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묘역및 묘지탐방 /조선 좌의정 목서흠 묘역

조선 증 영의정 목서흠 묘역탐방 사천목씨 선영 탐방

아베베1 2012. 11. 2. 18:56

 

  
 도봉구 방학동 도봉산 둘레길의 문화재를 찾아서

  

도봉구 방학동 정의공주 묘지 입구에서 도봉산 둘레길을 따라서 가면 사천목씨의 재실이 있고(모현재)

재실 뒷편에는  조선좌의정 (증 영의정)이신  사천목씨 매계 목서흠 선생의 산소와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 답사를 하였지만  가는 길에 다시 한번 들려서 현장을 살펴 보았다 

 시루봉 아래 위치하는 사천목씨 의 선산을 탐방 하여 보았다 

 여러가지를 배우는 학인으로서 여러가지 자료를 모아서 공부를 하고 자 한다 ..

 주변에는 여러 집안의 묘역이 있다  전주이씨 왕족의 묘역과 , 죽산안씨 묘역 ,사천목씨 묘역이 있다 

 


      


인물 사전 

목서흠(睦敍欽)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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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경(舜卿)
매계(梅溪)
시호 충정(忠貞)
생년 1571(선조 4)
졸년 1652(효종 3)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사천(泗川)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목서흠(睦敍欽)에 대하여
1571년(선조 4)∼1652년(효종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순경(舜卿), 호는매계(梅溪).

부친은 이조참판 목첨(睦詹)이며, 모친은 증병조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

1597년 음보로 제용감참봉(濟用監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1603년 다시 내시교관(內侍敎官)을 거쳐, 1606년 양구현감(楊口縣監)에 재직하던 중 문묘낙서(文廟落書)사건의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18년 병조정랑 및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함경도선유어사(咸鏡道宣諭御史)광주목사(廣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1625년(인조 3) 지제교(知製敎)에 이어 좌승지가 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에 호종하였으며, 양양부사개성부유수참찬관(參贊官)좌‧우승지예조참판을 거쳤다.

1650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기로소의 당상관을 겸하고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孝宗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贈議政府左贊成梅溪睦公諱敍欽

龍洲先生遺稿卷之十九
 神道碑
贈左贊成梅溪睦公神道碑銘 幷序 a_090_346b


 

贈議政府左贊成梅溪睦公諱敍欽。字舜卿。號梅溪。其先嶺南泗川人也。上之元年庚寅。公拜同知中090_346c樞府事。上疏辭以老病不克任事。下該部。故相韓興一方都大戎。啓曰。睦敍欽痼疾。固不可煩以職事。顧其年八十。不可無優老之典。上迺命加階資憲。爵知中樞府事。兼耆老所堂上。壬辰三月二十四日。卒于靑坡里第。訃聞。上悼愴罷朝。命有司錫弔與祭。夏。葬于楊之海等村道峯山足午向之原。從先兆也。其冬。公孤處善等五人具公世系歷官懿行壽年子姓孫支爲狀。命其孫林馨以請墓隧之碑于不佞漢陽趙絅。絅起而拜手曰。不佞當仁祖朝。忝長南宮。與公均茵而坐。居恒念前糠之恥。而抑幸同陞也。090_346d古語有之。同官爲僚。同僚之誼。惡可以一死一生有間。況公行應銘法。蔡中郞無愧郭有道碑。於是乎在。不佞何幸當之。按狀。睦遠有代序。有諱德昌。以閤門祗侯顯于高麗。入我朝諱進恭。事獻廟。位民部左侍郞。號名臣。其後四傳諱世秤。卽己卯善類之一。世號玄軒先生。己卯善類擧不免蘭漆之焚割。獨先生超然文罔外。素履保貞。君子以爲徐孺子後一人。是生諱詹。歷事明宣兩朝。爲吏曹參判。於公爲皇考。再娶東萊君鄭湖后孫謇之女。生丈夫子三人。公及二季。曰長欽,大欽。俱以文學進。先公鳴。用其貴。累090_347a贈參判公至領議政。妣貞敬夫人。公自髫齔。氣專而容寂。襮順而裏方。涵濡庭訓。長而愈篤。親戚閭里咸稱焉。癸巳。丁議政公憂。時夷德無厭。民死亡無弔。公方居延之焚次。能自祗力。治喪以禮無愆。聞者稱說。丁酉。除濟用參奉不就。經六年。拜內侍敎官。考滿。陞主北部簿。轉版曹郞辭。丙午。由秋部郞知楊口縣。未瓜坐罷。庚戌。登謁聖第。自是年至壬戌十有餘載。遷官不翅數十銜。而勞勩肯䋜則如赴樂地。膴仕美職則畏避退處如怯夫然。由是。濁世訾垢不得浼公。癸亥。仁祖大王正宗祊。初政選擇宣諭御史。公090_347b膺是命往北關。墨吏茅靡。民獲蘇醒。還拜成均直講。改兵曹正郞。俄陞司藝。轉軍資監正。甲子适叛。大駕幸公山。公從自行在拜廣州牧。之任僅數月。民安之。無何。廟議定城南漢。以爲文吏不可。易以武弁。公遂移守南陽。秋用扈聖勞賜緋。乙丑。拜僉知中樞府事,知製敎。俄分鍾城符。病不赴。又拜泰安郡守。戊辰。無賴賊任之後見告密者。遂上變。雜引諸名宰。公亦不免對理。先王洞燭卽釋。未幾。拜舒川郡守。元舅具宏新拜統制使。欲以軍政見能。稱承上旨。檄三道舟師合操南海中。公上疏極言水卒居090_347c送之弊。不如各於其道會操便。上嘉納。統營合操遂寢。三道軍民戶歌。辛未。拜同副承旨。壬申。陞右副辭遞。甲戌。拜左副。仍陞東壁。乙亥。遷騎省參議。旋拜左承旨。時有摘倡逐主司儒生充軍海西事。公啓曰。儒生縱有罪。律非其律。上乃悟。命改律。丙子。又遷騎省參議。移拜左承旨。辭遞家居久。冬。西事急。朝紳家城外者多不及從衛。人多未晢大駕駐所。故遑遑路岐。公曰。人臣之義。要見君父而後決所從。遂趣馬入南漢。公見孤城受圍踰月。朝暮且陷。閫外之臣無一人赴難者。慷慨流涕。乃抗疏請斬將帥之090_347d逗遶者。明年。大駕還都。拜公爲右承旨。又賞羈靮勞。授公嘉善。歷同知中樞府事。拜襄陽府使。府卽東海之隱居邑也。民羯羠不均。歲且大侵。公盡心力賑饑。聚邑中子弟之秀者。肄業丙舍。貧不能自食者。與之糧。尤貧不能行冠昏者。厚乞以資。歲未周。化大行。戊寅。坐事罷。久未敍。李相景奭在臺時上箚理之。卽命敍。其夏。拜松都留守。其治大都如理郡規模。尤加潔廉。減廚傳省誇嬉。新學校增學廩。表善竹橋。修花潭書院。忠臣孝子烈婦之旌閭頹圮者擧皆釐整。耆老嗟歎。癸未。象胥輩忌公不利於己。橫挑客怒絀090_348a公。公始政於廣。終政於松。其所設張擧措。不亶儒雅而已。時露剛柔茹吐之風。公果世儒輇才之徒哉。冬歷京兆左右尹。甲申。兼副摠管。同知義禁。澤堂李植秉銓。語人曰。余觀國乘。睦公自少至老無點瑕。筆端是非亦不及。誠一代完人。棄擲宂散可惜。遂擬公諫長。丙戌。移拜禮曹參判。丁亥己丑。荐拜同知中樞府事。至庚寅。宿恙轉痼。其承優老之恩。則闕廢支體時也。享年八十二。嘗聞公考議政公得年亦七十九。與沈聽天守慶,宋西郊贊俱入洛社會。一時艶稱。公又趾美。豈非世間希覯事哉。蓋公之父子相繼享遐090_348b齡。與其家法行事之篤實。略與宋之陳文惠公同。而爵位差不及。若其子姓之顯隆。孫曾之難盡記。有過之。無不及焉。良由世德之畜厚而發大。然公之逢將承應者亦豈少哉。孟軻氏有言曰。居下位而不獲於上。民不可得而治矣。獲於上有道。不信於友。不獲於上矣。信於友有道。事親不悅。不信於友矣。信哉是言也。觀公屢涖州郡。而事有害於民者。無不盡言。言輒見讎。可不謂獲於上乎。近世砥行標節。咸推鄭休翁先生爲第一。公與休翁爲莫逆交。休翁許公不汚邪世。休翁之終也。以寡妻幼女托公。公乃以四郞室其090_348c女。經紀其家。若敖之鬼賴以不餒。可不謂信於友乎。幼壯事議政公。盡溫凊之道。仕宦奉大夫人。致滫瀡之養。可不謂悅於親乎。其他內行之修。兄弟之和樂。宅堇容馬。衣堇蓋形。訓諸子若功令。惡朋比如惡臭。擧公孝悌忠信之推與。公可謂淸眞篤厚君子者矣。夫人安東權氏。贈兵曹判書晫之女。配君子無違德。門內親族皆師柔順。先公甲戌十一月二十六日卒。春秋六十二。葬與公同墓而鬲焉。始視公秩贈貞夫人。后用第三男兼善參原從一等。贈公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090_348d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又視公秩。贈夫人貞敬夫人。男五人。長處善某官。娶知中樞府事鄭應聖女。嗜善某官。娶監司兪昔曾女。兼善文科某官。娶右贊成閔馨男女。志善進士。娶副提學鄭弘翼女。來善文科某官。初娶監司李命雄女。後娶通德郞尹昌言女。女二。黃道亨郡守。權跋幼學。孫男十一。林奇。處善出。林馨。嗜善出。林英,林儒兼善出。志善,來善各生男尙幼。孫女外孫曾玄幾四十餘人。多不載。銘曰。
有位有年。有弟有子。算之古今。詘不多指。天敷錫福。090_349a于公之備。公緖遙遙。發軔自泗。入國朝來。蟬聯珪組。粤維玄軒。實公皇祖。德以衛身。贏以壽胤。議政嗣興。齒爵竝峻。云誰無子。戩穀斯尠。洛社几杖。橋梓相嬗。孝哉惟公。訓襲休迎。於義若渴。於利若驚。於家事治。雍雍和樂。亦旣抱孫。蹌鷟趨鸑。人莫敢扳。公門之盛。豈惟其盛。行世致敬。我銘樂石。庸澒厥慶。
원본글 출처

목서흠의 비명(碑銘)

  • 저자

    조경(趙絅)

  • 이명

    : 순경(舜卿)
    : 매계(梅溪)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16 경재(卿宰)

  •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된 매계(梅溪) 목공(睦公)의 휘는 서흠(叙欽)이고, 자(字)는 순경(舜卿)이며, 호(號)는 매계인데, 그의 선조는 영남(嶺南)의 사천(泗川) 사람이다. 효종(孝宗) 원년(元年)인 경인년(庚寅年, 1650년)에 공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자 소(疏)룰 올려 늙고 병이 들어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므로 해당 부서에 회부하였는데, 고(故) 상신(相臣) 한흥일(韓興一)이 바야흐로 병조 판서로서 아뢰기를, “목서흠의 고질(痼疾)은 직무로써 번거롭게 할 수 없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그의 나이가 80세이니,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자급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벼슬은 지중추부사 겸 기로소 당상(知中樞府事兼耆老所堂上)으로 더하게 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652년 효종 3년) 3월 24일 청파리(靑坡里) 집에서 졸(卒)하였는데, 부음이 알려지자 임금이 슬퍼하며 조회를 파(罷)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조문과 제사를 내려 주게 하였다. 여름에 양주(楊州)의 해사촌(海寺村) 도봉산(道峰山) 기슭 오향(午向)의 터에 장사지냈으니, 선영[先兆]을 따른 것이었다.

    그해 겨울 공의 아들 목처선(睦處善) 등 다섯 명이 공의 세계(世系)와 벼슬한 이력과 아름다운 행적, 그리고 수(壽)를 누린 일과 자손들의 벋은 것을 갖추어 가장(家狀)을 만들어서 그의 손자 목임형(睦林馨)에게 명하여 묘비명(墓碑銘)을 불녕(不佞)인 한양(漢陽) 조경(趙絅)에게 청원하였다. 조경이 일어나서 경의를 표하고 말하기를, “불녕이 인조조(仁祖朝)에 욕되게 예조 판서가 되어 공과 반열을 같이하여 앉았었는데, 항상 지난날의 부실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함께 반열에 오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옛말에 같이 벼슬하는 것을 ‘동료(同僚)’라고 하였는데, 동료로서의 정의가 어찌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았다고 하여 간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공의 행적은 새기는 것이 당연하니, 채 중랑(蔡中郞, 후한(後漢) 영제(靈帝) 때의 채옹(蔡邕))이 곽 유도(郭有道, 후한 때의 곽태(郭泰))의 비명을 쓴 것이 부끄러움 없었던 일을 본받는다. 하지만 불녕에게 있어서 어떻게 요행히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가장을 살펴보니 목씨는 멀리 대수의 차례가 있었다. 휘 덕창(德昌)은 합문 지후(閤門祗侯)로 고려(高麗) 때 드러났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휘 진공(進恭)은 태종[獻廟]을 섬겨 벼슬이 민부 좌시랑(民部左侍郞)이며 명신(名臣)으로 알려졌다. 그 뒤 4대(代)를 전하여 휘 세칭(世秤)은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 현인(賢人)의 한 사람이며 세상에서 현헌 선생(玄軒先生)이라 불렀다. 기묘년의 명현이 난칠(蘭漆)의 불태워지고 베이는 화를 모면하지 못하였지만 유독 선생은 법망 밖을 벗어나 평소의 조행을 곧게 보전하였으므로 군자(君子)가 서 유자(徐孺子, 한(漢)의 서치(徐穉)) 이후로 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이분이 휘 첨(詹)을 낳았으니 명종(明宗)ㆍ선조(宣祖) 두 조정을 차례로 섬겨 이조 참판이 되었는데, 공에게는 아버지가 된다. 동래군(東萊君) 정호(鄭湖)의 후손인 정건(鄭謇)의 딸에게 두 번째 장가들어 장부(丈夫)인 아들 셋을 낳았으니, 공과 두 계씨(季氏)로 목장흠(睦長欽)과 목대흠(睦大欽)이며, 모두 문학(文學)으로 진출하여 선공(先公)이 명성을 날린 것은 그들의 귀하게 된 때문이었으며, 여러 번 추증되기를 참판에서 영의정에 이르렀다. 비(妣)는 정경 부인(貞敬夫人)이다.

    공은 어렸을 적부터 기상이 전일하되 용모는 침착하였고 겉으로는 유순하면서 속은 방정하였으며, 가정 교훈에 푹 젖어 장성하면서 더욱 독실하였기에 친척과 이웃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의정공(議政公)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당시 오랑캐의 성정(性情)은 만족함이 없어 백성이 사망하여도 조문하지 않았다. 공이 바야흐로 연안부(延安府)의 불타고 부서진 여사(旅舍)에 있으면서 스스로 공경히 힘을 다하여 예(禮)로서 상사를 어긋남이 없이 치르자, 듣는 사람이 칭찬하며 좋아하였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6년을 지나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고, 임기가 만료되자 북부 주부(北部主簿)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호조 낭관[版曹郞]으로 전보되었으나 사임하였다.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형조 낭관[秋曹郞]을 거쳐 양주 현감(楊州縣監)이 되었으나 임기 전에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하였으며, 이해부터 임술년(壬戌年, 1622년 광해군 14년)까지 10여 년 동안 벼슬을 옮긴 것이 수십 직함뿐만이 아니었지만 수고롭고 긴요한 경우는 낙지(樂地)로 달려가듯 하고, 후한 녹봉을 받는 좋은 관직은 두렵게 여기고 회피하여 겁쟁이처럼 물러나 살았다. 이런 연유로 혼탁한 세상의 거짓과 간사함도 공을 더럽힐 수 없었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종묘[宗祊]를 바르게 하고 처음 정치를 행하면서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선택하는데, 공이 이 명을 받들고 북관(北關, 함경도)으로 가니, 탐욕스러운 관리도 순종하며 따랐고 주민들은 소생하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에 임명되었다가 병조 정랑으로 바뀌었으며, 조금 있다가 사예(司藝)로 승진하여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전보되었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이 탄 수레가 공주[公山]로 떠나자 공이 호종하였으며, 행재소(行在所)에서 광주 목사(廣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얼마 안 되어 묘당(廟堂)에서 남한산(南漢山)에 성(城)을 쌓기로 논의하여 결정하고 문신(文臣)인 관리로는 불가하다고 하여, 무관(武官)으로 바꾸게 되자 공이 마침내 남양(南陽)의 수령으로 옮겼다. 가을에 임금을 호종한 공로로 비색(緋色)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을축년(乙丑年, 1625년 인조 3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ㆍ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종성(鍾城)의 병부(兵符)를 나누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또 태안 군수(泰安郡守)에 임명되었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무뢰적(無賴賊) 임지후(任之後)가 밀고하는 자를 보았다면서 드디어 상변(上變)하여 여러 명망 있는 재상도 섞여서 끌려갔는데, 공 또한 대질 심리를 모면하지 못하였으나 선왕(先王)께서 밝게 알고 즉시 석방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서천 군수(舒川郡守)에 임명되었다, 원구(元舅, 임금의 외삼촌) 구굉(具宏)이 새로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어 군정(軍政)의 능력을 보이려고 임금의 전지를 받들었다고 일컬으며 삼도(三道)의 수군에 격문을 보내어 남해(南海) 가운데서 합동 조련을 하려고 하므로, 공이 소(疏)를 올려 수졸(水卒)들이 생활하며 떠나보내는 폐단이 각기 그 도에서 모여 조련하는 편리함보다 못하다는 것을 극력 말하자, 임금이 가납(嘉納)하여 통제사 군영에서의 합동 조련이 마침내 정지되었으므로 삼도의 군민(軍民)이 집집마다 노래를 불렀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고 이듬해인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으나 사임하여 체직되고,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좌부승지에 임명되고 이어서 우부승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인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병조 참의로 옮겼다가 곧바로 좌승지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관사(官司)의 주장을 내쫓는 데 앞장선 유생(儒生)을 적발하여 해서(海西)에 충군(充軍)한 사건이 있었으므로 공이 아뢰기를, “유생에게 비록 죄가 있다 하더라도 적용한 형률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바로 깨닫고 적용한 형률을 바꾸도록 명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또 병조 참의로 옮겼다가 좌부승지로 임명하였지만 사임하여 체직되고 오래도록 집안에 있었다. 그해 겨울에 서사(西事, 호란(胡亂)을 가리킴)가 급박해지자 조정의 고관으로 집이 도성 밖에 있는 자는 미쳐 호종하고 호위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 대부분 대가(大駕)가 머무는 곳을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이리저리 허둥대므로 공이 말하기를, “신하로서의 의리는 군부(君父)를 뵌 뒤에 따를 바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공이 외로운 성이 한 달이 넘도록 포위되어 아침저녁으로 함락되게 되었는데도 군사를 통솔하는 신하로 한 사람도 위난을 구하려고 달려오는 자가 없음을 강개(慷慨)히 여겨 눈물을 흘리며 바로 소(疏)를 올려 장수로서 머뭇거리는 자는 참형하도록 청원하였다.

    이듬해에 대가가 도성으로 돌아오자 공을 우승지로 임명하였으며, 또 (대가를) 호종한 공로로 상을 내려 공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주어서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게 하고,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임명하였는데, 양양부는 바로 동해 바닷가 은거(隱居)하는 고을이다. 백성들의 간악하고 강함이 고르지 아니하고 농사 또한 흉년이 들었으므로 공이 마음을 다하여 굶주리는 자를 극력 진휼하였으며, 고을의 준수한 자제를 모아 병사(丙舍)에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고,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는 자에게는 식량을 주고 더욱 가난하여 관례(冠禮)나 혼례(昏禮)를 치를 수 없는 자에게는 밑천을 후하게 주었으므로, 한 해가 안되어 교화가 크게 행하여졌다.

    무인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년)에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고 오랫동안 서용되지 않았는데, 정승 이경석(李景奭)이 대간으로 있을 때여서 차자(箚子)를 올려 청리(聽理)하게 하여 곧바로 서용하도록 명하였으며, 그해 여름에 개성 유수[松都留守]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큰 도회 다스리기를 마치 군(郡)을 다스리는 규모로 하고, 청렴 결백을 더하게 하여 음식과 거마를 줄이고 과시와 놀이를 줄이며, 학교를 새롭게 하고 학름(學廩)을 증가시키며 선죽교(善竹橋)를 표시하고 화담 서원(花潭書院)을 수리하여 충신ㆍ효자ㆍ열부(烈婦)의 정려(旌閭)로 무너진 것은 모두 복구시켜 정돈하자 기로(耆老)들이 감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643년 인조 21년)에 상서(象胥, 역관(譯官))의 무리가, 공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꺼려하며 멋대로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유발하도록 하여 공을 물리치게 하였다. 공은 광주(廣州)에서 처음으로 정무(政務)를 보았고 송도에서 정무를 마쳤는데, 그가 베풀고 펼친 일과 조치는 유교의 의리일 뿐만이 아니고 당시에 강인하고 온유하며 삼키고 토하는 기풍이 드러났으니, 공이 과연 세속의 유학자로 재능이 작은 무리이겠는가? 겨울에 한성부 좌윤과 우윤을 역임하고 이듬해인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년)에 부총관(副摠官)으로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는데,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국사[國乘]를 살펴보매 목공(睦公)은 젊어서부터 늙기까지 한 점의 흠도 없어 붓끝에 시비(是非) 또한 미치지 않으니, 참으로 한 세대의 완전한 인물인데도 긴요하지 않은 한직에 내던져 버려둠은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하고, 마침내 공을 대사간[諫長]에 주의(注擬)하였다. 병술년(丙戌年, 1646년 인조 24년)에 예조 참판으로 옮겨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정해년(丁亥年, 1647년 인조 25년)과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에 동지중추부사에 거듭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경인년(庚寅年, 1650년 효종 원년)에 이르러 해묵은 병이 더욱 고질화 되었으니 그가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를 받은 것은 신체 기능이 닫히는 시기였으며 향년(享年)이 82세였다. 일찍이 들으니 공의 아버지 의정공의 향년이 79세에서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ㆍ서교(西郊) 송찬(宋贊)과 함께 낙사회(洛社會)에 들어갔으므로 당시에 부러워하며 칭송하였는데, 공이 또 그 아름다움을 이었으니, 어찌 세상에서 드물게 보는 일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공의 부자(父子)가 서로 잇달아 장수를 누렸는데, 그 집안의 규범과 일을 행하는 독실함이 거의 송(宋)나라 진 문혜공(陳文惠公, 진요좌(陳堯佐))과 비슷하면서 작위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그 자손이 높이 드러나고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인 것은 초과한 듯하고 못 미치는 바가 없다고 하겠으니, 진실로 대대로 쌓은 덕이 후하여 크게 발로된 것에 연유하였다. 그러나 공이 실행하고 계승하여 대응한 것 또한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맹가씨(孟軻氏,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아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데 방법이 있으니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 친구에게 신임을 받는 데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를 섬겨서 기쁘게 하지 못하면 친우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진실하도다 이 말이여! 공이 여러 차례 주군(州郡)을 다스린 것을 관찰하면 일이 백성에게 해로운 바가 있으면 모두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말을 하면 번번이 합당하게 여겼으니, 윗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근세(近世)에 행실을 닦고 지조의 본보기로는 모두들 휴옹(休翁) 정 선생(鄭先生, 정홍익(鄭弘翼))을 추대하여 첫째로 삼는데, 공이 휴옹과는 막역(莫逆)한 친구 사이였으며, 휴옹은 공이 사악한 세상에 오염되지 않았음을 허여하였다. 휴옹이 세상을 마치면서 과부가 된 아내와 어린 딸을 공에게 부탁하였는데, 공은 이에 넷째 아들을 그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여 그 집안일을 경영하게 하여 후사가 없는 귀신이 의뢰하여 굶주리지 않게 되었으니, 친우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려서부터 장년기까지 의정공을 섬기면서 겨울이면 따뜻하게 여름이면 서늘하게 하는 도리를 다하였고, 벼슬하여 대부인(大夫人)을 받들면서 맛있는 음식으로 극진히 봉양하였으니, 어버이에게 기쁨을 얻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평소 집안에서 조행을 닦은 것이며, 형제(兄弟)가 화락(和樂)한 것, 그리고 집은 겨우 말[馬]을 용납할 만하고 옷은 겨우 몸을 가릴 정도였으며, 여러 자식의 훈계는 법령[功令]처럼 하였고 붕당을 지어 아부하는 것을 싫어하기는 나쁜 냄새처럼 하였다. 공의 효도와 공경, 그리고 충성과 신의를 열거하면 추중하고 허여할 만하니, 공이야말로 깨끗하고 진실되며 효성이 독실한 군자(君子)라고 말할 만하다.

    부인(夫人)은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병조 판서에 추증된 권탁(權晫)의 딸인데, 군자(君子)의 배필로 덕행을 거스름이 없었으므로 집안의 친족들이 모두 유순(柔順)함을 본받았다. 공보다 먼저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 11월 26일에 졸(卒)하였으며, 춘추(春秋)가 62세였다. 공과 같은 묘(墓)에 장사지냈는데 간격이 있었다.

    처음에 공의 직질에 견주어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으나 뒤에 셋째 아들 목겸선(睦兼善)이 원종훈(原從勳) 1등에 참여하였으므로 공에게 숭정 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 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고, 또한 공의 직질에 견주어 부인은 정경 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5남을 두었는데, 첫째는 목처선(睦處善)으로 아무 벼슬[某官]을 하였으며 지중추부사 정응성(鄭應聖)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 목기선(睦嗜善)은 아무 벼슬을 하였으며 감사(監司) 유석증(兪昔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 목겸선(睦兼善)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아무 벼슬을 하였으며 우찬성(右贊成) 민형남(閔馨男)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 목지선(睦志善)은 진사(進士)인데,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 목내선(睦來善)은 문과에 급제하여 아무 벼슬을 하였으며, 처음에 감사 이명웅(李命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뒤에 통덕랑(通德郞) 윤창언(尹昌言)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공의 2녀는 군수(郡守) 황도형(黃道亨)과 유학(幼學) 권발(權跋)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열 한 명인데, 목임기(睦林奇)는 목처선이 낳았고, 목임형(睦林馨)은 목기선이 낳았으며, 목임영(睦林英)ㆍ목임유(睦林儒)는 목겸선이 낳았다. 목지선과 목내선도 각기 아들을 낳았지만 아직 어리다. 손녀와 외손, 그리고 증손(曾孫)과 현손(玄孫)은 거의 40여 명이 되므로 많아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지위도 있고 장수하기도 하며 동생도 있고 자식도 있는 이를, 고금을 두고 손가락을 꼽아봐도 많지 않네. 하늘이 복을 펴서 내려 공에게 갖춰지게 하였네. 공의 집안 내력 멀기도 하여 사천(泗川)에서 시작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온 이래로 높은 벼슬이 잇달았네. 저 현헌 선생(玄軒先生)은 실제로 공의 조부이셨지. 덕으로 몸을 감싸고 나머지로 자제를 장수하게 하였네. 의정공의 후사가 일어나 연세와 관작이 함께 높았네. 누구에게 자식이 없다고 하는가만 복록을 다 하는 이가 적는데, 낙사(洛社)에서의 안석과 지팡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사양하였네. 효성스럽도다 공이여, 훈계를 계승하고 아름다움을 맞이하도다. 의로움에는 목마른 듯하고 이끗에는 놀라는 듯하면서, 집안일을 다스림에는 화목하고 화락하였도다. 거기에다 이미 손자들 뛰어나서 예도(禮度)에 맞게 빨리 걸어가도다. 다른 사람들 감히 따라잡지 못함은 공의 집안이 융성해서이지. 어찌 그 융성함뿐이겠는가? 세상에서 행동함에 공경을 다하도다. 내가 빗돌에다 명(銘) 기록하여 그 경사스러움을 크게 하리로다.


     


















































    목서흠신도비(睦敍欽神道碑)
     
     
    시대
    조선
    연대
    1671년(현종12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218cm, 너비 85cm, 두께 22cm
    출토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2번지
    소재지
    (한국)-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 62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조경(趙絅) / 조위명(趙威明) / 미상
     1671  (), ()  ()  ()  . 
    (15711652)  (),  (), ()  () .   ()   30(1597)   1603     .  2(1610)     ·  ·   .1627     ,    ·  ·  ·  ·  ·   1650 .        . 
        1(1675) () .
     
    () , 1987, 1, 

     





       
      睦叙钦神道碑
    赠左赞成睦公神道碑铭(篆题)
    有明朝鲜国赠崇政大夫议政府左赞成兼判义禁府事世子贰师知经筵春秋馆事五卫都摠府都摠管行资宪大夫知中枢府事梅溪睦公神道碑铭幷序
    正宪大夫原任议政府左叅赞兼弘文馆大提学艺文馆大提学知经筵春秋馆成均馆事世子左宾客赵絅撰
    嘉义大夫开城府留守李正英篆
    通训大夫前行司谏院正言赵威明书
    赠议政府左赞成梅溪睦公讳叙钦字舜卿号梅溪其先岭南泗川人也上之元年庚寅公拜同知中枢府事上疏辞以老病不克任事下该部故相韩兴一方都大戎启曰睦叙钦痼疾固不可烦以职事顾其年八十不可无优老之典上迺命加阶资宪爵知中枢府事兼耆老所堂上壬辰三月二十四日卒于靑坡里第讣闻上悼怆罢朝命有司锡吊与祭夏葬于杨之海等村道峰山足午向之原从先兆也其冬公孤处善等五人具公世系历官懿行寿年子姓孙支为状命其孙林馨以请墓隧之碑于不侫汉阳赵絅絅起而拜手曰不侫当仁祖朝忝长南宫与公均茵而坐居恒念前糠之耻而抑幸同升也古语有之同官为僚同僚之谊恶可以一死一生有间况公行应铭法蔡中郎无愧郭有道碑于是乎在不侫何幸当之接状睦远有代序有讳德昌以合门祗候显于高丽入我朝讳进恭事献庙位民部左侍郎号名臣其后四传讳世秤即己卯善类之一世号玄轩先生己卯善类举不免兰柒之焚割独先生超然文罔外素履保贞君子以为徐孺子后一人是生讳詹历事明宣两朝为吏曺参判于公为皇考再娶东莱君郑瑚后孙謇之女生丈夫子三人公及二季日长钦太钦俱以文学进先公鸣用其贵累赠参判公至领议政妣贞敬夫人公自髫龀气专而容寂襮顺而裡方㴠濡庭训长而愈驾亲戚闾里咸称焉癸巳丁议政公忧时夷德无厌民死亡无吊公方居延之焚次能自祗力治丧以礼无愆闻者称说丁酉除济用参奉不就经六年拜内侍敎官考满升主北部簿转版曺郎辞丙午由秋部郎知杨口县未瓜坐罢庚戍登谒圣第自是年至壬戍十有余载迁官不翅数十衔而劳勩肯綮则如赴乐地膴仕美职则畏避退处如怯夫然由是浊世訿垢不得凂公癸亥仁祖大王正宗祊初政选择宣谕御史公膺是命徃北关墨吏茅靡民获苏醒还拜成均直讲改兵曺正郎俄升司艺转军资监正甲子适叛大驾幸公山公从自行在拜广州牧之任仅数月民安之无何庙议定城南汉以为文吏不可易以武弁公遂移守南阳秋用扈圣劳赐绯乙丑拜佥知中枢府事知制敎俄分钟城符病不赴又拜泰安郡守戊辰无赖贼任之后见告密者遂上变杂引诸名宰公亦不免对理先王洞烛即释未几拜舒川郡守元舅具宏新拜统制使欲以军政见能称承上旨檄三道舟师合操南海中公上疏极言水卒居送之弊不如各于其道会操便上嘉纳统营合操遂寝三道军民户歌辛未拜同副承旨壬申升右副辞递甲戍拜左副仍升东壁乙亥迁骑省叅议旋拜左承旨时有摘倡逐主司儒生充军海西事公启曰儒生纵有罪律非其律上乃悟命改律丙子又迁骑省叅议移拜左承旨辞递家居久冬西事急朝绅家城外者多不及从卫人多未晰大驾驻所故遑遑路岐公曰人臣之义要见君父而后决所从遂趣马入南汉公见孤城受围逾月朝暮且陷阃外之臣无一人赴难者慷慨流涕乃抗疏请斩将师之逗挠者明年大驾还都拜公为右承旨又赏羁靮劳授公嘉善历同知中枢府事拜襄阳府使府即东海之隐居邑也民羯羠不均岁且大侵公尽心力赈饥聚邑中子弟之秀者肄业丙舍贫不能自食者与之粮尤贫不能行冠昏者厚乞以资岁未周化大行戊寅坐事罢久未叙李相景奭在䑓时上札理之即命叙其夏拜松都留守其治大都如理郡规模尤加洁廉减厨传省夸嬉新学校增学廪表善竹桥修花潭书院忠臣孝子烈妇之㫌闾颓圯者举皆厘整耆老嗟叹癸未象胥辈忌公不利于己横挑客怒绌公公始政于广终政于松其所设张举错不亶儒雅而已时露刚柔茹吐之风公果世儒辁才之徒哉冬历京兆左右尹甲申兼副摠管同知义禁泽堂李植秉铨语人曰余观国乘睦公自少至老无点瑕笔端是非亦不及诚一代完人弃掷冗散可惜遂拟公谏长丙戍移拜礼曺参判丁亥己丑荐拜同知中枢府事至庚寅宿恙转痼其承优老之恩则阙废支体时也享年八十二甞闻公考议政公得年亦七十九与沈听天守庆宋西郊赞俱入洛社会一时艶称公又趾美岂非世间希觏事哉盖公之父子相继享遐龄与其家法行事之笃实略与宋之陈文惠公同而爵位差不及若其子姓之显隆孙曾之难尽记有过之无不及焉良由世德之畜厚而发大然公之逢将承应者亦岂少哉孟轲氏有言曰居下位而不获于上民不可得而治矣获于上有道不信于友不获于上矣信于友有道事亲不悦不信于友矣信哉是言也观公屡莅州郡而事有害于民者无不尽言言辄见仇可不谓获于上乎近世砥行标节咸推郑休翁先生为第一公与休翁为莫逆交休翁许公不污邪世休翁之终也以寡妻幼女托公公乃以四 ​​郎室其女经纪其家若敖之鬼赖以不馁可不谓信于友乎幼壮事议政公尽温淸之道仕宦奉大夫人致滫瀡之养可不谓悦于亲乎其他内行之修兄弟之和乐宅堇容马衣堇盖形训诸子若功令恶朋比如恶臭举公孝悌忠信之推欤公可谓淸眞笃厚君子矣夫人安东权氏赠兵曺判书晫之女配君子无违德门内亲族皆师柔顺先公甲戍十一月二十六日卒春秋六十二葬与公同墓而鬲焉始视公秩赠贞夫人后用弟三男兼善叅原从一等赠公崇政大夫议政府左赞成兼判义禁府事世子贰师知经筵春秋馆事五卫都摠府都摠管又视公秩赠夫人贞敬夫人男五人长处善县监娶知中枢府事郑应圣女嗜善正娶监司兪昔曾女兼善文科承旨娶右赞成闵馨男女志善监察娶副提学郑弘翼女来善文科承旨初娶监司李命雄女后娶通德郎尹昌言女女二黄道亭郡守ㆍ权跋学生处善生一男五女男曰林奇武科郡守女适进士金大年ㆍ学生李廷硕ㆍ进士李以寿ㆍ幼学李稠ㆍ生员李柱宇嗜善生四男三女男曰林馨县监林华生员林贤林挺女适县监成后周ㆍ持平安后稷ㆍ进士安应望兼善生四男二女男曰林英林儒参奉林重林楷女适幼学赵元锡ㆍ佐郎姜锡宾志善生二男三女男曰林硕林最女适幼学李净ㆍ安汝尹ㆍ尹首孙来善生二男三女男曰林一林昌女适学生沉胤元ㆍ幼学赵九辂ㆍ一幼黄道亨生二男四女男曰锡锜女适学生沉光湖ㆍ幼学金时献ㆍ生员姜植ㆍ花善都正湸权跋生一男四女男曰歙女适幼学李宇晋ㆍ愼硕谦ㆍ任翊元赵以道曾孙男天翊天汉林奇出天麟天凤天龟林馨出天祥林儒出余六尙幼曾孙女十四内外孙玄几九十余人多不载铭曰
    有位有年有弟有子算之古今诎不多指天敷锡福于公之备公绪遥遥发轫自泗入国朝来蝉联珪组粤维玄轩实公皇祖德以卫身赢以焘胤议政嗣兴齿爵并峻云谁无子戬谷斯尠洛社几杖桥榟相嬗孝哉惟公训袭休迎于义若渴于利若惊于家事治雍雍和乐亦旣抱孙跄鷟趋鸑人莫敢扱公门之盛岂惟其盛行世致敬我铭乐石庸鸿厥庆
    赵龙洲先生曾在癸巳撰此文今已十九年未能具石刻立孙林馨为金化县监得碑石子来善为杨州牧使遂刻文竖碑其后子孙之有亡有生及娶适添录如右
    崇祯戊辰后四十四年辛亥月日立

     




     

     


     

    사천목씨(泗川睦氏)

    [요약정보]

    본관명 사천(泗川)
    성씨명 목씨(睦氏)
    본관소재지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시(泗川市)
    본관이칭
    시조명 목효기(睦孝基)

    [상세내용]

    본관 연혁

    사천(泗川)은 경상남도 사천시 일원의 옛 행정구역명으로 신라시대에 사물현(史勿縣)이라 불리다가 757년(경덕왕 16)에는 사수현(泗水縣)으로 불렸이고 고성군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사주(泗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진주의 관할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사천현으로 개칭되었다. 동성(東城)이라는 별호가 있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에서 경상남도 사천군으로 이관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사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곤양군이 사천에 폐합되었다. 1925년 읍내면이 사천면으로 개칭되었고 1956년에 읍으로 승격했으며 1995년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어 사천시가 되었다.

    성씨의 역사

    641년(고구려 영류왕 24) 당(唐)의 8학사의 일원인 목충(睦种)이 고구려로 파견되어 건너와 이후 사천(泗川)에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고려 원종 때까지 약 6백 년 동안 세계가 분명하지 않아 고려 고종 때 낭장동정(郞將同正)을 지낸 목효기(睦孝基)를 시조로 삼는다.
    목효기의 아들 목덕창(睦德昌)은 1269년(원종 10) 교위(校尉)로서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연령(李延齡) 등의 반란을 평정하다가 영주성(靈州城: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서 죽었으며, 목덕창의 아들 목준평(睦俊平)은 조봉대부(朝奉大夫)로 비서윤(秘書尹)을 지내고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權相老, 동국문화사, 1961)
    《韓國人의 姓譜》(삼안문화사, 1986)
    《姓氏의 고향》(중앙일보사, 2002)

    [집필자]

    장규언

     


    목철경(睦哲卿)

    [문과] 성종(成宗) 10년(1479) 기해(己亥) 별시(別試) 병과(丙科) 1위(5/1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AA9CCA0ACBDU9999X0
    본관 사천(泗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명
    전력 생원(生員)
    관직 군수(郡守)

    [가족사항]

     
    [부]
    성명 : 목계남(睦繼男) 
    [조부]
    성명 : 목진공(睦進恭) 
    [증조부]
    성명 : 목손검(睦孫儉)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목대흠(睦大欽)

    [문과] 선조(宣祖) 38년(1605) 을사(乙巳)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5위(15/33)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BAA9B300D760B1575X0
    탕경(湯卿)
    다산(茶山)
    생년 을해(乙亥) 1575년(선조 8)
    합격연령 31세
    본관 사천(泗川)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전력 진사(進士)
    관직 승지(承旨)
    관직 이조좌랑(吏曹佐郞)
    타과 선조(宣祖) 34년(160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가족사항]

     
    [부]
    성명 : 목첨(睦詹) 
    [조부]
    성명 : 목세평(睦世枰) 
    [증조부]
    성명 : 목희안(睦希顔) 
    [외조부]
    성명 : 정건(鄭謇) 
    [처부]
    성명 : 유해(柳海) 
    [형]
    성명 : 목서흠(睦敍欽) 

    [자]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목장흠(睦長欽)

    [문과] 선조(宣祖) 32년(1599) 기해(己亥) 정시(庭試) 병과(丙科) 1위(5/1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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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경(禹卿)
    고석(孤石)
    생년 임신(壬申) 1572년(선조 5)
    합격연령 28세
    본관 사천(泗川)
    거주지 미상(未詳)

    [이력사항]

    선발인원 10명
    전력 참봉(參奉)
    관직 호조참판(戶曹參判)
    관직 홍문관리(弘文館吏)
    타과 선조(宣祖) 24년(1591) 신묘(辛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가족사항]

     
    [부]    성명    : 목첨(睦詹) 
    [조부]  성명  : 목세평(睦世枰) 
    [증조부] 성명 : 목희안(睦希顔) 
    [외조부] 성명 : 정건(鄭謇) 
    [처부]   성명 : 남위(南瑋) 
    [형]  성명 : 목서흠(睦敍欽) 

    [자]    성명 : 목성선(睦性善)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목내선(睦來善)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좌의정(左議政)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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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지(來之)
    수옹(睡翁)
    문무구분 문관
    생년 정사(丁巳) 1617
    졸년 갑신(甲申) 1704
    시대 조선중기
    왕대 숙종(肅宗)
    본관 사천(泗川)
    활동분야 관료
    항목 좌의정(左議政)

    [관인정보]

    제수년월 1689 [기사(己巳)] 이조판서(吏曹判書) 특배(特拜)

    [품관 정보]

    품관 정1품

    [과거 정보]

    과거 효종(孝宗) 경인증(庚寅增)

    [가족 관계]

    목서흠(睦敍欽)
    조부 목첨(睦詹)
    증조부 목세칭(睦世秤)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인물 사전 
    목임일(睦林一)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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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백(士伯)
    청헌(靑軒)
    생년 1646(인조 24)
    졸년 ?(미상)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사천(泗川)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목임일(睦林一)에 대하여
    1646년(인조 24)∼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사백(士伯), 호는 청헌(靑軒)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의 아들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에 합격, 1678년 통덕랑(通德郞)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검열이 되었다. 평안도에 암행어사로 다녀온 바 있으며, 1682년 지평부수찬정언을 거쳐, 이듬해에수찬정언부교리를 역임하였다. 남인이 득세한 1689년 아버지 목내선이 좌의정에 오르고, 그는 이조좌랑부응교응교집의승지대사간도승지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세력이 축출당함에 따라 남해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인 1695년에 풀려났다.

    그러나 1701년 민비가 죽자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중궁으로 올리자고 심단(沈檀)민언량(閔彦良)등과 더불어 상소를 올렸던 죄로 국모모해사건의 발각과 동시에 남인의 세력이 완전히 축출당할 때 다시 장흥에 원찬(遠竄)되었다.

    그뒤 여러 번 구제의 상소가 있은 뒤 1704년에 풀려났다. 그는 비록 관로(官路)에서는 굴곡이 있었으나 당시 왕의 그에 대한 인물평으로는 사람과 물건을 상해(傷害)하지 않는 착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집필자]

    박정자(朴定子)

     

     

    사천목씨(泗川睦氏)

    [사천목씨(泗川睦氏)의 인물들]

    [사천목씨(泗川睦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무과
    목경현(睦慶賢) 목세빈(睦世彬) 목임춘(睦林春) 목재흠(睦在欽) 목중형(睦重衡)
    목천서(睦天瑞) 목천익(睦天翊) 목춘휘(睦春輝) 목흥윤(睦興胤)
    문과
    목겸선(睦兼善) 목내선(睦來善) 목대흠(睦大欽) 목만중(睦萬中) 목만중(睦萬中)
    목서흠(睦敍欽) 목선항(睦善恒) 목성선(睦性善) 목승석(睦承錫) 목시경(睦時敬)
    목시경(睦時敬) 목용석(睦用錫) 목인배(睦仁培) 목인재(睦仁哉) 목인회(睦仁會)
    목임유(睦林儒) 목임일(睦林一) 목임중(睦林重) 목장흠(睦長欽) 목조수(睦祖洙)
    목조영(睦祖永) 목종하(睦宗夏) 목지경(睦趾敬) 목창명(睦昌明) 목천성(睦天成)
    목천수(睦天壽) 목천임(睦天任) 목천현(睦天顯) 목철경(睦哲卿) 목첨(睦詹)
    목첨(睦詹) 목취선(睦取善) 목태석(睦台錫) 목행선(睦行善)
    생원시
    목규석(睦奎錫) 목돈화(睦惇和) 목만중(睦萬中) 목사연(睦泗演) 목성관(睦聖觀)
    목세탐(睦世探) 목승평(睦昇平) 목시경(睦時敬) 목시윤(睦時尹) 목안중(睦安中)
    목원응(睦源應) 목인규(睦仁圭) 목인재(睦仁栽) 목인회(睦仁會) 목일중(睦壹中)
    목임화(睦林華) 목장흠(睦長欽) 목제인(睦齊仁) 목조순(睦祖舜) 목종하(睦宗夏)
    목중신(睦重信) 목중정(睦重廷) 목천규(睦天奎) 목천상(睦天祥) 목천운(睦天運)
    목천장(睦天章) 목천현(睦天顯) 목치상(睦致祥) 목형석(睦衡錫) 목황중(睦黃中)
    음관
    목승석(睦承錫) 목양석(睦養錫) 목양석(睦養錫) 목용석(睦用錫) 목인배(睦仁培)
    목인재(睦仁栽) 목인회(睦仁會) 목태석(睦台錫)
    진사시
    목겸선(睦兼善) 목경우(睦慶祐) 목기선(睦嗜善) 목낙선(睦樂善) 목내선(睦來善)
    목달경(睦達敬) 목무경(睦懋敬) 목사영(睦泗英) 목상경(睦尙敬) 목상순(睦尙純)
    목성관(睦聖觀) 목성함(睦聖咸) 목양석(睦養錫) 목용석(睦用錫) 목유석(睦裕錫)
    목윤경(睦允敬) 목윤중(睦允中) 목인배(睦仁培) 목인수(睦仁秀) 목인휘(睦仁徽)
    목임유(睦林儒) 목임일(睦林一) 목임장(睦林樟) 목임중(睦林重) 목임최(睦林㝡)
    목조눌(睦祖訥) 목조수(睦祖洙) 목조열(睦祖悅) 목조우(睦祖禹) 목존선(睦存善)
    목중광(睦重光) 목중도(睦重道) 목지경(睦趾敬) 목지선(睦志善) 목창만(睦昌萬)
    목창명(睦昌明) 목창조(睦昌朝) 목천건(睦天健) 목천광(睦天光) 목천근(睦天根)
    목천린(睦天麟) 목천성(睦天成) 목천임(睦天任) 목천조(睦天祚) 목태석(睦台錫)
    목행선(睦行善) 목회경(睦會敬) 목효범(睦孝範) 목후경(睦厚敬) 목희경(睦熙敬)

     



     

    목장흠(睦長欽)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BAA9C7A5D760B1572X0
    우경(禹卿)
    고석(孤石)
    생년 1572(선조 5)
    졸년 1641(인조 19)
    시대 조선 중기
    본관 사천(泗川)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목장흠(睦長欽)에 대하여
    1572년(선조 5)∼1641년(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우경(禹卿), 호는고석(孤石).

    부친은 이조참판 목첨(睦詹)이며, 모친은 증병조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

    1599년(선조 3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봉교(奉敎)를 거쳐 전적(典籍)감찰사서(司書) 등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판서 기자헌(奇自獻)의 미움을 받아 고성군수(高城郡守)로 나갔다.

    뒤에 직강(直講)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이어 응교(應敎)집의(執義)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역임하고, 1613년 좌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폐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려다가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연좌되어 청풍군수로 좌천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판결사함경도관찰사경주부윤 등을 거쳐 호조참판으로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1641년 도승지가 되었다.

    성격은 강직하였고 관후(寬厚)한 덕량이 있어 사람을 대하는 성의가 화기애애하였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이존희(李存熙)


     벽려신지의 내용중에  볗호의 내용중에는 송파,눌재 라는 별호가  많고 , 다음이 서계, 구봉 이라는 별호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별호(別號)가 중첩으로 나오는 경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서계(西溪) 양홍주(梁弘澍), 정세호(鄭世虎), 남주(南趎), 박세당(朴世堂), 김담수(金聃壽), 이덕윤(李德胤).
    졸암(拙菴) 이충작(李忠綽), 이직언(李直彦).
    동계(桐溪) 정온(鄭蘊), 이흘(李屹), 권달수(權達手).
    송암(松菴) 권항(權伉), 권징(權徵), 유관(柳灌).
    송당(松堂) 조준(趙浚), 권맹손(權孟孫), 박영(朴英), 김광재(金光載).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 민정중(閔鼎重).
    풍암(楓巖) 권식(權寔), 임복(林復), 문위세(文緯世).
    초려(草廬) 고려조(高麗朝)의 김진양(金震陽), 조선조(朝鮮朝)의 이유태(李惟泰).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주박(周博), 남계하(南啓夏), 김수일(金守一), 권덕린(權德麟), 신명인(申命仁).
    쌍백당(雙栢堂) 최기(崔沂), 홍중주(洪重疇), 이세화(李世華), 홍순각(洪純慤).
    동명(東溟) 황윤중(黃允中), 최기백(崔基銆), 정두경(鄭斗卿), 김세렴(金世濂).
    동강(東岡) 조상우(趙相愚), 최후상(崔後相), 김첨경(金添慶), 김우옹(金宇顒), 허요(許窰).
    회곡(晦谷) 신유(申愈), 조한영(曺漢英), 남선(南銑), 조광좌(趙光佐).
    송정(松亭) 신명화(申命華), 김수(金洙).
    묵재(默齋) 김관(金瓘), 김홍익(金弘翼), 홍언필(洪彦弼), 최유해(崔有海), 이심원(李深源), 심안세(沈安世).
    송강(松江) 조징(趙澄), 정철(鄭澈), 조사수(趙士秀).
    현주(玄洲) 조찬한(趙纘漢), 이명한(李明漢).
    성재(誠齋) 권고(權皐), 민이승(閔以升), 유탁(柳濯), 박은(朴誾), 오억령(吳億齡).
    만취당(晩翠堂) 김맹권(金孟權), 권율(權慄), 김위(金偉).
    잠곡(潛谷) 김의정(金義貞), 김육(金堉).
    옥봉(玉峯) 이원(李媛), 백광훈(白光勳).
    서하(西河) 고려조의 임춘(林椿), 조선조의 이민서(李敏敍).
    행촌(杏村) 고려조의 이암(李喦), 조선조의 민순(閔純).
    저촌(樗村) 심육(沈錥), 이정섭(李廷燮).
    쌍계(雙溪) 송응상(宋應祥), 이복원(李福源), 김뉴(金紐).
    운곡(雲谷) 송한필(宋翰弼), 이광좌(李光佐), 이택(李澤), 최계훈(崔繼勳), 최수(崔授), 남노성(南老星).
    사우당(四友堂) 송국택(宋國澤), 한명회(韓明澮).
    석탄(石灘) 고려조의 이양중(李養中)과 이존오(李存吾), 조선조의 한효중(韓孝仲)과 이신의(李愼儀).
    간이(簡易) 한숙(韓淑), 최립(崔岦).
    현석(玄石) 한인급(韓仁及), 박세채(朴世采).
    석봉(石峯) 한수(韓脩), 한호(韓濩).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 박승종(朴承宗).
    백석(白石) 남탁(南晫), 허직(許稷), 박태유(朴泰維).
    규봉(圭峯) 심연(沈演), 심봉의(沈鳳儀).
    양촌(陽村) 고려조의 권근(權近), 조선조의 정재희(鄭載禧)와 이겸지(李謙之).
    눌재(訥齋) 박증영(朴增榮), 이태연(李泰淵), 이예(李芮), 이충건(李忠楗), 양성지(梁誠之), 박상(朴祥), 김찬(金瓚).
    봉암(鳳巖) 한홍조(韓弘祚), 한몽린(韓夢麟).
    도곡(陶谷) 한술(韓述), 이필중(李必重), 이양원(李養源).
    약봉(藥峯) 이탁(李鐸), 심단(沈檀), 서성(徐渻), 김극일(金克一).
    보만재(保晩齋) 한명상(韓命相), 이육(李堉), 서명응(徐命膺).
    동고(東皐) 강신(姜紳), 김노(金魯), 이명(李蓂), 이준경(李浚慶), 성준득(成準得), 이수록(李綏祿), 박이서(朴彝敍).
    성암(省菴) 박필전(朴弼傳), 송준(宋駿), 김효원(金孝元), 성호(成浩), 조명국(趙鳴國), 이지번(李之蕃).
    송파(松坡) 조휘(趙徽), 이덕민(李德敏), 남응침(南應琛), 남세주(南世周), 서문상(徐文尙), 최성지(崔誠之), 이해창(李海昌).
    둔촌(遁村) 고려조의 이집(李集), 조선조의 조문형(趙文衡).
    약천(藥泉) 조계원(趙啓遠), 남구만(南九萬).
    치암(恥菴) 고려조의 박충좌(朴忠佐), 조선조의 송질(宋鑕), 구사민(具思閔), 한세양(韓世讓), 이지렴(李之濂).
    농암(聾巖) 심지명(沈之溟), 이현보(李賢輔).
    만사(晩沙) 심우승(沈友勝), 서경우(徐景雨), 심지원(沈之源).
    일재(一齋) 민회현(閔懷賢), 권한공(權漢功), 이항(李恒).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성담중(成聃仲).
    사암(思菴) 박순(朴淳), 성세장(成世章).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오달제(吳達濟), 김우급(金友伋).
    어은(漁隱) 오국헌(吳國獻), 민제(閔霽), 허회(許淮).
    설정(雪汀) 이흘(李忔), 조문수(曺文秀).
    설봉(雪峯) 박찬(朴燦), 강백년(姜栢年), 허홍(許烘), 윤수(尹燧).
    죽계(竹溪) 안순(安純), 문관(文瓘), 최경장(崔慶長).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안처순(安處順).
    약포(藥圃) 이희수(李喜壽), 안숙(安璹).
    초당(草堂) 강경서(姜景敍), 구면(具), 허엽(許曄).
    양파(陽坡) 홍언박(洪彦博), 정태화(鄭太和).
    고은(皐隱) 안지(安止), 이규보(李圭輔).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임규(任奎), 오이익(吳以翼), 윤봉오(尹鳳五).
    동리(東里) 윤옥(尹玉), 정세규(鄭世規).
    화곡(華谷) 정종명(鄭宗溟), 이경억(李慶億).
    구천(龜川) 어효첨(魚孝瞻), 이세필(李世弼).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김득신(金得臣).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유희령(柳希齡), 최철견(崔鐵堅).
    모당(慕堂) 홍이상(洪履祥), 손처눌(孫處訥).
    매계(梅溪) 목서흠(睦敍欽), 문근(文瑾).
    율곡(栗谷) 이이(李珥), 조명욱(曺明勗).
    옥산(玉山) 이우(李瑀), 이석(李晳).
    남곡(南谷) 이후(李垕), 조정서(趙正緖).
    창해(滄海) 이사호(李士浩), 허격(許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