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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이씨 시조공 철성부원군 이암 묘지명 병서

아베베1 2013. 1. 29. 13:18

 

 

목은문고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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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 문정공(李文貞公)의 묘지명 병서(幷序)


지정(至正) 갑진년(1364, 공민왕13) 5월 5일에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공(李公)이 나이 68세로 자택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태상(太常)에서 문정(文貞)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유사(有司)가 전고(典故)에 따라 장례에 관한 일을 주선하였다. 이해 6월 9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부인 홍씨(洪氏)의 묘역 안에 장사를 지냈다. 이듬해에 상이 공을 그리워하여 화공(畫工)에게 공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뒤에, 어주(御酒)를 하사하며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이에 막내아들 강(岡)이 눈물을 흘리며 치사(致謝)하고 물러 나와서는, 나를 찾아와 명(銘)을 부탁하기를 “명을 일찍 짓지 않은 것은 바로 이때가 오기를 기다린 것 같다. 이제 그대가 명을 지어 주면 좋겠다.” 하였다. 나는 강과 벗으로 지내면서 공을 아버지처럼 섬겨 왔다. 아, 그런 내가 어떻게 차마 명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군해(君侅)요, 자(字)는 익지(翼之)이다. 뒤에 흉인(兇人)의 이름을 피해서 암(嵓)으로 개명하고 자를 고운(古雲)이라고 하였다. 공은 진주(晉州) 고성현(固城縣) 사람이다. 증조부의 휘는 진(瑨)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조부는 휘가 존비(尊庇)인데, 유가(儒家)의 도를 행하면서 충렬왕(忠烈王)을 섬겼다. 30여 년 동안 전선(銓選 인사 행정)을 관장하면서 성균관(成均館)에서 인재를 시취(試取)하고 또 지공거(知貢擧)를 맡았으며, 죽을 때의 관직은 판밀직사사 감찰대부(判密直司事監察大夫)였다. 부친의 휘는 우(瑀)인데, 일 처리하는 재능을 인정받아 회양(淮陽)ㆍ김해(金海)의 부사(府使)와 전주(全州)ㆍ진주(晉州)의 목사(牧使)를 두루 역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었기 때문에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였으며,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다. 모친인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 박씨(朴氏)는 지원(至元) 연간에 공을 세워 천자로부터 금부(金符)를 하사받고 만부장(萬夫長)에 제수된 판삼사사(判三司事) 휘 지량(之亮)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남다른 데가 있었으며, 소학(小學)에 들어 갔을 때부터 벌써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어졌다. 나이 17세로 계축년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당시의 지공거인 권 정승(權政丞)과 최 찬성(崔贊成)이 크게 기이하게 여기면서 장차 재상이 될 그릇이라고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이 크게 진보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날로 전파되자, 의릉(毅陵 충숙왕)이 공의 재주를 사랑한 나머지 부인(符印)을 맡도록 명하고 비성(祕省)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리하여 교감(校勘)을 거친 다음에 재차 천전(遷轉)하여 낭(郞)과 주부(注簿)와 단양부 좌도관(丹陽府佐都官)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이 처음 즉위한 원년에 전의 영(典儀令)으로 있다가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발탁되고 감찰 집의(監察執義)를 겸하였다. 신미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았다.
지원(至元) 경진년(1340, 충혜왕 복위 1)에 지신사(知申事)로 복직했다가 조금 뒤에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는데, 이때의 품계는 봉익(奉翊)이었다. 얼마 있다가 상이 유지(有旨)를 내리기를 “성균관은 사도(師道)를 펴는 곳이니 그곳도 책임이 중하다고 하겠다만, 나의 정치를 보좌하는 일은 양부(兩府)가 실로 전담하고 있다 할 것이니, 추밀 동지(樞密同知)를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 명이 내리자 조사(朝士)가 서로 경하하면서 “선인(善人)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얼마 뒤에는 또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옮겨졌다. 신사년에 지공거를 맡았다. 이 무렵에 권세를 휘두르는 자가 우리 유가(儒家)의 도를 헐뜯어 비방하였으므로, 공이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에서 자신의 뜻을 끝내 펼칠 수가 없었으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바로잡아 구제한 것이 또한 많았다. 명릉(明陵 충목왕)이 즉위한 뒤에 공을 더욱 두텁게 총애하고 신임해서 찬성사(贊成事)의 관직을 더해 주었다. 총릉(聰陵 충정왕)이 즉위하고 나서 “선왕(先王)의 옛 신하로서 덕이 있고 공로를 세운 자 가운데 오직 이모(李某)만이 나의 정치를 도와줄 수 있다.” 하고는 마침내 좌정승(左政丞)에 임명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파직되었다.
금상(今上)이 본국에 돌아와서 공을 등용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하지 못하자, 공에게 부친의 봉작(封爵)을 이어받아 개부(開府)하게 함으로써 공경하는 뜻을 표하였다. 금상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계사년(1353)에,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이도 60이 다 되어 가고 지위도 끝까지 올랐으니, 이런 때에 물러가기를 청하지 않고서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고는, 벼슬을 버리고서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에 상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려는 마음이 매우 절실하여 기로(耆老)들을 예우하며 불러들였는데, 공이 돌아오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유시(諭示)하고는, 때때로 소명(召命)을 내려 입대(入對)하게 하다가 마침내는 공을 중용(重用)하기로 뜻을 굳혔다. 금상 즉위 8년째 되는 무술년(1358) 가을에 다시 수 시중(守侍中)이 되었다.
기해년(1359, 공민왕8) 겨울에 모거경(毛居敬)이 거느린 홍건적(紅巾賊)이 북쪽 변방을 침범하자, 공을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로 임명해 보내면서 제군(諸軍)을 총독(摠督)하게 하였다. 그런데 군대가 집결하기도 전에 적이 벌써 가까이 다가오자, 서경(西京)을 지키던 신하가 수비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창고를 불태우고 떠나려 하였다. 이에 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옳은 계책이 못 된다. 적이 먼 곳에서 싸우러 왔으니, 그 예봉(銳鋒)을 감당할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중간에서 적을 저지하지 않으면 그들의 형세로 볼 때 우리 국도(國都)를 진동시킬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적을 중간에서 저지하려면 이 성을 미끼로 내주는 것보다 좋은 계책이 없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노유(老幼)를 데리고 동쪽으로 피신하게 하되, 창고와 가옥을 단단히 잠궈서 안전하게 해 놓는 것이 좋겠다. 적이 이것을 보면 필시 우리를 겁쟁이로 여기고는 여기에서 또한 조금 머물게 될 것이다. 우리를 겁쟁이로 알면 마음이 교만해질 것이요, 조금 머물다 보면 예기(銳氣)가 무뎌질 것이니, 우리 군대가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습격하면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불태우려고 했던 것들이 뒷날 우리의 쓰임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한 달을 채 넘기기도 전에 공이 예측한 대로 적이 과연 패주(敗走)하였고, 창고와 가옥도 예전처럼 완전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공이 안동(安東)으로 행행(行幸)하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는데, 그 공이 모든 신하들 중에 으뜸을 차지하였다. 이듬해에 적을 평정하고 시상(施賞)할 적에, 공이 면대(面對)하여 아뢰기를 “지금 나라가 불행하게도 이처럼 일이 많은 때를 당했으니, 출장입상(出將入相)의 인재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그런데 신이 형편없는 몸으로 오래도록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이제는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할까 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공의 한결같은 충성심을 더욱 가상하게 여긴 나머지 공신(功臣)의 호를 더 내리는 한편, 군(君)에 봉해 주고 봉조청(奉朝請)의 직함을 특별히 가하였다.
공은 관청에서 공무를 처리할 적에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자세로 법도를 준수하면서 털끝만큼이라도 사정을 봐주는 일이 있지 않았고, 집에서 지낼 적에는 살림살이를 전혀 묻지 않은 채 오로지 도서(圖書)로 시간을 보내면서 담담하게 혼자 즐길 뿐이었다. 그리고 선원사(禪源寺)의 식영(息影) 노인과 방외(方外)의 우정을 나누면서, 사원(寺院) 경내에다 집을 짓고 해운(海雲)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건 뒤에 조각배를 타고서 왕래하곤 하였는데, 한번 가면 번번이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 고아(高雅)한 흥치가 대개 이와 같았으니, 행촌(杏村)이 바로 공의 자호(自號)였다.
공이 일찍이 《서경(書經)》 태갑편(太甲篇)을 손수 써서 상에게 올리면서, 아들인 강(岡)에게 이르기를 “너는 이 일을 기억해 두도록 하라. 내가 이미 늙어서 맡은 관직도 없고 말씀을 올려야 할 책임도 없지만, 임금님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공은 비서(祕書)에서 출발해서 재상의 지위에 이를 때까지 꼭 전선(銓選)에 참여하곤 하였는데, 관직을 주고 뺏을 적에 조금도 사정(私情)을 개입시키지 않았으므로 종신토록 원망하는 말을 듣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前後)의 문생(門生)들 중에서도 현달한 관원과 저명한 인사가 많이 배출되었고, 여러 자제들이 모두 공을 수립하였으니, 아, 이를 통해서도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준다는 사실을 증험할 수 있다 하겠다.
부인 홍씨(洪氏)는, 시중(侍中)으로 시호가 충정(忠正)인 휘(諱) 자번(子藩)의 증손녀요, 우대언(右代言) 휘 승서(承緖)의 딸인데, 공보다 27년 앞서서 세상을 떠났다. 며느리로서 집안의 경사를 제대로 잇고, 부인으로서 유덕군자(有德君子)의 짝이 되었으며, 모친으로서 많은 자제들을 낳아 길렀다. 아들은 넷을 두었다. 장남 인(寅)은 중정대부(中正大夫) 종부 영(宗簿令)이고, 다음 숭(崇)은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이고, 다음 음(陰)은 모거경의 홍건적을 평정할 때 참여한 공로로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신축년 겨울에 안주(安州)에서 전사하였고, 다음은 바로 강(岡)으로 현재 밀직사지신사 예문관제학 지제교 지전리사사(密直司知申事藝文館提學知製敎知典理司事)이다. 딸은 둘을 두었으니, 장녀는 판사(判事) 김광병(金光丙)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신(趙愼)에게 출가하였다. 측실 소생의 아들로 목(牧)이 있는데 낭장(郞將)이다. 손자 모(某)는 모관(某官)이고, 그 밖에 모와 모가 있으며, 손녀도 약간 명이 있다. 외손 김모(金某)는 모관이고, 모와 모가 또 있으며, 외손녀도 약간 명이 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우뚝 높이 솟은 우리 문정공 / 巍巍文貞
철성에다 관부를 개설하였도다 / 開府鐵城
정승으로 백관의 으뜸이 되자 / 初宅尤揆
차서 넘치는 걸 경계하면서 / 曰噫戒盈
몸 이끌고 뒤로 물러났나니 / 奉身而退
청산 녹수의 청평산이었어라 / 水綠山明
한가로이 출몰하는 저 구름처럼 / 如雲卷舒
세상일에 아득히 관심이 없다가도 / 杳乎無情
조정에 돌아와서 정사를 행할 적엔 / 還居廟堂
소리와 안색에 흔들림이 없었다오 / 不動色聲
탐학한 홍건적이 쳐들어왔다가 / 長蛇封豕
서경에서 천벌을 받게 되었을 때 / 就戮西京
공의 충성심을 하늘이 인도하여 / 天啓公衷
조용히 계책을 이루게 하였나니 / 從容策成
교만하게 만들어서 소탕한 그 공로여 / 俾驕以覆
종묘의 신령들이 놀라지 않게 하였도다 / 九廟不驚
사람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탄복하며 / 人始歎服
유자(儒者)도 용병을 잘하는 줄 알았나니 / 詩書用兵
이만하면 세상 덮을 큰 공로를 세웠는걸 / 大已蓋世
그 밖의 작은 일들이야 평할 것이 있겠는가 / 其細奚評
임금님이 이르기를 우리 원로는 / 王曰元老
비록 죽었어도 살았다고 할 것이니 / 雖死猶生
우리 원로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 我儀圖之
열경의 모범으로 삼으리라 하셨다네 / 以風列卿
그러고는 초상화가 일단 완성되자 / 旣成旣肖
관원을 계속 보내 제사를 올렸나니 / 明禋繼伻
열경이 서로들 권면함은 물론이요 / 列卿用勸
자손들도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어라 / 子孫與榮
흘러간 옛 역사를 살펴보건대 / 自古在昔
임금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고서 / 君臣聚精
망할까 염려하며 망하지 않게 하였나니 / 不亡其亡
그것은 다름 아니요 바로 성이라 / 匪他曰誠
그대 태사에게 알려 주노니 / 詔爾太史
역사를 편찬할 때 이 명을 참고하라 / 尙徵斯銘


 

[주D-001]차서 …… 경계하면서 : 《주역(周易)》 겸괘(謙卦) 단(彖)에, “천도는 차서 넘치면 무너지게 하고[天道虧盈]……귀신은 차서 넘치면 해를 끼친다.[鬼神害盈]”는 말이 나온다.
[주D-002]망할까 …… 하였나니 : 《주역》 비괘(否卦) 구오(九五)에 “혹시 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항상 염려해야만 굳건한 뽕나무에 매어 놓은 것처럼 안정되리라.[其亡其亡 繫于苞桑]”라는 말이 나온다.


 

 

 이암 선생의 지공거는

 상기의 문헌에 나오듯 권정승 최찬성 (최 찬성이 전주최공 고려문화시중 시 문성공 이신 전주최씨 문성공의 시조 되시는 분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