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연평부원군 이귀 신도비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시(諡) 충정(忠定)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아베베1 2013. 1. 31. 17:08

 

 
포저집 제3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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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명(墓碑銘) 4수(四首)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시(諡) 충정(忠定)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숭정(崇禎) 5년(1632, 인조 10) 2월 15일에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 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연평부원군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시(諡) 충정(忠定) 이공(李公)이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해 4월 18일에 교하(交河)에 장례 지냈다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해의 9월 17일에 공주(公州) 괘성산(掛城山) 술좌진향(戌坐辰向)의 언덕에 이장(移葬)하였다.
공의 휘(諱)는 귀(貴)요, 자(字)는 옥여(玉汝)요, 호(號)는 묵재(黙齋)이다. 공의 선조는 중국인이다. 당(唐)나라가 백제를 평정할 적에 중랑장(中郞將) 무(茂)가 제장(諸將)의 한 사람으로 따라왔다가 신라에 머물러 벼슬하면서 연안(延安)에 거주하였다. 본조(本朝)의 휘 석형(石亨)이라는 분은 호가 저헌(樗軒)인데,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으며,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녹훈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으니, 공에게 5세조가 된다. 증조 휘 수장(壽長)은 대호군(大護軍)으로 모관(某官)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부 휘 기(巙)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조정에 올라 현달하였으나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폄관(貶官)되었다. 고(考) 휘 모(某)는 보조 공신(補祚功臣) 영의정 연성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비(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태어난 지 2년 만에 부친을 여의고 권 부인을 따라 남쪽 지방으로 유락(流落)하였다. 나이 15세 때에 경사(京師)로 돌아와서 비로소 책을 읽고 글을 배울 줄을 알아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임오년(1582, 선조 15)에 생원시에 입격(入格)하였는데, 당시에 교분을 맺었던 사람들 모두가 지명(知名) 인사들이었다.
이때에 조정의 의논은 동서(東西)의 당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율곡이 신임을 받고 국정을 주도하는 것을 동인(東人)들이 질시하여 제거하려고 꾀한 나머지 삼사(三司)가 똑같은 내용으로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공이 다사(多士)를 효유(曉諭)하여 반궁(泮宮)에서 상소를 올려 변론을 하자 선묘(宣廟)가 가납(嘉納)하였다. 그리하여 참언(讒言)이 행해질 수 없게 되었고, 주모자는 처벌을 받고서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역적 정여립(鄭汝立)이 겉으로는 열심히 유업(儒業)을 닦는 척하면서 율곡을 사사하여 중망(重望)을 얻었다. 그러다가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동인 편에 빌붙어서 율곡을 연중(筵中)에서 헐뜯었다. 이에 공이, 율곡에게 보낸 정여립의 서한 속에 그지없이 추앙하고 심복한 내용이 있는 것을 보고는 위에 올렸는데, 정여립이 그 서한을 보낸 뒤에 절교했다고 말하자 공이 또 그 뒤에 보낸 정여립의 서한을 모아서 위에 올렸으니, 이는 율곡이 별세하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그러자 선묘가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邢恕)이다.”라고 하교하기까지 하였다.
정여립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떠난 뒤에도 동인이 율곡을 공격하는 것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공이 또 상소하여 동인과 율곡이 왕복한 서한의 글 수만 언을 차례로 거론하자, 상이 공을 소명(召命)한 뒤에 정원(政院)으로 가서 반복무상(反覆無常)한 자들의 성명을 모두 기록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당시에 승지 모두가 동인이었으므로 공에게 몽당붓을 주어 제대로 획을 긋지도 못하게 하였는데, 정원의 관리 한 사람이 뒤에서 새 붓을 던져 주기까지 하였으니, 이를 통해서도 물정(物情)이 모두 공의 상소를 통쾌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그리하여 당로자(當路者) 모두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자 부끄러워서 감히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공이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소장을 올려 임금의 마음을 깨닫게 하고 조정의 시비를 분명히 밝혔으므로 시론(時論)이 공을 장하게 여겼다.
처음에 강릉 참봉(康陵參奉)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곡을 하고 능을 하직한 뒤에 행재소(行在所)에 들어가 삼도 소모관(三道召募官)에 차임(差任)되었다. 당시에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은 탓으로 민간에서는 대가(大駕)가 이미 용만(龍灣 의주(義州))에서 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천(伊川)의 백성들이 떼를 지어 도적의 무리가 된 뒤에 관부(官府)를 습격하였으므로, 공이 필마(匹馬)로 고을에 달려가서 역순(逆順)의 도리에 입각하여 그들을 타이르자, 도적의 무리가 모두 공에게 와서 죄를 자복(自服)하고는 스스로 공을 세워 속죄하기를 원하였다.
광해(光海)가 세자(世子)의 신분으로 이천에 나오자 공이 모집한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영접하며 알현하니, 광해가 크게 기뻐하면서 공을 승진시켜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에 임명하였다. 그 뒤에 대조(大朝)에서 공을 공조 좌랑으로 뛰어 올려 임명하고는 불러들이자 공이 숙천(肅川)으로 가서 상을 알현하니,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에 차임하였다.
중국 군대가 왜적을 추격하다가 불리해지자 파주(坡州)로 퇴각하여 주둔하였는데, 마초(馬草)와 군량이 부족하자 체찰사(體察使) 유공 성룡(柳公成龍)이 우수와 번민에 잠긴 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에 공이 창졸간에 계획을 세워 열흘 사이에 대두(大豆)와 마초를 충분히 확보하자, 체찰사가 크게 기뻐하며 그 즉시 공을 도총검찰관(都摠檢察官)으로 삼았다. 그 뒤 장성 현감(長城縣監)이 되어서는 장정을 뽑아 훈련시켜 대도(大盜)를 쳐서 평정하는 한편,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수축하고 식량과 기계(器械)를 비축하여 왜적을 방비하였는데, 이 일이 위에 알려지자 승서(陞敍)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경성에 들어와서 여역(癘疫)을 만나 위태롭게 되자, 상이 의원과 약물을 보내 치료하도록 명하였다.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과 김제 군수(金堤郡守)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체찰사(體察使) 이공 덕형(李公德馨)이 공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하여 영남(嶺南)으로 가게 하였다.
당시에 정인홍(鄭仁弘)이 허명(虛名)을 등에 업고 교만방자하게 굴면서 주군(州郡)에 위세를 부렸으므로, 방백(方伯)과 사신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며 피하기만 할 뿐 감히 항거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이 합천(陜川)에 이문(移文)하여 죄를 추궁하며 그의 노복을 수감하자, 정인홍이 크게 성을 내었다. 그리고는 공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었으므로, 그의 무리인 문경호(文景虎)를 사주하여 우계를 배척하는 소를 올리게 하면서 간당(奸黨)으로 지목하게 하였다. 그 뒤에 정인홍이 대사헌이 되자 공이 상소하여 정인홍이 지방에 있을 때에 범한 열 가지의 죄를 거론하다가 이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정인홍 역시 상의 총애가 시들해지자 실의에 빠져 귀향하기에 이르렀다.
계묘년(1603, 선조 3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을 제수받았다. 안산 군수(安山郡守), 양재 찰방(良才察訪), 배천 군수(白川郡守), 함흥 판관(咸興判官)을 차례로 거쳤다. 광해 초에 전조(銓曹)에 몸담았는데, 맨 먼저 박건(朴楗) 등 외척 3인을 의망(擬望)하는 것에 대해서 공이 아름다운 일이 못 된다고 하여 상소해서 논하였다. 그 뒤에 숙천 부사(肅川府使)의 신분으로 통정(通政)의 품계에 올랐다.
임자년(1612, 광해군 4)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당시에 적신(賊臣)이 정권을 장악하고는 잇따라 역옥(逆獄)을 일으켜 총애를 굳히고 위세를 부리는 발판을 삼았으므로, 사대부가 죽고 귀양 가는 일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는 장차 국구(國舅)인 김제남(金悌男)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공이 당시의 정승이었던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과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양공(兩公)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만약 국구를 죽이는 일이 있게 되면 모비(母妃)를 폐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지금 이 일을 막지 않으면 폐모(廢母)하는 일을 막으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공은 탄식만 할 뿐 그 말대로 따르지 못하였다.
김제남을 이미 죽이고 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뒤에 대비(大妃)를 유폐(幽閉)시켜 위호(位號)를 없애고 서궁(西宮)이라고 칭하고는, 흉악한 무리가 폐출(廢黜)시켜 모욕을 가하려고 의논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에 공이 한교(韓嶠)를 보내어 이이첨(李爾瞻)에게 화복(禍福)의 도리를 거론하여 타이르게 하자 이이첨이 이 때문에 조금 주춤하게 되었으니, 대비의 화가 이 정도로 그친 것은 대개 공이 힘을 쓴 덕분이었다.
해주 목사(海州牧使) 최기(崔沂)가 무함을 받고 체포되자 친척과 벗들이 감히 찾아가 보지 못하였는데, 공이 홀로 찾아가서 만나 보았다가 그 일에 연루되어 이천(伊川)으로 유배당하였다.
광해의 무도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팔로(八路)에 원망하는 소리가 들끓었다. 공이 자제인 시백(時白) · 시방(時昉)과 함께 은밀히 사직(社稷)을 부호(扶護)할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사면을 받고 돌아오자 김류(金瑬)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의논을 확정하고는, 계해년(1623, 광해군 15) 3월 13일에 의군(義軍)을 홍제원(弘濟院)에 집결시킨 뒤에 주상(主上)을 모시고 창의문(彰義門)을 통해 입성하였다. 이에 대비가 복위하여 광해의 폐위를 명하고 주상을 책명(冊命)하여 보위(寶位)에 오르도록 하였으니, 이 모두가 새벽부터 시작해서 아침밥을 먹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튿날에 공을 경성 호위대장(京城扈衛大將)에 임명하여 제장(諸將)을 지휘하도록 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먼저 목 벤 뒤에 보고하도록 하니, 이서(李曙) 이하의 제장이 모두 공의 통제를 받았다. 이조 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하였다. 이때 모든 일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포치(布置)하는 일의 대부분이 공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달을 넘겨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특별히 승진되었고 얼마 뒤에 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겼으며 좌찬성으로 뛰어 올랐다.
책훈할 적에 공을 제이(第二)로 삼고 정사 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내렸으며 연평부원군에 봉하였다. 대개 제공(諸公)이 이미 오래전부터 뜻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모두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고서 감히 섣불리 거행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공이 홀로 비분강개하며 발분하여 제때에 계책을 세워 결단하고는 제공을 앞에서 이끈 것이었다.
그해 겨울에 역적 이유림(李有林)의 모반이 발각되었는데,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진술하였으나, 상이 지친(至親)이라는 이유로 문제 삼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장차 종묘사직의 화를 초래할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고 간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공이 송경(松京)은 서로(西路)의 요충지라고 여기고는, 군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할 목적으로 자진해서 그곳으로 가겠다고 청하자, 공을 개성유수 겸 어영사(開城留守兼御營使)로 삼았다. 이듬해 정월에 우찬성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이 중병(重兵)을 장악하고 외방에 있으면서 반란을 도모하는 한편, 자기의 아들 전(栴)으로 하여금 실의에 찬 무리들과 은밀히 결탁하여 내응(內應)하도록 다짐을 주었다. 그 일이 발각되었으므로 먼저 경성에 있는 그의 무리들을 체포하여 신문을 하니 모두 자복하였다. 그런데 국청(鞫廳)에서는 이괄이 훈신(勳臣)이라는 이유로 그 일을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이전만 체포하자고 청하였다. 이에 공이 “이괄이 그런 음모를 꾸미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아비가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아들만 체포할 경우 그가 조정의 명령을 들으려고 하겠는가. 따라서 부자 모두를 체포하는 것만 못하다. 그러고 나서 그런 사실이 없다면 다시 임지(任地)로 돌려보내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나, 그 말을 채택하지 않고는 사자(使者)를 영변(寧邊)에 보냈는데, 이괄이 사자의 목을 베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이르자 조야(朝野)가 경악하며 당황하였는데, 상이 공을 소견(召見)하고는 이르기를 “경의 말을 채용하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고 하였다.
이때에 신문 조서에 연루되어 수감된 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국청에서 그들을 신문할 여유가 없자 모두 죽이려고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극력 다투며 말하기를 “사태가 아무리 급박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신문해 보지도 않고서 목을 벨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공이 임진(臨津)을 방어하는 군대의 상황을 살펴보러 나갔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군사들이 무너져 흩어져서 적이 이미 강을 건넌 뒤였다. 이에 공이 말을 치달려 돌아와 상을 알현하고는 그날로 한강을 건너서 피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에 적이 도성에 들어왔다. 언자(言者)가 공이 제장(諸將)을 감독하여 방어하지 못했다고 논하자,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호가(扈駕)하라고 명했다가 얼마 뒤에 다시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거가(車駕)가 경사(京師)로 돌아왔을 적에 공이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임진의 그 일은 왕명을 받들고 군대를 점검하러 간 것인 만큼 군대를 거느린 일과 견줄 성격의 것이 아니니, 자신을 그렇게 논한 것은 타당한 죄목이 못 된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강변의 집에 물러나 거하면서 소장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니, 당시에 옥당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논핵(論劾)했던 자를 체차(遞差)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리고는 상의 궤문(饋問)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소명(召命)을 누차 내리면서 예조의 낭관을 보내어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당초 이괄의 모반이 발각되었을 때에 고발한 자나 그 패거리들의 진술을 보면 모두 공(珙)을 추대하기로 했다고 말하였다. 이에 공이 일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할 대책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옳은 계책이 될 수 없을뿐더러 공(珙)을 온전히 보호할 수 있는 길도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는 재차 차자를 올리자, 양사(兩司)에서도 모두 공의 뒤를 따라서 그런 내용으로 아뢰었다. 그런데 유독 부제학 정경세(鄭經世)만은 따르지 않으면서, 양사는 의리를 위주로 하지만 옥당(玉堂)은 은혜를 위주로 한다고 주장하자, 공이 극언(極言)을 하며 그를 배척하였다. 이에 정경세가 인피(引避)하고 출근하지 않자, 공이 퇴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박윤장(朴允章) 등의 역모가 발각되었을 때에도 공(珙)과 관련된 진술이 나왔다. 이에 삼사(三司)가 번갈아 소장을 올려 공(珙)을 처벌하기를 청하였고, 대신도 2품 이상의 관원을 이끌고 진달하며 아뢰었다. 그러나 상이 안 된다고 하면서 매우 간절하고 측은한 내용으로 답하였으므로 우의정 신흠(申欽)이 그만두려고 하자, 공이 좌석에서 분개하여 매도하다가 이 일로 파직되었다.
옥당이 남이공(南以恭)은 대사헌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논하자, 이조 판서 김류(金瑬)가 노하여 상에게 아뢴 결과, 응교(應敎) 박정(朴炡) · 유백증(兪伯曾)과 교리 나만갑(羅萬甲)이 모두 외직에 보임되었다. 이에 공이 남이공을 느닷없이 대사헌에 임명한 것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한 일로서 옥당을 견책하여 배척한 것은 너무 과했다고 아뢰고, 또 김류는 박정 등에 대해서 사감(私憾)을 지니고 있다고 아뢰었다.
당시에 군액(軍額)이 많이 감소되었으므로 병조가 군적(軍籍)을 만들어서 시행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건의하기를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되었으니, 지금 군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형세상 도망쳐 흩어질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먼저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하면서 차자를 세 차례나 올렸으나, 상은 마음속으로 여전히 어렵게 여겼다.
일찍이 조강(朝講)에서 호패와 군적의 이해관계에 대해서 극력 진달하다가, 박정 등의 일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비분강개하여 김류를 침해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날이 저물었으니 속히 경연(經筵)을 파하도록 하라.”고 하자, 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의 말을 노여워하여 물러가라고 하십니다마는, 신이 말씀을 다 진달드리지 못했으니 감히 물러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파직을 명하였다가 달을 넘겨서 다시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구언(求言)한 일을 계기로 해서 공이 상언(上言)하기를 “이괄이 변란을 일으킨 초기에 감옥에 있던 38인을 심문하지도 않고서 처형하였으니, 그 사이에는 필시 억울하게 당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기자헌(奇自獻), 유공량(柳公亮), 전유형(全有亨), 현즙(玄楫) 등이 모두 신설(伸雪)되었는데, 유형의 아들 습(䥪)의 경우는 공이 죽자 심상(心喪) 삼년을 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 4년) 정월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2월에 인헌왕후(仁獻王后)가 세상을 떠났다. 상이 즉위한 초기에 소생(所生) 부모에 대한 칭호를 의정(議定)하라고 명하니,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와 부제학 정경세(鄭經世)가 아뢰기를 “상이 지손(支孫)의 신분으로서 조부의 대통을 이었으니 인후(人後)가 된 경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조카가 숙부의 뒤를 잇는 경우와는 같지 않으니, 부모의 이름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생부에 대해서는 고(考)라고 칭하되 황(皇)이라는 글자는 가하지 말고, 상 자신은 자(子)라고 칭하되 효(孝)라는 글자는 가하지 말 것이요, 상제(上弟)인 능원군(綾原君)으로 하여금 그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타당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김장생(金長生)과 박지계(朴知誡)가 명유(名儒)로 소명을 받고 와 있었는데, 박지계는 “일단 부모라고 칭한 이상에는 반드시 삼년상을 입어야 하고 제사도 반드시 상이 직접 주관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김장생은 “옛날에 형의 신분으로 아우의 뒤를 이어도 조녜(祖禰)라고 칭하였으니, 선묘(宣廟)에 대해서는 고(考)라고 칭하고 소생(所生)에 대해서는 백숙부(伯叔父)라고 칭하는 것이 예법에 합당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와서 상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삼년상으로 확정해서 거행하라고 하였는데, 대신과 삼사(三司)가 쟁집(爭執)하자 상이 장기(杖朞)의 복으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공이 차자를 올려 삼년상을 거행하기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선묘(宣廟)의 아들 14인 중에서 임해(臨海)는 후사가 없고, 광해(光海)는 죄를 지어 폐위되었으며, 대원군(大院君)이 그다음입니다. 따라서 대원군이 생존했다면 전하가 양위(讓位)했을 것이니, 마치 현종(玄宗)이 상왕(相王)을 대한 것처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일단 인후(人後)가 아닌 이상에는 조자손(祖子孫)이 서로 잇는 통서(統緖)를 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는, 김장생과 영상 이원익(李元翼)을 비난하며 배척하였다. 이에 삼사가 번갈아 소장을 올려 공을 삭탈관직(削奪官職)할 것을 청하니, 상이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종묘의 전례(典禮)는 예로부터 의논이 많아서 정하기가 어려운데, 공의 생각에 옳다고 여겨지면 반드시 극력 주장한 것이 이와 같았다.
정묘년(1627)에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하여 세 개의 성을 함락하자 제진(諸鎭)이 모두 무너졌다. 이에 거가(車駕)가 강도(江都)로 피하였는데, 대간(臺諫)이 경성을 떠나기로 의정(議定)한 것을 공의 죄라고 하면서 찬출(竄黜)하기를 청하였다. 후금의 군대가 평양(平壤)에 이르러 강화(講和)를 요구하자, 조정에서 그들의 글에 답하여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논하였는데, 대간이 또 강화의 의논을 공의 죄라고 하면서 극력 공박하였다. 그러다가 화의(和議)가 일단 정해지자 양사(兩司)가 더욱 준엄하게 공을 논하였는데, 이때에는 여러 재신(宰臣)들도 조금씩 처음의 주장을 바꾸었다. 이에 공이 대간을 상대로 상의 앞에서 쟁론하며 말하기를 “싸우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면서 강화하지도 못한다면, 종묘사직을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 중에 강화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없을 텐데, 겉으로만 큰소리를 치고 있다.”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분개하여 매도하기까지 하였다.
후금의 군대가 물러가고 나서 공이 누차 대간의 탄핵을 당하자, 네 차례나 잇따라 차자를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면서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정죄(情罪)를 분간해 밝히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신이 아뢰기를 “경성을 떠나기로 한 의논은 당초 이귀(李貴)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귀는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난리에 임하여 자기 한 몸을 잊었습니다. 지금 조정에 이귀와 견줄 사람을 찾기 어려우니, 어떻게 그의 언어를 가지고 죄를 가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이귀의 충성심은 일월(日月)을 꿰고 있으니, 연소배(年少輩)가 짓밟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무진년(1628)에 유효립(柳孝立)의 역당이 자복하며 진술한 말 중에 “공(珙)이 자전(慈殿)의 밀지(密旨)를 받았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으므로, 자전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엄히 국문(鞫問)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국청(鞫廳)이 상에게 아뢰어 그 진술서를 태워 버리게 하였으므로,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공(珙)이 자전을 사칭하여 무함하면서 가짜로 밀지라고 칭하였으니, 끝까지 신문을 해서 자전이 무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라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물어보지도 않고 불태워 버렸으니 어떻게 무함받았다는 것을 드러내 밝힐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계해년 이후로 역모 사건이 여러 차례나 발생하였는데 그때마다 공(珙)의 이름이 거론되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모두 명백하게 처리하려 하지 않았고, 유독 공만이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극력 주장하곤 하였다.
공은 임금이 당파를 싫어하는 마음을 미리 가지게 되면 충직한 말이 거꾸로 의심받을 수도 있고 참언(讒言)이 그 틈을 타고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계미풍우록(癸未風雨錄)》과 정해년(1587, 선조 20)에 우계(牛溪)와 율곡(栗谷) 양 선생의 심적(心跡)에 대해서 논변한 소(疏)를 상에게 올렸으니, 이는 상으로 하여금 분당(分黨)하게 된 처음부터 끝까지의 사적(事跡)과 피차간의 공사(公私)와 시비(是非)의 소재를 분명히 알게끔 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다시 병조 판서에 임명되자 사양하였으나, 상이 “경은 인재 등용에 사심이 없고 군대 훈련에 법도가 있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경오년(1630)에 가도(椵島)의 장수 진계성(陳繼盛)이 유흥치(劉興治)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상이 계책을 결정하여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에 공이 중국 조정의 장관(將官)은 번국(藩國)에서 마음대로 토벌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서 쟁집(爭執)해 마지않았는데, 상이 군정(軍情)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공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신미년(1631)에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해를 넘기고는 사직하여 체차되었다. 공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에 한 시대의 인재를 널리 찾아서 하나의 책을 만들고는 다시 새로운 인재가 나오면 바로 그 책에 기록하곤 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에 임하여 의망(擬望)할 때마다 모두 그 책에 기록된 인재 중에서 뽑곤 하였으므로, 임용된 사람들 중에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현달한 관원이나 평소에 재망(才望)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혼조(昏朝) 때에 하자가 있었던 사람의 경우에는 청요직(淸要職)에 의망하지 않았다.
후금이 글을 보내 공갈하고 협박하는 일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세폐(歲幣)를 늘리는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국가의 안위를 도모하는 방법으로는 교전(交戰)과 방수(防守)와 강화(講和)의 세 가지가 있는데, 강화는 교전과 방수가 모두 불리할 적에 어쩔 수 없이 택하는 계책입니다. 그러나 강화만을 믿고서 교전과 방수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국가는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입니다.”라고 하고, 또 병농(兵農)을 분리하는 일, 장령(將領)을 택하는 일, 진관(鎭管)을 복구하는 일, 정예 선봉부대를 가려 뽑는 일, 요새지를 점거하고 청야(淸野) 작전을 행하는 일 등 모두 10개 조목의 일을 진달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지금 묘당(廟堂)에서 강구하는 것은 단지 세폐의 양을 조절하는 것일 따름이요, 교전과 방수에 대한 대책은 하나도 세우지 않고 있으니, 이는 앉아서 위망(危亡)의 화를 기다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신이 예전부터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보장(保障)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도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후금 사람들이 따르기 어려운 요구를 해 오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차라리 강도로 들어가 보존하며 먼저 근본을 굳건히 함으로써 범할 수 없는 형세를 만드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큰 화란(禍亂)이 장차 닥쳐올 것을 분명히 알고서 마음속으로 답답하게 여긴 나머지 이처럼 환란에 대비할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
공이 병을 앓자 상이 내의(內醫)를 파견하고 내약(內藥)을 보내면서 하루에 여러 차례나 문병하게 하였다. 공이 숨을 거두던 날 아침에 기운을 내어 창가의 태양을 향해 부복(俯伏)하면서 마치 엎드려 절하는 것과 같은 자세를 세 차례나 취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이 임금님에게 영결(永訣)을 고하는 것이냐고 묻자 공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이 부음(訃音)을 듣고는 슬퍼하여 통곡하였는데, 그 소리가 바깥뜰에까지 들렸다. 상이 안에서 쓰는 의복과 신발과 채색 무늬 비단 등을 갖추어 염습(殮襲)하도록 내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이귀는 알고서는 말하지 않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정성을 다 바쳐 나라를 도운 충직한 신하였는데, 지금 홀연히 세상을 버렸으니 내가 매우 슬퍼하며 애도하는 바이다.”라고 하였고, 또 “그를 미처 정승으로 삼지 못한 것이 매우 후회스러우니, 영의정을 추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특별히 묏자리를 잘 잡는 사람을 보내어 길지(吉地)를 가려서 장례 지내도록 하는 한편, 제사를 올리게 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내리도록 하였으며, 장례 때에 이르러서는 공의 자제들을 위문하고 물품을 내리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또 언젠가는 상이 분부를 내리기를 “지난밤 꿈속에서 선경(先卿)이 눈물을 흘리며 울기에 나도 손을 잡고 함께 울었는데, 꿈을 깨고 나서도 비창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다. 지금 세모(歲暮)에 자손들의 생활이 군색하지 않을까 염려되니, 미곡 10석을 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공의 기일(忌日)이 돌아올 때마다 항상 제수(祭需)를 내리게 하였으니, 전후에 걸쳐 베푼 상의 은휼(恩恤) 모두가 특별한 것이었다. 공의 향년(享年)은 77세이다.
부인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집안 살림을 검소하고 근면하게 하였으며, 부군을 내조하고 자제를 가르칠 적에 모두 의리에 입각하여 구차하게 하지 않았는데, 공보다 먼저 죽어서 고양(高陽)에 장사 지냈다가 옮겨서 부장(祔葬)하였다. 아들 3인을 두었으니, 장남 시백(時白)은 좌의정이고, 다음 시담(時聃)은 통정대부이고, 다음 시방(時昉)은 호조 판서이다. 시백과 시방은 모두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훈(策勳)되었다. 딸은 4인이다. 장녀는 김자겸(金自兼)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좌랑 변경윤(邊慶胤)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수찬 김설(金卨)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승지 김경여(金慶餘)에게 출가하였다.
시백은 아들 3인을 두었다. 장남 흔(忻)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이고, 다음 한(憪)은 참의이고, 다음 열(悅)은 현감이다. 딸은 2인이다. 장녀는 김련(金鍊)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진사 조내양(趙來陽)에게 출가하였으니 바로 나의 아들이다. 시담은 아들 4인을 두었다. 등(憕)은 현감이고, 형(悙)은 찰방이고, 오(悟)는 진사이고, 다음은 필(怭)이다. 딸은 윤유익(尹惟益)에게 출가하였다. 시방은 아들 4인을 두었다. 회(恢)는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이고, 관(慣)과 항(恒)은 모두 진사이고, 다음은 휴(懏)이다. 딸은 3인이다. 장녀는 한이평(韓以平)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진사 김세정(金世鼎)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별검 이주(李週)에게 출가하였다. 변경윤의 아들 명익(命益)은 판관이다. 김설의 아들 우석(禹錫)은 좌랑이고, 딸 3인 중에 장녀는 안두극(安斗極)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제현(李齊賢)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김경여의 아들은 진수(震粹)이고, 딸 2인 중에 장녀는 서진리(徐晉履)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어리다.
흔의 아들 2인 중에 장남 상주(相冑)는 진사이고, 다음은 상윤(相胤)이며, 딸 2인 중에 장녀는 이태장(李台長)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좌랑 여민제(呂閔齊)에게 출가하였다. 한의 아들은 홍저(弘著)이다. 열의 딸 2인 중에 장녀는 정시일(鄭時一)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정순양(鄭純陽)에게 출가하였으며, 아들 3인 중에 장남은 문저(文著)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김련의 딸은 이만유(李萬有)에게 출가하였다. 조내양의 딸 2인 중에 장녀는 김일진(金一振)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박태두(朴泰斗)에게 출가하였으며, 아들 지헌(持憲)은 어리다.
등의 아들 3인은 명저(明著) · 공저(公著) · 경저(慶著)이고, 딸 2인 중에 장녀는 이지일(李之鎰)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김제(金濟)에게 출가하였다. 오의 아들 3인 중에 장남은 만저(㬅著)이고, 딸 2인 중에 장녀는 신우상(申遇相)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필의 아들 1인과 딸 4인은 모두 어리다. 윤유익의 아들 4인 중에 장남은 선경(宣卿)이고, 다음은 임경(任卿)이며, 딸 3인 중에 장녀는 어진석(魚震奭)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변명익(邊命益)의 아들 3인과 딸 3인 중에 장녀는 홍수기(洪受箕)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관은 아들 2인을 두었고, 김세정은 아들 1인을 두었고, 이주는 아들 1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안두극의 아들은 후정(後定)이다. 김진수는 아들 2인과 딸 1인을 두었고, 서진리는 아들 3인과 딸 1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상윤은 아들 2인과 딸 2인을 두었고, 이태장은 아들 1인과 딸 2인을 두었고, 여민제는 아들 1인과 딸 1인을 두었고, 정시일은 아들 1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의 측실 소생으로 아들 시응(時膺)은 판관이고, 시형(時衡)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딸은 현감 안인건(安仁建)에게 출가하였다. 시응의 아들 중에 장남은 염(恬)이고, 다음 흘(忔)은 현감이고, 다음은 극(㥛)이며, 딸 중에 장녀는 신경명(申景溟)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충의(忠義) 송흥서(宋興緖)에게 출가하였다. 시형은 아들 2인과 딸 1인을 두었는데, 장남은 신(愼)이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안인건의 아들 3인과 딸 2인은 모두 어리다. 염의 아들은 의저(義著)이고, 딸은 신응벽(申應璧)에게 출가하였다. 흘의 아들은 신저(信著)이고 딸은 어리다. 극의 아들 4인과 딸 2인은 모두 어리다. 신경명은 아들 4인을 두었는데, 장남은 택(澤)이다. 송흥서의 아들 1인과 딸 1인은 모두 어리다.
공은 소싯적부터 기위(奇偉)한 기절(氣節)을 지니고서 자기 한 몸의 이해와 영욕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당세의 일만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 큰 시비(是非)가 걸린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극언하면서, 설혹 큰 처벌을 받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여 위축되는 일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다가 대훈(大勳)을 세운 뒤에는 세상에 드문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고 스스로 여기고는 그런 발언을 더욱 많이 하고 또 극진히 하였다. 그리하여 일을 논할 때마다 상의 뜻을 거스르면서 범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당시에 공경(公卿) 명인(名人)으로 상의 우대를 받는 자들에 대해서도 조금도 용서 없이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인주(人主)도 꽤나 염증을 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원들 또한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나 되었지만, 끝까지 고치거나 후회하지 않고 더욱 거세게 발언하곤 하였다. 대개 공이 말한 내용 중에는 사람들이 감히 발언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고, 사람들의 사려가 미치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자들이 많이 의심하기도 하였지만, 뒤에 와서는 그런 일들이 사실로 확인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사대부들로부터 민간의 천한 백성들까지 모두 충신이 죽었다고 말하였으며, 혹 조정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으레 “연평(延平)이 살아 있다면 반드시 이런 일을 바로잡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상 역시 공의 말을 채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는데, 남한산성에서 곤욕을 치를 때에는 “연평이 만약 있었다면 일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하였다. 대개 공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여기에 또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바를 공만은 볼 수 있었고, 그 마음이 또 강직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꺾이거나 동요하는 법이 없었으며, 담론하며 분변하는 것 역시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공이 항상 과감하게 말하면서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던 것인데, 상이 비록 염증을 내긴 하였어도 공이 충성심 외에는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데다가 뒤에 가서는 공의 말이 많이 입증되었으므로 매번 이와 같이 공을 그리워하였던 것이다.
아, 공은 이른바 간기(間氣)의 소유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공은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한 시대에 권세를 부리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뇌물과 관련된 소문이 파다하여 항간에서 손가락질하며 비난하는 일이 많은데, 공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털끝만큼도 그런 소문이 나지 않았을뿐더러 상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비분강개하면서 공공연히 뇌물이 행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세태를 지적하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피하곤 하였다. 공이 집안에서 행한 효성과 우애는 물론이요 궁고(窮孤)를 돌보고 친구를 후하게 대한 일들 또한 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많았고, 사람과 교제할 때에도 안과 밖을 훤히 드러내면서 속에 감추거나 숨기는 법이 없었다.
나는 곤궁할 때에 공을 뵙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공의 자제인 시백(時白)과 벗으로 지낼 뿐 아니라 자녀도 공의 집안과 혼사를 맺었으니, 공의 집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공에 대한 묘비명을 요청받고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연안 이씨의 시조는 / 延安之李
당나라에서 건너오신 분 / 來自唐室
저헌이 나온 뒤에 / 樗軒之後
백 년이 지나 그 명성을 회복했나니 / 百年乃復
회복하신 분이 그 누구였던가 / 其復伊誰
월사 그리고 우리 공이었다오 / 月沙與公
월사는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 彼以文章
우리 공은 공훈으로 이름을 날렸나니 / 公以勳庸
한 시대에 우뚝 서신 두 분 / 一時兩大
아무도 견줄 자가 있지 않았다네 / 莫我與隆
공은 부친을 여읜 소년 시절에 / 公始孤童
비로소 남쪽 지방에서 올라와 / 來自南陬
대현에게 의지하여 공부하면서 / 爰依大賢
출중한 재능으로 두루 유력하였다오 / 才俊遍遊
율곡이 서거한 지 얼마 안 되어 / 山頹無何
정여립이 흉악하게 헐뜯었으나 / 凶噴沙
조정에서 패거리와 결탁을 하여 / 朝中連結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처지였고 / 勢不可奪
간특한 합천의 정인홍 또한 / 至於陜奸
산림의 인물이라 자처하고는 / 山林托跡
입을 놀려 임금을 기망했으나 / 鼓吻欺天
사람들이 무서워서 숨을 죽였는데 / 衆皆脅息
우리 공이 믿고 의지할 것은 / 公無所恃
세 치의 혀와 한 자루의 붓뿐이었지만 / 寸管寸舌
한마디의 말로 통쾌하게 격파하여 / 一言破之
썩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 하였다오 / 摧枯振落
왜적으로 인한 화가 하늘에 가득하여 / 倭禍漫天
온 국토가 여지없이 결딴이 나자 / 八路波蕩
통곡을 하며 서쪽으로 달려갔다가 / 慟哭西走
풀숲으로 대가(大駕)를 따라간 뒤에 / 從駕草莽
있는 힘을 모두 바쳐 출입하면서 / 殫力出入
민간의 일이거나 군대의 일이거나 / 民間兵間
사람 따라 일을 잘 처리했으므로 / 人從事辦
상신이 놀라면서 감탄을 하였다오 / 相臣驚歎
광해(光海)의 정치가 극악무도해서 / 昏朝滅德
백성이 도탄에 빠져 신음할 적에 / 塗炭民罹
간악한 신하가 악행을 부추겨서 / 賊臣逢惡
대비에게 포학한 짓을 자행하는 등 / 虐及母儀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지고 / 綱常淪亡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자 / 宗社阽危
공이 일어나 바로잡음으로써 / 起而正之
태양이 다시 빛나게 하였어라 / 天日重新
나는 실로 알겠노니 이처럼 큰 공훈도 / 固知大功
상륜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서 / 不出常倫
공의 한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이 / 一心無他
국가의 운명만 걱정했다는 것을 / 唯國是循
과감하게 직언을 많이 하면서 / 多言觸犯
몸을 잊고 세상에 분개하다가 / 忘身憤世
전복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지만 / 幾顚幾覆
후회하지 않고 더욱 힘써 행했다오 / 不悔益勵
공이 조정에 버티고 있을 적에는 / 公在朝廷
사람들이 무서워하며 조심하였는데 / 人多憚顧
공이 조정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 自公之逝
미꾸라지가 춤추고 여우가 부르짖었다오
/ 鰌舞狐號
임금님도 공의 직언에 짜증을 내며 / 上厭其直
몇 번이나 공을 뜻을 꺾곤 하였으나 / 摧折何屢
그러면서도 충성심에 상을 내리며 / 亦賞其忠
더없는 은총으로 예우하였다오 / 極其恩遇
공의 자제 역시 / 公有男子
공의 충정한 후계자 / 忠貞是嗣
그 사업 그 가성이 / 事業家聲
백세토록 기념할 만하기에 / 百世可紀
묘비에 이렇게 명을 새겨서 / 刻詩墓碑
후세에 길이 전하려 하노라 / 以示來祀

[주D-001]형서(邢恕) : 스승을 저버리고 배반한 제자를 가리킬 때 흔히 거론하는 인물이다. 형서의 자는 화숙(和叔)으로, 《근사록(近思錄)》 권9 치법류(治法類)에 자기의 스승인 정명도(程明道)를 통유(通儒)요 전재(全才)라고 극찬한 말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보주(補註)에 “형서가 명도에 대해서는 이처럼 추앙하며 심복하였지만, 명도의 아우인 이천에 대해서는 아마도 불만스러운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배운 벗들이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많이 꾸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서야 꾸짖을 가치도 없다고 하겠지만, 이를 통해서 명도와 이천 두 형제간의 우열을 엿볼 수가 있다.〔邢恕推服明道如此 而於伊川則蓋有所未滿者 故社友多責其叛師耳 然恕不足責 但於此足覗伯叔兩子之優劣〕”라는 말이 나온다. 또 《상촌집(象村集)》 권42 외집(外集) 제2 휘언(彙言) 2에 “대현(大賢)의 문하에서 노닐었으면서도 소인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던 자는 순경(荀卿)에게서 배운 이사(李斯)와 정자(程子)에게서 공부한 형서와 구산(龜山 : 양시〈楊時〉)의 문인이었던 육당(陸棠)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정인홍(鄭仁弘)이 …… 죄 : 《선조수정실록》 35년 윤2월 갑오일 조에 이귀(李貴)가 정인홍의 죄악을 상세히 아뢴 상소문의 대략이 실려 있다.
[주D-003]인성군(仁城君) 공(珙) : 선조의 일곱째 아들이다. 정빈(靜嬪) 민씨(閔氏)의 소생으로, 선조 21년(1588)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선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인조반정 뒤에는 임금의 숙부로 예우를 받았는데, 역모가 일어날 때마다 으레 그의 이름이 거론된 관계로 항상 위태로운 처지에 빠지곤 하였다. 그리하여 유배당하기도 하고 다시 관대한 처분을 받고 돌아오기도 하다가, 마침내는 인조 6년(1628)에 유효립(柳孝立) 등이 대북파(大北波)의 잔존 세력을 규합하여 모반을 기도할 때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자결을 강요받고 죽었다. 인조 15년(1637)에 복관되었으며, 시호는 효민(孝愍)이다.
[주D-004]현종(玄宗)이 …… 마땅합니다 : 세자가 부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것처럼 인조(仁祖)가 생부인 대원군을 대우해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상왕(相王)은 당 고종(唐高宗)의 여덟째 아들로서, 황제가 되기 전에 상왕에 봉해졌던 예종(睿宗)을 가리킨다. 그는 형인 중종(中宗)과 함께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소생이다. 예종이 죽은 뒤에 그의 셋째 아들인 황태자가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현종이다.
[주D-005]계미풍우록(癸未風雨錄) : 2권 2책으로 된 《계미진신풍우록(癸未搢紳風雨錄)》을 말한다. 계미년 즉 선조 16년(1583)에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하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 서로 소차(疏箚)를 올리면서 벌인 당론(黨論)을 뽑아 모은 책이다.
[주D-006]청야(淸野) 작전 : 청야는 들판을 말끔히 청소한다는 뜻으로, 백성과 가축과 식량 등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그 일대를 텅 비게 함으로써 적군이 물자를 얻을 수 없게 하는 군사 작전을 말한다.
[주D-007]간기(間氣)의 소유자 : 이 세상에 드물게 천지간의 뛰어난 기운을 선천적으로 품부받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주D-008]월사(月沙) : 이정귀(李廷龜)의 호이다.
[주D-009]공이 …… 부르짖었다오 : 이귀(李貴)와 같은 군자가 세상을 떠나자 소인들이 거리낌 없이 행동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소식(蘇軾)의 제구양공문(祭歐陽公文)에 “깊은 산과 큰 못에 용이 사라지고 범이 떠나가면, 온갖 변괴가 발생하면서 미꾸라지와 뱀장어가 춤을 추고 여우와 살쾡이가 부르짖게 마련이다.〔深山大澤 龍亡而虎逝 則變怪百出 舞鰌鱔而號狐狸〕”라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