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성녕 대군 신도비명

유명 조선국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誠寧大君)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 신도비명 병서

아베베1 2013. 1. 31. 16:02

 

 

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太宗朝故事本末)
태종



태종 공정성덕신공문무예철성렬광효 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은, 휘는 방원(芳遠)이고, 자는 유덕(遺德)이며,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신의왕후(神懿王后)가 지정(至正) 27년 정미 공민왕 16년 5월 16일 신묘에 함흥 귀주동(歸州洞) 사저에서 낳았다. 홍무(洪武) 임술년에 고려에서 진사를 하고,다음 해인 계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태조가 즉위한 뒤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고, 경진년 건문 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11월에 송경(松京)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술년 영락(永樂) 16년 8월에 세종에게 왕위를 전하였는데, 11월에 성덕신공(聖德神功)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왕위에 있은 지 18년이고, 임인년 세종 4년 5월 10일 병인에 천달방(泉達坊) 새 대궐에서 승하하였으니,상왕위에 있은 지 4년이고, 수는 56세였다. 명 나라에서 시호를 공정(恭定) 공손하게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공(恭)이고, 순전한 행실을 어기지 않는 것이 정(定)이다. 이라고 하였다. 숙종 9년 계해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이라고 시호를 더 올렸고, 능은 헌릉(獻陵) 광주(廣州) 서쪽 대모산(大母山)에 있으니,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임인년(1422) 9월 6일에 장사지냈는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다.
○ 비(妃) 창덕소열원경 왕후(彰德昭烈元敬王后) 민씨(閔氏)는 본관이 여흥(驪興)이니, 문하좌정승 여흥부원군 문도공(門下左政丞驪興府院君文度公) 민제(閔霽)의 딸이다. 지정(至正) 25년 을사 공민왕 14년 7월 11일에 송경 철동(鐵洞) 사저에서 나고,홍무(洪武) 임신년 태조 원년 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으며, 경진년 정빈(貞嬪)으로 책봉되었다가,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정비(靜妃)로 책봉되었다. 무술년 태종 18년 에 후덕(厚德) 덕자가 겹으로 나오므로, 어첩(御牒)에는 기재하지 않았다. 이라고 존호를 올렸다.경자년 세종 2년 7월 10일 병자에 수강궁(壽康宮) 지금의 창경궁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시니, 수는 56세였다. 갑진년 세종 6년 에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고 존호를 추상(追上)하였다. 능은 헌릉(獻陵) 대왕의 능과 같은 언덕에 있고 경자년 9월 17일에 장사지냈다. 이다.
○ 아들 열 둘과 딸 열 일곱을 두었다.
사(嗣)는 세종 대왕이다. 차례로는 셋째이다.
첫째 아들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褆) 처음에 세자로 봉했다가 태종 18년에 폐(廢)하고 대군으로 봉하였다. 시호는 강정공(剛靖公)이다. 광주 김씨(光州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광산군(光山君)으로 좌의정을 추증한 한로(漢魯)의 딸인데,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었다.
둘째 아들 효녕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처음 이름은 이호(李祜)이고, 시호는 정효공(靖孝公)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으로 좌의정을 추증한 정도공(貞度公) 정역(鄭易)의 딸인데,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넷째 아들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 대광보국 변한공(大匡輔國卞韓公)으로 시호는 소경공(昭頃公)이다. 창녕 성씨(昌寧成氏)에게 장가들었으니, 판원사(判院事)로 좌의정을 추증한 희정공(僖靖公) 성억(成抑)의 딸이다.
첫째 딸 정순공주(貞順公主) 남편은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인데, 딸 하나를 두었다. 백강의 본관은 청주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문도공 거이(居易)이다.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 남편은 평양부원군 강안공(康安公) 조대림(趙大臨)인데,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었다. 대림의 본관은 평양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문충공 조준(趙浚)이다.
셋째 딸 경안공주(慶安公主) 남편은 길창군(吉昌君) 제간공(齊簡公) 권규(權跬)인데, 아들 둘을 두었다. 권규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다.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 남편은 의산군(宜山君) 소간공(昭簡公) 남휘(南暉)인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후궁 소생〉
첫째 아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 효빈(孝嬪) 김씨가 낳았고 시호는 제간공(齊簡公)이다. 청풍 김씨(淸風金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참의 증 좌찬성 김관(金灌)의 딸이다. 아들 넷을 두었다.
둘째 아들 함녕군(諴寧君) 이인(李裀) 신빈(信嬪) 신씨(辛氏)가 낳았고, 처음에 공녕(恭寧)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함녕으로 고쳤다. 시호는 정민공(貞敏公)이다. 전주 최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찬성 사강(士康)의 딸이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셋째 아들 온녕군(溫寧君) 이정(李裎) 신빈 신씨가 낳았고, 시호는 양혜(良惠)공이다. 순천 박씨(順天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부정(副正) 증 찬성 문목공(文穆公) 안명(安命)의 딸이다.
넷째 아들 근녕군(謹寧君) 이농(李襛) 신빈 신씨가 낳았고, 시호는 희의공(僖懿公)이다. 하양 허씨(河陽許氏)에게 장가들었으니, 관찰사 증 찬성 지혜(之惠)의 딸이다. 아들 둘과 딸 일곱을 두었다.
다섯째 아들 혜녕군(惠寧君) 이지(李祉) 안씨(安氏)가 낳았고, 시호는 양회공(襄懷公)이다. 무송 윤씨(茂松尹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증 찬성 윤변(尹汴)의 딸이다.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여섯째 아들 희녕군(熙寧君) 이타(李袉) 숙의(淑儀) 최씨가 낳았고, 시호는 이정공(夷靖公)이다. 순창 신씨(淳昌申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첨지 증 찬성 숙생(淑生)의 딸이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를 재취하였으니, 군수(郡守) 사렴(士廉)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다.
일곱째 아들 후녕군(厚寧君) 이한(李衦) 최씨가 낳았고, 시호는 희도공(僖悼公)이다. 평산 신씨에게 장가들었으니, 영(令) 증 찬성 경종(敬宗)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여덟째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 선빈(善嬪) 안(安)씨가 낳았고, 시호는 소강공(昭剛公)이다. 운봉 박씨(雲峯朴氏)에게 장가들었으니, 절제사(節制使) 증 찬성 종지(從智)의 딸이다. 딸 하나를 두었다.
첫째 딸 정혜옹주(貞惠翁主)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낳았다. 남편은 정난공신(靖難功臣)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 성렬공(成烈公) 박종우(朴從愚)이다. 종우의 본관은 운봉(雲峯)이고, 아버지는 찬성 충숙공(忠肅公) 박신(朴信)이다.
둘째 딸 정신옹주(貞信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인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계동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판서(判書) 윤향(尹向)이다.
셋째 딸 정정옹주(貞靜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한원군(漢原君) 소회공(昭懷公) 조선(趙璿)인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조선의 본관은 양주(楊州)이고,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문강공(文剛公) 말생(末生)이다.
넷째 딸 숙정옹주(淑貞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고, 남편은 행 판서(行判書)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인데, 아들 둘과 딸 넷을 두었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아버지는 판서 정진(鄭鎭)이다.
다섯째 딸 소선옹주(昭善翁主) 남편은 유천위(柔川尉) 변효순(邊孝順)인데,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효순의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아버지는 감찰(監察) 상주(尙周)이다.
여섯째 딸 숙혜옹주(淑惠翁主) 소빈(昭嬪) 노씨(盧氏)가 낳았다. 남편은 성원위(星原尉) 장절공(章節公) 이정녕(李正寧)이고,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다. 정녕의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아버지는 좌윤(左尹) 사후(師厚)이다.
일곱째 딸 숙녕옹주(淑寧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파성군(坡城君) 윤우일(尹愚一)인데,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다. 우일의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사간(司諫) 수미(須彌)이다.
여덟째 딸 소숙옹주(昭淑翁主) 안씨가 낳았다. 남편은 해평군(海平君) 평도공(平悼公) 윤연명(尹延命)인데,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다. 연명의 본관은 해평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연성(連誠)이다.
아홉째 딸 숙경옹주(淑慶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좌익 공신(佐翼功臣) 파평군(坡平君) 제도공(齊度公) 윤암(尹巖)인데,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윤암의 본관은 파평이고, 아버지는 생원(生員) 태산(太山)이다.
열째 딸 경신옹주(敬愼翁主) 안씨가 낳았다. 남편은 전성위(全城尉) 양효공(良孝公) 이완(李梡)이며,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이완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아버지는 판사(判事) 공전(恭全)이다.
열한째 딸 숙안옹주(淑安翁主) 김씨가 낳았다. 남편은 회천위(懷川尉) 양도공(良悼公) 황유(黃裕)인데, 아들 셋을 두었다. 황유의 본관은 회덕(懷德)이고, 아버지는 판사(判事) 자후(子厚)이다.
열두째 딸 숙근옹주(淑謹翁主) 신빈 신씨가 낳았다. 남편은 좌익공신(佐翼功臣) 화천군(花川君) 양효공(襄孝公) 권공(權恭)인데, 아들 하나를 두었다. 권공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아버지는 도절제사(都節制使) 권복(權復)이다.
열셋째 딸 숙순옹주(淑順翁主) 이씨가 낳았다. 남편은 파원위(坡原尉) 윤평(尹評)인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윤평의 본관은 파평이고, 아버지는 참의(參議) 윤창(尹敞)이다.
○ 태종은 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영특하고 지혜로웠다. 고려의 정치가 문란하여 백성의 마음이 떠나는 것을 보고 개연히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하륜(河崙)은 본시 남의 관상보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그에게 마음이 쏠려 볼 때마다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만한 영특한 기상이 있다.” 하였다. 《동각잡기》
○ 태조는 본시 유학(儒學)을 좋아하여, 비록 군중에서라도 창을 놓고 쉬는 때면 유명한 선비를 청하여 경서와 사기를 논의하느라고 밤중까지 가지 않기도 하였다. 가문에 유학하는 사람이 없어서 태종을 배움길에 나아가게 하였더니, 태종이 글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종의 글읽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찌 내몸에서 나지 않았는가.” 하였다. 고려 우왕 때에 태종이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태조가 대궐에 가서 배사(拜謝)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제학(提學)이 되니 태조의 기쁨이 대단하여 사람을 시켜서 관교(官敎 임명장)를 두세 번 읽게 하였다. 손님들과 연회할 때는 태종에게 연구(聯句)를 하게 하고, 매양 말하기를, “내가 손님들과 함께 즐거웠던 것은 너의 힘이 컸다.” 하였다. 《동각잡기》
○ 태종이 정안군으로 명 나라 남경(南京)에 갔을 때에 문황(文皇 뒤의 성조)이 연왕(燕王)으로 있었다. 태종이 지나는 길에 만났는데, 문황이 이야기를 하여 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대우가 지극하였다. 태종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연왕을 보니, 번왕(藩王)으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다. 장차 천하가 이렇게 정하여질지 헤아릴 수가 없다.” 하더니,얼마 안되어 연왕으로 있던 문황이 천자가 되니, 사람들이 태종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문황이 천자가 된 뒤에 우리 태종을 퍽 생각하고 매양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너의 군주를 만나보았는데, 참 천인(天人)이다.” 하였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태종이 이색(李穡)과 함께 돌아올 적에 발해(渤海)에 이르러 두 객선(客船)과 동행이 되어서 반양산(半洋山) 전횡도(田橫島) 에 당도하였는데, 회오리 바람이 크게 일어나서 두 객선은 침몰하고, 태종이 탔던 배도 위태롭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서 엎드렸으나, 태종은 신색이 태연하더니 마침내 무사히 돌아왔다. 《동각잡기》
○ 송도 추동(楸洞)에 있는 잠저(潛邸) 즉위한 뒤에 증수(增修)하고, 경덕궁(敬德宮)이라 하였다. 에 있을 때, 기미년(1379) 가을 9월 새벽녘 별이 드문드문할 때에 서까래만한 크기의 흰 용이 침실 위에 나타났다. 비늘의 광채가 찬란하고 꼬리를 굼틀거리면서,바로 태종이 있는 곳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시녀(侍女) 김씨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의 어머니가 처마 밑에 앉았다가 집선인(執膳人 임금의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 김소근(金小斤) 등에게 달려 가서 말하여 함께 나와 보았다. 조금 뒤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동각잡기》
○ 명 나라 태조가 상보사 승(尙寶司丞) 우우(牛牛)를 우리나라에 사절로 보내어, 태조가 종친을 시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였는데, 그 사람이 거만하여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그러다가 태종의 잠저에 가서 태종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공손하게 예를 하고 자리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니, 방석(芳碩)의 무리가 기뻐하지 않으며 서로 말하기를, “천자의 사절이 소국 신하에게 머리를 조아리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반드시 까닭이 있다.” 하고, 태조에게 참소하려고 하였다. 《동각잡기》
○ 경진년(1400)에 즉위하자, 수창궁(壽昌宮)에 화재가 있었다. 교서를 내려서 직언해주기를 청하니, 참찬 권근이 상소하기를, “첫째, 정성과 효도를 도탑게 하소서. 태상(太上)께 매일 세 차례 잡수실 것과 문안하는 신하를 보내시고, 열흘에 한 번씩 가서 뵙되, 법가(法駕 임금행차의 큰 절차)를 차리지 말고 간편하게 금위(禁衛)만 데리고 가소서.둘째, 정치를 부지런히 하소서. 내시가 명령을 전달하는 것은 장차 안과 밖이 막히게 되어 점차 간특한 짓이 행하여질 조짐이니, 멀리는 진(秦)과 수(隋)를, 가까이는 고려의 전철을 경계하소서. 신이 일찍이 명 나라 서울에서 몇 달 동안 묵으면서 조반(朝班)을 따라 문연각(文淵閣)에 들어가서 황제가 날마다 조당(朝堂)에 앉아서 정사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 법을 본받아 의주(儀註 식례(式例))를 마련해서 바치기를 청합니다. 셋째, 조사(朝士)를 자주 접견하소서. 넷째, 경연에 부지런히 나오소서.다섯째, 절의(節義)를 표창하시어 정몽주와 김약항(金若恒)은 더 추증(追贈)하고, 길재(吉再)는 다시 예(禮)로 부르시되, 오지 않거든 주(州)에서 그 집에 정려(旌閭) 하고 복호(復戶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도록 하소서. 여섯째, 여제(厲祭 전염병을 물리쳐 달라고 지내는 제사)를 행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 말을 모두 좇았다. 《국조보감》
○ 원년 신사에 오래 가물었는데, 김과(金科)에게 명하여 《시경》의 〈운한편(雲漢篇)〉을 강(講)하게 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금주(禁酒)하라는 명을 내렸어도 술먹는 사람이 그치지 않으니, 이것은 내가 술을 끊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하고, 명하여 술을 내오지 못하게 하니, 감히 술을 마시는 자가 없었다. 《국조보감》
○ 임금이 《대학》을 끝까지 읽고 난 뒤에 시독관(侍讀官) 김과에게 이르기를, “이 책을 읽고 나니, 곧 학문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겠다.” 하였다. 김과가 아뢰기를, “경연관들이 하례하기 위해 대궐문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능히 행한 뒤에 하례하여도 늦지 않다.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하례할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 임금이 시독관 김과를 때없이 들어오게 하여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서 강론하고 조용히 술을 주니, 김과도 마음을 다하여 아는데까지 대답을 하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권근에게 질문하여서 대답하였다. 임금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부지런하고, 글을 읽는 과정을 엄하게 세웠다.한번은 《통감(通鑑)》을 다 읽고 난 뒤에, 김과에게 이르기를, “내가 역대의 흥망을 대강 알았다. 경서(經書)를 읽으려고 하는데, 어느 경서가 성리(性理)의 본원이 되겠느냐.” 하니, 김과가 아뢰기를, “제왕의 학문을 신이 어찌 경솔히 의논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일 집중(精一執中)은 제왕의 학문이다.” 하고, 곧 《중용(中庸)》을 강론하였다.
○ 임금이 시강(侍講) 김첨(金瞻)에게 이르기를, “전대의 본받을 만한 일을 벽에 그려서 반성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고 싶다.” 하니, 김첨이 아뢰기를, “주 나라 문왕(文王)이 세자가 되었을 적에 왕계(王季)에게 새벽 문안하던 것과 한(漢) 나라 고조(高祖)가 상황(上皇)에게 헌수하던 것과 주 나라 선왕(宣王)의 왕후가 늦게 일어나는 것을 간하던 것과 당 나라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임금이 밝으므로 신하가 정직하다고 하례한 것들은 모두 그릴만 합니다.” 하였다. 상이 곧 벽에 그리도록 명하였다.
○ 6년 병술에 명 나라 황제가 태감(太監) 황엄(黃儼)을 보내어 제주(濟州)에서 동불(銅佛)을 모셔오라고 하였다. 불상이 사관(使館)에 당도하니, 황엄은 임금이 먼저 불상에 절을 한 뒤에 예를 행하고자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동불이 중국에서 왔으면 내가 마땅히 절을 하여 중국 조정을 공경하는 뜻을 극진하게 하겠지만,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니, 어찌 절을 하겠는가.” 하니, 하륜과 조영무가 아뢰기를, “황제는 불도를 높이고 믿어서, 멀리까지 보내어 동불을 구하고, 황엄은 흉하고 간악한 인물이니, 권도(權道)를 좇아 불상에 예를 행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여러 신하 중에는 의를 지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구나. 황엄을 이와 같이 두려워하니, 임금의 어려움을 구원할 수가 있겠느냐.고려의 충혜왕이 원 나라에 잡혀갔을 때, 나라 사람 중에 구원하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역시 그와 같겠구나.” 하고, 곧 황엄에게 이르기를, “번국의 화복(禍福)은 천자에게 달려 있고, 동불에게 있는 것이 아니오. 마땅히 먼저 천자의 사신을 볼 것이니, 어찌 내 나라의 동불에게 절을 하랴.” 하였더니, 황엄이 한참 동안 하늘을 쳐다보다가 미소하면서 허락하였다. 《필원잡기》
○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바치는 말은 임금이 친히 고르는데 하등(下等)의 말 한 필을 제 일등으로 세우니, 마부들이 모두 괴상하게 여겼다. 곧 바쳤더니, 문황제가 보고 사신에게 이르기를,“조선 국왕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앞에 세운 말이 참 좋은 말이다.” 하였다. 그런 뒤에야 성신(聖神)의 보는 바가 거의 같다는 것을 알았다. 임금이 전에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준마를 고르는 것과 인재를 분별하는 데는 내가 옛사람보다 못하지 않다.” 하였다. 《필원잡기》
○ 중국 사람 증자계(曾子棨)의 문집(文集)에 천마가(天馬歌)가 있는데, 영락(永樂 문황의 연호) 때에 조선에서 바친 황류마(黃騮馬)가 매우 좋은 말이므로 문황(文皇)이 이 노래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는 것이 이 말인가 한다. 《식소록(識小錄)》
○ 후원에서 기르던 코끼리를 순천(順天) 노루섬[獐島]에다 놓아 주었더니, 코끼리가 물도 풀도 먹지 않고 사람을 만나면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감사가 이를 아뢰니, 태종이 가엾게 여겨 다시 데려다가 처음과 같이 길렀다.아아! 이는 참으로 먼 곳의 진귀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과 인자함을 동물에게까지 미치는 두 가지 뜻이 다 지극하다 할 것이다. 저 고려 태조가 낙타(駱駝) 50마리를 한 날에 굶주려 죽게 한 것과 어떻다고 할 것인가. 《지봉유설(芝峯類說)》
○ 9년 기축에 날이 가물어 술을 금지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술 마시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내가 술을 금지하는 것은 가뭄만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백성이 주릴까 염려하는 것이다.” 하고, 구언(求言)하였다. 예조좌랑 정효복(鄭孝復)이 상소하기를,둔전(屯田)은 만백성이 다 같이 싫어하는 바이고, 여자는 내시가 거느릴 것이 아니니, 이것을 금하지 않고 어찌 정치가 되겠습니까. 군사는 많기만 하여 좋은 것이 아니라 오직 정예로워야 하고, 관원은 꼭 자리를 다 채울 것이 아니라 오직 쓸 사람을 써야 합니다. 긴요하지 않은 관원과 쓸데 없는 군사가 많으면,백성이 어찌 곤궁하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가난하지 않겠습니까. 중들이 나라에 무엇을 돕기에 직첩(職牒)을 받고 좋은 말을 타며, 왜놈이 백성에게 무슨 덕을 보였기에 배에 곡식을 싣고 가서 주림을 구제하여 줍니까. 공은 같은데 상이 높고 낮은 것은 귀천(貴賤)을 따랐기 때문이고, 죄는 한 가지인데 벌이 가볍고 무거운 것은 친소(親疏)를 따라 했기 때문이니 이러고서야 상이 어찌 권장되며 벌이 어찌 징계되겠습니까.한 사람이 죄 있어서 온 나라 사람이 다 죽여야 한다고 하여도 오히려 곧바로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한다면 여러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가 있으며 국가를 위태롭지 않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이 보고 한참동안 칭찬하다가 이르기를, “곧은 사람이다. 조정의 신하에 이렇게 곧은 말을 한 사람이 없었다.” 하고, 어필(御筆)로 친히 ‘공은 같은데’ 한 구절과 ‘죄는 한가지인데’의 구절에 비점(批點)을 찍고 효복을 사간원 우헌납(右獻納)으로 승진시켰다. 《국조보감(國朝寶鑑)》 《대동운옥(大東韻玉)》
○ 예조에서 원회(元會)에 쓸 악장(樂章)을 올리는데,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을 첫머리로 삼았다. 태종이 이르기를, “이것은 꿈과 도참(圖讖)에서 나온 말인데 어찌 악장의 첫머리로 하겠느냐.” 하니, 우대언(右代言) 조말생(趙末生)이 아뢰기를, “후직(后稷)이 탄생한 것을 찬미하여 이제무민(履帝武敏)이라는 시를 악장으로 썼고, 설(契)이 탄생한 것을 찬미하여 천명현조(天命玄鳥)라는 시를 악장으로 썼습니다. ‘수보록’과 ‘몽금척’은 실로 태조께서 하늘의 명을 받으시게 되리라는 상서(祥瑞)였으니, 악장의 첫머리로 하여도 옳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하륜이 아뢰기를, “촉(蜀) 사람 동오경(董五經)의 말을 옛날 선비가 말하였고, 청청천리초(靑靑千里艸)를 주자(朱子)가 감흥시(感興詩)에 썼으니 도참을 옛사람도 폐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태종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의 일어남은 천명과 인심에 매인 일이거늘 어찌 부(符)와 참(讖)으로 논할 것이랴.” 하고, 이에 근천정(覲天庭)과 수명명(受明命)으로 첫 악장을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또 이르기를, “도참은 믿을 것이 못된다. 첫째 이유는 삼전(三奠)ㆍ삼읍(三邑)이 삼한을 없앨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삼전은 정도전(鄭道傳)ㆍ정총(鄭摠)ㆍ정희계(鄭熙啓)라 말하였다. 그러나 희계는 재덕(才德)과 공로가 없었으니, 과연 시운(時運)에 맞추어 나온 인물이라고 하겠느냐.둘째 이유는 목자장군 검(木子將軍訒) 주초대부 필(走肖大夫筆) 비의군자 지(非衣君子智) 부정삼한 물(復正三韓物)이라 하였는데, 사람들이 비의는 배극렴(裵克廉)이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극렴은 정승노릇도 오래 하지 않았고 정치에도 별 성과가 없었으니, 다 시운에 맞추어 나온 인물이라고 하겠느냐. 지금부터는 악부(樂府)에서 이 곡조를 삭제하라.” 하였으나, 하륜이 굳이 청하므로 ‘수보록’을 세 번째 악장으로 하였다.
하륜이 보동방(保東方)ㆍ수정부(受貞符) 라는 두 악장(樂章)을 올리니 임금이 이르기를, “수정부도 또한 비결의 말이니 옳지 못한 듯 하다.” 하였다.김여지(金汝知)가 하륜의 말로써 아뢰기를, “비기(秘記)에 고려는 송악(松嶽) 아래에 도읍하여 480년을 이어갈 것이고, 조선은 한양에 도읍하여 8천년을 이어간다고 하였는데, 고려의 지낸 햇수로 증험이 되니 비기의 말을 거짓이라고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전에 한(漢) 나라 강충(江充)이 무제(武帝)의 괴상한 꿈을 인하여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였고,, 왕망(王莽)ㆍ공손술(公孫述)의 무리가 비기를 혹신(惑信)하다가 백성에게 재앙을 끼치고 자기도 화를 당하였다. 이것으로 보면 비기나 꿈은 믿을 것이 못된다. 우리 태조께서 왕업을 새로 이룩하신 것은 천명과 인심으로 일어난 것이니, 비록 ‘금척’이나 ‘보록’의 이적(異蹟)이 없었다 한들 어찌 창업을 할 수가 없었겠는가.경 등은 모두 선비이면서 어찌 의논함이 이 지경에 이르느냐.” 하였다. 그 뒤에 하륜이 또 아뢰기를, “신이 전에 올린 ‘수정부’ 한편은 전하께서 옳지 못하다고 하셨지만, 신은 ‘수보록’이 아무리 비기에서 나왔어도 실로 천명이 먼저 정한 것이니, 민간에서 노래하는 것은 금하지 마소서.” 하였다.
○ 12년 임진에 큰 바람이 나무를 뽑았다.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큰 바람으로 나무가 뽑혀진 것은 신하들에게 관계된 것이라 하고, 또 근간에 큰 돌이 떨어진 것도 신하에 관계된 것이라고 하나 어찌 재변을 신하에게만 돌리고 자신은 반성하지 않을 것인가. 더군다나 자기가 실덕(失德)이 있는데, 어찌 허물을 끌어 자책하지 않을 것인가.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대업을 받아 이었기 때문에 오직 상제께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전번에 세자에게 왕위를 전하고 별궁에 물러가서 생을 마칠까 하였더니, 높고 낮은 신하들이 불가하다 하였다. 내가 비록 자리를 내놓더라도 호령과 정사를 어린 사람에게 다 맡길 수가 없어 정사를 결정하는 데에 내가 간간이 참여한다면 이것은 국정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는 것이 못되므로 결국 뜻대로 하지 못하였다.항상 하늘에 고하기를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구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바로 상제가 명한 것이니, 나에게 죄가 있으면 어찌 다만 내몸에게만 죄를 주지 않는가.’ 하였다. 경들인들 어찌 과인의 마음을 다 알겠는가.” 하였다.
○ 임금이 해주(海州) 강무장(講武場)의 땅이 기름져서 농사를 지을 수가 있으므로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면서 이르기를, “짐승만 살게 하기보다는 우리 백성들이 농사 짓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 임금이 해주(海州)에서 강무(講武 군사연습)를 할 때에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전날밤에 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 공의공(恭懿公))의 부고가 왔으나 조영무(趙英茂)와 김여지(金汝知)가 짐승을 몰라는 영을 이미 내렸다는 이유로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 임금이 듣고 여지를 꾸짖어 이르기를,“너희들은 일찍이 《춘추》를 읽었을 터인데 대신이 죽은 것을 어찌하여 곧 알리지 않았느냐.” 하고, 조금 후에 예조에서 보고가 오자 조회(朝會)를 거두고 사흘 동안 소찬(素饌)하도록 명하였다. 이튿날 해주에 머물렀는데, 여지가 아뢰기를, “바람불고 서리내리는 벌판에서 여러날 소찬을 하시는 것이 옳지 않은 듯합니다” 하니,임금이 이르기를,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3년 동안 복을 입는데 임금은 신하를 위하여 어찌 은정(恩情)이 없겠느냐.” 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
○ 예빈시(禮賓寺)의 물고기 기르는 쌀을 그만 두라고 명하였다. 《전교(典敎)에 상세하다》
○ 13년 계사에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예전부터 가뭄과 큰물의 재앙은 다 임금이 덕이 없어 이르는 것인데, 지금 중과 무당을 모아서 비를 빌게 하니 부끄럽지 않느냐. 나는 비를 비는 제사는 그만 두고 사람의 일을 잘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도 경서를 약간 읽어서 중이나 무당의 속이고 허망함을 아는데, 이제 도리어 요술을 빙자하여 하늘이 비를 내려주기를 바라서야 되겠느냐.” 하니, 김여지가 아뢰기를,“이는 비록 옛 성왕의 정도(正道)는 아니지만 여러 신에게 모두 제사지내는 것 역시 예전부터 내려온 일입니다. 지금 중들이 이미 모였고 준비도 다 되었으니, 풍속을 따라서 행하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가뭄이 지극하면 절로 비가 오는 것이다. 만일 비가 오면 사람들은 반드시 부처의 힘이라고 할 것이고, 이뒤로는 경들도 다시 부처를 헐뜯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임금이 이르기를, “원민생(元閔生)이 서북방에서 왔는데 그가 지나온 곳에는 심은 벼가 다 말랐다고 하니, 하늘이 재앙을 어찌 이렇게까지 내리는고.” 하니, 조영무가 아뢰기를, “그 허물은 중국에 있고 우리나라에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예전 사람은 재앙을 당하면 반드시 자신을 책망하고 남에게 돌리지 않았다.” 하였다.임금이 가뭄을 근심하여 눈물까지 흘리고 하루에 한 끼만 고기를 먹고 진상하려고 사냥하는 자를 그만 두라고 명하니,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아뢰기를, “온 나라가 한 분을 받드는 것이니, 수백 명이 사냥을 한다하여 폐가 될 것은 없습니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 17년 임금이 이르기를, “도참(圖讖)에서 나온 말은 의논하는 사람이 모두 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 같은 밝음으로도 오히려 도참에 혹한 것은 광무제가 도에 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참서를 불사르지 않아 후세에까지 내려간다면 이치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반드시 깊이 혹할 것이다. 종묘 사직의 화복과 장단을 어찌 이것으로 알겠느냐.” 하고, 좌의정 박은(朴訔),지신사 조말생(趙末生)에게 서운관(書雲觀)에 가서 요망하고 허탄하며 떳떳하지 않은 음양에 관한 서적을 모두 불사르도록 명하고, 인하여 서울이나 지방에 요망하고 허탄한 서적을 사사로이 감춘 것은 기일을 정하여 자수하고 관청에 바쳐 불사르게 하였는데, 어기는 자는 고발하게 하고 요망한 글을 지은 자의 법률에 의하여 죄를 주게 하였다. 이색(李穡)의 문집 15째 권도 기일을 정하여 찾아 바치게 하였다. 《동각잡기》 《국조보감》
○ 18년 무술 3월에 임금이 이르기를, “사람이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모두 하늘이 정한 것이다. 지금 나는 성녕(誠寧)의 장사를 지내는 데에 석달의 제도를 따르려고 한다. 서운관에서는 음양설의 금기(禁忌)에 구애되어 말하기를 4월 초닷새가 조금 길하나 다만 태세(太歲)가 나의 본명(本命)을 누르므로 내년 정월 초나흗날로 다시 정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말해보면, 신미년에 선비(先妣)의 장사를 모실 때에 그해도 태세가 나의 본명을 누르는 해였다. 무자년에 태조를 능에 뫼시는 날이 상왕[정종]의 본명을 누르는 날이었었다. 내가 즉위한 뒤에 개울이 마르고 바닷물이 붉어지며 돌이 옮겨지는 괴상한 일이 많았는데,점서(占書)에는 왕의 자리가 바뀔 징조라고 하였으나 내가 이 자리에 18년이나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믿지 못할 분명한 징험인 것이다. 예전에 경사(卿士)와 서인(庶人)의 장사지내는 것이 모두 달수가 있었는데, 세상 풍속이 음양의 금기에 구애되어 예전 제도를 준행하지 않는다. 후세에까지 법을 세우려면 종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이제 성녕의 장사는 선왕이 정한 제도를 따를 것이니, 서운관에서 다시 말을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 세종 4년 임인에 임금(그때는 상왕)이 승하하시려고 할 때에 하교하기를, “가뭄이 지금 심하니 죽은 뒤에도 아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이날 비가 오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뒤로 매양 제삿날이면 반드시 비가 왔기 때문에 세상에서 ‘태종의 비’라 하였다. 《조야첨재》
○ 임금은 총명하고 신성하고 용맹하고 슬기롭고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고려의 운수가 이미 다해지는 때를 당하여 천명과 인심이 돌아오는 것을 알고 태조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열었고,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문학을 숭상하고 정성껏 제사를 지냈으며 어진 사람을 친애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였다.정사를 하는 여가에 경사(經史)를 보느라고 매양 밤중까지 이르렀고, 의장(儀章)과 법도(法度)를 한결같이 옛것을 준행하여 정사가 찬란하게 갖추어졌다. 승하하던 날에는 신하와 백성들이 부모상을 당한 것처럼 모두 슬퍼하였다.
○ 임금이 둥근 부채를 두고 시를 짓기를

바람 쏘이는 자리에 앉아서는 밝은 달 생각나고 / 風榻倚時思朗月
달 밑에서 시읊을 땐 맑은 바람 그립더니 / 月軒吟處想淸風
대깎고 종이붙여 둥근 부채 만든 뒤엔 / 自從削竹成圓扇
밝은 달 맑은 바람이 손가운데 있노라 / 朗月淸風在手中

하였다. 《용재총화》 《지봉유설》
○ 5월 16일은 임금의 탄신일이다. 각도에서 그 지방 물산을 올릴 때에 풍해도 절제사(豊海道節制使) 유은지(柳殷之)가 〈무일편(無逸篇)〉을 그림으로 그린 족자도 겸하여 올렸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사간 신맹인(辛孟仁)이 태종이 친히 행하는 제사 때에 대축(大祝)으로서 손에 축문을 들고 망연히 한 구절도 읽지 못하니, 태종이 노하여 이르기를, “맹인은 문관으로서 축문도 읽지 못하니, 장차 무엇에 쓰겠느냐.” 하고, 만호(萬戶)에 임명하였다. 《용재총화》
○ 8년에 모화관(慕華館)의 남지(南池)를 팔 때에 역사가 오래 되어도 끝이 나지 않아, 사헌부에서 제조관(提調官) 박자청(朴子靑)을 논박하였는데, 태종이 노하여 지평 최자해(崔自海)를 불러서 꾸짖고 집으로 나가라고 하니, 집의 권우(權遇) 등이 모두 대죄하였다.좌사간 김상지(金相知)가 아뢰기를, “대신(臺臣)은 말하는 것이 책임인데, 전하께서 이와 같이 억누르고 욕을 보이시니, 뒷 세상의 모범이 되지 못합니다.” 하고, 대사헌 남재(南在)도 아뢰기를, “대간(臺諫)은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말이 아무리 적당하지 않아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말하는 길을 열어서 보고 듣는 것을 넓혀 만세의 계책을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자청이 탄핵 당한 것은 논의할 일이 못됩니다만, 혹시 간신이 권세를 부리고 일이 큰 것에 관계가 되어도 대간이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즉시 권우 등에게 나와 일을 보라고 명하였다. 《조야첨재》


 

[주D-001]후궁 소생 : 적자(嫡子)와 서자(庶子)를 구별하여 일이삼의 순서를 따로 매겨서 적자와 서자를 둔 임금 밑에 일남을 두 번 썼으니, 그것은 적(嫡)의 일남과 서(庶)의 일남을 따로 쓴 것이다. 아래도 이와 같다.
[주D-002]연구(聯句) : 여러 사람이 함께 시를 짓는 한 형식인데 한 사람이 한 수를 짓지 않고 일인일구(一人一句)로 합하여 한 수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D-003]운한편(雲漢篇) : 선왕(宣王)이 여왕(厲王)의 포학한 정사의 뒤를 이어 안으로 혼란을 수습하려는 뜻을 품고, 재앙(한재)을 만나 두려워하며 행실을 닦아 재앙을 사라지게 하려고 하자, 잉숙(仍叔)이 시를 지어 찬미한 글이다.
[주D-004]정일집중(精一執中) : 《서경(書經)》에 요ㆍ순ㆍ우가 군위를 주고 받을 때, 서로 경계한 잠언(箴言)인데, 주자학에서는 《중용》을 요ㆍ순ㆍ우의 도통을 바로 받은 것이라 한다.
[주D-005]한 나라 …… 헌수하던 것 : 한 고조가 평민으로 황제가 된 뒤에 자기 아버지를 상황(上皇)으로 모시고 술잔을 올리면서 말하기를, “아버님, 전일 ‘네 형은 농사에 부지런하고 너는 게으르다’ 고 꾸중하시더니, 오늘 저를 얻은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말했다 한다.
[주D-006]주 나라 선왕(宣王)의 …… 간하던 것 : 주 선왕(宣王)이 안방에서 자다 늦게 일어나니, 왕후 강씨(姜氏)가 문 밖에서 대죄하며 아뢰기를, “첩이 잘못하여 왕이 정사에 게으르게 되었습니다.” 말했다 한다.
[주D-007]장손황후(長孫皇后)가 …… 하례한 것 : 당 태종이 조회를 받은 뒤에 안에 들어와 이르기를, “위징(魏徵)이 나의 뜻을 거스르니 없애 버리겠다.” 하니, 장손황후가 축하하기를, “임금이 밝으므로 신하가 직언합니다.” 하였다.
[주D-008]이제무민(履帝武敏) : 주(周) 나라의 시조(始祖) 후직(后稷)의 어머니가 후직을 낳을 적에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감동되어 임신하여 후직을 낳았다는 전설이다.
[주D-009]천명현조(天命玄鳥)라는 시 : 은(殷) 나라의 시조 설의 어머니가 들에 갔다가 검은 새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받아먹고 아이를 배었다는 전설이다.
[주D-010]동오경(董五經) : 측중에 살던 예언자로 종종 기이하게 맞춘 일이 간혹 있었다.
[주D-011]청청천리초(靑靑千里艸) : 후한 말(後漢末)에 청청천리초십일복(靑靑千里艸十日卜)이 살지 못한다는 동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동탁이 패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주D-012]부(符) : 왕업(王業)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리는 징조인데 예를 들면 태조의 꿈에 금척(金尺)을 얻은 것 등을 말한다.
[주D-013]꿈으로 …… 하였고 : 한 무제(漢武帝)가 낮잠을 자다가, 나무로 만든 사람 수십 명이 막대기를 들고 치는 꿈을 꾸었는데, 강충이 태자와 사이가 좋지 못하므로 태자의 궁에 목인(木人)을 묻었다고 태자를 모함하였다.
[주D-014]왕망ㆍ공손술의 무리 : 왕망은 한(漢) 나라를 찬탈한 자이고, 공손술(公孫述)도 같은 시대에 촉땅에서 황제라고 자칭한 자인데, 모두 비결을 빙자하였던 사람들이다.
[주D-015]태세(太歲)가 누르므로 : 본명(本命)은 낳은 날의 일진(日辰)이고 태세는 당년의 간지(干支)인데, 흉사(凶事)에 태세와 본명이 맞부딪히면 본인에게 해롭다는 음양설(陰陽說)이다.


 

 

 


춘정집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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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 조선국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誠寧大君) 변한소경공(卞韓昭頃公) 신도비명 병서



영락(永樂) 16년 무술년(1418, 태종 18) 봄 2월 5일에, 대광보국 성녕대군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졸했다. 근신이 왕지(王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성녕대군 종(褈)이 죽었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아들도 없으니, 슬픔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그의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여서 구천(九泉)에 있는 정혼(精魂)을 위로하고, 또 내가 끝없이 슬퍼하지 않게 하라.” 하므로, 신 계량(季良)이 엎드려 명을 받들었다.
삼가 살피건대, 대군의 휘는 종(褈)이고 세자의 동모제(同母弟)이며, 형제의 차례로는 넷째인데, 을유년(1405, 태종 5) 가을 7월 임인에 태어났다.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하지 않았으며, 어린아이들의 잡다한 장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왕과 왕후께서 극진히 사랑했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했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고 조금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또 활쏘기 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되니, 건장하고 능한 자들이 다 추앙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에도 다 도리를 얻어 한결같이 어른과 같았으니, 전하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 평상시 기거하실 때나 음식을 드실 때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갑오년(1414, 태종 14) 1월에는 성녕대군으로 봉해졌고, 정유년(1417, 태종 17) 9월에는 대광보국의 품계를 받았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성공(成公) 휘 억(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금년 1월 19일에 병이 드니, 왕과 왕비께서 근심이 극심하여 기도와 치료 등의 일에 모든 정성을 다하셨고, 급기야 졸하자 극도로 슬퍼하여 이틀 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다. 종친(宗親)과 모든 신료(臣僚)들로부터 아래로 노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의정부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하께 위로의 말씀을 올리고 또 수라를 들기를 청하니, 이튿날 죽을 올리라고만 명했으며, 사흘 동안 정사를 보는 것을 중지했다. 당시에 전하께서 지나치게 애통해하시어 몸과 기운이 자못 편치 못하게 되니, 원로 대신들이 육선(肉膳)을 드시라고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더욱 부지런히 주청했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고, 소찬(素饌)으로 30일을 마쳤다. 대군을 변한국공(卞韓國公)으로 추봉하고 소경(昭頃)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유사(有司)가 장사의 절차를 갖추어서 이해 4월 을유에 고양현(高陽縣) 북쪽 산리동(酸梨洞) 진향(震向) 산기슭에 장사 지냈다. 전하께서는 대군의 제택(第宅)에 사당을 세우고, 또 후사(後嗣)를 세워 그 제사를 맡게 하라고 명했으니, 장사하고 제사하는 예가 대체로 유감이 없게 되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아들로서 어버이께 효도를 다하고,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자애를 다했다. 지금 대군의 상사를 만나 성심은 지극하고 애통해함은 끝이 없었으며 사려는 깊고 본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것이 비록 천성적인 덕에서 나오고 인륜의 도에 지극한 것이기는 하나, 또한 대군의 자품이 남달리 뛰어나고 행실이 서로 맞았기 때문에 전하의 사랑을 독실히 얻음이 이같이 지극했던 것이니, 대군이 어질다고 하겠다. 그러나 불행히 수명이 짧았으니, 아,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신이 일찍이 《논어》를 읽다가,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아들 이(鯉)를 잃고서 곡하는 불행을 면치 못했던 것을 진실로 유감으로 여겼더니, 이제 소경(昭頃)이 졸한 것에서 하늘의 이치가 혹 일정하지 않음이 있다는 데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소경의 자질은 / 昭頃之質
옥같이 깨끗하고 볕처럼 온화하며 / 玉潔陽和
소경의 행실은 / 昭頃之行
효도하고 우애 있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 孝悌柔嘉
명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 敏而好學
왕과 왕비의 관심과 사랑이 더했었네 / 眷愛有加
하늘은 어찌 덕을 부여하고 / 天胡賦德
수명을 빼앗는가 / 而奪之年
아, 전하의 부정(父情)은 / 嗚呼聖父
슬픔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네 / 痛彌天淵
진실로 하늘의 이치 일정하지 않음이여 / 信乎靡定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인가 / 孰使其然
품질(品秩)을 높여 봉하고 / 崇秩其封
후사(後嗣)를 세워 제사를 받들게 함에 / 立後以祀
일월이 밝고 / 日月其良
산천이 아름답도다 / 山川其美
그 무덤 치밀하니 / 其藏其密
길이길이 평안하리 / 其永寧哉
묘도에 명을 새겨 / 刻銘墓道
그 슬픔을 밝히노라 / 用昭厥哀


 

 

 

 

동문선 제24권

 교서(敎書)
교 졸 성녕대군 모서(敎卒誠寧大君某書)



변계량(卞季良)

왕은 이르노라. 수요(壽夭)가 고르지 못한 것은 타고난 천명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고, 부자간의 지극한 정리(情理)는 천성에 박혀 있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인심의 고유한 것이요, 기수(氣數)가 미리부터 정하여진 것이다. 네가 을유년에 나서 지금 열 네 살이 되도록 하루도 나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내가 밥을 먹으려 하면 네가 반드시 먼저 맛보며, 내가 활 쏘는 것을 보려 하면 네가 반드시 수행하여 언제나 기거할 적에는 반드시 너와 같이 하였는데, 이제는 다 끝났다. 어떻게 마음을 잡으랴. 아, 슬프다. 너는 얼굴 바탕이 단정하고 깨끗하여 조금도 부족한 데가 없고, 총명하고 온아하여 효도하고 공순하였다. 글을 읽어 때때로 익히며, 활쏘기를 배워 여러 번 맞추었다.
아내를 맞이하게 하고 또 대군(大君)을 봉하여, 장차 성인(成人)이 되어서 나의 늘그막을 위로하려 하였더니, 아, 그만이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네가 처음 병이 났을 때에 아이들의 보통 일로 생각하였더니, 병이 이미 위독하게 되고서야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빌지를 않은 까닭인가, 치료를 잘 못한 까닭인가? 희고 흰 네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있고, 낭랑한 네 말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있구나. 아, 슬프다.
나와 네 모친이 너를 통곡하는 슬픔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의 효성으로 운명할 때도 부모를 생각하였으니, 황천(黃泉)에서도 한(恨)을 머금은 것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네가 내 자식으로서 효성 있고 또 재주 있어서 자식된 직책에 부족함이 없었다. 길고 짧은 명수(命數)는 하늘에서 전해진 것이니, 네 죄가 아니다. 네가 무엇을 한하겠는가.
나는 네 아비가 되어서 염습할 때에 의금(衣衾)도 살펴보지 못하고, 초빈할 때에 관도 어루만지지 못하며, 묻을 때에 광중(壙中)도 드려다 보지 못하여, 천승(千乘)의 임금이면서도 도리어 필부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도 못하였으니, 내가 정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나의 한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 슬프다.
이에 유사에 명하여, 너의 자급을 높이고 네게 시호(諡號)를 주었으니, 은수(恩數)가 융숭하여 상례(常例)와 다르다. 이제 근신을 진관사(津寬寺)에 보내어, 수륙(水陸)의 여러 물품을 베풀어 명복을 빌고 또 박전(薄奠)을 베풀어 제문으로써 권한다. 슬프다. 말에는 한이 있으니 할 말을 다해도 정은 다할 수 없다. 너는 아느냐 모르느냐.


 

 

 

동문선 제113권
 소(疏)
성녕대군 법화 법석 소(卒誠寧大君法華法席疏)



변계량(卞季良)

부처께서 사람을 구제하시어, 구하는 이는 반드시 응해 주시며, 부모가 죽은 자식을 천도하는 것은 오래 될 수록 더욱 부지런하다 합니다. 이에 붉은 정성을 다하여 망령이 흰 과보[白報]를 받기를 바랍니다. 음성과 용모가 영영 막히어 다시는 보고 들을 수 없음이 슬프고, 혹시 영혼이 오히려 있으며 어두운 데에 방황할까 염려됩니다. 애통만 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천도하여 주기에 힘쓸 뿐이로소이다. 이에 죽은 아들의 재산을 가지고 세 불상을 조성하오니, 가만히 도와서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또 법화경은 마음을 밝히는 것이요, 범망경(梵網經)은 오로지 계(戒) 받는 것을 논하는 것으로 모두 구제하여 주는 보배로운 교훈이므로 이에 기한을 정하여 금자로 썼습니다. 무덤 곁에 새로 지은 암자에, 산중에서 오래 공부한 스님들을 모아서 골고루 가사와 바리[衣鉢]를 보시(布施)하며 향과 꽃으로 장엄하게 갖추었습니다. 존용(尊容)에 예배하니 곧 서방 극락세계의 승한 모임이요, 비전(秘典)을 선양하니 실로 상승(上乘)의 진종(眞宗)이라, 능례(能禮)와 소례(所禮)가 모두 공하였다 하지만, 감(感)하면 통하는 것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가련한 신세는 14세가 겨우 지났고, 어느덧 벌써 백일재(百日齋)가 되었습니다. 생각하오니, 죽은 아들은 타고난 성품이 온공(溫恭)하고, 그 마음이 효도하고 공경하였습니다. 금생(今生)에 지은 망령된 인연은 없었으나 피하기 어려운 전생의 업장이 혹 있었는가. 엎드려 원하옵건대 모든 경(經)이 옹호하고, 大聖이 돌보시어 혼기(魂氣)가 소명(昭明)하고 성령(性靈)이 깨달아서, 계(戒)ㆍ정(定)혜(慧)가 구족(具足)하여 다생(多生)의 괴로움을 버리고, 법(法)ㆍ보(報)ㆍ화(化)에 귀의하여 구품(九品) 연대(蓮臺)의 자리에 오르게 하여 주소서. 여러 고(苦)를 받는 무리들도 함께 이 공덕이 입혀지이다.


 

[주D-001]흰 과보[白報] : 과보는 착한 업이나 악한 업의 인행(因行)에 따라 받는 과보이다. 흰 과보는 깨끗한 업인에 의하여 얻는 좋은 과보를 말함.
[주D-002]능례(能禮)와 소례(所禮) : 능(能)은 능동으로서 동작하는 것이고, 소(所)는 피동으로서 동작을 받는 것, 능례(能禮)는 예경(禮敬)을 하는 중생이요, 소례는 예경을 받는 부처님인 것.
[주D-003]계(戒)ㆍ정(定)ㆍ혜(慧) : 계율(戒律)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를 말함. 계율은 불교의 윤리 도덕의 총칭임. 소극적으로는 잘못을 막고, 악을 그치게 하는 힘이요, 적극적으로는 만선(萬善) 발생의 근본임. 불교 삼학(三學)의 하나요, 육바라밀다(六波羅密多)의 하나이며, 삼장(三藏)의 하나임. 선정은 범어의 선나의 준말임.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라 번역함. 진정한 이치를 사유하고 생각을 고요히 하여 산란하지 않게 하는 것임. 불교의 삼학의 하나요, 육바라밀다의 하나임. 지혜는 범어 반야바라밀다의 번역인데, 실상(實相)을 비춰 보는 지혜로서, 나고 죽는 이 언덕을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는 것임. 불교의 삼학 가운데 하나요, 육바라밀다 가운데 하나임.
[주D-004]법(法)ㆍ보(報)ㆍ화(化) : 법신(法身)ㆍ보신ㆍ화신 즉 삼신(三身)을 말함. 법신은 법계(法界)의 이(理)와 일치한 부처의 진신(眞身)임. 빛깔도 형상도 없는 부처의 본체신(本體身)임. 인간에 출현한 부처 이상의 영원한 부처의 본체인 것임. 보신은 인위(因位)에서 지은 한량없는 원(願)과 행(行)의 과보(果報)로 나타난 만덕(萬德)이 원만한 부처의 몸인 것. 화신은 변화신(變化身)이라는 뜻임. 오취(五趣)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알맞은 대상(對象)으로 화현하는 것. 보통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이라 한다.

동문선 제113권
 소(疏)
성녕대군 법화 법석 소(誠寧大君法華法席疏)



변계량(卞季良)

일천 함(函)의 대장경이 모두 중생을 건네주는 배이지만은, 8권의 법화경이 모든 부처의 가장 근본이 됩니다. 일찍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전부를 금자(金字)로 쓰게 하였습니다. 간절히 생각하옵건대, 죽은 아들 대군(大君) 모(某)는 온(溫)하고 문(文)함을 타고났으며, 효도와 우애를 돈독하게 행하였나이다. 정을 쏟아 사랑하여 천상에서 온 기린(麒麟)으로 여겼더니 꿈속의 나비처럼 갑자기 죽을 줄 알았으리요. 비록 죽고 사는 것이 명이 있다 하나, 가이없는 슬픔을 참을 수 없나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자나깨나 애달픔만 더할 뿐이요, 저승과 이승이 영영 막히어 다시는 보고 들을 수 없습니다. 작년의 이 날은 여전하건만 화락한 안색 부드러운 얼굴은 어디에 있는고. 말이 이에 미치고 보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나이다. 그러나 슬퍼만한들 무엇하리, 천도하기만 힘쓸 뿐입니다. 죽은 날이 돌아오니 마땅히 불사(佛事)를 베풀 것입니다. 산중의 청정한 중들을 청하고, 무덤 옆 새절에서 부처님 전에 예배하며 법화경을 읽으니, 글자마다 광명을 나타내고 말씀마다 진리를 발휘(發揮)하나이다. 이 21명 중의 정진(精進)으로 이 천백억신(千百億身)의 응감(應感)에 사무치어 5일 동안의 설법(說法)으로 다생(多生)의 죄(罪)를 씻고, 육시(六時)의 맑은 범음(梵音)이 일만 겁(劫)의 어두움을 열게 하여지이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혼기(魂氣)가 밝아지고 본원(本原)이 맑아져서 공관(空觀)과 가관(假觀)과 중관(中觀)의 이치를 갑자기 깨달아서[頓悟] 큰 보리(菩提)를 성취하고, 법신과 보신과 화신께 친히 참알(參謁)하여 모든 쾌락이 받아지이다. 모든 괴로움을 받는 중생들에게 함께 이 공덕을 입어지이다.


 

[주D-001]공관 …… 중관(中觀) : 관법(觀法)의 내용을 삼종으로 나누어 진리를 설명한 것임. 천태종(天台宗)에서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뜻을 밝힌 것으로서 현상적으로 본다면 가유(假有)요, 본체적(本體的)으로 보면 공(空)이다. 그러나 제법은 현상도 본체도 아니다. 현상과 본체가 서로 의지하는 데서 존재하는 것이니, 이를 중(中)이라 한다. 이 공과 가와 중은 각각 독립한 것이 아니다. 셋은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인 것.

동문선 제113권
 소(疏)
왕대비께서 성녕대군을 천도하는 백일재의 소 [王大妃薦誠寧大君百齋疏]



변계량(卞季良)

모든 부처님의 원력(願力)은 빠진 것을 구제하는 데 힘쓰시며 노파(老婆)의 마음은 간 사람을 천도하려는 데 간절합니다. 귀의하여 숭배함이 지극하오니 이익을 더하여 주옵소서. 생각하오니, 저 죽은 이는 일찍이 나의 양딸과 혼인하였으며, 자색과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과 도량이 너그러워서 영화스러운 효도를 여생(餘生)에 보려 하였더니, 어찌 젊은 나이에 죽을 줄 알았으리요. 아, 그만이로다. 애통하고 상심한들 어찌하리. 자나깨나 생각하여 천도하기에 힘쓰나이다. 이에 삼보가 계신 곳을 찾아서 백일의 재를 올립니다. 장만한 것은 보잘 것 없어 물방울이나 티끌처럼 작지마는 살펴 비추시기를 물에 달이 뜨듯이 분명하게 하소서. 엎드려 원하나이다. 묵은 업장(業障)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발심(發心)으로 복성동자(福成童子)가 여러 곳에 두루 다니 듯하고, 부처님께 귀의해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지이다.


 

동문선 제121권
 비명(碑銘)
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착한 아들과 뛰어난 손자를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매, 우리 태종(太宗)으로써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 되게 하셨다. 아, 장하다. 어찌 사람의 작위(作爲)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이로구나. 그것은 상(商) 나라의 왕실(王室)에 어진 임금과 착한 임금이 이어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의 왕가(王家)에서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은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오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벼슬한 휘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6대 손인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만에 태종 임금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가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잘 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잔하게 되니,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다. 공을 쌓고 어진 덕행을 누적(累積)하였음이 그 유래가 장구하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 낳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특하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슬기로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 20도 못 되어서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정치는 산란하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의 서울에 조회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가 훙(薨)하니, 태종이 제릉(齊陵)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의 행차에서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며 모시었다. 공양왕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 들과 더불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외치고 태조를 추대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로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갑술년 여름에, 명(明) 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조회하게 하라고 명령하니, 태조가 우리의 태종이 경서에 능통하고 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명 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만족하였으므로, 예를 갖춘 우대를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몸이 편찮았는데 권신(權臣)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가 곧 일어날 것 같으므로 태종이 낌새를 밝게 살펴 제거해 버렸다. 그때에 종친들과 장군과 재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의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였다. 박포만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의 벌에 처하였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공정(恭靖)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일이 다 우리의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比等)하였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니, 황제가 충성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전대로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袞冕) 9장(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을 주었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내리어서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그때부터 뒤에는 황제의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하여 쉬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국왕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번번히 ‘지성이라.’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태종이 애모함을 그지없이 하였다. 양암(諒闇 임금이 거상(居喪)할 때에 있는 방)에 거처하면서 초상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매우 슬퍼하고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예부 낭중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서서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추증하였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은 자가 상언(上言)한 것이 있었다고 하여 담당 관사(官司)에게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본래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는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 달콤한 이슬)가 함흥부 월광구미리(咸興府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의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어 진하(進賀)하였으나 임금이 받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禔)가 패덕(敗德)하다고 해서 세자의 직위를 해제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함이 없어서 국민들이 촉망(囑望)한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중국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하였다.
이해 8월에 임금이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을 주청(奏請)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부왕(父王)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號)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으로 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과 찬성(贊成) 신 이종무(李從茂) 등을 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상왕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다. 칙서(勅書)의 사연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며,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다. “부왕이 돈후하고 노성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였으며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었다.” 하였다.
9월에 공정(恭靖)이 죽자, 전하가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역월의 복제[易月之制]를 마쳤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알리었더니, 다음해 4월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였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薨)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하여 몸을 훼상(毁傷)함이 예(禮)에 지나친다고 하여 거상 기간을 날을 달로 계산하는 역월의 복제를 좇기를 명하였으나 전하가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장사 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服制)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太后)를 광주(廣州) 수읍(首邑)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陵)을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신축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太宗)에게 품의(禀議)하고 원자(元子) 향(珦)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지 않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으며,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함은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았다. 사대하는 일은 천자가 그의 지성을 칭찬하였으며,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의 도(道) 있음에 심복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제하였다. 덕과 예(禮)를 우선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淫事)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였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하였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없애버리니, 모든 사적(事績)은 다 빛이 났다.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산물은 풍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성대하도다. 그가 상제(上帝)의 사랑을 얻음이 융숭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감로(甘露)를 내리는 상제의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다음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 들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년을 거상(居喪)할 것을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왕위에 있은 것이 19년이었다. 한가롭게 살며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크고 작은 신료들과 아래로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목이 쉬도록 호곡(號哭)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더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6일 경자(庚子)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하였다. 유언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부고(訃告)가 가니, 황제가 슬퍼하여 정사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 와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돈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서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부음이 멀리 들려오니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낍니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께서 부의(賻儀)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리었다. 대체로 우리 태종(太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전하의 효성이 지극함이 앞뒤에서 서로 받들어서 천심을 잘 누렸기 때문에 마지막과 시초의 즈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하게 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姓)은 민씨(閔氏)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障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 만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복(扑)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황비(皇妣)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딸이다. 선을 쌓음으로써 흘러나오는 경사가 맑고 덕 있는 이를 낳게 되었으니, 총명하고 지혜스러움이 남에게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매 배필을 가려서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건지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나, 태후는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가정의 공궤(供饋)에는 삼가하여 그의 공부를 힘쓰게 하였으며,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였다. 첩(妾)과 시녀들을 예(禮)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하여졌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정할 즈음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큰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하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여 정비(靜妃)로 봉하였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명 나라의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황제의 하사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의 호(號)를 올리었고,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차분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경건한 덕을 타고났으며 태종을 잘 도와서 내치(內治)에 전심하였다. 20년 동안 궁궐 안에서의 용의(容儀)는 엄숙하고도 화목하였으며, 또 착한 아들을 낳아서 종사(宗社)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흥하자 빈(嬪)과 시녀와 첩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부(婦)가 모(母)의 거동을 본받음이 지극하였도다. 4남 4녀를 낳았으니,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제(褆)이며, 다음은 이름을 보(補)이니 효녕대군(孝寧大君)으로 봉하였다. 그 다음은 종(種)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였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혜옹주(貞惠翁主)로서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이름을 인(禋)이라고 하며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큰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숙정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비(緋)인데 경녕군(敬寧君)으로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가 1남을,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인 온(溫)의 딸이다. 4남 2녀를 낳았으니, 첫째는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효녕(孝寧)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前判中軍都摠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성녕(誠寧)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다. 물론 같은 이씨가 아니다. 정경공주(貞慶公主)가 딸 넷을 낳았으니, 첫째는 돈녕 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中淹)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름을 담(聃)이라고 하며 한성 소윤(漢城小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가 2남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경녕(敬寧)이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공녕(恭寧)이 병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신은 적이 살펴보니, 우리 태종(太宗)의 큰 덕과 높은 공이 본래 이미 모든 임금들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나, 배필의 어지심과 내조의 공도 또 촉도 신지(蜀塗莘摯)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고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 있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능(陵)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겨 길이 뒷 세상에 밝혀 보이고자 하여, 전하가 신(臣) 계량에게 명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손으로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 / 天眷海東
우리 태종을 내려주셨네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쓰는 태종이여 / 亹亹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조근하여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하였네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 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적계 형을 높여 세자되게 하였네 / 嫡長是尊
형제간의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鬩墻
우애가 오히려 두터웁네 / 友愛猶惇
효제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도 드물었네 / 從古罕聞
그 덕은 후하고 / 維德之厚
그 공은 성대하니 / 惟功之懋
하늘이 매우 밝게 살펴 / 天鑑孔昭
거듭하여 보우하시네 / 式申保佑
휘황한 금보가 / 煌煌金寶
전후에 빛나고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도착하매 / 帝誥荐臻
내 드디어 왕위를 받았네 / 我乃龍受
할아버지 훈계를 지켜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아름답게 문채나네 / 煥乎郁郁
상중에 여막살며 / 遭喪居盧
애모함이 망극하여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사대하니 / 抵事朝廷
황제가 지성이라 칭찬하였네 / 帝稱至誠
경건하게 승사하니 / 肅肅承祀
신명이 감응하고 / 感于神明
교린에 도 있으니 / 交隣有道
왜국이 복종하며 / 倭邦來庭
왕씨 후예 돌보아 / 存䘏王裔
편안히 살게 하였네 / 俾遂其生
안팎이 태평하기 / 中外又安
20년이 되어가니 / 垂二十齡
윤택한 감로가 / 浥浥甘露
해마다 함부에 내리었네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湜) 폐하시고 덕 있는 이에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길이 천수를 누리며 / 期享永年
이 땅에 군림하시기를 기약하였는데 / 父臨下土
그 어찌 빈천을 재촉하여 / 何促賓天
병이 낫지 않는가 / 一疾莫愈
슬프다, 착하신 아들 / 哀哀聖子
슬퍼함이 가이없어 / 痛悼無比
3일 동안 철선하고 / 徹膳三日
상심을 못이기며 / 不勝摧毁
거상 중의 모든 절차를 / 凡百喪事
예대로 지키었네 / 維禮之履
황제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자 보내 사제하고 / 遣使以祀
높이는 시호 주며 / 贈謚褒崇
후한 부의 내리시니 / 賜賻優隆
조문의 예를 완비함에 / 恤典之備
신하들 기뻐하네 / 喜溢臣工
신의 태후 생각 같아 / 思齊太后
진실로 화순하네 / 允也肅雝
가만히 도와 사직을 안정시켜 / 密贊定社
큰 총명에 배필하고 / 克配亶聰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제주 되게 했네 / 俾主宗祐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 乾健离明
공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하고 바르심은 / 坤厚柔貞
원경의 법칙이네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슬 같은 벗이요 / 琴瑟以友
죽어서도 같이 장사하였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 같도다 / 于嗟其麟
종묘 제사 / 緜緜宗祀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 / 臣拜獻詞
옥 같은 굳은 돌에 이 사연 새기어서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 없이 / 萬代不磨
우리 나라 빛나게 하리라 / 昭我東垠

하였다.

동문선 제1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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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명(碑銘)
유명조선국 대광보국 성녕대군 변한소경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大匡輔國誠寧大君卞韓昭頃公神道碑銘) 幷序



변계량(卞季良)

영락(永樂) 16년 무술년 봄 2월 5일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성녕대군(誠寧大君)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측근 신하가 왕지(王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성녕대군 종(種)이 죽었다. 나이도 어릴 뿐 아니라 또 아들도 없으니, 그를 슬퍼하는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사신(史臣)으로 하여금 그의 무덤 길에 비석을 세워 영구히 전하여서 조금이나마 그의 구천(九泉) 아래에 있는 정혼(精魂)을 위로함이 있게 하고, 또 나의 무궁한 슬픔을 막게 하라.” 하였다. 신(臣) 계량은 엎드려 명령을 받들었다.
삼가 상고하건대, 대군의 휘는 종(種)이니, 세자(世子)의 동모(同母) 아우이며, 형제의 차례로는 넷째이다. 을유년 가을 7월 임인일에 낳다.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치 않았다. 어린아이들의 잡스러운 장난에는 담담히 좋아하는 바 없으니, 왕과 왕후 양궁(兩宮)께서 몹시 사랑하였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하였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또 활쏘기 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되니, 장년이며 능한 자도 다 그를 추중(推重)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에까지도 다 도리를 얻어 모든 것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전하가 더욱 소중하게 여겨, 기거하고 음식 먹는 데까지도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갑오년 정월에는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고, 정유년 9월에는 대광보국(大匡輔國)의 위계(位階)를 주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좌군 동지 총제(左軍同知摠制) 성공(成公) 휘 억(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봉하였다.
금년 정월 19일에 병이 드니, 양궁께서 근심이 극심하여 기도하고 구료(救療)하고 약쓰는 등의 일을 성심껏 다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졸하자 매우 슬퍼하여 이틀 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다. 종친(宗親)과 모든 신료들과 아래로 노비의 무리에 이르기까지 슬퍼하지 아니하는 자 없었다.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조위의 말씀을 올리고, 또 수라 들기를 청하니, 이튿날 다만 죽을 올리라고만 명령하였으며, 정사 보는 것을 3일 동안 중지하였다. 그때 전하가 애통해함이 지나쳐서 몸과 기운이 조금 평안치 못하게 되니, 기로(耆老)들과 대신들이 고기 반찬을 드시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두 번 세 번 더욱 부지런히 주청하였으나 마침내 윤허하지 아니하고, 소찬(素饌)으로 30일을 마쳤다. 대군 변한국공(大君卞韓國公)으로 추봉(追封)하고 소경(昭頃)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주무관(主務官)이 장사의 절차를 갖추어서 이해 4월 을유일에 고양현(高陽縣)의 북쪽 산리동(酸梨洞) 진방(震方)의 산기슭에 장사 냈다. 그의 제택(第宅)에 사당을 세우고 또 후사(後嗣)를 세워 그의 제사를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장사하고 제사하는 예는 대체로 유감됨이 없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는 아들이 되어서는 어버이에게 그의 효도를 다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아들에게 그의 자애(慈愛)를 다하였다. 지금 대군(大君)의 상사에 성심은 간절하고 지극하며, 애통해함은 다함이 없고 생각하는 것은 깊고 멀어서 근본과 결말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것은 비록 타고난 천성의 덕에서 나왔지만 인륜의 도를 지극히 한 것이다. 아니면 또한 대군의 자질과 품성이 우뚝하여 행동과 실지가 서로 맞기 때문에, 전하의 사랑함이 이와 같이 지극함을 얻은 것일 것이니, 대군은 어지시었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명이 짧았으니 아, 슬픔을 이길 수 있겠는가. 신이 일찍이 《논어》를 읽다가 공자 같은 성인도 먼저 죽은 아들 이(鯉) 때문에 우는 일을 면치 못한 것을 진실로 유감으로 여겼더니, 이제 소경(昭頃)이 졸하니, 하늘의 혼은 또 바르지 못한 것도 있음을 의심하게 되었다.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쓰노라.
명에 이르기를,

소경의 자질은 / 昭頃之質
옥같이 깨끗하고 볕처럼 온화하다 / 玉潔陽和
소경의 행실은 / 昭頃之行
효도하고 우애 있고 부드럽고 아름답다 / 孝悌柔嘉
명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 敏而好學
양궁의 권애함이 더함이 있었다 / 眷愛有加
하늘은 어찌하여 덕을 부여하고 / 天胡賦德
수명은 빼앗는가 / 而奪之年
아, 성스러운 아버지여 / 嗚呼聖父
슬픔이 천지에 가득하네 / 痛彌天淵
진실로 바르지 못함이여 / 信乎靡定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 孰便其然
품질을 높여서 그를 봉군하고 / 崇秩其封
후사를 세워서 제사를 받들게 하였네 / 立後以祀
해와 달은 이미 밝고 / 日月旣良
산과 시내는 아름답도다 / 山川其美
그의 몸 그윽하게 감췄으니 / 其藏其密
길이길이 평안하리라 / 其永寧哉
묘도에 비 세우고 명을 새겨 / 刻銘墓道
슬픔을 밝히노라 / 用昭厥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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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동은 양근군(楊根郡) 경계(境界)까지 25리, 여주 경계까지 75리, 남은 이천부(利川府) 경계까지 74리, 양지현 경계까지 85리, 용인현 경계까지 43리, 서는 과천현(果川縣) 경계 양재역(良才驛)까지 27리, 안산군 경계까지 76리, 북은 양주 경계에 이르기까지 10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남한산성이다.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 13년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고,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에 또 도읍을 남평양성으로 옮겼다 지금의 경도(京都). 당 나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쳐서 없애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간 뒤에 신라가 그 땅을 점차 거두어 남한산성을 고쳐 한산주라 하고, 또 남한산주라고도 불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는 한주(漢州)라 고쳤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두었는데 광주는 그 하나이다.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봉국군(奉國軍)이라 이름하고 관내도(關內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에 폐하여 안무사가 되었다가 9년에 8목(牧)을 정할 때에 다시 목이 되었다. 본조에서는 이를 따랐다.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진관】 목 1. 여주 도호부 1. 이천 군 1. 양근 현 5. 지평(砥平)ㆍ음죽(陰竹)ㆍ양지(陽智)ㆍ죽산(竹山)ㆍ과주(果州)
【관원】 목사 1인, 종 3품이다. 여러 목도 같다.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鎭)이 같다. 판관(判官) 1인, 종 5품으로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는데, 여러 도와 여러 진이 같다. 교수(敎授) 1인, 종 6품이다. 여러 도의 도호부 이상은 같다. 『신증』 연산군(燕山君) 11년에 이 주의 사람으로 난언(亂言)한 자가 있어 본주(本州)를 혁파하였다가, 지금 임금 초년에 복구하였고, 6년에는 주가 잔악하고 피폐함으로써 판관을 폐지하였다.
【군명】 남한산ㆍ한산주ㆍ한주ㆍ회안(淮安)ㆍ봉국군(奉國軍).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윤(尹)ㆍ석(石)ㆍ한(韓)ㆍ안(安)ㆍ김(金)ㆍ지(池)ㆍ소(素), 노(盧)ㆍ장(張)ㆍ박(朴)이다 모두 속성(屬姓)이다.
【풍속】 상기사 독서사(尙騎射讀書史) 《수서(隋書)》에, “백제 풍속이 말타고 활 쏘기를 숭상하며, 서사(書史)를 읽어 행정의 일에 능하고, 또 의약과 점치고 상보는 법을 안다.”하였다. 혼인의 예절은 대략 중화(中華)와 같다 위와 같다. 두 손을 땅에 디딤을 공경으로 삼는다 위와 같다. 의복은 깨끗하다 《남사(南史)》 삼년거복(三年居服) 《북사(北史)》에, “부모 및 남편 죽은 자는 3년 동안 복을 입고, 나머지 친척은 장사를 끝내면 복을 벗는다.”하였다.
【형승】 한수(漢水)의 남쪽으로 토양이 기름지다. 백제 시조 온조의 말이다. 고적(古跡)편에 나타나 있다. 면이 모두 높은 산이다. 이곡(李穀)의 청풍정기(靑風亭記).
【산천】 검단산(黔丹山) 주 동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청계산(淸溪山) 주 서쪽 50리에 있는데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모산(大母山)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일장산(日長山) 주 남쪽 5리에 있는데 일명 남한산이라고도 한다. 조곡산(早谷山)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일명 초동산(草洞山)이라고도 한다. 문현산(門懸山) 주 남쪽 45리에 있다. 천천현(穿川峴) 주 서쪽 30리에 있다.
○ 중 선탄(禪坦)의 시에, “관산(關山)은 아득히 멀고, 길은 굽이굽이 돌았는데, 걸음이 양주에 가까우니 안계(眼界)가 점점 열리는구나. 삼산(三山)이 본래부터 친함이 있는 듯, 은근히 백리에 강을 건너옴을 깊이 사례하노라.”하였다.
영장산(靈長山) 주 남쪽 20리에 있다. 운길산(雲吉山) 주 동쪽 30리에 있다. 수리산(修理山) 주 서쪽 60리에 있다. 또 과천현 편에 보라. 대해산(大海山) 주 남쪽 50리에 있다. 군월라산(軍月羅山) 주 동쪽 15리에 있다. 원적산(元寂山) 일명 무적산(無寂山)으로, 주 동쪽 60리에 있다. 대쌍령(大雙嶺) 주 동쪽 40리에 있다. 소쌍령(小雙嶺) 주 동쪽 45리에 있다. 가마령(佳亇嶺) 주 동쪽 45리에 있는데 성종 어태(御胎)를 봉안했다. 이령(梨嶺)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지금 임금의 어태를 봉안했다. 추령(楸嶺) 주 남쪽 47리에 있다. 망월봉(望月峯) 주 서쪽 10리 몽촌(夢村)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긴 바람에 배부른 돛으로 한수(漢水)에 급히 달려, 산중으로 돌아오니 술이 처음 익었네. 마른 창자에 술이 들어가니 또한 쉽게 취하는구나. 두 귀가 취중에 찡 울리며 흥이 스스로 족하니, 술 두루미를 옮겨 몽산 머리에 날아 올라가, 슬쩍 눈을 동쪽 봉우리로 돌려 새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본다. 새 달이 넘실넘실 구름 끝에 나오니, 빙륜(氷輪)이 둥그런데 금 물결 무늬 일렁거리네. 잠깐 사이에 하늘 중앙에 달려 있으니, 구주(九州)와 사해(四海)가 모두 맑은 빛이네. 잔을 들어 달에게 물어도 달은 응하지 아니하는데, 돌아보니 토끼가 나의 청광(淸狂) 많음을 웃누나. 옛 사람이 달을 사랑하는 이는 모두 유선(儒仙)이라,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지 천년이나 되었네. 적벽(赤壁) 어느 때에 검은 학이 춤 추었더냐. 백중(伯仲)되는 호걸 기운이 천하에 제일이었네. 한 두루미 술이 넘실넘실 강과 같이 다함이 없으니, 지금 사람과 옛 사람이 같지 않을까. 오경 밤이 깊어도 달은 지지 아니하니, 사가(四佳 서거정의 호(號)) 취한 늙은이 머리가 반백일세.”하였다.
구질포(仇叱浦) 주 서쪽 90리에 있다. 이관포(梨串浦) 주 서쪽 88리에 있다. 조포평(助布坪) 주 서쪽 30리에 있는데 옛 목장이다. 탄천(炭川) 주 남쪽 30리에 있는데 삼전도(三田渡)로 들어간다. 소천(小川) 주 동쪽 30리에 있는데 도미진(渡迷津)으로 들어간다. 독포(禿浦) 주 북쪽 11리 도미진(渡米津)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 이색(李穡)의 시에, “독포 모래 가에 어둠빛이 닥치니, 먼 산과 편평한 들의 형세가 굽이쳐 뻗었네. 뱃사람이 닻줄을 걷어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달이 양주에 밝은데 마침 시를 지었네.”하였다.
세고탄(洗姑灘) 주 서쪽 15리 광진(廣津) 하류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강가에서 빨래하는 색시 얼굴이 꽃과 같은데, 어릴적부터 빨래하여 생활하였네. 아침엔 흰 발을 씻으니 눈빛 같고, 저녁에 흰 팔을 씻으니 서릿발 같네. 아침마다 저녁마다 씻고 도 씻으니, 한 물이 스스로 깨끗해져 마음에 스스로 만족하리. 흰 실[綿]을 내리니 빙사(氷絲) 더 희매, 밤마다 흰 달 아래 찬 북[梭]을 울리네. 가는 비단을 짜 재단하여 옷을 만드니, 교초(蛟綃)보다 가늘고 월사(越紗)보다 가볍네. 강물이 맑고 또 잔잔함이여, 날마다 눈을 내리어 쉴 때 없어라. 씻기 끝나매 소담[談]한 화장[粧]이 물 밑에 비치니, 소아(素娥 월궁의 선녀)도 깨끗함을 사양하겠고, 강비(江妃 강의 신녀)도 부끄러워하겠네. 문득 미친 바람이 있어 천지가 어두우니, 티끌이 아득하여 갈 곳을 잃었네. 허둥지둥 진흙물 가운데서 당황하니, 옥질(玉質)은 이미 잘못되어 옷도 검어졌네. 시누이 문에 나와 색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색시는 빨래하기 왜 더딘고. 색시가 돌아오매 시누이는 손뼉치며 웃되, 추악하여 우리 집 시(施 서시(西施)의 성)가 아니라 하네. 시누이 나이는 겨우 열 세 살, 이때에 철이 아직 안 들었네. 시누이야, 시누이야 색시를 웃지 말아라. 이 한(恨)을 뒷날 너도 혹 알게 되리라.”하였다.
도미진(渡迷津) 주 동쪽 10리, 양근군 대탄 용진(龍津) 하류에 있는데, 그 북쪽 언덕을 도미천(渡迷遷)이라 이름한다. 동쪽으로 봉안역을 향하여 돌 길이 7~8리나 빙빙 둘렀는데, 신라 방언(方言)에 흔히 물 언덕 돌 길을 천(遷 벼루)이라 불렀다. 뒤에 나오는 것도 이와 같다.
○ 고려 한수(韓脩)의 시에, “햇볕이 잠깐 움직이자 오는 바람이 부드럽고, 하늘 그림자는 멀리 비췄는데 돛은 한가히 가네. 머리를 돌려 은근히 삼각산을 이별하되, 달이 아직 반쯤 둥글기 전에 내 돌아오리라.”하였다.
○ 권우(權遇)의 시에, “산 허리 구불구불 사닥다리 길 비꼈는데, 가다가 길 다한 곳에 사람 집이 있구나. 하늘은 차고 날은 저물고 바람은 급하게 부는데, 머리 돌려 긴 강을 바라보니 물결이 꽃을 피우네.”하였다.
광진(廣津) 주 서쪽 18리 독포 하류에 있다. 또 양주 편에 보라. 삼전도(三田渡) 주 서쪽 18리에 있는데, 한성부(漢城府) 편에 자세히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자기(磁器) 해마다 사옹원(司饔院) 관리가 그림 그리는 사람을 인솔하고 가서, 궁중에서 쓸 그릇을 감독하여 만든다. 도기(陶器)ㆍ은어[銀口魚]ㆍ눌어(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蟹].
【봉수】 천천현 봉수(穿川縣烽燧) 남쪽으로는 용인현(龍仁縣) 보개산(寶蓋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서울 남산 제2봉수에 응한다.
【누정】 청풍루(淸風樓) 객관 동북쪽에 있는데 옛 청풍정이다. 목사 홍석(洪錫)이 다시 지어 누로 만들었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원 나라 순제(順帝)의 연호) 기축년 여름 4월에 어버이를 뵈러 고향으로 가는 길에 낙생역(樂生驛)에 이르니, 광주 목사 백화보(白和父)가 글을 보내 초청하고 또 말하기를, ‘관사의 북쪽에 옛날의 청풍정 터를 찾아 네 기둥을 세워 집을 지었는데, 실로 한 고을의 제일가는 명승이라. 기문(記文)을 지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갈 길이 바빠 우선 답하기를, ‘뒷날 서울에 돌아갈 때에 한 번 가서, 눈으로 보고 기를 지어도 아직 늦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이듬해 광주에 이르니 백군은 이미 조정에 불려 들어갔고, 이군 모(某)가 대임(代任)된 지 반 년이나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혹심한 더위라 허덕이는 숨길이 실끝 같았다. 이에 이른바 청풍정에 올라 기둥에 기대어 옷깃을 헤치니,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며 모발(毛髮)이 선들선들하여져, 더러운 데서 매미가 허물을 벗고 티끌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이군은 술을 장만하고, 조용히 말하기를, ‘네 기둥의 제도는 간소하기는 간소합니다만 아침저녁에 해가 쬐고, 동쪽 서쪽으로 빗발이 치므로 앉아 노는 손님들이 이것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내가 양쪽 옆으로 달아내어 남쪽 추녀를 지어 각각 다섯 자씩이요, 북쪽도 또한 이와 같이 하니 약간 넓어지고 또 깊어졌습니다. 벌써 흙 손질을 끝내고 장차 단청을 하려는 참이온데 선생께서 마침 이르러 오시니 어찌 술잔을 들어 낙성(落成)하고, 연월을 써서 기록하여 주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내 이미 전에 백군에게 허락하였기에, 이에 정자가 폐허된 지가 몇 해인가 물었으나 부로(父老)들이 아는 자 없으니 오늘날 폐한 정자를 일으킴이 사실에 있어서는 새로 세움과 같다. 《춘추(春秋)》에 공사(工事)한 것을 쓴 것은 안할 공사를 하였다고 한 것도 있고, 또 《논어(論語)》에, ‘노(魯) 나라 장부(長府)를 하필 다시 지으리요.’ 한 말도 있으니, 성인이 가르침을 남기신 뜻이 깊다. 내, 광주 형세를 보니 3면은 높은 산이요, 북쪽은 비록 틔여서 넓으나 지세가 낮아서, 공청이나 백성의 집이 우물 밑에 있는 것 같아, 손들이 오면 낮고 누추하다고 불편하게 여길 것이나, 지척(咫尺) 사이에 이 같은 시원한 곳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매, 이 정자를 지음이 《춘추》의 폄(貶)한 예(例)에 들지 않을 것이다. 내 이에 기문을 쓴다. 청풍이란 뜻은 백군의 말에 다하였으므로 내 다시 보태지 아니한다. 백군은 동년(同年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 이군의 벗인데, 정사가에 모두 청렴하고 부지런하다는 칭찬 평이 있다.”하였다.
○ 권담(權湛)의 시에, “바람이 장미를 흔드니 벌써 꽃이 떨어졌고, 녹음이 땅에 가득하니 한이 왜 이다지도 많은가. 젊었을 때 이 누의 달 아래서 노래하며 춤추었더니, 10년 만에 돌아오매 두 귀밑털이 희었네.”하였다.
무진정(無盡亭) 주 서쪽 15리, 화산군(花山君) 권반(權攀)의 별장에 있다.
○ 최항(崔恒)의 시에, “하늘이 기이한 지경을 아꼈다가 호걸과 영웅에게 부쳐 주니, 한없는 기관(奇觀)이 한강 동쪽을 다 차지하였네. 봄 비에 바다 갈매기 난간 밖을 의지하고, 저녁놀과 따오기[霞鶩]가 술잔 속에 들어오네. 우연히 오는 죽백(竹帛)의 이름이 무슨 소용되겠소. 늙어감에 강산의 흥이 무궁하네. 저는 나귀를 거꾸로 타니 가는 곳마다 좋고, 어찌하면 돌아올 줄 아는 지친 새와 같을꼬. 푸른 도롱이[簑]에 취한 몸을 붙들어 어부를 따르고, 흰 삿갓에 노래를 높이 부르며 소 치는 늙은이와 짝하네. 돌아가지 않는 것이지 돌아가면 갈 수 있을 것인데, 부끄럽다 내 공연히 오호(五湖) 바람을 생각하네.”하였다.
압구정(狎鷗亭)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가 두모포(豆毛浦) 남쪽 언덕에 정자를 지었다. 사신으로 명(明) 나라에 들어가 정자의 이름을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에게 청하였더니, 예겸이 이름짓기를 ‘압구'라 하고 기문을 지었다. 그 뒤 을미년에 또 사신으로 명 나라에 들어가 조정 선비들에게 시를 청하였더니,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 등이 말하기를, “이 분이 압구정 주인이다.”하고, 한 가지로 시를 지어 보여 정자 이름이 마침내 중국에 들리게 되었다.
○ 예겸의 기문에, “조선 왕성의 남쪽 십수 리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 한다. 그 근원은 금강ㆍ오대 두 산으로부터 나와서, 모여서 긴 강이 되고 서로 흘러서 바다에 들어간다. 내 옛날에 조서(詔書)를 받들어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 강 위에 이르러 정자에 올라 잔치하며 시를 읊었었고, 또 배를 강 가운데 띄우고 오르내리며 즐겼었다. 그 강은 넓고 파도가 아득하여 바람 돛이 오가고, 갈매기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시원하고 경치가 다함이 없어, 황홀히 몸을 창해와 한수(漢水)ㆍ면수(沔水 중국의 강 이름)의 사이에 둠과 같아서, 몸이 동방 조선에 머물러 있음을 잊어버렸다. 이별한 지 10년에 매양 강 언덕의 풍치를 멀리 그리며, 정신이 달려가지 아니한 적이 없었었다. 천순(天順) 원년 겨울에 조선의 이조 판서 한명회 공이, 그 국왕의 명을 받들고 들어와 봉사(封事)를 천자에게 바치었다. 공은 전에 별장을 한강 가에 두고 정자를 그 가운데 지었으나,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했다 한다. 내 전날 사신 가서 한 차례 놀았으므로, 그 좋은 경치를 안다 하여 사람을 시켜 나에게 이름을 청하고 인하여 기문 쓰기를 부탁하였다. 내 이름 짓기를 압구(狎鷗)라 하고 다음과 같이 쓴다. 갈매기는 물새의 한가한 자이다. 강이나 바다 가운데 빠졌다 떴다 하고, 물가나 섬 위에 날아다니는 것으로, 사람이 길들일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어찌 친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위태로운 기미를 보면 바로 날아 떠오르고, 공중을 휘 날은 뒤에라야 내려앉는 것이니, 새이면서 기미를 보는 것이 이같은 까닭으로, 옛적에 해옹(海翁)이 아침에 해상으로 나갈 적에, 갈매기가 이르러 오는 수를 백으로 헤아린 것은 기심(機心)이 없는 까닭이요, 붙들어 구경하고자 하기에 미쳐서는 공중에서 춤추며 내려오지 아니하니, 그것은 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오직 기심이 없으면 갈매기도 자연히 서로 친하고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큰 키가 옥처럼 섰고 거동과 풍도가 빼어났으며, 위대하여 번국(藩國)에서 벼슬할 때, 인재를 뽑아 쓰는 데 공명(公明)한 재주를 나타내었고, 천조(天朝 중국)에 사신 오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예절로 삼갔으니, 나라에 돌아가면 등용됨이 융숭할 것이어서, 어찌 갈매기와 친압할 수 있겠는가. 만물의 정은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느끼고, 만사의 이치는 반드시 기심이 없은 뒤에라야 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조금이라도 사심이 붙어 있게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기심이 진실로 없게 되면 조정에서는 사람들이 더불어 친하기를 즐기지 아니할 자 없고, 이 정자에 오를 적에는 갈매기도 더불어 한가히 친압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부귀와 이록(利祿)에 대하여서는 자신에게 관계가 없는 것같이 한다면, 이는 도(道)에 나아감이 높은 이가 아니겠는가. 정자를 이로써 이름함이 아마도 마땅할 것이다. 옛날 송 나라 한위 충헌공(韓魏忠獻公 한기(韓琦))도 일찍이 정자 이름을 압구로 하니,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수(脩))이 시를 지어 보내기를,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 한 절개는 금석과 같아, 공훈과 덕이 함께 높아 예와 이제에 비치었다. 어찌 기심을 잊어[忘機] 갈매기가 믿는데 그치겠으랴. 만물을 다스리는 것도 본래 무심(無心)함이다.’ 하였다. 충헌공이 시를 얻고 기뻐 말하기를, ‘영숙(永叔 구양수의 자)이 나를 아누나.’ 하였다. 외국[朝鮮]과 중국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사람의 마음은 같고, 고금이 비록 다름이 있으나 우리 도(道)는 다르지 아니하다. 내가 공에게 바라는 것도 자못 이와 같다. 공의 마음에도 역시 나더러 잘 안다고 할는지 모르겠다. 혹시 잘 안다고 여기거든 이 말로써 정자 가운데에 걸어 기문으로 삼으면 다행이겠다.”하였다.
○ 태복시 승(大僕寺丞) 김식(金湜)의 시에, “초정(草亭)이 길이 한강을 대하여 열렸으니, 엄자릉(嚴子陵)의 옛 조대(釣臺)와 방불하구나. 다만 백구가 있어 짝이 될 만하니, 한가로이 날아갔다 또 날아오는구나.”하였다.
○ 급사중(給事中)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한 정자 물과 구름 사이에 산뜻하고 깨끗하게 서 있는데, 정자 밖 강 갈매기는 임의로 오가네. 종일 서로 친하여 푸른 물가에 의지하였고, 가끔 가다 가까이 날아와 붉은 난간에 서기도 하네. 피차에 맹세 깊었으니 기심을 잊은 지 오래고, 공무에서 아침저녁 퇴근하면 취미가 스스로 한가하네. 아직 높은 관직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연래에는 명리(名利)와 이미 관계가 없어졌다네.”하였다.
○ 급사중 장녕(張寧)의 시에, “물과 구름 깊은 곳에 초정(草亭)이 그윽한데, 손이 있어 기심을 잊어 흰 갈매기를 대하네. 공명(功名) 다름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한가로운 심사(心事)를 가지고 더불어 부침(浮沈)하는 것을 배우지 말지어다. 윤건(綸巾)과 우선(羽扇 도인(道人)의 복색(服色))으로 한가하게 이야기할 만하고, 부슬비와 비낀 바람에 늦도록 다시 머무네. 좋을씨고 곡강(曲江) 누은(樓隱)한 곳에 갈매기와 서로 부르고 서로 가까이함이 몇 가을이나 되었는고.”하였다.
○ 무정후(武靖侯) 조보(趙輔)의 시에, “그윽한 정자 높이 큰 강 동쪽을 굽어보는데, 갈매기와 서로 기심을 잊어 즐거움이 다함이 없네. 떴다 잠겼다 함이 때가 있음에 둥둥 제대로 맡기고, 오고감에 스스로 걱정하는 생각이 없네. 한가한 가운데 넉넉히 연파(煙波)의 흥취를 얻었고, 고요한 가운데 바야흐로 조화(造化)의 공을 알겠네. 위국공(魏國公)의 청풍을 이제 잇는 이 있으나, 나의 시(詩)는 구양공(歐陽公)에 끌리네.”하였다.
○ 정서후(定西侯) 장완(蔣琬)의 시에, “현달한 사람이 그윽하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정자를 꽃다운 물가에 지었네. 수레바퀴 말발굽 소리는 멀어졌는데, 맑은 바람만이 때로 오고 가네. 깨끗한 옥과 같은 새가 있어 서로 대하여 얼굴을 화하게 함에 족하다. 한 점 눈은 청산을 깨뜨리고, 모래에 새기니 푸른 이끼 얼룩지네. 물결이 편평하니 마음대로 떴다 잠겼다 하고, 화하게 울음 우니 소리 또한 꽥꽥하네. 세한 세월과 한가지로 오래니, 기심 잊어 흰 구름과 더불어 한가롭다. 보통 새와 서로 어울리기가 부끄러워, 소요(逍遙)하며 티끌 세상 밖에서 거니네. 위국공이 가신 지 이제 천 년이 되나, 높은 바람은 진실로 사모할 만하네.”하였다.
○ 태자소보 겸 좌도어사(太子少保兼左都御史) 왕월(王鉞)의 시에, “물 구름 고장 속에 초정이 그윽한데, 정자 위에 앉은 사람이 마치 물 위의 갈매기와 같네. 티끌 세상 백 년에 이런 낙이 없을 것이며, 연파(煙波) 만경(萬頃)에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구양자(歐陽子)의 제품(題品 품평(品評))을 이미 거쳤고, 충헌공은 일찍이 은퇴하기 원하였네. 물(物)과 내가 서로 잊고 마음과 경계[境]가 고요하매, 한가한 가운데 소식은 봉후(封侯)보다 낫네.”하였다.
○ 병부 상서(兵部尙書) 항충(項忠)의 시에, “외로운 정자 푸른 물가에 몸이 흰 갈매기와 벗이 되네. 벼슬살이는 이미 꿈과 같으매 한가한 마음은 마치 구름 같네. 물결 빛은 대 자리[簟] 빛을 밝게 하고, 연꽃 기운은 향로의 향기와 섞였네. 해옹(海翁)에게 말을 전하고자 하노니, 기심 잊은 것은 이 분에게 돌려 보내소.”하였다.
○ 병부 좌시랑(兵部左侍郞) 등소(滕昭)의 시에, “작은 정자를 새로 낚시터 곁에 짓고, 매양 떼지어 나는 갈매기를 사랑하여 앉아서 돌아가지 아니하네. 잔 물결, 가벼운 바람에 둥둥 뜨고, 외로운 부평초와 나무 토막처럼 스스로 떠 다니네. 갈고리 낚시에 미끼를 달아 놓으니, 앞을 다투어 서로 쪼아 먹고, 돛대를 두들겨 소리나도 날아가지 아니하네. 시험 삼아 묻노니 해옹은 어찌 이것을 얻었는가. 원래 물(物)과 내가 한 가지로 기심을 잊었음이네.”하였다.
○ 이부 좌랑(吏部左郞) 유비(劉斐)의 시에, “그윽한 정자에서 강가를 굽어보니, 강물은 맑고도 깊네. 단정히 있으니 분위기 잡된 티끌을 물리쳤고, 경치는 그윽함을 찾을 대로 찾았네. 저 물결 위의 갈매기로 정자 이름 지으니, 한가함이 내 마음과 같다네. 서로 친하여 둥둥 뜨니 외로운 읊조림을 발하고, 아득하게 송설옹(松雪翁 원(元)의 조맹부(趙孟頫))을 생각하니, 천 년에 여운(餘韻)이 있네.”하였다.
○ 호부 낭중(戶部郞中) 이형연(李炯然)의 시에, “새로 모정(茅亭)을 푸른 강 가까이 지으니, 들 갈매기 오가매 뜻이 더욱 깊네. 항상 작은 배에 의지하여 낚시 드리움을 보고, 때로는 그윽한 창에 가까이 와서 거문고 타는 소리듣네. 한 가지로 연파에 늙기로 응당 약속했으리라.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으니 모두 무심(無心)함일세. 아, 나는 밝은 시대에 애착되었으니, 맹세를 어기어 오래 찾지 아니함을 괴이하게 여기지 말게.”하였다.
○ 병부 낭중(兵部郞中) 우면(于冕)의 시에, “공무를 파하고 돌아오니 모든 생각이 멎었는데, 한가한 정자에 날마다 모래 갈매기가 가까이 오네. 인간에는 부질없이 기사(機事)가 많음을 말하는데, 나 홀로 무심하여 마음대로 가고 머물고 하네.”하였다.
○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 장여필(張汝弼)의 시에, “봄바람 두약주(杜若州 향초)에 앉아서 늙으니, 흰 갈매기 나를 잊고 나는 갈매기를 잊었네.”다시 한 점의 기심도 없으니, 구름은 스스로 떠 다니고 물은 스스로 흘러 가네.”하였다.
○ 한림 수찬(翰林修撰) 나경(羅璟)의 시에, “세상에서 말하기를, ‘기심 잊은 사람은 일찍이 기심 잊은 새를 사랑한다.’ 하였네. 사람과 새가 서로 잊어 아침 저녁으로 좋은 맹약을 맺었네. 여기에다 이 정자를 지으니 높다랗게 강가에 임했네. 맑고 깨끗함이 침향(沈香) 아니라 경치는 하늘의 조화를 앗았네. 맑고 기이함이 산기슭에 비쳤는데, 모래 아득하고 구름과 안개가 둘렸네. 한 길이 대숲으로 들어가니, 오가는 차와 말도 적으며 연기 아득하니 호수가 맑고, 저자 머니 사람이 오지 아니하네. 달빛은 찬 물결에 잠겼는데, 풍광은 푸름 마름[藻]에 엉기네. 눈을 멀리 들어 긴 하늘 향하여 사면을 돌아보니, 푸른 산이 작아 보이네. 누가 망기(忘機)의 짝을 알랴. 스스로 이름하기를 망기로(忘機老)라네. 한가로이 망기 시를 읊조리다가 취하여 망기초(忘機草)에 누웠네. 망기한 사람이 아니면 어찌 망기함을 일찍 하겠는가.”하였다.
○ 교유(敎諭) 오가립(鄔可立)의 시에, “한 정자가 바다 동쪽 가에 그윽하게 있으니, 뭇 갈매기 날마다 나와 친해짐을 매우 기쁘게 여기네. 날아서 술자리에 떨쳐 도무지 피하지 아니하고, 물 난간에 다가드니 잘 길들인 것 같으이. 창파에 떠다니니 흰 털이 무거워짐을 아끼고, 푸른 풀밭에서 조니 눈[雪] 점이 새로움을 보겠네. 물건과 더불어 맹약을 맺으니 특히 탈속했구나. 이국(異國)엔들 어찌 사람이 없겠는가.”하였다.
○ 진사(進士) 진승(秦昇)의 시에, “은은한 외로운 정자 푸른 물 흐름을 대하니, 바다 갈매기는 나를 잊고 나는 그를 잊었네. 모래 개니 비낀 난간에 가까워서 편안히 졸고, 구름이 따뜻하니 항상 굽은 난간을 돌면서 노누나. 달이 잠길 때를 당함에 금 거울이 고요하고, 물결 일어나는 곳을 밟으매 옥 꽃이 뜨네. 호기 있게 노저어 타고 봄 연기 밖에 나가니, 몇 번이나 쌍쌍이 나는 갈매기 낚시 배와 친했던가.”하였다.
○ 회계(會稽) 진지(陳贄)의 시에, “본뜻은 한가함을 좋아하는데, 빛나는 정자를 강가에 임하여 지었네. 한가한 날 여기서 배회하니, 한가히 가슴이 트이네. 고운 놀은 물결 넘실거리고 넓은데, 맑은 물 흐름은 창을 둘렀네. 갈매기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떼 지어 물가에 모이네. 훨훨 날개를 날리니, 눈같이 희고 희어 서리 같은 깃이 빛나네. 문득 산란하게 나니, 천 조각 배꽃이 춤추는 듯하네. 처마에 가까이 가끔 오가고, 물결에 목욕하며 임의로 노니네. 오리들과 유가 되지 아니하고 원추새와 해오라기[鵷鷺]와는 거의 짝이 될 만하겠네. 고상한 사람은 진실로 즐거워 이것을 보고 깊이 깨달음을 얻으리라. 피차가 둘다 기심을 잊으니, 서로 보매 섬세한 티끌도 없네. 기심이 조금이라도 싹트게 될 것 같으면 문득 날아가리라.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물(物)과 더불어 항상 거스르지 않는다네.”하였다.
○ 호부 낭중(戶部郞中) 기순(祁順)의 시에, “산뜻한 초가집을 한강 동쪽에 지으니, 주인의 뜻 백구와 같네. 맹약(盟約)을 맺었으니 즐겨 모랫가의 짝 백구를 저버리랴. 생각을 바꾸다가 해옹(海翁)이 매우 부끄럽네. 들 나루에서 천 이랑 물결에 떴다 잠겼다 하고, 낚싯배에는 한 줄기 실바람이 살랑이네. 재상의 덕업이 앞시대 뒷시대에 빛나니, 정자의 이름만이 위공(魏公)에게 비할 뿐이 아니네.”하였다.
○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상당(上黨) 한후(韓侯)의 자는 자준(子濬)인데, 머리 땋은 소년 때부터 같이 놀며 서사(書史)를 읽었네. 장한 뜻 우뚝하여 구속받지 아니하며, 그윽함을 찾고 외롭게 놀다가 취미를 산수에 붙였네. 동중서(董仲舒)의 장막 10년에 경서(經書)를 안았는데, 푸른 적삼 미관(微官)이 될 말인가. 대장부 뜻을 두었으니 끝내 하고 말 것이니, 하루아침 초려(草廬)에 풍운이 일어나네. 융중(隆中)에 높이 누워 있을래야 할 수 없으니, 곤어ㆍ붕새[鯤鵬]의 변화함이 참으로 잠깐 사이일세. 손으로 해바퀴[日轂]를 떠받들어 하늘 운수 돌리니, 하늘을 돌리고 북두(北斗)를 굴림이 한 번 돌아보는 동안일세. 공훈과 이름 빛나고 빛나 한 몸에 있으니, 소하(蕭何)ㆍ장량(張良)ㆍ구순(寇恂)ㆍ등우(鄧禹)를 족히 헤아릴 것 없네. 고귀한 벼슬이 우연히 굴러 왔지 기약한 바 아닌데, 세월은 쉬 흘러 머물지 아니함이 괴롭네. 평생에 맑은 마음을 임천(林泉)에 붙여, 높은 정자를 지어 강가에 임했네. 마음 앎은 오직 흰 갈매기가 있을 뿐, 날고 울며 서로 따르니 한가지로 한가롭네. 옥 패물을 버리고, 난지(蘭芝)를 바늘로 꿰어 차니, 한 강의 연파(煙派)가 스스로 찰랑거리네. 공이 이루어지고 이름이 이루어지매 번화함이 싫어서, 아침 저녁 그윽한 생각 강에 있네. 훈업(勳業)은 비단 동쪽 나라에 있을 뿐 아니라, 성하고 아름다움이 스스로 천하에 퍼졌네. 중국의 유로(儒老)들이 다투어 붓을 휘둘러, 그대를 위하여 서술하고 칭도하였네. 세상 벼슬아치들은 공연히 떠들썩한데, 남아가 이 지경에 이르면 바야흐로 운운 하랴. 동방의 창생(蒼生)이 큰 비를 기다리는데, 어찌 능히 그대를 갈매기 떼에 두겠는가. 아, 갈매기야 서로 귀찮게 말아라. 성주(聖主)님의 융숭한 총애가 오직 그대에게 쏠렸네.”하였다.
○ 안지(安止)의 시에, “한공의 아담한 취미 청한(淸閑)한 것을 사랑하여, 매양 강 정자를 향하여 갔다왔다하기 좋아하네. 다만 고기 낚는 늙은이의 눈 같은 귀밑털을 드리운 것과 짝하는데, 즐겨 노래하는 기생들 구름 머리채를 어여삐 여기랴. 갈매기는 섬돌 밑 맑은 물에 길들었고, 소라[螺]같이 물가에는 점점(點點)한 산이 벌려 섰네. 사직의 특별한 공을 어찌 말하랴. 뜻대로 푸른 물굽이 굽어봄이 무방하리라.”하였다.
○ 성임(成任)의 시에, “해를 하늘에 받들어 팔도(八道)에 비치니, 공명은 드높이 기린각에 올랐네. 묘당(廟堂)에선 이미 경륜의 손을 펴고는, 도리어 갈매기를 짝하여 물가에서 희롱하네.”하였다.
○ “벼슬하는 틈에 조용히 대궐에서 물러나와 신세를 물가에 붙였네. 옆사람들이 부질없이 고기잡이와 나무꾼으로 보고, 당시 조정에 제일류(第一流)를 몰라 보네.”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압구정은 산 그윽한 곳에 있는데, 아래 맑은 강이 있어 만고에 흐르더라. 상공(相公)이 여가 날에 와 거닐어,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니 마음이 한가롭구나. 공명을 세상에 덮었으나 유후(留侯)를 봉함에 족하고, 부귀는 우연히 굴러 들어온 것이매 뜬구름과 같네. 몸이 한가하여 이에 빈 배를 띄웠는가 의심하고, 기심을 잊었으니 강변의 갈매기를 친압할 만하구나. 흰 갈매기 날아와 긴 물가에 희롱하니, 날개를 비비고 그림자를 희롱하며 울어 서로 화답하네. 가끔 놀라 일어나 강가를 지나니, 맞은 언덕 바람이 창랑(滄浪) 노래 보내네. 상공이 난간에 의지하여 흥을 걷잡지 못하니, 건곤 만리가 두 눈에 드는구나. 물에서 헤엄치고 구름 속에 나는 것이 각각 자유로우니, 강 위에 모든 물건이 시름없구나. 바람과 비는 때 맞추어 순조로우니, 남촌과 북촌에는 뽕과 삼이 풍년일세. 공(公)이 능히 이같은 태평한 아름다움을 이룩하였으니, 만년에 조용히 노는 기회 얻으셨네. 그대는 서린 용이 한 번 일어나면, 구주(九州)에 은택 줌을 보지 못하였는가. 삼농(三農)에 고무(鼓舞)되어 해가 풍년이 들었네. 돌아와서는 도리어 물고기와 짝하여, 여의주(如意珠)를 안고 깊은 한 못 속에 푹 잠드네.”하였다.
○ 이문형(李文炯)의 시에, “빛나는 정자 높이 한강 물가에 임하니, 성남(城南) 지척 사이에 홍진(紅塵)이 막혔구나. 목란주(木蘭舟)를 달밤에 띄우니 연기는 개울에 비끼고, 버드나무 술집에서 물고기를 잡는데 비는 나루터에 어둡네. 들 밖의 산 빛은 창[戟]을 벌여 놓은 듯, 난간 앞 물결 그림자는 사람을 흔드네.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대업을 역사에 전해 두고, 창주(滄洲)에 돌아와 흰 갈매기와 친하네.”하였다.
○ 최경지(崔敬止)의 시에, “임금이 하루에 세 번이나 은근히 불러 보아 총애가 흐뭇하니, 정자는 있으나 와서 놀 틈이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만 끊어졌다면, 벼슬 바다 앞에서도 갈매기를 친압할 수 있으련만.”

【학교】 향교(鄕校) 서쪽 2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문(斯文)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천년에 드리우니, 착하고 좋은 풍속이 응당 한 고을에서 많이 나오리라.”하였다.

【역원】 경안역(慶安驛) 남쪽 50리에 있다. 본도의 속역(屬驛)은 일곱인데, 덕풍(德豐)ㆍ양화(楊花)ㆍ신진(新津)ㆍ안평(安平)ㆍ아천(阿川)ㆍ오천(吾川)ㆍ유춘(留春)이다. ○ 역승(驛丞) 1인 . ○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을 피하여 남으로 피난할 때 이 역에 이르렀다. 중랑장(中郞將) 임견미(林堅味)가 재추(宰樞)에게 말하기를, “적이 이미 서울에 들어왔다. 임진(臨津) 이북은 우리 소유가 아니니 제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적을 치자.”하였다. 재추들이 응하지 아니하므로 곧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에게 아뢰었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작스러운 사이에 어떻게 하겠는가.”하고, 마침내 복주(福州)로 피하였다.
봉안역(奉安驛) 주 동쪽 30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시에, “옛 역정(驛亭)이 무성한 나무 사이에 열렸는데, 느지막이 서늘할 때에 와 쉬니 몸이 편안함을 깨닫겠네. 산림(山林) 궁벽한 곳에 백성의 집이 적고, 주전(廚傳)이 드물 때에 아전의 일이 한가하네. 벼랑 길이 강을 굽어보니 누가 험한 길을 뚫었는가. 시내 흘러 돌에 부딪치니 스스로 찬 기운이 생기네. 내가 오매 대접한 것이 없었다 말하지 마오. 말이 푸른 꼴[靑蒭]에 배 불렀으니 오히려 염치 없소.”하였다.
낙생역(樂生驛) 주 남쪽 45리에 있다. 덕풍역(德豐驛) 주 북쪽 5리에 있다. 하진참(下津站) 주 서쪽 20리에 있다. 사평원(沙平院) 한강의 남쪽 기슭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피로한 말이 걸음도 느린데 길은 험하고 길다. 안장을 부리고 애오라지 여기에 머무르리라. 왕래하는 말[騶]들 길에 가득차, 처음엔 시끄러움을 싫어했더니, 한 마리 학이 숲에서 울매 비로소 그윽함을 사랑하겠네. 만 길이나 높은 다리[飛橋]는 무지개가 꼬리를 둘렀고, 천 척 늘어선 배는 얼새[鷁] 머리를 나란히 하였네. 고인(故人)이 보이지 아니하니 슬픔이 더하다. 떨어지는 해 아득한데 누(樓)에 기대지 마오.”하였고, ○ “강 어귀에 돛을 내리고 머뭇거리기 한참, 맑은 물에 비춰보며 가만히 수염을 세어 보네. 풀이 언덕 가에 어우러져 겨우 학(鶴)이 숨을 만하고, 밀물이 강가에 오매 오리를 영접하듯 하네. 뱃사공은 앉아서 물이 깊고 얕음을 알고, 나루터 사람은 능히 바람이 있고 없음을 점치네. 급히 흰 비단을 찾아 그림을 그려야겠으니, 한 쌍 한가한 오리 쇠잔한 갈대 속에서 졸고 있네.”하였다.
판교원(板橋院) 주 남쪽 45리에 있다. 동양원(東陽院) 주 서쪽 50리에 있다. 말을천원(末乙川院) 주 남쪽 50리에 있다. 황교원(黃橋院) 주 동쪽 20리에 있다. 쌍령원(雙嶺院) 주 동쪽 50리에 있다. 금척원(金尺院) 주 동쪽 60리에 있다. 이부원(利夫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봉헌원(鳳獻院) 주 서쪽 30리에 있다. 둔입원(芚入院) 주 서쪽 3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주 남쪽 30리에 있다. 도미원(渡迷院) 도미천에 있다. 인덕원(仁德院) 주 서쪽 45리에 있다. 사근내원(沙斤乃院) 주 서쪽 55리에 있다. 정금원(鄭金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광진원(廣津院) 광나루 북쪽 언덕에 있다.
【불우】 신복선사(神福禪寺) 이곡(李穀)이 지은 중영기(重營記)가 있다. 봉수사(奉水寺) 모두 한산에 있다. 수리사(修理寺) 수리산에 있다. 약정사(藥井寺) 한산에 있다. 백종사(百種寺) 주 북쪽 20리에 있다.
수종사(水鍾寺) 조곡산(早谷山)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절의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흰 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거나.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參禪) 이야기하려 하니,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라.”하였다. ○ “용진강(龍津江) 위 옛 절을 찾으니, 구불구불 돌길이 푸른 삼(杉)나무 숲으로 들어갔네. 옛날 자주 사영운(謝靈運)의 지난 일이 생각되고 지금 원공(遠公 혜원(惠遠)) 말을 못 들은 지 오래로세. 시냇가에서 바릿대[鉢]에 주문(呪文) 외우니 용이 응당 엎드릴 것이요, 돌 위에서 불경을 설(說)하니 호랑이 또한 참여하여 듣네. 흰 버선과 푸른 짚신 신고 내 또한 있으니 서로 만나 한 번 호계(虎溪) 남쪽에서 웃어보세.”하였다. 백중사(伯仲寺) 일명 암사(巖寺)이며, 하진참(下津站) 동쪽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절간이 푸른 벼랑에 걸쳐 있으니, 어느 날 금을 펴고 지었는고. 낙엽은 쓰는 사람이 없는데, 빈 집에 오는 손이 있네. 산 형세는 물에 다달아 끊겼는데, 물 구비는 산에 부딪쳐 돌아 흐르네. 앉아서 고승(高僧)과 같이 말을 주고 받으니, 마음이 스스로 티끌이 없어지네.”하였다. 봉은사(奉恩寺) 저도(楮島)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능묘】 헌릉(獻陵) 주 서쪽 30리 대모산(大母山) 남쪽에 있다. 태종 공정대왕(太宗恭定大王)의 능인데, 원경왕후(元敬王后)를 부장(附葬)하였다.
○ 변계량(卞季良)의 비명(碑銘)에, “하늘이 장차 큰 책임을 덕 있는 사람에게 내리려 함에 반드시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을 낳아서 큰 운수를 열고 넓은 복을 길게 누리게 한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일어나시매 우리 태종으로서 아들을 삼고, 우리 전하(殿下 세종(世宗))로서 손자를 삼으시니, 아, 성하도다. 어찌 인위(人爲)로 능히 된 것이겠는가. 하늘이 하심이다. 그 상(商) 나라에 현성(顯聖)의 임금이 계속하여 일어남과 주(周) 나라에 태왕(大王) 왕계(王季), 문왕ㆍ무왕이 서로 이어 받음과 무엇이 다름이 있겠는가. 신(臣)이 삼가 상고하건대 선원(璿源) 이씨는 전주의 드러난 성이니 사공(司空) 휘 한(翰)은 신라에 벼슬하여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6세(世)만에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습니다. 13세에 태조의 고조부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 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어, 4대를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아름다운 업적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가 이미 쇠하자 할아버지 환왕(桓王)께서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으니, 공을 쌓고 인(仁)을 쌓았음이 그 유래가 오래였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丁未) 5월 신묘(辛卯)에 태종을 함흥부 후주(厚州) 사제(私第)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시다.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셨고, 점점 자라매 영특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셨다. 글 읽기를 좋아하셔서 공부가 날로 진보되어 나이 아직 20이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합격하셨다. 이때에 정사는 문란하여 민심이 이반(離叛)됨에 나라 형세가 위태로웠으므로 개연히 세상 건질 뜻을 두니 태조께서 사랑하시기를 여러 아들과 달리 하셨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함께 명 나라 서울에 입조(入朝)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명 나라 태조 홍무 신미(辛未) 9월에 신의왕후께서 돌아가시매 제릉(齊陵) 옆에 여막을 지어 3년상을 마치고자 하셨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께서 서쪽으로 가셨다가 병을 얻어 돌아오시니, 와서 시병(侍病)하셨다. 공양왕의 신하 정몽주(鄭夢周) 등이 틈을 타 태조를 모함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였는데, 태종께서 사기(事機)에 응하여 변고를 처리하여 그들의 괴수를 제거하니 그들의 모략이 깨어졌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수와 재상과 더불어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태조를 추대해서 집을 나라로 만드시고, 정안군(靖安君)에 봉해 지셨다. 갑술년 여름에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께서 친 아들을 보내 입조(入朝)하라고 명하니, 태조께서 우리 태종이 경서(經書)에 통하고 예에 숙달하여 여러 아들 가운데서 가장 어질다 하시어 곧 파견하여 황제의 명에 응하였다. 이미 명 나라에 이르자 아뢰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맞아 특별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시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께서 병이 나으시매, 권신(權臣)이 붕당을 모아 어린이[芳碩]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뜻대로 함부로 하려는 자가 있어 화(禍)가 곧 절박하였다. 태종께서 기미를 밝게 보시어 섬멸 제거하셨다. 이때에 종친과 장상들이 모두 우리 태종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기를 청하였으나 태종께서 굳이 사양하고, 공정 대왕(恭靖大王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태조께 청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종사(宗社)를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께서 병이 낫지 아니하시므로 공정대왕에게 전위(傳位)하시었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가만히 방간(芳幹)의 부자를 꾀어 동기를 해치려고 꾀하고,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매 태종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여, 박포는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하여 형제의 정의를 폐하지 아니하셨다. 공정대왕께서 후사(後嗣)가 없으시고 또 나라를 창업하고 사직을 안정함이 모두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 하시어 책봉하여 세자로 삼으셨다.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말미암아 우리 태종에게 전위하고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명(策命)을 청하니, 다음 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승(通政侍丞) 장근(章謹) 등을 번갈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을 삼았다. 겨울에 홍로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 면복(冕服)을 주고 품질(品秩)을 친왕(親王)에 준하였다. 임오년에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시매 태종께서 좌정승 신(臣) 하륜(河崙)을 보내 등극을 하례하니, 황제는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서 다음 해 계미년 4월에 고명(誥命)과 인장을 주셨다.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 그대로 왕에 봉하였다. 가을에 한림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어 곤룡포ㆍ면류관ㆍ구장(九章)과 금단(錦段)ㆍ사라(沙羅)ㆍ서적(書籍)을 주고, 태조께는 금단ㆍ사라를, 원경 왕태후께는 관(冠)ㆍ포(袍)와 금단ㆍ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이때부터 그 뒤로는 황제께서 물건을 내림이 거듭되어 비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께서 도읍하셨던 곳이라 하여 여러 신하의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께서 하정사(賀正使)로 입조(入朝)한 사신에게 이르기를, ‘조선국왕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하였다. 이뒤부터 사신이 갈 때마다 매양 지성이라고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께서 돌아가시니 슬퍼하시고 사모함이 망극(罔極)하셨고, 거상(居喪)을 하고 상사와 장사를 예로써 하셨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부고를 고하니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朝會)를 철폐하시고 예부 낭중(禮部郞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태뢰(大牢)의 제사를 내리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고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셨다. 임진년 겨울에 고려 왕씨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어 있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조정에 아뢰어 죽이기를 청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제왕의 일어남은 스스로 천명이 있는 것이다. 당초에 왕씨의 후손을 죽인 것은 우리 태조의 본 뜻이 아니다.'하시고, 이에 하교(下敎)하여, ‘왕씨의 후예로 생존한 사람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생업에 편안하게 하라.’ 하셨다. 갑오년 6월 일(日)에 감로(甘露)가 함흥부 월광(月光) 구미리(仇未里) 및 정평(定平)의 백운산에 내렸다. 다음 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에 내리니, 우리 동방에 전에는 있지 않았던 일이라 정부에서 모두 전(箋)을 올려 하례하였으나 받지 아니하셨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지(禔)가 덕이 없으므로 폐하고 양녕대군으로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제(孝悌)하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으며, 나라 사람들이 촉망하므로 책봉하여 황제께 아뢰니 황제가 허락하셨다. 이해 8월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시고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명(誥命)을 청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尊號)를 올리어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 하였다. 다음 해 정월에 황제가 홍로시 승(鴻臚寺丞) 유천(兪泉) 등을 보내어 고명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倭)가 국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죽이고 약탈하매 영의정 신(臣) 유정현(柳廷顯) 및 장천군(長川君)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해군으로서 가서 치게 하니, 섬 왜인들이 복종하여 전과 같았다. 8월에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어 잔치를 내리니,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왕의 지성이 두터워 공경히 조정을 섬기고, 한 덕과 한 마음이 끝까지 게으르지 아니하매, 능히 어진 이를 가리어 덕 있는 이를 명하여 종사(宗社)로 하여금 의탁 할 곳이 있게 함으로써 나라 사람의 바람에 맞게 하였도다.’ 하고,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내리셨다. 칙서에 대략 이르기를, ‘네 아버지가 도탑고 후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天道)를 공경하더니, 충성스럽고 순한 정성이 오래 갈수록 변하지 않는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매 참최(斬衰)의 복을 입어 역월(易月)의 복제를 마치었다. 사신을 보내어 보고하니, 다음 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공정(恭靖)이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께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태상왕의 호를 올리려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께서 돌아가시매 우리 전하가 슬퍼하심이 예(禮)에 지나치므로 명하여 역월의 복제를 따르도록 하였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시매, 이에 장사 뒤에 복을 벗고 백의(白衣)로 상기(喪期)를 마치도록 하셨다. 9월 임오에 태후를 광주(廣州) 고을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지내고,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신축년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께서 책보(冊寶)를 받들어 태상왕의 호를 올리고, 10월에 태종에게 품하여 원자(元子 문종)를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께서는 세상에 흔히 나지 않는 자질로서 학문을 쌓으시어 효제(孝弟)는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 사직에 감동되었다. 대국을 섬기매 천자는 그 지성을 일컬었고, 이웃나라를 사귀매 왜국은 그 도덕에 복종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생각하여 검소를 숭상하고 씀씀이를 절약하였으며 덕과 예(禮)를 먼저하고, 형벌을 삼가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셨다. 간사한 사람을 내치고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시키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히며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여 쌓였던 폐단이 모두 개혁되어 모든 업적이 빛나, 온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은 편안하고 물질이 풍부하니 제왕의 도(道)가 성하였다. 상제(上帝)의 돌보심이 융숭함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가 내리는 최상의 상서(祥瑞)를 얻음이 마땅하도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이 드시어 다음 달 5월 병인(丙寅)에 이궁(離宮)에서 돌아가시었다. 우리 전하께서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사흘 동안 음식을 폐하시니, 군신이 울면서 음식 드시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년의 상복으로 정하여 역월(易月)의 복제를 쓰지 아니하셨다. 태종의 나이 56세였는데 왕위에 19년 동안 계시었고, 한가히 계신 지 5년 만에 문득 돌아가셨다. 대소의 신하들과 아래로 노예(奴隸)에 이르기까지 소리 내어 울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고, 날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여 부모를 여윈 것같이 하였으니 아, 슬프다. 이해 9월 초2일 병진(丙辰)에 존호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태종이라 하였다. 초6일 경신(庚申)에 원경 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이었다. 명 나라에 부고를 보내매 황제는 애통하여 조회를 철폐하고,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어 제사를 내리니, 그 글에 대략 이르기를, ‘왕은 뜻이 돈후하고 지성스럽고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조정을 공경히 섬기어, 충성스럽고 순종하는 마음이 종시 바뀌지 아니하더니, 부고가 멀리서 들림에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끼노라.’ 하였고, 또 고명(誥命)을 주어 시호를 공정(恭定)이라 하였으며, 또 전하에게 부의를 후히 내리셨다. 대저 우리 태종의 성한 공덕과 우리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에 서로 이어 능히 황제의 마음을 맞춘 까닭으로 종시(終始)하는 즈음에 있어 특별한 은전(恩典)이 이와 같이 갖추어 지극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니 여흥(驪興)의 대대로 이름난 집이시다. 고려 문하시랑 평장사 문경공 휘 영모(令謨)로부터 6세 만에 고조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릉(毅陵)을 도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에 이르고, 시호를 충순(忠順)이라 하였다. 충순이 증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諱) 적(頔)을 낳고, 문순이 조부 대광 여흥군(大匡驪興君) 휘 변(抃)을 낳고, 대광이 아버지 순충동덕찬화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여흥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純忠同德贊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驪興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어머니 송씨는 삼한국 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했으니, 고려 중대광 여량군(重大匡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시다. 착함을 쌓아 경사가 나매 이에 숙덕(淑德)을 낳으니 총명이 보통과 다르셨다. 배우자를 가리어 우리 태종에게 시집오셨다. 태종께서 젊었을 때부터 세상을 건질 뜻을 두시어 경사(經史)에 유의하시고,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셨다. 태후께서는 치가(治家)하심이 검소하고, 부엌 일을 삼가시고 여공에 힘쓰셨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 의방(義方)에 순종하게 하셨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접하여 부도(婦道)를 극진히 하셨다. 홍무(洪武) 임신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하고, 무인년에 태종께서 정사(定社)할 때에 사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로웠는데 태후께서 마음을 다하여 도와 큰 일을 치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에 봉하고, 그해 겨울에 태종께서 즉위하시자 정비(靜妃)에 봉해지셨다. 영락(永樂) 계미년에 황제가 관포(冠袍)를 하사하였다. 이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하사를 다섯 번이나 받았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존호를 올리어 후덕대왕비(厚德大王妃)라 하였고, 경자년 9월에 시호를 올려 원경왕태후라 하였으니, 춘추가 56세이셨다. 태후께서 정숙한 덕을 타고 나서 능히 태종에 짝하시어 내치(內治)를 오로지하기 20년 동안에 부도(婦道)가 엄숙하고 공경하여 또 성자(聖子)를 낳으시매 종묘와 사직에 주인이 되게 하심으로써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셨다. 돌아가시기에 미쳐 빈첩(嬪妾)과 시녀들이 마음을 다하여 슬퍼하고 아파하지 아니한 이가 없었다. 부인으로서의 법도와 어머니로서의 거동이 지극하심이로다. 네 아들과 네 딸을 낳으셨으니 우리 전하께서는 셋째이시다. 장남은 지(禔)요, 차남은 보(補)이니 효령대군에 봉하고, 그 다음은 종(種)으로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하였다가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로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하가(下嫁)하니 본관이 같은 이씨가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하가하였고,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하가하였다가 먼저 죽고,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하가하였다. 의빈 권씨(懿嬪權氏)가 딸 하나를 낳으니 정혜옹주인데,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고,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가 3남 7녀를 낳았으니 장남 인(裀)은 공녕군(恭寧君)에 봉하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장녀 정신옹주(貞信翁主)는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가고, 다음 정정옹주(貞靜翁主)는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가고, 다음 숙정옹주(淑貞翁主)는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궁인 안씨(宮人安氏)가 1남 3녀를 낳았으니 모두 어리고, 김씨가 1남을 낳았으니 비(裶)요, 경녕군(敬寧君)에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1남을 낳고, 최씨(崔氏)가 1남 1녀를 낳고, 이씨(李氏)가 1남을 낳고,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께서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으로 4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곧 세자(世子)이시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양녕대군은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효령대군은 전(前) 판중군 도총제 부사(判中軍都總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성녕대군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다. 정순공주는 1녀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는데 본관이 같은 이씨가 아니다. 경정공주는 4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는 2남을 낳았으니 맏은 담(聃)으로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경녕군은 호조 참의(戶曹參議) 김관(金讙)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공녕군은 병조 참판(兵曹參判)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신(臣)이 그윽히 보옵건대, 우리 태종의 성한 덕과 높은 공이 진실로 이미 백왕(百王)의 위에 높이 뛰어나시고, 배필의 어지심으로 내조(內助)의 공이 또 촉도(蜀塗 고양씨의 어머니)ㆍ신지(莘摯 무왕의 어머니 태사씨(太姒氏)를 말함)로 더불어 사실이 서로 맞고 아름다움이 같았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神道碑)에 명(銘)을 새기어 영세(永世)에 밝게 보일 것을 원하므로, 전하께서 신 계량(季良)에게 명하시니, 신 계량이 명을 받자와 조심스럽고 떨리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옵고, 삼가 머리 조아려 절하며 다음과 같이 명(銘)을 올립니다. ‘하늘이 해동(海東)을 돌보시와 우리 태종을 내리시니, 덕을 부지런히 하신 태종은 성덕(聖德)이 몸에 있으시고 성부(聖父)를 추대하여 능히 큰 공을 이루시네. 이에 황제의 뜰에 조회(朝會) 가서 아뢰기를 조용히 하셨고, 황제의 은혜를 두터이 입으시어 우리 백성을 보호하시네. 시기[炳幾]를 밝게 보아 난을 평정하시어 적장(嫡長 정종(定宗))을 높이시니, 비록 혁장(鬩墻)을 만났으나 우애가 두터우셨네.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예로부터 드물게 들은 바이로다. 오직 덕이 두텁고 오직 공(功)에 힘쓰시어 하늘의 내려 보심이 매우 밝으시고 거듭 황제를 보우(保佑)하셨네. 빛나는 금보(金寶)가 전후에 비쳤으니 황제의 고명(誥命)이 거듭 이르매 내가 이에 은혜로 받았네. 할아버지(태조)의 유명(遺命)을 따라서 한수 북쪽 서울로 돌아오셨네. 예와 악(樂)을 제작함에 찬란히 빛나도다. 상사를 당하여 여막에 계심에 애모(哀慕)함이 망극하셨네. 장사지내고 제사지냄에 옛 예법대로 따르셨고, 공경히 명나라 조정을 섬김에 황제가 지성이라 일컬었네. 엄숙하게 제사를 받들매 신명(神明)에 감동하셨고, 이웃을 사귐에 도가 있으니 왜국이 조회하려 왔었네. 왕씨의 후예를 가엾게 생각하여 그들을 살도록 하셨도다. 중외가 다스려져 편안함에 억천년을 드리우리. 흐뭇한 감로(甘露)는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네. 어두운 양녕대군을 폐하고 덕 있는 세종(世宗)을 명하사 백성의 주인을 삼았네. 오랜 수(壽)를 누리시어 이 땅에 아버지로 임하시기를 바랐더니, 어찌 하늘로 올라가심을 재촉하여 한 번 든 병환이 낫지 아니하셨는가. 슬프다, 성자(聖子)는 아프고 슬픔이 비할 데 없으시어 삼일 동안 음식을 철폐하시니, 지쳐서 상함을 이기지 못하시어 범백(凡百) 상사에 오직 예를 따르셨네. 황제께서 듣고 슬퍼하시어 사신을 보내 제사하고, 시호를 주어 포장하여 높이고 부의를 융숭하게 내리셨네. 은전(恩典)이 갖추어졌으매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치었네. 어지신 태후께서는 진실로 엄숙하고 화하셨도다. 가만히 정사(定社)함을 도우시어 능히 큰 성군(聖君)에게 짝이 되셨네. 성철(聖哲)을 나으시므로 하여금 종묘(宗廟)의 제사를 주장하게 하셨네. 건(乾)의 건장하고 이(離)의 밝음은 공정대왕의 덕이 좋고, 곤(坤)의 후하고 유(柔)하고 정(貞)함은 원경왕태후의 법도로다. 금슬로서 벗하시다가 장사도 한곳에 하셨네. 자손이 많으시니, 아, 기린(麒麟)이로라. 길이 이어 가는 종사(宗祀)는 억만 년을 드리우리다. 신이 절하고 글을 올려 좋은 돌에 새기오니 만대에 닳지 아니하여 우리 동방에 비치리다.’ 하였다.”했다.
○ 윤회(尹淮)의 비음기(碑陰記)에, “공손히 생각건대 우리 태종대왕께서 성스러운 덕과 신공(神功)이 뚜렷하여 전고(前古)보다 높았도다. 춘추 아직 많지 아니하실 적에 자리를 성자에게 전해주시고, 바야흐로 한가함을 얻으시어 영화로운 봉양을 누리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시니, 우리 전하께서 슬퍼하시고 상하심이 예법대로 다하셨나이다. 다음 5월에 원경왕태후의 헌능에 합장하시니 유명(遺命)을 따름이다. 능은 광주(廣州) 치소(治所)의 서쪽 대모봉(大母峯) 밑 건해좌(乾亥坐)의 산에 있는데 건좌손향(乾坐巽向)이다. 북으로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 된다. 삼가 살펴보건대, 이 산은 장백산(長白山)으로부터 내려오다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넘어 상주(尙州)의 속리산(俗離山)에 이르고, 여기서 꺾여 서북으로 또 수백 리를 달려 과천(果川)의 청계산(淸溪山)에 이르고, 또 꺾여 동북으로 달려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는데 이것이 대모산이다. 땅의 영기(靈氣)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 능(陵)의 길조(吉兆)로 기다림인가. 전하께서 능의 손방(巽方) 63보에 나아가 큰 비를 세워서 덕의 아름다움을 기록하여 빛을 이제와 오는 세대에 드리우라 명하시고, 또 개국 좌명 정사공신(開國佐命定社功臣)들의 이름을 차례로 비 뒤에 새기도록 명하시었다. 신이 그윽히 생각건대, 자고로 제왕(帝王)이 일어남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신하가 있어 때에 응하여 나서 대업(大業)을 도와서 이루었습니다. 이에 종명이정(鐘銘彝鼎)에 공을 기록하는 법이 있는 것이니 썩지 않을 공을 보여 영구히 전하는 바입니다. 우리 조정이 임신년에 창업됨과 무인년과 경진년의 내란을 평정함을 얻은 것은 실로 하늘이 태종을 열어준 바가 된 것이요, 그러므로서 조선 억만년 무궁한 복조의 기초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또한 장상(將相)들이 몸을 잊고 명을 바쳐 보좌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마땅히 비석에 새겨 영세에 보여서 뒤에 보는 사람이 오히려 능히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빛나는 공을 현양(顯揚)하고 원훈(元勳)을 포장(褒獎)하신 지극한 뜻을 알게 할 것입니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문하시중(門下侍中) 배극렴(裵克廉)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ㆍ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계림군(鷄林君) 정희계(鄭熙啓)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의성군(宜城君) 남은(南誾)ㆍ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ㆍ서원군(西原君) 정총(鄭摠)ㆍ한산군(漢山君) 조인옥(趙仁沃)ㆍ의녕군(宜寧君) 남재(南在)ㆍ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ㆍ익화군(益和君) 김인찬(金仁贊)ㆍ파평군(坡平君) 윤호(尹虎)ㆍ상산군(商山君) 이민도(李敏道)ㆍ호조전서(戶曹典書) 조영규(趙英圭)ㆍ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남양군(南陽君) 홍길민(洪吉旼)ㆍ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ㆍ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ㆍ평해군(平海君) 황희석(黃希碩)ㆍ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안경공(安景恭)ㆍ계림군(鷄林君) 김균(金稛)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유원정(柳爰廷)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오사충(吳思忠)ㆍ안평부원군(安平府院君) 이서(李舒)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이백유(李伯由)ㆍ흥원군(興原君) 이부(李敷)ㆍ연성군(延城君) 김노(金輅)ㆍ고성군(高城君) 고려(高呂)ㆍ동원군(東原君) 함부림(咸傅霖)ㆍ서원군(西原君) 한상경(韓尙敬)ㆍ상호군(上護軍) 한충(韓忠)ㆍ여천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
정사공신(定社功臣)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익안대군(益安大君) 방의(芳毅)ㆍ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ㆍ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ㆍ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ㆍ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 복근(福根)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화산군(花山君) 장사길(張思吉)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연성군(延城君) 김노(金輅)ㆍ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장철(張哲)ㆍ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신극례(辛克禮)
좌명공신(佐命功臣) 상당군(上黨君) 이저(李佇)ㆍ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ㆍ한산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ㆍ취산부원군(鷲山府院君) 신극례(辛克禮)ㆍ계성군(鷄城君) 이내(李來)ㆍ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ㆍ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ㆍ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ㆍ완천군(完川君) 이숙(李淑)ㆍ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ㆍ칠성군(漆城君) 윤저(尹抵)ㆍ의성군(義城君) 김영렬(金英烈)ㆍ파평군(坡平君) 윤곤(尹坤)ㆍ금천군(錦川君) 박은(朴訔)ㆍ평양군(平陽君) 박석명(朴錫命)ㆍ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 마천목(馬天牧)ㆍ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 조온(趙溫)ㆍ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ㆍ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원(李原)ㆍ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ㆍ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 유양(柳亮)ㆍ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ㆍ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霔)ㆍ마성군(麻城君) 서익(徐益)ㆍ남양군(南陽君) 홍서(洪恕)ㆍ칠원군(漆原君) 윤자당(尹子當)ㆍ계림군(鷄林君) 이승상(李升商)ㆍ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ㆍ이성군(利城君) 서유(徐愈)ㆍ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이종무(李從茂)ㆍ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ㆍ풍산군(豐山君) 심구령(沈龜齡)ㆍ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ㆍ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한규(韓珪)ㆍ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ㆍ월천군(越川君) 문빈(文彬)ㆍ여산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ㆍ증 동지중추원사(贈同知中樞院事) 김덕생(金德生)” 하였다.

선릉(宣陵) 주 서쪽 30리 학당동(學堂洞)에 있다. 성종 대왕(成宗大王)의 능이다. 평원대군 (平原大君) 묘(墓) 주 남쪽 18리에 있다. 한확(韓確) 묘(墓) 주 동쪽 30리에 있다. 임영대군(臨瀛大君) 묘(墓) 주 남쪽 60리에 있다. 광평대군(廣平大君) 묘(墓)ㆍ영순군(永順君) 묘(墓) 모두 주 서쪽 25리에 있다. 이원(李原) 묘(墓) 주 서쪽 30리에 있다. 구치관(具致寬) 묘(墓) 주 동쪽 60리에 있는데, 서거정이 비명을 지었다. 최항(崔恒) 묘(墓) 주 동쪽 20리에 있는데 서거정이 비명을 지었다. 박은(朴訔) 묘(墓) 주 북쪽 23리에 있다. 이극배(李克培) 묘(墓) 주 북쪽15리에 있다. 밀성군(密城君) 묘(墓) 주 서쪽 7리에 있다. 서거정(徐居正) 묘(墓) 주 서쪽 13리에 있다. 정창손(鄭昌孫) 묘(墓) 주 서쪽 14리에 있다. 오사충(吳思忠) 묘(墓) 주 북쪽 11리에 있다. 권진(權軫) 묘(墓) 주 동쪽 20리에 있다. 맹사성(孟思誠) 묘(墓) 주 남쪽 30리에 있다. 유창(劉敞) 묘(墓) 주 북쪽 10리에 있다. 이극증(李克增) 묘(墓) 주 남쪽 40리에 있다. 정난종(鄭蘭宗) 묘(墓) 주 남쪽 70리에 있다. 함부림(咸傅霖) 묘(墓) 주 서쪽 12리에 있다. 김승주(金承霔) 묘(墓) 주 동쪽 30리에 있다. 한계희 묘(韓繼禧) 묘(墓) 주 남쪽 40리에 있다. 어효첨(魚孝瞻) 묘(墓) 주 북쪽 17리에 있다. 정척(鄭陟) 묘(墓) 주 서쪽 7리에 있다. 이지강(李之剛) 묘(墓) 주 북쪽 7리에 있다. 이계손(李繼孫) 묘(墓) 주 서쪽 80리에 있다. 이문화(李文和) 묘(墓)ㆍ이승손(李承孫) 묘(墓) 모두 주 서쪽 30리에 있다.
『신증』 희릉(禧陵) 대모산(大母山)에 있는데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이다. 제안대군(齊安大君) 묘(墓) 주 남쪽 16리에 있다.
【고적】 온조왕고성(溫祚王古城) 온조왕 13년에 왕도(王都)에 늙은 할미가 변화하여 남자가 되고, 다섯 호랑이가 성안에 들어왔으며, 왕의 어머니가 돌아갔다. 왕이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적은 데다가, 더욱 지금 요사스러운 조짐이 자주 나타나고, 국모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사세가 스스로 편안히 있을 수 없어 반드시 장차 도읍을 옮겨야겠다. 내 어제 나가서 한수의 남쪽을 순시하여 보니, 토지가 비옥하다. 마땅히 그곳에 도읍하여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리라.”하고, 7월에 한산에 나아가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기고, 9월에 성과 궁궐을 세웠다. 일장산성(日長山城) 바로 신라 때 주장성(晝長城)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쌓은 것인데, 안에 여섯 우물과 시내가 있다. 주위가 8만 6천 8백 척, 높이는 24척인데 석축이다. 요탄역(饒呑驛) 고려 현종 9년에 거란이 와서 침범하므로 왕이 광주로 행차하였다가 두 왕후의 간 곳을 잃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게 하였더니, 이 역에 이르러 바로 만나 모시고 돌아왔다. 왕이 기뻐하여 사흘 동안을 여기에 머물렀다.
【명환】 신라 김대문(金大問) 성덕왕(聖德王) 3년에 김대문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고려 이혼(李混) 참군이 되었다. 홍자번(洪子藩) 통판이 되었는데 간 뒤에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생각함이 있었다. 안보(安輔) 사록(司錄)이 되었다. 김부의(金富儀) 사록이 되었다. 장선(張瑄) 목(牧)이 되었다. 이세화(李世華) 고려 때에 오랑캐의 침략으로 인하여 장차 도읍을 옮기려고 하였는데 광주가 중도의 큰 진(鎭)인 까닭에 세화를 보내 나가 자사(刺史)가 되게 하였다. 몽고의 대병이 와서 포위하고, 백 가지 계교로 공격하였으나, 세화가 주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사기(事機)에 따라 응변하니 오랑캐가 드디어 포위를 풀고 갔다. 이진(李瑱) 사록이 되었다.
본조 권진(權軫) 판관이 되었다. 최부(崔府) 목사가 되었다. 안노생(安魯生) 목사가 되었다. 남금(南琴) 태종조에 양녕군을 이 주에 안치(安置)하였는데, 주관(州官)이 잘 제재하지 못하므로 임금이 특히 경창부윤(慶昌府尹) 남금으로서 판목사(判牧事)를 삼았다.
【인물】 백제 고흥(高興)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의 사람이다. 백제 개국 이래로 아직 문자로서 일을 기록함이 있지 못하더니, 고흥이 박사가 되매 비로소 서기(書記)가 있었다.
본조 안성(安省)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개성부 유후(開城府留後)에 이르렀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이집(李集) 본주의 아전이다.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올랐다. 천성이 강직하여 신돈(辛旽)에게 붙지 아니하니 돈이 죽이고자 하매 그 아버지를 업고 영주(永州)로 도망하였다가 돈이 죽음을 받자 서울로 돌아와 본조에 벼슬하여 전교판사(典校判事)에 이르렀다. 학문이 높아서 한 때에 사귀던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의 무리들이 모두 존경하고 중히 여겼다. 호는 둔촌(遁村)이요 시집이 있다. 이지직(李之直) 이집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형조 참의에 이르렀다. 이지강(李之剛) 이지직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叅贊)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이지유(李之柔) 이지강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다. 이장손(李長孫) 이지직의 아들로 급제하여 벼슬이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이르렀다. 이인손(李仁孫) 이장손의 아우로 일찍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다. 간절하고 정직하게 국사를 말하다가 대신에게 거슬려 한성부윤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호조 판서가 되었다. 세조가 위로하고 일깨워 말씀하시기를, “경의 나이 많음이 민망하나 탁지(度支)의 무거운 임무는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승진 되었다가 치사(致仕)한 지 5년 만에 죽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고 큰 포부가 있었다.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가산(家産)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벼슬에 있으면서 삼가고 주밀하여 전의 법도를 준수하기에 힘썼다. 시호는 충희(忠僖)다. 다섯 아들이 모두 급제하였다. 이예손(李禮孫) 이인손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극배(李克培) 이인손의 아들로 급제하여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였다. 벼슬은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고, 광릉부원군(廣陵府院君)에 봉하고, 시호를 익평(翼平)이라 하였다. 성품이 엄중하고도 풍채가 있었으며 정치의 대체를 알았다. 아들 세필(世弼)ㆍ세광(世匡) 또한 과거 급제하였다. 이극감(李克堪) 이극배의 아우로 두 번 과거에 합격하였다. 세조조에 좌익공신이 되어 광성군(廣城君)을 봉하였고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세우(世佑)도 급제하여 벼슬이 경기 관찰사에 이르렀다. 이극증(李克增) 이극감의 아우로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익대공신(佐理翊戴功臣)에 참여하여 광천군(廣川君)을 봉하였다.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관(官)을 다스림에 집과 같이 하였다. 시호는 공장(恭長)이다. 이극기(李克基)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다.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관(官)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었다. 『신증』 이극균(李克均) 극증의 아우로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년에 피살되었다. 이세좌(李世佐) 이극감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서에 이르렀다. 연산군 갑자년에 피살되었다. 이점(李坫)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윤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이손(李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시호는 호간(胡簡)이다. 아들 수언(粹彦)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인(舍人)에 이르렀다가 일찍 죽었다.
【우거】 고려 조운흘(趙云仡) 늘그막에 주의 몽촌(夢村)에 우거하였다. 하루는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의 당(黨) 가족들이 멀리 귀양가는 것을 보고 시를 짓기를, “사립문에 해가 낮이 되어서야 사람 불러 열고, 임정(林亭)에 걸어 나와 돌 이끼[苔]에 앉았도다. 어제 밤 산중에 비바람 사나워, 시내에 가득 흐르는 물이 꽃을 띄워 오누나.”하였다.
본조 박계성(朴繼姓)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청렴하고 근엄하게 직무를 보았다. 조추(趙秋) 벼슬이 예문관 직제학에 이르렀다.
【효자】 본조 한구(韓逑) 나이 다섯 살에 아버지가 죽고, 장년이 되어 어머니가 죽으매 아버지 묘에 부장하고 6년 상을 입었다. 이런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정수명(鄭守明) 그 아버지 호겸(好謙)이 악질(惡疾)을 얻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수명이 나이 겨우 14세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 드렸다. 이런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내은이(內隱伊) 사비(私婢)이다. 도둑이 그 집에 들어 와서 약탈하고 사람을 죽였다. 내은이가 몸으로써 그 아버지를 가리워 대신 죽음을 당하려 하여 마침내 아버지와 함께 화를 면했다. 사실이 나라에 들리매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부역을 면제하였다. 『신증』 정주신(鄭舟臣) 그 아버지 성근(誠謹)이 연산군 갑자년의 화를 만나 죽으니 가슴을 두들기며 통곡하며 먹지 않고 죽었다. 금상(今上) 초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신증』 【열녀】 본조 이씨(李氏) 정랑 성경온(成景溫)의 처이다. 연산군 때에 경온이 멀리 귀양갔다가 피살되었다. 이씨가 염습(殮襲)하고 장사 지내는데 예를 다하여 여막을 산소 곁에 짓고 손수 제사 음식을 갖추었다. 복을 벗은 뒤에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니 금상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사면운산옹관사(四面雲山擁官舍) 이색의 시에, “사면의 구름산이 관사를 옹위하였는데, 한 줄기 강물은 어대(漁坮)를 둘렀더라.”하였다. 창산녹수장의구(蒼山綠水長依舊)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푸른 산과 푸른 물은 길어 예와 같은데, 푸른 기와와 붉은 기둥은 몇 번이나 새 것으로 바꾸었는고.”하였다. 수기저정생준예(秀氣儲精生俊乂) 유백유(柳伯濡)의 시에, “빼어난 기운이 정기를 저장하여 준걸을 낳았으니 조선의 인물이 빛이 있구나.”하였다.
변오 고려 이집(李集) 이당(李唐)은 본주의 아전이다. 조심하여 어진 행실이 있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집은 그 셋째 아들로, 처음 이름은 원령(元齡)이다.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과 지조로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 이색ㆍ정몽주ㆍ이숭인 등과 서로 더불어 공경하는 벗으로 삼았다. 일찍이 바른 것으로서 항거하다가 적승(賊僧) 신돈에게 거슬리매, 신돈이 장차 잡아 죽이려 하므로 가만히 그 아버지 당(唐)을 업고,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 영천(永川)의 최윤도(崔允道)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신돈이 죽음을 받으매 비로소 돌아와 이름을 고쳐 집(集)이라 하고 자를 호연(浩然)이라 하고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출세할 뜻이 없었다. 봉순대부 판전교시사(奉順大夫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얼마 아니하여 물러가 여주의 천녕현(川寧縣)에 살며 몸소 밭 갈고 글을 읽었다. 때로는 시편(詩篇)과 새 곡식을 정몽주 등에게 선사하니 몽주가 글을 부쳐 감탄하였다. 공양왕 정묘년에 죽으니 몽주ㆍ숭인 등이 글을 지어 애도(哀悼)하였다. 그뒤 여러 어진 이들이 서로 이어 죽자, 고려가 망하고 아조(我朝)에서 개국하였다. 그의 사적의 전말이 여러 문집에 갖추어 실려 있었으나, 역사를 편찬함에 미치어 임사홍(任士洪) 부자가 매우 이극감(李克堪) 형제를 질투하여, 이에 거짓으로 이집이 이조에 들어와 벼슬한 것으로 하여 마침내 본조 인물 밑에 그릇 기록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시림(詩林)을 주석한 자 또한 그 그릇된 기록을 따랐다. 선종(宣宗 선조(宣祖))조에 경연관(經延官) 홍적(洪迪)이 고치기를 청하니 선종이 인출(印出)할 때를 기다리라 명하였다. 금상 3년에 비로소 이 책을 간행하여 세상에 공포하였다. 8대손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상서하여 유교(遺敎)를 따라 바로할 것을 청하니 금상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다시 편찬하도록 하였다. 거짓을 고쳐 실지로 삼으니 출처(出處)의 큰 대절(大節)이 명백하여져 유감 없이 되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高宗)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가 32년 부(府)로 승격시켰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인조(仁祖) 원년에 유수(留守)로 승격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4년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고 관청을 성안으로 옮기었다 수어사를 설치하여 광주(廣州) 등의 진(鎭)을 절제하게 하고 군무(軍務)는 목사(牧使) 겸 방어사(防禦使)가 보게 하였다. 11년에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고 15년에 부윤(府尹)으로 고쳤다. 효종(孝宗) 3년에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6년에 폐지하였다. 숙종(肅宗) 6년에 다시 겸하게 하였으나, 다시 폐지하였다. 9년에 유수로 승격(陞格)시키고 수어사를 겸하게 하고 또 경력(經歷)을 두었다. 전영(前營)을 여주(驪州)로 옮기고 16년에 다시 부윤을 두어 방어사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하였다. 전영장(前營將)을 두고 경력을 없앴다. 17년에 다시 수어부사(守禦府使)를 겸하게 하고 21년에 이를 폐지하였다. 영조(英祖) 26년에 수어사를 폐지하고 유수를 두어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으며, 경력을 두고 전영을 이천(梨川)으로 옮기었다. 35년에 유수와 경력을 폐지하고 수어사를 두어 경청(京廳)을 설치했는데, 부윤 겸방어사ㆍ전영장ㆍ수성장(守城將)은 옛과 같다. 정조(正祖) 19년에 유수로 승격하고 수어사를 겸하고 나가서 본성(本城)을 진무하게 하였다. 따라서 경청은 폐지하고 진을 여주로 옮겼다.
【관원】 유수(留守) 수어사를 겸한다. 판관(判官) 전영장ㆍ수어종사관(守禦從事官)을 겸한다. 검률(檢律)ㆍ의학(醫學) 각 1인.
【토산】 밤[栗]ㆍ앵도(櫻桃)ㆍ사과[林檎]ㆍ칠(漆)ㆍ자초(紫草 지초 뿌리는 염료(染料)로 쓰인다)ㆍ수철(水鐵)ㆍ석회(石灰)ㆍ실[絲]ㆍ목화[綿]ㆍ삼베[麻]ㆍ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은어[銀口魚]ㆍ잉어[鯉魚]ㆍ낭어(魚 숫게)ㆍ쏘가리[鱖魚]ㆍ누치[訥魚 잉어과에 속하는 민물 고기]ㆍ쏘가리[錦鱗魚 아름다운 물고기]ㆍ밀어(密魚 망둥과에 속하는 물고기) 압구정(押鷗亭) 앞 강에서 산출된다.
【궁실】 행궁(行宮) 상궐(上闕)ㆍ하궐(下闕)ㆍ좌전(左殿) 우실(右室) 등이 있다. 재덕당(在德堂)ㆍ한남루(漢南樓)ㆍ인화관(人和館)ㆍ사근평(肆覲坪)ㆍ행궁(行宮) 관해 좌승당(坐勝堂)ㆍ일장각(日長閣)ㆍ수어영(守禦營)ㆍ제승헌(制勝軒) 등이다.
【방면】 성안에 두 개의 동(洞)이 있다 남동(南洞)과 북동(北洞)이다. 경안(慶安)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10리이고 그 끝이 40리이다. 오포(五浦)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는 30리이고, 끝은 50리이다. 세촌(細村) 남쪽에 있는데 첫머리가 50리, 끝이 20리이다. 악생(樂生)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마지막이 40리이다. 돌마(突馬) 남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동부(東部) 동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끝이 30리이다. 서부(西部)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10리요, 마지막이 20리이다. 퇴촌(退村) 동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초부(草阜) 동쪽으로 첫머리가 30리, 끝이 60리이다. 도척(都尺)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이고, 끝이 70리이다. 실촌(實村)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50리, 끝이 70리이다. 초월(草月) 동남쪽으로 첫머리가 30리이고, 끝이 40리다. 중대(中垈) 서쪽으로 첫머리가 10리, 끝이 20리이다. 언주(彦州) 서쪽으로 첫머리가 20리, 끝이 40리이다. 구천(龜川)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20리요, 끝이 30리이다. 육왕(六旺)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15리요, 마지막이 30리이다. 의곡(義谷)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40리요, 끝이 60리이다. 왕륜(旺倫) 서남쪽으로 처음이 60리요, 끝이 70리이다. 북방(北方)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끝이 90리이다. 월곡(月谷) 서북쪽으로 첫머리가 70리요, 마지막이 80리이다. 성곶(聲串) 서남쪽으로 첫머리가 80리고, 마지막이 1백 리로 해변(海邊)이다.
【진도】 송파진(松坡津) 서북쪽으로 20리며, 삼전도(三田渡)와 무동도(舞童島)를 주관하는데 별장(別將)은 한 사람이다. 삼전도(三田渡) 서북쪽으로 25리이며, 옛날에는 도승(渡丞)이 있었는데, 송파(松坡)로 옮겼다. 광진(廣津) 북쪽으로 20리다. 마점진(麻岾津) 봉안(奉安) 동쪽으로 통하는데 25리이다. 신천진(新川津) 삼전도 북쪽으로 5리이다. 두미진(斗迷津) 동쪽으로 20리인데 그 북쪽 언덕은 두미천(斗迷遷)으로 돌길이며, 빈강 강 가로 따라 둘리기를 7, 8리이며, 동쪽으로 봉안을 향한다. 미음진(渼音津) 북쪽으로 30리인데, 양주(楊州) 편에 보면 자세하다.
【사원】 귀암서원(龜岩書院) 북쪽으로 30리인데, 현종(顯宗) 정미년에 건립하였고, 숙종(肅宗) 정축년에 액(額)을 내리었다. 이집(李集)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는 둔촌(遁村)이고 본관은 광주(廣州) 사람이며, 벼슬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다. 이양중(李養中) 자는 자정(子精) 호는 석탄(石灘)이고 광주(廣州) 사람인데 고려말에 벼슬은 형조 우참의(刑曹右參議)였다. 우리 태종이 즉위하여 부르니, 평민으로 와서 보거늘 특별히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승직하니 받지 않았다. 정성근(鄭誠謹) 자는 신(信)이고 진주(晉州) 사람으로 연산주 본관 갑자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승지요, 증직 이조 판서이다. 정엽(鄭曄) 자는 시회(時晦) 호는 수몽(守夢)이고 본관 초계(草溪) 벼슬은 좌참찬이며, 증직 우의정이고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오윤겸(吳允謙) 자는 여익(汝益)이며 호는 추탄(楸灘)이고, 본관 해주(海州) 사람이다.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임숙영(任叔英) 자 는 무숙(茂叔) 호는 소암(疎庵), 본관은 풍천(豐川)이다. 벼슬은 수찬(修攢)이고 부제학(副提學)이다.
○ 수곡서원(秀谷書院) 서쪽으로 20리이며 숙종(肅宗) 을축년에 세웠고 을해년에 액(額)을 내렸다. 이의건(李義健) 자는 의중(宜中) 호는 동은(峒隱)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벼슬은 공조 정랑이고 증직 집의(執義)이다. 조속(趙涑) 자는 계온(季溫) 호는 창강(滄江)이며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벼슬은 진선(進善)이며 증직 이조참판이다. 이후원(李厚源) 자는 사심(士深) 호는 우재(迂齋)이고 완산(完山)이다. 벼슬은 우의정이며 완남부원군(完南府院君)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현절사(顯節祠) 부성 안에 있다. 숙종 무진년에 세웠고 계유년에 액을 내렸다. 김상헌(金尙憲) 경도(京都) 태묘(太廟) 편에 보라. 정온(鄭蘊)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 증직 영의정(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 두 현인(賢人)은 강화부(江華府)에 보라. 오달제(吳達濟) 자는 계휘(季輝)이며 호는 추담(楸潭)이고 본관은 해주(海州)다. 벼슬은 교리요 증직 영의정이며,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능침】 정릉(靖陵) 선능(宣陵) 동쪽 산에 있는데 중종 대왕(中宗大王)의 능이며 기일은 11월 15일이다. □직장(直長)ㆍ참봉(參奉) 각 1인. 인능(仁陵) 헌능(獻陵)의 오른편 언덕에 있는데, 순조 대왕(純祖大王)의 능이다. 기일은 11월 13일이고, 처음에 장례(葬禮) 모신 곳은 교하(交河) 장릉(長陵) 국내(局內)인데, 철종(哲宗) 6년에 이곳으로 천장(遷葬)하였다.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도 이곳에 합장(合葬)하였는데, 기일은 8월 4일이다. □령(令)ㆍ참봉(參奉) 각 1인.


 

[주D-001]청광(淸狂) : 미친 것이 아니면서 미친 것 같은 것이다.
[주D-002]유선(儒仙) : 유학(儒學)하는 사람으로 신선의 풍치가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주D-003]교초(蛟綃) : 동해(東海)에 교인(蛟人 인어(人魚) 비슷한 것)이 비단을 짜는데 그 비단은 세상의 비단보다 곱다 한다.
[주D-004]노(魯) 나라……지으리요 : 노(魯) 나라에서 장부(長府 국가의 창고)를 새로 지으려 하니, 공자의 제자 민자(閔子)가 말하기를, “옛것을 그대로 수리하면 될 터인데 하필 고쳐 지으랴.”하였다.
[주D-005]《춘추》의…… 예(例) : 《춘추》의 필법(筆法)에 포(褒)하고 폄(貶)한 것이 있다.
[주D-006]바람이……많은가 : 당 나라 두목지(杜牧之)가 젊을 때 양주(揚州)에 놀러가서 어린 미인을 사랑하여, “내가 10년 만에 양주 자사(揚州刺史)가 되어 올 터이니, 그때까지 시집가지 말고 기다려라.”하였다. 그 뒤에 과연 양주 자사로 갔는데, 10년이 조금 넘었으므로, 그 여인은 벌써 시집가서 자녀(子女)까지 두었다. 두목지는 시를 짓기를, “꽃을 찾기 너무 더딘 것이 한이로다. 지금에는 바람이 흔들어 꽃이 떨어지고 푸른 잎이 그늘이 되고 열매가 가지에 찼구나”. 하였다. 아마 그때에 작자가 어느 여인과 관계가 있었던 모양이다.
[주D-007]저녁놀과 따오기[霞鶩] : 왕발(王勃)의 글 〈등왕각서(滕王閣序)〉에 , ‘낙하고목(落霞孤鶩)'이란 명구가 있는데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08]나귀를 거꾸로 타니 : 송 나라 시인 반랑(潘閬)이 나귀를 거꾸로 타고 화산(華山)의 경치를 구경한 일이 있다.
[주D-009]봉사(封事) : 임금에게 소(疏)를 올려 중요한 국사(國事)를 아뢸 때에, 밀봉(密封)하여 올리는 것을 봉사(封事)라 한다.
[주D-010]곡강(曲江) 누은(樓隱) : 당 나라 서울 부근에 곡강(曲江)이라는 명승지가 있다. 누은(樓隱)은 산중에 숨을 것 없이 강가의 누각에 숨었다는 뜻이다.
[주D-011]조화(造化) : 한명회가 정승이었으므로 만물을 기르는 조화(造化)에 비유한 것이다.
[주D-012]한 점……깨뜨리고 : 옛 시에, “백구(白鷗)는 날아서 푸른 산의 허리를 벤다.”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도 그 뜻을 모방한 것인데 빛이 희기 때문에 날아서 푸른 산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주D-013]강호(江湖)에서 서로 잊으니 : 《장자(莊子)》에, “사람은 도덕 가운데서 서로 잊고, 물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는다.”하였다. 그것은 제 몸과 저 사람의 몸이 있는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주D-014]동중서(董仲舒)의 장막 10년 : 한(漢) 나라 동중서가 장막을 내리고 그 속에서 글읽기에 부지런하여 10년 동안 전원(田園)을 돌보지 아니하였다.
[주D-015]하늘을……굴림 : 이것은 한명회가 세조(世祖)를 도와서 임금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주D-016]난지(蘭芝)를……차니 : 굴원(屈原)의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말로, 지초와 난초를 얽어서 패물로 한다는 뜻이다.
[주D-017]공명은……올랐네 : 한(漢) 나라 선제(宣帝)가 기린각(麒麟閣)에다 공신(功臣)들의 화상을 그렸다.
[주D-018]공명을……족하고 : 한 고제(漢高帝)가 공신들을 봉해 줄 때에 장량은 자원하기를, “내가 폐하(陛下)를 유(留)에서 처음 만났으니, 유후(留侯)로 봉하면 족합니다.”하였다.
[주D-019]몸이……띄웠는가 : 《장자(莊子)》에, 사람을 태운 배가 가다가 남의 배에 부딪치면 부딪침을 당한 배에서 노하고 꾸짖지마는, 빈 배가 부딪칠 때에는 꾸짖지 않는 것은, 빈 배는 무심(無心)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남과 시기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주D-020]창랑(滄浪) 노래 :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 “창랑수(滄浪水)가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수가 탁하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한 노래가 있다.
[주D-021]벼슬 바다 : 관계(官界)를 벼슬 바다[宦海]라 한다. 그것은 풍파가 많음을 뜻한다.
[주D-022]갈매기를……있으련만 : 이 시는 한명회가 벼슬을 좋아하고 욕심이 많음을 풍자한 것이므로, 현판(懸板)에 새기지 아니하였다.
[주D-023]얼새[鷁] : 배의 돛대 위에다 얼새 모양을 만들어 다는데, 그것은 이 새는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D-024]흰 구름은……줄거나 : 육조 시대(六朝時代)의 은사(隱士)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산중에 무엇이 있는가. 언덕 위에 흰 구름이 많네. 다만 나 혼자 좋아할 수 있고 임에게 가져다 줄 수 없다네.”하였다.
[주D-025]바릿대[鉢]에……것이요 : 육조(六朝) 시대에 주문을 외워서 용을 바릿대[鉢] 속에 들게 한 도승(道僧)이 있었다.
[주D-026]금을 펴고 지었는고 : 인도(印度)의 수달장자(須達長者)가 부처를 위하여 절을 지으려고 땅을 사려 하니 땅 주인이 팔기가 싫어서, “그 땅에 금을 가득 펴면 그만큼 땅을 팔겠다.”하니, 수달장자는 곧 금을 폈다.
[주D-027]태조를……만드시고 : 처음 나라를 창업(創業)한 것을 말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그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일으키기를 권하니, 그 아버지는, “집을 망치고 몸을 죽이는 것도 너 때문이요, 집을 변하여 나라를 만드는 것도 너 때문이다.”하였다.
[주D-028]구장(九章) : 장(章)은 무늬인데, 천자는 열두 가지 무늬[十二章]의 곤룡포를 입고 제후(諸侯)는 구장(九章)의 옷을 입는다. 무늬에 산(山)ㆍ쌀[米]ㆍ꿩[華蟲] 등이 있다.
[주D-029]역월(易月)의 복제 : 상복의 기간을 짧게 하는데 날로써 달과 바꾸어서 27일을 입는 것이다.
[주D-030]의방(義方) : 아비는 자식에게 옳은 도리[義方]를 가르쳐야 한다는 옛 글이 있다.
[주D-031]태종께서 정사(定社) : 태종(太宗)이 그의 아우인 세자(世子) 방석(芳碩)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것을 정사(定社)라 한다.
[주D-032]혁장(鬩墻) : 《시경》에, “형제가 담장 안에서는 서로 싸우다가도 바깥 사람의 침노함이 있을 때에는 함께 막는다.”하였다.
[주D-033]건(乾)의……법도로다 : 《주역》에 “건괘(乾卦)의 덕은 건(健)하고 이괘(離卦)의 덕은 밝은 것인데, 임금의 덕에 비하고, 곤괘(坤卦)의 덕은 유(柔)하고 후(厚)한데 후비(后妃)의 덕에 비한다.”라고 하였다.
[주D-034]자손이……기린(麒麟)이로라 : 《시경》에, “번성한 공자(公子)들이여, 아, 기린이로다.”한 구절이 있다.
[주D-035]비음기(碑陰記) : 비석의 후면에 따로 새기는 것을 음기(陰記)라 한다.
[주D-036]종명이정(鐘銘彝鼎) : 국가에 큰 공적이 있으면 종(鐘)과 솥[鼎]에 그 기록을 새겨서 영원히 전한다.



 

 
춘정집 제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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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명 증시 공정 조선국(有明贈諡恭定朝鮮國) 태종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헌릉(獻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신성한 자손을 낳게 하여 큰 운을 열고 길이 큰 복을 받게 한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이 일어남에 우리 태종으로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 손자가 되게 했으니, 아, 성대하도다.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한 일이다. 그것은 상(商) 나라 왕실에 성군이 이어서 일어난 것과 주(周) 나라 왕가에 태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이 삼가 왕실의 근원을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휘(諱) 한(翰)이 신라에 벼슬하여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6대를 내려와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했고, 13대에 이르러 태종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는데, 4대가 내리 작위를 세습하여 모두 선대(先代)의 아름다운 공렬을 계승하였다. 원 나라 정치가 이미 쇠하게 되자, 조부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겼으니, 공(功)과 인(仁)을 쌓음이 그 유래가 오래이다.
우리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1367, 공민왕 16) 5월 신묘에 태종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서 낳으시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드님이다. 태종은 나면서부터 신이(神異)하더니, 차츰 자라면서 영명하고 지혜로움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나, 글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했다. 나이 20세가 못 되어 고려의 과거에 급제했는데, 그때 고려의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가 위태로웠다. 개탄스러운 심정으로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했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 서울에 갔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1391, 공양왕 3) 9월에 신의왕태후께서 돌아가시니, 제릉(齊陵) 곁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을 마치고자 했는데, 임신년(1392, 공양왕 4) 봄에 태조가 서쪽 지방으로 행차했다가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살피며 시중들었다. 이때에 공양왕(恭讓王)의 신하가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들과 함께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태조를 추대하여 나라를 세우니,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갑술년(1394, 태조 3) 여름에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입조하도록 명하니, 태조께서는 우리 태종이 경서에 통하고 예법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에 응했다. 태종이 명 나라에 이르러서 황제의 뜻에 맞도록 잘 아뢰었으므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무인년(1398, 태조 7) 가을 8월에 태조가 편치 않으시자, 붕당(朋黨)을 만들어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하는 권신(權臣)이 있었다. 때문에 화가 곧 닥칠 다급한 상황이었으므로 태종이 기미를 밝게 살펴서 제거했다. 당시 종친(宗親)과 장상(將相)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했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대하여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건문(建文) 경진년(1400, 정종 2) 1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태종의 형제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했다. 박포만을 주벌하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시키는 벌에 처했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않았다. 공정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안정시킨 일이 다 우리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겨울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왕위를 전하고는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다음해 신사년(1401, 태종 1)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왕으로 봉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鴻臚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했다.
임오년(1402, 태종 2)에 지금의 황제 성조(成祖)가 즉위하였는데,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하례하자 황제가 충성을 가상히 여겼다. 다음해 계미년(1403, 태종 3)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그대로 왕으로 봉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 구장(袞冕九章)과 금단사라(錦段紗羅), 서적(書籍)을 내렸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각각 차등 있게 내렸다. 이로부터 황제가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 이르러 거르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1405, 태종 5)에 한양은 태조께서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정해년(1407, 태종 7)에 황제가 정조(正朝)에 하례하러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 국왕은 지성으로 대국을 섬긴다.” 했는데,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그 지성을 칭찬하였다.
무자년(1408, 태종 8) 5월에 태조가 승하하니 태종이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그지없이 하고, 상차(喪次)에 거처하면서 상례와 장례를 예에 따라 거행하였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리자 황제가 매우 슬퍼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로써 제사 지내게 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내렸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리고 후하게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1412, 태종 12) 겨울에 민간에 숨은 왕씨(王氏)의 후예가 있다는 상언(上言)이 있자, 담당 관사(官司)에서 죽이기를 청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이 일어남은 본디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살아남은 왕씨의 후예들을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했다.
갑오년(1414, 태종 14) 6월에 감로(甘露)가 함흥부의 월광구미리(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리고, 다음해 을미년(1415, 태종 15)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 덕산동(德山洞)에 내리니, 우리나라에서는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이 상서로운 일에 대하여 모두 전문(箋文)을 올려 하례했으나 태종은 받지 않았다.
무술년(1418, 태종 18) 6월에 세자 제(褆)가 패덕(敗德)하다는 이유로 폐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며 효도하고 우애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어서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명 나라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했다. 이해 8월에 태종이 우리 전하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했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부왕에게 성덕신공 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를 올렸다.
이듬해 기해년(1419, 세종 1) 1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鴻臚寺丞) 유천(劉泉) 등을 파견하여 고명을 보내와서 우리 전하를 봉하여 왕으로 삼았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 유정현(柳廷顯)과 찬성 신 이종무(李從茂) 등에게 명하여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우리나라를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태종에게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 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했도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도 잔치를 하사했는데, 칙서의 대략에, “경의 부왕이 독후(篤厚)하고 노성(老成)하여 천도를 삼가 공경했으니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다.” 하였다. 9월에 공정왕(恭靖王)이 승하하니 태종이 참최복(斬衰服)을 입어 거상(居喪) 기간을 달 대신 날로 계산하는 역월(易月)의 상제(喪制)를 마쳤다. 명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부음을 알렸더니, 이듬해 4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이란 호를 올릴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돌아가셨는데, 우리 전하께서 너무도 애통해하여 몸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역월의 제도를 따를 것을 명했으나, 전하께서 울며 굳이 사양하니 장사 지낸 뒤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했다. 9월 임오에 태후를 광주(廣州)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獻陵)이라고 했다.
신축년(1421, 세종 3) 가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과 금보를 받들고 태상왕이란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에게 여쭈어서 원자- 문종(文宗) 휘(諱) - 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은 세상에 드물게 나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고,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사직의 신을 감격시켰다. 사대(事大)에 있어서는 천자가 그 지성을 칭찬하고, 교린(交鄰)에 있어서는 왜국이 그 도가 있음에 복종했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재용을 절약했다. 덕(德)과 예(禮)를 앞세우고 형벌을 신중히 했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했으며, 고금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했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했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혁파하니 모든 일이 다 일신되었고,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물산은 풍성했다. 제왕의 도가 실로 성대하니, 하늘로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아 두 번이나 감로(甘露)가 내리는 상서를 얻음이 당연하다.
임인년(1422, 세종 4)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5월 병인에 이궁(離宮)에서 승하하시니,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를 들기를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삼년상을 행할 것을 정하고 역월의 제도를 쓰지 않았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19년 동안 왕위에 계셨다. 왕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며 휴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대소 신료들로부터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목놓아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어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과 같이 했다. 아, 슬프다. 이해 9월 2일 병진에 존호(尊號)를 올려 ‘성덕신공문무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는 ‘태종’이라고 했다. 6일 경신에 원경왕태후의 능에 합장하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명 나라에 부고가 알려지자, 황제가 슬퍼하여 조회를 멈추고, 특별히 예부 낭중 양선(楊善) 등을 보내와 사제(賜祭)했는데, 그 제문의 대략에, “왕은 독후(篤厚)하고 지성(至誠)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賢達)하여, 공경으로 조정을 섬김에 있어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도다. 부음이 멀리서 들리니 실로 슬픈 감회가 깊도다.” 하고, 또 고명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했다. 또 전하에게 부의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렸다. 대체로 우리 태종의 성대한 공덕과 전하의 지극한 효성이 앞뒤로 서로 이어져서 천자의 마음을 잘 받들었기 때문에 시종(始終)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했던 것이다.
중궁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閔氏)이니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를 거쳐 고조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 시랑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공이 증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頔)을 낳고, 문순공은 조부 대광(大匡) 여흥군(驪興君) 휘 변(抃)을 낳고, 대광공은 부친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霽)를 낳았다. 모친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봉해졌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璿)의 따님이니, 선을 쌓음으로써 경사가 전해져서 맑은 덕이 있는 태후를 낳게 되었다.
태후는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시집갈 나이가 되자 우리 태종의 배필이 되었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구제하려는 뜻이 있어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으나, 태후는 검소하게 집안을 꾸려나가고 음식을 장만하는 일도 삼감으로써 태종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했으며, 많은 아들을 가르쳐서 의(義)를 따르게 하고, 첩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능히 부인의 도리를 극진히 했다.
홍무(洪武) 임신년(1392, 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해졌다.
무인년(1398, 태조 7)에 태종이 사직을 안정하게 할 즈음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했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대사를 이루게 했다.
경진년(1400, 정종 2) 봄에 정빈(貞嬪)에 봉해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면서 정비(靜妃)에 봉해졌다.
영락(永樂) 계미년(1403, 태종 3)에는 명 나라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는데, 이해부터 정유년(1417, 태종 17)까지 모두 다섯 번이나 황제의 하사를 받았다.
무술년(1418, 태종 18) 겨울에 우리 전하가 존호를 올려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라 하였다.
경자년(1420, 세종 2)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춘추 56세였다.
태후는 한아(閒雅)하고 정정(貞靜)한 덕을 타고나 능히 태종의 배필이 되어 내치(內治)에 전심했다. 20년 동안 왕비로서의 위의는 엄숙하고, 또 성자(聖子)를 낳아서 종사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승하하기에 이르러 빈(嬪)과 시첩(侍妾)들이 마음을 다해서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부인의 법칙과 모후의 위의가 지극했도다.
4남 4녀를 낳았는데,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바로 제(褆)이고, 다음은 보(補)인데 효령대군(孝寧大君)에 봉해졌고, 다음은 종(褈)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에 봉해졌는데 먼저 죽었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權跬)에게 시집갔는데 또한 먼저 죽었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1녀를 낳았는데, 정혜옹주(貞惠翁主)이니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가 3남 7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인()이니 공녕군(恭寧君)에 봉해졌고, 나머지는 어리며, 맏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정숙옹주(貞淑翁主)이니 월성군(月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가 1남 3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비(裶)이니 경녕군(敬寧君)에 봉해졌다. 고씨(高氏)가 1남, 최씨(崔氏)가 1남 1녀, 이씨(李氏)가 1남, 김씨(金氏)가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우리 중궁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 온(溫)의 따님이다.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은 김한로(金漢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효령(孝寧)은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정역(鄭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성녕(誠寧)은 전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성억(成抑)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는 1녀를 낳았는데, 용양시위사 호군(龍驤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疄)에게 시집갔고 물론 같은 이씨는 아니다. 경정공주(慶貞公主)는 4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돈녕부 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仲淹)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담(聃)이니 한성 소윤(漢城少尹) 정연(鄭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경녕(敬寧)은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을 낳았는데, 다 어리다. 공녕(恭寧)은 병조 참판 최사강(崔士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녀를 낳았는데, 다 어리다.
신이 삼가 살펴보니, 우리 태종의 성대한 덕과 높은 공이 실로 이미 역대의 제왕을 크게 능가하였으나 배필의 현숙함과 내조의 공이 또한 촉도(蜀塗),신지(莘摯)와 일치하는 점이 있다. 많은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에 명(銘)을 새겨서 길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원하니, 전하께서 이 일을 신 계량에게 명하셨다. 신 계량은 명을 받고 나서 조심스럽고 두려워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머리를 조아려 명을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해동을 사랑하여 / 天眷海東
우리의 태종을 내려주시니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써서 쉬지 않는 태종이여 / 亹亹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능히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사신 가서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陳奏)하니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형을 높여 보위에 오르게 하니 / 嫡長是尊
비록 형제간에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䦧墻
우애 오히려 도타웠으니 / 友愛猶惇
효성과 우애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 드물었네 / 從古罕聞
오직 덕을 후하게 하고 / 惟德之厚
오직 공에 힘썼으니 / 惟功之懋
하늘의 살핌이 매우 밝아 / 天鑑孔昭
이에 거듭 보우해 주셨네 / 式申保佑
빛나는 금보가 / 煌煌金寶
찬란하게 비춤에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誥命) 거듭 내리니 / 帝誥荐臻
내 곧 은총을 받았네 / 我乃龍受
선왕의 훈계를 따라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문채가 빛나네 / 煥乎郁郁
상을 당해 여막에 거처하며 / 遭喪居廬
애모가 망극하고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식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명 나라를 섬기시니 / 祗事朝廷
황제는 그 지성을 칭찬했고 / 帝稱至誠
엄숙하게 제사를 받듦에 / 肅肅承事
신명이 감응하였네 / 感于神明
교린에 도가 있으니 / 交鄰有道
왜국이 와서 복종하였고 / 倭邦來庭
왕씨의 후예를 보살펴 / 存䘏王裔
편안히 살도록 했으니 / 俾遂其生
중외가 다스려져 태평하여 / 中外乂安
억만 년 길이 드리우리 / 垂億千齡
윤택한 감로가 / 浥浥甘露
해마다 함흥부에 내렸고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 폐하고 덕 있는 아들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영년토록 향수(享壽)하여 / 期享永年
상왕으로 계시길 기약했더니 / 父臨下土
어찌 하늘에 오르기를 재촉하여 / 何促賓天
한 질병이 낫지 않았던가 / 一疾莫愈
애달프도다 성자여 / 哀哀聖子
슬픔을 비길 데 없어 / 慟悼無比
사흘 동안 수라를 그치고 / 撤膳三日
상심으로 몸이 손상함을 견디지 못했네 / 不勝摧毁
거상(居喪) 중의 모든 절차 / 凡百喪事
오직 예대로 이행하니 / 惟禮之履
황제가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신을 보내 사제(賜祭)했네 / 遣使以祀
시호를 주어 포숭하고 / 贈諡褒崇
부의(傅儀)를 후하게 내리니 / 賜賻優隆
황제의 조문하는 예가 구비되매 / 恤典之備
기쁨이 신하들에게 넘쳤네 / 喜溢臣工
엄정하신 태후여 / 思齊太后
진실로 엄숙하고 화순하니 / 允也肅雝
사직의 안정을 가만히 도와 / 密贊定社
능히 총명한 성군의 짝이 되었네 / 克配亶聰
돈독히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의 주인 되게 하셨네 / 俾主宗祐
하늘처럼 굳세고 명철함은 / 乾健离明
공정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덕하고 유정함은 / 坤厚柔貞
원경왕후의 법칙이니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실이 좋으시고 / 琴瑟以友
죽어서는 같이 장사 지냈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아, 기린같이 인후하여 / 吁嗟其麟
끊임없는 종묘사직 / 綿綿宗社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명(銘)을 바쳐서 / 臣拜獻詞
옥돌에 새기노니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되지 않고 / 萬代不磨
우리 동방에 밝게 빛나리라 / 昭我東垠
비음(碑陰)은 윤회(尹淮)가 기록했다.

[주D-001]촉도(蜀塗) : 촉산씨(蜀山氏)와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말한다. 황제(黃帝)가 그 아들 창의(昌意)를 촉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여 고양(高陽)을 낳았는데 이가 제곡(帝嚳)이다. 또 하(夏) 나라 우왕(禹王)이 도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계(啓)를 낳았다.
[주D-002]신지(莘摯)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신(莘)에서 맞이하여 무왕(武王)을 낳은 후비 태사(太姒)와 태왕(大王)이 지(摯)에서 맞이하여 문왕을 낳은 후비 태임(太任)을 말한다.

 
춘정속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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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록(附錄)
태종실록

○ 7년 4월 22일(병오).
인정전(仁政殿)에 임어하여 친시(親試) 문과(文科)를 방방(放榜)하였는데,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변계량(卞季良)은 을과(乙科) 제1등을 하사하고, 예조 참의에 초배(超拜)한 다음, 홍패(紅牌)와 꽃[花]ㆍ일산[蓋]을 주어 사흘 동안 유행(遊行)토록 하였다. 그리고 전지(田地) 20결(結)을 하사하고, 또 각각 본향(本鄕)의 노(奴)와 비(婢) 1명씩을 하사하였다.
○ 7년 8월 25일(병오).
중월부시(仲月賦詩)에 관한 법을 시행하였는데, 권근(權近)의 말에 따른 것이다. 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권근(權近),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성석인(成石因) 등이 관각(館閣)의 제학(提學) 2품 이상과 함께 예문관에 모였다. 시(詩)와 표(表) 두 가지의 제목을 내고, 시직(時職)ㆍ산직(散職) 3품 이하 문신으로 하여금 각각 사가(私家)에서 글을 지어서 3일 안에 바치게 하였는데, 예조 참의 변계량이 1등을 하였다. 이후부터 매번 봄과 가을 중월이 되면 상례(常例)로 삼아 거행하였다.
○ 8년 1월 29일(무인).
예조 참의 변계량과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유백순(柳伯淳)을 생원시의 시원(試員)으로 삼았다.
○ 8년 10월 25일(기해).
변계량을 겸좌우보덕(兼左右輔德)으로 삼았다.
○ 8년 11월 9일(계축).
길창군(吉昌君) 권근(權近)이 대간(臺諫)의 직임 사목(職任事目)을 올리고, 상언(上言)하기를, “이달 7일에 예조 참의 변계량과 정랑(正郞) 장빈(張贇) 등이 왕지(王旨)를 삼가 받들었는데, 신(臣) 권근과 더불어 대간의 직임 사목을 함께 상고하여 조목조목 열거해서 올리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 9년 3월 20일(계해).
우보덕 변계량 등이, 세자에게 활쏘기를 일찍 익히게 하도록 다시 간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9년 윤4월 13일(을묘).
변계량을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로 삼았다.
○ 9년 8월 10일(기유).
변계량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이는 대개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해서이다.
○ 9년 8월 29일(병인).
왕지(王旨)를 의정부에 내려 운운하였다. -원집(原集)에 보인다.- 상이 제학(提學) 변계량을 불러 내전(內殿)에 들어오게 하고, 즉시 명하여 글을 짓게 하였다.
○ 10년 1월 11일(무인).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河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유관(柳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정이오(鄭以吾)ㆍ변계량이 비로소 《태조실록(太祖實錄)》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 10년 6월 19일(갑인).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직사(職事)에 나올 것을 명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형조(刑曹)의 원리(員吏)가 신 때문에 죄를 얻어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풀어 주소서.” 하였는데, 회답하지 않았다.
○ 10년 6월 22일(정사).
예문관 제학 변계량이 전(箋)을 올려 사직(辭職)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전에,
“몸에 질병이 심하여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구차하게 형벌을 면하는 것은 선비가 편하게 여길 바가 아니며, 작은 그릇은 차기가 쉬운 법인데 지나치게 성은(聖恩)을 입었습니다.”
하였는데, -원집에 자세히 보인다.- 상이 다 보고 나서 전을 승정원(承政院)에 내리며 이르기를,
“내가 요점을 알지 못하겠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여러 대언(代言)이 아뢰기를,
“이 전은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것은 신들이 모두 아는 바이고, 형벌은 구차히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바른 대로 결단할 뿐입니다. 또 외로운 뿌리가 서기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어찌 성조(盛朝)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리 생각한다. 경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하고, 그 전을 돌려보냈다.
○ 10년 7월 12일(정축).
예조(禮曹)에 명하여 고(故) 왕사(王師) 묘엄 존자(妙嚴尊者)에게 시호를 더하고, 또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앞에 보인다.- 묘엄은 곧 무학(無學)이다. 상이, 상왕(上王)께서 그를 존중하고 신뢰하여 극력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10년 8월.
문묘(文廟)에 비(碑)를 세웠다. 비문(碑文)에 운운하였다. -원집에 보인다.-예문관 제학 변계량이 지은 것이다.
○ 11년 9월 27일(을유).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전지 20결(結)을 내려주었다. 그 사패(賜牌)에 이르기를, “내가 정해년 4월에 친히 유신(儒臣)을 시험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여 10인을 뽑았는데, 경(卿)이 을과(乙科) 제1인(第一人)에 뽑혔다. 내가 그대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전지 20결, 노(奴) 1인, 비(婢) 1인을 내려주니, 경은 자손에게 상전(相傳)하라.” 하였다. 제2인(第二人) 이하도 모두 패(牌)와 전지를 받았는데, 전지의 수에 차등이 있었다. 이 전지와 노비는 당초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였을 때에 이미 주었던 것인데, 그 뒤에 의례로 준 전지는 환수(還收)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 12년 3월 22일(병오).
변계량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으로 삼았다.
○ 12년 6월 26일(기묘).
검교판한성부사(檢校判漢城府事) 변계량이 전(箋)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전에 운운하였는데, -앞에 보인다.- 상이 그 글을 보고 돌려주면서 다시 직사에 나오라고 명하였다. 사헌부를 불러 전지를 내리기를, “비록 성인(聖人)일지라도 작은 허물이 있는 것을 면치 못하는데, 더구나 그보다 못한 일반인이겠는가. 만일 지금 변계량을 파직하면 문한(文翰)의 임무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12년 9월 15일(정유).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광화문루(光化門樓)의 종명(鍾銘)을 짓게 하였는데, 그 글에 운운하였다. -원집에 보인다.-호조 판서 한상경(韓尙敬)이 이 글을 썼다.
○ 14년 2월 26일(경오).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남재(南在),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변계량, 예문관 제학 김여지(金汝知)에게 명하여 회시(會試)를 맡아서 신생원(新生員) 조서강(趙瑞康) 등 33인을 뽑았다. 권도(權蹈), 성개(成槩), 이하(李賀), 이수(李隨)는 모두 조사(朝士)인데, 아무도 시험에 합격한 자가 없는 것을 보면, 시험을 공정하게 관장하였음을 알 만하다.
○ 15년 1월 26일(을축).
변계량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 15년 1월 28일(정묘).
세자빈객(世子賓客) 이내(李來)와 변계량을 경연청(經筵聽)에서 인견하였는데, 사람들을 물리치고 하교하기를,
“근간에 보니, 세자가 간사한 소인(小人)들을 가까이하는데 경들의 직분이 세자를 인도하는 데에 있거늘 어찌 간언하여 그치게 하지 않는가. 사우(師友)를 설치한 것은 바로 덕성(德性)을 함양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도리를 배우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이 네 가지 가운데 과연 하나라도 있는가?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는 없으나, 학문을 함양하는 것으로 말하면 도무지 공효가 나지 않으니, 경들이 마땅히 잘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이내등이 황공하여 마침내 이사(貳師) 유창(劉敞), 빈객(賓客) 민여익(閔汝翼)과 함께 서연관(書筵官)을 거느리고 동궁(東宮)으로 나아가 상이 명하신 것을 모두 말씀드리고, 인하여 전후에 실덕(失德)한 것을 낱낱이 들어 말하였다. 유창이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슬픔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말이 간절하니, 민여익과 변계량 등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세자가 부끄러워하면서 사죄하였다.
○ 15년 6월 7일(임신).
상이 장무(掌務)를 불러 명하기를, “내가 즉위한 이후로 자주 가뭄을 만났지만 금년이 더욱 심하다. 가뭄이 들게 된 이유를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하고, 전 대제학 정이오(鄭以吾)와 예문관 제학 변계량의 집으로 주서(注書)를 보내서 비가 내릴 시기를 점쳐 보게 하였다.
○ 15년 6월 10일(을해).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의 집에 가서 동전법(銅錢法)을 의논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포백(布帛)으로 세(稅)를 거두는 것은 중국 명왕(明王)의 유법(遺法)인데, 오늘날 30분의 1을 세로 받으면서 20장(張)에 차지 못하는 것을 종이로 환산하여 거두도록 하니, 어린아이 장난과 같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동(銅)ㆍ철(鐵)ㆍ연(鉛)ㆍ석(錫) 4등(等)의 전법(錢法)이 있으므로, 이제 이 법을 시행하려 한다. 그러면 포백으로 세를 거두는 것보다 편리하고, 제사고기[脁]를 기화로 삼는 근심도 없어질 것이다. 다만 몰래 돈을 주조(鑄造)할까 염려되지만 마땅히 주조를 금지하는 영(令)이 있을 것이고, 또 옛날에 포(布)를 사용할 때에도 백성들이 직조(織造)하는 것을 들어주었으니, 비록 돈을 몰래 주조한다 하더라도 어찌 문제가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는데, 변계량이 가서 상의 뜻을 전하니, 하륜이 아뢰기를,
“중국 조정의 저폐(楮幣)는 1000문(文)에 준하는 것 외에 또 900문에서 100문짜리까지 있으므로 당초에 저폐를 시행하도록 건백(建白)하였을 때에 역시 계속해서 작은 저폐를 주조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날 대초(大鈔)를 1000문에 준하게 하고, 차츰 이를 줄여서 10단위로 하여서 900문에서 100문에 이르기까지 9개 등급의 저폐를 만들면, 포백으로 세를 거두는 것보다 편리할 것이고, 또 민간에서 되[升]를 헤아려 매매하는 것보다 더욱 이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변계량이 복명(復命)하자, 다음날 육조가 이에 대한 의견을 진달하였다. 이어서 환관(宦官) 최한(崔閒)에게 명하여 작은 저화(楮貨)를 만드는 것이 편리한지의 여부에 대하여 승정원에 왕복하며 논란(論難)하도록 하고, 또 묻기를,
“작은 저화의 신문(信文)은 어떤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지신사 유사눌(柳思訥)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전에 동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관(錢貫)의 다소로써 저화의 신문을 삼았습니다. 만약 쌀되[米升]로써 계산하면, 쌀값이 수시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본국에서는 이미 포필(布匹)로써 저화의 신문을 삼고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포필의 척수(尺數)로써 그 등급을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즉 35척을 상한으로 하여 3척씩 낮추어 9등급으로 나누면 거의 사용하기에 편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영수(零數)가 있어서 추이(推移)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오늘날 저화 1장을 가지고 종이 60장을 사며, 1되의 쌀을 가지고 종이 6장을 살 것 같으면, 세(稅)를 부과하는 법은 목면(木綿) 1필에 종이 30장을 거두고, 정5승포(正五升布) 1필엔 종이 10장을 거두게 하소서. 지금 정5승포 1필에 종이 12장을 거두게 되면 너무 많고, 만약에 이를 감해서 받는다면 작은 양처럼 보여도 이것이 쌓이면 많은 양이 될 것이므로 이익을 너무 많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진실로 돈을 주조하여 사용함으로써 낱낱이 세를 거두도록 한다면 무엇보다 편리하고 또 정돈될 것입니다.”
하고, 좌대언(左代言) 탁신(卓愼)이 아뢰기를,
“대초(大鈔) 외에 10분의 1에 해당하는 소초(小鈔)를 만들어 단지 대소(大小)로써만 사용하게 한다면, 거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간악한 상인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며, 또 사용하기에도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좌부대언(左副代言) 조말생(趙末生)은 하륜의 말에 따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넘치거나 부족한 물건은 세를 거두는 예(例)에 들어 있지 않아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할 수 없었다. 상이 최한에게 명하여 선포하기를,
“내가 《문헌통고》를 승정원에 내려보내서 동전의 주조법을 자세히 상고하도록 하려 한다. 또 생각건대, 고려조(高麗朝) 500여 년 동안 이 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고, 태조(太祖)도 일찍이 이 법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 민중의 원망을 사려 한다는 말인가. 세를 거두는 법을 역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의 뜻은 대체로 초법(鈔法)은 백성들이 즐겨 쓰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동전을 사용해서 백성들을 길들여 개정하려고 한 것이다. 유사눌이 이것을 찬성하였다고 한다.
○ 15년 12월 15일(무인).
춘추관(春秋館)에 왕지(王旨)를 내렸다. 하루 전에 상이 의정부 참찬 황희(黃喜), 이조 판서 박은(朴訔), 지신사 유사눌에게 명하여, 민씨(閔氏)가 음참(陰慘)하고 교활하여 원윤(元尹) 이비(李裶)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 모자를 사지(死地)에 둔 죄를 갖추 써서 왕지를 내리고자 하다가, 제술(製述)한 것이 뜻에 맞지 않아서 하지 않았다. 박은이 아뢰기를,
“인신(人臣)이 비록 음식을 대했을 때에도 인군이 다수(多壽)하고 다남(多男)하기를 축원하는데, 왕자가 태어난 날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왕지는 내리지 않았더라도 신들이 이미 들었으니, 감히 잠자코 있으면서 전지를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다시 헤아려 보겠다.”
하였다. 이틀 후에 경승부 윤(敬承府尹) 변계량을 불러 왕지를 짓도록 한 다음,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운운하였다. -앞에 보인다.- 왕지가 이미 내려지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이숙번(李叔蕃)이 왕지를 적어 대간(臺諫)에 이문(移文)하고자 하였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륜이 지체하자, 이숙번이 위협적으로 하륜을 충동하니, 하륜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 16년 4월 17일(기묘).
경승부 윤 변계량에게 수문전 제학(修文殿提學)을 가자하였다. 좌의정 하륜이 변계량에게 위촉하여 그의 선묘(先墓) 신도비(神道碑)에 명문(銘文)을 짓게 하고, -원집에 보인다.- 박희중(朴熙中)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였다.
○ 16년 6월 1일(신유).
경승부 윤 변계량이 상서(上書)하여 운운하였다. -원집에 보인다.- 상이 자못 옳게 여기고, 곧 《책부원귀(冊府元龜)》를 조계청(朝啓廳)에 내다가 거기에 실린 “천자(天子)는 천지(天地)에 제사하고, 제후(諸侯)는 산천(山川)에 제사한다.”라는 말을 제시하니, 육조판서 및 대언(代言) 등이 아뢰기를, “이것은 예(禮)의 상전(常典)입니다. 한재(旱災)를 만나서 하늘에 비는 것도 가한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변계량에게 제문(祭文)을 짓도록 명하고, 자책하는 뜻으로 유시하기를 매우 자세하게 하였다. 변계량이 지어서 바친 글이 뜻에 맞으니, 구마(廏馬) 1필을 하사하였다.
○ 16년 8월 15일(갑술).
문과와 무과를 경회루(慶會樓) 아래에서 친시(親試)하고, 상왕(上王)을 모시고 지켜보았다. 진산부원군 하륜, 예조 판서 조용(趙庸), 예문관 제학 변계량, 지신사 조말생(趙末生),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이적(李迹) 등에게 명하여 문과시(文科試)를 관장하였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를 모두 응시하게 하였다.
○ 16년 9월 7일(을미).
세자빈객 변계량 등이 대궐에 나아가서 세자에게 《중용(中庸)》을 진강(進講)하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자식을 바꾸어서 가르쳤고 또 이미 장성하였으니, 나는 가르칠 수가 없다. 경들이 《중용》을 가르쳐서 그 뜻을 통하게 하여 마음과 하나가 되게 하라.” 하였다.
하루는 필선(弼善) 정초(鄭招) 등이 세자전(世子殿)에서 매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내보내기를 청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이것은 하찮은 물건이다. 내가 이것을 가지고 말을 달려 사냥을 하기 위함이 아니고, 다만 두고 보려는 것일 뿐이다. 빈객(賓客)에게는 고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지금의 주상(主上)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니, 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누차 서연(書筵)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하여 세자를 격려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고 있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아무 글을 읽는다.”라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탄미하였다.
○ 16년 10월 11일(기사).
빈객 변계량 등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강무(講武)하러 가면서 세자를 데리고 가고자 했더니, 세자가 남아서 학문하기를 청하였다. 어떠한가?”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치란(治亂)이 무상(無常)하니, 무사(武事)를 배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듣건대, 세자의 활 솜씨와 말타는 솜씨가 이미 능하다고 하니, 남아서 학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아 있도록 하라.” 하였다.
○ 17년 1월 18일(을사).
예조 판서 맹사성(孟思誠), 예문관 제학 변계량 등이 생원시를 관장하여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다.
○ 예문관이, 춘등(春等)과 추등(秋等)에 제술(製述)하는 법에 대하여 상언하기를, “봄과 가을로 제술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제술하는 기한을 3일을 넘기는 것은 너무 느슨한 듯하니, 이제부터는 봄과 가을 중월(仲月)의 아일(衙日)에 관각(館閣)과 양부(兩府) 이상이 세 차례 의정부에 모여 율시(律詩)의 제목을 내어 그날 오시(午時)까지 짓게 하고, 고시(古詩)도 그리하게 하소서. 표(表)와 전(箋)은 미시(未時)까지 시권(試券)을 거두어서 그 고하(高下)를 매기고, 전함(前銜) 3품부터 4품까지는 예문관의 조방(朝房)에, 5, 6품부터 참외(參外)까지는 성균관의 조방에 모여서 제술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제학 변계량과 좌의정 박은의 뜻이었다.
○ 17년 3월 16일(임인).
영의정 남재(南在), 예조 판서 맹사성, 예문관 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문과(文科)를 시험하게 하였다. 남재 등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시험에 응시한 사람들에게 백일장(白日場)을 한다고 하고는 삼관(三館)이 대수롭지 않은 과실을 이유로 오래도록 문 밖에 세워 두니 매우 법도가 없는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벼슬에 나갈 수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명백히 윗사람에게 보고하여 정거(停擧)하게 하고, 그 나머지 대수롭지 않은 과실을 범한 사람들은 문에 세워 두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7년 2월 15일(임신).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 전 소윤(小尹) 권보(權堡), 악공(樂工) 이법화(李法華), 환자(宦者) 김기(金奇) 등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악공 이오방(李五方)이 동궁(東宮)에 잠입하여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의 자색(姿色)과 재예(才藝)가 모두 출중하다고 칭찬하니, 세자가 즉시 이오방으로 하여금 그녀를 데려오게 하였다. 이오방이 이에 그 무리 홍만(洪萬)과 더불어 곽선 생질녀의 남편 권보(權堡)에게 청하니, 권보가 말하기를,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의 첩 계지(桂枝)를 시켜 어리에게 말하였는데, 어리가 응하지 않았다. 이법화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신물(信物)을 보내는 것만 못합니다.” 하여, 즉시 소환(小宦)을 시켜 비단 주머니를 가져다 주게 하였는데, 어리가 사양하자 억지로 두고 돌아왔다. 어리가 이 일을 곽선의 양자(養子) 이승(李昇)에게 알리고 그대로 그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법화가 달려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자, 세자가 소수(小竪)를 거느리고 대궐 담을 넘었다. 도보로 이오방의 집에 들러 그와 함께 이승의 집으로 간 다음 어리를 찾았다. 이승이 듣지 않자, 강요한 뒤에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어리와 함께 이법화의 집에 가서 자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들여 놓았다. 세자는 이승에게 활을 보내고, 어리도 이승의 처에게 비단을 보냈는데, 이승이 활만 받고 비단은 받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에게 계문(啓聞)하려 하자, 세자가 사람을 시켜 힐문하기를, “너는 내가 한 일을 헌부나 형조에 고할 것이냐? 그래 어디에다 고할 것이냐?” 하니, 이승이 두려워하여 계문하지 못하였다.
마침 전별감(殿別監)소근동(小斤同)은 본래 김한로(金漢老)의 가노(家奴)인데, 무수리종[水賜婢]과 서로 희롱한 일이 있었다. 김한로가 이를 알고 아뢰기를, “소근동이 범한 죄가 있으니, 그 죄를 물으소서.” 하니, 상이 내관(內官) 최한(崔閒)에게 명하여 심문하게 하였다. 소근동이 겁이 나서 가리키는 바를 알지 못하여 어리의 일을 가지고 대답하니, 상이 그 말을 듣고 대단히 노여워하여 즉시 이승을 불러 그 까닭을 물었다.
이승이 고하기를,
“작년 섣달에 신이 가족을 데리고 곽선이 사는 적성현(積城縣)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어리가 서울에 사는 친족을 보고 싶다고 말하니, 곽선이 이를 허락하므로 즉시 신과 함께 왔었습니다. 며칠 있다가 신더러 말하기를, ‘근자에 기이한 일이 있다. 계지(桂枝)가 처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너를 보고자 한다.」고 말하더니, 뒤에는, 「세자가 너를 보고자 한다.」고 말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다. 더구나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라고 하였다.’ 하기에, 신이 놀라서 여종을 시켜 권보(權堡)의 집으로 가서 계지가 중매한 일을 말하게 하였더니, 권보가 대답하기를, ‘근일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으니,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기에 종을 불러 내다보게 하였더니, 바로 환관 김기(金奇)였습니다. 김기가 말하기를, ‘세자께서도 오셨다.’ 하기에, 신이 이 말을 듣고 황급히 의관을 차리고 나가 뵙고 엎드렸더니, 세자께서 말씀하기를, ‘속히 어리를 데려 오라.’ 하시므로, 제가 부득이 그 말을 따랐습니다. 세자가 데리고 가신 뒤로는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하여, 상이 이르기를,
“이 같은 큰일을 어째서 계문하지 않았느냐?”
하니, 이승이 대답하기를,
“처음에 계문하고자 하였으나, 권보가 와서 말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계달(啓達)하는 것은 속담에 이른바, 누이 주고 형에게 호소한다는 격이다.’ 하기에, 신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즉시 계달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조말생(趙末生)에게 명하여, 이승에게 편(鞭) 100대를 때리고 그 직첩(職牒)을 거두게 하였다. 또 권보를 소환하여 이를 물었더니 숨기고 고하지 아니하므로 모두 의금부에 내리고, 참찬 윤향(尹向), 우부대언(右副代言) 목진공(睦進恭)에게 명하여 형조와 대간과 함께 한자리에 모여서 다스리게 하였다. 지사(知事) 김사문(金士文)을 공주(公州)로 보내어 이오방을 잡아 오게 하고, 도사(都事) 양질(楊秩)을 경성(鏡城)에 보내어 구종수(具宗秀)를 잡아 오게 하였다. 삼군 진무(三軍鎭撫) 인인경(印仁敬)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니, 인인경은 동궁문(東宮門)을 파수함에 조심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의정부ㆍ육조(六曹)ㆍ대간에 명하여, 권보, 이승, 이오방, 이법화의 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만약 세자가 복을 누리기를 바랐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세자로 하여금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 것이니, 반역(叛逆)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세자가 착한 일을 하도록 하신 뜻을 생각하지 않고, 세자의 일시적 쾌락만을 얻게 하려고 했으니, 그들이 상께 불충한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청컨대, 율(律)에 따라 시행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세자의 전후 좌우가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면 세자께서는 충분히 천선개과(遷善改過)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은 옛사람의 언론과 다름이 없다.” 하였다.
여러 신하가 모두 나가는데, 상이 조말생과 이원(李原)을 머물게 하여 의논하기를, “세자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태갑(太甲)을 내쫓던 고사(古事)를 본받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세자께서는 본래 천질(天質)이 아름다우니, 만약 뜻을 맞춰 주는 자들을 제거하고 정직한 사람을 골라 가르치게 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사인(舍人) 심도원(沈道源)을 박은(朴訔)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이승 등의 죄를 의논하게 하니, 박은이 아뢰기를, “신이 그전에 구종수를 논했을 때, 만약 신의 말을 좇아 일찍 구종수를 참(斬)하였다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은, ‘이승 등의 마음에는 상(上)이 없다.’라고 여겼는데, 상이 없는 것은 대역(大逆)이요, 저부(儲副)를 혼란에 이끌어 넣은 것은 나라의 근본을 그르치게 만든 행위입니다. 상께서는 반드시 신의 말을 지나치다 할 것이나, 능지 처사(凌遲處死)하더라도 가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심도원이 이로써 아뢰니, 상이, “그럴 줄 알았다.”고 하였다.
빈객 변계량, 이맹균(李孟畇), 탁신(卓愼) 등이 아뢰기를,
“세자로 하여금 이 지경이 되게 한 것은 실상 신들이 제대로 교도(敎導)하지 못하여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세자께서 그전에 구종수를 치죄(治罪)할 때에 신들과 더불어 말씀하시기를, ‘내 이제부터는 반드시 이 같은 일들을 하지 않겠다. 만약 개전(改悛)하지 않고 또다시 전철(前轍)을 밟는다면 상께서는 비록 부자간(父子間)의 지극한 은혜로써 즉시 죄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으므로, 신들이 이 말을 듣고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라 기록하여 서연청(書筵廳)의 벽에 붙여 두었는데, 어찌 오늘날의 일이 또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이 점을 신들이 황송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들은 진실로 원하옵건대, 이런 무리들을 대의(大義)로 처단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경들의 죄가 아니다. 나는 아비인데도 능히 정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경들은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전지(傳旨)하기를,
“옛날에 이윤(伊尹)은 신하였으나 태갑을 동궁(桐宮)에 거처하게 하여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게 하였으니, 태갑은 능히 허물을 고친 자라 하겠지만 세자는 고치지 못한 자라 하겠다.”
하였다.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신들은 성상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세자께서 사리(事理)에 통하시고 마음을 공평정대(公平正大)하게 세워서 전하께 효도를 다하기를 바랐을 뿐이니,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실로 신들이 제대로 교도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이니, 신들의 죄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니, 변계량에게 전교(傳敎)하기를,
“예전에 내가 임실(任實)로 갈 때 경은 세자가 정성(定省)을 오랫동안 빠뜨리게 되는 것을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므로, 내가 경의 말을 듣고 경은 고인(古人)이 세자를 보도(輔導)했던 도리를 지닌 사람이라고 여겼다. 어찌하여 하늘에 맹세하기를, ‘행실을 고치겠다.’ 하고서 겨우 20일을 넘기자마자 다시 전철을 밟는다는 말인가.”
하였다.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세자는 타고난 자질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고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같은 무리를 제거하신다면 하루아침에 천선개과(遷善改過)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태조(太祖)께서 신성문무(神聖文武)하신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지금 세자는 한 가지도 없으니 어떻게 조선 만대의 치욕을 씻을 것인가. 내가 태조의 일을 말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신들은 벌써 성상의 하교를 알고 있습니다. 태조께서 재덕(才德)을 겸전(兼全)하셨던 것을 조선의 신자(臣子)로서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찮은 백성들까지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 17년 3월 20일(병오).
상이 세자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이제부터는 진현(進見)하지 말라.” 하고, 지신사(知申事) 조말생에게 명하여, 우보덕(右輔德) 조서로(趙瑞老) 등을 부르게 하여 전지를 선포하기를, “세자가 빈객에게 ‘자경(自警)하며 자책(自責)한다.’고 말하고 종묘에 고(告)한 것을 내가 기뻐한다. 그러나 세자가 일찍이 불의(不義)를 행하고서 자경잠(自警箴)을 지어, 하늘에 맹세하기를, ‘내가 또 불의를 행하면, 성상께서는 아버지이시니 혹시 나를 용서하실지 모르나 하늘이야 어찌 용서하겠는가.’ 하여, 서연관이 이를 벽에다 써 두었다. 그렇게까지 해 놓고 얼마 안 가서 불의를 행하였으니, 나를 속이고 하늘을 속인 것이다. 지금 비록 종묘에 고하였다 하더라도 내 어찌 믿겠는가. 그런 까닭에 반드시 문왕(文王)이 세자였을 때의 소행(所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린 뒤에 내가 부자의 도리로써 대우하려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구종수(具宗秀) 등이 세자 때문에 주륙(誅戮)을 당하였다. 비록 그가 스스로 자초한 죄라 하더라도 늙은 어미가 생존해 있으니, 이와 같은 형벌은 내가 진실로 뜻하지 않았던 일이다. 나의 오늘의 소회(所懷)를 장차 누구와 말하겠는가. 이 뜻을 마땅히 빈객 변계량, 탁신, 이맹균에게 효유하고 아울러 세자에게도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17년 2월 17일(갑술).
세자를 찬성(贊成) 김한로(金漢老)의 집에 두게 하고, 공상(供上)을 정지하라고 명하니, 빈객 변계량과 탁신이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 신들이 왕세자의 저제(邸第)에 나아가, 세자께 법도를 무너뜨리고 욕심을 마음껏 부려 성상께서 염려하시게 한 데 대하여 극력 진달하였더니, 세자께서 말할 때마다 땅에 엎드려 흐느껴 울면서 허물을 뉘우쳐 말씀하기를, ‘내 이 뒤로는 다시 이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오.’ 하였습니다. 이에 변계량이 고하기를, ‘세자께서는 지난번에도 구종수의 유혹에 깊이 빠져 감히 부도(不道)한 행위를 함으로써 성상의 염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때 세자께서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성상께서는 아버지이시니 끝까지 봐주시겠지만 하늘이야 어찌 나를 봐주겠는가.」 하시면서, 정녕(丁寧)하게 성상께 고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도 못 되어 또 이러한 일이 있으니, 세자께서 비록 「내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나, 저희들이 어찌 감히 그대로 믿겠습니까.’ 하니, 세자께서 이르기를, ‘삼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전지하기를,
“경들이 빈사(賓師)로서 나아가 보았다. 그러나 세자가 일찍이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말을 하고도 지금 말을 실천하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그 말을 믿고 들어주겠는가. 또 성심(誠心)으로 허물을 고친 자취를 남에게 보여 주기란 가장 어려운 것인데, 그 자취를 장차 어떤 방법으로 나에게 보여 줄 것인가. 경은 다시 가서 물어보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상은 세자가 주색에 빠져 군부(君父)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 끝내 가르치고 일깨우는 것으로는 그 기질(氣質)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세자로 하여금 신명(神明)을 경외(敬畏)토록 하면 행여 행실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게 할 수 있을까 하여, 변계량 등에게 밀교(密敎)를 내려 이르기를,
“경들이 세자의 잘못을 극력 진달하여 세자로 하여금 뉘우쳐 깨닫게 하고, 세자가 다시는 전일에 있었던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종묘에 서고(誓告)하게 하라.”
하여, 변계량 등이 돌아가 세자에게 왕지(王旨)를 고하였다. 세자가 명을 듣고 이르기를,
“내 마음은 지극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소. 원컨대, 빈객 등이 분명하게 나에게 지시해 주면 나는 오직 지시대로 따르겠소.”
하니,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세자의 마음에 따라 말씀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니, 저희들이 지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세자가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대궐에 나아가 서고하기를, ‘내가 만약 그전의 행실을 고치지 않는다면 제대로 죽음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번에도 이 말로써 고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그 말씀은 자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지로 정성과 공경으로 허물을 고친다는 자취도 없습니다. 어찌 이 말로 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세자가 우러러 생각하다가 이르기를,
“마음은 지극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소. 원컨대, 빈객 등이 명확하게 나를 가르쳐 준다면 나는 그 말대로 모두 따르겠소.”
하니, 변계량 등이 아뢰기를,
“하늘에 고하고, 문소전(文昭殿)에 고하고, 사직(社稷)에 고하고, 종묘에 고한다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사직은 심원한 데 있으며, 조종(祖宗)의 밝으신 영령에게는 더욱 망녕되게 고할 수 없습니다. 이미 고한 다음에는 조종의 영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도 이르시기를, ‘세자가 이미 종묘의 영령에게 고하고 나면, 앞으로 다시는 전일과 같은 부도(不道)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므로 신들도 모두 이 말씀을 믿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종묘에 고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세자가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이르기를,
“내가 장차 무슨 낯으로 종묘와 조종의 영령 앞에 뵙겠소?”
하였다. 탁신이 고하기를,
“그 말씀이 진실로 옳습니다. 그러나 세자께서 종묘에 고하고 나서는 다시 전일과 같은 일을 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꺼려하는 바가 있어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그것이 무슨 말이오? 그런 게 아니오. 내가 장차 고할 것이니, 종묘에 고할 서문(誓文)을 빈객 등이 내 말을 듣고 지으시오. 종묘에 고하고 나서 또 상서(上書)하고자 하니, 아울러 짓도록 하오.”
하였다. 변계량 등이 이 말을 듣고 대궐에 나아가서 그대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만약 성심(誠心)으로 허물을 고쳐 종묘에 고한다면 내가 어찌 믿지 않겠는가. 이미 종묘에 고하고서 또 전일과 같이 한다면 그것은 실로 조종의 영령을 속이는 것이니, 내가 어찌 믿지 않겠는가.”
하였다.
○ 17년 4월 8일(갑자).
경복궁(景福宮)에 행행(行幸)하였다. 경회루(慶會樓) 아래로 나아가 문무과(文武科) 복시(覆試)를 보였다. 문과에는 예조 판서 맹사성, 예문관 제학 변계량 및 지신사 조말생을 독권관으로 삼아, 한혜(韓惠) 등 33인을 뽑았다.
○ 17년 4월 21일(정축).
변계량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 17년 5월 17일(임인).
변계량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 17년 윤5월 5일(경신).
종묘, 사직, 우사단(雩祀壇), 원구단(圓丘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판서 변계량이 요청한 것이었다.
○ 17년 윤5월 9일(갑자).
문과(文科)의 사의(事宜)를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경(三經) 이상은 임문 고강(臨文考講)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예조 판서 변계량이 불가하다고 하며 아뢰기를,
“비록 임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찌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신이 두 번 국가의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좋아하고 싫어함이 어찌 없다고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간(臺諫)이 있는데 어찌 좋아하고 싫어할 것이 있겠는가. 또 삼경은 불가하지만 《예기(禮記)》는 《사기(史記)》와 서로 가까우니 사수(師授)할 필요가 없으며, 《주역(周易)》은 비록 오묘한 이치를 깨닫기가 어려우나 또한 읽기는 쉽다. 사경(四經) 이상은 임문 고강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 또 나라의 대사(大事)를 내가 독단(獨斷)할 수 없으므로 경들과 의논하려 한다.”
하였다. 변계량이 또 아뢰기를,
“과장 안에서 등촉(燈燭)을 금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주에는 각각 지속(遲速)이 있기 때문에 그 더디고 빠름에 따라 장단점이 있다. 대체로 제술(製述)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더딘 점이 있다. 예전에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이 빨리 짓지 못하여 글을 지을 일이 있으면 좌우에 경서(經書)를 늘어 놓고 무척 고민하면서 제술을 하였지만, 일단 제술을 하고 나면 반드시 훌륭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백일장(白日場)이란 인재를 잃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백일장으로 하는 것이 가합니다. 신이 두 번 국가의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밤을 넘기게 되면 폐단이 진실로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경복궁친시(親試)에서 오히려 법을 범한 자가 있어서 의금부에서 잡아 조리돌렸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이 경노(驚怒)하여 과장 안의 사람들을 서둘러 내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백일장으로 하더라도 인재를 잃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도 이런 폐단이 있었는가?”
하니, 지신사 조말생이 아뢰기를,
“임문 강시법(臨文講試法)에 대하여 허조(許稠)가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진산부원군이 이 점을 항상 말하였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산부원군도 이것을 말하였는가? 과연 내 뜻과 부합한다. 가람(假濫)의 폐단은 단단히 금지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였다. 좌우가 모두 아뢰기를,
“비록 이를 금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강(考講)을 하게 되면 반드시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금년에는 고강을 할 것이기 때문에 경수(經數)가 다 차지 않은 자는 모두 응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단지 갑오년에만 이 폐단이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가람자(假濫者)도 시험에 합격하였던가?”
하니, 좌우가 아뢰기를,
“모두 합격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변계량이 불가하다고 고집하며 아뢰기를,
“백일장으로 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였다.
○ 17년 윤5월 12일(정묘).
상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과 예조 판서 변계량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그전에 내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부원군에게 수강하였는데, ‘환관(宦官) 진홍지(陳弘志)가 청니역(靑尼驛)에 이르러 봉장살(封杖殺)하였다.’는 글귀에 이르러, 부원군이 말하기를, ‘봉은 봉검(封劍)의 봉(封)과 같은 것으로 봉장(封杖)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하였다. 변 판서는 세자에게 무슨 뜻으로 가르쳤는가? 내가 수강한 이래로 항상 마음에 맞지 않게 여겼더니, 지금 《운회(韻會)》를 보니 봉 자를 주석하기를, ‘봉(封)은 계(界)이며, 강(疆)이다.’ 하였으므로 이것을 보고서야 나의 의심이 풀렸다. 이것은 필시 청니봉(靑尼封)에 이르러 장살(杖殺)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하였다. 상이 서적을 보기를 좋아하여 간혹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구명(究明)하여 변석(辨釋)한 뒤에 그만두었던 까닭에 《대학연의》를 본 지 수년이 되었어도 변석함이 이와 같았다.
○ 17년 6월 16일(경자).
예조 판서 변계량이 성균관ㆍ교서관ㆍ승문원의 권지(權知)를 군현(郡縣)에 나누어 보내 생도(生徒)들을 가르칠 것을 청하였다. 계문(啓聞)에 운운였는데, -앞에 보인다.- 그대로 따랐다. 오직 승문원만은 이문(吏文)을 익힌다는 이유로 보내지 않았다.
○ 17년 6월 27일(신해).
예조 판서 변계량이 붉게 물들인 옷을 입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에는 입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색(紅色)은 상(上)에 속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하여 입지 못하게 하자는 것인가? 예전에 내가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황색의 비단 요에 앉았더니, 졸(卒)한 정승 이서(李舒)가 고하기를, ‘앉으신 요[褥]의 빛깔이 황색이니 빨리 바꿔야 합니다.’ 하여, 나는 이 말을 듣고 저절로 땀이 흘렀다. 홍색은 황색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17년 7월 8일(신유).
예조 판서 변계량에게 면포 2필과 마포 2필을 하사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변 판서는 빈한한 선비이고 또 일이 많은 때에 수고하였으니, 특별히 하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17년 7월 15일(무진).
단자(段子)와 채견(綵絹)을 나누어 주었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 예조 판서 변계량 등에게 각각 저사(紵絲) 1필을 하사하고, 인하여 전지하기를, “황제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혼자서 쓰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각전(各殿)에 이미 모두 나누어 올렸고, 나도 또한 저사 한 필을 택하여 옷을 지어 입으려고 한다. 이제 대신도 입도록 하라.” 하였다.
○ 17년 7월 27일(경진).
두 사신이 양화도(楊花渡) 가을두(加乙頭)에서 놀고 있으니, 예조에 명하여 연회를 준비하도록 하고, 이조 판서 심온(沈溫)과 예조 판서 변계량 등을 연회에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 17년 8월 17일(경자).
편전(便殿)에 나아가서 정사(政事)를 보았다. 상이 유정현(柳廷顯) 등에게 이르기를,
“병신년에 가뭄이 대단히 심하였는데, 변계량이 원단(圓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야 한다는 것으로 진언(陳言)하고 상서하였다. 말이 매우 간절하였므로 내가 비를 바라는 지극한 마음으로 그 청을 따랐는데, 지금 《삼국사(三國史)》를 보니, 제후(諸侯)로서 원단제(圓壇祭)를 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전조(前朝)에서 원단제를 행하였으니,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전조가 어찌 상고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심한 가뭄을 당하여 하늘에 기도하여 비를 비는 것이 신의 뜻에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삼국사》를 두루 보았는데, 제후이면서 참람(僭濫)한 예(禮)를 행한 자를 모두 옳지 않게 여겼다. 또 노(魯) 나라의 교체(郊禘)를 성인(聖人)이 그르게 여겼으니, 예로부터 내려오면서 아랫사람으로서 참람한 예를 행하고서 경사(經史)에서 인정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내가 가뭄을 당하여 비를 빌기는 하지만 옳지 않은 줄을 알기 때문에 시행하고 싶지가 않다.”
하였다.
○ 17년 8월 28일(신해).
노비(奴婢)의 공문(公文)을 의논하였다. 유정현(柳廷顯)이 아뢰기를,
“사노비(私奴婢)에게 공문을 만들어 주는 것은 이미 정한 의논이 있으니, 연한을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공문은 만들어 줄 수 있으나, 수는 정할 수 없다. 만일 수를 정하면 사람들이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하자, 변계량이 아뢰기를,
“반드시 수를 정해야 합니다. 그 수를 제한하지 않아서 한 집의 노비가 혹 1000여 구(口)까지 이른다면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많아도 150구는 초과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지만 수를 정할 수는 없다. 비록 1000여 명을 가진 자가 있더라도 자손이 있으면 반드시 나누어 줄 것이고, 비록 자손이 없더라도 사손(使孫)과 수양(收養) 중에 나누어 주게 되면 반드시 남는 수가 없을 것이다.”
하니, 장령(掌令) 이하(李賀)가 아뢰기를,
“수를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150명이 적다고 한다면 약 200명으로 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150명으로 한다면 신도 또한 실망입니다. 신에게도 200여 명의 노비가 있습니다.”
하였는데, 육조(六曹)가 수를 정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아뢰었다. 상이 전지(傳旨)하기를,
“수를 정한다는 말은 발설하지 말고 만들어 주는 것이 가하다. 또 노비가 많은 자가 비록 자손 일족(一族)에게 나누어 주더라도 남는 수는 알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17년 9월 17일(기사).
처음으로 태조(太祖)와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의 기신(忌晨)에 원묘(原廟)에 제사 지내기로 정하였다. 변계량이 일찍이 상정소(詳定所)의 제조(提調)가 되어 예조에 의논하기를,
“불사(佛祠)에 재(齋)를 설행하면서 원묘에 제사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계목(啓目)을 올려 문소전(文昭殿)에 제사하기를 청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참의(參議) 허조(許稠)와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가 저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변계량이 상언하니, 이에 행하게 된 것이다.
○ 17년 12월 14일(을미).
예조가 친향(親享)하는 의식 절차를 올렸다. 처음에 변계량이 계청하기를,
“종묘(宗廟)에 친히 제사하는 날에 실(室)마다 잔을 올리고 재배(再拜)를 행한 뒤에 소차(小次)에 들어가서 앉아 쉬다가 음복(飮福)할 때에 이르러 위차(位次)에 나와 음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마다 재배를 행하는 것은 가하지마는, 소차에 들어가서 앉아 쉬는 것은 편치 않다. 내 경우를 놓고 본다면 세자가 내게 잔을 올리고서 소차에 들어가고, 그 아우가 차례로 잔을 올릴 때에 세자는 아랑곳없이 물러간다면 나와 세자의 뜻이 어떠하겠는가? 고문(古文)을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송(宋) 나라 고종(高宗) 때에 이 예가 있었습니다. 고종이 친히 종묘에 제사할 때에 조계(阼階) 동쪽에 소차를 설치하고, 잔을 올리는 의식이 끝나면 소차에 들어가서 아헌(亞獻)을 기다리고, 또 실마다 강신제와 술잔을 올린 뒤에 문 밖에 나와 재배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제의(祭儀)는 이미 정한 제도가 있는데, 대신이 각각 소견대로 다시 법제를 세우니, 어느 때에 정하여지겠는가. 고종은 참으로 현명한 임금이다. 그러나 재위 기간이 30여 년이었는데, 이 법은 고종이 늙었을 때에 만든 것이 아닌가. 더구나 소차에 들어가는 것이 조종(祖宗)의 명령이 아닌데, 어찌 이 제도에 국한할 수 있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상이 오랫동안 당하(堂下)에 서 계시면,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이 마음에 반드시 편치 못하여 잔을 올리는 예를 빨리 행하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성과 공경이 온전하지 못할까 두렵고, 또 조종의 신령도 반드시 전하가 오래 서 있는 것에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 18년 1월 9일(경신).
사헌부가 예조 판서 변계량, 참판 허조(許稠) 및 좌랑 설순(偰循) 등의 죄를 탄핵하였다. 처음에 설순이 진헌(進獻)의 물목(物目)을 승문원에 보내면서 실수로 오미자(五味子) 100근(斤)을 더 넣었다. 변계량 등이 스스로 발견하고 승정원에 나아가 상달(上達)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속하게 발견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헌사(憲司)가 직사(職司)를 공경히 하지 못했다고 하여 그들의 죄를 청하니, 상이 조말생(趙末生)과 하연(河演) 등에게 묻기를,
“죄로 보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변계량과 허조가 예조의 직임에 합당하고, 또 청렴하고 빈한(貧寒)한데 녹(祿)을 받지 못하면 어찌 되겠느냐?”
하니, 조말생이 대답하기를,
“중대한 사건에 관계되었으니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권한이 없는 직임에 옮긴다면 그 녹을 받을 수 있고, 또한 징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여,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 18년 1월 11일(임술).
변계량을 예문관 대제학으로 삼았다.
○ 18년 1월 13일(갑자).
세자가 편찮다고 하여 정강(停講)하였다. 빈객 변계량이 아뢰기를,
“근래 사신(使臣)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강론(講論)을 빠뜨렸고 또 새해 들어 공부를 시작하지 않고 있으니, 삼가 저하(邸下)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배움은 날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날마다 신시(申時)를 기다려 강론을 듣도록 하소서.”
하니, 세자가 몸이 많이 불편하다고 대답하였다. 빈객이 다시 강론하기를 청하니, 세자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빈객과 대간(臺諫)은 나가서 기다리시오. 몸의 기운이 회복되면 낮에 배운 것을 익히겠소.”
하였다. 빈객 등이 아뢰기를,
“처음에 편찮다고 말씀하였으나, 또 배운 것을 익히려고 하시니, 저희들은 깊이 감사합니다. 또 편찮다는 말씀을 듣고 감히 강론하기를 청하였으니, 어리석고 미혹한 듯합니다. 그러나 저희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하의 덕(德)을 보필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여, 청하기를 다섯 차례나 한 뒤에야 강론을 들었다. 세자가 이르기를,
“나의 기침(起寢)과 진선(進膳)의 절차를 서연관(書筵官)에 고(告)하는 것은 어찌하여 그전대로 하고 그만두지 않는 것이오?”
하니, 보덕(輔德) 조서로(趙瑞老)가 아뢰기를,
“어찌하여 날마다 하는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꺼려하십니까.”
하였다. 변계량이 또 아뢰기를,
“옛날 정자(程子)가 천자(天子)에게 아뢰기를, ‘궁중(宮中)의 일을 모두 경연관(經筵官)으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천자의 존귀함으로서도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더구나 저부(儲副)이겠습니까. 저희들도 또한 이 일이 저하에게 유익하다고 여깁니다. 기거(起居)와 선수(膳羞)의 대절(大節)을 근시(近侍)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그렇다고 하였다.
○ 18년 3월 3일(계축).
동부대언(同副代言) 성엄(成揜)에게 명하여, 진관사(津寬寺)에 가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해 수륙재(水陸齋)를 설행하게 하였다. 사제(賜祭)하는 교서(敎書)에 운운하였다. -원집에 보인다.- 변계량의 글이다. 양전(兩殿)의 슬프고 애통함이 지극하여, 성녕대군을 천도(薦導)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상이 교서(敎書)를 반쯤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흐느껴 울면서 차마 끝까지 읽지 못하고 물리치면서, “나의 정의(情意)를 다하였도다.” 하였다.
○ 18년 3월 4일(갑인).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을 불러서 귀신(鬼神)이 감응(感應)하는 이치를 물었다.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귀신은 본래 저곳에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제사 지내면 와서 흠향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이 있고, 그 정성이 없으면 그 귀신이 없는 것이니, 내가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귀신은 나의 정성과 공경에서 이루어져 와서 이르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설(說)은 불씨(佛氏)의 사리분신(舍利分身)의 설과 서로 비슷하다.”
하였다. 대개 성녕대군의 죽음을 비통해하여,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 18년 4월 4일(갑신).
소경공(昭頃公)의 분묘(墳墓) 곁에 암자를 지었다. 전 총제(摠制) 조용(趙庸)에게 묘지(墓誌)를 지으라고 명하고, 대제학 변계량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 -원집에 보인다.- 을 지으라고 명하고, 직예문관(直藝文館) 성개(成槩)로 하여금 이를 모두 쓰게 하였다.
○ 18년 5월 23일(임신).
상이 명하기를,
“사복시(司僕寺)에서는 이제부터 세자가 출입할 때는 반드시 나의 명(命)을 기다려서 안마(鞍馬)를 바치라.”
하고, 우빈객 변계량을 불러서 전교하기를,
“서연(書筵)의 빈객 등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조용(趙庸), 김여지(金汝知), 탁신(卓愼)과 신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 말고는 다시 달리 구할 수가 없다. 중국에서 구한다면 얻을 수 있을지라도, 본국(本國)에서 구한다면 다시 얻을 수가 없다. 옛날에 그 어미를 사사(賜死)하고도 아들을 태자(太子)로 삼은 경우가 있다. 김한로(金漢老)가 비록 죄가 있더라도 숙빈(淑嬪)이야 무슨 죄이겠는가. 전(殿)에 도로 들이게 하고 싶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부인(婦人)이 남편의 집을 안으로 삼는 것은 남편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숙빈의 심정이야 어찌 세자의 허물을 드러내고자 함이겠습니까. 숙빈의 행위는 부도(婦道)에 합당하니, 숙빈을 전(殿)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지당합니다. 신이 일찍이 이러한 뜻으로 계달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아뢰지는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도 숙위(宿衛)를 많이 설치할 수 없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숙위사(宿衛司)의 속모치(速毛赤) 등을 혁파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세자에게 무익(無益)하니 이를 혁파하였다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려서 다시 세워도 괜찮을 것입니다. 다만 오래도록 서연(書筵)을 파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니, 세자가 허물이 있다면 더욱 강경(講經)에 부지런하여야 합니다. 청컨대, 속히 다시 설치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당연히 다시 설치할 것이나, 그 요속(僚屬)은 정밀히 더 선발을 해야겠다. 병조의 관원이 전교(傳敎)하는 날에 세자가 ‘백성의 집에 가서 거처하고 싶다.’고 큰소리로 말하였으니, 그의 공손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경으로 하여금 가서 그 잘못에 대해 말하게 하려고 한다. 숙빈의 본가(本家)에 있던 노비(奴婢)는 1명도 전(殿)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
하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세자가 백성의 집에 거처하고 싶다는 것은 어찌 다른 마음이 있어서이겠습니까. 하늘을 속이고 종묘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임금을 속일까 두려워하여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한 것입니다. 세자가 어리(於里)를 끔찍이 사랑하다가 병이 난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먼 지방으로 내쳐서 내통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성(三省)에서 김한로의 죄를 청하였는데, 내가 법대로 처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자가 인연을 끊고 인척으로 여기지 않게 하려고 한다.”
하니, 변계량이 아뢰기를,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큰 죄를 지으면 어버이로 여기지 않는 것이 예(例)인데, 장인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고, 최한을 한경(漢京)에 보내어 숙빈을 본전(本殿)에 도로 들어가게 하고, 또 서연을 다시 열라고 명하였다.
○ 18년 5월 27일(병자).
세자 이사(世子貳師) 유창(劉敞), 좌빈객(左賓客) 김여지, 우빈객(右賓客) 변계량이 아뢰기를, “김한로는 세자의 장인인데, 불의(不義)로써 이끌었으니, 세자로 하여금 인연을 끊고 인척으로 여기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에 형조에 전지를 내려 왕세자로 하여금 김한로와 인연을 끊고 인척으로 여기지 않게 하였다.
○ 18년 5월 30일(기묘).
세자가 내관(內官) 박지생(朴枝生)을 보내어 상서(上書)하였는데, 상이 이를 읽어 보고 대언(代言) 6명과 변계량에게 내보이며 이르기를,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니, 《맹자》에서 이른바 ‘아버지도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부끄러운 점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 글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는가. 내가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하고, 변계량으로 하여금 답서(答書)를 짓게 하니, 아뢰기를, “이 일은 모두 망녕된 것인데, 어찌 답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의(義)를 들어 책망하게 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옳다고 하였다.
○ 18년 6월 3일(임오).
세자 제(褆)를 폐하여 광주(廣州)에 추방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을 왕세자로 삼았다. 상이 이르기를, “백관(百官)들의 소장(疏狀)을 읽어 보니, 몸이 송연(竦然)하였다. 이것은 천명이 이미 떠나가 버린 것이다.” 하고 마침내 이를 따랐다.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좌의정 박은(朴訔), 우의정 한상경(韓尙敬),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 찬성 최이(崔迤), 병조 판서 박신(朴信),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 평성군(平城君) 조견(趙狷),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 판좌군 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이화영(李和英), 이조 판서 이원(李原), 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 공조 판서 심온(沈溫), 도총제(都摠制) 박자청(朴子靑)ㆍ이징(李澄), 대제학 변계량,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 형조 판서 박습(朴習), 참찬 김점(金漸), 총제(摠制) 권희달(權希達)ㆍ유은지(柳殷之)ㆍ최윤덕(崔潤德)ㆍ최운(崔沄)ㆍ문계종(文繼宗)ㆍ홍부(洪敷)ㆍ홍섭(洪涉)ㆍ이배(李培)ㆍ김귀보(金貴寶)ㆍ문효종(文孝宗)ㆍ윤유충(尹惟忠), 예조 참판 신상(申商), 병조 참판 이춘생(李春生),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이담(李湛), 공조 참판 이적(李迹), 부윤(府尹) 이원항(李原恒), 호조 참판 이발(李潑), 부윤(府尹) 민계생(閔繼生), 사간(司諫) 정상(鄭尙), 집의(執義) 허규(許揆) 등이 조계청(朝啓廳)에 모였다.
○ 18년 8월 10일(정해).
최한에게 명하여 박은 등에게 전교하기를,
“주상(主上)이 장년(壯年)이 되기 전에는 국가의 결단하기 어려운 일을 의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각각 가부(可否)를 진달하게 하라. 나도 참여할 것이다.”
하니, 박은이 이원과 더불어 교서(敎書)를 지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뜻으로 유시하기를 계청하였다. 상이 이에 예조 판서 변계량에게 명하여 전위(傳位)하는 교서를 짓게 하였다. -앞에 보인다.-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경복궁(景福宮)에 가서 진하(陳賀)하게 하였다. 이날 경시(庚時)에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경복궁 전정(殿庭)에 반열에 맞추어 늘어서니, 세자가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착용하고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서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 18년 8월 11일(무자).
상이 지신사(知申事) 이명덕(李明德)으로 하여금 부왕(父王)에게 아뢰기를,
“존호(尊號)를 태상왕(太上王)이라 올리기를 원합니다.”
하니, 부왕이 이르기를,
“상왕(上王)을 태상왕으로 하고, 나를 상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가 감히 겸덕(謙德)해서가 아니라, 천륜(天倫)의 차서(次序)입니다. 주상이 나에게 효도하고자 하거든 모름지기 내 말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내 임의로 하는 것은 아니니, 마땅히 재상(宰相)의 여러 의논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명덕이 반명(反命)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정부와 육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유정현 등이 아뢰기를,
“상왕이 비록 먼저 즉위하셨으나, 부왕의 공덕(功德)이 깊고 소중합니다. 더구나 주상께서 왕위를 부왕으로부터 받으셨으니 마땅히 가까운 데에서부터 먼 데에 미쳐야 하므로 마땅히 부왕을 높여 태상왕으로 삼고 상왕은 그대로 상왕으로 삼으소서.”
하고, 변계량 등은 아뢰기를,
“후사(後事)가 되는 것은 아들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즉위한 선후(先後)로 논하여야 하며, 공덕으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상왕을 높여 태상왕으로 하고, 부왕을 상왕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윽고 상왕이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태상(太上)이란 두 글자는 내가 감당할 바가 못 됩니다.”
하자, 이에 인덕궁(仁德宮)의 태상왕 존호를 중지하였다.
○ 세종 3년 9월 7일(정묘).
의정부 참찬 변계량과 예조 참판 하연(河演)이 낙천정(樂天亭)에 나아가 문무 백관이 존호를 가상(加上)하기를 청하는 전문(箋文)을 올리니, -원집에 보인다.- 상이 이에 윤허하였다.
○ 4년 9월 6일(경신).
헌릉(獻陵)에 장사 지냈다.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에게 명하여 신도비문을 짓게 하였다. -원집에 보인다.

[주D-001]10년 8월 : 이 기사는 《태종실록》에는 10년 9월 29일(계사) 조에 실려 있다.
[주D-002]17년 2월 15일(임신) : 이 기사는 《태종실록》을 참고로 하면 2월 15일(임신)에 해당하므로, 17년 3월 16일(임인) 기사 앞에 있어야 한다.
[주D-003]17년 2월 17일(갑술) : 이 기사는 《태종실록》을 참고로 하면 2월 17일(갑술)에 해당하므로, 17년 2월 15일(임신) 기사 뒤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