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풍양조씨 시조 조암

高麗國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墓碑銘) 병서

아베베1 2013. 1. 13. 13:07

 

 

 

 

 

 

 

계곡선생집 제13권

 비명(碑銘) 9수(首)

고려국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 묘비명

(高麗國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上柱國三重大匡門下侍中平章事趙公墓碑銘) 병서


고려조의 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 상주국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 조공(趙公)이야말로 풍양 조씨(豐壤趙氏)의 비조(鼻祖)가 되는 분이다. 그 묘소가 풍양현(豐壤縣) 적성동(赤城洞) 신향(申向)의 언덕에 있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후손들이 대대로 초부(樵夫)와 목자(牧者)의 출입을 엄금하면서 지켜온 지 어언 6백여 년이 되었다.
그러다가 우리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10년에 이르러 공빈 김씨(恭嬪金氏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光海君)의 생모)가 죽자 공의 식묘(食墓) 뒤쪽 30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에 공의 후손 약간 명이 상소하여 호소를 하자, 소경왕이 이르기를,
하였다. 그런데 장례를 치른 지 34년이 지난 광해(光海) 2년에 낳아 준 어미를 추융(追隆)하면서 공빈을 높여 후(后)로 하고 그 묘소를 성릉(成陵)으로 부르게 하는 한편, 근처에 있는 분묘(墳墓)들을 모두 파내어 없애 버리도록 하였다. 그 결과 공의 묘소 역시 당연히 그 대상 중에 포함이 되었는데, 당시에 대신이 말하기를,
“오래 된 묘소를 파내어 없애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 그저 봉분만 깎아 버려 평지처럼 만들면 충분하다.”
하자, 광해가 그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공의 묘소가 완전히 평지로 변하여 후손들이 성묘할 길이 전혀 없게 되었으므로 원통한 생각을 품어 온 것이 14년이나 되었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 1)에 이르러 금상(今上)이 대위(大位)에 오르셨는데, 그 뒤 8년이 지난 숭정(崇楨) 경오년(1630, 인조 8)에 공의 후손 약간 명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성릉(成陵)을 이미 혁제(革除)한 만큼 신의 선조 모(某)의 묘소에 예전대로 봉분을 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10월 모일에 자손들이 모두 묘소 아래에 모여 글을 지어 고한 뒤 묘역을 열어 보니 광중(壙中)의 네 모퉁이를 완연히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에 마침내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벽돌로 석계(石階)를 조성하는 등 완전히 옛날 제도대로 복구하였다. 이 일을 마치고 나서 이구동성으로 모두 말하기를,
“생각건대 아조(我祖)를 이곳에 모신 지 6백여 년이 지난 때에 봉분을 헐게 되었고 훼손된 지 20년 만에 다시 복구하게 되었다. 대저 6백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까지 후손들이 그 묘소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경우는 흔치가 않은 법이요, 게다가 일단 훼손되었다가 곧바로 복구되는 경우로 말하면 더더욱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아조의 덕업(德業)이 성대하여 신명(神明)이 말없는 가운데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비석을 세워 그 자취를 기록함으로써 영원히 전해지도록 해야만 하겠다.”
하고는, 나 역시 외손의 대열에 속한다고 하여 나에게 비명을 쓰도록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공의 원래 이름은 암(巖)으로 풍양에서 살았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은 처음부터 전야(田野)에 은둔하면서 출세할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는데, 급기야 고려 태조(太祖)가 일어남에 미쳐 한번 보고는 마음이 계합(契合)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맹(孟)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누차 공적을 세워 벽상공신(壁上功臣)의 호를 받은 뒤 관직이 시중(侍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대저 고려 태조야말로 영무(英武)한 분으로 사람을 잘 알아보고 그에 맞는 임무를 적절하게 부여하였으므로 현능(賢能)한 인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었다. 그런데 공이 초야에서 솟구쳐 나와 재상의 지위에 이르고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되었으니, 한 세상에 명성을 떨치는 위인(偉人)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처럼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세대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고 징험할 만한 문적(文籍)도 없어 상세한 사업(事業) 내용이나 생몰년대 및 배필, 자손들을 모두 상고해 볼 수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단지 보첩(譜諜)에 기재된 내용을 의거하고 노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참작하여 대략 이와 같이 서술한 다음 명시(銘詩)를 붙이는 바이다. 내외의 여러 후손들 가운데 저명하게 된 이들은 비 뒷면에 기록되어 있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 빛나는 고려 태조 / 於赫麗祖
제왕 될 부서(符瑞) 쥐고 천명 응할 때 / 握符應期
우리의 시중 어른 / 維時侍中
실로 협찬하였도다 / 實左右之
상주국 품계 성큼 올라 / 勳躋柱國
삼공(三公)의 반열 자리하고 / 位列台司
우뚝 원훈(元勳)되어 / 倬爲元臣
육태사(六太師)와 어깨 겨뤘도다 / 齊六太師
적성동 묘역은 / 赤城之塋
사후의 안식처라 / 降魄攸依
나무들 울창히 우거진 채 / 鬱彼松檟
대대로 출입 금했어라 / 蕘牧遠違
육백여 년 세월 지나 / 歷祀六百
묘소가 훼손되며 / 堂封見夷
봉분마저 없어지자 / 丘壠殘滅
부로들 비탄에 잠겼도다 / 父老傷悲
하늘의 뜻 정해지면 반드시 이기는 법 / 天定必勝
난정(亂政) 뒤엎으며 / 反乎覆而
성군(聖君)이 폐단 개혁함에 / 聖作革僞
후손들 일제히 상소하여 청했다네 / 雲仍齊辭
광중(壙中)을 열어 보니 / 有窅其宮
완연한 네 모퉁이 / 周以阿陲
봉분하고 비 세우고 / 旣封旣樹
훌륭한 모습 되찾았지 / 隆然而巍
아 우리 시중 어른 / 於維侍中
그 덕업 휘황하니 / 德業光輝
유허(遺墟)와 묘소 자리한 곳 / 墟墓所在
백세토록 공경 받아야 하리 / 百代永祗
훼손된 뒤에 복구되어 / 旣隳而復
더더욱 공고해졌는데 / 鞏固益彌
공의 많은 손자들 / 公多孫子
본손(本孫) 지손(支孫)은 물론이요 / 有本有支
나아가 외손까지 / 延及外裔
금관조복(金冠朝服) 착용하고 / 佩服金緋
성묘하고 제(祭) 올리며 / 來展來薦
법도를 어기지 말지어다 / 勿替式時
높은 산 가파른 언덕 / 豐岑巀嶭
강물은 출렁출렁 / 其水瀰瀰
공적 기록한 빗돌 위에 / 伐石紀烈
이 명시 붙이노라 / 陳此銘詩


 

[주D-001]공빈의 …… 나왔다 : 조씨 가문의 여성이 공빈 김씨의 가문으로 출가했음을 의미한다. 주(周) 나라에서 큰딸을 호공(胡公)에게 출가시키면서 진(陳) 나라의 제후로 봉한 것과 관련, “진 나라는 우리 주 나라에서 나왔다.[則我周之自出]”는 말이 나온 데에서 비롯되었다. 《春秋左傳 襄公 25年》
[주D-002]육태사(六太師) : 고려 태조의 창업을 도와 태사(太師)를 증직받은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知謙), 유검필(庾黔弼), 최응(崔凝) 등 6인을 가리킨다. 《大東韻府群玉 卷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