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지리 서원 전고 /해동역사 (지리지)

해동역사 (지리지)

아베베1 2012. 12. 24. 01:18


해동역사 속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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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
고금강역도(古今疆域圖)

서(書)는 기록으로 말을 하고, 도(圖)는 그림으로 나타낸다. 역대(歷代)로 지형을 나타냄에 있어서는 글로는 다 말할 수가 없으므로 강역도(疆域圖)를 만들었다. 먼저 팔도(八道)의 길이와 너비를 그려서 그 대개(大槪)를 드러내고, 그다음에 조선(朝鮮), 삼한(三韓), 사군(四郡), 삼국(三國), 발해(渤海)에 대해서 그 봉강(封疆)의 변동과 지명(地名)의 연혁(沿革)이 시대에 따라서 같지 않은 것을 각각 도로 만들었는데, 중복되는 것도 꺼리지 않아 쉽게 분별할 수 있게 하였다. 고려(高麗)의 사방 경계는 지금의 팔도를 미루어서 꿰맞출 수 있으므로 단지 서북분계(西北分界)에 대해서만 도를 만들었다.

본조(本朝)의 팔도도(八道圖)
해동역사 속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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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
고금지분 연혁표(古今地分沿革表)

지리의 연혁을 상고하는 데에는 표(表)보다 더 상세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지금의 팔도(八道)를 기준으로 삼아 연혁표를 만들었으며, 기씨조선(箕氏朝鮮)이나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와 같이 지분(地分)이 지금의 팔도 경계 바깥에 있는 경우에는 별도로 계외표(界外表)를 만들었다.

팔도표(八道表)
경기 한수(漢水) 북쪽 지역
주(周)기자조선(箕子朝鮮)의 지역이었다.
한(漢)위씨조선(衛氏朝鮮)의 지역이었다가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이 격파되어 낙랑군(樂浪郡)에 예속되었다.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차지하였는데, 지금의 한양(漢陽)에 도읍하고 위례성(慰禮城)이라고 불렀다. 광무제(光武帝) 때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었고, 후한(後漢) 말기에는 공손도(公孫度)에게 속하여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었다.
위진(魏晉)위(魏)나라 경초(景初) 2년(238)에 위나라가 공손연(公孫淵)을 격파하여 대방군이 위나라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건흥(建興) 이후에는 백제에 편입되었다. 함안(咸安) 1년(371)에 백제가 다시 광주(廣州)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남북조(南北朝)백제와 고구려가 번갈아 가면서 차지하였다. 양(梁)나라 때에는 한양 등지가 신라에 편입되었고, 한양 북쪽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당(唐)총장(總章) 1년(668)에 고구려가 망하면서 신라에 편입되어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요금(遼金)신라 말기에 궁예(弓裔)가 차지하였다가 얼마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초기에는 관내도(關內道)라고 칭하였다가 뒤에 경기(京畿)로 고쳤다.
원(元)고려의 경기였다.
본조(本朝)태조조(太祖朝)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였고, 태종조(太宗朝)에 한양 남쪽 지역을 합하여 경기(京畿)로 하였다.

경기 한수 남쪽 지역
한국(韓國)의 지역이었다.
마한(馬韓)의 지역이었다. 홍가 3년(기원전 18)에 백제가 차지하였는데, 애제(哀帝) 때 백제가 한수 북쪽에서 지금의 광주(廣州)로 도읍을 옮기고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고 불렀다.
위진백제의 지역이었다.
남북조백제의 지역이었다.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가 망하면서 신라에 편입되어 한주(漢州)가 설치되었다.
요금신라 말기에 궁예가 차지하였다가 얼마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초기에는 관내도(關內道)라고 칭하였다가 뒤에 양광도(楊廣道)로 고쳤다.
고려의 양광도였다.
본조태종조에 소사(素沙) 북쪽 지역을 떼어 경기에 예속시켰다.

충청도 지역
한국의 지역이었다.
마한의 지역이었다. 애제 때 금강(錦江) 북쪽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
위진백제의 지역이었다.
남북조백제의 지역이었다. 송(宋)나라 원휘(元徽) 3년(475)에 백제가 지금의 공주(公州)로 도읍을 옮기고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칭하였고, 양(梁)나라 대동(大同) 4년(538)에 또다시 지금의 부여현(扶餘縣)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거발성(居拔城)이라고 불렀다.
현경 5년에 백제가 평정되어 5개의 도독부(都督府)가 나뉘어 설치되었다. 얼마 뒤에 신라에 편입되어 웅주(熊州)가 설치되었다.
요금신라 말기에 견훤(甄萱)이 차지하였다가 얼마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처음에는 중원도(中原道)와 하남도(河南道) 두 도로 되었다가 예종(睿宗) 때 양광도(楊廣道)에 합해졌다. 명종(明宗) 때 나뉘어 충청도(忠淸道)가 되었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또다시 양광도에 합해졌다가 공민왕(恭愍王) 때 다시 충청도라고 칭하였다.
본조충청도가 되었다.

전라도 지역
한국(漢國)의 지역이었다.
마한(馬韓) 여러 나라의 지역으로, 그 총왕(總王)의 도읍지는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었으며, 국호는 목지국(目支國)이었다. 한나라 초기에 기준(箕準)의 차지가 되었다가 얼마 뒤 다시 마한이 되었다. 애제(哀帝) 때 그 북계(北界) 지역은 백제에 편입되었다.
위진백제의 지역이었다.
남북조백제의 지역이었다.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를 평정하고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였다. 얼마 뒤에 신라에 편입되어 전주(全州)와 무주(武州)가 설치되었다.
요금신라 말기에 견훤이 차지하여 전주에 도읍하였으며 국호를 후백제(後百濟)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초기에는 강남도(江南道)와 해양도(海陽道) 두 도로 되었다가 뒤에 병합되어 전라도가 되었다.
고려의 전라도였다.
본조전라도가 되었다.

경상좌도 지역
한국의 지역이었다.
진한(辰韓) 12국의 지역이었다. 그 총왕이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지금의 경주(慶州)에 도읍하고서 국호를 사로국(斯盧國)이라고 하였으며, 신라(新羅)라고도 하였다.
위진신라의 지역이었다.
남북조신라의 지역이었다.
신라가 우도 지역을 합하여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를 설치하였다.
요금고려 초기에 우도 지역을 합하여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세 도를 두었다가 뒤에 병합되어 경상도가 되었다.
고려의 경상도였다.
본조초기에 합하여 경상도로 하였다가 뒤에 낙동강 동북쪽을 나누어서 좌도(左道)를 두었다. 얼마 뒤에 합하여 한 도로 하였다.

경상우도 지역
한국의 지역이었다.
변진(弁辰) 12국의 지역이었다. 그 총왕이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에 도읍하고서 국호를 구야국(狗邪國)이라 하였으며, 가야국(伽倻國)이라고도 하였다.
위진가야 여러 나라의 지역이었다.
남북조양(梁)나라와 진(陳)나라 때 신라에 편입되었다.
신라의 지역이었다.
요금고려의 경상도였다.
고려의 경상도였다.
본조낙동강 서남쪽을 나누어서 경상우도로 하였다가 얼마 뒤에 좌도에 합하였다.

강원도 영동(嶺東) 지역
조선(朝鮮)과 예(濊)의 지역으로, 도읍은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였다.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에 예(濊)의 항복으로 창해군(滄海郡)이 설치되었다가 얼마 뒤에 혁파되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이 격파되어 임둔군(臨屯郡)이 설치되었다.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군이 혁파되어 낙랑군에 편입되고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예속되었다. 광무제(光武帝) 때 다시 예후(濊侯)의 지역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신라에 편입되었다.
위진신라의 지역이었다.
남북조신라의 지역이었다.
신라가 명주소경(溟州小京)을 설치하였다.
요금고려 때 강원도가 되었는데, 혹은 삭방도(朔方道)라고도 칭하였다.
고려 말기에 교주도(交州道)에 합하였다.
본조영동과 영서를 합하여 강원도로 하였다.

강원도 영서(嶺西) 지역
조선의 지역이었다. 뒤에 맥종(貊種)이 차지하여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에 도읍하였다.
원삭 1년에 창해군(滄海郡)에 예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혁파되었다. 원봉 3년에 조선이 격파되어 임둔군에 예속되었고, 시원 5년에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었다. 그 뒤 한나라 말기에 신라에 편입되었다.
위진신라의 지역이었다.
남북조신라와 고구려가 번갈아 가면서 차지하였다.
신라가 삭주(朔州)를 설치하였다.
요금신라 말기에 궁예가 차지하여 지금의 철원부(鐵原府)에 도읍하고서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고려에 편입되어 교주도(交州道)가 되었다.
고려의 교주도였다.
본조강원도이다.

황해도 지역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지역이었다.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지역이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이 격파되어 낙랑군에 예속되었다. 홍가 3년(기원전 18)에 저탄(豬灘) 남쪽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 광무제(光武帝) 때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었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도(公孫度)에게 속하였으며, 남계(南界) 지역이 할양되어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었다.
위진위(魏)나라 경초(景初) 2년(238)에 공손연(公孫淵)이 격파되어 낙랑군과 대방군이 위나라에 예속되었다. 진(晉)나라 건흥(建興) 이후에는 낙랑군은 고구려에, 대방군은 백제에 편입되었다.
남북조고구려의 지역이었으며, 그 남계 지역은 혹 백제가 차지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지역이었다. 총장(總章) 1년(668)에 고구려가 격파되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예속되었다. 개원(開元) 연간에 신라에 내려져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요금신라 말기에 궁예가 차지했다가 얼마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초기에는 관내도(關內道)에 예속되었다가 뒤에 나뉘어 서해도(西海道)가 되었다.
고려의 서해도였다.
본조초기에는 풍해도(豐海道)로 하였다가 얼마 뒤에 황해도로 고쳤다.

평안도 지역
기자조선의 지역으로, 도읍은 지금의 평양(平壤)이었다. 기자조선 말기에 패강(浿江) 북쪽 지역이 연(燕)나라와 진(秦)나라에 속하였다.
패강 북쪽 지역은 한나라의 요동군(遼東郡)에 속하고, 남쪽 지역은 위씨조선에 속하였다. 원봉 3년에 조선이 격파되어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광무제 때 청천강(淸川江) 북쪽 지역은 고구려에 편입되고 남쪽 지역은 낙랑군에 예속되었다. 그 뒤에 공손도에게 속하였다.
위진위(魏)나라 경초(景初) 2년(238)에 공손연(公孫淵)이 격파되어 낙랑군이 위나라에 속하였다가 얼마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정시(正始) 8년(511)에 고구려가 압록강 바깥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남북조고구려의 지역이었다.
총장(總章) 1년(668)에 고구려가 격파되어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다. 패강 북쪽 지역은 얼마 뒤에 발해(渤海)에 편입되어 압록부(鴨綠府)에 예속되었고, 패강 남쪽 지역은 개원(開元) 연간에 당나라가 신라에 내려 한주(漢州)에 예속되었다.
요금신라 말기에 궁예가 패강 북쪽 지역을 취하였다. 고려 태조가 평양에 서경(西京)을 설치하였다. 성종(成宗) 때 압록강 동쪽 지역을 병합하여 패서도(浿西道)라 하였고, 그 뒤에 북계(北界)라고 개칭하였다. 지금의 운산(雲山) 북쪽 지역은 여진(女眞)이 차지하였다.
고려의 서북면(西北面)이었다. 지원(至元) 6년(1269)에 원나라에 함락되어 평양에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되었다. 원나라 말기에 다시 고려가 차지하였다.
본조압록강 안쪽 지역을 모두 개척하여 평안도로 하였다.

함경도 관남(關南) 지역
동옥저(東沃沮)의 지역이었다. 함흥(咸興) 남쪽은 예(濊)의 지역이었다.
원봉 3년(기원전 108)에 옥저 지역은 현도군(玄菟郡)이 되고 예 지역은 임둔군(臨屯郡)에 예속되었다. 시원 5년(기원전 82)에 모두 낙랑군에 예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예속되었다. 광무제 때 다시 옥저후(沃沮侯)의 지역이 되었다가 얼마 뒤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함흥 남쪽 지역은 불내예후(不耐濊侯)의 지역이 되었다.
위진고구려에 속하여 남해(南海)로 칭해졌다. 진(晉)나라 때에는 불내예의 지역으로, 고구려의 지역은 아니었다.
남북조고구려의 지역이었으나, 남계(南界) 지역은 혹 신라가 차지하기도 하였다.
총장 1년(668)에 고구려가 격파되어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었다. 얼마 뒤에 발해에 편입되어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가 설치되었으며, 덕원(德源) 남쪽 지역은 신라에 편입되어 명주(溟州)에 예속되었다.
정평(定平) 남쪽 지역은 고려에 편입되어 삭방도(朔方道)에 예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동계(東界)로 개칭되었다. 정평 북쪽 지역은 여진에 편입되어 갈라전(曷懶甸)이라고 불렸다. 고려 예종(睿宗) 때 함주(咸州) 등 9개의 성을 그 지역에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 여진에게 돌려 주었다.
정평 남쪽 지역은 고려의 동계였고, 정평 북쪽 지역은 금나라의 합라로총관부(合懶路摠管府)에 예속되었는데, 이라로(移懶路), 야라로(耶懶路)라고도 불렸다.
함흥에 합란부(合蘭府)가 설치되었다. 그 뒤에 또 영흥(永興) 북쪽 지역이 다시 원나라에 편입되어 쌍성부(雙城府)가 설치되었다. 원나라 말기에 길주(吉州) 남쪽 지역이 모두 고려에 편입되어 삭방도라고 개칭하였다.
본조태종조(太宗朝)에 남관(南關)과 북관(北關)을 합하여 영길도(永吉道)로 하였다가 얼마 뒤 다시 함길도(咸吉道)로 고쳤으며 또다시 영안도(永安道)로 고쳤다. 뒤에 다시 함경도로 고쳤다.

함경도 삼수(三水)ㆍ갑산(甲山) 지역
고구려의 지역이었다.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설치되어 현도군에 예속되었다. 광무제 때 고구려에 편입되어 졸본(卒本)의 경계가 되었다.
위진고구려 졸본의 경계였다.
남북조고구려 졸본의 경계였다.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발해에 편입되어 솔빈부(率賓府)에 예속되었다.
솔빈부에 예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여진에 편입되었다.
휼품로(恤品路)를 설치하였다가 뒤에 이곳으로 합라로(合懶路)가 옮겨졌는데, 속빈로(速頻路)라고도 하였다.
여진의 지역이 되었다가 원나라 말기에 고려에 편입되어 갑주(甲州)가 설치되었다.
본조갑산부(甲山府)와 삼수부(三水府)를 설치하여 함경도에 예속시켰다.

함경도 관북(關北) 지역
북옥저(北沃沮)의 지역이었으며, 치구루(置溝漊)라고도 칭하였다.
원봉 3년(기원전 108)에 현도군에 예속되었으며, 시원(始元) 이후로는 낙랑군에 예속되었다. 광무제 때에는 다시 옥저후(沃沮侯)의 지역이 되었다가 얼마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위진고구려에 속하여 책성(柵城)이라고 칭해졌다.
남북조고구려의 책성 지역이었다.
총장 1년(668)에 고구려가 격파되어 안동도호부에 예속되었다. 얼마 뒤에 발해에 편입되어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가 설치되었으며, 책성부(柵城府)라고도 칭해졌다.
여진의 도부(都部) 지역이었다.
호리개로(胡里改路)에 예속되었다.
호리개만호부(胡里改萬戶府), 도온만호부(桃溫萬戶府) 등이 설치되었으며, 합란부(合蘭府)에 예속되었다. 뒤에 여진의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이 차지하였다.
본조두만강(豆滿江) 안쪽 지역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였으며, 모두 함경도에 예속시켰다.



경계(境界) 바깥의 지분표(地分表)

요동(遼東) 지방
동쪽으로는 혼동강(混同江), 남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요수(遼水), 북쪽으로는 개원현(開原縣), 동남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까지의 지역이다.
주(周)기자조선의 지역이었다. 동남쪽의 장백산(長白山)과 가까운 지역은 고구려의 지역이었고, 북쪽은 부여(夫餘)의 지역이었다. 기자조선 말기에는 연(燕)나라에 편입되었다가 그 뒤에 진(秦)나라에 속하여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다.
한(漢)요동군이 설치되어 18개 현이 예속되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또다시 고구려의 옛 지역에 진번군(眞番郡)이 설치되었다가 얼마 뒤에 이곳으로 현도군이 옮겨져 3개 현이 예속되었다. 원제(元帝) 때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高朱蒙)이 부여에서 옮겨와 압록강과 파저강(婆豬江) 사이에 도읍하고는 졸본(卒本)이라고 불렀으며,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불렀다. 또다시 졸본과 가까운 지역에 국내(國內)와 환도(丸都) 두 도읍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초기에 현도군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편입되었으며, 현도군이 또다시 지금의 승덕현(承德縣)과 가까운 지역으로 옮겨져, 요동군에 예속되었던 3개 현이 나뉘어 소속되었다. 후한 말기에 요동군과 현도군은 공손도(公孫度)가 차지하였다.
위진(魏晉)위(魏)나라 경초(景初) 2년(238)에 공손연(公孫淵)이 격파되어 평주(平州)에 예속되었다가 얼마 뒤에 유주(幽州)에 예속되었다. 다시 얼마 뒤에 모용씨(慕容氏)에게 속하였다. 동진(東晉) 때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었으며, 부여 지역 역시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요수(遼水) 동쪽, 개원현(開原縣) 남쪽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였다.
당(唐)총장(總章) 1년(668)에 고구려가 격파되어 평양에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9개의 도독부, 42개의 주가 예속되었다. 상원(上元) 3년(676)에 안동도호부가 요동고성(遼東故城)으로 옮겨지고 의봉(儀鳳) 1년(676)에 또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겨졌다. 개원(開元) 연간에 다시 요서(遼西)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얼마 뒤 폐해져 지역이 모두 영주(營州)에 예속되었고, 당나라 말기에는 거란(契丹)에 편입되었다. 동북계(東北界)는 성력(聖曆) 이후부터는 발해에 편입되어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 장령부(長嶺府), 부여부(夫餘府), 막힐부(鄚頡府) 등이 설치되었다.
요(遼)동경도(東京道)가 되어 요동 전체 지역을 거느렸다.
금(金)동경로(東京路)와 함평로(咸平路) 등의 지역이 되었다.
원(元)요양로(遼陽路), 심양로(瀋陽路) 등이 설치되어 요양등처행중서성(遼陽等處行中書省)에 예속되었다.
명(明)홍무(洪武) 4년(1371)에 정료도호(定遼都護)가 설치되었다가 8년(1375)에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로 바뀌면서 주현(州縣)이 폐지되고 25개의 위(衛)가 설치되었다.
청(淸)봉천부장군(奉天府將軍)이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다.

영고탑(寧古塔) 지방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두만강(豆滿江), 서쪽으로는 혼동강(混同江), 북쪽으로는 흑룡강(黑龍江)까지의 지역이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였다.
읍루국(挹婁國) 지역으로, 도읍은 지금의 영고탑성(寧古塔城)이었다.
위진물길국(勿吉國) 지역이었다.
말갈(靺鞨) 여러 부락의 지역이었다. 성력(聖曆) 연간에 발해에 편입되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정리부(定理府), 안변부(安邊府) 등이 설치되었다. 또 동평부(東平府), 철리부(鐵利府), 회원부(懷遠府), 안원부(安遠府) 등 4부가 흑룡강 지방에 설치되었다.
천현(天顯) 1년(926)에 발해가 격파되어 동단국(東丹國)이 설치되었다가 얼마 뒤에 여진이 차지하였다.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가 설치되었다.
수달달로(水達達路)가 설치되었으며, 또 도온만호부(桃溫萬戶府), 호리개만호부(胡里改萬戶府), 알타련만호부(斡朶憐萬戶府), 탈알련만호부(脫斡憐萬戶府), 발고강만호부(孛苦江萬戶府),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가 설치되어 다섯 지역으로 나뉘어 합란로(合蘭路), 수달달로 등에 예속되었다.
모련위(毛憐衛)에 예속되었다.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이 관할하는 지역이 되었다.


 
해동역사 속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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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2
조선(朝鮮)

○ 조선(朝鮮)이란 이름은 단군(檀君)에게서 시작되었는데, 대체로 한수(漢水) 북쪽을 이른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해(東海)의 안쪽 북해(北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한다. ○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燕)에 속한다. ○ 주(注)에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樂浪縣)으로,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다. 열(列)은 역시 수명(水名)으로, 지금의 대방(帶方)에 있으며, 대방에는 열구현(列口縣)이 있다.” 하였다.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국(東國)은 옛날에는 한수(漢水) 일대를 한계로 삼아, 북쪽은 조선(朝鮮)이었고 남쪽은 한국(韓國)이었다. 한수는 바로 열수(列水)이다. 물의 북쪽을 양(陽)이라고 하니, 열양이란 것은 한수 이북을 칭하는 것이다. 동사(東史)에, “단군이 당요(唐堯) 무진년에 평양(平壤)에 비로소 나라를 열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산해경》을 세상에서는 우하(虞夏) 때의 책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산해경》에서 조선이라고 이른 것은 과연 단군조선(檀君朝鮮)을 가리키는 것이다.
○ 주(周)나라 초기에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진 것을 인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평양이 바로 기자가 도읍한 곳이다.
《전국책(戰國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진(蘇秦)이 연(燕)나라 문후(文侯)에게 유세하기를, “연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遼東)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치자 무왕(武王)이 그 소식을 듣고 인하여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성은 압록강(鴨綠江)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하며, 바로 기자의 옛 도성이다. 성 밖에는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우공추지(禹貢錐指)》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주(靑州)는 바다에 닿아 있으며 요동과 우이(嵎夷)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순(舜) 임금이 청주를 고쳐서 영주(營州)라고 하였는데, 요동과 조선이 모두 영주의 영역 내에 있었다. 조선은 바로 우이의 지역으로, 기자가 봉해진 조선이 바로 이 지역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평양 외성(外城)은 바로 기자의 고성(古城)으로, 성 밖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 토산(兔山)에 기자묘가 있다.
○ 기자 당시의 강역은 필시 넓고 크지는 않았을 것인데, 그 뒤 왕위를 이어받은 임금이 땅을 개척하고 넓혀 서쪽으로 요하(遼河)를 지나 연(燕)나라와 접하였을 것이다.
《위략(魏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가, 주(周)나라가 쇠약해지자 연(燕)나라가 스스로를 높여 왕이라고 하면서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것을 보았다. 이에 조선후 역시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쳐 주나라 왕실을 높이 받들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대부(大夫) 예(禮)가 간하자, 이에 중지하였다.
《수서(隋書)》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구(裴矩)가 서장(書狀)을 올려 상주(上奏)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땅으로, 주(周)나라 때에는 기자에게 봉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세 군(郡)으로 나누었습니다.”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죽국은 은주(殷周) 시대에 백이(伯夷)의 동생이 임금으로 있었던 곳이다. 춘추(春秋) 시대에는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산융(山戎)을 정벌하면서 고죽국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고죽국은 춘추 시대 이후에야 조선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가 조선이 가장 강성하였을 시기로, 조선이 연나라가 왕을 참칭(僭稱)하였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하였는바, 그 강대함을 잘 알 수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죽국은 지금의 요서(遼西) 영원주(寧遠州)이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언박(溫彦博)이 아뢰기를, “요동(遼東) 땅은 주(周)나라가 기자의 나라로 삼았습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성(朝鮮城)은 영평부(永平府)의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수봉(受封)한 지역이라고 전해 온다.
《일지록(日知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낙랑군의 현은 25개인데, 그 가운데 하나가 조선현(朝鮮縣)이다. 응소(應劭)는 말하기를, “옛 조선국이다. 무왕(武王)이 이곳에 기자를 봉하였다.” 하였다. 또 《후한서(後漢書)》 지리지에 이르기를, “은(殷)나라의 도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 하였다. 《산해경》에는 이르기를,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이다.” 하였으며, 주(註)에는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현으로, 기자가 봉해진 곳이다. 지금의 고구려국 경내에 있다.” 하였다. 모용씨(慕容氏)는 영주(營州)의 경내에 조선현을 설치하였으며, 위(魏)나라 때에는 또 평주(平州)의 경내에 조선현을 세웠는데, 이는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으로, 한나라 때의 조선현과는 그 거리가 1000여 리나 된다. 그런데 《대명일통지》에는 이에 이르기를, “조선성은 영평부의 경내에 있는데, 기자가 수봉한 지역이다.” 하였다. 이는 기자가 지금의 영평에 봉해진 셈이 되는 것이다. 《대명일통지》를 찬수할 당시에 고금(古今)의 사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찬수하게 하였다면, 어찌 이 지경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그들을 위해 크게 탄식하는 바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주(遼陽州)는, 주(周)나라 때에는 청주(靑州) 지역이었다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여 조선의 서계(西界)가 되었으며, 전국(戰國) 시대에는 연(燕)나라에 속하였다. ○ 해성현(海城縣)은, 주나라 때에는 조선에 속하였으며, 진(秦)나라 때에도 같다. ○ 개평현(蓋平縣)은, 주나라 때에는 조선에 속하였으며, 진나라 때에는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차지하였다. ○ 복주(復州)는,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였으며, 진나라 때에도 같다. ○ 영해현(寧海縣)은,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였으며, 진나라 때에도 같다. ○ 광녕현(廣寧縣)은, 주나라 초기에는 조선의 경계였으며, 그 뒤에는 연나라에 속하였다. ○ 의주(義州)는, 주나라 초기에는 조선의 경계였으며, 그 뒤에는 연나라에 속하였다. ○ 봉황성(鳳凰城)은,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였으며, 진나라 때에도 같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아(爾雅)》의 구주도(九州圖)를 보면, 우이(嵎夷)는 바로 조선으로 기자가 봉해진 지역이고, 《요동지(遼東志)》를 보면, 요동은 본래 기자국(箕子國)이며, 《대명일통지》를 보면, 요동의 명환(名宦) 가운데에 역시 기자가 들어 있고, 《성경통지》를 보면, 요수(遼水) 동쪽과 서쪽 지역이 모두 기씨(箕氏)의 옛 강역에 속해 있다. 그런즉 기씨의 서쪽 경계는 멀리 요하(遼河)를 건너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의 영평부(永平府)를 가리켜 곧바로 기자가 수봉(受封)한 지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가 않다. 정림(亭林) 고염무(顧炎武)가 《일지록》에서 변증(辨證)한 설이 맞다.
○ 기씨가 쇠약해지자 서쪽 경계 2000여 리 지역을 연나라에게 빼앗기게 되었으며, 진한(秦漢) 시대에는 대동강(大同江)을 서쪽 경계로 삼게 되었다.
《위략(魏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후(朝鮮侯)가 죽은 뒤에 그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나라에서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어 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2000여 리의 지역을 차지한 다음, 만반한(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이에 조선이 결국 쇠약해졌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서는 몽염(蒙恬)을 시켜서 요동까지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 왕 기비(箕否)가 즉위하고는 진나라에 복속하여 연(燕)에 소속되었다. 기비가 죽고 그의 아들인 기준(箕準)이 즉위하였다. 20여 년이 지난 뒤에 진섭(陳涉)과 항적(項籍)이 기병(起兵)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ㆍ제(齊)ㆍ조(趙)의 백성들이 이를 근심하여 점점 도망쳐 기준에게 귀화하였다. 기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서 살게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서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았는데, 조선과는 격수(湨水)를 경계로 하였다.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에 연나라가 전성기 때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공략하여 복속시킨 다음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붙였다.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멀어서 지키기가 어렵다고 여겨 다시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는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여 연에 소속시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위략》에서 이른 바 격수(湨水)는 바로 패수(浿水)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이다. 지금 《위략》과 《사기》를 가지고 참고해 보건대, 연나라와 진나라의 동쪽 경계는 당초에는 만반한에 이르렀으며, 한(漢)나라 초기에는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뒤로 물려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그런즉 만반한이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곳이 어느 지역인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설문(說文)》에 나오는 낙랑반국(樂浪潘國)이 아마도 그곳일 것이다. 혹자는 요동의 반한현(潘汗縣)이 만반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맞지가 않다. 지금 평양(平壤)에서 서쪽으로 영평부(永平府)에 이르기까지는 2000리에 불과한바, 연나라의 본계(本界)를 제외하고 새로 개척한 땅이 2000여 리이면 패수를 건너서 한참 더 동쪽으로 오니, 이 당시에 기후(箕侯)는 남쪽으로 옮겨옴을 면치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진나라가 연의 경계를 안찰하면서 요동에 소속시켰으니, 위만(衛滿)이 패수(浿水)를 건너서 진나라의 공지(空地)에 와서 산 것을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견(聞見)이 좁아서 《사기》를 읽고는 문득 연나라와 진나라의 동쪽 경계가 지나치게 멀다고 의심하여, 심지어는 패수를 압록강(鴨綠江)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더욱더 틀린 것이다.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地理志)를 상고해 보면, 마자수(馬訾水)와 패수(浿水)가 각각 두 군(郡)에 실려 있는바, 서로 뒤섞어 하나로 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패수라는 것은 바로 대동강을 가리킬 뿐이다.
○ 한나라 초기에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와서 기씨(箕氏)의 옛 강역을 차지하고는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는데, 서쪽은 역시 대동강을 경계로 하였다.
《사기》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넌 다음 진(秦)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에 살았다. 그러고는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에 도읍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기후(箕侯)는 남쪽으로 금마군(金馬郡)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으로 달아났으므로 위만이 옛 강역을 차지하였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또 이르기를, “한나라에서 사신 섭하(涉何)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달랬다. 섭하가 가서 경계 지점인 패수 가에 이르러 전송 나왔던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였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위만의 서쪽 경계도 패수를 경계로 하였음을 잘 알 수가 있다.
○ 왕험(王險)은 대동강 남쪽에 있으며, 기자의 옛 도읍지인 평양이 아니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만은 왕험에 도읍하였는데, 왕험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 고구려는 평양성에 있었으니 바로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의 왕험성(王險城)이다.
《후한서》의 주(註)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성은 바로 왕험성이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치소(治所)인 평양성은 본디 왕험성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대동강의 옛 이름은 패수이다. 《사기》에 이르기를,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한나라의 순체(荀彘)가 요동에서 나와 조선을 쳐서 조선의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험성 아래에 이르렀다.” 하였는바, 왕험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에서 왕험성이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평양이라고 한 것은 잘못되었다. 패수는 대동강이다. 지금 《사기》 조선열전을 상고해 보면, 왕험은 과연 패수의 동남쪽에 있는바, 어찌 평양이 왕험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한나라가 위씨조선(衛氏朝鮮)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다음 그 치소를 조선현(朝鮮縣)에 두었는데, 조선현은 바로 평양이다. 《통전》을 지은 두우(杜佑)는 위씨조선의 고도(古都)를 조선현이라고 여겼으므로 곧바로 평양을 왕험이라고 한 것이다. -호삼성(胡三省)이 이르기를, “조선현은 우거(右渠)가 도읍한 곳을 치소(治所)로 삼은 곳이다.” 하였는데, 이 역시 억측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평양이란 칭호는 이미 기자조선(箕子朝鮮) 때부터 있어 왔는바, 위만이 도읍하고서 명명한 것은 아니다. 어찌 현(縣)의 이름이 조선이라는 이유로 마침내 곧바로 왕험이라고 한단 말인가. 평양은 기자조선 말기부터 동국의 관할에서 벗어난 지 수백 년이 지난 위진(魏晉) 시대에 와서 고구려가 비로소 도읍하였다. 당(唐)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가 발해(渤海)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또다시 수백 년이 흘러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동국의 판도(版圖) 안에 들게 되었다. 신라 사람들은 일찍이 평양이 어디인지조차 몰랐다. 시중(侍中)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찬하면서는 이미 믿을 만한 우리나라의 사적(史蹟)이 없으므로 한갓 두우(杜佑)의 설만을 그대로 끌어대었으며, 또 고기(古記)에서 이른바 ‘단군왕험(檀君王險)’의 설을 끌어대어 견강부회해서 심지어는 “평양은 선인(仙人) 왕험이 도읍한 곳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찬술(撰述)하면서는 이런 황잡(荒雜)한 설을 그대로 베껴 쓰면서 말하기를, “단군의 이름은 왕검(王儉)인데, 왕험(王險)이라고도 한다. 평양은 왕험이라고 부르며, 왕검이라고도 한다.” 하여, 평양이 마침내 왕험이 되어 이 설을 깨뜨릴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이 평양에 도읍하였다는 것도 믿을 만한 글이 없으며, 더구나 성명(姓名)이 왕험이라는 것을 누가 있어서 알겠는가. 험(險) 자를 고쳐서검(儉)이라고 한 것은 더더욱 심하게 천착한 것이다. 이렇게 된 병통의 근원을 따져 보면, 처음에는 두우에게서 잘못되었고, 다음에는 김부식에게서 잘못된 것이다. 왕험은 분명히 대동강 남쪽 지역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천부(成川府)를 송양(松讓)으로 잘못 알고 고구려가 도읍한 곳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이곳이 왕험성인 것 같다.
또 살펴보건대,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누선장군(樓船將軍)이 제(齊)에서 배를 타고 발해를 건너가 우거(右渠)를 토벌할 적에 먼저 왕험에 이르렀다. 좌장군(左將軍)이 패수상군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험성 아래에 이르러 서쪽과 북쪽을 포위하였으며, 누선장군도 달려가서 성 남쪽을 점거하였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누선장군이 거느린 군사가 열구(列口)에 이르렀다.” 하였다. 열구는 바로 한수(漢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보면, 왕험성이 대동강의 남쪽, 한수의 북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누선장군이 한수 입구에서 왕험성의 남쪽을 공격하고 좌장군이 대동강을 건너서 왕험성의 서쪽과 북쪽을 포위하였던 것이다. 우거가 지키던 곳이 만약 평양이었다면, 평양을 공격하려고 하면서 군사가 한수 입구로 들어왔을 리는 전혀 없는 것이다.
《한서음의(漢書音義)》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의 험독현(險瀆縣)에 대해서 응소(應劭)는 말하기를, “조선 왕 위만이 도읍한 곳이다. 험고한 물에 의지해 있으므로 험독이라 한 것이다.” 하였고, 신(臣) 찬(瓚)은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이 험독(險瀆)이다.” 하였으며,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찬의 설이 옳다.”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험독현은 서한(西漢)에서 설치하였는데, 요동군(遼東郡)에 예속되었다. 지지(地志)를 살펴보면, 옛 집주(集州)를 한(漢)나라의 험독현이라고 하였다. 다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내의 석지(釋地) 한 조항을 살펴보면, 험독은 낙랑의 패수 동쪽에 있고, 패수는 또 평양성의 동쪽에 있으며, 평양성은 지금의 압록강 동쪽에 있다. 그런즉 험독은 이미 고구려의 경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승덕현(承德縣)의 경내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험독은 이미 요동의 속현(屬縣)이니, 어찌 위만이 도읍한 곳일 리가 있겠는가. 응소 등이 망녕되이 말한 것일 뿐이다.
○ 이 당시에 예(濊) 및 옥저(沃沮), 고구려가 모두 위씨(衛氏)에게 복속되었다.
《사기》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인 위만이 병권(兵權)과 재물(財物)을 얻어서 주위에 있는 여러 작은 고을을 침입하여 항복시켰다. 그러자 진번(眞番), 임둔(臨屯)이 모두 다 와서 복속하여 사방이 수천 리나 되었다.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디 모두 조선의 땅이다.
《삼국지(三國志)》 옥저전(沃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만이 조선의 왕으로 있을 적에 옥저가 모두 복속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번은 지금의 흥경(興京) 등지이다. 임둔은 바로 강릉(江陵)의 예(濊)이다. 고구려는 지금의 폐사군(廢四郡) 지역인 압록강 북쪽 지역이다. 옥저는 지금의 함경도이다. 위씨조선의 경계는 대동강 남쪽에서 남쪽으로 한강에 이르고, 동쪽으로 강원도에 이르며, 그 북쪽 경계는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 사이를 들쭉날쭉하면서 폐사군의 강 북쪽까지 잇닿아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 진번이 모두 그에게 복속되었던 것이다.
○ 한(漢)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사군(四郡)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한서》 조선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설(說)은 사군총론조(四郡總論條)에 나온다.

[주D-001]조선은 …… 속한다 : 열양(列陽)의 위치에 대해서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대동강(大同江)이나 한강(漢江)으로 비정(比定)하고 있으며, 신채호(申采浩), 정인보(鄭寅普) 등 및 북한의 이지린은 요수(遼水)로 보고 있다. 이병도(李丙燾)는 《산해경》의 이 부분과 그에 대한 곽박(郭璞)의 주(注)인 ‘朝鮮 今樂浪縣……列亦水名也 今在帶方 帶方有列口縣’의 구절에 대하여, “열양은 지금의 대동강인 열수(列水)와 관계 있는 지명으로, 열수의 북쪽이란 뜻으로 명명된 것이다. 곽씨가 열수를 ‘今在帶方’이라 한 것은, 열수의 하류 일부가 당시 대방 경내인 지금의 황해도 서북계(西北界)를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열양을 대동강의 북쪽, 특히 지금의 평양 대성산(大城山) 아래에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72쪽》
[주D-002]왕험성(王險城) : 왕검성(王儉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왕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동강 북쪽의 평양(平壤)이라는 설과 요하(遼河) 하구(河口)의 영구(營口)라는 설이 있다. 이병도는 지금의 평양으로 보았고,《이병도,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82쪽》 북한의 이지린은 오늘날의 개평(開平)이라고 하였으며,《이지린, 고조선연구, 과학원출판사, 1964, 88쪽》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요하(遼河) 하류의 동쪽 유역에 있다고 하였다.《조선전사 제2권,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9, 101쪽》
[주D-003]우이(嵎夷) : 해가 뜨는 곳, 즉 동방 바닷가에 있는 족속이란 뜻이다.
[주D-004]조선후 …… 칭하면서 : 조선후(朝鮮侯)가 왕을 칭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燕)나라가 왕을 칭한 것이 역왕(易王) 10년(기원전 323)인바, 이와 거의 같은 시기로 보면 대략 기원전 320년경이라고 짐작된다. 왕을 칭한 것은 다만 수장(首長)의 호칭 변개(變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 사회가 분명한 국가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을 선포하는 중대한 정치적 변화로 이해되며, 이를 한국사(韓國史)에서 고대(古代)의 개막으로까지 보려는 견해가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10쪽 주》
[주D-005]대부(大夫) 예(禮) : 대부는 고조선의 관직 이름이고, 예는 인명으로 짐작된다.
[주D-006]고죽국(孤竹國) : 현재의 황해도 해주(海州)라는 설이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에 나와 있으나, 이는 고죽국의 왕자인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은 곳과 동명(同名)인 수양산(首陽山)이 해주에 있기 때문에 부회(附會)한 것이라는 사실은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백이조(伯夷條)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고죽수양산조(孤竹首陽山條) 등에서 지적된 바가 있다. 천관우(千寬宇)는 이 고죽국을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 곧 난하(灤河)와 대릉하(大凌河) 사이, 특히 그 수부(首府)를 난하 하류의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지역으로 보고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9쪽 주》
[주D-007]만반한(滿潘汗) : 만반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며, 요동군의 속현(屬縣)인 문현(文縣)과 번한현(番汗縣)으로 보는 견해와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으로 비정(比定)하는 설이 있다. 이병도는 “패수(沛水)와 패수(浿水)의 위치를 상고하는 것이 곧 번한현의 위치와 요동군의 동계(東界)를 밝히는 첩경이 될 것이다. 패수(沛水)는 지금의 박천강(博川江), 패수(浿水)는 지금의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 따라서 번한현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에 비정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하였다.《韓國古代史研究 71쪽》 천관우(千寬宇)는 문현(文縣)을 태자하구(太子河口)인 영구(營口)의 남쪽, 즉 개평(蓋平)으로 보아, 만반한은 만주의 개평과 평북(平北)의 박천(博川)을 연결하는 선으로 추정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0쪽 주》
[주D-008]몽염(蒙恬)을 …… 하였다 : 진시황(秦始皇) 32년(기원전 215)에 장수 몽염이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융적(戎狄)을 친 뒤 감숙(甘肅)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증축하였다.
[주D-009]격수(湨水) : 패수(浿水)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달라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은 “여러 설 가운데 대동강을 패수라고 칭한 설이 가장 명백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옳은지 모르겠다.” 하여 대동강으로 비정하였고,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패수에는 네 개의 패수가 있는데, 한나라와 고조선이 경계를 이룬 패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고 하였고, 이병도는 청천강(淸川江)이 틀림없다고 보았고,《청구학총 제13호》 북한에서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선은 시기에 따라 좀 들쭉날쭉하였으나, 대체로 패수 즉 오늘날의 대릉하(大凌河)였다.” 하였다.《조선전사 제2권, 93쪽》
[주D-010]요동의 외요(外徼) : 이에 대해서는 ‘요동군 외부의 간접적 지배 지역’이라는 설과 ‘군(郡) 밖으로 나가서 이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목책(木柵)을 세우고 병사를 주둔시켜 이를 진무하고 그 침략을 차단하는 요새’라는 설 등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3쪽 주》 이병도는 이 요동의 외요를 하장(下障)으로 보아 대동강 북안(北岸)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2쪽》
[주D-011]요동고새(遼東故塞) : 이병도는, 요동고새가 바로 번한새(番汗塞)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쪽》
[주D-012]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지 아니한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鄣)은 상하 두 곳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大洞江) 북안(北岸)에 비정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주D-013]비왕(裨王) 장(長) : 비왕은 위씨조선(衛氏朝鮮)의 관직, 특히 국왕을 시종(侍從)하는 무관직(武官職)이 아닐까 생각되며, 장(長)은 인명, 또는 수장(首長)의 뜻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2쪽 주》
[주D-014]왕검(王儉) : 원문에는 ‘王險’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朝鮮光文會本)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검(儉) : 원문에는 ‘險’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송양(松讓) : 기원전 37년에 비류수(沸流水) 상류에 자리 잡은 비류국(沸流國)의 왕(王)인데, 여기서는 비류국을 가리킨다. 송양이 동명왕(東明王)에게 항복하자, 비류국은 다물도(多勿都)로 개칭되었고, 그의 딸은 유리왕(琉璃王)의 비(妃)가 되었다.
[주D-017]누선장군(樓船將軍) : 중국 고대 군직(軍職)의 하나이다. 한나라에서 조선을 침공할 때 양복(楊僕)의 직책으로서, 현재의 해군 제독에 비견되는 것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59쪽 주》
[주D-018]신(臣) 찬(瓚) : 《한서》를 주석(註釋)한 사람인데, 성씨와 관향은 상세하지 않다. 《유원(類苑)》에는 우찬(于瓚)이라고 하였고, 《수경주(水經注)》에는 설찬(薛瓚)이라고 하였고, 《훈찬(訓纂)》에는 부찬(傅瓚)이라고 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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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2
예(濊)

○ 예(濊)는 본디 중국 동북쪽의 오랑캐로,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등지에 살았다.
《삼국지》 부여전(夫餘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는 현도(玄菟)에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나라의 기로(耆老)들이 스스로 옛날에 도망해 온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인문(印文)에 ‘예왕지인(濊王之印)’이라고 하였다. 그 나라에는 오래된 성(城)이 있는데 이름을 예성(濊城)이라고 한다. 본디 예와 맥(貊)의 지역인데, 부여가 그 가운데 왕으로 있었다. 스스로를 ‘망인(亡人)’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濊)는 혹 예(薉)라고도 하고 예(穢)라고도 한다. 《삼국지》와 《진서(晉書)》에는 모두 “부여는 본디 예의 지역이다.” 하였으며,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기로들이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고 한다.” 하였다. 고구려는 본디 부여에서 나왔으니, 예가 부여의 옛 지역인 것은 분명하다. 대개 ‘부여’를 빨리 읽으면 ‘예’가 되고 천천히 읽으면 ‘부여’가 되는바, 실제로는 같다. 부여는 지금의 개원현에 있었으니, 예의 옛 근거지는 바로 그 지역이다.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동쪽에는 위국(蔿國)이 있는데, 기장[黍]을 먹고 사조(四鳥)를 부리며, 호(虎), 표(豹), 웅(熊), 비(羆)가 있다. ○ 학의행(郝懿行)의 전소(箋疏)에 이르기를, “위국은 바로 예맥(濊貊)이다.” 하였다.
○ 그 뒤에 예의 종족들은 우리나라 대관령(大關嶺)의 동쪽으로 옮겨와서 동예(東濊)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강릉부(江陵府)가 바로 그 나라이다.
《후한서》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는, 북쪽은 고구려ㆍ옥저와 접해 있고, 남쪽은 진한(辰韓)과 접해 있으며, 동쪽은 큰 바다와 맞닿아 있고, 서쪽은 낙랑(樂浪)에까지 이른다.
《삼국지》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는 지금의 조선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구(戶口) 수는 2만이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북쪽 경계인 명주(溟州)는 대개 예(濊)의 고국(古國)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지》 고구려전(高句麗傳)을 보면, “옥저와 동예가 모두 소속되었다.” 하였으며, 예전(濊傳)에는 “한나라 때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은 도위(都尉)가 주관하게 하였으며, 모두 예(濊)로써 백성을 삼았다.” 하였다.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大關嶺)으로, 고개의 동쪽이 모두 바로 예의 땅이므로 동예(東濊)라고 칭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북명(北溟) -바로 강릉(江陵)이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얻었다.” 하였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명주(溟州)는 지금의 강릉부(江陵府)로, 부의 동쪽에는 예 시대에 쌓은 옛 성의 유지(遺址)가 있다.” 하였는바, 강릉이 예국(濊國)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진한은 조령(鳥嶺)의 남쪽에 있었으며, 옥저는 바로 북청(北靑) 등지에 있으면서 예와 접경하고 있었으니, 이를 미루어서 예의 사방 경계를 알 수가 있다. 지금의 함흥(咸興)에서부터 오른쪽은 고개까지 왼쪽은 바다까지 남쪽으로는 평해(平海) 등지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예의 강역이다. 예는 본래 개원(開原)에 있었는데, 한나라 초기에 이미 대관령 동쪽에 있었다. 이것은 필시 북쪽에서 옮겨 온 것이다.
○ 한나라 초기에는 예가 위씨(衛氏)에게 붙었고,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에는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한나라에 항복하자 한나라에서 그 지역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 그 뒤 원삭 3년(기원전 126)에 창해군을 혁파하였다.
《후한서》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삭 1년에 예군 남려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요동으로 와서 내속(內屬)하니, 무제(武帝)가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삼았다가 몇 년 뒤에는 혁파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를 보면 “무제가 즉위하고서 몇 년 뒤에 팽오(彭吳)가 길을 열어 예(濊), 맥(貊), 조선(朝鮮)에 길을 통하게 하고 창해군을 두니, 연(燕)과 제(齊) 사이에 있는 백성들이 창해군 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는바, 남려가 항복한 것이 그때에 있었던 일임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동해(東海)를 창해라고 하는바, 예가 동해 가에 위치하였으므로 군명(郡名)을 창해군이라고 한 것이다. 그 당시에 조선 일역(一域)은 위씨(衛氏)가 북쪽에 있고, 한후(韓侯)가 남쪽에 있었다. 남려는 위씨의 부용국(附庸國) 군주였는데, 한나라 군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온 경내를 들어서 항복해 귀부하였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는 드디어 바다를 건너서 한수(漢水) 일대에서 동해 가에까지 가로질러서 군(郡)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한후와 위씨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경략(經略)하기가 불편하므로 곧바로 혁파한 것이다.
○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한나라에서 다시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에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고 예의 지역을 나누어 7현(縣)으로 삼은 다음,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을 낙랑(樂浪)에 병합시켰다. 그 뒤에 7현을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치소(治所)를 불이현(不而縣)에 두었다.
《후한서》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봉 3년에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 5년에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 이에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옥저와 예와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그 뒤에 영토가 너무 크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나누어 영동 7현을 두고 낙랑 동부도위를 설치하였다.
《삼국지》 옥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부도위의 치소는 불내성(不耐城)이며, 별도로 고개 동쪽의 7현을 주관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낙랑군 불이현은 동부도위의 치소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불내(不耐)는 바로 불이(不而)의 음이 바뀐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은 바로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낙랑에 소속된 동이(東暆), 불이(不而), 잠대(蠶台), 화려(華麗), 야두매(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이다. 《무릉서(茂陵書)》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이다.” 하였으며, 《삼국지》 예전에는 “단단대령 동쪽의 7현은 모두 예(濊)로써 백성을 삼는다.” 하였다. 이것을 참고해 보면 영동의 예 지역이 임둔군임이 분명하다.
○ 건무(建武) 6년(30)에 동부도위를 없앤 다음 관직을 회복시키고 봉토(封土)를 주어 우두머리를 예후(濊侯)로 삼았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여러 현을 모두 후국(侯國)이라 칭하였다.
《삼국지》 옥저전(沃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광무제(光武帝) 6년(30)에 동부도위를 없앴다. 그 뒤에는 모두 그 현의 우두머리[渠帥]를 세워 현후(縣侯)를 삼으니, 불내(不耐), 화려(華麗), 옥저(沃沮) 등 여러 현이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설문》에, “분어(魵魚)와 면어(鮸魚)는 예(薉)의 야두국(邪頭國)에서 난다.” 하였는데, 야두는 바로 야두매현(邪頭昧縣)이다. 이것을 근거로 보면 영동의 7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옥저가 후국이 된 데에 이르러서는, 예와 같은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나란히 거론한 것이지, 7현 속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
○ 예의 종족으로서 불이현에 사는 자는 불내예(不耐濊)라고 칭했다. 그 뒤 조위(曹魏) 시대에 이르러서는 혹 고구려에 붙기도 하고 중국에 붙기도 하였다. 불내성(不耐城)은 지금의 함흥부(咸興府) 등지이다.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전에 이르기를, “동부도위를 없애고 그곳 지역의 우두머리를 봉하여 후(侯)로 삼았다. 지금의 불내예가 모두 그 종족이다. 한나라 말기에 다시 고구려에 속하였다. 정시(正始) 6년(245)에 낙랑 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고개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 이에 불내예후(不耐濊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8년(247)에 예왕(濊王)이 대궐에 나아가 조공(朝貢)하자,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에 제수하였다.” 하였다. ○ 관구검전(毌丘儉傳)에 이르기를, “위나라 정시 6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고궁(高宮)이 매구(買溝)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현도 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파견하여 추격하였다. 왕기가 옥저(沃沮) 땅 1000여 리를 지나 숙신(肅愼)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공적을 새겼는데, 환도산(丸都山)에도 새겨 놓고 불내성에도 명(銘)을 새겨 놓았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불내성은 함흥부(咸興府)의 북쪽 한현(漢縣)에 있으며,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었고 동부도위가 이곳을 다스렸다. 그 뒤 후한(後漢) 때에는 폐지하였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연간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환도산에 이르러 돌에 공을 새겨 놓았으며, 불내성(不耐城)에도 명(銘)을 새겨 놓고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진수(陳壽)가 말한 “한나라 무제(武帝)가 낙랑군을 설치하였다. 단단대령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고 고개 동쪽 7개 현은 동부도위가 통치하였는데, 모두 예 땅 사람들로 백성을 삼았다.” 한 것으로, 이곳이 바로 이른바 불내예(不耐濊)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불내(不耐)는 바로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에서 말한 불이현(不而縣)으로, 분명히 단단대령의 동쪽에 있었다. 관구검이 동쪽을 정벌할 때를 당하여 고구려가 도읍해 있던 곳은 지금의 초산부(楚山府) 강 건너편 지역이다. 그리고 매구(買溝) -《후한서》에, “북옥저는 일명 치구(置溝)라고도 한다.” 하였다.- 는 지금의 관북(關北) 육진(六鎭) 등지이다. 초산에서 관북 지역으로 달아날 경우에는 반드시 황초령(黃草嶺)을 넘어서 함흥을 경유해야 하는데, 함흥의 북쪽은 바로 옥저(沃沮) 지역이다. 그렇다면 왕기(王頎)가 경유한 불내예성(不耐濊城)은 마땅히 함흥에 있어야 한다.
○ 단단대령 동쪽의 예 지역은 그 뒤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이에 대한 설은 신라 북계연혁조(新羅北界沿革條)에 나온다.
○ 중국의 서적에는 혹 압수(鴨水) 서쪽의 봉황성(鳳凰城) 등지를 예의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요사(遼史)》의 잘못을 답습해서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한 설은 발해 용원부변오조(渤海龍原府辨誤條)에 나온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단단대령(單單大嶺) : 단단대령의 위치에 대하여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03]부의 …… 쌓은 : 원문에는 ‘府東有濊時所等’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府東有濊時所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예군(濊君) 남려(南閭) : 이병도는, 예군 남려는 지금의 통구(通溝) 방면에 있던 대수맥(大水貊)의 군장(君長)으로 대수(大水)와 소수(小水) 유역의 사회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최고 맹주일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356쪽》
[주D-005]창해군(蒼海郡)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지금의 통구(通溝) 부근에 설치한 군현(郡縣)으로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에 설치되었다가 2년 뒤인 원삭 3년에 폐지되었다. 예와 맥은 본디 지금의 통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있다가 세력이 약해지면서 후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으로 옮겨 왔는데, 후대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예와 맥을 혼동하여 예와 맥이 본디 강원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동예전(東濊傳) 속에 잘못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주D-006]팽오(彭吳)가 …… 하고 : 이 부분의 해석에 대해 이병도는 “《한서》의 ‘팽오천예맥조선(彭吳穿濊貊朝鮮)’을 《한서》보다 앞선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 대조하여 보면, 거기에는 ‘팽오가멸조선운운(彭吳賈滅朝鮮云云)’이라 하여 천(穿) 자가 가(賈)로 되고 예(濊) 자가 멸(滅)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사기》의 원문이 어느 때 사오(寫誤), 혹은 판오(板誤)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86쪽》
[주D-007]7현(縣) : 옛 임둔군(臨屯郡)에 있었던 7현을 가리킨다. 안정복이나 한진서(韓鎭書)는 모두 이 7현의 위치를 지금의 관동(關東) 지방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병도는 이 7현을 덕원군(德源郡) 부근에 있던 동이현(東暆縣), 안변(安邊)이나 통천(通川)에 있던 불이현(不而縣), 문천(文川)이나 고성(高城)에 있던 야두매현(邪頭昧縣), 함흥(咸興) 부근에 있던 부조현(夫租縣), 영흥(永興)에 있던 화려현(華麗縣), 평강(平康)이나 회양(淮陽) 두 곳에 있던 전막현(前莫縣)과 잠대현(蠶台縣)이라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96~208쪽》 북한의 이지린은 ‘불내(不耐)를 국내성(國內城)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영동 7현의 위치를 압록강 즙안(楫安) 지역에서부터 요동반도 동해안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조선연구 191쪽》
[주D-008]불이현(不而縣) : 불내현(不耐縣)이다. 이병도는 지금의 안변(安邊)으로 비정하였으며, 북한의 이지린은 압록강 주위의 즙안(楫安)으로 보았다.
[주D-009]불내예(不耐濊) : 지금의 함경도 안변군(安邊郡)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주D-010]조위(曹魏) : 삼국 시대 때 조씨(曹氏)에 의해 세워진 위(魏)나라로, 척발씨(拓跋氏)에 의해 세워진 원위(元魏)와 구별하기 위하여 이렇게 칭한다.
[주D-011]고궁(高宮) :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다.
[주D-012]매구(買溝) : 이병도는, “매구루(買溝漊)의 ‘구루’는 고구려어에 성읍(城邑)을 의미하는 말로 현대어의 ‘골’에 해당하고, ‘매’는 천류(川流)를 의미하는 말로 합해서 ‘천성(川城)’이나 ‘수역(水域)’이다. 이러한 관계로 볼 때 나는 저 ‘매성(妹城)’이라는 고칭(古稱)을 가진 지금의 함경남도 문천(文川)으로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04쪽》
[주D-013]왕기가 …… 이르러 : 이병도는 이에 대해 “위지(魏志)에 나오는 ‘옥저 땅 1000여 리를 지나서’란 부분은 위나라 군사가 환도(丸都) 방면에서 척량산맥(脊梁山脈)을 넘어 함흥 지방을 거쳐 원산(元山), 안변(安邊) 방면의 불내성(不耐城)에 이르는 과정을 추산한 숫자로, 이는 동천왕의 행방과 위나라 군사의 추격을 북옥저(北沃沮)로 알고 잘못 말한 것이다.” 하였다.《이병도, 국역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265쪽 주》
[주D-014]환도산(丸都山)에도 …… 놓았다 : 원문에는 ‘九都山’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이병도는, “환도산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환도를 함락시킨 뒤에 관구검이 환도성의 북쪽, 곧 지금의 소판차령(小板岔嶺)에 비석을 세운 것을 말한 것이고, 불내성에 새겨 놓았다는 것은, 왕기의 별견대(別遣隊)가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아 패하여 낙랑 방면으로 철수한 뒤, 낙랑 태수 유무(劉茂)와 대방 태수 궁준(弓遵)이 그 뒤를 이어 고구려군이 점거하였던 동예(東濊) 지방의 불내성(不耐城)을 쳐서 항복받고 그곳에 비석을 세운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이병도, 국역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265쪽 주》

 해동역사 속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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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2
맥(貊)

○ 맥은 본디 중국의 동북쪽 오랑캐인데, 후대에 우리나라로 옮겨와 지금의 대관령(大關嶺) 서쪽 지역에 거처하였다. 그들이 도읍한 곳을 우수주(牛首州)라고 하는데, 바로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이다.
《산해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쪽에 있는데, 지역이 연(燕)과 가까워서 멸망되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은 북쪽으로 예와 맥과 접경하였다.
《고금군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동남쪽, 예의 서쪽은 예전 맥 지역이다.
《수서》 백제열전(百濟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3일을 가면 맥국에 이른다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예맥국(濊貊國)은 지금 조선의 강원도(江原道)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맥(貊)이 어떤 데에는 맥(貉)으로 되어 있다. 《설문》에는, “맥(貉)은 북방의 맥종(豸種)이다.” 하였고, 《급취편주(急就篇注)》에는 이르기를, “맥(貉)이란 것은 동북쪽의 오랑캐이다.” 하였고, 《시경(詩經)》의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었도다.[其追其貊]”에 대한 정현(鄭玄)의 전(箋)에 이르기를, “퇴와 맥이 험윤(玁狁)의 침입을 받아 점점 동쪽으로 옮겨간 것이다.” 하였고, 《사기》 흉노전(匈奴傳)에는 이르기를, “묵특(冒頓)이 강성해져서 동쪽으로는 예맥(薉貊)과 조선(朝鮮)에 접하였다.” 하였다. 대개 맥은 본디 북적(北狄)의 종족인데 후세에 점차 동쪽으로 옮겨와서 진한(秦漢) 시대에는 이미 우리나라의 강역 안에 자리 잡았다. 그러므로 《사기》에서는 조선과 예(薉)와 나란히 칭한 것이다. 《여지승람》에는 이르기를, “춘천부(春川府)는 본디 맥국이며, 신라에서는 우수주(牛首州) -일명 우두주(牛頭州)라고도 한다.- 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지금 소양(昭陽)과 신연(新淵) 두 강이 합하는 곳에 우두촌(牛頭村)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맥국의 고도(古都)라고 전한다. 그리고 《산해경》이나 《후한서》 군국지(郡國志) 등의 여러 설을 참고해 보면 맥국이 춘천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한나라 무제(武帝) 초년에 비로소 길이 맥국에 통하였고,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한나라에서 낙랑군을 두어 맥국이 한나라 군(郡)에 속하게 되었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무제가 즉위하고서 몇 년 뒤에 팽오(彭吳)가 예, 맥, 조선과 통하는 길을 뚫었다.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해동역사》 본기(本紀)를 살펴보면, 우수주(牛首州)에 팽오통도비(彭吳通道碑)가 있으니, 팽오가 길을 뚫었다고 하는 맥은 분명히 춘천(春川)이다. 그 뒤 수십 년 뒤에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사군(四郡)을 두어서 맥이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이르기를, “온조왕(溫祚王) 18년(기원전 1) -한나라 애제(哀帝) 때이다.- 에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牛頭山城)을 습격하고자 하여 구곡(臼谷)에까지 이르렀다가 대설(大雪)을 만나 돌아왔다.” 하였는바, 춘천의 맥국이 낙랑에 소속되었음이 이를 근거로 하여 보면 더욱더 분명하다.
또 살펴보건대, 《진서(晉書)》 민제기(愍帝紀)의 사론(史論)에 이르기를, “오악(五嶽)과 삼도(三塗)가 모두 외적에게 점령당하였고, 이때를 틈타 용천(龍川)과 우두(牛頭)에 군장(君長)이 섰다.” 하였으며, 《남사(南史)》 서효사열전(徐孝嗣列傳)에는 이르기를, “황산(黃山)을 에워싸고 우수(牛首)에게 항복받은 것은 한나라가 성대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강남(江南)이 다 정복되지 않았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잠시 그쪽에 대해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여기에서 이른바 우수라는 것도 역시 춘천을 가리키는 것이다.
○ 압록강의 서쪽에 또 한 종류의 맥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고구려의 다른 종족이지, 춘천에 있었던 맥은 아니다.
《후한서》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高句麗)는 일명 맥(貊)이라고 하는데, 다른 종족이 있어서 작은 강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이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 칭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위지(魏志)》를 보면, 소수맥은 서안평현(西安平縣) 북쪽에 있는데, 서안평은 지금의 압록강 바깥쪽 지역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유리왕(琉璃王) 33년(14) -신(新)나라 왕망(王莽) 6년- 에 양맥국(梁貊國)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군사를 진격시켜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 -지금의 흥경(興京)이다.- 을 습격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양맥 역시 소수맥(小水貊)의 종족으로, 춘천의 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주D-001]소수맥(小水貊) : 압록강의 지류(支流)인 동가강(佟佳江)의 예맥(濊貊)을 말한다. 압록강 유역의 예맥족을 대수맥(大水貊)이라 하고, 졸본부락(卒本部落)을 소수맥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고구려가 일어났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
[주D-002]양맥국(梁貊國) : 소수맥으로, 한나라 현도군(玄菟郡)의 한 속현(屬縣)이었던 서개마현(西蓋馬縣)에 살던 종족이다.《국역삼국사기 227쪽 주》

해동역사 속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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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2
옥저(沃沮)

○ 옥저는 지금의 홍원(洪原), 북청(北靑) 등지에서부터 북쪽으로 두만강(豆滿江)까지의 지역이 바로 그 지역이다.
《후한서》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하였고, 북쪽은 읍루(挹婁), 부여(夫餘)와 접하였고, 남쪽은 예(濊), 맥(貊)과 접하였다. 그 땅이 동서는 좁고 남북은 긴데, 긴 것을 잘라 짧은 데 보태면 사방 1000리가량 된다. 토질이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다.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지형이 동북은 좁고 서남은 긴데 사방이 1000리가량 되며, 호구 수는 5000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옥저의 지역은 지금 조선의 동북쪽 경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마대산은 바로 백두산의 남쪽 지맥(支脈)을 가리키며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의 경계를 나누는 산맥이다. 읍루는 두만강 바깥쪽에 있고, 예는 함흥 이남에 있다. 옥저는 이들과 모두 경계를 접하고 있으면서 동쪽으로 큰 바다를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개마대산까지였으며, 긴 것을 잘라 짧은 데에 보태면 사방 1000리가량 되었다. 그런즉 그 사방의 경계를 가지고 보면 지금의 함경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그 북쪽 경계를 구별하여 북옥저(北沃沮)라고 하는데, 지금 관북(關北)의 육진(六鎭) 등지이다.
《후한서》 동옥저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또 북옥저가 있는데,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며, 남옥저에서 800여 리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읍루와 접하였는데[南接挹婁], -삼가 살펴보건대, 남(南)은 마땅히 북(北)으로 되어야 한다. 읍루열전(挹婁列傳)을 보면, “읍루는 남쪽으로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다.”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 노략질을 자주 하므로, 북옥저에서는 그것을 두려워하여 매년 여름이면 암혈(巖穴) 속에 숨어 살다가 겨울이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된 다음에야 마을로 내려 와서 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북옥저의 북쪽을 읍루라고 하였는데, 읍루는 지금의 두만강 바깥쪽 지역이다. 읍루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와서 노략질을 하는데, 겨울이 되어 얼음이 얼 때가 되면 뱃길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즉 옥저의 북쪽은 바다가 아니라 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바, 그 경계가 두만강에서 그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금의 회령(會寧), 종성(鍾城) 등지가 바로 북옥저가 된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800여 리를 가면 이원(利原), 북청(北靑) 등지에 이르는데, 이곳이 동옥저가 된다. 대개 북옥저는 옥저 가운데 북쪽 경계를 구별 지어서 칭하는 것이다. 남옥저라고 칭하는 것은 북쪽을 상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및 《문헌비고》에는 동옥저와 북옥저 두 옥저 이외에 또 남옥저(南沃沮) 한 종족이 있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 한(漢)나라 초기에는 위만(衛滿)에게 붙었다가 무제(武帝) 때에 현도군(玄菟郡)의 치소(治所)가 되었으며, 그 뒤 현도군이 옮겨 가고서는 또다시 옥저를 현으로 삼아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소속되게 하였다.
《삼국지》 동옥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초기에 위만(衛滿)이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 옥저는 모두 조선에 속하였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조선의 지역을 나누어 사군(四郡)으로 삼은 다음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그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 옥저는 도로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뒤에 한나라에서는 지역이 너무 넓고 멀다는 이유로 동부도위를 나누어 두고서 별도로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7현(縣)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 한나라 성제(成帝) 때에는 북옥저가 고구려에게 병탄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설은 고구려 강역총론조(高句麗疆域總論條)에 나온다.
○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에 동부도위를 혁파하고 다시 동옥저를 봉(封)하여 후국(侯國)으로 삼았다.
《삼국지》 옥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설은 예조(濊條)에 나온다.
○ 건무 32년(56)에 동옥저 역시 고구려에 병탄되었다.
《후한서》 동옥저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국토가 작은 데다가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던 탓에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로 복속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고구려 강역총론조에 나온다.
○ 중국의 서적에서는 혹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해성현(海城縣)이 옥저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요사(遼史)》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본디 옥저국의 땅으로, 발해(渤海)에서는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라고 불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옥저국에 대해서 《요사》에서는 “해주(海州)는 본디 옥저국의 땅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후한서》를 보면 “동옥저는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예, 맥과 접하였으며,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이제 《대명일통지》를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대산은 조선에 있다. 그런즉 그 국도(國都)가 지금의 해성현 경계 바깥에 있으며, 해주는 그 외읍(外邑)이다.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또 북옥저가 있는데, 남옥저에서 800여 리 떨어져 있다.” 하였는데, 지금 그 옛 땅을 모두 상고할 수는 없으나, 대개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성현은 봉천부에서 남쪽으로 24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해주는 본디 옥저의 지역이다.” 하였고,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하였고,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개평(蓋平)은 옛 개모성(蓋牟城)이다. 《한서》에 ‘고구려에는 개마대산이 있다.’ 하였으며, 지리지에는 ‘서개마(西蓋馬)는 현도(玄菟)에 속한다. 당나라의 개모성은 바로 한나라의 서개마이다.’ 하였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지금 해성현의 서남쪽 모퉁이에서 개평까지는 80리인바, 개평은 옛 개마(蓋馬)이고, 해성현은 옛 옥저이니, 해성이 과연 개평의 동북쪽 경계가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또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해성현에는 사비성(沙卑城)이 있는데, 고구려에서 고옥저(故沃沮)를 둔 지역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발해의 남경(南京)은 돌을 겹쳐 쌓아 성을 만들었는데, 폭이 9리로, 발해의 대씨(大氏)가 축조한 것이다. 지금의 해성현의 경계에 있다.” 하였다. 《당서(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의 “옥저의 고지(故地)는 남경 남해부가 된다.”고 한 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더욱더 징험하여 알 수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동의 지리는 비록 《요사》에 의해서 어지럽혀지기는 하였지만, 예로부터 변하지 않은 것은 압록강(鴨綠江) 일대이다. 압록강은 해성(海城)의 동쪽에 있으며, 개마산(蓋馬山)은 또 압록강의 동쪽에 있고, 옥저는 또 개마산의 동쪽에 있음을 전사(前史)에서 징험할 수가 있다. 그런데 어찌 동서가 각각 1000리나 되는 지역을 끌어다가 개평현(蓋平縣)을 개마산이라 하고 해성현을 옥저 지역이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만약 해성현이 옥저의 지역에 해당된다면, 그 북쪽을 혹 부여(夫餘)에 접하였다고 해야 하는데, 그 남쪽에 어떻게 예와 맥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서쪽에 어떻게 고구려가 있을 수 있으며, 그 동쪽에 어떻게 큰 바다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른바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으며, 긴 것을 잘라 짧은 것에 보태면 사방이 1000리이다.”라고 한 지역을 또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당서》에 이르기를, “발해가 옥저의 옛 땅으로써 남해부(南海府)를 삼았다.” 하였는데, 지금의 북청(北靑) 등지이다. 《요사》 지리지에서 이른 바 남해군(南海軍)은 지금의 해성현이다. 《요사》 지리지에서는 남해(南海)라는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드디어 곧바로 발해의 남해부(南海府)라고 이르고, 또 곧바로 옥저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런 것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은 채 《요사》 지리지의 내용을 견강부회하였는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주D-001]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고조선연구 307쪽》
[주D-002]치구루(置溝婁) : 이병도는 “지금의 어디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북옥저의 한 지방명이 틀림없고, 남옥저에서 8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함경북도의 북부 지방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하겠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04쪽》




 
해동역사 속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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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3
삼한(三韓)


강역총론(疆域總論)
○ 옛날에는 한수(漢水) 남쪽을 한국(韓國)이라고 일렀고, 또한 진국(辰國)이라고 일렀다. 중간에 세 종족으로 나뉘었는데, 서쪽을 마한(馬韓)이라 하고, 마한의 동쪽을 진한(辰韓)이라 하고, 진한의 남쪽을 변진(弁辰)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다. 첫 번째는 마한이고, 두 번째는 진한이고, 세 번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國)이며, 북쪽은 낙랑(樂浪)과 연접하였고 남쪽은 왜(倭)와 연접하였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북쪽은 예(濊), 맥(貊)과 연접하였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남쪽 역시 왜와 연접하였다. 한은 모두 78국이며, 백제(伯濟)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이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았다. 사방의 지역을 합하면 4000여 리이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았는바, 모두 옛날의 진국(辰國)이다. 그 가운데서 마한이 가장 크므로 여러 한이 함께 그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웠는데,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의 땅을 모두 다스렸다. 여러 나라 왕들의 선대(先代)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삼국지(三國志)》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방군의 남쪽은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는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리 동방은 옛날에 스스로 나뉘어서 남북으로 되었는데, 북쪽은 본디 세 조선(朝鮮)의 지역으로, 단군(檀君)이 요(堯) 임금과 나란히 섰으며, 기자(箕子) 및 위만(衛滿)을 거쳐서 사군(四郡)으로 나뉘었다가 2부(府)로 합해져 고주몽(高朱蒙)과 번갈아 가면서 성쇠(盛衰)를 반복하였다. 동진(東晉) 시대 이후로는 고씨(高氏)가 드디어 그 지역을 병합하였는바, 이것이 고구려(高句麗)이다.
남쪽은 바로 삼한(三韓)의 지역이다. 한(漢)나라 초기에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축출되어서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와 한(韓) 지역에 이르러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하고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마한(馬韓)이다. 진(秦)나라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부역을 피하여 한 지역으로 들어왔는데, 한에서는 동쪽 경계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으니, 이것이 진한(辰韓)이다. 또 그 남쪽에는 변한(弁韓)이 있어서 진한에 복속하였는데, 각각 우두머리[渠帥]가 있었다.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변한은 남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다.” 하였는바, 삼한 지방을 가리킨 것도 이미 상세하다.
신망(新莽) 1년(9)에 온조(溫祚)가 마한을 멸망시키고 백제(百濟)를 일으켰다.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진한의 6부(部) 백성들에 의해 추대되어 신라가 비로소 건국되었다. 변한에 대해서는 전사(前史)에서 비록 전해 온 바를 말하지는 않았지만,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41)에 수로왕(首露王)이 가락(駕洛)에 나라를 처음 열고 진한의 남쪽 경계 지역을 차지하였다. 그 뒤에 신라로 편입되었는데, 아마도 이곳이 바로 변한 지역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쪽은 남쪽대로 북쪽은 북쪽대로 있어서 본디 서로 간에 침범해 들어가지 않았는바, 비록 그 계한(界限)은 어느 곳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강(漢江) 일대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비로소 마한을 여(麗)라고 하고 변한을 제(濟)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첫 번째 잘못이다. 권근(權近)은 비록 마한이 백제라는 것을 알기는 하였으나, 역시 고구려가 변한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서 뒤섞어서 말하였는데,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한서》에 이르기를, “변진(弁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왜(倭)와 접경하고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뒤섞여 살아 의복과 거처가 같다.” 하면서 변한을 칭하면서는 반드시 변진이라고 하였다. 그런즉 변한이 진한에 대하여 반드시 부용국(附庸國)이었을 것이며, 서로 간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또 이르기를, “마한은 54국(國)을 통할하고,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국을 통할한다.” 하였는데, 이른바 국(國)이라는 것은 지금의 군현(郡縣)으로, 진한과 변한 두 한을 합하더라도 겨우 24국으로, 마한의 반도 못 된다. 이것으로써 본다면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이 합하여 마한이 되고, 영남(嶺南) 한 도가 나뉘어서 진한과 변한 두 한이 됨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한수(漢水)의 남쪽을 통틀어서 한국이라고 하였으며, 그곳을 총괄하는 왕을 진왕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시 진국이라고도 이른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을 마한이라고 한다. 마한의 동쪽 경계에 별도로 거주하는 것을 진한이라고 하는데, 진한 가운데서 또 나뉘어서 변진이 되었다. 대개 삼한의 지계(地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변설(辨說)은 잘못된 것을 답습하여 일정한 설이 없이 분분한데, 오직 구암 한백겸이 논한 것만이 명확하여 바뀌지 않았는바, 세상에서는 정론(定論)이라고 여긴다.
○ 마한이 가장 크며 진한과 변한이 모두 마한에 복속하였다.
《진서(晉書)》 진한열전(辰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 12국은 모두 진한에 예속되었으며, 진한에서는 항상 마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 대대로 세습하였고, 그 나라 사람이 스스로 왕이 될 수는 없었는바,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마한에게 제압당한 것이 분명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에 “여러 한이 함께 마한의 종족을 진왕(辰王)으로 세웠는데, 진왕이 삼한의 땅을 모두 다스렸다.” 하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이르기를, “혁거세 38년(기원전 20) -한나라 성제(成帝) 때이다.- 에 호공(瓠公)을 마한에 보내어 조빙(朝聘)하니, 마한의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들어서는 직공(職貢)을 보내지 아니하는바, 대국을 섬기는 예가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그러니 마한이 당시에 삼한의 패권을 잡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 그 뒤에 마한의 여러 나라들은 백제에 병탄되었고, 진한과 변한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한의 땅은 해도(海島) 가에 있으며, 조선의 동남쪽에 있다. 삼한은 대부분 백제와 신라에 병탄되었으며, 백제는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 중국의 서적에서 삼한의 지계(地界)를 말한 것은 동유(東儒)의 잘못된 설을 답습하였는바, 몹시 그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삼한의 지역은, 지금의 조선의 황해도와 충청도가 본디 옛 마한의 옛 지역이며, 전라도는 본디 변한의 지역이며, 경상도는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삼한은 얼마 뒤에 백제와 신라에 병탄되었다. -《잠확유서(潛確類書)》 및 《무비지(武備志)》에도 이와 같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최치원(崔致遠)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 이르기를, “동해의 바깥쪽에 세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으로,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입니다.” 하였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이르기를, “경기와 황해도는 옛 조선과 마한의 지역이며, 전라도는 본디 변한의 지역이며, 경상도는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하였다. 대개 《여지승람》은 최치원의 잘못된 설을 따른 것이고, 《대청일통지》 등 여러 서책은 또 《여지승람》의 잘못된 설을 따른 것이다.
○ 또 혹자는 요동(遼東)을 삼한의 옛 지역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요사(遼史)》의 설을 견강부회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주(辰州)는 본디 고구려 개모성(蓋牟城)으로, 발해(渤海)에서 개주(蓋州)로 고쳤다가 또 진주로 고쳤는데, 진한(辰韓)으로 인해서 이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평현(蓋平縣)은 주(周)나라 때 조선에 속하였으며, 본디 진한의 지역이다. 요(遼)나라에서 이 길을 통하여 진한에 통하였으므로 진주를 설치하였다. ○ 복주(復州)는 주나라 때 조선의 경계이며, 진한의 지역이다. ○ 영해현(寧海縣)은 주나라 때 조선의 경계이며, 진한의 지역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서는 《요사》의 설을 부회하였는바, 그 설이 망녕되다.
《일지록(日知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 사람들이 요동을 일러 삼한이라고 하는 것은, 《요사》 지리지에 “고주(高州)의 삼한현(三韓縣)은, 진한은 부여(扶餘)가 되고, 변한은 신라가 되고, 마한은 고구려가 되었다. 개태(開泰)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하여 삼국의 유민(遺民)들을 포로로 잡고 현을 설치하였다.”는 글이 있어서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삼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다가 내지(內地)에 현을 두면서 삼한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일 뿐인데, 지금 사람들이 이에 요동을 삼한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내지를 가지고 외국(外國)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을 따져 보면, 명(明)나라 천계(天啓) 초에 요양(遼陽)을 잃은 뒤로 장주(章奏)의 글에서 드디어 요동 사람을 일러 삼한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서인데, 이는 외국으로 여긴 것이다. 지금 요동 사람들이 이것으로 자칭하는데, 이 역시 스스로 외국으로 여긴 것이다.
○ 혹자는 한(韓)이라는 칭호가 이미 삼대(三代) 시대부터 있었다고 하고, 혹자는 기씨(箕氏) 역시 일찍이 한이라고 칭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분명치 않은 말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안(韓雁)은 바다 가운데 도주(都州)의 남쪽에 있다. ○ 학의행(郝懿行)의 전소(箋疏)에 이르기를, “대개 삼한은 옛 나라의 이름이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다.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나온다.” 하였다.
《상서전(尙書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동의 여러 이(夷)에는 고구려, 부여(扶餘), 한(馯), 맥(貊)의 족속이 있는데,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기고 이들 모두와 길을 통하였다. ○ 공씨(公氏)의 소(疏)에는 이르기를, “한(馯)은 바로 한(韓)으로, 음이 같으면서 글자 모양이 다른 것이다.” 하였다.
《일지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시(毛詩)》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韓城)은, 연의 백성들이 쌓은 것이로다. 왕께서 한나라 제후에게, 퇴와 맥을 다스리게 하시매,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도다.[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하였으며,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에는 이르기를, “옛날에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에도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연(燕)과 가까웠다. 그 뒤에 위만(衛滿)에게 정벌되어 바닷가로 옮겨 갔다.” 하였다. 한(漢)나라 때에는 주나라와 시기상으로 머지않았으므로 당연히 전수함이 있었을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참으로 《산해경》이나 《상서전》 등의 설과 같다면, 한이라는 칭호는 이미 삼대 시대 때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부의 설에 근거하여 보면, 《모시》에서 이른 바 한후(韓侯)는 바로 기씨(箕氏)이다. 그렇다면 한이라는 칭호는 기씨에게서 말미암은 것인 듯한데, 기씨가 한이라고 칭한 것은 또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金馬)로 오기 이전에 있었던 일인 듯하다. 그러나 《후한서》와 맞지 않고 또 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상세히는 알 수가 없다.

마한(馬韓)
○ 마한(馬韓) 54국은 지금의 경기남도(京畿南道) 및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 있었으며, 그 지역을 총괄하는 왕을 진왕(辰王)이라고 칭하였고,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에 도읍하였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國), 신분활국(臣濆活國), 백제국(伯濟國)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백제(百濟)이다.-,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占離卑國), 신흔국(臣釁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冉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辟卑離國), 구사오조국(臼斯烏朝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臣蘇塗國), 고랍국(古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야국(不斯濆邪國), 해지국(奚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0여 국 총 10여 만 호이며, 진왕이 월지국(月支國)을 다스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본문에는 막로국(莫盧國)이 겹쳐 실려 있으므로 지금 그 가운데 하나를 삭제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지국은 바로 범엽(范曄)의 《후한서》에서 이른 바 목지국(目支國)이다. 《고려사(高麗史)》 지지(地志)에 이르기를, “금마군(金馬郡)은 본디 마한국이다.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서 남쪽으로 한(韓)의 땅에 이르러서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금마군은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범엽의 《후한서》를 근거로 하여 보면, 마한은 본디 스스로 나라가 있었는데, 기준이 특별히 와서 습격해 탈취한 것이다. 그런즉 금마가 마한의 국도가 된 것은 기준이 오기 전에 있었던 듯한데, 이른바 월지국이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소석색국은 바로 《후위서(後魏書)》의 백제 왕(百濟王)이 올린 표문(表文)에서 이른 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이 바로 그것으로 -소석산조(小石山條)에 나온다.-, 충청도 바닷가에 있는 곳이다.
또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를 보면,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북쪽은 낙랑과 접경하였고, 남쪽은 왜(倭)와 접경하였으며, 서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 하였으니, 그 지역의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임이 분명하다. 북쪽은 낙랑과 한수(漢水)를 경계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마한의 왕이 온조왕(溫祚王)을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河水)를 건너 발 디딜 만한 곳이 없었는데, 내가 동북쪽 100리의 땅을 떼어 주었다.’ 하였다.” 하였는데, 하수란 한수로, 온조왕이 도읍한 곳은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한수 남쪽은 분명히 마한의 관할지였다. 그러므로 이를 떼어서 백제에게 준 것으로, 백제가 마한에 소속된 것이다. 그리고 변한과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었으며, 뒤에 신라가 되었는데, 신라는 서쪽으로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삼았다. 그런즉 마한의 동쪽 경계도 여기까지이다.
○ 한나라 초기에는 기준이 남쪽으로 옮겨 와서 마한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섰다가 곧바로 대가 끊어져서 멸망하였으며, 토추(土酋)가 다시 서서 진왕(辰王)이 되었다.
《후한서》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초에 조선 왕 기준이 위만에게 격파당하고는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격파하고는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었다. 그 뒤에 기준의 후예는 끊어졌으며, 마한 사람들이 다시 서서 진왕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은 본디 스스로 나라가 있었는바, 기준이 처음으로 세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기준이 마한 왕이 된 것은 자기 한 대에 그쳤지, 일찍이 세대를 전하여 오래가지 않았다.
○ 한나라 무제(武帝) 때 마한의 진왕이 비로소 중국과 통하였다.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효혜(孝惠)와 고후(高后) 때 위만과 약조를 맺어 외신(外臣)이 되게 하였는데, 만이(蠻夷)의 군장(君長)들이 중국 천자에게 알현하러 가는 것을 금지시키지 말게 하고자 하였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 때에 이르러서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를 알현하려고 하는 것을 중간에서 가로막고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안사고(顔師古)가 이르기를, “진(辰)은 진한국(辰韓國)을 이른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한이라고 하지 않고 진국이라고 하였으니, 이때에 마한 사람들이 다시 스스로 서서 진왕이 된 것이 분명하다. 안사고가 그것을 일러 진한(辰韓)이라 한 것은 맞지 않다.
○ 한나라 애제(哀帝) 때 지금의 공주(公州) 북쪽 지역의 마한 땅이 백제에 복속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 강역조(百濟疆域條) 온조왕(溫祚王) 14년 조에 나온다.
○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마한이 백제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마한에 소속되었던 여러 나라들이 다 통일되지는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조왕 26년(8) -왕망(王莽) 거섭(居攝) 3년-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거짓으로 사냥한다고 하고는 몰래 마한을 쳐서 드디어 그 국읍(國邑)을 병합하였는데,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만은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 ○ 27년(9)에 두 성이 항복하였으므로 그 성의 백성들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에 마한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 서진(西晉) 때에도 마한의 여러 나라가 여전히 중국과 통하였는데, 그 뒤에 끝내 백제에 병합되었다.
《진서(晉書)》 장화열전(張華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張華)가 안북장군(安北將軍)이 되었다. 이에 산골짜기와 바닷가에 살면서 대대로 중국에 복속되지 않고 있던 마한(馬韓), 신미(新彌) 등 20여 국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을 바쳤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마한이 이미 온조왕이 살아 있을 적에 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서진 시대에도 마한 등 20여 국이 능히 각자 조공을 바쳤다. 그런즉 온조가 멸한 바는 마한을 총괄하던 왕의 나라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마한에 소속되었던 여러 나라는 미처 통일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후한서》와 《위서(魏書)》에서는 모두 마한은 54국이라고 하였는바,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범엽(范曄)과 진수(陳壽)가 역사서를 찬수할 때에도 백제는 오히려 통일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진한(辰韓)
○ 진한은 진(秦)나라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이 영남 지역에서 따로 살던 곳이다.
《후한서》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진(秦)나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로서, 고된 부역을 피하여 한국(韓國)으로 왔는데, 마한에서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 한나라 초기에 조선(朝鮮)의 신하와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역시 영남에 이르게 되었으며, 비로소 육부(六部)의 칭호가 있게 되었다.
《위략》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에 우거(右渠)가 격파되지 않았을 때 조선의 재상인 역계경(歷谿卿)이 이를 간하였으나, 우거가 그 말을 듣지 않고 동쪽 진국(辰國)으로 갔다. 이때에 백성들 가운데서 우거를 따라가 산 자가 2000여 호였다. 역시 조선(朝鮮), 공번(貢藩)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遺民)이 이곳에 와서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여섯 촌(村)을 이루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 -양부(梁部)로 개칭하였다-,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 -사량부(沙梁部)로 개칭하였다-,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 -본피부(本彼部)로 개칭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 -점량부(漸梁部)로 개칭하였다-,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 -한지부(漢祗部)로 개칭하였다-,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 -습비부(習比部)로 개칭하였다.- 으로, 이것이 진한의 6부(部)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6부는 바로 위지에서 “진한에 비로소 6국이 있게 되었다.”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6부는 모두 경주(慶州)의 경계 안에 있었다.
○ 육부는 그 뒤에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으며, 진한이라고 통칭하는데, 지금의 경상좌도가 바로 그 지역이다.
《삼국지》 삼한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은 처음에는 6개의 나라였다가 나뉘어서 12개의 나라로 되었다. 또 여러 개의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각자 우두머리[渠帥]가 있었다. 이지국(已祗國), 불사국(不斯國), 늑기국(勒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염해국(冉奚國), 군미국(軍彌國), 여담국(如湛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사로국(斯盧國), 우중국(優中國)이 있다.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모두 24국이며, 호구 수는 총 4, 5만 호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지에 실려 있는 진한과 변한의 나라는 뒤섞여서 실려 있으며, 오직 변진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변진(弁辰)이라는 두 글자를 더 붙여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나누어서 각자 수록하였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 사이술(四夷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예(穢)와 접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에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북쪽으로는 예(穢), 맥(貊)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변진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바다를 한계로 한다.” 하였는바, 진한은 바로 신라(新羅)이다. 신라 초년에는 북쪽으로는 조령(鳥嶺)을 경계로 삼았는바, 진한의 북쪽 경계는 마땅히 조령까지이다. 그리고 조령 북쪽은 예와 맥이다. 신라의 서쪽과 남쪽은 변진의 경계이다. 대개 지금의 경상좌도가 이곳이다.
○ 한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양산촌(楊山村) 사람인 혁거세(赫居世)가 즉위하여 진한 사로국(斯盧國)의 왕이 되었는데, 이가 실로 진한을 총괄하는 왕이었다. 사로(斯盧)는 신라이다.
《양서(梁書)》 신라열전(新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진한의 종족이다. 진한은 처음에 여섯 나라가 있었는데, 점차 나뉘어서 12개의 나라가 되었으며, 신라는 그 가운데 한 나라였다. 위(魏)나라 때에는 신로(新盧)라고 하였고, 송(宋)나라 때에는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라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한나라 선제 오봉 1년에 진한의 육부(六部) 사람들이 혁거세를 추대하여 군장(君長)으로 삼고는 사로(斯盧)라고 칭하면서 금성(金城)에서 살았다.” 하였다. 대개 사로니, 사라니, 신라니, 신로니 하는 것은 모두 ‘새로 세운 나라[新國]’임을 말한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신(新)을 ‘새[斯伊]’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고 한다. 그리고 로(盧)와 라(羅)는 음이 비슷하며, 사(斯)와 신(新)은 뜻이 같다. 지금의 경주(慶州)가 바로 그 지역이다.
또 살펴보건대, 진한의 6부는 바로 진한의 여러 나라이다. 혁거세가 6부 추장(酋長)들에 의해 추대되었으니, 그가 진한을 총괄하는 왕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변진(弁辰)

○ 변진 12국은 지금의 경상우도 연해 지역이다.
《후한서》 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살았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았으며, 언어와 풍속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왜와 가까웠으므로 문신(文身)을 새긴 자들이 자못 있었다.
《삼국지》 삼한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은 12국인데,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고성군(固城郡)이다-,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낙노국(弁樂奴國) -삼가 살펴보건대, 진(辰) 자가 빠졌다-,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다-,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이다-,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이 있다. ○ 변진독로국은 왜(倭)와 접경하였으며, 12국에는 역시 왕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범엽의 《후한서》를 보면, “변진은 진한의 남쪽, 마한의 동쪽에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하였다.” 하였는바, 지금의 경상우도 연해 지역이 이곳이다.
○ 변진 12국은 모두 진한에 복속되었다.
《진서》 진한열전(辰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진 12국은 각자 우두머리[渠帥]가 있으며, 모두 진한에 복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혁거세 19년(기원전 39) -한나라 원제(元帝) 10년- 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하였는바, 변진 12국이 응당 일시에 항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12국이 여전히 《후한서》, 위지, 《진서》 등의 사서에 실려 있으니, 전한(前漢) 시대에는 신라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고 한 것은 와서 복속된 것이지, 온 나라를 들어서 바친 것은 아니다.
○ 후한 시대 초기에 김수로(金首露)가 가라국(加羅國)의 왕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변진구야국으로, 지금의 김해부가 그 지역이다.
《후한서》 왜열전(倭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왜는 한(韓)의 동남쪽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는데, 낙랑군(樂浪郡)의 변경 지역에서 왜의 서북쪽 경계 지역인 구야한국(狗邪韓國)까지의 거리는 7000여 리이다.
《삼국지》 왜인전(倭人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방군(帶方郡)에서 출발하여 왜에 이르고자 하면 해안을 따라서 물길로 가 한국(韓國)을 거쳐서 남쪽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가면 왜의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여기까지가 7000여 리이다. 여기에서 다시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바다 하나를 건너 1000여 리를 가면 일지국(一支國)에 이른다. -《오학편(吾學編)》에 이르기를, “일본에는 100여 국의 부용국(附庸國)이 있는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다.” 하였다.
《남제서(南齊書)》 가라열전(加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建元) 1년(479)에 국왕 하지(荷知)가 사신을 보내와서 공물을 바쳤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 유리왕(儒理王) 18년(41) -한나라 광무제 17년- 에 가락(駕洛)의 장(長) 9인이 수로왕(首露王)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고는 국호를 가락이라고 칭하였으며, 또 가야(伽倻)라고 칭하였다. 그 뒤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삼국사기》 권44 사다함열전(斯多含列傳)의 자주(自註)에, “가라(加羅)는 일명 가야라고도 한다.” 하였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변한과 마한은 그 남쪽이 모두 왜와 접하였다. 그런즉 변한이 마한 남쪽 경계의 동쪽에 있고, 북쪽은 진한에 접하였는바, 사방의 경계가 바로 가락의 지역과 합치된다. 가락은 바로 가야 가운데 하나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가야금(伽倻琴)을 변한금(弁韓琴)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권4 진흥왕조에, “가야국의 가실왕(嘉悉王)이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만들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라(加羅), 가야(伽倻), 가락(駕洛)은 모두 같은 것이다. 그 나라의 도읍은 지금의 김해부(金海府)에 있었다. 위지에서 이른 바 변진구야국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 말에 구(狗)를 ‘가이(伽伊)’라고 하는바, 음은 바뀌었으나 뜻은 같은 것이다. 그러니 구야(狗邪)는 가라이다. 그리고 《삼국지》 왜인전을 상고해 보면, 대마국은 지금의 대마도(對馬島)이며, 구야국은 대마도에서 바다 건너편의 서북 해안에 있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1000여 리이다. 그런즉 그곳이 김해부임을 더욱더 알 수가 있다. 이 당시에 임나(任那), 구야(狗邪) 등의 나라가 모두 왜에 복속되었으므로 왜의 서북쪽 경계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삼한의 종족이기 때문에 반드시 구야한국이라고 한 것이다.
○ 가라의 종족 중에 임나라고 하는 종족이 있는데, 이것 역시 변진의 족속이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라와 임나는 모두 삼한의 지역에 있다. -《송서(宋書)》에 이르기를, “승명(昇明) 연간에 왜왕(倭王)이 스스로 도독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칠국제군사(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숭신(崇神) 65년(기원전 33) -한나라 원제(元帝) 16년- 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조공하였다. 임나국은 축자국(築紫國)에서 2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데, 북으로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계림(鷄林)의 서남쪽에 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숭신 65년에 임나국 사람이 왔다. 임나의 본 이름은 가라이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의 왕자로, 이름이 도노아아라사(都怒我阿羅斯 츠누카아라시)이다.” 하였다. ○ 수인(垂仁) 2년(기원전 28)에 임라국(任羅國) 사람 도노아아라사 등이 귀국하게 해 주기를 요청하니, 허락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 미마키)의 이름을 따라서 너희 나라의 이름으로 삼으라.” 하였다. 도노아아라사 등이 귀국하여 그 나라의 이름을 고쳐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고 하였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서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의부가라국이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대가락국(大駕洛國)으로 되어 있으며, 시조의 이름은 김수로(金首露)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임나는 또 임라(任羅)로 표기하기도 한다. 송하견림이 말하기를, “임나는 바로 대가락(大駕洛)이다.” 하였는데, 대가락이란 것은 대가야(大伽倻)이다. 《일본서기》를 보면, 흠명(欽明) 23년(562)에 신라가 임라를 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이해에 대가야를 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임나가 대가야임이 분명하다. 대가야는 가라국 수로왕과 같은 종족으로,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 바로 그 지역이다. 이제 《일본서기》를 상고해 보면, 숭신 때 임나가 일본과 통하였다. 그런즉 임나라는 칭호는 이미 전한(前漢) 시대에 있었던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임나는 바로 가라(加羅)의 우호국이다. 가라는 바로 변진의 속국이다. 이곳에서 임나가 미마나국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하였는데, 미마나는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부(附)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공(神功) 49년(249) -위(魏)나라 정시(正始) 10년- 에 황전별(荒田別 아라타와케)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백제 사람인 구저(久氐) 등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인하여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녹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등 7국 사람들을 평정하였다. 그러고는 군사를 돌려 고해진(古奚津)에 이르자, 백제 왕 고초(古肖) 등이 고해진으로 장군을 찾아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네 고을이 스스로 항복해 왔다. 다음 해 봄에 삼한(三韓)의 궁창(宮倉)을 정하여 임나(任那)의 왕을 궁창수(宮倉首)로 삼은 다음, 비자발, 남가라, 녹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 등 7국과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네 고을을 임나에게 붙여서 궁장(宮藏)으로 삼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비자발(比自㶱) 등 여러 나라는 분명히 가라의 족류(族類)로서 임나와 이웃해 있는 나라들이다. 생각건대 이들은 변진의 족속이므로 이곳에 붙여서 기록하여 참고하는 데 대비하였다.
○ 대개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칭한 여섯 가야(伽倻)는 모두 변진의 여러 나라이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가야(大伽倻)는 지금의 고령현(高靈縣)이고, 소가야(小伽倻)는 지금의 고성현(固城縣)이고, 고령가야(古寧伽倻)는 지금의 함창(咸昌)이고, 아라가야(阿羅伽倻)는 지금의 함안군(咸安郡)이고, 성산가야(星山伽倻)는 지금의 경산(京山)이며 벽진(碧珍) -지금의 성주(星州)이다.- 이라고도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수로왕이 가락국의 왕이 되었는데, 그의 동생 다섯 사람이 각각 다섯 가야의 주인이 되었다.” 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여섯 가야이다.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이 가락국이 되고,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이 대가야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명확한 증거가 있다. 그리고 위지를 보면, 변진고자국(弁辰古資國)이 있는데, 고자(古資)는 고성(固城)의 옛 이름이다. -동사(東史)에는 고자(古自)로 되어 있다.- 고성은 소가야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여섯 가야가 변진의 여러 나라임은 다시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동사에서 가야는 신라와 뒤섞여 살면서 후한 시대에 시작되어 제(齊)나라와 양(梁)나라 때 없어졌다고 한 것이나, 중국사(中國史)에서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살면서 후한 시대에 일어나 위진(魏晉) 시대에 번성하였다고 한 것은, 피차간에 기록한 바가 연대의 차이가 없고 강역이 모두 합치된다. 신라가 이미 진한이니 가야는 저절로 변진인 것이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를 보면, 수로왕이 일어난 곳이 변진이라고 하였는데, 이 어찌 탁월한 견해가 아니겠는가.
또 살펴보건대, 일설에 의하면, “변(弁)은 가락(駕洛)이고, 가락은 가야(伽倻)이다. 우리나라의 풍속에 꼭대기 부분이 뾰족한 모자를 통틀어서 변(弁)이라고 하며, 또한 가나(駕那)라고도 한다. 지금도 의금부(義禁府)의 조례(皁隸)들이나 군현(郡縣)의 시노(侍奴)들이 꼭대기 부분이 뾰족한 모자를 쓰면서 그것을 가나(駕那)라고 부르며, 또한 금가나(金駕那)라고도 하는데, 방언(方言)이 흘러 전해 내려온 것이 반드시 그 근원이 있을 것이다. 신라 시대에 가락국이 지금의 김해부에 있었는데, 혹 가라(加羅)라고 칭하기도 하고 혹 가야(伽倻)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변진(弁辰)을 총괄해 다스리는 왕으로, 반드시 모자의 끝 부분이 뾰족한 모양새의 모자를 만들어 썼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라국이라고 호칭하였던 것인데, 중국 사람들이 이를 글자로 표기하면서 변진이라고 한 것이다.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가 신라에 투항한 뒤로는 그 나라를 이름하여 금관(金官)이라고 하였는데, 금관(金官)은 금관(金冠)이고, 금관(金冠)은 금가나(金駕那)이다. 그러니 가나가 변진으로 변한 것을 어찌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이 일설은 전 시대의 사람들이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치상 참으로 그럴듯하다. 대개 변진은 바로 가야이며, 가야는 바로 변진이다. 변진과 가야는 결단코 전후로 있었던 별개의 두 나라 호칭이 아니다.
○ 그 사방은, 동쪽으로는 낙동강(洛東江)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가야산(伽倻山)에 이르고, 서쪽은 지리산(智異山)까지이고,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야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황산강(黃山江)까지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가야산까지 이르고, 서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은 지리산을 경계로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강은 지금의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세속에서 삼차수(三叉水)라고 이르는 곳이다. 가야산은 성주(星州)에 있다. 지금 성주와 합천(陜川) 등지로부터 왼쪽으로는 낙동강까지, 오른쪽으로는 지리산까지, 남쪽으로는 김해, 고성 등의 연해 지역까지가 바로 변진의 강역이다.
○ 소량(蕭梁) 때에 이르러서 가라의 여러 나라들이 마침내 신라에 병탄되었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가라, 임나 등 여러 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흠명(欽明) 23년(562) -진(陳)나라 문제(文帝) 3년- 에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 지증왕(智證王) 6년(505) -양(梁)나라 무제(武帝) 4년- 에 소가야를 취하였고, 법흥왕(法興王) 19년(532) -양나라 무제 31년- 에 금관가야국(金官伽倻國)의 구해왕(仇亥王)이 항복하자, 그 지역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고, -수로왕부터 구해왕까지는 19대로, 모두 491년이다.- 진흥왕(眞興王) 23년(562) -진나라 문제 3년- 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대가야를 탈취하였다. 이상이 신라가 변진을 병탄한 자취이다.


[주D-001]한국(韓國) : 국(國)의 성격과 규모에 대하여 이병도(李丙燾)는 하나의 부족 국가로서 그 영역과 인구가 한군현(漢郡縣)의 일개 현에 불과하다고 파악하였다. 김원룡(金元龍)은 철제(鐵製) 농구(農具)를 사용하는 사회 계층을 기반으로 하는 부족 국가로, 천관우(千寬宇)는 지역 단위로서의 성(城)의 병합을 거치면서 성립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김정배(金貞培)는 인구 10000명 정도의 군장사회(君長社會)로, 백남욱(白南郁)은 국읍(國邑)과 별읍(別邑)을 중심으로 하는 상호 보완적인 생활 공동권을 형성하는 지역 집단(地域集團)으로서 대략 50리 내외의 반경을 가진 지역 범위일 것으로 추산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66쪽 주》
[주D-002]진왕(辰王) : 삼한 전체, 특히 마한 제국(諸國)의 맹주로서 아마도 여러 소국(小國)과의 주종(主從) 관계를 통하여 중국 군현과의 접촉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병도는 “진국(辰國)은 진왕(辰王)의 나라란 뜻이고, 진왕은 제부족 사회(諸部族社會)의 맹주국(盟主國)인 목지국(目支國)의 군장(君長)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03]목지국(目支國) : 고대 삼한 시대 마한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아직 국가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부족 사회였으며, 위치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목지국의 군장은 진왕(辰王)이라 하며, 주위의 모든 소국을 지배하였고, 여러 소국들은 목지국의 진왕을 최고 맹주로 삼았다.
[주D-004]신망(新莽) :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을 말한다.
[주D-005]한안(韓雁) : 명(明)나라 왕숭경(王崇慶)은 지금의 요동 부근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보았으며, 최남선(崔南善)은 한안이 한(韓), 한(寒) 등의 글자와 마찬가지 글자로, 동이(東夷)의 국가를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주D-006]한성(韓城) :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한성현(韓城縣)이라는 설과 두 번째는 하북성(河北省) 고안현(固安縣) 방성(方城)이라는 설이 있다. 김상기(金庠基)에 의하면 서주(西周) 시대에는 섬서성의 한성에 있다가 동주(東周) 시대에는 하북성 한성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4쪽 주》
[주D-007] : 원문에는 ‘傳’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마한은 …… 50여 국 : 마한은 고대 한민족 부족 국가의 하나로, 진한(辰韓), 변한(弁韓)과 함께 삼한(三韓)이라고 한다. 마한 5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이병도(李丙燾)의 설과 천관우(千寬宇)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62~266쪽》 《천관우, 마한 제국의 위치시론, 동양학 9, 1979》
소국명현재의 지명
이병도 설천관우 설
원양국경기 수원 음덕면 일대경기 파주, 연천 일대?
모수국경기 수원 일대경기 양주
상외국경기 수원 장안, 우강면 일대경기 파주, 연천?
소석색국경기 서해의 섬경기 강화 교동
대석색국소석색국 부근경기 강화
우휴모탁국경기 부천강원 춘천
신분활국경기 양성경기 가평?
백제국경기 광주서울 강남
속로불사국경기 통진 지방경기 김포 대곶, 월곶
일화국미상경기 양평, 지평?
고탄자국미상경기 양평, 지평?
고리국경기 양주 풍양경기 여주?
노람국경기 이천군의 음죽면 일대경기 이천군?
월(목)지국충남 직산, 성환평택 등지를 포함한 지역
자리모로국경기 이천군의 일부(노람국과 인접)충남 서산 지곡
소위건국미상충남 보령군
고원국미상충남 당진
막로국미상충남 예산, 덕산
비리국전북 옥구군 회면 일대충남 예산, 덕산
점리비국전북 고부군?충남 홍성군 결성
신흔국충남 옛 진잠현?충남 온양군?
지침국충남 대흥 지방충남 예산군 대흥
구로국충남 청양군?충남 청양군
비미국옛 비인현(충남 서천의 일부)충남 서천군 비인
감해비리국충남 홍성군충남 공주군
고포국미상충남 부여군
치리국국충남 서산군 지곡면 일대충남 서천군 한산
염로국미상전북 익산군 함열
아림국충남 서천군?충남 서천군
사로국충남 홍성군 장곡면충남 논산군 은진?
내비리국미상충남 대덕군 유성
감해국전북 함열전북 익산군
만로국충남 보령군의 일부인 남포전북 옥구군
벽비리국전북 김제 전남 보성군 복내면 일대전북 김제군
구사오조국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전북 김제군 금구
일리국미상전북 부안, 태인?
불리국전남 나주군전북 부안, 태인?
지반국미상전북 부안, 태인?
구소국위명(僞名)으로 간주전북 정읍군 고부
첩로국미상전북 정읍군
모로비리국전북 고창군전북 고창군
신소도국충남 태안(서산)전북 고창군 흥덕
막로국중출(重出)로 간주전남 영광군
고랍국전북 남원군전남 장성군
임소반국전북 옥구군전남 광산, 나주?
신운신국충남 천안군?전남 광산, 나주?
여래비리국전북 여산 지방전남 화순군 능주
초산도비리국전북 정읍군전남 진도군 군내면
일난국미상전남 영암군
구해국전남 강진군전남 해남군 마산
불운국충남 공주의 서부?전남 보성군 복내 이복성?
불사분야국전북 전주군전남 승주군 낙안
원지국미상전남 여수군
건마국전북 익산군전남 장흥군
초리국미상전남 고흥군 남양


[주D-009]한나라 …… 때 : 효혜(孝惠)는 한나라 혜제(惠帝)를 가리키고, 고후(高后)는 소제공(少帝恭)과 소제홍(少帝弘)을 가리킨다. 이 시대는 고조(高祖)가 죽고 여 태후(呂太后)가 섭정하던 시기이다.
[주D-010]공번(貢藩) : 진번(眞番)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부분에 대해 이병도는 공(貢) 자를 진(眞) 자의 오자로 보아 진번으로 해석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93쪽》
[주D-011]진한은 …… 24국이며 : 진한과 변진 24국의 현재 위치에 대하여는 이병도(李丙燾)의 설과 천관우(千寬宇)의 설이 있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韓國古代史硏究 274~276쪽》 《천관우, 진ㆍ변한 제국의 위치 시론, 백산학보 20, 1976》
소국명현재의 위치
이병도의 설천관우의 설
이저국경북 안동군경북 영주군 풍기(기목)
불사국경북 창녕군경북 안동
변진미리미동국경남 밀양군경북 예천군 용궁, 상주군 함창 포함
변진접도국경남 칠원미상(경북 상주?)
근기국경북 영일군경북 청도
난미리미동국경북 의성군경남 창녕군 영산
변진고자미동국경남 고성군경남 고성
변진고순시국미상경남 사천, 삼천포
염해국경남 울산군미상(경북 대구?)
변진반로국경북 성주군미상(경남 합천?)
변릭노국경남 하동군 악양면 일대미상(경남 진주?)
군미국미상경북 칠곡군 인동
변군미국경남 사천군경북 칠곡군 약목, 성주
변진미오야마국경북 고령 지방경북 고령, 성산 포함
여담국경북 군위군경북 의성군 탑리, 군위
변진감로국경북 금릉군 개령 일대경북 금릉군 개령, 선산 포함
호로국경북 상주군 함창면 일대경북 영천
주선국미상미상(경북 경산군 자인, 경산?)
마연국미상경남 밀양
변진구야국경남 김해 일대경남 김해
변진주조마국경북 금릉군 조마면 일대경남 함안군 칠원, 마산
변진안야국경남 함안군경남 함안
변진독로국경남 동래군경남 동래
사로국경북 경주경북 경주
우유국경북 청도군경북 울진


[주D-012]혁거세(赫居世) : 이병도는, “혁거세는 실상 휘가 아니라 존호(尊號)이니, ‘혁(赫)’은 바로 광명(光明), 명철(明哲), 현명(賢明)이라는 말인 ‘’의 차훈(借訓)이요, ‘거세(居世)’는 왕호(王號) ‘거서간(居西干)’의 ‘거서(居西)’와 같은 음과 뜻인 말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쪽 주》
[주D-013]사로국(斯盧國) : 이병도는, “서나(徐那), 서라(徐羅), 서야(徐耶)는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와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으로서, 서(徐), 사(斯), 신(新)은 바로 ‘소벌(蘇伐)’의 소(蘇)와 같이 ‘솟[高, 上]’의 사음(寫音)인 것 같다. 나(那), 라(羅), 야(耶), 로(盧)는 ‘나라[國]’의 고어(古語)인즉, 바로 상국(上國)이라는 뜻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쪽 주》
[주D-014]금성(金城) : 이병도는, “금성은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그 뜻을 취해온 것이 아니라 ‘검성(儉城)’, 즉 ‘임금의 성’이라는 뜻인 듯하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쪽 주》
[주D-015]고령현(高靈縣) : 원문에는 ‘馬靈縣’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숭신(崇神) 65년 : 《일본서기》에 응신기(應神紀) 이전에 나오는 연대는 백제 측의 사료(史料)와 맞추어 볼 때 2주갑(周甲), 즉 120년을 올려 기년(紀年)을 세웠는바, 대개 120년을 내려서 보면 맞는다. 본서에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연대를 그대로 표기하였다.
[주D-017]임나국(任那國) : 고대 변진(弁辰) 지방에 자리 잡고 있던 나라 이름으로, 금관가야(金官加耶)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는 가야연맹체를 총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임나라는 명칭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은 우리나라의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으로, 여기서는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의 내용으로 보아 임나가라는 금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일본서기》에서는 여러 가야를 총칭해 임나라고 하였다. 후대의 학자 가운데에는 이곳에 나오는 ‘임나가 축자(築紫), 즉 오늘날의 복강현(福岡縣) 지방으로부터 2000여 리가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험한 물이 가로막고 있고, 그리하여 계림 즉 오늘날의 경주(慶州)의 서남방에 있다.’라고 한 구절을 근거로 그 위치를 대마도(對馬島)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文定昌, 韓國古代史, 柏文堂, 1970》
[주D-018]의부가라국(意富加羅國) : 의부(意富)는 일어(日語)로 ‘대(大)’의 뜻으로, 대가라(大加羅), 즉 금관가야(金官伽倻)를 가리킨다.《古代韓日交流文化硏究, 한국정신문화원, 1990, 208쪽》
[주D-019]미마나국(彌摩那國) : 임나국(任那國)으로, 나라의 명칭이 어간성천황의 이름을 따라서 정해졌다고 하는 내용인데, 이는 허구로, 오히려 임나란 국호에서 어성간이란 이름이 정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古代韓日交流文化硏究, 한국정신문화원, 1990, 209쪽》
[주D-020]비자발(比自㶱) …… 가라(加羅) : 이들 7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국내에 비정(比定)하는 설과 대마도(對馬島), 일기도(一岐島), 구주(九州) 지방의 섬에 비정하는 설이 있는데, 각 학자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국명 \ 학자말송보화(末松保和)금서룡(今西龍)김성호(金聖昊)이병선(李炳銑)
비자발창녕(昌寧)창녕창녕비전승(比田勝)
남가라김해(金海)김해김해당주(唐洲)
탁국경산(慶山)대구(大邱)창원(昌原)하도(下島)
안라함안(咸安)함안함안
다라합천(陜川)진주(晉州)사천(泗川)
탁순대구창원남해(南海)
가라고령(高靈)고령광양(光陽)

탁순(卓淳)은 원문에는 ‘탁부(卓浮)’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권9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고해진(古奚津) : 주정개장(酒井改藏)은 섬진강(蟾津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하동군(河東郡)의 고포(高浦)로, 이병선(李炳銑)은 제주도의 어느 나루로 비정하였다.
[주D-022]비리(比利) …… 반고(半古) : 비리는 전주(全州), 벽중(辟中)은 김제(金堤)나 임실(任實), 포미지(布彌支)는 공주(公州)나 순창(淳昌), 반고는 나주(羅州)나 구례(求禮)로 비정한다. 포미지는 원문에 포미우(布彌友)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비자발(比自㶱) : 원문에는 ‘比自’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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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4
사군(四郡)


건치총론(建置總論)
○ 사군(四郡)은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위씨조선(衛氏朝鮮)을 멸하고 다섯 나라의 지역을 나누어서 설치한 것이다.
《한서(漢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전(朝鮮傳)에 이르기를,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이 항복하자, 그 지역에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도(玄菟), 진번(眞番) 사군을 설치하였다.” 하였다. ○ 지리지(地理志)에 이르기를,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조선, 예(濊), 맥(貊), 고구려(高句麗)의 만이(蠻夷) 지역에 설치하였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고구려, 맥 -삼가 살펴보건대, 맥(貊) 자 위에 당연히 예(濊) 자가 있어야 한다-, 동옥저(東沃沮) 등 다섯 나라의 지역은 동서가 1300리이고, 남북이 2000리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때 설치한 요동, 현도, 낙랑 세 군은 대부분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치소(治所)의 동남쪽 및 조선의 내지(內地)에 속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옛 지리는 한수(漢水) 북쪽이 조선인데, 조선의 동쪽을 예맥(濊貊)이라 하고, 동북쪽을 옥저라 하고, 북쪽을 고구려라 한다. 이들은 모두 위씨조선에 복속된 나라들이다. 한나라 무제가 우거(右渠)를 격파하고 이 다섯 나라의 지역을 나누어서 사군을 설치하였는데, 조선은 낙랑, 예맥은 임둔, 옥저는 현도, 고구려는 진번이 되었다. 한수 남쪽은 한나라 때 다시 경략(經略)하지 않았다. 사군의 대략은 이와 같다.
○ 소제(昭帝) 때 사군을 아울러 현도와 낙랑 두 군을 설치하고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후한서(後漢書)》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제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
《진서(晉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가 동쪽 변방을 개척하여 현도군, 낙랑군 등을 두었는데, 모두 유주(幽州)에 예속시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한나라 소제 시원 5년에 2부(府)를 두어 조선의 옛 지역인 평나군(平那郡), 현도군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삼고, 임둔군, 낙랑군 등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용하여 또다시 동부도위를 고쳐서 동부도독부(東部都督府)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사군이 합하여 2부(府)가 되었다는 설이 문득 믿을 만한 사실인 것으로 되어, 마침내는 평나가 진번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되었다. 그러나 《한서》를 상고해 보면 단지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라고만 하였지, 언제 도독부를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군현의 이름에 언제 이른바 평나라는 것이 있었던가? 그리고 한나라 때에는 도독이라는 칭호가 없었는바, 이는 견강부회하여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이는 필시 사군을 병합하여 2군으로 만든 다음 낙랑의 7현(縣)을 동부도위에 나누어 예속시켰고, 한(漢)나라 말기에공손도(公孫度)가 요동에 웅거하면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고, 위진(魏晉) 시대에는 이를 인하여 현도군, 낙랑군, 대방군 등을 통합하였고, 당(唐)나라에서는 평양(平壤)에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고, 다시 도독부(都督府)라고 하였다가 그 뒤에 평주로 옮겨 갔으므로, 후대에 역사서를 찬하는 자들이 이를 혼동해서 말하여 이처럼 잘못되게 된 것이다.
○ 후한 말기에 낙랑군을 나누어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이에 2군이던 것이 3군으로 늘어났는데, 이들은 평주에 예속되었다.
《삼국지(三國志)》 삼한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었다.
《진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에서 동이 교위(東夷校尉)를 두어 양평(襄平)에 있게 하고,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도, 대방, 낙랑 5군으로 나누어 평주로 삼았으며, 뒤에 다시 이를 합하여 유주(幽州)로 만들었다. 진(晉)나라 무제(武帝) 함녕(咸寧) 2년(276)에 창려, 요동, 현도, 대방, 낙랑 등 5개의 군국(郡國)으로 나누어서 평주를 설치하였다.
○ 서진(西晉) 시대 이후로는 3군이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에 병탄되었다. -이에 대한 설은 아래에 나온다.

진번군(眞番郡)
○ 진번은 본디 고구려 지역으로, 한나라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군을 설치하였다.
《한서》 주(註)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臣) 찬(瓚)이 말하기를, “《무릉서(茂陵書)》를 보면, 진번군의 치소(治所)인 삽현(霅縣)은 장안(長安)에서의 거리가 7640리이며, 15개의 현이 있다.” 하였다. ○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현도군은 옛 진번과 조선에 있는 호국(胡國)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번군은 한나라 원봉 3년에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삽현이다. 살펴보건대, 삽현이 《한서》 지리지에는 실려 있지 않다.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요동군에 번한현(番汗縣)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진번인 듯하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번군에 대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부분 그 위치에 대해서 의심하여, 진(辰) 지역에 있었다고도 하고, 맥(貊) 지역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틀린 것이다. 《후한서》를 보면, “소제(昭帝) 때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고 하였는바, 임둔이 이미 낙랑에 병합되었다면 진번이 현도에 병합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위지(魏志)》에 이르기를,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하였으며, 응소는 말하기를, “현도는 옛 진번국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현도군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은 옛 고구려이다.” 하였다.-응소가 말한 현도는 모두 시원(始元) 연간에 북쪽으로 옮긴 현도군을 가리킨다.- 이상의 여러 설을 참고하여 보면, 현도군 -바로 북쪽으로 옮겨간 현도군이다.- 은 바로 진번의 옛 지역이며, 진번은 바로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조선과 접경하였고, 동쪽으로는 옥저와 접경하였고, 북쪽으로는 부여와 더불어 접경하였으며, 지방은 2000리이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진번군의 사방 경계이다. 대개 원봉 연간 이전에는 옥저, 고구려, 조선 세 나라가 지역을 서로 접하고 있었으며, 원봉 연간에는 현도, 낙랑, 진번 세 군이 강역을 서로 접하고 있었다. 옥저가 이미 현도가 되고 조선이 이미 낙랑이 되었으니, 고구려는 저절로 진번이 되는 것이다.
○ 지금의 흥경(興京) 동남쪽 지역인 파저강(婆豬江) 좌우의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사기(史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전에 이르기를, “연(燕)나라 때 진번과 조선 두 나라를 침략하여 복속시키고는 관리를 두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요동의 외요(外徼)에 붙였다.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가서는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에 거주하자, 점차 진번과 조선이 투속하였다.” 하였다. ○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이르기를,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하였고, 동쪽으로는 예, 맥, 조선, 진번의 이로움을 통괄하였다.” 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은 남쪽으로는 조선을 틀어쥐고, 동쪽으로는 진번을 틀어쥐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사군이 설치되기 전에 이미 진번이라는 호칭이 있어서 위씨조선과 국경을 접하였다. 그런즉 진번이 요동의 동쪽, 조선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더욱더 확실하다. 지금 흥경(興京)의 남쪽에 있는 파저강 좌우 강안(江岸)의 1000리 지역은 이미 요동이 아니며 조선이나 옥저도 아니니, 그 지역의 위치는 고구려의 사방 경계와 정확하게 합치된다. 그러니 이곳이 어찌 진번의 옛 지역이 아니겠는가. 다만 신(臣) 찬(瓚)이 이른바 장안(長安)에서의 거리가 7000리라고 한 것과는 맞지가 않는다.
○ 시원 5년(기원전 82)에 진번을 혁파하고 그 지역에 현도군을 옮겨 왔다. -이에 대한 설은 현도조(玄菟條)에 나온다.

현도군(玄菟郡)
○ 현도는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의 옥저 지역에 설치한 군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다.
《후한서》 옥저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옥저의 지역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옥저는 지금의 북청부(北靑府) 등지이다. 상세한 내용은 옥저조(沃沮條)에 나온다.
○ 한나라 소제(昭帝) 원봉(元鳳) 6년(기원전 75)에 현도군을 서북쪽으로 옮겨 진번의 옛 지역으로 옮기고 3개의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삼국지》 옥저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에서 사군(四郡)을 설치하여 옥저성(沃沮城)을 현도군으로 삼았다. 그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이른바 현도의 옛 부(府)가 바로 그곳이다.
《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소제 원봉 6년 봄에 군국(郡國) 사람들을 모집하여 현도성을 옮겨 쌓았다.” 하였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현도군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개설하였다. 왕망(王莽)은 고구려를 하고구려(下高句麗)라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현도군은 옛 진번과 조선에 있는 호국(胡國) 지역이다.” 하였다.- 은 호구 수가 4만 5006호이고, 인구수가 22만 1845명이다. 현이 3개인데, 고구려현(高句麗縣)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산은 요수(遼水)가 나오는 곳이다. 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서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북쪽으로 흘러 변경 밖을 지난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고구려호(高句麗胡) 지역이다.” 하였다-, 상은대현(上殷台縣) -왕망은 하은대(下殷台)라고 하였다-, 서개마현(西蓋馬縣) -마자수(馬訾水)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지나가는 고을이 둘이고, 1100리를 흘러간다. 왕망은 현도정(玄菟亭)이라고 하였다.- 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경(盛京)은 옛 익주(翼州)와 청주(靑州)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요동군, 요서군(遼西郡), 현도군(玄菟郡) 지역이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을 보면,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진번을 혁파하여 현도군에 병합하였고, 현도는 다시 고구려의 서북쪽 지역으로 옮겼다.” 하였다. 《한서》를 보면, “원봉(元鳳) 6년에 현도성을 옮겨 쌓았다.” 하였다. 대개 시원 연간에는 진번이 현도에 병합되었다가 그 뒤에 이맥(夷貊)의 침입을 받아 원봉 6년에 이르러서 고구려 지역으로 군을 옮겼다. 고구려는 바로 진번의 옛 지역으로, 응소가 이른바 현도군은 옛 진번국이라고 한 말은 맞다.
현도가 군을 옮긴 뒤로 옥저 지역은 이미 낙랑에 속하였으며, 진번의 동쪽 지역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다시는 경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속현(屬縣)이 이와 같이 적었던 것이다.
○ 현도군의 치소였던 고구려현은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으로, 혼하(渾河)가 발원하는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옛 성이 흥경성 북쪽에 있다. 한나라 무제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조선의 지역을 개척하여 현도군을 설치하고, 또 고구려현을 설치하여 현도군의 치소로 삼았으므로, 응소가 ‘옛 고구려국’이라고 하였다. 《위지》를 보면, 한 무제 초기에 옥저성을 현도군으로 삼았고, 그 뒤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고구려의 서북쪽 지역으로 군을 옮겼으며, 후한(後漢)과 공손도(公孫度) 때에는 모두 치소가 고구려현이었다. 《오서(吳書)》에 “현도군은 요동의 북쪽에 있는데 거리가 200리이다.”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 뒤에 폐하였다. 살펴보건대 《한서》 지리지를 보면, 고구려현은 소요수(小遼水)가 발원하는 지역인데, 지금의 흥경 근처 혼하의 근원지가 바로 한나라 고구려현 지역이다. 고구려국은 본디 고구려현의 동쪽에 있어 요동에서의 거리가 1000리이다. 한나라에서 현을 설치하면서 그 이름만을 취하여 고구려현이라고 한 것이다. 현도군은 비록 처음에는 옥저에 설치하였으나 얼마 있다가 고구려 지역으로 옮겼다는 것을 《한서》 지리지에서 상고할 수가 있다. 《방여기요(方輿記要)》에 이르기를, “공손도가 처음으로 개설하여 요동의 북쪽에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고구려현이다.”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오서》에서는 이르기를, “요동에서의 거리가 200리이다.” 하였는데,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보면, “요동군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이다.” 하였고, 현도군에 대해서는 4000리라고 하였다. 그런즉 실제 거리는 400리이다. ○ 고구려성(高句麗城)이 함흥부(咸興府)의 동북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현(縣)으로, 현도군의 치소였다. 후한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현은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 지리지에 의거하면, 마땅히 소요수가 발원하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소요수는 바로 혼하로, 지금의 흥경 서북쪽 100리 되는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지금의 흥경이 그에 해당된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그런데 또다른 한 개의 고구려성이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다고 한 것은 틀린 말이다.
○ 현도군에 소속되었던 서개마현은 지금의 갑산부(甲山府) 등지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국(蓋國)이 거연(鉅燕)의 남쪽, 왜(倭)의 북쪽에 있다. 왜는 연(燕)에 속한다. ○ 학의행(郝懿行)의 전소(箋疏)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후한서》 동이열전(東夷列傳)을 보면, 이현(李賢)의 주(注)에, ‘개마(蓋馬)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한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개마는 아마도 본디는 개국(蓋國)이었던 듯하다.” 하였다.
《후한서》 주(註)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에 속하며, 그 산은 평양의 서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서개마현은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를 살펴보면, 마땅히 마자수(馬訾水) 상류의 동쪽, 개마산(蓋馬山)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개마산은 바로 백두산이고, 마자수는 압록강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갑산(甲山) 등지가 서개마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후한서》 주에서 평양의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후한 시대 초기에는 현도군의 고구려현과 서개마현은 모두 고씨(高氏)가 차지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강역총론조(高句麗疆域總論條)에 나온다.
○ 이에 현도군은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북쪽 200리 되는 지역으로 다시 옮겨졌는바, 바로 요동군의 고현현(高顯縣) 등 3개의 현이 와서 예속되었다.
《후한서》 군국지(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무제(武帝)가 설치하였으며, 낙양(洛陽)에서 동북쪽으로 4000리이다.- 은 여섯 성(城)에 호구 수가 1594호이고, 인구수가 4만 3163명이다. 고구려현은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발원한다. 서개마현, 상은대현(上殷台縣), 고현현(高顯縣)은 예전에 요동에 속하였다. 후성현(侯城縣)은 예전에 요동에 속하였다. 요양현(遼陽縣)은 예전에 요동에 속하였다. -《동관한기(東觀漢記)》를 보면, 안제(安帝)가 즉위한 해에 세 현을 나누어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 《일지록(日知錄)》에 이르기를, “《후한서》 지리지를 보면, 후성을 현도군에 다시 소속시켰는데, 요동군조에 다시 한 후성이 나온다. 후성은 반드시 하나였을 것으로, 의당 삭제하여야 한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요양은 바로 옛날의 양평(襄平)이며, 옛날의 요양은 이와는 별도로 현이 있었다. 《대청일통지》에서 “옛 요양현은 마땅히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서북쪽 경계인 승덕(承德)과 요양 사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은 옳은 말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청룡(靑龍) 1년(233)에 오나라 왕이 태상(太常) 장미(張彌)를 사신으로 보내어 공손연(公孫淵)을 책봉하여 연왕(燕王)으로 삼았다. 장미 등이 양평(襄平)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양평현은 요동군의 치소(治所)로, 공손연이 도읍한 곳이다.” 하였다.- 에 도착하자, 공손연은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먼저 그들이 데리고 온 관리와 군사 60인을 분산시켜 현도(玄菟)에 구금시켰다. 현도는 요동에서 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호삼성이 말하기를, “이곳은 현도군의 옛 치소가 아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 시대 초기에 고구려현, 서개마현 등이 고씨(高氏)에게 함락당하였다. 그런즉 현도의 근본이 이미 무너진 것이니, 안쪽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와 위(魏)나라가 교체하던 즈음에는 현도군이 양평에서 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었는바, 바로 지금의 승덕 등지이다. 호삼성은, “이곳은 현도군의 옛 치소가 아니다.” 하였고, 《후한서》 군국지에서는 “안제(安帝) 초년에 요동의 세 현을 나누어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참고해 보면, 현도군을 재차 요동과 심양(瀋陽) 지역으로 옮긴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군을 옮긴 것은 반드시 안제가 즉위하기 이전에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현도군을 재차 옮긴 뒤에는 그 거리가 요동군에서 200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조에 이르기를,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3600리이다.” 하였고, 현도군조에는 이르기를, “4000리이다.” 하였는바, 서로 간의 거리가 400리인 것은, 아마도 바로 옛 현도군의 거리를 가지고 그대로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현 등 세 현의 이름이 그대로 판적(版籍) 안에 실려 있으니, 이것은 그 현을 옮기고서 그 이름을 그대로 모칭(冒稱)하여 쓴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후한서》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을 보면, “안제(安帝) 원초(元初) 5년(118)에 고구려가 예(濊), 맥(貊)과 현도를 노략질하여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하였는데, 화려성은 본디 낙랑에 예속되어 있는 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일곱 현(縣)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즉 이곳에서 말한 화려성 역시 생각건대 요동의 한 현에다가 화려란 이름을 모칭한 것이다.
○ 서진(西晉) 말기에는 현도군이 모용연(慕容燕)에 속하였고, 그 뒤에는 풍씨(馮氏)에게 속하였고, 풍씨가 망한 뒤에는 원위(元魏)에 속하였다.
《진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주(平州)의 현도군은 통할하는 현이 셋이며, 호구 수는 7200호이다. 고구려현(高句麗縣), 망평현(望平縣), 고현현(高顯縣)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때의 고구려현 역시 모칭한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나라 태원(太元) 10년(385)에 고구려가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켰다. 그러자 모용농(慕容農)이 고구려를 공격해 다시 요동군과 현도군을 수복하였다.
《후위서(後魏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풍문통열전(馮文通列傳)에 이르기를, “세조(世祖)가 풍문통을 토벌하자, 풍문통과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연화(延和) 1년(432)의 일이다.- ○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연화 1년 9월에 요동군, 낙랑군, 대방군, 현도군의 백성들을 유주(幽州)로 옮기고 창고를 열어 진휼(賑恤)하였다.” 하였다.
○ 원위(元魏) 시대에는 현도가 마침내 고구려에 병탄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위나라 연화 1년 이후로는 현도의 흔적이 중국의 역사서에 다시 보이지 않는데, 《후주서(後周書)》에는 이르기를, “고구려에 요동, 현도 등 수십 성이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현도가 고구려에 편입된 것이 원위 시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중국의 서책에서 지금의 해성(海城), 개평(蓋平), 봉성(鳳城) 등지를 한나라 때의 현도 땅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요사(遼史)》의 잘못을 답습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본디 옥저국(沃沮國)의 지역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성현은 주(周)나라 때에는 조선(朝鮮)에 속하였으며, 본디는 옛 남옥저국(南沃沮國)이다. 한나라가 조선을 평정하고 그 지역을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그 뒤에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하였다. 동한(東漢) 때에는 동부도위를 혁파하고 이어 옥저의 군장(君長)을 봉하여 후(侯)로 삼았다. 위(魏)나라 때에는 평주(平州)에 속하였고, 진(晉)나라와 수(隋)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으며, 당(唐)나라에서는 개주(蓋州)를 설치해 통할하게 하였다. 발해(渤海) 때에는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를 설치하였고, 요(遼)나라 때에는 해주(海州)를 설치하였고, 금(金)나라 때에는 징주(澄州)로 고쳤으며, 본조(本朝)에서는 해성현으로 고쳤다. ○ 개평현(蓋平縣)은,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위나라 때에는 평주에 속하였고, 진나라 초기에는 그대로 평주에 속하였다가 그 뒤에 고구려에 속하였다. ○ 복주(復州)는,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위나라 때에는 평주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다. ○ 영해현(寧海縣)은,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진나라 초기에는 그대로 현도군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 고구려에 속하였다. ○ 봉황성(鳳凰城)은 본래 예(濊)의 지역이었는데,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평주에 예속되었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다. ○ 옛 요수현(遼隧縣)은, 한나라 때 이곳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는데, 요수는 지금의 삼차하(三汊河) 우장(牛庄)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평현은 봉천부(奉天府)에서 남쪽으로 360리 되는 곳에 있다. 《성경통지》에 의거하면, 개평현이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으며, 고적(古蹟)에 실려 있는 “왕망(王莽)이 현도정(玄菟亭)이라 하였다.” 한 곳은 바로 개평현의 경내에 있다. ○ 복주는 봉천부에서 남쪽으로 54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복주는 위나라 때에는 평주에 속하였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개주(蓋州)에 속하였는데, 그 지역이 아직도 지금의 개평 남쪽에 있다. 개평이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으니, 복주가 반드시 현도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영해현은 봉천부에서 남쪽으로 72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성경통지》를 보면, 지금의 영해에 당나라 때의 금주성(金州城)이 있는바, 당나라 때의 금주가 바로 지금의 영해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상고해 보건대, 금주는 한나라 때에는 현도에 속하였는바, 이곳은 또 한나라 때의 현도군인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옥저의 옛 지역은 한나라 때 현도군이었고, 발해 때에는 남해부(南海府)였으며, 지금은 함경도이다. 요나라의 남해군(南海軍)은 지금의 해성현이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잘못 옥저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옥저조(沃沮條)에 상세히 나온다.- 《성경통지》를 찬수한 자가 별안간 옥저 두 글자를 근거로 해성현이 한나라 때 현도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였다고 하였는바, 현도의 연혁(沿革)과 낙랑의 흥폐(興廢)에 대해서 전연 무지몽매하여 서로 간의 거리가 수천 리나 되는 지역을 합하여 한곳으로 만들었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서 이미 해성현을 현도군이라 하고서 개평현, 복주, 영해현 등의 고을이 해성현의 남쪽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아울러서 현도군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요하(遼河) 동쪽이 모두 현도군이 되는 셈인데, 요동군의 18현을 다시 어느 곳에 둘 것인가?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런 점을 살피지 아니하고서 한결같이 《성경통지》만을 따라서 설을 만들어 잘못되게 하였다. 대개 현도의 자취는 함경도에서 일어나 흥경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요양에서 북쪽으로 200리 되는 지역으로 옮겨졌다가, 인하여 고씨(高氏)에게 함락된 것이다. 요양 남쪽 지역은 애당초 현도와는 관계가 없다.
부(附)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평산(白平山)에 납시었다. 백평산은 《산해경》에 백평(白平)이라고 하였으며, 요수(遼水)가 발원하는 곳이다.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이었다. 살펴보건대, 현도는 지금의 봉천부성(奉天府城)에서 동북쪽으로 12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바, 응당 영고탑(寧古塔)에 소속된 지역에 있어야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현도가 또 어떻게 영고탑과 관계가 있단 말인가. 매우 잘못되었다.

임둔군(臨屯郡)
○ 임둔은 한나라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의 예(濊) 지역에 설치한 군이며, 군의 치소(治所)였던 동이현(東暆縣)은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한서》 주(註)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臣) 찬(瓚)이 말하기를, “《무릉서》를 보면, 임둔군의 치소인 동이현은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6138리이며 15개의 현이 있다.” 하였다.
《설문(說文)》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어(鰅魚)의 가죽은 무늬가 있으며, 낙랑과 동이현에서 난다. 신작(神爵) 4년(기원전 58) 초에 이를 잡아서 고공(考工)으로 실어 보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명주(溟州) -강릉- 는 본디 예국(濊國)으로, 한나라 때에는 임둔이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지》 예전(濊傳)을 보면, “영동(嶺東) -대관령- 7현은 모두 예(濊)의 사람들로 백성을 삼는다.”라고 하였는데, 동이는 바로 그 7현 가운데 한 현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랑조(樂浪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또 이르기를, “예(濊)의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난다.”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설문》에서 말한 ‘우어의 가죽은 무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이현이 예의 지역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며, 예라는 것은 지금의 강릉부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예조(濊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는데, 몇 년 뒤에 창해군을 혁파하였다가 우거(右渠)를 격파하고서 다시 구획을 나누어 임둔군을 설치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을 예(濊)라 하고, 서쪽을 맥(貊)이라 하는데, 지금의 강원도 지역이다. 영동의 지역은 7개 현에 불과하였으니, 임둔이 관할하는 15개 현은 대부분 단단대령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대개 원봉(元封) 연간에 군을 설치하면서는 예와 맥의 지역을 합하여 임둔군으로 만든 것이다.
○ 소제(昭帝) 때에는 임둔군을 혁파하고서 낙랑에 병합시켰다.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켰다. 이에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자치통감》 주(註)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臣) 찬(瓚)은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이라고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그 뒤에 임둔과 진번 두 군이 폐지되었다. 반고(班固)의 《한서》 지리지를 보면, 동이현은 낙랑에 속한다고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임둔과 진번을 혁파하여 낙랑과 현도에 병합시킨 것은 어찌 임둔을 낙랑에 병합시키고 진번을 현도에 병합시켰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반고의 《한서》 지리지를 보면, 임둔군의 치소인 동이현은 낙랑에 속하였다고 하였으니, 임둔이 낙랑에 병합된 것이 분명하다.

낙랑군(樂浪郡)
○ 낙랑은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 지역에 설치한 군이며,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임둔군을 합병한 뒤에는 관할하는 현이 25개였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무제(武帝) 원봉 3년에 개설하였다. 왕망(王莽)은 낙선(樂鮮)이라고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하였다. 응소(應劭)는 옛 조선국이라 하였고, 안사고(顔師古)는 樂浪의 음은 낙랑(洛狼)이라고 하였다.- 은 호구 수가 6만 2812호이며, 인구수가 40만 6748명이다. -운장(雲障)이 있다.- 현은 25개이다. 조선현(朝鮮縣) -응소는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였다-, 남감현(䛁邯縣) -맹강(孟康)은 䛁의 음은 남(男)이라고 하였고, 안사고는 邯의 음은 감(甘)이라고 하였다-, 패수현(浿水縣) -패수는 서쪽으로는 증지(增地)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은 낙선정(樂鮮亭)이라 하였다. 안사고는 浿의 음은 보대(普大)의 반절(半切)이라고 하였다-, 함자현(含資縣) -대수(帶水)가 서쪽으로 대방(帶方)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점제현(黏蟬縣) -복건(服虔)은 蟬의 음은 제(堤)라고 하였다-, 수성현(遂成縣), 증지현(增地縣) -왕망은 증토(增土)라고 하였다-, 대방현(帶方縣), 사망현(駟望縣), 해명현(海冥縣) -왕망은 해환(海桓)이라고 하였다-, 열구현(列口縣), 장잠현(長岑縣), 둔유현(屯有縣), 소명현(昭明縣) -남부도위(南部都尉)의 치소이다-, 누방현(鏤方縣), 제해현(提奚縣), 혼미현(渾彌縣) -안사고는 渾은 하곤(下昆)의 반절이라고 하였다-, 탄열현(呑列縣) -분려산(分黎山)이 있는데, 열수(列水)가 근원하는 곳이다. 열수는 서쪽으로 점제(黏蟬)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820리를 흘러간다-, 동이현(東暆縣), 불이현(不而縣)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치소이다-, 잠대현(蠶台縣), 화려현(華麗縣), 야두매현(邪頭昧縣), 전막현(前莫縣), 부조현(夫租縣)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시원 5년에 임둔을 낙랑에 병합시키고는 단단대령 동쪽 지역을 모두 낙랑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반고가 《한서》 지리지를 찬하면서는 예전에 임둔에 속하였던 단단대령 동쪽의 7개 현을 모두 낙랑에 붙인 것이다. 그 뒤에 《한서》 지리지를 읽는 자들이 이 25개 현을 원봉 연간의 제도로 여긴 것은 틀린 것이다.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大關嶺)이다.
○ 낙랑에 소속된 여러 현은 마땅히 패수(浿水), 대수(帶水), 열수(列水) 세 강의 출입을 가지고 상고하여 정해야 하며, 동이현 이하 7개 현은 대관령 동쪽에 있다.
《수경주(水經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허신(許愼)은 ‘패수는 누방(鏤方)에서 나온다.’고 하였고, 어떤 데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며, 《십삼주지(十三州志)》에는 이르기를,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쪽에 있으며 누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패수는 대개 패수현에서 나와 누방현을 경유하는 것이다. 지금 고구려의 국성(國城)이 패수의 남쪽에 있는데,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의 조선현을 경유한다. 조선현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이다.
《사기》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열구현(列口縣)은 바다를 건너면 먼저 당도한다.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장성의 동쪽은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에 들어갔는데,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살펴보건대,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갈석(碣石)의 오른쪽을 끼고 하(河)로 들어갔다.” 하였는데, 갈석의 오른쪽은 바로 하(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지금의 평주(平州)에서 남쪽으로 200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고구려의 중간은 갈석 왼쪽이 된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임금이 평양성에 거처하는데,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은 대개 우거(右渠)가 도읍하여 치소로 삼은 곳이다. ○ 열구현(列口縣)은 낙랑군에 속한다. 내가 생각건대, 그 지역은 열수(列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해당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자성(含資城)은 조선 국성(國城)의 남쪽 경계에 있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연간에 군사를 나누어서 함자도(含資道)로 나갔는데, 대개 한(漢)나라의 현으로써 도(道)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 점제성(黏蟬城)은 평양 서남쪽에 있는 한나라의 현으로, 낙랑군에 속하였다. 후한(後漢) 시대에는 점제(占蟬)라고 하였으며, 진(晉)나라 때에는 없앴다. 수나라 대업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점제도(黏蟬道)로 나갔는데, 대개 한나라의 현으로써 도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 수성폐현(遂城廢縣)은 평양의 남쪽 경계에 있다. 한나라가 설치하였으며, 낙랑군에 속하였다. 후한과 위진(魏晉) 시대에는 모두 그대로 답습하였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수성도(遂城道)로 나갔는데, 바로 이곳이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갈석산은 한나라 수성현에 있다. 진(秦)나라가 장성을 갈석산에서부터 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 그 유지가 동쪽으로는 요수를 끊고 고구려까지 들어가 있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진태강지리지》의 설에 근본을 둔 것으로, 실은 잘못된 것이다. ○ 증지폐현(增地廢縣)은 평양의 남쪽 경계에 있다. 한나라 때의 현으로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후한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진나라 때에는 없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는 군사를 나누어서 증지도(增地道)로 나갔는데, 바로 이곳이다. ○ 탄열성(呑列城)이 조선 국성(國城)의 동남쪽에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대방군에 속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선현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이다. 《수경주》에 근거하면 지금의 평양부(平壤府)가 이곳이다. 패수현은, 반고의 《한서》 지리지와 《수경주》에 근거하면 마땅히 패수가 발원하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패수는 바로 대동강인바, 지금의 영원현(寧遠縣)이 이곳이다. 함자현은 마땅히 대수(帶水)의 상류쪽 강 연안 지역에 있어야 하는데, 대수는 바로 임진강으로, 지금의 연천(漣川)이나 마전(麻田) 등지가 이곳이다. 점제현은,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 근거하면 마땅히 열수(列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로, 지금의 교하(交河) 등지가 이곳이다. 수성현(遂成縣)은 바로 수성현(遂城縣)으로 평양 남쪽에 있었던 듯한데, 《진태강지리지》 및 《통전》에서 진나라의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맞지 않는 듯하다. 증지현은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 근거하면 마땅히 패수가 바로 들어가는 곳에 있어야 하니, 지금의 용강(龍岡)이나 강서(江西)가 이곳이다. 지금의 증산현(甑山縣)은 본디 강서(江西)의 증산향(甑山鄕)이었은즉, 옛날에 용강이나 강서 등지를 혹 합하여 한 현으로 하였다면 패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 된다. 대방현은 지금의 장단(長湍)이나 풍덕(豐德) 등지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나온다.- 열구현은 지금의 강화부(江華府)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강화의 옛 이름이 혈구(穴口)로, 열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바로 해당되는바, 혈구가 열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소명현은 바로 남부도위(南部都尉)의 치소이다.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에는 이르기를, “도위(都尉)의 치소는 마땅히 명도(名都)에 있어야 한다. 춘천부(春川府)는 옛 맥국(貊國)이었으며, 또 소양강(昭陽江)이 있는바, 이곳이 아마도 소명현일 것이다.” 하였다. 누방현은 《수경주》에 근거하면 마땅히 낙랑군 -바로 평양을 이른다.- 의 동쪽에 있으면서 패수가 지나가는 지역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강동현(江東縣)이 이곳이다. 탄열현은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 근거하면 마땅히 분려산(分黎山)에서 열수가 나오는 곳에 있어야 하는데, 열수는 오대산(五臺山)의 서쪽에서 나오는바, 지금의 정선군(旌善郡)이 바로 옛 탄열현이다. 장잠현, 둔유현, 제해현, 해명현 등 네 현은 진(晉)나라 때에는 대방군에 속하였으니, 네 현은 마땅히 낙랑군의 남쪽 경계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임진강 좌우 지역이 아마도 그 지역일 것이다. 동이현(東暆縣), 불이현(不而縣), 잠대현(蠶台縣), 화려현(華麗縣), 야두매현(邪頭昧縣), 전막현(前莫縣), 부조현(夫租縣) 등은 이른바 단단대령 동쪽의 7개 현으로,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을 보면, “낙랑의 단단대령 동쪽 7개 현을 나누어서 동부도위에 예속시켰다. 광무제(光武帝) 때 동부도위를 혁파하고서 드디어 단단대령 동쪽 지역을 버렸다.” 하였으며, 《후한서》 군국지(郡國志)를 보면 낙랑군의 속현(屬縣)에 동이현 이하 7개 현이 실려 있지 않다. 그런즉 동이현 등은 대관령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예조(濊條)에 나온다.
○ 낙랑군의 사방 경계는 북쪽으로는 압수(鴨水)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한수(漢水)까지이며, 동쪽과 서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후한서》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한은 북쪽으로 낙랑과 접경하였고, 진한은 북쪽으로 예, 맥과 접경하였다.
《괄지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은 남쪽 경계까지가 600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시원(始元) 연간에 군(郡)을 합병시킨 뒤에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는데, 옥저는 지금의 함흥 북쪽 지역이고, 예와 맥은 지금의 강원도이다. 그 남쪽은 진한과 조령(鳥嶺)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리고 《괄지지》에서 말한 조선은 바로 평양으로, 평양에서부터 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을 헤아려 보면 마땅히 한수(漢水)에 이르게 된다. 한수의 남쪽은 바로 마한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낙랑의 지계(地界)는 동쪽과 서쪽은 모두 바다로 막혀 있고, 남쪽은 조령과 한수로써 경계를 삼았던 것이 분명하다.
또 살펴보건대, 반고의 《한서》 지리지에 실려 있는 요동군의 속현 가운데 서안평(西安平)은 지금의 의주(義州)에서 강 건너편 지역이다. -고구려 박작성조(高句麗泊灼城條)에 나온다.- 그런즉 압록강 북쪽 지역은 모두 요동에 속하며, 낙랑의 북쪽 경계는 압록강까지라는 것을 징험하여 알 수가 있다.
○ 그 뒤에 한나라에서는 단단대령 동쪽의 7개 현을 나누어서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예속시켰다.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령 동쪽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그 뒤에 영토가 너무 크고 멀다는 이유로 다시 영동의 일곱 현(縣)을 나누어 낙랑 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를 설치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예조(濊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서 낙랑의 남쪽 변경인 대방현(帶方縣) 등지가 백제에게 점거되었으며, 후한(後漢) 이후로는 다시 한나라에 속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나온다.
○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30)에 동부도위를 혁파하고서 마침내 단단대령 동쪽의 지역을 모두 버렸다. 이에 낙랑군의 속현(屬縣)은 18개의 성(城)으로 되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열전에 이르기를, “건무 6년에 도위관(都尉官)을 없애고 마침내 단단대령 동쪽 지역을 버렸다.” 하였다. ○ 군국지(郡國志)에 이르기를, “낙랑군(樂浪郡) -무제(武帝)가 설치하였다. 낙양(洛陽)에서 동북쪽으로 5000리 되는 곳에 있다.- 은 18개의 성이며, 호구 수는 6만 1492호이고, 인구수는 25만 7050명이다. 조선현(朝鮮縣), 남감현(䛁邯縣), 패수현(浿水縣), 함자현(含資縣), 점제현(占蟬縣), 수성현(遂城縣), 증지현(增地縣), 대방현(帶方縣), 사망현(駟望縣), 해명현(海冥縣), 열구현(列口縣) -곽박(郭璞)의 주(注)에, “《산해경》에 열(列)은 수명(水名)이라 하였는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 하였다-, 장잠현(長岑縣), 둔유현(屯有縣), 소명현(昭明縣), 누방현(鏤方縣), 제해현(提奚縣), 혼미현(渾彌縣), 낙도현(樂都縣)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 25개 현이 후한 때에는 8개의 현이 줄어들었는데, 그 가운데 7개의 현은 바로 단단대령 동쪽에 있는 것이다. 하나는 탄열현(呑列縣)으로 단단대령 서쪽에 있는 것인데, 바로 낙도현(樂都縣)으로 개칭한 것인 듯하다. 단단대령 동쪽의 7개 현 지역은 그 뒤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예조(濊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건무 13년(37)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켰다. 7년 뒤에 한나라가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여 취하였다. 이에 청천강(淸川江) 남쪽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무신왕(大武神王) 20년(37) -후한 광무제 13년- 에 고구려가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 27년(44) -광무제 20년- 가을 9월에 후한의 광무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와서는 낙랑을 쳐 탈취한 다음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에 살수(薩水) 남쪽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살수는 지금 안주(安州)의 청천강이다. 한나라가 성대하였던 시기에 동쪽으로는 임둔에서 서쪽으로 요동에 이르기까지 지경이 서로 연결되어 조금도 끊어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강성해져 요수(遼水)와 패수(浿水) 사이를 웅시(雄視)하고 있는 탓에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는 사군(四郡) 지역을 전부 회복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선은 살수 북쪽을 고구려에 떼어 주고 평양 등지의 옛 강역만을 수복한 것이다.
《헌제기거주(獻帝起居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안(建安) 18년(213) 3월 경인에 주(州)를 없애고 군(郡)을 합병하여 우공(禹貢)의 구주(九州)를 회복하였는데, 기주(冀州)는 요동(遼東)의 속국(屬國)인 요서(遼西), 현도(玄菟), 낙랑(樂浪) 등 33개 군을 얻었다.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낙랑의 남쪽 경계 지역을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낙랑은 공손씨(公孫氏)에게 속하였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조위(曹魏) 경초(景初) 2년(238)에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씨(公孫氏)를 멸망시켜서 낙랑이 이에 조위에 속하게 되었다.
《삼국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공손도전(公孫度傳)에 이르기를, “경초 2년에 사마선왕(司馬宣王 사마의(司馬懿))이 공손연(公孫淵)을 참수하고 요동, 낙랑, 대방, 현도를 모두 평정하였다.” 하였다. ○ 삼한전(三韓傳)에 이르기를, “경초 연간에 명제(明帝)가 몰래 대방 태수 유흔(劉昕)과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어 바다를 건너가서 대방군과 낙랑군을 평정하게 하였다.” 하였다.
○ 위나라 정시(正始) 8년(247)에 낙랑의 평양이 고구려에게 점거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천왕(東川王) 21년(247) -위(魏)나라 정시(正始) 8년- 에 평양성(平壤城)을 축조하고 백성들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 서진(西晉) 시대 초기에는 낙랑이 그때까지도 중국의 관할이었다.
《진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주(平州) 낙랑군은 통할하는 현이 6개이며, 호구 수는 3700호이다. 조선현(朝鮮縣) -주(周)나라 때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다-, 둔유현(屯有縣), 혼미현(渾彌縣), 수성현(遂城縣) -진(秦)나라 때 쌓은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누방현(鏤方縣), 사망현(駟望縣)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위(曹魏) 시대 이후로 둔유현 남쪽은 나누어져서 대방군에 소속되고, 평양 북쪽은 고구려에게 빼앗겼다. 그러므로 진나라 때에는 낙랑에서 관할하는 현이 6개 현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얻었다가는 곧바로 잃어버려 단지 판도(版圖)만 보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조선현이라는 것도 옛 평양이 아니었다.
○ 진(晉)나라 민제(愍帝) 건흥(建興) 1년(313)에 낙랑이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나라 건흥 1년에 요동의 장통(張統)이 낙랑군과 대방군에 웅거하여 고구려 왕 을불리(乙弗利)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미천왕(美川王)의 이름이 을불(乙弗)이라 하였다.- 와 서로 공격하였는데, 몇 해 동안을 계속 싸웠다. 그러자 낙랑왕 준(遵)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모용준(慕容遵)이다.- 이 장통을 달래니, 장통이 백성 1000여 호를 이끌고 모용외(慕容廆)에게 귀순하였다. 모용외는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삼가 살펴보건대 유성(柳城)에 교치(僑治)를 설치한 것이다.- 장통을 태수로 삼았다.
《문헌통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낙랑군과 현도군의 지역은 후한(後漢) 시대부터 위(魏)나라 때까지는 공손씨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공손연에 이르러서 멸망된 뒤 서진(西晉)의 영가(永嘉) 이후로는 다시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위진 시대 이후로는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해져서 낙랑과 대방이 날마다 침략을 받아 깎여 나갔다. 장통이 이들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쉴 새 없이 싸웠으나 형세상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군(郡)을 버리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이 뒤로는 낙랑이라는 명칭이 다시는 중국의 사서(史書)와 우리나라의 사서에 칭해지지 않았다. 그런즉 낙랑이 고구려에 병합된 것은 마땅히 이때의 일일 것이다.
○ 원위(元魏) 때에 이르러서는 낙랑, 대방 등의 군현을 요서(遼西) 지역에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후위서》 지형지(地形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영주(南營州) 영구군(營邱郡)은 관할하는 현이 3개로, 부평현(富平縣), 영안현(永安縣), 대방현(帶方縣) -원상(元象) 연간에 설치하였다.- 이다. 낙랑군 -천평(天平) 4년(537)에 설치하였다.- 은 관할하는 현이 1개로, 영락현(永樂縣) -흥화(興和) 2년(540)에 설치하였다.- 이다. ○ 영주(營州) 낙량군(樂良郡)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설치하였다. 전한과 후한 및 진(晉)나라 때에는 낙랑(樂浪)이라고 불렀고, 그 뒤에 혁파하였다가 정광(正光)말년에 다시 설치하였으며, 치소(治所)는 연성(連城)이다.- 은 관할하는 현이 2개로, 영락현 -정광 말년에 설치하였다-, 대방현 -전한과 후한 및 진나라 때에는 대방군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 혁파하였다가 정광 말년에 다시 소속시켰다.-이다. ○ 평주(平州) 북평군(北平郡) 조선현(朝鮮縣)은 전한과 후한 및 진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다가, 그 뒤에 혁파하였으며, 연화(延和) 1년(432)에 조선의 백성을 비여(肥如)로 옮기고서 다시 소속시켰다.
《수서(隋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곡군(上谷郡)은 관할하는 현이 6개인데, 수성현(遂成縣)과 영락현(永樂縣) 등이다. ○ 후위에서는 남영주에 5군을 설치하였는데,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하고 대방현은 영구군에 속하였다. 후제(後齊)에서는 이들을 모두 없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은 진나라 건흥(建興) 초기에 이미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모용씨(慕容氏)가 이를 인하여 내지(內地)에 낙랑군을 두고는 옛 칭호를 모칭(冒稱)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모용씨의 낙랑군 및 조선현은 모두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 경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척발씨(拓跋氏 후위(後魏))에 이르러서는 또 요서나 북평(北平) 등지에 낙랑과 대방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 때의 군현과는 서로 관계가 없는 것으로, 단지 그 이름만을 취한 것일 뿐이다.
○ 중국의 서책에서 혹 요동의 여러 현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디 조선의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이 되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를 함락하였다. 원위(元魏)의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이 고구려 왕이 사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렀다. 요나라의 동경(東京)은 바로 이곳이다. ○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나라 때에는 패수현(浿水縣)이었다. ○ 자몽현(紫蒙縣)은 본디 한나라 때에는 누방현(鏤方縣) 지역이었다. ○ 흥주(興州)는 본디 한나라 때에는 해명현(海冥縣)이었으며, 동경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다. ○ 숭주(崇州)는 본디 한나라 때의 장잠현(長岑縣) 지역이었으며, 동경에서 동북쪽으로 150리 되는 곳에 있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평부(咸平府)는 옛 조선의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고구려가 그 지역을 침입하여 차지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잠현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지금 조선의 경계 안에 있는바, 요나라 숭주가 바로 그 지역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에서 이미 요양주(遼陽州)를 평양성이라고 하였으므로 요동의 주현을 이로 인하여 낙랑의 여러 현에 꿰맞춘 것이다. 《요사》 지리지는 모두가 두찬(杜撰)된 것으로 많이 논변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이 설을 인용하여 요양의 이하(泥河)를 한나라 때의 패수(浿水)라고 하였으니, 몹시 잘못되었다. 그리고 원나라의 함평부는 지금의 성경(盛京) 근처 지역으로, 낙랑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성경통지》에서는 또 해성현(海成縣)을 한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현도조(玄菟條)에 나온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요사》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라서 그런 것이다.
부(附)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열수(列水)는, 한나라 때의 낙랑군에 열구성(列口城)이 있는데, 열수가 나오는 곳이다. 곽박(郭璞)의 《산해경주(山海經注)》를 보면, 열수가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낙랑은 지금 봉천부성(奉天府城)에서 동북쪽으로 220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니, 흑룡강(黑龍江) 주방(駐坊)의 경내에 속하는바, 열수가 어디에 있는지는 상세하지 않다.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을 흑룡강 경내에 있다고 한 것은 더욱더 망녕된 것이다.

부(附) 대방군(帶方郡)

○ 대방(帶方)은 한나라 때 낙랑군의 속현(屬縣)이며, 지금의 장단(長湍), 풍덕(豐德) 등지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를 보면, “낙랑군의 함자현(含資縣)에는 대수(帶水)가 있는데, 대수는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수라는 것은 옛날의 칠중하(七重河)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나온다.- 로,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다. 임진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남쪽을 교하(交河)라 하고 북쪽을 풍덕이라 하며, 서쪽으로는 연안(延安), 배천(白川)과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이곳들은 모두 옛날의 낙랑군 남부 지역이다. 그러니 대방의 자취는 의당 지금의 장단이나 풍덕 지역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 한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이르러서 대방의 남쪽 경계가 백제의 온조왕(溫祚王)에게 점거되었다.
《북사(北史)》 백제열전(百濟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夫餘) 동명왕(東明王)의 후손 가운데 구태(仇台)란 자가 처음에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조왕 37년(19) -왕망(王莽) 때이다.- 에 한수(漢水)의 동북쪽 부락에 기근이 들어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사이가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다음 해 봄에 온조왕이 순무(巡撫)하면서 동쪽으로는 주양(走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온조왕이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고 하였는데, 패수는 바로 대동강의 별원(別源)으로, 그 근원이 곡산(谷山) 경내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한 대수는 반드시 대동강의 남쪽, 한산(漢山)의 북쪽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임진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당시에 패수와 대수 사이에는 이미 영장(令長)이 없어서 모두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다는 것이 또 분명하다.
○ 후한 이후로는 한수 북쪽의 대방 등지가 다시 한나라에 속하였다.
《후한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두헌(竇憲)이 최인(崔駰)을 외방으로 내보내어 장잠현(長岑縣)의 장(長)이 되게 하였다. 이에 최인이 멀리 외지로 나가 뜻을 펼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겨 마침내 부임하지 않은 채 돌아가 버렸다. -화제(和帝) 때의 일이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연간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을 침범하였고, 또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길가에서 대방 영(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낙랑을 정벌하여 그 지역을 취함으로써 살수(薩水) 남쪽 지역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백제는 도읍을 한수 남쪽으로 옮겼으며 -백제조에 나왔다-, 살수 -청천강(淸川江)- 남쪽 지역은 낙랑에 속하였으니, 한수 북쪽의 대방 등지가 다시 한나라의 현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장잠(長岑) -뒤에 대방군에 예속되었다.- 과 대방은 모두 낙랑의 남쪽 경계에 있어서 후한의 시대가 끝나도록 여전히 한나라의 조정에서 관리를 보낸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서안평은 지금 우리나라 의주(義州)의 강 건너편 지역으로, 대방 영(帶方令) 및 낙랑 태수의 처자가 본디 요동에서 동쪽으로 낙랑에 부임하면서 서안평을 경유해 오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살해당하고 사로잡혔다는 것은 이치상 그럴듯하다. 동사(東史)에서 혹 이 글을 증거로 삼아 대방이 요동의 바닷가 지역에 있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이르러서 공손강(公孫康)이 비로소 낙랑 남부 지역을 분할하여 대방군을 세웠다. 이것이 대방군이 설치된 시초이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의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郡縣)에서 통제하지 못하자, 백성들이 대부분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 남쪽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공손모(公孫模)와 장창(張敞) 등을 보내어 유민(遺民)들을 수습하고 군사를 일으켜서 한(韓)과 예(濊)를 치자, 옛 백성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이 뒤로 왜(倭)와 한이 드디어 대방군에 속하였다.
《진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방군은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하였으며, 통할하는 현은 7개이고, 호구 수는 4900호이다. 대방현(帶方縣), 열구현(列口縣), 남신현(南新縣), 장잠현(長岑縣), 제해현(提奚縣), 함자현(含資縣), 해명현(海冥縣)이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屯有縣)과 유염현(有鹽縣)을 나누어서 대방군을 만들었다. -둔유현과 유염현은 모두 한나라 요동의 속현(屬縣)인데, 지금은 모두 동이(東夷)들의 차지가 되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방성(帶方城)은 평양 남쪽에 있는데, 한나라의 현(縣)으로 낙랑군에 속하였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건안 연간에 공손강이 임둔현(臨屯縣)과 소명현(昭明縣) 남쪽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이곳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하였다. 진(晉)나라에서는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그 뒤에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수(隋)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서 대방군으로 가게 하였는데, 바로 이곳이다.-삼가 살펴보건대, 두우의 설을 보면, 둔유현과 유염현 두 현을 나누어서 대방군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를 끌어대면서 임둔현과 소명현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둔유현은 《한서》에 실려 있는 낙랑군의 속현이다. 유염현은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다. 연안은 고구려 때에는 염주(鹽州)였고, 삼국 시대에는 시염성(豉鹽城)이었는데, 시염은 유염이다. 《통전》의 주(注)에 둔유와 유염을 요동의 속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제대로 상고하지 않고서 한 말이다. 한(韓)은 신라와 백제이다. 예(濊)는 불내현(不耐縣) 사람이다. 공손씨가 이미 한과 예를 정벌하여 동쪽으로 지역을 개척해 넓히고, 또 낙랑을 나누어 대방군을 만들었다. 그런즉 낙랑의 여러 군현이 공손씨의 관할하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살펴보건대, 《위지》를 보면,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한은 한수 남쪽의 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기림왕(基臨王)이 순행(巡幸)하다가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니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부(歸附)하였다.” 하였으며, 고구려본기를 보면, “미천왕(美川王) 15년(314) -진(晉)나라 건흥(建興) 2년- 에 왕이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범하였다.” 하였다. 이 당시에 고구려는 평양에 도읍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방군은 대개 한수의 북쪽, 춘천(春川)의 서쪽, 평양의 남쪽에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는 곳인바, 장단(長湍), 풍덕(豐德) 등지가 그 지역이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니 대수(帶水)가 임진강이라는 것을 어찌 다시 의심하겠는가.
○ 조위(曹魏) 경초(景初) 연간에 공손씨(公孫氏)가 멸망되고 나서는 대방이 중국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관할지가 되었다.
《삼국지》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랑조(樂浪條)에 나온다.
○ 서진(西晉) 때에도 대방은 오히려 중국에서 관할하는 바였다.
《송서(宋書)》 오행지(五行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晉)나라 혜제(惠帝) 원강(元康) 2년(292) 9월에 대방(帶方), 함자(含資), 제해(提奚), 남신(南新), 장잠(長岑), 해명(海冥), 열구(列口) 지역에 벌레가 볏잎을 모두 갉아먹어서 다 없어졌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에도 대방이 아직 중국의 내복(內服)이었으므로 재상(災傷)이 사관(史官)에게 상세히 보고된 것이다.
○ 서진 말기에는 대방을 장통(張統)이 차지하였으며, 그 뒤에는 대방이 드디어 백제에 병합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진(晉)나라 건흥(建興) 1년(313)에 장통이 대방군에 웅거해 있으면서 고구려와 서로 공격하였는데, 장통이 그의 백성들을 이끌고 모용외(慕容廆)에게 귀순하였다.”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낙랑조에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진나라 건흥 2년에 고구려가 남쪽으로 대방을 침입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장통이 웅거해 있었던 대방은 분명히 평양의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방의 남쪽은 바로 백제이다. 동진(東晉) 이래로 백제의 북쪽 경계는 곡산(谷山), 신계(新溪) 등지에까지 이르러서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었으니, 대방이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모용연(慕容燕) 이후로는 요서(遼西) 지역에 대방이라는 명칭이 있었는데, 이것은 헛되이 직호(職號)만을 둔 것이거나 아니면 임시로 현명(縣名)을 차용한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10년(385) 윤5월에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대방왕(帶方王) 모용좌(慕容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6월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자 모용좌가 사마(司馬)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에게 패하였다. 연왕 모용수가 모용농(慕容農)을 파견하자 모용농이 용성에 이르러서 고구려로 진격하였다. 다시 용성으로 돌아와 상소하여 능묘(陵廟)를 수리할 것을 청하니, 이에 모용수가 모용농을 도독 유평이주제군사(都督幽平二州諸軍事)로 삼아 용성을 지키게 하고, 대방왕 모용좌를 평곽(平郭)으로 옮겨 지키게 하였다.
《후위서》 본기(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연화(延和) 6년(437)에 평동장군(平東將軍) 하다라(賀多羅)에게 조서를 내려 풍문통(馮文通)과 대방 태수 모용현(慕容玄)을 공격하게 하니, 후고(猴固)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수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후위(後魏)에서는 영주(營州)를 화룡성(和龍城)에 두고 낙랑군(樂浪郡), 영구군(營邱郡) 등과 대방현(帶方縣), 유성현(柳城縣) 등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후제(後齊)에서는 오직 영락현(永樂縣), 대방현 등만을 남겨 두었다. 그 뒤 개황(開皇) 1년(581)에는 이들을 모두 폐지하였고, 대업(大業) 1년(605)에는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였는데, 군에 대방산(帶方山)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용성(龍城)은 《후위서》 지형지(地形志)에 근거해 보면, 마땅히 요서의 유성현과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하는바, 대개 모용좌가 실제로는 용성의 진수(鎭帥)가 되었으면서 헛되이 대방왕이라는 직명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풍연(馮燕)과 후위(後魏)의 대방 역시 요서 지역의 여러 현에 모칭(冒稱)한 것이다.
○ 동사(東史)에서 잘못 지금의 남원부(南原府)를 대방군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당(唐)나라 때 모칭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를 평정하고서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아울러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다. 인덕(麟德) 연간 이후에는 폐지하였다.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주류성(周留城)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인궤(劉仁軌)를 기용하여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아 격퇴하게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원부는 본디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으며, 후한(後漢) 건안(建安) 연간에 대방군(帶方郡)이 되었고, 조위(曹魏) 때에는 남대방군(南帶方郡)이 되었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서는 당나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삼았으며, 경덕왕(景德王)이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고쳤고,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다시 대방군으로 삼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 지리지에서 이른 바 대방주(帶方州)라는 것은 한때에 차용한 이름으로, 백제국의 총칭이지 한 군이나 한 현을 이르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거해 보면, 유인궤는 이미 부여풍(夫餘豐)의 난(難)을 평정하고 남원소경으로 옮겨 주둔하면서 신라가 서쪽으로 침범해 올 것을 방비하고 있었다. 유인궤가 대방주 자사로서 일찍이 남원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남원이 드디어 대방이라고 칭해지게 된 것이다.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이런 사실을 살피지 못하고 곧장 한위(漢魏) 시대에 이미 남원을 대방이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니, 매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당나라 총장(總章) 2년(669)에 이세적(李世勣)이 이미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여러 성을 헤아려 주군(州郡)을 두고 편의에 따라 분할하였는데, 이세적이 아뢴 주문(奏文)에 이르기를, “대방주는 본디 죽군성(竹軍城)으로 속현(屬縣)이 지류(至留) 등 6개 현입니다. 죽군이란 것은 본디 두힐(豆肹)입니다.” 하였는데, 두힐이라는 것은 회진(會津)이다. 그렇다면 이세적이 칭한 대방주는 바로 지금의 나주(羅州) 회진고현(會津古縣)이다. 이 역시 한때의 편의에 따라서 명칭을 붙인 것이지, 그 지역의 본명을 인하여 명명한 것은 아니다.


[주D-001]공손도(公孫度) : 후한 말기의 장군으로, 본래 요동의 하리(下吏)로 있다가 요동 태수가 되었다. 고구려와 오환(烏桓)을 공격해 세력을 떨쳤으며, 고국천왕(故國川王) 12년(190)에 요동군을 요서군(遼西郡)과 중료군(中遼郡) 두 개의 군으로 만들고 스스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平州牧)이 되었다.
[주D-002]공손강(公孫康) : 위(魏)나라 초기의 장수로 공손도(公孫度)의 아들이다.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로 있으면서 고구려 왕 이이모(伊夷模) 즉 산상왕(山上王)을 공격해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또 낙랑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한(韓), 예(濊)도 공격하였다.
[주D-003]둔유현(屯有縣) : 이병도(李丙燾)는, “둔유현은 원래의 낙랑(樂浪)의 남쪽 경계로, 지금의 황해도 북단의 황주(黃州)가 틀림이 없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49쪽》
[주D-004]염난수(鹽難水) :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주D-005]현도군(玄菟郡) : 원문에는 ‘元菟郡’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청(淸)나라의 4대 황제 성조(聖祖)의 이름인 현엽(玄燁)의 글자를 휘(諱)해서 표기한 것이다. 이에 모두 현도군으로 번역하였다.
[주D-006]공손연(公孫淵) : 삼국 시대 때 요동 태수로, 공손강(公孫康)의 아들이다. 위(魏)나라에서 관구검(毌邱儉)을 파견해 공손연에게 항복하기를 요구하자, 공손연은 이를 물리치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였다. 다음 해 위나라에서 다시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요동을 공격해 공손연을 잡아 죽였다. 이로 인해 요동, 대방, 낙랑, 현도 네 군이 위나라의 판도로 들어갔다.
[주D-007]모용연(慕容燕) :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연(燕)나라를 말한다. 모용씨의 연나라는 3세기경에 만주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16년(285)에 농안(農安) 부근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을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몰아내었다.
[주D-008]원위(元魏) : 북위(北魏)를 말한다.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뒤에 성(姓)을 척발씨(拓跋氏)에서 원씨(元氏)로 바꾸었으므로 원위라고 하는 것이다.
[주D-009]고공(考工) : 한(漢)나라 때 설치하였던 관서 이름으로, 기계를 만드는 일을 담당하였다.
[주D-010]창해군(蒼海郡)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지금의 통구(通溝) 부근에 설치한 군현으로 원삭(元朔) 1년(기원전 128)에 설치했다가 2년 뒤인 원삭 3년에 폐지하였다. 예와 맥은 본디 지금의 통구 부근에 근거를 두고 있다가 세력이 약해지면서 후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으로 옮겨 왔는데, 후대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이 두 예와 맥을 혼동하여 예, 맥이 본디 강원도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잘못 동예전(東濊傳)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주D-011]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大關嶺)이다 : 단단대령의 위치에 대하여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하권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2]갈석산(碣石山) : 갈석산은 조선 후기 실학파(實學派)의 여러 학자들 이래로 ‘조선(朝鮮)’과의 관련 가능성이 지적되어 왔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여러 설이 있다. 《통전(通典)》에는 고구려 옛 경계인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灤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 등 세 가지 설을 열거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갈석산이 한반도의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 있었다는 견해가 예로부터 있었고, 또 그와는 반대로 낙랑군이 본래부터 평양이 아니라 난하 하류였다고 하는 견해가 있었다.《천관우, 古朝鮮史三韓史硏究, 일조각, 1989, 120쪽 주》 북한의 이지린은 산해관(山海關) 부근이라 하였다.《고조선연구 210쪽》
[주D-013]장성이 …… 시작된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長城起於北山’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長城起於此山’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이다. 이병도는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에 대한 고구려의 칭호로, 살(薩)은 청백(淸白)의 뜻인 ‘햘(hsial)’의 표현인 듯하다.” 하였으며,《국역삼국사기 235쪽 주》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소자하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소자하라는 강 이름의 소자는 살수(薩水)의 살(薩)이 음이 변한 것이며, 지금의 소자하 하류에는 사리채와 같이 ‘살’과 관련되는 지명도 있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4쪽》
[주D-015]공손강(公孫康) : 위(魏)나라 초기의 장수로 공손도(公孫度)의 아들이다. 공손도의 뒤를 이어 요동 태수로 있으면서 고구려 왕 이이모(伊夷模) 즉 산상왕(山上王)을 공격해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또 낙랑 지방에 세력을 뻗쳐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한(韓), 예(濊)도 공격하였다.
[주D-016]평양성(平壤城) : 이병도는, 여기에서 말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라 최초 동황성(東黃城) 소재의 지명인 듯하며, 동황성은 환도성(丸都城)의 별칭으로 지금의 통구(通溝) 지방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이 당시에 낙랑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 근처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7쪽 주》
[주D-017]미천왕(美川王) : 원문에는 ‘東川王’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17 미천왕조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8]유성(柳城) : 요령성(遼寧省) 조양(朝陽)이다.
[주D-019]교치(僑治) : 어느 지역이 망한 뒤 다른 지역에 치소(治所)를 두고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주D-020]원상(元象) : 동위(東魏) 효정제(孝靜帝)의 연호로, 존속 시기는 538년 한 해이다.
[주D-021]정광(正光) : 북위(北魏) 효명제(孝明帝)의 연호로, 존속 시기는 520~524년이다.
[주D-022]비여(肥如) : 하북성(河北省) 노룡현(盧龍縣) 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주D-023]칠중하(七重河) : 칠중은 지금의 적성(積城)이다.
[주D-024]패수(浿水) : 이병도는 이곳의 패수는 예성강(禮成江)을 가리킨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9쪽》
[주D-025]주양(走壤) : 춘천(春川)을 가리킨다.
[주D-026]장잠현(長岑縣) : 장잠현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황해도 풍천군(豐川郡)에 비정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128쪽》
[주D-027]서안평(西安平) : 한나라 때 설치한 서안평현(西安平縣)으로, 고구려가 뒤에 이곳을 차지하여 박작성(泊灼城)이라 하였다. 지금의 봉천(奉天) 요양현(遼陽縣) 동쪽 60리 되는 곳에 안평(安平)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곳이 옛날의 서안평고성(西安平故城)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2쪽 주》
[주D-028]군사를 …… 치자 : 이 부분이 원문은 ‘興兵伐韓滅’로 되어 있는데, 《삼국지》 삼한전에 의거하여 ‘興兵伐韓濊’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모용연(慕容燕) :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연(燕)나라를 말한다. 모용씨의 연나라는 3세기경에 만주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여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16년(285)에 농안(農安) 부근에 살던 부여족(扶餘族)을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몰아내었다.
[주D-030]화룡성(和龍城) : 위진남북조 시대 때 용성현(龍城縣)의 별칭으로, 지금의 조양(朝陽)이다.
[주D-031]인덕(麟德) :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존속 시기는 664~665년이다.
[주D-032]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주D-033]죽군성(竹軍城) : 죽군성의 위치에 대해서 이병도는 지금의 고흥군(高興郡) 두원면(豆原面)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572쪽》

 
해동역사 속집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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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5
부여(夫餘)

○ 부여는 본디 예(濊) 지역에 있는 북이(北夷)로, 북이의 왕자(王子) 동명(東明)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혹 북부여(北夫餘)라고도 칭하며, 지금의 봉천부(奉天府) 개원현(開原縣) 등지이다.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燕)은 북쪽으로 오환(烏桓), 부여(夫餘)와 이웃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부여열전(夫餘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읍루(挹婁), 서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였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사방이 2000리이고, 본디 예의 땅이다. 처음에 북이의 색리국왕(索離國王)의 아들인 동명(東明)이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掩淲水)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삼국지(三國志)》 부여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1000리이다. 사방이 2000리이며, 호구 수는 8만이다.
《진서(晉書)》 부여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와 접하였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나라 때 모용씨(慕容氏)가 요수(遼水)의 동쪽과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남쪽으로 선비와 접하였다고 한 것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국은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의 치소(治所) 경계 안이 모두 그 지역이다. 부여국의 왕성(王城)은 개원현성의 서남쪽에 있었다. 요(遼)나라에서 통주(通州)로 고쳤다.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부여국은 장성의 북쪽에 있으며, 현도에서의 거리가 1000리이다.” 하였는데, 지금의 도리(道里)로 계산해 보면, 부여에서 한(漢)나라 요동군(遼東郡)까지의 거리가 1천 4, 5백 리이며, 지금의 개원에서 요양성(遼陽城)까지의 거리는 겨우 300리밖에 안 된다. 그리고 적옥(赤玉)과 미주(美珠)가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경내에서 산출된다고 한다. 그런즉 부여부(夫餘府)는 마땅히 변새(邊塞) 밖의 영고탑(寧古塔)이나 흑룡강 등의 지역에 있어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에 있었다. 선비는 지금의 대요수(大遼水) 서북쪽 지역에 있었다. -《후한서》를 보면, “선비가 동쪽으로는 부여를 물리치고 서쪽으로는 오손(烏孫)을 쳐서 흉노(匈奴)의 옛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동쪽으로는 요동에 이르러서 부여, 예, 맥과 접경하였다.” 하였으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르기를, “처음에 선비 막호발(莫護跋)이 비로소 새외(塞外)로부터 요서(遼西)와 극성(棘城)의 북쪽으로 들어와 살면서 모용부(慕容部)라고 하였다.” 하였다.- 읍루는 지금의 영고탑이다. 약수(弱水)는 흑수(黑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진서》에 ‘읍루는 북쪽으로 약수에 닿았다’고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읍루는 동쪽에 있고, 부여는 서쪽에 있으므로 두 나라의 북쪽 경계가 모두 흑수가 경유하는 곳에 해당된다. 그리고 범엽(范曄)의 《후한서》에 이르기를, “부여에서는 적옥(赤玉)과 대주(大珠)가 산출된다.” 하였는바,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적옥과 미주(美珠)가 지금의 흑룡강에서 산출되니, 부여의 북쪽 경계는 흑수에 이른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부여의 사방 경계는 이를 미루어서 알 수가 있다.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발해가 부여의 옛 지역을 부여부로 삼았다.” 하였는데, 부여부는 지금의 개원현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조(渤海條)에 나온다.- 고구려전(高句麗傳)에는 이르기를, “고구려가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무릇 1000여 리였다.” 하였는데, 서남쪽의 바다는 지금의 여순(旅順) 앞바다이다. 여순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은 개원 등지에 해당된다. 그리고 《요사(遼史)》 및 《성경통지》에 의거하면, 개원현에 부여의 왕성(王城)이 있었는바, 부여가 지금의 개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범엽의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현도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여는 마땅히 개원의 동북쪽에 있어야 하며, 개원은 변경 지역에 불과하다. 생각건대, 부여가 처음에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지역에 있다가 그 뒤에 다른 나라의 침입을 받아서 개원 지역으로 옮겨 온 듯하다. 《자치통감》에 이르기를, “부여는 처음에 녹산(鹿山)에 살다가 서쪽으로 연(燕) 지역 가까이로 옮겨 왔다.”라고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듯하다.
또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부여(夫餘)가 넷이 있다. 첫 번째는 동부여(東夫餘)인데, 바로 금와(金蛙)의 나라이다. -금와는 북부여(北夫餘)로부터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 와 도읍하였으니, 이것이 동부여(東夫餘)이다. 예전의 도읍지에는 해모수(解慕漱)라고 칭하는 자가 와서 도읍하였다. 그 뒤 한나라 명제(明帝) 때 동부여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동부여의 지계(地界)에 대해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두 번째는 북부여인데, 바로 해모수가 세운 나라로, 중국사에서 부여라고 칭하는 나라이다. 세 번째는 졸본부여(卒本夫餘)인데, 바로 고구려로 주몽(朱蒙)이 세운 나라이다. 네 번째는 남부여(南夫餘)인데, 바로 백제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다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모두 예전의 칭호를 사용한 것이다.
○ 진(晉)나라 영화(永和) 2년(346)에 부여가 모용연(慕容燕)에게 멸망되어 부여의 땅이 고구려로 편입되었으며, 부여의 북쪽 지역은 뒤에 말갈(靺鞨)이 차지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나라 영화(永和) 2년이다. 당초에 부여가 녹산(鹿山)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녹산은 바로 그곳에 있다.- 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는데, 연에 대해 방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慕容儁)을 보내어 부여를 습격하게 하여 부여 왕 현(玄)과 부락 사람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위서(後魏書)》를 보면, 세조(世祖) 때 고구려의 지역이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옛 부여에 이르는 것으로 되어 있고, 《당서》에는 이르기를, “고구려는 북쪽으로 말갈(靺鞨)과 이웃하고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말갈의 서쪽은 돌궐(突厥)에 속하고 남쪽은 고구려와 닿아 있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여의 옛 지역은 고구려로 편입되었으며, 북쪽 지역은 말갈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부여의 남은 종족들은 옛 부여국의 동북방으로 옮겨 가 살면서 두막루(豆莫婁)라고 칭하였는데, 이곳은 부여의 옛 지역이 아니다.
《후위서》 두막루열전(豆莫婁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두막루국은 물길(勿吉)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낙양(洛陽)에서의 거리가 6000리이며, 옛 북부여이다. 실위(失韋)의 동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사방 강역이 2000리이다. 혹자는 본디 예, 맥의 지역이라고 한다.
《당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開元) 11년(723)에 달말루(達末婁) 수령(首領)이라는 자가 와서 조공하였는데, 달말루가 스스로 말하기를, “북부여의 후예인데, 고구려가 북부여를 멸망시키자 남은 사람들이 나하(那河)를 건너가 그곳에서 살았다.” 하였다. 나하는 혹 타루하(他漏河)라고도 하는데, 동북쪽으로 흘러서 흑수(黑水)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달말루는 바로 두막루의 음이 변화된 것이다. 물길(勿吉)은 바로 읍루(挹婁)인데,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고, 두막루는 또 읍루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런즉 그 지역은 부여의 옛 지역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를 옛 북부여라고 한 것은, 본부여(本夫餘)의 유종(遺種)임을 말한 것이고, 본디 예, 맥의 지역이었다고 한 것은 전사(前史)의 부여전(夫餘傳) 내용을 그대로 답습해서 쓴 것이다.

[주C-001]부여(夫餘) : 기원전 1세기경부터 300년까지 현재의 북만주(北滿洲) 농안(農安), 장춘(長春) 일대에 웅거하였던 우리나라 고대 국가의 하나이다. 그 강역은 동쪽으로는 읍루(挹婁), 남쪽으로는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다. 일찍부터 농경 생활을 하였으며, 중국의 철기 문명을 수입하고 은력(殷曆)과 복골(卜骨)을 사용하였다. 중국 정사(正史)에 보이는 부여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있으며, 이 밖에 《진서(晉書)》, 《통전(通典)》 등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멸망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으며, 대체로 4세기경부터 고구려의 판도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49~151쪽》
[주D-001]읍루(挹婁) : 만주에 있던 부족명으로,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목단강(牧丹江) 유역에서 연해주(沿海州) 및 두만강까지 퍼져 살았는데,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부여에 복속되어 있던 미개 종족으로 군장(君長)은 없고 각 부락마다 추장(酋長)이 있었으며, 모두 부여에 조부(租賦)를 바쳤다. 언어는 부여와 달랐으며, 주로 돼지를 사육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통상적인 유목민족과는 다른 특성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
[주D-002]선비(鮮卑) : 고대 아시아 민족의 하나이다. 전국 시대 무렵에 만주(滿洲)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쳤으며, 그 일파가 3세기경에 거란족(契丹族)으로 발전하였다.
[주D-003]약수(弱水) : 약수라는 이름은 《서경(書經)》 우공편(禹貢篇)에 처음 나오며,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병도(李丙燾)는 여기에서의 약수를 송화강(松花江)을 지칭하는 듯하다고 하였고, 《韓國古代史硏究 3쪽》 북한에서는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하였다.
[주D-004]색리국왕(索離國王) : 탁리왕(橐離王), 고리왕(櫜離王)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것이 고려(高麗), 혹은 고구려(高句麗)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17쪽》
[주D-005]엄호수(掩淲水) : 엄니수(掩泥水), 엄시수(掩施水)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기되나, 이는 엄니수(掩泥水)를 잘못 쓴 것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가 틀림없다. 엄리는 큰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이나,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17쪽》
[주D-006]요(遼)나라에서 통주(通州)로 고쳤다 : 원문에는 ‘遼開通州’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遼改通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장성(長城) :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말한다. 고구려 영류왕 14년(631)에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요하구(遼河口)까지 쌓았다.
[주D-008]부여성(夫餘城) : 지금의 요령성 서풍현 서풍에 있는 성자산산성이다.《조선전사 제3권, 124쪽》
[주D-009]동부여(東夫餘) : 《삼국유사》에는 북부여(北夫餘)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동해 가로 옮겨 가서 세운 나라라고 하였다. 부여의 일족(一族)으로 보인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333쪽 주》 동부여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해서 금서룡(今西龍)은 ‘백두산 북쪽에 남아 있던 부여족’일 것이라고 하였고, 이병도는 ‘함경남도 정평(定平) 이남에서 강원도 북단(北端) 사이에 있던 동예 지방’이라고 하였고, 천관우(千寬宇)는 ‘두만강 하류’로 추정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512쪽 주》
[주D-010]금와(金蛙) : 지신족(地神族)인 ‘곰’, 또는 ‘고마’에서 유래한 것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6쪽 주》
[주D-011]가섭원(迦葉原) : ‘갓벌’ 즉 변지(邊地)의 의미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32쪽 주》
[주D-012]해모수(解慕漱) : ‘해(解)’는 해, 즉 태양을 의미하며, ‘모수(慕漱)’는 고구려의 인명인 ‘명림어수(明臨於漱)’, ‘우수(于漱)’의 ‘어수’나 ‘우수’와 서로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편(東明王篇)에 해모수의 별명을 ‘천왕랑(天王郞)’이라고 한 것은 해모수의 의역명(意譯名)일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쪽 주》
[주D-013]백제(百濟) :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는 백제는 고구려(高句麗)의 오류인 듯하다고 하였고, 《東史綱目 附錄 上卷 考異》 이병도 역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너무도 거리가 맞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의 오기(誤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1쪽》
[주D-014]두막루(豆莫婁) : 고대 국가의 이름으로, 흑룡강(黑龍江) 동쪽, 동해 바닷가에 있었다.
[주D-015]물길(勿吉) : 물길은 말갈(靺鞨)의 별칭이다. 물길은 숙신족(肅愼族)의 하나로 고구려 북쪽 송화강(松花江) 하류에 있던 소국(小國)이다. 5세기 말에는 부여를 공략하는 등 강력한 팽창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6세기 말에 말갈에 흡수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D-016]실위(失韋) : 실위(室韋)로 표기하기도 한다. 거란의 동북방에 있는 종족 이름이다. 흑룡강 북부에 있다가 뒤에 거란에게 병합당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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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5
읍루(挹婁)

○ 읍루(挹婁)는 옛 숙신씨(肅愼氏)이다. 지금의 백두산(白頭山) 북쪽의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의 나라가 그곳에 있다.
《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渤海)의 왕성(王城)은 홀한해(忽汗海) 가에 있으며,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옛 숙신성(肅愼城)이 있다.
《송막기문(松漠記聞)》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숙신성은 사면이 약 5리가량 되는데, 옛 성의 성첩(城牒)이 발해의 국도(國都)에서 30리 되는 곳에 아직까지 남아 있으며, 역시 돌을 포개어 쌓아서 성 기초를 만들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라, 영고탑은 주(周)나라 때 숙신씨의 나라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불함산(不咸山)은 지금의 백두산이다. 홀한해는 지금의 호아합하(虎兒哈河)이다. 지금 영고탑의 동남쪽이 이 강가에 닿아 있는데, 이곳은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
○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서쪽으로는 오라 등지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흑수에 이르고, 남쪽으로 두만강까지 이른다.
《후한서》 읍루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읍루는 옛 숙신씨의 나라이다.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끝닿은 곳을 모른다. 토지는 산이 많아서 험하다.
《진서》 숙신씨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한다. 불함산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1일을 가야 하는 거리이다.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약수(弱水)에 닿아 있다. 그 땅의 경계는 넓어서 너비가 수천 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북옥저는 북쪽으로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니, 읍루의 남쪽 경계는 마땅히 이 강까지일 것이다. 읍루는 뒤에 말갈(靺鞨)이 되었는데, 말갈의 북쪽은 흑수(黑水) 지방을 다 포함한다. 그런즉 읍루의 북쪽 경계는 이를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진서》에서 이른 바 약수(弱水)라는 것은 흑수를 지칭하는 것인 듯하다. 읍루의 서쪽은 부여이다. 부여는 뒤에 고구려 지역이 되었는데, 고구려의 동쪽 경계는 장령(長嶺)까지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조에 나온다.- 그런즉 읍루의 서쪽 경계는 마땅히 오라 등지까지이다.
○ 원위(元魏)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수당(隋唐) 시대에는 말갈(靺鞨)이라고 하였으며, 그 뒤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후위서》 물길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며, 옛 숙신국이다.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는데, 너비가 3리 남짓 되며, 이름을 속말수(速末水)라고 한다.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속말수는 지금의 혼동강(混同江)이다.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열전(黑水靺鞨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은 숙신의 지역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돌궐(突厥)에 속해 있고, 남쪽은 고구려이며, 북쪽은 실위(室韋)이다. 땅은 수십 개의 부(部)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가 속말부(粟末部)로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태백산에 닿아 있으며, 속말수(粟末水)의 강가에 의지하여 산다.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돌부(汨咄部)이고, 그다음의 것이 안거골부(安居骨部)이며, 더 동쪽은 불녈부(拂涅部)이다.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있는 것이 흑수부(黑水部)이고, 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백산부(白山部)이다. 부와 부의 사이는 멀게는 3, 4백 리이고, 가깝게는 200리이다.
왕사(王師)가 평양성(平壤城)을 탈취하자, 골돌부와 안거골부 등이 모두 도망쳐 흩어졌으며, 유민(遺民)들은 발해(渤海)로 흘러 들어갔다. 오직 흑수부만이 강역을 완전하게 보존하여 16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 후세의 지지(地志)에서 봉천부(奉天府) 승덕현(承德縣)을 읍루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요사》의 잘못된 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심주(瀋州) 소덕군(昭德軍)은 본디 읍루국 지역이며, 발해에서 심주(瀋州)를 세웠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 승덕현은 주(周)나라 때의 숙신씨 지역이며, 한나라 때에는 읍루국이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발해에 속하였으며, 여기에 심주를 설치하였다. ○ 철령현(鐵嶺縣)은 주나라와 진(秦)나라 때 숙신씨의 지역이며, 한나라와 진(晉)나라 때에는 읍루국 지역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의 치소는 옛 읍루국이 있었던 곳이다. 동북쪽은 모두 읍루에 속하였으며, 북쪽에는 부여가 있었고, 남쪽의 바다 가까운 곳은 옥저에 속하였다. ○ 악교고성(樂郊古城)은 지금의 승덕현(承德縣) 치소(治所)이며, 요나라 때에는 심주의 치소였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심주는 본디 읍루국이었다” 하였고,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승덕현은 당나라 때 발해에 속하였으며, 대씨(大氏)가 심주를 두어 정리부(定理府)에서 관할하였다. 그런즉 승덕이 실제로 옛 읍루국이었음을 알 수가 있으며, 심주라는 이름은 발해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상고해 보건대, 승덕현에서 북쪽으로 철령현의 경계까지가 70리인데, 읍루국의 옛 성이 철령현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승덕현과 철령현이 다 같이 읍루국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명확한 증거이다. 혹자는 《후한서》에 나오는 “읍루가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을 근거로 하여, 읍루국이 요동에서 먼 곳에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후한서》를 보면,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부여는 남쪽으로 고구려와 접하였고, 동쪽으로 읍루와 접하였다.” 하였는데, 부여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만약 승덕현을 읍루라고 한다면 이 읍루는 도리어 부여의 서남쪽에 있는 것이 되니, 그래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리고 승덕 등지는 한위(漢魏) 시대에는 요동과 현도 두 군의 지역이었으며, 그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어 개원(開原) 남쪽과 오라(烏喇) 서쪽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였다. 그런즉 읍루가 어떻게 고구려 지역을 1000여 리나 뛰어넘어 승덕 등지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후세의 지지(地志)에서는 이런 사실을 살펴보지 않고 도리어 《후한서》의 내용을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된 병통의 근원을 따져 보면, 모두가 《요사》 지리지에 나오는 심주(瀋州)의 연혁(沿革)이 잘못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서》에 이르기를, “발해는 읍루의 옛 지역을 정리부(定理府)로 삼아 정주(定州)와 심주(瀋州)를 관할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발해의 심주는 마땅히 영고탑(寧古塔) 지방에 있었으며, 요나라의 심주는 지금의 승덕현이었다. 요나라에서 발해를 병합하고서는 백성을 옮기고 고을을 옮긴 다음 옛 호칭을 모칭(冒稱)하였는데, 《요사》 지리지를 찬하는 자가 심주라는 명칭이 읍루에서 나왔다는 것만을 알고 지금의 심주가 발해 때의 심주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하고서 마침내 읍루의 옛 지역이라고 한 것이니, 어찌 그리도 잘못되었단 말인가.
또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서는 흥경(興京)과 개원(開原) 역시 숙신과 읍루의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요사》의 잘못된 설을 끌어다가 붙인 것이다. 흥경은 본디 고구려 지역이었으며, 개원은 본디 부여 지역이었다. 그러니 숙신이나 읍루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주D-001]읍루(挹婁) : 만주에 있던 부족명으로,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목단강(牧丹江) 유역에서 연해주(沿海州) 및 두만강에까지 퍼져 살았는데, 중국의 사서(史書)에서는 숙신(肅愼)의 후예라고 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부여에 복속되어 있던 미개종족으로 군장(君長)은 없고 각 부락마다 추장(酋長)이 있었으며, 모두 부여에 조부(租賦)를 바쳤다. 언어는 부여와 달랐으며, 주로 돼지를 사육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통상적인 유목민족과는 다른 특성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8쪽 주》
[주D-002]숙신씨(肅愼氏) : 만주 동쪽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고조선 시대에 만주 동쪽에서 수렵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 서천왕(西川王) 때 종족의 일부가 병합되었고, 광개토왕 때 완전히 병합되었다. 뒤에 숙신의 후예로 추정되는 말갈(靺鞨), 읍루(挹婁)의 종족이 일어났다. 식신(息愼), 직신(稷愼) 등으로도 표기된다.
[주D-003]불함산(不咸山) :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다. 만주어의 ‘bulkan’에서 비롯되었는데 ‘bul’은 하늘을, ‘kan’은 임금을 나타내는 말로써, 불함산은 곧 천산(天山)을 뜻한다. 백두산은 이 밖에도 장백산(長白山), 도태산(徒太山), 도대산(徒大山) 등으로 표기된다.
[주D-004]발해(渤海)의 왕성(王城) : 동모산(東牟山)을 말한다.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게 굳어지고 있다.《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 신서원, 1994, 85쪽 주》
[주D-005]홀한해(忽汗海) : 홀한하(忽汗河)로,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을 말한다. 읍루하(挹婁河), 오루하(奧婁河)라고도 한다.
[주D-006]이 강가에 닿아 있는데 : 원문에는 ‘濱于北河’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濱于此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구만한국(寇漫汗國) : 《진서(晉書)》 비리등십국전(卑離等十國傳)에 나오는 구막한국(寇莫汗國)을 가리키는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56쪽 주》
[주D-008]속말수(速末水) :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을 가리킨다.
[주D-009]도태산(徒太山) : 원문에는 ‘徙太山’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다. 백두산은 이 밖에도 장백산(長白山), 도대산(徒大山), 불함산(不咸山) 등으로 표기된다.
[주D-010]《성경통지》에는 …… 것이다 : 이 부분은 《대청일통지》에서 《성경통지》를 인용하면서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마치 《대청일통지》를 찬(撰)한 자의 안설인 것처럼 인용하였으므로, 번역하면서는 그에 따라 하였다. 이 글을 예로 보면 중간에 나오는 ‘《성경통지》를 보면’이라고 한 구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성경통지》에 나오는 글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전체를 《성경통지》에서 인용한 것으로 번역하면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안설에 해당되는 부분은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의 안설로 처리하였다. ‘정리부(定理府)’는 발해의 15부 가운데 하나이다. ‘한나라와’에서 ‘지역이다’까지의 이 부분을 원문에는 ‘漢晉挹婁國志’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漢晉挹婁國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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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6
고구려(高句麗)


강역총론(疆域總論)
○ 고구려는 본디 동이(東夷)의 나라 이름이다. 한(漢)나라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멸망되어 진번군(眞番郡)에 속하였다가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 현도군(玄菟郡)의 치소(治所)를 이곳으로 옮겼으며, 지금의 흥경(興京) 등지이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으로 삼아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의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은 옛 구려호(句麗胡)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공안국(孔安國)의 《상서대전(尙書大傳)》을 보면, “무왕(武王)이 상(尙)나라를 쳐서 이기자 해동(海東)의 여러 오랑캐들 가운데 구려(駒驢)의 족속이 모두 길을 통하였다.” 하였는바, 구려(句麗)라는 명칭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할 적에는 항복한 나라들을 현으로 만들어 고구려를 진번군에 속하게 하였다가 시원 5년에 이르러서 현도군의 치소를 이곳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흥경이 바로 그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 현도조(四郡玄菟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한나라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에 고주몽(高朱蒙)이 졸본천(卒本川)에 나라를 세우고는 또다시 고구려라고 하였다. 졸본은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에서 강 건너편쪽 지역이다.
《후한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요동(遼東)에서 동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은 조선(朝鮮), 예(濊), 맥(貊)과 접하였고, 동쪽은 옥저(沃沮)와 접하였고, 북쪽은 부여와 접하였으며, 사방 2000리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은데, 백성들이 산골짜기를 따라 거주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선과 예, 맥은 평안도 지역이고, 옥저는 백두산 남쪽 대간(大幹) 동쪽 지역이며, 부여는 개원현이다. 이것으로 미루어서 따져 보면 고구려의 사방 경계를 대략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주몽(朱蒙) 초기에는 현도군의 경내에 부쳐 살아 사방 경계가 한(漢)나라의 한 현의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런즉 범엽(范曄)의 《후한서》에서 이른 바는 반드시 고구려가 개국한 초기에 이미 이와 같았다는 것은 아니다. -졸본천에 대한 안설(按說)은 흘승골성조(紇升骨城條)에 나온다.
○ 그 뒤에 강역이 점차 커져서 후한 초기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한나라 요동군에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청천강(淸川江)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부여에 접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명왕(東明王) 10년(기원전 28) -한나라 성제(成帝) 5년- 에 북옥저를 멸하고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 유리왕(琉璃王) 33년(14) -왕망(王莽) 6년- 에 양맥국(梁貊國)을 멸하고 군사를 보내어 한나라의고구려현(高句麗縣)을 습격해 취하였다. ○ 대무신왕(大武神王) 9년(26) -한나라 광무제 2년- 에 개마국(蓋馬國)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았다. ○ 태조왕(太祖王) 4년(56) -광무제 32년- 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옥저와 북옥저는 지금의 함경도 지역이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은 지금의 흥경이며, 개마국은 지금의 삼수(三水)ㆍ갑산(甲山) 등지이고,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으로 강 남쪽 지역은 바로 낙랑의 경계 지역이며 -이상에 대한 내용은 모두 사군조(四郡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창해는 지금의 관북 지방의 경흥(慶興) 앞바다이다. 이때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그 지역을 병합하여 차지하였으니, 고구려의 지경이 점점 커진 대개를 알 수가 있다.
또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태조왕 3년(55)에 요서(遼西) 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를 방비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한나라의 요동군과 현도군이 모두 요수(遼水)의 동쪽 강안(江岸)에 있으면서 날마다 고구려와 싸움을 하였는데, 고구려가 어떻게 요수를 넘어가서 10개의 성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필시 한때에 잠시 탈취하여 점거하였다가 곧바로 빼앗긴 것이다.
○ 이때 고구려는 졸본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또 환도성(丸都城)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들은 모두 압록강(鴨綠江) 북쪽 지역에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국내성조(國內城條) 및 환도성조(丸都城條)에 나온다.
○ 조위(曹魏) 때에는 고구려가 점차 서북쪽 경계 지역을 잃어서 드디어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사방이 2000리이고, 호구 수가 3만 호이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후한 때에는 사방이 2000리였다가 위(魏)나라 때 이르러서는 남북 간의 거리가 점차 좁혀져 겨우 1000리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지》를 보면, 한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고구려를 쳐서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락(邑落)을 불태웠으며, 위나라 정시(正始) 연간에는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격파하고 환도성을 도륙하였다. 대개 공손씨(公孫氏)가 이때 한창 강성하여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지역을 모두 관할하면서 요수(遼水)와 패수(浿水) 사이의 지역을 다 차지하고 있었는바, 고구려의 변경 지역이 형세상 반드시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옛 도성이 잔파되자 다시는 지탱할 수가 없어서 남쪽인 평양으로 도성을 옮긴 것이다. 그런즉 이 당시에 고구려가 쇠약했다는 것은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통전》에서 이른 바는 맞는 말이다.
○ 서진(西晉) 말기에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낙랑을 병탄하였다. 진송(晉宋) 즈음에는 고구려의 사방 경계가 북쪽으로는 개원현(開原縣)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황해도의 바다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에 닿았다.
《후위서(後魏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나라 세조(世祖)가 이오(李敖)를 고구려에 보냈다. 이오가 고구려 왕이 있는 평양성에 이르러 그 나라의 여러 가지 사정을 탐문하고는 말하기를, “요동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르며, 북쪽으로는 옛 부여(夫餘)에 이릅니다. 백성들의 호구 수는 전위(前魏) 때에 비해 3배에 이르며, 그 지경이 동서는 2000리이고, 남북은 1000여 리입니다. 백성들은 모두 토착민이며, 산골짜기를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후위 태연(泰延) 1년(435)에 이오(李敖)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는바, 바로 송(宋)나라 문제(文帝) 원가(元嘉) 12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책성은 지금의 부령부(富寧府)이다. -발해조(渤海條)에 나온다.- 소해는 지금의 해주(海州) 남쪽 바다에서 곧바로 건너가 충청도 당진(唐津) 등지의 앞바다에 이르는 지역으로, 《위서(魏書)》에도 “백제는 소해의 남쪽에 처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을 이른 것이다. 대개 발해(渤海)는 한쪽 구비가 충청도와 황해도 사이에 끼어 있어 경기(京畿) 지방이 그 동쪽에 위치해 있는바, 해주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자는 그곳을 소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여는 지금의 개원현이다. 부여는 진(晉)나라 영화(永和) 2년(346)에 모용연(慕容燕)에게 멸망당해 그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병합되었으며, 현도와 요동 역시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조(四郡條)에 나온다.- 그런즉 요수 동쪽 지역은 모두 고구려가 관할하였다.
또 살펴보건대, 동한(東漢) 초기에는 고구려가 낙랑과 살수(薩水)로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위나라 정시(正始) 8년(247)에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 뒤부터는 대방군, 낙랑군과 해마다 싸움을 하였다. 진(晉)나라 건흥(建興) 초기에 이르러서는 낙랑의 전 강역이 마침내 고구려에 병탄되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에 남쪽 경계가 해주의 바다에까지 이른 것이다.
○ 수당(隋唐) 시대에는 고구려의 사방 경계가 동쪽으로는 창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넜으며,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오라(烏喇) 등지까지였고, 남쪽으로는 한강(漢江)에 이르렀는바, 그 지역이 총 5부(部) 176성(城)이었다.
《후주서(後周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이 동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2000리가 되고, 남쪽으로는 백제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이웃하여 1000여 리이다. 치소는 평양성이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 점차 커져 동서가 6000리였다.
《구당서(舊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51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신라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영주(營州)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백제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말갈과 접경하였다. 동서의 거리는 3100리이고, 남북의 거리는 2000리이다. 바깥에 주현(州縣) 60여 성(城)을 설치하였다. ○ 정관(貞觀) 5년(631)에 고구려가 장성(長城)을 수축했는데, 동북쪽의 부여성(夫餘城)에서 시작해 서남쪽의 바다에까지 이르니, 1000여 리였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그 지역이 동쪽과 서쪽은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요하(遼河)에 이른다.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열전(黑水靺鞨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말부(粟末部)는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태백산(太白山)에 닿아 있어서 고구려와 서로 접해 있으며, 속말수(粟末水)의 강가에 의지하여 산다. 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백산부(白山部)로, 백산부는 본디 고구려에 신하로 복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唐書)》를 보면, “발해가 고구려의 옛 지역을 장령부(長嶺府)로 삼았다.” 하였는데, 장령은 지금의 혼동강(混同江) 서쪽의 오라(烏喇), 영길(永吉) 등지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조에 상세히 나온다.- 그렇다면 동쪽으로는 오라에서부터 서쪽으로는 개원현에 이르는 지역이 고구려의 북쪽 경계이다. 《수서(隋書)》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요수 서쪽에 무려라(武厲邏)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금주(金州), 복주(復州), 해주(海州)가 모두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그렇다면 북쪽으로는 개원현에서 요수 서쪽을 따라 광녕(廣寧)과 여순(旅順)의 바다에 이르는 곳이 바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인데, 장성(長城)의 수미(首尾)는 바로 이 경계를 따라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말갈의 속말부는 백두산 북쪽에 있고, 백산부는 속말부의 동쪽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신하로 복종하였다. 그런즉 고구려의 동북쪽 경계가 백두산 동쪽에서 뻗어 두만강의 안팎에까지 이른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살펴보건대, 고구려가 낙랑을 병합한 이후에 남쪽으로는 신라, 백제와 이웃하여서 서로 간에 강역을 빼앗기고 빼앗고 하여 몹시 어지러웠다. 유송(劉宋) 시대에는 고구려가 국경을 개척하여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까지 이르렀으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때에는 다시 신라에게 빼앗겨서 그 남쪽 경계가 한산(漢山)까지에 불과하였다. 고려(高麗)의 서희(徐煕)가 칭한바 ‘삼각산(三角山) 북쪽이 고구려의 지역이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남쪽 경계의 연혁에 대해서는 신라조(新羅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처음에 중국의 동북쪽 모퉁이에서 일어났는데, 한나라가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이래로 호령(號令)이 중간에 쇠약해졌으며, 다시 왕망(王莽) 때 경시(更始)의 난리를 겪어서 고구려가 그 강역을 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북쪽은 바로 부여(夫餘)인데, 부여는 유리왕(琉璃王)에게 격파되어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부여의 서북쪽은 바로 흉노(匈奴)인데, 흉노는 다섯 선우(單于)와 남북(南北) 선우의 난리를 겪으면서 도망쳐 숨어 그 지역이 또 비었다. 이에 고구려가 그 틈을 타고서 남쪽으로 침략하고 북쪽으로 정벌하여 토지가 날로 넓어졌다.
건무(建武) 연간에는 고구려가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노략질하였는데, 우북평은 바로 순천부(順天府)이고, 어양은 우북평의 서쪽에 있고, 상곡은 또 어양의 서쪽에 있고, 태원은 또 상곡의 서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한나라의 북쪽 변경 지역으로, 흉노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고구려가 이곳을 침략하면서 사군(四郡)의 지역을 경유하였는바, 일찍이 북쪽으로 그 땅을 개척하고 점차 서쪽으로 뻗어서 사군의 경계와 서로 가까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를 호(胡)라고 칭하나 지역은 실로 북쪽과 가까우며, 지금의 압록강 동쪽 연안과 처음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뒤에 비록 동쪽에서 군사를 써서 살수(薩水)를 경계로 하였으나, 그 지역은 역시 고구려의 변경 지역에 불과하였다.
그 뒤 중국 지역에 삼국(三國)이 정립해 대치하고 있을 적에 공손강(公孫康)이 바다 밖으로 기세를 펼치고 관구검(毌丘儉)이 환도성(丸都城)을 도륙하여 고구려가 마침내 쇠약해졌다. 《통전》에서 이른 바 고구려가 조위(曹魏) 때에 이르러서는 남북 간의 거리가 점차 줄어들어 겨우 1000여 리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뒤에는 또 모용씨(慕容氏)가 요수의 북쪽에서 일어나 근공책(近攻策)을 쓰자 고구려가 지탱하지 못하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와 평양에 도읍하여 드디어 동방의 나라가 되었다. 그 뒤에는 또다시 모용씨가 잔멸(殘滅)되고, 풍씨(馮氏)가 투항해 오고, 두 위(魏)나라가 패권을 다투면서 중국 지역이 전란에 시달렸다. 그러자 고구려가 다시 강성해져서 국경을 넓혔다. 《통전》에서 이른 바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서 국토가 점차 커져 동서 간의 거리가 6000리였다고 하는 것은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 지금 성경(盛京)에서 관할하고 있는 요동의 군현들은 모두 고구려의 지역이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진(魏晉) 시대 이후로 중국에 병란이 일어나자 고구려가 내침하여 요동 지방을 병합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의주(義州), 광녕(廣寧) 동쪽, 개원(開原) 남쪽의 요동 전 지역이 모두 고구려의 옛 강역이었다. ○ 흥경(興京)은,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물길(勿吉)의 지역이었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의 지역이었으며, 당(唐)나라 초기에는 연주(燕州)를 설치하였다. ○ 요양주(遼陽州)는, 주(周)나라 때에는 청주(靑州)의 지역이었고,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여 조선의 서쪽 경계가 되었고, 전국(戰國) 시대에는 연(燕)나라에 속하였고, 진(秦)나라 때에는 요동군이 되었고, 한나라 때에는 양평(襄平), 요양(遼陽) 두 현이 되었고, 후위(後魏) 때에는 양평현(襄平縣)으로 요동군의 치소를 삼았다. 그 뒤에 고구려국에 편입되었으며,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 지역이었고, 당나라 태종(太宗) 때 고구려를 정벌하여 요동성을 얻어 요주(遼州)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버리고 지키지 않았다. 고종(高宗) 때 또다시 탈취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치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 해성현(海城縣)은, 위나라 때에는 평주(平州)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여 비사성(卑沙城)이 되었다. 당나라 때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여 이 성을 얻어 개주(蓋州)를 두어 통치하였다. ○ 개평현(蓋平縣)은, 주(周)나라 때에는 조선에 속하였고, 위나라 때에는 평주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초기에는 그대로 내려오다가 후기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여 개모성(蓋牟城)이 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 복주(復州)는,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였고, 위나라 때에는 평주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으며, 수나라 때에도 같다. ○ 금주(金州)는,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로 본디 진한(辰韓)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그대로였다가 후기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처음에는 금주를 두어 통치하다가 그 뒤에 발해의 삼로군(杉盧郡)에 속하였다. ○ 영해현(寧海縣)은,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였고, 진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처음에는 금주를 두어 통치하였다. ○ 의주(義州)는, 주나라 초기에는 조선의 경계였다가 그 뒤에 연(燕)나라에 속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 지역이 되었다. ○ 광녕현(廣寧縣)은 주나라 초기에는 조선의 경계였다가 그 뒤에 연나라에 속하였으며,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무의부(巫醫府)를 설치하였다. ○ 봉황성(鳳凰城)은, 주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였고,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에 속하여 경주(慶州) 지역이 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안동도호부에 속하게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경(盛京)은 옛 기주(冀州)와 청주(靑州)의 영역으로, 순(舜) 임금이 기주의 동북쪽을 나누어서 유주(幽州)로 삼고, 청주의 동북쪽을 나누어서 영주(營州)로 삼았다. 하(夏)나라 때에는 유주와 영주를 없애서 기주의 영역으로 병합시켰다. 상(商)나라 때에는 기주의 이름을 고쳐서 총칭하여 영주(營州)라고 하였다. 주(周)나라 초기에는 유주란 이름을 다시 회복시켰는데, 이때에는 숙신국(肅愼國)이 그 동북쪽에 있고, 조선국이 동남쪽에 있었는데 실제로 기주와 영주 지역을 아울러 차지하고서 함께 유주의 경내가 되었다. 전국(戰國) 시대에는 연(燕)나라에 속하였다. 진(秦)나라 때에는 요동(遼東), 요서(遼西) 두 군을 설치하였다.
한나라 초기에는 그대로 답습하여 유주에 속하였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기원전 107)에 조선 지역을 평정하고는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의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기원전 82)에는 진번과 임둔 두 군을 없애서 낙랑과 현도에 편입시켰다. 이에 요동, 요서, 현도 세 군의 지역이 되었으며, 그 동쪽은 고구려 지역이 되고, 북쪽은 부여, 읍루 등 여러 나라의 지역이 되었다. 그 뒤 한나라 건무(建武) 13년(37)에 요동은 청주에 속하였고, 24년(48)에는 도로 유주에 속하였다. 안제(安帝) 때에는 요동의 속국도위(屬國都尉)를 더 설치하였다.
한나라 말기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차지하였다. 위(魏)나라에서 공손씨(公孫氏)를 물리치고는 동이 교위(東夷校尉)를 두었는데, 치소는 양평(襄平)이었으며, 요동, 현도 등 다섯 군을 나누어서 평주(平州)를 설치했다가 그 뒤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요동군을 고쳐서 국(國)으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회복시켰으며, 다시 요동, 현도 등의 군을 나누어서 그대로 평주에 예속시키고서는 모용외(慕容廆)를 자사(刺史)로 삼았다. 태흥(太興) 2년(319)에 모용외가 차지하였다. -연록(燕錄)을 살펴보면, 모용외가 진나라 태흥 2년에 비로소 평주 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를 축출하고 요동을 차지한 다음, 그의 아들인 모용인(慕容仁)을 시켜 진무(鎭撫)하게 하였으며, 4년(321)에 진나라에서 모용외를 평주목(平州牧)에 제수하였다. 이로부터 평주의 치소가 극성(棘城)으로 옮겨졌으며, 이 이전에는 요동에 치소가 있었다.
태화(太和) 5년(370)에는 진왕(秦王) 부견(苻堅)에게 속하였고, 태원(太元) 연간에는 후연(後燕)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는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었다. -대개 모용농(慕容農)이 요동을 회복하면서부터 모용보(慕容寶)에 이른 뒤 얼마 안 되어 다시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는데, 그것이 어느 해의 일이었는지는 모른다.- 후위(後魏) 및 수(隋)나라 때에는 요하(遼河) 동쪽 지역이 고구려에 속하였다. -살펴보건대, 《북사(北史)》 고구려열전을 보면, 후위 때에 고구려는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를 건너서 동서 간의 거리가 2000리였으며, 《통전》에도 이르기를, “안동도호부는, 후위 때 고구려가 도읍한 지역이다.” 하였는바, 대개 후위 때에는 요동, 현도의 옛 지역이 이미 고구려에 속하였다. 《후위서》 지형지(地形志)를 보면, 요동군의 치소는 고도성(固都城)이었는데, 이는 영주(營州)의 경계 안에 있는 교치(僑治)였지, 한나라의 옛 군이 아니었다.- 요하 서쪽의 지역은 영주(營州)의 동쪽 경계가 되고, 또 그 동북쪽은 말갈국(靺鞨國) -후위 때의 이름은 물길(勿吉)이고, 수(隋)ㆍ당(唐) 시대에는 말갈이라 칭하였다.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으며, 7부(部)가 있었는데, 바로 옛 숙신씨이다.- 이다.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에 고구려를 정벌하고서는 요주(遼州), 개주(蓋州), 암주(巖州)를 설치하였으며, 총장(總章) 초에는 고구려를 평정하고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고, 9년(676)에는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치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둔(高麗屯)은, 봉천부(奉天府)로부터 동북쪽으로 70리를 가면 의로참(懿路站)에 이르고, 다시 70리를 가면 고려둔참(高麗屯站)에 이른다. ○ 개소둔(蓋蘇屯)은, 당나라 때 고구려의 개소문(蓋蘇文)이 살던 곳이므로 이렇게 명명하였다. 빈주성(嬪州城)에서 서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의 경가장(耿家莊)에 있다. ○ 고려가(高麗街)는, 요양주성(遼陽州城)에서 동남쪽으로 25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흥경(興京)에는 고려고성(高麗故城)이 성에서 남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위는 3리 30보(步)이고, 남쪽과 서쪽에는 각각 한 개의 문이 있다. ○ 영해현(寧海縣)에는 고려구성(高麗舊城)이 현성(縣城)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 광녕현(廣寧縣)에는 고려판성(高麗坂城)이 현성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위가 1리 72보이며, 남쪽으로 한 개의 문이 있다. ○ 안와산(鴈窩山)은 개평현에서 동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위에는 고려성(高麗城)이 있다.
○ 당나라 고종(高宗) 때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요서(遼西)로 옮겼다.
《구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1년(668) 9월에 사공(司空)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나라 전체가 오부(五部)로 나누어져 있으며, 성이 176개, 호구 수가 69만 7000호였다. 이해 12월에 고구려의 지역을 9개 도독부(都督府), 42개 주(州), 100개 현(縣)으로 나누었으며, 안동도호부를 평양성에 설치하여 통괄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우두머리를 택해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을 제수하였고, 장군(將軍)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안동부를 진무하게 하였다. 상원(上元) 3년(676) 2월에 안동도호부를 요동군의 옛 성으로 옮겨 설치하였으며, 의봉(儀鳳) 2년(677)에 또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성력(聖曆) 1년(698) 6월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개칭하였고, 신룡(神龍) 1년(705)에 다시 안동도호부라 하였으며, 개원(開元) 2년(714)에 안동도호부를 평주(平州)로 옮겨 설치하였고, 천보(天寶) 1년(742)에 요서고군(遼西故郡)의 성으로 옮겨 설치하였고, 지덕(至德) 연간 이후로는 폐지하였다. 처음에 설치하였을 때 -살펴보건대, 평양에 있을 때를 말한다.- 에는 관할하는 기미주(羈縻州)가 14개였고, 호구 수가 1582호였으며, 경사(京師)에서의 거리가 4625리였고, 동도(東都)까지의 거리가 3820리였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하고 9개의 도독부와 42개의 주를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남은 주는 14개뿐이었다. ○ 고구려의 항호(降戶)는 14주 9도독부이다. 남소주(南蘇州), 개모주(蓋牟州), 대나주(代那州), 창암주(倉巖州), 마미주(磨米州), 적리주(積利州), 여산주(黎山州), 연진주(延津州), 목저주(木底州), 안시주(安市州), 제비주(諸比州), 식리주(識利州), 불녈주(拂涅州), 배한주(拜漢州),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 가물주도독부(哥勿州都督府), 위락주도독부(衛樂州都督府), 사리주도독부(舍利州都督府), 거소주도독부(居素州都督府), 월희주도독부(越喜州都督府), 거조주도독부(去朝州都督府), 건안주도독부(建安州都督府)이다. -《구당서》에 이르기를, “무릇 이들 14개의 주는 모두 성지(城池)가 없다. 이는 고구려의 항호(降戶)들을 여러 군진(軍鎭)에 흩어져 살게 하고 그 우두머리를 도독, 자사로 삼아 기미(羈縻)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 《자치통감》 주(注)에 이르기를, “이적(李勣)이 설치한 42개 주 가운데 지리지에 남아 있는 것은 14주뿐이다.” 하였다.
《구당서》 본기(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종 함형(咸亨) 1년(670) 1월 신묘에 요동의 지역을 나누어서 주현(州縣)으로 삼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 지리지에 남아 있는 9부 14주 가운데 《구당서》 지리지에 나오는 것은 오직 신성주도독부, 요성주도독부, 가물주도독부, 건안주도독부 등 4부와 남소주, 목저주, 개모주, 대나주, 창암주, 마미주, 적리주, 여산주, 연진주, 안시주 등 10주로, 모두 합하여 14주가 될 뿐이며, 그 나머지 제비주 이하 4주와 위락주 이하 5부는 모두 실려 있지 않다. 이적이 올린 서장(書狀)에 실려 있는 압록강 북쪽의 성은 오직 신성, 요성 두 주와 안시, -이상은 항복하지 않은 성이다.- 목저, 남소, -이상은 이미 항복한 성이다.- 적리, 여산 -이상은 도망한 성이다.- 등 다섯 성뿐이다. 위에서 말한 14주는 모두 압록강 북쪽에 있어야 마땅한데, 이적이 아뢴 것은 단지 다섯 성뿐이니, 아마도 전문(全文)이 아닌 듯하다.

성읍(城邑)
○ 흘승골성(紇升骨城)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국은 큰 강에 의지하여 산다.
《후위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몽(朱蒙)이 부여(夫餘)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도중에 큰 강 하나를 만났다.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는데,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그를 위해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이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되었다. 주몽이 드디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른 다음, 거기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후주서》에는 흘두골성(紇斗骨城)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몽이 가다가 엄시수(淹淲水)에 이르렀는데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무사히 그 강을 건너게 되었다. 주몽이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러 토질이 비옥하고 산하가 험고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궁실(宮室)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단지 비류수(沸流水)의 물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고 하였다. 이때는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1년(기원전 38)이었다. 그 지역은 말갈(靺鞨)의 부락(部落)과 연접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침략당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드디어 그들을 쳐 물리쳤다. 그러자 말갈이 두려워하면서 복종해 감히 고구려를 침범하지 못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흘승골성은 바로 졸본천(卒本川)으로,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건너편 지역이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요동에서 동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요동은 한나라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현(襄平縣)이다. -《대청일통지》에는 양평이 지금의 승덕현(承德縣)과 요양(遼陽)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또 부여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지금 개원현의 동남쪽에서 양평현의 동쪽 1000리 되는 곳까지 가면 여연(閭延)의 강 북쪽에 이른다. 주몽이 이미 졸본에 도읍하였는데, 유리왕(琉璃王) 21년(2)에 교제(郊祭)의 희생(犧牲)으로 쓸 돼지가 달아나는 바람에 국내성(國內城)까지 쫓아가서 잡았다. 무릇 하늘에 교제를 지내던 장소는 반드시 서울 가까운 곳에 있었을 것이며, 달아난 돼지도 또 그다지 멀리 가지 못하였을 것이니, 졸본은 국내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국내성은 지금의 만포진(滿浦鎭)에서 강 건너편에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졸본천이나 비류수는 모두 한곳에 있는데, 비류수는 환도(丸都)의 서쪽에 있고, 환도는 초산부(楚山府)의 강 바깥쪽에 있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참고해 보면 졸본이 여연의 강 북쪽임을 더욱더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천부(成川府)를 졸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설로, 《문헌비고》에서 변증한 것이 맞다. 내 생각으로는, 졸본은 바로 발해(渤海) 솔빈부(率賓府)의 음이 변한 것이며, 솔빈은 바로 금(金)나라의 휼품로(恤品路)인데, 휼품은 지금의 압록강 상류의 내외(內外)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연혁조(高麗東北界沿革條)에 나온다.- 그러니 졸본의 지역을 어찌 다른 곳에서 찾겠는가.
○ 국내성(國內城)
《후주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국내성(國內城)이 있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馬訾水)는 일명 압록강(鴨綠江)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국내성의 남쪽을 경유하여 또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한 강과 합쳐지는데, 바로 염난수(鹽難水)이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불내성(不耐城)은 바로 국내성이다.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인용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유리왕(琉璃王) 21년(2) -한나라 평제(平帝) 2년- 3월에 교제(郊祭)의 희생(犧牲)으로 쓸 돼지가 달아나자, 설지(薛支)가 뒤쫓아가 국내위나암(國內尉那巖)에 이르러 잡았다. 설지가 돌아와서 왕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국내위나암에 이르러서 살펴보니, 그곳의 산수(山水)가 깊고 험하며, 토질은 오곡(五穀)에 알맞았으며, 또 들짐승이나 물고기의 산출(産出)도 많았습니다. 만약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이익이 무궁할 뿐만 아니라 또한 병란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22년(3) 겨울 10월에 왕이 국내위나암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국내성은 마땅히 강계부(江界府)의 만포진(滿浦鎭) 강 건너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나온다.- 국내성은 혹 불내성(不耐城)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불이성(不而城)이라고도 칭하는데, 이는 모두 국내의 음이 변한 것이지, 《한서》 지리지에 실려 있는 낙랑의 불이성(不而城)은 아니다. 김부식(金富軾)이 ‘국내성은 혹 불이성이라고도 한다’ 하여, 《한서》 지리지에 나오는 불이성을 가리킨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환도성(丸都城)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하였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고구려 왕 이이모(伊夷模)가 다시 새 나라를 세워 환도산(丸都山)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비류수(沸流水)의 동쪽에 있었다.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환도의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았다. 《삼국지》 관구검전(毌丘儉傳)을 보면,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에 올라갔다.’고 하였는바, 그 험함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도성은 조선 국성(國城)의 동북쪽에 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험고함을 의지하여 성을 쌓고는 환도(丸都)라고 하였는데, 주위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았다. 두우(杜佑)의 《통전》을 보면, “한나라 건안(建安) 연간에 고구려 왕 이이모가 다시 나라를 세우고는 환도산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비류수의 동쪽에 있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7년(246)에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가 자주 반란을 일으켜 침입한다는 이유로 제군(諸軍)을 독려하여 현도(玄菟)로 출병하여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 위궁(位宮)이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정현(赬峴)에까지 이르러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성에 올라가 성을 도륙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고구려가 다시 이곳에 도읍하였다. 진나라 함강(咸康) 8년(342)에 고구려가 모용황(慕容皝)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는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치려고 도모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중병(重兵)으로 북쪽 길을 방비하고 있었는데, 모용황이 몰래 경병(勁兵) 4만 명을 거느리고 남쪽 길을 통해 불시에 침입하였다. 그러자 고구려 왕고쇠(高釗)가 패주하여 드디어 환도로 들어가서 그 성을 무너뜨리고 크게 약탈한 다음에 돌아왔다.” 하였다. 《당서》 지리지를 보면, “압록강 입구로부터 뱃길로 100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동북쪽으로 가되 모두 520리를 가면 환도성에 이른다.”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산상왕 2년(198) -한나라 헌제(獻帝) 9년- 에 환도성을 쌓았다. 13년(209) 10월에 왕이 도읍을 환도로 옮겼다. ○ 동천왕 20년(246) -위주(魏主) 방(芳) 7년- 에 위나라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도륙하였다. 21년(247)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 고국원왕 12년(342) -진(晉)나라 성제(成帝) 17년- 봄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11월에 연왕(燕王) 모용황이 침략하여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무너뜨렸다. 13년(343) 7월에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압록강 입구로부터 뱃길로 100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올라가면 박작구(泊灼口)에 이르고, 또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환도현성은 옛날에 고구려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이르기를, “녹주(綠州)는 본디 고구려의 고국(故國)이 있던 곳으로 발해에서는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라고 불렀다. 환주(桓州)는 고구려의 중도성(中都城) -바로 환도성의 오기(誤記)이다.- 으로 고구려 왕이 이곳에 궁궐을 창립하고는 신국(新國)이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모용황에게 패하여 궁실이 분탕질당하였다. 녹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고국(故國)이라고 한 것은 유리왕(琉璃王)의 국내성(國內城)을 두고 한 말이다. 발해에서는 이곳에 신주(神州)를 두어 압록부(鴨綠府)의 치소로 삼았으며, 요(遼)나라에서는 이를 녹주(綠州)로 고쳤다. 신국(新國)이라고 한 것은 산상왕(山上王)의 환도성을 두고 한 말이다. 발해에서는 이곳에 환주를 설치하였으며, 요나라에서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신당서》 지리지의 설을 따르면 압록강 입구에서 뱃길로 동북쪽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에 이르는데, 박작구는 지금의 의주(義州) 강 건너편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박작성조(泊灼城條)에 나온다.- 여기에서 또다시 강을 따라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성에 이르는데, 환도성은 바로 고구려의 환도성이고 요나라의 환주로, 지금의 초산부(楚山府) 강 북쪽 지역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강을 따라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이르는데, 신주는 바로 고구려의 국내성이고 요나라의 녹주로, 지금의 만포진(滿浦鎭) 강 북쪽 지역이다. 《요사》 지리지에서 이른 바 ‘환주는 녹주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통전》을 보면, “압록강은 국내성 남쪽을 경유해 흐른다.”고 하였고, 이적(李勣)이 올린 서장(書狀)을 보면, 압록강 북쪽의 이미 항복한 11개의 성 가운데 그 하나가 국내성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국내성은 분명히 압록강의 서북쪽에 있었으며, 환도성은 또 국내성의 서남쪽에 있었다. 그런즉 지금의 초산부 강 건너편 지역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책구루(幘溝漊)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 왕이 한나라 때에는 항상 현도군에서 조복(朝服)과 의책(衣幘)을 받아갔다. 그 뒤에는 현도군의 동쪽 경계 지역에 작은 성을 쌓고서 그 안에 조복과 의책을 놓아둔 다음 세시(歲時)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이 이 성을 책구루라고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책구루는 지금의 흥경부(興京府) 경내에 있다.
○ 박작성(泊灼城)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22년(648)에 설만철(薛萬徹)이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압록수(鴨綠水)에서 100여 리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박작성에서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머물렀다. 설만철이 박작성의 성주(城主) 소부손(所夫孫)을 참수한 다음, 진격하여 박작성을 포위하였다. 박작성은 산세를 따라 성을 쌓고 압록수로 가로막혀 튼튼하기 그지없었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삼가 살펴보건대, 부의 치소는 옛 한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에서 남쪽으로 압록강 북쪽의 박작성까지가 700리인데, 박작성은 옛 안평현(安平縣)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안평고성(西安平故城)이 요양주(遼陽州)의 성 동쪽에 있는데, 한(漢)나라 때 현을 두어서 요동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후한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삼국지》 오서(吳書)를 보면, “손권(孫權)이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 왕 고궁(高宮)을 선우(單于)로 책봉하게 하자, 진순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하였다.” 하였는데, 안평구는 바로 안평현(安平縣)의 해구(海口)이다. 그리고 진(晉)나라 함강(咸康) 7년(341)에 석호(石虎)의 장수인 왕화(王華)가 수군을 거느리고서 바닷길을 통하여 연(燕)나라의 안평(安平)을 습격해 격파하였는데, 역시 이곳으로 왔다. 그 뒤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어 박작성이 되었다. ○ 박작성은 평안(平安)의 서쪽 경계에 있으며, 적리성(積利城)과 서로 가깝다. 당나라 정관 22년에 설만철(薛萬徹) 등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박작성을 포위하였다가 되돌아갔다. ○ 옛 파사부(婆娑府)는 봉황성(鳳凰城) 동쪽에 있다. 금(金)나라에서는 파속로통군사(婆速路統軍司)를 설치하였는데, 원(元)나라에서 파속로를 잘못 파사로(婆娑路)라고 하면서 처음에는 파사부로(婆娑府路)를 설치하였다가 지원(至元) 17년(1280)에 고쳐서 동경 총관부(東京摠管府)에 예속시켰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면, “파사부는 도사성(都司城)에서 동쪽으로 47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당나라 때 고구려의 박작성이 압록강의 북쪽에 있었는데, 바로 지금의 금나라나 원나라 때의 파속부(婆速府) 지역이다. 파속(婆速)의 음은 박작(泊灼)과 서로 비슷한바, 아마도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을 그대로 따라 부르면서 글자가 조금 달라진 것인 듯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박작성은 지금의 우리나라 의주(義州) 옥강보(玉江堡)의 강 건너편 지역으로, 바로 한나라의 서안평(西安平), 요나라의 갈소관(曷蘇館), 금나라의 파속로(婆速路), 원나라의 파사부(婆娑府)인데, 이는 모두 음이 변한 것이다.
○ 오골성(烏骨城)
《수서》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遼東)의 전역(戰役)에서 우중문(于仲文)의 군사가 오골성에 주둔하였다. 우중문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자, 고구려에서 군사들을 출동시켜 치중(輜重)을 습격하였다. 우중문이 군사를 돌려 이들을 쳐 크게 격파하고는 압록강에 이르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 지리지를 보면,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500리를 가면 도리진(都里鎭)에 이르고, 이곳에서 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800리를 가면 오골강(烏骨江)에 이르며,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오목도(烏牧島)를 지나서 패강(貝江) 입구 -바로 대동강이다.- 에 이른다. 《당서》 고구려열전을 보면, “태종(太宗)이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모의하여 아뢰기를, ‘오골성(烏骨城)의 누살(傉薩)은 이미 늙었으니, 아침에 공격하면 저녁에는 함락시킬 것입니다. 오골성을 무너뜨리면 평양성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뭇 신하들도 아뢰기를, ‘장량(張亮)의 군사가 사비성(沙卑城)에 있는데, 그를 부르면 이틀 안에 올 수가 있습니다. 오골성을 함락하고, 압록수(鴨綠水)를 건너서 심장부를 압박하는 것이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이상의 여러 설을 참고하여 생각해 보면 오골성은 압록강 서쪽의 바닷가에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대개 요동에서 육로(陸路)로 압록강을 건널 경우에는 안시성이 인후(咽喉)가 되고, 수군으로 평양에 이를 경우에는 오골성이 문호(門戶)가 되는바, 사비성 등 여러 성과 서로 순치(脣齒)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지금의 연산관(連山關)은 바로 명(明)나라의 아골관(鴉鶻關)인데, 이는 아마도 오골의 음이 아골로 변한 것인 듯하다.
○ 대행성(大行城)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남건(燕男建)이 부여성(夫餘城)을 공격하자, 이적(李勣)이 살하수(薩賀水) 가에서 격파하고는 진격해서 대행성을 함락시켰다.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이적의 군사와 압록강에서 만났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행성은 함흥부(咸興府)의 서남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건봉(乾封) 3년(668)에 이적이 살하수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진격하여 대행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여러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는 또다시 진격하여 압록책(鴨綠柵)에 이르렀다.
○ 사비성(沙卑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나라 대업(大業) 10년(614)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내호아(來護兒)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렀다. ○ 주에 이르기를, “바로 비사성(卑沙城)으로,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에서 바닷길로 평양성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비사성을 거쳐야 한다. 당나라 정관(貞觀) 말에 정명진(程名振) 역시 이 길을 경유하였다.” 하였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 19년(645)에 황제가 고구려를 직접 정벌하였다.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에서 바다를 건너 비사성에 이르렀는데, 그 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오직 서쪽 문만 공격할 수가 있었다. 이에 아장(亞將) 정명진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야밤에 습격해서 그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고는 총관(摠管) 구효충(邱孝忠) 등을 나누어 보내어 압록수에서 유격 활동을 하게 하였다.
《요사(遼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고구려 때 사비성이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위(海州衛)는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남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디는 개모성(蓋牟城)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이었고, 발해 때에는 남해부(南海府)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해주 남해군이었다. 금나라 천덕(天德) 초기에 징주(澄州)로 고쳤으며, 원나라 때에는 폐지했다가 본조(本朝) 홍무(洪武) 1년(1368)에 해주위를 설치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성현(海城縣)은 옛 사비성으로, 고구려 때 설치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정명진이 사비성을 공격하였는데, 바로 이 성이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비성이 해성현의 경내에 있는데, 또한 비사성(卑沙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 설치하였으며,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만들었고, 너비는 9리이다. 혹 와전되어 비사성(卑奢城)이라고도 한다. 등주나 내주에서 바닷길을 통해 고구려의 평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먼저 이곳을 경유해야 한다. 수나라 대업 10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내호아(來護兒)가 바닷길로 나와서 비사성(卑奢城)에 이르러 고구려를 격파하고 장차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하자, 고구려가 두려워서 항복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정관 19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는 장량과 정명진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사비성을 습격하였는데, 사비성은 사면이 깎아지른 듯하고 오직 서쪽 문만을 공격할 수가 있었다. 당나라 군사들이 그 성을 함락시키고는 압록강 가에서 군세(軍勢)를 뽐내었다.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 나오는 해성(海城)의 사비성(沙卑城)은 당나라 때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공격한 사비성이 바로 이 성으로, 옛 옥저 지역이다. 《한서》를 보면, 개마대산(蓋馬大山)이 평양성 서쪽에 있는바, 바로 지금의 개평(蓋平) 지역이다. 이 당시에는 대개 해성을 경유해서 개평(蓋平)으로 진격해 평양을 드디어 함락시켰던 것이다. 봉황산(鳳凰山)의 왼쪽은 바로 아래에 나오는 대흑산성(大黑山城)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압록강 가에서 군세를 뽐내었다고 한 것으로, 지리(地理)를 상고해 보면, 설이 바로 합치된다. ○ 대흑산성은 영해현(寧海縣) 동쪽의 대흑산(大黑山) 위에 있다. 《전요지(全遼志)》에, “산꼭대기에 옛 성이 있는데, 봉황산의 왼쪽에 있으며, 사방이 약 2리가량 된다. 당나라 때 장량이 수군을 거느리고서 바다를 건너와 사비성(沙卑城)을 공격하였는데, 바로 이곳인 듯하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전요지》에서 이른 사비성은 《요사》 지리지에서 이른 해주(海州)에 있다고 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데, 《전요지》의 설이 옳은 듯하다. 다만 당나라 때의 사비성은 고구려의 중진(重鎭)이었는바, 이와 같이 협소하여서는 마땅치가 않다. 대개 역시 옛사람들이 병란을 피한 곳일 뿐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사비성(沙卑城)은 혹 비사성(卑沙城)이라고도 되어 있고, 혹 비사성(卑奢城)이라고도 되어 있으며, 혹 사성(沙城)이라고도 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한 성으로, 해성현에서 가까운 지역의 바닷가에 있는 것이다.
○ 안시성(安市城)ㆍ후황성(后黃城)ㆍ은성(銀城)
《구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9년(645)에 황제의 거가(車駕)가 안시성(安市城) 북쪽으로 나아가 주둔하고서 공격하였다. 고구려와 말갈(靺鞨)의 군사 15만 명이 와서 안시성을 구원하였는데, 이적이 이들을 치니 적(賊)들이 크게 무너져서 항복을 청하였다. 고구려는 온 나라가 크게 놀랐고, 후황성과 은성은 다 스스로 도망쳐서 수백 리 사이에 다시는 사람의 그림자가 없었다. 이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서 철군(撤軍)시켰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시폐현(安市廢縣)이 개주위(蓋州衛)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한나라 때 설치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설인귀(薛仁貴)가 흰옷을 입고 성 위로 올라간 곳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 때에는 철주(鐵州)를 설치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탕지현(湯池縣)으로 고쳐서 개주(蓋州)에 속하게 했고, 원나라 때에는 없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시고성(安市故城)이 개평현(蓋平縣)의 동북쪽에 있다. 한나라 때 현을 설치해 요동군에 속하게 하였고, 후한(後漢) 및 진(晉)나라 초기에는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그 뒤에는 고구려에 편입되어 안시성이 되었다. 당나라 정관 19년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함형(咸亨) 3년(672)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고간(高侃)을 장수로 보내어 이들을 치게 해 안시성에서 격파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고쳐서 철주(鐵州)를 설치하였는데,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철주(鐵州) 건무군(建武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안시현(安市縣)으로,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이고, 발해 때에는 철주를 설치하였다. 고현(故縣)은 넷으로, 위성현(位城縣), 하단현(河端縣), 창산현(蒼山縣), 용진현(龍珍縣)인데 모두 폐지되었으며, 치소는 탕지현(湯池縣)이다. 동경(東京)에서 서남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주(州)를 폐지하고 현(縣)으로 만들어 개주(蓋州)에 속하게 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없앴다. 《대명일통지》에는 “안시폐현이 개주위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성경통지》에는 “지금 탕지보(湯池堡)가 현에서 동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옛 탕지현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나오는 철주는 본디 발해에서 설치한 것이다. 《성경통지》의 안시성, 한나라 때의 안시현, 고구려 때에 설치한 안시성, 당나라 설인귀가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흰옷을 입고 올라간 성이 바로 이 성이다. 금나라 때 개주에서 관할하는 현 가운데 탕지현이 있는데, 바로 요나라의 철주, 고구려의 안시성, 옛 한나라의 안시현이다. 지금 탕지보가 안시폐현에서 겨우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이것이 맞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안시성은 바로 한나라 요동군의 속현(屬縣)이다.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 지리지를 보면, “대요수(大遼水)가 안시(安市)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고,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개주위에서 동북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당서》 설인귀열전(薛仁貴列傳)을 보면, 안시(安市)가 안지(安地)로 되어 있으며, 이적이 올린 서장(書狀)을 보면, 압록강 북쪽의 항복하지 않은 성 11개 가운데 하나가 안시성으로, 옛 안촌홀(安寸忽)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선비들이 안시성의 위치에 대해 용강(龍岡)이라고도 하고, 안주(安州)라고도 하고,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명나라의 조사(詔使) 진가유(陳嘉猷)가 지은 ‘용강안시성시(龍岡安市城詩)’에 이르기를, “성루 높아 백 척이라 구름에 닿았는데, 육군이 전에 여기 주둔했다 하누나.[城樓百尺拂晴雲 此地曾聞駐六軍]” 하였는데, 이는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못 전하는 말을 듣고서 시를 지은 것일 뿐이다. 후황성(后黃城)과 은성(銀城)은 모두 안시성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성이다.
○ 평곽(平郭)ㆍ건안성(建安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송(宋)나라 원가(元嘉) 15년(438)에 연왕(燕王) 풍홍(馮弘)이 고구려에 도착하자, 고구려에서는 평곽(平郭)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북풍(北豐)으로 옮겼다.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 19년(645)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장검(張儉)이 군사를 진격시켜 요수(遼水)를 건너 건안성으로 나아갔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성에서 서쪽으로 300리를 가면 건안성에 이르는데, 한나라 때의 평곽현(平郭縣)이다. ○ 평곽현은 한나라 때에는 요동군에 속하였고, 진나라 때에는 없앴다. 진나라 때 동이 교위(東夷校尉)의 치소는 양평(襄平)이었는데, 최비(崔毖)가 모용외(慕容廆)에게 패하자, 모용외가 모용인(慕容仁)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무하게 하면서 치소를 평곽에 두었다. 《신당서》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건안성(建安城)은 옛날의 평곽현이다.”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건안현은 고구려에서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면서 개주에 예속시켰으며, 원나라에서는 폐지하였다.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태종이 이미 개모성(蓋牟城)을 함락시킨 뒤에 이세적(李世勣)이 서쪽으로 건안성을 치는 것이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만 못하다고 헌의하였다. 건안성은 지금 개평현성의 서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곽고성은 개평현의 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에는 현을 두어 요동군에 예속시켰으며, 후위(後魏) 태연(太延) 2년(436)에 북연(北燕)의 임금 풍홍(馮弘)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고구려에서는 평곽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북풍(北豐)으로 옮겨 있게 하였다. 그 뒤 고구려에서는 고쳐서 건안성을 두었다. 당나라 의봉(儀鳳) 1년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건안고성으로 옮겼다. 가탐(賈耽)이 말하기를, “안동도호부에서 서남쪽으로 건안성까지는 300리인데, 옛 평곽현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평곽은 바로 건안이다. 《당서》를 보면 태종이 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서 이적(李勣)과 의논하여 안시성을 버리고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이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쪽에 있습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건안이 개평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 백애성(白厓城)
《구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 19년(645)에 황제가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백애성(白厓城)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백애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임해 있어 사면이 아주 험하였다. 이적이 충거(衝車)로 성을 때려 부수면서 돌과 화살을 성안에 비 오듯 퍼부었다. 그러자 성주(城主) 손벌음(孫伐音)이 몰래 사신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 성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암주고성(巖州古城)이 요양주(遼陽州)의 동북쪽에 있다. 본디는 고구려의 백애성이었는데, 당나라 태종이 그 성을 함락시키고서 그 지역을 암주로 삼았다가 그 뒤에는 폐지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암주성은 요양주에서 동북쪽으로 57리 되는 곳에 있는 석성산(石城山) 위에 있으며, 주위는 4리이고, 성문은 하나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애성이 《자치통감》에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되어 있고, 《수서》에는 백애성(柏厓城)으로 되어 있으며, 《당서》 지리지에는 암주(巖州)가 백주(白州)로 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하나이다. 석성산 위에 있다고 한 것은 참으로 옳다.
○ 개모성(蓋牟城)
《구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 19년 여름 4월에 이적의 군사가 요수(遼水)를 건너서 개모성을 공격해 함락시키고는 포로 2만 명을 사로잡고, 그 성에 개주(蓋州)를 설치하였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모성은 요동성의 동북쪽에 있다. 당나라가 그 성을 취하고는 그 지역을 개주로 삼았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요양부로(遼陽府路)에 개주(蓋州) 요해군(遼海軍) 절도(節度)가 있어서 건안(建安), 탕지(湯池), 웅악(熊岳), 수암(秀巖) 등 네 현을 거느렸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은 본디 고구려의 개모성이다. 당나라 태종 때 이세적(李世勣)이 공격해 격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 때에는 고쳐서 개주로 삼았다가 또다시 진주로 고쳤는데, 진한(辰韓)으로 인해 진주라고 한 것이다.
《금사(金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주 봉국군은 본디 고구려의 개갈모성(蓋葛牟城)이고, 요나라의 진주(辰州)이다. 명창(明昌) 4년(1193)에 갈소관(曷蘇館)을 혁파하고 진주 요해군을 세웠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주위(蓋州衛)는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남쪽으로 240리 되는 곳에 있다. 본디는 한나라 요동군 지역이었는데, 고구려에서 개모성으로 삼았으며, 당나라 때에는 개주를 설치하였다. 발해 때에는 이를 그대로 답습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이 길이 진한과 통한다는 이유로 진주로 고치고서 봉국군으로 승격시켰다. 금나라 때에는 개주로 되었고, 원나라 때에는 요양로(遼陽路)에 속하였으며, 본조 홍무(洪武) 9년(1376)에는 주(州)를 폐지하고 위(衛)를 두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모성은 고구려에서 설치하였는데, 옛터를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주고성은 지금의 개평현(蓋平縣) 치소이다. 요나라 때에는 진주 봉국군을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건안현(建安縣)이었다. 금나라 초기에는 갈소관로(曷蘇館路)를 설치하였다가 뒤에 개주로 고쳤으며, 원나라 때에는 현을 폐지하고 주는 남겨 두었다. 명(明)나라 초기에는 다시 위(衛)를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를 보면, “진주(辰州)는 본디 고구려의 개모성이다. 당나라 태종 때 이세적이 공격해 격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 때에는 개주로 고쳤다가 또다시 진주로 고쳤다.” 하였으며,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요나라 때 이 길이 진한과 통한다는 이유로 진주를 세웠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개평성(蓋平城)은 고구려의 성인데, 이적이 함락시키고서 개주로 삼았다. 웅악성(熊岳城) 역시 고구려의 성인데, 당나라 때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웅산(熊山)에서 싸우다가 활을 잘 쏘는 자를 석성(石城)에서 사로잡았다. 이들 두 성은 실로 고구려의 문호(門戶)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웅악성은 지금 개평현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바, 개평성이 당나라 때의 개모성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조선(朝鮮)의 고지(古志)에 의거하면, 진한이 도리어 조선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아주 멀게 여겼는데, 이는 해성(海城)이 주(周)나라나 진(秦)나라 때 실로 조선에 속하였다는 것을 모른 것이다. 《성경통지》를 보면, 해성의 동남쪽에서 개평의 경계까지가 60리라고 하였다. 그런즉 개평은 자연 조선의 동쪽에 있게 되는 것이다. ○ 개평현은 봉천부(奉天府)에서 남쪽으로 36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가탐(賈耽)의 말을 인용하여 개모성이 안동도호부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안동도호부는 바로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니, 이것에 의거하면 지금의 개평은 옛 개모성이 아닌 듯하다. 상고해 보건대,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개모성을 탈취하여 개주를 설치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발해에서는 개주를 고쳐서 진주로 삼았는데, 이는 당나라의 개주를 고친 것이다. 요나라에서는 진주를 승격시켜 진주 봉국군으로 삼았는데, 이는 발해의 진주를 승격시킨 것이다. 진주가 이미 지금의 개평인즉 개평은 반드시 옛 개모성이다. 만약 가탐이 말한 바와 같다면 요양은 이에 한나라 요동군 지역이고, 《성경통지》에 의거하면, 개평은 한나라 때 현도군에 속하였다. 그런데 고적(古蹟)에 실린 왕망(王莽)의 현도정(玄菟亭)은 바로 개평 경내에 있다. 그런즉 개평이 당나라의 안동도호부가 아님은 역시 근거가 있어서 믿을 만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 지리지에서는 가탐의 설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개모성, 신성(新城)을 경유하면 발해의 장령부(長嶺府)에 이른다.” 하였는데, 안동도호부는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고, 장령부는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서쪽 경계이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모성은 요양주의 동북쪽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서 개모성을 지금의 개평현이라고 한 것은 전적으로 《요사》 지리지의 잘못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 신성(新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晉)나라 함강(咸康) 5년(339)에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군사가 신성(新城)에 이르자 고구려 왕 고쇠(高釗)가 화친을 요구하여 돌아갔다. ○ 주에 이르기를,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으로, 서남쪽으로는 산과 가까이 있고, 동북쪽으로는 남소(南蘇), 목저(木底) 등의 성과 접하였다.” 하였다.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봉(乾封) 2년(667)에 이적(李勣)이 신성에 군사를 주둔하고서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모의하기를,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邊境)의 요해처(要害處)여서 먼저 이곳을 얻지 못하면 나머지 성들은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서남쪽 산에 벽을 쌓아 성안을 굽어보자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성주(城主)를 포박하고서 나와 항복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성은 흥경(興京)의 북쪽에 있다. 진나라 함강 5년에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군사가 신성에 이르렀다가 고구려가 화친을 요구하여 돌아갔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9년(613)에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왕인공(王仁恭)을 파견하여 부여도(夫餘道)로 나아가게 하였다. 왕인공이 진격하여 신성에 이르러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에 이세적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요수를 건넌 다음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경의 요해처인바, 먼저 이곳을 얻지 못하면 나머지 성들은 취하기가 쉽지 않다.” 하고는, 드디어 서남쪽 산에 벽을 쌓아 성안을 굽어보고는 진격하여 16개 성을 모두 함락시켰다. 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 주를 보면, 신성이 남소성(南蘇城)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 위정열전(韋挺列傳)을 보면, “위정이 개모성(蓋牟城)에 있으면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신성과 인접해 있어 밤낮없이 전투를 벌여 북소리와 함성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하였다. 가탐(賈耽)은 이르기를, “안동도호부 동북쪽에서 개모성과 신성을 경유한다.”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참고해 보면, 신성은 마땅히 개모성의 동북쪽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서》나 《자치통감》 주와 같은 서적을 근거로 하여 보면, 신성은 남소성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성이다. 그런데 남소성은 분명히 지금의 흥경(興京) 경내에 있었으니,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바 신성이 흥경의 북쪽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이다. 개모성이 지금의 개평이 아니라는 것은 이를 인하여 더욱더 알 수가 있다.
○ 남소성(南蘇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晉)나라 영화(永和) 1년(345)에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서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모용각이 남소성을 함락하고 수병(戍兵)을 두고서 돌아갔다. ○ 주에 이르기를, “남소성은 남협(南陜)의 동쪽에 있는데,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한 뒤에 남소주(南蘇州)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주(蘇州) 안복군(安復軍) 절도(節度)는 본디 고구려의 남소성이었는데, 흥경 경내에 남소주를 두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소성은 고구려에서 설치하였는데 요나라 때에 폐지하였다. 당나라 때 곽대봉(郭待封)이 수군을 거느리고서 바다를 건너가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설인귀(薛仁貴)가 금산(金山)에서 싸워 고구려의 군사를 대패시키고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창암성(蒼巖城)을 함락시켰다. 이들 세 성은 모두 지금의 금주(金州) 경내에 있던 것인데, 옛터를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소성은 흥경(興京)의 경내에 있으며, 고구려 때 설치하였다. 진(晉)나라 영화(永和) 1년(345)에 연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서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모용각이 남소성을 함락하고 수병(戍兵)을 두고서 돌아갔다. 진나라 융안(隆安) 2년(398)에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고구려를 습격하여 신성(新城)과 남소성을 빼앗아 700여 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수나라 대업(大業) 7년(611)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는 단문진(段文振)을 나누어 파견하여 남소도(南蘇道)로 나아가게 하였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667)에는 설인귀가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남소, 목저, 창암 등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현경(顯慶) 연간에는 남소주(南蘇州)를 설치하였는데, 남소주는 바로 지금의 금주(金州)이다.
이제 《한서》 지리지를 상고해 보건대, 고구려현(高句麗縣)에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바, 고구려가 성을 설치하면서 대개 이 물로 인하여 남소성이라고 한 것이다. 《진서(晉書)》 재기(載記)를 보면, 모용황이 남협(南陜)을 통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다고 하였고, 《자치통감》 주에는 “남협은 요동의 동남쪽에 있으며, 남소와 목저 등 여러 성이 또 남협의 동쪽에 있다. 설인귀가 신성에서 진격해 남소와 목저를 함락시켰다.” 하였다. 가탐(賈耽)은 이르기를, “신성은 요동의 북쪽에 있다.” 하였다. 그런즉 남소성과 목저성은 마땅히 신성의 동남쪽인 지금의 흥경 경계에 있지, 금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구지(舊志)에서는 단지 《요사(遼史)》에 실려 있는 것만을 근거로 남소성과 목저성을 금주의 고적(古蹟)에 실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 지리지를 보면, “고구려현에는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의 발원지이다. 또 남소수가 있어 서북쪽으로 변경 밖을 지나간다.” 하였다. 고구려현은 지금의 흥경이다. 그런즉 남소수는 마땅히 흥경에서 가까운 곳의 서북쪽을 흐르는 큰물로써, 요수와 서로 비등한 강이다. 지금의 흑이소하(黑爾蘇河) 등의 강이 장령자(長嶺子)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변경 밖을 지나 대요수(大遼水)에 합쳐지는바, 이 강이 혹 남소수일 것이다. 남소성은 마땅히 이 강이 지나가는 지역에 있어야 하는바, 《대청일통지》에서 흥경의 경계에 있다고 한 것은 옳은 말이다.
○ 목저성(木底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의희(義煕) 2년(406)에 연왕 모용희(慕容煕)가 경병(輕兵)으로 고구려를 습격하였는데,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목저성은 금주(金州)의 경내에 있다. 고구려에서 설치하였으며, 당나라 때에는 폐지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목저성은 흥경의 경계에 있다. 진(晉)나라 함강(咸康) 8년(342)에 모용황(慕容皝)이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모용한(慕容翰)이 말하기를, “고구려에서는 일반적으로 헤아려 보고는 반드시 대군이 북쪽 길을 따라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을 가벼이 여길 것입니다. 이제 정예병을 이끌고 남쪽 길을 따라 공격하여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했을 때 치면 환도(丸都)는 취하려고 애쓸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따로 일부의 군사를 북쪽 길로 내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더라도 고구려는 복심(腹心)이 이미 무너져서 사지(四肢)를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모용황이 그 의견을 따라서 드디어 고구려를 이겼다. 대개 북풍(北豐)을 통해서 나아가는 것이 북쪽 길이고, 남협(南陜)을 통해서 목저성으로 들어가 나아가는 것이 남쪽 길이다. 의희 1년(405)에는 후연(後燕)의 왕 모용희가 고구려의 목저성을 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667)에는 설인귀가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얼마 뒤에 이곳에 목저주(木底州)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에 폐지하였다.
○ 창암성(蒼巖城)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봉(乾封) 3년(668)에 고간(高侃)이 신성(新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어 습격하니, 설인귀가 구원하였다. 고간이 금산(金山)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워 패하였다. 고구려가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예기가 몹시 날카로웠는데, 설인귀가 갑작스럽게 쳐서 고구려의 군사를 대파하여 5만여 급(級)을 참수하였으며, 남소성(南蘇城), 목저성(木底城), 창암성(蒼巖城) 세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고는 군사를 이끌고 가 땅을 침략해 이적(李勣)의 군사와 합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창암성은 금주(金州)의 경계 안에 있다. 고구려 때 설치하였으며, 당나라 때에는 폐지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목저성과 창암성은 모두 남소성과 서로 접해 있으며, 또 신성과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바, 마땅히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동쪽, 흥경(興京) 서쪽 경계에 있어야 한다. 《성경통지》에서 금주의 경계 안에 있다고 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 남협(南陜)ㆍ북치(北置)
《진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강(咸康) 7년(341)에 모용황이 경병(勁兵) 4만 명을 거느리고 남협(南陜)에서 침입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형인 모용한(慕容翰)과 아들 모용수(慕容垂)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따로 왕우(王寓) 등을 파견하여 북치(北置)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왕 고쇠(高釗)는 모용황의 군대가 반드시 북쪽 길을 통해서 나올 것이라고 여기고는 그의 아우인 고무(高武)를 파견하여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북치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졸(弱卒)을 거느리고 남협을 방비하였다. 모용한이 고쇠와 목저성에서 싸워 대패시키고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드디어 환도(丸都)에 들어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을 보면, “모용황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할 적에 고구려로 진격하는 길에는 두 길이 있었는데,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았다.” 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 주에는 이르기를, “북쪽 길은 북치로부터 나가고, 남쪽 길은 남협에서 목저성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그리고 《대청일통지》에는 《자치통감》 주를 인용하여 남협이 요동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며, 남소와 목저 등 여러 성이 또 남협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여러 설을 참고하여 보면 목저성은 환도성의 서쪽에 있으며, 남협은 또 목저성의 서쪽에 있으니, 이는 흥경(興京)의 경계 안 지역이다.
○ 북풍성(北豐城)
《송서(宋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가(元嘉) 15년(438)에 연왕(燕王) 풍홍(馮弘)이 색로(索虜)에게 공격당하였는데, 풍홍이 패하여 고구려의 북풍성으로 달아났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풍성은 승덕현(承德縣)의 서북쪽에 있다. 후한(後漢) 말기에 공손도(公孫度)가 요동을 점거하고는 이곳에 성(城)을 두고서 풍성(豐城)이라고 하였다. 사마의(司馬懿)가 요동을 정벌하고서 풍성 사람들을 청주(靑州)와 제주(齊州)로 옮기고 남아 있는 것을 북풍(北豐)이라고 불렀다. 송나라 원가 15년에 연왕 풍홍이 고구려로 달아나자 고구려에서는 평곽(平郭)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북풍성으로 옮겼으며, 다시 얼마 있다가 살해하였다. 호삼성이 말하기를, “모용한(慕容翰)이 적은 수의 군사를 내어 북쪽 길을 통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었는데, 북도는 바로 북풍도(北豐道)를 말한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서 북풍이 승덕현의 서북쪽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모용한이 군사를 진격시킨 북치(北置)를 북풍에 끌어댄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혹자는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에 황제(皇帝)의 무덤이 있는데, 세상에 전해 오기를 풍홍을 장사 지낸 곳이라고 하면서 이곳을 고구려의 북풍성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틀린 것이다.
○ 요동성(遼東城)ㆍ현도성(玄菟城)
《후주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가 다시 요동, 현도 등 수십 성을 차지하고 모두 관사(官司)를 설치하고서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진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가 요동을 침입하자 모용좌(慕容佐)가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구려에게 패하였다. 이에 요동, 현도가 드디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모용농(慕容農)이 진격해 고구려를 쳐서 요동, 현도 두 군을 수복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3월 계사에 모든 군사가 요수(遼水)에 이르러 물가를 따라 진을 쳤다. 고구려 군사들이 요수를 막고 굳게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들이 요수를 건너지 못하였다. 하조(何稠)가 부교(浮橋)를 만들어 이틀 만에 완성하자 제군(諸軍)이 서로 잇달아서 계속 진격해 나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워 고구려 군사가 대패하였다. 수나라 군사가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요동성은 바로 한(漢)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구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9년(645)에 이적(李勣)이 군사를 진격시켜 요동성을 공격하니 고구려가 크게 무너졌다. 요동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양평고성(襄平古城)이 요양주(遼陽州)의 북쪽에 있다. 한나라 때 현을 두어 요동군의 치소로 삼았다. 후한과 진(晉)나라 때에는 모두 요동군의 치소가 되었으며, 그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정관 19년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요동성을 함락시키고는 요주로 삼았다. 의봉(儀鳳) 초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고성(遼東故城)으로 옮겼으며, 그 뒤에 다시 신성(新城)으로 옮겼다. 《방여기요(方輿記要)》에는 “한나라의 양평성이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북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地理志)를 보면 연(燕) 지방의 동쪽에 요동이 있고, 흉노전(匈奴傳)을 보면 연에서 요동군을 두어 호(胡)를 막았다고 하였으며, 《통전》을 보면 순(舜) 임금이 영주(營州)를 설치하였는데 요수의 동쪽이라고 한 것이, 이 요동성이다. 연나라 때에는 요동군이었고, 진(秦)나라와 한나라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낙랑(樂浪)과 통하였다. 진(晉)나라 때에는 평주(平州)를 설치하였고, 후위(後魏) 때에는 고구려국이 그 지역에 도읍을 정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양계산하고(兩戒山河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은 옛 연나라 지역이다. 진(秦)나라 때에는 군(郡)을 두었고, 한나라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여 유주(幽州)에 속하였으며, 치소는 양평이다.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요수는 양평현고성의 서쪽을 지난다.” 하였는데, 이는 요수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다. 진(晉)나라 회제(懷帝) 영가(永嘉) 말년에 고구려에 함락되어 편입되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성(高麗城)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였을 때 세운 것으로, 요동성이라고도 한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지금의 요양주성(遼陽州城)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고 하는데, 명나라 정료중위(定遼中衛)의 치소를 속칭 고려영(高麗營)이라고 하는바, 이것이 바로 그 옛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요동성은 바로 한나라 때의 요동군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칭한 승덕현과 요양주의 사이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현도성(玄菟城)은 요수의 동쪽 강안(江岸)에 있는 것이다. -옛 현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조(四郡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보장왕(寶藏王) 4년(645)에 이적(李勣)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군에 이르고, 그다음에 개모성(蓋牟城)에 이르고, 그다음에 요동성에 이르렀다.” 하였다. 그런즉 현도성이 요수 가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 부여성(夫餘城)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봉(乾封) 3년(668)에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다른 성 30여 개가 모두 항복하였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성은 부여국의 옛터이므로 성에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부여는 바로 동사(東史)에서 칭하는 북부여(北夫餘)로,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이적이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주현(州縣)을 설치하면서 올린 서장에 이르기를, “북부여성주(北夫餘城州)는 본디 조리비서(助利非西)입니다.”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석성(石城)ㆍ적리성(積利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21년(647)에 우진달(牛進達), 이해안(李海岸)이 고구려의 경내로 들어가 무릇 100여 차례를 싸워 모두 이기고, 석성을 쳐서 빼앗고 진격하여 적리성에 이르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석성산(石城山)은 개평성(蓋平城)에서 동북쪽으로 1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일명 고려성산(高麗城山)이라고 한다. ○ 웅악성(熊岳城)은 고구려의 성이다. 돌을 포개 쌓았으며, 둘레는 20리이다. 당나라 때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웅산(熊山)에서 싸우다가 활을 잘 쏘는 자를 석성에서 사로잡았다. 이 성은 실로 고구려의 문호(門戶)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적리성은 평양 서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정관 21년에 우진달이 바닷길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석성을 함락시키고 진격해 적리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진달 등이 바닷길을 통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먼저 석성에 이르렀다. 그런즉 석성은 압록강 입구의 서쪽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어야 하며, 적리성은 또 그와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성경통지》에서 지금의 웅악성을 고구려 성의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가시성(加尸城)
《구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9년(645)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백애성(白厓城)이 항복하자,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가 가시성의 군사 700명을 파견하여 개모성(蓋牟城)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적(李勣)이 이들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시성은 평양의 서남쪽에 있다. 고구려에서 설치하였다. 당나라 정관 19년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개소문(蓋蘇文)이 가시성의 군사 700명을 파견하여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곳이 이 성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적이 올린 서장(書狀)에, 압록강 북쪽의 도망한 성 7개 가운데 하나가 여산성(犂山城)인데, 본디는 가시달홀(加尸達忽)이라고 하였다. 그런즉 《당서》에 나오는 고구려(高句麗) 항호(降戶)의 기미주(羈縻州) 가운데 여산주(黎山州)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횡산성(橫山城)ㆍ마미성(磨米城)ㆍ맥곡성(麥谷城)
《책부원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 19년에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9월에 군사를 철수하였다. 이 출정에서 고구려의 현도(玄菟), 횡산(橫山), 개모(蓋牟), 마미(磨米), 요동(遼東), 백암(白巖), 비사(卑沙), 맥곡(麥谷), 은산(銀山), 후황(後黃) 등 모두 10개 성을 함락시켰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횡산성에 대해서는, 《구당서》에 “용삭(龍朔) 1년(661)에 설인귀가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웠다.” 하였고, 《성경통지》에는 횡산(橫山)이 웅산(熊山)으로 되어 있으며, 지금의 웅악성(熊岳城)이 그곳이라고 하였다. 마미성에 대해서는, 《당서》 지리지에는 고구려 항호(降戶)의 기미주 가운데 마미주(磨米州)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이다. 맥곡성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은산성(銀山城)은 바로 위에서 이른 은성(銀城)이다.
○ 독산성(獨山城)
《구당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연간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정명진(程名振)이 평안도 행군총관(平安道行軍摠管)에 제수되어 전후로 고구려의 사비성(沙卑城)을 공격하고 독산성을 격파하였는데, 모두 적은 수의 군사로써 많은 수의 적을 쳤으므로 명장(名將)이라고 칭하였다.
○ 적봉진(赤烽鎭)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3년(658)에 영주 도독(營州都督)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右領軍中郞將)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을 쳐서 함락시켰다.
○ 무려라(武厲邏)
《수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업(大業) 8년(612)에 요수(遼水)의 서쪽에서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의 무려라를 함락한 다음 요동군(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하고서 돌아왔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무려라는 고구려에서 요수의 서쪽에 순찰군을 두고서 요수를 건너는 자를 감시하던 곳이다.
이상은 압록강 서북쪽에 있는 성이다.
○ 평양성(平壤城)ㆍ한성(漢城)
《후위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세조(世祖)가 이오(李敖)를 파견하였는데, 이오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렀다.
《후주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다. 그 성은 동서 간의 거리가 6리이며, 남쪽으로는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성안에는 곡식과 무기만을 저장하여 구적(寇賊)이 쳐들어오는 것을 대비하였다가 구적이 쳐들어오는 날에는 곧바로 성안으로 들어가서 굳게 지킨다. 왕은 그 곁에 저택을 별도로 지어 놓았지만 평상시에는 거처하지 않는다. 그 외에 또 국내성(國內城) 및 한성(漢城)이 있는데, 모두 별도(別都)이다.
《수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국은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 간의 거리가 6리이며, 산세를 따라서 굴곡지게 쌓았고,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해 있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都會地)로서, 그 나라에서는 이를 삼경(三京)이라고 부른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는, 동진(東晉) 이후로 그 왕이 거처하는 곳은 평양성인데, 역시 장안성이라고도 부르며,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왕험성(王險城)이다. 모용황(慕容皝)이 정벌한 이후에는 국내성에서 옮겨 와 이 성에 도읍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성이 압록강의 동쪽에 있는데, 일명 왕험성이라고도 하며, 바로 기자(箕子)의 옛 나라로, 성 바깥에 기자묘(箕子墓)가 있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의 치소였으며, 진(晉)나라 의희(義煕) 연간 이후로는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이 성에 거주하였다. 그 뒤에는 서경(西京)이라고 불렀으며, 원(元)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가 되었다.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성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졌을 때에도 이미 성이 있었다. 고구려에 이르러서 또 성이 험한 곳에 있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겨 다시 그 성 북쪽에 성 하나를 증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을 내려다보고 북쪽으로는 금수산(錦繡山)에 접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천왕(東川王) 21년(247) -위주(魏主) 방(芳) 8년- 에 환도성(丸都城)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겨 거처하였으며, 그로부터 96년이 지난 뒤인 고국원왕(故國原王) 12년(342)에 환도성으로 옮겼다가, 그다음 해에 모용황의 난리를 겪고서는 다시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그 뒤 장수왕(長壽王) 때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평원왕(平原王) 때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겼다. 대개 동황성, 장안성, 평양성은 모두 지금의 평양부(平壤府)이다.
또 살펴보건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신라의 한양군(漢陽郡)은 본디 고구려의 북한산군(北漢山郡)이었으며, 일명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경성(京城) 근처이다. 지지(地志)에는 또 이르기를, “고구려의 한성군(漢城郡)은 일명 식성(息城)이라고도 하고, 일명 한홀(漢忽)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지금의 재령군(載寧郡)이다. 그런즉 《주서(周書)》에서 칭한 한성(漢城)은 분명하게 어디라고 지적해 말할 수는 없다.
○ 노성(魯城)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魯陽山)이 있는데, 노성이 그 위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혹 대성산(大城山)이라고도 하고 혹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
○ 벌노성(伐奴城)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형(咸亨) 4년(673)에 이근행(李謹行)이 고구려의 반란군을 발로하(發蘆河)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다시는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신라로 도망쳐 들어갔는바, 4년 만에 평정되었다. 처음에 이근행이 아내 유씨(劉氏)를 벌노성(伐奴城)에 남겨 두어 지키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공격해 오자, 유씨가 갑옷을 입고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니, 고구려 군사가 물러갔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벌노성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 함형 2년(671)에 행군총관(行軍摠管) 이근행이 호로하(瓠蘆河)의 서쪽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는 아내 유씨를 벌노성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말갈(靺鞨)의 군사를 이끌고 와 공격하자, 유씨가 이를 막았다. 혹은 말하기를, “벌노성은 영주(營州)의 경내에 있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벌노성은 발로하 근처 지역으로, 평양과 서로 접한 곳에 있어야만 한다. 발로하는 지금의 순안현(順安縣) 서쪽에서 대동강과 합하는 강이다. 《대청일통지》에 호로하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산수조(山水條)에서 상세하게 변론하였다.
○ 욕이성(辱夷城)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1년(668)에 이적(李勣)이 대행성(大行城)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에서 여러 군사들과 모였다. 고구려가 이에 대항해 싸우자 이적이 쳐서 대파하였다. 고구려의 군사를 200여 리나 추격하여 욕이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성이 모두 줄줄이 항복하였다. 이적의 군대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욕이성(辱彝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 총장 1년에 이적 등이 고구려의 군사를 압록책(鴨綠柵)에서 격파하고는 200여 리나 추격하여 욕이성(辱彝城)을 함락한 다음 드디어 평양으로 진격해 포위하였는데, 그 욕이성이 바로 이 성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욕이성은 압록강에서 남쪽으로 2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런즉 지금의 정주(定州) 등지가 그에 해당된다.
○ 책성(柵城)
《후위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책성(柵城)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소해(小海)에 이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탐(賈耽)이 이르기를, “발해국의 책성부(柵城府)는 본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하였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태조왕(太祖王) 46년(98) -한나라 화제(和帝) 10년- 에 동쪽으로 책성을 순시할 때 책성의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서 흰 사슴을 잡았으며, 50년(102)에는 사람을 보내어서 책성을 안무(安撫)하였다.” 하였다. 그런즉 고구려에 책성이 있는 것은 이미 한나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지금의 부령부(富寧府) 등지가 그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 용원부조(渤海龍原府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수구성(水口城)
《신당서》 신라열전(新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 17년(643)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신라에 조서(詔書)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와 고구려의 형세를 분산시키게 하였다. 그러자 선덕왕(善德王)이 군사 5만 명을 고구려의 남쪽 국경으로 들어가게 해 수구성(水口城)을 함락시켰다.
○ 해곡(海谷)
《책부원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667)에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조서를 내려 독고경운(獨孤卿雲)에게 압록도(鴨綠道)를 경유하게 하고, 곽대봉(郭待封)에게 적리도(積利道)를 경유하게 하고, 유인원(劉仁願)에게 필렬도(畢列道)를 경유하게 하고, 김대문(金待問)에게 해곡도(海曲道)를 경유하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문무왕(文武王) 7년(667)에 당나라에서 유인원에게 명하여 비열도(卑列道)를 따라서 진격하게 하고, 또 신라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해 다곡도(多谷道)와 해곡도(海谷道) 두 길로 진격해 평양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하였다. 다곡은 지금의 평산부(平山府)이다. 그런즉 이른바 해곡이라는 곳도 평산부와 서로 가까운 곳이다.
○ 누방(鏤方)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하남(河南), 하북(河北), 회남(淮南)의 군사를 모집해서 평양(平壤)과 누방(鏤方)의 행영(行營)으로 나아갔다.
《신당서》 본기(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 1년에 조서를 내려 우효위장군(右驍衛將軍) 정명진(程名振)을 누방도 총관(鏤方道摠管)으로 삼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누방은 바로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으로, 지금의 강동(江東)이 그곳이다. 대개 고구려 때에는 옛 이름을 답습해서 남겨 둔 것이다.
○ 잠지락(蠶支落)
《후한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무(建武) 23년(47)에 고구려 잠지락의 대가(大加) 대승(戴升) 등이 낙랑으로 나와서 예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 고구려의 남쪽 경계는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렀는데, 청천강 남쪽은 바로 낙랑이다. 이곳에서 잠지락이 낙랑에 내속(內屬)하였다고 하였으니, 잠지락은 반드시 고구려의 남쪽 변방에 있었던 것이다. 한나라 낙랑군의 속현 가운데 잠대현(蠶台縣)이 있는데, 광무제 초기에 이곳을 버렸으니, 바로 지금의 대관령 동쪽 지역이 혹 그 지역인 듯하다.
이상은 압록강 동쪽과 남쪽에 있는 성이다.

부(附) 미상(未詳)의 성읍(城邑)

○ 구려현(句麗縣)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나라의 패수현(浿水縣)으로, 고구려에서 구려현이라고 고쳤으며, 발해 때에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 경주(慶州)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절도(節度)는 본디 예(濊), 맥(貊)의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였는데, 통할하는 현은 하나이다. 개원현(開遠縣)은 본디 책성(柵城)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龍原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폐현(開遠廢縣)은 옛 개주(開州)의 치소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본디는 책성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이었는데, 경주가 치소였고, 발해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초기에 폐지하였다가 뒤에 다시 설치하였다.” 하였다.
○ 동산현(銅山縣)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주(咸州) 안동군(安東郡)은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평부(咸平府)는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 지역으로, 요나라 때에는 함주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평부는 본디 조선(朝鮮) 지역으로, 기자(箕子)가 봉해진 곳이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뒤에는 고구려가 그 지역을 침입하여 차지하고서 동산현을 설치하였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안동도호부를 두어 그곳을 통할하게 하였으며, 이어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 막힐현(鄚頡縣)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주(韓州) 동평군(東平軍)은 본디 고리국(藁離國)의 옛 치소인 유하현(柳河縣)으로, 고구려 때에는 막힐부를 두어 막주(鄚州), 힐주(頡州)를 도독(都督)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 당산현(當山縣)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광주(廣州) 방어(防禦)는 한나라 때에는 양평현(襄平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당산현이었고, 발해 때에는 철리군(鐵利郡)이었다.
○ 영녕현(永寧縣)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주(尙州) 영창현(永昌縣)은 본디 고구려 영녕현 지역이다.
○ 상암현(霜巖縣)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집주(集州) 회원군(懷遠軍)은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상암현이었고, 발해 때에는 주(州)를 설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려현(句麗縣) 이하 일곱 성은 《요사》에 처음으로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데, 《요사》는 본디 두찬(杜撰)한 것이 많은바 일곱 성의 이름도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는 듯하다. 그러므로 아래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주D-001]졸본천(卒本川) : 이병도(李丙燾)는 “졸본은 바로 우리말의 ‘솔골’을 뜻하는 졸홀(卒忽), 승흘골(升紇骨)의 이칭(異稱)으로 볼 것이며, 고구려의 최초의 수도(首都)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의 환인(桓仁)으로 비정(比定)한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17쪽 주》
[주D-002]양맥국(梁貊國) : 소수맥(小水貊)으로, 한나라 현도군(玄菟郡)의 한 속현(屬縣)이었던 서개마현(西蓋馬縣)에 살던 종족이다.《국역삼국사기 227쪽 주》
[주D-003]고구려현(高句麗縣) : 여기에서의 고구려현은 본래의 현도군 치소였던 고구려현이 아니라, 지금의 흥경(興京), 노성(老城) 부근으로 옮겨 간 현도군의 치소인 고구려현을 말하는데, 이곳의 완전한 탈취는 태조왕(太祖王) 때에야 이루어졌다.《국역삼국사기 227쪽 주》
[주D-004]태조왕 …… 방비하였다 : 이 기사에 대해 이병도는 요서(遼西)라는 지명이 오기(誤記)이거나 아니면 고구려의 전성기 때의 기사를 잘못 이곳에 실은 것 같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39쪽 주》
[주D-005]국내성(國內城) : 고구려 전기(前期)의 수도로, 만포진(滿浦鎭) 대안(對岸)의 집안현성(輯安縣城)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제2대 유리왕 때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근거지가 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3쪽 주》
[주D-006]환도성(丸都城) : 고구려의 옛 도성으로 지금의 통구(通溝)이다. 서기 2세기경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 도읍한 이후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300년간의 수도였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과 함께 그 위치와 양자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종래에는 양자를 별개의 도성으로 보아 국내성에서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대체로 국내는 환도의 한역명(漢譯名)이라 생각하고 국내성과 환도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1쪽 주》
[주D-007]책성(柵城) : 책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라 하였으며, 이병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으로 보았다.
[주D-008]장성(長城) : 천리장성(千里長城)을 말한다. 고구려 영류왕 14년(631)에 동북쪽의 부여성(扶餘城)에서 요하구(遼河口)까지 쌓았다.
[주D-009]부여성(夫餘城) : 지금의 요령성 서풍현 서풍에 있는 성자산산성이다.《조선전사 제3권, 124쪽》
[주D-010]무려라(武厲邏) : 무려(武厲)라는 곳에 설치한 고구려의 국경감시소를 말한다. 라(邏)는 순라(巡邏)의 뜻이다. 이곳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무려의 위치는 상세하지 않으나, 지금의 봉천성(奉天省) 신민부(新民府)가 봉천과 요양(遼陽)에 통하는 요하(遼河) 서편의 중요한 지점인 것으로 보아 이 부근으로 비정하고 싶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15쪽 주》
[주D-011]유송(劉宋) : 남조(南朝) 송나라의 별칭으로, 조송(趙宋)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르는 칭호이다.
[주D-012]계립령(鷄立嶺) : 지금의 조령(鳥嶺)을 말한다. 이병도는, “계립령은 마목현(麻木峴)이라고도 하고 혹은 마골산(麻骨山)이라고도 하는데, 계립은 마골의 방언(方言)인 ‘겨릅’의 대음(對音)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3쪽 주》
[주D-013]비사성(卑沙城) : 원문에는 ‘沙卑城’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비사성은 지금의 대련만(大連灣) 북쪽 해안에 있는 대화상산(大和尙山)이다.
[주D-014]개소문(蓋蘇文) : 이병도는, 개소문의 완칭은 천개소문(泉蓋蘇文)이고, 다른 한 이름은 개금(蓋金)이었는데, 천씨(泉氏)는 본래 연씨(淵氏)였으나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휘(諱)를 피하여 소문의 아들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투항한 뒤 천(泉) 자로 대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이 통설(通說)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21쪽 주》
[주D-015]오부(五部) : 고구려를 형성한 5개의 부족, 즉 소노부(消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절노부(絶奴部), 계루부(桂婁部)를 말한다. 이 오부는 나중에 행정 구역으로 변하고 제도화되었는데, 서울을 5부로 나누어 계루부는 내부(內部) 혹은 황부(黃部)로, 소노부는 서부 혹은 우부(右部)로, 순노부는 동부 혹은 좌부(左部)로, 절노부는 북부 혹은 후부(後部)로, 관노부는 남부 혹은 전부(前部)로 각각 개칭하였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5쪽 주》
[주D-016]신성(新城) : 신성은 고국원왕(故國原王) 5년(335)에 수축되어 고구려의 서방 요충이 되었고, 수(隋)ㆍ당(唐)과의 항쟁 때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에서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이곳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 이병도는 지금의 만주 봉천(奉天) 무순성(撫順城) 뒤편의 북쪽 산 위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지(高句麗山城址)로 비정하였고,《국역삼국사기 269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신성은 요하와 살이허산성 사이에 있는 무순(撫順)의 고이산성이 틀림없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93쪽》
[주D-017]흘승골성(紇升骨城) :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8]큰 강 : 《양서(梁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되어 있는데, 엄체수는 소요수(小遼水)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된다. 《삼국사기》에는 엄시수(淹淲水)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의 소주(小註)에 “일명 개사수(蓋斯水)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개사수가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다는 설은 주몽의 본국(本國)을 동부여(東夫餘)로 잘못 안 데서 나온 것이므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북부여(北夫餘)의 위치가 지금의 농안(農安) 부근이었으므로, 여기의 대수(大水)는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17쪽 주》
[주D-019]보술수(普述水) :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비류수(沸流水)와 같은 말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된다.
[주D-020]졸본천(卒本川) : 이병도(李丙燾)는 “졸본은 바로 우리말의 ‘솔골’을 뜻하는 졸홀(卒忽), 승흘골(升紇骨)의 이칭(異稱)으로 볼 것이며, 고구려의 최초의 수도(首都)인 만큼 저명한 곳이니, 지금의 환인(桓仁)으로 비정(比定)한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17쪽 주》
[주D-021]비류수(沸流水) :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이다.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이를 평양의 동북쪽으로 추정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는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동가강의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4쪽 주》 이병도는 혼하(渾河)로 비정하였다.
[주D-022]국내성(國內城) : 고구려 전기(前期)의 수도로, 만포진(滿浦鎭) 대안(對岸)의 집안현성(輯安縣城)과 그 배후의 산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제2대 유리왕 때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장수왕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고구려의 근거지가 되었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83쪽 주》
[주D-023]환도(丸都) : 고구려의 옛 도성으로 지금의 통구(通溝)이다. 서기 2세기경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이 도읍한 이후 장수왕 15년(427) 평양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300년간의 수도였다.
[주D-024]염난수(鹽難水) :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주D-025]이이모(伊夷模) : 고구려 제9대 왕인 산상왕(山上王)의 이름이다.
[주D-026]고구려가 …… 쌓고는 : 원문에는 ‘高句麗依儉爲城’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高句麗依險爲城’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7]위궁(位宮) :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다.
[주D-028]정현(赬峴)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에는 “동천왕이 이때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이 죽령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5쪽 주》
[주D-029]북쪽 길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북쪽 길은 지금의 흥경(興京)에서 통화현(通化縣)을 거쳐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로 나오는 길인 듯하고, 남쪽 길은 흥경에서 부이강구(富爾江口)를 거쳐 하천 골짜기를 따라 통구에 이르는 길인 듯하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77쪽 주》
[주D-030]고쇠(高釗) :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이름이다. 사유(斯由)라고도 한다.
[주D-031]13년 …… 옮겼다 : 국내(國內)의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국내의 환도(丸都)로 천도한 것이다.
[주D-032]평양성 : 이병도는 여기에서 말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라 환도성(丸都城)의 별칭으로 지금의 통구(通溝) 지방이라고 하였다.
[주D-033]신국(新國) : 원문에는 ‘新州’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4]의책(衣幘) : 중국식의 의복과 관모(冠帽)를 말한다. 책(幘)은 두건의 일종이다.
[주D-035]책구루는 …… 있다 : 원문에는 ‘要在今興京界內’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漊在今興京界內’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6]박작성(泊灼城) : 지금의 안평(安平) 하구(河口)에 있다. 지금의 단동현(丹東縣) 동쪽의 구련성(九連城)이다.《조선전사 제3권, 124쪽》
[주D-037]진순(陳恂) : 원문에는 ‘陸恂’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嘉慶重修一統志)》 권60에 의거하여 ‘陳恂’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8]선우(單于) : 한나라 때 흉노족의 군장(君長) 칭호이다.
[주D-039]석호(石虎) : 후조(後趙)의 3대 황제인 무제(武帝) 석계룡(石季龍)을 가리킨다. 명제(明帝) 석륵(石勒)의 종자(從子)로, 석륵의 아들인 석홍(石弘)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대조천왕(大趙天王)이라고 칭하였으며, 다시 칭제(稱帝)하였다. 재위 기간은 334~349년이다.《晉書 卷106 石季龍載記》
[주D-040]오골성(烏骨城) :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오골성의 위치에 대해 종전에는 봉황성(鳳凰城)이나 그 부근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었다. 그러나 봉황성은 그 당시에 고구려의 부수도(副首都)였다는 것이 명백한만큼 그러한 견해들은 맞지 않는 것이다. 오골성은 지금의 요령성 수암현에 있는 수암성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3쪽》
[주D-041]안시성(安市城) : 당나라와 경계 지점에 있었던 성으로, 지금의 요동의 해성현(海城縣)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英城子)이다. 고구려의 국방상 요충지였다.
[주D-042]누살(傉薩) : 욕살(縟薩)을 말한다. 욕살은 군(郡) 규모의 여러 성을 통괄하는 커다란 행정 구역인 대성(大城)의 장관이다.
[주D-043]대행성(大行城) : 지금의 구련성(九連城)이다.
[주D-044]사비성(沙卑城) : 비사성(卑奢城)을 말한다. 지금의 대련만(大連灣) 북쪽 해안에 있는 대화상산(大和尙山)이다.
[주D-045]비사성(卑奢城) : 원문에는 ‘卑屠城’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6]평양을 …… 것이다 : 원문에는 ‘平壤遂大護’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平壤遂大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7]치소는 탕지현(湯池縣)이다 : 원문에는 ‘置湯池縣’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治湯池縣’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8]안주(安州) : 원문에는 ‘安市’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건안성(建安城) : 호삼성(胡三省)은 “당 건안성은 요동의 서남쪽 300리 되는 곳에 있으니, 바로 한나라 때의 평곽현(平郭縣)이다.” 하였다. 지금의 개평(蓋平) 동북쪽에 있는 석성산(石城山)이다.
[주D-050]먼저 …… 못하다고 : 원문에는 ‘不知先攻安市’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不如先攻安市’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1]풍홍(馮弘) : 원문에는 ‘馮宏’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청(淸)나라 6대 황제 고종(高宗)의 휘(諱)인 홍력(弘曆)의 홍(弘)을 휘해서 굉(宏)으로 표기한 것이다. 이하도 같다.
[주D-052]가탐(賈耽) : 당나라 때 사람으로, 자가 돈시(敦詩)이며,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서책 보기를 좋아하였으며, 먼 지방을 여행하고 온 사람을 만나면 그곳의 지리와 풍속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특히 지리(地理)에 밝아 《고금군국현도사이술(古今郡國縣道四夷述)》, 《정원십도록(貞元十道錄)》, 《도리기(道里記)》 등의 지리서를 저술하였다.《新唐書 卷166 賈耽列傳》
[주D-053]백애성(白厓城) : 《신당서》와 《삼국사기》에는 백암성(白巖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요령성 요양현(遼陽縣) 동북쪽에 있는 연주성(燕州城)으로 비정하고 있다. 당나라에서 이곳을 빼앗은 다음에 암주(巖州)를 설치하였다.
[주D-054]손벌음(孫伐音) : 《통감》과 《삼국사기》에는 손대음(孫代音)으로 되어 있다.
[주D-055]개모성(蓋牟城) : 지금의 무순(撫順) 서쪽에 있는 탑산산성이다. 심양(瀋陽)과 요양(遼陽)의 중간 지점인 십리아반(十里阿畔)이라는 설과 대련(大連)의 북쪽인 개평(蓋平)이라는 설도 있다.
[주D-056]신성(新城) : 신성은 고국원왕(故國原王) 5년(335)에 수축되어 고구려의 서방 요충이 되었고, 수(隋)ㆍ당(唐)과의 항쟁 때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으며, 고구려가 망한 뒤 당나라에서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이곳으로 옮기기도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해서 이병도는 지금의 만주 봉천(奉天) 무순성(撫順城) 뒤편의 북쪽 산 위에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지(高句麗山城址)로 비정하였고,《국역삼국사기 269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신성은 요하와 살이허산성 사이에 있는 무순(撫順)의 고이산성이 틀림없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93쪽》
[주D-057]남소성(南蘇城) : 신성(新城)과 함께 연(燕)과 접경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중진(重鎭) 가운데 한 성으로, 지금의 남산성자(南山城子)이다. 남소성의 지리적인 위치에 대하여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요령성(遼寧省) 무순현(撫順縣) 동북쪽에 있는 살이허성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봉천(奉天) 경현(京縣)의 경계에 있다’고 하였는바, 이로 보면 지금의 심양(瀋陽) 부근의 신성(新城)과 가까운 지점일 것으로 추정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513쪽 주》
[주D-058]금산(金山) : 《성경통지(盛京通誌)》에는,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27리 지점에 있는 황금산(黃金山)이 이곳이라고 하였다.
[주D-059]요사(遼史) : 원문에는 ‘遼東’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嘉慶重修一統志)》 권6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0]목저성(木底城) :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목기(木奇)이다.
[주D-061]금산(金山) : 《성경통지(盛京通誌)》에는,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27리 지점에 있는 황금산(黃金山)이 이곳이라고 하였다.
[주D-062]남협(南陜) : 《동사강목》 제2 상에 “남협은 지금의 연산관(連山關) 통원보(通遠堡)에서 봉성(鳳城)으로 가는 길인 것 같다.” 하였다.
[주D-063]색로(索虜) :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남조 사람들이 북조 사람들을 천시해서 부르던 칭호이다. 색두(索頭), 색두로(索頭虜)라고도 하는데, 북조 사람들이 변발(辮髮)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북조에서는 남조를 도이(島夷)라고 칭하면서 천시하였다.
[주D-064]요동성(遼東城) : 지금의 요령성 동북부 요하(遼河) 동쪽에 있던 성이다.
[주D-065]방여기요(方輿記要) : 원문에는 ‘方輿記故’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았다.《방여기요》의 원명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記要)》로, 청나라 고조우(顧祖禹)가 찬하였다.
[주D-066]바닷길을 …… 정벌하면서 : 원문에는 ‘自海道代高麗’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自海道伐高麗’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7]정관 19년 : 원문에는 ‘貞觀十八年’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8]고구려(高句麗) : 원문에는 ‘高書’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高麗’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9]고련(高璉) : 장수왕의 이름으로, 거련(巨連)이라고도 한다. 413년에 즉위하였다.
[주D-070]평양성(平壤城) : 이병도는, 여기에서 말한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성이 아니라 최초 동황성(東黃城) 소재의 지명인 듯하며, 동황성은 환도성(丸都城)의 별칭으로 지금의 통구(通溝) 지방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이 당시에 낙랑의 수도가 지금의 평양 근처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7쪽 주》
[주D-071]그다음 해에 …… 거처하였다 : 국내(國內)의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국내의 환도(丸都)로 천도한 것이다.
[주D-072]장안성(長安城) : 이병도는, “여기에서 말한 장안성은 지금의 평양시를 말한 것으로, 평원왕 28년(586)에 대성산(大城山) 아래에서 이곳으로 옮겨 장안성이라고 하였던 모양인데, 후에는 역시 이 성도 평양성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557쪽 주》
[주D-073]발로하(發蘆河) : 《삼국사기》에는 호로하(瓠瀘河)로 되어 있다. 《동사강목》 제4 하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는데, 징파도는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에 있다.
[주D-074]책성(柵城) : 발해에서 예(濊)의 옛 땅을 동경(東京)으로 삼은 다음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고 불렀는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에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라 하였으며, 이병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으로 보았다.
[주D-075]50년 : 원문에는 ‘五十五年’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76]비열도(卑列道) : 이병도는, 비열을 지금의 안변(安邊)의 고호인 비열(比列)로 보아서 안변에서 아호비령(阿虎飛嶺)을 넘어 양덕(陽德), 성천(成川), 강동(江東)을 거쳐 평양에 이르는 길로 보았다.《국역삼국사기 99쪽 주》
[주D-077]다곡도(多谷道)와 해곡도(海谷道) : 이병도는, 다곡도의 다곡은 지금의 평산(平山)인 고구려 대곡성(大谷城)을 일컫는 것으로, 지금의 평산에서 서흥(瑞興), 황주(黃州)를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인 듯하고, 해곡도의 해곡은 지금의 신계(新溪)인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으로, 삭녕(朔寧), 신계, 수안(遂安)을 거쳐 평양으로 가는 길인 듯하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99쪽 주》

 
해동역사 속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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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7
신라(新羅)


강역총론(疆域總論)
○ 신라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1년(기원전 57)에 경주(慶州)에 나라를 세웠으니, 바로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이다.
《양서(梁書)》 신라열전(新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본디 진한의 종족이다.
《북사(北史)》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또한 사로(斯盧)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시조 혁거세(赫居世)가 전한(前漢) 오봉 1년에 개국하고는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였으며,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고도 하였다. 시조 이래로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이다.- 에 거처하였다.
○ 그 뒤에 신라는 진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그 사방 경계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에 이르렀는바, 대개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신라국은 지금 조선의 경상도로, 신라의 땅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신라는 북쪽으로 계립령에 이르른다.” 하였는데, 이는 상대(上代) 때의 지역을 말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계립령은 바로 조령(鳥嶺) 근처의 지역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한 12국은 지금의 경상좌도 지역이며, 신라는 바로 그 12국 가운데 한나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탈해왕(脫解王) 이후로 10여 개의 작은 나라를 병탄하여 북쪽으로는 조령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가야(伽倻)와 이웃하여 경상좌도 지역을 전부 차지하였다. 그런즉 진한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병탄된 것은 분명하다.
○ 조위(曹魏) 때부터 신라는 점차 조령 북쪽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해서 진(陳)나라 때에는 북쪽 경계가 함흥(咸興)까지 이르렀다.
《수서(隋書)》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으며, 한나라 때에는 낙랑(樂浪) 지역을 차지하였다. 혹 사라(斯羅)라고도 칭하며, 옥저(沃沮), 불내예(不耐濊), 한(韓)의 지역을 차지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注)에 이르기를, “수나라 때에는 옥저 지역이 이미 신라에 편입되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 북쪽은 바로 한나라 때 낙랑군의 남쪽 경계이다. 동한(東漢) 이후로 신라가 그 지역을 침입하였는바, ‘낙랑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 뒤에는 또 북쪽으로 국경을 넓혀서 양(梁)나라와 진(陳)나라 때에는 동북쪽으로 함흥 등지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삼각산(三角山)까지 경계로 삼았다. 함흥 북쪽은 옛 옥저이며, 함흥 남쪽은 바로 불내예인바, ‘옥저와 불내예 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북계조(北界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양(梁)나라와 진(陳)나라 사이에는 신라가 가야(伽倻)의 여러 나라를 병합해서, 동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지리산(智異山)을 경계로 하였다.
《양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백제에서 동남쪽으로 5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는 500리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그 땅은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남쪽과 북쪽은 고구려, 백제와 접하고 있다. 그 나라의 풍속에 성(城)을 ‘건모라(健牟羅)’라 하고, 성안에 있는 읍(邑)을 ‘탁평(啄評)’이라 하고, 성 밖에 있는 읍을 ‘읍륵(邑勒)’이라 하는데, 이는 중국 말로 군현(郡縣)을 뜻한다. 나라 안에는 6개의 탁평이 있고, 52개의 읍륵이 있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이르기를, “신라에서는 성안에 있는 읍을 ‘탁평’이라 하고, 성 밖에 있는 읍을 ‘읍륵’이라 하는데, 6개의 탁평과 52개의 읍륵이 있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6개의 탁평은 바로 신라의 6부(部)이다. 6부 가운데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가 황초령신라비(黃草嶺新羅碑)에는 ‘탁부(啄部)’와 ‘사탁부(沙啄部)’로 되어 있는데, 탁평(啄評)은 탁부(啄部)의 오기(誤記)인 듯하고, 탁평(啄評)은 또 탁평(啄評)의 오기인 듯하다. 6부는 모두 경주(慶州)의 경내에 있으므로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고 한다’ 한 것이다.
《구당서(舊唐書)》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국은 한나라 때에는 낙랑 지역에 있었는데,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와 접하였고, 북쪽은 고구려와 이웃하였다. 동서 간의 거리는 1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2000리이며, 성읍(城邑)과 촌락(村落)이 있다.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동서가 1000리이고 남북이 3000리이다. 동쪽은 장인국(長人國)에 닿았고, 동남쪽은 일본, 서쪽은 백제, 남쪽은 바다, 북쪽은 고구려에 닿았다. -또 이르기를, “장인(長人)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키가 3장(丈)이고 톱니 치아에 갈퀴 손톱을 하였으며, 검은 털이 온몸을 덮고 있다. 화식(火食)을 하지 않고, 새와 짐승을 날로 씹어 먹으며, 간혹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부인(婦人)을 얻으면 의복(衣服)을 만들게 한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에 이어지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는 관문(關門)이라고 한다. 신라는 그곳에 항상 쇠뇌를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하였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지리산에 이르고, 북쪽은 한수(漢水)에 닿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는 법흥왕(法興王) 때부터 6가야의 지역을 모두 병합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변진조(弁辰條)에 나온다.-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경계로 삼았다. 지금 조령 남쪽에서 뻗어내려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1000여 리 산맥이 동서를 나누어서 동쪽은 경상도로 바로 신라 지역이고, 서쪽은 충청도와 전라도로 바로 백제 지역이다. 이것이 신라의 대개이다. 그러나 충청도의 영동(永同), 황간(黃澗), 청산(靑山), 보은(報恩), 옥천(沃川) 다섯 고을 및 전라도의 운봉(雲峯), 무주(茂朱) 두 고을은 본디 신라에 속하였다.
○ 당나라 중종(中宗) 때 신라는 백제 지역 및 고구려의 남쪽 경계를 병합하여 9개 주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이때 사방의 경계는, 삼면은 모두 바다까지 닿았고, 북쪽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삼았다.
《구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 -신라 태종왕(太宗王) 7년- 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토평(討平)하였다. 이때부터 신라가 점차 고구려와 백제 지역을 소유하여 그 경계가 점차 넓어져서 서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고 드디어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상주(尙州), 양주(良州), 강주(康州),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한주(漢州), 삭주(朔州), 명주(溟州) 등 9개 주를 설치한 다음, 주에는 도독(都督)을 두어 10개 혹은 20개의 군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군에는 태수(太守)를 두고, 현에는 소수(小守)를 두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당나라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고는 드디어 9개 주를 두었다. 본국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상주(尙州) -지금의 상주(尙州)이다-, 양주(良州) -지금의 양산현(梁山縣)이다-,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晉州)이다.- 이고, 옛 백제국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웅주(熊州)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전주(全州) -지금의 전주이다-,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光州)이다.- 이고, 옛 고구려의 경계 안에 3개의 주를 두었으니, 한주(漢州) -지금의 광주(廣州)이다.-, 삭주(朔州)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이다-,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부(江陵府)이다- 이다. 9개 주가 관할하는 군현(郡縣)은 무려 450개였는바, 신라의 지리적 범위가 이렇듯 넓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태종왕 7년(660)에 백제가 망하였고, 문무왕(文武王) 8년(668)에 고구려가 망하였다. 신문왕(神文王) 5년(685) -당나라 중종 2년- 에 이르러서 세 나라의 땅을 합하여 9개 주를 설치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때에 군현(郡縣)의 이름을 고쳤다. 아홉 주가 관할하는 바는 소경(小京)이 6개, 군(郡)이 120개, 현(縣)이 298개였다.
또 살펴보건대, 한주, 삭주, 명주가 고구려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를 두루 상고해 보면, 삭주는 혹 고구려의 옛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한주의 경우에는 본디 백제에 속해 있었고, 명주는 본디 신라에 속해 있었다. 간혹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잠시 잃기는 하였으나 곧바로 수복하였는바, 고구려의 강역은 일찍이 한수(漢水) 남쪽,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즉 강릉(江陵) -바로 명주(溟州)이다.- 과 광주(廣州) -바로 한주(漢州)이다.- 를 어떻게 고구려 지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개 신라가 9개 주를 나누어 설치하고서는 세 주가 관할하는 바가 대부분 고구려의 남쪽 경계 지역임을 범범하게 말한 것인데,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제대로 고찰하지 않고서 마침내 세 주의 관내를 모두 고구려 지역이라고 한 것이다. 이에 영남의 순흥(順興) 등 9개 고을이 명주에 예속되어 있자, 이곳을 그대로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수 남쪽의 수원(水原) 등 10개 고을이 한주에 예속되어 있자, 이곳을 그대로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경계는 본디 한수 남쪽을 넘어오지 않았는데, 더구나 조령의 남쪽이겠는가.
○ 신라 말기에는 8개 주를 모두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차지하여 단지 양주(良州)만이 남아 있었으며, 그 뒤에는 고려(高麗)에 병합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경순왕(敬順王) 9년(935) -후당(後唐) 노왕(潞王) 2년- 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으므로 왕이 온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하니, 태조가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고 하였다.

북계(北界)의 연혁(沿革)
○ 후한(後漢) 때 신라는 동해 가를 따라 낙랑의 영동(嶺東) 7개 현을 모두 차지하고 북쪽으로 철령(鐵嶺)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해왕(南解王) 16년(19) -왕망(王莽) 11년- 에 북명(北溟)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사람이 밭을 갈다가 예왕(濊王)의 도장을 발견해 바쳤다. ○ 파사왕(婆娑王) 때 -한나라 장제(章帝) 때이다.- 실직국(悉直國)-지금의 삼척(三陟)이다.- 이 와서 투항하였다. ○ 일성왕(逸聖王) 4년(137) -한나라 순제(順帝) 12년- 에 말갈(靺鞨)이 변경에 들어와 장령(長嶺)의 5책(柵)을 불살랐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나라 때에는 말갈이란 칭호가 없었다. 혹자는 불내예(不耐濊)라고도 한다.- ○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7) -한나라 환제(桓帝) 11년- 에 장령진(長嶺鎭)을 순행하여 수졸(戍卒)들을 위로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척이나 강릉 등지는 본디 낙랑의 영동 7개 현이다. 후한(後漢) 초기에는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 두 고개의 길을 열지 못하였으므로 신라가 동해 가를 따라서 그곳 7개 현의 지역을 차지하고는 북쪽으로 장령(長嶺)까지를 경계로 삼은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지지(地志)를 근거로 보면, 지금의 영흥부(永興府)를 고구려 때에는 장령진(長嶺鎭)이라고 칭하였는바, 여기에서 이른 장령은 철령(鐵嶺)을 지칭하는 듯하다.
○ 한나라 환제(桓帝) 때 신라는 비로소 계립령과 죽령 두 고개의 길을 열고서 점차 북쪽 경계를 개척해 춘천(春川) 등지까지 이르렀다.
《삼국지(三國志)》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제와 영제(靈帝)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서 군현(郡縣)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樂浪郡)을 말한다.- 이 제압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은 바로 신라와 백제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 -한나라 환제 10년- 에 계립령의 길을 열었다. -계립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북쪽으로 2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속칭 마골산(麻骨山)이라고 부른다.- 5년(158)에 죽령(竹嶺)의 길을 열었다.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나해왕(奈解王) 27년(222) -위(魏)나라 문제(文帝) 3년- 에 백제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春川)이다.- 에 쳐들어오자 이벌찬(伊伐湌) 충훤(忠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막았다.
○ 조위(曹魏) 정시(正始) 연간에는 신라의 북쪽 경계 지역을 낙랑에게 빼앗겼다.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종사(部從事)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의 남부종사(南部從事)이다.- 오림(吳林)이, 낙랑이 본디 한국(韓國)을 통치하였다고 해서 진한(辰韓)의 8개 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였다. 그런데 역관(譯官)이 말을 전하면서 다르게 전달하여, 신지(臣智)가 한(韓)의 분노를 자극해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에 두 군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군과 대방군이다.- 이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니, 드디어 한이 멸망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정시(正始) 7년(246)의 일이다. 진한은 신라를 가리킨다. 오림이 분할한 8개 국은 바로 조령 북쪽에 있는 춘천 등지이다. 조령 남쪽의 군현들은 오림이 분할할 수가 없었으며, 역시 낙랑이 받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韓)이 멸망되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조령 북쪽의 한 우두머리[渠帥]가 두 군에 의해 멸망된 것이다. 계림(鷄林)의 한을 두 군이 어떻게 멸망시킬 수 있었겠는가.
○ 서진(西晉) 이후로는 안변(安邊)의 춘천(春川) 지역을 다시 신라가 차지하였으며, 유송(劉宋) 초기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림왕(基臨王) 3년(300) -진(晉)나라 혜제(惠帝) 11년- 에 비열홀(比列忽) -지금의 안변(安邊)이다.- 에 순행하였다.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니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귀복(歸服)하였다. ○ 내물왕(奈勿王) 42년(397) -진나라 안제(安帝) 1년- 에 북쪽 변경의 하슬라(何瑟羅) -바로 강릉이다.- 에 가뭄이 들었다. ○ 눌지왕(訥祗王) 22년(438) -송나라 문제(文帝) 15년- 에 우두군(牛頭郡)에서 산골짜기의 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려 50여 가(家)가 떠내려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때 춘천은 오히려 신라에 속해 있었으므로 재상(災祥)이 사관(史官)에게 상세히 보고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晉)나라 때부터 송(宋)나라 때까지 춘천 동쪽, 철령 남쪽 지역은 그대로 신라의 지역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송나라 문제(文帝) 15년(438) 이후로는 신라의 계립령과 죽령 서쪽 지역과 북쪽 지역이 모두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본기에 이르기를, “눌지왕 34년(450) -송나라 문제 27년- 에 고구려의 변장(邊將)이 실직(悉直)의 들판에 와서 사냥을 하였는데, 신라의 하슬라(何瑟羅) 성주(城主)가 군사를 내어 살해하였다. 고구려 왕이 노하여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하였다. ○ 열전(列傳)에 이르기를, “고구려 왕이 김춘추(金春秋)에게, ‘마목현(麻木峴), 죽령의 서쪽과 북쪽 지역은 본디 우리의 땅이다.’ 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의 온달(溫達)이 말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은 우리의 땅이다.” 하였다. 대개 마목현은 바로 계립현으로, 방음(方音)으로 마(麻)를 겨릅[鷄立]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라 눌지왕 22년(438) -송나라 문제 15년- 이전에는 춘천 등지를 매번 신라에서 관할하였는바, 고구려의 경계는 반드시 죽령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34년에 이르러서 고구려가 실직의 들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고구려 왕이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직은 지금의 삼척이고, 서쪽 변경은 삼척의 서쪽을 가리키는바, 죽령 서쪽과 북쪽 지역이 고구려에게 함락된 것이 이즈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가 사냥을 하면서 삼척에 이르른 것이며, 고구려가 침입한 것에 대해서도 반드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입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고구려는 백제의 한수 북쪽에 있는 여러 부(部)를 빼앗아 차지하여, 그 남쪽 경계가 백제의 동쪽에서 대관령의 서쪽 지역까지는 계립령과 죽령 두 고개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신라의 삼척 등지와 경계를 접하였던 것이다.
○ 이 당시에 대관령 동쪽의 바닷가 지역은 여전히 신라에 속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왕(慈悲王) 11년(468) -송나라 명제(明帝) 4년- 9월에 하슬라 사람들을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을 쌓았다. ○ 소지왕(炤智王) 3년(481) -송나라 순제(順帝) 5년- 에 비열성(比列城) -지금의 안변(安邊)이다.-에 순행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군복을 하사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대관령 서쪽 지역은 비록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영동의 강릉 등지는 신라가 관할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강릉이 본디 고구려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며, 강릉이 관할하는 순흥(順興) 등 9개 고을을 모두 고구려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강릉이 고구려 지역이라는 형적이 본디 없는데, 더구나 강릉이 관할하는 영남의 여러 현이겠는가. 영남이 참으로 고구려 지역이었다면 고구려 왕이 김춘추(金春秋)를 꾸짖을 적에나 온달(溫達)이 군사들에게 맹서할 적에 어찌하여 영남 지역을 거론하지 않고 반드시 죽령 서쪽과 북쪽을 말하였겠는가. 영남 지역은 본디 고구려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2년(551)에 신라가 다시 조령 북쪽의 충주(忠州) 등지 및 한수(漢水)의 동쪽과 북쪽 지역을 빼앗아 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眞興王) 12년(551) -양나라 간문제 2년- 에 왕이 거칠부(居柒夫)에게 명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백제가 먼저 공격해 평양(平壤)을 격파하자, 거칠부 등이 승세를 타고 죽령 바깥쪽, 고현(高峴) 안쪽의 10개 군을 탈취하였다. ○ 18년(557) -진(陳)나라 무제(武帝) 1년- 에 국원성(國原城) -지금의 충주(忠州)이다.- 을 소경(小京)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온달열전(溫達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달이 상주하기를, “신라가 우리 한수 북쪽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원컨대 군사를 거느리고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출발에 임해서 온달이 맹서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 서쪽 지역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나가서 신라의 군사들과 싸우다가 죽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한양(漢陽) 남쪽 지역은 백제에 속하였다. 그런즉 거칠부가 취한 바는 바로 충주 북쪽 지역 및 한수의 동북쪽 지역이다. 온달이 이른 바 ‘우리 한수 북쪽 땅을 빼앗아 갔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양나라 원제(元帝) 2년(553)에 신라가 또 지금의 한양(漢陽), 이천(利川) 등지를 취하였는바,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로 끼어들어가,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삼각산(三角山)을 경계로 하였고, 서쪽으로는 안산(安山)의 앞바다까지 닿았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들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 14년(553) -양나라 원제 2년- 에 백제의 동북쪽 변방 지역을 탈취해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 16년(555)에 왕이 북한산(北漢山) -지금의 한양이다.- 을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劃定)하였다. ○ 18년(557)에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 29년(568) -진(陳)나라 임해왕(臨海王) 3년- 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南川州) -지금의 이천(利川)이다.- 를 설치하였다.
《고려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희(徐煕)가 말하기를, “삼각산 북쪽은 고구려의 옛 땅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은 바로 한양, 이천 등지이다. 이 당시에 신라가 이미 그 지역을 차지하였으므로 진흥왕이 순행하면서 북한산주에 이르러서 강역을 획정하였던 것이다. 북한산은 지금의 삼각산으로, 삼각산의 승가사(僧伽寺)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북쪽 산봉우리 위에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비문은 모두 12행인데, 마멸되어서 판독할 수가 없고, 판독할 수 있는 것 가운데, 제1행에는 ‘진흥태왕 및 중신들이 순수할 때 기록한 것이다[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時記]’란 글이 있고, 제8행에는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글이 있으며, 세운 날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이는 진흥왕 16년에 강역을 획정할 때 세운 것이며, 이곳이 고구려와 국경을 나눈 곳이다.
또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신라에서 당나라와 통하는 길은 매번 당은포(唐恩浦), 당항성(棠項城) 등지를 경유하는데, 당은포는 바로 남양부(南陽府)이고, 당항성은 바로 안산군(安山郡)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성읍조(城邑條)에 나온다.- 그렇다면 신라의 서쪽과 북쪽 경계는 충주, 이천에서 안산, 남양의 바다에 이르는 지역으로,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이 당시에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까지 이르렀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흥왕순수비가 함흥부 북쪽 초방원(草坊院)에 있는데, 그 비문에 대략, “세차(歲次) 무자년(568) 가을 8월에 관내 지역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폈다.” 하였다. 비문은 12행이며 행마다 35자로 전체 비문의 글자 수는 420자인데,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겨우 278자이다. 삼국(三國)이 정립해 있던 시기에는 신라 지역이 안변부를 지나지 못하였는데, 함흥은 안변에서 북쪽으로 200여 리나 되는 곳에 있다. 이 사실은 국사(國史)와 야승(野乘)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인데, 홀로 먼 지방의 한 조각 비석이 천고의 고사(故事)를 남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무자년은 바로 진흥왕 29년이다.
○ 당나라 초기에는 신라의 서북쪽 경계가 임진(臨津) 등지에 이르렀다.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원(上元) 2년(675) -신라 문무왕 15년- 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호로하(瓠蘆河)를 건너가 신라 북방의 큰 진(鎭)인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였다.
《자치통감》의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내가 살펴보건대, 《당서》 유인궤열전에 나오는 호로하는 마땅히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 북쪽에 있어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고, 호로하는 바로 임진강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선덕왕(善德王) 7년(638) -당나라 태종 12년- 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칠중성을 침공하였다고 하였다. 그런즉 적성이 신라 지역이 된 것은 이미 당나라 초기의 일이었다.
○ 당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동북쪽 경계는 덕원군(德源郡), 서북쪽 경계는 대동강(大同江)에 이르러서 발해(渤海)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 24년(736)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칙서를 내려 패강(浿江) 남쪽 지역을 하사해 준 데 대해 사은(謝恩)하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를 경계로 삼았다.
《문원영화(文苑英華)》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현종칙신라왕서(唐玄宗勅新羅王書)에 이르기를, “경(卿)이 패강에 방수(防戍)를 설치하고자 하는데, 이곳은 발해의 요충지에 해당되는바, 참으로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칙서는 바로 개원 26년(738)에 내린 칙서이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뒤로 동북쪽은 천정군(泉井郡)의 탄항관(炭項關)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의 덕원(德源)이고, 서북쪽은 당악현(唐嶽縣)으로 경계를 삼았는데, 지금의 중화(中和)이다. 중화에서 동쪽으로 지금의 상원(祥原), 수안(遂安), 곡산(谷山)을 거쳐 덕원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신라의 변새(邊塞)이고, 그 밖에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는 모두 발해가 차지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하(泥河)는 마땅히 덕원군(德源郡)에 있어야 하고, 패강(浿江)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당나라 현종이 내린 칙서에 의거하면 패강 북쪽은 분명히 발해 지역이었다. 대개 당나라 고종(高宗) 때 고구려를 격파하고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그 지역에 설치하였다가 개원(開元) 이후로는 안동도호부를 서쪽의 요서(遼西) 지역으로 옮겼다. 그러므로 패강 북쪽 지역은 발해에 편입되고, 남쪽 지역은 신라에 속하게 된 것이다.
○ 신라 말기에 궁예(弓裔)가 비로소 대동강 서북쪽 지역을 취하였다.
《삼국사기》 궁예열전(弓裔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궁예가 말하기를, “옛날에 신라가 당나라에 청병(請兵)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무성하다.” 하였다. 성책(聖冊) 1년(905) -당나라 애제(哀帝) 2년- 에 패서(浿西)13진(鎭)을 나누어 설치하였다. 평양성주(平壤城主) 검용(黔用)이 항복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패수의 서북쪽 지역은 바로 발해의 압록부(鴨綠府) 남쪽 경계이다. 발해가 한창 거란(契丹)과 서로 싸우고 있었으므로 궁예가 그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성읍(城邑)

○ 금성(金城)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은 금성(金城)에 거처하는데, 성 주위가 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혁거세(赫居世) 21년(기원전 37)에 궁성(宮城)을 쌓고는 금성이라고 하였는데, 그 성은 지금 경주부에서 동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다.
○ 계림(鷄林)
《구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3년(663)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을 계림주 도독부(鷄林州都督府)로 삼고, 신라 왕 김법민(金法敏)에게 계림주 도독(鷄林州都督)을 제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탈해왕(脫解王) 9년(65)에 시림(始林)에서 닭이 우는 변괴가 있어서 다시 이름을 계림이라고 고치고는 인하여 국호로 삼았는데, 시림은 지금 경주에서 남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다.
○ 상주(尙州)ㆍ양주(良州)ㆍ강주(康州)ㆍ웅주(熊州)ㆍ전주(全州)ㆍ무주(武州)ㆍ한주(漢州)ㆍ삭주(朔州)ㆍ명주(溟州)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강역총론조(疆域總論條)에 나온다.
○ 당은군(唐恩郡)ㆍ장구진(長口鎭)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등주(登州)에서 동북쪽으로 바닷길로 갈 경우, 바닷가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오골강(烏骨江) -삼가 살펴보건대, 강은 압록강 서쪽에 있다.- 에 이르며, 이어 남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오목도(烏牧島), 패강(貝江)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이다.- 입구,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에 있는 장구진에 도달한다. 또 마전도(麻田島), 고사도(古寺島), 득물도(得勿島)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덕물도(德勿島)이다. 덕(德)과 득(得)은 옛날에 통용하였다.- 를 지나 1000리를 가면 -삼가 살펴보건대, 오골강(烏骨江)에서 당은포(唐恩浦)까지가 1000리임을 이른 것이다.- 압록강의 당은포 입구에 이르고, 이어 동남쪽으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에 이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는 신라 때 당은군(唐恩郡)이라고 칭하였다. 그런즉 당은포는 남양의 바다 포구이다. 《신당서》에 당은포에서 육로를 통해 700리를 가면 신라의 왕성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왕성은 지금의 경주(慶州)이다. 경주는 과연 남양부에서 동남쪽으로 7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리고 소정방(蘇定方)이 올 적에 신라 왕이 이천(利川)에 나와 주둔해 있으면서 배를 보내어 소정방을 덕물도(德勿島)에서 맞이하였는데, 덕물도는 남양의 앞바다에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당시에 당나라와 통하는 길은 반드시 남양을 경유하였을 것이므로, 당은포가 남양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신당서》에서 압록강(鴨綠江)의 당은포라고 한 것은, 당시에 전사(傳寫)하면서 잘못 쓴 것이다. 장구진은 마땅히 초도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초도는 지금의 풍천(豐川) 앞바다에 있는바, 생각건대 지금의 장연(長淵)이나 은율(殷栗) -본명은 율구(栗口)이다.- 등지이다. 당나라 때 신라는 대동강을 경계로 삼았으므로 초도와 장구진이 신라의 서북쪽 경계가 된 것이다.
○ 당항성(棠項城)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6년(642)에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해서 당항성을 탈취해 신라에서 당나라에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고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항성은 조선의 전주(全州) 동북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항성은 신라에서 당나라로 통하는 길이다. 당시에 당나라로 통하면서는 매번 남양부의 앞바다를 경유하였은즉, 당항성은 마땅히 남양 근처에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보면, 지금의 안산군(安山郡)은 본디 장항구현(獐項口縣)인데, 당(棠)과 장(獐)은 음이 비슷한바, 이른바 당항이란 것은 안산인 듯하다.
○ 칠중성(七重城)매초성(買肖城)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가 고구려의 반군(叛軍)을 받아들여서 백제의 지역을 침략해 지키고 있자,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동원해 정벌하였다. 상원(上元) 2년(675)에 유인궤(劉仁軌)가 신라의 군사를 칠중성(七重城)에서 격파하였다. 조서를 내려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신라의 매초성(買肖城)에 둔병(屯兵)하게 하였는데, 신라와 세 번 싸워서 모두 이겼다. -삼가 살펴보건대, 칠중성은 지금의 적성현(積城縣)이고 매초성은 바로 매성(買省)의 와전으로, 지금의 양주(楊州)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칠중성은 조선의 경주(慶州) 북쪽 경계 안에 있다.
○ 천정군(泉井郡)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발해의 책성부(柵城府)까지는 39개 역(驛)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정군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이다.
○ 청해진(淸海鎭)
《신당서》 신라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가 신라로 돌아가서 그 나라의 왕을 알현하고는 말하기를, “온 중국이 신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해(淸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잡아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청해는 해로(海路)의 요충지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해가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청해진(淸海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의 강진현(康津縣) 완도(莞島)이다.
○ 김주(金州)
《책부원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927)에 신라국의 김주사마(金州司馬) 이언모(李彦模)를 가간교우상시(可簡較右常侍)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해부(金海府)를 고려 때 김주라고 칭하였는데, 이곳에서 김주라고 칭한 것이 과연 김해부를 가리키는지는 미상이다.
○ 천주(泉州)
《오대사(五代史)》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후당(後唐) 동광(同光) 2년(924)에 신라국의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쳤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사비성(沙鼻城)ㆍ기노강성(岐奴江城)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지천황(天智天皇) 2년(663) -당나라 용삭(龍朔) 3년- 3월에 장군을 파견하여 신라를 정벌해 신라의 사비기성(沙鼻岐城)과 노강성(奴江城)을 빼앗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성은 상고할 수가 없다.


[주D-001]사로국(斯盧國) : 이병도(李丙燾)는, 서나(徐那), 서라(徐羅), 서야(徐耶), 사로(斯盧), 사라(斯羅), 신라(新羅)는 같은 음을 다르게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 서(徐), 사(斯), 신(新)은 바로 ‘소벌(蘇伐)’의 소(蘇)와 같이 ‘솟[高, 上]’의 사음(寫音)인 것 같다. 나(那), 라(羅), 야(耶), 로(盧)는 ‘나라[國]’의 고어(古語)인즉, 바로 상국(上國)이라는 뜻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쪽 주》
[주D-002]불내예(不耐濊) : 지금의 함경도 안변군(安邊郡)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주D-003]건모라(健牟羅) : 큰 성(城)이라는 뜻이며, 후에는 금성(金城)이라고 썼다. 고구려ㆍ백제의 왕도(王都)에 상당한 것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한 왕기(王畿)를 말하는데, 우리말의 ‘큰마을’을 음사(音寫)한 것이다. 이병도는 “건모라는 고대어(古代語)에서 대촌(大村), 대읍(大邑)을 뜻하는 ‘큰므르’, ‘큰몰’의 사음(寫音)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619쪽》
[주D-004]탁평(啄評) : 신라 때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 건모라의 내읍(內邑)을 말한다. 신라에는 6탁평이 있었다.
[주D-005]읍륵(邑勒) : 신라 때 지방 행정 단위의 하나로, 신라어의 읍(邑)과 촌(村)을 의미하는 ‘벌(伐)’, ‘불[火, 弗]’의 대음(對音)이다. 곧 ‘읍’의 종성(終聲)인 ‘ㅂ’과 ‘륵’의 초성인 ‘ㄹ’을 반절한 것으로 생각된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95쪽 주》
[주D-006]소수(小守) : 신라의 관직명으로, 외사정(外司正) 밑에 있는 지방 관원이다.
[주D-007]북명(北溟) : 이곳에서의 북명에 대해 이병도는 지금의 원산(元山) 방면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7쪽 주》
[주D-008]실직국(悉直國) : 이에 대해 이병도는 종래의 삼척설(三陟說)은 거리상 너무 멀어 불가하고, 지금의 월성군(月城郡) 근처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7쪽 주》
[주D-009]장령(長嶺) : 이병도는, “영흥(永興)의 장령진(長嶺鎭)이 있으나, 이 당시에 신라의 판도가 이곳까지 미쳤다고 보기는 어려운바, 강원도 방면의 어느 곳일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9쪽 주》
[주D-010]신지(臣智) : 삼한 시대 군장(君長) 칭호의 하나이다. 이병도는 “신(臣)은 대(大)를 의미하는 옛말인 것 같고, 지(智)는 벼슬아치, 장사치, 조라치, 갓바치 등의 직업자(職業者)의 호칭인 ‘치’의 사음(寫音)일 것이다. 즉 신지는 대인(大人), 대관(大官)의 뜻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40쪽》
[주D-011]50여 가(家) : 원문에는 ‘五千餘家’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3에 의거하여 ‘五十餘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이하(泥河) : 여기에서의 이하는, 이병도는 강릉의 오십천(五十川)이라고 하였다.
[주D-013]평양(平壤) : 지금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성(北漢城)에 있었던 남평양(南平壤)을 가리킨다.
[주D-014]고현(高峴) : 이병도는 지금의 철령(鐵嶺)인 듯하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644쪽》
[주D-015]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 비문은 모두 12행에 행마다 32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순조(純祖) 16년(1816)에 김정희(金正喜)와 김경연(金敬淵)이 비문을 조사하고 판독하였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眞興太王及衆臣等巡狩□□之時記, 言□令甲兵之□□□年□□□霸主設□, 之所用□祀嶽之時新羅大王, 耀德不用兵故□□□□□□□文大得人民□□, □是巡狩管境□□□□□□□□如有忠信精誠, □可加賞□功以□□□□□□衆路過漢城陟□, 見道人□居石窟□□□□刻石誌辭, 尺干內夫智一尺干智㖨多刻□智迊干南川軍主□, 夫智及干未智大奈□□□□沙喙屈丁次奈□□, 夫□指□空幽則□□□□□□□立所造非□, □守見□□□□刊石□□□記幷” 《朝鮮金石總覽上, 조선총독부, 경인문화사, 11쪽》
[주D-016]민심을 살폈다 : 원문에는 ‘坊采民心’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訪采民心’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7]호로하(瓠蘆河) : 《동사강목》 제4 하에 “지금의 마전(麻田) 징파도(澄波渡) 하류에 호로하가 있는데, 그 남쪽이 바로 칠중성(七重城)이다.” 하였는데, 징파도는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에 있다.
[주D-018]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19]이하(泥河) : 발해가 신라와 경계를 접했던 이하에 대해서는, 함경도 덕원(德源) 부근의 용흥강(龍興江)이라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이와는 달리 정약용(丁若鏞)은 강릉(江陵) 북쪽, 양양(襄陽)이라고 보고 있으며, 강원도 명주군에 있는 연곡천(連谷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주D-020]애제(哀帝) : 원문에는 ‘末帝’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패서(浿西) : 이병도는 패서의 위치를 예성강(禮成江) 북쪽 지역이라고 하였다.
[주D-022]검용(黔用) : 원문에는 ‘黔勇’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50 궁예열전에 의거하여 ‘黔用’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금성(金城) : 이병도는, “금성은 금성탕지(金城湯池)에서 그 뜻을 취해온 것이 아니라 ‘검성(儉城)’, 즉 ‘임금의 성’이라는 뜻인 듯하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쪽 주》
[주D-024]시림(始林)에서 …… 삼았는데 : 이에 대해 이병도는, “시림을 계림이라고 한 것은 ‘始’의 음(音)과 ‘鷄’의 훈(訓)이 같은 데에서 사용된 것이지 전설과 같이 닭이 울어서 계림으로 고친 것은 아니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13쪽 주》
[주D-025]당항성(棠項城) : 지금의 경기 남양(南陽)으로, 신라에서 당나라로 통하는 요충지였다. 당항성(黨項城)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26]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서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27]매초성(買肖城) : 지금의 경기도 양주(楊州)로 추정되고 있으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사강목》 제4 하에는 “매초는 매성군(買省郡)으로, 지금의 양주이다.” 하였다.
[주D-028]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 왕봉규는 신라 말기의 호족(豪族)으로, 처음에 지금의 의령(宜寧)인 천주현(泉州縣)이라고도 하는 의상현(宜桑縣)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력을 떨치다가 뒤에 지금의 진주(晉州)인 강주(康州) 지역도 석권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 중국과 활발한 교섭을 벌여 후당(後唐)으로부터 천주 절도사(泉州節度使), 회화장군(懷化將軍) 등의 직을 제수받았다. 뒤에 견훤(甄萱)의 지배하에 들어가 세력이 소멸되었다.
[주D-029]사비성(沙鼻城)ㆍ기노강성(岐奴江城) : 사비기성(沙鼻岐城)과 노강성(奴江城)의 잘못이다. 사비기는 무주(茂朱)의 옛 이름인 삽계[朱溪]이고, 노강은 무주 동쪽에 있는 눈나리[雪川]를 가리킨다.《완역일본서기 480쪽 주》
 
해동역사 속집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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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8
백제(百濟)


강역총론(疆域總論)
○ 백제는 본디 마한(馬韓)의 속국(屬國)으로, 시조인 온조(溫祚)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에 한수(漢水) 북쪽에 나라를 세웠다.
《후한서(後漢書)》 한열전(韓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韓)에는 세 종족이 있다. 모두 78개 국이며, 백제는 그 가운데 한나라이다.
《주서(周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선조는 대개 마한의 속국(屬國)이었다. 부여(夫餘)의 별종(別種) 가운데 구태(仇台)란 자가 처음에 대방(帶方)에 나라를 세웠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비류(沸流)와 온조 -두 사람은 바로 구태(仇台)의 아들이다.- 가 남쪽으로 와서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바로 삼각산(三角山)이다.- 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기를 원하자,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곳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띠고 동쪽으로 고악(高嶽)에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대해(大海)를 격하였으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미추홀(彌鄒忽) -지금의 인천(仁川)이다.- 로 돌아갔다. 그러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이때는 한나라 성제 홍가 3년이었다. -원주(原註)에 이르기를,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넜다.” 하였다.- ○ 8년(기원전 11)에 말갈(靺鞨)이 와서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온조가 고구려로부터 남쪽으로 가 패수 -대동강- 와 대수 -임진강- 두 강을 건너서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아보았으며, 13년(기원전 6)에 이르러서야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즉 온조가 처음 도읍한 위례성은 마땅히 부아악의 남쪽, 한수의 북쪽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우리 한양(漢陽)이 바로 그 지역이다. 이곳은 본디 대방의 남쪽 경계 지역이므로 ‘처음에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온조가 처음 부아악에 이르렀을 때 비류가 바닷가에 도읍하려고 하자 열 명의 신하가 하남에 도읍하기를 권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신(史臣)이 전후에 걸쳐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건설한 일을 총체적으로 말한 것이지, 온조 1년에 곧바로 하남에 도읍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 그 뒤 14년(기원전 5)에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廣州)가 바로 그 지역이다. 이 당시 사방 경계는, 북쪽으로 곡산(谷山)에서 남쪽으로 공주(公州)까지이고, 동쪽으로 춘천(春川)에서 서쪽으로 바다까지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온조왕 13년(기원전 6) -한나라 애제(哀帝) 1년- 5월에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동쪽에는 낙랑(樂浪)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영토를 침입해 와 형세가 편안하지 않으니 반드시 국도(國都)를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나아가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면서 살펴보니 땅이 기름졌는바, 그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7월에 한산(漢山)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하북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다. 8월에 마한(馬韓)에 사신을 보내어 도읍을 옮긴 사실을 고하고 마침내 강역을 획정하였는데, 북쪽으로는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웅천(熊川)까지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주양(走壤)까지였다. ○ 14년 1월에 도읍을 옮겼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漢山)은 지금의 광주이다.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피하여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분명하다. 대개 위례(慰禮)라는 명칭은 한수 북쪽에 있을 때 비롯되었는데, 한수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고서도 또 옛 칭호를 그대로 썼는바, 이것이 이른바 하남위례성이다. 우리나라 역사서에서는 직산(稷山)이 온조가 처음 도읍한 위례라고 하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직산은 부아악과의 거리가 200리나 되는데 어찌 능히 살 만한 곳인가를 살펴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북쪽의 적들을 피하려고 하면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한 것은, 평양의 낙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낙랑 남부도위(樂浪南部都尉)의 치소(治所)였던 소명현(昭明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소명현은 지금의 춘천부(春川府)인바, -이에 대한 내용은 사군낙랑조(四郡樂浪條)에 나온다.- 과연 백제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말갈은 바로 불내예(不耐濊)의 족속이다. 웅천은 지금의 공주이고, 주양은 바로 춘천이다.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 별원(別源)으로 곡산(谷山)의 경계 안에 있는 능성강(能成江)이라고 하는 강이다. 백제의 북쪽 경계가 매번 수곡(水谷) -신계(新溪)-, 십곡(十谷) -곡산(谷山)-, 장새(獐塞) -수안(遂安)- 등의 현에 그치는바, 패수가 능성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당시에 낙랑에는 이미 중국에서 임명한 관원이 없었으므로 패수 남쪽 지역을 온조가 차지하여 할거하였던 것이다.
○ 후한(後漢) 이래로 한수 북쪽 지역이 다시 중국에 속하여 대방군(帶方郡)에 예속되었으며, 한나라와 위(魏)나라가 교체할 즈음에는 백제의 북쪽은 대방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나온다.
○ 서진(西晉) 말기에는 백제가 북쪽으로 대방군의 지역을 병합하여 비로소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였으며, 또 마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이웃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진(晉)나라 이후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주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동쪽 끝은 신라와 닿았고 북쪽은 고구려와 접하였으며, 서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로 막혀 있다. 동서 간의 거리는 45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900여 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진나라 건흥(建興) 연간에는 백제가 북쪽으로 대방군을 병탄하여 -이에 대한 내용은 대방군조(帶方郡條)에 나온다.- 북쪽 경계가 곡산, 신계 등지까지 이르러서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이 당시에는 또 마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남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는바, 대개 지금의 저탄(豬灘) 남쪽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가 모두 백제의 관할지였던 것이다.
《송서(宋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가 요서(遼西)를 침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고 한다.
《양서(梁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본디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해 차지하였으며,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晉平) 두 군의 지역을 차지하고는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통고》에도 이 조항을 인용하였는데, 자주(自注)에 이르기를, “요서와 진평은 당나라 때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에 있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가 요서 지역의 몇 개 군을 차지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송서》에서 말한 것은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며, 《양서》 및 《문헌통고》의 기록은 한갓 《송서》의 기사만을 답습한 것인바, 따져 볼만한 것이 못 된다.
○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 1년(371)에는 백제가 광주(廣州)에서 지금의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이 당시에는 북쪽 경계가 신계(新溪) 등지에 이르렀다.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본기에 이르기를,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 -진나라 간문제 1년- 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왕이 듣고는 패하(浿河) 강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들이 패배하였다. 겨울에 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이 전사하자, 왕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도성을 한산(漢山)으로 옮겼다.” 하였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백제의 도읍인 위례성은 389년을 거친 뒤 근초고왕 때 이르러 고구려의 남평양을 공격해 취하고는 한성(漢城)으로 옮겨 도읍하였다.”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수림왕(小獸林王) 5년(375) -진나라 효무제(孝武帝) 3년- 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사왕(辰斯王) 2년(386) -효무제 11년- 에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 서쪽으로는 바다에까지 이르렀다. ○ 아신왕(阿莘王) 4년(395) -효무제 20년- 에 왕이 고구려를 정벌하였는데, 한수를 건너가 청목령 아래에 주둔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성은 지금의 우리나라 한양이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본디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이른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성 등지는 온조왕 이전에는 낙랑에 속하였으며, 온조왕 이후로는 백제에 속하였다. 간혹 대방군에 예속되기는 하였으나 잃었다가도 곧바로 수복하였는데, 어느 겨를에 고구려의 지역이 될 수 있었겠는가. 수곡성은 지금의 신계현(新溪縣)이다. 청목령은 분명히 한수의 북쪽에 있었을 텐데, 송악(松嶽)에 예전에는 청목(靑木)이라는 칭호가 있었는바, -이에 대한 내용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고경문(古鏡文)에 나온다.- 혹 이것을 이른 것은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당시에 백제의 북쪽 경계를 대략 알 수가 있다.
○ 송(宋)나라 원휘(元徽) 연간에는 백제가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한양에서 공주(公州)로 도읍을 옮겼다. 이 당시에 한수 북쪽의 지역은 대부분이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다.
《후위서(後魏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북쪽으로 고구려까지의 거리가 1000여 리로, 소해(小海)의 남쪽에 있다. 그곳 백성들은 토착민들이며, 지역이 대부분 낮고 습하여 모두 산에 산다. 연흥(延興) 2년(472)에 백제 왕 여경(餘慶)이 비로소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表文)을 올렸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되어 여러 해 동안 쇠미해져서 남한(南韓) 지역으로 옮겨 가 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 -송나라 창오왕(蒼梧王) 원휘(元徽) 3년- 에 고구려가 한성(漢城)을 포위하여 성이 격파되고 왕이 전사하였다. 10월에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 동성왕(東城王) 4년(482) -남제(南齊) 고조(高祖) 4년- 에 말갈이 습격하여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광주이다.- 을 격파하고 300여 호(戶)를 포로로 잡아가지고 돌아갔다. ○ 21년(499) -제왕(齊王) 보권(寶卷) 1년- 여름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고구려로 도망쳐 들어간 한산(漢山)의 백성들이 2000명이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웅진은 바로 공주이고, 소해(小海)는 바로 당진(唐津) 앞바다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강역총론조에 나온다.- 공주는 당진의 남쪽에 있으므로 소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한성이 비록 고구려에게 함락당하였으나, 지금의 광주는 오히려 백제의 관할지였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강역은 일찍이 한수 남쪽의 지역을 한 발자국도 넘어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지금의 수원(水原) 등 10개 고을을 본디 고구려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조(新羅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에는 백제의 북쪽 경계가 철령(鐵嶺), 서흥(瑞興) 등지까지 이르렀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통(普通) 2년(521) -백제 무령왕(武寧王) 21년- 에 백제 왕 여륭(餘隆)이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하면서 비로소 통호(通好)하였다.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무령왕 7년(507) -양나라 무제 6년- 에 장령성(長嶺城) -바로 철령이다.- 을 쌓아 말갈(靺鞨)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성왕(聖王) 7년(529) -양나라 무제 28년- 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의 혈성(穴城)을 공격하자, 좌평(佐平) 연모(燕謨)에게 명하여 오곡(五谷) -지금의 서흥부(瑞興府)이다.- 의 들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
○ 양나라 무제 37년(538)에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현(扶餘縣)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왕 16년 봄에 사비(泗沘) -일명 소부리(所夫里)라고 한다.- 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 -지금의 부여현이다.- 라고 하였다.
○ 양나라 원제(元帝) 2년(553)에 한수 북쪽 지역이 신라에게 함락되었다. 이에 백제의 사방 경계는 북쪽으로는 한강에 닿았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이웃하였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았으며, 지역을 5부(部)로 나누었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에서는 읍을 담로(檐魯)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郡縣)이란 말과 같은 말이다. 백제에는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이 나누어 차지하였다.
《수서(隋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기내(畿內)를 5부(部)로 나누었으며, 부에는 5항(巷)이 있어 사인(士人)들이 산다. 5방(方)에는 각각 방령(方領) 1인이 있으며, 방좌(方佐)가 그를 보좌한다. 방(方)에는 10개의 군(郡)이 있으며, 군에는 장(將)이 있다. ○ 백제국의 서쪽과 남쪽에 있는 섬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섬은 열다섯 곳이며, 모두 성읍(城邑)이 있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백제국의 서쪽과 남쪽 바다에는 15개의 큰 섬이 있는데, 모두 읍(邑)을 두어 사람이 살고 있으며, 백제에 속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전라도 바다에 있는 여러 섬을 말한다.
《구당서(舊唐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국은 일찍이 마한의 옛 지역이었으며, 경사(京師)에서 동쪽으로 62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처해 있다. 동쪽과 북쪽으로는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고구려에 이른다. ○ 외방에는 6대방(帶方)을 두었는데, 방마다 10개의 군을 관할한다. ○ 백제국은 예전에는 5부(部)로 나누었는데, 통할하는 군이 37개, 성이 200개, 호구가 76만 호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6대방은, 6주(州)를 두고서 주마다 모두 대방(帶方)이라고 칭하였던 것 같다.
《신당서(新唐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경사(京師)에서 곧장 동쪽으로 6000리 되는 곳의 바닷가 남쪽에 위치하였다. 서쪽은 월주, 남쪽은 왜국, 북쪽은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는데, 모두 바다를 건너야만 갈 수가 있다. 백제의 동쪽은 신라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백제국은 지금 조선의 전라도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동쪽으로는 신라까지이고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로 막혔으며, 북쪽으로는 바다와 강에 닿아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제는 나라를 세운 이래로 한수 북쪽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가 양나라 원제(元帝) 2년에 이르러서 지금의 한양, 이천(利川) 등지가 신라에 편입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북계조(新羅北界條)에 나온다.- 이 뒤로부터는 백제의 북쪽 경계는 한수 남쪽에 그쳤다. 명(明)나라 사신인 기순(祈順)의 시에 이르기를, “백제의 지형은 한수까지 닿았다.[百濟地形臨水盡]” 하였고,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주(注)에, “백제국의 국경은 양화도(楊花渡)의 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수를 가리킨 것이다. 양화도는 지금의 한수 양화진(楊花津)이다.
○ 당나라 현경(顯慶) 5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5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그 뒤에는 그 지역이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 5년에 백제를 평정하고는 그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連), 덕안(德安) 등 5도독부를 설치하였다. -《당서(唐書)》 백제열전에 이르기를, “5도독부를 두고는 각자 주군(州郡)을 통할하게 하였다.” 하였다.- 아울러서 대방주(帶方州)를 두었다가 인덕(麟德 당 고종(唐高宗)의 연호) 이후로는 폐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에서는 대방주를 백제의 경내에 설치하였는데, 옛 지명을 따라서 주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웅진은 지금의 공주이다. 마한은 바로 마한의 옛 도읍지인 익산군(益山郡)이다. 동명은 바로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현으로, 백제가 동명왕(東明王)의 후손이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덕안은 바로 《주서》에서 이른 바 득안성(得安城)으로, 지금의 은진현(恩津縣)이다. -이에 대한 설은 아래의 득안성조(得安城條)에 나온다.- 금련은 상고할 수가 없다. 당나라에서 5도독부를 두고서 군사를 남겨 두어 진수(鎭守)하였으며, 그 뒤에는 당나라 군사가 철수해 돌아가고 신라가 그 지역을 차지해 웅주(熊州), 전주(全州), 무주(武州) 세 주를 설치하였다.

성읍(城邑)
○ 고마성(固麻城)ㆍ거발성(居拔城) -혹은 구발성(俱拔城)이라고도 한다.
《양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치소(治所)를 고마(固麻)라고 한다.
《수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그 도읍을 거발성(居拔城)이라고 한다.
《북사(北史)》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도읍지는 구발성(俱拔城)이며, 또한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한다.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사는 곳에는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공주의 웅진을 세속에서는 ‘고음아진(古音兒津)’이라고 칭하는데, ‘고음아’는 우리나라 말의 ‘곰[熊]’이다. 고마(固麻)는 고음아의 음이 바뀐 것으로, 곰성[熊城]을 말한다. 백제는 유송(劉宋) 시대 이후로 공주에 도읍하였으며, 소량(蕭梁) 때에는 또 부여현으로 도읍을 옮겼다. 그런즉 《양서》에서 이른 바 ‘고마’란 것은 처음 공주에 도읍하였을 때의 칭호이고, 《수서》에서 이른 바 ‘거발(居拔)’이란 것은 부여현으로 도읍을 옮긴 뒤의 칭호이다. 이것이 이른바 동서에 두 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구발(俱拔)’은 바로 ‘거발’의 음이 바뀐 것이다. 《북사》에서, 구발은 고마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고사성(古沙城)ㆍ득안성(得安城)ㆍ구지하성(久知下城)ㆍ도선성(刀先城)ㆍ웅진성(熊津城)
《주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치소는 고마성(固麻城)이고, 그 이외에 다시 5방(方)이 있는데, 중방(中方)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熊津城)이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발성은 전주(全州)의 남쪽에 있다. 《북사》를 보면, “백제는 구발성에 도읍하였으며, 역시 고마성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다시 5방이 있는데, 중방은 고사성, 동방은 득안성, 남방은 구지하성, 서방은 도선성, 북방은 웅진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당나라 현경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하고는 유인원(劉仁願)을 머무르게 하여 백제의 부성(府城)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는데, 바로 구발성이다.” 하였다. ○ 웅진성은 전주의 서북쪽에 있다. 바로 웅진강 입구에 있는데, 백제의 험요처(險要處)이다. 당나라 현경 5년에 소정방이 백제를 토벌할 적에 성산(成山)에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백제가 웅진강의 어귀를 지키고 있자, 소정방이 이를 쳐서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곧장 백제의 도성으로 달려가 함락시켰다. 그런 다음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그 지역을 진수하였다.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부성(府城)을 포위하자, 유인궤(劉仁軌)에게 조서를 내려 달려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그러자 백제에서는 웅진강 어귀 양쪽에 목책을 세웠는데, 유인궤가 이를 쳐서 격파하여 부성의 포위가 드디어 풀렸다. 유인궤가 이로 인하여 그곳에 주둔해 있으면서 진수하였다. 얼마 뒤에는 다시 웅진 동쪽에서 백제의 나머지 군사를 격파해 다시금 백제를 평정하였다. 혹자는 지금의 한강(漢江) 어귀가 바로 옛날에 부성을 두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사성이 중방(中方)의 성이 되는바, 마땅히 부여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을 것이다. 혹자는 지금의 고부현(古阜縣) -본디 백제의 고사부리군(古沙夫里郡)이었다.- 을 이에 해당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고부는 바닷가에 치우쳐 있는바, 중방의 성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득안성은, 이적(李勣)이 올린 서장(書狀)에 “득안현은 본디 덕근지(德近支)이다.” 한 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덕근지는 지금의 은진현(恩津縣)이다. 웅진성은 바로 공주로, 고마(固麻)와 서로 멀지 않은 곳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지금의 한강 입구라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구지하성 및 도선성은 모두 상고할 수가 없다.
또 살펴보건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르기를, “제명(齊明) 6년(660) -당나라 현경 5년- 에 백제가 와서 고하기를, ‘금년에 신라가 당나라 사람들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전복시켰습니다. 이에 서부(西部)의 은솔(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은 발분(發憤)하여 임야기산(任射岐山)에 웅거하고, 달솔(達率) 여자진(餘自進)은 중부(中部)의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 웅거하여 각각 한 곳을 경영하면서 흩어진 군졸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대개 임야기산은 바로 임존산(任存山)이고, 구마노리성은 생각건대 구지하성의 음이 바뀐 것인 듯하다.
부(附)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이에 신라의 왕이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 -고사는 지명으로 백제의 국내에 있다.- 에 이르렀을 때 복신이 요격하여 격파하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를 통하여 도망쳐 돌아갔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주성(泗州城)은 경주(慶州)의 서쪽에 있는데, 혹자는 바로 고사성(古泗城)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용삭 1년에 백제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인원과 서로 대치하자, 조서를 내려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켰다. 신라의 장수 김흠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사에 이르러 백제에게 요격당하여 패하자 갈령(葛嶺)을 통하여 도망쳐 돌아갔다. 지금 사주(泗州)에서 가까운 곳에 갈령도가 있다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사주에 웅거해 있으면서 중로(中路)라고 하였는데, 북쪽으로는 진강(晉江)에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대해(大海)와 통하여 동쪽과 서쪽을 성원(聲援)하였다. 대수(大帥) 동일원(董一元)이 이를 함락시켰다가 얼마 뒤에 다시 패하여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보면, “태종왕(太宗王) 8년(661) -용삭 1년- 에 백제의 잔적(殘賊)들이 와서 사비(泗沘) -부여현- 를 공격하자, 왕이 이찬(伊湌) 품일(品日) 등에게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신라의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였다가 두량윤성(豆良尹城)으로 진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백제군과 싸워 패하였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고사(古泗)는 바로 고사비성이며, 고사비성은 바로 고사성(古沙城)인 듯하다. 《대청일통지》에서 경상도의 사천현(泗川縣)을 고사라고 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 주류성(周留城)가림성(加林城)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 1년(661)이다. 당초에 소정방이 이미 백제를 평정하고는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백제의 부성(府城) -삼가 살펴보건대, 부성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거하면 바로 공주이다.- 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수하게 하였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백성들을 끌어 모아 주류성을 점거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서 유인궤(劉仁軌)를 다시 기용해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유인궤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여러 장수들이 가림성이 수륙(水陸)의 요충(要衝)이니 먼저 이곳을 공격하자고 하였는데, 유인궤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급히 공격하면 사졸이 상하게 되고 느슨히 공격하면 날짜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근거지이니 의당 이곳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 하였다. 이에 웅진에서 백강(白江)으로 들어가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류성은 전주의 서쪽에 있다. 또 서북쪽에는 가림성이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림성은 지금의 임천군(林川郡)이다. 주류성은 《당서》에 근거하면 마땅히 금강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를 보면, “천지천황(天智天皇) 1년(662) -당나라 용삭 2년- 3월에 당나라와 신라 군사가 고구려(高句麗) -바로 백제의 오기(誤記)이다.- 를 침범해 오자 고구려가 일본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장군을 파견하여 소류성(疏留城)에 웅거하게 하였다. 2년(663) 8월에 신라는 복신(福信)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먼저 주유성(州柔城)을 탈취하기로 모의하였다.” 하였는데, 대개 소류(疏留)나 주유(州柔)는 모두 주류(周留)의 음이 바뀐 것이다.
○ 임존성(任存城)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승(僧) 도침(道琛)과 옛 장수 복신이 백성들을 이끌고 주류성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켰다.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그러자 도침 등이 웅진강 어귀 양쪽에 목책을 세우고 관군(官軍)을 막았다. 유인궤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하여 공격하자 도침 등이 물러나 임존성을 지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에 있다.
《자치통감》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은 백제의 서부(西部) 임존산에 있다. -《통감고이(通鑑考異)》에 이르기를, “실록(實錄)에는 혹 임효성(任孝城)으로 되어 있는데, 어느 쪽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자주 나오는 쪽을 따른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은 전주의 서쪽에 있는데, 옛날에 백제에서 설치한 성이다. 당나라 용삭 1년(661)에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인궤가 이들을 웅진강 입구에서 격파하였다. 그러자 그 무리들이 백제 부성(府城)의 포위를 풀고는 임존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임존성은 백제의 서부에 있다. 임존산을 의지해 있으므로 임존성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3년(663)에 유인궤가 군사를 보내어 임존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 진현성(眞峴城)지라성(支羅城)윤성(尹城)ㆍ대산현(大山縣)ㆍ사정책(沙井柵)
《구당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 2년(662)에 유인궤 등이 웅진의 동쪽에서 복신의 나머지 군사를 크게 격파하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성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어 군사를 나누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을 끼고 있고 험준하며 또 요충지라고 여겨 군사를 보태어 지켰다. 유인궤가 신라의 군사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첩(城堞)에 기어 올라가 그 성을 점거해 드디어 신라와의 향도(餉道)가 뚫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현성은 전주의 북쪽에 있다. 《당서》를 보면, 지라성, 진현성 등 여러 성이 모두 웅진의 동쪽에 있다. ○ 정읍진(井邑鎭)은 전주의 동북쪽에 있다. 혹자는 이곳이 바로 백제의 옛 사정채(沙井砦)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倭)의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왕경(王京)을 침범하였다가 정읍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는데, 왕경에서의 거리가 600여 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를 보면, 진현성이 정현(貞峴)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진잠현(鎭岑縣)이다. 대산현(大山縣)은 지금의 홍산현(鴻山縣)이다. 윤성(尹城)은 이적(李勣)이 상주한 서장에 의거하면, “윤성현(尹城縣)은 본디 열기(悅己)이다.” 하였는바, 열기는 지금의 정산현(定山縣)이다. 지라성은 상고할 수가 없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 “지라는 혹 주류(周留)라고 한다.”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정책(沙井柵) 역시 상세하지가 않다. 《대청일통지》에서 정읍현이라고 한 것은 맞지 않는다.
○ 풍달군(風達郡)
《신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의 서부(西部) 사람이다. 백제의 달솔(達率)이면서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사(刺史)와 같은 직책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풍달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부(附) 미상(未詳)의 성읍(城邑)

○ 서하(西河)
《송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가(元嘉) 27년(450)에 백제 왕이 글을 올려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 태수(西河太守)로 삼은 것을 추인(追認)해 주고, 표문(表文)을 올려 《역림(易林)》과 식점(式占), 요노(腰弩)를 보내 주기를 요구하였다.
○ 광양(廣陽)ㆍ조선(朝鮮)ㆍ대방(帶方)ㆍ광릉(廣陵)ㆍ청하(淸河)
《남제서(南齊書)》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태(牟太)가 또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이 파견한 행 광양 태수(行廣陽太守) 고달(高達), 행 조선 태수(行朝鮮太守) 양무(楊茂), 행 선위장군(行宣威將軍) 회매(會邁) 등 3인에 대해서 특별히 굽어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고달은 이제 가행 용양장군(假行假行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라 하였습니다. 양무는 이제 가행 건위장군(假行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라 하였습니다. 회매는 이제 가행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라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인가하였다.
○ 낙랑(樂浪)ㆍ성양(城陽)
《송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무(建武) 2년(495)에 모태가 사신을 파견해 표문을 올리기를, “신이 파견한 행 낙랑 태수(行樂浪太守) 모유(慕遺), 행 성양 태수(行城陽太守) 왕무(王茂), 행 조선 태수(行朝鮮太守) 장색(張塞)은 지금 신의 사신으로 가는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가 그 지성을 다하고 있는바, 실로 그들의 관작을 올려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서하(西河) 이하의 여러 군은 단지 《송서》와 《남제서》에만 보이며, 다른 책에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그리고 그 명호(名號)도 이때에 임시로 빌린 것인 듯하므로 아울러 아래에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주D-001]78개 국 : 마한 54국, 진한(辰韓) 12국, 변진(弁辰) 12국을 합하여 78개 국이다.
[주D-002]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 : 이병도(李丙燾)는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 지금의 광주(廣州) 춘궁리(春宮里)와 남한산성 일대의 지역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백제가 처음 도읍한 곳은 하남위례성이 아니라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며, 그 위치는 서울 세검동(洗劍洞) 일대의 골짜기라고 비정(比定)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2쪽 주》
[주D-003]패수(浿水)와 대수(帶水) : 이병도는 “패수와 대수는 시대에 따라 이동이 있는바, 여기에서 패수는 예성강(禮成江)을 가리키고 대수는 임진강(臨津江)을 가리킨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5쪽 주》
[주D-004]우리나라의 …… 있어서 : 이병도는 이 부분의 글은 방위가 뒤바뀐 것으로, ‘북쪽에는 낙랑이 있고 동쪽에는 말갈이 있다.’고 고쳐야 한다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7쪽 주》
[주D-005]7월에 …… 옮겼다 : 이병도는 이에 대해,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한 연대가 온조왕 13년(기원전 6)이라고 믿을 수는 없으며, 옮긴 이유로 보면 비류왕(比流王) 초년에 옮긴 것으로 생각된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7쪽 주》
[주D-006]패하(浿河) : 원문에는 ‘浿海’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23에 의거하여 ‘浿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병도는 이곳에서의 패하는 지금의 예성강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6쪽》
[주D-007]웅천(熊川) : 이병도는 지금의 안성천(安城川)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6쪽》
[주D-008]주양(走壤) : 이병도는 지금의 춘천(春川)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56쪽》
[주D-009]한산(漢山) : 이병도는, “여기에서의 한산은 글자 그대로 지금의 남한산(南漢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평지역(平地域)인 춘궁리(春宮里)의 한성에서 연접해 있는 산성(山城)으로 옮긴 것이다. 후래의 사서(史書)에서 북한산(北漢山)으로 인식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75쪽 주》
[주D-010]수곡성(水谷城) : 지금의 황해도 신계(新溪)이다.
[주D-011]청목령(靑木嶺) : 이병도는 개성(開城) 부근에 있던 고개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376쪽》
[주D-012]아신왕(阿莘王) : 원문에는 ‘阿幸王’으로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권2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여륭(餘隆) :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이다. 무령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는 ‘사마(斯摩)’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사마(斯麻)’로 되어 있으며, 공주(公州)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사용하기 위한 중국식 왕명인지 모르겠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403쪽 주》
[주D-014]담로(檐魯) : 이병도는 이에 대해 “담로는 ‘담로(擔魯)’로, 대읍성(大邑城)을 말하는 백제어(百濟語)인 ‘다라’의 음을 베껴 쓴 것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405쪽 주》
[주D-015]5방(方) : 백제에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내(都內)의 5부(部)와 지방의 5방(方) 제도가 있었다. 지방에 있었던 5방의 위치에 대하여 이병도는 “동방 득안성(得安城)은 지금의 충청남도 은진(恩津) 부근이고, 서방 도선성(刀先城)은 미상(未詳)이고,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은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長城)이고, 북방 웅진성(熊津城)은 지금의 공주(公州)이고, 중방 고사성(古沙城)은 지금의 전라북도 옥구(沃溝)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563쪽 주》
[주D-016]5도독부(都督府) :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 땅에 설치한 통치 기구인데, 웅진도독부가 나머지 4도독부를 통할하였으며, 몇 년 뒤 모두 없어지고 그 지역은 신라로 귀속되었다.
[주D-017]고마성(固麻城) : 고마(固麻)는 ‘고마’의 차음(借音)으로, 웅진(熊津) 즉 ‘고마나루’를 가리키는바, 지금의 공주(公州)이다.
[주D-018]부성(府城) : 당나라에서 설치한 도독부가 있던 곳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을 가리킨다.
[주D-019]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20]귀실복신(鬼室福信) : 복신(福信)을 가리킨다. 복신은 의자왕의 종제(從弟)로,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에 가 있던 왕자 풍(豐)을 영립하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풍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D-021]임존산(任存山) : 임존산은 임존성(任存城)으로,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봉수산(鳳守山)에 있던 백제의 성이다. 한산(韓山)의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으나, 그 운동이 실패한 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임성군(任城郡)이 되었다.
[주D-022]고사(古泗) : 지금의 고부(古阜)이다.
[주D-023]고사비성(古沙比城) : 이병도는 지금의 임피(臨陂)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88쪽》
[주D-024]두량윤성(豆良尹城) : 이병도는 지금의 금산군(錦山郡) 부리면(富利面)이라고 하였다. 두량이(豆良伊)로 표기한다.《국역삼국사기 88쪽》
[주D-025]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복신(福信)과 도침(道琛) 등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 운동의 근거지로, 661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물리치고 한때 전세가 유리하기도 하였으나, 내부의 알력으로 전력이 약화되어 663년에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는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주D-026]가림성(加林城) : 지금의 충청남도 임천(林川)의 성흥산성(聖興山城)이다.
[주D-027]임존성(任存城) : 예산군(禮山郡) 봉수산(鳳守山)에 있던 백제의 성이다. 한산(韓山)의 주류성(周留城)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의 중심지였으나, 그 운동이 실패한 뒤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임성군(任城郡)이 되었다.
[주D-028]진현성(眞峴城) : 진현(眞峴)은 지금의 진잠(鎭岑)인데, 이곳은 강을 끼고 있는 험고한 곳이 아니다. 이에 대해 이병도는, “진잠에는 강을 임한 험고한 곳이 없으므로 이는 잘못인 것 같다. 이것은 옛 이름이 내사지성(內斯只城)인 유성산성(儒城山城)으로 정정하여야 할 것이다. 유성산성은 강을 임한 험고한 곳이다.” 하였다.《국역삼국사기 431쪽 주》
[주D-029]지라성(支羅城) : 지금의 충남 대덕군 진잠(鎭岑)이다. 또는 주류성(周留城)의 별칭이라는 설도 있다.
[주D-030]윤성(尹城) : 지라성 부근에 있는 성이다.
[주D-031]사사로이 …… 주고 : 원문에는 ‘私假臺使馮夫西河太守’로 되어 있는데, 《송서》 권97에 의거하여 ‘私假臺使馮野夫西河太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여기에서의 가(假) 자는 중국 왕조에서 임명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당시에 백제는 가행(假行)의 형식을 빌어 관원을 임명한 다음에 중국으로부터 추인(追認)을 받은 뒤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주D-032]역림(易林)과 식점(式占) : 《역림》은 한(漢)나라 초연수(焦延壽)가 지은 책으로 총 16권인데, 길흉을 점치는 법을 기술하였다. 식점은 육임(六壬), 태을(太乙), 뇌공(雷公) 등 세 종류의 점치는 법을 말한다.
 
해동역사 속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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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9
발해(渤海)


강역총론(疆域總論)
○ 발해는 말갈(靺鞨)의 종족이다.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성력(聖曆) 연간에 옛 읍루(挹婁) 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지방이 바로 그곳이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자로, 성은 대씨(大氏)이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자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넜다. 그런 다음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는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이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옥령위 대장군(玉鈴衛大將軍) 이해고(李楷固)를 보내어 쳤다. 이때에는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패잔병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領)을 넘었으나, 이해고가 패하여 돌아왔다. 대조영은 멀리 떨어져 있음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國王)이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선천(先天) 연간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고는 영홀한주도독(領忽汗州都督)의 직을 더해 주었다. 이로부터 발해가 비로소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칭하였다.
《구당서(舊唐書)》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조영이 이해고에게 맞서니, 당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측천무후가 대조영을 토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조영은 마침내 그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읍루(揖婁)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여 성을 쌓고서 살았다. 그 뒤 성력(聖曆) 연간에 스스로 서서 진국왕(振國王)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에 대해서 《신당서》와 《구당서》의 발해열전을 참고해 보면, 고구려가 망하자 말갈의 종족인 대씨(大氏)가 가속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 가 살았다. 그 뒤 걸걸중상이란 자가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遼水)를 건너와 태백산 동북쪽의 읍루의 옛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대조영이 이로 인하여 그곳에 나라를 세웠다. 태백산은 바로 백두산이다. 그리고 또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읍루의 동모산을 차지하였는데,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이다.” 하였는데, 《당서》 지리지를 상고해 보면, 영주는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에서 서쪽으로 600여 리 되는 지역에 있으며, 여기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은 바로 영고탑성(寧古塔城)이다. 대조영이 개국한 읍루의 옛 지역은 바로 이 지역이다.
○ 개원(開元) 이후로는 발해가 더욱더 커졌으며, 또 고구려의 옛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에 그 사방의 경계는 서쪽으로 개원현(開原縣)에서부터 동쪽으로 바다까지였으며, 북쪽은 흑룡강(黑龍江)에 닿았고 남쪽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에서 서쪽으로 대동강(大同江)에 이어지는 지역까지 이르렀다.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르며, 땅은 사방 2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발해는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차지하였는바,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로써 경계를 삼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땅은 사방 5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며,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변한을 차지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개원 7년(719)에 대조영이 죽었다.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즉위하여 영토를 크게 개척하자, 동북방에 있던 여러 오랑캐 족속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 그를 섬겼다. ○ 흑수말갈열전(黑水靺鞨列傳)에 이르기를, “흑수부(黑水部)만이 강역을 완전히 보존하여 16부락으로 나누어져 있으면서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일컬었으니, 그 위치가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다. 흑수말갈에는 불녈부(拂涅部), 우루부(虞婁部),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의 부가 있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으로는 실위(室韋)에 이르는데, 남북은 2000리이고, 동서는 1000리이다. 그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발해에 투속(投屬)하였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부(平壤府)는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이라 하였고, 그 뒤 고구려 왕이 이곳에 도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에 발해에게 함락되었으며, 오대(五代) 시대에는 고려가 다시 취하여 서경(西京)으로 삼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는 서쪽으로는 거란에 접하였는데, 지금의 개원현이다. 그런즉 발해의 서쪽 경계는 개원까지이다. 흑수말갈은 흑룡강 안팎에 살다가 모두 발해에 투속(投屬)하였다. 그런즉 발해의 북쪽 경계는 흑룡강까지 미친다. 그리고 당나라 현종(玄宗)이 신라 왕에게 신칙한 조서에 이르기를, “경이 패강(浿江)에 방수(防戍)를 설치한 것이 이미 발해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하였고, 가탐(賈耽)이 이르기를, “신라는 발해와 천정군(泉井郡)으로써 경계를 삼는다.” 하였는데, 천정은 지금의 덕원군이고, 패강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그런즉 동쪽으로 덕원에서부터 서쪽으로 대동강에 이르는 이 지역이 신라와 경계를 나눈 곳이다.
○ 발해는 그 지역을 나누어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설치하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지역에는 5경, 15부, 62주가 있다.
《요사(遼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조(太祖)가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여 103개의 성읍을 차지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경(京), 부(府), 주(州)를 흑수말갈의 남쪽과 고구려의 옛 지역에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발해가 설치한 5경, 15부, 62주는 대부분이 지금의 길림(吉林),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 및 조선(朝鮮)의 경계에 있다. 안동부(安東府)에서 통치한 요동의 옛 지역이 비록 발해에 편입되기는 하였으나 설치한 사실을 볼 수가 없다. 지리지와 가탐의 설에서 상고할 수 있는 요(遼)나라 때 동경(東京)의 주현(州縣)은 대부분 그 명호(名號)만을 답습한 것이지, 다시 옛 지역을 수복한 것은 아니다. 《요사》에서 모두 발해의 옛 지역이라고 한 것은 실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경(京)과 부(府)는 모두 영고탑, 오라 및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 지역에 있었으며, 요동의 옛 지역은 애당초부터 발해의 강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원현이 비록 부여부가 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깊숙이 비껴 들어가 있는 서쪽 끝 지역의 경계일 뿐이다. 그리고 개원현의 동남쪽이 장령부(長嶺府)가 되고, 또 그 남쪽이 압록부(鴨綠府)가 되기는 하였으나, 모두가 그 변방 경계 지역이었다. 그런즉 발해의 서쪽 경계는 요동으로 한 발자국도 넘어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대청일통지》에서 논한 바가 맞다.
○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지금의 영고탑 호이합하(虎爾哈河)의 동쪽에 있었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숙신(肅愼)의 옛 지역을 상경(上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용천부(龍泉府)라고 하였는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 천보(天寶) 말기에 대흠무(大欽茂)가 도성을 상경으로 옮겼는데, 옛 도성에서 300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었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 요수(遼水)를 건너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까지는 500리인데, 안동도호부는 옛 한나라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경유하고 또다시 발해의 장령부(長嶺府)를 경유해 15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王城)에 이르는데, 왕성은 홀한하에 임해 있다. 왕성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옛 숙신성(肅愼城)이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덕리진(德理鎭)을 경유해 가면 남쪽의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1000리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호주(湖州)는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다.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천부에 예속되었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발주(勃州)는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다.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천부에 예속되었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상경성(上京城)은, 지금 《당서》로써 상고해 보건대, 마땅히 영고탑의 서남쪽 경계이면서 금(金)나라의 상경(上京)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이르기를,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 발해의 상경에 도읍하였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 영고탑은 옛 숙신국의 지역이다. 양한(兩漢) 때에는 읍루(挹婁)라 하였고, 후위(後魏) 때에는 물길(勿吉), 수(隋)나라 때에는 말갈국의 지역이었다. 당나라 때에는 발해가 상경 용천부를 설치하였다. 그 동북쪽은 흑수말갈의 지역이다. 요나라 때에는 여직국(女直國)이었으며, 금나라 초기에는 이곳에 도읍을 세우고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라고 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합란부(合蘭府),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의 지역이었고, 명나라 때에는 건주위(建州衛), 모련위(毛憐衛) 등의 지역이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홀한하는 지금의 호이합하이다.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하고서 발해의 상경에 도읍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금나라의 상경 회령부를 가리키는데, 상경 회령부는 지금의 영고탑이다. 《당서》에 의거하면, “발해의 상경은 홀한해(忽汗海)의 동쪽에 있는데, 성이 그 강에 임해 있다.” 하였다. 그런즉 지금의 영고탑 호이합하의 동쪽 물가 지역이 바로 용천부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영고탑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는 상경 용천부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으니, 바로 오라(烏喇)의 동남쪽 경계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의 옛 지역을 상경으로 삼았다. 그 남쪽을 중경 현덕부라고 하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를 관할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경 현덕부는 길림 오라성의 동쪽에 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 “상경의 남쪽을 중경 현덕부라고 하며, 노주, 현주, 철주, 탕주, 영주, 흥주를 관할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당서》 지리지에는, “압록강 입구에서 뱃길로 100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올라가면 박작구(泊灼口)에 이르러 발해의 경계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성(丸都城)에 이르는데, 환도성은 옛날에 고구려 왕이 도읍한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육로로 400리를 가면 현주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발해 왕이 도읍한 곳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현주는 바로 중경 현덕부로, 당나라 선천(先天) 2년(713)에 홀한주(忽汗州)라고 이름을 하사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요사》에서 바로 평양성(平壤城)이라고 한 것이나, 또 요나라에서 설치한 동경(東京)의 현주(顯州)는 본디 발해의 중경 현덕부 지역이라고 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 발해열전에, “천보 말기에 상경으로 도성을 옮겼는데, 옛 도성에서 300리 떨어진 곳이었다.” 하였고, 지리지에는 이르기를, “현주는 천보 연간에 발해 왕이 도읍한 곳이다. 이로부터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하였다. 현주는 바로 중경 현덕부로, 발해열전에서 이른 바 옛 나라가 이것이다. 왕성은 바로 천보 말기에 옮겨간 상경 용천부이다. 그렇다면 중경 현덕부는 마땅히 상경 용천부에서 서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어야 한다. 다만 지리지에서 말한 거리는 발해열전에 나오는 것과 비교해 볼 때 300리나 더 먼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호이합하의 서남쪽, 오라성의 동남쪽 지역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는 지금의 함경도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지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穢), 맥(貊)의 옛 지역을 동경(東京)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龍原府)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를 관할하였다. ○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 대흠무(大欽茂)가 정원(貞元) 연간에 도성을 동남쪽에 있는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대화서(大華嶼)가 왕이 된 후 다시 도성을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국의 남해부(南海府), 압록부(鴨綠府), 부여부(扶餘府), 책성부(柵城府)는 본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까지는 39개의 역(驛)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인용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책성이라는 명칭은 고구려에서 비롯되어 발해에서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후위서(後魏書)》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쪽은 책성까지 이른다.” 하였고, 가탐(賈耽)은 말하기를, “책성은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한 것이 모두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신라의 천정군은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으로, 이곳에서 북쪽으로 39개의 역을 가는 거리를 재 보면 1170리이니 -당나라의 제도에는 30리마다 한 개의 역(驛)을 두었다-, 마땅히 부령부(富寧府)나 경성부(鏡城府)의 경계에 이르는바, 이곳이 동경 용원부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곳은 본디 옥저(沃沮)의 옛 지역인데, 예, 맥의 옛 지역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혹 옥저가 북쪽에 있고 예, 맥이 남쪽에 있으면서 지역이 서로 맞물려 있어 이처럼 혼동하여 말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살펴보건대,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일본일사(日本逸史)》에 의거하면, “발해의 사신이 탄 배가 대부분 하이국(蝦夷國) 및 출우(出羽), 능등(能登)의 지역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에서는 그것을 싫어하여 축자도(筑紫道)의 태재부(太宰府)를 경유하게 하였다. 그 뒤에 또 능등에 도착하자, 일본에서는 약속을 어긴 것을 따졌다. 그러자 발해의 사신인 사도몽(史都蒙)이 대답하기를, ‘실로 전에 그런 분부를 받았으므로 우리나라 남부(南府)의 토우포(吐亏浦)에서 출발하여 서쪽으로 대마도(對馬島)의 죽실진(竹室津)을 향해 갔는데, 도중에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이곳 금지 구역에 도착한 것이다.’ 하니, 일본에서 끝내 금지시키지 못하고는 드디어 능등에 발해의 사신을 접대할 정관(亭館)을 지었다.” 하였다. 하이국, 출우, 능등 등지는 우리나라의 함경북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지역으로, 당시에 사신들이 탄 배가 동북쪽의 바다를 지나서 일본에 오간 것을 미루어서 알 수가 있다.
○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는 지금의 함경도 북청부(北靑府) 등지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옥저의 옛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남해부라고 하였는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를 관할하였다. ○ 남해(南海)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옥저는 지금의 북청 등지이며,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옥저조(沃沮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가탐(賈耽)이 이른바, “발해의 남해부는 옛 고구려 지역이다.”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남해부라는 칭호 역시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 이르기를, “태조왕(太祖王) 62년(114) 8월에 왕이 남해를 순수(巡狩)하였다.” 하였다. 대개 동북쪽의 지형이 왼쪽은 바다이고 오른쪽은 육지로, 흑룡강 지방에서 바닷가를 따라 서남쪽으로 오면 토문강(土門江)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이르고, 다시 바닷가를 따라 서남쪽으로 오면 함흥부(咸興府)의 도련포(都連浦)에 이른다. 토문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 점점 서쪽으로 가면 영고탑 등지가 있으며, 영고탑에서 우리나라의 함경도 바다를 보면 정남쪽에 있다. 그러므로 남해라고 칭한 것이다. 함경도의 남쪽 경계는 바로 천정군(泉井郡)으로, 이곳이 신라와의 경계가 나누어진 곳이다. 그러므로 신라도(新羅道)라고 한 것이다.
○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는 지금의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북쪽의 강 건너편 지역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지역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압록부(鴨綠府)라고 하였는데, 신주(神州), 풍주(豐州), 환주(桓州), 정주(正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 압록은 조공도(朝貢道)이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압록강 입구에서 뱃길로 100여 리를 가서 다시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동북쪽으로 30리를 올라가면 박작구(泊灼口)에 이르러 발해의 경내에 다다를 수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5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이르는데, 환도성은 옛날에 고구려 왕이 도읍한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2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에 이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육로로 400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 연간에 발해 왕이 도읍한 곳이다. 이로부터 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綠州) 압록군(鴨綠軍)은 절도(節度)를 둔다. 본디 고구려의 옛 나라이다. 발해 때에는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라고 하였다. 신주, 풍주, 환주, 정주의 일을 도독(都督)한다. 옛 현은 셋으로 신록(神鹿), 신화(神化), 검문(劍門)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환주는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이다. 옛 현은 셋으로 환도(桓都), 신향(神鄕), 기수(淇水)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고구려 왕이 이곳에 궁궐을 창건하자 나랏사람들이 신국(新國)이라고 하였다. 5대손인 고쇠(高釗) 때에 이르러 진(晉)나라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황(慕容皝)에게 패하여 궁실이 분탕질당하였다. 녹주에 예속되었다.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 풍주는 발해 때 반안군(盤安郡)을 설치하였다. 옛 현은 넷으로 안풍(安豐), 발각(渤恪), 습양(隰壤), 협석(硤石)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녹주에 예속되었다. ○ 정주는 본디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인데, 나라가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 때에는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녹주(淥州)에 예속되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성(淥州城)은 평양 서쪽 지역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다. 발해 때에는 서경 압록부를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이를 고쳐서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을 설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박작구(泊灼口)는 지금의 의주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이다. 환도현성은 바로 환주로 지금의 초산부(楚山府) 강 바깥쪽 지역이다. 신주는 바로 압록부의 치소(治所)로, 고구려 때에는 국내성(國內城)이었고, 요나라 때에는 녹주였는데, 지금의 강계부(江界府) 만포진(滿浦鎭) 강 바깥쪽 지역이 그곳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환도성조(丸都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압록부의 치소가 비록 강 바깥쪽에 있었으나 평양(平壤) 서쪽 지역이 모두 그 관할지였다. 이 당시에 당나라에 통하는 길은 압록강 입구에서 배를 띄워 등주(登州)의 바다에 이르렀으므로 조공도(朝貢道)라고 한 것이다.
○ 장령부(長嶺府)는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등지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옛 지역을 장령부라고 하였는데, 하주(瑕州)와 하주(河州)를 관할한다. ○ 장령은 영주도(營州道)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탐(賈耽)이 이르기를, “안동도호부 -지금의 요양주(遼陽州)이다.- 에서 동북쪽으로 개모성(蓋牟城), 신성(新城)을 경유하고, 또 발해의 장령부를 경유해 15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하였다. 대개 장령부는 당시에 발해가 요동과 왕래하는 길이었으며, 바로 발해의 서쪽 경계의 초입이었던 것이다. 지금 장백산(長白山)의 큰 줄기가 북쪽으로 뻗어 가 납록와집(納綠窩集)이 되고, 또다시 북쪽으로 뻗어 가 오라(烏喇)의 서남쪽에 이르러 고로눌와집(庫魯訥窩集)이 되고, 또다시 북쪽으로 뻗어 가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이 되어, 산등성이가 수천 리에 걸쳐 뻗었는데, 이를 통틀어서 장령자(長嶺子)라고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성경통지》에 나온다.- 장령이란 칭호는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으니 발해의 장령부는 마땅히 지금의 영길주 등지에 있었을 것이다.
○ 부여부(扶餘府)는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며, 여기에서 가까운 곳은 막힐부(鄚頡府)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여의 옛 지역을 부여부로 삼았다. 이곳에는 항상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거란(契丹)을 방어하였으며, 부주(扶州)와 선주(仙州)를 관할하였다. 막힐부는 막주(鄚州)와 고주(高州)를 관할하였다. ○ 부여는 거란도(契丹道)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은 본디 부여국의 왕성이다. 발해 때에는 부여성(扶餘城)이라고 불렀다. 태조(太祖)가 용주(龍州)로 고쳤고, 성종(聖宗)이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통할하는 현은 넷인데, 통원현(通遠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현(扶餘縣)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통주(通州)에서 통할하는 통원(通遠), 안원(安遠), 귀인(歸仁), 어곡(漁谷) 네 현은 모두 발해의 현이라고 하는데,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지금은 수록하지 않았다. 아래 미상(未詳)의 주현조(州縣條)에 나온다.- ○ 용주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자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으므로 이름을 고쳤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부여부는 당나라 때 발해가 설치한 것인데, 그 지역은 개원현성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고성(黃龍古城)이 개원현의 경내에 있는데, 본디 발해의 부여부였다. 지금 개원현이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북쪽에 있으며, 옛 개원성(開元城)의 치소는 현의 경내에 있지 않은바, 이곳이 황룡부의 옛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한주(韓州) 동평군(東平軍)은 본디 고리국(藁離國)의 옛 치소인 유하현(柳河縣)이다. 고구려가 막힐부를 설치하였다. 막주(鄚州)와 힐주(頡州)를 도독(都督)한다. 발해 때에는 이를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폐지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에서는 항상 강한 군대를 부여부에 두고서 거란을 방어하였다. 지금 개원현은 길림과 오라의 목구멍에 해당되는 반드시 지켜야만 할 요충지인바, 이곳이 부여부인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막힐부 역시 부여의 옛 지역이다. 고리국은 바로 부여가 발생한 곳이며 부여의 북쪽에 있던 나라이다. 그리고 《대청일통지》를 보면 요나라 때에는 한주(韓州)였고, 금나라 때에는 함평로(咸平路)에 속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함평부(咸平府)에 속하였고, 명(明)나라 때에는 삼만위(三萬衛)에 속하였는데, 삼만위는 지금의 개원현이며, 개원의 서쪽은 바로 거란 지역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막힐부는 마땅히 개원현의 동북쪽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는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지방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읍루의 옛 지역을 정리부로 삼았는데, 정주(定州)와 심주(瀋州)를 관할하였다. 안변부는 안주(安州)와 경주(瓊州)를 관할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의 옛 지역은 바로 발해가 처음 일어난 지역이며, 지금의 영고탑 지방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영고탑에서 건국하였다는 조항에 상세하게 나온다.- 안변부와 정리부는 바로 이 지역에 있었다.
○ 솔빈부(率賓府)는 지금의 함경도 삼수부(三水府) 서쪽, 압록강 안팎의 지역에 있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솔빈(率賓)의 옛 지역을 솔빈부로 삼았는데,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를 관할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솔빈부는 자사(刺史)를 둔다. 옛 솔빈국의 지역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휼품로(恤品路)는 금(金)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절도사가 있었다. 본디 요나라 때의 솔빈부 지역이었다. 원(元)나라 때에는 폐지하였고, 지금은 흥경(興京)의 동남쪽 변경 밖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폐휼품로(廢恤品路)는 영고탑성의 동남쪽에 있다. 《금사(金史)》 지리지에 이르기를, “휼품로는 요나라 때의 솔빈부로, 본디 솔빈국의 옛 지역이다. 천회(天會) 2년(1124)에 야라로(耶懶路) 도발근(都孛菫)이 사는 지역이 척박하다고 하여 마침내 이곳으로 옮기고서는 인하여 속빈(速頻)이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휼품이나 속빈은 바로 솔빈의 와음(訛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솔빈부는 고구려 때에는 졸본(卒本)이라 하고, 금나라 때에는 휼품이라 하였는데, 휼품은 지금의 삼수부 서북쪽, 압록강 안팎의 지역이고, 졸본은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북쪽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紇升骨城條) 및 고구려 동북계조(東北界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지금 삼수 등지의 서쪽에서부터 여연(閭延)의 강 북쪽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발해의 솔빈부이다. 그리고 전사(前史)를 상고해 보면 솔빈국(率賓國)이라는 이름이 없는데, 생각건대 졸본이 고구려의 옛 도읍이므로 솔빈국이라고 한 듯하다.
○ 동평부(東平府)와 철리부(鐵利府)는 마땅히 지금의 영고탑 동북쪽의 흑룡강 지방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불녈(拂涅)의 옛 지역을 동평부로 삼았는데,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沱州), 흑주(黑州), 비주(比州)를 관할하였다. 철리(鐵利)의 옛 지역을 철리부로 삼았는데, 광주(廣州), 분주(汾州), 포주(蒲州), 해주(海州), 의주(義州), 귀주(歸州)를 관할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당서》에, “흑수말갈에는 불녈부(拂涅部), 월희부(越喜部), 철리부(鐵利部) 등의 부가 있는데, 모두 발해에 역속(役屬)하였다. 그 땅은 남쪽으로는 발해에 닿아 있고, 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으로는 실위(室韋)에 이르는데, 사방이 수천 리이다.” 하였는데, 지금의 흑룡강 지역이다. 그리고 여러 부들 가운데 더 동쪽에 있는 것을 불녈부라고 하는데, 천보 연간에 당나라에 경정(鯨睛)을 바쳤다고 하였다. 그러니 불녈부는 마땅히 흑룡강 지역에서 가장 동쪽에 있어야 하며, 여기가 바로 동평부(東平府)이다. 철리부는 철리의 옛 땅이니 역시 흑룡강 지방에 있는 것이다.
○ 회원부(懷遠府)와 안원부(安遠府)는 마땅히 지금의 흑룡강 지방 서쪽 경계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희말갈(越喜靺鞨)의 옛 지역을 회원부로 삼았는데, 달주(達州), 월주(越州), 회주(懷州), 기주(紀州), 부주(富州), 미주(美州), 복주(福州), 사주(邪州), 지주(芝州)를 관할하였다. 안원부는 영주(寧州), 미주(郿州), 모주(慕州), 상주(常州)를 관할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희말갈은 흑수부(黑水部) 소속이다. 《구당서》에 이르기를, “발해는 서쪽으로는 월희말갈에 접하였고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에 이른다.” 하였다. 그렇다면 월희말갈은 흑수부에서 가장 서남쪽에 있는 것으로, 마땅히 지금의 흑룡강주방(黑龍江駐防) 서쪽 경계의 낙니강(諾泥江) 근처 지역에 있어야 하는데, 이곳이 회원부와 안원부인 것이다.
○ 또 독주주(獨奏州)가 있는데, 영주(郢州), 동주(銅州), 속주(涑州)가 있으며, 지계(地界)는 미상이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영주, 동주, 속주를 독주주로 삼았다. 속주란 명칭은 속말강(涑沫江)과 가깝기 때문이다. 대개 속말강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독주(獨奏)는 다른 부(府)에 예속되지 않고 직접 진달하는 것을 이른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영주(郢州) 창성군(彰聖軍)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동주 광리군(廣利軍)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속주는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영주는, 살펴보건대 《요사》를 보면 발해에서 설치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었으며,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속주는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금나라 때에는 폐지하였는데,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신당서》 발해열전을 보면, 속말하(粟末河)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이제 살펴보건대, 속말하는 바로 혼동강(混同江)이니 응당 혼동강 좌우의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일본(日本)의 사서(史書)를 보면, 발해의 사신 가운데 약홀주 도독(若忽州都督)이니 현도주 자사(玄菟州刺史)니 하는 칭호가 있는데, 약홀주는 홀한주(忽汗州)의 와전인 듯하고, 현도주는 아마도 헛되이 붙인 관호(官號)일 것이다. 그리고 《구당서》 발해열전을 보면, 계루군왕(桂婁郡王) 대문예(大門藝)라는 칭호가 있는데, 계루는 혹 군명(郡名)인 듯하다. 그러나 모두 다른 사서에서 증명할 수 없기에 지금은 생략하였다.
○ 후당(後唐) 때에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켜서 그 지역을 여진(女眞)이 차지하였는바, 바로 금나라가 일어난 지역이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숙신 지역은 수당(隋唐) 때에는 흑수말갈이라고 하였으며, 그 뒤에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역속(役屬)하였다. 또 그 뒤에는 발해가 거란의 공격을 받아 흑수말갈이 그 지역을 다시 차지하였다. 그 지역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남쪽 경계는 고려와 접하였고, 서쪽과 북쪽 경계는 거란과 접하였는데, 바로 금나라 시조(始祖)가 살던 부락이다. 초기에는 여진(女眞)이라고 불렀다가 뒤에는 요나라 흥종(興宗)의 휘(諱)를 피하여 여직(女直)으로 고쳤다. 태조(太祖)인 오고타(烏古打)가 요를 멸망시키고는 즉시 상경(上京)에 도읍을 세웠으며, 해릉(海陵)이 연(燕) 지방으로 천도하고는 회령부(會寧府)로 고쳤다.

발해의 경(京)과 부(府)에 대한 잘못된 설을 밝히다 군현(郡縣)의 명목(名目)을 덧붙이다.
○ 요나라가 발해를 병합하고는 그 주현(州縣)을 요동 지역으로 옮기면서 명칭을 그대로 가져다가 써서 강역(疆域)이 분명치 않게 되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遼) 지역은 요나라와 금나라가 발해의 5경(京) 제도를 그대로 따르면서부터 형세가 분명해졌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해의 지리에 대해서는 《당서》에서 비록 소략하게 서술하기는 하였으나 경과 부의 위치가 질서 정연하였는데, 《요사》에서 어지러워졌다. 요나라가 발해를 병합하고는 백성을 옮기고 고을을 옮기면서 대부분이 옛 명칭을 그대로 가지고 갔다. 그런데 지리지를 찬하는 자가 이를 다시 구별하지 않고 그대로 요동에 있는 주현을 가지고 견강부회하여 서술하였다. 《요사》의 설을 그대로 따른다면 동경(東京)이 서경(西京)의 서쪽에 있게 되고, 중경(中京)이 또 동경의 서쪽에 있게 되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성경통지》에서 이른 바 요나라가 발해의 5경 제도를 답습하여 형세가 분명해졌다고 한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요사》 지리지에서 칭한 발해 군현의 명칭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상고할 만한 것이 있으므로 모두 아래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 모두를 믿기는 어려우니, 글을 보는 자가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 상경 용천부의 위치를 요동이라고 하거나 혹 개원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호주(湖州) 흥리군(興利軍)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발주(勃州) 청화군(淸化郡)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상경도(上京道) 보화현(保化縣)은 본디 발해국의 부리현(富利縣) 사람들이다. 태조가 용주(龍州)를 격파하고는 부리현의 사람들을 모두 옮겨서 상경의 남쪽에 흩어져 살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동경은 바로 요양고성(遼陽古城)으로, 그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는 혼동강(混同江)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요수(遼水)를 넘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른다. 또 동경의 서북쪽에 상경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광녕현(廣寧縣) 서북쪽의 변경 바깥 지역이다. 발해의 용주, 호주, 발주는 본디 용천부에 예속되어서 지금의 호이합하(虎爾哈河) 동쪽에 있었다. 그런데 요동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용천부는 분명히 숙신의 옛 지역이니, 숙신이 또 요동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로(開元路)는 옛 숙신 지역이다. 수당(隋唐) 시대에는 흑수말갈이라 하였으며, 그 뒤 발해가 강성해지자 말갈이 모두 역속하였다. 또 그 뒤에는 여진(女眞)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는 즉시 상경(上京)에 도읍을 세우고 회령부(會寧府)로 삼았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의 장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 지역에 웅거하였다. 원나라 초기인 계사년(1233)에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하여 포선만노를 사로잡았다. 군사가 개원(開元), 휼품(恤品)에 이르기까지 동쪽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개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황룡부(黃龍府)였다. 지원(至元) 23년(1286)에 이르러서 개원로로 고쳤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원현(開元縣)은 숙신씨 지역이다. 한나라 때에는 부여국의 경계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발해가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라고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삼만위(三萬衛)는 개원현의 성안에 있으며, 명나라 홍무(洪武) 22년(1389)에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삼만위는 본디 옛 숙신씨 지역이며, 뒤에 읍루(挹婁)라 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수나라 때에는 흑수말갈이라 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개원 연간에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였고, 원화(元和) 연간 이후에는 발해에 복속되어 상경 용천부가 되었다. 거란이 발해를 공격하자 흑수말갈이 그 틈을 타서 그 지역을 다시 수복하고는 숙여직(熟女直)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는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서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연(燕)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고는 이곳을 고쳐서 회령부(會寧府)로 삼고는 상경(上京)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開元路)로 고쳤다. 홍무 21년(1388)에 올자야인걸례미여진군민부(兀者野人乞例迷女眞軍民府)를 설치하였다가 22년에 부를 혁파하고 삼만위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삼만위는 발해 때에는 부여부(扶餘府)라 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황룡부(黃龍府)라 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라 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라 하였는데, 사실은 같은 곳이다.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옛 개원성(開元城)이 삼만위의 서문(西門) 밖에 있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의 장수인 포선만노가 요동 지역에 웅거하였는데, 원나라가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하여 포선만노를 사로잡고는 군사가 개원에 이르러서 동쪽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개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가 그 지역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를 설치하였다. 그런즉 명나라의 삼만위가 바로 원나라의 개원 만호부임을 잘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금나라 초기에 도읍을 세워 회령주(會寧州)를 설치하였다가 태종(太宗) 때 회령부로 승격시켜서 상경이라고 불렀다. 원나라 초기에 개원 만호부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였다. 그런즉 원나라의 개원 만호부가 바로 금나라의 회령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요나라 때 용주(龍州)는 동경(東京)에 예속되었다. 금나라 태조가 도읍을 세워 회령주를 설치하였다. 《요사》에는 이르기를, ‘태조가 황룡부를 두었다가 보령(保寧) 연간에 폐지하였으며, 개태(開泰) 9년(1020)에 다시 용주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그런즉 금나라의 회령부가 바로 요나라의 황룡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또 이르기를, “황룡부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요나라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황룡이 성 위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리에 걸쳐 뻗었으며, 광채가 휘황찬란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황룡부라고 이름하였다. 그런즉 요나라의 황룡부가 바로 발해의 부여부임을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에 나오는 고적(古蹟)이 실려 있는 바를 상고해 보면, 부여성(扶餘城)은 본디 부여의 왕성으로 지금의 개원현 경내에 있는바,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혹자는 《전요지(全遼志)》에 나오는 ‘함평(咸平)이 개원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드디어는 명나라의 삼만위가 바로 금나라의 함평부(咸平府)라고 한다. 그러나 함평은 옛 동산(銅山)의 지역으로, 개원현의 남쪽에 있는 것이니, 그 설은 잘못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요지》의 설이 옳은 듯하다.- ○ 개원현은 봉천부(奉天府)에서 동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당우(唐虞) 시대에는 식신씨(息愼氏)라고 하였고, 상주(商周) 및 진(秦)나라 때에는 숙신씨(肅愼氏)라 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부여(扶餘)의 경계에 속하였고, 당나라 때에는 흑수주도독부(黑水州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그 뒤에는 발해에서 탈취하여 부여부라고 하였다가 얼마 뒤에 용천부라고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용주에 속하였다. 금나라 초기에 도읍을 세우고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원나라 초기에는 개원로를 설치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개원(開元)을 개원(開原)으로 고쳤으며, 뒤에는 개원로를 폐지하고 삼만위를 설치하였다. 강희(康煕) 3년(1664, 현종5)에 개원현(開原縣)을 설치하여 봉천부에 예속시켰다. 살펴보건대, 옛 삼만위가 지금의 개원성 성안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옛 개원성이 삼만위의 서문(西門) 밖에 있는바, 개원(開元)이 개원(開原)으로 바뀐 것이지, 서로 다른 곳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원현은 옛 부여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부여부였고, 요나라 때에는 황룡부였고, 금나라 때에는 함평부였고, -《전요지》에 나온다.- 원나라 때에는 개원이었고, 명나라 때에는 삼만위였다. 영고탑은 옛 읍루국(挹婁國)이다. 발해 때에는 용천부였고, 요나라 때에는 여진국이었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였고, 원나라 때에는 수달달로(水達達路)였고, 명나라 때에는 모련위(毛憐衛)였다. 전사(前史)를 두루 상고해 보면, 두 지역의 연혁(沿革)이 또렷하여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런데 《대명일통지》나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를 뒤섞어서 말하여 잘못되게 되었다. 그리고 《대청일통지》를 가지고 말한다면, 영고탑의 연혁에 이르기를, “발해 때에는 용천부였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였다.” 하고서 -이에 대한 내용은 위의 용천부조(龍泉府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또 개원현의 연혁에는 이르기를, “발해 때에는 부여부였다가 얼마 뒤에 용천부가 되었으며,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하였다. 이미 영고탑이 회령부임을 알았으면서 또 개원현에 끌어댄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당서》를 상고하여 보면, 발해는 초기에 경(京)을 옮기고 부(府)를 옮긴 사실이 없다. 그런데도 “개원현이 처음에는 부여부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용천부가 되었다.”고 한 것은 또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그리고 성경(盛京)의 연혁에는 이르기를, “금나라 때에는 혼동강(混同江) 동쪽 지역을 상경 회령부로 삼고, 혼동강 서쪽 지역을 함평부로 삼았다.” 하였다. 이것은 과연 분명하고 정확한 견해여서 개원이 회령부가 아님을 더욱더 증명할 수가 있다. 그런데 유독 개원현의 연혁을 말하면서는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서 전에 한 말을 모두 뒤집었으니, 어쩜 그리도 잘못되었단 말인가.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라(烏喇), 영고탑(寧古塔)은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씨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읍루국이었고, 당나라 때에는 흑수부를 설치하였다. 발해 때에는 대씨(大氏)가 혼동강의 서쪽에 상경 용천부를 설치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혼동강의 좌우에 조주(肇州), 융주(隆州), 신주(信州)를 두고서 동쪽을 호리개로(呼里改路), 서쪽을 휼품로(恤品路)라고 하였고, 고려와 가까운 남쪽은 합라로(哈懶路)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발해의 상경성(上京城)에 대해, 《대명일통지》에서는 바로 삼만위 지역이라고 하였다. 지금 삼만위의 위치를 상고해 보면, 바로 발해의 부여부 지역이다. 명나라 때에는 아극살산(牙克薩山)으로 경계를 삼았다. 지금 개원(開原)은 위원보(威遠堡)로 경계를 삼는다. 그런즉 발해의 상경은 응당 오라의 경계 안에 속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에서 용천부가 삼만위 지역이 아님을 변증한 것은 옳다. 그러나 혼동강의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됨을 면치 못하였다.
○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의 위치를 요양주(遼陽州)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는 본디 조선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이었다.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함락하였다. 원위(元魏)의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었는데 사신이 고구려 왕이 사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렀다. 요나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 뒤에는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중종(中宗)이 도읍지에 홀한주(忽汗州)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바로 옛 평양성이다. 중경 현덕부라고 불렀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공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함락하고는 발해 왕 대인선(大諲譔)을 사로잡아 동단국왕(東丹國王)으로 삼은 다음, 태자 도욕(圖欲)을 세워 인황왕(人皇王)으로 삼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주(州), 부(府), 군(軍), 성(城)을 87개로 나누었다. 통할하는 현(縣)은 9개이다. ○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발해국의 금락현(金樂縣) 지역이다. 한나라 때에는 패수현(浿水縣)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구려현(句麗縣)이라고 고쳤다. 발해 때에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는 금덕(金德)과 상락(常樂)이 현덕부의 현 이름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상세하게 나온다.- ○ 선향현(仙鄕縣)은 본디 한나라의 요대현(遼隊縣)으로, 발해 때에는 영풍현(永豐縣)이었다. -또 이르기를, “현주(顯州) 산동현(山東縣)은 본디 한나라의 망평현(望平縣)이었다. 목종(穆宗)이 발해 영풍현의 백성들을 떼어 능호(陵戶)로 삼았다.” 하였다.- ○ 학야현(鶴野縣)은 본디 한나라의 거취현(居就縣)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계산현(鷄山縣)이었는데, 옛날에 정령위(丁令威)의 집이 이곳에 있었다. ○ 탁목현(柝木縣)은 본디 한나라의 망평현 지역이었다. 발해 때에는 화산현(花山縣)이었다. ○ 흥료현(興遼縣)은 본디 한나라 때 평곽현(平郭縣) 지역이었다. 발해 때에는 장녕현(長寧縣)이라고 고쳤다.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에 발해 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部)를 침략하여 군읍(郡邑)을 개설하면서 드디어 지금의 이름으로 정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경도(上京道) 장녕현은 본디 현덕부의 현 이름이었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는 그 백성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하였다.- ○ 노주(盧州) 현덕군(玄德軍)은 본디 발해의 삼로군(杉盧郡)이었다. 옛 현은 다섯으로, 산양현(山陽縣), 삼로현(杉盧縣), 한양현(漢陽縣), 백암현(白巖縣), 상암현(霜巖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또 이르기를, “암주(巖州) 백암군(白巖軍)은 본디 발해의 백암성(白巖城)이다. ○ 백암현은 발해가 설치하였다.” 하였다.- ○ 철주(鐵州) 건무군(建武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안시현(安市縣)으로, 고구려 때에는 안시성이었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을 때 설인귀(薛仁貴)가 흰옷을 입고 성 위로 올라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 때에는 철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넷으로, 위성현(位城縣), 하단현(河端縣), 창산현(蒼山縣), 용진현(龍珍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오대사(五代史)》에는 이르기를, “유주(幽州)로부터 10여 일을 가서 평산(平山)을 지나고 유관(楡關)을 나가 사적(沙磧) 가운데를 지나 7, 8일을 가면 금주(錦州)에 이른다. 또다시 5, 6일을 가면 해북주(海北州)를 지나고 다시 10여 일을 가면 요수(遼水)를 건너서 발해국의 철주(鐵州)에 이른다.” 하였다.- ○ 탕주(湯州)는 본디 한나라 때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옛 현은 다섯으로, 영봉현(靈峯縣), 상풍현(常豐縣), 백석현(白石縣), 균곡현(均谷縣), 가리현(嘉利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또 이르기를, “건주(乾州) 영산현(靈山縣)은 본디 발해의 영봉현 지역이다.” 하였다.- ○ 흥주(興州) 중흥군(中興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해명현(海冥縣) 지역인데, 발해 때 흥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셋으로, 성길현(盛吉縣), 산산현(蒜山縣), 철산현(鐵山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또 이르기를, “중경도(中京道) 성길현은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흥주의 성길현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이곳에 살게 하고는 이를 인하여 현을 설치하였다.” 하였다.- ○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은 본디 발해의 현덕부 지역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나라의 요동군에는 요양현이 있는데, 대량수(大梁水)와 요수(遼水)가 만나는 곳이다. 거란이 이곳에 요양부를 두었다. 구양수(歐陽脩)의 《신당서》를 보면, 황룡부에서 서북쪽으로 1300리를 가면 요양부에 이른다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양부는 거란의 동경(東京)인바, 옛 발해 지역은 연경(燕京)에서 2510리 거리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주는 옛 발해성이다. 당나라 때 발해의 대씨가 세웠다. 지금은 주성(州城)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다. ○ 옛 선향현은, 《요사》 지리지를 보면 발해 때에는 영풍현이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지금의 해성현성(海城縣城)의 서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 옛 학야현은, 《요사》 지리지를 보면 발해 때에는 계산현이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지금의 요양주성의 서남쪽에 있다. ○ 금주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설치하였는데, 뒤에 발해의 삼로군에 속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양고성(遼陽古城)은 지금의 요양주(遼陽州) 치소이다. 살펴보건대, 요양은 본디 한나라의 현 이름으로 요동군에 속하였다. 그 뒤에 후한(後漢) 안제(安帝) 때 고쳐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였다. 진(晉)나라 때에는 폐지되어서 그 터가 오랫동안 인멸되었다. 《한서(漢書)》 지리지와 《수경주(水經注)》를 상고해 보건대, 그 지역은 마땅히 지금 주의 서북쪽 경계인 승덕현(承德縣)과 요양 사이, 양수(梁水)와 혼하(渾河)가 교차해 만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요양주는 바로 요나라와 금나라 때의 요양이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는, “요양현은 본디 한나라의 패수현으로, 고구려에서 고쳐서 고구려현이라고 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상락현(常樂縣)이었다.” 하였다. 패수는 한나라 낙랑군(樂浪郡)에 있는바, 지금 조선의 경계 안이며, 금덕(金德)과 상락(常樂)은 바로 발해 중경 현덕부의 현 이름으로, 모두 이곳에는 없다. 또 살펴보건대, 《신당서》를 보면 발해에서 건국한 부(府)와 주(州) 가운데 요양이란 이름은 없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요양고성이라고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에서는 곧바로 ‘발해의 요양고성’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나라 중엽에 안동도호부를 폐지한 뒤 발해가 이곳에 성(城)을 두고서 요양이라고 한 일이 혹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인가? 상고해 보건대, 《요사》 본기(本紀)를 보면, “태조(太祖) 3년(909)에 요동에 행행(幸行)하였다. 신책(神冊) 3년(918)에 요양고성에 행행하였다. 4년에 동평군(東平郡)을 세웠다. 천현(天顯) 1년(926)에 비로소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진격해 홀한성(忽汗城)을 포위하자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하였다. 이에 동단국(東丹國)을 설치하였다. 태종(太宗) 3년(928)에 동단국의 백성을 동평군으로 옮겼다.” 하였다. 그런즉 이는 발해가 평정되기 전에 요양 지역이 일찌감치 거란에 편입되어 처음에는 요동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요양이라고 한 것으로, 아마도 요나라 때 명명한 것이지 발해로 말미암은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제대로 지리를 상고하지 않고서 드디어는 동경(東京)을 일러 곧바로 평양성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곧바로 홀한주라고 하고, 또다시 곧바로 중경 현덕부라고 하여, 서로 간에 거리가 각각 1000여 리나 되는 지역을 합하여 하나로 하였는바, 매우 잘못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동 지역은 본디 발해에 편입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위에 나왔다.- 어찌 요양주를 중경 현덕부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요나라의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은 본디 요수 서쪽 지역에 있었으니, 또 어찌 그곳을 일러 중경 현덕부의 옛 지역이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대청일통지》에서 논변한 것이 몹시 상세한바, 그 말이 옳다.
○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의 위치를 봉황성(鳳凰城)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은 본디 예(濊), 맥(貊)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가 되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가 되었다. 궁전(宮殿)이 있으며, 경주,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의 일을 도독(都督)하였다. 옛 현은 6개로 용원현(龍原縣), 영안현(永安縣), 오산현(烏山縣), 벽곡현(壁谷縣), 웅산현(熊山縣), 백양현(白楊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축조하였으며, 성 둘레는 20리이다. 당나라 때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과 웅산에서 싸우다가 활 잘 쏘는 자를 석성(石城)에서 사로잡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이곳 백성들을 대부락(大部落)으로 옮겨서 성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신라를 정벌하고서 돌아오다가 성터를 두루 살펴보고는 다시금 수리하고서 개봉부(開封府)라고 하였다. 통할하는 주가 3개이고 현이 1개이다. ○ 개원현은 본디 책성(柵城)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이 되었고,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요나라 때에는 초기에 폐지하였다가 성종이 동쪽을 토벌하고서 다시 설치하였다. ○ 염주는 본디 발해의 용하군(龍河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해양현(海陽縣), 접해현(接海縣), 격천현(格川縣), 용하현(龍河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목주 보화군(保化軍)은 본디 발해의 회농군(會農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회농현(會農縣), 수기현(水岐縣), 순화현(順化縣), 미현현(美縣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하주는 본디 발해의 길리군(吉理郡)이다. 옛 현은 4개로 홍하현(洪賀縣), 송성현(送誠縣), 길리현(吉理縣), 석산현(石山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종주(宗州) 웅산현은 본디 발해현 지역이다. ○ 상경도(上京道) 영안현(永安縣)은 본디 발해의 용원부 경주의 현 이름인데, 태조가 발해를 평정할 적에 회주(懷州)의 영안현을 격파하고서 그곳 사람들을 옮겨서 성채(城寨)를 두고 현을 세웠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황성(鳳凰城)은, 주(周)나라 때에는 조선의 경계로 본디 예(濊) 지역이었으며,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에 속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평주(平州)에 예속되었다. 수나라 때에는 고구려의 경주(慶州) 지역에 속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서는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다가 뒤에 발해 대씨가 그곳을 차지하여 동경 용원부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를 살펴보면, “산 위에 돌을 포개 쌓아서 성을 축조하였으며, 폭이 20리이다.” 하였는데, 지금 봉황성 산 위에는 옛 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 옛 개원현이 봉황성 경내에 있는데, 바로 발해의 용원현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 서북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가 경주를 설치하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봉부(開封府) 개원군(開遠軍)을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말기에는 고려에 편입되었는데, 혹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촉막군은 지금의 개성부(開城府)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군(郡)은 개주의 동쪽에 있으며, 또 개원폐현은 옛 개주의 치소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본디 책성 지역이다. 고구려가 용원현으로 삼았는데, 경주의 치소였다.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요나라 때에는 초기에 폐지하였다가 뒤에 다시 설치하였다.” 하였다. ○ 웅산성(熊山城)이 개주의 서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통할하는 현은 여섯으로 용원현, 영안현, 오산현, 벽곡현, 웅산현, 백양현인데, 요나라 초기에 모두 폐지되었다. ○ 염주성(鹽州城)이 개주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염주는 개주에서의 거리가 140리로, 본디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용하군이라고도 한다. 통할하는 현이 해양현, 접해현, 격천현, 용하현 등 네 현인데, 요나라 초기에 모두 폐지되었으나, 염주는 예전 그대로 설치하였다. 또 목주성(穆州城)이 개주에서 서남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회농군(會農郡)이라고도 한다. 회농현, 수기현, 순화현, 미현현 네 현을 통할한다.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두고서 목주(穆州)라고 하였으며, 치소는 회농현이다. 또 하주성(賀州城) 역시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길리군(吉理郡)이라고도 한다. 통할하는 현은 홍하현, 송성현, 길리현, 석산현 등 네 현인데, 요나라 때에는 모두 폐지하였으며, 그대로 하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주는 염주, 목주와 더불어 모두 개주에 예속되었으며, 뒤에 고려에 함락당하였다. ○ 개주고성(開州故城)이 봉황성 동남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주 진국군은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이곳 백성들을 대부락(大部落)으로 옮겨 성이 마침내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다시금 수리하고서 개봉부(開封府)라고 호칭하였다. 통할하는 주는 염주, 목주, 하주 등 세 주이다. 금나라 때에 폐지되었다. 《전요지》를 보면, 개주성은 요양성에서 동쪽으로 3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봉황산보(鳳凰山堡)이다. 살펴보건대, 《후한서》에는, “예, 맥은 고구려, 옥저와 더불어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하였다. 《당서》에는, “발해는 예, 맥의 옛 지역을 동경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라고도 하였는데, 경주, 염주, 목주, 하주를 관할하였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하였는바, 그 지역은 지금의 조선 동쪽 경계에 있었다. 상고해 보건대, 명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조선의 사신이 귀국하다가 봉황산 아래에서 약탈당하고는 다시금 조공하는 길을 옛길의 남쪽으로 바꾸어 주기를 요청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 성을 쌓았다. 그런즉 봉황성은 실로 조선의 동쪽에 있으며, 요나라 때에는 개주가 되었고, 발해 때에는 용원부가 되었다. 또 《성경통지》를 보면, 봉황성이 봉천부(奉天府)에서 동남쪽으로 4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요양성은 120리 되는 곳에 있다. 420리에서 120리를 빼면 개주성과 요양성과의 거리가 과연 300여 리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 《전요지》의 설 역시 통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개주는 실로 지금의 봉황성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발해의 용원부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을 따져 보지 않고서 개주의 위치를 함흥부라고 하기도 하고, 봉황성이라고 하기도 하고, 개성부라고도 하여, 동쪽과 서쪽에다가 억지로 끌어다 붙였다. 그러고는 또 조공하는 길을 연 일을 끌어대면서 드디어는 봉황성이 조선의 동쪽에 있다고 하면서 실로 예, 맥의 옛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예는 본디 우리나라 영동 지역인데 봉황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봉황성 지역은 또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발해의 서경은 분명히 압록강 상류에 있었다. 만약 봉황성이 용원부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동경이 도리어 서경의 서쪽에 있는 것이 되니, 말이 되겠는가. 용원부는 우리나라의 경성(鏡城) 지역임이 분명하다.
○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의 위치가 봉천부의 해성현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본디 옥저국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沙卑城)이었으며,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일찍이 이곳을 공격하였다. 발해 때에는 남경 남해부라고 불렀다. 돌을 포개 쌓아 성을 축조하였으며, 폭이 9리이다.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를 도독(都督)한다. 옛 현은 여섯으로 옥저현(沃沮縣), 취암현(鷲巖縣), 용산현(龍山縣), 빈해현(濱海縣), 승평현(昇平縣), 영천현(靈泉縣)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 요주(耀州)는 본디 발해의 초주이다. 옛 현은 다섯으로 초산현(椒山縣), 초령현(貂嶺縣), 시천현(澌泉縣), 첨산현(尖山縣), 암연현(巖淵縣)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 빈주(嬪州) 유원군(柔遠軍)은 본디 발해의 정주이다. 옛 현은 다섯으로 천정현(天睛縣), 신양현(神陽縣), 연지현(蓮池縣), 낭산현(狼山縣), 선암현(仙巖縣)인데, 모두 폐지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남경(南京)은 돌을 포개 쌓아 성을 축조하였는데, 폭이 9리로, 발해 대씨(大氏)가 축조한 것이다. 지금의 해성현 경계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고성(海州古城)은 지금의 해성현(海城縣) 치소에 있다. 요나라 때에는 해주 남해군을 설치하였고, 또 임명현(臨溟縣)을 두어 해주의 치소로 삼았다. 금나라 때에는 징주(澄州)로 고쳤고, 원나라 때에는 주와 현을 모두 폐지하였고, 명나라 때에는 이곳에 해주를 설치하였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는 “해주는 본디 옥저국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이었다.” 하였으며, 《성경통지》에는 이르기를, “해주에는 사비성이 있는데, 고구려 때 설치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정명진(程名振)이 사비성을 공격하면서 한밤중에 그 성의 서쪽 성곽으로 들어갔는데, 그 성이 바로 이곳 옛 옥저 지역이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후한서》를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한나라 때의 개마(蓋馬)는 바로 당나라 때의 개모(蓋牟)로,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다. 지금 해성은 서남쪽으로 개평 경계까지의 거리가 80리이다. 이는 해성이 바로 개평현의 경내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을 가지고 설명해 보면, 해주는 한나라 때에는 옥저였고,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이었고, 발해 때에는 남해부였고, 요나라 때에는 해주였음을 다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요주고성(耀州古城)은 해성현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요주는 본디 발해의 초주이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성경통지》에 “해성은, 당나라 초기에 설치했을 때 개주(蓋州)였다가 발해에 들어와서는 남경 남해부가 되었는데, 옥주, 정주, 초주를 관할하였으며, 현은 6개였다. 요나라 때의 요주는 바로 해주 남해군에서 통치하였던 초주이다.” 하였다. 또 《한서》에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은 평양의 서쪽에 있다.” 하였다. 지금의 해성 서남쪽은 실로 개평의 경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옥저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북청(北靑) 등지에 있었으며, 발해의 남해부는 바로 그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 해성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미 옥저 강역조(疆域條)에서 다 말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많이 논변하지 않는다.
○ 정리부(定理府)의 위치가 봉천부의 승덕현(承德縣)이라고 하거나 흥경(興京)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심주(瀋州) 소덕군(昭德軍)은 본디 읍루국 지역이며, 발해에서 심주를 세웠다. 옛 현은 9개인데 모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이 흥료군(興遼軍)을 설치하였으며,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 ○ 정리부에는 자사(刺史)를 둔다. 옛 읍루국 지역이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심양로(瀋陽路)는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다. 발해 대씨가 정리부를 두고서 심주와 정주(定州)를 도독하였는데, 이곳이 심주 지역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 승덕현(承德縣)은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씨(肅愼氏)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읍루국이었다. 당나라 예종(睿宗) 때에는 발해의 대씨에게 속하여 심주를 설치하였으며, 정리부에서 관할하였다. ○ 옛 심주는 당나라 때 발해가 설치하여 정리부에 예속되게 하였다.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지금 살펴보건대, 심수(瀋水)가 승덕현의 성에서 남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있으며, 옛 심주가 지금 성안의 지역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 승덕현은 진(秦)나라 이전에는 숙신씨 지역이었고, 한나라, 진(晉)나라, 당나라 때에는 읍루국에 속하였다. 당나라 예종(睿宗) 때 발해 대씨에게 속하여 심주를 설치하였는데, 정리부에서 관할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흥료군을 설치하였고, 뒤에 소덕군(昭德軍)으로 개칭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심주(瀋州)의 치소가 되었다. 원나라 초기에는 심주에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摠管府)를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심양로(瀋陽路)로 고쳤다.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심양중위(瀋陽中衛)를 두어 요동도지휘사(遼東都指揮司)에 예속시켰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성경(盛京)이 되었으며, 강희(康煕) 13년(1674)에 승덕현을 설치하여 수읍(首邑)으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당서》 발해열전을 보면, 읍루의 옛 지역이 정리부라고 하였다. 《요사》에는 이르기를, “심주는 본디 읍루국 지역이었다. 발해가 심주를 세웠다.” 하였는바, 두 설이 딱 들어맞는다. 《성경통지》의 고적조(古蹟條)에는 “승덕현에는 오루하(奧婁河)가 있다.”고 실려 있으며, 주(注)에는 이르기를, “오루(奧婁)는 바로 읍루(挹婁)이다.” 하였다. 지금의 승덕현은 실로 요심주(遼瀋州)인바, 이곳이 옛 읍루의 지역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읍루고성(挹婁故城)이 철령현(鐵嶺縣)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요나라 때에는 흥주(興州) 중흥군(中興軍)을 설치하였고 상안현(常安縣)을 설치하였다. 금나라 때에는 경주(慶州)였다. 대정(大定) 29년(1189)에 읍루현(挹婁縣)으로 고쳐서 심주에 속하게 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폐지되었으며, 명나라 때에는 와전(訛傳)되어 의로성(懿路城)이 되었으며, 지금은 의로참(懿路站)이 되었다. 살펴보건대, 《요사》 지리지에, “흥주는 본디 한나라 때의 해명현(海冥縣)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흥주를 설치하였다.”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에는, “읍루현은 요나라 때에는 옛 흥주의 상안현이었다. 요나라가 일찍이 정리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는데,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었다.” 하였다. 《요사》와 《금사》의 두 지리지가 서로 다른데, 마땅히 《금사》 지리지를 따라야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심주는 실로 지금의 승덕현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러 발해 정리부의 심주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리부는 바로 읍루의 옛 지역으로 영고탑 지방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승덕현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읍루가 승덕현 지역이 아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다 말하였는바, -읍루 강역조에 나온다.- 다시금 논변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정리부 한 조항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여부(扶餘府)가 거란도(契丹道)가 되었는바, 이는 서쪽 변경의 끝 경계이다. 만약 승덕현이 정리부에 해당된다면, 이는 정리부가 도리어 부여부의 서쪽에 있는 것이니, 그럴 수가 있겠는가. 《요사》 본기(本紀)에 “천현(天顯) 1년(926) 1월에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고는 진격하여 홀한성(忽汗城)을 격파하자, 대인선(大諲譔)이 나와 항복하였다. 2월에 남해부(南海府)와 정리부 등 여러 부가 와서 조회하였다.” 하였다. 정리부가 만약 부여부의 서쪽에 있었다면 어찌하여 먼저 요나라 군사의 침략을 받지 않고 홀한성이 격파되어 망한 뒤에야 비로소 항복하였겠는가. 정리부가 홀한성 -바로 영고탑이다.- 의 동쪽에 있었음은 더욱더 분명하다. 후세에 지지(地志)를 찬하는 자가 이를 상고하지 않고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을 답습하였는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흥경(興京)은 주(周)나라 때에는 숙신씨 지역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읍루 지역이었고,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물길(勿吉) 지역이었고, 수(隋)나라 때에는 고구려 지역이었으며, 당나라 초기에는 연주(燕州)를 설치하였다. 뒤에 발해 대씨가 차지하여 이름을 고쳐서 정리부에 예속되게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정리부의 지역이 심주(瀋州)에 속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심양로(瀋陽路)를 설치하였으며, 명나라 때에는 건주위(建州衛) 지역이 되었다. ○ 흥경의 고적(古蹟)인 옛 정주(定州)는 고구려가 설치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라서 정리부에 속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고쳐서 정주(定州) 보령군(保寧軍)이 되었고, 금나라 때에는 폐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흥경을 정리부라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되었다.
부(附)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은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안정군(安定郡)을 설치하였으며, 통할하는 현은 1개이다. 쌍성현(雙城縣)은 본디 발해의 안이현(安夷縣) 지역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쌍성폐현(雙城廢縣)은 철령현(鐵嶺縣)의 서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 “쌍주 보안군은 본디 읍루의 옛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안정군을 설치하였고, 오래 지나서는 폐지하였다.” 하였으며, 《전요지》에 이르기를, “쌍성현은 철령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상고해 보건대, 《성경통지》를 보면 철령현이 실로 읍루국 지역에 있으며, 쌍주가 철령성 서쪽에 있는바, 역시 읍루고성임을 알 수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정군은 본디 읍루의 지역이었으니, 이곳은 정리부와 안변부(安邊府) 가운데에서 한 부가 관할하였을 듯하다. 그러니 마땅히 영고탑 지방에 있어야 하는바, 철령현에 있다고 한 것도 잘못된 것이다.
○ 솔빈부(率賓府)의 위치를 요서(遼西) 지역이라고 하거나 봉황성(鳳凰城)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이 통할하는 강주(康州)는, 세종(世宗)이 발해 솔빈부의 백성들을 옮겨서 설치하였으며, 통할하는 현은 1개이다. 솔빈현(率賓縣)은 본디 발해의 솔빈부 지역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솔빈부는 발해가 설치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는데, 옛터를 상고할 수가 없다. 살펴보건대, 발해열전을 보면, “발해는 옛 솔빈국 지역에 솔빈부를 설치하였는데, 화주(華州), 익주(益州), 건주(建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주(州)는 폐지하고 부(府)는 그대로 두었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주와 부를 모두 폐지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건주는 흥경의 경계 안에 있으며, 솔빈부와 화주, 익주는 모두 봉황성의 경계에서 가깝다. ○ 옛 화주는 당나라 때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솔빈부에 편입되었다. 지금 옛터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익주는 발해가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폐지되었다. 지금 봉황성의 동남쪽 120여 리 되는 곳의 조선의 경계에 익주성(益州城)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애주(愛州)라고 잘못 부르고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 솔빈현은 현주(顯州)에 예속되어 있었는데, 현주는 요서(遼西)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 남쪽에 있는바, 그곳을 일러 발해의 솔빈부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통지》에 이른 바 익주는 우리나라의 의주(義州)를 가리킨다. 또 화주와 익주는 봉황성 경계 안에 있다고 하였는데, 봉황성이나 의주 등지는 발해 때에는 압록부(鴨淥府)에 속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솔빈부를 둘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솔빈부는 금나라 때에는 휼품로(恤品路) -지금의 삼수부(三水府)이다.- 가 되었은즉, 봉황성 등지와 휼품로는 동서 간의 간격이 멀어서 서로 속하지 않는다.
○ 동평부(東平府)의 위치를 승덕현(承德縣)이나 광녕(廣寧) 등지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주(遼州) 시평군(始平軍)은 본디 불녈국(拂涅國)의 국성(國城)인데, 발해 때에는 동평부였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을 적에 이세적(李世勣)이 함락시킨 요성(遼城)과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정명진(程名振)ㆍ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정토하게 하였을 적에 신성(新城)에 이르러서 크게 격파한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태조(太祖)가 발해를 함락시킬 적에 먼저 동평부를 격파하고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옛 동평부는 이주(伊州), 몽주(蒙州), 타주(陀州), 흑주(黑州), 비주(比州) 등 다섯 주를 도독(都督)하며, 관할하는 현이 모두 18개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요하(遼河), 양장하(羊腸河), 추자하(錐子河), 사산(蛇山), 낭산(狼山), 흑산(黑山), 건자산(巾子山)이 있다. 통할하는 주는 1개이다. 기주(棋州) 우성군(祐聖軍)은 본디 발해의 몽주 지역이었다. ○ 요양부(遼陽府) 자몽현(紫蒙縣)은 본디 한나라의 누방현(鏤方縣) 지역이었다. 뒤에 불녈국에서 동평부를 두어 몽주 자몽현을 통치하게 하였다가 뒤에 요성으로 옮겨 황령현(黃嶺縣)에 병합되었다. 발해 때에는 다시 자몽현이 되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 상고해 보건대, 《당서》를 보면, 속말말갈(粟末靺鞨)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고, 거기에서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출부(汨泏部)이고, 더 동쪽은 불녈부(拂涅部)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승덕현(承德縣)이나 광녕(廣寧)에서 아주 멀다. 《요사》 지리지에서는 요주에 동평군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마침내는 그곳이 바로 발해의 동평부라고 하고, 또 주의 이름이 요(遼)임을 인하여 마침내는 그곳이 바로 당나라 때의 요성이나 신성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평부는 본디 흑룡강(黑龍江) 지방에 있었다. 그런데 광녕 등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대청일통지》에서 《요사》 지리지의 잘못을 논변한 것은 옳다.
부(附)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상주(尙州) 진원군(鎭遠軍)은 본디 한나라 때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발해 때에는 동평채(東平寨)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평채는 동평부에 소속된 것인 듯하나, 상고할 수가 없다.
○ 철리부(鐵利府)의 위치를 요동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책(神冊) 1년(916)에 발해를 평정하고서 광주(廣州)를 얻었다. 광주는 본디 발해의 철리부였는데, 고쳐서 철리주(鐵利州)라고 하였다. ○ 동경도 광주(廣州) 방어(防禦)는, 한나라 때에는 양평현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당산현(當山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철리군(鐵利郡)이었다. 태조가 발해의 사람들을 옮겨서 살게 하고는 철리주를 세웠다. ○ 철리부(鐵利府)에는 자사(刺史)를 둔다. 옛 철리국(鐵利國) 지역이다. ○ 상경도(上京道) 영주(永州) 의풍현(義豐縣)은 본디 철리부 의주(義州)였는데, 요나라 군대가 이곳을 격파하고는 그 백성들을 남루(南樓)의 서북쪽으로 옮긴 다음 그대로 의주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회주(懷州) 부의현(富義縣)은 본디 의주(義州)로, 태종이 발해의 의주 백성을 이곳으로 옮겼다.” 하였다.
○ 회원부(懷遠府)의 위치를 지금의 철령현(鐵嶺縣)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본디 월희말갈(越喜靺鞨)의 옛 성이다. 발해 때에는 회원부(懷遠府)를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그 지역이 고려와 인접하였다는 이유로 개태(開泰) 1년(1012)에 주를 설치하였다. ○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은 본디 발해의 부주(富州)이다. 태조가 은(銀)을 제련하는 곳이라는 이유로 이름을 바꾸었다. 통치하는 현은 3개이다. 연진현(延津縣)은 본디 발해의 부수현(富壽縣) 경내에 연진고성(延津古城)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신흥현(新興縣)은 본디 옛 월희국의 지역으로 발해가 은을 제련하는 곳을 설치하면서 일찍이 은주(銀州)를 설치하였다. ○ 수주(遂州)는 본디 발해의 미주(美州) 지역이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철령현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때 숙신씨 지역이며, 한(漢)나라와 진(晉)나라 때에는 읍루국 지역이고, 수(隋)나라 때에는 월희말갈 지역이었다. 당나라 때에는 발해 대씨가 월희말갈의 땅을 취하여 부주(富州)라고 고치고 회원부(懷遠府)에 속하게 하였다.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함평부(咸平府)였다. 명나라 때에는 철령위(鐵嶺衛)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鐵嶺城)이 칠령위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어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홍무(洪武) 21년(1388)에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 26년(1393)에 이곳으로 옮기고서는 그대로 철령위라고 하였다. 살펴보건대, 옛 철령성은 지금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다. ○ 발해는 지금의 철령에 은을 제련하는 곳을 두었으므로 은주라고 불렀다. ○ 옛 신주는 본디 발해의 회원부 지역으로, 지금의 영고탑 경내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주는 옛 월희말갈의 지역으로, 지금의 개원현(開原縣) 남쪽에 있었다. 《전요지》에서 개원현의 동북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철리부와 회원부는 모두 흑룡강 지방에 있다. 그런데 《요사》 지리지에서는 잘못 요동의 주현을 끌어다 붙였다. 《성경통지》에서는 한결같이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을 따라서 마침내는 지금의 철령현이 한나라 때에는 읍루의 지역이었고, 수나라 때에는 월희말갈의 지역이라고 하였으니, 아주 잘못되었다.
○ 안원부(安遠府)의 위치를 압록강 서쪽 지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이는 모두가 《요사》 지리지의 잘못된 설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녹주(淥州) 압록군(鴨淥軍)에서 통치하는 모주(慕州)는 본디 발해의 안원부(安遠府) 지역이다. 옛 현은 2개로 모화현(慕化縣)과 숭평현(崇平縣)인데, 오랫동안 폐지되었다. 녹주에 예속되었으며, 녹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녹주성은 조선의 평양 서쪽 경계에 있다. 모주성(慕州城)은 녹주에서 서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디 발해의 안원부 지역이며, 모화현 숭평현 두 현을 통할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모주(慕州)라고 고쳐서 녹주에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폐지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안원부 역시 흑룡강 지방에 있던 부이다. 요나라의 녹주는 지금의 강계부(江界府) 북쪽 강 건너편 지역에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압록부조(鴨淥府條)에 나온다.- 그런즉 녹주에서 서쪽으로 200리 되는 곳이 어떻게 안원부가 될 수 있겠는가.

부(附) 미상의 군현(郡縣)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은 본디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李世勣)과 함께 공격해 격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 때에는 고쳐서 개주(蓋州)로 삼았다가 또다시 진주(辰州)로 고쳤는데, 진한(辰韓)으로 인해 진주라 한 것이다. 우물과 마을이 줄지어 있어서 가장 요충이 되는 곳이다. ○ 숭주(崇州) 융안군(隆安軍)은 본디 한(漢)나라의 장잠현(長岑縣) 지역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3개로 숭산현(崇山縣), 위수현(潙水縣), 녹성현(淥城縣)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 건주(乾州) 광덕군(廣德軍) 사농현(司農縣)은 본디 발해의 녹군현(麓郡縣)으로, 녹파현(麓波縣)과 운천현(雲川縣)을 아울러서 편입시켰다. ○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은 본디 한나라의 양평현(襄平縣) 지역이다. 통할하는 현은 2개이다. 귀덕현(貴德縣)은 본디 한나라 양평현으로, 발해에서 숭산현이라고 하였다. 봉덕현(奉德縣)은 본디 발해의 녹성현 지역으로, 일찍이 봉덕주(奉德州)를 설치하였다. ○ 집주(集州) 회중군(懷衆軍)은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상암현(霜巖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주(州)를 설치하였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봉집현(奉集縣)인데,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수주(遂州)는 본디 발해의 미주(美州) 지역이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산하현(山河縣)이다. 산하현은 본디 발해의 현으로 흑천현(黑川縣)과 녹천현(麓川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은 본디 발해의 부여성(扶餘城)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부여부조(扶餘府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은 4개이다. 통원현(通遠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현(扶餘縣)으로, 포다현(布多縣)을 병합해 설치하였다. 안원현(安遠縣)은 본디 발해의 현의현(顯義縣)으로, 작천현(鵲川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귀인현(歸仁縣)은 본디 발해의 강사현(强師縣)으로, 신안현(新安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어곡현(漁谷縣)은 본디 발해현(渤海縣)이었다. -또 이르기를, “상경도(上京道) 회주(懷州) 부여현은 본디 용천부(龍泉府)인데, 태조가 발해 부여현의 항복한 사람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하였다.- ○ 한주(韓州) 동평군(東平軍)은 본디 발해의 막힐부(鄚頡府)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막힐부조(鄚頡府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유하현(柳河縣)이다. 유하현은 본디 발해의 월희현(粵喜縣) 지역으로, 만안현(萬安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 은주(銀州) 부국군(富國軍) -이에 대한 내용은 회원부변오조(懷遠府辨誤條)에 나온다.- 에서 통할하는 영평현(永平縣)은 본디 발해의 우부현(優富縣) 지역이다. 태조가 포로로 잡은 호구(戶口)로 설치하였다. 예전에는 영평채(永平寨)가 있었다. ○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은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銅山縣) 지역으로, 발해 때에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그 위치는 한나라 때의 후성현(候城縣) 북쪽, 발해 때의 용천부 남쪽에 있었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함평현(咸平縣)이다. 함평현은 당나라 때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천보(天寶) 연간에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사이를 다스린 곳이 바로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시 안동군(安東軍)을 설치하였다. ○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이에 대한 내용은 회원부변오조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이 2개이다. 무창현(武昌縣)은 본디 발해의 회복현(懷福縣) 지역이다. 정무현(定武縣)은 본디 발해의 표산현(豹山縣) 지역인데, 유수현(乳水縣)의 인호(人戶)를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 빈주(賓州) 회화군(懷化軍)은 본디 발해성(渤海城)으로 통화(統和) 17년(999)에 올야부(兀惹部)의 사람들을 옮기고서 압자강(鴨子江)과 혼동강(混同江) 사이에 자사(刺史)를 두었다. ○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扶餘府)로, -이에 대한 내용은 앞의 부여부조(扶餘府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이 3개이다. 황룡현(黃龍縣)은 본디 발해의 장평현(長平縣)으로, 부리현(富利縣), 좌막현(佐幕縣), 숙신현(肅愼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천민현(遷民縣)은 본디 발해의 영녕현(永寧縣)으로, 풍수현(豐水縣), 부라현(扶羅縣)을 병합하여 설치하였다. 영평현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또 이르기를, “상경도(上京道) 장태현(長泰縣)은 본디 발해국의 장평현(長平縣) 백성들이다. 태조가 대인선(大諲譔)을 정벌하면서 먼저 이 고을을 취하여 그 백성들을 서울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한민(漢民)들과 섞여 살게 하였다.” 하였다.- ○ 발주(渤州) 청화군(淸化軍)은 -이에 대한 내용은 용원부변오조(龍原府辨誤條)에 나온다.- 통할하는 현이 1개로 공진현(貢珍縣)이다. 공진현은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 녹주(麓州)는 발해에서 두었다. ○ 상경도 정패현(定霸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부 강사현(强師縣) 백성들이다. 태조가 부여부를 함락시키고는 그 백성들을 서울의 서쪽으로 옮겨 한민(漢民)들과 섞여 살게 하였다. ○ 봉주(鳳州)는 고리국(藁離國)의 옛 지역으로, 발해의 안녕군(安寧郡) 경내이다. 남왕부오장(南王府五帳)과 지역을 나누었다. 한주(韓州)에서 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북쪽으로 상경(上京)과의 거리가 900리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옛 무창현은 발해의 회복현 지역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 옛 정무현은 본디 발해의 표산현 지역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나성(東那城)은 정주(正州)에서 서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발해에서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가 이어 정주에 속하게 하였으며, 뒤에는 폐지하였다. ○ 조선의 곽주성(郭州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발해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곽산부(郭山府)라고 부른다. ○ 구지(舊志)를 보면, 정료전위(定遼前衛)의 치소가 요양성(遼陽城)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었는데, 바로 발해(渤海)의 성으로, 전해 오기를 발해의 대씨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주D-001]걸걸중상(乞乞仲象) : 걸걸중상과 대조영(大祚榮)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두 사람을 이명동인(異名同人)이라는 설, 기록대로 대조영의 아버지가 걸걸중상이라는 설, 대조영이 걸걸중상의 아들이 아니라 백산말갈인(白山靺鞨人)이며 걸걸중상은 거란인(契丹人)이라는 설이 있다.《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 신서원, 1994, 91쪽 주》
[주D-002]오루하(奧婁河) : 원문에는 ‘奧婁阿’로 되어 있는데, 《신당서》 권219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오루하는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挹婁河), 홀한하(忽汗河), 호이합하(虎爾哈河)라고도 한다.
[주D-003]천문령(天門領) : 천문령의 위치는 정겸(丁謙)의 장광재령설(張廣才嶺說),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승덕현(承德縣) 서쪽설, 송정등(松井等)의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分水嶺)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설 등이 있으며, 《발해의 대외 관계사 85쪽 주》 북한에서는 요령성 창무현 서쪽 산간 지대에 있는 고개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04]동모산(東牟山) :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여 굳어지고 있다.《발해의 대외관계사 85쪽 주》 《조선전사》에는 “길림성 돈화현 오동성은 이전 고구려 영역의 동북부에 해당되는 곳으로, 말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300여 리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매우 길고 험한 장광재령 산줄기, 서남쪽으로는 부이령 산줄기, 동쪽과 남쪽으로는 노야령 산줄기, 동북쪽으로는 목단강의 상류를 끼고 있어서 고구려의 유민들이 자리 잡기에 적당한 지점이었다.”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05]월희말갈(越喜靺鞨) : 길림성(吉林省) 회덕부(懷德府) 근처에 있던 말갈의 한 부족이다. 발해의 건국과 더불어 회원부(懷遠府)에 편입되었다.
[주D-006]이하(泥河) : 발해가 신라와 경계를 접했던 이하에 대해서는, 함경도 덕원(德源) 부근의 용흥강(龍興江)이라는 설이 정설로 되어 있으나, 이와는 달리 정약용(丁若鏞)은 강릉(江陵) 북쪽, 양양(襄陽)이라고 보고 있으며, 강원도 명주군에 있는 연곡천(連谷川)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주D-007]5경(京) : 선왕(宣王) 때 설치한 것으로, 국도인 상경(上京)을 중심으로 5경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부여의 사출도(四出道)나 고구려의 오부(五部) 제도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5경은 지금의 영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었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이나 길림성 화룡현(和龍縣)에 있었던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 훈춘현(琿春縣) 부근이나 북한의 청진(淸津)에 있었던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있었던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집안현(輯安縣) 통구(通溝)에 있었던 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이다. 《조선전사》에는 남경 남해부의 위치가 함경북도 동해안 지역인 신창 부근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주D-008]15부(府) : 발해의 15부는 5경 외에 장령부(長嶺府), 부여부(扶餘府), 막힐부(鄚頡府), 정리부(定理府), 안변부(安邊府), 솔빈부(率賓府), 동평부(東平府), 철리부(鐵利府), 회원부(懷遠府), 안원부(安遠府)이다.
[주D-009]호이합하(虎爾哈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을 말한다. 홀한하(忽汗河), 읍루하(挹婁河), 오루하(奧婁河)라고도 한다.
[주D-010]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正東如北’으로 되어 있는데, 《신당서》 권43 하 지리지에 의거하여 ‘正北如東’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 : 동경 용원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함경북도 종성(鍾城)이라 하였으며, 이병도는 지금의 훈춘(琿春)으로 보았다. 대개 길림성 훈춘현 팔련성(八連城)이 정설로 여겨져 왔는데, 최근 북한에서는 청진(淸津) 부거리설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다.
[주D-012]도성을 …… 옮겼다 : 한규철은, “발해가 수도를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긴 시기는 정원(貞元) 연간이고, 여기에서 다시 상경 용천부로 옮긴 시기는 대흥(大興) 연간이다. 동경 용원부는 약 9년 정도 수도였다고 생각된다.” 하였다.《발해의 대외 관계사 175쪽 주》
[주D-013]축자도(筑紫道) : 축자는 구주(九洲)의 별칭이다.
[주D-014]토우포(吐亏浦) : 원문에는 ‘吐弓浦’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 : 남경 남해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약용(丁若鏞)의 함흥설(咸興說)을 비롯하여 경성설(鏡城說), 종성설(鍾城說), 북청설(北靑說) 등이 있으나, 함흥설이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주D-016]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 : 서경 압록부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약용의 자성북안설(慈城北岸說)을 비롯하여 통화(通化) 부근의 임강설(臨江說), 통구설(通溝說) 등이 있으나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주D-017]정북쪽에서 약간 동쪽으로 : 이 부분이 원문에는 ‘正東如北’으로 되어 있는데, 《신당서》 권43 하 지리지에 의거하여 ‘正北如東’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8]환도성(丸都城) : 원문에는 ‘中都城’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정주는 …… 지역인데 : 원문에는 ‘正州本沸流王故都’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 지리지에 의거하여 ‘正州本沸流王故地’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등주(登州) : 원문에는 ‘登舟’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도발근(都孛菫) : 원문에는 ‘都學堇’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여진족 추장(酋長) 칭호이다.
[주D-022]타주(沱州) : 《요사》 권38 지리지에는 ‘陀州’로 되어 있다.
[주D-023]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은 적고내(迪古乃)이며,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희종(煕宗)을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뒤에 폐위되었다.《金史 卷5 海陵本紀》
[주D-024]포선만노(蒲鮮萬奴) : 금나라의 무장(武將)이다. 함평로 선무사(咸平路宣撫使)로 있다가 정우(貞祐) 3년(1215)에 금나라를 배반하여 요동에 웅거하고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하여 대요국(大僚國)과 대립하였다. 원나라 성길사한(成吉思汗)에게 쫓겨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 국호를 동진국(東眞國)으로 고치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위에 있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217년(고종4)에 몽고와 화맹(和盟)하고는 고려를 구한다는 구실로 고려의 동북쪽을 쳐들어왔으며, 1233년(고종20)에 몽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주D-025]봉천부(奉天府) : 원문에는 ‘奉天縣’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6]정령위(丁令威) : 한(漢)나라 때의 신선이다. 한나라 때 요동 사람 정령위가 영허산(靈虛山)에서 도를 닦아 신선이 되었다. 그 뒤에 학이 되어 요동에 돌아와 화표주(華表柱)에 앉아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새여 새여 정령위여, 집 떠난 지 천년 만에 오늘에야 돌아왔네. 성곽은 의구한데 사람들은 아니로세. 어찌 신선 아니 배워 무덤이 총총하뇨.[有鳥有鳥丁令威 去家千載今始歸 白骨如山陵谷變 何不學仙塜累累]”라고 하였다고 한다.《搜神後記》
[주D-027]타주(陀州) : 《신당서》 권219 발해열전에는 ‘沱州’로 되어 있다.
[주D-028]그대로 의주라고 하였다 : 원문에는 ‘仍兵義州’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7 지리지에 의거하여 ‘仍名義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올야부(兀惹部) : 여진족(女眞族)의 한 종족이다.
[주D-030]그 백성들을 …… 옮기고는 : 원문에는 ‘遷其人於宋西北’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遷其人於京西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1]발주(渤州) : 원문에는 ‘渤海’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 지리지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2]한주(韓州)에서 …… 있으며 : 원문에는 ‘古韓州北二百里’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7 지리지에 의거하여 ‘在韓州北二百里’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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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0
고려(高麗) 1


강역총론(疆域總論)
○ 고려 초기에는 그 강역이 삼면은 바다로 막혔고, 북쪽은 정평(定平)의 도련포(都連浦)를 경계로 삼았으며, 서북쪽은 청천강(淸川江)을 경계로 삼았다가 뒤에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熱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지역은 압록강 동쪽과 갈라로(曷懶路) 남쪽에 위치하였으며, 동쪽과 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로 막혀 있고 북쪽은 옛 거란(契丹)의 땅과 접하였고 동쪽은 금(金)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日本), 유구(琉球), 탐라(耽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땅의 경계가 서로 맞물려 있다. 신라(新羅)와 백제(百濟)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병합되었으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그 지역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있다.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가면 그 국경에 이르는데, 무릇 3790리이다. 바닷길로 갈 경우에는, 하북(河北), 경동(京東), 회남(淮南), 양절(兩浙), 광남(廣南), 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가 있다. 지금 세워진 나라는 등주(登州), 내주(萊州), 빈주(濱州), 체주(棣州)와 마주 보고 있다. 옛날에는 봉경(封境)이 동서 간의 거리가 2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가 1500여 리였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병합하였으며,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고, 그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옛날에 대요(大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가 뒤에는 대요의 침입을 받게 되어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역시 압록강을 험요처로 믿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태조가 신라(新羅), 궁예(弓裔), 견훤(甄萱)의 땅을 통합하여 그 강역이 동쪽, 서쪽, 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았고, 북쪽 경계는 서쪽으로는 청천강(淸川江)에서부터 동쪽으로 도련포(都連浦)에 이르기까지를 경계로 삼았다. 그 뒤에 서쪽 경계를 조금 더 개척하여 압록강까지 이르렀다. 그러니 《고려도경》에서 서쪽 경계는 요수(遼水)까지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태조(太祖) 때 주현(州縣)을 설치하면서는 신라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
《오대사(五代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건(王建)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와 백제를 격파하였다. 이에 동이(東夷)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려에 귀속하였다. 2경(京), 6부(府), 9절도사(節度使), 120군(郡)이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조 때에는 송경(松京)과 서경(西京)이 있었으니 2경(京)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신라에는 6소경(小京), 9주(州), 128군(郡)이 있었으니, 6부, 9절도사, 120군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신라의 옛 제도를 그대로 따라서 크게 변혁시키지 않은 것이다.
○ 성종(成宗) 때 경내를 나누어서 10도(道)로 만들었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원(郭元)이 스스로 말하기를, “본국의 도성에는 담장이 없다. 부(府)를 개성(開城)이라고 하는데, 6현(縣)을 관할하고, 주민은 3000호에서 5000호를 밑돌지 않는다. 주(州)마다 군사 100여 명씩을 두고, 10로(路)에 전운사(轉運司)를 설치하여 그들을 통할하고 있다. 주마다 5, 6개의 현을 관할하는데, 작은 주는 3, 4개의 현이며, 현마다 3, 4백 호가 산다. 국경은 남쪽에서 북쪽까지가 1500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가 2000리이다.”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종이 주(州), 부(府), 군(郡), 현(縣) 및 관(關), 역(驛), 강(江), 포(浦)의 호칭을 고치고 마침내 경내를 나누어서 10도로 만들었으며, 12개의 주에다 각각 절도사를 두었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양주(楊州), 광주(廣州), 황주(黃州), 해주(海州)를 관할한다-, 중원도(中原道) -청주(淸州), 충주(忠州)를 관할한다-, 하남도(河南道) -공주(公州), 운주(運州)를 관할한다-, 강남도(江南道) -전주(全州), 영주(瀛洲), 순주(淳州), 마주(馬州)를 관할한다-, 영남도(嶺南道) -상주(尙州)를 관할한다-, 영동도(嶺東道) -경주(慶州), 김주(金州)를 관할한다-, 산남도(山南道) -진주(晉州)를 관할한다-, 해양도(海陽道), -나주(羅州), 광주(光州), 정주(靜州), 승주(昇州), 견주(見州), 담주(潭州), 낭주(朗州)를 관할한다-, 삭방도(朔方道) -춘주(春州), 교주(交州), 화주(和州), 명주(溟州), 등주(登州)를 관할한다-, 패서도(浿西道) -서경(西京)에서 관할하는 바를 관할한다.- 등이다. 10도가 관할하는 주와 군은 모두 580여 개다.
○ 현종(顯宗) 때 3경(京), 4도호부(都護府), 8목(牧)을 설치하였다. 이 뒤로는 5도(道), 양계(兩界)로 정하였으며, 문종(文宗) 때 또 남경(南京)을 두어서 모두 4경이 되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다. 신라 지역을 동주(東州) 낙랑부(樂浪府)로 삼아 동경(東京), 백제 지역을 금주(金州)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아 남경(南京), 평양(平壤)을 진주(鎭州)로 삼아 서경(西京)이라고 부르는데, 서경이 가장 번성하다. 통틀어서 모두 3경, 4부, 8목에 군이 118개, 현(縣)과 진(鎭)이 390개, 주도(洲島)가 3700개이다. 작은 군읍은 간혹 100호밖에 안 된다. 인구는 남녀가 총 210만 명이며, 병사, 백성, 승려 등이 각각 3분의 1씩을 차지한다. 지역은 기후가 춥고 산이 많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종 초기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4도호부, 8목을 설치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5도, 양계로 정하였는데, 5도는 양광도(楊廣道), 경상도, 전라도, 교주도(交州道), 서해도(西海道)이고, 양계는 동계(東界), 북계(北界)이다. 총 4경(京), 8목, 15부, 129군, 335현, 29진(鎭)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양광도는 지금의 경기 양주(楊州) 남쪽 및 충청도 지역이다. 경상도와 전라도는 지금과 같다. 교주도는 지금의 강원도 영서(嶺西) 지역이다. 서해도는 지금의 황해도 지역이다. 동계는 지금의 강원도 영동(嶺東) 및 함경남도 지역이다. 북계는 지금의 평안도 지역이다. 이 이외에 또 경기가 있는데, 지금의 양주 북쪽 및 황해도 금천(金川), 평산(平山) 등지이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초기부터 송경과 서경 두 경이 있었는데, 성종이 또 경주(慶州)에 동경을 두고서 낙랑부(樂浪府)라고 불렀다가 뒤에 강등시켜서 주(州)로 삼았다. 현종(顯宗)이 다시 동경을 두어 3경을 갖추었다. 문종(文宗) 때 또 지금의 경성(京城)을 승격시켜서 남경으로 삼아 모두 4경이 되었다. 《송사》에서 금마군(金馬郡)을 남경으로 삼았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금마군은 지금의 익산군(益山郡)이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주현(州縣)의 설치는 실제와 명칭이 맞지 않고, 다만 취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나라의 서북쪽으로부터 거란(契丹), 대금(大金)의 접경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보루(堡壘)와 참호(塹壕)가 있고, 그 동남쪽의 바닷가에도 도서(島嶼)에 설치한 것이 있다. 오직 서경이 가장 번성하여 성과 시가(市街)가 대략 왕성(王城)과 같다. 또한 3경, 4부, 8목이 있고, 또 방어하는 군이 118개, 현과 진이 390개, 주도(洲島)가 3700개가 있는데, 여기에는 모두 수령(守令)과 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 신이 듣건대, 사이(四夷)의 군장(君長)들은 대부분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 다니는 것을 편하게 여겼으므로, 본디부터 나라에 도읍(都邑)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서역(西域)의 거사(車師)나 선선(鄯善) 등의 나라만이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삼을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제국(城郭諸國)’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읍(邑)에는 가옥을 만들고, 주(州)에는 마을 문을 세우고, 높은 성첩(城牒)을 둘러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을 받은 옛 땅이라서 중화의 전해 오는 풍속과 습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 듯합니다. 우리 조정에서 간간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 보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동북계(東北界)의 연혁(沿革)

동북계는 지금의 함경도이다. 옛날에는 옥저국(沃沮國)이었고, 한나라 때에는 현도군(玄菟郡)을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고구려에 함락되었는데, 졸본(卒本), 책성(柵城) 등지가 바로 그 지역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속하였으며, 덕원(德源) 남쪽은 신라에 편입되었다. 발해의 대씨(大氏)가 흥성하고서는 남해부(南海府), 용원부(龍原府), 솔빈부(率賓府) 세 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발해가 망하고서는 함흥(咸興) 북쪽은 여진(女眞)이 차지하였는바, 바로 금(金)나라 사람들이 처음 일어난 지역이다. 고려의 시대가 다 끝나도록 얻고 잃음이 무상하였다. 그러므로 별도로 조항을 만들어 상고하였다.
○ 고려 초기에는 여진과 더불어 정평(定平)의 도련포(都連浦)를 경계로 삼았으며, 뒤에는 이곳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여진은 옛 숙신씨(肅愼氏)로, 대대로 혼동강(混同江)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압록강(鴨綠江)이 발원하는 지역에서 살았으며, 남쪽으로 고려와 인접하였다.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가 처음 고려에서 올 적에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시조는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에서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여진은 본디 고구려의 부락으로, 개마산(蓋馬山)의 동쪽에 모여 살면서 대대로 직공(職貢)을 닦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마산은 바로 백두산의 남쪽 대간(大幹)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산수조(山水條)에 나온다.- 개마산의 동쪽은 지금의 함흥(咸興), 길주(吉州) 등지로, 이른바 야라(耶懶) 및 복간수(僕幹水)가 바로 그곳에 있다. 《고려사》를 보면, 예종(睿宗)이 금나라 임금에게 준 글에 “더구나 저들이 발원한 곳은 반이 우리의 영토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북쪽으로는 도련포로 경계를 삼아 장성(長城)을 쌓았다.” 하였고, 병지(兵志)에는 이르기를, “덕종(德宗) 2년(1033) -송나라 인종(仁宗) 11년- 에 유소(柳韶)가 비로소 북쪽 경계의 관방(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화주(和州)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등의 성까지 이어지는 곳에 설치하여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다.”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도련포는 함흥부에서 남쪽으로 3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 장성의 꼬리가 이곳까지 닿았다. 이곳이 바로 고려와 여진의 경계가 나누어진 곳이다.
○ 함흥 북쪽에서 단천(端川), 길주(吉州) 등지에 이르는 지역을 금나라 사람들은 합라로(合懶路)라고 한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라로에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였다. 정원(貞元) 1년(1153)에 총관(摠管)을 고쳐서 윤(尹)으로 삼고 이어 합라로 병마도총관(合懶路兵馬都摠管)을 겸하게 하였다. 승안(承安) 3년(1198)에 병마부총관(兵馬副摠管)을 설치하였다. 옛날에 해총(海蔥)을 바쳤는데, 대정(大定) 17년(1177)에 혁파하였다. 이록고수(移鹿古水)가 있다. 서북쪽으로 상경(上京) -삼가 살펴보건대, 영고탑(寧古塔)이다.- 까지 1800리이고, 동남쪽으로는 고려의 경계까지 500리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폐합라로(廢合懶路)가 영고탑성 동남쪽에 있다. 금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갈라로(曷懶路)라고도 한다. 서북쪽으로는 상경까지 1800리이고, 동남쪽으로는 고려까지의 경계가 500리이다. 원(元)나라 때에 폐지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합라로는 갈라로라고도 하고, 압라로(押懶路)라고도 하고, 야라로(耶懶路)라고도 하고, 이라로(移懶路)라고도 하는데, 모두 같은 것이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회령부(會寧府)에서 동남쪽으로 휼품로(恤品路)까지 1600리이고, 갈라로까지 1800리이며, 휼품로에서 서남쪽으로 갈라로까지 1200리이다. 《대청일통지》를 보면, “회령고성(會寧古城)이 영고탑성 서남쪽에 있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영고탑에서 남쪽으로 토문강(土門江)의 조선 경계까지가 600리이다.” 하였다. 회령부는 바로 금나라의 상경으로, 옛 성이 지금의 영고탑에서 서남쪽으로 9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호이합하(虎爾哈河)의 남쪽에 있다. 그런즉 남쪽으로 토문강까지는 의당 500리에 불과할 것이다. 휼품로나 갈라로 역시 토문강 남쪽의 함경도 안에 있어서 북쪽은 휼품로가 되고 남쪽은 갈라로가 된다. 휼품로에서 갈라로까지 1200리라는 것은 도발근(都孛菫)이 주둔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듯한바, 실제로는 지역을 서로 접하고 있는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금사》 지리지를 보면, 합라로 동남쪽에서 고려의 경계까지 500리이다. 지금 도련포 북쪽에서부터 500리를 가면 이원(利原)이나 단천(端川) 등지에 이른다. 그런즉 합라로총관부(合懶路摠管府)는 마땅히 마천령(磨天嶺)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삼수부(三水府) 서북쪽의 압록강 안팎 지역을 금나라 사람들이 휼품로라고 하였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휼품로에는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요나라 때에는 솔빈부(率賓府)로 삼고 자사(刺史)를 두었다. 본디는 솔빈(率賓)의 옛 지역이다. 태종(太宗) 천회(天會) 2년(1124)에 야라로의 도발근이 거주하는 곳의 땅이 척박하다는 이유로 마침내 이곳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해릉(海陵)의 예로써 만호(萬戶)를 혁파하고 절도사를 두었으며, 인하여 속빈로 절도사(速頻路節度使)라고 하였다. 세종(世宗) 대정(大定) 11년(1171)에 야라로와 속빈로의 거리가 1000리가 되는 데다가 이미 속빈로에 거처하고 있었으나, 근본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여 마침내 석토문 친관맹안(石土門親管猛安)을 일러 압라 맹안(押懶猛安)이라고 하였다. 승안(承安) 3년(1198)에 절도부사(節度副使)를 두었다. 서북쪽으로 상경(上京)까지 1570리이고, 동북쪽으로 호리개(胡里改)까지 1100리이고, 서남쪽으로 합라로까지 1200리이고, 북쪽으로 변방 경계인 간가아련(幹可阿憐) 천호(千戶)까지 2000리이다. 야라(耶懶)는 또 압라(押懶)로도 표기한다.” 하였다. ○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천회 9년(1131)에 도문수(徒門水) 서쪽, 혼동수(渾疃水), 성현수(星顯水), 잔준수(僝蠢水)의 삼수(三水) 북쪽의 한전(閑田)을 갈라로의 여러 모극(謀克)에게 주라고 명하였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폐휼품로(廢恤品路)가 영고탑성의 동남쪽에 있다. 원나라 때 폐지하였다.
살펴보건대, 휼품(恤品), 속빈(速頻)은 바로 솔빈(率賓)의 와음(訛音)이고, 야라(耶懶), 압라(押懶)는 바로 합라(合懶)의 와음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휼품은 바로 발해의 솔빈부와 고구려의 졸본(卒本)으로, 모두 음이 바뀐 것이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천회 2년(1124)에 야라로의 도발근이 거주하는 곳의 땅이 척박하다는 이유로 휼품로로 옮겼다.” 하였으며, 본기(本紀)를 보면, “천회 2년에 이라로(移懶路)의 도발근 완안충(完顔忠)을 소빈수(蘇濱水)로 옮겼다. 9년에 도문수 서쪽, 삼수(三水) 북쪽의 한전을 갈라로의 여러 모극에게 주었다.” 하였는데, 이라로는 야라로이고, 소빈(蘇濱)은 휼품이고, 도문수는 지금의 두만강이다. 삼수는 지금의 삼수부(三水府)이다. 삼수부라는 이름은, 압록강이 그 북쪽을 경유하고 허천(虛川)이 동쪽에 있으며 장진강(長津江)이 서쪽에 있음으로 인해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금사》에서는 혼동수, 성현수, 잔준수 세 강을 일러 삼수라고 하였는바, 이는 옛날과 지금의 명명한 것이 다른 것이다. 《금사》에 또 이르기를, “오연포할노(烏延蒲轄奴)는 속빈로(速頻路) 성현하(星顯河) 사람이다.” 하였는바, 성현수 등 세 강이 속빈로에 있음을 여기에 의거하여 더욱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 이르기를, “휼품로는 지금의 흥경(興京) 동남쪽 변경 밖에 있다.”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르기를, “갑산(甲山)은 본디 허천부(虛川府)로, 오랫동안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였고, 《갑산부지(甲山府志)》에는 칭하기를, “여진의 도통(都統)이 살던 곳이다.”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졸본이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건너편 지역에 있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高句麗紇升骨城條)에 나온다.- 이상의 여러 사실들을 참고해 볼 때 지금의 갑산부, 삼수부 등의 지역에서부터 서쪽으로 폐여연군의 압록강 지역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옛날의 졸본, 솔빈, 휼품의 지역이었다.
○ 《금사》에서 칭한 오국(五國)의 여러 부(部)와 그 나머지 여러 지역들은 모두 지금의 관북(關北) 지역이다.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조(昭祖)가 무위(武威)를 빛내면서 청령(靑嶺), 백산(白山)에 이르러서 소빈(蘇濱), 야라(耶懶)의 지역에 들어가 이르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 경조(景祖) 때 -송나라 인종(仁宗) 때이다.- 점차 여러 부(部)가 역속(役屬)하여 백산(白山), 야회(耶悔), 통문(統門), 야라(耶懶), 토골론(土骨論)의 족속에서부터 오국(五國)의 장(長)에 이르기까지 모두 명령에 따랐다. ○ 오국(五國)의 포섭부 절도사(蒲聶部節度使) 발을문(拔乙門)이 반란을 일으켜 요나라의 응로(鷹路)가 통하지 않았다. 이에 경조가 습격하여 사로잡아서 요나라 임금에게 바쳤다. 그러자 요나라 임금이 경조를 생여진 절도사(生女眞節度使)로 삼으니, 전후로 귀부(歸附)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알민수(斡泯水)의 포찰부(蒲察部), 태신특보수(泰神忒保水)의 완안부(完顔部), 통문수(統門水)의 온적흔부(溫迪痕部), 신은수(神隱水)의 완안부(完顔部) 등이 모두 서로 연이어 와서 귀부하였다. ○ 요나라 함옹(咸雍) 8년(1072)에 오국(五國) 몰연부(沒撚部)의 사야 발근(謝野勃菫)이 반란을 일으켜 요나라의 응로가 통하지 않자, 경조가 정벌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白山)은 지금의 백두산이고, 통문(統門)은 바로 도문(徒門)으로 지금의 두만강이고, 야라는 바로 함흥 북쪽 지역이고, 소빈은 바로 삼수 등지이다. 함흥 북쪽으로부터 백산, 소빈에 이르기까지는 금나라 사람들이 처음으로 일어난 지역임이 분명하다. 그런즉 그 접경에 있었던 오국(五國)의 여러 부들을 어찌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아서야 되겠는가.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목종(穆宗) 3년(1096, 숙종1) -송나라 철종(哲宗) 11년- 에 성현수(星顯水) 흘석렬부(紇石烈部)의 아소(阿疏)와 모도록(毛睹祿)이 군사를 출동시켜 막아 일이 어려워졌다. 이에 목종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아소를 정벌하였다. 이때 도온수(陶溫水)와 도롱고수(徒籠古水) 흘석렬부의 아합판(阿閤版) 및 석로(石魯)가 오국(五國)의 응로를 막아 요나라의 매[鷹]를 잡는 사자(使者)를 붙잡아서 살해하였다. 그러자 요나라에서 목종에게 조서를 내려 토벌하게 하였다. ○ 태조(太祖)에게 명하여 유가성(留可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게 하였다. 태조가 이로 인하여 목종을 모셔 오고서는 통문(統門), 혼준(渾蠢), 야회(耶悔), 성현(星顯) 4로(路) 및 영동(嶺東)의 여러 부(部)로 하여금 이 뒤로는 부장(部長)을 칭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승관(勝管)과 추아(醜阿) 등에게 명하여 을리골령(乙離骨嶺)과 주아문수(注阿門水)의 서쪽에 있는 여러 부의 백성들을 무마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 주외수(主隈水)와 독답수(禿答水)의 백성들이 응로를 막았다. 이에 요나라에서 목종에게 명하여 응로를 막는 자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목종이 겉으로는 응로를 평정한다고 떠들어 대고서 토온수(土溫水)에서 사냥을 하다가 돌아왔다. ○ 경조(景祖) 이래로 양세(兩世) 4주(主)에 이르기까지 지업(志業)이 서로 이어져서 마침내는 각 지방을 나누고서 일체를 본부(本部)의 법령(法令)으로 다스렸다. 이에 동남쪽으로는 을리골령, 갈라, 야라, 토골론에서부터 동북쪽으로는 오국, 주외, 독답에까지 이르렀는바, 금나라는 대개 여기에서 강성해졌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혼준(渾蠢)은 지금의 혼춘하(渾春河) -두만강 북쪽에 있다.- 이다. 을리골령과 토골론은 모두 여진의 동남쪽에 있는바, 이곳은 마땅히 정평부(定平府) 근처의 지역이며, 주아문수 역시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도온(陶溫)은 바로 토온(土溫)으로, 《여지승람》 온성부조(穩城府條)를 보면, 여진이 들어와 살면서 다온평(多溫平)이라 하였다고 하였는바, 도온은 바로 다온(多溫)인 듯하다. 도롱고수는 바로 오롱소수(吾籠所水)의 음이 변한 것으로, 근원이 종성부(鍾城府) 녹야현(鹿野峴)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두만강과 합해지는 물이다. 성현수는 지금의 삼수부(三水府)이다. 《금사》에서는 성현수 흘석렬부라 하고 또 도롱고수 흘석렬부라고 하면서 오국의 응로를 막았다고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흘석렬부는 삼수부와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종성에 있는 도롱고부와 함께 응로를 막았으니, 이른바 오국이라는 것은 삼수나 종성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문종(文宗) 27년(1073) -송나라 신종(神宗) 6년- 에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상주하기를, ‘대지절(大支櫛)부터 소지절(小支櫛)의 요응포(褭應浦) 해변까지의 장성(長城) -바로 도련포(都連浦)의 장성이다.- 이 무릇 700리입니다. 지금 제번(諸蕃)이 줄지어서 귀순하고 있습니다.’ 하였고, 또 동로병마사(東路兵馬使)가 상주하기를, ‘동번(東蕃)의 두룡골이(豆龍骨伊), 여파한(餘波漢) 등의 부락이 주현(州縣)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사는 곳은 멀어서 예전에도 일찍이 조근(朝覲)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모두 귀복(歸服)하였습니다. 만약 봉강(封疆)을 정하고 관방(關防)을 설치할 경우, 여파한의 고개 바깥 지역은 들판이 가없이 펼쳐졌고 번호(蕃戶)들이 줄지어 살고 있어서 변방 끝까지 다 설험(設險)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동번은 바로 동여진(東女眞)을 칭하며, 두룡골이는 바로 도롱고(徒籠古)이다. 도문수(徒門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만강이라고 부르는데, 도(徒)와 두(豆)는 음이 비슷하다. 두룡골이가 사는 곳이 비록 멀다고는 하였으나, 지금 이에 내복(內服)이 되기를 청하였고, 고려에서는 그 지역에 관방을 설치하려고 하였으니, 두만강 남쪽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볼 때 도롱고가 지금의 종성부임이 더욱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금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종(康宗) -송나라 휘종(徽宗) 때이다.- 이 석적환(石適歡)을 파견하여 성현(星顯)과 통문(統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을리골령(乙離骨嶺)에 이르러서 군사를 더 모집한 다음, 활녈수(活涅水)로 나아가 갈라전(曷懶甸)을 순행하면서 배반하여 도망한 7성(城)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 2년(1104)에 고려가 와서 침공하자, 석적환이 벽등수(闢登水)에서 막아 크게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고려의 군사를 추격해서 벽등수로 들어가 그 잔병들을 국경 밖으로 축출하였다. 이에 고려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드디어 사갈(斜葛)로 하여금 국경을 확정하게 하였다. 사갈이 을리골수(乙離骨水)와 갈라전, 활녜수(活禰水)에 이르렀다. 사갈이 송사(訟事)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종이 사갈을 송환하고 석적환을 파견하였다. 석적환이 삼잔수(三潺水)에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지난날에 몰래 고려와 왕래하면서 화란을 일으킨 자들을 즉시 법에 의거해 처단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숙종(肅宗) 9년(1104) -금나라 강종(康宗) 2년- 에 동북면 병마사 임간(林幹)이 동여진(東女眞)과 정주(定州) -지금의 정평부(定平府)이다.- 의 성 밖에서 싸워 패하자, 여진이 정주의 선덕관(宣德關)에 난입해 사람들을 무수히 죽이고 약탈하였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금사》에서 이른 바 벽등(闢登)의 전역(戰役)으로, 벽등수가 정평부에 있음이 분명하다. 을리골수는 바로 을리골령에서 흐르는 물이다. 활녈수는 바로 활녜수이다. 을리골수나 활녈수는 모두 여진과 고려 두 나라의 경계에 있는바, 이것 역시 정평부의 근처 지역에 있는 것이다. 삼잔수는 또 그와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회(天會) 2년(1124) -송나라 휘종 24년- 에 갈라로(曷懶路)의 군사(軍師)가 말하기를, “지난날에는 해마다 고려의 경내에서 해구(海狗), 해동청(海東靑), 아골(鴉鶻) 등을 포획하였는데, 근래에 배 두 척을 타고 그곳에 가자 고려에서 전함(戰艦)을 타고 기다렸다가 쳤습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당시에 고려의 경계는 정평(定平)을 넘어가지 못하였는데, 금나라 사람들이 매번 고려의 경내에서 매[鷹]를 포획하였다. 그런즉 정평 북쪽 바닷가 지역은 모두 예전에 매를 포획하던 지역이었다. 지금 관북 지방의 여러 현에서는 모두 좋은 매가 산출된다.
《문헌통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동청은 오국(五國)의 동쪽에서 산출된다. 거란 사람들이 몹시 좋아하는데, 스스로 잡아 올 수가 없다. 이에 여진의 동북쪽이 오국과 인접해 있으므로, 해마다 거란에서는 반드시 사신을 파견해 오국의 경내로 들어가 둥지를 뒤져서 잡는다. 거란의 임금인 연희(延禧)가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고는 응방자(鷹坊子) 1000명을 파견해 장백산(長白山)을 넘어가 그물로 잡아 왔는데, 해가 갈수록 더 많이 잡아 왔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국고성(五國故城)이 영고탑성 동북쪽에 있다. 《거란국지(契丹國志)》를 보면, “여진의 동북쪽은 오국과 인접해 있고, 오국의 동쪽은 큰 바다와 접해 있는데, 좋은 매가 산출된다. 해동(海東)에서 온 좋은 매를 해동청(海東靑)이라고 부르는데, 요나라 사람들이 이를 몹시 좋아해 해마다 여진에 그것을 보내라고 요구한다. 이에 여진에서는 오국에 가서 전투를 벌인 다음에야 그것을 잡을 수 있어서 몹시 괴롭게 여겼다.” 하였으며, 《대금국지(大金國志)》를 보면, “천회(天會) 8년(1130)에 송나라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두 황제가 한주(韓州)에서 오국성으로 갔다. 오국성은 금나라가 도읍한 곳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보면, “이곳으로부터 동쪽은 나누어져서 5국이 되었으므로 오국성이라고 한 것이다. 예전에 전해 오기를 송나라 휘종을 이곳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하였으며, 《호종록(扈從錄)》을 보면, “영고탑에서 동쪽으로 600리를 가면 강돌리갈상(姜突里噶尙)이라는 곳이 있는데,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이 이곳에서 합류한다. 큰 토성(土城)이 있는데, 혹 오국성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우리나라의 회령(會寧) 등지가 바로 옛 오국성이다. 《거란국지》에서 여진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단지 금나라가 도읍한 곳이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인 줄만 알고서 마침내는 오국성이 상경(上京)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나 600리 되는 곳으로,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등지에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실은 거란이 매를 보내기를 요구하였을 때는 금나라의 경조(景祖)와 목종(穆宗)이 바야흐로 갈라전(曷懶甸)에 있으면서 오국(五國)의 포섭부(蒲聶部), 몰연부(沒撚部) 등과 고전(苦戰)하면서 응로(鷹路)를 열 때였다. 갈라전은 지금의 함흥 등지인즉, 오국성은 마땅히 갈라전의 동북쪽에 있어야 하는바, 상경의 동북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상경은 지금의 영고탑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회령부는 바로 함흥의 동북쪽에 있다. 그리고 회령부의 보을하진(甫乙下鎭) 서쪽에 대총(大塚)이 있는데, 예로부터 이곳을 황제총(皇帝塚)이라고 칭하며, 여러 개의 소총(小塚)이 대총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를 시신총(侍臣塚)이라고 부른다. 지금 밭을 가는 자들이 가끔씩 숭녕전(崇寧錢)을 발견하고 있는바, 이곳이 어찌 휘종을 장사 지낸 곳이 아니겠는가. 또 《철경록(輟耕錄)》을 보면, 양련진하(楊璉眞瑕)가 송나라의 능침(陵寢)을 발굴한 일에 대해 말하면서, 송나라 주밀(周密)이 지은 《계신잡지(癸辛雜識)》를 인용하여 말하기를, “휘종과 흠종을 오국성에 장사 지냈으므로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금나라 사람들에게 간청해 재궁(梓宮)을 송나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였다. 이에 6, 7년 동안 간청한 뒤에야 허락받아서 회계(會稽)의 영릉(永陵)과 우릉(祐陵)에 장사 지냈다. 이때에 이르러 파헤쳐지게 되었는데, 휘릉에는 썩은 나무 한 토막만 있었고, 흠릉에는 나무로 된 등잔걸이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두 황제의 유해(遺骸)는 사막 지방에서 흩어져 애당초 송나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이상은 《독례통고(讀禮通考)》에 나왔다.- 그렇다면 휘종과 흠종의 능은 모두 우리나라의 회령에 있는 것인바, 회령이 오국성임은 분명하다.
또 살펴보건대, 매가 함흥 북쪽 지역에서 산출되므로 요나라의 매를 포획하는 자들이 매번 요동에서 백두산을 넘어 온다. 《문헌통고》에서 이른 바 “장백산을 넘어가서 그물로 잡는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금사》 세기를 근거로 해서 보면, 당시에 응로(鷹路)를 막은 자는 분명히 삼수, 종성 등지의 사람들이다. 오국이 만약 영고탑의 동북쪽에 있다면, 요나라 사신은 백두산을 넘을 수가 없으며, 삼수 등의 사람들이 길을 막을 수가 없다. 오국성이 지금의 회령부임은 다시 무엇을 더 의심하겠는가.
○ 지금 우리나라의 회령 북쪽 금나라 호리개로(胡里改路)의 남쪽 경계였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호리개로는 국초(國初)에 만호(萬戶)를 두었다. 해릉(海陵)이 만호를 폐하고 이어 고쳐서 절도사(節度使)를 두었다. 승안(承安) 3년(1198)에 절도부사(節度副使)를 두었다. 서쪽으로 상경까지 630리이고, 북쪽으로는 변방 경계인 합리빈특(合里賓忒) 천호(千戶)까지 1500리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폐호리개로(廢胡里改路)는 영고탑성의 동쪽에 있다. 금나라 때에는 절도부사를 두었으며, 원나라 때에는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두었다.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상도(上都)에서의 거리가 4200리이고, 대도(大都)에서의 거리가 3800리이다. 또 도온로(都溫路)가 있는데, 상도에서의 거리가 4000리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호리개로는 금나라의 상경에서 동쪽으로 630리 되는 곳에 있고, 휼품로는 동북쪽으로 110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금의 영고탑 동쪽 지역이 바로 그 지역이며, 남쪽 경계는 우리나라의 회령 등지에 미친다. 《대금국지》를 보면, “천회 8년(1130)에 송나라의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한주(韓州)에서 오국성으로 갔다.” 하였고, 《금사》 본기를 보면, “태종(太宗) 천회 8년 7월에 혼덕공(昏德公)과 중혼후(重昏侯)를 골리개로(鶻里改路)로 옮겼다.” 하였으며, “희종(煕宗)이 즉위한 4월 병인에 혼덕공 조길(趙佶)이 졸하였다.” 하였다. 이것으로 참고해 보면, 오국성은 골리개로에 있었으며, 골리개는 바로 호리개의 음이 바뀐 것이다. 휘종이 옮겨지고 졸하고 장사 지낸 곳이 모두 이곳에 있다. 그런즉 우리나라의 회령이 호리개로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대개 회령 등지는 초기에는 오국(五國)의 여러 부였다가 금나라가 여러 부를 멸하고 호리개로에 예속시킨 것이다.
○ 고려 예종(睿宗) 2년(1107)에 금나라의 갈라전(曷懶甸) -바로 합라로(合懶路)이다.- 을 공격해 빼앗고는 함주(咸州), 길주(吉州) 등 9성(城)을 수축하였는데, 지금의 함흥 북쪽에 있는 단천(端川), 길주(吉州) 등지이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강종(康宗) 4년(1106) -고려 예종 1년- 에 고려에서 갈라전에 군사를 출동시켜 9성을 쌓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요나라 사람들이 장차 우리를 탓하여 공격해 올까 염려됩니다.’ 하였는데, 태조(太祖)만이 혼자 아뢰기를, ‘만약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어찌 갈라전 지역만 잃겠습니까. 여러 부(部)를 모두 우리가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강종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알새(斡賽)로 하여금 군병을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고려의 군사를 대파하였다.” 하였다. ○ 열전(列傳)에 이르기를, “알로(斡魯)가 알새를 대신해서 그 군사를 거느렸다. 알로 역시 고려의 9성에 대치해서 9개의 성을 쌓아 고려와 버티면서 나가서는 싸우고 들어와서는 지켰다.” 하였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예종 2년(1107)에 평장사(平章事)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삼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삼았다. 이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격파하여 내쫓고는 9성을 쌓은 다음 공험진의 선춘령(先春嶺)에 비(碑)를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 하였다. ○ 살펴보건대, 구사(舊史)를 보면, 9성의 지역은 오래도록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예종 2년에 윤관과 오연총에게 명하여 여진을 쳐서 내쫓고 군사를 나누어 땅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 이에 동쪽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궁한령(弓漢嶺)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렀는바, 이것을 우리 강역으로 삼았다. 그러고는 몽라골령 아래에 영주(英州)를 수축하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웅주(雄州)를 수축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복주(福州)를 수축하고, 궁한촌(弓漢村)에 길주(吉州)를 수축하였다. 3년 2월에 함주(咸州) 및 공험진(公嶮鎭)에 성을 쌓고, 3월에 의주(宜州),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 세 성을 수축하였다. 이에 여진이 그들의 소굴을 잃고는 해마다 침입해 왔다. 국가에서는 갖가지로 군사를 징발한 탓에 중외(中外)가 소요하였다. 4년(1109)에 여진이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에 비로소 길주에서부터 시작하여 9성의 전구(戰具)를 내지(內地)로 실어 들이고, 마침내 숭녕진(崇寧鎭)과 통태진, 진양진(眞陽鎭) 및 영주, 복주(復州)를 철수하였으며, 또 함주와 웅주 및 선화진(宣化鎭)의 성을 철수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상을 가지고 상고해 보건대,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의주 여섯 주와 공험진, 통태진, 평융진 세 진이 9성의 수에 들어간다. 성을 철수하고 여진에게 돌려줄 적에는 의주 및 공험진, 평융진이 없고,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 세 진이 더 나오는바, 이것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의주의 지역은 정주(定州) 남쪽에 있는바, 반드시 여진을 쳐서 쫓아낸 뒤에 설치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찌 마침 이때에 이르러서 성보(城堡)를 처음 수축하였으므로 아울러 9성으로 칭하였으면서도 철수한 숫자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 윤관열전(尹瓘列傳)에 이르기를, “병마검할(兵馬鈐轄) 임언(林彦)이 지은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정병(精兵) 30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을 토벌하여 6000여 급(級)을 참수하자, 궁시(弓矢)를 싣고서 진(陣) 앞에 와서 항복한 자가 5000여 구(口)였다. 그 지역이 사방 300리로,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개마산(蓋馬山)을 끼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 정주(定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두 주를 합하여 정평부가 되었다.- 와 접하였다. 이곳은 본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는바, 옛 비석의 유적(遺跡)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에 새로 6개 성을 설치하고는 첫 번째를 진동군 함주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 두 번째를 안령군 영주 방어사(安嶺軍英州防禦使), 세 번째를 영해군 웅주 방어사(寧海軍雄州防禦使), 네 번째를 길주 방어사(吉州防禦使), 다섯 번째를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 여섯 번째를 공험진 방어사(公嶮鎭防禦使)라고 하였다.’ 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리지를 보면, 임언이 기문을 지은 것이 예종 3년 2월이었으므로 3월에 수축한 의주(宜州) 등 세 성은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처음 설치하였을 때의 9성은 함주 -지금의 함흥부이다-, 영주 -지리지에 이르기를, “길주(吉州)에 병합되었다.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웅주 -지리지에 이르기를, “길주에 병합되었다.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길주 -지금도 그대로이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길주는 북쪽에 있고, 웅주는 남쪽에 있다.” 하였다-, 복주 -지금의 단천부(端川府)이다-, 공험진 -지리지에 이르기를, “일설에는 공주(孔州)에 있다고 하며, 일설에는 광주(匡州)에 있다고 하며, 일설에는 선춘령(先春嶺) 동남쪽, 백두산 동북쪽에 있다고 하며, 일설에는 소하(蘇河) 강변(江邊)에 있다고 한다. 공주와 광주는 모두 지금의 경원부(慶源府)이다.” 하였다-, 의주 -지금의 덕원군(德源郡)이다-, 통태진 -유형원(柳馨遠)이 이르기를, “마땅히 길주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평융진이다. 여진에게 돌려주었을 때의 9성은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통태진,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9성을 처음 설치하였을 때와 여진에게 돌려주었을 때는 그 명호(名號)가 같지 않으며, 게다가 공험진은 애당초 분명하게 어디라고 가리켜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지금 억지로 해석할 수는 없다. 오직 임언이 지은 기문이 믿을 만한 것인데, 거기에서 이미 “여러 성은 사방 300리에 불과하다.” 하였다. 그런즉 공험진의 위치 역시 함흥 북쪽 300리 안쪽 지역이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고려사》 오연총열전(吳延寵列傳)을 보면, “여진이 다시 길주성을 포위하여 거의 함락당할 뻔하자 왕이 다시 오연총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하였는데, 가다가 공험진에 이르렀을 적에 적들이 길을 막고 습격하는 바람에 우리 군사가 대패해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하였다. 여기에서 더욱더 공험진이 길주 남쪽에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지금의 경원(慶源) 등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임언이 지은 기문을 보면, “첫 번째를 함주, 두 번째를 영주라고 하였다.” 하였으며, 또 지리지를 보면, “서쪽으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이르러서 영주를 수축하였다.” 하였으며, 예종세가(睿宗世家)를 보면, “3년 8월에 병마판관(兵馬判官) 척준경(拓俊京)이 여진과 더불어서 함주와 영주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설을 가지고 참고해 볼 때, 영주는 함주 접경 지역에 있었으며 여러 성 중에서 가장 서쪽에 있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영주는 뒤에 길주에 병합되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9성의 북쪽 경계는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고려사》를 보면,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 도당(都堂)에서 원나라의 행성(行省)에 올린 글에 이르기를, “쌍성(雙城)과 삼살(三撒) -지금의 북청부(北靑府)이다.- 은 본디 우리나라의 영토로, 북쪽으로는 이판(伊板)까지를 경계로 삼는다.”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 상세하게 나온다.- 이판은 바로 길주의 마천령(磨天嶺)이다. 이보다 앞서서는 북쪽 경계가 일찍이 마천령까지 이르지 않았다. 그런즉 여기에서 말한 바는 생각건대 바로 9성의 옛 경계인 것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사》를 보면, “알로(斡魯)가 합라전(合懶甸) 지역에 9성을 수축하여 고려와 대치하면서 나가서는 싸우고 들어와서는 지켰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봉황성(鳳凰城) 변경 밖에 구련성(九連城)이 있어서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대청일통지》 역시 이 설을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련성은 지금의 압록강 서쪽에 있어서 합라전의 9성과는 동쪽과 서쪽으로 현격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바, 《성경통지》의 설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 《금사》에서 이른 바 타길성(駝吉城)과 아로성(亞魯城) 등도 9성의 칭호이다.
《금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에서 갈라전(曷懶甸)에 9성을 수축하자 알새(斡賽)가 이를 막으면서 아도한(阿徒罕)을 선봉으로 삼았다. 고려의 군사 가운데 해도(海島)에 주둔해 있는 자들이 있었는데, 아도한이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 영책(營柵)과 전함(戰艦)을 불태우고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마침내 타길성을 함락시켰으며, 얼마 뒤에는 나머지 여덟 성을 모두 함락시켰다. ○ 출로(朮魯)가 정왕(鄭王) 알새를 따라 갈라전에서 고려를 정벌하여 아로성을 빼앗았다. ○ 골모파(鶻謀琶)가 고려를 정벌하는 데 따라가서 갈라전을 격파하였는데, 타로성(陀魯城)을 함락할 때 공을 세웠다. ○ 고려가 갈라전에 9성을 수축하자, 혼탄(渾坦)이 이를 공격하면서 목리전(木里甸)에서 고려 군사를 만나 오래도록 힘을 다해 싸운 끝에 적이 마침내 무너졌다. 혼탄이 석적환(石適歡)과 더불어 도문수(徒門水)에서 군사를 합하였다. 아리(阿里)가 먼저 적병을 쳐부수고 두 성을 빼앗았다. 고려 군사들이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요해처를 차지하고 있어서 진격하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아리가 이들을 추격한 끝에 갈라수(曷懶水) 가에 이르러 고려의 군사를 거의 대부분 죽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타길성은, 《금사》에 의거하면 분명히 9성 가운데 하나이다. 길주를 옛날에는 길성(吉城)이라고 칭하였는바, 이곳이 바로 타길성이다. 타로(陀魯)는 바로 아로(亞魯)의 음이 변한 것이며, 이 역시 9성 가운데 한 성의 이름인데, 이는 금나라의 국어(國語)가 같지 않은 탓에 칭호가 다르게 표기된 것이다. 목리전(木里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 수가 없으나, 《고려사》에 의거해 보면, 9성의 전역(戰役)에서는 매번 여진과 더불어 함주와 길주 사이에서 싸웠다. 그런즉 목리전의 위치가 함주나 길주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몇 년 뒤에 9성의 지역을 금나라 사람들에게 돌려주고는 다시 도련포(都連浦)의 장성(長城)을 경계로 삼았다.
《금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7월에 고려에서 강화를 요청하면서 9성의 둔수(屯守)를 파하고 침략한 옛 땅도 되돌려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마침내 고려와 강화하였다.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종(睿宗) 4년(1109) 6월에 여진의 사신 요불(褭弗)과 사현(史顯) 등이 조회와서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께서 일찍이 ‘우리 조종들께서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들에 이르러서는 의리상 대방에 귀의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태사로 있는 오아속(烏雅束)께서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조공(朝貢)을 끊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지난해에는 크게 군사를 출동시켜서 9성을 설치해, 떠돌아다니면서 살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태사께서 저희들을 보내어 옛 땅을 돌려 달라고 청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9성을 돌려주도록 허락하여서 우리들로 하여금 생업에 안정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우리들은 하늘에 맹세하고는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감히 기와 조각 하나 변경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원수(元帥) 등에게 조서를 내려서 9성을 돌려주라고 유시하였다. 7월 신유에 여진의 추장이 함주(咸州)의 성문 밖에 단(壇)을 설치하고는 하늘에 맹세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자손 대대로 악심(惡心)을 품지 않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길 경우에는 번토(蕃土)가 멸망할 것입니다.” 하며 맹세를 마치고는 물러갔다. 이에 비로소 길주(吉州)에서부터 시작하여 차례대로 9성의 전구(戰具), 물자와 군량을 내지(內地)로 실어 들였다. 임술에 숭녕진(崇寧鎭)과 통태진을 철수하였으며, 갑자에 영주(英州)와 복주(福州), 진양성(眞陽城)을 철수하였으며, 을축에 함주(咸州)와 웅주(雄州) 및 선화진(宣化鎭)의 성을 철수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길주에서 철수하기 시작해서 차차 함주, 웅주에 이르렀다는 것에서 먼 곳부터 시작해서 차차로 내지(內地)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9성의 지역은 북쪽으로 길주까지라는 것을 더욱더 징험할 수 있다.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天輔) 3년(1119) -고려 예종 14년- 11월에 갈라전의 장성(長城)을 고려에서 3척을 높여서 증축하였다. -《금사》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변경의 관리가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막자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옛 성을 보수하는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장성은 바로 유소(柳韶)가 쌓은 장성이다. 이미 9성을 되돌려 주고서 다시 도련포를 경계로 삼았으므로 옛 성을 증축한 것이다. 그리고 《금사》에 의거해 보면, “대정(大定) 15년(1175)에 의주(義州) -지금의 의주이다.- 는 길이 막혀 통하지가 않으니 정주(定州) -지금의 정평부(定平府)이다.- 를 경유해 갈라로(曷懶路)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고려에서 상주(上奏)하자, 조서를 내려 허락하였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정평부의 북쪽이 금나라의 갈라로임이 더욱더 분명하다.
○ 그 뒤에 금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흥하여서는 도련포 북쪽 지역은 모두 원나라의 차지가 되어 원나라에서 함흥에 합란부(合蘭府)를 설치하였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나라 말기에 금나라의 장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에 웅거해 있었다. 원나라 초기인 계사년(1233) -고려 고종 20년- 에 군사를 출동시켜 정벌해 포선만노를 사로잡았다. 군사가 개원(開元), 휼품(恤品)에 도달하여서 동쪽 지역이 다 평정되었다. ○ 합란부(合蘭府),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의 지역은 토지가 광활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살았다. 원나라 초기에 5개의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하여 북쪽 변경을 진무하였는데, 하나는 도온(桃溫)으로 상도(上都)에서의 거리가 4000리이고, 하나는 호리개(胡里改)로 상도에서의 거리가 4200리, 대도(大都)에서의 거리가 3800리이고, -호리개강(胡里改江)과 혼동강(混同江)이 있으며, 또 합란하(合蘭河)가 있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나는 알타련(斡朶憐)이고, 하나는 탈알련(脫斡憐)이고, 하나는 발고강(孛苦江)으로, 각각 유사(有司)가 있어서 혼동강 남북 지역을 나누어 거느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휼품로는 지금 우리나라의 삼수, 갑산 등지이다. 합란부는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함주(咸州)를 원나라 때 합란부(哈蘭府)라고 칭하였다.” 하였으며,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합란부의 옛 치소가 지금의 함흥부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합란(哈蘭)은 바로 합란(合蘭)이며, 합란(合蘭)이란 것은 금나라 때의 합라(合懶)이다. 도온(桃溫)은 바로 《금사》에서 칭한 도온(陶溫)이다. 호리개 역시 금나라 때의 호리개로이다. 호리개강은 지금의 오소리강(烏蘇哩江)이다. -두만강의 북쪽에 있다.- 수달달로는 지금의 영고탑 등지이다. 원나라 초기에는 개원로(開元路)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에서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을 거쳐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기까지 모두 휼품로의 옛 지역이었다. 인하여 남쪽으로 내려와서는 함흥에 합란부를 설치하였으며, 또 도온만호부(桃溫萬戶府), 호리개만호부(胡里改萬戶府) 등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우리나라 육진(六鎭) 등이 바로 그 지역이다.
○ 그 뒤 수십 년 동안 영흥부(永興府) 북쪽 지역은 또 원나라에 함락당하였으며, 원나라에서는 영흥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였다.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8년(1258) -고려 고종 45년- 에 차라대(車羅大)를 파견하여 고려를 책하였다. 차라대가 여사(廬舍)를 불지르고 백성들을 마구 죽이면서 약탈하였다. 이에 고려 사람 휘(暉) -삼가 살펴보건대, 휘(暉)는 바로 조휘(趙暉)이다.- 등이 마침내 화주(和州) 북쪽 땅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고려사》 세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종 45년(1258)에 몽고의 산길대왕(散吉大王) 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옛 화주(和州) 지역에 와서 주둔하였다. 용진(龍津) 사람 조휘(趙暉)와 정주(定州) 사람 탁청(卓靑)이 화주 북쪽 지역을 들어 몽고에 항복하자, 몽고에서는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으로, 탁청을 천호로 삼았다.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29년(1292)에 고려와 여진의 계수관(界首官)인 쌍성(雙城)에 기근이 들었다. 고려 왕에게 칙령을 내려 해운(海運)한 곡식 가운데서 덜어 내어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화주는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영흥의 서쪽은 바로 강계부(江界府) 등지인데, 이 당시에는 오히려 서여진(西女眞)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쌍성을 고려와 여진의 계수관이라고 칭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를 보면, “쌍성폐현(雙城廢縣)이 철령현(鐵嶺縣) 서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쌍주(雙州) 보안군(保安軍)은 구리승왕(漚里僧王)이 남쪽으로 정벌하여 진주(鎭州)와 정주(定州)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서 주(州)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쌍성현(雙城縣)이다.’ 하였다. 《전요지(全遼志)》에는 이르기를, ‘쌍성현은 철령성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하였다. 대개 쌍성은 본디 요나라 때 요동현(遼東縣)의 이름인데, 원나라에서 화주에 모칭(冒稱)한 것이다.
○ 원나라 말기에 고려가 쌍성을 공격해 격파하고서 도련포(都連浦) 남쪽 지역을 수복하였으며, 또 도련포 북쪽 지역을 빼앗아 함주(咸州), 길주(吉州) 등을 설치하였다. 이에 합라로(合懶路)의 옛 지역이 비로소 우리나라의 판도 안으로 들어왔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공민왕 5년(1356) -원나라 순제(順帝) 16년- 에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유인우(柳仁雨)를 파견하여 쌍성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이에 지도(地圖)를 상고하여 화주(和州), 등주(登州), 정주(定州), 장주(長州), 예주(預州), 고주(高州), 문주(文州), 의주(宜州) 및 선덕진(宣德鎭), 원흥진(元興鎭), 영인진(寧仁鎭), 요덕진(耀德鎭), 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을 수복하였다. 이보다 앞서 삭방도(朔方道)에서 도련포를 경계로 삼아 장성(長城)을 수축하였는데, 원나라에게 함락당하였다가 99년 만인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수복한 것이다.” 하였다. ○ 함주(咸州)는 원나라에서 합란부(哈蘭府)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옛 강역을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 길주(吉州)는 원나라에서 해양(海洋)이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수복하였다. 복주(福州)는 원나라에서 독로올(禿魯兀)이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때 수복하였다. -지금의 단천(端川)이다.- 북청주(北靑州)는 원나라 때 삼살(三撒)이라고 칭하였다. 공민왕 5년에 수복하였다. ○ 세가(世家)에 이르기를, “공민왕 6년(1357)에 도당(都堂)에서 원나라의 행성(行省)에 올린 글에 이르기를, ‘살펴보건대, 쌍성(雙城)과 삼살(三撒) 등지는 본디 우리나라의 땅으로, 북쪽으로 이판령(伊板嶺)까지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관방(關防)을 잘못함으로 인하여 여진 사람들이 토지와 인민을 취득해서는 멋대로 채금호계(採金戶計)라고 하였습니다. 화주의 이름을 쌍성이라고 고침에 미쳐서는 총관부(摠管府)와 천호소(千戶所)를 설치하였습니다. 근래에는 본국에서 죄를 짓고 도망친 무리들이 국경을 넘어 그곳으로 가서 숨어 있습니다. 만약 이판령의 좁은 길목에 관방을 설치하여 출입을 제한한다면 거의 후환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유인우(柳仁雨)가 수복한 8주와 5진은 모두 도련포 남쪽 지역에 있는바, 본디 고려조 경내 지역이다. 도련포 북쪽은 바로 윤관(尹瓘)이 개척한 9성의 지역인데, 곧바로 금나라 사람들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 뒤로는 금나라와 원나라에 함락되었으며, 240여 년이 지난 뒤인 이때에 이르러서 수복하여 다시 이판령으로 경계를 삼은 것이다. 이판령은 지금의 마천령(磨天嶺)으로, 이곳이 바로 9성의 옛 경계였다.
○ 대명(大明) 홍무(洪武) 연간에 명나라에서 안변(安邊)의 철령(鐵嶺) 북쪽 지역을 떼어 달라고 하여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고려에서 주청하여 중지되었다.
《명사(明史)》 조선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무 20년(1387) -고려 신우(辛禑) 13년- 7월에 고려에서 주달하기를, “요동(遼東)의 문주(文州), 고주(高州), 화주(和州), 정주(定州) 등은 모두 우리나라의 옛 영토이니, 철령(鐵嶺)에 나아가 둔수(屯守)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예부(禮部)가 아뢰기를, “이들 몇 주는 모두 원나라의 판도(版圖) 안으로 들어와서 요동에 속하였으며,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습니다. 지금 철령에 이미 위(衛)를 설치하였으니, 다시 진정(陳情)하여 청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호부(戶部)에 명하여 고려 왕에게 자문(咨文)을 보내게 하였는데, 그 자문에, “철령의 북쪽, 동쪽, 서쪽의 지역으로 예전에 개원로(開元路)에 소속되었던 곳은 요동에서 관할하고, 철령 남쪽의 예전에 고려에 소속되었던 곳은 고려에서 관할하라. 그리하여 각자 경계를 확실히 정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1년(1388) 4월에 신우가 표문을 올려서 아뢰기를, “철령의 땅은 실제로는 대대로 고려에서 지켜왔으니, 예전대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런데 지금 와서 철령이 경계였다고 꾸며 대는바, 이는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짐이 말한 대로 효유하여 고려로 하여금 흔단을 일으키지 않게 하라.” 하였다.
《고려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우 14년(1388)에 설장수(偰長壽)가 경사(京師)에서 돌아와 구선(口宣)한 성지(聖旨)에 이르기를, “철령 북쪽은 본디 원(元)나라에 속한 지역이니 모두 요동에 속하게 하라.” 하였다.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고 하자, 신우가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의중(朴宜中)을 경사에 보내어 표문을 올려 청하기를, “철령 북쪽의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嶮鎭)에 이르기까지는 본디 본국의 땅이었습니다. 원나라 초기에 몽고(蒙古)의 산길대왕(散吉大王) 보지관인(普只官人) 등이 여진(女眞)을 거두어들일 적에 본국의 정주(定州) 반민(叛民) 탁청(卓靑)과 용진현(龍津縣) 사람 조휘(趙暉)가 화주(和州) 북쪽 땅을 들어 원나라에 항복하였는데, 이들이 금조(金朝)의 요동(遼東) 함주로(咸州路) 부근에 있는 심주(瀋州)에 쌍성현(雙城縣)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국의 함주 근처의 화주에 옛적에 쌓은 작은 성 두 개가 있음을 인하여 애매하게 주청하면서 마침내 화주를 쌍성이라고 모칭(冒稱)하였습니다. 그 뒤 지정(至正) 16년(1356)에 이르러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화주 북쪽 지역을 본국으로 환속시켰습니다. 지금 성지를 흠봉(欽奉)하건대, ‘철령 북쪽, 동쪽, 서쪽 지역은 본디 개원로(開元路)에 속하는 곳이니 소관(所管) 군민(軍民)도 그대로 요동에 속하게 하라. 이를 공경히 시행하라.’ 하였습니다. 철령(鐵嶺)의 산은 왕경(王京)과의 거리가 겨우 300리 밖에 안 되며, 공험진으로 변방의 경계를 정한 지는 한두 해가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들 몇 개의 주 지역을 그대로 하국(下國)의 강토로 삼게 해 주소서.” 하였다. 서북면 도안무사(西北面都按撫使)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지휘(指揮) 2인을 보내어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江界)에 와서 장차 철령위를 세우려 합니다. 그런데 황제가 미리 철령위를 설치하였으므로 진무(鎭撫) 등의 관원들이 모두 요동에 이르렀으며, 요동으로부터 철령에 이르기까지 70참(站)을 설치하고서 참마다 백호(百戶)를 두었습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주는 지금의 문천군(文川郡)이고, 고주는 지금의 고원군(高原郡)이다. -화주, 정주, 함주는 앞에 나온다.- 철령은 안변부(安邊府)에서 남쪽으로 83리 되는 곳에 있다. 명나라 초기에 압록강 서쪽의 봉황성(鳳凰城) 근처 지역에 철령위를 두고서 지금의 평안도 강계(江界)와 폐사군(廢四郡) 동쪽에서 철령 북쪽에 이르는 지역을 떼어서 경계로 삼았다. 그러므로 요동에서부터 철령에 이르는 지역에 70개의 참(站)을 늘어세우고서 요동의 지휘(指揮)가 먼저 강계부(江界府)에 이른 것이다. 대개 요동에 함주, 쌍성, 철령이란 호칭이 있으며, 우리나라 함경남도에도 역시 함주, 쌍성, 철령이란 호칭이 있어서 여지(輿地)를 상고하는 자가 쉽사리 의혹하게 된다. 고려에서 상주하여 밝혀 정지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천부(奉天府) 철령현(鐵嶺縣)은 금나라와 원나라 때에는 함평부(咸平府)였고, 명나라 때에는 철령위로 고쳤다. 옛날에는 철령성이 철령위의 치소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어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홍무 21년(1388)에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가 그 뒤 26년(1393)에 이곳으로 옮겨 오고서는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철령현이다.- 그대로 철령위라고 이름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봉천부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을 헤아려 보면 봉황성 근방에 이른다. 홍무 21년에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서 고려의 북계(北界) 지역을 떼어 여기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그 뒤에 끝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6년에 이르러서는 봉천부(奉天府)의 북쪽으로 철령위의 치소를 옮겼는데, 지금의 철령현이 바로 그곳이다.
○ 고려 말기에 비로소 지금의 갑산, 삼수 등지를 수복하였는데, 이곳은 바로 휼품로(恤品路)의 옛 지역이다. 지금의 마천령(磨天嶺) 북쪽의 육진(六鎭) 등지는 오히려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갑주(甲州)는 본디 허천부(虛川府)인데, 오랫동안 여진이 차지하고 있어서 여러 차례 병화를 겪은 탓에 사는 사람이 없었다. 공양왕 3년(1391)에 비로소 갑주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지금은 갑산부(甲山府)와 삼수부(三水府)로 되었다.- ○ 세가에 이르기를, “공양왕 4년(1392) 3월 경자에 알도리(斡都里) 올량합(兀良哈)의 여러 추장(酋長)에게 모두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또 방문(牓文)을 보내어 여러 부락에 유시(諭示)하기를, ‘홍무 24년(1391) 7월에 이필(李必) 등을 차임하여 방문을 싸 가지고 여진의 지역인 두만(豆萬) 등지로 가서 불러 유시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해에 알도리 올량합의 만호ㆍ천호ㆍ두목(頭目) 등이 즉시 귀부하였으므로 상을 내리고 명호(名號)를 나누어서 그들 모두 각자가 생업에 복귀하도록 하였다. 그곳에 있는 속빈(速頻), 실적멱(失的覓), 몽골(蒙骨), 개양(改陽), 실련(實憐), 팔린(八隣), 안돈(安頓), 압란(押蘭), 희날올(喜刺兀), 올리인(兀里因), 고리한(古里罕), 노별(魯別), 올적개(兀的改) 등의 지역은 본디 우리나라 공험진(公嶮鎭)의 경내에 속하므로 일찍이 불러서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치에 있어서 맞지 않으므로 다시금 이필 등을 보내어 방문을 가지고 가서 불러 유시하게 하니, 방문이 도착하는 날에 각자 와서 귀부하면 상을 주고 명호를 나누는 것은 일체 앞서 귀부한 알도리 올량합의 예에 의하여 할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알도리(斡都里)는 알타리(斡朶里)라고도 한다. 《문헌비고》에, “회령부는 본디 여진 알타리부락의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가 차지해 살던 곳이다.”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두만(豆萬)은 도문수(徒門水)이다. 속빈(速頻)은 휼품(恤品)이다. 압란(押蘭)은 합라(合懶)이다. -또한 압라(押懶)라고도 한다.- 올적개(兀的改)는 호리개(胡里改)이다. 이들은 모두 《금사》에 나오는데, 지금의 단천(端川), 길주(吉州) 북쪽의 육진 지역이 그곳이다. 이 당시에는 육진 지역을 모두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합라와 휼품 지역은 고려가 비록 수복하기는 하였으나, 예전의 여진 부락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귀부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지역도 역시 방문에 아울러서 칭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철령 북쪽을 일러 북관(北關)이라고 하는데, 옛날의 옥저(沃沮) 지역이다. 한(漢)나라 무제(武帝) 초기에 이곳에 현도군(玄菟郡)을 두었다가, 그 뒤에 구려현(句驪縣) -지금의 흥경(興京)이다.- 으로 옮겼다. 위(魏)나라 때에는 현도 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가 고구려 왕을 추격하여 남옥저(南沃沮)를 지나 1000여 리를 가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나라와 위나라 때 우리나라 북관 지역과 통하면서는 모두 요동으로부터 흥경(興京) 지방을 지나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넌 다음 황초령(黃草嶺)을 넘어서 왕래하였던 것이다. 이 뒤로는 일찍이 중국에서 이 지역을 엿본 적이 없었다. 발해의 대씨(大氏)가 망하자 함흥 북쪽 및 평안도 북계 지역이 모두 여진의 차지가 되어 동여진(東女眞), 서여진(西女眞)의 칭호가 생겼다. 동여진이 갈라전(曷懶甸) -바로 함흥(咸興)이다.- 에서 일어나 드디어 서여진 -지금의 평안도 북계에 있었다.- 을 병합하였는바, 《금사》에서 “수국(收國) 1년(1115, 예종10)에 보주(保州) -바로 의주(義州)이다.- 의 제부(諸部) 여진이 모두 항복하였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에 서쪽으로 압록강을 건너가 요주(遼州), 심주(瀋州) 지역을 차지하였다. 원나라 때에는 국토를 확장하길 좋아하여 개원(開元) -지금의 개원현(開原縣)이다.- 에서부터 휼품(恤品) -지금의 삼수부 등지이다.- 까지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와서는 함흥에 합란부(合蘭府)를 설치하였다. 명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는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기로 의논하여 역시 요동에서부터 역참(驛站)을 죽 연결시켰는데, 길은 강계(江界)를 경유하였다. 대개 두만강 북쪽의 영고탑(寧古塔) 등지는 예로부터 읍루(挹婁), 말갈(靺鞨), 여진(女眞)의 구역으로, 중국에서 경략(經略)하면서는 일찍이 이 지역까지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북관(北關)으로 통하는 길은 반드시 압록강을 경유하는 것이 편하고 빨랐던 것인바, 지금 북관의 관방(關防)에 유의하는 자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려의 북쪽 경계는 끝내 마천령을 넘어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리 조선이 북방에서 일어나서는 야인(野人)을 정벌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하고서야 비로소 두만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 당시에 명나라는 천하를 막 안정시킨 때라서 달단(韃靼)에 대해서만 걱정하였고, 동북쪽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건주위(建州衛), 모련위(毛憐衛) 등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한갓 견제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역시 일찍이 쌍성(雙城) 지역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는 마침내 이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았다. 이러한 연고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군사를 출동시켜 북쪽을 정벌하면서 날마다 조금씩 넓혀 성읍(城邑)을 세웠는바, 이 역시 천하의 큰 기회였던 것이다. 육진의 지역은 동북쪽으로 뚫고 들어가 있는바, 백두산이 서남방에 위치해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고탑까지 600리에 불과하다. 그런즉 갈라전(曷懶甸)을 지나서 호리개(胡里改)까지 이르고, 옥저를 지나서 읍루의 지역까지 이른 것인바, 봉역(封域)의 크기가 전 시대보다 훨씬 넓어지게 되었으니, 참으로 아름답고도 성대하도다.

서북계(西北界)의 연혁(沿革)


서북계는 지금의 평안도 지역이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을 설치하였으며, 뒤에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으며, 곧바로 발해의 대씨(大氏)에게 함락되어 압록부(鴨綠府)에 속해졌다. 대씨가 쇠약해져서는 궁예(弓裔)가 비로소 패서(浿西) 지역 13진(鎭)을 취하였다. 고려가 흥함에 미쳐서는 궁예의 옛 영토임을 인하여 안북부(安北府)로 경계를 삼았으며, 청천강(淸川江) 북쪽 지역은 여진이 차지하였다가 그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 고려 초기에 서북쪽은 지금의 안주(安州) 청천강을 경계로 삼았으며, 청천강 바깥쪽 지역은 여진의 땅이었다.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의 평안도와 함경도는 고구려가 망한 뒤부터는 발해와 여진의 차지였고, 궁예가 차지한 것은 패서 지역의 12진뿐이었다. 서희(徐煕)가 말하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에서 우리나라 안북부(安北府)까지는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였었는데, 광종(光宗)이 이곳을 취하여 가주(嘉州)의 송성(松城)을 쌓았다.” 하였다. 서희는 바로 성종(成宗) 때의 사람인바, 이는 그가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일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북부(安北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 정종(定宗) 때부터 청천강 북쪽 지역을 조금씩 취하여 광종 때에는 서북쪽으로 운산(雲山), 태천(泰川) 등지까지 이르렀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병지(兵志)에 이르기를, “정종 2년(947)에 덕창진(德昌鎭) -지금의 박천(博川)이다.- 에 성을 쌓고, 덕성진(德成鎭) -지금의 영변(寧邊)이다.- 에 성을 쌓았다. 광종 1년(950)에 위화진(威化鎭) -지금의 운산(雲山)이다.- 에 성을 쌓고, 3년(952)에 안삭진(安朔鎭) -지금은 영변에 병합되었다.- 에 성을 쌓았고, 20년(969)에 태주(泰州) -지금의 태천(泰川)이다.- 에 성을 쌓고, 24년(973)에 가주(嘉州) -지금의 가산(嘉山)이다.-에 성을 쌓았다.” 하였다. ○ 최승로열전(崔承老列傳)에 이르기를, “성종 1년(982)에 최승로가 상서(上書)하기를, ‘우리나라가 삼국을 통합한 이래 47년 동안 사졸들이 편안하게 쉬지 못하고 군량을 허비함을 면치 못하였던 것은 서북 지방이 오랑캐들과 인접해 있어 방수(防戍)할 곳이 많아서였습니다. 무릇 마헐탄(馬歇灘)으로 경계를 삼고자 한 것이 태조(太祖)의 뜻이었으며, 압록강 가의 석성(石城)으로 경계를 정한 것은 대조(大朝)에서 정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두 곳 가운데에서 결단을 내리시어 요해처를 선택해 강역을 획정하고 토인(土人)들 가운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자를 선발해 방수에 충당시키소서. 그럴 경우 경군(京軍)이 번갈아 가면서 수자리를 사는 고생을 면할 것이고, 군량을 실어 나르는 비용도 줄어들 것입니다.’ 하였다.” 하였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옹희(雍煕) 3년(986) -고려 성종 5년- 에 북쪽으로 군사를 출동시켜 거란(契丹)을 정벌하였다.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이에 감찰어사(監察御史)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유시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거란이 여진을 칠 적에 고려의 경계를 거쳤기 때문에 여진은 고려가 거란의 군사를 유인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이에 조정에 와서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왕치(王治) -살펴보건대, 고려 성종의 휘(諱)이다.- 가 그 말을 듣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한국화가 이르자, 그에게 말하기를, “지난해 늦겨울에 여진이 와서 고하기를, ‘거란이 군사를 내어 우리의 경계에 들어왔는데, 고려에서 알지 못하고 있을 듯하다. 그에 대해 미리 방비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또 사람을 보내어 거란의 기병(騎兵)이 이미 매하(梅河)를 건너왔다고 알려 왔다. 그 뒤 얼마 지나서 거란의 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와서 여진을 크게 공격하여 죽이고 빼앗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에 여진의 남은 족속들도 패하여 도망가자, 거란의 군사들이 여진을 잡으려고 뒤쫓아 와서 우리의 서북쪽 지역인 덕창(德昌)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박천(博川)이다-, 덕성(德成)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영변(寧邊)이다-, 위화(威化)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운산(雲山)이다-, 광화(光化)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태천(泰川)이다.-의 경내로 들어와서 사로잡아 갔다. 그때 거란의 한 기병이 덕래하(德來河)의 북쪽에 이르러서 관성(關城)을 지키는 군졸을 큰소리로 불러 말하기를, ‘여진이 우리의 변방 지역을 노략질하였다. 이제 원수 갚는 일을 끝냈으니,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겠다.’ 하였다. 그러자 여진에서는 또 본국에게 매하진(梅河津)을 봉쇄하고 성루를 쌓아 거란을 방비하라고 권하였다. 이에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막 그곳을 둘러보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진은 군사를 몰래 출동시켜 본국의 관원과 백성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여진이 해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때문에 감히 군사를 내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란은 요해(遼海)의 바깥에 끼어 있고 또 대매하(大梅河)와 소매하(小梅河)의 두 강으로 막혀 있으니, 어떤 길을 통해 오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최승로(崔承老)가 이른바 마헐탄은 청천강 나루의 요해처로, 바로 고려 태조가 경계를 정한 곳이다. 그리고 “압록강 가로 경계를 정한 것은 대조(大朝) -경종(景宗)을 가리킨다.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고 성종의 형이다.- 에서 정한 것입니다.” 한 것은, 경종(景宗)이 일찍이 그런 뜻을 품고 있었으나 미처 획정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대개 광종(光宗)이 개척한 지역은 북쪽으로 운산(雲山), 태천(泰川) 등지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성종 1년에 운산과 태천 사이를 고려의 서북쪽 경계라고 칭한 것이다. 덕래하(德來河)는 《송사》에 의거하면 마땅히 운산과 태천의 북쪽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대령강(大寧江) 상류 지역이 아마도 그곳인 듯하다. 매하(梅河)는 압록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 성종 때 여진을 축출하고 구주(龜州)와 곽주(郭州) 등 여섯 주를 두어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의 운산 북쪽 지역은 오히려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요사(遼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10년(992) -고려 성종 11년- 에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항덕(蕭恒德)이 고려를 정벌하였다. 11년에 고려 왕 왕치(王治)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죄를 청하였다. 그러자 조서(詔書)를 내려서 여진에게서 빼앗았던 압록강 동쪽 수백 리의 땅을 고려에 내주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희열전(徐煕烈傳)에 이르기를, “성종 12년(993)에 거란이 침입해 오자, 성종이 스스로 이를 막고자 서경(西京)으로 행차하였다. 거란의 동경 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해 격파하고는 또다시 글을 보내어 속히 항복하라고 하였다.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회의하였는데, 어떤 자가 서경 북쪽 지역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에서부터 절령(岊嶺)에 이르기까지를 봉강(封疆)으로 삼자고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거란의 동경에서부터 우리의 안북부(安北府)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의 지역은 옛날에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차지하였던 곳인데, 광종(光宗)께서 이를 취하여 가주(嘉州)와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해 온 것은 그 뜻이 이 두 성을 취하고자 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취할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은 실은 우리를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병세(兵勢)를 보건대 몹시 성대한바, 갑자기 서경 북쪽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각산(三角山) 북쪽 지역 역시 고구려의 옛 지역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달라고 요구할 경우,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것입니까? 하물며 땅을 떼어서 적에게 내주는 것은 만대토록 수치스러운 짓입니다.’ 하였다. 성종이 누가 거란의 군영으로 가서 담판을 벌여 적을 물리칠 것인가를 물으니, 서희가 자신을 보내 주기를 요청하였다. 서희가 소손녕의 군영으로 가자, 소손녕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고구려의 지역은 우리의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입해 잠식하였다. 또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서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군사를 출동시킨 것이다. 만약 땅을 떼어서 바치고 조빙(朝聘)을 닦는다면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고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를 가지고 논할 것 같으면, 상국(上國)의 동경(東京)이 모두 우리의 영역이다. 그런데 어찌 침입해 잠식하였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압록강 내외의 지역 역시 우리의 경내(境內)이다. 지금 여진(女眞)이 그 사이를 차지하고 있어서 가는 길이 바다를 건너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고 힘들다. 조빙을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그 지역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진을 몰아내고 길을 통할 수 있게 한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몹시 강개하였다. 그러자 소손녕이 억지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강화를 맺고 군사를 거느리고 물러갔다. 성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즉시 박양유(朴良柔)를 파견해 들어가 조근(朝覲)하게 하였다. 그러자 서희가 말하기를, ‘신이 소손녕과 더불어 여진을 탕평하기로 약속하였으니 옛 지역을 다 수복한 다음에 조근을 통하여야 합니다.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 지역을 수복하였으니 압록강 바깥 지역을 얻기를 기다려서 조빙을 닦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성종이 마침내 서희를 파견하였다. 13년(994)에 서희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여진을 축출하고는 장흥진(長興鎭), 귀화진(歸化鎭)과 곽주(郭州), 구주(龜州)의 성을 쌓았다. 그다음 해에 또다시 안의진(安義鎭)과 흥화진(興化鎭)의 성을 쌓았으며, 그다음 해에 선주(宣州)와 맹주(孟州)의 성을 쌓았다.” 하였다. ○ 세가에 이르기를, “성종 13년에 소손녕이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근자에 압록강 서리(西里)에 다섯 개의 성을 쌓으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미리 먼저 지휘하시어 안북부(安北府)에서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의 지역에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적당히 참작한 다음, 아울러 성을 쌓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거마(車馬)를 통하게 함으로써 조공하고 조근하는 길을 영원토록 열도록 하소서.’ 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에서 이른 바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는 바로 새로 쌓은 여섯 성이다. 그러므로 《요사》 및 《고려사》 현종세가(顯宗世家)에도 여섯 성이라고 칭하였다. 그런데 지금 서희가 쌓은 것은 여덟 성이며, 명호(名號)도 또 같지 않은바, 왜 그런지는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대개 서희가 개척한 바는 바로 박천강(博川江) 서쪽에서 의주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런즉 운산(雲山) 북쪽 지역은 여전히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현종(顯宗) 1년(1010)에 이르러서 요나라 사람들이 다시 6주의 지역을 다투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송(王誦)이 졸하고 그의 동생인 왕순(王詢)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현종이다.- 이 국사를 임시로 맡아서 처리하였다.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어 여섯 성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나 왕순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중상부(大中祥符) 3년(1010) -고려 현종 1년- 에 거란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고려를 정벌하였다. 왕순이 여진과 더불어 기병(奇兵)을 매복하였다가 요격하여 거란 군사를 거의 모두 죽였다. 왕순이 또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아 내원성(來遠城)과 서로 마주 보게 하였다. 그러고는 강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은 다음 군사를 매복시켜 새로 쌓은 성을 튼튼하게 하였다.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개태(開泰) 1년(1012) -고려 현종 3년- 에 조서를 내려 왕순이 직접 조회하라고 하였다. 8월에 고려 왕이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표문을 올리면서 병을 핑계 대어 직접 조회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조서를 내려서 다시 강동의 여섯 주의 지역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하였다. ○ 열전에 이르기를, “당초에 고려가 내속(內屬)하자 여진(女眞)에게서 빼앗은 6부(部)의 지역을 하사해 주었다. 개태 연간에 이르러서 공물을 제때에 바치지 않았다. 이에 야율자충(耶律資忠)에게 조서를 내려 고려에 가서 사유를 묻게 하였는데, 고려에서는 땅을 돌려줄 뜻이 없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 3년에 거란에서 조서를 내려 왕이 직접 와서 조회하라고 하였는데, 현종이 사신을 보내어 병을 핑계 대어 직접 조회할 수 없다고 하자, 거란의 임금이 노하여 조서를 내려서 흥화진,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구주 등 여섯 성을 취하라고 하였으며, 4년(1013) 3월에 거란이 야율행평(耶律行平)으로 하여금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따지게 하였으며, 7월에 다시 와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5년(1014) 9월에 장군 이송무(李松茂)를 파견하여 또다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6년(1015) 4월에 야율행평을 파견하여 또다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9월에 이송무가 또 와서 여섯 성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외에도 여섯 성을 침입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었다.
○ 이 당시에 요나라에서는 압록강 동쪽에 보주(保州) 및 내원성(來遠城)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의 의주가 바로 그곳이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 3년(1014) -고려 현종 5년- 5월에 조서를 내려 국구(國舅)인 상온(詳穩) 소적렬(蕭敵烈)과 동경 유수(東京留守) 야율단석(耶律團石) 등으로 하여금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놓고 보주(保州), 선의주(宣義州), 정원주(定遠州) 등에 성을 쌓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현종 6년(1015) 봄에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쪽의 동쪽과 서쪽에 성을 쌓자, 군사를 파견하여 공격하였으나 패하였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해에 거란이 선화진(宣化鎭)과 정원진(定遠鎭)을 취하여 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요사》에서 개태 3년의 일이라고 이른 것이다. 선화진은 아마도 선의진(宣義鎭)인 듯하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주(定州) 보령군(保寧軍)은 고려에서 주(州)를 설치하였다. 옛 현은 하나로, 정동현(定東縣)이다. 성종(聖宗) 통화(統和) 13년(995)에 군(軍)으로 승격시키고서 요서(遼西) 지역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다. 동경 유수사(東京留守司)에 예속되었으며, 통할하는 현은 하나이다. 정동현은 고려에서 설치하였다. 요나라 때 요서 지역의 백성들을 옮겨서 살게 하였다. 호구 수는 800호이다. ○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은 절도(節度)를 둔다. 고려에서 주를 설치하였으며, 옛 현은 하나로, 내원현(來遠縣)이다. 성종이 고려 왕 왕순(王詢)이 멋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왕순이 불복하였다.통화(統和) 말기에 고려가 항복하였으며, 개태 3년에 보주와 정주를 빼앗고서는 이곳에 각장(榷場)을 설치하였다. 동경 통군사(東京統軍司)에 예속되었으며, 통할하는 주군(州軍)이 둘이고 현이 하나이다. 내원현은 처음에 요서 지역의 여러 현의 백성들을 옮겨서 채웠고, 또다시 해(奚)와 한족(漢族)의 군사 700명을 옮겨서 방수(防戍)하게 하였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선주(宣州) 정원군(定遠軍)은 자사(刺史)를 둔다. 개태 3년에 한호(漢戶)를 옮겨서 설치하였으며, 보주에 예속되었다. 회화군(懷化軍)은 등급이 하(下)로 자사를 둔다. 개태 3년에 설치하였으며, 보주에 예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보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고려는 성종 때부터 이미 지금의 용천(龍川), 철산(鐵山) 등지를 차지하였고, 덕종(德宗) 때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부터 장성(長城)을 쌓았다. 정종(靖宗) 때에는 또 지금의 창성부(昌城府)를 설치하였다. 그런즉 요나라가 고려의 경계 상에 보주(保州)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필시 압록강 동쪽 언덕의 한 현에 해당하는 지역일 뿐이다. 그렇다면 보주가 관할하였다는 두 개의 주군(州軍) 및 정주의 정동현은 압록강 동쪽에 아울러 있을 수가 없으며, 마땅히 압록강 서북쪽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정주는 본디 고려에서 설치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원현에 대해서는, 《고려사》 악지(樂志)에 이르기를, “내원성(來遠城)은 정주(靜州)의 물 안쪽 지역에 있다. 고구려 때 적인(狄人)들이 와서 투항하자 이곳에 둔 다음 그 성의 이름을 내원(來遠)이라고 하였으며, 노래를 불러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하였다. 정주(靜州)는 지금의 의주이다. 그런즉 압록강 가운데 있는 검동도(黔同島)나 위화도(威化島) 등이 생각건대 옛 내원현인 듯하다.
또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에는 내원(來遠)이란 칭호가 둘이 있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내원성은 본디 숙여진(熟女眞) 지역이다. 통화 연간에 고려를 정벌하면서 연군(燕軍)이 날래고 용감하다는 이유로 두 지휘(指揮)를 두고서 성을 쌓아 방수하게 하였다. 병사(兵事)는 동경 통군사에 속한다.” 하였다. 이것은 압록강 서쪽에 있으면서 동경 통군사에 속한 것이지, 보주에 소속된 내원현이 아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주(保州)는 고려에서 설치하였다. 내원현을 관할한다. 요나라 때에는 보주(保州) 선의군(宣義軍)이 되었다. ○ 내원현은 본디 고려의 옛 현이다. 요나라 때에는 그대로 따랐다. ○ 옛 보주는 그 지역이 압록강 서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주성(保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태 3년(1014)에 고려 왕 왕순(王詢)이 멋대로 왕위에 올랐다는 이유로 문책하자 왕순이 불복하였으므로, 보주와 정주를 빼앗고서는 이어 보주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내원현이다. 선의군(宣義軍)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금나라 초기에는 고려가 신하로 복속하였다는 이유로 보주를 떼어서 고려에 주었는데, 바로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그 근처에 회화군(懷化軍)이 있는데, 이 역시 요나라가 개태 3년에 설치하였으며, 보주에 예속시켰다. 금나라 초기에는 역시 고려에 편입되었다. ○ 정주성(定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고려에서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정동현(定東縣)이다. 요나라가 취하여서는 그대로 정주라고 하였으며, 보령군(保寧軍)이라고도 한다. 그 뒤에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지금은 그대로 정주가 되었다. 서남쪽으로 의주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보주를 지금의 안주라고 하고, 정주를 지금의 정주라고 한 것은 모두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지금의 정주는 바로 우리 조선에서 설치한 것인데 요나라 때의 정주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대청일통지》에서는 지금의 선천(宣川)을 보주에서 관할하는 선의군(宣義軍)이라고 하였는데, -본조 강역조(本朝疆域條)에 나온다.- 이것 역시 잘못된 것이다.
○ 덕종(德宗) 2년(1033)에 이르러서 장성(長城)을 수축하였는데, 서쪽으로는 보주의 경계까지 쌓아 북쪽에 있는 여진을 방어하였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덕종 2년에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북쪽 경계의 관방(關防)을 창설하게 하였다. 서쪽 바닷가의 옛 국내성(國內城) 경계인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위원(威遠), 흥화(興化), 정주(靜州), 영해(寧海), 영덕(寧德), 영삭(寧朔), -이상의 여섯 성은 지금은 모두 의주(義州)에 편입되었다.- 운주(雲州), 안수(安水), 청새(淸塞), -이상은 지금의 희천군(煕川郡)이다.- 평로(平虜), 영원(寧遠), -이상의 두 진은 지금은 합해져 영원현(寧遠縣)이 되었다.- 정융(定戎), 맹주(孟州), 삭주(朔州) 등 13성을 지나서 요덕(耀德),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 3성 -이 3성은 지금은 합해져 영흥부(永興府)가 되었다.- 에 이르러 동쪽으로 바닷가에 닿았는데, 길이가 1000리이고, 돌로 성을 쌓았으며, 높이와 두께는 각각 25척(尺)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요나라의 보주가 압록강 안쪽에 있었으며, 희천, 운산 북쪽 지역은 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장성을 쌓아 동쪽으로 삭주, 희천, 운산의 북쪽을 지나 영흥의 동쪽에 이른 것이다.
○ 문종(文宗) 때 요나라에게 보주의 지역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요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강(太康) 4년(1078) -고려 문종 32년- 에 고려 왕 왕휘(王徽)가 압록강 동쪽 지역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허락하지 않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문종 9년(1055)에 거란이 포주(抱州) -바로 보주이다.- 의 성 동쪽에 궁구(弓口)와 문란(門闌)을 설치하자, 고려에서 첩문(牒文)을 보내어 압록강 동쪽 지역을 다스리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유홍(柳洪)을 파견하여 요나라 사신과 함께 지형을 살펴서 경계를 정하게 하였는데, 획정하지 못하고서 되돌아왔다. 얼마 뒤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주에 놓은 다리를 부수기를 청하자, 요나라에서 그 일을 중지하였다.” 하였다. 《요사》에서 이른 바 ‘고려에서 압록강 동쪽 지역을 되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것은, 생각건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그러나 연조(年條)가 서로 차이가 나는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 요나라가 멸망하고 금나라가 흥성하자 고려에서는 보주를 취하여 의주라고 개칭하였으며, 비로소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금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국(收國) 1년(1115) -고려 예종 10년- 9월에 태조가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명하여 보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보주는 고려와 가까운 곳에 있는데, 요나라가 고려를 침입해서 보주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가고살갈에게 명하여 빼앗게 하였는데,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11월에 개주(開州)를 공격하여 빼앗자, 보주에 있는 여진의 여러 부(部)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2년에 고려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또 말하기를, “보주는 본디 우리 고려의 땅이니 반환해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러자 태조가 사신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스스로 취하라.” 하였다. 가고살갈 등이 보주를 공격하게 되자 요나라의 수장(守將)이 도망쳤는데, 고려의 군사들이 이미 성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얼마 뒤에 고려의 국왕이 포마(蒲馬)를 시켜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서 고려국왕에게 유시하기를, “포마가 단지 입으로만 보주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표문(表文)을 올려 요청해 온다면 그 즉시 별도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천회(天會) 4년(1126) -고려 인종 4년- 에 상이 고백숙(高伯淑)과 오지충(烏至忠)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사신이 왕래함에 있어서는 모두 요나라와의 구례(舊例)를 준수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고백숙 등에게 칙령(勅令)을 내리기를, “만약 고려에서 우리 측의 요구를 모두 따라 주면 즉시 보주 땅을 그들에게 주라.” 하였다. 고백숙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 왕 왕해(王楷)가 표문을 올려 사례하고, 모든 일을 예전에 요나라를 섬기던 규례대로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초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 강안에 성을 설치하고는 보주라고 칭하였다. 문종조에 거란이 또 궁구(弓口)와 문(門)을 설치하고는 포주(抱州)라고 하였다. 예종 12년(1117)에 요나라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 등이 금나라 군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서 도망친 다음, 우리나라의 영덕성(寧德城)에 공문(公文)을 보내 내원성과 포주를 우리나라에 돌려주었다. 이에 우리 군사들이 그 성에 들어가서 병장기와 전곡(錢穀)을 수습하였다. 그러자 왕이 기뻐하면서 의주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에 다시금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다. 인종 4년(1126)에 금나라에서도 주(州)를 돌려주었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에서 동쪽 지방은 바로 예전에 거란에 소속되었었다. 지금 오랑캐들이 이미 망하고 난 뒤에는 대금(大金)에서 그 지역이 불모지라는 이유로 다시는 성을 쌓아 지키지 않은 채 한갓 왕래하는 길로만 삼고 있다. 압록강의 서쪽에는 또 백랑수(白浪水)와 황암수(黃嵓水) 두 강이 합류하여 요수(遼水)가 되는데, 그 물이 얕고 좁은바, 예전에 이 강을 믿어서 험고함으로 삼은 적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고려가 압록강의 동쪽으로 물러나 지키고 있는 것이다.
○ 압록강의 서쪽은 바로 금나라의 갈소관(曷蘇館)인데, 혹 파속로(婆速路)라고도 하며, 금나라와 고려가 경계를 접한 지역이다.
《요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 2년(1013)에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대군이 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의 북쪽을 경유하여 곧장 압록강을 건너서 대하(大河)를 따라 올라가면 곽주(郭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세기에 이르기를, “천회 2년(1124)에 남로 군수(南路軍帥) 도모(闍母)에게 명하여 갑사(甲士) 1000인을 합소관로(合蘇館路)의 발근(孛菫) 완안아실뢰(完顔阿實賚)에게 보태 주어 고려를 방비하게 하였다.” 하였다. ○ 고려열전(高麗列傳)에 이르기를, “천회 8년(1130)에 고려 사람 10인이 고기잡이하다가 풍랑을 만나 그 배가 해안에 닿았는데, 갈소관 사람들이 이들을 잡았다. 조서를 내려서 그 나라로 돌려보내게 하였다.” 하였다. ○ 대정(大定) 11년(1171)에 고려 왕 왕호(王晧)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의종(毅宗)이다.- 가 나라를 양위(讓位)한 사실을 와서 고하자 파속로(婆速路)에 조서를 내려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갈소관은 《요사》와 《금사》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서쪽에 있는바, 지금의 압록진(鴨淥津) 서쪽, 봉황성(鳳凰城) 동쪽 지역이 바로 그 지역이다. 합소관(合蘇館)은 바로 갈소관이다. 《금사》를 보면 갈라로(曷懶路) 역시 합라로(合懶路)라고 하였는바, 갈(曷)과 합(合)을 서로 바꿔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대청일통지》를 근거로 해서 보면 한(漢)나라의 안평현(安平縣)이 고구려 때에는 박작성(泊灼城)으로 되고, 금나라 때에는 파속로(婆速路)라고 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파사부(婆娑府)라고 하였다. 그 지역은 봉황성의 동쪽에 있는바,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박작성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바로 갈소관의 지역과 딱 들어맞는다. 그런즉 파속은 분명히 갈소(曷蘇)의 음이 변한 것이며, 파사(婆娑) 역시 파속(婆速)의 음이 변한 것이다.
○ 고려 명종 때에는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난을 일으켜 서흥(瑞興)의 자비령(慈悲嶺) 서쪽 지역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 15년(1175) -고려 명종 5년- 9월에 고려의 서경 유수 조위총이 고려국왕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자비령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 사이에 있는 40여 성을 바치고 내부(內附)하겠다고 청하였는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9월에 고려 왕이 조위총을 복주(伏誅)하였다고 상주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절령(岊嶺)이라고도 하는데, 서흥부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 고종(高宗) 때에는 서북쪽의 여러 성이 원나라에 함락되었으며, 고려에서 얼마 뒤에 다시 공격해 빼앗았다.
《원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태종(太宗) 3년(1231) -고려 고종 18년- 에 살례탑(撒禮搭)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고려 사람 홍복원(洪福源)이 군사들을 맞이하면서 항복하여 왔다. 이에 홍복원이 거느리고 있던 편민(編民) 1500호를 얻으니, 부근에 있던 주군(州郡)에서도 항복해 오는 자가 있었다. 살례탑이 즉시 홍복원과 함께 귀부하지 않은 주군을 공격하고, 또 아아독(阿兒禿)으로 하여금 홍복원과 함께 왕경(王京)으로 가서 고려 왕 왕철(王㬚)을 불러오게 했다. 그러자 왕철이 강화를 요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경(京), 부(府), 현(縣)에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두어 감독하게 하고는 마침내 회군하였다. 5년에 왕철이 다시 군사를 파견하여 이미 내부하였던 서경 등처의 항복한 백성들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홍복원의 집을 빼앗았다. 6년에 홍복원이 항복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경(東京)으로 옮겨 와 살게 해 달라고 청하여 허락하였다.” 하였다. ○ 지리지에 이르기를, “원나라 초기에 요동을 평정하였을 적에 고려국 인주(麟州)의 신기 도령(神騎都領) 홍복원이 서경(西京), 도호(都護), 구주(龜州) 인근의 40여 성을 거느리고 투항하자, 이곳에 각각 진수사(鎭守司)를 세우고 관원을 두어 그곳 백성들을 무마하였다. 그 뒤에 고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홍복원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귀부하였으므로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를 제수하였고, 항복해 온 백성들을 요양(遼陽)과 심주(瀋州)에 나누어 흩어져 살게 하였는데, 교치(僑治)는 요양고성(遼陽故城)이다. 중통(中統) 2년(1261)에 이를 고쳐서 안무고려군민총관부(按撫高麗軍民摠管府)로 삼았다. 고려가 온 나라를 들어 내부하기에 이르러서는 4년에 또다시 질자(質子)인 왕준(王綧)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고 2000여 호를 나누어 거느리면서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원정(元貞) 2년(1296)에 두 사(司)를 병합시켰는데, 치소는 그대로 요양고성이었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고종 20년(1233) 5월에 서경 사람 홍복원 등이 성을 들어서 반란을 일으키자, 북계 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가 토벌하였으며, 홍복원이 몽고로 도망쳐 들어가자 남아 있던 백성들을 해도(海島)로 옮겨 서경이 마침내 폐허가 되었다. 그 뒤에 서북 지방의 여러 성들이 해마다 몽고 군사에게 침입당하였다. 지금 《원사》에 기록된 것이 《고려사》와는 연조(年條)에서 조금 차이가 나는데, 왜 그런지 상고할 수가 없다.
○ 원종(元宗) 때에는 자비령(慈悲嶺) 서북쪽 지방이 원나라에 함락되었으며, 원나라에서는 평양(平壤)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하였다.
《원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6년(1269) -고려 원종 10년- 에 고려의 도통령(都統領) 최탄(崔坦) 등이, 임연(林衍)이 난을 일으키자 서경(西京)의 50여 성을 이끌고 들어와 귀부하였다. 7년에 조서를 내려 서경을 내속시켜 동녕부로 고치고는 자비령으로 경계를 삼았으며, 망가도(忙哥都)를 안무사(按撫使)로 삼아 호부(虎符)를 차고서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종 10년에 서북면 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의 기관(記官) 최탄(崔坦),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난을 일으켜 서경 및 여러 성을 들어 몽고에 귀부하였다. 그러자 몽고에서는 서경을 동녕부로 삼고는 관리를 두어 다스렸으며,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
○ 그 뒤에 원나라에서는 동녕부를 동녕로총관부(東寧路摠管府)로 승격시켰으며, 이로 인하여 의주(義州) 등 4개의 성을 떼어 파사부(婆娑府)로 옮겨 예속시켰다. 파사부는 바로 금나라 때의 파속로(婆速路)이다.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는 본디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때 조선을 멸하고서 낙랑군과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 지역이었다. 진(晉)나라 의희(義煕) 연간 이후에 고구려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평양성에 거주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겨 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는바, 평양의 옛 지역이 아니었다. 왕건(王建) 때에 이르러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았다. 원나라 지원 6년(1269)에 이연령, 최탄, 현원열(玄元烈) 등이 부(府), 주(州), 현(縣), 진(鎭) 60성을 들어서 귀의하였다. 8년에 서경을 고쳐서 동녕부로 삼았다. 13년(1276)에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키고 녹사사(錄事司)를 설치하였으며,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威遠鎭)을 떼어 파사부에 예속시켰다. 본로(本路)는 영사(領司)가 하나이며, 나머지 성들은 잔폐되어서 관사를 설치하지 않았다. 지금은 우선 옛 이름만을 기록해 둔다. ○ 녹사사는 토산현(土山縣), 중화현(中和縣), 철화진(鐵化鎭)을 관할한다. ○ 도호부(都護府)는 당나라 말기에 고려로 땅이 편입되었으며, 주, 부, 현, 진 60여 성을 설치하여서 이곳이 도호부가 되었다. 비록 당나라 때의 명칭을 그대로 쓰기는 하였으나, 도호부로서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지원 6년에 이연령 등이 그 지역을 들어 귀의하였다. 그 뒤에는 성이 무너져서 겨우 그 명목만 남아 있었으며, 동녕로에 속하였다. ○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撫州), 황주(黃州),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등 다섯 현과 장명진(長命鎭) 한 진을 거느린다.- 자주(慈州), 가주(嘉州), 순주(順州), 은주(殷州), 숙주(宿州), 덕주(德州), -강동현(江東縣), 영청현(永淸縣), 통해현(通海縣), 순화현(順化縣) 네 현과 영원진(寧遠鎭), 유원진(柔遠鎭), 안융진(安戎鎭) 세 진을 거느린다.- 창주(昌州), 철주(鐵州), -정융진(定戎鎭) 한 진을 거느린다.- 태주(泰州), 개주(价州), 삭주(朔州), 선주(宣州), -영삭진(寧朔鎭), 석도진(蓆島鎭) 두 진을 거느린다.- 성주(成州) -수덕진(樹德鎭) 한 진을 거느린다-, 희주(煕州), 맹주(孟州), -삼등현(三登縣)과 초도진(椒島鎭), 가도진(椵島鎭), 영득진(寧得鎭) 세 진을 거느린다.- 연주(延州) -양암진(陽巖鎭) 한 진을 거느린다-, 운주(雲州)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동녕로 및 파사부가 거느리는 주(州), 현(縣), 도(島), 진(鎭)은 모두 합하여 50성으로, 60성을 들어 귀의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려사》를 근거로 하여 보면, 이 당시에 서해도(西海道)의 수안(遂安), 곡산(谷山), 은율(殷栗) 역시 원나라에 투항하여 동녕부에 속하였으며, 충렬왕 12년(1286)에 원나라에서 곡주 등 세 성을 되돌려 주었다. 이것은 《원사》에서 미처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동녕로 주현(州縣)의 연혁(沿革)에 대해서는 성읍조(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또 살펴보건대,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동녕부조(東寧府條)를 보면, 가주(嘉州)는 요나라 때의 가평군(嘉平軍)이고, 순주(順州)는 본디 요대현(遼隊縣) 지역이고, 철주(鐵州)는 본디 안시현(安市縣)이고, 태주(泰州)는 본디 거란목(契丹牧) 지역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요동 지방에 있는 주현을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으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의 동녕로는 본디 고구려의 평양성이다. 지원 13년(1276)에 동녕로를 설치하였는데, 그 지역은 지금의 조선 경계 안에 있었다.
○ 고려 충렬왕 16년(1290)에 원나라가 동녕로를 혁파하고서 서북쪽 지방의 여러 성들을 모두 되돌려 주고는 다시 압록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서북쪽 지방의 성이 원나라에 함락된 기간은 21년 동안이었다.
《고려사》 세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충렬왕 16년 -원나라 지원 27년- 에 원나라 황제가 동녕로를 혁파하고서 서북쪽의 여러 성을 모두 되돌려 주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공민왕(恭愍王)이 장차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다. 19년(1370)에 우리 태조가 동북면(東北面)에서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우라산성(亏羅山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항복하였으며, 여러 성들이 모두 잇따라 항복하였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 바다,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의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보면,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여러 성을 되돌려 준 뒤에 동녕부를 압록강 북쪽으로 옮겨 설치하였다는 것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공민왕 때 희천(煕川) 북쪽에 있던 여진을 축출하고 비로소 지금의 강계(江界), 벽동(碧潼) 등지를 수복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계부(江界府)는 공민왕 10년(1361)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라고 하였다가 18년(1369)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 임토(林土)와 벽단(碧團)은 본디 모두 여진이 살던 곳이다. 공민왕 6년(1357)에 이성만호(泥城萬戶) 김진(金進) 등을 보내어 쳐서 달아나게 하였다. 그러고는 임토를 고쳐서 음동(陰潼)이라 하고 벽단을 음동에 예속시켰으며, 남계(南界)의 인호(人戶)를 옮겨서 채웠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음동은 지금의 벽동군(碧潼郡)이다. 고려 말기에 비록 강계, 벽동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압록강 안쪽의 지역을 다 개척하지는 못하였다. 본조(本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을 경계로 삼고는 여연(閭延), 무창(茂昌), 우예(虞芮), 자성(慈城) 등 네 군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변경 지역에 껄끄러운 일이 자주 발생함으로 해서 마침내 그 지역을 비워 두었다.


[주D-001]갈라로(曷懶路) : 갈라전(曷懶甸)을 말한다. 갈라전의 위치에 대해서는 함흥평야(咸興平野) 일대라는 설이 있으나, 대체로 길주(吉州) 북쪽에서 두만강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으며, 치소(治所)는 경성(鏡城)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D-002]체주(棣州) : 원문에는 ‘隸州’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곽원(郭元) : 송(宋)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1015, 현종6)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주D-004]4도호부, 8목을 설치하였다 : 원문에는 ‘置四都八護牧’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편하게 …… 없습니다 : 원문에는 ‘以爲便敵國未嘗知有國邑之制’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以爲便適 固未嘗知有國邑之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거사(車師)나 선선(鄯善) : 모두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 이름이다.
[주D-007]완안부(完顔部) : 12~13세기에 걸쳐 지금의 만주 아성현(阿城縣)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살다가 금나라를 세운 여진의 부족 이름이다. 오고내(烏古迺) 추장 때 세력을 급속히 확장하였고, 아골타(阿骨打) 때에 이르러 금나라를 세웠다.
[주D-008]옛날에 해총(海蔥)을 바쳤는데 : 원문에는 ‘舊有海蔥’으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24에 의거하여 ‘舊貢海蔥’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토문강(土門江) : 두만강(豆滿江)을 가리킨다. 두만강, 도문강(徒門江), 통문강(統門江), 도문수(徒門水)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10]호이합하(虎爾哈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을 말한다. 홀한하(忽汗河), 읍루하(挹婁河), 오루하(奧婁河)라고도 한다.
[주D-011]도발근(都孛菫) : 여진족 추장의 칭호이다.
[주D-012]해릉(海陵) : 금나라의 폐제(廢帝)인 해릉서인(海陵庶人) 완안량(完顔亮)을 가리킨다. 본래의 이름은 적고내(迪古乃)이며,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둘째 아들이다. 평장사(平章事)로 있다가 희종(煕宗)을 시해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가 뒤에 폐위되었다.《金史 卷5 海陵本紀》
[주D-013]마침내 …… 하였다 : 원문에는 ‘遂命名親管猛安曰 押懶猛安’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금사》 권24에 의거하여 ‘遂命名石土門親管猛安曰 押懶猛安’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석토문(石土門)은 야라로 완안부(完顔部) 사람으로, 금나라 시조(始祖)의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의 후손이다. 맹안(猛安)은 금나라의 관직으로,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맹안은 1000부(夫)의 장(長)이다.” 하였다.
[주D-014]성현수(星顯水) : 지금의 포이합도하(布爾哈圖河)를 가리킨다.
[주D-015]모극(謀克) : 금나라의 관직으로, 《금사》 국어해(國語解)에 “모극은 100부(夫)의 장(長)이다.” 하였다.
[주D-016]소조(昭祖) : 금나라 헌조(獻祖)의 아들로, 이름이 석로(石魯)이며, 뒤에 소조로 추존되었다.
[주D-017]응로(鷹路) : 매[鷹]를 조공(朝貢)하는 길을 말한다. 요나라 사람들이 매를 좋아하였는데, 우리나라의 함경도 지방에서 나는 매를 특히 좋아하였다.
[주D-018]알민수(斡泯水) : 원문에는 ‘幹泯水’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1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삼잔수(三潺水)에 막부(幕府)를 설치하고 : 원문에는 ‘立募府于三潺水’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135 고려열전에 의거하여 ‘立幕府于三潺水’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사람들을 …… 약탈하였다 : 원문에는 ‘登水無算’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殺掠無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정평 …… 지역은 : 원문에는 ‘定以北濱海處’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定平以北濱海處’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거란 …… 좋아하는데 : 원문에는 ‘契酷愛之之’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契丹酷愛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오국고성(五國故城)이 : 원문에는 ‘五國頭城’으로 되어 있는데, 《대청일통지》에 의거하여 ‘五國故城’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4]양련진하(楊璉眞瑕) : 원나라 때의 서역(西域) 승려로, 양련진가(楊璉眞加), 양련진가(楊璉眞伽)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세조(世祖) 때 강남석교총통(江南釋敎摠統)이 되어 송나라의 능묘를 발굴하기를 주청해서 송나라의 능침을 모두 발굴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元史 卷202》
[주D-025]9성(城) : 윤관(尹瓘)이 갈라전 지역에 있던 여진족을 정벌하고 쌓은 함주(咸州), 복주(福州), 영주(英州), 길주(吉州), 웅주(雄州), 통태진(通泰鎭), 진양진(眞陽鎭), 숭녕진(崇寧鎭), 공험진(公嶮鎭) 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분분하여 정설이 없다.
[주D-026]9개의 성 : 김상기는 “고려의 9성에 대해 여진 측에서도 각각 9개의 성을 쌓아 대치한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여진에서 장기전을 각오하고 임시로 작은 성과 책(柵)을 쌓아 그곳을 공격의 근거지로 한 데 불과한 것이다.” 하였다.《김상기, 高麗時代史,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221쪽 주》
[주D-027]소하(蘇河) : 원문에는 ‘蘇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58에 의거하여 ‘蘇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쌍성(雙城) :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주D-029]영가(盈哥) : 금나라 목종(穆宗)의 이름이다. 영가는 완안부(完顔部)의 기초를 확립하기 시작한 오고내(烏古迺)의 뒤를 이어 계승한 추장(酋長)으로서,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오늘날의 간도(間島) 지방을 복속하였으며, 다시 남하하여 광의(廣義)의 함흥평야(咸興平野)를 지칭하는 갈라전(曷懶甸)까지 그 세력을 미치게 하여 금나라의 기초를 닦았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61, 376쪽》
[주D-030]정평부의 북쪽이 : 원문에는 ‘定平之此’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定平之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1]포선만노(蒲鮮萬奴) : 금나라의 무장(武將)이다. 함평로 선무사(咸平路宣撫使)로 있다가 정우(貞祐) 3년(1215)에 금나라를 배반하여 요동에 웅거하고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라 하여 대요국(大僚國)과 대립하였다. 원나라 성길사한(成吉思汗)에게 쫓겨 두만강 유역으로 이주한 다음, 국호를 동진국(東眞國)으로 고치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위에 있는 여진족을 통합하였다. 1217년(고종4)에 몽고와 화맹(和盟)하고는 고려를 구한다는 구실로 고려의 동북쪽을 쳐들어왔으며, 1233년(고종20)에 몽고의 공격으로 멸망당했다.
[주D-032]화주(和州) 북쪽 땅 : 화주는 지금의 영흥(永興)으로, 철령(鐵嶺) 북쪽 땅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몽고에서 이곳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조휘(趙暉)를 총관으로, 탁청(卓靑)을 천호(千戶)로 삼았다.
[주D-033]정주(定州) : 여기서는 함경남도 정평(定平)을 말한다.
[주D-034]계수관(界首官) : 주위에 있는 주부(州府)와 군현(郡縣)을 관할하는 중심이 되는 고을을 말한다.
[주D-035]구리승왕(漚里僧王) : 원문에는 ‘謳里僧王’으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6]철령(鐵嶺) : 고려 말기에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철령위(鐵嶺衛)의 귀속 문제가 있었다. 1387년 1월에 명나라에 다녀온 설장수(偰長壽)가 명나라에서 이 지역을 모두 요동에 귀속시키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5도(道)에 명을 내려 성을 수축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을 북방에 보내어 대비케 한 다음, 박선중(朴宣中)을 명나라에 보내어 철령 북쪽의 문천(文川), 고원(高原), 영흥(永興), 정평(定平), 함흥(咸興) 등과 공험진(公嶮鎭)까지가 모두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면서 철령위의 설치를 중지해 달라고 교섭하였으나, 결과가 여의치 않았다. 이에 최영(崔瑩)이 중신 회의를 열고 정료위(定遼衛) 정벌을 논의한 결과 모두 화의(和議)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자 최영은 왕과 비밀회의를 열어 요동을 정벌하기로 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출군하였으나,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갔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中世篇, 786쪽 주》
[주D-037]개원로(開元路) : 요양성(遼陽城)에 소속된 지명으로, 원나라에서 처음 설치하였다.
[주D-038]봉천부(奉天府) : 원문에는 ‘奪天府’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9]5년 : 원문에는 ‘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0]대매하(大梅河)와 소매하(小梅河) : 대매하는 지금의 요하(遼河)이고, 소매하는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41]소항덕(蕭恒德) : 소손녕(蕭遜寧)을 가리킨다. 소항덕은 본명이며, 손녕은 그의 자(字)이다.
[주D-042]흥주(興州) …… 여섯 성 : 평안북도 서북쪽 해안 지대에 있는 여섯 성으로, 이것이 이른 바 강동 육주(江東六州)이다. 이 강동 육주는 당시에 군사상ㆍ교통상의 요지로,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요나라와 고려가 치열한 분쟁을 치렀는데, 거란의 3차 침입 이후에는 고려의 영토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주D-043]내원성(來遠城) : 요나라의 진지(陣地)로, 압록강 가의 검동도(黔同島)이다.
[주D-044]상온(詳穩) : 요나라의 관직으로, 변방 백성을 진무하는 관직이다. 국어해(國語解)에, “여러 관부(官府)를 감독하고 다스리는 장관(長官)이다.” 하였다.
[주D-045]선의주(宣義州) : 지금의 선천(宣川)이다.
[주D-046]정원주(定遠州) : 지금의 정주(定州)이다.
[주D-047]통화(統和) …… 설치하였다 : 이 부분이 원문에는 ‘開泰三年 取其保定二州 統和末 高麗降 於此置權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도치되었기에 《요사》 권38 지리지(地理志)의 주석에 의거하여 ‘統和末 高麗降 開泰三年 取其保定二州 於此置榷場’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각장(榷場)이 원문에는 ‘權場’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각장은 송(宋), 요(遼), 금(金), 원(元)나라 때 변경에 설치하고서 인근의 나라들과 호시(互市)를 열었던 시장을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전매세(專賣稅)를 거두었으며, 관부에서 발행한 증명서가 있어야만 교역할 수 있었다.
[주D-048]32년 : 원문에는 ‘十二年’으로 되어 있는데, 연대가 맞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가고살갈(加古撒喝) : 원문에는 ‘加右撒喝’로 되어 있는데, 《금사》 권13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또 …… 설치하고는 : 원문에는 ‘又設弓口問’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又設弓口門’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1]한갓 …… 있다 : 원문에는 ‘徙爲往來之道而已’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徒爲往來之道而已’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2]갈소관여진(曷蘇館女眞) :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진을 정벌할 때 여진 사람 수천 호(戶)를 요양(遼陽)의 남쪽으로 이주시켰는데, 이를 갈소관여진이라 한다. 일설에는 숙여진(熟女眞)을 갈소관여진이라고도 한다. 합소관여진(合蘇官女眞)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高麗時代史 186쪽 주》
[주D-053]다루가치(達魯花赤) : 점령 지역 내의 민정(民政)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원나라의 관직으로, 진수자(鎭守者), 단사관(斷事官), 지방장관 등을 뜻한다.
[주D-054]왕준(王綧) : 원문에는 ‘王淳’으로 되어 있는데, 《원사》 권59 지리지의 주석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왕준은 고려의 왕족으로 영녕공(永寧公)에 봉해진 뒤 고려 고종(高宗)의 명에 따라 왕자라고 칭하고 원나라에 볼모로 갔다. 그 뒤에 원나라의 신임을 받아 안무고려군민총관이 되어 심주(瀋州)를 다스렸다.
[주D-055]심주 : 지금의 봉천(奉天)이다. 이 당시에 봉천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는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거나 항복한 백성, 유민(流民) 등 고려 백성들이 많이 살아서 마치 고려의 영지(領地)와 같았다. 이에 몽고에서는 고종 28년(1241)에 영녕공 왕준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이들을 관할하였으며, 그 뒤에는 또 충선왕(忠宣王)을 봉하여 심양왕(瀋陽王)으로 삼아 이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韓國史 중세편, 진단학회, 569쪽》
 
해동역사 속집 제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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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1
고려(高麗) 2


성읍(城邑)
○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 -개주(開州)라고도 하고, 송악군(松嶽郡)이라고도 하고,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왕은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서 사는데, 이곳을 개성부(開城府)라고 한다. 큰 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세웠으며 성벽을 쌓았는데,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한다. 백성들이 사는 집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었고, 크기가 단지 두어 칸에 지나지 않으며, 기와로 지붕을 이은 집은 겨우 10분의 2쯤 된다.
《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국성(國城)은 삼면이 산을 등지고 있는데, 북쪽이 가장 높고 가파르다. 시내가 있어서 굽이굽이 성안을 관통하여 흐르는데, 서남쪽이 하류이므로 조금 넓고 평평하다. 성은 둘레가 20여 리이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서 쌓았으나 형세는 튼튼하고 장엄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당(唐)나라 이전에는 평양에 있었다. 당나라 말기에 고려는 여러 대에 걸쳐 겪은 병란에 징계되어 점차 동쪽으로 옮겨 갔다. 지금의 왕성은 압록강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바,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둘레가 60리인데, 산이 빙 둘러 있으며 모래와 자갈을 섞어 지형에 따라 쌓았다. 성 밖에는 참호(塹壕)가 없고, 여장(女牆)을 만들지 않았다. 줄지어 잇닿은 집들은 행랑채와 같은 모습으로,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성에는 비록 병기(兵器)를 설치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기는 하였으나, 산의 형세에 따라서 성을 쌓은 탓에 전체가 견고하지는 않다. 이에 낮은 곳의 경우는 적을 막아 낼 수 없는바,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능히 지켜 내지 못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받았음으로 도읍을 세움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형세를 살펴보아 장구한 계책을 세울 수 있는 곳을 택한 다음에 자리 잡는다. 한(漢)나라 말기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도읍을 옮겼고, 후위(後魏)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에 도읍하였다. 당나라 이적(李勣)이 평양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점차 동쪽으로 도망쳐 옮겨 가 살았는데, 어디에 도읍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당나라 말기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바로 지금 도읍한 곳이다. 이곳은 대개 전에 개주(開州)였던 곳으로, 지금도 개성부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은 북쪽으로 숭산(嵩山)에 의지하였는데, 숭산은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 내려오다가 산등성이에 이르러서 점차 나뉘어져 두 줄기가 되어 서로를 감고 돌았는바, 음양가들은 그것을 일러 청룡(靑龍)과 백호(白虎) 줄기라고 한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商)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으면 흥성하는데,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卦)이다. 뻗어 내린 등성이가 서북쪽[亥方]으로 나갔으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쪽으로 돌아 나와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았다. 그 형상이 마치 물동이를 엎어 놓은 것 같은데, 이 산이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바깥에 또 하나의 안산이 있는데, 높이가 배는 높으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丙]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壬]에 있다. 물은 숭산 뒤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방[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艮方]에 이르러 꾸불꾸불 흘러서 성안으로 들어온다. 광화문(廣化門)을 지나면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서 빠져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金)이 되는데, 금의 가장 좋은 방위는 동남쪽[巳]이므로,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마치 청룡(靑龍)이 시냇물을 마시는 형상과 같다. 그러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오래도록 역년(歷年)을 누리면서 항시 성조(聖朝)의 속국(屬國)이 됨 직하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에 이르러서 고려의 임금이 되어 숭악(崧岳)으로 천도한 자는 성이 왕씨(王氏)이고 이름이 건(建)이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조선의 국성(國城)에서 서남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려에서 주(州)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이 있어서 험고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숭악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천우(天祐) 초에 애꾸눈의 승려인 궁예(躬乂) -삼가 살펴보건대, 궁예(弓裔)의 잘못된 표기이다.- 가 이곳에 웅거하였다. 주량(朱梁) 정명(貞明) 5년(919)에 회남(淮南)의 양융연(楊隆演)에게 들어와 조공하였다. 후당(後唐) 청태(淸泰) 말기에 왕건(王建)이 궁예를 시해하고 대신 임금이 되어 그대로 이곳에 도읍하고는 동경(東京)이라고 일렀는데, 개경(開京)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개성부라고 한다. ○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遼史)》 지리지에, “본디 예(濊), 맥(貊)의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를 두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가 되었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이 되었으며, 요나라 말기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혹은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도경》을 보면 군(郡)은 개주의 동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성부는 신라 때에는 송악군(松嶽郡)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 2년(919)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여 개주가 되었다. 광종 때 개성부로 고쳤고 지금은 그대로 따랐다. 《송사》에서 이른 바 촉막군은 바로 송악군의 음이 변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개주가 바로 개성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 두 개의 주로 나누고서 또다시 요나라의 개주를 억지로 끌어다 붙였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요나라의 개주는 지금의 봉황성(鳳凰城) 등지로, 촉막군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 승천부(昇天府)
《원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5년(1268) 7월에 조서를 내려 도통령(都統領)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사신이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의 국왕이 승천부(昇天府)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대개 군사를 사열하고 배 만드는 일에 대해 효유하기 위해 간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승천부는 지금의 풍덕부(豐德府)이다.

이상은 경기(京畿)에 예속되었다.

○ 양주(楊州)ㆍ광주(廣州)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양주(楊州), 광주(廣州), 영주(永州) 세 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양주는 신라 때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한양군(漢陽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때 양주로 고쳤다가 뒤에 남경(南京)으로 승격시켰는데, 지금의 경성(京城)이다. 광주는 지금도 그대로이다. 영주는 지금의 경상도 영천군(永川郡)인데, 고려 때 영주로 칭한 곳이 과연 이 경상도 영주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상고할 수가 없다.
○ 풍양현(豐壤縣)
《명시종(明詩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운흘(趙云仡)은 고려 풍양현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풍양은 지금 양주(楊州)에 병합되었다.
○ 당성군(唐城郡)
《원사》 홍복원열전(洪福源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복원은, 그 선조는 중국 사람으로, 자손 대대로 삼한(三韓)에서 귀하게 되었는데, 사는 곳을 당성(唐城)이라고 이름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당성은 지금의 남양부(南陽府)이다.
○ 강화현(江華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화도는 개주성(開州城)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원나라 때 고려 왕 왕식(王植)의 서족(庶族)인 승화후(承化侯)가 이곳에 거주하였다. 《고려도경》을 보면 지금 강화부(江華府)가 있는데, 대개 섬 이름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강화는 지금도 그대로 따랐다.
○ 처인현(處仁縣)
《원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 4년(1232)에 살례탑(撒禮搭)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살례탑이 왕경의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處仁城)을 공격하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처인현은 지금의 용인현(龍仁縣)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인성은 전주(全州)의 서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주의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송나라 소정(紹定) 6년(1233)에 몽고의 임금 와활태(窩闊台)가 장수 살례탑을 파견하여 고려를 공격하게 하자, 살례탑이 국성(國城)의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주(竹州)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김구용(金九容)이 글을 올려서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이하는 것을 저지하였다가 죽주로 유배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주는 지금의 죽산부(竹山府)이다.
○ 삼각산성(三角山城)ㆍ양근현(楊根縣)ㆍ천룡산성(天龍山城)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3년(1253)에 종왕(宗王) 야호(耶虎)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하여 삼각산, 양근, 천룡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삼각산의 중흥동(中興洞)에 옛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가 9417척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삼각산성은 아마도 이것인 듯하다. 《고려사(高麗史)》를 보면, 고종 40년(1253) -원나라 헌종 3년- 10월 기유에 몽고의 군사가 양근성(楊根城)을 포위하였으며, 갑인에 천룡산성을 공격하였는데, 황려 현령(黃驪縣令) 정신단(鄭臣旦)이 항복하였다. 그러니 천룡산성은 여주(驪州)의 근처 지역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여지승람》에서 “천룡산이 충주(忠州)에서 서쪽으로 4, 5십 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양근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안성현(安城縣)
《원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정동성(征東省)은 충청주도권과사(忠淸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하였다. ○ 세기에 이르기를, “헌종 5년(1255)에 차라대(箚剌䚟)가 고려를 정벌하여 안성, 충주 등의 성을 함락시켰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충주와 청주 및 안성은 지금 모두 그대로 따랐다.
○ 홍주(洪州)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홍주산(洪州山)은 자운섬(紫雲苫)에서 동남쪽으로 수백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주(州)가 그 아래에 세워져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홍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한산현(韓山縣)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이색(李穡)은 여러 관직을 거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이상은 양광도(楊廣道)에 예속되었다.

○ 경주(慶州)ㆍ상주(尙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은 경상주도권과사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경주와 상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영일현(迎日縣)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몽주(鄭夢周)는 고려 영일현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일은 바로 연일(延日)의 잘못된 표기이다. 연일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김주(金州)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18년(1281) 11월에 고려국의 김주(金州) 등지에 변진만호부(邊鎭萬戶府)를 설치하여 일본(日本)을 억눌러 제압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주는 바로 김해부(金海府)이다.
○ 동래현(東萊縣)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정추(鄭樞)는 충민왕(忠愍王) 때 폄관(貶官)되어 동래 현령(東萊縣令)이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래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의안군(義安郡)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 8년(1271)에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고 이어 고려국왕 왕창(王昌)에게 명하여 고려의 의안군에 주둔해 있으면서 후원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안은 지금의 창원부(昌原府)이다.
○ 합포현(合浦縣)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 22년(1285)에 칙서를 내려 강회(江淮) 지방에 있는 쌀 100만 석을 조운(漕運)하되, 바다를 건너 싣고 가서 고려의 합포(合浦)에 쌓아 두고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포는 지금 창원에 병합되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포는, 《고려도경》을 보면 진주(晉州) 남쪽에 있는바, 바로 진강(晉江)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원나라 지원 22년에 일본을 정벌하기로 의논하고는 칙령을 내려 강회 지방의 쌀 수백만 석을 조운하여 고려의 김포에 쌓아 두게 하고, 이어 동경(東京) 및 고려로 하여금 각각 1만 석의 곡식을 저축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데 대비하게 하였으며, 다음 해 8월에 모두 김포에 모이게 하였는데, 끝내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원사》에 월포(月浦)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포는 바로 합포의 잘못된 표기이다.
○ 거제현(巨濟縣)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 18년(1281)에 일본행성(日本行省)의 신하가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대군(大軍)은 현재 거제도(巨濟島)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에 도착하니, 섬 사람이 말하기를, ‘태재부(太宰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예전에 수군(戍軍)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미 징발되어 싸우러 나갔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비어 있는 틈을 타 쳐들어가서 유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거제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안동부(安東府)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김구용(金九容)은 안동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동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경산부(京山府)
《명시종》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이숭인(李崇仁)은 경산부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경산은 지금의 성주(星州)이다.
○ 강주(康州)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속군(屬郡)에 강주(康州)가 있는데, 고려에서 남쪽으로 5000리 되는 곳에 있으면서 명주(明州)와 마주 보고 있다. 강주의 이웃 군을 무주(武州)라고 한다. 귤과 유자가 생산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강주(康州)와 무주(武州)는 모두 신라 때의 주 이름이다. 고려 때 강주는 진주(晉州)로 고쳤는데, 지금은 그대로 따랐으며, 무주는 광주(光州)로 고쳤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아래에 나온다.

이상은 경상도에 예속되었다.

○ 전주(全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征東省)은 전라주도권과사(全羅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금마군(金馬郡)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강역총론 삼경조(疆域總論三京條)에 나온다.
○ 남원부(南原府)
《경의고(經義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이정(李靖)은 문종 때 지남원 부사(知南原府事)가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원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나주(羅州)ㆍ승주(昇州) -승주(勝州)로 되어 있는 데도 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송(王誦)이 졸하고 그의 동생인 왕순(王詢) -삼가 살펴보건대, 현종(顯宗)이다.- 이 국사를 임시로 맡아 처리하였다. 거란이 고려를 습격하자 왕순이 승라주(昇羅州)로 옮겨 가서 피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나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으며, 승주는 지금의 순천부(順天府)이다.
《요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開泰) 2년(1013) -고려 현종 4년- 에 고려에 대해 잘 아는 여진 사람이 말하기를, “개경에서 동쪽으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이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남쪽에도 2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승주(勝州)는 바로 《송사》에서 말한 승주(昇州)가 와전된 것이다.
○ 광주(光州)ㆍ현봉성(玄鳳城)ㆍ진원현(珍原縣)ㆍ갑향현(甲向縣)ㆍ옥과현(玉果縣)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箚刺䚟)가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였다. 그 뒤에 또 3년에 걸쳐 잇따라 고려를 정벌해 광주(光州), 안성(安城), 충주(忠州), 현봉(玄鳳), 진원(珍原), 갑향(甲向), 옥과(玉果) 등의 성을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광주와 옥과현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진원은 지금 장성부(長城府)에 병합되었다. 갑향은 바로 갑향(甲鄕)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말기에 지금의 창평현(昌平縣)에 병합되었다. 현봉은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 진도현(珍島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도성은 제주(濟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 진도(珍島) 위에 있으며, 진도군(珍島郡)이라고도 한다. 송나라 함순(咸淳) 6년(1270)에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킨 배중손(裵仲孫)이 고려 왕 왕식(王植)의 서족(庶族)인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세워 왕으로 삼고는 진도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몽고에서 토벌해 평정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도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탐라현(耽羅縣)
《원사》 탐라열전(耽羅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탐라는 고려의 여국(與國)이다. 세조(世祖)가 이미 고려를 신하로 복속시키고는 탐라가 남송(南宋), 일본(日本)과 통하는 요충지라고 여겨 주의를 기울였다.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반적(叛賊) 김통정(金通精)이 탐라로 도망쳐 들어갔다. 10년(1273)에 경략사(經略使) 흔도(忻都) 등에게 명하여 탐라의 적당(賊黨)을 정토하게 하였는데, 적당들을 평정하고서 그 지역에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를 세우고, 진변군(鎭邊軍)을 주둔시켰으며, 공부(貢賦)로 해마다 모시포(毛施布) 100필을 바치게 하였다. 초토사는 뒤에 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로 바꾸고, 또다시 군민안무사(軍民按撫司)로 바꾸었다. 31년(1294)에 고려 왕이 상언(上言)하여 탐라 지역은 조종조 이래로 본국에 신속(臣屬)하였으니 그 나라를 예전대로 돌려 달라고 청하자, 황제가 그러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마침내 다시 고려에 예속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를 보면, 탐라국은 전라도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탐라국기(耽羅國紀)에 상세하게 나온다.- 태조 때 탐라국의 태자가 와서 조회하였다. 숙종(肅宗) 때 탁라(乇羅)를 개칭하여 탐라군으로 삼았다. 의종(毅宗) 때 현령을 두었다. 희종(煕宗) 7년(1211)에 탐라현의 석천촌(石淺村)을 귀덕현(歸德縣)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12년(1271)에 김통정이 삼별초(三別抄)를 거느리고 들어가서 난을 일으켰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김방경(金方慶)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원나라에서 장군 흔도를 파견하여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군사 500명을 남겨 두어 진압하였다. 충렬왕 3년(1277)에 원나라에서 목장을 설치하였다. 20년(1294)에 충렬왕이 원나라에 조회하면서 주청하여 마침내 탐라를 돌려받아 다시 본국에 예속되었다. 이에 제주(濟州)로 삼고는 비로소 최서(崔瑞)를 목사로 삼았다. 26년(1300)에 원나라의 태후(太后)가 또 내구마(內廏馬)를 방목하였다. 31년(1305)에 우리나라에 다시 속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1318)에 초적(草賊) 사용(士用)과 엄복(嚴卜)이 군사를 일으켜 어지럽히자, 사인(士人) 문공제(文公濟)가 군사를 출동시켜 주살하고서 원나라에 아뢰니, 원나라에서 다시 관리를 두었다. 공민왕 11년(1362)에 원나라에 예속시켜 주기를 청하자, 원나라에서 다시 만호(萬戶)를 두었다. 16년(1367)에 원나라에서 주(州)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때 목호(牧胡)가 강성하여 국가에서 파견한 목사와 만호를 자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金庾)가 목호를 토벌하였다. 그러고는 왕이 원나라에 상주하여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서관(署官)하고 기른 말을 뽑아서 바치기를 예전처럼 해 주기를 요청하니, 원나라에서 따랐다. 이때 원나라 순제(順帝)가 제주에서 피난하고자 하여 궁실을 짓고서는 어부(御府)의 금백(金帛)을 실어 왔으나, 다음 해에 원나라가 망하였다. 23년(1374)에 명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좋은 말 2000필을 가지고 오게 하였는데, 문하 평리(門下評理) 한방언(韓邦彦)을 제주에 파견하여 말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러자 합적(哈赤),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 관음보(觀音保)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어찌 감히 세조황제(世祖皇帝)께서 방목한 말을 명나라에 바칠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300필만 보냈다. 이에 왕이 최영(崔瑩)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평하였다. 지금은 제주목이 되었다.

이상은 전라도에 예속되었다.

○ 교주(交州)
《원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동성은 동계교주도권과사(東界交州道勸課使)를 거느린다. -삼가 살펴보건대, 교주는 지금의 회양부(淮陽府)이다.
○ 춘주(春州)ㆍ동주(東州)ㆍ화산(禾山)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헌종(憲宗) 3년(1253) 12월에 종왕(宗王) 야호(耶虎)에게 명하여 홍복원(洪福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화산(禾山), 동주(東州), 춘주(春州)를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춘주는 지금의 춘천부이고, 동주는 지금의 철원부(鐵原府)이다. 화산(禾山)은 바로 화산(花山)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의 홍천(洪川)과 김화(金化)의 고려 때 별호가 화산(花山)이다.
○ 이주(伊州)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 3년에 그의 동생인 야굴왕(也窟王)으로 하여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의 동계(東界)로 들어가게 하고, 아모간(阿母侃)과 홍복원으로 하여금 북계(北界)로 나아가게 하였다. 몽고의 군사가 대이주(大伊州)에 주둔하고서 옛 화주(和州)를 향해 나아가자, 고려 사람들이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버티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주(伊州)는 바로 이천(伊川)의 잘못된 표기이며, 이천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이상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 해주(海州)ㆍ백주(白州)ㆍ옹진현(瓮津縣)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강도(芝岡島)로부터 순풍을 만나 바다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옹진(甕津) 어귀에 닿아 상륙한 뒤, 다시 육로로 160리를 가서 고려의 경내인 해주(海州)에 닿고, 또다시 100리를 가서 염주(閻州)에 닿고, 또다시 40리를 가서 백주(白州)에 이르고, 또다시 40리를 가서 그 나라의 국도(國都)에 이르렀다. -삼가 살펴보건대, 해주와 옹진현은 모두 지금 그대로 따랐다. 백주는 지금의 배천군(白川郡)이다.
○ 염주(鹽州) -어떤 데에는 연안부(延安府)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염주(閻州)로 되어 있다.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2년(1252)에 아모간(阿母侃)이 고려의 염주(鹽州)에 주둔하였다.
《엄주별집(弇州別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도(金濤)는 고려국의 연안(延安) 사람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의 해주에서 100리를 가면 염주(閻州)에 이르고, 또다시 40리를 가면 백주에 이른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추론해 보면, 염주는 바로 염주(鹽州)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지금의 연안부이다. 고려 충선왕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 평주(平州)
《요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배압(蕭排押)이 통화(統和) 연간에 성종(聖宗)이 고려를 정벌할 적에 종정(從征)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진격하였는데, 개경(開京)의 서령(西嶺)에 이르러서 고려 군사를 격파하였다. 그러자 고려 왕 왕순(王詢)이 두려워서 평주(平州)로 도망하였다. 이에 소배압이 개경으로 들어가서 크게 약탈한 다음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주는 지금의 평산부(平山府)이다. 이 당시에 고려 왕이 전란을 피해 남행(南幸)하였는바, 평주로 도망쳤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봉주(鳳州)ㆍ동주(洞州)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太宗) 을미년(1235)에 당고발도아(唐古拔都兒)에게 명하여 홍복원과 함께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봉주(鳳州), 해주(海州), 동주(洞州) 세 주의 산성을 함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주는 지금의 봉산군(鳳山郡)이고, 동주는 지금의 서흥부(瑞興府)이다.
○ 신주(信州)ㆍ영녕현(永寧縣)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신주(信州) 영녕(永寧) 사람인 강전(康戩)은 자가 휴우(休祐)인데, 아버지인 강윤(康允)은 3대 동안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주는 지금의 신천군(信川郡)이고, 영녕은 지금의 송화현(松禾縣)이다.
○ 황주(黃州)ㆍ안악군(安岳郡)ㆍ토산현(土山縣)ㆍ장명진(長命鎭)ㆍ철화진(鐵化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성(海州城)은 국성(國城)에서 서남쪽으로 2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닷가에 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동북쪽은 바로 안악현이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경내에 안악(安岳), 삼화(三和), 용강(龍岡), 함종(咸從), 강서(江西)의 다섯 현과 장명진(長命鎭) 한 진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황주(黃州)에 속하였다. 모두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았다.” 하였다. ○ 또 이도기(理道記)를 보면, 조선 황해도의 황주, 봉주(鳳州)에서 중화(中和)에 이르는데,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불과 360리이며, 중화현에서 동쪽은 바로 토산현(土山縣)이다. 두 현은 모두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으며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지금은 예전 그대로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주와 안악은 모두 지금 그대로 따랐다.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장명은 지금의 장련현(長連縣)이다. 철화는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철화(鐵和)로 되어 있으며, 뒤에는 황주에 병합되었다. 삼화, 용강, 함종, 강서 네 현 및 중화현은 본디 북계(北界)에 예속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또 아래에 나온다.- 이상의 여러 성들은 모두 고려 때 처음 설치된 것으로, 《대청일통지》에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정주조(靜州條)에서 상세하게 밝혔다.

이상은 모두 황해도(黃海道)에 예속되었다.

○ 함주(咸州)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을사년(1245)에 정종(定宗)이 아모한(阿母罕)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홍복원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함주(咸州), 평로성(平鹵城)을 함락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예종(睿宗) 2년(1107)에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취하여 함주를 두었는데, 지금의 함흥부(咸興府)이다. 그 뒤 4년(1109)에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동북계연혁조(東北界沿革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함주는 생각건대 바로 성을 철수해 돌려준 뒤에 내지(內地)에 교치(僑治)를 두고서 단지 그 이름만 존속시킨 것일 뿐이다. 평로성은 지금의 평안도 영원현(寧遠縣)이다. 함주와 평로성을 아울러 거론하였으니, 이는 영원현과 서로 가까이에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 등주(登州)ㆍ화주(和州)
《원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원(至元) 1년(1264)에 등주(登州)와 화주(和州) 등지의 모든 여진 사람들에게 고려의 경계에 들어가서 노략질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등주는 지금의 안변부(安邊府)이고, 화주는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 고주(高州)ㆍ문주(文州)ㆍ정주(定州)
《명사(明史)》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동북계 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타길성(駝吉城)ㆍ아로성(亞魯城)
《금사(金史)》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동북계 연혁 구성조(九城條)에 나온다.

이상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다.

○ 서경(西京) -어떤 데에는 평양(平壤)으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검성(王儉城)은 바로 평양성이다. 수(隋)나라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조선도(朝鮮道)로 나아갔는데, 바로 이곳이다. 오대(五代) 시대에 왕건(王建)이 고려에 웅거하면서 비로소 서경(西京)이라고 일렀다. 동관보(潼關堡)가 평양 서경에 있는데, 역시 조선에서 수졸(戍卒)을 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양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 강동현(江東縣)ㆍ중화현(中和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동성(江東城)은 평양의 동쪽에 있다. 고려에서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강동군(江東郡)이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군은 대동강(大同江) 동쪽 언덕에 바짝 다가가 있는데, 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가면 바로 중화현(中和縣)이다.” 하였다. 송나라 가정(嘉定) 9년(1216)에 거란(契丹)의 부장(部長)인 육가(六哥)가 고려에 쳐들어가서 강동성에 웅거하였는데, 금나라의 임금 아골타(阿骨打)가 군사를 파견해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육가를 공격해 격파한 것은 바로 몽고의 임금인 철목진(鐵木眞)이 한 일로, 금나라 임금이 하였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강동현과 중화현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여섯 성을 국경 가에 수축하고는 곽주(郭州)라 하였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였는데, 동주(銅州), 곽주(霍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하였고, 《문헌비고》에는 이르기를, “곽주(霍州)는 바로 곽주(郭州)이다.” 하였는데, 모두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 영주(靈州) -어떤 데에는 흥화군(興化軍)으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흥주(興州)로 되어 있다-ㆍ철주(鐵州)ㆍ정융진(定戎鎭)ㆍ희주(煕州)ㆍ무주(撫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철주성(鐵州城) 역시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에서 주를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도 철주성을 설치하였다. 정융진을 관할한다. 지금 그대로 따라 철주라고 한다. 또 그 서북쪽에 있는 것을 영주(靈州)라고 하는데,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예전 명칭을 그대로 쓴다. 또 희주성(煕州城)이 철주의 동북쪽에 있는데, 당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희천군(煕川郡)이라 한다.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을 무주(撫州)라고 하는데,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예전의 명칭을 그대로 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설치하고서는 흥주(興州), 철주(鐵州)라고 하였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개태(開泰) 6년(1017)에 고려의 흥화군(興化軍)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하였으며, 《고려사》에 의거하면, 흥주에 흥화진(興化鎭)을 만들었다. 그런즉 흥화군은 흥주이다. 고려 현종 때 승격시켜 영주(靈州)라 하였다. 지금은 의주(義州)에 병합되었는데, 의주에서 남쪽으로 55리 되는 곳에 있다. 정융진 역시 의주에 병합되었는데, 의주에서 동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철주는 지금의 철산부(鐵山府)이다. 희주는 지금의 희천군이다. 무주는 지금 덕천군(德川郡)에 병합되었는데, 덕천군에서 서쪽으로 180리 되는 곳에 있다.
○ 가주(嘉州) -혹은 가주(葭州)라고도 한다-ㆍ용주(龍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주성(嘉州城) 역시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 지금은 가산군(嘉山郡)이라고 한다. 서쪽으로 의주의 경계에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안주(安州)의 경계에 접하였다.
○ 강서현(江西縣)ㆍ함종현(咸從縣)ㆍ용강현(龍岡縣)ㆍ삼화현(三和縣)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황주조(黃州條)에 나온다.
○ 구주(龜州) -어떤 데에는 정원부(定遠府)로 되어 있다-ㆍ자주(慈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원성(定遠城)은 평양의 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에 속하였으며, 그 뒤에는 존폐가 일정치 않았다.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라 정원부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대로 따랐다. 그 남쪽에 있는 것을 자주성(慈州城)이라고 하는데,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자산군(慈山郡)이 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설치하고는 구주(龜州)라 하였다.”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를 근거로 하여 보면, 구주를 고종 때 승격시켜 정원부(定遠府)로 삼았으며, 또 정주(定州)로 고쳤다. 그 뒤에는 치소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는데, 바로 지금의 정주이다. 옛 구주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자주는 지금의 자산부(慈山府)이다.
○ 곽주(郭州) -어떤 데에는 곽주(霍州)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주성(郭州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발해 때에 그대로 따랐고, 그 뒤에는 요나라에 속하였다. 재기(載記)를 보면, 당초에 거란이 압록강 북쪽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은 마땅히 동쪽이어야 한다.- 을 고려에 주자, 고려에서는 흥주(興州), 철주(鐵州), 통주(通州), 용주(龍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등 모두 여섯 성을 축조하였다. 송(宋)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에 거란이, 고려 왕이 멋대로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한 데다가 또 들어와서 조회하지 않은 데 대해 노하여 다시 6주의 지역을 빼앗기로 의논하였는데, 어떤 자가 이르기를, “개경에서 말을 타고 7일을 가면 넓기가 개경만 한 큰 성채가 있는데, 주위의 여러 주에서 보내오는 진귀한 물품이 모두 그곳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승라주(勝羅州) 등의 남쪽에도 두 개의 큰 성채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물품이 쌓여 있습니다. 만약 대군이 압록강에서 대하(大河)를 따라서 올라가면 곽주(郭州)에 이르러서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고려를 취하여서 차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7년(1014)에 거란이 야율세량(耶律世良)과 소굴렬(蕭屈列)을 파견하여 고려와 곽주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원나라 때에도 이곳에 곽주를 두었다. 지금은 곽산부라고 한다.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 3년(1231)에 오야이(吾也而)가 고려를 정벌하여 용주(龍州), 선주(宣州), 태주(泰州), 가주(葭州)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가주(葭州)는 가주(嘉州)의 음이 와전된 듯하며, 지금의 가산군(嘉山郡)이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부(龍川府)이다.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축조하고는 용주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 성주(成州)ㆍ수덕진(樹德鎭)ㆍ순주(順州)ㆍ개주(价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주성은 평양의 동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 수덕진을 관할한다. 지금은 성천부(成川府)라고 한다. 또 그 북쪽에 있는 것을 순천군(順川郡)이라고 하며, 순천군의 서쪽에 있는 것을 개천(价川)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개천군(价川郡)이라고 한다. 모두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이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성천은 지금의 성천부이다. 수덕진은 지금은 양덕현(陽德縣)에 병합되었는데, 양덕현에서 서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다. 순주와 개주는 고려 때 주라고 칭하였으며,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 순천(順川)과 개천(价川)으로 고쳤는바, 《원사》 동녕로조(東寧路條)에 순주와 개주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 개주와 순주를 개천과 순천으로 고치고서 그것이 원나라 때의 옛 이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숙주(宿州)ㆍ은주(殷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주는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또 그 동북쪽에 있는 것을 은주성(殷州城)이라고 한다. 모두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옛 이름을 그대로 쓴다. -삼가 살펴보건대, 숙주(宿州)는 바로 숙주(肅州)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의 숙천부(肅川府)이고,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다.
○ 덕주(德州)ㆍ영청현(永淸縣)ㆍ통해현(通海縣)ㆍ순화현(順化縣)ㆍ영원진(寧遠鎭)ㆍ유원진(柔遠鎭) -어떤 데에는 평로성(平鹵城)으로 되어 있다-ㆍ안융진(安戎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덕주성(德州城)은 함흥부의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그 뒤에 그대로 따랐고, 원나라 때에는 그대로 이어 덕주를 설치하였다. 강동현, 영청현, 통해현, 순화현 네 현과 영원진, 유원진, 안융진 세 진을 관할한다. 뒤에 고려에 함락되었으며, 고려에서는 그대로 덕주라고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덕주는 지금의 덕천군(德川郡)이다. 영청현, 통해현은 지금은 영유현(永柔縣)에 병합되었다. 순화(順化)는 바로 순화(順和)의 오기(誤記)로, 지금의 순안현(順安縣)이다. 안융진은 지금 안주(安州)에 병합되었으며, 안주에서 서쪽으로 65리 되는 곳에 있다. 유원진은, 《고려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본디는 평로진(平虜鎭)으로,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하였다. 유원진과 영원진은, 《고려사》를 근거로 하여 보면, “유소(柳韶)가 수축한 장성이 서해 바닷가의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운주(雲州)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이다-, 안수(安水), 청새(淸塞) -지금의 희천군(煕川郡)이다-, 평로(平虜), 영원(寧遠), 맹주(孟州) -지금의 맹산현(孟山縣)이다.- 등의 성을 지나서 화주(和州) -지금의 영흥부(永興府)이다.- 에 이르렀다.” 하였다. 그런즉 평로진과 영원진은 마땅히 희천과 맹산의 사이에 있어야만 한다. 《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영원진은 지금의 영원현(寧遠縣)이다. 유원진 역시 마땅히 영원현의 경내에 있어야 한다.”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여지승람》에서 영원진과 유원진이 지금은 영유현에 합하여졌다고 한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또 살펴보건대, 《원사》 열전을 보면, “을사년(1245)에 홍복원이 고려를 정벌하여 함주(咸州)와 평로성(平鹵城)을 함락시켰다.” 하였다. 또 《묵사(墨史)》에는 이르기를, “고려에서 먹[墨]을 진공(進貢)하였는데, 그 명문(銘文)에 평로성진공(平鹵城進貢)이니 순주공묵(順州貢墨)이니, 맹주공묵(猛州貢墨)이니 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하였다. 평로성은 바로 평로진(平虜鎭)이다. 평로(平鹵)의 로(鹵)가 《고려사》 지리지에는 로(虜)로 되어 있는데, 마땅히 먹에 새겨진 글자를 바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창주(昌州)ㆍ삭주(朔州)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삭주성(朔州城)은 평양의 북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도 역시 삭주라고 한다. 또 그 동북쪽에 창주성(昌州城)이 있는데, 이 역시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이다.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창성부(昌城府)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창주는 지금의 창성부이고, 삭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태주(泰州) -어떤 데에는 광화(光化)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주성(泰州城)은 정원부(定遠府)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의 서쪽에 있다.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은 태천현(泰川縣)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추격하여 고려의 서북쪽에 있는 광화(光和)의 경계에 이르렀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이르기를, “태주는 본디 광화현(光和縣)인데, 광종(光宗) 때 태주로 칭하였다.” 하였다. 지금의 태천군(泰川郡)이다.
○ 선주(宣州) -어떤 데에는 통주(通州)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동주(銅州)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강주(鋼州)로 되어 있다-ㆍ영삭진(寧朔鎭)ㆍ석도진(蓆島鎭) -어떤 데에는 군도진(羣島鎭)으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선주성(宣州城)은 평양에서 동북쪽으로 2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여 안동도호부에 속하였다. 요나라 때에 그대로 따라 선주(宣州)라고 하였으며, 역시 정원군(定遠軍)이라고도 하였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태(開泰) 3년(1014)에 설치하였으며, 치소는 보주(保州)이다.” 하였다. 대개 발해 때 폐지한 것을 요나라 때 다시 설치한 것이다. 원나라 때에도 선주라 하였으며,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영삭과 군도 두 주를 거느린다. 바로 지금의 선천군(宣川郡)이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였다.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강조(康肇)가 동주(銅州)에서 막아 싸웠는데, 이를 패퇴시켰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주성(鋼州城)은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송나라 대중상부(大中祥符) 연간에 거란이 고려를 쳤는데, 고려의 장수 강조가 패하여 강주(鋼州)에 들어가 있다가 거란의 포로가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고려에서 국경 가에 여섯 성을 쌓고는 통주(通州)라고 하였다.” 하였고,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통주는 현종 때 선주(宣州)라고 개칭하였는데,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다. 《요사》에서 이른 바 동주(銅州)는 바로 통주(通州)의 음이 와전된 것이며,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바 강주(鋼州)는 바로 동주(銅州)의 오자(誤字)로, 모두 같은 곳이다. 영삭진(寧朔鎭)은 지금 의주에 편입되었는데, 의주에서 동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다. 군도(羣島)는 《원사》에 석도진(蓆島鎭)으로 되어 있는데, 대개 섬 안에 진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아도 상고할 수가 없다.
○ 맹주(孟州) -어떤 데에는 맹주(猛州)로 되어 있다-ㆍ삼등현(三登縣)ㆍ초도진(椒島鎭)ㆍ가도진(椵島鎭)ㆍ영덕진(寧德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맹주성(孟州城)은 조선의 국성(國城) 서쪽에 있다. 당나라 때 맹주를 설치하였다. 삼등현과 초도진, 가도진, 영덕을 거느린다. 지금은 주(州)는 폐지되고 현(縣)만 남아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묵사》를 보면 “고려에서 먹[墨]을 진공(進貢)하였는데, 그 명문(銘文)에 어떤 것에는 맹주진공(猛州進貢)이라 하였다.” 하였다. 또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의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맹주(孟州)가 어떤 데에는 맹주(猛州)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곳이다. 지금의 맹산현(孟山縣)이다. 삼등현(三登縣)은 지금 그대로 따랐다. 초도는 지금의 풍천(豐川) 앞바다에 있고, 가도는 지금의 철산(鐵山) 앞바다에 있다. 대개 고려 때 이 두 섬에 진을 설치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대개 역사 기록이 탈략(脫略)된 것이다. 영덕진은 《원사》에는 영득진(寧得鎭)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의주에 편입되었는데, 의주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다.
○ 연주(延州)ㆍ양암진(陽巖鎭)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연주성(延州城)은 함흥부(咸興府)의 서북쪽에 있다. 역시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예전의 명칭을 그대로 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 운산군(雲山郡)에 편입되었으며, 운산군에서 동쪽으로 40리 되는 곳에 있다. 양암진은 지금의 양덕현(陽德縣)이다. 《원사》 동녕로조(東寧路條)를 근거로 해서 보면, 양암진은 연주에서 관할하였므로 이곳에다가 부기(附記)하였다.
○ 운주(雲州) -어떤 데에는 위화(威化)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운주는 평양의 동북쪽에 있다. 당나라 때 설치하였으며, 원나라 때에 그대로 따랐고, 지금 역시 운흥군(雲興郡)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칠 적에 고려의 서북쪽 지역인 위화(威化)까지 추격하여 이르렀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운주는 광종 때 위화진(威化鎭)이라고 칭하였다가 성종 때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지금의 운산군(雲山郡)이다. 《대청일통지》에서 운흥군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의주(義州)
《금사》 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大定) 15년(1175)에 고려에서 상주하기를,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사신을 파견하여 고하고자 하나, 의주로(義州路)가 막혀 통할 수가 없으니, 정주(定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정평부(定平府)이다.- 를 경유해서 갈라로(曷懶路)로 들어가 아뢰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허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의주는 지금 그대로 따랐다.
○ 정주(靜州)ㆍ인주(麟州)ㆍ위원진(威遠鎭)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정주(靜州)와 위원진은 지금 의주에 편입되었는데, 의주에서 남쪽으로 25리 되는 곳에 있다. 인주는 지금 의주의 인산진(麟山鎭)이다. 대개 서경 이하의 여러 주(州), 현(縣), 진(鎭) 및 서해도(西海道)의 황주(黃州) 등 다섯 성은 모두 《원사》 지리지에 나오는바, 동녕로에 예속된 것들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서북계연혁조(西北界沿革條)에 나왔다.- 《원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안동도호부는 당나라 말기부터 그 지역이 고려에 편입되었다. 주(州)와 진(鎭)을 설치하였다. 지원(至元) 6년(1269)에 그 지역이 와서 귀부하자 동녕로에 속하게 하였다.” 하였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잘못 이 설에 의거하여 이상에서 말한 여러 성들을 모두 당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원나라에서는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전혀 말이 안 된다. 동녕로의 주와 진은 모두 고려에서 설치한 것이니, 어떻게 당나라 때의 옛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 영주(寧州)ㆍ위주(渭州) -어떤 데에는 귀주(貴州)로 되어 있고, 어떤 데에는 덕성(德成)으로 되어 있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하였는데,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주(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동주(銅州)의 잘못된 표기이다.- 와 가까운 곳으로는 또 비주(費州)와 귀주(貴州) 등이 있다. 혹자는, 비주는 지금의 매주(買州)의 와전이라고 하고, 귀주는 지금의 위주(渭州)의 와전이라고 말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고려 때 영주안북부(寧州安北府)라고 칭하였는바, 지금의 안주(安州)이다. 귀주는 《대청일통지》에서 이른바 위주(渭州)의 와전이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로,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다. 그리고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추격하여 고려의 서북쪽 지역인 덕성(德成)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를 근거로 해서 보면, 위주는 일명 옛 덕성이라고 한다. 그런즉 덕성은 역시 위주인 것이다. 고려 문종 때 위주가 이미 폐지되고 무주(撫州)가 치소(治所)가 되었으므로 《원사》 지리지에서는 싣지 않은 것이다.
○ 박주(博州) -어떤 데에는 덕창(德昌)으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운주(雲州)의 동북쪽에 박천성(博川城)이 있는데, 고려에서 설치한 것이다. 지금은 그대로 박천군(博川郡)이라고 한다. 서남쪽으로는 자산군(慈山郡)과 경계를 접하였고, 동쪽은 개천군(价川郡)과 경계를 접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를 보면, “거란이 여진을 추격하여 고려의 서북쪽 지역인 덕창에까지 이르렀다.” 하였으며, 《고려사》 지리지를 보면, 박주는 일명 덕창이라고 한다. 원종(元宗) 때 주가 이미 폐지되고 가주(嘉州)에 속하였으므로 《원사》 지리지에서는 누락된 것이다.

이상은 북계(北界)에 예속되었다.


부(附) 미상(未詳)의 성읍(城邑)


○ 오리산성(五里山城)ㆍ옹자성(瓮子城)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영조(王榮祖)가 기축년(1229)에 북경등로정행만호(北京等路征行萬戶)에 제수되어 고려를 정벌하였다. 또 제왕(諸王) 야홀(也忽)을 따라 삼한(三韓) 지역을 정벌하여 천룡성(天龍城) 등 여러 진보(鎭堡)를 함락하였는데, 군사들에게 난폭하게 약탈하는 것을 금지시키니 백성들이 모두들 기뻐하였다. 오리산성을 격파하고는 주장(主將)에게 청하여 그 백성들을 보존시켜 주었다. 마침내 옹자성(瓮子城), 죽림채(竹林寨) 및 고섬(苦苫) 등 몇 개의 섬을 함락하고는 진을 고려의 평양(平壤)으로 옮겼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천룡성은 충주(忠州) 근처에 있다. 고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에 있는 해도(海島)이다. 오리산성 및 옹자성은 지금 천룡성이나 고섬과 함께 거론하였으니 이들 두 성은 마땅히 한강 남쪽에 있어야 한다.
○ 개주(開州)ㆍ수주(受州)ㆍ화량성(花涼城)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매노(買奴)가 정행만호(征行萬戶)로써 태종 경인년(1230)에 고려의 화량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러고는 진군하여 개주(開州)를 공격해 개주의 장수 김사밀(金沙密)을 포로로 잡았으며, 마침내 용주(龍州), 선주(宣州), 운주(雲州), 태주(泰州) 등 14성을 함락하였다. ○ 태종 3년(1231)에 오야이(吾也而)가 살리탑(撒里搭)과 함께 고려를 정벌하여 수주, 개주, 용주, 선주, 태주, 가주(葭州)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 금산(金山)ㆍ귀주(歸州)
《원사》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종 을미년(1235)에 당고발도아(唐古拔都兒)에게 명하여 홍복원(洪福源)과 더불어 나아가 고려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용강(龍岡), 함종(咸從) 두 현과 봉주(鳳州), 해주(海州), 동주(洞州) 세 주의 산성 및 자주(慈州)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또 금산(金山), 귀주(歸州), 신주(信州), 창주(昌州), 삭주(朔州)를 함락하였다.
○ 비주(費州) -어떤 데에는 매주(買州)로 되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위주조(渭州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개주(開州) 이하의 여러 성은 비록 이를 증명할 다른 서책은 없지만, 이들은 모두 서북쪽 지방에 있는 성 이름이다.


[주D-001]오음(五音) : 음률의 기본이 되는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를 말한다.
[주D-002]객산(客山)은 …… 있다 : 원문에는 ‘實主丙壬’으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에 의거하여 ‘賓主丙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주량(朱梁) : 오대 시대 때의 양(梁)나라를 말한다. 주씨(朱氏)가 창건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하며, 대개 남조(南朝)의 소량(蕭梁)과 구별하기 위해 주량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D-004]왕식(王植)의 서족(庶族)인 승화후(承化侯) : 왕식은 원종(元宗)의 이름이고, 승화후는 왕온(王溫)이다. 원종 11년(1270)에 원종이 강화도에서 나와 개성으로 환도할 때 삼별초(三別抄)의 영수로 있던 배중손(裵仲孫)이 이에 따르지 않고는 강화에서 반란을 일으켜 승화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주D-005]충민왕(忠愍王) : 공민왕(恭愍王)의 잘못된 표기이다. 정추는 공민왕 15년(1366)에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인하여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되었다.
[주D-006]일본행성(日本行省) :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설치하였던 관청으로, 3차에 걸쳐서 세워졌는데, 일본 정벌을 포기한 뒤로는 고려에 대한 간섭 기관으로 변모되어 공민왕 5년(1356)까지 존속하였다.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정동행성(征東行省), 정동성(征東省) 등으로도 칭하였다.
[주D-007]명주(明州)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영파부(寧波府)이다.
[주D-008]목호(牧胡) : 원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말을 기르는 몽고인을 말한다.
[주D-009]홍천(洪川) : 원문에는 ‘洪州’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0]헌종(憲宗) : 원문에는 ‘定宗’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대동강(大同江) : 원문에는 ‘大東江’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육가(六哥) : 야율육가(耶律六哥)이다. 금나라의 북변 천호(北邊千戶)로 있다가 몽고군이 침입하자 10여 만 명의 무리를 끌어 모아 몽고에 붙었다. 스스로 요왕(遼王)이 되어서는 연호를 원통(元統)으로 고치고 요동 지방을 차지한 다음, 지금의 개원(開原)인 함평(咸平)에 도읍하였다가 다시 몽고에 항복하여 원수(元帥)가 되었다. 야율유가(耶律留哥)로 표기하기도 한다.
[주D-013]통주(通州) : 원문에는 ‘通山’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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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2
조선(朝鮮)

○ 조선의 강역은 삼면이 바다로 막혔고, 북쪽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는바, 지역이 전 시대보다 훨씬 더 넓다.
《홍서(鴻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동은 옛날의 병주(幷州)와 영주(營州) 지역이다. 그 뒤쪽은 사막(沙漠)이고 앞쪽은 바다이다. 그 남은 기운이 조선국이 되었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은 바다에 닿았고, 북쪽은 여직(女直)과 이웃하였으며,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다. 동서 간의 거리는 20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4000리이다. 국성(國城)에서 경사(京師)까지는 3500리이고, 남경(南京)까지는 4000리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이르기를,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따르면 조선의 10리는 우리의 1리이다. 일본의 거리로 계산하면 조선국은 동서 간의 거리가 200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가 400리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은 성경(盛京)에서 동쪽으로 18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까지가 770리이고, 남쪽으로는 바다까지가 1300리이고, 서남쪽으로는 바다까지가 80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압록강까지가 750리이고, 북쪽으로는 구련성(九連城)까지가 1115리이다. 조공하는 길은 봉황성(鳳凰城)에서 연경(燕京)까지가 3096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성에서 동쪽으로 강릉부(江陵府)까지가 600리이고, 서쪽으로 풍천부(豐川府)까지가 560리이고, 남쪽으로 해남현(海南縣)까지가 1007리이고, 북쪽으로 온성부(穩城府)까지가 2101리이다. 동서 간의 거리는 합하여 1162리이고, 남북 간의 거리는 합하여 3108리이다.
○ 압록강과 두만강 바깥쪽은 모두 성경(盛京)에서 관할하는 변계(邊界)이다.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그 나라의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며, 정북쪽은 모련(毛憐)과 해서(海西)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건주는 지금의 흥경(興京) 지방이고, 모련과 해서는 지금의 영고탑(寧古塔) 등지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경(盛京)의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희객탑산(希喀塔山)까지가 200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봉천장군(奉天將軍)이 관할하는 강역은 동남쪽으로는 진강성(鎭江城)까지가 540여 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봉황성(鳳凰城)의 성수(城守)는, 동쪽으로는 애강(靉江)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고, 동남쪽으로는 의주강(義州江)까지 1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영고탑은 남쪽으로 토문강(土門江)까지가 60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 오라(烏喇) 성수(城守)는 남쪽으로 장백산(長白山)까지 1300여 리이며, 그 남쪽은 조선과 경계이다. ○ 혼춘(渾春)은 서쪽으로 토문강까지가 20리로, 조선과 경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희(康煕) 54년(1715)에 혼춘(渾春)의 고이객제(庫爾喀齊) 등지가 조선과 단지 토문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오가다가 일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장수 안도립타(安都立他)로 하여금 목노(木弩), 방옥(房屋), 와포(窩舖)를 즉시 철거하여 영고탑에서 파견한 관병(官兵)의 둔장(屯莊)과 더불어 모두 강에서 조금 먼 곳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이후로는 연강(沿江) 근처에서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는 것을 모두 엄하게 금지시키도록 하였다.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12년(1747)에 조선의 국왕이 봉황성의 성책(城柵)을 설치하는 것과 망우초(莽牛哨)에 군사를 설치하는 것 및 성책 밖에 개간하는 것을 정지해 준 일에 대하여 사은(謝恩)하였다.
○ 경내를 나누어서 팔도(八道)로 만들었다.
《잠확유서(潛確類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동쪽, 서쪽, 남쪽 삼면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북쪽은 압록강에 닿았으며, 북쪽은 여진과 닿았다. 팔도로 나누었는데, 가운데를 경기(京畿)라 한다. 동쪽을 강원도(江原道)라 하는데, 본디 예(濊), 맥(貊) 지역이다. 서쪽을 황해도(黃海道)라 하는데, 옛 조선(朝鮮), 마한(馬韓)의 옛 지역이다. 남쪽을 전라도(全羅道)라 하는데, 본디 변한(卞韓) 지역이다. 동남쪽을 경상도(慶尙道)라 하는데, 바로 진한(辰韓) 지역이다. 서남쪽을 충청도(忠淸道)라 하는데, 모두 옛 마한(馬韓) 지역이다. 동북쪽을 함경도(咸鏡道)라 하는데,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서북쪽을 평안도(平安道)라 하는데, 본디 조선의 옛 지역이다. 나누어 통치하는 군(郡)이 40개, 부(府)가 36개, 현(縣)이 70개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은 팔도이며, 나누어 통치하는 군이 41개, 부가 33개, 주가 38개, 현이 70개이다.
○ 가운데는 경기(京畿)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경기의 치소(治所)는 국성(國城)으로, 조선의 도읍지이다. 한성(漢城)이라고도 한다. 명(明)나라 초기에 고려 왕이 개주(開州)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7도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새(四塞)라고 칭한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양근군(楊根郡), 풍덕군(豐德郡), 수성군(水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원부(水原府)의 옛 호칭이다.- 이고, 부가 3개로 한성부(漢城府), 개성부(開城府), 장단부(長湍府)이고, 주가 7개로 양주(楊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武備志)》에는 상주(傷州)로 잘못 되어 있다-, 광주(廣州), 윤주(潤州) -삼가 살펴보건대, 윤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여주(驪州), 과주(果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과천현(果川縣)으로 개칭하였다-, 곡주(谷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곡산부(谷山府)로 황해도에 속한다-, 파주(波州) -삼가 살펴보건대, 파주(坡州)의 오기(誤記)이다.- 이고, 현이 3개로 교하현(交河縣), 삼등현(三登縣), 토산현(土山縣)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土山)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삼등과 상원은 모두 평안도에 속한다.- ○ 지(志)에 이르기를, “조선에는 삼도(三都)가 있는데, 평양(平壤), 한성(漢城), 송악(松嶽)을 이른다.” 하였다. ○ 풍덕성(豐德城)은 국성의 남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이곳에 풍덕군을 설치하였다. 명나라 만력(萬曆) 20년(1592, 선조25)에 왜적이 부산(釜山)으로부터 몰래 임진(臨津)을 건넌 다음 군사를 나누어서 풍덕군을 함락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무(洪武) 25년(1392, 태조1)에 조선이 지금의 한성부로 천도(遷都)하고서 개성(開城)을 유도(留都)로 삼았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경기는 바로 한양성으로, 가운데에 있다. ○ 그 성은 동쪽에는 여강(麗江), 남쪽에는 한강(漢江), 서쪽에는 서강(西江)의 물이 넘실대고 있고, 남산(南山), 북산(北山), 삼각산(三角山) 등의 산이 높이 솟아 있다. 서울은 사방이 40여 리인데 바위를 자르고 돌을 쌓아 담장을 만들었으며, 푸른 돌로 사방의 벽을 쌓았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기는 본디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지역이다. 태종조에 사방의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개성 동쪽 지역 및 양광도 소사(素沙) 북쪽 지역을 합하여 경기로 만들었다. 관할하는 부가 1개, 목(牧)이 3개, 도호부가 10개, 군이 9개, 현이 13개이다.
○ 경기의 남쪽은 충청도(忠淸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충청도의 치소는 충주(忠州)로, 국성의 서남쪽에 있다. 본디 마한의 옛 지역이다. 왕경이 팔도의 가운데에 있어서 동쪽으로 막은 것이 조령(鳥嶺)과 충주이고, 서쪽으로 막은 것이 남원(南原)과 전라(全羅)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왕경은 조선의 도회(都會)이다. 함경도와 충청도가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서 아울러 천험이라고 칭해진다.” 하였다. 관할하는 군이 4개로 청풍군(淸風郡), 온양군(溫陽郡), 천안군(天安郡), 임천군(臨川郡)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임천(林川)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맞다.- 이고, 주가 9개로 충주(忠州), 청주(淸州), 금주(衿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천(舒川)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산수고 금강조(山水考錦江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정주(靖州) -삼가 살펴보건대, 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행주(幸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경기 고양현(高陽縣)에 병합되었다-, 흥주(興州) -삼가 살펴보건대, 대흥현(大興縣)을 가리키는 듯하다-, 예주(禮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산현(禮山縣)이다-, 홍주(洪州)이고, 현이 7개로 영춘현(永春縣), 보은현(報恩縣), 연산현(連山縣), 부여현(扶餘縣), 석성현(石城縣), 연기현(燕岐縣), 보령현(保寧縣)이다. ○ 공주성(公州城)이 충주의 서남쪽 경계에 있다. 그 동남쪽은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와 가깝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왜적이 남원에 들어왔는데, 마귀(麻貴)가 군사를 출동시켜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막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청주성(淸州城)이 충주의 서쪽에 있는데, 그 동쪽은 천안군(天安郡)에 접하였으며, 천안군의 서남쪽은 공주와 경계를 접하였다. ○ 직산(稷山)은 충주의 서쪽에 있으며, 직산감(稷山監)을 두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이 전라도를 함락시키고 북쪽으로 올라왔는데, 마귀가 군사를 출동시켜 직산을 지켜 왜적의 예봉을 막았다. 또 청산(靑山)이 있는데, 직산과 서로 가깝다. 지(志)에 이르기를, “직산의 남쪽은 바로 천안군성(天安郡城)으로, 남쪽으로 전주(全州)로 내려가는 요도(要道)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충청도는 고려 초에 양광도(楊廣道)라고 칭하였고, 뒤에 충청도로 고쳤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따랐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공주(公州)에 있다. 목 4개, 도호부 1개, 군 12개, 현 37개를 관할한다.
○ 경기의 동쪽은 강원도(江原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원도의 치소는 강릉부(江陵府)로, 국성의 동쪽에 있다. 본디는 예(濊), 맥(貊) 지역이며, 한(漢)나라 때에는 임둔군(臨屯郡)의 경내였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오성군(忤城郡) -삼가 살펴보건대, 간성(杆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평해군(平海郡), 통천군(通川郡), 영월군(寧越郡), 송악군(松岳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기 개성부의 옛 호칭이다-, 정선군(旌善郡), 고성군(高城郡)이고, 부가 5개로 강릉부(江陵府), 회양부(淮陽府), 산척부(山陟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삼척(三陟)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삼보(三步)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양양부(襄陽府), 철원부(鐵原府)이고, 주가 4개로 원주(原州), 강주(江州) -삼가 살펴보건대, 강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괴주(槐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괴산현(槐山縣)으로, 충청도에 속한다-, 명주(冥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명주(溟州)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강릉의 옛 호칭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이고, 현이 10개로 평강현(平康縣), 안창현(安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고성군(高城郡)에 병합되었다-, 기린현(麒麟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기린현(基麟縣)으로, 뒤에 춘천부에 병합되었다-, 주천현(酒泉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원주에 병합되었다-, 단성현(丹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에 속한다-, 인제현(麟蹄縣), 울진현(蔚珍縣), 서화현(瑞和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춘천에 병합되었다-, 흡곡현(歙谷縣)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강원도는 고려 때 대관령(大關嶺) 동쪽 지역은 동계(東界)에 예속되었고, 서쪽 지역은 교주도(交州道)에 예속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를 합하여 강원도라고 하였으며, 관찰사영(觀察使營)은 원주에 있다. 대도호부 1개, 목 1개, 도호부 7개, 군 5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 경기의 서쪽은 황해도(黃海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해도의 치소는 황주(黃州)로, 국성의 서쪽에 있다. 옛 고구려와 마한의 옛 지역이다. 거느리는 군이 2개로 수안군(遂安郡), 평나군(平那郡)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평산부(平山府)는 옛 한나라 때의 평나군(平那郡)이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근거가 없는 설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랐다.- 이고, 부가 3개로 평산부(平山府), 서흥부(瑞興府), 승천부(承天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승천(昇天)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 지금의 경기 풍덕부(豐德府)를 승천부(昇天府)라고 칭하였다.- 이고, 주가 5개로 황주(黃州), 백주(白州), 해주(海州), 애주(愛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의주(義州)로, 평안도에 속한다-, 인주(仁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인천부(仁川府)로 개칭하였다. 경기에 속한다.- 이고, 현이 8개로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삼가 살펴보건대, 삼화현 이하의 네 현은 지금은 평안도에 속한다.- 우봉현(牛峯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평산부에 속한다-, 문화현(文化縣), 장연현(長淵縣)이다. ○ 평산성(平山城)은 황주에서 동북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으며, 혹은 옛 이름을 증산부(甑山府) -삼가 살펴보건대, 증산현(甑山縣)은 평안도에 속하는데, 잘못하여 평산의 옛 호칭이라고 하였다.- 라고도 한다. 서쪽으로는 황주와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평양과 연결된다. 이곳과 가까운 곳으로는 경산(瓊山) -삼가 살펴보건대, 경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이 있다. 지금은 평산부가 되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해도는 그 북쪽은 모두 산이며, 그 남쪽은 바다에 닿았다.
《전목재시집(錢牧齋詩集)》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를 보면, 토산(兎山)은 황해도에 속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삭녕군(朔寧郡)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삭녕군과의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쪽으로는 우봉(牛峯)과의 경계까지 33리이고, 신계(新溪)와의 경계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안협(安峽)과의 경계까지 19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황해도는 고려 때에 서해도(西海道)였다. 조선 태조 초에 풍해도(豐海道)로 고쳤다가 태종조에 개성 서쪽 지역이 와서 속하여 황해도로 개칭하였다. 관찰사영은 해주에 있으며, 목 2개, 도호부 5개, 군 7개, 현 9개를 관할한다.
○ 충청도의 남쪽은 전라도(全羅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전라도의 치소는 전주(全州)로, 국성의 남쪽에 있다. 본디 변한(弁韓) 지역으로, 뒤에 백제국이 되었다. 당나라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정벌하고서 백제 왕을 사로잡은 다음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등 5도독부를 두었다. 그 뒤에 신라에 합병되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가 그 지역을 차지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조선의 지계(地界)는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전라도의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닿았으며,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등 여러 섬이 조선 바다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으면서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왜선(倭船)이 부산에 이르고서도 전라도를 넘어 서해(西海)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팔도 가운데에서 오직 전라도 한 도만이 북쪽에서 볼 때 정남쪽에 있으며, 그 서쪽은 요동(遼東)과 대치하고 있다. 일본이 요계(遼薊) 지방과 동떨어져 있어서 해도(海道)를 통할 수 없는 것은 조선이 있는 데에 힘입어서이며, 조선이 변경을 굳게 지키면서 여러 섬들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전라도가 있는 데 의지해서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전라도 지역은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고, 동쪽으로 경상도에 접해 있어서 조선의 문호가 되는바, 왜적들이 조선을 침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하였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영암군(靈巖郡), 고부군(古阜郡), 진도군(珍島郡)이고, 부가 2개로 전주부(全州府), 남원부(南原府)이고, 주가 4개로 나주(羅州), 제주(濟州), 광주(光州), 앙주(昻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승주(昇州)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 지금의 순천부(順天府)를 승주라고 칭하였다.- 이고, 현이 23개로 만경현(萬頃縣), 무장현(茂長縣), 진안현(鎭安縣), 부안현(扶安縣), 전거현(全渠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구(金溝)의 잘못된 표기이다-, 강진현(康津縣), 흥덕현(興德縣), 황성현(黃成縣) -삼가 살펴보건대, 황성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낙안현(樂安縣), 창평현(昌平縣), 제남현(濟南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반남(潘南)의 잘못된 표기로, 고려 때의 현 이름인데, 지금은 나주(羅州)에 병합되었다-, 회령현(會寧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장흥부(長興府)에 병합되었다-, 대강현(大江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경상도 대구(大邱)의 잘못된 표기로,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상세하게 나온다-, 임파현(臨波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임피(臨陂)의 잘못된 표기이다-, 고고현(古皐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부(古阜)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되었다-, 남양현(南陽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뒤에 보성군(寶城郡)에 병합되었다. 《무비지》에 남양(南洋)으로 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부순현(富順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부령현(扶寧縣)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부안현(扶安縣)으로 고쳤다-, 마인현(麻仁縣)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인(庇仁)의 잘못된 표기로, 지금은 충청도에 속한다-, 서성현(緖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저성(渚城)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해남현(海南縣), 신령현(神靈縣)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 신녕현(新寧縣)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이안현(移安縣) -삼가 살펴보건대, 무안현(務安縣)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이다. ○ 남원성(南原城)은 전주(全州)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전주와 더불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국성의 요해처가 된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이 남원을 함락하고 마침내 전라도를 침범하여 국성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러자 이여송(李如松)이 이르기를, “전라도는 비옥한 지역인데, 남원이 전라도의 인후(咽喉)에 해당된다.” 하였는데, 바로 이곳을 두고 한 말이다. 남원성과 가까운 곳에 운봉성(雲峯城)이 있는데, 이 역시 요충지이다. ○ 제주성(濟州城)은 남원부의 남쪽 바다 섬 가운데에 있으며, 제주도(濟州島)라고도 하는데, 조선에서 이곳에 주를 설치하였다. 지(志)에 이르기를, “조선의 제주는 중국의 경주(瓊州)와 같다. 혹자는 바로 옛날의 탐라(耽羅)라고도 한다. 지금은 그대로 제주라고 한다.” 하였다. ○ 순천성(順天城)은 경주(慶州)의 서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6년(1598)에 왜추(倭酋)가 이곳에 웅거하고서는 서로(西路)라고 하였다. 《조선기사(朝鮮紀事)》를 보면, “왜추 평행장(平行長)이 율림(栗林)과 예교(曳橋)에 웅거해 있으면서 성채(城寨)를 몇 겹으로 세우고는 순천성에 의지하여 남해영(南海營)과 서로 바라보았는데, 산을 등지고 물을 끼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새지의 성채가 되었다. 대수(大帥) 유정(劉綎)이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전라도는 고려 때 전라도라고 칭하였으며,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 관찰사영은 전주에 있으며, 부 1개, 목 4개, 도호부 6개, 군 10개, 현 34개를 관할한다.
○ 전라도의 동쪽은 경상도(慶尙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경상도의 치소는 경주로, 국성의 동남쪽에 있다. 본디 진한 지역으로, 뒤에 신라국이 되었다. 바다에 닿아 있어 일본과 서로 마주 보고 있는바, 조선의 병풍이 된다. 관할하는 군이 7개로 울산군(蔚山郡), 함양군(咸陽郡), 웅천군(熊川郡), 합천군(陜川郡), 영천군(永川郡), 양산군(梁山郡), 청도군(淸道郡)이고, 부가 6개로 김해부(金海府), 선산부(善山府), 영해부(寧海府), 밀양부(密陽府), 안동부(安東府), 창원부(昌原府)이고, 주가 5개로 경주(慶州), 사주(泗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사천현(泗川縣)으로 고쳤다-, 상주(尙州), 진주(晉州), 울주(蔚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울산(蔚山)의 옛 이름으로, 잘못하여 겹쳐 기록하였다.- 이고, 현이 12개로 동래현(東萊縣), 청하현(淸河縣), 의흥현(義興縣), 문경현(聞慶縣), 거제현(巨濟縣), 창녕현(昌寧縣), 삼가현(三嘉縣), 안음현(安陰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안의현(安義縣)이다-, 의성현(義城縣), 산음현(山陰縣)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산청현(山淸縣)이다-, 고령현(高靈縣), 수성현(守城縣) -삼가 살펴보건대, 수성(壽城)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수성은 고려 때의 현 이름으로, 지금은 대구(大邱)에 병합되었다.- 이다. ○ 안동성(安東城)이 경주 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안동부이다. 지(志)에 이르기를, “안동부는 마령(馬嶺)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조령(鳥嶺)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경주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였다. ○ 의성(義城)은 안동성의 서쪽에 있는데, 조선의 의성현이다. 또한 의성(宜城)이라고도 한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독신(督臣) 형개(邢玠) 등이 왜추(倭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을 경주(慶州)에서 공격할 적에 군사를 나누어서 의성에 주둔시켜 동쪽으로는 경상도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전라도를 움켜쥐었다고 한다. ○ 진주성(晉州城)은 경주의 서남쪽에 있다. 만력 26년에 대수(大帥) 동일원(董一元)이 진격하여 진주를 탈취한 다음, 승세를 타고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영춘(永春)과 곤양(昆陽) 두 성채(城寨)를 불태웠다. 그러자 왜적들이 물러나서 사주(泗州)의 노영(老營)을 지켰다. 동일원이 그 성을 빼앗고는 진격해서 새 성채에 바짝 다가갔다. 새 성채는 삼면이 강에 임하여 있고, 한 방면이 육지에 닿아 있는데, 바닷물을 끌어 들여서 호(濠)를 만들었으며, 또 김해(金海)와 고성(固城) 두 성채를 만들어서 좌익과 우익으로 삼았고, 가운데로 해양창(海陽倉)과 통하였다. 동일원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패하여 진주로 돌아왔다. ○ 합천성(陜川城)은 경주의 동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합천군(陜川郡)이다. 명나라 만력 22년(1594)에 이여송(李如松)이 왕경(王京)을 수복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이곳에 주둔해서 방어하였다. 또 그 동남쪽에 웅천군(熊川郡)이 있는데,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해 있다. ○ 창녕성(昌寧城)은 진주의 동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현을 둔 곳이다. 남쪽으로 진강(晉江)에 임해 있으며, 진강의 남쪽은 고성현(固城縣)이다. 고성현의 남쪽에는 당포(唐浦)가 있는데, 바닷가 진의 요해처이다. ○ 울산성(蔚山城)은 경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바로 울산군(蔚山郡)이다. 남쪽에 도산(島山)이 있는데,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성이 험고한 산에 의지해 있으며, 가운데에 강이 있어서 부산(釜山)의 성채와 통하고,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경유해서 부산과 통한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울산에 주둔해 있었는데, 대수(大帥) 마귀(麻貴)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얼마 뒤에 왜적들이 더욱더 성책(城柵)을 높이 쌓고는 이곳에서 웅거하여 지키면서 동로(東路)라고 하였다. 마귀가 마침내 군사를 진격해 다가가서는 험고한 데 의지하여 화곡(禾穀)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거짓으로 퇴각하여 유인하였는데, 마귀가 패하였다. ○ 양산성(梁山城)은 울산성의 동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양산군(梁山郡)이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마귀가 울산을 공격하면서 별장(別將)을 파견하여 이곳에 주둔해 있으면서 부산과 언양에서 구원하러 오는 길을 끊게 하였다. ○ 대강성(大江城)은 남원부의 동남쪽에 있는데, 조선에서 현을 설치한 곳이다. 동쪽으로는 경상도의 진주와 접하였다.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부산포(釜山浦)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여송이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면서 대강(大江) -삼가 살펴보건대, 《명사(明史)》에는 대구(大丘)로 되어 있다. 이하도 같다.- 과 충주(忠州)에 주둔하게 해서 왜적들을 억눌렀다. 얼마 뒤에 왜적들이 부산에서 서생포(西生浦)로 옮겼다. 유정(劉綎)이 조선에 머물러서 진수(鎭守)할 적에 경상도와 대강에 나누어 주둔하였는데, 이곳이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를 보면, 전라도에 대강현(大江縣)이 잘못 예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청일통지》에서는 이로 인하여 《명사》에서 대구라고 칭한 것을 잘못 대강성(大江城)이라고 하였다.- ○ 함양성(咸陽城)은 진주의 서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함양현(咸陽縣)이다.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함양과 진주를 침범하였는데, 바로 이곳이다. -또 이르기를, “남양성(南陽城)이 남원부의 서북쪽에 있는데, 조선의 남양현(南陽縣)이다. 명나라 만력 22년에 이여송이 장수에게 명하여 남원을 지키게 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이곳에 주둔해 지키게 하였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명사》를 보면 함양(咸陽)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옳다. 《대청일통지》에서는 잘못 남양(南陽)이라고 하였다.- ○ 영천군(永川郡)은 양산(梁山)의 동남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주와 경계를 접하였다. ○ 거제도(巨濟島)는 죽도(竹島)의 동쪽에 있는데, 바닷가이다. 조선에서 거제현(巨濟縣)을 설치하였으며, 겸하여 수군영(水軍營)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험고한 요충지로는 부산 다음간다. ○ 부산은 동래현(東萊縣)에서 남쪽으로 2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북쪽으로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1400리이다. 큰 바닷가에 있으면서 일본의 대마도(對馬島)와 서로 바라보고 있는바, 돛을 올리고 달리면 한나절이면 도달할 수 있다. 부산의 동쪽에는 동래(東萊), 기장(機張), 서생(西生), 임랑(林瑯), 옥포(玉浦)가 있어서 좌익이 되고, 서쪽에는 안골(安骨), 안굴(安窟), 가덕(嘉德), 웅천(熊川), 삼포(森浦), 거제(巨濟), 한산(閑山), 덕교(德橋), 김해(金海), 죽도(竹島), 용당(龍堂)이 있어서 우익이 되는데, 서로 연결되어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어서 공격할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다. 명나라 만력 20년(1592)에 왜추(倭酋) 평수길(平秀吉)이 그의 도당인 평행장(平行長) 등을 파견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진(釜山鎭)으로 쳐들어가서 경상도를 함락하고, 삽시간에 왕경(王京)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에는 왕경을 버리고서 부산으로 돌아와 주둔해 있으면서 서생, 기장 등지에 성을 증축하고는 군사를 나누어 웅거해 지켰는데, 부산을 근본으로 삼았다. 관병(官兵)이 부산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야 비로소 왜적들이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에, “조선의 부산 지방은 일본 대마도에서의 거리가 겨우 하루 일정이다. 전해 오는 말에, ‘예전에는 이곳이 일본에 속하였는데, 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서 조선에 떼어 주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에 크게 흉년이 들어 조선에서 곡식 1만곡(斛)을 빌려 왔는데, 조선에서 사람을 보내어 이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일본에서 부산 지역을 돌려 달라고 말하였는데, 조선의 사신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다. 만력 신묘년(1591)에 일본의 관백(關白) 평수길이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미처 왕경에 이르기도 전에 조선의 국왕이 사람을 보내어서 표문(表文)을 올려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중신(重臣)들에게 명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군병을 조발하고 군량을 늘리느라 날마다 백만금을 허비하면서 피차간에 서로 승부를 겨루었다. 왜적들은 모두 부산에 웅거하여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획을 하였다. 그러다가 무술년(1598) 7월에 평수길이 병으로 죽고서야 비로소 군사를 철수해 돌아갔다.” 하였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왕성에서 부산포까지는 126리이고, 개경(開京)에서 합포(合浦)까지는 140리이고, 부산포에서 일본 대마도 이기(伊崎)까지는 4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는 본디 고려 때 칭한 바이며, 조선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뒤에 낙동강(洛東江)을 동서쪽으로 나누어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경상우도(慶尙右道)로 삼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합하여 한 도로 하였다. 관찰사영(觀察使營)은 대구(大邱)에 있으며, 부 1개, 대도호부 2개, 목 3개, 도호부 13개, 군 12개, 현 40개를 관할한다.
○ 강원도의 북쪽은 함경도(咸鏡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경도의 치소는 함흥부(咸興府)로, 국성의 동북쪽에 있다. 본디 고구려 지역이다. 관할하는 군이 3개로 단천군(端川郡), 촉막군(蜀莫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려 때의 송악군(松岳郡)의 음이 와전된 것으로, 지금의 개성부이며, 경기에 속한다-, 영원군(寧遠郡) -삼가 살펴보건대, 평안도에 속한다.- 이고, 부가 5개로 함흥부, 경성부(鏡城府), 회령부(會寧府), 영흥부(永興府), 안변부(安邊府)이고, 주가 8개로 연주(延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寧邊府)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덕주(德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덕천군(德川郡)으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개주(開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이다. 고려 성읍조(高麗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혜주(惠州)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속주(速州)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소주(蘇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합주(合州) -삼가 살펴보건대, 길주(吉州)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연주(燕州)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수주(隋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정주(定州)로 고쳤으며, 평안도에 속한다.- 이고, 현이 1개로 이성현(利城縣)이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金)나라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는 장백산(長白山)의 북쪽, 안출호수(按出虎水)의 근처에 있다.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에 옛 성이 있으며, 그 성안에는 궁전의 터가 있다. 조선의 경내에 또 회령부라는 이름이 있는데, 분명한 근거를 알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의 회령부는 세종조에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바, 금나라의 회령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함경도는 고려 때에는 동계(東界)라고 칭하였으며, 조선 초기에 국경을 개척해서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러 경계를 삼고는 영길도(永吉道)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함길도(咸吉道)로 개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함경도로 개칭하였다. 성종조에 영안도(永安道)라고 개칭하였다가 뒤에 다시 함경도로 고쳤다. 관찰사영은 함흥부에 있으며, 부 1개, 대도호부 16개, 군 2개, 현 2개를 관할한다.
또 살펴보건대, 고려 말기에 북쪽 경계는 갑산(甲山), 길주(吉州) 등지까지였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이지란(李之蘭)을 파견하여 여진을 불러 위무하고서 비로소 공주(孔州) -지금의 경흥부(慶興府)이다-, 경주(鏡州) 등의 주를 설치하였는데, 그 뒤에 경성(鏡城) 북쪽이 여진에게 함락되었다. 태종 10년(1410)에 비로소 부거참(富居站)에 경원부(慶源府)를 설치하였다. 세종 10년(1428)에 회가(會家) -지금의 경원부 지역이다.- 로 부를 옮겼고, 13년(1431)에 또 부령부(富寧府) -본디는 경성의 석막성(石幕城)으로, 처음에는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다가 뒤에 지금의 종성(鍾城) 행영(行營)으로 진을 옮기고 이곳에 부령부를 설치하였다.- 를 설치하였다. 14년(1432)에 올량합(兀良哈)이 알목하(斡木河) -지금의 회령 지역이다.- 를 공격하여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를 살해하였다.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삼아서 경흥(慶興) -처음에는 공주 지역에 설치하였다-, 회령(會寧), 종성(鍾城) -본디 여진의 수주(愁州) 지역이다-, 온성(穩城) -본디는 여진의 다온평(多溫平) 지역이다.- 등 4개의 진(鎭)을 설치하고는 성을 쌓고 백성을 채운 다음 경원과 부령을 합하여 육진(六鎭)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번호(藩胡)로서 강 안쪽에 있던 자들이 그 지역을 떠나기를 싫어하여 강 안쪽에 살면서 영원토록 배반하지 않는 신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부득이하여 강변에 장성(長城)을 수축하고는 장성 바깥에 있는 강 안쪽의 지역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는데, 바로 차유령(車踰嶺) 바깥쪽의 지금의 무산(茂山) 지역으로, 이 지역은 오랫동안 번호인 노토마우롱(老吐亇亏籠)의 차지가 되었다. 선조 33년(1600)에 번호가 철수하여 북쪽으로 돌아갔다. 현종 15년(1674)에 무산진(茂山鎭)을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숙종 10년(1684)에 부(府)로 승격시켰다.
또 살펴보건대, 두만강 바깥쪽 지역은 본디 우리나라의 지역에 속한다. 국초에 영파보(寧波堡), 진지달보(榛遲達堡), 안정보(安定堡) 등의 진(鎭)을 설치하였다가 세종조 이후로 모두 폐지하였다.
○ 황해도의 서북쪽은 평안도(平安道)라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안도의 치소는 평양부로, 조선의 서쪽 경계이다. 동남쪽으로 국성(國城)과의 거리가 500여 리이다.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이라고 하였으며, 뒤에 고구려 왕이 도읍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안동부를 설치하였고, 뒤에 발해에게 함락되었다. 오대(五代) 시대에는 고려가 다시 취하여 서경으로 삼았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의 주현(州縣) 60여 성을 들어서 와서 복속하였으므로 이를 인하여 서경을 고쳐서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원나라 말기에 다시 조선에 돌려주었다. 관할하는 군이 11개로 가산군(嘉山郡) -삼가 살펴보건대, 《무비지》에는 가산(加山)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다-, 개천군(价川郡), 곽산군(郭山郡), 운흥군(雲興郡)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운산군(雲山郡)의 잘못된 표기이다. 《무비지》에는 운흥(云興)으로 되어 있는데, 역시 잘못된 것이다-, 희천군(煕川郡), 선천군(宣川郡), 강동군(江東郡), 자산군(慈山郡), 용천군(龍川郡), 순천군(順川郡), 박천군(博川郡)이고, 부가 9개로 평양부(平壤府), 성천부(成川府), 정원부(定遠府)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 칭한 바이며, 지금은 구성부(龜城府)로 고쳤다-, 창성부(昌城府), 합란부(合蘭府)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함경도 함흥부를 원나라 때 합란부라고 칭하였는바, 평안도의 부 이름이라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광리부(廣利府), 견인부(見仁府), -삼가 살펴보건대, 광리부와 견인부 두 부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영변부(寧邊府), 강계부(江界府)이고, 주가 16개로 안주(安州), 정주(定州), 평주(平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평산부(平山府)로 고쳤으며, 황해도에 속한다-, 의주(義州), 강주(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선천부(宣川府)로, 고려 성읍조(高麗城邑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철주(鐵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철산부(鐵山府)로 고쳤다-, 영주(靈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의주에 병합되었다-, 삭주(朔州), 무주(撫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寧邊府)에 병합되었다-, 숙주(宿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숙주(肅州)의 잘못된 표기이다. 지금의 숙천부(肅川府)로, 고려 때에는 숙주(肅州)라고 칭하였다-, 위주(渭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영변부에 병합되었다-, 매주(買州) -삼가 살펴보건대, 어디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고려 성읍조에도 나온다-, 청주(靑州)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 때의 주 이름으로, 지금은 북청부(北靑府)로 개칭하였으며, 함경도에 속한다-, 승주(昇州) -삼가 살펴보건대, 전라도 순천부(順天府)이다. 전라도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상주(常州), 은주(銀州)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주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이고, 현이 6개로 맹산현(孟山縣), 덕천현(德川縣), 양덕현(陽德縣), 강동현(江東縣) -삼가 살펴보건대, 이미 강동군(江東郡)이 실려 있는데 또 강동현을 실었으니, 크게 잘못 대조하였다-, 중화현(中和縣), 태천현(泰川縣)이다. ○ 의주성(義州城)은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2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서남쪽은 용천군(龍川郡)이다. 모두 압록강 가에 있다. 명나라 만력 20년(1592)에 조선의 왕이 일본 관백(關白)의 침입을 피하여 의주에 와서는 중국에 내속(內屬)하기를 청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안가관(晏家關)이 의주의 서남쪽, 압록강의 동쪽 언덕에 있는데, 옛날의 요충지 역할을 하던 나루였다. ○ 운산(雲山)은 삭주(朔州)의 서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서는 운산을 산 이름으로 잘못 보아서 본국 산수조(本國山水條)에 실었는데, 잘못된 것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선천군(宣川郡)은 의주의 동쪽에 있다. ○ 곽산군(郭山郡)은 그 성이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리서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황성(鳳凰城)에서 동남쪽으로 120여 리 되는 곳인 조선의 경계에 익주성(益州城)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애주(愛州)라고 잘못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의주를 혹 익주(益州)라고 하고, 또 애주(愛州)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음이 변한 것이다.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양에서 압록강까지가 506리이고, 왕성에서 평양까지가 68리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평안도는 고려 때에는 서북계(西北界)라고 칭하였다. 고려가 끝날 때까지 북쪽으로는 강계부(江界府)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에 압록강 안쪽 지역을 모두 개척하여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평안도라고 하였다. 관찰사영은 평양부에 있으며, 부 2개, 대도호부 1개, 목 2개, 도호부 13개, 군 12개, 현 12개를 관할한다.
또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주현(州縣)이 이와 같이 잘못된 것은 대개 《무비지》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라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소남(齊召南)의 《수도제강(水道提綱)》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지명은 자못 치밀하고도 상세하나, 역시 착오가 많다. 이것에 대해서는 산수조(山水條)에서 모두 따져 밝혔으므로 이곳에서는 중복해서 말하지 않았다.


[주D-001]여강(麗江) : 여강(驪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주D-002]함종현(咸從縣) : 원문에는 ‘咸宗’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북쪽에서 …… 있으며 : 원문에는 ‘直北至南’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直北正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기각(掎角) : 원문에는 ‘倚角’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마귀가 …… 거두어들였다 : 원문에는 ‘麻貴後進師逼之據收其禾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에 의거하여 ‘麻貴遂進師 逼之據險 收其禾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예전에는 …… 속하였는데 : 원문에는 ‘舊俗日本’으로 되어 있는데, 《가경중수일통지》 권550에 의거하여 ‘舊屬日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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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3
산수(山水) 1 경내(境內)의 산(山)과 도서(島嶼)

○ 삼각산(三角山)ㆍ남산(南山)
《조선부(朝鮮賦)》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각산은 곧 왕경(王京)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의 산허리에 있다.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처럼 생겼다. ○ 홍제원(弘濟院) 동쪽으로부터 반 리도 채 못 가서 하늘이 한 관문(關門)을 만들었는데, 북쪽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산에 접하였으며, 그 사이로는 말 한 필만이 통과할 수 있어서 험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가 없다. ○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서 둘러싸고 있는 형세이다. 삼각산에서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빛은 모두 희면서도 약간 붉어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온 것 같다.
○ 백악(白岳) -혹은 북악(北岳)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한성부(漢城府)의 경내에 있다. 본조(本朝) 초에 조선국의 왕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북악산은 국성(國城)의 북쪽에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들이 왕성에 웅거해 있으면서 북악산을 등지고 한수(漢水)를 향해 있었는데, 이 산이 바로 그 산이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에는 백악이 있다.
○ 용두봉(龍頭峯) -혹은 용산(龍山)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조선국의 한강 동쪽에 있다.
《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이르면 한강 가에서 잔치를 하고 양화도(楊花渡)에서 배를 띄워 용두봉에 올라가 강산의 승경(勝景)을 두루 구경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각산은 경도(京都)의 진산(鎭山)으로, 남쪽으로 문수봉(文殊峯)에 이르러 백악(白嶽), 응봉(鷹峯), 인왕산(仁王山)이 되는데, 왕궁(王宮)이 거기에 있다. 낙산(酪山)이 그 왼쪽에 솟아 있고, 무악(毋岳)이 그 오른쪽에 걸터 있으며, 목멱산(木覓山)이 앞에서 공읍(拱揖)하고 있고, 한강이 그 남쪽을 흐르니, 이곳은 참으로 만대토록 영원할 크나큰 터전이고 하늘이 만들어 낸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새이다. 백악은 혹 북악(北岳)이라고도 하는데, 도성 안 정북쪽에 있다. 목멱산은 바로 동월(董越)의 《조선부》에서 말한 남산이다. 용두봉은 바로 잠두봉(蠶頭峯)으로, 혹 용산이라고도 하며, 양화도의 동쪽 강 언덕에 있다.
○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옥저열전(東沃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개마는 현 이름으로 현도군(玄菟郡)에 속하며, 그 산은 지금의 평양성(平壤城) 서쪽에 있다. ○ 《대청일통지》에 이르기를, “개마대산은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한서(漢書)》 지리지를 보면, ‘현도군에 서개마현(西蓋馬縣)이 있다.’ 하였는바, 산을 인하여 현을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후한서》 주석의 잘못된 설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괄지지(括地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말갈국(靺鞨國)은 옛 숙신이다. 그 나라에는 백산(白山)이 있는데, 조수(鳥獸)와 초목이 모두 희다.
《금사(金史)》 고려열전(高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옛 숙신의 지역에 산다. 그곳에는 산이 있는데, 백산이라고 한다. 대개 장백산(長白山)은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
《행정록(行程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주(同州)에서 40일을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는데, 동쪽으로 대산(大山)이 바라보인다. 금나라 사람들이 이르기를, “이곳은 신라산(新羅山)이다. 그 산속에서는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산출되며 고구려와 경계를 접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바로 장백산이다.
섭융례(葉隆禮)의 《요지(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사는 곳이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옛날에는 속말하(粟末河)라고 불렀는데, 태종(太宗)이 진(晉)을 격파하고서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쳤다. 그곳의 풍속에는 나무를 파내어서 배를 만드는데, 길이가 8척가량 되며, 모양이 베틀의 북[梭]과 같이 생겼으므로 사선(梭船)이라고 한다. 배 가장자리에 노를 하나 매달아 놓았는데, 단지 고기잡이를 하는 데 쓴다. 수레를 건넬 때에는 두 척의 배를 나란히 잇대거나 혹은 세 척의 배를 잇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의 동남쪽에 있으면서 1000여 리에 걸쳐 길게 뻗어 있다. 동쪽으로 영고탑(寧古塔)에서 서쪽으로 봉천부(奉天府)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산이 모두 이 산에서 발맥(發脈)한다.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어서 압록강(鴨綠江), 혼동강(混同江), 토문강(土門江) 세 강이 발원한다. 옛 이름은 불함산이며, 또한 태백산이라고도 하고 백산이라고도 한다. 《산해경》에는 “대황(大荒)의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산이라고 한다.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며, 《진서(晉書)》에는 “숙신씨는 불함산 북쪽에 있다.” 하였으며, 《후위서》에는 “물길국의 남쪽에는 도태산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서는 대소변을 보지 못하므로 산을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대소변을 그릇에 담아 가지고 간다.” 하였다. 《금사》 세기(世紀)를 보면, “그 북쪽에는 혼동강과 장백산이 있다. 혼동강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도 부른다. 이른바 백산(白山)이니 흑수(黑水)니 하는 것은 이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예지(禮志)를 보면, “대정(大定) 12년(1172)에 장백산신(長白山神)을 봉해 흥국영응왕(興國靈應王)으로 삼고는 그 산 북쪽 지역에 묘우(廟宇)를 세웠다. 명창(明昌) 4년(1193)에 다시 책봉하여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로 삼았다.” 하였다. 섭융례의 《요지》를 보면, “장백산은 냉산(冷山)에서 동남쪽으로 10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산에 사는 금수(禽獸)는 모두 흰색이며, 사람들은 감히 들어가지 못하는데, 그 산속에서 대소변을 보았다가 뱀 따위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서이다.” 하였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옛 회령부(會寧府)에서 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1000리에 걸쳐서 길게 뻗어 있으며, 높이가 200리이다. 그 산꼭대기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고, 북쪽으로 흐르는 것이 혼동강이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阿也苦河)이다.” 하였다. 《성경통지(盛京通志)》를 보면, “장백산은 바로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다.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야고하이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건대, 서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압록강이고, 동남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토문강이며,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혼동강으로,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는바, 고금의 명칭이 다르게 변한 것이다. 금나라 때 세운 묘우는 무너졌으며, 조선조에서는 높여서 장백산지신(長白山之神)으로 삼았다. 사당은 길림성의 서남쪽에 있는 온덕항산(溫德恒山)에 있는데, 보름에 제사 지낸다. 강희(康煕) 17년(1678)에 황지(皇旨)를 받들어서 대신(大臣)인 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등을 파견하여 장백산에 올라가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이들이 산에 올라가다가 산기슭 한 곳을 보니, 사방에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진 가운데 둥글고 평평한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 숲을 나와서 1리쯤 가자 향나무가 줄지어 자라고 황화(黃花)가 향기를 자욱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산 중턱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위로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꿇어앉아서 황지(皇旨)를 읽자, 구름과 안개가 확 걷히면서 산의 형세가 환하게 드러나, 작은 산길이 있어서 올라갈 수가 있었다. 그 중간에 섬돌 모양으로 된 석대(石臺)가 있었는데, 평탄하여서 사방을 둘러보기에 좋았다. 산꼭대기는 둥근 형세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서 환하게 밝았다. 그 위에 올라가 보니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부(府)처럼 빙 둘러 솟아 있었고, 남쪽에 있는 한 봉우리가 조금 낮아서 문(門)과 같았다. 그 가운데 있는 연못은 몹시 깊었는데, 절벽에서의 거리가 50장(丈)가량 되었으며, 둘레가 40여 리 정도 되었다. 산의 사방 주위에서는 수많은 샘물이 분출하였는데, 바로 세 개의 큰 강이 발원하는 곳이었다. 강희 23년(1684)에 다시 주방협령(駐防協領) 늑출(勒出) 등을 파견하여 다시금 주위를 돌면서 산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너비와 길이 및 길게 뻗은 것이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것과 같았다. 산꼭대기에는 다른 나무는 자라지 못하였고, 풀들은 대부분이 흰 꽃이 피어 있었다. 남쪽 산기슭은 길게 뻗어 엉켰다가 두 줄기로 나뉘어졌다. 그 가운데 서남쪽을 향한 한 줄기의 동쪽 경계는 압록강이고, 서쪽 경계는 통가강(通加江)인데, 산기슭이 다한 곳에서 이 두 강이 모였다. 다른 한 줄기는 산의 서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수백 리를 뻗쳐 있는데, 여러 물이 나뉘어지는 곳이므로 구지(舊志)에서는 이를 통틀어 분수령(分水嶺)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서쪽으로 흥경(興京) 주변에 이르기까지 수목이 무성하고 빽빽하여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그 지방 토착민들은 이를 납록와집(納綠窩集) -삼가 살펴보건대, 와집(窩集)은 바로 수림(樹林)을 칭한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부터는 서쪽으로 흥경의 문(門)에 이르러서 마침내 개운산(開運山)이 된다. 납록와집에서부터 북쪽으로 뻗은 한 산등성이는 그 길이가 40여 리나 되는데, 토착민들은 이를 가이민주돈(歌爾民朱敦) -삼가 살펴보건대, 가이민주돈은 바로 장령(長嶺)의 칭호이다.- 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천주산(天柱山)과 융업산(隆業山)이 되는데, 빙빙 돌면서 굽이져 뻗어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것과 같다. 그 사이에는 땅을 인하여 이름을 지어 산(山)이 되고 영(嶺)이 된 것이 한두 곳이 아닌데, 그 모두가 장백산의 지맥(支脈)이다. 장백산의 신령스럽고 기이함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일컬어져 왔거니와, 신성(神聖)한 황조(皇朝)가 발상(發祥)하여 지금에 와서 흥성해졌는바, 억만년토록 영원할 크나큰 왕업은 이 산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통지(通志)》에 이르기를, “선창(船廠)에서 동남쪽으로 13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는데, 지금 상고해 보니, 이 장백산은 실제로는 주(州)에서 동남쪽으로 600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높이가 200여 리이고, 1000여 리에 걸쳐서 뻗어 있다. 웅대한 모습으로 우뚝하니 높이 솟아 있어 영기(靈氣)가 모인 곳이다. 산 위에는 못[潭]이 있는데, 달문(闥門)이라고 한다. 못은 둘레가 80리이며, 근원이 깊고 흐름이 넓어 압록강, 혼동강,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애호강은 바로 아야고하(阿也苦河)의 음이 변한 것이다.
《강희기가격물론(康煕幾暇格物論)》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은 오라(烏喇)의 남쪽에 길게 뻗어 있다. 장백산의 사방 주위에는 수많은 샘물이 솟아나와 송화강(松花江), 압록강(鴨綠江), 토문강(土門江) 세 큰 강의 근원이 된다. 그 남쪽 산기슭은 두 개의 큰 줄기로 나눠지는데, 서남쪽으로 향한 한 줄기는 동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통가강에 이른다. 대개 고려의 여러 산들은 모두 그 지맥(支脈)이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에 압록강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이다. 《대명일통지》와 《대청일통지》에는 평양의 서쪽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고, 《대청일통지》에는 또 지금의 개평현(蓋平縣)이 그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의 갈라전(曷懶甸)을 격파하고 9성(城)을 설치한 곳이 지금 함흥(咸興) 북쪽 지역인데, 임언(林彦)의 구성기(九城記)를 보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에 끼어 있고, 남쪽으로는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에 접하고 있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개마가 백두산인 것이 분명하다.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은 일찍이 개마산을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참으로 개(蓋)의 초성(初聲)은 실로 해(奚)와 같은데, 우리나라의 음은 백(白)을 일러 해(奚)라고 하고, 마(馬)를 일러 말[摩尼]이라 하고, 두(頭)를 일러 역시 머리[摩尼]라 한다. 개마(蓋馬)란 것은 해마니(奚摩尼)이며, 해마니는 백두(白頭)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그럴 듯하다.
○ 마천령(磨天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천령은 함흥부의 동북쪽에 있으며, 조선에서는 동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천령은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
○ 극적혼산(克敵昏山)
《금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연골사호(烏延鶻沙虎)는 갈라로(曷懶路) 극적혼산 사람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갈라로는 지금의 함흥부 북쪽 지역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영강산(永岡山)ㆍ올평산(兀平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영강산은 함흥 주변에 있다. 또 올평산이 함흥에서 북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두 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을리골령(乙離骨嶺)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철령(鐵嶺) -안변부(安邊府)의 남쪽에 있다.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연혁 철령위조(鐵嶺衛條)에 나온다.
○ 소백산(小白山) -바로 백두산의 남쪽 봉우리로 압록강이 발원하는 곳이다-ㆍ충천령(沖天嶺) -삼수부(三水府)의 서쪽에 있다-ㆍ증산(甑山) -단천부(端川府)의 서쪽에 있다-ㆍ회산(檜山) -이원현(利原縣)의 서쪽에 있다-ㆍ성대산(聖代山) -북청부(北靑府)의 북쪽에 있다-ㆍ입원산(立元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도안산(道安山) -정평부(定平府)의 남쪽에 있다-ㆍ비백산(鼻白山) -정평부의 북쪽에 있다-ㆍ우선산(遇仙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박산(大博山) -영흥부(永興府)의 서쪽에 있다-ㆍ반룡산(盤龍山) -문천군(文川郡)의 서남쪽에 있다-ㆍ검화산(劍華山) -바로 검봉산(劍峯山)의 잘못된 표기로, 안변부(安邊府)의 서남쪽에 있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백산 이하는 압록강조(鴨綠江條)에 나오고, 증산은 두만강조(豆滿江條)에 나오고, 회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온다.
○ 적유령(狄踰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보면, “삭주(朔州)의 서북쪽에 적유령이 있는데, 조선에서는 그것을 서북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적유령은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에 있다.
○ 소철산(小鐵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소철산은 압록강의 동쪽 강 언덕, 의주(義州)의 경내에 있는데, 강을 건너는 곳이다. 또 서남쪽은 요동 경내의 승복도(僧福島)와 피도(皮島)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철산은 상고할 수가 없다.
○ 용골산(龍骨山) -어떤 데에는 용호산(龍虎山)으로 되어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골산은 용주성(龍州城)의 동쪽에 있다. 용주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 동녕로를 평양에 설치하였다. 용주는 지금의 용천군(龍川郡)이며, 용골산은 용천군의 동쪽에 있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호산은 용천군의 진산(鎭山)이다.
○ 웅골산(熊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골산은 철산군(鐵山郡)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웅골산은 철산군의 동쪽에 있다.
○ 장화산(長花山)ㆍ천성산(天聖山)ㆍ영산(靈山)ㆍ향산(香山)ㆍ웅화산(熊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화산은 철주(鐵州)의 서남쪽에 있다. 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철주는 지금의 철산군이며, 장화산은 철산군의 서남쪽에 있다.- 천성산은 은주(殷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은주는 지금의 은산현(殷山縣)이며, 천성산은 은주현의 동북쪽에 있다.- 영산은 선주(宣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선주는 지금의 선천부(宣川府)이며, 영산은 선천부의 동남쪽에 있다.- 향산은 연주(延州)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연주는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이며, 향산은 영변부의 동쪽에 있는데, 어떤 데에는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웅화산은 곽주(郭州)의 동북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곽주는 지금의 곽산군(郭山郡)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곽산군의 능한산성(陵漢山城)을 웅화산에 해당시키는데, 옳은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이상의 주(州)는 모두 동녕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성산은 은주의 동북쪽에 있고, 영산은 선주의 서남쪽에 있고, 웅화산은 곽주군의 동북쪽에 있다. 또 육령산(育靈山)이 선주군의 동남쪽에 있으며, -삼가 살펴보건대, 육령산은 영산(靈山)인데 잘못하여 겹쳐 기록한 것인 듯하다.- 용골산(龍骨山)은 용천군(龍川郡) 성의 동쪽에 있다.
○ 굴암산(屈巖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굴암산은 정원부(定遠府) 성의 동쪽에 있는데, 바위 골짜기가 구불구불해서 이렇게 부른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원부는 지금의 구성부(龜城府)이다. 《여지승람》에는 굴암산(窟菴山)으로 되어 있는데, 굴암산은 구성부의 동쪽에 있다.
○ 천마산(天馬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마산은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는 마산(馬山)으로 되어 있다. 천마산은 옛 정주의 북쪽에 있다.
○ 능한산(凌漢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곽산군 성은 산꼭대기에 있는데, 지서(志書)에는 능한성(凌漢城)이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능한산은 곽산군의 동북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 서쪽 강 언덕에 능한산이 있다.
○ 봉두산(鳳頭山)ㆍ가산령(嘉山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봉두산은 바로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가면 가산령이 가장 높은데, 그 꼭대기에는 ‘효성(曉星)’이라고 하고 ‘망해(望海)’라고 하는 곳이 있으니, 모두 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봉두산은 가산군 북쪽에 있다. 가산령이 《여지승람》에는 서문령(西門嶺)으로 되어 있는데,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가산령은 가산군의 서쪽에 있다. 가산군이라는 이름은 이로 인한 것이다.
○ 마두산(馬頭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寧州)의 동쪽에 있다. 영주는 동녕로에 속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안주(安州)이며, 마두산은 안주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두산은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다. 의주에서 남쪽으로 80리 되는 곳에 역시 마두산이 있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과 《대명일통지》에서 이른 마두산은 바로 한 산이다. 영주는 영주(寧州)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천보산(天寶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에 있는데, 산에는 사리(舍利)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천보산은 영유현(永柔縣)의 남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보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서쪽 경계에 있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장수를 파견해 천보산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을 막게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 마읍산(馬邑山)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고구려를 격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아서 마침내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읍산은 평양성 서남쪽에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마읍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여지승람》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여 마읍산이 평양부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 노양산(魯陽山) -혹은 용산(龍山),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ㆍ금수산(錦繡山)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 동북쪽에 노양산이 있는데, 노성(魯城)이 그 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양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산은 일명 구룡산이라고도 하고 노양산이라고도 한다. 금수산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산꼭대기에는 99개의 못[池]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수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는데, 바로 평양의 진산(鎭山)이다.
○ 위산(葦山)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평양성에서 서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위산이 있는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산은 평양부의 서남쪽에 있다.
○ 모란봉(牧丹峯)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계사년(1593)에 대군(大軍)이 평양성에 다가가자 왜적들이 모란대(牡丹臺)를 지키면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모란봉은 금수산에 있다.
○ 토산(兔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기자묘(箕子墓)는 평양성 서북쪽 모퉁이의 토산에 있는데, 평양성과의 거리가 반 리도 채 안 되며, 산세가 몹시 높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평양부의 북쪽에 있다.
○ 건복산(乾伏山)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임진년(1592)에 심유경(沈惟敬)을 보내 왜적과 통하게 하였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평양의 건복산 기슭에서 만났다.
○ 관문산(觀門山)ㆍ화산(花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土山縣)의 북쪽에 있다. 토산현은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토산은 지금의 상원군(祥原郡)이다. 《여지승람》에는 관음산(觀音山)으로 되어 있다. 관문산은 상원군의 북쪽에 있다.-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화산은 상원군의 동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관문산은 토산현의 북쪽에 있고, 화산은 토산현의 동남쪽에 있는데, 모두 토산현 경계의 큰 산이다.
○ 금당산(金堂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黃州) 삼화현(三和縣)의 서북쪽에 있다. 황주는 동녕로에 속하며, 안악현(安岳縣), 삼화현(三和縣), 용강현(龍岡縣), 함종현(咸從縣), 강서현(江西縣) 다섯 현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당산은 삼화부의 서쪽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당산은 황주 삼화현의 서북쪽에 있다. 지(志)에 이르기를, “삼화는 황주에서 서남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정방산(政方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방산은 황주의 경계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방산은 황주의 남쪽에 있다.
○ 자비령(慈悲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성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비령은 평양에서 동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다. 송나라 순희(淳煕) 2년(1175)에 고려의 서경 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자비령에서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붙고자 하였으나, 금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조위총이 복주(伏誅)되었다. 원나라 지원(至元) 6년(1269)에 고려의 신하인 이연령(李延齡) 등이 서경(西京) 이하 60성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에서는 이로 인하여 동녕로를 설치하고는 자비령을 경계로 하였다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자비령은 서흥부(瑞興府)에서 서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평양에서 경도(京都)로 통하는 옛길이다. 원나라 때에는 이곳을 그어 국경으로 삼았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강역고(高麗疆域考)에 상세하게 나온다.- 일명 파령(巴嶺)이라고도 한다. 《중주집(中州集)》을 보면, 왕적(王寂)의 ‘송장중모사삼한시(送張仲謀使三韓詩)’에 이르기를, “압강에선 도엽이 아침에 건너는 걸 맞이하고, 파령에선 송화로 밤중에 탕 끓이리라.[鴨江桃葉朝迎渡 巴嶺松花夜煮湯]” 하였는바, 중국 사람들도 파령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의 산 이름 가운데에서 평안도 지역이 특별히 상세하여, 매번 이르기를, “주(州)는 동녕로에 속하였다.” 하였다. 이는 대개 원나라 때 절령(岊嶺) 북쪽 지역이 동녕로에 속하여 산천의 이름이 원나라의 판도(版圖)에 실려 있으므로 《대명일통지》를 찬수하는 자가 상세하게 실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개막산(蓋幕山) -삭주(朔州)의 북쪽에 있다-ㆍ수양산(首陽山) -해주(海州)의 동쪽에 있다-ㆍ구금산(駒芩山) -황주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ㆍ악산(嶽山) -바로 약산(藥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변부의 서쪽에 있다-ㆍ이산(耳山) -영변부의 북쪽에 있다-ㆍ백벽산(白碧山) -운산군(雲山郡)의 서쪽에 있다-ㆍ태조산(太祖山) -안주(安州)의 동쪽에 있다-ㆍ대목산(大木山)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로, 강동현(江東縣)의 북쪽에 있다-ㆍ무학산(舞鶴山) -강서현(江西縣)의 북쪽에 있다-ㆍ부석산(傅石山)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로, 송화현(松禾縣)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막산 이하는 해조(海條)에 나오고, 악산 이하는 청천강조(淸川江條)에 나오고, 백벽산은 대령강조(大寧江條)에 나오고, 태조산 이하는 대동강조(大東江條)에 나온다.
○ 성불령(成佛嶺)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불령은 북쪽으로는 산을 베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개는 평산부(平山府)의 서쪽에 있다.
○ 총수산(蔥秀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수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해 있는데, 삐쭉 솟아 있어서 빼어나게 아름답다. 옛 이름은 총수산(聰秀山)인데, 내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면서 일찍이 기문(記文)을 지은 것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총수산은 평산부의 북쪽에 있다.
○ 노고달령(奴古達嶺)
《요사》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자 동주(銅州), 곽주(霍州), 귀주(貴州), 영주(寧州) 등이 모두 항복하였다. 소배압(蕭排押)이 북도(北道)를 경유해 진격하여 노고달령에 이르러 적병을 만나 패주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요사》 소배압열전(蕭排押列傳)을 보면, “소배압이 북도를 경유해 진격하여 개경 서쪽의 고개에 이르러서 적병을 격파하였다.” 하였는바, 노고달령이 개성의 서쪽에 있음을 징험해 알 수가 있다.
○ 송악(松嶽) -혹은 숭산(崧山)이나 신숭산(神嵩山)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성부는 북쪽으로 숭산에 의지해 있다.
《원사(元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대(五代) 시대 때 고려는 송산(松山)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악은 개성부의 북쪽에 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숭산은 개성부에 있는데, 일명 숭악(嵩岳)이라고도 한다. 후당(後唐) 때 왕건(王建)이 이 산에 의지하여 도읍을 세웠다.
○ 성거산(聖居山)ㆍ천마산(天磨山)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거(聖居), 송악(松嶽), 천마(天磨)는 모두 산 이름이다. 송악은 바로 개경의 진산(鎭山)이다. 성거산과 천마산은 동북쪽에서 뻗어나왔다.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모두 하늘에 꽂힌 듯이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봉우리는 마치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 같은데, 가운데 한 봉우리는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낮아서 마치 시자(侍者)의 모습과 같다. 산에는 항상 안개와 구름이 끼어 있어 보기에 매우 좋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거산과 천마산은 모두 송악의 북쪽에 있다.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흥동(大興洞)은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에 있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천석(泉石)이 깨끗하다. 여름이면 녹음이 땅을 덮고 목련화(木蓮花)가 피어 맑은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며, 가을이면 붉은 단풍과 누런 잎새가 물 밑까지 비쳐,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아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오봉봉(五鳳峯)
《무몽원집(無夢園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지(志)를 보면, 오봉봉은 개성부에 있는데, 봉 아래에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이 있다.
○ 오관산(五冠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오관산은 경기 장단부(長湍府)에서 서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산꼭대기에는 다섯 봉우리가 있어 마치 관(冠)과 같이 둥글게 모여 있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역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평산령(平山嶺)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평산령은 개성부에서 1리 되는 곳에 있는데, 흙 빛깔이 모두 붉다. -삼가 살펴보건대, 평산령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도봉산(道峯山)
《전등록(傳燈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원(淸源) 아래 제9대인 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의 법사(法嗣)에 고려 도봉산(道峯山)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봉산은 양주(楊州)의 남쪽에 있다.
○ 금강산(金剛山)
《화엄경(華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에 금강산이 있는데,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1만 2000보살과 더불어서 항상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한다.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강산은 조선의 강원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그 이름이 같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이로부터 동방에 금강산이 있어 법희보살(法喜菩薩)이 불사(佛事)를 일으킨다.” 하였는데, 두 나라에서 모두 이로 인하여 금강산이라고 한 것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폭동(萬瀑洞)은 금강산 안에 있다. 일백 곳에서 흘러나와 날리는 샘물이 골짜기 속으로 쏟아져 내려 그 형상이 하나가 아니므로 만폭동이라고 한 것이다. 골짜기 어귀에 산봉우리가 있어 오인봉(五人峯)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푸른 학이 그 모퉁이에 살고 있다.” 한다. 깊고 큰 물이 하나 있는데, 관음담(觀音潭)이라고 한다. 관음담 가의 돌벼랑은 푸른 이끼로 덮여 있는 탓에 미끄러워서 사람들이 다 칡넝쿨을 부여잡고서야 지나갈 수 있으므로, 그 이름을 수건애(手巾崖)라고 한다. 돌 가운데가 방아 절구같이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관음보살이 빨래를 한 곳이다.” 한다.
보덕굴(普德窟) 앞에 이르면 빠른 여울물이 돌에 엉키면서 벼랑에 부딪치는데, 물방울이 눈처럼 휘날려 맑은 대낮에도 어두컴컴하다. 돌바닥은 물이 깊어서 푸른 쪽빛과 같다. 또 두어 걸음 가면 성난 폭포가 구슬을 뿜고 눈을 흩날리면서 쏟아져 내리는데, 그 가운데 큰 것은 12층이고, 작은 것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므로 만폭동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 아래의 못을 주연(珠淵)이라고 한다. 또 돌이 하나 있는데, 그 형상이 마치 거북이 못 가운데에 엎드려 있는 것과 같아 귀담(龜潭)이라고 부른다. 또 한 못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는데, 화룡담(火龍潭)이라고 한다. 그 위에 봉우리가 있는데, 사자암(獅子巖)이라고 한다.
만폭동 안에 보덕굴이 있는데, 절벽을 파서 판자를 걸치고 구리쇠 기둥을 바깥쪽에 세운 다음 작은 방 3칸을 그 위에다가 만들고는 관음각(觀音閣)이라고 하였다. 관음각을 쇠사슬로 묶어서 바윗돌에 못 박아 놓았는데, 공중에 떠 있어서 사람이 올라가면 흔들린다. 그 안에 부처를 모신 함을 안치하고 구슬과 옥으로 장식하였으며, 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손으로 만질 수 없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세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포구산(浦口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포구산은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동쪽으로 9리 되는 곳에 있다. 고성포(高城浦)에는 우뚝 솟은 바위가 계단과 같이 층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그 바위 북쪽에 또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를 바라보면 5리쯤 되는 곳에 돌로 된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봉우리 아래에 돌이 있는데,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는 것 같은 기이한 모습이다. 또 돌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마치 사람이 함께 말하는 것 같은데, 돌의 빛깔은 모두 희어서 푸른 바다에 광채가 비쳐, 바라보면 그림과 같다.
○ 한계산(寒溪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계산은 강원도 인제현(麟蹄縣)에서 동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다. 산 위에는 성(城)이 있다. 냇물이 성안으로부터 흘러나와서 곧바로 폭포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수백 척이나 떨어져 내려 바라보면 마치 흰 무지개가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다. 원통역(圓通驛)으로부터 동쪽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두 큰 산이어서 동부(洞府)는 깊숙하며, 계곡의 물은 이리저리로 흘러서 무려 36번이나 건너야만 한다. 나무들은 마치 갈대자리를 말아 세운 듯이 위로 하늘에 솟았고 곁에는 가로 뻗은 가지가 없는데,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욱 높아서 그 꼭대기를 볼 수가 없다. 또 그 남쪽에는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그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기괴하며, 너무 높아서 나는 새도 지나가지 못한다. 그 아래에는 맑은 샘물이 바위에 부딪쳐서 못을 이루었으며, 반석이 평평하여 둘러앉을 만하다. 또 동쪽의 몇 리는 동구(洞口)가 매우 좁으며, 가느다란 길이 벼랑에 걸려 있는데, 바위 구멍은 입을 벌리고 있고 봉우리들은 높이 솟아 있다. 이에 마치 용이 끌어당기고 범이 움켜잡을 것 같다. 층층다리를 겹쳐 놓은 것 같은 것이 수없이 많아서 그 좋은 경치는 영서(嶺西)에서 으뜸이다.
○ 분려산(分黎山)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탄열현(呑列縣)에는 분려산이 있다. 분려산은 열수(列水)가 나오는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바로 한수(漢水)이다. 분려산은 한수의 근원이 있는 곳이니, 금강산이 아니면 바로 오대산(五臺山)이다.
○ 오대산(五臺山)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의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에서 나온다.
《열조시집(列朝詩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강릉(江陵)은 옛 명주(溟州)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삼한(三韓)에는 12동천(洞天)이 있는데, 이곳이 두 번째 동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대산은 강릉부의 서쪽에 있다.
○ 단단대령(單單大嶺)
《후한서》 예열전(濊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대령(單大嶺) 동쪽의 옥저, 예, 맥이 모두 낙랑에 속하였다.
《삼국지(三國志)》 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단단대산(單單大山)의 고개 서쪽은 낙랑에 속하여 동부도위(東部都尉)가 통치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文獻備考)》를 보면, “함경도 검산(劍山)의 분수령(分水嶺)에서부터 철령, 금강산, 오대산에 이르기까지가 대관령인데, 1000여 리에 걸쳐 뻗쳐 있는바, 바로 단대령이다.” 하였다.
○ 황룡산(黃龍山) -흡곡현(歙谷縣)의 서쪽에 있다-ㆍ추지령(秋池嶺) -바로 추지령(楸池嶺)의 잘못된 표기로, 통천군(通川郡)의 서쪽에 있다-ㆍ두사산(頭蛇山) -바로 두타산(頭陀山)의 잘못된 표기로, 양구현(楊口縣)의 북쪽에 있다-ㆍ장산(張山) -상고할 수가 없다-ㆍ오갑산(五甲山)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김화현(金化縣)의 북쪽에 있다-ㆍ공작산(孔雀山) -홍천현(洪川縣)의 동쪽에 있다-ㆍ치악산(雉岳山) -원주(原州)의 동쪽에 있다-ㆍ우두산(牛頭山)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ㆍ관악산(冠岳山) -과천현(果川縣)의 서쪽에 있다-ㆍ수리산(修理山) -안산군(安山郡)의 남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황룡산 이하의 산들은 해조(海條)에 나오고, 오갑산 이하의 산들은 한강조(漢江條)에 나온다.
○ 임존산(任存山)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존성(任存城)은 백제 서부(西部)의 임존산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존성은 지금의 대흥군(大興郡)인바, 이 산은 마땅히 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임야기산(任射岐山)으로 되어 있다.
○ 부용산(富用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부용창산(富用倉山)은 바로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이다. 그 산은 홍주(洪州)의 경내에 있으며, 산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 둔 곡식이 많은데, 변경(邊境)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을 때 쓰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것이므로 부용(富用)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홍주산(洪州山)ㆍ동원산(東源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루어져 있다. 또 동쪽에는 금이 산출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고 있으며, 그 산 위에는 못[潭]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삼가 살펴보건대, 두 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홍주산은 충주(忠州)의 서쪽 경계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명일통지》를 보면, “홍주가 이 산 아래에 세워져 있으며, 조금 동쪽에 동원산이 있는데, 금이 산출된다.” 하였다.
○ 소석산(小石山)
《후위서》 백제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의 왕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신의 나라 서쪽 경계에 있는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의 바다에서 10여 구의 시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폐하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오는 것을 긴 뱀처럼 흉악한 것 -삼가 살펴보건대, 고구려를 가리킨다.- 이 길을 막고 바다에 침몰시킨 것입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석산은 지금의 충청도 서해 바닷가에 있어야 한다.
○ 월악산(月嶽山)
《명산장왕향기(名山藏王享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원나라 헌종(憲宗) 5년(1255)에 차라대(車羅大)가 고려를 정벌하면서 충주를 도륙하자, 사람들이 월악사(月嶽祠)로 올라가서 피란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월악산은 충주의 동쪽에 있다.
○ 속리산(俗離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속리산은 충청도 보국현(報國縣) -삼가 살펴보건대, 보은현(報恩縣)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 있다. 산봉우리 아홉 개가 뾰족하게 솟아 있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嶽)이라고 일컬었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꼭대기에는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층이 쌓인 돌이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공중에 높게 솟았다. 그 높이는 몇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으며, 그 너비는 사람 3000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문장대 위에는 가마솥만 한 구덩이가 있어서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불어나지 않는다. 이 물이 세 줄기로 나누어져서 허공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흘러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산 아래에는 팔교(八橋)와 구요(九遙)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 끝인 듯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보면 또다시 멀고 멀다. 이렇게 아홉 번을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구요라고 한 것이다. 구요 속에는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져서 흐르는데, 한 굽이마다 하나의 다리가 있어, 도합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교라고 한다. 첫 번째 다리는 수정교(水精橋)로,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그 각 속으로 다닌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갈령(葛嶺) -마땅히 부여현(扶餘縣)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백제 성읍조(百濟城邑條)에 나온다.
○ 차현산(車見山) -바로 차현(車峴)의 잘못된 표기로, 공주(公州)의 북쪽에 있다-ㆍ가야산(加耶山) -해미현(海美縣) 북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조(海條)에 나온다.
○ 조령(鳥嶺) -주흘산(主屹山)을 덧붙인다.
《광여기(廣輿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충주에 있는데,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다.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령은 경주(慶州)의 서북쪽 경계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尙州)의 경계에 접해 있다. 70여 리나 넓게 뻗어 있는데, 가파른 벼랑이 깎아지른 듯하며, 그 사이로 길 하나가 실처럼 통해 있다. 관목(灌木)이 우거져 있어서 말을 타고 줄지어서 갈 수가 없다. 조선에서는 이를 남도(南道)의 웅관(雄關)이라고 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21년(1593)에 왜적들이 왕경(王京)을 버리고 도망치자, 별장(別將) 유정(劉綎)이 상주에서 왜적들을 추격해 조령에 이르렀는데, 왜적들이 험고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별장 사대수(査大受)가 충주에서 괴산감(槐山監)으로 넘어가 조령의 뒤편으로 나아가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부산포(釜山浦)로 옮겨 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계책을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조령은 문경현(聞慶縣)에서 서쪽으로 27리 되는 곳에 있다. 주흘산은 문경현 북쪽에 있으면서 문경현의 진산(鎭山)인데, 조령과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명시종(明詩綜)》을 보면, 조선 사람인 이효칙(李孝則)의 조령(鳥嶺) 시가 실려 있는바, 그 시에 이르기를, “갈바람에 누런 잎 우수수 떨어지고, 주흘산 높아 반쯤 구름 속에 잠겼네.[秋風黃葉落紛紛 主屹山高半沒雲]”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죽령(竹嶺)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령은 충주의 동쪽에 있는데, 구부러진 길이 빙빙 돌아서 자못 험준하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왕경을 버리고 죽령을 넘어서 경상도로 달아났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령은 풍기군(豐基郡) 북쪽에 있다.
○ 노음산(露陰山)
《정지거시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사람 조운흘(趙云仡)은 상주의 노음산 아래로 물러나 살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노음산은 상주의 서쪽에 있다.
○ 빙산(氷山)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빙산은 경상도 의성현(義城縣)의 동남쪽 40리 되는 곳에 있다. 빙산의 큰 바위아래에 돌구멍[石穴]이 있는데, 구멍의 입구는 높이가 3척, 폭이 4척 8촌, 가로의 길이가 5척 1촌이다. 이것을 풍혈(風穴)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구멍이 바위 아래에서 곧장 밑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한 길이며, 길이는 겨우 한 길까지만 잴 수 있으며, 그 아래로는 구부러져서 깊이를 잴 수가 없다. 입하(立夏)가 지난 뒤부터 얼음이 엉기기 시작하여 아주 더우면 얼음이 굳게 얼다가 장마가 들면 얼음이 풀린다. 봄가을로는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겨울에는 따뜻한 기운이 봄과 같다. 이것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 도산(島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산은 울산군(蔚山郡) 남쪽에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1597)에 마귀(麻貴) 등이 울산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자, 왜적들이 모두 도산으로 달아나 산 앞에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세우고 버티면서 지켰다. 도산은 울산성보다 높은 데다가 왜적들이 또 그 위에 새로 석성(石城)을 쌓아 몹시 견고하였다. 이에 중국 군사들이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뒤에는 패해 돌아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도산은 울산부(蔚山府)의 남쪽에 있다.
○ 백석산(白石山)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로,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ㆍ청량산(淸涼山) -영양현의 서쪽에 있다-ㆍ모자산(母子山) -영천현(永川縣)의 북쪽에 있다-ㆍ파음산(巴音山)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로, 상주(尙州)의 서쪽에 있다-ㆍ적암산(赤巖山)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로, 무주부(茂州府)의 동쪽에 있다-ㆍ화악산(華岳山) -밀양부(密陽府)의 북쪽에 있다-ㆍ금오산(金鼇山) -경주(慶州)의 남쪽에 있다-ㆍ윤산(輪山) -동래부(東萊府)의 북쪽에 있다-ㆍ웅산(熊山) -웅천현(熊川縣)의 북쪽에 있다-ㆍ무계산(武溪山)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낙동강조(洛東江條)에 나온다.
○ 지리산(智異山) -혹은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두시전주(杜詩箋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지(志)를 보면, 지리산은 남원부(南原府)에서 동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진(女眞)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의 산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른다. 또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두보(杜甫) 시(詩)의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에 대한 주석과 《통감집람(通鑑輯覽)》에서 모두 “방장은 대방군(帶方郡)에 있는데, 바로 남원의 남쪽이다.”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글과 아래에 나오는 《삼재도회속집》에서 인용한 두 조항은 모두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학동(靑鶴洞)은 지리산 속에 있다. 길이 몹시 좁아서 겨우 한 줄로 통해 있다. 몸을 구부리고 올라가 몇 리쯤 가면 넓게 트인 지경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은 사방이 모두 기름진 옥토(沃土)라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靑鶴)이 그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청학동이라고 부른다. 대개 옛날에 속세를 피해 사는 사람이 살던 곳으로 무너진 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세속(世俗)에 전하기를, 최치원(崔致遠)이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 구정봉(九井峯)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석(動石)은 월출산(月出山) 구정봉 아래에 있다. 세 개의 돌이 층암(層巖) 위에 튀어나와 있는데,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된다. 서쪽으로는 산꼭대기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는데, 그 무게는 비록 수백 명을 동원해도 움직일 수 없으나 한 사람이 흔들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석(靈石)이라고 칭하며, 군(郡)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구정봉은 영암현(靈巖縣) 월출산에 있다.
○ 황산(黃山)
《유서찬요》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충청도는 옛 마한(馬韓)의 영역으로, 황산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황산은 전라도 금구현(金溝縣)의 서쪽에 있는바, 충청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모악산(母岳山) -태인현(泰仁縣) 동쪽에 있다-ㆍ무목산(無木山)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로, 광주(光州)의 동쪽에 있다-ㆍ송경산(松京山)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로, 순천부(順天府)의 서쪽에 있다-ㆍ천관산(天冠山) -장흥부(長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용잠산(龍岑山)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로, 담양부(潭陽府)의 서쪽에 있다-ㆍ추월산(秋月山) -담양부의 서쪽에 있다-ㆍ한라산(漢拏山)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모악산은 금강조(錦江條)에 나오고, 무목산 이하의 산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한라산은 제주(濟州)의 남쪽에 있다. 그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노인성(老人星)을 볼 수가 있다. 세속에서는 이 산을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운급서(雲笈書)》에 이르기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 부라악(浮羅岳)에 내려왔다.” 하였고, 한유(韓愈)의 ‘송정상서서(送鄭尙書序)’에,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 유구(琉球), 모인(毛人) 등의 나라는 동남쪽으로 천지(天池) 가에 있다.” 하였다. 탐부라는 지금의 제주이니, 부라악은 과연 한라산을 가리키는 것인가?
○ 서산(瑞山)
《화한삼재도회》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이르기를,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에 탐라(耽羅)의 바다 속 남쪽에서 산이 솟아올랐다. 그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땅이 뒤흔들려서 우레가 치는 듯하였는데, 7일 밤낮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갰다. 산의 높이는 100여 길이나 되고 둘레는 40여 리이다. 초목이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서 바라보면 마치 석유황(石硫黃) 같다.’ 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전공지가 그 산 아래에 가서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산은 정의현(旌義縣)에 있다.

이상은 경내에 있는 산(山)이다.

○ 장자도(獐子島)
《초학집(初學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정묘년(1627)에 적(敵)이 조선을 약탈하여 황해도(黃海道)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욱(周文郁)이 수군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가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장자도(獐子島)에 신인(神人)이 있어서 그로 하여금 나뭇등걸을 타고 바다에 떠 있게 해 살아날 수 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장자도는 지금의 신도(薪島)로, 용천부(龍川府)의 남쪽에 있다.
○ 석도(蓆島)ㆍ초도(椒島)ㆍ가도(椵島) -혹 피도(皮島)라고도 한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녕로(東寧路)의 선주(宣州)는 석도진(蓆島鎭)을 관할한다. ○ 맹주(孟州)는 초도진(椒島鎭)과 가도진(椵島鎭)을 관할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석도는 바로 석도(席島)인 듯한데, 은율현(殷栗縣) 서쪽에 있다. 초도는 풍천부(豐川府) 서쪽에 있고, 가도는 철산부(鐵山府) 남쪽에 있다.
《명사(明史)》 조선열전(朝鮮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계(天啓) 1년(1621)에 모문룡(毛文龍)이 조선을 구원하러 갔다가 피도에 군진(軍鎭)을 설치하였다. 피도는 또한 동강(東江)이라고도 하는데, 등주(登州)와 내주(萊州)의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며, 둘레가 80리이고,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북쪽 해안에서 바닷길로 80리를 가면 바로 청(淸)나라 경계이며, 그 동북쪽 바다 너머는 바로 조선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피도는 바로 가도이다.
○ 위도(葦島)
《명산장왕향기》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염주(鹽州)의 바다 가운데 위도(葦島)란 섬이 있는데, 10여 리쯤 되는 평탄한 개펄에 해조(海潮)가 넘나든다. 예전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방경(金方慶)이 백성들을 시켜 이곳에 제방을 쌓아 큰 못을 만들고는 개간하여 벼를 심었는데, 백성들이 이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염주는 지금의 연안부(延安府)이며, 위도는 정주(定州) 앞바다에 있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김방경이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을 때 몽고의 군사들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자 위도로 들어가서 지켰다. 김방경이 백성들에게 제방을 쌓고 종자를 뿌리게 하여, 백성들이 처음에는 몹시 괴롭게 여겼다. 가을이 되자 풍년이 들어 사람들이 이에 의지하여 살아났다.” 하였다.
○ 대청서(大靑嶼)ㆍ소청서(小靑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숲이 진한 눈썹과 같으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청서는 대청서와 모양새가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礁石)이 많을 뿐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도와 소청도는 모두 장연현(長淵縣)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도는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일명 대청서라고도 한다. 원나라 문종(文宗)이 그의 형의 아들인 타환첩목아(妥歡帖木兒)를 고려로 내쫓고서는 그로 하여금 대청도에 살게 하였다가, 얼마 뒤에 광서(廣西)의 정강(靜江)으로 옮겼는데, 바로 이곳이다. 대청도와 가까운 곳에 또 소청서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 대청도 안에는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궁궐 터가 있어 부서진 기왓장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청요(靑瑤)이다.
○ 몽금도(夢金島) -장연현(長淵縣)의 서쪽에 있다-ㆍ정족도(鼎足島) -초도(椒島) 근처에 있다-ㆍ사야구미(沙也九味) -대청도 근처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백령도(白翎島) -대청도 서쪽에 있다-ㆍ교동도(喬桐島) -강화부(江華府)의 서쪽에 있다-ㆍ각화도(覺華島) -바로 강화도이다-ㆍ연자도(硯子島) -상고할 수가 없다-ㆍ대부도(大富島)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합굴(蛤窟)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그 산이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며, 주민들도 많이 산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가면서는 반드시 제사를 드린다. 바닷물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급수문(急水門)과 비교해 볼 때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합굴은 마땅히 예성강(禮成江)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개성부(開城府) 남쪽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등성이에 용을 모신 사당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굴은 광주(廣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산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사는 백성들도 매우 많다. 산등성이에는 용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바다를 오가는 자들은 모두 제사 지낸다.
○ 자연도(紫燕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자연도는 바로 광주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館舍)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쓰여 있다. 주민들이 사는 초가집도 많이 있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제비가 많이 살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연도는 인천부(仁川府)의 서쪽에 있다.
○ 마전도(麻田島)ㆍ고사도(古寺島) -이들 두 섬은 마땅히 초도(椒島) 남쪽 지역에 있어야 한다-ㆍ득물도(得勿島) -어떤 데에는 덕물도(德勿島)로 되어 있으며, 남양부의 서쪽에 있다.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 및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구두산(九頭山)ㆍ당인도(唐人島)ㆍ쌍녀초(雙女礁)ㆍ화상도(和尙島)ㆍ우심서(牛心嶼)ㆍ계심서(鷄心嶼)ㆍ섭공서(聶公嶼)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9일에 마도(馬島)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숲이 무성하여 맑고 윤기가 도는 것이 보기 좋았다. ○ 당인도(唐人島)는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며,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 아래를 지나갔다. ○ 쌍녀초는 그 산이 아주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이 없다. 앞에 있는 산은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는 않았다. 뒤에 있는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 출발해 이어 이 쌍녀초를 지나갔다. ○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되어 있고 골짜기가 깊고 숲이 무성하다. 산속에는 호랑이가 많이 산다. 옛날에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이 거기에 살고 있었는데, 산짐승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바로 그 유적(遺蹟)이다. 그러므로 고려 사람들이 그 섬을 화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 우심서는 작은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있어 그 형상이 엎어 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뾰족하다. 고려 사람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牛心]’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볼 수 있다. 또 형체가 이 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을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 이날 미시(未時) 정각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몹시 뾰족한데 바짝 다가가서 보면 마치 담과 같다. 대개 그 형체가 납작해서 가로로 보는 것과 세로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화상도는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그 위에는 엽로사(葉老寺)가 있다. ○ 당인도는 청주(淸州)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구두산과 서로 가깝다. ○ 쌍녀초는 《고려도경》을 보면 섬과 같다고 하였는데, 순전히 돌로 이루어진 섬을 초(礁)라고 한다.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구두산은 광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으며, 숲의 나무가 몹시 무성하게 자라 있다. ○ 우심서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이곳과 서로 가까운 곳에 또 계심서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원씨액정기(元氏掖庭記)》를 보면, 고려의 당인도에서는 만화초(滿花草)가 산출된다고 하였는데,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당인도는 바로 이곳이다. 이제 《고려도경》의 해도일록(海道日錄)을 근거해 보면, 8일에 해미현(海美縣)의 마도(馬島)에서 출발해 북쪽을 향해 가 9일에 구두산, 당인도, 쌍녀초, 화상도, 우심서, 섭공서 등 여러 섬을 지나고, 이날 인천부(仁川府)의 자연도에서 묵었다. 그런즉 이들 여러 섬은 모두 태안(泰安) 앞바다 북쪽에서 인천 앞바다 남쪽 지역에 있는 것이다.
○ 아자섬(鵶子苫)ㆍ마도(馬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아자섬은 또한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 사람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 마도는 대개 청주(淸州)의 경내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를 평상시에는 이곳에 방목(放牧)해서 기르므로 마도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고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도는 청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나라 안의 방목지(放牧地)이다. 예전에는 객관이 있었는데, 안흥정이라고 하였다. 알자섬과 가깝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알자섬은 청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마도는 해미현의 서쪽에 있으며, 알자섬은 바로 태안군(泰安郡)의 갈도(葛島)이다. 《고려도경》에 이르기를, “고려 사람들은 삿갓을 알(軋)이라고 한다.” 하였고,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이르기를, “고려의 방언에 삿갓을 개(蓋)라고 한다.” 하였는데, 그 본주(本注)에 “개(蓋)의 음은 갈(渴)이다.”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보면 알(軋)과 갈(葛)은 같은 음임이 분명하다.
○ 용도(龍島) -태안군의 북쪽에 있다-ㆍ원산도(元山島)ㆍ오평도(烏平島) -이들 두 섬은 모두 태안군의 서쪽에 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 군산도(羣山島)ㆍ횡서(橫嶼)ㆍ자운섬(紫雲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羣山島)는, 산의 열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러 있는 것이 마치 성과 같다. 군산정(羣山亭)이 있으며, 서쪽의 가까운 곳에 있는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주민들의 집은 10여 호가 있다. ○ 횡서(橫嶼)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는데, 한 산이 특히 크며,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돌 밑뿌리를 둘러 있다. 한 개의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며,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레와 같다. ○ 횡서에서 묵었다. 일찍 출발하였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였는데, 그것을 자운섬(紫雲苫)이라고 하였다. 가로지른 봉우리가 들쭉날쭉 포개져 있었는데, 그 뒤쪽에 있는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 쌍의 눈썹에 푸른빛이 엉겨 있는 것 같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군산도는 만경현(萬頃縣) 서쪽에 있는데, 지금은 고군산도(古羣山島)라고 한다. 횡서와 자운섬은 마땅히 군산도의 남쪽에 있어야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군산도는 전주(全州)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열두 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서 성(城)과 같다. 그 남쪽에는 횡서가 있는데, 역시 안섬이라고도 한다.
○ 궤섬(跪苫)ㆍ춘초섬(春草苫)ㆍ빈랑초(檳榔礁)ㆍ보살섬(菩薩苫)ㆍ죽도(竹島)ㆍ고섬섬(苦苫苫)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궤섬(跪苫)은 백의도(白衣島)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부서진 암초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 춘초섬(春草苫)은 궤섬의 바깥쪽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에는 모두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이 자라는데, 바라보면 울창하다. ○ 빈랑초(檳榔礁)는 형태가 빈랑나무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오직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가리켜서 뱃사람들이 빈랑초라고 한다. ○ 보살섬(菩薩苫)은 고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일찍이 기이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 죽도(竹島)는,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였으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살고 있고, 주민들 가운데에는 또한 장(長)이 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다. ○ 고섬섬(苦苫苫)은 죽도에서 그리 멀지 않으며, 그 산의 생김새가 비슷한데, 역시 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마치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보살섬, 자운섬, 고섬섬, 춘초섬, 궤섬은, 《고려도경》을 보면 서(嶼)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는 것을 섬(苫)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 섬들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빈랑서(檳榔嶼)는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수서(隋書)》를 보면,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과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倭國)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耽羅國)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지금 해미(海美), 태안(泰安), 남포(藍浦), 흥덕(興德) 등지에서 죽도라고 칭하는 섬이 한두 곳이 아닌바, 《고려도경》 및 《수서》에서 칭한 죽도가 어느 섬을 가리키는지는 상세하지가 않다. 고섬섬은 바로 부안현(扶安縣)의 위도(蝟島)이다. 그 밖의 다른 섬은 전라도 서해에 있는 섬들이다.
○ 월서(月嶼)ㆍ난산도(闌山島)ㆍ백의도(白衣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서(月嶼)는 둘인데, 흑산(黑山)에서의 거리가 아주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하는데,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서 작은 배가 그 사이로 통행할 수가 있다. ○ 난산도(闌山島)는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그 산은 높고 험하다. 멀리서 바라보면 벽같이 우뚝 서 있으며, 앞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암초는 마치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 백의도(白衣島)는 세 개의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비스듬히 자란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보기가 좋다. 또한 백갑섬(白甲苫)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의도와 난산도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 대월서와 소월서는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에서 말한 세 섬은 나주(羅州)의 서쪽 바다 가운데에 있어야 한다.
○ 흑산도(黑山島)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산(黑山)은 백산(白山)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로 바라다보일 정도로 매우 가깝다. 처음에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한데, 바짝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속에다가 배를 감출 만하다. 옛날의 바닷길을 보면, 이곳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라고 하였는바, 그 당시의 관사(館舍)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가는 길을 바꿨으므로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는다. 섬 위에는 주민들이 사는 부락이 있는데, 나라의 대죄인(大罪人)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항상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를 적마다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를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까지 전달하는데, 봉화를 올리는 것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송사(宋史)》를 보면, “명주(明州) 정해현(定海縣)에서 순풍을 타면 3일 만에 바다에 들어가고, 다시 5일 만에 고려의 흑산에 도착한다.” 하였고, 《원사》를 보면, “지원(至元) 5년(1268)에 일본의 정벌을 의논하면서 탈타아(脫朶兒) 등에게 명하여 흑산도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살펴보게 하였다.” 하였다. 이 섬은 송나라와 원나라 때 해도(海道)의 요충지로써, 고려에서는 흑산현(黑山縣)을 두었으며, 뒤에 나주에 속하였다. 나주에서의 거리가 뱃길로 900리이며, 둘레가 35리이다.
○ 백산(白山)
《고려도경》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배도(排島)에서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한 산이 보이는데, 아주 큰 것이 마치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으며, 햇빛이 쬐는 곳은 마치 옥같이 희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과 흑산은 모두 전주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산은 전주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바로 백수산(白水山)이다. 당나라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高侃)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을 백수산에서 쳤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산은 흑산의 서쪽에 있는 섬이다. 그런데 《대청일통지》에서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 백수산을 끌어다 대었는바, 전혀 잘못된 것이다.
○ 구룡도(九龍島)ㆍ고금도(鼓金島)ㆍ가덕도(加德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6년(1598)에 진린(陳璘)이 해상을 전담하여 관할하면서 왜적들을 막았는데, 부총병(副摠兵) 진잠(陳蠶), 등자룡(鄧子龍) 등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전함(戰艦) 수백 척을 모두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고금도(鼓金島) 등 여러 섬에 정박시켜 두었다. 충청도에 구룡도란 섬이 있는데, 수족(水族)들이 신령스럽고 괴이스럽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절수영(浙水營)의 중군(中軍) 방일신(方一新)이 절병(浙兵) 3000명을 거느리고 의주(義州)에서 고금도에 주둔해 있는 등자룡에게 가다가 9월 29일에 이 섬에 도착하였다. 밤중에 시각을 알리는 총을 쏘아 수족들을 놀래키자, 태풍이 갑자기 일면서 파도가 솟구치는 바람에 누선(樓船)의 머리와 꼬리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 한꺼번에 뒤집어져서 몰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금도는 바로 고금도(古今島)의 음이 변한 것으로, 고금도는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있다. 가덕도는 웅천현(熊川縣)의 남쪽에 있고, 구룡도는 상고할 수가 없다.
○ 추자도(楸子島)
《대청회전(大淸會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륭(乾隆) 5년(1740)에 소전현(蕭田縣)의 백성이 바다로 나아가 무역을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는데, 조선국의 추자도에 이르러서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 -삼가 살펴보건대, 추자도는 영암군(靈巖郡)의 남쪽에 있다.
○ 한산도(閒山島) -어떤 데에는 안산도(鴈山島)로 되어 있다-ㆍ칠산도(漆山島)
《명사》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고 한산(閒山)을 침입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군사가 궤멸되어 드디어 한산도가 함락되었다. 한산도는 조선의 서해 입구에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산도는 고성군(固城郡) 남쪽에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총병(摠兵) 마귀(麻貴)가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계금(季金)과 우승은(于承恩)에게 남병(南兵)을 거느리고서 조선의 수병(水兵)과 함께 장기(長鬐), 진도(珍島)를 경유해 안산도(鴈山島)에 이르러서 의병(疑兵)을 펼쳐 방비하게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산도는 한산도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산도는 경주의 서남쪽에 있는데, 조선의 서해 입구이다. 오른쪽으로는 전라도의 남원부(南原府)가 막고 있어서 전라도의 외번(外藩)이 된다. 이곳을 한번 잃으면 연해변에 방비가 없게 되어, 천진(天津)과 등주(登州), 내주(萊州)가 모두 돛을 한 번만 올리면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한산도와 가까운 곳에 또 칠산도(漆山島)가 있다. 명나라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경주에 들어오고 한산도를 침입하면서 밤중에 칠산도를 습격하였는데, 관군이 궤멸되어 달아나 마침내 한산도를 잃었다. 이에 왜적들이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해서 함락시켰다.
○ 죽도(竹島)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죽도는 경주의 서남쪽 바닷가에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부산에 배를 정박시키고는 죽도를 왕래하면서 점차 양산(梁山), 웅천(熊川)을 핍박하였다. 얼마 뒤에 양산을 빼앗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왔다. -삼가 살펴보건대, 죽도는 울산부의 남쪽에 있다.
○ 송도(松島)ㆍ우산도(于山島)ㆍ울릉도(鬱陵島)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송도, 울산, 부산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우산도는 바로 왜적들이 이른바 송도(松島)이다.” 하였고, 《여지승람》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디 한 섬으로, 사방 100리이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때 그 나라를 토벌하여 정복하였다. 지금의 울진현(蔚珍縣)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하였고, 《수도제강》을 보면, “울진에서 동쪽으로 바다 건너편에 있는 섬을 천산도(千山島)라고 하는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하였다. 천산도는 바로 우산도의 잘못된 표기이며, 완릉도는 바로 울릉도이다. 《습유기(拾遺記)》를 보면, “봉래산(蓬萊山)은 그 높이가 2만 리인데, 울이국(鬱夷國)이 있다.” 하였고, 왕유(王維)의 ‘송일본조감서(送日本晁監序)’에, “부상(扶桑)은 냉이 같고 울도(鬱島)는 부평(浮萍) 같으리라.” 하였는데, 울이국이나 울도는 울릉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 절영도(絶影島) -동래부의 남쪽에 있다-ㆍ국도(國島) -안변부(安邊府)의 동쪽에 있다-ㆍ저도(豬島)ㆍ웅도(熊島) -두 섬은 영흥부(永興府)의 동쪽에 있다-ㆍ묘도(卯島) -바로 난도(卵島)의 잘못된 표기로, 단천부(端川府)의 동쪽에 있다-ㆍ신도(薪島)ㆍ연도(連島) -두 섬은 덕원군(德源郡)의 동쪽에 있다-ㆍ화도(花島) -함흥부(咸興府)의 남쪽에 있다-ㆍ사도(沙島) -상고할 수가 없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해조(海條)에 나온다.

이상은 도서(島嶼)이다.

[주D-001]대황(大荒) : 중국에서 아주 먼 지역을 말한다.
[주D-002]개마대산(蓋馬大山) : 현재의 백두산을 가리킨다는 설과 낭림산맥(狼林山脈) 일대를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북한의 이지린은, “개마(蓋馬)는 ‘곰’으로 해석되며, 곰산[熊岳]이 요동에 있다.” 하였다. 《고조선연구 307쪽》
[주D-003]각라오목눌(覺羅吳木訥) : 각라(覺羅)는 청나라 종실(宗室)의 성이다. 각라무목눌(覺羅武穆訥)로도 표기된다.
[주D-004]통지(通志) : 《성경통지》 권27에는 이 부분이 ‘舊志’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경통지》에 나오는 안설(按說)을 《대청일통지》를 찬한 자가 자신의 안설(按說)로 만들면서 ‘通志’로 바꾼 것인 듯하다. 여기에서의 안설은 모두 《성경통지》의 안설이다.
[주D-005]영재(泠齋) : 원문에는 ‘冷齋’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두(頭)를 …… 한다 : 원문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주D-007]철주는 정융진(定戎鎭)을 관할한다 : 원문에는 ‘州領定戎二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州領定戎一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봉두산은 …… 있다 : 원문에는 ‘鳳頭山在郡此’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鳳頭山在郡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도엽(桃葉) : 진(晉)나라 왕자경(王子敬)이 그의 첩(妾)인 도엽을 위하여 지은 악부(樂府)의 청상곡(淸商曲) 이름인데, 여기서는 가기(歌妓)를 가리킨다.
[주D-010]청원(淸源) : 청원 행사 선사(淸原行思禪師)의 별호(別號)로, 길주(吉州)의 청원산(靑原山)에 머물렀으므로 선서(禪書)에서는 흔히 청원(靑原)으로 표기한다.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문하에 청원과 남악(南岳) 두 제자가 있어 2대 법통(法統)이 나왔는데, 청원의 법은 조계(曹溪)로 흘렀고, 남악의 말류(末流)는 임제(臨濟)가 되었다.
[주D-011]청량(淸涼) 익 선사(益禪師) : 문익(文益)을 가리킨다. 청량은 건당(建唐)에 있는 절 이름이며, 법안종(法眼宗)의 개조이다.
[주D-012]돌바닥은 …… 같다 : 원문에는 ‘石底水蔚始翠藍’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石底水蔚如翠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그 형상이 …… 같아 : 원문에는 ‘形如龜狀潭中’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形如龜伏潭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바깥쪽에는 철망(鐵網)을 둘러서 : 원문에는 ‘外施銅鐵’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47에 의거하여 ‘外施鐵網’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5]단단대령(單單大嶺) : 안정복은 “단단대령은 지금의 철령(鐵嶺) 안팎에서 대관령(大關嶺)에 이르는 한 가닥 산령(山嶺)이 바로 그것이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서 대관령을 또한 대령(大嶺)이라고 칭하였으니, 아마 옛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하였고,《동사강목 부록 권하 지리고》 이병도는 “위지에서 이른 바 단단대령은 지금의 대관령이 아니라, 지금의 함경도와 평안도 양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분수령(分水嶺)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였으며,《韓國古代史硏究 192쪽》 북한의 이지린은 “단단대령이란 영은 요동반도를 좌우로 나누는 산맥의 최고산인 현 마천령이다.” 하였으며,《고조선연구 310쪽》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중국의 천산산(天山山) 줄기로 보고 있다.《조선전사 제2권, 113쪽》
[주D-016]단대령(單大嶺) : 원문에는 ‘單大領’으로 되어 있는데, 《후한서》 권115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7]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나, 마한(馬韓) 54국 가운데 하나인 소석색국(小石索國)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역주삼국사기 3책 676쪽》
[주D-018]길이 …… 있다 : 원문에는 ‘路其隘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路甚隘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9]무너진 …… 있다 : 원문에는 ‘頹垣壤塹’으로 되어 있는데, 《여지승람》 권30에 의거하여 ‘頹垣壞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0]배가 …… 지나갔다 : 원문에는 ‘舟過舟下’로 되어 있는데, 《고려도경》 권38에 의거하여 ‘舟過其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만화초(滿花草) : 만화석(滿花席), 즉 여러 가지 꽃무늬를 수놓은 방석을 만드는 풀로, 골풀을 말한다. 골풀은 줄기는 원기둥형이고 1m 이상 자라는 풀로, 말린 줄기로 자리를 짠다. 등심초(燈心草), 석용추(石龍芻), 골속, 용수초(龍鬚草)라고도 한다.
[주D-022]우승은(于承恩) : 원문에는 ‘千承恩’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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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4
산수(山水) 2 경내(境內)의 수(水)

○ 바다 -제수(諸水)의 총설(總說)을 덧붙인다.
《수도제강(水道提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朝鮮國) -지형은 정북쪽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발원하여 남쪽으로 전라도의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바다에 닿았으며, 일본의 대마도(對馬島) 등 여러 섬이 바다의 동남쪽에 널려 있으면서 경상도의 부산(釜山)과 마주 바라보고 있다.- 은 동쪽, 서쪽, 남쪽의 삼면이 모두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북은 길고 동서는 좁다. -북쪽으로는 동경(東經) 11도(度) 4분(分), 북위(北緯) 42도가 약간 못 되는 장백산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동남쪽 모퉁이의 바다에 있는 대마도와 서남쪽 모퉁이의 바다에 있는 한라산(漢拏山)까지에 이르는데, 북위는 34도이다. 그러나 그 실제 지역은 바닷가에 있는 진해성(鎭海城)과 고성(固城)으로, 북위가 34도 4분인바, 거리가 7도 반으로 1870여 리이다. 서쪽으로는 동경 8도, 북위 40도인 압록강(鴨綠江) 해구(海口)로부터 동북쪽으로는 동경 14도 반, 북위 42도 반인 토문강(土門江) 입구에 이르는바, 거리가 6도 반으로, 1600여 리이다. 왕경(王京)에서 동쪽으로는 동경 12도 6분, 북위 37도 5분인 양양(襄陽)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동경 9도, 북위 37도 4분인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는바, 동서 간의 거리는 900리이며, 양쪽 모두 바다에 닿아 있다. 오직 남쪽 경계만이 조금 넓은데, 그 동남쪽 모퉁이의 동경 13도 8분, 북위 35도 3분인 좌수성(左水城)에서부터 서남쪽 모퉁이의 동경 8도 6분, 북위 34도 7분인 무안성(務安城)까지는 거리가 1300여 리이다.- 토문강(土門江) 남쪽 둔치에서부터가 조선의 동북쪽 경계이다. -나라에서 동북쪽으로 가장 먼 곳은 경원부(慶源府)의 서북쪽에 있는, 동경은 13도를 넘어 14도에 가깝고, 북위는 42도 조금 넘는 온성(穩城) 및 미천진성(美踐鎭城)이고, 가장 동쪽에 있는 곳은 경원부 동남쪽에 있는 경흥성(慶興城) 및 이봉파(李鳳坡)로, 동경 14도 5분, 북위 42도 5분인 토문강 입구에 해당된다. 또 남쪽은 해안에 있는 서수락성(西水洛城)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미천진(美踐鎭)은 바로 미전진(美錢鎭)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북쪽의 여러 물줄기가 모여서 토문강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토문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바다는, 토문강 입구에서 이봉파(李鳳坡) 동쪽을 경유하여 조금 남쪽으로 가면 서수락성(西水洛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수라성(西水羅城)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간 다음, 또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큰 산의 기슭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200리가량 가다가 꺾어져서 남쪽으로 굽이굽이 300여 리를 간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서 조금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간다. 여기에서 비로소 꺾어져서 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단천성(端川城)의 동쪽을 지난다. -동경 12도 6분, 북위 40도 7분이다. 서수락성에서 이곳까지는 바닷가에 성곽이 없고 큰 산이 많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다. 단천에 이르러서야 조금 넓어지는데, 그 동쪽의 바닷물은 맑고 깨끗하여 10여 길 아래까지 훤히 들여다보여 다른 곳의 바다와는 다르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하나의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한 물은 단천에서 서북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중간에 세 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합해져 동남쪽으로 200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단천부(端川府)의 남대천(南大川)으로, 근원은 원산(圓山)에서 나와 가덕천(加德川)과 합류하여 단천부의 치소 남쪽에 이르고, 또다시 서쪽에서 흘러온 복대천(福大川)과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다가 이성(利城)의 동쪽을 지나 -이성의 서쪽에 회산(檜山)과 성대산(聖代山)이 있다.-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북청성(北靑城) 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성대산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세 개의 물이 합해져서 동남쪽으로 2백 수십 리를 흘러 북청성 동북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강(洛江)으로, 근원이 성대산(聖代山)에서 나온다. 또 하나의 물이 회산에서 나오고 하나의 물은 성의산(聖義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북청부의 동쪽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홍원성(洪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홍원성(洪原城)으로 되어야 한다.- 동쪽의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요원수(要原水)로, 근원이 북청부의 중산(中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홍원현(洪原縣)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수구가 있는 앞바다에는 도서(島嶼)가 있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입원산(入元山)의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함흥성(咸興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이 합류하여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정평현(定平縣)의 북쪽 경계를 지나며,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도안산(道安山)의 동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성천강(城川江)으로, 근원이 함흥부의 낙림산(樂林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에서 흘러온 원천(元川)과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영흥성(永興城) 동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근원이 두 개인데, 하나는 서북쪽으로 정평현 서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른다. 여기에서 양덕(陽德)의 우선산(遇仙山) 동쪽에서 흐르는 물이 서쪽에서 와서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영흥의 북동쪽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용흥강(龍興江)으로, 근원이 영흥부의 철옹산(鐵瓮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면서 오른쪽으로는 운곡천(雲谷川)의 물을 합하고 왼쪽으로는 요덕천(耀德川)과 비류천(沸流川)의 물을 합한 다음, 영흥부의 북쪽을 경유해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우선산(遇仙山)은 어느 산인지 상세하지 않다.- 수구가 있는 앞바다에는 바로 화도(花島), 사도(沙島)가 있으며, 그 동쪽에는 웅도(熊島), 연도(連島)가 있고, 그 동남쪽에는 신도(薪島), 묘도(卯島), 저도(猪島), 국도(國島)가 있어서 원근에서 서로 바라보고 있다. -연도는 홍원의 동쪽에 있는데 가장 북쪽에 있으며, 묘도는 조금 큰데 가장 동쪽에 있으며, 국도는 가장 남쪽에 있다. 나머지 섬들은 모두 함흥이나 영흥과 가까운 바다에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묘도는 아마도 난도(卵島)의 글자가 잘못된 듯하다.- 바다는, 영흥의 동북쪽에 있는 수구에서 동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대박산(大博山) 북쪽의 평지(平地)를 지나고, -여기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곳이 바로 국도(國島)이다.-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고원성(高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고원성(高原城)으로 되어야 한다.- 동쪽을 지난다. -동경 12도 5분, 북위 39도이다.- 여기에서 또 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문천성(文川城) 동북쪽의 경계에 소수구가 있다. -물은 큰 근원이 두 개인데, 문천성 서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하나는 동남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동쪽으로 흘러 100여 리를 가다가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반룡산(盤龍山)과 문천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문천의 배기이천(配岐伊川)을 말한 것인 듯한데, 용흥강과 합류하는 물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간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덕원성(德源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안변성(安邊城) 동북쪽의 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으로 평강성(平康城) 동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검화산(劍華山) 남쪽, 황룡산(黃龍山) 북쪽을 지나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안변성의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변부의 남대천(南大川)이다. 그 근원이 평강(平康)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안변의 북쪽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흡곡성(歙谷城)과 통천성(通川城) 동쪽을 지나고, -남북 간의 거리가 모두 50리이다.- 조금 남쪽으로 가면 고성(高城) 동북쪽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추지령(秋池嶺)의 남쪽 기슭에서 나와 동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추지령은 추지령(楸池嶺)으로 되어야 한다.- ○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가면 금성(金城)의 동쪽을 지나고, -금성의 서쪽은 바로 금성산(金城山)이며, 금성산의 서쪽은 바로 회양성(淮陽城)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회양부는 금성의 동쪽에 있는바, 여기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양양성(襄陽城)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두사산(頭蛇山)이 있는데, 수구가 있다. -두사산은 바로 금성산 남쪽에 있는 행간산(行幹山)이다. 그 서쪽은 바로 금강산(金岡山)이며, 또 그 남쪽은 장산(張山)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두사산은 두타산(頭陀山)으로 되어야 한다. 두타산의 물이 서쪽으로 흘러 소양강(昭陽江)에 합해지는바, 여기에서 양양의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금강산은 마땅히 금강산(金剛山)으로 되어야 한다. 금강산은 두타산의 동쪽에 있는바, 여기에서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은 역시 잘못된 것이다. 장산은 어느 산인지 상고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강릉성(江陵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삼섭포(三涉浦) -삼가 살펴보건대, 삼척포(三陟浦)로 되어야 한다.- 의 동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울진성(蔚珍城)의 동쪽을 지나게 되는데, 그 동남쪽 바다 건너에는 천산도(千山島) -삼가 살펴보건대, 우산도(于山島)로 되어야 한다.- 가 있으며, 완릉도(菀陵島)라고도 한다. -동경 130도, 북위 36도 8분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평해성(平海城) 동남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봉화성(奉化城)의 동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두 개의 근원이 합해져서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는 바로 천산도가 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영해성(寧海城) 동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예안성(禮安城) 동쪽의 백석산(白石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영덕성(盈德城) 동남쪽으로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쪽에 있는 진보현(眞寶縣) 동쪽의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영덕성의 남쪽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오포(烏浦)로 들어가는 영덕현의 오십천(五十川) 하류를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직보현(直寶縣)은 마땅히 진보현(眞寶縣)으로 되어야 한다.- 이곳의 남쪽 해안은 청하성(淸河城)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흥해성(興海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연일성(延日城)의 동남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서남쪽에 있는 영천성(永川城) 동쪽의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보현산(普賢山)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연일성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연일의 남쪽 해안은 장로일성(長老日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장기성(長鬐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지역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좌병성(左兵城)의 동쪽 경계를 지나고,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태화강(太和江)이다. 태화강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가 있다. -바로 양산성(梁山城) 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오는 물로,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가면 좌수성(左水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조선 경계의 동남쪽 끝모서리인데, 동경 14도가 약간 못 되고, 북위 35도 2분이 조금 넘는다.-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또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동남쪽 모서리가 끝나는 지역이 된다. -동경 14도가 조금 못 되고, 북위 34도 9분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3백 수십 리 되는 바다 건너편에 대마도(對馬島)가 있는데, 큰 섬이다. -대마도의 모양새는 서북쪽으로부터 비스듬하게 굽었으며, 서남쪽은 뾰족하고 길면서 안으로 굽었다. 그 가운데에는 가지가 있어서 서쪽으로 꺾여 큰 칼 모양새를 하고 있다. 북쪽 뾰쪽한 곳부터 서남쪽 뾰족한 곳까지에는 긴 산이 죽 뻗어 있어서 마치 등뼈와도 같다. 길이가 300리가량 되고, 너비는 가운데는 100리이고 앞부분과 뒷부분은 수십 리이며, 뾰족한 곳은 10여 리이다. 동경 14도, 북위 33도 8분에서부터 동경 15도가 약간 못 되고, 북위 34도 4분까지 이른다. 대개 조선 동남쪽 해방(海防)의 요충지로, 서북쪽으로는 절영도(絶影島) 및 동래현(東萊縣)과 정면으로 마주해 있고, 서남쪽으로 김해(金海)의 동쪽에 있는 대수구(大水口)까지가 400리가량 된다.- 바다는, 좌수성의 동남쪽 지역에서 비로소 서쪽으로 꺾인다. 서남쪽으로 100리를 가면 기장성(機長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바로 기장 서쪽 경계의 물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면 동래성(東萊城)의 남쪽을 지나는데, 동래성의 남쪽에서 30리 되는 해안이 바로 부산이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절영도가 있다. -해안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대수구가 있다. -동경 13도, 북위 34도 6분이다.-이것은 조선 동남쪽의 큰 하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동강(洛東江)으로, 낙동강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 바다는, 김해성 남쪽에서 서쪽으로 100리를 가면 웅천성(熊川城) 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십 리나 되는 큰 섬이 있는데, 가덕(加德)과 천성(天城)이라고 한다. -서로 간의 거리가 5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가덕과 천성은 바로 두 진의 이름으로, 모두 가덕도(加德島) 안에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창원성(昌原城) 남쪽 경계 및 우병성(右兵城) 남쪽을 지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섬이 있는데, 영등도(永登島)라고 한다. -섬은 길이가 70리이고 너비가 30리이다. 섬의 동쪽을 우수영(右水營)이라 하고 섬의 서북쪽을 거제(巨濟)라 하며, 섬의 남쪽은 지설포(知泄浦)이다. 역시 조선 남방(南防)의 요충지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거제도로, 영등(永登)은 바로 섬 안에 있는 진(鎭) 이름이다. 지설포는 지세포(知世浦)로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진해성(鎭海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100여 리를 가면 사천(泗川)의 남쪽 경계에 있는 고성(固城)의 남쪽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곤양성(昆陽城) 남쪽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바다를 사이에 두고 큰 섬이 있다. -섬 주위를 돌자면 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가고, 다시 동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가며, 여기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간다. 한 뾰족한 부분은 북쪽 해안을 향하여 있고, 한 뾰족한 부분은 남쪽을 향하여 있다. 너비는 100리이고, 길이는 80리이며, 섬 가운데는 50리이다. 북쪽에 있는 것을 남해성(南海城)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진조항(珍助項)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것을 평산포(平山浦)라고 한다. 북쪽 해안까지의 거리가 3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하동성(河東城)까지의 거리가 5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큰 섬은 바로 남해부(南海府)로, 남해부는 섬 안에 있다. 진조항은 미조항(彌助項)으로 되어야 한다. 미조항 및 평산포는 모두 섬 안에 있는 진 이름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하동성(河東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두치강(豆恥江)으로, 두치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100리를 가면 좌수성의 남쪽에서 조금 서쪽을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물은 북쪽에 있는 낙안성(樂安城)의 동북쪽 송경산(松京山) 기슭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송경산은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흥양성(興陽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가면 천관산(天冠山)의 수구가 있다. -천관산은 흥양성 서북쪽에 있는 낙안(樂安) 및 보성(寶城)의 남쪽에 있다. 물은 천관산의 서북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장흥성(長興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병성(兵城)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는 수십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양강(汭陽江)으로, 그 근원이 나주(羅州)의 쌍계산(雙溪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장흥부를 감싼 다음, 서쪽으로 흘러 강진현(康津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병성(兵城) 및 강진성(康津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가면 해남성(海南城)을 지난다. 또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하나의 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창평(昌平)의 동북쪽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광주(光州)의 남쪽 경계를 지나 무목산(無木山)의 북쪽에 이른다. 또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데, 서북쪽에 있는 정읍(井邑) 서쪽의 용잠산(龍岑山) 남쪽 언덕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무목산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화순(和順) 남쪽과 능주(綾州)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영암(靈巖)의 북쪽을 지난다. 또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물이 있는데, 능주의 남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우수성(右水城)의 서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가다가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는 넓어서 수십 리나 된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호강(沙湖江)이다. 사호강은 근원이 담양부(潭陽府)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황룡천(黃龍川)과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이른바 정읍의 서쪽에서 온다고 하는 물이다.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나주(羅州)의 치소(治所)를 감싼 다음,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영암의 북쪽에 이르러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덕진포(德津浦)의 물과 합류한다. 이것이 이른바 능주의 남쪽 산에서 온다고 하는 물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무목산은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이고, 용잠산은 바로 용천산(龍泉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곳 해구(海口)에서 서남쪽으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섬을 흑산도(黑山島)라고 하며, 그 남쪽에 있는 조금 큰 섬을 여도(㻌島) -삼가 살펴보건대, 진도(珍島)의 잘못된 표기이다.- 라고 한다. 또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먼 곳에 가장 큰 섬이 있는데, 제주도(濟州道)라고 한다. -흑산도는 해구의 서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남해성(南海城) 해안과의 거리가 100리이며, 북쪽으로 무안(務安)의 남쪽 해안과의 거리가 50리이다. 모양새가 거위알처럼 생겼는데, 가운데에 흑산(黑山)이 있으며, 둘레가 50여 리이다. ○ 진도는 흑산도에서 동남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해성 해안과의 거리가 90리이다. 모양새가 길면서도 네모지게 생겼다. 남쪽에 금이산(金伊山)이 있으며, 그 북쪽을 남도포(南桃浦)라고 한다. 둘레가 100리가량 된다. ○ 삼가 살펴보건대, 여도(㻌島)는 진도(珍島)로 되어야 한다. 금이산은 바로 금갑(金甲)의 글자가 잘못된 것으로, 이는 섬 안에 있는 진(鎭) 이름이다. ○ 제주도는 진도에서 동남쪽으로 7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남해성 해안과의 거리가 1백 수십 리이다. 모양새는 세모지게 생겼으며, 동서 간의 거리가 130리이고, 동남쪽에서 서북쪽까지의 거리는 100여 리이고, 북쪽에서 서남쪽까지는 90여 리이다. 섬 가운데에 한라산(漢拏山)이 있으며, 북쪽을 제주(濟州)라 하고, 동남쪽을 정의(旌義)라 하고, 서쪽을 대정(大靜)이라 하는데, 조선의 서남쪽 바다를 방비하는 요충지이다. 동경은 4도 5분에서 9도 약간 못 미치는 데까지 이르고, 북위는 34도에서 34도 3분까지 이른다.- ○ 해구(海口)의 서쪽에는 무안성(務安城) 남쪽 경계인데, 조선 서남쪽의 모퉁이 지역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꺾어져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무안성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산기슭을 지나며,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남평성(南平城) -삼가 살펴보건대, 함평성(咸平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소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용잠산(龍岑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장성(長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는바, 본문이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무장성(茂長城)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조금 길게 꺾어져서 서쪽으로 간 다음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고창성(高敞城)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조금 굽어들면 부안성(扶安城) 서쪽 경계를 지나며, 조금 북쪽으로 가면 수구가 있는데, 바로 옥구성(沃溝城) 서남쪽 경계이다. -물은 근원이 두 개이다. 남쪽 근원의 물은 동남쪽에 있는 추월산(秋月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금구성(金溝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만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고부성(古阜城)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만전성(萬塡城)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부안(扶安)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만난다. ○ 북쪽 근원의 물은 추월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성(金堤城)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임피(臨陂) 남쪽과 만전성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부안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남쪽 근원에서 나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의 길이는 300여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남쪽 근원의 물은 바로 동진강(東津江)으로, 근원이 정읍현(井邑縣)의 내장산(內藏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김제에 이르러서 태극포천(太極浦川)의 물과 만나 만경(萬頃)의 남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북쪽 근원의 물은 바로 사수강(泗水江)으로, 근원이 용담현(龍潭縣)의 주줄산(珠崒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김제의 북쪽과 임피의 남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만전성(萬塡城)은 바로 만경(萬頃)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옥구성(沃溝城) 서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과 바다를 격해 30리 되는 곳에 섬이 있어 군산도(羣山島)라고 한다. -섬은 타원형으로 둘레가 60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가면 서천(舒川) 남쪽의 수구가 있는데, 바로 옥구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에 있는 물로, 역시 조선의 큰 하천 가운데 하나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강(錦江)으로, 금강조(錦江條)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강 입구에서 바다를 격해 정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는 섬을 원산도(元山島)라고 한다. 그 남쪽에서 조금 동쪽에 있는 섬을 군산도라고 하는데, 앞에서 나왔다. 원산도의 모양새는 길이가 60리이고, 폭이 20리이다. 북쪽으로는 요아량(要兒梁) 지역과의 거리가 40리이고, 서북쪽으로는 오평도(烏平島)와의 거리가 90리이다. 이 섬들은 모두 이 강 서쪽면의 수구이다.- ○ 바다는, 수구에서 북쪽으로 가면 기해저(岐海渚)이고, 다시 북쪽으로 가면 시인성(施仁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인성(庇仁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과 수성(水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영(水營)이다.- 서쪽을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결성(結城)의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태산성(泰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태안성(泰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동남쪽 경계의 해저(海渚)를 지나고,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꺾어져서 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요아량(要兒梁)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흥량(安興梁)의 잘못된 표기이다.- 지역을 지나는데, 바로 태산현 남쪽 지역이 한 줄기로 뻗어서 바다로 들어간 곳으로, 모양새가 코끼리의 코처럼 생겼다. 동쪽으로는 수성, 시인성의 해안을 바라보는데, 거리가 3, 4십 리이다. 바다는, 요아량의 남쪽으로부터 돌아서 서북쪽으로 가면 요아량의 서쪽을 지나는데, 그 서쪽은 오평도이다. -섬은 둘레가 50리이고 동쪽으로 요아량 해안과의 거리가 60리이다.- 바다는 또다시 북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태산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그 바깥은 덕물도(德勿島)이다. -섬은 거위알처럼 생겼으며, 둘레가 5, 6십 리이고, 동쪽으로 태산 해안과의 거리가 50리이다.- 여기에서 또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가면 태산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그 바깥쪽은 용도(龍島)이다. -섬의 모양새는 약간 길게 생겼으며, 둘레는 50여 리이고, 남쪽으로 해안과의 거리는 30여 리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면 단산성(端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산성(瑞山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산 북쪽으로 지나는데, 조금 동쪽에 수구가 있으며, 수구의 서쪽이 바로 대부도(大富島)이다. -물은 동쪽에 있는 청주(淸州)의 서쪽 큰 산에서 나오며, 전의(全義)의 동북쪽에 이르러서 서북쪽으로 흘러 천안성(天安城)의 동북쪽 경계를 경유한 다음 동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성(安城)과 양성(陽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직산성(稷山城)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 있는 차현산(車見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진위(振威)의 남쪽과 평택(平澤)의 북쪽을 지난 다음 또 서북쪽으로 흐른다. 여기에서 북쪽에 있는 금천성(衿川城) 동북쪽의 관악산(冠岳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수원성(水原城)의 남쪽, 아산성(牙山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평성(富平城)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부터 흘러오는 물이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신창(新昌)의 남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예산성(禮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서남쪽에 있는 가야산(加邪山)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 다음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덕산성(德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서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아산성의 서쪽, 면천성(沔川城)의 동북쪽을 지나 흘러오는 물과 이곳에서 합류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면천성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남양성(南陽城)의 남쪽, 당진성(唐津城)의 북쪽을 지나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수성의 남쪽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발원지에서부터 500여 리를 흐른다. ○ 삼가 살펴보건대, 경기와 호서(湖西) 두 도가 나뉜 경계의 대진(大津)은 그 근원이 세 개가 있다. 하나는 선원천(禪院川)으로 양지현(陽智縣) 곡돈현(曲頓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돈곶진(頓串津)으로 청양현(靑陽縣) 백월산(白月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미륵천(彌勒川)으로 공주(公州)의 차현(車峴)에서 나온다. 선원천은 서남쪽으로 흘러 소사(素沙)의 들판에 이르러서 왼쪽에서 흘러오는 아주천(牙洲川)의 물과 합류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오른쪽에서 흘러오는 항곶천(亢串川)의 물과 합류한 다음 평택현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공진포(貢津浦)에 이른다. 돈곶진은 남쪽으로 금마천(金馬川), 미륵천(彌勒川), 승선천(昇仙川) 등 여러 물과 합류하여 아산(牙山)과 면천(沔川) 두 현의 사이로부터 오는 물과 합류하여 대진(大津)이 되어서 또다시 서쪽으로 당진현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수도제강》에서 이른 바 근원이 청주(淸州)의 서쪽 산에서 나온다고 한 것은 아주천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 흘러가다가 천안성(天安城)의 경계를 지나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만난다고 한 것은 바로 선원천이다. 또 차현산(車見山)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이 있어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미륵천이다. 차현산은 바로 차현(車峴)의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또 한 물이 관악산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항곶천으로, 그 근원이 수원부의 광교산(光敎山)에서 나오는바, 관악산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또 신창(新昌)의 남쪽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있어서 예산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고 한 것은 바로 돈곶진이다. 또 가야산에서 흘러나오는 한 물이 있어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금마천으로, 그 근원이 홍주(洪州)의 오서산(烏棲山)에서 나오는바, 가야산에서 나온다고 하였으니, 역시 잘못된 것이다. 또 덕산의 경계를 지나서 서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고 한 것은 바로 승선천이다. ○ 수구에서 정서쪽으로 바다에 있는 섬이 대부도인데, 섬의 모양새는 둥글고, 둘레가 50여 리 된다. 동북쪽으로 수성 해안과의 거리가 40리이다.- ○ 바다는, 수구가 있는 수성(水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수원부이다.- 서쪽으로부터 또다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가면 인천성(仁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조금 동쪽에 조선의 대수구(大水口)가 있는데, 이는 큰 하천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한강(漢江)이다. 한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수구의 동남쪽 바다에 대부도(大富島)가 있으며, 수구의 정서쪽에서 약간 북쪽에 정포(井浦)가 있는데, 큰 섬으로 둘레가 200리이며, 가운데에 강화성(江華城)이 있다. 섬의 모양새는 네모졌으면서도 서남쪽이 뾰족하다. 동쪽으로는 교하성(交河城) 해안까지의 거리가 40리이다. 바로 예전에 각화도(覺華島)라고 하던 섬이다. 이 섬에서 서남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있는 섬이 연자도(硯子島)인데, 섬의 모양새는 둥글면서도 긴 벼루 모양으로 생겼다. 남쪽으로 용도(龍島)ㆍ덕물도(德勿島)와 100여 리를 떨어져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면서 바깥쪽 대수구가 된다. ○ 바다는, 강 입구에 있는 교하성(交河城)의 서쪽에서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100리가량 가면 임진강(臨津江) 입구가 되는데, 임진강 역시 큰 하천이다. -해구(海口)의 바깥쪽은 동남쪽에 있는 강화도(江華島)와 북쪽에 있는 교동성(喬桐城) 큰 섬으로 대수구(大水口)를 삼는다. ○ 임진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임진강 입구에서 북쪽으로 가면 풍덕성(豐德城)의 서남쪽 지역이 되는데, 조금 서북쪽에 하나의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성강으로, 예성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해구의 동남쪽은 바로 바다 가운데에 교동성이 있는데, 큰 섬이다. 섬의 모양새는 길게 네모졌는데, 서남쪽이 뾰족하다. 둘레는 200리로 강화도와 비슷하며, 해안까지의 거리는 40리이다.- ○ 바다는, 수구로부터 서북쪽으로 90리를 가면 연산(延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연안(延安)의 잘못된 표기이다.- 남쪽이 되는데, 하나의 소수구가 있다. -물은 동북쪽에 있는 구잠산(駒岑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건수성(建水城) 서북쪽과 봉산성(鳳山城)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배천성(白川城) 남쪽으로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수양산(首陽山) 남쪽 기슭 및 연산성(延山城)의 남쪽을 돈 다음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는 300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해주(海州)의 삼탄(三灘)으로, 근원이 평산부(平山府)의 성불산(成佛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단역(靑丹驛)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구잠산은 황주(黃州)에 있는 구현(駒峴)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나, 구현은 삼탄의 근원이 아닌바 상세히는 알 수가 없다. 건수(建水)는 검수(劍水)의 음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 바다는, 연산성의 남쪽으로부터 꺾어져서 서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강익성(康翊城) -삼가 살펴보건대, 강령성(康翎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옹진성(瓮津城)의 서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가면 장연성(長淵城)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바다 가운데에 초도(椒島)가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풍천성(豐川城)의 서쪽을 지나는데, 바다 가운데에 백령도(白翎島)가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다가 꺾어져서 동쪽으로 100리가량 가면 은율성(殷栗城)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8, 9십 리를 가면 삼화성(三和城) 남쪽이 되는데, 패수구(浿水口)가 있다. -동쪽으로 봉산(鳳山), 배천(白川)에서 서쪽으로 연산, 강령, 옹진, 장연에 이르기까지는 뒤쪽으로 모두 산을 등지고 있는데, 산이 끊이지 않고 연속되어 뻗어 있다. 여기에서 또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풍천(豐川), 송화(松花), 장련(長連)이 되며, 동쪽으로 가면 안악(安岳)에 이르는데, 여기도 역시 산들이 서려 있다. 그러므로 이곳 수백 리의 지역은 서쪽, 남쪽, 북쪽 삼면이 모두 바닷가에 닿아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송화는 바로 송화(松禾)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지금 대동강(大同江)이라고 한다. -대동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삼화성(三和城) 남쪽에 있는 수구에서부터 꺾어져서 북쪽으로 200여 리를 가면 함종성(咸從城)과 증산성(曾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증산성(甑山城)으로 되어야 한다.- 두 성의 서쪽을 지나고,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영유성(永柔城) 서북쪽을 지나며, 또다시 동북쪽으로 가면 소수구가 있다. -바로 순안성(順安城) 서북쪽에 있는 큰 산의 북쪽에서 나오는 물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통덕천(通德川)으로, 그 근원이 순안에 있는 법홍산(法弘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숙천부(肅川府)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숙천성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안주(安州)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청천강(靑泉江)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淸川江)으로, 청천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가면 대정강(大定江) 수구가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령강(大寧江)으로, 대령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 바다는,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가면 나청하(那靑河) 소수구가 있다. -나청하는 가산성(嘉山城) 서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봉두산(鳳頭山) 동쪽과 나청청(那靑廳) 서쪽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대천하(大川河)의 소수구가 있다. -대청하는 북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봉두산의 서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에서 조금 서쪽으로 흘러 정주성(定州城)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상의 두 수구는 대정강과 청천강 두 수구와의 서로 간의 거리가 100리 사이에 있다. ○ 삼가 살펴보건대, 대천하는 바로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인 듯하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정주의 서남쪽 경계 및 곽산성(郭山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동래천(東來川) 소수구가 있다. -동래천은 삭주(朔州) 북쪽에 있는 산과 개막산(蓋幕山)이 서로 연결된 곳에서 나오는데, 여기에서 북쪽으로 산 너머가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에 있는 오등성(敖登城), 요곽이성(遼郭爾城), 창성(昌城)의 세 성이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흘러 곽산성(郭山城) 서쪽과 선천성(宣川城) 동쪽을 지나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동로강(東路江)으로, 그 근원이 구성(龜城)의 마구리산(馬仇里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선천부(宣川府)의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오등성과 요곽이성 두 성에 대해서는 압록강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선천성(宣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며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가면 선천하(宣川河) 소수구가 있다. -선천하는 북쪽 산에서 나오며, 그 산 너머의 서북쪽이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에 있는 숙주성(宿州城)이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흘러 철산(鐵山)의 동쪽 기슭을 돌아서 선천성의 서남쪽 경계 지점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선천부의 청강(淸江)으로, 그 근원이 보리산(菩提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철산군의 동쪽 경계를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숙주는 삭주(朔州)의 음이 와전된 듯하다.- ○ 바다는,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가면 철산성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수십 리를 가다가 꺾어져서 북쪽으로 가면 용천성(龍川城)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삭천하(朔川河) 소수구가 있다. 용천성에서 하천 건너편의 북쪽 둔치에 바로 의주성(義州城)이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가면 바로 압록강 남쪽 둔치의 애주(愛州)이다. -삭천하는 동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용천성의 북쪽과 의주성의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진강(古津江)으로, 그 근원이 천마산(天磨山)의 동남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양책관(良策館)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애주는 바로 의주이다.- ○ 바다는, 삭천하의 수구로부터 의주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그 서쪽은 바로 압록강 수구이며, 서북쪽 둔치는 성경(盛京)과의 경계가 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막혀 있다. 그러므로 차풍(次風) 제소남(齊召南)이 수도(水道)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바다를 강(綱)으로 삼아 두만강 입구부터 시작하여 바다를 따라서 남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고 북쪽으로 올라가 압록강 입구까지 이르렀는데, 매번 해구(海口)로부터 원류(源流)를 거슬러 올라갔는바, 마치 강(綱)을 쳐들면 목(目)이 따라 올라오는 것과 같아 자못 치밀하고 상세하다. 이는 본국의 여도(輿圖)를 살펴보고서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과 군(郡)의 호칭에 있어서는 잘못된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제 조목에 따라서 변정(辨正)하였다. 큰 강 중에 다른 서책에도 나와서 각각의 목(目)을 세운 것은 각 목의 아래에다 나누어 붙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경계는 동쪽, 서쪽, 남쪽 삼면이 모두 바다에 닿아 있으며, 그 동해의 물은 맑고 깨끗하여 10길 남짓의 아래에까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송사(宋史)》 고려열전에 이르기를, “고려의 동쪽에 임해 있는 바다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10길 아래에까지 환하게 내려다보인다. 동남쪽으로는 명주(明州)가 바라다보이는데, 물이 모두 푸르다.” 하였다.- 구지(舊志)를 보면, 서쪽의 큰 바다에는 황주(黃州)의 장명진(長命鎭)이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통강(大通江)으로 들어간다. 또 백주(白州)와 해주(海州)의 서쪽은 모두 바닷가와 가깝다. 강희(康煕) 50년(1711)에 조선국의 섬인 몽금도(夢金島), 정족도(鼎足島), 사야질구미(沙也叱九味) 등지가 모두 봉천부(奉天府)의 금주(金州)ㆍ복주(復州)ㆍ개주(蓋州)ㆍ해주(海州)와 서로 가깝다는 이유로, 봉천부의 장군(將軍) 및 부윤(府尹)에게 자문(咨文)을 보내어서 연해(沿海)에 사는 백성들이 조선과 가까운 바다에 가 고기잡이하는 것을 엄금하라고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문휘고(同文彙考)》를 보면, “강희 49년(1710)에 중국 예부(禮部)에 보낸 자문에, ‘오차포진(吾叉浦鎭)과 몽금도(夢金島) 앞바다, 초도진(椒島鎭)과 정족도(鼎足島) 앞바다, 소청도(小靑島)와 사야구미(沙也九味) 앞바다에 중국의 고기잡이 배가 끊임없이 오가서 변경에 사는 백성들이 놀라 소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칙령을 내려 금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강희 50년에 예부에서 봉천부의 부윤에게 자문을 보내어 금령(禁令)을 신칙하게 하였다.” 하였다. 《대청일통지》에서 이른 바는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오차포(吾叉浦)는 장연현(長淵縣)에 있으며, 초도(椒島)는 풍천부(豐川府)에 있다.
○ 한강(漢江) -옛날에는 열수(列水)라고 하였으며, 혹 여강(驪江)이라고도 한다. ○ 습수(濕水)와 산수(汕水)를 덧붙인다.
《산해경(山海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쪽에 있다. ○ 조선은 열양(列陽)에 있다. ○ 주(注)에 이르기를, “열(列)은 물 이름으로, 지금 대방(帶方)에 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열수는 예로부터 혹 한수라고 하였음이 명백하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樂浪郡) 탄열현(呑列縣)의 분려산(分黎山)은 열수(列水)가 근원하는 곳이다. 열수는 서쪽으로 점제(黏磾)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820리를 흘러간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에는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汕水) 세 강이 합해져 열수(列水)가 된다. 아마도 낙랑이니 조선이니 하는 것은 여기에서 이름을 취한 듯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습수와 산수는 아마도 한강의 별원(別源)으로 회양(淮陽)과 보은(報恩)에서 나오는 물인 듯하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한강은 국성(國城)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근원은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남쪽은 바로 옛 백제국이다. ○ 양화도(楊花渡)는 왕성의 서남쪽, 한강 가에 있는데, 각도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이곳에서 모두 모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강은 또 웅진강(熊津江)이라고도 하는데, 국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근원은 금강산과 오대산(五台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두 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왕성(王城)은 이 강을 의지하여 험고함으로 삼는다. 한강의 남쪽은 바로 옛 백제국 지역이다. 명(明)나라 만력 연간에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구원하자 왜적들이 왕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이에 이여송이 성안에 들어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에 임하여 왜적의 후미를 뒤쫓아가 철수하는 자들을 치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 양화도는 국성의 서남쪽, 한강 가에 있는데, 각도에서 올라오는 곡식을 모두 이곳에서 모은다. 혹자는 바로 임진도(臨津渡)라고 한다.
《유서찬요(類書纂要)》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국의 경기(京畿)에 여강(驪江)이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강의 물이 여주(驪州)의 경계에 이르면 혹 여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인천성(仁川城)의 북쪽에서 조금 동쪽은 조선의 대수구이다. 대수의 근원은 남파(南派)와 북파(北派)가 있다. 남파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대산(五臺山)의 우통(于筒)에서 나오는 한강의 정원(正源)이다.- 는 동쪽으로 장산(張山) -삼가 살펴보건대, 장산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에서 나와 두 개의 물이 합해져서 서쪽으로 흘러 우두산(牛頭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용두산(龍頭山)의 잘못된 표기로, 제천현(堤川縣)의 북쪽에 있다.-남쪽 기슭, 청풍성(淸風城)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또 서쪽에 한 개의 강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섬강(蟾江)이다.- 이 있어, 동북쪽에 있는 영시촌(寧市村) 서쪽의 공작산(孔雀山) -삼가 살펴보건대, 공작산은 홍천현(洪川縣)의 남쪽에 있다.- 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섬강의 근원은 횡성현(橫城縣)의 덕고산(德高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흥원진(興元津)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제천성(堤川城)의 서남쪽에 있는 치악산(雉岳山)의 남쪽 기슭을 지난다.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가 원주의 동남쪽 경계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음성(陰城)의 동북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충주(忠州)의 서쪽 및 여주(呂州)의 동쪽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물이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천민천(天民川)으로, 그 근원이 충주의 소속리산(小俗離山)에서 나와 북동쪽으로 흘러 여주의 경계에 이르러서 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원주성(原州城)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이주성(利州城) -삼가 살펴보건대, 이천(利川)으로 되어야 한다.- 의 북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은천(新恩川)으로, 그 근원이 지평현(砥平縣)의 부동산(不動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한강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광주성(廣州城)의 북쪽과 양근(楊根)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비정(碑亭)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조선의 국성(國城) 동남쪽에 있는 삼각산(三角山) 앞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북쪽 근원에서 나온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은 양근의 경계에서 한강에 합해지는바, 여기에서는 국성의 동남쪽에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 북쪽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연강(新淵江)으로, 그 근원이 회양부(淮陽府)의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에서 나온다.- 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동북쪽의 금성(金城) 동남쪽에 있는 추지령(秋池嶺) -삼가 살펴보건대, 추지령(楸池嶺)으로 되어야 한다.- 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은 바로 신진(新津)으로, 근원이 회양의 말휘령(末暉嶺)에서 나온다.- 서쪽으로 흘러 서북쪽에서 흘러온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철령(鐵嶺)의 은계천(銀溪川)이다.- 과 합류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낭주(狼州) -삼가 살펴보건대, 낭천(狼川)으로 되어야 한다.- 의 동남쪽 경계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신진은 북서쪽으로 흘러 은계천과 합류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신연강에 들어간다.- 하나는 회양성의 북쪽 산 및 남쪽의 금성산(金城山)에서 나온 두 개의 물이 합류해서 서쪽으로 흘러 양구성(楊口城) 및 인제성(麟蹄城)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회양의 북쪽 산과 금성산에서 나오는 두 개의 물은 상세히 알 수가 없다.-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이미 합류해서 서남쪽으로 흘러 가평성(加平城) 남쪽 경계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남쪽 근원에서 흘러오는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소양강(昭陽江)이다.- 이 동남쪽에 있는 금강산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동북쪽으로 흘러 평창성(平昌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소양강은 근원이 오대산의 북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춘천부(春川府)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신연강과 합류하는바, 여기에서 가평군에 이르러서 합류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세 개의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진 다음에는 서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오갑산(五甲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오신산(五申山)의 잘못된 표기로, 오신산은 김화현(金化縣)에 있다. 세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져서 오신산을 지난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의 남쪽 기슭과 홍천성(洪川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춘천성(春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횡성(橫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홍천강(洪川江)으로, 그 근원이 강릉부(江陵府)의 백치(柏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신연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저평성(底平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지평(砥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 경계와 포천성(抱川城)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양근성(楊根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그 북쪽 둔치에 있는 산은 바로 양주성(楊州城)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돌아서 삼각산(三角山) 앞에 이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광주(廣州)에서 흘러온 남파(南派)의 물과 합류한다. ○ 남파와 북파 두 개의 강이 이미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서는 국성(國城)의 안산(案山)의 남쪽 기슭 -국성은 동북쪽으로부터 동쪽, 남쪽, 서쪽은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북쪽에 동경 10도 6분이 조금 넘고, 북위 37도 6분인 작은 산이 있는데, 산 너머 동쪽이 양주(楊州)이며, 그 북쪽 80리 되는 곳에 백악산(白岳山)이 있다. 백악산의 동북쪽은 적성(積城)이다. 또 북쪽으로 30리 되는 곳이 바로 임진강(臨津江)이다. 백악산에서 서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이 고양성(高陽城)이고, 또 서북쪽으로 50리 되는 곳이 파주(坡州)이다. 파주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이 바로 임진강이다. 국성의 서남쪽에는 산이 가로질러 있으면서 안산(案山)이 되는데, 동서쪽으로 수백 리에 뻗쳐 있으면서 강물을 따라서 안대(案對)가 되었다. 굉자원(宏滋院)이 성에서 서남쪽으로 50여 리 되는 곳의 산 사이에 있다. ○ 강물은 또 서쪽으로 흘러 안산의 남쪽 기슭을 돈 다음 과천성(果川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과천성은 국성의 서남쪽에 있으며, 또 과천의 서남쪽에는 용인성(龍仁城)이 있다. 또 서남쪽에는 관악산(冠岳山)과 수리산(修理山)이 있다.- 을 지나 1백 수십 리를 흘러 양천성(陽川城)의 북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산성(安山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앵봉천(鸎峯川)을 말하는 듯하다. 앵봉천은 근원이 삼각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공암진(孔巖津)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을 받고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흘러 김포성(金浦城)의 서쪽을 지나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 있는 수원성(水原城)의 북쪽 산에서 흘러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부평성(富平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통진성(通津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의 남쪽 둔치에는 인천성(仁川城)이 있고, 북쪽 둔치에는 교하성(交河城)이 있는데, 서로 간의 거리가 100리이다. ○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종횡(縱橫)으로 10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보면, 한강 외에는 800리나 되는 큰 강이 없으니 아마도 한수(漢水)가 열수(列水)인 듯하다. 《산해경》을 보면, 맥국(貊國)은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맥국은 지금의 관동(關東) 지방인바, 과연 한수의 동북쪽에 있다. 또 세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져서 구불구불 800리를 흐르는바, 열수가 한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강은 그 근원에 세 개가 있는데, 하나는 오대산의 우통(于筒)에서 나오고, 하나는 회양(淮陽)의 금강산에서 나오는데 이를 신연강이라고 하고, 하나는 그 근원이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 문장대(文藏臺)에서 나오는데 이를 달천(達川)이라고 한다. 오대산에서 나오는 물은 남쪽으로 흘러 정선군(旌善郡)을 지나고, 서쪽으로 흘러 충주(忠州)에 이른다. 여기에서 달천이 괴산(槐山)과 연풍(延豐) 두 현 사이를 지나 남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 충주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여주(驪州)를 지나고 양근군(楊根郡)에 이른다. 여기에서 신연강이 북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는 서남쪽으로 흘러 광주(廣州)의 경계를 감돌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경성(京城)의 남쪽을 감돌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교하군(交河郡)의 남쪽에 이른다. 여기에서 임진강(臨津江)이 북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하여 풍덕부(豐德府)에 이르러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살펴보건대, 《무비지(武備志)》를 보면, 우리나라의 지도에 팔도의 여러 강을 합하여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대청일통지》에서는 한강을 또 웅진(熊津)이라고 하였고, 또 양화도(楊花渡)가 바로 임진도(臨津渡)라고 하였고, 또 백마강(白馬江) 하류가 한강에 합류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비류강(沸流江)이 한강으로부터 나뉘어 흘러 대동강(大同江)에 합해진다.”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잘못된 것을 다시 잘못 전하면서 바로잡지 않은 탓에 그렇게 된 것이다.
○ 달천(達川)
《삼재도회속집(三才圖會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 속리산의 산꼭대기에는 문장대가 있는데, 문장대 위에서 한 물이 나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한강의 별파(別波)로, 앞에 나오는 안설(按說)에 상세하게 나온다.
○ 임진강(臨津江) -옛날에는 대수(帶水)라고 하였으며, 혹 호로하(瓠蘆河), 청강(淸江)이라고도 하였다.
《한서》 지리지(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군 함자현(含資縣)에는 대수(帶水)가 있다. 대수는 서쪽으로 흘러 대방(帶方)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상원(上元) 2년(675)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거느리고 호로하를 건너가서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격파하였다.
《황명세법록(皇明世法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산동(山東) 문등현(文登縣)의 성산위(成山衛)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호로하로 들어가 신라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수는 지금의 임진강으로, 옛날의 칠중하(七重河)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사군강역 대방군조(四郡疆域帶方郡條)에 나온다.- 칠중성은 바로 적성현(積城縣)이다. 지금 임진강이 흐르다가 적성의 서쪽에 이르러서 호로탄(瓠蘆灘)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유인궤가 강물을 건넌 곳이다.
《요사(遼史)》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통화(統和) 28년(1010)에 야율분노(耶律盆奴) 등이 고려를 정벌하면서 개경(開京)에 들어가서 왕경(王京)을 크게 약탈하고 불사른 다음 청강(淸江)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야율분노가 이미 개경을 약탈하고서 청강에 이르렀으니, 청강은 개경 남쪽에 있는 강임이 분명하다. 《명시종(明詩綜)》에 실려 있는 조선 이행(李荇)의 임진강(臨津江) 시에 이르기를, “임진에서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해, 나루터를 물으면서 청강에 가네.[臨津催早發 問渡卽淸江]” 하였다. 이에 의거하면 청강이 바로 임진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선부(朝鮮賦)》의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진강은 장단부(長湍府)에 속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왜적이 임진을 건너서 개성을 약탈하였는데, 얼마 뒤에 이여송(李如松)이 개성에 주둔해 별장(別將) 사대수(査大受)를 파견하여 임진을 지키면서 동쪽과 서쪽으로 책응(策應)하게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진강은 동북쪽에 있는 이천성(伊川城)의 서북쪽 큰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안협(安峽)의 북쪽을 지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큰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정산탄(靜山灘)으로, 그 근원이 평강현(平康縣)의 분수령(分水嶺)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안협현(安峽縣)의 북쪽에 이르러서 임진강에 합류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삭녕성(朔寧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한 개의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마룡연(馬龍淵)이다.- 이 있어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철원(鐵原)의 남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마룡연은 그 근원이 평강현의 상현(霜峴)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철원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삭녕의 남쪽에 이르러서 임진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하나의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탄강(大灘江)이다.- 이 있어서 합류하는데, 이 물은 동남쪽에 있는 가평(加平)의 북쪽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홀러 김화성(金化城)의 남쪽 경계와 영평성(永平城)의 북쪽 경계 및 연천성(連川城) -삼가 살펴보건대, 연천성(漣川城)으로 되어야 한다.- 의 서남쪽 경계를 지나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탄강은 그 근원이 회양부(淮陽府)의 쌍령(雙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철원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연천현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마전성(麻田城)의 남쪽 경계와 적성(積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큰 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러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에서 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이 바로 백악산(白岳山)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파주(坡州)의 북쪽 경계와 장단성(長湍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여기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한 큰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沙川)이다.- 이 동북쪽에 있는 개창부(開昌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의 송악산(松岳山) 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장단의 북쪽 경계 및 개성부의 남쪽 경계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을 서쪽으로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천은 그 근원이 송도(松都)의 성거산(聖居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송도천(松都川)과 판적천(板積川)을 지나서 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에 들어간다.- 송악(松岳)은 바로 조선의 중악(中岳)으로, 백악(白岳)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임진강이 되어 다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이 강은 근원에서 7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임진강은 그 근원이 안변부(安邊府) 영풍고현(永豐故縣)의 방장동(防墻洞)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이천부(伊川府)의 경계로 들어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삭녕군(朔寧郡)의 경계로 들어갔다가 서남쪽으로 흘러 장단부(長湍府)의 남쪽을 돌아 교하군(交河郡)에 이르러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예성강(禮成江) -저탄(豬灘)을 덧붙인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성강은 두 산 사이에 있는데, 돌 협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데, 이것이 이른바 급수문(急水門)으로 몹시 험악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급수문은 그 문이 바다 섬과는 닮지 않았으며, 흡사 무협(巫峽)의 강로(江路)와 같았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바로 물길이다. 수세가 산협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어, 요란하기가 우레가 울리는 것과 같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일로(一路)에 시냇물이 있는 곳에는 모두 소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았다. 보산관(寶山館) 근처에 시내가 있어 저탄(楮灘)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탄(豬灘)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라고 하는데, 폭이 20여 길이나 되는데도 역시 소나무로 다리를 놓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성항(禮成港)은 개성부의 남쪽에 있는데, 예성강의 하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또 급수문이 있는데, 《대명일통지》를 보면, 개성부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으며, 흡사 무협과 같이 생겼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풍덕성(豐德城)에서 조금 서북쪽에 한 수구(水口)가 있다. 그 물의 근원은 동북쪽에 있는 곡산성(谷山城)의 동북쪽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서 곡산성의 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서 흘러온 하나의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신계성(新溪城) 북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수산성(遂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수안성(遂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남쪽에 이른다. 이곳에서 북쪽에서 흘러온 큰 물과 합류하는데, 이 물은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토산성(兎山城)을 지나 북쪽으로 흐르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송악산 개창부(開昌府)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개성부(開城府)의 잘못된 표기이다.-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 산의 남쪽 기슭을 돈 다음 서쪽으로 흘러 동금천성(東金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서금천성(西金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이곳에서 금천하(金川河)와 합쳐지는데, 금천하는 동북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동금천성의 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온 두 개의 근원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평산성의 남쪽을 지나는 물과 합류한다. 서쪽에서 흘러온 금탄하(金灘河)는 서쪽으로 흘러 서금천성을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만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풍덕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물은 바로 예성강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원류(源流)가 지나는 바와 별파(別派)가 합류되는 바에 대해서 모두 뒤섞어서 말하여 어거지로 해석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금천성은 하나일 뿐인데, 이곳에서는 동금천성과 서금천성 두 개로 말하였으니 더욱더 잘못된 것이다. 이른바 금탄하라는 것도 역시 어느 물을 가리키는지 알 수가 없다.- ○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500여 리를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예성강은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신계현(新溪縣)의 서쪽을 지난 다음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평산부(平山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저탄(豬灘)이 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도경》에서 이른 바 급수문은 아마도 이 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가리키는 것인 듯하다.
○ 오조천(吾助川) -박연(朴淵)을 덧붙인다.
《허문목집(許文穆集)》의 회란석시(廻瀾石詩) 서문(序文) -허국(許國)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적에 지은 것이다.- 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조천 가에 병풍처럼 생긴 돌이 있어서 오조천의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데, 예전에는 이 돌의 이름이 없었다. 이에 내가 그 돌을 명명하여 ‘회란석(廻瀾石)’이라 하였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연(朴淵)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는데, 모양이 마치 석옹(石甕)과 같이 생겼으며, 속을 들여다보면 온통 검은색이다. 반석이 있어 그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나는데, 이를 도암(島巖)이라고 한다. 물이 절벽에 이르러서는 성난 폭포가 되어 아래로 떨어지는데, 높이가 10여 길이나 되어 마치 흰 무지개가 허공에 걸린 듯하고, 눈발이 흩날리는 듯하며, 벼락이 치는 듯한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전설에, “옛날에 박 진사(朴進士)라는 사람이 연못가에서 젓대를 불고 있었는데, 용녀(龍女)가 그 소리를 듣고는 감동하여 그를 불러서 남편으로 삼았으므로 이름을 박연이라고 한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오조천은 바로 어조천(語早川)이 와전된 것이다. 그 근원은 송도의 천마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고연담(姑煙潭)과 박연폭(朴淵瀑)이 되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금천군(金川郡)의 서쪽을 돌아 조읍포(助邑浦)에 이르러서 예성강으로 들어간다.
○ 금강(錦江) -혹은 웅진강(熊津江), 백강(白江), 백마강(白馬江)이라고 하기도 한다.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成山)에서 바다를 건너 웅진강(熊津江)의 어귀에 이르렀다. 백제가 온 나라를 기울여서 와서 저항하였는데, 크게 싸워서 격파하고는 백제를 모두 평정하였다. ○ 용삭(龍朔) 1년(661)에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信)이 주류성(周留城)을 점거한 채 반란을 일으켰다. 2년에 유인궤(劉仁軌)가 수군을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백강의 입구에서 왜병(倭兵)들을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승리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웅진은 국성의 남쪽에 있다. 옛 백제의 해구(海口)로, 당나라에서 이곳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백강은 웅진의 동남쪽에 있는데, 역시 큰 바다를 접하고 있으며, 전주(全州)의 서쪽 경계에 닿아 있다. 당나라 용삭 3년(663)에 유인궤가 수군을 이끌고 웅진에서 주류성으로 나아가면서 백강의 입구에 이르러서 왜병과 만나 네 번을 싸워 모두 이겼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백마강은 청주(淸州)의 남쪽에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긍주(矜州)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서천(舒川)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백마강이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청주의 경계를 들어갔다가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고, 또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천안군(天安郡)의 경계를 지나고, 여기에서 꺾어져서 북쪽으로 흐르는데, 그 하류는 한강에 합해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강이 일본의 서적에는 백촌강(白村江)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이르기를, “천지천황(天智天皇) 2년(663)에 백촌강(白村江)에서 당나라 군사와 싸웠다.” 하였다.- 지금의 백마강이다. 지금 백마강의 상류를 웅진(熊津)이라고 하는데, 《당서》에서 칭한 웅진은 백강의 하류에 있는바, 이는 바로 고금(古今)의 칭호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대청일통지》에서는 백강과 백마강을 나누어서 두 강으로 하였으며, 또 백마강을 한강에 끌어대어 합하였으니, 몹시 잘못되었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속리산에서 나오는 한 물은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천(舒川)의 남쪽 수구 역시 조선의 하나의 큰 하천이다. 강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하나는 동남쪽에 있는 금산성(錦山城) 동남쪽 경계의 적암(赤巖) 서북쪽 기슭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적천(赤川)으로, 그 근원이 무주부(茂朱府)의 적상산(赤裳山) 동쪽에서 나오는바, 적암은 바로 적상(赤裳)의 잘못된 표기이다. 금강은 그 근원이 장수현(長水縣) 분수치(分水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무주의 서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적천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금산성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제원천(濟源川)으로, 그 근원이 금산군 월봉산(月峯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진산성(珍山城)의 동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서남쪽에 있는 고산성(高山城)에서 나와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흘러 영동성(永同城)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천(松川)이다.- 이 동남쪽에 있는 파음산(巴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웅이산은 상주(尙州)에 있다.- 의 북쪽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황간성(黃磵城)의 북쪽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송천은 그 근원이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간현의 북쪽을 지나 영동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흘러 옥천성(沃川城)의 북쪽을 지나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회덕성(懷德城)의 북쪽과 문의성(文義城)의 남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진잠성(珍岑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진잠성(鎭岑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을 지나며,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공주(公州)의 동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 북쪽의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동진강(東津江)으로, 그 근원이 충주(忠州)의 망이산(望夷山)에서 나온다.- 은 동북쪽에 있는 조령(鳥嶺)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안성(淸安城)의 서쪽 경계와 진천성(鎭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 있는 음성(陰城)과 괴산(槐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청주(淸州)의 서북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 있는 보은(報恩)의 동쪽, 개경(開慶)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문경(聞慶)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청주의 남쪽 경계와 회인(懷仁)의 북쪽 경계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상의 두 물은 모두 동진강의 별파(別派)인데, 알 수가 없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전의(全義)의 남쪽 경계와 문의(文義)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흘러 공주의 동쪽에 이르러서 남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진강은 망이산으로부터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진천현(鎭川縣)의 남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현(燕岐縣)의 남쪽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 두 근원에서 흘러온 물이 이미 합해져서는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공주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연기성(燕岐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지난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부여성(扶餘城)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100리가량을 흐른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석성(石城)의 북쪽 경계와 정산성(定山城)과 임천(林川)의 동쪽을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과 합류한다. ○ 강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초포(草浦)로, 그 근원이 계룡산(鷄龍山)에서 나온다.- 은 동쪽에 있는 연산(連山)의 동북쪽, 진잠(珍岑)의 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이산(泥山)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노성현(魯城縣)이다.- 의 남쪽 경계와 여산(礪山)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은진성(恩津城)의 북쪽을 지난다. 이곳에서 또 서남쪽에 한 물이 있어서 남쪽에 있는 전주(全州) 서남쪽의 모악산(母岳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익산성(益山城)의 서쪽을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 보건대, 이 물은 어느 물인지 상세하지 않다.- 여기에서 또다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용안(龍安)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함열(咸悅)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남쪽과 북쪽에서 흘러온 작은 물을 각각 만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큰 산의 남쪽 기슭을 지나고, 또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정산과 임천의 큰 물과 만난다.-삼가 살펴보건대, 초포는 서쪽으로 은진현 서쪽의 강경(江景)에 이르러서 금강으로 들어간다.- ○ 이미 합류한 다음에는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청양(靑陽)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한산성(韓山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서천성(舒川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주현(州縣)에서 흘러오는 수십 개 근원의 물을 합하여 거의 1000리나 흐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금강의 근원은 장수현(長水縣)의 분수치(分水峙)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영동현(永同縣)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송천(松川)의 물이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흘러 옥천현(沃川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용천(龍川) -바로 《고려도경》에서 칭한 물이다.- 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청산현(靑山縣)의 남쪽 경계를 돌아서 흘러와 합류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진강이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된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웅진(熊津)이 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부여현(扶餘縣)의 동쪽에 이르러서 백마강(白馬江)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초포(草浦)의 물을 모은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두치강(豆恥江) -전탄(錢灘)과 광탄(廣灘)을 덧붙인다.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원균(元均)의 수군을 습격하여 한산도(閑山島)를 빼앗았다. 이에 왜적들이 수로와 육로로 한꺼번에 나와 왜선이 2, 3일도 되지 않아 광양(光陽)의 두치진(豆恥津)에 정박하였는데, 두치진은 남원(南原)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웠다. ○ 우리나라의 각 장수들이 여러 차례 왜적들을 참획하였다. 12월에 광양의 전탄(錢灘)에서 싸워 왜적 4명의 수급을 참획하였고, 11월에 보성군(寶城郡) 광탄(廣灘)에서 싸워 왜적 1명을 참획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하동성(河東城)의 서쪽에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물은 북쪽에 있는 남원성(南源城) -삼가 살펴보건대, 남원(南原)으로 되어야 한다.- 서북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곡성(谷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이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요천(蓼川)으로, 그 근원이 장수현(長水縣)의 장안산(長安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두치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영례성(永禮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구례(求禮)의 잘못된 표기이다.-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무목산(無木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무등산(無等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나와 송경산(松京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광산(松廣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및 순천성(順天城)의 북쪽을 거쳐 동남쪽으로 흐르는 한 물이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낙수(洛水)로, 그 근원은 장흥부(長興府)의 웅치(熊峙)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무등산의 서쪽을 돈 다음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구례현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두치진에 합류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광양성(光陽城)의 동쪽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이 바로 하동성(河東城)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두치강은 일명 섬강(蟾江)이라고도 한다. 그 근원이 진안(鎭安)의 마이산(馬耳山) 중대(中臺) 및 전주(全州)의 웅치(熊峙)에서 나와 이 두 물이 합해져서 남쪽으로 흘러 남원부의 서쪽 경계를 지나고, 또다시 동쪽으로 흘러 왼쪽으로 요천(蓼川)을 지난 다음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압록진(鴨綠津)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낙수(洛水)가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흘러 광양현의 동쪽을 지나서 전탄(錢灘)이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서 칭한 광탄(廣灘)은 바로 낙수(洛水)의 상류이다.
○ 낙동강(洛東江) -진강(晉江)을 덧붙인다.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속리산에서 나오는 한 줄기 물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곡천(豬谷川)으로, 그 근원이 속리산 문장대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대수구(大水口)가 있는데, 조선국 동남쪽의 큰 하천으로, 바로 진강(晉江)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을 진강으로 잘못 알았다.- 이다. 진강의 물은 북쪽의, 왕경(王京)에서 동남쪽으로 500리 되는 곳에 있는 영천현(榮川縣)의 북쪽 큰 산에서 나오는데, 그 산맥은 북쪽으로 장백산(長白山)과 소백산(小白山)으로부터 꾸불꾸불 서리면서 2000여 리를 내려오다가 봉화현(奉化縣)의 서쪽, 예안현(禮安縣)의 서북쪽에서 봉우리를 일으키며, 지봉(支峯)이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두 줄기로 갈라져 남쪽으로 가 각 군현(郡縣)의 경락(經絡)이 되면서 바다까지 닿는다. 이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沙川)을 가리키는 듯한데, 사천의 근원은 안동부의 백병산(白屛山) 및 봉화현의 문수산(文殊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된다.- 은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영천현의 동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안동성의 서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백석산(白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백암산(白巖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백암산은 영양현(英陽縣)의 동쪽에 있다.- 의 물을 받아들인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소천(小川)으로, 그 근원이 영양현의 검마산(劍磨山)에서 나온다. 낙동강의 정원(正源)이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남쪽으로 흐르다가 소천(小川)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청량산(淸涼山)의 서쪽 기슭을 지나고, -삼가 살펴보건대, 소천이 이미 황지에서 나온 물과 합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청량산의 서쪽, 안동부의 동남쪽을 지난 뒤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사천과 합류한다.-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의성(義城)의 서쪽 경계와 용궁성(龍宮城)의 동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남쪽의 북안성(北安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안성(比安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서쪽에서 흘러온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위수(渭水)이다.- 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위수는 그 근원이 의흥현(義興縣) 화산(華山)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비안현(比安縣)의 동쪽을 감싸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풍유천(豐酉川)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예천군(醴川郡)의 와전으로, 천(川)의 이름으로 잘못 안 것이다.- 이 있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함창성(咸昌城)의 북쪽 산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흐르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저곡천(豬谷川)으로, 속리산에서 흘러나온다. 이미 앞에 나왔다.- 서쪽에서 온 상주(尙州) 서북쪽의 파음산(巴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웅이산(熊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동쪽에서 나온 물과 만나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이수(伊水)로, 그 근원이 상주의 웅이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으로 흘러 인동성(仁同城)의 서쪽과 선산(善山)의 동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령성(開寧城)의 동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감천(甘川)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적암(赤巖)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적상산(赤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흘러오다가 서남쪽에서 흘러온 거창(居昌)의 물과 합류한 다음 또다시 동쪽으로 금산(金山)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온 한 물과 합류하여 성주(星州)의 북쪽, 개령(開寧)의 남쪽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감천은 그 근원이 지례현(知禮縣)의 대덕산(大德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면서 직지천(直旨川)과 아천(牙川)을 모으고, 꺾어져서 동쪽으로 흘러 선산부(善山府) 옥산(玉山)의 동쪽에 이르러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호강(琴湖江)이다.- 이 있어 합류한다. 이 물은 동북쪽에 있는 경주(慶州) 서북쪽과 영천(永川) 동남쪽의 모자산(母子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하양성(河陽城)의 남쪽을 경유한 다음 또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공곡성(恭谷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칠곡성(漆谷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 경계를 지나 꺾어져서 정남쪽으로 흐르다가 대구성(大邱城)의 서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호강은 그 근원이 청송부(靑松府)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천(永川)과 하양(河陽) 두 현 사이를 지나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대구부의 북쪽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또다시 남쪽에서 조금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가야천(伽倻川)이다.- 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남쪽에 있는 협천성(浹川城)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고령성(高靈城)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가야천은 그 근원이 합천군(陜川郡) 가야산(伽倻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또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원풍성(元風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현풍성(玄風城)이다.- 남쪽과 의령성(宜寧城) 북쪽으로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흘러 창녕(昌寧)의 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진강(晉江)이다.- 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서남쪽에 있는 운봉(雲峯)의 지리산(智異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함양(咸陽)의 남쪽과 단성(丹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산음(山陰)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산청현(山淸縣)이다.- 의 물을 받아들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삼가(三嘉)의 남쪽을 지나 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양천(梁川)으로, 그 근원이 삼가현의 화지현(花旨峴)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진강에 합류한다.- 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흘러 진주(晉州)의 남쪽을 지나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공원성(恭原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칠원성(漆原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북쪽을 지나 굽이굽이 동북쪽으로 700리를 흘러와서 합류하는데, 이 물이 바로 사천(泗川)인 듯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강은 그 근원이 무주부(茂朱府)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지리산에서 나오는 임천(瀶川)의 물과 합류해 동쪽으로 흘러 단성현(丹城縣)의 북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양천(梁川)을 지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진주의 남쪽을 지나며,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사천은 바로 현 이름인데, 잘못 진강이라고 하였다.- ○ 여기에서 또다시 동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흘러 영산성(靈山城)의 서쪽을 지난다. -영산(靈山)은, 큰 산맥(山脈)이 모자산(母子山)에서 구불구불 내려오다가 경주(慶州), 손인(蓀仁), 경산(慶山), 화랑(火郞), 청도(靑道)의 다섯 성을 지난 다음 남쪽으로는 창녕(昌寧)에 이르러서 무계산(武溪山)이 되고, 동남쪽으로는 영산성(靈山城)의 북쪽에 이르러서 화악산(華岳山)이 되는데,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손인은 바로 자인(慈仁)의 잘못된 표기이며, 화랑은 아마도 화왕(火王)의 와전인 듯하다. 화왕산성(火王山城)은 창녕의 북쪽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응천(凝川)이다.-이 있어서 합류한다. 이 물은 동북쪽에 있는 밀양(密陽)의 북쪽에서 나와 경산(慶山)의 서남쪽 산 및 동북쪽에 있는 손인(蓀仁) 동쪽의 금오산(金鼇山)에서 나오는 물과 만난 다음 남쪽으로 흘러 언양(彦陽)과 양산(梁山)의 서쪽 경계와 밀양의 동쪽 경계를 지나서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응천은 그 근원이 현풍(玄風)의 비슬산(琵瑟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청도군(淸道郡)을 감싸 흐른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밀양부의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김해성(金海城)의 동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 동쪽 언덕은 동래(東萊)의 서쪽 경계이다. 동래의 북쪽에는 윤산(輪山)이 있고, 김해의 서쪽에는 웅산(熊山)이 있다. 강구(江口)의 동남쪽은 바로 절영도(絶影島)이고, 또 큰 바다 건너편의 동남쪽에는 대마대도(對馬大島)가 있다. 이 물은 근원으로부터 길게 1000리를 흐르면서 수십 성의 산에서 나오는 물을 모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강(晉江)은 경주(慶州) 서남쪽에 있는 사주성(泗州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사천성(泗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북쪽에 있는데, 혹 서강(西江)이라고도 하며,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마귀(麻貴)가 울산성(蔚山城)을 공격하면서 군사를 파견해 서강(西江) 입구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의 수로(水路)를 막게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진강이 과연 사천현 북쪽을 지나기는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경주의 서남쪽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마귀가 막은 수로는 바로 울산부의 태화강(太和江)인데, 진강이라고 하였으니, 더욱더 잘못되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낙동강은 그 근원이 안동(安東) 태백산(太白山)의 황지(黃池)에서 나와 여러 물을 모은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예천군(醴川郡)의 남쪽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속리산에서 나오는 저곡천(豬谷川)의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대구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금호강(琴湖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영산현(靈山縣)의 경계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진강(晉江)이 무주(茂朱)의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부터 꺾어져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김해부(金海府)의 동쪽에 이르러서 흩어져 삼차하(三叉河)가 되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삼랑강(三浪江)
《명사(明史)》 조선전(朝鮮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1597) 7월에 왜적들이 양산(梁山)과 삼랑(三浪)을 탈취하고서 마침내 경주(慶州)로 들어가 한산(閑山)을 침입하였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이 송도(松島), 울산(蔚山), 부산(釜山)에 나누어 주둔해 있었다. 경략(經略) 형개(邢玠)가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에 대해 상의하면서 말하기를, “소서행장(小西行長)의 군영은 부산에 있고, 가등청정(加藤淸正)의 군영은 서생포(西生浦)에 있다. 부산을 격파하고자 할 경우에는 육로로는 반드시 양산(梁山)의 서북쪽을 경유해야 하는데, 이곳에는 높은 산과 험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한 필만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악하다. 남원(南原) -삼가 살펴보건대, 원(原) 자는 연문(衍文)인 듯하다.- 을 경유할 경우에는 삼랑(三浪)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이 두 곳은 모두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요충지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삼랑은 아마도 낙동강 하류의 삼차하(三叉河)를 가리키는 듯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랑강(三浪江)은 양산군(梁山郡)의 남쪽에 있다. 구지(舊志)를 보면, 양산(梁山)의 서북쪽에는 험준한 고개가 있어 단지 말 두 필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길이 몹시 험하며, 남쪽에는 삼랑의 큰 강이 있어서 곧장 김해(金海)와 죽도(竹島)로 통한다. 명나라 만력 연간에 왜적들이 양산과 삼랑을 탈취하고서 마침내 경주로 들어갔다.
○ 태화강(太和江)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25년에 왜적들이 울산(蔚山)에 진을 치고 모여 있었다. 울산의 남쪽에 도산성(島山城)이 있는데, 도산성은 산세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견고함으로 삼았다. 성 한가운데에 강이 하나 있어 부채(釜寨)와 통할 수 있으며, 육로로는 언양(彦陽)을 거쳐 부산과 통할 수 있다. 왜적들이 연이어서 세 개의 성채(城寨)를 쌓았는데, 반구정(伴鷗亭), 성황당(城隍堂), 태화강(太和江)이 모두 도산(島山)의 앞에 있었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로일성(長老日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장기성(長鬐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동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가면 소수구(小水口)가 있다. 이 물은 서북쪽에 있는 위산성(尉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울산성(蔚山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쪽 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울산성의 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쪽으로 흘러 좌병(左兵)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좌병영(左兵營)이다.- 의 남쪽 경계를 지나 1백 수십 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태화강은 그 근원이 경주의 단석산(斷石山)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울산부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이칭일본전(異稱日本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신라에 도착하자, 신라의 왕이 즉시 흰 끈으로 얼굴을 묶고 앞에 와서 강화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고는 거듭 맹세하기를,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또 아리나예하가 거꾸로 흐르고 냇물의 돌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지 않는 한, 봄가을로 조공을 빠뜨릴 경우에는 하늘의 신령과 땅의 귀신이 함께 우리들을 토벌할 것입니다.” 하였다. -송하견림(松下見林)이 말하기를, “압록강(鴨綠江)은 삼한(三韓)에 있다.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보면,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은 천하의 세 대하(大河)라고 하였는바, 압록강은 세 대하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서기》에서 이른 바 아리나예하는 바로 압록강이다.” 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바로 신라 나해왕(奈解王) 때의 일이다. 이 당시에 신라의 강역은 경상좌도(慶尙左道)에 그쳤는바, 아리나예하는 마땅히 한나라의 대수(大水)로, 만일 태화강이 아니라면 과연 낙동강을 가리킬 것이다. 일본인이 아리나예하가 압록강이라고 한 것은 망녕된 설이다.
○ 대동강(大同江) -옛날에는 패수(浿水), 대통강(大通江)이라고 하였다. ○ 비류강(沸流江)과 흑하(黑河)를 덧붙인다.
《사기(史記)》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한(漢)나라가 천하를 평정하고는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수축하고서 패수(浿水)까지를 경계로 하였다. 위만(衛滿)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에 살았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현(浿水縣)의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水經)》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鏤方縣)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臨浿縣) -삼가 살펴보건대, 《한서》 지리지를 보면 임패현이 없다.- 동쪽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수경주(水經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허신(許愼)이 이르기를, “패수는 누방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鏤方東入海]” 하였고, 어떤 데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 하였으며, 십삼주지(十三州志)에는 이르기를, “패수현은 낙랑의 동북쪽에 있으며, 누방현은 낙랑군의 동쪽에 있다.” 하였다. 패수는 대개 패수현에서 나와 누방현을 경유하는 것이다. 옛날에 연인(燕人) 위만(衛滿)이 패수로부터 조선에 이르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널 리가 없다. 그 지역은 지금 고구려의 국성(國城)이다.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을 찾아가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평양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다.” 하였다.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옛 낙랑의 조선현(朝鮮縣)을 경유하는데, 조선현은 바로 낙랑군의 치소로, 한나라 무제(武帝) 때 설치하였다. 그런데 서북쪽으로 흐르므로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고금(古今)의 일을 상고해 보건대, 일이 어긋난다. 이는 대개 《수경》에서 잘못 증험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東入於海]’ 한 곳의 동(東) 자를 위 구절에 붙이면 《수경》의 글이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주서(周書)》 고구려열전(高句麗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치소(治所)는 평양성(平壤城)이다. 그 성의 남쪽은 패수에 임해 있다.
《수서(隋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읍은 평양성인데, 산을 따라서 굽이지게 쌓았으며, 남쪽으로는 패수에 임해 있다. 매년 초에 패수 가에 모여서 놀이를 하는데, 왕이 요여(腰輿)를 타고 나가 우의(羽儀)를 펼쳐 놓고 이를 관람한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왕이 사는 곳은 평양성인데,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다. 성은 산의 굴곡을 따라 외성(外城)을 쌓았으며, 남쪽은 패수에 임해 있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패수는 요동(遼東)의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낙랑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통강(大通江)은 평양성의 동쪽에 있다. 옛 이름은 패수이며, 강 가운데에 조천석(朝天石)이 있다. 당나라 때 소정방(蘇定方)이 패수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여 사로잡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조선부》 주(注)에 이르기를, “평양의 기린석(麒麟石)은 부벽루(浮碧樓) 아래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왕(東明王)이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이 굴에 들어왔다가 땅속에서 조천석 위로 나와 승천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 당시의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하였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동강은 바로 옛날의 패수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통강은 평양성의 동쪽에 있는데, 대동강이라고도 하며, 옛 이름은 패수이다. 《사기》를 보면, “진(秦)나라 때 요동고새를 수리하고는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았으며, 한나라 초기에는 연인(燕人) 위만이 망명하여 동쪽으로 달아나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가서는 진나라의 옛 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여러 종족 및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자들을 역속(役屬)시킨 다음 그들의 왕이 되었다.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는 한나라의 순체(荀彘)가 요동에서 나와 조선을 쳐서 조선의 패수상군(浿水上軍)을 격파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서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렀다.” 하였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낙랑군에 패수현(浿水縣)이 있는데,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현(增地縣)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대개 왕험성은 패수의 남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경》을 보면, “패수는 낙랑의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말이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는 내호아(來護兒)가 강호(江湖)의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건너 먼저 진군하여 패수로 들어갔는데, 평양과의 거리가 600리 되는 곳이었다. 얼마 뒤에 고구려의 군사에게 패하여 도로 해포(海浦)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다. 당나라 용삭(龍朔) 1년(661)에는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패수 가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평양으로 들어갔다. 명나라 만력 21년(1593)에는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하여 평양에 이르자, 왜적들이 온 힘을 다해 막아 지켰다. 이여송이 그곳의 지형을 헤아려 보고는, 동쪽과 남쪽은 모두 강에 임하여 있고, 서쪽은 산을 타고 있어 가파르며, 북쪽은 모란봉(牧丹峯)이 높이 솟아 있어서 최고의 요해처임을 알아내었다. 이에 이여송이 장수를 보내어 모란봉을 공격하게 하고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사면에서 성에 기어 올라가게 해 마침내 함락시켰다. 얼마 뒤에 이여송이 개성(開城)에 주둔해 있으면서는 별장(別將) 양원(楊元)을 평양에 주둔시켜 대동강을 제압해 군량을 운송할 수 있게 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 비류강(沸流江)은 강동군(江東郡)의 남쪽에 있는데, 한강(漢江)에서 갈라져 나와 서쪽으로 흘러 대동강에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한강에서 갈라져 나온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이미 한강조(漢江條)의 안설(按說)에 나왔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패수는 지금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바로 대통강(大通江)이다. 남쪽과 북쪽에 두 개의 큰 근원이 있다. 남쪽의 근원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동쪽에 있는 문천성(文川城)에서 서북쪽으로 16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의 서쪽 기슭에서 나온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비류강(沸流江)으로, 그 근원은 양덕현(陽德縣)의 오강산(吳江山)에서 나온다.- 산에서 나온 근원이 하나는 서쪽으로 흐르고 하나는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동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조금 북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초천(草川)이다.-이 와서 합류한다. 이 물은 북쪽에 있는 덕양(德陽) -삼가 살펴보건대, 양덕(陽德)으로 되어야 한다.- 의 동남쪽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초천은 그 근원이 양덕현 삼방령(三方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비류강에 유입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이것이 패수가 되어 성천성(成川城)의 동남쪽 경계에 이르러 다른 남쪽 근원의 물과 합류한다. 남쪽 근원의 다른 하나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능성강(能成江)이다.- 는 동남쪽에 있는 곡산성(谷山城)에서 서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 다음 다시 굽이굽이 서북쪽으로 200리를 흘러 다른 남쪽 근원의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비류강은 서쪽으로 흘러 성천부의 북쪽에 이르러서 대동강과 합해지는바, 이곳에서 비류강이 성천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능성강과 합해진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또다시 서쪽으로 흘러 곡산성 -삼가 살펴보건대, 곡산(谷山)은 오자(誤字)인 듯하다.- 의 남쪽을 지난 다음,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흘러 삼등성(三登城) 대목산(大木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박산(大朴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 경계와 상원성(祥原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만난다. -삼가 살펴보건대, 북쪽 근원의 물은 바로 대동강의 정원(正源)이다. 능성강은 그 근원이 두류산(豆流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곡산부의 북쪽 경계를 감싸 흐른 다음에 서쪽으로 흘러 삼등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대동강과 합류한다.- ○ 북쪽의 근원은 세 개가 있다. 하나는 동북쪽에 있는 양덕현(陽德縣) 북쪽의 우선산(遇仙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금계(錦溪)로, 그 근원이 옛 순천(順川)의 강서산(江西山)에서 나온다.- 서쪽으로 흘러 동북쪽에서 흘러온 맹산성(孟山城) 동남쪽 산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그런 다음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굽이굽이 200리를 흘러 은산성(殷山城)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계는 서쪽으로 흘러 은산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또 다른 북쪽의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막탄강(瘼灘江)이다.- 은 정평성(定平城)의 서북쪽에 있는 비백산(鼻白山) 서쪽 기슭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맹산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덕천성(德川城)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개천성(价川城)의 동북쪽 경계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막탄강은 그 근원이 맹산현의 안도리산(安都里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맹산현의 북쪽 경계를 지나 대동강에 들어간다.- 또 다른 정북쪽의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동강의 정원(正源)으로, 영원군(寧遠郡)의 내낙림(內樂林)에서 나온다.- 은 영원성(寧遠城)에서 동북쪽으로 100여 리 되는 큰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원성의 동쪽 경계와 덕천성의 서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개천성의 동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다른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 다음 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또 다른 근원에서 나온 물이 동쪽으로부터 흘러와서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내낙림에서 나온 대동강이 서남쪽으로 흘러 덕천현의 동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막탄강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흘러 은산현(殷山縣)의 서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금계를 지나고서 다시 서쪽으로 흐른다.- ○ 여기에서 약간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은산성의 서남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연산성(燕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자산(慈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동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강동성(江東城)의 서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상원(祥原)의 북쪽 경계에 이르러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은 바로 능성강이다.- ○ 여기에서 서쪽으로 100리를 흘러 중화성(中和城)의 동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평양성(平壤城)의 동쪽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쪽으로 흘러 평양성 남쪽을 지난다. -평양은 바로 옛 왕험성(王險城)으로, 기자(箕子)의 고도(故都)이다. 한나라 때에는 일찍이 낙랑군의 치소(治所)를 두었으며, 진(晉)나라 이후로는 고구려가 이곳에 도읍하였다. 당나라가 평양을 함락하자 고구려가 비로소 평정되었다. 오대(五代) 때에는 왕건(王建)이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는 비로소 서경(西京)이라고 불렀다. 지금 성에서 동북쪽으로 60리 되는 곳에 금수산(錦繡山)이 있으며, 그 북쪽에는 순천성(順川城)이 있고, 또 그 북쪽에는 큰 산이 있다. 이 산은 동북쪽에 있는 영원(寧遠)에서부터 뻗어 내려와 서남쪽으로 향산(香山)이 되고, 태조산(太祖山)이 되고, 순안성(順安城)이 되며,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내려와 무학산(舞鶴山)이 되며, 다시 남쪽으로 강 입구에 이르는데, 총 500리를 끊이지 않고 남쪽으로 패수를 감싸고서 내려온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은 중화성의 북쪽 산이 되어 안산(案山)이 되며, 여기에서 남쪽은 황주(黃州) 및 봉산(鳳山)이다.- 평양성 남쪽에서부터는 서쪽에서 조금 북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30리를 흐르는데, 이곳을 대동강이라고 한다. 대동강은 강서성(江西城)과 용강성(龍岡城) 두 성의 동남쪽을 지나 삼화성(三和城)의 동남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황주(黃州) 북쪽에서 흘러오는 흑하(黑河)가 동서쪽으로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오는 안악(安岳)의 물을 합한 다음 다시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 흑하는 그 근원이 상원(祥原) 동남쪽의 경계에 있는 큰 산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근원에서 나오는 물이 합해져서 서쪽으로 총 300리를 흐른 다음 상원의 남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황주의 북쪽 경계와 중화의 남쪽 경계를 지나고, 다시 서쪽에서 조금 남쪽으로 흘러 삼화성(三和城)의 동남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안악에서 흘러온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흑하는 아마도 흑교천(黑橋川)인 듯하다. 대동강이 남쪽으로 흘러 중화현의 서남쪽에 이르러서 왼쪽으로 흑교천을 지난 다음 급수문(急水門)을 통해 나가는데, 남쪽으로 황주(黃州), 재령(載寧), 안악(安岳) 등처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 절양해(絶瀼海)를 이룬다.- ○ 안악에서 흘러오는 물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어초천(於草川)이다.- 은 동북쪽에 있는 황주의 동쪽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주의 남쪽과 봉산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재령성(載寧城)의 북쪽 경계를 지나고 안악의 동북쪽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어초천은 그 근원이 수안군(遂安郡) 천자산(天子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황주의 남쪽을 지난 다음 급수문으로 들어가 북쪽으로 대동강과 절양해에서 만난다.- 또 다른 한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진(迎津)이다.- 은 서남쪽에 있는 바닷가의 장연성(長淵城) 동북쪽에 있는 부석산(傅石山)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박석산(縛石山)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서 나와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 송화성(松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송화성(松禾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남쪽과 신산성(信山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신천성(信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북쪽을 지나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영진(迎津)은 그 근원이 송화현(松禾縣)의 달마산(達摩山)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신천군의 북쪽을 돌아 절양해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신천(信川)의 남쪽 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해주성(海州城)의 북쪽을 지나오는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전방천(箭防川)으로, 그 근원이 해주의 수양산(首陽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월당강(月唐江)과 만나 절양해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안악성의 동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 동북쪽에서 흘러오는 다른 근원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어초천(於草川)이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90리를 흘러 동쪽에서 흘러온 흑하와 합류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 대동강은 이미 남쪽에서 흘러온 물을 합한 다음에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 800리를 흘러가는바, 조선의 서북쪽에 있는 큰 하천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대동강은 바로 패수로, 그 근원은 영원군 내낙림의 백산(白山)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막탄과 금계 등 여러 물을 합하여 성천부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비류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사천(蛇川)을 지난다. 여기에서부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삼등현의 서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능성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합류한 물은 평양성의 남쪽을 돌아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왼쪽으로 발로하(發蘆河)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급수문을 통과하면서 왼쪽으로 어초천을 지나고, 남쪽으로 월당강과 만나서 절양해가 되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살펴보건대, 《위략(魏略)》을 보면, “한(漢)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삼고는 격수(湨水)를 조선과 연의 경계로 하였다.” 하였다. 격수는 하내(河內)의 물 이름으로, 《춘추(春秋)》를 보면, 양공(襄公) 16년 3월에 양공이 진후(晉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정백(鄭伯), 거자(莒子), 주자(邾子), 설백(薛伯), 기백(杞伯), 소주자(小邾子)와 더불어 격량(湨梁)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바로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이곳이 연(燕)과 조선(朝鮮)의 경계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격수는 패수(浿水)의 오자(誤字)이다. 그리고 《당서(唐書)》를 보면, 현경(顯慶) 5년(660)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저강(沮江), 요동(遼東), 평양(平壤)의 길로 나아갔으며, 지리지(地理志)에는 이르기를, “패강(貝江) 입구의 초도(椒島)를 지나서 신라 서북쪽을 얻었다.” 하였다. 저강(沮江)이니 패강(貝江)이니 하는 것도 패강(浿江)이 와전된 것이다.

부(附) 패수(浿水)에 대해 잘못된 것을 밝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漢)나라의 패수현(浿水縣)이었다. ○ 패수는 또한 이하(泥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물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어니하(淤泥河)는 해성현(海城縣) 성에서 서남쪽으로 65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요사》를 보면, “요양현은 한나라 때 패수현으로, 그 북쪽에 패수가 있는데, 또한 어하(淤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이라고도 하는데, 물 안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하였는데, 《대명일통지》에서는 이 설을 그대로 따랐으며, 이어 또 조선의 대통강(大通江)을 패수라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어니하는 그 근원이 성수산(聖水山)에서 나와 흘러 미진산(迷眞山)의 서쪽에 이르러서 흩어지는바, 이 물이 바로 요동 지방의 헌우락으로, 조선의 경계 안에 있는 패강(浿江)과는 같지 않다.
《사군지(四郡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살펴보건대, 《여지승람(輿地勝覽)》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계 안에는 세 개의 패수가 있는 듯하다. 그 첫 번째는 《사기》에 나오는 패수로, “위만(衛滿)이 동쪽으로 패수를 건넜다.” 하였는데, 이것은 압록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당서》에 나오는 패수로, “평양부의 남쪽 가는 패수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대동강을 패수라고 한 것이다. 세 번째는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패수로, 평산부(平山府)의 저탄(豬灘)을 패강(浿江)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세 개의 패수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압록강은 마자수(馬訾水)이지 패수가 아님을 밝혔는데, 이것은 제대로 된 설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문헌비고》를 보면, “압록강은 바로 마자수이다. 마자수와 패수가 동시에 낙랑군과 현도군 두 군에 나누어 보이고 있으니, 압록강이 패수가 아님은 매우 분명하다.” 하였다.- 그리고 또 《요사》를 인용하여 이르기를, “요양(遼陽)의 패수는 참으로 한(漢)나라 때의 패수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그렇지가 않다. 《요사》는 요양부(遼陽府)를 평양(平壤)이라고 하였으므로, 또다시 어느 한 물을 가리켜 패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요사》가 찬수되기 전에 나온 《당서》에 평양의 남쪽 가가 패수임을 분명하게 말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는 태반이 두찬(杜撰)인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른바 고기(古記) 및 《요사》 지리지는 모두 근거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나라의 여지(輿地)를 밝힐 수가 있다. 저탄(豬灘)을 가리켜 패수라고 한 것은, 이것은 가탁하여 이름한 것이니 따지고 말고 할 것도 못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사》에서 저탄을 패수라고 한 것은, 백제의 온조(溫祚)가 북쪽으로 패강을 경계로 삼았기 때문이다. 백제의 패강은 바로 곡산부(谷山府)의 능성강(能成江)이 대동강에 합해지는 곳이다.- 그렇다면 단지 평양부의 한 패수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문견이 좁아서 《사기》를 읽으면서는 문득 연(燕)과 진(秦)의 동쪽 경계가 지나치게 먼 것을 의심하고, 또 위만이 건넌 강이 대동강이 아닌 듯하다고 의심한다. 이것이 바로 세 개의 패수 설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연과 진의 동쪽 경계가 어디까지이며, 위만이 동쪽으로 건너와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지금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한나라 때에서 멀지 않은 시대에 나온 《수경주》나 《주서》, 《수서》, 《당서》에서 평양성의 남쪽 물을 패수라고 한 것을 정확하다고 믿는 것이 차라리 더 낫지 않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연과 진의 동쪽 경계가 대동강을 지난 것과 위만이 살았던 왕검성(王儉城)이 평양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조선조(朝鮮條)에서 상세하게 밝혔다.
○ 월당강(月唐江)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불당강(月不唐江)은 황주(黃州) 안악현(安岳縣)의 동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월불당강은 황주 안악현의 동쪽에 있는데, 그 물은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지(舊志)를 보면, 안악현은 황주에서 남쪽으로 1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월불당강은 바로 월당강이다. 그 근원은 서흥부(瑞興府) 웅파산(熊坡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서흥부의 남쪽을 경유하여 다시 서쪽으로 흘러 봉산군의 남쪽을 경유하고서 북쪽으로 흘러 대동강과 급수문(急水門)에서 만난다.
○ 사수(蛇水) -어떤 데에는 다하(茶河)로 되어 있다-ㆍ타하(陀河)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용삭(龍朔) 2년(662)에 좌효위 장군(左驍衛將軍) 방효태(龐孝泰)가 고구려와 사수(蛇水) 가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패하여 전사하였다.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요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태(開泰) 7년(1018)에 고려를 정벌할 적에 소배압(蕭排押)이 고려와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사이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익사한 자가 많았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수는 평양의 서쪽 경계에 있다. 당나라 용삭 초에 방효태 등이 고구려를 칠 적에 영남(嶺南)의 군사로써 사수에서 벽을 쌓았다. 송나라 천희(天禧) 2년(1018)에 거란이 고려를 정벌할 적에 사하(蛇河)와 타하(陀河) 두 물에서 싸워 패하고서 돌아왔다. 구지(舊志)를 보면, 두 물은 모두 평양의 서북쪽에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사수는 그 근원이 자산부(慈山府) 웅초덕산(熊草德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대동강으로 들어간다. 《요사》에서 이른 바 다하(茶河)를 《대청일통지》에서는 사수라고 하였는데, 이는 음이 비슷하여서 그런 것인가? 타하 역시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물인데, 상고할 수가 없다.
○ 발로하(發蘆河)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2년(669)에 고구려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근행(李謹行)에게 조서를 내려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근행이 발로하(發蘆河)에서 격파하였다. 이에 평양성의 패잔병들이 쇠약해져서 서로 이끌고 신라로 도망갔는바, 4년 만에 평정된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함형(咸亨) 4년(673)에 연산도 총관(燕山道摠管) 이근행이 고구려의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호로하(瓠蘆河)의 서쪽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의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내가 《당서》 유인궤열전(劉仁軌列傳)을 살펴보건대, 호로하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북쪽에 있어야 한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로하는 평양성의 서쪽에 있는데, 당나라 때 이근행이 이곳에서 신라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로하는 경주(慶州) 서쪽 경계에 있다. 구지(舊志)를 보면, 고구려의 남쪽 경계, 신라의 칠중성 북쪽에 있다. 당나라 함형 4년에 이근행이 호로하의 서쪽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고, 함형 5년에는 유인궤가 동쪽으로 신라를 정벌하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 호로하를 끊고서 신라의 대진(大鎭)인 칠중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발로하는 그 근원이 자산부의 자모산(慈母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순안현(順安縣)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평양부의 서쪽을 지나 대동강에 들어간다. 유인궤가 건넌 호로하는 바로 장단부(長湍府)의 임진강(臨津江)인바, 발로하와 혼동하여 칭해서는 안 된다. 《자치통감》에서는 발로하를 잘못 호로하라고 하였는데, 호삼성의 주(注)에서도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유인궤가 건넌 물이라고 하였으며, 《대청일통지》에서는 또다시 잘못된 호삼성의 주를 답습하였으니, 전혀 틀렸다.
○ 청천강(淸川江) -옛날에는 살수(薩水)라고 칭하였다.
《수서》 열전(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업(大業) 8년(612)에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우문술(宇文述)이 동쪽으로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우문술에게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기를 청하자, 우문술이 돌아왔다. 우문술이 살수를 건널 적에 고구려의 군사가 후군(後軍)을 습격하였다. 이에 크게 무너져서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鴨綠水)에 이르렀는바, 450리를 행군한 셈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살수는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수나라의 장수 신세웅(辛世雄)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 청천강(淸川江)은 안주(安州)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옛 이름은 살수이다.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살수는 《대명일통지》를 보면, 압록강의 동쪽,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였는바, 지금 성경(盛京)의 경계 바깥에 있다.” 하였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주성은 아래로 살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로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를 칠 적에 패한 곳이다. 또 청천강이라고도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청천강은 안주성의 동쪽에 있는데,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역시 살수라고도 한다. 수나라 대업 8년에 우문술 등이 고구려를 칠 적에 압록수를 건너서 고구려의 대신인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우문술이 동쪽으로 살수를 건넌 다음 평양성에서 30리쯤 떨어진 지점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쳤는데, 평양성이 험고하여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우문술이 군사를 철수하면서 살수에 이르러서 군사가 반쯤 건넜을 적에 고구려 군사의 습격을 받아 여러 군사가 모두 무너졌다. 장사(將士)들이 앞을 다투어 도망쳐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수에 이르렀는바, 450리를 행군하였다. 지금은 대령강(大寧江)이라고도 한다. 구지(舊志)를 보면, 평양과 황주는 서쪽으로 대령강으로 막혀 있고, 동쪽은 대통강(大通江)으로 막혀 있어서 ‘양쪽 강의 중간’이라고 이른다. 본조(本朝) 강희(康煕) 37년(1698)에 조선에 흉년이 들자, 조선에서 표문을 올려 중강 개시(中江開市)를 열 것을 청하였는데, 황지(皇旨)를 받드니, “저축해 둔 미곡(米穀)을 수로와 육로로 4만 석을 운송하여 중강(中江)에 이르러서 매매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청천강과 대령강을 한 강이라고 한 것은 틀린 것이다. 그리고 개시(開市)를 한 중강(中江)은 바로 압록강인데, 잘못 청천강이라고 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안주의 서남쪽 경계에 청천강(靑泉江)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淸川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수구(水口)가 있다. 청천강은 두 개의 근원이 있다. 한 근원은 동북쪽에 있는 영원성(寧遠城) 동북쪽의 큰 산에서 나오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청천강의 정원(正源)으로, 강계부(江界府)의 갑현(甲峴)에서 나온다.- 덕천(德川)의 동북쪽 근원에서 나와 흘러서 패수로 들어가는 물과 단지 한 산을 격하여 있다. 이 물은 서남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서천성(西川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희천성(煕川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남쪽으로 지나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산기슭을 끼고 돈 다음 영변성(寧邊城)의 남쪽에 이르러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악산(岳山)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약산(藥山)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의 남쪽 기슭을 돌아 안주의 동북쪽에 이르러서 북쪽 근원에서 흘러온 물과 합류한다. ○ 북쪽 근원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공포(孔浦)이다.- 은 남쪽 근원에서 북쪽으로 9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작은 물과 합류하고, 다시 서쪽으로 굽이굽이 흐르다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천성의 북쪽 경계를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여러 산의 북쪽 기슭과 이산(耳山)의 뒤쪽과 영변성의 북쪽 경계를 돈 다음 꺾어져서 남쪽으로 흐르면서 악산의 서쪽 기슭을 돌아 남쪽 근원에서 나온 물과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포는 그 근원이 운산군(雲山郡) 유동령(柳洞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영변부(寧邊府)를 돈 다음 남쪽으로 흘러 청천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주성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 500리를 흘러간다. ○ 두 근원의 물은 근원에서부터 합해지는 곳까지가 400리이며, 가운데에는 단지 20여 리의 사이를 두고 산으로 막혀 있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청천강은 옛날의 살수이다. 그 근원은 강계부의 갑현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희천군의 남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영변부의 남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공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안주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해망(海望)의 모퉁이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부터 흘러온 대령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대령강(大寧江) -혹은 대정강(大定江)이라고도 한다. ○ 박천군(博川郡)에 있는 강이다.
《조선부》 주(注)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大定江)은 박천군(博川郡)에 있으니, 바로 옛날에 주몽(朱蒙)이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준 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것은 동사(東史)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또 박천강이라고도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박천군의 서쪽에는 대정강이 있는데, 혹 대령강이라고도 한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정강은 동북쪽에 있는 청천강(靑泉江) 북쪽 근원의 서쪽을 격해 있는 산에서 나와,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창성강(昌城江)으로, 그 근원이 벽동군(碧潼郡) 구계령(九階嶺)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태천현(泰川縣) 북쪽 경계에 이르러서 대령강으로 들어간다.-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령강의 정원(正源)으로, 의주의 천마산(天磨山)에서 나온다.- 과 합류한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박천성(博川城)의 남쪽에 있는 백벽산(白碧山)의 남쪽을 지나 북쪽에서 흘러온 운산(雲山)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송림천(松林川)을 가리키는 듯하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구성(龜城) 동북쪽 산의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구성강(龜城江)으로, 그 근원이 구성부 팔영령(八營嶺)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태천현(泰川縣)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대령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받아들인 다음 남쪽으로 흘러 큰 산의 북쪽 기슭을 돌아 가산성(嘉山城)의 남쪽 경계와 안주성의 서북쪽 경계를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은 근원에서부터 400여 리를 흐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령강은 창성강, 구성강 등 여러 강의 물을 모은 다음 남쪽으로 흘러 청천강과 합류한다.- ○ 해구(海口)의 동남쪽은 청천강(靑泉江)과의 거리가 20리이다. 근원으로부터 흘러오면서 청천강과는 단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데 불과하다.
○ 압록강(鴨綠江) -옛날에는 마자수(馬訾水)라고 하였으며, 혹 애강(靉江),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한다. ○ 독로강(禿魯江)을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서개마현(西蓋馬縣)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 -삼가 살펴보건대,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로 들어가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서안평(西安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지나는 고을이 둘이고, 1200리를 흘러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안평현(西安平縣)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하며, 압록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의 북쪽에 있다.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가 있는데, 그 근원은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鴨綠)이라고 부른다. 강물은 국내성(國內城)의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安市)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평(安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그리고 평양은 압록강의 동남쪽에 있는데, 큰 배를 타고 건너야 하므로 이를 의지하여 참호로 삼는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마자수는 일명 압록강이라고도 하는데, 그 근원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이라고 한 것이다. 요동에서의 거리가 500리이다. 국내성의 남쪽을 지나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다가 한 물과 합류하는데, 바로 염난수이다. 두 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의 물 가운데에서 이 물이 가장 커서 푸르고 맑은 물결이 일렁이며, 지나가는 나루에는 모두 대선(大船)을 놓아둔다. 그 나라에서는 이 강을 의지하여 천참(天塹)으로 삼는다. 물의 너비는 300보이다. 평양에서 서북쪽으로 450리 되는 곳에 있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쪽으로 480리 되는 곳에 있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는 서북쪽으로 거란과 접해 있다. 압록강을 의지하여 험고함으로 삼는데, 강은 너비가 300보이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쪽으로 56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안시(安市)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압록수에서 무위(武威)를 뽐내었는데, 거기가 바로 이곳이다. ○ 압록강은 조선 국성(國城)에서 서북쪽으로 1450리 되는 곳에 있다. ○ 큰 강이 영주(靈州)의 동쪽에 있는데, 서북쪽으로 흘러 대통강(大通江)으로 들어간다. -삼가 살펴보건대, 영주는 지금의 의주(義州)이고, 큰 강은 바로 압록강 하류의 별파(別派)이며, 대통강은 바로 대총강(大總江)의 음이 변한 것이다. 뒤의 안설(按說)에 상세하게 나온다.
《명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전요지(全遼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요양성(遼陽城)에서 동쪽으로 53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長白山)에서 나와 협주성(夾州城)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흘러 독로강(禿魯江) -삼가 살펴보건대, 독로강은 그 근원이 함흥부(咸興府) 설한령(雪寒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강계부(江界府)의 남쪽을 경유한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흘러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을 지나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과 합류한 다음 애주(艾州)에 이르러서 파저강(婆豬江)과 함께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일명 익주강(益州江)이라고도 하며, 혹 애강(靉江)이라고도 부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익주(益州)는 지금의 의주(義州)로, 중국의 음으로는 같다.- 장백산 남쪽의 여러 시냇물이 남쪽으로 모여들어 큰 강을 이루어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가강(佟家江)과 만난 다음 다시 500리를 흘러 봉황성(鳳凰城)의 동남쪽을 돌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강의 동남쪽은 조선과의 경계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길림(吉林), 오라(烏喇)에서 남쪽으로 977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조선과의 경계를 나누며, 봉황성의 동남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옛날의 마자수이다.
《황여고(皇輿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하에는 세 개의 대수(大水)가 있으니, 황하(黃河), 장강(長江), 압록강(鴨綠江)이 그것인데, 압록강은 또한 외이(外夷) 지역에 있다.
《조선부》 주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바로 화이(華夷)의 경계가 된다.
《향조필기(香祖筆記)》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남쪽의 장강과 북쪽의 황하 두 물줄기 외에 북쪽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혼동강(混同江)이라 하고 압록강이라 하는데, 이들은 모두 먼 변방 바깥에 있어서 우(禹) 임금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다.
《장거유서(莊渠遺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지(大地)의 산맥(山脈)은 모두 곤륜산(崑崙山)을 조산(祖山)으로 삼는데, 남쪽의 산맥과 북쪽의 산맥이 가장 크다. 북쪽의 산맥은 유연(幽燕) 지방에서 끝나는데, 대하(大河)가 이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 압록강과 만난다. 동쪽에는 하사(下沙)가 있는데, 이곳은 산과 물이 한 번 크게 모여 만나는 곳이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압록강은 바로 옛날의 마자수이다. 그 근원은 장백산 남쪽 기슭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에서 나누어 나와 합류한다. 그런 다음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소백산(小白山)에서 나온 물이 동쪽에서 와 모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조선의 북쪽 경계에서 나온 몇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꺾어져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흐른다. 이곳에서 장백산 서쪽 지역의 이어진 산들의 남쪽 기슭에서 나온 모든 물이 십이도구(十二道溝)로부터 두도구(頭道溝)에 이르기까지 모두 몰려들어 수세가 비로소 왕성해진다. -강물이 남쪽으로 흘러 조선의 사산성(謝山城) 동북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건천구(建川溝)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사산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쪽에서 흘러온 물이 모여든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인선위(因禪衛), 낙언성(諾言城), 소진성(小辰城)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신갈이보(新噶爾堡)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남쪽에 있는 삼산성(三山城)에서 나온 한 물이 북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옛 보(堡)의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십이구(十二溝) 및 십일구(十一溝)의 물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충천령(沖天嶺) 동쪽의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으로 십구(十溝), 구구(九溝), 팔구(八溝)의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칠구, 육구, 오구, 사구의 물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 두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삼구, 이구 및 두구(頭溝)의 물을 받아들인다. ○ 삼가 살펴보건대, 사산성은 혜산진(惠山鎭)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고, 건천구는 아마도 허천강(虛川江)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며, 인선위는 인차외보(仁遮外堡)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낙언성은 바로 나난보(羅暖堡)의 음이 변한 것이며, 소진성은 바로 소농보(小農堡)의 잘못된 표기이고, 신갈이보는 바로 신갈파지보(新噶坡知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삼산성은 아마도 삼수부(三水府)의 잘못된 표기인 듯하다. 그 ‘삼산성에서 나온 물이 와서 합류한다.’ 한 것은 아마도 장진강(長津江)을 가리키는 듯하고, 옛 보는 바로 옛 갈파지보(葛坡知堡)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모아산(帽兒山)의 동쪽 기슭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굽이져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30리를 흐른 다음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가운데에 모래밭이 있어서 서쪽으로는 이자구(李子溝)의 물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는 해낙이(該諾爾)의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으로 이하(里河)의 물을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한 물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만포성(滿浦城), 발등성(發登城), 고산리성(高山里城) 세 성 -삼가 살펴보건대, 발등성은 바로 벌등성(伐登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세 진(鎭)은 모두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에 있다.- 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네 개의 작은 물이 흘러와서 모인다. -그 가운데 큰 것을 백마령하(白馬嶺河)와 파성자하(破城子河)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도로하(圖魯河)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독로강(禿魯江)의 음이 변한 것이다. 앞글에 나온다.- 가 동쪽에 있는 장걸성(張傑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강계부(江界府)의 음이 변한 것이다.- 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조금 남쪽에 마역하(馬驛河)가 있어 서쪽에서 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미원촌(未源村)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오로량수(五老梁水)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위수(渭水)로, 그 근원이 강계부의 두읍령(杜邑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위원군의 남쪽을 지나서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가 동남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지고이성(地古爾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직동보(直洞堡)로, 중국음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이산(理山)의 서북쪽을 지나는데, 세 개의 작은 물이 서북쪽에서 와서 합류한다. -지고이성 북안(北岸)에 곧장 있는 것을 유수하(楡樹河)라고 한다. 또 그 남쪽에 작은 물이 있으며, 또 그 남쪽에 있는 것을 차구(叉溝)라고 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가강(佟家江)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산양공성(山陽公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산양회보(山羊會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의 서남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동금하(東金河) -삼가 살펴보건대, 아마도 동건강(童巾江)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동건강은 그 근원이 초산부(楚山府)의 유도막령(踰都幕嶺)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산양회진(山羊會鎭)을 지나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흘러 소비성(小丕城), 대비성(大丕城), 필동성(必東城) 세 성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동해하(東垓河) -삼가 살펴보건대, 소비성과 대비성 두 성은 바로 소파아진(小坡兒鎭)과 대파아진(大坡兒鎭) 두 진의 음이 변한 것이고, 필동성은 벽동군(碧潼郡)의 음이 변한 것인 듯하다. 동해하는 아마도 벽동천(碧潼川)을 가리키는 듯하다.- 가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쪽으로 흘러 필동성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소거류성(小巨流城) -삼가 살펴보건대, 소길호리진(小吉號里鎭)의 잘못된 표기이다.- 과 대수고성(大水高城), 대길로성(大吉魯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대길호리진(大吉號里鎭)이다.- 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창성부(昌城府)의 자잔천(自潺川)이다.- 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상주걸하(常州傑河)가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흘러 오등성(敖登城)과 요곽이성(遼郭爾城) -삼가 살펴보건대, 오등성은 어정진(於汀鎭)인 듯하다. 요곽이성은 바로 묘동보(廟洞堡)로, 중국음으로는 서로 비슷하다.- 과 창성(昌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객점하(客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장점하(長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소자가하(蘇子街河)가 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왼쪽으로 한 작은 물을 받아들인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포서하(浦西河)가 서북쪽에 있는 대전(大甸)으로부터 흘러나와 남쪽으로 흘러 합류하며, 그 남쪽에 작은 물이 있어 흘러와서 모인다. 여기에서 숙주성(宿州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이 동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아포하(阿布河)가 서북쪽에 있는 봉황성(鳳凰城)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아포하는 바로 애합하(愛哈河)로, 그 근원이 애합변문(愛哈邊門) 바깥의 동북쪽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근원이 합해져 서남쪽으로 흘러 유조변(柳條邊)으로 들어가 석두성(石頭城)의 서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유조변을 나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남쪽으로 흘러 애주성(愛州城)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작은 물 -삼가 살펴보건대, 의주의 옥강천(玉江川)인 듯하다.- 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다가 세 갈래로 갈라져서 20리를 흘러간 다음 다시 합해져 구련성(九連城)의 동남쪽을 지난다. -구련성은 조선의 애주성과 강안을 마주하여 경계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강물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영아하(永阿河)가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남쪽으로 흘러 의주의 서쪽을 지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서 합련하(哈連河)가 서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장백산(長白山)의 위치는 동경 11도 8분 북위 41도 9분이며, 강어귀의 위치는 동경 8도 북위 40도이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압록강은 그 근원이 백두산의 큰 연못에서 나와 땅속으로 흐르다가 남쪽으로 나와 혜산진(惠山鎭)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흘러 삼수부(三水府)의 북쪽 경계를 지난 다음 서북쪽으로 흘러 옛 무창(茂昌)의 경계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위원군(渭原郡)의 북쪽에 이르는데, 이곳에서 독로강(禿魯江)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초산부(楚山府)의 서쪽 경계를 지나는데, 이곳에서 파저강(婆豬江)이 새외(塞外)로부터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의주(義州)의 북쪽에 이르러서 세 갈래로 갈라져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 다시 합해져 하나가 된다. 청수량(淸水梁)에 이르러서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한 갈래는 서쪽으로 흘러 적강(狄江) -중국 쪽에 있다.- 과 합해지고 한 갈래는 남쪽으로 흘러 대강(大江)이 된다. 이 두 갈래가 위화도(威化島)를 감싸 흐르다가 다시 합해져서 대총강(大總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 덕래하(德來河) -바로 대령강(大寧江)의 상류이다-ㆍ대매하(大梅河)ㆍ소매하(小梅河) -대매하와 소매하는 바로 압록강 상하의 요충지가 되는 진(津)이다.
《송사》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서북계 연혁 취청천강이북지조(取淸川江以北地條)에 나온다.
○ 이하(泥河) -덕원군(德源郡)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신라 북계 연혁 여발해접계조(與渤海接界條)에 나온다.
○ 활녈수(活涅水) -어떤 데에는 활녜수(活禰水)로 되어 있다-ㆍ벽등수(闢登水)ㆍ을리골수(乙離骨水)ㆍ삼잔수(三潺水) -이상의 여러 물은 정평부(定平府) 등지에 있다.
《금사(金史)》 고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이록고수(移鹿古水) -함흥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합라로조(合懶路條)에 나온다.
○ 복간수(僕幹水) -함흥부 이북의 지역에 있다-ㆍ주아문수(注阿門水) -정평부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다-ㆍ도온수(陶溫水) -어떤 데에는 토온수(土溫水)로 되어 있다. 마땅히 온성부(穩城府) 등지에 있어야 한다-ㆍ도롱고수(徒籠古水) -바로 종성부(鍾城府)의 오롱소수(吾籠所水)이다.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 연혁 여여진위계조(與女眞爲界條) 및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혼동수(渾疃水)ㆍ성현수(星顯水)ㆍ잔준수(僝蠢水)ㆍ소빈수(蘇濱水) -이상의 여러 물은 삼수부 등지에 있다.
《금사》 본기(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동북계 연혁 휼품로조(恤品路條) 및 오국성조(五國城條)에 나온다.
○ 알목하(斡木河)
《쌍괴잡초(雙槐雜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건주위(建州衛), 해서위(海西衛), 올자위(兀者衛) 등의 사람들은 먼저 알목하에 살면서 칠성(七姓)의 야인(野人)들과 원수 관계가 되어 조선으로 달아나 투항하였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알목하는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 무산령(茂山嶺)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회령부의 서쪽에 이르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당초에 알목하 지역은 여진의 알타리부락(斡朶里部落)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조선 세종(世宗) 14년(1432)에 칠성(七姓)의 야인들이 알목하를 침공하여 맹가첩목아(孟哥帖木兒)를 살해하자, 그의 동생인 범찰(凡察) 등이 경원부(慶源府) 근처의 지역으로 옮겨 와서 살기를 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빈틈을 타 알목하에 회령부를 설치하였다.
○ 두만강(豆滿江) -혹은 토문강(土門江), 도문수(徒門水), 통문하(統門河), 아야고하(阿也苦河), 애호강(愛滹江)이라고도 한다. ○ 팔하천(八下川)을 덧붙인다.
《금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열전에 이르기를, “고려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을 수축하자, 혼탄(渾坦)이 석적환(石適歡)과 도문수(徒門水)에서 군사를 합하여 고려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금사》 석토문열전(石土門列傳)을 보면, 석토문은 한자(漢字)로는 신도문(神徒門)이라고 쓰는바, 이를 근거로 해서 보면 도문(徒門)이 토문(土門)임은 분명하다.- ○ 세기에 이르기를, “요나라에서 경조(景祖)를 생여진절도사(生女眞節度使)로 삼으니, 통문수(統門水)의 온적흔부(溫迪痕部), 신은수(神隱水)의 완안부(完顔部)가 모두 서로 뒤를 이어 와서 귀부하였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장백산 꼭대기에는 연못이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토문강은 영고탑성(寧古塔城)에서 남쪽으로 600여 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조선의 북쪽 경계를 감싸고 흐른 다음 다시 동남쪽으로 꺾어져서 여러 물을 모아 바다로 들어간다. 《성경통지》에 이르기를, “《대명일통지》를 보면, 아야고하가 있는데, 그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 장백산의 물 가운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토문강이 있을 뿐 아야고하라는 이름은 없다. 살펴보건대, 《금사》의 유가열전(留可列傳)을 보면, 유가(留可)는 통문(統門)과 혼준수(渾蠢水)가 합류하는 지역의 오고륜부(烏古倫部) 사람이다. 지금 혼춘하(渾春河)가 남쪽으로 흘러 토문강과 합해지니, 통문은 바로 토문(土門)의 음이 변한 것이다. 또 《명사》 지리지를 보면, 도문하(徒門河)가 있는데, 강물은 건주위(建州衛)의 동남쪽을 지나 1000리를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바, 이 강이 바로 도문하로, 아야고하와는 당연히 같은 한 물이다.” 하였다. ○ 토문강은 조선국의 서북쪽 경계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 동남쪽 기슭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萬曆) 20년(1592)에 왜병들이 평양에 모여 있으면서 격문(檄文)을 보내어 조선에 고하기를, “부산에서 평양까지 오는 데 한 달도 채 안 걸렸다. 그런 데다가 풍신수길과 가등청정을 평안도에 보내어 두만강(豆滿江) 가에 이르게 하였는바, 그 일대가 모두 우리의 수중에 들어왔다.” 하였다.
《수도제강》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토문강은 그 근원이 장백산 꼭대기의 동쪽 기슭에서 나오는데, 이를 토문색금(土門色禽)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흘러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서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또 수십 리를 흐른다. 이곳에서 한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하고, 또 두 근원이 합해진 한 물이 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하는데, 이 두 물은 모두 장백산의 지봉(支峯)에서 나오는 물이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한 물이 있어 두 근원의 물을 합하여 서남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이 물 남쪽은 바로 조선국이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북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남쪽 둔치로 작은 물 두 개와 큰 물 하나를 받아들인다. -두 개의 작은 물은 모두 증산(甑山) 북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100리가량을 흐른다. 하나의 큰 물은 홍단하(洪丹河)라고 하는데, 그 근원은 서남쪽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세 연못에서 근원하는 물을 합하여 동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른 다음, 꺾어져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한 작은 물을 합한 다음 다시 북쪽으로 흘러 증산의 동쪽 기슭을 지나고 다시 동북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100여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홍단하는 바로 홍단하(紅丹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조금 동쪽에 아궤개토문(阿几个土門)이 있어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한 다음 동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아궤개색금(阿几个色禽)은 장백산 산꼭대기에서 동북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는 큰 산에 있다. 그 서쪽은 바로 이아모색금(泥牙母色禽)과 이아고색금(泥牙庫色禽)인데, 서북쪽으로 흘러 송화강(松花江)이 되는 물이다. 이 물은 산 동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는데, 두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진 한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는데, 역시 토문강의 별원(別源)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100리를 흐르며 남쪽 둔치에서 두 개의 물을 받아들인다. -한 물은 어순하(魚順河)라고 하는데, 남쪽으로부터 두 근원에서 나온 물을 합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한 물을 합하여 300여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또 한 물은 파하천(波下川)이라고 하는데, 세 근원에서 나온 물이 합해져 북쪽으로 굽이굽이 2백 수십 리를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 삼가 살펴보건대, 파하천은 바로 팔하천(八下川)으로,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 원산(圓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흐르다가 회령부성 북쪽으로 지나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다시 큰 산의 동쪽 기슭에 이르러 꺾어져 북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온 두 개의 물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쪽 언덕에는 조선의 무산성(茂山城)이 있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을 받아들이는데, 그 동쪽 언덕에는 조선의 양옹성(良雍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양영보(梁永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동북쪽으로 평지(平地) 가운데를 1백 수십 리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물 세 개를 받아들이는데, 그 동남쪽 언덕에는 바로 조선의 방산보(方山堡) 및 회령(會寧), 고령(高岭)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고령진(高嶺鎭)이다-, 왕탄(王坦)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방원보(防垣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종성(鍾城), 동관(潼關), 옹대(雍大)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영달보(永達堡)의 음이 변한 것이다.- 등 일곱 성이 있는데, 모두 강가에 있다. 이곳에서 한 작은 물이 서북쪽에서 흘러 들어온다. 그 북쪽 언덕에서 큰 산의 남쪽 기슭에 이르기까지 사이에는 갈합리하(噶哈里河)가 있다. 갈합리하는 북쪽의 흥안령(興安嶺) 서남쪽 기슭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물을 합한 다음 꺾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복아합토하(卜兒哈兔河)를 합하고,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하는데, 이 역시 큰 하천이다. 이곳과 마주한 남쪽 둔치에 바로 조선의 온성(穩城)이 있다. -갈합리하는 흥안령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다가 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을 합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합달하(哈達河)가 있어, 서북쪽에 있는 마아호리령(馬兒呼里嶺)의 큰 산에서 나와 몇 개의 근원에서 나온 물을 합한 다음 동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활혼산(活渾山)에서 나온 애의육하(艾衣六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서쪽에서 흘러오는 활궤하(活几河) 및 동쪽에서 흘러오는 살기고하(薩其庫河)를 받아들이고,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살극득향령(薩克得享嶺)의 부아합하(付兒哈河)를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합순하(哈順河)를 받아들인다. 갈합리하는 근원에서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이미 400여 리를 흘러왔는데, 이곳에서 다시 복아합토하가 서쪽에서 와서 합해져, 두 개의 큰 물이 와서 모이는 것이다. ○ 갈합리하는 다시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흘러 토문강과 합류한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꺾어져 동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세 개의 작은 물을 받아들인다. -한 물은 이름이 없고, 한 물은 호란하(呼蘭河)라고 하고, 한 물은 미첨하(米瞻河)라고 한다.- 여기의 남쪽 둔치에는 조선의 미천진성(美踐鎭城)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미전진성(美錢鎭城)의 잘못된 표기이다.- 이 있다. 여기에서 꺾어져 동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 또 동영액하(東英額河)가 있어 흘러 와서 합류한다. 이곳의 서쪽 둔치에는 바로 조선의 순진성(循鎭城)이 있고, 남쪽은 경원부성(慶源府城)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휘춘촌(輝春村)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혼춘촌(渾春村)이다.-의 서남쪽을 지난 다음 다시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에 휘춘하(輝春河)가 있어 동북쪽에서 나와 10여 개의 물을 합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와서 합류한다. -휘춘하는 동북쪽에 있는 여러 산속에서 나와 서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우비첨사리하(牛非尖舍利河)와 서쪽에서 흘러오는 부답족혼하(夫答足渾河)를 합한다. 그런 다음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100여 리를 흐르면서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서백하(西白河)와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심계랍고하(心鷄拉庫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쪽으로 1백 수십 리를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합이달산(哈爾達山)의 물 및 동남쪽에서 흘러오는 한 물, 남쪽에서 흘러오는 호로하(虎魯河), 이아하(你牙河), 하화리하(下禾里河)를 합한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합달하(哈達河), 늑특하(勒忒河)를 합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수십 리를 흐르면서 동쪽에서 흘러오는 합달하를 합한다. 그러고는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토문강은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100리를 흐르면서 조선의 서쪽 언덕에서 흘러오는 물 두 개를 받아들인다. -한 물은 경원부(慶源府)의 남쪽 물로, 서남쪽에 있는 산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고, 한 물은 전원포(前元舖) 앞 물로,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100여 리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경원부의 남쪽 물은 바로 오룡천(五龍川)으로, 그 근원이 회령부(會寧府)의 갈성령(葛城嶺)에서 나와 동북쪽으로 흘러 건원보(乾原堡)에 이르러서 두만강으로 들어간다. 전원포(前元舖)는 바로 안원보(安原堡)의 잘못된 표기이다.- 여기에서 꺾어져 남쪽으로 20리를 흐른 다음 다시 꺾어져 동쪽으로 흐르면서 남쪽 둔치의 한 물 -바로 아산포(阿山舖)의 남쪽에 있는 한 물로, 길이가 1백 수십 리이다.- 을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다시 꺾어져 동북쪽으로 20여 리를 흐르면서 -바로 오아곤산(烏兒滾山)의 남쪽에서 80리쯤 되는 곳이다.- 동쪽 둔치에는 무산성(茂山城)이 있는데 -삼가 살펴보건대, 무산(茂山)은 아마도 중국쪽의 성 이름인 듯하다.- 북쪽의 물을 받아들인다. 이 물 이름은 서수락천(西水洛川)으로, 그 근원이 동원(東源) -삼가 살펴보건대, 동해(東海)로 되어야 한다.- 가에 있는 큰 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온 물 두 개를 받아들이고, 다시 북쪽으로 굽이굽이 흘러 무산성의 동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무산성 북쪽으로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토문강으로 들어간다. 또 북쪽에 한 물이 있는데, 이름은 없으며, 그 남쪽 둔치의 물굽이진 곳에 바로 조선의 경흥성(慶興城)이 있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큰 바다로 들어간다. -해구(海口)의 위치는 동경 14도 5분, 북위 42도 5분이다. 해구의 남쪽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으며, 그 동쪽에 있는 하나의 산이 바로 대도살합(代都薩哈)이다. 또 동쪽으로 수십 리 되는 곳이 바로 서사하도(西思河島)이다. 섬과 산의 북쪽은 바로 화탁화하(火擢火河)의 해구이다. 이 강은 근원에서부터 1000여 리를 흐르는데, 서쪽 둔치의 경흥성에서 남쪽 물가까지를 색봉파(索鳳坡)라고 하고, 다시 남쪽으로 대해구(大海口)까지를 서수락성(西水洛城)이라고 한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토문강, 도문강, 통문강, 두만강은 모두 한 강으로, 음이 변한 것이다. 《대청개국방략(大淸開國方略)》을 보면, 장백산은 압록강, 혼동강(混同江), 애호강(愛滹江) 세 강의 물이 나오는 곳이라고 하였다. 애호강은 바로 《대명일통지》에서 말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음이 변한 것으로, 역시 두만강이다. 두만강의 근원은 백두산의 남쪽, 갑산부(甲山府)의 천평(天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무산부의 서쪽으로 지나고 회령부의 경계에 이르러서 오른쪽으로 알목하(斡木河)와 팔하천(八下川)을 지난다. 여기에서 꺾어져 북쪽으로 흘러 온성부의 북쪽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갈합리하(葛哈里河) -중국쪽 지역에 있다.- 를 지나고,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흘러 경원부(慶源府)를 지나면서 왼쪽으로 후춘강(後春江) -바로 혼춘하(渾春河)로, 중국쪽 지역에 있다.- 을 지나고, 오른쪽으로 오룡천(五龍川)을 지난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경흥부의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 합란하(合蘭河)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합란부(合蘭府), 수달달로(水達達路) 등지에 5개의 군민만호부(軍民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호리개(胡里改)로, 이곳에는 호리개강(胡里改江)과 혼동강(混同江)이 있으며, 또 합란하(合蘭河)가 있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호리개는 금나라의 호리개로(胡里改路)로, 지금 우리나라 육진(六鎭) 북쪽, 영고탑(寧古塔) 동쪽 지역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려 동북계연혁 합란부조(合蘭府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호리개강은 바로 오소리강(烏蘇哩江)이다. 지금 육진 북쪽의 물로써 스스로 바다에까지 도달하면서 크기로도 오소리강과 나란히 칭할 만한 강으로는 두만강이 있을 뿐이다. 그런즉 합란하는 바로 두만강인 듯하다.
부(附)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북쪽인 달단(韃靼)과의 경계 지역에 큰 강이 있는데, 이름을 보려천(保呂川)이라고 하며, 그 너비가 15리이다. 매년 8월에서 3월까지는 강물이 굳게 얼어 강을 메우는데, 얼음의 두께가 세 자 남짓이나 되어 육지에서와 같이 배 밑에 수레바퀴를 달아 밀고서 다닐 수가 있으며, 사람들은 신발 바깥쪽에 못을 박고서야 걸어다닐 수가 있다. 3월 이후에는 얼음이 풀려서 다시 큰 강이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보려천은 두만강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너비가 15리나 된다고 한 것은 망녕된 것으로, 상고할 수가 없다.

[주D-001]그 동쪽의 바닷물은 : 원문에는 ‘其東南海水’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其東面海水’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수구가 …… 있다 : 원문에는 ‘縣海中有島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懸海中有島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03]우선산(遇仙山) : 원문에는 ‘右仙山’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여도(㻌島) : 원문에는 진도(鎭島)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및 …… 다음 : 원문에는 ‘之延山城之南’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及延山城之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6]홍천현(洪川縣) : 원문에는 홍주현(洪州縣)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칠중성(七重城) :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積城)이다. 칠중성은 진평왕(眞平王)과 선덕왕(善德王) 때 신라 북경(北境)의 요충지로써 신라와 고구려 간 교통로의 중심이었다.
[주D-008]무협(巫峽) : 양자강의 상류에 있는 세 협곡 가운데 하나로, 험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주D-009]성산(成山) : 산동반도(山東半島)의 동쪽 끝에 있는 산동성 영성현(榮成縣)이다. 성산(城山)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주D-010]주류성(周留城) : 지금의 충청남도 한산(韓山) 지방에 있던 백제의 성으로, 지라성(支羅城)이라고도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금강(錦江) 하류의 한산 부근에 있는 건지산성(乾至山城)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주D-011]백촌강(白村江) : 《당서》에는 백강(白江), 《삼국사기》에는 기벌포(伎伐浦)로 되어 있다. 강경(江景) 근처의 금강(錦江)이라는 설과 변산반도(邊山半島) 남쪽의 줄포만(茁浦灣)이라는 설이 있다.
[주D-012]서남쪽으로 …… 지나 : 원문에는 ‘西南流經黃磵縣山’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西南流經黃磵縣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또다시 …… 이르러서 : 원문에는 ‘又西南置燕岐縣之南’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又西南至燕岐縣之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4]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 원문에는 ‘兩朝平壤錄’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이하도 같다.
[주D-015]임천(瀶川) : 원문에는 ‘臨川’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6]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 : 낙동강(洛東江)이나 알천(閼川)이라는 설이 있으나, 반드시 고유명사로 보이지는 않고 대하(大河), 대수(大水)를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듯하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227쪽 주》
[주D-017]요동고새(遼東故塞) : 이병도(李丙燾)는 요동고새는 바로 번한새(番汗塞)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쪽)》
[주D-018]공지(空地)인 상장(上障)과 하장(下障) : 이병도는, “공지는 일종의 완충 지대로서, 인민의 거주를 허락하지 않은 까닭에 공지라 한 것이다. 그리고 상하장(上下障)은 상하 두 곳의 장새(障塞)를 말한 것으로, 상장은 번한새(番汗塞), 즉 박천(博川)을 말한 것이고, 하장은 열수(列水), 즉 대동강(大同江) 북안(北岸)에 비정(比定)되어야 한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71~72쪽》
[주D-019]600리 : 60리의 잘못된 표기이다. 《수서(隋書)》에는 60리로 되어 있다.
[주D-020]다시 …… 이르는데 : 원문에는 ‘又西經南至三和城東南’으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又西稍南至三和城東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1]격수(湨水) : 패수(浿水)의 잘못된 표기이다. 패수는 고조선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서로 달라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 안정복(安鼎福)은 대동강으로, 정약용(丁若鏞)은 압록강으로, 이병도(李丙燾)는 청천강으로, 북한의 학자들은 대릉하(大凌河)로 비정하여 일정하지 않다.
[주D-022]이곳이 …… 말인가 : 원문에는 ‘河與於燕朝鮮之界耶’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何與於燕朝鮮之界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3]다하(茶河)와 타하(陀河) 두 하천 : 이에 대해서 김상기(金庠基)는, “이는 고려 측의 기록에 보이는 석천(石川) 즉 지금의 황화천(皇華川)에 해당하는 것이다. 다하와 타하 두 강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다타이(茶陀二)의 이(二)를 숫자로 본 데서 나온 착오이다.” 하였다.《高麗時代史 99쪽 주》
[주D-024]살수(薩水) : 오늘날의 청천강(淸川江)이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소자하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4쪽》
[주D-025]중강 개시(中江開市) : 의주(義州)의 건너편인 중강(中江), 즉 지금의 마자대(馬子臺)에서 열었던 중국과의 무역을 말한다. 임진왜란 중에 기황(飢荒)을 계기로 요동의 미곡(米穀)을 수입하기 위하여 선조 26년(1593)에 처음 열었으며, 난이 끝나고 선조 34년(1601)에 폐지하였다. 다음 해에 명나라의 요청으로 다시 열었으며, 광해군 1년(1609)에 다시 폐지하였다. 그 뒤 청나라가 개국하자 인조 24년(1646)에 다시 열었는데, 이를 중강 후시(中江後市)라 한다.
[주D-026]유가열전(留可列傳) : 원문에는 ‘有可傳’으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7]홍단하(紅丹河) : 원문에는 ‘洪丹’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8]심계랍고하(心鷄拉庫河) : 원문에는 ‘心難拉庫河’로 되어 있는데, 《수도제강》 권26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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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4
부록(附錄)

《삼재도회속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조선의 삼일포(三日浦)는 고성(高城)에서 북쪽으로 7, 8리 되는 곳에 있다. 바깥쪽은 여러 산봉우리들이 겹쳐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안에는 36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동학(洞壑)이 맑고 그윽하며, 소나무와 돌이 기이하고 고아하다. 물 가운데 작은 섬이 있고 푸른 돌이 평평한데, 그 위에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배꽃이 만발해 있으며, 호수 물은 맑고 깨끗하여 거울과 같은바, 인간이 놀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는 바로 《여지승람》의 본문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서생포(西生浦)는 울산군(蔚山郡)에서 남쪽으로 52리 되는 곳에 있다. ○ 감포(甘浦)는 경주(慶州)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고려도경》을 보면, 감포와 가까운 곳에 장기포(長鬐浦)가 있다. ○ 안골포(安骨浦)는 웅천군(熊川郡)에서 남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이곳과 가까운 곳에 또 천성포(天成浦)가 있다.
《양조평양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력 정유년(1597)에 왜적들이 조선에 쳐들어와서 동래(東萊), 기장(機張), 서생포, 두모포(豆毛浦), 안골포 등이 모두 왜적들에게 점거당했다.
《이칭일본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제포(薺浦)는 경상도 웅천(熊川)에서 남쪽으로 5리 되는 곳에 있다. ○ 웅천의 내이포(乃而浦), 동래의 부산포(富山浦), 울산의 염포(鹽浦)를 삼포(三浦)라고 부른다.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중국의 서적에 나오는 포(浦)의 이름으로는 남양(南陽)의 당은포(唐恩浦) -신라 성읍조(新羅城邑條)에 나온다-, 고성(固城)의 당포(唐浦), 울산의 임랑포(琳瑯浦), 거제(巨濟)의 옥포(玉浦)와 삼포(森浦) -조선 강역조(朝鮮疆域條)에 나온다-, 지세포(知世浦) -제수 총설조(諸水總說條)에 나온다.- 가 있는데, 이미 앞에서 다 말하였으므로 이곳에 겹쳐 수록하지 않았다.


[주D-001]배꽃이 만발해 있으며 : 원문에는 ‘黎花亂開’로 되어 있는데, 조선광문회본 《해동역사》에 의거하여 ‘梨花亂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해동역사 속집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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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고(地理考) 15
산수(山水) 3 경계 바깥의 산수

○ 환도산(丸都山)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환도산은 조선 국성(國城)의 동북쪽에 있다. 한나라 때 고구려의 왕 이이모(伊夷模)가 이곳에 도읍하였으며, 진(晉)나라 때에는 모용황(慕容皝)에게 격파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환도산은 압록강과 파저강(婆豬江) 사이에 있다. 고구려 환도성조(高句麗丸都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정현(赬峴)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5년(244)에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 왕 고궁(高宮)이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정현(赬峴)에까지 이르러 온갖 신고를 겪으면서 환도성(丸都城)에 올라가 고구려가 도읍한 곳을 도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정현과 환도산은 서로 이어진 것이다.
○ 요산(遼山) -지금의 혼하(渾河)가 나오는 장령(長嶺)이다.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소요수조(小遼水條)에 나온다.
○ 갈석산(碣石山)
《진태강지리지(晉太康地理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낙랑의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長城)이 시작되는 곳이다.
《통전(通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진(秦)나라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지금 살펴보건대, 장성은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횡단하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그 터가 아직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통전》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갈석산은 지금의 압록강 서쪽의 책(柵)을 세운 곳 동쪽 머리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右碣石)은 바로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으로, 평주(平州)에서 남쪽으로 20여 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은 지금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바, 이곳에서 말한 갈석과는 다르다. 고려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左碣石)이 되는바, 《통전》에서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우공추지(禹貢錐指)》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태강지리지》를 보면, “낙랑의 수성현에 갈석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하였고, 《통전》에는 이르기를, “지금 고려의 옛 경계 안에 있는데, 바로 몽염(蒙恬)이 수축한 바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하였다. 왕백후(王伯厚)는 이르기를, “고려의 경계 안에 있는 것이 좌갈석이 되고, 평주의 남쪽에 있는 것이 우갈석이 된다.” 하였는데, 이는 경문(經文)에 나오는 우(右) 자를 아래로 끊어 읽은 것이다. 김길보(金吉甫)는 고려에 있는 것을 좌갈석이라 하고, 사문도(沙門島)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발해(渤海)의 입구에 해당되는 철산(鐵山)을 우공편(禹貢篇)에 나오는 우갈석이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생각하기를, “갈석은 한 곳일 뿐인데 어찌 우갈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과연 그렇다면 도산(導山)의 글에 우 자가 없는 갈석은 좌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길보가 취한 바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 주필산(駐蹕山)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정관(貞觀) 19년(645)에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서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을 크게 격파하고는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바꾸어 주필산이라고 고쳤다. ○ 《자치통감》 주에 이르기를, “주필산은 구사(舊史)에 의거하면 본디 이름이 육산(六山)이다.” 하였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수산(首山)은 요양주(遼陽州) 서남쪽 15리에 있다. 해성현(海城縣)의 경계와 이어져 있는데, 일명 수산(手山)이라고도 하고, 또 주필산이라고도 한다. 《위지(魏志)》를 보면, “경초(景初) 2년(238)에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공손연(公孫淵)을 토벌하기 위해 군사가 요동에 이르렀는데, 8월 병인 밤에 길이가 수십 길이나 되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의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의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하였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요양부(遼陽府)에 주필산이 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그 산꼭대기에 며칠 동안 주필하고서는 돌에 새겨 공을 기록하였다. 세속에서는 수산(手山)이라고 칭한다. 산꼭대기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 모양으로 생긴 곳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구당서(舊唐書)》를 보면, “정관 19년에 태종이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였다. 요동성(遼東城)을 격파하고 백애성(白崖城)의 항복을 받은 다음 안시성(安市城)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는데, 고구려의 욕살(褥薩) 고연수와 고혜진이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 이에 태종이 산에서 내려가 군사를 이끌고 임하자,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지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모두 항복하였다. 인하여 행차하였던 산의 이름을 주필산이라고 고치고는 중서 시랑(中書侍郞) 허경종(許敬宗)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돌에 새겨서 그 공을 기록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곳에서 말한 주필산은 안시성에 있는바, 요성(遼城) 근방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요사(遼史)》에서 말한 바는 《당서》와 맞지 않는다. 《방여기요(方輿記要)》를 보면, “개주위(蓋州衛) 동쪽 분수령(分水嶺)의 여러 산은 바로 당나라 태종이 주필한 곳이다.” 하였다.
○ 금산(金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건봉(乾封) 2년(667)에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정벌하면서 진격하여 금산에 이르렀다. 설인귀(薛仁貴)가 고구려의 군사를 대파하고는 고구려의 남소(南蘇), 목저(木底), 창암(蒼巖) 등 세 성을 함락시켰다.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서남쪽 127리 지점에 황금산(黃金山)이 있는데, 설인귀가 고구려의 군사를 금산에서 격파하였다고 하는 금산이 바로 이곳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청일통지》를 보면, 금산은 마땅히 흥경(興京)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 석성산(石城山)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석성산은 개평현성(蓋平縣城)에서 동북쪽으로 1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일명 고려성산(高麗城山)이라고 한다. 세속에서 전해 오기를, 그 안에 용담(龍潭)이 있는데, 초하룻날 밤에 달이 보인다고 한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토인(土人)들이 이곳에 살면서 병란을 피하였다고 한다. -《대청일통지》에는 이르기를, “석성산은 요양주(遼陽州)에서 동북쪽으로 57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 횡산(橫山)
《구당서》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용삭(龍朔) 1년(661)에 설인귀가 요동에 주둔해 있으면서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溫沙門)을 만나 횡산에서 싸웠다. 고구려 군사 가운데 활을 잘 쏘는 자 10여 명을 석성(石城) 아래에서 쏘아 죽였는데, 설인귀가 산 채로 사로잡았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웅악성(熊岳城)은 고구려의 성인데, 당나라 때 설인귀가 고구려의 대장 온사문과 웅산(熊山)에서 싸우다가 활을 잘 쏘는 자를 석성에서 잡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성경통지》를 가지고 《당서》를 참고해 보면, 웅산은 바로 횡산이며, 석성산과는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산이다.
○ 백석산(白石山)
《수서(隋書)》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설세웅(薛世雄)이 요동의 전역(戰役)에서 우문술(宇文述)과 함께 평양(平壤)에서 패하였다. 돌아올 적에 백석산에 주둔하였다가 고구려 군사에게 포위당하였는데, 설세웅이 격파하였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석산은 횡산(橫山)이라고도 한다.
○ 명왕산(明王山)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병산(東屛山)은 복주(復州)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명산(明山)이 복주위(復州衛)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명왕산이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 왕의 아들을 동명(東明)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다가 장사 지냈다. 지역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아마도 바로 이 산인 듯하다.” 하였다. 지금 복주의 동쪽에 있는 여러 산들 가운데에는 명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없다. 그리고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은 복주의 지역이 아니다. 현지(縣志)를 보면, 또 지금의 동병산이 바로 명산이라고 의심하여 드디어는 동명왕묘(東明王墓)를 능묘조(陵墓條)에 끼워 넣었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요양부에 명왕산이 있다.” 하였는바, 반드시 요양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금의 명칭이 달라서 상고할 수가 없다.
○ 역산(易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23년(649)에 오호 진장(烏胡鎭將)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고구려 군사와 역산 -삼가 살펴보건대, 《신당서(新唐書)》에는 역산이 갈산(曷山)으로 되어 있다.- 에서 싸워 격파했다. 그날 밤에 고구려의 군사들이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는데, 고신감이 또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역산은 마땅히 지금의 영해현(寧海縣) 동남쪽 바닷가 지역에 있어야 한다.
○ 천산(泉山)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겸모잠(鉗牟岑)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간(高侃)이 반군을 안시성에서 격파하였으며, 또 천산에서 격파하였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형(咸亨) 3년(672)에 고간이 고구려의 남은 백성들과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백수산은 바로 천산의 잘못된 표기이다.
○ 동모산(東牟山)천문령(天門嶺)
《신당서》 발해열전(渤海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渤海)는 본디 속말말갈(粟末靺鞨)로서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나라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백성들을 거느리고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보존하였는데,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지역이다. ○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대장군(大將軍) 이해고(李楷固)에게 조칙을 내려 발해를 치게 하니, 대조영(大祚榮)이 도망쳤다. 이해고가 끝까지 추격하여 천문령(天門嶺)을 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모산은 영고탑(寧古塔)에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발해 강역총론조(渤海疆域總論條)에 나온다. 천문령은 《대명일통지》에 의거하면 지금의 영길주(永吉州) 경계 안에 있어야 하는바, 지금의 장령자(長嶺子)인 듯하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천주산(天柱山)은 승덕현성(承德縣城)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당서》를 보면,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자, 발해의 대씨(大氏)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동모산 지역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견고히 하였다.” 하였다.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심양위(瀋陽衛)에서 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지금 -원문 빠짐- 정동쪽으로 20리 되는 곳에는 없다. 그런즉 이 산이 바로 옛날의 동모산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설은 매우 잘못되었다.
○ 녹산(鹿山)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가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百濟)의 침입을 받아 서쪽으로 연(燕)과 가까운 곳으로 옮겨 갔다. ○ 주에 이르기를, “부여는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대개 녹산은 바로 그곳이다.” 하였다.

이상은 경계 밖에 있는 산(山)이다.

○ 보술수(普述水)
《후위서(後魏書)》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주몽(朱蒙)이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달아나다가 도중에 큰 강 하나를 만났다. 그런데 물고기와 자라가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이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다. 주몽이 마침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나 그들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른 다음, 거기에서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보술수는 지금의 폐여연군(廢閭延郡)의 강 건너편 지역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高句麗紇升骨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비류수(沸流水)
《삼국지》 관구검전(毌丘儉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위(魏)나라 정시(正始) 5년(244)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이에 고구려 왕 고궁(高宮)이 군사를 거느리고 비류수 가로 나아가 갈구(梁口)에서 크게 싸웠다. 고궁이 잇따라 패해 달아나자 관구검이 이를 추격하여 환도(丸都)를 도륙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비류수는 환도성의 서쪽 경계에 있는바, 동가강(佟家江)과 서로 가까운 강인 듯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이르기를, “비류수의 상류에는 비류국(沸流國)이 있다.” 하였는데, 바로 이 물이다. 동사(東史)에서 성천부(成川府)의 비류강(沸流江)을 비류수에 해당시키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흘승골성조에 상세하게 나온다.
○ 염난수(鹽難水)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玄菟郡)의 서개마현(西蓋馬縣)에는 마자수(馬訾水)가 있다.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간다.
《명사(明史)》 조선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성화(成化) 3년(1467)에 조정에서 군사를 출동시켜 건주여진(建州女眞)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러자 조선의 왕이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강순(康純)을 보내어 1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과 발저강(潑豬江)을 건너게 하였는데, 구미(九獼)의 여러 채(寨)를 쳐부순 다음 많은 적을 참획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발저강(潑豬江)은 바로 파저강(婆豬江)의 잘못된 표기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가강(佟家江)은 길림(吉林) 오라성(烏喇城)에서 남쪽으로 802리 되는 곳에 있는데, 통가강(通加江)이라고도 하며,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과 만나는데, 바로 옛 염난수(鹽難水)이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마자수가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간다.” 하였고, 《당서》 고구려열전을 보면, “압록수는 서쪽으로 염난수와 합류한다.” 하였고, 《성경통지》를 보면, “동가강은 그 근원이 장백산 남쪽의 분수령에서 나오는데, 세 개의 샘이 골짜기 안에서 나와 모여 하나로 된 다음 서남쪽으로 흘러 합이민하(哈爾民河) 등 여러 물을 받아들이며, 압록강이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대명일통지》에 ‘대충강(大蟲江)이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남쪽으로 4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은 용봉산(龍鳳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봉황성(鳳凰城)의 경계 안에는 대충강이 있다고는 들리지 않는바, 아마도 바로 동가강일 것이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가강은 바로 파저강이다.
○ 소요수(小遼水) -남소수(南蘇水)를 덧붙인다.
《한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현도군 고구려현(高句驪縣)에는 요산(遼山)이 있는데, 요수(遼水)가 나오는 곳이다. 요수는 서남쪽으로 요대(遼隊)에 이르러서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 남소수(南蘇水)가 있어 서북쪽으로 흘러 새외(塞外)를 지나간다.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소요수는 그 근원이 요산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대량수(大梁水)와 합류한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하(渾河)는 승덕현(承德縣)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새외(塞外)에서 나와 흥경(興京) 경계 안으로 흘러들어서 요양주(遼陽州)의 서북쪽에 이르러 태자하(太子河)와 만나는데, 바로 옛 소요수이다. 살펴보건대, 지금 혼하는 그 근원이 장령자(長嶺子)의 납록와집(納綠窩集)에서 나오는데, 이를 납록하(納綠河)라고 한다. 납록하는 영액변문(英額邊門)으로 흘러 들어와 갈상아하(噶桑阿河)와 만나 혼하가 된다. 여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흥경 경계 안을 지나는데, 이곳에 소패하(小貝河)가 있어서 개원현(開原縣) 경계로부터 서남쪽으로 흘러와 합류하며, 또 소자하(蘇子河)가 있어 흥경 경계로부터 서북쪽으로 흘러와 합류한다. -삼가 살펴보건대, 남소수(南蘇水)는 《대청일통지》에 의거하면 흥경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고구려 남소성조(高句麗南蘇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대요수(大遼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에는 대요수가 있는데, 그 근원이 말갈(靺鞨)의 서남쪽 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로 안시(安市)에 이른다. -삼가 살펴보건대, 안시는 바로 당나라 문황(文皇)이 공격하였던 성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요하(遼河)는 봉천부(奉天府)에서 서쪽으로 100리 되는 곳에 있다. 동쪽과 서쪽의 두 근원이 변경 밖에서 흘러와 합류한 다음 남쪽으로 흘러 개원현(開原縣)과 철령현(鐵嶺縣) 두 현의 서쪽을 지나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승덕(承德), 요양(遼陽), 해성(海城)의 서쪽을 지나며, 다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망평현(望平縣)에는 대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변경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요하는 구려하(句驪河)라고도 하며, 지금은 거류하(巨流河)라고 한다. 거류하는 그 근원이 새외(塞外)에서 나오는데, 두 개의 근원이 있다.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너무 멀어서 상고할 수가 없다. 동쪽에서 흘러오는 한 근원은 역시 장백산 서북쪽에 있는 여러 와집(窩集) 안에서 나와 흑이소하(黑爾蘇河) 등과 합류한 다음 북쪽으로 흘러 변경을 나가 서북쪽으로 흘러 등자촌(鄧子村)을 감돈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꺾어지면서 서북쪽에서 흘러온 한 물과 합류하여 하나가 된다. 여기에서 마침내 서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명안패륵둔(明安貝勒屯) 동쪽 10리 되는 곳에서 변방에서 흘러온 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 흘러 철령현의 북쪽을 지나는데, 이곳에서 청하(淸河)가 동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다시 쌍협구(雙峽口)의 서남쪽으로 들어가 두 물로 나누어지는데, 이를 내요하(內遼河), 외요하(外遼河)라고 한다. 다시 현의 서남쪽을 돈 다음 합해져서 하나가 된다. 개성(開城)에 이르러서 거류하가 되었다가 또 나누어 흐르다가 다시 남쪽에서 모여 해성현(海城縣)의 서쪽을 지나면서 태자하(太子河)와 합류하는데, 이곳을 삼차하(三汊河)라고 하며, 여기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하(河)는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나누어지는 곳이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적에 진흙탕길 200여 리에 흙을 깔고 다리를 만들어서 건넌 곳으로, 지금도 이 지역 100여 리 이내에는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되어 길을 갈 수가 없다. 강희(康煕) 58년(1719)과 옹정(雍正) 6년(1728)에 서로 잇달아서 길을 닦아 점차 평탄한 길이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 흑이소하는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서남쪽에 있는 고이낙와집(庫爾諾窩集)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갔다가 곧바로 꺾어져서 서남쪽으로 흐른다. 그 서쪽의 한 근원은 바로 서라목륜하(西喇木倫河)로, 그 근원이 고북구(古北口)에서 북쪽으로 500여 리 되는 곳에 있는 몽고(蒙古)의 극서극등(克西克騰) 경계 안의 백이흑하이홍(百爾黑賀爾洪)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고북구 바깥에 있는 몽고의 여러 주목지(駐牧地)를 지나면서 북쪽으로는 객라목륜하(喀喇木倫河)를 받아들이고, 남쪽으로는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흘러 개원현의 서북쪽 변경 밖에 이르러서 흑이소하와 합류하여 변경으로 들어가서 요하가 된다. 《한서》 지리지나 《수경주(水經注)》에서 말한 요수의 근원은 모두 지금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한 지류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며, 동쪽에서 나오는 한 근원에 대해서는 《통전》에서 처음으로 말하였다.
○ 대양수(大梁水)
《통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대량수는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새외(塞外)에서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소요수(小遼水)로 들어간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자하(太子河)는 요양주(遼陽州)에서 북쪽으로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옛날의 대량수로, 일명 동량하(東梁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살수선산(撒水禪山)에서 나와 위자곡(葦子谷) 동쪽에서부터 변방으로 들어가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주의 서북쪽에 이르러서 혼하(渾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해성현(海城縣) 서북쪽에 이르러서 요하(遼河)로 들어간다. 《한서》 지리지를 보면, “요양현의 대량수는 서남쪽으로 흘러 요양에 이르러서 요하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동쪽 산으로부터 나와 서쪽으로 흘러 혼하와 합류하여 소구(小口)가 되고,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또 태자하라고도 하며, 대량수라고도 한다.” 하였다. 《금사(金史)》 지리지를 보면, “동량하는 국명(國名)이 올로홀필자(兀魯忽必刺)이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태자하는 그 근원이 간라산(幹羅山)에서 나와 서쪽으로 500리를 흘러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동북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이른다. 여기에서 꺾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혼하에 이르러 합해져 소구가 된 다음 요하와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방여기요》를 보면, “태자하는 바로 옛 연수(衍水)로, 연(燕)나라 태자(太子) 단(丹)이 연수에 숨어 있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태자하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 오골강(烏骨江)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정관(貞觀) 19년(645)에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자, 오골성(烏骨城)에서 군사 1만여 명을 보내어 백암성을 성원하였다. ○ 주에 이르기를, “등주(登州)에서부터 동북쪽 바다로 가면 오호도(五湖島)에 이르고, 다시 500리를 가면서 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가면 청니포(靑泥浦), 도화포(桃花浦), 행인포(杏人浦), 석인왕(石人汪), 탁타만(橐駝灣)을 지나서 오골강(烏骨江)에 이른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골강은 바로 오골성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는 강으로, 압록강에서 서쪽으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만 한다. 고구려 오골성조(高句麗烏骨城條)에 상세하게 나온다.
○ 귀단수(貴端水)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당나라 영휘(永徽) 6년(655)에 정명진(程名振) 등이 고구려를 치고자 요수(遼水)를 건넜다. 고구려 군사들이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와 맞서 싸웠는데, 정명진 등이 격파하였다.
○ 살하수(薩賀水)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총장(總章) 1년(668)에 이적(李勣)이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였다. 고구려의 군사가 부여성을 습격해 왔는데, 이적이 이들을 살하수(薩賀水) 가에서 격파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자치통감》에는 설하수(薛賀水)로 되어 있다. 설하수는 개원현(開原縣) 근방에 있어야 한다.
○ 엄호수(淹淲水)ㆍ개사수(蓋斯水)
《후한서(後漢書)》 부여열전(夫餘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처음 북이(北夷)의 색리국왕(索離國王)의 시아(侍兒)가 남자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왕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자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쳤다. 엄호수(淹淲水) -원주(原注)에, “지금 고구려 안에 개사수(蓋斯水)가 있는바, 이 강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하였다.- 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떼 지어 물 위로 떠올랐으므로 동명이 이를 타고 건너갔다. 이어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엄시수는 개원현의 북쪽에 있어야 한다. 동사(東史)에서 지금의 대정강(大定江)을 그에 해당시키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개사수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가 없다.
○ 홀한해(忽汗海)
《신당서》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왕성(王城)은 홀한해에 임해 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호이합하(虎爾哈河)는, 영고탑의 동남쪽이 모두 이 물가이다. 그 근원은 길림(吉林) 오라(烏喇)의 경계에서 나와 옛 회령성(會寧城)의 북쪽을 지난 다음 다시 90여 리를 흘러 영고탑성의 남쪽을 감돈 다음 다시 꺾어져서 북쪽으로 700여 리를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간다. 당나라 때에는 홀한하(忽汗河)라고 하였고, 발해 대씨(大氏) 때에는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였는데, 이 물로써 주 이름을 삼은 것이다.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발해의 왕성은 홀한해에 임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을 말한 것이다. 금나라 때에는 또 금수(金水)라고 이름하였는데, 세속에서 금(金)을 안출호(按出虎)라고 하는바, 안출호수(按出虎水)가 이곳에서 근원하므로 금원(金源)이라고 이르며, 건국하고는 이를 인하여 국호를 금(金)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때에는 또 홀아해하(忽兒海河)라고 하였다.
○ 오루하(奧婁河)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에 걸걸중상(乞乞仲象)이란 자가 있었는데, 동쪽으로 달아나 태백산(太白山)의 동북쪽을 차지하고는 오루하(奧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굳게 지켰다. 걸걸중상이 이미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나라를 세우고는 발해라고 하였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오루하는 승덕현(承德縣)에 있는데, 오루(奧婁)는 바로 읍루(挹婁)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오루하는 태백산의 동북쪽, 홀한하와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한다. 《성경통지》에서 승덕현에 있다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미타호(湄沱湖)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에서는 세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이 미타호의 붕어[鯽]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미타호는 지금의 흥개호(興凱湖)인 듯하다.
○ 속말수(粟末水)
《후위서》 물길열전(勿吉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 숙신국(肅愼國)이다.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이 3리 남짓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速末水)라고 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의 속주(涑州)는 속말강(涑沫江)과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대개 속말강은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혼동강은 길림 오라성의 동남쪽에 있으며, 지금의 이름은 송화강(松花江)이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諾尼江), 흑룡강(黑龍江) 등과 만나서 바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옛 속말수(粟末水)이다. 《위서(魏書)》를 보면, “물길국에는 큰 강이 있어 폭이 3리 남짓 되는데, 이름을 속말수라고 한다.” 하였고, 《당서》를 보면, “속말말갈(粟末靺鞨)은 속말수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의 근원은 태백산에서 나와 북쪽에 이르러 타루하(它漏河)로 들어간다.” 하였고, 《요사》를 보면, “성종(聖宗) 태평(太平) 4년(1024)에 조서를 내려 압자하(鴨子河)를 혼동강(混同江)으로 고치게 하였다.” 하였으며, 《금사》 지리지를 보면, “상경로(上京路)에 혼동강(混同江), 송와강(宋瓦江), 압자하(鴨子河)가 있다.” 하였다. 《성경통지》를 보면, “혼동강은 바로 송아리강(松阿里江)이다. 일명 압자하라고도 하며, 일명 속말강이라고도 하고, 일명 송와강이라고도 하고, 일명 송화강이라고도 한다. 《대명일통지》에는 이르기를, ‘혼동강은 개원성(開元城)에서 북쪽으로 15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온다. 옛 이름은 속말하(粟末河)이며, 세속에서는 송와강이라고 부른다. 북쪽으로 흘러 금나라의 옛 회령부(會寧府) 아래를 지나 오국성(五國城)에 도달해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송화강은 개원에서 동북쪽으로 10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장백산에서 나와 북쪽으로 흘러 금나라의 옛 남경성(南京城)을 지난 다음 회배강(灰扒江), 혼동강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바, 이는 송화강과 혼동강을 두 강으로 여긴 것이다. 이제 살펴보건대, 요나라 때 압자하를 혼동강으로 고쳤는바, 혼동강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오며,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송아리강(松阿里江)이라고 부른다. 《금사》 지리지에는 송와강(松瓦江)이 있는데, 이는 송아리강의 음이 와전된 것이다. 《대명일통지》에 나오는 송화강은 바로 송와강의 글자가 변한 것이다. 《금사》 제기(帝紀)를 보면, ‘혼동강은 일명 흑룡강(黑龍江)이라고 한다.’는 글이 있는데, 이는 그 하류의 두 강이 서로 만나는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혹자는 이 강을 송화강이라고 하는데, 이는 살합련강(薩哈連江)을 혼동강으로 여긴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살펴보건대, 금나라 세종(世宗)이 강신(江神)을 책봉(冊封)한 글에 이르기를, ‘강의 근원이 장백산에서 나왔다.’ 하였는바, 이 강이 혼동강을 지칭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송와강이니 송화강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음을 따라서 글자를 취한 것으로, 이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강은 동쪽과 서쪽 두 개의 근원이 있다. 동쪽 근원은 장백산 산꼭대기의 연못에서 나와 여울이 되어 빠르게 흐르다가 천 길이나 되는 폭포를 이루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토랍고(土拉庫)라고 한다. 여기에서 두 개의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대토랍고(大土拉庫), 서쪽에 있는 것을 소토랍고(小土拉庫)라고 부르며, 여기에서 수십 리를 가서 다시 합류해 흐른다. 그 동쪽에 또 낭목낭고하(娘木娘庫河)와 합극통길하(合克通吉河)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장백산의 동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들어온다. 서쪽 근원의 물 역시 두 개의 물줄기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액흑눌음하(額黑訥音河)라 하고, 서쪽에 있는 것을 새음눌음하(賽音訥音河)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장백산의 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동쪽 근원의 물 및 여러 샘에서 나온 물과 합해져 한 물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북쪽으로 흐르면서 여러 하천에서 흘러오는 물을 모은 다음 주성(州城)의 동남쪽을 돌아 북쪽으로 흘러 변경으로 나간다. 여기에서 꺾어져서 서북쪽으로 흘러 백도눌성(白都訥城)의 서쪽을 돈 다음 다시 북쪽으로 흘러 낙니강(諾尼江)의 물과 합류하고, 다시 동북쪽으로 돌아 흐르면서 남쪽에서 흘러오는 호이합하(虎爾哈河)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600여 리를 흐르는데, 이곳에서 흑룡강이 서북쪽에서 흘러와 합류한다. 여기에서 다시 200여 리를 흐르다가 남쪽에서 흘러오는 오소리강(烏蘇哩江)과 합류하고, 다시 조금 꺾어져서 북쪽으로 흘러 걸륵아흑(乞勒兒黑)과 진비아합(眞飛牙哈) 등 여러 부(部)의 지역을 돌아 동해로 들어간다. 이 강은 발원지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곳까지 총 3500여 리를 흐른다.
○ 흑수(黑水)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남쪽으로 신라와 서로 접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른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흑룡강(黑龍江)은 흑룡강성(黑龍江城)의 동쪽에 있으며, 옛 이름은 흑수(黑水)이고, 완수(完水)라고도 한다. 또 실건하(室建河)라고도 하고, 알난하(斡難河)라고도 한다. 그 근원은 객이객(喀爾喀) 북쪽 경계의 긍특산(肯特山)에서 나오는데, 그 지방 토착인들은 오란하(敖嬾河)라고 한다. 여러 개의 작은 물을 모아서 동북쪽으로 흘러 이포초성(泥布楚城)의 남쪽을 지나 내지(內地)로 들어와 흘러 아극살성(雅克薩城)의 남쪽을 지난 다음, 꺾어져서 동남쪽으로 흘러 흑룡강성을 감돈다.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과 합류한다. 《북사(北史)》 오락후국열전(烏洛侯國列傳)을 보면, “오락후국의 서북쪽에 완수가 있는데, 동북쪽으로 흘러 난수(難水)와 합류한다.” 하였고, 《구당서》 실위열전(室韋列傳)을 보면, “대산(大山)의 북쪽에 대실위부락(大室韋部落)이 있으며, 그 부락의 곁에는 실건하가 있다. 이 물의 근원은 돌궐(突厥)의 동북쪽 경계인 구륜박(俱倫泊)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나하(那河), 홀한하(忽汗河)와 합류하고, 여기에서 다시 동쪽으로 흘러 남흑수말갈(南黑水靺鞨)의 북쪽과 북흑수말갈(北黑水靺鞨)의 남쪽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금사》 지리지를 보면, “조주(肇州) 시흥현(始興縣)에 흑룡강이 있다.” 하였고, 《원사》 태조기(太祖紀)를 보면, “1년에 황제가 알난하의 근원지에서 황제위에 올랐다.” 하였고, 《대명일통지》를 보면, “흑룡강은 개원성(開原城)에서 북쪽으로 2500리 되는 곳에 있다. 그 근원은 북산(北山)에서 나오는데, 흑수말갈이 예전에 이곳에 거주하였다.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흑수라는 명칭은 남북조(南北朝) 시대 때 시작되었으며, 흑룡강이란 이름은 《금사》에서 나온다. 그 상원(上源)은 《북사》에 나오는 완수이며, 《구당서》에 나오는 실건하이다. 지금의 오란하가 정원(正源)인데, 오란하는 바로 《원사》에 나오는 알난하(斡難河)가 음이 변한 것이다.
○ 약수(弱水)
《진서(晉書)》 숙신씨열전(肅愼氏列傳)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씨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삼가 살펴보건대, 읍루는 바로 말갈인데, 말갈은 북쪽으로 흑수 지방까지 닿아 있다. 그런즉 약수는 흑수인 듯하다. 그리고 《후한서》에는 이르기를, “부여(夫餘)의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 하였는데, 역시 이 물을 가리킨다.

이상은 경계 바깥에 있는 수(水)이다.

[주D-001]이이모(伊夷模) : 고구려 산상왕(山上王)의 이름이다.
[주D-002]고궁(高宮) : 고궁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의 이름이다.
[주D-003]정현(赬峴) :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제5에는 “동천왕이 이때 남옥저(南沃沮)로 달아나 죽령(竹嶺)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죽령의 위치에 대해 이병도(李丙燾)는 함흥(咸興)의 황초령(黃草嶺)이라고 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5쪽 주》
[주D-004]갈석산(碣石山) : 갈석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낙랑군(樂浪郡) 수성(遂城)이라는 설, 난하(灤河) 하류의 노룡(盧龍)이라는 설, 상곡군(上谷郡) 역현(易縣) 방면의 수성(遂城)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주D-005]왕백후(王伯厚) : 백후는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의 자이다. 왕응린은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을 지었다
[주D-006]김길보(金吉甫) : 길보는 송나라 김이상(金履祥)의 자이다. 김이상은 《통감전편(通鑑前編)》을 지었다.
[주D-007]그 산꼭대기에 …… 주필하고서는 : 원문에는 ‘駐蹕其嶺數日’로 되어 있는데, 《요사》 권38에 의거하여 ‘駐蹕其巓數日’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8]백석산(白石山) : 어느 곳인지 자세하지 않다.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백석산이란 지명은 후세의 역사서나 지리서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금도서집성》 등을 보면 해성과 수암 사이에는 백산, 활석령, 백사산 등 백석산과 관련되는 산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백석산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산으로는 해성과 수암의 중간 지점에 있는 백사산이다.” 하였다.《조선전사 제3권, 248쪽》
[주D-009]동모산(東牟山) : 동모산의 위치에 대해서 예전에는 길림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오동성(敖東城)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였으나, 최근에는 길림성 돈화시의 성산자산성(城山子山城)을 동모산으로 보려는 견해가 우세하여 굳어지고 있다.《한규철, 발해의 대외 관계사, 신서원, 1994, 85쪽 주》
[주D-010]천문령(天門嶺) : 천문령의 위치는 정겸(丁謙)의 장광재령설(張廣才嶺說),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의 승덕현(承德縣) 서쪽설, 송정등(松井等)의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의 분수령(分水嶺)인 장령자(長嶺子) 부근설 등이 있다.《발해의 대외 관계사 85쪽 주》 북한에서는 요령성 창무현 서쪽 산간 지대에 있는 고개라고 하였다.《조선전사 제5권, 21쪽》
[주D-011]백제(百濟) : 이곳에서의 백제에 대해 《동사강목》에서는 백제는 고구려의 오류인 듯하다고 하였고,《東史綱目 附錄 卷上 考異》 이병도 역시 “글자 그대로 보아서는 너무도 거리가 맞지 아니하므로 고구려의 오기(誤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21쪽》
[주D-012]보술수(普述水) : 《삼국사기》에는 ‘모둔곡(毛屯谷)’으로 되어 있다. 비류수(沸流水)와 같은 말이다. 동가강(佟佳江)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
[주D-013]큰 강 : 《양서(梁書)》에는 엄체수(淹滯水)로 되어 있는데, 엄체수는 소요수(小遼水)로, 오늘날의 혼하(渾河)로 비정(比定)된다.《삼국사기》에는 엄호수(淹淲水)로 되어 있으며, 그 아래의 소주(小註)에 “일명 개사수(蓋斯水)이니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주D-014]흘승골성(紇升骨城) : 주몽(朱蒙)의 고구려 건국 위치에 대하여 광개토왕릉비에는 홀본(忽本)으로,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환인현(桓仁縣)의 혼강(渾江) 일대로 비정되는 동일한 지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D-015]비류수(沸流水) : 지금의 동가강(佟佳江)이다. 《고려사》에서는 이를 평양의 동북쪽으로 추정하였고, 《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평안도 성천(成川)으로 비정하였으나, 이는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며, 동가강의 상류라는 것이 통설이다.《韓國學基礎資料選集 古代篇, 174쪽 주》
[주D-016]갈구(梁口) : 이병도는 갈구(梁口)를 동가강(佟佳江)과 그 지류인 부이강(富爾江)이 합류되는 곳인 지금의 부이강구(富爾江口)로 비정하였다.《국역삼국사기 263쪽 주》
[주D-017]염난수(鹽難水) : 지금의 파저강(婆豬江)이다.
[주D-018]구미(九獼) : 원미(元彌)의 잘못된 표기이다.
[주D-019]귀단수(貴端水) : 지금의 혼하(渾河)이다.
[주D-020]엄호수(淹淲水) : 엄니수(掩泥水), 엄시수(掩施水)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병도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기되나, 이는 엄니수(掩泥水)를 잘못 쓴 것으로,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나오는 엄리대수(奄利大水)가 틀림없다. 엄리는 큰 물이라는 뜻인 ‘엄내’로서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이나 또는 송화강 상류의 휘발하(輝發河)를 지칭한 것이다.”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21]색리국왕(索離國王) : 이병도는 색리(索離)는 고려(高麗), 혹은 구려(句麗)를 달리 표기한 것이라고 하였다.《韓國古代史硏究 217쪽》
[주D-022]오루하(奧婁河) : 송화강(松花江)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이다. 읍루하(挹婁河), 홀한하(忽汗河)라고도 한다.
[주D-023]속말수(粟末水) : 길림성(吉林省)의 송화강(松花江)을 가리킨다.
[주D-024]약수(弱水) :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약수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오며, 후대의 사서(史書)에는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이 동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이병도는, 약수는 송화강(松花江)을 지칭하는 듯하다고 하였고, 북한에서는 흑룡강(黑龍江)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