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퇴계 이황 선생년보

퇴계 이황선생 연보

아베베1 2013. 1. 7. 12:50


 
 퇴계선생연보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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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1

효종(孝宗 명나라 황제) 홍치(弘治) 14년 연산군 7년 (신유) 11월 25일 기해 진시(辰時) 에, 선생은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에서 나셨다. 선생의 선조는 진보현(眞寶縣)에 살았는데, 5대조 송안군(松安君)이 왜적을 피하여 안동부 풍산현(豐山縣) 남쪽 마애리(磨崖里)로 이사하여 살았다. 뒤에 또 주촌(周村)으로 옮겼고, 조부 판서공 때에 이르러 예안현 북쪽 온계리의 빼어난 산수를 사랑하여 비로소 거기에 살게 되었다.
15년 (임술) 2세 6월에 찬성공이 별세하다. 선생이 지은,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朴氏)의 묘갈(墓碣)을 보면 “선군(先君)이 병으로 돌아가셨을 때 큰형이 겨우 장가들었고, 그 나머지 어린 것들이 앞에 가득하였다. 부인은, 사내 자식은 많은데 일찍 홀몸이 되어 장차 집안을 유지하지 못할까 매우 염려해서, 더욱더 농사와 양잠 일에 힘써서 옛 살림을 잃지 않으셨다. 여러 아들이 점점 장성하자, 가난한 중에도 학비를 내어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취학을 시켜서 늘 훈계하였으니, 문장에만 힘쓸 뿐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실을 삼가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항상 간절히 타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보통 과부의 자식은 옳게 가르치지 못하였다고 욕을 한다. 너희들이 남 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하니, 이것을 보면 선생은 비록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그 학문을 성취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6년 (계해) 3세
17년 (갑자) 4세
18년 (을축) 5세
무종(武宗) 정덕(正德) 원년 중종대왕 원년 (병인) 6세 처음으로 글 읽을 줄 알게 되다. 이웃에 어떤 노인 한 분이 제법 천자문을 알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가서 배웠다.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가서 울타리 밖에서 가만히 전날 배운 것을 여러 차례 속으로 외어 본 후에 들어가서, 엎드려 배우기를 마치 엄격한 스승에게 하듯 하였다.
2년 (정묘) 7세
3년 (무진) 8세 ○ 둘째 형이 칼에 손을 다쳐 선생이 붙들고 울자, 어머니께서 “너의 형은 손을 다쳤는데도 울지 않는데, 네가 왜 우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형은 울지 않으나, 피가 저렇게 흐르는데 어떻게 손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선생은 온순하고 공손하며 겸손하고 우애가 있었다. 존장자를 대할 때에는 감히 태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고 밤중에 깊이 잠들었다가도 어른이 부르면 곧 깨어나서 바로 대답하고 매우 조심하였다. 6, 7세 때부터 벌써 그러하였다.
4년 (기사) 9세
5년 (경오) 10세
6년 (신미) 11세
7년 (임신) 12세 숙부 송재공(松齋公) 이우(李堣)에게 논어를 배우다. “제자가 들어가면 효도하고, 나가면 공순하여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자, 근심하여 스스로 경계하기를, “사람 된 도리가 당연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하루는 이(理)라는 글자로 송재공에게 묻기를, “모든 일에 있어 옳은 그것이 이(理)입니까?” 하니, 송재공이 기뻐하면서, “네가 벌써 글의 뜻을 알았구나.” 하였다. 송재공은 성격이 근엄하여 자제(子弟)들에게 인정해 주는 일이 적었으나, 선생이 형 대헌공(大憲公) 이해(李瀣)와 함께 글을 배울 때에, 송재공이 늘 칭찬하면서,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또 선생을 가리켜 말하기를, “우리 가문을 유지할 자는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8년 (계유) 13세
9년 (갑술) 14세 글 읽기를 좋아하여, 비록 여러 사람이 많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가만히 속뜻을 음미하였다.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10년 (을해) 15세
11년 (병자) 16세
12년 (정축) 17세
13년 (무인) 18세 〈봄에 노닐며 들판의 연못을 읊다〉 절구시에,
이슬 맺힌 풀 곱게 물가에 둘러 있고 / 露草夭夭繞水涯
작은 못 맑고 깨끗해 티끌도 없네 / 小塘淸活淨無沙
구름 날고 새 지나는 것이 본래 제 나름대로나 / 雲飛鳥過元相管
때때로 제비 와서 물결 찰까 두려울 뿐이다 / 只怕時時燕蹴波
하였다.
14년 (기묘) 19세 심사(心事)를 읊은 시에,
유독 초당의 만 권 책을 사랑하여 / 獨愛林廬萬卷書
한결같은 심사로 지내온 지 십여 년 / 一般心事十年餘
근래에는 근원의 시초를 깨달은 듯 / 邇來似與源頭會
내 마음 전체를 태허(太虛)로 여기네 / 都把吾心看太虛
하였다.
15년 (경진) 20세 주역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느라, 거의 먹고 자는 것을 잊다. 이로부터 항상 파리하고 고단한 병이 있게 되었다. 뒤에 선생이 조사경(趙士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어린 나이로 일찍이 망녕되게 뜻한 바 있었으나, 그 방법을 몰라서 단지 너무나 지나치게 고심하기만 했던 탓으로 파리하고 고단하여지는 병을 얻었다.” 하였다.
16년 신사 21세 부인 허씨에게 장가들다. 진사 이찬(李瓚)의 딸
세종(世宗) 가정(嘉靖) 원년 (임오) 22세
2년 (계미) 23세 10월에 아들 준(寯)이 출생하다. ○ 이해에 선생이 처음으로 태학에 유학(遊學)하다. 이때는 기묘(己卯)의 화를 거친 뒤였으므로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여서, 선생의 법도 있는 행동거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비웃을 뿐이요, 서로 상종하는 이는 오직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한 사람 뿐이었다. 얼마 안 되어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하서가 작별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대는 영남의 수재요, 이(李)ㆍ두(杜)의 문장에 왕ㆍ조의 글씨라.”라는 구절이 있었다.
3년 (갑신) 24세
4년 (을유) 25세
5년 (병술) 26세
6년 (정해) 27세 가을, 경상도 향시(鄕試)의 진사시(進士試)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생원시에서 2위에 입격(入格)하다. ○ 10월, 둘째 아들 채(寀)가 출생하다. ○ 11월, 부인 허씨가 죽다.
7년 (무자) 28세 봄, 진사시 회시 2등에 입격하다.
8년 (기축) 29세
9년 (경인) 30세 부인 권씨에게 장가들다. 봉사 권질(權礩)의 딸
10년 (신묘) 31세 6월, 측실(側室)에게서 아들 적(寂)이 출생하다.
11년 (임진) 32세 선생이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 보는 데 뜻이 없었으나, 형 대헌공(大憲公)이 어머니에게 여쭈어 권하므로 과거에 나가게 되었다. 이해에 문과 별시의 초시(初試)에 2위로 입격하였다.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촌사(村舍)에서 자다가 밤중에 도둑이 들었는데, 동행들은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으나 선생은 태연히 앉아서 동요하지 않았다.
12년 (계사) 33세 반궁(泮弓 성균관)에 유학하다. 동료들이 모두 존경하고 마음으로 선생을 좇았다. 가을,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여주(驪州)를 지나는 길에 모재(慕齋) 김 선생(金先生)을 뵙게 되다. 이번 길은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을 따라 동행한 것이다. 모재는 이름이 안국(安國)이니 이때에 벼슬을 사퇴하고 여주 이호촌(梨湖村)에 살고 있었다. 선생이 만년에 스스로 말하기를, “모재를 뵙고 비로소 정인군자(正人君子)의 언론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경상도 향시에 응시해서 1위로 입격하다.
13년 (갑오) 34세 3월,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게 되다. 4월, 선발되어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천거되었으나 곧 체차되어 도로 승문원 부정자가 되다. 선생의 장인인 권질은 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다. 권전은 기묘 사류(己卯士類)로서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죄를 입고 죽었다. 권질도 연좌되어 내쳐지게 되었다. 이때에 간관이 권력층의 사주를 받아 “아무개(선생을 가리킴)는 권질의 사위이니, 사관(史官)이 될 수 없고, 그를 천거한 자도 역시 옳지 못합니다.”라고 아뢰어, 예문관관(藝文館官)을 추고(推考)하고 선생을 사관직에서 체차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 때문에 의논이 분분하여, 예문관 관원이 모두 파면되고, 선생도 드디어 갈리게 되었다. 영천군(榮川郡)에 김안로의 논밭이 있었는데, 그곳은 전 부인 허씨의 친정이 있는 곳이었다. 김안로가 동향이라는 이유로 선생을 만나자고 하였으나, 선생이 가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앙심을 품고 대간을 사주하여 탄핵하게 하였던 것이다. ○ 6월, 정자(正字)로 승진되다. ○ 7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가 근친(近親)하다. ○ 10월, 저작(著作)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돌아오다. 정시(廷試)의 시제(試題)가 〈문신기영회도(文臣耆英會圖)〉였고 10운의 배율시로 짓는 것이었는데, 선생이 장원을 차지했다. 12월, 무공랑(務功郞) 박사(博士)로 승진되다.
14년 (을미) 35세 6월,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노(倭奴)를 동래(東萊)로 이송하다. 여주(驪州)를 지나다가 목사 이순(李純)과 신륵사(神勒寺)에서 노닐며 지은 시가 있는데,
수를 물어서 이치의 속을 더듬는 것이 가능할까 / 問數可能深理窟
신선을 말할 때는 곧 시속 무리들을 사절코자 하노라 / 談仙直欲謝時流
하고, 선생이 스스로 주를 달아 “공이 《황극경내편(皇極經內篇)》을 주석하느라 공을 들인 지 20여 년 만에 비로소 완성했다.” 하였다. 이날 《황극경내편》과 《참동계(參同契)》의 수련하는 법을 논하였다. ○ 이번 길에 고향에 들러서 어머니를 뵙고 갔다.
15년 (병신) 36세 3월, 선무랑(宣務郞)이 되다. ○ 6월, 성균관 전적에 오르고, 중학 교수(中學敎授)를 겸임하다. ○ 7월, 휴가를 얻어 근친하다. ○ 9월, 호조 좌랑에 임명되다.
16년 (정유) 37세 4월, 선교랑이 되다. ○ 5월, 승훈랑(承訓郞)이 되다. ○ 9월, 승의랑(承議郞)이 되다. ○ 10월, 어머니 박씨의 상사(喪事)를 당하다. 선생이 6품에 오르면서부터 지방관으로 나가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편하게 하려 했으나, 요직에 있는 자에게 저지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서울로부터 급히 달려갔다. 초상을 치르는 동안에 꼬챙이처럼 말라 병을 얻으니, 거의 생명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2월, 갑자일에 박부인을 온계리(溫溪里) 수곡(樹谷) 언덕에 장사 지내다.
17년 (무술) 38세
18년 (기해) 39세 12월, 삼년상을 마치다. ○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되다. 이날, 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에 승진되다. 이때에 김안로가 이미 실각하였으므로, 선생이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들어가게 되었으나, 형 대헌공이 의정부 사인으로서 춘추관을 겸하였기 때문에, 선생이 상피(相避)로 기사관은 겸하지 않았다.
19년 (경자) 40세 1월, 사간원 정언으로 임명하는 임금의 부르심을 받고 조정에 돌아오다. ○ 2월, 봉훈랑(奉訓郞)이 되고, 봉직랑(奉直郞)으로 승진되다. ○ 3월,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을 겸하다. ○ 4월, 지제교가 되다. 이로부터 통정대부 이하의 내직(內職)에 임명되면 으레 겸하게 되었다.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경연(經筵)에 들어가서 아뢰기를, “근래 가뭄이 너무 심하온데 정전(正殿)을 피하여 거처하신다든지 수라에 반찬의 가짓수를 줄인다든지 하는 일이 비록 모두 형식적인 일이긴 하나, 지성으로 행하여야 마땅할 것입니다. 가뭄으로 인하여 자주 사면을 내리는 것은 매우 불가하니, 옛사람도 ‘자주 사면을 내리면, 여러 착한 사람이 해를 입고 간사한 무리들이 기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새 간사한 자들이 생각하기를 극도로 가물게 되면 반드시 사면이 있을 것이라 여겨, 죄를 범한 자가 희망을 갖게 되고, 고의로 범죄한 자가 거리낌이 없어져서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간언을 옳게 여겨 받아들였다. 형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 되어 사정으로 인하여 파직되다. ○ 9월, 서용(叙用)되어 다시 형조정랑 겸 승문원교리에 임명되고, 홍문관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이 되다. ○ 10월, 교리로 승진되다. ○ 11월, 통선랑(通善郞)이 되다.
20년 (신축) 41세 3월, 경연에 들어가 일을 아뢰다. 이때에 우역(牛疫)이 심하였기에 선생이 아뢰기를, “《오행지(五行志)》에 이르기를, ‘토(土)가 만물을 낳는 것인데 토기(土氣)를 길러 주지 않으면 농사가 잘 되지 못하며, 그래서 소의 화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지진의 변괴가 있었는데, 이제 전염병과 우역이 한꺼번에 일어났으니 옛사람의 말이 참으로 거짓이 아닙니다. 게다가 봄에 가뭄이 들까 염려되고, 토맥(土脈)이 윤택하지 못하여 흉년이 들 징조가 이미 나타나고 있으니, 농사 역시 가히 점칠 수 있습니다. 재앙과 이변(異變)이 겹쳐서 일어남이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상께서는 더욱더 수양과 반성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 뒤에 석강(夕講)에 들어가 또 아뢰기를, “한나라 명제(明帝) 때에 날이 가물어서 종리의(鍾離意)가 상소하여 간하니, 명제가 즉시 토목 공사하던 것을 중지시키고, 백관들에게 자기의 허물을 효유하였더니 즉시 큰비가 내렸습니다. 근래 재변이 있었을 때 주상께서 근심하시고 놀라시어 ‘죄가 내게 있다.’ 하신 말씀이 역시 매우 간절하셨기 때문에, 하늘이 때맞추어 비를 내렸습니다. 이것으로 보아도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응한다는 이치는 틀림이 없으니, 대개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면 그에 알맞은 보응이 오는 법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힘써 매진하며 저녁에 허물이 없었는가 하여 가다듬으면 허물이 없다.’ 하였고, 《중용》에 이르기를, ‘중화(中和)를 이룩하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어서 만물이 생육된다.’ 하였으니, 모든 행사를 일반 인심에 화합하도록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인심이 화합하면 재앙이나 이변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다 독서당이 동호(東湖)에 있으니, 그것은 국가에서 인재를 기르는 곳이었다. 문학하는 선비를 극히 엄선하여 충원하였으며 번갈아 글을 읽게 하니 거기에 선택된 자는 영광스럽기가 영주(瀛州)에 오른 것에 비견되었다. 그러나 선발된 사람 대부분이 나돌아 다니며 편안히 지내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늘 자기 차례가 되면 반드시 갔고, 가면 반드시 글 읽는 일에만 힘을 썼다. 남쪽 누대 왼편에 조그만 집을 지어 문회당(文會堂)이라 이름하였는데, 해마다 이 서당에서 주고받은 시작(詩作)이 여러 편 있다. 4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 5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다. ○ 자문(咨文 중국 관청에 보내는 편지) 점마관(點馬官 말을 점검하는 관원)으로 의주에 가다. 〈의주잡영(義州雜詠)〉 12수가 있다. 부교리로 승진되어 빨리 오라는 재촉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다. ○ 10월,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임하다. ○ 11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다. ○ 12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또다시 형조 정랑에 임명되다.
21년 (임인) 42세 2월,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되고, 전직은 겸하였다. 3월에 경연 자리에 입시하여 글을 보다가 아뢰기를, “한 시대가 흥하는 데는 반드시 그렇게 될 만한 규모가 있는 법입니다. 동한(東漢) 광무제(光武帝)는 외척을 중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망하게 되어서는 오로지 외척의 손에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창업한 임금들이 친히 규모를 세웠다지마는, 그 자손들은 이를 지키지 못하고 나랏일을 그르쳤습니다. 장제(章帝)도 어진 임금이었으나, 그때부터 비로소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 조짐이 생겼던 것입니다. 대개 역사책을 읽을 때는 모름지기 세상이 잘 다스려지고 혼란해지게 되는 까닭을 살펴야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 선생의 취향은 높고 깨끗하여, 항상 거리낌 없이 선뜻 물러나겠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비록 영예로운 벼슬자리에 있어도 즐겨하지 않았다. 이해 봄에 옥당에서 숙직하고 있으면서 매화를 그린 시가 있었는데,
뜰에 매화 한 그루, 가지에 눈이 만발한데 / 一樹庭梅雪滿枝
세상 풍진에 품었던 꿈이 어긋났구나 / 風塵湖海夢差池
옥당에 앉아서 봄 밤의 달을 대하니 / 玉堂坐對春宵月
기러기 우는 소리에 생각되는 바 있도다 / 鴻雁聲中有所思
하였으니, 그의 고결하고도 단아한 마음이 있는 바를 엿볼 수 있다.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어사가 되어 충청도에 내려가서 군ㆍ읍에서 흉년 구제 작업이 잘되고 있는지를 검찰(檢察)하다. 4월, 돌아와 결과 보고를 하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흉년 구제 상황을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3년을 지탱할 저축이 없으면 나라 꼴이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제 한 해 흉년이 들었다고 공사 간에 군색하고 결핍됨이 이러하니, 금년에도 만일 농사일이 실패된다면 흉년 구제는 모양새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보통 때에 경비를 절약해서 저축하여 두어야 예상치 못한 재해가 있더라도 군색하고 급히 서두를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공주 판관(公州判官) 인귀손(印貴孫)은 못되고 탐욕스러우며, 흉년 구제를 잘 수행하지 않았으니 그 죄를 다스리소서.” 하여,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회재(晦齋) 이 선생(이언적(李彥迪))을 남쪽 교외에서 전송하다. 그때에 회재가 경주로 돌아갔다. 5월, 통덕랑(通德郞)이 되고, 사인(舍人) 겸 승문원교감 시강원문학으로 승진하다. ○ 8월, 농암(聾岩) 이공(李公 이현보(李賢輔))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다. 송별시가 있다. 재해를 시찰하는 어사로 임명되어 강원도로 가다. 과청평산(過淸平山) 시서(詩序)가 있다. ○ 12월,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다.
22년 (계묘) 43세 2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에 임명되었다가 또 장령에 임명되고, 전설사수(典設司守)로 옮기다. ○ 6월, 조봉대부(朝奉大夫)가 되다. ○ 7월, 성균관사예 겸 승문원교감 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에 임명되다. ○ 8월, 조산대부(朝散大夫)가 되고 사간원 사간으로 승진되었으나, 병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다. 수찬 김후지(金厚之)가 휴가를 얻어 귀성하는 것을 전송한 시가 있으니,
내가 지난날 그대와 더불어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노닐 적에 / 我昔與子遊泮宮
한마디로 도가 맞아 기꺼이 서로 사귀었지 / 一言道合欣相得
그대는 세상살이가 빈 배와 같음을 알았고 / 君知處世如虛舟
나는 저력(樗櫟)처럼 쓸모없다 믿었지 / 我信散材同樗櫟
부귀영화가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은 것 / 富貴於我等浮雲
우연히 얻었을 뿐 내가 구한 바 아니었네 / 偶然得之非吾求
가을바람 소슬하게 한강 물에 부는데 / 秋風蕭蕭吹漢水
바닷길 산길 천리에 그대 먼저 가네그려 / 海山千里君先去
하였다. ○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임명되다. ○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하다. ○ 11월,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살피건대, 선생이 뒤에 조남명(曺南冥 남명 조식(南㝠曺植))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어릴 때부터 옛 성현을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을 뿐이나, 집이 가난하고 모친이 노쇠하다는 연유로 친구들이 억지로 과거를 통해 이록(利錄)을 얻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내 그때에 실로 식견이 없어서 곧 그 권유에 마음이 움직여 추천하는 글에 이름을 걸고 보니, 세상일에 골몰하느라 날마다 겨를이 없거늘, 다른 것은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 그 뒤에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스스로 생각하여도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뒤돌아 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서 옛 성현의 글을 많이 가져다 읽었습니다. 이에 크게 깨달아 그 길을 따라서 길을 고치고 방향을 달리하여 상유(桑楡)의 경(景)을 거두려 합니다. 사직을 청해 벼슬자리를 떠나서 옛 서적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직 미처 이르지 못한 것을 구하고자 하는데, 혹시라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차츰차츰 조금씩 쌓은 끝에 만에 하나라도 보탬이 된다면, 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소원이나, 성은이 하찮은 자를 포용하시고, 헛된 명예가 사람을 몰아부쳐서 계묘년(1543, 중종38)부터 임자년(1552, 명종7)에 이르는 동안 세 번 물러났으나 세 번 불려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늙고 병든 정력으로 공부도 전심하지 못하였는데 이러고서도 무엇이 이루어질까를 바란다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정유일(鄭惟一)이 지은 〈언행록〉에도, “선생은 본래 벼슬할 마음이 적었고, 또 그때의 시국이 크게 어려운 사정이 있음을 보고, 계묘년부터 벼슬에서 물러나 쉬기로 뜻을 정하고, 그 뒤에는 여러 번 불려 돌아와도, 항상 조정에 오래 있지 않았다.” 하였다. 12월, 봉렬대부(奉列大夫)가 되다.
23년 (갑진) 44세 2월, 홍문관 교리로 불려 조정에 돌아오다. 독서당 매화가 늦은 봄에 비로소 피었기 때문에, 소동파의 운을 따라 지은 시 2수가 있다. 4월, 세자시강원 좌필선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숙배하지 않다.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다. ○ 6월,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성균관 직강으로 옮겨 제수되다. 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체차되고 종친부 전첨에 제수되다.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가 북경으로 갈 때에 지어 준 시가 있다. 8월, 홍문관응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 승문원교감이 되다. ○ 9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가다. ○ 10월, 조정으로 돌아오다. ○ 11월, 중종이 승하하다. 조정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부고를 전하고 또 시호를 청하였는데, 두 표문은 모두 선생이 짓고 쓴 것이었다. 중국에 가니, 예부의 관원이 찬탄하며 말하기를, “표문의 글이 매우 좋고, 서법 또한 기묘하다.” 하여, 사신이 돌아와서 그 일을 보고하였다. 선생에게 말[馬]을 주게 하였다.
24년 인종 원년 (을사) 45세 1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다. 의주로 가는 임사수(林士遂)를 전송하는 시가 있다. 3월, 병으로 사직하고,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에 제수되다. ○ 4월, 봉정대부(奉正大夫)가 되고 군자감 첨정(軍資監僉正)에 임명되다. ○ 5월,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다. ○ 6월,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고, 전한(典翰)으로 승진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다. ○ 7월,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다. 상소하여 왜인들이 강화하자고 비는 것을 허락하자고 청하다. 지난 경오년(1510, 중종5) 삼포(三浦)의 왜적들이 난을 일으켜서 변장을 죽였기 때문에, 조정에서 유담년(柳耼年)과 황형(黃衡) 등을 보내어 토벌하여 평정하고 마침내 왜와 절교하여 왕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왜인이 여러 차례 강화하기를 애걸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지난 일 때문에 또 거절했다. 이때 국가에 큰 초상이 있었고, 인심이 흉흉하였으므로 선생은 혹시 왜인들이 틈을 타서 화를 일으킬까 염려해서 상소하여 이에 대해 논하였다. 그 개략은 이러하다. “예전에 섬 오랑캐가 일으킨 사량포(蛇梁浦)의 변란은 개나 쥐와 같은 도둑에 불과했습니다. 이미 적도를 소탕하여 죽여서 물리쳤고, 또 왜관에 있는 자까지 쫓아냈으니, 국위를 이미 떨친 데다가 왕법도 역시 바로잡혔습니다. 저들이 마침내 우리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잘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새로이 하고 허물을 고치며, 머리를 숙여 불쌍히 여기심을 빌고, 꼬리를 흔들며 불쌍히 여겨 줄 것을 애걸하고 있습니다. 왕도는 탕탕하여 거짓일까 미리 예측하지 않으며, 미덥지 못할까 억측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와 같은 마음으로 온다면 받아들일 뿐입니다. 지금 천변은 위에서 보이고 인사(人事)는 아래서 어긋나 큰 화가 중첩하고 나라의 운수가 군색해지고 막혔으니, 이것은 우리나라의 어떤 시국입니까. 또, 나라에서는 이미 북쪽 오랑캐와 분쟁이 벌어졌는데, 만일 남ㆍ북의 두 오랑캐가 한꺼번에 일어난다면, 무엇을 믿고 이 일을 극복하여 내겠습니까. 조정에서 왜국과 절교하여야 한다는 청이 있다 함을 듣고는, 내심 한탄하였습니다. 이 일은 백 년 사직에 관계되는 근심이요, 억만 백성의 생명에 걸리는 일이라 생각되오니, 신의 이 글월을 자전(慈殿)께 여쭈시고, 널리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에게 의논하셔서 잘 절충하시어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8월,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으나, 병으로 홍문관직을 사임하니,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에 제수되다. ○ 9월, 사옹원 정에 제수되고, 다시 홍문관 전한에 임명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다. ○ 10월, 이기(李芑)가 선생의 관직을 삭탈(削奪)할 것을 계청(啓請)하다. 이때에 간사한 권력배들이 세도를 부리니, 사화가 크게 일어나 죽이고 귀양 보내는 일이 잇따랐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 꼼짝도 못하였다. 우상 이기는 더욱 흉험하여, 선비의 여론이 찬성하지 않음을 알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를 다 몰아내어 여러 입을 틀어막으려고, 대궐에 들어가 홀로 아뢰기를, “근일에 죄목을 정한 것이 각기 그 죄에 적당하였사오나, 다만 조정의 관리 중에는 죄로 인해 파직될 자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천계(李天啓)ㆍ이황(李滉)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ㆍ정황(丁熿) 등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이 때문에 선생과 정황 등 몇 사람이 같은 날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조야가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 12일에 인종의 재궁(梓宮)을 산릉(山陵)으로 발인하였는데, 선생은 반열에 들어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홀로 교외로 나가서 망곡하여 예를 행하였다. 관직 첩지(牒旨)를 돌려주라고 명하다. 이기(李芑)의 조카인 교리 이원록(李元祿)이 평소부터 선생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기에게 힘써 간하였고, 이기의 당인 임백령(林百齡) 역시 이기에게 말하기를, “이 아무개는 근신하여 제 할 일만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아는 일인데, 지금 만약 이 사람을 죄준다면, 사람들이 필시 전날의 죄 입은 사람도 모두 모함에 빠져서 억울하게 죄를 입었다 할 것입니다.” 하니, 이기가 또 대궐에 들어가 전번에 잘못 아뢴 것을 사죄하고 직첩을 도로 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서용되어 사복시정 겸 승문원참교에 임명되다. ○ 11월, 통훈대부가 되고 영접도감 낭청(迎接都監郎廳)에 임명되다.
25년 명종(明宗) 원년 (병오) 46세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인 권질(權礩)의 장사를 지내다. ○ 5월, 병으로 조정에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관직에서 해임되다. ○ 7월, 부인 권씨가 죽다. ○ 8월, 교서관 교리 겸 승문원 교리가 되다. ○ 11월,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다. ○ 양진암(養眞菴)을 퇴계(退溪)의 동쪽 바위 위에 짓다. 이보다 먼저 작은 집을 온계리 남쪽 지산(芝山) 북쪽에 지었으나, 인가가 조밀하므로 아늑하고 고요하지 못하였다. 이해에 처음으로 퇴계 아래의 두서너 마장 되는 곳에 집을 빌려 살면서, 동쪽 바위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양진암(養眞菴)이라 이름하였다. 시내는 속명이 토계(兎溪)였으나, 선생은 토(兎) 자를 퇴(退) 자로 고치고, 이것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26년 (정미) 47세 7월, 안동 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 8월, 홍문관 응교로 임명되고, 겸직은 전과 같다. 부름을 받고 조정에 돌아오다. 〈고의(古意)〉ㆍ〈설죽가(雪竹歌)〉ㆍ〈병중에 사서를 읽고 느끼는 바가 있어서[病中讀史有感]〉라는 시가 있다. 12월, 병으로 사직하니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에 제수되다. 이때에 나라의 의논이 더욱 엇갈려서 양사(兩司)와 홍문관이 서로 상소하여,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 중종의 왕자)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선생은 만류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병이라 핑계하고 사직하였다.
27년 (무신) 48세 1월, 외직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단양 군수에 임명되다. 선생이 외직을 요청한 것은, 깊은 뜻이 있어서였다. 보내 줄 것을 요청했던 청송(靑松) 대신 단양 군수에 제수된 후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푸른 솔에 흰 학은 비록 연분이 없으나 / 靑松白鶴雖無分
푸른 물 붉은 산은 과연 인연이 있구나 / 碧水丹山信有緣
○ 선생은 고을을 정성스럽고 미더우며 백성을 측은히 여기는 태도로 다스렸고, 정사(政事)가 청렴하고 간결하였기 때문에, 아전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겼다. 군내에는 특이한 명승지가 많았는데, 구담(龜潭)ㆍ도담(島潭) 등이 더욱 아름다웠다. 선생은 행정을 보다 틈이 나면 그런 곳에 가서 노닐며 시를 읊거나 풍광을 감상했는데, 그럴 때면 마치 조용히 세속을 벗어나 있는 듯한 흥취가 있었다. 단양의 산수 가운데 가히 놀 만한 곳을 적은 속기(續記)와 이락루(二樂樓)ㆍ화탄(花灘) 등의 여러 시가 있다. 2월, 둘째 아들 채(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 8월, 향교에서 석전례(釋奠禮)를 행하다. ○ 9월, 휴가를 얻어서 고향에 돌아가 성묘하다. ○ 10월, 풍기 군수로 전임되다. 형 대헌공이 충청 감사가 되자, 단양이 그 관내에 들어가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28년 (기유) 49세 2월, 향교에서 석전례를 행하다. ○ 한식에 선영(先塋)에 성묘하다. ○ 4월, 소백산을 유람하다. 유산록(遊山錄)과 석륜사(石崙寺)에서 이백(李白)의 〈자극궁유감(紫極宮有感)〉이라는 시의 운을 따라 지은 여러 시가 있다. 9월, 병으로 감사에게 사장(辭狀)을 올리다. ○ 12월, 감사에게 글을 올려 백운동서원의 편액(扁額)과 서적을 청하였더니, 감사가 왕에게 아뢰어 내려 주다. 백운동은 군의 북쪽 소백산 아래 죽계(竹溪) 위쪽에 있었는데, 전조(前朝)인 고려 때의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가 살던 곳이었다. 주세붕(周世鵬)이 군수가 되었을 적에, 비로소 그곳에 서원을 세워 문성공을 제사하고, 또한 여러 선비들이 학문을 하는 곳으로 삼았다. 선생은 ‘옛날에는 우리나라에 서원이 없었다가 이제 처음으로 생겼기 때문에, 위에서 시켜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면 혹시 그대로 없어져 버릴까’ 염려하여, 감사에게 글을 올려서 임금에게 보고하여 송나라의 고사에 의거해서 책을 내려 줄 것과 편액을 왕명으로 내려 줄 것과 겸하여 토지와 노비를 주어서 배우는 자가 의지할 곳이 있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서원의 이름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하고,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을 시켜 기문(記文)을 짓게 하며,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의 책을 내려 주었다. 서원의 흥성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병으로 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장을 올려 관직에서 해임해 주기를 청하고, 회보를 기다리지 않은 채 돌아오다. 행장이 쓸쓸해서 오직 책 두어 상자 뿐이었다.
29년 (경술) 50세 1월, 함부로 임소(任所)를 버리고 갔다 하여 고신(告身) 2등을 빼앗기다. ○ 2월, 처음으로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고 살다. 이보다 먼저 하명동(霞明洞) 자하봉(紫霞峯) 아래에 땅을 얻어 집을 짓다가 끝내지 못했고, 다시 죽동(竹洞)으로 옮겼으나 또 골이 좁고 시냇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마침내 계상(溪上)으로 정하였으니 무려 세 번이나 옮겨 살 곳을 정한 것이다. 한서암(寒栖菴)을 짓다. 집의 이름을 정습(靜習)이라 하고, 그 안에서 글을 읽었다. 시가 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니 어리석은 분수대로 편안하나 / 身退安愚分
배움은 퇴보하여 늦은 나이 근심스럽네 / 學退憂暮境
시내 위에 비로소 살 곳을 정하니 /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에 임하여 날로 반성함이 있으리 / 臨流日有省
하였다. 이로부터 배우러 오는 선비가 날로 많아졌다. 농암(聾岩) 이공을 분천(汾川)에 가서 뵙다. 소동파가 〈달밤에 살구꽃 아래서 술을 마시며[月夜飮杏花下]〉 지은 시에 운을 맞춘 시가 있다. 4월, 광영당(光影塘)을 파다. 한서암 앞에 있으니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뜻을 취해서 이름 지은 것이다. 8월, 형 좌윤공(左尹公) 이해(李瀣)가 별세하였다는 부음을 듣다. 좌윤공이 전에 사헌부에 있을 때에, 이기(李芑)가 정승이 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논한 일이 있었다. 이에 이기의 모함에 빠져 곤장을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은 것이다.
30년 (신해) 51세 이해에는 선생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 있다. 여러 사람과 주고받은 시 14수가 있다. 3월, 안동 마명동(馬鳴洞) 선영에 가서 성묘하다.
31년 (임자) 52세 입춘시 2수가 있는데, 그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서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여 / 黃卷中間對聖賢
밝고 빈 방에 초연히 앉았노라 / 虛明一室坐超然
창가에 매화 또 봄 소식을 전하니 / 梅窓又見春消息
거문고 줄 끊어졌다 탄식 말아라 / 莫向瑤琴嘆絶絃
농암을 임강사(臨江寺)로 찾아 뵙다. 시가 있다. 4월, 홍문관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승문원교리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다. ○ 5월 8일, 입시하여 진강(進講)하다. 글을 보다가 아뢰기를, “선행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선행을 쌓지 않는 집에는 반드시 재앙이 있습니다. 대개 사람이 악한 일을 할 때에 스스로 이만한 일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 하겠지만, 그 악이 점점 쌓이면 종국에는 큰 화가 이르게 되는 법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선을 좇음은 올라가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것은 무너지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 마땅히 정일집중(精一執中)의 훈계를 가슴에 새기고, 한결같이 이것을 지켜 사사로운 마음이 섞이지 아니하면 간사한 마음이 자연 싹트지 아니하고, 그 마음가짐이 한결같이 공정(公正)하여 공과 사(私), 의(義)와 이(利)가 구별될 것이니 주상께서는 반성하시고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매 사임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 6월, 동료들과 함께 차자를 올려 일을 논하고,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홍문관 부응교에 임명되다. ○ 7월,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이때에 대사성의 자리가 비었기 때문에, 이조에서 대신의 뜻으로 계청하여 당하관 중에서 글 잘하고 재주 있고 실행력 있는 자를 택하여 의망(擬望)하였는데 선생이 수망(首望)에 올랐기 때문에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된 것이다. ○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에 발문(跋文)을 썼다. 11월, 병으로 사임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다.
32년 (계축) 53세 4월, 대사성에 임명되다. 임금이 학교가 피폐하고 해이해졌다 하여, 권학 절목(勸學節目)을 내려서 분명하게 거행하게 하니, 선생이 사양하여 사임하고 다시 사장(師長 대사성)을 선발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사학(四學)에 통문을 돌려서 생도들을 타이르다. 그 개략을 들면, “학교는 풍습과 교화의 근원이요, 다른 곳보다 나은 곳입니다. 선비는 예의를 밝히는 주인이요, 원기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나라에서 학교를 설치하여 선비를 기르는 데는 그 뜻이 매우 높으니, 스승과 학생 사이에는 마땅히 예절과 의리를 앞세워서, 스승은 엄하고 학생은 공경하여, 각각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생도 여러분은 모든 일상생활을 의리 속에서 행하여, 서로 신칙하고 격려해서 묵은 습관을 씻어 버리기에 힘을 다할 것이며, 들어와서 아버지와 형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가서는 어른과 윗사람을 섬기는 예절로 삼을 것이며, 안으로는 충성과 믿음을 주로 하고, 밖으로는 온순하고 공손한 것을 실행하여, 나라에서 문화를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기 위하여 학교를 설치하고 선비를 기르는 뜻에 부응해야 합니다.” 하였다. 6월, 상께서 학전(學田)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여러 생도들을 거느리고 전(箋)을 올려 사례하다. ○ 7월, 대왕대비의 환정교서(還政敎書)를 지어 올리다. ○ 병으로 사직하여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다. ○ 8월, 친시 대독관(親試對讀官)에 선출되다. ○ 9월 병진, 경복궁에 화재가 났으므로 종묘를 위안하는 제문을 지어 올리다. ○ 충무위 상호군에 임명되다. 홍응길(洪應吉)의 〈유금강산록(遊金剛山錄)〉에 서문을 써 주었다. 10월,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개정하다. 정지운의 자는 정이(靜而)요, 호는 추만(秋巒)이다. 〈천명도〉를 짓고 또 그 설명이 있었는데, 선생이 그를 위하여 정정해 주고 그 뒤에다 서(叙)를 써 주었다. 그 개략을 들면, “내가 벼슬하기 시작할 때부터 한양에 와서 서쪽 성문 안에 우거한 지 20년이나 되었으나 그래도 이웃에 사는 정정이(鄭靜而)와 서로 사귀어 왕래하지 못했었다. 하루는 이른바 〈천명도〉라는 것을 얻었는데, 그 그림과 설이 잘못된 것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정이를 찾아서 원래의 도면을 보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또 정이를 만나자고 청하였더니, 말이 몇 차례 오간 뒤에 만나게 되었다. 정이가 말하기를, ‘지난번에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ㆍ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두 선생 문하에서 배우면서 그 의론은 들었으나, 원래 성리학은 미묘하기 때문에 어디 가서 질문하여 밝힐 곳이 없음을 근심하였습니다. 시험 삼아 주자의 학설을 가져다가 여러 설을 참고하여 천명도를 만들어 그것을 선생(모재ㆍ사재)께 가지고 가서 그 그릇된 것을 지적해 줄 것을 청했더니, 선생께서는 공을 쌓지 않고 가볍게 의논할 것이 못 된다고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잘못된 곳을 자각하여 고친 것이 역시 많지마는 아직도 완성본은 아닙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두 선생께서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 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을 것이나, 오늘 우리들이 학문을 강구하다가 타당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어찌 구차하게 동조하거나 억지로 감싸주며, 그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내지 아니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태극도와 그 학설을 끌어다 증거하고 지적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잘못되었으니 고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필요 없으니 삭제해야 할 것이다. 저것은 부족하니 보충하여야겠는데 어떠한가.’ 하니, 정이가 모두 다 알아듣고 수긍하였으며 노여워하거나 아끼는 빛이 없었다. 오직 내 말에 타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극력 변론하여 지극히 타당한 데로 귀착되어야 그만두었다. 게다가 다시 호남 선비 이항(李恒)이 논한 ‘정(情)은 기(氣)의 권내(圈內)에 둘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으는 자료로 삼았다. 그런 지 두어 달 만에 정이가 그 개정한 그림과 그에 따른 설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다시 서로 참고하고 교정하여 완성하였다. 과연 그릇된 것이 없지나 않은지 알지 못하겠으나, 우리들이 본 바로는 거의 할 수 있는 것은 다한 것이었다. 이에 이것을 앉는 자리 좌우에 걸어 두고 조석으로 마음을 가라앉혀서 보고 완미하여, 그림으로 인하여 깊은 속을 밝혀내어 조금이나마 진취하고 유익함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였다.
33년 (갑인) 54세 2월, 동궁(東宮)의 상량문을 짓다. ○ 4월,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 5월, 형조 참의에 임명되다. ○ 6월, 병조 참의로 옮기다. ○ 7월, 주신재(周愼齋 주세붕)의 죽음에 곡하다. 만사(挽詞)가 있다. 노이재(盧伊齋 노수신(盧守愼))에게 편지를 보내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주해한 것을 논하다. 이재가 이때에 진도(珍島)로 귀양 가 있으면서 〈숙흥야매잠〉을 주해하였다. 선생이 편지로 이것을 논하였는데, 개략을 들면, “〈숙흥야매잠〉은 옛날에 나 역시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그래도 조리의 치밀함이나 공부의 과정에 엄격함이 이같이 지극한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해한 것을 보니 장(章)을 나누어 구절을 분석하였고, 정대하고 숭고한 이론으로 가장 골자가 되어 있는 곳을 마음껏 파헤쳐서 밝고 넓은 경지에 홀로 도달하였으니 탄복하여 마지않습니다. 혹 그중 몇 군데 해석에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기에 삼가 집어내어 별지에 적어 보내니, 바로잡아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쓰다. ○ 《연평답문(延平答問)》에 발(跋)을 쓰다. 청주에서 그 답문을 새로 판에 새기고 목사 이정(李楨)이 편지를 보내어 청하므로 그 뒤에 발문(跋文)을 썼다. 9월, 체차되어 상호군에 임명되다. ○ 10월, 사정전(思政殿)에 〈대보잠(大寶箴)〉을 써 올리다. ○ 11월, 상사(上舍) 홍인우(洪仁祐)의 죽음에 곡하다. 선생이 어느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 사람은 학문이 있고 문장이 있었는데 갑자기 죽게 되어 매양 깊이 탄식하며 아까워하였습니다.” 하였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다. ○ 12월, 〈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리니, 상께서 말을 하사하시다.
34년 (을묘) 55세 2월, 강녕전(康寧殿)에 칠월편(七月篇)을 써 올리다. ○ 병으로 세 번 사직하여 해직되자 즉시 도성을 나가 배를 사서[買舟] 고향으로 돌아가다. 이날 상호군에 제수되다. ○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패초하는 교지를 내려 서울에 와서 의원에게 보이라고 명하다. 선생이 전(箋)을 올려 은혜에 감사하고 소명(召命)은 사양하였으나, 상께서 윤허하지 않고 5월에 다시 부르다. 선생이 귀향한 뒤에 이귀수(李龜壽)가 아뢰기를, “이황이 병으로 귀향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는데도 성상께서는 알지 못하시니, 옛사람이 이른 바, ‘지난날에 등용하였던 자가 오늘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필시 이런 경우를 말하는 것인가 하옵니다. 이황의 사람됨이 문장과 절조가 있는데 산야(山野)로 조용히 물러갔으니, 이런 사람을 높여서 장려하면 가히 선비의 기풍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였고, 신여종(申汝悰)이 또 아뢰기를, “서울에 있으면 의원을 찾아 약 쓰기에 편할 것이오니, 올라오게 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므로, 이에 고쳐서 첨지중추부사를 제수하고 불러오게 하였다. 선생은 전(箋)을 올려 감사한 뜻을 진술하고, 병으로 벼슬을 해임하여 주시기를 빌었다. 얼마 후 정유길(鄭惟吉)이 또 아뢰기를, “이황은 학술과 뛰어난 재주가 있습니다. 한 시대에 인재가 한도가 있는데, 이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므로 다시 부르게 되었다. 교지에, “오직 그대는 문한(文翰)의 재주를 가졌고 맑고 신중한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서울에 두고 고문(顧問)으로 대비하게 하려 했더니, 어찌 한 가지 병이 있다 하여 급거 고향으로 물러갔는가. 이제 사직하는 글과 감사하는 전을 보니, 내 마음이 허전하다. 마음 편히 조리하여 시기를 따지지 말고 언제든 올라오라.” 하였다. 가묘에 제사 지내어 고유(告由)하다. 은사(恩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월, 농암(聾巖)이 별세하였으므로 그 집에 가서 곡하다. 선생이 행장을 지었다. 선비(先妣) 정부인(貞夫人) 김씨와 박씨의 묘표(墓標)를 짓다. 선생은 박씨 소생이요. 김씨는 먼젓번의 어머니였다. 겨울, 청량산(淸凉山)에 갔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다. 산을 유람하며 지은 시가 여러 수 있다.
35년 (병신) 56세 5월,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임명되어 부름을 받다. 이보다 전에 좌의정 상진(尙震)이 조사수(趙士秀)와 같이 경연 석상에서 선생을 부르기를 청하였다. 사수가 아뢰기를, “아무개의 사람됨이 퇴폐되어 가는 풍속을 붙들 만합니다.” 하여서 임금이 어찰로 불렀는데, 그 편지에 “그대는 성품이 월등하게 맑고 간결하며, 세상에 드문 문장으로 공명을 탐내지 않고 시골에 한가로이 살고 있다. 조용히 물러가려는 그대의 뜻을 가상하게 여기고 항상 서울로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렸으나, 어진 사람을 구하는 내 정성이 부족하여 조정에 벼슬하지 않으려 하니, 내 마음이 매우 섭섭하다. 내 비록 상문(尙文)의 덕은 없으나 그대는 어찌 부춘(富春)에 숨어 사는 것을 좋아하는가. 빨리 올라와 벼슬자리에 나와 내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라.” 하고, 또 음식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에 부제학을 제수하고 또 불렀다. 두 번째로 사직하여 부제학에서 체차되다. ○ 6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내린 교지에, “그대의 정상과 뜻이 간절하므로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라.” 하다. ○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차(編次)하여 완성하다. 선생은 《주자대전》 중에 있는 편지들은 바로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제자ㆍ친구들과 문답을 교환한 글로서 각각 그 재주와 품성의 정도와 학문의 수준에 따라 억제하기도 하고 높여 주기도 하며 인도하고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더욱 배우는 자에게 절실하나, 다만 그 분량이 너무 방대하여서 그 가리킨 뜻을 좀처럼 알기가 어렵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중에 더욱 학문에 관계되고 실용에 절실한 것을 골라, 편찬하여 이름을 《주자서절요》라 하였다. 8월, 일가 사람들을 모아 안동(安東)에서 고조와 증조의 묘에 제사 지내다. ○ 9월 9일, 온계리의 여러 친족과 낙모봉(落帽峯)에 오르다. ○ 12월, 향약(鄕約)을 초안(草案)하였다. 이때에 국가에서 향도(鄕徒)의 영(令)이 있었기 때문에 선생이 향약으로 초하였으나, 다른 일로 인하여 실행되지 못하였다. 《주자서절요》에 서문을 쓰다.
36년 (정사) 57세 3월, 〈수곡암기(樹谷庵記)〉를 짓다. 수곡은 선생의 선영이 있는 곳이다. 도산(陶山) 남쪽에 서당 지을 터를 마련하다. 다시 서당 지을 땅을 정하고 감상이 있어서, 〈두 번째 가서 도산 남쪽 골을 보면서〉라는 등의 시를 지었다. 4월, 태자산(太紫山)에 유람하고 대방동(大方洞)을 찾다. ○ 7월, 《계몽전의(啓蒙傳疑)》가 완성되다. 선생의 자서(自序)를 대강 추리면, “이(理)와 수(數)의 학문은 그 범위가 넓고 크며 미묘하여 연구하기 쉽지 않다. 혹 숨은 경전이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서적에서 나온 것은 반드시 상고하여 의논한 뒤에 그 뜻을 알 수 있고, 숨겨져 있는 오묘한 뜻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전사하거나 인쇄하는 과정에서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곱하고 나누는 것은 상세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혹 생각하다가 깨달은 것이 있거나, 옛것을 상고하다가 증명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조목대로 직접 기록하여 상고해 보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하였다.
37년 (무오) 58세 3월, 창랑대(滄浪臺)를 지었다. 후에 천연대(天淵臺)라 고쳤다. 4월, 오담(鼇潭)에서 노닐다. 좨주(祭酒) 우탁(禹倬)을 위해 오담 근처에 서원을 세우고자 하여 그 터를 둘러 보았다. 6월, 어관포(魚灌圃 어득강(魚得江))의 시집에 발(跋)을 쓰다. ○ 윤7월,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빌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려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오다. 이보다 앞서 6월에 영의정 심연원(沈連源)과 대제학 정사룡(鄭士龍)이 경연 석상에서 선생에게 경관직(京官職)을 제수하고 감사로 하여금 잘 말하여 올려 보내게 할 것을 계청하였다.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드디어 상소하여 질병으로 벼슬하기 어렵다는 뜻을 극력 설명하였다. 그 개략을 들면,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젊을 때부터 임금 섬기는 도리를 들었으니, 어찌 말에 멍에 메우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명을 받는 것이 공경함이 되는 줄 모르겠습니까만 그 한 구석만을 굳게 지켜 중론의 비난과 누적된 의심 안에 처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는 것은 바로 자신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크게 어긋날까 두려워서입니다. 무엇을 의(義)라 하겠사옵니까. 사리에 마땅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것을 숨기면서 벼슬자리를 도둑질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병으로 폐인이 된 자가 녹을 도둑질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헛된 명성으로 세상을 속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잘못인 줄 알면서도 무릅쓰고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이겠사옵니까. 이 5가지 마땅하지 못함을 가진 채 조정에 선다면 그 신하 된 자로서 의가 어떻겠습니까. 엎드려 비오니, 신의 사정에 어둡고 어리석은 것을 살피시옵고, 신의 잔피(孱疲)하고 수척한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전에 제수하신 그대로 길이 시골에 물러 나와, 허물을 고치고 병을 조리하게 하여 여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친히 편지를 내려 이르기를, “이제 상소의 말을 보니 그간에 물러나려던 일을 다 기록하고, 다섯 가지 마땅하지 못한 점을 진술하며 오지 못하겠다고 굳게 고집하니, 내가 비록 마땅한 사람을 얻어서 정치답게 하여 보려고 하지만 어찌 그 뜻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내가 실로 덕이 없고 사리에 어두워 함께 큰일을 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가 도를 지키고 의를 지키면서 도와줄 뜻이 없는 것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노라. 마땅히 내 뜻을 알라.” 하였다. 선생이 마지못해 명을 좇아 길을 떠나 9월 그믐에 서울로 들어왔다. 10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임금이 은밀히 불러 선생이 정원에 나오니 이르기를, “학교는 풍속을 교화하는 근원인데 퇴폐하여 미약함이 너무 심하고 선비의 기풍은 마땅히 바르게 길러야 하는데도, 경박하고 방탕하여 아름답지 못하다. 이것은 비록 나의 불민한 탓이기는 하나, 제대로 고무(鼓舞)하고 교화하지 못한 소치이기도 하니 또한 사장(師長 대사성)과도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그대는 문장에 능하고 청렴하며 근실하여 교육하는 소임에 합당하기 때문에 내가 그대에게 위임하는 것이니,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서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교화시켜 학교를 진흥시키고 선비의 기풍을 바로잡으라.” 하고, 담비 가죽으로 된 귀마개를 하사하였다. 선생이 이르기를, “신의 병이 심하여 전에도 두 번이나 이 임무를 맡았어도 모두 감당하지 못하였사옵니다. 이제 또 맡기시니 또 전과 같이 감당해 내지 못할까 근심이 되옵니다.” 하였는데 또 술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11월, 병으로 사양하여 상호군에 제수되다. ○ 12월, 임금이 친필로 써서 특별히 가선대부 공조 참판에 승진시켰으나 병으로 사양하다. 허락하지 않아 재삼 사양하였으나 모두 허락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명을 받다. 또다시 극력 사양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38년 (기미) 59세 2월,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분황(焚黃)하다. 병으로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장계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이때에 선생이 분황차 물러 나와 돌아가지 아니하니, 어떤 이가 의아하게 여기고 물었다. 선생이 편지로 대답하기를, “옛사람도 매우 부득이한 처지에 이르게 되면 또한 다른 일을 빌려서 거취를 정하였으니, 어찌 임금을 섬기는 데 정성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싫어하는 바가 가탁하는 것보다 심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내가 분황하려 휴가를 청한 것은 원래 법례대로 따른 것이며, 병으로 조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기에 그대로 물러날 것을 청한 것인데, 이 어찌 남들 말처럼 일을 가탁하여 성실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옛 의리는 살피지 않고 남을 너무 가혹하게 책망합니다.” 하였다. 5월, 또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7월, 또 사직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허락하여 참판을 체차하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하고 본도(本道)에 명하여 식량을 주게 하다. ○ 황중거에게 보내는 답서에서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를 논하다. 《집해》는 송당(松堂) 박영(朴英)이 서술한 것인데, 잘못된 곳이 있어서 선생이 사리대로 따져 해석하였다.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짓다.편액을 쓰고 서원의 규약을 정하였다. 12월,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주자 이후로 도학하는 선비가 매우 많았으나, 기록이 여기저기에서 나와 그 논한 바의 차이와 시비, 학문의 깊이와 수준을 모두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선생이 주자서와 어류(語類), 실기(實記), 사전(史傳), 일통지(一統志) 등의 서적에 의거하여, 그 언행과 사적(事蹟)을 채택, 수집해서 각각 종류에 따라 분류하여 송나라가 강남으로 건너간 뒤로부터 원(元)ㆍ명(明)에까지 이르렀고, 이름하기를 《이학통록(理學通錄)》이라 하였다. 육구연(陸九淵)의 학문을 하는 자에게는 별도로 외집(外集)을 만들어서 그 뒤의 부록으로 삼아 학술이 통일될 수 있게 하였다.
39년 (경신) 60세 1월, 조남명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의 발(跋)을 썼다. ○ 11월에 기고봉(奇高峯)의 편지에 회답하여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변론하다. 기대승(奇大升) 명언(明彦)이, “천명도(天命圖)의 사단칠정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킨 것은 너무나 심하게 분리시킨 것이고, ‘이(理)와 기(氣)는 갈라져서 두 물(物)이 되며, 칠정은 이(理)에서 나오지 아니하고, 사단은 기를 타지 않는다.’라고 한 말은 뜻에 병폐가 없지 않다.”고 편지를 보내와 변론하였다. 선생이 회답하였는데, 개략을 들면, “사단은 정(情)이요, 칠정도 역시 정입니다. 다 같이 정이면서 어째서 사단과 칠정이란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보내온 말에 이른바 ‘말한 바 대상이 달랐기 때문이다.’ 함은 옳은 말입니다. 대개 이와 기가 본래 서로 힘입어 체(體)가 되고, 서로 기다려 용(用)이 되니, 본래 이 없는 기도 있을 수 없고, 또한 기 없는 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하는 바 대상이 같지 않다면 역시 분별이 없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 성(性)이라는 글자 하나를 가지고 말하자면, 자사(子思)의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과 맹자의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에서 두 성(性) 자가 가리키는 뜻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와 기의 타고난 성품 가운데로 나아가서 이 이치의 근원이 되는 본연(本然)의 곳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리킨 바가 이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순수한 선이며 악이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기를 겸하여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성의 본연이 아닐 것입니다. 대개 자사나 맹자와 같이 도체(道體)의 전부를 환하게 본 사람들이 이 같은 말을 주장한 것은, 그 하나만 알고 그 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로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한다면 성 본연의 선(善)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자(程子)와 장자(張子) 등 여러 사람들이 기질의 성[氣質之性]이 있다고 논한 것은 부득이한 까닭이요, 남보다 많은 것을 구하고, 색다른 의논을 세우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적하여 말한 것은 선천적으로 받아 나온 뒤에 있기 때문에, 또 본연의 성을 가지고 섞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내 생각으로, 정(情)이 사단칠정으로 나누어지는 것은 성의 본연과 타고난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을 이미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정에 있어서만 홀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없겠습니까. 측은히 여길 줄 안다든지,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불선(不善)을 미워할 줄 안다든지, 사양한다거나 시비할 줄 안다는 것이 어디서부터 발하여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성에서 발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희(喜)ㆍ노(怒)ㆍ애(哀)ㆍ구(懼)ㆍ애(愛)ㆍ오(惡)ㆍ욕(欲)은 어디서부터 발하여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외물(外物)이 그 형상에 부딪치고 안에서 동(動)하여서 경계를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사단이 발하여 나오는 것을 맹자가 이미 심(心)이라 하였으니, 심은 진실로 이(理)와 기(氣)가 합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리켜 말하는 바가 이(理)를 주로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인ㆍ의ㆍ예ㆍ지의 성은 순수하게 안에 있는 것으로서, 이 네 가지는 그 발현의 단서인 것입니다. 칠정이 발하여 나오는 것을 정자는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고, 주자도 ‘각각 해당한 바가 있다.’고 말하였으니 본래 이ㆍ기를 겸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말하는 것이 기에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외물이 오는 것은 느끼기 쉽고, 먼저 동하는 것은 형기(形氣)와 같은 것이 없으니, 이 일곱 가지는 곧 사물의 근원입니다. 사단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네 가지의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하였고, 또 ‘그 정(情)은 가히 선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칠정은 근본이 선한 것이나 악에 흐르기 쉽기 때문에 그 발하여 나와서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이 한번 있을 때 잘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이미 바르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면 두 가지(사단ㆍ칠정)가 다 비록 이와 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그 근원하는 바[所從來]로 연유하여 각각 주장한 것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떤 것은 이가 된다 하고, 어떤 것은 기가 된다고 하지 못할 게 무엇입니까. 대개 의리의 학문은 심오하고 미묘함의 극치인데, 모름지기 마음을 크게 두고 안목을 높게 가지며, 결코 먼저 한 가지 설만으로 주장을 삼지 말고 마음을 겸허하게 하여 심기를 안정시킨 뒤에 천천히 그 뜻과 취지를 보아서, 같은 속에 다른 점이 있음을 알고, 다른 속에도 같은 점이 있음을 알며, 나누어져 둘이 되었다 하여도 일찍이 떨어진 일이 없었다고 하는데 문제되지 않고, 합하여 하나가 된다 하여도 실은 서로 섞이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귀착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두루 알고 편벽됨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그대가 변론한 바는 이와 달라서, 합하는 것을 기뻐하고 떨어지는 것을 미워하며, 뭉쳐서 온전한 것을 좋아하고 분석하는 것을 싫어하여, 사단칠정의 근원하는 바는 규명하지 아니하고, 대체로 이와 기를 겸하여 선과 악이 있다 하여 깊이 분별하여 말하는 것을 옳지 않다 하니, 이것은 바로 이와 기를 한 물건이라 여겨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근세에 나정암(羅整菴 명나라의 학자 나흠순(羅欽順))이 이와 기는 서로 다른 물건이 아니라는 말을 주창하여 주자의 말을 옳지 않다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나는 평소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보내온 편지의 말이 이와 비슷합니다. 대체로 학문을 강구하려고 하면서 분석함을 싫어하고, 합하여 하나로 만들기만 힘쓰는 것을 옛사람은, ‘대추를 통째로 꿀떡 삼킨다.’고 하였으니, 그 병폐가 적지 않습니다. 계속 이와 같이 하면, 차츰차츰 기를 가지고 성을 논하는 폐단으로 들어가 인욕(人欲)을 오인(誤認)하여 천리(天理)라고 하는 낭패에 떨어질 것이니, 어찌 옳다고 하겠습니까. 보내온 편지를 받은 이후로부터 즉시 나의 소견을 보낼까 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나의 견해가 반드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래도록 보내지 못하였습니다. 근래 《주자어류(朱子語類)》를 보니, 맹자의 사단을 논한 글의 마지막 한 조목에 바로 이 일을 논하였으니, 그 말에 ‘사단은 이 이(理)에서 발하여 나온 것이요, 칠정은 이 기(氣)에서 발하여 나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감히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스승을 믿는다.’라고 옛사람이 말하지 아니하였습니까. 이 말을 본 뒤에 비로소 어리석은 나의 소견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믿게 되어 이에 감히 구구한 것을 대강 진술하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하였다. 명언이 또 조목조목 변론하여 편지 왕래가 서너 번 있었는데 마지막에 선생이 회답하기를, “의리를 변론하여 해석하는 데는 마땅히 치밀하고 폭넓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대가 논한 것을 살펴보니 그 변론한 조목과 줄거리가 너무나 번거롭고 말씀이 산만하여, 왕왕 임시로 옛날 선비의 말을 찾아다 자기가 모자란 답변의 자료로 삼으니, 이것은 과거 보는 선비가 과거 장소에 들어가 시험 제목을 보고 옛날 사실을 주워 모아 답안을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설사 그것이 십분 옳고 당연하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한 터럭만큼도 밀착된 것이 없는데도 다만 부질없이 다투어 성인(聖人)의 문하에서 크게 금하는 것을 범할 뿐입니다. 하물며 참으로 능히 옳고 마땅하지도 못한 것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전번과 같이 선뜻 회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 뒤에 명언이 비로소 이전의 자기 견해가 그릇되었음을 깨달아 자신의 학설을 버리고 선생을 따라 사단ㆍ칠정설을 지어서 말하기를, “맹자가 사단을 논함에 있어서, 대개 사단이 나[我]에게 있는 것을 모두 확충(擴充)할 줄 안다.” 하였으니, 대체로 이 사단이 있고 그것을 확충하고자 한다면, 사단이 이(理)가 발하여 나온 것이라 함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정자가 칠정을 논하여 말하기를, “‘정이 이미 왕성하여 더욱 방자해지면 그 성(性)이 뚫린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자신의 정을 단속하여 중(中)에 합하게 한다.’ 하였으니, 대개 칠정이 왕성하여 더욱 방자하게 될 때 그것을 단속하여 중(中)에 합하게 한다면 칠정은 이 기에서 발하여 나온 것이라 함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로써 본다면, 사단ㆍ칠정을 이(理)와 기(氣)로 분속하게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것은 1년 동안의 일은 아니나, 변론의 시발과 귀착한 곳을 보기 위하여 모두 여기에 기록하였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완성되다. 이로부터는 또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였다. 당(堂)은 3칸인데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고,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하였다. 정사는 7칸인데,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이름하였다. 선생이 매양 도산에 이르면 항상 완락재에 거처하면서 좌우에 도서를 쌓아 놓고 고개 숙여 읽으며 우러러 사색하기를 밤낮으로 계속했다. 집이 가난하여 나물과 잡곡밥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 나갔기 때문에 각고(刻苦)한 공부와 담박한 생활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견뎌 내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나 선생은 넉넉한 듯하였다. 선생은 도에 더욱 근접해 갔고 조예도 더욱 깊어져서 스스로 즐겼고, 바깥 물정을 부러워하지 않은 까닭에, 비록 궁하고 모자라는 가운데에서도 여유가 있고 스스로 터득한 바가 있어서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그 뒤에 학생들이 정사 서쪽에 집을 짓자 그곳에 거처하면서 이름을 역락(亦樂)이라 하였으니, 논어의 ‘자원방래(自遠方來)’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12월에 임금의 부름을 받다. 중국 사신이 올 것이므로 송순(宋純)ㆍ임억령(林億齡) 등과 같이 불렀다.


[주D-001]이해에 …… 유학(遊學)하다 : 선생이 김하서 작별시의 뒤쪽에 손수 쓴 작은 서문[小序]에 말하기를 “계사년(1533, 중종28) 가을에 서(西)로 가서 반궁(泮宮)에 들어갔다.” 하였으니, 이 조목은 마땅히 반궁에 갔다는 계사년 조목 아래 있어야 할 것이다.
[주D-002]이(李)ㆍ두(杜) :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3]왕ㆍ조 :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를 가리킨다.
[주D-004]문신기영회도(文臣耆英會圖) :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늙어 관직에 물러나 낙양(洛陽)에 있으면서, 명망 있는 노인들과 결사(結社)하여 기영회(耆英會)라 이름하고,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여기서는 국가에서 설치한 기로소(耆老所)에 든 사람들의 모임을 그림으로 그린 것을 말하는데, 기로소는 문관 이품(二品) 이상으로 60세가 넘은 사람을 입소(入所)시켜 공경하여 대접하는 곳이다.
[주D-005]군자가 …… 없다 : 《주역》 〈건괘(乾卦) 구삼(九三)〉의 효사(爻辭)이다.
[주D-006]중화(中和)를 …… 생육된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나온다.
[주D-007]사가독서(賜暇讀書) :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8]영주(瀛州)에 오른 것 : 영주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에 오른다는 것을 말한다. 당 태종(唐太宗)이 문학관(文學館)을 짓고 18학사를 선발하자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여 “영주에 올랐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다. 《新唐書 褚亮列傳》
[주D-009]조정으로 돌아오다 : 이 구절 다음에 “9월, 경기도의 재해를 시찰하는 어사가 되다.”라는 조목이 빠졌다.
[주D-010]세상살이가 …… 알았고 : 텅 빈 마음으로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떠돌아다니는 빈 배와 같다는 뜻으로,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히면 비록 마음이 편협한 사람도 성을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주D-011]저력(樗櫟)처럼 쓸모없다 믿었지 : 가죽나무[樗]와 상수리나무[槡]는 《장자(莊子)》의 〈인간세(人間世)〉와 〈소요유(逍遙遊)〉에서 대표적인 쓸모없는 나무[散材]로 거론되었다.
[주D-012]상유(桑楡)의 …… 합니다 : 상유는 서쪽에 태양이 지는 곳이며, 경은 햇빛이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가 풍이(馮異)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비록 동쪽에서 잃었으나 상유에서 거두었다.” 하였으니, 곧 처음에 실패하였다가 뒤에 회복하였다는 말이며, 여기서는 만년(晩年)에 공부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주D-013]삼포(三浦) : 조선 시대에 왜인들이 와서 있도록 허락하여 준 곳으로 부산(釜山)의 부산포(富山浦), 울산(蔚山)의 염포(鹽浦),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세 곳이다.
[주D-014]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 : 주희(朱熹)의 시에, “반 이랑 네모진 연못이 한 거울을 열었으니,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한다.[半畒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도학적(道學的)인 시이다.
[주D-015]정일집중(精一執中) : 정밀하게 살펴 사욕이 없게 하고 의리의 정도(正道)를 한결같이 지켜야 참으로 중도(中道)를 잡을 거라는 뜻으로,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온다. 송(宋)의 주희(朱熹)는 이를 요(堯)ㆍ순(舜)ㆍ우(禹)의 전수심법(傳授心法)이라 하였다.
[주D-016]환정교서(還政敎書) : 그때까지 왕대비가 관여하던 정사를 왕에게 완전히 돌려 줌을 선포하는 교서이다.
[주D-017]연평답문(延平答問) : 주희(朱熹)가 그의 스승 이연평(李延平)과 문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주D-018]칠월편(七月篇) : 《시경(詩經)》에 칠월편(七月篇)이 있는데, 사시(四時)의 농사짓는 풍경을 읊은 시이다. 주공(周公)이, 자기의 선대에서 왕업(王業)을 일으킬 때에 농사에 힘썼다는 것을 임금에게 알리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주D-019]상문(尙文)의 …… 좋아하는가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9장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세 가지 중함이 있다.[王天下有三重焉]”라는 구절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석에 “하와 상과 주는 각각 충과 질과 문을 숭상하였다.[夏尙忠 商尙質 周尙文]”라는 말이 있다.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살던 사람은 한의 엄광(嚴光)으로 광무제(光武帝)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주D-020]향약(鄕約) : 송나라 남전(藍田)의 여씨(呂氏) 형제들이 향약(鄕約)을 처음 만들었는데, 그것은 향촌(鄕村)에서 풍속을 교화하기 위하여 실천할 규약을 설정한 것이다. 이 강령(綱領)은 네 가지인데, “덕업으로 서로 돕고, 예속으로 서로 사귀며, 과실을 서로 충고하고, 환난에 서로 구조한다.[德業相勸 禮俗相交 過失相規 患難相恤]”이다. 후세에 이 여씨의 향약을 모방하여 실행하는 데는, 강령은 그대로 두고 세밀한 조목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각각 달리하였다.
[주D-021]우탁(禹倬) : 세상에서 역동(易東) 선생이라고 일컫는 고려 말기의 명현이다.
[주D-022]자원방래(自遠方來) : 《논어》의 첫 장에,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란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