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성호 이익 선생 행장

성호 이익 선생 행장 가장 묘갈명

아베베1 2013. 1. 20. 21:51

 

 

 

성호전집 부록 제1권
행장〔行狀〕[문인(門人) 윤동규(尹東奎)]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익(瀷), 자는 자신(子新)이다. 광주(廣州) 선영 아래의 첨성리(瞻星里)에 살았으므로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 그 선대는 여흥인(驪興人)이다.
8세조는 병조 판서를 지냈고 좌참찬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경헌공(敬憲公)이고 휘는 계손(繼孫)인데, 문학(文學)으로 집안을 일으켰다. 일찍이 북도(北道)의 관찰사가 되어 문옹(文翁)의 교화를 베풀었으므로 북도 사람들이 지금까지 서원을 세워 선사(先師)로 제사하고 있다고 한다.
증조 휘 상의(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공(翼獻公)이다. 선묘조(宣廟朝)에 몸가짐이 조심스럽고 진중한 것으로 공경들 사이에 이름이 났다. 조부 휘 지안(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하진(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숙묘조(肅廟朝)에 문장과 절행(節行)으로 힘써 청의(淸議)를 부지(扶持)하여, 조정을 떠나는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을 만류하기를 청하였다가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고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좌천되었다. 이어 당쟁이 일어나 용사(用事)하는 자가 기필코 무거운 벌을 주고자 하여 죄상을 긁어모았지만 소득이 없자 마침내 작은 일로 죄안을 날조하였다. 그리하여 운산군(雲山郡)에 귀양 가서 졸하였다.
비(妣)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유수(留守) 휘 후산(後山)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고, 비(妣)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휘 대후(大後)의 따님이다. 선생은 대헌공(大憲公)의 계자(季子)로, 권 부인(權夫人)의 소생이다.
선생은 우리 숙종(肅宗) 7년 신유년(1681) 10월 18일에 대헌공의 귀양지인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그 이듬해인 임술년(1682)에 대헌공이 세상을 버리니, 선생이 태어난 지 겨우 이태 되던 때였다.
선생은 허약한 체질이라 병이 많았다. 권 부인이 매우 애지중지하여 항상 약을 주머니에 담아 두고서 수시로 간호하고 보살폈다. 이 때문에 일찍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선생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여 아무도 따를 자가 없었다.
조금 자라서 공부할 나이가 되자 공부하기를 재촉하지 않아도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 분발하였다. 여럿이 함께 기거하며 강학하였는데 여러 학생들이 혹 곁에서 떠들며 장난을 쳐도 선생은 늘 묵묵히 앉아 책장을 넘기기를 종일토록 그만두지 않았다. 권 부인이 일찍이 몰래 보고는 몹시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아이가 능히 이와 같이 하니, 내가 근심이 없다.” 하였는데, 이윽고 문사(文辭)에 큰 진전이 있었다.
을유년(1705, 숙종31)에 책문(策問)으로 초시에 입격하였으나 녹명(錄名)이 규식에 어긋나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았다.
병술년(1706)에 둘째 형이 앙화를 만나자 근신하며 은거할 뿐 세상에 뜻이 없었다.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셋째 형 옥동(玉洞 이서(李漵)) 선생과 종형(從兄) 소은(素隱 이진(李))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학문하는 방법을 익히고 들었다. 조석으로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것 외에는 방에 바르게 앉아 날마다 성현의 글을 펴 놓고 되풀이하여 읽고 사색하여 터득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늘 대부인(大夫人)의 뜻을 따르고 어긴 적이 없었으며, 집안 살림이 궁핍해지자 스스로 집안을 경영하여 대부인에게 근심을 끼치지 않았다.
을미년(1715)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거상(居喪)에 예(禮)를 다하여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벗지 않았고, 장사 지내기 전에는 미음만 들었으며, 장사 지낸 뒤에는 거친 밥에 쓴 소금만 먹고 입맛을 돋우는 생강과 계피 등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상기를 마치자 노비와 집기를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모두 종가로 보내 생계가 어려웠지만 지내는 것이 태연자약하였다.
집안에 규약을 정해 남에게 빌리거나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직 농사지어 얻은 수확으로 날짜를 안배하여 자급하였다. 농사를 일 잘하는 노복에게 위임했는데 부리는 데에 법도가 있었고, 그 노복 또한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하여 만년의 살림살이가 또한 이에 힘입어 다소 넉넉해졌다.
금상(今上) 정미년(1727, 영조3)에 조정에서 선생의 이름을 듣고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하였다. 선생은 은명(恩命)에 한 번 사은하려고 상경하였으나 사은한 전례가 없다고 하므로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계미년(1763)에 국가에 경사가 있어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를 베풀었는데, 당시 선생의 연세가 83세였으므로 규례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의 직함을 제수받았다. 이해 겨울 11월에 가벼운 질환을 앓다 12월 17일에 침실에서 운명하였다.
염습(斂襲)에는 지금(紙衾)을 쓰고 악수(握手)와 신〔履〕은 쓰지 않았으며, 반함(飯含)은 마련하기만 하고 쓰지는 않았다. 평소에 빠진 머리카락으로 베개를 만들고 손톱과 발톱을 잘라서 관 귀퉁이에 넣었는데 모두 종이로 쌌다. 명정(銘旌)이 있었는데 또한 종이에다 선생이 직접 ‘성호징사여주이공지구(星湖徵士驪州李公之柩)’라고 10글자를 써 둔 것이다. 멱건(幎巾)과 혼백(魂帛)도 종이로 만들었는데 멱건은 검은 칠을 하였다. 관의 두께는 2치〔寸〕 남짓인데 옻을 칠하는 대신 송진(松津)을 발랐다. 천시(遷屍)하고 올리는 전(奠)은 찬장에 있는 음식을 썼고, 성빈(成殯)하기 전까지 조석(朝夕)으로 올리는 궤전(饋奠) 또한 폐하지 않았다. 장사 지낼 때에는, 광중에 넣는 현황(玄黃)의 속백(束帛)은 비단 대신 종이를 썼고, 구의(柩衣), 공포(功布), 삽선(翣扇) 등을 쓰지 않았으며, 결관(結棺)은 새끼줄〔藁索〕을 썼다. 이는 모두 평소에 정해 둔 것이다. 선생에게 수업한 문인 및 족인(族人)들 중 단문친(袒免親)을 넘어서는 자들은 백포(白布)로 된 건(巾)과 띠〔帶〕를 하기도 하고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기도 하여 장례 때에 벗었는데, 혹 상기를 마칠 때까지 소대(素帶)를 한 자들도 있었다.
이듬해인 갑신년(1764) 2월 27일에 집 북쪽에 있는 선영의 임좌(壬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전에 목 부인(睦夫人)을 장사 지낼 때, 선생이 문인들과 함께 미리 무덤 쓸 자리를 잡아 두고서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삼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목 부인과 합장하고 또 전배(前配) 신 부인(申夫人)의 묘를 이장해 와서 삼광동혈(三壙同穴)의 제도를 따랐으니,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전배(前配) 청주 신씨(淸州申氏)는 정언(正言) 필청(必淸)의 딸이다. 후배(後配)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천건(天健)의 딸이니, 유순하여 지아비를 받들매 한결같이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고, 정숙하고 음전하며 식구들과 화목하여 내조(內助)의 공을 이루었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수십 년을 출입하였지만 비복을 꾸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규문의 의칙(儀則)을 본받을 만한 것이 이와 같았다. 아들은 정랑(正郞) 맹휴(孟休)이고, 딸은 판관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으니, 모두 목씨 소생이다. 정랑은 참판 채팽윤(蔡彭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구환(九煥)을 두었다. 구환은 권세억(權世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판관은 1녀를 두었는데 일찍 잃었다.
선생은 얼굴이 반듯하고 키가 훤칠한 데다가 눈매가 형형하여 영기(英氣)가 사람을 압도하였다. 온화하고 화락하여 친근하게 느껴지는 얼굴빛과 웃음소리는 마치 춘풍이 만물을 자라나게 하는 듯하고, 굳세고 엄정하여 사기(辭氣)가 준엄한 것은 마치 열일(烈日), 추색(秋色)과도 같았다. 타고난 자질이 이미 바른 데다가 함양(涵養)한 것 또한 지극하였다. 위의(威儀)는 검칙하는 바가 있되 너무 얽매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고, 너그럽고 넉넉함은 자연스럽고 온화함과 평이함은 절도에 맞았으니, 이천(伊川)이 말한 “형체(形體)의 예가 아니다.〔非體之禮〕”라는 것이다. 그 얼굴빛은 장중하고 그 말씀은 엄격하였으며, 그 용모는 편안하면서도 공손하고 그 앉은 자세는 바르고 곧았다. 세수한 자리에는 물방울이 튄 자국이 없었고, 음식을 먹을 때에는 수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중야(中夜)에는 반드시 침수(寢睡)에 들었고 매상(昧爽)에는 반드시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한 뒤에 의관을 갖추고 가묘(家廟)에 배알하였고, 물러 나와서는 서실에 앉아 계셨는데 궤안(几案)을 반드시 바르게 정돈하였다. 글을 읽을 때에는 소리의 청탁과 고저가 음운(音韻)에 맞았다. 그 동정과 용모와 거지(擧止)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았다.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다. 비록 노쇠해진 뒤에도 혹 말이 부모에게 미치면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고 울음을 삼키며 오열하기까지 하였다. 일찍 대헌공을 여의어 선친의 얼굴과 풍모를 알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원통하게 여겼다. 뒤에 대헌공께서 돌아가신 지 갑년(甲年)이 되는 해에 추복(追服)을 입으려다가 이윽고 말씀하기를, “퇴옹(退翁 이황(李滉))께서도 나처럼 일찍 선군(先君)을 여의었지만 추복을 입지 않으셨다. 퇴옹은 내가 스승으로 섬기는 분이니 어찌 감히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고는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생을 마치도록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상중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형제와 자질(子姪)들에게는 지극한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 둘째 형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늘 마음 아파하여 후사를 세워 주었으며, 또 그 서출(庶出)의 자손들에 대해서도 거두어 길러 주고 교육하였고 시집보내 주고 장가보내 주어 성가(成家)시켰다. 일찍 고아가 된 여러 조카들도 집으로 데려와서 가르치고 길러 주었는데 한결같이 자기 자식처럼 여겨 병이 나면 의원을 찾고 약을 구하기 위하여 밤길과 풍설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씨(鄭氏) 집안의 며느리가 된 누나가 일찍 과수가 되어 자식이 없었는데 선생은 딱하게 여겨 데려와 대부인 곁에 두었다가 그 집안에서 후사를 세우기를 기다려서 돌려보냈다.
족인(族人) 가운데 혼인할 시기를 놓친 사람들에 대해서는 혼주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혼구(婚具)를 도와주기도 하였다. 굶주리면 반드시 구휼하고 병이 나면 반드시 문병하고 상사(喪事)가 나면 반드시 부조하되 집안 형편에 맞게 하였다.
동복(僮僕)에 대해서는 똑같이 어루만지고 보살펴 주었다. 일찍이 부지런히 일하고 충성을 다한 노복이 죽었는데 그를 위해 가서 곡하였고, 집에 기르는 개가 있었는데 죽으면 묻어 주도록 하였으니, 대개 나의 인(仁)으로부터 미루어 나가 남에게 미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집이 소종(小宗)의 집과 다소 떨어져 있었는데 삭망(朔望)과 속절(俗節)의 천향(薦享) 때에는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몸소 가서 제사를 지냈고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폐하지 않았다.
몇 대(代)를 모신 선영(先塋)은 속절이면 무덤으로 올라가 온종일 전배(奠拜)하였는데 일찍이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한 적이 없다. 말씀하기를, “몇 대가 같은 선영에 계시는데 만약 세대의 원근과 묘전(墓田)의 유무에 따라 가까운 조상은 제사를 지내고 먼 조상은 제사를 폐한다면 조상의 마음이나 자손의 마음에 똑같이 서운할 것이다.” 하여, 재물을 모아 묘전을 두고 매년 맹동(孟冬) 상정일(上丁日)에 한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또 이르기를, “8세조 경헌공(敬憲公)은 아조(我朝)에 들어와 집안을 일으킨 개조(開祖)이시다. 국법(國法)에는 공자(公子)나 공신(功臣) 이외는 달리 입종(立宗)에 관한 명문(明文)이 없는데, 《예기》 〈왕제(王制)〉의 주(註)에 이미 ‘비록 별자가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작위를 받은 자 또한 그렇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서성(庶姓)이 입종(立宗)한 증거가 될 수 있다.” 하여, 경헌공의 사당을 종손의 집에 새로 세우고 해마다 한 차례씩 제사 지냈다. 또 ‘입종하는 것은 장차 종족을 한데 모으려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매년 서울과 시골에서 각각 한 차례씩 회합하였다. 그리고 대헌공의 유교(遺敎)를 따라 숙부와 숙모의 제사를 모셨는데 제식(祭式)을 정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제사 지내기를 한결같이 친자식처럼 하였다.
일찍 죽은 누나가 있었는데 기일(忌日)에 제사를 폐하지 않았고, 서모(庶母)가 돌아가셨는데 제사를 받드는 그 외손이 혹 길이 멀어 오지 않으면 또한 찬수(饌需)를 나누어 주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또 고조 측실의 묘가 무너져 알아볼 수가 없었는데 다시 봉토(封土)하여 수축하고, 그 묘전을 찾아내서 종인(宗人)에게 맡겨 향화(香火)가 이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모(乳母)가 죽어 자식이 없었는데 집 곁에 단을 쌓고 제문을 지어 제사 지내고 이어 해마다 한 차례씩 술잔을 올리도록 하였다. 선생께서 조상을 받들고 종인들을 돈독히 대하며, 먼 데까지 미루어 나가고 아래에까지 미친 것이 이와 같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어 규문(閨門) 안팎이 정숙하였다. 비록 자손과 친족이라 하더라도 까닭 없이 내당에 들어간 적이 없었으니, 늘 《주역》의 “가인(家人)이 원망함은 심한 잘못이 아니요,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함은 집안의 절도(節度)를 잃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늦게 아들 하나를 보았는데 지극히 총명하고 영특하였다. 비록 매우 사랑을 쏟았지만 그 가르침만큼은 반드시 법도대로 하였다. 조금만 잘못해도 용서하지 않고 엄히 꾸짖으면서 말씀하기를, “사람들은 자제가 재주가 있어도 항상 교도(敎導)가 잘못될까 봐 매양 걱정한다. 두려운 게 없기 때문에 망가지는 것이다.” 하였다. 비록 종족 간이라 하더라도 의리상 불가한 점이 있으면 정색하고 엄히 책망하였고, 일이 지나가고 원래대로 돌아오면 탓하지 않았으므로 두려워하고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자제가 출입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게 하여 잠깐 나갈 때도 반드시 절하였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절하였다. 그러므로 수업하는 문인들도 보고는 감화되어 똑같이 하였다. 아래로 천것인 비복에 이르러서도 서로 추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감히 큰 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지 못하게 하였다. 주위로 마을 사람들에 대해서도 바른말로 나무라 그른 짓을 못하게 하니,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가르침에 경복(敬服)하였고 존경하고 신뢰할 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선생께서 사람을 감화(感化)시키는 덕의 일단을 볼 수 있다.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는 것 또한 각기 원칙과 법도가 있었다. 변두(籩豆)는 정해진 수효가 있어 깨끗하지만 풍부하지 않았다. 조석의 찬도 정해진 가짓수가 있어 자신이 먹는 것과 똑같이 남을 대접하고 빈객의 귀천에 따라 반찬을 달리하지 않았다. 의복은 몸을 가리는 데에 주안을 두어 검소하지만 깨끗하였고, 음식은 배를 채우는 데에 주안을 두어 조악하고 사치하지 않았다. 길흉사 등의 제반 비용은 모두 한 해 예산으로 충당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니, 대요는 절검에 힘써 모자라나마 한 해 예산에 맞게 할 뿐이었다. 일찍이 〈입검설(入儉說)〉을 지어 시속의 폐단을 개탄하였고, 또 구황(救荒)하는 음식으로는 콩〔豆〕만 한 것이 없다고 여겨 흉년이 들면 반드시 콩을 갈아 죽을 만들어 먹고 〈반숙가(半菽歌)〉를 지어 스스로 즐겼다. 아들이 남쪽 고을의 원이 된 적이 있는데, 부임할 때 목 부인(睦夫人)만 모시고 가서 봉양하게 하고 선생은 홀로 고향 집에 남아 계셨다. 혹 남은 녹봉(祿俸)으로 음식물을 보내오면 선생은 물리치고 받지 않으며 말씀하기를, “무릇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열에 여덟아홉은 옳지 못한 것이니,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이 가하겠는가. 내가 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내 밭을 갈면 굶주림과 추위는 면할 수 있다.” 하고는 생선과 술만 받아 이웃과 친척, 문생들과 함께 모여 같이 마셨다. 선생이 집안을 다스리고 선조를 받들며, 자식을 가르치고 빈객을 접대하며, 사람들을 통솔하고 재물을 절약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학문하는 방법은 선현이 정한 과정을 따라 공부하여, 경서를 먼저 공부하고 이어 《사기》와 제자백가(諸子百家)를 공부하였는데 끝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글을 읽을 때에는 글자마다 훈고를 탐구하고 구절마다 뜻을 탐색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으니, 요컨대 깊이 연구하여 자득하는 데에 목표를 두었다. 널리 글을 배우고 상세히 이치를 설명하여 터득하는 대로 기록하였는데 《맹자》로 처음을 삼았으니, 그 지은 책을 이름하여 《맹자질서(孟子疾書)》라고 하였다.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묘리를 터득하는 것이야 어찌 내가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마는, 그 글을 얼른 기록하는 뜻은 내가 삼가 취한 바가 있다.” 하였다.
《맹자질서》의 서문에 이르기를, “질서란 무엇인가. 생각이 떠오르면 곧 기록하는 것이니, 이내 잊어버릴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생각이 다시 떠오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귀하니, 얼른 기록하는 것은 차선이고, 또한 익숙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주 부자(朱夫子)께서 말씀하기를, ‘초학자는 반드시 책자를 비치해 두고 터득한 바와 본 바를 기록해야 한다.’ 하였으니, 이 말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반드시 《맹자》 7편(篇)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어째서인가? 시간적으로는 후대(後代)가 되고, 내용상으로는 의미가 상세하기 때문이다. 후대이면 가깝고 상세하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인의 뜻을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맹자》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 부자의 《맹자집주(孟子集註)》가 나오면서 많은 말들이 잠잠해졌고, 해외에 전파되면서 모두 같은 길을 따르게 되었으니 성대하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맹자》의 뜻을 발명(發明)한 제가(諸家)의 설(說)이 숲에 나무가 빽빽하고 바다에 물결이 무수히 일듯 다양하고 분분하여 반드시 다 들어맞지는 않았는데 영락(永樂) 연간에 호광(胡廣)의 무리가 하찮은 학문으로 발신(發身)하여 취사한 것이 근거가 없었던 탓에 주석의 뜻이 혹 매몰되고 잘못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으니, 《맹자질서》를 짓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 주자가 맹자를 높이고 후인들이 주자를 높인 것은, 후인들이 주자를 높인 것이 오히려 주자가 맹자를 높인 것보다 심하였으니, 현자가 성인을 바라고 선비가 현자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세인 것이다. 현자는 지혜가 능히 성인에 미치기 때문에 맹자의 기상이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찍이 존모하는 마음이 독실하다 하여 이를 숨긴 적이 없고, 선비는 아랫줄에 곤궁히 처해 있기 때문에 《맹자집주》에 대해서 시비를 일삼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자신을 믿지 않고 믿을 만한 것을 믿는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학자의 바른 태도이긴 하지만 혹 독실하게 믿은 뒤에도 풀리지 않는 의혹이 있으면 강습할 때 드러내거나 책자에 몰래 기록해 두었다가 자득하기를 구하니, 이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문득 윗사람을 비난한 죄로 다스리니, 죄를 다스리는 것은 진실로 의도가 있는 듯하지만, 엄격한 법과 가혹한 형벌을 어찌하여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쓴단 말인가. 옛글에 이르기를, ‘스승을 섬김에 숨김이 없어야 한다.’ 하였으니, 이는 의심을 품는 것을 금하지 않은 것이다. 아랫자리에 처하여 공부에 진전이 있기를 바라면서 곧 스스로 환히 통했다고 여기는 자는 어리석지 않으면 편협한 사람이니, 나는 실로 이를 부끄러워한다. 이런 까닭으로 정전(井田)을 구획하고 세수(歲首)를 정하는 따위에 대해 함부로 일설(一說)을 제기하여 미진한 뜻을 보완하려고 하니, 이것들은 모두 주자가 일찍이 의심을 가졌던 문제이다. 의심을 가졌기에 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으니, 말이 들어맞지 않는 것은 말한 자에게 죄가 있는 것이다. 우리 부자(夫子)께서 황천에서 다시 살아나신다면 반드시 진보하기를 구하는 마음을 불쌍히 여겨, 말이 들어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 나에게 죄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하였다.
또 《논어질서(論語疾書)》의 서문에 이르기를,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먼저 이 주(註)를 보아야 하고 먼저 그 마음을 이해해야 하니, 주자(朱子)의 마음을 이해하면 부자(夫子)의 마음 또한 거의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무엇을 그 마음이라 하는가. 주자가 이 주(註)를 지을 때에 구설(舊說)에 있어서 그대로 따를 만하면 따랐으니 구차하게 새로 만든 것이 아니요, 혹 전후의 견해가 다르면 바꾸었으니 구차하게 그대로 남겨둔 것이 아니요, 비록 문인 제자가 생각나는 대로 반론을 제기한 것일지라도 일단의 장점만 있으면 모두 채택하여 수록하였으니 구차하게 버린 것이 아니다. 이로써 본다면 주자의 마음은 천지와 드넓음을 함께하고 고금과 공정함을 함께하여 털끝만큼의 인색함도 개입되지 않고 오직 의리를 따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취사(取捨)했던 기상을 볼 수 있는데, 오늘날에는 그 글은 높이면서도 그 마음은 놓치고, 그 글은 외우면서도 그 의리는 뒷전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생각하면 망녕된 짓이라 하고 의심하면 참람한 짓이라고 하며, 뜻을 밝히면 군더더기 말이라고 하여 모든 사소한 것과 일체의 비근(卑近)한 것까지 억지로 금망(禁網)을 설치하여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구분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옛사람이 후인들에게 기대한 바이겠는가. 더구나 《논어》는 의미가 가장 심오하고 말이 가장 간결하다. 성인의 말씀은 뜻만 표현하면 곧 멈추어서, 일정한 법도가 있는 《중용》, 《대학》이나 부연한 것이 많은 《맹자》와는 같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가 난해한 것이니, 내가 이 책을 지은 것은 감히 주석 이외의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다. 주자 문하의 제자(諸子)들의 문목(問目)과 마찬가지로 밝은 스승을 기다려 질정을 받을 작정이다.” 하였다.
글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며 의리를 변별하고 뜻을 독실하게 하는 것은 정주(程朱) 이후의 학문을 하는 심법(心法)이니, 이 두 서문을 보면 또한 선생이 이 학문에 있어서 성현의 심법을 전수하고 거의 단절된 사학(斯學)의 맥을 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선생이 세속의 학문이 모호하여 명확하지 않고 옛것을 답습할 뿐 얻는 것이 없어서 천리(天理)에 어두워지고 인욕(人慾)에 사로잡히게 된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는 절절한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중용》, 《대학》, 삼경(三經), 《근사록》, 《심경》 등 여러 책에 있어서 모두 이런 뜻으로 각각 논술한 것이 있으니, 예컨대 정전(井田)과 정삭(正朔)에 대해 상고한 것, 역학(易學)의 도서(圖書)에 대해 논한 것, 설시(揲蓍)와 산기(算期)에 대해 논한 것, 《중용》 10장(章)의 대지(大旨)를 논한 것, 관중(管仲)이 죽지 않은 것에 대해 논한 것, 백이(伯夷)에 대해 논한 것과 같은 여러 글들은 선현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내용이 많다.
사칠이기(四七理氣)에 대한 논변에 이르러서는, 퇴옹(退翁)과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이후에 다시 우계(牛溪 성혼(成渾))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두 분의 논쟁이 있어 세상의 큰 논변거리가 된 지 오래이다. 대개 사단(四端), 칠정(七情)의 명칭과 뜻은 실로 순(舜) 임금이 말씀하신 인심(人心), 도심(道心)이라는 것과 실체는 같고 명칭만 다른 것인데 후인들은 합하여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혹 사단은 한 덩어리〔渾淪〕이며 사단은 칠정의 선한 쪽의 일면〔善一邊〕이라는 의심에 구애되어 이렇듯 여러 갈래의 논의가 있게 되었고, 이어 당론(黨論)이 성해지면서 각기 한쪽만을 주장하여 더 이상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른바 ‘퇴도(退陶)를 높이고 율곡을 버렸다.’라는 말은 끝내 삼키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면서 ‘선일변’의 설(說)로 귀결되는 결과를 면치 못하였다. 선생께서 이 문제를 조목조목 나누고 하나하나 분석해서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지어 발명(發明)하고 서문에 이르기를, “순 임금이 인심과 도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있다. 학자들이 이를 학문의 본령으로 삼고 각기 지향(指向)하는 바가 있어 그 뜻을 서로 밝혔다. 맹자는 사단을 위주로 말씀하였고, 《예기》 〈예운(禮運)〉에서는 칠정(七情)을 위주로 말하였다. 정자(程子)의 〈호학론(好學論)〉은 〈예운〉의 뜻을 조술(祖述)하였고, 주자(朱子)의 인(仁)에 관한 설(說)은 《맹자》의 뜻을 조술하였으니, 그 말이 지극히 상세하여 그 뜻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 학문과 식견이 보잘것없는 자들이 대체도 모르고 다시 천착하여 신기한 것을 내놓으려고 힘쓰다 보니 밝음을 구하려다 도리어 어두워지고 정밀하게 하려다가 실은 산만해졌으니, 이는 성현께서 후학을 인도하는 뜻이 분명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도록 만든 자들의 잘못일 뿐이다.” 하시고는 이어 학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이는 평이하여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닌데 도리어 어렵게 만들었으니, 이는 우리 동국에서 시작되었다.” 하였다.
예(禮)에 있어서는 《가례(家禮)》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또한 《가례질서(家禮疾書)》를 통해 해석을 가하였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의례》에까지 미치고 《예기》, 《통전(通典)》 등의 책까지 두루 통섭(通涉)하였다. 《가례질서》의 서문에 이르기를, “예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다. 하늘은 하나의 이치〔理〕가 있을 뿐인데 삼대(三代)의 예가 다른 것은 어째서인가? 계절의 절서(節序)가 바뀌는 것에서 증험해 보면, 사시(四時)의 기운이 같지 않기 때문에 추우면 갖옷을 입고 더우면 갈옷을 입는다. 그 생활하는 방식이야 다르지만 이치야 똑같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이치는 만나는 상황에 따라 기운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는 시의〔時〕라고 말하는 것이다. 시의를 중시하여 이로써 준절(撙節)하면 하늘도 어기지 않는 법이니, 이 뜻을 아는 자라야 예를 말할 수 있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처(妻)를 위해 연제(練祭)를 지내는 것과 조부의 상중에 부친이 죽었을 경우 대신 복을 입는 문제 등에 대하여 널리 시말을 상고하여 변증한 것이 많다.
또 풍속이 날로 사치해져 사우(士友)들 사이에 몹시 빈천하면서도 권귀(權貴)를 본받아 사치함으로써 가계를 지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고금의 마땅함을 참작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규식을 지어 일가(一家)의 예로 삼고 친한 벗들과 공유하고자 하였으니, 이는 공성(孔聖)께서 “공순하지 못한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편이 낫다.〔與其不孫也寧固〕”라고 하신 말씀주자(朱子)께서 “부화(浮華)와 문식(文飾)을 줄이고 근본과 실질을 편다.”라고 하신 말씀의 유의(遺意)를 받든 것인데 그 규식과 절목(節目)이 《상위일록(喪威日錄)》에 들어 있어 본받을 수 있으니, 여기에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다.
또 말씀하기를, “동방의 학문은 퇴계 이 선생(李先生)보다 성대한 분은 없다.” 하였다. 선생께서 평상시에 퇴계를 본받은 것 가운데 작은 것으로 말하면, 식사할 때에 수저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세수할 때에 물방울이 튀지 않는 것과 서찰에 자신의 이름을 쓴 것이고, 큰 것으로 말하면, 퇴계의 《유집(遺集)》 및 《어록(語錄)》에 기록된 언행을 《근사록》의 체례대로 편집하여 《이자수언(李子粹言)》이라 하고, 예를 논한 글들을 편차하여 《예설유편(禮說類編)》이라 하여 퇴계를 존모하는 마음을 담고 몸소 실천한 것이다.
선생은 비록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말씀하기를, “천하의 일은 갑(甲)이 하지 않으면 을(乙)이 하는 법이다.” 하여 일찍이 폐단의 근원을 묵묵히 탐구하고 구제할 대책을 모두 생각하여 《곽우록(藿憂錄)》, 《사설(僿說)》 등 여러 책을 지었다. 《사설》은 여가가 생기면 수시로 글을 지어 두었다가 권질을 이루면 그 조목을 나열한 다음 문인 안정복(安鼎福)에게 주어 정리하게 하였는데, 위로는 천지로부터 아래로는 만물에 이르기까지, 멀리는 원고(遠古)로부터 가까이는 당대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중화(中華)로부터 밖으로는 이적(夷狄)에 이르기까지 포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논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록(漫錄)이 생긴 이래로 이에 견줄 만한 것은 없다. 안정복이 《동사(東史)》를 찬술할 때에, 범 태사(范太史 범조우(范祖禹))가 《당감(唐鑑)》을 찬수하면서 한결같이 이천(伊川)의 말을 따랐던 것처럼, 선생의 말을 따라 마한(馬韓)을 정통으로 삼은 것이라든지 기타 마한의 주근(周勤)과 고려의 조위총(趙位寵)을 표장(表章)한 것이라든지 하는 따위가 그 일례이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대해서도 논하여 저술한 것이 있고, 인정(人情)에 절실한 우리나라 속담 등도 모두 채록하여 뜻을 해설하여 《백언해(百諺解)》라고 이름 지었으니, 이 또한 동요(童謠)를 들었던 공자의 유의(遺意)에서 나온 것이다. 여사(餘事)로 지은 문장은 섬부(贍富)하되 번다(繁多)하지 않고, 요약되어 있되 소략하지 않다. 선조의 행장(行狀) 등을 써 달라고 원근에서 찾아오는 선비들에 대해서도 그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었으며, 미수(眉叟) 허목(許穆), 남파(南坡) 홍우원(洪宇遠),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등 여러 군자에 이르러서는 그 후손이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그 연보(年譜)를 짓기도 하고 갈문(碣文)과 유사(遺事) 따위를 찬술하기도 하였으니, 이는 현자를 존모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은 선생께서 강학하고 저술하신 것의 대개이다. 의리에 편안한 것으로 말하면 남과 자기의 구분에 얽매이지 않았고, 이치를 터득한 것으로 말하면 비방과 칭찬에 깊이 연연해하지 않았다. 용맹하게 곧장 앞으로 나아가 주위의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고인의 언외지의(言外之意)를 발명한 것이 많은데 융회(融會)하고 관통(貫通)하여 얼음이 녹듯 의혹이 풀렸으니, 우리 동국에 학문이 있은 이래로 이런 분은 선생 한 분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는 소자(小子)가 선생을 좋아해서 아첨하는 말이 아니다. 논저가 모두 남아 있으니,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자가 읽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동국 사람들이 귀를 귀하게 여기고 눈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당론이 생긴 이후로 더욱 심해졌으니, 만약 선생의 《논어질서》와 《맹자질서》의 두 서문을 읽고 집주(集註)를 낸 주 부자(朱夫子)의 본심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부지런히 애써 저술한 우리 선생님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선생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계발해 주는 사람이 없어 결국 우매함으로 끝나고 말 뿐이라면 그 말이 마치 심질(心疾)을 앓는 미치광이가 남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헛소리를 바람벽을 향해 혼자 되뇌는 것에 불과할 것이니 우습고도 슬프다.” 하였으니, 또한 염려가 여기에 미쳐서 이렇게 탄식하신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 주 부자께서 남헌(南軒 장식(張栻))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대개 평소 익숙하게 말하던 것이라도 갑자기 그 말을 들으면 자연 믿음이 가지 않는 법입니다. 다만 마음을 비우고 자세히 음미하기를 오래하다 보면 의혹이 풀리기 마련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일부러 유념해서 주장하고 찾는다면 구설(舊說)에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 말씀에 또한 집주를 만든 뜻이 들어 있다. 만약 우리 선생님께서 두 서문에서 말씀하셨듯이 회암(晦菴)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다면 우리 선생님께서 주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사도(斯道)에 공이 크다는 것을 알 것이니, 후세의 자운(子雲)을 조석으로 만나는 셈이다. 하지만 모두가 명에 달린 것이니, 내가 어찌 헤아리겠는가.
선생의 학문은 넓으면서 섬부하고 간략하면서 핵심이 있었다. 그 몸가짐은 너그럽고 진중하며 화락하고 평이하였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엄정하고 절검을 숭상하였다. 남들을 대할 때는 단정하고 온화하였으며, 종족(宗族)과 어울릴 때는 화목하고 돈후하였다. 향당(鄕黨)에 있을 때에는 귀천을 막론하고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잘 교화되었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알기 쉽고 평이하게 가르쳐 어진 사람이건 어리석은 사람이건 모두 유익함이 있었으니, 비유하면 마치 여러 사람이 강에서 물을 마실 때 각자 그 양껏 마시는 것과 같았다. 재주는 만물에 두루 미쳤고 식견은 고금에 통달하였다. 육경(六經)의 심오한 뜻과 백가(百家)의 이설(異說)에 이르러서는 깊이 연구하고 정밀히 선별하여 분명하게 흉중에 담아 두었고, 당세의 일에 있어서도 두루 관심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만일 조정에 등용되었다면 이를 들어서 쓰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벼슬길이 막혀 한번 시험해 보지도 못하고 뜻을 품은 채 돌아가셨다. 이것이 비록 한스러울 듯도 하지만 하늘이 팔순을 누리게 하여 책을 저술하여 도를 밝힘으로써 옛 성현을 계승하여 후학에게 앞날을 열어 준 공이 있다. 이는 하늘이 선생을 후하게 길러준 것이니, 선생에게 벼슬하고 벼슬하지 않는 것이 무슨 손익이 있겠는가.
선생의 조카 이병휴(李秉休)가 쓴 선생의 행장에 이르기를, “선생은 상지(上智)의 자질에다 지성(至誠)의 학문까지 겸하셨다. 무릇 성품에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은 한 가지 이치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직분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한 가지 일도 닦아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行)은 신명(神明)에 통할 만하였는데 그 근원은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서 나왔고 도(道)는 천인(天人)을 관통할 만하였는데 그 기틀은 한 치, 한 푼씩 쌓은 공력으로 다져진 것이다. 그 범위가 큰 것으로 말하면 땅이 만물을 싣고 바다가 강물을 포용하듯 광대하고, 그 분석이 치밀한 것으로 말하면 누에에서 뽑은 실과 소의 가는 털처럼 정밀하다. 그 지조와 행실의 엄격함으로 말하면 규구(規矩)로 그린 듯 단아하고 곧으며, 그 타고난 성품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옥빛처럼 맑고 종소리처럼 쟁쟁하다. 그 마음은 주자를 배워 공자를 기약하는 것이었으니, 성대하고도 지극하다.” 하였고, 문인 신후담(愼後聃)은 일찍이 말하기를, “퇴옹은 덕으로 이루셨고 선생은 지혜로 이루셨다.” 하였으니, 모두 선생을 잘 형용하였다고 하겠다. 일찍이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분발하여 먹는 것도 잊고 깨달으면 근심을 잊고 즐거워하여 늙음이 닥쳐오는 줄도 모른다.”라는 말씀을 들었는데, 우리 선생님이 또한 이 말씀에 가까운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 삼가 생각해 보니, 지난날에 선생께서 소자(小子)와 논변하실 때에 의견이 합치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선생께서는 실망한 듯 기뻐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예전에 미옹(眉翁 허목(許穆))께서 〈자서(自序)〉를 썼는데, 나 또한 그런 뜻이 있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후학이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그 후에는 선생의 정신과 기력이 이미 여기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지금 경협(景協 이병휴의 자(字))이 선생의 언행을 행장에 기록하면서 정추(精粗)와 세대(細大)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갖추었으므로 다시 췌언을 덧붙여서는 안 되겠지만, 옛날에 이천(伊川)이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행장을 지을 때 하고 싶은 말을 다했으면서도 오히려 주광정(朱光庭), 범조우(范祖禹) 등 4인의 서술을 취하였고, 면재(勉齋)가 회옹(晦翁)의 행장을 지을 때 또 과재(果齋)의 기록을 인용하였으며, 퇴옹의 문하에서는 월천(月川), 학봉(鶴峯), 문봉(文峯) 등 제공(諸公)이 각각 기록한 것이 있으니, 대개 성덕(盛德)과 지행(至行)이 한 사람의 기록만으로는 누락이 생길까 걱정해서 그런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내가 경협의 행장에 있어 열에 여덟아홉은 그 말을 인용하여 감히 위와 같이 논술하였으니, 동문의 벗들은 각기 스스로 얻은 바에 따라 글을 지어 선생의 한 마디 말씀과 한 가지 행동도 누락되는 일이 없게 하기를 바란다.


 

[주D-001]문옹(文翁)의 교화 :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진작하는 것을 이른다. 한(漢)나라 경제(景帝) 말기에 문옹이 촉군(蜀郡)을 맡아 다스리면서 교화(敎化)를 숭상하고 많은 학교를 세워 성도(成都)에 문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무제(武帝) 때에는 천하의 군국(郡國)에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
[주D-002]숙종(肅宗) 7년 신유년 : 대본은 ‘肅廟八年辛酉’로 되어 있는데, 이익이 출생한 연도가 1681년 신유년이 맞으므로 ‘肅廟八年’은 숙종이 즉위한 해부터 기산하여 재위 연도를 헤아린 것으로 보인다. 역사 연표에 따라 숙종 7년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둘째 …… 만나자 :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세자 이윤(李昀)의 후원 세력인 남인(南人)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몰락하면서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성호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상소하여 “전후좌우에서 춘궁(春宮)에게 칼날을 들이댄다.”라고 하며 세자 보호를 역설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악역(惡逆)으로 지목하였다가 국문받던 도중에 죽었다.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2, 78~85쪽》
[주D-004]청주 신씨(淸州申氏) : 이병휴(李秉休)가 쓴 〈가장(家狀)〉과 〈묘지(墓誌)〉, 채제공(蔡濟恭)이 쓴 〈묘갈명(墓碣銘)〉, 허전(許傳)이 쓴 〈시장(諡狀)〉에는 모두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청주 신씨는 고령 신씨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단 대본대로 번역하였다.
[주D-005]이천(伊川)이 …… 것이다 : 예(禮)가 자연스럽게 이치에 맞아 편안하였다는 말이다. 이천은 정이(程頤)의 호이다. 정이의 말은 《근사록(近思錄)》 권4 〈존양(存養)〉에 보이는데, “지금 배우는 자가 공경하되 자득하지 못하고 또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다만 공경하는 마음이 생소해서이며, 또한 경(敬)을 가지고 종사하기를 너무 무겁게 해서이니, 이는 공손하기만 하고 예가 없으면 수고롭다는 것이다. 공(恭)은 사사로이 공손하게 하는 공이요, 예(禮)는 형체의 예가 아니다. 이는 자연(自然)의 도리인데, 다만 공손하기만 하고 자연의 도리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자재하지 못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주D-006]묘리를 …… 있다 :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는 밤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의리에 대해 새로 깨달은 것이 있으면 바로 일어나서 붓으로 얼른 기록해 두곤 했다는데, 주희(朱熹)가 지은 〈횡거선생찬(橫渠先生贊)〉에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껏 실천하며, 묘하게 계합할 때마다 얼른 기록하였네.〔精思力踐 妙契疾書〕”라는 구절이 있다. 《晦庵集 卷85 六先生畫像贊》
[주D-007]영락(永樂) …… 못하였으니 : 명(明)나라 영락(永樂) 13년(1415)에 한림원 학사(翰林院學士) 호광(胡廣, 1369~1418) 등이 황명을 받들어 사서오경을 다시 정리한 《사서대전(四書大全)》과 《오경대전(五經大全)》의 편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주D-008]이 …… 하니 : 이 책은 《논어》를 가리키고, 이 주(註)는 주자의 집주를 가리키고, 그 마음은 주자의 마음을 가리킨다. 《星湖全集 卷49 論語疾書序》
[주D-009]순(舜) …… 것 :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기록된,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하니, 정(精)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D-010]공성(孔聖)께서 …… 말씀 : 《논어》 〈술이(述而)〉에 보이는 말로, 공자가 “사치하면 공순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하다.〔奢則不孫 儉則固〕”라고 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주D-011]주자(朱子)께서 …… 말씀 : 주희의 〈가례서(家禮序)〉에 보이는 말이다.
[주D-012]이 …… 것이다 : 하찮은 동요를 듣고도 득실을 살핀 공자(孔子)의 뜻을 받들었다는 말이다. 이 말은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서 온 것이다. 동자(童子)가 “창랑(滄浪)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빨 것이요,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겠다.”라는 노래를 부르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소자(小子)들아 저 노래를 들어보라. ‘물이 맑으면 갓끈을 빨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하니, 이는 물이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13]후세의 …… 셈이다 :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릴 것도 없이 당장 이 책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다. 후세의 자운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漢)나라 양자운(揚子雲), 즉 양웅(揚雄)이 《태현경(太玄經)》을 짓고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자, 스스로 말하기를, “후세에 양자운(揚子雲)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한 데에서 온 말이다. 《昌黎集 卷17 與馮宿論文書》 조석으로 만난다는 것은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만세 후에라도 이 뜻을 알아주는 큰 성인을 한번 만난다면 그것은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먼 후세 사람이라 하더라도 당장 만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뜻이다.
[주D-014]배우기를 …… 모른다 : 《논어》 〈술이(述而)〉에 보이는 공자의 말씀이다.
[주D-015]옛날에 …… 취하였고 :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선형(先兄) 명도(明道) 정호(程顥)의 행장을 짓고, 행장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것을 보완할 만한 문인의 기록 가운데, 유입지(劉立之), 주광정(朱光庭), 형서(邢恕), 범조우(范祖禹) 4인의 기록을 취하여 행장 말미에 부록(附錄)하였다. 《伊洛淵源錄 卷2 明道先生行狀》
[주D-016]면재(勉齋)가 …… 인용하였으며 : 면재(勉齋)는 황간(黃榦)의 호로 자는 직경(直卿)이며, 주희(朱熹)의 사위이며 문인이다. 과재(果齋)는 이방자(李方子)의 호로 자는 공회(公晦)이며, 주희의 제자이다. 이방자가 주희의 행장을 지으면서 황간이 주희의 언행을 기록한 내용의 일부를 행장에 인용하였다. 황간의 기록은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실려 있다.
[주D-017]퇴옹의 …… 있으니 : 퇴계의 제자인 월천 조목(趙穆), 학봉 김성일(金誠一), 문봉 정유일(鄭惟一)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글들이 《퇴계전서(退溪全書)》에 실려 있다.


 

 

 

 

성호전집 부록 제1권
가장〔家狀〕[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 휘(諱)는 익(瀷), 자(字)는 자신(子新)이다. 광주(廣州)의 첨성(瞻星)에 살았으므로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8세조 휘 계손(繼孫)은 문학(文學)으로 집안을 일으켜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경헌(敬憲)이다. 일찍이 문옹(文翁)의 교화를 북도(北道)에서 드러내니 북도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선사(先師)의 예로 제사하였다.
증조 휘 상의(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조부 휘 지안(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하진(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숙종조(肅宗朝)에 청의(淸議)를 힘써 부지(扶持)하여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이 조정을 떠나는 것을 만류하기를 청하였다가 좌천되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나갔다. 이어 시론(時論)이 크게 변하는 때를 만나 작은 일로 꼬투리를 잡혀 운산군(雲山郡)에 귀양 가서 졸(卒)하였다. 전비(前妣) 증(贈) 정부인(貞夫人)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유수(留守) 후산(後山)의 따님이고, 계비(繼妣)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대후(大後)의 따님이니, 선생은 권 부인(權夫人) 소생이다.
숙종(肅宗) 7년 신유년(1681) 10월 18일에 선생은 대헌공(大憲公)의 귀양지인 운산군에서 태어났고 이듬해인 임술년(1682)에 대헌공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일찍 부친을 여읜 데다가 허약한 체질이라 병이 많았으므로 권 태부인(權太夫人)께서 늘 약주머니를 차고 있으면서 약을 먹이셨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은 일찍이 스승에게 나아가 글을 배운 적이 없었지만, 남다른 자질을 타고나 총명함을 따를 자가 없었다. 조금 자라서는 둘째 형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에게 배웠는데 스스로 분발하여 마음을 다잡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여럿이 함께 공부할 때 여러 학생들은 모두 웃고 떠들며 장난쳤으나 선생은 홀로 묵묵히 앉아 책장을 넘기기를 종일토록 그만두지 않으니, 태부인께서 몰래 보고는 기뻐하며 말씀하기를, “이 아이가 공부하기를 재촉하지 않아도 이렇듯 배우기를 좋아하니, 내가 근심이 없다.” 하였다. 이윽고 수많은 서적을 두루 보아 선인(先人)들의 말씀과 행실을 기억하였고, 또 글을 잘 엮어 시를 지음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구절이 많으니, 동학(同學)들이 모두 자기들은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매사에 반드시 태부인의 마음에 들도록 하여 어기는 바가 없었다. 또 어렸을 때부터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태부인께서 억지로 새 옷을 입히면 비록 감히 어기지는 못하였으나 번번이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였으니, 도(道)에 가까운 성품을 타고난 것이 본디 이와 같았다.
을유년(1705, 숙종31)에 조정에서 증광과(增廣科)를 설행하였다. 선생은 책문(策問)으로 초시(初試)에 입격하였으나 시소(試所)에서 녹명(錄名)한 것이 격식에 어긋나는 바람에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않았고, 이듬해 병술년(1706)에 둘째 형이 앙화를 만나자 이때부터는 세상에 뜻이 없어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다시 셋째 형 옥동(玉洞 이서(李漵)) 선생 및 종형(從兄) 소은(素隱 이진(李)) 선생에게 배웠다. 개연히 도를 구하는 뜻이 있어 집에서 태부인을 모시면서 조석으로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것 외에는 방에 바르게 앉아서 성현의 경전 및 송(宋)나라 정주(程朱)의 책과 우리나라 퇴계(退溪)의 글을 펴 놓고 되풀이하여 읽고 사색하며 반복하여 상호 고증하였으니, 그 슬기가 드러나고 정신이 미친 곳은 아무리 심오한 것도 드러나고 아무리 은미한 것도 해석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비록 한 글자의 잘못과 한 가지 뜻의 어긋남도 분명하게 변석하고 상세하게 기억하였으니, 공부가 정밀하고 민첩한 것은 선유(先儒) 가운데 미칠 사람이 드물었다.
평소의 생활은 유난스러운 행실이나 명예를 좇는 일이 전혀 없었고, 오직 수신과 실천에 힘썼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이미 엄격한 데다 집안을 정도(正道)로 다스리고 남을 대하는 것이 예의가 있고 향리에서의 처신이 도리에 맞으니, 사림(士林)이 이미 똑같은 마음으로 추중하였다.
을미년(1715, 숙종41)에 태부인의 상을 당하였는데, 애훼(哀毀)가 예법에 맞았다. 3년 동안 거친 밥에 쓴 소금만 먹고 맛있는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최질(縗絰)을 몸에서 벗지 않았다. 상기를 마치자 원근에서 배우러 오는 선비들이 점점 많아졌는데, 선생은 각기 그 재주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 때문에 문하에 있는 자가 비록 얻은 것의 깊이는 같지 않았으나 모두 차츰 공부가 쌓여 학문이 성취되는 효과가 있었다.
금상(今上) 정미년(1727, 영조3)에 조정에서 선생의 이름을 듣고 선공감 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제수하였다. 선생이 은명(恩命)에 한번 사은하기 위하여 서울에 이르니, 선공감의 관리가 사은하는 규례가 없으니 본감(本監)의 제조에게 명자(名刺)를 넣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이번에 온 것은 다만 사은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벼슬할 뜻이 없다면 명자를 넣어 무엇하겠는가.”라고 하고는 즉일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에 종신토록 성호장(星湖莊)을 지키니, 실천은 더욱 순일해지고 조예는 더욱 깊어졌다. 경전을 토론하여 지은 글이 집안에 가득하니, 그 대요만 든다면 경학(經學)에 있어서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를 통해 육경(六經)의 뜻을 탐구하였는데 그 속에는 선유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들도 많았으니, 모두가 깊이 사고하여 자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예(禮)를 논한 것은 반드시 사치함을 버리고 검약을 따르는 것이었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논한 것은 반드시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이었으니, 모두 근본을 탐구하고 요점을 제시하였으며 각각 조목이 있어 그대로 시행할 만하므로, 세유(世儒)들의 진부하고 쓸모없는 공언(空言)과는 다르다.
계미년(1763, 영조39), 선생의 나이 83세 때 마침 국가에서 규례에 따라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게 되어 자급이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그해 12월 17일에 가벼운 질환으로 인하여 침실에서 운명하였다. 습의(襲衣)는 상복(常服)을 쓰고 염구(斂具)는 지금(紙衾)을 썼으며 명정(銘旌)은 일찍이 ‘성호징사여주이공지구(星湖徵士驪州李公之柩)’라는 10글자를 친히 종이에 써 둔 것을 널 위에 덮었고, 관은 옻칠하지 않고 송진(松津)을 발랐으며, 속광(屬纊)한 뒤에는 즉시 찬장에 있는 음식으로 전(奠)을 올리고 성빈(成殯)하기 전까지는 조석으로 올리는 궤전(饋奠)을 폐하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선생께서 평소 정해 둔 것이었다. 성복(成服)하던 날에 문하의 제자들이 모두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고, 족인(族人)들은 비록 단문친(袒免親)을 넘어섰더라도 모두 포건(布巾)과 포대(布帶)를 하고 장례가 끝난 뒤에 벗었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이미 바른 데다 기운은 맑고 정신은 밝으며, 성품은 엄준(嚴峻)하고 모습은 고결하였으며, 눈매가 또렷하여 영채(英彩)가 사람을 쏘는 듯하였으니, 타고난 훌륭한 자질이 진실로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게다가 함양한 것이 깊고 수신(修身)이 독실하였다. 공부가 알차게 쌓이면서 덕성이 순수하고 견고해져서 뽐내는 자취는 털끝만큼도 볼 수 없었고, 엄숙한 몸가짐이 중정(中正)하여 법도에 다 맞았다. 말소리와 웃음이 화락하여 지나치게 구애받는 데에 이르지 않았으며, 위의(威儀)가 장엄하여 마치 하늘이 만들어 낸 사람 같았으니, 덕을 이룬 모습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서 나왔다. 태어난 지 겨우 이태 만에 대헌공이 돌아가셨으므로 늘 선고(先考)의 얼굴을 알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원통해하였다. 뒤에 대헌공이 돌아가신 지 갑년(甲年)이 되는 해를 만나 추복(追服)을 입고자 하여 문인들과 그 의리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끝내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였지만 애훼(哀毀)의 모습은 상중에 있는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태부인을 섬김에 효성과 공경을 다하였으니, 태부인의 병환이 심해지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 안에 떨어뜨린 덕에 태부인께서 좀 더 사실 수 있었다. 비록 노쇠해진 뒤에도 말이 대헌공과 태부인에게 미치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또 둘째 형에게 후사가 없는 것을 가슴 아파하여 후사를 세워 주었으며, 그 서출(庶出)의 자손들도 모두 거두어 길러 주어 시집보내 주고 장가보내 주었다. 넷째 형이 일찍 죽고 고아 몇이 남았는데 집으로 데리고 와서 가르치고 길러 주는 것이 자기 자식이나 진배없었다. 혹 병이라도 나면 의원을 찾고 약을 구하기 위하여 밤길과 풍설도 피하지 않았다. 다섯째 누나가 일찍 과수가 되어 자식이 없었는데 측은히 생각하여 불러다 태부인 곁에 두고서 은애를 극진히 베풀었고 그 집안에서 후사를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돌려보냈다. 먼 종족(宗族)에 이르러서도 항상 마음을 써서, 곤궁하고 유약하여 혼인할 시기를 놓친 자들에 대해서는 혼주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혼구(婚具)를 도와주기도 하는 것이 집안일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굶주린 자들은 반드시 다급한 상황을 알아보고서 음식을 대 주었고 병이 든 자들은 반드시 치료해 주고 문병하였으며 장사 지내는 자들은 반드시 부의하고 조문하였는데 집안의 궁핍함을 따지지 않았고 몸의 수고로움을 돌아보지 않았다. 친구들에 대해서는 환난과 궁액에 들었다 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으니, 시휘(時諱)를 생각지 않고 마음을 다해 두루 보살펴 평소의 의리를 보였다.
조상을 받드는 것으로 말하면, 집이 소종(小宗)의 사당에서 조금 먼데도 기제(忌祭)와 삭망(朔望), 속절(俗節)의 천향(薦享)은 심한 병이 아니면 반드시 몸소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아무리 바람이 세차고 비가 사나워도 혹시라도 폐한 적이 없었다. 또 증조 이하의 묘가 각기 다른 곳에 있어 혹 수백 리 밖에 있기도 하였는데 행장을 꾸려 가서 성묘하는 것을 몹시 늙기 전까지는 폐한 적이 없었다. 또 11세조부터 고조까지의 묘가 모두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근대(近代)에 와서 묘전(墓田)이 있는 것 외에는 대부분 제사를 지내지 못하자, 선생은 “조상을 추모하는 자손들의 마음에 제사를 모시건 모시지 못하건 간에 매우 불안하다.”라고 하고, 또 대수가 먼 외조의 묘가 선영 가까이 있었는데 선생은 ‘조상의 마음으로 미루어 본다면 이분만 빠뜨릴 수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형편에 맞게 재물을 모아 각각 묘전을 두고 매년 10월 상정일(上丁日)에 각 분묘에 일일이 제사를 지냈다. 또 대헌공의 유의(遺意)에 따라 숙부 및 숙모 오씨(吳氏)의 제사를 집으로 모셔 와 정성을 다해 경건하게 제사 지내기를 한결같이 후사가 된 사람처럼 하였다. 이 밖에도 일찍 죽은 누나가 있었는데 기제와 묘제를 혹시라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또 서모(庶母) 중에 후사가 없어 외손이 제사를 받드는 분이 있었는데 묘제 때 혹 외손이 오지 않으면 또한 찬수(饌需)를 나누어 주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또 세월이 오래 되다 보니 고조 측실의 묘가 무너져 알아볼 수 없었는데, 증축하고 봉토하였으며 그 묘전을 찾아내어 종인(宗人)에게 부탁해서 향화(香火)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또 자식 없이 죽은 유모(乳母)가 있었는데 집 곁에다 단을 쌓고 제사 지내 주고 이어 해마다 한 차례씩 술잔을 올리도록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자신의 효성을 미루어서 다른 이에게도 두루 미친 것이다.
집안에서의 생활은 엄격하면서도 법도가 있었으니, 매일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양치한 뒤에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배알하였고 물러 나와서는 규정에 따라 제생들을 가르쳤다. 식사할 때는 반드시 장유에 따라 차례대로 앉아 먹었는데 매우 조심하여 감히 숟가락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또 출입을 법도에 맞게 하여 내외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게 하였으니, 비록 자손과 친족이라도 까닭 없이 내당에 들지 못하였으므로 규문 안이 정숙하였다.
또 자제나 제자가 사차(私次)에서 묵게 되면 반드시 절하고 뵙도록 하였으니, 잠깐 외출할 때에도 반드시 절하고 여쭈었고 돌아와서도 반드시 절하고 뵈었다. 종족과 친구처럼 온종일 보는 자들도 서로 읍(揖)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각각 절을 하게 하였으니, 말씀하기를, “절은 예의 시작이니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런 까닭에 문하에 있는 자들이 배례(拜禮)에 익숙한 것이 마치 조정이나 관부에 있는 듯하였고 밖에 나가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도 또한 그렇게 하니, 비록 일면식도 없던 자가 만나더라도 그가 선생의 문인이나 자제라는 것을 이내 알아차렸다. 아래로 천것인 비복에 이르러서도 서로 추한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향리에서 싸우는 자가 있으면 또한 바른말로 꾸짖어 잘못을 그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또 평상시에 장기나 바둑 등 놀이 기구를 배척하여 멀리하였으니, 말씀하기를, “공자(孔子)께서 낮잠 자는 것을 심히 꾸짖으셨으면서도 장기나 바둑 두는 것은 오히려 낫다고 하셨으니, 이는 필시 까닭이 있어서 하신 말씀이다. 지금 보건대 한번 장기나 바둑에 빠진 자는 정신을 소모하고 뜻이 미혹되어 방탕한 데로 흘러 돌아올 줄 모른다. 그 해악이 낮잠 자는 것보다 열 배는 되니, 결코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오늘날 풍속이 담배 피우는 것을 중하게 여겨 온 세상이 함께 즐기는데 선생은 말씀하기를, “날마다 독한 연기로 신명(神明)이 깃든 곳을 쬐는 것은 옳지 않으니, 또한 단연코 끊어야 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그 문하에서 노니는 자들은 장기나 바둑을 알거나 담배를 가까이하는 자가 있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것은 검소하고 절제가 있었다. 가업이 매우 빈약하였지만 그런 중에도 본디 규모가 있었다. 창두(蒼頭) 한 사람을 골라 농사짓는 일을 맡겨서 수확한 뒤에는 내정(內庭)에 들여 식구들이 먹도록 하고, 뽕나무를 기르고 목화를 심어 옷감으로 쓰고 또 과수를 심어 제수에 충당하였는데, 그 대요는 절약과 검소함을 위주로 하였다. 끼니는 배를 채우는 데에 목적을 두어 사치함을 금하고, 의복은 몸을 가리는 데 목적을 두어 화려함을 금하고, 제수는 향기롭고 깨끗한 것을 취하고 풍요로움을 구하지 않았다. 또 조석의 반찬은 정해진 가짓수가 있었다. 자신에 대한 봉양이 이미 간소하였고 남을 대할 때에도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귀한 손님이라고 해서 반찬을 더 놓지 않았고 비천하다고 하여 줄이지도 않았다. 또 까닭 없이는 닭과 개를 잡은 적이 없었고 그 밖에 그만두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허비하는 바가 없었으므로 비록 따로 변통하는 일이 없어도 한 해 살림살이가 그런대로 넉넉하였다. 이따금 혹 남은 것이 있으면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였으면 하였지, 모자라서 남에게 빌린 적은 끝내 없었다. 일찍이 〈입검설(入儉說)〉을 지어 세상 사람들이 맛난 음식을 좋아하고 남몰래 치장하는 것을 풍자하였다. 늘 말씀하기를, “굶주림을 구제하는 데에는 콩〔豆〕만 한 것이 없다.” 하여 흉년이 들면 반드시 콩을 삶아 죽을 만들어서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였다. 일찍이 콩죽 한 그릇과 된장 한 종지와 콩기름에 버무린 겉절이 한 접시를 차려 놓고 족인들과 밤새워 환담하였는데, 모임의 이름을 삼두회(三豆會)라고 하였으며, 또 〈반숙가(半菽歌)〉를 지어 스스로 즐겼다. 아들 맹휴(孟休)가 일찍이 남쪽 고을의 원이 되어 고을 소산의 음식물을 보내자 선생이 물리치고 편지를 보내 경계하기를, “무릇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열에 여덟아홉은 옳지 못한 것이니,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이 될 말이냐. 내가 내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때에 맞추어 내 밭을 갈면 굶주림과 추위는 면할 수 있다. 거위 고기는 나가서 토해야 마땅하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선생의 뜻을 볼 수 있다.
경학에 있어서는, 학문에 뜻을 둔 처음에는 먼저 《맹자》를 읽었다. 그 해에 정랑(正郞)이 태어났으므로 이름을 맹휴로 지어 기쁨을 표현하였고, 이어 《맹자질서(孟子疾書)》를 지었다. 그다음에는 《대학》을 읽고, 다음에는 《소학(小學)》을 읽고, 다음에는 《논어》를 읽고, 다음에는 《중용》을 읽고, 다음에는 《근사록(近思錄)》 및 《심경(心經)》을 읽고, 다음에는 《역경》을 읽고, 다음에는 《서경》을 읽고, 다음에는 《시경》을 읽고 각각의 질서(疾書)를 지었는데, 《역경질서(易經疾書)》와 《시경질서(詩經疾書)》는 만년에 이전 본(本)을 버리고 개찬하였다. 《가례질서(家禮疾書)》는 《가례》를 볼 때마다 수시로 기록하여 십수 년 만에 완성하였다. 질서라고 하는 것은 〈횡거화상찬(橫渠畫像贊)〉의 “터득한 바가 있으면 얼른 기록하였다.〔妙契疾書〕”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전설(前說)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득하려고 애썼다. 경문의 주석에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하였고 생각해서 터득하면 얼른 기록하였고 터득하지 못하면 나중에 다시 생각하여 반드시 터득해야만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질서 중에는 선유가 미처 발명하지 못한 뜻이 많다. 그 큰 것을 뽑아 간략하게 부록(附錄)하여 그 견해를 보인다.
삼대(三代)의 정전(井田)에 대해서는 말씀하기를, “50묘(畝)에서 변하여 70묘가 되고 70묘에서 변하여 100묘가 되었다는 것은 그 경계(經界)를 바꾼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고인(故人) 또한 성법(成法)을 파괴하고 백성들을 번거롭게 만들었다는 의심을 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계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고 여긴다. 내 생각에는 전(田) 자는 모양을 본뜬 글자이니, 옛날의 전(田)은 필시 이 글자와 비슷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평양(平壤)에도 기자(箕子)의 유제(遺制)가 아직 남아 있다. 전이 모두 4구(區)로 되어 있고 도랑을 함께하여 전(田) 자 모양이니, 필시 옛날 제도가 이와 같았을 것이다. 대개 900묘를 구획하여 1정(井)을 삼으니, 1정은 9전(田)으로 1전은 사방 100묘이고, 1전은 4구로 1구는 사방 50보(步)이다. 하(夏)나라 때에 1부(夫)가 1구를 받았으니, 이른바 ‘하후씨(夏后氏) 때에는 50묘를 받았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은(殷)나라 때에는 늘려서 1부에게 2구를 주었으니, 길이가 100보, 너비가 50보이다. 평방근(平方根)을 구하면 70보 남짓이 되니, 이른바 ‘은나라 사람은 70묘를 받았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주(周)나라 때에는 1부가 4구를 받아 길이가 100보, 너비가 100보가 되니, 이른바 ‘주나라 사람은 100묘를 받았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이와 같다면 구태여 성법을 파괴하거나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고도 일거에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니, 맹자가 어찌 근거도 없이 이렇게 말씀하였겠는가.” 하였다.
관중(管仲)이 죽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성인이 이미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도랑에서 목매어 죽는 것처럼 하겠는가.’ 하였으니, 저 죽은 자는 알량한 작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 죽지 않아도 되는데 죽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면 관중이 죽지 않은 것은 소홀(召忽)에게 부끄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소홀의 처의(處義)도 미진한 점이 있다. 나라가 어지럽고 망해 가는 때를 당하여 종사가 끊어지려고 하였으니,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이든 공자(公子)라면 각자 신주를 받들고 출국하여 일이 이루어질 만한 기회를 기다리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은 아니다.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외국에 있는 여러 공자는 진실로 기회를 엿보고서 본국으로 돌아와 구업(舊業)을 보전하기를 도모해야 마땅하다. 이때는 실로 상투를 틀지도 못하고 갓끈만 맨 채로 속히 달려가야 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니, 어느 겨를에 그 장유(長幼)를 논하겠는가. 설령 규(糾)가 형이고 환공(桓公)이 아우였더라도 당시 나라에 주인이 없은 지가 이미 반년인데 소백이 먼저 들어가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다면 규는 여러 공자 중의 하나일 뿐이니, 어찌 나이가 다소 많다는 이유로 문득 가서 나라를 놓고 다툴 수 있겠는가. 더구나 환공이 형으로서 먼저 들어갔으니 나라에 주인이 있는 것이고 일도 정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중하고 더불어 다투지 않아야 하니, 이는 바꿀 수 없는 천지의 대경대법(大經大法)인 것이다. 화살을 쏘아 환공의 허리띠 고리를 맞힌 일은 관중이 오로지 자신이 섬기는 사람만을 위하여 마음을 거칠게 먹고 멋대로 행동한 것이니, 그 죄는 덮을 수 없다. 그러나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것은 군자가 취하는 도리이니, 어찌 그 처음이 옳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끝내 또한 잘못을 이루어 함께 죽겠는가.” 하였다.
위첩(衛輒)이 부친의 입국을 막은 것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호씨(胡氏 호안국(胡安國))는 비록 ‘첩(輒)이 그 자리를 사양하고 부친에게 양보했다면 위(衛)나라의 신하들은 괴외(蒯聵)를 막고 첩을 도왔어야 하고, 첩이 자리를 탐내어 부친을 막았다면 위나라의 신자들은 작록(爵祿)을 버리고 떠났어야 한다.’라고 하였지만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 가령 첩에게 진실로 부친에게 양보할 마음이 있는데 신하들이 그 부친을 막고서 첩을 도왔다면 첩이 따를 수 있었겠는가. 이런데도 따랐다면 이런 마음이 참으로 없는 것이니, 어찌 부친이 와서 나라를 놓고 다투는데 자식이 궁중에 있으면서 신하들이 부친을 막도록 내버려 두는 경우가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의례(儀禮)》 〈상복(喪服)〉에 ‘임금의 부모와 조부모를 위해 기년복(期年服)을 입는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선유(先儒)는 말하기를, ‘혹 적통(嫡統)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임금이라면 그 부친과 조부가 폐질(廢疾)이 있어 즉위하지 못하고 지금의 임금이 증조(曾祖)에게 나라를 물려받은 것이다. 부친이나 조부가 졸(卒)하면 임금은 그를 위하여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신하들은 종복(從服)하여 기년복을 입는다.’ 하였다. 저 영공(靈公)은 자기 아들을 쫓아내고 손자를 세웠으니, 이는 손자가 조부에게 나라를 물려받은 것이다. 괴외가 살아 있었던 만큼 폐질에 걸린 것과 같은 경우로 보아야 한다. 부자(夫子)께서 위(衛)나라에서 정사(政事)를 행하여 첩으로 하여금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그 부친을 맞아들여서 괴외가 사양하고 받지 않은 연후에 공손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부친을 받들어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힘쓰고 또한 괴외에게 분명하게 고하고서 나라의 봉양을 편안히 누리게 하여 자리를 다투려는 뜻을 접도록 하였더라면 군신간의 도리와 부자간의 도리를 둘 다 충족시켰을 것이니, 이른바 ‘명분을 바로 세우겠다.〔正名〕’라는 부자의 말씀은 필시 이를 가리켜서 하신 말씀일 것이다. 그렇지만 부자의 이 말씀은 아마도 첩이 새로 즉위했을 때에 하신 말씀일 것이니, 세자가 척성(戚城)에 들어왔을 때에 석만고(石曼姑)가 포위한 지경에 이르러서는 성인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왕풍(王風)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정현(鄭玄)을 비롯한 제유(諸儒)들이 모두 ‘동천(東遷)한 이후에 왕실이 미약해져 제후와 동등해졌기 때문에 아(雅)가 되지 못하고 풍(風)이 되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풍과 아는 체재가 자별하여 흥쇠(興衰)와는 관계가 없다. 주(周)나라 왕실이 한창 흥륭했을 때에도 풍이 있었으니 이남(二南)이 그것이고, 미약한 제후에게도 아가 있었으니 〈억(抑)〉 시가 그것이다. 그리고 왕택(王澤)이 다했어도 변아(變雅)가 지어졌으니, 평왕(平王)이 비록 미약했지만 어찌 변아의 끝에 낄 수 없었겠는가. 제유들의 설은 거의 잘못된 것이다. 동도(東都)는 왕성(王城)이니, 천자가 제후에게 조회를 받는 곳으로 후에 이곳으로 옮겨와 거주하였던 것이다. 무릇 큰 도회지로서 민풍(民風)을 볼 수 있는 곳에는 모두 시가 있었다. 그러므로 전에는 빈(豳)과 주(周)에 풍이 있었고 뒤에는 왕성에 풍이 있었으며 멸망한 나라로까지 확대하면 삼위(三衛)에 풍이 있었으니, 그 경우가 같다. 왕풍이라고 하는 것은 왕성의 풍이라고 하는 것에 불과하고 동천한 평왕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맹자》에 ‘미자(微子), 미중(微仲), 왕자(王子) 비간(比干), 기자(箕子), 교격(膠鬲)은 모두 현인(賢人)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기자와 미자, 미중의 예로 미루어 본다면 ‘왕(王)’이 나라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성은 본래 비간을 봉한 곳인데 주공이 경영했을 수도 있으니, 이렇지 않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하였다.
정풍(鄭風)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는 대부분 음탕한 시로 해석하여 ‘정(鄭)나라의 음악은 음란하다.’라는 글에 호응시켰다. 그러나 성인께서 정나라의 음악이 아악(雅樂)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반드시 추방하고자 하였으니 또 무엇 때문에 보존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암송하고 말하도록 하였겠는가.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보존한 것은 사람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하는데, 나는 이 말을 끝내 믿을 수가 없다. 계자(季子)가 음악 연주를 보고 이르기를, ‘정나라는 정사의 번쇄(煩碎)함이 너무 심하다.’라고만 하였고 일호라도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은 보지 못하였으니, 이로써 주나라 음악은 음녀(淫女)가 스스로 지은 노랫말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정나라와 위(衛)나라의 음악은 난세의 음악이고, 상간(桑間)과 복상(濮上)의 음악은 망국의 음악이다.’ 하였는데, 이는 음악을 가리켜서 한 말이지, 시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정백(鄭伯)이 진(晉)나라에 갔을 때에 자전(子展)이 〈장중자(將仲子)〉를 읊었고, 정백이 조맹자(趙孟子)에게 연향을 베풀 때에 태숙(太叔)이 〈야유만초(野有蔓草)〉를 읊었고, 정나라의 육경(六卿)이 한선자(韓宣子)를 전별(餞別)할 때 자차(子齹)가 〈야유만초〉를 읊고, 자태숙(子太叔)이 〈건상(褰裳)〉을 읊고, 자유(子遊)가 〈풍우(風雨)〉를 읊고, 자기(子旗)가 〈유녀동거(有女同車)〉를 읊고, 자류(子柳)가 〈탁혜(籜兮)〉를 읊었다. 이 시들은 이른바 음탕한 사람이 지었다는 것인데 숙향(叔向)에게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조무(趙武)와 한기(韓起)가 기롱을 당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들 시가 음탕한 자가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건상〉과 〈풍우〉 같은 시들은 그 뜻이 소서(小序)에서 적시한 대로 ‘악한 것을 미워하거나, 찬미하거나 풍자하는〔惡惡美刺〕’ 올바른 풍속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의 의리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복희(伏羲)가 괘(卦)를 그릴 때에 하도가 때맞추어 출현하여 마치 부절(符節)을 합친 듯하였으니, 이른바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않는다.〔先天而天不違〕’라는 것이요, 하후(夏后)가 낙서를 얻어 〈홍범(洪範)〉을 지었으니 이른바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天時)를 받든다.〔後天而奉天時〕’라는 것이다. 공자께서 또 ‘하늘은 1이고 땅은 2이다.〔天一地二〕’라는 한 구절을 드러냈으니, 이는 또 하도의 본원(本源)인데, 선천, 후천, 낙서 셋은 모두 하도에 총괄된다. 하도의 수(數)는 그 기우(奇偶)로써 선천도(先天圖)를 삼고, 그 배합(配合)하는 것으로써 후천도(後天圖)를 삼고, 그 생성(生成)하는 것으로써 낙서를 삼는다. 낙서가 부연(敷衍)되어 〈홍범〉이 지어졌다. 그 두 번째 오사(五事)의 숙(肅)ㆍ예(乂)ㆍ철(哲)ㆍ모(謀)ㆍ성(聖)과 여덟 번째 서징(庶徵)의 숙ㆍ예ㆍ철ㆍ모ㆍ성이 서로 부합되니, 하늘과 사람이 감통(感通)하는 이치를 적연히 볼 수 있고 낙서 가운데 2와 8 두 수는 분명히 서로 자리가 바뀌었으니, 기자(箕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 하였다. 이는 그 대략이니, 상세한 내용은 《역경질서》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상의 여러 설은 옛날에는 없었던 것으로 선생이 처음 제기하였는데, 그 가운데 관중을 논한 것과 위첩을 논한 것 두 가지 조목은 혐의(嫌疑)를 변별하고 윤기(倫紀)를 부지(扶持)하여 세교(世敎)에 크게 도움이 되니, 더더욱 드러내 밝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밖에 성명(性命)의 이치와 학문의 방법 등 전주(傳註)의 뜻을 발명(發明)하고 그 오류를 바로잡은 것과 같은 것은 일일이 기록할 겨를이 없다.
우리 동국(東國)의 선현에 대해서는 말씀하기를, “퇴계의 학문이 홀로 주자의 도를 전하였는데 가장 성대하다.” 하여 퇴계를 존모하는 것이 주자를 존모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평상시에 생활하고 실천할 때에 퇴계를 본받아서 행한 것이 많았다. 《유집(遺集)》과 문인의 기록에 보이는 퇴계의 언행을 모아 《근사록》의 체례(體例)대로 편집하여 《이자수어(李子粹語)》라고 이름 짓고 후학들이 암송하여 본받을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유집》 중에서 예(禮)를 논한 서찰을 뽑아내어 유(類)별로 분류하고 편집하여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이라고 이름 지어 예를 행하는 자가 상고하고 근거할 바가 있게 하였으며, 또 퇴계 문하의 여러 제자들의 사적(事蹟)이 산실(散失)된 것이 많았는데 두루 상고하여 각각 소전(小傳)을 써서 민멸되지 않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사도(斯道)를 보호하고자 하는 뜻을 볼 수 있다.
또 사칠이기(四七理氣)의 설은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보이는데 중국 사람들 가운데 이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우리 동국의 퇴계에 이르러,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에 실린 그 말씀을 취하여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비로소 의심하여 말하기를,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에 분속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면서 퇴계와 편지를 왕복하면서 논변한 말이 많았는데, 종국에는 그 주장이 그르다는 것을 깨달아 의견이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 후에 이율곡(李栗谷)은 주장한 말이 더욱 많았는데 그 대요는 고봉의 처음 견해와 다르지 않았다. 이에 퇴계를 종주(宗主)로 삼는 자들은 “율곡은 이와 기를 하나로 보는 병통이 있다.”라고 하고, 율곡을 종주로 삼는 자들은 “퇴계는 이와 기가 호발(互發)한다고 보는 잘못이 있다.”라고 하여 양측이 서로 비판하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선생께서는 “오늘날 다투는 바는 모두 주자의 뜻이 아니다. 주자가 일찍이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주석을 달기를, ‘도심(道心)은 의리(義理)에서 발(發)하고 인심은 형기(形氣)에서 발한다.’ 하였고, 또 《주자어류》에서는 말하기를,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 하여 〈대우모〉의 주석과 어맥(語脈)이 동일하니, 이가 발하고 기가 발한다는 주자의 말은 ‘의리가 발하고 형기가 발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 뜻이 본래 의심스러운 데가 없는데 율곡이 이를 살피지 못하고 마침내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다.〔發者氣也 所以發者理也〕’라고 하였다. 이는 단지 마음에서 발동(發動)하는 이와 기로써 말한 것이니, 그것이 《주자어류》의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뜻과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율곡이 또 이르기를, ‘사단은 곧 칠정의 선(善)한 쪽의 일면이다.〔四端卽七情之善一邊〕’라고 하였으니, 만약 그렇다면 사단이 칠정 가운데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주자어류》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는 말의 본뜻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지어 회암(晦菴 주희(朱熹))의 뜻을 발명하고 퇴계의 설을 뒷받침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다시 문인들과 더불어 《사칠신편》의 여의(餘意)를 강구(講求)하였는데 생각을 속속들이 다 밝혀 더욱 자세하게 완비되었다. 그 글이 모두 문집에 들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는다.
예(禮)에 대해서는 항상 말씀하기를, “주자의 《가례(家禮)》는 바로 제왕(帝王)의 법제(法制)이니, 지금의 예를 행하는 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바이다. 그러나 고금의 사정이 다르고 귀천의 분수가 달라진 것은 또 바꾸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러므로 마침내 《가제법상위전후록(家祭法喪威前後錄)》을 지어 일가(一家)의 예(禮)가 되게 하였다. 거기에 이르기를, “국제(國制)에 6품 이상은 3대(代)를 제사하니, 선유 가운데 소재(穌齋)와 율곡(栗谷)이 이를 따르고 주 문공(朱文公 주자(朱子))의 《가례》를 쓰지 않았다. 또 7품 이하는 2대를 제사하고, 서인은 고비(考妣)만 제사하니, 그 뜻을 헤아려 보건대 6품 이상은 대부(大夫)의 예를 쓰고 7품 이하는 사(士)의 예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관품(官品)의 고하를 논하지 않고 《가례》를 내세워 4세(世)를 제사 지내는 규례를 통용(通用)하고 관품이 없는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본받아서 행하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게다가 대부는 3세를 제사 지낸다는 것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제법(祭法)〉에는 증조(曾祖)까지 제사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고, 〈왕제(王制)〉에는 소(昭)가 1위(位), 목(穆)이 1위에 시조(始祖)까지 3위가 된다 하였으니, 그 의리를 헤아려 보건대 〈왕제〉가 옳다. 오늘날의 제도는 별자(別子) 외에도 공훈이 있는 자에게는 또 입종(立宗)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신주를 조천(祧遷)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조가 있는 것이니, 시조를 제사하고 또 증조 1위(位)를 더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다. 《가례》는 비록 4세를 허락하였지만 이는 당시에 시조의 사당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만약 시조를 제사한다면 공후(公侯)와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주자는 이미 그것이 참람하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였다. 또 더군다나 주자는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한 몸으로 거상(居喪)할 때에 《가례》를 지었으니, 그 뜻이 어찌 지위가 없는 사(士)까지 통틀어서 말한 것이겠는가. 7품 이하가 3세를 제사 지내는 것은 국제에서 허여하지 않는 바인데 하물며 감히 4세를 제사 지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관위(官位)가 없는 오늘날의 사(士)는 서인과는 차이가 있을 듯하다. 살펴보건대 《의례》 〈상복〉의 전(傳)에 ‘대부와 학사(學士)는 조상을 높일 줄 안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이르기를, ‘학사는 상서(庠序) 및 나라의 태학(太學)과 소학(小學)의 선비이다. 비록 관작은 없지만 대부와 동등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을 오히려 원례(援例)로 삼을 수 있다. 상서의 선비의 경우, 왕고(王考)와 선고(先考)를 제사 지내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으니, 혹 나중에 6품의 대부로 승품(陞品)하게 되면 그때 가서 현재의 제도를 따라 증조까지 제사 지내도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장방(長房)의 규례는 《가례》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 의문을 품고 난처하게 여기는 것은 태반이 이 문제에 있으니, 바꾸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하다. 그리고 주자의 의론 중에도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다. 《주자대전(朱子大全)》의 이요경(李堯卿)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이 일은 다만 예문(禮文)을 신중히 지켜야지 갑자기 새로운 예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였고, 호백량(胡伯量)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비록 인정에 편치 않은 느낌이 들지만 달리 조처할 도리가 없다.’ 하였는데, 이 두 조목이 《가례》와 더불어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리고 《주자어류》의 심간(沈僴)에게 답변한 말에 이르기를, ‘또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 성인이 세운 법은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다.’ 하였다. 《주자어류》의 〈목록(目錄)〉을 살펴보면 이는 무오년(1198) 이후에 들은 말인데 주자는 경신년(1200)에 돌아가셨으니, 어찌 최후의 정론(定論)이 아니겠는가. 오직 포양(包揚)에게 답변한 말에 이르기를, ‘대종법(大宗法)을 이미 세울 수 없다면 또한 소종법(小宗法)을 세워야 한다. 제사는 고조 이하부터 지내며 친진하게 되면 고조를 모셔 내어 백숙위(伯叔位) 중에 복(服)이 다하지 않은 자에게 옮겨 제사 지낸다.’ 하였으니, 이는 《가례》와 같다. 그러나 나라에 대종법이 없어야만 비로소 이렇게 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니, 대종법이 세워진 뒤에는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예는 《가례》의 글은 고수하면서 주자의 본지는 잃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땅히 뒤에 정해진 의론을 위주로 하여 종자(宗子)가 친진한 뒤에는 이천(伊川 정이(程頤))의 말대로, 장방이 다만 지방(紙榜)을 사용하여 그 집에서 제사해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제찬(祭饌)의 가짓수를 정한 것은, 모두 《가례》를 따르되 세속의 제도를 참작하여 어떤 것은 줄이고 어떤 것은 늘려 6변(籩), 6두(豆), 3형(鉶)으로 하였다. 또 수두(羞豆) 2품(品)이 있으니, 바로 지금 세속에서 말하는 간남(肝南)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병(餠), 면(麵), 반(飯), 갱(羹), 주(酒), 적(炙)까지 합쳐 모두 23품이 되는데, 말씀하기를, “《가례》에는 19품으로 되어 있는데 주자가 후에 말씀하기를, ‘온공(溫公 사마광(司馬光))은 15품으로 정했는데 제수 비용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집안에 걸맞지 않을까 걱정이다. 후에 만약 살림이 더욱 어려워지면 4변, 4두, 1형만 쓰고 또 수두까지 없앤다면 온공의 예에 부합할 것이다.” 하였다.
신후(身後)의 예를 정해서 기록한 것은, 대렴포(大斂布)를 쓰지 않고, 구의(柩衣)를 쓰지 않으며, 결관(結棺)할 때에는 새끼줄〔稿索〕을 쓰고 장사 지낼 때에는 칡으로 만든 관끈〔葛茀〕을 쓰며, 또 이불과 명정(銘旌) 외에는 또한 종이를 쓰도록 하였는데, 말씀하기를, “동한(東漢) 이전에는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예경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도리어 종이를 천하게 여기지만 실은 귀한 것이니, 염(斂)할 때 지금(紙衾)을 쓰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옛날 주(周)의 태조(太祖)가 세종(世宗)에게 명하기를, ‘염할 때 지금을 쓰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지 않겠다.’ 하였다. 오늘날의 풍속은 살아생전에는 제대로 봉양도 하지 않았으면서 죽어서는 반드시 성대히 장사를 치르고자 하니 심히 가증스럽다.” 하였다.
이러한 모든 가르침에 대해 잘 모르는 자는 혹 지나치게 검박(儉薄)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세속의 견해이다. 공자가 자유(子遊)에게 답하기를, “재물이 있어도 예법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 만일 재물이 없다면 옷과 이불로 시신의 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수족(手足)을 염하고 곧바로 장사 지내야 한다. 관끈을 손으로 들어서 하관(下棺)하여 묻는다고 해서 어찌 비난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고, 주자가 《가례》를 지을 때에 ‘부화(浮華)와 문식(文飾)을 줄이고 근본과 실질을 펴서, 삼가 선진(先進)을 따르겠다는 부자(夫子)의 뜻을 부친다.’ 하였으니, 저들이 어찌 선생의 가르침이 공자와 주자의 마음을 깊이 터득한 것인 줄 알겠는가.
아, 선생께서 이렇게 하신 것이 어찌 한 집안만을 위한 말씀이겠는가. 오늘날 풍속의 사치함과 참람함이 날로 심해져 지위가 없는 평민들도 권귀(權貴)를 본받아 형식과 절차를 번거롭고 성대하게 하면서 혹 남에게 미치지 못하면 수치스럽게 여긴다. 모두가 하나같이 휩쓸린 채 이를 곳을 모르니 이는 나라에 정해진 제도가 없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 말씀하기를, “왕자(王者)가 일어나면 반드시 덜거나 줄여 중도에 맞게 하여 따로 서인(庶人)의 가례 1편을 만들어서 분수를 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교화가 행해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질 것이다.” 하였으니, 늘 이 세상을 근심하여 애태우는 뜻이 사람을 재삼 탄식하게 만든다.
또 문중의 제도를 새로 만든 것으로 말하면, 우리나라는 종법(宗法)이 분명하지 않아 공자(公子)나 훈신(勳臣) 이외에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종중(宗中)이 없다. 그러므로 서성(庶姓)의 대족(大族)이 흩어진 채 하나로 단합하지 못한다. 선생은 《예기》 〈왕제〉의 소(疏)에 “이성(異姓)으로서 대부가 된 자 또한 태조가 될 수 있다.”라는 글에 의거하여 말씀하기를, “우리 8세조 경헌공(敬憲公 이계손(李繼孫))은 가문의 기틀을 연 시조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여, 종자(宗子)의 집에 사당을 세우고 제전(祭田) 약간을 두어 향사(享祀)의 수용(需用)으로 삼고, 종인(宗人)들을 이끌고서 한 해에 한 차례 제사 지냈다. 이에 사대부들 사이에 소문을 듣고 이를 따른 자들이 제법 많았다. 이에 앞서 족인(族人) 중에 시골에 있는 자들은 촌수가 이미 멀어져 길 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고, 서울에 있는 자들은 종중의 의견이 갈려 화평함을 잃기도 하였는데, 선생께서 “입종(立宗)하는 것은 장차 종족을 한데 모으려는 것이다.” 하고 또 종전(宗田) 약간을 두어 연회(宴會)의 비용으로 삼아 먼저 서울에 있는 족인들을 소종의 옛집에서 모이게 하여 친목을 돈독히 하고 우애를 다지도록 하였고, 다음으로 시골에 있는 족인들을 대종의 집에서 모이게 하여 조종(祖宗)을 존경할 줄 알게 하였으니, 지금 족인들이 변함없이 화목을 유지하는 것은 모두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다.
근세의 선유가 지은 상례(喪禮)는 그 가운데 잘못된 부분이 없지 않은데 그대로 따른 지 이미 오래되어 통용하는 전례(典禮)가 되었다. 선생은 이를 근심하여 본말을 널리 상고하고 예의(禮意)를 절충하여 마침내 〈부친이 적자(嫡子)인데 거상(居喪) 중에 죽으면 아들이 대신 승중(承重)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의〔父爲適居喪而亡子不可代受重議〕〉, 〈승중한 자의 처는 시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조부의 복을 입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설〔承重者之妻姑在不服祖說〕〉, 〈담제(禫祭)는 윤달은 넣지 않고 계산한다는 것에 대한 설〔禫不計閏說〕〉, 〈처를 위해 연제(練祭)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설〔爲妻不練等說〕〉 등을 지어서 오류를 밝혔다. 이에 사우들 사이에 그 잘못을 깨닫고 선생의 설을 따르는 자들이 점점 많아졌다.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있어서는 몸은 비록 초야에 있었지만 이 세상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씀하기를, “《주역》 〈간괘(艮卦) 상(象)〉에 ‘생각이 그 지위를 벗어나지 않는다.〔思不出其位〕’라고 한 것은 분수를 편안히 여겨 떳떳함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 지위가 아니라는 핑계를 내세워 생각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렇지가 않다. 성인께서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政事)를 도모하지 않는다.’라고 경계하셨는데, 여기에서 ‘도모한다〔謀〕’라는 것은 간여한다는 말이다. 필부(匹夫)로서 국정에 간여하는 것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만약 평소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면 정사를 맡긴다 한들 장차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공맹(孔孟)을 보면 알 수가 있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학문을 시작한 초기부터 세무(世務)에 유념하여 무릇 국정이 무너지고 민사(民事)가 어려워지는 것에 대해 묵묵히 폐단의 근원을 탐구하고 바로잡을 대책을 모두 생각하여 마침내 《곽우록(藿憂錄)》을 지으셨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시대와 나라에 대한 걱정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내용이 잡저(雜著) 및 붕우와 문인에게 보낸 서찰에 매우 많이 보이는데, 그 대요는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며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는 데에 있으니, 오활하지도 않고 구차하지도 않아서 의심의 여지없이 반드시 시행할 만한 것이다.
또 일찍이 개탄하기를, “세도(世道)가 더 이상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세 가지 재앙에서 연유한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폐단은 영정(嬴政)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한(漢)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고, 인재를 등용하면서 문벌을 숭상하는 폐해는 위만(魏瞞)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진(晉)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고, 문사(文辭)로 과시(科試)하는 폐단은 양광(楊廣)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唐)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으니, 세 가지 재앙을 없애지 않는다면 다스림을 논할 수 없다. 세 가지 중에 과거(科擧)의 폐해가 가장 크니, 차선(次善)의 것을 말한다면 당나라 양관(楊綰)이 논한 효렴과(孝廉科)가 근접하고 국조(國朝)의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이 주청하여 시행한 현량과(賢良科)가 또 그다음이다. 지금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져 조 선생이 존경을 받아 성묘(聖廟)에 배향되었는데 들어서 시행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아, 저 세 가지는 세상에서 말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양법(良法)’이라는 것인데 선생께서는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끊어서 배척하여 세도의 재앙이라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지극하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삼대(三代)의 다스림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차선이라고 말한 것은 세속을 면려하기 위하여 부득이해서 한 말이지 그 본의는 아니다. 선생은 때를 만난 것이 불우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아래에 있었던 탓에 그 말이 조금도 시행되지 못하여 사업이 나라에 드러나지 못하고 혜택이 백성에게 베풀어지지 못하였다. 이는 비록 당대의 불행이기는 하지만 백 년 뒤에 제대로 다스리고자 하는 임금이 있다면 반드시 취해서 법으로 삼을 것이니, 때를 만나는 것이 이르고 늦은 것이야 또 어찌 따질 것이 있겠는가.
또 글을 읽고 일에 응하는 여가에 견문을 통해 터득하거나, 사색을 통해 터득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기록하였다. 이것이 쌓여서 권질(卷帙)을 이루었으니, 이름하여 《사설(僿說)》이라고 하였다. 그 안에는 경(經)에 관한 글도 있고 역사에 관한 글도 있으며, 음악에 관한 글도 있고, 상수(象數)에 관한 글도 있고, 국가의 경륜(經綸)에 관한 글도 있어서 위로는 천지로부터 아래로는 만물에 이르기까지, 멀리는 원고(遠古)로부터 가까이는 당대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중화(中華)로부터 밖으로는 이적(夷狄)에 이르기까지 포괄하지 않은 것이 없고 논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거개가 고증하고 징험한 것이며 도움이 되고 쓸모가 있는 것이니, 만록(漫錄)이 생긴 이래로 이에 견줄 만한 것은 없었다.
또 일찍이 동국의 사서(史書)가 미흡하다고 여기셨다. 이를테면 《동국통감(東國通鑑)》이나 《여사제강(麗史提綱)》 같은 책은 내용이 거칠고 오류가 있어 저술에 착수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문인 안정복(安鼎福)에게 이런 뜻이 있음을 보고 편지를 보내 권하기를, “무릇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갑(甲)이 하지 않으면 을(乙)이 하게 마련이다. 어찌 옛날과 지금, 남과 나의 구분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뒤에 다시 편지를 왕복하여 정정해 준 것이 많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사(東史)》 한 책이 완성되었는데, 그 책의 규모, 의리와 체례는 대개 선생이 정한 것에서 나왔으니, 이를테면 마한(馬韓)을 정통으로 삼은 것이라든지, 또 마한의 장수 주근(周勤) 및 고려의 조위총(趙位寵)의 충절을 드러내어 특서(特書)한 것은 바로 그 한두 가지 예이다.
또 선생의 만년에는 원방의 선비들이 발이 부르트는 것을 무릅쓰고 선생의 집에 이르렀다. 선대의 행록(行錄)을 가지고 와서 행적이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행장을 써 달라고 부탁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선생은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언(記言)》 이후에는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으니, 지금 입언(立言)의 책임을 사양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애써 부탁에 응하였으니, 진실로 그 사람의 언행이 족히 세교(世敎)에 보탬이 될 만하고 사업이 족히 국승(國乘)에 실릴 만한 것이면 반드시 드러내 특서하여 후인이 고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미수 허목, 판서(判書) 남파(南坡) 홍우원(洪宇遠), 참의(參議)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진선(進善)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등 여러 군자에 이르러서는 그 연보를 짓거나, 갈문(碣文)과 유사(遺事)를 찬술하는 등의 일은 그 후손이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청해서 지어 현자를 존모하는 정성을 폈으니, 포의(布衣)의 선비로서 선생처럼 묘문(墓文)을 많이 지은 사람은 있지 않다.
선생의 저술로는 제경(諸經)의 질서(疾書)와 문집이 있고 시집이 있으며, 《사칠신편(四七新編)》이 있고 《상위전후록(喪威前後錄)》이 있으며, 《곽우록(藿憂錄)》이 있고 《사설(僿說)》이 있으며, 이 밖에 또 《자복편(自卜編)》, 《관물편(觀物編)》, 《백언해(百諺解)》, 《해동악부(海東樂府)》 등의 책이 있고, 또 편서로는 《이자수어(李子粹語)》,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이 있어 총 100여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내가 일찍이 선생을 모시면서 삼가 보니, 선생께서는 어떤 이가 선(善)을 택하여 홀로 행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기쁜 기색을 얼굴에 드러내면서 칭탄(稱歎)해 마지않았고, 혹 어떤 이가 시류를 좇아 이익을 탐한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의기(義氣)를 얼굴에 드러내면서 마치 자신을 더럽힌 듯이 여기셨다. 또 남의 우환과 곤액을 보면 반드시 딱하게 여겨 구제할 것을 생각하였고, 혹 곁에 있는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고 웃으면서 비속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문득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여 듣지 못한 듯이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성정의 바름을 볼 수 있다.
또 평소의 몸가짐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음성과 기색은 씩씩하고 근엄하셨다. 서 계실 때는 반드시 몸을 곧게 폈고 다니실 때는 반드시 발걸음을 삼가셨으며, 의대(衣帶)는 반드시 매무새를 가다듬었고 궤안(几案)은 반드시 바르게 하셨으며, 세수한 곳에는 물방울이 튄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와 신발은 정해진 곳에 두었고 행동거지는 떳떳한 법도가 있었으니, 여기에서 자신의 수양이 엄격함을 볼 수 있다.
또 날마다 많은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왕래하는 빈객과 문생(門生)들을 연접(延接)하는 것이 하나하나 마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그렇게 하고 남은 여가에 글을 읽고 의심나는 것은 기록해 두었으며, 그러고도 여가가 나면 문득 서신에 답장을 하거나 그 밖에 글을 지어 달라는 요구에 부응하였다. 비록 신분이 낮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도 일을 당하면 반드시 문안하였고 편지를 보내오면 반드시 답장하여 혹시라도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밤에는 반드시 등불을 밝히고 책을 대했는데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니 잠자는 시간이라야 겨우 서너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문인 제자를 만나서 함께 경전의 뜻을 강론하게 되면 혹 밤이 다하도록 그치지 않아 밤새 눈을 붙이지 못한 것이 며칠씩 되어도 피곤한 기색을 보지 못하였으니, 여기에서 다시 그 정력이 과인함을 알 수 있다.
또 일찍이 말씀하기를, “초학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먼저 그 구두를 바르게 떼도록 해야 한다.” 하고 □□의 방언으로 규식을 만들어 〈구두지남(句讀指南)〉이라 이름 짓고 학생들로 하여금 참고하여 글을 읽게 하였는데, 말씀하기를, “구두를 뗄 수 있으면 뜻이 통한다.” 하였다.
또 일찍이 《관자(管子)》의 “생각하고 생각하며 또다시 생각하라. 생각했는데도 터득하지 못하면 귀신이 통하게 해 줄 것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고는 학생들에게 고하기를, “생각하기를 오래하면 홀연 깨달음이 있게 된다. 바로 귀신이 통하게 해 주는 것이다.” 하였다. 반드시 스스로 연구해서도 터득하지 못한 뒤에야 비로소 몇 마디 말씀으로 깨우쳐 주셨는데 밝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선생에게 글을 배운 자들은 몇 달이면 대번에 효과가 나타났다. 또 선생이 남을 가르치는 것은, 용광로의 화력(火力)이 비교적 세서 일단 그 속에 들어오면 신속히 녹아들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하셨으니, 이는 과정에 따라 가르치는 여느 방식으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선생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니, 육경(六經)과 자사(子史) 이외에 단편적인 글이나 만록(漫錄)이라도 채택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구해서 읽어 보셨다. 그러나 이단(異端)인 불가(佛家)의 글이나 작은 기예인 술가(術家)의 서적, 패관(稗官)의 잡설(雜說) 같은 것은 일찍이 눈에 가까이하지 않고 말씀하기를, “내가 평소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오직 이 세 종류의 글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집안의 자질(子姪)들에게 이르기를, “내 뱃속에는 얼마간의 기억하고 있는 지식이 있다. 하지만 한스럽게도 마음을 대 주는 방법〔沃心法〕이 없어 제군들에게 전해 줄 수가 없다.” 하였다.
이와 같은 것들은 비록 사소하여 대체(大體)와 무관한 듯 보이지만 선생의 덕행과 언론을 어렴풋이 상상해 볼 수 있는 점이 있기에 감히 빼놓을 수가 없었다.
대개 선생은 상지(上智)의 자질에 지성(至誠)의 학문까지 겸하셨다. 무릇 성품에 본디 지니고 있는 것은 한 가지 이치도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직분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한 가지 일도 닦아 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행(行)은 신명(神明)에 통할 만한데 그 근원은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서 나왔고 도(道)는 천인(天人)을 관통할 만한데 그 기틀은 한 치, 한 푼씩 쌓은 공력으로 다져진 것이다. 그 범위가 큰 것으로 말하면 땅이 만물을 싣고 바다가 강물을 포용하듯 광대하고, 그 분석이 치밀한 것으로 말하면 누에에서 뽑은 실과 소의 가는 털처럼 정밀하다. 그 지조와 행실의 엄격함으로 말하면 규구(規矩)로 그린 듯 단아하고 곧으며, 그 타고난 자질과 성품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옥빛처럼 맑고 종소리처럼 쟁쟁하다. 체(體)와 용(用)을 아울러 포괄하고 겉과 속이 하나로 통하니, 순수한 중에도 순수한 분이다. 또 그 나머지 것들로 말하자면 경륜(經綸)은 족히 상고 시대를 만회할 만하고, 문장은 족히 일세를 수식할 만하다.
총괄해서 말한다면, 그 마음은 주자(朱子)를 배우는 데 있고 그 목표는 성인에 두었으니, 성대하고도 지극하다. 나의 소견으로는 동국이 생긴 이래로 이런 분은 선생 한 분뿐이다. 우리 동국은 퇴계 이후로 유현(儒賢)이 계속해서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선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졌으니, 마치 송(宋)나라 두 분 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이후에 회옹(晦翁)이 크게 이루어 놓은 것과 흡사하다. 이는 나 혼자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니, 훗날의 학자가 만일 선생의 글에서 찾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 선생의 집에서 성장하여 교육의 은혜를 두터이 입었다. 그 은덕을 갚으려니 은혜가 하늘처럼 커서 정성을 쏟을 길이 없다. 삼가 집안에서 과거에 들은 이야기에 의거하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중에 얻은 것을 참고하여 감히 위와 같이 장문(狀文)을 지었다. 그렇지만 지식은 혼우(昏愚)하고 문사는 졸렬하여 우리 선생의 빛나는 도와 덕을 만분지일도 형용할 수 없었으니, 오직 이것이 두렵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 또한 마음을 다하였으니, 차라리 소략하게 할망정 감히 부연하지 않았고 차라리 졸렬하게 할망정 감히 수식하지 않았다. 한 글자도 감히 구차히 놓지 않았고 한마디 말도 감히 실정을 지나치는 말을 쓰지 않았으니, 만약 당세의 대인군자(大人君子)로부터 기꺼이 묘도문(墓道文)을 써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된다면 혹 여기에서 채택할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배(前配)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언(正言) 필청(必淸)의 딸인데 자식이 없다. 후배(後配)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천건(天健)의 딸이니, 부인 또한 정순(貞順)하여 시부모의 명을 어김이 없었고 삼가 곤정(壼政)을 닦았다. 선생보다 먼저 돌아갔고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맹휴(孟休)로 벼슬이 정랑이다. 능히 가학을 전할 만하였는데 일찍 졸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딸은 판관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참판 채팽윤(蔡彭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구환(九煥)이다. 판관은 1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구환은 권세억(權世檍)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갑신년(1764, 영조40) 2월 27일에 첨성리(瞻星里) 임좌(壬坐) 언덕에 있는 후배 목씨 부인의 묘에 합장하고 또 전배 신씨 부인의 널〔柩〕을 옮겨와 부좌(祔左)하였다.


 

[주D-001]문옹(文翁)의 교화 : 학교를 세워 문풍(文風)을 진작하는 것을 이른다. 한(漢)나라 경제(景帝) 말기에 문옹이 촉군(蜀郡)을 맡아 다스리면서 교화(敎化)를 숭상하고 많은 학교를 세워 성도(成都)에 문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무제(武帝) 때에는 천하의 군국(郡國)에 모두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
[주D-002]숙종(肅宗) 7년 신유년 : 대본은 ‘肅廟八年辛酉’로 되어 있는데, 이익이 출생한 연도가 1681년 신유년이 맞으므로 ‘肅廟八年’은 숙종이 즉위한 해부터 기산하여 재위 연도를 헤아린 것으로 보인다. 역사 연표에 따라 숙종 7년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둘째 …… 만나자 :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세자 이윤(李昀)의 후원 세력인 남인(南人)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몰락하면서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성호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상소하여 “전후좌우에서 춘궁(春宮)에게 칼날을 들이댄다.”라고 하며 세자 보호를 역설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악역(惡逆)으로 지목하였다가 국문받던 도중에 죽었다.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2, 78~85쪽》
[주D-004]공자(孔子)께서 …… 하셨으니 : 공자가 낮잠 자는 것을 심히 꾸짖은 것은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이는 말로, 제자인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자, 공자는 “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가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질할 수가 없다. 내가 재여에 대하여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또 “내가 처음에는 남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으나, 이제 나는 남에 대하여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그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재여 때문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라고 하여 재여를 심히 꾸짖었다. 바둑을 두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것은 《논어》 〈양화(陽貨)〉에 보이는 말로, 공자가 말씀하기를,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치면서 마음을 쓰는 곳이 없다면 어렵다. 장기와 바둑이라도 있지 않은가. 그것을 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5]입검설(入儉說) : 《성호전집(星湖全集)》 권41 잡저(雜著) 부분에 실려 있다.
[주D-006]반숙가(半菽歌) : 《성호전집》 권5에 실려 있다.
[주D-007]거위 …… 마땅하다 : 불의(不義)한 방법으로 얻은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보이는 말이다. 제(齊)나라의 진중자(陳仲子)는 성품이 지나치게 청렴하여 만종(萬鍾)의 녹(祿)을 먹고 있는 자기 형 진대(陳戴)의 녹과 집이 모두 불의한 것이라 하여 먹지도 살지도 않고 오릉(於陵)이라는 곳에 따로 가 살면서 사흘씩이나 굶어야 할 정도로 곤궁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자기 형 집에 왔다가 누가 산 거위를 선사한 것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리며 “이 꽥꽥거리는 놈을 어디에 쓰자는 거요?”라고 하였다. 얼마 뒤 어머니가 그것을 잡아 주어 먹고 있는데 형이 들어와서 “이것이 꽥꽥거리던 그 거위 고기이다.”라고 하자, 뛰어나가 모두 토해 버렸다고 한다.
[주D-008]질서라고 …… 것이다 : 횡거(橫渠)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장재는 밤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의리에 대해 새로 깨달은 것이 있으면 바로 일어나서 붓으로 얼른 기록해 두곤 했다는데, 주희(朱熹)가 지은 〈횡거선생찬(橫渠先生贊)〉에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껏 실천하며, 묘하게 계합할 때마다 얼른 기록하였네.〔精思力踐 妙契疾書〕”라는 구절이 있다. 《晦庵集 卷85 六先生畫像贊》
[주D-009]50묘(畝)에서 …… 것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夏后氏)는 50묘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殷)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周)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徹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 철은 통한다는 뜻이요, 조는 돕는다는 뜻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 徹者徹也 助者藉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주D-010]기자(箕子)의 유제(遺制)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권11 〈전제(田制)〉에 보면 기자가 평양에 도읍하고 정전(井田)을 구획하였다고 하면서, “기자가 남긴 정전 제도는 맹자가 논한 ‘정(井)’ 자의 제도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 그중에 함구문(含毬門)과 정양문(正陽門) 두 문 사이의 구획이 가장 분명한데, 그 제도는 모두 ‘전(田)’ 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전이 4구획으로 되어 있는데 구마다 모두 70묘(畝)이다. 큰길 안에서 횡으로 보면 전(田) 넷에 8구획이 있고, 종으로 보아도 또한 전 넷에 8구획이 있어 64구획이 아주 네모반듯하여 그 모양이 꼭 〈선천방도(先天方圖)〉와 같다.” 하였다. 〈선천방도〉는 송나라 소옹(邵雍)의 역도(易圖) 가운데 하나이다.
[주D-011]사방 100묘 : 가로세로가 각각 100보(步)가 되는 면적이다.
[주D-012]관중(管仲)이 …… 것 :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 양공(襄公)이 무도(無道)하자 포숙아(鮑叔牙)는 공자(公子) 소백(小白)을 받들고 거(莒)나라로 망명하고, 관중과 소홀(召忽)은 공자 규(糾)를 받들고 노(魯)나라로 망명하였는데, 뒤에 양공이 무지(無知)에게 시해당하고 무지 또한 죽자 노나라는 공자 규를 호송하여 제나라로 들여보내고 관중에게는 따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거나라에서 제나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게 하였는데 관중이 소백을 화살로 쏘아 소백의 허리띠 고리를 맞혔다. 소백은 죽은 척하여 공자 규의 행보를 늦추게 하고 먼저 제나라로 들어갔으니, 이 사람이 바로 환공(桓公)이다. 환공이 노나라로 하여금 공자 규를 죽이게 하고 관중과 소홀을 보내 줄 것을 청하자, 소홀은 공자 규를 따라 죽고 관중은 함거(檻車)에 갇히기를 자청하여 포숙아의 천거로 끝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春秋左氏傳 莊公8, 9年》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주D-013]성인이 …… 하였으니 : 자공(子貢)이 관중이 죽지 못한 것을 비난하자, 공자는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를 바로잡게 한 덕분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 필부필부가 작은 신의를 위하여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 죽되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겠는가.”라고 하였다. 《論語 憲問》
[주D-014]위첩(衛輒)이 …… 것 : 위첩은 위(衛)나라 출공(出公) 첩(輒)으로, 위 영공(衛靈公)의 손자요, 세자 괴외(蒯聵)의 아들이다. 괴외는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의 음란함을 미워하여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송(宋)나라를 거쳐 진(晉)나라로 망명하였는데, 영공이 죽고 첩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위 출공(衛出公)이다. 뒤에 진나라 조앙(趙鞅)이 세자 괴외를 위나라 지역인 척성(戚城)에 들였는데 출공이 석만고(石曼姑)를 보내 제(齊)나라의 국하(國夏)와 함께 척성을 포위하게 하여 아비의 입국을 저지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2, 3年》 《史記 卷37 衛康叔世家》
[주D-015]선유(先儒) : 《의례소(儀禮疏)》를 쓴 가공언(賈公彥)을 말한다.
[주D-016]종복(從服) : 자식이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 친족의 복을 입고 아내가 남편을 따라 남편 친족의 복을 입으며, 남편이 아내를 따라 아내의 부모를 위해 복을 입고 신하가 임금을 따라 임금의 친속을 위해 입는 복이다. 《禮記 大傳》
[주D-017]이른바 …… 말씀 :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만약 위(衛)나라에서 정치를 행한다면 무엇부터 먼저 하겠느냐고 묻자, 공자가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우겠다.〔必也正名乎〕”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論語 子路》
[주D-018]왕풍(王風) :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이다. 주 평왕(周平王)이 동도(東都) 낙읍(洛邑)으로 천도한 이후 그 지방에서 채집한 시로, 〈서리(黍離)〉부터 〈구중유마(丘中有麻)〉까지 10편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주(周)나라 왕실의 존엄함이 실추되어 제후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하여 그 시 또한 왕국(王國)의 변풍(變風)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주D-019]아(雅)가 …… 되었다 : 《시경》은 그 내용과 성격에 따라 크게 풍(風), 아, 송(頌)으로 분류되는데, 풍은 국풍으로 주나라 때 각 지방의 민요이고,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로 주나라 때 조정(朝廷)의 아악(雅樂)이고, 송은 주송(周頌), 상송(商頌), 노송(魯頌)으로 선조(先祖)의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종묘악(宗廟樂)이다.
[주D-020]이남(二南) :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병칭하는 말로,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의 채읍(采邑)에서 수집한 시(詩)이다. 《詩經集傳 卷1 國風》
[주D-021]변아(變雅) : 《시경》 소아, 대아를 일컫는 정아(正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개 주나라가 쇠퇴하여 정치가 문란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소아는 〈녹명(鹿鳴)〉부터 〈청청자아(菁菁者莪)〉까지를 정소아(正小雅), 〈유월(六月)〉부터 〈하초불황(何草不黃)〉까지를 변소아(變小雅)라고 하고, 대아(大雅)는 〈문왕(文王)〉부터 〈권아(卷阿)〉까지를 정대아(正大雅), 〈민로(民勞)〉부터 〈소민(召旻)〉까지를 변대아(變大雅)라고 한다. 《詩經集傳 詩經集傳序》
[주D-022]빈(豳)과 …… 있었고 : 빈풍(豳風)과 주남(周南)을 가리킨다.
[주D-023]왕성에 풍이 있었으며 : 왕풍을 가리킨다.
[주D-024]멸망한 …… 있었으니 : 주나라에 멸망당한 은(殷)나라의 고도(故都)에 해당하는 삼위(三衛), 즉 패(邶), 용(鄘), 위(衛)에도 풍이 있었다는 말로, 삼위는 패, 용이 후에 위나라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일컬은 것이다. 《星湖全集 卷41 雜著 國風總說》
[주D-025]정(鄭)나라의 …… 글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보이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하(夏)나라의 책력(冊曆)을 행하며, 은(殷)나라의 수레를 타며, 주(周)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음악은 소무(韶舞)를 할 것이요, 정나라 음악을 추방해야 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할 것이니, 정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다.〔行夏之時 乘殷之輅 服周之冕 樂則韶舞 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하였다.
[주D-026]성인께서 …… 하였으니 : 《논어》 〈양화(陽貨)〉에 “나는 자주색이 주색(朱色)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정나라의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며, 말 잘하는 사람이 나라를 전복시키는 것을 미워한다.〔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라는 공자의 말씀이 보인다.
[주D-027]계자(季子)가 …… 하였고 : 계자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다.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아들인데 연릉(延陵)에 봉해졌으므로 연릉의 계자라고도 한다. 계찰이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각 나라의 음악을 듣고 각각 비평을 가하면서 정나라의 음악에 대해서는, “아름답도다. 하지만 그 번쇄함이 너무 심하다. 백성들이 감내하지 못할 것이니, 이 나라가 먼저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春秋左傳注疏 卷39 襄公29年》
[주D-028]정백(鄭伯)이 …… 읊었고 : 정백은 춘추 시대 정 장공(鄭莊公)으로, 이름은 오생(寤生)이다. 자전(子展)은 자한(子罕)의 아들로 정나라의 상경(上卿)이다. 노 양공(魯襄公) 26년 가을 7월에 제후(齊侯)와 정백이 진(晉)에 잡혀 있던 위후(衛侯)를 돕기 위하여 진나라로 갔는데, 제후의 상례(相禮) 국자(國子)가 일시(逸詩)인 〈비지유(轡之柔)〉를 읊고 정백의 상례 자전이 〈장중자(將仲子)〉를 읊자, 진후가 위후의 귀국을 허락하였으며, 진나라의 대부 숙향(叔向), 즉 양설힐(羊舌肸)은 자전을 두고 말하기를, “정 목공(鄭穆公)의 후손 일곱 가문 중에서 한씨(罕氏)가 최후에 망할 것이다. 자전은 몸가짐이 검소하고 마음씀이 전일(專一)하다.” 하였다. 《春秋左傳注疏 卷37 襄公26年》 〈장중자〉를 비롯해서 이후에 열거한 시는 모두 《시경》 정풍(鄭風)의 편명이다.
[주D-029]정백이 …… 읊었고 : 조맹자(趙孟子)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재상인 조무(趙武)로 조맹(趙孟)이라고도 하며 시호가 문자(文子)이므로 조문자(趙文子)라고도 한다. 노양공 27년에 정백이 수롱(垂隴)에서 조맹을 위해 연향을 베풀었는데, 자전(子展), 백유(伯有), 자서(子西), 자산(子産), 자태숙(子太叔) 등 7인이 정백을 시종하였다. 조맹의 요청으로 이들 7인이 시를 읊었는데 조맹이 각각의 시에 대한 평을 하면서 자태숙이 읊은 〈야유만초〉에 대해서는 “이는 그대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하였다. 《春秋左傳注疏 卷38 襄公27年》
[주D-030]정나라의 …… 읊었다 : 한선자(韓宣子)는 진(晉)나라의 대부 한기(韓起)로 선자(宣子)는 시호이다. 자차(子齹)는 자피(子皮)의 아들로 이름은 영제(嬰齊)이며, 자태숙(子太叔)은 정나라의 정경(正卿) 태숙단(太叔段)이다. 자유(子遊)는 사언(駟偃)의 자로 정나라의 정경이다. 자기(子旗)는 공손단(公孫段)의 아들이고, 자류(子柳)는 인단(印段)의 아들이다. 한선자가 정나라에 왔다가 돌아갈 때 정나라의 육경이 그를 교외에서 전별하였는데, 그때 한선자가 말하기를, “청컨대 그대들은 나에게 시를 읊어 주어 내가 정나라 사람들의 지향(志向)이 어떤지 알게 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이들이 각각 시를 읊었는데, 한선자는 “어린 분들이 훌륭하니, 내가 기대한다.”라거나, “정나라는 아마 번창할 것이다. 그대 군자들이 임금의 명에 따라 나에게 시를 선물로 읊어 주었는데, 노래한 것이 정나라의 지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두 나라의 우호를 돈독히 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등의 말로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春秋左傳注疏 卷47 昭公16年》
[주D-031]소서(小序)에서 …… 풍자하는 : 제(齊), 노(魯), 한(韓) 등 3가(家)의 시에도 서(序)가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보통 현존하는 〈모시서(毛詩序)〉를 줄여서 시서(詩序)라고 한다. 이 시서는 대서(大序)와 소서(小序)의 구별이 있는데, 이에 대한 구분은 학설이 분분하다. 주희(朱熹)는 〈모시서〉의 〈주남(周南) 관저(關雎)〉의 서(序) 가운데 《시경》의 육의(六義) 전체의 뜻을 풀이한 부분을 대서로 보고, 그 나머지 앞뒤 부분과 그 뒤의 각 편에 딸린 서를 소서라고 하였다. 시서의 작자에 대해서도 대서는 자하(子夏)가 썼고, 소서는 자하와 모공(毛公)의 합작이라고 하는 등 역시 학설이 갈린다. 《四庫全書總目 卷15 經部15 詩類1 詩序 卷2》 《詩傳大全 詩序 朱子辨說》 소서에는 각 시편에 대해 “〈야유사균(野有死麕)〉은 무례함을 미워한 것이다.”라거나 “〈감당(甘棠)〉은 소백(召伯)을 찬미한 것이다.”라거나 “〈웅치(雄雉)〉는 위 선공(衛宣公)을 풍자한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각 시를 총평한 말이 있다.
[주D-032]하도(河圖)와 낙서(洛書) : 복희씨(伏羲氏) 때에 등에 1에서부터 10까지의 문양이 그려진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이것이 하도로 복희씨가 이것을 보고 괘(卦)를 그었다고 하며, 하(夏)나라 우(禹) 임금 때 등에 1에서 9까지의 점이 박혀 있는 거북이가 나왔는데 이것이 곧 낙서로 우 임금이 이를 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만들었다고 한다. 《尙書正義 洪範, 顧命》
[주D-033]선천(先天)과 후천(後天) : 복희씨의 팔괘(八卦)를 선천이라 하고, 주 문왕(周文王)의 팔괘를 후천이라 한다. 이는 송(宋)나라 소옹(邵雍)이 주역(周易)의 괘도(卦圖)를 해설하면서 구분한 것으로, “선천은, 곧 천지ㆍ수화(水火) 등을 대응시킨 것으로서 체(體)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후천은 현상계를 나타낸 것으로서 용(用)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선천은 후천이 아니고서는 그 변화를 완성시킬 수가 없고 후천은 선천 없이 홀로 행해질 수 없다.”라고 하였다. 《皇極經世書 心易發微一 先天八卦圖, 後天八卦圖》
[주D-034]이른바 …… 것 :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무릇 대인(大人)이란 천지(天地)와 그 덕(德)이 합하며, 일월(日月)과 그 밝음이 합하며, 사시(四時)와 그 질서가 합하며, 귀신(鬼神)과 그 길흉(吉凶)이 합하여,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않으며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천시(天時)를 받드나니, 하늘도 어기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며, 귀신에게 있어서랴.”라는 말이 보인다.
[주D-035]공자께서 …… 드러냈으니 : 공자가 지은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천(天)이 1이고 지(地)가 2이며, 천이 3이고 지가 4이며, 천이 5이고 지가 6이며, 천이 7이고 지가 8이며, 천이 9이고 지가 10이니, 천(天)의 수(數)가 다섯이고 지(地)의 수가 다섯이다. 다섯의 자리가 서로 맞으며 각기 합함이 있으니, 천의 수가 25이고 지의 수가 30이다. 무릇 천지의 수가 55이니, 이것이 변화를 이루며 귀신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보인다.
[주D-036]낙서가 …… 부합되니 : 《서경》의 〈홍범〉은 홍범구주(洪範九疇), 즉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요체를 말한 것으로, 본래 우(禹)가 만들었는데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질문에 부연(敷衍)하여 답하였다고 한다. 그 아홉 가지 항목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인데 그중에 두 번째인 오사와 여덟 번째인 서징이 서로 관통함을 말한다. 오사는 모양〔貌〕, 말〔言〕, 보는 것〔視〕, 듣는 것〔聽〕, 생각함〔思〕으로 이 오사는 순서대로 다섯 가지 덕(德), 즉 공손함〔恭〕, 순종함〔從〕, 밝음〔明〕, 귀밝음〔聰〕, 지혜로움〔睿〕이 호응하고, 이 다섯 가지 덕은 순서대로 다섯 가지 덕의 용(用), 즉 엄숙함〔肅〕, 다스림〔乂〕, 지혜〔哲〕, 헤아림〔謀〕, 성스러움〔聖〕이 호응하는데, 이것이 여러 가지로 징험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징이다. 서징은 비 옴〔雨〕, 볕 남〔暘〕, 더움〔燠〕, 추움〔寒〕, 바람〔風〕이 때에 따라 이르는 것〔時〕으로, 엄숙하매 제때에 비가 내리며〔肅時雨若〕, 조리(條理)가 있으매 제때에 날이 개며〔乂時暘若〕, 지혜로우매 제때에 날이 따뜻하며〔哲時燠若〕, 헤아리매 제때에 날이 추우며〔謀時寒若〕, 성스러우매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聖時風若〕이 아름다운 징조(徵兆)이다. 《尙書正義 洪範》
[주D-037]정지운(鄭之雲) : 1509~1561.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이다. 김정국(金正國)과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황(李滉)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心經)》 등을 배웠다.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지어 조화(造化)의 이치를 구명하고 그 뒤 1553년(명종8)에 이황의 의견을 따라 다시 정정하였는데, 이것이 뒤에 사칠 논쟁(四七論爭)의 발단이 되었다.
[주D-038]소재(穌齋) :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의 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ㆍ학자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穌齋)ㆍ이재(伊齋)ㆍ십청정(十靑亭)ㆍ암실(暗室)ㆍ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저서에 《소재집(穌齋集)》이 있다.
[주D-039]제법(祭法)에는 …… 있고 : 《예기》 〈제법〉에, “대부(大夫)는 3묘(廟)를 세우고 단(壇)이 둘이다. 3묘는 고묘(考廟), 왕고묘(王考廟), 황고묘(皇考廟)로 사시(四時)에 각각 한 차례 제사 지낸다.〔大夫立三廟二壇 曰考廟 曰王考廟 曰皇考廟 享嘗乃止〕” 하였다.
[주D-040]왕제(王制)에는 …… 하였으니 : 《예기》 〈왕제〉에, “대부는 3묘이니, 1소, 1목에 태조의 묘까지 셋이 된다.〔大夫三廟 一昭一穆 與太祖之廟而三〕” 하였다.
[주D-041]별자(別子) : 고대의 종법(宗法) 제도에서 제후(諸侯)의 적장자(嫡長子) 이외의 아들, 즉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예기》 〈대전(大傳)〉에, “별자가 조(祖)가 되고 별자의 적통을 계승한 이는 종(宗)이 되고 아비를 계승한 자는 소종(小宗)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 繼禰者爲小宗〕” 하였는데, 이는 별자는 적통(嫡統)을 잇지 않지만 별자에게도 후손은 있으니, 그 후손이 별자를 높여 조(祖)로 삼을 경우, 그 별자를 계승한 적장(嫡長)은 대종(大宗)이 되고, 별자를 계승한 적장 이외의 아들들은 소종이 된다는 뜻이다.
[주D-042]장방(長房)의 …… 비롯되었다 : 장방은 어른의 집이란 뜻으로, 친진(親盡)한 신주가 있어 조천(祧遷)해야 하는데 족인(族人) 가운데 친진하지 않은 자가 있을 경우에는, 최장방(最長房)으로 신주를 옮겨서 제사 지낸다. 《주자가례》 〈상례(喪禮) 대상(大祥)〉에, “친진한 조상이 지자(支子)인데 족인 가운데 친진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판축(祝版)에 기록하고서 사당에 고한 다음 최장방으로 옮겨서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한다. 만약 족인이 이미 모두 친진하였다면 판축에 기록하고서 사당에 고한 다음 양 계단 사이에 묻는다.〔其支子也 而族人有親未盡者 則祝版云云 告畢 遷於最長之房 使主其祭 若親皆已盡 則祝版云云 告畢 埋於兩階之間〕” 하였다.
[주D-043]이요경(李堯卿)에게 …… 하였고 : 요경은 이당자(李唐咨)의 자로, 용계(龍溪) 사람이다. 주희의 문인으로 주희가 장주(漳州)를 맡았을 때 그를 학생들의 스승으로 초빙한 바 있다. 《閩中理學淵源考 卷21》 이당자의 맏형이 죽고 조카가 제사를 물려받아 고조의 신주를 조천하게 되자 이당자가 자신의 집에서 고조를 제사하고 싶은데 지자(支子)가 제사하는 것은 예경(禮經)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자 주자가 이렇게 답한 것이다. 《晦菴集 卷57 答李堯卿》
[주D-044]호백량(胡伯量)에게 …… 하였는데 : 백량은 호영(胡泳)의 자로, 건창(建昌) 사람이다. 일찍이 주자를 종유(從遊)하였다.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학자들이 존경하여 동원(洞源) 선생이라고 불렀다. 백록동(白鹿洞) 삼현사(三賢祠)에 종사(從祀)되었다. 《江西通志 卷91 人物 南康府》 호영이, 후사를 보지 못하고 죽은 맏형을 위해 입후(立後)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고자 하는데 이렇게 되면 고조를 조천해야 하느냐고 묻자 주자가 이렇게 답한 것이다. 《晦菴集 卷63 答胡伯量》
[주D-045]심간(沈僴)에게 …… 하였다 : 심간은 자가 두중(杜仲)으로 영가(永嘉) 사람이다. 《朱子語類 目錄》 심간이, “적손(嫡孫)이 제사를 주관하게 되면 바로 6세조와 7세조의 신주를 조천해야 하는데 적손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조천해야 하지만 만약 숙조(叔祖)가 아직 살아 계시다면 고조와 증조를 조천하는 것이 마음에 편하겠는가?”라고 묻자 주자가 이렇게 답한 것이다. 《朱子語類 卷87 禮4 小戴禮 曲禮》
[주D-046]포양(包揚)에게 …… 하였으니 : 포양은 주희의 제자로, 자는 현도(顯道)이고 건창(建昌) 사람이다. 포양의 질문에 답변한 말은 《주자어류》 권90 〈예(禮)7 제(祭)〉에 보인다.
[주D-047]간남(肝南) : 간(肝)으로 만든 적(炙)이다. 남쪽에 진설한 절육(切肉)을 세간에서 부르는 말로, 이른바 수두에 담는 것이다. 《星湖僿說 卷4 萬物門 肝南》
[주D-048]옛날 …… 하였다 : 후주(後周) 태조(太祖)가 임종할 때 세종(世宗)에게 경계하기를, “옛날에 내가 서쪽으로 정벌하러 갔을 때 보니, 당(唐)의 18릉(陵)이 모두 발굴되어 있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금과 옥을 많이 매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종이로 염을 하고 와관(瓦棺)을 쓸 것이며, 석물(石物)을 쓰지 말고 능 앞에 ‘주천자(周天子)께서 평생 검약(儉約)을 좋아하여, 지의(紙衣)를 쓰고 와관을 사용하도록 유명(遺命)을 내리셨기에 사천자(嗣天子)가 감히 어기지 못하노라.’라는 글을 돌에 새겨 두도록 하라. 혹시라도 내 말을 어기면 내가 너에게 복을 내리지 않겠다.” 하였다. 《資治通鑑 卷291 後周紀2 太祖 顯徳元年 春正月》
[주D-049]공자가 …… 하였고 :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보이는 말이다. 자유(子遊)가 상구(喪具)에 대해 묻자 공자가 “재물이 있고 없는 것에 걸맞게 해야 한다.〔稱家之有無〕”라고 답하면서 이 말을 하였다.
[주D-050]주자가 …… 하였으니 : 이 말은 〈가례서(家禮序)〉에 보인다. 선진(先進)은 선배와 같은 말이다. 선배들은 예악(禮樂)에 있어 문(文)과 질(質)이 적당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촌스럽다고 비판하고, 후배들은 예악에 있어 문이 질보다 지나치거늘 당시 사람들은 도리어 군자라고 하는 것에 대해, 공자가 “내가 만일 예악을 쓰게 되면 선진을 따르겠다.” 하였다. 《論語 先進》
[주D-051]서성(庶姓) : 왕의 동성(同姓), 왕의 인척인 이성(異姓) 이외의 여러 성씨를 말한다. 《毛詩正義 小雅 伐木 孔穎達疏》
[주D-052]예기 …… 글 : 《예기》 〈왕제(王制)〉에, “대부는 3묘(廟)이니, 1소(昭), 1목(穆)에 태조(太祖)의 묘까지 셋이 된다.〔大夫三廟 一昭一穆 與太祖之廟而三〕”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注)에 “태조는 별자(別子)로서 처음 작위(爵位)를 받은 자이니,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별자가 태조가 된다.’ 하였다. 비록 별자가 아니더라도 처음 작위를 받은 자 또한 태조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太祖別子始爵者 大傳曰 別子爲祖 謂此雖非別子 始爵者亦然〕”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 “이성으로서 대부가 된 자 및 다른 나라의 신하가 처음으로 와서 대부에 임명된 자 또한 태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별자가 아니더라도 처음 작위를 받은 자 또한 태조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한 것이다.〔異姓爲大夫者及他國之臣初來任爲大夫者亦得爲太祖 故云雖非別子始爵者亦然〕” 하였다.
[주D-053]근세의 …… 상례(喪禮)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상례비요(喪禮備要)》,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가리킨다.
[주D-054]성인께서 …… 경계하셨는데 : 《논어》 〈태백(泰伯)〉에 보이는 공자의 말씀이다.
[주D-055]영정(嬴政)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 영정은 진 시황(秦始皇)의 성명이다. 대본은 ‘自嬴政治’로 되어 있는데, 《성호전집(星湖全集)》 권27의 〈답안백순(答安百順)〉 및 부록의 〈묘갈명(墓碣銘)〉에 의거하여 ‘治’를 ‘始’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6]위만(魏瞞) :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위(魏)나라 조조의 어렸을 때 이름이 아만(阿瞞)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호칭한 것이다.
[주D-057]양광(楊廣) : 수 양제(隋煬帝)의 성명이다.
[주D-058]양관(楊綰) : 당(唐)나라 대종(代宗) 때 사람이다.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진사(進士)ㆍ명경과(明經科)를 폐지하고 효렴(孝廉)의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 바 있다. 《新唐書 卷44 選擧志上》
[주D-059]동국통감(東國通鑑) : 신라 초기부터 고려 말기까지를 기록한 사서로 서거정(徐居正), 정효항(鄭孝恒) 등이 왕명(王命)에 따라 편찬하였다.
[주D-060]여사제강(麗史提綱) :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체재에 따라 편찬한 편년체(編年體)의 고려사(高麗史)로 유계(兪棨)가 편찬하였다.


 

 

 

성호전집 부록 제1권
묘갈명 병서〔墓碣銘 幷序〕[채제공(蔡濟恭)]



선생의 휘는 익(瀷), 자는 자신(子新), 성은 이씨이다. 광주(廣州)의 첨성리(瞻星里)에서 은거하며 수도하였으니, 성호(星湖)라고 자호(自號)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선생은 태어난 지 이태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모부인께서 그 체질이 허약하여 병치레가 잦은 것을 근심하여 일찍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도록 하지 않았다. 조금 자라서는 둘째 형 섬계공(剡溪公 이잠(李潛))에게 배웠는데 전심하여 학업에 힘썼고 따를 자가 없을 만큼 영특하여 군서(群書)를 두루 열람하였다. 둘째 형이 세상의 앙화를 입게 되자 세상에 대한 미련이 없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셋째 형 옥동공(玉洞公 이서(李漵)), 종부형(從父兄) 소은공(素隱公 이진(李)) 두 분을 따라 배웠다. 개연히 도(道)를 구하는 뜻이 있어 방에 바르게 앉아서 경전 및 송(宋)나라 정주(程朱), 우리나라 퇴계(退溪)의 글을 펴 놓고 되풀이하여 읽고 사색하니 마치 엉킨 실타래가 예리한 칼날에 한 올 한 올 풀리듯 은미한 뜻이 해석되었다.
선생의 도(道)에 들어가는 문로(門路)는 경(敬)을 위주로 하였으니, 일찍이 말씀하기를, “발(發)하기 전에는 정(靜)할 때의 경(敬)이 있고, 이미 발한 뒤에는 동(動)할 때의 경이 있다. 그러나 동할 때의 경 또한 다만 정할 때의 공부에서 근본하니, 만약 정할 때 경을 주장하지 못하면 동할 때에 어떻게 경을 지켜 바르게 될 수 있겠는가.” 하고, 〈경재잠도(敬齋箴圖)〉와 〈경재잠설(敬齋箴說)〉을 지었는데, 〈경재잠〉의 “동하고 정함에 어긋남이 없고 안과 밖이 서로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한다.〔動靜不違 表裏交正〕”라는 구절을 법도로 삼았다.
선생이 학문을 진보시킨 방법으로 말하면, 행(行)은 반드시 지(知)를 우선으로 하므로 치지(致知)를 역행(力行)의 근본으로 삼았고, 아는 것은 장차 행하기 위해서이므로 역행을 치지의 실제로 삼았다. 후대의 학자들이 혹 장구(章句)의 지엽적인 뜻에만 전적으로 마음을 쏟고 실제적인 공부에는 착수하려 하지 않는 이가 많은 것을 근심하여 항상 말씀하기를, “그 말을 배웠어도 반드시 마음으로 깨닫는 것은 아니며 마음으로는 비록 깨달았어도 반드시 몸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자신에게 체득해야 하니, 그런 뒤에라야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행할 수 있다.” 하였으니, 정(靜)할 때에 보존하고 동(動)할 때에 살피며, 참으로 알고 힘써 행하여 공부가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조정에서 그 이름을 듣고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매우 연로해진 뒤에는 첨지중추부사에 제수하였으니,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었다. 아, 선생의 수(壽)는 맹자의 부동심(不動心)한 나이보다 두 배를 누리고도 몇 해를 더 사셨다.
선생은 무릇 성품에 본디 지니고 있는 것에 있어서는 한 가지라도 궁구하지 않은 이치가 없고, 직분에 있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에 있어서는 한 가지라도 갖추지 않은 일이 없었다. 행(行)은 신명(神明)에 통할 만하였는데 그 근원은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에서 나왔고 도(道)는 천인(天人)을 관통할 만하였는데 그 기틀은 한 치, 한 푼씩 쌓은 공력으로 다져진 것이다. 땅이 만물을 싣고 바다가 강물을 포용하듯 그 범위가 광대하고 누에에서 뽑은 실과 소의 가는 털처럼 그 분석이 치밀하였으니, 이를 세상에 펴게 하였더라면 임금은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되었을 것이고 백성은 요순의 백성이 되었을 것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선생께서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참되고 올바른 포부를 한두 가지도 펴지 못하였다. 후생이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법에 엄격한 가행(家行)뿐이고, 전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지면에 기록된 지론(至論)뿐이다.
그 가행으로 말하면, 매양 선고의 얼굴과 풍모를 알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원통하게 여겨 말이 선고에 미치면 주르륵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는데 늙어서까지도 그러하였다. 뒤에 선고가 돌아가신 지 갑년(甲年)이 되는 해에 추복(追服)을 입으려고 했다가 이윽고 말씀하기를, “퇴옹(退翁)께서도 나처럼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지만 추복을 행하지 않으셨다. 퇴옹은 나의 스승이니 어찌 감히 넘어설 수 있겠는가.” 하고 여생을 마치도록 재계하고 소식(素食)하며 지냈는데,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 상중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평소의 생활은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고 물러 나와서는 서실(書室)에 계셨으며, 의대(衣帶)는 반드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사우(士友)를 만나면 반드시 공손하게 절하였으니 말씀하기를, “절은 예(禮)의 시작이니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 때문에 문인과 제자 중에 사차(私次)에서 묵는 자들은 들어올 때도 반드시 절하고 뵈었고 나갈 때도 반드시 절하고 하직하였다.
규문(閨門) 안은 정숙하였다. 비록 자손과 친족이라도 까닭 없이 내당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항상 《주역》 〈가인(家人) 구삼(九三) 상(象)〉의 “가인(家人)이 원망함은 심한 잘못이 아니요, 부인과 자식이 희희낙락함은 집안의 절도를 잃은 것이다.”라는 구절을 암송하였다.
형제와 자질(子姪)에게 한결같은 정성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교육하였다. 비록 촌수가 먼 자라도 굶주리면 구휼하고 병이 나면 약을 지어 주었으며 상사가 나면 부조하였고 때를 놓쳐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못한 자에게는 혼수를 마련해 주어 윤상(倫常)이 폐기되지 않도록 하였다.
선영(先塋)에 대수(代數)가 멀어 제사를 못 지내는 분묘가 있었는데 각기 묘전(墓田)을 두어서 그 재원으로 매해 10월에 제사를 지냈다. 개조(開祖)인 8세조 경헌공(敬憲公)의 사당을 종자(宗子)의 집에 새로 세우고 해마다 종인들을 이끌고 한 차례 제사하였다. 글을 지어 그 의리를 밝히기를, “국조(國朝)의 경우, 공자(公子)나 훈신(勳臣) 이외에는 입종(立宗)에 관한 명문(明文)이 없다. 그러므로 서성(庶姓)의 대족(大族)이 흩어진 채 하나로 단합하지 못한다. 그러나 《예기》 〈왕제〉에 의거하면, ‘별자(別子)가 조(祖)가 되고 별자의 적통을 계승한 이는 종(宗)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이르기를, ‘비록 별자가 아니더라도 처음으로 작위를 받은 자 또한 그렇다.’ 하였고, 그 소(疏)에 이르기를, ‘이성(異姓)으로서 대부(大夫)가 된 자 또한 태조가 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서성이 입종한 증거이다.” 하였다.
그 지론(至論)으로 말하면, 대부분 깊이 탐구하고 스스로 터득하여 전에는 밝히지 못했던 것을 밝힌 것들이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하도의 수(數)는 그 기우(奇偶)로써 선천도(先天圖)를 삼고, 그 배합(配合)하는 것으로써 후천도(後天圖)를 삼고, 그 생성(生成)하는 것으로써 낙서를 삼는다. 낙서가 부연(敷衍)되어 〈홍범(洪範)〉이 지어졌다. 그 두 번째 오사(五事)의 숙(肅)ㆍ예(乂)ㆍ철(哲)ㆍ모(謀)ㆍ성(聖)이 여덟 번째 서징(庶徵)에도 호응하여 나타난다. 그리고 낙서 가운데 2와 8은 서로 자리가 바뀌었으니, 기자(箕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 하였다.
삼대(三代)의 정전(井田)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50묘(畝)에서 변하여 70묘가 되고 70묘에서 변하여 100묘가 되었다는 것은 그 경계(經界)를 바꾼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선유가 이를 의심하였지만 이는 변석(辨析)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고, 1정(井)은 9전(田)이 되고, 1전은 4구(區)가 되고, 1구는 사방 50보(步)가 되는 제도를 변석하여 하(夏)나라 때는 1부(夫)가 1구를 받고, 은(殷)나라 때는 늘어나서 1부가 2구를 받고, 주(周)나라 때는 늘어나서 1부가 4구를 받았음을 밝히면서, “그러므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정전이 50묘에서 바뀌어 70묘가 되고 100묘가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맹자가 어찌 우리를 속였겠는가.” 하였다.
삼대의 정삭(正朔)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계절〔時〕을 바꾸고 달〔月〕을 바꾼 것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분분하여 절충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시경》, 《서경》, 《주역》을 살펴보면 계절과 달을 바꾸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춘추》, 《맹자》 및 맹헌자(孟獻子)의 말을 살펴보면 계절과 달을 바꾸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계절과 달을 바꾼 것은 주나라가 동천(東遷)하여 쇠미해진 뒤의 일이다. 동천하기 이전에 계절과 달을 바꾸었다는 글을 찾아낼 수 있는 자가 있는가.” 하였다.
왕풍(王風)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정현(鄭玄)을 비롯한 제유(諸儒)들은 모두 ‘동천한 이후에 왕실이 미약해져 제후와 동등해졌기 때문에 아(雅)가 되지 못하고 풍(風)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풍과 아는 원래 나름의 체재가 있고 흥쇠와는 관계가 없다. 주나라 왕실이 한창 흥륭했을 때에도 풍이 있었으니 이남(二南)이 그것이고, 제후가 미약했어도 아(雅)가 있었으니 〈억(抑)〉 시(詩)가 그것이다. 그리고 왕택(王澤)이 다했어도 변아(變雅)가 지어졌으니, 평왕(平王)이 비록 미약했지만 어찌 변아의 끝에 낄 수 없었겠는가. 계찰(季札)이 주나라의 음악 연주를 구경하였을 때 왕(王) 지역은 위(衛)나라 언저리에 있었으니, 패(邶), 용(鄘), 위(衛), 왕(王)은 모두 동도(東都)였다. 동도는 왕성(王城)이니, 천자가 제후에게 조회를 받는 곳으로 후에 옮겨와 거주하였던 것이다. 무릇 큰 도회지에는 모두 시(詩)가 있어서 민풍(民風)을 살필 수 있었다. 앞서서는 빈(豳)과 주(周)에 풍이 있었고 뒤에는 왕성에 풍이 있었으니, 왕풍이라는 것은 왕성의 풍을 일컫는 것이지 동천한 평왕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하였다.
삼경(三經)과 사서(四書) 및 《소학》, 《근사록》, 《심경》에 있어서는 글자마다 그 훈고를 탐구하고 구절마다 그 뜻을 탐색해서 모두 질서(疾書)를 지었으니, 장횡거(張橫渠)의 ‘터득한 바가 있으면 얼른 기록하였다.〔妙契疾書〕’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순서는 《맹자》부터 시작하였는데, 말씀하기를, “시간적으로는 후대가 되고, 내용상으로는 의미가 상세하다. 후대이면 가깝고 상밀하면 드러난다. 그러므로 성인의 뜻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맹자》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였다.
예(禮)에 있어서는 삼례(三禮)를 근본으로 하고 두우(杜佑)의 《통전(通典)》 및 역대 제유들의 설을 두루 통섭(通涉)하되 《가례》에서 절충하였다. 그래서 또 저술한 《가례질서(家禮疾書)》가 있다. 《관의(冠儀)》, 《가취의(嫁娶儀)》, 《상위록(喪威錄)》, 《묘묘향사의(廟墓享祀儀)》의 제편(諸編)을 산절(刪節)한 데에 이르러서는 드러내어 일가(一家)의 법으로 삼았다.
퇴계를 존모한 것이 주자(朱子)를 존모한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유집(遺集)》 및 문인의 기록에 보이는 퇴계의 언행을 《근사록》의 체례대로 편집하여 《도동록(道東錄)》이라 이름 짓고, 또 예를 논한 퇴계의 글들을 분류하고 편집하여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이라 이름 지었다.
퇴옹(退翁) 이후에 사칠이기(四七理氣)에 대한 설이, 주자가 해석한 “도심(道心)은 의리(義理)에서 발하고, 인심(人心)은 형기(形氣)에서 발한다.”라는 말과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실린,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요,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라는 말과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을 근심하여 《사칠신편(四七新編)》을 지어 주자의 뜻을 발명하고 퇴도(退陶)의 설을 뒷받침하였다.
비록 초야에 묻혀 있었지만 이 세상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어 《곽우록(藿憂錄)》, 《사설(僿說)》 등의 책을 지었다. 일찍이 개연히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백세토록 훌륭한 정치가 없었던 것은 세 가지 재앙에서 연유한다.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누르는 폐단은 영정(嬴政 진 시황(秦始皇))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한(漢)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고, 인재를 등용하면서 문벌을 숭상하는 폐해는 위만(魏瞞 조조(曹操))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진(晉)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고, 문사(文辭)로 과시(科試)하는 폐단은 양광(楊廣 수 양제(隋煬帝))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唐)나라가 혁폐하지 못하였으니, 세 가지 재앙을 없애지 않는다면 다스림을 논할 수 없다. 세 가지 중에 과거(科擧)의 폐해가 가장 크니, 차선의 것을 말한다면 당나라 양관(楊綰)이 논한 효렴과(孝廉科)가 근접하고 국조(國朝)의 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현량과(賢良科)가 또 그다음이다. 정암이 이미 성묘(聖廟)에 배향되었는데 들어서 시행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였다.
동국(東國)의 사서(史書)가 소략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을 근심해서 문인 안정복(安鼎福)에게 부탁하여 의리(義理)와 체례(體例)를 정해 주고 마침내 믿을 만한 사서 1질(帙)을 완성하게 하였다.
저술한 시문(詩文)은 여러 편서(編書)까지 아울러 도합 수백여 권이다. 요약하면 학문은 문식(文飾)을 제거하고 실제에 힘썼으며, 예를 논한 것은 사치를 버리고 절검을 따랐으며,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논한 것은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이다. 모두 본원을 탐구하고 요점을 제시하였으므로 각기 조리가 있어 들어서 시행할 만한 것들이니, 아 성대하다.
이씨(李氏)의 본은 황려(黃驪 여주(驪州)의 고호(古號))에서 나왔으니, 비조(鼻祖)는 고려(高麗)의 인용교위(仁勇校尉) 인덕(仁德)이다. 8세조 휘(諱) 계손(繼孫)은 병조 판서를 지냈고 시호는 경헌(敬憲)이니, 일찍이 북로(北路)의 관찰사가 되어 유교의 교화가 크게 드러났으므로 북도 사람들이 서원을 세워 선사(先師)의 예로 제사하였다. 증조 휘 상의(尙毅)는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고 시호는 익헌(翼獻)이니, 실로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명신이었다. 조부 휘 지안(志安)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미수(眉叟) 허 문정(許文正 허목(許穆))과 정총산(鄭蔥山 정언옹(鄭彦))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도의(道義)로써 서로 추중하였다. 부친 휘 하진(夏鎭)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고, 숙종조(肅宗朝)에 힘써 청의(淸議)를 부지(扶持)하여 사류(士流)들의 추중을 받았다. 전비(前妣) 증(贈) 정부인(貞夫人)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유수(留守) 후산(後山)의 따님이고, 후비(後妣) 정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대후(大後)의 따님이니, 선생은 권 부인 소생이다.
선생은 숙종 신유년(1681, 숙종7)에 태어나 영종(英宗) 계미년(1763, 영조39)에 졸하였으니, 향년 83세이다. 속광(屬纊)하자마자 즉시 찬장에 있는 음식으로 전(奠)을 올리고 성빈(成殯)하기 전까지 조석으로 올리는 궤전(饋奠)을 폐하지 않았다. 염(斂)할 때는 지금(紙衾)을 쓰고, 종이에다 명정(銘旌)을 썼으며, 관은 옻칠하지 않고 송진을 발랐으니, 모두 선생께서 평소 정해 둔 것이다. 문하의 제자들은 모두 1년 동안 조복(弔服)에 가마(加麻)하였고, 단문친(袒免親)을 넘어서는 족인(族人)들도 포건(布巾)과 포대(布帶)를 하여 장례가 끝난 뒤에 벗었다. 집 북쪽에 있는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선생의 초취(初娶)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정언(正言) 필청(必淸)의 딸인데 자식이 없다. 재취(再娶)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천건(天健)의 딸이다. 두 부인은 선생의 묘에 합장되었다. 1남 맹휴(孟休)는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였고 벼슬은 정랑에 이르렀다. 가학(家學)을 능히 전할 만하였는데 일찍 졸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1녀는 위솔(衛率) 이극성(李克誠)에게 시집갔다. 정랑은 참판 채팽윤(蔡彭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구환(九煥)을 낳았으니 성균관 생원이다. 위솔의 계자(系子)는 윤하(潤夏)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기보(畿輔)의 관찰사가 되어 군현(郡縣)을 순행할 때 길을 우회하여 첨성리(瞻星里) 집으로 선생을 찾아뵈었는데, 선생은 당시 81세였다. 선생은 처마가 낮은 폐옥(弊屋) 아래에 단정히 앉아 계셨는데 안광이 형형하여 쏘는 듯하였고, 성긴 수염은 아래로 띠〔帶〕에까지 드리워 있었다. 절을 하기도 전에 벌써 공경하는 마음이 숙연히 일었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뵈니 화락하고 너그러우셨으며 경전(經傳)을 담론하실 때는 고금을 넘나들며 말씀하시어 전에 듣지 못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다만 한스럽게도 세상사에 쫓기다 보니 가시는 적막한 길에 정성스레 향화(香花)도 한 번 올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선생의 종손 처사군(處士君) 삼환(森煥)이 소매에 가장(家狀)을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그저 늙은이일 뿐이니 어찌 도(道)가 있는 기상을 잘 형용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오도(吾道)는 원래 통서(統緖)가 있으니, 퇴계는 우리 동국의 부자(夫子)이다. 그 도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전했고 한강은 그 도를 미수(眉叟 허목(許穆))에게 전했고, 선생은 미수를 사숙(私淑)한 분이다. 미수를 배워 퇴계의 도통을 접맥하였으니, 후대의 학자는 사문(斯文)이 대대로 도통을 계승하여 속일 수 없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안 연후에 지향점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선생의 명을 지어도 되겠느냐고 하자, 처사군이 말하기를, “그 말이 요체를 얻어 번다하지 않으니, 선생을 잘 아십니다.” 하였다. 마침내 옷깃을 여미고 명을 지었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도를 품고도 혜택을 베풀지 못한 것은 / 抱道而莫能致澤
한 시대의 불행이지만 / 一世之不幸
글을 지어 또한 은택을 베풀 수 있으니 / 著書而亦足嘉惠
백세의 다행이로다 / 百世之幸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 天之意無乃在是歟
일세는 짧고 백세는 긴 법이다 / 一世短而百世永
선생의 명을 지어 오당을 권면하노니 / 銘先生而勉吾黨
어찌하여 함께 선생의 글을 읽지 않는가 / 盍與讀先生書
도통의 전수가 나에게 말미암지 남에게 말미암겠는가 / 傳統由己而由人乎


 

[주D-001]둘째 …… 되자 :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세자 이윤(李昀)의 후원 세력인 남인(南人)과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몰락하면서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지자 성호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상소하여 “전후좌우에서 춘궁(春宮)에게 칼날을 들이댄다.”라고 하며 세자 보호를 역설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악역(惡逆)으로 지목하였다가 국문받던 도중에 죽었다. 《이성무, 조선시대당쟁사2, 동방미디어, 2002, 78~85쪽》
[주D-002]경재잠 : 주희(朱熹)가 장경부(張敬夫)의 〈주일잠(主一箴)〉의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여 지은 잠으로, 경재(敬齋)의 벽에 붙여 놓고 스스로 경계한 글이다. 《晦庵集 卷85》
[주D-003]맹자의 부동심(不動心)한 나이 : 40세를 가리킨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는 40세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我四十不動心〕”라는 말이 보인다.
[주D-004]예기 …… 하였으니 : 별자(別子)는 고대의 종법(宗法) 제도에서 제후(諸侯)의 적장자(嫡長子) 이외의 아들, 즉 서자(庶子)를 가리킨다. 다만 여기에서 “별자가 조(祖)가 되고 별자의 적통을 계승한 이는 종(宗)이 된다.〔別子爲祖 繼別爲宗〕”라는 구절은 《예기》 〈왕제〉가 아니라, 《예기》 〈상복소기(喪服小記)〉와 〈대전(大傳)〉에 보이는 말이고, 성호가 인용한 주와 소는 《예기》 〈왕제〉의 “대부는 3묘(廟)이니, 1소(昭), 1목(穆)에 태조(太祖)의 묘까지 셋이 된다.〔大夫三廟 一昭一穆 與太祖之廟而三〕”라는 구절에 대한 주와 소이니, 착오가 있는 듯하다.
[주D-005]그 …… 나타난다. : 《서경》의 〈홍범〉은 홍범구주(洪範九疇), 즉 천하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의 큰 요체를 말한 것으로, 본래 우(禹)가 만들었는데 기자(箕子)가 무왕(武王)의 질문에 부연(敷衍)하여 답하였다고 한다. 그 아홉 가지 항목은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오기(五紀), 황극(皇極), 삼덕(三德), 계의(稽疑), 서징(庶徵), 오복(五福)인데 그중에 두 번째인 오사와 여덟 번째인 서징이 서로 관통함을 말한다. 오사는 모양〔貌〕, 말〔言〕, 보는 것〔視〕, 듣는 것〔聽〕, 생각함〔思〕으로 이 오사는 순서대로 다섯 가지 덕(德), 즉 공손함〔恭〕, 순종함〔從〕, 밝음〔明〕, 귀밝음〔聰〕, 지혜로움〔睿〕이 호응하고, 이 다섯 가지 덕은 순서대로 다섯 가지 덕의 용(用), 즉 엄숙함〔肅〕, 다스림〔乂〕, 지혜〔哲〕, 헤아림〔謀〕, 성스러움〔聖〕이 호응하는데, 이것이 여러 가지로 징험되어 나타나는 것이 서징이다. 서징은 비 옴〔雨〕, 볕 남〔暘〕, 더움〔燠〕, 추움〔寒〕, 바람〔風〕이 때에 따라 이르는 것〔時〕으로, 엄숙하매 제때에 비가 내리며〔肅時雨若〕, 조리(條理)가 있으매 제때에 날이 개며〔乂時暘若〕, 지혜로우매 제때에 날이 따뜻하며〔哲時燠若〕, 헤아리매 제때에 날이 추우며〔謀時寒若〕, 성스러우매 제때에 바람이 부는 것〔聖時風若〕이 아름다운 징조(徵兆)이다. 《尙書正義 洪範》
[주D-006]50묘(畝)에서 …… 것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하후씨(夏后氏)는 50묘에 공법(貢法)을 썼고, 은(殷)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助法)을 썼고, 주(周)나라 사람은 100묘에 철법(徹法)을 썼으니, 그 실제는 모두 10분의 1이다. 철은 통한다는 뜻이요, 조는 돕는다는 뜻이다.〔夏后氏五十而貢 殷人七十而助 周人百畝而徹 其實皆什一也 徹者徹也 助者藉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7]맹헌자(孟獻子)의 말 : 맹헌자는 노(魯)나라의 대부(大夫) 중손멸(仲孫蔑)이다. 《예기》 〈잡기(雜記)〉에 “맹헌자가 말하기를, ‘1월 일지(日至)에 상제(上帝)에게 제사하고, 7월 일지에 시조(始祖)에게 제사할 수 있다.’ 하였으니, 7월의 체(禘) 제사는 맹헌자가 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체 제사는 본래 건사지월(建巳之月), 즉 음력 6월을 썼는데, 헌자로 인하여 건오지월(建午之月), 즉 음력 7월을 썼다는 말이다.
[주D-008]왕풍(王風)에 대해서는 논하기를 : 《시경》 국풍(國風)의 하나이다. 주 평왕(周平王)이 동도(東都) 낙읍(洛邑)으로 천도한 이후 그 지방에서 채집한 시로, 〈서리(黍離)〉부터 〈구중유마(丘中有麻)〉까지 10편을 가리킨다. 이때에는 주(周)나라 왕실의 존엄함이 실추되어 제후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하여 그 시 또한 왕국(王國)의 변풍(變風)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주D-009]아(雅)가 …… 되었다 : 《시경》은 그 내용과 성격에 따라 크게 풍(風), 아, 송(頌)으로 분류되는데, 풍은 국풍으로 주나라 때 각 지방의 민요이고, 아는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로 주나라 때 조정(朝廷)의 아악(雅樂)이고, 송은 주송(周頌), 상송(商頌), 노송(魯頌)으로 선조(先祖)의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종묘악(宗廟樂)이다.
[주D-010]이남(二南) :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병칭하는 말로, 주공 단(周公旦)과 소공 석(召公奭)의 채읍(采邑)에서 수집한 시(詩)이다. 《詩經集傳 卷1 國風》
[주D-011]변아(變雅) : 《시경》 소아, 대아를 일컫는 정아(正雅)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대개 주나라가 쇠퇴하여 정치가 문란했던 시대를 반영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소아는 〈녹명(鹿鳴)〉부터 〈청청자아(菁菁者莪)〉까지를 정소아(正小雅), 〈유월(六月)〉부터 〈하초불황(何草不黃)〉까지를 변소아(變小雅)라고 하고, 대아(大雅)는 〈문왕(文王)〉부터 〈권아(卷阿)〉까지를 정대아(正大雅), 〈민로(民勞)〉부터 〈소민(召旻)〉까지를 변대아(變大雅)라고 한다. 《詩經集傳 詩經集傳序》
[주D-012]빈(豳)과 …… 있었고 : 빈풍(豳風)과 주남(周南)을 가리킨다.
[주D-013]왕성에 풍이 있었으니 : 왕풍을 가리킨다.
[주D-014]장횡거(張橫渠)의 …… 것이다 : 횡거(橫渠)는 송(宋)나라 유학자 장재(張載)의 호이다. 장재는 밤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의리에 대해 새로 깨달은 것이 있으면 바로 일어나서 붓으로 얼른 기록해 두곤 했다는데, 주희(朱熹)가 지은 〈횡거선생찬(橫渠先生贊)〉에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껏 실천하며, 묘하게 계합할 때마다 얼른 기록하였네.〔精思力踐 妙契疾書〕”라는 구절이 있다. 《晦庵集 卷85 六先生畫像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