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 금석문 등/최보순묘지명(崔甫淳墓誌銘)

전주최공 휘 보순 관련자료

아베베1 2012. 12. 27. 12:24

 
 

 
최수상(崔首相) 묘지

▨▨의 물은 하늘가에 닿아 있어 그 샘이 먼 곳으로부터 나오고, 숭악(崇岳)의 봉우리는 땅바닥에 기둥을 대고 있어 그 뿌리가 깊숙하게 박혀 있다. 대개 영(靈)들이 이 곳에 모이는데, 성씨를 가지게 되고 이름이 지어진 것은 오직 우리 공뿐인가.
공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보순(甫淳)이며, 자는 청로(淸老)이며, 유화부(流化府) 사람이다. 아버지 균(鈞)은 벼슬하여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郞中)이 되었다. 대정(大定) 14년 갑오년(명종 4, 1174)에 동번(東蕃)의 20여 성이 제멋대로 날뛰자, 만사(萬死) 중에서도 생사를 돌보지 않고 왕명을 받들어 단기로 홀로 가서 화복(禍福)으로서 설득하여 각기 귀순하게 하였다.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적에게 살해당하였으니, 슬프다,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이로다. 우리 조정에서 공훈을 추록하여 ▨도(司徒)로 추봉하였다. 대개 임금을 섬기다 돌아가신 이는 그 후손이 반드시 창성하게 되니, 공은 그 분의 적자(嫡子)이다.
공은 성품과 생김새가 뛰어나게 훌륭하고 가슴에 품은 뜻이 넓고 컸다. 해박하고 통달한 지식으로 널리 화합하면서도 때를 만나면 반드시 행하였으며, 자유분방하며 얽매이지 않았으나 기회를 만나면 능히 결단하였다.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자애로와 종족들을 흡족하게 하니 집안에서의 행실이 뛰어났고, 나라에는 인의(仁義)와 예지(禮智)가 조정에 스며들게 하니 밖으로도 훌륭함이 뚜렷하였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처음 옷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하고 용맹하게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의 책을 마음에 새기고 반고(班固)와 양웅(楊雄)과 같은 문장가의 행적을 몸으로 본받으니, 문필의 바다에서 자라를 희롱하는 듯하고 문장의 경연장에서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듯하였다. 명종(明宗)이 재위하던 태정(泰定) 22년 임인년(명종 12, 1182 )에 을제(乙第)에 합격하게 되자, 이로 말미암아 천리마가 해를 좇는 발굽을 내닫고 붕(鵬)새가 하늘을 어루만지는 깃촉을 펴게 되었다.
정미년(명종 17, 1187)에 제안서기(齊安書記)에 임명되니, 절의를 지키는 것이 얼음보다 맑고 물보다 깨끗하였다. 농사를 장려하여 우거진 풀숲을 불사르고 메마른 땅에 물을 대게 하니 쓸모 없는 땅 천 리가 양전(良田)으로 바뀌었다. 첫 해 가을에 곡식이 크게 익어 만 호(戶)의 백성들이 모두 풍족하게 되었으므로, 당시의 출척사(黜陟使)가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청렴하고 공정한 수령이 백성을 편안하게 구휼하고, 이로운 것은 늘리고 해로운 것은 없앴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정에 알리자, 이 때문에 발탁되어 국학(國學)에 들어갔다. 차례대로 승진해 가니 6관(六管)의 여러 생도들이 듣고 즐거워하여, 말하는 것이 종과 북보다 심하였다. ▨▨ 우경승(于承慶)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었는데, 한 번 보고는 크게 놀라 “참으로 재상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바로 중서주의(中書注意)로 뛰어 올랐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니, 산과 같이 꼿꼿이 서서 중심에 자리 잡고, 서리같이 맑게 세상 밖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종(神宗)이 재위하던 승안(承安) 5년 경신년(신종 3, 1200)에 비로소 봉지(鳳池, 中書門下省)에 들어가 좌우(左右) 정언(正言)과 사간(司諫)을 두루 역임하고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낭랑하게 간(諫)하는 목소리는 임금의 허물을 바르게 다듬었고, 아름다운 꽃과 같은 글을 올려 임금의 은택을 크게 하니, 천자의 직책을 ▨ 도와주어 ▨▨ 윤이 나게 하였다.
태화(泰和) 2년 임술년(신종 5, 1202 ) 가을에 남쪽 지방에서 도둑 떼들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일어나자, 공을 중군병마판관(中軍兵馬判官)으로 기용하였다. 방패 머리에서 먹을 갈고 말을 탄 채 격문을 지으니 온갖 계책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는데), 3년에 적을 평정하였다.

대상왕(大上王, 熙宗)이 즉위한 
대화(大和) 4년 갑자년(1204)에 공훈으로 기거랑 직보문각(起居郞 直寶文閣)에 임명되고, 이전처럼 지제고(知制誥)와 태자문학사경(太子文學司經)을 겸하였다. 을축년(희종 1, 1205) 겨울에 거란(契丹)에 들어가는 사절의 우두머리가 되니, 추장들이 모여 바라보며 말하기를, “동국(東國)에 현인(賢人)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돌아와 예부낭중 기거주 전고(禮部郞中 起居注 典誥)가 되었다. 임금이 바야흐로 지방을 중시하여 칙령으로 낭관(郞官)들을 백 리(里)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였다. 공은 관례에 따라 안남대도호부사(安南大都護副使)가 되었는데, 뚝을 높게 쌓고 고랑을 터서 사람들의 수화(水禍)를 제거하니, 그 자애롭게 다스린 것이 제안(齊安)에 있을 때보다 만의 만 배나 더하였다. 반 년 만에 들어와 예빈소경(禮賓少卿)에 임명되고, 국자사업 겸 어사잡단(國子司業 兼 御史雜端)에 오르고, 또 소부감(少府監)으로 승진하였는데 모두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모두 두 번 염안사(廉按使)가 되었는데, 처음은 경상도(慶尙道)이고 나중은 전라도(全羅道)였다. 나라를 걱정하기를 집안처럼 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처럼 하니, 모두 현인[德星]이 남방(南方)에 나왔다고 ▨ 하였다. 찰방(察訪)이 절의를 지키며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백성들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포상하기를 아뢰었다.
강종(康宗)이 즉위한 대안(大安) 3년 신미년(1211)에 이부시랑 우간의대부(吏部侍郞 右諫議大夫)로 승진하여 임명되고, 이듬해 임신년(강종 1, 1212)에 상서좌승(尙書左丞)에 올랐는데, 이전처럼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이 해 봄에 감시(監試)의 좌주(座主)가 되어 꼼꼼하고 분명하게 살펴서 무소의 뿔이나 코끼리의 어금니와 같이 귀하고 훌륭한 이들을 뽑으니, 당시 방(榜)이 거꾸로 걸렸다는 비방이 없었다.

숭경(崇慶)
 2년 계유년(고종 즉위, 1213)에 태복경(太僕卿)에 임명되고, 이어 간의 제고 한림시강학사(諫議 制誥 翰林侍講學士)를 겸하였다. 을해년(고종 2, 1215) 봄에 동계도통(東界都統)이 되어 나가자 곤궁한 백성들을 돌보는 것을 작은 물고기를 굽듯이 하고, 간악한 적을 제어하기를 포악한 호랑이를 잡듯이 하니, 이에 온 고을이 모두 편안하게 베개를 베게 되었다. 정축년(고종 4, 1217) 봄에 판비서성(判秘書省)이 되고, 이전과 같이 제고(制誥)를 겸하였다.
지금의 임금<高宗>이 다스리는 정우(貞祐) 6년 무인년(고종 5, 1218)에 조서를 내려 추밀원우승선 한림학사(樞密院右承宣 翰林學士)가 되고, 또 좌산기상시 충사관수찬관 지병부사(左散騎常侍 充史館修撰官 知兵部事)를 겸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청탁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여 문을 닫아걸고 깊숙하게 들어앉아 손님을 만나지 않았으나, 공은 홀로 그 문을 활짝 열고 백관이 올리는 글을 받아들이면서 흐르는 물과 같이 판결하니, 임금의 은택이 위에서 막히지 않고 백성들이 마음이 아래에서 막히지 않게 되었다. 거의 3년이 되자 은청광록대부 상서우복야(銀靑光錄大夫 尙書右僕射)가 되었는데, 앉은 자리가 채 더워지기도 전인 정우(貞祐) 8년 경진년(고종 7, 1220)에 갑자기 중서(中書)에 들어가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대학사 동수국사 판예부사(金紫光錄大夫 叅知政事 集賢殿大學士 同修國史 判禮部事)에 임명되었다.

그동안 
과거[春場]를 네 차례 맡았다. 한 번은 동제거(同提擧)가 되고 세 번은 상제거(上提擧)가 되었는데, 방(牓)에 붙은 자들이 모두 뛰어나서 수후(隋侯)의 구럭에 물고기 눈알이 없고, 변화(卞和)의 바구니에 쥐고기 포가 없듯이 쓸모 없는 이가 없었다. 
임오년(고종 9, 1222) 겨울에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수문전대학사(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 修文殿大學士)에 임명되자, 덕을 여유롭게 베풀면서 너그러움으로 사나움을 다스리고, 넓고 후덕한 마음으로 임시로 합당하게 다스렸다. 갑신년(고종 11, 1224) 겨울에 수대위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守大尉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가 수대부 감수국사 주국(守大傅 監修國史 柱國)을 더하였다.
일찍이 한인(閑人)의 선발을 담당하였는데, 세 번 빠진 자가 있으면 관사(官司)에서 마땅히 전정(田丁)을 거두었다. ▨(공은?)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딱하게 여겨 한 번 더 시험을 치르게 하니, 이에 ▨우(于)▨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 감복하였다. ▨▨ 과부와 고아 등이 억울한 일을 호소하고자 하면 이졸(吏卒)들이 막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으나, 공은 불러서 당하(堂下)로 오게 하고 ▨▨▨ 끝까지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하면서 마치 귀신 같이 판결하니, 듣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와 같은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무자년(고종 15, 1228) 겨울에 삼한벽상(三韓壁上) 정(正)▨▨▨▨▨▨▨이부사(吏部事)가 되고, ▨ 나머지는 이전과 같았다. 이 해 4월[夏初]에 밤에 중서성(中書省)에 숙직하다가 갑자기 병이 들었다. 임금이 놀라 상방의(上方醫, 御醫)에게 명하여 만금(萬金)의 양약(良藥)으로 치료하게 하니, 잠시 뒤에 바로 나았다. 그러나 때때로 다시 발병하니, 곧 글[表]을 갖추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대신이 자리를 비우면 정사를 함께 돌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신을 보내어 간곡하게 타이르며 떠나지 말도록 만류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나와서 업무를 보았으나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12월[冬末]에 정사당(政事堂)에 들어가 관리의 인사에 관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물러나 쉬다가, 이듬해 기축년(고종 16, 1229) 정월 초2일 새벽에 시각을 묻고는 벽을 향해 누웠는데 잠을 자듯이 돌아가시니, 향년 68세이다.
공은 모두 다섯 임금을 섬기면서 두 차례 헌대(憲臺)에 들어가고, 네 번 간액(諫掖)에 올랐으며, 한 번 납언(納言)이 되었다. ▨▨ 복야(僕射)[文昌]가 되어 상(相)으로 재임한 것이 10년이고, 2재(二宰)로 있던 것은 6년이며, 총재(冢宰)가 된 것은 2년 동안이었다. 이 때 달단(達旦) 우가(于加)가 서북에, 만노(萬奴)가 동쪽에, 일본(日本)이 남쪽에 있으면서 호랑이가 침을 흘리듯이 우리 나라를 엿보았으나, 끝내 삼키지 못한 것은 우리 공이 조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즉 음공(陰功)과 은덕(隱德)으로 삼한(三韓)을 안정시킨 것이 이와 같았다.
공의 부인은 용구현부인 진씨(龍駒縣夫人 秦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중기(仲基)의 딸이다. 아들은 두 명인데, 장남은 내시 합문지후(內侍 閤門祗候)이고, 막내는 국자박사 겸 직한림원(國子博士 兼 直翰林院)이다. 딸은 세 명인데, 장녀는 예부원외랑 최씨(禮部員外郞 崔氏)에게 시집갔고, 두 명 역시 관인(官人)의 아내가 되었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매우 슬퍼하고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도구를 갖추게 하고 부의를 더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책명(冊命)하고 시호를 문정공(文定公)이라 하였다.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여 이 해 2월 초7일에 백구산(白駒山)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아, 공명과 부귀와 장수와 영화를 갖추어 인신(人臣)의 도리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도다. 문생(門生) 이부원외랑 전고(吏部員外郞 典誥) 성산 수지(星山 綏之)가 외람되게도 가장 두텁게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덕망과 작위와 연치(年齒)의 만 분의 일을 겨우 거두어 굳은 돌에 새긴다.
명(銘)하여 이른다.
하늘에서 정령이 내려와 공이 태어나고
북두(北斗)의 정기가 쌓여서 공이 출세하였으니,
공의 용모는 오악(五嶽)과 같이 빼어나고
공의 마음은 사해[四溟]와 같이 깊도다.
학식이 풍부한 것은 갈비뼈가 아홉 개인 거북과 같고
문장이 뛰어난 것은 오색(五色)의 봉(鳳)새와 같아서,
처음에는 하루에 천 리를 가더니
대성하게 되자 백 일동안 지극히 먼 곳까지 이르도다.
서쪽 담장에서 천자가 내려주신 약(藥)을 마셨고
북쪽 문에서 풀을 보았으니, 
큰 손을 바쁘게 놀리자 훌륭한 글이 나오고
바른 의견을 베푸니 강직하고 굽히지 않는 말[言]이었도다.
두 번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남쪽 백성을 보살피고
잠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동번(東藩)을 진압하였으며,
▨▨가 한 번 열리니 ▨가 공평해지고
과거[春場]를 네 번 담당하니 거울(鏡)이 맑아지도다.
용후(龍喉)가 되어 귀한 곳을 날아다니고 
계설(鷄舌)을 머금어 일을 아뢰니,
유리 병에 이름을 남기고 
금 솥을 길들여 조화롭게 하도다.
세 번 과거를 여니 다섯 용이 하늘을 날고
한 번 큰 물결을 막으니 여섯 자라가 산을 이었으며[戴], 
아상(亞相)이 되니 조정이 세 발 달린 솥과 같이 무거워지고
총재(冢宰)가 되니 사직이 반석과 같이 편안하도다.
두루 다섯 임금을 섬기고
영원히 삼한(三韓)을 다스리니
훌륭한 장성(長城)이 만리(萬里)에 걸쳐 있고
큰 가마[大爐]에 불을 지펴서 수많은 사람이 다듬어지도다.
한(漢)의 안위(安危)가 양 손에 달려 있고
당(唐)의 경중(輕重)이 한 몸에 걸려 있는 듯하였네.
어찌하여 흰 닭은 꿈에 나타나고 
붉은 용을 부렸으나 돌아오지 않는가.
천자가 통곡하니 비오듯 눈물이 흐르고
나라 사람들이 울부짖으니 그 소리 우레가 치는 듯하도다.
아,
용이 큰 연못에서 죽으니 미꾸라지와 두렁허리[鰌鱓]가 춤을 추고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죽으니 여우와 너구리가 노래하는데,
나라에 사람이 없으니
끝내 어찌하겠는가.
백 사람의 몸으로도 그 공적을 잇기 어려운데
만 사람이 나와 전송하였으니,
오직 나머지 진한 향기는
길이 사서(史書)[竹素]에 남으리로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崔首相墓誌」
▨▨▨水接于天遙源長發祟岳之峰柱于地層構深盤盖鍾靈於此爲姓爲名者其惟我公乎公姓崔名甫淳字淸」
老流化府人也考均仕爲尙書禮部郞中當大定十四年甲午東蕃二十餘城跋扈飛揚於萬死中不顧死生奉承」
王命單騎獨往諭以禍福各令歸順定亂之後返於路次乃爲他賊所害惜乎爲國亡身者也 本朝錄功追封▨徒」
蓋死於王事者其後必昌公其嫡子也公資貌魁奇胷懷宏大弘和博達而遇節必立恢曠放㢮而應機能斷其居室」
也孝悌慈愛洽乎宗族而內行著焉其在國也仁義禮智浸于朝廷而外美彰焉此其大略也始自勝衣至于弱冠孜」
孜焉仡仡焉心周孔之書體班楊之作鼇弄筆海虎戄詞場及 明宗在位泰定二十二年壬寅登乙第由是驥伸逐」
日之蹄鵬展摩霄之翮在丁未年除齊安書記其守節也淸於氷潔於水其勸農也焚薈蔚漑鹵赤地千里化爲良」
田一秋大稔萬戶皆足時黜陟使褒美之曰淸白守公存恤百姓興利除害因奏之」
朝以此擢入國學循資轉秩六」
管諸生樂聞嘉言甚於鍾鼓▨▨▨承慶知人者也一見大驚曰眞宰相器也因此直登中書注意之捷梯俄受監察」
御史山立班心霜淸物表 神宗在位承安▨年庚申始入鳳池歷登左右正言司諫至居舍人皆兼三字琅琅諫」
舌直磨天缺艷艷詞花如帶春露▨縫袞職潤色▨▨泰和二年壬戌秋南方群盗如猥毛而公以中軍兵馬判官」
楯頭磨墨倚馬作檄萬擧萬全之計皆▨其手三年賊平 大上王卽位大和四年甲子以功拜居郞直寳文閣」
依前知制誥兼太子文學司經乙丑冬爲入丹大使酋長聚看曰東國有賢人矣還爲禮部郞中居注典誥上方重外」
勅令郞官出宰百里公例爲安南大都護副使峙堤坊決㙲澮除人水禍其慈化過於」
齊安萬萬矣半年入拜禮賓少」
卿遷國子司業兼御史雜端又遷少府監皆兼制誥凡兩爲按廉使前則慶尙後則全羅憂國如家愛民若子皆賀」
▨德之星出於南方矣察訪以守節奉公蘇復百姓褒奏之 康宗卽位大安三年辛未進拜吏部侍郞右諫議大夫」
翌年壬申遷尙書左丞依前制誥是年春爲監試座主考閱精强拔犀角擢象齒時無倒牓之誚崇慶二年癸酉拜太」
僕卿仍兼諫議制誥翰林侍講學士乙亥春出爲東界都統理疲民若烹小鮮禦黠虜如搏暴虎所以一方皆安枕矣」
丁丑春判秘書省依前制誥 今上在位貞祐六年戊寅詔爲樞密院右承宣翰林學士又兼左散騎常侍充史館修」
撰官知兵部事他皆厭聞請謁牢閉深坐不接賓客公獨大闢其戶容受百官章奏判决如流使君之澤無壅於上民」
之情無欝於下幾三載遷銀靑光祿大夫尙書右僕射席未暇暖於貞祐八年庚辰旋入中書拜金紫光祿大夫叅知」
政事集賢殿大學土同修國史判禮部事其間四掌春場一爲同提舉三爲上提擧所牓皆賢隋侯之櫝無魚目卞和之」
樻無鼠璞矣壬午冬拜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修文殿大學士示優游之德寛以濟猛推廣厚之心權以合經甲」
申冬爲守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加守大傅監修國史柱國甞掌閑人之選有三度闕者官司當收田丁」
▨憫其如此更加考試乃▨于▨無一闕焉人皆感▨▨▨寡婦孤兒欲訴寃結爲吏卒所禁未得至前公呼來堂下」
▨▨▨底明白是非决之如神聞之者無不隕涕如此者不可勝數戊子冬爲三韓壁上正▨▨▨▨▨▨▨吏部事」
▨並如故是年夏初夜直中書忽然感疾 上驚惶命上方醫將萬金良藥理之須臾卽愈然時時復作尋具表▨▨」
▨▨上恐大臣釋位無與共政遣使敦諭挽留不去公强視事非所好也及冬末入政事堂除吏旣畢退息私第翌」
年己丑正月初二日曉問其時刻面壁偃臥如睡而終享年六十有八公凡仕五朝兩入憲臺四登諫掖一爲納言▨」
▨文昌爲相十年爲二宰六年爲冡宰二年是時達旦于加在於西北萬奴在東曰本在南如虎垂涎窺覦我國終未」
呑噬者以我公在朝故爾然則陰功隱德鎭壓三韓者有如此也公之室龍駒縣夫人秦氏乃閤門祇候仲基之女也」
子二人長爲內侍閤門祇候季爲國子博士兼直翰林院女三人一適禮部員外郞崔氏二亦皆爲官人之婦」
上聞訃軫悼乃命有司庀葬具加賻禮冊命諡曰文定公仍令百官祖送以是年二月初七日葬于白駒山麓禮也噫」
功名富貴壽考哀榮人臣之道無一缺焉門生吏部員外典誥星山綏之辱知最厚聊拾德爵齒之萬一上于貞珉其銘曰」
(公之生兮天降靈 五嶽秀兮公之容 學識富兮龜九肋 始達兮一日千里 吟藥西垣」
公之出兮斗儲精 四溟深兮公之胷 文章麗兮鳳五色 大成兮十旬遠至 視草北門」
煩大手兮高文 再憑熊兮閔南民」
陳讜議兮鯁言 暫分虎兮鎭東藩」)
(▨▨一開兮▨之平 爲龍喉兮翔貴 瑠甁貯名 三取白日兮授五龍而飛天 爲亞相兮朝廷鼎重」
春場四闢兮鏡之淸 含鷄舌兮奏事 金鉉調羨 一遏洪濤兮使六鼇而戴山 爲冡宰兮社稷盤安」
歷仕五君 賢長城兮橫萬里」
永鎭三韓 啓大炉兮鑄億人」)
(漢之安危兮在於兩握 何白鷄兮入夢 天子慟兮淚如兩 噫 龍亡大澤兮鰌鱓舞 國無人兮」
唐之輕重兮繫于一身 馭赤虬兮不廻 國人哭兮聲如雷   虎逝深山兮狐狸歌 其終奈何」
百身難續 唯餘芳烈」
萬人出祖 長留竹索」)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下篇 (1984)]
 
 가정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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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춘헌기(春軒記)

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高麗史節要卷之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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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煕宗成孝大王
[己巳五年 宋 嘉定二年,金 東海侯大安元年,蒙古 太祖四年]

春正月,王,聞金主崩,遣奉慰使史洪紀,祭奠使李淳中,如金,淳中請祭器於金,有司不許,淳中曰,道途遼遠,聞訃最晩,騰裝速赴,未暇賫來,大國,何責人以細故,而吝惜此器耶,乃許之,及祭,奠具精腆,金人,嘉其至誠。○金遣孫居寬來,告喪。○三月,遣上將軍金元傑,禮部侍郞房應喬,如金,賀卽位,表曰,五馬渡江,表晉朝之開新主,六龍御極,符羲易之見大人,少府監崔甫淳辭也,金主,兄弟爭位,惡其觸實,中書省,詰云,我聖上龍飛,非若晉朝渡江之比,何用比語,甫淳坐免。○夏四月,崔忠獻,殺右僕射韓琦,將軍金南寶等九人,分配從者于遠島,初靑郊驛吏三人,謀殺忠獻父子,詐爲公牒,召募諸寺僧徒,牒至歸法寺,寺僧,執賫牒者,以告忠獻,忠獻,卽別立敎定別監于迎恩館,閉城門,大索其黨,靑郊人,因讒構琦,故幷三子被殺。○五月,平章事崔詵,卒,詵惟淸之子,以文學聞於世,恬淡寡言,不以門地自負,禮賢下士,王,以詵,年高有德,自參知政事,超拜冢宰,旣而,引年致政。○六月癸亥朔,日食。○平章事金鳳毛,卒,鳳毛,美風儀,且解胡漢語,每金使至,必令儐接。○秋九月,崔忠獻,會賓客,設重陽宴,使都房有力者手搏,勝者,卽授校尉隊正,以賞之。
史臣任翊曰,按國家頒政例,六月謂權務政,十二月謂大政,吏兵判事,與諸同寮,會坐于各部,功者陟之,罪者黜之,一陟一黜,皆承上命,過此時,雖有所缺,未嘗差授,況無功者乎,忠獻威傾一國,獨專政柄,若有所缺,則不顧官爵之爲公器,乃以眼前小戲,亂其邦憲,又因左右所托,或授東班權務之職,若納賂稱意者,卽許之,其頒政無常,專恣弄法,未有甚於此者矣。
平章事奇洪壽,卒,洪壽,自少善書工文,及壯,投筆從武班,積官至平章,嘗引年勇退,琴書自悞。○冬十一月,還御延慶宮,日將晡,乘輿未駕,左御史崔傅,右御史尹世儒,飢甚,入路傍家飮酒,不覺駕出,傅犯馳道,世儒泥醉,使人控馬,言語狂亂,憲府劾奏,左遷傅,安東都護府判官,世儒,梁州副使。○遣閣門通事舍人徐延,如金賀正。○金,遣戶部侍郞幹勤正來。○參知政事李椿老,卒,椿老,以淸謹稱。

高麗史節要 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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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安孝大王[二]
[壬午九年 宋 嘉定十五年,金 元光元年,蒙古 太祖十七年]

春正月,城宜州,和州,鐵關,凡四旬而畢。○三月,崔瑀,宴三品以上于其第,又宴四品官。○夏四月,左承宣崔宗峻,欲令其子,試於國子監,正錄,以非衙日固拒,宗峻,屬其姪壻崔瑀,請于正錄,不得已而試之,舊制,國子監,以四季月,六衙日,集衣冠處子,試論語孝經,取中者,報吏部,吏部更考世系,始授初職,宗峻,附勢紊法,如此。○賜梁等,三十一人,及第。○秋七月,東眞兵,萬餘,入靜州,初,韓恂多智之黨,分配海島,後皆遇赦,還鄕,至是,復引東眞兵,入靜州,遂侵義州,防守將軍守延,與戰敗績,麟州人,謀與敵通爲內應,防守將軍,知之,出屯城外,以解其謀,勒兵掩襲東眞兵,斬首二百餘級,遣中軍兵馬使李迪儒,右軍兵馬使趙廉卿,後軍兵馬使金叔龍,發西京兵,追捕之。○壬申,彗見,八月,戊寅,彗又晝見,太白晝見經天。○王太后,王氏薨,后神宗之妃,煕宗,尊爲王太后,后自幼,勤女功,當忠獻,廢立之際,備嘗艱難,謹愼自守,謚宣靖,蒙古使三十一人,來。○冬十二月,以崔甫淳,爲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史,洪紀,金就礪,參知政事,文惟弼,知門下省事,鄭通輔,韓光衍,竝爲樞密院使,宋臣卿,知樞密院事,李勣,同知樞密院事,貢天源,吳壽祺,爲樞密院副使,柳澤,爲尙書,右僕射。


高麗史節要 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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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安孝大王[二]
[戊子十五年 宋 紹定元年,金 正大五年]

春正月,丙子朔,地震。○貶金良鏡,爲尙州牧使,良鏡,雖書生,素習兵法,從軍累有功,今被譖而出,故舊無一人相送者。○三月,懷音鎭別將,告西都有謀叛者,兵馬使,移牒西都,索之不得,押送告者于京,崔瑀,欲因此,收北人之心,以錦衣,金帶,細馬,綾羅,絹五十匹,紬苧各十匹,米三十碩,賞告者,令驛輸其家,又奏請褒異,王,亦賜廏馬一匹,綾羅絹四十匹,紬百匹,布二百匹,懷音鎭都領希幹,捕謀叛者來告,賜綵帛四十匹,廏馬一匹。○賜李敦等,三十一人,及第。○夏五月,北界有賊變,又蝗害稼,王,分遣內侍,禱于中外神祠,又設般若道場于宣慶殿,二七日。○六月東眞,矛克王奴,卑司曆,高隣,幹闌哥,來投。○掌牲署,囚徒中,有一女,美恣色,署吏當直夕,欲奸之,其女,固拒曰,我亦隊正妻也,肯從他乎,吏劫之,囚於猪廏,衆猪爭囓,其女叫呼甚急,吏以爲詐,置而不救,比明,視之,唯骨在焉。○秋七月,東眞兵千餘人,來屯長平鎭,議遣三軍以禦之,尋聞賊退,竟不行。○八月,崔瑀,以私田,七百餘結,屬諸衛散員,及校尉房,以收人心。○詔曰,東眞,潛據近地,數寇邊鄙,出軍追討,卽輒遁去,迨軍之還,復入窺窬,制馭之術,安在,書曰,謀及卿士,宜爾文武四品,臺省六品以上,各以長策,條上。○有僧,將營慈惠院,伐材于江陰縣,監務朴奉時,禁之,官納其材,其僧,托大將軍大集成,貽書以請,奉時不從,集成請崔瑀,送敎定所牒,又不從,集成,慚恚,復訴於瑀,流奉時于遠地,時人,莫不憤嘆。○九月,淸塞鎭,戶長,妄作童謠,欲與龍州謀叛,兵馬使蔡松年,按誅之。○冬十月,和州城廡,三百餘閒,火。○飯僧三萬。○己巳,太白,晝見經天。○十一月,辛未朔,地震。○朴寅,還自日本,寅到大宰府,經一年賫和親牒,以來,崔瑀給銀甁五,段子六十匹,布五百匹,米豆五十碩,鞍馬以賞之。○知門下省事文惟弼,卒。○十二月,庚子朔,日食。○平章事王珪,卒,珪,性溫雅,美容儀,年七歲,爲東宮學友,敏厚有器局,初授軍器注簿同正,門下省,以幼駁之,毅宗曰,其父,有佐命之功,豈拘常例耶,嘗留守南京,有惠政,年未七十,上章乞退,杜門縣車,優游自適,世論,年高德邵,以珪爲稱首。○奉御衣帶,移安于白岳假闕。○崔甫淳,判吏部事,金就礪,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崔瑀,加鼇戴鎭國功臣,貢天源,崔正份,竝參知政事,崔宗峻,知門下省事吏部尙書,金仲龜,知樞密院事,奇泞,同知樞密院事,陳湜,爲樞密院副使御史大夫,史光補,兪升旦,竝爲樞密院副使。


高麗史節要 卷之十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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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宗安孝大王[二]
[己丑十六年 宋 紹定二年,金 正大六年,蒙古 太宗元年]

春正月,平章事,崔甫淳卒。○有鄭相者,通輔之子,金希磾之壻也,嘗夜至壽德宮里,里門閉,相,怒管鑰者遲來,從門隙,射殺之,法官,大集成,金得循,崔宗藩,洪斯胤等,以通輔希磾四託,不問,惟郞中李廷翮,固執不得,遂以輕罪,論免,時廷翮,爲晉陽副使,瑀嘉其守法,拜紫門指諭,以褒之。○二月,東眞人,到咸州請和,親遣式目錄事盧演,往聽約束。○夏四月,崔瑀,占奪隣舍,百餘區,築毬場,東西相望,數百步,平坦如碁局,每擊毬,塵起,必使里人,汲水灌之。○五月,盧演,還自東北面,時東界,赴防將軍金仲溫,訴演怯懦,不與東眞約束,崔瑀怒,囚演于街衢所,以前巨濟縣令陳龍甲,爲長平鎭將,約束東眞。○以旱,宥二罪以下。○東眞,寇和州,掠牛馬人口,陳龍甲,遣人諭之,皆棄去。○六月,北邊人,前別將銳爵,反覆多詐,犯罪,曾配和州,自言,知東眞道路,夷險遠近,東北面兵馬使崔宗梓,信之,遣爵等,三人,入東眞國,聽探消息,爵,與東眞言,我國,欲與和好東眞,亦信其言,遣還爵一行人待報,國家,猶豫不報,東眞,以爵行詐,斬之。○秋七月,兩府,會崔瑀家,議備禦東眞之策。○八月,尙書左僕射致仕庾資諒,卒,資諒,莊重寡言,毅宗朝,文臣大盛,資諒,時年十六,與儒家子弟,結契,欲引武人吳光陟,文章弼,爲契,契中皆不肯,資諒曰,交游之中,文武備具可矣,未幾庚寅之變,同契,皆賴光陟章弼營救,獲免,嘗引年乞退,爲耆老會,事佛甚篤。○有司,劾崔宗梓,擅遣銳爵于東眞,以生邊釁,左遷梁州副使。○東眞,寇和州。○九月,平章事致仕崔洪胤,卒。○崔瑀,又奪人家,以廣毬場,日使擊毬習射,觀之,前後占奪,無慮數百戶。○冬十月,崔瑀,宴宰樞於其第,臨毬庭,觀都房,馬別抄擊毬,弄槍騎射,鞍馬衣服,弓矢,務相誇耀,爭效韃靼風俗,毬場舊有樓三間,至是,瑀命就增三間,是日晩起役,詰旦告畢,瑀又邀宴耆老宰樞觀擊毬,弄槍騎射,能者立加爵賞,都下子弟,爭事鞍馬衣服,妻家多以貧乏見棄。○臨陂縣令田承雨,嫉上將軍金鉉甫,廣植田園,盡收田租,入官,又以其田與民,鉉甫,托按察使崔宗裕,還徵其租,承雨,憤恚償以官司銀器,報于法司,法司,劾鉉甫及宗裕,崔瑀,要奪其狀,止之。○十一月,崔瑀,閱家兵,都房馬別抄,鞍馬衣服,弓劍兵甲,甚侈美,分五軍,習戰,人馬多有顚死傷者,及其終,習田獵之法,籠山絡野,循環無端,瑀悅之犒以酒食。○十二月,崔瑀,奏今年大旱,禾穀不實,請遣使五道,審檢損實從之。

 東文選卷之三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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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批答
崔甫淳讓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集賢殿大學士同修國史判禮部事。不允敎書。[李奎報]

云云。夫代天理物。貳王行政者。宰相之任也。國以之重輕。民由之肥瘠。以人爲鑒。唐宗保魏徵之明。用汝作舟。商后倚傅說之濟。如非遠量。曷副輿情。卿該通天人。諳練典故。業文而資之武。體柔而濟以剛。精神折衝。弄敵人於掌上。論議有據。藏國子於胸中。貞松不爲寒暑變其容。良玉不因燥濕渝其性。擧國安危而是託。非卿德望而孰當。是用直越鴻樞。擢登鳳閣。申峻史臣之職。兼崇書殿之資。用玆西省之新榮。雪爾南曹之舊屈。大抵王者之用人也。雖未嘗究閱其爲人。苟僉言之皆允。猶柄用而不疑。况如卿者。在昔納言密邇之時。朕已親試。置斯當軸論思之地。誰復異詞。毋執小謙。更陳牢讓。所請宜不允云云

筆苑雜記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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筆苑雜記卷之一 徐居正撰

嘗考。自唐堯元年甲辰。至洪武元年戊申。摠三千七百八十五年。自檀君元年戊辰。至我太祖元年壬申。亦三千七百八十五年。吾東方歷年之數。大槩與中國相同。帝堯作而檀君興。周武立而箕子封。漢定天下而衛滿來平壤。宋太祖將興而高麗太祖已起。我太祖開國亦與太祖高皇帝同時。
古記云。檀君與堯同日而立。歷虞夏至商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山爲神。享年一千四十有八。當時文籍不傳。其眞僞不得而考。至今傳襲。以古記爲說。居正以爲當堯之時。人文昭宣。至于夏商。世漸澆薄。人君享國久長者不過四五十年。人壽。上壽白年。中壽六七十年。下壽四五十年。安有檀君獨壽千百年以享一國乎。知其說之誣也。又云。檀君生子扶婁。是爲東扶餘王。至禹會諸侯於塗山。檀君遣扶婁朝焉。其說無據。若檀君享國久長。扶婁往會塗山。則雖我國文籍不備。中國之書豈無一語及之乎。檀氏相傳享國之數。千四十八年者。無疑矣。權文忠公近詩曰。聞說鴻荒日。檀君降樹邊。世傳不知幾。歷年曾過千。蓋言其傳世歷年之久也。
箕子封朝鮮。在周武己卯。至後王準。漢高祖丙午。衛滿侵之。浮海而南。其都平壤者八百七十八年也。準移都金馬郡。是謂馬韓。歷四郡二府之時。至百濟溫祚王二十六年戊辰而亡。亦百四十餘年矣。金富軾三國史。但書百濟王襲馬韓取之。不明言箕氏世係。當時亦必無可考者矣。
按天運紹統。涵虛子曰。朝鮮在安東國之東。古肅愼氏之地。武王封箕子爲諸侯。以奉殷祀。爲中國藩邦。自周亡至後漢千餘年。爲公孫康所簒。箕子之統緖失傳焉。又云。箕子率中國五千人入朝鮮。其詩書禮樂醫巫陰陽卜筮之流。百工技藝。皆從而往焉。故曰半萬殷人渡遼水者是也。今考公孫康所簒者無據。其曰半萬殷人渡遼水者。又不知出於何書也。
涵虛子又曰。箕子至朝鮮。言語不能通。譯而亦知之。敎以詩書。使知中國禮樂之制。父子君臣之道始行。五常之禮始備。敎以百工技藝。醫巫陰陽卜筮之術始有焉。以禮義田蠶。制八條之敎而化之。逾年而民自化。相殺者以財償。相傷者以穀償。盜者男沒爲奴。女子爲婢。不三年人皆向化。崇尙信義而篤儒術。釀成中國之風。可謂聖化。敎以勿尙兵鬪。謂一日之亂。十年不定生民塗炭。不能安其業。故以德服强暴。隣國皆慕其義而相親之。爲中國之蕃邦。故歷代親信於中國。受封爵。朝貢不絶。禮義之道不缺。衣冠制度。悉同乎中國各代之制。故曰。詩書禮樂之邦仁義之國也。而箕子始之也。居正以爲。涵虛子論與漢書畧同。深悉我東國風俗。歷代諸史及國朝渾一誌所論。紕繆無據。皆出於所聞之誤耳。
我國分野。古人擬以燕都。己巳年間。彗星出燕分。日官奏云。於本國不干。世宗深以爲憂曰。我國同燕之分。安得爲不干乎。己巳秋正統皇帝陷北庭我世宗上賓。與燕同分之說。庶幾近之。
沸流溫祚登負兒岳。相可居之地。沸流都彌鄒忽。溫祚都慰禮城。後溫祚移都南漢山城。卽今廣州。又移都北漢山城。卽今漢陽。其所卜明堂。未知何地也。以漢陽爲李氏都者。見於道詵圖讖。是以高麗建南京于漢陽。種李樹擇李姓以尹。王亦歲一巡幸。埋龍鳳帳壓之。居正嘗考高麗史。漢陽明堂。但書曰壬坐丙向之原。不明言其地。今考景福昌德兩宮正殿。皆壬坐丙向。臆意高麗所卜。要不外此兩宮之基耳。近有術士崔揚善。以承文院古基爲正明堂。或者又以宗廟樂天亭爲大地者。皆淺見無稽之說也。
道詵百濟人。初詵母爲處子。出遊川澤上。得一美大瓜啖之。忽覺有娠。及生兒。父母以爲不祥。而棄之川上。時方冱寒。羣鷗數千來集。上下承覆之。不死十數日。父母異以收養之。及長出家。入山修鍊。有天仙下降。授天文地理陰陽之祕。又入唐。學一行法。世傳圖讖。皆詵所著也。近得唐本星曜一帙。有曰高麗國師賦。而議論精微。非詵不能爲也。然其所與議論者耶律楚財。時之相距甚遠。是可疑也。安知高麗國師者。密傳詵術。不傳於東方而傳於中國乎。今靈巖縣道岬寺。有詵碑。亦有鷗林。
我東國筆法。金生爲第一。姚學士克一僧坦然靈業亞之。皆法右軍。李奎報嘗評論。以崔忠獻爲神品第一。坦然爲第二。柳紳爲第三。阿附權貴非公論也。自元以來。學字者皆法趙孟頫焉。先生平生手跡。遍滿四海。其流傳東國我所得見者。不下數百本。墨跡如新。所不得閱者不知其幾。散在天下者又不知其幾。自趙距今尙遠。吾東方在一偏隅。得見趙跡猶多。自唐距晉亦不遠。文皇以天下之大。求右軍眞跡。遣蕭異。間關崎區。勞然後得何耶。己巳年間倪學士謙。奉使來曰。趙公筆法。中國罕見。蓋嘆我國之多有也。竊謂。高麗忠宣王入元朝。構萬卷堂。日與當世名儒六七人。從容談論。趙公其一也。我國文儒如李先生齊賢。侍從亦多。王之東還。文籍書畫。馱載萬籤。趙之手跡滿於東方。蓋由是也。吾東方人得趙公筆法精神者。杏村李嵒一人而已。
金生新羅元聖王時人。以能書聞。宋崇寧中。高麗學士洪瓘入宋。翰林待詔楊球李革奉帝勅書圖簇。瓘以金生行草一卷示之。二人大駭曰。不圖今日得見右軍眞跡。瓘曰。此乃新羅人金生書也。二人笑曰。天下除右軍。焉有妙筆如此哉。瓘卞之終不信。近見趙學士子昂昌林寺碑跋尾曰。右唐新羅僧金生所書其國昌林寺碑。字畫深有典刑。雖唐人名刻。未能遠過之也。古語云。何地不生木。信然。觀趙學士此跋。金生筆法之冠絶古今知也。
崔文昌侯致遠入唐登第。從高騈伐黃巢。其檄巢曰。非特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巢讀至於此。不覺下牀。因此名聞天下。今桂苑筆耕多有不解處。恐當時氣習如此。或東方文體未能如古也。新羅之文。傳於今者絶無。只有元曉薛聰所著一二篇而已。予嘗見新羅獻唐織錦五言古詩。高句麗乙支文德贈于仲文五言四句。皆精到。當時能文之士。不爲不多矣。而今無所傳於萬一惜哉。
唐學士顧雲送崔致遠還鄕詩。有十二乘舟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之語。又有贈言者曰。巫峽重峯之歲。絲入中華。銀河列宿之年。錦還東國。蓋十二而入唐。二十八而東還也。東還之後。其遭遇設施。未有所考。或云時適世亂。隱於伽倻山海印寺。與緇流遊燕。公所築瀛洲等三山。紅流洞鳳下石。書巖遺跡。至今宛然。不知所終。世稱仙去。按唐僖宗十二年乙巳。新羅憲康王十一年。致遠自唐捧帝詔還。越十年甲寅眞聖王八年。致遠進時務十餘條。王嘉納之。時後百濟甄萱。據完山叛。已三年矣。越二十五年戊寅高麗太祖王建立。越十年丁亥甄萱入新羅弑王。則致遠年方七十。不至衰耗。而其出處無所考。可疑也。
事大表牋。要須精切。高麗時。遼人欲過鴨綠江爲界。朴參政寅亮脩陳情表。立語用事。明白懇切。遼帝寢其議。我太祖高皇帝二十九年賀正。淸城君鄭擢撰表。光山君金若恒撰牋。西城君鄭摠吉昌君權近潤色之。帝怒表牋語涉戲侮。徵摠若恒近詰責。近蒙宥以還。摠等被留不還。高麗知製誥崔甫淳嘗撰賀金帝登極表云。五馬渡江。表晉帝之開新主。六龍馭極。符羲易之見大人。時金主兄弟爭國。惡其觸實。勅曰引用晉元事不當。崔由是得譴。崔之表辭。非不工也。而觸帝之怒。則由用事不切也。
世傳。金富軾妬才忌能。害鄭知常。今考麗史。知常墮妙淸術中。羽翼悉去而。自全實難。非富軾所得私貸。且本傳及諸書。無一語及枉害。而世之所傳如是何耶。近考金台鉉東國文鑑註曰。金鄭於文字間積不平。然則當時已有是言矣。
金富軾入宋。詣祐神館。見一堂設女仙像。館伴王黼曰。此貴國之神。公等知之乎。遂言曰。古有帝室之女。不夫而孕。爲人所疑。乃泛海。抵辰韓生子。爲海東始主。帝女爲地仙長在仙桃山。此其像也。今考之。新羅高句麗百濟之初。無此帝女事。但東明之出。有柳花事。恐中國誤認有此說也。
高麗季。人心皆歸我太祖。而牧隱李先生穡稍存形跡。然撰桓王碑在太祖潛邸之時。用周邦雖舊其命維新之語何耶。崔都統瑩臨死語曰。李廣平常言判三司事當爲國主。廣平都統皆當國大臣。而尙有是言。天命人心之歸我太祖。不待戊辰而可知矣。
我太宗之朝京師也。太宗文皇帝以燕王在藩邸。太宗過謁。文皇帝與言大悅。寵遇款至。及太宗還國。我朝士大夫問太宗曰。天下其大定乎。時高皇倦勤。建文爲太子。太宗曰。我觀燕王。天日之表。龍鳳之姿。恢廓大度。非久爲藩王者也。天下之定未可知也。未幾文皇帝以燕王有天下。人皆服太宗先見之明。文皇帝登極。眷祐我太宗異常數。每語國人曰。朕嘗見汝國主。眞天人也。
我國進貢馬。太宗親御揀閱。有一馬。班在下列。命置於首圉。人皆怪之。旣進。文皇見之勅曰。朝鮮國王愛我。首進之馬甚良。然後知聖神所見畧同太宗敎편001 臣曰。擇駿馬。辨人才。予當不讓於古人。
世宗天性好學。其未出閤。每讀書必百遍。於左傳楚詞。又加百遍。嘗違豫。亦不輟讀。病漸劇。太宗命中官。猝至其所。盡搜書帙而來。獨歐蘇手簡一卷。遺在屛障間。世宗讀千百遍。及卽位日。御經筵無書不讀。緝煕時敏之功。高出百王。嘗語近臣曰。讀書有益。如寫字製作。人君不必留意也。晩年倦勤不視朝。然於文學之事。尤所軫慮。命儒臣分局。撰次諸書。曰高麗史。曰治平要覽。曰兵要。曰諺文。曰韻書。曰五禮儀。曰四書五經音解。同時撰修皆經睿裁成書。一日御覽可數十卷。其可謂天行健純亦不已也。
世宗始制雅樂。朴中樞堧贊成之。每坐臥。手於心胷之間。爲戛擊形。嘯於口吻之中。爲律呂聲。積十餘年乃成。世宗深倚重之。世宗又制自擊漏。簡儀臺欽敬閣仰釜日晷。制作極爲精緻。皆出於宸衷。雖百工匠。無能副上意者。惟護軍蔣英實仰承睿智。運奇騁巧。無不沕合。上甚重之。人皆曰。堙與英實。皆爲我世宗制作之盛。應期而生也。
世宗嘗留意於溫公資治通鑑。患其箋釋未盡句讀不明。命儒臣博採群書。隨事夾註。以便觀覽。於是據胡三省音注及源委釋文集覽等書。删潤之。有未盡處。旁採他書以補。且文學回互艱深處。輒註本史全句。或書句字於句下。以便句讀。以至字釋翻音。莫不詳備。皆取睿裁。名之曰思政殿訓義。綱目通鑑亦如是。其訓義之精。今古所無。近見今皇朝所撰綱目通鑑輯覽。頗有疏漏處。又不夾註於句下。以附於每卷之末。觀覽亦不便。臣妄意當以我朝訓義爲第一。且訓義之成。在正統丙辰。而輯覽之成在近日。當中國輯覽之時。見我國訓義。則必歎賞不暇矣。
太宗始作鑄字。模樣有未盡善。歲庚子世宗命李蕆。以中國善書字樣改鑄。比舊尤精。是謂庚子字。甲寅世宗命爲善陰陽字樣改鑄。極爲精緻。是謂甲寅字。庚子字小而甲寅字大。其所印書冊極好。世宗末年。用瑢所書樣及姜希顏所書字樣改鑄。其所印書冊。漸不如舊。今則銅字盡爲工匠所盜。而兼用木字。字之大小生熟不同。行列不齊。視舊印冊本。迥然不侔矣。
世宗勵精文治。高出萬古。歲庚子始置集賢殿。選文士十人充之。後增三十員。又改二十員。十人帶經筵。十人帶書筵。專任文翰。討論今古。朝夕論思。文章之士。彬彬輩出。得人甚盛。集賢殿南有大柳。歲己巳庚午間。有白鵲來巢。子皆白。數年間布列顯要皆出於集賢。如鄭領相麟趾李左相思哲鄭領相昌孫李領院季甸安領院止金判書銚金參判墩金判樞鉤金判樞末申領相叔舟權左相擥朴參贊仲孫崔領相恒金判書淡李判樞石亨尹議政子雲魚判樞孝瞻盧參判叔同梁判書誠之成判書任李判書克堪李府尹鳴謙金判書禮蒙盧領府思愼韓西平繼禧洪贊成應李參贊承召李參判坡李判書苪趙府尹瑾姜府尹希顏姜判書希孟崔府尹善復朴參判捷。雖以居正之無狀。亦獲列其間。又如朴仲林朴彭年河緯地成三問李塏柳誠源。一時顯隆。歲癸酉甲戌柳盡枯。或戱誠源曰。禍必自柳始。誠源敗。言果驗。集賢殿尋罷。
世宗設集賢殿。聚文學之士。培養數十年。人材輩出。尙慮朝衙夕直。不專意講讀。選年少有才行者數人。許暇遊山讀書。官給供具。肆意於經史百子天文地理醫藥卜筮。淹貫該博。無所不通。將爲大用之地。前有辛文僖碩祖權承旨採南直殿秀文。後有申文忠公叔舟。餘皆名士也。文宗朝。洪南陽應李韓山坡。雖以居正之無似。亦獲是選。眞一時盛事。
文宗之爲世子。幸喜雨亭。以洞庭橘一盤賜近臣。御書盤面曰。栴檀便宜鼻。脂膏偏宜口。最愛洞庭橘。香鼻又甘口。字畫動龍蛇。光燭日月。予嘗臨其字藏之。眞天下之至寶也。
文宗睿藻精到。集賢殿嘗製棘城祭文以進。文宗賜覽。以朱筆抹之。御書數語。其畧曰。無情之謂陰陽。有情之謂鬼神。無情則不可與語。有情則可以理曉。且曰。水火養人。而有時乎殺人。鬼神生人。而有時乎傷人。天語渾成。非詞臣儒士所能到。
宋仁宗崩。英宗皇帝悲慕。有妄議者曰。能神術使死者復生。英宗命試其術無效。乃曰。太宗與仁宗。宴臨白玉闌干賞牧丹。無意復來人間。英宗知誕妄。不深罪。我世宗初喪。有妖僧來獻是策。試於他屍無效。虛僞無理文。宗亦不之罪。
世祖天縱豪邁。平時議論。慨然慕唐太宗。而薄漢高祖。一日上從容與讓寧大君禔。論古今帝王。而謂唐宗不可及。讓寧對曰。殿下遠過唐宗。上改容曰。惡是何言。叔父之言過矣。讓寧曰。太宗以一微事而殺張薀古。殿下必不爲也。況我殿下家法之正。非太宗之所及也。上微笑。又語及征蒲州江野人事。讓寧曰。古人云千鈞之弩。不爲鼷鼠發機。願殿下留意焉。讓寧所見亦奇。
世祖嘗從容語臣曰。汝儒者。自古人君。於佛可拜否。爾毋隱焉。臣對曰。昔宋太祖幸相國寺。佛像前燒香。問當拜與否。僧贊寧曰。拜在佛不拜過去佛。太祖笑而不拜。然則人君不拜佛正也。拜佛權也。上大笑。臣又曰。太宗朝。中朝宦官黃儼。持濟州銅佛而來。使太宗先拜佛而後行禮。太宗欲不拜。河崙等請曰。黃儼兇險喜生事。宜從權先拜佛。太宗曰。彼佛若自中國來。則當敬皇帝之命拜之。今此佛自我國濟州而來。何拜之有。羣臣無人陳此者。予以謂不拜可也。竟不拜。儼屈遂行禮。大聖人所見各同。世祖又笑之。
世祖聖性恭儉。嘗入內殿。見御紺色木綿虎裘。穿靑草鞋。笠纓用純木。携竹杖。雖漢文澣濯。亦不如是其儉素也。
申高靈叔舟爲領相。具綾城致寬新拜右相。世祖急召兩相于內殿。上曰。今日有問於卿等。能對則已。不能對則罰不可辭。卿等自度何如。兩相拜謝曰。庶幾謹飭無罰。俄而上呼申政丞。申卽對。上曰予呼新政丞。子失對。罰一大爵。又呼曰具政丞。具卽對。上曰予呼舊政丞。子失對也。罰一大爵。上又呼曰具政丞。申卽對。上曰予呼姓子失對也。罰之。又呼曰申政丞。具卽對。上曰予呼姓子失對也。罰之。上又呼曰申政丞。申具皆不對。又呼曰具政丞。具申皆不對。上曰人君有召人。臣。不對非禮也。亦罰之。如是終日。兩相飮罰極醉上大笑。
魚判樞孝瞻唇厚。世祖嘗戱曰。魚孝瞻淳厚。尹議政士芬顋醓。朴文憲元亨對曰。尹士芬猜險。上大笑。
世祖於陰陽地理之書。無不淹貫。洞見是非而睿斷之。嘗謂臣居正曰。祿命之書。儒者窮理之一事。汝知之乎。臣對曰粗嘗涉獵。上曰汝作假令一書。臣退而裒集諸書。撮其大要。分門類聚。先之以凡例。次之以吉凶神殺。終之以吉凶論斷。以進。上曰予非崇信祿命之書。欲作假令使宮中之人不煩指授。開卷自明耳。且謂臣曰。卿意謂祿命何如。臣對曰。甲己之年正月丙寅。甲巳之日生時甲子。以六十位類推之。其數極於七百二十而盡。以七百二十之年。加七百二十之日時。則命之四柱極於五十一萬八千四百。而無復加矣。天下盛時。戶口至有千五六百萬。則億兆林林之衆。豈止五十一万八千四百而已哉。今於閭巷間。固有四柱皆同。禍福全不相似。以耳目所見。常편002二。則耳目之所不接者。安知非千百者乎。且千里不同風。百里不同俗。四柱則中國四海荒服之人無不同也。而中國則有公侯伯子男卿士大夫吏胥庶人之分。爵位科第之高下。皆一一有辨。四海荒服之俗。或同禽獸。無貴賤之分。是何囿於五十一万八千四百之人命。而其不同若是其紛紛耶。祿命之書不足信也。或曰。如李淳風李虛中邵堯夫徐子平。發無不中。則安可盡得而非之乎。臣意以謂。有明鏡於此。物來照之。姸媸自見。於李淳風邵堯夫輩。心本虛靈。如鏡之明。事至物來。吉凶禍福自燭難逃耳。非如後世術士徒守古人之糟粕。以五十一万八千四百之人命。惟斷天下億兆之人命也。臣以謂祿命之書不可信也。上笑曰。汝言是也。
睿宗初政。銳意圖治。未幾玉體漸乖。嘗手寫冊背曰睿宗。又曰。死得此諡足矣。不數月上賓。羣臣上諡曰睿宗。果合聖意。嗚呼悲哉。
菊齋權文正公溥。壬戌年壬子月己未日己巳時生。卜者曰。命限不永。先文淸公坦曰。若積德少可延長。嘗聞天寶山僧。積德之目。有三。曰行不中道。曰浴不流水。曰食不擇精。汝宜勉之。菊齋終身佩服。造次必於是。終享壽八十五。位至極品。一家九封君。福祿之盛今古罕比。人皆曰積德之效。予嘗觀益齋先生文菊齋碑曰。戊子己未虛拱壬巳之祿。互衝發之。蓋贊其造化之妙也。卜者謂之不永。亦不可知。
圃隱鄭文忠公。平生有志節。人無間言。或戱曰。人言子有三失。知之乎。文忠曰。試言之。或曰人言子於朋友讌飮。先入後罷。飮酒太遲。文忠曰誠有之。少在鄕曲。得一盆濁醪。思欲與親戚朋友一懽。今旣富貴。座上客常滿。樽中酒不空。吾豈悻悻然哉。或曰人言子於色不得淡然。文忠笑曰。好色人之常情。孔子亦曰。如好好色。則孔子非不知好色也。或曰人言子於唐物貿易。不得無心。文忠變色曰。老夫家貧。子女寔繁。婚姻之禮。例用唐物吾不能免俗耳。況貿遷有無。聖人之遺制。吾何嫌乎哉。或曰前言戲耳。
權文忠公近常赴京師道遇雨。假郵吏笠帽。旣還之。訟公不還。責其直。公不較而與之。後有一郵吏。冒認氈衫之失。責其直。公又欲與之。使臣孛羅知其誣。鞫郵吏。乃曰此人前不較而與直。故敢爾。非失也。孛羅罰其人。
權文忠公嘗謫居忠州。癸酉春太祖幸鷄龍山。召赴行在。一日太祖賜銀盤一面于扈從諸宰樞。爭射賭之。武臣以次皆不中。文忠平生一不操弓。是日一箭中之。得銀盤。人皆曰。射以觀德。此之謂也。
鄭三峯道傳嘗赴早衙。穿靴一白一黑。及公坐。胥吏以告。三峯俯視一笑。竟不易。及衙罷。騎馬而行。笑謂傔從曰。爾毋怪乎。吾靴之黑白也。左者見白不見黑。右者見黑不見白。亦何傷乎。其不外飾如此。
李文靖公穡朝京師。太祖高皇帝引見與語曰。汝之漢語似納哈出。穡貌不揚。帝曰此翁堪畫。及穡東還。語人曰。今皇帝中無所主之主也。人皆以穡言爲失。今觀大明有天下百有餘年。列聖相承。持盈守成。一遵高皇帝遺制。不得變更。其規模制度。遠過漢唐。曾謂中無所主之主乎。然穡大儒也。不知高皇帝之爲大聖人。焉得爲智乎。臆意以謂。高皇帝初定天下。駕馭英雄。恢拓邊疆。留神軫慮於創造大業。其視穡豎儒如嬰兒啼笑於坐側而不加之意也。穡之意亦以爲。高皇在位未久。天下之事。未可知也。而待外人。簡傲侮慢如是也。是以有此言。高皇以光武之待馬援者而待穡。必無此言矣。
趙文貞公庸學問精邃。尤深於性理之學。長國學二十餘年。誨人不倦。作成有效。凡文章操紙立就。詞理精到。性聰敏。一覽輒記。少時聞一書生得元朝文選策問祕之。文貞求見。生不許。他日更往求之。則生爲借三日。文貞一覽盡記。如約而還。一日文貞與生同在黌舍。誦策三四道。不差一字。生以謂偶熟此而已。亂抽諸策令誦之。亦如此。生曰。如公者。雖張巡不能及也。
孟文貞公思誠淸簡端重。在相府持大體。公年庚子。嘗因戱托癸卯契。一日在上前。上問公年有幾。文貞對以庚子。朝退。契中以非同庚出之。一時傳笑。文貞性解音律。常執一笛。日弄三四聲。關門不接賓客。有稟事者。令人開門引接。夏則坐松陰。冬則坐房內蒲茵。左右無他物。稟事者去。旋卽關門。稟事者到洞口。聞笛聲則知公之必在。
權文順公弘早以文翰著名。尤工於篆隷。位至極品。享年八十七。嘗卜宅南山陲。鑿雙池種蓮。幅巾藜杖。逍遙自適。洒然若神仙。其書獻陵碑篆成均館碑甚好。嘗世宗朝上書請立箕子祠碑。言頗得體。
朴貞肅公安信器度寬偉。嘗與孟文貞公思誠同在臺。論事忤旨當誅。文貞面有黑色。蒼黃罔措。貞肅顏色自若。作詩一絶。有恐君留殺諫臣名之句。無紙筆。以磁尖畫地成字。瞋目語獄吏曰。當以是上聞。否則我爲厲鬼。爾屬無焦類矣。太宗聞而霽威赦之。後貞肅奉使日本還遇海賊。賊抽刃攔入船上。抄掠行具。人皆搖手不得。貞肅踞胡床不動。從容指揮。賊畏不敢近。一行賴以安全。
柳文貞公寬公廉方正。雖位極人臣。茅屋一間。布衣芒鞋。淡如也。公退之暇。敎誨不倦。摳衣者坌集。有來內謁。顧之而已。不問姓名。公之第在興仁門外。時開史局于金輪寺。寺在城內。公領脩史。嘗以軟帽杖屨而行。不煩輿馬。或携童冠。嘯咏往還。人服其雅重。寺今已廢。嘗霖雨經月。屋漏如麻。公手傘庇雨。顧夫人曰。無傘之家。何以能堪。夫人曰。無傘者必有備。公笑。
成文景公石磷少有倜儻奇節。嘗爲楊伯顏幕下禦倭。失律當刑。公假寐。有人告曰。公著蒿冠無憂也。公自解曰。蒿冠以蒿裹頭。不祥莫甚。竟貸死除名。後爲首相曰。吾夢蒿冠者高官也。早年與四五同僚在政房。辛旽負手傍觀。指文景曰。終必大顯。福德非諸君所及。卒如其言。老賊亦復具眼。公年六十。慈氏亦年踰七十。病革。瞑目不言者數日。藥餌無效。公焚香祈禱。哀號幾絶。俄而慈氏曰。是何聲也。侍者驚喜曰。祈禱聲也。慈氏曰。天遣人賜几杖曰。有子至誠如此。可扶而起。病尋愈。人皆嘆文景孝誠之篤。
河襄靖公敬復晉州人。母夢鼈入懷中。因有娠生。小字王八。自幼膂力過人。補甲士宿衛。直禁門。時適冬至。上林苑熨養梅花數盆。將進置於禁門之側。公折一長條。揷兜牟上。掌者大驚叱之。公曰。吾家籬邊繫牛馬者此樹。折爲薪樵者也。有何所貴。不小屈。人皆笑其麤猛。而大其氣。以武能擢拔大顯。嘗出鎭東北面。有野人以三百斤强弓請公彎之者。公爲置酒歡飮。且語曰。此弓制作甚妙。急呼弓手。依樣制造。潛令人爆之。筋力少解。從容引滿。野人叩頭下拜。
卞文肅公季良性固執。宣德年間賀白雉表詞中。有惟玆白雉之語。文肅曰玆字宜中行。諸公曰不屬上何謂中行。文肅固執之。諸公曰宜取旨。世宗是諸公之議。文肅復啓曰。耕當問奴。織當問婢。殿下爲國。若鷹犬宜問文孝宗輩。至於詞命。當依任老臣。不可輕許他議。世宗不得已從之。
崔貞烈公潤德生而母卒。父雲海鎭邊不能擧。托養于同隣楊水尺家。稍長膂力絶人。挽强射堅。時隨水尺出獵。所獲實多。一日牧山中。有大蟲瞥出林莽。諸畜犇散。公驟騎一發一箭斃之。來報水尺曰。有物斑紋。其大顒然。是何物。吾已射殪之。水尺往見。乃一大虎也。水尺異之。家君出鎭合蒲。水尺以公往謁。譽公不已。家君曰當試之。及與校獵。公左右馳射。發無不中。觀者嘖嘖稱美。家君笑曰。兒手雖敏。而尙未識軌範。兒今所爲乃山虞技耳。不可謂之長技。仍敎射禦之方。遂爲名將。
黃翼成公喜度量寬洪。有大臣之體。居相位三十年。享年九十。論決國事。務從寬大。平居淡如。雖兒孫僮僕羅列左右啼號戱噱。畧不可禁。或有挽胡批頰者。亦從其所爲。嘗引僚佐議事。方濡筆書牘。有童奴溺其上。公無怒色。但以手拭之而已。其德量如此。嘗謫在南原七年。閉門端坐不接賓客。手執韻書一帙。凝神注目而已。後雖年高。於字書音義偏傍點畫。百不一失。
河文孝公演讌居常著烏紗帽。去軟角。焚香靜坐。終日唫哦。爲詩奇僻近古。筆法遒勁得體。嘗言。少時在春坊。作詩手寫之。河浩亭嘆曰。河文學作而河文學寫。亦一人間寶玩也。文孝嘗按慶尙道。南政丞智爲亞使。公甚器重。不以僚佐待之。嘗行至晉州。文孝嘆山川雲物之勝。公晉人也。南改容曰。山水雖勝。而品官甚惡。文孝大笑。人服其雅量。後與南同升黃閣。
許文敬公稠簡嚴方正。公廉淸謹。動慕聖賢。每鷄鳴盥櫛。冠帶正坐。雖終日不見惰容。矻矻常以國事爲念。言不及私。論議國政。自信獨守。不與人軒輊。時稱賢宰相。家法亦嚴。子弟有過。必告祠堂罰之。奴婢有罪。按律治之。公自幼銷瘦如削。肩背傴僂。嘗判禮曹。定上下服色儀制。截然有分。巿井輕薄子深疾之。號曰瘦鷹宰相。蓋鷹肥則颺去。瘦則思搏禽也。
金孝襄公孝誠莊襄公南秀之子也。莊襄與妻吉氏異居。孝襄年四五歲。有奴抱立桑樹下。忽有雙鳩來集。孝襄曰。瞻彼雙鳩。雌雄並行。吾父母各在東西何耶。仍泣下奴異之。告吉氏亦泣。鄕閭皆異之。公事母至孝。公年五十七。而吉氏卒。廬墓喪祭。一出至誠。物論多之。
姜戴敏公碩德性好古。風流文雅。近代無比。作詩最高古。書畫亦妙絶。諡之曰敏宜矣。諡法好古不怠曰敏。此元朝學士趙文敏之敏也。世之人以公不於紅紙上題名輕之。甚非也。子府尹希顏字景愚。畫詩書三絶。獨步一時。詩似韋柳。畫似劉郭。書兼王趙。爲人有才有德。眞大人君子也。不大厥施。惜哉。
趙中樞吾倅陜川。暑月鱸魚山積。雖腐爛不許家小得嘗。人皆服其廉。或曰與其腐爛棄之於地。寧使家小得嘗。況不以此傷廉乎。趙家至貧。其爲禮曹正郞。避方賃屋。桂玉不繼。同僚有以白粒三斗問之者。不受。後於公座誇之。人或有譏其矜作。然平居。關節不到。後退老村莊。室如懸磬。無絲毫干請於人。眞廉謹篤信君子也。
權安肅公蹲聰明過人。明達吏體。嘗爲讞部。決獄如神。有二盜殺一家三人。情跡稍存。贓證未白。前後官吏首鼠未決。幾四五年。一日安肅前二盜而語曰。爾輩情跡甚明。敢不服。我有一語。爾無遁情。爾輩初議爲盜。如是如是。中爲作賊。如是如是。終始本末俱陳之。如是如是。爾敢隱乎哉。盜相顧吐舌曰。此公莫是曾爲盜者耶。何悉我情跡如是。遂服。
甲午春權文景公踶。趙判書克寬。權參判克和。金參判墩俱失志禮闈。抵水原蓮亭。文景曰。吾輩眺矂落魄至此。他日得意。細雨濛濛。雨雪霏霏。明月八簾。荷香滿座。與二三子相與觴詠。亦足賞今日之行矣。諸公抵掌曰。雨旣濛濛。雪不當霏霏。雪旣霏霏。月不當明。荷香又豈雪中得乎。何言之不倫也。文景無以應。是年秋榜。文景居大魁。諸公相繼擢第。壬子文景爲京畿監司諸公會餞。趙執盞言曰。水州雪中荷花。今可賞矣。文景笑曰。欲與君共耳。不數月趙出宰是府。文景巡臨。趙行禮詣就座。適荷花盛開。相目而笑。文景有詩曰。雨雪霏霏月政明。荷香荏苒滿亭淸。當時此說神應祕。二十年前事已成。
金文長公鈞。金文長公末。金大司成泮。皆博通經史。尤邃性理之學。同時選授胄監。誨人不倦。作成有效。人稱曰三金。而泮先逝。兩金皆年踰八耋。官躋一品。俱謚曰文長。諡法博聞多見曰文。誨人不倦曰長。其得此謚宜矣。尹提學祥時爲胄監之長。學問尤精。諸生爭先摳衣。絲分縷柝。耳提面授。終日矻矻不知倦。今之達官聞人。皆公弟子也。國朝以來。爲師範之最。
金文長公末有一女無子。嘗曰。聞開千眼者得陰報。予自筮仕以來五十餘年。未嘗不待學館職。敎誨不倦。卒無嗣。豈非予荒蕪僞學未能德於人耶。將終。沐浴冠帶執笏端坐。家人痛哭。公止之曰。予位至一品。官非不達。年踰八耋。壽非不高。生死常理。得正而死。豈非幸歟。尋卒。
崔先生萬理嘗爲集賢殿副提學。上書極論宦官著軟脚烏紗帽。不合古制。依中朝例著冠。其言曰。自古歷代人主。寵任宦官。權傾天下者甚多。然不能易其冠者。蓋以閽寺之流。不可混於縉紳。駭人觀聽耳。言甚切至。諸宦官側目相視。議遂寢。
柳先生義孫。權先生採。辛文僖碩祖。南先生秀文。同在集賢殿。文章齊名一時。而物論尤推重南先生。高麗史節要初草。大抵皆出於南手也。諸君皆不大達。惜也。
奇公虔嘗宰延安府。鮒魚多產。公私徵請輻湊。弊或及民。前此有宰姓金者。喜食鮒魚。邑人嘲之。大書館壁曰。六年何事業。喫盡一池魚。奇欲避謗。六年不食鮒魚。又出牧濟州。濟之有鰒。猶延之有鮒也。三年亦不食。人皆服其執而疑其作也。
金判書銚早以文學著名。世宗嘗宴群臣。皆酒酣。上曰。今日諸君。各陳平生所願。銚曰。臣願百年之內日侍御榻。進退俯伏於金葵花底而已。群臣皆曰。臣等所願無踰於銚。上笑。
金文節公淡性溫雅淡簡。喜怒不形於色。然善治盜。嘗守忠州安東慶州三邑。人有犯盜情跡。少有可疑。必殺勿饒。盜不入境。民賴以安。然枉殺亦多。公享年不永。刑罰之於人。甚可畏也。
李文安公思哲體質豐大。飮食過人。每食一大器飯二蒸鷄一壺酒。患背腫臨絶。醫云宜忌炙肉毒酒。公曰與其不食而生。毋寧食之而死乎。飮酒啗炙如常。卒獲平善。人皆曰享富貴者。飮食亦異於常矣。文安之少也。與諸輩遊三角山僧寺。各佩壺。但無飮器。時權斯文枝穿新制馬皮套鞋。文安先酌飮之。諸公以次飮之。相視大笑曰。皮鞋杯自我作古。不亦可乎。後文安貴顯。語權曰。今日金杯酒味。大不如遊山時皮鞋杯也。
鄭貞節公甲孫性淸直嚴峻。子弟不敢干以私。嘗爲咸吉道監司。被召如京。及還道見解榜。子烏亦中焉。公奮髥怒罵試官曰。老奴敢狐媚我乎。吾兒烏業未精。豈可僥倖欺君耶。遂鉤去之。竟黜試官。
貞節爲大司憲。激濁揚淸。朝綱大振。然寬厚持大體。舊例公會臺諫必連幕而次。或時飮酒捲帳相屬。號曰捲帳飮。若値酒禁臺諫執法不飮。諫院飮醉自如。一日諫官持抔引滿。戲於帳隙示臺長。臺長亦戲以袖拂之。杯從帳隙中而墮。圜轉止於憲長案前。諸臺長惶懼無措。臺吏亦相目未敢猝止。終日在前。臺中恐生事。將仕罷。貞節語吏曰。彼如鵝卵者何物耶。可容水精珠幾顆乎。吏曰可容百顆。貞節曰可從所出隙中擲之。滿座皆服其雅量。諫院相傳。有杯形如鵝卵。可容一升許水精珠。玩禁而設者。
尹文度公淮南集賢秀文皆能文章。而性喜酒。常飮過度。世宗惜其才。命飮酒毋過三爵。自後凡宴會。二公必飮三大椀。名雖三爵而實倍飮於他人。世宗聞而笑曰。予之戒飮。適所以勸飮也。
鄭文成公麟趾天資豪邁。胸次豁達。嘗酒酣。尙論古人曰。如我者倘遊聖門。純粹如顏子。篤實如曾子。固不可及。如遊夏之徒。未知何如也。歲庚午翰林侍講倪謙奉使來。文成爲官伴。周旋交際。得儐使體。又與之商礭古今。往復酬唱。侍講敬重之。常夜坐。侍講曰月在何分。公曰在東井。侍講嘆服。及辭別。侍講曰如夜深何。公曰可怕李金吾。侍講曰莫逢王玉汝。相與笑曰。天下未嘗無無對之句。歲丙寅昭憲王后赴山陵。大雨江漲。梓宮不可渡。權厝樂天亭。或云南首。或云北首。議竟未決。文成後至曰。禮在殯南首。不死其親之意。在玄宮北首之。幽之故也。今亦殯宜南首。諸公曰。宰相不可不用讀書人。
侍從封章。始盛於李文烈公季甸。文烈在集賢殿。屢欲封章論事。有一二同列。官居文烈之上。每沮之曰。自古喜論事者。終受禍。況我侍從者。講論德義。啓沃輔道而已。至於諫諍非職也。君勿好事。文烈曰。人各有心。論事之敗之榮。不如含默之恥之深耶。遂率下僚抗疏極陳者。非一再矣。而上官終不署名。物論譏之。每進封章。世宗曰。季甸之疏又來矣。遂有大用之志。尋擢同副承旨。
權翼平公擥弱齡有大志。博覽强記。才名挺出儕輩。然屢屈場屋。怡然自處。不屑屑於懷。予誦孟郊詩曰。出門卽有礙。誰謂天地寬。郊之落第悲悴困窮者。無所容其身者。今子將無然乎。翼平笑曰。得不得寧非命耶。予知其爲大器。後翼平年三十五。以文擢壯元。四十六入相。爲一代元勳之首。蓋眺矂悲傷。士之常情。而公之大度如是。郊之不遇。豈非局小使然耶。
申文忠公叔舟嘗奉使日本。回還到我境。不及數里。忽遭颶風。未及艤岸。衆皆蒼黃。公神色自若曰。大丈夫當遠游四方以蕩襟懷。今涉洪濤。見日出之鄕。足爲壯觀。倘乘此風。得泊金陵。飽見山河雲物之盛。亦一快也。時刷還孕婦在舟中。衆曰。自古孕婦於行船大忌。宜投海以穰。公曰。殺人求活。於德不祥。强止之。俄而風定。文忠始登第。選入集賢殿。一日當直入藏書閣。取平昔所未見書讀之。漏已下三鼓。世宗遣小宦覘視。端坐讀書。及四鼓又遣覘之。亦如是。函賜御衣以奬。
具忠烈公致寬性方嚴公正。嘗判吏曹。關節不行。前此長銓曹者。例於除授之際。親執官案。恣行胸臆。亞官以下。袖手傍觀。公嘗憤之。思欲矯其弊。凡進退人物。博採群議。雖小官卑職。未嘗獨薦。又不以私恩貸親舊。嫉人干請。有或干請者。當遷不敍。時居正爲參議。一日在政房。適醉睡。公厲聲曰。參議謂致寬。注擬人物。恣行胸臆。不欲與聞耶。他日有用人之失參議其曰在家不知耶。嘗擬一文士知名者。爲臺官。駁者曰。此子滑稽不可。公曰若然則漢武帝何取於東方朔耶。竟擬臺官。又一文士調外郡敎官。十年不遷。公欲擬縣職。駁者曰。此子迂闊不可。公曰。天道十年必復。安可使人久屈如是。遂擬縣職。果有治效。公之用捨。一出至公如此。
崔文靖公恒性謙恭簡正。端介無華。平生與人語。先示退損。不自表襮又不立崖岸自異。爲文章。不襲古人畦畛。自出機杼。大放以肆雄豪富瞻。如長江大河。滔滔汩汩。百折逶迤。勢不能止。尤工於騈驪。凡朝廷事大表牋。皆出其手。華人每稱。我國表辭精切。皆公所著也。平居雖隆冬盛暑。整衣冠終日端坐。不設情容。未嘗疾語遽色。天性然也。
世祖嘗嘆。東方學者。語音不正。句讀不明。雖有先儒權近鄭夢周口訣。紕繆尙多。腐儒俗士。傳訛承誤。遂命老臣宿儒。分授四書五經。考古證今。參定口訣。又會文儒講同異。上親加睿裁。文靖常在左右。每承顧問。毫分縷析。應對如響。上聽之亹亹不厭。語左右曰。寧城眞天才也。
朴文憲公元亨明達事體。諳熟典故。中原使臣陳鑑高閏張寧陳嘉猷之來。皆爲儐。周旋交際。咸中其宜。張奉使嘗語文憲曰。如子之才。生於春秋之時。當不在叔向子產之下矣。
尹文憲公子雲。爲咸吉道體察使。至安邊。聞李施愛殺節度使康孝文。又殺吉州牧使薛丁新。據州以叛。分遣腹心于諸郡。殺守令殆盡。兇徒所在響應。公倍道至咸興。是夕賊又作亂。殺監司申㴐。盡殺公差官吏。尋移兵抵公所。排闥露刃環庭者如墻。公整衣冠端坐。言笑自若。賊懼而退。嘯聚之黨。恣行胸臆。狙詐不測。公在圍中者七日。處之泰然。屹不動心。賊悔悟。或有周旋左右爲公地者。卒全身而還。
咸東原禹治嘗爲全羅道監司。有閥閱兄弟爭釜大小訴於官者。咸怒命吏。亟取大小二釜來曰。當擊碎均其斤兩而分之。二人服。訴遂止。
洪中樞逸童器宇卓犖。性任天眞。不脩邊幅。善詞賦劇飮。無何醉則用草葉作吹笛聲。悲壯震厲。平居獨撫古琴。有絃無譜。嘗曰。吾之琴得淵明千古不傳之趣。昔伯牙鼓琴。唯子期知之。吾之琴。淵明不生。世無知者。天地間奇男子也。嘗於上前論佛事。世祖佯怒曰。當殺此虜以謝佛氏。命左右取劍來。逸童論辨自若。左右佯以劍撫頂者再。亦不顧視。無懼色。世祖壯之曰。汝能飮乎。逸童曰。樊噲漢士也。項王他主也。巵酒彘肩不敢辭。況聖賜乎。賜酒一銀盆。健倒。上曰頗畏死乎。逸童曰。當死則死。當生則生。敢以生死而易其心乎。上喜賜貂裘一領。慰解之。
逸童嘗遊眞寬寺。食餠一器麪三椀飯三鉢豆腐麪九椀。及到山下。有餉之者。食蒸鷄二隻魚羹三椀魚膾一盤酒四十餘觚。觀者壯之。明日世祖聞之。召逸童問曰。信如是能喫乎。逸童拜謝。上曰壯士也。然常時出入。但食餌屑醇酒而已。不喫飯。後到洪州劇飮。尋卒。人疑其爛腹也。有志不施。位不滿能。惜哉。
唐末鄭谷以詩鳴於世。時人稱其官爲鄭都官。宋梅聖兪晩年得都官。一日會歐陽永叔家。劉原父戲之曰。聖兪官必至於此。昔有鄭都官。今有梅都官。座客皆驚。而聖兪亦不樂。未幾病卒。居正少與尹恕同游學。恕嘗自言。萬一登第得爲司諫院正言。必休官。男子於紅旌上。書正言二字足矣。諸君勿訝也。恕與居正同登甲子科。庚午辛末年間。始授正言。居正戲曰。可休官矣。恕笑曰。第觀之。未幾病卒。蓋原父戲聖兪。尹恕之自期。果合於言。是何理耶。
陽村權文忠公常著入學圖說。依周子太極圖及朱子中庸章句之說。作天人心性合一之圖。廣大該包。精深微妙。擴前聖之未發。開後學於無窮。君子修之吉小人悖之凶之說。則但擧大綱以示學者。其旨深矣。猶子權先生採。亦依圖說及朱子中庸大學章句或問之說。以著天理流行發育之象及學者變化氣質作聖之道。其進德先後之目則引孔曾思孟之說。用功淺深之意則斷以程朱諸子之論。其論天人心性之說。多有所發揚陽村之意焉。於是著作聖圖。
近世好事者。有成佛圖。有從政圖。皆用骰子。權先生採。著作聖圖。其目有十三。曰論圖象。曰論性理。曰論陰陽。曰論造化。曰論氣質。曰論誠敬。曰論資質。曰論功夫淺深。曰論用功作輟。曰論賢智。曰論愚不肖。曰論進德先後。曰摠論。於十三論之中。亦有多少節目。又用骰子。六面書誠敬肆僞四字。但誠再書而肆僞一書。其爲字。皆有分數。擲之以分數多少。爲進修次第。凡人之性。厭學問而樂戲玩。成佛從政之圖之類。亦博奕之流也。徒費曰力。而無所用心。先生之作此圖。初非戲玩設也。欲學者因其所樂而開牖之也。不知者以用骰子近於博奕。故不深究其意。不思之甚矣。夫用骰子。意非在於骰子。以示誠敬肆僞之分耳。誠敬肆僞。乃學者用心之地。因骰子而開示指道於初學。尤爲親切。卽圖而求之。雖愚稚孩童。亦可以知所向方。而進德之序。有條不紊。可與聖賢同歸矣。圖未行而先生卒。今知者蓋鮮。先生之文章。有仲父陽村風。
李文安公石享嘗因眞德秀大學衍義。删繁就簡。添入麗史之可爲勸戒者。爲一書。名曰大學衍義輯略。請於經筵進講。上嘉納之。公之意以謂。經書時方經進高麗之事。傳聞所及。鑑誡最切。故或删或約或添之。其於觀覽。不無有益。然論者以謂。經以載道。皆聖人之言。德秀之編。皆非苟爲。今盡删去。於義未安。因舊衍義之文。添入麗史。庶幾近之矣。
高麗文宗朝。禮部尙書鄭惟產立糊名取士之法。凡赴試諸生。卷首寫姓名本貫四祖糊封。試前數日呈試院。開場前一日午後。主文具題脚於狀。詣紫門實封進呈。上自折封賜覽。各於題上落點。封押而出。主文承奉到試院。翌日黎明折封放題。當直承宣擎奉金印往試院。與主文同坐。於擧子卷封。一一印之。上又遣內侍二員賜酒果。主文亦設筵以慰。間一日當直承宣到試院。開拆放榜。第二場亦如之。第三場至二更放題。餘同儀。間兩日主文各於中選卷子背上。科次貼黃函封。進詣紫門。上坐便殿。承宣二員捧函上前折封。文儒承宣讀過其科次。上下竝依主文之望而放榜焉。其後相襲。大槩如此。至國朝。科擧之法漸備。糊名卷子與高麗同。餘皆不同。其收卷官封彌官査同官枝同官易書等事。皆遵元朝制。兩頭場始於世宗朝。或講經或製述。隨時不同。
古者無武科。太宗朝始設焉。故事文武科放榜日。賜牌賜花酒。文武科一等三人。別賜皁蓋。一時榮之。世祖朝文科賜蓋。武科賜旗。遊街之日。癡兒愚婦皆辨其爲文武科也。武班頗不悅。尋罷復舊制。
舊例官至三品者。不赴文科。六品者不赴生員進士試。以堂上官赴試始於權花山攀。宗親極品赴試始於永順君溥。駙馬極品赴試始於世祖朝。事尋罷。
近日場屋。有出賦題曰海東靑。韻府群玉書。有古人詩一句曰。麗句妙於天下白。高才駿似海東靑。有一擧子誤解曰。麗句妙於天下則惟白高。一介才士之駿似海東靑者矣。擧場和之。以白高爲賦。至有成句曰。繫海東之爲靑。同白高之駿才。試官亦取之。多有登第者。聞者縮頸。
國朝以來。科場文體穩平。自癸酉甲戌以來。一二文士詭奇崛强之文。擢巍科。四五六年之間。文體盡變爲西崑。今國學及科場。擧歐陽公黜劉幾故事。黜其甚者。文體稍稍如舊。然未能盡變也。近於殿策起頭。有一主曰。披沙揀金有大冶之精。執策臨馬有伯樂之明。有一主曰。天開於子。地闢於丑。人生於寅。其浮華不切。
舊例諸科會試。每三場日。禮曹設宴。又別有內賜酒果。諸試官懽飮爲榮。於諸生亦置淡粥淸酒數十盆。以解渴喉。及式例出。而皆罷之。近在試院有一參試官。戲成一句云。座主不飮香醪一盞。何烘其頭。諸生甘吸墨水數升。皆黔其吻。僕亦有句云。茶椀始從今日大。酒杯仍憶去年深。滿座皆笑。
河東鄭相國麟趾。魁甲午初榜。又魁丁未覆試。國朝以來一人而已。李延城石亨魁辛酉進士生員及第三榜。三韓以來未之聞也。南司成季英魁生員及第二榜。亦其次也。
父子相繼爲壯元者。權文景公踶。權翼平公攬。兄弟相繼爲壯元者。柳正自濱。柳校理自漢也。
父子相繼入相者。黃翼成公喜。黃成烈公守身。沈議政溫。沈左相澮也。
國朝以壯元入相。河東鄭公麟趾。吉昌權公攬。寧城崔公恒。洪南陽應。以前朝壯元入本朝爲相。柳政丞亮。孟政丞思誠也。
甲寅別試。崔寧城恒爲壯元。曺昌寧錫文爲榜眼。朴延城元亨爲探花。具綾城致寬居丙科。在世祖朝。四人相繼入相。古今所無也。
甲午秋親試。讀卷官河崙等。取擧子三人卷子以進。太宗曰。當依古焚香祝壯元故事。信手抽之。乃權文景公蹈也。
上喜曰。予悼蹈父近之早逝。今得子爲壯元。聊復自謂。顧語崙等曰。此榜乃予門生。卿等不得爲自家桃李也。崙等終不受禮謁。庚午殿試。讀卷官以權翼平攬擬第四人。榜旣出。
文宗曰權攬居幾。左右曰第四。上督令左右進諸卷子。讀至第四曰。此誠壯元也。親札第一。蹈後改名踶。踶父子壯元。皆御賜也。
筆苑雜記卷之一終

[편-001]延 : 
[편-002]有 : 有字下恐落一字


海東雜錄[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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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朝[四]
徐居正

大丘人。字剛仲。舊字子元。號四佳亭。我英廟甲子登第。光廟朝又擢重試拔英試登俊試三科。爲詩文贍敏。多所著述。歷事五朝。主文衡二十六年。侍經幄四十五年。詔使祁順東來。居正爲遠接使。順歎服稱能。官至贊成事。謚文忠。有集行于世。所著有大東詩話筆苑雜記太平閑話滑稽傳。○徐居正卽權陽村之外甥。英敏夙成。年纔六歲。知讀書屬句。一門謂之奇童。稍長。校藝學宮每居前列。時人謂。陽村之文。其必傳之外甥乎。 行狀景泰庚午。翰林學士倪謙給事中司馬恂。奉使東來。徐居正時爲修撰。兩使見其述作。稱賞不已。成化丙申。祁順張瑾又出來。公爲遠接使兼館伴。每與唱酬。筆不停。兩使輒稱嘆曰。眞奇才也。如吾輩終夜構思。僅得一二篇。公於立談間落筆。皆成珠玉。可橫行天下。後詔使往來。必問其安否。 上同四佳亭爲詩。專倣韓陸之體。隨手輒成。艶麗無雙。人或有求碑誌記序詩賦雜文。酬答如流。波瀾泛溢。奇文異話。傳誦於世。 上同 天地不虛。無以囿群形。河海不虛。無以納百川。山藪不虛。無以藏衆疾。萬竅至虛也。風蕩之鳴。萬隙至虛也。日月容其光。 虛谷記 一年之內。逢大旱大雨大風。傷災變之重重。作詩以記之云云。大雨尙可言。燥者蒙其利。大旱尙可言。濕者受其賜。大風尙可言。百物盡憔悴。如何一年內。三災同荐至。三嘆復三嘆。是用詩以誌。 本集 四佳撰歷代年表。中國則上自帝嚳甲子。下至皇明成化戊戌。東方則上自檀君戊辰。下迄于本朝。凡三千八百十一年。上列甲子。下註年代。上同 四佳憤一甲越職。論彈著守職一書。凡物各有職。牛之職職耕。馬之職職服。雞職晨犬職夜。能職其職。謂之守職。不職其職。而代他職。謂之越職。越職則悖理。悖理則受害。 上同 作鈇腸調帝疇。汝以鐵腸百鍊其鋼。則不可屈。亦不可折。愼爾自修。毋或爲繞指之柔也。 上同 四佳東都十二詠。有鰲山奇勝有詩云。海上金鰲眺望宜。風流文物異前時。破碑或見金生字。古寺曾留致遠詩。 上同 四佳有竹狖圖詩。節本淸高葉更癯。子成忙待鳳鳴雛。世問鼠輩知無數。畫手何人枉作圖。 上同 徐達城於後園鑿池。種蓮作亭。號亭亭亭。金東峯有詩云。亭亭亭壓白蘋洲。洛盡紅衣葉葉愁。 上同 高麗舊制。有藝文應敎。秩雖卑。必擇其有文章重望。他日可主文盟者爲之。其選至重。本朝仍之。本嘗作懶病詩。以自嘲云。閑能成懶懶成癖。病亦思歸歸亦難。門掩蒼苔春寂寂。枕書高臥日三竿。眞懶病者之高致。 詩格 作白髥吟一絶。說爲問答。以自嘲云。去歲白髥雪半粘。今年髥上十分添。問髥何事白如許。曰坐吟詩苦撚髥。 上同 成化壬寅閏八月。獨坐有詩云。大材端合柱明堂。樗散如予乏寸長。自笑一生無適用。如何縮閏似黃楊。 上同 有夜讀自哂詩。少日如魚眼孔明。燈前細字讀高聲。如今老病成何事。墻角無心棄短檠。 上同 孫勿齋舜孝。幷三休四休。自號七休子。以事適罷憲長。徐達城以詩戲呈云。可休休日休方好。休不休時休亦羞。三四休幷七休客。休休今復更休休。 上同 剛仲少與尹恕同遊學。尹恕嘗自言。萬一登第得爲正言。必休官。男子於紅紙上。書正言足矣。恕與剛仲同登科。七八年間始授正言。剛仲戲之可休官。尹笑曰第觀之。未幾病卒。 筆苑 國朝舊制。吏曹參議。必拜二品。徐達城以吏曹參議赴京。還到鴨綠江。移拜禮曹參議。卽脫金帶。還着銀帶。醉賦一絶云。曾聞橘渡淮爲枳。未見金渡水爲銀。 上同 朝官姓吳者。坐贓當刑。其妻出秘計。令一奴服婦人服。以帽裹頭。拑獄吏告曰。罪人吳某之妻。聞良人明當就戮。願一相見訣。獄吏哀而許之。就一隙地。爲夫婦永訣之狀。奴預袖刀鉅。截去鎖杻。轉加身上。以婦人服加其主。擠出獄門。別置駿馬於外。卽騎走。獄吏入視。乃奴也。追捕不及。我英廟義其奴而免之。 上同 國朝以來。文軆穩平。有一二文士。以詭奇崛强之文。擢嵬科。五六年來。文軆盡變。爲西崐。公擧歐陽公黜劉幾故事。黜其甚者。文軆稍稍復舊。然未能盡變也。 上同 議政尹士편001 腮齇。朴元亨曰。尹士朌猜險。我光廟大笑。 上同 李領樞石亨金判書禮蒙。同里閈。一日相對象戱。李有兩馬而勢强。金有一車而勢弱。時宰樞有名馬勝者。朝官有名車有者。李曰。其惟馬勝乎。金應聲曰。吾非車有乎。相與大笑。 上同 李文景種善牧隱之子。權總制踐陽村之子。摠制醉謂文景曰。君爲牧隱之子。而文章不足。我爲陽村之子。而文名不及。君與吾當作燈下不明契。聞者皆笑。 上同 國朝故事。又武科放榜日。賜紅牌花酒。一等三人。皆皁蓋。蓋一時榮之。光廟朝武科則賜旗。上同 文酒會。斯文古風。三館士執大鍾滿酌呼先生。自高官下至卑職。其與會者。雖達官貴人。若不於紅紙上題名。則不曰先生。而曰大人。其風始於高麗。 上同 按資治後梁紀。高麗眇僧躬乂。聚衆據開州稱王。號太封。遣使入貢。躬乂卽弓裔。開州卽開城。太封卽泰封。 上同 我國分野。故人擬以燕都。正統間彗星見燕分。日官奏云。不干我國。英廟深以爲憂。曰我國同燕之分。安得爲不干乎。己巳秋。皇帝陷虜庭。英廟又賓天。 上同 煕宗五年。知製誥崔甫淳。撰賀金帝登極表云。五馬渡江。表晉帝之開新主。六龍御極。符羲易之見大人。時金主兄弟爭國。惡其觸實。勅曰。引用晉元帝事不當。崔由是得譴。 上同 宋仁宗皇帝崩。有妖術者曰。能使死者復生。英宗命試其術。無效。乃曰。太宗與仁宗宴。臨白玉闌干賞牧丹。無意復來人間。英宗知誕妄。而不深罪。我英廟初喪。有妖僧來獻是策。試於他屍無效。虛僞無理。文宗亦不之罪。 上同 壯元入相者。前朝柳政丞亮。孟政丞思誠。國朝鄭河東麟趾。權吉昌擥。崔寧城恒。洪南陽應也。 上同 國朝父子入相者。黃翼成喜子烈成公守身。沈議政昷。子左相澮也。 上同 甲寅別試。崔恒爲壯元。曺錫文爲榜眼。朴元亨爲探花。具致寬居丙科。我光廟朝。四人相繼入相。一榜四相。古今所無也。上同 李思哲軆質豐大。飮食過人。每食一大器飯二蒸雞一壺酒。嘗患背腫臨絶。醫云。宜忌毒酒炙肉。公曰。與其不食而死。無寧食之而死乎。飮酒啖炙如常。卒獲平善。人皆曰。富貴者飮食。亦異於常矣。 上同 新羅時。東海濱有二人。夫曰迎烏郞。女曰細烏女。一日迎烏採藻海濱。漂至日本爲王。細烏尋至其國爲妃。時日月無光。日者奏云。迎烏細烏。日月之精。今去日本。故有此怪。王遣使求二人。迎烏以細烏所織綃付之。使祭天於池上。日月復光。池曰日月池。遂置縣。以迎日爲名。 上同 唐宋奏事。皆用箚子。居正之長憲府也。始建議立箚子之法。蓋懼言辭出納之際有遺失且防後世近侍中官用事之漸。法初立。人皆以爲萬世可行之良法也。近來爲臺諫者。不識大軆。少得過失。則深文羅織。極口詆壞。箚子之設。適足以害人而已。天下未有法立而無弊者也。 上同 近有一奴。酷似女奴。自少雌服。出入士大夫家。事頗露。臺諫請論如法。世祖以事涉曖昧。欲貸之。顧問臣居正。對曰。臣少閱江湖記。江湖間一比丘尼善針繡。有良家遣女兒師事之。忽覺有娠。爺孃詰責之。女曰。與比丘尼同寢處。如有人道。乃至於斯。良家訴官。覈審比丘尼。則陰陽二道俱闕。官將貸之。有老嫠曰。用鹽湯浸陽根上。以黃狗舐之。陽道逬出。試之果然。官曰。非男非女。亂人道之正。誅之。 上同徐居正少與二三人遊山寺。見一畫佛。題其上曰。孔子讚。吳道子畫。蘇軾書。或曰孔子周人也。漢明帝時。佛法始入中國。謂孔子讚佛無理。且吳道子唐人也。安有吳道子畫而孔子讚。蘇軾生於千百載之後。安得與孔子同時。而書所著之讚乎。必後世好事者所爲也。 上同 麗季。若値酒禁。臺官不飮。諫官飮酒自若。諫官以朱衣爲前驅。臺官以烏衣爲前驅。嘗於禁酒時。朱衣大醉。詆烏衣曰。我則日日沈醉。面朱故衣亦朱。汝則如汝臺官。酸冷不飮酒。面長有黑色。衣亦烏。聞者皆笑。 上同 四佳有南海漕舡詩。帆檣織織簇如麻。租賦南方較舊多。獨喜靑山漕不得。年年長屬野人家。 本集 景泰癸酉。光廟之赴京也。徐居正以校理隨行。到鴨綠江。是夕居正母訃至。光廟欲秘之。夜居正有異夢。驚起流涕。同宿者問之。居正曰。夢月怪在天。月母象也。吾有母在堂。夢徵不祥。是以悲耳。有以此言告者。光廟嘆曰。居正之誠孝。足以動天。遂以實言之。光廟常稱鴨綠之夢曰。吾之取子。非獨才也。 上同 典文衡二十二年。掌試取士者。二十三榜。多得人。董學士越來頒詔本國。見居正甚尊禮之曰。曾見倪學士遼海編。又見祁戶部皇華集。欽慕高風久矣。今何幸得相見也。 上同 御史之職。其任重其責大。君有過擧。則批龍鱗抗雷電觸鐵鉞。而不辭。臣有愆違。則得以繩糾之。貴近有驕悍。則得以彈擊之。 憲府題記 有妓紫洞仙。才貌冠絶。宗室永川君酷愛之。永川君嘗寵靑郊柳。旣而移愛於紫洞仙。適往松都。都中有靑郊驛紫霞洞。徐達城以詩贈之曰。靑郊楊柳傷心碧。紫洞烟霞盡意濃。永川君常誦此詩以自誇 劇談 成化間。兵曹請刊銃筒鑄成放砲式。令頒給沿海各官。常行肄習。居正以爲不可。啓曰。火藥出於倭地。我境與彼密邇。況三浦之倭。與國人雜處。恐細奸之民潛通。流入於彼土。非國家之深計也。上曰。當初不復深惟其弊。此言甚當。 雜記 公山有百濟時所造石甕。徐四佳公山十景。有石甕菖蒲詩。百濟古物惟石甕。腹大濩落何所用。誰知昌陽天地精。斲石開雲此移種。 勝覽 平海郡有海棠岸。徐四佳有詩云。金鰲頭戴山重重。兩崖夾走盤靑龍。一夜光風吹嫋嫋。海棠開遍紅髼鬆。 上同 徐達城東都十二詠曰。雞林靈異。鰲山奇勝。鮑亭感懷。蚊川騁望。半月古城。瞻星老臺。芬皇廢寺。靈妙舊刹。五陵悲弔。南亭淸賞。聞玉篴聲。過庾信墓。 上同 唐津下流有洗姑灘。徐達城詩。江邊洗姑顏如花。小少洸澼爲生涯。朝洗白足如雪色。暮洗白腕如霜華。朝朝暮暮洗復洗。一身自潔心自多。燥白白於水繭絲。夜夜向月嗚寒梭云云。忽有狂風天地黑。塵沙漠漠迷所之。蒼頭顚倒泥潦中。玉色已誤衣復緇。小娘出門待姑歸。姑洗姑洗來何遲云云。 上同 村人於平原曠野。累土爲高。上施畢弋罥禽鳥者。謂之草纛。有一官出宰。闇於吏事。終日兀坐如泥塑然。民有訟於官不雪其冤者。曰此草纛何時開口乎。 滑稽傳順興郡小而妓惡。饌品亦薄。南智爲監司。金文起爲亞使。金虎生爲郡守。一日監司爲設宴。官妓裙色淡紅。郡守鼻齄爛紅。亞使曰。妓裙雖淡。主人之鼻爛紅。一可賀也。主人行酒執大鍾。亞使曰。郡雖小鍾則大。二可賀也。羹飯進。亞使曰。飯紅醬白。三可賀也。是稱順興三可賀。 上同 雞林有一美娼。長安一年少頗情好珍重。臨別善哭。年少以行橐贈之。娼謝曰。願得君切身之物。年少折板齒與之。及還京。廉聞娼纔別就他。遣蒼頭徵還板齒。娼撫掌大笑曰。屠門戒殺。娼家責禮。非愚則妄。有人作詩譏之曰。莫言這物恩情薄。齒豁頭童得壽徵。 上同 有一達官。未達時。常騎牛而出郊。人譏之曰。何不騎馬而牛乎。答曰。馬者午也。縮頭爲午。出頭爲牛。此吾出頭象也。人皆奇。後脫至達頭。 上同 有長身者。譏矮者作詩云。着笠纓垂地。穿靴已沒頭。路逢牛跡水。欲渡芥爲舟。矮者次曰。蓋衾欲露脚。入屋先打頭。斬脚方入槨。刖足可撑舟。○有一豪將將。病劇。請醫診之。左粉黛右琴瑟。酒肉羅前。醫曰。如欲理病。宜先去此等物。豪將曰。吾之欲延朝夕之命者。正爲此等物。如使去之。雖享百年。吾不欲也。醫笑而退。○有文士金柳。分居里之東西。柳東金西。柳譏金曰。西心爲惡。西口爲哂。○有一邑宰。性不廉謹。好吟咏。有措大曰。是爲足足鳥。古人有詩云。足足長鳴鳥。如何長足足。世人不知足。是以長足足。蓋譏其不廉也。宰曰。汝不知是爲呵呵鳥。昔人有詩云。呵呵呵呵鳥。呵呵復呵呵。昔人大可笑。是以長呵呵。○有一守令。待客饌品有三等。常約邑人。厚餉者則撫眉。次則撫鼻。又次則撫頤。餉儀豐儉。以此爲驗。有一客。見守捫頤。避席請曰。夙有交分。願亨以眉。守赧然。饌品甚盛。○近世有一吏姓周者。美風儀。一日投宿一村舍。適主家醮女。周冀霑餘瀝。間坐席末。夜旣深。衆賓皆散。新壻被酒。周獨在賓席。主家誤認爲新壻。揖入之。比曉主翁知之。欲逐之。周從出拜曰。女子之道。一與之齊。終身不改。一失其行。中士恥爲其夫。奪我令節之人。爲彼虧行之婦。不亦左乎。翁唶舌良久曰。爲之奈何。遂定爲甥舅。後周立門戶。子孫繁盛。○近有斯文姓金者。善談笑。嘗訪友。友爲設酌。只佐蔬菜。先謝曰。家貧市遠。絶無兼味。惟淡薄是愧。適有羣鷄。啄庭除。金曰。當斬吾馬。主人曰。斬一馬。騎何物還。金曰。借鷄騎還。主人大笑。殺鷄餉之。○南州有一守。性貪墨。一日民有罪當贖。吏徵犢子而來。守叱退曰。徵布物而來。民憤之訴於庭曰。願一言而死。守曰任汝所言。民曰布物無脛。能抵子家否。有四足。將無抵乎。守大慚。○近世上舍宋克明鼻齄。學中號曰宋橘。有一上舍。作橘賦曰。有天作之橘。有人作之橘。洞庭之橘。天作之橘也。克明之橘。人作之橘也。○衛士龍順雨性癡直。少名珊瑚。元日賀百官排班。順雨亦持戟庭立。通禮唱山呼。順雨曰唯。通禮再唱山呼。順雨曰唯唯。滿庭皆笑。誤認以山呼爲珊瑚。○上舍吳陟之嘗過一縣。佳賓咸集。上舍後至居末。擧止羞澁。主人劈橘作杯。盃行到吳。飮訖幷喫橘盃。一座喧劇。○柳孝寬性㥘。嘗於國子課試。鳴鼔督之。執草遑窘。字字分裂。化爲蠅蛾而飛。不卞一字。○有一瞽者。與數十人往金剛山而還。有問揄岾棟宇之制。無能對者。瞽者曰。佛殿瓦溝百二十也。人問其故。瞽曰。初到時。忽有驟雨。瓦溜滴成窠凹。我捫其數而知之。○有儒士。五人會飮。作酒令曰。一字而三音。意味醺甘者飮之。一人曰。行行行。餳水喫砂糖。一人曰。說說說。熊掌合淸蜜。一人曰。樂樂樂。醇酒和酡酪。一人曰。重重重。香閨雲雨濃。最後一人苦吟曰。已己巳。白粒持歸市。四人曰。已己巳非一字。白粒非醺甘。其人曰。三字畫同。白粒持歸市。則砂糖在是。雲雨亦可濃也。豈不醺甘乎。○有二老官。比隣相從。一鑷白黑如漆。一不鑷白如雪。黑者曰。鑷有五利。曰掩醜老。曰美容顏。曰隨少年。曰悅妻妾。曰不致仕。白者曰。有形鬚髥或可隱。無形之年齒。終能諱歟。○有一士子。性偏急。嘗食獨䔉。圓小以箸着之不得。怒起踏之。○書生尹發性㥘嘗於場屋名紙上。磨墨長嘯曰。誰謂尹發㥘。學中號曰尹㥘。○有文士數人。與西原名妓下陽臺。會作文字會。陽臺歌舞遏雲。有武士在末席。適黃雀投宿簷端。武士彈之。丸激簷楣。反入陽臺口。折板齒。有措大。賦詩嘲之云。西原佳妓下陽臺。歌舞叢中獨擅才。最恨當年文字會。適從何處武人來。金丸反入風流竅。玉齒飜成脾睨開。自從繞梁聲反澁。空敎座客恨難裁。 閑話 我英廟朝。學擧業者。徒事騈儷。不讀半行經書。講經之議。始於我文廟在東邸親臨講問。一生講書䀌傷之䀌曰盡。一生講詩殿屎之屎曰尾。一生講禮檀弓曰檀木之弓。一生講春秋鄭突之突曰突升。諸生相詬曰。䀌屎變音。弓突易名。哿矣三場。難哉五經。 上同 近有一學長。淸吟無比。嘗作乞衣詩呈于邑宰曰。寒藏四軆藏頭鼈。冷縮雙眉縮頸蝙。 上同 柳上舍孝寬性㥘。嘗於國學課試。鳴鼔督之。柳面或靑或白。時人以靑㥘紅㥘譏之。上同 李思哲與權妓申枰少遊三角山。各佩一壺酒。無飮器。權穿馬皮套鞋。可容一二椀。李如約飮之。諸君以此皆飮。後貴顯語權曰。今日金盃酒味。甚不如遊山時皮鞋盃也。 上同 近世有官承命。刷定軍額。苛察不貸。有一人。扶杖膝行曰。右足蹩不能步。官出遣之。其人蹩左足而出。官拿問曰。入何右蹩出何左蹩。其人猝應曰。忽忘右而左。官曰。今定汝役。蹩之左右。任汝爲之。 滑稽傳 近有一書生。場圍日逼。忌用落字。駝駱則曰駝立。魚有落地則曰立地。如犯落字。則必罰之。將入棘圍。衆中墮名楮於地。一生隨後言。汝之名楮立矣。生不悟遂失之。 上同 近有一文士。爲執禮。友人戲於儀注中樂作樂字上。加草頭。乃行禮唱曰藥作。聲未落。更唱曰去草頭樂作。時人號曰藥作執禮。 上同 近有三館新進士。擬設紅裙會。相與議曰。若使風流文彩者間坐。則吾輩事去矣。宜請容貌不揚者爲座客。以金安節尹統庾順道爲座客。三先生皆貌醜者。聞者皆笑。世因貌醜者曰座客。○近有出宰晉陽。徵斂無藝。雖山林蔬果。利無少遺。寺社髡緇亦受其弊。一日雲門寺僧來謁。宰曰。汝寺瀑布。今年想佳。僧不知瀑布爲何物。恐亦徵斂。應聲曰瀑布今年爲猪喫盡。有人作詩嘲之曰。寒松何日虎將去。瀑布當年猪盡喫。江陵有寒松亭。山水之勝。擅於關東。使華賓客之往來。輪蹄輳集。供億不貲。州人常詬曰。寒松亭何日虎來將去。○有一郞官。年頗老。髥髭半白。嘗見一佳妓。悅而挑之。妓曰。嗚呼其老也。郞官還來倩細君鑷白。細君盡去其黑而存白者。誣曰。近日善自修飾。非復前日髥。老郞大喜。抵妓家託曰。我面如丹。我髮如漆。妓微笑。故取鏡置屛障間。郞引身自照。皤皤然一老郞。大慚而還。○有一大將。酷畏妻。一日豎紅靑旗於郊。令曰。畏妻者紅。不畏妻者靑。衆皆紅。一人獨靑。大將壯之曰。我領百萬之衆。臨敵鏖戰。矢石如雨。曾不少拙。至於閨門之內。恩常掩義。子何修而至此。其人曰。妻常戒。三人聚會必談女色。汝愼勿往。今見紅旗下聚人甚衆。是以不往。大將喜曰。畏妻不獨老物。○有兩文士。比屋而居。一髥一禿。每相嘲謔。禿嘲髥曰。可笑于思客。渾身是髮毛。兩腮何處在。一鼻獨能高。未見靑唇動。時看白齒搖云云。髥嘲禿曰。禿老知何物。容顏汝可憎。初看疑醜婦。細見似妖僧。巷伯眞同調。優姿合作朋。似聞甘露變。渠輩痛先懲。○有三儒生。會讀書。有遣白粒者。一人嗜酒。一人嗜飯。一人嗜餠。三人曰。當以文義爲勝否。餠者曰。沽酒不食。不時不食。飯者曰。酒喪厥儀。餠不救飮。酒者曰。小兒啼餠。餓者乞食。昔堯飮千鍾。舜飮百榼。禹飮而甘。高宗命作醴。康叔德將無醉。孔子有酒無量。晉平揚觶。魏文浮白。伯倫頌其德。樂天讚其功。焦華著其譜。徐邈稱其聖。況天有酒星。地有酒泉。鄕有酒鄕。仙有酒仙。自古及今皆稱曰酒。無一語及餠與飯。於是沽酒滿眼。餠者嗅氣而醉。飯者執盞而倒。酒者引滿健倒陶陶而已。○衛士龍順雨性癡直。嘗夜行遇巡官。潛伏橋下。是夜適以龍虎爲號。巡官禁人曰龍哥。順雨以爲認己。遽出呈身曰。我是龍哥。巡官笑遣之。俗因號愚者龍哥。○有一士子。性偏急。啜菜羹唇爛。起以靴鼻蹴之。羹汁被家婦頭面。婦徐徐拂袖曰。吾頭面化爲口腹。喫盡一椀煖羹矣。○有一官。到三嘉縣。主倅設酌。用陳色酒。色味皆惡。勸之甚苛。官停杯蹙頞曰。騮馬能嚙。何以堪飮倅曰何也。酒色黃赤如騮。其味酸辣。口吻痛楚如嚙。遂大笑罷酒。有人作詩戲之曰。太守慇懃騮馬酒。○近世有朝士姓咸者。不近權貴。由是官不達而死。俗以爲氷凍死。有姓金者。奔走權門。求美官而暴死。人以爲近熱爛死。有人作詩嘲之曰。火鼠氷蟲不思兼。人間寒熱性偏堪。閻羅定作平和劑。殺却炎金補冷咸。○四佳有野老送蟹詩一絶。玉鰲金甲內黃候。風味江湖第一流。可惜無腸空郭索。不辭五鼎近糟丘。○近世有一宰臣。性過緩。嘗以重價市馬於肆。三年不知爲牝。一日騎赴會。有風馬者。衆笑曰。崔宰相之馬也。崔徐徐言曰。吾馬是牝耶。吾初以父馬而置之。賊奴欺我也。○我光廟設登俊試。金守溫爲壯元。姜希孟爲亞元。徐居正爲探花。徐寄詩于姜曰。探花三月差遲晩。最好芳菲二月天。二月亞元也。三月探花。殿試以第三爲探花郞。 詩話 日本東征天使題驪江淸心云。江淸徹見水中水。樓逈可觀山外山。徐達城曰。山外山意好。水中水前輩無此等語。頗牽强。○李大諫仁老。林間出沒幾多屋。天末有無何處山。李政丞混。長天去鳥欲何向。大野東風吹不休。李相國奎報。郵吏送迎何日已。使華來往幾時休。三李句法相似。然奎報詞語重複未圓。當豎降幡。○唐時麗使過海有詩云。水鳥浮還沒。山雲斷復連。賈浪仙作爲梢工聯云。棹穿波底月。船壓水中天。麗使嘉歎不復續。以麗使爲崔孤雲。○松都天水院壁。有詠落花詩云。帶雨無情墮。乘風作意回。映溪千萬朵。却恨十分開。徐達城評云。意深而語滯。好詩者當卞之。○詩者言之發氣之充。古人以爲讀其詩而可知其人。○雪梅名妓也。善唱樂詞。趙浚初入相。諸國老設宴西郊以慰之。酒未半。命召赴闕。諸老共進一爵。命雪梅唱歌詞。乃唱西園未罷看花會。又被宣招宴上陽之句。一座驚歎。後河崙巡察西鄙。設帳都門外。簪纓滿座。雪梅又唱。勸君更進一杯酒。西出陽關無故人之句。一座稱歎不已。○李奎報東都三百韵。重押二施二祗字。有何所祖。徐達城曰。杜甫八仙歌。押二眠三前字。古人尙然。何獨愧於李乎。○古人作詩。無一句無來處。李政丞混。上浮碧樓詩。永明寺中僧不見。永明寺下江自流。本太白鳳凰臺上凰鳳遊。鳳去臺空江自流。山空孤塔立庭除。人斷小舟橫渡頭。本韋蘇州野渡無人舟自橫。長天去鳥欲何向。大野東風吹不休。本陳后山度鳥欲何向。奔雲亦自閑。往事微茫問無處。淡烟斜日使人愁。本太白摠爲浮雲能蔽日。長安不見使人愁之句。句句皆有來處。粧點自妙。格律森嚴。○古人云。天下無無對之句。薛司藝緯忤執政褫職。有句云。怒於甲者移於乙。用則行之捨則藏。徐達城頃在春坊聯句云。治國其猶指諸掌。崔文靖恒對曰。存人者莫良於眸儘乎天下無無對之句。○李仁老瀟湘八景絶句。淸新富麗。工於模寫。陳澕七言長句。豪健淸峭。得之詭奇。皆古今絶唱。後之作者。未易伯仲。○古之詩人。托物取況。語多精切。如黃山谷詠茶糜詩云。露濕何郞試湯餠。日烘荀令炷爐香。以丈夫比花。崔文靖恒詠黑豆詩云。白眼似嫌憎客意。漆身還有報仇心。以文人烈士比黑豆。用事奇特。○崔忠獻集門客四十餘員。賞冬日牧丹。邀李奎報。以諸姓押韻賦詩。古人未有以人姓押韵賦詩者。亦一詩家之俳優。非正軆也。○晩翠堂趙先生詠秋嶽詩。磨鎌似新月之句。語徐達城曰。韓退之詩。新月似磨鎌。吾用此語而反其意。所謂飜案法。○李陶隱鄭三峯之詩。齊名一時。李淸新高古。而乏雄渾。鄭豪逸奔放。而少鍛鍊。互有上下。牧隱每當題評。先李而後鄭。○柳思菴淑乞退詩云。大名之下久居難。讒者訴于辛旽害之。朴貞肅安信坐言事當誅。吟一絶云。恐君得殺諫臣名。我太祖聞而霽威。人曰。詩能殺人。亦能活人。○新羅朴學士仁範。題經州龍朔寺詩。燈撼螢光鳴鳥道。梯回虹影落巖扃。高麗朴參政寅亮。題泗州龜山寺詩。塔影倒江飜浪底。磬聲搖月落雲間之句。皆載方輿勝覽。吾東人之以詩鳴於中國。自諸君子始。○高麗革命。諸王皆屛居海島。有山僧。與一王氏相善。欲追別海岸。舟已解纜。僧揮笠示之。王氏斷袖血書云。一聲柔櫓蒼茫外。且問山僧奈爾何。向岸投之。僧泅得之。痛哭而返。○徐達城云。予嘗愛李文順。披衿快得風從北。隱几終敎日向西。言順字穩以爲佳對。後見韓子蒼詩。朝辭杞國風微北。夜泊寧陵月正南。李使字與韓甚相似。雖謂之暗合可也。○千峯上人有一聯云。檜老千年色。鍾寒半夜聲。陶隱獨愛之曰。此謂釋氏聲色俱空言也。○西都有錦繡山。其峰曰牧丹。麗王嘗幸此峯。御製唱句云。北斗七星三四點。有一生進對曰。南山萬壽十千秋。王嘆賞爲第一。三四爲七。十千爲萬。○有一華使。題古風一篇于太平館。自批云。精深雅健。又賦放鞍馬詩曰。漢文旣是輕千里祖逖無心着一鞭。又自批老健。人臣以漢文自比。識者譏之。 詩話徐居正多愛句中字疊。如雪中出去雪邊行。屋下吹來屋上平。積得重重那許重。飛來片片又何輕。 瑣錄 魯典書璵書順興樓詩。寒推岳色僧扃戶。冷踏溪聲容上樓。許平章伯杆城樓詩。五更曉色先虛閣。一葉秋聲滿小樓。孰優。徐達城曰。魯詩大巧而反拙。許詩似俗而大奇。 詩話 我海東諸輩詩。多用子規。如李堅幹隔窓杜宇終宵聽。尹汝衡杜鵑啼血杜鵑花。曺係芳子規來叫月明時。語皆淸絶。其中李詩尤高。 詩話 詩不可舍評而祛疵。醫不可棄方而療疾。如李益齋稗說李大諫破閑等作。而吾東方詩學精粹。始有得所考。 詩話序 金富軾鄭知常。以詩齊名一時。金詩嚴正典實。眞有德者之言。鄭詩語韵淸華。句格豪逸。深得晩唐軆。二家氣象不侔。 詩話江陵府有雲錦樓。樓南有池。蒔以芙蕖。池中有島。島上又種竹。池水漲綠。荷花盛開。紅香綠影。映帶繚繞。凈而植者。淸而遠者。奇姿異態。氣象不同。 徐達城記 勿醜婦醜醜。勿薄酒薄薄。古來美酒伐人性。未有哲婦不亡國。 四佳後薄薄酒錦江下流有一亭。昔有一按廉。登眺亭上。酒酣不覺醉舞。仍號其亭。曰按舞。後有一州倅。欲重修。爲監司所譴。未果。詩人笑曰。昔有醉舞按廉。今有醒吟監司。徐達城有詩。殺此風景是何人。白頭監司眞惡客。 勝覽 公山十詠。有金池菡萏。徐達城詩云。天孫爲織雲錦機。綠爲裳兮紅爲衣。宜風宜雨又宜月。輕烟細霧香霏霏。 上同 守令卽古之諸侯。於民有父母之道。於吏有君臣之分。於父母之心愛民則民悅。操威福之柄御吏則吏畏。民不悅則失之苛。吏不畏則失之慢。 四佳亭集 南谷李先生有二孫。長曰宗儉。季曰宗謙。年未衰耗。皆謝簪笏。來家焉構亭。號曰孝友。兩先生山冠野服。白鬚紅顏。日杖屨於其中。吟哦談笑。其樂囂囂。其風流高致。一鄕慕之。求之於古。當不減於兩疏。 徐達城同亭記 東都有一村娼獨居。夜忽大震俄霽。庭中有一物。光彩爛然。就視之。明珠團圓。如雞卵大。置之房中。每夜光如燈燭。纖毫可鑑。有一年少。濃誘袪去。詿云納府。朝庭遣官劾推。竟不得。年少素貧乏。日就饒富。人疑其珠使也。 筆苑東方屬木。宜尙靑。而尙白。是金克木不可也。蓋陽中有陰。陰中有陽。屬靑而尙白。是陰中之陽也。 上同 延安地鮒魚多產。極肥大。有一宰。酷嗜蒸鮒。一日三四進。下筯一空。邑人嘲之。大書館壁曰。六年何事業。喫盡一池魚。仍號曰鮒魚塚。 上同 濟州之地。多出珍產。如橘柚橙柑美具貞梓。他邑所無。至於海錯。財貨之資於人者夥。故商船之懷利者。往來如梭。 出四佳集 盈天地之間者。其物有萬。皆有自性。如山有山之性。水有水之性。嵬然高大。孰不知其爲山。汪然流下。孰不知其爲水。于以見似異而有同。似同而有異。變化無定之妙也。 石假山記 山之氣勢。左右綿絡。峭然而爲峯。隆然而爲嶺。窈然而爲壑。蓊然而爲麓。乍低乍昂。紆靑繚白。其爲狀不一。 上同 公山有吏兒。嘗從州牧兒讀書。牧兒得熊掌而食。與吏兒魚頭曰。何不食熊足。吏兒曰。大丈夫立志。要居人上。寧食魚頭不食熊足。一世奇之。後果至達官。 滑稽傳徐達城蓮塘繡鴨詩曰。翠蓋紅粧蔭碧漣。一雙花鴨錦成鈿。江湖矰繳何曾管。閑倚晴沙穩作眠。 本集 過松京懷古云云。一朵松巒高入天。荒城落日鎖寒烟。傷心欲問前朝事。雲物渾非全盛年。上同



 
고려사절요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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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종 성효대왕(熙宗成孝大王)
기사 5년(1209), 송 가정 2년·금 동해후(東海侯) 대안(大安) 원년·몽고 태조 4년

○ 봄 정월에 왕이 금주(金主)가 붕(崩)하였다는 말을 듣고 봉위사(奉慰使) 사홍기(史洪紀)와 제전사(祭奠使) 이순중(李淳中)을 금 나라에 보냈다. 순중이 제기(祭器)를 금 나라에 청하니 담당 관원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순중이 말하기를, “길이 너무 멀어서 부음을 제일 늦게 들었기 때문에 빨리 행장을 차려 오느라고 미처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대국이 어찌 작은 일로 책망하며 이 제기를 아까워합니까.” 하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제사지낼 때에 차린 것이 정결하고 많으니 금 나라 사람이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겼다.
○ 금 나라에서 손거관(孫居寬)을 보내와서 금주(金主)의 상을 알렸다.
○ 3월에 상장군 김원걸(金元傑)과 예부시랑 방응교(房應喬)를 금 나라에 보내어 금주(金主)의 즉위를 하례하게 하였는데, 그 표문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넜으니 진(晉)나라 조정에 새로 왕이 선 것을 보겠고, 여섯 용이 위(位)에 올랐으니 복희(伏羲)·역경(易經)의 대인(大人)을 본다는 말에 부합하였다.[五馬渡江 表晉朝之開新主 六龍御極 符羲易之見大人].” 하였으니, 소부감 최보순(崔甫淳)이 지은 글이다. 금주의 형제가 위(位)를 다투었으므로 그 글이 사실에 저촉된 것을 싫어하여 중서성에서 힐문하기를, “우리 성상이 제위에 오른 것은 진 나라의 오마(五馬)가 강을 건넜던 일에 비교할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말을 쓰느냐.” 하였다. 보순이 이 일로 파면되었다.
○ 여름 4월에 최충헌이 우복야 한기(韓琦)와 장군 김남보(金南寶) 등 9명을 죽이고, 그들의 종자를 나누어 먼 곳의 섬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청교(靑郊)의 역리(驛吏) 3명이 충헌 부자를 죽이려고 거짓으로 공첩(公牒)을 만들어 여러 절의 중들을 불러 모았다. 공첩이 귀법사(歸法寺)에 이르니 중이 공첩을 가지고 온 사람을 잡아서 충헌에게 알렸다. 충헌이 즉시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영은관(迎恩館)에 따로 설치하고 성문을 닫고 그 당(黨)을 크게 수색하니, 청교 사람이 이로 인하여 한기를 참소하여 무함한 까닭에 아들 셋과 함께 살해 되었다.
○ 5월에 평장사 최선(崔詵)이 졸하였다. 선(詵)은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염담(恬淡)하고 말이 적으며, 문벌(門閥)로써 자부하지 않고 어진 이를 예(禮)로 대우하고 선비에게 자기 몸을 낮추었다. 왕은 선(詵)이 나이 많고 덕이 있으므로 참지정사에서 관등을 뛰어 총재(冢宰)에 임명하였더니 조금 후에 늙음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 6월 1일 계해에 일식이 있었다.
○ 평장사 김봉모(金鳳毛)가 졸하였다. 봉모는 풍채가 아름답고 또 금 나라의 말과 한족의 말을 해득하였으므로 매양 금 나라의 사신이 이르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였다.
○ 가을 9월에 최충헌이 빈객을 모아 중양절 잔치를 베풀었는데, 도방의 힘이 센 사람을 시켜 손으로 서로 치게 하여 이긴 사람에게 곧 교위와 대정(隊正)에 임명하여 그들을 포상하였다.
사신 임익(任翊)이 말하기를, “국가가 정사(政事 관리(官吏)의 인사)를 반포(頒布)하는 예(例)를 살펴보건대, 6월에 반포하는 것을 권무정(權務政)이라 하고, 12월에 반포하는 것을 대정(大政)이라 한다. 이부·병부의 판사(判事)가 여러 동료와 각 부(部)에 모여 앉아 공이 있는 사람은 승진시키고, 죄가 있는 사람은 파출시켜 한 번 승직시키고 한 번 파출시킴도 모두 왕의 명을 받게 되었으니, 이 시기를 지나면 비록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임명할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공이 없는 사람에 있어서랴. 충헌의 위세가 한 나라를 기울일 정도여서 정권을 혼자 마음대로 하였다. 만약 결원이 있으면 관작이 공기(公器)인 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에 눈앞의 조그만 놀이로써 나라의 근본 법규를 문란하게 하고, 또 측근의 청탁으로 인하여 혹은 동반(東班)의 권무직(權務職)을 임명하기도 하며, 만약 뇌물을 바친 것이 마음에 맞는 사람이면 곧 관직을 주었으니, 그 정사(政事)를 반포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법을 희롱함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 평장사 기홍수(奇洪壽)가 졸하였다. 홍수는 젊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하였는데 장년이 되어서는 붓을 던져버리고 무반에 종사하여 벼슬이 누진되어 평장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나이를 이유로 과감히 물러나 거문고와 글로써 스스로 즐기었다.
○ 겨울 11월에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돌아왔다. 포시(晡時)가 될 무렵에도 어가(御駕)가 출발하지 않으니 좌어사(左御史) 최부(崔傅)와 우어사 윤세유(尹世儒)가 배 고픔이 심하여 길가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다가 어가가 나옴을 알지 못하였다. 부(傅)는 어가의 길을 범하고, 세유는 술이 몹시 취하여 사람을 시켜 말고삐를 잡게 하며, 말이 광란(狂亂)하니 헌부(憲府)에서 탄핵하여 부(傅)는 안동도호부판관으로 세유는 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서연(徐延)을 금 나라에 보내어 정조를 하례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호부시랑 간근정(幹勤正)을 보내왔다.
○ 참지정사 이춘로(李椿老)가 졸하였다. 춘로는 청렴하고 근신한 이라고 일컬었다.

[주D-001]다섯 말 : 서진(西晉) 이 망하고 황족(皇族) 사마씨(司馬氏) 들이 양자강을 건너갔는데, 그 중의 낭랑왕이 동진(東晉) 의 황제가 되었다. 그 당시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너서 한 말이 용이 된다.”는 동요의 예언이 있었다.
[주D-002]여섯 용 : 《주역》에 건괘(乾卦) 의 육효(六爻) 를 6용(龍) 으로 상징하였는데, 6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은 왕의 즉위를 상징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1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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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종 성효대왕(熙宗成孝大王)
기사 5년(1209), 송 가정 2년·금 동해후(東海侯) 대안(大安) 원년·몽고 태조 4년

○ 봄 정월에 왕이 금주(金主)가 붕(崩)하였다는 말을 듣고 봉위사(奉慰使) 사홍기(史洪紀)와 제전사(祭奠使) 이순중(李淳中)을 금 나라에 보냈다. 순중이 제기(祭器)를 금 나라에 청하니 담당 관원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순중이 말하기를, “길이 너무 멀어서 부음을 제일 늦게 들었기 때문에 빨리 행장을 차려 오느라고 미처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 대국이 어찌 작은 일로 책망하며 이 제기를 아까워합니까.” 하니, 그제야 허락하였다. 제사지낼 때에 차린 것이 정결하고 많으니 금 나라 사람이 지극한 정성을 가상히 여겼다.
○ 금 나라에서 손거관(孫居寬)을 보내와서 금주(金主)의 상을 알렸다.
○ 3월에 상장군 김원걸(金元傑)과 예부시랑 방응교(房應喬)를 금 나라에 보내어 금주(金主)의 즉위를 하례하게 하였는데, 그 표문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넜으니 진(晉)나라 조정에 새로 왕이 선 것을 보겠고, 여섯 용이 위(位)에 올랐으니 복희(伏羲)·역경(易經)의 대인(大人)을 본다는 말에 부합하였다.[五馬渡江 表晉朝之開新主 六龍御極 符羲易之見大人].” 하였으니, 소부감 최보순(崔甫淳)이 지은 글이다. 금주의 형제가 위(位)를 다투었으므로 그 글이 사실에 저촉된 것을 싫어하여 중서성에서 힐문하기를, “우리 성상이 제위에 오른 것은 진 나라의 오마(五馬)가 강을 건넜던 일에 비교할 것이 아닌데 어찌 이런 말을 쓰느냐.” 하였다. 보순이 이 일로 파면되었다.
○ 여름 4월에 최충헌이 우복야 한기(韓琦)와 장군 김남보(金南寶) 등 9명을 죽이고, 그들의 종자를 나누어 먼 곳의 섬으로 귀양보냈다. 처음에 청교(靑郊)의 역리(驛吏) 3명이 충헌 부자를 죽이려고 거짓으로 공첩(公牒)을 만들어 여러 절의 중들을 불러 모았다. 공첩이 귀법사(歸法寺)에 이르니 중이 공첩을 가지고 온 사람을 잡아서 충헌에게 알렸다. 충헌이 즉시 교정별감(敎定別監)을 영은관(迎恩館)에 따로 설치하고 성문을 닫고 그 당(黨)을 크게 수색하니, 청교 사람이 이로 인하여 한기를 참소하여 무함한 까닭에 아들 셋과 함께 살해 되었다.
○ 5월에 평장사 최선(崔詵)이 졸하였다. 선(詵)은 유청(惟淸)의 아들이다.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염담(恬淡)하고 말이 적으며, 문벌(門閥)로써 자부하지 않고 어진 이를 예(禮)로 대우하고 선비에게 자기 몸을 낮추었다. 왕은 선(詵)이 나이 많고 덕이 있으므로 참지정사에서 관등을 뛰어 총재(冢宰)에 임명하였더니 조금 후에 늙음을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 6월 1일 계해에 일식이 있었다.
○ 평장사 김봉모(金鳳毛)가 졸하였다. 봉모는 풍채가 아름답고 또 금 나라의 말과 한족의 말을 해득하였으므로 매양 금 나라의 사신이 이르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였다.
○ 가을 9월에 최충헌이 빈객을 모아 중양절 잔치를 베풀었는데, 도방의 힘이 센 사람을 시켜 손으로 서로 치게 하여 이긴 사람에게 곧 교위와 대정(隊正)에 임명하여 그들을 포상하였다.
사신 임익(任翊)이 말하기를, “국가가 정사(政事 관리(官吏)의 인사)를 반포(頒布)하는 예(例)를 살펴보건대, 6월에 반포하는 것을 권무정(權務政)이라 하고, 12월에 반포하는 것을 대정(大政)이라 한다. 이부·병부의 판사(判事)가 여러 동료와 각 부(部)에 모여 앉아 공이 있는 사람은 승진시키고, 죄가 있는 사람은 파출시켜 한 번 승직시키고 한 번 파출시킴도 모두 왕의 명을 받게 되었으니, 이 시기를 지나면 비록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임명할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공이 없는 사람에 있어서랴. 충헌의 위세가 한 나라를 기울일 정도여서 정권을 혼자 마음대로 하였다. 만약 결원이 있으면 관작이 공기(公器)인 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에 눈앞의 조그만 놀이로써 나라의 근본 법규를 문란하게 하고, 또 측근의 청탁으로 인하여 혹은 동반(東班)의 권무직(權務職)을 임명하기도 하며, 만약 뇌물을 바친 것이 마음에 맞는 사람이면 곧 관직을 주었으니, 그 정사(政事)를 반포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법을 희롱함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하였다.
○ 평장사 기홍수(奇洪壽)가 졸하였다. 홍수는 젊을 때부터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하였는데 장년이 되어서는 붓을 던져버리고 무반에 종사하여 벼슬이 누진되어 평장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나이를 이유로 과감히 물러나 거문고와 글로써 스스로 즐기었다.
○ 겨울 11월에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돌아왔다. 포시(晡時)가 될 무렵에도 어가(御駕)가 출발하지 않으니 좌어사(左御史) 최부(崔傅)와 우어사 윤세유(尹世儒)가 배 고픔이 심하여 길가 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다가 어가가 나옴을 알지 못하였다. 부(傅)는 어가의 길을 범하고, 세유는 술이 몹시 취하여 사람을 시켜 말고삐를 잡게 하며, 말이 광란(狂亂)하니 헌부(憲府)에서 탄핵하여 부(傅)는 안동도호부판관으로 세유는 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서연(徐延)을 금 나라에 보내어 정조를 하례하게 하였다.
○ 금 나라에서 호부시랑 간근정(幹勤正)을 보내왔다.
○ 참지정사 이춘로(李椿老)가 졸하였다. 춘로는 청렴하고 근신한 이라고 일컬었다.

[주D-001]다섯 말 : 서진(西晉) 이 망하고 황족(皇族) 사마씨(司馬氏) 들이 양자강을 건너갔는데, 그 중의 낭랑왕이 동진(東晉) 의 황제가 되었다. 그 당시에, “다섯 말이 강을 건너서 한 말이 용이 된다.”는 동요의 예언이 있었다.
[주D-002]여섯 용 : 《주역》에 건괘(乾卦) 의 육효(六爻) 를 6용(龍) 으로 상징하였는데, 6용을 타고 하늘에 오르는 것은 왕의 즉위를 상징한 것이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임오 9년(1222), 송 가정 15년ㆍ금 원광(元光) 원년ㆍ몽고 태조 17년

○ 봄 정월에 의주ㆍ화주ㆍ철관에 성을 쌓아 무릇 40일 만에 마쳤다.
○ 3월에 최우가 그 집에서 3품 이상의 관원에게 잔치를 베풀고, 또 4품관에게도 잔치를 베풀었다.
○ 여름 4월에 좌승선(左承宣) 최종준(崔宗峻)이 그 아들에게 국자감(國子監)의 시험을 보게 하려고 하였으나, 정록(正錄)이 아일(衙日)이 아니라 하여 굳이 거절하였다. 종준이 그 조카 사위인 최우에게 부탁하여 정록에게 청하니, 마지못하여 그를 시험보게 하였다. 옛 제도는 국자감이 4계월(季月 사계절의 마지막달 즉 계춘ㆍ계하ㆍ계추ㆍ계동) 6아일에 의관처자(衣冠處子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들을 모아 놓고 《논어》ㆍ《효경》을 시험해서 합격자를 뽑아 이부(吏部)에 보고하면 이부가 다시 그의 세계(世系 내력(來歷))를 상고하여 비로소 초직(初職)을 주는 것인데, 종준이 세도를 믿고 법을 문란케 함이 이와 같았다.
○ 양부(梁)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가을 7월에 동진군사 만여명이 정주(靜州 의주(義州) 부근)로 들어왔다. 예전에 한순ㆍ다지의 무리가 섬으로 분배(分配 귀양)되었다가 모두 사면령을 만나 고향으로 돌아갔었는데, 이에 이르러 다시 동진군사를 이끌고 정주에 들어와 드디어 의주를 침범하였다. 방수장군 수연(守延)이 맞서 싸우다가 패하였다. 인주(麟州) 사람이 적과 통하여 내응하기를 모의하였는데, 방수장군이 이를 알고 성 밖에 나와 둔을 치고 그 모의를 풀게 하며 군사를 몰아 동진군사를 엄습하여 2백여 급의 목을 베었다. 중군병마사 이적유, 우군병마사 조염경, 후군병마사 김숙룡(金叔龍)을 보내어 서경 군사를 징발하여 그들을 추격하여 잡았다.
○ 임신일에 혜성이 나타나고 8월 무인일에 혜성이 또 낮에 보이며,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왕태후 왕씨가 훙하였다. 태후는 신종(神宗)의 비인데 희종(熙宗)이 왕태후로 높였다. 태후는 어려서부터 여공(女功)을 힘썼고, 충헌이 신종을 폐립(廢立)할 때에 온갖 어려움을 다 거쳤으나, 삼가서 스스로를 지켰다. 시호를 선정(宣靖)이라 하였다.
○ 몽고 사자 31명이 왔다.
○ 겨울 12월에 최보순(崔甫淳)을 중서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로, 사홍기와 김취려를 참지정사로, 문유필을 지문하성사로, 정통보와 한광연을 모두 추밀원사로, 송신경(宋臣卿)을 지추밀원사로, 이적을 동지추밀원사로, 공천원(貢天源)과 오수기를 모두 추밀원부사로, 유택(柳澤)을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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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무자 15년(1228), 송 소정(紹定) 원년ㆍ금 정대 5년

○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에 지진이 있었다.
○ 김양경을 폄하여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삼았다. 양경은 비록 서생이나 평소 병법을 익혀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는데, 이때에 참소를 당하여 내쫓기니 고구(故舊) 중에서 한 사람도 양경을 전송하는 사람이 없었다.
○ 3월에 회음진(懷音鎭) 별장이 서도(西都)에 모반하는 자가 있다고 고하자, 병마사가 서도에 공문을 보내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고해 바친 자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최우가 이로 말미암아 북인(北人)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금의(錦衣)ㆍ금띠[金帶]ㆍ세마(細馬), 능라(綾羅) 50필, 명주와 모시 각 10필, 쌀 30석을 고한 자에게 상주고, 역(驛)에 명하여 그것을 집에 실어다 주게 하였다. 또 왕에게 특별히 포상하도록 주청하여, 왕 또한 구마(廐馬) 1필, 능라 40필, 명주 백 필, 베 2백 필을 내려 주었다. 회음진 도령 희간(希幹)이 모반한 자를 잡아 와서 고하니, 비단 40필과 구마 한 필을 내려 주었다.
○ 이돈(李敦) 등 31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 여름 5월에 북계에 적변(賊變)이 있는 데다가 메뚜기가 벼농사를 망치자, 왕이 내시를 나눠 보내어 중외의 신사(神祠)에 빌고, 또 반야도량(般若道場)을 선경전에 27일 동안 베풀었다.
○ 6월에 동진 모극왕(矛克王)의 종 비사력(卑司曆)ㆍ고린(高隣)ㆍ간란가(幹闌哥) 등이 와서 투항하였다. 장생서(掌牲暑) 죄수들 가운데 자색이 아름다운 한 여자가 있었는데, 서리(署吏)가 당직날 저녁에 강간하려고 하니, 그 여자가 굳게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 역시 대정(隊正)의 아내인데 어찌 남에게 몸을 맡기겠느냐." 하였다. 서리가 기어이 그를 강간한 뒤에 돼지우리에 가두었더니, 뭇 돼지들이 앞 다투어 그 여자를 물어 뜯어 사람살리라고 다급하게 불렀으나, 서리는 거짓으로 그러는 줄 알고 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 이튿날 밝을 녁에 가보니 다 뜯어 먹고 오직 뼈만 남아 있었다.
○ 가을 7월에 동진 군사 천여 명이 장평진(長平鎭 함남 영흥(永興))에 둔치자, 삼군을 보내어 막을 것을 의논하였는데 조금 후에 들으니 적이 물러갔다 하므로 마침내 중지하였다.
○ 8월에 최우가 사전(私田) 7백여 결을 제위(諸衛)의 산원(散員)과 교위방(校尉房)에 소속시켜 인심을 수습하였다.
○ 조하기를, “동진이 몰래 가까운 땅에 웅거하여 자주 변방을 침략하다가, 군사를 내어 쫓아가 토벌하면 문득 달아나고 군사가 돌아오면 다시 침입하여 엿보고 노략질하니, 제어하는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서경》에, '경사(卿士)와 더불어 모의하라.' 하였으니, 마땅히 너희 문무 4품과 대ㆍ성(臺省)의 6품 이상은 각각 장구한 계책을 조목조목 써 올리라." 하였다.
○ 어떤 중이 자혜원(慈惠院)을 지으려고 강음현(江陰縣 황해 금천(金川))에서 재목을 베니, 감무(監務) 박봉시(朴奉時)가 그것을 금하고 관(官)에 그 재목을 바치게 하였다. 그 중이 대장군 대집성(大集成)에게 부탁하여 편지를 얻어 청하였지만 봉시가 듣지 않으니, 집성이 최우에게 청하여 교정소(敎定所)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도 또 따르지 않자, 집성이 부끄럽고 분하여 다시 최우에게 호소하여 봉시를 먼 고장으로 귀양보내니, 그때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9월에 청새진(淸塞鎭) 호장(戶長)이 망녕되이 동요를 지어 용주(龍州)와 더불어 모반하려 하자, 병마사 채송년(蔡松年)이 안핵(按覈)하여 그를 죽였다.
○ 겨울 10월에 화주성(和州城) 행랑 3백여 칸이 불에 탔다.
○ 중 3만 명을 대접하였다.
○ 기사일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쳤다.
○ 11월 초하루 신미일에 지진이 있었다.
○ 박인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박인이 태재부(太宰府)에 다다른지 일년 만에 화친하는 첩문을 가지고 오니, 최우가 은병 다섯, 비단 60필, 베 5백 필, 쌀ㆍ콩 50석, 안마를 주어 그를 포상하였다.
○ 지문하성사 문유필이 졸하였다.
○ 12월 초하루 경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 평장사 왕규(王珪)가 졸하였다. 왕규는 성품이 온화하고 아담하여 용의가 아름다워 나이 7살에 동궁의 학우(學友)가 되었으며, 민첩하고 너그러우며 재간과 도량이 있었다. 예전에 군기주부(軍器主簿) 동정문하성(同正門下省)이 되었을 때, 어리다고 논박하는 사람이 있으니, 의종(毅宗)이 이르기를, “그 아비가 좌명(佐命)한 공이 있는데, 어찌 상례(常例)에만 구애를 받겠는가." 하였다. 일찍이 남경의 유수로서 은혜로운 정사를 베풀었으며, 나이가 70이 못되어 글을 올려 물러나기를 빌고 문을 닫고 현거(縣車 치사 후 수레를 매달아 둠)하여 우유자적하니, 세상 사람들은 나이 많고 덕이 높기는 왕규가 으뜸이라고 논하였다.
○ 왕의 의대(衣帶)를 받들어 백악(白岳 경기 장단)의 임시 대궐로 옮기어 안치하였다.
○ 최보순(崔甫淳)을 판이부사로, 김취려를 중서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로 삼고, 최우에게는 오대진국공신(鼇戴鎭國功臣)을 올려주고, 공천원ㆍ최정분(崔正份)을 아울러 참지정사로, 최종준(崔宗峻)을 지문하성사 이부상서로, 김중귀를 지추밀원사로, 기저(奇泞)를 동지추밀원사로, 진식(陳湜)을 추밀원부사 어사대부로, 사광보(史光補)ㆍ유승단(兪升旦)을 추밀원부사로 삼았다.


고려사절요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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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
기축 16년(1229), 송 소정 2년ㆍ금 정대 6년ㆍ몽고 태종(太宗) 원년

○ 봄 정월에 평장사 최보순이 졸하였다.
○ 정상(鄭相)이란 자가 있었는데, 통보(通輔)의 아들이며, 김희제의 사위이다. 일찍이 밤에 수덕궁리(壽德宮里)에 이르니, 이문(里門)이 닫히어 있었다. 정상이 열쇠 가진 자가 더디 오는 것에 노하여, 문틈으로 활을 쏘아 그를 죽였다. 법관 대집성(大集成)ㆍ김득순(金得循)ㆍ최종번(崔宗藩)ㆍ홍사윤(洪斯胤) 등이 통보와 희제의 청탁으로 죄를 묻지 않고, 오직 낭중 이정핵(李廷翮)이 고집하였으나 되지 않아, 마침내 가벼운 죄로 논면(論免)하였다. 이때 정혁이 진양부사(晉陽副使)로 있었는데 최우가 그 법을 지킨 행동을 아름답게 여겨 자문지유(紫門指諭)를 배수하여 포상하였다.
○ 2월에 동진 사람이 함주(咸州)에 이르러 화친을 청하니, 식목녹사(式目錄事) 노연(盧演)을 보내어 가서 약속을 듣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최우가 이웃집 백여 구(區)를 점탈하여 구장(毬場)을 지으니 동서로 수백 보가 바라다 보이고, 평탄하기가 바둑판과 같았다. 매양 격구(擊毬)를 할 때면 먼지가 일므로 반드시 동네 사람을 시켜서 물을 길어다 뿌리게 하였다.
○ 5월에 노연이 동북면에서 돌아왔다. 이 때에 동계 부방장군(赴防將軍) 김중온(金仲溫)이 노연은 겁이 많고 나약하여 동진과 약속하지 못하였다고 고소하니, 최우가 노하여 노연을 가구소(街衢所)에 가두고, 전 거제현령 진용갑을 장평진장(長平鎭將)으로 삼아 동진과 약속하였다.
○ 가뭄으로 2죄(二罪) 이하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 동진이 화주에 쳐들어와 우마와 사람들을 노략하자, 진용갑이 사람을 보내어 타이르니, 모두 버리고 갔다.
○ 6월에 북변(北邊) 사람 전 별장 예작(銳爵)이 변덕스럽고 속임수가 많아, 죄를 짓고 일찍이 화주로 귀양와 있으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동진 도로의 평탄하거나 험한 곳과 멀고 가까운 곳을 안다." 하니, 동북면병마사 최종재(崔宗梓)가 그 말을 믿고 예작 등 세 사람을 보내어 동진국에 들어가 소식을 정탐하고 오라 하였다. 예작이 동진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동진과 화호하고자 한다." 하니, 동진이 또한 그 말을 믿고 예작 일행을 돌려 보내고 회보를 기다렸는데, 국가에서 미루고 회보하지 않자, 동진은 예작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하여 그를 죽였다.
○ 가을 7월에 양부가 최우의 집에 모여, 동진을 방비하여 막을 대책을 의논하였다.
○ 8월에 상서좌복야로 치사한 유자량(庾資諒)이 졸하였다. 자량은 장중하고 말이 적었다. 의종조(毅宗朝)에는 문신의 세력이 크게 성하였는데, 자량은 이때 나이가 16세로서 유가(儒家)의 자제와 더불어 계(契)를 맺었다. 무인 오광척(吳光陟)과 문장필(文章弼)을 이끌어 계원으로 삼으려 하니, 계원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았는데, 자량이 말하기를, “교유하는 중에 문ㆍ무가 갖추어지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인년(1170)의 변이 일어나자, 같은 계원들은 모두 광척과 장필이 변명하여 구해준 덕분에 해를 면할 수 있었다. 일찍이 나이가 많으니 물러나겠다고 청하고, 기로회(耆老會)에 들어가서 부처를 매우 독실히 섬겼다.
○ 유사가, “최종재가 제멋대로 예작을 동진에 보내어 변방에 흔단(釁端)이 생겼다." 고 탄핵하니, 종재가 양주부사(梁州副使)로 좌천되었다.
○ 동진이 화주를 침범하였다.
○ 9월에 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윤(崔洪胤)이 졸하였다.
○ 최우가 또 인가를 빼앗아 구장을 넓혀, 날마다 격구와 활쏘기 연습을 하게 하고 이를 구경하니, 전후로 민가를 점탈한 것이 무려 수백 호였다.
○ 겨울 10월에 최우가 그 집에서 재추에게 잔치를 베풀고, 구정에 임하여 도방(都房) 마별초(馬別抄)가 격구하고 창을 놀리며 말타고 활쏘는 것을 구경하는데, 안마와 의복ㆍ활과 화살을 서로 과시하기에 힘써 달단(韃靼)의 풍속을 앞다투어 본받으려고 하였다. 구장이 옛날에는 누(樓)가 세 간이었는데, 이때에 최우가 세 간을 더하라고 명하니, 이날 늦게 공사를 시작하여 이튿날 아침에 다 마쳤다고 고하였다. 최우가 또 기로의 재추들을 맞아 잔치하면서 격구하고 창을 놀리며 말타고 활쏘기를 구경하다가 능한 자에게는 현장에서 작과 상을 더해주니, 도하(都下)의 자제가 다투어 안마와 의복을 장만하게 되어 처가가 가난하다고 버림받는 일이 많았다.
○ 임피현령(臨陂縣令) 전승우(田承雨)가, 상장군 김현보(金鉉甫)가 전지를 넓게 불리는 것을 미워하여, 그 전조(田租)를 거둬 관아에 납입하고 또 그 밭을 백성에게 주었는데, 현보가 안찰사 최종유(崔宗裕)에게 부탁하여 그 전조를 도로 징수하려 하니, 승우가 분하고 성이 나서 은그릇을 가지고 관사에 보상하고 법사(法司)에 보고하였다. 법사가 현보와 종유를 탄핵하니, 최우가 그 탄핵장을 빼앗고 그만두게 하였다.
○ 11월에 최우가 가병ㆍ도방(都房)ㆍ마별초를 사열하는데 안마와 의복, 궁검과 병갑이 매우 사치스럽고 고왔다. 오군으로 나누어 습전(習戰)하는데 인마가 엎어지고 자빠져 죽거나 다치는 자가 많았다. 그것을 마치고 나면 사냥하는 법을 익히는데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서서 순환하기가 끝이 없으니, 최우가 기뻐하여 술과 음식으로 호군하였다.
○ 12월에 최우가 아뢰기를, “올해는 크게 가물어서 곡식이 부실하니, 사자를 5도에 보내어 손실을 살펴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가정 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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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춘헌기(春軒記)

어떤 객이 춘헌(春軒)에 와서 춘(春)이라고 이름 붙인 뜻을 물어보았으나, 주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객이 다시 앞으로 나앉으며 말하였다.
“우주 사이의 원기가 조화의 힘에 의해 퍼져서 땅에 있는 양(陽)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하늘과 막힘없이 통하게 되면, 만물의 생동하는 뜻이 발동할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덩달아 활짝 펴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봄이 오면 온갖 꽃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니, 봄의 풍광은 사람의 기분을 마냥 들뜨게 하고 봄의 경치는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 주는 법이다. 그래서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고 봄바람 속에 있었던 듯도 하다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자 객이 또 말하였다.
“원(元)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근본이요, 춘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시절이요, 인(仁)은 천지가 만물을 내는 마음이니, 이름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이치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노쇠하고 병든 자들이 봉양을 받을 수 있고 곤충과 초목이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이러한 이치 때문이라는 그 뜻을 취해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인가?”
이에 주인이 말하기를,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대야 한다면 온화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여름에는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고 겨울에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가을에는 썰렁해서 몸이 으스스 떨리니, 사람에게 맞는 것은 온화한 봄이 아니겠는가. 객이 말한 것이야 내가 어떻게 감히 감당하겠는가.”
하자, 객이 웃으면서 물러갔다.
내가 그때 자리에 있다가,
“그만한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자처하지 않는 것은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알기에 주인은 흉금이 유연(悠然)해서 자기를 단속하고 남을 대할 적에 속에 쌓였다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화기(和氣) 아닌 것이 없으니, 대개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바람 쐬며 노래하는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니 주인이 취한 뜻이 어찌 온화하다고 하는 정도로 그치겠는가. 그런데 객이 어찌하여 그런 것은 물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고는, 마침내 붓을 잡고 이 내용을 벽에다 써 붙였다.
주인은 완산 최씨(完山崔氏)로, 문정공(文定公)의 후손이요 문간공(文簡公)의 아들이다. 박학강기(博學强記)한 데다가 특히 성리(性理)의 글에 조예가 깊어서, 동방의 문사들이 질의할 것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가서 묻곤 한다.

[주D-001]봄 누대에 …… 하고 : 《노자(老子)》 제 20 장에 “사람들 기분이 마냥 들떠서, 흡사 진수성찬을 먹은 듯도 하고 봄 누대에 오른 듯도 하네.〔衆人熙熙 如享太牢 如登春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봄바람 …… 하다 : 주희의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4에 “주공섬(朱公掞)이 여주(汝州)에 가서 명도(明道) 선생을 만나 보고 돌아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한 달 동안이나 봄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某在春風中坐了一月〕’라고 했다.”는 말이 실려 있다.
[주D-003]기수(沂水)에 …… 부류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늦은 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벗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을 하고 기우제 드리는 무우에서 바람을 쏘인 뒤에 노래하며 돌아오겠다.〔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자신의 뜻을 밝히자, 공자가 감탄하며 허여한 내용이 《논어》 선진(先進)에 나온다.
[주D-004]주인은 …… 아들이다 : 주인의 이름은 최문도(崔文度)이다.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문정공(文定公) 최보순(崔甫淳)의 5세손이요, 광양군(光陽君)에 봉해진 문간공(文簡公) 최성지(崔誠之)의 아들이다. 자는 희민(羲民)이고, 관직은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다. 1345년(충목왕 1)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경(良敬)이다. 아들의 이름은 사검(思儉)이다.
 
  • 補遺篇 (全羅道)
    • 完山誌卷下
人物名臣 高麗 崔均 自幼力學出郡仁宗朝登第累遷少府主簿時宰相 崔允儀奉旨擇文士詳定禮儀首居其選後允儀臨絡犻薦王授閣門祗侯明宗朝以禮部侍郞兵馬副使擊西京趙位寵柀執遇害贈禮部尙書 원주 崔陟卿 以吏登第毅宗初授京山府判官秩滿還京足不至權門者十餘年後再爲耽羅令累轉監察御史左正言知制誥官至禮部侍郞 秘書監 원주 李俊陽 以淸白達毅宗朝官至平章事 원주 崔甫淳 之子平章事文定 원주 柳光植 風儀環偉淸儉節欲況重寡言高宗朝平章事 원주 柳韶 光植之子性剛亢許可不事産華位至平章事 원주 崔誠之 甫淳四世孫忠宣王時人官至僉議贊成事光陽君謚文簡公 원주 柳邦憲 官至門下平章事貞簡 원주 崔得枰 廉貞自守人皆敬憚官至選部典書致仕歷事烈宣肅三朝而忠宣尤器重之 원주 崔宰 得抨之子忠肅朝登第王以有父風除監察持平忠
<하권1030-3>

惠卽位乃裭其職及王被執如元凡王所設置悉皆更革立都監以宰爲判官歎曰王之失德而非王自爲乃左右逢之耳逢之於前揚之於後吾實恥之稱疾不出恭愍朝封完山君之貞 원주 
崔龍甲 擢第一人及第 원주 李資乙 擢第一人及第與崔龍甲俱有文才名 원주 崔七夕 有將師材 원주 崔龍角 改名永濡 侍中 之子櫂壯元爲海州牧使恭愍朝紅巾之亂賊兵犯境殉節後達忠烈祠于海州鵂巖 원주 李文挺 官至政堂文學 원주 崔瀁 晩六 圃隱 鄭夢周甥姪登文科官至寶文閣大提學我 太祖龍興之日退居本府大勝洞享祀于西山祠今廢 원주 本朝崔府 官至判書靖簡 원주 李伯由 文挺之孫開國功臣封完城君 원주 柳義孫 登第官至吏曹判書有文名 원주李思哲 登第靖灘功臣官至左議政 원주 崔德之 存養堂 太宗朝人登文科集賢殿直提學 원주 崔敬之 登第官至弘文館副提學원주 李瓊仝 文挺四世孫擢重試官至兵曹參判以文章名於世 원주 李繼孟 墨巖登文枓
<하권1030-4>

官至左贊成日文平 원주 
柳軒 登第官至大司諫 원주 柳崇祖 登第官至成均同知 원주 李廷鸞 文科官至府尹壬辰倭亂公先紏義旅常語子弟曰足底黑子汝等宜知之蓋死節之意已定終安全湖詳載名臣錄 원주 宗室湖城君 德源君 之曾孫初封湖城今卜居于本州萬曆壬辰倭寇猝迫都城失守宣祖大王播越龍湾公紏合義旅由海都謁于 行在所倭兵已屯平壤公奮力泣血自請先鋒直向平壤連日摶戰殺賊無數遂奏捷 上大喜進封湖城君錄宣武原從功一等賞賜田全州地 원주 黃璞 武科壬辰亂戰亡錦山事聞 贈兵使旌閭 원주 崔虎 武科壬辰倭亂戰亡錦山郡 贈兵曹參判旌閭 원주 李富永 ■力過人武科宣傳官戊午 天朝有深河之役徵兵 本朝以姜弘立都元師 金景瑞副之領兵赴授金將軍以助防將亦在行中檄公爲偏裨而從馬與賊遇於富車嶺劉都督喬遊擊相繼敗衂姜弘立 金景瑞皆投降惟助防一軍獨當巨寇矢石如雨而畫夜力戰虜兵累却忽狂風大起雲霧四塞砲路旣迷兮
<하권1031-1>

又折勢無奈何而猶且身冒白刃手釰當賊所格殺無數虜遣人誘降公與金將軍罵不絶口虜亦義之嘖嘖稱之曰柳下兩將眞忠臣也募生擒不得能身被十餘創貫賊箭而歿韓忠立 徐福男 崔得宗自軍中脫身而歸細傳其顚未焉遂招溾而歸葬於牧丹洞 원주 
宋英耉 瓢翁登第官至慶尙監司光海朝廢 母議起公守正抗義力斥邪論士咸猗重 원주 李興浡 雲巖登文科官玉果縣監 仁廟賓天守制三年贈吏曹參議癸酉以忠節 命旌閭 원주 李起浡 西歸 興浡生員丙寅虜使來公與伯氏抗疏請斬來使丁卯文科爲大同察訪與本方伯及諸員奉審箕子殿公獨不拜及丙子亂公與兄興浡翰林 梁曼容倡率義旅行至淸州遇胡騎公挺釰大喝追斬九級長驅而進未及南漢三十里聞 大駕出城北首痛哭累拜養士春坊終不就陳情曰臣白牌至下大夫皆書大明年號知有大明而巳 顯廟贈都承旨 英宗甲子以忠節 命旌閭 원주 李尙眞 晩庵 府尹 廷鸞曾孫文科官至右議政己巳壼議將廢以原任大臣瀝血抗章被
<하권1031-2>

北靑選入淸白吏 원주 
卓祥 壬辰倡義丁酉殉節官至佐郞旌閭 원주 金億萬 武科官至訓鍊院判官壬辰倭亂聞 大駕去邠之報與弟守門將 億熙及其子部將 北望痛哭伏釰赴義幸州之捷斬獲甚多錄宣武原從勳贈左承旨明年庚午 命旌閭 원주 金億熙 億萬弟武科守門將壬辰倭亂與兄赴敵多捷贈兵曹參議以忠節旌閭 원주 金㥧 億萬第四子武科部將以壬辰忠節贈兵曹參判命旌閭 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