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한산백 목은 이색 선생 행장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 행장

아베베1 2012. 12. 20. 14:58


 
양촌선생문집 제4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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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목은 선생(牧隱先生) 이 문정공(李文靖公) 행장

공(公)의 휘는 색(穡)이요 자는 영숙(穎叔)이며 호는 목은(牧隱)인데, 본관은 충청도 한주(韓州)이다. 증조부는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된 창세(昌世)며, 조부는 봉훈대부(奉訓大夫) 비서 감승(秘書監丞)에 선증(宣贈)되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靖大夫)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봉(追封)된 자성(自成)이요, 아버지는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宣授) 받고 본국(本國)에서 광정대부(匡正大夫) 도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상호군(都僉議贊成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上護軍)으로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요, 이름은 곡(穀)이다. 원조(元朝) 원통(元統) 계유(1333)에 제과(制科)에 합격했으며 호는 가정(稼亭)이요 문집 2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는 요양현군(遼陽縣君)에 선봉(宣封)된 본국의 함창군부인(咸昌郡夫人)인 김씨(金氏)다. 천력(天曆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무진(戊辰) 5월 신미(辛未)에 공을 낳았는데,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특이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보면 곧 욀 수 있었다.
신사년에 공은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본국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니, 이미 명성이 우뚝하였다. 20세가 되매 혼인을 구하니, 당시의 높은 가문과 덕망 있는 집안에서 사위를 고르는 자들은 모두 그 딸을 시집보내고자 하여 혼인지낼 때까지도 다투었다. 이에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명위장군 제군만호부 만호(明威將軍諸軍萬戶府萬戶)를 선수(宣授) 받은 본국의 중대광 화원군(重大匡花原君)인 중달(仲達)의 딸이며, 원조(元朝)의 조열대부(朝列大夫)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며 본국의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 한공(漢公)의 손녀다. 무자년에 가정 선생(稼亭先生)이 원조(元朝)에 있을 때에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는데, 공은 조관의 아들로서 국자감 생원(國子監生員)으로 보충되어서, 3년 동안 재학하며 중국의 연원(淵源) 있는 학문을 익혔는데 탁마(琢磨)하고 함양하여 더욱 진보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이 본국에 돌아와서 졸(卒)하니 분상(奔喪)하여 복제를 다 마쳤다. 계사년 5월에 공민왕(恭愍王)이 과장을 열고 선비들을 시험했는데, 공이 장원을 하여 숙옹부 승(肅雍府丞)을 제수받았고, 가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향시(鄕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곧 진봉사서장관(進奉使書狀官)이 되어 원 나라 서울에 갔었다. 갑오년 2월에는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 구양현(歐陽玄)과 예부 상서(禮部尙書) 왕사성(王思誠)이 회시(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또 합격하였고, 3월에는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 시험을 보았는데, 제이갑(第二甲)에 두 번째로 합격되었으므로, 독권관참지정사(讀卷官參知政事) 두병이(杜秉彝)와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 등 제공이 크게 칭찬하였다. 칙령으로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동지제고 겸 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仕郞同知製誥兼國史院編修官)을 제수받았다.
귀국하여 차례를 기다리는데 공민왕(恭愍王)은 통직랑 전리정랑 예문응교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通直郞典理正郞藝文應敎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하였다. 을미년 봄에 왕부(王府)의 필도지(必闍赤)가 되어 비목(批目) 베껴 쓰는 것을 맡았으니 선비로는 영광된 피선이었고, 계자를 더 높여 주어 봉선대부(奉善大夫) 시내사사인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試內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을 제수하였다. 여름에는 또 서장관(書狀官)에 충원되어 표(表)를 받들고 원경(元京)에 갔는데, 8월에 한림원(翰林院)에 예사(禮仕)되었으며, 겨울에는 경력(經歷)에 임시 임명되기도 하였다. 병신년 정월에 어머니가 늙으신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본국으로 돌아왔으니, 대개 천하(天下)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을에 본국의 관제(官制)가 다시 시행되매 중산대부(中散大夫)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지제고 겸 춘추관편수관 겸 병부낭중(吏部侍郞 翰林直學士知製誥兼春秋館編修官兼兵部郞中)이 되어 문무관(文武官)의 선발 권한을 맡았었다. 당초 공이 시정(時政) 8개항을 아뢰어 모두 시행되었는데, 그 하나는 정방(政房)을 폐하고 이ㆍ병부(吏兵部)의 선거를 복구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정유년에는 국자좨주 지각문(國子祭酒知閣門)이 되어 중대부(中大夫)에 오르고 지인상서(知印尙書)가 되니, 이는 필도지의 장(長)으로 이에 선임된 것은 더욱 명예스러운 것이다. 7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옮기면서 계자(階資)는 대중대부(大中大夫)에 올랐다. 이 뒤로부터는 모든 벼슬을 제수하는 데 모두 관직(館職)을 겸대하게 하였다.
무술년에는 어느 일을 말하다가 권귀(權貴)들에게 거슬려 한때 간관(諫館)들이 모두 좌천되었다. 공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어 행장을 정리하고 새벽을 기다려 떠나려고 하였는데, 그날 밤에 특명이 내려 공만은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知工部事)가 되었다. 왕(王)이 재상(宰相)에게, 이르기를,
“이색(李穡)은 재덕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니 그를 등용하기를 이같이 아니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없다.”
고 하였다. 이렇게 임금에 가까운 직책과 국가의 중요한 기밀에 참여하여 관장한 것이 모두 7년 동안에 계책을 진술하고 유익한 일을 아뢰어서 나라에 도움된 바가 대단히 많았다.
신축년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하여 임금이 피란하게 되니 신료(臣僚)들은 창졸간에 모두 흩어졌었다. 공은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호위하고 참모하여 많은 어려움을 구제하고 회복하는 큰 공(功)을 세웠으므로 1등훈(一等勳)에 책봉하고 철권(鐵券) 및 전지(田地) 1백 결(結)과 노비 20명을 하사하였다. 계묘년에 봉훈대부(奉訓大夫) 정동행중서성 유학제거(征東行中書省儒學提擧)를 선수(宣授) 받고 겨울에 본국에서 단성보리공신(端誠輔理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었다. 이때부터 20여 년이나 나라 정사에 참여하여 비록 관직을 그만두고 한가히 있더라도 언제나 큰 정사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와서 물었다. 을사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뽑았다. 정미년 겨울에는 조열대부(朝列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선수(宣授) 받았으며, 본국에서 판개성 겸 성균관대사성(判開城兼成均館大司成)이 되었다.
당초 신축년 병란을 겪은 후에 학교의 교육이 폐이(廢弛)되었으므로, 임금께서는 이를 다시 일으키려고 성균관(成均館)을 숭문관(崇文館)의 옛 터에다 다시 지었다. 강의(講義)를 맡을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당시의 경술에 능한 선비를 뽑았으니, 영가(永嘉) 김구용(金九容)ㆍ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ㆍ반양(潘陽) 박상충(朴尙衷)ㆍ밀양(密陽) 박의중(朴宜中)ㆍ경산(景山) 이숭인(李崇仁) 같은 사람들인데, 모두 다른 관직에 있으면서 학관(學官)을 겸하게 했으며, 공으로써 그 장(長)을 시켰으니 대사성(大司成)을 겸직한 것도 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 무신년 봄에는 사방(四方)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제공(諸公)이 경서(經書)를 나누어서 가르쳤다. 매일 강의(講義)가 끝나면 서로 의심나는 뜻을 토론하여 각각 그 극진함을 다하였다. 이때에 공은 화평한 표정으로 중도를 잡아 변석하고 절충하여 정주(程朱)의 학설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며, 밤이 다하여도 지칠 줄을 몰랐다. 이로부터 우리나라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났었고, 학자들은 그 기송사장(記誦詞章)의 습관을 버리고 신심성명(身心性命)의 이치를 연구하였으며, 유학을 높일 줄 알고 이단(異端)에 빠지지 아니하며, 의리를 바로잡고 공리(功利)를 구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유풍(儒風)과 학술(學術)이 새롭게 찬란하였으니 이는 모두 선생의 가르친 공로였다. 4월에 왕(王)이 구재(九齋 고려 문종(文宗) 때 최충(崔冲)이 세운 사학(私學)의 9개 과목)에 거둥하여 직접 제생(諸生)들을 경의(經義)로써 시험하매, 공에게 독권(讀卷 독권관. 시험 답안을 읽어 올리는 시험관)을 명하였는데, 이첨(李詹) 등 7인을 뽑아서 급제(及第)를 주었다. 기유년 여름에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유백유(柳伯濡) 등 33인을 뽑았는데, 처음으로 중국의 과거 제도인 역서통고법(易書通考法)을 채용한 것이었다.
당초 공민왕(恭愍王)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영전(影殿)을 왕륜사(王輪寺)의 동쪽에 세우는데, 사치하고 화려함이 극하여 몇 해가 되도록 이루지 못하고 마암(馬巖)의 서쪽에 터를 잡아서 다시 짓는데 그 굉장함은 더욱 심하여 인력과 비용이 헤일 수 없었다.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첨서밀직(僉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馬巖)의 역사는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할 뿐만 아니라, 술사(術士)의 말에 ‘여기다 큰 집을 지으면 나라에 불리할 것이다.’라고 했으니, 내가 재주가 없으나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있으면서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차라리 죽기로써 간하겠다.”
하고, 바로 글을 올려 옳지 못함을 극론(極論)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시켜 베려고, 공에게 명하여 백성에게 알리는 글[諭衆文]을 지으라 하였다. 공이 그들의 죄명(罪名)을 묻자 왕(王)이 이르기를,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불의(不義)를 많이 행하여 하늘로 하여금 크게 가물게 한 것이 그 하나요, 연복사(演福寺)의 전지(田地)를 빼앗은 것이 그 둘째요, 노국공주의 죽음에 3일간 제사를 궐한 것이 그 셋째요, 노국공주의 장사를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예로써 낮추어 시행한 것이 그 넷째이니, 불충불의(不忠不義)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는가.”
하매, 공이 이에 답하여 아뢰기를,
“그것은 모두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요사이 유탁 등의 상서(上書)는, 영전(影殿)의 역사(役事)를 정지할 것을 청한 것이오니, 비록 위에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일로 죄를 준다 해도 백성은 모두 상서를 했기 때문이라 할 것이요, 또한 이 네 가지 일들은 모두 죽일 죄가 못 됩니다. 원하옵건대 다시 생각하소서.”
하니, 왕(王)은 더욱 노하여서 글짓기를 재촉하였으나, 공이 엎드려 아뢰기를,
“신(臣)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그 글을 지어서 그들의 죄를 만들겠습니까. 또한 상서(上書)한 일은 영도첨의(領都僉議)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 때에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극히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잡았는데, 마침 왕의 옆에 앉아 있었다. 신돈도 할 수 없이 이어 아뢰기를,
“노신(老臣)도 알고는 있었습니다마는, 다만 왕께서 노하실까 하여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왕은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국인(國印)을 봉하게 하니 춘부가 허리를 굽히고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므로, 신돈이 아뢰기를,
“마땅히 말한 자로 하여금 봉하게 하소서.”
하니, 곧 공에게 명하였다. 공은 왕이 더욱 노할까 두려워서, 곧 봉(封)하고 쓰기를 ‘신 색은 삼가 봉합니다.[臣穡謹封]’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부덕하므로 내 말을 좇지 않으니, 이 국인을 가지고 가서 덕있는 자를 구하여 섬기어라. 우리 태조(太祖)께서도 처음이야 어찌 왕손(王孫)이었겠는가. 내가 자리를 피하리라.”
하고, 곧 거처를 정비궁(定妃宮)으로 옮기고 음식 들이는 것도 허락하지 아니했다. 다음날 신돈은 왕의 노함을 풀게 하려고 왕에게 아뢰어, 공을 옥에 가두고 문책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臣)은 하찮은 선비로 외람히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재상(宰相) 지위에 올랐으니 임금의 덕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죽임을 당할지라도 힘을 다해 말씀드려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 합니다. 지금 유 시중(柳侍中)이 누설(縲絏 구금되는 것으로 감옥을 가리킨다)에 있는데, 신이 감히 죄가 없음을 끝까지 아뢴 것은 왕(王)의 마음이 감동되어 깨닫고 대신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신이 우는 것은 죽기가 두려워서가 아니요, 다만 이 한 번 실수로 인하여 왕의 이름이 후세에 불미하게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옥관(獄官)이 사실대로 왕에게 아뢰니 왕이 드디어 감동하고 깨우쳐서, 유탁(柳濯) 등을 풀어주고 공으로 하여금 목욕하고 조정에 나오게 하였다. 신해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잠(金潛) 등 33인을 뽑았다. 가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배수받고 문충보절 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더 받았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지문하사(知門下事)가 되었을 때 공민왕은 가까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물의(物議)가 어떠한가?”
하매, 공이 아뢰기를,
“모든 사람들이 나라에서 인재들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하니, 왕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문관ㆍ무관 모두 최고의 인물을 기용하여 재상(宰相)으로 삼았으니 누가 감히 말하리오.”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같은 날 두 어진 사람을 함께 등용했음을 스스로 흡족히 여긴 것이다. 왕은 언제나 공과 성산(星山)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대내에 들어오게 할 때는 꼭 좌우 시종을 시켜 닦고 쓸며 향불을 피우게 하니, 행승(倖僧) 신조(神照)가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보려 하면서 어찌하여 이처럼 공경합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네가 어찌 이런 일을 알겠는가. 이 두 사람의 도덕은 보통 선비들과 다르며 또한 이색(李穡)은 학문이 겉치레를 버리고 정수를 얻은 자이다. 중국에서도 비하기 드문 선비인데 어찌 감히 함부로 하겠느냐.”
하였다. 이는 왕이 일찍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갔을 때에 그곳의 사대부들이 평소부터 공을 칭찬함을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9월에 어머니 요양현군(遼陽縣君)의 상사를 당하였다. 다음해 임자년 9월에 왕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기복(起復 거상중 왕명에 의하여 출사하는 것)을 명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계축년 겨울에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대광(大匡)의 계자를 받았다. 갑인년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훙(薨)하였는데, 공은 어머니가 돌아간 뒤부터 심한 슬픔으로 병이 되어 구토(嘔吐)와 설사병에 걸렸는데 왕이 훙했다는 말을 듣고 더욱 위독해져서 문을 닫고 나가지 않은 지 7~8년이 되었었다. 그런 사이에 왕명에 의하여 지공(指空)과 나옹(懶翁) 두 화상(和尙)의 부도(浮屠 사리탑(舍利塔)을 말한다)에 명(銘)을 지었는데, 그 무리들이 인하여 공의 집을 많이 왕래하였고 시문(詩文)을 구하면 모두 지어 주었으므로 불교(佛敎)에 아첨한다는 비방도 있었다. 공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들이 우리 임금과 어버이에게 명복을 빈다 하니, 내 감히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정사년에 추충보절 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號)를 받았으며,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임술년에 삼중대광 판삼사사(三重大匡判三司事)를 배수했으며, 계해년에 다시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갑자년에는 다시 한산부원군이 되었으며, 을축년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검교 문하시중(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門下侍中)을 제수받고, 병인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서 맹사성(孟思誠) 등 33인을 뽑았다. 무진년에 조정(朝廷 명 나라 조정)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니, 시중(侍中) 최영(崔瑩)이 국권을 장악하고 있는 때라 군사를 일으켜서 요동을 공격하였다. 우리 태상왕(太上王)이 의거(義擧)하여 회군(回軍)한 후 최영(崔瑩)을 물리치고 공을 기용(起用)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삼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금 국가간에 틈이 생겼으니 왕(王)이나 집정(執政)한 신하가 직접 중국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변명할 수 없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는 노부(老夫)의 책임이다.”
하고, 곧 북경에 갈 것을 자청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은 모두 공이 늙고 병이 심하다 하여 굳이 만류했지만 공이 말하기를,
“신(臣)이 하찮은 선비로서 지위가 최고의 품계에 이르렀으니, 항상 죽음으로써 이에 보답하려 하였는데 지금이야말로 죽을 곳을 얻은 것이다. 설사 길에서 죽어 시체가 된다 하더라도 왕명을 받들어 천자(天子)에게 전달하게 된다면 죽는다 해도 산 것과 같다.”
하고, 북경에 입조(入朝)하니 고황제(高皇帝 명 태조)가 가상히 여겨 상품을 많이 내려 특별히 대우하고 돌려보냈다. 기사년에 나라에 돌아와서 가을에 사퇴하기를 청했으나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 겨울에 공양왕(恭讓王)이 등극하니 공을 꺼리는 무리들이 탄핵하여 장단(長湍)으로 쫓겨났고,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으로 내쫓기었으며 5월에는 이초(彝初)를 명 나라에 파견했다는 모함을 입어서, 공 등 수십 명이 청주(淸州)로 잡혀갔는데 국문이 너무 준엄하여 일이 어찌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공이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마땅히 의리와 운명에 순응할 뿐이다.”
라고 하며 그 처신함이 태연하였다. 그 수일 후 새벽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대낮이 되기 전에 산이 무너지고 물이 솟구쳐서 성문을 부수며 넘쳐들어와서 집들이 함몰되었고, 문사관(問事官)도 물에 빠져 떠내려가다 나무를 붙잡아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이 사실을 나라에 알리니 곧 석방시키고 불문에 붙였다. 이 고을이 생긴 후 이같이 극심한 수재가 없었으므로, 모두 공(公)의 충성에 감동되어서 그랬으리라고 하였다. 이때 왕(王)은 평소부터 공이 딴 마음이 없음을 알았으므로 누차 불러들였으나, 공을 꺼려하는 자들에게 탄핵을 입어 바로 쫓겨나곤 하였다. 사람들은 공이 쫓겨났다 들어왔다 하는 것을 비웃기도 하고 더러는 공이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병을 핑계하고 가지 말라고 한 사람도 있었다.
신미년 겨울에 나라에 부름을 받고 또 함창(咸昌)으로부터 올라왔다. 제자인 권근(權近)도 충주(忠州)로 쫓겨났는데 길에서 공을 만나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고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거짓이다. 신하된 도리는 오직 임금이 명한 바에 따라서 부르면 오고 버리면 가야 하며, 죽음이라도 피하지 못할 것이어늘 갔다 왔다 하는 것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조정에 이르니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임신년 4월에 다시 금주(衿州)로 쫓겨났다가 6월에는 여흥(驪興)으로 옮겼다.
7월에 우리 태상왕(太上王 이 태조)이 즉위하매, 공을 꺼리는 자들이 극형(極刑)을 가하고자 하니, 공은 말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망녕된 말을 하지 않았는데 구태여 거짓으로 승복하겠는가. 비록 죽는다 해도 나는 바른 귀신이 되겠다.”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왕(王)은 그 정상을 살펴서 특별히 놓아 주고 장흥부(長興府)에 옮겨 두게 하였으며, 이때 공을 힘입어 살아난 자가 많았다. 겨울에 풀려나와 한주(韓州)로 돌아왔다.
공양왕(恭讓王) 초기부터 공을 꺼려 여러 번 간계를 꾸며 죽이려는 자가 있었으나 왕이 그때마다 구원하여 온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공을 꺼리는 자들도 감히 다시는 그 간계를 부리지 못하였다. 을해년 가을에는 관동(關東) 지방에 가서 놀았고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왕이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여 다시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봉했다. 나아가 뵙고 물러나오는데 중문(中門)까지 나와서 전송하며 옛 친구의 예로서 대우했다. 병자년에 공의 나이 69세였다. 여름 5월에 여강(驪江)으로 피서 갈 것을 청하고 곧 배를 타려다가 병이 나서, 아들 종선(種善)을 경성(京城)에서 불러왔는데 초7일에는 병이 위독하여졌다. 중이 불도(佛道)를 진언하니, 공은 손을 저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죽고 사는 원리를 알아서 의심이 없다.”
하고는, 말을 마치자 곧 졸하였다. 부음을 아뢰자 왕은 슬픔이 가득하여 식사를 거두고 3일간 조회를 정지했으며,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제사지내며, 부의를 보냈고, 시호를 문정공(文靖公)이라 하였다. 10월에 자손들이 영구를 받들고 한주(韓州)로 돌아가서 11월 갑인일에 가지(加智)의 언덕에 장사했다.
공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밝고 깊으며, 학문이 정밀하고 넓었다. 일을 처리함에는 자상하고 마음가짐은 너그러우며, 옳고 그름을 의논함에는 명백하고 절실하였으나 반드시 충후(忠厚)함을 주장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물건에 접할 때는 공경하고 겸손하여 화기애애하였으나 그 늠름한 기상은 범할 수 없었다. 그가 재상(宰相)이 되었을 때는, 헌장(憲章)을 준수함에 힘써 자주 변경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대체를 지켰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사랑하던 마음은 늙어서도 변치 않아 언제나 얼굴에 나타나고 시문(詩文)에서도 나타났다. 후학들을 권면함에 있어서도 반드시 윤리(倫理)를 주장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모든 글을 널리 보았으며 더욱 이학(理學)에 정심하였고, 무릇 문장을 지을 때에는 붓만 잡으면 곧 쓰는데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 조금도 거침이 없이 말과 뜻이 정밀하고 품격이 고고하여, 넓고 깊은 것이 강물이 바다에 모여드는 듯하였다. 문집으로는 시(詩) 35권과 문(文) 20권이 있다.
원(元) 나라 말엽 지정(至正) 계사(1353)로부터 황조(皇朝) 홍무(洪武) 기사(1389)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간 나라의 문한(文翰)을 맡았고, 거듭되는 변고로 험난한 때에 임금의 말과 명령을 문장으로 잘 다듬어서 여러 번 가상하다는 감탄을 받았었다. 공이 쫓겨나매 공을 꺼려한 자가 전문(典文 문한을 맡음을 말함)이 되었는데, 표사(表辭)가 잘못되었다 하여 처음으로 황제의 책망을 들었으니 공의 문장과 지식이 세상에 도움됨이 이와 같았다. 아깝게도 공민왕(恭愍王)은 한갓 공경할 줄은 알았지만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쓰지 못하였으며, 뒤에 백관의 장(長)이 되었으나 바로 파관되고 드디어 헐뜯고 배척을 당하여 그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은 끝내 크게 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는 천운이었나 보다.
집을 다스리되 그 가용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아니하고, 비록 자주 양식이 없다 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평생에 급한 말이나 당황한 빛이 없었으며 집안 식구나 노복들이 혹 실수가 있더라도 서서히 이치로 타일러 성낸 말을 한 일이 없었으며, 잔치 자리에서도 예사롭게 행동하나 난잡스러운데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말과 행동이 조용하며 즐겁고 성냄을 나타내지 않고 모난 행동이 없어 마치 훈훈한 한 덩이의 화기(和氣)인 듯했다. 오랫동안 은총을 받고 권리를 잡은 자리에 있었으나, 교만하고 뽐냄을 보지 못하였으며 나이들어 환란을 만났어도 기개를 잃지 아니하여 옥중에 갇혀도 욕되게 여기지 아니하고, 높은 벼슬에 올라서도 영화로 여기지 아니하였으니, 공은 몸과 마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역시 확고하여 뺏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하겠다.
공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는 종덕(種德)이니,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요, 둘째는 종학(種學)이니 봉익대부(奉翊大夫) 첨서 밀직사사(僉書密直司事)인데, 병진년에 진사(進士)가 되고 무진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기사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었으나, 이 두 아들은 공보다 먼저 졸(卒)하였다. 셋째는 종선(種善)인데,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교령 지제교(典校令知製敎)였으며 임술년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큰아들 밀직(密直)은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자 맹유(孟㽥)는 중현대부(中顯大夫)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이요, 둘째는 맹균(孟畇)인데 승봉랑고공좌랑(承奉郞考功佐郞)으로 을축년에 진사가 되었고, 셋째는 맹준(孟畯)인데 임신년에 진사가 되었다. 넷째는 맹진(孟畛)인데 인덕궁 사연(仁德宮司涓)이 되었다. 딸이 둘인데 큰딸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추부 우부대언(承樞府右副代言) 유기(柳沂)에게 시집가고, 둘째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종부영(宗簿令) 하구(河久)에게 시집 갔다.
둘째 아들 첨서(僉書)는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장자는 숙야(叔野)로 조봉대부(朝奉大夫) 사재소감(司宰少監)이요, 둘째는 숙규(叔畦)로 성균 생원(成均生員)이요, 셋째는 숙당(叔當)으로 호용순위사 부사직(虎勇巡衛司副司直)이요, 넷째는 숙묘(叔畂)로 조산대부(朝散大夫)사수소감(司水少監)이요, 다섯째는 숙복(叔福)으로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여섯째는 숙치(叔畤)인데 아직 어리다. 딸이 둘인데 큰딸은 정윤(正尹) 이점(李漸)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아직 어리다.
셋째 아들 전교(典校)는 아들 하나인데 계주(季疇)이다. 증손은 남자가 일곱이며 여자가 아홉이다.

[주D-001]가을에……시행되매 : 고려가 충렬왕 이후 원 나라에 예속되어 옛 관제(官制)를 변경하였다가 공민왕 5년에 다시 복구한 것을 말한다. 《高麗世家 卷第38 恭愍王2年》
[주D-002]이초(彝初)를……파견 : 이는 윤이(尹彝)이며 초는 이초(李初)인데, 이 두 사람은 명 나라에 가서 “이성계(李成桂)는 왕씨가 아닌 요(瑤 공양왕)를 왕으로 세우고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치려 하므로, 이색(李穡) 등 재상들이 우리들을 비밀히 보내 이 사실을 황제께 고하라 하여 왔다.”고 한 사건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윤혁동 (역) ┃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