늙음을 마쳤다.
정여창(鄭汝昌)의 집 남부 회현방(會賢坊)에 있었다. 그래서 일두(一蠹 정여창의 호)의 후손이 해마다 그곳에 사는 민가에서 텃세를 거둔다.
윤관(尹寬)의 정사 쌍계동(雙溪洞)에 있었다. 윤이 동리 안에 삼휴정사(三休精舍 삼휴는 별호)를 짓고 공부하면서 늙음을 마쳤다.
수진동(壽進洞)에 정도전(鄭道傳)의 집터가 있었다. 제용감ㆍ사복시ㆍ중학이 모두 그 옛터라 한다. ○ 송현(松峴)에 있는 달성위(達城尉 이름은 서경주(徐景霌)의 집은 바로 옛날 판서 유자신(柳自新)이 살던 곳이다. ○ 대정동(大貞洞)에 하징(夏徵)의 집터가 있다. ○ 누국동(漏局洞)에 김사계(金沙溪 이름은 장생(長生))의 옛집이 있는데, 지금까지 서로 전해 온다. ○ 태평관(太平館)에 박사암(朴思庵 순(淳))과 이아계(李鵝溪 산해(山海))의 옛집이 있다. ○ 창동(倉洞)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옛집이 있다. ○ 회현동에 선복교(善復橋)가 있다. ○ 장흥동(長興洞)에 박읍취헌(朴挹翠軒 은(誾))과 심일송(沈一松 희수(喜壽))의 옛집이 있다. ○ 낙동(駱洞)에 정고옥(鄭古玉 작(碏))의 옛집이 있다. ○ 나석좌(羅碩佐)가 살던 곳은 나대장동(羅大將洞)이라고 일컫는다. ○ 교서관동(校書館洞)에 임경업(林慶業)과 채호주(蔡湖洲 유후(裕後))의 옛집이 있고, 예관 부군당(藝館府君堂)에 임 장군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지낸다. ○ 필동(筆洞)에 윤미촌(尹美村 선거(宣擧))의 옛집이 있다. ○ 옛날 묵사(墨寺)가 있던 곳에 송송정(宋松亭)이 있으니, 곧 송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송정이다. ○ 쌍리문동(雙里門洞)은 이첨(爾瞻 성은 이)이 살던 곳인데, 광해군 폐위시에 권세가와 귀족들이 많이 살았고, 윤희굉(尹希宏)도 살았다. ○ 묵사동(墨寺洞)에 찬신정동(纘新井洞)이 있고 남소동(南小洞)에 이동고(李東皐 준경(浚慶))의 옛집이 있다. ○ 허적(許積)이 현종조에 동현(銅峴)에 체찰부(體察府)를 설치했으므로 체부청동(體府廳洞)이 동현에 있다. ○ 대은암(大隱巖) 바위 곁에 옥랑(屋廊 제(第)와 같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송귀봉(宋龜峯 익필(翼弼))이 태어난 곳이며, 낭옥은 지금도 있다. ○ 삼청동문 곁에 민로봉(閔老峯 정중(鼎重))의 옛 집이 있다. ○ 만리탄(萬里灘)은 곧 백악산 기슭 남곤(南袞)의 집 뒤에 있는데, 박읍취헌이 이름지어졌다. ○ 청석동(靑石洞)은 대사동 서쪽에서 전의감동으로 통하는 작은 동리인데, 청성(淸城 부원군 김석주(金錫冑))이 옛적 살던 곳인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이 살던 대사동 집은 바로 정승 신만(申晩)의 집이라 한다. ○ 계생동(桂生洞)은 바로 제생원(濟生院)이다. 이동고의 옛집과 연암(燕庵) 박지원(朴趾源)의 중국식 집이 있다. ○ 맹감사현(孟監司峴)은 감사 맹만택(孟萬澤)이 살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 누각동(樓閣洞)은 인왕산 아래에 있다. 연산군 때에 누각을 지었으므로 그렇게 이름지었다. 지금 그 거리에는 아전으로 늙어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꽃과 과실나무를 많이 심어서 생업으로 한다. ○ 장동(壯洞)에는 정송강(鄭松江 철(澈))의 옛집이 있다. ○ 독암(獨庵) 조종경(趙宗敬)의 집은 남문 밖의 염초청(焰硝廳) 곁에 있다. 담 안에 이른 감 두 그루가 있어 잘 열었는데, 길가는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올 감이 저렇게 만발했는데 팔아서 돈을 거둔다면 그 이익이 얼마나 될까.” 하니, 부인 이씨는 헌납(獻納 관직명) 잠(箴)의 딸인데,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겨 말하기를, “양반 집에서 과일 나무를 심어서 이익을 본다는 이름이 나면 그 어찌 세상에서 떳떳하겠느냐.” 하고, 곧 그 나무를 베어 없애고 집을 팔아 이사했다.

【사묘】 백악신사(白岳神祠) 백악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醮祭)를 거행한다. 중악(中岳)인 삼각산(三角山)을 이곳에서 제사지낸다. 삼각산 신위는 북쪽에 있고 백악산 신위는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목멱신사(木覓神祠) 목멱산 정상에 있는데, 봄ㆍ가을에 초제를 거행한다. 지금은 없어지고 사당만 있다.
한강단(漢江壇) 한강의 북쪽 언덕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제사지낸다.
부군사(符君祠) 각사(各司) 아전의 청방 곁에 있으며, 해마다 10월 1일에 제사지낸다. 세상에서 혹 말하기를, 고려의 시중(侍中 고려 관제의 수상직) 최영(崔瑩)이 관직에 있을 때 재물에 깨끗하고 징수를 하지 않아서, 이름이 떨쳤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사모하여 그 신을 모셔 존숭한다고 한다. 각 고을에도 모두 있다.
통명청(通明廳) 맹인청(盲人廳)이라고도 한다. 영희전(永禧殿) 동쪽 담 밖에 있는데, 김자점(金自點)의 집 옛터라 한다. 국복(國卜 나랏일을 점치는 점쟁이) 한 사람에게 지중추(知中樞)의 직함을 주어 주관하게 한다.
이색(李穡)의 영당(影堂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 중부 수진방에 있는데, 봄ㆍ가을마다 후손이 제사지낸다.
지덕사(至德祠)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는데, 곧 양녕대군의 사당이며, 숙종이 이름을 내렸고 정종이 편액을 내렸다. 사당기(祠堂記)가 있다.
신수근(愼守勤)의 사당 소의문(昭義門) 안에 있다. 영종 기미년에 공에게 영의정 익창부원군(領議政益昌府院君)을 증직(贈職)하고, 임금이 손수 고금동충(古今同忠)이라는 네 글자의 큰 글씨를 써서 내리고, 호조에 명하여 사당 옆에 각(閣)을 지어서 간직하게 했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사당 흥인문(興仁門) 밖 안암동의 옛 집터에 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사당기가 있다.
심희수(沈喜壽)의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을 때에 제사지내는 사당) 반촌(泮村 반궁 곧 성균관 근처 마을)에 있다. 선조 병오년에 투서한 자가 있어서 명하여 체포하니, 학관원(學官員)이 법을 잘못 집행하여 반례(泮隷 성균관 하인)에 미쳤는데, 공이 장관으로서 밝히기 어려움을 힘써 아뢰어 송사를 종결지을 수 있었다. 공이 죽은 뒤에는 반촌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지낸다.
윤집(尹集)의 사당 서부 반송방 옛집에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지은 묘정비(廟庭碑)가 있다.
윤성준(尹星駿)의 생사당 반촌에 있다. 옛 규례로는 재실 유생들의 식당에서 여종이 상을 나르는데, 급식이 끝난 다음에 규례를 어기고 야비한 짓을 하는 일이 심해졌으므로, 숙종 기축년에 윤성준이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의 장관)으로서 상소하여 이 규례를 폐지하니, 반촌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생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낸다.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사당 서부 적선방에 있다. 옹주가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상을 당하자, 음식을 끊고 죽었는데, 영종이 손수, “정성이 부족해서 돌이키지 못했구나, 네가 정절을 따랐음을 가상히 여긴다[誠淺莫回嘉隨貞].”라는 8자를 써서 내려 사당 안에 받들어 걸게 하고, 뒤에 정렬을 정표하게 했다.
【역원】 노원역(蘆原驛) 흥인문 밖 4리 떨어진 곳에 있다.
청파역(靑坡驛) 숭례문 밖 3리에 있다. ○ 위의 두 역은 병조에 직속되어 있다.
보제원(普濟院) 흥인문 밖 3리에 있는데, 누각이 있어 상원(上元 음력 1월 15일)과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에 기로소의 재상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한다. ○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홍제원(洪濟院) 홍(洪)은 홍(弘)으로도 쓴다. 추모현(追慕峴) 북쪽에 있는데, 고려 성종 을유년에 중 정현(鼎賢)이 창설한 것이다. 누각이 있어 중국 사신의 옷 갈아입는 곳인데, 뒤에 폐지했다. 인조 26년에 태평관(太平館)과 인경궁(仁慶宮)의 자재를 거두어 관우(館宇)를 옮겨 지어 중국 사신이 유숙하는 곳으로 삼았다.
이태원(梨泰院) 목멱산 남쪽에 있다. ○ 세상에서 전하기를, 임진란 뒤에 왜인의 귀순한 자를 숭례문 밖 남산 아래에 살게 하여 자연히 한 마을을 이룬 까닭에 이타인(異他人)이라고 일컬었으므로 동리 이름이 되었는데, 뒤에 이름을 고쳤다.
전관원(箭串院) 전관교(箭串橋 살곶이다리) 서북쪽에 있다.
【시가】 운종가(雲從街) 곧 종루서가(鐘樓西街)인데 속칭 생선전이라 한다. 영종 경진년에 다시 개국초의 옛 이름을 회복하여 운종가로 고쳤다.
【장시】행상이 모여서 물건을 바꾸고 헤어지는 것을 장(場)이라고 한다.
○ 세상에 전하기를, 신무문(神武門) 밖 북쪽에 예전에 시장이 있었으니, 곧 주례(周禮 주(周) 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책 또 그 제도를 뜻함) 후시(後市)의 뜻이라고 하는데,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모두 네 곳이 있다.
종루가상(鐘樓街上)ㆍ이현(梨峴)ㆍ칠패(七牌)ㆍ소의문외(昭義門外)이다.
【시전】 정종(定宗) 원년에 비로소 시전을 설치하니, 좌우 행랑(行廊) 8백여 칸이 혜정교(惠政橋)로부터 창덕궁 입구까지 이르렀다.
유분각전(有分各廛) 각 전 가운데서 형편이 괜찮은 자로, 분수를 헤아려 정해서 국역(國役나라의 일)에 응하게 하고, 유분각전이라고 부르며, 10분에서 1분까지 모두 37전인데, 국역을 당할 때마다 10분전은 10분의 일에 응하고 1분전은 1분의 일에 응하여, 대궐 안팎 여러 상사(上司)의 각처 수리와 도배, 재봉하는 사람도 이에 준해서 나가 일한다.
선전(縇廛) 전의감 동구의 동ㆍ서쪽 곧 종루로(鐘樓路) 북쪽에 있다. 모두 42방(房)인데, 중국산 필로 된 단(緞 겨울 비단)ㆍ초(綃 여름 비단)ㆍ견(絹 봄ㆍ가을 비단) 같은 것을 판다. ○ 저자가 서는 처음에, 먼저 선전을 세웠다. 속칭 입전(立廛)이라 하며, 국역 10분에 응한다.
면포전(綿布廛) 종루로 서쪽에 있는데, 은붙이도 겸하여 팔기 때문에 은목전(銀木廛) 또는 백목전(白木廛)이라고도 부르며, 국역 9분에 응한다.
면주전(綿紬廛) 면포전 뒤, 전옥서 앞에 있는데, 국산 면포와 명주를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내어물전(內魚物廛) 이문(里門) 동ㆍ서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건어물을 팔고, 국역 5분에 응한다.
외어물전(外魚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국역 4분에 응하며, 내전과 합쳐서 9분역이다.
지전(紙廛) 동전(東廛)은 포전 남쪽에 있고, 서전은 면포전 남쪽에 있는데, 9분역에 응한다.
저포전(苧布廛) 진사전 동쪽에 있는데, 모시와 황모시를 팔며, 국역 6분에 응한다.
포전(布廛) 면포전 건너편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하고, 저포전과 합쳐서 11분역이다. ○ 선전으로부터 여기까지 6전을 육의전(六矣廛)이라 하는데, 속칭 육주비전(六注比廛)이라 하며, 각 전 중에서 가장 큰 전이다. ○ 예전에는 선전ㆍ면포전ㆍ면주전ㆍ지전ㆍ저포전 및 내외어물전ㆍ청포전을 합쳐서 육의전으로 구분했는데, 지금은 고쳐서 선전ㆍ면주전ㆍ면포전ㆍ내외어물전ㆍ내전을 합쳐 구분하고, 지전ㆍ저포전ㆍ포전의 저ㆍ포를 합쳐 구분해서 육의전으로 하며, 육의전 외에는 난전(亂廛)을 금하지 않는다.
청포전(靑布廛) 종루 동쪽에 있는데, 중국산 삼승포(三升布)와 양털, 모자를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연초전(煙草廛) 도가(都家)가 하량교(河良橋) 남쪽에 있으며, 국역 5분에 응한다.
상전(床廛) 물건들을 상 위에 늘어 놓은 까닭에 속칭 상자리전(箱貲利廛)이라 한다. 말총ㆍ가죽ㆍ초[燭]ㆍ실ㆍ책ㆍ휴지 같은 잡물(雜物)을 파는데, 모두 13곳이다. 망문(望門) 상전은 의금부 앞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하고, 신(新) 상전은 안국동에 있으며, 묘(廟) 상전과 국역 2분씩에 응하고, 동(東) 상전은 종루 남쪽에 있으며, 수진(壽進) 상전과 국역 1분씩에 응하고, 포(布) 상전ㆍ철(鐵) 상전ㆍ필(筆) 상전ㆍ남문(南門) 상전ㆍ염(鹽) 상전은 이전(履廛 신전) 동쪽에 있다. 정릉동(貞陵洞) 상전ㆍ동현(銅峴) 상전ㆍ지(紙 종이) 상전은 모두 국역 분수가 없다.
생선전(生鮮廛) 병문(屛門) 동남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생선을 팔며, 국역 3분에 응한다. 미전(米廛) 여러 가지 곡식을 팔며, 모두 다섯 곳인데, 상ㆍ하 미전은 상전(上廛)이 의금부 서쪽에 있고 하전이 이현에 있어, 국역 3분씩에 응하며, 문외(門外) 미전은 소의문 밖에 있어 국역 2분에 응하며, 서강(西江) 미전과 마포(麻布) 미전은 모두 분수가 없다.
잡곡전(雜穀廛) 철물교(鐵物橋)의 서쪽 가 남ㆍ북쪽에 있으며, 국역 3분에 응한다. ○ 남문안 미전 도가는 수각교(水閣橋) 서쪽에 있어 한달에 40냥을 잡곡전에 납세한다.
유기전(鍮器廛) 바리전이라고도 한다. 내어물전의 서쪽 행랑 뒤에 있는데, 여러 가지 놋그릇을 판다.
은면전(銀麪廛) 전의감 동구 동쪽 가에 있다.
의전(衣廛) 잡곡전 서쪽에 있는데, 남녀가 입는 옷을 판다.
면자전(綿子廛) 광통교 북쪽 가 동ㆍ서쪽에 있는데, 면화전(綿花廛)이라고도 하며, 씨를 뺀 솜을 판다.
이전(履廛) 청포전 동쪽에 있는데, 여러 가지 가죽신을 판다. 이상 5전은 국역 5분에 응한다. ○ 신전은 여러 곳에 있으나 종루전(鐘樓廛)만이 유정혜(油釘鞋 기름 바르고 징을 박은 신)를 판다.
화피전(樺皮廛) 동상전 동쪽에 있다. 여러 가지 물감과 중국 과실을 파는데, 물건을 벗나무 껍질로 쌌으므로 이렇게 이름을 부른다.
인석전(茵席廛) 수진동 동구 서쪽에 있으며, 용수석(龍鬚席 용수풀로 만든 자리)ㆍ책상ㆍ걸상 같은 물건을 판다.
진사전(眞絲廛) 의금부 문 밖 동쪽에 있고 여러 가지 당사실ㆍ과실ㆍ갓끈ㆍ띠ㆍ실을 엮어서 만든 끈 같은 물건을 판다.
청밀전(淸蜜廛) 도가는 하피마병문(下避馬屛門) 동쪽 가에 있다.
경염전(京鹽廛) 숭례문 밖에 있으며, 서해에서 구운 소금을 판다.
체계전(髢髻廛) 칠목기전 남쪽에 있는데, 속칭 다리전이라 하며, 부인네의 머리 장식하는 다리를 판다.
내장목전(內長木廛) 여러 곳에 있는데 집을 짓는 재목을 판다.
철물전(鐵物廛) 여러 곳에 있으며, 여러 가지 철물을 판다.
연죽전(煙竹廛)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군기시 앞에 있고 하나는 약현에 있으며, 여러 가지 물들인 담뱃대, 담배통을 판다. 위의 9전은 모두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시저전(匙箸廛) 모두 내ㆍ외 2전인데 내전은 염탄전(鹽炭廛) 동쪽에 있고 외전은 소의문 밖에 있으며, 국역 1분씩에 응한다.
우전(牛廛)ㆍ마전(馬廛) 양전이 모두 태평교(太平橋)의 남쪽 언덕에 있으며, 1분씩에 응한다. 이상의 41전 가운데서 10전은 분수가 없고, 나머지 31전과 위에 나온 6주비전을 아울러 37전이 된다. 무분각전(無分各廛)ㆍ외장목전(外長木廛) 성 밖에 있다.
채소전(菜蔬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이현에 있다.
모전(毛廛) 속칭 우전[隅廛]이라 하는데, 처음에 길모퉁이에 설치했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으며 토산(土産 그 지방 고유의 산물)의 과실을 판다. 모두 여섯 곳인데 송현(松峴) 모전ㆍ정릉동(貞陵洞) 모전ㆍ상 모전ㆍ하 모전ㆍ전의감동 모전이다.
혜정교잡전(惠政橋雜廛) 우산ㆍ갈대발ㆍ용지(龍脂)ㆍ중간치 횃불[炬] 같은 것을 판다. 세물전(貰物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혜정교 남쪽에 있으며, 혼례ㆍ상례에 쓰는 제구를 세준다.
양대전(涼臺廛) 돈의문 밖에 있다.
잡철전(雜鐵廛) 여러 곳에 있다.
염전(鹽廛) 숭례문 밖에 있고, 마포에도 있다.
백당전(白糖廛) 여러 곳에 있다.
좌반전(佐飯廛) 곧 반찬전인데, 절인 생선ㆍ젓갈 따위를 판다. 모두 네 곳인데, 생선 좌반전ㆍ상미(上米) 좌반전ㆍ내어물(內魚物) 좌반전ㆍ외어물 좌반전이다.
계전(鷄廛) 광통교에 있다.
생치전(生雉廛) 생선전 병문에 있으며, 꿩을 판다.
계란전(鷄卵廛) 생치전 곁에 있다.
저전(豬廛) 각처에 있다. ○ 큰 상사[喪]에는 준례로서 저전 사람이 방상시(方相氏 장례 행렬 맨 앞에서 탈을 쓰고 귀신을 쫓으며 가는 사람)가 된다.
복마제구전(卜馬諸具廛) 종루에 있는데, 나무안장ㆍ말가슴걸이ㆍ고삐ㆍ채찍 같은 것을 판다.
세기전(貰器廛) 잔치에 쓰이는 것을 세주는데, 사기 그릇과 홍칠반(紅漆盤 나무에 붉은 칠을 한 그릇)은 숙수도가(熟手都家 숙수는 요리사 숙수가 모여 있는 곳)에 있다.
승혜전(繩鞵廛) 생마혜(生麻鞋)와 숙마혜(熟麻鞋 삼으로 만든 신. 숙마혜는 익힌 삼으로, 생마혜는 익히지 않는 삼으로 만든 것)를 파는데, 여러 곳에 있으며 도가는 의금부 문밖의 동쪽에 있다.
상ㆍ하목기전(上下木器廛) 상전은 육조 앞에 있고, 하전은 이현에 있는데, 모판ㆍ싸리농[杻籠]ㆍ성긴 싸리농ㆍ키ㆍ궤짝 같은 것을 판다.
칠목기전(漆木器廛) 여러 가지 나무 그릇과 장(欌)을 팔기 때문에 장전이라고도 부르며, 무늬 있는 나무장ㆍ종이장ㆍ방장(房欌) 따위를 판다. 여러 곳에 있는데, 효경교(孝經橋)에 지금 가장 많다.
등전(鐙廛) 곧 마상전(馬床廛)인데, 광통교 곁에 있으며, 지상전(紙上廛)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는 지전 앞에 있는데 말안장을 판다.
백립전(白笠廛 국상이 있으면 사용하는 흰말총으로 만든 갓)ㆍ흑립전(黑笠廛) 양전의 도가는 어의동 병문에 있다.
초립전(草笠廛) 청포전 서쪽에 있다.
자기전(磁器廛) 종루와 숭례문 밖에 있는데, 토산 자기와 중국 자기를 판다.
침자전(針子廛) 은침(銀針)과 크고 작은 보통 바늘을 판다.
분전(粉廛) 모두 넷인데, 하나는 영희전 동쪽 안팎에 둘씩 있다. 또 여러 곳에 있는데, 분ㆍ연지ㆍ색실을 팔며, 방물전(方物廛)이라 부른다. 여자 장사가 다니며 팔거나, 앉아서 팔기도 한다.
족두리전(簇頭里廛) 종루에 있는데, 부인네의 머리 장식품을 판다.
망건전(網巾廛) 하나는 종루에 있고, 하나는 소의문 밖에 있다.
내전립전(內氈笠廛) 마전교에 있다.
외전립전(外氈笠廛) 돈의문 밖에 있다.
파립전(破笠廛) 여러 곳에 있는데, 도가는 어의동에 있다.
고초전(蒿草廛) 숭례문 밖과 흥인문 밖에 있는데, 지붕을 잇는 짚과 울타리 대싸리를 판다.
초물전(草物廛) 소의문 밖에 있는데, 생삼[生麻], 삶은 삼ㆍ칡[葛]ㆍ노끈ㆍ왕골ㆍ기령풀 따위를 판다.
죽물전(竹物廛) 숭례문 밖에 있는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대로 만든 물건들을 판다.
이저전(履底廛) 창전(昌廛)이라고도 한다. 입전동(笠廛洞)에 있는데, 소가죽신 창을 판다. 시목전(柴木廛) 용산 강변에 있다.
파자전(笆子廛) 성 밖에 있다.
합회전(蛤灰廛 조개껍질을 구워서 만든 회) 하나는 이현 아래에 있고, 하나는 육조 앞에 있다.
전족전(箭鏃廛 화살과 촉) 이교남천(二橋南川) 가에 있다.
도자전(刀子廛) 종루 거리 위에 있는데 거리에 앉아서 장도ㆍ은비녀ㆍ부인네의 패물ㆍ금 은 가락지ㆍ담배통을 판다.
염수전(鹽水廛)ㆍ종자전(種子廛) 여러 곳에 있으며, 채소ㆍ쪽ㆍ연지풀의 씨앗을 판다.
교자전(轎子廛) 회현방 동구에 있으며, 여러 가지 가마를 판다.
형파전(荊把廛) 성 밖에 있으며, 나무꾼이 쓰는 갈퀴를 파는데, 갈퀴라는 것이 즉 형파(荊把)이다. 이 밖에 소소한 여러 전은 종류가 번다해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전에 없거나 드문 물건은 평시서(平市署)에서 나누어 정해주어서 육의전에 무역해 들인다. 붙임 감고(監考) 일이소(一二所)가 있는데 각 전 사람 중에서 착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을 뽑아서, 일이소의 감고로 정하고, 해마다 중국으로 사신이 갈 때 세폐(歲幣)로 가져갈 생상목(生上木 상등면포)을 일이소 감고처에서 2통 40자씩 값을 받고 올린다. 뒤에 금계(金契)의 공인(貢人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람)과 더불어 요역(徭役 나랏일에 이바지하는 것)하여 삯을 받고, 세폐 1백 25바리를 평산부(平山府)에 운반해 놓는다.
【포사】 서적포(書籍舖) 정도전의 서문이 있다. ○ 상고해 보건대, 개국 초에 가게를 열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만둔 것 같다.
책사(冊肆) 정릉동 병문에도 있고, 육조 앞에도 있는데, 사서삼경(四書三經)과 백가(百家 여러 학자 또는 그 학파)의 여러 가지 책을 판다.
서화사(書畫肆) 대광통교(大廣通橋) 서남쪽 개울 가에 있는데, 여러 가지 글씨와 그림을 판다.
금교세가(金轎貰家) 여러 곳에 있는 종친ㆍ옹주ㆍ공주의 옛집에서 세주는 것인데, 혼인하는 신부의 집에서 쓴다.
약국(藥局) 동현의 좌ㆍ우 거리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산재하는데, 대신의 관청이나 여러 군영에는 다 약방이 있다.
현방(懸房) 소를 잡아 고기를 파는 곳이다. 반인(泮人 성균관에 딸려 있으며 대대로 쇠고기를 팔던 사람. 관인이라고도 한다.)이 그 파는 일을 맡았는데, 고기를 걸어 놓고 파는 까닭에 현방이라 부른다. 중부 다섯 곳인데, 하량교ㆍ이전(履廛)ㆍ승내동(承內洞)ㆍ향교동(鄕校洞)ㆍ수표교이고, 동부 세 곳인데 광례교(廣禮橋)ㆍ이교(二橋)ㆍ왕십리이고, 남부 네 곳인데, 광통교ㆍ저동ㆍ호현동(好賢洞)ㆍ의금부이고, 서부 일곱 곳인데, 태평관ㆍ소의문 밖ㆍ정릉동ㆍ허병문(許屛門)ㆍ야주현(冶鑄峴)ㆍ육조 앞ㆍ마포이고, 북부 세 곳인데, 의정부ㆍ수진방ㆍ안국방으로 합쳐서 스물 세 곳이다.
붙임
향도(香徒 상여꾼) 는 소광통교(小廣通橋) 남쪽에 있고, 수표교의 남쪽 개울 가의 동쪽에도 있으며, 또 여러 곳에 산재한다.
【장방】 금방(金房) 여러 곳에 있으며, 또 금박(金箔 금을 엷게 입히는 것)하는 집이 있다. 은방(銀房) 도가가 둘인데, 하나는 백목전 도가(白木廛都家) 남쪽에 있고, 하나는 내어물전 북쪽의 향도정동(香徒井洞)에 있다.
옥방(玉房) 여러 곳에 있는데, 비녀ㆍ가락지 따위를 판다.
두석방(豆錫房 두석은 주석) 도가는 다래전 남쪽에 있다.
능라방(綾羅房) □산루(□山樓)에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주피방(周皮房) 안장 따위를 만들며, 도가는 장악원 건너편에 있다.
궁방(弓房) 내방(內房)은 도총부 북쪽에 있고, 외방은 마전교에 있다.
시방(矢房) 역시 내ㆍ외방이 있고, 또 여러 곳에 있다.
사모방(紗帽房) 여러 곳에 있다.
각대방(角帶房) 여러 곳에 있다.
도자방(刀子房) 여러 곳에 있다.
안경반(眼鏡房) 여러 곳에 있다.
석경방(石鏡房 예전의 구리 거울 등에 대하여 지금의 유리 거울을 말함) 여러 곳에 있다. 모의방(毛衣房) 여러 곳에 있다.
필방(筆房) 여러 곳에 있다.
입방(笠房) 여러 곳에 있다.
연죽방(煙竹房) 여러 곳에 있다.
【공장】서울의 여러 중앙 관서의 장인(匠人 기술자)은 그 관계 서류를 작성하여 공조와 소속 관서에 비치하며, 가장 긴요한 장인이 궐원이 있을 때에는 군인ㆍ보솔(保率)ㆍ관속(官屬 관청의 최하급 관원)ㆍ공천(公賤 관청 소속의 하인)을 막론하고 합당한 사람으로 차출하여 정한다. ○ 옹기점 장인은 군병이거나 공천ㆍ사천을 물론하고 그릇 굽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를 공조에서 세를 거두어 채용하며, 무쇠 장인의 인원수가 모자라는 것은 모자라는 대로 곧 보충한다. ○ 사옹원(司饔院)의 사기그릇[沙器] 장인은 그 자손이 다른 일에 충당되지 않고 대를 잇는다. ○ 공조에는 초립장(草笠匠) 8명, 사모장(紗帽匠) 2명, 도다익(都多益) 2명, 다회(多繪) 2명, 망건장(網巾匠) 2명, 모자장(帽子匠) 2명, 옹장(瓮匠) 13명, 화장(和匠) 4명, 은장(銀匠) 8명, 금박장(金箔匠) 2명, 과피장(裹皮匠) 2명, 화혜(靴鞋) 6명, 숙피장(熟皮匠) 10명, 화아(花兒)10명, 사피장(斜皮匠) 4명, 전장(氈匠) 4명, 입사장(入絲匠) 2명, 칠장(漆匠) 10명, 두석장(豆錫匠) 4명, 주장(鑄匠) 20명, 나전장(螺鈿匠) 2명, 유장(鍮匠) 8명, 배첩장(褙貼匠) 2명, 침장(針匠) 2명, 경장(鏡匠) 2명, 조각장(雕刻匠) □명, 동장(銅匠) 4명, 주피장(周皮匠) 6명, 한치장(汗致匠) 2명, 안롱장(鞍籠匠) 2명, 간다개(看多介) 2명, 필장(筆匠) 8명, 죽장(竹匠) 2명, 추골장(鞦骨匠) 2명, 인장(印匠) 2명, 수철장(水鐵匠) 30호(戶), 대ㆍ중ㆍ소야장(大中小冶匠) 각 10명, 야장(冶匠) 4명, 주장(珠匠) 2명, 점보로(䩞甫老) 2명, 매즙(每緝) 2명, 안자장(鞍子匠) 10명, 어적(於赤) 4명, 점장(䩞匠) 2명, 목소장(木梳匠) 2명, 소성장(梳省匠) 2명, 통개장(筒介匠) 2명, 첩선장(貼扇匠) 4명, 표통장(表筒匠) 2명, 칭자장(稱子匠) 2명, 원선장(圓扇匠) 2명, 죽소장(竹梳匠) 10명, 침선장(針線匠) 6명, 초염장(草染匠) 6명, 목영장(木纓匠) 4명이다. ○ 봉상시에는 옹(瓮) 10, 화(花) 6, 변두(邊荳) 4이다. ○ 내의원에는 분(粉) 2, 향(香) 2이다. ○ 상의원에는 능라(綾羅) 1백 5, 장립(章笠) 6, 유립(襦笠) 2, 사모 4, 양태(涼太) 2, 도다익 2, 다회(多繪) 4, 망건 4, 모자 2, 도련(擣鍊) 2, 잠(箴) 10, 옥(玉) 10, 옹(瓮) 10, 화(和) 8, 은 8, 금박 4, 과피 4, 화(靴) 10, 피혜(鞁鞋) 8, 숙피 8, 화아(花兒) 4, 침피(針皮) 4, 모의 8, 전 8, 입사(入絲) 4, 모관(毛冠) 2, 사금(絲金) 4, 칠 8, 두석 4, 마조(磨造) 4, 궁현(弓絃) 4, 유칠(油漆) 2, 주(鑄) 4, 나전 2, 하엽사(荷葉絲) 2, 생피(生皮) 2, 유(鍮) 2, 배첩(褙貼) 4, 침 2, 경(鏡) 2, 풍물(風物) 8, 조각 4, 묵(墨) 4, 동(銅) 4, 궁인(弓人) 18, 시인(矢人) 21, 도자(刀子) 6, 야(冶) 8, 연(鍊) 10, 매즙 4, 목소(木梳) 2, 재금(裁金) 2, 도목개(都目介) 2, 도결아(都結兒) 2, 웅피(熊皮) 2, 전피(猠皮) 2, 화빈(火鑌) 2, 죽소(竹梳) 2, 환도(環刀) 12, 침선 40, 합사(合絲) 10, 청염(淸染) 10, 홍염(紅染) 10, 세답(洗踏) 8, 도침(擣砧) 14, 연사(鍊絲) 75, 방직(紡織) 20, 초염(草染) 4이다. ○ 군기시에는 칠 12, 마조(磨造) 12, 궁현(弓絃) 6, 유칠 2, 주 20, 생피 4, 갑(甲) 35, 궁인(弓人) 90, 시인(矢人) 1백 50, 쟁(錚) 11, 아교(阿膠) 2, 고(鼓) 4, 연사(鍊絲) 2이다. ○ 교서관에는 야 6, 균자(均字) 40, 인출(印出) 20, 각자(刻字) 14, 주 8, 조각 8, 목(木) 2, 지(紙) 4이다. ○ 사옹원에는 사기 3백 80이다. ○ 내자시에는 옹 8, 화(花) 20, 방직 30, 잠(箴) 2이다. ○ 내섬시에는 옹 8, 방직 30, 잠 2이다. ○ 사도시(司導寺)에는 옹 8이다. ○ 예빈시에는 옹 8, 화 6이다 ○ 사섬시(司贍寺)에는 인출 2, 저폐(楮幣) 2 이다. ○ 선공감에는 마조 8, 조각 10, 죽 20, 목 60, 석(石) 40, 개(蓋) 20, 이(泥) 20, 도분(塗粉) 20, 돌(堗) 8, 거(車) 10, 우산(雨傘) □, 단(簞) 10, 염(簾) 14, 파자(把子)10, 상화롱(牀花籠) 4, 석회(石灰) 6, 마미사(馬尾篩) 4, 통(桶) 10, 아교 2 이다. ○ 제용감에는 숙피 2, 모관(毛冠) 2, 화엽사(花葉絲) 2, 분 2, 황단(黃丹) 2, 절죽(截竹) 2, 홍염(紅染) 10, 도침(擣砧) 6, 세답(洗踏) 4, 침선 24, 방직 30, 잠 2, 청염(靑染) 20이다. ○ 장악원에는 풍물 4, 황엽(簧葉) 2이다. ○ 관상감에는 자격(自擊) 10이다. ○ 전설사(典設司)에는 침 2, 다회(多繪) 6이다. ○ 전함사에는 선(船) 10이다. ○ 내수사(內需司)에는 옹 7, 야 2, 도 10, 유 5, 수철(水鐵) 6호(戶), 대중소야 각2, 사기 6, 목 2이다. ○ 소격서에는 옹 4이다. ○ 사온서는 옹 4이다. ○ 의영고는 옹 4, 촉(燭) 4이다. ○ 장흥고는 균(菌) 8, 도배(塗褙) 8이다. ○ 장원서에는 옹 8이다. ○ 사포서는 옹 10이다. ○ 양현고는 옹 □이다. ○ 조지서는 목 2, 염(簾) 8, 지 81이다. ○ 도화서는 배첩 2이다. ○ 와서는 와(瓦) 40, 잡상(雜象) 4이다. ○ 귀후서는 목 4, 야 2, 칠 2이다. (봉상시 이하는 장(匠) 자를 쓰지 않았다.) ○ 이상의 여러 관서 중에서 사섬시ㆍ전함사ㆍ소격서ㆍ사온서ㆍ귀후서는 지금 모두 폐지되고, 내자시ㆍ내섬시ㆍ사도시ㆍ예빈시ㆍ제용감, 전설사ㆍ장악원ㆍ사포서ㆍ양현고ㆍ도화서는 지금 공장(工匠)이 없으며, 그 밖의 여러 관서는 명색이 새로운 것과 예전대로 있는 것이 서로 차이가 있고, 인원수의 더하고 덜한 것이 일정하지 않은데, 적(籍)을 만들어서 공조에 두는 규례를 폐지하여 행하지 않고 속전(續典 속대전)을 만들 때에도 거론되지 않은 까닭에 지금도 모두 예전 그대로 하고 고치지 않았다. 금장ㆍ은장ㆍ옥장ㆍ두석장(豆錫匠)ㆍ목수ㆍ석수ㆍ소목장(小木匠)ㆍ대정(大丁) 쇠를 부어 칼이나 잡물을 만드는 사람을 속칭 대정이라 한다. ㆍ조주장(造主匠 신주 만드는 공장)ㆍ관곽장(棺槨匠)ㆍ모의장(毛衣匠)ㆍ안장장(鞍粧匠)ㆍ주자장(鑄字匠)ㆍ숙수장(熟手匠)ㆍ각수장(刻手匠)ㆍ장책장(粧冊匠)ㆍ칠장은 모두 지금 세상에서 통용하는 장색(匠色 색은 종류라는 뜻)이다.
【원묘】 의소묘(懿昭墓) 북부 아현(阿峴)의 서쪽, 연희궁(延禧宮)의 동쪽에 있다.
효창묘(孝昌墓) 서부 청파(靑坡) 서쪽에 있다.
선희묘(宣禧墓) 연희궁(延禧宮) 대야동(大野洞)에 있다. 의빈성씨 묘(宜嬪成氏墓) 효창묘의 왼쪽 언덕에 있다.
【불우】대체로 절은 새로 창건하지 못하며, 다만 옛터를 중수하는 자는 양종(兩宗 교종ㆍ선종의 두 종)에 고하고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啓聞 임금에게 알리는 것)하며, 능침(陵寢)에 가까운 곳에 사찰을 새로 세우는 것은 엄금한다. 서울의 여러 관서나 궁방(宮房)의 원당(願堂 부처에게 원하는 집)은 일체 혁파했다. ○ 승과시험을 보아 승(僧)이 된 자는 3개월 안으로 선종(禪宗)에 고하고, 혹 교종(敎宗)은 경의 암송을 시험보는데, 예조에 보고하여 계문하고 정전정포(丁錢正布 부역이나 병역을 면제하는 대신에 바치는 포목) 30필을 걷고 도첩(度牒)을 내어 준다.
흥천사(興天寺) 서부 황화방의 정릉 동쪽에 있는데, 본래 고려의 옛절이다. 홍무(洪武 중국 명 태조의 연호) 정축년에 중건하여 선종이 되었다. 권근의 기문이 있으며, 사리각(舍利閣)이 있어 우뚝한 높이가 5층이고 서울 안에 높이 섰으며, 보물과 불경을 그 안에 간직하였다. 능을 옮긴 뒤에 절은 예전대로 두었다. 연산군 때에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로 삼았고, 중종 반정 뒤에 계속 관청을 삼았다. 절은 이미 무너졌고 사리각만 남았는데, 경오년 3월에 이르러 중학의 유생들이 이단(異端)을 쓸어버린다고 부르짖으며 밤을 타서 부수고 불살라서 불길이 공중에 치솟고, 불구름이 하늘을 덮었는데, 도성 안의 깊은 골짜기의 그윽한 굴 속의 조그만 것까지도 다 들어내어 불태웠다. 세조 7년에 큰 종을 주조하여 걸었고, 한계희(韓繼禧)의 명(銘)이 있었는데 지금은 흥인문 안에 있다. 영종 무진년에 각을 세웠는데 뒤에 무너졌으며 지금은 광화문 루에 걸려 있다.
흥덕사(興德寺)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으니, 바로 정종(定宗)의 잠저 동쪽이다. 연못이 있다. 교종(敎宗)이 됐고 지금은 없어졌다. ○ 변계량(卞季良)이 늘 이 절에 거처하면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지었다. 권근의 〈덕안전기(德安殿記)〉가 있다.
내불당(內佛堂)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원각사(圓覺寺)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흥복사(興福寺)인데, 개국 초에는 조계종(曹溪宗)의 본사(本社)가 되었다가 뒤에 폐지되어 관청이 되었다. 세조 10년에 고쳐 창건하여 원각으로 삼았으며,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비명(碑銘)이 있고 또한 큰 종이 있는데, 바로 지금의 종루의 종이다. 연산군 때 흥청(興淸)ㆍ운평(運平) 등을 두고서 연방원(聯芳院)이라 부르고 이 절에 국(局)을 설치하였다. 중종 7년에 양종(兩宗)과 원각을 철거하여, 그 재목을 연산군 때 집을 헐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내려주었다. 이름난 탑 13층에 12회상(會相)을 새겼는데, 새긴 불상이 매우 정밀하고 기교하며, 또 처마 밑에 각각 해서로 쓴 작은 액자 다보회(多寶會)ㆍ영산회(靈山會) 등 글씨가 있고, 탑 기둥 사면에는 모두 용의 모양을 새겼다. 위 3층은 임진년에 왜적들이 무너뜨렸다. ○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이르기를, “원각사는 옛 큰 절의 터이며, 처음에는 대전(大殿)과 동ㆍ서의 선당(禪堂)뿐이었는데, 관습도감(慣習都監)을 대전의 서선당에 붙이고, 예장도감(禮葬都監)을 동선당에 붙이고, 대전의 북쪽은 중학의 유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삼았다. 세조가 일찍이 철거하여 다시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게 하고 이름하여 원각이라 하였으며, 임금이 여러 번 행행하였고,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가 되어 내리고, 사리가 여러 개로 나누어지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 뒤에 중부청사가 가각고(架閣庫) 자리에 옮겼고, 예장도감을 송현행랑(松峴行廊)에 붙여서 귀후서에 속하고, 관습도감을 봉상시의 악학(樂學)에 합쳐서 이름하여 악학도감이라 했다가 얼마 안 되어 장악원으로 고쳤다.” 하였다.
인왕사(仁王寺) 인왕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강굴(金剛窟) 인왕사 서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금륜사(金輪寺) 성 안에 있는데, 이 절 안에 사국(史局 춘추관)을 개설하였다. 유관(柳寬)이 일찍이 영수사(領修史)로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갔었다는데, 바로 흥덕사인 듯하다.
복세암(福世菴) 인왕산에 있었으며 세조조에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장의사(藏義寺) 창의문 밖에 있다. 신라가 백제 군사와 황산벌에서 싸웠는데,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 싸움터에서 죽었으므로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두 사람을 위하여 이 절을 창건했다. 우리 조정의 세종이 이 절을 집현전의 여러 신하에게 하사하여 그 안에서 글을 읽게 했으며, 성종조에 나이 적은 문관 채수(蔡壽) 등을 뽑아서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니, 문장접(文章接)이라고 했다. 뒤에 없어졌다. 연산군 병인년에 장의문(藏義門) 밖에 수각(水閣)을 세웠는데, 지금은 탕춘대(蕩春臺)가 되었다.
연굴(演窟) 소격서동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향림사(香林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 현종 경술년의 사변(거란의 2차 침입), 무오년의 난(거란의 3차 침입) 때에 태조의 재궁(梓宮 임금의 관)을 이 절에 옮겨 모셨다.
적석사(積石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청량사(淸涼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고려의 이자현(李資玄)이 청평산(淸平山)으로부터 불려와서 머물렀다.
승가사(僧伽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상서(尙書) 이오(李䫨)의 중수기(重修記)가 있다. ○ 옛날 신라 낭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 어령대사(飫聆大師)의 성적(聖跡)이다. 삼각산 남쪽에 좋은 곳을 가려서 바위를 깨고 굴을 만들며, 돌을 깎아 대사의 도용(道容 도통한 이의 성스러운 모습)을 본따 새겼다. 나라에 재난과 이변이 있으면 기도하여 재앙을 물리쳤는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한다.
삼천사(三川寺) 삼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대지국사비명(大智國師碑銘)〉이 있다.
진관사(津寬寺) 삼각산 서쪽에 있다. 태조가 수륙도량(水陸道場)의 상ㆍ중ㆍ하 3 단(壇)을 만들게 하고 여러 번 행행하였으며, 권근의 〈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가 있다. 세종 조에 신숙주(申叔舟) 등에게 말미를 주어, 이 절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도성암(道成庵) 삼각산 동쪽에 있는데, 정의공주(貞懿公主)의 원찰(願刹 어느 사람을 위해서 기도 드려 주는 절)이다.
자수원(慈壽院) 바로 개국 초의 북학이 있던 자리이다.
인수원(仁壽院) 현종 2년에 자수, 인수 양원을 철거하고 그 재목으로 학궁(學宮)과 무관(武館)을 수축하여, 중과 여승들은 환속(還俗 중이 도로 세상에 나와 보통 사람이 됨)하게 하며, 북학을 다시 세웠다. 북학조에 상세하다.
정업원(淨業院)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있는데, 성 안에 있다고도 한다. 정순왕후(定順王后 단종의 비 송씨)를 부인으로 강봉(降封)할 때 세조가 흥인문 안의 연미정동에 집을 내려주었는데, 주인이 따로 초가를 짓고 자칭 정업원 주지(住持)라 했다. 앞에 돌산 봉우리가 있는데, 주인이 때때로 올라가서 영월(寧越)을 바라보았으므로 동망봉(東望峯)이라고 부른다. 영종 계묘년에 어필로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5자를 써서 동망봉 아래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 ○《장릉지(莊陵志)》의 〈해평가전(海平家傳)〉에 이르기를,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 세조 찬위 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 송씨가 살아 있을 때 성 안에 있으려 하지 않고 동쪽 교외에 살면서 노릉(노산군의 능 곧 장릉)을 바라보기를 원하므로 조정에서 동문 밖에 집을 짓고 영빈정동(英嬪貞洞)이라 불렀는데, 부인이 따로 초가 몇 칸을 짓고 살면서 소의소식(素衣素食 흰옷을 입고 채소 음식을 먹음)으로 일생을 지냈다. 성종조에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불상을 만들어서 이 원에 보냈는데, 유생 이벽(李鼊) 등이 빼앗아서 불태웠다. 선조 계유년에 성균관 유생들이 철거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했으나 허가하지 않았다. ○ 이상의 3원은 모두 여승이 사는 곳이다. ○ 성현의《용재총화》에, “성 안에 여승의 절간이 이미 철거되고 정업원만이 남았으며 여승들은 모두 다 흥인문 밖으로 쫓겨나 안암동 등지에 서너 집이 있었다. 숭례문 밖 종약산(種藥山) 남쪽에 예전에 한 집이 있었는데, 그 후에 그 곁에 작은 집들을 지어서 지금은 10여 집이 있다.” 하였다.
중흥사(重興寺) 북한 삼각산 등안봉(登岸峯) 아래에 있다. ○ 고려의 중 보우(普愚)가 늘 이 절의 동쪽 봉우리에 살았으며 태고(太古)라고 편액했다. ○ 목은 이색이 지은 원증국사 보월(圓證國師寶月)의 〈승공탑명(昇空塔銘)〉이 있다. ○ 총섭(摠攝 승병(僧兵)의 사령관)이 여기에 군영을 개설했다. ○ 1백 49칸이다.
태고사(太古寺) 북한 등안봉(登岸峯) 태고대(太古臺)아래에 있다. ○ 경서(經書)ㆍ통사(通史)ㆍ옛 당 나라의 당시(唐詩) 등의 판을 저장했다. ○ 1백 36칸이다.
보국사(輔國寺) 금창(禁倉) 아래에 있다. ○ 67칸이다.
진국사(鎭國寺) 노적봉(露積峯) 아래 중성문(中城門) 안에 있다. ○ 1백 4칸이다.
부왕사(扶旺寺) 휴암봉(鵂巖峯) 아래에 있다. ○ 1백 11칸이다.
국영사(國寧寺) 의상봉(義相峯) 아래에 있다. ○ 70칸이다.
보광사(普光寺) 대성문(大城門) 아래에 있다. ○ 75칸이다.
원각사(圓覺寺) 증봉(甑峯) 아래에 있다. ○ 81칸이다.
용암사(龍巖寺) 일출봉(日出峯) 아래에 있다. ○ 88칸이다.
상운사(祥雲寺) 영취봉(靈鷲峯) 아래에 있다. ○ 89칸이다.
서암사(西巖寺) 수구문(水口門) 안의 민지암(閔漬巖)의 옛 집터에 있다. ○ 1백 7칸이다. ○ 위의 11절에는 승장(僧將) 1명, 수승(首僧) 1명, 번승(番僧) 3명씩을 두었다.
봉성암(奉聖菴) 귀암봉(龜巖峯) 아래에 있다. ○ 25칸이다.
원효암(元曉菴) 원효봉(元曉峯) 아래에 있다. ○ 10칸이다.
문수암(文殊菴) 문수봉 아래에 있다. ○ 이상의 여러 절은 모두 북한성 안에 있다.
【고적】남평양성(南平壤城)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성과 궁궐을 세워 서울을 옮겼으며, 진사왕(辰斯王) 7년에 궁실을 중수하고 땅을 파서 산을 만들고 기이한 풀을 심으며 기이한 새를 길렀다. 개로왕(蓋鹵王)이 궁실을 크게 세우고 도성 안의 사람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쪄서 토성을 쌓았다. 누각(樓閣 누나 각이나 비슷하나 누에는 다락이 있음)ㆍ대사(臺榭 높은 곳에 있다는 점에서 같고 사에는 집이 있다고 한다)가 웅장하고 수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 때문에 나라가 피폐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죽게까지 되었다. ○ 진사왕이 구원행궁(狗原行宮)을 세웠다.
장한성(長漢城) 한강 위쪽에 있다. 신라 때에 중요한 진(鎭)을 두었는데, 뒤에 고구려가 점거한 것을 신라 사람들이 군사를 일으켜서 회복하고 장한성가를 지어서 그 공을 기념하였다.
대성락영(大星落營) 용삭(龍朔) 당 고종의 연호) 원년 봄에 고구려와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서 진군하여 북한산성을 에워싸서 성 안이 위태로웠는데,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영에 떨어지고 우레치고 비오며 벼락치니, 적들이 놀라서 포위를 풀고 도망갔다.
신혈사(神穴寺) 삼각산에 있다. ○ 고려의 현종이 머리 깎고 이 절에 거처하였다.
면악(面嶽) 고려 숙종이 최사추(崔思諏)ㆍ윤관(尹瓘) 등을 시켜 남경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더니, 사추가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노원역ㆍ해촌(海村)ㆍ용산 등지에 가서 산수를 살펴보니 도읍을 세우기에 합당치 않은데, 삼각산 면악의 남쪽 만은 산의 모양과 물의 형세가 옛글에 부합됩니다. 원줄기의 중심이 임좌병향(壬坐丙向 북쪽에 앉아 남쪽을 향함)이니 형세에 따라 도읍을 세우소서.” 하였다. 여기서 형세를 따라서 동쪽으로는 대봉(大峯)까지, 남쪽으로는 사리(沙里)까지, 서쪽으로는 기봉(岐峯)까지, 북쪽으로는 면악까지를 경계로 하여 남경을 세우며, 오얏나무를 심고 이씨를 택해서 윤(尹 서울 지방의 장관)으로 삼고, 임금이 또한 한 해에 한 번씩 순행하며 용봉장(龍鳳帳 임금의 포장)을 묻어, 지기(地氣)를 진압하였다. ○ 지금 상고해보면 면악은 바로 백악인 듯하다.
【제영】 8영(八詠) 기전(圻甸 임금 직할의 지역 곧 경기)의 산하, 도성의 궁원, 여러 관서가 별처럼 모여 있음, 여러 동리가 바둑처럼 펼쳐 있음, 동대문의 교련장, 서강의 조선(漕船)이 머무름, 남쪽 나루터의 길손, 북쪽 교외의 기르는 말. 10영 목멱산의 꽃구경, 마포의 배 띄우기, 제천정의 달 구경, 양화도의 눈밟기, 반송정의 손님 배웅, 장의사의 중 찾기, 흥덕사의 연꽃 구경, 입석포의 낚시질, 전관교의 꽃찾기, 종가의 등불 구경하기. 남산 8영 북쪽 대궐에 비낀 구름, 남쪽 강에 가득한 물, 바위 아래의 그윽한 꽃, 고개 위의 긴 소나무, 봄철 3월의 푸른 풀 밟기, 9월 9일에 높은 곳에 오름, 산봉우리에 올라가 등불 구경하기, 시내 따라가며 갓끈 빨기. 국도(國都) 8영 필운대의 꽃과 버들, 압구정의 배 띄우기, 삼청동의 녹음, 자각의 관등, 청계의 단풍놀이, 반지의 연꽃 구경, 세검정의 시원한 폭포, 광통교의 맑은 달.
【명환】 고려의 강감찬(姜邯贊) 현종 때 판관(判官)이 되었는데, 한양에 범이 많았다. 감찬이 편지 한 장을 적어서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북문 밖에 있는 산골짜기에 반드시 두 중이 있을 것이니, 갖다 주어라.” 하였다. 아전이 그 말대로 하니, 과연 두 중이 있어 아전을 따라와서 배알하였는데, 감찬이 꾸짖기를, “너는 빨리 무리를 데리고 멀리 가거라.” 하니, 한성유수(漢城留守)가 그 말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감찬이 또 본색을 드러내라고 명령하니, 중이 곧 옷을 벗고 두 범으로 바뀌어서 크게 울부짖었다. 감찬이 말하기를, “빨리 가라.” 하니, 범은 곧 뛰어서 사라졌는데 이후로 호환(虎患)이 드디어 없어졌다.


 

[주D-001]평교자(平轎子) : 교자 바탕만 있고, 위에 가리는 것이 없어서 전신이 드러나게 되어 있고, 교자 자체가 길어서 휘청휘청하므로 빨리 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주D-002]옥로(玉鷺) : 옥으로 조그마하게 백로 형상으로 만든 것인데, 그것을 모자 꼭대기에 단다. 그것은 생쇄권(生殺權)이 있다는 표지이다.
[주D-003]기린(麒麟) : 예전 관복의 가슴과 등에 수놓은 것. 약 20cm의 사각형을 대는데, 그것을 흉배(胸背)라고 한다. 그것이 관직의 고하에 따라 다른 것은 여기의 본문과 같다.
[주D-004]화혜(靴鞋) : 화(靴)는 발목까지 올라오는 긴 신이요, 혜(鞋)는 보통 발등까지도 안 올라오는 신이다.
[주D-005]북독(北瀆) : 독은 물이란 말인데, 나라에서 큰 강물에 제사할 때 그 강물을 말한다.
[주D-006]하징(夏徵) : 예전에 역적은 성(姓)을 떼고 이름만 쓰는 것이 법이었다. 그러므로 여기 이하징(李夏徵)이라는 사람도 성을 떼고 이름만 쓴 것이다. 아래에도 그런 곳이 여러 곳 있다.

   

필원잡기 제1권
필원잡기 제1권



서거정(徐居正) 저(著)

○ 일찍이 상고하건대, 당요(唐堯) 원년(元年) 갑진년 으로부터 홍무(洪武 명 태조 연호) 원년 무신년까지가 총 3천 7백 85년이며, 단군(檀君) 원년 무진년으로부터 우리 태조(太祖) 원년 임신년까지가 역시 3천 7백 85년이니, 우리나라 역년(歷年)의 수가 대개 중국과 서로 같다. 제요(帝堯)가 일어나자 단군이 일어났고, 주 무왕(周武王)이 나라를 세우자 기자가 봉해졌으며, 한(漢) 나라가 천하를 평정하자, 위만(衛滿)이 평양으로 왔고, 송 태조(宋太祖)가 장차 일어날 때에 고려 태조가 이미 일어났으며,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한 것도 명 태조 고황제(明太祖高皇帝)와 같은 시대이다.
○ 옛 기록에 이르기를, “단군이 요(堯)와 같은 날에 즉위하여 우(虞) 나라와 하(夏) 나라를 지나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이르러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는데, 향년(享年)이 1천 48세이다.” 하였다. 당시의 문적(文籍)이 전하지 않아서 그 참과 거짓을 상고할 수 없으나 지금까지 그대로 전하여서 옛 기록을 적은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요의 시대에는 인류 문화가 밝게 선양(宣揚)되었는데, 하(夏)ㆍ상(商)에 이르러 세상이 점점 나빠져서 임금이 왕위(王位)에 있음이 장구한 자도 40~50년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사람의 수명이 상수(上壽)는 백 년, 중수(中壽)는 60~70년, 하수(下壽)는 40~50년인데, 어찌 단군만이 1천 백 년에 가까운 수를 갖고 한 나라의 왕위에 있었으리오. 그 말이 거짓임을 알겠다.
또 이르기를, “단군이 아들 부루(扶婁)를 낳았으니, 이가 동부여왕(東扶餘王)이 되었다. 우(禹)임금이 제후(諸侯)들을 도산(塗山)에 모을 때에 이르러 단군이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 하였으나, 그 말은 근거가 없다. 만약 단군이 오래도록 왕위에 있었고 부루가 도산의 모임에 갔었다면, 비록 우리나라의 문적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국의 글에 어찌 한마디 말도 이를 기록한 것이 없었을까.
단씨(檀氏)가 서로 대를 전하여 나라를 이은 햇수가 1천 48년인 것은 의심이 없다.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시에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천지가 아득한 날에 / 聞說鴻荒日
단군이 박달 나무가에 내려왔다 하네 / 檀君降樹邊
몇 대를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 世傳不知幾
지내온 햇수는 천 년이 넘네 / 歷年曾過千
하였으니, 이는 그 대를 전함과 역년(歷年)이 오래 되었음을 이른 것이다.
○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封)한 것이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이었으며, 뒤에 임금 준(準)에 이르러, 한고조(漢高祖) 병오년에 위만(衛滿)이 침입하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하였는데, 기씨(箕氏)가 평양에서 도읍한 것이 8백 78년이다. 기준(箕準)이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여 이를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한사군(漢四郡)과 이도독부(二都督府)의 시대를 지나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26년 무진년에 망하였으니, 이것이 또 1백 40여 년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왕이 마한을 습격해서 점령한 것만을 기록하였고, 기씨의 세계(世系)는 명백히 말하지 않았으니, 당시에도 필시 상고할 만한 것이 없어서일 것이다.
○ 《천운소통(天運紹統)》을 상고해 보니, 함허자(涵虛子)가 말하기를, “조선은 안동국(安東國) 동쪽에 있는데 옛 숙신씨(肅愼氏)의 땅이다. 무왕이 기자를 봉하여 제후를 삼아서 은(殷)은 뒤를 이어 중국의 번방(藩邦 속국)을 삼았는데, 주(周)가 망함으로부터 후한(後漢)까지 천여 년을 지나서 공손강(公孫康)에게 찬탈당하여 기자의 전통이 끊어졌다.” 하였다.
또, “기자가 중국의 5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갈 때에,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의(醫)ㆍ무(巫)ㆍ음양복서(陰陽卜筮) 등속과 온갖 공인(工人)과 기예(技藝)들이 모두 따라갔기 때문에, 반만(半萬)의 은인(殷人)들이 요수(遼水)를 건넜다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공손강의 찬탈이란 것은 근거가 없고, 5천의 은나라 사람들이 요수를 건너갔다는 것은 어느 글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 함허자(涵虛子)가 또 말하기를, “기자가 조선에 이르니, 말이 통하지 아니하여 통역으로 말을 알았고, 시서(詩書)를 가르쳐서 중국의 제도를 알게 하였다. 그 결과 부자와 군신의 도리가 비로소 행해지고, 오상(五常)의 예의가 비로소 갖추어졌으며, 백공의 기예를 가르쳐서 의원ㆍ무당ㆍ음양복서의 술법이 비로소 있게 되었다. 예의와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로써 여덟 가지 법을 제정해서 백성을 교화하니, 한 해가 지나자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재물로써 속죄(贖罪)하고, 상해(傷害)한 자는 곡식으로 속죄하며, 도둑질한 자는 남자는 노예가 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니, 3년이 못 되어 사람들이 모두 교화되었다. 그리하여, 신의(信儀)를 숭상하고 유학(儒學)을 독실히 하여 중국의 풍속을 이룩하였으니, 성인의 교화라 이를 만하다. 병기(兵器)로써 싸우지 말기를 가르치기를, ‘하루의 난리는 10년이 지나도 안정되지 못하여 생민이 도탄(塗炭)에 빠져서 생업을 편안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덕으로써 강포(强暴)함을 감복시키니, 이웃 나라에서 그 의(義)를 사모하고 서로 친하였으며 중국의 번방(藩邦)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역대(歷代)로 중국을 친히 하고 신임하여 봉작(封爵)을 받고 조공(朝貢)을 끊이지 아니하였으며, 예의의 도(道)가 없어지지 않아서 의관과 제도가 모두 중국 각대(各代)의 제도와 같기 때문에, 시서예악(詩書禮樂)의 나라요, 인의(仁義)의 나라라 말하게 된 것은 기자가 창시한 것이다.” 하였다.
나는 생각하기를, 함허자의 논술이 《한서(漢書)》와 대략 같은데 우리 동국의 풍속에 세밀하였다. 역대의 여러 역사서와 국조의 《혼일지(渾一誌)》에 논술한 바는 그릇되고 근거가 없으니, 모두 잘못 들은 데에서 나온 것이다.
○ 우리나라의 분야(分野)는 옛 사람은 연도(燕都 북경)에 비겼었는데, 기사 연간에 혜성(彗星)이 연경의 분야에서 나오니, 일관(日官 천문을 보는 관리)이 아뢰기를, “이는 우리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세종께서 깊이 근심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연경과 분야가 같은데 어찌 관계가 없겠는가.” 하더니, 기사년 가을에 정통황제(正統皇帝)가 북정(北庭)에서 함몰되었고, 우리 세종대왕이 승하(昇遐)하였으니 연경과 분야가 같다는 말이 일리가 있을 듯하다.
○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서 살 만한 땅을 살펴보고,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였고, 온조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며, 또 북한산성(北漢山城)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양(漢陽)인데, 그 중 명당(明堂) 터는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양이 이씨(李氏)의 도읍 터가 된다는 것은 도선(道詵)의 도참(圖讖)에서 나타났는데, 이 때문에 고려에서 한양에 남경(南京)을 세우고 오얏나무[李]를 심었으며, 이성(李姓)을 가려서 부윤(府尹)을 삼고 왕도 해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용봉장(龍鳳帳)을 묻어서 그 지기를 눌렀었다.
내 일찍이 《고려사(高麗史)》를 상고하건대, 한양 명당(漢陽明堂)은 임좌병향(壬坐丙向)의 자리라고 한 것만 쓰여 있고 그 땅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데, 지금 창덕궁(昌德宮)과 경복궁(景福宮) 두 궁궐의 정전(正殿)을 살펴보면 다 임좌병향이니, 억측하건대 고려에서 잡은 곳도 이 두 궁터에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래에 술사(術士) 최양선(崔揚善)이라는 이가 있어 승문원(承文院)의 옛 터가 바로 명당자리라 하고, 혹자는 또 종묘 낙천정(宗廟樂天亭) 자리가 대지(大地)라고 한 것은 다 식견이 얕고 근거가 없는 말이다.
○ 도선은 백제(百濟) 사람이다. 일찍이 도선의 어머니가 처녀로서 냇가에 놀다가 아름답고 큰 오이[瓜]를 얻어서 먹었는데 갑자기 아이 밴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낳으니 부모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냇가에 버렸더니 바야흐로 추울 때인데, 갈매기 떼 수천 마리가 날아와서 위아래로 싸고 덮어서 십여 일이 되어도 죽지 않으므로 부모가 이상하게 여겨서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출가하여 입산수도하였는데, 하늘의 신선이 하강하여 천문ㆍ지리ㆍ음양의 비법을 전수하였다. 또 당(唐)에 들어가서 승려인 일행(一行)의 술법을 배웠으니, 세상에 전하는 도참은 모두 도선이 지은 것이다.
근간에 당본(唐本)인 《성요(星曜)》 한 질(秩)을 얻었는데, 그 책에 고려국사부(高麗國師賦)라 한 것이 있으니, 의논이 정미(精微)하여 도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의논한 야율초재(耶律楚財)와는 시대의 거리가 너무 떨어지니, 이는 의심스러울 만하다. 어쩌면 고려국사라는 이가 도선의 술법을 비밀히 전하여 동방에는 전해 주지 아니하고 중국에 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영암현 도갑사(靈巖縣道岬寺)에 도선의 비(碑)가 있고 또 구림(鷗林 갈매기가 모였던 숲)이 있다.
○ 우리 동국의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요학사 극일(姚學士克一)과 중 탄연(坦然)ㆍ영업(靈業)이 둘째가 되는데 모두 우군(右軍 왕희지(王羲之))를 본받았다. 이규보(李奎報)가 일찍이 평론하기를, 최충헌(崔忠獻)을 신품제일(神品第一)로 삼고, 탄연을 둘째로 삼고, 유신(柳紳)을 셋째로 삼았으니, 이는 권세가에게 아부한 것이요, 공정한 평론은 아니다.
원(元)으로부터 내려오면서 글씨를 배우는 이는 다 조맹부(趙孟頫)의 법을 세웠다. 선생(조맹부)의 수적(手跡)이 온 세상에 퍼져서 그 동국에 유전한 것을 내가 본 것만도 수백 본이 되었는데, 묵적(墨跡)이 새 것 같다. 그 보지 못한 것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으며, 온 세상에 흩어진 것이 또 얼마인지 알지 못하겠고, 조맹부로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오히려 멀며, 우리 동국은 한쪽 구석에 있으나 조맹부의 필적을 오히려 많이 얻어 볼 수 있었다. 당(唐)으로부터 진(晉)까지의 시대는 서로 멀지 않은데도 당의 문황(文皇)은 천자의 큰 힘으로써, 왕희지의 진적(眞跡)을 구할 때에 소이(蕭異)를 보내어 많은 고난을 겪은 뒤에 얻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사년 간에 학사인 예겸(倪謙)이 사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조공(趙公)의 필법을 중국에서는 보기 드물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것을 감탄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날마다 당시의 명유(名儒) 6~7명과 더불어 조용히 논담(論談)하였으니, 조공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우리나라 문유(文儒)로 이제현(李齊賢) 선생 같은 분도 그와 또한 많이 시종했다. 왕이 동으로 돌아올 때에 문적과 서화 만 첨(萬籤)을 싣고 왔으니, 조맹부의 수적이 동국에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동국에서 조공의 필법과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杏村) 이암(李嵒) 한 사람뿐이다.
○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인데, 글씨를 잘쓰기로 유명하였다. 송(宋) 나라 숭녕(崇寧) 때에 고려의 학사 홍관(洪瓘)이 송나라에 들어갔었더니, 한림 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족자에 글씨를 쓰는데, 홍관이 김생의 행서와 초서 한 권을 보여주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우군의 진적(眞跡)을 얻어 볼 줄은 생각지 못하였다.” 하였다. 홍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 사람 김생의 글씨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우군을 빼놓고 어찌 이 같은 신묘한 필적이 있으리오.” 하였다. 관이 항변하였지만 끝내 듣지 않았었다.
근간에 조학사 자앙(趙學士子昻 조맹부)의 창림사비 발문(昌林寺碑跋文)을 보니 이르기를, “위의 글씨는 당 나라 때 신라의 승려 김생이 쓴 신라국의 창림사비인데 자획이 매우 법도가 있으니, 비록 당 나라 사람의 유명한 각본(刻本)이라도 이보다 크게 낫지 못할 것이다. 옛 말에, ‘어느 땅엔들 나무가 나지 않으리오.’ 하였으니, 과연 옳다.” 하였으니, 조학사의 이 발문을 보면 김생의 필법이 고금에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당 나라에 들어가서 과거에 급제하고,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黃巢)를 토벌하였다. 그 격문(檄文 편지)에 이르기를, “천하의 사람이 모두 드러내어 죽이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들도 이미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한다.” 하니, 황소가 격서를 읽다가 이 대문에 이르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평상에서 내려왔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금 그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이해하지 못할 곳이 많으니, 당시의 기습(氣習)이 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동방의 문체가 옛 법식과 같지 못해서인지 의심스럽다. 신라의 글이 지금에 전하는 것은 전혀 없고 다만 원효와 설총이 지은 한두 편이 있을 뿐이다. 내가 일찍이 신라에서 당 나라에 바친, 비단에 수놓은 오언고시(五言古詩)와 고려 을지문덕의 우중문(于仲文)에게 준 오언사구(五言四句)를 보니,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당시에 글이 능한 선비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 만분의 일도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애석하도다.
○ 당 나라 학사 고운(顧雲)이 지은 최치원의 고향에 돌아감을 송별하는 시에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舟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에 이름을 떨쳤다 / 文章感動中華國
한 것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이 준 글에,
무협 중봉의 나이(12세)에 베옷으로 중화에 들어갔다가 / 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
은화 열수의 나이(28세)에 비단옷으로 동국에 돌아갔다 / 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
한 것이 있으니, 이는 12살에 당에 들어갔다가 28세에 동국에 돌아갔다는 것이다.
동국에 돌아온 뒤의 이력과 행적은 상고할 바가 없다. 혹은 말하기를, “그때 마침 세상이 어지러워서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 중들과 한가롭게 놀았다.” 하였다. 공이 쌓은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과 홍류동 봉하석(紅流洞鳳下石)에 그가 쓴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나, 그의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하겠으며, 세상에서는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고 한다. 상고해 보면 당(唐) 희종(僖宗) 12년 을사년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인데, 최치원이 당 나라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돌아왔고, 10년이 지난 갑인년 진성왕(眞聖王) 8년에 시무(時務) 10여 조항을 올렸는데 왕이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完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지가 이미 3년이 되는 해이다. 25년을 지나서 무인년에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나라를 세웠고, 또 10년을 지나 정해년에 견훤이 신라에 들어가서 임금을 시해하였는데, 최치원의 나이 그때 70이 되어 크게 노쇠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그 거취(去就)를 상고할 바가 없으니, 의심할 만한 일이다.
○ 사대(事大)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은 모름지기 정밀하고 간절하여야 한다. 고려 때에 요인(遼人)들이 압록강을 넘어 국경 삼으려 하니, 참정(參政) 박인량(朴寅亮)이 진정표(陳情表)를 지었는데, 이론과 실지가 명백 간절하였으므로 요제(遼帝)가 그 의논을 정지하였다.
명 태조(明太祖) 29년 하정(賀正)할 때에,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표문을 지었고, 광산군(光山君) 김약항(金若恒)이 전을 지었으며, 서성군(西城君)정총(鄭摠)과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윤색하였는데, 황제가 보고 표문과 전문의 말이 모멸에 가깝다고 노여워하여 정총ㆍ김약항ㆍ권근 등을 불러 문책하였는데, 권근은 용서를 받아 돌아왔으나, 정총 등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고려의 지제고(知制誥) 최보순(崔甫淳)이 금 나라 황제의 등극(登極)을 하례하는 표문에 이르기를, “오마(五馬)가 강을 건너 진제(晉帝)가 새 임금이 됨을 나타내었고, 육룡(六龍)이 등극하니 주역(周易)의 대인(大人)을 봄과 부합한다.” 하였는데, 그때 금나라 군주는 형제가 나라를 다투었었으므로, 이러한 사실에 저촉된 것을 미워하여 그 칙명에, “진(晉) 원제(元帝)의 일을 인용한 것은 부당하다.” 하였다. 최보순은 이로 인하여 견책을 당하였으니, 최보순의 표사(表辭)가 묘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요의 노여움을 일으킨 것은, 일을 인용함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 세상에 전하기를, “김부식(金富軾)이 정지상(鄭知常)의 재능(才能)을 질투하여 살해하였다.” 하나, 지금 《고려사》를 상고해 보니, 정지상이 묘청(妙淸)의 술책에 빠져서 그 우익(羽翼)이 다 제거되어 스스로 온전하기는 실로 어려웠으므로, 김부식이 사사로이 용서할 바도 아니었다. 또 본전(本傳) 및 여러 책에 한 마디도 억울하게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없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바가 이와 같음은 무슨 까닭인가. 근래에 김태현(金台鉉)의 《동국문감(東國文鑑)》을 상고해 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김과 정이 문자(文字) 사이에 감정이 쌓여 있었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당시에 이미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이다.
○ 김부식이 송나라에 들어가서 우신관(祐神館)에 가보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을 놓았는데, 관반(館伴 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는 귀국의 신(神)인데 공 등은 아는가?” 하고 말하기를, “옛날 황제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서 사람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에 바다를 건너가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그녀는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서 영생(永生)하는데, 이것이 그 여신상이다.” 하였다. 지금 상고하건대, 신라ㆍ고구려ㆍ백제의 시초에는 이런 황제의 딸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다만 동명왕(東明王)의 출생에 유화(柳花)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중국에서 잘못 알고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 고려 말기에 인심이 다 우리 태조께 돌아왔으나, 목은 이색(李穡) 선생은 조금 다른 형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환왕(桓王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 환조로 추존됨)의 비문을 지은 것이 태조의 잠저(潛邸 왕이 되기 전) 때였는데, “주(周) 나라가 비롯 옛 나라이나, 천명이 새롭도다.”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도통(都統) 최영(崔瑩)이 죽을 때에, “이광평(李廣平 이인임(李仁任)의 봉호)이 항상 말하기를 ‘판삼사(判三司 태조)가 마땅히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하더라.” 하였으니, 광평과 도통은 다 나라를 담당한 대신으로서 오히려 이런 말이 있었으니, 천명과 인심이 우리 태조에게 돌아간 것은 무진년(태조가 등극한 해)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우리 태종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문황제(文皇帝)가 연왕(燕王)으로 있었는데 태종이 찾아가 방문하자 문황제가 말을 해보고 크게 기뻐하여 총애와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환국함에 미쳐 우리 조정 사대부들이 태종께 묻기를, “천하가 크게 평정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때는 고황제(高皇帝 태조)가 정무를 사퇴하고 건문제(建文帝)가 태자로 있을 때이다. 태종이 대답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와 용봉(龍鳳)의 자품이며 넓고 큰 도량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 천하가 안정될 것은 알 수 없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황제가 연왕으로서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모두 태종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의 위에 오른 뒤에 우리 태종을 특별히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너희 나라의 임금을 보니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이더라.” 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명나라에 진공(進貢)하는 말을 태종이 친히 뽑아 고르는데 하열(下列)에 있는 말을 제 일등으로 하기를 명하니, 마부들이 모두 괴이하게 여겼는데, 말을 진상하자 문황이 보고 말하기를, “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맨 먼저 올린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태종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준마(駿馬)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것은 내가 옛 사람에게 양보하지 아니한다.” 하였다.
○ 세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여 합문(閤門)을 나가기 전에, 언제나 글을 반드시 백 번씩 읽으며, 《좌전(左傳)》과 《초사(楚詞)》는 다시 백 번을 더하였다. 일찍이 몸이 편치 못하면서도 글 읽기를 폐하지 아니하여 병이 점점 심해지니, 태종이 내시에게 명하여 갑자기 그 처소에 가서 책을 모두 거두어 오게 하였다. 이때 오직 구양수(歐陽脩)와 소동파(蘇東坡)가 손수 쓴 간찰문 한 권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는데, 세종은 천 백 번을 읽었다. 왕위에 오르자 날마다 경연(經筵)에 나가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밝고 부지런한 공이 백왕(百王)에서 뛰어나셨다. 일찍이 근신(近臣)에게 말하기를, “글을 읽는 것은 유익한 일이나 글씨 쓰고 글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임금으로 유의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만년에 노쇠하여 정무는 보지 않으면서도, 문학에 대한 일에는 더욱 마음을 두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부서를 나누어 여러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니, 《고려사(高麗史)》ㆍ《치평요람(治平要覽)》ㆍ《병요(兵要)》ㆍ《언문(諺文)》ㆍ《운서(韻書)》ㆍ《오례의(五禮儀)》ㆍ《사서오경음해(四書五經音解)》 등이 동시에 편찬되었는데, 다 왕의 재결을 거쳐서 이룩되었으며 하루 동안에 열람한 것이 수십 권에 이르렀으니, 가히 하늘의 운행과 같이 정성이 쉬지 않는다 하겠다.
○ 세종이 처음 아악(雅樂)을 제정함에 중추(中樞) 박연(朴煗)이 도와서 이룩하였다. 박연은 앉으나 누우나 매양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하며, 입으로는 휘파람을 불어 음률(音律)의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비로소 이룩하니, 세종이 매우 중하게 여겼다. 세종은 또 자격루(自擊漏)ㆍ간의대(簡儀臺)ㆍ흠경각(欽敬閣)ㆍ앙부일구(仰釜日晷) 등을 제작하였는데, 만든 것이 극히 정치(精緻)하였으며, 모두가 왕의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여러 공장(工匠)들이 있었으나 임금의 뜻을 맞추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實)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 기묘한 솜씨를 다하여 부합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박연과 장영실은 모두 우리 세종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태어난 인물이다.” 하였다.
○ 세종이 일찍이 사마온공(司馬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유의하였는데, 그 주석이 정밀하지 못하고 구두가 명백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유신(儒臣)에게 명해서 많은 책을 널리 채집하여 일에 따라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간주(間註)를 달아서 열람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이에 호삼성(胡三省)의 《음주(音注)》와 《원위(源委)》, 《석문(釋文)》, 《집람(集覽)》 등의 책을 의거해서 깎고 보태었으며, 미진한 곳은 다른 책을 상고하여 보충하였다. 혹 글이 이해하기 곤란한 곳은 본사(本史)의 전구(全句)를 주해하고, 혹은 글 구(句) 밑에 구자(句字)를 써서 구두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글자의 해석과 번음(飜音)에 이르러서도 상세하게 갖추어 있지 않음이 없으니, 모두가 왕의 재량으로 이룩한 것인데, 이를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 이름 하였다. 《강목통감(綱目通鑑)》도 그렇게 하였으니, 그 훈의(訓義)의 정밀함은 고금에 없는 바이다.
근래에 명나라에서 편찬한 《강목통감집람(綱目通鑑集覽)》을 보니, 엉성하고 빠진 부분이 자못 많고, 또 주해를 글 구(句) 밑에 넣지 아니하고 매권(每卷)의 끝에 붙여서 열람하기에 불편하였다. 나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마땅히 우리나라의 《훈의》를 제일로 쳐야 할 듯하다. 또 《훈의》가 이룩된 것은 정통(正統) 병진년 이었고, 《집람》이 이룩된 것은 근일의 일이니, 중국에서 《집람》을 편찬할 때에 우리나라의 《훈의》를 보았더라면 반드시 탄상하여 마지않았을 것이다.
○ 태종이 일찍이 주자(鑄字)를 만들었는데, 모양이 썩 좋지는 못하였다. 경자년에 세종이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중국의 좋은 글자 모양으로 고쳤는데, 이전 것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였으며 이를 경자자(庚子字)라 한다. 갑인년에 세종이 명하여 좋은 음양자(陰陽字)의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극히 정교하였으며 이를 갑인자(甲寅字)라 한다. 경자자는 작고 갑인자는 컸는데 인쇄한 서책이 매우 아름답다. 세종 말년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쓴 글자 모양과 강희안(姜希顔)의 쓴 글자 모양으로 다시 주조하였는데, 인쇄한 서책이 점차 예전만 못하여졌다. 지금에 동자(銅字)는 다 공장(工匠)들이 훔쳐갔기 때문에 목활자(木活字)를 겸하여 사용하므로 글자의 크고 작은 것과, 새 것과 헌 것이 같지 아니하며 글줄이 고르지 못하니, 옛날 인쇄한 책에 비하여 크게 뒤떨어진다.
○ 세종은 문치(文治)에 힘씀이 만고에 뛰어나서 경자년에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문사(文士) 열 사람을 뽑아서 채웠으며, 뒤에 30명으로 증원하였다가, 또 20명으로 고쳐서 열 사람은 경연(經筵)의 일을 맡고, 열 사람은 서연(書筵)을 겸직하였다.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고금의 일을 토론하고 아침저녁으로 연구하니, 문장 하는 선비가 성대히 배출되어 인재를 많이 얻게 되었다.
집현전 남쪽에 큰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기사년과 경오년 사이에 흰 까치가 와서 집을 지었는데 새끼가 모두 흰 색이었다. 수년 사이에 요직에 있는 이는 모두 집현전에서 나왔다. 영상 정인지(鄭麟趾), 좌상 이사철(李思哲), 영상 정창손(鄭昌孫),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ㆍ안지(安止), 판서 김조(金銚), 참판 김돈(金墩), 판중추부사 김균(金鈞)ㆍ김말(金末), 영상 신숙주(申叔舟), 좌상 권람(權擥), 참찬 박중손(朴仲孫), 영상 최항(崔恒), 판서 김담(金淡), 판중추부사 이석형(李石亨), 의정 윤자운(尹子雲),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 참판 노숙동(盧叔仝), 판서 양성지(梁誠之)ㆍ성임(成任)ㆍ이극감(李克堪), 부윤 이명겸(李鳴謙), 판서 김예몽(金禮蒙), 영중추부사 노사신(盧思愼), 서평군(西平君) 한계희(韓繼禧), 찬성 홍응(洪應), 참찬 이승소(李承召), 참판 이파(李坡), 판서 이병(李苪), 부윤 조근(趙瑾)ㆍ강희안(姜希顔), 판서 강희맹(姜希孟), 부윤 최선복(崔善復), 참판 박첩(朴捷) 등이며, 불초하지만 나 또한 그 사이에 참여하였다. 또 박중림(朴仲林)ㆍ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 등과 같은 이는 한때 현달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에 버드나무가 모두 말라 죽었으므로 어떤 이가 유성원에게 농담하기를, “화(禍)가 반드시 유(柳)로부터 시작할 것이라.” 하였는데, 유성원이 실패하였으니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고 집현전도 얼마 후 없어지고 말았다.
○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모아서 수십 년 동안을 양성하여 인재가 많이 나왔으나, 오히려 아침에는 관청에 나가고 저녁에는 숙직하여 공부에 전념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나이가 젊고 재주와 덕행(德行)이 있는 몇 사람을 뽑아서 휴가를 주어 산에 들어가 글을 읽게 하고, 관청에서 그 비용을 공급하여 경사(經史)와 백가(百家), 천문(天文)과 지리(地理), 의약(醫藥)과 복서(卜筮) 등을 마음껏 연구하여 학문이 깊고 넓어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함으로써 장차 크게 쓰일 기초가 되게 하였다. 앞에는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 승지 권채(權採), 직전(直殿) 남수문(南秀文)이 있었고, 뒤에는 문충공 신숙주가 있었으며, 그 밖의 사람도 모두 명사(名士)들이었다. 문종조(文宗朝)에는 남양군(南陽君) 홍응(洪應)과 한산군(韓山君) 이파(李坡)가 있었고, 보잘것없는 나도 여기에 선발되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거룩한 일이었다.
○ 문종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희우정(喜雨亭)에 행차하여 동정귤(洞庭橘) 한 소반을 근신(近臣)에게 하사하고 손수 소반 위에 쓰기를
향기로운 향나무는 코에만 좋고 / 旃檀便宜鼻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맞는데 / 脂膏偏宜口
귀여울사 동정귤은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도다 / 香鼻又甘口
하였는데, 자획이 용사(龍蛇)가 꿈툴 거리는 듯하고 광채가 빛났다. 내가 일찍이 그 글자를 임서(臨書)하여 간직하였는데 참으로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 문종은 지혜가 밝고 정밀하였다. 집현전에서 일찍이 극성제문(棘城祭文 해주에 여귀(癘鬼)가 심하여 제사한 글)을 지어서 올렸더니, 문종이 보고 주묵(朱墨)으로 고치고 몇 마디 말을 썼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정(精)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것을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는 것은 더불어 말할 수 없으나, 정이 있는 것이면 이치로써 깨우칠 수 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물과 불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나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으며, 귀신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지마는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하여, 글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문장 하는 신하와 선비들이 미칠 바 아니었다.
○ 송(宋) 나라 인종(仁宗)이 죽으매, 영종황제(英宗皇帝)가 슬퍼하고 사모하니, 어떤 망녕된 자가 말하기를, “능히 신술(神術)을 부려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린다.” 하므로 영종이 그 신술을 시험하기를 명하였으니, 효험이 없자 그 자가 말하기를, “태종이 인종과 함께 한가롭게 백옥루(白玉樓) 난간에 다다라서 모란꽃을 감상하시느라 인간에 다시 올 뜻이 없으십니다.” 하니, 영종이 그가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크게 죄를 주지 않았다. 우리 세종의 초상(初喪) 때에 요망한 중이 와서 이런 술책을 아뢰므로 다른 시체에 시험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니, 이치에 없는 거짓말이므로, 문종도 죄를 주지 아니하였다.
○ 세조(世祖)는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평시에 의논이 개연(慨然)히 당 태종(唐太宗)을 흠모하고 한 고조(漢高祖)를 하찮게 여겼는데,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양녕대군(讓寧大君) 제(禔)와 더불어 고금의 제왕(帝王)을 의논하다가, 당 태종에게는 미칠 수 없다고 하니, 양녕이 대답하기를, “전하는 당 태종보다 크게 뛰어납니다.” 하니, 임금이 얼굴을 고쳐 말하기를, “아! 이 무슨 말씀입니까. 숙부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하므로, 양녕이 말하기를, “당 태종은 한 조그만 일로 장온고(張薀古)를 죽였는데, 전하는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전하의 가법(家法)이 바른 것은 당 태종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세조가 빙긋 웃었다. 또 포주강(蒲州江)의 야인(野人)을 정벌하는 일을 언급하자 양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천균(千鈞)의 활[弩 쇠뇌]은 작은 쥐를 보고 발사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원컨대 전하는 유의하옵소서.” 하였으니, 양녕의 소견이 역시 기이하였다.
○ 세조가 일찍이 조용히 나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이니 예로부터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그대는 숨김 없이 말하라.”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옛날 송 태조(宋太祖)가 상국사(相國寺)에 갔을 적에 불상 앞에서 향을 태우면서 마땅히 절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물었더니, 중 찬녕(贊寧)이 대답하기를, ‘현재 부처에게는 절하고 과거의 부처에게는 절을 아니 하는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웃고 절을 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임금이 부처에게 절을 하지 않음은 정도(正道)이고, 절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라 생각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내가 또 아뢰기를, “태종조(太宗朝)에 중국 환관 황엄(黃儼)이 제주에서 동불(銅佛)을 가져 왔는데, 그가 태종께 먼저 부처에게 절을 하고 뒤에 예를 행하게 하니, 태종께서 절을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하륜(河崙) 등이 청하기를, ‘황엄은 마음이 흉험(凶險)하여 트집하기를 좋아하니 권도를 좇아 부처에게 먼저 절을 하는 것이 마땅할까 합니다.’ 하니, 태종께서 이르기를, ‘저 부처가 만약 중국에서 왔다면 마땅히 황제의 명을 공경하여 절을 할 것이나, 지금 이 부처는 우리나라 제주에서 왔으니 어찌 절할 것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이를 말하는 사람이 없지만 내 생각에는 절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고, 끝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황엄이 굴복하고 드디어 예를 행하였으니, 거룩한 임금의 소견은 각기 같은 것입니다.” 하니, 세조가 또 웃었다.
○ 세조는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였다. 내가 일찍이 내전(內殿)에 들어가 보니, 감색(紺色) 무명에 범을 그린 갖옷을 입고 푸른 짚신을 신었으며, 갓끈은 순 무명으로 하였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었으니, 비록 한 문제(漢文帝)가 옷을 빨아서 입었다는 일도 이와 같이 검소하지는 못할 것이다.
○ 고령군(高靈君) 신숙주는 영의정으로 있었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은 새로 우의정이 되었는데, 세조가 두 정승을 급히 내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조가 이르기를, “오늘 내가 경들에게 물을 것이 있으니 대답을 잘하면 그만이겠지만,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하니, 두 정승이 공손히 대답하기를, “삼가 힘을 다하여 벌을 받지 않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윽고 세조가, “신 정승” 하고 불렀다. 신숙주가 곧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신 정승(新政丞)을 부른 것인데, 그대는 대답을 잘못하였다.” 하고, 큰 술잔으로 벌주(罰酒) 한 잔을 주었다. 또 “구 정승” 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대답하였더니, 세조가 말하기를, “나는 구(舊)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벌주 한 잔을 주었다. 임금이 또 부르기를, “구 정승” 하니, 신숙주가 대답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구(具)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또 부르기를 “신 정승” 하니, 구치관이 대답하므로 말하기를, “내가 신(申) 정승을 불렀는데, 그대가 잘못 대답하였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다음에는 “신 정승” 하고 불렀더니, 신과 구가 다 대답하지 않았다. 또“구 정승” 하고 불러도 구와 신이 다 대답하지 않으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하고 또 벌주를 주었다. 종일 이와 같이 하여 두 정승이 벌주를 먹고 극도로 취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판중추부사 어효첨(魚孝瞻)이 입술이 두터웠는데, 세조가 일찍이 희롱하기를, “어효첨은 순후(淳厚 순후(唇厚)와 음이 같다)하다.” 하였는데, 의정 윤사분(尹士芬)은 볼에 험이 있었기 때문에 문헌(文獻) 박원형(朴元亨)이 대답하기를, “윤사분은 시험(猜險 시험(腮險)과 음이 같다)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웃었다.
○ 세조는 음양지리의 글에도 모두 널리 통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게 보고 판단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 사주책)는 유학자가 궁리(窮理)하는 하나의 일인데 그대는 아는가.”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일찍이 대강 보았습니다.” 하니, 세조가 이르기를, “그대가 가령서(假令書 사주책 풀이) 한 편을 지어보라.” 하므로, 내가 물러 나와서 여러 책을 모아 그 대요(大要)를 뽑아서 분류해 모으되, 범례(凡例)를 먼저하고 길흉신살(吉凶神殺)을 다음으로 하고 길흉론단(吉凶論斷)을 끝으로 하여 바쳤더니, 세조가 이르기를, “내가 녹명서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가령서를 지어서 궁중 사람으로 하여금 가르쳐주는 수고가 없이 책을 펴보면 스스로 밝게 알도록 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또 나에게 이르기를, “경의 뜻에는 녹명이 어떠한가.”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의 정월은 병인(丙寅)이요, 갑일과 기일의 생시(生時)는 갑자(甲子)이니, 육십갑자를 가지고 추산하면 그 수(數)가 7백 20이 되니, 7백 20년을 가지고 7백 20일과 시(時)에 곱하면 사람의 사주(四柱)는 51만 8천 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습니다. 천하의 인구가 성할 때에는 1천 5백~6백만에 이르니, 억조 중생이 어찌 51만 8천 4백에만 그치리이까. 지금 항간에서 사주는 꼭 같아도 화복(禍福)은 전연 같지 않은 자가 있으니, 직접 보고 들은 것으로 일찍이 한두 명이 있는데, 직접 보고 듣지 못한 자가 어찌 천백 명뿐이겠습니까. 또 거리가 천 리가 되면 풍(風)이 같지 아니하고 백 리가 되면 속(俗)이 같지 않은데, 사주는 중국과 사해(四海) 민족이 다름이 없으며, 중국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ㆍ이서(吏胥)ㆍ서인(庶人)의 구분이 있어서 작위와 품계의 높고 낮음을 일일이 다 구별할 수 있으나, 사해 민족의 풍속은 혹 금수와 같아서 귀천의 분별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51만 8천 4백 명의 녹명(祿命)에 매어서 그 같지 않음이 이같이 분분하겠습니까. 녹명의 글을 족히 믿을 것이 못 됩니다. 혹은 말하기를, ‘이순풍(李淳風)ㆍ이허중(李虛中)ㆍ소요부(邵堯夫)ㆍ서자평(徐子平) 등은 백발백중으로 맞았는데, 어찌 그 모두가 그르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 신의 생각으로는, 밝은 거울이 여기 있어서 물건이 와서 비추면 좋고 나쁜 것이 스스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순풍ㆍ소요부의 무리는 마음이 본래 허령(虛靈)해서 밝기가 거울과 같기 때문에, 사물(事物)이 그 앞에 이르면 길흉화복(吉凶禍福)이 저절로 나타나 속이지 못하니, 후세 술사들이 한갓 옛 사람의 글로써만 51만 8천 4백 명의 명수로써 천하 억조의 인명을 판단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신은 녹명서는 믿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하니, 세조가 웃고 이르기를, “자네 말이 옳다.” 하였다.
○ 예종(睿宗)이 처음 집정하여 대단한 각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옥체(玉體)가 점점 위태하였다. 일찍이 손수 책 등에 쓰기를, 모두 예종이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죽어서 이 시호(諡號)를 얻으면 만족하겠다.” 하였는데, 몇 달이 못 되어서 승하하니, 군신들이 시호를 예종으로 올려 과연 성상의 뜻에 부합하였다. 아! 슬프도다.
○ 국재(菊齋) 문정공(文正公) 권부(權溥)는 임술년 임자월 기미일 기사시에 났는데, 점(占)을 치는 이가 보고, “수명이 길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 아버지 문청공(文淸公) 탄(坦)이 말하기를, “만약 덕을 쌓으면 조금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천보산(天寶山)의 중에게 들었는데, 덕을 쌓는 조목이 세 가지가 있는바, 길 가운데로 다니지 말고, 흘러가는 물에 목욕하지 말고, 음식을 먹을 때 좋은 것을 가리지 않는다 하니, 너는 마땅히 힘쓸지어다.” 하였다. 국재가 종신토록 이 일에 명심하고 힘써서 잠시 동안이라도 어기지 않았는데 마침내 85세의 수(壽)를 누렸고, 지위가 일품에 이르렀으며, 한 가문(家門)에서 봉군(封君)한 이가 아홉 사람이나 되어, 복록(福祿)의 융성함이 고금에 거의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덕을 쌓은 효험이다.” 하였다. 그러나 익재(益齋) 선생이 지은 국재의 비문(碑文)을 보니, “무자(戊子)와 기미(己未)가 임사(壬巳)의 녹(祿)과 만나 서로 맞아 발복하였으니, 이는 천지조화의 묘함이다.” 하였으니, 점치는 이가 수명이 길지 못하다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 포은(圃隱) 정문충공(鄭文忠公)은 평생에 지절(志節)이 있고 남을 이간(離間)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떤 이가 농담하기를, “자네는 세 가지 과실이 있는데 알겠는가.” 하였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말을 해 보라.” 하니, 말하기를, “남이 말하기를, ‘자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먹을 적에 남보다 먼저 들어가서 맨 나중에 자리를 파하니, 술 마시는 것을 너무 오래한다.’ 하더라.” 했다. 문충공이 대답하기를, “진실로 그런 일이 있다. 젊어서 시골에 있을 적에 한 동이 술을 얻으면 친척과 친구들과 더불어 한 번 실컷 마시고 즐기고 싶었는데, 지금은 부귀(富貴)하여 자리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떨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조급하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여색에 있어 담담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함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공자께서도 말하기를, ‘아름다운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라.’ 하셨으니, 공자도 여색이 좋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자네가 중국산 물건을 무역(貿易)하는 데에 무심하지 못하다고 남이 말을 하더라.” 하니, 문충공이 낯빛을 변하여 말하기를, “내가 집이 가난하고 자녀가 많은데, 혼인의 예식에 으레 중국의 물건을 사용하니, 나도 시속을 면할 수 없다. 하물며 있고 없는 것을 교역함은 성인의 제도인데, 내가 무엇을 혐의하겠는가.” 하니, 그가 말하기를, “앞에 한 말은 농담일세.” 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일찍이 경사(京師 남경)에 갔었는데, 길에서 비를 만나 역리(驛吏)의 삿갓을 빌렸다가 돌려주었는데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트집하고 그 값을 요구하므로, 공이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다. 뒤에 어떤 역리가 전삼(氈衫)을 잃은 것을 공에게 씌워서 그 값을 요구하니, 공이 또 주려고 하였는데, 사신(使臣) 발라(孛羅)가 그 속임을 알고 우리를 국문하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이분이 전에 다투지 아니하고 값을 주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한 것이요, 잃은 것이 아닙니다.” 하여, 발라가 그에게 벌을 주었다.
○ 권문충공이 일찍이 충주에 귀양가 있었는데, 계유년 봄에 태조가 계룡산에 행차하였을 적에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밖에 나갔을 때 임시로 머무는 곳)로 불려서 나갔었다. 하루는 태조가 호종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은쟁반 하나를 주고 활을 쏘아 내기를 하게 하였다. 무신(武臣)들은 차례로 쏘았으나 모두 과녘을 명중시키지 못하였는데, 문충공은 평생에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으나, 이날에는 한 화살에 명중시켜 은쟁반을 차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활 쏘는 법으로써 그 덕(德)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이 일찍이 새벽에 관아(官衙)에 나갔는데, 한 짝은 희고 한 짝은 검은 신을 신었다. 공석에 앉자 서리(胥吏)가 이를 고하였는데, 공이 내려다보며 한 번 웃고는 끝내 바꾸어 신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말을 타고 갈 적에 웃으며 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 신이 한 짝은 검고 한 짝은 흰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말아라. 왼쪽에서는 흰 것만 볼 것이요, 검은 것은 보지 못할 것이며, 오른쪽에서는 검은 것만 볼 것이고 흰 것은 보지 못할 것이니, 또한 어찌 해가 있겠느냐.” 하였으니, 그가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이 경사(京師)에 갔을 적에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불러 보고 이르기를, “그대의 한어(漢語)는 나합출(納哈出)과 같구나.” 하였고, 이색의 외모가 훤출하지 못하다고 황제가 이르기를, “이 늙은이는 그림 그릴 만하구나.” 하였다. 색이 환국하게 되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황제는 속에 주장이 없는 사람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이색의 말을 실언이라 하였다. 지금 대명(大明)이 천하를 통치한 지 백여 년인데 여러 군주가 대(代)를 이어 나라를 지켜서 고황제가 남긴 제도를 한결같이 따르고 변경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 규모와 제도가 한(漢)ㆍ당(唐)보다 크게 뛰어나니, 어찌 속이 없는 임금이라 할 것인가. 그러나 이색은 큰 유학자이니, 고황제의 큰 인물됨을 알지 못하였으면 어찌 지혜롭다 할 것인가.
억측하건대, 고황제는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영웅들을 통어하며 변강(邊疆)을 개척하여 대업(大業)을 창조하는 데에 정신을 두었으니, 그가 이색 같은 늙은 선비 보기를, 어린애가 곁에서 울고 웃는 것 같이 마음에 두지 않았을 것이며, 이색을 뜻도 고황제가 천자가 된 지 오래되지 않아 세상일을 알 수 없는데 외국 사람대접하기를 이와 같이 거만하고 업신여기는가 하여 이러한 말이 있었을 것이다. 한 광무(漢光武)가 마원(馬援)을 대접하듯 고황제가 이색을 대접하였다면, 반드시 이런 말이 없었을 것이다.
○ 문정공 조용(趙庸)은 학문이 정밀하고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20여 년을 있었는데,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하여 인재 양성에 공이 있었다. 대개 문장은 종이를 잡고 즉시 글을 썼는데 문장과 논리가 정밀하고 지극하였으며, 성품이 총민(聰敏)하여 한 번 보면 곧 기억하였다. 젊을 때에 한 서생(書生)이 원 나라의 책문(策問) 가려 뽑은 것을 구해 비장(祕藏)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문정공이 보기를 청하였으나, 서생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른 날 다시 가서 청하니 서생이 사흘 동안만 빌려주었는데, 문정공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하고는 약속한 날짜에 돌려주었다. 하루는 문정공이 그 서생과 같이 글방에 있으면서 책문(策問) 서너 편을 외웠는데 한 자의 착오도 없으니, 서생이 이를 우연히 익힌 것이라 하고, 여려 책문을 닥치는 대로 뽑아서 외우게 하여도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서생이 말하기를, “공과 같은 분은 비록 장순(張巡)이라도 미칠 수 없다.” 하였다.
○ 문정공 맹사성(孟思誠)은 성품이 청백하고 소탈하며 단정하고 중후하여 의정부에 있으면서 대체(大體)를 지켰다. 공은 경자생(庚子生)인데 일찍이 장난으로 계묘계(癸卯契)에 들었었다. 어느 날 임금 앞에 있을 적에 임금이 공의 나이 몇인가를 물으므로 문정공이 경자생 이라고 대답하였더니, 조정에서 물러나오자 계중(契中)에서 동갑이 아니라고 제명되어 한때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공이 천성으로 음률을 깨쳐서 항상 피리를 잡고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고 문을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않았다. 공사(公事)를 아뢰러 오는 이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문을 열고 맞이하였다.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에 앉아 있고 겨울에는 방 안 부들자리에 앉아 있었으며 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일을 아뢰는 이가 가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아뢰러 오는 이들은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 문순공(文順公) 권홍(權弘)은 일찍이 문한(文翰)으로 이름이 드러났었고, 더욱 전서(篆書)와 예서(隸書)에 묘하였으며, 지위는 일품에 이르고 향년은 87세이다. 일찍이 남산 모퉁이에 집을 정하고 두개의 못을 파서 연꽃을 심었었는데, 복건(幅巾) 쓰고 여장(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을 끌며 한가롭게 거니는 모양은 깨끗하여 신선과 같았다. 그가 해서로 쓴 헌릉비(獻陵碑)와 전서로 쓴 성균관 비의 글씨는 매우 좋다. 일찍이 세종조(世宗朝)에 상서하여 기자(箕子)의 사당에 비를 세우기를 청하였으니, 말이 자못 대체(大體)를 얻었다.
○ 정숙공(貞肅公) 박안신(朴安信)은 기국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이었다. 일찍이 문정공 맹사성과 대간(臺諫)에서 같이 일을 의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문정공은 낯빛이 흙빛이 되고 경황이 없이 어쩔 줄을 몰라 하였으나, 정숙공은 낯빛이 태연자약하였다.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우리 임금이 간관을 죽인 이름을 얻을까 두렵 도다 / 恐君留殺諫臣名
하였다. 이 시를 종이와 붓이 없어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서 글자를 쓰고, 눈을 부릅뜨며 옥리(獄吏)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이 시를 상감께 아뢰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여귀(癘鬼)가 되어 너희들을 씨가 없게 할 것이다.” 하였더니, 태종이 듣고 노여움을 풀고 석방하였다.
그 뒤에 공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적에 해적을 만났는데, 해적이 칼을 빼어 들고 배 위로 뛰어들어서 행구(行具)를 약탈하니, 사람들은 손도 놀리지 못하였으나, 공은 걸상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찬찬히 지휘하니, 해적이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행은 이에 힘입어 안전하였다.
○ 문정공 유관(柳寬)은 공정하고 청렴하여 비록 최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초가집 한 칸에 베옷과 짚신으로 생애가 담박하였다.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후생을 가르치기에 부지런하니,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와서 뵈려는 이가 있으면 고개만 끄덕일 뿐이요 성명은 묻지 않았다.
공의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 그때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개설하였으니, 그 절은 성 안에 있었다. 공이 역사를 편수하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일찍이 연모(軟帽)에 지팡이와 신을 갖추고 걸어서 다니며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어떤 때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그 절이 지금은 없어졌다. 일찍이 달이 넘도록 장마가 졌는데, 삼대처럼 집에 비가 줄줄 새었다. 공은 우산을 잡고 비를 가리며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견딜꼬.” 하니, 부인이 대꾸하기를, “우산 없는 집에는 반드시 미리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껄껄 웃었다.
○ 문경공(文敬公) 성석린(成石磷)은 젊어서부터 뜻이 드높아 큰 절개가 있었다. 일찍이 양백안(楊伯顔)의 막하(幕下)가 되어 왜적을 방어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어 형(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공이 졸고 있었는데 꿈결에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공은 쑥대 관[蒿冠]을 쓸 것이니 근심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스스로 풀이하기를, “쑥대 관은 쑥으로 머리를 싼다는 것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하였는데, 죽음을 면하고 제명(除名)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수상(首相)이 되어서 말하기를, “내 꿈에 호관(蒿冠)은 고관(高官)의 뜻이다.” 하였다.
소년 시절 4~5명의 동료들과 더불어 정방(政房)에 있었는데, 신돈(辛旽)이 뒷짐을 지고 곁에서 보다가 공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나중에 반드시 크게 현달할 것이니, 그 복록은 제군들이 미칠 바 아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았으니, 늙은 역적(신돈을 가리킴)도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갖추었다 하겠다.
공의 나이가 60이었을 적에 그 어머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병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한 지가 며칠이 되었고, 약도 효험이 없어서 공이 향을 태우고 기도하며 슬피 부르짖다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조금 뒤 어머니가 깨어나 말하기를, “이게 무슨 소리냐.” 하니, 모시고 있던 사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기도하는 소립니다.”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하늘에서 사람을 보내어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주며 말하기를, ‘아들의 정성이 이같이 지극하니, 이것을 붙들고 일어나라.’고 하더라.” 하고는 병이 곧 나으니, 사람들이 문경공의 효성이 지극함을 감탄하였다.
○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은 본관이 진주다. 그 어머니가 꿈에 자라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어릴 때 이름이 왕팔(王八)이었다. 어려서부터 기운이 남보다 뛰어났었고, 갑사(甲士)로 숙위(宿衛)에 보임되어 궁문에 숙직하였는데 때마침 동짓날이었다. 상림원(上林苑 비원) 온실에서 가꾼 매화 몇 분(盆)을 궁문 곁에 옮겨 두려 할 적에, 공이 긴 가지 하나를 꺾어서 투구 위에 꽂았다. 이 책임을 맡은 이가 크게 놀라 꾸짖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집 울타리 가에 마소[馬牛]를 매는 것이 이 나무요, 꺾어서 땔나무도 하는 것인데 무엇이 귀할 게 있으리오.” 하고, 조금도 굽히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거칠고 사나움을 비웃으면서도 그의 기개를 훌륭하게 여겼다. 무(武)에 능함으로써 발탁(拔擢)되어 크게 현달하였다. 일찍이 동북면(東北面)을 지킬 적에 야인(野人)이 3백 근이나 되는 강력한 활을 공에게 당겨보도록 청하는 자가 있었다. 공이 그들을 위하여 술상을 놓고 즐겁게 마시면서 또 말하기를, “이 활은 매우 잘 만들었다.” 하고는, 급히 궁수(弓手)를 불러서 그 모양과 같이 만들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서 그 활을 불에 구워 힘이 조금 풀어지게 한 뒤에, 여유만만하게 활을 가득히 당기니, 야인들이 탄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였다.
○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은 고집스런 성품이었다. 선덕(宣德) 연간에 흰 꿩을 하례하는 표(表)에 ‘유자백치(惟玆白雉)’라는 어구가 있었는데, 문숙공이 말하기를, “자(玆)는 중행(中行 글자를 가운데 줄에 씀)으로 써야 한다.” 하니, 제공(諸公)들은, “성상(聖上)에 속(屬)한 것이 아닌데, 왜 중행이라 이르는가.” 하였으나, 문숙공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였다. 제공들은 취품(取稟 임금에게 문의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세종(世宗)께서는 제공(諸公)들의 의견을 옳다고 하니, 공이 다시 아뢰기를, “농사짓는 일은 남종[奴]에게 물을 것이요, 길쌈하는 일은 여종[婢]에게 물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나라를 다스릴 때에 매와 개를 데리고 사냥하는 일이라면 문효종(文孝宗)의 무리에게 묻는 것이 마땅하오나, 사명(詞命)에 이르러서는 노신(老臣)에게 위임하는 것이 마땅하오니, 다른 사람의 의견을 가볍게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여, 세종이 부득이 그의 의견을 좇았다.
○ 정렬공 최윤덕(崔潤德)은 태어나자 곧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 운해(雲海)는 변방(邊方)을 지켰기 때문에 그를 양육할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부탁하여 키우게 하였다. 조금 장성하자 기운이 남보다 뛰어나고 굳센 활을 당겨서 단단한 물건을 쏘아 맞추었으며, 때로는 양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짐승을 많이 잡아오곤 하였다. 하루는 산중에서 가축을 먹이는데 큰 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나와서 여러 짐승들이 놀라 달아났다. 공은 급히 말을 타고 활을 쏘아 한 발에 죽이고, 집에 와서 양수척에게 알리기를, “어떤 짐승이 무늬가 얼룩지고 그 크기가 엄청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미 쏘아 죽였습니다.” 하였다. 양수척이 가보니, 한 마리의 큰 범이었다. 이에 양수척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가군(家君 필자인 사가(四佳)의 아버지 곧 서미성(徐彌性))께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양수척이 최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칭찬해 마지않으니, 가군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시험해 보겠다.” 하고, 같이 사냥하여 재주를 시험하니,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보는 이가 못내 칭찬하였으나, 가군께서는 웃으며 말하기를, “이 아이의 솜씨가 비록 빠르나 아직 무예(武藝)의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 하는 것은 곧 사냥꾼의 기술이요, 무예의 좋은 재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시고, 곧 활을 쏘고 적을 막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는 도량이 넓고 커서 대신의 체통이 있었다. 정승의 자리에 30년이나 있었고, 향년(享年)이 90이었다. 국사(國事)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는 관대(寬大)하기에 힘쓰고, 평상시에 마음이 담박하여 비록 아들, 손자, 종의 자식들이 좌우에 늘어서서 울부짖고 장난을 하고 떠들어도 조금도 꾸짖어 금하지를 아니하며, 어떤 때는 수염을 잡아 뽑고 뺨을 쳐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일찍이 보좌관을 불러 일을 의논하면서 막 책에 글씨를 쓰려 하였는데, 종의 아이가 그 위에 오줌을 누었으나, 공이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이 손으로 닦아낼 뿐이었으니, 그 덕스러운 도량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7년 동안을 귀양살이 하였는데,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손에는 운서(韻書 자전(字典)) 한 질(秩)을 갖고는 정신을 집중하여 볼 뿐이었다. 그 뒤에 비록 나이가 많았으나, 자서(字書)의 음과 뜻, 편방(偏傍)과 점획(點劃)에 대해서 백에 하나라도 틀리는 것이 없었다.
○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이 한가히 있을 적에는 항상 오사모(烏紗帽)에 뿔을 뺀 것을 쓰고,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시를 읊었는데, 시품(詩品)이 기이하고 궁벽하여 고시(古詩)에 가까웠으며, 필법(筆法)이 굳세어 서법에 부합하였다. 소년 때 춘방(春坊)에 있으면서 시를 지어서 손수 썼더니, 하호정(河浩亭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 하연을 가리킴)이 시를 짓고 하문학이 직접 쓰니, 역시 한 세상의 보배이다.” 하였다. 문효공이 경상도안찰사(按察使)로 있을 때, 정승 남지(南智)가 아사(亞使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공은 매우 중히 여겨 보좌관이라 하여 낮게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진주(晉州)에 가서, 문효공이 산천과 경물의 아름다움을 감탄하니, 공의 본관이 진주였기 때문이다. 이에 남공(南公)이 낯빛을 변하며 말하기를, “산수는 비록 좋지마는, 품관(品官 안찰사를 가리킴)은 매우 못났다.” 하였으나, 문효공이 크게 웃으니, 사람들이 그 아량(雅量)에 탄복하였다. 뒤에 남공과 같이 정승에 올랐다.
○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 효양공(孝襄公) 김효성(金孝誠)은 장양공(莊襄公) 남수(南秀)의 아들이다. 장양은 그 아내 길(吉)씨와 따로 살고 있었는데, 효양공의 나이 4ㆍ5세 때에 종이 안고 뽕나무 밑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한 쌍의 비둘기가 날아와서 함께 앉는 것을 공이 보고 말하기를, “저 비둘기를 보니 쌍쌍이 짝을 지어 다니는데, 우리 부모는 동서(東西)에 따로 떨어져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고, 슬피 우니 종이 기이하게 여겨 길씨에게 아뢰니 이 말을 들은 길씨도 눈물을 흘렸으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공의 나이가 57세에 어머니 길씨가 죽자 시묘 살이를 하고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니,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 대민공(戴敏公) 강석덕(姜碩德)은 성품이 예스러움을 좋아하여,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은 근대에 비길 데가 없으며, 시품(詩品)이 매우 고고(高古)하고 서화도 절묘하였으니, 그 시호(諡號)를 민(敏)으로 한 것은 적당한 칭호라 할 것이다. 시법(諡法)에, “옛 것을 좋아하고 게으르지 않음을 민(敏)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원 나라 학사 조문민(趙文敏)의 민(敏)과 같은 것이다. 세상 사람이 공이 과거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그를 가볍게 여김은 아주 잘못이다. 아들 부윤(府尹) 희안(希顔)의 자(字)는 경우(景愚)인데, 그림ㆍ시ㆍ글씨 세 가지에 절묘하여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시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고 그림은 유송로(劉松老)ㆍ곽희(郭熙)와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ㆍ조맹부를 겸하여 재주와 덕을 구비하였으니, 참으로 대인군자(大人君子)이다. 그러나 그것을 크게 쓰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판중추부사 조오(趙吾)가 합천(陜川) 수령이 되었을 적에, 여름에 농어가 많이 쌓여서 썩는 일이 있어도, 자기 집에는 조금도 맛보지 못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그것을 썩혀서 땅에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집에서 조금이라도 먹게 하는 것이 낫겠는데, 이런 데서까지 청렴함을 더럽히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였다. 조공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그가 예조 정랑이 되었을 적에 이리저리 셋집을 전전하였으며 양식과 땔나무를 이어가지 못하였는데, 동료(同僚) 중에 쌀 3말을 주는 이가 있어도 받지 아니하였고, 뒤에 공석(公席)에서 이 일을 자랑하니, 사람들이 그 자랑하는 것을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 남의 청탁을 일체 들어주지 않았으며, 뒤에 늙어서 시골집에 물러 나와서도 살림살이가 아무것도 없었으나,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요구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청렴하고 독실한 군자라 할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권준(權蹲)은 총명(聰明)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관리의 체통을 잘 알았다. 일찍이 형조의 관리가 되어 옥사를 귀신같이 판결하였다. 어떤 두 강도가 한 가족 세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심증은 다소 있었으나 물증이 분명하지 못하여 전후(前後) 관리가 의심하고 결단하지 못한 것이 거의 4ㆍ5년이었다. 하루는 안숙공이 두 도둑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강도짓을 한 증거가 분명한데 감히 불복하느냐. 내가 한 마디 할 터이니 너희들은 숨기지 말아라. 너희들이 처음 일을 의논할 때는 이러이러하게 했고, 중간에 일을 꾸미기는 이러이러하게 한 것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경위가 이러이러한 것인데, 너희가 감히 숨기겠느냐.” 하니, 도둑이 서로 돌아보고 혀를 빼물며 말하기를, “이분이 일찍이 도둑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어떻게 우리가 한 일을 이같이 자세히 아는가.” 하고, 마침내 자복하였다.
○ 갑오년 봄에,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 판서 조극관(趙克寬), 참판 권극화(權克和), 참판 김돈(金墩) 등이 모두 문과에 실패하고 수원(水原) 연정(蓮亭)에 이르렀다. 문경공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실의에 빠져 번뇌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후일에 성공한다면 이슬비 자욱하고, 함박눈 펄펄 내리며, 밝은 달빛은 주렴으로 들어오고 연꽃 향기는 자리에 가득할 적에, 그대들과 더불어 술잔을 들고 시를 읊으면 족히 오늘의 일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제공들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비가 자욱하다면 눈이 펄펄 내리지 못할 것이고, 눈이 펄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며, 또 연꽃 향기를 어찌 눈 가운데서 얻을 수 있으리오. 어찌 말이 서로 들어맞지 않는가.” 하였더니, 문경공은 응답이 없었다. 그해 가을 과거에 문경공은 장원이 되고, 제공들도 연달아 과거에 뽑혔다. 임자년에 문경공이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되자 제공들이 모여서 전별(餞別)하는데, 조(趙) 판서가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수원 눈 속의 연꽃을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문경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들과 함께 보려고 하였네.” 하였다. 몇 달이 안 되어 조공이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을 때, 문경공이 그 고을에 순행하니, 조공이 예를 행하고 자리에 나갔는데 때마침 연꽃이 한창 이었으므로 서로 보고 웃었다. 문경공이 시를 지었는데,
비와 눈 흩날리는데 달빛은 밝고 / 雨雪霏霏月政明
연꽃의 맑은 향기 정자에 가득하네 / 荷香荏苒滿亭淸
당시의 이런 말 신비로워라 / 當時此說神應秘
20년 전에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도다 / 二十年前事已成
하였다.
○ 문장공(文長公) 김균(金鈞), 문장공 김말(金末), 대사성(大司成) 김반(金泮)은 모두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더욱 성리학(性理學)에 연구가 깊어서 동시에 성균관에 제수되어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인재양성에 공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삼김(三金)이라 일컬었는데, 김반은 먼저 죽었고, 남은 두 김공은 모두 80이 넘도록 살아 벼슬은 1품에 올랐으며, 시호(諡號)를 모두 문장(文長)이라 하였다. 시호를 짓는 법에,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아니함을 장(長)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 시호를 받음이 마땅하다.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그때 성균관의 대사성이 되었는데, 학문이 더욱 정밀하여 제생(諸生)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가 물으니, 공이 문리(文理)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며 종일토록 쉬지 아니하고 지칠 줄을 몰랐다. 지금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공의 제자이니, 국조 이래로 사범(師範)의 으뜸이다.
○ 문장공 김말(金末)은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들으니, ‘천 사람의 눈[眼 지식을 이름]을 열어주는 이는 음덕의 보답을 받는다.’ 하였는데, 내가 벼슬한 뒤로부터 50여 년간 학관(學館)의 직책을 맡아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도 마침내 자식이 없으니, 이는 나의 학문이 거칠고 거짓되어 남에게 은덕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죽을 무렵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홀(笏)을 잡고 단정하게 앉았는데, 가족들이 통곡하니 공이 울음을 그치게 하고는 “내가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니 벼슬이 부족함이 없고,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수(壽)가 높지 않음이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사람의 상리(常理)이니 바름을 얻고 죽으면 어찌 다행하지 않는가.” 하고, 곧 죽었다.
○ 최만리(崔萬理) 선생이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나서 글을 올려, 환관(宦官)들의 연각건(軟脚巾)을 쓰고 오사모(烏紗帽)를 씀이 옛 제도에 맞지 않으니, 중국의 예(例)에 의해 일반 관을 쓰게 할 것을 극론하였다. 그 말에, “예로부터 역대 임금이 환관을 사랑하고 신임하여, 그 권세가 천하를 기울이는 자가 심히 많았으나, 그 갓을 바꾸지 않은 것은 환관의 무리를 사대부들과 혼동하여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으니, 말은 매우 적절하였으나, 여러 환관들이 눈을 흘겼기 때문에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기건(奇虔)공이 일찍이 연안부(延安府)에 부임하였는데, 그 고을에는 붕어가 많이 나서 공사(公私)로 청탁이 많아 폐단이 백성에게도 미쳤다. 그 전에 김씨 성을 가진 부사가 있었는데 붕어 먹기를 좋아하므로, 고을 사람들이 조롱하여 관사(館舍)의 벽에 크게 쓰기를,
6년 동안 무슨 사업을 하였는가 / 六年何事業
한 못의 고기만 다 먹었도다 / 喫盡一池魚
하였다. 기공(奇公)이 이런 평을 면하려고 6년 동안 붕어를 먹지 않았고, 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나가서는 제주의 복어(鰒魚)가 연안의 붕어와 같이 많았으나 3년을 역시 먹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고집은 탄복하였으나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 판서 김조(金銚)는 일찍이 문학으로 유명하였다. 세종(世宗)께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하였는데 모두가 술이 취하였다. 세종께서, “오늘 제군(諸君)들은 각기 평소의 소원을 말하라.” 하니, 김조가 아뢰기를, “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날마다 어탑(御搨 임금의 자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해바라기꽃인데, 신하의 자리를 뜻함) 밑에서 진퇴부복(進退俯伏)하는 것뿐입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신등의 소원도 김조와 같습니다.” 하여, 임금이 웃었다.
○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은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담박 하며 소탈하여,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얼굴에 드러내지 아니하였으나, 도둑을 잘 다스렸다. 일찍이 충주(忠州)ㆍ안동(安東)ㆍ경주(慶州) 세 고을의 수령이 되었는데, 도둑질한 죄를 범한 증거가 있으면, 조금 의심할 만한 점이 있더라도 반드시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니, 도둑이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여 백성들이 편안하였으나, 잘못 죽인 자도 많아서 공의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으니, 남에게 형벌을 베푸는 것은 참으로 두려울 만한 일이다.
○ 문안공(文安公) 이사철(李思哲)은 몸집이 커서 음식을 남보다 유달리 많이 먹었는데, 항상 큰 그릇의 밥 한 그릇과 찐 닭 두 마리와 술 한 병을 먹었다. 등에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의원이 불고기와 독주(毒酒)를 금해야 한다고 말하니, 공이 말하기를, “먹지 아니하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먹고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면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불고기를 먹어도 마침내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귀를 누리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도 보통사람과 다르다.” 하였다.
공이 젊어서 여러 벗들과 삼각산의 절에서 놀 때에 각각 술 한 병씩을 가졌으나 술잔이 없었다. 그때 권지(權枝) 선생이 새로 만든 말 가죽신을 신었었는데, 문안공이 먼저 그 신에 술을 따라 마시니 제공(諸公)들도 차례로 마셨는데, 서로 보며 크게 웃고 말하기를, “가죽신을 술잔으로 삼은 것이 우리들로부터 고사(故事)가 되었으니, 이 또한 좋지 않은가.” 하였다. 뒤에 문안공이 귀하게 되어 권지에게 말하기를, “오늘 금 술잔의 술맛이 산놀이 할 때의 가죽신 술잔보다 못하구려.” 하였다.
○ 정절공(貞節公) 정갑손(鄭甲孫)은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엄준하여, 자제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로써 간청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적에, 소명(召命)을 받고 서울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방(榜 시험 발표)이 나왔기에 보니, 그 아들 오(烏)도 합격되었다. 공은 수염을 꼿꼿이 세우고 성을 내어 시관(試官)을 꾸짓기를, “늙은 놈이 감히 내게 여우같이 아첨하는가. 우리 아이 오(烏)는 학업이 아직 정밀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아들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결국 시관을 내쫓았다.
정절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자 탁한 것은 물리치고 맑은 것은 드날리게 하여 조정의 기강을 크게 떨쳤다. 그러나 너그럽고 후하여 대체는 잃지 않았다. 전례(前例)에 공청(公廳)에서 모일 적이면 대간(臺諫 사헌부와 사간원)이 반드시 함께 막차(幕次)를 연접시키고, 혹 술을 마실 적에는 장막을 걷고 이름을 권장음(捲帳飮)이라 서로 붙였다. 만약 금주령(禁酒令)이 있을 적에는 대관(臺官)들은 법을 철저히 지켜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간원(諫院)에서는 술 마시기를 예사로 하였다. 하루는 간관(諫官)이 술을 잔에 가득히 부어 가지고 장난으로 장막 틈으로 대장(臺長 사헌부의 장령과 지평)에게 보이니, 대장도 장난으로 소매로 뿌리쳤는데 술잔이 장막 틈으로 떨어져서, 대사헌인 정절공의 책상 앞에 굴러갔었다. 여러 대장(臺長)들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대리(臺吏)들도 서로 바라만 볼 뿐 감히 그 술잔을 치우지 못하여 이 술잔이 종일토록 대사헌의 앞에 있었다. 사헌부에서는 일이 날까 두려워하였는데, 사무를 마칠 적에 정절공이 관리에게 말하기를, “저기 거위 알 같은 것은 무엇인가. 수정(水精) 구슬이 몇 알이나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니, 아전들이 대답하기를, “백 개는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절공이 이르기를, “굴러 나온 틈으로 던져주라.” 하니, 자리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아량에 탄복하였다. 간원(諫院)에서 전해 오는 술잔의 모양이 거위 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정 구슬이 한 되 가량 들어갈 만하였으니, 이는 금주령을 당하면 술잔을 숨기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 문도공(文度公) 윤회(尹淮)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남수문(南秀文)은 모두 문장에 능하였는데, 술을 좋아하여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께서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두 공(公)은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 잔을 마시니, 이름은 비록 석 잔이라도 실은 다른 사람보다 곱을 마신 것이다. 세종께서 듣고 웃기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먹도록 권한 것이 되고 말았구나.” 하였다.
○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는 천성이 호매 하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일찍이 술이 취하여 옛 사람을 평론하여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만약 공자의 문하에서 놀았으면, 순수한 안자(顔子)나 독실한 증자(曾子) 같은 분에게는 진실로 미칠 수 없으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무리와는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오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예겸(倪謙)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었는데, 문성공이 접대관이 되어서 일을 주선하고 교제하여 빈사(儐使)의 체모를 지켰으며, 또 같이 고금을 의논하고 시를 서로 주고받았으니, 예겸이 매우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어느 날 밤에 같이 앉아서 시강(侍講)이 말하기를, “달이 어느 분야(分野)에 있는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동정(東井)에 있습니다.” 하자, 시강이 탄복하였다. 작별할 적에 시강이 말하기를, “밤이 깊은데 어떻게 갈 것인가.” 하니, 공이 “이금오(李金吾)가 두렵소.” 하자, 예겸은, “왕옥여(王玉汝) 는 만나지 마시오.” 하고는, 서로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대구(對句) 없는 것이 없다.” 하였다.
병인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비 김씨) 장례 때에 큰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 재궁(梓宮 임금이나 왕비의 관)을 건널 수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낙천정(樂天亭)에 임시로 모셔두었는데, 혹은 남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고, 혹은 북쪽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하여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문성공이 뒤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빈소(殯所)에서 남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그 어버이를 죽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 뜻이며, 광중(壙中)에서 북쪽으로 머리 두는 것은 죽은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시 빈궁(殯宮)이니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제공(諸公)들이 말하기를, “재상은 마땅히 독서한 사람을 써야 한다.” 하였다.
○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상소하는 것은 문열공(文烈公) 이계전(李季甸)으로부터 비로소 성행하였다. 문열공이 집현전에 있을 적에 여러 번 상소하여 정사를 논하려 하니, 동렬(同列)로서 벼슬이 문열공의 위에 있는 한두 사람이 매양 말리기를, “예로부터 정사를 논하기 좋아하는 이는 마침내 화를 받는 것인데, 하물며 우리 시종들은 덕의(德義)를 강론하여 임금의 마음을 밝히고 도울 뿐이요, 간쟁(諫諍)하는 일은 그 직책이 아니니 그대는 일 만들기를 좋아하지 말게.” 하였다. 문열공이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각각 다름이 있으니, 국사를 논하다가 실패하는 영광이 침묵하다가 당하는 수치만 못하다.” 하고, 마침내 하관(下官)들을 거느리고 글을 올려 극간(極諫)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상관이 끝내 여기에 서명하지 아니하였으니, 여론이 그 상관을 기롱하였다. 상소를 올릴 적마다 세종(世宗)께서 이르기를, “계전(季甸)의 상소가 또 왔구나.” 하고, 마침내 크게 쓸 뜻을 두어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뽑았다.
○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은 어려서 큰 뜻을 두었고 책을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여 재주와 명성이 남보다 크게 뛰어났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고도 태연히 처하여 가슴속에 연연하지 않았다. 내가 맹교(孟郊)의 시에,
문 밖을 나가면 곧 막힘이 있으니 / 出門卽有礙
그 누가 천지를 넓다고 했던가 / 誰謂天地寬
한 것을 외우며, “맹교가 낙방하여 슬퍼하고 곤궁한 것은 그 몸을 용납할 곳이 없어서였는데, 지금 자네가 그렇지 않은가.” 하였더니, 익평공은 웃으며, “과거에 급제하고 급제하지 못함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았는데, 뒤에 익평공이 35세에 선비로서 장원에 뽑히고, 46세에 정승에 올라 한때 원훈(元勳)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대개 과거에 실패하면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이 선비의 상정(常情)인데, 공의 큰 도량이 이와 같으니, 맹교의 불우(不遇)함은 어찌 국량(局量)이 작아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 충렬공(忠烈公) 구치관(具致寬)은 성품이 엄격하고 공정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뇌물이나 청탁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 전에는 이조 판서가 되면 관리를 제수할 적에 으레 친히 선발하는 명부를 잡고 자기 멋대로 행하였고, 참판 이하는 팔짱만 끼고 옆에서 볼 뿐이었는데, 공이 이를 분하게 여기고 그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대체로 사람을 올리고 내리는 데는 여러 사람의 의논을 널리 취하였고, 비록 작고 낮은 관직이라도 단독으로 추천하지 않았고, 사사 은혜로써 친구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남이 청탁하는 것을 미워하여 혹 청탁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올릴 것도 올려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참의(參議)가 되어 하루는 정방(政房)에 있다가 마침 술이 취하여 잠이 들었는데, 공이 거친 목소리로, “참의는 내가 인물 등용을 마음대로 행한다 하여 참견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후일에 사람을 잘못 쓴 일이 있으면, 참의는 집에 있어서 알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하였다.
일찍이 이름이 알려진 한 문사(文士)를 추천하여 대관(臺官)으로 삼으려 하니, 반박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익살이 심하니 불가하다.” 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러면 한 무제(漢武帝)는 어찌 동방삭(東方朔) 을 취하여 썼겠는가.” 하고, 마침내 대관으로 추천하였다. 또 한 문사가 외군 교관(外郡敎官)으로 있으면서 10년 동안 승진하지 못하였다. 공이 현감(縣監)으로 추천하려 하니, 반대하는 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실정에 어두워서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어찌 사람을 이와 같이 오래도록 굽혀둘 것인가.” 하고, 마침내 현감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는 과연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이 사람을 쓰고 버릴 적에 한결같이 공정하게 함이 이와 같았다.
○ 문정공(文靖公) 최항(崔恒)은 성품이 겸손하고 단정하고 간결하여 겉치레를 아니 하며, 평생토록 남과 말할 적에는 먼저 양보함을 보이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또 별다른 이론(異論)을 세우지 않았다. 글을 짓는 데에도 옛 사람의 규범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스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크게 펼쳐놓으니, 웅장하고 풍부함이 장강대하(長江大河)와 같이 물결이 뛰고 넘치고 솟구치고 구비 치듯 형세가 그치지 않았으며, 더욱 변려문(騈驪文)에 공교하여 무릇 조정에서 중국에 올리는 표문(表文)과 전문(牋文)이 다 그 손에서 나왔었다. 중국 사람이 매양 우리나라 표문(表文)이 정밀하고 적절하다고 칭찬한 것은 모두 공이 지은 것이다. 평상시에는 비록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이라도 의관을 정제하고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빠른 말이나 급한 표정을 하지 않았으니, 천성이 그러하였다.
○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우리나라의 학자들은 어음(語音)이 바르지 못하고, 구두(句讀)가 분명치 못하며, 비록 선유(先儒)인 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의 구결(口訣 한문의 토)이 있으나 아직도 오류가 많은데 진부한 세속의 선비들이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음을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숙한 신하와 경험 있는 유학자에게 명하여 사서 오경(四書五經)을 …… 주어 고금(古今)의 책을 고증(考證)하여 구결을 정하였고, 또 글하는 선비를 모아서 같고 다름을 강론(講論)하게하고 상감이 직접 결정하였다. 이때 문정공(최항)이 항상 좌우에 있으면서 매양 질문을 받으면 정밀하게 분석하여 민첩하게 응대하니, 상감이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성(寧城 최항이 뒤에 영성부원군이 됨)이 참으로 천재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박원형(朴元亨)은 사체(事體)에 통달하고 전고(典故)에 익숙하였다. 중국 사신 진감(陳鑑)ㆍ고윤(高閏)ㆍ장녕(張寧)ㆍ진가유(陳嘉猶) 등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에, 공이 매번 빈관(儐官 접대관)이 되어 주선하고 교제하기를 모두 마땅하게 하였다. 사신 장녕이 일찍이 문헌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으면 마땅히 진(晉) 나라 숙향(叔向)이나 정(鄭) 나라 자산(子産)의 밑에는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 문헌공(文憲公) 윤자운(尹子雲)이 함길도(咸吉道) 체찰사(體察使)가 되어 안변(安邊)에 이르렀을 적에,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과 길주 목사(吉州牧使) 설정신(薛丁新)을 죽이고는 그 고을을 점거하고 반역을 일으켜서 여러 고을에 심복을 보내어 수령들을 거의 다 죽이니 흉한 무리들이 간 곳마다 서로 합세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공은 밤낮으로 빨리 달려 함흥(咸興)에 이르니, 그날 밤에 역적들이 또 난을 일으켜서 감사 신면(申㴐)을 죽이고는 병력을 이동하여 공의 처소에 이르러 문을 박차고 칼을 뽑아 들고 뜰에 담같이 둘러섰으나, 공은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서 웃으며 말하기를 태연하게 하니 도적들이 두려워서 물러갔다. 도적의 무리들이 제 마음대로 날뛰고 간사함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이 7일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지만 태연하게 대처하고 마음을 동요하지 않으니, 도적들 중에 혹 뉘우쳐서 공을 위하여 주선하고 돕는 자가 있어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 동원공(東原公) 함우치(咸禹治)가 일찍이 전라도 감사가 되었는데, 어떤 양반의 집 형제가 서로 큰 가마솥을 가지려고 관청에 소송하는 자가 있었다. 함공이 노하여 아전에게 명하여 급히 크고 작은 두 가마솥을 가져오게 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깨뜨려서 고르게 …… 주겠다.” 하니, 두 형제가 복종하고 분쟁을 마침내 중지하였다.
○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噲)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 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裘)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홍일동이 일찍이 진관사(眞寬寺)에서 놀 적에, 떡 한 그릇, 국수 세 주발, 밥 세 바릿대, 두부 국 아홉 주발을 먹었는데, 산 밑에 이르니 대접하는 이가 있어, 또 찐 닭 두 마리, 물고기국 세 주발, 생선회 한 쟁반, 술 마흔 잔을 먹으니, 보는 이들이 대단하게 여겼다. 세조(世祖)가 듣고 홍일동을 불러 묻기를, “참으로 이와 같이 먹었느냐.” 하니, 홍일동이 그렇다고 사과하자, 상감은 장사(壯士)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평상시 출입할 적에는 다만 미숫가루와 전술[醇酒]을 먹을 뿐이요, 밥을 먹지 않았다. 뒤에 홍주(洪州)에 가서 폭음(暴飮)을 하고 곧 죽었는데, 사람들이 그가 배가 터져 죽은 것이라 의심하였다. 뜻이 있어도 시행치 못하였고 벼슬이 그 능력에 차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 당(唐) 나라 말기에 정곡(鄭谷)이 시를 잘 지어 세상에서 유명하였는데 그때 사람이 그 관직에 따라 정도관(鄭都官)이라 하였다. 송(宋) 나라 매성유(梅聖兪)가 만년(晩年)에 도관(都官)이 되었다. 어느 날 구양영숙(毆陽永叔)의 집에 모였는데, 유원보(劉元父)가 농담하기를, “매성유의 벼슬이 반드시 여기에 그칠 것이다. 예전에는 정도관(鄭都官)이 있었고 지금은 매도관(梅都官)이 있다.” 하였다. 자리에 있는 손님들이 다 놀라고 매성유도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아니 되어 매성유가 병들어 죽었다. 내가 젊어서 윤서(尹恕)와 같이 유학하였는데, 윤서가 일찍이 말하기를, “만일 과거에 올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만 되면, 반드시 벼슬을 그만 두겠다. 남자가 명정(銘旌 상여 앞에 들고 가는 기) 위에 정언(正言) 두 글자를 쓰면 만족하다. 제군(諸君)들은 의심치 말라.” 하였는데, 윤서와 내가 갑자년 과거에 올라서 경오년과 신미년 사이에 비로소 정언에 임명되었다. 내가 농담하기를, “벼슬을 그만 둘만하다.” 하니, 윤서가 웃으며, “두고 보라.”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병들어 죽었다. 유원보가 매성유에게 농담한 것과 윤서가 스스로 기약한 말이 과연 그대로 부합하였으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 문충공(文忠公) 권양촌(權陽村)이 일찍이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었는데,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中庸章句)》의 말에 의거하여 〈천인심성합일도(天人心性合一圖)〉를 만들었는데, 이는 내용이 광대하여 모든 이치를 포함하였으며, 정묘하고 심오하여 옛 성인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확충하여 후학(後學)에게 무궁한 이치를 열어주었다. ‘군자는 마음을 닦으므로 길하고 소인은 이치를 거스르므로 흉(凶)하다.’ 한 말은, 그 대강만 들어서 배우는 사람에게 보인 것인데 그 뜻이 깊다. 그 조카인 권채(權採) 선생이 또 이 《입학도설》과 주자(朱子)의 《중용장구》와 《대학장구》 및 《혹문(或問)》의 해설에 의거하여, 천리가 유행발육(流行發育)하는 형상과, 학자(學者)가 기질을 변화하여 성인이 되는 방법을 서술하였는데, 그 덕으로 나아가는 선후의 조목은, 공자ㆍ증자ㆍ자사(子思)ㆍ맹자 등의 말을 인용하였고, 그 공부하는 방법의 깊고 얕은 의미는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논설로써 단정하였으며, 그 천인심성(天人心性)의 논설은 양촌(陽村)의 뜻을 발명하여 작성도(作聖圖)를 지었다.
근세에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만든 성불도(成佛圖)가 있고, 종정도(從政圖)가 있는데, 모두 투자(骰子 주사위)를 사용한다. 권채(權採) 선생이 작성도를 만들었는데, 그 종목이 열세 가지가 있으니, 도상론(圖象論)ㆍ성리론(性理論)ㆍ음양론(陰陽論)ㆍ조화론(造化論)ㆍ기질론(氣質論)ㆍ성경론(誠敬論)ㆍ자질론(資質論)ㆍ공부천심론(功夫淺深論)ㆍ용공작철론(用工作輟論)ㆍ현지론(賢智論)ㆍ우불초론(愚不肖論)ㆍ진덕선후론(進德先後論)ㆍ총론(總論) 등인데, 13논(論) 중에 또 다소의 절목(節目)이 있으며, 역시 주사위를 사용한다. 주사위 6면(面)에 성(誠)ㆍ경(敬)ㆍ사(肆)ㆍ위(僞) 4자를 썼는데, 성ㆍ경은 두 번씩 썼으며, 그 글자는 다 수(數)로 나누어서, 주사위를 던지면 그 수로써 나아가는 순서를 삼는다.
무릇 사람의 성품은 학문하기는 싫어하고 놀음하기를 좋아하니, 성불도(成佛圖)와 종정도(從政圖)와 같은 것은 역시 장기와 바둑의 한 종류이다. 한갓 시일만 허비하고 마음 쓸 바는 없는데, 선생이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당초에 놀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문하는 이가 그것을 즐겨 하여 그 지혜의 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는 주사위 쓰는 것을 장기나 바둑에 가깝다 하여 그 뜻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니, 생각지 못함이 심하다. 무릇 주사위를 쓰는 것은 뜻이 주사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ㆍ경ㆍ사ㆍ위의 등분을 보이기 때문이다. 성ㆍ경ㆍ사ㆍ위는 곧 학자의 마음 쓰는 경지이다. 주사위로 인하여, 처음 배우는 이에게 도(道)를 지시함이 더욱 친절한 것이다. 이 도(圖)로써 성인의 도(道)를 구하면 비록 어리석고 어린이들이라도 방향을 알게 할 수 있으며, 덕에 나아가는 순서가 조리가 있고 문란하지 않아서, 성현(聖賢)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도(圖)가 세상에 행하여지지 못하고 선생이 죽었으니, 지금 아는 이는 대개 드물다. 선생의 문장은 중부(仲父) 양촌의 풍모가 있다.
○ 문강공(文康公) 이석형(李石亨)은 일찍이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가지고 번거로운 것을 깎고 간략한 것을 취하고, 《고려사(高麗史)》에서 권선징악이 될 만한 것을 더 넣어서 책을 만들어 이름을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이라 하고, 경연(經筵)에 진강(進講)하기를 청하니, 상감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공의 뜻은, ‘경서(經書)는 바야흐로 진강하는 중이요, 고려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므로 거울삼아 경계하기에 가장 간절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러므로 삭제하기도 하고 요약하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으니, 보기에 유익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를 평하는 이는 이르기를, “경서는 도(道)를 실은 것이니 전부 성인의 말씀이다. 진덕수의 편찬이 모두 구차한 것이 아닌데, 지금 다 깎아버리면 의리에 온당치 못하니, 옛 《대학연의》에 《고려사》를 보태 넣으면 근사할 것이다.” 하였다.
○ 고려 문종조(文宗朝)에 예부 상서(禮部尙書) 정유산(鄭惟産)이 과거에 이름을 봉하고 선비를 뽑는 법을 세웠다. 응시하는 여러 선비들이 시권(試券 시험지) 머리에 성명ㆍ본관ㆍ부ㆍ조ㆍ증조ㆍ외조의 이름을 써서 풀로 봉하고 시험 보기 며칠 전에 시원(試院)에 올리도록 하였다. 과장(科場)을 개시하는 하루 전날 오후에, 주문관(主文官 시관(試官))이 글의 제목 몇 개를 적어 가지고 궁궐 문에 나아가 봉하여 올리면, 임금이 친히 뜯어보고 각각 글제 위에 낙점(落點)하고는 봉하여 도장을 찍어서 내어주면, 주문관이 받아서 시원(試院)에 가지고 간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봉함을 뜯고 글제를 내면 당직한 승선(承宣)이 금인(金印 어보(御寶))을 받들어 시원에 가서 주문관과 같이 앉아서 거자(擧子 과거 보는 사람)의 권봉(券封)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는다. 임금이 또 내시(內侍) 두 사람을 보내어 술과 과일을 주고 주문관 또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한다.
하루가 지난 다음 당직한 승지가 시원에 이르러 권봉을 뜯고 급제자를 발표한다. 제2장(第二場)도 이와 같다. 제3장(第三場)에서는 이경(二更)에 이르러서 글제를 내고 다른 것은 같다. 이틀 사이를 두고 주문관이 각각 합격된 시권(試券)의 표면에다가 등급의 차례를 적은 황지(黃紙)를 붙이고 함에 봉하여 궁궐로 올린다. 임금이 편전(便殿)에 앉고 승선(承宣) 두 사람이 그 함을 받들어 임금 앞에서 봉함을 뜯고 문신(文臣)과 승선이 그 과거의 등급을 읽되, 상하의 등급은 모두 주문의 의망에 의하여 방(榜)을 붙인다. 그 에도 대개 이와 같이 해 왔었다.
국조(國朝)에 이르러 과거의 법이 점점 갖추어졌는데, 시권에 이름을 봉하는 것은 고려와 같고 나머지는 모두 같지 않다. 그 수권관(收卷官)ㆍ봉미관(封䌤官)ㆍ사동관(査同官)ㆍ지동관(枝同官)ㆍ역서(易書) 등의 일은 다 원(元)의 제도를 따랐고, 양쪽에 시장(試場)을 설치함은 세종조(世宗朝)에서 시작되었는데, 혹은 강경(講經)으로, 혹은 제술(製述)로 하여 때에 따라 달랐다.
○ 예전에는 무과(武科)가 없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고사(故事)에 문무과(文武科)의 방(榜)을 내는 날에는 홍패(紅牌)를 하사하고 어사화(御史花)와 어사주(御史酒)를 내렸으며 문무과 1등 3명에게는 별도로 검은 일산[皁盖]을 주었으니, 당시에 큰 영광으로 여겼다. 세조(世祖) 때에 문과는 일산을 주고 무과는 기(旗)를 주어, 유가(遊街)하는 날에는 어린아이와 어리석은 아낙네들도 모두 문과와 무과의 구별을 알게 되니, 무반(武班)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으므로, 곧 파하고 예전 제도를 회복하였다.
○ 구례(舊例)에는, 벼슬이 정3품에 이르면 문과 시험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6품에 이르면 생원(生員) 진사과(進士科)에 나가지 않았는데, 당상관으로서 문과에 응시한 것은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에서 시작되었고, 종친(宗親)의 극품(極品 정일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영순군(永順君)에서 시작되었으며, 부마(駙馬) 극품으로서 시험에 나간 것은 세조 때에 시작되었으나 이내 없어졌다.
○ 근일에 과장(科場)에서 부의 제목을 내었는데, 해동청(海東靑 매(鷹))이라 한 것이 있었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註)에 보면 옛 사람의 시구(詩句) 중에
아름다운 글귀는 천하의 이백보다 묘하고 / 麗句妙於天下白
높은 재주는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 高才駿似海東靑
한 것이 있는데, 어떤 과거에 온 선비가 잘못 해석하기를, “아름다운 글귀가 천하에 묘한 이는 오직 백고(白高) 한 사람이니, 그 재주의 뛰어남이 해동청과 같도다.” 하였다. 이에 온 과장이 덩달아 따라서 백고(白高)를 부(賦)의 제목으로 삼아 심지어 시를 짓기를
해동청의 보라매여 / 繫海東之爲靑
백고의 높은 재주와 같도다 / 同白高之駿才
하였는데, 시관도 이것을 모르고 선발하여 과거에 오른 이가 많았으니, 이 말을 듣는 이는 심히 목을 움츠리고 웃었다.
○ 국조 이래로 과장(科場)의 문체가 평온하였는데, 계유년과 갑술년 이후로 한두 사람의 문사(文士)가 괴이하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니, 4, 5 ,6년 사이에 문체가 모두 변하여 서곤(西崑 오대(五代) 및 송초(宋初)의 시풍)의 문체가 되고 말았다. 지금 국학(國學 성균관)과 과장에서는 구양공(歐陽公)이 유기(劉幾)를 내친 고사(故事)를 들어서, 그 중에 심한 자를 내치니, 문체가 조금씩 예전과 같아지나 완전히 변하지는 못하였다. 근래 전시 책문(殿試策文)의 기두(起頭)에 한 유생은
모래를 헤치고 금을 가려내니 큰 대장장이의 정밀함이 있고 / 披沙揀金有太冶之精
채찍을 잡고 말에 임하니 백락(말을 잘 아는 사람)의 밝음이 있도다 / 執策臨馬有伯樂之明
하였고, 한 유생은
하늘은 자시에 열리고 / 天開於子
땅은 축시에 열리고 / 地闢於丑
사람은 인시에 열린다 / 人生於寅
하였으니, 그것은 부화(浮華)하여 절실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 구례(舊例)에는 여러 과거의 회시(會試)에는 매번 삼장(三場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세 시험)을 보는 날에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고, 또 별도로 궁내에서 술과 과일을 내려서 여러 시관(試官)들이 즐겁게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제생(諸生)들에게도 묽은 죽과 청주(淸酒) 수십 동이를 주어 목마름을 풀어주었는데, 식례(式例)가 나오면서 모두 폐지되었다. 근래에 시원(試院)에서 한 참시관(參試官)이 희롱으로 한 구(句)를 지었는데
좌주(시관)는 약주 한 잔도 안 먹었는데 / 座主下飮香醪一盞
어찌하여 얼굴이 붉어지는가 / 何烘其頭
제생들은 먹물 몇 되를 달게 마시니 / 諸生甘吸墨水數升
모두 그 입술이 검어졌도다 / 皆黔其吻
하였다. 나도 한 구를 남겼는데
차주발은 오늘로부터 비로소 커지고 / 茶椀始從今日大
술잔은 지난해에 가득하였음을 기억한다 / 酒杯仍憶去年深
하였더니,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 정인지(鄭麟趾)는 갑오년 초시(初試)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 복시(覆試)에서도 장원하였으니, 국조 이후로 한 사람뿐이다.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은 신유년에 생원진사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세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삼한(三韓) 이후로 듣지 못한 일이다. 사성(司成) 남계영(南季英)은 생원시에 장원하고 문과에 두 번째로 급제하였으니, 역시 그 다음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문경공(文景公) 권제(權踶)와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이고, 형과 동생이 연달아 장원한 이는 정언(正言) 유자빈(柳自濱)과 교리(校理) 유자한(柳自漢)이다.
○ 아버지와 아들이 잇달아 정승에 오른 이는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와 성렬공(成烈公) 황수신(黃守身)과 영의정 심온(沈溫)과 좌의정 심회(沈澮)이다.
○ 조선조에 장원으로서 정승에 오른 이는 하동부원군 정인지(鄭麟趾)ㆍ길창(吉昌)부원군 권람(權擥)ㆍ영성(寧城)부원군 최항(崔恒)ㆍ남양(南陽)부원군 홍응(洪應)이며, 고려에 장원하고 조선조에 정승이 된 이는 유량(柳亮)과 맹사성(孟思誠)이다.
○ 갑인년 별시(別試)에 영성부원군 최항은 장원이 되었고, 창녕(昌寧)부원군 조석문(曺錫文)은 방안(榜眼 2등)이 되었고, 연성부원군 박원형(朴元亨)은 탐화(探花 3등)가 되었으며, 능성(綾城)부원군 구치관(具致寬)은 병과(兵科 3등)가 되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네 사람이 잇달아 정승으로 올랐으니, 고금에 없던 일이다.
○ 갑오년(1414) 가을 친시(親試 임금이 직접 과장에 나와서 보이는 과거) 때에 독권관(讀券官) 하륜(河崙) 등이 과거 본 세 사람의 시권(試券)을 뽑아서 올리니, 태종(太宗)께서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장원을 뽑던 옛 일을 따를 것이다.” 하고, 손가는 대로 뽑아보니, 곧 문경공(文景公) 권도(權蹈)였다. 임금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도(蹈)의 아버지 근(近)이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였더니, 지금 그 아들이 장원이 되었으니 적이 위안이 된다.” 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번 과거는 나의 문생(門生)이니, 경등은 자기 문생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으므로, 하륜 등이 끝내 좌주(座主)의 예(禮)를 받지 않았다. 경오년 전시(殿試) 때에 독권관이 익평공(翼平公) 권람(權擥)을 제4등으로 추천하였다. 방이 나오자 문종(文宗)께서 이르기를, “권람은 몇 째가 되었는고.” 하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넷째입니다.” 하니,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로 하여금 시권을 읽어보게 하시고는 네 번 째에 이르러 “이 글이 진실로 장원이라.” 하고, 친히 제1등으로 뽑았다. 도(蹈)는 뒤에 이름을 제(踶)로 바꾸었는데, 제(踶)의 부자가 장원이 된 것은 모두 임금이 내린 것이다.


 

[주D-001]이금오(李金吾) : 당 나라 두보가 이금오(李金吾)와 함께 술을 먹으며 지은 시에, “취하여 돌아갈 때 통행금지에 걸리지 않겠느냐.” 하니, 금오가, “두렵다.” 했다. 금오는 지금의 검찰청장의 직이므로 이렇게 희롱한 것이다.
[주D-002]왕옥여(王玉汝) : 왕옥여(王玉汝)는 아마도 한옥여(韓玉汝)의 잘못인 듯하다. 송나라 한진(韓縝)의 자가 옥여인데 법을 엄하게 다스리므로 당시 사람들이, “차라리 호랑이를 만날지언정 한옥여를 만나지 말라.” 한 말이 있다.
[주D-003]동방삭(東方朔) : 한(漢) 무제(武帝) 때 사람으로 조정에 미관으로 있으면서 재담과 농담을 잘하였으며 임금 앞에서 괴이한 행동을 하기로 유명하였다.

홍재전서 제18권
 행장(行狀)
현륭원(顯隆園)의 행장(行狀) 기유년



선군(先君)의 휘는 모요, 자는 모로 숙종 원효대왕(肅宗元孝大王)의 손자이시고, 영종 현효대왕(英宗顯孝大王)의 아들이며,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낳으셨다. 삼가 행록(行錄)을 상고하면 다음의 내용이 있다.
탄생하시기 며칠 전에 성운(星雲)의 상서가 있었는데, 탄강하시자 얼굴이 훤하고 울음소리가 종소리 같아 영종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삼종(三宗)의 핏줄이 끊어지는가 했더니 이제는 지하에 가서도 열성조를 뵈올 면목이 생겼다.” 하시면서 숙종 경오년에 있었던 고사대로 곤전(坤殿)으로 하여금 아들을 삼게 하시고 원자(元子)로 호칭을 정했는데 그때가 바로 을묘년(1735, 영조11) 1월 21일이었다. 종묘 사직에 고하고 중앙과 지방에 대사면을 내렸다.
타고난 바탕이 크고 의젓하여 몇 달도 안 돼서 이미 두세 살 난 아이 같았으므로 제신에게 들어와 보라 하시고, 이어 근시(近侍)에게 명해 성경(誠敬) 두 글자를 써서 보이도록 하자 마치 알기라도 하는 듯 한참을 보았다. 가을에 보양관(輔養官)의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효경장구(孝敬章句)》를 등초하여 좌우로 하여금 날마다 그 곁에서 외우도록 했으며, 병진년에는 세자(世子)로 책봉하여 3월 15일에 모든 의식을 갖추고 양정각(養正閣)에서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이때 연신(筵臣)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저하(邸下)가 꼭 효종의 모습을 닮았으니, 참으로 종묘사직의 끝없는 복이옵니다.” 하였다. 영종께서 궁관(宮官)에게 명해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을 병풍에다 써서 올리게 했는데, 이때 와서는 이미 글자 뜻을 이해하고 왕(王)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영종을 가리키고, 세자(世子)라고 쓴 곳을 보고는 자신을 가리켰으며, 또 천지(天地) 부모(父母) 등 63자를 알았다. 정사년에 서연(書筵)을 처음으로 열고 《효경(孝經)》과 《소학초해(小學鈔解)》를 강하면서 궁관이 읽어 나가자 손으로 문왕(文王) 두 글자를 짚어 보이기도 했고, 궁관이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하자 목소리가 낭랑하고 몇 줄을 읽어도 틀린 곳이 없었다. 또 다섯 자를 크게 썼는데, 글자 획이 힘차고도 법도에 맞았다. 언젠가는 궁중에서 팔괘(八卦) 떡을 만들어 올리자 들지 않고서는, “팔괘 모양을 먹어서 되겠느냐.”고 했다. 얼마 후 복희도(伏羲圖)를 보더니 좌우를 시켜 앞에다 걸게 하고 여러 번 절을 하면서 경의를 표했다. 그후에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던 것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부 상견례(師傅相見禮)를 처음으로 행하고 나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우는데, ‘치(侈)’ 자를 배우더니 입고 있던 반소매 상의와 자색 비단옷 및 진주 장식의 모자를 가리키면서, 이게 바로 사치라고 말하고 즉시 벗어 버렸으며, 영종께서 명주와 무명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으냐고 물었을 때는 무명이 더 좋다고 했고, 어느 옷을 입으려느냐고 묻자 무명옷을 입겠다고 하였는데 영종이 신하들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성장 후에 미쳐서는 과연 무명이나 베옷만을 입을 정도로 타고난 성품이 원래 그리 검소했는데, 역적들은 그것을 도리어 화를 부르는 발판으로 삼았으니 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어느 날 저녁밥을 먹는데, 영종께서 부르자 즉시 밥을 뱉어 버리고 대답하며 일어났다. 좌우에서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소학》에 ‘밥이 입에 있으면 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여, 영종이 듣고는, “이제 겨우 세 살짜리가 체인(體認) 공부를 알고 있구나.” 하였다는 것이다. 무오년에 영종이 빈연(賓筵)에 납시자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신이 빈료(賓僚)로 있으면서 동궁 얼굴을 뵈오니 타고난 바탕이 탁월하고 영민하며 호걸스러워서 천고(千古)를 능가하는 기상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기르는 방법은, 격동시키지도 말고 그렇다고 그대로 두어서도 안 되니 장래의 성취는 그 모든 책임이 전하께 있습니다.” 했는데 그후로 소조(小朝)는 풍원군(豐原君)의 그 말이 본인의 마음에 꼭 맞는 말이라 하여 시종일관 풍원군에 대한 예우가 변치 않았다.
기미년에는 영종께서 묘당에다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을유년에 있었던 전례대로 내선(內禪)을 하려 하면서 이르시기를, “내가 즉위한 지 금년으로 15년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라는 것이 마치 초개(草芥)처럼 보이는데, 다행히 원량(元良)이 있어 이미 만으로 5세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이 짐을 벗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백성들을 소홀히 하는 것이겠는가. 송 태종(宋太宗)이 ‘짐(朕)의 몸을 어디에 둘까’라고 하였는데 무슨 마음으로 한 말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명이 내리자 조정 신료들이 강력히 청하여 결국 그 명을 철회하고 이어 소조로 하여금 시민당(時敏堂)에서 하례를 받도록 하였는데, 이는 내선이 곧바로 철회되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에 대비전에 휘호(徽號)를 올리면서 법복(法服)을 갖추고 예를 행하는데, 진퇴에 법도가 있고 조금도 실수가 없어 궁중의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했다.
기주(記注)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궁관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기를, “하늘의 태양 같은 의표를 한 번 보면 알 만하고, 눈빛도 예사롭지 않아 의젓하기가 성인(成人) 같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성인입니다. 바라건대 4, 5일 간격으로 한 번 요속(僚屬)을 접견하고, 8, 9일에 한 번씩 빈객(賓客)을 인접하는 것을 공식으로 정하도록 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다. 이때부터 강연(講筵)에 임하면 몇 번 읽지 않아 금방 외우고는 오래도록 잊어버리지 않았다.
임술년에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고 나서 주상께서 하교하기를, “원량(元良)이 곁에서 사묘(私廟)에는 언제 가느냐고 물었는데, 저 여덟 살짜리가 예를 행하고 싶어 그런다.” 하시고, 그로부터 며칠 후에 사묘에 가 배례를 올렸는데, 구경 나온 도성의 백성들이 그 자태를 보고서는 모두 춤을 추며 환호성을 올렸는데, 상께서는 이르시기를, “세자(世子)의 예를 거행하는 모습이 익숙하여 하나도 틀림이 없으니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도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하였다.
그해 3월에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고 유자(儒者)의 의관으로 문선왕(文宣王) 전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다음 명륜당(明倫堂)에 와서 박사(博士) 자리에 나아가 소학제사(小學題辭)를 강했는데, 다리 주위에서 그를 구경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었다. 언젠가 강학할 때 강관(講官)이 평소 배우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요순(堯舜)을 배우고 싶을 뿐 그 밖에는 모른다고 답하니 강관이 물러나서 말하기를, “융성했던 삼대(三代) 시절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말했으며, 또 누군가가 효제충신(孝弟忠信)을 강조하자 즉시 그 네 글자를 써서 자리맡에다 붙여 두었다. 강관이 또 성(誠)과 경(敬)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자, 답하기를, “성과 경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도 같아서 둘로 나눌 수 없다.” 했고, 궁관이 지은 시를 보여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시구 가운데 ‘동쪽에서 해가 떠서 사해(四海)를 밝힌다’라는 한 구절이 있었다. 궁관이 그 시를 보고 축하하기를, “그 시의 기상이 태조의 일출시(日出詩)와 같다.”고 하였다.
계해년 3월 17일 관례(冠禮)를 행하고 법복(法服) 차림으로 대조(大朝)를 알현한 후 물러 나와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았다.
행록(行錄)을 보면 다음의 내용이 있다.
영종을 모시고 앉아 있는데, 영종께서,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있어 온 조정 관료들 사이의 붕당론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묻자, 대우도 똑같이 하고 등용도 똑같이 하면 된다고 하여 영종께서 크게 칭찬하였다. 또 영종이 혹 밤늦게까지 일을 보실 때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기다렸다가 취침하신 후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으며, 독서를 시작하면 영종께서 항상 그만 하라고 할 정도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혹시 병이 있을 때 영종이 오시게 되면 반드시 의관을 갖추고 일어나 앉아 있으면서도 겉으로 피곤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궁중기문(宮中奇聞)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갑자년 1월 11일 가례(嘉禮)를 행했는데, 영의정 풍산(豐山) 홍공 봉한(洪公鳳漢)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사흘 후 빈궁(嬪宮)과 함께 주상을 따라 묘현례(廟見禮)를 행했다. 그런데 그 전에 혜성이 나타난 적이 있었다가 가례 때 와서 갑자기 없어졌다. 주상께서 또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이라는 책 표제를 써서 궁관을 시켜 진강하게 하시고, 묻기를, “마음을 어찌하여 거울에다 비유했으며, 성경(誠敬)을 왜 닦는 것에다 비유했을까?” 하니, 대답하기를, “경(敬)은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를 관통하는 공부이고, 성(誠)은 바로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그 성과 경이 곧 마음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했는데, 빈객(賓客) 이종성(李宗城)이 거기에다 더 부연 설명을 하니, 설명 내용이 매우 진지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그 성의에 감격해서 그에 대한 대우가 매우 융숭해졌다.
겨울에 상이 병이 들었다가 쾌유하자 진연례(進宴禮)를 행하고 얼마 뒤에 강석에 임했는데, 강관(講官)이 묻기를, “서연에서 독서하는 것과 잔치에 가서 풍악을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하자, 답하기를, “독서는 궁리(窮理)를 위해 하는 것이고, 풍악 듣는 일은 주상을 모시고 즐기는 일이므로 독서도 물론 좋지만 풍악을 듣는 것도 좋다.” 했다. 을축년에는 상이 상훈(常訓)을 지어서 읽어 보라 하시고는 이르시기를, “글자 음을 잘 붙여 읽고, 답변하는 것도 근거가 있다. 이는 실로 하늘에 계시는 영령들이 도와주신 것이고 또 한편 궁료들이 잘 교도한 소치이기도 하다.” 했다.
봄 주강(晝講)에 《소학》을 배우는데, 북제(北齊)의 태자(太子)가 고윤(高允)을 구제한 대목을 두고 궁관에게 이르기를, “이는 태자가 잘못했다.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속여서야 될 일인가. 고윤이 사실을 그대로 쓴 것은 바로 역사를 쓰는 법으로서 죽을죄가 아니니 그러한 뜻으로 구제를 했어야 했고, 만약 태무(太武)가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 울면서 간해도 된다.” 하였다. 병인년 봄에는 주상을 모시고 후원에서 볏모 심는 것을 구경하다가 상께서 농사일을 왜 어렵다 하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무더운 여름에 끓는 듯한 물속에서 베옷을 입고 김을 매니 그 어려움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상께서 그 정경을 두고 시를 지어 보라고 하시고는 지은 시를 평하기를, “첫 구절은 가뭄을 걱정하여 비를 바라는 뜻이고, 끝 구절은 나더러 덕을 닦으라는 뜻인데, 내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원량으로부터 더욱 노력하라는 말을 들으니 부끄럽기도 하고 가상하기도 하다.” 하시고, 이어 야대(夜對)에 들어서 이르기를, “오늘 동궁의 시를 보니 뜻이 크고 원대하였고, 대우행(大雨行) 한 구절은 마치 한 고조(漢高祖)가 읊었던 대풍가(大風歌)와 기상이 비슷해서 내 이제부터 마음에 믿을 데가 있게 되었다.” 하였다.
언젠가는 궁관들과 신임 사건(辛任事件)에 관해 논했는데, 의리(義理)의 근원을 시원스럽게 변별하셨고, 이어 애일잠(愛日箴)을 써서 뜻을 나타냈다. 주상이 병 요양 중에 약원(藥院)의 신하들을 불러 접견할 때 부제조(副提調)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어제 세자께서 밤 새워 곁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효도란 백행지원(百行之源)이라고 하는데,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 하니 참으로 종묘사직의 복입니다.” 하였다. 상께서 친히 권학가(勸學歌)를 지어 하유(下諭)하시고 이어 이르시기를, “근래에 또 원량이 독서에 열중하여 밤이 깊도록 앉아서 글을 읽는데, 내가 잠이 안 올 때 그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기운이 더욱 솟아나곤 한다.” 하였다.
정묘년에 궁중에 천연두가 유행할 때 병을 피해 거처를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기게 했는데, 삼전(三殿)의 안부를 오래 묻지 못한 것을 늘 걱정하고 있어 어느 연신(筵臣)이 그 사실을 상께 아뢰자 상께서는, “그 어린 나이에 어버이 사랑하는 마음이 가상하다.” 하시고 그날로 대가(大駕)가 그곳에 갔었고, 환궁할 때 또 직접 기후를 살피게 해 주기를 누차 청했지만 상께서는 돌아가도록 특별히 명했다. 또 언젠가 손수 보리를 심고 있는 것을 보고 상께서 묻기를, “심을 만한 것들이 많은데 왜 좋은 화초나 나무를 심지 아니하고 하필이면 보리를 심느냐?” 하자, 이것은 곡식이므로 그 결실을 보고 싶어서 심었다고 답하여 상이 크게 기뻐했다.
5월에는 상께서 환경전(歡慶殿)에 납시어 빈객(賓客) 및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의 신료들을 모두 입시하게 하고 서연을 열어 밤이 늦도록 강독도 하고 논란(論難)도 하다가 파하였는데, 상께서 크게 기뻐하시며 각 궁료들에게 차등 있게 상사(賞賜)를 베풀었다. 겨울에는 또 거처를 경덕궁으로 옮겨 이듬해 무진년 봄까지 계셨는데, 궁관을 시켜 기후 살필 것을 청했으나 상께서 그만두라고 하였으므로 문안 궁관(問安宮官)이 갈 때마다 의레 부주(附奏)를 했었다. 궁관 이이장(李彝章) 등이 고사(故事)로 묻자 답하기를, “예부터 성왕(聖王)으로 큰 효자 아닌 자가 뉘 있으리오마는 맹자가 유독 순(舜)을 칭했던 것은 보통 사람은 환경에 따라 마음이 쉬이 변하는데, 순만은 천하를 소유하고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을 일컬은 것이다. 마른밥에 나물을 먹을 때나 비단옷 입고 거문고 탈 때나 순은 똑같았다.” 했고, 또 이르기를, “이윤(伊尹)이 이 도(道)로 이 백성들을 깨우치겠다고 했는데, 그 도란 바로 위에서 말한 요순(堯舜)의 도이다. 요순은 먼저 깨달은 분들이고, 이윤은 요순보다 뒤에 깨달은 분이며, 그 백성들은 또 더 늦게 깨친 자들이다. 깨달음에 있어서는 대소천심(大小淺深)의 차이가 있지만 일단 깨닫고 나면 똑같은 것이고, 도도 역시 똑같은 것이다.” 했다. 또 말하기를, “백리해(百里奚)가 우공(虞公)에게 간하지 않은 일을 맹자는 지혜로운 처사라고 하였지만 장남헌(張南軒)은 간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 간하지 않은 일은 불충(不忠)이라고 했는데,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의리는 남헌의 말로 정도를 삼아야 한다.” 하고, 또 “임금이 현자를 참으로 좋아하면 군자(君子) 한 명으로도 많은 소인배를 물리칠 수 있다. 맹자가 도움 없이 외로운 존재인 설거주(薛居州)를 걱정했지만 군자가 고립 상태가 되면 왜 유독 설거주만 걱정스럽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기(氣)는 체내에 충만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잘 배양하면 요순이 되지만 잘못 배양하면 도리어 일을 해치는데, 한 무제(漢武帝) 같은 경우가 바로 그 예로 그것은 기(氣)의 죄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배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였다.
언젠가 서연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현사(賢邪)의 진퇴는 국가의 흥망과 관계된다. 좌우의 가까운 신하와 모든 대부(大夫)들과 온 나라 사람들이 옳다고 한다면 진퇴를 결정하는 데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그런데도 어렵게 여기고 신중을 기하는 것은 호오(好惡)와 공사(公私)의 구분에 있어 자기에게 명확한 기준이 서 있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칭송하고 헐뜯고 하더라도 거기에만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맹자가 뭇사람이 헐뜯는 가운데서도 광장(匡章)의 어짊을 입증했고, 사람들이 칭송했지만 중자(仲子)를 비난했던 이유이다. 따라서 반드시 내 마음의 저울과 자를 가지고서 상대를 헤아리고 취사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지 그렇지 못하면 화살이 도리어 자기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서연에서 《맹자》를 강하다가,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라는 대목에 대해서 논하기를, “주(周) 나라 덕이 지극하여 천하가 다 심복해 왔으니, 그때 주 나라 신하가 되지 아니한 자라면 그들은 모두 악에 물들어 백성을 해치는 자들이었다. 천리(天吏)로서 그들을 정벌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후세 유자들 중에는 주(紂)를 도왔느니, 상(商)을 떠났느니 하는 말로 무왕(武王)에 대해 시비를 가리려고 하고 있으니 그것은 좁은 견해이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선(善)이란 천하의 공리(公理)로서 자기가 진심으로 그것을 좋아하면 이 세상 모든 선이 다 자기의 것이 된다. 순(舜)의 지공무사(至公無私)한 마음이 바로 그랬다. 그러나 지혜가 밝지 못하면 남의 선을 알 수가 없으므로 학문을 하는 데는 반드시 치지(致知)를 우선해야 한다.” 했고, 또 이르기를, “마음은 한 몸의 주재(主宰)이니 잠시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마음이 한번 나가 버리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利)라면 인의(仁義)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이것이 《주역(周易)》에서 말한 ‘미리(美利)’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한 것이다. 맹자가 인의만 말하고 이는 말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미리의 이’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공자는 만약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했는 데 반해, 맹자는 관중은 증서(曾西)도 취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했는데, 상황에 따라 말한 것은 달라도 각기 다 맞는 데가 있으니 공자와 맹자의 견해가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 시의(時義)라는 것을 성인이 아니고는 누가 알겠는가.” 하기도 했다.
그해 여름에 화평옹주(和平翁主)가 죽었다. 그 전에 원자가 탄생했을 때 상이 영빈(暎嬪)에게 이르기를, “무게가 없으면 위엄이 서지 않으니 지금 이 명호를 정하는 초기에 규모를 크게 해서 주위에서 모두 우러러보도록 해야 한다.” 하시고는 백일(百日)이 지나자 소조(小朝)를 옛날 경종이 거처하던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고 전각 이름은 저승(儲承)이라 했으며, 여관(女官)과 시인(寺人)들도 모두 갑진년과 경술년에 내쳤던 경종을 섬기던 자들로 충원하였다. 이는 오염을 씻고 불순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안정시켜 화합의 기풍을 조성하려고 했던 것인데, 그들은 도리어 그것을 기화로 얼마 안 가서 입방아를 찧고 손뼉을 치면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를, “영빈이 비록 세자를 낳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사친(私親)이므로 군신(君臣) 관계가 있으니 자주 보게 해서는 안 되고, 또 보더라도 빈어(嬪御)가 정전(正殿)을 배알하는 예로 보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예절과 의식을 내세워 규제를 가하였다. 그 때문에 영빈은 자주 못 가고 그저 하루에 한 번, 혹은 하루 걸러서 또는 며칠 만에 한 번 가기도 하고 혹은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못 갈 때도 있었다. 그 계획이 저들의 마음먹은 대로 되자 이번에는 또 대조(大朝)가 자주 임어하시는 것도 꺼려하여 궁중 곳곳에 사람을 심어 두고 주상의 동정을 살펴 가면서 날마다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소조가 그 진상을 주상께 세세히 아뢰자 상께서는 비로소 깨닫고 후회했으나, 그 여관과 시인들이 모두 경종을 섬기던 자들이라서 차마 극형에 처하지는 못하였고 또 성상의 마음도 자연 그전과는 달라져 갔다.
그때 옹주가 울면서 아뢰기를, “경종과의 관계는 그 혐의가 별것 아니지만 대를 이어 갈 핏줄은 너무나도 중대한 문제인데, 일시적 사소한 일로 하여 종묘사직의 장래를 생각지 않아서야 됩니까.” 하여, 그때부터 양궁(兩宮) 사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통곡하고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하였다. 옹주는 또 한편으로 모빈(母嬪)에게도 간절히 간하였다. 그때 주상은 집복헌(集福軒)에 계셨는데, 저승전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정묘년에는 거처를 경춘전(景春殿)으로 옮겼다. 그것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 옹주의 청을 들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옹주가 지금 와서 갑작스런 병으로 죽고 말았으므로 소조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면서 앞으로의 난국을 헤쳐 나갈 방법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사실을 아는 바깥에서는 모두 동궁의 신변에 위험을 느꼈다.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 우빈객(右賓客) 이종성(李宗城) 등이 임기응변의 호위책(護衛策)을 발의하여 기사년 봄부터는 소조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도 했었다.
기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월 22일 밤 4경(更)에 상이 봉서(封書) 한 통을 정원에 내렸는데, 내선(內禪)에 관한 일이었다. 승지가 청대하여 그 봉서를 도로 올리며 아뢰기를, “아까 덕성합(德成閤)을 지나는데, 동궁이 벌써 촛불을 밝히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리하시면 그 얼마나 더 놀라고 어쩔 줄 몰라하겠습니까.” 하였다. 조금 후 저하가 대조가 계시는 문밖에 와 엎드려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입시하여 봉서를 뜯어보니 첫 번째는 내선에 관한 것이었고, 그다음은 대리(代理)에 관한 문제였었다. 제신이 서로 나서서 철회하실 것을 청했는데도 상께서 두 번에 걸쳐 저하를 앞으로 나오도록 명하였다. 저하가 어좌 앞에 나와 엎드려 오열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청하자 상께서, “옛날부터 있어 왔던 전례이니 놀랄 것 없다.”고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이 아뢰기를, “옛날 신축년에 청정(聽政) 명령이 내려졌을 때 전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자리에 임하셨는데, 어찌하여 전하의 그날 심정으로 오늘 동궁의 마음을 헤아리지 아니하십니까.” 하자, 상이 비로소 깨닫고는 대리 명령을 취소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첫 번째 문제는 다행히도 취소를 하셨으나 나머지 한 건도 신들로서 어떻게 감히 그 명령을 받들 수 있겠습니까.” 했으나 상께서 듣지 않으셨고, 저하는 그때까지도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차 상의 명을 받고서야 비로소 물러갔다.
그로부터 6일 후 시민당에서 조참(朝參)을 대리하고 영지(令旨)를 내려, 대소 신공(臣工)들로 하여금 허심탄회하게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며 마음을 합쳐 나라를 도우라고 하고, 또 각도에도 민생을 보살피도록 영을 내렸으며, 또 경향을 막론하고 때가 지나도록 혼인을 못 했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 자는 관에서 도와주도록 했다. 우참찬(右參贊) 원경하(元景夏)가 주상께 아뢰기를, “신들이 처음 자리에서의 영지를 보았을 때 모두 서로 격려하며 허심탄회하게 서로 공경하며 화합할 도리를 생각했습니다.” 했고, 호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아뢰기를, “대리 명령이 내려졌을 때 동궁 얼굴에 눈물이 가득하였는데 하는 일들이 절도에 맞아 바깥에서 듣고는 모두 경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주상의 하교 중에, 원량이 나보다 낫다고 한 틈을 타서 박문수가 조호(調護)에 관한 의견을 강력히 개진했으며, 또 며칠 후에는 인재 등용과 민생 돌보는 일에 대해 면교(面敎)를 내려 소조로 하여금 그대로 준행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그 뒤에 또 제왕가(帝王家)의 가법(家法)은 엄절한 것이 좋기는 하지만 너무 엄절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가법이 원래가 그렇다. 나도 옛날 조심조심하던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하였다.
궁중기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서연에서 《시경》을 강할 때 궁관에게 이르기를, “척호편(陟岵篇)에 자기가 어버이 생각하는 것은 말하지 않고, 어버이가 자기 생각하는 것만 말했는데, 효자는 부모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지만 자기가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 속에 있다.” 했고, 《상서(尙書)》를 강하면서는, “요순은 대성인이지만 그 신하들이 오히려 ‘게을리 하지 말라, 황음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신하로서 임금에게 고하는 도리는 책난(責難)하는 것을 위주로 삼아야 한다. 더군다나 요순보다 못한 임금에게 바른말 잘 하는 신하가 없다면야 나라 꼴이 되겠는가.”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은(殷)의 삼종(三宗)과 주(周)의 문왕(文王)은 안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나라를 누렸고, 제순(帝舜)은 인재를 골라 정사를 맡겨 버리고 편안하게 지냈기에 역년(歷年)이 가장 길었는데, 그것이 비록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무일(無逸)의 과정을 거치고 난 후에야 비로소 편안해지니 임금의 도는 무일을 버리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경오년 8월에 의소세손(懿昭世孫)이 탄생하여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행록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그해 9월에 영종이 온천 행행을 한 그다음 날 비가 내리자 유도 대신(留都大臣) 영의정 조현명 등을 불러 이르기를, “어제 대가(大駕)가 떠나자마자 많은 비가 내려 성상 체후에 혹시 손상이나 없는지 그것이 답답해서 경들을 부른 것이오.” 하고, 이어 유도 군병(留都軍兵)들을 위로하라고 명했다. 그때부터 환궁 때까지 거의 20일을 밤이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아침까지 있었으며 천안(天顔)을 오래 못 뵈었다 하여 밤낮으로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궁중에서는 그게 너무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묻자 말씀하시기를, “내가 태어난 후로 멀리 떨어진 것이 이번이 처음이어서 그리운 마음에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환궁하시어 영조께서 그 말씀을 듣고는, 원량이 하는 일은 언제나 상상 밖이라고 하였다.
기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미년 가을 각도에 여역(癘疫)이 극성을 부리자 영지(令旨)를 내려 방백(方伯)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특별한 보호 조치를 하라고 하였다. 임신년 봄에는 대조의 상호(上號) 문제로 여러 날을 두고 정청(庭請)을 하여 주상께서 황단(皇壇)에 가서 명을 비는 일까지 있었는데, 그때 많은 신하들이 울면서 환궁할 것을 청했으나 듣지 않다가 소조가 평복 차림으로 걸어서 주상 앞에 나아가 울면서 계속 간하자 자전(慈殿)께만 진호(進號)할 것을 명하고서 환궁했고, 소조는 명정전 월대에서 날이 샐 때까지 엎드려 있었다. 3월에 의소세손이 죽었는데, 소조는 위로 삼전(三殿)을 위로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슬픔을 억제하였고, 9월에는 원손(元孫)이 탄생하자 지금이 경오년의 그때보다도 더 기쁘다고 했으며, 겨울에는 홍진(紅疹)을 앓아누워 있으면서도 약원(藥院)의 직숙(直宿)들을 인접할 때는 반드시 의식을 갖추었으므로, 와내(臥內)로 불러 인접하도록 제신이 청했지만, 옷 하나 더 걸치는 게 뭐 그리 어려워서 누워서 신하를 인접하느냐고 하였다.
당시 조정의 논의가 두 갈래로 갈리어 그 때문에 영종이 약을 물리친 일까지 있었다. 소조가 승지에게 이르기를, “내가 4년을 대리청정하는 동안 성상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 심지어 약을 물리치기까지 하셨으니 내가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는가.” 하였다. 11월에는 상께서 무슨 일로 격노 끝에 선위하겠다는 하교를 하셨다가 금방 취소하고, 12월에 송현궁(松峴宮)에 행차하여 선위 명령을 또 내리고 며칠 지난 후에 또 선화문(宣化門)에서 종전 명령을 되풀이하여, 소조가 엎드려 울면서 머리를 조아려 이마의 피가 자리에 젖을 정도였다.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동궁이 지극한 효성으로 눈물을 저렇게 흘리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철회하실 것을 허락하셨으니 식언(食言)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깊은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다니는 것도 매우 민망스러운데 더구나 중병을 앓은 뒤인 데이겠습니까.” 하자, 이종성 등을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고 이튿날 대가가 육상궁으로 갔다. 소조가 옷자락을 붙들고 간청하려고 했는데, 상은 금방 또 창의궁(彰義宮)으로 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소조가 궁문 밖까지 걸어가서 상소를 했으나 답이 없어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취소할 것을 청했지만 듣지 않고 빨리 환궁하라고 독촉만 하였다. 다음 날 밤에도 또 궁문 밖에 가 엎드려 청했으나 역시 듣지 않아 돈화문(敦化門) 밖으로 물러 나와서 석고대명(席藁待命)하기를 여러 날 했다. 상이 또 북한산성 행궁으로 가시려고 하니 소조가 울며 승지에게 이르기를, “나야 죽거나 살거나 관계없지만 이 엄동설한에 성상께서 저렇게 추위를 무릅쓰고 다니시니 마음이 에이는 듯하여 안절부절못한다오.” 하시며 즉시 약원 신하를 시켜 다시 삼다(蔘茶)를 올리게 했는데, 그후로도 며칠이 지나서야 상께서 비로소 환궁하시고 전번 명령을 취소하였다.
궁중기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때 화협옹주(和協翁主)의 상을 당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그 누이에게는 각별한 정이 있는데, 지금 갑자기 가고 말았으니 이 슬픔을 어디에다 비할까. 직접 가서 이 슬픔을 쏟을 길도 없으니 지극히 한이 된다.” 하였다는 것이다. 계유년 1월에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당해 성 밖에 나가 있다가 3월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문녀(文女)가 임신 중이어서 나라 안팎이 온통 뒤숭숭했는데, 이종성이 위호론(衛護論)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작년 겨울 하마터면 뜻을 달리하는 자들에 의해 모함을 당할 뻔했는데, 지금 와서는 일이 더 다급하게 되어 고향으로는 끝까지 가지 않고 성 밖에 머물러 있다가 3월 초에 문녀가 딸을 낳자 비로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 은혜를 입어 온 터라서 어느 누가 나를 쫓아 버리려고 해도 내 마음은 끄떡 않고 또 비록 주먹질 발길질을 당해도 오직 죽음이 있을 뿐 물러서지는 않는데, 지금 다행히도 옹주가 태어났다니 이제는 내가 물러가도 된다.” 하고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소조는 이르기를, “백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문녀 문제는 나로서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고, 또 설사 있다 해도 일월(日月)같이 밝은 대조께서 틀림없이 준엄하게 물리치실 것이다. 다만 아랫것들이 양수걸이를 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상신(相臣)이 그 일을 조용하게 가라앉혔다.” 하였다.
겨울에는 왕명으로 삼복(三覆)을 행하여 사형수를 결정하면서 많은 죄수를 살렸고, 그후로도 해마다 그리하였다. 밤에 궁관을 불러 밤늦게까지 강론하고 궁관들에게 감귤을 내렸는데, 다 먹고 나자 쟁반 밑에 시가 있어 궁관들이 즉석에서 그 시에 화답한 일도 있었다. 갑술년에는 각도의 환곡(還穀)을 백성들에게 보탬이 되도록 하여 서민들의 절실한 고충을 덜어 주게 하고, 대동(大同)의 군포(軍布)를 돈으로 대신 방납(防納)하는 것을 금했다. 재지기[齋隸]가 임금이 하사한 은 술잔을 밤에 가지고 나갔다가 나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하여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권당(捲堂)을 하자, 이르기를, “대조께서 유생들을 얼마나 중히 여기셨는데, 감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소란을 일으켜 성묘(聖廟)에 사람이 없게 만든다는 말인가.” 하고, 병조의 장을 엄중히 추고하고 유생들은 입재(入齋)를 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논어》를 강하다가 삼월불위장(三月不違章)에 와서 강관이 아뢰기를, “이는 공자 말씀이므로 안자(顔子) 이름을 휘(諱)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자, 이르기를, “비록 공자가 말씀하셨지만 그것을 읽는 이는 뒷사람들이다.” 하고서 휘하였고, 영지를 내려 밖에 있는 서연관(書筵官)까지 모두 불러들여 사물잠(四勿箴)을 강하게 하고는 이르기를, “사욕(私欲)이 생길 때 대소천심(大小淺深)의 차이는 있지만 작은 잘못을 소홀히 여겼다가 결국 큰 허물을 초래하게 되면 그 피해는 똑같다. 한 소열(漢昭烈)이 ‘악이 작다 하여 하지 말라’고 한 말이 참으로 좋은 말이다.” 했는데, 상께서 그 말을 듣고는 기뻐하시며 학문을 강론한 힘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또 《소학》을 강할 때 이르기를, “애연(譪然)한 사단(四端)이 느낌을 따라 나타난다고 했는데, 나타나면 그것을 확충해 나가야 하지만 나타나기 이전에도 모름지기 주경(主敬)의 공부가 있어야 한다. 나타나기 전에 주경 공부를 해야만 그것이 나타났을 때 다 절도에 맞게 되므로 무엇보다도 우선 경(敬)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손사막(孫思邈)이 마음은 작게 하려고 하고 담력은 크게 하려고 한다고 했는데, 무왕(武王)의 군대가 맹진(孟津)을 건너갈 때 그야말로 의기양양하고 거칠 것 없는 기상이었는데도 오히려 밤낮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하였으니, 성인이 마음은 작게 하고 담력은 크게 하는 것을 거기에서도 볼 수 있다.” 하였다.
겨울에 춥다 하여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방면했고, 을해년 역변(逆變) 때는 주상께서 장전(帳殿)에 납시어 죄수들을 국문하면서 소조를 곁에 앉게 하고 말씀하시기를, “신임(辛壬) 연간의 여섯 흉적과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등을 지금에야 비로소 역률(逆律)로 다스리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음으로 하여 의리(義理)가 비로소 밝아졌다는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 하였다.
《강목(綱目)》을 강할 때는 이르기를, “즉묵(卽墨)이 끝까지 함락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위왕(威王) 때 상을 받았던 대부(大夫)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했기에 그날에 그 힘이 발휘되었던 것 같다.” 하고, 또 이르기를, “9명의 행신(幸臣)이 전단(田單)을 참소할 때 초발(貂勃)만이 그의 억울함을 주장했으므로, 제군(齊君)의 입장에서 초발이 전단과 무슨 사적인 관계가 있는가 의심할 법했는데도 의심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를 기용했으니 제군은 참으로 어진 임금이었다.” 했으며, 또 민지(澠池)의 모임에 대해 논하면서는, “협곡(夾谷) 모임에서 공자(孔子)가 임금을 예(禮)로 인도했기 때문에 제군(齊君)이 두려움을 느끼고 감히 노(魯) 나라에 무례를 행하지 못했듯이 인상여(藺相如)가 만약 처음부터 예로 대했더라면 틀림없이 힘을 그렇게 허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했다. 또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현군(賢君)이라고 할 수 있으나 황로(黃老)를 숭상하고, 단상(短喪) 제도를 주장했으며, 가의(賈誼)가 있었는데도 등용하지 않았으니 후세의 기의(譏議)를 면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다만 가의도 그 상소가 시정(時政)의 득실에만 매달려 이러쿵저러쿵 했지 근본 병폐에는 언급이 없으니 동자(董子)의 정군심론(正君心論)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당 현종(唐玄宗)이 ‘조정 일은 재상에게 맡기고, 변방 일은 장수에게 맡겼으니 짐(朕)이야 걱정할 게 무어 있느냐’고 한 말이 옛날에 이른바 ‘현자를 구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인재를 얻어서 맡겨 놓으면 편하다’고 한 말과 그리 틀리지 않은 것 같지만, 현종은 현자를 찾는 데는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맡기면 편안하다는 것만 알았기 때문에 결국 천보(天寶)의 난을 불러일으키고 말았으니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리고 또 한휴(韓休)와 소숭(蕭嵩)을 두고 논할 때 좌우에다 사사로운 말을 했던 그 자체가 벌써 현자를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딘지 억지로 한 기미가 있어 그리 썩 좋은 일은 못 되므로 그 정치가 끝맺음을 못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기도 했다. 또 이르기를, “위(衛)의 사군(嗣君)이 자기 조상의 토지를 일개 서미(胥靡)와 바꾼 것은 입법(立法)의 면에서는 엄밀하다 하겠으나 경중(輕重)을 안다고는 못 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악의(樂毅)가 제(齊)를 정벌할 때 극신(劇辛)이 고립된 군대가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들어 난색을 표했으나, 위(魏)는 송(宋) 나라 땅을 경략하고 있었고, 조(趙)는 하간(河間)을 수복하여 제 나라 군대를 충분히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거에 성공을 했다. 그러므로 용병에는 형세 판단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였다.
여름에 너무 더워서 궁관이 서연 여는 시간을 고쳐 정할 것을 청하자, 이르기를, “아침저녁은 시원하여 송습(誦習)하기에 알맞을 뿐만 아니라 대조께서는 낮시간에 주강(晝講)도 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더위가 싫다고 시간을 바꿀 것인가.” 하고 듣지 않았으며, 서연관 송명흠(宋明欽)이 고을을 맡아 나가면서 하직 인사를 하자 특별히 불러 《대학》의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대해 조용히 자문하고 토론하였는데, 수작(酬酢)이 메아리처럼 빨랐다. 송명흠이 아뢰기를, “성의, 정심의 문제는 송제(宋帝)도 듣기 싫어했던 문제인데 저하께서는 그 깊은 뜻을 밝혀내기에 권태를 모르고 그렇게 진지하시니 실심으로 공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또 《맹자》를 강할 때는 궁관에게 이르기를, “우(禹)가 용사(龍蛇)를 늪지대로 몰아냈다고 했는데, 우가 어떻게 용사를 몰아냈겠는가. 우가 물길을 트고 길을 내고 하여 물이 모인 곳이 늪이 되니 용사가 그리로 따라가 형세가 마치 몰아낸 것처럼 되었다. 그러므로 형세일 뿐이라고 하였다. 성인(聖人)이 때와 기미를 살펴 무엇이든지 척척 해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형세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진퇴존망(進退存亡)을 미연에 아는 이가 바로 시중(時中)의 성인이다.” 하였다.
병자년 5월에 낙선당(樂善堂)이 불에 탔다.
기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영지를 내리기를, “불초한 내가 외람되이 대리청정을 한 지 이미 8년이 되었으나 어느 일 하나 성상의 뜻에 맞게 해 드리지 못하고 번번이 걱정만 끼쳐 드려서 지금 와서는 사실 신료들 대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다. 다행히도 지극히 인자하신 우리 성상의 힘으로 오늘까지 왔는데, 어제 내리신 하교를 받고는 한편 감격하고 한편 황송하여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내가 불민하다고만 하지 말고 그때그때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했는데, 상께서 듣고는 하교하기를, “원량이 자기 책망의 말을 한 것이 어찌 덕 없는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겠는가. 모두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우심이다. 대소 신료들은 우리 원량의 그 뜻을 십분 이해하고 지성으로 돕고 인도하라.” 하였다.
궁중기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소조가 원래 술을 가까이 않는 것은 궁중에서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때로는 상반된 말이 떠돌고 있어 소조가 옛 성훈(聖訓)의 무면(無勉)의 뜻으로 영지를 내려 자신을 탓하고 또 주상께 과음(過飮)을 한 것으로 아뢰자 좌우에서, “그러한 사실이 없으면서 있다고 한 것은 도리어 성실치 못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소조가 답하기를, “지극히 인자하시고 지극히 현명하신 성상께서 그 사실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실 터인데, 내가 어떻게 감히 내 입으로 발명을 하겠는가.” 하였는데, 얼마 후 상께서 그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시며 이르기를, “그러한 말이 떠돌게 만든 것은 모두 내 불찰이다.” 하시며 누차에 걸쳐 감오(感悟)의 뜻을 보였다. 그리고 또 전교를 내려 성상의 뜻을 중외에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보다 앞서 불이 난 그 이튿날 상께서 신하들을 책망하며 이르기를, “근래 일어난 일들을 내게 와서 고하는 자가 없으니 믿을 만한 신하가 없다.” 하자, 역적 김상로(金常魯)가 대답하기를, “소조가 무서운 존재이기 때문에 감히 그리 못 하는 것입니다.” 하여, 다음으로 승지에게 또 물으니 승지 이이장(李彝章)이 아뢰기를, “세상에 그런 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그런 신하를 두었다가 어디에다 쓰시겠습니까.” 하니, 상께서 승지 말이 과연 옳다고 하였다. 이이장이 또 아뢰기를, “아버지에게 과실이 있으면 아들이 간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옛말에도 ‘아버지에게 간하는 아들이 있다’고 하였고, 자식에게 과실이 있으면 아버지가 책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맹자》에 ‘사람들은 어진 부형(父兄) 있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부자(父子) 사이에는 과실이 있으면 간하고 책망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성인이 말씀하신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긴다.’는 것은 간하고 책망하면서도 외인(外人)들이 모르게 하는 것으로 이것을 숨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하신 하교는 사실 성인이 말씀하신 ‘숨긴다[隱]’는 그 뜻과는 실로 위배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일이옵니까?” 하자, 상께서 드디어 얼굴을 푸시고 이르기를, “그것은 지성으로 한 말이다. 승지 같은 사람은 이렇게 걱정을 하지만, 저 몹쓸 것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이이장도 사건 내용을 다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아뢰고 말았다. 급기야 영지가 먼저 내리고 뒤이어 전교가 내리자 궁중 외정 할 것 없이 모두 서로 축하하면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인자하시기 때문에 감오한 것이고, 또 감오를 하게 한 것은 소조의 효성이다.”라고 하였다. 또 영지를 내려 직언 극간(直言極諫)을 구하고, 농사를 권장하고, 빈민을 구제하고, 서민들 아픈 곳을 찾아보도록 중외에 강조했으며, 겨울에 앓던 천연두가 말끔히 나아 축하를 올리고 사면령을 내렸다.
정축년 2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소조가 울부짖고 발버둥을 치며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초빈에서 발인 때까지 다섯 차례의 전(奠)과 일곱 차례의 곡(哭)을 모두 몸소 봉행하면서 정성을 다하였고, 새벽 밤낮 할 것 없이 곡소리가 거의 그치지 않아 내외척과 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찬탄을 아끼지 않았고, 그 소식을 들은 중외에서는 모두 눈물을 흘렸다. 상께서도 제신에게 이르기를, “나는 별로 슬픔을 못 느끼는데, 지금 저 원량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 어떻게 억제하고 살아갈지 모르겠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아뢰기를, “지난번 성상께서 병환 중이실 때 숭문당(崇文堂)에 입시하여 동궁께서 밤새워 애태우시는 것을 보고 혹시 큰 병환이라도 나실까 걱정했었습니다. 지금도 만약 저대로 그냥 두면 틀림없이 손상이 올 것입니다. 성상께서 가호(加護)하시기 바라옵니다.” 하였다.
3월에 인원왕후(仁元王后)가 또 승하하여 주상께서 너무 슬퍼하시자 소조가 좌우에서 위로하시며 정(情)과 예(禮)를 다했고, 6월에 정성왕후 발인 때는 대궐 문 밖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좌우를 슬프게 했고, 도성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울면서 앞으로 몰려드는 것을 전구(前驅)가 벽제하자, 다칠까 염려하면서 못 하게 하였다. 반우(反虞) 때 교차(郊次)에서 신련(神輦)을 맞이하면서는 자리에 눈물이 비 고이듯 고였고, “내 의장(儀仗)과 흠위(廞衛)가 가로막고 있어 바라볼 수가 없으니 대열을 나누어 가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묘지문(墓誌文)을 친히 지어 광중(壙中)에 넣기도 했으나 이 모두는 외신(外臣)들이 다 모르는 일이다. 그후로 병이 더 위독해졌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두 혼전(魂殿)에 칠우(七虞)와 삭망제(朔望祭)를 빠짐없이 행하여 병은 점점 더해지고 슬픔은 슬픔대로 더해졌는데 그때 보덕(輔德) 윤동승(尹東昇)이 중간에서 주선하고 조호(調護)한 힘이 컸다. 그리하여 늘 말씀하시기를, “만약 동승이 아니었다면 내 심정을 어떻게 밝게 드러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기주에 다음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무인년 가을 주상이 혼전 뜰에 엎드려 구주(口奏)를 했는데,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을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쓰게 하고,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파직하였다. 이튿날 아침 도승지 채제공(蔡濟恭) 등이 승지와 사관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아뢰기를, “전하께서 어찌하여 그러한 일을 하십니까. 신하로서는 감히 볼 수가 없고, 또 차마 보아서도 안 되는 내용입니다. 누가 감히 붓을 들고 그것을 기주(記注)에다 옮겨 쓰겠습니까. 신들은 만 번 죽을 각오로 이것을 돌려 드리고 물러가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는 그 구주 등본(謄本)을 옷소매 속에서 꺼내 주상 앞에다 놓았다. 한참 후에 주상이 이르기를, “말인즉 옳다. 내 그것을 받으리라.” 하였다.
그달 그믐날 주상은 명정전 월대에 계시고, 소조는 시민당 뒤뜰에서 석고대죄를 하고 있었다. 영부사 이종성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40년을 학문에 종사하신 전하께서 지금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사이에 이와 같은 일을 하시니 신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또 나를 책하는구나. 나는 물러가겠다.”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였다. 대신들이 영부사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니 자기 소회를 다시 말해 보도록 하라고 청하자, 이종성이 다시 아뢰기를, “신이 한 말이 그 뜻이 아닌 것이 아니라 남의 신하 된 도리는 대조 앞에서는 대조께 책난(責難)을 하고 소조 앞에서는 소조께 책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일로 말하면 신들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육군(六軍)이나 만민(萬民)도 모두 죽기를 원하는 마음밖에 없는데, 그가 우리 임금의 아들로서 장차 종묘사직과 신인(神人)을 맡아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전혀 과실이 없기를 밤낮으로 바라는 것이고, 불행히 과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천리(天理)요 인정(人情)입니다. 그리고 만약 왜 그래야 하는가의 까닭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가 바로 우리 임금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전하는 동궁과 바로 한 몸이신데, 어떻게 둘로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한 몸을 둘로 보시는 것이 바로 신이 마음 아파하는 점이옵니다.” 하고 이어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참소하는 자를 물리치라는 뜻으로 말을 끄집어냈다가 맺지를 못하고 물러갔고, 채제공과 여러 대신들도 시민당 뜰로 돌아와 소조를 대하였다. 이때 소조는 자신을 책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 말을 했고, 이종성과 채제공이 정성을 쌓아 주상의 마음을 돌릴 방법에 대해 번갈아 가며 의견을 말하였다.
궁중기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듬해 정월에 영부사 이종성이 죽었는데, 그가 임종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을 곳이 없을까 그게 걱정이다. 낙선당(樂善堂)에 입시했을 때 죽기를 각오하고 할 말을 다 하려다가 그리 못 했고, 명정전(明政殿) 입시 때도 그리하려다가 못 하고 지레 나와 버렸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살아서는 나라 저버린 사람이 되고, 죽어서는 눈감지 못하는 귀신이 되겠구나.” 하였다고 한다. 부음을 듣고 상께서는 깜짝 놀라 오래도록 슬퍼했고, 소조는 성복(成服)날까지 흰 띠를 두르고 소찬을 드셨으며, 삼년상이 끝나도록 제수를 내리고 그의 아들도 돌보았다.
기묘년에는 세손 책봉례와 중궁전 책봉례를 거행했다. 행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소조가 중궁을 꼭 정성왕후 섬기듯 하여 궁중에서 모두 그 돈독한 효성에 감격했으며 영종은, “원량이 내전(內殿) 섬기는 것을 보니 참으로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하시면서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내전도 소조에 대한 자애(慈愛)가 극진했다.
그해에 《무기신식(武技新式)》을 훈련원에 내리셨다.
궁중기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소조가 어려서부터 뜻이 영걸스러워 놀이를 할 때도 반드시 병위(兵威)를 펼쳤는데 주상께서 시험 삼아 물어보면 하나하나 자세하게 대답했으며, 군대의 훈련 동작에 있어서도 그 모두를 손으로 긋고 입으로 말하고 하면서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또 병가서(兵家書) 읽기를 좋아하여 기정 변화(奇正變化)의 묘리에 대해 모두 배우지 않고도 정통하였다. 효종이 무기를 좋아하여 틈이 있으면 북원(北苑)에 가 말을 달리고 무예를 익히곤 하였다. 그때 쓰시던 청룡도(靑龍刀)와 철퇴 등이 저승전(儲承殿)에 아직껏 있었는데 힘깨나 쓰는 무사들도 다룰 수가 없는 것을 소조는 15, 6세 때부터 그것들을 다 다루었다. 또 사어(射御)도 잘하여 활만 잡으면 반드시 정곡을 맞히고 아무리 사나운 말도 고삐만 잡았다 하면 고분고분하여 그때 궁중에서 하는 말들이, “풍원군이 연주 때에 꼭 효종의 기상을 닮았다고 했다더니 과연 선견지명이 있다.”고 했다.
그때 와서 장신(將臣)들이 무예를 익히지 않음을 걱정하여 《무기신식》이라는 책 한 권을 엮어 반포하였다. 척계광(戚繼光)이 쓴 책에 실려 있는 무기(武技)는 전해진 것이 육기(六技)뿐으로 곤봉(棍棒), 등패(藤牌), 낭선(狼筅), 장창(長槍), 당파(鎲鈀), 쌍수도(雙手刀) 등이며 연습 방법도 틀린 게 많아 그 모두를 구서(舊書)를 기준으로 정정하고, 또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劒),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劒), 제독검(提督劒), 본국검(本國劒), 권법(拳法), 편곤(鞭棍) 이상 12기(技)를 그림까지 곁들여서 치고 찌르는 자세를 나타내고, 그것을 하나의 전서(全書)로 만들어 훈련원에다 배부하여 익히게 했다. 언젠가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국토가 좁아 무(武)를 쓰려 해도 쓸 곳이 없지만 그래도 동에는 왜(倭)가 있고, 북쪽으로는 호(胡)와 이웃하고 있으며, 서남쪽의 큰 바다는 바로 옛날 중원(中原)이다. 지금은 비록 국경 지대가 조용하지만 미리 대비를 해야 한다. 더구나 효종이 뜻하신 바를 아직 펴지 못하고 있고, 북유(北囿)에 있는 척단(尺壇)이 우리의 적개심을 일깨우고 있음에랴. 아, 병기(兵器)는 비록 아무 일이 없을 때라도 성인(聖人)들이 미리 만들어 두고 외적에 대비했던 것인데,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효종께서 뜻을 둔 일까지 있는 데이겠는가.” 했으며, 또 날마다 벽돌 1백 장씩을 이리저리 옮겼던 도간(陶侃)을 늘 들먹이면서 고요한 밤이면 자신이 직접 해 보기도 했다.
또 이르기를, “의(醫)는 의(疑)인 것이다. 사람의 오장육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하나 미루어 가면 알아지기 마련이다. 나라 병을 고치는 솜씨는 말할 것도 없지만 약성(藥性)이나 맥리(脈理)를 대충만 알아도 오늘 한 사람 고치고, 내일 또 한 사람 고쳐서 그렇게 점점 숙달이 되면 한 시대의 명의(名醫)도 될 수 있다. 유자(儒者)의 학문은 의심에서 시작하여 의심이 없을 때까지 하는 것이지만 의술은 의문으로 의문을 푸는 것이다.” 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즉시 효험을 보기도 했으나 그것은 소기(小技)라 하여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또 의복 제도에 대해서도 이르기를, “옛날에는 의복이 각기 상징하는 바가 있었다. 지금 이른바 창의(氅衣)나 원몌의(圓袂衣) 같은 것을 나는 일찍이 싫어했다. 창의는 세 면이 막히고 뒤폭만 터져 있어 그 형상이 음(陰)에 속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은 양(陽)에 속하고, 오랑캐 나라들은 음에 속한다.’ 했는데, 우리나라에 창의가 생기고부터 비로소 북쪽으로 건주(建州)와 왕래가 있었고, 원몌의는 앞의 두 폭은 겹쳐지고 뒤의 한 폭은 끌리게 되어 역시 남쪽을 면(面)하고 북쪽을 등진 뜻이 아니다.” 하면서 평상시는 반드시 와룡관(臥龍冠)에 학창의(鶴氅衣)를 착용했는데, 학창의는 사마광(司馬光)의 심의(深衣) 제도를 모방한 옷이었다.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정복은 단령(團領)과 철릭(貼裏)이다. 단령은 바로 왕조(王朝) 회동(會同)의 복장이고, 철릭은 황제(黃帝)의 의상 제도이며, 전투복이 소매가 좁은 것은 그것도 고제(古制)로서 융사(戎事)를 다루는 의복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요즘 풍속은 무엇을 미리 대비할 줄을 모르고 또 절약하고 검소할 줄을 모른다. 미리 대비해 두면 걱정이 없고 검소하면 재정에 여유가 생긴다. 지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복장이나 편리하고 몸에 맞는 기물들을 나는 가까이하지 않았다.” 했으며, 또 이르기를, “궁중 사람들이 누가 잘못했다고 내게 와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두 쪽을 다 불러 서로 대질을 시킨 후 만약 혐의가 없으면 고인(告人)을 죄주고, 비록 사실일지라도 반드시 두 쪽 다 벌을 주는데, 그렇게 하였더니 고자질하는 자가 줄어들었다.”고 하였다.
사직(司直) 박치원(朴致遠)이 노력하라는 뜻으로 상서(上書)하자 후한 답을 내렸고, 그후 중신(重臣) 서지수(徐志修)가 서연에서 역시 경계의 뜻이 담긴 말을 하자, 이는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말이라고 했으며, 덕을 닦으라고 말했던 자들은 모두 칭찬을 받았다. 계방(桂坊)의 나삼(羅蔘)이 주연(胄筵)에서 입바른 말을 많이 했는데, 그후 궁료(宮僚)들을 대하면 반드시 그의 안부를 물었다. 하루는 궁관이 걱정스러운 시사(時事)에 관해 묻자 크게 책망하면서 이르기를, “그것은 우리 양궁(兩宮)을 이간질하는 짓이다. 소인 무리라는 것은 바로 그런 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기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때 액례(掖隷)가 영지(令旨) 내리는 것을 빙자하여 민간에 횡포를 부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일이 발각되자 즉시 담당관에게 넘겨 다스리게 하고 이어 영지를 내리기를, “요즘 기강이 해이하여 이후로도 그러한 폐단이 없으라는 법이 없다. 다시 범한 자가 있으면 법사(法司)가 곧바로 체포해서 다스리라.” 하였다.
경진년 가을에 상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기고, 7월에 온천에 갔다가 8월에 환궁하였다. 행록을 살펴보면 다음의 내용이 있다.
당시 소조가 오랜 병을 앓고 있어 영종께서 온천욕을 하라고 하셨다. 수레가 강변에 이르니 물이 불어 뱃길이 좋지 않아 늦게야 비로소 건넜는데,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 등과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말에 대해 서로 논의하였다. 이튿날 수원에 갔는데 그 북쪽에 있는 화산(花山)이 바로 기해년에 영릉(寧陵)으로 치표(置標)한 곳이다. 거기 올라 사방을 두루 보며 한참 동안 감탄하며 구경하고 산성(山城)으로 돌아와서는 무기(武技)를 사열했는데, 연로(輦路)가 지나는 곳의 부로(父老)들이 모두 나와 길을 막고 얼굴을 보려고 했다. 소조는 곧 수레를 멈추게 하고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묻고 정요(征徭)를 경감하도록 하니 고을 전체가 크게 기뻐하였다. 한 위사(衛士)의 말이 콩밭에 들어가 짓밟고 뜯어 먹자 지방관을 불러 밭 주인에게 후한 보상을 해 주게 하고 즉시 그 위사를 다스렸다. 그 고을의 연로자를 위문하고 유일(遺逸)들을 불러 후하게 대우했으며, 온천에 도착해서는 날마다 강연을 열어 열성조가 온천 행행 때면 옥당관(玉堂官)을 불러 대했던 고사(故事)를 따랐다. 절구(絶句)를 지어 궁관들로 하여금 화답하게도 하고, 달이 바뀌자 망궐례(望闕禮)를 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궁료들에게 묻기도 했으며, 이어 궁궐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 견딜 수 없이 그립다고 하면서 그날로 수레를 돌렸다. 서울에 도착하여 곧바로 경희궁으로 가 문안하려고 했는데, 영종께서 미리 도승지를 보내 성 밖에서 맞아 유시하기를, “병을 앓고 나서 먼 길을 달려왔으니 바로 돌아가서 조섭을 하고 다음에 틈이 있거든 오도록 하라.” 하였다. 어느 재상이 나아가 아뢰기를, “학가(鶴駕)가 한 번 왕림하자 호중(湖中)의 인사들이 예덕(睿德)의 탁월함을 비로소 알고는 부로(父老)와 사서(士庶)가 모두 동궁의 덕을 칭송했으니 참으로 신민들의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 행차 때 출궁(出宮)에서 환가(還駕)까지 빈번히 수봉(壽鳳)을 시켜 지나는 지방을 돌면서 그곳 주민들을 위로하게 하고 혹시 재해를 당한 곡식이 없는지 살폈으며, 또 너무 더운 때를 만났으므로 약원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도중에 더위 먹은 장졸들을 구제하게 했기 때문에 돌아올 때까지 병에 걸린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신사년에 와서 현재 입장의 필요한 대책을 대신들에게 물었던바 대신들이 답을 못 하자 드디어 서읍(西邑)으로 갔는데, 그것은 바로 주상께 직접 말하여 적들의 모사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역적 홍계희(洪啓禧)가 오히려 그 중간에서 난을 꾸미려고 하여 소조가 그 소식을 듣고는 길을 재촉하여 지레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승지 한 사람이 주상께 아뢰어, 조정 신하가 소조에게 올린 상소문을 보시라고 청한 자가 있어 사태가 급박하게 되었으므로, 소조가 직접 주상 앞에 나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의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아뢰었고, 주상께서는 그 말을 듣고 비로소 의심이 풀렸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소조가 빈연(賓筵)에서 이르기를, “저군(儲君)도 임금은 임금인데, 신사(臣事)라고 했다 하여 거기에 간모(奸謀)가 들어 있다고 한다면 그게 될 말인가.” 하면서 역적 홍계희의 무엄한 행위에 대해 거듭 준엄하게 꾸짖고 그를 강충(江充)에다 비유했었다. 그러나 음모가 그때부터 더욱 급박해져서 임오년 5월에 역적 나경언(羅景彥)이 처형되었다.
기주와 궁중기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경언이 형조(刑曹)에다 한 통의 투서를 했는데, 그 투서 내용에, “전하의 바로 가까운 신하들이 모두 불충(不忠)한 마음을 품고 있어 변고가 당장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이 있어 형조 관원이 그 투서를 소매 속에 넣고 가서 청대(請對)했는데, 그때 역적 홍계희가 경기 감사로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상께서 함께 입시하도록 명했는데, 형조 관원이 그 투서 내용을 고하자 상께서는 깜짝 놀라 내시(內侍)에게, “나경언이 액례 나상언(羅尙彥)과 같은 족속이냐.”고 물으니, 내시가 바로 나상언의 형으로서 그도 일찍이 액례에 속해 있던 자라고 대답하였다. 상이 역적 홍계희에게, “궁성(宮城)을 호위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홍계희가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국가에 변란이 있으면 궁성을 호위하는 것인데, 무신년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하여, 상께서는 성문을 닫고 군대를 풀어 각 궁문을 파수하도록 즉시 명하고, 이어 태복시(太僕寺)로 가서 나경언을 국문하니 나경언은 꿰맨 옷 속에서 또 한 통의 봉서(封書)를 꺼내 주상께 올렸는데, 그 봉서가 길이는 5촌(寸)이 넘고 둘레는 한 줌에 가득 찼다. 상이 보고 나서 좌상에게 보이니, 좌상이 받아 겨우 몇 줄 읽더니만 목 놓아 울면서 아뢰기를, “신이 먼저 죽겠습니다. 동궁이 만약 이 소식을 듣는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가서 위로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상께서 그리하라고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한익모(韓翼謩) 등이 아뢰기를, “경언이 흉칙한 말을 지어내어 모함하여 위로 동궁을 핍박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면서, 엄히 국문하고 사형에 처할 것을 누차 청하자 상이 비로소 형을 가하라고 명했다. 사서(司書) 임성(任珹)이 분개하면서 한익모에게 말하기를, “그 흉서(凶書)를 어찌 경언이 스스로 만들었겠는가.” 하니, 한익모는 또 그 사주자가 누구인가를 빨리 밝힐 것을 청했다. 이에 상이 노하여 한익모를 파직시키니, 대사간 이심원(李心源)이 한익모를 구제하기 위해 나섰다가 그도 파직을 당했다. 한익모 등이 파출되고 난 후에 나경언은 결국 동궁을 무함한 것으로 자복하였다. 이에 제신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극형에 처할 것을 청했고, 동지의금부사 이이장(李彝章)은 말하기를, “일반 사람을 무함해도 그것은 역적인데, 더구나 이군(貳君)을 무함한 자이겠는가. 흉칙한 말은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죄인이 이미 실정을 자복했으니 저 역적과 함께 살 수는 없다.” 하면서, 앞에 나아가 강력히 주장하였다. 주상의 책망이 거듭 내려졌으나 그의 주장은 더욱 절직(截直)하여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때 소조는 걸어서 궐문 밖으로 가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께서 들어오라고 하여 드디어 뜰에 와 엎드려서 눈물에 옷이 다 젖도록 울었고 뭇 신하들은 감히 얼굴을 들고 바라보지 못했다. 새벽녘에 정휘량(鄭翬良)이 비로소 청대하여 아뢰기를, “죄인이 이미 ‘무함동궁(誣陷東宮)’이라는 넉 자로 자복을 하였으니 그 죄는 단 하루도 그냥 둘 수 없습니다.” 하여, 상이 그제서야 나경언에게 사형을 가하도록 명했고, 소조는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환궁하여 울면서 제신에게 이르기를,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였다.
윤5월 21일 훙서(薨逝)하니, 시호를 사도(思悼)로 내렸으며, 궁호는 수은(垂恩)이라고 하고, 7월 23일에 양주 배봉산(拜峯山)에다 갑좌(甲坐)로 안장했는데, 장례 지내는 날 주상이 친히 광(壙)에 임하여 어필로 제주(題主)하였다. 다음 달에 조재호(趙載浩)를 북변에 귀양 보내고 그의 조카 조유진(趙維鎭)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있는 것을 대간이 법으로 처리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 동룡(銅龍)을 볼 때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여러 신하들은 차마 말 못하는 이 심사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빨리 정지할 것을 명하고 이어 말한 자에게 죄를 내렸으며, 조유진은 여러 번 고문을 당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할 말만 하다가 정배되어 가던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기주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윤5월 13일 검열(檢閱) 윤숙(尹塾)이 뜰에다 이마를 짓찧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서도 호위를 밀치고 나가 의관을 불러 약을 가져다 올렸다. 그때 대신들이 모두 합문 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윤숙이 위사(衛士)들을 물리치고 몸을 빼 뛰어나와 대신의 손을 잡고 함께 들어가서 신만(申晩) 등을 책하면서 아뢰기를, “이렇게 위급할 때 대신들이 왕의 섬돌에 머리통을 부수며 죽기를 작정하고 강력하게 간언하지 않는다면야 그런 대신을 어디에 씁니까.” 하였다. 역적 구선복(具善復)과 홍인한(洪麟漢) 등이 각기 흉계를 부려서 윤숙도 결국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지만 상께서는 오히려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분사(分司)의 한림 임덕제(林德躋)가 소조를 따라 뜰아래 엎드려 있으면서 곁을 떠나지 않자, 상께서 내쫓으라고 했으나 땅에 버티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 위사가 끌어내자 임덕제가 꾸짖기를, “내 손은 사필(史筆)을 잡는 손이다. 이 손을 끊을지언정 끌어낼 수는 없다.” 했는데, 정의(旌義)로 귀양 갔다가 윤숙과 함께 곧 풀려났고 그후 임덕제는 궁관으로 임용되었다.
임성과 권정침(權正忱) 등은 죽기를 각오하고 나가지 않았고, 분주서(分注書) 이광현(李光鉉)도 역시 빠져나와 의관(醫官)을 데리고 들어왔으며, 도승지 이이장은 머리를 찧고 울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하자 상이 노하여 군문(軍門)에 붙여 효수하라고 하였다. 쫓겨난 뒤에 또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땅에 엎드려 통곡하였는데, 전교(傳敎)를 쓰라고 하자, 신이 죽으면 죽었지 그 명령은 못 듣겠다고 하면서 금오문(金吾門) 밖으로 달려 나가 명을 기다렸다. 패초(牌招)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었는데, 그후 그에게 묘소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겼다. 송형중(宋瑩中) 등은 대간이 다른 말을 꾸며 탄핵했던 관계로 상으로부터 준엄한 척퇴를 받았으나 그가 죽자 즉시 그의 아들을 녹용하라고 명령하면서, 나라가 어지러우니 어진 재상이 생각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분사 제조(分司提調) 한광조(韓光肇)는 궁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가 갓을 벗고 울어 대자 상이 파직을 명하니 한광조가 이르기를, “신이 죽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한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했으나 또 몰아내라고 하자, 통곡을 하며 기어 나갔다. 또 그의 아버지는, “머리통을 부수고 죽어 버리지도 못했으면서 무슨 참반(參班)을 할 것인가.” 하고 반교(頒敎) 때 참여하지 않았는데, 한광조는 대정(大靜)으로 귀양 갔다가 금방 풀려났다. 그후 주상이 하교하기를, “그때의 처분에 대해 나도 후회하고 있다.”고 하였고, 그가 죽자 친히 제문(祭文)을 짓기를, “부자(父子)가 한 조정에서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하고, 이어 그의 아들을 녹용했다.
승지 조중회(趙重晦)는 울면서 강력 진언하다가 도배(島配) 명령을 받았지만 금방 철회되었는데, 계속해서 또 항언(抗言)하다가 결국 멀리 귀양 갔다. 그러나 그후 그를 두고 모진 바람에 굳센 풀을 안다고 하시며 총재(冢宰)까지 승진시켰고, 제학(提學) 한익모(韓翼謩)는 다섯 번씩이나 소명을 어기고 교문(敎文)도 짓지 않았는데 이르시기를, “분의(分義)로 보아 그럴 법도 하니 부르지 말라.” 하고서도 또 치사(致詞)를 지어 올리도록 했는데, 그에게 소패(召牌)가 여덟 번이나 내렸지만 끝까지 나오지 않고 금오문에서 석고대죄했다가 삭직을 당했는데, 그후 여러 차례 가상하다는 칭찬을 하시고 영의정으로 발탁하였다. 승지 이익원(李翼元)은 강력히 버티면서 전교를 쓰지 않았고, 승지 정순검(鄭純儉)은 전상에 올라가 큰소리로, “신을 죽이소서. 신은 비록 죽더라도 이 교서는 감히 반포하지 못하겠습니다.” 했다가 파직당하고, 총관(摠管) 이태화(李泰和)는 갓을 벗고 머리를 짓찧으며 극구 간쟁을 했지만 뒤에 특명으로 가자(加資)되었다.
갑신년 가을 입묘례(入廟禮)를 거행할 때 상이 친히 임하시고, 을유년 5월 기신(忌辰) 때는 하루 전날 시사(視事)를 멈추게 하고 조정 신료들에게 윤음(綸音)을 내리기를, “작년 이후 처음으로 이날을 당해서 경연(經筵)을 정지했었는데, 그게 어찌 내 편의를 위한 것이겠는가. 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그게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니 또 어떻게 영령을 위로하겠는가. 아, 신하들아. 지금 80을 바라보는 임금의 오늘 심정을 알아서 신하의 분의에서 설사 부잡하고 다투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 와서는 봄눈 녹듯이 다 녹여 없애기를 바란다.” 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은 지금 병 조섭 중이므로 상선(常膳)을 드셔야 한다고 청하였다. 이튿날은 또 수은묘(垂恩墓) 헌관(獻官) 홍낙인(洪樂仁)에게 명하여 제사가 끝난 후에 문 주위를 살펴서 아뢰라고 하고 그가 경연에 나오자 나무들이 얼마나 자랐더냐는 등의 사정을 자세히 묻기도 하였다.
가을에는 상께서 의궁(義宮)에 행차하여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묘궁(廟宮)에 가 절을 하게 하면서 눈물 바람으로 보내고 그때 일들을 많이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이어 도보로 후원 산기슭에 올라가 담에 기대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후부터는 밤중이면 일어나 문지방을 두들기며 탄식하기를, “옛날에 사자궁(思子宮)과 망사대(望思臺)가 있었다더니 내가 직접 그 지경을 당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느냐.” 하고, 또 연신들에게 이르기를, “그때 조정 신료 중에 충절이 안금장(安金藏) 같은 자가 있었던가. 지금까지도 협잡을 부리는 자가 있으니 그게 무슨 심보란 말인가.” 하였다. 무자년에는 주상이 전정(殿庭)에서 향지영례(香祗迎禮)를 행할 때 효장묘(孝章廟) 이하 각묘(各廟)의 향축(香祝)과 다른 신하들이 압존(壓尊)이 되어 즉시 국궁(鞠躬)을 하지 않자, 상이 소리를 지르면서 거기 모시고 참례한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고, 이어 병조 판서 및 시위(侍衛)한 여러 신하들을 전부 잡아들이게 하고는 하교하기를, “아, 대륙의 한 모퉁이 청구(靑丘)가 바로 조선(朝鮮)이다. 이군(貳君)의 혼령을 맞이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제신은 하지 않는가. 아, 수은(垂恩)이여. 오늘 제신 중에는 10년 동안 신사(臣事)한 사람들이 많으니, 무심(無心)하다고 말하지 말라. ‘무심’ 그 두 글자를 이러한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고, 다시 자정전(資政殿)으로 가 대신 이하 제신을 궁전 앞에 모이게 하고, 10년 동안 신사했던 의리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유시했으며, 이틀 후 대정(大政)을 행하면서 또 대소 신료들에게 유시하기를, “아, 임오년에 있었던 일을 어찌 차마 말하랴. 그의 자질이 아름다웠었는데 내가 사실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했고, 경인년에는 또 의금부에 하교하기를, “왕년의 일을 들먹이면 내가 들었을 때 마음이 뒤집힌다.” 했으며, 갑오년 여름에 가물자 친히 묘소에 가 제문을 직접 지어 전작례(奠酌禮)를 행했는데, 세손(世孫)도 그때 따라갔었다. 제신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단비가 올 것이다.” 하고는 찬례(贊禮) 이하 뒤따라온 근신(近臣)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병신년 봄에는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비롯하여 모든 공문서의 정축년부터 임오년까지 있었던 차마 말 못할 내용의 기록들을 전부 지워 버리라고 하면서 이르기를, “그에 관한 세손의 상소를 듣고 특별히 청을 들어준 것이다. 지금의 내 마음은 슬퍼 견딜 수가 없다.” 하시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리고 전교(傳敎)를 쓰라고 하시면서 또 이르기를, “지금 나는 밤낮으로 마음이 오직 종국(宗國)에 있을 뿐이다. 지금의 이 일도 실은 충자(沖子)를 위해서다. 아, 임오년 윤5월의 일기(日記)는 사도(思悼)가 저승에서라도 지각이 있다면 틀림없이 울먹이면서 ‘내 이제 한이 없다.’고 하리라. 그리고 그때 일기(日記)는 실록(實錄)의 전례대로 승지(承旨)와 주서(注書)가 함께 차일암(遮日巖)으로 가서 세초(洗草)해 버리라. 아, 내가 덕이 없어 이 만고에 없는 일을 당하였다. 그러나 말세 인심이 부잡하여 떠들기를 좋아하니 비록 그때 그 일기를 본 자라도 그것을 다시 문자(文字)로 들먹이는 자가 있으면 그는 무신년 효경(梟獍)의 남은 종자로 알고 준엄한 징벌을 가하겠다. 하물며 뒷날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후로는 임오년 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당연히 역률(逆律)로 논할 것이다. 모두들 이 말을 똑똑히 듣고 나라 법을 범함이 없도록 하라. 충자(沖子)가 직접 이 유시를 들었으니 나는 이제부터 마음 푹 놓고 자도 되겠다.” 하였다. 그 이튿날 또 세손에게 명해 묘소에 가서 절하고 제례를 행하라고 하시면서는 이르기를, “세손의 오늘 심정이 어떨지를 누워서 생각해 본다. 왜 그의 심정만 그러하겠는가. 내 심정은 어떻겠는가. 그러니 오늘 심정은 과연 태어난 후 처음이다.” 하였다.
궁원의(宮園儀)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병신년에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상(追上)하고, 궁호(宮號)는 경모(景慕)로 고치고 원호(園號)는 영우(永祐)로 하였으며, 계묘년에는 또 수덕돈경(綏德敦慶)이라는 존호(尊號)를 추상하고, 갑진년에 또 존호를 홍인경지(弘仁景祉)로 추상했다. 사당에서의 제례(祭禮)는 태묘(太廟)에 비해 한 등급 낮추고, 원의(園儀)도 그에 준한다.

임하필기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築城)에 대한 논의



숙종 30년(1704)에 신완(申琬)이 아뢰기를, “북한산성은 매우 험조(險阻)한 데다 도성(都城)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대가(大駕)가 이곳에 주필(駐蹕)한다면 도성의 사민(士民)들이 힘을 합쳐서 이를 굳게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록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더라도 결단코 이를 모두 포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를 방해하였다.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보장(保障)할 수 있는 곳으로 말하면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다로 도적이 침입하게 될 경우 이때 대가(大駕)가 강도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말하면 이는 비록 산세(山勢)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실로 천연의 요새(要塞)로서 이 또한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성에 대한 계책으로 말하면 신의 생각은 수상(首相)과는 다소 다릅니다. 도성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북한산성의 둘레는 도성에 비하여 5리나 더 된다고 하며 지세의 험함도 도성보다 더하므로 이 또한 넓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북한산성을 새로 쌓는 공력을 도성을 증수(增修)하는 데 들인다면 그것이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으로서 사민(士民)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지키면서 이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 부모를 보호하고 처자를 보존하게 한다면 어느 누군들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바쳐 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신완이 말하기를, “험조(險阻)한 점으로 말하면 북한산성이 훨씬 더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에 주필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이미 북한산성을 쌓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성이라도 쌓아서 근본에 대한 계책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여가 말하기를,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말하면 바다의 방위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먼저 육지의 병력을 안정시켜서 근본을 튼튼하게 한 다음에 이를 굳건히 지켜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산성은 비록 험고(險固)하다고 말하지만 만약 도성을 적에게 내주고 위축된 병력을 가지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적들과의 간격이 단지 하나의 성문(城門)을 격한 것이 될 뿐이니, 이러고도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감히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성을 버리고서 군부(君父)를 모시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만전(萬全)을 도모하는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경인년(1710, 숙종36)에 장신(將臣) 이기하(李基夏)와 김석연(金錫衍)을 보내어서 북한산성 축성(築城)의 편의 여부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이에 김석연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이덕형(李德馨)은, 바로 도성의 지근(至近) 거리에 이와 같은 천연의 요새가 있는데도 이를 그냥 버려두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바다의 도적이 염려된다는 북자(北咨 청나라의 자문(咨文))로 인하여 상도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묘년(1711, 숙종37) 4월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이해 9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다음 해 임진년 4월에 거가(車駕)가 이곳에 행행(幸行)하여 그 천연의 험고함에 감탄하였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다.


 

숙종 29년 계미(1703,강희 42)
 3월15일 (경신)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북한산성의 축성하는 일을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구(金構)가 아뢰기를,
“나라의 보장(保障)은 다만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이 있을 뿐인데, 전일에 성상의 하교에 또한 이르기를, ‘남한은 외롭게 떨어져 있고 강도는 조금 멀며, 또 해구(海寇)를 피하는 데에 적합하지 못하다.’라고 하셨으나, 신의 염려하는 바는 다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양도(兩都)가 비록 믿을 만하더라도 군기(軍器)와 군량[糧餉]을 서울에 저장하였으니, 만일 피란하는 일이 있으면 다만 도적에게 이용되는 자료가 될 뿐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급한 때에 임하여 파천(播遷)할 계책을 하려고 한다면, 미곡은 날마다 먹는 식량이므로 비록 폐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병기(兵器)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만들지 말게 하여 한갓 재력만 허비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득책(得策)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완풍 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 조정의 의논이 갈래가 많았는데, 이서가 홀로 자신이 담당하여 마침내 그 역사(役事)를 완성하여 병자년·정축년 난리에 힘을 크게 얻었습니다. 또 듣건대, 이서가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어 대선(大船) 10여 척을 감독해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의혹스레 여기므로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그 만든 까닭을 물으니, 이서가 말하기를, ‘만일 사변이 있어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가게 되면, 건너갈 배를 만들어 기다리게 하려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선배(先輩)가 나라를 위하는 깊은 생각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방금 국가가 안일에 빠져서 구차하게 무사한 것만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사변이 있으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한 사람도 깊이 근심하고 먼 앞일을 생각하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이 편리하다고 여겨 다시 가서 거듭 살펴보니, 천지 만엽(千枝萬葉)이 둘러 쌓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또 깍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功役)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낳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都城)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지만 군부(君父)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軍兵)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수 있습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이 일을 발단(發端)한 자는 신(臣)인데 조정 의논이 서로 달라서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저으기 개탄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승평(昇平)한 지 70년에 재이(災異)가 거듭 이르고, 세도(世道)가 더욱 떨어져서 어느 때에 어떤 화변(禍變)이 있을지 알지 못하니, 사전(事前)에 준비하는 계책을 어찌 늦출 수 있겠습니까? 전일에 소란[騷屑]이 있자, 도성 백성이 모두 북한산성을 빨리 쌓기를 원하여 재물을 내어 부역(赴役)하려고까지 하였으니, 모든 일이 진실로 나라에 이(利)로우면 백성이 비록 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인정(人情)을 크게 볼 수 있으니,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란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흉년에 백성을 부역시킬 수 없다.’고 하지만 이것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기민(飢民) 가운데 장정(壯丁)을 거두어 모아서 양식을 주어 부역하게 하면, 무슨 의심스러움이 있겠습니까? 이기하(李基夏)가 전번에 도성을 지키기를 청하였는데, 신도 반드시 도성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산성은 지세가 높아서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 보고 있으니, 사람에 비유하면 목을 조르고 등을 누르는 형세입니다. 만약 도성을 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삼고 힘을 합하여 같이 지킨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북한산성을 버린다면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코 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형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대저 일을 행할 시초에는 여러 의논이 뜰에 가득한 것인데,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단연코 시행할 뿐입니다.”
하였다. 김구(金構)는 말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쌀 1만 석·면포(綿布) 1천 동(同)과 역군(役軍) 1만여 명으로 두어 달 역사(役事)를 하면 완전히 쌓을 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통영 순검(統營巡檢)의 쌀과 베를 가져와 쓴다면, 재물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혹시 파월(播越)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쌀과 베가 산처럼 쌓였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는 대사(臺榭)를 영작(營作)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고, 장차 종사(宗社)가 의탁할 곳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니, 재력(財力)을 아낄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에 들어갔는데, 선조(宣祖) 경인년신묘년 무렵에 이런 천변(天變)이 있자, 충신 조헌(趙憲)이 천문(天文)에 정통(精通)하여 남에게 보낸 글과 조정에 올린 상소에, ‘어찌 이런 천변이 있는데 병란(兵亂)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한 말이 있었는데, 얼마되지 아니하여 임진(壬辰)·계사(癸巳)의 병화(兵禍)가 있었습니다. 앞의 일이 이미 징험되었으니, 일찍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홍수주(洪受疇)는 말하기를,
“대개 민정(民情)을 들어 보건대,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이 성(城)에 들어가기만 하면 난리에 이르러서 처자(妻子)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며, 모두 같은 말로 성을 쌓기를 원하는데, 이제 만약 중지하면 반드시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신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卿)이 올린 책을 내가 이미 자세히 보았다. 대저 조용히 생각하건대, 양도(兩都)의 보장(保障)은 믿을 수 없음이 저와 같고, 도성(都城)은 넓고 커서 또한 지킬 수 없으니 형편으로 말하자면 북한산성이 가장 좋다. 인조(仁祖) 병인년에 비로소 남한산성을 쌓았는데, 병자년 난리에 처음에는 강도(江都)로 들어가려고 하였다가 마침내 남한사성으로 들어갔으니, 그때에 만약 남한산성이 없었다면 나랏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지 알지 못하겠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마음이 떨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오늘날 사변의 준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옛날에 유선주(劉先主)가 강릉(江陵)으로 달아날 적에 강한 도적이 뒤에서 추격하는데, 백성들이 어린애를 업고 서로 따르자 선주가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하여 하루에 수십 리만 갔으니, 이는 이른바 신의(信義)가 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도성 백성이 우러러 받드는 바는 오직 국가인데, 난리에 임하여 창졸간에 버리기를 잊은 것처럼 한다면, 왕자(王者)가 백성과 더불어 어려움을 함께 하는 뜻이 아니니, 백성이 어찌 윗사람을 친하고 장관(長官)을 위해 죽을 마음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 성을 쌓아서 군기(軍器)를 단련하고 식량을 저장하여 군신(君臣) 상하가 한 마음으로 굳게 지키면, 종사(宗社)가 파월(播越)하는 욕됨이 없고 도성 백성이 흩어질 염려가 없으며, 온 성(城)의 안팎이 문득 부자(父子)와 같아서 병졸(兵卒)은 죽음으로써 싸워서, 마침내 천험(天險)의 요새지를 지키게 될 것이니, 어찌 만전의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형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도성을 지키기를 청하였는데, 성상께서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병사(兵事)에 어두워서 끝내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도성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면 또한 마땅히 더 쌓아야 할 것인데, 공력(功力)이 새로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김구가 말하기를,
“도성은 넘보는 산[窺山]이 많이 있고, 성첩(城堞)이 낮고 약하며 지세가 낮고 평탄하므로, 비록 더 쌓는다 하더라도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하자,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도 도성(都城)을 더 쌓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성(山城) 중에 넘보는 산이 없는 것은 아주 적으니, 비록 넘보는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방어할 대책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신은 감히 도성의 일은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김구의 말에는 서로 힐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북성을 쌓은 뒤에 도성을 포기하여 청야(淸野)의 법과 같이 한다면 혹시 될 수가 있겠지만, ‘우선 민병(民兵)으로 성첩을 지키다가 급할 때에 다다라서 물러가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황급히 옮겨 들어갈 즈음에 백성이 장차 짓밟혀서 모두 죽을 것이며, 북성의 사민(士民)의 마음도 또한 반드시 놀라 소란할 것인데 어찌 능히 성을 지키겠습니까? 이 일은 거의 아이의 장난과 같으므로 결코 옳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전일 성상의 하교에, ‘책언(嘖言)을 근심하셨으니, 다시 마땅히 선후책(善後策)을 깊이 생각하여 역사를 시작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구가 말하기를,
“노약자와 군량[粮餉]을 먼저 옮겨 들이고, 지존(至尊)을 모시어 성첩(城堞)을 파수하면, 사민(士民)의 용기나 백 배나 더할 것이니 견고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없으며, 인하여 남은 군사로서 도성을 아울러 지키고,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높은 데 올라가 험한 곳에 웅거하기를 고사(古史)에 이른 바와 같게 한다면, 또한 족히 스스로 튼튼할 것이며 평지에 진영(陣營)을 연한 것과는 아주 다를 것인데, 어찌하여 짓밟혀서 남는 백성이 없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쪽과 저쪽 두 성이 서로 순치(脣齒)의 형세를 이루면, 적(賊)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거가(車駕)가 머무는 곳에는 적(賊)이 그곳에만 마음을 써서 공격할 것이니, 반드시 북한산성을 놓아 두고 도성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며, 비록 도성을 탈취한다 하더라도 백악(白岳)과 인왕산(仁旺山) 밑은 형세가 오래 머물기는 어려우니,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서로 달라서 적의 형세 또한 피폐해질 것입니다.”
하자, 민진후가 말하기를,
“하나의 도성도 오히려 넓고 크다고 하면서, 새로이 성을 쌓아서 남은 힘으로 두 성을 다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성을 지키는 자가 처음에는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로 믿을지라도, 진(陣)에 임하여 적과 대하면 오히려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하물며 반드시 지키지 못할 형세를 먼저 보이고서 급함에 임하여 옮겨 피하게 하면 군사의 마음이 이미 흉흉(洶洶)할 것이니, 어찌 능히 굳게 지키겠습니까? 이미 도성을 잃으면 북한산성의 사람들이 형세를 바라보고서 기운이 빠져 또한 곧 함락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사리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린아이도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일을 시작하는 데에도 오히려 아주 안전하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이겠으며, 일이 작은 것도 살피고 삼가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군비(軍備)의 일이겠습니까? 다시는 위험한 일을 행하는 데 유의하지 않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북한산성은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 보고 있어서 포(砲)와 돌이 서로 미칠 수 있으니, 우리가 북한산의 형세를 웅거하여 굽어보면서 적의 사명(死命)을 제압하면 적이 쳐다보고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능히 오래 머물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먼저 북한산에 웅거하면 비록 사대문(四大門)을 열어 놓을지라도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취상(尹就商)은 말하기를,
“두 성의 형세가 내외성(內外城)과는 다름이 있으니, 가령 도성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어찌 북한산성을 보존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오직 수어(守禦)는 적임자를 얻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고, 김구는 말하기를,
“지금 재이(災異)가 이와 같은데, 만일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도리어 둘째 일이니, 성을 쌓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성의 형편은 진실로 아주 안전하므로 이때에 비록 역사(役事)를 시작하지 못하더라도,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먼저 여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경리(經理)하도록 하라.”
하자, 신완이 일어나 하례하기를,
“성상의 계책을 이미 굳게 정하셨으니, 진실로 종사(宗社)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이 자주 갈려서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있는데, 고을의 탕패(蕩敗)는 진실로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대계(臺啓)는 풍문(風聞)에서 나왔으니 비록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마는,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면 한갓 사체(事體)만 손상시킬 뿐이어서 윤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뜬소문으로 전하는 말은 사실과 틀리기가 쉬우며, 바꾸는 장리(長吏) 또한 반드시 어질지는 못할 것이다. 이 뒤로는 대각(臺閣)에서 마땅히 발론(發論)할 처음에 자세히 살필 것이다.”
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사실과 어긋남으로써 인피(引避)한 사례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일에 최진한(崔鎭漢)은 잘 다스린다는 명성(名聲)이 있었으나 탄핵을 받고 떠나가므로, 신이 잉임(仍任)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발론한 대신(臺臣)이 오히려 끝까지 스스로 옳다 하니, 진실로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홍수주(洪受疇)는 말하기를,
“요즘의 대계(臺啓)로써 말하면 연안(延安)의 은결(隱結)과 전화(錢貨)는 거의 장오(贓汚)에 가까운데도 죄가 파직에만 그쳤으니, 비록 억울한 단서가 있더라도 어떻게 변명해 밝힐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은 마땅히 잡아다 사실을 조사하면 죄가 있고 없음은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풍문은 간혹 사실과 어긋남이 있지만, 만약 이로 인해 외축되어 탄핵하는 일이 없으면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무엇을 징계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염려하심이 민폐(民弊)에 미치시니 뜻이 매우 거룩하십니다만, 만일 대계(臺啓)에 대해 문득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으로 의심하시면 대각을 가볍게 여기는 잘못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각의 논의가 어찌 반드시 모두 옳겠으며, 또한 어찌 모두 그르겠는가? 탄핵이 한 번 일어나면 반드시 벼슬이 갈리고야 말게 되니, 내가 자세히 살피도록 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원전】 40 집 9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주D-001]병자년 : 1636 인조 14년.
[주D-002]정축년 : 1637 인조 15년.
[주D-003]파월(播越) : 임금이 파천(播遷)함.
[주D-004]대사(臺榭) : 정자.
[주D-005]경인년 : 1590 선조 23년.
[주D-006]신묘년 : 1591 선조 24년.
[주D-007]병인년 : 1626 인조 4년.
[주D-008]유선주(劉先主) : 삼국 시대 촉(蜀)의 유비(劉備).
[주D-009]청야(淸野)의 법 : 전시에 적의 이용을 없애기 위하여 건물이나 들에 있는 곡식 등을 없애는 것.
[주D-010]책언(嘖言) : 청국의 비난.
[주D-011]지존(至尊) : 임금.
[주D-012]순치(脣齒) : 이해관계가 밀접함.
[주D-013]금성 탕지(金城湯池) : 견고한 성지.
[주D-014]장리(長吏) : 수령.
疎齋集卷之十
 
北漢山城禁衛營移建記 a_172_258b



聖上三十七年辛卯四月。分命訓局御營及本營。改築百濟古城。各置軍營於信地。庾粮備械。國家異日緩急。將與都民共守此天險也。其十月。城役完。本營。築自龍巖東南。至普賢峰下。二千八百二十一步。一172_258c 千六十五垜。城門二。曰大東小東。皆上設譙樓。暗門二。柴壇峰爲將臺。下有房屋十間。城廊六十區。凡一百七十八間。保國,普光,龍巖,太古四寺屬焉。營舍倉庫。九十餘間。初設于小東門內。以其地勢高。風雨萃。倉隅當水道易傾壞。乙未三月。移建于保國寺下。哨官邢義賓。經紀財力。把摠張友軫。蕫領功役。至八月告成。石砌一百二十步。中堂負巽。中軍以下各所及倉廏門廊。共一百三十七間。山抱水深。結搆增固。可以永護儲胥云。


  태조 2년 계유(1393,홍무 26)
 1월21일 (정묘)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

이조에서 경내(境內)의 명산(名山)·대천(大川)·성황(城隍)·해도(海島)의 신(神)을 봉(封)하기를 청하니, 송악(松岳)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和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 성황(城隍)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무등산(無等山)·금성산(錦城山)·계룡산(鷄龍山)·감악(紺嶽)·삼각산(三角山)·백악(白嶽)의 여러 산과 진주(晉州)의 성황(城隍)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護國)의 신(神)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劉敬)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원전】 1 집 40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東國李相國全集卷第三十五
 碑銘
故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奉宣述 a_002_062a


夫道本自如。孰抑揚是。要之世與人而已矣。蓋人能弘道。非道弘人。人固難得。而閱千百世。儻一値焉。則世與人二者相須。而後道行焉。況道之最者曰禪。非若膠於文句者。而直見自家所有一靈印耳。降及叔世。妄執鉗固。不知佛是吾物。捨而之外。認賊爲子者多矣。道不終否。世將002_062b復古。於是乎有眞人出焉。與道吻合。得正法眼藏。陶鑄生靈者。繄我國師是已。國師姓田氏。諱志謙。字讓之。系出靈光郡太祖功臣雲騎將軍諱宗會。而光廟朝。擢第龍頭。官至樞密院使諱拱之之六代孫也。皇曾祖諱漑。檢校大子詹事。皇祖諱德普。大倉署令。皇考諱毅。檢校大子詹事。皇妣南宮氏。良醞令榮之女也。母夢梵僧至家請寄宿。因而有娠。及生。骨相峻爽。機神英邁。弱不好弄。常若有思念者。忽遇異僧曰。此子塵中無着處。師自是斷葷腥。002_062c年甫九歲。懇求出家。十一。就禪師嗣忠祝髮。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師天資警悟。淹貫外典。以此潤色。故凡於問對詞辯。捷疾如機發箭激。不可遏已。一時公卿名儒韻士。想望風彩。願與之交焉。自少已有宿望如此。明廟卽祚元年。始擧禪選。時內侍鄭仲壺掌選。夢神人告曰。明日得王者師。是日師中焉。舊諱學敦。是年。遊角山。宿道峯寺。夢山神告曰。和尙名志謙。何用今名。遂改焉。大定己酉。始住登高寺。明昌四年。批除三重大師。七年。加禪師。泰和四年。又加大002_062d禪師。師旣名聞四方。凡內外有開禪會。輒請師主盟。師亦以荷擔宗乘。傳法度人爲己任。承安四年。移住郁錦寺。是年。進禮郡設禪會。請指南者。上命師赴焉。是會也。縣令李中敏夢。天人告曰。淨佛國土。何囹圄不空耶。及覺。遍體流汗。躬至獄門。罪無輕重。皆原之。聞者莫不驚歎。泰和戊辰。旱甚。上迎入內道場說法。至五日不雨。師憤之。乃禱佛曰。佛法不自行。須憑國主。今若不雨。靈應何存。無幾何。甘澍霶霈。時號和尙雨。師至孝。凡得檀施。苟有異饌。先送孀母。然後敢自002_063a食。一日聞母亡。遂於帝釋前禱曰。母若算窮。願以子壽代之。未幾。家僮馳報夫人已起。時以爲孝感所致。泰安辛未。移住國淸寺。崇慶二年。康王卽祚。循祖宗舊例。欲得釋門重望爲師。時晉康公當國。爲上遴選。凡於兩宗五敎。求可以承當大任者。無出師右。遂以師薦焉。上遣重臣。請行摳衣之禮。師上表固讓。上復遣使。敦諭至再三。師不獲已受請。上特遣上將軍盧元崇等兩使。就所寓普濟寺。備禮封崇。受冊訖。遂入大內。親受師禮。上以廣明寺近帝闕。請住焉。申以居002_063b頓寺爲本寺。充香火之費。秋八月。上不豫。師亦發背疽。門人等請禱。師厲色曰。上體不安。而子幸有疾。切欲移之身。汝將禱耶。上升遐。今上嗣位。以寧考師。復崇師禮。恩遇益縟。晉康公亦割捨愛子。剃度爲門人。其餘士大夫亦爾。門弟之盛。近古未之有也。貞祐五年。忽謂門人曰。吾起寒門。至爲王者師。於分足矣。豈可貪冒恩寵。久留輦轂耶。遂上書乞退甚篤。上不得已允之。以花藏寺境地淸勝。薪水贍足。請下安於此。將行也。晉康公邀餞。公出拜。親扶腋上階。及上道。贈002_063c寶馬。又遣門客等衛行。師雖在千里。上之眷意不已。屢遣近臣問安。其贐餉亦無虛月矣。下寺之十三年己丑六月十五日。震雷暴作。大石崩落。是日。師示微疾。七月二日。晨起盥洗。召門人玄源。裁書三道。囑國王及今相國晉陽公高僧松廣社主。告以長邁。寫訖良久曰。今日行未便。迨後日迺別。遂就寢至八日。忽起告衆曰。定光寂寂。慧日明明。法界塵寰。臍輪頓現。有僧問故人云。後夜月初明。吾將獨自行。作麽生是和尙獨行處。答曰。蒼海闊白雲閑。莫將毫髮着其間。002_063d言訖。叉手當胸。翛然坐逝。顔如傅粉。脣色丹潤。遠近無不奔赴瞻禮。上聞訃震悼。命近臣將作少監趙光就及日官等監護喪事。遂茶毗于寺之西岡。拾靈骨葬于登禪山之麓。仍降制贈諡靜覺國師。享年八十五。僧臘七十五。國師爲人。略無緣飾。因性循理而已。雖歷住大伽藍。每至齋時。先衆而出。手擎鉢立待。麤食淡羹。與衆均味。而未曾別開饌食。其精勤佛事。雖盛寒酷熱。略無欹傾倦怠之色。此皆老境所難而能行之。嗚呼。眞化身菩薩歟。其感應靈異之事。則雖或002_064a多焉。皆道境之細。而又恐後人以爲怪誕。故於此不載。門人大禪師廓雲等聞于上曰。師沒久。碑猶未立。是臣等所深疚。請爲文者鑱諸石。以永其傳。上命小臣文之。仍賜額曰某碑。臣未敢辭避。謹再拜銘之曰。
達摩傳心兮靈光東曜。後學倒見兮背鏡求照。焯焯國師兮揭日以行。一廓煙氛兮昏矇皆。法王出世兮祖月重暉。覺路司南兮學者知歸。門弟林林兮親哺以乳。又翼其鷇兮放之使飛。種福滋久兮流潤罔極。天子屈尊兮北面請益。002_064b生爲帝範兮卒作國師。龜鑑斯亡兮安所取則。上命小臣兮期以不晦。臣拜刻銘兮與山作配。來者去者兮騎行則下。寧不拜佛兮惟碑是拜。

견한잡록(遣閑雜錄)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沈守慶) 찬(撰)

○ 조정의 과거를 말하면 거듭 장원한 이가 거의 없었으나, 정인지(鄭麟趾)는 급제와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남계영(南季瑛)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이석형(李石亨)은 한 해에 생원시와 진사시 그리고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은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흔(金訢)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다. 신종호(申從濩)는 진사시와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金千齡)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고, 김극성(金克成)은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으며, 김구(金絿)는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양응정(梁應鼎)은 생원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김홍도(金弘度)는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이이(李珥)는 한 해에 생원시와 급제에서 장원하였고, 생원시의 초시와 급제 복시에서도 모두 장원을 하였으며, 정윤희(丁胤禧)는 급제와 중시에서 장원을 하였고, 강신(姜紳)은 진사시와 급제에서 장원을 하였으니 이들은 진실로 어려운 일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이석형ㆍ신종호ㆍ이이 같은 이는 더욱 어려운 일을 하였다. 한 집안이 거듭 장원 급제한 일도 있으니, 김흔ㆍ김전(金銓) 형제와 김흔의 아들 김안로(金安老)도 모두 장원을 하였다. 김천령ㆍ김만균(金萬均)ㆍ김경원(金慶元)은 연이어 3대가 장원을 하였고, 채수(蔡壽)와 그 사위 김안로ㆍ이자(李耔)가 모두 장원을 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조정에서 5형제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일이 거의 없으나, 그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부모가 생존하면 쌀을 주고 죽은 이에게는 관작을 주는 것이 법례로 되어 있다. 이예장(李禮長)ㆍ이지장(李智長)ㆍ이함장(李諴長)ㆍ이효장(李孝長)ㆍ이서장(李恕長)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으며, 안중후(安重厚)ㆍ안근후(安謹厚)ㆍ안돈후(安敦厚)는 문과에, 안관후(安寬厚)ㆍ안인후(安仁厚)는 무과에 각각 합격하였다. 이기(李芑)ㆍ이행(李荇)ㆍ이미(李薇)는 문과에, 이권(李菤)ㆍ이영(李苓)은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윤호(尹晧)ㆍ윤탁(尹晫)ㆍ윤철(尹㬚)ㆍ윤순(尹㫬)ㆍ윤서(尹曙)는 4년 동안에 연이어 문과에 합격하였으니, 그 부모가 더욱 기이하다. 또 심연원(沈連源)ㆍ심달원(沈達源)ㆍ심봉원(沈逢源)ㆍ심통원(沈通源)이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심연원은 중시(重試)에, 심봉원은 탁영시(擢英試)에 각각 합격하였고, 심달원은 일찍 죽었으나, 그 아들 심전(沈銓)이 또 중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드문 일이다. 박형린(朴亨麟)ㆍ박홍린(朴洪麟)ㆍ박종린(朴從麟)ㆍ박붕린(朴鵬麟)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고, 황위(黃瑋)ㆍ황성(黃珹)ㆍ황진(黃璡)ㆍ황찬(黃璨)은 모두 문과에, 황수(黃琇)는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윤방(尹昉)ㆍ윤양(尹暘)ㆍ윤휘(尹暉)ㆍ윤훤(尹暄)은 모두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그 부친인 전(前) 의정(議政) 윤두수(尹斗壽)가 아직 생존하고 있으니, 비록 5형제는 아니라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 무자년 이후에는 사마방(司馬榜) 안에 장원 급제한 자가 많아서 때로는 5, 6명이나 되고, 적어도 2,3명 이하는 없었는데 계묘년 사마방에는 오직 심수경(沈守慶) 한 사람뿐이니, 이는 기이한 일이다. 계묘년 후 갑진년부터 계축년까지 10년 동안의 식년시와 별시와 알성 정시(謁聖庭試)에 매번 급제하였고 계묘년 사마시에 연이어 2등을 하고, 그 후 여러 방에서도 2등을 하였으니, 더욱 기이하다. 이것은 우연한 것 같으면서도 우연이 아니다.
○ 고려 때 매번 방을 내걸 때에 장원 급제한 이는 용두회(龍頭會)를 열어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자랑으로 여겼다. 김양경(金良鏡)은 뛰어난 재주로 과거 시험에 2등을 하여 벼슬이 재상이 되어서도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더니, 그 이웃에 용두회를 여는 이가 있자, 시를 지어 보내기를,
듣자니 그대 집 귀빈들의 잔치는 / 聞道君家宴貴賓
아름다운 숲 모두 하나의 봄이네 / 佳林渾是一枝春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려 하여도 분수 아님이 부끄러워 / 欲參高會慙非分
문득 그때 2등 됨을 한하네 / 却恨當年第二人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용두회를 열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나처럼 재주없는 자도 어쩌다 요행히 장원을 하였는지라, 장원의 명예를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웃에 사는 유근(柳根)ㆍ황혁(黃赫)ㆍ황치성(黃致誠)이 모두 장원을 하여 네 명의 장원이 이웃하고 있으니, 역시 성대한 일이다. 내가 장난삼아 김양경의 시에 차운(次韻)하기를,
옛날 용두회의 주빈이 성대하더니 / 昔會龍頭盛主賓
폐지된 지가 몇 해나 되는고 / 邇來停廢幾秋春
우리 이웃이 전조의 일을 본뜨려고 하나 / 吾隣欲效前朝事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워라 / 却恐觀瞻駭世人
하였다. 김양경은 김인경(金仁鏡)으로 이름을 고쳤다.
○ 무자년 이후 사마방(司馬榜) 안에서 의정부에 참여한 자는 무자년의 윤원형(尹元衡)ㆍ권철(權轍)ㆍ홍섬(洪暹)이고, 신묘년의 민기(閔箕)ㆍ이탁(李鐸)ㆍ정유길(鄭惟吉)이고, 갑오년의 노수신(盧守愼)이고, 정유년에는 없었으며, 경자년의 박순(朴淳)ㆍ김귀영(金貴榮)이고, 계묘년의 강사상(姜士尙)ㆍ나ㆍ심수경(沈守慶)이며, 병오년 춘시와 추시에는 모두 없었고, 기유년의 정지연(鄭芝衍)ㆍ유홍(兪泓)이다. 임자년에는 유전(柳琠)ㆍ정탁(鄭琢)이고, 을묘년에는 이양원(李陽元)ㆍ최흥원(崔興源)ㆍ윤두수(尹斗壽)이며, 무오년에는 이산해(李山海), 신유년에는 정철(鄭澈)이며, 갑자년에는 유성룡(柳成龍)ㆍ이원익(李元翼)이고, 정묘년에는 김응남(金應男)이고, 경오년 이후는 때를 아직 알지 못한다.
○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이로 의정부에 참여한 자가 거의 없으나, 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권남(權擥)ㆍ홍응(洪應)ㆍ신승선(愼承善)ㆍ유순정(柳順汀)ㆍ김안로ㆍ심통원(沈通源)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ㆍ노수신ㆍ정철ㆍ심수경이다. 나는 재주로 없고 덕망도 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갑신년 여름에 내가 좌참찬이 되었을 때, 영의정에는 박순, 좌의정에는 노수신, 우의정에는 정유길이며, 우찬성에는 정철과 나였는데, 모두 장원 급제를 하였다. 3공(三公 박순ㆍ노수신ㆍ정유길)은 모두 대제학을 지냈고, 찬성(정철)은 이때 제학을 겸하고 있었으며, 나도 일찍이 제학을 지냈으니, 이 다섯 사람은 한때 동료로서 성대한 일이라고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담담한 정승청에 장원들만 모였으니 / 潭潭相府會龍頭
인간 성사로 비교하기 드무네 / 盛事人間罕比侔
한때 규와 벽처럼 빛난다고들 말하는데 / 爭道一時奎璧煥
나 같은 용렬한 사람이 명류에 끼임이 부끄럽네 / 只慙庸品厠名流
하니, 찬성이 화답하기를,
5학사에 5장원이 있고 보니 / 五學士爲五壯頭
내 이름 비교도 안 되네 / 聲名到我不相侔
다만 좋은 일에는 분별이 없는 듯하니 / 只應好事無分別
당시 제일류라 하리로다 / 等謂當時第一流
하였다. 정철이 3공에게 화답의 시를 구하고, 이어서 조중(朝中)에도 여러 화답의 시를 구해서 성대한 일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정철이 산직(散職 이름만 있는 벼슬로 녹만 먹는 직)이 되었으므로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 병술년 가을에 내가 우찬성이 되니, 그때 영의정 노수신과 좌의정 정유길은 을해생(71세)이고, 나는 병자생(70세)이고, 좌참찬 황임(黃琳)과 우참찬 안자유(安自裕)는 정축생(69세)으로, 모두 기로소 당상(耆老所堂上)에 참여하였으니, 한때 동료로서 또한 성사(盛事)라 하겠다. 내가 시를 짓기를,
정승들의 높은 연세 을ㆍ병ㆍ정이라 / 相府高年乙丙丁
누가 뛰어난 노인들이 한자리에 모임을 알까 / 誰知一席會耆英
이때 성사를 꼭 기록해 두자 / 此時盛事應須記
수역이 열린 여기에서 태평을 보리라 / 壽域開邊見太平
하였다.
○ 재상 중에 연령이 80세 이상 된 이를 내 눈으로 본 바 있으니, 송순(宋純)은 지중추(知中樞)로 92세이고, 오겸(吳謙)은 찬성으로 89세이고, 홍섬(洪暹)은 영의정으로 82세이고, 원혼(元混)은 판중추(判中樞)로 93세이며, 임열(任說)은 지중추로 82세이고, 송찬(宋贊)은 우참찬으로 88세이고, 나는 영중추(領中樞)로 82살인데, 모두 아직 병이 없이 건강하니 다행이다.
○ 기로회(耆老會)는 당(唐)ㆍ송(宋) 시대로부터 있었고, 전조(고려) 때에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로소(耆老所)를 두어 연령이 70세이고 관작이 2품 이상이면 참여시켰다. 조종조에서는 의레 3월 3일과 9월 9일에 훈련원이나 반송정(盤松亭)에서 기로소 노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때에는 기로소 안에 간직된 물건으로써 춘추에 잔치를 베풀 뿐이었다. 나는 을유년에 좌참찬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의정(議政) 노수신(盧守愼)과 의정 정유길(鄭惟吉), 판부사(判府事) 원혼(元混), 팔계군(八溪君) 정종영(鄭宗榮)과 지사(知事) 임열(任說)과 지사 강섬(姜暹)이 동료가 되었고, 그 후 판서 황임(黃琳), 판서 안자유(安自裕), 판서 이인(李遴), 영부사 김귀영(金貴榮)이 또 동료가 되었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제공(諸公)들이 서로 이어서 작고하고, 오직 김귀영ㆍ강섬과 나만이 생존하여 인원수가 매우 적은 관계로 기로회를 하기 어려웠다. 조종조에서는 종2품도 참여시킨 예가 있으므로 송찬(宋贊)ㆍ목첨(睦詹)ㆍ신담(申湛)ㆍ기(李墍)도 참여하였는데, 지금은 송찬이 지중추로 88세이고, 나는 영부사로 82세이며, 이기는 이조 판서로 76세인데 아직 병 없이 건강하다. 임진난 후에는 폐지되어 기로회를 열지 못하다가, 의정 유홍(兪泓), 판서 이헌국(李憲國)ㆍ이증(李增), 참판 유희림(柳希霖)ㆍ이희득(李希得)ㆍ이관(李瓘)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또한 기로회는 열지 못하였다. 이헌국은 73세이며, 이증은 72세이고, 유희림은 78세이며, 이희득은 76세로 모두 병 없이 건강하다. 정유년이었다.
○ 독서당(讀書堂)은 세종 때에 창설하였는데, 연소한 자로 문장에 능숙하고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서 장가 독서(長暇讀書 오랫동안 휴가를 주어서 강학에 전심하게 하는 제도)하게 하였다. 중종 때에는 동호변(東湖邊)에 집을 짓고, 관에서 모든 물품을 공급하여 총애가 유달랐다. 나는 병오년 가을에 급제하고, 무신년 봄에 장가 독서에 선발되었고, 을묘년 가을에는 당상관으로 승진되었다. 전후 8년 동안 서당에 있었던 동료 20명이 승진하고 침체되고 오래살고 일찍 죽은 것이 각각 달랐으니, 민기(閔箕)ㆍ정유길(鄭惟吉)ㆍ김귀영과 나는 의정(議政), 이황(李滉)은 찬성(贊成)이 되었으며, 김주(金澍)는 판윤(判尹), 박충원(朴忠元)ㆍ윤현(尹鉉)ㆍ윤춘년(尹春年)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박민헌(朴民獻)은 참판, 허엽(許曄)은 감사(監司), 남응룡(南應龍)은 참의(參議), 유순선(柳順善)은 승지(承旨), 김홍도(金弘度)는 정언(正言), 김인후(金麟厚)와 한지원(韓智源)은 교리(敎理), 윤결(尹潔)은 수찬(修撰), 김질충(金質忠)은 좌랑(佐郞), 안수(安璲)는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중 박충원ㆍ정유길ㆍ이황ㆍ박민헌ㆍ김귀영은 모두 70세가 넘어서 작고하였다. 나의 나이는 지금 82살이다. 22명 중에서 70세가 넘은 이는 6명뿐이고, 생존자는 6명뿐이며, 《선생안(先生案)》 중에도 70세가 넘는 이는 매우 드무니, 70세는 과연 희귀하다 하겠다.
○ 나의 동년(同年 과거에서의 동기를 말함)인 계묘년 사마방(司馬榜) 중에는 문과에 급제한 자가 61명이며, 음직(蔭職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공덕으로 받는 관직)으로 벼슬한 자가 31명인데, 강사상(姜士尙)과 나는 의정, 심강(沈鋼)은 영돈녕, 박계현(朴啓賢)ㆍ황임(黃琳)ㆍ이임(李琳)ㆍ윤의중(尹毅中)은 판서, 이감(李戡)ㆍ이중경(李重慶)ㆍ김덕룡(金德龍)ㆍ심전(沈銓)ㆍ손식(孫軾)ㆍ황응규(黃應奎)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윤주(尹澍)ㆍ정척(鄭惕)ㆍ홍천민(洪天民)ㆍ조징(趙澄)ㆍ유승선(柳承善)ㆍ김언침(金彦沈)ㆍ신희남(愼喜男)ㆍ권벽(權擘)ㆍ유종선(柳從善)ㆍ장사중(張士重)ㆍ조부(趙溥)ㆍ김백균(金百鈞)ㆍ이억상(李億祥)ㆍ권순(權純)ㆍ임여(任呂)ㆍ이집(李楫)은 통정대부가 되었다. 70세가 넘은 이를 말하면, 지방에 있는 자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서울에 있는 이는 이봉수(李鳳壽)ㆍ이집이 83세, 엄서(嚴曙)가 82세, 정척이 80세, 유성남(柳成男)과 이권충(李勸忠)이 77세, 황린(黃璘)과 신희남이 75세, 권벽이 74세, 조부ㆍ허현ㆍ박홍(朴泓)이 73세, 심호(沈鎬)ㆍ권순이 73세, 김언침ㆍ이감(李鑑)ㆍ이인(李遴)이 71세, 심전ㆍ김진(金鎭)이 70세였는데, 모두 작고하였고, 나는 82세, 황응규는 80세, 장사중은 74세인데, 모두 아직도 무병하다. 2백 명이 같은 방(榜)으로 급제한 지도 55년이나 되어 세 명만이 생존해 있으니, 아, 서글프다. 장사중은 정유년 여름에, 황응규는 무술년 가을에 작고했다.
○ 나와 동갑인 병자생으로 계를 한 이가 35명이다. 그 중 70이 넘은 이는 소흡(蘇潝)ㆍ박인수(朴麟壽)ㆍ성세평(成世平)ㆍ윤위(尹緯)ㆍ유성남(柳成男)ㆍ홍섬(洪暹)인데, 모두 작고하고, 정걸(丁傑)과 나는 82세로 아직 무병하니, 35명 중에 2명이라도 생존한 것은 다행이다. 정걸도 정유년 여름에 작고했다.
○ 을묘년 여름에 왜구(倭寇)가 호남에 침범하니, 호조 판서 이준경(李浚慶)이 도순찰사(都巡察使), 홍문관 전한인 나와 이조 좌랑 김귀영(金貴榮)이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토벌하였다. 그 후 이준경은 벼슬이 영의정이 되어 70세가 넘었고, 김귀영은 좌의정으로 74세이며, 나는 우의정으로 지금 82세이니, 3명이 모두 의정(議政)에 참여하고 70세가 넘었으니,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이는 변계량(卞季良)ㆍ윤회(尹淮)ㆍ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신숙주(申叔舟)ㆍ최항(崔恒)ㆍ서거정(徐居正)ㆍ어세겸(魚世謙)ㆍ홍귀달(洪貴達)ㆍ성현(成俔)ㆍ김감(金勘)ㆍ신용개(申用漑)ㆍ남곤(南袞)ㆍ이행(李荇)ㆍ김안로(金安老)ㆍ소세양(蘇世讓)ㆍ김안국(金安國)ㆍ성세창(成世昌)ㆍ신광한(申光漢)ㆍ정사룡(鄭士龍)ㆍ홍섬(洪暹)ㆍ정유길(鄭惟吉)ㆍ박충원(朴忠元)ㆍ박순ㆍ노수신(盧守愼)ㆍ김귀영ㆍ이이(李珥)ㆍ이산해(李山海)ㆍ유성룡(柳成龍)ㆍ이양원(李陽元)ㆍ이덕형(李德馨)ㆍ윤근수(尹根壽)로, 중임(重任)을 서로 전할 때 자연 우열(優劣)은 있으나 모두 인심에 흡족하였으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연소하여 정승이 된 이로 말하면 조종조의 일은 상세히 모르겠으나, 당대(선조)에 박순(朴淳)은 겨우 50세에, 유전(柳琠)은 55세에, 이산해(李山海)는 50세에, 정철(鄭澈)은 54세에, 유성룡은 49세에, 김응남(金應南)과 이원익(李元翼)은 50세에 각각 정승이 되었으니, 이는 근대에 드문 일이다. 70세 이후에 정승이 된 이는 전혀 없는데, 겨우 나만이 75세에 정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욕되게 한 일이다. 김귀영이 축하하는 시를 지어 주기를,
금항아리를 백두의 경이 차지하니 / 金甌拈得白頭卿
천심(임금의 마음)이 노성한 이를 중하게 여김이로다 / 自是天心重老成
조야가 모두 몽복(문왕이 강태공을 만난 고사)을 칭송하는데 / 朝野共稱賢夢卜
갓 털고 친구의 축하하는 정 알리라 / 彈冠應識故人情
하니, 내가 화답하기를,
욕되게 여러 조에 다섯 경을 지냈고 / 忝辱諸曹歷五卿
찬성으로도 6년이건만 아무 한 일 없었네 / 贊成六載竟無成
하루 아침에 총애를 받고 보니 / 一朝誤荷非常寵
열등한 이 몸 어찌 물정에 맞다 할까 / 駑劣何能稱物情
하였다.
○ 조정의 의정(議政)으로 70이 지나서 기로소에 참여한 이는 권희(權僖)ㆍ권중화(權仲和)ㆍ이서(李舒)ㆍ성석린(成石磷)ㆍ조준(趙浚)ㆍ하륜(河崙)ㆍ황희(黃喜)ㆍ허주(許稠)ㆍ하연(河演)ㆍ최윤덕(崔潤德)ㆍ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어세겸(魚世謙)ㆍ유순(柳洵)ㆍ정광필(鄭光弼)ㆍ이유청(李惟淸)ㆍ윤은보(尹殷輔)ㆍ유부(柳溥)ㆍ홍언필(洪彦弼)ㆍ윤인경(尹仁鏡)ㆍ기(李芑)ㆍ상진(尙震)ㆍ윤개(尹漑)ㆍ이명(李蓂)ㆍ이준경(李浚慶)ㆍ권철(權轍)ㆍ홍섬ㆍ노수신ㆍ정유길ㆍ김귀영(金貴榮)과 나이다.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공통적으로 높이는 두 자리에 참여하고 명상(名相)의 대열에 참여하였으나, 어찌 그 외람됨을 말하랴. 최항 이상은 기로소의 《선생안(先生案)》에 있으므로 이렇게 기록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최항의 나이는 70이 못 되었다 하고, 그 나머지도 자세하지 않다. 정승이 되면 비록 70이 못 되어도 으레 모두 연회에 참여하게 되니, 그가 연회에 참여한 까닭으로 《선생안》에 기록한 것인가.
○ 중종조에 명기(名妓) 상림춘(上林春)이 있었는데, 거문고를 잘 탔다. 참판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가 돌보아주어 그 집이 종루(鍾樓) 곁에 있었는데, 하루는 삼괴당이 들러서 부른 즉흥시에
제오교 머리에 푸른 버들 늘어지니 / 第五橋頭煙柳斜
늦바람과 햇빛이 더욱 맑고 화창하다 / 晩來風日轉淸和
열두 상렴 늘어진 곳에 사람이 옥과 같은데 / 緗簾十二人如玉
청아한 시인이 말 가는 대로 지나가네 / 靑瑣詞臣信馬過
하였는데, 호사자가 그림을 그리고, 그 시를 그림 끝에 썼다. 그 후 판부사 정사룡(鄭士龍)이 7언 율시를 지어 주고, 우의정 정순붕(鄭順朋), 영의정 홍언필(洪彦弼), 우의정 성세창(成世昌), 찬성 김안국(金安國)ㆍ신광한(申光漢) 등 여러 공이 연이어 화답하니, 드디어 시첩이 되었다. 나도 소시적에 상림춘(上林春)을 보고서 책 끝에 시를 쓴 일이 있으나,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의 비(婢) 석개(石介)는 가무(歌舞)를 잘하여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었는데, 영의정 홍섬이 절구 3수를 지어 주고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내가 연이어 화답하고, 기타 재상들도 많이 화답해서 드디어 큰 시첩이 되었다. 둘 다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
○ 중이 시를 고관(高官)과 유생(儒生)들에게 구해서 몸가짐의 보배로 삼고 이것을 시축(詩軸)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중들의 고풍(古風)이다. 명공 거경(名公巨卿)들까지도 모두 써 주었는데, 여성군 이암(頤菴 송인의 호)이 가장 많이 써 주었고, 나 또한 잘 써 주는 편이다. 이는 중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세종이 양화(楊花) 나루 옆에 있는 희우정(喜雨亭)에 거동하여 수레를 멈추고 날을 보낼 때 문종은 동궁으로서 따라가고, 안평대군(安平大君) 또한 따라 갔다. 그날 저녁에 안평대군이 성삼문(成三問)ㆍ임원준(任元濬)과 강으로 가서 술을 마시며 달구경하는데, 동궁이 동정귤(洞庭橘) 두 쟁반을 보내주었다. 그 쟁반에 씌어져 있기를,
단향목의 향기는 그저 코에만 좋고 / 栴檀偏宜鼻
고기의 맛은 입에만 좋다 / 脂膏偏宜口
동정귤을 가장 사랑하니 / 最愛洞庭橘
코에도 향기롭고 맛도 달아서이다 / 香鼻又甘口
하였다. 그리고 시를 지어 들이게 하니, 안평대군과 성삼문ㆍ임원준이 각각 시를 지어 올렸다. 안평대군은 그때 사연을 서술한 글과 시를 손수 쓰고, 그림 잘 그리는 안견(安堅)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명사(名士)로 계속 화답한 이가 매우 많았다. 서거정(徐居正) 역시 화답을 하였는데, 그가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는, “동궁이 동정귤을 근신(近臣)에게 보내주고 그 쟁반 안에 글을 써 주었다…….” 하였으며,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도 이 일이 기재되었는데, 내용이 《필원잡기》와 같다. 서거정과 성현은 모두 안평대군과 같은 시대 사람들인데, 그 기재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어찌된 것인가. 세조 때에 안평대군이란 말을 숨기려고 근신이라고만 한 것이 아닌가.
○ 사인사(舍人司)의 연정(蓮亭)에서 학을 한 쌍 길렀는데, 무자년과 기축년에 학이 알을 낳아 새끼를 깠다. 인가에서는 학은 기르되 대부분 새끼를 까 기르지 못하는데 새끼를 깠으니, 기특한 일이다. 기축년 여름에 내가 찬성으로 우연히 연정을 지나게 되었는데, 연꽃은 한창 피었고 학(鶴)의 새끼는 기우뚱기우뚱 걷고 있었다. 내가 장난삼아 사인(舍人) 권극지(權克智)에게 말하기를, “연정에서는 근래 전직자를 초청하는 일이 드무니, 옛날 성사(盛事)가 자못 쓸쓸하게 되었네.” 하였더니, 사인 권극지가 말하기를, “연꽃이 본래는 성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연꽃이 가득하며, 학이 또한 새끼를 깠으니, 내 생각에는 연정의 일이 옛날보다 낫습니다.” 하므로, 서로 껄걸 웃었다. 내가 즉시 기둥 위에 시를 쓰기를,
일찍이 중서성에 들어간 지 30년 만에 / 曾入中書卅載餘
지금 다시 와 보니 슬프기만 하구나 / 如今重到足嗟吁
옛날 있었던 일 모두 없어졌다 말하지 마소 / 莫言故事全消歇
연꽃은 연못에 가득하고 학은 새끼를 쳤네 / 荷滿池塘鶴産雛
하였다.
○ 사인사의 연정에는 연못과 누대(樓臺)의 좋은 경치가 있고, 사인(舍人)은 직무가 없으므로 매양 선생(先生 사인사의 전직자)들을 청하여 음악과 기녀들의 풍악을 울렸는데, 재상도 많이 오므로 사람들은 이를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였다. 가정(嘉靖) 임자년 봄에 치숙(治叔) 송찬(宋贊)은 좌사인(左舍人)이 되고, 나는 우사인(右舍人)이 되었더니,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이르러서는 어언 40년이 된지라, 송치숙은 82세로 벼슬이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나는 나이 76세로 벼슬이 참정(參政)을 거쳐 판중추부사가 되어 《선생안(先生案)》에 같이 연명(聯名)하였으니, 이 역시 인세(人世)의 다행이다. 하루는 약속하고 연정(蓮亭)에 가서 술이 반취되었는데, 내가 절구시 한 수를 읊기를,
기억하건데 연정온 지도 40년 / 憶入蓮亭四十年
당시 동료로 있었던 것도 인연이었네 / 當時僚契亦因緣
같이 백발이 된 것도 참으로 다행이니 / 俱成白首眞多幸
오늘도 손 잡고 옛 자리에서 취해보세 / 此日同携醉舊筵
하니, 송치숙이 화답하기를,
함께 이 정자에서 취한 적이 청년 시절인데 / 共醉玆亭在盛年
서로 백발 휘날리니 무슨 인연인가 / 相携黃髮是何緣
누가 오늘 함께 노는 흥을 알까 / 誰知此日同遊興
주인의 풍류가 베푼 자리에 맞네 / 地主風流趁肆筵
하였다. 사인 노직(盧稷)이 이 시를 현판에 새겨 벽에 달았다. 송찬은 지금 88세이며, 나의 나이는 82세이니, 더욱 다행한 일이다.
○ 중종 때에 이락정(二樂亭) 문경공(文景公) 신용개(申用漑)가 찬성으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었는데, 대제학을 남곤(南袞)에게 전하려 하여 하루는 남곤과 담화하며 시를 짓기를 청하였다. 남곤이 시를 지어 올렸는데,
버들 우거지고 낮닭 울려는데 / 楊柳陰陰欲午鷄
졸지에 궁벽한 시골에 수레 가득 찬 것 놀랐었네 / 忽驚窮巷溢輪蹄
다투어 풍채 구경 하느라고 이웃은 집을 비우고 / 爭看風裁空隣舍
재촉하여 술자리 마련하는 노처는 궁색하네 / 促具盤筵窘老妻
흥이 나면 술잔이나 기울일 줄 알았는데 / 乘興但知傾藥玉
누구인지 생각도 않고 허리띠를 잡아 끌었노라 / 忘形不覺挽鞓犀
중얼중얼 높으신 분 찾으신 것 시로 지어볼까 하였으나 / 沈吟欲賦高軒過
정중하여 거친 문자 감히 못 쓰겠네 / 鄭重荒詞未敢題
하니, 문경공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의발(衣鉢)이 갈 곳이 있다.”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남곤이 대제학을 맡았다. 이 일이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나오는데, 문경공이 필시 이날 남곤의 시에 차운을 하였을 것인데 《패관잡기》에는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감히 내가 문경공을 헤아려 시를 짓기를,
우연히 고문(남곤의 집을 높여 말함)에 후한 대접을 받아 / 偶過高門見殺鷄
반나절이 넘도록 말을 매어 두었노라 / 淹留半日縶駑蹄
옥 같은 시구는 음을 아는 벗으로 허락했고 / 瓊詞許以知音友
한 말 술은 공손히 대접하는 부인에게 물어본다 / 斗酒謀諸擧案妻
방고에 비기면서 말 볼 줄 안다 하면서 / 自擬方皐能相馬
모름지기 온교를 번거롭게 연서를 시험했네 / 須煩溫嶠試燃犀
의발을 전하고자 하는데 인망에도 합하니 / 欲傳衣鉢孚人望
성가의 짝 없기는 품제에 달려 있네 / 聲價無雙在品題
라고 하였다.
○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면 장원을 존대하여 장원님이라 부르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며, 보면 문득 절을 하고 감히 읍(揖)을 못하니, 급제한 사람도 그러하다. 이는 사문(斯文)의 고풍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자가 또 문과 급제에서 같이 합격하면 재년(再年)이라고 한다. 계묘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고, 또 급제에 같이 합격한 사람이 9명인데, 그 중에서 이광전(李光前)은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나는 급제시에서 장원을 하였기로 서로 장원님이라고 불렀으니, 이 또한 하나의 드문 일이다. 이광전은 급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으니, 아까운 일이다.
○ 생원과 진사를 연방(蓮榜)이라 하고, 혹은 사마(司馬)라고도 한다. 함께 합격한 사람끼리는 서로 형과 아우로 부르며, 정이 친하여 춘추로 모임을 갖고 사이좋게 지냈는데, 세월이 오래되면 폐지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 계묘년에 함께 합격한 사람들은 서울에 있는 이가 가장 많았으므로, 춘추의 모임을 오래도록 폐지하지 않고 정해년에 이르러서는 45년이나 되니, 생존자가 겨우 15명뿐이다.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 동기생들이 정은 비록 두터우나 1년에 두 번 모임으로 어찌 기쁨을 말하기 흡족하리오. 하물며 지금 나이는 늙고 수효도 적으니 더욱 자주 모여야겠기에 달마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 어떠냐.”고 말하니, 모두 좋다고 승낙하며 다투어 먼저 모임을 가지려 하였다. 그 후 모임이 한 바퀴 돌고 다시 시작되니, 듣는 이들이 성사(盛事)라며 부러워들 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생존자가 10명으로, 엄서(嚴曙)는 81세로 벼슬이 부정(副正)이고, 유성남(柳成男)은 76세로 벼슬이 역시 부정이었다. 나는 76세로 의정을 지냈고, 정척(鄭惕)은 75세로 승지로 산관(散官)이 되었고, 이권충(李勌忠)은 74세로 벼슬이 장원(掌苑)이고, 권벽(權擘)은 72세로 벼슬이 참의이다. 박홍(朴泓)은 72세로 벼슬이 사의(司議)이고, 이굉(李宏)은 69세이며 현감으로서 산관이 되었고, 이유관(李惟寬)은 69세이며 군수를 지냈으며, 장사중(張士重)은 68세로 참의로 있다가 난리를 만나 산관이 되었다. 계사년 겨울에 서울로 돌아오니 생존한 이는 나와 정척ㆍ정사중 3명뿐이니, 아, 슬픈 일이다.
○ 우리 마을에 기로회(耆老會)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아이현(阿耳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경진년 가을부터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흩어졌다. 모임은 매월 각 집에서 돌아가며 가져 한 번 돌면 다시 시작하는데, 활도 쏘고 혹은 작은 표적의 활도 쏘며 바둑도 두고 혹은 시를 지어 매우 즐겁게 지냈다. 처음에는 20명이던 것이 끝에 가서 9명이었다. 영주 감사(瀛州監司) 의경(義卿)은 90세이고, 동지(同知) 송찬은 82세이며, 영해 감사(瀛海監司) 지경(智卿)은 80세이다. 판중추부사 나는 77세이며 전 직장 성학령(成鶴齡)은 76세이고, 전 직장 심수약(沈守約)은 73세이다. 첨정(僉正) 남전(南銓)은 73세이며, 전 응패두(鷹牌頭) 심수의(沈守毅)는 72세이고, 주부(主簿) 심수준(沈守準)은 69세였다. 또 하나는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사는 노인들의 모임으로, 임오년 봄부터 시작하였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로 말미암아 이 모임도 흩어졌다. 매달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 것이나 활 쏘고 바둑 두고 시 짓는 것이 모두 아이현의 모임과 같았다. 처음에는 12, 13명이던 것이 끝에는 70명이나 되었다. 동지 송찬과 나의 나이는 위에 썼고, 첨지(僉知) 이이수(李頤壽)와 경력(經歷) 안한(安瀚)은 80세이며, 좌윤(左尹) 목첨(睦詹)은 78세, 첨지 서봉(徐崶)은 75세, 참의 송하(宋賀)는 79세였다. 임진난 후 갑오년 겨울에 생존해서 서울에 사는 자는 동지 송찬과 경력 안한과 나 세 명뿐이었다. 감격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송찬과 안한에게 시를 지어주기를,
우리 마을 노인들 다년간 모임 갖더니 / 吾鄕耆老會多年
한번 동서로 흩어진 후 세상사 몇 번이나 변했는고 / 一散東西事幾遷
지금 살아 있는 이는 단지 세 사람 / 今日生存只三箇
옛일 회상하노라면 그저 멍해지네 / 回思舊興却茫然
하니, 송동지가 화답하기를,
성 서쪽에서 활이나 쏘며 여생을 보내노라니 / 城西爭鵠屬殘年
습관이 되어 다른 일은 하기 어려웠네 / 成癖難爲他技遷
오늘 쓸쓸히 활쏘던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 今日漂零思射
슬픔을 금치 못하여 눈물이 흐르네 / 不禁哀涕自潸然
하였고, 또 안경력이 화답하기를,
이웃에서 성은 알아도 나이는 몰랐으니 / 四隣知姓不知年
젊어 사귄 정 늙은들 변할까 / 自少交情老豈遷
오늘 셋이 솥발처럼 앉으니 / 今日三人成鼎坐
그 동안의 마음이 흰 머리에 비춰지네 / 這間肝膽照皤然
하였다.
○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은 남곤(南袞)과 용재(容齋)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으로써 서로 벗하였는데, 남곤과 용재는 모두 읍취헌을 추대하여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읍취헌은 17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8세에 급제하였으며 26세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가, 연산조(燕山朝) 때에 갑자사화를 만나 피살되었다. 남곤과 용재는 모두 대제학을 지내고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다. 용재가 읍취헌의 시문을 모아서 이름을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라 하고 세상에 간행하였다. 또 읍취헌의 아들 참판공(參判公) 박공량(朴公亮)이 읍취헌의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蒿)》를 만들고, 읍취헌의 손자인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를 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서 상하권을 만들고 나에게 발문(跋文)을 부탁하였다. 유고(遺稿) 권말(卷末)에 오율(五律) 세 수가 있으니,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삼매 지경이 넘어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일장에서 다했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 땅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하였으니, 이는 택지(擇之) 용재의 시이고,
뛰어난 재주 때를 만나지 못하여 / 高才時不遇
야박한 세상 문장을 싫어하네 / 薄俗惡文章
한 가지 일이라도 후세에 전한다면 / 一事堪傳後
인생은 길 필요 없는 것 / 浮生不較長
죽고 살았으니 길이 다름을 슬퍼하고 / 存亡嗟異路
시 짓고 술마시던 그곳이 그립구나 / 詩酒憶逢場
지금도 종남산 빛이 / 尙有終南色
의연하게 읍취헌 곁에서 푸르도다 / 依然挹翠傍
하였으니, 이는 호숙(浩叔) 이원(李沅)의 시이고,
젊어서 짓던 일 경솔히 마쳤더니 / 少作吾輕了
이제 도리어 10년 공을 들여야 하리 / 還添十載功
늙어서야 묘경에 놀라고 / 晩來驚入妙
죽은 뒤에야 공부 더함을 깨달았네 / 身後覺增工
불우한 일생은 짧았지만 / 奇釁一生短
길이 울린 명예 만년에 다시 없으리라 / 長鳴萬世空
종남산의 푸른빛 누가 잡으리 / 終南翠誰挹
저녘 빛이 하늘에 뻗어 있네 / 暮色尙連穹
하였으니, 이는 명중(明仲) 이우(李堣)의 시이다.
○ 근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공은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난 자이다. 어떤 사람이 술을 노래하는 시를 짓기를 청하며 감(甘) 자 운을 부르니, 임억령이 즉시 응하기를,
늙어서야 비로소 이 맛 단 줄 알았네 / 老去方知此味甘
라고 하거늘 또 삼(三) 자 운을 부르니, 응하기를,
한 잔 술에도 도통하니 석 잔을 마시랴 / 一杯通道不須三
하였다. 또 남(男) 자 운을 부르니, 곧 응하기를,
그대는 혜강(동진 때 죽림 7현의 한 사람)과 완적(죽림 7현의 한 사람)이 유계(한고조)를 조롱한 것을 아는가 / 君看嵇阮陶劉季
공후백자남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 不羨公侯伯子男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기이(奇異)한 작품이다. 내가 감탄하고 나서 그 시에 차운하여 자손들을 경계하기를,
일찍 들으니, 대우는 마셔보고 달게 여겼다지만 / 曾聞大禹飮而甘
술 좋아하고 몸 온전한 이는 열에 두셋뿐이다 / 嗜酒全身十二三
한 잔 술도 잡지 말고 마땅히 삼가 경계할 것이요 / 勿把一杯宜戒愼
모름지기 여색을 멀리할 줄 아는 자가 정남이다 / 須知遠色是貞男
하였다. 임석천의 뜻을 뒤집은 것이나 시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 남대문 밖 한 이웃에서 동년배 문사(文士)로 재상이 된 자가 5명이 있으니, 윤부(尹釜)는 경오생으로,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28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으며, 수(壽)는 50세였다. 오상(吳祥)은 임신생으로,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2세였다. 윤현(尹鉉)은 갑술생으로,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4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으며, 수는 65세였다. 유창문(柳昌門)은 갑술생으로, 27세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고, 수는 57세였다. 나는 병자생으로 2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장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으며, 나이 82살인데도 여전히 병이 없다. 나는 5인 중에서 재주와 덕이 최하이면서 벼슬과 수(壽)는 최고이고 보니, 하늘이 주신 풍부하고 군색한 것은 실로 알지 못하겠다. 이는 늦게 영달한 이유에서인가. 재주 없는 내가 장원 급제한 것은 첫 번째 요행이고, 급제한 지 10년 만에 승지에까지 오른 것은 두 번째 요행이고, 본래 명망도 없으면서 벼슬이 의정에 이른 것은 세 번째 요행이고, 권세를 잡지 않았으므로 집에 손님이 드문 것은 네 번째 요행이다. 네 가지 요행이 있는 데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다섯째 요행이다. 어찌 하늘이 주신 운명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영규율수(瀛奎律髓)》를 보면, 유우모(劉禹謨)가 여상공(呂相公)에게 올린 시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중하고 맑은 명망을 천하가 두루 아니 / 重名淸望遍華夷
신선인가를 알지 못하겠네 / 恐是神仙不可知
한 번에 용호방(과거)에서 장원이 되더니 / 一擧首登龍虎榜
10년 만에 몸이 봉황지(한림 벼슬)에 이르렀네 / 十年身到鳳凰池
묘당에선 다만 말 없는 자 같고 / 廟堂只似無言者
집은 항상 귀하지 않을 때와 같구나 / 門館長如未貴時
문득 낙양에서 나와 지키던 것 뺀다면 / 除却洛京居守外
성조의 현상은 다시 누구라고 쓰랴 / 聖朝賢相復書誰
하였다. 경인년 가을에 이웃에 사는 벗 죽계(竹溪) 안한(安瀚)이 이 시의 두 연(聯)이 나의 관적(官跡)과 근사하다고 하며 베껴서 보여 주거늘, 내가 곧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그 시에 차운하여 보냈다. 임진난 후 갑오년 가을에 우연히 《영규율수》를 열람하다가 이 시를 보고서 그때 차운하였던 시가 기억나기는 하나, 가물가물하여 한 구절도 기억나지 않기에 감히 또 졸렬한 시를 지어서 훗날 보는 데에 대비하였으니, 그 시에,
나라가 언제나 태평할꼬 / 乾坤何日屬淸夷
난후에 천심을 실로 모르겠네 / 亂後天心實未知
평생 벼슬길은 험하기만 하고 / 半世宦途嘗險阻
하루 아침 사람일은 모두 어긋났네 / 一朝人事盡差池
선도 복숭아는 3천 년이 가도 익지 않는데 / 蟠桃未熟三千載
백발은 부질없이 80이 되어가네 / 華髮空垂八十時
나라 위한 단심은 아득하기만 하니 / 許國丹衷徒耿耿
어려운 이 고비 건져줄 이 그 누구랴 / 艱危弘濟更伊誰
하였다.
○ 내가 명조 때 가정(嘉靖) 병오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 급제를 하였는데, 그때 문과(文科)가 33명, 무과가 28명이고, 중시 문과(重試文科)가 18명, 중시 무과(重試武科)가 35명이며, 역과(譯科)가 19명, 그리고 음양과(陰陽科)와 율과(律科)가 각각 8명씩으로 모두 1백 47명이었다. 이것을 합하여 《방목(榜目 합격 기록)》 한 책을 만들어 인쇄하여 각기 간직하였다. 만력(萬曆)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경성을 함락하여 나라도 망하고 집안도 망하는 바람에 공사서적(公私書籍)들이 모두 깡그리 없어졌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고, 그 해 겨울에 성상이 경성으로 돌아왔다. 갑오년 가을에 어떤 사람이 우연히 《병오방목(丙午榜目 병오년에 급제한 자를 적은 기록)》을 얻어 주기에 내가 펴 보니, 1백 47명 중에서 생존한 자는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다. 49년 안에 인사(人事)가 이같이 변하였다. 생존자인 내가 이 책을 얻은 것은 아, 또한 다행한 일이다.
○ 국법(國法)에 서얼(庶孼)은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데, 이는 옛날에는 없던 일이다. 당초 이런 법을 세운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근래에는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의론이 여러 번 있었으나, 결국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서얼로 문장에 능한 자는 선조(先朝) 때에는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曹伸)이 가장 유명하였고, 근세에는 어숙권(魚叔權)과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유명하며, 그 나머지는 모두 기억하지 못하나, 재주를 가지고도 출세하지 못함은 어찌 억울하지 않으리오. 그리고 나라에서 인재를 수용하는 데에도 방해가 될 것이다.
○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는 것이 옛 풍습이다. 젊은이가 먼저 마시고 노인이 뒤에 마시는데, 지금 풍속은 또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사람을 만나면 그 이름을 부르고, 그 사람이 대답하면 “나의 허술한 것을 사가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의 병을 파는 것으로 재앙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의 설날 아침에 대한 절구를 좋아하였는데, 이르기를,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도소주 마시는 이 많으니 / 人多先我飮屠蘇
이제는 쇠퇴한 줄 알겠으니 큰 포부를 저버렸다 / 已覺衰遲負壯圖
일마다 병을 파나 병은 끝나지 않으니 / 事事賣癡癡不盡
그대로 옛 나를 가지고 지금의 내가 될 뿐이네 / 猶將古我到今吾
라고 한 것이다. 내가 80세 되던 설날 아침에 장난삼아 이 시에 차운하여 이르기를,
약한 몸 병이 많아 도소주 빨리 못 깬다 / 微軀多病少醒蘇
80살 강녕은 생각조차 못했는데 / 八十康寧是不圖
어찌 병 팔려고 먼저 술 마실까 / 何用賣癡先飮酒
시장에서의 강한 상대에게나 대항해 볼까 / 詩場强敵可支吾
라고 지어서 서교(西郊) 송동지(宋同知 송찬)에게 보냈다.
○ 우리 나라의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과 4월 8일, 그리고 9월 9일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 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 하여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의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 백낙천(白樂天)의 자경시(自警詩)에 이르기를,
누에 늙어 고치 되어도 제 몸은 못 가리고 / 蚕老繭成不庇身
벌은 굶주려 가며 꿀 만들어서 다른 사람 위하네 / 蜂飢蜜熟屬他人
모름지기 알아 두자꾸나 늙어서도 집안 걱정 하는 자 / 須知年老憂家者
두 벌레의 헛수고 같다는 것을 / 恐似二虫虛苦辛
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통달한 자의 말이로다. 내가 난리로 집안이 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길래 두어 칸 집을 사고자 하는데, 나이 80이 넘었으니 여생이 얼마나 되나 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백낙천의 시를 보고 깊이 느낀 바 있어 웃고 집 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 근세에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이 있어 이름을 《동몽선습(童蒙先習)》이라고 하는데, 누구의 저작인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가 사문(斯文) 박세무(朴世茂)의 저작이라 하기에 그 조카 박정립(朴挺立)에게 물어보았더니, 과연 자기 숙부의 저작이라고 하였다. 그 책은 먼저 오륜(五倫), 다음으로는 역대 사실을 서술하였으며, 그 다음은 우리 나라의 사실과 경사(經史) 약간을 서술하였으니, 어린이에게 마땅히 먼저 읽힐 것이 된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자는 어찌 이것을 먼저 가르치지 않겠는가.
○ 근세에 우리 말로 장가(長歌)를 짓는 자가 많으니, 그 중 송순(宋純)의 〈면앙정가(俛仰亭歌)〉와 진복창(陳復昌)의 〈만고가(萬古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 흡족하게 한다. 면앙정가의 줄거리를 보면 아늑한 산천과 널찍한 전야의 모양과 높고 낮은 정대(亭臺), 휘돌아드는 지름길, 그리고 춘하추동 사시와 아침 저녁의 경치를 두루 기록하지 않음이 없는데, 우리 말에 한자를 써서 그 변화를 지극히 하였으니, 진실로 볼 만하고 들을 만하다. 송공(宋公)은 평생 동안 가사를 잘 지었는데, 이것은 그 중에서도 가장 잘된 작품이다. 〈만고가(萬古歌)〉는 먼저 역대 제왕(帝王)의 현부(賢否)를 서술하고, 다음에는 신하들의 현부를 서술하였는데, 대개가 양절 반씨(陽節潘氏)의 논(論)을 본받아서 우리 말로 가사를 짓고 곡조를 맞추었으므로 또한 들을 만하다. 사람들은 진복창이 삼수(三水)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재주가 덕(德)보다 나은 자라 하겠다.
○ 세상에서 선조를 위하여 비명문(碑銘文)과 묘지문(墓誌文)을 지을 때는 반드시 글 잘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에게 청하는데, 혹 청하여도 얻지 못하거나 미루다 써주지 못하는 자도 많다. 비갈(碑碣)은 묘(墓) 밖에 세우고, 지석(誌石)은 묘 앞에 묻는 것인데, 이는 만일 세월이 오래되어 비갈이 없어지면 지석을 상고하여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갈과 지석을 설치하는 뜻이 대개 여기에 있으니, 각기 다른 글을 쓰지 말고 같은 글을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런데 예로부터 각기 다른 글을 쓰기 위하여 두 사람에게서 각기 다른 글을 받으니, 이는 무슨 뜻일까. 나의 어리석은 견해가 이러하니, 예(禮)를 아는 자는 부디 헤아려주기 바란다.
○ 우리 나라 사대부(士大夫)의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기재되었는데, 상례는 전적으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쓰지만 간혹 조금 다르고, 제례는 《주자가례》와 다른 점이 많으니, 이는 필시 우리 나라 음식(飮食)의 절차가 중국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제물(祭物)은 직품(職品)의 차등(差等)에 따라 간략하고 쉽게 갖추게 되어 있으나, 지금 사람들은 국가 제도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이르러서는 사시의 시제(時祭)를 모두 지내지 못하고, 다만 한두 시제만 지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전혀 지내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기제(忌祭)마저 핑계대고 지내지 않는 자도 있다. 이는 모두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니,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한양 경복궁(景福宮) 광화문(光化門) 위에 큰 종이 있고 종루(鐘樓)에도 큰 종이 있는데, 모두 새벽과 저녁에 울린다. 신덕왕후(神德王后 태조의 계비 강씨)의 정릉(貞陵)이 돈의문(敦義門) 안에 있고 능 곁에 절이 있었는데, 능을 옮기자 절도 폐지되었으니, 오직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원각사(圓覺寺)는 도심지에 있었는데, 절이 폐지되자 또한 큰 종만 있을 뿐이다. 중종 때에 김안로(金安老)가 정승이 되어 건의하여 두 종을 동대문과 남대문에 옮겨 두고 또한 새벽과 저녁에 울리려고 하다가, 김안로가 죄를 입게 되면서 종을 달지 못하고 수풀 속에 버려둔 지 60여 년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고 멋대로 불을 지르니, 광화문 종과 종루의 종도 모두 불에 녹게 되었다. 계사년 여름에 왜구가 물러가자, 그해 겨울에 성상이 환도(還都)하였고, 갑오년 가을에는 남대문에 종을 걸어 새벽과 저녁으로 울리게 하니, 그 종 소리를 듣는 서울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유년 겨울에 명 나라 장수 양호(楊鎬)가 서울에 와서는 종을 명례동(明禮洞) 고개 위에 옮겨달도록 명령하였다.
○ 역서(曆書)는 국가의 큰 정사로, 중국에서는 매년 역서를 반포한다. 우리 나라도 역서를 만드는데 중국과 비슷하여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오직 주야(晝夜)에 있어서 중국은 극장(極長)이 60각인데 우리 나라는 61각이며, 중국은 극단(極短)이 40각인데 우리 나라는 39각이다. 이는 우리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있어 해가 뜨는 동쪽과 가까우므로, 1각의 가감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항상 이것을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는데,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도성(都城)을 함락하여 모든 역기(曆器) 등의 물건이 깡그리 없어지게 되었다. 그해 겨울에 의주(義州)로 따라갔던 일관(日官) 몇 명이 우연히 《칠정산(七政算)》과 《대통력주(大統曆註)》등의 서적을 얻어서 계사력(癸巳曆)을 만들어서 목판으로 몇 권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계사년 겨울에 성상이 환도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옛날 역서(曆書)를 인쇄하던 주자(鑄字)를 얻어 바치므로 옛 역서에 의하여 인쇄 반포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 육방옹(陸放翁)의 이름은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 나라 시인의 대가이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하였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 세종 16년 갑인년 알성친시방(謁聖親試榜)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3명이 있었으니, 유학(幼學) 최항(崔恒)과 전 문소전직(文昭殿直) 조석문(曹石門 후에 석문(錫文)으로 개칭), 그리고 생원(生員) 박원형(朴元亨)이다. 이들 셋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고, 최항은 대제학까지 하였으니, 그 알성친시방에서 인재 얻은 것이 성대하다 하겠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과거(科擧)는 ‘갑과(甲科)ㆍ을과(乙科)ㆍ병과(丙科)가 있다.’고 하였는데, 조종조(祖宗朝)에서는 혹 갑과와 병과는 없이 다만 을과(乙科)만 두어 3등으로 나누었으며, 혹은 을과 병과 정과(丁科)를 두었고, 혹은 무슨 과가 없이 1, 2, 3등만 두었으니, 그 제도는 모두 상세하지 않다. 세조 12년 병술년 5월의 발영시(拔英試)에서는 일찍 급제한 자로 정2품 이하는 응시를 허락하여 합격자 40명을 뽑았고, 같은 해에 또 등준시(登俊試)를 보였는데, 발영시의 예에 따라 합격자 10명을 뽑았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는 등준시에 참여하여 제5위가 되고, 또 무자년 중시(重試)에서는 제1위가 되었으며, 춘양군(春陽君) 이래(李徠)는 같은 해인 무자년 식년시에서 병과 제2위가 되었으니, 영순군은 광평대군(廣平大君 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아들이고, 춘양군은 보성군(寶城君)의 아들이다. 이들은 모두 군(君)으로서 시험에 참여하였다. 국초부터 세조까지의 매년 방목(榜目)을 보면 종실(宗室)로 등과(登科)한 자는 없었으며, 그 후에도 없었으니, 아마 이 두 사람은 특명으로 응시한 듯하나, 공도(公道)는 아니다.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는 정인지(鄭麟趾)의 아들로, 세조의 부마였는데, 친시(親試)에 참여하여 제3위를 하였다. 이 또한 상규(常規)는 아니다.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 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篈)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 나라 풍습에 바둑ㆍ장기(將棋)ㆍ쌍륙(雙陸) 등을 잡기(雜技)라고 한다. 바둑은 검고 흰 것으로 해변에서 검정 돌과 조개껍질이 물에 씻기어 반질반질한 것을 쓰고, 장기는 차(車)ㆍ포(包)ㆍ마(馬)ㆍ상(象)ㆍ사(士)ㆍ졸(卒)을 나무로 깎아 만들어 글자를 새기고 채색을 칠하여 쓰며, 쌍륙은 흑백마아(黑白馬兒)를 나무로 깎아 만들거나 또는 뼈로도 만들어 쓴다. 이것들은 모두 판국(板局)이 있어서 통틀어 박국(博局)이라고 부른다. 그 기술은 각각 잘하고 못함이 있어서 승부를 겨루는데, 이는 모두 소일거리로 놀이이다. 다만 혹 즐기다가 뜻을 상실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도박으로 재산을 날리는 자도 있으니, 잡기는 이로움은 없고 손해만 있다 하겠다.
○ 중종 때 사문(斯文) 박상(朴祥)의 호는 눌재(訥齋)로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어 세상에 유포되다가 난리 후에 문집은 없어지고 그 나머지만 있다. 충주 목사(忠州牧使)로 있을 때 율시(律詩) 3수를 지었는데, 많은 사람이 전송(傳誦)하므로 지금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도록 한다. 탄금대(彈琴臺)에서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지난 일은 아득해서 찾을 수 없는데 / 往事悠悠不可探
탄금대 물은 쪽빛처럼 푸르네 / 彈琴臺下水如藍
문장가 강수는 무덤마저 없고 / 文章康首無遺墓
명필 김생
은 쓰러진 암자만 있구나 / 翰墨金生有廢庵
해 떨어진 강 위에 배는 쌍쌍이 있고 / 落日上江船兩兩
바람 비껴 서리는 물가에 해오라기는 세 마리씩 있네 / 斜風盤渚鷺三三
가아야, 뱃노래 부르지 말라 / 淘辭莫遣歌兒唱
듣는 나 부끄럽기만 하다 / 大守聞來面發慙
하였고, 다음은 시냇가에서 읊은 시로,
남여(의자처럼 걸터앉아서 타는 가마)로 성밖 성긴 솔밭을 지나노라니 / 藍輿出郭度踈松
3월 풍광이 눈에 가득 무르녹네 / 三月風光滿眼濃
산새는 봄 좋다 지저귀고 / 山鳥好春如說話
들꽃은 아름답게 맞아 주네 / 野花嬌笑似迎逢
시냇가에서 술 마시는 서너 사람 / 臨溪酌酒人三四
꿩 잡고 생선 지지니 맛이 더욱 좋네 / 煮雉烹鮮味再重
21년을 지방에만 있어 / 二十一年長在外
서울 바라고 고봉에 오른들 무엇하리 / 望京安得上高峯
하였다. 다음은 동년승(同年僧) 벽사(甓寺) 주지에게 보내는 시로,
남도에서 과거보던 병진년 / 采蓮南省丙辰年
대사도 그때 대선에 발탁되었지 / 師亦同時擢大禪
유교 불교가 다른 세계라 말하지 마오 / 儒釋莫言殊世界
과거 시험은 다행히 같이 보았네 / 科名曾幸共因緣
신륵사 강 위의 달빛 찾지 못하고 / 未尋神勒江心月
중원(충주군)의 창고 속 돈이나 먹고 지내네 / 謾食中原庫裏錢
멀리 상상하노라니 상방(절집)의 세상일 고요한데 / 遙想上房塵事靜
종일 향불 피우며 부처에게 예배하리 / 炷香終日禮金仙
하였다.
○ 나의 소년 시대에는 선비가 고시(古詩)를 학습하는 데는 모두 한퇴지(韓退之 한유)와 소동파(蘇東坡)의 시를 읽었으니, 이는 예부터 내려온 일이다. 근년에는 선비들이 한퇴지와 소동파의 시는 비근(卑近)하다 하여 읽지 않고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두보)의 시를 취하여 읽는데, 모르겠지만 이태백과 두자미의 시를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시를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풍습이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쫓고 내실을 업신여기지 않음이 없으니, 인심이 일정하지 않음이 진실로 우스운 일이다.
○ 문사 차천로(車天輅)는 문장에 능하여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가장 잘하는 것은 시와 4ㆍ6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서울을 함락하자, 성상이 서쪽 의주(義州)로 가서 머무르며 중국에 구원을 청하니, 황제(皇帝 명의 신종)가 시랑(侍郞) 송응창(宋應昌)과 도독 이여송(李如松)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계사년 봄에 도독 이여송이 왜구를 평양(平壤)에서 대파하니, 그해 여름에 왜구가 동래(東萊)와 부산(釜山) 등지로 물러갔다. 가을에 도독 이여송이 중국으로 돌아가느라 작별에 임하여 이별시를 여러 문사에게 구하니, 차천로는 시와 7언 율시 1백 수(首)와 7언 배율시(七言排律詩) 1백 운(韻)을 지어 주었다. 율시는 상하평성(上下平聲)으로 각각의 운자를 붙여서 2일 만에 지었고, 배율시는 양(陽) 자 운을 붙여서 반나절 만에 지었는데, 그 시가 풍부하고 민첩(敏捷)하여 당대에 짝이 없었으니, 진실로 천재로다. 그 시가 마침내 세상에 널리 퍼졌다.
○ 만리현(萬里峴) 아래에 있는 향로회(鄕老會)에서는 여름에는 점심을 마련하고 겨울에는 만두를 장만하는데, 술은 약간 내놓는다.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다가 갑오년 겨울에 서울에 돌아와 모이니, 생존자는 다만 송서교(宋西郊 송찬)ㆍ안죽계(安竹溪 안한)ㆍ나ㆍ심청천(沈聽天 심수경) 3명뿐이었다. 3명도 모두 난리로 집이 없어져서 성중(城中)에서 협방(夾房)살이를 하므로 서로 찾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서교가 말하기를, “옛날 계(契)에서 아직 3명이 살아 있으니, 돌아가며 계모임을 하자.”고 하여 내가 먼저 만두와 술을 차렸는데, 옛날에 비해서 더욱 간소하였다. 자리에서 내가 시를 읊기를,
두 해나 큰 난리를 겪고도 / 二年經大亂
세 늙은이 여생 보전하였네 / 三老保餘生
옛 모임을 여전히 계속하여 / 舊會猶堪續
새 술이나 꼭 마셔보세 / 新醅正可傾
서로 수염과 귀밑털이 흰 것을 바라보며 / 相看鬚䰅白
똑같이 웃으며 담소가 맑네 / 共作笑談淸
계모임에 몇 사람인지 알겠어 / 托契知多少
우리가 가장 정이 두텁구나 / 吾儕最有情
하니, 서교가 화답하기를,
부슬부슬 내리던 비 그쳤으니 / 濛濛昏雨歇
어서 앉아 지난 일이나 이야기하세 / 促席話平生
청안으로 문장을 의논하고 / 靑眼論文對
단심은 마시기에 기울어지네 / 丹心挾酒傾
가는 기러기 짝 부르느라 급하고 / 征鴻呼侶急
찬 국화 맑은 향기 보내 주네 / 寒菊送香淸
취해서 지는 해 보자스랴 / 倚醉看斜日
뉘라서 오래 있는 정 알까 / 誰知坐久情
하였고, 죽계가 화답하기를,
다시 옛 계를 계속하니 / 重修舊契客
경오ㆍ계유ㆍ병자생이네 / 庚癸丙年生
선과는 금쟁반에 올리고 / 仙果金盤薦
향기로운 술은 잔 가득 기울이네 / 香醅盡盞傾
흰 머리는 상산사호처럼 늙고 / 白頭商嶺老
높은 흥은 죽림처럼 맑네 / 高興竹林淸
백 세를 살아도 날이 많지 않으니 / 百歲無多日
모름지기 이 정을 다하리 / 終須盡此情
하였다. 이때 서교는 86세이고, 죽계는 83세이며, 나는 80살이었다.
○ 계묘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동기생끼리 매월 돌아가며 방회(榜會)를 열었는데,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분산되었다. 갑오년 봄에 서울에 돌아오니, 생존자는 다만 나와 정쌍곡(鄭雙谷 정척), 그리고 장송령(張松嶺 장사중) 3명뿐이었다. 을미년 가을 9월에 내가 말하기를, “3명이라도 방회를 하는 것이 좋다.” 하고, 내가 먼저 모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읊기를,
2백 명이나 되던 동년방이 / 二百同年榜
생존한 자 세 사람뿐이네 / 生存只箇三
쓸쓸하기 이렇게 심하나 / 凋零雖太甚
회라도 하면서 견디어 보세 / 會集亦猶堪
죽어 가약을 배반한단 말인가 / 抵死拚佳約
우리끼리 미담이나 하고 지내 보세 / 從人作美談
때는 좋은 가을이라 / 正逢秋色好
창 밖에 종남산을 바라나 보세 / 窓外望終南
하니, 쌍곡이 화답하기를,
때는 9월 / 令節月當九
늙은이 셋이 마주 앉았네 / 衰翁坐對三
새 기쁨은 정이 가시지 않고 / 新歡情不盡
옛 정의는 생각할수록 어찌 견디겠는가 / 舊義思何堪
회포는 시나 술로 의탁하고 / 懷抱憑詩酒
세월은 미담이나 하며 지내세 / 光陰付笑談
배회하며 차마 못 가겠소 / 徘徊不忍去
작별하면 동남으로 떨어지리 / 一散隔東南
하고, 송령이 화답하기를,
아름다운 때 단란히 모여 / 佳節團樂會
친한 벗 셋이 앉았네 / 親朋鼎坐三
가을이라 나는 회포 어이하며 / 送秋懷作惡
늙은이 병들어 견디기 어렵네 / 垂老病難堪
흥이 나면 시 짓고 술 마시며 / 寓興詩兼酒
만나면 웃고 이야기하네 / 逢場笑且談
석양이 되어 돌아가는 길에는 / 夕陽歸去路
단풍이 남산에 가득하네 / 楓葉滿山南
하였다. 이때 나는 80살이고, 쌍곡은 79세이며, 송령은 72세였다.
○ 지사(知事) 송찬(宋贊)은 중종 정유년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경자년에 급제하였다. 인종과 명종 때 두루 관직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올랐으며, 기축년에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에 올랐으며, 을미년 가을에는 특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조정에서 주찬(酒饌)과 미두(米豆)를 보내니, 이는 사조(四朝 중종ㆍ인종ㆍ명종ㆍ선조)에 걸쳐 벼슬한 노인에 대해 우대하는 예절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조야에서 모두 감탄하였고, 송찬은 성상께 글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때 송찬의 나이 86세였으나 정력이 정정하니, 사람들이 지상의 신선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로써 하례하기를,
80세에 품계를 더함은 국전에 있으나 / 八十加階國典存
지난 해 녹봉을 더해 준 것은 특별한 은혜로세 / 頃年增秩亦殊恩
하루 아침 신명을 받으니 / 一朝又是紆新命
세상에서는 드문 영광이라고들 하는구나 / 稀世榮光萬口喧
주찬을 하사하고 미두까지 겸했으니 / 酒饌頒來兼米豆
조정에서 노인 우대하는 은택이 흡족하다 / 朝家優老澤初霑
90세 노인에게도 마땅히 그러할 일 / 九旬耆舊宜如許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 / 閑周蒙恩且莫嫌
하였다. 은명(恩命)이 내린 후에 공이 말하기를, “늙은이가 은혜를 입은 것이 온당치 못하다.” 하였으므로 ‘한가할 때 은혜를 입었다고 혐의 마소.’한 것이다.
○ 기해년 봄에 공(公)의 연세 90세여서 조정에서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내가 하례하는 시를 보내기를,
향년 90은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라 / 享年九十世應難
숭정대부에 오르는 것 사리상 당연하도다 / 仍致崇班理固安
지상 선인이라 하는 말 망령되다 마소 / 稱以地仙非妄語
천하에 구한들 어찌 많이 볼 수 있으리오 / 求之天下豈多看
성조에서 우대하는 은혜 대단히 무겁고 / 聖朝優異恩殊重
노인을 존중하는 예 또한 너그럽네 / 耆席通尊禮亦寬
아, 나 같은 후생도 80이 되었소 / 嗟我後生猶八壽
채찍을 잡고 길이 당신을 음단(吟壇)에서 모시고 싶네 / 執鞭長欲侍吟壇
하였더니, 공(公)이 화답하기를,
붕새가 구만리 장천을 차고 난다는 고담은 알기 어렵고 / 鵬歌高談解道難
나직이 한 가지 사이를 나는 메추라기야 제 분수에 편안하오 / 低飛唯分一枝安
꿈으로 점치던 강태공은 찾을 길 없으리니 / 匪態渭老何緣訪
바다에 뜬 갈매기나 친해본들 무엇하리 / 浮海沙鷗欲押看
까마득히 높은 숭정대부는 나이 덕에 올랐으니 / 縹緲崇班憑齒躐
놀랍고 황공한 내 마음 술로나 진정시키리 / 驚惶卑抱酌醪寬
채찍을 잡다는 말은 도리어 희롱이 되나니 / 執鞭謙語還爲謔
도량이 넓은 정승의 집안에 옥단(玉壇)이나 세우소 / 落落台躔立玉壇
하였다.
○ 상주(尙州)는 본래 문헌(文獻)의 고을로 명사가 많이 나왔다. 나와 같은 해 급제한 판사 서극일(徐克一)이 이 고을에 살았는데, 두 아들 서상남(徐尙男)과 서한남(徐漢男)을 두었다. 기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두 아들이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여막 곁에는 송정(松亭)이 있고, 한 동자(童子)가 여막에 와서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동자가 어느 날 밤에 꿈을 꾸니, 송정에 6명이 모여 앉아 동자에게 말하기를, “저기 우두머리에 앉은 이는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 노수신)이고, 다음은 판사 김충(金冲)이고, 다음은 판사 노기(盧祺)이고, 다음은 판사 서극일이고, 다음은 현감 김범(金範)이며, 다음은 진사 김언건(金彦健)이다.” 했다. 그리고 좌중이 그 정자 이름을 관행정(觀行亭)이라 하고, 시(詩) 한 수를 지어 동자로 하여금 여러 번 읽어서 기필코 외우도록 하였다. 깨어서 기억하니, 그 시에,
청산 아래 두어 서까래 여막 효자가 지어 / 靑山山下數椽盧孝子營
효자는 거의 계시듯이 하는 효성을 다하네 / 孝子幾竭如在誠
효자는 풍우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세 번 와서 / 孝子不廢風與雨日三來
울부짖으며 명복을 비네 / 號哭聲中冥夢回
관행정에 여섯 명의 신선이 모였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 觀行亭中六仙會眞樂事
관행정이란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 / 觀行亭名留百수
낙동강 가에 가히 여섯 신선의 사당 지을 만한데 / 洛江江上可以立六仙社
낙동강 맑은 물 만고에 푸르리 / 洛江萬古流不舍
하였는데, 아마 이는 노소재의 솜씨인 듯하다. 일이 매우 기이하여 아직도 세상에 전해진다.
○ 내가 75세에 아들을 낳고 81세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모두 비첩의 몸에서 태어났다. 80세에 자식을 낳은 것은 근세에 드문 일로 사람들은 경사라 하나, 나는 재변이라고 여긴다. 장난삼아 두 절구를 지어서 서교(西郊 송찬)와 죽계(竹溪 한안) 두 늙은 친구에게 보냈더니, 두 노인이 모두 화답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세상에 전파되었으니, 더욱 우습다. 나의 시에,
75세 생남도 세상에 드문 일인데 / 七五生男世古稀
어이하여 80에 또 생남했나 / 如何八十又生兒
알겠구나. 조물주가 참으로 하는 일이 많아 / 從知造物眞多事
이 늙은이를 후대하여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것을 / 饒此衰翁任所爲
80 생남은 재앙인가 두려우니 / 八十生兒恐是災
축하는 당치 않소 웃기나 하소 / 不堪爲賀只堪咍
괴이한 일이라고 다투어 말하게나 / 從敎怪事人爭說
어쩌리 세상 풍정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을 / 其奈風情尙未灰
하였다.
○ 가정(嘉靖 중국 명 나라 세종의 연호) 경자년 겨울에 내가 장원(長源) 윤결(尹潔) 군과 태휘(太輝) 허엽(許曄) 군과 더불어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였는데, 하룻밤에는 태휘가 나와 장원에게 시 한 구씩 지어 시편을 만들자고 권하기에 드디어 7언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매일 밤 짓다가, 17일째 되던 밤에 그쳤다. 시편마다 등(燈) 자와 월(月) 자를 써서 시축(詩軸)을 만들고 그 이름을 《등월록(燈月錄)》이라고 하였다. 내가 시편 끝에, “시 짓기를 밤마다 한 편씩 하여 17일째 밤에 그치니, 시 또한 17수이다. 그 말은 등불과 달빛이 서로 비춰 준다는 것이고, 그 뜻은 우리 마음을 서로 환히 알아 준다는 것이다. 부생(浮生)의 모이고 흩어짐이 덧없으므로, 훗날의 면목(面目)을 이 시편에 의탁하여 찾을까 하노라.” 하였다. 태위의 시에,
중흥사에서 17일 밤 읊은 새로운 시는 / 重興十七首新詩
늙어서 보면 기쁨을 가히 알리라 / 老眼看來喜可知
천석은 재사의 시에 흥청거리고 / 泉石始經才子弄
산림은 응당 보물인 양 갈무리됐네 / 山林應盡寶藏奇
등잔불에 책을 읽으니 빛이 찬란하고 / 玉虫逐卷光猶爛
달은 중천에 떠 그림자 옮기지 않네 / 圓桂當中影不移
훗날 난정에서 절창을 읊을 적에 / 他日蘭亭堪絶唱
내 몸 병들어도 따르고 싶구나 / 吾人雖病欲相隨
하였다. 장원과 태휘는 모두 정축생인데, 장원은 정유년에 태휘는 경자년에 각각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나는 병자생으로 진사가 되지 못하였다. 그 후 장원은 계묘년에 급제하고, 나와 태휘는 병오년에 급제하였다. 정미년 봄에 나와 장원이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한담하던 중에 우연히 중흥사에서 시를 짓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장원이 말하기를, “그때 시 초고(草藁)가 송둔암(宋鈍庵 송인) 공에게 있다 하니, 가져다 볼까.” 하기에, 드디어 가져다 보고 태휘의 시운(詩韻)에 따라서 각기 한 편씩 지었다. 장원이 소서(小序)를 짓기를, “경자년 겨울에 내가 심희안(沈希安 심수경의 자)과 삼각산 중흥사에 기숙하며 공부하던 여가에 등불을 피우고 이야기하다 연구(聯句)를 짓기 시작하여 17일째 밤에 그쳤다. 그런데 그때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산만하여 다시 기억하지 못하였다. 내가 계묘년에 급제하고 희안은 병오년에 장원으로 뽑혀 금년 봄에 함께 사간원(司諫院)에 들어와서 바야흐로 그 동안의 헤어지고 만남을 이야기하던 중에 우연히 송둔암 공이 중흥사에서 쓴 시고(詩稿)를 얻어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때때로 펴 본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랍게 여겨 드디어 편지를 보내 구해 오니, 희안이 쓴 초고인데, 희안의 시는 그때 이미 원숙(圓熟)하고 나는 아직도 생삽(生澁)하였다. 손을 꼽아 헤아려보니 이미 8년이 지난지라,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태휘의 시운을 따라서 각기 장률(長律)을 짓고, 장차 화시(和詩)를 평상시에 왕래하는 이들에게 구하여 한가할 때 일개 해이(解頤 옛일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빙그레 웃는 것을 말함)로 삼으려고 한다. 돌아보건대, 구본(舊本)은 더럽고 헐어서 책을 펴보기 어렵기로 이제 다시 고쳐 쓴다.” 하였다. 장원이 또 시를 읊기를,
산당에서 등잔불을 돋우며 밤새워 시를 읊었지 / 山堂挑燈夜覔詩
그때는 알아줄 사람 있으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 當時不料有人知
이런 시편 완상한 저이들 참 일도 많아라 / 被他傳玩眞多事
이제 와서 다시 보니 또한 기특한 노릇이로세 / 到此重看亦一奇
진리를 찾던 것은 모두 젊어서의 일인데 / 搜討共憑筋力壯
이별마저 잦다보니 세월도 흘렀네 / 別離頻見歲星移
직책이 보곤(임금에게 간하는 직책)에 있건만 적은 보답도 없으면서 / 職居補袞虛微報
공연히 마음껏 술도 못마셔 보네 / 空負奚童荷鍤隨
하였고, 나는,
산중에서 우연히 지은 연구의 시편 / 山中聯句偶成詩
남들에게 전해질 줄 처음에야 알았으랴 / 却被人傳未始知
부끄럽소. 나의 공부는 지금도 거친데 / 愧我工夫今鹵莽
당신들의 격률은 더욱 청기로운 것이 / 多君格律轉淸奇
반생 동안 골몰하여 임천을 멀리하니 / 半生汨沒林泉遠
지난 자취 까마득히 세월만 지났네 / 陳迹蒼茫歲月移
이합은 사단이 많으니 운수라고나 할까 / 離合多端還有數
미원(사간원)에서 다시 어울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 薇垣何幸更追隨
하였고, 둔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인데, 공신으로 정2품 봉군(封君)을 이어받았다. 의 시에는,
두 사람은 모두 당세에 시로 이름이 났네 / 兩君當世共鳴詩
붓을 들면 사람이 놀라는 것 자신들은 모르리라 / 下筆驚人不自知
고사에서 함께 지내며 흥취가 넘쳤던 시를 / 古寺同栖饒興趣
새로 번갈아가며 읊으면서 웅장함을 겨루네 / 新聯迭唱鬪雄奇
듣자니, 오랫동안 명예 중함을 사모하여 / 傳聞久仰聲名重
시를 읊으면 해 지는 줄도 몰랐다네 / 唫玩都忘晷景移
아, 나의 불구는 그대로 절름발이가 되었지만 / 嗟我畸孤仍蹙鈍
시단에서 받아준다면 채찍 잡고 따라가겠소 / 肯容壇壘執鞭隨
하였다. 또 임당(林塘) 홍문관 교리 정유길로,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대제학을 지냈다. 의 시에,
미원에 별이 뜰 때 시를 지으란 명령 받아 / 星動薇垣荷索詩
맑은 시편이 노부까지 알 것을 허락한다 / 淸篇仍許老夫知
삼봉(삼각산)의 푸른 빛이 창앞에서 보이는데 / 三峯蒼翠當窓見
두 사람의 문장은 특히 기이하네 / 二子文章特地奇
고고한 모습은 남곽의 은사를 닮아가지만 / 枯槁漸成南郭隱
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勒回長被北山移
내년 봄 배꽃이 떨어질 녘에 찾아가 / 明春好趁梨花落
물가에 산책하노라면 한 중이 따를 걸세 / 散策溪頭一衲隨
하였다. 정미년 겨울에 바야흐로 이것을 빙자하여 동료들에게 많은 화답의 시를 구하였는데, 무신년 가을에 장원(長源)이 피화(被禍) 윤장원이 친우와 시사(時事)를 의논하였는데, 진복창(陳復昌)이 듣고 그 친우를 협박하여 주달하게 하였으므로 고문을 당하여 죽었다. 하니, 다시 화답의 시를 구하지 못하고 책상자에 간직하였다가, 을해년 가을에 우연히 그 상자를 열어 보니, 나도 모르게 슬픔이 일어 책 끝에 시를 썼으니,
등월의 남은 빛이 아직도 이 시에 남아 있는데 / 燈月餘輝尙在詩
그때 심사를 뉘라서 알아 줄까 / 當年肝肺有誰知
되려 늙은 나만 오래 삶이 부끄럽기만 하네 / 却慙老物生偏久
한스럽다, 그대 큰 재주로 운수 홀로 기구한 것을 어찌하리 / 堪恨高才數獨奇
세정은 많이 변하는 것을 / 無耐世情多變幻
예로부터 인사는 그저 무상하구나 / 自來人事喜遷移
차마 손수 쓴 것 보다가 책상에 간직해둠은 / 忍看手藁留巾笥
저승에서 만날 때 혹시라도 가져갈까 해서라네 / 泉下他時儻可隨
하였다. 10여 년 후에 아계(鵝溪)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로, 문형(文衡)을 주관하였다. 가 시축을 빌어보더니, 시를 짓기를,
부질없는 세상에 공연히 두어 수 시를 전하니 / 浮世空傳數首詩
담백한 마음을 아이들이 어찌 알리오 / 沖襟寧許小兒知
두 분의 재주 원래 대적할 이 없고 / 二公才調元無敵
대가들이 포장(화답의 시로 큰 시첩을 만듬)을 하였으니 또 하나의 기사로세 / 諸老鋪張又一奇
달 지자 새벽종 울리니 읊으며 옛일이나 기억하세 / 殘月曙鍾吟裏憶
저문 산은 공연히 푸르렀다가 아름답게 쇠잔하네 / 晩山空翠卷中移
평생에 장원님을 애석히 여겼는데 / 平生每惜長源丈
젊어서 이름 높더니 화 또한 따라들었네 / 妙歲名高禍亦隨
하였다. 이 시축을 임진난에 잃었으니, 아, 가히 한탄할 일이다.
○ 성균관(成均館)에서 춘추로 행하는 석전제(釋奠祭)가 끝나면 문무 대소관(文武大小官)이 모여 음복례(飮福禮)를 행하는데, 그 예가 매우 성대하였다. 1품부터 당상(堂上) 3품까지는 명륜당상(明倫堂上)의 교의(交倚)에 앉고, 당하(堂下) 3품부터 9품까지는 계단 위에 마련한 긴 의자에 앉아있다가, 조촐하게 차린 상 앞에 서서 차례로 엎드렸다가 일어나 음복하였다. 음복이 끝나면 상과 교의 그리고 긴 의자를 철거하고, 제자리로 가서 평좌(平座)하면 각기 큰 상을 드리는데, 주찬(酒饌)이 매우 풍성하였다. 이는 모두 성균관에서 마련하는 것으로, 당상관ㆍ당하관 할 것 없이 서로 주거니받거니하였다. 또 술을 잘 마시는 자에게는 따로 큰 잔을 주어 아주 취한 뒤에야 파하였다. 춘추로 행하는 독제(纛祭)를 지낸 뒤에도 음복의 예를 훈련원(訓鍊院)에서 행하는데, 석전제와 마찬가지이다. 병조(兵曹)에서 보병에게 군포(軍布)를 주면 본원(本院 훈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다. 관례에 따라 관악(官樂)과 영기(伶妓)를 주어 가무(歌舞)를 성대히 베풀어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또 춘추로 행하는 무예도시(武藝都試)를 여는데, 종장(終場)하는 날에는 정부 6조의 당상관 전원과 도총부(都摠府)와 훈련원에서는 각기 당상관 한 사람씩이 참석하였다. 관례에 따라 조정에서는 주악(酒樂)을 내리고, 각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모든 기구를 공급하게 하여 또한 환락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파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조정의 성대한 일이었는데, 임진난 후 음복 등의 행사가 모두 행해지지 않으니, 크게 탄식할 일이다.
○ 국가의 과거법전(科擧法典) 안에는 다만 식년시(式年試)만 있고, 별시(別試)는 근대에 나온 것으로, 시험 내용을 보면 사서(四書 대학ㆍ중용ㆍ논어ㆍ맹자)와 삼경(三經 시경ㆍ서경ㆍ주역) 중에서 제비를 뽑아 강하거나 전혀 강하지 않기도 하니, 이를테면 알성정시(謁聖庭試)를 보는 사람은 더욱 등한시했다. 유생(儒生)들이 강서(講書)를 힘쓰지 않음은 실로 별시(別試)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는 치르지 않고 별시만 더욱 잦았으므로, 경서(經書)를 강하는 것이 전폐되어 과거의 모양새를 이루지 못하니, 가히 탄식할 일이다.
○ 문과 식년 초시(文科式年初試)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성균관에서 생활한 지 3백 일이 넘는 자를 50명 뽑으니, 이는 생원과 진사가 성균관에서 지내도록 권유하는 것이다. 양현고(養賢庫)를 성균관 옆에 설치하고 따로 미두(米豆)를 저장하여 매일 2백 명 분의 식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생원과 진사들은 성균관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또 원점 부시법(圓點赴試法 지낸 일수에 따라 시험에 응시하게 하는 법)을 세워 성균관에서 있은 지 3백 일이 넘는 자는 관시(館試 성균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고, 1백 50일이 되는 자는 한성시(漢城試 서울에서 행하는 시험)나 향시(鄕試 지방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응시하게 하니, 생원ㆍ진사를 배양하고 권면하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균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주야로 있으면서 공자(孔子)를 모시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는 것이 원칙인데, 지금 성균관에서 지내는 것은 유명무실하고, 다만 과거에만 응시하기 위해서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조석으로 식당에 가서 식사가 끝나면 책에 서명하고 그 서명한 것을 계산해서 장부에 올리는 것을 원점(圓點)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도 성균관에서 기숙하지 않고, 자기 집에서 조석으로 와서 식사만 하고 책에 서명한 후 곧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으로 3백 일을 채우니, 이것을 성균관에서 지냈다고 하겠는가. 임진난 후에는 식년시도 거행하지 않고 원점마저 폐지되었으니, 더욱 개탄할 일이다.
○ 세상에서 유학(幼學)으로 문과 급제한 이를 비렴(飛簾)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자세하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생원이나 진사를 거치지 않고 급제한 이를 세상에서 희귀(希貴)하게 여겨서 급제자를 발표한 뒤 유가(遊街)할 때 사람들이 발을 걷고 구경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을미년 겨울에 실시한 별시에서 나의 친척 조카 성이민(成以敏)이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다. 일찍이 동지중추부사 이충원(李忠元)도 또한 유학으로 장원 급제하였으므로, 성이민이 시관(試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날에 동지(同知 이충원)도 청하여 참석하였다. 나는 병으로 참석하지 못하고 이동지에게 1절의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장원 급제하기 세상에 드문 일로 / 居魁及第世稀看
유학이 장원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로세 / 幼學居魁是更難
듣자니 동지가 축하하는 자리에 갔다 하니 / 聞道同知臨慶席
문생과 좌주가 부디 즐겁게 지내소 / 門生座主幸同歡
하였다. 이 동지가 시에 차운하여 보내기를,
큰 거리 많은 집들이 발을 걷고 보면서 / 九街千戶擧簾看
모두들 문과에 장원되기 어렵다 하네 / 共道文科第一難
늙은 정승님 옛일 회상하며 / 黃髮相公懷舊事
좋은 시 읊으니 기쁨 넘치겠소이다 / 爲吟佳句侈玆歡
하였다. 나도 일찍이 장원 급제하였기로, 이동지의 시에 ‘옛일을 회상한다.’고 한 것이다. 또 내가 시를 보내기를,
은문(문생이 시험관을 부를 때)을 잔치에 초대하니 세상이 부러워하고 / 恩門邀宴世多看
의발을 서로 전하니 더욱 어려움을 깨닫겠네 / 衣鉢相傳更覺難
다만 당신이 말석이라도 참석 못해 한스럽소 / 却恨衰翁孤席末
좋은 용두회(장원)가 기쁨을 얻지 못하므로 / 龍頭佳會未成歡
하였다.
○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 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역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 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의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 가정(嘉靖) 신해년 가을 내가 이부랑(吏部郞)으로서 관서(關西) 지방에 사명(使命)을 띠고 갔을 때에 기성(箕城 평양)의 기생 동정춘(洞庭春)과 정을 나누었다가 조정에 돌아왔는데, 그 후 동정춘이 편지를 보내기를, “님을 사모하나 보지 못하니, 생이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겠소. 차라리 죽어서 함께 묻히기라도 바라니, 멀지 않아 선연동(嬋娟洞)으로 가겠나이다.” 하였다. 선연동은 기성 칠성문(七星門) 밖에 있는 곳으로, 평양 기생이 죽으면 모두 여기에 장사지낸다. 내가 장난삼아 한 구를 지어 보냈으니,
종이 가득 쓴 글 모두 맹세한 말 / 滿紙縱橫摠誓言
나도 훗날 저승에서 만나기로 기약하네 / 自期他日共泉原
장부도 한번 죽음을 면하기 어려우니 / 丈夫一死終難免
마땅히 선연동 속의 혼이 되어 보리 / 當作嬋娟洞裏魂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동정춘이 병으로 죽었는지라, 내가 장난삼아 다시 율시 한 수를 짓기를,
생이별에 길이 슬픔에 젖었으니 / 生別長含惻惻情
어찌 사별까지 생각했으리. 문득 목이 맺히네 / 那知死別忽呑聲
부음을 듣자마자 간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 乍聞凶訃腸如裂
가만히 목소리와 용모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네 / 細憶音容淚自傾
편지 몇 번이고 패수에서 왔건마는 / 書札幾曾來浿水
꿈에도 기성에는 가지 못했네 / 夢魂無復到箕城
선연동에 묻힌다는 장난말이 예언이 되었으니 / 嬋娟戱語還成讖
저승에서 같이 지내자는 맹세 저버려 부끄럽소 / 愧我泉原負舊盟
하였더니, 벗들이 보고서 웃었다. 기미년 봄에 내가 호서(湖西) 지방 관찰사로 있을 때 참판 권응창(權應昌) 공이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있어서 그의 서제(庶弟)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이 따라가 있었다. 내가 홍주에 가던 날 송계가 고을 사람에게 가르치던 가요율시(歌謠律詩) 두 수를 주었는데, 그 끝구에,
인생은 뜻대로 남북이 없는 것이니 / 人生適意無南北
선연동의 혼만 되려 하지 마소 / 莫作嬋娟洞裏魂
하였는데, 간절하고도 온당하여 의미가 있었으니, 그때 내가 홍주 기생 옥루선(玉樓仙)을 사랑하였으므로 송계의 시는 징험이 된다. 홍주를 순행할 때 옥루선에게 율시 한 수를 주었는데,
동풍 향해 앉았어도 남몰래 마음 쓰라려 / 坐向東風暗斷魂
창 앞에서 우는 새소리마저 차마 듣지 못하겠네 / 窓前啼鳥不堪聞
이별은 많고 만나기는 드물고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는데 / 離多會少春將晩
길 멀어 편지마저 드문 채 날도 저물려 하네 / 路遠書稀日欲曛
못 믿겠네. 오작교에 까막까치 있단 말 / 未信星橋曾有鵲
무산에 구름마저 없다스랴 / 却疑巫峽更無雲
이 마음 표현하자니 도리어 슬퍼서 / 此情欲寫還怊恨
공연히 금로에 저녁 향불만 피우노라 / 空對金爐換夕薰
하였다. 이어 다른 이로부터 많은 시를 받아 시축(詩軸)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계사년 봄에 공사로 말미암아 홍주에 가서 옥루선(玉樓仙)이 살아있는지 물으니, 시골 마을에 살아있으며 시축도 간직하고 있다 하기에 가져다 보니, 수적(手跡)이 완연한지라, 약간의 발문(跋文 책 끝에 그 책의 내용과 관계 사항을 쓴 것)을 써서 돌려 주었다. 손꼽아 헤아려보니 기미년부터 금년 계사년까지는 35년이며, 나의 나이는 78살인데, 다시 옛날에 왔던 지방을 오게 되었으니, 가히 다행이라 하겠다.
○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 가정 경술년 봄에 어떤 사건으로 벼슬을 잃고 백부의 임소(任所)인 대구(大邱)로 갔다가, 이어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에 놀러가니, 성주 목사 조희(曹禧) 공은 나의 친척되시는 어른인지라, 수일을 머물게 하고 어린 기생으로 하여금 따라다니도록 하였다. 기생의 나이는 겨우 16살이었다. 대구로 돌아가게 되자 목사 조희가 그를 따라보내서 몇 개월이나 같이 지냈는데, 장난으로 절구를 지어 주기를,
어여뿐 기생들 중에서도 제일로 아리따운 그대 / 綽約梨園第一容
나그네로 오늘 우연히 만났네 / 客中今日偶相逢
다른 이의 금석 같은 굳은 맹세 믿지 말고 / 靡他信誓堅金石
천 마디 만 마디 말하건대, 부디 따라가지 말게 / 萬語千言愼莫從
하였다. 다른 이의 시도 많이 받았다. 동료들 중에 사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간 이들이 이것을 보고 많이 화답하였다. 계해년 봄에 내가 본도(경기도) 감사로 있으면서 성주에 가서 기생의 안부를 물으니, 그는 경적(京籍)에 뽑혀 갔다고 하였다. 내가 갈리어 돌아오니, 그 기생은 또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다. 기러기와 제비처럼 가는 길이 어긋나니, 가히 한탄할 뿐이다. 얼마 후에 그 기생이 병으로 죽으니, 권송계(權松溪)는 성주 사람이라, 그 부음(訃音)을 전하고 시로써 조상하거늘, 내가 그 시에 차운하기를,
늙어서 낙신부를 지을 마음 없으니 / 老去無心賦洛神
물결 위에 걷는 버선 먼지 나는 것 못 보노라
/ 凌波不見襪生塵
아직도 처음 만나던 모습만 생각나는데 / 當年謾憶初呈態
오늘 죽었다는 소식 듣고 놀랐네 / 此日驚聞忽化身
운우지락 있던 그때 꿈 희미하니 / 暮雨朝雲迷舊夢
춤추고 노래하던 옷과 부채 누구에게 전했을꼬 / 舞衫歌扇付何人
성주는 이로부터 화려한 맛 감해져서 / 星山自此繁華減
적막한 임풍루(성산에 있는 누각) 누각 이름 에 손님만 앉았으리 / 寂寞臨風 樓名 座上賓
하였다.
○ 징군(徵君) 성운(成運)은 보은(報恩) 종곡(鍾谷) 사람이다. 행동거지가 매우 고상하고 문장이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 시에 이르기를,
종산 속에 들어와서 / 一入鍾山裏
솔과 대를 벗삼아 초막에 누웠네 / 松筠臥草廬
하늘은 높아도 머리는 숙여야 하고 / 天高頭肯俯
땅은 좁다 해도 무릎은 펼 만하다 / 地窄膝猶舒
명성 있는 사람 누가 있을꼬 / 名下何人在
숲 속에 늙은이 남아있네 / 林間此老餘
사립문에는 손님도 절로 끊어졌는데 / 柴門客自絶
금서는 놓는 날이 없네 / 無日罷棄書
하였다. 또 을사 위사훈(乙巳衛社勳)을 혁파하였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짓기를,
일은 지났거니 슬퍼한들 무엇 하리오만 / 事往嗟何及
어진 이를 회상하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네 / 懷賢淚滿衣
물결이 뒤집히면 용도 말라죽고 / 波軋龍爛死
소나무가 넘어지면 학도 놀라 날아가네 / 松倒鶴驚飛
지하(地下)에는 은원이 없으련만 / 地下無恩怨
인간세상에는 시비만이 남아있네 / 人間有是非
우러러 저 햇빛을 보라 / 仰瞻黃道日
누가 그 빛을 가리리 / 誰復俺光輝
하였으니, 두 시가 모두 대단히 아름답다. 성징군은 세상에 뜻이 없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처사(處士)였다.
○ 당(唐) 나라 회창(會昌 당 무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洛陽)에 살던 전 회주 사마(懷州司馬) 호고(胡杲)는 89세,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致仕 나이가 늙어서 벼슬을 사직함)한 길민(吉旼)은 88세, 전 자주 자사(磁州刺史) 유진(劉眞)은 87세, 전 용무군장사(龍武軍長史)인 정거(鄭據)는 85세, 전 시어사 내공봉관(侍御史內供奉官) 노진(盧眞)은 83세,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 장혼(張渾)은 77세,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한 백거이(白居易)는 74세였는데, 7명이 칠로회(七老會)를 만들고, 각각 칠언 육운 배율시(七言六韻排律詩) 한 수씩을 지었으며, 백거이는 그 서문을 썼다. 낙양에 오래 살던 노인 이원상(李元爽)은 136세, 승(僧) 여만(如滿)은 95세인지라, 2명을 추가하여 가입시켰으므로 이것이 구로회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사모하여 후세에 전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謩)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모임에는 비록 참여하였으나 대열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송(宋) 나라 지화(至和 인종의 연호) 연간에 저양(雎陽)에서 살던 태자의 태사(太師)로 치사한 두연(杜衍)은 80세,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치사한 왕환(王煥)은 90세, 사농경(司農卿)으로 치사한 필세장(畢世張)은 94세,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치사한 주관(朱貫)은 88세, 가부 낭중(加部郞中)으로 치사한 풍평(馮平)은 87세였는데, 5명이 오로회(五老會)를 만드니, 그때 사람들이 그 모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그 성사(盛事)를 기록하였으며, 두연이 칠언 율시(七言律詩) 한 수를 지으니, 다른 4명도 모두 차운을 하였다. 동향 사람 전명일(錢明逸)은 두연의 명을 받고 서문을 지었다. 송(宋) 나라 원풍(元豐 신종의 연호) 연간에 낙양에 살던 사도(司徒)로 치사한 부필(富弼)은 79세, 태위 판하남부(太尉判河南府) 문언박(文彦博)은 77세, 상서 사봉낭중(尙書司封郞中)으로 치사한 석여언(席汝言)은 77세였다. 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치사한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 소경(太常少卿)으로 치사한 조병(趙丙)은 76세, 비서감(秘書監)으로 치사한 유궤(劉几)는 75세, 위주 방어사(衛州防禦使)로 치사한 풍행(馮行)은 75세, 천장각 대제 제거 숭복궁(天章閣待制提擧崇福宮) 초건중(楚建中)은 72세, 사농 소경(司農少卿)으로 치사한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 남원 사판 대명부(宣徽南院使判大名府) 왕공진(王拱辰)은 71세, 태중 대부 제거 숭복궁(太中大夫提擧崇福宮) 장문(張問)은 70세, 용도각 직학사 제거 숭복궁(龍圖閣直學士提擧崇福宮) 장도(張燾)는 70세, 단명 전학사 겸 한림 학사(端明殿學士兼翰林學士) 사마광(司馬光)은 64세였는데, 13명이 기영회(耆英會)를 만들고, 민(閩 지금 복건성의 지명) 사람인 정환(鄭奐)에게 명하여 회원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이때 왕공진이 대명부(大名府)에 있으면서 문로공(文潞公 문언박)에게 글을 보내 사마광(司馬光)을 기영회에 가입시키도록 청하니, 이때 사마광은 나이 70이 못 되어서 기영회에 가입할 수 없으나, 문로공이 전부터 그의 인격을 존중하던 터라 적겸모(狄兼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영회에 가입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사마광은 후배라고 사양하니, 문로공이 정환에게 몰래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전하게 하였다. 문로공이 첫번째로 모임을 열었으며 그 나머지 회원들도 차례로 모임을 가졌다. 부공(富公 부필)이 먼저 오언 장편시(五言長篇詩)를 짓고, 다음에 문로공이 칠언 육운 배율시를 지으니, 나머지 회원들도 배율시로 5언이나 7언시를 지었으며, 또는 7언 장편시를 지은 자도 있었는데, 사마광이 그 시편에 서문을 썼다. 위에서 말한 칠로회나 오로회, 그리고 기영회에서는 모두 모임을 할 때의 나이가 쓰여져 있으나 그들의 향년(享年 평생 산 나이)이 얼마인지 상고할 수 있는 자로는 오직 백거이는 86세, 두연은 81세, 문언박은 92세, 사마광은 68세였다. 나머지 회원의 나이는 모두 기록한 것이 없다. 우리 고을의 노인들이 당송(唐宋) 제현(諸賢)의 일을 사모한 나머지 10여 명이 모임을 만들어 여러 해를 지내다가 난리를 만나 해산하였는데, 난리 후에 생존한 이는 다만 서교(西郊) 송공(宋公 송찬)과 죽계(竹溪) 안공(安公 안한), 그리고 나(심수경) 세 명이었는데, 죽계도 이제 또 작고하였다. 두 명만으로는 모임을 다시 하지 못하겠으니, 가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豆毛浦)의 북변(北邊) 산기슭에 있으니 서울과는 7, 8리가 된다. 조종조(祖宗朝)에서는 인재를 기르려는 뜻이 대단하여 모든 은총(恩寵)이 이 서당(書堂)에 특별하니 사람들은 신선이 사는 영주(瀛洲)에 오름에 비유하였다. 성종 때는 수정배(水精盃)를, 중종 때에는 선도배(仙桃盃)를 하사하였으며, 명종 기유년 여름에는 서당에 선온(宣醞)을 베풀고 또 혜호배(蟪䗂盃)를 하사하였다. 혜호는 벌레 이름으로 술을 마시기만 하면 죽는다. 이 벌레 모양으로 술잔을 만든 것은 술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다. 관물(觀物) 민기(閔箕) 공ㆍ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공ㆍ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 공ㆍ국간(菊磵) 윤현(尹鉉) 공, 그리고 내가 선온(宣醞)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튿날 독서당 동료들이 나에게 사은(謝恩)의 글을 지으라고 하여 한 구절을 지었으니,
수정배ㆍ선도배와 더불어 함께 전해지리 / 與水精仙桃而竝傳
하였는데, 이 말은 이 술잔을 하사한 성종과 중종 때에 서당에 대한 은총이 더욱 현저하였으므로 이렇게 쓴 것이다. 임당이 이 구절을 독서당의 《고사록(故事錄)》에 쓰고, 이것을 ‘실록이라.’ 하였다. 이 일은 이미 49년이 지난지라, 동료들은 모두 작고하고 나만 살아 있으니, 아, 슬프다. 임진난 후에는 서당마저 폐지된 지 오래되니 실로 한탄스럽구나.
○ 나의 당질 심일승(沈日昇)이 사옹원(司饔院) 참봉으로서 사기소(沙器所)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나에게 말하기를, “술에 대한 시를 지어 보내 주시면 잔대에 그 시를 써서 구워 만들겠다.” 하기에 내가 5언 절구를 지었으니,
주덕송은 참으로 읊을 만하며 / 酒德眞堪頌
얼큰히 취하면 화평스럽다 / 醺醺養太和
술잔에 내 훈계를 부치노니 / 巵觴我寓戒
오직 원하건대 술은 많이 들지 마소 / 唯願酌無多
하였더니, 심일승이 그 시를 새겨 새 술잔을 구워 보내왔다. 대개 이 시는 나의 자식이나 조카를 훈계하고자 한 것이지, 타인에게야 어찌 준수하기를 바라리오마는, 술의 재앙은 비참하니, 몸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라면 어찌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명종 임술년 겨울에 왕명으로 김주(金澍)ㆍ박충원(朴忠元)ㆍ오상(吳祥)과 나를 정원(政院)에 불러 비단에 그린 긴 병풍 네 벌을 내리시니, 병풍마다 8폭으로 되어 있고 그 끝 폭은 비어 두었다. 그림은 네 벌이 각기 다르니, 곧 성천도(成川圖)ㆍ영흥도(永興圖)ㆍ의주도(義州圖)ㆍ영변도(寧邊圖)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김주는 성천도를, 박충원은 영흥도를, 오상은 의주도를, 심수경은 영변도를 각기 맡아 기문(記文)과 장편시(長篇詩)를 지어서 비어 있는 비단폭에 직접 써서 들이라.” 하였다. 네 명이 배복(拜伏)하고 황공히 물러와서 저마다 수일 내에 기사(記事)와 시(詩)를 써서 바쳤는데, 나와 같은 거친 문장과 졸렬한 글씨로 성상의 상을 입기까지 하였으니, 영광스럽고도 다행함을 어찌하리오. 이보다 앞서 한양궁궐도(漢陽宮闕圖)가 있었는데, 홍섬(洪暹)에게 기문을 짓고 정사룡(鄭士龍)에게 장편시를 짓게 하였다. 또 평양도(平壤圖)는 정유길(鄭惟吉)이 장편시를 짓고 전주도(全州圖)는 이량(李樑)이 장편시를 지었는데, 모두 병풍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듣자니, 이 병풍 그림을 좌우에 두고 영원히 전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진년의 병화로 모두 불에 타고 말았으니, 아, 애통하다.
○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인시화(東人詩話)》에 이르기를, “전조(前朝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 사암(思菴) 유숙(柳淑)이 벼슬을 사직하고 시골로 돌아가는 벗을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인간들이 기름을 짜듯이 서로들 괴롭히는데 / 人間膏火自相煎
명철한 공은 길이 역사에 전하리 / 明哲如公史可傳
이미 위급한 때에 사직을 편안히 하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시골로 가니 신선이 되겠구려 / 更從平地作神仙
오호에 놀던 꿈은 끊어지고 연파(자연풍경을 말함)만 푸르고 / 五湖夢斷煙波綠
삼경에 가을이 깊으니 들국화 곱구나 / 三逕秋深野菊鮮
그러나 나는 벼슬을 버리고 가지를 못하니 / 顧我未能投紱去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하였다. 신돈(辛旽)이 이 시를 보고 명철(明哲)이나 오호(五湖) 등의 말을 들어 왕에게 참소하여 죽였다.” 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에도 이 시가 쓰여져 있는데, 여기에는 이인복(李仁復)이 유숙(柳淑)을 전송하며 지은 시라 하고, 그 시 끝에 주(註)를 내기를, “끝 구절을
서풍(여기에서는 불교를 지칭한 것으로, 곧 신돈을 말함.)이 부는 속세에 대한 뜻은 막연하네 / 西風塵土意茫然
라고 하였다가, 신돈이 볼까 염려하여
요새는 쌍빈이 흰눈처럼 날리네 / 邇來雙鬢雪飄然
라고 고쳤다.” 하였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모두 문장을 박람(博覽)한 사람이며 또 시대의 선후도 서로 멀지 않는데, 기록된 내용이 이처럼 다름은 괴이하다. 신돈이 이 시를 가지고 왕에게 참소하였다면 유숙이 지은 것이 명백하다.
○ 부모에 대한 삼년상(三年喪)은 성인(聖人)이 정한 제도이다. 그러므로 효자(孝子)와 자손(慈孫)이 혹 곡읍(哭泣)과 음식의 절차에는 예(禮)에 지나치는 일도 있으나, 기상(期祥 복 입는 기간)과 복제(服制 복 입는 제도)는 감히 고치지 못한다. 또 국상(國喪)의 제도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상세히 정해서 법 조항의 첫 번째에 명시하였으므로 대대로 이 법령을 준수하였으니, 한 사람의 사견(私見)으로 변경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지난번 왕후(王后) 상(喪)에 한 음관(蔭官)이 제의하기를, “졸곡(卒哭) 후 백관(百官)이 오사모(烏沙帽)와 흑각대(黑角帶)를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하여, 조정에서 회의를 열어서 백모(白帽)와 백대(白帶)를 고치니, 그렇게 큰 예(禮)를 경솔히 고칠 수 있을까. 진실로 한심한 일이다. 대신(大臣)과 예관(禮官)들은 그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 국상 복제(國喪服制)에 변방(邊方)은 상사(喪事)를 행하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는 적(敵)에게 국상(國喪)이 있음을 알리지 않고자 해서이다. 변장(邊將)이라 해서 국상을 지키는 제도에 어찌 내지(內地)와 다름이 있으리오마는, 듣자니 무사들은 국상이 있어도 술과 기생으로 노는 것이 평시와 같다 하니, 진실로 한심하다. 명종의 상이 있을 때 내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서 남도 병사(南道兵使)로 전근되었는데, 수개 월 동안 갑산 행영(甲山行營)에서 유방(留防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방비함)하게 되었다. 영중(營中)에 정원루(定遠樓)라는 누각이 있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스스로 우습구나, 인생은 부질없이 고생만 하는데 / 自笑浮生謾苦辛
해마다 전근하느라 머리털만 희어 가네 / 年年飄轉鬂絲新
누가 옥장(장군의 영막)의 이 외로운 손을 알아 줄까 / 誰知玉帳孤眠客
일찍이 나도 청릉 속에 누웠던 사람이라네 / 曾是靑綾慣臥人
천리나 떨어진 달밤에 지내기 어려운데 / 千里月明難度夜
뜰에 꽃이 지니 봄도 지났네 / 一庭花落已經春
호두연함은 원래 나의 일이 아니니 / 虎頭燕頷非吾事
그저 허명으로 이 몸을 그르칠까 한하네 / 却恨虛名誤此身
하였다. 이해가 만력(萬曆) 기사년 봄이다. 수십년 후에 들으니 그 시판(詩板)이 아직도 있다고 하더라.
○ 명종 때에 내가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다시 부수찬(副修撰)으로 있다가, 부교리(副校理)와 부응교(副應校)를 지냈는데, 모두 오래지 않아서 교체되었고, 계축년 초봄에 응교(應校)가 되었다가 그 해 초가을에 교체되었다. 그 동안 성상이 부지런히 경연(經筵)에 나오니 하루에 세 번이나 접한 날도 많으며 어떤 때는 밤까지 접하기도 하였다. 판서 박계현(朴啓賢)이 한림(翰林)이 되어서 나에게 말하기를, “공의 진강(進講)하는 소리는 가히 들을 만하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그 해 겨울 부모를 모시기 위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가 되기를 원하니, 박계현이 나에게 이별시를 지어 주기를,
강독은 당세에 제일이라 추존하니 / 講讀當今推第一
모름지기 다시 범순부가 온 것 같다 / 會須重喚范淳夫
하였는데, 범순부는 송(宋) 나라의 시강(侍講) 범조우(范祖禹)의 자(字)이다. 정이천(程伊川 정이)은 그는 온화한 기색으로 “시비를 개진해서 임금의 뜻을 인도한다.”고 칭찬하였고, 소동파(蘇東坡 소식)는 “그는 강사(講師)의 삼매(三昧)를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용렬하고 노둔한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비유가 되겠는가. 그저 시인의 허탄한 말일 뿐이다. 갑인년 가을에 내가 병으로 부평 부사를 그만두고 집에 한가로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특지(特旨)로 전한(典翰)에 임명하였으니, 관원(館員)에게 특지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을묘년 5월에 직제학에 오르고, 그해 8월에 승지가 되니 그 은총이 근래에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조금의 보답(報答)도 없었으니, 진실로 죄가 있다. 그 후에는 왕이 경연에 나오는 일이 드물 뿐만 아니라 관원들도 병을 핑계하고 2, 3개월 동안 직(職)에 머무른 자가 없었으니, 식자(識者)로서는 한심한 일이다.
○ 송(宋) 나라 참정(參政) 채제(蔡齊)는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날마다 진한 술을 마시고 가끔 술에 취하니, 그 대부인(大夫人)은 연세 높은 노부인으로 매우 근심하였다. 가속(賈餗) 공속이 채제의 어짊을 사랑하여 그가 술로써 학문을 폐하고 병이 생길까 염려하여 시를 주어 풍자하였으니,
성군의 사랑이 두터워 장원으로 뽑히고 / 聖君寵厚龍頭選
자모의 은혜 깊어서 백발이 늘어졌네 / 慈母恩深鶴髮垂
임금의 사랑과 어머니 은혜를 모두 갚지 못한 채 / 君寵母恩俱未報
술로 병이 들면 후회한들 무엇하리 / 酒如成病悔何追
하니, 채제가 놀라 일어나 사죄하였다. 이로부터 친객(親客)이 아니면 술을 대하는 일이 없으며, 종신(終身)토록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세상에 술을 즐기는 자는 비록 부모의 훈계도 듣지 않는데, 채공은 과객의 풍자로 인하여 즉시 그 허물을 고쳤으니, 참으로 현인이라 하겠다.
○ 명종(明宗) 즉위(卽位) 3년인 무신년 봄에 독서당(讀書堂)에 같이 선발된 자는 교리 윤춘년(尹春年), 좌랑 한지원(韓智源), 전적 박민헌(朴民獻), 수찬 윤결(尹潔), 그리고 좌랑 나였다. 윤춘년은 갑술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서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고 나이가 60이 넘어 작고하였다. 한지원은 계유생으로 갑진년 가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는데, 나이 50도 못 되어 작고하였으며, 박민헌은 병자생으로 병오년 봄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고 나이 70이 넘어 작고하였다. 윤결을 정축생으로 계묘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수찬이 되었다가 32세로 비명에 죽었다. 나는 병자생으로 병오년 가을 식년시에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議政)에 이르렀고 나이 80이 넘었는데도 아직 병이 없다. 나는 5명 중에서 재덕(才德)이 가장 낮은데 벼슬과 수(壽)는 가장 높으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벼슬은 혹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재앙을 없앨 수 있으며 수명은 혹 조심하고 섭생으로써 요절(夭折)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 그 본분은 천명에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될 바가 아니다.
○ 송(宋) 나라 승상(承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은 자기 고향인 낙양(洛陽)으로 돌아왔을 때 78세였는데, 조산대부(朝散大夫) 정향(程珦), 조의대부(朝議大夫) 사마단(司馬旦)과 사봉 낭중(司封郞中) 석여언(席汝言)과 더불어 동갑회(同甲會)를 만들고 각기 시를 지었다. 노공의 시에,
4명의 나이 3백 12살인데 / 四人三百十二歲
또한 동갑 병오생이네 / 况是同生丙午年
양원(양 나라 효왕의 화원)에서 시를 읊는 격이요 / 占得梁園爲賦客
상령에서 지초를 캐는 신선이로세 / 合成商嶺採芝仙
청담은 물 흐르듯 바람은 저절로 나고 / 淸談亹亹風生席
흰머리 날리니 눈이 어깨에 가득 찬 듯하네 / 素髮蕭蕭雪滿肩
이 같은 모임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니 / 此會從來誠未有
낙양에서 응당 그림으로 길이 전하리 / 洛中應作畵圖傳
하였다. 내가 항상 부러워하고 그 시에 차운하기를,
노공과 동갑으로 네 어진 분이 있었는데 / 潞公同甲四名賢
80에서 아직 두 살이 모자라네 / 八十將臨未二年
낙양에는 노인이 많다지만 / 共道洛中多壽考
누가 이 지상에 신선 있는 줄 알리 / 誰知地上有神仙
백 살이던 자야(예전에 오래 산 장자야)의 걸음을 따를 것이요 / 百齡子野堪追武
구로회를 만든 향산(당 나라 백낙천)과 어깨를 겨루리 / 九老香山可竝肩
어찌 그림으로 길이 남기련가 / 何用畵圖垂不朽
좋은 시구 지금도 전해지네 / 好看詩句至今傳
하였다. 노공의 향년(享年)은 92세였고, 정향(程珦)과 사마단과 석여언의 향년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때에 낙양에서는 나이 70이 되면 동갑회를 만들었다고 하니, 또한 기특한 일이다. 나와 동갑은 병자생으로 35명이 있어 동갑 계(契)를 하였는데, 5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나 혼자 생존하였다. 노공의 시에 차운한 여흥(餘興)으로 감탄한 나머지 다시 한 수를 지었으니,
동갑 병자생 35명은 / 同丙生人三十五
젊어서 계를 하여 이제 노쇠하였네 / 少年爲契到衰年
세월은 흘러 많은 사람 세상 떠나 / 光陰遞去多辭世
80년 동안 모두 신선이 되었네 / 八十踰來盡作仙
번화하던 자리 적막하여 홀로 탄식하고 / 盛席寥寥空自嘆
외롭고 쓸쓸한 몸 누구와 같이하리 / 孤形孑孑比誰肩
길게 살고 오래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 / 長生久視眞難事
다만 팽조와 노자만 만고에 전해지네 / 只有彭耼萬古傳
하였다.
○ 우리 나라에서 장원 급제하여 대제학이 된 자는 권제(權踶)ㆍ정인지(鄭麟趾)ㆍ최항(崔恒)ㆍ김안로(金安老)ㆍ정사룡(鄭士龍)ㆍ정유길(鄭惟吉)ㆍ박순(朴淳)ㆍ노수신(盧守愼)ㆍ이이(李珥)이다. 조종조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이 문형을 맡고 홍문관 대제학은 다른 사람이 겸임하였는데, 중종 이후에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두 대제학을 한 사람이 겸직하게 되었다. 특히 어세겸(魚世謙)과 이행(李荇), 그리고 김안로는 의정(議政)이 된 뒤에도 대제학을 겸하고 있어서 여론이 좋지 않기도 하였다.
○ 선가(禪家 불교의 한 종파)에서는 사제(師弟)간에 도(道)를 전하는 것을 의발(衣鉢)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의발로 도를 비유하는 것이다. 고려 때에 문생(門生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좌주(座主 과거의 수석 고시관)가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문자을 의발에 비유한 것이다. 대제학도 의발을 서로 전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조종조에서는 대제학에게 큰 벼루가 있어서 서로 전하였다고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
○ 벼슬이 1품으로 나이 70세 이상이 되어도 국가에 중요한 일에 관계하여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에게 궤장(几杖 70세가 넘은 노재상에게 주는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는 것이 국가의 법례이다. 만력(萬曆) 계유년 4월에 영중추부사 홍섬(洪暹)이 이미 영의정을 지내고 나이 70에 궤장의 하사를 받고 궤장연(几杖宴)을 베풀 때 여러 재상들이 많이 모였다. 내시 중사(中使)와 도승지 이희검(李希儉)은 선온(宣醞 하사하는 술)을 가져오고, 주서(注書) 이준(李準)은 교서(敎書)와 궤장을, 우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참찬 원혼(元混),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 판윤(判尹) 강섬(姜暹), 형조 참판 박대립(朴大立), 우윤(右尹) 김계(金啓)가 자리에 참여하고, 나 또한 호조 참판으로 말석에 참여하였다. 이때 상공(相公 홍섬)의 대부인(大夫人)의 나이 87세였는데, 그는 영의정 송질(宋軼)의 딸이었다. 상공의 선군(先君) 홍언필(洪彦弼)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궤장을 하사 받았으니, 대부인은 영의정의 딸이고 영의정의 아내이며 영의정의 어머니다. 두 번이나 이런 영화를 보니, 이는 근고에 없던 성사(盛事)였다. 노의정(盧議政 노수신)이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기를,
삼종 동안 모두 정승 집 문밖에 나가지 않았으니 / 三從不出相門闈
이 같은 영화는 오늘이 처음이로세 / 此事如今始有之
조정에서는 영수장 짚고 다니다가 / 更拄省中靈壽杖
집안에서는 노래자(중국 초 나라의 현인이며 효자로 70세에 아이옷을 입고 어린이 장난을 하여 부모를 위안하였다)의 옷을 입었네 / 却被堂上老萊衣
우로와 같은 은혜 천년에 참으로 드문 일이요 / 恩霑雨露眞千載
기쁘게 맞아들인 대관들은 한때에 극진한 분이었네 / 歡接冠紳盡一時
어디서 와서 나도 자리에 참여하니 / 何處得來叨席次
좋은 시로 정승 집 빛내지 못함이 부끄럽네 / 愧無佳句賁黃扉
하였다. 나도 시를 지었으니,
궤장의 큰 은혜는 이 나라에 드물거니 / 几杖鴻恩罕此邦
정승님 집안 경사 다시 짝이 없네 / 相公家慶更無雙
세 정승을 이어받으니 삼괴 구극 벼슬 다 지냈고 / 傳三議政官槐棘
대부인 모셨으니 복은 바다와 강물 같네 / 奉大夫人福海江
자리에 가득 찬 영광 꽃이 자리에 비쳐 있고 / 滿座榮光花映席
하늘에 오를 듯 기쁜 일 술마저 동이에 가득하네 자리 위에 만든 꽃이 두 바구니가 있고, 선온한 술이 열 항아리가 있었다. / 騰空喜氣酒盈缸 席上有造花二盆宜醞十缸
이때 이 성사를 기록하여 전하려 하나 / 一時盛事應須記
어디서 크게 펴 놓을 서까래 같은 붓을 얻으리오 / 安得鋪張筆似杠
하였다. 여성군 송인은 상공의 표제(表弟 외종제)로, 기문(記文)과 배율시(排律詩)를 짓고 또 다른 이의 장편시며 율시(律詩)도 수집하여 시첩(詩帖)을 만들었다. 상공이 화공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여성군은 그 그림 뒤에 여러 시를 써서 일가(一家)의 보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대부인의 향년이 94세, 상공의 향년이 82세이니, 인간 세상의 복된 경사가 진실로 짝이 없도다.
○ 계유년 인재(忍齋) 홍상공(洪相公 홍섬)의 궤장연(几杖宴) 때에 지은 소재(蘇齋) 노상공(盧相公 노수신)의 시와 나의 시는 이미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계유년에서 벌써 25년이 지나고 보니 그 잔치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나와 이준(李準)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이공(이준)은 벼슬이 2품이고 나는 벼슬이 의정을 거치고 나이 80을 넘긴 터라 그때 잔치를 추억하노라니 어렴풋이 일어나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고 그때 시를 생각하니, 그 즉석에서 경솔히 지었기로 자못 정(情)을 다하지 못한지라 이제 점 찍으며 고쳐 짓는데, 추한 여자가 화장한 격으로 다만 더욱 추하게 만들까 염려하면서도 다음의 시를 읊기를,
궤장은 원래 나이와 작위가 높은 이를 위함이니 / 几杖元因齒爵堪
고문에서 성은 내리심을 독차지하였네 / 高門偏荷聖恩覃
두 임금 대에 계속하여 70살이 두 분이요 / 二朝繼顯稀年二
삼대를 이어받은 정승이 셋이로다 / 三代相傳議政三
대부인 모시고 편안히 복받고 / 奉大夫人綏福履
재상을 맞이하니 동남에서 모두 왔네 / 邀諸宰相盡東南
인간 세상 영화가 누군들 이 같을까 / 世間榮耀誰如此
왁자하게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네 / 喧播應爲萬口談
하였다. 인재의 아들 홍기영(洪耆英)은 나의 사위이다. 그 잔치 때에 만든 화첩(畵帖)을 병화로 잃었다 하기로 이 글을 주어서 보관하도록 하니, 이는 그때 화첩의 만분에 일이라도 충당할까 해서이다.
○ 독서당(讀書堂)은 옛날에 대청(大廳)과 남루(南樓)가 있고, 남루 북편에는 침방(寢房)이 있었다. 임자년 연간에 당료(堂僚) 임당(林塘)ㆍ정유길(鄭惟吉)과 낙촌(駱村) 박충원(朴忠元), 국간(菊磵) 윤현(尹鉉), 동원(東園) 김귀영(金貴榮), 그리고 내가 서로 상의하여 남루 동편에 당 하나를 지으니 매우 산뜻하였다. 누각을 문회당(文會堂)라고 하였는데,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당원(堂員)들이 또 새 집을 남루(南樓) 서북쪽 못가에 지으니 더욱 산뜻하였다. 독서당의 선생(先生 전직장)들을 모시고 낙성연(落成宴)을 베푸니 나와 지사(知事) 임열(任說)이 참여하였다. 당시 당원으로는 교리 유근(柳根)ㆍ이항복(李恒福), 그리고 봉교(奉敎) 이호민(李好閔)이 자리에 있었다. 사미(四美 양신(良辰)ㆍ상심(常心)ㆍ미경(美景)ㆍ낙사(樂事))와 이난(二難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빈객)을 갖추었으니 그 또한 훌륭한 모임이었다. 술이 반취되어 내가 먼저 칠언 율시와 오언 율시를 지으니, 제공(諸公)이 서로 수창(酬唱)하여 수십여 편이 되었다. 다만 내가 먼저 지은 시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모두 기억나지 않는다. 7언시에,
생각해보니 내가 독서당에 들어갔던 것은 30년 전으로 / 憶昨登瀛卅載前
남루와 동각에 올라 신선과 짝하였네 / 南樓東閣伴神仙
몸이 대궐로 돌아가 관에 오래 얽매이니 / 身歸闕下官長繫
길이 호변에 막혀 꿈만 자주 꾸네 / 路隔湖邊夢屢牽
좋은 날 외람되게 늙은이 초청되어 / 勝日猥蒙招舊物
화려한 집에 욕되게도 첫 자리에 앉았었네 / 華堂忝得赴初筵
눈에 보이는 풍경은 예나 다름없는데 / 眼中風景渾如昔
부끄럽다 시 쓰자니 서까래 같은 붓이 없네 / 愧乏題詩筆似椽
하였고, 또 5언시에는,
몇 해나 구관을 그리워하였더니 / 幾年思舊館
오늘에야 신당을 감상하네 / 今日賞新堂
나무 그림자는 3층 문지방에 어른거리고 / 樹影三層砌
하늘 빛은 반 마지기 연못에 비추네 / 天光半畝塘
학은 어리석어 처음으로 춤 배우고 / 鶴癡初學舞
연꽃은 늙어도 향기를 머금었네 / 荷老尙含香
날이 저물어도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 盡日忘歸去
어찌 시 짓고 술 마시기 사양하리 / 寧辭詠且觴
하였다. 이때는 만력 정해년 8월 25일이었다. 이때 임지사(임열)는 78세이며 나는 72살이었다. 유교리(유근)는 39세이며 이교리(이항복)는 32세이고 이봉교(이호민)는 38세였다. 이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제명(題名)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정해년부터 지금까지가 11년이 되었는데, 유공(柳公)과 두 이공(李公)의 벼슬은 모두 2품이 되고, 나 역시 벼슬이 1품으로 아직도 죽지 않았는데, 서당은 병화에 타고 터만 있어서 다시는 사문(斯文)의 모임을 갖지 못하겠으니, 실로 한탄할 바로다.
○ 의정(議政) 유송당(兪松塘 유홍)은 벼슬이 2품이 되었을 때에 치사(致仕)하고, 광주(廣州) 용진(龍津) 무수동(無愁洞)에 농막을 짓고 그 이름을 퇴우정(退憂亭)이라 하고, 여러 재상들에게 시를 구하니, 의정 박사암(朴思菴)이 첫머리에 칠언 율시를 쓰고, 의정 노소재(盧蘇齋)ㆍ정임당(鄭林塘)ㆍ김동원(金東園)ㆍ이아계(李鵝溪)가 차례로 쓰고, 다른 재상들도 많이 화답하였으며, 나도 화시를 지었으니,
비로소 티끌 세상 나오니 문득 신선이로세 / 纔出塵寰便是仙
무수동 속에 별천지 감추어져 있네 / 無愁洞裏別藏天
젊어서 큰 공을 세워 은혜 갚았으니 / 黑頭勳業酬恩日
청산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게 되었네 / 靑嶂栖遲乞退年
누가 세상에 일 많음을 알까 / 誰識世間忙歲月
몇 번이고 외방의 좋은 산천 생각했네 / 幾思方外好山川
나도 소매를 떨치고 그대 따라가리라 / 從君拂袖吾將決
돌아가는데 어찌 성 아래 옥토가 필요하랴 / 歸去寧須負郭田
하였다. 임당(林塘)은 끝까지 물러나지 못하고 72세로 작고하였다. 나도 벼슬이 2품으로 70살이 된 후로는 여러 번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다가 80이 넘어서야 겨우 물러나게 되었다. 내가 만일 수년 전에 죽었더라면 물러나려는 뜻을 끝내 얻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게 되었으니 어찌 하늘이 주신 다행이 아니리오. 이에 이전 시에 차운하기를,
슬프다, 송당이 이미 신선이 되었구나 / 怊悵松塘已作仙
출세하고 은둔하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 모두가 하늘의 소관일세 / 行藏修短摠關天
거친 전원으로 돌아가려 청한 것이 오늘까지 많았는데 / 荒園乞退多今日
별장에서 시를 구하던 옛날이 생각나는구나 / 別墅求詩憶昔年
얻고 잃었다 한 것 몇 번인가 희미해 꿈만 같고 / 得喪幾回迷似夢
세월을 어찌하리 냇물처럼 흘렀네 / 光陰無耐逝如川
율리 사는 비선리에 밤나무가 많으므로. 에 늦게 왔다고 말하지 말라 / 莫言栗里 飛仙多栗 歸來晩
생계는 그래도 두어 마지기 밭이 있다네 / 生計猶存數畝田
하였다.
○ 서자[庶孼]로서 문장에 능한 자는 조종조 때 어무적(魚無跡)과 조신(曺伸)이 이름이 났고 근세에는 권응인(權應仁)이 또한 이름이 났는데 그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한 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아깝다. 평소 나와 수창(酬唱)한 시가 상당히 많은데 10년 전에 나에게 두 편의 율시를 보냈기로 그 시에 차운할 일이 있는데, 권응인의 시는 기억치 못하고 다만 나의 졸작만 기록해 본다.
처세하기 참으로 취한 듯 위의도 잃어버렸네 / 處世眞同醉失儀
평생의 이내 심사를 누가 알아 줄까 / 百年心事竟誰知
죽고 살고 오래 살고 요절하는 것 모두 운수 소관이요 / 死生修短皆關數
잘 되고 못 되고 근심과 기쁨 각기 때가 있다네 / 榮辱憂歡各有時
병골은 지리멸렬하여 오래 살기 어려운데 / 病骨支離侵壽域
빛난 직함 판서 다음 자리 부끄럽구나 / 華銜慙愧亞台司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엇 하나 능하리 / 致君謀國何能得
자기 힘 헤아리고 한직에 옮겨가면 분수 마땅할 걸 / 自料投閑分是宜
하였고, 둘째 시에는,
저 달 오래 보노라면 두 고장 비춰 주어 / 明月長看照兩鄕
서로 생각하는 천리 길에 머리털 희어졌네 / 相思千里鬢成霜
바람 비 궂은 날에 향탁(임금 앞)에 나가는 것 못 견디어 / 不堪風雨趨香十
그림과 글씨로 초당 위에 누웠던 것 공연히 부러워라 / 空羨圖書臥草堂
평상을 내려 보아도 유자를 만날 길 없고 / 下榻末由逢孺子
고기 보려 하나 호량(아름다운 호수와 언덕)에 같이 갈 자 누구런가 / 觀魚安得共濠梁
운수는 하늘이 주신 것 그대로 따르려나 / 窮通且可安天賦
다만 양공이 예장을 버린 것이 한스럽네 / 只恨良工棄豫章
하였다.
○ 사람이 관직을 받는 것은 이조(吏曹)에서 그 재주를 보고서 헤아려 직책을 주나, 실은 하늘의 명(命)에 있고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하는 바 아니다. 세상에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 그리고 홍문관(弘文館)의 관원과 정부의 이조(吏曹)ㆍ병조(兵曹) 두 조랑(曹郞 좌랑과 정랑을 말함)을 청요(淸要)의 직이라 하며, 또 이상(二相 의정부의 좌ㆍ우찬성)과 삼사재(三四宰 의정부의 좌ㆍ우참찬)와 육조 판서(六曹判書)와 팔도감사(八道監司)와 양계 병사(兩界兵使), 그리고 개성 유수(開城留守)와 승지(承旨)는 모두 화현(華顯)의 직이라고 한다. 나는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과 정부의 이조ㆍ병조의 낭관을 두루 지내고, 또 이상(二相)과 삼사재(三四宰)를 지내고, 또 호ㆍ예ㆍ병ㆍ형ㆍ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외방으로는 강원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함경ㆍ경기 감사와 함경남도 평안도의 병사(兵使)와 개성 유수와 승지를 지냈다. 본래 재덕과 인망이 없어서 그런 직책에 맞지 않건만, 이력이 이와 같으니 어찌 하늘이 준 명에 말미암는 바 아니리오. 세상에서는 혹 지력(智力)으로 얻으려 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은 하늘의 명을 모르는 자라 하겠다.
○ 나는 13세 때에 부친이 별세하였으므로 자모(慈母)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 후 성장해서 벼슬과 명망이 현달(顯達)하자, 자모의 봉양과 은혜 갚을 뜻을 항상 품고 있었다. 가정(嘉靖) 을축년 여름에 개성 유수로 임명되었고, 정묘년 여름에 만기가 되어 조정에 돌아왔고, 그 해 가을에 또 원해서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고, 무진년 여름에 함경남도 병사로 전임되었다가, 기사년 여름에는 본도(경상도) 감사에 부임되었다. 신미년 여름에는 만기가 될 때 병을 빙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7년 간 네 곳을 전임하면서 맛난 음식의 공양을 조금이라도 대접하여 숙원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다행이리오. 모친의 연세 86세에 갑자기 작고하니, 하늘처럼 크나큰 은혜 망극할 뿐이었다. 모친은 평생에 교훈이 엄격하였다. 모든 관청이나 고을의 송사에 한 번이라도 뇌물을 받고 간청을 들어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비난하고 헐뜯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낳아 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으려 해서이다. 벼슬이 1품에까지 오르고 나이 80이 넘은 것은 부모의 여경(餘慶)이라고 생각한다.
○ 참의 임억령(林億齡)은 호가 석천(石川)이며 해남(海南) 출신으로, 시(詩)가 빼어나고 참신하여 일찍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그 아우 임백령과 뜻이 같지 않아 위사훈(衛社勳)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가 늦게야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부임하였는데, 시를 읊기를,
아침에 북궐에 나아갔다가 저녁에 남주에 오니 / 朝趨北闕暮南州
성군 시대의 가짜 허유(요 임금 때의 고사로, 요 임금이 천하를 주려하자, 기산에 숨었다.)에 비유하네 / 竊比明時偉許由
종적은 구름 같아 퍼졌다가 없어지고 / 蹤跡似雲舒或卷
행장은 물과 같아 그쳤다가 다시 흐르네 / 行藏如水止還流
혼탁한 세상에 도잠(동진 때 시인으로, 자는 연명임)의 허리 굽히는 것 무엇이 해로우리 / 何妨混世陶腰折
명예 다투어 후예(옛날 활 잘 쏜 사람)와 활쏘며 노닐던 것 뒤에 후회하네 / 追悔爭名羿彀遊
해변에 돌아와 늙을 것을 내 이미 결정하였노라 / 歸老海邊吾已決
누런 꽃 붉은 귤 고향의 가을일세 / 黃花朱橘故園秋
하였고, 또 읊기를,
아전들 돌아간 빈 뜰에는 새 날아 들고 / 吏散庭空鳥印蹤
살구꽃 그림자 듬성듬성 달 밝은 밤이로세 / 杏花䟱影月明中
백두와 오사모 쓰기 싫어 / 白頭剛厭鳥紗帽
객이 가면 매달고 객이 오면 머리에 쓰네 / 客去而懸客至籠
하였다.
○ 세상에 유생(儒生)으로 점을 좋아하는 자가 많은데, 나는 평생에 한번도 점을 쳐 본 일이 없다. 이는 이순풍(李淳風)과 소강절(邵康節) 같은 이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점장이들은 길흉을 말하나 반드시 믿지는 못한다. 그들이 모년(某年)에 길하다고 하면 혹 요행을 바라기도 하지만, 끝내 그 징험이 없고, 또 모년에는 흉하다고 하면 헛되이 근심과 회의로 세월을 허비하나, 끝내 그 징험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고 해롭지 아니하랴. 유생으로 혹은 자기가 점을 잘 친다고 하면서 곧잘 사람의 길흉을 말하나 선비로서는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
○ 지리풍수설(地理風水說)은 아득하고 거짓말이므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더러는 그 말에 얽매여 그 어버이의 장사할 시기가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않는 자가 있고, 혹은 먼 선조의 묘를 파서 이장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당치 않는 일이다. 세종 때의 재상 어효첨(魚孝瞻)이 상소하여 극력히 풍수설의 잘못된 점을 진술하였는데 명백하고 성대하였다. 그는 그 부모를 가원(家園) 옆에 장사지냈으며, 그 아들인 정승 어세겸(魚世謙)도 그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 땅을 가리지 않았다. 그 집안의 법도가 이러하였으니, 진실로 탄복할 일이다. 고려 때의 모든 왕릉도 모두 같은 산에 썼으며, 중국에서도 역대의 여러 능을 같은 산에 썼으니, 반드시 정견(定見)이 있으리라.
○ 동호(東湖)의 저자도(楮子島)는 절승(絶勝)이다. 전조(前朝 고려) 때 정승 한종유(韓宗愈)가 별장을 짓고 여생을 보내며 시를 읊기를,
10리나 되는 판판한 호수에 가랑비 지날 제 / 十里平湖細雨過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저 편에서 들리네 / 一聲長篴隔蘆花
금정(나라)에서 국(정치)을 조리하던 손을 가지고 / 直將金鼎調羹手
다시 낚싯대 잡고 늦게 모랫가로 내려가네 / 還把漁竿下晩沙
홑적삼 짧은 모자로 연못을 돌아드니 / 單衫短帽繞池塘
건너편 언덕 늘어진 버들 서늘한 바람 보내는구나 / 隔岸垂楊送晩涼
산보하다 돌아오니 달은 산 위에 떠올랐고 / 散步歸來山月上
지팡이 끝에 연꽃 향기 어려 있네 / 杖頭猶襲露荷香
하였으니, 시 또한 흥취가 좋다. 봉은사(奉恩寺)는 저자도에서 서쪽으로 1리쯤에 있다. 몇 해 전에 내가 동호 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에 타고 간 배를 저자도 머리에 정박하고 봉은사를 구경하고 돌아오니, 강가 어촌에 살구꽃이 만발하여 봄 경치가 더욱 아름답기에, 배 안에서 시를 짓기를,
동호의 빼어난 경치는 모두들 알고 있지만 / 東湖勝槪衆人知
자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네 / 楮島前頭更絶奇
절에 가는 길 솔잎 우거진 길이요 / 蕭寺踏穿松葉徑
어촌을 두루 보니 살구꽃 흐드러진 울타리로세 / 漁村看盡杏花籬
따스한 모래밭 연한 풀에 원앙 한쌍 잠들었고 / 沙暄草軟雙鳶睡
물결은 잔잔하고 바람은 솔솔 부는데 돛대 한척 흘러가네 / 浪細風微一棹移
봄 흥취와 봄 수심을 채 읊기도 전에 / 春興春愁吟未了
압구정 언덕엔 벌써 석양이로세 / 狎鷗亭畔夕陽時
하였다. 지금 40여 년이 지났는데 다시 가서 구경을 못하니, 가물거리는 회포를 견디지 못하겠도다. 압구정은 저자도의 서쪽 수리(數里)에 있는데, 재상 한명회(韓明澮)가 별장을 지어 또한 이로써 유명하다.
○ 서울에서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형성(李亨成)의 세심정(洗心亭)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하여 눈처럼 찬란하고 기타 다른 꽃들도 많았다. 이형성은 매우 시를 좋아하여 매양 시객(詩客)을 맞아들여 시를 지으므로, 나도 여러 번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상사(上舍) 이굉(李宏)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형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아니하니, 이굉이 시 한 수를 지어 그 문병(門屛)에 크게 쓰기를,
섬돌 앞의 푸른 대는 속된 것 고치기 어렵고 / 階前綠竹難醫俗
대 아래의 맑은 물은 마음 씻지 못하노라 / 臺下淸川未洗心
하여, 한때 세상에 전해져 웃음거리가 되었다. 임진년 초봄에 내가 어느 친우의 집에 가니 그 자리에 이형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내가 절구 한 수를 지어 그 여종에게 주며 그 주인인 이형성에서 전하라고 하였다. 그 시에,
거문고 소리 들을 만한데 타는 여자 누구뇨 / 彈琴可聽誰家女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하네 / 自說洗心臺下人
만 그루 살구꽃 피기를 기다려 / 要待萬株山杏發
술병 가지고 봄놀이 감세 / 爲携壺酒去尋春
하였다. 그 후 병난(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 고려 때에 졸옹(拙翁) 최해(崔瀣), 가정(稼亭) 이곡(李糓),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그리고 흥령군(興寧君) 안축(安軸)은 모두 중국의 원 나라에서 급제하였다. 최해는 재주가 뛰어났고 지조가 높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침내 사자산(獅子山) 아래에 살며 스스로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을 저술하고 작고하였다. 이곡은 원 나라에서 한림 국사원 검열(翰林國史院檢閱)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색은 원 나라에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고려의 시중(侍中)이 되었으며, 이인복은 고려의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고, 안축도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이곡은 한산(韓山)의 향리(鄕吏)이며, 이색은 바로 그의 아들이다. 이인복은 성산 향리(星山鄕吏) 이조년(李兆年)의 손자로 세상에서 현인이라 칭하였는데, 원 나라 동년(同年 같이 급제한 사람) 승지 마언휘(馬彦翬)와 학사(學士) 부자통(傅子通)에게 시를 지어 보내기를,
매양 경림(한림원)을 향하여 술 취해 돌아오던 일 생각하니 / 每向瓊林憶醉歸
하사하신 꽃 봄볕 따스하고 그림자 하늘하늘거렸네 / 賜花春煖影離離
작별한 뒤에야 옛정 두터움을 깨달았건만 / 別來更覺交情厚
늙었으니 어찌 세상사 그른 것 알소냐 / 老去安知世事非
노둔한 자로 잔두(사소한 이익을 단념하지 못함)를 그리워한 것 부끄럽고 / 駑鈍尙慙懷棧豆
붕새 날 적에 누가 울타리 돌아보랴 / 鵬飛誰復顧藩籬
그대 동이(우리 나라) 비루하다 웃지 마소 / 請君莫笑東夷陋
해상에 세 봉우리(삼신산) 푸른 공중에 솟아있네 / 海上三峯聳翠微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이 시를 《청구풍아(靑丘風雅)》에 기록하고, 주(註)를 달기를, “이때 원 나라는 난말(亂末)의 시기라, 이 글로써 두 사람(마언휘와 부자통)을 초청하여 동방에서 피난하도록 권한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마언휘)와 학사(부자통)는 황제의 근시(近侍)로 계급이 높은 벼슬인데, 이인복이 비록 동기생으로 친했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감히 이렇게 초청할 수 있을까. 하물며 끝구를 보아도 초청의 뜻이 없는데, 점필재는 무슨 근거로 이런 주를 달았는지 모르겠다.
○ 만력(萬曆) 신묘년 가을에 기로당(耆老堂)에 참석한 자는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지사(知事) 강섬(姜暹), 그리고 나였다. 그 후에 동지(同知) 송찬(宋贊)과 좌윤(左尹) 목첨(睦詹)과 참판 신담(申湛)과 대사성(大司成) 이기(李墍)가 모두 종2품으로 참석하였는데, 뒤에 참석한 제공이 윤번으로 모임을 갖기로 하여 송찬이 먼저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 김영부사와 목좌윤, 그리고 내가 참석하고, 신참판과 이대사성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내가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서교(송찬의 호) 영감 베푼 자리 술상도 성대하이 / 郊翁設席盛杯盤
기영들이 모였으니 참으로 장관이네 / 會得耆英有足觀
발그레한 뺨 흰 머리에 꽃이 모자 위에 꽂혀 있고 / 紅頰白鬚花壓帽
수놓은 병풍이며 비단 장막과 기생이 난간처럼 둘러있네 / 繡屛羅幕妓圍欄
풍류는 멀리 삼한 때부터 내려왔으니 / 風流逈自三韓舊
고운 단장 참으로 구로의 기쁨 같네 / 爭像眞同九老歡
가장 하례할 일 주인이 80세 넘은 일 / 最賀主人踰八耊
세상에 이런 일은 보기도 드물구나 / 世間玆事見之難
하였다. 모두가 각기 화시를 지났으나 모두 기억이 안난다. 임진난이 지나고 정유년에 이르러서는 오직 송공(宋公 송찬)과 이공(李公 이기), 그리고 나만 생존하였으므로, 기로회를 다시 갖지 못하였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한탄스럽다.
○ 정덕(正德 명 나라 무왕 때 연호) 정축년에 나의 선친과 계부(季父) 묵재(黙齋) 공이 같은 방(榜)에 급제를 하였으며, 계미년 연간에는 김명윤(金明胤)과 그 아우 김홍윤(金弘胤)이 연방(連榜)에서 급제를 하였는데, 김홍윤은 장원이었다. 남곤(南袞)이 축하시를 김명윤의 부친인 찬성 김극핍(金克愊)에게 보내고, 겸하여 나의 조부 소요공(逍遙公)에게도 보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 아드님이 나란히 급제하는 것 세상에 자랑거리인데 / 二子登科世供誇
집안에서 장원이 나온 것에 더욱 영광이겠소 / 壯元門戶更光華
광산 김씨와 풍산 심씨 아울러 / 光山金與豐山竝
예전부터 경사 많은 줄 알았소이 / 知是從前積慶多
하였다. 광산은 바로 김명윤의 본관이고, 풍산은 바로 우리 심가의 본관이다. 나는 불초한데도 요행으로 급제를 하였으나, 이후 자손들은 급제하지 못하였고 김명윤의 집안도 급제한 자가 없으니, 어찌 경사가 많다는 말이 선대에만 징험이 있고 후대에는 없는가. 두 집안이 모두 쇠한 것은 자손들이 학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인가 보다.
○ 상국(相國)노소재(盧蘇齋 노수신)가 석가산(石假山)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재상들에게 시(詩)를 청하기에 내가 시를 짓기를,
담 아래 높다랗게 석가산을 만드니 / 墻下嵯峨作假山
산 앞 한 줌 샘물 만족할 만하여라 / 山前一掬水堪慳
아침엔 아지랭이 저녁엔 안개 언제나 끼어 있고 / 朝嵐暮靄尋常裏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 지척간에 벌려 있네 / 衆壑群峯咫尺間
굽이친 물가에서 때때로 새발 전자 그려 있고 / 曲渚時時留鳥篆
깊숙한 시냇물은 곳곳에 이끼 무늬 끼어 있네 / 幽溪處處着苔斑
좋은 경치 두루 놀 것 필요 없네 / 不須崇華觀遊遍
길이 산만 대하고 홀로 문 닫고 있네 / 長對孱顔獨閉關
열 그루 사철나무 정자를 에워싸니 / 十樹冬靑擁一亭
변함없이 푸른 빛은 갈수록 푸릇푸릇 / 靑靑不改更靑靑
찬기운 쌀쌀해지자 바람이 문을 지나고 / 寒聲遞動風過戶
그림자 어른거리는데 달은 뜰에 가득하네 / 密影交加月滿庭
매화와 버들 서로 피어날 제 푸른 빛 한층 아름답고 / 梅柳爭時增秀色
눈보라 서릿발 몰아칠 때 경치 더욱 기이하네 / 雪霜嚴裏轉奇形
세상에 영고가 있음을 한하지 말라 / 世間何限榮枯事
높은 집에 모범됨을 보아 알라 / 看取高標有典刑
하였더니, 노상국이 보고 웃으며 버리지 않았다. 대[竹]또한 푸르나 십청(十靑)의 대열에 들지 못한 것은 대는 마를 때가 있어서 십청에 비교가 못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노상공에 말하기를, “취사(取捨)가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하다.” 하였다 한다.
○ 상국(相國) 노소재(盧蘇齋)가 70세 되던 갑신년 원일(元日)에 시를 짓기를,
벼슬을 그만두고 전원에 돌아오니 / 寄也歸而免
슬그머니 찾는 사람 드물구나 / 居然到者稀
누가 성인이 원하던 바대로 따르리오 / 誰從聖人欲
오래도록 대부(큰 벼슬)의 그른 것에 어두웠네 / 久昧大夫非
한 번 맺은 군신의 계분 / 一理君臣契
깊은 충심 노병으로 어긋났네 / 深衷老病違
다만 매화와 버들빛만이 / 只應梅柳色
예전처럼 들어와서 옷깃 적시누나 / 依舊入霑衣
하였다. 내가 70살 되던 을유년 원일에 노상국의 시에 차운하기를,
문득 새해 옴을 깨달으니 / 斗覺新年至
누가 70살이 드물다고 하였는고 / 誰言七十稀
영화와 쇠락함 실컷 겪었고 / 飽經榮與落
옳고 그른 일 많이도 견디었네 / 多耐是兼非
오래 살고 단명하는 것은 하늘이 응당 정한 것이고 / 修短天應定
행하고 쉬는 것 이치이니 어찌 어길쏘냐 / 行休理敢違
물러날 것 생각하였다가 / 思量乞身事
기필코 관복을 벗으리라 / 準擬解朝衣
하였으니, 이 시는 장차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면서 회포를 표현한 것이다. 80살이 되던 을미년 원일에 또 앞의 시에 차운하기를,
인생 70이 드물다면 / 人生稀七十
80이란 더욱 희귀하리 / 八十更應稀
위무공의 경계를 배우려 하였지만 / 欲學武公戒
전부터 거원의 지난날 잘못했다는 것도 알았노라 / 曾知蘧瑗非
은혜를 탐하다 몸이 묶여 있고 / 食恩身局束
물러나기 바랬지만 일이 어긋났네 / 乞退事乖違
원하는 일 언제나 될꼬 / 志願何時遂
슬프구나 먹고 입는 것 때문일세 / 嗟哉食與衣
하였다. 여러 번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이 시로써 송서교(西郊 송찬)에게 보이니, 송서교가 화답하였다. 그 한 연구에,
성안에 그대로 있는 것 옳은 일이요 / 城內仍留是
전원에 가려는 것 그른 일일세 / 林間欲去非
하였으니, 이는 병란이 아직 그치지 않았으므로, 물러나 향촌(鄕村)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이렇게 시에 쓴 것이다. 내가 다시 시를 지어 보내기를,
작록은 사람마다 누릴 수 있지만 / 爵祿人皆享
늙도록 사는 것은 세상에 드무네 / 期願世固稀
머무르라고 하는 것도 과연 옳지만 / 仍留果爲是
가려는 것도 그름은 아닐세 / 欲去未應非
늙었으니 마땅히 물러가야지 / 晩節尤宜退
처음 마음 어찌 변할쏘냐 / 初心詎肯違
요분(전쟁)은 언제나 평정되리 / 妖氛何日定
다만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기를 바랄 뿐이네 / 唯望一戎衣
하였다. 병신년 늦겨울에서야 퇴휴(退休)의 은전을 받았다. 생각하면 여생은 많지 않고 휴일인들 얼마나 되리오마는, 소원을 얻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겠다.
○ 가정(嘉靖) 경술년 봄에 나의 백부(伯父)가 대구 부사(大邱府使)로 있었는데, 나는 이조 좌랑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로 가서 백부에게 문안한 일이 있었다. 영천(永川)과 하양(河陽)은 모두 인접한 고을이었는데, 그때 영천 군수는 사문(斯文) 김취문(金就文)이고, 하양 현령(河陽縣令)은 사문 민호(閔箎)였다. 민공과는 일찍이 교분이 있었는데, 하루는 사명으로 대구부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영천(永川) 명월루(明月樓)는 사람들이 승경이라고 하니, 어찌 한번 구경가지 않습니까.” 하거늘, 나는 그 고을 군수와 안면도 없으려니와 더욱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구경 놀이는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사양하니, 민공이 억지로 끌고가 보니, 과연 명월루는 승경이었다. 올라가서 구경한 뒤에 작은 술상을 차려놓고 담화하는데, 군수 김취문과 민공이 나에게 시(詩)를 짓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사양하고 짓지 않았다. 술이 얼큰해져서 김공이 칠언 율시 한 수를 써서 내놓으며 말하기를, “평생 시를 지은 적이 없으나 오늘은 훌륭한 시를 보고자 감히 이처럼 약자가 선수를 쳤나이다.” 하거늘, 내가 즉석에서 화시를 지어 주었다. 이튿날 돌아올 때에 듣자니 어제 김취문의 시는 명월루의 현판에 있는 옛 시를 자기 시인 양 써서 나를 속였다는 것이다. 모두들 껄걸 웃고 작별하였다. 그 뒤에 참판 조사수(趙士秀) 공의 집에 가서 뵈오니, 조공이 말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영남 관찰사로 영천(永川)에 가서 명월루에 있는 그대의 시를 보았는데, 그 한 연구(聯句 연구는 율시의 둘째 셋째 구절)에,
꾀꼬리 한 소리에 봄빛은 다 가고 / 黃鳥一聲春色盡
새파란 십리 들에 석양이 더디다 / 靑蕪十里夕陽遲
하였는데, 매우 아름다운 시라고 칭송하였다. 이는 당시 영천 군수였던 김취문이 나의 졸시(拙詩)를 현판(縣板)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계해년 봄에 내가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영천에 가니 시판(詩板)이 그때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김취문과 민호는 모두 작고하였으니, 옛일의 감회를 마지 못하겠다.
○ 고려 때에 이규보(李奎報)와 진화(陳澕)는 문장이 당시에 떨쳤다. 한림별곡(翰林別曲)에 이른바, “이정언(李正言)ㆍ진한림(陳翰林)의 쌍운에 주필(走筆 빠르게 쓰는 것)이라 함은 곧 이규보와 진화를 말함이니, 두 사람은 빨리 짓는 것으로 같이 명성을 날렸다. 이규보는 벼슬이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에 이르고, 진화는 우사간(右司諫)에 이르렀는데, 그들 연세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다.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이르기를, “동국의 명필을 말하자면 김생(金生)이 제일이고, 다음은 요학사(姚學士) 극일(克一)과 중 탄연(坦然)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규보의 평론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제일이고 탄연이 두 번째, 유신(柳紳)이 세 번째이다.” 하였으니, 이는 권력자에게 아부한 것으로 공론(公論)이 아니다. 만일 권력에 아부하여 명예를 얻는다면 문장인들 어찌 보잘 것 있으리오. 그가 지은 두문시(杜門詩)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 요란하게 비방하는 소리 피하기 위해 / 爲避人間謗議騰
문닫고 높이 누워 자니 머리마저 헝클어졌네 / 杜門高臥髮鬅鬙
처음은 방탕한 사내 여자 생각하는 것 같더니 / 初如蕩蕩懷春女
점차 고요하게 도 닦는 중을 닮아가네 / 漸作寥寥結夏僧
아이가 옷을 당기며 재롱떠는 것 족히 즐겁고 / 兒戲牽衣聊足樂
찾아든 손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할 것 없네 / 客來敲戶不須경
빈궁(貧窮)과 영달(榮達), 명예와 수치는 모두 하늘의 명이거늘 / 窮通榮辱皆天賦
어쩌다 굴뚝새가 대붕(大鵬)을 부러워하리 / 斥鷃何曾羨大鵬
하였으니, 당시에도 대단한 비방이 있었던 것이다.
○ 세조(世祖)는 선위(禪位)를 노산(魯山 단종)에게서 받고 노산을 높여 상왕(上王)이라고 하니,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門)ㆍ유성원(柳誠源)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응부(兪應孚)ㆍ김질(金礩)과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이며, 상왕의 처남 권자신(權自愼) 등이 몰래 상왕의 복위(復位)를 꾀하였는데, 거사하기로 약속한 날에 기회를 잃자 김질이 성사가 못 될 줄을 알고 달려가 그의 장인 상국(相國) 정창손(鄭昌孫)에게 고하여 궐내에 들어가 변고를 아뢰었다. 김질은 녹공을 받고 그 나머지는 모두 주살(誅殺)되었다. 대사를 약속하고서 기회를 잃은 것이나 김질이 고변한 것은 다 하늘의 뜻이지 어찌 사람의 힘이라 하겠는가. 당초에 세조가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대신 김종서(金宗瑞) 등을 주살하고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될 때 박팽년과 성삼문은 집현전 숙위(宿衛 당직)로 있었으므로 전례에 따라서 공신훈에 참여하였다. 성삼문이나 김질 등 공신들이 차례로 연회를 베푸는데 성삼문은 홀로 베풀지 않았고, 또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는 예방 승지(禮房承旨)로 있으면서 국새를 안고 실성통곡(失聲痛哭)하였다. 세조가 만약 그만이 연회를 베풀지 않은 것이라든지 선위(禪位)할 때 실성통곡한 정상을 의심하고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을까. 성삼문의 처사는 가히 오활(迂闊)하다고 하겠다. 박팽년은 당시 충청 감사로 있으면서 모든 상소(上疏)에 신(臣) 자를 쓰지 않고 다만 박아무개라고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세조가 만일 살펴서 깨닫고 신 자를 쓰지 않은 내심을 힐문하였다면 어찌 위태롭지 않았으리오. 박팽년의 처사도 오활한 것이다. 대사를 거행하고자 하면서 처사를 이처럼 오활하게 하고서야 어찌 탄로와 실패를 면하겠는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편찬한 《육신전(六臣傳)》은 세상에 드물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다. 박팽년은 문장이 충담(沖澹)하고 필법이 고묘(高妙)하였으며, 성삼문은 세종조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영총(榮寵)이 지극하고 명망(名望) 또한 중하였으며, 유성원ㆍ이개ㆍ하위지도 모두 세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며, 유응부는 무관 재상이었다. 세조가 영의정을 지낼 때 나라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박팽년이 시를 짓기를,
묘당 깊은 곳에서 처량한 거문고 소리 들리는데 / 廟堂深處動哀絲
일만 가지 일 지금 와선 모두 알지 못하겠네 / 萬事如今摠不知
버들은 푸른데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 柳綠東風吹細細
꽃은 붉은데 봄날은 정히 더디기도 하네 / 花明春日正遲遲
선왕의 구업은 금궤에 간직하고 / 先王舊業抽金櫃
성주(聖主)의 신은은 옥치를 보내 왔네 / 聖主新恩倒玉巵
즐겁지 않은 정이야 어찌 오래 가랴 / 不樂何爲長不樂
노래하고 술마시며 시 지으니 태평시절이로세 / 賡歌醉賦太平時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남의 글을 표절하는 것은 금법(禁法)이 매우 엄격하나, 명리(名利)를 좋아하고 파렴치한 무리들은 도도하게 범하여 사풍(士風)을 불미스럽게 하였다. 알성(謁聖 공자 사당에 참배)이 있은 후에 제술(製述 시나 부 같은 것을 지음)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조종조(祖宗朝) 이후에 점차로 잦아져 급작스레 요란하게 되자, 뽑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표절하여 합격하는 자가 또한 많았다. 명종 때에 외척 권신(外戚權臣)의 아들인 이정빈(李廷賓)은 과거 공부도 하지 않고서 표절로 장원을 하고 빛나고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공론(公論)이 일어나 마침내 삭직(削職)을 당하였고, 같은 때에 또 여계선(呂繼先)이란 자는 문사 차천로(車天輅)의 글을 표절하여 장원을 하였는데, 일이 탄로되어 국문을 당하고 또한 과거에서도 삭제되었으니, 국가의 수치가 어떠하리오. 알성한 뒤에 간혹 친히 임(臨)하여 시관(試官)에게 경서를 강(講)하게 하여 옛날에 경서를 펴 들고 어려운 곳을 질문하던 것처럼 해서 혹은 급제를 혹은 상(賞)을 주었더라면 또한 족히 많은 선비들을 위안하게 할 것이니, 제술(製述)로써 인재를 취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체모에 합당할까 한다. 나의 조부(소요공 심정)는 양천현(陽川縣) 동북쪽에 있는 공암(孔巖) 서쪽 강 연안에 집을 짓고 이름을 소요당(逍遙堂)이라 하였다. 이곳 지세는 한강(漢江) 이남의 강 연안에 있는 정자 중에서 가장 승경인지라, 당시 명사(名士)들이 시를 지어 정자 벽에 가득하였다. 그 중 남곤(南袞)의 율시 두 수 있는데, 그 한 수에,
물은 여주로부터 산은 화산(삼각산을 말함)에서 내려와 / 水從驪漢山從華
모두가 정자 앞으로 모여들어 기이한 자태 나타내네 / 盡向亭前更效奇
외로운 섬 교묘하게도 강 넓은 곳에 당해 있고 / 孤島巧當江濶處
긴 연기 달 뜰 때 일어나네 / 長煙遍起月生時
바라보니 중경 어귀와 볼수록 같고 / 望中京口看猶似
꿈속에 구지(중국 서북방의 산위에 있는 곳)에 와 있는 듯 의심되네 / 夢裏仇池到自疑
그대가 소요하려고 하더니 어찌 그리도 급히 되었나 / 君欲逍遙寧遽得
이 다음 늙어서 흰 수염 날리며 길이 쉬러 가겠네 / 他年長往鬢垂絲
하였다. 또 사문(斯文) 장옥(張玉)은 서문을 4. 6변려체(倂儷體)로 5, 60구나 지었는데, 사람들은 가작(佳作)이라 칭찬하며 등왕각(滕王閣) 서문에 비유하였다. 그 첫머리에 이르기를,
파릉현 북쪽과 / 巴陵縣北
한양성 서쪽에 / 漢陽城西
삼도(공암과 다른 두 조그마한 섬)가 떠 온 것을 / 三島浮來
육오(바다의 삼신산을 자라가 떠받들고 있다 함)가 이고서 있다네 / 六鰲載立
십리나 되는 긴 강은 / 十里長江
해구로 굽이쳐 흐르고 / 流下海口
천척이나 되는 절벽은 / 千尺斷岸
깊은 물에 달려든 듯 / 走入波心
하였고 또,
천향이 소매에 가득하니 / 天香滿袖
멀리서 서호의 바람이 회오리치고 / 遠飄四湖之風
강우가 낯을 스치니 / 江雨入顔
북궐에서 하사한 술 조금 있네 / 微醒北闕之酒
하였다. 이밖에도 경구(警句)가 매우 많으나 내가 젊어서 보았으므로 그 전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그저 한스럽다.
○ 예나 지금이나 문인으로서 저술한 잡기(雜記)가 많은데, 내가 본 것을 들어보면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ㆍ《강호기문(江湖記聞)》ㆍ《유양잡조(酉陽雜俎)》ㆍ《시인옥설(詩人玉屑)》ㆍ《학림옥로(鶴林玉露)》등의 서적과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우리 나라에서는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화(東人詩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靑坡劇談)》,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조신(曹伸)의 《소문쇄록(謏聞鎖錄)》, 김정국(金正國)의 《사재척언(思齋摭言)》,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禦眠楯)》,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응인(權應仁)의 《송계만록(松溪漫錄)》 등은 모두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할 때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내가 신미년 가을부터 몸소 겪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연대에 따라서 기록한 것이 모두 몇 가지가 되는데, 그 이름을 《견한잡록》이라 하였다. 비록 여가를 보내는데 주를 두어서 쓸모없고 난잡하기는 하지만, 꼭 모두가 쓸데없고 무익한 말만은 아닐 것이니, 보는 이는 부디 비웃지 말았으면 한다. 만력 기해년 봄에 청천당(聽天堂)은 발문(跋文)을 쓴다.

[주D-001]규와 벽 : 28수(宿) 중의 두 가지로, 규는 문장을 맡은 별이고, 벽은 정치를 맡은 별이다.
[주D-002]방고 : 구방고(九方皐)로, 옛날 말을 잘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주D-003]온교 : 동진(東晉) 사람으로, 양자강에서 무소의 뿔을 불에 태워서 비춰 보니, 그 강 속이 환하게 들여다 보였다고 한다.
[주D-004]칠정산(七政算) :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는데, 세종 때 이순지(李純之)ㆍ김담(金淡)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역서. 내편은 중국 원 나라의 《수시력법(授時曆法)》과 명 나라의 《통궤력법(通軌曆法)》을 참고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나라의 도수에 맞도록 만든 것이고, 외편은 《회회력경통(回回曆經通)》과 《가령력서(假令曆書)》를 개정 증보한 것이다.
[주D-005]강수 …… 김생 : 강수(康首)는 신라 때의 문장가이고, 김생(金生)은 신라 때의 명필이다.
[주D-006]신륵사 : 일명 벽절이라 하는데,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되어서이다.
[주D-007]난정 : 중국 절강성 회계현 산음(山陰) 지방에 있던 정자로, 동진(東晉) 때에 많은 명사들이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놀았는데, 지금까지 왕희지(王羲之)가 지은 난정서(蘭亭序)가 유명하다.
[주D-008]북산으로 못 돌아간 지 오래로구나 : 남북조 시대 제(齊) 나라의 주옹(周顒)이라는 사람이 북산에 은거하며 덕행이 있었는데, 황제가 불러 나가서 벼슬하다가 여의치 못하자, 다시 북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그와 동지인 공치규(孔稚圭)라는 사람이 북산이문(北山移文)을 지어서 산은 그런 사람이 오는 것을 거절한다는 뜻을 밝혔다.
[주D-009]피화(被禍) : 명종 때에 동료인 안명세(安名世)의 필화(筆禍) 사건을 변호하여 주다가 함께 사형을 당하였다.
[주D-010]문생과 좌주 : 과거에 합격된 사람이 그 과거의 시험관에게 문생[제자]이라고 하고, 그 과거의 시험관을 좌주라고 부른다.
[주D-011]의발 : 불교 선종(禪宗)에서 스승이 죽을 때에 자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에게 자기가 쓰던 가사(袈裟)와 바리때를 전해주고 죽는데, 이것은 그를 자기의 후계자로 인증한다는 뜻이다.
[주D-012]무산 : 중국 호북 지방에서 양자강 물을 거슬러 사천 지방으로 가려면 무산이 있는데, 예전에 초(楚) 나라 양왕이 그 무산 아래에 놀러갔다가 가끔 미인을 만나서 흥겹게 놀았는데, 그 미인은 무산의 신녀(神女)라고 자칭하면서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된다고 하였다.
[주D-013]낙신부를 …… 못 보노라 : 옛날 중국 삼국 시대의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와 조식(曹植)이 함께 견씨(甄氏) 집 처녀를 사모하다가, 결국은 형인 조비에게 빼앗겼다. 그 후에 조비는 아버지 조조의 후계자로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견씨를 사랑하던 마음이 식어져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자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 하여 사약을 내려 죽였다. 그 후에 조식이 꿈에 그 견씨를 만나서 예전에 사모하였다는 것을 호소하였으나, 그것은 역시 꿈이어서 바로 깨고 말았다. 조식은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여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견씨를 낙수(洛水)의 신녀라고 비유하고 그 신녀가 낙수 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오는데, 버선에 물이 묻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지가 난다고 형용하였다.
[주D-014]호두연함 : 중국 한(漢) 나라 반초(班超)의 상이 범의 머리에 제비 턱이므로, 후(侯)로 봉해질 상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대로 후일 후(侯)에 봉해지게 되었다.
[주D-015]삼괴 구극 : 삼괴는 3재상의 위(位)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3재상이 세 계수나무 아래에 좌정했다. 그러므로 3공과 같음. 구극은 9경(九卿)을 말한다.
[주D-016]예장 : 예(豫)와 장(樟)은 모두 좋은 재목으로, 재능이 있는 사람을 비유한다.
[주D-017]한림별곡(翰林別曲)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생긴 시가의 하나로, 학자들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락적이고 풍류적인 생활 감정을 표현한 노래이다. 시부ㆍ명필ㆍ명주(名酒)ㆍ화훼ㆍ음악ㆍ누각ㆍ추천 등이 실려 있다.

고려사절요 제6권
 숙종 명효대왕 1(肅宗明孝大王一)
병자 원년(1096), 송 소성 3년ㆍ요 수륭 2년

○ 봄 정월 동여진에서 아부한(阿夫漢)ㆍ고란곤(高蘭昆)ㆍ두문(豆門) 등 1백 79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조(詔)하기를, “짐이 선왕의 검소하셨던 덕을 이어받아 행하고자 하여 음식의 가짓수를 감하고 기호(嗜好)대로 다 하지 아니하는데, 근래에 들으니 '내외의 풍속이 사치를 좋아함이 한도가 없어서 음식에도 잔과 쟁반이 지나치게 많아 풍속을 상하게 한다.' 하니, 마음이 매우 통탄스럽다. 이제부터는 마땅히 등급을 정하고, 어사대에서 규찰하게 하라." 하였다.
○ 왕의 생신을 대원절(大元節)이라고 하였다.
○ 2월 우원령(禹元齡)을 요에 보내어 전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것에 사례하였다. 표문에, “번신(藩臣)의 생일을 기억하고 화사(華使)를 보내어 은총을 내려주시니, 마땅히 배수(拜受)해야 하지만, 병든 몸이 더욱 약해져서 마침내 친히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임시로 한 지방을 지키면서 전왕을 대신하여 두터운 은혜를 받자온바, 조서에 별도로 기록한 것은 이미 전하여 부쳤습니다…" 하였고, 전왕의 표문에는, “신은 일찍부터 허로병(虛癆病)이 들어서 치료(治療)하기 어려웠습니다. 번방(藩邦)의 중한 업무를 진실로 잠시나마 비울 수 없사옵고, 공물 바치는 법을 혹시라도 궐하게 할 수 없사오므로, 감히 숙부에게 미루어 이에 국권을 위임하였습니다. 세상일을 포기하고 별제(別第)에 물러나 있어서 파리한 자질은 늘 장빈(漳濱)에 누웠사옵고, 황홀한 혼(魂)은 다만 대악(岱嶽)에 놀고 있습니다. 병이 이미 심하여 위태하온데, 어찌 낫기를 바라오리. 근자에 들으니, 공첩(公牒)이 갑자기 왔는바 황제의 말씀이 내린 줄을 알았습니다. 기복시키는 특례를 주고 책봉을 거행하는 성대한 의식을 행하고, 모든 것을 탕감하여 원하고 바라는 바에 맞게 하는 것과 또 생일을 축하해 줄 것과 특별히 물품을 하사하고자 미리 유시(諭示)하시나, 잔명(殘命)이 조그만 공로도 없었사오니, 이때에 어찌 후하게 주심을 받으오리까. 불쌍하게 여기시어 간절한 아룀을 굽어 살피셔서 다시 왕위에서 물러남을 곧 허락함을 내리시고 생일 축하의 사신 보내는 것을 중지하여 병든 신(臣)에게 무거운 짐을 영구히 면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다.
○ 전왕이 흥성궁(興盛宮)에 나아가서 거처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그 말을 따랐다.
○ 서여진에서 아라화(阿羅火) 등이 내조하였다.
○ 3월에 어사대에서 아뢰기를, “간신 이자의(李資義) 등이 사사로이 미곡을 축적하여 수량이 거만(鉅萬)이온데, 이것은 모두 백성을 착취하여 모은 것이니 관에서 몰수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 말을 따랐다.
○ 지례사(持禮使) 고민익(高民翼)을 요의 동경(東京)에 보내었다.
○ 김보신(金輔臣) 등 30명, 명경 4명, 은사 4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4월 선정전에 나아가서 해[日]가 저물도록 조회를 하였다. 중서성에서 아뢰기를, “때는 만물이 자라는 철이온데, 3월 이래로 기후가 어긋나서 물이 맺혀 얼음이 되고, 서리가 내려 만물을 죽이며, 밤에 번개가 갑자기 쳤습니다. 《홍범 오행전(洪範五行傳)》에 '우박은 음(陰)이 양(陽)을 협박하는 상(象)이다.' 하였고, 경방(京房)의 《역전(易傳)》에는 '죽이는 형벌이 이치에 벗어나면, 그 재앙으로 서리가 내린다.' 하였으며, 또 '위에서 한쪽 말만 치우치게 들어서, 하정(下情)이 막혀 이해를 잘 생각하지 못하고 준엄하고 급하게만 힘쓰는 실책이 있으면, 그 재앙으로 항상 기후가 차다.' 하였사오며, 또 '군사를 일으켜서 망령되게 죽이면, 이것을 법이 없다 하는 것이온데 그 재앙으로 여름에도 서리가 내려서 오곡(五穀)을 죽인다.'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어린 임금께서 병환이 심하여 정사를 결단함이 밝지 못하고 모후가 정사를 대리하여, 미혹에 빠져 법도를 잃으니 흉한 사람이 틈을 타서 반란을 도모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륙을 크게 행하여 그 무리를 남기지 않으나, 처결할 때에 정상(情狀)을 밝게 살피지 못하여 구금된 자 중에는 반드시 죄 없는 이도 있었을 것이므로, 원망하는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여 화기가 변해서 재앙으로 된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천명에 순응하여 대통을 이어 모든 정사를 바로잡았사오니, 어사대와 상서ㆍ형부에게 모든 의심되는 옥사로서 옳고 그름이 확정되지 못한 것을 빨리 정당하게 처결하여 원통하고 과람함이 없게 하시고, 사실이 아닌 것을 무고한 자는 모두 번좌(反坐)하도록 하시어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시면, 민정(民情)이 서로 즐거워하여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받아 들였다.
○ 현종(顯宗)ㆍ경종(景宗)의 두 능을 배알하였다.
○ 5월 요의 동경에서 지례사(持禮使)로 예빈부사(禮賓副使) 고양정(高良定)이 왔다.
○ 6월에 경종의 신주(神主)를 영릉(榮陵 경기도 개풍군 진봉면 탄동리)으로 옮기고 선종을 태묘(太廟)에 부(祔)하였다.
○ 진명도부서사 문주방어판관(鎭溟都部署使文州防禦判官) 이순혜(李順蹊) 등이 해적(海賊)과 싸워 머리 17급(級)을 베었다.
○ 동여진에서 영손(英孫) 등 17명이 내조하였다.
○ 왕이 동지(東池)에 배를 띄워서 술자리를 베풀고, 재상과 근신을 불러 참여하게 하여 함께 시를 지었는데, 밤중에 이르러 우레와 비가 오자 중지하였다.
공복(功服) 친족끼리 혼인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 가을 7월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서 역대 깊이 간직하였던 문서를 열람하고 부질(部帙)이 완전한 것은 나누어서 문덕전 어서방(御書房)과 장령전(長齡殿) 비서각(祕書閣)에 간직하고, 또 양부(兩府)의 재신(宰臣) 및 고원(誥院)ㆍ사한(史翰)ㆍ내시 문신(內侍文臣)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 8월 동각(東閣)에는 국가원로를, 좌우동락정(左右同樂亭)에는 서민의 늙은이를 모아 향연(饗宴)을 베풀었는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음식을 권하고 이어 의복ㆍ폐백ㆍ실ㆍ솜[綿]을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 동여진에서 와돌을(臥突乙)ㆍ고마요(古馬要) 등이 오자, 왕이 번사(蕃事 오랑캐 지방의 일들)를 묻고 주식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 귀령각(龜齡閣)에 나아가서 무반의 장군 이하의 활쏘기ㆍ말몰기를 친히 사열하였는데 11월이 되어서 마쳤다.
○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가 글을 올려서 남경(南京)으로 도읍을 옮기기를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도선기(道詵記)》에 이르기를 '고려국에 세 곳의 서울이 있으니, 송악(松岳)이 중경이 되고, 목멱양(木覓壤)이 남경이 되며, 평양(平壤)이 서경이 되는데, 11ㆍ12ㆍ정ㆍ2월은 중경에 머물고, 3ㆍ4ㆍ5ㆍ6월은 남경에 머물며, 7ㆍ8ㆍ9ㆍ10월은 서경에 머물면 36국이 와서 조회한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국한 뒤 일백 60여 년에는 목멱양에 도읍한다.' 하였는데, 신은 지금이 바로 새 서울에 순주(巡駐)할 시기라고 여깁니다. 지금 국가의 중경과 서경은 있으나 남경이 없으니 삼각산 남쪽, 목멱산 북쪽 평지에 도성을 건설하고 때때로 순주하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하니, 이에 점술가인 문상(文象)이 그 말에 따라서 부동(附同)하였다.
○ 9월에 우복야 참지정사 박인량(朴寅亮)이 졸하였다. 인량은 문장이 전아하고 화려하였다. 송 나라 희령(熙寧) 연간에 김근(金覲)과 함께 사신으로 갔는데, 그가 저술한 척독(尺牘)ㆍ표(表)ㆍ장(狀) 및 시를 송 나라 사람이 칭찬하여, 두 사람의 시와 문을 간행까지 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고 불렀다. 일찍이 요에서 압록강을 지나와서 경계(境界)로 삼으려고 하자, 인량이 진정표를 지었는데, “온 하늘 아래가 왕의 땅, 왕의 신민 아님이 없는데, 얼마 안 되는 땅의 나머지를 하필 내 경계니 내 관할이니 할 것입니까." 하고, 또 "문양(汶陽)의 옛 토지를 돌려주어서 저희 나라를 돌보아 주시면, 장사(長沙)의 졸(拙)한 소매를 돌려서 태평 시대에 춤추오리다." 하니, 요의 황제가 보고 그 의논을 중지하였다. 시호를 문열(文烈)이라고 하였다.
○ 탐라 성주(星主)가 사람을 보내와서 왕의 즉위를 축하하였다.
○ 회경전(會慶殿)에서 《인왕경(仁王經)》을 3일 동안 강(講)하고 중 1만 명을 밥먹였다.
○ 겨울 10월 시중(侍中) 소태보(邵台輔)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관고(官誥)를 내리고, 겸해서 금은 그릇과 의대(衣襨)ㆍ비단ㆍ포목ㆍ안장차린 말 및 음악ㆍ꽃ㆍ술을 하사하여 그의 집에서 잔치하게 하였다.
○ 동지사정(東池射亭)에 나와서 좌복야 황중보(黃仲寶) 등을 불러 활과 화살을 하사하고 쏘게 하였더니, 어사중승(御史中丞) 김경용(金景庸)이 먼저 곡(鵠)을 맞히자, 은접시 5개와 말(馬) 1필을 하사하고 그 밖에도 맞힌 자에게는 모두 하사품이 있었다.
○ 송 나라 상인 홍보(洪輔)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 오연총(吳延寵)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天安節)을 축하하였다.
○ 11월 소충(蘇忠)을 요에 보내서 공물을 바치고, 백가신(白可臣)은 신정을 축하하게 하였다.
○ 12월 요에서 이유신(李惟信)을 보내와서 전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 조하기를, “옛 제도에 모든 관리가 송사(訟事)를 결단하는 데에 소사(小事) 5일, 중사(中事)는 10일, 대사(大事)는 20일이고, 도죄(徒罪) 이상의 옥사를 안핵(按覈)하는 데에는 30일로서 이미 정한 기한이 있으니, 내외 유사는 거듭 밝혀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주D-001]장빈(漳濱) : 한 나라 왕찬(王粲)이 장빈(漳濱)에 병들어 누웠다는 시(詩)가 있으므로, 병든 것을 장빈에 있다고 한 말이다.
[주D-002]번좌(反坐) : 예를 들어, 사형에 해당한 죄로 무고(誣告)하면 무고한 자가 도리어 사형을 받고, 귀양갈 죄로 무고하면 도리어 귀양가게 하는 법률이다.
[주D-003]공복(功服) 친족 : 대공(大功 : 9월)·소공(小功 : 5월)의 복을 입을 친족 관계이다.
[주D-004]문양(汶陽) : 춘추 시대에 노(魯)가 문양(汶陽)의 토지를 제(齊)에게 빼앗겼다가, 공자(孔子)가 외교를 잘한 덕으로 문양의 토지를 되찾았다.
[주D-005]관고(官誥) : 지금의 사령장(辭令狀)과 같은 것인데, 다만 그 당시에는 임명하는 전교(傳敎)의 문장을 지어서 첨부하였다.

 

농암집 제29권
 제문(祭文)
기설제문(祈雪祭文)



아 밝은 신명이 / 於赫明神
나라 명맥 도와주니 / 有國所賴
수한 때면 기도하여 / 水旱禱祀
은택을 구한다네 / 輒徼嘉惠
나는 신을 섬긴 뒤로 / 自予事神
지은 죄가 실로 많아 / 實多罪戾
밤낮으로 가슴 죄며 / 夙夜怵惕
낭패 올까 두려웠네 / 懼及顚沛
헌데 겨울 따뜻하여 / 惟茲冬煖
내년 농사 걱정이니 / 憂在嗣歲
싸락눈도 아니 내려 / 霰雪極無
명충 피해 예견되네 / 螟䘌爲害
아, 우리 밀과 보리 / 嗟我來牟
농사가 망쳐져서 / 將受其敗
백성 하나 안 남으면 / 民靡孑遺
나라 꼴이 어이 될꼬 / 邦幾何蹶
근심이 참으로 커 / 憂心孔殷
규벽(圭璧)도 아끼지 않았으니 / 圭璧靡愛
상서론 눈 퍼붓기를 / 一霈瑞霙
신명을 놓아두고 뉘에게 비오리까 / 非神誰丐
위는 사직단에 기원한 것이다.

못난 이 몸 소자가 / 眇予小子
종묘 제사 이어받고 / 嗣守宗禋
지닌 덕이 부족하여 / 惟德之否
하늘에 죄 지으니 / 獲罪于天
재앙이 계속되어 / 災荒洊臻
국운이 끊길 지경 / 國命將顚
올해 흉년 들었어도 / 今歲失登
내년 농사 바랐건만 / 尙冀來年
하늘이 아니 도와 / 曾是不弔
겨울마저 이상 기후 / 冬候又愆
얼음 얼 절기인데 / 節届氷壯
따스하기 봄 날씨라 / 氣若春暄
안개 늘상 자욱해도 / 氛霧恒泄
눈 한 점 안 내리니 / 點雪猶慳
황충 떼에 보리 죽을까 / 蝗繁麥死
근심으로 애가 타네 / 怛焉心煎
종묘 뜰 오르내리는 / 於昭列祖
밝으신 조상 신령 / 陟降有神
부디 나라 도우시어 / 蘄垂冥祐
궁한 백성 살리소서 / 活此窮民
위는 종묘에 기원한 것이다.

엄숙하신 음의 신령 / 肅肅陰靈
임계방(壬癸方)에 머물면서 / 宅于壬癸
한겨울과 화합하여 / 厥協盛冬
감수운(坎水運)을 관장하니 / 以司坎水
시절에 맞는 기후 / 時焉靜翕
신령이 이뤄준 것 / 實資發遂
헌데 이번 겨울 일은 / 乃茲寒冱
양기가 간여하여 / 陽干其事
음기를 데워서 안개를 뿜어내니 / 蒸陰泄霧
기후가 한결같이 따뜻하게 풀어져서 / 氣專縱弛
눈은 아니 내려오고 / 雪則不降
비만 대신 뿌리누나 / 惟雨之以
덕이 없고 정사 잘못 / 德愆政乖
내 허물을 압니다만 / 予固知咎
기근 들어 백성 죽으면 / 歲饑民死
신령인들 좋으리까 / 神亦何利
희생과 술 올리면서 달려와 비는 것은 / 牲酒走禱
나를 위한 일 아니니 / 匪以自爲
신이여 삼백 상서 / 三白之祥
부디 내려 주옵소서 / 庶拜神賜
위는 북교(北郊)에 기원한 것이다.

하늘이 화를 내려 / 天禍我東
해마다 기근 드니 / 饑饉歲臻
허물은 내 것인데 / 咎則在我
백성이 고통 받네 / 殃顧及民
떠돌다 굶어 죽은 저들 시체 보노라면 / 相彼流莩
나는야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인데 / 予欲無身
하늘이 아니 도와 / 曾是不弔
재해가 이어지네 / 災害相因
겨울이 봄인 양 날씨가 따스하여 / 麥不見雪
보리가 눈 구경을 단 한 번도 못 하는데 / 冬疑於春
하소연할 곳 없어 / 哀籲靡從
근심만이 클 뿐이네 / 憂心孔殷
우뚝한 국망이여 / 巍然國望
신령님만 믿사오니 / 所恃惟神
부디 은택 내리시어 / 庶降冥貺
이 사람들 살리소서 / 以活斯人
위는 삼각산(三角山)에 기원한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 / 哀我東民
큰 기근을 거듭 당해 / 洊罹大饑
굶어 죽기 직전인데 / 溝壑在前
구제할 방도 없네 / 予莫拯之
오직 하나 밀과 보리 자라나길 기대하며 / 惟指二麥
남은 백성 구제하자 마음을 먹었더니 / 以救孑遺
오호라 이 겨울은 / 乃茲冬月
가뭄이 더욱 심해 / 暵乾益彌
눈이 아니 내리니 / 雪不下地
보리 모두 시들겠네 / 麥將擧萎
슬피 울며 먹여주길 기다리는 목숨들 / 呱呱待哺
죽을 일만 남았구려 무엇에 의지하리 / 竟死何資
백악산 신령이여 / 惟嶽有神
이들이 가련커든 / 尙或憐茲
속히 은택 베푸시어 / 亟霈玄澤
땅을 적셔 주옵소서 / 以膏以滋
위는 백악산(白嶽山)에 기원한 것이다.

이 산 밑에 있는 도성 / 國於山下
조석으로 대하는데 / 朝夕几案
수목이 울창하고 구름이 피어나서 / 薈蔚之隮
가뭄이 들 적에도 촉촉히 적셔줬네 / 卽潤槁暵
다른 산 어찌 없으랴만 / 豈無羣望
가장 가까이 의지하여 / 依仰最近
재앙이 올 적마다 / 凡有災患
치성을 드렸다네 / 輒控忱款
더구나 이 큰 기근 / 矧茲大饑
국운 끊길 지경인데 / 國命幾斷
내년 근심 조짐이네 / 嗣歲之憂
겨울 가뭄 들었으니 / 又兆冬旱
보리농사 흉작되면 / 麥苟失登
백성 죽음 면하리까 / 民死曷逭
부디 구름 일으키사 / 三白之賜
삼백 상서 내리소서 / 尙賴膚寸
위는 목멱산(木覓山)에 기원한 것이다.

넘실넘실 맑은 한강 / 瀰瀰淸漢
나라의 금대인데 / 爲國襟帶
전답에 스며들어 / 滋液滲漉
은택 크게 끼치시니 / 厥施斯沛
나라에서 제사하고 / 禮秩祀典
백성들이 귀의커늘 / 民歸神惠
이 몸은 부덕하여 / 顧予不德
후회할 일 자초했네 / 自速咎悔
겨울에 눈 안 오면 / 一冬無雪
밀과 보리 망치는 법 / 來牟盡敗
계속되는 기근을 구제하지 못하면은 / 洊饑靡救
나라의 명맥도 끊기고 말 것이라 / 大命將蹶
신명께 고하면서 / 控于明神
희생을 바치나니 / 我牲靡愛
은택 조금 내리시면 / 一勺之澤
만백성이 소생하리 / 萬姓是賴
위는 한강에 기원한 것이다.

거룩하신 하늘이 / 於穆玄天
만물을 화육할 제 / 化育萬彙
누가 직무 맡아보나 / 孰任厥職
중대한 것 네 가지네 / 其大有四
움직이고 뒤흔들고 / 鼓舞動盪
습기 주고 적셔 주고 / 蒸潤霑被
작용은 다르지만 공효는 똑같아서 / 異用同功
만물이 그 덕분에 생겨나고 완성되네 / 以資生遂
이번 겨울 가뭄은 / 惟茲冬旱
신령께도 수치이니 / 神與有愧
내 탓 아니라 하지 마시고 / 罔曰非我
백성들을 동정하소 / 哀此民類
입김 불고 습기 모아 / 呼噓翕集
각기 직사 도모하여 / 各圖其事
상서로운 눈을 빚어 / 以釀瑞雪
정갈한 제사에 답하소서 / 以答蠲饎
위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 기원한 것이다.

울창한 산천들이 / 鬱彼山川
온 나라에 얼기설기 / 經緯邦域
강은 깊고 산은 높아 / 流深峙高
구름 피고 땅 적시네 / 出雲施澤
그 공효 미치는 곳 / 功利所及
무얼 아니 기르랴만 / 于何不育
덕정을 못 베풀자 / 德政之諐
신도 복을 아끼시어 / 神顧惜福
엄동설한 겨울철에 / 冱陰之月
눈이 아니 내려오니 / 雪不可得
백성들이 재앙 당해 / 民罹其菑
골짜기를 메울 지경 / 將胥塡壑
희생과 술 마련하여 온 산천에 기도하며 / 牲酒徧禱
다급한 이 사정을 고하여 올리나니 / 告此崩迫
어찌 감히 많은 것을 구하고자 하리까 / 豈敢多求
오직 하나 보리농사 구원하여 주소서 / 尙救此麥
위는 국내(國內)의 산천에 기원한 것이다.

내가 왕위 오른 뒤로 / 自予卽阼
해마다 흉년 들더니 / 歲比大侵
금년에는 혹독하기 / 其在今年
신임년보다 더하여 / 酷于辛壬
집집마다 곡식 한 톨 남아 있지 않으니 / 室如磬懸
백성들이 굶어 죽어 시체가 널릴 지경 / 民將尸枕
하늘이 이제 그만 화를 거두나 싶었더니 / 謂天悔禍
이 겨울은 재앙이 한층 더 심해져서 / 而又益甚
중동에다 그믐인데 / 仲冬且晦
다순 날이 훨씬 많네 / 恒燠少凜
눈 안 오면 보리 흉작 / 無雪無麥
너무나도 참혹할 터 / 亦孔之憯
백성 오직 신령께 의지하고 있사오니 / 民所庇依
신 아니면 그 어디에 하소연하오리까 / 非神曷諗
한바탕 눈 부디 내려 / 毋惜一霈
풍년 들게 하옵소서 / 以賜豐稔
위는 성황(城隍)에게 기원한 것이다.

아, 밝은 양의 신이 / 於昭陽神
만물 태동 맡아서 / 職司啓發
천지조화 새 출발을 도와서 일으키어 / 贊始大專
자연의 온갖 만물 푸른 싹을 피워내네 / 榮施羣物
비록 계절 겨울이라 음기가 가득해도 / 雖在陰閉
그 속에 생기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 生意靡閼
가뭄 이리 들었으니 / 惟此乾旱
이는 바로 신의 과실 / 亦神之闕
보리 말라 다 죽으면 / 麥枯將盡
백성들도 죽어갈 터 / 民死自必
저기 저 어린 아기 / 如彼赤子
젖줄 끊긴 신세리라 / 乳哺是絶
신령께서 어찌 차마 그런 짓을 하시리까 / 神胡忍此
차라리 이내 몸이 벌을 달게 받으리다 / 予寧受罰
부디 제사 흠향하고 / 尙歆禋祀
눈을 한번 내리소서 / 報以一雪
위는 구망씨(句芒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밝으신 신령께선 / 有赫明靈
왕성한 덕을 지녀 / 其德恢台
전답 곡식 성숙하고 / 登成甫田
온갖 초목 무성하네 / 百昌咸熙
헌데 내가 즉위하자 / 乃予忝位
하늘이 포학하여 / 逢天疾威
해마다 기근 들어 / 仍歲洊饑
백성 종자 끊길 판에 / 民靡孑遺
올겨울도 따뜻하여 / 方冬恒燠
싸락눈도 볼 수 없네 / 霰雪愆期
지금 춥지 아니하면 / 今失翕聚
내년 농사 뻔할 텐데 / 來者可知
만물을 길러주는 왕성한 능력을 / 生養之功
신께서는 어디에 베풀려 합니까 / 神顧安施
부디 지금 한 자 깊이 / 一霈盈尺
눈을 펑펑 쏟으소서 / 尙及此時
위는 축융씨(祝融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넓고 너른 대지여 / 坤輿磅礴
그 덕이 성대하여 만물을 실어 주고 / 德盛持載
하늘 작용 받들어서 / 順承天施
공능이 넓고 크네 / 功化弘大
자라나는 만물을 / 衆萬幷生
모두 품어 기르면서 / 函育靡外
어이 재앙 내리시어 / 胡寧降災
나라를 아니 돕나 / 國靡攸賴
겨울 눈이 아니 내려 / 冬雪不降
보리 싹 죄다 병드니 / 麥苗盡瘁
애달픈 궁한 백성 / 哀此窮民
누구에게 목숨 비나 / 命于何丐
인자하신 신령이여 / 惟神孔仁
어여삐 여기시어 / 尙冀見愛
한 자 깊이 흰 눈을 / 盈尺之貺
펑펑 한번 쏟으소서 / 秪在一霈
위는 후토씨(后土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기운 맑은 가을을 / 沆碭西灝
신령께서 주관하여 / 神實司令
천지 기운 한데 모아 / 一氣揫斂
온갖 열매 영그는데 / 萬寶成性
어이 은혜 아니 펴서 / 胡寧不惠
우리 백성 힘겹게 하나 / 爲我民病
홍수와 심한 가뭄 / 極備極無
한 해 안에 연이었네 / 一歲以倂
그래도 보리 익길 / 尙蘄麥熟
주림 참고 바랐건만 / 忍飢引領
이 겨울 기후 보니 / 視茲冬候
그 또한 가망 없네 / 又將無幸
지금 한 번 눈 내리면 / 及今一雪
남은 목숨 구할지니 / 庶救餘命
신령이여 동정하여 / 神其哀之
간곡한 청 들어주소 / 無孤至請
위는 욕수씨(蓐收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밝으신 신령께서 / 仰惟明神
우리 농사 주관하니 / 實主我稼
백곡(百穀)이 자라는 것 / 百嘉之生
모두 그 조화의 힘 / 咸資其化
신이 혹여 잘못하면 / 神或失職
백성들이 주리는데 / 民則受餓
애처롭다 겨울철에 찾아든 이 가뭄이 / 哀此冬旱
봄 여름 가뭄보다 한층 더 심하구나 / 殆甚春夏
음기가 풀리어서 / 陰氣解弛
눈이 제때 아니 오니 / 雪不時下
싹 텄던 보리들이 / 有茁者麥
들판에서 말라 죽네 / 枯死于野
백성 양식 걱정되어 / 念及民食
밤낮으로 안절부절 / 不遑夙夜
신령이여 은택 내려 / 神其降澤
나의 죄를 사하소서 / 我罪是赦
위는 후직씨(后稷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거룩하신 현제께서 / 於穆玄帝
북방에 위치하니 / 宅于坎位
겨울이라 이 절기는 / 凡是冬令
모두 신이 부린 조화 / 皆神之自
춥게 하고 눈 내림은 / 爲寒爲雪
모두 신의 책임인데 / 孰非其事
어이 직무 수행 못해 / 云胡失職
기강을 실추했나 / 綱紀墮弛
따스하기 봄날 같아 / 暄燠若春
싸락눈도 안 내리니 / 霰雪不摯
한숨 어린 이 기도를 / 吁嗟之禱
뭇 신령께 올렸으나 / 雖徧群示
겨울 위엄 떨치는 일 / 自奮玄威
오직 신께 바라나니 / 匪神誰冀
부디 이 점 살피시어 / 尙鑑在茲
우리 백성 위하여 은택을 내리소서 / 爲我民賜
위는 현명씨(玄冥氏)에게 기원한 것이다.


[주C-001]기설제문(祈雪祭文) : 작자의 나이 35세 때인 1685년(숙종11) 11월에 왕명에 따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주D-001]규벽(圭璧)도 아끼지 않았으니 : 규벽은 흉년이 들었을 때 신(神)에게 예(禮)로 바치는 옥(玉)이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지금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하늘이 환란을 내리사 기근이 거듭 이르기에, 신에게 제사를 거행하지 않음이 없으며, 이 희생을 아끼지 아니하여 규벽을 이미 모두 올렸는데도, 어찌하여 내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십니까.’ 하였다.[王曰於乎 何辜今之人 天降喪亂 饑饉薦臻 靡神不擧 靡愛斯牲 圭璧旣卒 寧莫我聽]” 하였다.
[주D-002]삼백(三白) 상서 : 동지 이후 세 번째 돌아오는 술일(戌日)을 납일(臘日)이라고 하는데, 납일 전에 세 번 눈이 내리는 것을 삼백이라고 한다. 이때 내리는 눈이 보리농사에 가장 좋기 때문에 상서라고 한 것이다.
[주D-003]국망(國望) : 삼각산의 백운대(白雲臺)와 만경봉(萬景峯)에 대한 이칭이다.
[주D-004]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 : 서울 남쪽 교외의 청파역(靑坡驛) 근방에 있었던 제단으로,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풍운뇌우의 신좌(神座)를 가리킨다. 다음 문장에 나오는 국내 산천의 신좌는 왼쪽에, 그 다음 문장에 나오는 성황의 신좌는 오른쪽에 있었는데,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주D-005]신임년 : 신유년(1681, 숙종7)과 임술년(1682)을 말한다.
[주D-006]구망씨(句芒氏) : 오행(五行) 중에 목(木)의 운(運)을 맡은 신(神)으로, 봄을 관장한다.
[주D-007]축융씨(祝融氏) : 오행 중에 화(火)의 운을 맡은 신으로, 여름을 관장한다.
[주D-008]후토씨(后土氏) : 오행 중에 토(土)의 운을 맡은 신으로, 토지를 관장한다.
[주D-009]욕수씨(蓐收氏) : 오행 중에 금(金)의 운을 맡은 신으로, 가을을 관장한다.
[주D-010]후직씨(后稷氏) : 순(舜) 임금 때에 후직 벼슬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준 기(棄)를 말하는데, 뒤에 곡식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셔졌다.
[주D-011]현명씨(玄冥氏) : 오행 중에 수(水)의 운을 맡은 신으로, 겨울을 관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