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이공(李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아베베1 2012. 12. 20. 19:37

 
 
목은문고 제15권
 비명(碑銘)
고려국(高麗國) 증(贈) 순성경절동덕보조익찬공신(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판전리사사(門下侍中判典理司事)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이공(李公)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新羅)의 아간(阿干) 휘(諱) 광희(光禧)가 사도(司徒)인 삼중대광(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는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은 승삭(承朔)을 낳고, 승삭은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은 경영(景英)을 낳고, 경영은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은 화(華)를 낳고, 화는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는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은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고, 대장군은 내시 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았다. 집주는 시중(侍中) 문공(文公) 휘 극겸(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고, 장군은 상장군(上將軍) 이공 강제(李公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 목조(穆祖))를 낳았다.
안사는 성격이 호방하여 사방을 경영해 보려는 뜻을 지녔다. 일찍이 의주(宜州 덕원(德源)의 옛 이름)의 장관이 되어서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는데, 인척(姻戚)과 관계된 일로 그만두고는 강릉부(江陵府)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살았으니, 이는 그곳의 풍토(風土)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있다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서는 몽고씨(蒙古氏)에게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소(五千戶所)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다루가치가 천우위 장사(千牛衛長史) 이공(李公) 휘 공숙(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千戶) 행리(行里 익조(翼祖))를 낳으니, 행리가 부친의 직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을 정벌하려고 하자 천하의 병선(兵船)이 모두 해동(海東)으로 집결하였다. 이에 우리 충렬왕(忠烈王)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전함을 건조(建造)하게 하는 한편, 명장(名將)을 선발하여 정예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일본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남경(南京)의 천호(千戶)도 조정의 명을 받들고 와서는 충렬왕을 알현하게 되었는데, 두 번 세 번 횟수가 거듭될수록 더욱 공경하고 경건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왕이 이르기를 “경(卿)은 본래 사족(仕族) 출신이니 어찌 근본을 잊을 리가 있겠는가. 지금 경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천호(千戶)가 등주(登州)의 호장(戶長)인 최공(崔公) 휘 기열(基烈)의 딸에게 장가들어 증(贈) 찬성사(贊成事) 춘(椿 도조(度祖))을 낳았다. 찬성사가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우리나라의 조정에 들어오자, 충숙왕(忠肅王)이 은상(恩賞)을 더욱 풍성하게 내렸으니, 이는 그의 충성심을 북돋우기 위함이었다. 찬성사가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박공(朴公) 휘 광(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바로 공에게 고비(考妣)가 된다.
공의 휘는 자춘(子春 환조(桓祖))이요 자(字)도 자춘(子春)이다. 7, 8세 무렵부터 벌써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더니, 점점 자라나면서는 말 타고 활 쏘기를 또 잘하였는데, 부친의 직책을 이어받자 사졸(士卒)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귀부(歸附)하였다. 지정(至正) 을미년(1355, 공민왕4)에 선왕(先王)을 알현하자, 선왕이 이르기를 “그대의 조부와 그대의 부친이 몸은 비록 국외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항상 왕실에 두고 있었으므로, 나의 조고(祖考)께서 실로 총애하며 가상하게 여기셨다. 이제 그대도 그대의 조고에게 욕됨이 없게 하라. 나 역시 그대를 완전하게 성취시켜 줄 것이다.” 하였다.
쌍성(雙城 영흥(永興)의 옛 이름)은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서 관리들의 행정력이 그다지 철저하게 미치지 않았을뿐더러, 땅이 비옥하여 인구가 날로 번성하였으므로, 우리 동방의 남쪽 백성들 가운데 생활 터전이 없는 자들이 그곳으로 많이 이주하였다. 국가에서 이런 사실을 원(元)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리자, 성지(聖旨)를 받든 차관(差官)이 왔고, 요양성(遼陽省)에서도 차관이 왔다. 이에 선왕이 성(省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을 급히 보내 그들과 만나서, 신구(新舊)의 호적(戶籍)에 편입된 백성들을 분간(分揀)하게 하였으니, 이를 일러 ‘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라고 한다. 그런데 그 뒤에 백성을 안정시키는 계책이 타당성을 잃은 나머지 시간이 갈수록 그곳을 떠나 유랑하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상이 공에게 명하여 그곳을 주관하게 하였으니, 이는 몇 대에 걸친 충성심을 보상하여 상을 내리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안정을 되찾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병신년(1356, 공민왕5) 봄에 공이 조정에 오자, 선왕이 영접하며 이르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무마하여 안정시키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은가.” 하였다. 이때에 기씨(奇氏 기철(奇轍)) 일당이 반란을 꾀한다는 비밀 보고가 들어왔는데, 쌍성의 관리 중에도 연루된 자가 나왔다. 이에 선왕이 공에게 이르기를 “경은 돌아가서 우리 백성들을 진정시키도록 하라. 그리고 혹시라도 변란이 일어나면 내가 명령한 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한 뒤에, 재신(宰臣) 유인우(柳仁雨)에게 명하여 쌍성에 가서 잔당(殘黨)을 소탕하도록 하면서, 평민들이 두려워하지 않도록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그런데 유인우가 쌍성의 경계에 도착한 뒤에도 머뭇거리기만 할 뿐 감히 전진하지 못하자, 상이 공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고 중현대부(中顯大夫)의 품계를 내린 뒤에,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통해서 공에게 내응(內應)하도록 유지(有旨)를 전하였다. 공이 왕명을 듣자마자 그 즉시로 군사들에게 떠들지 못하도록 하무를 물리고 행군하여, 유인우의 군대와 합세한 뒤에 소생도경(小生都景)을 축출하니, 소생도경이 처자도 버려둔 채 밤에 도망을 쳤다. 이에 상이 명하기를 “쫓아낼 자를 쫓아냈으니, 이제 남은 사람들은 모두 우리 백성이다. 서로들 해치지 말고 서로들 모질게 굴지 말라.” 하니, 백성들이 다 함께 기뻐하면서 음식물을 들고 나와 군사들을 환영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 지역의 주현(州縣)들도 모두 옛 이름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고주(高州), 요덕(耀德), 장평(長平), 원흥(元興), 정주(定州), 함주(咸州)가 바로 그것이다.
9월에 공의 품계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올리고 사복경(司僕卿)으로 벼슬을 옮겨 주는 한편, 개경(開京)에 저택을 하사하여 그대로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천우위 상장군(千牛衛上將軍)으로 승진하면서 통의대부(通議大夫)와 정순대부(正順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이해에 내가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조정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았는데, 마치 주사(朱砂)를 칠한 듯 붉고 윤이 났으며 수염이 무척 아름다웠다. 내가 감히 자리를 건너가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으나, 공의 그 풍채만큼은 아직도 나의 마음과 눈 속에 남아 잊혀지지가 않는다.
경자년(1360, 공민왕9) 봄 3월에 영록대부(榮祿大夫)로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맡고 있다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나갔는데, 그해 4월 갑술일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으니, 그때 나이가 46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현릉(玄陵 공민왕)이 그지없이 애도하면서 사신을 보내 조곡(弔哭)하는 한편, 예법에 따라 부의(賻儀)를 전하게 하였다. 사대부들도 공의 죽음을 듣고는 모두 놀라면서 “동북면(東北面)에 이제는 인물이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咸州)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휘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의 이름은 성계(成桂)인데, 지금 충성양절익찬선위정원공신(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判三司事兼判典農寺事上護軍)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이다. 딸은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삼중대광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공 인벽(趙公仁璧)에게 출가하였는데, 지금 정화택주(貞和宅主)로 봉해졌다. 측실(側室) 이씨(李氏)는 아들 원계(元桂)를 낳았는데, 지금 추충절의보리공신(推忠節義輔理功臣) 중대광(重大匡) 완산군(完山君)이다. 김씨(金氏)는 아들 화(和)를 낳았는데, 지금 성근보조공신(誠勤輔祚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동지밀직사사 상호군(同知密直司事上護軍)이다.
판삼사공(判三司公)의 전부인(前夫人)은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치사(致仕)한 한공(韓公) 휘 경(卿)의 딸인데, 원신택주(元信宅主)에 봉해졌다. 부인이 낳은 아들로, 방우(芳雨)는 전 예의 판서(禮儀判書)이고, 방과(芳果)는 추충여절익위공신(推忠礪節翊衛功臣) 봉익대부(奉翊大夫)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상호군(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鷹揚軍上護軍)이고, 방의(芳毅)는 중정대부(中正大夫) 신호위 대호군(神虎衛大護軍)이고, 방간(芳幹)은 전 군기 소윤(軍器少尹)이고, 방원(芳遠)은 통직랑(通直郞) 예의정랑 지제교(禮儀正郞知製敎)이고, 방연(芳衍)은 종사랑(從仕郞) 성균 박사(成均博士)이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후부인(後夫人)은 판삼사사 강공(康公) 휘 윤성(允成)의 딸인데, 부인이 낳은 아들로는 고공 좌랑(考功佐郞)인 방번(芳蕃)과 군기 녹사(軍器錄事)인 방석(芳碩)이 있으며, 딸은 대호군(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출가하였다.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의 아들 경(卿)은 진사(進士)이고, 후(候)는 액정 내알자(掖庭內謁者)이고, 그 밖에 사(師), 부(傅), 보(保), 백(伯)은 모두 어리며, 장녀는 미혼(未婚)이고, 차녀는 내부 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출가하였다. 완산군(完山君 원계(元桂))은 두 번 장가들었다. 문씨(文氏) 소생의 아들로, 양우(良祐)는 전 사복 정(司僕正)이고, 천우(天祐)는 전 호군(護軍)이며, 딸은 전 중랑장(中郞將) 이인우(李仁雨)에게 출가하였다. 김씨(金氏) 소생의 아들로, 조(朝)는 진사(進士)이고, 서(曙)는 전 낭장(郞將)이며, 딸은 생원(生員) 노신(盧愼)에게 출가하였고, 다음 딸 둘은 모두 어리다. 동지(同知 화(和))는 두 번 장가들었다. 안씨(安氏) 소생의 아들 지숭(之崇)은 전 연경궁 부사(延慶宮副使)이다. 노씨(盧氏) 소생의 아들로, 숙(淑)은 진사이고, 징(澄)은 별장(別將)이고, 다음 아들 셋은 모두 어리고, 딸 하나도 어리다.
판서(判書)는 찬성사(贊成事) 지공(池公) 휘 윤(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복근(福根)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大護軍)은 간성 군수(杆城郡守) 최인두(崔仁㺶)의 딸에게 장가들어 석근(石根)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少尹)은 판도 판서(版圖判書) 민공(閔公) 휘 선(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맹중(孟衆)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며, 딸 둘은 모두 어리다. 정랑(正郞)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민공(閔公) 휘 제(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가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밀직 제학(密直提學)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는데, 이듬해에 판삼사공이 와서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그리고 신해년(1371, 공민왕20)에 삼사공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를 제수받던 날에, 내가 사공(司空)으로 있다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다. 이에 현릉(玄陵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하문하기를 “문신인 색(穡)과 무신인 성계(成桂)가 같은 날에 문하성(門下省)으로 들어왔는데, 조정의 여론은 뭐라고 하던가?”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긍(自矜)하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에 비추어 보면 조정의 반열에 공과 함께 있었던 시간이 얼마 되지는 않는다고 하겠지만, 나와 공의 우정이 마치 물처럼 담박하기만 하고, 오래되어도 서로가 공경하는 풍도를 보고는 사람들이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니 내가 감히 공의 부친을 나의 부친처럼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서 신도비(神道碑)의 명(銘)을 짓게 되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전주 이씨 족보를 살피건대 / 我考李氏譜
신라의 대아간으로부터 비롯되어 / 新羅大阿干
부민한 이들이 관장을 한 그 뒤에도 / 膚敏旣祼將
후한 봉록의 고관들이 많이 나왔어라 / 膴仕多高官

오마의 수레 타고 삭방으로 나가서는 / 五馬游朔方
위엄과 은혜 조화된 선정을 펼치다가 / 威惠迺並彰
풍토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겼나니 / 留居樂土風
삼척 땅이 마치 고향과 같았어라 / 三陟如故鄕
뜻이 어디 있었던가 중원의 벼슬 / 志欲仕中原
몸을 떨쳐 원나라로 망명했나니 / 挺身歸大元
오천호소의 다루가치 명을 받고서 / 授命長千夫
대대로 덕 베풀자 백성들이 사모했네 / 世德民懷恩
공경하는 자세로 옛 임금을 섬기면서 / 溫恭事舊君
얼마나 근실하게 문안 인사 드렸던가 / 朝騁何勤勤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한 일 / 報本又返始
세상을 일깨우며 공을 또 세웠다오 / 警俗仍樹勳
우리 시중공이야 더 말할 게 있으리요 / 矧我侍中公
현릉께서 그 충성심 크게 상을 내렸는데 / 玄陵大賞忠
하늘이 어찌 그렇게도 빨리 데려갔나 / 天胡奪之亟
인간의 운명은 정말 아무도 알 수 없네 / 孰司人窮通
시중공을 계승하신 우리 판삼사는 / 有嗣判三司
공과 명성 한 시대의 으뜸이시요 / 功名冠一時
자손들도 모두가 귀하게 현달하였으니 / 子孫盡貴顯
하늘이 무심하지 않은 것을 또 알겠네 / 天道非無知
뿌리가 굳건하면 가지가 무성하고 / 本固枝必茂
근원이 심원하면 멀리 흘러내리는 법 / 源遠流斯長
비명 지은 졸렬한 솜씨 부끄럽긴 하오마는 / 銘詩愧我拙
밝게 빛나는 그 덕만은 천년토록 드리우리 / 千載垂耿光

[주D-001]얼마 …… 되었다 : 이 대목이 《동문선(東文選)》 권119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일로 지현의 뜻을 거스르자, 지현이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누가 공에게 알려 주자, 공이 가솔을 이끌고 몽고씨에게 망명하니, 몽고씨가 남경에 거처하게 하고는 오천호소의 다루가치로 임명하였다.[以事忤知縣 知縣謀害之 或以白公 挈家奔于蒙古氏 蒙古氏處之南京 爲五千戶所達魯花赤]”로 되어 있다. 여기서 남경(南京)은 중국의 남경이 아니라, 원(元)나라의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 즉 요양로(遼陽路)에 속한 함경도 지방의 종성(鍾城)을 가리킨다. 중원(中原)이라는 용어 역시 당시에 함경도 지방까지 원나라의 행정력이 미쳤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2]두 번 …… 보였다 : 《동문선》에는 이 뒤에 “천호가 그때마다 사죄하기를 ‘전하의 신하인 저의 선조가 북쪽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구(虎口)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일 뿐이지, 감히 군부를 저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니, 바라건대 그 죄를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每謝曰 先臣奔于北 實脫虎狼之口耳 非敢背君父也 願上釋其罪]”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다.
[주D-003]삼성조감호계(三省照勘戶計) : 중서성(中書省)ㆍ요양성(遼陽省)ㆍ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3성(省)이 공동으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분간해서 호적을 작성한 일을 말한다. 이 일로 인하여 원나라와 고려가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반원 정책(反元政策)을 펼치던 공민왕 5년(1356)에 이자춘의 내응(內應)을 받아 쌍성총관부의 지역을 99년 만에 원나라로부터 수복(收復)하는 개가를 올린다.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고도 한다.
[주D-004]부인 최씨(崔氏) : 《동문선》에서는 이 대목을 “공은 모두 세 번 장가들었다.[公凡三聚]”로 시작하면서, 이씨(李氏)를 첫 번째 부인으로, 최씨(崔氏)를 두 번째 부인으로, 김씨(金氏)를 세 번째 부인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본 《목은문고》에서는 최씨를 맨 앞에 소개하고 이씨는 측실로 격하시킨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공의 자손들을 소개할 때에도 《동문선》에서는 이 순서를 따르고 있는 반면, 본고에서는 판삼사공(判三司公) 즉 이성계를 맨 먼저 소개하고 있다.
[주D-005]정화택주(貞和宅主) : 《동문선》에는 진화택주(眞和宅主)로 되어 있다.
[주D-006]마치 …… 하고 :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군자의 우정은 물처럼 담박한 반면에,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콤하다.[君子之交淡若水 小人之交甘若醴]”는 말이 나온다.
[주D-007]오래되어도 …… 풍도 :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안평중은 남과 잘 사귄 사람이다. 시간이 오래되어도 상대방을 여전히 공경하였으니.[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8]부민(膚敏)한 …… 나왔어라 : 신라가 망하고 고려 조에 들어와서도 높은 관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말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아름답고 민첩한 은나라 관원들이 나라가 망한 뒤에, 주(周)나라 서울에 와서 강신(降神)하는 술을 따라 올리며 제사를 돕는구나.[殷士膚敏 祼將于京]”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9]오마(五馬)의 …… 나가서는 : 이자춘의 선조인 이안사(李安社)가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나가서 다스린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태수(太守)는 다섯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으므로, 지방 장관을 보통 오마로 비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