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 남효은 (추강거사) /약천 남구만 선생

의령남씨 자료 약천 남구만 선생 자료

아베베1 2013. 2. 9. 21:04

 


 

약천집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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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승(家乘)
족보 서(族譜序)



남씨(南氏)가 성을 얻은 것은 처음 신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4년에 안녹산(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현종(玄宗)이 촉(蜀)으로 파천하였는데, 이때 수행하던 신하 김공(金公) 휘 충(忠)이 안렴사(按廉使)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의 예주(禮州)에 이르니, 바로 지금의 영해(寧海)이다. 공은 말하기를, “중국과 외국이 똑같은 천하이니, 황제의 땅 아님이 없다. 이곳에 살기를 원한다.” 하니, 경덕왕(景德王)은 천자에게 아뢰고 공이 우리나라에 살려는 소원을 허락해 주었으며, 중국의 여남(汝南) 사람이라 하여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였는데, 영양(英陽)에 거처를 정하여 그대로 본적(本籍)을 받았다고 한다.
뒤에 고려조에 이르러 삼 형제가 있었으니, 군기시 주부동정(軍器寺主簿同正) 휘 홍보(洪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휘 군보(君甫), 고성군(固城君) 휘 광보(匡甫)이다. 홍보는 그대로 영양을 관향으로 삼았고 군보는 의령(宜寧)으로 관향을 옮겼으며 광보는 고성(固城)으로 관향을 옮겨서 족보가 비로소 셋으로 나누어졌다. 군보의 후손 휘 재(在)는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을 보좌하여 개국 공신이 되고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영의정으로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받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이로부터 의령 남씨가 번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현달한 자들은 대부분 그 후손이다.
구보(舊譜)와 신보(新譜) 두 족보가 있는데, 연대가 아득히 멀어서 기재한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고(故) 판서 선(銑)이 자료를 모으고 수정하였으나 또한 미비한 점이 많았는데, 지난번에 고 참판 익훈(益熏)이 여러 종인(宗人)들에게 묻고 보태어서 권질(卷帙)을 만든 다음 북도(北道 함경도)의 관찰사가 되어 목판에 새겨서 널리 인쇄하여 집안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먼 후손과 미천한 후손들로 하여금 모두 성씨를 얻게 된 유래와 파가 나뉜 까닭을 알게 하였으니,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과 종족을 수합하는 정의(情誼)가 부지런하고 또 지극하다고 이를 만하다.
이제 족보에 기록된 것을 보면 본적을 받은 뒤로부터 관향을 옮길 때까지가 500여 년이 되는데 보첩(譜牒)에 기록된 것은 겨우 6대뿐이니, 유실된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천보 연간에 현종이 촉으로 파천할 때에 수행한 신하로서 사명을 받고 일본에 갔다가 표류하여 신라에 온 사실은 《당서(唐書)》와 우리나라 역사책에 모두 기록된 것이 없으며 안렴사라는 직함은 또 천보 연간에 있었던 벼슬이 아니니, 이는 모두 후세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한 것을 들은 대로 기록하여 고증할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는 오직 밀직공(密直公) 이상은 의심스러운 내용을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고 밀직공 이하는 믿을 만한 내용을 사실대로 전할 뿐이다.
민마보(閔馬父)가 《시경(詩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일컫기를 ‘옛날부터〔自古〕’라고 하였고, 옛날을 ‘재석(在昔)’이라 하였고, 예전을 ‘선민(先民)’이라 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서이다.” 하였다. 이제 의심스러운 것과 믿을 수 있는 것이 유래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감히 사실을 없앨 수 있겠는가.
내가 들으니 성주(成周)의 제도에 성(姓)을 받은 것을 관장하기 위하여 사상(司商)이라는 관직이 있었고, 세계(世系)를 정하기 위하여 소사(小史)라는 직책이 있었으니, 성씨와 세계가 국가의 정치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관청을 만들고 관직을 세우기를 이와 같이 거듭하고 또 많이 하였단 말인가.
내가 짐작건대 천하는 한 나라를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나라는 한 집안을 미루어 넓힌 것이요, 한 집안은 한 사람을 미루어 넓힌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의 몸이 성씨가 있어 그 적(籍)을 나타내고, 집안이 있어 그 종(宗)을 세우고, 족보가 있어 그 대수(代數)를 기록하여, 계통이 후세에 밝아져서 유풍이 그대로 보존되고, 친애하는 마음이 먼 선조에까지 미쳐서 남긴 가르침이 없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는 한 사람의 교화가 한 집안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이르고 나라로부터 천하에 이르러 교화가 점점 이루어짐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이니, 성왕(聖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성씨와 세계를 소중히 여긴 것이 어찌 아무 이유가 없겠는가. 이와 같기 때문에 족보를 만들어서 뿌리를 상고하고 계파를 분별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이는 선조의 덕을 높이고 어짊을 본받아서 낳아 주신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기 위해서이다.
영의공(英毅公)은 타국에서 온 나그네 신하로 몸을 삼가 후손을 도와서 끝내 해동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을 이루었고, 충경공(忠景公)은 나라가 혼란할 때를 당해서 개국하는 시기에 경륜하여 마침내 대려(帶礪)의 훌륭한 공신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후손들이 그 공렬(功烈)을 잇고 그 발자취를 계승해서 무궁한 후세에 이르도록 실추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만약 단지 세차(世次)를 드러내고 벼슬과 지위를 기록해서 집안의 높고 낮음을 비교하고 가문의 갑을(甲乙)을 정하려고만 한다면 어찌 오늘날 이 족보를 편찬하는 본의이겠는가.
익훈(益熏)의 중씨(仲氏) 치훈(致熏)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바닷길로 이 목판본을 수송해 갔고, 해임하여 돌아오게 되자 또 밀직부군(密直府君)의 묘소가 있는 의령으로 판본을 옮겨 왔으며, 막내인 지훈(至熏)은 현재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판각을 보관할 집을 경영하여 오래도록 보관할 계획을 하고 있다.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주갑(周甲)이 되는 정축년(1697, 숙종 23) 8월에 후손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구만(九萬)은 삼가 쓰다.


 

[주D-001]민마보(閔馬父)가 …… 하였다 : 민마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大夫)로 민자마(閔子馬)라고 칭하기도 하며 선민(先民)은 옛날의 성인(聖人)을 이른다. 《시경(詩經)》 상송(商頌) 나(那)에 “예로부터 옛적에 선민들이 공경한 일을 하였으니, 아침저녁으로 온화하고 공손하여 일을 집행함에 공경하였다.〔自古在昔 先民有作 溫恭朝夕 執事有恪〕” 하였는바, 민마보는 이 시를 인용하여 옛 성인들은 이 공경하는 도를 자신이 처음으로 했다고 하지 않고 ‘자고(自古)’니 ‘재석(在昔)’이니 ‘선민(先民)’이라고 하여 반드시 옛날에 근본하였으니, 이는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國語 卷5 魯語》
[주D-002]대려(帶礪) : 나라와 함께 복록을 누릴 공신이란 뜻으로 흔히 개국 공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평정한 뒤 공신들을 봉작(封爵)하면서 맹세하기를, “황하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아도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 후손에게까지 미치게 하겠다.〔使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寧 爰及苗裔〕”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18 高祖功臣侯者年表》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세승 서(世乘序)



청양(靑陽)의 사군(使君) 남반 유안(南磐幼安)은 바로 나의 10대조인 충경공(忠景公)의 11대 종손이다. 하루는 그가 손수 기록한 가승(家乘)을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충간공(忠簡公) 이상은 선조가 나와 똑같았고 의령군(宜寧君) 이하는 유안(幼安)과 계파가 나뉘었다. 우리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그 선대부(先大夫 조고친)에 이르기까지 채택함에 근거가 있고 기재함에 빠뜨림이 없어서 가풍(家風)을 기술하고 세덕(世德)을 열거하였으니, 어찌 부화함과 과시를 일삼은 반악(潘岳)의 글과 육기(陸機)의 부(賦)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문견이 적었고 늙을수록 더욱 혼미하고 우둔해져서 선대의 모든 유문(遺文)과 고사(故事)에 대해 실로 모르는 것이 많았는데, 지금 유안이 편집한 책을 보고서 비로소 그동안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아, 유안은 백세토록 체천(遞遷)하지 않은 불천위(不遷位)를 모시고 있어 집안사람들이 공경히 섬기는 종손(宗孫)이 되었으니, 이 사업에서 선조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점에 대해 남모르게 감동하는 마음이 있었다.
우리 선조인 충경공과 충간공은 조선 초기에 국운이 흥왕(興旺)하여 지극히 성할 때를 당해서 조손이 연달아 정승이 되어 공적이 기상(旂常)에 기록되고 사적이 역사책에 찬란하게 빛나 우뚝이 천지에 남아 있으니, 진실로 신도비에 새겨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후손들의 추모하는 뜻을 가지고 말한다면, 유택(幽宅)에 묘표를 세워서 단지 몇 글자를 새긴 조각돌만으로서는 너무 지나치게 검소해서 크게 걸맞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우리 후손들이 선조의 남은 음덕(蔭德)을 입고 벼슬을 이어 대대로 고관을 지내어서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는데, 마침내 국전(國典)의 장례 법령에 있어 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하지 못한 지가 이제 수백 년이 되었으니, 모든 우리 후손들이 어찌 마음에 서운함이 없지 않겠는가.
유안이 먼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이 돈독하여 이미 이 가승을 지었으니, 바라건대 또 그 뜻을 미루어 우리 집안사람들을 힘써 인솔해서 힘이 미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하여 용머리에 거북 좌대(座臺)로 된 신도비를 두 선조의 묘역에 세워 무궁한 후손에게 길이 보여야 할 것이니, 이는 실로 종손이 해야 할 일이요, 또한 집안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다.
무인년(1698, 숙종 24) 2월 5일에 종인(宗人) 구만은 재배하고 삼가 쓰다.


 

[주D-001]반악(潘岳)의 …… 부(賦) : 반악과 육기(陸機)는 진(晉)나라 문장가로 육기는 《변망론(辨亡論)》과 《호사부(豪士賦)》 등을 지었고, 반악은 무제(武帝)가 친히 적전(籍田)을 갈 때에 그 일을 찬미하는 부를 지어 재명(才名)을 세상에 날렸다.
[주D-002]기상(旂常) : 《주례(周禮)》 춘관(春官) 사상(司常)에 “용의 형상을 서로 어긋나게 그린 것을 기(旂)라 하고, 해와 달을 그린 것을 상(常)이라 한다.” 하였는데, 옛날 신하 가운데 국가에 공덕이 있으면 여기에 기록하여 드러내어 밝혔다.


 

약천집 제24권
 가승(家乘)
14대 조고(祖考) 고려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부군 묘추지(墓追誌)



고려 때 통헌대부 추밀원 직부사를 지낸 남공(南公) 휘 군보(君甫)는 영양(英陽)에서 의령현(宜寧縣)으로 관향을 옮겨 묘소가 또한 이 고을에 있는데, 세대가 멀어서 실전(失傳)되었다가 후손들의 꿈에 나타나 잃었던 산소를 찾아서 다시 봉분하고 비석을 세워 처음 장례할 때와 같이 하였는바, 이 일이 간이(簡易) 최립(崔岦)이 지은 묘표 음기(墓表陰記)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제 백년이 지나서 글자 획을 거의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인 지훈(至熏)이 진주 목사(晉州牧使)로 있으면서 묘표를 다시 새기고 음기는 자기(磁器)를 구워 지석(誌石)을 만들어서 장차 유택에 묻으려 한다고 하였다.
내가 들으니, 토지와 노비를 장만하여 재계하는 사찰에 주고 또 부역을 면제하여 묘소를 지키게 한 것은 실로 우리 고조인 승지공이 처음 시작하였는데, 본도의 우병사 이흥(以興), 순찰사 훤(翧), 통제사 두병(斗柄), 의령 현감 두장(斗長), 군위 현감(軍威縣監) 득붕(得朋), 송라 찰방(松蘿察訪) 종백(宗伯), 고성 현령(固城縣令) 몽뢰(夢賚), 의령 현감 두추(斗樞), 칠곡 부사(漆谷府使) 취성(聚星), 동래 부사(東萊府使) 익훈(益熏), 의성 현령(義城縣令) 상훈(尙熏), 신녕 현감(新寧縣監) 치훈(致熏)이 또 앞뒤로 봉급을 내어서 노비와 토지를 더 장만하였으며, 순찰사 선(銑)이 또 담장을 쌓고 문을 세워 때때로 여닫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비석을 다시 세운 것은 우도 병마우후 택(澤)이 이 일을 주관하였으며, 상훈이 또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고 치훈이 또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어서 힘을 합해 이룬 것이다.
숭정 기원 후 주갑이 되는 정축년 8월 일에 14대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구만은 삼가 쓰다.

 

 

 약천연보 제1권
[연보(年譜)]



약천(藥泉) 문충공(文忠公)의 시조는 중국 사람이다. 당(唐)나라에서 명령을 받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 때문에 신라의 유린군(有隣郡) - 지금의 영해부(寧海府) - 에 표류하니, 이때 나이가 40여 세였다. 신라왕은 그가 신라에 살기를 원하자 이 사실을 당나라 황제에게 아뢰었다. 여남(汝南)에서 왔기 때문에 그것과 연관하여 남씨(南氏) 성(姓)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이라 하여 영의공(英毅公)에 봉하니, 마침내 영양(英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 후에 척(倜)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익(翼)은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로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졌는데, 태자첨사는 고려 문종(文宗) 이후의 관직이다.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휘 군보(君甫)에 이르러 본관을 의령(宜寧)으로 옮겼다. 통헌대부는 충렬왕(忠烈王) 34년(1308)에 충선왕(忠宣王)이 개정한 관계(官階)로 종2품이었다. 이때에 밀직사(密直司)를 파하였으나 이해에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복구하였으며, 2년 뒤에 종2품을 고쳐서 상등(上等)을 광정대부(匡靖大夫)라 하고 하등(下等)을 봉익대부(奉翊大夫)라 하였으니, 통헌대부 밀직부사는 충선왕 초기의 관직이다.
의령 남씨의 족보를 살펴보면 대장군 휘 진용(鎭勇)은 바로 밀직부사 부군(府君)의 선고(先考)인데, 영양 남씨(英陽南氏)의 옛 족보에는 이와 반대로 되어 있고 또 봉호를 의령군(宜寧君)이라 하였으며,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 휘 익지(益胝)를 의령군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의령 남씨의 족보에는 대장군의 손자라고 하였으니, 지금 감히 그 사실 여부를 자신할 수 없다.
풍저창 부사 부군은 문충공에게 13대조가 된다. 이분이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 휘 천로(天老)를 낳았는바, 공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천로는 문하시중(門下侍中) 경렬공(敬烈公) 휘 을번(乙蕃)을 낳았다. 그리고 휘 을번이 영의정으로 의령부원군(宜寧府院君)에 봉해진 충경공(忠景公) 휘 재(在)를 낳았는데, 우리 태조(太祖)의 개국 일등 공신에 책록(策錄)되고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는바, 공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휘 재는 병조 의랑(兵曹議郞) 휘 경문(景文)을 낳았다. 그리고 휘 경문이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휘 지(智)를 낳았는바, 공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휘 지가 간성 군수(杆城郡守) 휘 구(俅)를 낳았는데 형제 중에 셋째이다. 휘 구가 부사과(副司果) 휘 계(悈)를 낳았는바, 공이 묘표를 지었다. 휘 계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 치욱(致勗)을 낳았는바, 공이 묘표를 지었다. 휘 치욱이 좌승지 휘 언순(彦純)을 낳았는바, 공이 묘표를 지었다. 휘 언순이 부호군(副護軍) 휘 타(柁)를 낳았는데 형제 중에 셋째이다. 공이 이분의 증손이 된다.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묘표와 묘지(墓誌)를 지었다. 부인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장사랑(將仕郞) 덕형(德亨)의 따님으로,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휘 타가 평강 현감(平康縣監) 휘 식(烒)을 낳았는데 공이 이분의 손자가 된다.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묘표와 묘지를 지었다. 부인 연산 서씨(連山徐氏)는 참판에 추증된 주(澍)의 따님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휘 식이 금성 현령(金城縣令) 휘 일성(一星)을 낳았는데 공이 이분의 아들이 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행장(行狀)과 묘표를 지었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강릉 부사(江陵府使) 엽(曗)의 따님으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공은 휘가 구만(九萬)이고 자가 운로(雲路)이다.

1세 기사년(1629, 인조7)
인조대왕 7년 12월 3일 계축일 유시(酉時)에 공이 충주(忠州) 누암(樓巖)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 이때 권 부인(權夫人)이 누암에 근친(覲親)하러 갔다가 공을 낳았는데, 공의 오른손 손바닥과 팔뚝 사이에 일곱 개의 까만 점이 있었는바, 모양이 북두칠성과 같았다.

2세 경오년(1630, 인조8)

3세 신미년(1631, 인조9)

4세 임신년(1632, 인조10)

5세 계유년(1633, 인조11)
4월 4일에 증조비(曾祖妣) 현 부인(玄夫人)이 별세하니, 공은 어버이를 따라 정릉(貞陵) 소동(小洞)의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6세 갑술년(1634, 인조12)

7세 을해년(1635, 인조13)

8세 병자년(1636, 인조14)
11월에 어버이를 따라 청나라 침략군을 피해 용안(龍安)으로 갔다.

○ 이때 조고(祖考) 평강(平康) 부군(府君)이 용안 현감(龍安縣監)이었는데, 공은 어버이를 따라 용안현에 있었다.

9세 정축년(1637, 인조15)

10세 무인년(1638, 인조16)
어버이를 따라 결성(結城)에 있는 구산(龜山)의 전려(田廬)로 돌아왔다.

○ 공이 태어나기 1년 전에 평강 부군이 구산에 전려를 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노친을 봉양하였다.

11세 기묘년(1639, 인조17)
10월 29일에 증조고(曾祖考) 부호군(副護軍) 부군(府君)이 별세하였다.

12세 경진년(1640, 인조18)

13세 신사년(1641, 인조19)

14세 임오년(1642, 인조20)
가을에 충주(忠州)의 외가에 머물러 있었다.

15세 계미년(1643, 인조21)
12월에 부호군 부군을 홍주(洪州)의 모과동(木瓜洞)에 장례하였다.

○ 이보다 앞서 부호군 부군을 임시로 장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남응민(南應敏)으로 하여금 묏자리를 정하게 하였다. 남응민은 충경공(忠景公)의 아우인 강무공(剛武公) 은(誾)의 후예로서 방기(方技)로 이름이 났는데, 공의 숙부인 의졸공(宜拙公 남이성(南二星))과 공의 관상(觀相)을 보고 말하기를,
“두 분 모두 반드시 높이 현달할 터인데, 조카의 관상이 더욱 완전하고 좋으니 축하할 만합니다.”
하였다.

16세 갑신년(1644, 인조22)

17세 을유년(1645, 인조23)

18세 병술년(1646, 인조24)
관례(冠禮)를 치르고 어버이를 따라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19세 정해년(1647, 인조25)
○ 10월에 숙부 의졸공(宜拙公)이 평강(平康)의 임소(任所)로 평강 부군을 근친하러 갔는데, 이때 공이 배율(排律) 120운(韻)을 지었다. 그 내용에 “아름다운 시절 해마다 이르러, 인생의 곳곳마다 만나네.〔佳節年年至 人生處處逢〕”라고 하였으니, 약관의 나이에 기상(氣像)과 문리(文理)가 갖추어진 것이 이와 같았다.

20세 무자년(1648, 인조26)
1월에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를 맞이하였다.

○ 부인은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의 현손(玄孫)이고 봉사(奉事) 정수(鄭脩)의 따님이니,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21세 기축년(1649, 인조27)

22세 경인년(1650, 효종1)
효종대왕 원년 7월 25일에 조고 평강 부군이 별세하였다.

23세 신묘년(1651, 효종2)
7월에 공은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 3등에 제61인(人)으로 입격하였다. 11월 12일에 훗날 조씨(趙氏)의 며느리가 되는 딸이 태어났다.

○ 이때 공은 이민적(李敏迪) 형제와 교분을 맺고 학업을 익혀 과시(課試)에서 여러 번 1등을 차지하였는데, 이백강(李白江)이 한번은 공이 초한 원고를 보고 감탄하기를,
“이 사람의 문필을 보건대 정신이 충만해 있으니, 앞으로 차지할 명성과 지위가 결코 내 자식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 공은 모두 4녀를 낳았는데, 세 명은 요절하였다.

24세 임진년(1652, 효종3)
6월 22일에 조비(祖妣) 서 부인(徐夫人)이 별세하였다.

25세 계사년(1653, 효종4)

26세 갑오년(1654, 효종5)
2월 7일에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출생하였다.

○ 이해에 공은 논(論)에서 이상(二上)으로 별시(別試) 초시(初試)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27세 을미년(1655, 효종6)

28세 병신년(1656, 효종7)
7월에 아들이 태어났다.
8월에 별시 을과(乙科)의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11월에 가주서(假注書)에 차임되었다.
12월에 권지 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가 다시 가주서로 친정(親政)에 입시(入侍)한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하고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 아들이 8세에 요절하였다. 뒤에 무신년(1668, 현종9)과 기유년(1669)에 두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한두 살이 못 되어 요절하였다.
○ 공이 대책문(對策文)으로 별시 초시에서 1등을 차지하고, 그다음 달에 마침내 급제하였다. 방(榜)이 막 붙을 무렵에 공이 장인 정공(鄭公)을 찾아가서 문후하였는데, 말하는 도중에 정공이 묻기를,
“방이 언제 나오는가?”
하니, 공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오는 도중에 들으니 제가 급제했다 합니다.”
하였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관인(館人)들이 떠들썩하게 찾아와 축하하므로 온 집안 식구들이 뛸 듯이 기뻐하였으나 공은 여느 날처럼 조용히 행동하며 하고자 하는 말을 다하고 돌아왔다. 공은 어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뻐도 크게 웃지 않고 노여워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결하고 순수한 기운이 얼굴과 등에 배어 나오고 자애로운 마음이 말과 행동에 넘쳐났다. 그리하여 행동거지가 위엄이 있고 말소리가 온화하였으니 천성이 본래 그러하였던 것이다.
○ 고사(故事)에 의하면 오직 상주서(上注書)만이 친정(親政)에 입시한 공으로 승진하는 법인데 이때에 이르러 격식을 뛰어넘어 제수되었으니, 이는 공이 기록하고 응대하는 것이 성상의 뜻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듬해 1월에 사헌부에서 명의 개정을 청하는 계사(啓辭)를 네 차례 올리고 정지하였다.

29세 정유년(1657, 효종8)
1월에 겸 중학교수(兼中學敎授)로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2월에 선조실록수정청등록관 겸 춘추관기사관(宣祖實錄修正廳謄錄官兼春秋館記事官)에 차임되고, 동당 초시(東堂初試) 이소 시관(二所試官)에 차임되었으며, 세자시강원 사서에 제수되었다.
3월에 병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7월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8월에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정언으로 옮겼다.
9월에 시강원 문학에 제수되고 실록 세초연(實錄洗草宴)에 참여하였다.
10월에 활을 하사받았고 세자의 회강(會講)에 참여하여 홍면주(紅綿紬)와 남주(藍紬)를 하사받았으며, 국청(鞫廳)의 문사 낭청(問事郞廳)에 차임되었다.

○ 3월에 감기에 걸려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공은 평소 이동규(李同揆)와 서로 친하지 않았는데, 이동규가 마침 교외에 나갔다가 공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공의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의 기국(器局)과 식견이 반드시 여기서 끝나지 않을 줄을 아니, 병세의 차도를 자세히 알아보고서 나에게 알려 달라.”
하였다. 그 후 십수 일 만에 과연 공의 병이 나았다.
○ 9월에 문학에 제수되었는데 10월에 진선(進善) 권시(權諰)가 강관(講官)을 구임(久任)시킬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근래에는 강관 중에 재주와 학식이 세자를 보필하고 인도할 만한 자가 있더라도 자주 체직되어서 실효가 없습니다.”
하니, 이로부터 공이 시강원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30세 무술년(1658, 효종9)
3월에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4월에 춘당대 문신 정시(春塘臺文臣庭試)에 입격하여 지필묵(紙筆墨)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고 비변사 낭청(備邊司郞廳)에 차임되었다.
5월에 홍천(洪川)의 삼성추고 경차관(三省推考敬差官)에 차임되었는데, 이달에 복명하고 정언(正言)으로 옮겼다.
6월에 재차 상소하여 타위(打圍)하겠다는 명을 중지할 것을 간하여 이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으며, 지제교(知製敎)로 뽑혔다.
7월에 지평에 제수되었다.
9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10월에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문학에 제수되었다.

○ 여름에 병조 정랑으로 비변사 낭청에 차임되었는데, 이듬해 여름에도 옥당관(玉堂官)으로 있으면서 또 이와 같이 겸직하였으며, 현종(顯宗) 원년(1660) 겨울에도 전랑(銓郞)으로 있으면서 또 이와 같이 겸직하였고, 그 이듬해 가을에도 이와 같이 겸직하였다.
○ 이해 여름에 상(上)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상(喪)에 두 번 임어(臨御)하였고 다시 세 번째 임어하여 치제(致祭)하고자 하자, 양사(兩司)에서 국조(國朝)의 예문(禮文)에서 시행하지 않던 일이라고 간쟁하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말이 옳다. 국조의 예문에 실려 있는 일은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으며, 사람들 또한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일례로 근자에 강무(講武)하고 타위(打圍)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루어 놓은 법을 실추시킬까 두렵다. 유사(有司)로 하여금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해서 금년 가을에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정언으로서 상소하여 간하기를,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준수해야 할 것은 준수하고 변통해야 할 것은 변통하는 것이 모두 선조의 일을 계승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다만 대신(臺臣)들의 주장에 격분하신 까닭에 이처럼 타위하고 강무하겠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우리 조종께서는 신무(神武)로 나라를 창건하시고 여러 대를 전해 오면서 크게 형통하고 매우 편안한 때에 수렵(蒐獵)과 군정(軍政)을 시행하였으므로 백성들의 힘을 크게 손상시켰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또 정사에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후세에서 비교하여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이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살펴보니, 태종대왕(太宗大王)께서 모시는 신하에게 이르시기를, ‘봄가을로 강무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이니 또한 폐지할 수가 없으나, 백성들을 뽑아 짐승들을 몰게 하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난번 임실(任實), 태안(泰安), 해주(海州)에 사냥 나간 것을 후회하나 이제 와서 어쩔 수 있겠는가.’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이 분부를 살펴보건대, 이것을 후세에게 법으로 물려주려고 하지 않으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국운(國運)이 매우 위축된 때에 조종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을 이미 차례로 거행하지 못하셨으면서, 도리어 한때 대신들의 말에 격분하시어 선왕께서도 후회하셨던 일을 행하신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기를,
“그대가 진언(進言)한 정성을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며칠 있다가 공이 재차 상소하기를,
“초상에 세 번 임어하는 예(禮)는 옛 경서에 기재되어 있고, 군주가 신하의 상에 친히 제사 지낸 것은 옛날 역사책에 보이니, 대신(臺臣)들이 어찌 이것을 가지고 도리가 아니므로 행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대신들의 구구한, 도에 지나친 계책이 도리어 군주의 훌륭한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도리를 잃고 국제(國制)에 의거하려고 하다 보니 전하께서는 신하들이 군주를 제재하려 한다고 여기시고 반드시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내 말을 어기지 말았으면 한다.’ 하고 바라신 것인데, 그렇다면 우(虞)나라 신하들의 간쟁과 조기(祖己)의 훈계, 난간을 부러뜨린 주운(朱雲)과 옷자락을 붙잡은 신비(辛毗)는 모두 군주를 제재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윗사람을 범한 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두 번의 진언에서 나라를 근심하고 군주를 사랑하는 정성을 여실히 볼 수 있었다. 내 이를 가상히 여기노라.”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중지하였다.
○ 이달에 지제교(知製敎)로 뽑혔다. 수년 후에 현종(顯宗)이 정북창(鄭北窓)의 서원에 사액(賜額)하였는데, 예문관에서 공을 차임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게 하자, 공이 이르기를,
“북창이 유문(儒門)에서는 그 공부의 깊이가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 통달했다고 일컫는 이상 이미 잡박한 것이다. 또 타심통(他心通)이 있어 산속에서 산 밖의 일을 알았고 중국에 들어가서 안남(安南)과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모두 말이 통했다고 하니, 방술(方術)이 기이하고 괴이하다. 서원을 만들어 받드는 것은 부당할 듯하다.”
하고는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동춘(同春) 송공 준길(宋公浚吉)이 여러 유생의 요청에 따라 거듭 권하여 마지않았으나 공은 끝내 응하지 않았다. 말년에 숙종이 김동봉(金東峯)의 사우(祠宇)에 사액하였는데, 서계(西溪) 박공 세당(朴公世堂)이 여러 유생들과 함께 공에게 원장(院長)이 되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동봉의 인품은 절개가 비록 고상하나 원래 방외(方外)에서 노닐었던 사람입니다. 또 초년에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가 중간에 도로 일반인의 옷을 입었는데, 말년에 또다시 승복(僧服)을 입었습니다. 만약 사우의 제도로 조처한다면 괜찮겠지만 지금 마침내 원장과 유사(有司) 등의 명칭을 붙인다면 이는 바로 서원의 제도입니다. 지금 동봉과 북창을 나란히 놓고 논한다면 인품의 고하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으나 서원에 모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동봉이 더 심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편지를 보내 사양하였다.
○ 9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에 앞서 사헌부에서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진(李袗)이 관향미(管餉米)를 제멋대로 사용하였다고 탄핵하자, 수어사(守禦使) 이시방(李時昉)이 차자를 올려 이미 선혜청이 차용(借用)하도록 허락한 일이라고 아뢰었다. 10월에 대사헌 홍명하(洪命夏)가 차자(箚子)를 올려 이진이 너무 지나치게 차용한 점을 아뢰고, 이어 강화 경력(江華經歷) 이위국(李緯國)이 형벌을 남용해 가며 환곡(還穀)을 거둬들인 것을 사헌부 대간들이 탄핵한 일은 사실과 다르다고 진술하니, 상이 답하기를,
“근래에 수령들이 도리를 어기면서 백성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 본래 이와 같다.”
하고, 또 이르기를,
“대간(臺諫)의 계사(啓辭)가 진실하지 못한 것이 본래 이와 같다.”
하였다. 이에 공이 상소하여 간하기를,
“전하께서 온 나라의 수령을 통틀어 모두 백성들의 칭찬을 구한다고 의심하시니, 이 어찌 왕자(王者)가 공평한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하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온 나라의 대간들을 통틀어 모두 진실하지 못하다고 의심하시니, 이 어찌 성인이 겸허한 마음으로 간언을 듣는 도리이겠습니까. 또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신뢰가 우선이고 국방과 식량이 그다음인 것이며, 국가를 보장(保障)하는 계책은 인화(人和)를 우선으로 삼습니다. 지금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국가의 중요한 진영이요 큰 방어진으로서 만일 국가에 변란이 있으면 피난처로 삼아야 할 곳입니다. 그러니 이곳을 지키는 신하의 도리로 볼 때 어찌 오로지 포흠(逋欠)한 것을 독촉하여 받아 내고 창고를 굳게 지키는 것만 가지고 자신의 직책과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진(李袗)이 도리를 어기면서 백성들의 칭찬을 구하려는 마음이 과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만일 관향미를 차용하여 백성들의 부역(負役)에 보충한 것을 죄로 삼는다면 지나친 것입니다. 그리고 이위국이 쇠사슬로 죄인을 거꾸로 매달고 가시 발〔荊簾〕로 죄인을 둘러싼 일이 있었는지 또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만일 국가를 위하여 포흠한 것을 징수하려고 하다가 그리 했다 해서 그 죄를 용서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또 도리를 어기면서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한 것은 진실로 가증스러우나, 도리를 어기면서 윗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것에 비한다면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근래 고을의 수령과 변방의 장수들에 대해 혹 특별히 군기(軍器)를 마련했다 하여 승진시킨 경우도 있고, 혹 특별히 군량(軍糧)을 마련했다 하여 상을 내린 경우도 있는데, 비용을 줄이고 아껴 써서 그 비용에 충당한 자가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이 가운데에는 또한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고 관청의 물건을 줄여서 윗사람에게 아첨하려는 계책을 부린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 이들에 대해서는 도리를 어기면서 칭찬을 구했다는 이유로 처벌한 적이 없으시고, 유독 관향미를 차용하여 백성들의 부역에 보충한 자에 대해서는 이처럼 깊이 미워하시고 통렬히 배척하시니, 진실로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혹 그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는 장차 전하께서 단지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만 미워하고 윗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여길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이에 홍명하가 다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남구만이 급급히 상소하여 이 일을 맡고 나섰습니다.”
하자, 상은 공을 망녕된 사람이라고 답하였다. 찬선(贊善) 송준길(宋浚吉)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나이 젊은 사람이 기어이 자신의 소회를 다 피력하고자 한 것이니, 구태여 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이진이 관향미를 차용하여 백성을 구휼한 것은 미워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 조서(詔書)를 사칭하고 창고의 곡식을 방출한 자가 있었는데, 만약 오늘날이라면 반드시 용서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 젊은 대관(臺官)이 과감하게 아뢴 것은 성명하신 군주께서 좋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해서인데, 성상께서 준엄하게 배척하신다면 천리 밖에서 간언하는 자를 막아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공의 상소를 보다가 “단지 백성들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만 미워하고 윗사람에게 칭찬을 구하는 자는 미워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에 이르자, 이 부분을 표시하여 칭찬하고 탄복하여 이르기를, “내가 이 사람을 만나 보고 싶다.” 하였으며, 판서(判書) 윤이지(尹履之)도 그의 손자를 보내어서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공은 연양부원군은 비록 덕망이 있으나 훈귀 대신(勳貴大臣)이므로 끝내 찾아가서 문안하지 않았고, 윤공(尹公)은 8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쉬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찾아갔다. 공은 성품이 남을 칭찬하거나 당(黨)을 맺어 서로 원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송(兩宋)이 조정을 맡고 있을 때에 온 세상 사람이 몰려갔으나 공은 한 번도 찾아가지 않으니, 회천(懷川)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 나를 찾아와 만나 보지 않은 자는 남모(南某)와 이만영(李晩榮)이다.”
하였다. 공은 시강원(侍講院)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동춘(同春)이 실로 찬선(贊善)을 전담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서연(書筵)에 출입하면서 깊이 서로 추존하고 허여(許與)하였으며, 공은 또한 동춘을 스승으로 섬겼는데 동춘은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이백헌(李白軒)이 공이 지은 시문(詩文)을 보기를 요구하였으나 공은 이것으로 남에게 인정받기를 구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여 공손히 사양하였고, 두세 번 강요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박공 장원(朴公長遠)이 후배를 논할 적에 반드시 공을 첫 번째로 꼽곤 하였다.
○ 11월에 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때 대사헌 채유후(蔡裕後)가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여러 번 상의 엄한 전교(傳敎)를 받고 사직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비록 기강이 없으나 채유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한단 말인가.”
하였다. 12월에 공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영특한 지혜를 타고나셨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들 가운데 누구도 전하의 마음에 차는 자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을 함부로 대하는 마음이 생기시어 공경하고 예우하는 도리가 부족하십니다. 지난번에 채유후의 사직소(辭職疏)는 대체로 정도에 지나치게 사직을 청한 것일 뿐이지 어찌 기강이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평소 채유후에게서 공경하고 예우할 만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를 이와 같이 함부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함부로 대하셨다면 또한 어찌 그를 헌관(憲官)의 우두머리 자리에 놓아두실 수가 있으며, 이미 그를 헌관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히셨다면 또 어찌 공경하고 예우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총애하는 신하를 엄격하게 대하는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옛날의 훌륭한 제왕들은 비록 신하들을 언제나 강하게 책려(責勵)하면서도 또한 반드시 한 가닥 염치를 지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 스스로 그 의리를 다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시니, 이 때문에 신처럼 어리석고 천한 자도 마음속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스스로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기를,
“나는 그대가 진언한 정성을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31세 기해년(1659, 효종10)
1월에 지평에 제수되었다.
2월에 소대(召對)한 자리에서 주강(晝講)과 석강(夕講) 및 소대할 때에 양사(兩司)에 아울러 명하여 입시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3월에 군사들을 여러 궁가(宮家)에 나누어 보내는 것을 중지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윤3월에 사서(司書)에 제수되었다가 정언으로 옮기고 이조 홍문록(吏曹弘文錄)에 뽑혔다.
4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승진하고 병조 정랑에 제수되었다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이달에 명을 받고 전남 우도 연해(沿海)의 열세 고을의 암행 어사가 되었다.
5월 4일에 효종대왕이 승하하니, 조정에서는 공에게 일을 마치고 복명할 것을 명하였다.
6월에 공은 강진(康津)과 금성(錦城)에 대해 봉고(封庫)하였다.
7월에 빈전(殯殿)에 복명하고 상에게 서계(書啓)를 올리자, 상이 이조에 내려 용안 현감(龍安縣監)과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파직시키고, 만경 현령(萬頃縣令)과 옥구 현감(沃溝縣監)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으며, 영광 군수(靈光郡守)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게 하였다.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다.
12월에 교리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옮겼으며, 산릉 독보관(山陵讀寶官)이었다 하여 말〔馬〕을 하사받았다.

○ 처음에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즉시 간관에게 명해서 경연에 입시하여 일에 따라 규간(規諫)하게 하였으며, 중종(中宗)은 일정한 때 없이 대관(臺官)들을 매우 자주 접견하였다. 그리고 선조(宣祖)는 때로 정전(正殿)을 피하여 비현각(丕顯閣)에서 개강(開講)하였는데, 지형이 협소하여 지사(知事)와 특진관(特進官)은 모두 들어가지 못하였고 대간(臺諫)만 대신(大臣), 강관(講官)과 함께 들어갔다. 인조 4년(1626)에 이르러 정언 이경석(李景奭)이 대간으로 대궐에 나아간 자가 만약 경연을 열 때를 만났으면 곧바로 들어가 논계(論啓)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이해 2월에 소대할 적에 공이 지평의 신분으로 아뢰기를,
“대간이 군주의 좌우를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옛날 우리 선왕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입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규례에는 오직 조강(朝講)에만 양사(兩司)가 입시하도록 되어 있으나 조강이 매우 드물기 때문에 대신(臺臣)들이 군주를 접견할 수 있는 때가 마침내 없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시종관(侍從官)이라고는 하나 군주께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시니, 이 때문에 군신 간에 서로 믿는 아름다움이 없고 서로 막혀 통하지 못하는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인견하고 소대할 때에 계사(啓辭)를 가지고 입시하는 것으로 말하면 예전부터 진실로 이러한 규례가 있었으나 갑자기 탑전(榻前)에 들어가 황송하여 몸을 굽히고 아뢰다가 성상의 답하는 말씀이 내리면 즉시 물러 나오니, 어떻게 자신의 소회를 차분히 반복해서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주강과 석강 및 소대할 때에 양사의 관원 1명씩을 차례대로 돌아가며 입시하도록 아울러 명하소서.”
하였다. 상이 전례를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자, 공이 아뢰기를,
“대간을 접견하는 것은 본래 폐단이 되는 일이 아니고 또 조종조의 옛 규례가 있으니, 어찌 굳이 근래의 규례를 지키려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한 바가 이와 같으니 그대로 하라.”
하였다.
○ 3월에 공이 아뢰기를,
“지방의 기병(騎兵)을 서울에서 번(番)을 세우는 것은 본래 숙위(宿衛)하고 순찰하여 비상시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각 관사의 수직(守直)은 각자 그 관사에 딸린 전복(典僕)이 있고, 역군(役軍)을 고용하여 세울 경우에는 따로 보병(步兵)에게 거두는 군포(軍布)가 있으니, 이는 조종조의 좋은 법으로 군사와 백성들이 이 때문에 원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다사다난한 이후로 법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 각 관사의 수직 및 여러 곳의 입역(立役)에 모두 번군(番軍)을 나누어 보내니, 이미 조종조의 본뜻이 아닙니다.
근래에 듣자 하니 여러 궁가(宮家)에는 담장 밖에 모두 군보(軍堡)를 설치하고 군졸을 나누어 보내는데, 궁가 사람들이 모두 이들을 종처럼 부려먹는다 합니다. 궁가 근처에는 간혹 예전부터 이미 성 밑에 군보가 있었는데, 지금 혁파한 뒤에도 여전히 군졸을 정하여 보내서 궁가의 부역에 응하게 하고 있으니, 비단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명분을 참람되게 하고 어지럽히는 데에 관계되는 일이니, 지금부터 여러 궁가에 나누어 보내는 군사를 모두 감제(減除)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수일 후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리고 동료들이 거듭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은 작은 일에는 능하면서 중대한 일에는 능하지 못하니, 매우 애석하다.”
하였다. 공이 인혐(引嫌)하여 아뢰기를,
반영(繁纓)을 하고 조회하는 것은 사가(私家)에 군보(軍堡)를 설치한 일에 비하면 작은 문제일 뿐인데도 중니(仲尼)는 이것을 애석해하셨습니다. 지금 이번에 논한 것을 성상께서 만일 옳지 못하다고 여기신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하찮은 작은 일이라서 굳이 들을 것조차 없다고 하신다면 또한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들이 하는 일이 불쾌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일부러 윤허하지 않았던 것인데, ‘작은 일’이라는 말에 격하여 인피(引避)하는 말이 이와 같으니,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근래에 대각(臺閣)의 기풍이 크게 무너져서 여러 궁가의 일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만 사대부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 지난번 전남도 어사(全南道御史)의 서계(書啓)에 ‘한 사대부가 완도(莞島)에 전장(田莊)을 설치했다.’라고 하였는데도 대간들이 전혀 거론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무슨 사리인가.”
하였다. 이날 상이 전교하기를,
“대간들이 말한, 궁가에 정하여 보내는 군사를 지금 이후로 보내지 말라.”
하니, 공이 다시 인혐하여 아뢰기를,
“완도의 일은 이미 도백(道伯)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으니, 경솔하게 이보다 앞서 논열(論列)하는 것은 실로 우매한 신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 윤3월에 이조 홍문록(吏曹弘文錄)에 뽑히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은 한미한 가문의 출신인데 다만 재주와 식견이 특출함으로 인해 청요직(淸要職) 같은 엄격한 선발에서 항상 명망 있는 자들 중에 으뜸을 차지했다.”
하였다. 뒤에 대관(大官)과 장상(將相)이 되었을 때에도 그렇게 말하였다.
○ 4월에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병조의 낭관을 엄격하게 선발할 것을 청하자, 공이 홍문관의 부수찬에 임명되어 아직 숙배(肅拜)하지도 않았는데 그날로 옮겨서 병조 정랑이 되었다.
○ 이때에 상이 바야흐로 정신을 다잡아 훌륭한 일을 하였으나 서해에는 바닷물의 색이 붉어지고 동해에는 얼음이 얼었으며 강물이 혹 끊기고 흐르지 않으니, 나라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공이 부교리로서 상소하기를,
“신이 들으니, 제갈량(諸葛亮)이 군주에게 아뢰기를, ‘궁중(宮中)과 승상부(丞相府)는 모두 일체이니, 잘하는 자를 올려 주고 잘못하는 자를 벌주는 데에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간사한 짓을 하여 죄과를 범하거나 또는 충성과 선행을 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에게 맡겨서 형벌과 상을 논하게 함으로써 폐하의 공평하고 분명한 다스림을 밝혀야 할 것이요, 편벽되이 두둔해서 궁중과 궁 밖에 법을 다르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고, 주자(朱子)는 군주에게 아뢰기를, ‘옛날 성왕(聖王)들은 모든 음식과 거처, 기용(器用)과 재정, 또 환관과 궁첩에 대한 정사를 모두 해당 관서의 법으로 통제하여 눈 한 번 깜짝이고 숨 한 번 쉬는 시간이라도 털끝만 한 사욕을 숨김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선왕의 정치가 안에서 밖으로 파급되어 가고 은미한 데에서 환히 드러나는 데 이르기까지 조금의 하자도 없이 순수하고 깨끗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유풍(遺風)과 훌륭한 업적이 그대로 남아 후세의 모범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신은 삼가 두 현자의 말씀에 감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은 삼가 들으니, 근자에 대궐 안에서 죄를 범한 자들을 모두 내수사(內需司)에 맡겨 내관(內官)과 서제(書題)로 하여금 심문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내수사라는 명칭부터 본래 공명정대한 것이 아닙니다. 당초에 이것을 설립한 뜻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재물의 출납을 관장하는 데에 불과하니, 이곳이 어찌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죽이는 장소이겠습니까. 아, 훌륭한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으니, 그렇다면 내수사는 진실로 혁파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혁파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은 도리어 사람을 형벌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폐해의 근원이 한번 열려 그 폐해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지금 이후로는 반드시 이로 인하여 점점 끝없이 좋지 않은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내수사에서 사람을 국문(鞫問)하는 규정을 속히 혁파하시어 비록 궁중의 사람이라도 죄를 범한 일이 있으면 모두 법을 처리하는 기관에 맡겨서 법률에 따라 결단하게 하되, 이것을 법조문으로 만드시어 후세에 영원히 남기소서. 그리하여 궁중과 조정이 모두 일체가 되어 털끝만 한 사심도 숨기는 것이 없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내수사의 설치는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고, 조정의 신하 중에 혁파할 것을 건의하고 요청한 자가 또한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훌륭한 정치를 하시려는 이때에 만일 또 이것을 혁파하지 못하신다면 앞으로도 끝내 혁파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에 천하의 재정과 세금을 모두 대영고(大盈庫)에 저장하고 환관에게 이것을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환관들이 이것을 굳게 틀어쥐고 점거하여 건드릴 수가 없었는데, 양염(楊炎)이 머리를 조아리고 그 폐해를 한번 아뢰자 덕종은 당일로 조서를 내려 모두 좌장(左藏)에 귀속시키고 궁중에서 해마다 사용하는 경비를 계산해서 봉입(捧入)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장차 세상에 드문 훌륭한 정치를 이루고자 하시는데 그러면서도 아낌없이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좋아하는 것이 도리어 덕종이 한 것만 못하시니, 다른 것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안으로 마음을 결단하시고 밖으로 조정의 신하들에게 하문하시어 이를 일체 혁파해서 재정을 담당한 관서에 모두 맡기소서. 그리하여 궁중의 모든 수용(需用)은 모두 밖에서 진공(進供)하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성인의 사심이 없는 덕을 보여 주시고 한편으로는 수백 년 동안 내려온 끝없는 병폐를 고치소서. 이렇게 한다면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밝혀서 후세의 모범이 됨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에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나 내수사를 혁파하지는 않았다.
○ 이달에 상이 암행 어사 8명을 나누어 보냈는데, 공은 전남 우도 연해의 함열(咸悅), 용안(龍安), 여산(礪山), 익산(益山), 김제(金堤), 영광(靈光), 만경(萬頃), 옥구(沃溝), 임피(臨陂), 금성(錦城), 강진(康津), 영암(靈巖), 부안(扶安) 등 열세 고을을 암행하였다.
○ 5월 10일에 강진의 남성(南城) 밖을 지날 적에 감영(監營)의 이문(移文)을 받았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4일 오시(午時)에 대전(大殿)이 승하했다.”
하였다. 공은 통곡하고 객사(客舍)에 들어가서 예조의 이문을 받았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어사들의 공무 수행에 대해 대신에게 여쭈었는데, ‘반드시 즉시 올라오라.’라고 말했다.”
하였다. 이에 공이 마침내 급히 달려가면서 중도에서 성복(成服)하려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고 이르기를,
“《오례의(五禮儀)》에 ‘밖에 있는 사신(使臣)은 부고를 들은 지 6일째 되는 날에 성복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조정에 돌아갈 수 없는 자를 이른 것이다. 지금 나는 일을 끝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올라가므로 조정에 돌아가 성복하겠다.”
하였다. 공주(公州)에 이르러 이조의 이문을 받았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장령(掌令) 허목(許穆)이 아뢰기를, ‘무릇 사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국상을 만난 자는 반드시 일을 마친 뒤에 빈전(殯殿)에 복명하는 것이 예(禮)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도의 암행하는 신하가 미처 일을 마치지 못하였는데, 예조에서 이를 살피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오라는 관문(關文)을 갑자기 전하였습니다. 당초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어사를 보내어 염찰하신 뜻을 그대로 버려두고 거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선왕의 명령을 풀숲에 내버리는 것이니, 어찌 심히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러 도의 어사 중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는 그대로 일을 끝마치고 복명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하였다. 19일에 공은 공주의 객사에 이르러 성복하였다.
○ 6월에 공이 해남(海南)에 도착하여 들으니, 전관(前官)이 가렴주구한 것이 끝이 없으며, 새로 부임해 온 사또가 진휼(賑恤)한다는 명목으로 부유한 백성들에게 제멋대로 사채(私債)를 요구하여 백성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하였으며,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관청에 남아도는 저축이 있는데 창고를 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공이 통영(統營)의 환자곡을 조사해 보니, 회외미(會外米)로 변란에 대비하여 창고에 남겨 둔 것이 180여 석이었다. 마침내 이 가운데 150석을 꺼내어 신관 사또로 하여금 굶주린 백성들에게 백급(白給)하게 하고 이어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었으나 해남은 열세 고을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여 죄줄 것을 청하지 못하였다. 강진(康津)에 도착하여 현감(縣監) 김명열(金命說)이 제멋대로 세금을 거두어 자신의 배를 채웠다 하여 봉고파직하고 죄줄 것을 청하였으며, 금성(錦城)에 도착하여 현감 심지명(沈之溟)이 백성들의 부역을 제멋대로 바꾸었으며 명성을 얻고자 백성들에게서 많이 취했다 하여 봉고파직하고 죄줄 것을 청하였다.
○ 7월 11일에 공이 빈전(殯殿)에 복명하고 상에게 아뢰기를,
“용안 현감 김세필(金世泌)은 감영에서 지급한 무명을 나누어 주되 환봉(還捧)의 어려움을 미리 염려하여 생활 터전이 있는 사람에게 1인당 혹 심지어 여러 동(同)을 받게까지 하면서도 곤궁한 사람은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영암 군수 전명룡(全命龍)은 대동미(大同米)의 남은 곡식을 나누어 주면서 관리와 양반 등은 5, 6석까지 받게 하면서도 형편이 더욱 나쁜 굶주리는 백성들은 혹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만경 현령(萬頃縣令) 김여량(金汝亮)은 청근(淸謹)함이 승려와 같으며, 이웃 고을 사람들도 이르기를, ‘피해를 입은 참혹한 실상은 만경이 제일이지만 태수의 어짊은 만경이 으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옥구 현감(沃溝縣監) 이정(李晶)은 상사(上司)에서 지급해 준 것 이외에 별도로 곡식을 마련하여 구휼한 것이 거의 100여 석에 이르렀고, 영광 군수 홍수(洪燧)는 구휼할 때에 저축된 곡식이 다 바닥났으며 호령이 엄격하고 분명했습니다.”
하였다. 이달에 이조에서 복주(覆奏)하니, 용안 현감 김세필과 영암 군수 전명룡은 파면하고 만경 현령 김여량과 옥구 현감 이정에게는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으며, 영광 군수 홍수에게는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공이 상계(上啓)할 때에 또 아뢰기를,
“부안, 만경, 옥구, 임피, 용안, 함열, 여산, 김제, 익산 등 아홉 고을은 대부분 물가에 임해 있어서 지세가 낮고 평평하여 물이 한 번 불어나면 빠지지 않으니, 참혹한 피해가 다른 고을보다 심합니다. 지금 백성들의 힘을 다소라도 덜어 줄 수 있는 방법은 재해의 정도에 따라 급재(給災)하고 환자곡의 봉입을 줄여 주며 감영 소유의 무명을 탕감해 주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이 만경 현령의 말을 들어 보니, 금년 봄에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이르기를, ‘조정에서 우리들을 구휼해 주는 것은 우리들이 굶주리는 것을 민망히 여겨서 반드시 살려 주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선 밭을 갈고 김을 매도록 구제하여 추수한 뒤에 징수하려고 해서인가?’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뜻이 가엾고 애처로우니 가장 먼저 체념(體念)해야 할 일입니다. 무릇 조정의 호령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항상 믿지 않는 것입니다. 금년 봄에 백급(白給)으로 준 곡식이 있었으나 백성 중에 죽을 지경에 이르지 않은 자는 굶주림을 참고 받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민심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근심하고 탄식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무릇 함께 고생하는 것은 좋아하고 혼자만 편안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정이 모두 그러하니, 옛사람이 이 때문에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대동미를 충청도에서는 10두를 거두고 전남도(全南道)에서는 13두를 거두었으니, 조정에서 앞으로 세금을 줄이고 늘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명이 있었으나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13두가 전날의 부역보다 무겁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만 똑같은 한 나라의 대동법으로 전남도에서만 3두를 더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다시 헤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 효종(孝宗)이 즉위했을 때에 우상(右相)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동법은 공역(公役)을 균등히 하고 백성들에게 편의를 주는 것으로, 비록 여러 도에 두루 시행하지는 못했으나 경기와 관동(關東) 지방은 이미 시행하여 효과를 보았습니다. 만약 또다시 이것을 양호(兩湖)에 시행한다면 나라에 유익한 방법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3년 뒤에 이것을 호서(湖西)에 시행하고 지난해에 또 호남(湖南)에 시행하였는데, 호남의 감사(監司) 권우(權堣)가 아뢰기를,
“쌀을 거두는 것이 늘어나면서 민정이 불편해합니다.”
하자, 김육이 이르기를,
“13두는 영구히 정한 것이 아니다. 1년의 비용을 살펴보아서 10두 외에 3두를 2두로 줄이고 2두를 1두로 줄이는 것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대동미의 고르지 못한 실정에 대해 말하였는데, 3년 뒤 가을에 마침내 일체 12두를 정수(定數)로 삼았다.
○ 이번 암행 어사가 출발할 때에 효종이 봉서(封書)를 내려 이르기를,
“해방(海防)이 지극히 허술하다 하니, 각별히 살피라.”
하였는데, 공이 복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계하였다.
“각 포구의 주사(舟師)에 소속된 정병(正兵)은 으레 대부분 육지에 있는 속오군(束伍軍)의 군역(軍役)을 겸하니, 군역을 이중으로 부담하는 것이 괴로울 뿐만 아니라 이들이 주사로 입번(入番)할 때에는 육지에 있는 속오군의 대오는 곧 비게 됩니다. 또 주사 중에 새로 뽑은 무학군(武學軍)과 충장위(忠壯衛) 등 여러 색목(色目)에 소속된 자들은 모두 육지에 있는 속오군의 대오에 속해 있는 사람인데, 이들도 각 포구에 모두 나누어 보내어 한 달간 번을 서게 하니, 공사 간의 이해로 헤아려 보건대 모두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이러한 부류를 모두 조사해서 전속(專屬)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그 액수(額數)가 많아서 대신할 자를 구할 수 없는 점을 어렵게 여깁니다만 한 사람이 두 군데에 이름을 등재하고 있으니, 성책(成冊)을 살펴보면 결원이 없는 듯하지만 갑자기 두 곳에 다 쓰려 할 때에는 한 사람을 나누어 두 사람으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다만 목전의 눈가림을 위한 계책일 뿐이고 난리에 임하여 낭패를 당할 염려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후일 시퍼런 칼날을 무릅쓰고 싸워야 할 사람들이니, 평소에 특별히 더 우대하고 돌봐야 합니다. 어찌 두 군데의 군역에 응하게 하여 살을 깎아 내고 골수를 빼냄으로써 임금을 친애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을 먼저 끊어 버리게 한단 말입니까. 비록 결원이 있어도 대신할 사람이 없어 액수가 많이 줄어든다 해도 한 사람을 두 군데에 소속시키는 폐단은 시급히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각 포구의 물력(物力)이 매우 잔폐한 상황입니다. 국가에서 지급해 준 것은 차경전(借耕田) 4, 5섬지기나 6, 7섬지기에 지나지 않는데, 모두 병작(幷作)을 주기 때문에 추수가 많을 경우에는 3, 4십 석이고 적을 경우에는 2, 3십 석이며, 어떤 경우에는 원래 차경전이 없는 포구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밖에 매월 입방(入防)할 때에 요군(料軍)과 지군(紙軍)을 각각 1명씩 지급해 주어서 그 군포(軍布)를 거두어 이로써 요미(料米)와 지지(紙地)의 값을 마련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가지고 관청의 일을 잘 거행하고 군기(軍器)를 정돈하기를 바란다면 진실로 밀가루 없이 수제비를 만드는 격입니다. 그런데도 혹 이것을 마련한 경우 그 물력의 출처를 따지면 모두 군포에서 나온 것인데, 조정에서는 혹 별도로 준비했다 하여 이들에게 상을 내리고 혹 점검할 때에 부족하다 하여 벌을 내리고 있으니, 이는 실로 서로 모순되는 일입니다. 또 차경전을 본읍(本邑)에서 모두 수세(收稅)하고 있기 때문에 전삼세(田三稅)와 대동미(大同米)를 각 포구에서 모두 납부하는 셈입니다.
신이 들으니 도감(都監)의 둔전(屯田)은 온 나라가 모두 세금을 면제받고, 속오군 또한 50부(負)를 급복(給復)하도록 허락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각 포구의 차경전은 결수(結數)를 정하고 부족한 것은 혹 관둔전(官屯田)을 더 주되 모두 세금을 면제하여 공적(公的) 비용을 충분히 마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군포를 사사로이 쓰는 폐단을 또한 일절 금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공은 또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서 과외(科外)로 징수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 또한 조정의 덕(德)을 베푸는 뜻을 잘 알고 있으나 그 가운데 홀로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바로 시노비(寺奴婢)입니다. 모든 시노비의 신공(身貢)을 연해(沿海)에서는 모두 쌀로 환산하여, 사내종은 1구(口)에 공목(貢木)이 2필인데 쌀 20두로 환산하고, 계집종은 1구에 공목이 1필 반인데 쌀 15두로 환산하며, 또 저화(楮貨), 작지가(作紙價), 역가(役價), 강창가(江倉價) 등도 쌀로 환산하는데, 지난해 조정에서 특별히 배려하여 공목 1필을 모두 쌀 6두로 환산하고 저화 또한 줄여 주니, 저들이 모두 감격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호조에서 사내종과 계집종을 막론하고 각각 후목(後木) 반필을 쌀 1말 2되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니, 이는 전에 없던 것으로서 별도로 생긴 명목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모두 이르기를, ‘감히 저화를 영원히 탕감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만약 후목을 바치지 않게 해 준다면 참으로 큰 다행이겠다.’라고 하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헤아리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또 지금 비록 흉년 때문에 공목 1필을 쌀 6두로 환산하여 줄여서 정하였으나 평상시에는 1필에 10두이거나 10여 두를 넘기도 합니다. 조정에서 대동미를 무명으로 환산할 때에는 5두에 1필인데, 노비의 공목을 쌀로 환산할 때에는 1필에 10두이니 수량의 다과에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그리하여 매양 많은 이익이 국가로 돌아가게 하고 적은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게 하니, 위를 덜어 내어 아래에 보태 주는 정사에 비한다면 어찌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신은 생각건대 노비의 공목을 쌀로 환산하는 것을, 만약 대동미를 무명으로 환산하는 것으로 기준을 삼아 매양 2필에 10두로 정한다면 저들이 큰 혜택을 입어 다시 생명을 보전할 뿐만 아니라 숨기고 누락시켰던 자들이 자수해 오고 도망갔던 자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니, 국가에도 반드시 손해가 없을 것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헤아려서 조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우도(右道)의 봄가을 수조(水操)를 예전에는 매년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서 시행하였는데, 기묘년(1639, 인조17)에 유림(柳琳)이 통제사(統制使)로 있을 때 비로소 통영(統營)에서 합동 조련하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임피(臨陂) 이하의 각 고을과 위 지방에 있는 여섯 포구는 2월 보름 이후에 배를 띄우고 수영(水營) 이하의 각 고을과 아래 지방에 있는 일곱 포구는 3월 초에 배를 띄워 서로 만나 합동 조련한 뒤에 돌아오는 노정이 4월 이후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두세 달 왕래하는 사이에 양식을 싸 가야 하고 농사를 폐하게 되며, 천리 풍파 속에 훈련 기간은 한계가 있고 배가 표류하다가 침몰할 위험도 매우 우려할 만합니다. 그리고 수영과 각 포구에는 비록 입번(立番)하는 수군(水軍)과 육군(陸軍)이 있으나 모두 배 타고 노젓는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병선(兵船), 사후선(伺候船), 방패선(防牌船) 등의 경우에는 원래 격군(格軍)을 정하여 보내는 일이 없고, 모두 토졸(土卒)을 동원하되 대가(代價)를 주든 주지 않든 모두 윤격(閏格)이라 칭하고 강제로 배정하여 배에 타게 합니다. 그리하여 합동 조련을 할 때마다 영진(營鎭)의 가내(家內) 남정네들이 토졸이 되어 전부 배를 타서 봄과 여름을 헛되이 보냄으로써 해마다 농사를 망치고 있습니다.
대체로 수사(水使) 또한 대장(大將)이니, 소속 병사들을 거느리고 앞바다에서 조련하는 것이 미진함이 없을 듯하고, 만일 통제사가 주장(主將)이므로 병기 상태를 직접 검열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수사의 임기가 24개월이므로 격년(隔年)으로 합동 조련해도 통제사가 재임 중에 한 번 검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군사와 백성들이 겪는 폐해가 제거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성(錦城)은 경진년(1640, 인조18)부터 염목(鹽木) 60동(同)을 마련하여 호조에 바치고 있는데, 당초의 사목(事目)은 각처의 염분(鹽盆)에 대해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을 막론하고 모두 중지하고 혁파하여 모두 염철(鹽鐵)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한 후 시일이 오래되자 점점 침탈당하여, 본현(本縣)의 염분 도합 34좌(坐) 중에 7좌는 내수사(內需司)에 속하고 4좌는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에 속하고 6좌는 정혜옹주방(貞惠翁主房)에 속하고 그 나머지는 다만 17좌뿐입니다. 염목을 마련하여 바칠 때에 본현에서 백방으로 구해 장만하기 때문에 민간에 폐해가 미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갑신년(1644)에 본도(本道)에서 해조에 보고하여 염목 25동을 감면받았으나 그 나머지 35동을 마련하여 갖추기가 어렵습니다. 금년 봄에 영광(靈光)의 백성들이 감사에게 하소연하는 글을 올려 이르기를, ‘영광과 금성은 토지와 인민의 많고 적음이 현격하게 다른데, 금성은 염목이 단지 35동이고 영광은 60동에 이르니, 감사가 해조에 보고하여 금성에서 지난번에 감면받았던 염목을 다시 그대로 바치도록 함으로써 영광 백성들의 의혹을 제거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대체로 염목이 나오는 것은 염분에 달려 있고, 인민과 토지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영광은 고을이 비록 작지만 염분이 74개인데 폐지된 것이 7개이고, 금성은 고을이 비록 크지만 염분이 34개인데 침탈당한 것이 17개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토지의 크고 작음을 일컬으면서 염분의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음으로써 이미 면제받았던 부세를 금성에 다시 더하였으니, 이는 일의 실정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금년에 사복시(司僕寺)에서 본도에 이문(移文)을 보내어 이르기를, ‘금성의 별장(別將)이 관장하고 있는 여러 섬의 염분과 어살을 본관(本官)에서 절대로 침해하여 징수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섬에 있는 염분 15좌가 장차 모두 별장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고 본현에 속한 것은 2좌뿐이니, 2좌의 염분을 가지고 60동의 염목을 내게 하는 것은 일이 온당치 못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헤아려서 변통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처의 목장(牧場)에 모두 감목관(監牧官)이 있으나 근래 사복시에서 별장을 정하여 목장 근처에 보내어 둔전(屯田)과 소금을 굽는 일, 어물을 채취하는 등에 관한 일을 오로지 관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목장은 본래 말을 먹이기 위한 것인데 지금은 말이 없는 곳도 목장이라고 칭하고는 곳곳마다 둔전을 설치해서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많이 점유하고 있으니, 이른바 별장을 사복시로 하여금 혁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 공이 이번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나갔을 때 인물을 물색해 보니, 금성(錦城) 사람으로 전(前) 세마(洗馬) 김만영(金萬英)과 담양(潭陽) 유학 유진석(柳震錫)이 있었다. 유진석은 고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후손이다. 그러나 봉서(封書)에 인재를 천거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하였다. 2년 뒤 봄에 공이 혜성측후관(彗星測候官)에 임명되었을 때 상소하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아뢰자, 상이 재주에 따라 전형하여 서용하라고 명하였으나 승정원에서 이것을 이조에 내리지 않았다. 그다음 해 봄에 공이 영남 진휼 어사(嶺南賑恤御史)로서 겸하여 인재를 물색하라는 명에 따라 상소하여 아뢰기를,
“지금 조정이 대체로 성실성이 없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이 천거한 자가 만약 거짓되고 망녕되다면 지금 다시 천거하더라도 실로 일에는 유익함이 없고 단지 먼 지방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혹여라도 그렇지 않다면 지난번에 천거했던 자를 오히려 등용하여 시험해 볼 만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특별히 승정원에 명하시어 신이 지난번에 올린 상소문을 다시 가져다 유사에게 내리소서.”
하였다. 이에 이조에서 그 인재를 거두어 쓸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32세 경자년(1660, 현종1)
현종대왕(顯宗大王) 원년 1월에 금성(金城) 부군(府君)을 진천(鎭川)의 임소에서 모셨다. 이달에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3월에 문신의 삭시사(朔試射)에 나아가지 아니하여 파직당하였다.
11월에 다시 서용되어 병조 정랑에 제수되고 뒤이어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12월에 명을 받들고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시호를 광주(廣州)에 내려 주었다.

33세 신축년(1661, 현종2)
1월에 혜성측후관(彗星測候官)에 차임되었다.
2월에 북학 교수(北學敎授)를 겸하였다.
5월에 말미를 얻어 진천에 근친하러 갔다.
6월에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고 교리에 제수되었다.
8월에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제수되었다.
9월에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말미를 얻어 진천에 근친하러 갔다.
12월에 헌납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 1월에 혜성이 나타나자 공을 측후관으로 차임하니, 공이 마침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천문학에는 귀머거리나 봉사와 다름이 없는데 마침내 측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조정에서 실제로 하늘의 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신이 천문학에 밝아서 옛날 감석(甘石)과 같다 하더라도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광망되고 어리석은 신의 계책을 아뢰어, 마음을 다하여 공경히 닦고 반성하시는 전하를 만분의 일이나마 돕는 것이 나을 것이니, 이렇게 하면 행여 다소라도 그 책임에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가장 친애하고 신임하시며 중외에서 평소 기대를 거는 자는 실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두 사람보다 더한 이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빈번하게 부르심이 이미 간절하고 지극하셨습니다만, 이처럼 재앙을 당한 때에는 다시 도움을 청하는 뜻과 자신을 겸허히 하는 정성으로 기필코 조정에 나올 때까지 계속하여 부르셔야 할 것입니다. 전 참판 박장원(朴長遠)은 영화와 이익에 관심이 없어 대신(大臣)이 재상감으로 천거하였고 선왕조에서도 특별히 장려하여 등용할 뜻을 품으셨으나 근래 하찮은 일에 걸려서 오랫동안 물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의논하는 자들이 애석해하는 바입니다. 청풍 부사(淸風府使) 유경창(柳慶昌)은 청렴과 고행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재신(宰臣)들이 선왕조에 등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끝내 조정에 등용되지 못하였으니, 오늘날 더욱 먼저 거두어 써서 표창하는 뜻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담양 부사(潭陽府使) 임유후(任有後)는 훌륭한 이름이 당세에 알려졌고, 또 주군(州郡)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아 훌륭한 업적을 드러냈으나 노쇠하여 장차 죽게 되었는데도 끝내 외직에 버려져 있으니, 국가에서 인재를 장려하고 선비를 아끼는 도리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에 홍수가 범람하여 도성 문까지 밀려드는 재앙이 생기자, 구양수(歐陽脩)는 포증(包拯), 장괴(張瓌), 여공저(呂公著) 등을 등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후세에 논하는 자들이 근본을 모색한 훌륭한 의논이라고 칭찬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오늘 어리석은 신이 구구히 바라는 뜻입니다.”
하였다.
○ 이때 상(上)이 도성 안에 있는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두 비구니(比丘尼) 사찰의 비구니가 궁인(宮人)들과 서로 내통하는 것을 미워하여 승려와 비구니들을 도태하여 환속시키라고 특별히 명하였는데, 대신과 옥당(玉堂)이 갑자기 시행하기 어렵다고 아뢰어 마침내 먼저 두 비구니 사찰을 철거하였다. 비구니 가운데 나이가 젊은 자는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내보내게 한 다음 사찰의 목재를 봉은사(奉恩寺) 승려에게 주었다. 우참찬 송준길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국학(國學)에 오랫동안 북학(北學)이 없으니, 비구니 사찰의 목재로 북학을 설립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2월에 공은 북학 교수를 겸하였다. 이때 봉은사의 승려가 이미 비구니 사찰의 목재를 철거해 가서 오직 주춧돌과 기둥만이 남아 있었는데, 공은 약간의 창호(窓戶)와 판자 등을 사찰의 승려들에게서 되돌려 받고, 호조에 공문을 보내어 감역(監役)을 정하여 파견해서 관사의 규모를 갖출 수 있도록 청하였으나 네댓 번 회보(回報)한 뒤에야 비로소 감역을 정하여 보냈다. 그리고 병조에서는 또 말하기를,
“북학을 설립하는 것이 비록 성상의 특별하신 분부에서 나왔으나 북학의 수리(修理)는 본래 계하(啓下)받은 공사(公事)가 아니니, 사람을 부리는 값으로 주는 포목을 내줄 수 없다.”
하여 부득이 중간에 그 역사를 중지하고 말았다. 공은 또다시 예조에 보고하여 북학을 수리하는 일을 계하받기를 청하여 봄부터 여름을 거쳐 윤7월에 이르도록 예닐곱 차례 보고하였는데, 그제야 예조에서 비로소 예전에 없던 흉년 때문에 결코 이 일을 의논할 수 없다는 뜻을 글로 써서 보내왔다. 북학에 이미 담장도 없고 벽도 없으므로 공공연히 도둑질이 만연하여 재목과 기와가 날로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관리가 숙직 때 기록하는 생기(省記)에도 매번 ‘공(空)’ 자를 써넣었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영남 진휼 어사로 출발하기에 앞서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당초에 조정에서 만약 먼저 유사에게 명하여 학궁(學宮)을 설립한 뒤에 관원을 두어 직책을 맡게 하였더라면 사리가 저절로 순하였을 터인데, 학궁이 완공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필요 없는 관원을 두는 바람에 마침내 여러 차례 공문을 보낼 때마다 번번이 한 철 혹은 몇 달씩을 끌다가 끝내 큰 흉년을 당하여 그대로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또 금년 가을에 만약 큰 풍년이 들지 않는다면 2, 3년 안에는 결코 수리할 가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후일에 다시 수리한다 하더라도 집은 반드시 모두 썩고 기와와 돌은 반드시 모두 흩어져 잃고 말 것이니, 그때에 이곳의 관리가 되었던 자가 어찌 감히 스스로 자기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난해 가을에 외람되이 옥당의 관리에 임용되었을 때 인대(引對)하는 여가에 이 일을 아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성상의 체후가 편치 않으시어 문자로 번거롭게 아뢰는 것도 심히 외람되었으므로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지난번 성균관과 예조에 보고하면서 본학의 관원을 지금 우선 입계(入啓)하여 감하(減下)하고 본학에서 떼어 받은 재목과 기와를 지금은 우선 호조로 돌려보냈다가 풍년이 들면 다시 의논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성균관과 예조에서는 모두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또 명을 받고 외지로 나가게 되어 돌아올 기약이 아득하니, 신의 작은 정성을 성상께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공연히 관원을 두어 쓸데없이 허비하고 일을 그르치는 걱정이 없게 하시기를 참으로 바라 마지않습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해 또 깊이 서글퍼하는 바가 있습니다. 비구니의 사찰을 혁파하고 학궁을 새로 설립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보기 드문 훌륭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유사로 있는 자들이 일을 미루면서 하루하루 날짜만 보내다가 오늘에 와서는 과연 이처럼 학궁의 수리를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는데, 지난해 봄에 어째서 한 구역의 집을 보수하여 군상(君上)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지 못했단 말입니까. 서울에 있는 관원이 성상께서 특별히 하교하신 일을 시행할 것을 청하는데도 시일을 지체하여 결국에는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데, 하물며 저 먼 지방의 미천한 백성이 서울의 아문에 도움을 요청할 경우 어찌 한 철이나 한 달 만에 그가 원하는 대로 그 일이 모두 마감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은 외람되이 성상의 총애를 입어서 조석으로 출입하여 말씀을 다 아뢸 수 있는 위치인데도 오히려 한번 조용히 앞자리에 나아가 자세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여러 관리와 일반 신료들이 무슨 방법으로 각자 성상께 자신의 소회를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을 미루어 보면 또한 지금의 국사를 돌이켜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성찰하소서.”
하였다. 상은 이 상소문을 이조에 내려 마침내 사찰의 재목과 기와를 우선 호조에 돌려보내 학관(學官)을 감하하였다. 이해 가을에 송 참찬(宋參贊)이 초야에 있었는데, 상소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의 상소에 곡절을 자세히 말하였는데, 원근에서는 이 일을 전하면서 웃음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오늘날의 정령(政令)이 대부분 이와 같다는 것을 아신다면 이 일을 통해 후일을 경계하는 데에 도움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 해에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사찰의 재목을 옮겨 와 비천당(丕闡堂)과 벽입재(闢入齋)를 만들었다.
○ 9월에 공이 이조 정랑에 제수되었다. 이보다 앞서 정언(正言) 이지익(李之翼)이 ‘중신(重臣) 이일상(李一相)이 곤수(閫帥)의 미곡을 실은 배를 받은 것’을 조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인심이 복종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전형(銓衡)하는 자리에서 발론(發論)하여 이지익을 지평에 첫 번째로 의망(擬望)하였는데, 이조 참판 김수항(金壽恒)으로서는 이를 막고자 하니 말하기가 어렵고 침묵하자니 비방을 받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잠깐 장막 밖으로 나가 쪽지에 글을 써서 공에게 전달하기를,
“지평의 수망(首望)을 말망(末望)으로 바꾸면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이 사람이 의망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의망을 해 놓고 어찌 아무런 이유 없이 다시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참판이 자리로 들어와 다시 말이 없었다. 이지익이 지평에 제수되고 난 뒤에 예전에 거론했던 이일상의 일을 대대적으로 말하니, 당시의 공론이 전조(銓曹)의 잘못된 인사 탓으로 돌렸다. 이조 참판 김수항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이지익이 외직에 보임되었다가 이제 막 돌아왔으니 곧바로 의망하는 것은 너무 급하다고 생각하였으나 낭관이 끝내 기어이 의망하니, 진실로 용렬한 신으로서는 굳이 고집하지 못했습니다.”
하여 드러내 놓고 공을 배척하니, 공이 이 때문에 편안하지 못하였다.
○ 10월에 공은 말미를 얻어 진천(鎭川)에 근친하러 갔는데, 12월에 기한이 지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하여 개차(改差)되었다가 다음 해 여름에 다시 전조의 자리에 들어갔다. 이때 장선징(張善澂)이 부사(府使)로 있다가 급제하자, 이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그를 호명하며 지평에 첫 번째로 의망하라고 하였다. 공이 붓을 멈추고 말하기를,
“당하관을 통청(通淸)하는 것은 권한이 낭관에게 있는데 저에게 먼저 묻지 않고 곧바로 거명하는 것은 옛 제도가 아닙니다.”
하였다. 홍공(洪公)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계곡(谿谷)의 아들인 정지(靜之)의 벼슬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낭관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낭관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홍공이 끝내 강요하지 못하였다.

34세 임인년(1662, 현종3)
1월에 경상도 진휼 어사에 뽑혔는데, 상소하여 지나는 길에 진천(鎭川)에 들러서 병든 어머니를 문안할 것을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2월에 공이 하직인사를 할 때에 상이 인견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백성을 구제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4월에 공이 장계를 올려 진휼하는 일의 타당한 방안을 아뢰니, 상은 장계를 비변사에 내리고 아울러 감사에게 이문을 보냈다. 이달 공은 경상도의 좌도와 우도를 두루 거쳐 거창 현감(居昌縣監)을 파직하고 성주(星州)를 도회(都會)로 정하여 여러 고을에 보내는 문서를 감회(勘會)하였다. 이달에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5월에 헌납으로 옮겼다. 영해 부사(寧海府使)를 파직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부모에게 문안할 것을 상소로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조 정랑으로 옮겼다.
6월에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으며, 동학 교수(東學敎授)를 겸하였다. 공은 이달에 복명하고 서계(書啓)를 올려서 상주(尙州) 등 열두 고을의 수령을 표창하고 예천(醴泉) 등 여섯 고을의 수령을 폄하하였는데, 상이 이 일을 이조에 내려서 열두 고을의 수령은 차등을 두어 상을 내리고 여섯 고을의 수령은 파직하였다. 또한 도내의 어진 인재인 하홍도(河弘度), 조임도(趙任道) 등 23인을 천거하니, 상은 두 사람에게 미곡(米穀)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7월에 홍문관부응교 겸 교서관교리에 제수되었다.
8월에 감시(監試) 초시(初試) 일소 시관(一所試官)에 차임되었다.
9월에 말미를 얻어 진천에 근친하러 갔다.
10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정시(庭試) 대독관(對讀官)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장인인 지평 정공(鄭公)이 별세하였다.

○ 1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 행 호군(行護軍)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방의 기근이 날로 심해지니, 진휼 어사를 일찍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엄밀하게 선발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예전에 보냈던 암행 어사의 서계는 부적당한 부분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에서 묘당과 의논하여 엄밀하게 선발해서 영남과 호남에 먼저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공이 경상도 진휼 어사가 되었다.
○ 2월 3일에 하직 인사를 할 때 상이 두 어사를 인견하였는데, 앞으로 나오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말하고 싶은 일을 일일이 계달(啓達)하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진휼청(賑恤廳)에서 계하(啓下)받은 사목(事目)이 자못 자세하나 외방의 형세는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 점이 있으니, 비록 사목 가운데 기록된 일이 아니더라도 편의상 백성을 구휼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행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일의 형편상 약간 늦추어도 되는 것은 즉시 계달하고, 만일 불에 타는 자와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는 것처럼 급한 일은 편의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앞서 중종 임인년(1542, 중종37) 봄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구황적간 어사(救荒摘奸御史)로 진천(鎭川)에 이르러서 시를 지었는데, 그 네 구절에,
아픈 백성들은 단비가 온 뒤에 소생하고 / 民病欲蘇時雨後
봄빛은 나그네 시름 속에 다 보내노라 / 春光都盡客愁邊
황정은 참으로 어진 수령이 있어야 하니 / 荒政儘由賢守宰
삼 년 묵은 약쑥 함께 버리지 마오 / 莫令幷棄艾三年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이 진천을 지나며 문안할 적에 객사의 판각(板刻)을 보고 감동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흉년에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는 예로부터 잘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러한 중임을 담당하니, 선현이 시행하신 것은 과연 어떠하였는지 모르겠다. 퇴계(退溪)께서 당시에 시행하신 것을 지금 고증할 수가 없으니, 공경히 차운(次韻)하여 세월이 그때나 지금이나 서로 같음을 표할 뿐이다.”
하였다.
○ 이때 진휼청에서 정한 사목에 이르기를,
“각 고을의 관수(官需)에 사용하고 남은 곡식과 통영(統營)의 곡식, 함경도, 강원도의 곡식을 재해가 특별히 심한 곳에 나누어 보내어 환자곡으로 나누어 지급하되, 요컨대 수량의 많고 적음을 적절히 헤아려 공평하게 하라.”
하였다.
○ 2월에 공이 고성(固城)에 이르러서 성내(城內) 통영의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 4600여 석을 인근 연해의 고성, 진해(鎭海),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 함안(咸安), 칠원(漆原), 양산(梁山) 등 여덟 고을에 나누어 주되, 재해의 경중과 인민의 다과에 따라 모곡(耗穀)을 제하고 환자를 갚게 하였다. 공은 이날 통영에 이르러 통영에 있는 조곡(租穀) 700석을 양산의 감동창(甘同倉)에 보내어 건량(乾糧)과 죽미(粥米)를 재해가 더욱 심한 연로의 선산(善山), 인동(仁同), 대구(大丘), 창녕(昌寧), 현풍(玄風), 영산(靈山) 등 여섯 고을에 백급(白給)하게 하였다. 며칠 있다가 사천(泗川)에 이르러서 감사(監司)에게 공문을 보내 산군(山郡)의 곡식을 인근 우도(右道)의 재해가 심한 고을에 나누어 주고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운반해 온 쌀을 좌도(左道)에 나누어 주며, 그 나머지를 우도에까지 나누어 주게 하였다.
○ 3월에 공은 이 일을 모두 장계로 아뢰었다. 이때에 정언 이무(李堥)가 아뢰기를,
“더욱 심한 재해를 입어 곤궁한 자들에게는 여러 고을에서 환자를 되돌려 받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애당초 나누어 지급할 때에 초입(抄入)하지 않았습니다. 양남(兩南)의 회부곡(會付穀)의 경우는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우나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운반해 온 미곡의 경우는 결코 환자를 갚게 할 수가 없으니, 모두 백급하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 상소문을 비변사에 내리니,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수년 동안 계속하여 거듭 기근이 드니, 환난을 염려하는 방도를 생각할 때 국가의 저축을 일시에 모두 비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장차 죽게 될 백성들도 곡식을 얻으면 살 수가 있으니 가을 추수 뒤에 환자의 상환이 어려울 것인가 쉬울 것인가를 곡식을 나누어 줄 때에 따지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만, 더욱 심한 재해를 입은 부류를 혹 초입하지 않았다면 과연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어사와 도신(道臣)에게 거듭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4월에 공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경우 좌도와 우도와의 거리가 매우 먼 관계로 곡물을 나누어 줄 때에 각각 가까운 곳을 따라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북쪽에서 운반해 온 쌀을 좌도에는 전부 주고 우도에는 혹은 나누어 주기도 하고 혹은 아예 나누어 주지 않기도 하였는데, 만일 백급하게 한다면 그 혜택을 골고루 입을 수 없게 될 것이니, 원래 행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본도의 원회곡과 각 아문(衙門)과 각 영(營)의 곡식은 흉년이 들어 거둘 수가 없으므로 현재 남아 있는 수가 적습니다. 장부를 살펴보고 문적을 고찰하면서 거두어들일 명목을 물어보면 지극히 작은 고을이라도 거의 1만 석이 넘습니다. 그러므로 예전에 민간에서 비록 풍년을 만나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것은 모두 환자곡의 수량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약간 백급한다 하더라도 하늘의 은택을 입어 추수할 때에 다소 풍년이 들어서 바쳐야 할 것을 바치고 나면 저축이 텅 비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염려할 것이 아니고 혹여라도 또다시 흉년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문제인데, 이럴 경우 비록 문적에 나와 있는 환자곡의 수량이 다시 곱절이 된다 해도 결코 국가의 재정에는 보탬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곡물은 장차 가을에 추수한 뒤에 반드시 도로 바쳐야 하므로 곤궁한 백성들의 경우 반드시 더욱 심히 궁핍한 자에게 먼저 주게 하니, 이는 결코 행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신이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물정(物情)을 물어보니, 초봄에 굶주린 백성들을 초출(抄出)할 때에 조정의 분부에 따라 소와 말과 가마솥과 전택(田宅)이 있는 자는 모두 초출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3, 4월이 되자 그들의 굶주림과 곤궁함이 초입(抄入)한 자에 비하여 도리어 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추가로 넣는 것을 허락하자니 그 수효가 끝이 없고, 전결(田結)에 따라 환자곡을 나누어주자니 소유한 결부(結負)가 없어서 전혀 곡식을 얻지 못하거나 결부의 수가 적어서 얻는 것이 몇 되와 몇 홉에 지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여러 고을에 분부하여 이와 같은 무리들을 별도로 초출해서 식구를 계산하여 환자곡을 나누어 주되 한결같이 기민(飢民)의 예(例)대로 시행하여 누락될 염려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백급하도록 허락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 이에 여러 고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재해가 더욱 심해서 환자곡을 바치기 어려운 자는 모두 구휼한 뒤에 개록(開錄)하여 서면으로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 경우는 마땅히 조처하는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여러 고을의 굶주린 백성들의 숫자와 재해를 입은 정도에 대해 이미 그 대략을 알았으니, 만약 도회관(都會官)의 문서를 마감할 때에 기민에게 지급할 죽미(粥米)와 건량(乾糧)의 수량을 미리 계산하여 회감(會減)하고 다시 재해를 입은 실태의 경중을 헤아려서 여러 고을에 각각 1, 2백 석이나 혹은 2, 3백 석을 출연(出捐)하여 백급한다면 전염병에 걸려서 막사에 나와 있는 자와 더욱 심하게 가난에 쪼들리고 잔약한 자의 환자곡을 탕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조정에서는 곡식을 출연할 때에 허실을 서로 속이는 폐단이 없을 수 있고, 여러 고을에서는 세금을 낼 사람이나 빚을 진 사람이 죽거나 달아나서 세금을 받을 길이 없는 경우 제멋대로 징수할 우려가 없으며, 굶주린 백성들은 겨우 죽음을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환자곡을 갚으라는 독촉으로 곤란을 겪는 일이 없을 것이고, 공곡(公穀)의 원수(元數)도 이 때문에 크게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각 영(營)의 회록(會錄)하고 남은 곡물도 백급으로 쓰기에 미진한 것이 있으니, 만약 이것을 옮겨다가 회감하게 하면 더욱 편리하고 합당할 듯합니다. 이번에 아뢰는 바는 중대한 사안에 관계되니, 성상께서 밝게 생각하시어 가부를 분명히 살피셔서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그 득실을 참작하여 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하니, 이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어사의 장계를 자세히 살펴보니, 진휼 상황을 자세히 고찰하여 반복하여 진달한 내용이 그 실제를 제대로 갖추었으니 실로 사의(事宜)에 부합합니다. 세 등급으로 나누어서 회감하면 비록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이라 해도 줄여 주는 양이 300석을 넘지 않을 것이니, 이런 뜻으로 감사에게 아울러 공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생각하기를, ‘회감하는 수량의 경우 그 등급을 획일적으로 매기면 자연 열 배, 백배의 차이가 생기게 되므로 세 등급으로 나누는 것보다 곤란한 점이 있다. 즉 작은 고을이라도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인 경우에는 줄여 주는 수량이 혹 100여 석을 넘는 경우도 생기고, 큰 고을이 재해를 당했을 경우에는 굶주린 백성이 혹 십수 배에 이르는데도 반드시 300석으로 제한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장차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이른바 300석이라는 것도 미(米)와 조(租)를 구분하지 않는다면 비록 수량을 정하여 제한하더라도 혜택이 고르게 돌아가지 못하는 병폐가 없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재해가 가볍고 고을이 작은 곳은 혹 6, 7석을 줄여 주거나 아예 감면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고을이 크고 재해가 심한 곳은 혹 300석 이상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5월에 공이 장계로 자세히 보고하였는바, 추가로 초입한 굶주린 백성들이 원래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재해의 심한 정도를 따지지 않고 모두 절반으로 줄여서 탕감해 주었는데 허비한 바가 그다지 많지 않고 탕감하지 않은 수효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감사인 민희(閔熙)에게 약속한 대로 복명할 때에 ‘모두 탕감하도록 허락하되 그 방식은 상평창(常平倉)에 남아 있는 곡식 3, 4천 석과 감영의 별회곡(別會穀)을 회감하는 식으로 할 것’을 청하였다. 이 일을 비변사에 내리자,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추가로 초입한 기민들은 생활 터전이 없는 자와는 차이가 있으니, 어사가 아뢴 대로 탕감하여 조정의 은혜로운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공이 하직하고 떠날 적에 아뢰기를,
“도내의 각 아문과 각 영의 둔전(屯田) 및 여러 궁가(宮家)의 농장에 있는 미곡을 진휼하는 데에 전량 가져다 사용하고, 그 값으로 도내의 무명을 올려 보내면 양쪽 다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공이 대구(大丘)에 이르러 창원(昌原)의 용동궁(龍洞宮) 둔전 백성이 올린 정장(呈狀)을 보니, 도장(道掌)이 해마다 침탈한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공이 창원 현감 김여량(金汝亮)으로 하여금 이 일을 조사하게 하였다. 3월에 공이 창원에 이르러 캐물으니, 둔전 64결(結) 중에 태반이 재해를 입어서 실제 결수가 29결이 못 되는데도 그대로 64결로 하여 1결마다 10석씩을 거두었으며, 도장이 잡곡으로 1결마다 8두를 사사로이 거두었다고 하였다. 공이 마침내 현감으로 하여금 먼저 도장을 내쫓아 손을 쓰지 못하게 하니, 둔전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소생한 것처럼 절하고 기뻐하며 발을 굴렀다. 4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도장은 본래 궁인(宮人)의 족속으로 세력을 믿고 공갈을 치면서 못하는 짓이 없어서 현감들도 대등하게 맞서지 못하니, 이들의 포악함이 어찌 경주(涇州)의 전지(田地)에서 납입하기로 한 숫자만을 알 뿐이라고 한 초영심(焦令諶)의 포악한 행위에 그치겠습니까. 비록 선왕조에서 계하한 공사(公事)를 받들어 경작하는 자를 곧 도장으로 삼는다 해도 마침내 반드시 그 안에서 함부로 징수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니, 본관(本官)에서 거두어들이는 것만 못합니다. 이와 같은 곳이 다만 한 고을이나 한 도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융통성 있게 잘 조처해서 백성들이 뼈를 깎아 내고 살을 저미는 듯한 고통을 모두 면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영남의 좌수영(左水營)에서 양산(梁山)의 구법곡(仇法谷)에 도청(都廳)을 설치하고 시장에서 곡식을 말〔斗〕로 될 적에 세금을 거두었는데, 3월에 공이 양산에 이르러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을 듣고는 수영에 이문을 보내 통렬히 근절시키며 말하기를,
“배와 수레에까지 세금을 거두는 것도 옛사람들은 오히려 백성을 해친다고 말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되와 말에까지 세금을 거두니, 더욱 놀라고 탄식할 만하다.”
하였다. 공은 또 서계(書啓)를 올릴 적에 연해의 선세(船稅)가 선척(船隻)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 병폐를 아뢰니, 상이 각 아문과 각 궁가에 명하여 지금 있는 선척 외에는 숫자를 계산하지 말도록 하였다.
○ 공이 하직하고 떠날 때에 63개의 고을을 일일이 다 다니기 어려운 점을 아뢰니, 상이 사세를 살펴서 잘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재해를 입은 고을에 이르러서 다시 생각하기를,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은 진실로 직접 다니면서 방문하지 않을 수가 없고, 곡식을 다소 수확한 고을도 반드시 직접 완급(緩急)을 살핀 뒤에야 곡식을 내어 재해를 입은 고을에 옮겨 지급할 수 있다.’ 하였다. 이에 좌도와 우도를 두루 돌아다니되, 남해(南海), 거제(巨濟), 개령(開寧), 금산(金山), 지례(知禮) 등 다섯 고을은 곡식을 다소 수확하였고 길이 멀기 때문에 다만 문서로 신칙하였다. 4월 16일에 공이 다시 대구에 이르렀는데, 그달 하순인 맥추(麥秋)에 이르면 여러 고을들이 사목에 따라 모두 진휼을 끝내도록 되어 있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모맥(牟麥)이 처음 익을 때에 죽을 끓여 먹이던 수많은 백성들을 한꺼번에 풀어 돌려보내면 갑자기 먹을 것이 없어서 기로에서 방황하다가 굶주려 죽어 시신이 골짜기에 버려질 염려가 있고 또한 반드시 좀도둑질이 공공연히 만연할 우려가 있다.’ 하여, 마침내 여러 고을에 분부해서 비록 진휼을 끝냈더라도 그중에 더욱 의지할 곳이 없고 힘없는 자들을 가려 혹은 본관에서 조처하거나 혹은 약간의 진휼곡을 내어서 6, 7일 동안 더 먹인 다음 모맥이 익기를 기다린 뒤에 풀어 돌려보냄으로써 보리 이삭을 주워 먹어 연명할 방법이 있게 하였다. 또 날씨가 더워서 전염병이 심하니, 비록 모맥이 익었더라도 막사를 나가는 무리들이 보리를 베어다가 방아를 찧어 먹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여, 마침내 여러 고을로 하여금 남은 환자곡을 나누어 주되 진휼할 때와 똑같이 시행하여 전공(前功)이 헛수고로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을 장계로 자세히 아뢰었다.
○ 이때 성주(星州)를 도회로 정하여 여러 고을의 문서를 감회(勘會)하였다. 공이 5월에 감회를 마치고 장계를 올리기를,
“구휼하는 정사는 마땅히 관청에서 마련한 곡식과 굶주리거나 병들거나 죽은 백성의 다소를 가지고 수령들의 상벌을 정해야 할 듯합니다. 신이 일의 형편을 자세히 살펴보니, 저축이 많은 부유한 고을은 수령이 힘을 들이지 않더라도 곡식을 많이 얻을 수 있지만 지극히 잔폐하고 작은 고을은 수령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주선한다 해도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곡물의 많고 적음은 수령이 유능한가 유능하지 못한가를 가늠하는 실적이 못 됩니다. 그런데 수령이 스스로 마련했다 하여 논공행상한다면 허위를 조장하는 병폐가 있을 듯합니다.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에 대해 여러 고을에서는 혹 삼가 돌보지 않아 이렇게 만들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염려한 나머지 와서 보고하는 자가 전혀 없으므로 신이 별도로 공문을 보내어 이르기를, ‘윗사람을 섬기는 데 있어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는 도리로 볼 때 마땅히 하나하나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데 더구나 사람이 죽은 경우이겠는가. 아마도 오래 기근이 들고 질병이 더욱 극성한 탓일 터이므로 조정에서도 사세를 헤아릴 것이니, 혹시라도 죽은 자를 누락시킨다면 각별히 죄를 청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후로 속속 와서 보고하는 자가 있으나 아직도 줄여서 보고하는 일이 없지 않은데, 달리 상고할 방법이 없으니, 수령이 스스로 보고한 숫자만 가지고는 결코 공과 죄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두 건(件)을 책으로 만들어서 이미 개록(開錄)하고 이러한 실정을 먼저 아룁니다.”
하였다. 6월 25일에 공이 복명한 뒤 입대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일을 마치고 올라왔는데, 도내의 일은 어떠한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깊이 염려해 주시고 수령들도 모두 삼가 두려운 마음으로 임했기 때문에 겨우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흉년이 든 해이기는 하나 별달리 도적이 창궐할 염려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흉년에 도적이 창궐하는 것이 으레 백성들의 우환이 되었는데, 이제 그럴 염려가 없다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하였다.
○ 공이 하직하고 출발할 적에 아뢰기를,
“신의 출행이 이미 암행이 아니니, 수령들 중에 가장 유능한 자와 유능하지 못한 자를 뽑아서 서계(書啓)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4월에 공은 거창 현감(居昌縣監) 성진흡(成震熻)이 옮겨 온 미곡이 2분은 조(租)이고 1분은 미(米)라 하여 파직하고, 5월에 영해 부사(寧海府使) 조사기(趙嗣基)가 신칙을 태만히 하고 문서가 뒤섞여 두서가 없다 하여 파직한 다음 모두 장계로 아뢰었다. 공이 복명할 때에 아뢰기를,
“수령들 중에는 필시 가을이 된 뒤에 거관(去官)하고자 하는 자가 매우 많을 것인데, 금년 가을에 민사(民事)를 조처하기가 진휼할 때보다도 더 어렵습니다. 반드시 시말을 자세히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해야 하니, 금년 겨울까지는 절대로 가볍게 체직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조에 말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이어 서계를 올려서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성기(李聖基), 선산 부사(善山府使) 권성원(權聖源), 동래 부사(東萊府使) 이원정(李元禎),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지온(李之馧), 인동 부사(仁同府使) 양일한(楊逸漢), 안동 부사(安東府使) 성후설(成後卨), 함안 군수(咸安郡守) 권희(權曦), 청도 군수(淸道郡守) 목내선(睦來善), 전 창원 현감(昌原縣監) 김여량(金汝亮), 진해 현감(鎭海縣監) 박영계(朴永繼), 함창 현감(咸昌縣監) 이최만(李最晩), 진보 현감(眞寶縣監) 채익준(蔡翊俊)을 표창하고, 예천 군수(醴泉郡守) 김운장(金雲長), 자인 현감(慈仁縣監) 우규(禹糾), 양산 군수(梁山郡守) 김하현(金夏鉉), 울산 부사(蔚山府使) 이후석(李後奭), 장기 현감(長鬐縣監) 신경윤(申慶胤), 김제 군수(金堤郡守) 남천택(南天澤)을 폄하하였다. 다음 날 이조에서 복주하기를,
“이성기, 이원정, 이지온에게는 모두 말을 하사하고, 성후설, 목내선, 김여량, 이최만에게는 모두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권성원, 양일한, 권희, 박영계, 채익준은 모두 승진시키고, 김운장 등 6명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다.
○ 이번에 진휼 어사로 나갈 때 겸하여 인재를 물색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므로 3월에 공이 여러 고을에 이문을 보내기를,
“경내에서 행실이 크게 드러난 인물은 각각 그 이름 아래에 행적을 자세히 쓰고, 한두 구(句)로 범범하게 제목을 쓰지 말라.”
하였다. 그리하여 고을을 지나갈 때에 길가에 있는 자는 직접 만나 보았고, 거리가 조금 먼 경우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묻곤 하였다. 공이 이때에 별도의 단자(單子)를 올려 아뢰기를,
“영남(嶺南)은 평소 인재의 부고(府庫)로 알려져 있는데, 인재의 명성이 뚝 끊어짐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먼 지방에서 고요히 자신을 지키는 선비는 비록 훌륭한 행실과 세속을 초월한 높은 뜻이 있더라도 명성이 조정에 알려지지 못하여 작은 녹봉도 얻지 못하고, 사판(仕版)에 이름이 나열된 자들은 사사로이 청탁하고 권문세가에 붙어서 애걸하고 뇌물을 쓴 무리들입니다. 이 때문에 시골 백성들이 태수를 논할 때에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오기를 바라고 지방에 있는 사람이 오기를 원치 않으니, 서울 사람이 모두 지방에 있는 사람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시골에서는 그보다 더 염치없는 자들이 끝내 벼슬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공은 이어 진주(晉州) 사람인 전 현감 하홍도(河弘度)와 함안(咸安) 사람인 전 좌랑(佐郞) 조임도(趙任道)의 어짊을 아뢰기를,
“본도(本道)에는 예로부터 선생과 장자(長者)가 많아서 후진들을 잘 이끌어 주었는데, 불행히도 근자에 고을에는 존경하여 우러를 만한 사람이 없고 지방에는 본받을 만한 스승이 드물어서 법도와 현자가 살아 있던 땅이 도리어 시끄럽게 송사하는 고을이 되었으니, 이는 실로 국가에서 선한 자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구별하여 기풍을 세우는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도내에 들어간 뒤로 인사(人士)들이 함께 추앙하고 복종하는 자를 물어보니, 모두 이 두 사람을 들었습니다. 조임도는 집이 다소 멀어서 직접 찾아가서 만나 보지 못하였고, 하홍도는 가서 만나 보았는데 비록 늙고 병들어서 세상에 쓰이기에는 마땅하지 않았으나 서당에서 학문을 닦고 강독하며 생도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 예전에 이미 표창하였으니, 다시 거두어 녹용(錄用)하거나 혹은 특별히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비단을 내려 주고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묻는 것이 인물을 장려하는 방도에 합당할 듯합니다. 조임도는 이미 나이가 많으니 더욱이 그가 살아 있을 때에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서 피폐한 교화와 나쁜 풍속이 흥기될 수 있도록 하소서.”
하였다. 공은 또 만나 본 현풍(玄風)의 유학(幼學) 곽태재(郭泰載), 합천(陜川)의 유학 배일장(裵一長), 안음(安陰)의 유학 박이점(朴爾點)을 천거하고, 또 소문으로 들은 영해(寧海)의 전 참봉(參奉) 이휘일(李徽逸), 성주(星州)의 유학 이석견(李碩堅), 진주(晉州)의 유학 박만(朴曼), 안동(安東)의 전 참봉 김시온(金時榲), 청송(靑松)의 생원(生員) 조함세(趙咸世), 금산(金山)의 유학 배상유(裵尙瑜), 상주(尙州)의 전 현감 정도응(鄭道應), 영천(永川)의 무인(武人) 정호례(鄭好禮), 봉화(奉化)의 전 부솔(副率) 강흡(姜恰) 등을 천거하니, 상이 하홍도와 조임도에게 쌀과 곡식을 차등 있게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 8월에 감시(監試) 초시(初試) 일소 시관(一所試官)에 차임되니, 공은 오로지 연구하여 고시(考試)하는 데에 힘썼다. 종전에는 감시에서 사서의(四書疑)를 지은 자는 몇 사람 안 되고 그 밖에는 대부분 그대로 옛것을 본뜨고 앞뒤만 약간 바꾸었는데, 공은 그런 것들을 모두 떨어뜨리느라 17일 만에야 비로소 방(榜)이 나왔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은 15일 만에 방을 내었고 완양군(完陽君) 이충원(李忠元)도 열흘 남짓이 걸렸으며, 그 밖에는 모두 8, 9일을 넘지 않았다.” 하였다.

35세 계묘년(1663, 현종4)

1월에 홍문관 응교에 제수되었다.
2월에 사헌부 집의로 옮겼으며, 감시(監試) 복시(覆試) 참시관(參試官)에 차임되고 부응교에 제수되었다.
3월에 영녕전수개도감 낭청(永寧殿修改都監郞廳)에 차임되고 문과(文科) 복시(覆試) 일소 참시관(一所參試官)에 차임되었다.
4월에 문과(文科) 전시(殿試) 대독관(對讀官)에 차임되었다.
5월에 사간원 사간에 제수되었다.
7월에 집의에 제수되었다.
8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사도시 정(司䆃寺正)에 제수되었으며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제수되었다.
9월에 집의에 제수되었다가 부응교로 옮겼다.
10월에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에 제수되었다가 집의로 옮기고 응교에 제수되었으며, 수어청 종사관(守禦廳從事官)에 차임되었다.
12월에 사인에 제수되고 유생 전강의 참고관에 차임되었으며, 남한산성 번고 어사(南漢山城反庫御史)에 차임되었다.

○ 예전에 태조 3년(1394)에 종묘를 세우고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 네 분을 봉안하였다. 세종 3년(1421)에 정종(定宗)을 부묘(祔廟)하려 할 적에 예조에서 송(宋)나라 소희(紹熙) 연간의 사조묘(四祖廟) 제도를 따를 것을 청하였다. 이로 인해 정전(正殿) 네 칸을 종묘의 서쪽에 짓고 이름을 영녕전(永寧殿)이라 하여 목조를 제1실(室)로 체천(遞遷)하였고, 세종을 부묘할 때에 익조를 제2실로 체천하였으며, 세조를 부묘할 때에 도조를 제3실로 체천하였고, 예종을 부묘할 때에 환조를 제4실로 체천하였다. 성종을 부묘할 때에 연산군(燕山君)이 처음으로 정종을 영녕전 협실(夾室)로 체천하니, 이후로 체천한 신주를 모두 이와 같이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5년 후에 선조(宣祖)가 종묘를 중건(重建)할 적에 도궁(都宮)의 옛 제도를 회복하려 하였는데,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마침내 한결같이 임진왜란 이전의 제도를 따랐다. 효종을 부묘하려 할 때에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송나라 조정의 의논하는 자들이 희조(僖祖)를 별전(別殿)으로 체천하려고 하자, 주자(朱子)가 그 잘못을 극력 말하였습니다. 우리나라 목조는 바로 송나라의 희조와 같아서 주(周)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에 비견되는 분인데 태묘(太廟)에 으뜸이 되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신주를 체천하고 부묘할 때에 목조를 옮겨 봉안하여 시조로 삼음으로써 한결같이 주나라의 옛 제도와 같이 하셔야 합니다. 또 태묘에 동서의 협실을 만들어서 익조 이하의 체천한 신주를 봉안한다면 명분이 바르고 의리가 분명해져서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해도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을 예조에 내려서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니, 정태화(鄭太和)와 심지원(沈之源)이 그 불가함을 아뢰어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해 3월에 이르러 종묘서 제조(宗廟署提調)인 김좌명(金佐明)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영녕전 동서의 익실(翼室)이 매우 좁아서 다시 세우자는 의논이 오래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서쪽 익실의 서북쪽 모퉁이 담장에 생긴 틈이 점점 벌어져서 반드시 철거하고 중수해야 하니, 이번 기회에 고쳐서 다시 세우소서.”
하자, 마침내 수개도감(修改都監)을 설치하였다. 공이 낭청이 되어 아뢰기를,
“정전(正殿) 네 칸의 서쪽에 마땅히 여섯 칸을 늘려서 협실에 모신 정종 이하 체천한 신주를 일체 정전에 봉안하소서.”
하니, 도제조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는 곧 종묘가 둘인 것이니, 다만 익실을 세 칸 늘리소서.”
하였다. 4월에 상이 정전을 본떠 좌우로 세 칸을 세울 것을 명하니, 입대한 재신(宰臣)들의 의견이 똑같았는데, 사인 이단상(李端相)이 상소하기를,
“자손의 체천한 신주를 시조의 협실에 봉안하는 것은 바로 옛 제도입니다. 우리나라 태묘의 제도는 이미 태조를 제1실로 삼고 있으니, 사조(四祖)의 체천한 신주를 협실에 내려서 봉안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녕전을 둔 것이니, 영녕전의 협실은 바로 목조의 협실입니다. 공정대왕 정종(定宗) 이하의 체천한 신주를 협실에 봉안하는 것은 비록 옛 제도에 온전히 부합하지는 않으나 오히려 자손의 체천한 신주를 시조의 협실에 올려서 봉안하는 뜻이 있습니다. 영녕전의 제도가 이미 사조의 별묘(別廟)가 된다면 체천한 여러 신주를 함께 제향하는 사당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기어이 변통하고자 할 경우 혹 정종 이하의 체천한 신주를 태묘의 협실에 봉안하는 것은 그래도 근거할 만한 점이 있지만 영녕전의 정전에 일체 봉안하는 것은 옛날과 지금의 제도를 참고해 보건대 모두 근거할 바가 없으며, 다만 조종조에서 협실에 봉안하게 한 깊은 뜻을 도리어 낮추고 구차하게 만드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가을에 이단상이 다시 편지를 보내 공에게 묻자, 공이 답하기를,
“지금 종묘의 예(禮)를 논하는 설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합하여 도궁(都宮)을 만드는 것이요, 두 번째는 주자(朱子)가 정한 것을 따르자는 것이요, 세 번째는 정종 이하의 체천한 신주는 태묘의 서쪽 협실에 옮겨 봉안하자는 것입니다. 지난날 상하가 의문을 제기하며 논란할 적에도 모두 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존형(尊兄)께서 상소하여 건의한 것에도 이 문제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다만 영녕전의 정전(正殿)에 정종 이하를 함께 봉안하는 것과 그 협실에 내려 보관하자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겠습니다.
만약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에 대해 영녕전의 제도가 종묘의 제도와 구분되지 않아 종묘가 둘이 되는 혐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주례(周禮)》를 상고해 보면 선공(先公)의 체천한 신주를 후직(后稷)의 사당에 보관하고, 선왕(先王)의 체천한 신주를 목(穆)은 문왕(文王)의 묘실에 보관하고 소(昭)는 무왕(武王)의 묘실에 보관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서 이미 태묘를 세우고 또 영녕전을 세웠으니, 이미 종묘가 둘이 되는 혐의를 면치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영녕전에 있는 협실을 가지고 혐의를 피하고 은미한 것을 밝히는 방도로 삼으려 한다면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제 생각에는 체천한 신주를 협실에 보관하는 것은 바로 태묘의 제도이므로, 이제 영녕전을 이미 조묘(祧廟)라 해 놓고 다시 그 협실에 신주를 보관하는 제도를 둔다면 진실로 이것이 혐의쩍은 일이지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이 혐의쩍은 일은 아닐 듯합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상공(相公)이 이른 바 종묘가 둘이 되는 혐의가 있다는 것과 형의 상소문 가운데에 ‘어찌 다만 사당이 둘이 되는 혐의만 있을 뿐이겠는가.’라고 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에 대해 조종(祖宗)의 본의가 어떠한지 알지 못하면서 망녕되이 고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악을 만든 것은 세종조(世宗朝)에 시작되어 성종조(成宗朝)에 이루어졌으니, 《오례의(五禮儀)》는 바로 성종조에서 완성한 책입니다. 《오례의》의 영녕전 도본(圖本)을 살펴보면 그 아래 글에 이르기를, ‘영녕전에는 체천한 신주를 봉안한다.’라고 하여, 사조(四祖)를 별묘에 모신다는 말이 없고 다른 신주를 협실에 보관한다는 말도 없으니, 그렇다면 영녕전은 애당초 사조의 별묘가 아니고 바로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정종 이하를 어찌 유독 협실에 내려 보관한단 말입니까.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똑같이 정전에 봉안하는 것은 결코 조종의 뜻이 아니다.’라고 말씀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전에 함께 봉안하는 것에 대해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에 고증할 수가 없어 사람들의 의심을 풀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한나라와 당나라는 모두 체천한 신주를 별도로 봉안하는 사당이 없으며, 송나라의 사조전(四祖殿)은 희조를 이미 체천한 뒤에 오직 사조만 봉안하였을 뿐이고 뒤이어 들인 체천한 신주가 없습니다. 오직 명나라의 종묘 제도만이 바로 우리나라의 제도와 유사하니, 명나라의 덕조(德祖)ㆍ의조(懿祖)ㆍ희조(熙祖)ㆍ인조(仁祖)는 바로 태조 때에 추존한 사조입니다. 그 후대에 이르러 차례로 체천하여 태묘의 침전(寢殿) 뒤에 별도로 조묘(祧廟)를 세워서 봉안하였으며, 선종(宣宗)과 인종(仁宗) 두 신주도 조묘에 들여 봉안하고 사조와 함께 정전에 나열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근거할 만한 제도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우리나라의 영녕전은 태묘의 서쪽에 있는데 명나라의 조묘는 태묘의 침전 뒤에 있고, 우리나라 신좌(神座)의 위차는 서쪽을 상석으로 하였는데 명나라 신좌의 위차는 중앙을 존위(尊位)로 삼았으니, 이것이 같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협실에 보관하지 않고 한 전(殿)에 함께 봉안하는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명백한 고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전혀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이 동춘(同春) 어른에게 보낸 편지에 ‘한ㆍ당ㆍ송ㆍ명에서는 또 태조 이하의 체천한 신주와 태조 이상의 체천한 신주를 정전에 함께 제향한 준례가 없다.’라고 말씀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종의 체천한 신주를 체천한 초기에 협실에 봉안하였고 그 후 열성조(列聖朝)가 끝내 이것을 고치지 못한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감히 끝까지 주장하여 말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맨 처음 영녕전의 협실에 봉안된 체천한 신주가 바로 정종의 신주인데, 그때는 연산군(燕山君) 때입니다. 성종의 제도와 법이 이미 《오례의》의 내용과 같으니 연산군이 행한 것은 선조(先祖)의 일을 잘 계승하지 못했다고 이를 만합니다. 후대의 왕이 끝내 이것을 고치지 못한 것으로 말하면 드러난 사적이 없으니 지금 고증할 수가 없습니다만, 선조(宣祖) 때의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이 이전에도 고치지 못하였고 이 뒤에도 변경하지 못하였음을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또 지금의 논의도 종묘를 개수(改修)하는 일로 인하여 나온 것이니, 만약 개수하는 일이 없었다면 결코 이러한 논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과거를 그대로 따르다가 지금에까지 이른 것에 불과한 듯한데, 이제 역대의 조정에서 변경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리석은 저로서는 그것이 과연 사정에 합당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100여 년 동안 열성조가 추모하고 우러러 받든 지극한 뜻에서도 그렇고 예를 지킨 수많은 유신(儒臣)들이 반드시 이미 모여서 의논하여 사당을 고쳐 세우는 데에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범연히 말하면 옳지만 세세히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정종 이하를 협실에 봉안하는 것에 대해 자손의 체천한 신주를 시조(始祖)의 협실에 올려 봉안하는 고례(古禮)의 뜻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고례의 뜻은 그 시조가 바로 체천하지 않는 신주이고 훼철(毁撤)하지 않는 사당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지금 영녕전의 경우는 사당은 바로 체천한 사당이고 신주는 모두 체천한 신주입니다. 이미 체천한 사당에 이미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였으면서 또 이제 시조와 자손을 구분하여 각각 정전과 협실에 따로 제향하자고 하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또 익조ㆍ도조ㆍ환조의 삼조(三祖)를 또한 정전에 봉안하자고 하는데, 이른바 시조묘에 대한 내용은 더더욱 감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주나라의 불굴(不窟)을 시조인 후직(后稷)의 협실에 봉안한 것을 근거로 삼은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만약 처음에 협실을 설치한 것은 별다른 뜻이 없고 단지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날 영녕전을 봉심(奉審)할 때에 협실의 제도를 보니, 앞과 뒤에 모두 툇기둥이 없고 단지 한 줄에 단칸뿐이었는데, 그 한 칸 안에 감실(龕室)을 둔 데다가 또 용상(龍牀)을 두고 탁상(卓牀)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앞에 여유 공간이 없어서 사람들이 몸을 돌릴 수가 없었으며, 심지어 술을 따라 올리는 준소(尊所)가 짧은 처마 밖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술잔을 올릴 때 비바람이 혹 몰아치면 빗발이 감실에까지 들이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건대 처음에 협실을 설치한 것이 과연 체천한 신주를 봉안하려는 뜻에서 나왔다면 비록 혹 정전에 비해서 그 제도를 다소 줄일 수는 있다 해도 어찌 비바람이 몰아쳐 젖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겠습니까. 또 지금 영녕전 동쪽 협실의 동쪽에 이른바 ‘제기고(祭器庫)’라는 것이 있는데, 《오례의》의 도본(圖本)에는 이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헤아려 본다면 처음에 협실을 설치한 것은 단지 제기(祭器)와 제복(祭服)을 보관하기 위한 것으로 필시 종묘 협실의 제도와 같았을 터인데, 체천한 신주를 봉안한 뒤에 제기와 제복을 보관할 곳이 없어서 비로소 고실(庫室)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애당초 도본에는 기재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 한 단락을 가지고 논한다면 형의 상소문 가운데 ‘어찌 봉안할 곳이 없어서 우선 의물(儀物)을 보관하는 방에 임시로 봉안한 것이겠는가.’라고 말씀한 것은 옳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도감 당상(都監堂上) 김수항(金壽恒)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이렇게 증축할 때에 차라리 정전의 칸 수를 좀 더 늘려서 여러 체천한 신주의 신위를 함께 봉안하는 것이 나으니, 어찌 굳이 다시 낮고 좁은 익실(翼室)의 공간에 구차하기 짝이 없는 제도를 행할 것이 있겠습니까. 남 학사(南學士)의 말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은 농사철에 가뭄이 심하므로 우선 1, 2년을 기다렸다가 다시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4년 뒤에 마침내 두 이공(李公)의 말을 따랐다.


 

[주D-001]방기(方技) : 의술(醫術) 및 천문(天文), 복서(卜筮), 상명(相命), 둔갑(遁甲), 감여(堪輿) 등의 술수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감여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이른다.
[주D-002]이백강(李白江) : 백강은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호이다. 이민적(李敏迪)과 이민서(李敏敍)의 아버지로 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주D-003]이상(二上) : 시문(試文)을 평하는 등급의 하나로, 둘째 등급의 첫째를 이른다. 가장 절묘하게 지은 것을 상상(上上)ㆍ상중(上中)ㆍ상하(上下)로 분류하고, 그다음을 이상ㆍ이중(二中)ㆍ이하(二下)로 분류하고, 그다음을 삼상(三上)ㆍ삼중(三中)ㆍ삼하(三下)로 분류하며, 품제(品第)에 들지 못한 것을 차상(次上)ㆍ차중(次中)ㆍ차하(次下)로 분류하며, 가장 졸렬한 것은 갱지갱(更之更)이라 하는바, 갱지갱은 등수에 들지 못한 꼴찌를 뜻한다.
[주D-004]친정(親政) : 임금이 직접 인사 행정을 보는 것을 이른다.
[주D-005]실록 세초연(實錄洗草宴) : 세초는 초고를 물에 씻어 버리는 것으로, 실록의 찬수(撰修)를 마치고 원고를 정리할 때에 여는 잔치를 이른다.
[주D-006]타위(打圍) : 임금이 직접 나가서 하는 사냥을 이르는바, 몰이꾼이 짐승을 몰면 임금이 직접 쏘아서 잡았다.
[주D-007]우(虞)나라 …… 훈계 : 우나라의 순 임금이 옻칠한 그릇을 사용하려 하자 이에 대해 간하는 자가 10여 명이었다 한다. 《資治通鑑 卷197 唐太宗 貞觀17年》 상(商)나라 고종(高宗)이 융제(肜祭)를 지내던 날에 꿩이 우는 이변(異變)이 있자 조기(祖己)라는 신하가 글을 지어 스스로 반성할 것을 촉구하였으니, 이 글이 바로 《서경》의 〈고종융일(高宗肜日)〉이다.
[주D-008]난간을 …… 신비(辛毗) : 전한(前漢) 때에 성제(成帝)의 신임을 받는 장우(張禹)가 외척인 왕씨(王氏)를 비호하자, 괴리 영(槐里令)을 지낸 주운(朱雲)이 상소하여 간신 장우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극간하였다. 이에 성제가 대로하여 어사(御史)에게 주운을 끌어내라고 하니, 주운이 난간을 부여잡고 버티자 그만 난간이 부러졌다. 뒤에 성제는 그의 충성심을 기려 난간을 새로 만들지 말고 그대로 보수하게 하여 그의 충성이 드러나게 하였다. 《漢書 卷67 朱雲傳》 삼국 시대 위(魏)나라 문제(文帝)인 조비(曹丕)가 일찍이 기주(冀州)의 백성 10만 호를 옮기려 하자, 신비(辛毗)가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문제가 화를 내고 내전으로 들어가려 하자, 신비는 쫓아가 문제의 소매를 붙잡고 끝까지 간쟁하여 결국 반만 옮기게 하였다. 《三國志 卷25 魏書 辛毗傳》
[주D-009]정북창(鄭北窓) : 북창은 정렴(鄭磏, 1505~1549)의 호로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1530년(중종25)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여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고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의 교수를 겸하였으며, 포천 현감(抱川縣監)이 되었으나 신병으로 그만두고 광주(廣州)의 청계사(淸溪寺)와 과천(果川)의 관악산(冠岳山) 등지에서 스스로 약을 구하여 정양(靜養)하다가 죽었다. 삼교(三敎)에 능통하고 천문ㆍ지리ㆍ의약에 밝았으며 거문고에도 고명하였다.
[주D-010]김동봉(金東峯) : 동봉은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호이다. 이 외에도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라는 호가 있었는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단종(端宗)이 죽은 뒤에 세상을 체념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광인(狂人)이 되어 방랑 생활을 하였다.
[주D-011]관향미(管餉米) : 국가의 비상시에 군량으로 쓰기 위하여 보관, 관리하던 곡식을 이른다. 1623년(인조1)에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각 지방에 군량을 비축하고, 관향사(管餉使)를 파견하여 이를 관리하게 하였다. 뒤에 이 관향곡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만 비축하게 되어, 1636년에는 평안 감사가 관향사를 겸임하게 되었으며,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관향곡을 환곡(還穀)으로 쓰기도 하였다.
[주D-012]환곡(還穀)을 거둬들인 것 : 대본에는 ‘捧䊮’으로 되어 있는데, 앞뒤의 문맥을 살펴 ‘䊮’을 ‘糶’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3]천리 …… 막아 :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잘난 체하는 음성과 얼굴빛이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는다.〔訑訑之聲音顔色 距人於千里之外〕”라고 하였다.
[주D-014]양송(兩宋) : 두 송씨(宋氏)로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킨다.
[주D-015]회천(懷川) : 회덕(懷德)의 별칭으로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주D-016]이백헌(李白軒) : 백헌은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호이다. 병자호란에 청나라가 삼전도(三田渡)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비문을 요구하자, 인조가 장유(張維)와 조희일(趙希逸) 등이 쓴 글을 보냈으나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 하여 다시 요구하였다. 인조가 직접 이경석에게 비문을 쓰게 하니, 할 수 없이 써서 바치고는 형에게 문자를 배운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며 개탄하였다.
[주D-017]지사(知事)와 특진관(特進官) : 지사는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가리킨 것으로 정2품이 겸직하였으며, 특진관은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임금의 고문에 응하던 벼슬로, 성종(成宗) 때에 처음으로 설치하고 2품 이상의 관원을 임명하였다.
[주D-018]반영(繁纓)을 …… 애석해하셨습니다 : 반영은 제후의 말에만 꾸밀 수 있는 뱃대끈과 굴레이다. 춘추 시대 위후(衛侯)가 제(齊)나라를 공격하여 신축(新築)에서 싸웠는데, 중숙(仲叔) 우해(于奚)가 손환자(孫桓子)를 구원하였으므로 위후가 상으로 고을을 내렸으나 우해는 이것을 사양하고 제후라야 쓸 수 있는 곡현(曲縣)과 반영을 갖추고 조회하도록 해 줄 것을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애석하구나! 고을을 많이 주는 것만 못하다. 기물과 명칭은 아무에게나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이니, 임금만이 맡는 것이다.” 하고 탄식하였다. 곡현은 삼면(三面)에 악기를 매단 수레이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019]내관(內官)과 서제(書題) : 내관은 환관을 이르며, 서제는 조선 시대에 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를 가리킨다.
[주D-020]대영고(大盈庫) : 황제가 사사로이 사용하기 위하여 국고(國庫)와 별도로 재물을 보관하던 창고이다.
[주D-021]좌장(左藏) : 국고를 이르는바, 왼쪽에 있기 때문에 좌장이라 칭한 것이다.
[주D-022]회외미(會外米) : 회계 장부에 회록(會錄)하고 남은 쌀을 이른다.
[주D-023]백급(白給) : 아무 조건 없이 공짜로 주는 것을 이른다.
[주D-024]적은 …… 것입니다 : 《논어》 〈계씨(季氏)〉에 “나라를 소유하고 집을 소유한 자는 백성이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못한 것을 근심하며, 가난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한다. 고르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백성이 적지 않고 편안하면 나라가 기울지 않는다.〔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라고 하였다.
[주D-025]무학군(武學軍) : 병법과 무예를 익힌 사람들로 편성된 군대를 이른다.
[주D-026]요군(料軍)과 지군(紙軍) : 요군은 부료군관(付料軍官)의 약칭으로 급료를 받는 군관을 이른다. 지군은 종이를 만들어서 국가나 관아에 납부하는 일을 맡은 사람으로 보이는바, 이 일은 주로 사찰의 승려들이 담당하였으므로 지군승(紙軍僧) 또는 지승(紙僧)이라고도 하였다.
[주D-027]저화(楮貨) …… 강창가(江倉價) : 저화는 노비의 원래 신공(身貢) 외에 별도로 더 거두는 것이고, 작지가(作紙價), 역가(役價), 강창가는 신공을 바칠 때 들어가는 일종의 수수료인바, 작지가는 신공을 관리하는 관사에서 거두는 사무 처리 비용이고, 역가는 신공을 지방에서 강창(江倉)까지 운반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고, 강창가는 신공을 강창에 입고(入庫)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다. 강창은 강변에 설치하여 각 지방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할 때까지 보관하여 두던 창고이다.
[주D-028]후목(後木) : 원래 법적으로 바치도록 되어 있는 무명〔木〕 이외에 수수료 명목으로 더 바치는 무명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주D-029]위를 …… 정사 : 국가에 바칠 세금이나 공물을 줄여 주어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정사를 이른다. 《주역(周易)》의 〈손괘(損卦)〉는 위는 간(艮 )이고 아래는 태(兌 )인데, 간은 산이어서 높고 태는 못이어서 깊으니, 아래가 깊어지면 위가 더욱 높아지므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상(象)이 된다. 이와 반대로 〈익괘(益卦)〉는 위는 손(巽 )이고 아래는 진(震 )인데, 양()이 변하여 음()이 된 것은 손(損)이고 음()이 변하여 양()이 된 것은 익(益)이므로 〈익괘〉는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상이 된다. 아래를 덜어 위에 보태는 것은 백성들의 재물을 덜어 윗사람을 받들어서 결국 백성들이 원망하고 배반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는 상이 되므로 나라에 손해가 되고, 위를 덜어 아래에 보태는 것은 윗사람에게 바칠 세금이나 공물을 줄여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상이 되므로 결국 나라에 유익함이 되는 것이다.
[주D-030]토졸(土卒) : 일정한 지역에 정착하여 사는 사람으로 조직된 그 지방의 군사를 이른다.
[주D-031]윤격(閏格) : 보조 격군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주D-032]염분(鹽盆) : 바닷물을 졸여서 소금을 만들 때에 쓰는 큰 가마를 이른다.
[주D-033]어살 : 싸리, 참대, 장목 따위를 개울, 강, 바다 등에 날개 모양으로 둘러 꽂아 나무 울타리를 친 다음 그 가운데에 그물을 달아 두거나 길발, 깃발, 통발과 같은 장치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주D-034]삭시사(朔試射) : 매월 실시하던 활쏘기 시험이다. 문관은 50세 이하의 당하관에게 무관은 나이와 품계에 관계없이 모두 응시하게 하였으며 연말에 성적을 통계하여 상벌을 가하였다.
[주D-035]감석(甘石)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인 감공(甘公)과 위(魏)나라 사람인 석공(石公)을 이르는바, 둘 다 천문학(天文學)에 밝았다.
[주D-036]생기(省記) : 관아에서 숙직하는 사람의 성명 따위를 적어 임금에게 올리던 숙직 일지를 이른다. 병조에 입직(入直)하는 낭관(郞官)이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軍號), 궁궐의 각처에 입직하는 관원, 하례(下隸), 각 영과 각 문에 입직하는 장사의 이름을 열기(列記)하여 승정원을 거쳐 임금에게 올렸다.
[주D-037]의망(擬望) : 이조에서 적임자를 세 명 뽑아 후보자로 올림을 이른다. 이때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자를 수망(首望), 두 번째를 중망(中望) 또는 부의(副擬), 맨 끝을 말망(末望)이라 하였다.
[주D-038]통청(通淸) : 이조와 삼사 등을 청환(淸宦)이라 하는데, 벼슬하는 사람이 청환에 들어가는 것을 통청이라 한다.
[주D-039]계곡(谿谷)의 아들인 정지(靜之) : 계곡은 장유(張維, 1587~1638)의 호이며, 정지는 장선징(張善澂, 1614~1678)의 자이다. 장유는 효종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로 문장과 학식이 뛰어나 대제학과 우의정 등을 지냈으며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주D-040]감회(勘會) : 자세히 조사하여 의정(議定)함을 이른다.
[주D-041]삼 년 …… 마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약쑥을 구한다.” 하였는바, 이는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약쑥을 구하기가 쉽지 않으므로, 그 말을 듣는 즉시 약쑥을 뜯어 두면 다행히 죽지 않고 10년을 살 경우 그 약쑥이 3년이 되어 병을 고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때가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됨을 비유한 것이다.
[주D-042]모곡(耗穀) : 백성에게 양곡을 대여하였다가 받아들일 때 창고에서 생길 손실에 대비하여 미리 10분의 1을 더 받아 놓는 곡식을 이른다.
[주D-043]회부곡(會付穀) : 호조의 장부에 기록된 환곡을 뜻하는 말로, 원회(元會), 원회곡(元會穀), 창원회(倉元會), 호조곡(戶曹穀), 군자곡(軍資穀), 원회부(元會付)라고도 한다. 지방에서는 이것을 받아 반은 유치해 두고 반은 백성에게 대여하여 그 이자를 사직(社稷)이나 산천(山川)에 지내는 제사 비용으로 사용하고, 상을 주거나 진휼하는 비용, 늠료(廩料)의 재원으로도 사용하였다.
[주D-044]도회관(都會官) : 서울에서 각 도(道)에 이르는 큰길에 인접한 고을이나 그 고을의 수령을 말한다. 임시로 설치하는 갖가지 도회소(都會所)를 으레 도계(道界)의 머리가 되는 고을에 설치하였으므로 계수관(界首官)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經國大典 卷3 禮典 奬勸》
[주D-045]회감(會減) : 회록(會錄)된 재화를 회안(會案) 상에서 공용으로 사용한 것으로 회계 처리하여 삭감하는 것이다.
[주D-046]조(租) : 조곡(租穀)으로, 찧지 않은 벼를 이른다.
[주D-047]별회곡(別會穀) : 지방 관아에서 관장하는 환곡을 이르는바, 서울에서 관장하는 세곡인 원회(元會)와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주D-048]생활 …… 있으니 : 대본에는 ‘餘無根着者有異’로 되어 있는데, 앞뒤의 문맥이 통하지 않아 《약천연보(藥泉年譜)》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餘’를 ‘與’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9]도장(道掌) : 궁방(宮房)의 토지를 관리하고 도조(賭租)나 결미(結米) 따위를 징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중에는 관둔전(官屯田)이나 개인의 토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도장이라 불렀다.
[주D-050]경주(涇州)의 …… 그치겠습니까 : 백성의 곤궁함을 생각하지 않고 세금을 거두어들임을 이른다. 당(唐)나라 덕종(德宗) 때 경주대장(涇州大將)으로 있던 초영심(焦令諶)은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점유하고는 이 땅을 백성에게 소작으로 주어 가을철에 곡식이 익으면 수확의 절반을 받기로 약속하였는데, 이해에 크게 가뭄이 들어 곡식을 전혀 수확하지 못하였다. 백성이 이러한 사실을 고하자, 초영심은 “나는 수확의 절반을 바치기로 한 숫자만을 알 뿐이요, 가뭄은 내 알 바가 아니다.〔我知入數而已 不知旱也〕” 하고 빨리 약속한 곡식을 바치라고 독촉하니, 그 백성은 영전관(營田官)으로 있던 단수실(段秀實)을 찾아가서 하소연하였다. 이에 단수실은 면제해 주는 첩(帖)을 써서 농부에게 주고 사람을 시켜 초영심을 공손히 타일렀으나 앙심을 품은 초영심이 그 농부를 잡아다가 곤장을 쳐서 거의 죽게 만들었다. 이에 단수실은 농민을 데려다가 치료해 주는 한편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을 팔아 농민의 곡식을 상환해 주었다. 뒤에 회서장군(淮西將軍) 윤소영(尹少榮)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초영심을 꾸짖자 초영심은 매우 부끄러워한 나머지 죽고 말았다. 《新唐書 卷153 段秀實列傳》 《資治通鑑 卷223 唐紀》
[주D-051]김제 군수(金堤郡守) : 대본에는 ‘金山堤郡守’로 되어 있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아 ‘山’을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주D-052]사서의(四書疑) : 문과 초장(初場)과 생원시(生員試)의 종장(終場)에서 보이던 시험의 한 가지로, 사서의 의의(疑義)를 논술하게 하는 것이다. 의(疑)는 사서 가운데에서 의심이 들 만한 대목의 글 뜻을 설명하게 하는 것이고, 의(義)는 경서의 글 뜻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다.
[주D-053]사도시 정(司䆃寺正) : 대본에는 ‘司導寺正’으로 되어 있는데, 《대전회통(大典會通)》에 의거하여 ‘導’를 ‘䆃’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4]사조묘(四祖廟) : 고조(高祖)ㆍ증조(曾祖)ㆍ조(祖)ㆍ고(考)의 사당을 이른다.
[주D-055]도궁(都宮) : 여러 사당이 모여 있는 궁궐을 칭한 것으로, 옛날에는 여기에 여러 개의 사당을 따로따로 모셨으나 후세에는 한 사당에 여러 위패(位牌)를 함께 모셨다.
[주D-056]희조(僖祖) :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趙光胤)의 고조(高祖)로 이름은 조(朓)이다. 뒤에 희조로 추존(追尊)되었다.
[주D-057]별묘(別廟) : 사당을 따로따로 만들어 봉안함을 이른다.
[주D-058]사람들의 …… 말한다면 : 대본에는 ‘無以釋人之疑乎爾’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乎’와 ‘爾’ 사이에 ‘云’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59]단지 …… 말한다면 : 대본에는 ‘只爲奉安遷主之地乎爾’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乎’와 ‘爾’ 사이에 ‘云’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0]감실(龕室) : 사당 안에 신주를 모셔 두는 장(欌)을 이른다.
[주D-061]준소(尊所) : 제사 때에 술동이를 놓아두는 곳을 이른다.
[주D-062]두 이공(李公) : 이경석(李景奭)과 이단상(李端相)을 가리킨다.


 

 

 

 약천연보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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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36세 갑진년(1664, 현종5)
1월에 응교에 제수되었다.
2월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겸하였고 집의에 제수되었다.
3월에 병에 걸렸다.
4월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병을 살피게 하였으며, 이달에 사간에 제수되었다.
5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진 발탁되었고 이달에 복명하였다.
6월에 청대(請對)하였는데, 이날 말미를 받아 금성(金城)의 임소에 근친하러 갔다.
윤6월에 예조 참의에 제수되고, 헌릉정자각중건청 당상(獻陵丁字閣重建廳堂上)에 차임되었다.
9월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옮겼다.
10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인견할 때에 상의원(尙衣院)에서 연경(燕京)에 사신 갈 때 금령을 범한 물건을 사오는 일이 많은데 그렇게 하지 말게 할 것을 청하고, 감사와 수령으로서 집을 지은 자를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적발하도록 한 명령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며, 전사한 군사들에 대한 징포(徵布)를 탕감하고 군안(軍案)에서 이름을 삭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11월에 공이 청대하여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체직되었다.

○ 지난해 겨울에 좌상 원두표(元斗杓)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남한산성과 강도(江都)의 번고 어사(反庫御史)를 이미 차출하였으나 모두 출신(出身)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서 관리의 공무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니, 적합한 임무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바꾸어 차임하라.”
하였다. 좌상은 공과 민유중(閔維重)을 천거하였고, 영상 정태화(鄭太和)는 공을 남한산성의 번고 어사로 차임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이해 2월에 공은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겸하여 마침내 길을 떠났다. 3월에 감기에 걸렸는데, 4월에 대신(大臣)들이 상에게 아뢰어 어의(御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으니, 장수와 정승이 아니면서 이러한 대우를 받은 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한 달 남짓 만에 비로소 병이 나았다.
○ 이보다 앞서 신축년(1661, 현종2)에 공이 부묘(祔廟)할 때의 독옥책관(讀玉冊官)으로 차임되었는데 부묘를 마치고 나서 규례대로 품계를 올려 주니, 공은 스스로 나이가 적은 신진(新進)이라 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지 않았고, 지난해에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부의(副擬)되었는데 이해 봄에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 5월에 동부승지에 승진 발탁되었다. 공이 이달에 복명할 적에 상계(上啓)하기를,
“호조(戶曹)와 수어영(守禦營)의 여러 창고에 각각 환자곡을 거둬들이지 못한 수량이 기해년(1659, 효종10) 이전에는 1년에 많아도 1000여 석에 지나지 않았는데, 경자년(1660, 현종1)에는 4600석이고, 신축년(1661)에는 1만 200석이며, 임인년(1662)에는 1만 1000석이고, 계묘년(1663)에는 1만 1300석이니, 이와 같이 끝없이 증가한다면 몇 년 뒤에는 장차 남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계산해 보건대 성첩(城堞)을 지키는 병졸을 1만 명은 써야 하니, 1년 동안 먹는 것이 4만 8800석입니다. 만약 창고에 비축해 두는 곡식을 항상 5만 석의 수량이 되게 확보하면 그 곡식으로 1년을 지탱할 수 있다고 이를 만한데, 지금 장부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수량은 8만 석을 넘지만 겨울 뒤에 입고(入庫)되는 것은 채 4만 석이 못 되며 여름에는 1만 석이 못 되니, 이는 비록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이렇게 되었다고는 하나 환자곡을 거두고 방출하기를 편의대로 할 수 없는 규정 때문입니다. 대략 듣건대 처음 거두어들일 때에 수어사(守禦使)가 종사관(從事官)을 보내는바 이를 일러 개창(開倉)이라고 하는데 불과 4, 5일 만에 서울로 돌아가며, 다 거두어들인 뒤에 또다시 종사관을 보내는바 이를 일러 봉고(封庫)라고 하는데 금방 왔다가 금방 가니 아무런 보탬이 없다고 합니다. 광주부에서는 종사관들이 왕래한다는 이유로 그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고자 하지 아니하니 일이 실효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환자곡의 출납을 오로지 본부에 위임하고, 수어사는 다만 환자곡을 나누어 주고 창고에 비축하는 곡식의 수량만 정해 주어 감히 임의대로 분산하지 못하게 하며, 간간이 종사관을 보내어 허실을 규찰하게 한다면 그런대로 성공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 인조 때에 수어청(守禦廳)을 설치하였는데, 숙종 신유년(1681, 숙종7) 가을에 이르러 지경연사 민유중(閔維重)이 수어청을 혁파하고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하여금 수어청을 총괄하게 할 것을 청하였고, 계해년(1683) 봄에 영경연사 송시열이 수어청을 혁파하는 것의 편리함에 대해 아뢰기를,
“광주 백성들이 호소하기를, ‘광주 부윤과 수어사가 각각 군병과 재정을 관장하여 서로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합니다.”
하였는데, 공이 동지경연사로서 아뢰기를,
“강도(江都)의 준례에 따라 반드시 지위와 명망이 수어사가 되기에 걸맞은 사람을 광주 유수로 삼는다면 일과 권한이 한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마침내 경청(京廳)을 혁파하고 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경오년(1690, 숙종16) 봄에 당시 재신(宰臣)이 건의하여 유수를 파하고 다시 예전처럼 부윤과 수어사를 두었다.
○ 처음에 조종조(祖宗朝)의 옛 제도에 대개 각 고을의 환자곡은 오직 호조의 원회부(元會付)만 있고 그 모곡(耗穀)은 모두 본 고을로 귀결시켰다. 그리하여 이것으로 여러 해 동안 포흠이 생긴 것과 유망(流亡)하거나 자손이 끊어진 가호(家戶)의 결손을 보충하고, 또한 관청의 수요 경비와 민역(民役)에 보충하니, 원곡(元穀)의 수량이 해마다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병폐가 없었다. 그런데 효종조에 이르러 영남의 문신인 김응조(金應祖)의 건의로 인해 모곡을 상평청(常平廳)에 귀속시키고 또 모곡의 모곡까지 계산하게 되자, 비록 흉년으로 인하여 환자곡을 거두지 않더라도 상평청의 모곡의 수량은 민간에서 저절로 불어나서 작은 고을은 환자곡이 수천 석이고 큰 고을은 몇만 석이며, 1만 석의 모곡이 1년에 1000석이어서 회록(會錄)하는 것이 한이 없으므로 장부에 허위로 기재한 수량이 절반을 넘었다. 그리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 통영(統營)과 수영(水營) 등도 이러한 행위를 본받아 각기 환자곡을 마련하고 모두 모곡까지 아울러 징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이 호남 지방을 염찰(廉察)할 때에 장계를 올리기를,
“무릇 환자곡은 군대가 출동하면 군사상 필요한 물자가 되고 흉년이 들면 구휼하는 곡식이 되니, 진실로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자곡을 출납하는 폐단이 적지 않으니, 만약 석수(石數)가 점점 늘어나서 나누어 주는 것이 더욱 많아지면 형세상 백성들의 곤궁함과 괴로움이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근래에 각 아문(衙門)에서 해마다 모곡을 내게 하여 백성들의 식량을 은밀히 빼앗고 점점 백성들의 재력을 고갈시키니, 지금 비록 세금을 감면하고 부역을 면제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특별히 명령을 내려서 모두 모곡을 거두지 않게 한다면 백성들에게 면제해 주는 수량이 작은 고을은 수백 석이 되고 큰 고을은 수천 석이 될 것입니다. 백성들이 입는 혜택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또 회부곡(會付穀)은 오히려 국가에서 알고 있고 상평창의 모곡은 오히려 여러 경비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각 영(營)의 경우에는 회외곡(會外穀)을 자기들 영에서 사사로운 재물과 다름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 혹 공공연히 자기 수입으로 넣어서 모곡을 취하는 것이 도리어 원곡(元穀)보다 더 심하니, 이 어찌 사리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고 헤아려서 백성을 좀먹는 일을 제거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이때에 이르러 남한산성에 있는 환자곡의 모곡을 일체 광주부로 귀속시킬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유망하였거나 자손이 끊어진 가호와 구걸하는 자들의 누적된 포흠은 모곡으로 대신 충당하도록 허락하고, 4년이나 5년을 기한으로 하여 현재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8만 석의 수량을 채우게 하되 100석 이상을 거두지 못한 자는 해유(解由)를 받는 데에 구애가 되게 한다면 본부에서 거두어 바칠 때에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8만 석을 채운 뒤에는 해마다 2만 석을 내어서 환자곡으로 나누어 주고 항상 6만 석을 창고에 남겨 두게 하면 설령 사변이 있더라도 군량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4년 안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개색(改色)할 수가 있고 민간에서도 한꺼번에 가혹하게 거두는 데에 따른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대사간으로서 입대하여 백성의 재물을 은밀히 빼앗는 폐단에 대해 거듭 아뢰기를,
“원회곡의 수량이 많아지고 나서는 형편상 이것을 다 징수하였을 리가 만무한데, 각 고을에서는 각 아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매번 기준대로 다 거두어들였다고 기록하니, 만약 지금 변통하여 잘못된 규례를 깨끗하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라가 제대로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각 고을의 환자곡은 상평청과 감영, 병영, 통영, 수영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국곡(國穀)을 거두어들이는 규례에 따라 그 모곡을 가록(加錄)하는 일을 모두 금지하고, 원회곡의 모곡을 상평청으로 이관하는 일도 혁파하소서.”
하였으나 일이 시행되지 못하였다.
○ 처음에 조정의 신하들 중에는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로 청나라를 부모의 원수로 여기는 이가 많았다. 그리하여 청나라 사신이 와서 접대하는 일이 생기면 번번이 관직을 사임할 것을 청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수찬(修撰) 김만균(金萬均)이 청나라는 조모(祖母)의 원수라 하여 대가(大駕)를 수행하는 일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고 두 번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았다. 이에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본원(本院)에서는 달리 청할 만한 벌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잡아다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응교로서 차자를 올리기를,
“부자간(父子間)과 조손간(祖孫間)은 정리(情理)에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아비의 말을 감히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본래 통렬히 미워하고 깊이 질시할 만한 일이 아니며 감옥에 가두어 욕보일 만한 죄도 아닙니다. 합당한 형벌을 헤아려 시행해서 가까이 모시는 신하를 대우하는 예를 보전하소서.”
하니, 상이 김만균을 파직하고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이해 봄에 이상(貳相) 송시열은 주자(朱子)의 “복수(復讎)의 의리는 오세(五世)에 이르러 다한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서필원은 “조손간은 삼강(三綱)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면서 상소를 올려 서로 다투니, 이상에게 영합하기를 바라는 자들은 이를 확대하여 고조, 증조, 종형제(從兄弟), 붕우(朋友)의 원수에까지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상은 이상 송시열을 소중히 여겨 그의 잘잘못을 드러내어 말씀하지 않았으나 이상을 추종하는 세력들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4월에 간관(諫官) 두 사람을 멀리 외직에 보임하였고, 이조에서 사사로이 비호하고 권력을 독단했다 하여 이조 참의 민정중(閔鼎重)을 파직하고, 피혐하지 않고 간관을 구원했다 하여 집의 민유중(閔維重)을 체직하였다. 이때 진언(進言)하는 자가 선왕조에서 이정기(李廷夔)가 조부의 원수라는 이유로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하는 데 차임되지 않았음을 인용하자, 상이 이르기를,
“교린(交隣)과 사대(事大)를 똑같이 할 수는 없다.”
하였다. 6월에 공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온 조정이 동요하여 반년이 지나도 아직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처음에는 매우 작은 일이었는데 지금은 큰 관건이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옳고 그름을 통촉하고 계시면서도 모든 하교(下敎)에 일찍이 한 번도 분명히 따지지 않으시고 다만 신하들이 거조(擧措)를 내는 데에서 생긴 작은 일을 거론하여 꺾으시니, 신은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인조(仁祖)께서 겪으신 성하(城下)의 수치와 선대왕(先大王 효종)께서 품으신 평소의 뜻을 전하께서 반드시 잘 알고 계실 터인데, 이제 할아버지와 손자는 서로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말에 대하여 일찍이 받아들이지 않으신 채 ‘교린과 사대를 똑같이 할 수 없다.’라는 하교를 내리시니, 의리로 볼 때 더욱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개연(慨然)히 안색을 바꾸고 이르기를,
“나의 본의가 어찌 저 청나라를 섬기는 것을 천조(天朝 명나라)와 같이 생각하여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원수를 갚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지금 왜국은 우리나라를 진실로 핍박함이 없으나 청나라와 우리나라의 관계로 말하면 모든 일을 다 저 청나라에게 견제당하고 있어서이다. 내 비록 나이가 젊고 덕이 부족하나 조종조(祖宗朝)의 영원한 치욕을 어찌 감히 잊겠는가.”
하자, 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사세에 몰려서 신하들이 사사로운 정을 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다만 허락하지 않고 말았어야 하는데 지엄하신 하교가 계속 잇따르다 보니 대관(臺官)들이 공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大臣)들이 이 점을 아뢰어야 하는데도 모두 서필원의 공격을 받을까 우려해서 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지금 위와 아래가 마음이 서로 통하지 못하여 그 옳고 그름을 분명히 말하지 않다 보니 한갓 엄한 전지(傳旨)만 내리고 있습니다. 모든 일은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한 뒤에야 소요를 진정시킬 수 있는데, 지금 신하들은 성상의 뜻이 있는 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진달하였는데, 내 이미 그 뜻을 잘 알고 있다.”
하였다. 이에 처분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자, 당시 사람들이 “공이 한마디 말로 군주를 깨우쳤다.”라고 칭송하였다.
○ 10월에 혜성이 나타나고 6일이 지나서 매서운 바람과 심한 우레가 일어나자, 다음 날 상이 2품 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의 관원을 인견하여 각각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게 하니, 모두들 사치를 금할 것을 아뢰었다. 공이 대사간으로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연경으로 가는 사신 행차 가운데 상의원(尙衣院)에서 무역하는 물건 중에 금령을 범한 물건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만약 얻기 어려운 재화를 반드시 구하고자 하여 궁중에서 먼저 스스로 금령을 범한다면 사대부와 서민 중에 제도를 어기는 자를 어떻게 금지하며, 상인들이 금지하는 물건을 사사로이 사 오는 것을 어떻게 처벌하겠습니까. 금년 사행(使行)부터는 일절 사 오지 못하게 영구히 법식으로 삼는다면 또한 사단을 야기하여 모욕을 당할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 8일 후 인견할 때에 공은 공안(貢案)을 급히 고칠 것을 청하였다. 지난 연산군 신유년(1501, 연산군7)에 국가의 용도는 많은데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너무 적다 하여 조종조에서 마침내 공안을 늘렸다. 선조 갑술년(1574, 선조7)에 이르러 승지 이이(李珥)가 공안을 고쳐서 가혹하게 징수하는 폐단을 제거할 것을 청하였고, 신사년(1581)에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 성혼(成渾)과 전라 도사(全羅都事) 조헌(趙憲)이 또 이것을 아뢰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갑진년(1604)에 국(局)을 설치하고 공안을 개정해서 고을 형편의 부유하고 가난함과 전결(田結)의 많고 적음을 상고해서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되 참작하여 줄여 주어 공평하게 하니, 세상에서 이르기를, “100년 된 폐단을 고쳤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다시 폐단이 많아져서 효종 말년에 이것을 개정하도록 명하였으나 시일만 지체하고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재앙을 만나 경계하시고는 크게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십니다만, 삼가 근일의 조처를 보건대 또한 폐단이 많은 정사를 크게 개혁하여 생민(生民)들이 장구히 누릴 이익을 도모하는 일이 없습니다. 현재 폐단이 많은 정사 중에 제일 먼저 정비하여 바로잡아야 할 것은 공안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습니다. 긴요하지 않은 물건은 영원히 감면하도록 허락해 주고, 제철에 나지 않는 물건은 제철에 생산되는 물건으로 대신하는 등, 형편에 따라 재량하여 반드시 합당하게 하면 위로는 국가의 재용(財用)에 손해가 없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재력을 피폐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어찌 다만 한 가지 부세를 면제해 주고 한 가지 부역을 줄여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는 곳이라 해도 만약 이와 같이 잘 변통한다면 공물(貢物)의 값이 저절로 내릴 것이요, 값이 내리면 세금을 헤아려 줄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민생에 이익이 미치지 않겠습니까.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회의하여 모두 의견을 내게 하소서.”
하였다. 이 일을 비변사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니, 여러 신하들이 사치를 금할 것을 아뢰었는데,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시임 수령은 감히 가옥을 건축할 수가 없는데 지금은 감사 중에도 가옥을 건축하는 자가 있으니 지극히 해괴합니다.”
하니, 마침내 대간에게 가옥을 건축한 지방관들을 적발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대간은 간언을 직임으로 삼으니, 만일 외직에 있으면서 재물을 실어다가 집을 짓는 자가 있다면 이것은 당연히 듣는 대로 논열(論列)해야 할 것인데, 어찌 굳이 적발하라는 하교가 내리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논하겠습니까. 상신(相臣)의 말에 그 감사의 이름을 밝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누구인지 분명히 알 수 없으며, 일찍이 감사와 수령을 지내면서 집을 건축한 자를 이루 다 손꼽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이름을 열거하여 올려서 함께 죄를 청해야 할 터인데, 이는 사체에 있어 타당하지 않을 듯합니다. 또 대간으로 하여금 각기 들은 대로 논계(論啓)하게 하지 않고, 해당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상신의 말로 인하여 적발하게 하는 것은 또한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감사와 수령으로서 가옥을 건축한 자들을 대간으로 하여금 적발하게 한 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거행조건(擧行條件)에 내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황해도 각 고을의 무오년(1618, 광해군10)ㆍ정묘년(1627, 인조5)ㆍ병자년(1636)에 전사한 여러 명색(名色)의 군사들에 대해 병조에서 지금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무릇 국가를 위하여 죽은 자들은 의당 정표(旌表)하고 그 고아들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야 할 터인데, 이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백사장의 썩은 뼈다귀에 역포(役布)를 징수해 온 것이 47년이나 되었는데도 면제하지 않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담당 신하는 본 고을의 수령이 대정(代定)하지 못한 것에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대정하지 못한 것은 비록 고을 수령의 죄라 하더라도 어찌하여 수령이 지은 죄를 가지고 죽은 자에게 해독을 입히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또 지금 역포를 마련하여 바치는 자들은 전사한 자의 친척이 아니면 반드시 그 이웃 사람입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징수당한 지가 이제 40여 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대신할 자를 얻어 관청에 알리지 못했다면 대정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더러 군포를 감면해 준 때가 있었으나 단지 1, 2년 동안의 군포만 면제해 주고 끝내 그 이름을 도안(都案)에서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는 폐해가 지금까지 근절되지 않는 것입니다. 청컨대 황해도 여러 고을의 무오년ㆍ정묘년ㆍ병자년에 전사한 군사들에 대한 징포를 모두 탕감하고, 원래의 군안 가운데에서 그 이름을 영영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로 하여금 전사한 군사 중 대정하지 못한 숫자를 조사하여 입계(入啓)하게 한 뒤에 감면을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이때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송시열(宋時烈)이 서울로 오지 않는 까닭을 아뢰기를,
“지난해에 수도(隧道)를 참람하게 사용한 일로 고(故) 상신(相臣) 김육(金堉)의 묘소를 이장하고 그 자손을 죄주자는 의논이 민유중(閔維重)에게서 나왔는데,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은 이것이 송시열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또 일찍이 송시열의 복제(服制)에 관한 의논을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김좌명의 뜻이 이와 같다면 국구(國舅)의 뜻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11월에 병조 판서 김좌명과 아우인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이 연이어 상소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진술하였는데, 이때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국구의 뜻이 이와 같다고 한다면 저들은 또 장차 어떤 방향으로 일을 확대해 나가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동료와 함께 청대하여 아뢰기를,
“김좌명이 송시열과 서로 뜻이 부합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이지만 만약 유신(儒臣)이 오지 않는 것이 오로지 김좌명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는 실로 옳지 않습니다.
또 이른바 ‘국구의 뜻도 반드시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억측인 듯하니, 표현이 온당치 못합니다. 다만 김좌명의 처지에서는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자책하면서 공론을 기다렸어야 할 터인데, 스스로 논열해서 잘잘못을 따지고 심지어는 ‘어떤 방향으로 확대해 나가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지극히 놀랍습니다. 만일 이러한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옳지 않은데, 더구나 김좌명이 어찌 이러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근일에 이 일로 인하여 논의가 분분하니, 만약 이러한 때에 자세히 곡절을 지적하여 말씀하지 않는다면 끝내 분분한 논의를 진정시킬 날이 없을 것이니, 조정의 시비를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병조 판서 김좌명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굳이 이런 일로 청대할 필요는 없다.”
하니, 헌납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반드시 이 일 때문에 청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오랫동안 성상의 용안을 뵙지 못하였고 현재 혜성의 변고 때문에 상하가 근심하고 경황이 없기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대략 아뢰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단상의 상소는 내가 바른말을 구했기 때문에 그르다고 하지 않았으나 송시열을 논한 일은 잘못되고 두서가 없는 말이 많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들도 합당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였다. 다음 날 좌상 홍명하(洪命夏)가 입대하여 김좌명을 파직한 것이 부당함을 아뢰고, 영상 정태화(鄭太和)와 우상 허적(許積)이 또 이 일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나 또한 파직하는 것이 온당한지 모르겠으나 대간(臺諫)들이 청대하기에 이르렀고 말한 뜻을 살펴보건대 또 심각한 쪽으로 귀결되니, 윤허하지 않으면 거북할 듯하기에 즉시 허락한 것이다.”
하였다. 좌상이 이어 아뢰기를,
“대간이 청대한 것은 신도 몰랐습니다. 이 일로 비록 체차할 수는 있으나 굳이 파직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대간을 체차하고 추고(推考)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공이 이민서 등과 함께 인혐(引嫌)하고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대간들의 의논을 듣지 못했다 하여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일을 논할 적에 반드시 재상에게 명령을 받는다면 이는 바로 재상이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일 것이니, 대간이 군주의 눈과 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일이 재상에게 관계되는 것이라면 또한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옛날에 어사(御史)가 일을 논할 적에는 각각 자기 뜻대로 말하고 대부(大夫)에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사대(御史臺) 안에는 장관(長官)이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더구나 재상의 경우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모두 체차하고 이르기를,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있어서 청대했다고 한 것은 주운(朱雲)과 같은 의논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며, 재해를 입어서 황급하여 청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데 재해를 입은 지 오래된 상황에서 어제서야 청대하였으니,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였다. 이에 승정원과 사헌부, 옥당이 다투어 간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 이때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금성(金城) 부군(府君)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영윤(令胤)이 풍채(風采)를 크게 떨치고 있고 소견이 모두 조리에 맞고 본말이 있으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크게 축하합니다.”
하였다. 십수 년 뒤에 신공 정(申公晸)이 《현종실록(顯宗實錄)》을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가 그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모공(某公 남구만)이 건의한 것은 모두 국조(國朝) 중고(中古) 이후로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하고 감탄하였다.

37세 을사년(1665, 현종6)
4월 12일에 금성(金城) 부군(府君)의 상을 당하였다.
8월에 금성 부군을 용인(龍仁)의 화곡(花谷)에 있는 평강(平康) 부군의 묘소 왼쪽 날등에 장례하였다.

38세 병오년(1666, 현종7)
5월에 누님인 박서계(朴西溪)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39세 정미년(1667, 현종8)
이해에 윤4월이 있으므로 5월에 복을 마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6월에 동부승지에 제수되고 공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7월에 딸이 조태상(趙泰相)에게 시집갔으며, 순릉정자각중건청 당상(順陵丁字閣重建廳堂上)에 차임되었다.
8월에 유생 전강(儒生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평양 영위사(平壤迎慰使)에 차임되었다.
9월에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다.
11월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 12월에 경기 감사가 수원(水原)의 요승(妖僧)에 대해 장계로 아뢰었다. 고사(故事)에 보면 아무리 급한 일을 알리는 글이라도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반드시 다 본 뒤에 임금께 올리도록 되어 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지체했다 하여 공을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공은 조회할 때마다 남들보다 먼저 공문(公門)에 이르렀는데, 이날 마부와 말이 미처 도착하지 못했으므로 승정원에서부터 도보로 걸어 의금부에 나아갔다. 혹자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죄의 경중을 막론하고 죄인으로서 수레에 멍에를 매기를 기다려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40세 무신년(1668, 현종9)
1월에 전경 문신 전강(專經文臣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2월에 상소하여 배를 파손한 죄인을 곧바로 사형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음을 논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4월에 승문원 부제조에 차임되고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6월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되었다.
7월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8월에 장례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9월에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노모 곁을 떠나기 어렵다 하여 상소를 올려 해임해 주기를 청하니, 대사간으로 옮겨 제수하였다.
10월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1월에 아들이 관례(冠禮)할 때에 동춘(同春) 송공(宋公)이 빈(賓)이 되었다. 이달에 우승지로 옮겼으며 아들의 혼인으로 인해 휴가를 받아 나주(羅州)에 갔다. 공이 상소하여 한오상(韓五相)을 전시(殿試)에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12월에 아들 남학명(南鶴鳴)이 목사(牧使) 이공 민서(李公敏敍)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 2월에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의 말로 인하여 세선(稅船)을 고의로 파손한 권시담(權時淡)을 효시(梟示)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라고 명하였다. 형조에서는 “권시담을 오랫동안 심문하였으나 자복하지 않는데 지레 먼저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법례(法例)에 부당하다.”라고 복주(覆奏)하니,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배를 파손한 사공(沙工)과 격군(格軍)을 강가에서 효시하라는 명령을 이미 내렸으니, 형벌을 시행할지 말지는 논할 바가 아니다. 탑전(榻前)에서 정탈(定奪)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공이 형조 참의로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조운사목(漕運事目)을 가져다 보니 ‘쌀을 도둑질하여 죄상이 드러난 자는 효시하고 용서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미 죄상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오히려 자복하여 진실을 밝혔다는 의미이니, 죄를 따지지 않고 죽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지금 권시담은 도둑질한 곡물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고, 감옥에 함께 갇힌 죄수 일곱 명 중에 한 사람도 자백한 자가 없으니, 그렇다면 율문(律文)의 이른바 여러 사람의 자복이나 증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아직 형사상 판결이 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것을 가지고 죄상이 드러났다고 하여 조운사목을 끌어다가 처형해서 여러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밑거름으로 삼으신다면, 비록 일시적으로는 상쾌하겠으나 실로 법령에는 위배됩니다. 정위(廷尉)의 저울대가 한번 기울면 형벌의 경중에 기준이 없게 될 것이니, 백성들이 어떻게 손과 발을 마음대로 펼 수 있겠습니까. 장석지(張釋之)의 말에, ‘만일 그 당시에 상께서 당장 죽이셨다면 모르겠지만 이제 이미 정위에게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법이 이와 같은데도 더 무겁게 처벌하신다면 법이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권시담의 죄가 본래 묻지도 않고 효시하는 것이 합당하다면 그를 체포한 초기에 즉시 죽였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미 법을 맡은 형조에 보내서 조사하고 신문하여 해를 넘겼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형벌을 시행한다면 어찌 심히 명분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백성들은 곤궁하고 하늘은 노여워하여 온갖 재변(災變)과 괴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비록 백성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하문하시고 여러 옥사(獄事)들을 신중히 처리하시더라도 행여 천명(天命)을 잇고 하늘의 아름다운 복을 받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죄인을 곧바로 죽이는 형벌을 시행하여 백성들이 놀라고 의혹을 품게 한단 말입니까.
신이 형조에서 봉직하고 있으므로 직책을 가지고 간하는 의리에 삼가 기대어 아뢰는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 밝게 살펴 주소서.”
하였다. 이날 형조에서 아뢰기를,
“죄인을 효시하는 일은 마땅히 시행해야 하나 본조(本曹) 참의의 상소문에 대한 비답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시행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은 상소의 내용대로 거행하되 우선 사형을 집행하지 말고 속히 엄히 신문(訊問)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거듭 조사하여 그 죄를 경감하여 살려 주는 의논에 부쳤다.
○ 6월에 안변 부사(安邊府使)에 제수되었다. 7월에 대사간 장선징(張善澂)이 아뢰기를,
“근래 당상관(堂上官)으로 청망(淸望)에 오른 자는 그 숫자가 더욱 적은데도 이들이 새로 제수되면서 외직에 보임되었습니다. 이는 이조가 내외의 경중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정사의 체통이 마땅함을 잃은 것이니,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이조의 해당 당상관과 낭청을 체차하고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체직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 처음에 선조(宣祖) 때 여러 왕자(王子)와 옹주(翁主)에게 별도로 사패 노비(賜牌奴婢) 8구(口)만을 하사하였고, 8구 중에 혹 탈이 있으면 대정(代定)하게 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에 장례원(掌隷院)에서 법례(法例)를 아뢰기를,
“무릇 사패 노비를 한 번 받아 나가면 비록 여러 가지 탈이 있더라도 다시 받을 수가 없는데, 임진왜란 뒤에 여러 공신 집에서 다시 받은 경우가 많아 매우 의의(意義)가 없으며 궁가에서도 이런 잘못된 전례를 본받으니, 지금 이후로 일절 추후에 다시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정명공주(貞明公主)에게 사패 노비 100구를 특별히 하사하고 또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450구를 하사하였으나 탈이 있다 하여 대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다가 효종(孝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인조(仁祖)가 영창대군의 전례(前例)는 너무 많다 해서 330구를 하사하였고 공주에게도 이와 같이 하였으며, 왕자와 옹주는 마침내 150구로 숫자를 정하였다. 그 뒤에 대군방(大君房)의 사무를 관장한 자가 사패 노비 중에 탈이 있다 하여 대정할 것을 청하자 장례원에서 상의 재가를 청하였는데, 대정을 금지하는 교지를 내리지 않았으면 개정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판하(判下)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여러 궁가의 사패 노비에 대해 10여 년이 흐르도록 교지를 내리지 않았다 하여 잇따라 대정해 주다 보니, 더욱 한도가 없어서 원래의 숫자가 있으나 계속 대정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해 8월에 공이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는데, 숙명공주(淑明公主)와 숙휘공주(淑徽公主), 숭선군(崇善君) 등 각 방(房)의 노비가 모두 탈이 있어 대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은 본원(本院)의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고 상계하기를,
“왕자와 옹주의 노비 150구는 선조조(宣祖朝)에서 8구를 하사한 것에 비하면 이미 수십 배가 넘습니다. 여러 궁가에서 전후로 대정하면서 한 방(房)에서 아뢰는 단자가 거의 40여 장에 이르니, 공사 간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양조(兩朝)에서 수교(受敎)한 것을 가지고 헤아려 보면 진실로 함부로 하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사패하라는 명령이 내린 뒤에 오랫동안 교지를 내리지 않았는데, 이는 사체(事體)에 있어서 지극히 온당하지 못합니다. 지금 사환(使喚)과 수공 노비(收貢奴婢)의 명단을 한결같이 법에 따라 만들어 주고, 이후로 탈이 있어 대정을 청할 경우 일절 허락하지 말도록 영원히 정식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10월에 공이 좌부승지로 양심합(養心閤)에 입시하였을 때에 상이 《심경(心經)》의 “욕심을 막고 선으로 옮겨 간다.〔窒慾遷善〕”라는 내용을 강하였다. 영경연사 송시열이 일도양단(一刀兩段)으로 욕심을 끊어야 한다는 말을 아뢰었는데, 공이 그 계제에 사패 노비를 대정하는 폐단을 거듭 아뢰니, 상은 마침내 사패 노비 중에 탈이 있어 대정을 청할 경우 일절 허락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상은 정식(定式)을 환수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이 일은 본래 할 수가 없는데 승지가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을사년(1665, 현종6) 이후로 상은 공을 중임에 낙점(落點)하지 않고 여러 번 승지를 제수하되 반드시 형방(刑房)에 한정하였으니, 이는 공이 형벌을 자세히 살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 처음에 참봉 한오상(韓五相)이 젊어서부터 이름이 알려져 임진년(1652, 효종3) 문과(文科) 회시(會試)에 급제하였는데, 전시(殿試)를 보기 전에 부친상을 당하고 복을 끝마치기도 전에 모친상을 당하여 마침내 너무 슬퍼한 나머지 생명을 잃었으며 또 자식도 없었다. 공은 젊어서 한오상과 함께 학업을 익혔는데, 이때에 상소하여 전시에 추록(追錄)할 것을 청하니, 마침내 주서(注書)를 추증하였다.

41세 기유년(1669, 현종10)
1월에 우승지에 제수되고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2월에 종실 및 유생의 친림 전강(親臨殿講)의 참고관(參考官)에 차임되고 이정청 부제조(釐正廳副提調)에 차임되었다.
4월에 시관(試官)으로 패초(牌招)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파직되었다.
8월에 서용(敍用)되어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며, 세자의 입학례(入學禮)와 작헌례(酌獻禮)에 참여하고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10월에 정시(庭試) 대독관(對讀官)에 차임되고 승문원 부제조에 차임되었다.

○ 1월에 공은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십고 십상(十考十上)이면 주의(注擬)하는 법을 한결같이 따라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천리 밖에 있는 자가 감찰(監察)을 얻은 경우가 있고, 대간(臺諫)의 풍채가 부족한 자를 외직으로 바꾸며, 아무 까닭 없이 배척당하여 등용되지 못한 자를 소통시켜 청환(淸宦)에 오르게 하니, 근거 없는 의논이 분분하여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3월에 공이 사직을 원하는 상소를 올리자, 상은 해임을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소장(疏章)을 여러 번 올리면서 세 번이나 패초에 나오지 않으니, 승정원에서 공의 병이 위중하다고 아뢰었다. 4월에 공을 시관으로 패초하였으나 나오지 않아 파직되었다.
○ 이보다 앞서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정리할 것을 청하고, 좌상 허적(許積)이 《대전속록(大典續錄)》과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수교(受敎)를 일찍이 개정(改正)하라는 명이 있었다 하여, 전장(典章)을 잘 아는 사람을 선발해서 회의하여 개정할 것을 청하니, 상은 개정하기를 기다려 《대전》을 정리하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국(局)을 설치하고 공을 당상관에 차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파직되었다. 8월에 대신이 상에게 공을 서용하도록 아뢰었는데, 이는 다시 의논하여 개정할 것을 생각한 것이나 끝내 결행하지 못하였다.
○ 공은 상복을 벗은 뒤로 병이 많아서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봉직할 수 없고 세상일이 뜻과 같지 않은 것이 많으므로 마침내 교외에 거주할 생각으로 말 한 필을 타고 동쪽으로 망우현(忘憂峴)을 나가 광진(廣津) 북쪽의 아차산(峩嵯山) 아래에 이르렀다. 그러나 산을 살 만한 재력이 없으므로 주인 없는 땅을 찾았다. 한강 언덕에서 1마장 쯤 떨어진 곳에 낙락장송이 늘어서 있고 폭포수가 아래로 쏟아져 흐르고 있었는데, 부근 사람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머리를 감으며 약수암(藥水巖)이라고 불렀다. 공은 마침내 그 동북쪽 절벽 아래에 네 칸짜리 집을 지었으나 공사가 원만하지 못하고 재력이 미치지 못해서 왕래한 지 수년 만에 겨우 벽에 흙을 바르고 이해 여름에 이곳에 머물렀다. 김공 만기(金公萬基)가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매번 본댁으로 문후하러 가도 뵙지 못하니, 강물을 구경하는 흥치가 아직 다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하였다. 공은 서울에 있는 집을 미재(美齋)라고 자호(自號)하고는 스스로 이르기를,
“《주역》의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다.〔美在其中〕’라는 내용과 《맹자》의 ‘충실한 것을 미인(美人)이라 이른다.〔充實之謂美〕’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약천(藥泉)이라 호하였다. 신미년(1691, 숙종17)에 양대(兩代)의 석물(石物)을 장만할 때에 마침내 이 정자를 팔았다.
○ 공은 가을과 겨울에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매번 과시(課試)할 때마다 종일토록 청사(廳事)에 앉아 있었고 방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남공 용익(南公龍翼)이 저녁 무렵에 교외에서 돌아오다가 집으로 찾아와 공에게 문안하고 말하기를,
“공이 인재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문장을 급히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였다. 당론이 서로 분열된 뒤로부터 유생들이 성균관에 거처하려 하지 않고, 심지어는 석전(釋奠)을 피할 방법을 꾀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석전을 올릴 때에 재임(齋任)이 유생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고 기한을 정한 다음 성균관의 하인들을 매질하였는데, 이것을 별독(別督)이라 칭하였는바, 그래도 오는 유생이 적었다. 공은 별독을 파하고 《청금록(靑衿錄)》을 만들어 한 식년(式年)에 한 번 석전에 참여하고 혹 세 번 분향(焚香)에 참여해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는데, 마침 대과(大科)가 있어서 제생들이 하루도 못 되어 몰려오니 반촌(泮村)이 이 때문에 꽉 찼다. 그리고 공은 명망 있는 관원으로 사성(司成)을 겸직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하련대(下輦臺)에 큰 집을 짓고자 그 설계도를 그리고 목공을 불러 경비를 물었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강행(講行)하였는데, 마침 직책을 떠나게 되어 결행하지 못하였다. 뒤에 북번(北藩 함경도)에 부임했을 때에 과거 큰 집을 짓고자 그린 설계도대로 운전서원(雲田書院)의 강당(講堂)을 지었다.

42세 경술년(1670, 현종11)
3월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4월에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갔다.
5월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7월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이해에 큰 기근이 들었다.
12월에 공이 상소하여 폐단을 아뢰었다.

○ 공은 지난해 11월 15일에 상소하여 과거를 시행하는 마땅한 도리를 아뢰고, 또 군사의 징발과 군포의 징수를 늦추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해 2월 18일에 상이 비답을 내릴 때에 자신의 뜻에 거슬린다 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4월에 공이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으로 돌아왔다. 공은 뒤에 북쪽 변방에 있을 적에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경술년(1670, 현종11)에 물러간 것은 진실로 견지한 뜻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늙으신 어버이를 봉양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뒤로 나가 쭉 관리가 되었고 계속해서 직임을 받게 되었다.”
하였다.
○ 이번에 길을 떠나갈 때에 홍주성(洪州城)에서 10리를 지나 전려로 돌아갔는데,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공 세화(李公世華)와는 예부터 친하였으나 공은 통문(通問)하지 않았다. 이공이 공의 서울 집에 음식을 전하게 하였는데, 음식을 가지고 간 사람이 돌아와 말하기를,
“남 영감(南令監)이 결성으로 돌아간 지 이미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공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옛날에 비록 관청에는 드나들지 말라는 말이 있으나 어찌 나를 박대함이 이와 같은가?”
하고 자주 와서 만나 보았으나 공은 한 번도 답방하지 않았다. 이웃 노인이 일찍이 공에게 작은 회화나무를 옮겨 심도록 허락하였는데, 공은 얼마 후에 다른 사람이 또 달라고 청했다는 말을 듣고는 사양하고 심지 않았다. 노래하는 기생이 시중드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고 비록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돌이라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한 번도 벽에 서화(書畵)를 붙여 두지 않았으며, “남을 해치지도 않고 재물을 탐하지도 않으면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不忮不求 何用不臧〕”라는 말을 항상 외워서 자손들을 경계시켰다.
○ 공은 7월에 청주 목사에 제수되고 다음 날 관청에 부임했는데, 고을 백성과 사족(士族)들이 간혹 골육 간에 송사하는 것을 서글퍼하였다. 그리하여 방문(榜文)을 써 붙여 타이르기를,
“동성(同姓) 8촌 이내와 이성(異姓) 4촌 이내의 친족 간에 서로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그 죄부터 먼저 다스리겠다.”
하였다. 이해에 큰 흉년이 드니, 12월에 공이 상소하여 폐단을 아뢰고, 또 본주(本州)의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그대로 남겨 두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본주는 뱃길이 아득히 멀어서 물건을 사고팔 길이 없고, 또 해마다 기근이 들어 민간에 물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시장에는 곡식을 파는 행상이 없고 마을에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라고 권유할 만한 부자가 없습니다. 팔도(八道)가 모두 흉년이 들어서 쌀을 팔아 올 곳이 없으니, 구휼을 위해 백성을 이주시키고 곡식을 실어 오는 일이 모두 불가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본주의 전세와 남은 대동미 가운데 지난번 상납(上納)할 적에 육지로 운송하고 배로 실어 가느라 허비하는 것이 수없이 많아서, 백성들이 셋을 내면 서울에 수송한 것은 겨우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만약 수납한 것을 본주에 보관하여 백성들을 구휼하는 곡물로 충당한다면, 혹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 중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굶어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버려지게 될 자들은 미음이나 죽으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만,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다소 여유가 있어 농사짓고 누에치기를 힘쓰며 국가의 부세에 응하는 자들에게 만일 세금을 경감하고 부역을 줄여 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모두 일어나서 굶주린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군(州郡)에서는 의뢰할 기반이 없어질 것이고, 미처 다 구휼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려되는 것은 단지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의 곤궁함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만약 전세를 본 고을에 남겨 두게 하면 전세를 낸 백성들이 이것을 운반하느라 소모하는 비용에 대한 걱정을 면할 수 있고, 구휼해 먹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로 먹고살 밑천을 그런대로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휼이 끝난 뒤에 만약 가을 농사가 풍년이 들면 또 장차 다시 거두어 국고(國庫)의 소유가 될 것이니, 관청에는 조금도 줄어드는 것이 없고 백성들은 혜택을 받는 것이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여 살펴 주소서.”
하였다.

43세 신해년(1671, 현종12)
1월에 상은 공의 상소를 비변사에 내려서 전세와 대동미를 그대로 남겨 두도록 허락하였다. 이해 봄에 공은 죽을 쑤어 백성을 구휼하는 곳을 10여 곳에 마련하고 백성들에게 모내기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월에 고모(姑母)인 오 학사(吳學士)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7월에 함경도 관찰사로 옮겨 발탁되었다.
10월에 공이 하직하고 길을 떠날 적에 상이 인견하였다.
11월에 대부인을 모시고 감영에 이르렀으며, 이달에 마침내 북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12월에 장계를 올려 각 고을 백성들의 부역을 등급을 논하지 말고 일체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 봄에 기근으로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였는데, 본 고을은 지역이 광활하므로 공은 죽을 쑤어 백성을 구휼하는 곳을 10여 곳에 마련하고 몸소 순찰하여 살폈다. 선비를 뽑아 유사를 맡기고 국가에 유익한 충성스러운 의논을 널리 들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지극한 정성을 보고 차마 속이지 못하였으며 서리(胥吏)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은혜가 골고루 미치고 재물을 허비하지 않았다. 공은 굶주린 토착민들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농사를 짓게 하고, 장차 가물 것이라 하여 백성들에게 모내기하는 것을 금지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여겼으나 나중에는 그 은택을 알았다. 공은 전세와 대동미를 그대로 남겨 둘 것을 청하고, 마침내 다른 고을에도 모두 똑같이 하였으며, 다른 고을의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또 많이 모여들어서 길거리에 가득하였는데, 공은 똑같이 보살피며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름에 또다시 보리농사가 크게 흉년이 드니, 공은 월름(月廩)을 절약하였다. 6월에 관청에 남아 있는 쌀 700여 석을 모두 꺼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백급(白給)하되 굶주린 백성을 선별할 수 없다 하여 식구가 많은 가호에는 1두를 주고 식구가 적은 가호에는 7승을 주었으며, 심지어 관청에 비축한 밀가루와 장(漿)을 방출하여 죽을 쑤어 계속 대게 하였다. 이에 온전히 살아남은 자가 셀 수 없이 많았으며 죽어 가는 자도 말하기를,
“이는 내가 복이 없어서이고 우리 사또가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때 노략질하는 자가 많았으나 오직 청주의 경내에는 없었다. 공이 관찰사로 옮겨 발탁되자, 청주의 백성들은 조정에서 금지한다 하여 감히 금석(金石)에 공덕을 새기지 못하고 유애각(遺愛閣)을 북문 안에 세웠는데, 송상 시열(宋相時烈)이 경내에 머물 적에 이 일을 기록하여 판각하였다. 7년 뒤 겨울에 공의 내제(內弟)인 권공 준(權公儁)이 충주(忠州)에서 결성(結城)에 은거하고 있는 공을 찾아갈 적에 청주를 경유하여 지나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서 마을의 노인에게 유숙할 것을 청하니, 그곳 풍속이 외지인이 묵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하던 차에 “어디를 가느냐?”라고 묻기에 남공(南公)의 내제라고 대답하였다. 노인은 그 말을 듣자 놀라서 별안간 내려와 절을 하고, 아내를 불러 이르기를, “남 영감의 아우이다.” 하고는 빨리 음식을 장만해 올리라고 재촉하였으며, 심지어 종과 말먹이도 다 그렇게 대접받았으니, 공이 남긴 사랑의 가피가 이와 같았다.
○ 조정에서는 이보다 3년 전에 공을 서북 지방 감사에 연달아 의망하였는데, 이해 여름에 예조 참판에 의망하였다가 7월에 마침내 함경 감사로 옮겨 발탁하였다. 그다음 달에 공이 서울에 이르렀는데, 9월에 상이 공의 사직소에 대해 “이번에 발탁한 것은 뜻이 있어서이다.”라고 답하였다. 이때 의졸공(宜拙公) 또한 충청 감사에 제수되니, 10월에 함께 가서 성묘하였다. 11월에 공은 함경도 감영에 이르러 6일을 머물다가 마침내 북쪽으로 순행하였다. 이때 비변사에서는 전 감사가 재실(災實)을 판별할 때에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해서 정밀하게 조사할 것을 계청(啓請)하여 마침내 이문(移文)을 보내왔다. 이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은 감영에 도착하자마자 남관(南關)의 각 고을을 순행하였는데, 밭과 들의 곡식은 이미 수확한 상태여서 백성들의 호소와 수령들의 보고를 채집하는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비록 허실을 자세히 참고하여 살폈으나 끝내 십분 정밀하고 합당한 것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겨울철이 반이 지났으니, 만약 신이 북쪽 지방을 모두 순행한 다음 장계로 보고한 뒤에 백성들의 부역을 감면할 것을 의논한다면 설을 쇤 뒤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그사이에 각 관사에서 연달아 빚을 독촉하여 도망하였거나 죽은 자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헐벗은 자들이 만약 침해를 당한다면 끝내 곡식을 마련하여 나라에 바치지 못할 것이요, 겨우 목숨만 보전한 자도 반드시 모두 재력이 고갈되고 가산을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면 조정에서 베푸는 은혜는 건어물 가게의 말라빠진 물고기에게 물을 끌어다 대 주는 것과 같아서 끝내 유익한 바가 없을 것입니다. 결코 쉽게 징수할 수 없는 백성들의 중대한 부역은 우선 경중을 구별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지만 곡물을 옮겨다가 주는 것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으니,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미리 요량하게 하면 명년 3, 4월 사이에 거의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12월 경흥(慶興)에 이르러 장계를 올리기를,
“갑산(甲山)과 삼수(三水) 두 고을은 북쪽을 순행하는 일보다 형편이 더 급합니다. 돌아가는 길에 순행하여 살핀다 해도 아직도 10여 일의 노정이 남아 있으니, 순행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게 되면 반드시 너무 늦어서 제때에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이므로 미리 장계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번에 각 고을을 등급에 따라 나눈 것은 재해의 경중에 따라 부역을 감면해 주기 위해서인데, 이 가운데 가장 넉넉한 두세 고을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관청의 곡식과 백성들의 저축이 혹 3월이나 4월까지 지탱할 수 있으나 본도(本道)의 보리 수확은 으레 6, 7월 사이에나 있게 됩니다. 3, 4월까지 지탱할 수 있는 자를 만약 1, 2월에 양식이 떨어지는 자에 비한다면 진실로 다소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굶어 죽는 사정을 논한다면 다만 이르고 늦는 차이가 있을 뿐이니, 어찌 차등이 있겠습니까.
마포(麻布)의 경우는 바로 본도에서 생산되는 것이니, 전역(田役)과 신역(身役)으로 바치는 것과 몸을 가릴 물품을 오로지 이에 의지하고 있는데, 금년 흉년의 재난 중에 마포가 더욱 심하여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헐벗은 자들의 가엾은 정상이 예전에 일찍이 없었던 바입니다. 만약 등급을 나누어서 재해의 경중을 차별한다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의 위급한 처지를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니, 지난해 재해를 입은 고을의 예(例)에 따라서 전역과 공물(貢物), 신공(身貢) 등으로 내는 미(米)와 포(布)를 등급을 따지지 말고 일체 모두 감면하거나 면제한다면, 비록 한 지방을 다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죽어도 여한이 없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히 이에 황공한 마음으로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다.

44세 임자년(1672, 현종13)
1월에 상은 공의 장계를 진휼청에 내려 각 고을의 부역을 감면해 주도록 허락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공은 이달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2월에 공이 장계로 아뢰니, 조정에서는 각 고을의 군역을 절반으로 감면하고 원양도(原襄道)와 평안도의 곡식을 수송해서 백성을 구제하도록 허락하였다.
3월에 남쪽 지방을 순행하고 이달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4월에 북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길주(吉州)에 이르러 병에 걸려서 5월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공은 이달에 수령들로 하여금 황폐한 전지를 뽑아 기록해 올리고 종자를 지급하게 하였다.
6월에 장계를 올려 서로(西路)에서 군포를 얻어다가 순행하는 고을에서 시재(試才)하여 시상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평안도 병영의 군포를 옮겨 주었다.
8월에 장계를 올려 영남 지방의 쌀을 얻어 이듬해 봄에 굶주릴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다.
10월에 남쪽 고을을 순행하여 순방한 여러 고을과 진보(鎭堡)에서 군사들을 모아 놓고 활쏘기를 시험하여 시상하였으며, 길주에 이르러 장차 북쪽 고을을 순행하려 하였는데, 함흥(咸興)에 있는 정릉(定陵)과 화릉(和陵)의 정자각(丁字閣)에 불이 났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대로 돌아왔다.
12월에 동춘(同春) 송공(宋公)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신위를 설치하고 스승을 위해 시마복(緦麻服)을 입었다.

○ 1월에 진휼청에서 공의 장계에 대해 복주(覆奏)하여 경흥(慶興), 온성(穩城), 이성(利城), 홍원(洪原) 네 고을은 공물의 본색(本色) 이외에 가포(價布)로 대납하는 것과 주(州)에서 진상하는 공물에 대한 작미(作米)와 내노비(內奴婢), 시노비(寺奴婢), 궁노비(宮奴婢), 각 아문의 노비에 대한 공포(貢布)와 공미(貢米)를 모두 감면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전세(田稅)로 바치는 쌀과 콩을 모두 감면하였다. 부령(富寧), 경원(慶源), 종성(鍾城), 회령(會寧) 네 고을은 전세로 바치는 쌀과 콩을 절반으로 감면하고, 부령 등 네 고을 및 단천(端川), 북청(北靑), 함흥(咸興), 정평(定平), 문천(文川), 덕원(德源), 안변(安邊)의 일곱 고을은 공물의 본색 이외에 가포로 대납하는 것을 절반으로 감면하였으며, 주에서 진상하는 공물에 대한 작미와 내노비, 시노비, 궁노비와 각 아문의 노비, 사노비(私奴婢)의 공포와 공미를 모두 감면하였으며, 공물의 본색을 상납할 때에 역가(役價)와 작지가(作紙價)를 다 감면하였다.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단천 이하 일곱 고을은 똑같이 지차읍(之次邑)인데 경원과 종성에 비하면 재해를 입은 것이 매우 심하니, 세금으로 바치는 쌀과 콩의 감면 여부를 따져 일체 시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경성(鏡城), 명천(明川), 길주(吉州), 영흥(永興), 고원(高原)의 경우는 이른바 작황이 조금 넉넉하다는 곳인데도 바로 평년에 비해 아주 심한 흉년이 들었으니, 어찌 크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원래 세금을 감면하거나 면제함이 없으니, 거두어들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푸는 것도 혹 균등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근래 들어 해마다 감면해 주었는데 지금 만약 이들 고을을 또다시 줄여 준다면 경중(京中)의 재정이 곤궁해질 것임을 또한 상상하여 알 수 있습니다. 본영(本營)에서 비축하고 있는 은자(銀子) 중에 이번에 진휼청에 올려 보내야 할 것이 600냥이고 남아 있는 것이 600냥인데 본영에서 달리 쓸 곳이 없으니, 차라리 이것을 다 보내지 말고 경성 등 다섯 고을 백성들의 신역으로 추이(推移)하여 감면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2월에 공이 또 각 고을의 기병과 보병의 보인(保人)과 정로위(定虜衛)ㆍ갑사(甲士)ㆍ금군(禁軍)의 보인과 여정(餘丁)에 대한 신역을 일체 감면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 일을 진휼청과 비변사에 내려 일곱 고을의 전세와 다섯 고을의 노비 신공을 모두 절반으로 줄이도록 허락하고, 각 고을의 군병의 신역도 이와 같이 하니, 이에 곤궁한 백성들이 춤을 추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진휼청의 복주(覆奏)로 인하여 원양도(原襄道)에 비축되어 있는 곡식 1천여 석과 평안도에 있는 1만여 석을 획급(劃給)해 주니,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이는 비록 곤궁한 백성들을 다 구제할 수는 없으나 또한 1만여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으니, 차후에 균등하게 구휼하지 못한 죄는 다만 관리들을 꾸짖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달에 공은 굶주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자가 많으므로 각 고을에 분부하여 친족이 없는 곤궁한 자에게 쌀과 소금을 지급하게 하고, 또 장계로 아뢰어서 해사(該司)로 하여금 약품을 넉넉히 보낼 것을 청하였다.
○ 공이 처음 하직하고 길을 떠나올 때에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은 더욱 유념해야 할 곳이니, 백성들이 유리(流離)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매우 합당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육진뿐만 아니라 여러 고을이 모두 그러한데 본도의 곡식으로는 형편상 두루 구제하기가 어려우니, 백성들을 고을에 남아 있게 하여 다 죽이는 것보다는 유리하면서 구걸하는 것을 금하지 말아서 모쪼록 생존을 도모하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마침내 상이 다른 도(道)에 있는 자는 호구(戶口)를 조사하고 나서 머물게 하여 음식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이때 북쪽 지방 백성들은 삼수와 갑산이 매우 심한 재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여 다른 고을에서 기어서 들어간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다른 고을도 각각 외지로부터 들어온 유민(流民)들이 있어서 토착민과 유민 모두가 서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삼수와 갑산의 수령들이 이들을 본토로 쇄환(刷還)하고자 하여 외지에서 들어온 장정 4, 5십 명을 가두자, 공이 말하기를,
“백성들을 몰아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짓은 결코 차마 할 수가 없으니, 우선 보증을 하고 석방해 주어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타일러서 보내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자는 남게 하여 음식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백성은 많고 곡식은 부족하자, 1월에 공이 장계로 아뢰어서 진휼청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지휘하게 할 것을 청하니, 진휼청에서 공문을 보내기를,
“각 고을로 하여금 토착민을 각각 먹이게 하되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에 올리지 않은 자는 환자곡을 주지 말고 죽을 먹이지 말며, 유리하며 걸식하는 무리들은 같은 도와 다른 도를 막론하고 노정을 계산하여 양식을 지급해서 본적지로 보내고, 구휼을 마친 뒤에 성책(成冊)을 가져다 살펴보아 경내의 백성이 다른 고을로 가장 많이 유리한 고을의 수령을 엄중하게 문책하라.”
하였다. 공은 이것을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 부근의 수령에게 자문하니, 모두 의견이 같았다. 2월에 공이 사사로운 편지를 보내 진휼청 당상 민정중(閔鼎重) 등 제공(諸公)을 책망하고, 다시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흉년에 백성들이 유리하고 흩어지는 것은 예로부터 늘상 있는 일이니, 사람이 먹을 것이 없으면 마침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각 고을로 하여금 다만 자기 고을 백성들만 먹이게 하고자 한다면 이미 고향을 떠난 자들은 뿌리가 잘린 풀과 같으니, 비록 이러한 명령을 듣는다 해도 결코 고향으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각 고을 수령들의 마음은 본래 유민(流民)들을 미워하니, 진정으로 측은히 여겨서 기어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자 이외에는 모두 이러한 무리들을 물리쳐 내쫓고자 합니다. 그러나 감히 공공연하게 이들이 구렁텅이에 구르며 죽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래도 자신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이 나고 상사(上司)의 책망을 받을까 염려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각 고을에 자기 고을의 토착민만을 구휼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이 유민들은 반드시 죽어서 시신이 시궁창에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 가운데 토착민이 굶어 죽은 경우가 있더라도 각 고을에서는 반드시 모두 이들을 가리켜 유민이라 할 것이니, 실로 허실을 분별하여 죄를 논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해 구휼할 때에 한갓 곡물만 허비하고 혹 백성들이 죽음을 면치 못하기도 하였으니, 이 일을 마땅히 징계해야 합니다. 만일 지난해에 유민들을 먹이지 않았다면 죽은 자가 이 수효보다 더 많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또 지금 현재 호적에 있는 사람과 창고에 있는 곡식의 많고 적음을 대략 계산해 보건대 종자를 계산해 지급하고 굶주린 자들을 다 구제할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분명하니, 오직 함께 구제하여 모두 살릴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재정이 바닥나고 형편이 어쩔 수 없게 된 뒤에는 비록 계속해서 대 주지 못하더라도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실정을 다 알게 되어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곡물을 절약하고 비축하고자 하여 다만 토착민만 먹인다면 보탬이 되는 것은 적고 잃는 것은 많을까 크게 염려됩니다.”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신이 본도에 와서 보니, 호구(戶口)를 내보이는 자는 몇 명이 안 됩니다. 호구를 내보이지 않는 자들이 모두 호적에 올라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생각건대 호적에서 누락된 자가 또한 반드시 많을 것이니, 이제 이들을 모두 조사하고자 하면 소요가 일어날까 염려됩니다. 굶주린 백성들 가운데 길에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모두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한 백성들입니다. 평소에 유리하며 옮겨 다니고 근거지가 없어서 신역(身役)을 바치지 않은 정상은 진실로 크게 미워할 만하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호구가 없다는 이유로 죽는 것을 보고 구원하지 않는다면 인정을 베푸는 도리에 있어서 또한 차마 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또 한 가호 안에 혹은 10여 명이 한 호구에 함께 실려 있는 경우도 있고, 혹은 2, 3십 명이 한 호구에 함께 실려 있는 경우도 있는데, 유리하며 옮겨 다니는 자들은 모두 호주(戶主) 아래의 솔정(率丁)과 노약자들입니다. 이들로 하여금 각각 호구를 내보이게 해서 허실을 징험한다면 형편상 참으로 불편한 점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호구의 장적(帳籍)을 조사하고자 한다면 또한 몸은 이 고을에 사나 이름은 다른 고을의 호적에 올린 자도 있고, 혹은 늙거나 나이가 어리고 또는 굶주려서 자기가 사는 곳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인데, 이들을 조사하여 밝히는 사이에 반드시 지레 먼저 죽게 될 염려가 있습니다. 이제 호구를 징험할 수 없다는 이유로 환자곡으로 죽을 쑤어 먹이는 길을 끊어 버린다면 형편상 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또 각각 토착민만 구휼한다는 이유를 들어 다른 고을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면 이 유민들이 어느 곳으로 돌아갈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들이 마침내 구걸하며 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사람을 죽이고 도적질하는 일마저 전혀 거리낌 없이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방금 한성부에서 또다시 본도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편으로 단자(單子)를 받아 호구를 만들어 주고 한편으로는 죽을 쑤어 먹이고 환자곡을 지급하라.’라고 하였는데, 이는 더더욱 시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호적을 수정(修正)하는 것은 비록 1년 내내 조사하여 십분 상세히 살피더라도 착오가 생기고 잘못되는 폐단을 면할 수가 없는데, 마침내 진휼을 베풀어 사람들이 북적대는 때와 유민과 토착민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사이에 그들로 하여금 호적을 써서 올리게 하면 이들은 모두 한때에 얻어먹는 것을 급하게 여겨서 한 사람이 각각 천 장, 백 장씩 써서 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호적을 만들어 주면 죽을 먹고 환자곡을 받은 뒤에는 바로 도망하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입니다. 구휼하여 줄 때의 허위와 혼잡이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며, 호적을 수정할 때에 또한 무엇에 근거하여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또 그중에 더욱 심하게 굶주리고 곤궁한 자는 반드시 종이와 먹을 얻지 못하여 단자를 써서 올리지도 못할 것입니다. 신의 얕은 생각에는 환자곡을 제급(題給)하는 것은 설령 호적을 상고하고 징험한다 하더라도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은 유민과 토착민, 호구의 유무를 따지지 말고 모두 지난해의 준례대로 시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호구를 만들어 주기 어려운 사정은 앞에 아뢴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신이 굶주린 백성들의 사정과 실태를 익히 살펴보건대 비록 가까운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먼 길을 왔다고 말하니, 그들이 말한 바에 의거하여 노정을 계산해서 식량을 주는 것은 매우 허술한 일입니다. 굶주린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서 제대로 식별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반드시 아침에 와서 양식을 받아 가고 저녁에 다시 오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들을 일일이 압송(押送)하고자 한다면 진휼하는 일 외에 또다시 한 가지 일이 생겨나 반드시 도로에서 일을 처리하느라 끝이 없을 것이니, 형편상 끝내 시행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향을 떠난 백성이 많고 적음은 수령들이 진휼을 잘하고 못함에 달려 있으나 또한 재해의 경중과 관곡(官穀)의 다소에 달려 있으니, 오로지 이것을 가지고 수령의 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또 이른바 성책(成冊)이라는 것도 만약 본 고을로 하여금 유망(流亡)하는 백성들을 계산하게 한다면 그 실상을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요, 만약 다른 고을의 성책을 가지고 어떤 고을의 유민이 가장 많은지를 고찰하게 하더라도 형편상 또한 두루 상고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마침내 우선 현재 있는 곳에서 입록(入錄)하도록 명하였다.
○ 5월에 공은 도내 백성들의 전지(田地) 중에 충분히 파종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는 거의 다 파종했으나 종자가 없어 아직 파종하지 못한 자가 오히려 많고 기근이 점점 심해져서 이미 파종한 자도 혹 황폐해질까 염려된다 하여, 마침내 수령으로 하여금 파종할 능력이 안 되는 자를 가려 종자를 지급하고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도와서 경작하게 하였다.
○ 6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본도는 10여 년 이후로 한 번도 풍년이 든 해가 없고 경술년(1670, 현종11) 이후로는 연달아 흉년을 만나 굶주려 죽고 병들어 죽고 유망(流亡)한 나머지 인심이 삭막하여 백성들이 살려는 의욕이 없습니다. 목면(木綿)으로 말하면 원래 생산되는 것이 아니고 행상(行商)들이 전파한 것이 혹 열에 한둘 정도였는데 지난해부터는 행상들이 완전히 끊겼으며, 목화(木花)는 근래 남쪽 지방도 해마다 흉작이어서 더욱이 조금도 구경할 수가 없으니, 노소(老少)가 입을 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있는 정상이 보기에 참혹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조정에서는 그동안 해마다 연말에 가난한 백성들의 옷감을 보내 주는 일이 있었으나 그중에 한 치, 한 자라도 나누어 얻는 자들은 겨우 천 명이나 백 명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합니다.
도신(道臣)이 순행할 때에는 으레 조정에 면포(綿布)를 청하여 시재(試才)할 때에 무예를 진작하고 백성들이 추위를 면하게 하였는데, 5, 6년 이후로는 순행하는 일이 이미 드물고 또 상으로 줄 만한 물건이 없어서 설혹 순행하더라도 그저 왔다 가기만 할 뿐이니, 변방의 백성들이 모두 고사(古事)를 언급하면서 면포를 보내 줄 것을 희망하고 또 개탄하고 있습니다. 추수한 뒤에 만약 도신이 지방을 순행한다면 시재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의 각 영(營)에 혹 남은 군포가 있을 경우 이것을 옮겨 본도로 실어 보내 주어서 시재할 때에 쓰게 한다면 한때에 사람들을 격려하고 권장하는 의미 이상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속히 품지(稟旨)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정에서 마침내 평안도 병영에 보관되어 있는 군포(軍布) 30동(同)을 옮겨 주니, 공은 감영에 보관한 것을 더 보태어서 삼수와 갑산 및 북도의 아홉 고을에 시상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남도와 북도의 군병(軍兵)과 군기(軍器)를 대략 살펴보니, 조련(操鍊)을 정지한 지가 이미 8, 9년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사수(射手)들은 활을 잡을 줄 모르고 포수(砲手)들은 총을 잡을 줄 모릅니다. 변장(邊將) 자신도 굶주림을 면치 못하니, 진실로 이들에게 군기를 보수하는 일을 책임 지우기 어렵습니다. 등급을 나누어 상벌을 내리는 것은 우선 보류하고, 문제가 있는 군기를 아울러 일신하고 군병의 궐액(闕額)을 점차 모두 충원하여 ‘추수한 뒤 현장 점검을 할 때 처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뜻으로 수령과 변장들에게 엄중하고 분명하게 신칙하였습니다. 그러나 더욱 심하게 잔폐한 변보(邊堡)에 대해서는 활에 사용하는 아교와 깃털, 쇠 힘줄과 벚나무 껍질 등의 물품을 신의 감영에서 마련하여 활과 화살을 수리하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 지방의 궁각(弓角)과 어교(魚膠 부레풀)는 더욱 얻기가 어렵습니다. 갑진년(1664, 현종5)에 조정에서 남병영(南兵營)과 북병영(北兵營)으로 하여금 육량궁(六兩弓) 수백 장(張)을 만들어 도내의 무사(武士)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비로소 사람들이 육량궁을 쏘게 되었는데, 지금 10년이 되자 활이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시재할 때에 수백 명의 무사들이 다만 육량궁 3, 4장을 가지고 서로 교대로 활쏘기를 하며, 육량전(六兩箭)의 경우는 민간에 없을 뿐만 아니라 각 고을에 원래 한 개도 없고 병영에 다만 10여 개가 있으나 또한 모두 파손되어 얽어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독하는 책은 사목(事目)에는 무경칠서(武經七書) 가운데 한 책을 취하도록 되어 있으나 본도에서 명색이 유학(儒學)을 한다는 자들도 책 한 권을 얻기가 어렵고, 무사들의 경우 글자를 아는 자도 찾아보기가 어려우며 무경칠서 등의 서적은 책 표지를 구경한 자도 많지 않습니다. 이번에 시재할 때에 무재(武才)가 이미 합격권에 들지 못하였으니, 무경(武經)의 책은 진실로 논할 것도 없는 상황입니다.
육량궁 수백 장에 들어가는 궁각과 어교를 만약 해조(該曹)에서 별도로 내려 보낸다면 남병영과 북병영으로 하여금 종전에 쓰던 활을 모아 궁각을 고쳐서 나누어 주게 하겠으며, 육량전을 만들 대나무를 또한 해조로 하여금 수량을 넉넉히 보내게 해 주시면 시재할 때에 나누어 주는 용도로 쓰겠습니다. 그리고 《손자(孫子)》, 《오자(吳子)》, 《삼략(三略)》 등의 책을 만약 병조에서 판본이 있는 곳에 분부하여 수십 건(件)을 인쇄하여 내려 보낸다면 각 고을에 나누어 주어 장관(將官)들이 돌려가면서 외우고 익히게 할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북쪽 지방을 순행하려 하면서 다시 군포를 청하여 또다시 20동을 지급받았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신의 감영에 소속되어 있는 아병(衙兵)으로 전부터 있던 자와 신이 부임한 뒤에 단속하여 얻은 자를 아울러 계산하면 6천여 명에 이르는데, 자주 사열하고 시재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상을 주어 분발시키고 권면할 밑천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무신년(1668, 현종9)에 호조에서 써야 할 인삼(人蔘)이 부족하다 하여 본도에 10근(斤)을 요구하여 바쳤는데, 그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어 해마다 10근씩 올려 보내고 있습니다. 호조는 써야 할 곳이 매우 많으니 형편상 보내지 않을 수 없으나, 이제 만약 군수용(軍需用) 포목 7, 8동을 옮겨 주어 인삼과 바꾸게 한다면 호조는 인삼이 부족할 염려가 없고 신의 감영에서도 보충하여 쓸 밑천을 얻을 것이니, 호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영구히 규례로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때 공이 자부(子婦)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편비(偏裨)가 준례에 따라 서울 집에 부의(賻儀)를 보낼 것을 청하자, 공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지금 관청을 집으로 삼고 있으니, 집의 양식이 어찌 죽은 사람을 장송(葬送)하기에 부족하겠는가.”
하였다. 공은 비록 친구의 혼례와 초상에 부족한 비용을 보태 주더라도 오직 어포(魚脯)를 보낼 뿐이고 삼베 한 끝도 사용하지 않았다. 공이 별세한 지 4년째 되는 해에 함경 감사 이광좌(李光佐)가 숙종에게 장계를 올리기를,
고(故) 상신(相臣)이 감사로 있었을 때에 군목(軍木)을 지급한 것이 매우 많아서 군사들의 무예가 예전에 비해 열 배나 향상되었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 고무되어 분발하고 있습니다. 사기를 진작하는 유익함과 군세(軍勢)를 유지하는 효험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삼수와 갑산의 성내(城內) 조련은 고 상신이 한 번 시행한 뒤에 폐지된 지가 거의 40년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 처음에 청나라 사람들이 영고탑(寧古塔)에서 회령(會寧)에 이르러 물건을 교역하고, 또 후춘(厚春)에서 경원(慶源)에 이르러 물건을 교역하였으므로 두 곳에 나누어 시장을 만들어서 해마다 상례로 무역을 하게 된 지 거의 20년이 되었다. 경자년(1660, 현종1) 12월에는 청나라 상인으로 회령에 온 자가 594명이고 말과 소, 낙타가 1144필이었는데, 체류하는 기간이 한정이 없어서 이들에게 공급하는 꼴과 양식을 우리 백성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으며, 청나라 상인들이 공갈하고 협박하여 못하는 짓이 없고 이들이 전전하며 남쪽에 가까운 안변(安邊) 등 여러 고을에까지 와서 제멋대로 물건을 요구하였다. 공이 이때 비변사의 낭관이었는데, 혜성(彗星)이 동북방에 나타난 일로 인해 상소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당초 개시(開市)를 한 것은 오직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들로 하여금 저들의 요구에 부응하게 한 것이었는데, 수요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그 형세가 반드시 온 나라의 재력을 고갈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또 개시의 폐단은 우리 백성들을 곤궁하게 할 뿐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저들을 끌어들여 국경에 들어오게 해서 우리의 허실을 엿보게 하고, 한편으로는 저들에게 양식을 갖다 주고 병기를 대 주어 저들을 더 부강하게 해 줄 것입니다.
더구나 북방은 서울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탐관오리가 전후로 계속 설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스스로 거세(去勢)하여 군역을 피하거나 자식을 버리고 기르지 않는 자까지 있습니다. 만약 변경에서 중국과 사이가 나빠지는 경우 저들은 아침에 말을 먹여 출발하면 저녁에 우리의 성 아래에 도착할 수 있는데, 조정을 밉게 보는 우리의 백성들이 결코 윗사람을 위해 희생하면서까지 굳게 지키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력이 적고 약한 점과 군비가 소홀한 것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하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북관(北關)의 병사(兵使)를 파견하되 일반적인 인사로 여겨서 평범한 사람의 손에 맡기지 마시고, 조정의 중신(重臣) 중에 평소 인망이 있는 자를 빨리 선발하여 그로 하여금 병폐를 보완하고 폐지된 것을 일으켜서 개시의 사무를 처리하고 저들을 회유함으로써 정신을 쏟아 저들의 획책을 막을 계책을 세우게 하소서. 또 본도(本道)의 궁핍한 상황을 북경(北京)에 사신을 보내어 알려서 완곡한 말로 잘 개진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발매(發賣)하는 물건을 줄여 줄 것을 요청하여 이를 영구적인 규정으로 정하고, 다시 변방의 신하에게 명하여 엄격히 규약을 마련해서 후일 끝없는 병폐가 일어날 조짐을 막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청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마침내 발매하는 것을 반으로 줄이고 청나라 상인이 350명을 넘지 못하게 하였으며, 체류하는 기간도 20일을 넘지 않게 하였다. 공이 북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경원(慶源)에 이르러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등록(謄錄)을 보니, 정식(定式) 외에 한도를 넘은 것이 많았다. 그때 청나라 사신이 막 와서 또다시 등록 이외의 염석(鹽石)을 요구하자, 공은 경원 부사로 하여금 정식에 의거하여 일절 거절하게 하고 이어 장계로 아뢰었다. 다음 해에 공이 다시 부령(富寧)에 이르러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젊었을 때에 북방을 걱정하여 / 少時憂北方
옥당에서 상소를 올렸는데 / 陳疏自玉堂
지금 부임해 와서 흉년을 만나 / 今來値饑歲
백성들 죽는 것 참혹하게 보노라 / 慘見赤子殤
죽음 구제하기에도 넉넉지 못하니 / 救死且不贍
어느 겨를에 국경을 튼튼히 할까 / 遑恤申封疆
봄철에 멀리 순행하여 임금님 뜻 전하고 / 乘春遠于宣
풍속을 묻느라 황폐한 고을 모두 찾아다니네 / 問俗窮荒鄕
구휼을 의논하니 위험에 빠진 자들 우선하고 / 議貸先阽危
농사를 권장함은 봄철에 미리 해야 한다오 / 勸耕及載陽
다만 옛 마음을 저버릴까 두려우니 / 但恐負宿心
어찌 감히 먼 길 다니는 것을 꺼릴까 / 詎敢憚路長
하였다.
○ 8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명년 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할 계책을 지금 요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흥(慶興) 등지는 바로 지금이 가을 곡식이 새로 나올 때인데도 굶주려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등지도 재해로 입은 손실이 매우 심하고, 함흥(咸興)과 정평(定平)에는 묵은 밭이 더욱 많습니다. 금년 봄에 조정에서 곡식을 획급(劃給)해 준 은혜를 입어 살아남은 백성들이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습니다만, 첩첩의 고개를 넘어 관서(關西) 지방에서 곡식을 받아 올 때에 도로에서 죽은 인민과 소와 말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노고하는 근심이 굶어 죽는 것에 비하여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설령 다시 곡식을 획급해 주는 은혜를 입는다 해도 받아 오기 어려운 점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듣자 하니 경상도는 올해 근래에 없는 풍년이 들었다 합니다. 지난 임인년(1662, 현종3) 영남 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에 신이 진휼하라는 명령을 받고 갔었는데, 이때 조정에서 함경도의 조미(造米) 710석과 전미(田米) 1만 4290석을 획급해 주었으니, 경상 좌도 인민들이 굶어 죽어 시신이 구렁을 메우는 형편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이 은택 때문입니다. 금년에 영남 지방은 저와 같이 풍년이 들었는데 본도는 이와 같이 흉년이 들었으니, 임인년(1662)에 내보내었던 곡식을 본도로 다시 수송해 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본도의 배는 큰 것이 겨우 곡식 30여 석을 싣는 데에 불과합니다. 금년 봄에 원양도(原襄道)의 곡식을 홍원(洪原), 북청(北靑), 이성(利城), 단천(端川)의 네 고을로 수송하고 함흥(咸興) 이남과 경성(鏡城), 명천(明川), 길주(吉州) 등의 곡식 8000여 석을 온성(穏城)과 경흥(慶興) 등지로 운반하여 보낼 때에 도내의 배를 통틀어 동원하니, 어민들이 봄부터 여름까지 고기잡이하는 이익을 전혀 보지 못하여 포구(浦口)에 사는 백성들의 고통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금년 여름에 영남의 동래(東萊) 등지에 있는 사상(私商)의 미선(米船)이 함흥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배의 크기를 물어보니 100여 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본도의 배에 비하면 너무나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완급을 잘 헤아려서 영남 연해에 있는 각 고을의 쌀 1만 5000석을 내년 2월 안에 본도의 초면관(初面官)으로 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조정에서 1만 석을 지급하도록 허락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북평사(北評事) 이훤(李藼)으로 하여금 종성(鍾城), 회령(會寧), 경성, 명천, 길주 등 여섯 고을의 곡식을 옮겨서 온성, 경원(慶源), 경흥의 세 고을을 구휼하였으며, 다음 해 3월에 영남 지방의 곡식을 실은 배가 이르러서 이해 여름에 마침내 각 고을 중 재해가 더욱 심한 곳으로서 곡식이 뚝 떨어진 지방을 구제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은 장계를 올리기를,
“운반해 온 곡식 1만 석 중에 대미(大米)가 9000여 석입니다. 만약 본색(本色)으로 이것을 회록(會錄)하여 환자곡을 징수하게 한다면 명천과 길주 이남은 간혹 논이 있지만 겨우 10분의 1, 2에 불과하고 경성 이북으로부터 육진(六鎭), 삼수, 갑산 등지까지는 원래 논이 없으니, 대미로 다시 바칠 도리가 만무합니다. 육진과 삼수, 갑산은 모두 전미(田米)로 회록하고 길주 이남은 그 지급되는 수량과 답결(畓結)의 정도를 보아 3, 4분의 1이나 5, 6분의 1을 대미로 회록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전미로 회록해야 거의 다시 거두어들일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 일을 진휼청(賑恤廳)에 내려 시행하였다.
○ 12월에 공은 동춘(同春)의 부음(訃音)을 듣고는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시마복(緦麻服)을 입었으며, 다음 해 12월에 이공 민적(李公敏迪)의 부음을 듣고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공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내가 지금 세상에 장자(長者)로는 동춘이, 동류(同流)로는 이민적이 있다고 여겼는데, 이제 모두 돌아가셨다.”
하였다. 처음에 평강(平康) 부군(府君)이 정동명(鄭東溟)과 서로 친하게 지내어 친척처럼 교유한 것이 3대에 이르렀으므로 공은 항상 예부터 내려온 세의(世誼)를 닦아 술을 가지고 가서 방문하곤 하였다. 지난해에 북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길주(吉州)에 이르러 동명(東溟)의 시가 쓰인 병풍을 보고 공이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하였다. 명년에 그의 부음을 듣고 그의 시집을 찾아 판각하여 세상에 유행하게 하였으며, 말년에 이르러 그 문집을 다시 정리해서 합하여 한 질을 만들었다. 배천 군수(白川郡守) 이준(李懏)은 공과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였는데, 중년에 사람들에게 말할 때마다 “친구 중에 높은 지위에 오른 자는 대부분 나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는데 오직 남모(南某)만은 전과 다름없이 대하니, 나는 이 때문에 탄복한다.” 하였다.

45세 계축년(1673, 현종14)

1월에 북쪽 고을을 순행하고 돌아올 때에 시사(試射)하고 시상하였다.
3월에 감영으로 돌아왔다.
8월에 임기가 찼는데 9월에 상이 특명으로 맥추(麥秋)까지 연임하게 하였다. 이해 가을 공은 문회당(文會堂)과 무양정(武揚亭)의 고사(故事)를 살펴 학제를 정비하고 남도의 문사와 무사들을 선발하여 학업과 무예를 익히게 하였다.
11월에 자부(子婦)의 상을 당하였다.
12월에 북쪽 고을을 순행할 적에 상소하여 변방의 일을 아뢰고 지도(地圖)를 올리니, 상이 먼저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에 새로운 길을 내고 요해처(要害處)에 진보(鎭堡)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 8월에 공의 임기가 차자, 상은 “북관(北關)의 흉년이 금년에 더욱 심하여 명년 봄에 진휼할 것을 미리 요량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가 고을을 순행할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는데, 새로 부임한 감사가 교대할 때에는 일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다.” 하여 특명으로 맥추까지 연임하게 하였다. 다음 달에 상은 “연임하라는 명령은 뜻이 있어서이다.”라는 내용으로 공의 사직소에 답하였다.
○ 공이 석담창(石潭倉), 고마청(雇馬廳), 문회당, 무양정의 절목(節目)을 정하였다. 처음에 함흥부(咸興府)의 치소(治所)는 성천강(城川江) 가에 있었는데, 물이 얕아 배가 다니지 못해서 해운(海運)이 통할 수가 없었다. 강을 따라 아래로 30리를 내려가면 작은 산이 해문(海門)을 막고 있는데, 들 가운데 세 못의 물이 산 아래에 이르러 합류하는바, 이름을 석담(石潭)이라 하였다. 이곳은 배가 다녀 바다와 통할 수 있으므로 남쪽과 북쪽에서 오는 모든 해양의 선박들이 다 이곳에 정박하였다. 석담으로부터 바다로 30리를 들어가면 화도(花島), 죽도(竹島), 초도(草島)라는 세 섬이 있는데, 화도는 1000여 가호를 수용할 수 있다. 일찍이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에 부(府)의 백성들이 왜적을 피하여 이 섬으로 들어가서 목숨을 보전한 자가 많으며, 또 정축년(1637, 인조15) 청나라 사람들이 철군하고 돌아갈 때에 본부(本府)를 경유해서 가니, 함흥부에서는 급히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 수백 석을 운반하여 이 섬에 가져다 놓았는데, 그 때문에 이 섬에 들어온 관리와 인민 수천 명이 오랑캐가 떠나간 뒤에 함흥부의 창고 곡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 섬에 있는 곡식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 공이 부임하여 이르기를,
“이처럼 한가할 때에 마땅히 후일을 대비하는 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본도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기까지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이니, 만약 중간의 한 곳이 막혀 길이 끊기는 우려가 생긴다면 조정의 명령이 통할 수가 없다. 그러니 더욱 해로(海路)에 군사를 모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석담 위에 창고를 짓고 4, 5천 석의 곡식을 쌓아서 위급할 때에 섬으로 운반해 들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 처음에 함경도 감영에는 토관(土官)이 있었는데 ‘육방지인(六房知印)’이라 칭하며, 그 아래에 또 주사(主事), 의생(醫生), 율생(律生), 영사(令史), 취수(吹手), 나장(羅將), 궁인(弓人), 시인(矢人), 야장(冶匠), 목수(木手) 등 여러 가지의 명목이 있는데, 각기 고공(雇工)과 솔정(率丁)을 지급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토관 이하가 모두 군대의 대오(隊伍)에 편입되어 아병(牙兵)이 되었으며, 이들이 돌아가며 차례로 감영 안에 입역(立役)하여 활 쏘고 말 타는 무예를 익혀 용맹한 무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로는 인민이 모두 죽고 징발이 잦아서 모든 진상의 배지(陪持)와 영송(迎送)에 쓸 쇄마(刷馬)와 관청을 수리하는 등의 부역을 모두 영속(營屬)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들 중에 1년에 여섯 번 돌아오는 입번과 각종 잡역(雜役)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한 자가 태반이나 되었고 비록 남아 있는 경우라도 군오에 편입되어 무예를 익히는 등의 일은 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무예는 원래 1000명을 정원으로 하였으나 인조 병인년(1626, 인조4)에는 600명으로 줄어들었고 고공과 솔정까지 합하면 거의 2000명이었다. 공은 생각하기를, ‘본영은 먼 변방에 있으므로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 군정(軍政)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는데, 수천 명의 민정(民丁)을 아침저녁으로 사령하는 임무에 종사하도록 하고 항오의 병졸은 태반이 늙고 나약한 자이며 또 결원이 많으니, 옛 제도가 한 번 변하면 폐단이 이렇게 심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 계속하여 민결(民結)을 잡역으로 돌리려고 하면 백성들이 혹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 안의 남는 곡식과 재물을 한 창고에 따로 모아 두고는 이름을 고마청(雇馬廳)이라 하였다. 그곳의 재물을 가지고 영송하거나 수리에 드는 비용을 대고 영속의 부역은 면제하여 다시 옛 규정을 복구해 군대의 대오에 편입하였다.
○ 처음에 함흥부(咸興府)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있었으니, 관찰사 유강(兪絳)이 창건하였다. 그 후 이후백(李後白)이 임금에게 계청(啓請)하여 경서를 반사(頒賜)하였고, 또 각 고을에 학전(學田)을 마련하여 세금을 거두어 수송하게 하였으며, 또 매월 어물과 찬을 운반하여 날마다 30인분을 공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남도 13개 고을의 유생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런데 중년에 일이 많아진 뒤로 이것을 폐지하고 거행하지 않으니, 나이 많은 노인과 자제들이 모두 이를 한하여 글로 읊어 탄식한 지가 오래였다. 공이 이것을 슬퍼하여 이해 가을에 다시 서원에서 고사(故事)를 살펴 정비하였다. 그러나 수년 동안 흉년이 든 나머지 갑자기 전성기의 규정을 회복하기가 어렵다 하여 간략히 예전의 준례를 따라 간단한 규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8월 말에 남도의 유생들을 모아 제술(製述)로 시험을 보인 다음 그중 20명을 선발하여 9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60일 동안 학업을 익히게 하였다. 그리고 1월에 또다시 시험을 보여 선비를 뽑아서 2월 초부터 3월 말까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공은 이르기를,
“1년 중 4개월 동안 20명이 먹는 양을 대략 계산해 보니, 30여 석의 쌀이 필요하다. 이는 양향고(糧餉庫)에 있는 영곡(營穀)의 1년 모곡(耗穀)만 가지고도 계속하여 대 줄 수 있으며, 어물과 찬은 감영에서 사용하고 남은 것을 가지고도 충분히 지급할 수 있다. 관리들이 친지와 과객들을 위하여 술과 밥을 장만하는 비용을 따져 보아도 이보다 더 쓰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하여 문교(文敎)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또 북도의 경원(慶源), 종성(鍾城), 온성(穩城), 회령(會寧)의 유생 각각 한 명씩을 감영에 데려다가 교육하였다. 전에 함흥부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군용관(軍容館)의 옛터가 있었는데, 전해 오기를 예전에 도내의 무사들을 모아 이곳에서 사열하였으므로 혹 무양정(武揚亭)이라 칭했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느 해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폐지된 지 5, 6십 년 만에 무예의 서툰 정도가 내지(內地)보다도 더욱 심하니, 공이 이를 위태롭게 여겼다. 그리하여 이해 가을에 남도 지방의 과거에 응시할 무사들을 모아서 말 타고 활 쏘는 것으로 시험 보여 20명을 뽑고는 무예를 익히는 일수(日數)와 음식을 공급하는 분량을 한결같이 문회당을 기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계속 대기가 어려워 행하지 못할 우려가 없게 하였다.
○ 11월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온성, 경원, 경흥 세 고을은 본도의 땅끝에 위치해 있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추위 때문에 겪는 고통이 다른 곳보다 가장 심합니다. 게다가 경술년(1670, 현종11)부터 연이어 4년 동안 큰 흉년이 들어서 곡식을 실어다 주고 옮겨 온 것이 전후에 걸쳐 수만 석이 넘고, 본 고을에서 종전에 거두지 못한 환자곡이 또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기유년(1669)에는 환자곡을 다 거두었다고 등재되어 있었으므로 이번 병오년(1666) 이전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환자곡을 탕감할 때에도 한 말과 한 되도 감면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우선 환자곡을 탕감해 주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은 바로 신해년(1671)과 임자년(1672) 두 해에 기근이 들고 염병이 돌 때에 전 가족이 사망한 자와 도망쳐서 한 명의 일가붙이도 없는 자들입니다. 봄철에 신이 순행할 때 세 고을에 이르러 명백하게 조사하여 골라내서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모두 도착하였으나 또한 크게 많지는 않습니다.”
하고, 마침내 6465석을 탕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 공은 평소에 몸가짐을 조심하고 삼가며 양생(養生)을 잘하였다. 이해 11월에 이르러 주자(朱子)가 해석한 《참동계(參同契)》를 판각하였는데, 그다음 달 숙부에게 올린 편지에 이르기를,
“이것을 배워서 신선이 되어 승천(昇天)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허황된 짓이지만 만약 항상 태양 유주(太陽流珠)가 늘 사람을 떠나고자 하는 것을 경계한다면 어찌 천수(天壽)를 다하는 데에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김공 만중(金公萬重)이 일찍이 공에게 양생술(養生術)에 대해 묻자, 공은 대답하기를,
“다른 것은 알지 못하겠고 오직 천도는 날마다 내면에 마음을 쓰는데 오직 사람은 날마다 외면에 마음을 쓰니, 이것이 장수하고 단명하는 구분점일 것이다.”
하였다.
○ 12월에 공은 북쪽 고을을 순행하였다. 3년을 연이어 추운 겨울에 불모지에 깊이 들어갔는데, 출발에 임박하여 상소를 올려 주진(州鎭)을 부령(富寧)의 차유령(車踰嶺) 밖에 설치할 것을 청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본도(本道)는 비록 고구려의 옛 땅이라고 하나 신라가 삼국을 통합할 때에 세력이 동북쪽에 미치지 못하여 모두 여진족(女眞族)에 유입되었고, 고려가 융성했을 때에도 단지 철령(鐵嶺)을 경계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윤관(尹瓘)이 나온 이후에 처음으로 이 지방을 개척하였으나, 곧바로 얻었다가 곧바로 잃어서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무(聖武)로 본도에서 일어나 곧 대동(大東)을 소유하시니, 국토의 넓이가 서북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에 이르고 동북쪽으로는 두만강(豆滿江)에 이르렀는바, 이는 실로 위엄과 덕으로 나라를 개척한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종(太宗) 때에 이곳을 지키던 신하가 잘못 방어하여 부령 이북을 포기함으로써 바로 지금의 수성역(輸城驛)과 석막보(石幕堡)의 지역을 경계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 후 김종서(金宗瑞)가 세종대왕의 특별한 인정을 받고 다시 육진(六鎭)을 개척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 또한 이의(異議)가 많았으나 세종대왕께서 여러 사람의 말을 물리치고 김종서에게 맡기시어 마침내 성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때 두만강 이내에 거주하는 번호(藩胡)들이 살던 고장을 떠나 옮겨 가는 것을 걱정하여 그대로 두만강 이내에 살면서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딴마음을 먹지 않는 신하가 되기를 간청하니, 조정에서는 형편상 일시에 모두 쫓아내어 그들의 원한을 사는 것을 곤란하게 여겼으므로 부득이 강변에 장성(長城)을 쌓고 장성의 밖에 있는 강 이내의 땅을 떼어 번호에게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살게 하였습니다. 또 부령의 북쪽 차유령 밖은 바로 두만강 이내 수백 리의 땅이니 우리의 소유가 되어야 함이 의심할 나위가 없는데, 그 당시 미처 주진(州鎭)을 설치하지 못한 까닭에 이 사실이 기록에 실려 있지 않아 지금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반드시 사세와 재력이 미치지 못해서 그랬거나 혹은 그 지역에 사는 오랑캐들이 조정의 명령을 받고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淸)나라 사람들이 건주(建州)에서 일어난 이후로 강 이내에 거주하던 번호와 노토(老土)와 마을우(亇乙于) 등의 부락에 살던 오랑캐들을 모두 데려갔고, 강 밖에 거주하던 여러 부족들도 모두 옮겨 갔으므로 이 땅에서 오랑캐의 흔적이 없어진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차유령 밖에 무산(茂山)에서 북쪽으로 120여 리를 가서 정승(政丞), 파오달(破吾達), 죽돈(竹頓), 모로(毛老), 동량동(東良洞), 노토 부락 등지를 지나 강변에 이르면 비로소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라는 곳이 있는데, 마을우는 오랑캐 우두머리의 이름이고, 시배는 오랑캐 말로 보성(堡城)입니다. 이곳에는 지금 옛날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수십 리의 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큰 강을 베고 남쪽으로는 긴 내가 띠처럼 둘러 있으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거울처럼 평평하여 토지가 비옥하니, 또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 뛰어난 형세를 살펴보건대 여기에는 마땅히 큰 진영을 설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우시배에서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면 헐연평(歇然坪), 서가선(西加先), 이시(利施), 도곤(都昆) 등 1백 수십여 리의 땅을 지나 비로소 회령(會寧)의 농산보(農山堡)로 나오는데, 이른바 헐연평 등지는 모두 옛날 오랑캐들의 취락지입니다. 들의 광활함은 마을우시배에 미치지 못하나 토지의 비옥함은 그곳과 다름이 없어 곳곳마다 모두 수천, 수백 명이 경작할 수 있을 만한 땅입니다. 신이 금년 봄 순행할 때에 형세를 살펴보니, 과연 하늘이 만든 오지(奧地)로 결코 지키지 않고 버려두어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또 무산(茂山)의 진영을 설치한 곳은 본래 자갈만 있는 불모지로 토졸들이 농사를 지어 먹고 살 토지가 없어서 보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조조(仁祖朝) 기묘년(1639, 인조17)부터 첨사(僉使) 박심(朴深)이 비로소 차유령 밖으로 나가서 경작하였는데, 효종조(孝宗朝) 경인년(1650, 효종1)에 첨사 이만천(李晩天)이 감사와 병사에게 요청하여 다시 토졸들을 인솔하여 들어가 경작하였습니다. 이때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이 지역에 진영을 옮겨 설치할 만한 상황에 대해 낱낱이 아뢰자, 조정에서는 그대로 경작할 것을 허락하되, 첨사로 하여금 5일마다 한 번씩 가서 적간(摘奸)하게 하고 경작하는 토졸들을 추수한 뒤에는 다시 본진으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경인년(1650) 이후로는 왕래하면서 경작하였는데, 토졸 이외에 그들 사이에 섞여 살고 있는 유민(流民)들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00여 리 사이에 인가가 거의 즐비하고 마을우시배에는 촌락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추수한 뒤에 다시 본진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늙고 약한 백성들이 그대로 이 지역에 머물러 사는 자가 반을 넘습니다. 지금에는 사세가 이미 굳어져서 다시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곤(都昆)에서 이시(利施)까지 60여 리 지역에 흩어져 사는 인민들의 민가 또한 연이어 늘어서 있으며, 아직까지도 빈 땅으로 버려져 있는 것은 단지 서가선(西加先)과 헐연평(歇然坪) 20여 리의 땅뿐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이 지역이 두만강 이내의 땅이라면 원래 우리의 땅입니다. 오랑캐들이 몰래 점거했을 때에는 비록 그들을 몰아내고 개척하기가 어려웠지만, 오랑캐들이 스스로 이주해 떠난 지가 5, 6십 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오랑캐들이 옛날 살던 곳이라 하여 감히 수습하지 못해서 마치 저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는 듯하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만일 후일에 갑자기 오랑캐 부락들이 다시 들어와 점거한다면 조정에서 비록 다시 취하고자 한들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이는 오랑캐들이 예전에 살던 지역이니, 우리나라가 진영을 옮긴 뒤에 오랑캐들이 만일 옛 땅을 되찾으려고 하여 다투고 따지는 일이 있게 되면 약소국의 도리에 있어 형편상 항거하기가 어려워서 반드시 철수하여 돌아오는 병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국경이 이미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있음은 오랑캐들도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런 이유로 번호들이 옛날에 살던 장성 밖의 땅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 모두 경작하고 있으나 강 건너에 사는 오랑캐들과 개시(開市)에 왕래하는 오랑캐들이 모두 한마디도 시비하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이 지역만 저들이 되찾을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저들이 되찾고자 하였다면 지금껏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백성들로서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이 이미 저와 같이 많은데도 수십 년 사이에 아직 한 번도 와서 따지는 일이 없었으니, 진영을 옮긴 뒤에 저들이 되찾아 갈 것을 우려하는 것은 진실로 지나친 걱정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또 말하기를, ‘강가에 있는 땅은 저들의 국경과 가까이 있으니, 진영을 옮겨 백성이 모여 살게 된 뒤에 우리 백성들이 몰래 저들의 국경을 넘어가는 병폐를 막을 수 없어서 반드시 잇따라 사단이 생길 염려가 있다.’라고 하는데, 이는 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회령에서 경흥(慶興)에 이르기까지 다섯 고을의 읍내와 각 진보가 모두 강변에 있으니, 만약 우리 백성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갈 것을 우려한다면 모두 내지로 옮겨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유독 이 지역에 진영을 설치하는 것만 불가하겠습니까. 가령 이 지역에 백성들이 들어와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원래 인적이 없더라도 간사한 백성들은 또한 반드시 빈틈을 타고 몰래 국경을 넘어갈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거주하는 백성들이 이미 가득하고 이들을 주관하거나 통솔할 사람이 없는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방비하고 금지하는 방도에서도 더욱 속히 진장(鎭將)을 두어 중요한 지역을 나누어 지켜야 할 것인바, 이에 대한 이해(利害)가 어찌 명백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부령(富寧)의 차유령(車踰嶺) 밖에 있는 회령(會寧), 도곤(都昆) 이상은 바로 200여 리가 되는 지역이니,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의 옛터에 한 부(府)를 설치하고 서가선(西加先), 이시(利施), 도곤 등지에 두세 개의 진보(鎭堡)를 죽 설치하여 강 연안의 방어하는 곳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차유령 밖에 장백산(長白山) 뒤로 통할 수 있는 길은 단지 박하천(朴下遷) 한 길이 있을 뿐이니, 또한 이 지역에도 한 보(堡)를 설치하여 대비해야 할 것이며, 이 밖에 회령의 풍산보(豐山堡)와 부령의 양영보(梁永堡), 무산(茂山)의 옥련보(玉連堡)와 경성(鏡城)의 어유간(魚游澗) 등지에 있는 진보는 모두 내지(內地)가 되므로 전부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만일 진보를 한꺼번에 새로 설치하고 한꺼번에 혁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무산진(茂山鎭)을 마을우시배에 옮겨 설치하고 양영보를 박하천에 옮겨 설치하고 풍산보를 이시에 옮겨 설치하였다가, 인민이 더욱 모이고 형세가 더욱 무르익기를 기다린 다음 부(府)를 설치하는 것을 서서히 의논하더라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마을우시배는 부령과의 거리가 160여 리이고 회령과도 1백 6, 7십 리여서 형세가 외로이 떨어져 있으며, 첨사가 이 지역을 맡고 있어서 지위와 명망이 중하지 못하니, 새로 설치하는 지역을 맡기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하니 반드시 부를 설치하고 수령을 두는 것이 변경을 진정시키는 도리에 실로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묘당(廟堂)에 물어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다시 갑산(甲山)과 길주(吉州) 사이에 새로운 길을 낼 것을 청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갑산과 삼수 두 고을은 첩첩의 고개와 큰 산줄기 밖에 있어서 들어가는 길이 단지 함흥(咸興), 북청(北靑), 단천(端川) 세 곳만이 있을 뿐입니다. 함흥의 길은 삼수군(三水郡)에서 9일 노정(路程)이고, 북청의 길은 갑산부(甲山府)에서 4일 노정이며, 단천의 길은 갑산부에서 5일 노정인데, 가파른 고개와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에 위태로운 잔도(棧道)와 돌길이 있어서 온 나라 안에 다시없는 험한 곳입니다. 또 삼수군의 서쪽은 후주(厚州)와 폐사군(廢四郡)인데, 모두 텅 비어 있는 곳이므로 강계(江界)와 길이 통하지 않고, 갑산부 동쪽은 또 백두산 남쪽 지맥(支脈)에 막혀 있으므로 길주(吉州)와 길이 통하지 않습니다. 또 이 갑산과 삼수 두 고을은 기후가 육진보다 훨씬 춥습니다. 그리하여 오곡이 자라지 못해서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우 적고 외로이 떨어져 있는 형세가 또 이와 같으니, 만일 위급한 상황이 닥칠 경우 결코 응원 세력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 또 평상시에 어물과 소금, 피복 등도 다른 고을에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으니, 진실로 안타깝습니다.
신이 들으니, 길주의 서북보(西北堡)에 담비를 사냥하는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이 있어 갑산부와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에 서북보의 만호(萬戶) 오상제(吳尙悌)와 길주의 장관(將官) 허휼(許潏)로 하여금 사냥로를 찾아가게 하였는데, 수목이 울창하고 빽빽하여 사람과 말이 뚫고 나가지 못하다가 5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갑산의 동인보(同仁堡)로 나왔고, 또다시 동인보에서 오는 길을 찾아서 2일 반 만에 서북보로 돌아왔습니다. 중간에 두 고개가 있으나 모두 그리 높고 험준하지는 않으니, 지금 만약 나무를 베어 길을 내어서 사람과 말이 다소간 통행할 수 있게 할 경우 가까우면 200여 리쯤 되고 멀어도 300리가 채 되지 못하며 또 지형이 자못 평탄하니, 단천(端川) 등지의 길이 험악하고 위태로워 발 디딜 곳이 없는 것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는 본래 우리의 국경이어서 저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이 길을 개통한다면 삼수와 갑산의 사람들이 평소에는 어물과 소금을 이용할 수 있고 위급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응원 세력이 미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또한 큰 이해가 달려 있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들으니, 서북보로부터 30리 지점에 옛 서북보의 폐성(廢城)이 있고 또 40리 지점에 이양춘(李陽春)의 옛터가 있는데, 이곳은 모두 인민들이 거주할 만한 지역이라 합니다. 그리고 고갯마루 서쪽 가에 또 감평(甘坪)이라는 곳이 있는데 다소 들판이 트여 있어서 경작할 수 있다 하니, 이 사이에 또한 한두 개의 진보를 설치하여 방어하고 기찰(譏察)하는 곳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길주의 사하북(斜下北)ㆍ덕만동(德萬洞)과 단천의 숭의(崇義)ㆍ오을족(吾乙足)ㆍ쌍청(雙靑)ㆍ황토기(黃土岐)와 갑산의 진동(鎭東) 등의 보(堡)는 다 내지가 되므로 모두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만일 일시에 여러 진보를 모두 바꾸는 것을 어렵게 여기신다면, 우선 길을 내어서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지형의 험하고 평탄함을 익숙히 안 뒤에 진보를 설치할 만한 곳을 결정하더라도 혹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묘당에 하문하시어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공은 또 후주(厚州)를 수복할 것을 청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갑산과 삼수의 지형이 외로이 떨어져 있는 것이 위에서 아뢴 바와 같으니, 이제 비록 길주의 길을 개통한다 하더라도 단지 단천 등의 세 길보다 조금 가깝고 쉬울 뿐이며, 또한 고개에서 수백 리 밖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 즉시 서로 구원할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습니다. 삼수군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를 내려가면 후주의 옛 땅이 있는데, 이른바 후주라는 곳은 어느 해에 설치하였으며 어느 때에 폐지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이 지역은 강의 남쪽에 있으니 본래 우리 땅입니다. 또 들이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험하고 척박한 삼수와 갑산과는 크게 다르며, 또 지형이 점차 낮아져 기후가 자못 따뜻하므로 삼수와 갑산처럼 심하게는 춥지 않습니다. 서리가 아주 늦게 내려서 오곡이 모두 잘 되니 진실로 사람들이 살 만한 좋은 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곳을 내버린 이후로 일찍이 오랑캐들의 소굴이 되었는데, 이 지역은 갈파지(坡知)와 인접한 데다가 별해(別害)와도 채 200리가 못 되어 중간에 다만 오만령(烏蔓嶺) 하나가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오랑캐들이 화살 쏘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들려서 어느 때고 침략을 당하지 않은 달이 없었는데, 다행히 그 당시 오랑캐들이 약탈한 것은 소와 말을 빼앗아 가는 데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성지(城地)는 겨우 빼앗김을 면했을 뿐입니다.
또 당초 조정에서 이미 사군(四郡)과 후주를 폐지하여 오랑캐에게 주고 장진강(長津江)을 국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오직 별해와 갈파지 두 진(鎭)을 장진강 서안(西岸)에 설치하고, 그 나머지 묘파(廟坡), 신방(神方), 강구(江口), 어면(魚面), 감파(甘坡), 자작(自作) 등의 보(堡)는 모두 강물의 동쪽에 설치해서 오랑캐들과 더불어 강을 끼고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를 설치한 곳이 모두 물살이 급하고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에 있어 도로가 매우 험해서 사람들이 통행할 수가 없으며 또 경작할 만한 토지가 없으니, 수비하는 형세의 편부는 말할 것이 없고 결코 인민이 살 만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 진보에 비록 변장(邊將)이 있으나 토졸들이 혹 5, 6호(戶)가 못 되니, 만약 적들이 영원히 침입해 오는 일이 없다면 괜찮겠지만 혹시라도 수십 명의 오랑캐 병사들이 별안간에 쳐들어온다면 반드시 잠시도 버텨 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비록 인민들을 많이 거주하게 하려 해도 지역이 저렇게 험악하니, 결코 백성들을 많이 살게 하여 편안히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건주(建州)의 오랑캐들이 강성하여 천하를 차지한 뒤로는 후주의 오랑캐들이 모두 쫓겨 가는 바람에 이 지역은 50년 동안 위급한 경보(警報)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혹 조만간에 다시 와서 점거하는 자가 있어 오만령을 넘어 곧바로 별해로 들어온다면, 묘파 이북에 설치한 10여 개의 보(堡)와 삼수와 갑산이 모두 적의 배후에 놓이게 됩니다. 별해에서 함흥까지는 비록 300여 리의 거리이나 이 사이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매우 적어서 무인지경이나 다름이 없으니, 실로 믿을 만한 방어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적들이 별해에서 곧바로 함흥으로 진출한다면 홍원(洪原) 이북에서 육진까지는 장차 모두 우리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니, 관방(關防)의 방어가 이보다 더 허술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을 가지고 말한다면 후주에 관련한 이해(利害)는 또 차유령의 일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후주를 폐지하여 버리는 잘못이 어찌 다만 살기 좋은 땅을 거저 버리는 애석함 정도에서 그칠 뿐이겠습니까. 지금 만약 후주의 옛 땅에 다시 군읍을 설치한다면 삼수와 갑산에도 서로 의지가 되고 응원 세력이 될 것이므로 외로이 떨어져 있는 걱정이 없을 것이며, 함흥에도 진실로 울타리가 되어서 방비가 허술해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진강(長津江) 일대에 있는 자작(自作), 어면(魚面), 강구(江口), 신방(神方), 묘파(廟坡), 별해(別害) 등의 진보가 다 내지(內地)가 될 것이므로 모두 혁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함흥에서 별해와 삼수의 경계에 이르기까지는 거의 400여 리가 되고 삼수에서 별해까지는 또 400여 리가 되니, 관청의 정사와 명령이 400리 밖에까지 미치기 어렵습니다. 이 사이에는 인민들이 산골짜기에 숨어 살아서 야생하는 새와 짐승을 길들이기 어려운 것과 같은 상황인 데다 또 중간에 적들이 침략할 우려가 없지 않은데도 관청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때에 달려가 하소연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다시 후주를 설치하여 변경을 방어하게 한다면 장진강 위아래에 설치한 여러 진보를 모두 혁파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하고 함흥의 황초령(黃草嶺) 이서와 삼수의 이송령(李松嶺) 이남의 땅을 떼어서 합하여 따로 한 군(郡)을 만들어 별해에 읍(邑)을 설치한다면 경계를 나누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로 볼 때도 실로 마땅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利害)는 신이 여러 해 동안 잘 생각하고 반복하여 물어본 뒤에 비로소 아뢰는 것이니, 실로 우연히 시험 삼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경자년(1660, 현종1)에 조계원(趙啓遠)이 본도의 감사로 있을 때에 후주에 가서 형편을 관찰하고 다시 주군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계문하였는데, 들으니 그 당시 조정의 의논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강변 지역에 진영을 설치한다면 반드시 백성들이 몰래 국경을 넘어가 금령(禁令)을 범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여 이 때문에 시행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 말대로라면 혜산진(惠山鎭)에서 갈파지(坡知)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가에 설치한 진보들이니, 또 어찌 다만 후주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관한 이해(利害)는 이미 차유령에 관한 일에서 다 말씀드렸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였다. 처음에 태종 병신년(1416, 태종16)에 함길도(咸吉道) 갑산군의 여연촌(閭延村)이 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소훈두(小薰頭) 이서 지방을 떼어 여연군(閭延郡)을 만들어 평안도에 소속시켰고, 세종 을묘년(1435, 세종17)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이보다 앞서 계축년(1433)에 여연군 시번강(時番江)의 자작리(慈作里)에 성을 쌓고 시번의 장항(獐項)을 방수(防戍)하게 하였는데, 이곳이 여연, 강계(江界)와 서로 떨어져 있어서 파저강(婆猪江)의 야인(野人)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노략질당하는 것을 미처 구원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두 고을의 중간에 있는 자작리에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하였다. 병진년(1436)에 여연 위에 무로보 만호(無路堡萬戶)를 두었는데, 경신년(1440)에 이 보(堡)가 여연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 땅을 떼어 무창현(茂昌縣)을 설치하고, 임술년(1442)에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계해년(1443)에 여연의 우예보(虞芮堡)가 본부에서 너무 멀다 하여 본부의 땅과 자성군 일부의 땅을 떼어 우예군(虞芮郡)을 설치하였다. 단종 을해년(1455, 단종3)에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박종우(朴從愚)가 아뢰기를,
“우예, 여연, 무창은 본 고을의 군사가 매우 적기 때문에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남도의 군사를 임시로 초정(抄定)하여 가서 수자리 살게 하다 보니 폐해만 있고 유익함은 없습니다. 소속된 여러 보를 모두 혁파해서 우예의 백성을 강계로 옮기고 여연과 무창의 백성을 귀주(龜州)로 옮기소서.”
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말을 따랐다. 세조 기묘년(1459, 세조5)에 병조에서 도체찰사의 계문(啓聞)에 근거하여, 자성에는 사람과 물자가 아주 적으므로 세 곳에 나누어 수자리 살게 하였는데, 전염병의 유행으로 인해 매번 보에 들어가면 서로 전염이 되어 죽는 자가 많다 해서 자성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백성들을 강계와 이산(理山) 등 사군(四郡)으로 옮기고 창고의 곡식을 강계로 옮겨 놓은 지가 1백 수십 년이 되었으나 그래도 수만 석의 곡식이 남아 있어서 묵고 썩어 먹을 수가 없었다. 사군이 폐지된 뒤로 야인들이 이 지역이 비어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 강을 넘어와서 제멋대로 사냥하고 인삼을 채취하였는데, 중종 때에 이르러 야인들이 점점 여연과 무창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군대를 일으켜 쫒아내도록 명하였으며, 또 평안 병사에게 명하여 매년 곡식을 베게 하여 야인들이 침입하여 점유하는 폐해를 근절하였다. 오랜 뒤에 오랑캐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날마다 국경 근처로 다가왔는데, 광해군 말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후주(厚州)에 사는 오랑캐들과 약속하여 모두 그 지역을 비우게 하였다. 현종 초년에 조정의 의논이 후주를 다시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또 이르기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후주보(厚州堡)와 사군(四郡)이 모두 강계에 속한다.’ 하였으니, 본래 함경도 땅이 아니며 조종조에서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땅을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고 이어 사군을 다시 설치할 것을 청하기를,
“지금 후주의 경내인 송전파(松田坡)의 파수(把守)와 후주의 강어귀 동쪽의 파수는 모두 삼수군의 사람을 보내어 지키고 있고, 후주의 강어귀 서쪽의 파수만 강계 사람이 올라와 지키고 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지금의 분계선도 오히려 후주를 삼수군에 속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지승람》에 이곳이 강계에 속한다고 말한 것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여연군도 본래는 갑산의 땅이고 더구나 후주는 또 여연군의 동쪽에 있는바, 본도의 지역임을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 당시 고을을 설치한 내력이 자주 바뀌어서 강역(疆域)이 한 번은 저쪽 지역이 되고 한 번은 이쪽 지역이 되어서 일정하지 않았던 것이니, 지금은 그 형세의 편부만을 논하면 되는 것이지, 이 도에 속하였는가 저 도에 속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따지고 논쟁하는 단서가 될 수 없을 듯합니다.
또 듣건대 여연 등의 폐사군(廢四郡)은 또한 넓은 들에 토지가 비옥하여 살 만한 곳이라 하니, 국가가 지금까지 버려 둔 것은 실로 매우 애석합니다. 국초(國初)에 본도의 함흥 이북과 평안도의 압록강 연안 고을들은 모두 야인(野人)들을 쫓아내고 새로 차지한 지역이어서 남쪽 백성들 중에 데려다가 변방에 살게 할 만한 자가 적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을 지켜 낼 수가 없었고, 강 북쪽에 넘어와 있는 야인들은 그 숫자가 실로 많았으며, 사군의 건너편에 있는 올량합(兀良哈)과 홀자온(忽刺溫) 등의 부락이 더욱 강성하게 날뛰어서 아침저녁으로 몰래 나타나서 끊임없이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으므로, 그 당시 조정에서는 토지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살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버리고 소유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강 북쪽의 1000여 리 밖에 오랑캐들의 침략이 전무한 지가 이제 이미 4, 5십 년이 되었습니다. 조정에서 이러한 때에 다시 우리의 옛 강토를 회복하여 점차 백성을 데려다가 살게 해서 우리 형세가 이미 굳건하게 다져지면, 비록 후일에 저들이 다시 와서 소요를 일으키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변경에 있는 땅을 만약 적과 가깝다 하여 버린다면 적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일은 끝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니, 이 어찌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밖으로는 밤중에 적들이 몰래 출현하는 걱정이 없고 안으로는 떠돌아다니는 자들 중에 이곳에 들어가 살기를 원하는 백성이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고을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강토를 수복하는 좋은 점이 있고 지키기 어려울까 염려할 일이 없는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조정에서 만일 한꺼번에 여러 고을을 모두 수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별해(別害)에 군(郡)을 설치하고 후주에 진(鎭)을 설치하여 인민들이 점점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차례로 다시 설치하더라도 혹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묘당에 하문하여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지도를 올리고 기문(記文)을 써서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주례(周禮)》에 ‘직방씨(職方氏)가 천하의 지도를 맡아 천하의 땅을 관장함으로 인해 유리한 곳과 불리한 곳을 두루 안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형의 유리함과 불리함은 지도가 없이는 두루 알 수 없습니다. 우리 국가가 나라를 세우고 영토를 개척해서 이를 나누어 팔로(八路)를 만들었는데 이 관북(關北) 지방이 가장 멀고 궁벽하며, 또 지세가 우리의 백두산이 남쪽으로 뻗어 오고 중국의 장백산(長白山)이 북쪽으로 꺾여 나가 오랑캐 땅과 맞닿은 국경이 거의 2천 리나 됩니다. 그 사이에 중첩된 고개와 관문이 높이 솟아 있고 드넓어서 나무 사다리와 돌다리를 연결하여 이으니, 무릇 산천이 흘러가고 뻗어 내려와서 이리저리 감아 도는 형세와 국경이 길어졌는지 짧아졌는지, 늘어났는지 줄어들었는지 그 실상을 두루 보아 다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에 기록된 것이 실로 오류가 많은데, 이것을 아무도 바로잡는 이가 없으니, 말하는 자들이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불초한 신이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부임한 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변경의 요새와 보루를 거의 다 출입하여 산해(山海)의 험하고 평탄한 지세와 곧게 뻗은 길과 우회하는 도로의 사정에 대하여 대략 10에 7, 8할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하되 길 가는 데 익숙하고 지리에 밝은 자에게 또다시 물어서 참고하고 수정하고 분별하여 도본(圖本)을 만들었는데, 중국의 여지도(輿地圖) 제도를 따라서 먼저 정(井) 자 모양으로 구획하여 한 구역마다 10리에 해당시켰습니다. 이로써 노정을 계산하여 산천과 군읍을 나열하고 배치하였으며 진보(鎭堡)와 봉수대(烽燧臺), 관령(關嶺)과 역참도 모두 일일이 헤아리고 가늠하는 등, 각각 이수(里數)에 따라 원근을 나누고 넓이를 정하여 경(經)과 위(緯)가 제자리를 잡고 굽은 모양이 원래 모습대로 그려짐으로써 수해(豎亥)를 수고롭게 걷게 하지 않고 기리고거(記里鼓車)로 번거롭게 기록하지 않아도 한번 보면 일목요연하여 손바닥에 물건을 올려놓고 보는 듯하니, 비록 발과 눈이 미치지 못하여 한두 곳의 차이가 없다고 장담하기는 어려우나 사방 너비의 총수(總數)와 관방(關防)의 대세는 거의 그 요체를 잡았다 할 것입니다. 지형의 이해(利害)를 두루 아는 데에 다소 보탬이 될 것이니, 직방씨가 관장하던 일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신은 또 여기에 한 가지 올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령(富寧)의 북쪽과 삼수(三水)의 서쪽은 의당 그 버려진 땅을 거두어 지켜서 국경을 튼튼히 해야 할 것이고, 길주(吉州)의 서쪽과 갑산(甲山)의 동쪽은 의당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왕래에 편리하게 해야 할 것이니, 생각건대 이 몇 가지 일은 정사에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한번 이 지도를 펴 보면 그 형세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미 변경을 개척하여 국경 문제로 시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또 영토를 확장하기를 좋아하고 공을 세우기를 좋아해서도 아니며, 우리의 토지를 거두고 우리의 울타리를 세우며 우리의 막힌 곳을 통하게 하고 우리의 응원 세력이 이어지게 하는 것이니, 어찌 지나친 계책이 되겠습니까. 신은 유리하고 불리한 내용을 별도로 적어서 그림과 함께 올리니, 금성(金城)의 방략(方略)이 반드시 도면을 그려 올림으로써 드러났고 농우(隴右)의 산천이 쌀을 모아 지형을 만듦으로써 드러난 것처럼 그렇게 쓰이기를 바라는 것이 오늘날 신의 간절한 마음입니다.”
하였다. 공은 정세규(鄭世規)와 조계원(趙啓遠)이 아뢴 장계를 함께 기록하고 모두 묘당에 내려서 이해(利害)를 자세히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이달 빈청 인견 때에 상이 공의 상소와 지도를 꺼내어 우상 김수흥(金壽興)에게 보이니, 김수흥이 다 보고 대답하기를,
“편리하고 타당한 대책을 마련하여 아뢴 것이 또한 매우 자세하고 치밀하나 중대한 일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는 이어 차유령 밖에 진을 설치한 뒤에 생길 난처한 상황에 대해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본래 우리 땅이니, 적이 떠난 뒤에 우리가 사는 것은 당연하다. 저들이 당초에 와서 살았던 것도 저희 땅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니, 지금 다시 군(郡)을 설치하더라도 저들이 어찌 와서 따지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채삼(採蔘)을 금지하는 약속에 대해 저들도 반드시 강을 넘어가는 것을 한계로 삼고 있으니, 장성 밖이라도 두만강 이내는 저들 또한 자기 땅이 아닌 줄을 알 것이다.”
하였다. 이때 지중추부사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지난번 저들이 와서 살았던 곳은 이 지역뿐만이 아닙니다. 회령 등지에도 많이 와서 살았으나 우리나라가 다시 군을 설치할 적에 저들이 와서 따져 물은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먼저 진(鎭)과 보(堡)를 강변으로 옮기는 것이 합당할 듯하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참으로 성상의 하교대로 우선 무산(茂山) 등의 보로 하여금 진을 옮기게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산과 양영(梁永)의 첨사(僉使)와 만호(萬戶)로 하여금 채삼을 금지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봄가을로 인삼을 캘 시기에 항상 강변에 머물게 하고 몇 년 동안 이렇게 한 뒤에 그대로 이 지역에 진을 설치한다면 저들의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요 군을 다시 설치하는 일도 점차 서서히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길을 내는 일은 그 청을 들어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험한 지역에 길을 내는 일은 병가(兵家)에서 크게 꺼리는 바이나 형편상 해야 한다면 또한 이 때문에 길을 내지 않을 수 없으니, 요해처에 큰 진과 보를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후주(厚州)를 설립하는 일은 그 청을 허락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유혁연이 아뢰기를,
“이는 불편할 것이 없습니다. 후주는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신이 서관(西關 평안도)에 있을 때에 백성들이 모두 살기를 원한다고 들었으니, 아침에 명령하면 저녁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강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하는 것이 많지 않은 까닭은 이 지역에서도 인삼을 채취할 수 있기 때문인데, 고을을 설치한 뒤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서 인삼을 많이 채취하여 전혀 생산되지 않으면 반드시 강을 넘어가는 일이 잦아질 것이니, 이것이 매우 염려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곡절을 함경도 감영에 회문(回問)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무산(茂山)에 진(鎭)을 옮기는 것은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우나 우선 첨사로 하여금 매년 봄가을로 인삼을 채취할 시기에 토졸들을 경작하는 곳에 들여보내어 수삼 개월 머물면서 단속하게 하고, 길주(吉州)와 갑산(甲山) 사이의 길이 통하는 곳에는 한두 개의 진보를 설치하되 굳이 별도로 설치할 것이 없습니다. 사하북(斜下北)의 여러 진보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곳을 옮겨 설치하면 될 것이요, 후주와 사군(四郡) 등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가볍게 거론할 수 없으나 먼저 후주에 진을 설치하되 또한 장진강(長津江) 일대의 여러 진보 중에 긴요하지 않은 곳을 옮겨 설치하면 됩니다. 인삼과 화피(樺皮)는 모두 폐읍(廢邑)에서 생산되는데, 진을 설치한 뒤에는 이것들을 채취하여 씨가 마르게 될 것입니다. 화피로 말하면 군기(軍器)에 소용되는 것이니, 점차 씨가 말라 전혀 나오지 않게 되면 관계되는 바가 작은 문제가 아니니, 이에 관련한 이해(利害)에 대해 도신(道臣)이 자세히 살펴서 계문하라고 이문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마을우시배(亇乙于施培)에서 도곤(都昆)까지는 바로 강 연안의 100여 리 지역이니 무산 첨사(茂山僉使)가 들어가 지키는 것은 형세상 매우 고단한 반면, 양영보(梁永堡)와 풍산보(豐山堡)는 유독 내지(內地)에 있어 또한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양영보의 권관(權管)이 서가선(西加先)에 들어가고 풍산보의 만호(萬戶)가 도곤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세와 이해 관계로 볼 때 결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비록 즉시 진보(鎭堡)를 옮길 수는 없으나 우선 이들을 무산 첨사가 감농(監農)하는 예에 따라 모두 강변으로 들여보내어 기찰하고 파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길주(吉州)와 갑산(甲山) 사이의 길이 통하는 곳은 신이 북로(北路)에서 올 때에 자세히 살펴보니, 길주목(吉州牧)에서 서북보(西北堡)까지가 50리이고 서북보에서 고서북보(古西北堡)까지가 20리이고 고서북보에서 이양춘(李陽春)의 옛터까지가 30리이고 이양춘의 옛터에서 양파(陽坡)까지가 40리이고 양파에서 설령(雪嶺) 위까지가 10리인데, 이곳은 길주의 경계이고 설령 서쪽부터는 바로 갑산의 경계입니다. 설령에서 운파(雲坡)까지가 15리이고 운파에서 감평(甘坪)까지가 40리이고 감평에서 동인보(同仁堡)까지가 50리이고 동인보에서 갑산부(甲山府)까지가 30리이니, 길주목에서 갑산부까지 통틀어 계산하면 280여 리이고 서북보에서 동인보까지는 겨우 200여 리입니다. 설령은 그리 높거나 험준하지 않으며 감평에서 동인보 사이까지는 종개주(終介州)라는 고개 하나가 있으나 또한 지형이 그리 험악하지 않습니다. 종전에 갑산에서 길주에 이르는 길을 가지고 말씀드리면 중간에 황토령(黃土嶺), 검의령(檢義嶺), 덕숭령(德崇嶺), 의덕령(義德嶺), 구운령(驅雲嶺), 마천령(磨天嶺) 등의 험한 곳이 있고 또 7일이 걸리는 노정입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낸 길은 가깝고 또 지형이 평탄하니, 관방(關防)의 측면에서 논하건대 이 200여 리의 요해처를 지키지 않고 7, 8일이나 걸리며 여러 봉우리와 골짝이 험하고 멀리 돌아가는 곳으로 후퇴해 지키는 것은 사리에 있어 실로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고서북보는 바로 예전에 진보를 설치했던 곳인데 지형이 평탄해서 경작할 수 있으며, 이양춘의 옛터는 더욱 넓고 토지의 비옥함이 또한 길주보다 갑절이나 낫습니다. 사하북(斜下北)과 덕만동(德萬洞) 두 보는 이 길의 남쪽에 있으니, 실로 긴요하지 않습니다. 사하북을 이양춘의 옛터로 옮기고 덕만동을 고서북보로 옮기는 것이 지극히 합당합니다. 이양춘의 옛터 위로부터 고개 아래까지는 지형이 매우 높고 기후가 추워서 반드시 서리가 일찍 내릴 우려가 있으니, 경작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그 중간의 50리 지역은 방호(防護)하고 수직(守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른바 양파(陽坡)라는 곳에 관사(館舍)를 짓고 사람을 모집하여 지키게 해서 나그네들이 잠시 의탁하는 곳으로 삼으며, 이양춘의 옛터로 진보를 설치한 곳에는 다른 진보의 수호하는 규정에 따라 군사를 윤번으로 보내고, 갑산(甲山) 경계의 고개 아래 15리 지점인 운파(雲坡) 지역에도 양파의 예에 따라 관사를 지어 수직하게 해야 합니다. 감평(甘坪)은 확 트여 있어 큰 동네를 이룰 만큼 땅이 지극히 펀펀하고 넓으니, 실로 진보를 설치하기에 합당합니다. 감평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가서 운총보(雲寵堡)와 갑산의 동인보(同仁堡)와 진동보(鎭東堡)까지는 모두 내지(內地)인데, 새로 설치한 진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형편상 다 혁파하기가 어려우나 진동보는 갑산부의 동남쪽에 있어서 더더욱 긴요치 않으니, 감평으로 옮겨 설치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후주(厚州)의 일은 신이 갑산에 있을 때에 다시 직접 살펴보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국상(國喪) 소식을 듣고 허둥지둥 진영으로 돌아오느라 살피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 이해(利害)와 편부(便否)에 대해서는 또한 이미 익숙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화피(樺皮)는 본래 지극히 추운 곳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본도에서 진상하는 것은 삼수와 갑산 두 고을, 혜산진(惠山鎭)과 운총보(雲寵堡) 두 진보에서 올리고 있습니다. 삼수는 갑산에 비하여 지형이 다소 낮으므로 사람들이 갑산에 들어가서 함께 화피를 채취하는바, 지금 새로 낸 길 북쪽의 백두산(白頭山)과 장백산(長白山) 등 여러 산 사이에 있습니다. 이 밖의 여러 곳에는 비록 혹 화피가 있더라도 다만 지붕을 덮고 사람을 매장하는 데에 사용할 뿐이요, 군기(軍器)에는 원래 사용하지 않습니다. 후주 등 사군(四郡)의 경우는 삼수에 비하면 또 더 하류여서 점점 낮아지는 지역이니, 사군에서 어찌 쓸 만한 화피가 있을 리 있겠습니까. 삼수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강계(江界) 사람들이 매번 와서 화피를 사 간다고 하였습니다. 사군 지역을 신이 두루 살펴보지는 못했으나 생각건대 삼수와 갑산보다 반드시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삼수와 갑산은 인삼을 채취하는 곳이 지극히 적지만 사군에서 인삼이 어찌 무한정 생산되며 온 나라에 통행되는 인삼이 또 어찌 모두 사군에서만 나오겠습니까.
조정에서 만약 국경을 넘어가서 인삼을 채취하는 것을 우려한다면 금령(禁令)을 범한 모든 자들을 일절 용서하지 않으면 될 것입니다. 만약 방비하고 단속하는 일이 차츰 해이해져서 사군을 영원히 버리고 인삼을 채취하는 밭이 된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이것을 만족스럽게 여겨 저들의 땅을 침범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또 4, 5십 년 전 호인(胡人)들이 후주에 가득하였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인삼과 화피가 부족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우리 땅이 된 뒤에 도리어 인삼과 화피가 부족할까 우려하여 진보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가령 인삼과 화피가 사군에서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얻기 어렵다 해도 마침내 이 두 가지 물건의 이로움을 위해 변방의 수백 리나 되는 요해처를 내버려서 후일에 적들이 몰래 점거하는 빌미가 되게 하는 것은 실로 국가를 지키는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참작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후주의 진영을 설치하는 것은 반드시 금년 봄에 조처해야 하는데, 이제 때가 지나려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만일 시행할 수 있다고 여기신다면 새로 설치하는 곳에 백성들을 안주시키고 자립시킬 수 있는 인물을 각별히 선발하여 보내십시오. 그리하면 거의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진강(長津江) 일대의 긴요치 않은 진보를 옮겨 설치하는 일은, 그 형세를 살펴보면 길주와 갑산 등 도로가 개통된 곳과는 다릅니다. 장진강 일대는 매 1식(息)마다 1보(堡)를 설치하여 역참(驛站)의 관사와 같으니, 이제 만약 한 곳을 철거하면 지나가는 역참의 중간이 끊어지게 됩니다. 신이 전에 올린 상소에 따라 장진강 일대의 진보를 모두 혁파하고 한 군(郡)을 별해(別害)에 별도로 설치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합니다. 만약 다 혁파하지 못하고 한두 곳만 철거한다면 실로 처음에는 잘하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이루지 못하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해 가을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강을 따라 붙어 있는 100여 리의 땅을 단지 무산(茂山)의 첨사로 하여금 지키게 할 경우 허술해지는 것은 진실로 감사가 아뢴 바와 같습니다. 양영(梁永)과 풍산(豐山)에도 인삼을 채취할 때에 관리가 들어가 머물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길주와 갑산에 길을 내는 일과 보(堡)를 옮기고 관사를 짓는 일은 본도에서 헤아려 처리하는 것이 적합할 듯하니, 이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후주에 진을 설치하는 것은 화피와 인삼의 채취 때문에 막을 수 없다면 종전에 분부한 대로 진을 설치하되 장진강의 진보는 형편상 옮겨 설치할 수 없을 듯합니다. 별도로 한 군을 설치하는 문제는 또한 매우 중대하고 어려우니, 남북도와 도로의 원근을 막론하고 긴요하지 않은 진보 한 곳을 이곳에 옮겨 설치하고 첨사를 차출해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이대로 이문(移文)을 보내니, 공이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진동보(鎭東堡)의 변장(邊將)은 본래 권관(權管)이었습니다. 새로 보를 설치하는 형세가 옛날 보와는 같지 않을 듯한데, 권관이라는 명칭은 지위가 너무 가볍습니다. 또 이곳은 적이 침입하는 중요한 길목으로 외롭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권관이 이미 인신(印信)이 없고 보면 변방의 상황을 문건으로 보고하는 사이에 또한 허술한 일이 있을 듯합니다. 현재 권관을 맡고 있는 정희선(鄭希善)은 일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임기가 찹니다. 새로 보를 옮겨 설치하는 곳을 만약 생소한 사람에게 맡기면 성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권관 정희선을 만호(萬戶)로 바꾸어 계하(啓下)하여 효과를 거두게 하소서.
감평보(甘坪堡)와 운총보(雲寵堡) 사이에 옛 운총보의 터가 있는바 바로 적이 침입하는 요충지로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인데, 감평보와 운총보의 형세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새로 설치하는 곳과 달리 보(堡)와 성(城)의 형태가 있고 또 인가와 농지가 있으니, 동인보(同仁堡)를 이곳에 옮겨 설치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후주는 이미 외롭게 떨어져 있고 삼수와 갑산은 모두 첩첩산중에 큰 고개가 있어서 가까운 곳이라고 하는 다른 고을까지도 모두 5, 6일 또는 8, 9일이 걸리니, 먼 지역에 있는 진(鎭)과 보의 백성은 방어의 중요성을 막론하고 결코 이전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지금 후주의 파수를 어면보(魚面堡)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후주와의 거리가 채 하룻길이 못 되니, 이 보의 백성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편리하고 쉬울 듯합니다. 또 어면보는 장진강(長津江) 일대의 여러 보 중에서 토지가 다소 넓어 토졸(土卒) 이외에 하릴없이 거주하는 백성들이 또한 많으니, 보를 옮긴 뒤에 역참의 관사를 수직하게 하면 염려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듣건대 어면보의 만호 이상식(李尙植)은 사람됨이 근면하고 재간(才幹)이 있어서 금년에 보의 백성들을 권면하여 농사를 지은 것이 자못 많다고 합니다. 새로 보를 설치한 곳에 생소한 사람을 들여보내면 본보(本堡)의 만호를 그대로 유임시켜 보내는 것보다 착실하게 수행하지 못할 듯하니, 만호 이상식을 첨사(僉使)로 승진하여 들여보내어 효과를 거두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장계를 미처 아뢰기 전에 국상을 당하였는데, 이윽고 숙종이 즉위하여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5년 뒤에 조정에서 새로 낸 길의 불편함을 의논하여 사하북(斜下北)과 덕만동(德萬洞), 장군파(將軍坡) 세 보(堡)를 서북보(西北堡)에 합하여 설치하고 첨사로 승격시킨 다음 마침내 새로 낸 길을 폐하였다. 그다음 해 여름에 평안 감사 유상운(柳尙運)이 하직하고 떠날 때에 사군을 폐지하는 것이 애석하다고 말하였고, 3년 후 봄에 연신(筵臣)이 다시 말하였으며, 공이 병조 판서로서 종전에 했던 말을 다시 아뢰자 상이 옳게 여겼고 영상 김수항(金壽恒)도 편리하다 하여 네 진(鎭)의 변장을 차임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여름에 유상운이 대사간으로 입대하여 그 불편함에 대해 아뢰기를,
“이 지역은 수백 리에 걸쳐 널리 뻗쳐 있습니다. 수목이 울창하고 도로가 막혀 끊어졌으니, 지금 만약 진을 설치하려면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토지를 개간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 설치한 잔약한 진영이 이미 적을 막을 수가 없으니, 그렇게 되면 도리어 적이 쳐들어오는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또 토지가 개간되면 초피(貂皮)와 인삼을 채취하는 이익이 끊겨 반드시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아뢰기를,
“북도의 초피와 인삼은 삼수와 갑산에서 나오는데, 고을을 설치한 지 수백 년이 되도록 그 이익이 끊기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사군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어찌 하루아침에 이익이 완전히 끊기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리고 강변을 왕래하는 길이 한둘이 아니니, 적이 어찌 반드시 사군을 경유하여 쳐들어오겠습니까. 수목도 적을 막을 수는 있으나 어찌 사람을 모집하여 들어가 살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다. 김수항이 공에게 명하여 대신(大臣)들에게 다시 묻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우상 김석주(金錫胄)는,
“마땅히 먼저 두 진에 첨사를 둔 다음 형편을 보아 추가로 설치하소서.”
하였고, 좌상 민정중(閔鼎重)은,
“그대로 네 진을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수항은 김석주의 말이 타당하다고 여겨 마침내 무창(茂倉)과 자성(慈城) 두 진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평안 감사 신익상(申翼相)이 그 불편함을 장계로 아뢰었다. 이는 비록 새로운 말이 아니었으나 김석주는 신익상의 말에 따라 별안간 진을 파하고 백성을 옮길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채 수십 일도 못 되어 백성들이 집을 새로 짓고 전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파종했는데 또다시 옮겨 가게 하니, 처음 옮길 때보다 원성(怨聲)이 더 심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하였다. 다음 해에 북백(北伯) 이세화(李世華)의 장계로 인하여 무산진(茂山鎭)을 승격시켜 부(府)로 삼았다. 공이 우상으로 있으면서 법식을 정하여 당상관의 부사(府使)로 삼아 육진(六鎭)과 일체로 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따랐다. 이에 무산부(茂山府)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생사당〔生祠〕을 세웠다. 1년 뒤 봄에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간 일로 인하여 후주보를 혁파할 것을 의논하였다. 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판부사(判府事) 이상진(李尙眞)은 ‘이미 설치하였다가 다시 혁파하는 것은 매우 애석합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좌상으로서 아뢰기를,
“신이 선왕조 때에 보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지금 문제가 생겨서 대죄하고 있으니, 거듭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충국(趙充國)이 이르기를, ‘국사의 이해(利害)는 마땅히 후일의 법이 되어야 한다. 어찌 한때의 공을 자랑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현명한 군주를 속이겠는가.하였으니,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신이 또한 대죄하고 있다 하여 어찌 감히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삼수와 갑산의 진보는 모두 강변이고 이번에 국경을 넘어간 여러 지역도 모두 그러하니, 그렇다면 후주만이 반드시 유독 인삼을 채취하는 통로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후주에는 곡식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타 지역 사람들이 모두 몰래 국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할 때 먹는 양식으로 이용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혁파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변진(邊鎭)을 설치하는 것은 인삼을 채취하는 일을 금지하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듣자 하니 저 청나라 사람들은 텅 비어 있는 지역인 애양(靉陽), 관전(寬奠), 노성(老城) 등지에 현재 군대를 더 증원하여 축성(築城)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옛사람처럼 변방에 곡식을 옮겨다 놓기는커녕 도리어 곡식이 자랄까 염려하여 이미 만들어 놓은 진보를 혁파하려고 하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비록 진(鎭)을 혁파하더라도 땅은 본래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변장(邊將)을 믿을 수 없어 혁파한다면 삼수와 강계의 파수하는 군사만은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파수하는 군사들도 반드시 스스로 국경을 넘는 것을 면하기 어렵고 그 결과 우려할 만한 단서가 진을 설치했을 때보다 도리어 더 많아질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금령을 엄격히 세워서 변장으로 하여금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금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광주 유수(廣州留守) 윤지완(尹趾完)이 아뢰기를,
“후주를 설치하기 전에도 해마다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하는 폐단이 있었으니, 후주를 혁파하고 혁파하지 않는 데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하러 갈 때 오로지 후주를 통과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민 판부사(閔判府事 민정중)가 일찍이 이곳의 감사를 지냈는데 혁파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니, 혁파를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감사 윤지완과 어사 이징명(李徵明)의 말에 따라 다시 후주를 혁파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여 무산(茂山)까지 혁파하려 하였다. 공이 이때 막 정사(呈辭)를 올렸으므로 비변사의 유사 당상에게 명하여 공에게 찾아가 묻게 하니, 공이 아뢰기를,
“무산은 전에 이미 진을 설치하였으니, 지금 고을을 혁파하더라도 다시 첨사를 두어야 하는데, 수령과 첨사 사이에 큰 이해 관계는 없을 듯합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이곳이 또한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하는 중요한 길목이라고 하나 삼수와 갑산 등지에도 모두 얕은 여울이 있으니 굳이 무산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비변사에서 아뢰자, 상은 무산을 혁파하지 말고 다만 후주만을 혁파하라고 명하였으며, 어면보 첨사(魚面堡僉使)를 만호로 강등하고 옛 보를 그대로 두게 하였다.


 

[주D-001]시재 어사(試才御史) : 시재(試才)는 재예(才藝)가 있는 자를 시취(試取)하는 것을 이르는바, 시재하기 위하여 특별히 보내는 어사이다.
[주D-002]부의(副擬) : 관직의 후보에 두 번째로 추천됨을 이른다. 옛날 이조(吏曹)에서 적임자를 세 사람 뽑아 올려 임금의 비점(批點)을 받았는데, 첫 번째로 주의(注擬)된 사람을 수망(首望)이라 하고 그다음으로 주의된 사람을 부의라 하였다.
[주D-003]개창(開倉) : 창고를 열고 공곡(公穀)을 출납함을 이른다.
[주D-004]원회부(元會付) : 환자곡을 분급하여 10분의 1의 이자를 받아 그중 10분의 1은 원곡에 충당하고 그 나머지 10분의 9는 고을에 모아 두는데, 이것을 장부에 회록하여 계상(計上)한 것을 원회부라 이른다.
[주D-005]회외곡(會外穀) : 회계 장부에 회록(會錄)하고 남은 곡식을 이른다.
[주D-006]이미 …… 뒤에는 : 대본에는 ‘旣滿八道之後’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道’를 ‘萬’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7]개색(改色) : 올해 햇곡식이 나오면 창고에 저장했던 묵은 곡식을 팔고 햇곡식을 사들여서 바꾸는 것으로, ‘색갈이’라고도 한다.
[주D-008]성하(城下)의 수치 : 성하는 성하지맹(城下之盟)으로, 성 밑까지 쳐들어온 적군과 맺는 맹약이라는 뜻인바, 항복한 나라가 적국과 맺는 굴욕적인 맹약을 이른다. 여기서는 병자호란 때에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게 항복한 것을 가리킨다.
[주D-009]공안(貢案) :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예산표(豫算表)를 이른다.
[주D-010]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 : 대본에는 ‘內瞻寺僉正’으로 되어 있는데, 《대전회통》에 의거하여 ‘瞻’을 ‘贍’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재물을 실어다가 : 대본에는 ‘輦革’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革’을 ‘財’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2]무오년ㆍ정묘년ㆍ병자년 : 무오년(1618, 광해군10)은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면서 조선에 원병을 요청해 오자 강홍립(姜弘立) 등이 원병을 이끌고 출정한 해이며,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은 호란(胡亂)이 있던 해이다.
[주D-013]도안(都案) : 병조의 도안청(都案廳)에서 군적(軍籍)의 변동 사항을 등록하여 두던 대장을 이른다.
[주D-014]수도(隧道) : 무덤으로 통하는 길을 이르는바, 제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제도라 한다.
[주D-015]국구(國舅) : 현종(顯宗)의 장인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을 가리킨다. 김좌명(金佐明)은 김우명의 형으로 영의정 김육(金堉)의 아들이었는데, 이들은 같은 서인(西人)이면서 한당(漢黨)으로 분류되어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주D-016]유신(儒臣) : 학자 출신의 신하란 뜻으로 송시열을 가리킨 것이다.
[주D-017]주운(朱雲)과 같은 의논 : 주운은 전한 성제(前漢成帝) 때의 직신(直臣)으로 일찍이 괴리(槐里)의 현령을 지냈는데, 성제 앞에서 상방(尙方)의 참마검(斬馬劍)을 청하며 간신의 머리를 베겠다고 하니, 성제가 누구냐고 물었다. 안창후(安昌侯) 장우(張禹)라고 대답하자, 성제가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면전에서 나의 스승을 욕하니 죽어 마땅하다.” 하고는 어사(御史)에게 끌어내리도록 하였는데, 주운이 난간을 붙잡으며 간쟁하다가 난간이 부러진 일이 있었다. 《漢書 卷67 朱雲傳》
[주D-018]영윤(令胤)이 …… 있고 : 영윤은 상대방의 아들을 이르는 말로 바로 남구만을 가리킨 것이며, 풍채(風采)는 위엄과 명성을 이르는바, 남구만이 대사간이 되어 자신의 지조를 굽히지 않고 간관(諫官)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9]박서계(朴西溪) : 서계는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호이다. 증광 문과에 장원하고 이조와 형조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비판하다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관직을 삭탈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으나 곧 취소되었다. 사후인 1706년(숙종45)에 복관(復官)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주D-020]정위(廷尉)의 저울대 : 정위는 옛날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므로 저울대란 그가 법을 적용하는 기준을 말한다.
[주D-021]장석지(張釋之)의 …… 있습니다 : 장석지는 전한 문제(前漢文帝) 때의 명신인바, 그가 정위로 있을 때의 일이다. 황제가 출행하는데, 어떤 사람이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도망하자, 황제의 수레를 끌던 말이 놀라 큰 사고가 일어날 뻔하였다. 그 사람을 포박하여 정위에게 치죄(治罪)하게 하였는데, 장석지가 황제에게 “이 사람은 벽제(辟除)의 법을 범하였으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하고 아뢰자, 황제는 크게 노하며 형벌이 너무 가볍다고 말하였다. 이에 장석지는 “법이란 천하에 공공(公共)의 것입니다. 지금 법조문이 이와 같은데 다시 법을 무겁게 내린다면, 이는 백성들이 법을 믿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그 당시 폐하께서 사람을 시켜 죽이셨다면 모르지만 이미 정위에게 맡기셨습니다. 정위는 천하의 저울대입니다. 저울대가 한번 기울면 천하에 법을 적용하는 것이 모두 기준이 없게 될 것이니, 백성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그의 말이 옳다.” 하고 칭찬하였다. 《漢書 卷50 張釋之傳》
[주D-022]사패 노비(賜牌奴婢) : 종친이나 공신에게 내려 준 노비를 이른다.
[주D-023]수교(受敎) : 황제(皇帝)의 명령을 조칙(詔勅)이라고 하는 데에 반하여 제후(諸侯)의 명령을 교(敎)라 하며, 교령(敎令)을 받은 관사(官司)에서는 이를 수교라고 한다.
[주D-024]수공 노비(收貢奴婢) : 국가에서 신공(身貢)을 거두어들이는 노비를 이른다.
[주D-025]십고 십상(十考十上) : 매년 2회에 걸쳐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 것을 고(考)라 하고, 그 성적을 상ㆍ중ㆍ하로 표시하였는데, 10회 평가에 모두 상의 성적을 얻는 것을 십고 십상이라 하였다.
[주D-026]양대(兩代)의 석물(石物) : 양대는 약천의 조고인 금성 현령(金城縣令) 남식(南栻)과 부친인 평강 현령(平康縣令) 남일성(南一星)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에 두 대의 묘표(墓表)를 세웠다.
[주D-027]재임(齋任) : 성균관이나 향교 따위에서 숙식하는 유생으로서 그 안의 일을 맡아보는 사람을 이른다.
[주D-028]청금록(靑衿錄) : 성균관 유생들의 명단을 기록한 장부이다.
[주D-029]한 식년(式年) : 식년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연(年)을 가리킨 것으로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온다.
[주D-030]반촌(泮村) :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근처의 동네를 이르는 말이다.
[주D-031]하련대(下輦臺) : 임금이 문묘(文廟)에 들어갈 때, 문묘 앞에서 타고 간 연(輦)에서 내리는 장소를 이른다.
[주D-032]남을 …… 않겠는가 : 《시경》 〈웅치(雄雉)〉에 보이는데, 《논어》 〈자한(子罕)〉에도 인용되어 있다.
[주D-033]백성들에게 …… 금지하였다 : 모내기는 날씨가 가물면 할 수가 없으므로 봄에 일찍 직파(直播)하여 한해(旱害)를 피하게 한 것이다.
[주D-034]오 학사(吳學士) :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를 가리킨다. 자는 계휘(季輝)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636년(인조14) 부교리로 있었는데,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이에 적극 반대하고 상소하여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였으며,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극력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나라 군대에게 항복한 다음 적진에 송치되었으나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굽히지 않아 다시 심양(瀋陽)으로 이송되었는데, 그곳에서도 갖은 협박과 유혹에 굽히지 않다가 결국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살해되니, 이들을 ‘삼학사’라 칭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주D-035]내제(內弟) : 외종(外從) 아우를 이른다. 일반적으로 고모의 아들을 내종(內從), 외숙의 아들을 외종(外從)이라 하나 예전에는 자기 집에서 밖으로 나간 것을 외(外)라 하여 고모의 아들을 외 또는 표(表)라 하고, 자기 집으로 시집온 어머니의 친정을 내(內)라 하였다.
[주D-036]남관(南關) : 마천령(摩天嶺) 남쪽 지방으로 함경남도를 이르는데 관남(關南)이라고도 한다.
[주D-037]지차읍(之次邑) : 그다음이 되는 고을, 즉 재해(災害)가 그리 심하지 않은 고을을 이른다.
[주D-038]호구(戶口) : 호적 등본을 이른다. 《대전회통(大典會通)》 〈호조(戶曹) 호적(戶籍)〉에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 등 식년(式年)에 호적을 작성하는데, 이때 호적에 오른 자에게 호구를 작성해서 지급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주D-039]솔정(率丁) : 호주가 한 가족으로 데리고 사는 성인 남정(男丁)을 이른다.
[주D-040]무경칠서(武經七書) : 일곱 종류의 병서(兵書)로 유가(儒家)의 사서(四書)ㆍ삼경(三經)인 칠서에 대칭하여 붙인 이름인바, 《손자(孫子)》, 《오자(吳子)》, 《육도(六鞱)》, 《삼략(三略)》, 《사마법(司馬法)》, 《울료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등이다.
[주D-041]편비(偏裨) : 감사를 보좌하는 도사(都事)나 부장(副將) 등을 이른다.
[주D-042]고(故) 상신(相臣) : 상신은 정승을 이르는바, 곧 남구만을 가리킨 것이다.
[주D-043]염석(鹽石) : 소금을 가리킨다. 석(石)은 소금의 수량을 나타내는 단위인데, 소금을 말할 때 염(鹽) 자 뒤에 붙여서 말한 것이다.
[주D-044]조미(造米) : 벼를 매통에 갈아서 왕겨만 벗기고 속겨는 벗기지 아니한 매조미쌀을 만드는 것을 이른다.
[주D-045]전미(田米) : 밭에서 나오는 쌀이란 뜻으로 육도미(陸稻米)를 이른다. 육도는 산도(山稻)라고도 한다.
[주D-046]초면관(初面官) : 지역의 분계(分界)에 있는 고을을 이른다.
[주D-047]정동명(鄭東溟) : 동명은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호이다. 별시 문과에 장원하여 홍문관 제학과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주D-048]멀리서도 …… 걸 : 양웅(揚雄)은 전한(前漢) 말기의 학자이며 문장가이다. 여기서는 정두경을 양웅에 비유하여, 그의 집에 술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쓸쓸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주D-049]토관(土官) : 토관직(土官職)을 가리킨다.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베푼 벼슬로, 지방 토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관찰사나 절도사가 그 지방에서 유력한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주D-050]아병(牙兵) : 본진에서 대장(大將)의 휘하(麾下)에 있는 병사를 이른다.
[주D-051]배지(陪持) : 지방 관아의 진상(進上), 장계(狀啓)를 가지고 서울에 가는 사람을 이른다.
[주D-052]참동계(參同契) : 양생술(養生術)에 관한 도가(道家)의 서적으로 한(漢)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주역(周易)》과 황로(黃老) 사상 및 노화(爐火) 즉 연단술(煉丹術)을 참고하여 지은 것이다.
[주D-053]태양 유주(太陽流珠)가 …… 것 : 태양 유주는 태양이 비추는 것으로 온갖 생물의 근원이라 한다. 《참동계》의 주석에 “사람의 생명은 동방(東方)에 있으니, 해가 묘방에서 떠오르는데 만물이 이것을 우러러 살아간다. 이는 만물이 모두 태양의 정기를 빌려 생명으로 삼는 것이다. 태양 유주는 생명의 보배로운 근원이니, 이 생명의 근원이 신(神)에 붙어 있으면 여러 가지를 궁리하여 생각을 어지럽히고 생각을 어지럽히면 물건을 따라 옮겨 가며, 정(精)에 붙어 있으면 가득 차서 보전하기 어렵고, 보전하기 어려우면 생각을 어지럽혀 정기가 누설되기 쉽다. 그러므로 늘 사람을 떠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주D-054]무산(茂山)의 옥련보(玉連堡) : 대본에는 ‘茂山之連’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之’와 ‘連’ 사이에 ‘玉’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55]폐사군(廢四郡) : 지금의 함경남북도 압록강 주변에 위치한 여연(閭延), 우예(虞芮), 무창(茂昌), 자성(慈城)을 말한다. 이 4군은 태종과 세종 때 개척하였는데 세조 때 야인(野人)들의 침탈을 이유로 백성들을 내지로 이주시키고 폐지하여 이후 폐사군이라고 불렸다. 《국역 성호사설 제2권》
[주D-056]매번 보에 들어가면 : 대본에는 ‘每當入保’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保’를 ‘堡’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7]직방씨(職方氏) : 천하의 지도(地圖)를 맡아서 땅을 관장한 관리로, 《주례(周禮)》의 하관(夏官)에 속한다. 또 사방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貢物)을 관장하였다.
[주D-058]수해(豎亥)를 …… 않아도 : 수해는 우(禹) 임금의 신하로, 걸음을 잘 걸었다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 “수해에게 북극에서부터 남극까지 걸어가게 하였더니, 모두 2억 3만 3500리 75보(步)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기리고거(記里鼓車)는 거리를 재는 수레로, 후송 인종(後宋仁宗) 천성(天聖) 5년(1027)에 내시(內侍) 노도륭(盧道隆)이 처음 만들었다. 멍에는 하나이고 바퀴는 쌍으로 되어 있으며, 상(廂) 위에 두 층이 있고 각각 목인(木人)을 만들어 여기에 앉혔는데, 수레가 1리쯤 가면 아래층의 목인이 나와 북을 치고, 10리쯤 가면 위층의 목인이 나와 징을 치게 되어 있다.
[주D-059]금성(金城)의 …… 드러났고 : 금성은 감숙성(甘肅省) 동부에 있던 지명이다. 한 선제(漢宣帝) 때 오랑캐 선령(先零)이 여러 강족(羌族)과 함께 작은 종족 등을 겁략(劫掠)하여 모두 배반하자, 조충국(趙充國)이 금성에 가서 방략(方略)을 도면으로 그려 올리고, 둔전법(屯田法)의 유익함을 아뢰어 이를 시행해서 큰 공을 세웠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주D-060]농우(隴右)의 …… 것처럼 : 농우는 농서(隴西)를 가리키는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가 농서의 외효(隗囂)를 치기 위하여 친정(親征)했을 때에 장수들의 의견이 엇갈리자,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불러 물으니, 마원이 광무제 앞에서 쌀을 모아 산골짝 모양을 만들고 지형을 만들어 가면서 여러 군대가 오가며 중도에 경유하는 곳을 보여 줌으로써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하였다. 이에 광무제는 “오랑캐가 일목요연하게 내 눈 안에 들어 있다.” 하고는 다음 날 마침내 진군하여 농서를 평정하였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주D-061]화피(樺皮) : 벚나무의 껍질로 활을 만드는 데 쓴다.
[주D-062]진동보(鎭東堡) : 송참(松站)의 옛 이름이다. 당(唐)나라 때 설인귀(薛仁貴), 유인궤(劉仁軌)가 요동(遼東)을 친 뒤,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설유참(薛劉站)이라 한 것인데, 와전되어 송참이라고 하였다. 일명 설성(雪城)이라고도 한다.
[주D-063]1식(息) : 30리를 1식이라 한다. 식은 한 번 쉬어 간다는 뜻으로 곧 역참이다. 《萬機要覽 財用編3》
[주D-064]백성들이 …… 짓고 : 대본에는 ‘草創家’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家’ 다음에 ‘舍’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5]옛 책에 …… 것 : 이 내용은 《국어(國語)》 〈오어(吳語)〉에 보인다.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越)나라와 싸워 승리하고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항복을 받아 주었으나 또다시 군대를 일으켜 월나라를 공격하자, 월나라 사신 제계영(諸稽郢)이 오왕에게 아뢰기를, “속담에 ‘여우가 묻고 여우가 다시 파내니, 이 때문에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이미 월나라를 봉해 주시어 현명하다는 명성이 온 천하에 알려졌는데, 또다시 공격하여 멸망시킨다면 이는 대왕께서 공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오왕 부차는 월나라 공격을 중지하였다.
[주D-066]북백(北伯) : 관북 지방의 도백(道伯)이란 뜻으로 함경 감사를 이른다.
[주D-067]공이 우상으로 있으면서 : 대본에는 ‘以右相’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以’ 앞에 ‘公’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8]현명한 군주를 속이겠는가 : 대본에는 ‘期明主’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期’를 ‘欺’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9]조충국(趙充國)이 …… 하였으니 : 조충국은 한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장이다. 당시 여러 장군들은 강족(羌族)을 토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충국은 둔전을 설치하여 강족을 장기적으로 대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강족들이 쇠약해지자 둔전을 파하고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는데, 이때 친구인 호성사(浩星賜)가 그를 맞이하며 주전론자(主戰論者)인 다른 장군에게 공을 돌리라고 권고했으나, 조충국은 “내가 이미 나이가 늙었고 지위가 높으니, 어찌 한때의 공을 자랑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현명한 군주를 속이겠는가. 군대의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니, 마땅히 후일의 법이 되어야 한다.” 하고, 선제에게 모든 상황을 아뢰었다. 《漢書 卷69 趙充國傳》


 

 

 

 약천연보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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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46세 갑인년(1674, 현종15)
2월 24일에 인선왕대비(仁宣王大妃)가 승하하였다.
3월에 감영으로 돌아갔는데, 이달에 상이 애책문 서사관(哀冊文書寫官)에 차임하고, 이어서 가을 수확 때까지 연임하도록 명하였다.
7월에 함흥성(咸興城)을 개축하였으며, 이달에 신병으로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해임하도록 윤허하였다.
8월 18일에 현종대왕(顯宗大王)이 승하하였다.
9월에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조정으로 돌아와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10월에 겸 동지경연사(兼同知經筵事)가 되고 비변사 유사 당상에 차임되었으며, 형조 참판에 제수되고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상소하여 변방을 대비하는 일로 청나라에 자문을 보내지 말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을 비변사에 내려 마침내 정지하였다. 이달에 행 대사성(行大司成)으로 옮겼다.

○ 처음에 선조(宣祖) 정미년(1607, 선조40)에 감사 장만(張晩)이 함흥성을 쌓았는데, 광해군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감사 심열(沈悅)이 아뢰기를,
“장만이 축성한 것은 모두 작은 돌이어서 견고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후로 점점 무너지는데도 수리하지 않은 지가 수십 년이 되었다. 공은 변방에 부임하자 즉시 이를 우려하였으나 시기가 어려울 때여서 미처 손쓰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해 4월에 이르러 함흥의 백성을 동원하여 나무와 돌, 벽돌을 장만하고 마침내 장계로 아뢰자, 남도(南道)의 11개 고을의 부북군(赴北軍) 441명에게 입방(立防)과 습조(習操)를 면제해 주어 축성하도록 허락하였다. 공은 또다시 각 고을에 축성할 인원을 나누어 배정하되, 전지(田地) 8결마다 역도(役徒) 1명을 징발하여 도합 2260명을 얻었다. 7월에 축성을 시작하여 9월까지 모두 43일 만에 공사가 끝났는데, 새로 쌓은 것과 같아서 지금까지 70년이 되도록 허물어지는 일이 없었다.
○ 7월에 공이 상소하였는데 이를 비변사에 내리자, 비변사에서 복주하기를,
“임기가 찬 뒤에 두 차례 연임하게 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본도의 일을 지극히 염려하시는 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 상소문을 살펴보건대 병의 증상을 자세히 아뢰었으니, 지금 비록 추수가 끝난 뒤 교대할 때까지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연임 기한 내에 소원에 따라 체직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처음 세조 정해년(1467, 세조13)에 영흥(永興)의 백성들이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호응하였는데, 참봉 김영로(金榮老)가 영흥 부사의 죽음을 면하게 하니, 고원(高原) 이남의 백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는 감히 읍장(邑長)을 해치지 못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김영로를 거산 찰방(居山察訪)에 제수하고 복호(復戶)를 주어 대대로 혜택을 입게 하였다. 향인(鄕人) 이팽수(李彭壽)도 함흥에서 판관(判官)의 죽음을 면하게 하니,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에 특별히 제수하고 똑같이 복호를 주었다.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 김영로의 증손인 김경복(金慶福)이 무과에 급제하고 온성 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을 따라 힘을 다해 싸워서 북쪽 오랑캐를 격파하였다. 신립이 이 일을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니, 상이 김경복을 불러서 만나 보고 《정충록(精忠錄)》을 하사하였으며, 현감을 제수하였다. 그 뒤 김경복은 임진년(1592, 선조25)에 북평사(北評事) 정문부(鄭文孚)의 선봉이 되어 왜구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그에게 특별히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제수하였다. 이팽수의 손자 이몽서(李夢瑞)도 무과에 올라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을 따라 오랑캐 추장을 사살(射殺)하고는 마침내 현감에 제수되었으며,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북로(北路)에 침입하였을 때에 특별히 소모 별장(召募別將)에 제수되었다. 이몽서는 요해처에 매복을 숨겨 두고 유격하는 왜군들을 다 사로잡거나 죽여서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살아남게 되었는데 미처 승진하기 전에 죽으니, 고을 사람들이 오랫동안 가엾게 여기고 애석해하였다. 이해 9월에 공이 그 실상을 적어 장계를 올리기를,
“을사년(1665, 현종6)에 감사 민정중(閔鼎重)이, 함흥 사람 유응수(柳應秀) 등이 임진년(1592)에 왜적을 토벌한 일을 조정에 보고하여 관직을 추증하고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제 이 네 사람의 의로운 공렬(功烈)도 진실로 이와 차이가 없고 대를 이어 아름다운 명성을 이루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후의 격례(格例)를 상고하여 모두 포증(褒贈)을 가하고 또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함으로써 풍교(風敎)를 세워 후인들을 권장하는 방도로 삼으소서.”
하였다. 처음 선조(宣祖) 때에 함흥 사람 문덕교(文德敎)가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이 되었는데 어질고 학문이 있었다. 감사 한준겸(韓俊謙)이 그를 불러 학직(學職)에 임명하였는데, 그가 죽자 사당에 제사하였다. 이때에 공이 그 유문(遺文)을 얻어 판각해서 세상에 유포하였다.
○ 공이 조정으로 돌아가자 북쪽 사람들은 쇠를 주조하여 송덕비를 세우고 명(銘)하기를, “청렴하고 소탈하며 세밀하고 자상하였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일으켰다.〔廉簡精詳 愛民興學〕” 하였다. 공은 정사를 베풀 적에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하는 데에 힘썼으며 까다롭게 하지 않았다. 공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가슴은 있으나 올바른 마음이 없어 헛되이 교만하고 거친 행위를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주자(朱子)의 “크게 공명을 세웠던 옛날 장수들은 매우 신중하고 두루 치밀하였는데 그래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씀에 깊이 공감하였다.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세밀하여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일에 있어 반드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그 일의 유리한 점과 문제점을 사람들에게 묻게 하여 좋은 것을 택한 다음 가능성을 보고서 시행하였고 그 결과 시행하면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그리고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여러 고을을 두루 순행하고 나서 진휼(賑恤)하는 유사 중에 사리를 아는 자 한두 사람과 일을 잘 아는 색리(色吏) 한 사람을 성주(星州)로 불러 문서 작성을 상의함은 물론이고 이어 본읍의 폐단을 널리 묻고 겸하여 그 인물을 관찰하였다. 또 북쪽 감영에 부임했을 때에는 궁벽한 성과 보루를 일일이 찾아가서 직접 묻곤 하였고, 경흥(慶興)에는 세 번이나 들어가 모든 일의 폐단을 묻고는 변통하여 처리하였으며, 전후로 담당한 여러 관사(官司)에 모두 조목과 법식을 만들어서 지금까지 그것을 대부분 준용(遵用)하고 있으니, 노련한 관리들이 아직도 공을 칭찬해 마지않는다.
○ 10월에 비변사 유사 당상에 차임되고, 승문원 제조에 차임되었다. 당시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장계로 아뢰기를,
“관왜(館倭)들이 말하기를, ‘오삼계(吳三桂)가 해적과 연합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1월에 영상 허적(許積)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청나라가 아군(我軍)에게 병기를 청하려는 뜻이 있으니 앞으로 군대를 청하는 일이 있을까 우려되고, 또 우리나라가 저들의 금령 때문에 양서(兩西)의 군무(軍務)를 포기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청컨대 군대를 다스려 해적을 방비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을 보내소서. 이렇게 하면 한편으로는 후일에 가령 저들이 군대의 파견을 청하는 일이 있을 경우 우리나라를 방비하기에도 겨를이 없다는 뜻으로 답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서도(西道)의 산성과 군비 등에 관한 일을 마음대로 조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이에 대하여 공이 아뢰기를,
“반드시 기휘(忌諱)를 범하여 문제가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하고 반대하였다. 조회를 파하고 나온 뒤에 중론은 “혹 후일의 장본(張本)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승문원에 명하여 자문(咨文)을 지었는데, 공이 이와 관련하여 상소하기를,
“지금 우리가 이 일을 가지고 저들에게 청하면 저들이 우리에게 대응하는 것은 요컨대 세 가지 가설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저들이 우리를 믿지 않는 것이 또한 우리가 저들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번 오경(吳耿)의 군대가 일어난 뒤로는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습격해 온다는 헛소문이 돌아서 밤낮으로 두려워하다가 고부사(告訃使)가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진정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때에 만일 갑자기 우리나라로부터 군대를 다스리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또 왜관(倭館)에서 얻은 오삼계의 격문(檄文)과 해선(海船)이 왕래한다는 등의 말을 듣게 되면, 저들은 반드시 우리가 그들과 내통하는가 의심할 것입니다. 저들이 비록 남쪽 지방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군대를 일으켜 우리나라에 쳐들어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 명의 사신을 급파하여 조사하고 힐책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니, 만약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요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마저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옛날 효종조(孝宗朝) 경인년(1650, 효종1)에는 청나라 사람들의 기세가 크게 성하였으니, 우리를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왜구(倭寇)를 방비하겠다고 청하자 조사하는 사신이 뒤이어 나왔고, 이로 인해 공경(公卿)들이 금고(禁錮)를 당했으니, 그 당시 나라가 치욕을 당하여 위태롭고 두려웠던 상황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지금 저들이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 반드시 경인년보다 심하여 난처한 일이 혹 뜻밖에 생길까 두려우니, 이렇게 된다면 어찌 심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저들이 현재 우리나라에 군기(軍器)를 요청하려 한다고 합니다. 군기를 요청하고 나면 반드시 장차 또 군대를 파견해 주기를 요청할 것이니, 조정에서 깊이 우려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조만간 저들이 이러한 요청을 해 올 경우 우리가 저들에게 답할 것은, 정축년(1637, 인조15)에 약조(約條)를 맺은 뒤로는 우리나라가 병기를 수리하지 않고 군대를 훈련시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구실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군대를 다스린다는 말을 한번 꺼내면 이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먼저 저들이 파병을 요청할 수 있는 단서를 열어 놓는 것이니, 이것을 우려하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세 번째는 저들이 이미 우리를 의심하지 않아 따지지 않고, 또 이로 인하여 파병을 요청하지 않고 단지 우리의 요청을 허락해 주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불가한 점이 있습니다. 삼남 지방과 경기, 강원도, 함경도 등은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병기를 수리하고 병사를 조련하는 모든 일에 있어 본래 저들로 인해 혐의하거나 구애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황해도와 평안도 두 곳은 옛날부터 저들을 두려워하고 꺼려서 포기하였으나 병사들을 점검하고 병기를 보수하는 등의 일은 간혹 시행했던 경우가 있는데, 이 때문에 사단이 생겼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만약 단지 이러한 일들을 하려는 것일 뿐이라면 굳이 저들에게 요청하여 허락을 받은 뒤에 조처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직로(直路)에 성지(城池)를 수축하는 일은 중국에 청하여 허락을 받아야 하나, 지금 황해도와 평안도의 형편이 세 차례 칙사(勅使)의 행차와 다섯 차례 사신의 행차가 금년 한 해에 있었으며, 또 앞으로 조제(弔祭)와 책봉(冊封) 칙사가 또 뒤이어 올 터인데, 두 도는 다른 곳보다 흉년의 참혹함이 심합니다. 그리하여 추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굶어 죽고 목을 매어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가령 저들이 우리의 요청을 순순히 허락한다 해도 명년 봄과 여름 사이에는 결코 백성들을 동원하여 성을 수축할 형편이 못 되니, 저들의 허락을 받은 뒤에 또 이것을 할 수 없다면 어찌 굳이 미리 요청해서 일을 크게 벌이는 듯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이 세 가지 중에 두 가지는 큰 폐해가 있고 하나는 작은 이익도 없습니다. 반복하여 심사숙고하건대 이 이치가 매우 분명하니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또 모든 일은 반드시 실제는 있고 소문은 없게 해야지 실제는 없으면서 소문만 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방에 관한 일은 먼저 누설하는 것을 더욱 꺼리니, 지금 우리나라가 가령 군대를 잘 다스려서 약한 군대를 바꾸어 강하게 만들 수 있다 하더라도 또한 은폐하고 감추어서 적들로 하여금 엿보거나 헤아리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애당초 한 가지 일도 조처한 것이 없으면서 먼저 군대를 다스린다는 헛소문을 낸단 말입니까.
만약 신의 말이 불행히도 적중된다면 국가의 이해 관계에 매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니, 감히 다시 성상 앞에서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다시 재량하고 조처하시어 뒷날 후회가 없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일을 비변사에 내리자, 다른 재상들이 말하기를,
“주상께서 현재 임시로 국사를 맡고 계시고 이 일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자문을 보내는 것을 중지하였다.

47세 을묘년(1675, 숙종1)
숙종대왕 원년 1월에 시책문 서사관(諡冊文書寫官)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다. 이달에 공이 상소하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 권력을 농단하는 것을 비난하자, 상이 크게 책망하였다. 이에 공이 첫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니, 상은 모든 관직을 해임하였다.
2월에 사간원에서 공을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였는데, 일곱 번 아뢰고 정지하였다.
3월에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왔다.
5월에 상이 지방에 있는 재신(宰臣)들을 책망하였으므로 공은 강교(江郊)에 나아가 대죄하였다.
7월에 공의 고신첩(告身帖)을 빼앗았다.
8월에 결성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아들이 성주 목사(星州牧使)인 이공 시현(李公時顯)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 처음에 현종(顯宗)이 새로 즉위하니, 이조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탑전에서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장로(長老)에게 들으니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광평대군(廣平大君)이 일찍 요절한 것을 슬프게 생각하셔서 그 아들을 궁중에 남겨 두어 양육하게 하셨는데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즉시 밖으로 내보내도록 명하셨으며, 선조대왕(宣祖大王)은 왕자와 왕손들이 계자인(啓字印)을 만지거나 가지고 노는 것을 일절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그 깊은 계책과 원대한 생각은 실로 후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인평대군(麟平大君)의 두 아들이 선왕조(先王朝)부터 궁중에 남아 양육되었습니다. 그 형 복창군 이정(李楨)은 현재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인데도 궁중을 무상출입하니, 외부의 말이 들어오고 내부의 말이 나가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전하의 대에 이르러서는 선왕조에 비하면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궁중에 남겨져 양육된 사람의 나이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전하께서는 궁중에 어찌 다시 이런 사람을 두어서 화의 기틀을 조성함으로써 충신과 의사(義士)들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고 근심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말세에 사고가 많음을 염려하시고 세종(世宗)과 선조(宣朝)의 깊은 생각을 본받으셔서 방편과 선처를 생각하여 시종 친애할 방도를 도모하소서.”
하였으나 현종(顯宗)은 그 말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숙종(肅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인평대군의 아들 이정과 이남(李柟) 등이 누조(累朝)에 걸쳐 받은 은혜를 믿고는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서 궁중에서 정탐을 하며 외당(外黨)을 끼고서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공이 이에 상소하기를,
“신이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한 것을 보니, 고(故) 판서 송준길의 관작을 추탈(追奪)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송준길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에 신은 그를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臺臣)이 송준길이 이미 죽은 뒤에 그의 죄를 이와 같이 논하고 있으니, 만약 송준길이 어진 사람인데 죽은 뒤에 망극한 비방을 억울하게 입은 것이라면 신은 의리상 현자(賢者)를 해치고 바른 사람을 질시하는 무리들에게 수치스럽게 영합하면서 이들과 함께 조정에 서서는 안 되며, 만약 송준길이 과연 말하는 자들의 말처럼 나쁜 사람이라면 신은 죄인의 문생(門生)으로서 또한 유배 가는 형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즉시 명하시어 신의 직명(職名)을 삭제하고, 다시 유사(有司)로 하여금 죄인을 스승으로 섬긴 신의 죄를 의논하게 하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또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조정의 상황은 둑이 터져 넘쳐흘러 그 형세가 이미 하늘에까지 이르러서 모두 이 가운데 빠진 것과 같으니, 진실로 한 사람의 한 손으로는 도도한 물결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신은 한미한 집안에서 발탁되어 여러 조정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몸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이르고 영화가 부모에게 미쳤으니, 신이 분골쇄신한다 해도 만분의 일이나마 우러러 보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온 조정이 물결에 휩쓸린 듯이 소란하여 국가의 안위가 정해지지 않은 지금, 신이 가슴속에 답답하게 맺혀 있는 생각을 한번 드러내지 않는다면, 신이 비록 죽어서 뼈가 썩어 없어진다 하더라도 오히려 장차 불충한 귀신이 되어 지하에 계신 선대왕(先大王 현종)과 효종대왕(孝宗大王)을 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만 번 죽을죄를 무릅쓰고 충심(衷心)을 아뢰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의 심정을 가엾게 여기고 저의 어리석은 마음을 용서하시어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
지금 조정이 서로 대치하여 피차가 서로 다투는 것은 송시열(宋時烈)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공격하는 말과 그를 변호하는 의논이 뒤섞여 나오고 번갈아 일어나는데, 왼쪽을 편드느냐 오른쪽을 편드느냐 하는 갈림길에서 화와 복이 뒤따라 배척당하고 쫓겨나는 일이 계속 이어져 반열이 거의 텅 비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보다 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아뢰는가 하면,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송시열이 국상(國喪)에 달려와서 곡하러 도성에 들어왔다는 말씀을 들으시자, 즉시 궁관(宮官)을 보내어 위로하고 기뻐하는 뜻을 전하셨고, 또 그로 하여금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돈유(敦諭)하는 명령이 7, 8번에 이르러서 끝내 불러온 뒤에야 그치셨으니, 이때 전하께서는 송시열을 간절히 기다리는 정성과 융숭하게 예우하는 뜻이 지극하였다고 이를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한두 달이 지나자 성상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시어 준엄한 분부와 꾸짖는 말씀이 앞뒤로 잇따라 신하로서 감히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본래 송시열을 이와 같이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셨다면 당초 즉위하셨을 때에 송시열을 우대하신 것이 어찌 저와 같이 간곡하고 돈독하셨습니까. 이 때문에 궁중(宮中)과 궁외(宮外)의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피부에 와 닿는 듯한 통절한 하소연과 물처럼 점점 스며드는 비방〔膚受浸潤〕에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앞뒤가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비록 소인의 심보로 성상의 뜻을 함부로 헤아린 것이나, 행적을 가지고 관찰해 본다면 만에 하나 이와 가까운 점이 없지 않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몸으로 홀로 재계하는 여막(廬幕)에 거처하시니, 안으로는 비록 두 자전(慈殿)께 아침마다 문안을 올리지만 평소에 항상 선왕을 모시던 때만은 못하고, 밖으로는 비록 비변사(備邊司)의 대신들을 접견하시지만 평소에 날마다 강관(講官)들을 접견하시던 것만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침과 낮, 새벽과 저녁 사이에 전하께서 함께 거처하는 자들을 알 만합니다.
통곡하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는 정이 이미 마음속에 간절하시고, 여러 가지 정무(政務)를 다스리는 번거로운 일이 또 앞에 가득하시니, 이때에 평소 친숙한 좌우의 측근들에게 때때로 의견을 묻고 심부름을 시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로부터 성스러운 군주와 현명한 제왕들도 혹 면치 못한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전하께서 비록 좌우의 측근들을 엄히 단속하시어 조금도 용서해 주지 않으시며 또 정사와 명령을 내리시는 사이에 홀로 용단을 내리시어 좌우의 측근들로 하여금 털끝만큼도 감히 참여하지 못하게 하신다 하더라도, 부앙(俯仰)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이들이 이미 전하의 마음을 바꿀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전대(前代)의 역사를 일일이 관찰해 보건대 이와 같은 경우에 군주가 처음에는 측근들을 친숙히 여겨 통제하기 쉽다고 생각하고 중간에는 친근하여 신임할 만하다고 여기다가 끝에는 화(禍)가 발생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자기 몸을 해치고 나라를 망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먼 옛날부터 도도(滔滔)히 이어져 마치 동일한 바큇자국이 난 것과 같으니, 이 때문에 지사(志士)와 충신들이 울분을 터뜨리고 팔뚝을 걷어붙이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한번 이런 말씀을 군주에게 올려서 혹시라도 깨닫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송시열이 죄를 입은 것이 비록 관련된 사안이 중대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번에 국가의 존망이 판가름 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신이 위에서 아뢴 것 중에 혹 조금이라도 유사한 점이 있다면 억조(億兆)의 신민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고 한심하게 여길 것이며 국가의 일이 끝내 어떻게 결말이 날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으며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군주가 어진 사대부를 접견하는 시간이 적으면 곁에서 모시는 사사로이 친한 자들을 가까이하는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끝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일 선비들을 가까이하시어 경서의 가르침을 강론하시고, 날마다 조정의 신하들을 접견하여 정치하는 도리에 대해 자문을 구하신다면, 고금의 치란(治亂)이 반복되는 데에 반드시 마음에 느끼시는 바가 있을 것이며, 정사와 명령의 잘잘못을 살펴보시면서 반드시 마음에 크게 부합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많은 부정한 문이 자연 닫히지 않을 수가 없고 여러 바른길이 자연 열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 어둡고 음흉한 자들이 나오는 것을 물리칠 수가 있고 궁내와 궁외의 말이 함부로 나가고 들어오는 데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길거리에서 말하고 골목에서 비판하며 속으로 애통해하고 길이 근심하는 자들이 모두 전하께서 한번 마음을 돌리시는 사이에 구름이 사라지고 얼음이 녹듯 의혹이 풀릴 것이니, 이 어찌 종묘사직과 신민(臣民)의 무궁한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옛날 주자(朱子)는 영종(寧宗)이 즉위한 초기에 대면하여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지금 폐하께서 즉위하신 지 채 열흘이 못 되었는데, 재상들을 승진시키고 물리치시며 대간(臺諫)들을 옮기고 바꾸시는 것이 모두 폐하의 독단에서 나오고 대신들과 상의하거나 급사(給舍)들과 미처 의논하지 않으시니, 만일 실제로 폐하의 독단에서 나와 그 일이 모두 도리에 합당하다 하더라도 이것은 정치하는 체통이 아니므로 장래에 무궁한 병폐를 열어 놓을 터인데, 하물며 중외(中外)에 전하는 소문에 의혹이 없지 않아 모두들 좌우의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다고 말을 하니, 이 병폐를 고치지 못하면 명색은 독단이라고 하나 군주의 위엄이 아래로 옮겨 감을 면치 못해서 훌륭한 정치를 하시려고 해도 도리어 혼란을 초래함을 면치 못할까 신은 염려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주자의 이 말씀을 반복하여 그 뜻을 깊이 음미해 보니, 비록 신이 충성을 다하고 깊이 생각하여 다시 논열(論列)하는 바가 있더라도 결코 이 말씀처럼 통렬하고 간곡하여 오늘날의 병폐에 딱 들어맞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에 감히 번거롭게 해 드리는 무례를 무릅쓰고 또 인용해 올리는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상소한 지 4일 만에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피부에 와 닿는 듯한 통절한 하소연과 물처럼 점점 스며드는 비방에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다.’라는 등의 말로 제멋대로 헤아리고 동요시켰다.”
하여 심하게 책망하였다. 하루가 지나 공이 첫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자, 여러 관직을 모두 해임하였다. 이때 김공 석주(金公錫胄)가 공의 상소문을 보고는 감탄하기를,
“약석(藥石)과 같은 훈계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을 공격한 상소가 또한 이 뒤에 나왔다.
○ 2월에 대사간 정석(鄭晳) 등이 공을 나문(拿問)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충년(冲年)에 즉위하신 이러한 때에는 인심이 미혹되기가 쉽습니다.”
하고, 정언 이수경(李壽慶)이 아뢰기를,
“경(卿)과 재신(宰臣)의 반열에 떠도는 소문이 과연 이와 같다면 은밀히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아뢰어서 외부 사람들로 하여금 모르게 해야 하는데, 어찌 반드시 문자로 써 보내어 원근에 돌려 보여서 사람들의 의심을 야기한단 말입니까.”
하여, 나문할 것을 일곱 번 아뢰고 정지하였다. 그리고 승지 남천한(南天漢)이 상소를 올렸는데, 《춘추(春秋)》의 무장(無將)이라는 말을 인용하며, 공을 도성 밖으로 축출하고 도성에 그대로 머물지 못하게 함으로써 진신(搢紳)들을 위협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는 병폐를 근절할 것을 청하였다.
○ 공은 약천정사(藥泉精舍)에 머물다가 3월에 대부인을 모시고 결성(結城)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독서하였다. 5월에 부수찬(副修撰) 박태상(朴泰尙)이 상소하여 “공이 일에 앞서 경계의 말씀을 올린 것은 숨김없이 진언하는 데에 뜻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가 상의 뜻을 거슬렀다. 이달에 상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근일에 이상진(李尙眞), 민유중(閔維重), 민정중(閔鼎重), 남구만(南九萬) 등 이 몇 사람은 시골에 내려가 올라올 뜻이 없으니, 진실로 지극히 한심스럽다. 우선 모두 먼저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공이 강교(江郊)에 나아가 대죄하였는데, 7월에 공의 고신첩(告身帖)을 빼앗았다.

48세 병진년(1676, 숙종2)
6월에 서용되었다.

49세 정사년(1677, 숙종3)
9월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50세 무오년(1678, 숙종4)
10월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이달에 형조 판서에 특별히 발탁되었는데, 사간원에서 개정(改正)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상이 공의 해임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성부 좌윤을 제수하였다.

○ 이보다 앞서 갑인년(1674, 현종15) 겨울에 공은 공조와 형조의 판서에 의망되었는데, 이해 10월에 특별히 형조 판서에 발탁되었다. 다음 날 사간원에서 개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즉위하신 초기에 간사한 상소를 올려 성상을 무함하는 등 그 내용이 음험하였는데, 이 사람에게 어떤 취할 만한 점이 있기에 이처럼 높이 발탁하십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남구만은 바로 선왕조에서 발탁하여 등용한 신하이다. 이번에 제수한 것은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해서이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으나 사간원에서 날마다 연이어 아뢰었다.
○ 11월에 열 번째 아뢰어도 상이 받아들이지 않자, 영상 허적(許積)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을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이 뜻밖에 나왔으므로 대신(臺臣)의 의논이 거듭 되고 계복(啓覆)이 또 가까이 다가왔으니, 그를 체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간신(諫臣)이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좌상 권대운(權大運)은 규례대로 등용했다가 괜찮은 점을 발견하면 승진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계복을 이유로 우선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다시 대사간 목창명(睦昌明)이 가자(加資)한 것을 개정하도록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8일 동안 여섯 번 아뢰었고, 정언 이한명(李漢命)이 입대하여 일곱 번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남모의 상소문을 가져다 보니 그 내용이 음험한 것 같지 않다.”
하였다. 허적이 가자하지 말고 해당 품계를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번 경우는 한 자급을 가자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남모는 사람됨이 강직하고 분명하니 일찍이 경연에 출입할 때에 내 그러한 것을 알았다. 이미 직임을 체차하였는데 또다시 자급까지 환수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조에서 의망(擬望)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내가 등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공을 체차할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계(臺啓)는 그대로 윤허하나 이조에서 이것을 알아 의망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5일 뒤에 마침내 말의(末擬)로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었다. 12월에 현도(縣道)를 통하여 사직소를 올리니, 부른 이유가 특별한 뜻이 있어서라고 상이 답하였다.

51세 기미년(1679, 숙종5)
2월에 공이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다. 이달에 공은 말미를 받아 병든 어버이를 문안하였다. 상소문을 올려 허견(許堅)과 윤휴(尹鑴)를 조사하여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3월에 허적(許積) 등이 입대하여 무함하는 말을 지어냄으로 말미암아 공은 거제도(巨濟島)로 귀양 갔으며, 4월에 남해(南海)로 옮겼다.
10월에 겨울에 우레가 치는 변고로 인하여 특별히 방면되었다. 사간원에서 공을 방면하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했다가, 12월에 정계(停啓)하였다.

○ 2월에 공이 말미를 받고 시골로 돌아가려 할 적에 상소하기를,
“신이 맡고 있는 한성부 좌윤의 직임은 지금 비록 관리들이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아서 국가의 큰 계책에 별다른 도움이 없으나, 만약 관직을 설치하고 직임을 분담한 뜻을 논한다면 바로 전한(前漢) 때 좌내사(左內史), 우내사(右內史), 경조윤(京兆尹)의 직책입니다.
이는 비록 오늘날 모두 그대로 본받기는 어려우나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살펴보면 ‘한성부(漢城府)는 경도(京都)의 사산(四山)과 싸움과 살인 등의 일을 관장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러한 일에 있어서 금법(禁法)을 범하거나 월법(越法) 행위를 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법령대로 다스려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승복시키고 도성을 맑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기준 없이 손을 올리고 내림에 따라 죄가 가벼워지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하여 권력이 있는 자들은 법망을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들만 수족을 둘 곳이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서울에 들어올 때에 길거리와 골목에서 수군거리며 떠들어대는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니, ‘고(故)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첩의 아우가 바로 전(前)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허견(許堅)의 아내인데, 부원군의 첩이 허견과 서로 따질 일이 있어 허견의 집에 갔다가 허견에게 구타를 당하여 이가 부러지고 몸에 상처를 입자 울부짖으며 귀가하였다.’라고 합니다. 첩이 길에서 악다구니 치는 소리가 저잣거리를 크게 울렸으니 누군들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한성부는 여염집의 천한 부인과 저잣거리의 품 파는 노비들이 사사로이 서로 치고받거나 소소하게 다투는 일에 대해서도 모두 송사(訟事)를 심리하여 처결해서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능멸하는 억울함이 없게 하는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은 법으로 추고하여 다스렸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부원군의 첩은 비록 천인이라고 하나 외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자전(慈殿)의 서모(庶母)입니다. 그녀가 무슨 일 때문에 허견의 집에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허견이 감히 그를 구타하고 욕보임이 이와 같았는데도 조정의 신하들 중에 전하에게 이것을 아뢴 자가 없으며, 그 당시에 한성부는 법을 관장하는 곳으로서 또한 감히 누가 그랬는지 따지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천하와 고금에 위태롭고 어지러웠던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점을 신은 삼가 애통하게 여깁니다.
신이 또 들으니, 대사헌(大司憲) 윤휴(尹鑴)가 한강 가에 있을 때에 공공연히 황해도와 평안도의 금송(禁松) 수천 주(株)를 베어다가 새로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무릇 생소나무를 10주만 베어도 죄가 전가(全家)에 이르니, 국가의 금령이 지극히 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상과 권문세가들이 온 산의 나무를 베어다가 자기 집을 짓는데도 이것은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고, 나무꾼과 목동들은 말라 죽은 소나무와 떨어진 잎만 채취해도 법을 따져 엄하게 다스려서 이로써 금령을 펴는 계책으로 삼는다면 어찌 크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또 들으니, 근자에 세력가들이 남의 처첩을 빼앗아 간통하고 속이는 등의 온갖 추악한 행태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도성 사람들이 원망하는 독기와 분노하며 비웃는 소리가 들끓어서 막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그 사람의 성명을 알 수는 없으나 이 또한 고금에 들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서울은 사방의 으뜸이 되는 곳인데, 풍속을 어지럽히고 기강을 파괴하는 것이 극에 달하여 국가의 멸망이 목전에 닥치게 되었으니, 신은 몸이 떨리고 가슴이 떨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서울에 머문 지 겨우 며칠이 안 되어서 보고 들은 것이 넓지 못하므로 다시 어떠한 일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으며, 또 신이 맡고 있는 직임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또한 감히 함부로 말하여 직책을 벗어나는 죄를 얻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금 아뢴 이 몇 가지 일은 전하께서 만약 본부(本府)에 분명히 명하시어 끝까지 조사하여 국법을 시행하게 하신다면, 모든 방부(坊部)의 백성들이 조정의 기강이 지엄함과 국가의 금령을 함부로 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모두 알아서 비록 채찍과 매로 때리지 않더라도 저절로 기강이 확립되어 부월(斧鉞)과 같은 위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천 명에게 형벌을 가하여 죽은 시신이 저잣거리에 쌓인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더욱 복종하지 아니하여 금령을 범하는 자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엄히 명을 내리시어 신하와 백성들을 경계하게 하시고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는 기회로 삼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은혜를 받고 조정에 들어왔다가 곧바로 시골로 돌아가니 이미 힘을 다해 봉직하는 의리를 잃었는데 거기에다 또 규간(規諫)하는 말 한마디 올리지 않는다면, 이는 전하께서는 신을 알아주셨으나 신은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일은 내 심히 놀라우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각기 엄중히 조사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상소의 끝에 언급한 일은 더욱 지극히 한심스러우니, 또한 담당 관사로 하여금 속히 분명하게 조사하여 품처(稟處)하게 해서 풍교(風敎)를 바로잡도록 하겠다.”
하였다. 다음 날 상이 해조에 거듭 명령하기를,
“남구만(南九萬)이 상소의 끝에 언급한 한 가지 조목은 풍교에 관계되는 것이니, 속히 개좌(開座)하여 조사해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영상 허적(許積)이 정사(呈辭)를 올리니, 직강(直講) 김태정(金台鼎)이 허견(許堅)을 위하여 상소문을 올렸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문(拿問)하여 조사한 뒤에 저절로 분명해질 것이다.”
하였다. 좌상 권대운(權大運)과 호조 판서 이원정(李元禎)이 윤휴(尹鑴)를 위해 입대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공의 말이 진실하지 않다 하여 조사하지 말도록 해부(該府)에 분부하였으나 판윤 김우형(金宇亨)과 우윤 신정(申晸)은 이미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냈다 하여 항소(抗疏)를 올려 아뢰었는바, 증거를 밝힌 것이 매우 분명하였다. 그리하여 형조에 명하여 산(山)의 주인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대사간 유하익(兪夏益)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미 조사를 중지하도록 명이 내려간 뒤에 과장하여 죄안(罪案)을 만들었으니, 김우형과 신정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형조의 사계(査啓)를 살펴본 뒤에 처리하겠다.”
하였다. 형조에서 산의 주인인 김세보(金世寶)가 함부로 벌목(伐木)한 것이라 하며 이리저리 둘러대어 윤휴를 빠져 나가게 하였고, 또 남의 아내를 빼앗은 사건을 조사하였으나 명백한 단서를 얻지 못했다 하여 상의 재가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허견이 역관(譯官)인 서효남(徐孝男)의 자부(子婦)를 빼앗았으니, 그녀는 바로 무인(武人)인 이동귀(李東龜)의 딸이다. 허견은 자기 처가 질투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처형까지 함께 구타했던 것이다. 상은 이동귀의 종인 득민(得民)이 공초(供招)한 내용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여 형조에 명해서 엄하게 형벌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 일이 아직도 의심스러운 사안으로 계류되어 있는 것은 조사를 결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포도청으로 하여금 허실을 조사하게 하소서.”
하니, 마침내 포도청으로 이 사건을 이송하여 여러 노비들을 조사해서 죄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모두 허견을 지목하였다. 그러자 권대운이 우상 민희(閔熙)와 함께 차자를 올리기를,
“단서가 이미 드러났다고 이를 만하니 허견을 차례로 조사하여 신문해야 합니다만, 듣자 하니 포도청에서 심문하고 조사한다고 하는데, 한갓 잔혹하게 고문하는 데에만 힘쓸 뿐입니다. 담당 관사에 다시 맡겨 법을 살펴 정죄(定罪)하소서.”
하였으며, 연신(筵臣)이 또 병조 판서 김석주를 심하게 비방하였다.
○ 3월 19일에 영상 허적이 좌상 권대운과 우상 민희 및 대사헌 오정위(吳挺緯), 대사간 권대재(權大載)와 함께 입대하여 남을 모함했다는 죄로 공을 얽어 넣어 거제도(巨濟島)로 멀리 귀양 보내고, 없는 죄를 꾸며 내어 죄안(罪案)을 만들었다 하여 포도대장 구일(具鎰)을 귀양 보냈다. 25일에 공이 대부인(大夫人)께 하직 인사를 하고 4월 4일 밤 바다를 건너 준령을 넘어갈 적에 시커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소낙비가 물동이로 쏟아 붓듯이 내렸다. 2경(更)에 거제도에 이르렀는데 9일에 들으니 유배지가 바뀌었다고 하였다. 이는 회천(懷川 송시열)이 막 장기(長鬐)로부터 거제도로 옮겨 왔으므로 한 곳에 거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공은 다시 바다를 건너 남해에 이르렀다. 6월에 판중추부사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허적(許積)을 공격하기를,
“허적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고 그 서자 허견(許堅)은 형편없는 짓을 많이 자행하였으니, 이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도 나라의 법을 관장하는 자가 이를 금하지 않습니다. 남구만의 상소로 인하여 이 일이 처음 발각되었는데, 오로지 엄폐하고 숨기기만을 일삼고 있습니다. 남구만은 귀양 갔는데 허견은 무사하니, 인심이 더욱 불쾌해하여 눈을 흘기며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 7월에 상은 가뭄이 들었다는 이유로 소결(疏決)하여 공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민희(閔熙) 등이 굳이 간쟁하여 중지되었다. 공은 절도(絶島)에 있을 적에 날마다 독서하여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
○ 9월에 공은 금산(錦山)을 유람하고 10월에 망운산(望雲山)을 유람하였으며, 그 틈에 〈영유시(咏柚詩)〉 20수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이 지역은 바다로 둘러싸여 염분이 많은 땅이라서 풀은 난초(蘭草)와 혜초(蕙草) 같은 향초가 없고 나무는 천초(川椒)와 계수나무 같은 향기로운 것이 없으니, 향기로운 것을 마시고 먹으며 향기로운 물건을 차고 입고자 한다면 이 유자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아, 유자는 비록 하나의 하찮은 물건이나 비흥(比興)의 체(體)와 멀고 가까운 도리를 또한 여기에 부칠 수 있으니, 마음이 계속 이끌리는 까닭과 말이 중복되는데도 삭제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 10월 초하루에 천둥이 치고 다음 날에도 이와 같았다. 3일에 상이 비망기를 내려 특별히 공을 석방하였는데, 사간원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다가 12월 20일에야 비로소 정계(停啓)하였다.

52세 경신년(1680, 숙종6)
1월에 진주(晉州)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2월에 결성(結城)으로 돌아왔다.
4월에 서용되어 행 도승지(行都承旨)에 제수되고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사도시 제조(司䆃寺提調)에 차임되고 비변사 유사 당상에 차임되었으며, 공조참판 겸 수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고 동지의금부사와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으며,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에 차임되었다.
5월에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을 지어 올리고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동지경연사를 겸하고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에 차임되었다. 대부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는 정사(呈辭)를 올리고 달려갔다. 상이 특별히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23일에 대부인이 결성에서 별세하였다. 다음 날 부고가 아산(牙山)에 이르자 공이 달려가 대렴(大斂)할 때에 도착하였는데, 상이 장례 물품과 상여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대부인을 금성(金城) 부군(府君)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10월 26일에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였다.

○ 지난해 겨울에 공이 숙부에게 올린 편지에,
“이 섬은 추위가 북도에서 순행할 때보다 더 심한 듯하며, 눈꽃의 크기가 거의 방석만 하니, 참으로 괴이하고 괴이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두시(杜詩)의 “살기가 남으로 와 지축을 흔들었나. 그렇지 않으면 모진 추위가 어찌 이리 혹독한가.〔殺氣南行動坤軸 不爾苦寒何太酷〕”라는 말에 깊은 동감을 나타낸 것이다. 1월에 아들의 질병 때문에 진주(晉州)에 잠시 머물다가 2월 초하루에 결성으로 돌아왔다.
○ 4월에 허견(許堅)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등이 반역을 도모한 일로 죽음을 당하니, 첫 번째로 공을 불렀다.
○ 공은 갑진년(1664, 현종5) 봄에 전한(典翰)에 두 번째로 의망되었고 갑인년(1674) 겨울에 대제학에 의망되었는데, 이때 수망(首望)으로 대제학에 천거되었다.
○ 5월 22일 밤에 공은 대부인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에 정사를 올리고 결성으로 달려갔다. 상이 특별히 납약(臘藥)을 하사하였다. 3일 뒤에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공조 참판 남구만은 문학과 재주와 기국(器局)이 실로 중임을 맡을 만하며 겸직하고 있는 여러 사무도 긴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지금 노모가 질병이 있어서 황급히 시골로 내려갔으니, 국사에 전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식 된 정리(情理)로 보아 어떠하겠는가.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은혜를 베푸는 도리가 없을 수 없으니, 노모의 병환이 조금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노모와 함께 바로 올라와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예(禮)를 펴도록 하라.”
하였다. 4일 뒤에 연신(筵臣)이, 공이 결성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초상에 달려갔다고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놀랍고 슬프다. 해조에 분부해서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하고 상여꾼을 지급하도록 본도의 감사에게 각별히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53세 신유년(1681, 숙종7)
9월에 집상(執喪)하던 중에 병이 났다.

○ 숙부 의졸공(宜拙公)이 ‘50세가 되면 부모의 상에 극도로 슬퍼하여 몸을 크게 훼손하지 않는 예’를 가지고 공에게 권도(權道)를 따를 것을 돈독히 권하자, 공은 울면서 말하기를,
“다만 스스로 제 힘을 헤아려 하겠습니다.”
하고, 소상(小祥)을 지날 때까지 첫날과 똑같이 하였다. 9월에 공은 팔의 통증이 매우 심해져서 마침내 종신의 고질병이 되었다. 공은 비로소 육즙(肉汁)을 올리게 하고 이르기를,
“이제 지탱하기 어려움을 스스로 헤아렸으니, 어찌 스스로 양심을 속이고 거듭 권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54세 임술년(1682, 숙종8)
7월에 삼년상을 마쳐 복을 벗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행 대사간 겸 동지경연사로 옮겼다.
8월에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에 차임되었는데, 태풍과 혜성(彗星), 함흥(咸興)의 수재(水災)로 인하여 상소를 올려 함경도의 사정을 논하였다. 공은 이달에 발탁되어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9월에 충의위사정청 당상(忠義衛査正廳堂上)에 차임되었다.
10월에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증광 문과(增廣文科)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에 차임되었고 북교(北郊)의 기설제 헌관(祈雪祭獻官)에 차임되었다.

○ 공이 혜성 측후관(彗星測候官)이 되었을 때에 상소하기를,
“후세에 인물을 등용하는 데에 관련한 병폐는 문벌을 소중히 여기고 화려한 문장을 우선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오직 경성(京城)과 삼남(三南) 지방의 사람들뿐이요, 양서(兩西)와 동북(東北) 지방은 한 사람도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인재가 제대로 등용되지 못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장연 부사(長淵府使) 염우혁(廉友赫)은 평소 경학(經學)에 통달하였고 또 지식과 사려가 깊으며, 밀양 부사(密陽府使) 이지온(李之馧)은 관직을 맡아 직무를 잘 수행하고 청렴과 근신함으로 자신을 지키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함경도 안변(安邊) 사람입니다. 이들은 먼 시골에서 발신하여 스스로 명성을 드러냈으니, 지금 만약 이들을 특별히 승진시키신다면 보탬이 없지 않을 것이요, 또 서북 지방 사람들에게도 분발하여 힘쓰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신해년(1671, 현종12) 봄에 조정에서 여러 도의 방백(方伯)에게 명하여 인재를 널리 찾아 천거하게 하자, 공은 함경도 관찰사로서 장계를 올리기를,
“종전에 조정에서 본도의 인재를 물색한 것이 또한 여러 번이었으나 일찍이 한 사람도 이로 인해 녹용(錄用)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비록 인재를 물색하라는 성상의 하교가 계셨으나 관리와 사민(士民)들이 모두 권면을 받고 분발하려는 뜻이 없으니, 한두 명을 등용해서 먼 지방 사람들에게 실제에 힘쓰는 것을 보이지 않을 수 없기에 감히 이렇게 염치를 무릅쓰고 번거롭게 올립니다.”
하고는 마침내 참봉 주남로(朱南老)와 진사 정역(鄭湙) 등 17명을 아뢰었다. 이해 7월에 이르러 태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혜성이 나타났으며, 함흥에 큰 홍수가 졌다. 8월에 상이 직언을 널리 구하고 묘당에 명하여 북로를 구제할 방책을 묻자,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함경도는 바로 성조(聖祖)께서 왕업(王業)을 일으킨 지역이니, 주(周)나라의 빈기(豳岐)와 한(漢)나라의 풍패(豐沛)라 할 것입니다. 우리 국가에서는 이 지역에 대해 선조를 추념하고 근본을 생각하는 도리에 있어 특별히 우대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지역의 인민들은 성품이 우직하고 후중하며 강하고 용감하여 다른 도의 사람들과는 크게 다릅니다. 그리고 근년에는 또 여러 대 조정의 교화를 입어 유학(儒學)을 익히고 예복(禮服)을 착용하는 자가 또한 상당수 있으니, 남쪽 지방의 외진 고을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다만 이 지역은 먼 곳에 위치하여 인재가 세상에 등용될 가망이 없어서 그대로 생을 마감하고 알려지는 경우가 없으니, 진실로 애석합니다.
또 조정에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 문벌을 먼저 따지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북관(北關)의 사람들은 가문이 침체하여 명성을 떨치지 못한 지가 이미 한두 대가 아니니, 선조 중에 드러나고 현달하여 칭찬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 이 때문에 비록 혹 이름이 사적(仕籍)에 올라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자가 있더라도 문신으로는 삼조(三曹)의 낭관(郞官)에 불과하고 무신으로는 장관(將官)과 수문장(守門將)에 불과할 뿐입니다.
옛 성왕(聖王)들은 어진 이를 등용할 때에 출신을 따지지 않으시어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차이를 둔 적이 없으며, 또 혹은 북쪽 오랑캐와 남쪽 월(越)나라를 한집안으로 여긴 이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관령(關嶺) 일대의 한계 때문에 내외의 구분을 명확히 그어서 일월(日月)을 배태(胚胎)한 곳을 마치 먼 변방 지역처럼 보고 있으니, 이는 인물을 등용하는 방법에 크게 어긋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찌 성조(聖朝)께서 어렵게 왕업(王業)을 창건하신 뜻을 추념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신은 외람되이 본도의 관찰사가 되어 본도의 인재가 쓸 만하고 사람들이 실망하는 현실에 대해 자세히 알고는 항상 서글퍼하였습니다. 조정에서 이때 마침 연달아 인재를 찾아내어 보고하라는 특별한 전교(傳敎)가 있었으므로, 곧 도내의 공론을 모아 문신과 무신 4, 5명으로 천거에 응하여 계문(啓聞)한 것이 두서너 차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한번 아뢴 뒤로는 일이 묘연하여 마치 깊은 우물에 돌을 던진 것처럼 끝내 한 사람도 등용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도리어 애당초 이런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들으니, 지난번 북도(北道)의 어사가 함경도에 서적을 하사할 것을 청하자, 그 당시 국정을 담당한 신하가 마침내 말하기를, ‘본도는 바로 변방으로서 무력을 사용하는 곳이니, 문교(文敎)를 베풀어서 무비(武備)가 점점 해이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이어 서적을 하사하지 말 것을 청했다 합니다.
아,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어찌 이처럼 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양(豫讓)은 절개를 지킨 선비일 뿐인데도 반드시 그를 국사(國士)로 대우한 뒤에야 마침내 국사로서 보답함이 있었습니다. 지금 북도 사람들에 대해서 무사(武士)의 경우에는 비록 문벌과 재주와 무예가 칭찬할 만하더라도 반드시 선전관(宣傳官)에 천거되는 것을 막고, 유생(儒生)의 경우에는 문교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서적을 하사하지 않으니, 이 지역 사람들을 천시하고 그 풍속을 어리석게 만듦이 자못 국경이 다른 이민족의 사람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심합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들을 위협하고 채찍질하여 마음대로 부려서 이들로 하여금 윗사람을 친애하고 상관(上官)을 위해 몸을 바치며 무비를 튼튼히 하고 변방을 호위하게 하고자 한다면 또한 실정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말을 오활(迂闊)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묘당(廟堂)에 하문하시어 사세를 자세히 헤아리소서. 그리하여 본도의 도백(道伯)과 병사(兵使)가 전후로 천거한 글을 가져다가 즉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먼저 인물을 선발하여 등용하되 문관과 무관의 높은 관직에 그 인품이 합당한지의 여부만 논하고, 북도에서 생장했다 하여 등용을 막는 폐단을 없애어 사람들을 감동시켜 분발하고 진작하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또 육진(六鎭)과 삼수(三水), 갑산(甲山)의 사람 가운데에 서울에 올라온 자들을 유생은 사학(四學)에 적을 두고 무사는 병조에 이름을 올려서, 각각 인원수를 정하여 재주를 시험하고 급료를 주어서 먼 지방 사람들을 회유하여 오게 하는 방법으로 삼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또 생각건대 본도는 이미 아득히 먼 곳에 위치해 있고 땅이 또 척박하여 백성들이 생활하는 형편이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의복은 오직 삼베와 개가죽뿐이요 음식은 오직 귀리와 잡곡뿐이니, 만약 남쪽 지방 백성들을 이곳에 살게 한다면 진실로 하루도 견뎌 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국가에 비록 국경을 넘는 것을 금하고 쇄환(刷還)하는 법이 있으나 끝내 막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정(男丁)들의 군역의 경우는 침탈이 다른 곳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 때문에 유리하여 도망하는 자가 잇따라 장부에 허위로 이름만 올라 있는 자가 많으니, 어찌 이들에게 군장(軍裝)을 정돈하고 무예를 익히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남영(南營)과 북영(北營)에 소속된 본도의 군병에게 모든 군영의 수요(需要)로 혹은 쌀이나 삼베, 혹은 나무와 숯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용도에 따라 나누어 모두 징수하다 보니, 군사들이 하소연하는 원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종전에 본도의 백성 중에 스스로 거세(去勢)를 하고 자식을 버리고 기르지 않은 자가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이 본도에 있을 때에 변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개선 방법을 찾지 못하여 4년간 차일피일 날짜만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자세한 사정을 알고 비로소 고칠 방도가 있음을 알아내었으나, 체직되어 돌아갈 시기가 임박하여 미처 주선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돌아가 조정에 여쭙고자 하였으나 조정에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아 죄를 얻고 물러나게 되었으므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 어리석은 자가 궁리 끝에 우연히 얻은 한 가지 계책을 올리겠습니다.
북관의 각 고을에서 거두는 조세는 본래 서울로 실어다가 바치지 않고 매년 환자곡(還上穀)으로 가록(加錄)하는데, 그 본의를 살펴보면 수송을 어렵게 여기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로 변방의 군량을 충분히 하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고을을 설치한 이래로 매년 그 수량이 늘어나서 그 많은 양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한 고을 백성의 힘으로는 환자곡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이렇게 수량이 적체되어 점점 많아진 뒤에는 반드시 포흠(逋欠)이 많아지고 포흠이 많아진 뒤에는 반드시 탕감해 주는 지경에 이르니, 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탕감한 수량이 끝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비록 곡식을 남겨 둔다고 하나 실제는 곡식을 버리는 것이며, 비록 군량을 충분하게 한다고 하나 실제는 군량을 잃는 것이니, 국가의 일 중에 실제가 없는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만약 남영과 북영 두 병영의 씀씀이를 참작하여 각 고을의 조세를 덜어 주고 충분한 수량을 떼어 주어 부족할 염려가 없게 하며, 종전에 군사들에게 거두어들이던 모든 명목(名目)을 일체 혁파하게 하소서. 이렇게 한다면 군졸들에게는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이 없고 병영에는 쓰임이 부족할 염려가 없으며, 각 고을에는 세금을 더 징수하는 폐단이 없으면서도 변방의 군량은 지금 회부(會付)한 원래의 곡식 이외에 또 두 병영에 떼어 준 여분이 있게 될 것이며, 사노비(私奴婢)의 신공(身貢)을 남겨 둔 것도 그 수량이 또한 적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무용한 것을 바꾸어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편리하게 하는 방책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한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묘당에 하문하시어 만일 신의 계책이 옳다고 한다면 본도의 도백으로 하여금 두 병영과 서로 의논해서 이대로 거행하도록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으소서. 그리고 만일 전례(前例)를 그대로 따라 군사와 백성들을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장률(贓律)로 논죄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말아서 변방의 군사들이 소생하여 국방의 일에 전념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에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여 조목조목 진달한 정성을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고 이 일을 비변사에 내려 복주(覆奏)하게 하였다. 상이 서북 지방 사람들을 다시 수교(受敎)에 따라 청환(淸宦)의 길에 통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무신 중에 재주와 무예가 있는 자를 특별히 선전관에 천거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육진(六鎭)과 삼수(三水), 갑산(甲山) 출신으로 서울에 올라온 자를 유생일 경우에는 사학(四學)에 적을 올리되 4명으로 정하고 무사일 경우에는 병조에 이름을 올려 재주를 시험해서 급료를 주게 하였다.
○ 이보다 앞서 갑인년(1674, 현종15) 가을에 공을 수어사(守禦使)에 첫 번째로 의망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발탁하여 병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상은 공의 사직소에 답하기를,
“경은 재주와 명망이 일찍 드러났으니 이번 등용은 또한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내 뜻이 먼저 결정되었고 공론이 모두 같다.”
하였다.
○ 처음 인조 을축년(1625, 인조3)에 평강(平康) 부군(府君)이 서울의 정릉(貞陵) 소동(小洞)에 집을 샀는데, 숙종 경신년(1680, 숙종6)에 조정에서 이것을 사서 인빈(仁嬪)의 사당을 만들었다. 이해 9월에 이르러 공은 목멱산(木覓山) 아래 명례동(明禮洞)에 집을 샀다. 고사(故事)에 한성부(漢城府)에서는 산 아래에 사는 사대부의 가노(家奴)들에게 분담시켜서 사람들이 소나무를 베어 가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으나, 대부분 법을 받들어 시행하지 않았고 감역(監役)이 적간(摘奸)할 때에도 대부분 종을 보내지 않았는데, 공은 엄중히 경계하여 태만히 하지 말도록 하였다. 하인이 일찍이 비변사의 접시꽃을 뜰에 옮겨 심자, 공은 하인을 꾸짖고 접시꽃을 돌려보냈다. 공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30년 동안 말을 기르지 않았는데, 혹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공은 웃으며 대답하기를,
“나는 말을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없어서 당상관이 된 뒤에도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쓰던 헌 안장을 바꾸지 않았는데 병조의 장관이 되어 교외에 나가 강무(講武)하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오래된 은청안(銀靑鞍)을 샀다.”
하였다. 다음 해 겨울에 혜산 첨사(惠山僉使)가 인삼과 표범 가죽을 보냈으나 공은 이를 물리쳤으며, 그 후 좌상으로 있을 때에 만포 첨사(滿浦僉使)가 인삼을 선물했고 서추(西樞)로 있을 때에 충청 수사(忠淸水使)가 솥 두 개를 보냈으나 모두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 이보다 앞서 병조에서 군포(軍布)를 징수할 때에 절반은 돈으로 섞어 징수하여 돈을 유통시키고자 하였는데, 이해 1월에 공은 돈을 유통시킨 뒤에 시장의 물건 값이 똑같지 않다 하여 귀천에 따라 경중을 구별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9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공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바로 삼베입니다. 색리(色吏)가 삼베를 가지고 서울에 와서 돈으로 바꾸어 납입하거나 혹은 서울에 있는 사람이 돈을 대납하고 본 고을에서 삼베를 징수하니, 이는 중간에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될 뿐이고 돈을 유통시키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돈의 가치가 일정치 않으니 한결같이 시장의 물건 값을 따라 점차 더 징수하면 또한 반드시 지방에서 원망을 받을 것입니다.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국가의 손실이 적지 않으니, 이후로는 일체 삼베를 가지고 와서 바치게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자, 상이 재가하였다.
○ 처음에 국조의 옛 제도에 병조에서 지방의 기병(騎兵)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상번(上番)하게 하였고 얼마 있다가 그중에 늙고 잔약한 자를 가려서 내려 보내게 하여, 1호(戶)마다 3명의 보인(保人)을 두었다. 호수(戶首)가 3명의 보인에게 베를 각각 2필씩 거두어 서울에 와서 병조에 바치면 병조에서 도성의 백성을 고립(雇立)하였다. 호수가 또 3명의 보인에게 인정포(人情布)를 거두어서 자신이 착복하기도 하고 병조의 아전에게 주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지방의 백성들이 왕래하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병조의 아전들이 이를 기화로 부정을 저질러서 문서를 고치고 바꾸어 돈과 삼베를 감추곤 하였다. 그리하여 혹은 서울에 와서 바치기 전에 아전이 중간에서 가로채는 경우도 있고, 혹은 사주인(私主人)이 받아서 취하고 바치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아전이 또 상번하는 군사들을 사사로이 풀어 주고 군포 6필을 거둔 다음 그중 2필로 사사로이 사람을 사서 세워도 관청에서 조사하지 않은 지 수십 년이 되어서 국가의 부고(府庫)가 텅 비었다. 이해 10월에 공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상번하는 군사의 군장(軍裝)을 보니 제대로 된 품새를 갖추지 못하여 지극히 한심하였습니다. 이는 갑자기 정돈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상번하러 올라온 뒤에 모두 원군(元軍)으로 파정(派定)하지 못하고 사람을 고립(雇立)한 곳이 많아 부득이 다시 내려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원군 중에 응당 포함될 숫자를 헤아려서 상번하게 하고 그 밖에는 모두 가포(價布)를 상납하게 하여 하리(下吏)들이 중간에서 농간하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니, 자문을 구해 조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은 또 아뢰기를,
“군인 중에 부자간에 함께 상번한 자가 있으니, 그 고을의 수령은 책임을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마침내 해당 수령을 추고하였다. 11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거듭 청하기를,
“상번하는 군사 중에 늙어 군역이 면제되는 자들에게 올라와서 점검을 받은 뒤에 받은 군포를 환송(還送)하기보다는 차라리 원군의 숫자를 먼저 정한 다음 본 고을로 하여금 건장한 장정을 뽑아서 숫자대로 올려 보내게 하고, 그 나머지는 보병의 준례에 따라 군포를 거두어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나으니, 이렇게 하면 병조와 군졸이 모두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모두 편리하다고 말하여 이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공은 또다시 호수(戶首)가 삼베를 거두어 곧바로 바치는 방법을 없애고 호보(戶保) 4명이 각각 2필씩 자기 고을에서 상납하게 하니, 이에 호수와 서리(胥吏)가 모두 이익을 빼앗기게 되었다. 공이 마침내 종전에 돈과 삼베를 출납한 숫자를 회계하여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게 해서 서리들이 지위를 사칭하고 수결(手決)을 날조하여 삼베 40동(同)과 돈 500냥을 도둑질한 사실을 적발하니, 깊이 캐내면 이보다 두 배 내지 다섯 배도 넘을 것이었다. 간사한 아전 몇 명이 스스로 반드시 죽게 되리라 여겨 도주하여 숨어서 나타나지 않자, 공은 그 처자식을 가두었다. 공은 법을 적용하는 것이 엄격하면서도 조급하지 않아서 죄상이 드러난 자는 추징하게 하였다. 종전에는 관리들 중에 값을 받고 대신 입군(立軍)시킨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하고 군인은 도(徒) 3년의 형률을 적용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은 아전을 변방으로 옮기고 군인은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다음 해 봄에는 소결(疏決)로 인해 추징당한 자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모두 재가하자, 간사한 관리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해 안에 병조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넘쳐서 청사(廳事)에 노적을 쌓기까지 하였고 다른 아문의 빈집을 빌려 곡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 공은 일찍이 문장을 논하여 이르기를,
“문장은 기예이니 비록 정교하더라도 기예일 뿐이다. 경학(經學)에 근본하고 국가의 체통에 밝으며 사정을 다 아뢰고 가슴속에 있는 것을 개진할 때에는 문장의 법칙으로 논할 수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 공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두루 통달하였는데, 오직 실제로 쓸 수 있는 것이라야 마음을 다하였다. 문장을 지을 적에는 내용이 통창하고 넉넉하며 간절하고 성실하였으며, 주소(奏疏)와 의논은 반드시 경학에 근거하여 전아(典雅)하고 후중해서 매우 볼만하였고, 서찰도 어록체(語錄體)를 사용하여 외면을 꾸미지 않았다. 11월에 공은 증광 문과(增廣文科) 회시(會試)의 시관(試官)에 차임되어 채정린(蔡廷麟) 등을 뽑았다. 공은 이달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는데, 이때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시관이 되어 거자(擧子)들의 글을 보니, 문체(文體)가 크게 변하였습니다. 으레 사용하는 문자를 기어이 신기하게 쓰는 데 힘써서 천연(天淵)이라고 쓸 말이면 바꾸어 성연(星淵)이라 하였으니 이는 별이 하늘에 있다고 해서이고, 말세(末世)를 바꾸어 해세(亥世)라 하였으니 해(亥)가 12지(支)의 끝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차이후(繼此以後)라고 쓸 말이면 윤자이예(胤玆以裔)라 하고, 공유(恭惟)라고 쓸 말이면 장유(莊惟)라고 바꿨습니다. 또 어려운 글자와 궁벽한 말로 문장을 엮어서 반드시 남들로 하여금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또 중국의 어록체를 섞어 쓰니, 상규(常規)를 뒤집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는 풍습이 진실로 매우 해괴합니다.
모든 중국의 어록체는 바로 우리나라의 이두(吏讀) 따위이니, 만약 선유(先儒)의 말씀이라면 문장을 바꾸기가 어려우므로 부득이 그대로 써야 하지만 자신이 지은 글에 어찌 이것을 뒤섞어 쓴단 말입니까. 또 기이한 말과 속담을 주워 모아 문장을 이루고 있으니, 더욱 괴이합니다.
문체의 변역(變易)은 진실로 세도(世道)의 성쇠(盛衰)와 관계되니, 이와 같은 문체를 통렬히 배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과거를 고시(考試)할 때에 이러한 문체들을 일절 물리치소서. 문풍을 크게 변역하는 방도는 오직 조정에서 중외(中外)에 알리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예조로 하여금 과거 사목(科擧事目)에 이 조항을 첨가하여 중외에 반포해서 금지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이달에 상이 대신(大臣)과 육경(六卿), 삼사(三司)의 장관에게 명하여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공은 전(前) 교관(敎官) 이세필(李世弼)과 현감 송병하(宋炳夏)를 천거하였고, 그 후 갑술년(1694, 숙종20)에 영상으로 있으면서 유학(幼學) 양득중(梁得中)과 전 교관 박심(朴鐔)을 천거하였다.
○ 이보다 앞서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조정에서는 만과(萬科)를 설치하고 무사를 뽑았는데, 그 후 선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해져서 두서가 없으니, 원성이 중외에 가득하였다. 이때에 공은 내삼청(內三廳)에서 선전관(宣傳官), 부장(部將), 수문장(守門將)으로 응당 천거하는 자들을 삼망(三望)의 숫자로 통계하여 12월에 내삼청에 모아 추천받은 자들에게 별도로 취재(取才)하여 활쏘기와 무예, 강서(講書)를 시험하고, 신(身)ㆍ언(言)ㆍ서(書)를 살펴서 가장 우수한 자를 기록하여 숫자를 채웠다. 다음 해 여름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였으며, 그해 겨울에도 이와 같이 하여 차례에 따라 의망하니, 사람들이 감히 비판하지 못하였다. 선발된 사람들이 뒤에 유명한 무신이 되니, 중외에서 모두 공을 칭송하였다.

55세 계해년(1683, 숙종9)
1월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하였는데 본직의 임무가 많다 하여 해직을 청해 윤허를 받았으며, 이달에 강화(江華)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였다.
2월에 현종대왕(顯宗大王)의 행장(行狀)을 지어 올렸다.
3월에 전 대제학으로 인조(仁祖)와 효종(孝宗)의 사당에 예고부조반교문(預告不祧頒敎文)을 지어 올리고 사역원제조 겸 지춘추관사에 차임되었다.
4월에 대제학을 겸하였다.
5월에 《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강화도에 봉안하였고, 태조대왕 가상시책문(太祖大王加上諡冊文)을 지어 올린 다음 말〔馬〕을 하사받았으며,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에 차임되었다.
6월에 태조와 태종의 가상시호반교문(加上諡號頒敎文)을 지어 올렸고, 병으로 사직하자 상이 내의원의 어의를 보냈다.
윤6월에 다시 병이 나자, 상이 내의원의 어의를 보냈다.
8월에 침을 맞고 뜸을 뜨기 위하여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이 침의(鍼醫)를 보냈다.
9월에 유생들에게 구일제(九日製)를 과시(課試)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날 밤에 빈청(賓廳)에서 선온(宣醞)하였다.
10월에 증광 문과(增廣文科) 회시(會試)의 시관에 차임되었다.
11월에 대전(大殿)의 두환평복반교문(痘患平復頒敎文)을 지어 올리고 문과(文科) 전시(殿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2월 5일에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가 승하하였다. 이달에 숙부 의졸공(宜拙公)이 별세하였다.

○ 이에 앞서 윤휴(尹鑴)가 현종대왕(顯宗大王)의 행장을 지어 올렸는데, 6년 뒤에 윤휴를 사사(賜死)하고는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다시 짓게 하였다. 김석주가 지난해 가을에 이미 묘지문(墓誌文)을 지었다고 사양하자 상이 마침내 공에게 명하니, 이해 2월에 지어 올렸다.
○ 4월에 공은 대제학을 겸하였다. 이에 앞서 이공 민서(李公敏敍)가 공을 대신하여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벼루를 전한 내용의 시(詩)를 짓고 화답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족하(足下)와 함께 유학(游學)하며 성장하였는데 지금 마침내 이 벼루를 전후로 서로 주고받았으니, 한마디 말씀을 하여 문원(文苑)의 고사(故事)에 붙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영광을 과시하고 떠벌이는 일에 관계된다 하여 글을 지으려고 하지 않다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화답하였다.
○ 5월에 무겸(武兼) 권용의(權勇義)가 의성(義城) 사람으로서 객사하자, 공은 서리(書吏)를 정하여 호상(護喪)하게 하고 관(棺)을 사서 주었다.
○ 10월에 증광 문과 회시의 시관에 차임되어 이동표(李東標)와 송정규(宋廷奎) 등을 뽑았다. 공이 기유년(1669, 현종10) 정시(庭試)에 장소를 나누어 고시할 때에 한태동(韓泰東)이 지은 부(賦)를 보고는 명관(命官)인 정공 치화(鄭公致和)에게 청하여 그 부를 여러 시관들에게 보이자, 김공 석주(金公錫胄)가 칭찬하여 마침내 장원(壯元)으로 정하였다. 정공은 돌아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남 영감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여 처리하지 않는 태도가 이와 같으니, 그 심덕(心德)이 더욱 공경할 만하다.”
하였다. 이때에 공이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이선(李瑄)의 변려문(騈儷文)에 이르자 주필(朱筆)로 어지럽게 그어져 있어 거의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런데 공이 대독관(對讀官) 김창협(金昌協)으로 하여금 삼중(三中)이라고 쓰게 하자, 김창협이 매우 의아해하고 거듭 난색을 표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의 문장을 보니 반드시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하는 자이다. 변려문에는 서툴지만 응당 대책문(對策文)에는 뛰어날 것이다. 반드시 종장(終場)까지 응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우선 높은 등급에 두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김창협은 부득이 삼중이라고 썼으나 그래도 공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이윽고 그 대책문을 보니 과연 좋은 작품이었다. 김창협이 돌아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문감(文鑑)이 남공과 같은 이가 시관이 되고 나서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할 만하다.”
하였다. 전시(殿試)의 장원을 정할 때에 홍공 만용(洪公萬容)은 송주석(宋疇錫)을 의중(意中)에 두었는데, 송주석은 바로 회천(懷川) 정승의 손자였다. 홍공은 이것을 기색에 나타내었으나 공은 거들떠보지 않고 순서에 따라 등급을 매겨 선발하였는데, 이때 선발된 자 중에는 문감이 있어 뒤에 시험을 주관한 자가 많았다. 박공 신규(朴公信圭)가 시원(試院)에 함께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친한 이에게 말하기를,
“남공의 밝은 식감(識鑑)과 공정함은 지금 세상에 일찍이 보지 못한 바이다.”
하였다.

56세 갑자년(1684, 숙종10)

1월에 의정부 우의정으로 승진하였다.
2월에 명을 받들어 태릉(泰陵)을 봉심(奉審)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공이 변방의 일로 인하여 함경도의 기병을 선발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명하여 절목(節目)을 정하게 하였다.
4월에 명성왕대비(明聖王大妃)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어 올리고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5월에 창빈(昌嬪)의 묘지명을 지어 올리고 말을 하사받았다. 말미를 받아 선영(先塋)에 분황(焚黃)하였는데 하직하는 날에 상이 선온(宣醞)하였다.
7월에 차자를 올려 군정(軍政)을 일관되게 시행할 것을 논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사은사 겸 동지사(謝恩使兼冬至使)에 차임되었다.
8월에 함경도 친기위(親騎衛)의 절목을 정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공은 명을 받들어 영릉(寧陵)을 봉심하였다.
9월에 국경을 나간다 하여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다. 정시(庭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0월에 명을 받들어 현릉(顯陵)을 봉심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김환(金煥)의 죄명을 정할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다시 전지(傳旨)를 봉입(奉入)하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공이 하직하고 사행(使行)을 떠났다.
11월에 안주(安州)에 이르러 병에 걸리니,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고 마침내 어의에게 배행(陪行)하도록 명하였다. 이달 공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12월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였다.

○ 1월에 공은 우상(右相)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조야에서 공이 크게 등용되기를 기대하여 정승에 발탁된 것이 너무 늦었다고 여겼으나 오랫동안 병조 판서를 맡기고자 하여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었는데, 상의 총애가 더욱 중해서 공이 매번 일을 거론하여 아뢸 때마다 윤허를 받았다. 도목대정(都目大政)을 두 번 치렀는데, 공은 그때마다 병조 판서의 직임을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린 것이 수십 줄에 이르렀으며, 공이 전후로 질병이 있다고 아뢸 때마다 상은 어의를 보내고, 경연에 임하여 병의 차도를 대신들에게 특별히 물으셨으며, 공을 지칭할 때에 관직명을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이때 상은 특명으로 가복(加卜)하고 사직소에 답하기를,
“경은 뛰어난 재주와 덕망이 있어서 진실로 보필하는 정승의 임무에 합당하다.”
하였다. 공이 사직소를 다섯 번째 올리면서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 “군자는 그 몸을 편안히 한 뒤에 움직이니, 위태로우면서 움직이면 백성들이 돕지 않고, 두려워하면서 말하면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인용하였으니, 이는 공이 항상 말하고 항상 지키던 바였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공은 비록 군주를 대면하더라도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 말을 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군주에게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등용되었으나 다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사대부에게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위인(偉人)을 말할 때에는 반드시 공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명신(名臣)으로서 군주에게 공경받는 이는 공만 한 이가 없다.”
하였다.
○ 지난해 겨울에 왜국(倭國)의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가 예조 참의에게 서찰을 보내어 이르기를,
“삼가 들으니 동녕(東寧)의 정금사(鄭錦舍)가 크게 기병(奇兵)을 모집하고 만리에 배를 띄워 귀국(貴國) 지방을 침범하려 하고, 올량합(兀良哈)은 곧장 북경(北京)으로 들어가 이제 공격을 결행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해 2월에 상이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여러 신하들에게 변방의 일을 하문하자, 공은 생각하기를, ‘이 편지는 거짓이어서 비록 믿을 것이 못 되나 만약 이로 인하여 대비하고자 한다면 배를 타고 와서 상륙하는 적을 마병(馬兵)으로 공격해야 할 터인데, 마병 중에 쓸 만한 자는 도감(都監)의 마병 외에 지방에는 원래 선발하여 훈련시킨 군대가 없다. 함경도는 호인(胡人)들과 접경한 지역이어서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가 많고 말이 또 험한 길을 치달릴 수 있으며, 또 사람과 말이 모두 여러 날 동안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으니, 실로 내지(內地)의 기병(騎兵)이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병을 선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절목을 정하게 하고 마침내 본도의 감사(監司), 병사(兵使)와 함께 왕복하면서 상의하게 하였다. 8월에 비변사(備邊司)에서 공이 아뢰어 새로 선발한 기병 부대를 친기위(親騎衛)라 호칭하고 마침내 절목을 만들어 올려서, 단속이 이미 이루어지고 무예가 이미 익숙해진 뒤에는 차례로 돌아가면서 상경하게 하고, 병조에서 사열하여 상벌을 내리되 금군(禁軍)의 예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녹을 줄 것을 청하니, 이에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2년 뒤에 공은 다시 사목(事目)에 따라 함경남북도(咸鏡南北道)의 금삼 어사(禁蔘御史)로 하여금 친기위를 시재(試才)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어사 홍수헌(洪受瀗)과 최규서(崔奎瑞)가 아뢰기를,
“이들을 제재하기 어려울까 우려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 당상관이 찾아와서 묻자 공은 그만둘 수 없음을 아뢰면서,
“다만 감사와 병사를 거듭 신칙하여 교만함과 횡포를 부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서 끝내 용맹한 기병 부대를 이루었다.
○ 공이 정승이 되자 김류(金瑬) 등의 구례(舊例)를 적용해서 대제학(大提學)을 그대로 겸직하게 하니, 공이 세 번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6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대제학을 해임해 줄 것을 거듭 청하자, 상이 해임을 허락하였다.
○ 공이 호남(湖南) 지방을 염찰(廉察)할 때에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조정에서는 흉년이 들었다 하여 오랫동안 세초(歲抄)를 정지하고 있는바, 세초는 민간에 부역을 내는 일이 아닌 경우에는 흉년이 들었다 하여 정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하거나 늙어서 군역이 면제된 자를 대정(代定)하기 전에는 으레 원래의 본인에게 징수하는데, 세초를 하지 않으면 한정(閑丁)이 있더라도 대정할 수가 없으며, 사망하거나 늙어서 군역을 면제받아야 할 자가 도리어 그 부역에 응하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누적된 결원을 한꺼번에 충정(充定)하면 분분히 소요가 생길까 우려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으며, 또한 다 충정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각 수령에게 분부하여 궐액(闕額)은 흉년과 풍년을 따지지 말고 결원이 생길 때마다 충정하여 사망하거나 늙어서 군역을 면제받아야 할 자가 다시 징발당하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공은 5년 뒤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입대하여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세초할 때에 한정을 얻지 못하여 매번 나이 어린 자로 충정하며, 사망하거나 늙어서 면제받아야 할 자까지도 대정할 길이 없으니, 이는 한정 중에 원래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지금 양민들이 투속(投屬)하는 경로가 매우 많습니다. 서울의 각 관사로 말하면 삼의사(三醫司)의 생도와 교서관(校書館)의 창준(唱準), 각 아문의 군관 등의 사역이 이것입니다. 지방으로 말하면, 신이 일찍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들으니, 감사의 아병(牙兵)으로 소속되어 있는 자가 성주(星州) 한 고을에만 거의 8, 9백 명에 이른다고 하였으니, 다른 고을의 사정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기타 병사(兵使)와 수사(水使), 영장(營將)과 방어사(防禦使)의 군관 등 명색을 다 열거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은 모두 양민들을 내몰아 역을 피할 수 있는 소굴로 내모는 것이니, 만약 크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나이 어린 자로 충정하는 것과 늙은 자와 죽은 자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일이 형편상 반드시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서울과 지방의 양민이 소속된 곳 중 원래 정해진 숫자가 있는 곳은 정원 이외의 사람을 도태시키고, 원래 정해진 숫자가 없는 곳은 정원을 헤아려 정해서 모속(冒屬)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현종(顯宗)이 이를 따랐다. 숙종 경신년(1680, 숙종6) 교화를 다시 펴던 때아약(兒弱)과 도고(逃故)에게 군포를 물리는 폐단을 제거할 것을 의논하고 성책(成冊)을 거두어 팔도에 조사했는데, 그 숫자가 지나치게 많고 허실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일시에 대정(代定)할 수가 없으며 또 그대로 군포를 물릴 수도 없었다. 이에 서울의 관아에 저축한 것을 모두 꺼내어 병조에 소속된 기병과 보병에게 징수하는 군포의 숫자를 충당하니, 비록 햇수를 한정하지 말고 군포를 감면해 주라는 명령이 있지는 않았으나 지방의 군사와 백성들은 스스로 오랫동안 감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감면해 준 지 1년 만에 국가의 경비가 거의 탕진되었다 하여 마침내 도로 징수하니, 백성들이 크게 실망하여 모두 조정에서 백성을 속였다고 원망하였다. 공이 처음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아약과 도고에게 물리는 군포를 조정에서 매번 충정하여 상환하고자 하니 결코 계속 시행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며, 이미 감면했다가 다시 징수하는 것도 신용을 크게 잃는 것이니, 각 고을에 엄하게 신칙해서 즉시 충원하여 대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흉년이 들었다 하여 세초(歲抄)를 정지하는 것은 비록 백성을 구휼하는 것이라고 말하나 군포를 징수하는 것은 줄이거나 면제해 준 적이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백성이 곤궁할 때에 더욱 대정해야 합니다.
신이 들으니 나주(羅州) 한 고을은 장인(匠人)이라고 일컫는 자가 2천 명에 이른다 하는데, 지금 병조의 군안(軍案)에 아약과 도고로서 대정해야 할 자가 팔도를 통틀어 겨우 1만 수천 명에 불과하니, 서울에 있는 아문과 지방의 영문(營門)과 주현(州縣)에 사사로이 소속되어 있는 부류를 찾아내어 모두 충정한다면 어찌 대정할 사람을 얻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찾아내어 대정하게 한 뒤에 또다시 서울에 있는 아문에서 계속하여 자기 관아에 소속된 자들을 침해하지 말 것을 청한다면 비록 지방에서 얻을 수 있는 양정(良丁)이 있더라도 이로 인해 해이해져서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는 다시 묘당(廟堂)과 사목을 강정(講定)하여 반드시 충정하고 계속 부정하게 고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 우상 김석주(金錫胄)의 말을 받아들여 경군(京軍)을 나누어서 금위영(禁衛營)의 군사 9060명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 4200명, 수어청(守御廳)의 아병(牙兵) 200여 명, 총융청(摠戎廳)의 아병 900여 명을 얻어서 결원을 대략 충정하였다. 상은 마침내 명하여 병조의 기병과 보병 중 아약과 도고에게 물리는 군포를 탕감해 주게 하였으며, 병조가 새로 정한 서울의 장적(帳籍)을 여러 도에 보내어 각 도로 하여금 새것과 옛것을 합해서 하나의 장적을 만들어 병조에 올려 보내게 하였다.
지난해 공이 낭관인 허지(許墀) 등에게 오래 일을 맡겨 조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인하여 인물을 천거하라는 명령에 따라 허지를 천거하였다.
이해 7월에 공은 차자를 올려 군정을 일관되게 시행할 것을 논하고, 마침내 절목을 정하여 올려 시행해서 일정한 법식이 되게 하였다. 얼마 후 남쪽 지방 백성들이 공을 위하여 아약제군영사불망비(兒弱除軍永思不忘碑)를 산음현(山陰縣)에 세웠다.
○ 이때 조정에서 해마다 사면령을 반포하니, 감옥 안에는 다만 중죄수 약간 명이 남아 있었다. 7월에 상은 가뭄이 심하다는 이유로 현재 형조에 갇혀 있는 죄수를, 이미 조사가 완결되었거나 아직 진행 중인 사건을 막론하고 일체 사면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에 공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정치하는 방도는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일 뿐입니다. 가령 죄 있는 자가 요행으로 형벌을 면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또 형벌을 만든 것은 악한 자를 징계할 뿐만 아니라 악행을 없앨 것을 기약하는 것이니, 인애(仁愛)의 뜻이 실로 그 가운데에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한해(旱害)를 만나 소결(疏決)하는 것은 본래의 뜻이 억울한 자가 있을 때 그 억울함을 풀어 줄 것을 의논하는 것인데, 죄수의 정상과 범죄의 허실을 따지지 않고 함께 뒤섞어서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를 힘쓴다면 그 속에서 아무리 합당한 도리를 찾으려 해도 진실로 부합되지 않으니, 어찌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이와 같으니, 사형수 중에 억울한 자를 다시 심리하여 품처(稟處)하고 다른 죄수들도 속히 판결할 것을 형관(刑官)에게 분부하고, 또 각 도에도 전지를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 이보다 앞서 임술년(1682, 숙종8) 겨울에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이 전(前) 병사(兵使)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허새(許璽) 등의 역모를 고변하게 하여 며칠 동안 국청(鞫廳)을 설치하였다. 김익훈은 무신(武臣)인 전익대(全翊戴)가 유명견(柳命堅)의 역모를 알고 있다고 은밀히 아뢰었고, 또 김중하(金重夏)를 사주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익대와 유명견을 국문하여 대질 심문하였으나 증거가 없었다. 그러다가 전익대가 허위임을 자백하기를, “이는 실로 김환이 고변하던 전날 밤에 어영청의 군뢰(軍牢)를 데리고 와서 달래고 위협하여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라고 하였으며, 김중하가 고발한 것도 증거가 없었다. 다만 낙서령(洛西令) 이수윤(李秀胤)도 이미 김환에게 고발당하여 다시 국문을 받다가 곤장을 맞아 죽었고 허새는 죄를 자백하여 법대로 처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김환의 품계를 올려 주고 김중하와 전익대를 유배 보냈다. 사헌부에서 전익대와 김중하, 김환을 엄하게 국문하고 김익훈을 삭출(削黜)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 다시 전익대를 국문하여 무고(誣告)한 사실을 모두 자백받고 사형을 집행하였으며, 김환을 도배형(徒配刑)에 처하였다. 사헌부에서 김환을 국문하고 김익훈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가 상의 엄한 전교를 받았으며, 상이 얼마 후 김익훈을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대신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김익훈의 삭출을 청하여 조정(調停)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이해 여름에 소결로 인하여 김익훈이 방면되었다. 사헌부에서 김익훈의 방면 조치를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파직당하였으며, 옥당에서 한재(旱災)는 김익훈을 방면하였기 때문이라고 아뢰자, 상이 특별히 옥당의 관원을 체차하였다.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병조 판서로 주강(晝講)에 입시하였을 때에 아뢰기를,
“이 일은 맡은 부서가 별도로 있으니 신이 감히 지위를 벗어나 아뢸 수가 없으나 마침 경연관으로서 감히 소견을 아룁니다. 오늘날 두 신하를 꺾으심은 조정을 진정시키는 도리가 절대로 아니니, 마땅히 그 청원을 윤허해 주셔야 할 것이며 억지로 구차히 동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김중하와 김환의 일을 신이 일찍이 속으로 헤아려 보니, 어찌 전익대는 죽었는데 김중하는 살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중하는 다만 이수윤이 임금을 원망한다는 말로 고발하였으니, 무고라고 할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전익대 또한 참으로 고변한 일이 없었으나 오히려 죄에 걸려 죽었습니다. 더구나 김중하가 고발한 내용에 ‘큰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은 역모가 아니고 무엇이며 무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김중하의 무고는 실로 한 곳에서 분부를 받은 것이므로 지금 만약 조사하면 반드시 죄가 귀결될 곳이 있기에 상께서 이를 특히 어려워하신다고 하니, 이는 바로 여항에 떠도는 말로서 여러 사람들이 이 때문에 의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대론(臺論)이 격해져서 험악한 지경에 차차 이른다면 끝내 어떤 지경에 이를지 알 수 없으니, 신의 깊은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조 참판 박세채(朴世采)가 아뢰기를,
“옛사람의 말에 ‘공론이 위에 있으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아래에 있으면 어지럽다.’ 하였으니, 지금 여항의 인심이 진실로 남구만이 대답한 바와 같습니다. 지금 상께서 민심을 진정시키는 조처를 취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남구만이 아뢴 대로 하여야 비로소 합당하게 처리될 것입니다.”
하였다. 얼마 후 대신이 국론을 안정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명하여 우선 김익훈의 방면 조처를 환수하게 하였는데, 이해 겨울에 상의 두환(痘患)이 평상으로 회복된 것을 기념하는 사면으로 인해 다시 김익훈을 방면하였으며, 옥문을 크게 열어 김중하와 김환이 모두 석방되었다. 이해 1월에 집의(執義) 이굉(李宏) 등이 김환을 국문해야 한다는 논계(論啓)를 정지하였다. 2월에 빈청 인견 때에 지평(持平) 조상우(趙相愚)가 이굉 등을 체직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 특별히 체차되었다. 공이 민정중(閔鼎重)과 함께 조상우를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는 김환을 국문할 것을 거듭 청하였다. 3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김환의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할 것을 청하자, 상은 국상(國喪)의 우제(虞祭)가 지나기를 기다려 삼사를 불러 의논해서 정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윽고 오랫동안 처분이 없었다. 6월에 인견할 적에 대사헌 윤지선(尹趾善)이 입시한 대신들에게 하문할 것을 청하였다. 좌상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김환이 비록 죄줄 만한 점이 없으나 대론(臺論)이 더욱 격해져서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성상께서 만약 자신의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으시면 끝내 수습될 기약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은 좌상과 다릅니다. 전익대의 결안(結案)에 김환이 달래고 위협하여 무고하는 말을 더 보탰다고 말하였는데, 김환이 이것에 대해 명백히 해명한 일이 없습니다. 똑같은 죄목인데 전익대는 사형에 처하고 김환은 당초에 유배를 보낸 것은 적당하지 못한 듯하니, 사람들의 여론이 이 때문에 지금까지 가라앉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이 일은 일찍이 우상이 아뢴 바를 따라 신도 참작하여 진정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오랫동안 처분이 없으시니, 사람들의 마음이 참으로 답답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김환이 죄가 없다고 말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죄를 가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이미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서 참작하여 조처하신다면 죄의 경중을 정함에 있어 어찌 크게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예전 그대로 유배 보낸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반드시 불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먼 곳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공론(公論)은 “영상과 좌상 두 정승이 이미 ‘김환이 죄가 없다.’라고 말하고 억지로 진정시키기 위한 계책을 썼다.” 하여 양사에서 날마다 격론이 벌어졌다. 7월에 한해(旱害) 때문에 대신(大臣)과 삼사와 2품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고 빈청에서 인견하였는데, 이때 판중추부사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일부 사람들이 실직하여 원망하고 억울해해서 한해를 부르는 한 단서가 된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원한을 품은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으니, 지난번 김환과 김중하 등에게 무고당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입니다. 무릇 사람이 실직한 것도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데, 하물며 저들에게 무고당하여 대역죄에 빠진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일이 이미 사실무근인데도 악명(惡名)이 몸에 남아 있으니, 원통하여 죽고 싶은 마음이 어찌 실직했기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김중하의 죄는 김환에 비하여 더 무겁습니다. 만약 이수윤의 일을 김환의 공로라고 한다면 김중하를 살려 줄 수 있는 단서가 아닙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세상일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만약 밀고(密告)하는 문을 막는다면 국가를 위한 심원한 생각이 아니다.’ 하고, 혹자는 이르기를, ‘무고당한 사람의 죄가 사형에 이르지 않으면 무고한 자 또한 죄에 걸려 죽지 않는다.’ 하니, 이 두 가지 말은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그 죄에 따라 처벌하고 공이 있으면 그 공에 따라 상 주어서 확연히 공정하게 하면 화평한 복이 절로 그 가운데 있겠지만 만약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서 처분이 분명하지 못하면 어떤 화(禍)와 근심이 그 사이에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벌을 분명하게 내리고 법을 신칙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효종(孝宗) 정유년(1657, 효종8)에 무고한 당진(唐津) 사람을 즉시 처형하여 죽이는 것을 직접 보았고, 신이 청주(淸州)를 다스릴 때에 고을 사람이 양송(兩宋 송시열과 송준길)과 병사(兵使), 감사(監司)를 무고하자 불문곡직하고 즉시 죽였습니다. 그리고 전익대도 그가 무고한 자 중에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으나 자신은 또한 죄에 걸려 죽었습니다. 이제 조정의 의논이 괴리되어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것은 모두 김중하와 김환의 일 때문이니, 반드시 이 일을 먼저 바로잡은 뒤에야 나랏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환은 지적할 만한 죄명이 없고, 이수윤의 일은 비록 김중하와 무관하지는 않지만 선왕조에도 무고한 사람을 석방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대명률(大明律)》에 무고한 사람은 3000리에 유배하도록 되어 있고,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난언(亂言)을 한 자는 사형에 처할 중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비견하여 사형을 논하는 것이니, 남을 대역죄로 무고하는 것은 정상이 증오할 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조(仁祖) 때에 무고한 사람 중에 죽지 않은 자가 또한 많으니, 이는 진실로 밀고의 문을 막았다가 발생할 화를 염려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인조가 반정(反正)한 초기의 일시적인 처분은 그와 같은 화를 염려한 것이지만 현재는 성군(聖君)이 서로 계승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안정되었으니, 무고하는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을 걱정하여 재앙을 사라지게 하고 그치게 할 대책을 논하는 이때에 김중하를 처벌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으니, 오늘날에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나랏일은 일률적으로 논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당초의 소견을 바꾼 것이 아니요, 법조문으로 인하여 김중하의 일을 겸하여 아뢴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이때에야 김중하를 사형으로 논죄하는 형전(刑典)을 비로소 거론하였으나 끝까지 양단(兩端)을 유지하였다. 사관(史官) 원성유(元聖兪)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김 정승은 탑전(榻前)에서 말씀을 꺼내어 아뢸 때마다 성상께서 편치 않게 생각하시면 그때마다 중지하였으며, 남 정승은 말씀을 꺼내지 않을지언정 꺼냈다 하면 끝까지 다 말씀하지 않고는 중지하지 않았다.”
하였다. 10월에 인견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전익대의 결안(結案)에 있어 먼저 김환이 범한 죄를 결정한 뒤에 전익대를 처단했으면 실로 옥사(獄事)의 사체에 부합하는데, 전익대가 먼저 죽었는바, 그 결안을 저보(邸報)에 분명히 게재하고 팔방에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중외에서 모두 이르기를, ‘전익대는 김환에게 유인당하고 사주받았는데도 형벌을 받아 죽었고, 유인하고 사주한 김환은 홀로 형벌을 면했다.’라고 합니다. 조정에서 이미 김환을 유배하도록 명령했으면서 그의 죄를 분명히 밝히지 않는다면 대론(臺論)이 다시 격해질 뿐만 아니라 국법에 있어서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김환이 말을 더 보태고 첨가한 것은 전익대의 결안에서 나왔는데, 전익대가 살아 있을 때에 분명하게 분변하지 않았으니, 지금 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죄명을 정하되 허새(許璽)를 고변한 공으로 한 등급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러한 죄명으로 다시 전지를 봉입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양사에서 비로소 정계(停啓)하였다.
○ 이보다 앞서 중종(中宗) 때에 경연관(經筵官) 김안국(金安國)이 아뢰기를,
“우리나라에서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을 때에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강하고 있으나 공력이 충분하지 못해서 다만 책의 일부를 뽑아 입으로 외우는 것으로 시강(試講)하는 계책으로 삼으니, 학자들의 학식이 이 때문에 천박하고 고루해지는 것입니다. 신이 주자(朱子)가 논한 ‘과거의 규칙’을 보니, ‘식년시(式年試)마다 미리 어떤 경서(經書)를 시험 보이면 거자(擧子)들이 모두 그 경서를 공부할 것이다. 시험에 이미 급제한 자는 한 가지 경서에 정통하게 되고 낙방한 자도 한 가지 경서를 전공하게 된다. 다음번의 시험에 또다시 어떤 경서를 시험 보이면 급제한 자는 두 가지 경서에 정통하게 되고, 뒤에 또다시 이와 같이 하면 유생들이 모두 오경(五經)을 공부하여 공력이 또한 넉넉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방식을 따라서 오로지 경서를 공부하게 하소서.”
하니, 중종이 이를 깊이 옳게 여겼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공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인재를 물색하라는 명령에 따라 별단(別單)을 올려 아뢰기를,
“조정에서 만약 지방의 인재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유사에게 명하여 명경과(明經科)의 제도를 조금 바꾸어서 용렬한 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조적(朝籍)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그 7년 뒤에 공은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의 강독 절목(講讀節目)을 초안하였는데, 여기에 “매월 초하루에 경서 한 권을 읽게 하고 맹월(孟月)마다 대사성에게 나와 강(講)하고 질문하게 하면 3년 뒤에는 사서와 삼경을 거의 끝마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절목이 이미 갖추어졌으나 해임되어 이 절목을 반포하지 못하였다. 이해 9월 공이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별시(別試)의 강경(講經)은 병신년(1656, 효종7)의 별시에서 강경한 이후로 별시에 강경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옛날 규례에는 알성시(謁聖試)에도 강경이 있었으니, 지금부터는 삼백관시(三百館試)와 육백관시(六百館試)를 막론하고 모두 강경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명하여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이날 《심경부주(心經附注)》를 강하였는데, 여기에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다만 문장의 뜻을 깨달아 알려고만 한다면 비록 여러 경서를 모두 통달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이로 인해 느낀 바가 있어 또다시 아뢰기를,
“경서를 공부하는 자가 비록 글 뜻을 통달하여 알고 한 글자도 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만약 자기 몸에 돌이켜 실행하는 공부가 없다면 또한 유익함이 없습니다. 더구나 글 뜻을 전혀 알지 못하면서 오직 한 글자도 틀리지 않기를 구한다면 폐단이 장차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조정에서 과거를 설행하여 인재를 뽑아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어찌 매우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식년의 문과는 3년마다 33명을 뽑으니 혹 쓸 만한 한두 명의 인재가 없지 않으나 대부분 입으로 외는 것만을 일삼아 원래 글 뜻을 알지 못합니다. 먼 지방의 무식한 사람들은 혹 어려서부터 언문(諺文)으로 경서를 외우고 익히기도 하니, 과거에 급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서찰(書札)을 써서 주고받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오히려 이보다 더 진전되기를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이르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다만 명경과(明經科)만 있었으나 문장을 잘하는 훌륭한 분이 여기에서 많이 나왔으니, 이제 만약 글 뜻을 많이 묻고 또 제술(製述)로 생획(生畫)의 과정을 거쳐 뽑는다면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다.’라고 하니, 이 말이 그럴 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강(講)하는 규정이 어떠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의 경우를 가지고 말한다면 주(注) 가운데 한 글자를 가감하고 언해(諺解)의 해석 하나와 토(吐) 하나가 틀리는 데에서 합격과 낙방이 모두 결정되니, 만일 사서와 삼경을 다 외우면서 글 뜻을 통달하고 제술을 잘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실로 중인(中人) 이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주자의 ‘학교사의(學校私議)’를 모방하여 사서 이외에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경(春秋經)》을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의 네 식년(式年)에 나누어 배정해서 사서와 한 가지 경서를 돌려가면서 강하게 한다면 익히고 외는 공부가 예전보다 크게 줄어들 것이니,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들도 모두 기꺼이 하려 할 것이고, 네 가지 경서 중에 한 가지에만 치우칠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서와 경서 한 가지로 연획(連畫)한 자를 뽑는다면 문장을 잘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많이 선발될 것입니다. 이렇게 한 뒤에야 글의 뜻을 물을 수 있고 생획이 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 명경과의 폐단만 문제가 아닙니다. 제술과(製述科)로 급제한 신과 같은 무리들도 과거 공부할 때에 식년시의 강경에 응시하는 것은 애당초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니, 명경과 제술이 서로 방해가 됩니다. 만약 사서와 한 가지 경서를 강하는 규정을 시행한다면 사람마다 모두 익히고 외워서 네 차례 식년을 거친 뒤에는 반드시 네 가지 경서를 다 읽은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릇 제술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 중에도 경학(經學)을 한 선비가 많아질 것이니, 어찌 둘 다 모두 합리적으로 되고 또 인재를 육성하는 효험이 있지 않겠습니까.
일찍이 선왕조에 신이 대사성이 되어 지관사(知館事)인 조복양(趙復陽)과 동지관사(同知館事)인 박장원(朴長遠)과 함께 이 일을 의논할 때에 모두 신의 말을 옳다고 하였으나 그때 묘당(廟堂)의 신하 중에 혹자가 말하기를, ‘옛 법을 갑자기 바꾸기 어려우니, 이렇게 하면 먼 지방 사람 중에 급제하는 자가 반드시 적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것을 어렵게 여기는 자가 많으나 과거를 설행한 뜻은 본래 인재를 얻는 데 있으니, 그 경중을 비교해 보면 어찌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식년과가 명경과라고는 하지만 전후의 방목(榜目)을 살펴보면 끝내 크게 쓸 만한 인물이 없으니, 우상이 말한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크게 변통하는 것이니, 다른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품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이 대부분 고식적이어서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2년 뒤 겨울에 우상 이단하(李端夏)가 공의 의견을 따라 금년 식년시부터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막혀 시행되지 못하였다.
○ 9월에 공은 정시(庭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어 신필청(申必淸) 등을 뽑았다.


 

[주D-001]부북군(赴北軍) : 북쪽 지방으로 방수(防戍)하러 나가는 군사를 이른다.
[주D-002]입방(立防)과 습조(習操) : 입방은 번을 서서 방어함을 이르고, 습조는 습진(習陣)과 군사 조련(操鍊)을 이른다.
[주D-003]복호(復戶) : 조선조 때 군인과 양반의 일부 및 궁중의 노비 등 특정한 대상자에게 조세(租稅)나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는 것을 이른다.
[주D-004]학직(學職) : 성균관이나 향교 등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벼슬을 이른다.
[주D-005]오삼계(吳三桂) : 요동(遼東)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산해관(山海關)을 지켰다. 이자성(李自成)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하고 그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빼앗아 가자, 마침내 청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와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청나라가 제국을 세운 뒤에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雲南)에 진주하여,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청나라 초기 사번(四藩)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청나라가 번진(藩鎭)을 철폐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모두 점령하였으나 곧 병사(病死)하였고 손자인 오세번(吳世璠)의 대에 이르러서 청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淸史稿 卷480》
[주D-006]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를 이른다.
[주D-007]오경(吳耿)의 …… 뒤 : 오삼계(吳三桂)와 경중명(耿仲明)이 반란하여 군대를 일으킨 사건을 이른다. 오삼계는 요동(遼東) 사람으로 명나라 말기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산해관(山海關)을 지켰다. 이자성(李自成)이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함락하고 그의 애첩인 진원원(陳圓圓)을 빼앗아 가자, 마침내 청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북경으로 들어와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 청나라가 제국을 세운 뒤에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지고 운남(雲南)에 진주하여,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定南王) 공유덕(孔有德),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과 함께 청나라 초기 사번(四藩)으로 일컬어졌다. 뒤에 청나라가 번진(藩鎭)을 철폐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켜 남부 지방을 모두 점령하였으나 곧 병사(病死)하였고 손자인 오세번(吳世璠)의 대에 이르러서 청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淸史稿 卷480》 경중명은 원래 산동(山東) 사람이었는데 뒤에 개주위(蓋州衛)로 옮겼는바, 명나라 말기 등주(登州)의 참장(參將)으로 있다가 청나라에 항복하고 조선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이자성을 토벌하고 정남왕(靖南王)에 봉해졌으나 번진이 철폐되자, 반기를 들었다. 《淸史稿 卷335》
[주D-008]고부사(告訃使) : 고부단사(告訃單使)를 이르는바, 국상이 났을 때 이를 알리기 위하여 중국에 보내는 사신이다. 국상을 알리고 새 임금의 즉위에 대한 중국 측의 승인을 얻는 것이 소임이었으며, 상사(上使)와 부사(副使)의 구별이 없으므로 단사(單使)라고 하였다.
[주D-009]복창군(福昌君) …… 이남(李柟) : 둘 다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이고 인조(仁祖)의 손자인데, 이들은 현종(顯宗)의 총애를 믿고 궁중에 무상출입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1680년(숙종6)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당시에 영의정 허적(許積)의 서자인 허견(許堅)과 함께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 해서 모두 사사(賜死)되었다.
[주D-010]피부에 …… 비방 : 《논어》 〈안연(顔淵)〉에 자장(子張)이 공자(孔子)께 밝음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씀하기를, “물처럼 점점 스며드는 비방과 피부에 와 닿는 듯한 통절한 하소연이 먹히지 않는다면 밝다고 이를 만하다.〔浸潤之譖 膚受之愬 不行焉 可謂明也已矣〕”라고 하였다.
[주D-011]급사(給舍) : 왕명의 출납을 맡는 자리로, 우리나라의 승정원과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宋史 卷161 職官1》
[주D-012]무장(無將) : 임금이나 부모를 위해(危害)하려는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됨을 이른다. 춘추 시대 노 장공(魯莊公)의 아우인 숙아(叔牙)가 장공을 시해할 생각을 굳히자, 숙아의 아우인 계우(季友)가 숙아에게 독약을 먹고 자살하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32년 조에 “공자 아가 지금 시해하려는 생각만을 가졌을 뿐인데, 글이 어찌하여 직접 시해한 자와 동일하게 다루었는가? 군친에게는 시해할 생각조차도 가져서는 안 된다. 가지기만 하여도 베어 죽이는 것이다.〔公子牙今將爾 辭曷爲與親弑者同 君親無將 將而誅焉〕” 하였다.
[주D-013]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사형할 죄인을 재심하는 것을 이른다. 승정원에서 추분(秋分) 후에 계품하여 9월, 10월 중에 날짜를 정해서 시행하였다.
[주D-014]대계(臺啓) :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이른다.
[주D-015]말의(末擬) : 말망(末望)으로 주의(注擬)함을 이른다. 관리를 임명할 때 전형(銓衡)을 맡은 아문에서 합당하다고 여기는 세 사람의 후보자로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는데, 삼망의 끝자리에 추천된 사람을 말망이라 한다.
[주D-016]현도(縣道) : 직접 상소를 올리지 아니하고 지방 관서(官署)를 통하여 올린 것이다.
[주D-017]정계(停啓) : 양사(兩司)의 전계(傳啓)에서 해당 사안을 빼 버리는 것을 이른다.
[주D-018]한나라 …… 하였고 : 급암(汲黯)은 당시 근엄하고 올곧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한 무제(漢武帝)가 그에게 우내사(右內史)를 맡겨 조정의 명령에 순응하지 않는 귀족과 외척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19]선제(宣帝) …… 따졌으니 : 조광한(趙廣漢)은 청렴하고 강직하여 고을을 잘 다스렸으나, 사사로운 원한으로 영축(榮畜)이라는 사람을 죽였는데,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고발하였다. 이 사건을 승상부(丞相府)에 내려 어사(御史)가 조사하려 하자, 조광한은 승상의 부인이 몸종을 죽인 것을 문제 삼아 이것을 가지고 승상을 위협하였다. 조광한은 결국 이 일로 황제의 미움을 받아 요참형(腰斬刑)을 당하였다. 《漢書 卷76 趙廣漢傳》
[주D-020]경도(京都)의 사산(四山) : 서울의 사면에 둘러 있는 백악산(白岳山), 목멱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 타락산(駝酪山)의 네 산을 이른다.
[주D-021]손을 올리고 내림 : 법을 농간함을 이른다. 춘추 시대에 초(楚)나라가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천봉술(穿封戌)이 정나라 장수 황힐(皇頡)을 사로잡았다. 공자(公子) 위(圍)가 그의 공을 가로채려 하여 서로 다투다가 백주리(伯州犁)에게 처리해 줄 것을 청하니, 백주리는 “황힐에게 물어보자.” 하였다. 갇혀 있던 황힐이 나와 증인이 되자, 백주리는 공자 위를 편들려는 마음이 있어 고의로 그의 손을 들어 올리면서 “이분은 왕자 위(圍)이시니 우리나라 군주의 귀한 아우이시다.” 하였고, 천봉술의 손을 내리면서 “이 사람은 천봉술이니 방성(方城) 밖의 현령이다. 누가 그대를 사로잡았는가?” 하고 물으니, 황힐은 백주리가 왕자의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고는 “나는 왕자를 만나 사로잡혔다.”라고 거짓으로 대답하였다. 이후로 손을 올리고 내리는 행위는 사정을 보아 법을 농간함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春秋左氏傳 襄公26年》
[주D-022]금송(禁松) : 법으로 벌목이 금지된 소나무를 이른다.
[주D-023]전가(全家) : 전가죄인(全家罪人)의 줄임말로, 죄인의 전 가족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바, 첫 번째는 역모(逆謀)와 같은 대죄를 범했을 경우 가족은 전부 중죄인으로 처리되어 장유(長幼), 남녀 및 관계의 구별에 따라 사형 또는 노비로 입역(入役)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비교적 경질(輕質)의 죄인으로서 북변(北邊) 국경 지방의 개척 정책에 의거하여 가족 전부를 북쪽 국경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다.
[주D-024]소결(疏決) : 국가에서 특별한 경우에 전국의 죄수를 다시 심리(審理)하여 너그럽게 처결하는 것을 이른다.
[주D-025]비흥(比興)의 …… 도리 : 비(比)와 흥(興)은 각각 시체(詩體)의 하나로, 비는 비유법이고 흥은 어떠한 사물을 먼저 말하여 실제 읊으려는 내용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며, 멀고 가까운 도리란 시를 배우면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邇之父母 遠之事君〕”라는 말을 이른 것이다. 《論語 陽貨》
[주D-026]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 : 역적을 토벌한 사실을 알리는 반교문을 이르는바, 반교문은 임금이 반포하는 교서이다. 이때 영상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이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는바, 이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 한다.
[주D-027]납약(臘藥) : 해마다 납일(臘日)에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약으로, 청심원(淸心元),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 등인데, 내의원(內醫院)에서 조제하였다.
[주D-028]양서(兩西)와 동북(東北) : 양서는 해서(海西)인 황해도와 관서(關西)인 평안도를 가리키며, 동북은 함경도를 가리킨다.
[주D-029]주(周)나라의 …… 풍패(豐沛) : 제왕의 발상지(發祥地)를 이른다. 빈(豳)은 빈(邠)으로도 쓰는바, 주나라는 원래 빈에 도읍하였다가 북적(北狄)의 침공을 받고 기산(岐山) 아래 주(周) 땅으로 천도하였는데, 뒤에 천하를 소유하였다. 패(沛)는 사수군(泗水郡)의 속현(屬縣)이고 풍(豐)은 패현(沛縣)의 작은 고을인바, 한(漢)나라를 개국한 유방(劉邦)은 원래 패현 풍읍의 양리(陽里) 사람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관향이 전주(全州)이고 그 선조가 함경도의 함흥(咸興) 등지에 살았으므로 함흥과 그 일대 및 전주 지방을 풍패지향(豐沛之鄕)이라 칭하였다.
[주D-030]삼조(三曹)의 낭관(郞官) : 삼조는 호조, 형조, 공조의 합칭이고, 낭관은 정랑(正郞)과 좌랑(佐郞)을 가리킨다. 삼조는 이조, 예조, 병조에 비하여 격이 떨어졌다.
[주D-031]일월(日月)을 배태(胚胎)한 곳 : 일월은 제왕을 의미하는바, 곧 함경도가 조선의 태조를 탄생시킨 곳임을 말한 것이다.
[주D-032]예양(豫讓) : 춘추 시대 말기 진(晉)나라의 자객(刺客)이다. 지백(智伯)이 조양자(趙襄子)의 공격을 받아 죽고 지씨(智氏) 일족이 멸망당하자,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우한 지백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조양자를 살해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 후 자신의 모습을 숨기기 위해 숯불을 삼켜 벙어리가 되고 전신에 옻을 칠하여 문둥병을 앓는 사람처럼 꾸며 다리 밑에 숨어 조양자를 죽이려 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양자에게 잡혀 죽었다. 《通鑑節要 卷1 周紀》
[주D-033]서추(西樞) : 중추부(中樞府)를 이른다. 중추부는 서반(西班)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주D-034]호수(戶首) : 정군호수(正軍戶首)를 말한다. 출역하는 군사인 정군을 호수라 하고, 그 호수가 거느린 보인(保人)을 솔호(率戶)라고 일컫는다.
[주D-035]고립(雇立) :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어 부역(賦役)이나 병역(兵役) 따위의 공역(公役)을 치르게 함을 이른다.
[주D-036]인정포(人情布) : 공물을 바칠 때 잘 봐 달라는 뜻으로 벼슬아치들에게 뇌물로 주는 베를 이른다.
[주D-037]어록체(語錄體) : 송나라 때 학자들이 후진의 교도(敎導) 및 편지에 필요한 당시의 속어(俗語)를 수집하여 구어체(口語體)로 기록한 것을 이른다.
[주D-038]천연(天淵) : 매우 큰 차이가 남을 비유하는 말이다.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못 속에서 뛰어 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말에서 기인하여,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詩經 大雅 旱麓》
[주D-039]계차이후(繼此以後) : ‘이 뒤로는’이란 뜻이다.
[주D-040]공유(恭惟) : ‘공손히 생각건대’라는 뜻이다.
[주D-041]만과(萬科) : 1616년(광해군8)에 변경의 사정이 날로 급박하고 또 응시자를 모두 서울에 모으기가 어렵다 하여 승지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널리 무사를 뽑았는바, 모두 합하여 1만여 명에 이르니, 당시에 이를 만과라 일컬었다.
[주D-042]내삼청(內三廳) : 내금위(內禁衛), 겸사복(兼司僕), 우림위(羽林衛)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주D-043]신(身)ㆍ언(言)ㆍ서(書) : 사람을 선별할 때에 기준으로 삼는 조건으로, 신은 신체를 이르고 언은 말솜씨이고 서는 문필을 이른다. 여기에 판(判) 즉 판단력을 더 보태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였다.
[주D-044]예고부조반교문(預告不祧頒敎文) : 부조(不祧)는 사당에서 체천(遞遷)하지 않는 것이다. 미리 사당에 체천하지 않는다고 고유(告由)하면서 반포한 교서(敎書)이다.
[주D-045]구일제(九日製) :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로, 해마다 9월 9일에 보이는 과거(科擧)를 이르는바, 국제(菊製)라 별칭하기도 한다. 오순절제는 철따라 보이는 다섯 가지 과거로 인일제(人日製), 삼일제(三日製), 칠석제(七夕製), 구일제(九日製), 황감제(黃柑製) 등이다.
[주D-046]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궁중의 사온서(司醞署)에서 빚은 술을 내림을 이른다.
[주D-047]무겸(武兼) :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의 약칭으로, 무관이 선전관을 겸직한 것이다.
[주D-048]명관(命官) : 임금이 과장(科場)에 친림(親臨)하는 시험을 대신 주재하도록 임명한 시관(試官)을 이른다.
[주D-049]변려문(騈儷文) : 변문(騈文), 변체(騈體)라고도 칭하는바, 4자(字)와 6자를 기본으로 대우(對偶)를 이루어 짓는 것으로 선진(先秦)의 이사(李斯)가 지은 〈간축객서(諫逐客書)〉와 전한(前漢) 시대 가의(賈誼)의 〈과진론(過秦論)〉 및 사부(詞賦)에서 비롯하였는데, 육조(六朝) 시대에 성행하다가 당나라 때 한유(韓愈)의 고문복구(古文復舊) 운동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주D-050]삼중(三中) : 시문(試文)을 평정하는 아홉 등급 중 여덟째 등급을 이른다.
[주D-051]종장(終場) : 사흘에 나누어 보이는 과거의 마지막 날 시험장을 이른다. 첫날의 시험장을 초장(初場), 둘째 날의 시험장을 중장(中場)이라 이른다.
[주D-052]문감(文鑑) : 문장을 감별하는 안목을 이른다.
[주D-053]회천(懷川) 정승 : 송시열을 말한다.
[주D-054]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追贈)될 경우, 사령장(辭令狀)과 황색 종이에 쓴 사령장의 부본(副本)을 받아 그 자손이 추증된 선조의 묘소 앞에서 이를 고하고 황색 종이의 부본을 불태우는 의식을 이른다.
[주D-055]도목대정(都目大政) : 도목 정사(都目政事)와 같은 말로, 매년 6월과 12월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관리들의 성적을 고과(考課)하여 인사(人事)를 결정함을 이른다.
[주D-056]가복(加卜) : 정승을 임용하는 절차 가운데 하나로, 정승 후보자를 천거하는 데 임금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는 경우에 다른 후보자를 추가하여 다시 천거하게 함을 이른다.
[주D-057]정금사(鄭錦舍) : 명나라 말기의 군벌(軍閥)이다. 일본 사람들이 정금(鄭錦)을 일컬어 금사(錦舍)라고 하여 사(舍) 자를 붙였는바, 이는 《맹자(孟子)》에 맹사(孟舍)를 맹시사(孟施舍)라고 칭한 것과 같다.
[주D-058]세초(歲抄) : 사망 또는 도망하거나 병에 걸린 군병을 조사하여 결원을 보충하는 것으로 6월과 12월에 두 차례 실시하였다.
[주D-059]한정(閑丁) : 국역(國役)에 나가지 않는 장정을 이른다.
[주D-060]투속(投屬) : 자기 몸을 남에게 종속시킴을 이르는바, 공사천(公私賤) 또는 양민이 신공(身貢)ㆍ조세(租稅)ㆍ공물(貢物)ㆍ군역(軍役) 등의 무거운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왕실(王室) 직속의 내수사(內需司) 또는 대군(大君)ㆍ제군(諸君) 및 권력가 등에게 스스로 의탁함을 이른다.
[주D-061]삼의사(三醫司) : 의료를 맡은 세 관사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를 통칭한다.
[주D-062]창준(唱準) : 소리를 내어 읽어 가면서 교정을 보는 것을 이르는바, 교서관에 소속되어 책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잡직이다.
[주D-063]아병(牙兵) : 본진에서 대장을 수행하던 병사를 이른다.
[주D-064]모속(冒屬) : 해당 사항이 없는 자가 허위로 들어가 소속되는 것을 이른다.
[주D-065]숙종 …… 때 : 경신년은 1680년(숙종6)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남인 일파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집권하여 정국이 크게 바뀐 때를 이른다.
[주D-066]아약(兒弱)과 도고(逃故) : 아약은 14세 이하의 어린아이를 이르고, 도고는 도망한 자와 물고(物故) 난 자를 이른다.
[주D-067]아약제군영사불망비(兒弱除軍永思不忘碑)를 산음현(山陰縣)에 세웠다 : 이 비는 아약에게 군포를 면제해 준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내용의 비이며, 산음현은 지금의 경남 산청군(山淸郡)이다.
[주D-068]소결(疏決) : 국가에서 특별한 경우에 전국의 죄수를 다시 심리(審理)하여 너그럽게 처결하는 것을 이른다.
[주D-069]김익훈(金益勳) : 1619~1689. 자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본관은 광산으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이고 참판 김반(金槃)의 아들이다. 1680년(숙종6) 복창군(福昌君)ㆍ복선군(福善君)ㆍ복평군(福平君) 등이 허견(許堅)과 반역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경신대출척에 적극 참여하여 김석주(金錫胄)와 함께 남인들을 몰아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그 공으로 보사 공신(保社功臣) 2등에 녹훈되고 광남군(光南君)에 봉해졌다. 1682년 김석주와 함께 남인의 허새(許璽)ㆍ허영(許瑛)ㆍ유명견(柳命堅)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계략을 꾸며 남인을 뿌리 뽑으려 했으나 서인 내부의 소장파인 한태동(韓泰東)과 조지겸(趙持謙) 등이 이를 반대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이 분열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주D-070]군뢰(軍牢) :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을 이른다.
[주D-071]삭출(削黜) :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함을 이른다.
[주D-072]복역(覆逆) : 임금이 내린 명령을 부당하다고 하여 재고(再考)하라고 돌려보냄을 이른다.
[주D-073]두 신하 : 김익훈의 삭출을 청한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주D-074]한 곳 : 김익훈을 말한다.
[주D-075]조적(朝籍) : 관원의 명부를 이른다.
[주D-076]맹월(孟月) : 사맹삭(四孟朔)으로,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의 각 첫달인 음력 1월, 4월, 7월, 10월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D-077]삼백관시(三百館試)와 육백관시(六百館試) : 관시(館試)는 성균관 유생이 보는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를 이른다. 대과(大科)의 초시는 한성부(漢城府)와 팔도(八道)에서 보았으나, 관시는 국가나 조정에 경사가 있을 경우 성균관의 생원과 진사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치른 별시(別試)의 일종으로, 합격자의 정수가 300명일 경우에는 삼백관시 또는 삼백별시(三百別試)라 하고 600명일 경우에는 육백관시 또는 육백별시(六百別試)라 하였다.
[주D-078]생획(生畫) : 식년(式年) 문과(文科) 복시(覆試)에서는 33인을 취하게 되어 있는데, 초장(初場)인 강서(講書) 시험에서 14분(分) 이상을 받은 사람으로 정원 중 32인을 뽑고 나머지 1인은 조(粗)나 약(略)을 받아 입격하지 못한 사람에게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뽑는다. 그러나 강서 시험 결과 입격자 수가 32인에 차지 않을 경우에는 나머지 인원을 모두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뽑는다. 또 입격자 수가 32인을 넘을 경우에는 14분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강서의 비교(比較)를 보여 32인을 채우고 탈락된 사람은 다시 제술 시험에 응시하도록 한다. 이렇게 다시 제술 시험을 보여 입격자를 뽑는 것을 생획이라고 하는데, 입격자를 뽑을 때 강서 시험의 점수를 살려 제술 시험 점수와 합산하기 때문에 생획이라 부른 것이다. 이들 입격자는 전시(殿試)에 응시하게 된다.
[주D-079]연획(連畫) : 시험 성적의 점수를 획(畫)이라 하는바, 연달아 일정한 점수를 얻는 것을 이른다.

 

 

약천연보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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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57세 을축년(1685, 숙종11)
2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4월에 복명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이달에 공이 차자를 올려 서로(西路)의 옥사에 대해 아뢰자, 상은 이홍술(李弘述)에게 죄를 더하도록 명하였다.
5월에 좌의정으로 전직하였다.
6월에 인견할 때에 공은 영소전(永昭殿)에서 희생을 사용하는 것이 온당치 못함을 아뢰고 다시 의논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희생을 사용하지 않게 하였다. 이달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렸는데 상이 승지와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재차 정사를 올리자, 도승지와 함께 오도록 명하고, 이날 승지와 함께 오도록 거듭 명하니, 공이 이달에 출사하였다.
7월에 사직단(社稷壇)에 직접 제사 지내는 기우제의 아헌관(亞獻官)으로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공은 남교(南郊)에서 지내는 기우제의 헌관에 차임되었는데 비가 내리자 말을 하사받았으며, 이달에 제주(濟州)에서 바친 말을 하사받았다.
8월에 명을 받들어 후릉(厚陵)을 봉심하였다. 청나라의 질책하는 말로 인해 책임을 지고 정사를 올렸다.
9월에 다섯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여덟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열일곱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10월에 서른한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해임을 허락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를 제수하였다.
11월에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12월에 청나라 사신이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조사하여 묻는 일로 인해 공은 의금부 당상관과 함께 길을 떠나 중화(中和)에 갔다가 돌아왔다.

○ 2월에 귀국길에 올랐다.
4월에 복명하였는데, 서로(西路)에서 들은 것을 가지고 차자를 올려 세 가지 옥사에 대해 아뢰었다. 이보다 앞서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홍술(李弘述)이 청강 만호(淸江萬戶)와 함께 모문룡(毛文龍)이 땅에 묻어 놓은 은(銀)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자, 은을 얻어 도망친 토졸을 놓친 것에 분노하여 진영(鎭營)의 군관에게 주뢰(周牢)의 형벌을 시행하여 죽게 만들었으며, 또 죽은 자의 아비가 거슬리는 말을 했다 하여 엄한 형장(刑杖)을 가해서 죽게 만들었는데, 의금부에서는 사람의 죄를 판결할 때에 법대로 하지 않은 죄를 적용하여 이홍술의 고신첩(告身帖)을 빼앗았다. 이에 이르러 공은 다시 이홍술을 무거운 법으로 처리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이홍술의 죄를 감하고 또 감하여 형벌을 남용한 죄보다도 가볍게 하였으니, 형벌의 경중에 기준이 없습니다. 관리 된 자가 국법을 두려워하며 조심하는 바가 없으니, 초가삼간에 살면서 울부짖고 원통해하며 애통한 마음을 품고 있는 저 군관의 아내와 고아들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이에 앞서 계해년(1683, 숙종9)에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 정제선(鄭濟先)이 관서(關西) 지방을 지나다가 외가의 배반한 노복 3명과 계집종의 남편 2명 및 양인(良人) 1명을 형추(刑推)하여 모두 죽게 만들었는데, 지난해 가을에 사간원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정제선을 나문(拿問)하고 본도에서 조사하였다. 이해 겨울에 의금부에서 상의 재가를 청하여 아뢰기를,
봉명(奉命)한 신하는 일반인들이 싸우다가 때려 사람을 죽인 것과는 구별이 있어서 일찍이 상명(償命)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별도로 판부(判付)할 적에 효종조(孝宗朝)에서 장령(掌令) 이증(李曾)이 사람을 죽인 일로 곤장을 맞아 죽은 일을 인용하며 복주(覆奏)한 것을 되돌려 주니, 판의금부사 여성제(呂聖齊)와 지의금부사 조사석(趙師錫)이 아울러 체차되었으며, 의금부에서는 대신들에게 상의할 것을 청하였다. 이해 1월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양민을 함부로 죽인 죄는 다시 핑계 댈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고 사람은 관청의 사람이 아닌데, 똑같은 예(例)로 취급하여 가볍게 처벌한다면 신은 옛날 법을 제정한 뜻이 진실로 이와 같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과연 근거할 만한 법과 전례가 있다면 참작하여 처리하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도일 듯합니다.”
하였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때에 봉명한 두 사람이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죽였는데 모두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였습니다.”
하며 추후의 법령을 반포할 것을 청하니, 김수항이 그 말에 동조하여 마침내 정제선을 유배 보냈다. 2월에 상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대간(臺諫)들이 정제선의 사형을 용서해 준 일을 간쟁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사헌부에서 형률대로 적용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공은 속히 윤허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옥사를 의논하여 형벌을 완화하는 것은 비록 왕자(王者)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살인자에 대한 형률은 용서해 준다는 법조문이 있지 않고, 노쇠한 자에게 형벌을 면제해 주는 것은 비록 주(周)나라의 아름다운 제도이나 사람을 죽인 자는 나이가 70세가 되고 80세가 되었다 해도 노쇠하다 하여 죄를 면제해 준 적이 없습니다. 그 본심을 따져 보는 것이 죄를 결정하는 통상적인 규례이나 사람을 죽인 자는 비록 잘못하여 죽이고 장난하다 죽여서 본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용서해 주기를 허락하지 않으니, 이는 어찌 죽음을 당한 자가 가엾어서 상명(償命)이 아니고는 그 원통함을 풀어 줄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의금부의 의계(議啓)에 이른 바 ‘봉명한 신하는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라는 것은 또 고금의 경전과 법률에 들어 보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봉명한 신하는 일반인과 차이가 있다고 하여 사람을 죽였더라도 상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면, 일반인과 분명하게 다른 천자(天子)의 아버지를 고요(皐陶)가 감히 붙잡는단 말입니까.
약법삼장(約法三章)에 다만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인다고만 말했을 뿐이고 신분의 귀천과 존비의 구별이 없는데, 역대에 이것을 공통으로 시행하여 대경 대법(大經大法)으로 지켜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봉명한 사신이라고 핑계 대어 대신(大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으니, 이것을 과연 천하의 공평한 법이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대신의 이른바 ‘일은 공적인 일이 아니고 사람은 관청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또한 이 옥사를 잘 판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에는 인조와 현종 두 조정의 전례대로 사형을 감하여 유배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나라의 법령이 너그러워 죄인을 함부로 풀어 준 지가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죽이고서 의금부에 들어간 자들이 이증(李曾) 한 사람 외에는 용서를 받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어찌 봉명하였는가 봉명하지 않았는가를 따진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종전에 사람을 죽인 자에게는 비록 정법(正法)을 적용하지 못했더라도 또한 반드시 여러 해를 형추(刑推)한 뒤에야 비로소 사형을 감면하는 논의를 하라는 명령이 내렸는데, 정제선의 경우는 의금부에서 애당초 의계(議啓)할 적에 본래의 형률을 버리고 곧바로 성상의 재가를 청하였습니다. 비록 성상의 하교가 엄하시어 상주한 신하를 견책하셨으나 뒤이어 아뢴 자가 오히려 감히 법을 집행하지 못하고 또다시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여 살려 주자는 의논에 붙였습니다. 이에 전하께서도 법을 굽혀 따르지 않으실 수가 없었으니, 저 대간(臺諫)들이 고집하여 간쟁하지 못함을 또 어찌 이상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이미 성상의 재가를 청한 것을 가지고 의금부를 견책하셨고, 또 논쟁하여 고집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대관(臺官)들을 허물하셨으니, 그렇다면 정제선의 죄가 죽어야 마땅함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위엄을 펴고 복을 내리는 권세가 본래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형벌하고 죽이는 것을 한결같이 성상의 마음에서 결정하셔야 할 터인데, 또 어찌 대관들의 말을 기다린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만약 나의 처지에서는 비록 법을 굽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대관의 처지에서는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신 것이라면, 인조 때 김경징(金慶徵)의 일과 자못 유사합니다. 김경징이 강도(江都)를 지키다가 실패한 뒤에 대간들이 형률대로 처리할 것을 청원하다 오래지 않아 정지하자, 인조께서 사사로운 일 때문에 정계(停啓)하였다고 준엄한 하교를 내리시니, 대관(臺官)들이 부득이 다시 그 의논을 제기하였습니다. 이때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기를, ‘임금은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쥐고 있는데, 신하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양사(兩司)의 손을 빌리고자 하십니까. 전하께서도 오히려 두려워하신다면 양사의 신하들이 유독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인조께서는 크게 노하시고 명을 내리시어 김경징의 죄를 바로잡으셨습니다. 오늘날 어리석은 신이 전하께 기대하는 것이 실로 유백증의 뜻과 같으며, 또한 전하께서는 인조께서 어기지 않으신 것을 법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또 듣건대 전하께서 정제선을 용서해 주신 뒤에 또다시 새로운 법령을 세우시어 ‘지금 이후로는 봉명한 사신이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 상명(償命)하게 하라.’ 하셨다 하니, 신은 이에 더욱 개탄스럽고 애석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옛날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즉위한 지 9년이 되어도 정사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아읍(阿邑)의 대부(大夫)를 삶아 죽이자, 제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잘못을 속여 꾸미지 못하고 그 실제에 힘써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습니다. 만일 혹 위왕이 아읍 대부의 죄를 법이 정해지기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우선 놓아주고서 다시 법을 세우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 만약 전야(田野)를 제대로 개척하지 않으면서 측근의 신하에게 뇌물을 써서 자신을 왕에게 칭찬해 주기를 구하는 자가 있으면 내 반드시 삶아 죽이겠다.’라고 하였다면, 어찌 그 아랫사람들에게 더욱 경시(輕視)당하는 데 이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봉명한 사신으로서 사람을 죽인 자를 만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여기신다면 정제선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으며, 정제선의 죽음을 만약 감면해도 된다고 여기신다면 후일에 봉명한 자가 어찌 반드시 죽는 데 이르겠습니까.
이와 같이 법을 세운다면 백성들이 전하의 마음의 깊이를 엿보아 더욱 경시하고 함부로 대하려는 마음을 열어 놓게 할 것이니, 새로 정한 법령이 반드시 후일에 행해지지 못하리란 것을 또 누구인들 미리 헤아려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개성부(開城府) 대흥산성(大興山城)의 별장(別將)이 창고에 있던 수백 냥의 은(銀)을 잃고는 고지기가 훔쳐 갔다고 의심하고 그의 어린 아들을 신문하여 입증(立證)하였다. 이에 비로소 차례로 조사하여 고지기에게 자백을 받고 포도청으로 이송하니, 포도대장 신여철(申汝哲)이 아뢰기를,
“그 아들의 공초(供招)는 명백한 증거의 단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성상께서 ‘자식으로서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하교를 이제 막 내리셨으니, 비록 이러한 명령이 내리기 전에 받은 공초라 하더라도 자식의 공초를 신빙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차례로 자복한 내용을 형조에 내려 은을 훔쳐 간 자를 참형에 처하게 하였다. 이때에 공은 별장과 포도대장, 형조의 당상관을 질책하여 파면할 것을 청하고 아뢰기를,
“형벌을 가하여 악을 징계하는 것은 본래 정치를 보완하는 방책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도의(道義)로 향하게 하고자 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자식으로 하여금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하여 처단하는 죄가 성립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이치를 끊어 버리고 윤리강상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나라가 올바른 나라가 되고 사람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저 대흥산성의 별장은 진실로 꾸짖을 것이 못 됩니다. 그러나 포도대장과 형조의 당상관으로 말하면 국가의 중신(重臣)이 되어서 도둑을 다스리고 법률을 담당하고 있는데, 또한 이 일을 놀랍게 여기지 않고 규례대로 판결하는 등 태연스레 일상적인 것으로 여겼으니, 아, 이것을 백성들에게 보인다면 어찌 추악한 소문이 일지 않겠습니까.
이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이미 그 자식에게 물어서 그 아비의 죄가 성립되었는데, 옥사를 결단할 즈음에 이것을 신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부자간에 서로 숨겨 주는 것은 본래 성인(聖人)의 교훈이니, 자식으로서 아비의 죄를 입증하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그 누구인들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마침내 지난날 성상의 하교로 신칙하신 것을 마치 새로 나온 명령인 것처럼 여겨서 이러한 명령이 내려지기 전이라고 말하였으니, 그렇다면 성상의 하교가 내리기 전에는 본래 부자간에 서로 입증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단 말입니까.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면 교수형에 처한다는 형률의 조문이 있고, 대공(大功) 이상의 친척은 반역죄(叛逆罪)를 제외하고는 또한 감싸 주고 숨겨 주는 것을 허락하였으니, 법조문의 뜻이 이미 이와 같이 명백합니다.
또 인조조(仁祖朝) 병인년(1626, 인조4)의 수교(受敎)에 이르기를, ‘자식이 부모에 대해서, 노비가 주인에 대해서, 아우가 형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는 설령 따질 만한 잘못이 있더라도 입증하지 말아서 풍속을 돈독히 하여 교화를 밝히라.’ 하였습니다. 지난번 성상의 하교는 바로 이 법조문을 거듭 밝히신 것으로 인조조 수교의 뜻과 바로 부합합니다. 그러하니 이것을 명이 내리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 진술한 세 가지 일은 내용이 지극히 준엄하고 바르니,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게 한다. 이홍술(李弘述)은 의금부로 하여금 다시 아뢰어 죄를 더하도록 하겠다. 자식으로 아비의 죄를 입증하게 한 것은 실로 심히 놀랄 만한 일이나 그 사이에 또한 선후와 경중의 구별이 없지 않으니, 산성 별장은 파직시키고 포도대장과 형조의 당상관은 모두 엄하게 추고(推考)하도록 하겠다. 정제선의 일은 죄목이 매우 중대하고 국법에 용서해 주기 어렵다는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특별히 사형을 용서해 준 것은 이전에 이러한 무리들이 모두 용서를 받았는데 유독 정제선에게만 상명(償命)의 형률을 대번에 시행하는 것은 법을 적용함에 있어 불공평함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율령(律令)이 정해졌으니, 어찌 후일에 시행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13년 뒤에 회양 부사(淮陽府使) 유신일(兪信一)이 북도(北道 함경도)의 선비에게 형장을 가하여 죽게 하자, 상이 율령을 따라 참형에 처하도록 명하고, 복역(覆逆)한 승지에게 답하기를,
“과거에 정제선을 구명(救命)하여 해명하는 말이 지극히 분분하므로 내 마음속으로 서글퍼하여 하교한 바가 있었는데, 뜻밖에도 오늘날 구습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처럼 방자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정제선에게 법을 잘못 적용하여 실착(失着)을 면치 못했는데, 어찌 이제 다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후에 상이 광주(廣州)의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로 인하여 비망기를 내리기를,
“우리나라는 양반의 권세가 중하여 정제선이 사람을 죽였는데도 그 당시 대신들이 사형을 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지금껏 24년 동안 양반 중에 사람을 죽인 자가 없으니, 법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권세가 중해서 그런 것인지를 모르겠다.”
하였으니, 이는 김수항(金壽恒)을 두고 한탄한 것이었다.
○ 이때 국상 1년 만에 풍악을 울렸다 하여 대간(臺諫)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감사(監司)를 추고할 것을 청하자, 평안 감사 유상운(柳尙運)이 상소하여 《예경(禮經)》을 증거로 대었다. 5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예는 진실로 알기 어려우나 예경의 본뜻을 상고해 보면 《예기》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복(服)이 있으면 한집안에 있는 자식은 음악에 참여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주(注)에 이르기를, ‘만약 집이 다르면 이와 같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복이 가벼운 경우를 이른 것이니, 만약 중한 복이라면 자식 또한 복이 있으니, 자식이 음악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3년상이 있으면 그 자식은 비록 1년이 지났더라도 오히려 호관(縞冠)에 현무(玄武)를 둘러 순길(純吉)의 복(服)을 입지 못하니, 자식도 복이 있다는 것은 호관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이른바 ‘집이 다르면 이와 같지 않다.’라는 것은 아버지가 중한 복이 있을 때에는 논할 수가 없는데, 유상운이 인용하여 비유하면서 본의를 잃었습니다. 또 《오례의(五禮儀)》의 국휼계령조(國恤戒令條)에 이미 3년 동안 음악을 정지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예조에서 행회(行會)할 때에 이 절목(節目)을 누락시켜서 지방의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대상(大祥) 날짜가 아직 멀었음을 자세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국상이 나던 때의 예조 당상관을 추고하고 다시 예조로 하여금 지방에 통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 이보다 앞서 조정에서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신위(神位)를 영소전(永昭殿)에 봉안하고 3년 뒤 오향 대제(五享大祭)와 속절(俗節)과 삭망(朔望)에 올리는 제수를 혼전(魂殿)에 올리는 상선(常膳)을 그대로 사용하고 또 시속의 음악을 사용했는데, 이해 봄에 예조에서 한결같이 종묘의 예를 따라 희생을 사용할 것을 청하니, 상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6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영소전에서 하향 대제(夏享大祭)부터 비로소 희생을 사용한다면 또 종묘의 헌가(軒架)와 일무(佾舞)의 음악을 사용해야 하지만 방해되는 점이 있어 불편한 일이 많습니다. 전대(前代)의 전례(典禮)에서 찾아보면 위(魏)나라의 견후(甄后)당(唐)나라의 장손후(長孫后)는 태묘(太廟)에 부묘(祔廟)하기 전에 모두 별도로 사당을 세우고 금석(金石)의 음악을 사용했습니다. 명(明)나라에 이르러서는 먼저 내상(內喪)이 있으면 봉선전(奉先殿)에 부묘하였으니, 봉선전은 우리나라 문소전(文昭殿)의 제도인데, 제사에 올리는 음식과 제사에 연주하는 음악을 모두 살아 있을 때의 속례(俗禮)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인조조에는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위를 숙녕전(肅寧殿)에 봉안하였는데, 3년 뒤에 예조에서 비록 한결같이 종묘의 예를 따라 제향하자는 청이 있었으나 부묘하기 전에는 원래 희생과 음악을 사용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살펴보면 성종(成宗)의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신위를 소경전(昭敬殿)에 봉안하고 제수와 제사에 연주하는 음악은 한결같이 문소전의 제도를 따랐으니, 이는 바로 영소전에서 희생을 사용하지 않는 제도입니다.
위나라와 당나라의 예는 자세한 것을 상고할 수 없지만 명나라와 우리나라의 전례(典禮)가 이와 같으니, 만약 희생을 사용하기 전에 의논했다면 다만 예전에 사용하던 전례를 그대로 받들어 행해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미 희생을 사용하고 이로 인하여 음악을 사용한다면 고례(古禮)에는 반드시 별도로 사당을 세운 뒤에야 사당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소전은 궁중의 별전(別殿)이니, 사당의 제도와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터서 사당의 제도로 만들고자 한다면 궁중에 사당을 세워야 하는데, 이는 또한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음악은 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 후비(后妃)에게는 무무(武舞)를 쓰지 않고 오직 문무(文舞)를 사용하여 종묘의 제도와 차이가 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제도를 만드는 것은 또한 매우 어려울 듯합니다.
그리고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을 세조(世祖) 이후로는 새로 만들 겨를이 없었는데, 영소전의 악장을 먼저 만드는 것도 온당치 못할 듯합니다. 이러한 곡절을 충분히 강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예조로 하여금 여러 대신 및 지방의 유신(儒臣)들과 다시 의논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당초 의논하여 정할 때에 미처 구례(舊例)를 널리 상고하지 못해서 이처럼 난처한 일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명나라와 우리나라에서 행해 오던 제도를 알았고, 또 부묘하기 전에 희생을 사용하는 예가 명백히 없다면 이미 거행했다가 곧바로 폐지하는 것이 비록 미안하기는 하나 시일이 오래되기 전에 고쳐서 옛 법을 따르는 것이 불가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고, 박세채(朴世采)도 그렇게 말하여 마침내 희생을 사용하지 않았다.
○ 7월에 가뭄이 심해지자, 상이 사직단에 친히 기도할 적에 공이 아헌관(亞獻官)으로 참여하여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고 이어 남교(南郊)의 기우제에 헌관으로 차임되었다. 비가 내리자, 상이 말을 하사하였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사양하고 이어 경계하는 말씀을 아뢰기를,
“옛날 명나라 고황제(高皇帝)는 대장군 서달(徐達)에게 명하여 10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그가 연(燕)과 계(薊) 지방을 평정하고 관중(關中)과 농서(隴西) 지방을 소탕하고 개선할 적에 그에게 준 상은 백금(白金) 500냥과 비단 옷감 50표리(表裏)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명나라 말엽 숭정(崇禎) 연간에 이르러 조대수(祖大壽)는 가만히 앉아서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 작은 공로도 없었는데 매월 만 금(金)을 하사하여 국고가 텅 비었으며, 심지어는 그 자신과 그의 아내에게도 각기 날마다 백 금을 하사하였지만 결국 국가가 멸망할 때에는 아무런 보탬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주가 신하들로 하여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충성하게 하는 것이 과연 상을 얼마나 주느냐에 달려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진종(眞宗) 때에는 천하가 크게 편안하고 백성과 물건이 지극히 풍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때 정승으로 있던 왕조(王朝)는 하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눈을 감고 한탄하기를, ‘백성들의 피와 땀을 어찌 이처럼 많이 허비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대관(大觀) 연간에 이르러서 채경(蔡京)의 무리가 국정을 담당하자, 지나친 하사와 멋대로 내린 상이 온 집에 가득하여 끝내는 집안과 나라가 모두 멸망한 뒤에야 그만두었으니, 이 어찌 신하가 지극히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유사(有司)가 가지고 있는 재화를 전하께서 사사로운 은혜에 사용하시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을 듯하나, 이것이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모두가 백성들의 심장의 살을 도려낸 것이니, 어찌 차마 가볍게 쓸 수 있겠습니까.
현재 조정의 혜택이 너무 지나친 것은 이와 같지 않은 일이 없어서 다 거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만약 큰 문제만 가지고 말한다면 만과(萬科)를 설치한 것이 진실로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이 되었으니, 비록 훌륭한 계책을 내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 재신(宰臣)들에게 상으로 가자(加資)하는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육경(六卿)의 반열에 있는 자가 죄를 지어 버림받거나 늙고 병들거나 한산직(閑散職)에 있는 자를 제외하고도 23명이나 되는 많은 수이며, 이 가운데 1품에 오른 자가 또 11명이나 됩니다. 비록 이 사람들이 덕망과 재주가 모두 그 지위에 걸맞다 하더라도 관직을 임명할 때에 신중히 하는 도리를 가지고 논한다면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일은 신이 자세히 모르지만, 신이 효종조에 출사한 이후로 선왕조(先王朝 현종) 말년에 이르기까지 매번 조정의 반열을 보면 상신 외에 1품의 반열에 있는 자가 한때에 한두 사람 혹은 두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매번 공청(公廳)에 모여 반열을 정할 때에 1품이 혹 2품보다 많기도 하니, 신은 이것이 성조(聖朝)에서 관작을 소중히 여겨 아끼는 도리가 아닐 듯싶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조정에 일이 많음으로 인해 무릇 궁중에서 시탕(侍湯)하거나 일을 맡고 부역을 감독한 공로가 있을 적에 전례에 의거하여 은혜로 가자한 자들입니다. 지금 그 숫자가 이와 같이 많게 되었으니, 일이 극에 달하면 변통하는 것은 이치와 형편상 당연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 이후로 조정의 신하 중에 전례(前例)대로 가자해야 할 자가 있으면 비단이나 말을 하사하는 것으로 바꾸어 시인(詩人)으로 하여금 ‘적불(赤芾)이 삼백 명’이라는 비난이 있지 않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에 은상(恩賞)을 지나치게 내리는 폐단에 대해 극언한 것은 진실로 절실하고 지극한 말이니, 내 매우 가상히 여겨 받아들인다. 일이 극에 달하면 변통해야 한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이치와 형세상 필연적인 것이지만 상을 하사하는 옛 제도의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상을 논할 때에 승자(陞資)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살펴보아 참작해서 낮추고 높이는 것이 혹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부묘(祔廟)의 예가 이루어졌는바, 신하들 중에 으레 품계를 올려 주어야 할 자들에게 말을 하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 공이 연경(燕京)에 사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통역관과 봉황성(鳳凰城) 사람들이 “모두 서북 지역에 우역(牛疫)이 번진다 하므로 개시(開市)를 정지할 것을 청해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압록강을 건너갈 적에 장계로 보고하니, 조정에서 이를 따랐다. 청나라 사람들이 사신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그 뜻을 만족시켜 주지 못하자, 청나라 사람들은 마침내 규례가 되었다고 핑계 대면서 질책하는 말을 하였다. 8월에 공이 인혐(引嫌)하여 차자를 올리고 인하여 정사(呈辭)를 올리자, 9월에 상이 세 차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10월에 공이 스무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이 승정원에 명하여 전임 대신 중에 정사를 가장 많이 올린 자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쉰 번 올린 자가 있다고 아뢰었다. 이달에 공이 서른한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마침내 해임을 허락하였다가 11월에 다시 제수하였다.
○ 이해 가을에 청나라 군주가 은밀히 화공(畫工) 두 사람을 보내어 백두산(白頭山)을 그리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변경 고을에서 발각되니 두 사람이 도망쳤다. 얼마 후 후주(厚州)에서 인삼을 캐던 백성이 얕은 개울을 건너가다가 이들과 서로 마주치자, 총포(銃砲)를 쏘아 부상을 입혔다. 10월에 연경(燕京)에서 급한 통고문이 12일 만에 이르렀으며 칙사(勅使)가 잇따라 나왔다. 그리하여 11월에 조사하고 돌아갈 적에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봉초(捧招)하려 하면서 대신과 의금부 당상관 한 명을 데리고 함께 가려 하였다. 공은 마침내 이 일을 자임하여 12월에 지의금부사 오두인(吳斗寅)과 함께 중화(中和)에 갔다가 돌아왔다.

58세 병인년(1686, 숙종12)
1월에 차자를 올려 감옥에 죄수를 오랫동안 가두어 둔 법관(法官)을 경책(警責)할 것을 청하니, 상은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2월에 태묘(太廟)의 부묘(祔廟)에 친히 제사할 때에 종헌관(終獻官)이었다 하여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4월에 사은사(謝恩使)에 차임되었으며, 윤4월에 명을 받들어 현릉(顯陵)을 봉심하였다. 이달에 상은 어의(御醫)에게 명하여 더위 먹은 데에 치료하는 약제를 가지고 연경에 따라가게 하였으며, 침의(鍼醫)도 따라가게 하였다.
6월에 국경을 나간다 하여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는데, 하직하던 날에 선온(宣醞)하였다.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이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에게 더 추증할 것을 청하자, 상은 정2품의 관직을 추증하고 사시(賜諡)하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공이 하직하고 사행(使行)을 떠났다가 11월에 복명하였다.
12월에 아홉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열두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 공은 옛날 함경도 감영에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형옥(刑獄)에 관한 일은 더욱 늦출 수 없다 하여 즉시 장계를 올리기를,
“일찍이 경신년(1680, 숙종6) 가을에 비변사의 관문(關文)으로 인해 외방(外方)의 죄수 중에 여러 해 동안 미결 상태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추안(推案)을 소결청(疏決廳)으로 올려 보내서 탑전(榻前)에서 품정(稟定)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소결청으로 올려 보낸 뒤에 회답 이문(移文)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느라 감히 죄수들을 처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두어 둔 지 3년이 넘었으나 아직도 회답이 없으며, 그중에는 또한 몸이 수척해져 죽은 죄수도 많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소결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려는 뜻이 도리어 옥사가 적체되고 막혀서 원망을 품게 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일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은 옥사의 실정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옥사를 다스리는 규정은 먼저 죄수의 얼굴빛을 관찰하고 또 그의 말을 들어 보며, 원고와 피고를 대질하고 증거를 참고해서 반복하여 조사하고 여러 가지로 고문(考問)해도 실정을 얻는 경우는 적고 실정을 잃는 경우는 많습니다. 지금 외방 관리가 작성한, 졸렬하고 소루(疏漏)하여 분명치 못한 추안(推案)을 가지고 멀리 수천 리 밖에서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고와 피고를 묻지 않고 정범(正犯)을 따지지 않으니,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아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또 정사를 다스리는 체통은 낮을수록 더욱 자세히 살피고 높을수록 더욱 소략하여, 마치 팔뚝과 손가락이 서로 부리고 그물의 벼리와 그물눈이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온 나라의 두서없고 혼란한 문안(文案)을 모두 탑전에서 결정하고자 하니, 이는 사체(事體)에 있어서 마땅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사이에 비록 문서가 오가면서 평번(平反)하는 일이 있더라도 기다리고 오래 지체하는 폐단이 형편상 반드시 뒤따를 것입니다.
또 외방의 관리들은 언제나 옥사를 추국할 때에 혹은 의견이 분명하지 못할까 염려하거나 혹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할까 우려하거나 혹은 세력에 구애되어 여러 가지 난처한 일을 모두 회피하여 모면할 것을 생각하는바, 이는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똑같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모두 서울로 올려 보내어서 여러 해 동안 죄수의 단죄를 지체하였으면서도 자신이 그 책임을 지지 않고 훗날 억울함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진(秦)나라 사람과 월(越)나라 사람이 서로 쳐다보듯이 하여 전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니, 국가에서 관리를 둔 것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입니까.
조정에서 반드시 여러 옥사를 가엾게 여기고 신중히 처리하고자 한다면 다만 이미 처결하고 편배(編配)한 무리 중에 오래된 죄안(罪案)을 취하여 날짜를 제한하지 말고 차분히 경중을 의논하도록 하고, 혹은 옥사에 밝은 관원을 특별히 파견하여 죄인이 있는 곳에 가서 죄를 캐물어 즉시 처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 갇혀 있는 죄인의 추안을 모두 본도로 돌려보내서 처결한 뒤에 계문(啓聞)하도록 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신이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에 오래 갇혀 있는 죄인들을 보니, 형용은 마치 썩고 더러운 해골과 같고 목소리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의 울음소리와 같아서 벌거벗은 몸으로 벌벌 떨며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죽(粥)을 달라고 구걸하고 불을 달라고 애걸하면서 속히 죽기만을 원하고 죄의 허실을 다시 따져 분별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들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도 이 참혹한 광경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몹시 서글퍼지고 놀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해 1월에 공이 또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형조에 현재 갇혀 있는 죄수는 매월 월말에 우상(右相)에게 기록하여 보이고, 만일 우상이 없을 경우에는 좌상(左相)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늘 옥관(獄官)이 가지고 온 수도안(囚徒案)을 보니, 국경을 넘어간 죄를 범한 죄인 43명 외에 기타 죄인이 또 100명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수가 많으니, 얼음이 풀려 봄이 되어서 만물이 소생하는 이때에 죄수들이 좁은 방에서 서로 베고 누워 신음하고 답답해하는 상황을 충분히 상상해 알 수 있습니다. 듣건대 그중에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곡을 하기도 하는 등 실로 죽고 싶어 하나 죽지 못하는 자가 있다 하니, 마음이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
신이 생각건대 형옥(刑獄)은 천하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 것이니, 나라를 소유한 군주가 소중히 여길 일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서경(書經)》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중죄수는 5, 6일을 두고 깊이 생각하며 열흘이나 한 철에 이르러 중죄수를 크게 처결한다.’ 하였으니, 이는 죄수를 처결하는 기한이 짧으면 5, 6일이고 늦어도 열흘이나 한 철을 넘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옥사를 처결하는 기한이 큰 일은 30일이고 보통 일은 20일이고 작은 일은 10일이며,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서 부득이 이 기한을 넘길 경우에는 반드시 사유를 갖추어서 아뢰게 하였으니, 고금(古今)의 제도를 참작해 보건대 죄수를 감옥에 오랫동안 가두어 두지 않으려는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갇혀 있는 죄수 중에 한 해가 넘도록 감옥에 있으면서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자가 매우 많으니, 비록 이 가운데 혹 서로 연관성이 있어서 부득이 기한을 넘긴 자도 있을 것이나 또한 속히 처결할 수 있는데 처결하지 않은 자가 어찌 없겠습니까. 고사(古事)에 형벌이 공정하여 감옥이 비면 법관이 상을 받는 법전이 있었으니, 옥사를 지체하여 처결하지 못한 자로 말하면 또한 경책(警責)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자세히 물어서 밝게 살피소서.
신이 임술년(1682, 숙종8) 겨울에 입시(入侍)하여 계복(啓覆)하였는데, 그 당시 대신이 아뢰기를, ‘율문(律文)에 추분(秋分)이 지난 뒤부터 형을 시행할 것을 허락하였으니, 계복은 굳이 연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근간에는 매번 섣달에야 비로소 계복을 청하므로, 혹 사고로 인해 며칠이 지나면 곧 입춘(立春)에 이르러서 또 한 해를 넘기게 되어 옥사가 지체됩니다. 지금 이후로는 초겨울에 계복을 정해 시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임술년(1682, 숙종8) 이후로는 겨울마다 국가에 사고가 있어서 계복을 시행하지 않은 지가 지금 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살 수 있는 방도가 있는데도 지금까지 감옥에 갇힌 자들이 있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도 지금까지 요행으로 면한 자들이 있으니, 상형(祥刑)으로 논해 본다면 그 잘못이 똑같습니다. 더구나 감옥에 갇혀서 두세 번 겨울을 나면 육신이 멀쩡한 사람도 오히려 병이 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죄의 여부를 논할 것도 없이 틀림없이 화기(和氣)를 손상시켰을 것입니다. 금년에는 삼가 바라건대 미리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추분이 지난 뒤에 즉시 계복할 시기를 정하여 예전처럼 차질을 빚어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차자 가운데 조목조목 진술한 것이 진실로 매우 마땅하니 모두 차자의 내용대로 시행하겠다. 지금 이후로 법관 중에 죄인을 속히 처결할 수 있는데도 처결하지 않는 자는 마땅히 중하게 논죄(論罪)할 것이다.”
하였다.
○ 4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공이 언로를 열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뜻에 거슬린 사람이 의망(擬望)에 낙점을 받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신과 같이 지위만 보전하는 자는 진실로 편하고 좋지만 군주와 정승이 모두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을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면 나라가 반드시 패망하는 데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렸다. 우상 이단하(李端夏)가 입대하여 김익훈(金益勳)을 등용할 것을 청하자,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좌상이 일찍이 이르기를, ‘오도일(吳道一) 등을 불러 등용하기 전에는 이 일을 먼저 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 이해 봄에 칙사(勅使)가 연경(燕京)으로 돌아갈 때에 벌금으로 은 2만 냥을 낼 것을 의논하여 아뢰니, 조정에서는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 등을 사은사(謝恩使)에 차임하였다. 4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국경을 나갈 것을 자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에 대신(臺臣)의 상소로 인하여 마침내 공을 차임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부연사(赴燕使) 정재숭(鄭載嵩)에게 이르기를,
“좌상이 연경에 갈 때에 내가 잊고 의원을 보내지 않았다가 그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보냈는데, 지금까지 나는 이것을 후회한다.”
하였다. 윤4월에 상이 전교하기를,
“이번 좌의정이 연경에 갈 때에 어의는 약물을 가지고 따라 가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전교하기를,
“좌상이 연경으로 가는 행차가 마침 무더운 삼복(三伏) 때를 만나니, 내 이 때문에 염려스럽다. 어의는 약물 중에 더위 먹은 데에 치료하는 약제를 다량 마련하여 가지고 가도록 하라.”
하고, 다음 날 전교하기를,
“침의(鍼醫)도 따라 가도록 하라.”
하였다.
○ 처음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가 척화(斥和)하다가 심양(瀋陽)에서 죽었는데, 효종(孝宗) 병신년(1656, 효종7)에 이르러 이들에게 부제학(副提學)을 추증하였다. 이해 6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에 의정부에서 서경(署經)한 시장(諡狀)을 보니, 송시영(宋時榮)이 강화도(江華島)에서 죽었다 하여 우참찬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습니다.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은 비록 차이가 없으나 수립한 공로를 논하면 삼학사가 송시영보다 월등한데도 이들에게 당상관을 추증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으니, 실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참으로 옳다.”
하고는 마침내 정2품의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주었다.
○ 처음에 청나라 사람들이 금주(錦州)를 침략할 적에 우리나라에게 파병(派兵)을 요청하였다. 어영군(御營軍) 이사룡(李士龍)이 성주(星州)의 포수로서 종군하였는데, 번번이 헛방을 쏘다가 청나라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다. 이사룡이 이르기를,
“중국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이니 내 어찌 차마 부모를 저버리고 그 나라 사람을 죽이겠는가.”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온갖 협박을 가하였으나 이사룡은 끝내 굽히지 않고 죽었다. 시신이 본주로 돌아오자, 인조(仁祖)가 성주 목사(星州牧使)에게 유시(諭示)하여 그의 묘소에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공이 영남 어사(嶺南御史)가 되었을 때에 현종(顯宗)에게 아뢰기를,
“지금까지도 성주 사람들이 이사룡의 일을 언급하게 되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찮은 병졸로서 애당초 명성이 알려지기를 구한 것이 아니지만 국가에서 포상하는 도리로 볼 때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에는 청나라가 두렵고 오해를 받을까 싶어 필시 드러난 은전을 가하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심양(瀋陽)에서 죽은 신하들이 모두 추가로 녹훈(錄勳)되었는데, 오직 이 멀리 떨어진 벽촌의 백성은 잊혀 사라지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해조에 특별히 명하여 적절한 표창과 추증을 가하고 그 자손들을 구휼하여 풍교(風敎)를 세우소서.”
하니, 조정에서 마침내 그 아들에게 만호(萬戶) 벼슬을 내렸다.
○ 공은 전후로 사신 갔다가 돌아올 때에 다만 책을 넣어 두는 농짝 하나만을 가지고 왔다. 고양(高陽)에서 유숙할 때에 편비(偏裨)가 아뢰기를,
“책을 넣어 두는 농짝이 비록 작으나 사람들이 혹 다른 물건이 있을까 의심하니, 닭이 울 때 먼저 들여보낼 것을 청합니다.”
하였으니, 이는 시속의 준례였다. 공이 말하기를,
“어찌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으나 그대로 그의 말을 따랐다.
○ 처음에 김공 만중(金公萬重)이 공에게 회천(懷川 송시열)과 일을 함께할 것을 권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나는 참으로 그럴 겨를이 없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우암(尤菴)은 매번 일을 할 때에 혹 온당치 못한 면이 있어서 사람들 가운데 가부를 말하며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훌쩍 멀리 떠나가서, 자신이 주장하여 경영한 일을 모두 버리고 떠나가는 모양이 마치 젖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한다. 그리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밖으로는 시작하기만 한다는 비난을 받게 하고 안으로는 정국을 수습할 걱정이 있게 하여, 자신은 항상 쉬운 데 처하고 조정은 항상 어려운 데 처하게 하니, 불가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공이 이 말을 회천에게 전하자, 회천이 불쾌해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정의 객인데 주인의 뜻이 저와 같으니 떠나갈 만하다.”
하였다.
○ 공이 정승이 된 지 몇 달 만에 삼공(三公)이 입대하였는데, 김수항(金壽恒)과 민정중(閔鼎重)이 함께 전(前) 대사헌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죄를 아뢰고 다시는 현자를 대우하는 예로 대우하지 말 것을 청하였다. 두 정승은 평소 회천에게 압박을 당하였으나 공은 평소에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공에게 상의하지 않았고, 상도 공을 알았으므로 공에게 묻지 않았다. 공은 이 일에 참여하여 듣지 않았으므로 그 일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은 이달 회천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세상일이 어지러워 어디로 갈지 알 수가 없고 허다한 곡절이 자꾸 생겨나서 새롭고 괴이한 일이 더욱 심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지금에 대처하는 방도는 혼자 울고 혼자 그치도록 내버려 두어 마치 물결 속의 갈매기가 물결과 함께 오르내리는 것처럼 해야 합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시비를 돌아보지 말고 일의 성패를 따지지 말고서, 눈을 크게 뜨고 담력을 키우며 할 말을 다하고 극진히 논하여 비록 이 때문에 분란이 더 생긴다 하더라도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상하 간에 주선해서 간곡히 미봉하여 행여나 사람들이 나의 충심(衷心)을 헤아려 주어서 천분의 한둘, 백분의 한둘이라도 해결되기를 바라야 합니까?
반복하여 헤아려 보아도 결단하여 떠나가지도 못하고 또 제대로 일을 하지도 못하여 장차 용서받기 어려운 죄인이 될 것이니, 근심스럽고 경황없는 심정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참판 박세채(朴世采)가 글을 지어 이르기를,
“스승에는 차등이 없으니, 군신 간처럼 복(服)을 입어야 한다.”
하였다. 공의 문인인 최공 석정(崔公錫鼎)이 공에게 이것을 묻자, 공은 이르기를,
“결코 이 말을 따를 수 없다.”
하였다. 공은 평소 힘써 성의(誠意)를 다하였는데, 부득이한 일이 생기면 단정한 태도로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고 지위를 벗어나 말하거나 남의 관직을 침해하지 않았다. 공이 국경을 나갈 적에 우상 정재숭(鄭載嵩)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수항이 공에게 묻기를,
“나라에서 정승을 논하게 되면 누구로 정해야 합니까?”
하니, 공은 이공 민서(李公敏敍)를 천거하며 말하기를,
연양(延陽)과 포저(浦渚)가 일찍이 인척으로 함께 정승에 올랐으니, 지금처럼 인물이 부족한 때에 어찌 우리 두 집안더러 인척을 사사로이 봐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영상 또한 이공과 인척간이 되므로 지난해에 일찍이 이것을 어렵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논이 정해져서 다른 것은 따지지 않기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회천이 편지로 판서 이단하(李端夏)를 천거하니, 영상은 감히 다시 논란하지 못하였다.
9월에 상이 복상(卜相)할 것을 명하자, 영상 김수항은 가복(加卜)하라는 명을 기다리지 않고 오직 회천의 말대로 이단하를 재상에 임명하였으니, 이는 회천의 형편이 매우 급하고 또한 두 이씨를 함께 올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나 또 이러한 이유를 공에게 말하지 않았다. 공은 돌아오자 국사를 어찌 할 수 없음을 알고는 자신이 제대로 주선하지 못해서 청나라에 벌금을 바치게 되었다 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다. 12월에 공이 정사(呈辭)를 올렸다. 다음 해 봄에 공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스스로 분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망녕되이 큰 임무를 맡아 위로는 국사를 그르치고 아래로는 제 자신을 욕되게 한 것이 또한 이미 많습니다. 신이 이에 그 일을 다 아뢰어 성상을 번거롭게 하고자 한다면 국가의 체통을 훼손하여 죄가 더욱 심해질 것이며, 그대로 겸연쩍게 감추어 스스로 잘못이 없는 것처럼 한다면 실로 평소의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니, 마음에 차마 그럴 수가 없습니다. 높이 계시면서 아무리 깊숙한 곳이라도 비추는 해와 달 같은 성상이시니, 또한 모두 다 굽어 살피실 것입니다.”
하였다.
○ 이보다 앞서 신유년(1681, 숙종7) 겨울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어떤 선비의 상소문으로 인하여 복주(覆奏)하니, 상이 마침내 충의위(忠義衛)에 모속(冒屬)한 자들을 사정(査正)하도록 명하였으나 한 철이 넘도록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이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을 때에 입대(入對)하여 충의위에 대한 사정을 거행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사정청(査正廳)을 설치하였다.
공은 이미 당상관으로서 사목(事目)을 정하였고 모속한 자들에게 자수하여 죄를 면할 길을 열어 주었으며, 모속한 자 및 적장(嫡長)과 문장(門長), 향소(鄕所)에서 이름을 잘못 적어 넣었는데도 자수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같은 죄로 처벌하되, 관직이 있거나 나이 70 이상이 된 자, 공의(功議)가 있음을 막론하고 모두 전가사변(全家徙邊)의 형률을 적용하기로 정하였다. 여러 당상관과 낭청이 이의가 없어서 임금께 계문하고 이것을 선시(宣示)하였는데, 이윽고 공이 정승이 되어서는 사정하는 일이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다. 대간(臺諫)들이 속히 완결할 것을 청하자, 공은 완녕군(完寧君) 이사명(李師命)을 당상관으로 차임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맡길 것을 청해서 한 달이 못 되어 사정을 마치니, 모속한 자가 1만 5000여 명이었다. 이해 6월에 빈청 인견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모속한 자들은 전가속포(全家贖布)의 벌을 시행하여야 하나 사람마다 무명 12필씩을 거둔다면 너무 많으니, 신의 생각에는 사정청으로 하여금 주호(主戶)를 초록(抄錄)하여 속포를 징수하게 했으면 합니다.”
하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동의하여 재가를 얻었다. 공은 또다시 아뢰기를,
“충의위에 소속된 자들을 입번(入番)하여 군대를 만드는 규정은 이제 복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국조 이래로 공신에 책록(策錄)된 자는 수백 명에 불과한데, 수백 명의 자손이 이제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수만 명의 자손이 뒤에 모두 충의위에 소속되어서 장차 온 나라 백성이 한가롭게 노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나라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원래의 숫자가 이와 같이 많기 때문에 모속(冒屬)한 자들을 더욱 구별하기가 어려우니, 만약 한계를 정하지 않는다면 지금 비록 사정(査正)을 하더라도 후일의 폐단이 예전과 같아질 것이니, 변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대왕의 자손은 효종 때로부터 법식을 정하여 6대 이후에는 일곱 가지 천역(賤役) 외에 모두 부역을 배정하게 하고, 공신의 자손은 우대하는 쪽으로 한계를 정하더라도 5대를 넘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은 2품 이상 및 삼사(三司)의 관원에게 명하여 빈청에 모여 의논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훈(正勳)의 봉사손(奉祀孫) 외에 여러 자손이 충의위에 소속되는 것은 5대까지만 한정하고, 그 나머지 모속한 자들은 모두 군역을 배정하되 미처 군역을 배정하지 않은 자는 여정(餘丁)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데에 따르고, 계파(系派)가 희미하지만 그래도 의심스러운 자는 충훈부(忠勳府)에 맡겨서 조용히 다스려 처리하게 하였다. 이때 사간(司諫)으로 있던 조종저(趙宗著)가 아뢰기를,
“근일 사정 낭청의 집에 불을 지른 자가 있으니, 사정을 그만두어 백성들의 원망을 그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조정에서 이 상소문으로 인하여 이 일을 그만둔다면 국가의 체통과 위엄을 손상하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것이니, 이후로 조정에서 어떻게 한 가지 일인들 나라 안에 시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설령 사정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하더라도 이 말이 나온 뒤에는 결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공이 국경을 나가게 되자 간사한 백성들이 이 틈을 타서 이사명(李師命)으로 하여금 영상을 동요하게 하였다. 8월에 큰바람이 불고 기후가 갑자기 추워지며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자, 영상 김수항이 이 때문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원망은 모속한 자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으니, 백성들의 원망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어 화기(和氣)를 유도하려 한다면 이 일을 변통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은 징수하는 속포(贖布)를 탕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영상은 특별히 상의 교지를 중외에 반포할 것을 청하고 얼마 후에는 여정(餘丁)에게 징수하는 군포를 면제해 주었다. 뒤이어 또 모속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가 많으므로 충훈부에서 이것을 접수하여 처리하기가 어렵다 해서 모두 본관(本官) 수령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낭청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11월에 공이 막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경유하는 곳의 수령들이 모두 아뢰기를,
“조정에서 사정청을 설치한 지가 5년이나 되어 국내의 문적(文籍)들을 다 모아다가 충훈부에서 고증하고 각 고을에서 조사하였습니다. 각 고을에서 알고 있는 허실은 사정청에서 조사할 때에 이미 모두 답한 것이니, 지금 어찌 다시 조사할 만한 자료가 있겠습니까. 또 당초 사목에 적장(嫡長)과 향소(鄕所) 등에게 모두 전가(全家)의 형률을 적용하기로 정했는데도 거리낌이 없이 모속하였다가 발각된 자가 이처럼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모두 죄를 용서해 주어 하나도 죄를 묻는 바가 없이 본관에게 맡겨 다시 조사하게 하니, 설령 사람들이 모두 그가 모속한 줄을 안다 하더라도 그 누가 기꺼이 원망을 사면서 증거를 내세워 사실대로 관청에 말하겠습니까. 조정에서 법대로 시행하기를 꺼리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수령 된 자 중에 그 누가 기꺼이 직접 일을 담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사세가 이와 같으므로 그 잔약함이 더욱 심하여 감히 관청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억울하다고 말하면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모두 다시 분간(分揀)하도록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간사함과 교활함을 조장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는 곤궁한 자들에게 원망을 사서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난해 가을에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어 종전에 당연히 바쳐야 할 부역도 견감(蠲減)해 줄 것을 의논하고 있으니, 충의위에 모속하였다 하여 그 벌로 속포를 내게 한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함께 징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사하는 일을 다시 본관 수령에게 맡긴 것으로 말하면 이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만약 사정한 일이 분명치 못해서 고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라면 전후에 일을 담당한 당상관과 낭청이 모두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낭청들에게 논공행상을 한 것은 또 무슨 공이 있어서입니까? 모속한 자들을 적발한 뒤에 원망과 비방이 크게 일어날 것은 알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도 오히려 이 일을 시작하여 이미 조사를 마쳤는데 다시 감면(減免)해 주는 절차를 밟으니, 근래 조정의 조처가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어서 중외에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비록 많으나 이 일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또 이 일이 오랫동안 지체되어 이루어지지 못할 형편이었는데, 독촉하고 감독하여 사정이 끝날 때가 되자, 이제는 모두 신의 몸에 원망을 돌리고 선친(先親)을 꾸짖고 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불초한 신이 외람되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편안히 어루만지지 못하고 또 간사한 무리들을 징계하지 못하였으니, 다시 무슨 마음으로 고개를 들고 남을 마주하여 직무를 거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국가의 체통을 생각하고 또 연경에 갈 날짜가 임박하였으므로 억지로 참으면서 날짜를 보내다가 일을 끝내고 복명한 뒤에 물러나와 엎드려 허물을 반성하려 하였으니, 신의 심정과 형편이 어찌 다시 이 세상에 대한 의욕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먼저 신의 관직을 삭탈하여 나라를 욕보인 죄를 바로잡아서 타인의 경계로 삼으소서. 그리고 또한 전하께서도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시어 모든 명을 내리고 조처하실 때에 처음에는 신중히 택하고 뒤에는 굳게 지켜서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형세를 부지하신다면 천만다행입니다.”
하였다. 이에 김 영상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 일은 가볍게 바꾸거나 고칠 수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본래 이와 같았는데, 지난가을에 변통한 것은 실로 일의 형세가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본관 수령으로 하여금 다시 조사하게 하고 낭청들에게 논공행상한 것으로 말하면 좌상(左相)이 올린 차자의 의논이 지극히 엄격하니, 신이 이에 대해 감히 할 말을 다하여 스스로 해명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이미 분명하게 알고 정확히 보지 못하였고 또 그것을 견지하고 고수하지 못하여 국가의 체통이 전도되고 백성의 뜻이 안정되지 못하게 만든 것이 어찌 다만 이 한 가지 일뿐이겠습니까. 오늘날 백성들의 의논이 신을 질책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또 어찌 좌상의 말만 그러하겠습니까.”
하고, 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좌상이 이미 이를 인혐(引嫌)하여 체직하였으니, 신이 어찌 감히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은 좌상이 체직되기를 청한 것은 오로지 이 한 가지 일 때문만이 아니라고 답하였다.

59세 정묘년(1687, 숙종13)

3월에 마흔여섯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서 영남과 관서 지방에 은(銀)을 채굴(採掘)하는 별장(別將)을 두어서는 안 됨을 논하여, 이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이달에 공이 쉰한 번째로 정사를 올리자, 상이 해임하도록 허락하고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제수하였다.
7월에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이달에 제주(濟州)에서 바친 공마(貢馬)를 하사받았다.
8월에 명을 받들어 정릉(貞陵)을 봉심하였다.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은 호남 지방에 갑자년(1684)의 세입(稅入)을 남겨 두어 진휼하는 데 쓰게 한 것을 일체 탕감해 주고 병인년(1686)의 대동미(大同米)를 물려 다음 해에 납부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며, 진주(晉州) 유황점(硫黃店)의 감독관을 조사하여 치죄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공은 명을 받들어 목릉(穆陵)을 봉심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강릉(康陵 명종(明宗)의 능)까지 대가(大駕)를 수행한 군병들이 한나절 동안 조련하였다 하여 시상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어서 계속 시행하기 어려움을 간하자, 상은 네 군영(軍營)에 명해서 시재(試才)하여 시상하게 하였다.
9월에 신하들과 함께 지관(地官)들을 거느리고 명을 받들어 장릉(長陵)을 봉심하였다. 이달에 공은 김만중(金萬重)을 나문(拿問)함으로 인하여 유언비어를 전달한 자에게 자수하도록 한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10월에 명을 받들어 정릉(貞陵)을 봉심하였다. 이달 공릉(恭陵)에 불이 나자, 공은 명을 받들어 공릉을 봉심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간사한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폐단을 아뢰고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조사석(趙師錫)을 불러오게 할 것을 청하자, 상이 받아들였다. 식년시(式年試) 전시(殿試)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주강(晝講)할 적에 한태동(韓泰東)에게 장례 물품을 지급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은 이달에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다.

○ 처음 선조(宣祖) 임인년(1602, 선조35)에 호조에서 은(銀)을 채굴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이익의 근원이 한 번 열리면 폐단이 반드시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개 한 가지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한 가지 폐해를 제거하는 것만 못하니,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오랜 뒤에 여러 군문(軍門)과 감영(監營)에서 여러 도에 각각 연점(鉛店)을 두고는 이어 은을 채굴하였다. 지난해 경상 감사(慶尙監司) 서문중(徐文重)이 아뢰기를,
“도내의 연점에 군역을 피해 들어온 무뢰배들이 산골짝에 득실거려 남의 재물을 도둑질하고 남의 아내를 약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니, 단속하는 바가 있어야겠습니다.”
하였다. 이해 2월에 호조에서 이 문제를 묘당과 의논하여 보고하자, 별장(別將) 두 사람을 경상도와 평안도에 나누어 보내어 여러 은점의 감독관을 모두 파하고 별장으로 하여금 모두 통솔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은과 납〔鉛〕을 거두어 모두 호조에 바치게 한 다음 은은 호조에 남겨 두고 납은 각 아문에 나누어 주었다. 또 별장의 지위가 높지 못하다 하여 인부(印符)를 주조해서 주고 군현(郡縣)에 관문(關文)을 보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이때 막 마흔 번째 정사를 올리고는 호조 판서 이민서(李敏敍)를 맞이하여 이 일의 잘못에 대해 말하였다. 3월에 호조 판서가 입대하여 말을 꺼내자,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만약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이 있을 경우 다시 혁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니, 공이 마침내 차자를 올리기를,
“서문중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만약 이것을 우려한다면 각 군문과 각 영(營)에서 여러 도에 설치한 연점을 모두 계산해서 그대로 남겨 둘 숫자를 참작하여 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혁파해야 할 것이며, 또 그대로 남겨 둔 연점에는 채굴꾼을 모집하는 숫자를 참작하여 정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되, 이것을 정하여 장부를 만들어서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도백(道伯)과 수령들이 엄하게 단속하고 살피게 하여 더 설치하거나 더 모집하는 병폐가 없게 하고 혹여라도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고 전과 같이 지나치게 하는 경우가 있을 때 그 감독관을 죄줄 뿐만 아니라 먼저 그 군문(軍門)과 영문(營門)을 문책하여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면 서문중이 우려하는 폐단이 한 번의 호령으로 모두 제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지 않고, 이미 설치한 모든 연점을 줄이거나 혁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나아가 호조에까지 은을 올렸으며, 새로 차출한 별장은 엄연한 한 별성(別星)이니 권한과 임무의 중요함과 접대하는 데 따르는 번거로움이 또 일반적인 규례에 따른 사행(使行)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한 도를 마음대로 통제하고 혹 큰 이익을 독점한 채 종횡으로 오고 가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둔다면 이 어찌 지난날 각 아문에서 사사로이 보낸 감독관의 병폐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또 서문중이 장계로 아뢴 것은 본래 무뢰배들을 단속하려는 데서 나온 것인데, 여러 곳의 감독관을 일체 혁파하고 이것을 별장 한 사람의 손에 모두 맡겨서 여러 곳을 오고 가면서 겸하여 관장하게 한다면, 무뢰배들을 단속하는 방법에 있어 지난날 감독관이 각각 하나의 연점을 관장할 때보다 과연 더 나은 점이 있겠습니까. 또 지난날 감독관들이 비록 폐단이 있었으나 오히려 크게 방종하지 않았던 것은 이들이 조정의 명령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어서 오히려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별장은 바로 조정에서 임명하여 보낸 자로 인부를 가지고 있는 관원이니, 이후로는 은점(銀店)이 반드시 장차 날로 더욱 많이 설치되고 백성을 모집하는 것이 반드시 날로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무덤과 집이 반드시 장차 날로 더욱 파헤쳐지고 산의 재목과 숲이 반드시 장차 날로 더욱 베어져서 민둥산이 될 터인데, 이렇게 되더라도 수령들이 감히 따지지 못할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도백(道伯)인들 또한 어떻게 이들을 막고 통제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에서 중시하는 것은 농사를 힘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이 다만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데에 있고 백성을 위하는 데에 있지 않다면 황무지를 개간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해서 세금을 거두는 것도 성인의 가르침에 죄를 얻는 것입니다. 또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고 별도로 사명(使命)을 맡은 자를 보내어 마치 당(唐)나라의 권농 판관(勸農判官)이나 송(宋)나라의 균세사(均稅使)와 같이 한다면 명목은 비록 백성을 위한 일이라고 하나 모두 천하 사람들에게 비방을 듣고 후세에 비판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이 납을 채굴하는 일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국가를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지금 이 별장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익을 취하는 연수(淵藪)로 삼으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한 도(道)의 복성(福星)으로 삼으려는 것입니까? 만약 이러한 폐단을 논한다면 설령 이로 말미암아 억만의 은을 얻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현재 국가에서 크게 걱정해야 할 것은 백성들이 굶주리는데도 먹을 것이 없는 데에 있지 은화(銀貨)가 부족하고 적은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굶어 죽은 시체가 널려 있는 이때에 새로운 관원을 두고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서 마침내 은을 채굴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다면 앞으로의 폐단은 굳이 논할 필요도 없으며, 다만 이 소문이 퍼지면 어찌 중외(中外)의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그 희망을 잃게 하지 않겠습니까.
또 모든 일은 처음에 여러 사람들에게 묻고 상의해서 모두 십분 옳고 마땅하다고 하더라도 끝에 과연 처음 계산했던 것과 같이 될지 기필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애당초 의심하면서 한 번 시험 삼아 해보는 것이 끝내 어찌 성공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지금 조정의 명령이 사방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며 국가의 기강이 날로 무너지는 데 이른 까닭은 오로지 정령(政令)과 조처가 금방 시행되다가 금방 중지되어 한 번도 굳게 정하여 오래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는 속담은 비록 예전부터 있어 왔으나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병조에 있을 때에 의심스러운 일은 절대로 가볍게 시작하지 말고 이루어진 일은 절대로 가볍게 고치지 말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혹 이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어리석은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만약 이 일을 기필코 시행해야 하고 의심할 것이 없다고 확신하신다면 신의 어리석고 망녕된 말을 진실로 채택할 것이 없습니다만 만일 뒤에 폐단이 있을 경우 다시 혁파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더더욱 이것을 가볍게 시행해서 초기에는 백성들의 원망을 부르고 뒤에는 백성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여 끝내 실제의 일에 유익함이 없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당나라 태종(太宗) 때에 시어사(侍御史)인 권만기(權萬紀)가 상언(上言)하기를, ‘선주(宣州)와 요주(饒州) 두 주에서 은이 많이 나오니, 이것을 채굴하면 해마다 수백만 냥의 은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태종은 당일로 권만기를 퇴출하였습니다. 태종의 뜻은 진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이익을 언급하는 길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태종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옛날 성왕(聖王)이겠습니까.
오랑캐인 원(元)나라 말기에 여러 곳의 도적 떼들이 대부분 금과 은을 주조하는 곳에서 나왔으니, 이는 실로 서문중(徐文重)이 우려했던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혁파하여 금지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더 증익하고 확대해서 마치 갈대를 묶고 기름을 부어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한단 말입니까.
명(明)나라 말기에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어 도적들이 떼 지어 일어나서 그칠 줄 몰랐던 것은 실로 은광(銀礦)의 세금에 연유한 것입니다. 만력황제(萬曆皇帝)가 환후(患候) 중일 때에 유조(遺詔)를 내리려 하였는데, 각신(閣臣)이 은광의 세금을 면제해 줄 것을 청하자,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환후가 낫자 그대로 전처럼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끝내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쓰러져서 국운이 뒤따라 기울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천하와 후세의 사람들이 탄식하고 통한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 은을 채굴하는 것을 명목으로 삼는 자들은 모두 오훼(烏喙)와 짐독(鴆毒)처럼 여기고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더구나 잘못을 본받아서 다시 지난날의 전철(前轍)을 되풀이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일이 만일 시행된다면 후일의 폐단을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이제 그 대략을 이와 같이 간략히 아뢰는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유념하여 살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묘당에 명하여 충분히 강론하게 하였다. 여러 날 뒤에 영상 김수항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신은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좌상의 차자가 엄정합니다.”
하여 마침내 별장을 두는 일을 혁파하였다. 4월에 호조 판서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대전》에 사사로이 은을 채굴한 자에 대한 죄가 교형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은을 채굴한 것을 알면서도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면 이는 은을 사사로이 채굴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니, 별장을 두는 일을 혁파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마땅히 본관으로 하여금 세금을 거두는 것을 주관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그리하여 감독관을 혁파하고 호조에 모두 바치게 한 다음 은은 호조에 남겨 두고 납은 각 아문에 나누어 주는 것을 모두 예전의 의논대로 하였는데, 경상 감사 박태손(朴泰遜)이 그 불편함을 아뢰었다. 9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는 납을 채굴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사로이 은을 채굴하는 일만을 금하였는데, 조총(鳥銃)이 생긴 이후로는 납으로 만든 탄환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납과 은은 똑같이 한 곳에서 나오니, 어찌 납만 채굴하고 은을 채굴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조종조의 법문(法文)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서문중은 본래 군사들을 모집하여 널리 모으는 폐단을 금하려 하였는데, 이제 이미 납에 대한 세금을 거두고 또다시 은에 대한 세금을 거둔다면 모집하는 채굴꾼의 수가 반드시 지난날보다 곱절이나 다섯 곱절이 되고 나서야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당초의 뜻과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대체(大體)를 가지고 논하건대 각 도에 은세(銀稅)를 거두는 법을 결코 오늘로부터 창시할 수 없으니, 신은 결단코 시행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시작하고 나서 만일 불편한 일이 생길 경우 애당초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니, 우선 정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7월에 공이 김수항(金壽恒)을 대신하여 영의정에 올랐다. 8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아뢰기를,
“호남 지방은 연이어 흉년을 만나서 갑자년(1684, 숙종10)에 백성들이 납입할 세곡을 전량 남겨 두어 진휼하는 데 쓰게 하였고 병인년(1686)에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금년에 와서는 3년 치를 한꺼번에 모두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백성들이 수년 동안 거두지 못한 것을 한꺼번에 거두어들일까 미리 두려워하여 금년에 비록 흉년을 면하였으나 전혀 생업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니, 3년 치를 끝내 다 거둘 수 없고 백성으로 하여금 시름하고 원망하게 할 뿐입니다. 갑자년 치는 일체 탕감해 주고, 병인년 치는 전세(田稅) 이외에는 다음 해를 기다리며, 대동미도 뒤로 물려서 납입하게 한다면 다소나마 백성의 힘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처음에 진주(晉州)의 지리산(智異山) 아래에서 유황(硫黃)이 나오니, 나라 안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수어청(守禦廳)이 감독관을 차임하여 산 아래에 유황점(硫黃店)을 설치하고는 반드시 성공시키고자 해서 동해에 정박하고 있는 배의 세금을 절급(折給)해 주고 낙동강에서 곡식을 운반하는 배를 만들어 주었으며, 철물장점(鐵物匠店)과 병항장점(甁缸匠店)을 점유하도록 허락한 다음 철물을 무수히 바치게 하고 병 7000여 개와 항아리 8000여 개를 해마다 바치게 하였다. 온 산에 세금을 거두고 10개 사찰의 승려들을 전원 부역시키되 이익을 많이 취하고 품삯을 적게 주었으며, 여러 고을에서 군사들을 모집하되 또한 자기들 마음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백성을 소유해서 엄연히 하나의 군읍(郡邑)을 이루었으며, 해마다 유황 2000근을 나라에 바치게 한 것이 수십 년이었다. 비변사가 진주 목사(晉州牧使)의 상소로 인하여 본도에서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였는데,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이 전후의 감독관을 형조로 잡아다가 엄중히 조사하여 죄목을 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남해(南海)에 귀양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지리산 아래를 지나오는데,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사이에 나무가 모두 없어져서 마치 소와 말의 가죽을 벗겨놓은 것과 같았습니다. 놀라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물어보니, 모두 이르기를, ‘유황 감독관이 온 산을 독점하여 유황을 구울 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백성들을 침탈하여 한 치, 한 푼의 이익조차도 모두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민간의 벌통에도 전량 세금을 거두어서 황랍(黃蠟)을 별도로 구비한 것이 혹 천 근, 만 근이나 됩니다. 그리하여 전후의 감독관들이 당상관인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마를 찌푸리고 슬퍼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건대 이들을 독사와 사나운 호랑이보다 더 두려워하니, 이번에 감독관을 조사하여 다스릴 때에 폐단을 개혁하여 백성들을 보호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황점을 비록 영원히 없앨 수는 없으나 절목을 헤아려 줄여서 수어청과 해도(該道)에 분부하여 번잡한 것을 엄금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수일이 지난 뒤에 공이 비변사에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은 국내에서 유황이 곳곳마다 생산되어 각 군문(軍門)에서 편리한 대로 채취하고 있으니, 굳이 수어청에서 이와 같이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산성을 수비함에 있어 유황이 가장 긴요하다고는 하나, 해마다 비축하여 재고(在庫)가 몇 만 근인지 알지 못할 정도이니, 또한 한없이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다른 군문의 예(例)에 따라 채굴하는 군사를 모집하되 100명으로 제한하여 능력대로 골라서 쓰고, 감독관도 굳이 장기간 체류하면서 채굴꾼을 모집하여 유황을 채취하는 것 이외에 음식을 제공하고 책응(責應)하는 폐단을 가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황을 구울 때에 철물(鐵物)과 병, 항아리가 없어서는 안 되나 지나치게 징수하는 정황이 더더욱 놀라우니, 철물장(鐵物匠) 1점(店)과 병항장(甁缸匠) 1점을 또한 떼어 주되 명수(名數)를 제한하여 본도에서 헤아려 지급하게 하고, 이 외에 동해에 정박하는 배의 세금과 낙동강의 배와 토지와 승려들을 동원하는 일을 일체 모두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이달에 상이 강릉(康陵)을 배알하고 돌아오다가 사한리(沙閑里)의 교장(敎場)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여러 군문에 명하여 군병들에게 상을 내리게 하고, 또 이후로는 준례로 삼지 말 것을 명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군병에 대한 시상은 넉넉하게 해야 하나 또한 명분과 절도가 없어 계속 시행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20리를 가는 사이에 대가(大駕)를 수행한 것과 한나절 동안 조련한 것은 본래 말할 만한 공로가 못 되니, 쇠고기와 술로 호궤(犒饋)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기거동작의 잘잘못을 따지지도 않고 무예(武藝)의 능하고 서투름을 논하지도 않고서 여러 군영마다 써 올린 이름대로 은상(恩賞)을 뒤섞어 내리니, 이대로 미루어 나간다면 봄 사냥과 가을 사냥을 할 때에는 어떻게 계속해서 상을 내릴 수가 있겠으며, 적진을 함락하고 적군을 목 베었을 때에는 어떻게 상을 더 올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여러 청(廳)의 군수(軍需)는 비록 본래 저축된 것이 있으나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경비는 모두 호조에서 나옵니다. 무릇 창고에 있는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이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설령 다소 여분이 있다 하더라도 더더욱 아껴 쓰고 절약해서 부역을 면제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여러 청과 호조가 모두 재정이 부족함을 걱정하고 있으며, 농사가 흉년이 들고 목화(木花)가 더욱 흉작이어서 앞으로의 일이 크게 우려할 만한 경우에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나치게 상을 내리는 폐단은 후일에 실로 계속 시행하기 어려우며, 만일 계속해서 상을 내리지 않는다면 도리어 군사들의 실망을 불러올 것입니다. 옛날 훌륭한 제왕들이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을 아끼며 해진 바지라도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내려 주지 않고 아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다시 헤아리시고 여러 군문(軍門)에 명해서 넉넉히 호궤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뜻을 보이시고, 시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또 군주가 명령을 내는 것은 한때의 득실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곧 후일의 규례가 되는데, 전하께서 이 일이 만약 후일에 규례로 삼기 어려움을 아셨다면 지금에도 시행할 수 없는 것이며, 지금에 시행할 수 있다면 후일에 이어서 규례로 삼는 것을 또한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천반(川班)의 전직(殿直)이 전례를 끌어다 대며 소원을 청하자 40여 명을 참수하여 군정(軍政)을 엄하게 하였고, 당(唐)나라 장종(莊宗)은 가까운 교외에 나갈 때마다 금병(禁兵)과 호위하는 군졸들에게 상을 절도 없이 내려서 위엄과 명령이 행해지지 못하여 자신은 죽고 나라를 잃었으니, 이는 실로 제왕의 귀감(龜鑑)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깊이 살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네 군영에 시재(試才)하여 시상하도록 명하였다.
○ 이때에 상이 왕세자가 없었다. 지난해 겨울에 교생(校生) 방숙제(方叔齊)가 장릉(長陵)을 옮겨야 한다고 아뢰자, 상은 우선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이해 8월에 전(前)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허빈(許彬)이 다시 아뢰자, 상이 마침내 비망기를 내리기를,
“능침(陵寢)의 사체(事體)는 매우 중차대하니, 널리 묻고 널리 의논하여 세밀히 조처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임 대신이 육경(六卿),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삼사(三司)의 장관(長官), 도승지와 함께 경외(京外)의 술업(術業)에 정통한 지관(地官)을 많이 데리고 장릉에 나아가 봉심한 뒤에 품처하라.”
하였다. 공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육경이 모두 나아가는 것은 너무 번거롭고, 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과 형조 판서 서문중(徐文重)은 또 대장의 임무를 겸임하였으니, 능을 살펴보는 일을 의당 정지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공이 또 지관들로 하여금 술서(術書)를 모두 가지고 가서 산론(山論)을 증명하게 하고 혹 제멋대로 근거 없이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9월에 공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장릉에 갔다가 다음 날 복명하였다. 공이 지관과 경주 부윤(慶州府尹) 신경윤(愼景尹) 등 13명의 산론을 아뢰고 이어 산도(山圖)를 올리자, 상이 이르기를,
“산론에 대부분 길지(吉地)라고 칭하였으며, 비록 혹 조금 미진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 때문에 능을 옮기는 일을 가볍게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방숙제와 허빈은 이미 상소한 자이니, 그들의 말이 이와 같이 좋지 않다 함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논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이사명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지관들이 영상 남구만의 뜻에 맞추느라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다.”
하였다. 혹자가 공에게 이르기를,
“다시 모여서 의논할 것을 청해야 합니다.”
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내 진실로 마음속으로 옳지 않다고 여기니, 능을 옮기자는 의견은 결코 찬성할 수가 없다. 더구나 성상의 분부가 매우 좋으시므로 내 이미 성상의 뜻을 받들어 따르고자 하니, 어찌 다시 청하여 비방을 면하고자 하겠는가.”
하였다. 다음 날 신경윤이 뒤에 이것을 논하여 올린 상소가 있어 비변사에 내리자, 공이 마침내 재신들 및 신경윤 등과 함께 비변사에 모여서 의논하여 아뢰니, 상이 옮기지 말라고 거듭 명하였다. 공이 청대하여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과 뒤늦게 온 지관들과 함께 봉심할 것을 청하였다. 출발에 앞서 이상(李相 이상진)이 김수흥(金壽興), 정지화(鄭知和) 두 정승과 함께 갈 것을 청하였으며, 뒤늦게 온 지관 7명도 수행하였다. 복명하여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신은 풍수설에 대해 본래 어두워 잘 알지 못하나 국조 이래로 능을 옮긴 것이 다섯 번인데, 장릉(章陵) 이외에는 모두 재앙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반 여염집에서도 햇수가 오래된 묘를 이장하는 일은 가볍게 거행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나라의 능이겠는가. 대신이 아뢴 말이 실로 나의 뜻에 부합한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장릉(長陵)이 다소 문제가 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으며, 지금 왕세자가 오랫동안 없는 것을 어리석은 백성들도 모두 장릉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다시 의논하여 판하(判下)하신 것이 십분 명백하니 중론(衆論)을 진정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대신들과 함께 다시 나아가 봉심할 것을 청하였고 이상진도 흠이 있다고 이르니, 경외(京外)의 여러 대신에게 수의(收議)하게 하고 2품 이상의 관원을 모아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합니다.”
하자,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윽고 또다시 삼사(三司)의 관원까지 일체 와서 모일 것을 청하여 마침내 빈청에서 회의할 적에 정지화 등 10명은 능을 옮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이사명 등 11명은 옮겨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조 판서 여성제(呂聖齊) 등 6명은 양쪽을 다 지지하였다.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은 집에 있으면서 의논을 올리기를,
“혹 흠이 있을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고, 송시열(宋時烈) 등 지방에 있는 대신 3명은 양쪽을 다 지지하니, 집의 강현(姜鋧)이 상이 친히 봉심할 것을 청하였다. 10월에 공이 대가(大駕)를 따라갈 적에 지관 20명에게 명하여 각각 소견을 따라 동서로 나누어 서게 하였다. 이때 신경윤은 중간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재촉을 당한 뒤에야 능을 옮겨야 한다는 쪽에 섰다. 대가가 돌아온 지 3일 만에 상이 인견하여 이르기를,
“50년 된 능침(陵寢)을 사소한 흠 때문에 풍수(風水)의 말을 믿고 가볍게 옮길 수 없다.”
하였다. 당시 포의(布衣)로 있던 허정(許)이 “한양(漢陽)은 장차 300년의 운기(運氣)가 다하려 합니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일이 있는데, 상이 그 상소를 꺼내 보이고 이르기를,
“죄가 국문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의 일은 드러난 행적이 없고 망녕되이 도참설(圖讖說)을 일컬었으니, 만약 죄줄 만하다고 여긴다면 죄가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버려 두고 따지지 않는 것이 조정의 대체에 합당하니, 어찌 굳이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 지난해 봄에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내가 생각건대 조종조에서 반드시 후궁(後宮)을 간택한 것은 왕자를 많이 두기 위해서이다. 지금 숙의(淑儀)가 미비하므로 내전(內殿)에서 일찍이 이러한 뜻으로 누누이 간청하였으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문의하게 하라.”
하였다.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예로부터 국가의 화복(禍福)의 단서가 혹 빈어(嬪御)를 많이 두는 데에 달려 있었으나 상천(上天)과 조종(朝宗)이 묵묵히 도우시어 왕세자의 탄생을 행여 기대할 수 있으니, 깊이 생각하고 대처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이상진(李尙眞)은 공의 의견과 같았고 다른 정승들은 모두 양쪽을 다 지지하였다. 영상 김수항(金壽恒)이 은밀히 공에게 이르기를,
“상께서 총애하는 궁인(宮人)인 장씨(張氏)가 있다.”
하였다. 이해 여름에 숙의(淑儀) 김씨(金氏)가 입궁하였는데, 그해 가을에 교리 이징명(李徵明)이 아뢰기를,
“후궁 중에 또 군주가 가까이 총애하는 이가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은 전하는 말이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였다. 대사성 김창협(金昌協)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여항에 떠도는 소문이 파다하여 모두들 궁중에 실제로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니, 만약 자손이 번성하는 경사가 있고 편애한다는 비난이 없다면 이 또한 성상의 덕에 무슨 누가 되기에 굳이 그 일을 숨기십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상이 마침내 장씨를 숙원(淑媛)으로 삼으니,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하였다.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가 이를 아뢰자, 상이 노여워하여 이르기를,
“궁중의 말을 밖에 전하여 선동하니, 차후에 만약 전파하면 효시(梟示)하겠다.”
하였다. 이때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장씨 편을 들어 특별히 총애를 받았다. 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근습(近習)으로 발신하고 권력을 탐하여 유언비어를 만들어냈으며, 여러 재신 중에 상이 의지하여 장수와 정승으로 삼고자 하는 자를 보면 그때마다 먼저 부정한 방법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어 저지하곤 하였다. 이해 5월에 영상 김수항이 우상 이단하(李端夏)와 함께 명령을 받아 복상(卜相)할 적에 상이 가복(加卜)할 것을 명하므로 이숙(李䎘)을 뽑았는데, 상이 또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므로 이민서(李敏敍)를 뽑았고, 상이 또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므로 신정(申晸)과 여성제(呂聖齊)를 뽑았다. 상이 또다시 가복할 것을 명하자, 김수항 등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들이 식견이 어둡고 미혹하여 가복이 네 번에 이르렀으니, 너무나도 황공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사석(趙師錫)의 덕망이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국사에 마음을 다하고 있으니, 상의하여 의망해 들이라.”
하니, 김수항 등이 부득이 명령대로 따랐다. 부교리 민진주(閔鎭周)가 상소하기를,
“임금의 임무는 정승을 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대신의 직책은 오직 어진 이를 천거하는 데에 있습니다. 영상과 좌상 두 정승이 성상의 뜻이 촉망하는 바에 현혹되어 처음에는 반열을 따라 품계를 따지는 듯하다가 끝에는 품명(稟命)하여 재가를 받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금구(金甌)에 거명한 사람의 숫자가 양전(兩銓)의 장관을 의망하는 것보다 더 많아 경재(卿宰)를 손꼽아 보니 남는 자가 거의 없어서 길거리에서 근거 없이 떠드는 자들로 하여금 이러쿵저러쿵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지금 정승으로 세운 현자가 세상의 명망에 어긋나지 않으나 만일 후세에 간신을 등용하는 군주가 오늘날을 구실로 삼아서 자기 마음대로 정승을 임명하고 신하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의 폐해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경박함을 책망하였다. 6월에 대사헌 이수언(李秀彦)이 다시 이를 말하였다. 이달에 이조에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을 혜민서 제조(惠民署提調)에 첫 번째로 의망하자, 상이 특별히 동평군 이항(李杭)을 제수하였다. 이는 근고(近古) 이래로 종친으로서는 사례가 없었던 일이므로 이조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고, 사간원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자, 의빈(儀賓)도 일찍이 내의원 제조를 겸한 일이 있다고 답하였다. 7월에 좌상 이단하가, 우상 조사석이 스무 번째 사직소를 올렸다 하여 해임을 허락하고 다시 임명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상이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은 전교하기를,
“민진주와 이수언 외에 필시 다시 경박한 의논이 있는 듯하니 모름지기 분명히 말하라.”
하고는 승지를 보내어 세 번 묻고 이어서 김수항과 조사석의 해임을 허락하였다. 8월에 사간원에서 동평군 이항의 일을 갑자기 정계(停啓)할 것을 아뢰고 즉시 공론에 따라 인혐하였는데, 상은 이날 이단하의 해임을 허락하고 마침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상벌(賞罰)과 출척(黜陟)은 군주의 큰 권한인데, 한 번이라도 그 권위가 흔들리거나 권한을 빼앗긴다면 군주가 장차 수족을 어디에 두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정승을 신중히 선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데, 지난해 가을의 일을 살펴보면 반드시 신중히 선발하려는 뜻에서 나왔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므로 금년 여름에 과연 여러 차례 가복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또한 처음에 가복한 사람을 합당하지 못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고,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였다.”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온당치 못한 전교를 고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대체로 군주가 신하를 대할 적에 공과 죄를 따져서 등용하고 물리치되 모두 마음을 너그럽게 해서 자세히 연구하고 차분히 살펴야 하고 털끝만큼이라도 혹 편벽됨이 있어서는 안 되니, 이렇게 한 뒤에야 우로(雨露)와 같은 은혜와 상설(霜雪)과 같은 위엄이 모두 교화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은 선왕조의 유명(遺命)을 받은 신하로서 세상에 드문 전하의 대우를 받아 국정을 맡은 지가 지금 8년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세상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사실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판중추부사 이단하를 정승으로 임명하신 것은 단지 아래에서 추천해 의망(擬望)했을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이미 여러 해 동안 그에게 임무를 맡겨 그의 인품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사간원의 신하들이 정계(停啓)하고 피혐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점점 확대되어 두 신하의 일에까지 미치었는데 성상께서 헤아려 용서해 주지 않으시니, 실로 끝내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꽉 막힌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풀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가을의 일은 결코 신중히 선발하는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지척에서 면대할 때 했던 구차(久次)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대단히 잘못되었으니, 내 마음이 항상 평정되지 못하여 잠시도 느긋한 적이 없다. 또 지친(至親) 간에 만일 잘못이 있으면 마음속에 감춰 두고 참은 적이 없는바, 외면의 가식은 본래 내가 배운 것이 아니니, 실로 갑자기 바꾸기가 어렵다.”
하였다.
○ 9월에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만중(金萬重)이 김수항을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할 적에 이르기를,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의 상소문 때문입니다.”
하고, 이어 여항(閭巷)에 떠도는 말을 아뢰기를,
“조사석이 장씨의 모친과 매우 친하기 때문에 특별히 정승에 제수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이제 이 말의 출처는 반드시 하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또한 향곡(鄕曲)에서 나온 것도 아닐 것이다.”
하고는 김만중을 나문(拿問)하라고 명하고, 또 말을 전한 자는 자수하라고 명하였다. 다음 날 공이 장릉(長陵)을 봉심하는 일로 청대할 적에 인하여 아뢰기를,
“터무니없는 말의 출처는 반드시 무도(無道)한 사람들일 것이니, 어찌 자수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평상시에는 작은 일이라도 매번 체통이 무너진다고 말했었는데, 이번 일은 대신 조사석이 불안해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 청탁을 받고 정승을 세웠다는 말을 군상(君上)에게 가하는데도 경악할 줄을 모르니, 이것이 옳은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김만중이 ‘문왕(文王)의 〈관저(關雎)〉의 세상에는 이러한 말이 없었을 듯하다.’ 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순(舜) 임금은 참소하는 말이 횡행하여 훌륭한 행실을 해치고 끊는 것을 미워하셨으니, 성인의 포용하는 도량으로 볼 때 이러한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힘쓰셨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자수하는 일은 김만중의 일과는 더욱 차이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말의 출처를 어떻게 조사하여 알아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설혹 의심 가는 사람을 찾아내어 살육하는 형전(刑典)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그 후에 어찌 분분한 말이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상께서 반드시 황극을 세우시어〔建用皇極〕 모든 일을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끝내 자수하지 않을 리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상께서 일시적인 분노로 인하여 끝내 정도를 넘는 방향으로 가고 계시기에 염려되어 아뢰는 것이지, 신이 어찌 감히 그런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듣고도 경악하지 않고 굽혀서 비호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경이 경악하지 않는다 하여 그러는 것이겠는가. 진달한 바가 이에 이르니, 자수하라는 비망기를 환수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마침내 김만중을 멀리 유배 보냈다. 다음 날 빈청 인견할 때에 상이 이르기를,
“내 마땅히 처음부터 설명해야겠다. 내가 대왕대비전에 항상 문안하고 혹 거른 적이 없는데, 5월 초하루에 복상(卜相)하는 일로 문안이 약간 늦었다. 여러 공주들이 문안차 내전에 들어왔다가 영상과 우상이 청대한다는 말을 듣고 숙명공주(淑明公主)가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묻기에, 공주가 바깥 조정에 관한 일을 알고자 하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하나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다. 또다시 ‘누가 정승이 되겠습니까?’ 하고 묻기에, 나는 대답하지 않고 나왔다. 낙점한 뒤에 대왕대비전에 나가자, 숙명공주가 또다시 ‘어떤 사람이 과연 정승이 되었습니까?’ 하고 묻기에, 내가 ‘조 아무개가 되었다.’ 하고 말했더니, 숙명공주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고, 숙안공주(淑安公主)도 말하기를, ‘조 아무개가 과연 좋은 명정(銘旌)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도리로 헤아려 보건대 공주들이 어찌 차마 이러한 말을 대왕대비전 앞에서 한단 말인가.
무릇 내전에 일이 있을 때에 공주가 들어와서 위로하는 것이 규례이므로, 지난번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의 상(喪)에 상궁(尙宮)이 아래에서 기별하자 숙휘공주(淑徽公主)가 즉시 내전에 들어왔는데, 숙명공주가 뒤늦게 와서 발끈하여 이르기를, ‘성상께서 들어오라는 하교가 없으시면 마땅히 들어오지 않아야 할 듯하나 상궁이 기별하였으므로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고는 음성과 기색이 매우 사납고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하였다. 비록 고모와 조카 사이라 해도 일반인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어찌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한단 말인가. 예로부터 조신(朝臣)이 내관(內官)과 결탁하고 궁가(宮家)에서 나인(內人)과 내통하는 것을 모두 경계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지난날 내가 효시하겠다는 뜻으로 특별히 비망기를 내려 거듭 금령을 밝혔던 것인데, 이로 인해 공주들이 크게 유감스러워하여 스스로 의심을 살 만한 단서를 자초하였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옛사람의 말에 ‘규문(閨門) 안의 다스림은 은혜로써 의(義)를 덮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의 동기간은 오직 공주 몇 분만이 계신데 성상의 하교가 이러한 데에 이르시니, 다시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공주를 예우하여 일찍이 조금도 소홀한 적이 없었는데, 공주들은 나에게 유감을 풀려고 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지금 경(卿)은 변고라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은혜로써 의를 덮는다는 말을 하니, 진실로 한심스럽다.”
하고, 또 이르기를,
“안으로는 지친에게 모욕을 받고 밖으로는 신하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이 자리에 있겠는가?”
하였는데, 어조(語調)가 매우 엄하여 용상(龍牀)이 진동하였다. 호조 판서 이민서(李敏敍)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신하가 임금에게 경계의 말씀을 올릴 때에 매번 궁금(宮禁)을 엄격히 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번에 공주의 일은 지극히 놀랍습니다만, 옛사람이 이르기를,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혜와 의리를 돈독히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붕당을 나누어 대치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일인가. 한쪽에서는 또다시 셋으로 나뉘었다. 지금 김만중은 자기 당파를 비호하기에 급급하여 군부(君父)를 깔보았으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상께서 단지 붕당을 미워하고 일의 옳고 그름을 규명하지 않으신다면 그 폐해가 더 클 것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의 유소(遺疏)에 조정 신하들의 사사로운 붕당의 폐해를 아뢰었는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이준경이 죽으려 할 적에 올린 말이 나빴다.’라고 하였으니, 이이의 말이 비록 지나친 듯하나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격분한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일 뿐이다. 어찌 반드시 모든 사람을 다 의심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판돈녕부사 조사석(趙師錫)이 교외로 나가 있었다. 10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조사석이 모함을 받고 교외로 나가 있는 것은 진실로 부득이해서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만약 끝내 불러오지 않으신다면 이후로 의지하고 신임하는 신하가 한 번 간사한 자에게 미움받기만 하면 모두 유언비어 때문에 쫓겨날 것이니, 후일의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게 여겨 다음 해 봄에 불러서 좌상으로 임명하였다.
○ 이달에 주강(晝講)에 입시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곤궁함을 굳게 지킨 전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의 청백한 절개는 실로 보통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데, 견책을 받은 이후로 물러가 지방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거두어 등용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또한 감히 벼슬하지 못하다가 청빈(淸貧)이 골수에 사무쳐 마침내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여 병들어 죽었으니, 진실로 매우 측은합니다. 청백한 사람을 표창하는 것은 본래 국가에 떳떳한 법전이 있으나 한태동은 죽은 뒤에 장례 물품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가 비록 일찍이 시종관(侍從官)을 지냈으므로 이미 법식에 따른 부의(賻儀)가 있기는 하지만 장례 물품을 특별히 지급하여 우대하는 뜻을 보이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공은 또다시 아뢰기를,
“국가가 훌륭한 국가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인재를 등용하는 길이 오직 과거(科擧)뿐이어서 그 관문이 너무 좁고 또 과거 급제자 중에 오직 명문 귀족만을 등용하기 때문에 인재가 적다는 한탄이 날로 심해지는 것입니다. 더욱 한탄스러운 것은 지금 과거를 거친 명문으로서 당상관을 지낸 자는 이여(李畬), 임영(林泳), 오도일(吳道一), 서종태(徐宗泰), 김창협(金昌協) 등이 있는데, 이들은 문장의 재주와 명망이 한 시대의 최고로 뽑혔으나 혹은 외직으로 나가 있기도 하고 혹은 파직되거나 한산직에 있어서 모두 진강(進講)하는 대열과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외직에 있는 자는 모두 불러서 등용하도록 명하시고 파직되거나 한산직에 있는 자는 거두어 서용하며, 사직하고 오지 않는 자는 돈독히 권면하여 올라오게 하시는 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고, 이어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인재를 수습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정치하는 방도는 언로(言路)를 넓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아직 언로가 열리지 않고 있어 참으로 오늘날 조정의 큰 병폐가 되고 있습니다. 옛날 제왕(帝王)의 일은 시대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갑자기 다 열거할 수가 없고, 다만 신이 섬겼던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두 조정의 일을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효종대왕이 장릉(章陵)을 배알하고 돌아오시는 길에 노량(露梁)에서 열무(閱武)하였는데, 정언 이상진(李尙眞)이 간하기를, ‘능을 배알하는 행차이고 마음을 깨끗하게 재계해야 할 때에 말을 달려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것은 선조를 추모하는 성상의 효심에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효종께서 그의 말이 간절하고 정직함을 장려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사간 유철(兪㯙)이 정사를 언급할 적에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관련되자, 성상께서 크게 진노하여 의금부에 하옥하여 형추(刑推)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대간(臺諫)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잠잠히 있었으나 사간 윤집(尹鏶)만이 홀로 예대(詣臺)하여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다음 날 효종께서 하교하시기를, ‘윤집이 홀로 아뢰었으니, 과감하게 말하는 기절이 숭상할 만하다.’ 하시고는 즉시 승지에 발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의관(醫官)의 품계를 높여 주고 녹봉을 주는 일을 병조에서 즉시 거행하지 않자, 병조의 아전을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잡아다가 엄하게 곤장을 쳐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유신(儒臣) 송준길(宋浚吉)이 온당치 못함을 지극히 아뢰자, 효종이 마침 병환이 있어 침상에 누워 계시다가 송준길의 말을 듣고는 즉시 일어나 앉으시며 말씀하기를, ‘경이 지방으로 나간 탓으로 나로 하여금 잘못하는 일이 있게 하였다.’ 하시고는 내시를 돌아보고 명하여 어공(御供)의 납약(臘藥)을 가지고 가서 병조의 아전을 치료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남을 따르는 효종의 아름다운 위의는 애당초 잘못된 조처가 없었던 것보다도 더욱 빛이 났으니, 그 성대한 덕(德)과 지극한 선(善)을 돌아가신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잊지 못하는 것은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종대왕 때에 이단상(李端相)이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의 일을 아뢰다가 또한 성체(聖體)에 관련된, 지극히 과격한 말을 하였는데도 현종께서는 죄를 가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말과 안장을 주어 칭찬하셨습니다. 두 조정에서 간언하는 자들을 우대하고 용납하는 것이 이와 같았는데, 지금은 오직 말을 하다가 죄를 얻었다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언로가 점점 막히면 성덕(聖德)에 누가 되고 치도(治道)가 쇠퇴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신은 참으로 이를 민망히 여기고 참으로 서글퍼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간곡한 진달을 내 매우 가상히 여기니, 마땅히 유념하여 체행하겠다.”
하였다.


 

[주D-001]4월 : 대본에는 ‘四日’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日’을 ‘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주뢰(周牢) : 주리의 원말로, 죄인을 신문할 때 두 발목을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서 비트는 형벌을 이른다.
[주D-003]본도에서 조사하였다 : 대본에는 ‘本道査聞’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聞’을 ‘問’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봉명(奉命)한 신하 : 군주의 명령을 받고 직무를 수행하는 신하로, 지방관과 사신(使臣), 기타 어떠한 지역을 조사하거나 어떠한 사태를 무마하기 위하여 나간 관리를 이른다.
[주D-005]상명(償命) : 피살자의 죽음에 대하여 살인자의 목숨으로 갚는 것을 이르는바, 곧 살인죄로 상대방을 무고하여 그를 죽게 하였을 경우 무고한 자에게 사형을 적용하는 따위를 이른다.
[주D-006]일반인과 …… 말입니까 : 고요(皐陶)는 순(舜) 임금의 신하로, 법률을 담당하여 공평하게 형벌을 집행한 자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도응(桃應)이 “순 임금이 천자가 되고 고요가 법관이 되었는데, 순 임금의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만약 사람을 죽였다면 고요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법을 집행하여 살인자인 고수를 붙잡을 뿐이다.” 하고 대답한 내용이 보인다.
[주D-007]약법삼장(約法三章) : 한 고조(漢高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종전에 있었던 진(秦)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지하고 세 조항으로 줄여서 새로 만든 법을 가리키는데, 세 조항의 법은 곧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남에게 상해를 입힌 자와 도둑질한 자에 대해서는 그 범죄 정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한다.〔殺人者死 傷人及盜抵罪〕”라는 것이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08]김경징(金慶徵)의 일 : 김경징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김류(金瑬)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때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에 임명되어 강화도 수어(守禦)의 임무를 띠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사로 삼아 함께 부임하였으나 강화도의 지리적인 조건만 믿고 방어 계획을 세우지 않아 방어에 실패하였다. 이에 대간들이 김경징을 탄핵하여 법대로 처단해야 한다고 논계하여 강계(江界)에 귀양 보냈다가, 전 판서 김시양(金時讓)과 참판 유백증(兪伯曾)의 상소로 인해 사헌부의 의논이 다시 일어나 사사되었고, 이민구는 영변(寧邊)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6 仁祖朝故事本末 江都敗沒》
[주D-009]제(齊)나라 …… 다스려졌습니다 : 전국 시대 초기 제나라 아읍(阿邑)의 대부(大夫)가 위왕(威王)의 좌우 신하들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자신을 왕에게 칭찬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위왕이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아읍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좌우 측근들의 칭찬하는 말과는 반대로 백성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전답이 제대로 경작되지 못하였으며 국경의 수비가 허술하였다. 이에 위왕은 아읍의 대부와 그를 칭찬한 좌우 신하들을 모두 삶아 죽였다.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감히 거짓말을 하지 못하고 실제에 힘써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資治通鑑 卷1》
[주D-010]성인(聖人)의 교훈 : 성인은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에 정직하게 행동하는 자가 있으니, 그의 아버지가 양(羊)을 훔치자, 아들이 그것을 입증하였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씀하기를, “우리 고을의 정직한 자는 이와 다르다. 아버지가 자식을 위하여 숨겨 주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吾黨之直者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矣〕” 하였다. 《論語 子路》
[주D-011]대공(大功) 이상의 친척 : 대공은 오복(五服)의 하나로 9개월 복이다. 상복(喪服)은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삼년(三年), 기년(期年), 대공 구월(大功九月), 소공 오월(小功五月), 시마 삼월(緦麻三月)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삼년은 참최 삼년(斬衰三年)과 자최 삼년(齊衰三年)으로 나누었다. 대공복은 비교적 올이 굵은 베로 상복을 만들어 9개월 동안 입으며, 중자(衆子)의 처(妻), 조카의 처, 사촌 형제 등이 대공복을 입는 친척이다.
[주D-012]호관(縞冠)에 현무(玄武) : 호관은 흰 깁으로 만든 관(冠)이고, 현무는 검은색으로 두른 관의 가선이다. 무(武)는 관의 가선〔冠卷〕이다. 《예기》 〈옥조(玉藻)〉에 “호관에 검은 무를 두르는 것은 아버지가 상중에 있을 때에 자손들이 쓰는 관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也〕” 하였다.
[주D-013]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원비(元妃)로 광주 김씨(光州金氏)이다. 1680년(숙종6)에 천연두를 앓다가 발병 8일 만에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익릉(翼陵)이다.
[주D-014]오향 대제(五享大祭) : 종묘(宗廟)에 지내는 다섯 번의 제향(祭享)을 이르는바, 4계절의 첫달과 12월의 납일(臘日)에 거행하는 춘향, 하향, 추향, 동향, 납향(臘享) 제사를 이른다.
[주D-015]혼전(魂殿) : 왕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부묘(祔廟)하기 전까지 신위(神位)를 모셔 두는 전각을 이른다.
[주D-016]헌가(軒架)와 일무(佾舞) : 헌가는 편종이나 편경 등과 같이 틀에 걸고서 연주하는 악기를 이르는바, 종묘(宗廟)와 문묘(文廟), 경모궁(景慕宮) 등의 제향 때 뜰아래에서 연주하는 음악이다. 일무는 종묘나 문묘 제향 때 여러 사람이 여러 줄로 벌여 서서 추는 춤을 이른다.
[주D-017]위(魏)나라의 견후(甄后) : 견후는 위나라 문제(文帝)의 후비(后妃)이고 명제(明帝)의 모후이다. 본래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遠煕)의 아내였다가 조조(曹操)가 원소를 격파하자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그의 아름다움을 탐내어 아내로 삼아 명제 조예(曹叡)를 낳았는데, 뒤에 곽후(郭后)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원망하다가 사사되었다. 명제가 제위에 오르자 문소황후(文昭皇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三國志 卷3 魏書 明帝叡》
[주D-018]당(唐)나라의 장손후(長孫后) : 장손후는 당 태종(唐太宗)의 후비로 시호는 문덕(文德), 성은 장손(長孫)인데, 고종(高宗)을 낳았다. 《新唐書 卷76 后妃列傳上》
[주D-019]금석(金石)의 음악 : 악기를 만드는 재료에 따라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의 여덟 가지로 나눈 것을 팔음(八音)이라 하는데, 팔음 중 금(金)은 종 따위이고, 석(石)은 석경(石磬)이다.
[주D-020]인열왕후(仁烈王后) : 인조의 비이다.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효종,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 등 네 아들을 두었다. 능(陵)은 장릉(長陵)으로 처음에 파주(坡州) 운천리(雲川里)에 장사 지냈으나 영조 때 교하(交河)로 이장하였다.
[주D-021]무무(武舞)를 …… 사용하여 : 무무는 악생(樂生)들이 무(武)를 상징하는 옷을 입고 열을 지어 추는 춤이며, 문무(文舞)는 악생들이 칼이나 창을 들지 않고 문관(文官)의 차림으로 열을 지어 추는 춤이다.
[주D-022]왕조(王朝) : 북송(北宋)의 명재상으로 원래의 이름은 단(旦)인데,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개명인 단(旦)을 휘(諱)하여 조(朝)로 쓴 것이다.
[주D-023]대관(大觀) : 북송 휘종(北宋徽宗)의 두 번째 연호이다.
[주D-024]만과(萬科) : 1616년(광해군8)에 변경의 사정이 날로 급박하고 또 응시자를 모두 서울에 모으기가 어렵다 하여 승지를 여러 도에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하고 널리 무사를 뽑았는바, 모두 합하여 1만여 명에 이르니, 당시에 이를 만과라 일컬었다.
[주D-025]적불(赤芾)이 삼백 명 : 적불은 붉은 슬갑으로 대부(大夫)의 관복이다. 《시경》 〈후인(候人)〉에 “저 소인이여, 붉은 슬갑을 찬 자가 삼백 명이나 된다.〔彼其之者 三百赤芾〕” 하였는데, 이는 춘추 시대 조(曹)나라 군주가 소인들을 많이 등용함을 비판한 내용이라 한다. 옛날 대부들은 붉은 슬갑을 차고 헌(軒)이라는 높은 수레를 탔는바, 당시 제후국에는 대부가 많았으며 특히 조나라는 약소국이었는데도 이처럼 관직을 남발하고 소인들을 중용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주D-026]봉초(捧招) : 죄인을 문초하여 구두로 진술을 받음을 이른다.
[주D-027]정범(正犯) : 주범(主犯)과 같은 말로 형법에서 자기 의사에 따라 범죄를 실제로 저지른 사람을 이르는바, 단독 정범과 공동 정범으로 크게 나뉜다.
[주D-028]평번(平反) : 옥사를 다시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함을 이르거나 또는 먼저보다 죄를 가볍게 함을 이른다.
[주D-029]편배(編配) : 유배 죄인을 배치하는 것으로, 곧 귀양 갈 사람의 이름을 도류안(徒流案)에 기록하는 것이다.
[주D-030]계복(啓覆) :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사형받을 죄인을 재심하는 것으로, 승정원에서 추분(秋分)이 지난 뒤에 계품(啓稟)하여 9월, 10월 중에 날짜를 정해서 시행하였다.
[주D-031]상형(祥刑) : 형벌을 잘 쓰는 것을 이른다. 《서경》 〈여형(呂刑)〉 채침(蔡沈)의 주(註)에 “형벌은 흉한 도구인데 상서라고 말하는 것은, 형벌은 죄인을 징계하여 형벌을 시행할 일이 없기를 기약해서 백성들이 중에 화합하면 그 상서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이다.〔夫刑凶器也 而謂之祥者 刑期無刑 民協于中 其祥莫大焉〕”라고 하였다.
[주D-032]서경(署經)한 시장(諡狀) : 서경은 심사를 거쳐 동의한다는 뜻이며, 시장은 재상이나 유현(儒賢)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임금에게 건의할 때에, 그가 살아생전에 한 일들을 적어 올리던 글을 이른다.
[주D-033]당시에는 : 대본에는 ‘常時’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常’을 ‘當’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34]스승을 배반한 죄 : 윤증(尹拯)이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죄를 이른다. 윤증은 일찍이 송시열을 사사(師事)하였으나 그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비문 문제로 반목하여 결국 송시열은 노론의 영수(領袖),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주D-035]연양(延陽)과 포저(浦渚) : 연양은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1581~1660)을 가리키는바, 인조반정 때 주도 세력이었던 이귀(李貴)의 아들로 1650년(효종1) 우의정이 되고 2년 후 연경을 다녀와 영의정에 올랐다. 포저는 조익(趙翼, 1579~1655)의 호로 효종 초년에 좌의정에 올랐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D-036]향소(鄕所) : 유향소(留鄕所)를 가리킨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지방의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으로, 풍속을 바로잡고 향리(鄕吏)를 감찰하며 민의(民意)를 대변하였다.
[주D-037]공의(功議) : 공신이나 그 자손의 범죄에 대하여 형벌을 감하여 주는 규정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은 죽을죄가 아니면 목에 칼을 씌우지 않았고, 공신의 자손으로 인륜을 어기거나 도둑질을 하여 그 죄가 장(杖), 유(流) 이하에 해당할 때에는 속죄(贖罪)로 대신하였다.
[주D-038]전가속포(全家贖布) : 속포는 죄를 면하기 위해서 죗값으로 바치는 베로, 전가속포는 죄인과 그 전 가족에게 속포를 물리는 것이다.
[주D-039]일곱 가지 천역(賤役) : 조선 시대에 가장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종사하였던 일곱 가지 천역으로 곧 관아의 조례(皁隷), 의금부의 나장(羅將), 각 지방청의 일수(日守), 조운창(漕運倉)의 조군(漕軍), 수영(水營) 소속의 수군(水軍), 봉화대(烽火臺)의 봉군(烽軍), 역참(驛站)의 역졸(驛卒) 등을 이른다.
[주D-040]정훈(正勳) : 정공신(正功臣)으로, 종훈(從勳) 즉 원종공신(原從功臣)과 상대되는 말이다.
[주D-041]여정(餘丁) : 국가의 충원 계획에 따라 현역(現役)에 징집하고 남은 장정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포목을 바쳤다.
[주D-042]네 군영(軍營) :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을 이른다.
[주D-043]연점(鉛店) : 수공업 방식으로 납을 캐는 광산을 가리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은을 캐는 광산을 은점(銀店)이라 한다.
[주D-044]별성(別星) : 임금의 명을 받드는 봉명 사신(奉命使臣)을 이른다.
[주D-045]황무지를 …… 것입니다 : 성인(聖人)의 가르침은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이른다. 《논어》 〈선진(先進)〉에 제자인 염구(冉求)가 계씨(季氏)의 가신이 되어 계씨의 마음씨와 행실을 고치지 못하고 세금을 거둔 것이 배가 되자, 공자는 “염구는 나의 무리가 아니니, 소자(小子)들아, 북을 울려 성토하라.” 하여 그의 죄를 꾸짖었다. 맹자는 공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이르기를, “군주가 인정(仁政)을 행하지 않는데도 그 군주를 부유하게 하면 모두 공자에게 버림을 받을 자이다.……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극형을 받아야 하고, 외교를 잘하여 제후들을 연합하는 자는 그다음의 형벌을 받아야 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해서 세금을 거두는 자는 그다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하였다. 《孟子 離婁上》
[주D-046]연수(淵藪) : 못에 물고기가 모여들고 숲에 새와 짐승이 모여드는 것처럼 여러 물건이나 사람이 모이는 소굴을 비유한 것이다.
[주D-047]복성(福星) : 복을 내리는 별 또는 신(神)으로, 곧 사자(使者)를 가리키기 때문에 한 지방을 구제하여 잘 살게 할 수 있는 지방관이나 어사(御史) 등을 이른다. 북송(北宋) 때 선우신(鮮于侁)은 자(字)가 자준(子駿)이었는데, 그가 절동 전운사(浙東轉運使)로 나갈 적에 사마광(司馬光)이 “지금 동쪽 지방의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자준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니, 이 사람은 한 도(道)의 복성이다.” 하였다. 《山堂肆考》
[주D-048]오훼(烏喙)와 짐독(鴆毒) : 오훼는 독약으로 모양이 까마귀의 부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짐독은 짐새의 깃에 있는 맹렬한 독을 이른다.
[주D-049]유황 : 대본에는 ‘䟽黃’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䟽’를 ‘硫’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0]책응(責應) : 수요에 따라 물품을 책임지고 내주는 것을 이른다.
[주D-051]훌륭한 …… 것 : 상(賞)을 함부로 주지 않음을 이른다. 전국 시대 한(韓)나라의 소후(昭侯)가 헌 바지를 잘 보관하라고 지시하자, 모시는 자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인자하지 못하십니다. 이 바지를 좌우 신하들에게 주지 않고 보관하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하였다. 이에 소후는 “내 들으니, 훌륭한 군주는 얼굴을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도 아끼고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바지야 어찌 한 번 찌푸리고 한 번 웃는 것뿐이겠는가. 나는 공이 있는 자를 기다려 주겠다.” 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내렸는데, 끝내 나라를 잘 다스려 유명하였다. 《韓非子 內儲說上》
[주D-052]송(宋)나라 …… 하였고 : 천반(川班)은 사천(四川) 출신의 무반(武班)이며, 전직(殿直)은 내전(內殿)을 지키는 무사를 이른다. 《송사(宋史)》 〈병지(兵志)〉를 보면 내전직(內殿直)으로 좌반과 우반 넷이 있었다. 송나라 태조(太祖)는 건덕(乾德) 3년 촉(蜀) 지방을 평정한 다음 재주와 모습이 걸출하고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 128명을 뽑아 내전직에 임명하고 녹미를 넉넉히 내려 주어 어마직(御馬直)과 똑같이 대우하였다. 이때 교제(郊祭)를 마치고 상을 줄 때에 어마직이 호종하였으므로 이들에게 특별히 1인당 5000전을 더 주니, 천반 내전직이 준례와 같지 않다 하여 마침내 서로 몰려와서 등문고(登聞鼓)를 치고 자신들에게도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태조가 노하여 이르기를, “짐이 그들에게 준 것은 은택인데, 어찌 준례가 있겠는가.” 하고는 청원한 자 40여 명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군으로 편입하였으며, 마침내 천반의 내전직을 폐지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 卷7 宋太祖》
[주D-053]당(唐)나라 장종(莊宗) : 후당(後唐)의 이존욱(李存勖)으로 용병술에 능하여 전투를 잘하였으나 뒤에 점점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재위 4년 만에 반란을 일으킨 곽종겸(郭從謙)을 토벌하다가 유시(流矢)를 맞고 죽었다.
[주D-054]장릉(長陵) :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능으로 교하(交河)에 있다. 1649년(인조27)에 인조가 승하하자, 초상(初喪)의 의절(儀節)을 조익(趙翼)이 많이 결정하였는데, 장릉을 버리고 다른 길지(吉地)를 선택하려 하였으나 조론(朝論)이 엇갈려 저지되었다. 《燃藜室記述 卷27 仁祖朝故事本末 長陵》
[주D-055]술서(術書) : 풍수지리를 논한 방술서(方術書)를 이른다.
[주D-056]산론(山論) : 풍수지리 가운데 산세(山勢)를 논한 내용을 이른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세를 용(龍)이라 하여 어느 산에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내려왔는가를 제일 중요시하며, 이것을 그린 것을 산도(山圖)라 한다.
[주D-057]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인조의 생부(生父)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으로 경기도 김포(金浦)에 있다. 추존하기 전에는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는데, 1632년(인조10) 추존하면서 장릉으로 고쳤다.
[주D-058]이사명 : 대본에는 ‘李師會’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과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거하여 ‘會’를 ‘命’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9]이 사람의 일 : 대본에는 ‘此人人事’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人’ 1자를 연문으로 보아 번역하지 않았다.
[주D-060]근습(近習) :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를 이른다.
[주D-061]조사석(趙師錫) : 1632~1693. 자는 공거(公擧)이고, 호는 만회(晩悔)ㆍ만휴(晩休)ㆍ향산(香山)ㆍ나계(蘿溪)이며 본관은 양주(楊州)로 형조 판서 조계원(趙啓遠)의 아들이다. 이때 김만중(金萬重)에 의해 희빈 장씨의 모친과 가까이 지낸 사실이 알려졌다.
[주D-062]금구(金甌) : 금으로 만든 사발 또는 잔을 이른다. 당 현종(唐玄宗)이 재상을 선임할 때마다 먼저 후보자의 성명을 쓴 종이를 금구로 덮어 놓고 중론(衆論)을 물어 임명하였는데, 한번은 마침 태자가 들어오므로 현종이 금구를 가리키며 “이 속에 재상의 이름이 들어 있다. 네 생각에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묻자, 태자가 “최림(崔琳)이 아니면 노종원(盧從愿)인가 합니다.” 하고 아뢰었는데, 과연 적중하였다. 이후로 금구는 재상을 임명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新唐書 卷109 崔義玄列傳》
[주D-063]양전(兩銓)의 장관 : 두 전조(銓曹)의 장관으로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를 이른다. 이조는 문관의 전형을 맡고 병조는 무관의 전형을 맡기 때문에 이조와 병조를 양전이라 칭한다.
[주D-064]의빈(儀賓) : 임금의 사위인 부마(駙馬)를 이르는 말이다.
[주D-065]구차(久次) : 오랫동안 같은 벼슬에 침체되어 있고 승진되지 못함을 이른다.
[주D-066]관저(關雎) :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번째 편명으로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인 태사(太姒)의 덕을 노래한 시이다. 태사는 훌륭한 부덕(婦德)이 있었는바, 이는 문왕이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잘한 소치라 한다.
[주D-067]순(舜) 임금은 …… 미워하셨으니 : 《서경》 〈순전(舜典)〉에 “순 임금이 말씀하기를, ‘용아! 짐은 참소하는 말이 선행(善行)을 끊어 짐의 무리들을 놀라게 하는 것을 미워해서 너를 납언으로 임명한다.〔龍 朕堲讒說殄行 震驚朕師 命汝作納言〕’ 하였다.” 하였다. 대본에는 ‘朕堲殄行’으로 되어 있는데, 《서경》 〈순전〉에 의거하여 ‘堲’과 ‘殄’ 사이에 ‘讒說’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68]황극을 세우시어 : 《서경》 〈홍범(洪範)〉에 보이는 내용으로 황극(皇極)은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황제의 법칙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69]내 …… 것이겠는가 : 대본에는 ‘予豈以鄕不爲驚動然也’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動’과 ‘然’ 사이에 ‘而’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70]명정(銘旌) :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씨 따위를 적은 기(旗)로, 일정한 크기의 긴 천에 보통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쓰며, 장사 지낼 때 상여 앞에서 들고 간 뒤에 널 위에 펴 묻는다.
[주D-071]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의 봉호이다.
[주D-072]선정신(先正臣) : 돌아가신 유현(儒賢)을 이르는 말로, 주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주D-073]예대(詣臺) : 사헌부나 사간원의 관원이 진계(陳啓)할 일이 있을 때 궁중의 대청(臺廳)에 나아가는 일을 말한다.
[주D-074]차비문(差備門) : 궁궐 편전(便殿)의 앞문을 가리킨다.
[주D-075]어공(御供)의 납약(臘藥) : 어공은 임금에게 바치는 물건이며, 납약은 해마다 납일(臘日)에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약으로, 청심원(淸心元),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 등인데, 내의원(內醫院)에서 조제하였다.


 

 

 

약천연보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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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60세 무진년(1688, 숙종14)
1월에 비변사에 나아가 경기의 여덟 고을과 강양도(江襄道)의 네 고을에 봄철의 대동미(大同米)와 전세(田稅)를 모두 남겨 두어 구휼하는 데 쓸 것을 계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3월에 상이 김진규(金鎭圭)를 기복(起復)하여 태조(太祖)의 어용(御容)을 모사(摹寫)하려 하였는데, 공이 예(禮)를 인용하여 의논을 올리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상이 온화한 유시를 내려 이상진(李尙眞)을 만류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4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선왕조(先王朝) 계묘년(1663, 현종4)에 내린 수교(受敎)를 거듭 밝혀 여러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을 제한하고, 새 궁가는 직전법(職田法)에 따라 유사(有司)에게 받으며 절수(折受)하는 것과 사전(私田)에 대한 면세를 혁파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6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금위영(禁衛營)에서 군기(軍器)를 제조한 공로에 보답하는 폐단을 논변하여 중지시키고 조가(朝家)에서 상을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며, 이단석(李端錫)의 장례 물품을 지급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7월에 청대할 때에 공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혜민서 제조에 제수한 것과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을 삭탈관직하라는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또 동평군 이항에게 사관(史官)을 보내는 것에 대해 간하면서 이정(李楨)과 이남(李柟)을 인용하여 경계하였다가 성상의 뜻에 거슬려 멀리 유배 갔다. 다음 날 상은 공을 경흥(慶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경흥에 이르렀다. 25일에 장렬왕대비(莊烈王大妃)가 승하하였다.
10월에 왕자가 처음 탄생하였다.
11월에 상이 공의 위리안치를 풀어 주도록 명하고, 다음 날 삭탈관작하여 풀어 주도록 명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삭탈관직하도록 명하였다.
12월에 상이 직첩을 다시 주도록 명하였다. 공은 이달에 돌아와 북청(北靑)에 이르렀다.

○ 1월 원일(元日)에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임하여 신하들의 경하를 받으니, 이는 참으로 역대의 조정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 송나라의 기거랑(起居郞) 호인(胡寅)이 올린 글에 ‘실효를 거두기를 힘쓰고 헛된 문식을 제거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효제(孝悌)와 구현(求賢), 납간(納諫)과 임장(任將), 치군(治軍)과 애민(愛民) 등의 여섯 가지 일에 대해 각각 그 허실(虛實)을 아뢴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끝에 이르기를, ‘이 여섯 가지 헛된 문식을 행하면서 황옥(黃屋)을 타고 악전(幄殿)을 세우고서 날이 밝을 무렵 연(輦)을 타고 방을 나오면 치미선(雉尾扇)과 금향로를 든 자들이 양쪽 섬돌에서 모시고, 의장마(儀仗馬)와 호위병이 엄숙히 의식을 분담하여 집행하면 예를 돕는 자가 백관을 인솔하여 차례로 들어가 문안을 올리며, 물러 나온 뒤에는 재상과 대신(大臣)들이 몸을 숙이고 앞으로 나아가서 홀(笏)을 꽂고 나와 아뢰며, 사신(司晨)이 진정(辰正)이 되었음을 창(唱)하면 대가(大駕)가 들어가고 의장이 나오니, 이는 천자의 헛된 문식입니다.’ 하였으니, 그 경계하고 깨우친 말이 아주 적절하여 군주의 약석(藥石)으로 삼을 만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만약 이러한 의식을 통해 실제 효험을 구하신다면 실로 종묘와 사직, 신하와 백성들의 무궁한 경사가 될 것이지만, 만약 헛된 문식을 우선으로 하고 실제 효험을 뒷전으로 여기신다면 또한 국가가 위태롭고 혼란한 데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유익함이 없을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고 군주를 사랑하여 가르치고 경계하는 말이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깊이 가상히 여기고 탄복하노라. 내가 비록 불민(不敏)하나 유념하여 가슴속에 새겨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3월에 낭원군(朗原君) 이품(李偘)이 태조의 모습을 그려서 남별전(南別殿)에 봉안할 것을 청하자, 상이 전(前) 지평(持平) 김진규(金鎭圭)를 기복(起復)하여 모사하게 하려 하면서 이것을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예(禮)에 ‘군자는 남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마음을 빼앗지 않고 또한 자신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효심을 빼앗기지 않으며, 오직 금혁(金革)의 일은 피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지금 어용(御容)을 모사(摹寫)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요하나 금혁의 시급함과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성상께서 억지로 시키신다면 이는 남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마음을 빼앗는 것이 되고, 아랫사람이 군주의 명을 받든다면 이는 자신의 어버이를 잃고 슬퍼하는 효심을 빼앗기는 것이 되니, 결코 태평한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금혁의 일조차도 《공양전(公羊傳)》에서는 오히려 ‘군주가 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신하가 행하는 것은 예이다.’ 하였으니, 더구나 금혁의 일이 아닌데 억지로 시킨단 말입니까.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예의를 엄격히 지키는 데에 달려 있으니, 경솔하게 변경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여,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 민정중(閔鼎重)이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있을 때에 마천령(磨天嶺)에 축성할 것을 의논하였고, 오랜 뒤에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다시 이것을 청하였다. 지난해 봄에 감사 윤지완(尹趾完)이 또한 이와 같이 청하고, 인하여 성진(城津)과 철령(鐵嶺)에 축성하고 남병사(南兵使)의 병영을 제인관(濟人館)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다. 이때 공이 좌상으로서 정사(呈辭)를 올린 상황이었는데, 비변사의 유사 당상이 명을 받들고 찾아와서 물으니, 공은 먼저 민심을 잃게 된다고 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인재를 수습하여 민심을 굳게 결속시키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때 윤지완이 강화 유수(江華留守)로서 입시하여 거듭 청하자, 공이 아뢰기를,
“마천령은 위아래 100여 리 사이에 통행할 수 있는 작은 지름길이 한두 곳일 뿐만이 아닙니다. 만일 적병(敵兵)이 마천령 아래에 이른다면 고갯길 한 길목은 성(城)에 올라가서 차단할 수 있으나 위아래의 여러 갈래 길을 어떻게 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고려의 윤관(尹瓘)이 여진(女眞)을 평정하고 영주(英州)와 웅주(雄州) 등에 구성(九城)을 쌓았는데, 그때 조정의 의논이 병목〔甁項〕을 얻어 그 지름길을 막으면 오랑캐들이 침공하는 길이 단절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의논을 정하고 군대를 출동하였는데, 막상 이곳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보니, 수로와 육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예전에 들었던 것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적들이 여러 번 매복을 두어 약탈하므로 끝내 구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었으니, 이른바 웅주성(雄州城)은 바로 길주(吉州)입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병목은 지금의 마천령으로서 방어에 유익함이 없는바 지난날의 일을 거울로 삼을 수 있습니다.
또 육로는 방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만약 길주 이북을 잃는다면 인민과 배가 모두 적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만약 적들이 배를 이용해서 야음(夜陰)을 틈타 성진강(城津江)의 한 모퉁이로 넘어온다면 방어선 상의 고갯길에 대한 방수(防守)가 형편상 반드시 와해되고 말 것이니, 어떻게 성을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군들이 만령(蔓嶺)을 점거하여 우리 군사들이 전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어유소(魚有沼)가 작은 배에 군사를 태우고 푸른색 옷을 입혀 초목의 색깔로 위장하게 한 다음 바다 모퉁이를 경유하여 벼랑을 타고 올라가 가장 높은 봉우리를 에워싸고 나아오며 적을 굽어보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자 적병이 일시에 궤멸되었습니다. 해로(海路)를 방어하기가 어렵고 적들이 몰래 넘어오는 것이 이와 같으니, 신은 성을 쌓아도 무익할까 염려됩니다. 또 마천령에 성을 쌓으면 마천령 이북의 백성들은 반드시 버림받았다 하여 실망할 것이니,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적들이 철령 아래로 쳐들어온다면 철령의 수비가 설령 견고하더라도, 안변(安邊)으로부터 황해도와 평안도 등지로 넘어올 경우 도처가 평탄한 길입니다. 적들이 철령에 막혀서 돌아가 함흥(咸興)을 공격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의 얕은 생각으로 볼 때 또한 반드시 옳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폐사군(廢四郡)입니다. 적들이 사군(四郡)의 강변을 통하여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따라 곧바로 함흥으로 나온다면 호마(胡馬)로 달릴 경우 하룻길에 불과합니다. 중간에 별해진(別害鎭)과 장진보(長津堡) 두 진보(鎭堡)가 있으나 모두 잔약한 병졸 수십 명이 지키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적들이 만약 이 길을 경유한다면 하룻밤 사이에 함흥으로 들어와 점거할 것입니다. 마천령과 함관령(咸關嶺) 등은 설령 금성(金城)과 철벽(鐵壁)이 있더라도 이렇게 되면 모두 적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니, 어떻게 우리에게 쓸모가 있겠습니까. 북로(北路)에 대한 염려는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감사로 있을 때에 사군을 다시 회복할 것을 청하였고, 또 영(嶺) 밖에 남병사를 설치하되 우선 후주(厚州)에 설치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다시 변장(邊將)을 파했습니다. 듣자 하니 윤지완도 이 점을 염려하여 황초령(黃草嶺) 위에 일대의 횡성(橫城)을 쌓아서 방수할 곳으로 삼았다 하니, 실로 옳은 의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적병이 별해진과 장진보를 이미 지나서 황초령 아래에 이른다면 고갯길 한 길이 아니라도 반드시 달리 넘어올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공이 인하여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물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이달에 폭풍이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멩이가 굴러다니니, 공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상진(李尙眞)이 입대(入對)하여 윤증(尹拯)이 배사(背師)했다고 하여 그를 죄준 잘못에 대해 말하고, 물러 나와서 또다시 차자를 올려 거듭 아뢰었다가 엄한 하교를 받고는 황공하여 향리(鄕里)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공은 인하여 아뢰기를,
“이상진이 일찍이 향리로 돌아갈 것을 청원하였으나 성상의 유시가 정성스럽고 간곡하시므로 감히 결연히 떠나가지 못하였으니, 그 사람이 충성스럽고 질박하여 딴마음이 없음을 성상께서 반드시 굽어 살피셨을 것입니다. 이상진이 지금 이 일로 떠나가서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않는다면 노신(老臣)을 예우하는 도리에 어찌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억하건대 옛날 효종대왕 때에 신이 사관(史官)으로 입시하였는데, 노신인 민응형(閔應亨)이 입대하여 쓸데없는 말을 지루하게 늘어놓아 종일토록 그칠 줄을 몰랐으며, 게다가 귀까지 먹어서 성상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이에 실로 잘못된 말이 많고 적절하지 못한 거조(擧措)가 많았으나 효종대왕께서는 오히려 유도하여 말하게 하시고 그가 소회를 다 털어놓은 뒤에야 그만두셨습니다. 이에 신하들이 모두 효종대왕의 성덕(聖德)을 존경하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이와 같지 않으면 성인의 큰 도량을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바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온화한 유시(諭示)를 내리셔서 노신의 떠나감을 만류하시어 성조의 관대하고 너그러이 포용하는 덕을 드러내시고, 조정의 신하들이 노대신이 떠나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을 위로해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서 다시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여 만류하였다. 지난해 봄에 이공(李公 이상진)이 이이명(李頤命)의 비방으로 인하여 한강을 건너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공이 편지로 안부를 묻자 이공은 답하기를,
“편지로 안부를 물은 것은 이번 걸음에 처음 본다.”
하였다.
○ 처음 태조조(太祖朝)에 궁가(宮家)의 면세전을 100결(結)로 제한하였는데, 배극렴(裵克廉)과 정도전(鄭道傳) 등이 더 하사할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이르기를,
“왕자와 제군(諸君)들은 본료(本料)가 100여 결이라도 굶주리고 추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다. 만약 또다시 더 하사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나더러 자기 자식을 편애한다고 이를 것이다. 더구나 토지는 한계가 있으니 어찌 지나치게 주겠는가?”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직전(職田)〉에 “대군(大君)은 225결이고 왕자군(王子君)은 180결이다.” 하였고, 공주(公主)와 옹주(翁主)의 경우는 부마도위(駙馬都尉)의 품계에 따라 계산하여 지급해 주되 혹 관청에 소속된 전지(田地)나 몰입(沒入)한 전지를 사여(賜與)하는 규정이 있었다. 선조조(宣祖朝)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서 전야(田野)가 개간되지 못하여 왕자와 옹주가 잇따라 출합(出閤)하였으나 사여한 토지가 규정된 결수(結數)에 차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선 공패(空牌)를 받기도 하였다. 호조 판서 한응인(韓應寅)이 예빈시(禮賓寺)에 소속된 여러 해수(海水) 지역에 대해 백관들에게 선반(宣飯)하던 비용의 지급을 정지하였다. 또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이 조빙(朝聘) 왔을 때에 접대할 것이 없으므로 어염(魚鹽)과 시탄(柴炭)이 나는 곳을 떼어 주고 전지 몇 결을 기준으로 삼아 세금을 거두어 접대하는 비용으로 쓸 것을 청하였던 것인데, 마침내 잘못된 규정이 되어 절수(折受)라고 부르게 되었다. 효종조(孝宗朝) 말년에 제도(諸道)의 감사에게 명하여 공사 간의 염분(鹽盆)과 어살을 조사하게 하고 사정(査正)하려고 하면서 어사(御史)들에게 염찰(廉察)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공이 이미 명령을 받고 호남에 간 뒤에 효종이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현종에게 아뢰기를,
“국가의 세금이 날로 줄어들고 곤궁한 백성들만 신역(身役)으로 고생하는 폐단의 근원을 찾아보면 모두 각 아문의 둔전(屯田)과 여러 궁가의 농소(農所)가 그 근원입니다. 신이 듣건대 부안(扶安)에 있는 것이 1050여 결이고, 고부(古阜)에 있는 것이 770여 결이고, 만경(萬頃)에 있는 것이 670여 결이라 하며, 기타 각 고을에 없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전지에 대한 국가의 세금을 내지 않고 백성들은 관청에서 부역하지 않으며, 이외의 전지에서만 국가에 세금을 내고 이외의 백성들만 국가의 부역을 담당하니, 어떻게 국가가 가난하지 않고 백성들이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번에 들으니 조정에서 조사하라는 조처가 있었는데, 마침 국상을 만나 미처 개정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롭게 교화하는 때를 만났으니, 더욱 성명(成命)을 잘 준수하여 누적된 폐단을 통렬히 개혁해서 공평하고 분명한 정치를 밝히소서.”
하였다. 이때 다섯 공주가 출합(出閤)하자, 절수하여 면세한 전지가 점점 넓어지니 소재지의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소의 신하들이 한 해를 넘기도록 혁파할 것을 아뢰자, 상이 회의하여 한계를 정하라고 명하여 500결로 한계를 정하였다. 이때 장령(掌令) 박세견(朴世堅)이 줄여서 정할 것을 청하였다가 상의 뜻에 거슬려서 예전대로 시행하고 수량을 한정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정언(正言) 여성제(呂聖齊)가 《경국대전》 〈제전(諸田)〉의 “직전(職田)과 사전(賜田)의 조세를 모두 경창(京倉)에 납부하면 군자감(軍資監)의 미두(米豆)로 바꾸어 준다.”라는 규정에 따라 궁가의 면세전 수량을 결정한 다음 그 세금을 모두 경창에 바치고, 직전(職田)의 제도대로 그 집에 나누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해 임인년(1662, 현종3) 겨울에 공이 부응교로서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리기를,
“옛날 당나라 중종(中宗)은 지극히 무도한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안락공주(安樂公主)가 곤명지(昆明池)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자, 중종은 말하기를, ‘곤명지는 백성들이 부들을 베어 쓰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곳이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안으로는 작은 구거(溝渠)와 밖으로는 큰 강과 바다, 넓은 들과 높은 산악을 모두 궁가들이 떼어 받아 차지하고 있으니, 전하께서 지키고 계신 조종(祖宗)의 강토는 그 나머지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두서너 궁가를 위하여 기필코 국가가 없어진 뒤에야 이 일을 그만두고자 하시니, 이미 국가가 없어지면 두서너 궁가도 반드시 그들만 그 부유함을 보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찌 지금 미리 대책을 세워서 궁가와 국가가 모두 무사하게 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른바 면세전이라는 것은 더욱 법 밖의 무리한 일입니다. 신들은 면세전의 많고 적음이 박세견의 신상에 무슨 이익이나 해로움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 마침내 면세전을 예전과 같이 하라는 분부를 내려 박세견을 꺾어 버리셨으니, 신들은 이 일이 장차 조정에 크게 불리할까 삼가 염려됩니다. 아, 어찌 전하께서는 태조대왕의 성스러운 교훈을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하시어 이렇게 다섯 곱절이나 되는 수량으로 정하신단 말입니까. 또 지금 기강이 엄숙하지 못하고 법령이 견고하지 못하니, 만약 풀을 벨 때에 뿌리까지 뽑듯이 한꺼번에 바로잡지 않고 단지 이 한도를 정하는 명령만 내리게 되면, 비록 그 400결을 줄여서 100결에 그치게 한다 하더라도 면세전이라는 명칭이 아직 외방에 잔존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년이 지난 뒤에는 반드시 더욱 불어날 것이니, 3자 되는 낮은 제방이 어떻게 산을 삼킬 만한 홍수의 세력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성제의 상소문은 진실로 발본색원을 주장한 훌륭한 의논으로 국가로 보나 개인으로 보나 실로 모두 편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윤허해 주셔서 신하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덕을 드러내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그다음 해 가을에 공이 집의(執義)로서 청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이제 지면의 문자로는 어리석은 충정을 다 아뢸 수가 없고, 성상께서 침묵하고 계시니 조정의 신하들이 감히 알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척에서 그 내용을 반복하여 말씀드려서 사리의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을 다 아뢰고자 합니다.”
하니, 상은 듣기가 매우 괴롭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이 인혐하여 아뢰기를,
“여러 궁가와 내시(內侍) 등에 관한 일은 매양 ‘윤허하지 않는다.〔不允〕’라는 두 글자만 얻고 돌아가니, 이미 성실하지 못하고 또한 매우 느슨하여 형식적입니다. 신하들의 계사(啓辭)가 여섯 번이면 그중 네 번은 바로 궁가와 내시에 관한 일인데 면대할 때에 한 번도 윤허해 주지 않으시니, 더구나 문자로 전계(傳啓)하여 윤허해 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일을 논하는 직임을 결코 헛되이 차지하고 있을 수 없으니, 신의 직임을 파직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대가 핍박한다 하여 내가 그것을 따르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출사(出仕)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남구만(南九萬)은 문자로 책임을 때우려 하지 않고 지척의 지엄하신 성상 앞에서 생각한 바를 다 말하고 꺼리지 않았으니, 대각(臺閣)의 풍채가 늠름하여 숭상할 만합니다.”
하였으나, 공은 끝내 직책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공 영(林公泳)이 공의 아들 회은공(晦隱公 남학명(南鶴鳴))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현종실록청(顯宗實錄廳)에서 기록한 것을 보니, 공이 여러 궁가의 일에 대해 아뢴 말이 대부분 통렬하고 간절하였다. 상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집의(執義)가 말한 것을 쓰지 말라.’ 하셨으니, 당시 공의 풍채를 볼 수 있다.”
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은 응교(應敎)로서 겨울철에 친 우레로 인해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주역(周易)》의 〈진괘(震卦) 상(象)〉에 이르기를, ‘우레가 거듭된 것이 진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행실을 닦고 반성한다.〔洊雷震 君子以恐懼修省〕’ 하였습니다. ‘두려워하고 조심한다.’라는 것은 마음속으로 하늘의 위엄을 공경하는 것이요, ‘행실을 닦고 반성한다.’라는 것은 밖으로 인간의 일을 닦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것은 숨겨져서 알기 어렵고, 밖에 있는 것은 드러나서 보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임금들이 재앙을 당했을 때에 공구(恐懼)하는 실제를 다한 것은 반드시 수성(修省)하는 도리에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 겨울 우레가 치는 변고가 또 여러 재앙이 겹친 때에 나타나니, 전하께서 놀라고 조심해서 마음속으로 공구하신 것을 반드시 신들이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성하는 일로 말하면, 마침내 어찌하여 이처럼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단 말입니까.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이 청대(請對)하여 올린 합사(合辭)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요점은 실로 절수(折受)와 둔장(屯莊)에 있는데, 전하께서는 건성으로 듣고서 모두 윤허하지 않으시고, 요청을 따른 것은 다만 자질구레하고 중요하지 않은 두서너 가지 일에 불과합니다.
신들은 오늘날 재앙을 부른 것이 과연 여기에서 연유했는지, 오늘날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또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밖으로 수성하시는 것이 이에 그칠 뿐이라면, 신들은 전하께서 마음속으로 공구하신 것도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지 못했을까 삼가 염려됩니다. 삼가 듣건대 성지(聖旨)에 ‘오래전부터 내려온 사여(賜與)의 규정을 지금에 와서 모두 삭제하기가 어렵다.’라고 하셨다 하는데, 신들은 그것이 옳지 않음을 밝히겠습니다. 지금 국가가 지켜서 규정으로 삼아야 할 것은 《경국대전(經國大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 〈호전(戶典)〉에 이르기를, ‘여러 도의 염분(鹽盆)과 어살은 등급을 나누어 장부를 만들어서 호조에 보관하고, 장부에서 누락시켜 사사로이 차지한 자는 곤장을 친 다음 관청에서 몰수한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산과 바다에서 나오는 이익을 개인의 집에 돌아가지 않게 한 것은 국가의 제도가 본래 그러한 것이니, 이 어찌 오늘날 행할 만한 규정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이것을 먼 시대의 일이라고 하시나, 우리 선왕(先王 효종)이 남기신 뜻을 생각하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여러 도에서 조사한 문적이 누차 올려지고 개정되다가 금년에 와서는 끝내 그 조처가 예전 틀로 돌아가고 말았다 합니다. 그리하여 곤궁한 백성들에게 신용을 잃고 팔방에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국가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여기에서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조종의 제도를 따르지 않으시고 또 선왕의 뜻을 계승하지 않으시고는 오직 임진왜란을 치른 뒤에 구차하게 인습하는 규정을 굳게 지키고 고집하여, 이를 마치 금석(金石)과 같은 법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그대로 앉아서 국가의 전지의 태반을 잃고도 걱정할 줄을 모르시니, 이는 또한 어째서입니까.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원스레 결단을 내리시어, 모든 산전(山田)과 해택(海澤)을 입안(立案)하여 절수받는 곳과 둔장(屯莊)에 모집된 백성들에게 잡역(雜役)을 시키지 못하게 하는 따위를 한결같이 모두 혁파해서, 이로써 하늘의 마음을 받들고 백성들의 고통을 풀어 주소서.”
하니, 상이 경연에 임하여 답하기를,
“조종조에서 사여한 것은 그대로 두고, 지금 이후로는 다시 시행하지 않는다면 근원 없는 폐단이 저절로 끊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간관(諫官) 김석주(金錫胄) 등이 아뢰기를,
“오늘날 옛 궁방(宮房)의 세액은 이미 감면하였으나 해수(海水)를 절수하여 점유하는 것은 예전 그대로이고, 새 궁방에서 관례에 따라 받은 것이 이미 수량이 찼는데도 격외(格外)의 입안을 또다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물 하나 던지고 낚싯대 하나 드리우는 곳까지 각각 소속된 곳이 있어서, 유유히 흘러가는 물까지도 모두 궁방이라는 그물 속으로 들어가니, 이것이 어찌 조종조께서 처음 궁방을 만드신 뜻이겠습니까. 시장(柴場)의 폐단으로 말하면 더욱 심합니다. 깊은 산골짝은 거리가 멀어서 원래 나무를 채취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이런 곳까지도 시장이라는 허명(虛名)을 붙여 거주하는 백성들을 관리하고 삼베와 곡식을 세금으로 거두니, 조종조에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마침내 직전법에 따라 결수를 더해 주고 면세의 한계를 정하여, 대군과 공주는 400결, 왕자군과 옹주는 250결로 하고, 시장(柴場)은 각각 한 곳만 헤아려서 남겨 두게 하고, 어장(漁場)과 망장(網場)은 오직 선조조(宣祖朝)에서 사여한 것만 남겨 두되 본인에게만 국한하게 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폐단이 여전하였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충청 감사가 아뢴 장계로 인하여 공주방(公主房)에 절수한 전지 내에 주인이 있는 민전(民田)과 절수하기 전에 백성들이 개간한 곳은 모두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함부로 차지하는 자는 처벌하였다. 경술년(1670)과 신해년(1671)에 팔도(八道)에 큰 기근이 드니, 조정이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임자년(1672)에 크게 사정(査正)할 것을 거듭 명하고 감사로 하여금 금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일일이 장계로 보고하게 하였으나, 이후에도 절수가 여전히 많았다. 숙종 경신년(1680, 숙종6)에 여러 대신이 임자년 이후에 절수한 것은 다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여러 궁가는 대부분 특별히 전교했다 하여 그대로 남겨 두었고, 여러 군문(軍門)은 다시 예전대로 회복할 것을 청하여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해 4월에 경상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아뢰기를,
“본도에는 현재 절수할 만한 공한지(空閑地)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장 숙원방(張淑媛房)에서 차인(差人)을 여러 번 내려 보내 점유하고자 하였으나 매번 저지당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감사에게 먼저 물어서 공한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궁가의 차인을 내려 보내소서.”
하였다. 이 장계를 비변사에 내리자, 공이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도신(道臣)이 궁가를 통렬히 미워하여 매번 저지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묘당 또한 그 뜻을 그대로 따르니, 오늘날 조정의 정사는 너무 까다롭고 자질구레하다고 이를 만하다.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며칠 있다가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판부하신 내용이 준엄하시므로 신이 차자를 올려 죄를 자인하였으나 아직도 직명을 띠고 있으니, 비록 다시 중한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구구한 정성을 감히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의 뜻은 아마도 ‘임자년(1672, 현종13)의 사목(事目)은 오로지 옛 궁가의 면세전이 지나치게 많은 것 때문이지, 신설한 궁가에 절수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하교하신 듯하니, 이는 밝게 통촉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그때 개정한 것은 본래 군읍(郡邑)에서 전지를 잃고 백성을 잃어서 끝없이 침탈당하고 점유당하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으니, 어찌 후일 신설한 궁가를 위하여 그들이 절수받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습니까. 문서가 아직 남아 있으니, 다시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백성이 불어난 것이 임자년에 비하면 몇 갑절이 될 뿐만이 아니어서 산택(山澤) 사이의 한 치나 한 자 되는 작은 땅도 모두 이미 경작하고 있으니, 실로 한 묘(畝)의 공한지도 없습니다. 임자년의 사목에 설령 새 궁가가 절수받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분명한 조문이 있더라도 백성들의 전지를 그저 빼앗는 도리 이외에는 결코 얻을 만한 땅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근년에 여러 도(道)에서 절수한 것이 너무 많아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고을 백성들이 징을 쳐서 원통함을 하소연하고, 도신(道臣)들이 장계를 올리며 대간(臺諫)들이 논계하여 그 어지러운 형세를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밝으신 성상께서 백성들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모두 도로 내주게 하시니, 궁가에도 이익 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후로 종묘사직에 경사가 있어서 종손(宗孫)과 지손(支孫)들이 번성하여 새 궁가가 한없이 많아진다면 장차 어느 곳에서 절수해서 백성들의 전지를 부당하게 빼앗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결코 변통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은 대책을 강구하여 잘 조처하도록 명하였다. 열흘 뒤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법전을 진실로 받들어 따라야 하고, 선왕조의 정식(定式) 또한 수량을 줄이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계묘년(1663, 현종4)의 수교(受敎)를 한도로 삼아 전세(田稅)와 대동미를 떼어 준다면 400결에서 바치는 것이 마땅히 4백 6, 7십 석이 될 것입니다. 궁가로 하여금 이것을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받게 하고, 이 밖에 계하(啓下)하여 절수한 것과 사전(私田)의 면세 등을 모두 혁파한다면, 유사(有司)의 경비는 혹 줄어들겠지만 백성들의 전지를 빼앗아 백성들의 원망을 크게 사는 데 비한다면 사안의 경중과 이해관계가 현격하게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닙니다. 《경국대전》 〈제전(諸田)〉에 ‘군자감의 미두(米豆)로 바꾸어 준다.’라는 것은 사전의 면세가 도에 지나치게 시행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니, 이른바 ‘공적인 부세(賦稅)로 상을 주면 매우 족하다.’라는 것입니다. 다만 궁가의 절수는 비록 선왕조에 정한 한계가 있으나 호조에서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는 전지를 자세히 조사하지 못하고, 또 절수받은 곳에서는 전답에서 생산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대나무와 시탄(柴炭), 어산물(魚産物) 등의 물건도 모두 거두지 않음이 없으며, 도장(道掌)과 궁노(宮奴)가 이를 빙자하고 사사로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직전법(職田法)을 결행한다면 이러한 불법 행위가 모두 숨을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확고하게 정하여 흔들리지 않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오직 후일의 새 궁가를 위하여 논한 것일 뿐이요, 옛 궁가는 선왕조 때에 한계를 정하여 면세한 것 외에 더 늘린 것은 해조(該曹)에서 개정해야 합니다. 당저(當宁)의 후궁은 인조와 효종의 일을 살펴보면 모두 절수하는 규정이 없는데, 지금 후궁을 하나는 200결, 하나는 150결로 한계를 정해 떼어 주라는 명령이 있으시니, 더욱 온당치 못합니다. 듣자 하니 절수할 때에 정한 한계를 채우지 못했다 하니, 규정 외의 일은 수량을 채우기를 기약할 것이 못 됩니다. 이후로는 다시 절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수진궁(壽進宮), 용동궁(龍洞宮) 등은 듣자 하니 조종조의 후사(後嗣)가 없는 궁가의 재산으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는데, 면세의 결수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로 절수를 더하여 한계가 없다 합니다. 옛날에 절수한 것은 다시 혁파할 수 없으나 이후로는 또한 영원히 혁파해야 합니다.
또 염분(鹽盆)과 어살, 시장(柴場)과 원당(願堂) 등의 절수를 혁파하는 일은 또한 이미 여러 번 혁파하였으나 받들어 시행한 효험이 없으니, 이는 그 폐단이 전답의 절수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제 일체 거듭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각 아문과 각 군문도 일체 시행해야 합니다. 또 이미 혁파한 곳도 대신 다른 곳으로 절수받기를 청하여 매우 분분하니, 여러 궁가와 각 아문을 막론하고 또한 일절 막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모두 재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현종조에 공주의 면세는 400결이고 부마(駙馬) 양위(兩位)가 생존해 있지 않으면 4대까지 150결을 주어 봉사(奉祀)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는데, 이는 실로 너무 많아서 계속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명선(明善)과 명혜(明惠) 두 공주는 출가하기 전에 별세하였는데, 듣자 하니 지금 절수한 수량이 적게는 600여 결이고 많게는 1000여 결이라고 합니다. 양위를 봉사하는 데에도 줄여서 150결을 주는데, 한 위(位)를 봉사하는 데 그보다 더 늘어난 1000여 결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예제(禮制)의 등차에 부합하겠습니까. 선왕조 때에 정한 것도 오히려 따라 봉행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이후에는 절수를 허락하지 말도록 새로 성명(成命)을 내린들 어찌 받들 가망이 있겠습니까. 결코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400결은 다시 감할 수가 없으며, 그 나머지 정한 수량 이외의 전지는 어떻게 조처해야겠는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근래에 계하한 절수의 문서에는 으레 갑술년(1634, 인조12) 양안(量案)에 ‘주인 없는 한전(閒田)을 궁가에 주도록 허락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술년으로부터 이미 5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록 주인이 없었다 해도 백성들이 경작하여 자기 것으로 삼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 있지도 않은 양안을 핑계 대고 빼앗아서 궁가에 넣고 있습니다. 이 두 궁에서 얻은 면세전도 반드시 각각 본래 주인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해진 수량 이외의 것을 혁파한다면 주인을 찾아내어 돌려주어서 성상의 덕스러운 뜻을 분명히 보여 민심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공이 이미 엄한 하교를 받고도 거듭 청하며 그치지 않자, 상이 감동하여 허락하였다. 공이 물러나와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군주가 이와 같이 어진데도 우리들이 일찍 정성을 다하지 않았으니, 이는 신하의 죄이다.”
하니, 조당(朝堂)에서 모두 감탄하였다. 이후로 후궁의 절수도 200결을 정식으로 삼았는데, 한도를 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을해년(1695, 숙종21) 가을에 유상운이 좌상으로서 입대하여 200결 외에는 다 혁파할 것을 청하고, 또 수진궁, 명례궁, 어의궁, 용동궁 등 네 궁과 명선(明善)과 명혜(明惠) 두 방(房)에 대해 무진년(1688) 이후에 절수한 것을 혁파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이, 사여(賜與)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하자, 모두 혁파하였다. 이해 겨울에 공이 영상으로서 입대하여 아뢰기를,
“궁가에서 대수(代受)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이른바 ‘대수’라는 것은 오래전에 절수받은 곳을 어떤 일로 인하여 잃은 뒤에 그 대신 절수받은 것이니, 일반 백성들의 입장에서 말하면 원통하고 억울하기가 똑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수한 결수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호조 판서 이세화(李世華)가 대답하기를,
“수진궁은 수백여 결이고 명례궁은 1000여 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뜻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하고, 마침내 무진년(1688, 숙종14) 이후에 대수한 것을 다 내주도록 명하였다.
○ 이때 소론(少論)이 차츰 등용되어 위세를 드날리니, 대각(臺閣)에 출입하는 자가 걸핏하면 박세채(朴世采)를 끌어다 대며 이르기를,
“아무개 어른께서 말씀하기를,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난 이상 도와서 이루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공은 노론(老論)이 스스로 초래한 것임을 알았으나 사류(士類)들이 서로 해칠까 우려하여 말하기를,
“재야의 인물이 걸핏하면 후배들에게 구실거리가 되니, 회천(懷川 송시열(宋時烈))의 일을 거울로 삼을 만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학질과 비슷해서 오한이 들었다가 다시 열이 나고 열이 나다가 다시 오한이 든다.’ 하였습니다. 신은 오늘날 조정의 행태를 보면 오한과 열이 그침이 없는 것과 같으니, 끝내 강둑이 터져서 물고기가 죽어 나가는데도 구원하지 못하고 멸망하는 지경에 이를까 두렵습니다. 신은 매번 재상들이 과감히 말하는 기개를 도와주지 못해서 정과 뜻이 막혀 진달되지 못하여 국가에 폐해가 미치는 것을 큰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언로를 열어 기휘(忌諱)함이 없는 것을 제일의 의리로 삼아야 한다고 지척에서 자주 아뢴 것입니다. 이제 성상의 잘못과 묘당의 죄과(罪過), 민생의 고통에 관계되지 않는 일로 인해 이리저리 번복하는 형세가 무궁한 근심이 될 것이니, 밝으신 성상께서는 헤아려 살펴 주소서.”
하였다. 이에 서로 격돌하는 자들이 모두 불쾌해하였고, 오직 임공 영(林公泳)과 박공 태보(朴公泰輔)만이 그 정당함에 감탄하고 공이 속으로 근심하고 있음을 알았다.
○ 공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에 자주 아뢰기를,
“중외(中外)의 군기(軍器)를 감독하여 만드는 자들이 조정의 물력(物力)으로 공장(工匠)을 모집하여 무기를 제조하고는 모두 은상(恩賞)을 받으니, 매우 외람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만들어진 규례라서 갑자기 혁파할 수가 없다.”
하였다. 이해 6월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병조 판서 이익(李翊)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금위영(禁衛營)에서 조총(鳥銃)과 창검(槍劍) 등의 물건을 만드는 데 드는 정철(正鐵)을 구입할 때 사람을 모집해서 그 정철을 구매할 비용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서 바치게 하는데, 물건을 모두 산 뒤에 원금을 도로 바치니, 원금도 없이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 병조 판서 이사명(李師命)이 재임했을 때에 많은 수량을 사서 바친 자가 있었고, 근래에 또 관리청(管理廳)에 내준 원금보다 더 바친 자가 있는데 그 수량이 1만여 근(斤)에 이르며, 이 사람 또한 원금을 도로 바쳤으니, 공로에 보답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전례를 상고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값을 주고 물건을 산 뒤에 본전을 도로 징수하고 논공행상하는 것은 실로 근래 여러 군문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군문의 처지에서는 이롭다고 이를 만하지만, 물건을 구매한 소득은 반드시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저절로 솟을 리가 없으니, 모두가 관청의 위세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한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일을 일절 통렬히 금해야 할 것이요, 결코 조장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미 거두어들인 이상 전 수량을 내버릴 수 없다면 본 군문에서 편의대로 논공하여 시상해야 할 것이니, 조정에서 어찌 그 이익 낸 것을 계산해서 경솔히 상전(賞典)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뢴 바가 진실로 옳으니, 본 군문에서 논공하여 시상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날 공이 아뢰기를,
“고(故) 좌윤(左尹) 이단석(李端錫)은 주군(州郡)과 감사(監司), 곤수(閫帥 병사)를 여러 번 역임하였는바, 청백한 한 절개는 실로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병들었을 때에 의원과 약을 써서 치료하지 못하였고, 초상났을 때에 입관(入棺)하고 염습(斂襲)하는 것도 제대로 모양을 갖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정의 권면하고 장려하는 도리로 볼 때 별도로 구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장례 물품을 제급(題給)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이달에 공이 승문원(承文院) 관원으로 하여금 아뢰게 하여 임영(林泳)과 오도일(吳道一)을 부제조(副提調)로 삼았다. 7월에 정언 정호(鄭澔)가 헐뜯기를,
“오도일에게 이 직책을 제수하니, 듣는 자들이 놀라고 분해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리니, 상이 차자에 답하기를,
“이는 각박하고 바르지 않은 의논으로 본래 개의할 것이 없다.”
하였다.
○ 이달에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가 부름을 받고 인견할 적에 수차(袖箚)를 올리기를,
“지난해 사간원에서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혜민서 제조로 임명한 일에 대해 자못 오랫동안 의논하였는데, 밝으신 성상께서는 즉시 따르지 않으시고 대간(臺諫)들은 확고하게 고집하지 않았으니, 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잘못한 것입니다. 세도(世道)가 더욱 나빠져 인심이 좋지 못합니다. 성상께서 우대하고 총애하여 직책을 더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주 접견하여 혹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하지 않으시니,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 이유를 따지고 손가락질하면서 비난함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동평군을 제조에 임명한 은전을 특별히 파하시고, 그 밖에 자주 접견하고 물건을 하사해 주심을 반드시 다른 종친들과 균등하게 하신다면, 실로 오늘날 동평군을 친애하고 보전하는 지극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한결같이 유독 그만을 편애하신다면 말류의 폐해가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고 말 뿐만이 아닐 듯합니다. 다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소서. 뜻하지 않은 일에 깊이 노여워할 것이 없고, 깊이 생각하지 않은 말에 심하게 집착할 것이 없으니, 이는 한때의 위엄으로 안정시키기가 어렵고 필경에는 도리로써만 설득할 수 있습니다. 대신(大臣)의 의구심을 풀어 주고, 중신(重臣)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며, 언사(言事)로 인해 처벌된 사람을 거두어 등용하고, 규정 외의 은전을 혁파하는 데에 조금도 인색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신다면 상하가 서로 막히고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을 달리 대하는 단서가 모두 장차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개듯 사라질 것이니, 이렇게 한 뒤에야 인심이 안정되고 나랏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노하여 비망기를 내리기를,
“동평군은 인조조(仁祖朝)의 친왕손으로 대왕대비전에 문안하는 예가 다른 종신(宗臣)들과는 더욱 구별이 있다. 설령 자주 접견하고 물건을 하사하여 우대한다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닌데, 더구나 원래 그를 자주 접견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한 번 제조에 특별히 임명한 뒤로 동종(同宗)과 친척들 사이에 실로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많아서 심지어는 태도와 안색에 나타내기까지 하니, 이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이런 모함하는 말이 주어(奏御)하는 문자에 오르기까지 할 줄은 생각지 못했으니, 종친부로 하여금 모함하는 말을 지어낸 자들을 오늘 안으로 즉시 적발하게 하고, 모두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라.”
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같은 종친을 모해하고 국가를 비방한 종친들을 조사하여 찾아내기 전에는 결코 그들을 문안하는 반열에 진참(進參)시킬 수 없다.”
하고, 즉시 자수하라고 명하였으며, 사관을 동평군에게 보내어 안심하고 공무를 수행하라고 전유(傳諭)하였다. 또 이러한 사실을 한결같이 굳게 숨겼다 하여 종친부 유사 당상인 전평군(全坪君) 이곽(李漷)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로 인해 다음 날 아침에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가 도성 밖으로 나갔다. 공이 빈청에 나아가 들으니, 승정원과 옥당이 청대할 때에 상이 마침내 전평군을 삭탈관직하도록 명하였고 종반(宗班)들에게는 문안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이조 판서 박세채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다고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나와서 공에게 이르기를,
“상께서 이미 처분하셨으니 굳이 다시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우상 여성제(呂聖齊)에게 이르기를,
“상의 뜻이 불쾌해하고 계십니다만 이항에게 특별히 제수하신 명을 만약 환수하지 않으시면 끝내 사람들의 의혹을 풀 수 없습니다. 성상 앞에서 이러한 뜻을 다 아뢰지 않고 묵묵히 물러갈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마침내 청대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해와 달이 다시 밝아졌으나 신들은 아직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동평군 이항을 접견하시고 물건을 하사하시는 것이 평상시의 규례와 다름을 박세채가 수차에서 언급한 것은 반드시 떠돌아다니는 소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이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에 임명한 것으로 말하면 대신(臺臣)의 의논이 있었고 이제 박세채의 말이 또 저와 같으니, 이는 진실로 국가의 법도를 한때의 은혜와 사랑으로 가볍게 훼손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이항에게 제수한 직임을 체차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다 해도 이항이 도리로 볼 때 또한 반드시 체차되려고 했어야 할 것이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체차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무릇 군주가 신하를 대우할 때에 조금이라도 정해진 분수를 넘으면 폐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며, 종반(宗班)의 경우는 지위가 혐의를 받기가 매우 쉽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옛날 효종대왕은 인평대군(麟坪大君)에 대한 돈독한 우애가 전고의 제왕들보다 훨씬 뛰어나셨으니 한결같이 국법으로 재단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효종께서는 현종대왕(顯宗大王)에게 명하시어 인평대군의 아들들을 동기간처럼 대하라고 당부하셨는데, 이정(李楨)과 이남(李柟) 등은 은총을 믿고서 도리어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이 자라났습니다. 이 때문에 고(故) 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은미할 때에 막고 잘 대처하는 방도를 지극히 아뢰었던 것입니다. 송준길의 문집을 성상께서 일찍이 어람(御覽)하셨으니, 밝으신 성상께서도 반드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때 현종께서는 비록 송준길의 말을 우대하여 받아들였으나 역시 그 말을 다 채택하여 시행하지는 않으셨는데, 점점 누적된 화가 끝내는 경신년의 일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모두 전하께서 몸소 겪고 보신 것이니, 가슴 깊이 거울로 삼고 경계함이 옛날 역사책에 기재되어 있는 범범한 일과는 견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동평군에게 또다시 과분한 은총을 더해 주시니, 신은 삼가 두렵습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가 이제 10여 년인데 아직 후사(後嗣)가 없으시니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하여 안정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까운 종친 가운데에 격외(格外)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남의 비난하는 말을 부르기 쉬우니, 더욱 성상께서 깊이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소원한 신하들은 비록 마음속에 품고 있더라도 반드시 감히 성상께 여쭙지 못할 것이니, 신과 같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또 감히 아뢰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어디에서 이러한 말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종친들 중에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낸 자를 적발해 내는 일은 본래 근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그 일을 직접 보셨다면 죄상이 명백한 자를 특별히 명하여 정죄(定罪)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유사 당상이 어디에서 조사해 내겠습니까. 가령 종친들이 참으로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는 잘못을 범했다 하더라도 기꺼이 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유사 당상의 죄이겠습니까. 만약 유사 당상이 성상의 위엄에 겁을 먹고서 허실을 따지지 않고 강제로 아무아무를 지정하여 책임을 면하려고만 한다면 그 죄가 도리어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즉시 조사하여 아뢰지 않은 것을 죄로 삼으시니, 비록 잡혀 가서 심문을 당하고 삭직되는 것은 면하였으나 또한 어찌 매우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동평군을 친애하고 우대하심은 실로 성상의 훌륭하신 덕이지만 다른 종친들 또한 똑같이 정의가 두터운 친족입니다. 그런데 종친들을 엄하게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는 모두 황송하고 떨려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동시에 대궐 문밖에서 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분위기가 참담하고 보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고 있으니, 윤리를 돈독히 펴는 도리를 손상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일찍이 직접 보신 것이 어떠한 사람이고 어떠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그것이 한 번 정해져서 바뀔 수 없는 언사(言辭)나 문자(文字)가 아니라면 단지 태도와 안색에 나타났다 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비방했다고 의심해서 죄로 단정하실 경우 한(漢)나라 때에 입을 다물고 그저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것을 처벌하던 법률과 같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백관과 서민들을 다스리더라도 법조문만 까다롭게 따지는 격이 되는데, 더구나 친족인 종친의 경우이겠습니까. 또 박세채는 전하께서 높이 발탁하여 불러와서 예우함이 어떠하셨습니까. 그런데 출사(出仕)한 지 한나절 만에 한마디 말이 부합하지 않는다 하여 마침내 말의 출처를 조사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고, 말의 출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종친부의 유사 당상에게 삭탈관직의 죄를 내렸으니, 박세채로 하여금 안심하고 조정에 있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찌 이러실 수가 있겠습니까. 또 박세채가 조정에 있으면 앞으로 국가의 일에 무슨 도움이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 일 때문에 갑작스럽게 물러간다면 언로(言路)에 해로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진실로 현자를 좋아하시는 성상의 덕에도 누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예로부터 군주가 현자를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禮)가 조금만 줄어들어도 오히려 초심(初心)을 지속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제 불러오고 오늘 배척하는 것이 잠깐 사이에 일어나고 있으니, 신들은 산림에서 자중(自重)하는 선비들이 이 때문에 전하의 조정에서 벼슬하기를 원치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어찌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동평군에게 제수한 혜민서 제조의 직임을 해면하도록 허락하시고, 전평군을 삭탈관직하도록 한 명령을 환수하신다면, 조정의 처분이 십분 마땅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박세채를 만류하는 방도에도 마땅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사람을 속으로는 싫어하고 하찮게 여기시면서 겉으로만 예로 구속하시는 것이니, 성심으로 대하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또 어제 사관을 보내어 동평군에게 전유(傳諭)하게 하라는 명을 내리셨으니, 예로부터 왕손(王孫)에게 사관을 보낸 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무릇 사관은 대군(大君)과 왕자(王子), 대신(大臣)에게만 보내거나, 혹은 유현(儒賢)을 우대할 때에만 보냈습니다. 지난번 국구(國舅)에게 사관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자 사람들이 이것도 오히려 이상하게 여겼으니, 더구나 동평군이겠습니까. 일이 정당하지 못함이 동평군을 혜민서 제조에 제수한 것보다도 더 심하니, 전하께서는 비록 편벽되게 후대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이 속으로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실상이 없으면 사람들의 말이 저절로 그치게 마련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위엄으로 제압하여 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실로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이에 상은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박세채의 차자는 혹 일반적인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정과 이남의 일과 나라에 왕세자가 없다는 등의 말로써 동평군을 의심하기까지 하였으니, 남구만을 국문함이 마땅하다. 어찌 다만 제조를 체직할 뿐이겠는가.”
하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은 바로 예전의 일을 인용하여 훗날의 경계로 삼으려는 뜻이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겨우 대궐 문을 나오자, 상은 즉시 멀리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고, 우상 여성제도 이와 같이 처벌하였으며, 이조 판서 박세채를 체차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두려워 떨었으며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고 삼사에서 야대(夜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 대신이 청대하기에 장차 전평군(全坪君)을 삭탈관직하라는 명령을 환수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사람을 악역(惡逆)의 죄과(罪科)에 몰아넣었으니, 그대들이 어찌 감히 저들을 구원하려고 도모한단 말인가?”
하니, 교리(校理) 유득일(兪得一)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남구만을 정승의 자리에 둔 지가 여러 해이니, 그의 심사를 반드시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구만은 평소에 강직하고 분명하며 정직하여 동요하거나 굽히지 않으므로 내가 또한 보상(輔相)의 책임을 맡긴 것인데, 그가 이와 같을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양사(兩司)의 관원을 모두 해임하고 유득일을 파직하였다. 상이 전교하기를,
“죄인에 대한 배소 단자(配所單子)를 2경(更) 전에 입계(入啓)하고, 이들을 압송하는 의금부 도사는 성문을 유문(留門)했다가 출발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마침내 공을 영암(靈巖)으로 유배 보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비망기를 내리기를,
“남구만 등이 마음 쓴 자취로 보아 결코 귀양 보내는 것만으로는 그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공은 경흥(慶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여상(呂相 여성제)은 경원(慶源)에 위리안치되었다. 헌납(獻納) 홍수헌(洪受瀗)이 명령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다가 원지(遠地)에 보임되었다. 사헌부에서 또다시 환수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승정원에서 복역한 것은 대충 책임만 면하려 하고 전지를 받들어 행하였으니, 해당 승지를 모두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속히 정계(停啓)하고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며칠 있다가 좌상 조사석(趙師錫)이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은 박세채의 말을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말한 것이 아니요, 개연(慨然)히 아뢰고자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남구만은 평소 강직함이 드러나서 성상께서 의지하고 소중하게 여기셨는데 하루아침에 위리안치되니, 어찌 성덕(聖德)에 큰 과오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구만의 품성이 강직하고 방정함은 나도 안다.”
하였다. 25일에 양사가 합계하여 환수할 것을 청하고 옥당에서 네 차례 차자를 올렸다. 좌상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망극한 무함을 당한 것은 실로 동평군에 대한 말과 동시에 일어났는데, 진실로 사체가 평상시의 격식과 다르다 하여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남을 헐뜯는 말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남구만이 세도(世道)를 깊이 우려하여 이미 경연에서 심사를 밝혔고, 또한 일찍이 동평군의 일을 한 번 아뢰고자 한다는 말을 신이 전에 들었습니다.”
하였다.
○ 8월에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차자로 아뢰어 유배 보낸 신하를 거두어 돌아오게 해서 옛 관작을 회복시킬 것을 청하였다. 공은 이미 북쪽 지방에 은혜로운 교화를 베풀었으므로 부로(父老)들이 모여서 보고 눈물을 흘렸으며, 경원, 종성(鍾城), 온성(穩城)의 유생 다섯 사람이 경흥까지 공을 따라와서 옛날 배웠던 것을 강하여 외웠다. 공이 이들에게 준 시에 이르기를,
여러 학생들 날마다 내 앞으로 찾아오니 / 躚躚學子日來前
서로 대하니 변방으로 귀양 온 것 잊게 하네 / 相對還忘絶塞遷
북두로 취하고 키로 까부름 천명에 맡기고 / 挹斗揚箕元委命
글줄을 찾고 글자를 봄 또한 인연에 따른다오 / 尋行數墨且隨緣
평소에 하는 일 여기에 그칠 뿐이니 / 生平素業止斯耳
분수 밖의 황비는 일찍이 우연이었네 / 分外黃扉曾偶然
글 읽는 소리 누워서 들으며 세월을 보내노니 / 臥聽伊吾聊自遣
원망과 허물 끝내 사람과 하늘에 미치지 않노라 / 怨尤終不及人天
하였다. 이윽고 장렬왕대비(莊烈王大妃)가 승하했다는 소식을 받들어 듣고 지은 만시(輓詩)의 서(序)에 이르기를,
“옛날 소식(蘇軾)이 유배 중에 태후(太后)의 부음(訃音)을 들었으나 곡하려 해도 곡할 수가 없고 울려 해도 울 수가 없어서 만사(輓詞) 두 장(章)을 지었는데, 그 한 구에 이르기를, ‘한 번 소리 내어 통곡하는 것도 오히려 할 곳이 없다.〔一聲痛哭猶無所〕’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죄지은 이 신하가 만난 처지이다. 슬픈 감회를 이기지 못하며 또 감히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차운하여 만사에 대신하는 바이다.”
하였다.
○ 10월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자신에게 제수한 혜민서 제조의 직임과 사관을 보내어 전유한 것을 사양하자, 상이 모두 따랐다. 이달 빈청 인견 때에 호조 판서 유상운(柳尙運)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 경상 감사 이세화(李世華)가 궁장토(宮莊土)를 막는 것에 관해 올린 장계 때문에 엄한 하교를 내리셨는데, 남구만이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하여 들어와서 자기의 생각을 숨김없이 고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성상의 노여움을 초래할 것이라고 여겼고, 애당초 전하께서 채택하여 시행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가짐이 변함이 없어 일을 논할 적에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궁구하는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지난번에 청대할 때에도 종친의 신하를 언급하면서 속마음을 다 펴서 아뢰었다가 성상의 격노를 초래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겨울철에 우레가 치는 변고로 인하여 옥당에서 어진 재상이 견책당한 일을 아뢰었다. 이날 온 조정이 다투어 간쟁하자, 상이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이르기를,
“나 또한 신하들이 사사로이 당색을 비호한다고 다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부덕한 사람으로서 어진 재상을 위리안치하게 하여 천재지변을 초래하였으나, 천재지변을 남구만과 여성제 두 신하가 죄를 입은 소치로 돌리고자 하니 이는 내가 실로 승복할 수가 없다. 옛말에 이르기를, ‘총애하는 길을 열어 놓아 업신여김을 불러들이지 말라.’ 하였으니, 만약 은총과 예우가 편중됨을 가지고 말한다면 일이 발생하기 전에 경계한 것이라고 핑계 댈 수 있다.”
하였다. 6일이 지나 경종(景宗)이 탄생하였다.
○ 11월에 상이 인견할 적에 위리안치를 풀어 주도록 명하였다. 다음 날 영상 김수흥(金壽興)이 참작할 것을 청하자, 상이 공은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여 풀어 주고 여 정승은 죄를 감등하여 삭탈관직하도록 명하였다. 양사에서 합계(合啓)하여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는 것을 환수하도록 청하였는데, 며칠 있다가 좌상이 입대하여 완전히 석방할 것을 거듭 청하자, 상이 삭탈관직을 명하고 이르기를,
“남구만이 평소에 강직하고 방정함을 내 본래 알고 있으나 그가 아뢴 것이 지극히 괴이하므로 놀라움을 이길 수 없다. 이제 이미 대신(大臣)과 신하들이 전후로 아룀으로 인하여 그의 본심을 알았으니, 이후 점차적으로 하겠다.”
하였다. 이에 합계가 비로소 정지되었다.
○ 12월에 상이 공의 직첩(職帖)을 환급하도록 명하였다.

61세 기사년(1689, 숙종15)
1월에 서용되어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에 올랐다. 이달에 누원(樓院)에 있는 총사(冢舍)에 이르렀다.
2월에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윤3월에 동쪽 교외로 나아가 대명(待命)하였다.
4월에 상이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도록 명하였는데, 양사에서 마침내 중도부처(中道付處)할 것을 청하여 강릉(江陵)에 부처되었다. 이달에 중궁(中宮)이 폐위되었다. 겨울에 서자(庶子) 남학성(南鶴聲)이 출생하였다.

○ 1월에 공이 누원에 이르렀다. 2월에 상소문을 올리고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시장의 백성 2, 3백 명이 서로 잇따라 찾아와서 문후하였다.
○ 이달에 상이 남인(南人)을 기용하였고 김만중(金萬重) 등을 끝까지 조사하였다.
○ 윤3월에 숙안공주(淑安公主)의 아들 홍치상(洪致祥)이 자백하였다. 상은 공이 홍치상으로 하여금 3년 동안 버젓이 편안히 있게 하였다고 허물하고 다시 비망기를 내려 유배 보냈다.
○ 정묘년(1687, 숙종13) 9월 인견할 적에 승지가, 공이 동쪽 교외에 나아가 대명하고 있다고 아뢰었다. 4월에 연신이 다시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자신이 대신이면서 도리어 사실을 은폐하여 행여 소문의 출처가 혹 탄로 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그 당시에 내 이미 온당치 못하게 여기는 뜻을 보였다. 그런데 대각(臺閣)에서는 아직까지 조용하기만 하니, 자못 이해할 수가 없다.”
하고, 공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라고 명하였다. 며칠 있다가 양사에서 각각 중도부처할 것을 청하여 공을 강릉에 부처하였다.
○ 5일 뒤에 중궁이 폐위되었다. 공이 도중에 대화역(大和驛)에 유숙하였는바, 꿈속에서 정승 정태화(鄭太和)와 홍명하(洪命夏)가 함께 입대하였는데 국가에 큰일이 있어 분위기가 몹시 참담하였다. 잠을 깨고는 놀라 이 일을 기록하였다. 다음 날 강릉에 이르니, 이달 27일이었다. 5월 3일에 들으니, 생질인 박태보(朴泰輔)가 중궁의 폐위에 대해 간하다가 국문(鞫問)을 받았다고 하였는데,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꿈을 꾼 날 밤이었다. 열흘 뒤에 꿈속에 박생(朴甥)이 얼룩말을 타고 와서 절을 하며 마치 먼 길을 떠나려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 박생의 부음(訃音)이 이르렀다. 공이 위로는 중궁을 위하여 애통해하고 아래로는 박생을 위하여 통곡하였다. 이때 영동(嶺東) 지방에 큰 흉년이 들어 아침저녁의 끼닛거리도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혹 술상을 차려 가지고 와도 공은 받지 않고, 혹 때로 한송정(寒松亭)과 경포대(鏡浦臺)에 나가 놀 것을 청하여도 문밖에 나가지 않고 이르기를,
“내가 남해에 유배 갔을 때는 혹 나가 놀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라서 감히 하지 못한다.”
하였다.

62세 경오년(1690, 숙종16)
4월에 소결(疏決)로 인하여 방면되어 돌아왔다.
5월에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11월에 누원(樓院)에 성묘하고 서계(西溪)를 방문하였다.

○ 지난해에 영동 지방이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공이 오던 날 큰비가 내리니, 백성들이 모두 ‘상공우(相公雨)’라고 말하였다. 다음 해 이날에 상이 가뭄 때문에 소결하여 공을 석방하였는데, 다음 날 큰비가 내리니, 도성 백성들도 모두 ‘상공우’라고 말하였다.

63세 신미년(1691, 숙종17)
3월에 홍주(洪州)에 성묘하였다.
7월에 학질을 앓았다.
윤7월에 강교(江郊)에 나아가 치료하였다.
8월에 화곡(花谷)의 총사(冢舍)에 머물렀다.
12월에 결성(結城)으로 돌아와서 피를 많이 토하였다.

○ 공은 평소에 천인(天人)의 성명(性命)을 담론하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책을 보고 침잠하여 한결같이 몸소 행하고 마음속에 자득(自得)하는 데에 힘썼다. 일찍이 동지경연사로서 《심경(心經)》을 시강(侍講)할 때에 아뢰기를,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는 비록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말이라도 유도(儒道)와 서로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쏟은 뒤에야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방심(放心)하고 독서한다면 끝내 생각하여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평소 뜻을 세우고 몸을 검속한 것을 살펴보면 국사에 매진하고 간결함으로 자신을 지켜서 작은 덕(德)에서도 출입한 것이 드무니, 타고난 자질이 도에 가까울 뿐만이 아니었다.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은 뒤에도 매년 생일날에 부모가 계시지 않다 하여 자손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과부가 된 누이가 공의 처소에서 염병에 걸리자 공이 직접 애쓰며 병을 간호하다가 병이 차도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내보냈다.
○ 이때 화곡(花谷)에 머물면서 묘표(墓表)를 장만하여 세웠으며, 10월에 비석이 있는 곳에 가서 작은 글자를 썼다.
○ 일찍이 선친의 대상(大祥) 뒤에 한 달이 넘도록 피를 토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피를 많이 토하여 매우 위태로웠다. 4년 뒤 가을에 묘소에 올라가 제사를 지내고, 종제(從弟)와 일찍 죽은 아들의 묘에도 모두 몸소 제사를 지냈다. 평강(平康) 부군(府君)의 묘소가 매우 높은 곳에 있었는데, 공은 7십 8, 9세에 이르렀으나 정월 초하루에 또한 몸소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64세 임신년(1692, 숙종18)
○ 이보다 앞서 을묘년(1675) 여름에 공은 해미(海美)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수원동(水源洞)의 빼어난 산수(山水)를 감상하고 이곳에 터를 잡고 살려는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그 이름을 수산재(隨山齋)라고 정하였으니, 당시(唐詩)의 “산을 따라 수원이 있는 곳에 이른다.〔隨山到水源〕”라는 말을 취한 것인데, 서재(書齋)가 끝내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해 여름에 다시 수원동을 찾아가서 놀고 12년 뒤 여름에 또 그렇게 하였으니, 이는 늙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은 것이었다.
별세한 지 수년 만에 문인 강성복(姜聖復)이 당진 현감(唐津縣監)으로 있으면서 영당(影堂)을 경영하여 지었다. 공이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갈 적에 화사(畫師)인 변량(卞亮)으로 하여금 영정(影幀) 두 본을 그리게 하여 집에 보관하였으며, 18년 뒤에 최공 석정(崔公錫鼎)이 기로사에 들어가 화사로 하여금 공의 영정 한 본을 모사하게 하여 지금까지 영당에 봉안하고 있다.

65세 계유년(1693, 숙종19)

가을에 서자(庶子) 남학청(南鶴淸)이 출생하였다.

○ 평강 부군이 홍주(洪州) 모과동(木瓜洞)에 선영(先塋)을 정하니, 계단 아래가 바로 결성(結城)이었다. 이미 결성의 용와리(龍臥里)에 전지를 사니, 구산(龜山)에서 20리 거리였다. 이때에 공은 이곳에 집을 지어 송추(松楸) 가까이에 기대어 살았다. 낙성하는 날에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깨끗한 책상 밝은 창문 앞에 책을 펼치니 / 净几明窓開卷帙
맑은 물과 푸른 산에 정신이 상쾌하네 / 淸流碧嶂爽精神
하였다.


 

[주D-001]기복(起復) :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어버이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감을 이른다. 즉 상중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지만 왕명에 의하여 부득이 벼슬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2]선왕조(先王朝) …… 수교(受敎) : 1663년(현종4) 4월 13일에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는 자리에서 궁가(宮家)의 면세전(免稅田)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 일은 1년 이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끌어 온 것인데, 이때에 현종의 수교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 수교에 의하면, 대군(大君)과 공주(公主)의 면세전은 400결(結)로 한정하고, 왕자군(王子君)과 옹주(翁主)의 면세전은 250결로 한정하였다. 《顯宗實錄》
[주D-003]직전법(職田法) : 조선 시대에 현직 관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기 위하여 제정한 제도로, 1466년(세조12)에 과전법(科田法)을 고쳐서 제정한 것이다. 경기(京畿)의 과전이 부족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현직 관료에 한해서 과전을 대폭 삭감하여 지급하도록 한 것인데,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대군(大君)의 직전은 225결이고, 왕자군의 직전은 180결이다.
[주D-004]전평군(全坪君) : 대본에는 ‘全平君’으로 되어 있는데, 《숙종실록(肅宗實錄)》과 《선원강요(璿源綱要)》에 의거하여 ‘平’을 ‘坪’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5]이정(李楨)과 …… 경계하였다가 : 이정과 이남(李柟)은 모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 이정은 복창군(福昌君)에, 이남은 복선군(福善君)에 각각 봉해졌다. 현종이 이들을 특별히 사랑하여 궁중에 수시로 출입하였는데,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복선군이 남인인 허견(許堅) 등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꾸몄다는 서인의 고변(告變)으로 형인 복창군과 아우인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과 함께 사사(賜死)되었다.
[주D-006]황옥(黃屋) : 누런 덮개를 씌운 수레로 천자가 사용하였다.
[주D-007]악전(幄殿) : 행사 때에 임금이 앉도록 휘장을 쳐서 임시로 만든 자리를 말한다.
[주D-008]사신(司晨)이 …… 창(唱)하면 : 사신은 새벽을 알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원이다. 고대에는 하루를 십이지(十二支)로 나누었는데, 그중 진시(辰時)는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7시를 진초(辰初), 8시를 진정(辰正)이라 하였다.
[주D-009]예(禮)에 …… 하였습니다 : 이 내용은 《예기(禮記)》 〈증자문 하(曾子問下)〉에 보인다. 군자는 군주를 가리키는바, 군주는 신하가 부모상을 당했을 경우 억지로 벼슬을 시키지 않고, 신하 역시 부모의 상중에는 아무리 군주가 불러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음을 이른다. 금혁(金革)의 일을 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하가 부모의 상중에 있더라도 국난(國難)을 당했을 때에는 상례(常禮)를 지키지 못하고 변례(變禮)로써 무기〔金〕를 들고 갑옷〔革〕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것을 이른다.
[주D-010]지난해 …… 하였는데 : 당시 이상진(李尙眞)이 향리(鄕里)로 돌아가겠다고 하면서, 홍우원(洪宇遠)과 민희(閔熙)가 죄를 받은 지 오래되었고 또 죽을 나이가 되었으니 관대하게 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 일에 대해 집의 이이명(李頤命)은 이상진이 유언비어에 동조하여 큰 죄인을 구제하려고 하였다고 비난하고 파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이상진이 한강을 건너 향리로 돌아가 다시는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肅宗實錄 12年 10月 8日, 27日》
[주D-011]출합(出閤) : 왕자가 자란 뒤에 사궁(私宮)을 짓고 따로 나가서 살거나 공주나 옹주가 시집감을 이른다.
[주D-012]공패(空牌) : 공명(空名)의 패로, 우선 이름을 기입하지 않은 채로 주었다가 나중에 기입하게 한 것이다.
[주D-013]해수(海水) : 바닷가와 강가 및 늪지를 가리킨다.
[주D-014]선반(宣飯) : 관아에서 벼슬아치에게 끼니때에 식사를 제공하는 것을 이른다.
[주D-015]도장(道掌) : 조선 시대에 궁방전(宮房田)이나 관둔전(官屯田)을 관리하여 도조(賭租)나 조세(租稅) 따위를 받아 지주에게 바치는 일을 맡은 사람을 이른다.
[주D-016]경신년의 일 : 1680년(숙종6)에 인조(仁祖)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아들인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이 허견(許堅)과 함께 역모를 꾸민 사건을 이른다.
[주D-017]한(漢)나라 …… 법률 : 한나라 무제(武帝) 때 안이(顔異)는 청렴하고 정직하여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는데, 법률을 담당한 장탕(張湯)과 사이가 나빴다. 어떤 사람이 안이를 다른 일로 고발하자, 무제는 장탕에게 회부시켜 치죄(治罪)하게 하였다. 이에 장탕은 고발한 사건은 제쳐 두고 다른 일을 들어 해당 법조문을 아뢰기를, “안이는 구경으로서 법령의 불편한 점을 알았으면 들어와 아뢰지 않고 마음속으로 비난하였으니, 사형으로 논죄해야 합니다.” 하여, 그를 처형하였다. 이후로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것을 처벌하는 법례〔腹誹之法比〕’가 생기게 되었다. 《資治通鑑 卷20 漢紀12》
[주D-018]망극한 …… 것 : 조사석(趙師錫)이 정승에 제수된 것은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모친과 매우 친하기 때문에 장 희빈에게 연줄을 댄 것이라고 비방한 것을 이른다.
[주D-019]북두(北斗)로 …… 맡기고 : 북두는 북두성(北斗星)으로 원래 자루가 달려 있는 말〔斗〕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키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하나인 기성(箕星)으로 키 모양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시경》 〈소아(小雅) 대동(大東)〉에 “남쪽에 기성이 있으나 키질하지 못하고 북쪽에 두성이 있으나 술과 음료를 떠 오지 못한다. 남쪽에 기성이 있는데 곧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북쪽에 두성이 있는데 서쪽으로 자루를 들고 있다.〔維南有箕 不可以簸揚 維北有斗 不可以挹酒漿 維南有箕 載翕其舌 有北有斗 西柄之揭〕” 하였다. 이는 부역과 조세가 무거워 살아가기 어려운 동쪽 지방 백성들이 이들 별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서쪽을 도와주고 자기가 있는 동쪽을 삼키거나 취하려는 뜻이 있음을 읊고 원망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는 모든 불운(不運)을 천명에 맡긴다는 뜻이다.
[주D-020]황비(黃扉) : 황각(黃閣)과 같은 말로 정승이 거처하는 집을 이르며, 때로는 정승을 가리키기도 한다.
[주D-021]원망과 …… 않노라 : 자신의 귀양살이에 대해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편안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뜻한다. 공자가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고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니, 나를 아는 자는 하늘일 것이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라고 하였다. 《論語 憲問》
[주D-022]총사(冢舍) : 무덤 옆에 있는 집이란 뜻으로, 일반적으로 묘 옆에서 집상(執喪)하는 사람이 머무는 곳을 이르나 여기서는 재실(齋室)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23]중궁(中宮)이 폐위되었다 : 중궁은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이다.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왕자를 탄생하자, 중궁을 폐하고 희빈 장씨를 중궁으로 책봉하였다.
[주D-024]홍치상(洪致祥)이 자백하였다 : 조사석(趙師錫)을 정승에 임명한 것은 조사석이 희빈 장씨의 모친과 친하기 때문에 희빈 장씨에게 연줄을 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자백한 것을 말한다. 《肅宗實錄 15年 閏3月 7日》
[주D-025]상공우(相公雨) : 상공은 정승을 이르는바, 상공우는 정승 때문에 내린 단비를 가리킨다. 남송 때 대신인 조정(趙鼎)이 월(越) 지방의 장수로 나가 있었는데 과거에 장원 급제한 왕응신(汪應辰)이 그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때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조정이 왕응신에게 명하여 명산에 가서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는데, 때마침 단비가 내리니 월 지방 사람들이 이것을 상공우라고 칭하였으나 조정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장원우(壯元雨)이다.” 하였다. 이는 곧 상공인 자신 때문에 비가 내린 것이 아니라 장원한 왕응신의 정성이 지극하여 하늘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비가 내렸다고 한 것이다. 《宋史 卷387 汪應辰列傳》
[주D-026]천인(天人)의 성명(性命) : 《중용장구》 제1장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른다.〔天命之謂性〕” 하였다. 명은 하늘이 사람에게 이치를 명령해 줌을 이르고, 성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이치를 부여받아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본성으로 삼음을 이르는데, 곧 성리학을 말한 것이다.
[주D-027]작은 …… 드무니 : 《논어》 〈자장(子張)〉에 “자하(子夏)가 말하기를, ‘큰 덕이 한계를 넘지 않으면 작은 덕은 출입하여도 괜찮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큰 덕은 큰일, 작은 덕은 작은 일을 가리키며, 출입은 일이 모두 예법(禮法)에 맞지 못하고 편차가 있음을 이른다.
[주D-028]송추(松楸) :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자라는 고향의 선영(先塋)을 이른다.


 

 

 

약천연보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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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66세 갑술년(1694, 숙종20)
4월에 서용되어 상이 특별히 영의정에 제수하고 세 번 사관을 보내어 불렀다. 이달에 중궁(中宮)이 복위(復位)되었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니, 상이 인견할 적에 선온(宣醞)하였다. 이때 승정원에서 신하들이 묘당에 모여 중전의 복위에 대해 의논할 것을 청한 잘못을 아뢰어 그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이달에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에 차임되고 호위청 대장(扈衛廳大將)을 겸하였으며, 중궁책례도감 도제조(中宮冊禮都監都提調), 훈련도감 도제조, 봉상시 도제조, 군기시 도제조, 군자감 도제조, 종묘서 도제조(宗廟署都提調)에 차임되었다. 공은 이달에 명을 받고 복상(卜相)하여 박세채(朴世采)가 좌상이 되고 윤지완(尹趾完)이 우상이 되었다. 공은 이달에 명을 받고 옥사를 조사하였는데, 김시걸(金時傑)의 상소로 인하여 대죄하자, 상은 세 차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5월에 다시 차자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네 번째 보냈다. 이달에 공이 병에 걸리자 상이 어의(御醫) 두 사람을 보내고 승지를 다섯 번째 보내니, 이달에 출사(出仕)하였다.
윤5월에 국청이 열릴 적에 공이 청대하여 장희재(張希載)를 참작해서 처리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대제학을 천거하였다. 공이 박상경(朴尙絅)의 무함하는 말로 인하여 도성을 나가자, 상이 비망기를 내려 분명하게 밝히고 세 번 승지를 보냈으며, 이조 판서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공은 중궁의 책례(冊禮)로 인해 도성으로 들어와서 차자를 올려 윤지완에게 편안한 수레와 가마꾼을 내려 주어 조정에 나올 수 있게 하고 대궐 안에서도 가마를 탈 수 있게 하며 인대(引對)할 때에도 부액(扶腋)하는 은전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옥사를 조사하는 것을 굳이 사양하자, 상은 도승지를 보내어 어필(御筆)로 비망기를 내렸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인견할 때에 민암(閔黯)은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장희재는 이 말을 전했다 하여 장희재를 엄히 심문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장희재가 마침내 자백하여 사형을 감면받았다. 이달에 인견할 때에 공이 대동미 1등(等)을 완전히 감면하고 신역(身役)을 감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6월에 중궁의 책례가 이루어져 안구마(鞍具馬)를 하사받았다. 강민저(姜敏著)의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공이 도성을 나오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다음 날 비파담(琵琶潭)에 은둔하였는데, 상이 도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현(縣)의 문에 나아가 상소를 올렸는데, 상이 호조 판서에게 함께 돌아오라고 명하므로 광주(廣州)의 송파(松坡)에 나아갔다.
7월에 상은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공이 대궐에 나아가 인견할 때에 함이완(咸以完)과 김인(金寅)의 죄가 모두 죽일 만함을 아뢰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수차(袖箚)를 올려 강만태(康晩泰), 최격(崔格), 이시회(李時檜), 한중혁(韓重爀)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상을 속인 죄를 통렬히 다스릴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다음 날 옥사를 조사할 때에 공은 민암을 사사(賜死)하는 것이 합당함을 아뢰었다. 중궁의 환후가 평상을 회복하자, 안구마를 하사받았다.
9월에 차자를 올려 강상 죄인(綱常罪人)이 살았거나 태어난 고을의 관원을 파직하고 고을을 혁파하는 것을 중지하고, 이러한 고을은 모두 읍호(邑號)를 강등하여 현감(縣監)이라 칭할 것을 청하였는데, 일이 마침내 시행되었다. 공은 명을 받들고 가서 휘릉(徽陵)을 봉심하였다.
10월에 차자를 올려 다시 한중혁을 추고하고, 한구(韓構)를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은 명을 받들고 가서 공릉(恭陵)을 봉심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공이 기사년(1689, 숙종15)의 성상의 하교를 삭제하거나 고치지 말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별시(別試) 전시(殿試)의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었다.
11월에 이현석(李賢錫) 등의 상소로 인하여 공이 세 차례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이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세 차례 명하므로 이달에 출사하였다.
12월에 정호(鄭澔)의 참소하는 말로 인하여 공이 상소를 올리자, 상은 도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다시 상소하자, 상이 도승지를 세 번째 보내니, 공은 언로의 폐단을 부주(附奏)하였다. 상은 도승지에게 네 번째 명하여 틈을 기다리다가 함께 오게 하였으며, 도승지에게 다섯 번째 명하여 우선 돌아와 틈을 기다리게 하였다. 세 번째로 상소하자 상이 승지를 보냈는데, 성상의 체후가 미령하므로 출사하였다.

○ 4월에 상이 영상으로 공을 불렀다. 공은 명을 듣고 9일에 선부군(先府君)의 제사를 행하고 나아갔는데, 이날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국운(國運)이 다시 돌아와서 중전이 복위되었으니, 백성들에게 두 군주가 없는 것은 고금에 공통된 의리이다. 희빈 장씨에게 내린 왕후의 옥새(玉璽)와 인수(印綬)를 환수하라.”
하고, 이어 희빈에게 예전의 작위를 내려서 세자의 혼정신성(昏定晨省)하는 예를 폐하지 않게 하였다. 다음 날 도승지 이세백(李世白) 등이 아뢰기를,
“중전의 승출(陞黜)은 국가에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대신으로 하여금 직접 명을 받들고 조정에서 함께 의논하게 하지 않으시니, 이 어찌 대성인(大聖人)이 변고에 대처하여 조심하고 삼가는 도리이겠습니까. 천천히 대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묘당에 모여서 의논하여 되도록 지당한 데로 귀결되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17일에 공이 사은숙배하였다. 인견할 적에 아뢰기를,
“승정원의 계사(啓辭)는 크게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려 했을 때에는 그 당시 조신(朝臣)인 자가 예경(禮經)을 가지고 간쟁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위호(位號)가 이미 정해졌다가 이제 또다시 도로 강등하는 조처가 있어 중궁이 당초의 정후(正后)의 자리로 복위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臣子)가 또다시 희빈의 위호를 강등하는 것을 간쟁한다면 한 나라에 존위(尊位)가 둘이 있게 되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감히 전하의 앞에서 아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만약 전하의 처분을 가지고 변고에 대처하여 조심하고 삼가는 도리에 흠이 있다고 생각해서 도리어 신하들로 하여금 묘당에 모여 의논하게 한다면 이는 자식 된 자가 어머니를 논하고 신하 된 자가 군주를 논하는 것입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설령 여러 신하라 해도 반드시 감히 그 사이에 한마디 말도 올리지 못할 것입니다.
묘당에 모여서 의논하는 일은 다만 신중히 하려다가 도리어 경솔하게 만들 뿐이니, 다만 신하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하께서 하문하실 바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상이 묘당에 모여서 의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공이 인하여 지난번 승정원의 계사에 ‘승강(陞降)’을 ‘승출(陞黜)’이라 하여 창졸간에 말을 제대로 가리지 못했음을 아뢰고 승지를 아울러 추고할 것을 청하자, 상은 이를 재가하였다. 그 후 6월에 박 좌상이 차자를 올리기를,
“복위하는 날 중재(重宰)로서 병조 판서의 지위에 있는 자가 의문을 품고 속히 의논할 것을 제창하고자 하여 소장(疏章)을 올렸습니다. 승정원에서 그 의논을 따라 묘당에 모여서 의논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는 장차 어디로 귀결시키려는 것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유사에게 명하여 그 잘잘못을 논하여 인정과 사세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자, 전 병조 판서 서문중(徐文重)을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지평(持平) 이정익(李禎翊)이 서문중을 삭탈관직하고 승지들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며, 좌상이 입대하여 거듭 청하자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해 가을에 보덕(輔德) 박만정(朴萬鼎)이 장 희빈(張禧嬪)을 높이는 예로 우대하여 별도로 당호(堂號)를 게시할 것을 청하였다. 9월에 공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신이 조정에 나온 초기에 우상이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내용이 박만정의 상소와 서로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뜻은 아마도 조정에서 왕후를 새로 바꾸어 세워서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겨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옛날 역사책에 혹 왕후가 폐위되어 별궁에 거처하면서 공봉(供奉)을 법대로 시행한 일이 있기는 하나, 지금의 사세로는 옳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한 궁궐 안에서 왕후에서 한 등급을 낮추면 당연히 빈(嬪)이 되어야 하니, 만일 또다시 높이는 예를 더한다면 왕후와 똑같아서 존귀함이 맞서게 되는 혐의가 있습니다. 궁중은 장 희빈만 거처하는 곳이 아니니, 또한 어찌 별도로 당호를 게시할 수 있겠습니까. 상의 처분이 결정된 뒤에 민심 또한 이미 크게 안정되었으니, 이러한 말을 만약 통렬히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민심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여 국가의 체통이 손상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이후로는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 4월에 명을 받고 복상(卜相)하였다. 윤5월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고요(皐陶)가 말한 것을 대우(大禹)가 불가하다 하였고, 주공(周公)이 하신 것을 소공(召公)이 기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각각 자기의 마음과 힘을 다하고 장점과 단점을 상호 보완하게 된 까닭입니다. 지금 신이 혼자서 국가의 중임을 맡은 지가 이제 3개월이 되었습니다. 설령 신이 왕릉(王陵)과 같이 어질다 해도 진평(陳平)의 도움이 없고, 요숭(姚崇)과 같은 재주가 있다 해도 노회신(盧懷愼)의 세속을 진정시킬 덕이 없습니다.
이제 들으니 박세채(朴世采)는 길에 오를 뜻이 있다 하고, 윤지완(尹趾完)으로 말하면 여러 해 동안 병이 낫지 않는 것은 각질(脚疾)이 특히 심해서일 따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편안한 수레와 가마꾼을 내려 주셔서 그가 안심하고 나올 수 있게 하며, 조정에 나온 뒤에도 고(故) 상신(相臣) 이상진(李尙眞)의 고사에 따라 대궐 안에서도 가마를 탈 수 있게 하고 인대(引對)할 때에도 부축을 받을 수 있게 하신다면 또한 어찌 차마 끝끝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는데, 12일 만에 두 정승이 모두 조정에 나왔다. 공은 혼자서 옥사를 조사하는 것을 재차 사양하고, 전후로 옥사를 조사할 때에 매번 여러 당상관과 문사랑(問事郞)으로 하여금 각각 소회를 다 말하게 하였다. 다음 해 여름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때에 곽 장군(霍將軍)이 딸을 바친 부분에 이르자, 공이 아뢰기를,
“군주가 한 신하를 편벽되이 등용하고 신하가 국정을 독점하는 것은 모두 혼란함을 초래하는 길입니다.”
하니, 상이 좋게 여겼다.
○ 중궁(中宮 인현왕후)이 폐위되어 사제(私第)로 나간 지 1년이 넘었다. 세자의 생모의 오라비인 장희재(張希載)가 병조 판서 민암(閔黯)을 찾아가서 만나자, 민암이 아들인 민장도(閔章道)와 조카인 민종도(閔宗道)를 모이게 하였다. 민종도가 이르기를,
“여염의 유언비어에 의하면 은자(銀子)를 모아 액정(掖庭) 사람들과 결탁해서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자가 있는데, 폐비와 김 귀인(金貴人)도 은자를 냈다고 합니다.”
하니, 민암과 민장도가 이르기를,
“폐비가 만약 은자를 내고자 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장희재가 마침내 언문(諺文) 편지로 장씨(張氏 장 희빈)에게 이 내용을 기별하였는데, 상이 그 편지를 보았다. 이때에 이르러 의금부에 명하여 민암이 국모를 모해(謀害)한 죄를 추문(推問)하고 또 장희재를 추문하자, 장희재가 속여서 거짓말하기를,
“민암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고변하려고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장희재를 엄하게 형문(刑問)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옛날 옥사를 다스릴 때에 차마 고문하는 형벌을 가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입증함으로써 그 죄를 결정하였는바, 이것이 바로 법례(法例)입니다. 지금 장희재가 범한 죄는 바로 성상께서 직접 간찰(簡札)을 보신 것이니, 그 명백함이 여러 사람들이 입증하는 것보다 더더욱 분명합니다. 이로써 조율(照律)하여 감죄(勘罪)한다면 본래 이에 알맞은 형률이 있을 터인데, 기어이 형벌을 가하려 하신다면 마음에 끝내 편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국청에서 청대하여 팔의(八議)를 아뢰었다. 이때에 세자가 겨우 7세였는데, 상이 공의 말을 받아들였다.
5월에 상이 대신들과 의논해서 장희재를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명하니,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한(漢)나라의 박소(薄昭)는 문제(文帝)의 외숙이요, 또 대왕(代王)으로 있던 문제를 오게 한 공로가 있었으나 문제는 오히려 그의 죽음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장희재를 박소에 비할 경우 그 친밀함으로 말하면 더 가볍고 그 죄를 논하면 더 무겁습니다. 가령 왕세자가 장성한 뒤라면 반드시 스스로 대의를 위하여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사세를 생각해 볼 때 왕세자가 현재 나이가 어리고 외가(外家)의 가까운 친척으로는 오직 장희재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전하께서 가엾게 여기고 측은히 여기셔서 하문하는 조처를 내리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말한 ‘인(仁)한 자는 그 사랑하는 바로써 사랑하지 않는 바에 미친다.’라고 한 것이 어찌 이와 같은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의금부와 양사(兩司)에서 모두 장희재를 국청으로 옮겨 올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후 김인(金寅)이 자백한 말이 국청과 연관되므로 청대할 때에 공이 장희재를 국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예전의 일을 아울러 물었으나 장희재는 자백하지 않았다. 윤5월 2일에 공은 판의금부사 신여철(申汝哲), 지의금부사 이세백(李世白), 동지의금부사 정재희(鄭載禧)와 함께 청대하였다. 이때 공이 아뢰기를,
“지금 옥사의 사체로 말하면 형벌을 청하는 것 외에는 달리 아뢸 말씀이 없으니, 신의 본의는 애당초 장희재를 위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이 비록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나 전하께서 이미 신을 이 자리에 두셨으니, 신이 어찌 감히 성상께 소회를 다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희재의 언문(諺文) 편지는 전하께 직접 진달한 것이 아니니, 반드시 경유하여 진달하게 한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죄를 가지고 형벌을 가하여 장희재를 심문한다면 형세상 어찌 희빈(禧嬪)에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희빈이 만일 이 때문에 불안해한다면 희빈의 소생인 왕세자 또한 어찌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로 존비(尊卑)의 신분이 뒤바뀌어 사람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답답해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성상께서 깨달으시고 명분을 바로잡으시니, 지난날의 여러 가지 일은 지금 논할 것이 없습니다. 단지 중궁 전하가 희빈에게 규목(樛木)의 은혜를 내리고 희빈이 중전에게 소성(小星)의 예를 다하며, 왕세자가 중전에게 효성을 다하여 또한 한(漢)나라 장제(章帝)가 마 태후(馬太后)를 섬기듯이 하고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유 태후(劉太后)를 섬기듯이 하기를 바랄 뿐이니, 이것이 신하들이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구구한 정성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희재의 옥사로 인하여 희빈과 왕세자가 점차로 불안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후일 궁궐 안이 화목하고 화평함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본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장희재에 대하여 법대로 처벌하기를 우러러 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불만스러워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진실로 법을 지키는 올바른 의논이나,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심히 염려하건대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이 또 장희재가 민장도와 언문 편지를 주고받은 일을 살펴보니, 민장도는 비록 이 일을 자백하지 않았으나 장희재는 즉시 사실대로 실토하고 아울러 그에게 대답한 말까지 일일이 바른대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독 언문 편지가 궁중으로 흘러들어 간 일에 대해서는 신이 ‘성상께서 직접 보셔서 숨길 수 없다.’라는 뜻으로 여러 차례 엄하게 심문을 하였으나 말을 하려다가도 말하지 않아서 끝내 명백하게 실토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록 민장도 부자가 애걸하며 유인하여 사주한 소치이긴 하지만, 또한 자신이 자백한 뒤에 희빈에게까지 여파가 미칠까 우려한 데서 비롯된 듯합니다.”
하였다. 승지 김구(金構)가 아뢰기를,
“장희재가 자백한 뒤에 참작하여 처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실로 국가를 위해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간절한 심정을 다 말하였으므로 나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뜻으로 분부한 것이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은 또 깊이 우려하는 바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왕세자에게 종묘사직을 만년토록 계승하도록 부탁하셨으니, 희빈을 돌봐 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만약 희빈을 위안하는 뜻을 아랫사람들에게 전혀 보여 주지 않는다면 궁중 사람들 또한 반드시 희빈을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이번에 관련된 일 말고도 앞으로 죄와 허물이 거듭하여 발생할 것을 또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께서 또한 어떻게 잘 처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제왕의 집안에는 으레 이러한 폐단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태자를 좋아하지 않자, 이필(李泌)은 좌우 신하들에게 이것을 알게 하지 말 것을 청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어찌 이러한 일을 장구하게 생각하고 뒤돌아보아 곡진히 방비하고 미리 조치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또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4, 5년이 되도록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셨는데 마침 세자가 이러한 때에 탄생하니, 만약 전하의 신하가 되고자 하지 않는 자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그 누가 기뻐 날뛰고 우러러 떠받드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를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신하들 중에 혹 신중히 할 것을 주장한 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쪽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들만 세자에게 관심을 두고 다른 쪽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참소하였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화가 기사년(1689, 숙종15) 5월에 이르러 지극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만약 세자에게 불안한 바가 있는데도 미리 생각하지 못해서 후일에 과연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을 초래하게 된다면 한쪽 사람들이 말했던 것을 방불케 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는 또 오늘날 신자(臣子)가 사생(死生)과 화복(禍福)을 돌아보지 말고 정성과 힘을 다해야 할 곳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말한 것이 또한 바로 나의 뜻이니, 내 어찌 주달하는 뜻을 알지 못하겠는가. 장희재는 전에 참작하여 조처하라고 판부(判付)한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의 비난이 크게 일어나 떠들썩하게 공을 공격하니, 양사에서 장희재를 엄히 국문할 것을 다시 청하였다. 10일에 시골 유생 박상경(朴尙絅)이 상소하여 공을 참소하자, 공이 도성을 나가 대죄하였다. 상이 비망기를 내리기를,
“아, 정사가 초야의 선비들에게 좌우되는 것은 본래 국가의 좋은 일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중전(中殿)이 복위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멀리 귀양 가서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지고 죄인들을 엄히 징벌하니, 또 일개 유생이 잇따라 상소를 올려서 함부로 간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천하의 일은 한결같이 명쾌한 것만을 주장하면 중도를 얻는 경우가 드물다. 군주를 이간하고 중전을 폐위할 것을 도모했다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은연중에 말이 과덕(寡德)한 이 몸에까지 미치니, 내 실로 백성 위에 군림할 면목이 없다.
아, 기사년에 중전을 사저(私邸)로 나가게 한 뒤에 민암(閔黯)이 임금의 말을 사칭하고 유언비어를 궁중에 유입시킨 죄와 장희재가 그 말을 듣고서 궁중에 전한 죄상은 진실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나서 은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군부(君父)의 앞에서 중전을 이간하고 중전이 폐위되기 전부터 폐위를 도모했다는 말은 털끝만큼도 비슷한 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명(明)나라의 선종(宣宗) 때에도 이러한 말이 있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
돌아보건대 내가 덕이 부족하여 비록 감히 두 군주에게 견줄 수는 없으나, 경장(更張)하는 초기에 중외에 내린 비망기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면 과인(寡人)의 본심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상경은 유독 군주의 분명한 가르침을 믿지 않고 기어이 실정 밖의 것을 억측하고자 하여 비견하지 말아야 할 곳에 비견하였다. 말한 내용과 어투가 전혀 실정에 걸맞지 않아서 지극히 놀라우며, 대신들의 죄상을 아뢰어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맹자(孟子)의 말씀을 역적들을 비호하는 데에 인용하였는데, 이는 그 마음이 단지 장희재가 있음만 알고 전하와 중궁이 있음은 알지 못한 것이며, 아성(亞聖)까지 아울러 모함한 것이니, 애통함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한편으로는 ‘전하께서 불행히도 대신의 말에 오도되어서 장희재의 사형을 감면하라는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신이 홀로 여론을 배척하고 또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면서 죽을힘을 다해 간쟁하여 온 세상 사람들의 귀와 눈을 가릴 계책을 세우는 것은 유독 어째서입니까.’라고 하였다. 그 말이 갈수록 더욱 신랄하니, 아, 이 어떤 사람이기에 마침내 감히 방자하고 무엄함이 이에 이른단 말인가. 내 하나하나 분변하고 설파하여 옳지 않음을 밝힐 것이다.
아, 장희재의 죄는 애매하지 않으니, 어찌 그를 용서할 마음이 있겠는가. 이는 결단코 원칙을 굽혀서 장희재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따로 이유가 있으니, 만약 장희재를 법대로 처벌하여 사건이 점점 확대된다면 세자가 마음속에 크게 불안해할 것이다. 이러한 지경에 이른다면 대소 신료들이 모두 황공하여 몸 둘 곳이 없음은 이미 말할 필요도 없으며, 부자간의 지극한 정도 과연 편안하겠는가, 편안하지 못하겠는가. 아, 국모(國母)가 모함을 받은 것은 진실로 분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이요, 부자간은 오륜(五倫)의 으뜸이다. 그런데 박상경 또한 한 명의 신하이거늘 이 막중한 두 가지 큰 의리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비난하는 데만 급급하니 유독 무슨 이유에서인가. 지난번 비망기에 ‘세자는 혼정신성의 예(禮)를 폐하지 말라.’라고 하교하였고, 오늘 ‘장희재를 참작하여 처분하라.’라고 하교하였으니, 앞뒤의 의사가 저절로 서로 맞아떨어지는데 어찌 내 일찍이 대신의 말에 동요되어 갑작스럽게 사형을 감면하라는 명을 내렸겠는가. 대신의 뜻이 또한 나의 뜻이니, 어찌 감히 장희재를 비호하여 말하였겠는가. 나의 이 마음을 진실로 이미 헤아렸으니 금석처럼 철저히 지켜서 끝내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큰일을 당하여 뜻을 바꾸지 않는 것은 본래 대신의 직무이니, 이처럼 지극히 중요한 일에 관계된 문제에 있어서는 나 역시 영상의 뜻이 혹시라도 변하지 않을 줄을 아노라.
아, 지난 잘못을 깊이 뉘우쳐서 정치와 교화를 다시 펴고 옛날의 원로대신에게 상의하고 맡겨서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니, 큰 화기(和氣)를 보전하고 화합하여 무궁한 복이 이르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개 진부한 유생이 마침내 감히 뛰쳐나와 스스로 막아서서 군주를 의심하고 조정을 경시함이 이와 같이 심하니, 이처럼 과격한 말을 틀어막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국가가 어지러워지고 의논이 분열될 조짐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상소문을 다시 내주고 박상경을 우선 정거(停擧)하라.”
하였다. 공은 상이 남김없이 분변하여 밝게 해명하였다 하여 마침내 사양하는 글을 올리고 변명하지 않자, 상이 세 차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간신(諫臣) 박권(朴權)이 박상경의 정거를 환수할 것을 청하자, 상은 다음 날 비망기를 내려 박상경을 멀리 유배 보내고 이르기를,
“이와 같이 간사하고 위험한 무리들에게 만약 좋고 나쁨을 분명하게 보여 먼 지역으로 추방하는 형전(刑典)을 속히 거행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장차 이러한 자들이 잇따라 나올 것이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이 세 번째로 상소하자, 상은 이조 판서에게 명하여 함께 오게 하였다. 공은 중궁의 책례(冊禮)로 인하여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로서 부득이하게 도성에 들어왔다. 5일 지나 삼사(三司)에서 청대하여 장희재를 조사할 것을 거듭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지어낸 자는 민암(閔黯) 부자(父子)이고 그 말을 전한 자는 장희재이니, 민암과는 차이가 있다.”
하였다. 응교(應敎) 김몽신(金夢臣)이 아뢰기를,
“말을 지어낸 것과 그 말을 전한 것이 비록 경중의 차이가 있으나 지금 만약 장희재를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낸다면 자연 그에 해당되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언 이정겸(李廷謙)이 아뢰기를,
“언문 간찰이 밖에서 들어왔다면 받아 보는 것이 당연한 형세이니, 어찌 털끝만큼인들 궁궐에 여파가 미치겠습니까. 그런데 대신이 이것을 우려하니 진실로 그것이 온당한지 알지 못하겠고, 전하께서 불안해하신다는 하교도 또한 지나친 우려에서 나온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사년(1689, 숙종15) 국본(國本 세자(世子))을 정하는 날에 별안간 듣고 의혹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유위한(柳緯漢)의 상소가 또다시 나왔다. 그리하여 부자간에 마음이 요동하는 단서가 없지 않아 지나친 조처가 있음에 이르렀다. 지금 박상경의 상소문은 말뜻이 위험하니 매우 가증스럽다. 그리고 장희재의 일은 그것이 궁중에 관계된다는 말이 아니라, 사건이 만약 확대된다면 희빈과 세자가 반드시 편안하기 어려운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를 깊이 생각하여 잘 대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천하의 사변은 무궁하니 이제 만약 처단한 뒤에 위험한 상소가 다시 나와서 또 하나의 사단이 생긴다면 그 난처함이 또 금일의 분분한 형세보다도 갑절이나 될 것이니, 애당초 참작하여 처리함은 이것을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이때 박 좌상(朴左相 박세채)이 조정에 나오려 하면서 공에게 보낸 편지에,
“대감께서 국가를 위하는 무궁한 계책은 비록 갑자기 바꾸기 어려우나 자신의 실제 소견을 군주에게 아뢸 적에 만일 ‘신의 뜻은 진실로 이와 같으나 저들의 주장도 선비와 백성들이 똑같이 주장하는 것이니, 신의 말에 구애하지 마시고 헤아려 처리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한다면 합하(閤下)의 도리로 볼 때 거의 둘 다 맞을 것이고, 조정에서도 겸하여 듣고 널리 보아서 한때의 공론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답장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모두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걱정한다고 소생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성상께서 내리신 비망기와 그저께 삼사에서 청대할 때에 성상의 하교에 운운하신 것과 전후로 내리신 성상의 하교를 살펴보면 궁중의 사세가 실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이러한 하교를 받들기 전에 소생이 이미 장희재를 형벌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었는데, 하교를 받든 뒤에 도리어 형벌을 청하는 의논을 따른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소생이 전후로 올린 차계(箚啓)에 이미 이르기를, ‘유생의 상소에서 주장한 바는 본래 중론(衆論)이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양사(兩司)에서 논쟁하는 것은 신이 생각해 봐도 그러한 논쟁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소생의 말은 여기에 그치고 말아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다음 날 상은 공이 옥사를 조사하는 일을 굳이 사양하자, 도승지를 보내 어필로 비망기를 내려 공을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이 대궐에 나아가 상이 인견할 때에 아뢰기를,
“장희재의 죄명을 대계(臺啓)에는 곤전(坤殿)을 모해하려 했다는 것으로 죄목을 삼았으나, 저 장희재의 원정(原情)에 ‘전해 들은 말을 궁중에 통지함으로써 경계하고 삼가게 하려 했다고 한다면 혹 그러한 일은 있다.’라고 하였으니, 과연 그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말을 지어내고 모해하려 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말을 전하기만 했을 뿐이라면 이로써 문안을 작성해 참작해서 처리하는 것도 혹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입니다. 만약 과연 중궁을 모해하려 했다는 말이 있다면 또한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 상께서 마땅히 명백하게 처분함이 있으셔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문 간찰에는 다만 민암(閔黯) 부자의 말을 전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공은 아뢰기를,
“장희재가 끝내 자백하지 않는 것은 희빈에게까지 여파가 미칠까 우려해서인 듯하고, 또한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이 계실 것을 믿어서인 듯합니다. 상께서 만약 언문 간찰의 내용을 조목조목 열거하고 분명히 지시하여 다시 엄하게 국문하게 해서 ‘승복할 경우에는 말을 전한 죄로써 예전대로 참작하여 처리할 것이요, 승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반드시 형신(刑訊)을 가하겠다.’라고 하시면 저 장희재는 반드시 감히 끝까지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민암을 추문할 때 판부한 내용에 이미 다 말하였으니, 이로써 추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다음 날 청대할 때에 공이 거듭 청하기를,
“조사하는 법의 명백한 도리로써 말씀드린다면 언문 간찰을 국청에 내려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언문 간찰 속에 혹 외부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 있다면 더욱 난처하기 때문에 감히 곧바로 청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지어낸 자는 민암이고 그 말을 전한 자는 장희재이니, 죄의 경중에 차이가 있다. 이로써 추문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날 장희재가 마침내 민암 등이 중궁을 언급했다고 하며 재차 공초에서 지만(遲晩)이라고 하였다. 상은 “말을 전한 자는 말을 지어낸 자와는 차이가 있으니, 애당초 국모를 모해하려 했다는 말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라고 판부하여, 마침내 장희재의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위리안치하였다. 양사에서 다시 아뢰기를,
“장희재가 이미 승복하였으니 형률대로 처단하소서.”
하였다.
이에 앞서 공이 차자로 아뢰어 박상경(朴尙絅)의 원배(遠配)를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빈청 인견(賓廳引見)으로 인하여 거듭 청하자, 또 정거(停擧)를 명하였다. 얼마 후 박 좌상이 조정에 나왔는데, 6월에 차자를 올려 송나라의 새로운 법과 명나라가 추숭(追崇)한 일에 대한 인심의 시비 평가를 인용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대신(大臣 남구만)이 국가를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멀리 염려하여 한 말에 대해 진언(進言)하는 자들이 대신과 대립하여 서로 논쟁할 뿐만이 아니었는데도, 대신은 마침내 이들을 용서하여 놓아줄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는 묘당의 충성스러운 생각이 보통 사람으로서 미칠 수 없는 바가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옳으니 그르니 논쟁하는 사이에서 인심을 붙든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 인심이 불안해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달 15일에 지방 유생 강민저(姜敏著)가 상소하기를,
“대신의 의견은 인지상정에서 크게 벗어났습니다. 곤위(坤位)의 승강(陞降)에 대해 맨 먼저 논계한 것은 마음 씀이 치밀하여 악역(惡逆)들을 구원하기까지 하였고, 전하께서 ‘실정은 털어놓게 하되 사형은 사면해 주도록 하라.’ 하신 하교는 크게 마땅함을 잃었는데, 이날 입시한 신하들이 함구하여 한 사람도 진언하는 자가 없었으니 어째서입니까? 또 대간이 처음에 박상경의 정거를 환수할 것을 청하자, 인하여 멀리 유배 보내라는 명령이 계셨는데도 감히 다시 논하는 자가 없었으니, 그의 죄가 다만 멀리 유배하는 데에 합당하고 정거하는 데는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양사에서 간쟁하여 의논할 때에 일을 그르친 신하인 남구만을 먼저 거론(擧論)한 뒤에야 말이 사리에 맞을 터인데, 전후로 아뢴 것이 도무지 한 마디도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망기를 내려 강민저를 정거하였다. 공이 도성을 나오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기를,
“이 어찌 일개 시골 유생이 혼자 힘으로 한 것이겠는가. 반드시 일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박상경의 위험한 계책이 성공하지 못하자 분하게 여겨 부추겨서 잇따라 일으킨 것이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다음 날 공이 비파담(琵琶潭)에 은둔하자, 상이 도승지에게 명하여 함께 오라고 하였다. 5일 뒤에 전교하기를,
“경의 심사(心事)가 충성스럽고 딴마음이 없음은 비단 내가 통찰(洞察)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명에게도 질정할 수 있다. 답답한 마음이 날로 더욱 심해지니, 경이 혹시라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나는 결심하고 직접 찾아가서 맞이해 올 것이요,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니, 공이 현(縣)의 문에 나아가 상소하기를,
“신이 경황없이 도성을 나올 때에 상소문을 남겨 하직을 고하는 것도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직접 맞이하겠다는 분부는 주(周)나라 이후로 비단 이런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런 말도 있지 않았으니, 신이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이 어찌 군주가 신자(臣子)에게 가볍게 할 수 있는 말씀이겠습니까.”
하였다. 좌상이 입대하여 승정원에 신칙해서 유생의 위험한 상소를 일절 올리지 말도록 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공이 두 번째 올린 상소에 먼저 이를 환수할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예전에 조정에서 의논이 서로 어긋나서 그때마다 각각 자기들 의견을 고집하여 정론(定論)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견을 내세우는 모든 상소문을 봉입(捧入)하지 말라는 명이 많이 있었으니, 신은 언제나 이것을 해괴하게 여기고 한탄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지금 신 자신에게 마침내 이러한 일이 있으니, 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겠으며 오래 지속될 수 있는 방도이겠습니까. 신이 또한 어찌 감히 이때를 틈타 다소 몸을 움직여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서 다시는 신을 침범하고 공격하는 말이 없을 것이라고 믿겠습니까.”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나는 세상일이 매우 어려워지는 형국을 염려하고 인심이 더욱 경박해짐을 통탄하여,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양손을 잃은 것처럼 허전하다. 아, 돌아보건대 나의 정성과 예가 지극하지 못해서 경의 마음을 감동시켜 되돌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경은 유독 두 선왕조께서 인정해 주고 예우해 주신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때 옥당에서 입대하여 아뢰기를,
“‘친히 맞이한다.〔親逆〕’라는 두 글자에 신하들이 송연해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참작하여 헤아리셔야 합니다.”
하였다. 좌상이 차자를 올리기를,
“인조 초년에 수상(首相) 이원익(李元翼)이 대신(臺臣)에게 배척을 당하여 병을 핑계 대고 나오지 않자, 상이 이르기를, ‘내 직접 찾아가서 문병하겠다.’ 하시고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선왕조의 고사(故事)를 상고하게 하자, 이원익이 놀라고 황송하여 대궐에 나왔습니다. 인조께서는 한결같이 지성으로 원로를 대우하시어 일찍이 존엄한 옥체를 굽히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으셨고, 이원익은 명령을 듣자 즉시 조정에 달려 나와서 또한 감히 늙고 병든 대신으로 자처하지 못하였으니, 군주와 신하 사이가 둘 다 도리에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옥당의 신하가 ‘마땅히 참작해야 한다.’라고 이른 것은 깊이 살피지 못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직접 맞이하겠다는 전교는 내 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성대한 일을 깊이 생각하여 참으로 이것을 본받아 친히 맞이하고자 한 것이다. 옥당에서 옛 규례를 기억하지 못했는데, 지금 경이 아뢴 것은 서로 상의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통했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상은 며칠 후에 호조 판서에게 명하여 공과 함께 돌아오게 하고 이르기를,
“경이 진실로 이와 같이 고집하고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국가가 실로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르겠다. 다만 조종조(祖宗朝)의 고사를 깊이 생각하여 반드시 직접 찾아가서 경을 맞이해 올 뿐이다.”
하니, 이에 공이 광주(廣州)의 송파(松坡)로 나왔다.
7월에 공이 사양하는 글을 올리자, 상은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고, 또다시 성상 앞에서 개진할 것을 명하였으며, 두 번째 올린 상소에 답하기를,
“경이 만약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맞이해 오려는 뜻이 어찌 전후에 다름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이날 동문(東門) 밖으로 나왔는데, 좌상이 나와서 맞이하여 공에게 장희재의 일을 참작해서 헤아릴 것을 거듭 권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의 잘못된 소견이 이와 같으니, 다만 한 세상의 죄인이 될 뿐입니다.”
하였고, 또 항상 이르기를,
“내 말이 만일 적중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의 복이니, 내가 일을 잘못 헤아린 죄를 받는 것은 논할 겨를도 없을 것이요, 불행히도 적중한다면 내가 비록 만 번 죽음을 당한다 해도 웃으면서 지하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이에 앞서 5월에 좌상이 공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장희재의 일을 혹자는 ‘대감의 뜻은 장희재에 대한 논쟁이 한층 더 심해질까 우려하여 이와 같이 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어찌 먼저 그 죄를 바로잡고 후일에 장 희빈의 죄가 밝혀졌을 때에 극력 고집하고 간쟁하는 것만 하겠는가. 이렇게 한다면 둘 다 의리에 부합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 말도 매우 일리가 있습니다.”
하였다. 이는 노론과 소론이 모두 “장희재를 죽여야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그 실정은 똑같지 않아서 양단(兩端)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말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좌상이 주장한 것이었다. 이때에 공이 입조하자, 좌상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달 연석(筵席)에서 수상(首相)을 소환하는 데에 급급하여 상법(常法)과 대의(大義)에 대해서는 미처 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언문 간찰에 대한 일은 장희재에게 그쳐야 하고 희빈에게 파급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후일에 혹 난처한 일이 있더라도 다만 그때 가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죽을 각오로 강력히 간쟁할 뿐이니, 또 어찌 세자를 불안한 곳으로 몰아넣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직 드러나지 않은 근심을 미리 헤아려서 국모를 모해하려는 지극한 죄를 지은 자를 먼저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됨이 매우 분명합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수상의 마음은 진실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나 그 일은 지나치게 깊이 우려하여 합당하지 않은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다시 입대하여 아뢰기를,
“국가를 위하는 영상의 깊은 우려는 신하들이 따라갈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의리의 대체(大體)를 가지고 말한다면 미진한 듯합니다. 성상의 하교는 한때 수상의 말을 억지로 따름으로 인하여 말을 주고받는 즈음에 말의 단서가 자연 이와 같이 귀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상의 마음을 굳게 정하시고 다시 수상에게 전유(傳諭)하시기를, ‘전일에 억지로 따른 것은 실언을 한 듯하다. 가령 후일에 우려되는 바가 있더라도 내가 있으니, 혹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라고 하교하시고, 인하여 대론(臺論)을 윤허하신다면 중궁과 세자와 희빈이 일체 모두 편안해지는 도리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박상경을 논죄하는 전교에 이미 내 뜻을 다 말하였으니, 한때의 대신의 말 때문에 이렇게 참작하여 처리한 것이 아니다. 천하의 일은 진실로 처음에 삼가야 하니, 처음에 삼가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진정시킬 수 없다.”
하였다. 좌상이 아뢰기를,
“시대가 바뀌고 일이 다르면 혹 이와 같을 수 있으나 현재 밝으신 성상께서 임어하시어 성상의 마음이 미리 정해지셨으니, 어찌 명백히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을 전하는 것과 말을 지어내는 것은 차이가 있으니, 애당초 장희재가 국모를 모해하려 했다는 말은 실로 도에 지나치다는 뜻으로 판부(判付)에 분명히 말하였다.”
하였다. 김구(金構)가 아뢰기를,
“국청의 판부는 으레 조보(朝報)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좌상이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희재가 비록 사실대로 공초한다 해도 내가 사형을 용서해 주려는 뜻은 전후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민암은 사사하고 장희재는 사형을 용서해 준다.’라는 전교를 내린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좌상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에 차이가 있다 하시어 처분하신 것은 당연하지만 대의로써 말한다면 말을 지어낸 자의 말을 듣고서 성상에게까지 알려지게 하였으니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언문 간찰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마땅히 삼가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실로 그 귀취(歸趣)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 이와 같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장희재가 혹 대내(大內 중궁 장씨)에서 놀라 동요함이 있을까 우려한 것이요, 민암의 말을 사실이라고 여겨서 전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11월에 좌상이 공을 방문하여 이르기를,
“민암과 장희재는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장희재와 장 희빈이 하나이면서 둘인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까? 편지를 보낸 자와 편지를 받은 자가 또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좌상이 매우 두려워하고 인하여 이르기를,
“장 희빈은 일찍이 중궁이었으니, 설령 폐비 민씨를 모해하려 한 형적(形迹)이 있다 해도 신하와는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때 양사에서는 장희재의 일을 논쟁한 지가 1년이 넘었다. 대사간 신양(申懹)이 상소하여 또한 상께서 공의 말을 억지로 따른 것이라고 아뢰자, 상이 답하기를,
“내가 주장한 것은 본래 가볍지 않고 중하였는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반드시 먼저 수상을 침해하고 핍박하니, 그 뜻은 대신이 불안해하여 한결같이 인책(引責)하고 들어가면 내가 당초의 마음을 다소 바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대신이 비록 참작하여 처리하고자 하더라도 나의 마음에 불가하다고 여긴다면 어찌 억지로 따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처분은 한갓 대신의 의논을 따른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아, 부자간은 오륜의 으뜸이고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이다. 애당초 일의 단서를 자세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고, 확대시켜서 세자로 하여금 크게 불안하게 하여 손상을 입게 한다면 비록 그대들처럼 이기기를 힘쓰는 자라도 분수와 의리에 있어서 어찌 감히 태연할 수 있겠는가. 나의 뜻은 굳게 정해졌으니, 결코 동요시키거나 빼앗기 어려울 것이다. 아, 큰일에 임하여 지키는 바를 바꾸는 것은 사람이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다. 홍수헌(洪受瀗)이 이어 대사간이 되어서 상소하여 상의 마음이 의심하고 막혔다고 아뢰자, 상은 답하기를,
“나의 생각에는 대간의 의논을 허락해 준 뒤에 다시 이보다 한층 더 과격한 의논이 나오면 세자가 반드시 손상을 입을까 우려한 것이요, 장희재의 죄를 바로잡는 것이 세자에게 해가 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이해 봄에 연신(筵臣) 이여(李畬)와 김시걸(金時傑) 등이 인하여 아뢰기를,
“영상의 뜻은 성상께서 혹 중도(中道)에 지나치신 분부를 내릴까 깊이 염려해서요, 아랫사람들이 한층 더 과격해질까 의심하는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혹자가 공에게 권하기를, “상께 노론은 이러한 뜻이 없음을 밝히라.”라고 하였으나 공은 동요되지 않았다. 이때에 이여와 유득일(兪得一) 등이 매번 찾아와서 공에게 문안하고 아뢰기를,
“장희재의 사형을 용서해 주는 것은 너무 이른 듯하니, 만약 화가 장 희빈에게까지 미친다면 소인들이 또한 죽음으로써 간쟁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만일 장희재가 다른 일로 죽을죄를 범했다면 내가 어찌 반 마디인들 그를 비호하겠는가. 지금 그 죄목이 장 희빈과 하나이면서 둘이다. 장희재에게 형벌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그다음에는 장 희빈에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니, 그때 가서 무슨 말로 구원할 수 있겠는가. 공들은 과연 일의 순서를 전혀 몰라서 우선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으로 반드시 옳지 않음을 알면서 겉으로만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장희재를 사형에 처한 다음 그의 죄상을 나열한 글에 장 희빈은 죽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죄상을 남김없이 나열한 뒤에 공들은 또한 장차 죽음으로써 간쟁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이여가 또 아뢰기를,
“장 희빈의 죄상을 상께서 발각하신다 하더라도 본래 장희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죄의 경중을 참작함은 이미 신하들이 감히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였으니, 이는 존귀함이 맞서게 됨을 혐의한 것이었다. 이에 이여 등은 말문이 막히고 얼굴빛이 붉어진 채 미소를 머금고 떠나갔다. 이때 최공 석정(崔公錫鼎)도 양쪽의 말을 잘못 듣고 공에게 질정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모든 천하의 일은 마땅히 시의(時義)를 살펴보아야 한다. 중전이 외롭고 위태로울 때에는 신하들이 중전을 붙들어 주고 보호하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하지만, 오늘날의 일은 예전과는 다르니, 춘궁(春宮)을 붙들어 주는 데에 지극함을 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공의 마음을 아는 자는 오직 박서계(朴西溪)와 윤 우상(尹右相 윤지완(尹趾完)) 및 유공 상운(柳公尙運), 오공 도일(吳公道一)뿐이었다. 공이 일찍이 서계(西溪)와 함께 사람들의 비방에 대처하는 도리를 논하였는데, 서계가 말하기를,
“지금 사대부들이 국가의 녹봉을 받고 살아 온 지가 300년이니, 사대부들이 먼저 국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각각 사리사욕만 돌아보고 근본과 대체(大體)에 대해서는 도무지 돌아보고 염려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는 국가는 사대부를 저버리지 않았으나 사대부가 국가를 저버리는 것이니, 나는 통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공이 만약 이로써 마음을 먹는다면 그 나머지 시끄러운 말에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정축년(1697, 숙종23) 봄에 김시걸(金時傑)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대신도 처음의 소견을 후회하고 있으니, 성상께서도 공론을 따르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그 잘못됨을 밝히니, 그달로 양사에서 정계하였다. 그 후 4년 뒤 가을에 중궁이 승하하니, 이로 인해 무고(巫蠱)의 옥사가 있었다. 상이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위리안치(圍籬安置)한 죄인 장희재에게 속히 국법을 시행하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죄가 이미 드러났으니, 장씨(張氏)를 자진(自盡)하게 하라.”
하였다. 최공 석정(崔公錫鼎)이 영상의 신분으로 세 번 차자를 올려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펼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장 희빈에게 다른 일이 없고 나서야 춘궁이 마침내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다가 마침내 견책을 당하여 귀양 갔다. 이여(李畬)는 이조 판서로서 최 영상과 한마음으로 희빈 장씨를 위해 강력히 간쟁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끝내 중지하였다. 얼마 후 이세백(李世白), 김창집(金昌集) 등과 함께 옥사를 조사하여 민종도(閔宗道)의 아들 민언량(閔彦良)의 결안(結案)을 아뢸 때에 ‘궁중을 정탐하여 국가를 어지럽혔다.’라는 죄목으로 공초를 받았다고 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기사년(1689, 숙종15)의 일은 갑술년(1694) 비망기에 자세히 말하였다. 민언량 등이 장희재 등과 사사로이 서로 모의하면서 반드시 임금의 뜻이라고 칭탁하였으니,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지금 계사(啓辭)를 보니 말이 분명치 않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하게 하는바, 민언량의 터무니없는 말은 털끝만큼도 근사한 점이 없고, 갑술년의 하교는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결코 장희재 등에게 지시받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도 경들이 나를 보는 것이 이와 같으니, 실로 신하와 백성들 위에 군림할 면목이 없다.”
하였다. 이세백 등이 상소하고 대죄하자, 마침내 ‘성상의 뜻을 가탁하여 사람들을 속여서 의심하고 혼란스럽게 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민언량의 결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갑술년 국옥의 추안(推案)을 찾아보고는 이르기를,
“당시의 추안은 과연 하자가 없다.”
하였다. 그다음 해 가을에 지중추부사 정재희(鄭載禧)가 상소하기를,
“지난해 장희재의 일을 신이 대신을 따라 함께 참여하여 조사했습니다. 사실을 물어 자복하지 않으면 형벌을 시행해서라도 자복을 받는 것이 옥사의 사체에 당연한 것인데, 대신이 이를 어렵게 여기고 신하들도 어렵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밖에서는 한자리에 앉아서 상의하고 입시해서는 합사(合辭)하여 아뢰었는데, 이제 남구만 한 사람은 악역(惡逆)을 비호하는 죄인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이 없는 사람이 되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습니까.”
하였으나, 이세백은 끝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 4월에 의금부에서 민암(閔黯)을 추문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았다. 공이 국청으로 인해 청대하여 아뢰기를,
“민암은 국문해야 할 듯하나 가의(賈誼)의 상소에서 말한 대신을 처우하는 도리를 따라 형신(刑訊)을 가하지 말고 참작하여 죄를 내리소서.”
하니, 상은 이를 재가하였다. 5월에 양사에서 민암을 국문할 것을 청하고, 얼마 안 있어 김인(金寅)의 추고(追告)로 인하여 공이 민암과 그의 아들 민장도(閔章道)를 국문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윤5월에 인견할 때에 장희재의 일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민암 부자는 다른 죄로써 보더라도 몸이 백 개라도 속죄하기 어렵다.”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이 지난번에 민암을 형신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니, 내 생각도 그러하다. 그를 체포하여 왔을 때부터 내 이미 마음속에 정한 바가 있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후일에 이로써 박상경(朴尙絅)이 터무니없는 말로 모함한 한 가지 단서를 삼았다. 장희재가 자백하자 민암을 사사(賜死)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장령(掌令) 심극(沈極)이 민암과 장희재를 대질시키고 엄하게 국문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 날 공이 청대할 때에 대질한 뒤에 민암을 사사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민장도는 곤장을 맞고 죽었다. 7월에 양사에서 민암을 국문하는 계사(啓辭)를 정지하니, 공이 마침내 민암의 죄는 사사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 이에 앞서 신유년(1681, 숙종7) 가을에 상이 태학생(太學生)과 팔도 유생의 합청(合請)으로 인하여 대신(大臣)에게 일일이 묻고, 그다음 해에야 비로소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두 현인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이는 그동안 여러 조정에서 미처 거행하지 못한 일이었다. 7년 뒤에 남인(南人)들이 국정을 담당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지방의 유생과 태학생들이 상소하여 마침내 두 현인을 출향(黜享)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경기도 유생들이 복향(復享)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상은 이 상소문을 예조에 내렸다. 5월에 국청에서 청대할 때에 예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특별히 처분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공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두 신하를 문묘에 종사하는 것은 누군들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 다만 사체가 중대하니, 더욱 지극히 삼가고 신중히 해야 합니다. 이미 문묘에 올려 제향했다가 다시 출향하고, 이미 출향했다가 다시 올리는데, 대신은 신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니, 우선 밖에 있는 대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널리 자문하여 처리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윤지선이 아뢰기를,
“상께서 대신에게 하문하시고 특별히 처분을 내리신다면 성상의 덕에 더욱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현신(賢臣)의 도와 덕을 내가 애당초 모른 것은 아니지만 선정(先正)을 모욕하는 무리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니, 내 항상 이것을 후회하고 한스러워한다. 만약 다시 전도될까 염려하여 즉시 거행하지 않는다면 끝내 예전(禮典)에 흠이 될 것이니, 특별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0년 뒤에 공이 자손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조정에서 벼슬했을 때의 일을 점검해 보니, 후회스러운 것이 세 가지이다. 사간으로 있을 때 조경(趙絅)을 문외출송하는 계사(啓辭)에 참여한 것이 하나요, 계해년(1683, 숙종9)에 태조(太祖)에게 시호를 가상(加上)하자는 의논을 준엄하게 배척하지 못한 것이 하나요, 갑술년(1694)에 어느 한쪽 사람이 들어오면 현신을 즉시 출향하고 어느 한쪽 사람이 들어오면 즉시 복향하는 것이 사체에 불경스럽다 하여 다소 시일을 지체할 것을 거듭 청하지 못한 것이 하나이다.”
하였다.
○ 윤5월에 공은 대제학으로 박태상(朴泰尙), 임영(林泳), 임상원(任相元), 이현석(李玄錫), 이여(李畬), 김창협(金昌協), 오도일(吳道一) 등 7명을 천거하였다. 이보다 앞서 계해년(1683)에 김만중(金萬重)을 첫 번째로 천거하였고, 그 뒤 병자년(1696)에는 최석정을 첫 번째로 천거하였다.
○ 이달 빈청 인견 때에 공이 아뢰기를,
“이번 국가에서 전에 없던 경사를 만나 신하와 백성들이 기뻐하고 있으니, 마땅히 백성들을 위로하여 기쁘게 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신은 오랫동안 향곡(鄕曲)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농사를 익히 살펴보았는데, 근년에는 흉년이 대단히 심한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백성들이 부역에 시달림이 더욱 심한 듯하며, 포흠(逋欠) 난 환자(還上)를 탕감해 주는 것이 매양 균등하지 못한 폐단이 있었습니다. 대동미는 봄과 가을 2등(等) 중에 1등을 감면해 준다면 혜택이 골고루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해청(該廳 선혜청)의 당상으로 하여금 국가 경상비의 수량을 상고한 뒤에 다시 품정(稟定)하게 하시고,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는 여러 도에는 먼저 감사로 하여금 본도의 부역 중에 대동법에 상당하는 것을 참작해서 아뢰어 처리하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21일 뒤에 인견할 때 공이 대동미 1등을 완전히 탕감해 줄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중론(衆論)이, ‘잔약한 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신역(身役)이니 조정에서 만약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면 신역을 면제해 주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신역 중에 3필과 2필을 바치는 자는 모두 1필을 줄여 주고, 1필 반을 바치는 자는 반 필을 줄여 주되 그 줄여 준 수량을 헤아려 본사(本司)에서 중외(中外)에 비축한 것을 옮겨다가 채워서 지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공이 특별히 영상에 제수되자, 승려들이 길거리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며 환호하였다. 길가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무개 공(公)이 정승이 되었으니 우리와 너희들 모두 장차 살아나게 되었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이 일로써 백성들의 심정을 알았다.
○ 이보다 앞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외척의 중신으로서 허견(許堅)과 이남(李柟)의 역모를 기찰하여 경신년(1680, 숙종6)에 큰 공훈을 세웠는데, 이윽고 과장(科場)의 익명서(匿名書)로 인하여 남인을 계속 기찰하였다. 김석주가 김익훈(金益勳)으로 하여금 어영청(御營廳)의 은자(銀子)를 많이 빌리게 하니, 김환(金煥) 등이 터무니없는 말로 속여서 큰 옥사를 일으켰다. 승지 조지겸(趙持謙)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성왕(聖王)께서 세상을 다스림은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과 같으니, 기찰은 쇠미한 세상의 일입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청성부원군이 별세한 뒤에 완녕군(完寧君) 이사명(李師命)이 청성부원군의 아들 김도연(金道淵)에게 훈련대장을 다시 제수하여 기찰하기에 편리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다시 기찰을 일으키는 것을 싫어하여 끝내 훈련대장 신여철(申汝哲)을 바꾸지 않았다. 이사명이 병조 판서가 되어 여전히 신여철을 기찰하자, 신여철은 마침내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공은 영상으로 있으면서 신 대장(申大將)에게 힘을 다해 봉직할 것을 권하고, 인하여 전조(銓曹)로 하여금 공조 판서에 제수하게 하니, 이사명은 자못 불쾌해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홍치상(洪致祥)과 함께 유언비어를 퍼뜨려 김만중(金萬重)의 일을 겪었고, 또 홍치상과 함께 장희재에게 붙어서 밀지(密旨)를 받아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기찰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장희재가 따르지 않았다. 조사석(趙師錫)이 다시 정승이 되었을 때에 지평 윤세희(尹世喜)가 이사명의 죄상을 열거하자 상이 그 허실을 공에게 물으니, 공은 대답하기를,
“신은 백관을 올리고 내치는 자리에 있으면서 이사명을 진휼청 당상과 강화도 구관당상(江華島句管堂上)에 제수하도록 아뢰었으니, 잘못된 사람을 추천하여 등용하게 한 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척에서 성상의 하교가 계시니, 또한 어찌 감히 침묵하겠습니까. 이사명은 출신이 바르지 않은데 1년 안에 재신(宰臣)에 오르고 또 추훈(追勳)에 기록되니, 비방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후에도 조심하고 삼가지 못하여 세간에 떠도는 비방이 매우 많고, 신도 그러한 말을 들었습니다. 윤세희의 상소에는 또한 신이 듣지 못한 내용이 있으니, 만약 그 허와 실을 따져 본다면 사람들의 말과 모두 같은지 또한 어찌 분명히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병인년(1686, 숙종12)에 정승 민정중(閔鼎重)이 공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떠도는 유언비어에 ‘상께서 공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소론(少論)을 하지 말라고 경계했다.’ 하였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이사명의 은밀한 행적과 군주의 명령을 사칭하고 속인 행실에 대해 말하자, 공 또한 떠도는 말이 여러 가지이지만 그 유래는 오직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사명이 마침내 기사년(1689)에 죽음을 당하였다. 그 결안의 초사(招辭)에 이르기를,
“동평군 이항의 교만하고 방자한 형적(形迹)을 보고 중신(重臣)이 된 몸으로서 탑전에서 곧바로 아뢰었더라면 남구만과 여성제(呂聖齊)가 받은 처분에 불과하였을 터인데, 혼미하고 불초해서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계책을 이루려다가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하였으니, 이는 그 또한 스스로 자신이 음험하고 더러움을 안 것이다.
공이 강교(江郊)로 나가 병을 치료할 때에 훈련대장 이의징(李義徵)이 그의 무리인 김영하(金永河)로 하여금 공을 은밀히 기찰하게 하였는데, 공은 이것을 알았으나 또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김영하가 다른 사람을 무고한 죄로 죽었다.
이때에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 등은 몰래 은자를 모으고는 “사대부들과 함께 궁중과 내통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복위를 도모한다.”라고 사칭하였다. 우상 민암(閔黯) 등이 이를 기찰하여 함이완(咸以完)과 최격(崔格)이 고발한 내용을 아뢰자, 상이 의금부에 명해서 체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하루가 지난 뒤에 국청을 열었는데, 형벌을 청하고 체포할 것을 청하여 서로 고발하고 끌어들여서 김춘택 등 수십 명이 감옥에 갇혀 가득하였으며, 한중혁 및 강만태(康晩泰), 이시회(李時檜)가 먼저 형벌을 받았다. 이에 최격, 강만태, 이시회는 모두 한중혁과 공모했다는 내용으로 결안을 작성하였고, 한중혁이 직접 쓴 서찰을 찾아내니, 민암 등은 장차 사건을 확대하여 수일 내에 서인들을 모두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상이 진노하여 비망기를 내리기를,
“공주의 집안과 한쪽 사람들이 고문받고 귀양 가는 죄과를 면할 수 있는 자가 적으니,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사대부를 어육(魚肉)으로 만들려는 정상이 지극히 통탄스럽다.”
하고, 마침내 민암 등을 멀리 쫓아내고 옛 신하를 불러다 등용하니, 이해 4월 2일 밤이었다. 한중혁 등 여러 명은 마침내 정배(定配)되고 나머지는 모두 용서받았다. 이에 앞서 이의징이 훈련도감의 은자와 돈, 쌀과 삼베로써 군관(軍官)인 윤희(尹憘)와 성호빈(成虎彬)을 매수하고 김인(金寅)과 함께 서인을 기찰하였는데, 오랜 뒤에 이의징은 그러한 사실이 없음을 알고 김인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때 이의징이 민암과 함께 막 함이완의 사건을 제기하자, 김인이 인하여 이의징 등이 무고의 옥사를 일으키고 이것이 성공하지 않으면 장차 큰일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변하였다. 공이 조정에 나와 옥사를 조사할 때에 윤희와 성호빈을 형신(刑訊)하니 모두 서인을 무함했다고 자백하였으나, 역모를 꾀한 일은 자백하지 않았고 역모를 꾀했다는 징험이 없었다. 국청에서 청대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무고에 관련된 사람들을 동시에 잡아다가 심문해야 할 듯하나 무고죄는 국문하는 본래의 취지가 아니니, 중요한 것을 놓아두고 가벼운 것을 심문함은 옥사의 사체에 어긋납니다. 김원섭(金元燮)과 민장도(閔章道)는 윤희와 성호빈에게 자백을 받은 뒤에 처리하고자 하므로 아직 체포해 올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때 문사랑(問事郞) 김시걸(金時傑)이 상소하여 지의금부사 서문중(徐文重)이 장희재를 비호하여 국옥(鞫獄)을 신속히 마치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공까지 언급하자, 상이 김시걸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대죄하였는데, 이틀 동안 상이 세 차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5월에 공이 다시 차자를 올리자, 상은 네 번째로 승지를 보냈다. 그리고 4일이 지난 뒤에 다섯 번째로 승지를 보내어 전교하기를,
“아, 사람의 마음은 여러 번 사변(事變)을 겪으면 자연 징계하고 삼가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인데, 더구나 십수 년 이래로 조정이 자주 번복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 이유를 규명해 보면 실로 내가 이치를 밝게 알지 못한 탓이다. 내가 이제 지나간 일을 깊이 뉘우치고 통렬히 자책하여 의심과 답답함을 시원하게 제거하고 힘써 성의를 다할 것이니, 경은 부디 나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또한 스스로 조심하고 힘써서 간직하고 있는 경륜을 다 펴도록 하라. 이렇게 하면 상하에 서로 수행(修行)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국가가 화평해지는 복을 이루게 될 것이니, 실로 내가 오늘날에 구구하게 기대하는 바이다. 경은 이를 깊이 생각하여 김시걸의 말을 개의치 말라.”
하니, 공은 마침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차자를 올려 김시걸의 파직을 환수해서 언로를 우대하여 포용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지난해에 공이 시골에 있을 적에 시골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기를, “밀지를 내려 공을 불렀다.” 하였고, 함이완이 끌어댄 사람들이 신문에 답변할 때에 김춘택(金春澤) 등이 사칭한 바를 대부분 인용하였다. 공이 조정에 나가기 전에 이미 이러한 말을 들었으나 살피지 못하였는데, 이달에 국청의 문안(文案)을 살펴보니, “남 정승(南政丞)에게 밀지를 내렸다.”라는 말이 있었다. 공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밀지를 내리셨는지 그 여부는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 계시니, 신이 감히 다시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남을 모함하는 수단이 본래 이와 같다.”
하였다. 이에 공이 김춘택 등을 통렬히 다스릴 것을 청하자, 김춘택 등이 매우 원망하였다. 윤5월에 김춘택 등이 시골의 유생을 사주하여 장희재의 일을 물고 늘어졌다. 이때에 노론은 김춘택을 비호하면서 권력을 독점하기에 급급하여 온 세상을 속이고 유혹하였다. 그리하여 혹자는 이르기를, “노론에게 원한을 맺으면 크게 해로움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김춘택의 아비 김진귀(金鎭龜)를 대장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공은 끝내 굽히지 않고 이세선(李世選)을 어영대장으로 삼고 이기하(李基夏)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공이 편지로 박 좌상과 윤 우상에게 묻자, 모두 공이 훈척(勳戚)에게 대장의 직임을 맡기지 않은 것에 탄복하였다. 우상이 조정에 나아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함이완의 옥사는 성상의 하교를 살펴보건대 사대부를 어육으로 만들려 했던 계책은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그러나 중궁을 복위한 것은 상께서 잘못을 깨달으시어 상께서 직접 처분을 내리신 것인데, 저들이 어찌 감히 도모한단 말입니까. 후일에 이들을 조사하여 다스리는 조처가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참으로 이러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조사하여 다스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당시의 의금부 당상을 추방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난처하다.”
하였다. 우상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 과연 사대부 중에 체포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당시에 체포할 것을 미처 청하지 못한 자도 있었고, 혹은 체포할 것을 청하였으나 미처 가두지 못한 자도 있었는데, 바로 지금 공경(公卿)의 이름이 대부분 그 가운데 들어 있다. ‘반드시 세 공주(公主)의 집안사람을 죽인 뒤에야 남인이 무사할 수 있다.’라는 것이 저들의 말이니, 이는 모두 민암 등이 죽어도 남는 죄가 있는 부분이다.”
하였다. 6월에 박 좌상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기사년(1689, 숙종15)의 일은 전하께서 진실로 세자를 우려하심이 깊고 간절해서였고, 금일의 일은 중궁의 원통함을 특별히 살피신 것이니, 성상의 독단에서 나온 것임이 어찌 명백하고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침내 여염에서 금화(金貨)를 모았다는 말이 퍼져 사실과 다르게 전해져서 오랫동안 그치지 않으므로 옥사의 발단이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출처를 규명해 보면 똑같이 두 당이 번갈아 뒤바뀌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와전된 말을 일일이 조사하여 대체를 손상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론 중에 죄과(罪科)가 저절로 드러나는 자들을 또한 모두 죄의 경중에 따라 배척하여 영원히 그 폐해를 끊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달에 공은 함이완과 김인의 죄가 똑같이 죽일 만하다 하여 국청에서 토론하였는데, 의금부 당상과 낭관이 이견이 없었다. 공은 인하여 차자를 올려 강만태(康晩泰) 등을 주벌할 것을 청하였는데, 차자를 정서(淨書)하여 미처 올리기 전에 다시 지방 유생 강민저(姜敏著)의 참소 때문에 물러갔다. 이때 헌납 윤성교(尹誠敎)가 상소하기를,
“바르지 않은 무리들이 명분과 의리를 가탁하나 웬 강민저라는 작자가 올린 말의 음험함이 박상경(朴尙絅)에 비하여 자못 심합니다. 아, 이번 일은 유래가 있습니다. 근년 이래로 세교(世敎)가 침체되어 선비가 선비답지 못해서 간사하고 편벽된 마음과 더러운 행실이 실로 청의(淸議)와 공론(公論)에 용납되지 못하였습니다. 이를 크게 두려워하여 오직 대신을 배격하고 청류(淸流)를 배척하여 제거하기만을 밤낮으로 궁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근에 전해지는 말이 통탄스럽고 해괴하지 않음이 없으니, 지금 성상께서 만약 엄하게 방비를 가하여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국가의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의 기틀이 반드시 여기에서 판가름 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기를,
“논한 바가 매우 격절(激切)하니, 내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이때 좌상이 옥사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추국(推鞫)을 굳이 사양하자, 상이 전교하기를,
“의계(議啓)는 영상이 올라오기를 기다린 뒤에 거행하라.”
하였다. 7월에 공이 동문 밖에서 좌상을 만나 차자의 원본을 먼저 보여 주자, 좌상이 크게 놀라 낯빛이 변하며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장차 김춘택을 어떠한 처지에 두려 하십니까?”
하니, 공은 이르기를,
“김춘택의 죄는 한중혁과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하지만 한중혁은 자신이 직접 쓴 서찰이 발각되었고 김춘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함께 처형하기를 청하지 못하고 있으나 어찌 김춘택을 애석하게 여겨 도리어 한중혁에게 공개 처형을 시행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하니, 좌상이 망연자실해하면서 돌아갔다. 다음 날 공이 차자를 소매 속에 넣고 대궐에 나아가서 인견할 때에 아뢰기를,
“국옥(鞫獄)을 거행한 지 이제 5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의계할 때에 올리는 몇 줄의 문자로는 그 곡절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으니, 우선 신의 얕은 생각을 탑전에서 다 아뢴 뒤에 물러나 의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앞서 김인(金寅)의 추고(追告)로 인하여 이의징(李義徵)과 이현일(李玄逸)을 추국하였다. 윤5월에 청대할 적에 공이, 이의징이 ‘금과 비단을 나누어 주어 기찰한 일’을 형추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따랐는데, 이의징이 자복하지 않았다. 이때에 공이 아뢰기를,
“김인은 말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일정치 않습니다. 추고하기도 하고 스스로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것들이 당초에 무고였으며, 또 윤희(尹憘)와 성호빈(成虎彬)이 잇따라 죽어서 다시 조사하여 실정을 찾아낼 방법이 없으므로 오직 이미 드러난 정상(情狀)과 자취를 가지고 의논하겠습니다. 당(唐)나라 신하 육지(陸贄)는 정상과 자취에 따라 형벌을 주어야 한다는 의논에서 이르기를, ‘자취는 꾸짖을 만하나 정상이 가련하면 성왕(聖王)은 이를 꾸짖지 않았고, 정상은 꾸짖을 만하나 자취가 용서할 만하면 성왕은 이를 꾸짖지 않았다. 오직 정상이 드러나고 자취가 나타나서 자백을 하고 사리가 막혀 어찌할 도리가 없고 나서야 형벌을 가한다.’ 하였으니, 이는 옛날 어진 신하가 군주에게 아뢴 훌륭한 말씀입니다. 이의징의 정상은 본래 살려 줄 수 있는 방도가 없으나 역모를 꾀한 자취는 분명히 지적할 만한 것이 없으며, 이현일은 중궁(中宮)이 사제(私第)에 돌아가 계실 적에 올린 상소에 패역(悖逆)한 말을 하여 목내선(睦來善)의 ‘불공경(不恭敬)’이란 말과 같으니, 자취는 잡아낼 만한 것이 있으나 정상은 혹 용서해 줄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청의 죄인은 반드시 문안(文案)에 올린 것을 가지고 심문하여 자복을 받아야 하나 잡아낼 만한 자취가 없으니, 정상이 용서해 주기 어렵다 하여 한결같이 형신(刑訊)한다면 또한 옥사를 신중히 처리하는 도리가 아니다. 대신의 말이 옳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이현일의 본뜻은 희빈 장씨를 예우하고자 한 것이나 말을 전혀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나 목내선을 이미 참작하여 죄를 정했으니, 이현일의 죄가 반드시 그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시도(李時棹)가 한중혁 등의 일을 고발하고자 하였는데, 함이완이 먼저 고발하였기 때문에 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사변이 일어난 뒤에 한쪽 편 사람들을 많이 고발하였는데, 그 말을 신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현재 옥에 갇혀 있는 자는 심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체포하기를 청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시도는 이랬다저랬다 하여 더욱 형편없으니, 결코 살려 줄 수 있는 방도가 없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함이완이 이미 서인(西人)의 사대부를 다 죽이고자 한 죄로 죽음을 당하였는데, 김인(金寅)의 의도도 남인의 사대부를 다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김인이 고발한 옥사가 사실이 아니라면 김인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인 또한 살려 주는 의논에 부칠 수가 없다.”
하였다. 공이 마침내 수차(袖箚)를 올려 아뢰기를,
“김석주(金錫胄)가 외척으로 중앙의 병권(兵權)을 맡는 자리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기찰을 행하여 종묘사직이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빠졌다가 다시 편안해졌습니다. 그러나 이 기찰은 매우 부득이한 일이었으니 또다시 행해서는 안 되는데, 경신년(1680, 숙종6) 이후에도 이러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 기찰로 인하여 한두 명의 흉악한 무리들이 숨긴 실상을 찾아냈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의심하게 하고 혼란하게 하며 세도(世道)를 훼손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은 비록 국가에 충성하기를 원했다 해도 그 일은 진실로 공론의 배척을 당해 마땅합니다. 그러다가 기사환국(己巳換局) 때에 그 당시 국정을 담당한 자가 기찰이라는 행위는 전인(前人)의 극악한 대죄라고 주장하면서 지나친 형벌을 적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민암(閔黯)은 또 함이완을 유인하고 위협하여 온 세상 사람의 절반을 그물과 덫 속으로 모두 몰아넣으려 했습니다. 다행히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아져서 민암이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사형을 당하였으나 이러한 길이 한 번 열린 뒤로는 잘못된 일이 계속 잇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그칠 때가 없으니, 만약 이러한 풍습을 통렬히 끊지 않는다면 나라가 반드시 구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강만태(康晩泰), 최격(崔格), 이시회(李時檜), 한중혁(韓重爀) 등 네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처분해서 온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들의 실정과 범죄의 경중을 분명히 알게 한 뒤에야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풀어 주고 사람들의 심정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강만태, 최격, 이시회는 모두 중전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것으로 결안(結案)을 작성하였습니다. 도모했다는 것은 장차 어디에서 도모하고자 했던 것입니까. 하찮고 무뢰한 천한 선비로서 마침내 감히 이러한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국가의 형세가 어찌 나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이 어찌 동요되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강만태 등의 결안에 이른 바 ‘임대(任臺)와 한구(韓構)가 해상(海上)의 진인(眞人)을 맞이해 오기로 의논했다.’라는 말은 문목(問目) 가운데에서 물은 것이 아닌데도 제 스스로 답변하였으니, 만약 이 일이 사실이 아니라면 남을 대역죄로 모함한 죄를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한중혁으로 말하면 그가 직접 써서 보낸 서찰이 있으니, 굳이 자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결단할 수가 있습니다. 옥관(獄官)은 바뀌었으나 조정은 본래 한 조정입니다. 이와 같은 죄를 지었는데도 다만 유배하는 것에 그친다면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이 어찌 더욱 심해지지 않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전하께서 오늘날 내리신 조처는 천고에 일찍이 없었던 것입니다. 억조 백성들이 기뻐 날뛰는 이유는 다만 중전이 복위된 것을 경사로 여길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행하시는 일이 광명하고 결단성이 있어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진 것처럼 털끝만큼도 가려짐이 없음을 더더욱 큰 경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과연 강만태 등의 말과 같다면 이는 중전의 복위가 강만태 등에게 다소나마 도움을 받은 것이 되니, 성상의 덕에 수치가 되고 누가 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이르기를, ‘강만태 등은 함이완이 고발하고 민암이 죽이고자 한 자이다. 이제 함이완과 민암이 극형을 받게 되었는데, 강만태 등도 또한 국법을 받음을 면치 못한다면 이는 마치 왕세충(王世充)과 두건덕(竇建德)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는 것과 같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옳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민암이 강만태 등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중전을 복위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해롭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강만태 등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저들이 중전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말이 국가에 치욕이 되고 성상의 몸에 모함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앞뒤의 죄목이 서로 비슷한 듯하나 법을 적용하는 뜻은 실로 하늘과 땅처럼 크게 다르니, 어떻게 앞사람의 소행을 답습했다고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만약 그때 체포했던 사람들을 함께 잡아다가 다시 신문하여 끝까지 캐묻는다면 이는 참으로 민암이 한 일이니 결코 옳지 않습니다. 만약 이 네 명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이는 극악한 역적들을 엄호하고 숨겨 주며 나쁜 계획을 세운 자들을 용납하고 비호해 주는 것이니, 현재 온 나라 백성들이 비난하는 말과 후세의 공론이 들고일어남을 끝내 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에 대처하는 방도는 먼저 강만태를 잡아다가 그가 흉악한 말을 했는지 그 사실 여부를 국문한 다음 국법을 명쾌하게 시행하고, 최격과 이시회에 대해서도 성상을 모함한 죄를 바로잡으며, 한중혁에 대해서는 그가 직접 써서 보낸 간찰을 가지고 죄를 논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을 결코 그만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조정의 조처가 비로소 명백하고 정대해질 것입니다. 이후로는 몰래 기찰한다는 말과 편법을 동원했다는 등의 의심이 영원히 종식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겉과 속이 서로 통하고 풍습이 크게 변해서 깨끗하고 밝은 정치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은 이미 국가와 큰 관계가 있으니, 그렇다면 나머지 일은 진실로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말하면, 그 이름이 죄수들의 공초(供招)에 오르내린 자가 매우 많습니다. 이처럼 통렬하게 분변하는 한 번의 조처가 있지 않으면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신하들이 모두 장차 이러한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가운데 의심을 받고 치욕을 당해서 끝내 스스로 해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으로 말하더라도 신의 이름이 또한 밀지를 받았다는 내용에 들어가 있으며, 신의 서종제(庶從弟)도 은을 모았다는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이 이러한 처지를 당해서 마침내 명백히 진달하여 분명한 처분을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장차 신더러 자신을 은폐하고 감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이 비록 심장을 도려내고 간을 가른다 한들 어떻게 추악함과 치욕을 씻을 수 있겠습니까. 먼지와 같이 보잘것없는 신도 오히려 혐의를 멀리하고 스스로 깨끗이 하고자 함이 이와 같은데, 더구나 당당하신 성상께서는 혁혁하게 위에 계시면서 어찌 이것을 가리고 숨겨서 애매모호하게 한다는 비난을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처음 명령을 받고 옥사를 국문할 때부터 이러한 생각을 품은 지 오래되었는데, 김인(金寅)이 고발한 옥사를 미처 끝내지 못했으므로 지체하여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감히 외람되이 어리석고 망녕된 소견을 아뢰니,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시고 굽어 살펴 주소서.”
하였다. 상이 다 보고 좋게 여겨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옳으니, 지금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난번에 우상도 이러한 말을 하였는데 내가 불가하다고 답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진실로 옳았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하였다. 이달에 이의징(李義徵)을 절도(絶島)에 위리안치하고, 이현일(李玄逸)을 먼 변방에 위리안치하였으며, 김인은 곤장을 맞고 죽었다. 9월에 강만태를 국문하여 자백을 받은 다음 사형을 집행하였고, 최격과 이시회는 의금부의 신문에 답변한 말이 종잡을 수가 없어 의금부에서 형추(刑推)할 것을 청하자, 상은 엄히 형신하라고 명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이시회는 형 이시도(李時棹)와 함께 영남 지방의 무인(武人)이었는데, 이시회는 수년 전에 장희재의 계집종의 남편이 되었고, 이시도는 다른 일에 연루되어 정배되었다. 한중혁(韓重爀)이라는 자는 한구(韓構)의 아들이다. 한구는 예전에 승지를 지냈는바,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의 친한 문객이었다. 한중혁이 이시회를 위하여 대필해서 그 형인 이시도에게 준 편지에는,
“비인(庇仁)의 승지 댁에서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왔으므로 현재 서울에 이르러서 한 생원(韓生員 한중혁)과 서로 의논한 일이 많았는데, 허다한 묘리가 있습니다.”
하였고, 이시도가 답한 편지에는,
“한 생원에게 은자 100냥을 잘 봉함하여 내려 보내니, 성동격서(聲東擊西)할 계획이다. 이러한 뜻을 한 생원과 함께 살펴보고 세밀히 생각한 다음 승지 영감께 아뢰고 다시 기별해 주면 좋겠다.”
하였다. 한중혁이 이시도에게 부친 편지에는,
“영감이 오랫동안 귀양 가 있는 것은 실로 우리들의 불행입니다. 올가을 이후로 한 가지 좋은 묘안을 얻었으나 상의할 길이 없으므로 영감의 계씨(季氏 이시회)와 함께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매우 기묘한 좋은 소식이 있으니, 비단 영감이 석방될 날이 머지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오래지 않아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허무맹랑하지 않으니, 영감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금부에서 한중혁을 추문(推問)하였는데, 한중혁은 ‘좋은 묘안’이라고 한 말은 제방을 쌓는 것으로 돌리고, ‘매우 기묘한 좋은 소식’이라고 한 말은 귀양 간 이시도의 방면(放免)을 도모한 것으로 돌리고, “우리들도 오래지 않아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이시도를 위로한 것으로 돌리며, “은자를 모았다.”라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돌렸다. 의금부에서는 곧바로 상에게 재결할 것을 청하여 마침내 한중혁을 먼 변방에 정배하는 것으로 조율(照律)하였고, 또 죄가 무거운데 형률이 너무 가볍다 하여 다시 절도(絶島)에 정배할 것을 청하였다. 10월에 공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한중혁이 거짓말을 하며 버티는 상황은 분명하여 은폐하기가 어려우니, 형추를 계청해야 하는데도 의금부에서는 그들의 거짓 공초를 따라 지레 먼저 형률을 적용하였으니, 이는 옥사의 사체에 있어서 실로 온당치 못합니다. 지금 신이 한중혁 등을 다스릴 것을 청하는 것은 본래 밝으신 성상을 위하여 중외의 의혹을 풀어 주고자 해서이고, 중궁을 위하여 복위(復位)의 정대(正大)함을 밝히고자 해서이며, 조정의 사대부들을 위하여 천고의 수치와 치욕을 씻어 주고자 해서이니, 이는 옛사람의 이른바 ‘조정을 해와 달 위에 높이 올려놓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서 이들의 죄를 다스리는 것이 다만 이에 그칠 뿐이라면 의심을 풀어 주기는커녕 도리어 의심을 불러일으킬까 매우 염려되니, 애당초 죄를 다스리지 않은 것만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다시 해부(該府)로 하여금 한중혁을 추문해서 실정을 모두 캐낸 다음 조처하게 하소서. 신은 또 삼가 생각건대 한중혁은 바로 젖비린내 나는 어리석은 놈이나, 한구로 말하면 나이도 많고 관직도 낮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시도가 자기 아우에게 답한 편지를 가지고 살펴보면, 그 모의를 주동한 자가 실로 한구입니다. 무릇 이러한 부류를 만약 용서해 준다면 이후로 뒤이어 일어나는 자들을 어떻게 징계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천하와 후세에 변명할 말이 있겠습니까. 한구가 강만태에게 모함을 당한 것은 비록 깨끗이 밝혀졌으나 그 자식과 함께 불순한 무리들을 불러 모아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을 도모한 죄는 결코 피할 수가 없으니, 그 죄는 본래 한중혁과 마찬가지로 체포하여 심문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만일 부자간에 함께 모의한 일에 대해 서로 힐문하는 것이 사체에 손상됨이 있다고 여긴다면, 또한 한구를 먼 변방으로 유배 보내어 깨끗한 조정을 의심하게 하고 어지럽히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분명한 결단을 명쾌하게 내리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난날의 처분은 내 마음으로 결단하여 명백하고 정대하니, 비록 불순한 무리들이 임금을 모함하는 말이 있다 하더라도 실로 내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 다만 당당한 천승지국(千乘之國)의 지존(至尊)에 대해 마침내 감히 의논할 수 없는 일을 도모하고 의논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가슴이 아프다. 차자에서 아뢴 내용은 말뜻이 분명하고 바르니,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탄복한다. 한중혁은 의금부로 하여금 엄히 국문해서 실정을 캐내어 조처하게 할 것이요, 한구는 먼 변방으로 유배 보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날 공이 판의금부사 신익상(申翼相)을 불러 그의 느슨한 조처를 책망하였다.
○ 이보다 먼저 무진년(1688, 숙종14) 봄에 신여철(申汝哲)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공사채(公私債)를 정봉(停捧)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군수(軍需)의 부채(負債)는 한 사람이 1000여 냥을 진 자가 있으니, 이는 봉입(捧入)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공은 봉입하는 양수(兩數)를 정하여 많은 자는 그대로 바치고 적은 자는 정봉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현재 군문(軍門)에서 각각 돈을 꾸어 주어 이자를 불리는 일을 하고 있는데, 중외의 무뢰배들이 목전의 이익만을 탐하여 꾸어 달라고 청한 다음 손에 들어오면 즉시 탕진하며, 이 가운데에는 또한 도망하거나 죽은 자가 많기 때문에 재앙이 친족에게까지 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부채 때문에 혹은 10여 명이 파산하는 데에 이르러서 구류당하고 형구를 차며 매를 맞는 일이 끊임없이 만연하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지금부터는 각 군문에서 돈을 꾸어 주는 것을 일절 통렬히 단절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은 옥안(獄案)에 군문의 은화를 빌린 자가 많음을 징계해서 엄단할 것을 거듭 청하고, 관장하는 여러 관사에서 일절 첩문(帖文)을 발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해 여름부터 공이 훈련도감의 도제조가 된 지 8년이 되었는데, 공의 속내를 알고자 하는 자가 있어 몰래 살펴보니, 공은 오직 서 말의 숯을 훈련도감에서 가져다 썼을 뿐이었다. 인현왕후의 복위를 위해 은자를 모았던 사람들의 명단에 이름이 오른 자 중에 공의 서종제(庶從第)가 있으니, 전 첨사(僉使) 남종만(南從萬)이다. 그가 이해 겨울에 사천 현감(泗川縣監)이 되었는데, 공이 입대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였다. 공은 말세에 편비(偏裨)의 무리들이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라서 불길한 일이 많다 하여 측실의 아들은 활을 잡지 말고 남의 막하(幕下)가 되지 말 것을 유훈(遺訓)으로 내렸다.
○ 이보다 앞서 인조 병자년(1636, 인조14)에 유신(儒臣)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옛 제도 가운데 변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과거제도가 그중에 으뜸입니다. 과거제도 중에 가장 무리가 있는 것은 바로 알성시(謁聖試)와 정시(庭試)입니다. 창방(唱榜)하기에 급급하여 수천여 폭(幅)의 글을 모두 한 시각 안에 평점하므로 잘한 자가 낙방하고 졸렬한 자가 도리어 등과(登科)합니다. 이에 마지못해 마침내 천명(天命)의 탓으로 돌리니, 아, 국가에서 인재를 취하는 것이 어찌 천명이란 말입니까. 만약 이것을 설치한 지가 오래되어 혁파하기 어렵다고 여긴다면 굳이 그날 창방하지 말고 성상이 환궁하셔서 고시관에게 명하여 두세 번 자세히 상고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여러 날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얻는다면 오히려 지난날보다 나을 것이니, 신이 이른 바 과거제도를 변경해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이때 병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근래의 정시와 알성시에서 서인(書人)의 일 때문에 재상이 심지어 자제를 위해 서리(書吏)를 다투기까지 한다 하니, 지금부터 엄금하소서.”
하고, 공은 아뢰기를,
“명륜당(明倫堂)에서 알성(謁聖)하고 시사(試士)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祖宗朝)에서 정한 규칙입니다. 국가의 태평함이 명종(明宗)과 선조(宣祖) 두 왕조에 이르러 가장 지극하였으니, 유생(儒生) 수가 많은 상황이 반드시 오늘날보다 못하지 않았을 것이나 일찍이 장소가 좁아서 수용하기 어려운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0여 년 전만 해도 장소가 좁은 폐단이 없었는데 근래에는 명륜당에서부터 서쪽 편의 반수당(泮水堂)까지 통틀어 모두 시소(試所)의 극위(棘圍) 안에 들어갔으나 오히려 부족합니다. 병인년(1686, 숙종12)에 고(故)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의 종자(從子)가 과장(科場)에서 밟혀 죽어서 선비를 선발하지 못하고 임금께서 즉시 환궁하셨습니다. 정시(庭試)에는 으레 인정전(仁政殿)에서 시행하였는데, 어찌 일찍이 수용하기 어려운 때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년(1684) 정시에는 병조의 앞뜰까지 통하게 하고도 오히려 부족할까 염려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도성의 인사 중에 세력이 있는 자들이 대부분 서인(書人), 협서인(挾書人), 음식과 좌석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데리고 오며, 심한 경우에는 혹 대술(代述)하는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그러므로 한 명의 사인(士人)에 수행하는 자가 십수 명이나 되며 아무리 피폐한 자라도 이것을 본받아 풍속을 이루니, 이는 국가에 기강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명령을 내리면서 금지하지 못한다면 도리어 아랫사람들에게 경시당할 것이니, 매우 우려할 만합니다.
또 임금이 거둥할 때에 좌우에 군대를 두어 호위함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인데, 어두운 밤중에 대가(大駕)가 동가(動駕)하실 때에 수만 명의 잡인들이 앞뒤로 몰려들어 북적거리니, 지극히 보기 미안합니다. 또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대궐 문을 열고, 조사(朝士)의 숫자를 정하여 수행하게 함은 모두 궁금(宮禁)을 엄격히 단속하여 비상사태를 염려해서인데, 정시(庭試)에는 어두운 밤중에 무수히 많은 잡인들이 떠들썩하게 몰려와서 내정(內庭)과 외정(外庭)을 모두 꽉 채우니, 어찌 더욱 미안하지 않겠습니다.
또 과거를 보는 선비의 숫자가 많고 수행하는 자들을 이와 같이 구비하기 때문에 제출된 시권(試券)이 수천 장에 이릅니다. 그리하여 고시(考試)할 때에 시각이 촉박하고 창방하기에 급하여, 처음에는 잘 지은 것도 빠뜨리고 끝에 가서는 형편없는 것이라도 숫자를 채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옛날에 제왕이 시학(視學)할 때에는 사람들이 교문(橋門)을 에워싸고 경전(經典)을 잡고 논란하는 것을 구경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선비들이 오직 과거만을 위주로 하고 국가에서도 선비를 선발하는 것만 중요하게 여겨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구차하게 충원하기를 이와 같이 합니다. 이 때문에 동표(東表)에서 널리 모여들어 글을 짓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면서 과거에 급제하는 자가 대다수이니, 이는 모두 오늘날 치료하기 어려운 고질병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정시(庭試)와 알성시(謁聖試), 무과(武科)는 으레 초시(初試)를 거행하고, 문과 또한 규례를 따라서 초시에 6, 7백 명을 뽑는다면 혼잡한 폐단을 없앨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전에 없던 규정이라서 새로 만들기가 어렵고, 또 세상 사람들의 의논에 자못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례(常例)를 따라서 신칙한다면 이것을 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 또한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겨 오직 잡인과 서인(書人)을 엄금하도록 명하였다. 5년 뒤에 좌상 최석정(崔錫鼎)이 선거(選擧)를 변통할 것을 의논하자, 공이 답하기를,
“국가가 국가답게 되는 것은 인재를 얻는 데에 달려 있고, 인재를 얻는 방도는 다만 과거(科擧)에 달려 있으니, 그렇다면 과거는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첫 번째 급선무입니다. 이는 다른 일이 각각 한때의 득실이 있는 것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문과의 제술(製述)은 책(策)ㆍ논(論)을 많이 뽑고 정시와 알성시는 반드시 초시를 보여서 고시(考試)할 때에 혼란한 지경에 이르지 않게 한다면 선발하는 일이 반드시 정밀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 과제(科製)는 대부분 표문(表文)ㆍ전문(箋文)을 사용하니, 실로 남의 글을 표절하여 요행으로 급제하는 문을 열어 놓은 것입니다. 또 정시와 알성시에는 4, 5천 장의 시권(試券)을 한나절이나 하룻밤 사이에 고과(考課)하여 차등을 매기게 합니다. 이것이 반드시 국가를 위해 인물을 얻고자 하는 뜻인지, 아니면 허다한 사람들 중에 운수가 좋은 자를 뽑아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을 변경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그 중요성이 또한 강경(講經)하는 규정을 개정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 이보다 먼저 무진년(1688, 숙종14)에 조정에서 강상 죄인(綱常罪人)으로 인하여 읍호(邑號)를 고치고 수령을 파직한 일이 있었다. 공이 차자를 써서 이것이 올바른 국법이 아님을 밝히고자 하였는데, 마침 죄를 입고 도성을 떠나가서 미처 올리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주인을 죽인 죄인으로 인하여 은진현(恩津縣)의 읍호를 고치고 현감을 파직하는 일이 있으므로 공이 마침내 전에 올리려던 차자를 기록하여 올리기를,
“지방의 주현(州縣)에 악역(惡逆)을 저지른 죄인이 있으면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는데, 이는 중국의 역대 율령(律令)에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대전속록(大典續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도 모두 이러한 법조문이 없습니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고을의 연혁(沿革)을 보건대 고을 백성들이 큰 공로가 있음으로 인하여 읍호를 승격시키기도 하고, 죄가 있음으로 인하여 읍호를 고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때의 특명이고 일정한 격례(格例)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개국(開國) 초기의 일은 비록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중종대왕 계묘년(1543, 중종38)에 안성(安城)에 부모를 살해한 자식이 있었는데, 사헌부에서 고을의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할 것을 계청(啓請)하자, 사간원에서는 이렇게 하면 너무 소란스럽다 하여 그대로 둘 것을 청하였습니다. 상께서 홍문관에 명하여 고사(故事)를 찾아내게 하시자, 홍문관에서 아뢰기를,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20년(646)에 대주(戴州)의 백성 중에 십악(十惡)을 범한 자가 있었습니다. 유사(有司)가 교화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하여 자사(刺史) 가숭(賈崇)을 탄핵하자, 태종이 이르기를, 「요(堯) 임금은 큰 성인이었고 유하혜(柳下惠)는 큰 현인이었으나 요 임금의 아들 단주(丹朱)가 불초하였고 유하혜의 아우 도척(盜跖)은 극악무도하였다. 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이 있고 부자간과 형제간이었는데도 오히려 훈도(薰陶)하여 변화시켜서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게 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자사가 고을 백성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만약 이 때문에 폄하하여 강등시킨다면 혹 서로 이러한 죄를 은폐하여 죄인을 놓치게 될 것이니, 다만 규찰을 분명히 가하게 하면 간악한 자들을 거의 숙청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중종대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 뒤 선조(宣祖) 때에 안동(安東)에 또 시역(弑逆)의 변고가 있었는데, 대간(臺諫)이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형전(刑典)을 거행하여 경계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때 연신(筵臣) 유희춘(柳希春)이 중종조의 일을 인용하여 그 불가함을 강력히 간쟁하였는바, 이는 유희춘이 사사로이 보관한 일기(日記)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어떠한 논의로 인해 마침내 이것이 준례로 행하는 정식(定式)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왕조 계묘년(1663, 현종4)에 이르러 형관(刑官)과 대신(大臣)이 또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것은 본래 법전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요, 또 이를 죄인의 태생지(胎生地)에 시행하는 것은 더더욱 부당하다.’라고 하여, 마침내 거주하는 고을에 시행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여쭌 것은 단지 강상 죄인의 경우였고 역적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경신년(1680, 숙종6)에 역모의 옥사가 있었을 때에는 읍호를 강등하고 수령을 파직하는 형전을 모두 태생한 고을에 시행했다 합니다. 일이 근거가 없고 일시적으로 품정(稟定)한 데에 뒤섞여 나와 전후가 모순되는데도 이를 바로잡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주(州)와 부(府), 군(郡)은 모두 강등하여 현으로 만들 수 있으나 현은 강등할 명칭이 없으므로 마침내 그 고을을 없애고 이웃 고을에 소속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주현(主縣)의 관리가 그 고을을 마치 자신에게 딸린 하급 관청처럼 대하기 때문에 관속들이 모두 도망하여 흩어지고 인민들이 원망하며 한탄하여 몇 년 뒤에는 곧 황폐한 고을이 되니, 또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악역(惡逆)의 변고에 대해 옛사람들이 대처한 방법을 경서(經書)와 사책(史策)에 실린 것을 가지고 말씀드린다면 《예기(禮記)》의 주루(邾婁)나라 정공(定公)의 말에 ‘죄인의 집을 부수고 그 집터를 깊게 파서 못을 만들며, 군주가 그달이 지난 뒤에야 술잔을 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세에 와서는 혹 그 성(城)의 모퉁이를 허물어서 치욕을 보일 뿐이었습니다. 읍호를 강등하고 관원을 파직하는 것으로 말하면 비단 고금의 법조문에 없을 뿐만 아니라, 옛 역사책의 전고(典故)와 조종조(祖宗朝)의 유사(遺事), 선현들이 논한 바에 모두 불가하다 하였으니, 이것은 오늘날 반드시 따라야 할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만약 인륜의 큰 변고이니 보통 일로 보아 넘겨서 경계하고 징계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비록 그 고을의 수령은 처벌하지 않더라도 관장이 현령인 고을 이상에서는 모두 호칭을 강등하여 현감으로 삼고, 관장이 현감인 고을의 경우는 예(禮)가 법제에서 다한다는 뜻을 따라 현감은 그대로 두되 다만 여러 현의 아래에 반차(班次)를 정하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또한 본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히 수치를 알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특별히 굽어 살피시고 해조(該曹)에 내려서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다. 상이 마침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박 좌상은 서로 전수해 오는 것은 반드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하여 주저하였으나 상이 공의 말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 10월에 빈청 인견 때에 장령 김호(金灝)가 기사년(1689, 숙종15)에 내리신 성상의 하교를 삭제하고 고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따랐다. 공이 아뢰기를,
“기사년의 일은 그 당시로 말한다면 진실로 성덕(聖德)에 누가 되지만, 오늘날 과실을 고치신 뒤로 말한다면 성상의 덕이 해와 달처럼 다시 밝아진 것을 더욱 우러러 공경하고 있으니, 본래 삭제하고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명령이 내렸을 때에 자구(字句)가 온당치 못한 부분을 고치기를 청하는 경우는 혹 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을 여러 해가 지난 뒤에 모두 삭제하고 고칠 것을 청하는 것은 진실로 지극히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다. 박세채(朴世采)가 아뢰기를,
“무릇 지난날의 일에 대해 모두 그 사실을 삭제한다면 천고(千古)의 사관이 애당초 어찌 일을 기록하는 규정이 있었겠습니까. 예로부터 인군 중에 과실을 고친 자는 있지만 과실을 엄폐한 자는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대신이 아뢴 것이 옳다. 대간이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다.”
하고, 마침내 고치지 말도록 명하였다.
○ 이달에 공은 별시(別試) 전시(殿試)의 독권관(讀券官)에 차임되어 이광좌(李光佐) 등을 뽑았다.
○ 처음 조종조(祖宗朝)에 의정부를 설치할 적에 고려의 첨의부(僉議府)와 같이 하여 삼공(三公)이 날마다 의정부에 앉아서 백관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세조가 그 권한이 너무 크다 하여 파하였다. 그리하여 육조(六曹)가 각각 그 임무를 전담해서 대신과 의논해야 하는 공사(公事)가 아니면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이라 해도 서로 묻는 일이 없었다. 명종(明宗) 을묘년(1555, 명종10)에 이르러서 왜구가 호남 지방을 침략하자 조정에서 비변사(備邊司)를 설치하였다. 이후로 마침내 공경(公卿)과 재신(宰臣)들로 하여금 열흘에 한 번씩 비변사에 모여서 군국의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선조조(宣祖朝)에 유성룡(柳成龍)이 의정부에서 서사(署事)하던 법을 정비하여 대신의 체통을 보전할 것을 청하였으며, 인조 정묘년(1627, 인조5)에 영상 신흠(申欽)이, 삼공이 5일마다 의정부에 들어가 육조에서 아뢴 글을 열람하여 그 편리 여부를 아뢸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정축년(1637)에 최명길(崔鳴吉)이 정승이 되어 비변사의 칭호를 바꾸어서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중서성(中書省)과 추밀원(樞密院)과 같게 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삼대(三代) 시대의 관제(官制)는 아득히 먼 시대의 일이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니, 서사(署事)하는 규정은 참으로 갑자기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소 참작하여 조정한다면 권한이 무겁다는 혐의가 없을 것이고 또 지위가 가볍다는 한탄도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에 이견이 많아 시행되지 못하였다. 숙종 무진년(1688, 숙종14)에 이조 판서 박세채(朴世采)가 비변사의 칭호가 바르지 못함을 아뢰고 의정부의 옛 제도를 회복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좌상(左相 최석정)에게 거듭 청하여 그 상소문을 비변사에 내렸다. 11월에 계복(啓覆)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중국과 우리나라는 중엽 이후로 풍속이 순박하지 못합니다. 명나라의 제도를 가지고 살펴보면 처음에 승상부(丞相府)를 설치하여 백관을 총괄하였습니다. 그 후 대신들이 죄를 지어 죽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승상을 파하고 오로지 육부(六部)의 상서(尙書)에게 맡겨서 내각(內閣)의 태학사(太學士)와 함께 조정의 정사에 참여하여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의정부의 옛 제도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시행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어진 정승을 가려 맡겨서 행하시는 데에 달려 있으니, 신들은 감히 행할 것을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조 때에도 허락하지 않았으니, 짧은 시간에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조용히 의논하여 정해야 한다.”
하였다. 4년 뒤 봄에 비변사에 명하여 5일마다 한 번씩 회의하게 하였다. 그다음 해에 좌상 최석정이 비변사를 중서성(中書省)으로 고칠 것을 의논하자, 공이 답하기를,
“비변사는 현행 제도인데 삼공(三公)이 그 일을 관장하고, 오경(五卿)과 무장(武將), 여러 재신 중에 다소 재능이 있는 자가 모두 겸직하여 함께 회의하며, 문무 낭청(文武郞廳)들도 모두 엄밀히 선발하여 임명하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송나라의 중서성과 추밀원을 합하여 문신과 무신 사이에 서로 반목하는 폐단이 없게 만든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모두 사의(事宜)에 합당하다면 또한 충분히 훌륭한 정치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굳이 중서성으로 명칭을 고친 뒤에야 훌륭한 정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은 실제를 앞세우고 명칭을 뒷전으로 미루면 자취가 없으면서도 효험이 있고, 명칭을 앞세우고 실제를 뒷전으로 미루면 듣고 보는 사람들이 놀라기 쉽고 비난하는 의논이 생기기 쉬워서 실제 효과가 이루어짐을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만약 기어이 명칭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의정부의 일과 권한을 다시 회복시켜서 조종조에서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이 옳은데, 이제 서사(署事)를 회복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별도로 중서성을 세운다면 이는 의정부의 본직을 허함(虛銜)으로 만들고 중서성을 빌려 명칭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습니까. 그러나 서사를 회복하는 것 또한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11월에 김호(金灝)가 이상주(李相周)의 전시 대책문(殿試對策文)에 초옥(楚獄)이 넘쳐 날 정도로 많다고 한 말을 지적하고 대제학 이하를 무겁게 추고할 것을 계청하였으니, 이는 그 의도가 공에게 있었다. 태학생 이현석(李賢錫) 등이 상소하여 장희재(張希載)를 법대로 조사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일을 맡은 신하가 성상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해서 이미 정해진 성상의 마음을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세 번 정사(呈辭)를 올렸는데, 상이 세 차례나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는 글을 아뢰기를,
“상신(相臣)은 백관들을 통솔하고 있으니, 먼저 그 염치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세종(世宗)께서 의지하고 신임하는 황희(黃喜)와 같은 자라도 대간의 탄핵이 있으면 그 직임을 해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비록 지난날 김석주(金錫胄)와 같이 공로가 있는 외척이라도 유생들의 상소가 있으면 그 직임을 교체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송(宋)나라 신하 소식(蘇軾)은 말하기를, ‘대간이 반드시 모두 다 어질지 않고 말한 바가 반드시 모두 다 옳지 않다 하더라도 일이 의정부에 관계되면 재상이 죄가 내리기를 기다리니, 이는 언관의 풍채(風采)를 떨치게 해 주고 벼슬자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비루한 자를 크게 막기 위함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신이 한갓 군주의 엄한 벌을 두려워하고 공론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지금 이후로 간사한 자들이 국정을 담당하고 총애받는 간신들이 지위를 얻을 경우 모두 반드시 신을 구실로 삼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비록 대간의 충분(忠憤)에서 나온 말과 성균관 유생들의 정직한 의논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해도 장차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은 이때 오로지 공에게 위임하여 군신 간에 틈이 없었다. 공을 원망하는 자들이 자주 시험하였으나 그 뜻을 다하지 못하니, 공이 부득이 나와서 벼슬하였다.
○ 12월에 수찬(修撰) 정호(鄭澔)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개기(改紀)하는 초기에는 뜻을 돌리시는 사이에 풍채가 당장 달라지셨는데, 일을 담당한 대신이 원대하고 심장(深長)한 생각이라 핑계 대어 전하로 하여금 형정(刑政)의 권도(權道)를 밝히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상은 도승지를 보내어 공의 상소에 답하기를,
“일 벌이기 좋아하는 무리들이 번갈아 공격하고 흔들어 대어 거의 조용한 달이 없으니, 실로 우리 국가의 불행이다.”
하였다. 공이 다시 상소하여 사양하니, 상은 이틀 동안 네 차례나 도승지를 보냈다. 5일이 지나 상의 체후가 미령하시므로 공이 나와서 벼슬하였다.

67세 을해년(1695, 숙종21)

1월에 인견할 적에 공이 순무사(巡撫使)를 삼남(三南) 지방에 나누어 파견해서 해방(海防)을 살피고 백성들의 고충을 제거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이달에 정사(呈辭)를 올리고, 2월에 네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으며, 일곱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세자(世子)가 강관(講官)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열한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네 번째로 승지를 보내고, 열두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다섯 번째로 승지를 보냈으며, 다시 상소하자 여섯 번째로 승지를 보내고 다음 날 도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니, 이달에 출사하였다.
3월에 홍수헌(洪受瀗)의 상소로 인하여 공이 네 번째 정사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고, 아홉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세자가 강관을 보내어 문병하였으며, 열세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두 차례 승지를 보내고, 스무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세 번째로 승지를 보냈다.
4월에 출사하였는데, 이달에 세자의 관례(冠禮)에 빈(賓)이 되니, 상은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였고 중궁(中宮)은 홍초(紅綃 홍색 생사 비단)와 청사(靑紗 청색 비단)를 하사하였다. 이달에 좌상, 우상과 함께 청대(請對)하고, 명을 받아 청백리(淸白吏)와 염근리(廉謹吏)를 선발하였다.
5월에 사옹원 도제조(司饔院都提調)에 차임되었다. 이달에 청대하여 윤증(尹拯)의 품계를 더해 주고 주급(周急)을 내려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폐출당하여 물러간 사람이 외직에 부임하지 않는 폐단을 아뢰자, 상이 재촉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6월에 김진규(金鎭圭)의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공이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으며, 다음 날 도성을 나오자 상이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상소문을 남겨 놓고 누원(樓院)으로 돌아오니 승지가 뒤따라 이르렀으며, 네 번째 상소를 올리니 예조 판서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7월에 여덟 번째 상소를 올리니 해임을 허락하였다. 영중추부사로서 대궐에 나아가니 상이 인견하였다. 탑전에서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는데, 사직하는 날에 상이 선온(宣醞)하였다.
8월에 상이 환후가 계시어 시강원으로 약방을 옮겼다.
9월에 상의 환후가 평상으로 돌아오니, 상이 안구마를 하사하였다.
10월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는데 네 번째 상소하여 사양하니 두 차례 승지를 보내고, 다섯 번째 상소하여 사양하니 세 번째로 승지를 보냈다. 상소하여 한중혁(韓重爀)에게 사형을 감해 주지 말 것과 당인(黨人 남인)의 인재들을 차츰 거두어 등용할 것을 청하고는 이 두 가지 일로써 진퇴를 기다렸는데,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11월에 인견할 적에 양남(兩南) 지방 감사(監司)의 사속(私屬) 장인(匠人)의 폐단을 아뢰고 모두 혁파하여 변통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달에 강민저(姜敏著)가 공이 다시 정승이 된 것을 참소함으로 인하여 상이 네 번째로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12월에 상이 다섯 번째로 승지를 보내고 강민저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으며, 일곱 번째로 승지를 보냈다. 오랫동안 병으로 사양하다가 출사하였다.

○ 지난해 11월에 좌상 박세채(朴世采)가 청나라 사신을 피하여 파주(坡州)로 돌아갔고, 12월에 우상 윤지완(尹趾完)이 79세로 나이가 많다 하여 사직하고 정승의 지위를 내놓았다. 이해 1월에 유상운(柳尙運)이 그 후임으로 정승이 되어 사은(謝恩)하였는데, 이날 공이 바로 정사(呈辭)를 올렸다. 2월에 네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기를,
“경이 오늘 인입(引入)한 것은 질병 때문이 아니고 정세(情勢) 때문이니, 이른바 정세라는 것은 진실로 덕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내가 일찍이 통찰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지난여름 경이 도성을 떠났을 적에 내가 직접 맞이하려 하기까지 하였으니, 경에게 의지하고 신임하는 돈독함이 이와 같은 점이 있다. 오늘날의 거취는 실로 국가의 안위에 관계된다.”
하였다. 구례(舊例)에 세자(世子)의 사부(師傅)가 정사를 올릴 경우 세 번째에 이르고 여섯 번째에 이르면 그때마다 세자가 강관(講官)을 보내어 문병하곤 하였는데, 이때 공이 일곱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세자가 겸문학(兼文學)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열한 번째 사직소를 올렸을 때, 신양(申懹)의 상소로 인하여 상이 하루에 승지를 두 번 보냈다. 열두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도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병으로 사양하다가 얼마 후 부득이 출사하였다. 열흘 뒤에 대사간 홍수헌(洪受瀗)이, 전 집의 김문하(金文夏)가 장희재(張希載)를 법률에 따라 처벌하는 일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였다고 말하면서 공까지 언급하자, 3월에 공이 네 번째 정사를 올렸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기를,
“아,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한 몸이 되어 서로 필요로 한다. 경이 다시 의정(議政)의 자리에 들어온 지 이제 2년이 되었는데, 말로(末路)가 시끄럽자 경은 지나치게 인혐하여 일찍이 하루도 지위에 편안히 있은 적이 없다. 이제 조정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곧바로 또 인입하여 다만 이 소자(小子)로 하여금 위에서 근심하고 수고롭게 하니, 어찌 한 몸이 되어서 서로 필요로 하는 의리이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홉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세자가 사서(司書)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스무 번째 사직소를 올렸다가 4월에 세자의 관례(冠禮)로 인하여 부득이 출사하였다. 공은 봄부터 여름까지 전후로 정무를 본 것이 채 100일이 못 되었으나, 오히려 날마다 백성들의 근심과 정사의 득실을 강구하였다. 정초의 빈청 인견 때에 공이 아뢰기를,
“삼남(三南) 지방의 연해(沿海)와 서쪽인 평안도와 북쪽인 함경도의 두 변경은 조종조(祖宗朝)로부터 매번 깊이 염려하시고 중신(重臣)이나 대신(大臣)을 자주 보내어 순무(巡撫)하고 일일이 하문하시어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곤 하였는데, 근래에 이 일이 오랫동안 폐지되었습니다. 지금 서북 지방의 변경은 국경을 넘어가 인삼을 채취함으로 인하여 법망이 또한 매우 조밀해져서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가 없으며, 삼남 지방의 연해 지역은 중외의 아문(衙門)들이 이익을 갈취하려고 모여들고, 또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호남의 연해에서 백성들의 원성이 가장 심합니다. 중신을 보내어 폐단을 묻되 영문(營門)과 상사(上司)를 따지지 말고 모두 바로잡은 뒤에야 일시적인 효험이나마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좌상(左相)으로 있을 때에 금위영(禁衛營)에서 안성(安城), 아산(牙山), 평양(平壤)에 흥판소(興販所)를 새로 만들었는데, 공이 도제조인 민공 정중(閔公鼎重)에게 이것을 혁파해야 한다고 말하자, 민공이 이 때문에 안성과 아산의 흥판소를 혁파하였다.
이해 1월에 공이 비변사에 나아가 충훈부(忠勳府)에서 호남 지방에 사인(私人)을 차송(差送)해서 백성들의 농지 10여 곳을 측량하였음을 아뢰니, 마침내 유사 당상인 평천군(平川君) 신완(申琓)을 파직하였다.
다음 해 봄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빚 독촉을 금하였는데, 한성부에서 법을 범하자 공이 아뢰어 한성부 판윤 임상원(任相元)을 파직하였다. 이해 여름에 진휼청 당상(賑恤廳堂上)인 민진장(閔鎭長)이 사인을 보내어 양호(兩湖)에서 보리를 사 오려 하였는데, 공이 타일러서 중지하였다.
공은 정승이 되자, 더욱 백성들의 일을 중요하게 여겨 경사(京司)에 백성을 해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중신이라도 반드시 죄주니, 공이 정승의 지위에 있을 때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모두 두려워하고 삼갔다.
○ 예전에 태조조에는 청백리에 찬성(贊成) 안성(安省) 등 3명을 뽑았고, 태종조에는 도절제사(都節制使) 경의(慶儀) 등 8명을 뽑았고, 세종조에는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등 12명을 뽑았고, 세조조에는 대사헌 노숙동(盧叔仝) 등 6명을 뽑았고, 성종조에는 판서 임정(林整) 등 16명을 뽑았고, 중종조에는 판서 최명창(崔命昌) 등 15명을 뽑았고, 명종조에는 참판 윤부(尹釜) 등 4명을 뽑았고, 선조조에는 영의정 이준경(李浚慶) 등 12명을 뽑았고, 인조조에는 참판 민여임(閔汝任) 등 9명을 뽑았다. 숙종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이르러 영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의 말로 인하여 청백리를 뽑도록 명하였으나 오랫동안 시행하지 못하였는데, 무진년(1688) 봄에 장령 조의징(趙儀徵)이 청백리를 속히 뽑아 탐욕 부리는 풍속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니, 상이 묘당(廟堂)에 재촉하였다. 공은 영상으로 있으면서 삼공(三公)이 구비되기를 기다려 함께 처리할 것을 청하였다. 지난해 가을에 좌상 박세채(朴世采)가 다시 이것을 청하면서 간략하고 엄격함을 위주로 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해 겨울에 다시 아뢰기를,
“이준경은 명종 임자년(1552, 명종7)에 이미 염근리(廉謹吏)에 선발되었고 그 후 또 추가로 청백리에 선발되었습니다. 청백리와 염근리가 다소 차이가 있는 듯하나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해 2월에 박 정승이 별세하였다. 4월에 공이 좌상 유상운(柳尙運), 우상 신익상(申翼相)과 함께 청대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청백리의 선발은 병자호란 이후로 처음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는데, 청렴하다는 명성이 크게 드러난 사람은 죽은 자가 많고 생존한 자가 적습니다. 이준경과 같은 때에 염근리에 뽑힌 자가 40여 명인데, 모두 궁궐 뜰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 뒤 임인년(1602, 선조35)에 이준경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또다시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조종조에서 청백리는 죽은 다음 의정(議定)한 뒤에 뽑는 것이고, 염근리는 생존했을 때에 장려하는 것인바, 인조 병자년(1636, 인조14) 전에 김상헌(金尙憲) 등 5, 6명이 염근리의 선발에 뽑혔는데 이들은 모두 생존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고사(古事)를 따라 죽은 자는 청백리로 삼고 생존한 자는 염근리로 삼아, 청백리는 이조에서 녹안(錄案)하고 염근리는 별도로 권장하는 방도가 있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재가하였다. 마침내 청백리 17명을 뽑았는바, 영의정 이시백(李時白)과 홍명하(洪命夏), 우의정 이상진(李尙眞), 판중추부사 조경(趙絅)과 강백년(姜柏年), 참판 조석윤(趙錫胤)과 유경창(柳慶昌), 좌참찬 박신규(朴信圭)와 최관(崔寬), 좌윤(左尹) 이지온(李之馧), 부사(府使) 성이성(成以性), 참지(參知) 이후정(李后定), 진선(進善) 조속(趙涑), 예빈시 정(禮賓寺正) 홍무(洪茂), 수사(水使) 홍우량(洪宇亮), 부사 강열(姜說)과 군수 이태영(李泰英)이고, 염근리 3명은 판서 이세화(李世華), 행 부호군(行副護軍) 강세귀(姜世龜), 현령 윤추(尹推)였다. 7월에 예조에서 계문(啓聞)하니, 상이 염근리에게 품계를 올려 주도록 명하였다. 다음 해 봄에 공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청백리를 널리 뽑기가 어려우므로 간략함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하들이 혹 뒤이어 선발하자는 청원이 있었으나 사체가 불가하여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뽑히지 않은 사람 중에도 크게 드러나 유명한 자가 많으니, 마땅히 선발하여 장려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단석(李端錫)의 처자식은 이미 우대하여 구휼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판서 남선(南銑), 수사 양칙(梁侙), 장령 조극선(趙克善),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집의 한태동(韓泰東)은 모두 청렴하고 검소함으로 이름이 드러났는데도 지금 그 처자식들이 곤궁하여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유사로 하여금 소재지를 물어서 주급(周急)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르고 매우 좋다고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박장원(朴長遠)과 강유후(姜裕後)는, 사람들이 또한 선발에 끼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는 자가 많으나 모두 자손들이 관직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석과 남선 등 6명의 후손으로 말하면 모두 얼마 안 되는 녹봉조차 받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선발된 자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자손을 녹용(錄用)하는 것이 비록 먼 후손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하나 만약 그 아들과 사손(嗣孫)이 관직에 임용할 만하면 해조(該曹)로 하여금 특별히 조용(調用)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 공이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있을 때에 동료 민유중(閔維重)이 주머니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서 보여 주었는데, 그 안에 수백 명의 성명(姓名)이 기록되어 있었다. 공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민유중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계(牛溪)와 율곡(栗谷)을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에 반대한 자들이니, 모두 폐출시켜 금고(禁錮)해야 하는데, 혹 잊어버리고 잘못하여 관직을 주의(注擬)할 때에 넣을까 염려되므로 써 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송공(宋公)에게 이르기를,
“사람들 중에 탁월한 식견이 있어 홀로 행할 수 있는 자가 적습니다. 저 반대한 자들은 그 잘못이 다만 스스로 당론(黨論)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여럿이 모여 대대로 지켜 온 의논을 한 번 바꾸지 못한 데에 있을 뿐이니, 그래도 때에 따라 부침(浮沈)하고 형세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또 이들 가운데에는 간혹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도 있고, 재주와 지혜가 있는 자도 있고, 문재(文才)가 있는 자도 있는데, 지금 이들을 일절 말살해 버립니다. 그리고 지금 관직에 선발한 자를 물어보면 여러 행실 중에 한 가지도 뛰어난 것이 없고, 단지 입으로만 ‘양현(兩賢), 양현’ 할 뿐인데 그들을 등용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러나 그 속을 관찰해 보면 또 반드시 양현의 아름다움을 참으로 알지 못하니, 현자를 높이는 도리로 보아 과연 이것을 바꿀 수가 없습니까?”
하니, 동춘이 지붕을 쳐다보며 한숨 쉬고 말하기를,
“자네 말이 진실로 옳으나 누가 따르겠는가?”
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 뒤에 숙종이 하교하기를,
“권세 있는 자를 돕고 간사한 의논에 붙었던 자들은 이미 모두 멀리 귀양 보냈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휩쓸리는 물결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니, 어찌 심히 꾸짖을 것이 있겠는가. 이처럼 인재가 부족한 때에, 죄의 경중에 따라 거두어 서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의 말살하자는 의논은 점점 더욱 심해졌다. 공이 일찍이 이것을 남공 용익(南公龍翼)에게 말하였다. 남용익이 돌아가 정세옥(鄭世沃)에게 말하기를,
“이제야 비로소 수십 년 동안 듣지 못했던 선언(善言)을 들었다.”
하였다. 정세옥이 말하기를,
“선언을 하는 것도 진실로 어렵지만 선언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니, 남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용렬한 사람이라고 여기는구나. 오직 송상(宋相 송시열)을 버리는 자라야 비로소 이 방법을 행할 수 있다.”
하였다.
지난해 여름에 박 좌상(朴左相 박세채)이 자청하여 대고문(大誥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해 가을에 ‘사사로운 마음을 크게 제거하여 한결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사랑할 것’에 대해 말하였다. 임공 영(林公泳)이 초야에 있었는데, 박 정승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붕당을 없애자는 영상(領相 남구만)의 뜻은 실로 문하(門下)와 암중에 서로 부합합니다. 두 노인이 한마음이니,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박 정승이 또 무진년(1688, 숙종14)에 올린 상소문의 내용을 거듭 주장해서 붕당을 타파하여 국론을 통일할 것을 청하였는데, 여기에 양현(兩賢)을 찬양하고 영남 지방을 수합하며 교계(敎戒)를 엄격히 하자는 세 가지 조목이 있었다. 이해 겨울에 공이 박 정승에게 말하기를,
“남인이 모두 서인과 같아진 뒤에야 비로소 등용할 만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이러한 이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루아침에 옛 소견을 다 버리고 세상에 아첨하는 계책을 품을 것이니, 그 풍조가 또한 비루하게 여길 만합니다. 다만 그 재주에 따라 등용하여 너무 심한 자를 제거할 뿐이니, 지금 만약 잘못을 일일이 따져서 한결같이 자신의 뜻과 같기를 바란다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니, 박 정승이 웃으며 말하기를,
“공의 의논이 좋기는 하나 어찌 쉽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앞서 박 정승이 현재(賢才)를 구할 것을 거듭 청할 적에 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학제(學制)를 따라서 연영원(延英院)과 존현당(尊賢堂)을 두어 초야에 숨어 있는 선비들을 맞이해서 그 어짊을 자세히 살핀 뒤에 특별히 발탁하여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해 4월에 청대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선현의 지극한 의논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마는 다만 지금의 형편을 또한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조정의 의논이 서로 비방하고 헐뜯고 있으니, 이로써 부르면 반드시 모두 나오지 않을 것이요, 혹 부름에 응하는 자가 있더라도 또한 어찌 실제 효과가 있겠습니까. 지난날 별천(別薦) 때에 참하관(參下官)과 아직 벼슬하지 않은 자로 모두 천거에 응하여 겨우 마감(磨勘)하여 아뢰었습니다. 이제 만약 전후의 추천장과 기타 명망이 있어 불러올 만한 자들을 통틀어서 참상(參上)과 참하(參下)를 막론하고 동료 정승과 상의해서 초계(抄啓)하여 전조(銓曹)에 내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굳이 한꺼번에 시종관(侍從官)에 아울러 의망하지 말고, 이조ㆍ예조ㆍ병조 삼조(三曹)의 낭관이나 혹은 각 관사의 낭청(郞廳)에 규례대로 제수하도록 합니다. 그러고 나서 직임을 잘 수행하여 명성이 점점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 혹 대간(臺諫)에 제수하거나 혹 경연(經筵)에 출입하게 한다면 비록 다 대간과 시종관이 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모두 재주에 따라 점차로 등용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굳이 연영원과 존현당, 덕행과(德行科)와 현량과(賢良科) 등의 사목(事目)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규례를 따라서 조용(調用)될 것입니다. 옛말에 ‘열 명을 뽑아 다섯 명을 얻는다.’라고 하였으니, 천거된 자가 반드시 모두 적임자는 아닐지라도 반드시 상규(常規)에 따라 등용된 자와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또 아뢰기를,
“박세채(朴世采)의 생각은 ‘한쪽 사람들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모욕한 것은 그분들의 도학(道學)의 실제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만약 양현(兩賢)의 문집과 연보 등의 서적을 널리 배포한다면 반드시 잘못을 깨닫고 마음을 돌릴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고유(誥諭)하는 글을 지어 엄히 가르치고 경계하면 영남 사람들 또한 반드시 마음을 낮추어서 따를 것이니, 그런 뒤에야 발탁하여 등용해서 함께 공경하고 화합할 수 있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 뜻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나 실정을 따져 보면 실로 시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양현에게 심복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선조로부터 내려온 지가 지금까지 100년이 지났으니, 이것이 어찌 문집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러한 것이겠으며, 어찌 별안간 한때의 하교로써 그들의 마음을 돌리고 의혹을 풀어 없앨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의 붕당을 타파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타파하려고 한다면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에 강상죄(綱常罪)를 범한 자는 진실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지만 문풍(門風)과 기습(氣習)에 휩쓸려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들은 비록 그의 이름이 죄인의 명부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점차 풀어 주어서 그들과 함께 새 출발을 해야 합니다. 예전에 의견을 달리하고 승부를 겨루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비난하거나 따지지 말고 절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등용할 때에 혹은 문학(文學), 혹은 정사(政事), 혹은 조행(操行)으로써 취하되, 오직 재주의 고하에 따라 등용하소서. 상께서 위에서 표준을 세워 공정하게 듣고 보시어 편당함이 없는 탕탕(蕩蕩)하고 평평(平平)한 도를 베푸신다면 아래에서도 상의 뜻을 체득하여 무릇 인재를 평론하며 등용하고 해임하는 일에 있어 피차의 색목(色目 당색)을 따지는 등의 일이 일거에 깨끗이 제거될 것입니다. 이러한 성의를 쌓아서 오래오래 노력하면 조정이 깨끗해지고 공론(公論)이 일어나서 혹시 일분(一分)이나마 당론(黨論)을 사라지게 할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저들이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린 뒤에 등용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럴 만한 때가 없을 것이요, 또한 어찌 붕당을 타파할 날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은 공의 말을 옳게 여겼다.
지난해 여름 대계(臺啓)에, 인품이 용렬하다고 남인(南人)을 지목하여 주서(注書)로 천거된 자와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자들을 혹은 삭제하고 혹은 파면하여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게 하였는데, 다시 채팽윤(蔡彭胤)을 홍문록(弘文錄)에서 삭제하였다. 그해 겨울 공이 입대하여 너무 심한 처사라고 말하였다. 이때에 지평 이희무(李喜茂)가 한림(翰林)으로 천거된 자 중에 양현(兩賢)을 출향(黜享)할 것을 주장한 상소에 연명(連名)한 자를 삭탈(削奪)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인품이 부적격한 자라 하여 함께 천거된 자를 아울러 삭탈할 것을 청하자, 공은 비변사의 재신(宰臣)들을 대하여 그 잘못을 말하였다. 5월에 이희무가 인혐(引嫌)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한두 명의 대신(臺臣)들이 각각 천거된 자를 삭제하고 홍문록에서 삭제할 것을 청하였으며, 지금 한림의 천거에서도 반드시 함께 삭제할 것을 청하니, 이 어찌 편당함이 없는 탕탕하고 평평한 도리이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인물을 취하고 버릴 때에 색목을 따지는 일을 일거에 깨끗이 제거할 것을 청하였는바, 바로 이러한 일을 가리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은 이러한 의논에 대해 결코 파란(波瀾)을 조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사람의 전철을 어찌 차마 다시 밟는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주장하는 바가 매우 사체에 합당하다.”
하였다.
○ 지난해 겨울에 박 좌상이 윤증(尹拯)을 찬선(贊善)으로 삼도록 계문하는 일을 의논했으나 노론(老論)이 싫어할까 염려하니, 소론에서는 비변사에서 속히 발탁하여 제수하지 않는다고 허물하였다. 공이 이르기를,
“윤공(尹公)이 만약 인망(人望)에 따라 등용될 경우 두 번만 승진하면 정승의 지위에 오를 것이다. 예로부터 인물을 등용하는 규정에 군주와 한 번도 대면하지 않고서 이처럼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뒤에 반드시 이것을 구실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이해 2월에 유 좌상(柳左相 유상운(柳尙運))이 윤공을 이조 판서에 의망하고자 하자, 공은 “박 좌상이 당연히 상에게 아뢰어야 하는데 말씀하지 않았으니, 이제 박 좌상이 별세한 달에 급급히 아뢰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여 중지하였다. 3월에 윤공에게 찬선(贊善)을 제수하였다.
5월에 공이 좌상과 함께 청대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우상(右相 신익상(申翼相))의 차자에, ‘윤증의 마음을 돌리기 어려우니, 오랫동안 이조 참판의 자리를 비워 놓고 기다리는 것은 겉치레에 가깝습니다. 직임을 체차하고, 그에게 찾아가서 조정의 정사에 대해 물으며, 관청에서 월름(月廩)을 보내 주어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에서 한창 초청하고 있는 형국에, 대뜸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니, 이 또한 온당치 못합니다.
또 정치를 일신한 뒤에 육경(六卿)의 적임자가 부족하니, 사림(士林)들이 우러러 바라는 것으로 보나 성상께서 예우하시는 것으로 보나 윤증이 진실로 마땅히 첫 번째로 높이 등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전에 유일(遺逸)의 선비는 비록 품계의 차례를 밟지 않고 차서를 뛰어넘어 등용하더라도 항상 반드시 상께서 직접 만나 본 뒤에 발탁하여 높은 지위에 두셨으니, 아래에서 감히 제멋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감히 의망(擬望)하지 못하였으나 이와 같이 명망과 덕이 있는 사람에게 끝내 품계를 올려 주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또 듣건대 그 사람이 진실로 곤궁하다고 합니다. 옛날에 인군이 주급(周急)하는 도리는 있었으나 일찍이 월름을 하사하는 규정은 없으니, 그가 반드시 이것을 받을 리가 없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 봉조하(奉朝賀)로 고향에 내려간 뒤에 법전(法典)에 따라 월름을 내렸으나 그 이전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으며, 주급을 시행한 것은 신해년(1671, 현종12) 기근이 들었을 때에 신이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조정의 명령을 따라 송시열과 송준길의 집에 쌀을 실어다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다음 날에 윤공(尹公)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에 제수하였다.
○ 5월에 청대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관리들이 변방의 수령 자리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것이 근래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갑산 부사(甲山府使) 이우진(李宇晉)과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인징(李麟徵)은 관직에 제수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연달아 비변사에 정사(呈辭)를 올리며 임소로 가려는 뜻이 없으니, 반드시 특별한 죄책(罪責)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견책당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다만 직책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니, 저들을 처벌하는 것은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또 신은 일찍이 이 점에 대해서 개탄하였습니다. 한쪽 사람들이 폐출된 뒤에 외직에 부임하지 않는 것은 그 뜻이 요컨대 세 가지에 불과합니다. 현재 시론(時論)이 그동안 지방관에 부임했던 자들을 비난하여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으니, 한쪽 사람들의 의논이 또 이와 같지 않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부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중요한 벼슬에 출입했던 사람으로서 다른 죄가 없이 내직에서 밀려나 외직에 보임되었다 하여 혹 이 때문에 싫어하고 괴롭게 여겨서 그러할 것입니다. 그중에는 혹 비록 군읍(郡邑)의 관직이라도 시론이 흔쾌히 허락하지 않고 억지로 보낸 것이어서 시비가 없지 않다고 여겨, 염치와 의리를 고집하며 굳이 부임하지 않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외직을 싫어하는 자들은 반드시 이 중의 하나에 해당될 것입니다. 관작이라는 것은 조정의 관작인데, 마침내 동류들이 조정에 있지 않다 하여 고을의 관직을 맡은 자는 공경히 명령을 받들려 하지 않고, 이를 의논하는 자들은 또 이것을 죄로 여기고 있으니, 신하의 분수와 의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류의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대사헌 이수언(李秀彦)이, 부제학(副提學) 오도일(吳道一)이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에 외직을 맡은 일을 들추어내어 “간흉(姦凶)에게 아첨한다.”라고 말하였으므로 공이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금일의 의논에 실로 가슴 아픈 점이 있다. 조정이 번복된 것은 나의 잘못이지만, 신하의 도리로 말하면 조정은 변함없이 그 조정이다. 그런데 그동안 군읍에 제수된 사람들을 마치 절개를 잃은 것처럼 여기고 있다. 이는 모두 나의 부덕한 소치이니, 지극히 부끄럽고 무안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 가운데 만약 권력을 잡은 간흉에게 아첨하여 섬긴 자가 있을 경우 의논하는 자들이 그 죄목을 드러내서 분명히 말하고 곧바로 지척(指斥)하면, 이에 해당되는 자 또한 반드시 자복할 것이다. 그런데 사안을 뒤섞고 말을 불분명하게 하여 지금 조정의 신하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폐단이 또다시 변방을 지키는 임무를 싫어하고 기피하는 문제를 초래한 것이다.”
하였다. 유 좌상이 아뢰기를,
“이우진은 조사기(趙嗣基)의 생질로서 제수되던 초기에 사람들의 비방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곧바로 부임하지 못하였는데, 전조(銓曹)에서 또다시 조사기의 생질인 박창한(朴昌漢)을 고부 군수(古阜郡守)로 의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론이 그에게 사로(仕路)를 열어 주고 허여함을 보여 주었으니, 그 또한 반드시 부임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각별히 재촉해서 수일 내에 출발시켜 보내도록 명하였다.
○ 지난해 여름 국청(鞫廳)에서 청대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부터 20년 동안 조정이 번복된 것이 네 번입니다. 번복될 때마다 번번이 주벌을 행해서 온 나라가 반으로 나뉘어 항상 원수가 되었으니, 국가의 명맥을 손상시킨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우왕(禹王)과 탕왕(湯王)은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으므로 크게 흥왕하였고, 걸(桀)과 주(紂)는 남에게 책임을 돌렸으므로 그 멸망이 빨랐다.’ 하였습니다. 지금 폐출당한 신하들은 그 죄상을 논한다면 실로 살려 줄 수 있는 방도가 없습니다만 이는 모두 상께서 알지 못하시는 가운데 그들이 독자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혁연(赫然)히 정사를 일신한 뒤에 법을 집행하는 신하가 비록 감히 관대하게 용서해 줄 수는 없으나 상께서 만일 ‘이는 나의 허물이니, 저 신하들을 어찌 다 처벌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그 죄를 다스릴 때에 모두 감등(減等)하여 나의 허물임을 알게 하라.’라고 하신다면 어찌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흠앙하여 탄복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성상의 덕을 빛내고자 하는 뜻은 무겁고 크며, 죄인들을 다 법대로 처벌하고자 하는 뜻은 가볍고 작기에 황공한 마음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의 말은 대의가 진실로 좋다.”
하였다. 몇 달 있다가 박 좌상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세상일이 자주 변하는 동안 대신(大臣)과 간신(諫臣)이 잇달아 죄를 입어 죽음을 당하고, 귀양 간 자들이 거의 다 사망하는 행태가 전후(前後)가 똑같습니다. 선유(先儒) 이언적(李彦迪)이 이른 바 ‘송나라 300년에 일찍이 한 명의 대신도 죽인 적이 없고, 고려 500년에 일찍이 한 명의 간신도 죽인 적이 없으니, 지극히 인자하고 후덕함이 국가의 명맥을 오래가게 할 수 있었다.’라고 한 것에 비하면 조금 다릅니다. 기사년에 축출된 신하들은 밝으신 성상께서 비록 이와 같이 하셨더라도 신하 된 자는 스스로 감히 대번에 그 예의(禮義)를 잃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의리로 보면 용서할 만한 점이 없고, 일로 보면 진실로 연유가 있어서 백성들을 속이는 데에 가깝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그 실정을 깊이 알고 신중히 처리하셔서 무릇 논죄할 때에 또한 반드시 옛날 삼자(三刺)의 법을 참고하시어 당론의 뜻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신다면, 자신에게 책임을 후하게 돌리고 남에게 책임을 박하게 돌리는 탕왕과 무왕의 경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후에 죄를 얻은 신하들이 비록 당시 권력을 잡은 자들에게 오도되었으나 군림하여 결단한 것은 반드시 군주에게 달려 있었으니, 만약 역모를 꾸민 죄로 사형시켜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분명한 전지(傳旨)를 내리시어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보여 주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권대운(權大運)이 기사년(1689, 숙종15)에 한나절 동안 정청(庭請)할 때에 영상으로 있었다 하여 극변(極邊)에 안치되었고, 당시에 삼사(三司)의 관원들이 모두 멀리 유배되었다. 이해 가을에 윤 우상(尹右相 윤지완(尹趾完))이 권대운을 석방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해 겨울에 사간 임원구(任元耈)가 비난하자 윤 우상이 사직하고 교외로 나갔다. 이조 판서 유상운(柳尙運)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임원구가 말한 ‘지론(持論)이 구차하다.’라는 것과 화복(禍福) 등에 관한 말은 어떤 사안을 놓고 평론하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大臣)의 말이 십분 합당한지는 알 수 없으나 본심은 결코 다른 것이 없다.”
하였다. 좌상(左相 박세채)이 아뢰기를,
“권대운이 의논한 심사(心事)를 혹 애석히 여기는 자가 있으나 기사년의 일은 책임을 장차 누구에게 돌리겠습니까. 권대운의 상소문은 비록 당시의 여러 신하보다 약간 나으나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감등(減等)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몇 달도 못 되어 곧바로 석방하여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으니, 조제(調劑)하는 방도에 있어 또한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신이 그저께 영상(領相 남구만)을 뵈니, 또한 이르기를, ‘우상(右相 신익상(申翼相))의 차자는 따를 수가 없어서 등대(登對)할 때에 성상께 우러러 아뢔야 하겠다.’라고 하였는데, 대신(臺臣)이 지레 먼저 상소를 올린 것입니다.”
하였다. 다음 날 공론이 아직도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하여 공이 차자를 올려 권대운을 비판하여 이르기를,
“신이 처음에 남의 말을 따라 그의 상소문을 자세히 살펴보니, 말한 내용이 도리어 성상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는 데에 해당되었는바, 신이 미리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서 가볍게 논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하였다. 이달에 공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권대운의 처신과 지론은 취할 만한 점이 없지 않으나 기사년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말뜻이 너무 간략합니다. 그때 이만원(李萬元)과 이후정(李后定) 같은 무리들은 바로 낮은 벼슬아치였으니 한 번 상소한 것으로도 직분을 잃지 않았다고 이를 수 있으나, 대신(大臣)의 경우는 한 번 상소한 것으로 책임을 때울 수 없습니다. 우상의 본의는 공도(公道)를 펴고 당화(黨禍)를 없애는 것을 오늘날 제일의 급선무로 삼은 것이니, 이는 십분 좋은 생각입니다. 설혹 경중(輕重)과 조만(早晩)에 약간의 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깊이 허물하여 망극한 죄악으로 얽어 넣을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은 본래 논의가 공정하고 바르니, 지금 다시 아뢴 뜻을 가지고 권면하여 타이르겠다.”
하였다. 이해 5월에 권대운과 정유악(鄭維岳)을 소결(疏決)하여 방귀전리(放歸田里)하였고, 민취도(閔就道)는 감등(減等)하였으며, 권유(權愈)ㆍ신학(申㶅)ㆍ이수징(李壽徵)은 양이(量移)하고, 권처경(權處經)은 석방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정유악에게 내린 소결의 명을 환수하였다.
신 우상(申右相 신익상(申翼相))이 한해(旱害)로 인하여 묘당(廟堂)과 삼사(三司)에 명하여 모여서 죄인의 경중을 의논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처결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 차자를 묘당에 내려 복주(覆奏)하여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소결할 때에 죄인들이 범한 죄명과 죄목을 보니, 모두 중대한 죄에 관계된 것이어서 실로 가볍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상께서도 어렵다고 하시어 결국 오직 7명만을 처분하셨는데, 대계(臺啓)에서 사람들의 마음에 특히 흡족하지 못한 자에 대해 소결의 명을 환수할 것을 곧바로 청하니, 상께서도 이를 따르셨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또다시 모여서 의논하여 마치 조정에서 그 죄의 유무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듯이 하였으니, 이는 일이 너무 번거롭고 중복될 뿐만 아니라 사체에 있어서도 실로 온당치 못합니다.
또 기사년의 조정 신하들로 말하면, 만약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그 형벌이 묵형(墨刑)이다.’라는 의리로써 말한다면 가볍게 처벌한다 해도 묵형보다 낮출 수 없고, 그 밖의 허다한 사람이 범한 죄도 가볍지 않습니다. 만약 관대한 은전을 보이고자 한다면 당나라 덕종(德宗)이 봉천(奉天)에서 내린 조서(詔書)처럼 해야 합니다. 이 조서에서 한결같이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을 위주로 하여 오직 주자(朱泚)만을 용서해 주지 않고, 그의 무리인 왕무준(王武俊)과 주도(朱滔) 등도 유신(維新)에 참여하자 인심이 기뻐하고 복종하였습니다.
상께서 자책하는 하교를 먼저 내리시고 뒤이어 대사(大赦)의 은전(恩典)을 행하시되, 성상께 품명(稟命)하여 재가를 얻어서 행한 자들은 모두 형벌을 가볍게 하소서. 그 가운데 특히 심한 자는 성상께서 결단을 내리셔서 아무개는 사면해 줄 수 있고 아무개는 사면해 줄 수 없다는 뜻으로 분명히 하교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유 좌상(柳左相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봉천의 조서 또한 육지(陸贄)가 청한 것입니다. 그 당시 육지는 지위가 대신(大臣)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물며 대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만약 사의(事宜)에 부합함을 안다면 어찌 사사로운 마음에 황공하다 하여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현재의 조정을 덕종이 파천(播遷)했을 때에 비한다면 그때보다는 조금 편안한 듯하지만, 조정이 번복되어 신하들이 죽고 귀양 가서 국가의 일이 끝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말한다면, 예로부터 어찌 지금과 같은 때가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이 생각건대 오늘날 근심해야 할 것은 재이(災異)의 위급함뿐만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계(臺啓)에서 죄인에 대한 징토(懲討)를 엄격히 하지 않은 것을 극언하였으니, 지금 비록 대사(大赦)의 은전을 시행하더라도 다만 분분한 동요를 일으키는 데로 귀결될까 염려되고, 악을 징계하는 방도에서도 합당한지 모르겠다.”
하고 모여서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삼사에서 의논할 만한 것이 없다 하여 모두 나오지 않았다. 상은 지평(持平) 어사휘(魚史徽)가 첫 번째로 소란을 일으켰다 하여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공은 상이 주저하고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일에 대하여 한번 분명히 아뢰어서 진퇴를 결정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 뜻은, ‘만일 자신을 많이 자책하고 남을 박하게 책망하는 의리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삼사의 일체 처벌하자는 의논이 끝내 그치지 않을 것이고, 국법(國法)을 빌려 사사로운 원한을 갚으려는 자를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김창협(金昌協)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에 공(公)이 장시관(掌試官)을 맡았고, 그가 평소 공을 사모하였다. 김창협이 지난해 여름에 편지를 보내어 부친의 원수를 엄히 다스려 줄 것을 청하고 이것을 허락한다는 말을 듣기를 원하였다. 공은 탄식하기를,
“설령 내가 그 원수를 엄히 다스린다 해도 어찌 먼저 저에게 허락하겠는가?”
하고는 비록 답장은 하였으나 그 청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달에 양사(兩司)에서 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정인홍(鄭仁弘)을 끌어다가 권대운(權大運) 등에게 견주었다. 박상(朴相 박세채(朴世采))이 공에게 답한 편지에 국옥(鞫獄)의 폐단을 논하면서 인조(仁祖) 계해년(1623, 인조1) 이후에 역도들을 비호한 조목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만약 과연 대역죄를 범하여 신하가 감히 논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르지만, 이러한 부류가 아닌데 원수의 집안을 제한하는 바가 없으니, 또한 저들이 하는 대로 모두 다 맡겨 두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다만 인정이 위험하여 한번 발을 잘못 떼면 사지(死地)로 들어가게 되니, 오직 몸소 공정함과 충성을 간직하여 한결같이 국가의 대체(大體)를 따를 것이요, 자신의 이해(利害)를 그 사이에 개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한 위공(韓魏公)이 자기 몸을 깨끗이 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하였다. 그다음 날에 공에게 다시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상변(上變)한 자들의 정상이 과연 대감의 말씀과 같다면 처분하신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러나 공론에는 이것을 역옥에 관련된 자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자못 사소한 근심이 아닙니다.”
하였다.
박 좌상이 조정에 나온 다음 군주가 자신을 책망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아뢰었으나 공과 옥사를 의논할 때에는 오히려 계해년의 일을 인용하여 공이 아뢴 형벌과 정적(情跡)의 의논에 대해 석연치 않게 생각하였다. 박서계(朴西溪 박세당(朴世堂))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현상(玄相 박세채) 또한 일찍이 말을 삼가지 않은 적이 없으나 다만 옆 사람에게 동요되어 한갓 원망의 소굴이 되었다.”
하였다.
노론들은 이미 국옥을 크게 벌이지 못하자,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의 대북파(大北派)를 다스린 죄를 끌어다가 남인들을 처벌하여 자신들의 사사로운 원한을 통쾌하게 갚고자 하였으므로 마침내 서로 안정되지 못하였다.
병조 참판 이현석(李玄錫)이 상소에 구양수(歐陽脩)의 말을 인용하여 아뢰기를,
“‘아버지가 병드셨는데 몸소 약을 올리지 않는 자는 비록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나 어버이를 죽이려는 뜻은 없는 것입니다. 옥사를 잘 다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판결하게 한다면 마땅히 칼을 잡고 죽인 자와는 죄과(罪科)가 다를 것이다.’ 하였으니, 이 어찌 의의(擬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6월에 상이 거듭 모여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정언 박견선(朴見善)이 중지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마침내 모여서 의논하고, 인하여 입시해서 소결(疏決)할 적에 권대운(權大運) 등의 사안에 이르러서 공이 아뢰기를,
“다른 사람들은 권대운에 비하면 부차적인 죄를 지은 데에 해당합니다. 광해군 때 여러 간흉들은 인목대비를 폐위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인헌왕후(仁獻王后)를 폐위할 때에 간쟁하여 고집하지 않았을 뿐이니, 비록 폐모(廢母)를 청한 자와는 차이가 있으나 현재 여러 죄인들 중 가장 죄가 무거우니, 가볍게 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동안 불쾌해하다가 이르기를,
“그대로 소결하라.”
하였다. 소결을 마치자, 상이 이르기를,
기사년에 폐모할 때에 신하들이 죽음으로써 강력히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오늘날에 말하는 자가 만약 이들을 공도보(孔道輔)와 범중엄(范仲淹)의 죄인이라고 말한다면 옳지만 혹은 심지어 광해군 때에 견주고 있다. 옛말에 ‘돌을 던져 쥐를 잡고자 하나 그릇을 깨뜨릴까 꺼린다.’ 하였으니, 신하들은 우선 제쳐 두고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광해군 때의 일은 천고에 없는 변고인데 마침내 여기에 견주니, 어찌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닌가?”
하였다. 공이 말을 함부로 했다 하여 죄를 청하고, 물러가서 또다시 차자를 올리자, 상은 답하기를,
“경이 의미 없이 말한 것이니, 내 마음속에 서운함을 쌓아 두지 않는다.”
하였다.
○ 응교(應敎) 김진규(金鎭圭)가 공을 심히 원망하고 있었는데, 즉시 상소하여 상의 뜻에 맞추어 자기 당파에서 늘상 하는 말은 숨기고 공이 전후로 경연에서 아뢴 말을 교묘히 비방하여 아뢰기를,
“대신의 뜻은 기사년의 신하들은 심히 죄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지척(指斥)하는 말이 도리어 임금께 귀결되는 것을 염려하지 않았으니, 쥐를 잡으려 하나 그릇을 깰까 우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권신과 간신의 죄를 성상의 몸에 전가시켰고, 엊그저께 아뢴 바에 이것이 더더욱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상소문을 도로 내주고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공이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으며, 다음 날 도성을 나가자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상이, 공이 올린 정사(呈辭)에 답하기를,
“김진규가 틈을 타 대신을 함정에 밀어 넣어서 마음 씀이 바르지 못한데, 지금 대번에 사직을 허락한다면 이는 속으로 실제 서운한 마음을 쌓아 두고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게 보이는 것이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마침내 상소를 남겨 두고 누원(樓院)으로 돌아오니, 승지가 뒤따라왔다. 공이, 사관이 올린 서계(書啓)에 부주(附奏)하기를,
“예로부터 신하가 군주의 마음을 얻은 것을 믿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했다가 자기 몸을 망치고 나라에 폐해를 입혀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고금의 일을 일일이 살펴보시어 지나간 일을 분명히 아실 것이니, 어찌 차마 신으로 하여금 다시 잘못된 전철을 밟게 하시겠습니까. 신은 본래 산림에 은거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뜻을 고상히 하는 사람이 아니니, 만일 본직이 체차된다면 즉시 대궐로 달려가서 다시 남은 죄를 청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신의 목숨이 다하여 반드시 죽어야 할 시기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상소에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신을 계속 부르시는 까닭은 반드시 정승의 직책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이 한번 조정에 나가면 정승의 직책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가벼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네 번째로 상소하자, 상이 예조 판서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여섯 번째 상소에 아뢰기를,
“신은 지난해 이후로 도성 밖으로 나온 것이 지금 세 차례입니다. 그런데 이제 만약 또다시 소명(召命)에 달려간다면 사람이 욕되고 행실이 천한 것이 진실로 진흙을 지고 있는 돼지나 탄환도 뚫지 못하는 솜덩이처럼 파렴치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마음이 매우 답답하여 차라리 직접 찾아가고 싶으나 갈 수가 없다.”
하였다. 상이 하루 있다가 전교하기를,
“대신이 향리(鄕里)의 전원에 오랫동안 머무는 것은 사체로 볼 때 매우 마땅하지 않다. 비록 즉시 나와 명을 받들 수는 없더라도 도성에 들어와 글을 올리는 것은 또한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공이 예조 판서가 올린 서계에 부주하기를,
“해임되기 전에 지레 도성으로 들어간다면 이는 그 몸은 뒤로 물러나고자 하면서도 걸음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어찌 천한 신의 죄를 더 보태고 청명(淸明)한 성상께 수치를 더 끼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일곱 번째 상소에 아뢰기를,
“조정의 사체와 미천한 신의 충정을 이미 갖가지로 다 아뢰었으니, 이로 인해 부월의 형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국법을 달게 받아 성상의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분에 넘치는 짐을 내려놓고 물러나 시신이 구렁에 던져진다 하더라도 성상의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 7월에 공이 여덟 번째로 상소하자, 상은 비로소 해임을 허락하고 이르기를,
“기억하건대 옛날 조종조에서 이러한 경우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우선 대신의 소청을 허락해 주고 다시 임무를 맡길 것을 생각하였으니, 오늘날 나의 뜻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공은 조정에서 오랫동안 벼슬하여 이미 임금의 신임을 크게 얻었으나 거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리로써 결단하여 한 자 한 치도 감히 스스로 구차하게 처신하지 않았다. 전후에 인퇴(引退)할 때에 상께서 돈독히 부르고 우대한 예가 고금에 뛰어나서 여러 번 육경(六卿)을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고 승지가 바로 그다음이었으며, 자주 “친히 맞이하고 직접 찾아가고 싶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나 공은 마땅히 사직해야 할 경우에는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으며, 마땅히 나아가지 말아야 할 경우에는 수십 번 소장(疏章)을 올려 허락을 받고서야 그만두었다.
○ 10월에 상은 다시 공을 영상(領相)에 제수하고 사직소에 답하기를,
“경은 내가 지난날 내린 비지(批旨)의 뜻을 깨닫지 못했는가. 이는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5월에 대신을 인견할 때에 한중혁(韓重爀)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자, 공은 최격(崔格), 이시회(李時檜)와 형벌을 달리할 수 없음을 아뢰었다. 그리하여 사간원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공이 이미 다섯 번째 상소하고, 승지의 서계에 부주하기를,
“신이 지난날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을 들은 것에 대해 또 개탄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군주를 섬기는 도리에 숨김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삼가 다시 소장을 갖추어 공손히 진퇴의 명령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지난해 4월 시골집에 칩거하고 있던 중 삼가 듣건대 성상께서 결연히 국정을 바로잡으시어 위로는 중궁(中宮)이 사가(私家)에서 나오시어 다시 지위와 칭호를 바로잡았고, 아래로는 간신들이 모두 귀양 가고 극형을 받아 국법을 분명히 바로잡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역사책이 나온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거룩한 일이기에 신은 기뻐서 날뛰고 뒤이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시 신을 등용하여 정승의 직책을 맡기는 소명(召命)이 계속 잇따랐으며 말씀하신 내용이 사람을 감동시키니, 신이 스스로 신의 재주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만분의 일인들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감당할 만한 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죄짓고 버려진 지 여러 해 만에 갑자기 특별히 부르시는 명을 받았으니 달려가 사은(謝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조정이 분분히 안정되지 못하여 초창기와 같으니 달려가서 문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이며, 세 조정의 은혜를 받고 삼사(三事)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만일 국가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는 천려일득(千慮一得)의 어리석은 견해가 있다면 비록 끓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라도 진실로 달게 여기는 것이 세 번째 이유입니다.
이른바 ‘천려일득의 어리석은 견해’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 조정을 바로잡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갑인년(1674, 현종15) 이후로 정국이 여러 번 뒤바뀌었는데, 재앙과 난리를 초래한 단초가 당론(黨論)에서 근원하였음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며, 번복이 일어난 빌미는 벼슬살이의 지름길을 찾으려고 연줄을 대는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소인이 선량한 사람을 해친 것은 애당초 말할 거리도 못 되고, 비록 국법에 당연히 처벌받아야 할 자라 하더라도 죄인이 일찍이 스스로 심복한 적이 없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난하는 여론 또한 많습니다. 이 때문에 엄한 처벌이 자주 공경(公卿)에게 시행되나 기강이 더욱 서지 않으며, 조정에서 처분이 매번 새로 내릴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더더욱 의심합니다. 출척(黜陟)에 일정한 기준이 없고, 상벌에 일정한 규정이 없어서, 혼란스럽기가 구름이 흩어지는 듯하고 물결이 치는 듯하니, 이미 위엄과 힘으로 억제할 수 없고, 또 집집마다 찾아가 타이르고 사람마다 깨우쳐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변고와 나쁜 풍습을 한중혁(韓重爀)의 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한중혁은 바로 젖비린내 나는 일개 미친 애송이인데, 또한 감히 사사로이 은화(銀貨)를 모아서 스스로 국가의 운명을 조종할 뜻을 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 비록 천고에 드문 거룩한 일이 있어도 비방하는 말이 먼저 먼 지방에 유포됩니다. 오늘 이와 같으면 내일을 또 기약할 수가 없고, 한 사람이 이와 같으면 다른 사람이 또 장차 뒤이어 일어날 것이니, 신은 진실로 사사로운 마음에 애통하게 여깁니다.
또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래되어 지혜가 날로 높아지시니, 모든 일의 진실하고 거짓됨과 모든 말의 옳고 그름과 국세의 편안하고 위태로움과 세도(世道)의 높고 낮음에 대해 반드시 모두 밝게 통달하여 잘 아시고 새롭게 할 방법을 생각하실 것입니다. 신은 이러한 때에 삼가 가슴속에 가득한 충심(衷心)을 전하를 위해 한번 토로할까 합니다. 신이 또다시 대궐에 들어가 다시 성상의 용안(龍顔)을 뵙고 기대하는 것은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명을 받고 옥사(獄事)를 조사한 뒤에 죄인을 심문하고 문안(文案)을 상고하고서야 한중혁 등의 정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중궁을 복위(復位)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바로 장희재(張希載)의 집에 은화(銀貨)와 인삼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재화는 모두 창기와 주육(酒肉), 안장을 얹은 말과 의복을 사는 비용으로 탕진하였습니다. 그 사람됨의 허망함과 일의 패역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는 본래 대의(大義)에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른 일에 뇌물을 쓰려고 했음을 분명히 징험할 수 있습니다.
신은 이에 성조(聖朝)를 위하여 마음이 열리고 눈이 밝아져서 도깨비와 마귀 같은 자들이 하늘의 햇빛을 범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간사한 자들을 생각하면 살이 떨리고 뼈가 아립니다. 국가가 공연히 이처럼 끝없는 오명(汚名)과 치욕을 받는 것을 삼가 분하게 여겨, 기어이 한번 설욕하고야 말 것입니다. 지난해 가을 탑전에서 직접 올린 차자와 그 뒤에 올린 한 통의 차자에서 이러한 내용을 모두 아뢰었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당당하고 혁혁하게 한 나라를 밝게 굽어 살피고 계시거늘 지금 여우와 쥐새끼와 같은 무리들에게 이처럼 무함을 당하시니, 신은 전하께서 반드시 큰 위엄을 떨쳐 특별히 처단을 내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규례대로 묻고 시일을 지체하다가 마침내는 사형을 감해 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신은 그날 또한 입시하는 대열에 있으면서 그 부당함을 대략 아뢰었으나 또한 감히 끝까지 아뢰고 간절히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전에 이미 한두 차례 이 일을 아뢰었으니, 또다시 아뢴다면 자신의 견해를 기어이 관철시키려는 것이 될까 두려우므로 다른 사람들의 공론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자 하여 주저하며 물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 일이 아직 미결의 사안으로 남은 상태여서 중외 인심의 의혹이 끝내 풀릴 기약이 없고, 조정의 청명한 아름다움을 오늘날에 다시 보기 어려울 듯하니, 신은 안타깝게 여깁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한중혁의 마음이 중전을 복위하려는 데에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대의(大義)가 있는 곳이다. 그 밖의 다른 과실과 악행은 굳이 심히 나무랄 것이 못 된다.’라고 합니다. 아, 만약 한중혁의 행위를 의거(義擧)라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중전을 복위하는 데에 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전을 복위한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이라 하겠지만 장차 전하의 처지를 어떻게 만들려고 한단 말입니까. 더구나 절대로 이러한 이치가 없는 경우이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은 또 말하기를, ‘한중혁은 바로 민암(閔黯)이 죽이고자 했던 자이니, 이제 민암을 위하여 한중혁을 죽여서 민암의 마음을 통쾌하게 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아, 민암의 죄는 이 일을 빙자하여 진신(搢紳)들을 결딴내려는 데에 있었고, 한중혁의 죄는 사람들의 마음을 의심하고 어지럽혀서 마침내 치욕이 성상의 몸에 미치게 한 것이니, 실정은 비록 똑같지 않으나 법은 차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피차를 구별하여 원칙이 흔들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당인(黨人)을 다스리는 일로 말하면 그동안 조정의 신하들이 한쪽 당이 진출하면 다른 한쪽 당이 물러나는 것이 마치 낮과 밤이 상반되고 봄과 가을이 서로 교대하는 것과 같아서 매번 이쪽 사람으로 하여금 저쪽 사람들의 죄를 의논하게 하니, 이는 이른바 상대는 칼과 도마가 되고 나는 어육(魚肉)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심과 분노가 쌓인 가운데에 시행하는 조처가 중도를 얻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
신의 경우를 말하더라도 온 세상이 당인으로 표방(標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전후의 영욕(榮辱)과 부침(浮沈)이 당인들과 서로 배치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기미년(1679, 숙종5)에 상소를 올려 윤휴(尹鑴)와 허견(許堅)의 죄상을 아뢰었을 때에 만일 밝으신 성상께서 신을 곡진히 보살펴 보전해 주지 않으셨다면 신은 반드시 실낱같이 남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인정으로 볼 때 어찌 저들에게 관용을 베풀려는 뜻이 있겠습니까.
다만 오늘날의 시세와 국사를 헤아려 보건대 지난날의 실패한 자취와 잘못한 일을 이제 통렬히 징계하고 맹렬히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른 바 ‘저들이 성급함으로 나를 대하거든 나는 너그러움으로 상대하고, 저들이 포악함으로 나를 대하거든 나는 인(仁)으로 상대한다.’라는 것이 바로 오늘날 본받아야 할 바이니, 일신의 사사로운 뜻을 어찌 감히 그 사이에 개입시킬 수 있겠습니까.
옛날 은(殷)나라의 완민(頑民)은 바로 관숙(管叔), 채숙(蔡叔)과 무경(武庚)의 잔당이었으니, 주(周)나라에게는 반란을 일으킨 백성이 됩니다. 만약 법을 바로잡고 죄를 단정한다면 이들은 모두 삼족(三族)을 멸하는 형벌을 받아야 할 터인데, 주공(周公)은 사람들을 다 죽일 수도 없고 또 다 버릴 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타이르는 말로 첫째는 ‘상왕(商王)의 선비’라고 하여 귀하게 높이고, 둘째는 ‘조정에서 인도하고 선발하여 큰 벼슬에서 일하고 있다.’라고 하여 장려하였으니, 크고 너그러운 뜻과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고 감동시킨 기틀을 천년 뒤에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완민들에게 성을 내고 미워하여 일절 용서해 줌이 없었다면 세상이 변하고 풍속이 바뀌는 교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이 당인들은 대부분 고가(故家)와 세족(世族)의 후손들이니, 스스로 간사한 짓을 하여 중죄를 지은 자는 이미 그 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은 죄의 실정이 다소 가벼운 자들은 점차 용서해 주지 않을 수가 없고, 기록할 만한 재주가 있는 자들은 점차 거두어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성상에게는 ‘한결같이 대하는 인자함’을 지니는 것이 되고 조정의 신하에게는 ‘사람과 함께하되 들에서 한다.〔同人于野〕’라는 것이 됩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는 공평무사함을 비록 갑자기 기약할 수 없으나 사람들의 분노를 해소한다면 혹 거의 국가가 복을 받는 데에 이를 수 있고 조정의 신하들도 참여할 것이니, 어찌 매우 다행스럽지 않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달도 가득 차면 이지러지고 해도 중천에 뜨면 기울어서, 사라지고 자라나며 이기고 지는 형세가 끝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사대부들의 화는 논할 겨를도 없고, 끝내 종묘사직의 우환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신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당인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 것은 저들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후일을 위해 대비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아, 이러한 말은 한쪽 사람이 등용될 때마다 언제나 상대방의 입을 막는 구실이 되어서 피차간에 똑같으니,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오늘 조정의 신하들이 힘을 다하고 정성을 바쳐야 할 것은 성상을 잘 받들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여, 편벽되고 사사로운 습관을 깨끗이 제거해서 반드시 후일에는 이러한 일이 다시 없기를 기약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찌 후일의 화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나는 후일을 위해 대비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마광(司馬光)이 이른 바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것과는 또한 다릅니다.
신이 비록 노둔하고 용렬하나 전하께서 신의 불초함을 알지 못하고 대신의 직책에 두셨으니, 그 책임이 단지 문서를 정리하고 기한을 맞추는 데에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야 조정을 바르게 할 수가 있고, 조정을 바르게 한 뒤에야 사방을 바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성상의 덕을 밝혀서 온 나라 사람들이 의혹하는 바를 없애지 못하고, 당론(黨論)을 깨끗이 소탕하여 조정이 점점 공평함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기근과 도적에 대한 근심이 비록 망극하다고 말하나 이것은 오히려 매우 부차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이 아뢴 두 가지 일에 대해서 신의 애타는 심정을 굽어 살피고 심사숙고하시어 신의 말을 허락해 주셔서 의심하고 어렵게 여기는 바가 없으시다면, 신 한 몸의 질병으로 인한 근심과 낭패할까 우려하는 마음을 또한 어찌 감히 다시 아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바라건대 속히 명하여 신을 체차하시고 다시 어질고 덕 있는 사람으로 정하여, 나라를 장구하게 다스리고 편안하게 할 계책을 찾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진술한 두 가지 일은 말뜻이 절실하니, 진실로 충성스러운 마음이 지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게 한다. 한중혁에게 사형을 감해 준 것은 국법을 기준으로 본다면 과연 형벌을 잘못 적용한 것임을 면치 못하나 이시회(李時檜) 등이 여러 차례 엄히 심문했는데도 굳게 고집하고 자복(自服)하지 않으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아, 지난해에 내가 내린 처분이 청천백일(靑天白日)처럼 분명한데도 하찮은 여우와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겉으로 중전을 복위한다는 대의(大義)에 가탁하여 공공연히 모함하고 욕보이니, 어찌 매우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한결같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시일을 지체하다가 끝내 저들이 죽음에 이른다면 어떻게 나라의 형정(刑政)을 밝히겠는가. 한중혁 등 세 사람을 해부(該府)로 하여금 모두 즉시 법에 따라 처단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당론을 깨끗이 소탕하자는 의견은 진실로 긴요하고 절실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이니, 내 특별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인재를 거두어 쓰라는 말은 더욱 받아들여 따르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수항(金壽恒)이 오시수(吳始壽)의 옥사를 조사할 때에 사마씨(司馬氏)의 말을 인용해서 윤지완(尹趾完)과 조지겸(趙持謙) 등에게 “후일의 보복을 대비해야 한다.”라고 위협하여 마침내 그들과 함께 남인을 죽였는데, 그의 아들인 김창협이 걸핏하면 그 실마리를 끄집어내어 공에게 편지를 보내고 다시 상소하여 아뢰었다. 공은 이에 상을 위하여 분명히 변론하였다.
사간원에서 한중혁 등이 아직 사실대로 자백하지 않았다 하여 다시 엄하게 심문하여 기어이 사실을 낱낱이 실토하게 할 것을 청하니, 시론(時論)은 이를 계기로 은밀히 사형의 형벌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대사간 유득일(兪得一)이 와서 공을 뵙자, 공은 그에게 이르기를,
“자백하기를 기다리도록 청한 것은 그가 살기를 바라서인가, 죽기를 바라서인가? 과연 분해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니, 유득일이 미소 지으며 말하기를,
“대감께서 소인의 마음을 헤아리심이 또한 깊습니다.”
하였다. 부제학 오도일(吳道一)이 상소하기를,
“한중혁은 문적(文蹟)이 명백하여 더 이상 자백받을 만한 정상이 없습니다. 이덕흘(李德屹)과 조사기(趙嗣基)에게는 모두 자백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법을 시행하였으니, 어찌 유독 한중혁에게만 이렇게 고집하십니까?”
하자, 상은 정당하다고 답하였다.
이해 여름에 공이 도성에 며칠 동안 우거하고 있었는데, 밤에 유시(流矢)가 창틈에 두 번이나 꽂히니, 이는 공을 원망하는 자가 심히 위협한 것이었다. 다음 날에 그 당인(黨人)인 이빈(李䎙)이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가 되니, 은자(銀子)를 모은 사람 가운데에 대장(大將)으로 삼고자 한 자였다.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이 매우 심해지자, 공은 병조 판서 민진장(閔鎭長)을 불러 세도(世道)를 더럽히지 말라고 책망하였다. 그다음 해 봄에 사간원에서 비로소 정계하였다.
의금부에서 법을 거행하자, 한중혁 등이 결안(結案)을 작성하는 것을 거역하므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세백(李世白) 등은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낼 것을 계청하였다. 상은 계첩(啓帖)을 도로 내주고 되도록 속히 공초(供招)를 받도록 명령하였는데, 또다시 거역하자 구기(拘忌)에 구애되지 말고 날마다 엄하게 형벌하여 공초를 받도록 명하니, 한중혁 등이 끝내 곤장을 맞고 죽었다.
○ 예전에 평안도(平安道)는 병자호란이 난 뒤부터 오로지 청나라 사신과 청나라에 사신 가는 자들만 응접하게 하여, 전세(田稅)를 상납하는 규정이 없고 백성들이 경도(京都)에 부역하러 오는 일이 없었다. 감영(監營)에는 착호군(捉虎軍)이 있고 병영에는 수영패(隨營牌)가 있어서 부역이 가벼우니, 민정(民丁)들이 부역을 피해 들어가는 소굴이 되어서 그 나머지 본관(本官)에서 부역하는 자들만 매우 괴로웠다. 이후 수십 년 뒤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돌아가면서 서로 이것을 본받아 별도로 명목을 세우고는 장인(匠人)이라 가칭하여 양인과 천민을 막론하고 사람을 모집하니, 그 숫자가 점점 많아져서 끝이 없었다. 경상도 어사(慶尙道御史)가 아뢰기를,
“1필의 삼베를 가볍게 거두어 소속되기를 원하는 길을 열어 주고, 주리(州里)의 부역을 강제로 금하여 투속(投屬)하려는 마음을 심하게 만듭니다. 청컨대 공조에 소속된 장인의 예(例)와 같이 인원수를 정하여 해마다 삼베 2필을 거두어 무거운 부역을 피하고 가벼운 데로 나가는 폐단을 막으며, 그 나머지 인원을 본관에 나누어 주어서 탈이 생긴 군정(軍丁)에 충정(充定)하게 하면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을 당하는 도내의 4, 5천 명이 군포를 납부하는 폐해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해에 이르러 비변사에서 순무사(巡撫使)의 사목(事目)을 이미 정하고 마침내 가벼운 부역의 숫자를 조사하게 하니, 경상도가 6000여 명이고 전라도가 1만 명 가까이 되었다. 공은 이때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 있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전체를 삭감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공사천(公私賤) 2000명을 배정하여 주기로 하였다. 전라도의 전임 감사 이수언(李秀彦)과 후임 감사 김만길(金萬吉), 경상 감사 이인환(李寅煥)은 각각 예전대로 따를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본영의 수요가 많아서 부득이 명령을 어기고 더 배정한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애당초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배정해 준 장인들은 모두 이리저리 유랑하는 백성이니, 만약 군보(軍保)를 옮겨서 정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물고기처럼 놀라고 새처럼 흩어져 달아나 국가는 장정을 얻는 이로움이 없고 감영은 1만여 명의 군포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11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아뢰기를,
“감사가 먼저 솔선하여 법을 받들어 시행해야 하는데, 도리어 ‘내 장차 명령을 어기려 한다.’라고 하니, 어떻게 속관(屬官)들로 하여금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관부(官府)의 재정은 본래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해야 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백성들의 고통을 근심하여 궁가(宮家)의 절수(折受)를 전부 혁파하시니, 생각건대 궁중의 경비가 예전에 비해 부족하겠으나 성상께서 일찍이 머뭇거리거나 어렵게 여기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두 도의 도신(道臣)이 감히 말하기를, ‘본영에 수요가 많다.’라고 하니, 이 어찌 군상(君上)께서 아끼고 절약하시는 뜻을 우러러 헤아리는 것이겠습니까.
또 향민(鄕民)을 부역시키는 규정에 부유한 자들은 대부분 가벼운 역에 들어가고 가난한 자들은 대부분 고된 역에 들어갔는데, 가벼운 역에 종사하는 1만여 명이 모두 유민(流民)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어찌 사리에 가까운 말이겠습니까. 토지와 인민, 정사는 나라의 세 가지 보배이고, 영남과 호남은 나라의 근본인데, 도신이 민정(民丁)을 제멋대로 점유하고서 스스로 서로(西路 평안도)에 견주니, 참으로 지극히 해괴합니다. 모두 엄하게 추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고 이르기를,
“두 감영에 장인을 두기 전에도 경영하는 방도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숫자를 정하여 떼어 준 뒤에 또다시 이러한 요청이 있으니 매우 불가하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익(李翊)이 경상 감사가 되었을 때에 조정에서 장인 3000명을 배정해 주었는데, 그 후 차츰 증가하여 이미 6000명을 넘었습니다. 이인환(李寅煥)이 이른 바 ‘장차 명령을 어기고 더 배정하려 한다.’라고 한 것은 진실로 잘못된 말이지만, 형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을 벗어난 명분 없는 일은 반드시 전부 혁파하여야 후일의 폐단을 없앨 수 있는데, 이제 그 숫자를 줄여서 앞으로 차츰 늘어나는 것을 금하고자 하니, 실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충청도 감영의 예(例)를 따라서 새로 뽑은 수백 가호를 배정해 주어 감영의 수요에 사용하도록 하고, 다시는 장인의 명목을 잔존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심한 흉년에 이러한 조처를 취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지금은 우선 예전처럼 분부하여 거행하고, 내년 가을에 추수하기를 기다려 변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공이 다시 벼슬을 내놓아 오랫동안 이 일에 대해 조처하지 않았다. 이때에 황해도 병영(兵營)에도 수영패가 있어 묘당(廟堂)에서 금지하였으나 폐하지 않았다. 3년 뒤 봄에 이후로는 충정(充定)하지 않고자 하여 비변사의 낭관으로 하여금 공에게 묻게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법을 받들어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하지 않고서 어떻게 후일을 징계하겠는가. 마땅히 첫 번째로 법을 범한 병사(兵使)를 죄주고 이미 충정한 자를 다 혁파하여야 한다.”
하였으나, 묘당에서 이를 따르지 못하였다.
○ 이때 호조 참판 유지발(柳之發)이 아뢰기를,
“독자(獨子)가 일찍 죽어 양자를 세우고자 하나 모두 죽은 아들보다 나이가 많으니,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소목(昭穆 항렬(行列))을 따르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불쌍히 여겨 윤허하였다. 11월에 인견할 때에 공이 아뢰기를,
“아비가 젊고 자식이 늙은 경우는 실로 고금에 없는 일입니다. 조정에서 법을 정하는 것은 장차 훗날 준행하는 준례가 되어야 하니, 혹시라도 예(禮)에 온당하지 못하면 그 일이 한 사람의 후손이 끊어지는 것보다 중합니다. 또 먼 일가 중에 또한 나이가 이에 상당(相當)한 자가 없지 않다고 하니, 그 상소문의 청원을 시행하지 말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 이달에 강민저(姜敏著)가 상소하기를,
“대신(大臣 남구만)이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아 후일의 말할 수 없는 화를 싹트게 하였는데, 전하께서 다시 그를 이 자리에 두심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상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영상(領相)이 공정하고 충성스러우며 청렴하고 정직함은 견줄 사람이 드물다. 일생 동안 붕당을 깨끗이 없애어 국가의 형세를 만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으니, 그가 경연(經筵)의 자리에서 지성스럽게 아뢰고 장주(章奏)에서 간절히 주장한 것은 실로 옛사람에게 뒤지지 않는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매번 당파가 다른 자들에게 헐뜯음을 당하는 것이니, 그를 헐뜯는 자들은 진실로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오늘 강민저의 상소는 바로 한 장의 변괴(變怪)의 글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함을 감히 어진 정승에게 가하였으니, 실로 군주를 무시하고 업신여긴 것이다. 그가 어찌 감히 남의 사주를 받아 앞뒤로 영상에 대한 공격을 담당하고 나선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이런데도 심상하게 조처한다면 끝내는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하고야 말 것이다. 생각이 이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통곡을 하게 된다. 강민저를 해부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엄히 심문하게 하라.”
하였다. 상은 인하여 승지를 보내어 공을 위로하고 권면하여 이르기를,
“아, 오늘날의 세도(世道)는 다시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여우와 쥐새끼 같은 강민저의 무리가 마침내 경을 다시 정승에 임명한 것을 미워하고 경의 상소에 유감을 품고는 제멋대로 중상모략하니,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지난해 박상경(朴尙絅)과 강민저의 상소문이 나왔을 때에 일부의 의논은 혹 ‘이미 대의(大義)에 가탁하였으니 처벌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아, 예로부터 간사한 자들이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해치려고 할 때에 반드시 먼저 그럴듯한 명목을 내세워 사람들의 귀와 눈을 가리고자 하나 저절로 자신의 속셈이 탄로 나게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근래의 일로 말하더라도 지난번 사람들이 한쪽 사람들의 죄를 얽어 만들 때에 국본(國本)이라는 두 글자를 명목으로 삼았다. 간사한 사람들의 수법이 원래 똑같은 투식을 쓴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상이 세 번째로 승지를 보내자, 공은 상소하여 사양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상소한 유신(儒臣)을 국문하는 것은 이제 신 자신 때문입니다. 신은 현재 스스로 큰 죄에 빠져서 감히 강민저를 위해 우러러 청할 수가 없으나 신이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분명합니다.
하였다.
○ 12월에 상은 강민저를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으며, 이틀 동안에 승지를 세 번 보냈다. 공은 병으로 사양한 지 20여 일 만에 출사하였다.


 

[주D-001]중궁(中宮)이 복위(復位)되었다 : 중궁은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가리키는바, 1689년(숙종15)에 폐위되었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복위되었다.
[주D-002]대동미 …… 감면하고 : 대동미(大同米)는 1년에 2회 징수한다. 경기도의 경우 1결(結)당 16두(斗)를 징수하는데, 봄에 8두, 가을에 8두를 징수하였다. 여기에서 1등(等)이란 봄이나 가을 중 한 차례를 가리킨다.
[주D-003]세자의 …… 하였다 : 혼정신성(昏定晨省)은 자식이 저녁이면 부모의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이면 문안하는 것을 이르는바, 숙종은 세자에게 생모인 희빈(禧嬪) 장씨(張氏)에 대해 아침저녁의 문안 인사를 폐하지 말라고 분부하였다.
[주D-004]서문중(徐文重) : 1634~1709.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여 중앙에서 밀려나 금천(衿川)으로 퇴거하였으며 남인의 책동으로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가 되었으나, 장 희빈과 남인들을 징계하는 문제에 온건한 입장을 취하다가 탄핵을 받아 다시 금천으로 은퇴하였다. 그 뒤 훈련대장, 형조 판서, 병조 판서를 지내고, 1700년 영의정을 거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주D-005]설령 …… 없습니다 : 왕릉(王陵)과 진평(陳平)은 모두 전한(前漢) 초기의 재상으로 왕릉은 충직한 반면 진평은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반역을 꾀한 진희(陳豨)를 토벌하러 갔다가 유시(流矢)를 맞고 돌아와 병석에 눕자, 황후인 여후(呂后)가 후임 정승을 물었다. 이 당시 승상(丞相)은 개국 일등공신인 소하(蕭何)였는데, 한 고조는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曹參)을 들고, 조참의 후임으로 왕릉을 들면서 “그는 다소 우직하니, 진평이 도울 수 있다.” 하였다. 이에 그 유언을 따라 정승을 임명한 결과 한나라는 개국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史記 卷8 高祖本紀》 노회신(盧懷愼)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초기의 명재상이었는데, 요숭(姚崇)은 정사를 잘 처리하는 반면 노회신은 청렴하고 근신하였다. 한번은 요숭이 아들의 상(喪)을 당하여 10여 일 동안 조정에 나오지 못하여 처리해야 할 공무가 잔뜩 밀리자, 노회신은 이를 처결하지 못하고 현종에게 사죄하였다. 이에 현종은 말하기를, “짐이 천하의 일은 요숭에게 맡기고, 경에게는 가만히 앉아서 세속을 진정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그 후 요숭이 나와 공무를 보자, 삽시간에 처리되었다. 《舊唐書 卷98 盧懷愼列傳》 《국역 약천집》 제8권의 〈사직하고 겸하여 우상을 돈독히 부를 것을 청한 차자〔辭職兼請敦召右相箚〕〉에 본 차자 내용이 자세히 보이는바, “설령 신이 왕릉과 같이 어질어서 진평이 도와줄 필요가 없고, 요숭과 같은 재주가 있어 노회신이 세속을 진정할 필요가 없다 해도 그 말이 모두 중도에 맞고 일이 다 도리에 부합하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주D-006]곽 장군(霍將軍)이 …… 부분 : 곽 장군은 한(漢)나라 때 대장군을 역임한 곽광(霍光)을 이른다. 무제(武帝)ㆍ소제(昭帝)ㆍ선제(宣帝)를 섬기며 온갖 요직을 역임하여 권력을 장악하였다. 선제 때에 곽광의 처(妻)는 자신의 딸을 선제의 황후로 삼기 위해 황후 허씨(許氏)가 출산할 때에 유모인 순우연(淳于衍)을 시켜 독살하게 하였다. 그 후 그의 딸은 선제의 황후가 되어 곽현(霍顯)ㆍ곽우(霍禹)ㆍ곽산(霍山)ㆍ곽운(霍雲) 등 일족이 부귀를 누렸으나 곽광이 죽자 선제는 친정(親政)하여 곽씨의 병권을 거두고 모반죄로 몰아 그의 족당(族黨)을 몰살시켰다. 《漢書 卷68 霍光傳》
[주D-007]팔의(八議) : 단죄할 적에 형벌을 감해 주는 여덟 가지 조목으로, 즉 의친(議親)ㆍ의고(議故)ㆍ의현(議賢)ㆍ의능(議能)ㆍ의공(議功)ㆍ의귀(議貴)ㆍ의근(議勤)ㆍ의빈(議賓)을 이른다.
[주D-008]박소(薄昭) : 한(漢)나라 문제(文帝)의 어머니인 박 태후(薄太后)의 오라비로, 대왕(代王)으로 있던 문제를 오게 하여 황제로 옹립하고 장군에 올랐으나 황제의 사자를 죽였다가 문제로부터 자살하라는 압력을 받고 결국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史記 卷10 孝文帝本紀》
[주D-009]존비(尊卑)의 신분이 뒤바뀌어 : 중궁인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나고 후궁인 희빈 장씨가 중궁이 되어, 높은 사람이 도리어 낮아지고 낮은 사람이 도리어 높아진 사건을 가리킨다.
[주D-010]중궁 …… 다하며 : 규목(樛木)은 나뭇가지가 아래로 늘어진 것이다. 《시경》 〈주남(周南) 규목〉에 “남쪽에 가지가 늘어진 나무가 있으니 칡덩굴이 감겨 있도다. 마음씨 좋은 군자여 복록으로 편안히 하도다.〔南有樛木 葛藟纍之 樂只君子 福履綏之〕” 하였는바, 마음씨 좋은 군자란 후덕한 왕비(王妃)를 가리킨다. 이는 곧 군주의 정실부인이 후덕하여 후궁들이 모두 그의 비호를 받고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소성(小星)은 작고 희미한 별이다. 《시경》 〈소남(召南) 소성〉에 “희미한 저 작은 별이여, 세 개와 다섯 개가 동쪽에 있도다. 조심조심 밤길을 가서 이른 아침과 저녁에 임금의 처소에 있으니 이는 운명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네.〔嘒彼小星 三五在東 肅肅宵征 夙夜在公 寔命不同〕” 하였는바, 옛날 후궁들은 군주를 모실 적에 하룻밤을 독차지하지 못하여 초저녁에 가서 군주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왔다가 새벽이면 다시 군주의 침소에 가서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데 그쳤다. 이 때문에 후세에는 첩을 소성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곧 왕비는 후궁들을 질투하지 아니하여 잘 보살펴 주고 사랑하며, 후궁들은 신분이 높은 왕비를 시기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편안히 여겨 왕비를 지성으로 섬겨야 함을 말한 것이다.
[주D-011]한(漢)나라 …… 뿐이니 : 마 태후(馬太后)는 후한 명제(後漢明帝)의 후비(后妃)이고 유 태후(劉太后)는 북송 진종(北宋眞宗)의 후비이다. 후한의 장제(章帝)와 북송의 인종(仁宗)은 모두 태후의 친아들이 아니었으나 태후를 잘 받들기로 유명하였는바, 곧 후일 희빈 장씨가 낳은 왕세자가 즉위했을 때에 대비인 인현왕후를 잘 섬기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주D-012]헤아릴 …… 것입니다 : 1689년(숙종15) 2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이 집권하고 원자를 세우는 것을 반대한 노론의 대신인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되었으며 인현왕후가 폐출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13]후한(後漢)의 …… 때에도 :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는 황후 곽씨(郭氏)를 폐위하고 귀인(貴人)인 음씨(陰氏)를 황후로 세웠다. 곽 황후(郭皇后)의 소생인 유강(劉彊)을 일찍이 황태자로 삼았으나 모후(母后)가 폐위된 다음 유강이 태자의 자리를 사양하니, 동해왕(東海王)으로 있던 유양(劉陽)을 다시 태자로 책봉하였다. 《後漢書 卷1 光武帝紀下》 명나라 선종(宣宗)은 처음에 호씨(胡氏)를 황후로 세웠으나 귀인인 손씨(孫氏)가 태자(太子)를 낳자 손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호씨는 물러나 별궁에 거처하게 하였는데, 뒤에 이것을 후회하여 매양 스스로 한탄하기를, “이는 짐이 나이 어릴 때에 저지른 일이다.” 하였다. 《明史 卷9 宣宗本紀》 여기서는 두 군주가 모두 정실부인을 폐위하고 귀인을 황후로 세웠으므로 인용한 것이다.
[주D-014]맹자(孟子)의 …… 있겠습니까 : 아성(亞聖)은 다음가는 성인이라는 뜻으로 맹자를 가리킨다. 숙종이 장희재를 더 이상 심문하지 말라고 명한 데 대하여 약천(藥泉)이 “인(仁)한 자는 그 사랑하는 바로써 그 사랑하지 않는 바에 미친다.”라고 칭송하였는데, 박상경(朴尙絅)의 상소에 “본시 맹자의 말씀은 자기의 마음으로 남을 이해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적을 비호하는 데에 인용하고 있으니, 이는 그들의 마음이 장희재가 있는 줄만 알고 전하와 중궁이 계심은 알지 못하는 것이며, 아성까지 모함한 것이니,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肅宗實錄 20年 閏5月 11日》
[주D-015]곤전(坤殿)을 모해하려 했다 : 곤전은 중전을 달리 지칭하는 말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가리킨다. 인현왕후가 폐비로 사가에 있을 때에 자신의 복위를 위해 은자(銀子)를 냈다고 장희재(張希載)가 그 말을 전한 것이다.
[주D-016]원정(原情) : 관아에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거나 또는 그러한 내용을 적은 글을 이른다.
[주D-017]직접 …… 아니라 :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승하하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여 주공(周公)이 섭정하자, 은(殷)나라 유민(遺民)을 감시하던 관숙(管叔) 등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반역을 도모하였다. 이에 주공이 이들을 토벌하였으나 성왕이 유언비어에 대해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을에 큰바람이 불고 천둥 벼락이 쳐 벼가 모두 쓰러지는 변괴가 일어났다. 성왕이 점을 치기 위하여 서고(書庫)를 뒤지다가 옛날 무왕이 병을 앓을 적에 주공이 축문을 지어 무왕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축원한 글을 보고는 주공이 절대로 찬탈할 마음이 없었음을 분명히 알았다. 이에 성왕이 주공을 맞이하기 위하여 교외로 나가니, 역풍(逆風)이 불어 쓰러졌던 벼가 모두 일어났으며,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한다. 《서경》 〈금등(金縢)〉은 바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군주가 정승을 친히 맞이하는 것이 주나라 이후에는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
[주D-018]상소하여 …… 아뢰자 : 대본에는 ‘疏言上意疑阻’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藥泉年譜)》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疏’ 앞에 ‘陳’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19]존귀함이 …… 것이었다 : 장희재를 국문하여 사형에 처한 다음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위해 신하들이 힘을 다해 변명하고 비호하게 되면 국모인 중궁과 희빈을 똑같이 높이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20]가의(賈誼)의 상소 :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양(梁)나라의 태부(太傅)로 있던 가의가 상소하여 잘못을 저지른 대신들을 함부로 대하는 당시의 폐습을 말하면서 “염치와 예절로 군자를 다스리므로 사사(賜死)하는 일은 있어도 죽이고 욕보이는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D-021]은자(銀子) : 대본에는 ‘銀于’로 되어 있는데, 필사 과정의 오류로 판단되어 ‘于’를 ‘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2]김원섭(金元燮)과 민장도(閔章道) : 이 부분은 문맥이 통하지 않아 《숙종실록》 20년 4월 26일 기사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23]세 공주(公主) : 익평군(益平君) 홍득기(洪得箕)에게 출가한 숙안공주(淑安公主),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출가한 숙명공주(淑明公主),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출가한 숙휘공주(淑徽公主)를 이르는바, 이들은 모두 효종(孝宗)의 딸이다.
[주D-024]중궁(中宮)이 …… 상소 : 중궁은 인현왕후 민씨를 가리킨다. 이현일(李玄逸)은 희빈 장씨를 옹호하는 상소문을 올려 “폐비 민씨가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하늘을 끊었다.” 하고, 또 민씨를 가리켜 ‘저〔彼〕’란 말을 썼으므로 불공하고 불경하다고 논죄하였다.
[주D-025]목내선(睦來善)의 불공경(不恭敬)이란 말 : 《국역 약천집》 제13권의 〈목내선의 죄를 단정한 의〔睦來善定罪議〕〉에 보인다.
[주D-026]종묘사직이 …… 편안해졌습니다 :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에 허견(許堅)과 이남(李柟)의 역모 사실이 미리 발각된 것을 이른다.
[주D-027]오늘날 내리신 조처 :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복위시키고 노론과 소론을 등용한 일련의 조처를 가리킨 것이다.
[주D-028]왕세충(王世充)과 …… 같다 :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즉위하기 전에 왕세충과 두건덕(竇建德)을 쳐서 멸하였다. 뒤에 태종의 형인 건성(建成)과 아우인 원길(元吉)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태종이 부황(父皇)인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형제들이 저를 죽이려는 것은 아마도 왕세충과 두건덕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려는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舊唐書 卷64 高祖二十二子列傳》 여기서는 강만태(康晩泰) 등을 죽이는 것이 민암(閔黯)을 위하여 원수를 갚아 주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주D-029]서종제(庶從弟) : 남종만(南從萬)을 가리키는바, 《국역 약천집》 제8권의 〈실정과 병세를 아뢰고 사직한 차자〔陳情病辭職箚〕〉에 보인다.
[주D-030]조정을 …… 올려놓는다 : 조정의 처사를 공명정대하게 처리하여 해와 달처럼 높고 빛나게 함을 이르는바, 소식(蘇軾)의 〈영주에서 올린 표문〔英州謝上表〕〉에 보인다. 《東坡全集 卷69》
[주D-031]지난날의 처분 : 중궁을 복위한 일을 가리킨다.
[주D-032]정봉(停捧) : 조세나 환곡 따위의 납부를 중지함을 이른다.
[주D-033]서인(書人)의 …… 한다 : 서인은 역서 서리(易書書吏)를 가리킨다. 역서(易書)란 과장에서 시험관이 응시자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답안을 다른 사람을 시켜 다시 옮겨 쓰게 한 제도로, 이때 이 일을 맡은 사람이 역서 서리인데, 과장에서 이들을 통한 부정이 자행되었으므로 당시 재상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서 잘 아는 사람을 역서 서리로 들여보내려고 다투기까지 하였다.
[주D-034]시소(試所)의 극위(棘圍) : 시소는 과거 시험을 치르는 곳이며, 극위는 과거 보는 장소에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가시나무로 막아 놓은 울타리를 이른다.
[주D-035]협서인(挾書人) : 과장(科場)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사람을 이른다.
[주D-036]옛날에 …… 있었는데 : 시학(視學)은 임금이 국학(國學)에 거둥하여 석전례(釋奠禮)와 양로례(養老禮)를 행하는 것을 이르며, 교문(橋門)은 태학으로 통하는 다리의 문을 이른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친히 벽옹(辟雍)에 나아가 양로례를 거행하고 명륜당에 앉아 스스로 경전(經傳)을 강하고 여러 학자들로 하여금 경서(經書)를 가지고 문답(問答)하게 하니, 교문을 둘러싸고 구경하는 사대부들이 억만(億萬)을 헤아릴 만큼 많았다. 《後漢書 卷79 儒林列傳 序》
[주D-037]강상 죄인(綱常罪人) :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한 죄인을 이르는 말로, 부모나 남편을 죽인 자, 노비로서 주인을 죽인 자, 또는 관노(官奴)로서 관장(官長)을 죽인 자 등을 이른다.
[주D-038]악역(惡逆) : 중죄로 다스리던 팔역(八逆)의 하나로 부모 및 조부모를 구타하거나 죽인 죄를 이른다.
[주D-039]십악(十惡) : 《대명률(大明律)》에 정한 10가지 큰 죄로 모반(謀反), 모대역(謀大逆), 모반(謀叛), 악역(惡逆), 부도(不道), 대불경(大不敬), 불효(不孝), 불목(不睦), 불의(不義), 내란(內亂)을 이른다.
[주D-040]주루(邾婁)나라 정공(定公) : 주루나라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딸려 있던 작은 나라이고, 정공은 누구의 시호인지 확실하지 않다. 목공(穆公) 때에 추(鄒)라고 나라 이름을 바꿨는바, 이 내용은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보인다.
[주D-041]예(禮)가 법제에서 다한다 : 이 말은 《통전(通典)》의 〈기련위인후(旣練爲人後)〉에 보이는바, 복제(服制)가 다하여 더 이상 강등할 수 없음을 이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을의 수령도 현감이 가장 낮아 현감에서 끝나므로 관장이 현감인 고을에서는 더 이상 강등할 수가 없어 현감을 그대로 둠을 의미한다.
[주D-042]여러 현의 아래에 : 대본에는 ‘諸之下’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諸’ 다음에 ‘縣’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43]서사(署事) : 육조(六曹)의 정무를 먼저 의정부에 보고하여 토의한 후 임금에게 계주(啓奏)하는 일을 이른다.
[주D-044]조정의 정사에 : 대본에는 ‘朝廷’으로 되어 있는데, 문맥이 통하지 않아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廷’을 ‘政’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45]허함(虛銜) : 실제의 직사(職事)가 없는 명칭만의 관직을 이른다.
[주D-046]초옥(楚獄) :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있었던 초왕(楚王) 영(英)의 역옥(逆獄)을 이른다. 수천 명이 애매하게 연좌되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후세에는 억울한 옥사를 초옥이라 칭하였다. 《後漢書 卷42 楚王英列傳》
[주D-047]개기(改紀) : 정치를 변경하여 새로이 한다는 말로, 여기서는 1694년(숙종20)에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복위되고 남인을 축출한 일을 가리킨다.
[주D-048]주급(周急) : 경제적으로 곤궁한 생활을 구휼해 줌을 이른다.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곡식과 고기를 대 주는 것을 가리킨다. 《論語 雍也》 《孟子 萬章下》
[주D-049]인입(引入) : 벼슬아치가 잘못된 일에 대하여 인책(引責)하고 출사하지 않음을 이른다.
[주D-050]신양(申懹)의 상소 : 1695년(숙종21) 2월 10일에 대사간 신양이 장희재(張希載)를 의친(議親)으로 관대하게 처분한 일로 상소하였다.
[주D-051]원수(元首)와 고굉(股肱) : 원수는 머리로 국가의 원수 즉 임금을 이르고, 고굉은 팔과 다리로 보필하는 신하를 이른다.
[주D-052]흥판소(興販所) : 많은 물건을 흥정하여 매매하는 곳을 이른다.
[주D-053]우계(牛溪)와 …… 자들 : 우계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을 반대한 북인과 남인을 가리킨 것이다. 우계와 율곡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여 영남 지방에서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D-054]연영원(延英院)과 존현당(尊賢堂) : 연영원은 영재(英才)의 학생을 맞이하는 집이고 존현당은 훌륭한 스승을 모시는 집으로,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숭정전(崇政殿)의 설서(說書)가 되어 손각(孫覺) 등과 함께 만든 학제(學制)에 보인다.
[주D-055]요컨대 : 대본에는 ‘惡’으로 되어 있는데, 필사 과정의 오류로 판단되어 ‘要’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56]오도일(吳道一)이 …… 일 : 외직을 맡았다는 것은 청풍 부사(淸風府使)로 있었음을 이른다. 《숙종실록》 20년 12월 21일 기사에 의하면 이수언(李秀彦)이 아뢰기를, “양현(兩賢)을 출향(黜享)했을 때에 오도일은 청풍 부사로 있으면서 벼슬자리를 탐하고 녹(祿)에 연연하여 자처(自處)할 바를 생각하지 않고 상소 진달(陳達)을 핑계로 우선 교묘하게 피하다가 일이 지난 뒤에 버젓이 소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조부(祖父) 고(故) 상신(相臣) 오윤겸(吳允謙)이 곧 성혼(成渾)의 고제(高弟)였고 보면, 성혼을 존경하기를 보통 사람들보다 배나 더해야 할 터인데, 이런 짓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주D-057]국가가 …… 번입니다 : 첫 번째는 1674년(현종15)에 대왕대비 장씨(張氏)의 복제(服制)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 1659년(효종10)에 승하한 효종의 복제 문제까지 추죄(追罪)하여 송시열(宋時烈)의 관직을 삭탈하고 남인이 집권한 일이고, 두 번째는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인 허적(許積)과 윤휴(尹鑴) 등이 사사(賜死)되고 서인이 집권한 일이고, 세 번째는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장 희빈(張禧嬪)이 중전에 오르고 이에 반대한 김수항(金壽恒)과 송시열 등이 사사되고 남인이 재집권한 일이고, 네 번째는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장 희빈이 쫓겨나고 민암(閔黯)이 사사되었으며 서인인 소론과 노론이 다시 집권한 일이다. 그러므로 20년 동안 네 번 조정이 번복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주D-058]삼자(三刺)의 법 : 삼자는 세 번 묻는 것을 이른다. 이는 주(周)나라 제도에 큰 사건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반복해서 계의(計議)한 뒤에 죄안을 판결했던 데서 온 말이다. 첫째는 여러 신하에게 묻는 것이고, 둘째는 여러 관리에게 묻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들에게 묻는 것이다. 《周禮 秋官 小司寇》
[주D-059]권대운(權大運) : 1612~1699.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이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자, 파직당하고 영일(迎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풀려나와 영의정에 올라 유배 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서인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고향에 돌아갔다. 죽은 뒤 왕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
[주D-060]권대운의 상소문 : 1689년(숙종15)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할 때에 권대운(權大運)이 올린 상소문을 이르는데, 그 내용이 강력히 간쟁하지 않고 면피(免避)하려고 올린 것이라 하여 문제가 된 것이다.
[주D-061]방귀전리(放歸田里) : 방축향리(放逐鄕里)와 같은 말이다.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는 것으로, 유배(流配)보다는 한 등급 가벼운 형벌이다.
[주D-062]신하로서 …… 묵형(墨刑)이다 : 이 내용은 《서경》 〈이훈(伊訓)〉에 보인다.
[주D-063]당나라 …… 조서(詔書) : 당 덕종(唐德宗)이 주자(朱泚)의 난(亂)을 피하여 봉천(奉天)으로 파천(播遷)하였는데, 이에 육지(陸贄)가 덕종에게 아뢰어 황제 자신을 책하는 조서를 내리게 하고, 반역을 꾀한 주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사면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을 크게 복종시킬 수 있었다. 《冊府元龜 帝王部》
[주D-064]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정인홍(鄭仁弘) : 이들은 모두 광해군 때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를 주장하였다가 1623년(인조1)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자들이다.
[주D-065]한 위공(韓魏公) : 위공은 북송의 명재상인 한기(韓琦)의 봉호로 자는 치규(稚圭)이다. 범중엄(范仲淹)과 함께 서하(西夏)의 침략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워 ‘한범’이라 불렸으며, 당시 조정에 분쟁이 많아 남들로부터 큰 의심을 받고 위태로운 경지에 빠졌으나 끝까지 공정하고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여 몸을 깨끗이 하였다.
[주D-066]계해년의 일 : 1623년(인조1) 인조가 반정한 일을 가리킨 것이다.
[주D-067]일찍이 …… 없으나 : 대본에는 ‘未嘗言之不勤’으로 되어 있는데, 필사 과정의 오류로 판단되어 ‘勤’을 ‘謹’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68]기사년에 폐모할 때 : 1688년(숙종15)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한 일을 이른다.
[주D-069]공도보(孔道輔)와 범중엄(范仲淹)의 죄인 : 공도보는 공자(孔子)의 45대손으로, 송(宋)나라 인종(仁宗) 명도(明道) 2년(1033)에 곽 황후(郭皇后)가 폐위되자 범중엄 등과 함께 곽 황후의 폐위에 극력 반대하여 직신(直臣)으로 명성이 높았다. 《宋史 卷297 孔道輔列傳》
[주D-070]공이 …… 청하고 : 대본에는 ‘公以忘請罪’로 되어 있는데, 필사 과정의 오류로 판단되어 ‘忘’을 ‘妄’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71]진흙을 …… 돼지 : 《주역》 〈규괘(睽卦) 상구(上九)〉에 나오는 말로, 더럽고 비루하여 사람들이 몹시 싫어하고 천시하는 것을 뜻한다.
[주D-072]달려가 …… 이유이고 : 대본에는 ‘不可不趨謝一者’로 되어 있는데, 필사 과정의 오류로 판단되어 ‘者’를 ‘也’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73]삼사(三事)의 지위 : 삼사는 삼공(三公) 곧 의정부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가리킨다. 《시경》 〈소아(小雅) 우무정(雨無正)〉에 “삼사와 대부가 새벽부터 밤늦도록 봉직하려 하지 않는다.〔三事大夫 莫肯夙夜〕” 하였는데, 《시경집전(詩經集傳)》에 “삼사는 삼공이고 대부는 육경(六卿)과 중대부(中大夫), 하대부(下大夫)이다.” 하였다.
[주D-074]은(殷)나라의 …… 잔당이었으니 : 완민(頑民)은 새 왕조인 주(周)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완악한 백성을 뜻한다. 주공(周公)은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정벌한 다음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은나라에 봉하여 탕왕(湯王)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자신의 형인 관숙(管叔)과 아우인 채숙(蔡叔)ㆍ곽숙(霍叔)으로 하여금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 후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하여 주공이 섭정을 하자, 관숙과 채숙 등은 주공이 장차 어린 군주를 내쫓고 천자가 될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무경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주공은 이들을 토벌하여 처형하는 한편 새 왕조에 협력하지 않는 은나라 백성들을 효유(曉諭)하였는데, 《서경》의 〈다사(多士)〉는 바로 이들을 타이른 내용이다.
[주D-075]첫째는 …… 장려하였으니 : 《서경》 〈다사〉에 “주공이 처음으로 새 도읍인 낙읍(洛邑)에서 상왕의 선비들에게 고하셨다.〔周公 初于新邑洛 用告商王士〕”라고 하였고, 또 “이제 너희들은 말하기를, ‘하나라의 신하들이 계적하고 간발하여 왕의 조정에 있었으며, 일하는 자들이 백료에 있었다.’ 하였다.〔今爾其曰 夏迪簡在王庭 有服在百僚〕”라고 하였다.
[주D-076]고가(故家)와 세족(世族) : 대대로 벼슬하여 국가와 운명을 함께하는 훈구세가(勳舊世家)를 가리킨다.
[주D-077]사람과 …… 한다 : 《주역》 〈동인괘(同人卦)〉의 괘사(卦辭)에 보이는 내용이다.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뜻을 합하여 일을 함께 한다는 뜻이며, 들에서 한다는 것은 당파나 지연(地緣), 학연(學緣)에 얽매이지 않고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道)로써 함을 이른다.
[주D-078]사마광(司馬光)이 …… 것 : 사마광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으로 그가 다시 집권하여 왕안석(王安石)이 시행하던 신법(新法)을 고치자, 혹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예전의 신하 중에 장돈(章惇)과 여혜경(呂惠卿)과 같은 무리들은 모두 소인이니, 후일에 이들이 만일 황제를 이간한다면 붕당의 화(禍)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광은 “하늘이 만약 우리 송나라를 돕는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과감하게 모두 개혁하였다. 《聞見錄》
[주D-079]사마씨(司馬氏)의 말 : 사마씨는 사마광(司馬光)으로 북송(北宋)의 명재상이다. 그가 다시 집권하여 왕안석(王安石)이 시행하던 신법(新法)을 고치자, 혹자가 그에게 말하기를, “예전의 신하 중에 장돈(章惇)과 여혜경(呂惠卿)과 같은 무리들은 모두 소인이니, 후일에 이들이 만일 황제를 이간한다면 붕당의 화(禍)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사마광은 “하늘이 만약 우리 송나라를 돕는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과감하게 모두 개혁하였다. 《聞見錄》
[주D-080]착호군(捉虎軍) : 백성들에게 폐해를 입히는 호랑이를 잡는 일을 맡은 군사이다.
[주D-081]수영패(隨營牌) : 평안도 관찰사와 병마절도사에 딸린 군대, 또는 그에 속한 군사를 이른다.
[주D-082]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첨정(黃口簽丁) : 백골징포는 죽은 자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함을 이르고, 황구첨정은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리는 것을 이른다.
[주D-083]궁가(宮家)의 절수(折受) : 궁가는 왕실의 일부인 궁실(宮室)과 왕실에서 분가하여 독립한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가 살던 집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절수는 이들 궁가가 자기 몫으로 전토(田土)나 결세(結稅) 따위를 국왕에게서 떼어 받는 것을 이른다.
[주D-084]마땅히 …… 병사(兵使) : 대본에 ‘宜罪其犯之兵使’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其’ 다음에 ‘首’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85]호조 참판 유지발(柳之發) : 대본에는 ‘參判柳之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參’ 앞에 ‘戶曹’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86]그 …… 중합니다 : 대본에는 ‘其事尤重於人之絶嗣’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於’ 다음에 ‘一’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87]그 …… 어떻겠습니까 : 대본에는 ‘其疏何如’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其’ 앞에 ‘勿施’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88]간사한 …… 때에 : 대본에는 ‘壬之謀害忠賢也’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壬’ 앞에 ‘姦’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89]사람들의 …… 하나 : 대본에는 ‘欲掩人之指目’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指’를 ‘耳’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90]한쪽 …… 때에 : 대본에는 ‘構罪一番’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番’ 다음에 ‘人’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91]국본(國本) : 나라의 뿌리란 뜻으로 세자(世子)를 가리킨다.
[주D-092]감히 …… 없으나 : 대본에는 ‘不敢爲著有所仰請’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爲’ 다음에 ‘敏’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93]한 가지 일만으로도 분명합니다 : 대본에는 ‘亦可矣’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亦’ 앞에 ‘一事’를 보충하고 ‘矣’ 앞에 ‘決’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94]이틀 …… 보냈다 : 대본에는 ‘日遣承旨’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日’ 앞에 ‘二’를, ‘日’ 다음에 ‘中三’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약천연보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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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68세 병자년(1696, 숙종22)
1월에 비변사에 나아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버려져 있는 시체를 묻어 주게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차자를 올려 종묘(宗廟)에서 연주하는 악장(樂章)을 늘리고 줄이는 일을 늦출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마침내 서서히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이달 인견할 때에 제도(諸道)에서 진휼(賑恤)할 때에 암행 어사를 보내어 염찰할 것을 청하였으며, 이제신(李濟臣)과 임숙영(任叔英)에게 시호를 내리는 것을 중지하여 한결같이 전장(典章)을 따를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였다. 명을 받들어 휘릉(徽陵)을 봉심하였다.
2월에 인견할 때에 임영(林泳)의 영구(靈柩)를 옮길 상여꾼을 지급해 주기를 청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명을 받들어 휘릉을 봉심하였다.
3월에 세자가례도감 도제조(世子嘉禮都監都提調)에 차임되었다.
4월에 명을 받아 장가(張家 장희재(張希載) 집안) 묘(墓)의 무고(巫蠱)의 옥사(獄事)를 조사하였다.
5월에 입시(入侍)하여 현상금을 걸고 도적을 잡아들이는 일은 경기(京畿)를 넘어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질병으로 가례도감 도제조를 해임해 줄 것을 청하여 허락받았는데, 가례가 끝나자 상은 말을 하사하였다. 이달에 네 번째 정사(呈辭)를 올리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이날 거듭 무고의 옥사를 조사할 것을 명하였다.
6월에 국청(鞫廳)에서 청대하여 사안을 끝까지 다스리지 말 것을 청하자, 상은 마침내 국청을 파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네 번째 정사를 올렸다. 이세기(李世耆) 등의 모함하는 말로 인하여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였으며, 다음 날 도성을 나오니, 상이 다시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이현명(李顯命)의 모함으로 인하여 상소문을 남겨 두고 광주(廣州)로 향하였는데, 승지가 뒤따라왔다. 세 번째로 상소하니 상이 해임을 허락하고 영중추부사에 제수하였으며 승지에게 함께 돌아오라고 명하였다. 이건명(李健命)의 모함으로 인하여 마침내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오니, 승지가 뒤따라왔으며, 어필(御筆)로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7월에 여덟 번째로 상소하자 상은 승지에게 우선 돌아오라고 명하고,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8월에 이현명이 멋대로 무함하니, 상이 형벌을 가하여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이달에 상은 사관(史官)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고, 별감(別監)을 보내어 전복탕(全鰒湯)을 하사하였다.
9월에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고 주급(周急)할 것을 명하였다. 이여(李畬)의 상소로 인하여 공은 이달에 열세 번째 상소를 올리고 마침내 결성(結城)으로 돌아가니, 상은 사관을 보내어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10월에 승지가 뒤따라왔으며, 열네 번째로 상소하자, 상은 승지에게 우선 돌아오라고 명하고, 별감을 보내어 어시(御詩)와 전복탕, 타락죽을 하사하였다. 이달에 상이 병환이 있었다.
11월에 상이 사관을 보내어 오라고 명하였다. 평택(平澤)에 이르러 상소하자, 상은 사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고, 와내(臥內)에서 인견하였다.
12월에 상은 약방에서 선온(宣醞)하고 사역원 도제조(司譯院都提調)에 차임하였다. 상의 체후가 평상을 회복하니,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였다. 상소하여 돌아갈 것을 청하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머물도록 권면하였다. 이달에 인견할 때에 상이 친히 손을 잡고 만류하니, 마침내 서울 집에 머물렀다. 이해에 서녀(庶女)가 태어났다.

○ 1월에 공은 비변사에 좌기(坐起)하여 패를 보내어 한성부(漢城府)와 오부(五部)의 관원을 불러, 성안의 유리걸식하는 무리들을 각 부(部)에서 진휼청(賑恤廳)에 즉시 보고하지 않아 쓰러져 죽은 자가 많다 해서 엄하게 신칙하여 속히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후로 입직(入直)한 오부의 관원 중에 태만한 자를 도태시킬 것을 계청하고, 진휼청으로 하여금 버려져 있는 시신을 묻어 주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윤허하였다.
이달에 빈청 인견(賓廳引見) 때에 공이 아뢰기를,
“지난날 신하들이 암행 어사를 많이 보낼 것을 청하자, 혹자가 이르기를, ‘제도의 수령들이 현재 진휼할 곡식을 마련하고 있으니, 염찰(廉察)하는 것이 그 일을 방해할까 두렵다.’ 하였습니다. 지금 여러 사람의 의논은 모두 이르기를, ‘곡식을 모으는 일이 끝나서 진휼이 이제 막 시작되었으니, 이때에 어사를 보내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진휼이 끝난 뒤에 염찰한다면 단지 수령의 공과 죄를 단정할 뿐이니, 진휼하는 정사에 시기를 놓쳐 아무런 효과가 없다.’ 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비록 일시에 모든 고을에 시행하기는 어려우나 염찰할 고을을 제비로 뽑아 계속해서 어사를 보내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 예전에 종묘의 악장(樂章)을 초헌(初獻)에는 〈보태평(保太平)〉 11성(聲)을 사용하였는데, 인입(引入)하고 인출(引出)할 때에 각각 1장(章)이 있고, 그 사이에 9장을 사용하였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는 모두 〈정대업(定大業)〉 11성을 사용하였는데, 인입하고 인출할 때에 또한 각각 1장이 있고, 그 사이에 또한 9장을 사용하였다. 선왕의 공덕을 칭술하는 것은 목조(穆祖)에서 비롯되어 세종(世宗)에 이르렀고, 영녕전(永寧殿)도 이와 같았다. 문소전(文昭殿)은 각 묘실(廟室)마다 각각 악장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문소전을 혁파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에 예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아뢰기를,
“종묘에서 연주하는 음악은 단지 국초의 문신이 처음에 정한 몇 장을 가지고 열성조(列聖朝)에 나누어 올리는데, 여러 선왕의 사업과 공적이 각각 달라서 감동시킬 수가 없으니, 묘실마다 각각 1장을 찬(撰)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선조(宣祖)가 자문을 구해 의논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인조 3년(1625) 가을에 연신(筵臣) 오윤겸(吳允謙)이 다시 이 일을 청하였다. 이듬해 여름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각 묘실의 음악이 악장은 길고 전헌(奠獻)은 쉽게 끝나서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술잔을 올리는 것이 이미 끝나니, 형편상 반드시 곡조와 춤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음악을 열성조의 묘실에서 통합으로 연주하는 것이 진실로 정리(情理)와 예법에 맞습니다. 명나라는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묘실에 각각 악장이 있는데, 인종(仁宗) 이하로 이것을 통용하니,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찬정(撰定)할 때에 이러한 전례(典禮)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상이 문신 이호민(李好閔)에게 명하여 선조(宣祖)의 묘실에서 연주하는 악장인 〈중광(重光)〉 1장을 별도로 찬하게 하였다. 인조를 부묘(祔廟)하게 되자 장악원 정(掌樂院正) 권우(權堣)가 선조의 예를 따라 별도로 악장을 찬할 것을 청하였다.
현종 때에 장악원 제조 송준길(宋浚吉)이 아뢰기를,
“위로는 세조(世祖), 성종(成宗), 중종(中宗) 3대와 아래로는 인조(仁祖)와 효종(孝宗) 2대에만 별도로 악장을 찬하지 않았으니,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점입니다.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두루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변경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중지되었다.
숙종(肅宗) 계해년(1683, 숙종9)에 인조와 효종의 묘실을 세실(世室)로 정하였는데, 갑술년(1694) 봄에 부제학 이봉징(李鳳徵)이 실(室)마다 각각 악장을 찬할 것을 다시 청하였다. 이해 겨울에 예조에서 인조의 묘실에 연주하는 악장을 별도로 찬할 것을 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으나 오래도록 헌의(獻議)하지 못하였다. 이해 1월에 이르러 상이 종묘에 나아가 배알할 적에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은 신하에게 명하여 하향 대제(夏享大祭)에 맞추어서 악장을 바로잡게 하였다. 이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이 일에 대하여 지난 계해년(1683, 숙종9) 장악원 제조를 겸임하고 있을 때부터 전말을 대강 알고 수의(收議)할 때에 아뢰고자 하였으나, 번거롭게 할까 두려워 지체하고 주저하다가 지금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감히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하나하나 논해 보겠습니다.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송(頌)에는 성탕(成湯)과 고종(高宗) 및 후직(后稷)과 문왕(文王), 무왕(武王)에 대해 각기 종묘의 제전에 연주하는 악장이 있어서 그 공렬(功烈)을 형상하였습니다. 이는 옛날 종묘의 제도가 도궁(都宮)에 혹 7묘(廟)나 9묘의 사당을 각각 세워서 각각 그분만 제사하였기 때문에 또한 각각의 악장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한(西漢) 시대에 이르러서는 종묘의 제도가 비록 도궁과 차이는 있었으나 각각 사당을 세우고 각각 제사한 것은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文帝)와 무제(武帝)를 제사할 때에 모두 종묘의 제전에 연주하는 악장이 걸맞지 않다고 하며 별도로 소덕지무(昭德之舞)와 문시지무(文始之舞)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동한(東漢)의 명제(明帝) 이후로 태묘가 모두 한 사당 안에서 서쪽을 상좌로 하는 제도를 사용하여 각각 사당을 세우지 않았으니, 악장 또한 각각 사용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조종조(祖宗朝)에서 〈보태평〉과 〈정대업〉 두 악장을 9장으로 정하여 열성조(列聖朝)의 제사에 함께 사용한 것도 한 종묘 안에서 각각 다른 악장을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악장이 아홉 번 변하여 숫자가 갖춰진 뒤에 어찌 열성(列聖)을 올려 부묘(祔廟)할 적에 신위(神位)마다 악장을 제정하여 9장 외에 더 첨가할 수 있겠습니까.
선조(宣祖)의 종묘에서 연주하는 악장인 〈중광(重光)〉 1장으로 말하면 더욱 온당치 않습니다. 세실 가운데 취사선택한 바가 있는 듯하니, 종묘에 강림하시는 선조의 영령께서 송구하여 제향을 편안히 흠향하시지 못하는 마음이 반드시 있으실 것입니다.
또 이 일에 대해 반드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말한다면 지금 우리 사조(四祖)를 이미 영녕전(永寧殿)에 옮겼는데 사조의 시(詩)를 아직도 종묘에서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혹 선조의 일을 가지고 자손들을 노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녕전에는 또 태조와 태종, 세종의 시를 사용하고 있는바, 이는 자손의 일을 가지고 선조를 노래하는 것이니, 이는 옛날 의리에서 찾아보아도 이미 맞지 않고 사람의 정으로 헤아려 보아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만일 문소전(文昭殿)의 제도를 따라 각 세실마다 각각 악장을 만들어 사용하고자 한다면 〈보태평〉과 〈정대업〉 두 악장이 모두 폐기되어 쓰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은 지극히 중요하니, 이제 어찌 감히 가벼이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음악의 근본은 본래 종(鐘)이나 북을 연주하는 데에 있지 않으니, 또한 어찌 악장을 늘리고 줄이는 데에 있을 뿐이겠습니까. 현재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간절하고도 시급한 걱정거리가 진실로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니, 이러한 전례(典禮)는 서서히 성조(聖朝)의 정치와 교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서 그 가부(可否)를 논하는 것이 선후와 완급의 순서에 합당할 듯합니다. 또 한번 이것을 변경하고자 하면 곧 방해되는 사안이 이와 같으니, 황급하게 대충대충 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옛날 송나라 인종(仁宗) 때에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완일(阮逸)과 호원(胡瑗) 등이 만든 종(鍾)의 음률을 함께 상정(詳定)하게 하였는데, 한기(韓琦)가 아뢰기를, ‘조종조의 옛 법을 따라 사용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음악을 만든 근원을 연구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는 근본으로 삼아서, 정사와 명령이 공평하고 간략하며 백성들이 즐겁게 생활하고 물건들을 풍족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우선 변방의 무비(武備)에 있으니, 음률을 따지는 정성을 뒤로 미루어 변경을 편안히 하는 논의로 옮겨서 시급한 바를 우선 조처한다면 도리에 있어서 좋은 점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인종은 마침내 그 논의를 중지하도록 명하고는 옛날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옛날과 지금을 살펴보시고 다시 조용히 생각하신 다음 이어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도록 명하시어 이치에 합당하도록 조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좌상 유상운(柳尙運)이 아뢰기를,
“9악장을 노래하여 읊을 때와 차례로 술잔을 올릴 즈음에 비록 제 몇 악장을 제 몇 번째 묘실에서 연주하는 일이 있으나 본래 한 묘실의 음악을 통용하니, 각 묘실마다 각각 연주하는 뜻이 아닌 듯싶습니다. 각 묘실의 수효가 9묘(廟)가 되기 전에도 연주하는 악장이 9악장에서 줄어들지 않았고, 각 묘실의 수효가 9묘를 넘은 뒤에도 연주하는 악장은 또한 9악장을 넘지 않았으니, 조종조에서 정한 제도를 준행하는 것 이외에는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서서히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 이에 앞서 옥당에서 선조 때의 병사(兵使) 이제신(李濟臣)과 인조 때의 지평 임숙영(任叔英)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상이 이 일을 예조에 회부하였다. 공이 1월에 우선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특별히 시호를 내리라고 전교하였다. 이달에 인견할 적에 공이 아뢰기를,
“시호를 내리는 법은 선인(善人)을 위하여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선과 악에 대해 모두 시호를 내려서 포폄(褒貶)하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 반드시 정2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뒤에야 시호를 내리도록 허락한 것은 현직(顯職)을 많이 거쳐 공과(功過)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세상의 유종(儒宗)이 된 자와 국가를 위하여 순절(殉節)한 자에게는 관작을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법이 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기타 문장과 훌륭한 행실이 있으나 벼슬과 품계가 부족한 자에게는 시호를 내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두 신하에 대하여 파격적으로 규례를 새로 만든다면 두 신하 외에 또한 반드시 도에 넘치게 시호를 내리는 폐단이 많아질 것이니, 진실로 우려할 만합니다. 마땅히 한결같이 전장(典章)을 따라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두 신하는 큰 명망이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허락하였는데, 대신이 아뢴 것도 깊은 뜻이 있으니, 우선 서서히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예전에 현종(顯宗)은 전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내의원에 명하여 약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지난해 겨울에 상이 부제학 임영(林泳)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해임을 허락하고 약을 지급하며 서울에 머물도록 명하였는데, 전의감(典醫監)에서 약 다섯 첩(帖)을 주고 지급을 중지하였다. 그다음 날에 공이 입대(入對)하여 그 잘못을 말하자, 좌상이 이단상의 일을 인용하여 아뢰기를,
“영상이 현재 내의원의 도제조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내의원에 명하여 약을 계속 지급하게 하였다.
○ 이해 2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아뢰기를,
“임영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서글프고 애석합니다. 그는 본래 고향에 돌아가 죽고자 하였는데 조정에서 만류하고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제 운구(運柩)할 상여꾼을 지급해야 하나 현재 봄철을 당하여 연로(沿路)의 백성들이 더욱 심하게 굶주림에 시달리고 또 그의 선산이 나주(羅州)에 있으니, 천리 먼 길에 경기, 충청, 전라 세 도에서 백성을 동원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은자와 삼베를 적당히 지급해서 경군(京軍)을 고용하게 한다면 병정을 조발(調發)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고 이르기를,
“지극히 놀랍고 비통하다. 내가 그를 돌아보고 구휼하도록 명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다.”
하였다. 며칠 있다가 지평 조태채(趙泰采)가 가금(價金)을 환수할 것을 청하자, 마침내 쌀과 삼베로 장례 물품을 지급하였다.
○ 공이 연경(燕京)으로 사신 갈 때에 관서 지방의 감사와 수령들에게 수레를 사용하도록 권하였는데, 좌상에 제수된 지 1년여 만에 입대하여 아뢰기를,
“배와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본래 천하가 공통적으로 편리하게 여겨서인데 우리나라는 오직 북도(北道) 외에는 모두 수레를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수레가 불편하다고 하는 자들은 우리나라가 길이 험해서라고 말하나 우리나라 북도와 요동(遼東)의 동팔참(東八站)이 모두 험난한데도 다 수레를 사용하고 있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결코 가지 못할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관서 지역은 길이 평탄하니 더욱 수레를 이용해야 합니다. 유상운(柳尙運)이 감사로 있을 때에 일찍이 수레를 만들 것을 청하여 장산곶(長山串)에서 재목을 가져다가 감영 아래에 두었는데, 그 뒤 감사가 자주 바뀌어서 아직도 수레를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연경에 갈 때에 영변(寧邊)에서 수레를 만들어 쇄마가(刷馬價)의 태반을 줄였으니, 그 편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감사에게 분부하여 기필코 완성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그다음 해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에 수레가 처음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이해에 사역원 정(司譯院正) 김지남(金指南)이 사행(使行)을 따라갔는데, 개인의 돈으로 연경에서 염초(焰硝)를 굽는 방법을 전수받아 오니, 공은 군기시 도제조로 있으면서 김지남으로 하여금 염초를 굽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 방법은 재와 아교를 사용하여 1년 된 잡초를 태워서 만들었는데, 공력이 덜 들면서도 염초를 얻는 것은 몇 갑절이나 되었으며 품질 또한 정교하고 위력이 있었으며, 다음 해에 다시 시험해 보니 더욱 좋았다. 그다음 해 여름에 공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염초를 굽는 방법이 엉성합니다. 매번 중국과 왜국의 방법을 배우고자 하여 많은 상금을 내걸기까지 하였으나 이국(異國)에서 방법을 숨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성심으로 구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또 지금 산림이 모두 민둥산이 되어서 토목(吐木)이 더욱 귀해지니, 여러 군문(軍門)에서 염초를 굽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방에 있는 고을 중에 토목이 없는 곳에서는 염초를 구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김지남이 배워온 방법은 토목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염초의 질이 정교하고 생산되는 양이 많으니, 영구적인 이익이 될 만합니다. 군문의 장교(將校)들이 활을 만들고 총을 만든 것과는 똑같이 견줄 수가 없으니, 특별히 공로에 보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 서북 지방의 변장(邊將)에 제수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 방법을 배워 익히게 하며, 또 문자로 자세히 기록하게 해서 군기시에서 이것을 간행하여 중외에 반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재가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김지남을 문성 첨사(文城僉使)에 제수하였는데, 대계(臺啓)에서 구례(舊例)에 역관은 변장이 될 수 없다 하여 개정(改正)했다가 1년 남짓 만에 병조에서 복주(覆奏)하여 승진하였다.
○ 이에 앞서 갑술년(1694, 숙종20) 여름에 훈련도감의 양향청(糧餉廳)에서 벼 500석을 내다 팔았는데, 호조 판서가 이르기를,
“도제조는 첩문(帖文)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양이 100석이고 제조와 낭청(郞廳), 원역(員役)은 각각 차등이 있다.”
하니, 공은 사체(事體)로 볼 때 받아서는 안 된다 하여 양향청에서 내다 판 대금을 나누어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지난해 중추부(中樞府)에 있을 때에 의정부에서 가을철 땔감을 나누어 주고 선혜청(宣惠廳)에서 장목(長木)과 초둔(草芚)을 나누어 주었으나 남이 대신 받아 가져다주는 규례가 없다 하여 모두 받지 않았다.
상평청(常平廳)에서 돈을 주조할 때에 대신(大臣) 이하 여러 당상관은 행하(行下)를 지급한 장인(匠人)이 각각 100여 명씩이나 되었고 많은 경우에는 3, 4백 명이나 되었으나 공만은 행하를 지급한 장인이 한 명도 없었다. 이해 봄에 선혜청에서 마른 소나무를 내다 팔자, 경대부 집안에서는 집집마다 첩문을 사서 운반해 갔다. 오도일(吳道一)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영상(領上 남구만)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하인을 시켜 영상의 집에 가서 훔쳐보게 하니, 자제들이 우거(寓居)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나무 한 가지도 없었다. 공이 북쪽으로 귀양 갈 때에 서울 집을 저동(苧洞)으로 옮겼는데, 공은 갑술년(1694, 숙종20)부터 여기에 살았다.
○ 4월에 생원 강오장(姜五章)이 아뢰기를,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선영(先塋)이 도성 서쪽의 연서(延曙)에 있는데, 묘에 비갈이 있고 그 아래에 신도비를 세웠으니, 이는 모두 내수사(內需司)에서 세운 것입니다. 지난해 갑자기 변고를 일으킨 자가 있어 그 비갈을 쳐서 깨뜨렸고, 게다가 흉한 물건을 무덤 속에 몰래 묻었는데, 본가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하여 시끄럽게 떠든 지가 1년이 넘으니, 그 관계되는 바가 중대합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철저하게 조사하여 벌을 내리셔서 신도(神道)가 어지럽혀지고 자손이 위태로워질 우려가 없게 한다면 종묘사직에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이르기를,
“이제 강오장의 상소문을 보니, 놀라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 허실을 따져보니, 지난겨울에 과연 표석(標石)을 부순 변고가 있다 하나 이 일은 그래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봄에 또 흉한 물건을 무덤에 묻은 변고가 있었는데,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어 환도(環刀)를 꽂아 놓고, 또 저주의 문자(文字)를 새겼다 하였다. 아, 세자 외조부의 묘에 이러한 저주가 있으니, 이 어찌 다만 그 묘소만을 욕되게 한 것이겠는가. 담당 관사로 하여금 먼저 본가 사람을 추문하여 변고를 일으킨 사람을 찾아내서 체포하여 속히 국법에 따라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이날 상이 전교하기를,
“변고를 일으킨 사람이 세자의 생년월일을 적어서 나무로 깎은 인형에 쓰기까지 하였다 하니, 그 흉악하고 패역함이 진실로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다. 즉시 국청을 열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좌상, 우상과 함께 장가(張家)의 종을 국청에서 심문하니, 장가의 종이 무고(巫蠱)한 흉적(凶賊)의 호패(號牌)를 얻었다고 거짓으로 칭하고 바쳤는데, 그 호패는 바로 병조 판서 신여철(申汝哲)의 가노(家奴)의 것이었다. 신가(申家)의 종을 조사한 결과 예전의 호패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그 주인의 관직명이 장가의 종이 바친 것과 서로 어긋났다. 다음 날 아침 호적(戶籍)을 상고할 것을 계청하자, 상이 몹시 노하여 신가의 종을 친히 국문해서 사주한 자를 실토하라고 형신(刑訊)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았다. 공이 아뢰기를,
“너무 급하게 형신하면 지레 죽을 것이요, 또 호패가 서로 다르니, 차분히 살펴 헤아리소서.”
하자, 우선 국문을 파하도록 명하였다. 다음 날인 5월에 상이 다시 친히 국문하고, 조금 뒤에 정국(庭鞫)하라고 명하였는데, 며칠 만에 신가의 종이 결국 죽어서 마침내 국청을 파하였다.
이달에 현상금을 걸고 매우 급하게 범인을 잡아들이려 하여 팔도에 통지하게 하자, 공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흉악한 자의 행동거지는 진실로 측량할 수 없으나 반드시 서울이나 혹 경기 사람일 것이니, 먼 지방에 반포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번거롭게 하고 적발하는 방법으로도 알맞지 않습니다. 오직 서울과 경기에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얼마 후에 고양(高陽) 사람 이만웅(李萬雄)이 장가의 종이 한 짓이라고 고발하였다. 공이 이때 막 네 번째 정사(呈辭)를 올렸는데, 국청에서 심문하는 일로 인하여 출사하였다. 장가의 종인 업동(業同)이 자못 혐의가 있고 답변이 명백하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가 스스로 무고하고 서인(西人)에게 화를 전가하려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공 또한 그의 혐의로 보면 형벌을 가해서 신문해야 하나 끝내 장 희빈을 난처하게 할까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생각하기를, ‘예로부터 무고의 옥사를 반드시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면 그 화가 반드시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또 이것은 궁중에 흉한 물건을 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양 무제(梁武帝) 때에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어머니인 정 귀빈(丁貴嬪)의 묘소에 납아(蠟鵝)를 묻은 일이 있어 그 일을 끝까지 다스리려고 하였는데,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있던 서면(徐勉)이 강하게 간하여 중지시켰으니, 그의 뜻이 충성스럽지 않아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6월 2일 밤 국청의 청대 때에 공이 이 뜻을 부연해서 말하니, 좌상도 또 이렇게 말하였으며, 우상도 이견이 없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경들의 말을 들으니 내 뜻과 참으로 부합한다.”
하고, 마침내 국청을 파하도록 명하고 장가의 종을 풀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의 비난이 벌 떼처럼 일어나 공을 공격하였으며, 삼사에서 업동을 형신(刑訊)할 것을 청하였다. 대사헌 오도일(吳道一)이 상소하기를,
“대신의 말을 대략 들으니 드러낼 수 없는 일이고 증거가 미비합니다. 의심스러운 단서만으로 큰 옥사를 결단하기 어려우며, 깊고 장구한 생각이 그 가운데에 들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공은 다시 네 번째로 정사를 올렸는데, 이날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세기(李世耆) 등이 먼저 역도(逆徒)를 비호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가 청대(請對)하여 아뢴 것은, 말 속의 의심스러운 단서를 가지고 대번에 신문하는 것이 옥사의 사체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깊고 장구한 생각이 따로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이른바 깊고 장구한 생각이라는 것은 내가 대신의 말로 인해 안 것이 아니요, 죄인의 공초(供招)를 보자 깊고 장구한 생각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먼저 싹튼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세기 등이 올린 상소문을 보니, 한 편의 상소문에서 온통 감정을 토로한 것이 오로지 수상(首相)에게 있었다. 아, 그간 국가를 위하여 장구하게 염려해 온 원로대신의 정성이 도리어 역도를 비호한다는 지극한 죄명을 입었으니, 어찌 이와 같이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기회를 틈타 없는 사실을 날조해서 대신을 배척하고 모함한 정상이 지극히 가슴 아프다. 소두(疏頭)인 이세기를 우선 정거(停擧)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좌상, 우상과 함께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다가 다음 날 도성을 나가자, 상은 다시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고 승지에게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며칠 있다가 전교하기를,
“이번에 국청의 옥사를 처결한 데에는 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나의 마음이 바로 경들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일에는 경도(經道)와 권도(權道)가 있다. 삼사(三司)가 소장(疏章)을 올리는 것은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의리에 무방하나 성균관 유생의 경우는 상소 한 편에서 주장한 바가 오로지 대신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데에 있어서 삼사(三事)의 신하로 하여금 경황없이 도성 문을 나가게 하였으니, 보기 좋지 못한 광경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하였다.
다음 날 학생 이현명(李顯命)이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이 더욱 공을 위태롭게 압박하였다. 공이 광주(廣州)로 향하면서 상소문을 남겨 아뢰기를,
“신은 죄를 지었는데도 아직 처벌받지 않았기에 도성 가까운 곳에서 배회하고 있는데,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성상께서는 혹시라도 한결같이 간곡히 타이르고 만류하면 신으로 하여금 전교를 받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십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신이 황공한 마음으로 엄명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도리어 혹시라도 은총을 구하고 더 많은 수치를 당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한강 너머로 물러날 계책을 세웠으니, 죄송한 마음을 더욱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승지가 뒤따라왔다. 상이 두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어젯밤 꿈에 경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내가 경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는데, 꿈을 깨자 갑절이나 서운하여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진실로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한 몸이어서 서로 필요로 하며 정성이 있으면 꿈에도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
하였다. 공이 이미 세 번째 상소하고, 승지의 서계(書啓)에 부주(附奏)하기를,
“엄한 유지(諭旨)가 날마다 내려오니, 신은 땅에 엎드려 슬피 웁니다. 다만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선왕조에서 행한 전례를 다시 살피시어 즉시 처분해 주소서.
하니, 상은 억지로 강요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해임을 허락하고 즉시 길에 오르도록 명하였다. 공이 병으로 사직하자 승지가 이 사실을 아뢰었는데, 상이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함께 돌아오도록 명하니, 공을 원망하는 자들은 공이 다시 도성으로 들어올까 두려워하였다. 수찬(修撰) 이건명(李健命)이 즉시 상소하여 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저지하기를,
“후일 깊고 장구한 화를 불러들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공의 네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유신(儒臣 이건명)의 상소는 경을 배척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니, 진실로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내 헤아리지 못하였다.”
하였다. 공이 마침내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가니 승지가 뒤따라왔다. 상이 어필(御筆)로 다섯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아, 경의 정승의 직임을 우선 해면하도록 허락한 것은 실로 경이 빨리 도성 문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 어찌 경을 침해하고 공격하는 말이 계속하여 일어나 경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어서 결연히 향리(鄕里)로 돌아가게 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예로부터 대신 중에 역경을 만난 자가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마는, 군주가 그의 소청을 마지못해 따라 주면 나와서 군주의 명령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진실로 군신 간의 대의(大義)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 국가가 매우 위태로운 시기를 당하였으니, 생각건대 정성을 다하여 국가를 생각하는 경의 마음이 직책을 내놓았다고 해서 결코 잠시라도 느슨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이 사관의 서계에 부주하기를,
“군주를 섬기는 의리는 본래 염치를 중요시하니, 이것을 한 번 잃으면 국가를 생각하는 정성이 있더라도 끝내 베풀 곳이 없게 됩니다. 신은 3년 동안 네 번이나 도성 문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쉬파리나 개처럼 작은 이익을 좇아 쫓아내도 다시 돌아와서 말하기를, ‘나는 국사를 위하고자 해서 온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7월에 이공 세귀(李公世龜)가 편지를 보내어 옥사의 곡절을 묻자, 공이 답하기를,
“지난날 장희재의 사건은 일이 중궁(中宮)과 관계되기 때문에 증거가 주상에게 있었는데도 그를 위해 손을 쓰고자 했소. 더구나 이번 일은 옥사의 성격이 장희재의 일과 약간 다르고, 또 고발한 자와 증인이 다만 수상한 점만을 말했을 뿐, 이 밖에는 옥사를 성립시킬 만한 별다른 말이나 증거가 없소.
예로부터 무고의 옥사는 아무리 입증한 것이 명백하더라도 자복(自服)을 받은 뒤에 오히려 더할 수 없는 후회를 한 경우가 있었으니, 중종조(中宗朝)에 동궁에서 발생한 작서(灼鼠)의 옥사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소. 지금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하는 바가 모두 장희재의 집안에 있다고 말하나 옥사를 조사하여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증거가 분명하여 의심할 바가 없고 나서야 장(杖)을 쳐서 신문하는 것이지, 의심스럽다고 해서 장을 쳐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오.
형장 아래에서는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하기 마련인데, 죄명이 정해지고 형률이 정해진 뒤에는 제아무리 큰 역량이 있는 자라도 잘 처리할 방도가 전혀 없소. 지금 사람들은 모두 형장으로 엄하게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잘 조처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과연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장희재를 법에 따라 처벌하자는 계사가 어찌 3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치지 않는단 말이오. 사람들의 의논을 자세히 살펴보면 품은 생각과 입으로 말하는 것이 전혀 서로 호응하지 않으니, 그 주장이 어찌 옳은 주장이겠소. 가령 잘 처리하여 용서한다 하더라도 죄명이 이미 정해진 뒤에는 인심의 향배가 반드시 전과는 크게 다를 것이니, 궁 밖이든 궁 안이든 또 어찌 이 기회를 틈타려는 자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소.
그러나 증거가 명백하다면 또한 어쩔 수 없지만 이 일은 아직 의심스러운 점이 있는데, 전혀 거리낌 없이 형장을 가하여 옥사를 이룬다면 오늘날 온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훗날 자신들도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면서 마음속에 스스로 위태롭게 여기는 생각을 품는다면 끝내 종묘사직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어찌 기필할 수 있겠소. 이것은 그 대략이고 이 밖에도 참으로 많은 곡절이 있으니, 고명한 그대가 어찌 이것을 간파하지 못하겠소.
나는 머지않아 땅속에 묻힐 사람이니 결코 보지 못하겠지만,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나중에 반드시 둘 중 하나에 해당될 것이니, 국가를 위해 염려하여야 하오. 어찌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통쾌하게 여기는 것을 좇아 국가의 안위와 존망을 중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소. 지금 나를 배척하는 자들은 추악하게 욕함이 끝이 없어서 역적을 비호한다고 하고 화를 두려워한다고 하니, 이러한 죄명은 내가 모두 달게 받겠소.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말할 수 없는 죄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차마 이 몸으로 무릅쓸 수가 없고, 또한 차마 국가로 하여금 이것을 당하게 할 수가 없소.”
하였다.
이달에 삼사(三司)가 청대하여 다시 국옥(鞫獄)을 일으킬 것을 거듭 청하였다. 이에 업동을 형신(刑訊)해서 마침내 무고한 흉적 이홍발(李弘渤) 등을 잡으니, 이홍발이라는 자는 이의징(李義徵)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양사(兩司)에서 강하게 주장하여 이의징을 위리안치(圍籬安置)시켰는데, 김인(金寅)의 고발에서는 비록 실정을 정확히 알아내지는 못하였으나 그 밖에 다른 죄를 지은 것이 낭자하므로 법대로 처형하기를 청하여 지난해 봄에 마침내 이의징을 사사(賜死)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이홍발은 형장을 맞고 죽었으며, 그 당파인 방찬(方燦)과 김이만(金以萬) 등은 모두 상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화를 끼쳤다는 것을 자백하고 죽음을 당하니, 김이만은 장희재의 처조카였다. 조정에서는 이것을 고발한 이만웅(李萬雄)에게 천 금(金)을 상으로 내리고 두 자급(資級)을 올려 주었다.
공이 여덟 번째 상소를 올려 인혐(引嫌)하자,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달에 승지의 계문(啓聞)으로 인하여, 상은 날씨가 서늘해지고 공의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생각을 고쳐 올라오라고 명하고, 승지는 우선 먼저 들어오게 하였으며, 얼마 뒤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였다.
○ 8월에 이현명(李顯命)이 다시 상소하여 멋대로 공을 모함하니, 상이 이현명을 불러서 사주한 사람을 묻고 국청을 열어 형신하도록 명하였다. 이현명이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성규헌(成揆憲)을 끌어들였는데, 성규헌이 자백하였다. 상은 이달에 사관(史官)을 보내어 공과 함께 오도록 명하고, 별감(別監)을 보내어 전복탕을 하사하였다.
○ 9월에 상은 다시 사관을 보내 전교하기를,
“음흉한 말을 어찌 입에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이번의 유시(諭示)는 실로 나의 심중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공이 열한 번째 상소하고 인하여 상소한 유생(儒生 이현명)을 형벌하여 심문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음흉한 무리를 느슨하게 치죄(治罪)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민진장(閔鎭長)이 입대하여 이현명이 이미 다 실토하였음을 아뢰고, 형벌을 가하는 것을 중지하고 곤장을 쳐서 유(流) 3000리로 정배(定配)할 것을 청하자, 상이 절도(絶島)에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영상 유상운(柳尙運) 등이 입대하여 공이 결성(結城)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말하니, 상은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고, 또 연신(筵臣)의 말로 인하여 주급(周急)할 것을 명하였다. 예조 판서 이여(李畬)가 즉시 상소하기를,
“조정의 병의 근원은 요컨대 ‘의(疑)’와 ‘조(阻)’ 두 글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갑술년(1694, 숙종20) 이후에 묘당이 시사를 말하는 자들과 대립하여 적이 되었습니다. 이현명의 상소는 매우 조리가 없거니와 반드시 사주한 자를 찾아내고자 하여 마치 크게 간악한 자가 있어서 모의하여 서로 어지럽힌 것인 양하니, 지금 이현명을 절도로 귀양 보내기로 의논한 것은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병의 근원이 항상 남아 있어 일이 생길 때면 점점 뿌리를 내려 서로 시기와 혐의를 이루니, 신은 조정이 더욱 심히 와해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공이 이에 열세 번째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아뢰고는 주급을 사양하고 마침내 사당(祠堂)의 신주(神主)를 받들어 모시고 부인과 함께 길을 떠났다.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이것을 아뢰자, 상은 사관을 보내어 떠나는 것을 만류하였다.
○ 10월에 승지가 공을 따라와서 결성에 이르러 계문(啓聞)하자, 상은 전교하기를,
“오직 성의를 더욱 돈독히 하여 조정에 나올 것을 기약해야 하나 다만 이제 막 향리(鄕里)의 전원에 이르렀는데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곧바로 길을 돌리게 하면 또한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다.”
하고는 마침내 승지에게 우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상은 공의 열네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려서 생각을 고쳐 길에 오르라.”
하였다. 공이 주급을 굳게 사양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고 재차 별감을 보내 전복탕과 타락죽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어시(御詩)를 어필(御筆)로 써서 하사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호연히 돌아가 누운 지 삼십 일이 지났으니 / 浩然歸臥浹三旬
깨끗한 꿈 응당 대궐에 가까이 있으리라 / 淸夢應知近紫宸
나라를 생각하는 정성 깊어 오직 법을 받들고 / 體國誠深惟奉法
세상을 걱정하여 힘을 다하니 스스로 몸을 잊었네 / 憂時力瘁自忘身
주나라에 다사다난하던 시기이고 / 周家正屬多難日
한나라 황실에 큰 보필을 생각할 때라오 / 漢室方思碩輔辰
자리 비워 놓고 간절히 기다리는 내 뜻에 부응하여 / 宜副丁寧虛佇意
부디 따뜻한 봄에 조정에 나오도록 하오 / 造朝須趁載陽春
하였다. 공은 엎드려 읽고는 감격하여 삼가 차운해서 자손들에게 보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한번 도성 문을 나와 백 일이 지나니 / 一出都門過十旬
구천이 아득히 멀어 대궐과 막혀 있네 / 九天迢遞隔楓宸
황비에 있으나 위태로움 구원하지 못해 부끄럽고 / 黃扉愧失扶顚策
백발에 도성을 떠나는 몸이 됨을 달게 여기노라 / 白髮甘爲去國身
뜻밖에 성상의 글이 쑥대 집에 떨어지니 / 不意龍章落蓬蓽
도리어 개미집 같은 곳에 별빛이 찬란하네 / 還敎蟻穴煥星辰
감격의 눈물 은혜로운 바다에 더하기 어려우니 / 難將感淚添恩海
우리 임금님 남산처럼 만만세 장수하시기만 축원하네 / 只祝南山萬萬春
하였다. 이때 이여(李畬)가 사적으로 공에게 편지를 보내 스스로 해명하자, 공이 답하기를,
“내가 기어이 물러가 엎드려서 두문불출하여 한창 일어나는 의논을 종식시키고자 한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다만 성상의 분부가 지엄하고 간절하시어 감히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가 없었소.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사람들의 노여움이 불길과 같고 비난하는 말이 집채와 같으니, 성상의 소명(召命)을 여러 번 어겼으나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의 마음에 반드시 용서하시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는 결심하고 시골로 돌아온 것이오. 본래 조정에 나아가려고 하다가 단지 대감의 한 말씀 때문에 비로소 물러가 은둔할 계책을 정한 것이 아니오. 그러나 대감의 상소문을 가지고 말한다면, 오늘날 조정에서 의심하여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원인을 저에게 돌려 수많은 말씀을 하였는데, 그 죄를 받아야 할 자가 본래 서로 다툴 마음이 없으니, 오직 황송하고 부끄러워 물러갈 뿐이오.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을 듯하오. 비록 서로 만나 한번 웃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토론하고자 하나 어찌 될 수 있겠소.”
하였다. 이달에 상의 옥체가 편찮았다.
○ 11월에 공은 내의원(內醫院)에서 통고한 글을 받고는 상소하여 도제조를 체직해 줄 것을 아뢰었는데, 상소문을 미처 올리기 전에 상이 사관을 보내어 전교하기를,
“이러한 때에 약방 도제조가 옆에 없으니, 나의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다.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공은 사행(私行)이라 하여 역마를 타지 않고 올라왔는데, 평택(平澤)에 이르러 상의 체후가 다소 편안해졌다는 통고를 받았다. 이에 공이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대궐 아래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오히려 멀리서 대궐을 바라보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면서 높은 산처럼 장수하시기를 축원하는 마음을 우러러 바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막 나는 손가락을 꼽으며 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수라(水刺)도 들기가 싫어 조금도 차도가 없으니, 경이 도제조의 직임에 있으면서 지체해서는 결코 안 된다.”
하고는 사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나아가 진위(振威)에 이르러 비로소 역마를 타고는 과천(果川)에 이르러 상소하기를,
“신의 죄와 허물이 세상에 넘치니 결코 다시 조정에 나아갈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국 제조(內局提調)의 직임을 헛되이 띠고 한 철을 넘겼으니 이것이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길을 떠난 지 열흘이 되어서야 비로소 근교(近郊)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이제 이곳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감히 명령을 받들어 도성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하니 이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하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전교하기를,
“반드시 내일 아침 문안하기 전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공이 마침내 대궐에 나아가자 상이 인견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이제 막 밖으로부터 들어와서 바람과 이슬을 맞았으니 약방에서 재숙(齋宿)하고 다음 날 입진(入診)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여 승정원(承政院)으로 하여금 넌지시 아뢰게 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와내(臥內)에서 인견하였다. 공이 다시 인책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무슨 잘못한 일이 있으며 무슨 대죄할 일이 있단 말인가?”
하였다.
○ 12월에 상은 약방에서 선온(宣醞)하고, 인하여 공이 가솔들을 데리고 올라왔는지 물었다. 얼마 후 상의 체후가 평상으로 돌아오자, 공이 상소하여 도제조를 강력하게 사직하고 인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상은 승지를 보내어 답하기를,
“경은 털끝만 한 하자도 없고 의리상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해야 하니,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그대로 경저(京邸)에 머물도록 하라.”
하였다. 3일이 지나 공은 상소문을 남겨 두고 곧바로 돌아가려 하였다. 하루 전날 약방에서 하루걸러 문안하자, 상이 답하기를,
“이제 이미 병이 쾌차하였으니 문안하지 말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도제조는 머물러 대령하라.”
하였다. 상은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남구만)를 인견하겠다.”
하였다. 공이 희정당(熙政堂) 동쪽 방에 입시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영부사는 나오라.”
하니, 공이 자리를 옮겨 조금 나아가 절하고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더 가까이 오라.”
하므로, 또 탑전으로 조금 더 나아가 절하고 엎드렸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승지가 가지고 온 서계(書啓)를 보니, 그대로 머물 뜻이 없는바 나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허탈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오늘 인견한 것은 친히 경을 보고 만류하여 멀리 떠나가려는 마음을 돌리고자 해서이다.
경이 점차 남쪽으로 돌아가 오랫동안 먼 외지에 있었는데, 내 몸이 편치 않다는 이유로 경이 올라오니, 나는 몸이 아픈 것도 잊은 채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한량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병이 겨우 차도가 보이자마자 경은 즉시 돌아갈 뜻을 가지니, 이는 반드시 예전의 일로 아직도 불안해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뜻은 어제 내린 비답에 이미 자세히 말하였으니, 다시 인혐하지 말고 서울에 머물면서 국사를 보필한다면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의 본의는 밝으신 성상께서 이미 굽어 살피고 계시니, 지금 굳이 일일이 스스로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근년 이래로 조정이 분열되고 과격하게 논쟁하는 단서가 매번 신으로 인하여 일어나니, 신이 만약 조정에 있다면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는 일이 반드시 날로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에 올린 정사(呈辭)에 이른 바 ‘나라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물러나는 것뿐입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신이 물러간다 하더라도 국가에 중대한 일이 있으면 올라오다가 길에서 쓰러져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성상께서 환후가 있으시기 때문에 올라왔는데,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조정에 나올 기회로 삼아서 뻔뻔스럽게 그대로 머물러 있다면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이 두려울 뿐만 아니라 신 또한 어떻게 잠시인들 스스로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은 아직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가. 더 가까이 오라.”
하므로, 탑전으로 나아가니, 상이 친히 손을 잡고 이르기를,
“군신 간에는 본래 알아주는 마음이 있으니, 경은 나의 마음을 알고 나는 경의 마음을 알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매우 많으니, 경이 나를 버려서는 안 되고 나 또한 경을 버릴 수가 없다. 오늘날의 일은 정의(情誼)가 여염집의 부자간과 같으니, 내 어찌 가식적인 말을 하겠는가.
경이 이유 없이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니, 누가 경을 의심하겠는가. 만일 경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지극히 불초한 자이니, 경이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부디 잘 생각하라. 나의 말이 어찌 옳지 않겠는가.
지난번 경이 시골에 있을 때에도 내가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질 때에 올라오라고 한 것은 기필코 초치하려고 해서였는데, 이제 서울로 올라왔거늘 곧 돌아가도록 허락한다면 도리가 결코 이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군주가 이와 같이 간곡히 만류한다면 비록 산림과 초야에 은둔해 있는 사람이라도 흔쾌히 그대로 머물겠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바라건대 분명하게 승낙해 주어 병을 앓고 난 뒤에 조리하는 나의 마음을 다소나마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한동안 있다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신이 비록 지극히 불안하지만 성상께 다시 감히 번거롭게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니, 승지 유집일(兪集一)이 아뢰기를,
“대신이 올라온 뒤에 대궐 밖 여막에서 임시로 우거하고 본가로 돌아가지 않으니, 이는 성상의 환후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즉시 내려가고자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이것을 우려하여 미리 성상께 아뢰고자 하였으나 미처 여쭙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공이 물러나 자리에 엎드려 울면서 아뢰기를,
“신이 전후에 내린 처사는 비록 국가를 위하는 괴로운 심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의리가 무궁무진하고 사변(事變) 또한 많으므로 신이 기어이 물러나 돌아가서 허물을 반성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년 동안 물러나 돌아가 있었던 것도 스스로 염치와 예의를 돌아본 것이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극진히 돌보아서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군신 간의 대의가 중하게 된 것이다. 사리가 매우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으니, 경은 부디 그대로 머물겠다고 흔쾌히 말하라.”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여러 번 반복해 마지않으시는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다시 무슨 말씀을 올리겠습니까. 신은 우선 머물면서 다시 성상의 하교를 기다리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이로 말미암아 부득이 서울에 머물렀다.

69세 정축년(1697, 숙종23)
5월에 전지(傳旨)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서 오랫동안 벼슬길에서 침체된 문무 관원을 천거하고, 인하여 재주가 드러났는데도 등용되지 않은 자를 아뢰자,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10월에 조정에서 천종(天宗)에게 제사하여 기곡제(祈穀祭)를 지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이 대도(大道)를 인용하여 의논을 올려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 여름에 상이 가뭄 때문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인재를 선발할 것을 명하자, 비변사에서 대신들로 하여금 각각 실적이 드러난 자로 두 사람씩 천거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5월에 공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성상의 뜻은 벼슬길에서 엄체(淹滯)된 자들을 소통하여 진작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문신 중에 당하관인 삼사(三司)의 관원과 당상관인 승지와 감사, 무신(武臣) 중에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는 모두 이미 선발되었으니, 또 감히 남에게서 전해 들은 말을 가지고 숫자만 채워 함부로 천거할 수가 없습니다.
전 목사 이징귀(李徵龜)는 신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낭관을 맡았는데, 직무를 잘 수행하였고 문학에도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기사년(1689, 숙종15) 이후에 동류들은 모두 현달한 지위에 등용되었으나 그는 구차히 영합하고자 하지 아니하여 배척을 받고 지방관으로 밀려났으며, 갑술년(1694) 초에 홍문록(弘文錄)에 들었으나 또다시 조정의 의논에 부합하지 않았으므로 외직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한 번 배척당한 뒤로는 다시 거두어 쓰지 않으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 부사 조상주(趙相周)는 신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 그로 하여금 병서(兵書)를 강(講)하게 하고 활쏘기를 시험해 본 결과 수십 명 중에 재주가 으뜸이었습니다. 그가 벼슬길에 올라서는 여러 번 변방 수령을 지냈는데 또한 자못 청렴하고 근신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곤수(閫帥)로 발탁하여 임용해서 다시 그 공적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묘당의 계사(啓辭)는 인재를 여러 해에 걸쳐 두루 시험하려는 계책이 아니요, 곧바로 당장 임용하여 효험을 보고자 하는 뜻입니다. 정재희(鄭載禧)와 이수언(李秀彦)은 품계가 이미 높은데도 오히려 등용하지 못하였고, 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원만춘(元萬春)은 조정에서 새로 발탁하여 자못 직책을 다하였으나 아무 이유 없이 물러나고 다시 거두어 부르지 않으니, 이는 《맹자》에서 말한, 옛날 등용한 사람이 오늘 도망하였는데도 그가 도망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이 매우 마땅하니, 모두 해조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거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정재희 등의 일은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정묘년(1687, 숙종13) 가을에 공이 입대하여 호조 참의 이관(李慣)과 전 부사 원만춘을 발탁하여 등용해야 함을 아뢰었다. 다음 날 상이 특별히 이관을 한성부 우윤으로 발탁하였고, 지난해 여름에 이조 판서 최석정(崔錫鼎)이 상에게 아뢰어 비로소 원만춘을 한성부 우윤으로 발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다시 아뢴 것이다.
○ 이달에 공은 성경(盛京)의 지도(地圖)를 올리고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은 선왕조 때에 근신(近臣)으로 입시하였는데, 재신(宰臣)이 일을 아뢰고 인하여 아뢰기를, ‘심양(瀋陽)에서 영고탑(寧古塔)으로 가려면 길이 매우 험하고 거리가 멀지만 만약 우리나라 서북 변경을 거쳐 가면 매우 가깝습니다. 저들에게 만약 위급한 변란이 생겨서 옛 땅으로 돌아간다면 반드시 먼 길을 버리고 지름길을 취하여 우리 서북 지방을 유린할 것이니, 조정에서는 유념하여 미리 방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습니다.
지난 신미년(1691, 숙종17)에 저들이 백두산의 지도를 그린다고 말하고는 다섯 명의 사신을 함께 보내어 우리에게 길을 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위로는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미관말직에 있는 자들까지 모두 이르기를, ‘저들이 위급한 일이 생겨 옛 땅으로 돌아갈 기미가 있기 때문에 이에 백두산의 지형을 그린다고 거짓으로 핑계 대는 것이니, 실제로는 길을 엿보고자 하는 조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시끄럽게 떠들고 소요를 일으켜 통제할 수가 없었는데, 저들이 사신을 보내려던 계획을 중지하고 보내지 않고서야 사람들의 마음이 비로소 안정되었습니다.
신은 그 당시에 삼가 생각하기를, ‘우리나라의 서쪽인 평안도와 북쪽인 함경도의 두 변경은 높은 고개가 거듭 이어지고 골짜기가 깊어서 하늘에 매달려 있는 듯한 험한 길이니, 심양과 영고탑 사이의 길이 반드시 이보다 더 험하고 이보다 더 멀 리가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살펴보니,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관할하는 곳은 기재된 내용이 매우 소략하였고, 먼 변방의 여러 위(衛)에 대해서는 다만 기미(羈縻) 지역이라는 허명(虛名)만 있고 분명히 지적하여 근거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전주(田疇)처럼 노룡(盧龍)과 유성(柳城)의 길을 자세히 아는 자가 없어 이것이 옳은지 질정할 수가 없었으므로 사적으로 답답한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난해 봄에 사신 중에 연경에서 돌아온 자가 있어 말하기를, ‘도중에 인가에서 새로 편찬한 《성경지(盛京志)》를 얻어 보았으나 여행 중에 돈이 없어 사 오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성경은 바로 옛날 심양입니다. 이곳은 청나라 사람들이 처음 요동을 얻었을 때에 수도로 정한 곳이니, 그 기록이 반드시 영고탑과의 거리를 자세히 기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경연에서 이러한 뜻을 아뢰고 앞으로 있을 사신의 행차에서 이 책을 구매하여 올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봄 사신이 돌아오는 길에 과연 한 본(本)을 구입해 와서 성상께서 보시고 비변사로 내려 보내셨습니다. 신이 비로소 이 책에 기록된 역참(驛站)과 길을 살펴보니, 심양에서부터 동북쪽으로 오랄(烏喇)까지가 800여 리였고, 오랄부터 동남쪽으로 영고탑까지가 400여 리였습니다. 이 길은 오랄을 경유하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먼저 북쪽을 향하여 가다가 나중에 남쪽을 향하여 가므로 자못 길이 우회한 듯하였는데, 합하여 계산해 보면 총 길이가 겨우 1300리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하니 만약 심양에서 지름길을 취하여 곧바로 동쪽으로 영고탑을 향한다면 또 반드시 더욱 가까워 1000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설령 청나라 사람들이 과연 위급하여 심양으로 돌아갈 일이 생긴다면 자기 영토의 익숙하고 가까운 길을 내버려 두고 마침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딴 나라의 먼 길을 빌린다는 것은 실로 이치와 형세상 반드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이에 비로소 지난날 신이 사사로운 마음에 예측했던 바가 과연 옳았음을 알고는 감히 《성경지》에 실려 있는 작은 지도를 가져다가 확대하여 큰 폭으로 만들어서 그 이수(里數)를 구분하고, 산천과 주현, 역참로의 이름을 자세히 기재하였으며, 또 지도 아래에 역대의 연혁(沿革)과 지금 설치한 관청을 간략히 기록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축(軸)으로 만들어 올려서 성상께서 한가로운 여가에 살펴보실 것에 대비하였습니다.
신은 이에 또 삼가 느낀 바가 있습니다. 압록강과 두만강 두 강의 근원은 모두 백두산에서 나오는데,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흘러 바다로 들어가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경계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 이 ‘성경도’에 조선의 경계를 두 강의 남쪽에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저들의 지도와 문적(文籍)에 우리나라 국경이라고 표시된 곳에 이르러서도 우리가 감히 경계를 그어 지킬 엄두를 내지 못해서, 주(州)와 진(鎭)을 차례로 설치하여 국경을 튼튼히 수비하려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이곳을 내버려 두어 숲만 우거지고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오직 산삼을 캐는 간악한 백성들이 몸을 숨기고 종적을 감추어 들락날락하며 마음대로 국경을 넘어가도 아무도 그들을 검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다만 거주하는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는 범죄만 우려하고, 주인 없는 빈 땅으로 만드는 것이 국경을 넘어가는 더욱 심한 범죄를 만든다는 것을 알지 못하니, 신은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신이 예전 선왕조 때에 함경 감사에 부임하라는 명을 받고 변경을 순행하여 대략 이들의 형편을 알았으므로 소장(疏章)을 올리고 겸하여 지도를 바쳤는데, 선대왕께서는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채택하여 그대로 진보(鎭堡)를 설치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신은 그 당시에 북쪽에는 무산(茂山) 등 세 진보를 설치하고, 서쪽에는 후주(厚州)를 설치하여 강 연안에 있는 지역을 점차 개척할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계해년(1683, 숙종9)에 병조 판서로 있을 때에는 또다시 자성(慈城) 등의 지역에 변장(邊將)을 둘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변장을 새로 두는 것은 조정의 의논이 통일되지 못하여 설치했다가 곧바로 중지되었고, 또 을축년(1685)에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의 의논은 무산과 후주도 함께 없애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혁파해서는 안 되는 상황을 강력히 말하였으나 이해(利害)를 명백히 진달하지 못하여 마침내 후주는 없어지고 무산은 다행히 잔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육진(六鎭)의 곳곳에 매년 흉년이 들었으나 무산만은 풍년이 들어서 다른 고을도 그 혜택을 입고 있으며,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짓는 것으로 말하면 다른 곳에는 자주 있으나 무산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발생하지 않는 것도 다행스럽지만, 또한 국경을 넘어가는 폐단이 반드시 새로 설치한 곳에서만 발생할 것을 우려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은 매번 이러한 말을 한번 성상 앞에서 아뢰고자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신은 죽을 때가 임박하였고 질병이 심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미천한 신이 조만간 죽어 다음에 진달할 수 있는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지도를 올리고 인하여 누누이 이것을 아뢰니, 지극히 황송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고 이어서 지도를 보니, 국가를 위한 깊고 원대한 염려가 이에까지 이르렀다. 내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니,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를 비변사에 내려서 의논하여 조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3년 후에 공이 시를 지어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하는 최창대(崔昌大)를 전송하였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두만강 근원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 豆滿江源自白頭
구역을 나누어 한가운데로 물이 흐르네 / 劃分區域水中流
그 사이 버려진 땅 지금도 빈 곳이 많으니 / 其間棄地今多曠
곳곳마다 변방 고을 설치해야 마땅하리 / 隨處邊防合置州
동서에 보초막이 있어 지키고 망보며 / 亭障東西聯守望
좌우에서 성원하여 적의 침입을 경계하네 / 聲援左右戒虞憂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그대 전송하니 / 送君書記翩翩去
모름지기 그곳의 정세 물어 묘당의 계책 돕구려 / 須訪情形贊廟籌
하였다. 공은 늙어서도 여전히 변방을 염려하였다.
○ 9월에 조정에서는 중강 개시(中江開市)에서 청나라로부터 쌀을 사 올 것을 의논하고, 또 곡식을 달라고 청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은 생각하기를, ‘곡식을 달라고 청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으나 쌀을 사 오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쌀을 사오는 것은 가장 하책(下策)이다. 만일 우리가 2만 석을 사 오려면 서로(西路)의 시장 가격으로 은자(銀子) 12만 냥을 주어야 하니, 반드시 중외에 보관한 것을 다 고갈시킨 뒤에야 겨우 관서의 청천강 이북 지방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고, 경기(京畿)와 양호(兩湖) 지방에는 혜택이 미칠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12만 냥을 가져다가 백성들의 신역(身役)을 돕는다면 어찌 상책(上策)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이것을 써서 영상 유상운(柳尙運)에게 주니, 영상이 이것을 빈청(賓廳)의 재신(宰臣)들에게 보이고, 입대하여 간략히 아뢰었다.
상이 마침내 경기와 양호 지방의 신역을 모두 면제하라고 명하였는데도 오히려 쌀을 사 오겠다고 자문(咨文)을 보냈으니, 이는 원접사(遠接使) 이유(李濡)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상우(趙相愚)가 조정에서 물러나와 공에게 하례하기를,
“대감의 계책 덕분에 기호(畿湖) 지방의 흩어진 백성들을 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이보다 앞서 계해년(1683, 숙종9)에 판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이 《예기(禮記)》 〈월령(月令)〉의 “원일(元日)에 상제(上帝)에게 곡식을 기원한다.”라는 내용과 《좌전(左傳)》의 “후직(后稷)에게 교사(郊祀)를 지내어 풍년을 기원한다.”라는 내용을 인용하여 사직단(社稷壇)에 제사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월령〉과 《좌전》에서 말한 것은 모두 천자의 일이지만 《주례》에 ‘모든 나라는 전조(田祖)에게 풍년을 기원한다.’라는 내용이 있으니, 이것을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월에 처음으로 사직단에 제사를 올렸다.
○ 이해 10월에 이르러서 사과(司果) 민진후(閔鎭厚)가 상소하여 천종(天宗)에게 제사해서 내년에 풍년 들기를 기원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는데,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큰 기근이 거듭 드니, 만일 풍년을 이룰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지극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왕의 명사(命祀)에는 각기 분한(分限)이 있기 때문에 공자(孔子)는 초(楚)나라 소왕(昭王)이 황하에 제사 지내지 않은 것을 가지고 ‘대도(大道)를 알았다.’라고 말씀하였는데, 하물며 천종에게 제사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사직단에 곡식이 풍년 들기를 기원함은 한때에 의리(義理)상 불가피하여 만들어 낸 예인데, 이것을 증거로 삼아 또 천종에게 제사한다면 그 제사는 이미 참람한 데에 가깝고 제사 지낼 적당한 장소가 없습니다. 신의 얕은 생각에는 거행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지금은 우선 그만두라.”
하였다.

70세 무인년(1698, 숙종24)

정월 초하루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상소하여 고례(古禮)와 국조의 전고(典故)를 인용해서 치사(致仕)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갈 것을 청하자, 상이 《예경(禮經)》을 인용하여 허락하지 않고 사직서 도제조에 차임하였다.
3월에 상이 비변사 당상에게 명하여 양전(量田)과 호포(戶布), 군제(軍制)에 대해 묻게 하였는데, 이때 공이 상소하여 인재를 얻어 신의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이달에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빈궁(嬪宮)의 환후가 회복되자 상은 말을 하사하였다.
4월에 거듭 치사를 청하였다.
6월에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월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와 누원(樓院)의 회곡(晦谷)에서 모였을 때에 기로소에서 음식을 가지고 따라왔다.
9월에 말미를 받아 성묘하였으며, 다시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에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시골에 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녹봉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1월에 단종대왕 복위시책문 제술관(端宗大王復位諡冊文製述官)에 차임되었다. 강교(江郊)로 나아가 사직할 것을 아뢰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12월에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올렸다. 이날 상소문을 남겨 두어 돌아감을 아뢰고 거듭 치사를 청하였다.

○ 1월에 공이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달에 상이 원임대신(原任大臣)에게 명하여 매월 세 차례 빈청의 회의에 들어와 참여하게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고례(古禮)와 국조의 전고(典故)를 인용하여 치사하고 전리로 돌아갈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빈청에 들어와 참여하라는 하교를 내린 것은 본래 뜻 없이 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경이 사직하고 일을 그만두기에 결코 적당한 시기가 아니다. 더구나 《예기》에 ‘만약 사직할 수가 없으면’이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군주가 치사를 허락하지 않음을 이른 것이다. 《예경》의 뜻이 이와 같이 분명하고, 내가 의지하고 소중하게 여김이 동량(棟樑)과 초석(礎石)보다도 더하니, 절대로 치사를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귀한 신하 중에 공을 잘 아는 자가 신년(新年)에 입대할 것을 거듭 권하였으나 공은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 3월에 공은 상소하여 거듭 치사할 것을 청하였다. 4월에 처음으로 빈청 인견 때에 들어가 거듭 치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 2월에 상의 옥체(玉體)에 뜸을 뜰 때에 공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이 여러 관사의 제조를 많이 겸임하고 있으므로 여러 번 소장(疏章)을 올려 체직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미 종묘서 제조를 겸임하고 또 사직서 제조를 겸임하였으니, 신의 분수에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도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제조를 겸임해서 안 될 일은 결코 없다.”
하였다. 공이 한사코 사직하자, 상이 해조에 명하여 전례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김류(金瑬)와 김수항(金壽恒)이 겸임하였다고 아뢰자 그대로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 옛날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년 뒤에 선조(宣祖)가 이르기를,
“국조(國朝)의 병제(兵制)는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를 따라서 국가를 지키기에는 편리하지만 적을 방어하기에는 항상 부족하다.”
하고, 명나라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제도를 가상히 여겼다. 그리하여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고 3000명의 군사를 길러서 도성과 대궐에 오래 머물게 하였으며, 식년(式年)마다 제도(諸道)에서 속오군(束伍軍)의 포수(砲手)를 뽑아 올려 보내어 그 결원을 보충하게 하였는데, 이후로 점점 숫자가 많아져 5000명에 이르렀다.
현종(顯宗) 기유년(1669, 현종10)에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차츰 변통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지금부터 다시 더 이상 뽑아 올려 보내지 말고 결원이 있어도 보충하지 말아서 어영청(御營廳)의 규정으로 보충한다면 10년이 채 못 되어 저 훈련도감이 없어지고 이 제도가 성립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자못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번(上番)과 휴번(休番)이 번갈아 올라오는 규정으로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어영군(御營軍)과 똑같이 설치해서 별대에 점차 두서가 잡히기기를 기다려 훈련도감의 원군(元軍)을 혁파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직 군사를 뽑아 올려 보내는 규정을 혁파하지 못하였고 또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여 병조 판서로 하여금 대장(大將)의 일을 겸직하게 하였다.
숙종 신유년(1681, 숙종7) 가을에 지경연사(知經筵事) 이단하(李端夏)가 옛 판서 민응형(閔應亨)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쓸모없는 병졸들이 가만히 앉아서 늠료(廩料)만 축내고 있다.”
하고 비판하자, 좌상 민정중(閔鼎重)이 인하여 말하기를,
“군대는 정예함을 귀중하게 여기니, 어찌 굳이 많기를 힘쓰겠는가?”
하였다. 다음 해 봄에 판중추부사 김수흥(金壽興)이 청하기를,
“군액(軍額)을 줄여서 반드시 군량과 서로 맞게 해야 합니다. 훈련도감의 별대를 지금 갑자기 없애기가 어려우니, 장정들을 뽑아 한 부대를 만드소서.”
하였다. 그리하여 병조 판서를 겸직하고 있던 김석주(金錫胄)가 마침내 변통하는 절목을 정해서 훈련도감의 군사 5707명 중에 707명을 감축하여 별대로 옮기고, 별대와 정초군 두 부대를 합하여 금위영(禁衛營)을 만들어서 금군(禁軍)과 서로 짝이 되게 하였다. 이해 여름에 민정중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훈련도감의 군사가 저잣거리의 사람과 차이가 없기 때문에 선왕께서 별대를 설치하였는데 미처 변통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정초군을 합하여 한 부대를 만든다면 훈련도감의 군제를 끝내 변통할 가망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불편한 점입니다. 군문(軍門)이 너무 많아서 호령(號令)이 통일되지 못하는 상태인데 또다시 하나의 큰 군문을 설치하니 이것이 두 번째 불편한 점입니다. 이미 금위영이라고 칭했으면 병조 판서로 하여금 주관하게 해야 하는데 병조 판서는 지체와 명망만으로 뽑아서 반드시 군무(軍務)에 밝은 자가 아니며 또 자주 체직되는 병통이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불편한 점입니다. 크게 변통해서 선왕조의 본의를 따르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김석주가 아뢰기를,
“번갈아 번을 드는 제도는 1년에 여섯 차례 번을 서고 번마다 5천 명이니 합하여 3만 명입니다. 또 3만 명에 대한 호수(戶首)의 보(保)가 도합 12만 명입니다. 지금 한정(閒丁)을 얻기가 어려운데 어디에서 12만 명을 찾아내겠습니까. 포수(砲手)들은 대부분 서울에서 생장하여 영리하고 군장(軍裝)이 깨끗하여 평상시 쓸 때에 지방에 있는 군사들보다 나으니, 신은 훈련도감의 원군(元軍)을 끝내 다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김석주의 말을 따랐다.
이달에 상이 조정에 임어하여 “국가가 한가하거든 이때에 미쳐 정사와 형벌을 밝힌다.”라는 《맹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성들의 부역이 너무 무겁고 군정(軍政)이 매우 엉성하며, 어린아이를 군역에 편입시키고 죽은 자들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니 더욱 가련하다. 이러한 폐단에 대해서는 반드시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차분히 강구하여 적절함을 헤아려서 변통해야 한다.”
하였다. 3월에 상이 비변사 당상에게 명하여 공에게 찾아가 묻게 하자, 공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지금 농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계를 바로잡는 일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백성들의 부역이 균등하지 못해서 전야(田野)는 날로 개간되지만 세입(稅入)은 날로 줄어들어 호조의 경비가 매년 부족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피와 땀으로 얻은 곡식은 대부분 탐관오리의 밑 빠진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으니, 이 때문에 양전(量田)을 하자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신역(身役)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문무(文武)에 종사하지도 않으면서 양반이라고 칭탁하고 산골짝을 전전하다가 스스로 입작민(入作民)이라고 핑계 대고는 군역(軍役)과 부세를 피하여, 온 집안이 한가롭게 노는 자가 나라 안에 10분의 6, 7할을 차지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힘없는 백성들만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를 당하고, 도망한 이웃과 친족들의 몫까지 겸하여 부역을 하고 거듭 세금을 바쳐서 살가죽을 벗기고 뼛속까지 긁어내는 가혹한 수탈의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이 때문에 호포(戶布)를 개정하자는 의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군제(軍制)를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훈련도감은 가만히 앉아서 밥만 축내는 서울의 병사들로 조직되어 있는데, 원래의 숫자는 5000명에 불과하지만 온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는 것은 마침내 3분의 2에 이르고, 의복의 비용으로는 3만 5000여 명의 보포(保布)를 징수하여 이들에게 주는데도 오히려 부족하여 병조와 호조에 비축된 것을 가져다가 사용하는 액수가 적지 않습니다. 또 군대에 편입된 자들을 보면 향리에서 승호(陞戶)되어 힘이 세고 고통을 견딜 만한 사람은 매우 적고, 군병 중에 사망하거나 탈이 있어 교대할 때에 서울에서 생장하여 시정(市井)의 일에 익숙하고 게으른 무리들로 구차하게 결원을 채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만약 관원을 시종하는 일을 맡긴다면 다소 영리하게 일할 듯합니다. 그러나 항오(行伍)의 병졸은 예로부터 병가(兵家)에서 시장 상인들을 병졸로 삼는 것을 가장 꺼렸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약아빠져 쓸 수가 없다고 여겨서이니, 진실로 우려할 만합니다.
어영청은 군병들이 번에 따라 번갈아 상번하고 휴번할 때에 식량과 물자, 병기를 보인(保人)들이 내는 쌀과 삼베로 마련하고 있으니, 이 제도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표하군(標下軍)을 마음대로 늘리는 바람에 서울에 놀고먹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며 군보(軍保)를 서울에서 망정(望定)하여 지방의 군액(軍額)이 점점 많아지니, 이는 바로 국가에서 군을 통제하는 좋은 제도가 없어서 나날이 불어나고 다달이 늘어나는 폐단입니다.
금위영으로 말하면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옮겨서 설치한 것입니다. 처음에 별대를 설치한 것은 본래 별대에 두서가 잡히기기를 기다려 훈련도감을 혁파하고 별대로 대신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당초의 계획과 달라지고 제도가 갑자기 중간에 변경되어 마침내 이렇게 군문(軍門)을 별도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병조 판서로 대장을 겸직하게 하여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이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였으니, 이는 조종조(祖宗朝)에서 이미 병조를 설치하고 별도로 도총부(都摠府)를 세운 뜻에 크게 위배되는바, 이것이 첫 번째 편리하지 못한 점입니다.
병조 판서의 직책은 형편상 오래 맡기가 어려워 1, 2년이 지나면 으레 반드시 개차(改差)하는데, 이미 사령관의 권한을 주었으나 장수는 병사들을 알지 못하고 병사들은 장수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마치 여관방에 나그네가 갈리듯 하니, 이것이 두 번째 편리하지 못한 점입니다.
예로부터 군사를 거느리는 장관(將官)은 모두 병조 판서의 통솔을 받는데, 훈련도감과 어영청에는 이미 대장이 있고 또 도제조가 있어서 아문(衙門)이 존엄하여 각각 기고(旗鼓)를 따로 사용하고, 병조 판서와 의정부의 명령을 받는 바가 없으니, 예전부터 지휘 계통이 없어서 제재하기 어려움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여기에다가 금위영을 더하였으니, 이것이 세 번째 편리하지 못한 점입니다.
수어청(守禦廳)과 총융청(摠戎廳) 두 군문으로 말하면 본래 외지에 있는 장수이니, 사체가 본래 서울에 있는 군문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다만 군관(軍官)과 서리(書吏) 몇 명만을 두어서 호령을 내고 문서를 전달하는 기구로 삼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중엽 이래로 신분이 귀하고 명망이 높은 신하들이 대부분 이 임무를 맡아 모든 규모가 날로 더욱 커져서 엄연히 각각 서울 안에 있는 큰 군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한 작은 도성 안에 다섯 개의 군문을 나누어 설치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좋은 제도가 아닙니다.
또 우리나라는 서쪽인 평안도와 북쪽인 함경도의 두 도를 제외하면 서울과 서로 호응하며 돕는 것은 오직 6도뿐입니다. 땅은 좁고 백성들은 가난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날로 더욱 곤궁해져 가는데, 예전부터 부담하던 중외의 온갖 부역 이외에 또 이처럼 새로 생긴 여러 군문의 가렴주구가 있어서 백성들의 힘과 관청의 재력이 모두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경기 한 도는 물력의 부족과 백성의 노고가 제도 중에도 특별히 심한데, 세 군문 외에 또다시 수어청과 총융청 두 군문에게 침탈당하고 있으니, 매우 가련합니다. 이 때문에 군제(軍制)를 변통하자는 의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수많은 병폐를 어느 누가 말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이것을 구제할 대책으로 말하면 진실로 누구나 다 알고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하게 탈이 난 곳만 이리저리 꿰맞추고 기워서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 성상께서 신하들의 건의하는 말이 없고 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깊은 궁중에서 심사숙고하고 개혁하는 데에 뜻을 두시니, 이는 진실로 크게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임금은 반드시 먼저 훌륭한 인물을 얻은 뒤에야 공을 세우고 사업을 이룩하는 효험이 있었으며, 반드시 먼저 큰 믿음을 세운 뒤에야 명령이 행해지고 금지하는 것이 시행되지 않는 효험을 이루었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근일에는 관직이 자주 바뀌어서 책임지고 성공을 담당할 사람이 없고, 법령이 자주 바뀌어서 일정하게 견지(堅持)하는 믿음이 없으니, 조정의 신하 중에 명령을 받고 직책을 맡아서 목숨을 걸고 끝까지 해내어 공적을 이룰 수 있는 자가 몇 사람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정의 정사가 한 사람의 말에 따라 시행되고 한 사람의 말에 따라 중지되어서, 지난해 관동 지방의 양전(量田)이나 충의위(忠義衛)에 불법으로 투속한 자들을 사정(査正)하는 것과 같은 일이 실로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기 때문에 오늘날 국가의 큰 걱정거리는, 조정의 신하들은 재주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용맹하게 나서서 앞으로 곧장 나아가 국사를 담당할 마음이 없으며, 조정의 정사는 가부를 논할 것 없이 모두 명령을 받들고 분부를 받들어서 기필코 따르고 어기지 않겠다는 뜻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여러 신하의 죄이지만, 또한 신하들이 이렇게 된 까닭이 성상에게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민심이 날로 이반(離反)하고, 기강이 날로 무너지고, 세도(世道)가 날로 나빠지고, 국가의 형세가 날로 위급해지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지금 밝으신 성상께서 만약 누적된 폐단을 깨끗이 제거하고 나라의 운명을 한번 새롭게 하고자 하신다면 먼저 훌륭한 인물을 얻고 믿음을 세운 뒤에야 비로소 이것을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렇게 하지 않고서 다만 목전의 폐단만 보고 후일의 난처함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경솔하게 조처했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반드시 중도에 망연자실하여 한탄하며 진퇴의 길목에서 의거할 곳을 잃는 걱정이 있을 것이니, 이는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밝으신 성상께서 이에 유념하여 훌륭한 정치를 도모하는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말이 망녕되고 계책은 어리석은 주제에 답한 내용이 상께서 물으신 이외의 것까지 감히 언급하였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은 공이 차자 끝에 올린 말이 더더욱 절실하다고 답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 좌상 최석정(崔錫鼎)이 직관(職官), 선거(選擧), 전부(田賦), 군려(軍旅) 네 조항을 아뢰고 나서 또 병사를 줄일 것을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비변사 낭청으로 하여금 공에게 묻게 하니, 공은 이미 조목별로 나열하여 답하고, 이어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자는 모두 백성을 괴롭혀 군대를 길러서 나라가 위태롭고 멸망하는 데 이르렀는데, 우리나라는 백성을 편안히 함으로써 군대를 곤궁하게 해서 국력이 약해지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옛 제도는 논할 것이 없고, 다만 오늘날 남쪽과 북쪽에 있는 두 적(敵)을 가지고 말하겠습니다. 왜인(倭人)들은 농민을 독려하여 부려서 곡식을 모두 거두어다가 군대를 길러서 농민들은 토란만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군사로 뽑혀 들어가 갑옷을 입으면 국가에서 많은 곡식과 재물을 지급하여 구족(九族)들이 경하하니, 이 때문에 병졸이 정예롭고 강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형편이 피폐하고 잔약하며 품팔이하고 빌어먹는 무리들은 군역을 피할 수가 없어서 갖가지 침해하는 고통을 당하며, 다소 힘이 있는 자들은 교묘하게 첨정(簽丁)을 피하여 종신토록 편안히 노는 즐거움을 얻습니다.
지금 군액(軍額)은 진실로 명목이 많으나 군적에서 누락된 자 또한 적지 않으니, 이는 조정에서 일일이 찾아내기가 어렵고 수령들이 감히 조사하지 못해서 제도와 습속이 예로부터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군사들은 수가 많든 적든 거칠며, 수를 늘리든 줄이든 거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옛 제도를 한번 바꾸어 백성들로 하여금 군대에 충원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예전의 정원에서 9분을 줄이고 1분을 남겨 둔다 해도 결코 정예로운 자를 얻을 수가 없으니, 군대는 정예로움을 힘쓰고 수가 많기를 힘쓰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에 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중외(中外)의 군사 중에 오직 훈련도감의 군대는 늠료를 많이 주기 때문에 다소 나으며, 어영청과 금위영 두 군대는 상번(上番)할 때에 양식을 지급하고 또 속오군(束伍軍)과 연호(煙戶)의 부역을 면제받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다음이 되는 것입니다. 군대로써 국가를 호위하는데, 이 다소 나은 군대에서 많은 수를 삭감하는 것은 진실로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조정에서 만약 크게 변통한다면 옛 규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만부득이하다면 차라리 새로 설치한 금위영을 혁파하는 것만 못합니다. 속오군은 바로 양민과 천민을 가리지 않고 뽑은 병사이므로 더더욱 경솔하게 초(哨) 수를 줄일 것을 의논해서는 안 되니, 부족한 수효는 해마다 점점 충원하더라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조정에서 거행하는 일은 반드시 성상이 마음으로 분명히 보고 분명히 알아서 확고하게 정하고 흔들리지 않아야 하니, 그런 뒤에야 신하가 스스로 성상의 뜻을 받들고 도와서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일을 시작한 뒤에 쓸데없는 의논이 조정에 가득하고 비방이 아래에서 일어나서 일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국가가 그 폐해를 입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또 지금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고 백성들도 모두 이익을 생각해서 기강을 유지할 수 없고 법령으로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큰 덕과 큰 공정함, 큰 위엄과 큰 믿음을 지녀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백성들에게 이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설령 묘당에서 밤낮으로 강구하여 기필코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사를 시행하고자 해도 명령을 받들고 가르침을 따를 리가 없으니, 이것이 염려됩니다. 이는 또 여러 조항의 득실 이면에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처리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달 재신들이 입대할 적에 판중추부사 유상운(柳尙運)이 공의 말을 들어 아뢰었다.
○ 8월에 서계(西溪)와 누원(樓院)의 회곡(晦谷)에서 회합하였다. 서계가 시를 지었는데 공이 화답하기를,
깨끗한 돌과 맑은 시냇물 한자리에 / 白石淸溪一席中
늙은 얼굴과 흰 머리로 동과 서에 앉아 있네 / 蒼顔華髮坐西東
그대는 우선 가볍게 헤어지지 마오 / 請君且莫輕分手
똑같이 인간에 칠십 세 된 늙은이이니 / 同是人間七十翁
하였다. 이해에 함께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기 때문에 기로소에서 음식을 가지고 놀이에 따라왔다.
○ 9월에 공은 말미를 받아 성묘할 적에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고 마침내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기로사 이외에는 여러 관사의 구채(驅債)를 받지 않았고 낭관들의 자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 10월에 시골에 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녹봉을 사양하였다.
○ 이에 앞서 윤휴(尹鑴)가 재신으로 있으면서 노산군(魯山君)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승 허목(許穆)이 사사로운 편지를 보내어 저지하였다. 이해 9월에 이르러 전 현감 신규(申奎)가 상소하기를,
“옛날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은 하늘이 명하시고 민심이 귀의하였습니다. 노산군이 어린 나이에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순종하였는데, 불행히도 사육신(死六臣)의 변고가 뜻밖에 생기고, 권람(權擥)과 정인지(鄭麟趾) 등이 은밀히 세조를 추대하려는 의논이 또 그에 따라서 격해져서, 세조로 하여금 상왕(上王)을 보호하는 은혜를 끝까지 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에 노산군이 다시 왕의 칭호로 불리지 못한 것은 혹 사세가 그렇게 만든 데에서 연유된 것이며, 또한 어찌 오늘의 밝으신 성상을 기다려서가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 사육신의 충절을 가상히 여기시어 사당을 세우도록 허락하시고 영화로운 사액(賜額)을 내려 주셨습니다. 더구나 노산군은 사육신의 옛 군주로서 일찍이 덕에 하자가 없었는데도 별세하여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제사에 왕의 예를 쓰지 못하니, 전하께서 측은히 여기시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만약 왕의 칭호를 추복하고 침원(寢園)을 봉하며, 별도로 사전(祠殿)을 세워서 예의와 제물을 구비하기를 한결같이 황조(皇朝)에서 경황제(景皇帝)를 추복한 고사(故事)와 같이 하신다면 신도(神道)를 위로할 수 있고 인정이 반드시 흡족해할 것입니다.”
하였다. 또 중종(中宗)의 폐비(廢妃)인 신씨(愼氏 단경왕후(端敬王后))를 추복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정릉(貞陵)을 폐위한 지 200여 년 만에 현종(顯宗)께서 복위시키셨고, 소릉(昭陵)이 폐위된 지 50여 년 만에 중종(中宗)께서 복위시키셨습니다. 그 밖에 혹독한 화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선비들에게도 모두 여러 조정을 지난 뒤에는 표창하여 증직하였으니, 지금 신이 논하는 것은 바로 폐하의 가법(家法)으로서 예전(禮典)에 있어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요, 명분과 의리상 회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일은 지극히 중대하니 널리 물어서 처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0월에 예조에서 대신의 뜻으로, 대신과 종친, 문무 2품 이상으로 하여금 빈청에 모여서 의논하게 하고, 또한 외방에 있는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비변사에서 다시 예조 참의 이덕성(李德成)의 상소로 인하여 백관들이 모여서 의논할 것을 청하자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마침내 신하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아뢰자, 상이 답하기를,
“이 일은 내 이미 마음속에 묵묵히 생각한 바가 있으니, 수의(收議)가 다 이르기를 기다려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공이 헌의(獻議)하기를,
광묘(光廟)께서 정난(靖難)하신 일은 비록 선양(禪讓)하여 물려준 것이라고 하나 실은 혁명하여 국란(國亂)을 제거한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 노산군을 높여 상왕이라 칭하였으나 뒤에는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였으니, 지금 뒤를 이은 후대 임금의 처지에서는 오직 어버이를 위하여 숨기고 높은 분을 위하여 숨길 뿐이며, 후세의 우리 백성들도 나라를 위하여 숨길 뿐입니다. 지금 오직 노산군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어버이와 지존과 나라를 위해 숨길 줄을 모른다면 《춘추》의 의리와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조종조(祖宗朝)의 일 중에 중종 때의 기묘사화와 명종 때의 을사사화로 말하면,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이기(李芑)와 윤원형(尹元衡)의 속임수와 모함에서 나온 것이고, 또 군주가 신하들을 처벌한 것이니, 후세의 왕에 이르러서 그 억울함을 뒤늦게나마 씻어 주고 다시 관직을 회복해 주는 것은 진실로 조종의 은덕에 빛나는 일이며 선왕을 계승하는 도리에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노산군의 일로 말하면 실로 그 당시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사육신이 격동시킨 탓으로 죄를 돌릴 수가 없으며, 권람과 정인지가 은밀히 세조를 도와 신하들을 제거한 것도 기묘사화와 을사사화 때에 신하들이 억울하게 죽은 일에 견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의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 이와 같으니, 기왕의 일을 비록 엄폐할 수는 없으나 다만 감히 의논을 제기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이 일을 표제로 거론하여 옳고 그름을 분명히 말해 변통하고자 하면서 ‘이와 같이 한다면 탕왕(湯王)에게 더욱 빛이 날 일이지 결코 마음에 부끄러워할 혐의가 없다.’라고 말하니, 신은 진실로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또 왕의 칭호를 회복한다면 별묘(別廟)에 모시는 것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지금 대수(代數)가 비록 체천(遞遷)하는 데에 이르렀으나 그 위차(位次)로 말하면 노(魯)나라 사람의 순사(順祀)를 따라서 광묘의 윗자리에 두어야 할 것이니, 광묘의 혼령이 만약 옛날 일을 생각하신다면 상상컨대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해서 뜰에 오르내리실 때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실 것이요, 노산군도 반드시 슬퍼하고 불안하여 제향을 차례로 흠향함을 좋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신명(神明)의 이치와 사람의 정이 어찌 서로 크게 다르겠습니까.
또 복위하는 큰 예를 거행한다면 특별히 태묘(太廟)에 고유하고 중외에 교서(敎書)를 반포해야 할 터인데, 당시의 사화와 변고를 만약 사실대로 말하려면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내용이 있고, 만약 숨기는 것이 있다면 이는 거짓 형식일 뿐이니, 또한 어떻게 신명과 사람을 믿게 하고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옛날 선조(宣祖) 때에 연신(筵臣) 박계현(朴啓賢)이 성삼문(成三問)의 충성을 논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크게 격발하여 장차 죄를 입을 상황이었는데, 상신(相臣) 홍섬(洪暹)이 구원하고 해명하여 중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경연일기(經筵日記)》에 이르기를, ‘《춘추》에는 국가를 위하여 휘(諱)하였으니, 이는 또한 고금의 공통된 의리이다. 박계현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말을 함부로 꺼내어 주상께서 잘못된 조처를 내리게 할 뻔하였으니, 어리석어서 일을 잘 몰랐다고 이를 만하다.’ 하였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말한다면 사육신을 추후에 장려하는 것이 무방할 듯한데도 선정(先正)의 말씀이 오히려 이와 같았으니, 하물며 노산군의 지위와 왕의 칭호를 회복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일은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이전을 상고해 보아도 전거로 삼을 만한 것이 없고, 오직 명(明)나라 때 경태제(景泰帝)의 호칭을 회복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시작과 끝이 노산군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있으니, 비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명나라 말엽에 이르러서 홍광제(弘光帝)가 건문제(建文帝)의 시호를 추상(追上)한 것이 바로 지금의 경우와 서로 유사하나, 다만 생각건대 그 당시 조정의 정사가 모두 마사영(馬士英)의 손에서 나와 매우 난잡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비단 건문제의 시호를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 사친(私親)을 추존하여 황제라 하였고, 역대 조정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어질고 간사함을 따지지 않고 모두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주어서 천하 사람들이 비난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1년이 못 되어 자신은 사로잡히고 나라는 멸망하였으니, 어찌 후세에서 따라 행할 전례(典禮)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저 옛날 선현들은 노산군의 일에 대하여 모두 서글프게 여겨 성상께 아뢴 자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혹은 묘소를 수리할 것을 청하고, 혹은 치제(致祭)할 것을 청하고, 혹은 후사(後嗣)를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복위에 대해 언급한 자는 없었습니다. 오직 지난번 윤휴(尹鑴)가 이것을 청하였다가 저지당하였으니, 이제 어찌 또다시 윤휴의 말을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를 복위하는 문제도 온당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맹자가 말씀하기를, ‘천자에게 신임을 얻은 자는 제후가 되고, 제후에게 신임을 얻은 자는 대부가 된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춘추》에 노(魯)나라 임금으로서 왕명이 없이 즉위한 자에 대해서는 모두 ‘즉위’라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낮은 자는 반드시 높은 자의 명을 얻은 뒤에야 자기 지위를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당초에 신씨가 쫓겨난 것이 비록 중종의 본의가 아니라고 하나 어쨌든 중종의 명으로 쫓아낸 것입니다. 중종이 재위하고 있던 때에 김정(金淨)과 박상(朴祥) 등이 상소하여 복위를 청한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올바른 의리를 얻었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중종이 처분을 내리지 않고 승하하여 하늘로 올라가 계신 지가 이제 100여 년이 넘었습니다.
후왕(後王)의 처지에서 마침내 막중한 조종의 배필에 대해 명을 받든 바가 없이 마음대로 올리고 내쳐서 오목(於穆)의 자리에 제체(齊體)를 더하고 두 왕비의 위에 올려서 함께 제향한다면 이 어찌 《예경(禮經)》에 이른 바 ‘전에 그 일을 폐기하였으면 추후에 그 일을 거행하지 않는다.’라는 뜻이겠습니까.
《춘추》에는 선공(先公)의 부인에게 비록 단절해야 할 큰 잘못이 있는 경우라도 감히 칭호를 폄하하지 않고 모두 소군(小君)이라고 썼으니, 이는 바로 신하들이 존귀한 군친(君親)에 대해 감히 자기 마음대로 지위를 주고 빼앗는 의리를 행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큰 잘못이 있어도 감히 마음대로 빼앗지 못한 것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큰 원통함이 있어도 감히 마음대로 줄 수 없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정릉(貞陵 신덕왕후(神德王后))과 소릉(昭陵 현덕왕후(顯德王后))을 복위한 것은 이 경우와 다릅니다. 두 능은 태조와 문종 당시에 폐출하라는 명을 내린 적이 없어 생전에는 높은 지위에 있었고 사후에는 존호가 있었는데, 능묘를 수리하지 않은 것은 후손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후세에 복위하는 것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여 의심할 만한 점이 없는 것이니, 어찌 오늘날 논하는 바와 똑같이 견줄 수 있겠습니까.
송(宋)나라 철종(哲宗)이 맹후(孟后)를 폐출한 것은 장돈(章惇)의 참소와 모함으로 인한 것인데, 휘종(徽宗) 때에 이르러 상 태후(向太后)가 철종이 평소에 후회한 뜻을 생각하여 복위하게 하였으니, 이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복위한 것입니다. 그 뒤에 다시 폐위되었다가 정강(靖康)의 난리에 이르러 송나라의 유신(遺臣)들이 궁중으로 맞이해 들였으니, 이는 혼란할 때의 일이므로 끌어다가 전례(前例)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오늘날 신씨를 복위하는 일은 옛날 일을 상고해 볼 때 무엇을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판중추부사 최석정(崔錫鼎)이 또한 외방에서 의논을 올려 《춘추》에서 높은 이를 위하여 휘(諱)하며, 《예경》에서 “전에 그 일을 폐기하였으면 추후에 그 일을 거행하지 않는다.”라는 의리를 인용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위호(位號)를 추복하는 것은 감히 의논할 수 없으나 신주(神主)가 오랫동안 여염집에 있으니, 끝내 온당하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만약 관(官)에서 사당을 짓고 사시(四時)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행하게 한다면 신민(臣民)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예경》과 《춘추》의 대의에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마침내 빈청에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명나라 경태제(景泰帝)의 일은 비록 서로 같지 않다고 하더라도 또한 본받아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소원한 신하로서 지극히 중대한 일을 거론하였으니, 이는 천년에 한 번 있는 일이라고 이를 만한데, 그 일을 끝내 시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 천자(天子)나 왕가(王家)의 처사(處事)는 본디 필부(匹夫)와는 같지 않으니, 진실로 시행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찌 반드시 의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라.
신비(愼妃)의 일은 추복하는 것이 예(禮)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많고, 옛말을 인용하여 비유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그러하다. 정릉(貞陵)과 소릉(昭陵)을 추복한 곡절이 이와 다르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태묘(太廟)에 올려 부묘(祔廟)하여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윗자리에 있게 하는 것은, 더욱 불편한 한 가지 단서가 된다.
상 태후(尙太后)가 맹씨(孟氏)의 위호를 특별히 추복하였으나 오늘날의 일은 크게 옳지 않은 바가 있다. 거의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 억지로 청묘(淸廟)에 올려 부묘하는 것은 과연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반복하여 생각해 보건대 끝내 중난(重難)한 일에 관련되어 있다. 어떻게 하면 예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조금이라도 존봉(尊奉)하는 도리에 부합되어, 억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소라도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였다. 다음 날 인견할 적에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사당을 세우자는 최석정의 의논이 마땅할 듯하다.”
하고, 마침내 신비를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달에 공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신비를 추복하는 것이 불가하다 하나 다만 예문(禮文)의 옳고 그름으로써 말한 것일 뿐이니, 혹 추복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은 후하게 예우하는 데에 가깝지만 노산군의 일에 이르러서는 종묘에 신(神)이 계시다면 반드시 큰 허물이 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세가 이미 정해져서 무단히 정지할 수가 없으니, 최 정승의 의논이 지극히 합당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조정에 만약 예를 아는 신하가 있어서 평소 주상께서 소중하게 여겼다면 논쟁하고 고집해서 중지할 것을 청할 수 있으나 이미 그러한 사람이 없고 또 급박하게 거행하여 미처 논할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느냐. 정릉을 복위할 때에는 온 나라에 반대하는 말이 없었는데도 선왕께서 몇 달을 고집하다가 허락하셨는데, 이번 일은 어찌 이와 같이 급박하단 말이냐. 끝내 마음속에 깊은 근심이 없지 않다.”
하였다.
○ 11월에 공의 문인인 예조 판서 최규서(崔奎瑞)가 보낸 편지에,
“혹자들은 공의 헌의(獻議)가 상의 마음을 역탐하고 잘못을 들추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하자, 공은 답장하기를,
“지금 만약 까닭 없이 이 일을 들추어 이와 같이 말한 것이라면 이로써 책망하는 것이 옳겠지만, 지금은 성상께서 노산대군(魯山大君)을 왕으로 추존하는 일을 가지고 하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세조가 선양(禪讓)을 받았다.’라고 한다고 해서 나 또한 ‘선양을 받았다.’라고 말하고, 사육신(死六臣)이 죽은 뒤에 이 일이 생겼다고 해서 또한 ‘사육신이 격동하여 이루었다.’라고 하면서 단종을 추존하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선왕을 무함하는 것이니, 어찌 휘(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헌의할 때에는 그 일을 감히 드러내고 말할 수가 없어서 십분 은미하게 말하였습니다. 가아(家兒)에게 보인 세 통의 편지에 흉중에 품은 뜻을 다 털어놓았는데, 대감께서는 아직도 의심하고 계십니까?
허다한 곡절은 말할 것도 없고 노산대군이 종묘에 들어가 조종(祖宗)이 되었는데, 신숙주(申叔舟), 권람(權擥), 한명회(韓明澮) 세 신하를 종묘에 나열하여 배식(配食)하게 하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만약 이 세 신하를 출향(黜享)시키려고 한다면 또 장차 광묘(光廟)께는 어떻게 대처한단 말입니까. 나는 내가 남들에게 비난을 받아 낭패를 당하는 것을 감히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조정에서 이처럼 큰 잘못을 저지르는데도 강력히 간쟁하는 자가 아무도 없는 것을 걱정하고 한탄합니다.
지난날에는 대감의 직책이 한가한 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을 따라 부화뇌동하는 말씀을 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국가의 예를 맡았으니, 만약 이 일이 십분 정당하다고 여긴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혹시라도 온당치 못하다고 여기는 뜻이 있다면 어찌 성상께서 옳게 여기신다고 하여 옳다고만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이달에 공이 시책문 제술관(諡冊文製述官)에 차임되었다. 얼마 뒤에 중궁이 며칠 동안 몸이 편치 못하였는데, 임시로 거처하는 승휘전(承暉殿)에 화재가 나자 공은 강교(江郊)로 나갔다. 중궁의 환후가 편안해지자 공은 상소하고 대죄하기를,
“신은 약방의 임무를 맡고 있으나 문안하는 대열에 달려가 참석하지 못하였고, 화재가 났는데도 또 위문하는 예를 뒤늦게 올렸으며, 큰 예에 대해 수의(收議)할 때에 망언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또 제술관에 차임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답하기를,
“지난번 말미를 청했을 때에 경이 돌아오지 않을 뜻이 있다는 것을 내 일찍 알았더라면 어찌 윤허할 리가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도 한탄한다. 내가 물어 모두 답하였으니, 어찌 인혐(引嫌)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속히 서울에 들어와 시책문을 지어 올리고 그대로 경저(京邸)에 머물라.”
하였다.
○ 12월에 공이 교외에서 시책문을 지어 올렸다. 이달에 부묘(祔廟)할 적에 상이 직접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는데 큰바람이 갑자기 불어서 궁 안팎의 등불이 다 꺼지고, 세조 묘실(廟室)의 승진판(承塵板)이 날아가서 뒤집힌 뒤에야 바람이 그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위안제(慰安祭)를 올렸다.

[주D-001]서서히 …… 이달 : 대본에는 ‘令循議 吏判’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命徐議 是月’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장가(張家) …… 옥사(獄事) : 무고(巫蠱)는 무술(巫術)로 남을 저주함을 이른다. 장 희빈(張禧嬪)의 아비 무덤이 도성 서쪽에 있었는데, 장씨 집안에서는 서인에게 죄를 뒤집어씌울 속셈으로 표석(標石)을 훼손하고 무덤 속에 흉물을 묻어 장씨 집안을 누군가 저주하였다 하여 옥사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병조 판서 신여철(申汝哲)의 종 응선(應先)의 소행이라 하였으나 결국에는 장희재(張希載)의 종인 업동(業同)의 소행으로 드러나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肅宗實錄 22年 6月》
[주D-003]주급(周急) : 경제적으로 곤궁한 신하를 구휼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곡식과 고기를 대 주는 것을 가리킨다. 《論語 雍也》 《孟子 萬章下》
[주D-004]인입(引入)하고 인출(引出) : 인입은 헌관(獻官)을 인도하여 사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인출은 헌관을 인도하여 사당에서 나오는 것을 이른다.
[주D-005]세실(世室) : 훌륭한 공덕이 있어서 친진(親盡)이 된 다음에도 대대로 제사를 받드는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신 종묘의 신실(神室)을 이르는바, 별실(別室)에 따로 모셨다.
[주D-006]도궁(都宮) : 여러 사당이 모여 있는 궁궐을 칭한다. 옛날에는 도궁에 여러 개의 사당을 따로따로 모셨으나 후세에는 한 사당에 여러 위패를 함께 모셨다.
[주D-007]사조(四祖) :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개국한 다음 추존한 네 분의 선조로 고조인 목조(穆祖)와 증조인 익조(翼祖), 조고인 도조(度祖), 아버지인 환조(桓祖)를 가리킨다.
[주D-008]가금(價金) : 사고 팔 때에 주고받는 돈으로, 가문(價文), 가액(價額)이라고도 한다.
[주D-009]요동(遼東)의 동팔참(東八站) : 압록강(鴨綠江)으로부터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있던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으로, 우리나라의 사신이 중국에 왕래하는 데 요로(要路)로 쓰였다.
[주D-010]쇄마가(刷馬價) : 쇄마는 지방에 배치하였던 관용(官用)의 말로, 외관(外官)의 영송(迎送)이나 조사(詔使)의 방물(方物) 등을 수송하는 데 쓰였다. 주로 삯을 주고 민간의 말을 사용하였는바, 쇄마가는 쇄마를 고용(雇傭)하는 삯을 이른다.
[주D-011]토목(吐木) : 짤막짤막하게 토막 친 나무로, 예전에 기와를 굽는 데에 쓰던 장작이나 땔감을 이른다.
[주D-012]장목(長木)과 초둔(草芚) : 장목은 물건을 받치거나 버티게 하는 데 쓰는 굵고 긴 나무를 가리키며, 초둔은 짚, 띠,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으로 비와 바람, 볕을 막는 데 사용한다.
[주D-013]행하(行下) : 상전이나 주인이 부리는 사람에게 품삯 이외에 특별히 더 주는 돈이나 물품을 이른다.
[주D-014]양 무제(梁武帝) …… 일 : 납아(蠟鵝)는 밀랍으로 만든 거위이다. 소명태자(昭明太子)의 어머니인 정 귀빈(丁貴嬪)이 죽자, 소명태자는 좋은 묏자리를 구하였다. 이때 환관 유삼부(兪三副)가 뇌물을 받고 다른 땅을 소개하여 지금 태자가 구한 땅보다 더 좋다고 무제에게 은밀히 아뢰었다. 무제는 말년에 의심이 많아 정 귀빈의 묘가 불길하다고 여기고 그곳으로 이장(移葬)하였는데, 도사(道士)가 말하기를, “이곳은 장자(長子)에게 불리하니, 만약 주술(呪術)을 사용하면 이것을 누를 수 있다.” 하므로 소명태자는 마침내 납아와 여러 물건을 만들어 묘 옆에 묻었다. 그 후 이 사건이 문제가 되었으나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있던 서면(徐勉)이 간곡하게 간하여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南史 卷53 昭明太子列傳》
[주D-015]깊고 장구한 생각 : 옥사를 일으키면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에게 파급되어 처벌하지 않을 수 없는바, 이렇게 되면 후일 세자가 즉위할 경우 이 사건이 문제가 될 것을 미리 염려함을 이른 것이다.
[주D-016]즉시 처분해 주소서 : 대본에는 ‘旣賜處分’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旣’를 ‘卽’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7]작서(灼鼠)의 옥사 : 1527년(중종22) 7월에 세자의 생일을 기하여, 쥐를 잡아 사지(四肢)와 꼬리를 자르고 입ㆍ코ㆍ귀ㆍ눈을 불로 지져 동궁(東宮)의 북정(北庭)에 있는 나무에 걸어 두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다. 그 당시 우의정 심정(沈貞) 등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고 범인 체포를 청하였으나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고 의옥(疑獄)이 자꾸 커졌다. 결국 경빈(敬嬪) 박씨(朴氏)가 의심을 받고 그 아들 복성군(福城君) 이미(李嵋)와 함께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쫓겨났다. 《燃藜室記述 卷9 中宗朝故事本末 朴敬嬪福城君之獄》
[주D-018]황비(黃扉) : 황각(黃閣)과 같은 말로 의정부를 가리킨다.
[주D-019]우리 …… 축원하네 : 남산(南山)은 종남산(終南山)으로 원래 주(周)나라 도성인 호경(鎬京)의 남쪽에 있는 산인데, 후세에는 모든 도성의 남산을 종남산이라 칭한다. 《시경》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남산처럼 장수하소서.〔如南山之壽〕” 하였는데, 이는 신하가 군주의 만수무강을 축원한 시이므로 약천 또한 인용한 것이다.
[주D-020]천종(天宗) : 해와 달, 별의 신을 이른다.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천자가 마침내 내년에 풍년이 들기를 천종에게 기원한다.〔天子乃祈來年于天宗〕”라고 하였다.
[주D-021]성경(盛京) : 심양(瀋陽)의 옛 이름이다. 청 태조(淸太祖) 천명(天命) 10년(1625)에 요양(遼陽)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태종(太宗) 때에 성을 쌓고 단과 사당을 세우고는 성경이라 불렀다. 그 후 세조(世祖)가 천하를 통일하고 북경(北京)으로 천도한 뒤 봉천부(奉天府)를 설치하고, 마침내 이곳을 유도(留都)로 삼았다.
[주D-022]전주(田疇) : 삼국 시대 우북평(右北平) 사람으로 조조(曹操)를 도와 북쪽으로 오랑캐를 정벌할 때 길을 안내하는 향도(嚮導)가 되었다. 노룡(盧龍)과 유성(柳城)은 선비족(鮮卑族)의 근거지를 급습하기 위해 전주가 안내했던 길 이름이다. 《三國志 卷1 魏書 武帝操》
[주D-023]큰 폭으로 만들어서 : 대본에는 ‘廣之爲大’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大’ 뒤에 ‘幅’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D-024]육진(六鎭) : 세종 때에 김종서(金宗瑞)를 시켜서 두만강 가에 설치한 여섯 진으로 경원(慶源)ㆍ경흥(慶興)ㆍ부령(富寧)ㆍ온성(穩城)ㆍ종성(鍾城)ㆍ회령(會寧)을 이른다.
[주D-025]명사(命祀) : 왕명을 받아서 나라 안의 산천(山川)에 제사하는 것을 이른다.
[주D-026]공자(孔子)는 …… 말씀하였는데 : 초나라 소왕(昭王)이 처음 병이 났을 때에 점을 쳤는데, 점괘에 황하(黃河)의 신(神)이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부들이 교(郊)에서 제사 지낼 것을 청하니, 소왕은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에 제후는 천자의 명으로 영지 안의 산천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초나라는 장강(長江)과 한수(漢水)ㆍ수수(睢水)ㆍ장수(漳水) 네 강의 신에게만 제사 지낼 뿐이다. 내가 비록 덕이 없으나 황하의 신에게 별다른 죄를 지은 바가 없다.” 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공자는 “초나라의 소왕은 대도(大道)를 알았다.”라고 칭찬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6年》
[주D-027]예기에 …… 있으니 :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대부는 70세가 되면 벼슬을 그만두니, 만약 사직할 수 없으면 반드시 궤장을 하사해 준다.〔大夫七十而致事 若不得謝 則必賜之几杖〕” 하였다.
[주D-028]승호(陞戶) : 중앙과 지방에서 공사천(公私賤)을 양민호(良民戶)로 승격하여 훈련도감의 포수(砲手) 정군(正軍)에 소속시킨 제도를 이른다.
[주D-029]표하군(標下軍) : 대장(大將) 이하 각 장관에게 전속된 수병(手兵)을 이른다.
[주D-030]정권(政權)과 병권(兵權) : 정권은 무신들을 고과(考課)하고 그 성적에 따라 승진 또는 좌천시키는 등의 인사에 대한 권한을 이르며, 병권은 군권(軍權)과 같은 말로 군을 직접 통솔하는 권한을 이른다. 원래 정권은 병조 판서가 맡고 병권은 대장이나 도총부의 도총관이 맡았다.
[주D-031]구채(驅債) : 관원에게 녹봉(祿俸) 이외에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의 급료로 더 주는 전곡(錢糓)이나 포백(布帛)을 이른다.
[주D-032]노산군(魯山君) : 단종(端宗)이 복위되기 전의 칭호로 원래 노산대군(魯山大君)이라 하였다. 세조(世祖)가 즉위한 다음 상왕(上王)으로 칭하다가 뒤에 노산군으로 강등하였다.
[주D-033]황조(皇朝)에서 …… 고사(故事) : 황조는 명나라를 높여 칭한 것이다. 경황제(景皇帝)는 경태황제(景泰皇帝)로, 곧 명나라의 7대 황제인 경제(景帝)를 가리키며 선종(宣宗)의 차자(次子)이고 영종(英宗)의 아우이다. 영종이 토목(土木)의 변으로 납치되자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경태는 그의 연호이다. 영종이 돌아온 뒤 폐위되어 성왕(成王)으로 있다가 죽었는데, 헌종(憲宗) 11년(1475)에 시호를 받고 황제의 호칭을 회복하였다. 《明史 卷11 景帝本紀》
[주D-034]정릉(貞陵) : 태조의 제2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능호(陵號)이다. 태조의 제1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는 태조가 즉위하기 전에 죽었고 강씨만이 생존했으므로 강씨가 정실(正室)로 인정되어 명나라로부터 정식 왕비로 책명(冊命)을 받았다. 그리하여 강씨 소생인 방석(芳碩)이 세자로 책봉되자, 한씨 소생으로 뒤에 태종이 된 방원(芳遠)은 강씨 소생인 방번(芳蕃)ㆍ방석 형제를 살해하고 결국 자신이 즉위한 후 강씨를 폐위시켰는데, 현종 때에 복위되었다.
[주D-035]소릉(昭陵) :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를 처음 안산(安山)에 장례했을 때의 능호이다. 현덕왕후는 문종이 즉위하기 전 단종을 낳고 죽었는데 문종이 즉위한 후 왕후에 추봉되었으며, 1454년(단종2)에 인효순혜(仁孝順惠)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받았다. 그러나 세조가 즉위한 후 친정 오라비인 권자신(權自愼)이 성삼문(成三問)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피살되자, 현덕왕후마저 죄인의 일가라 하여 폐위했었는데, 중종 때에 김정국(金正國) 등 유신(儒臣)들의 끈질긴 주장에 의하여 결국 복위되었다. 뒤에 양주(楊州)에 있는 문종의 현릉(顯陵)으로 이장하였다.
[주D-036]광묘(光廟)께서 정난(靖難)하신 일 : 광묘는 광릉(光陵)으로 곧 세조(世祖)를 가리키며, 정난(靖難)은 계유년(1453, 단종1)에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반대파를 숙청한 계유정난(癸酉靖難)과 을해년(1455)에 단종을 폐위하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
[주D-037]탕왕(湯王)에게 …… 일이지 : 《서경》 〈태서 중(泰誓中)〉에 “우리의 무용(武勇)을 떨쳐 저들의 국경을 침입해서 저 흉잔한 자를 취함으로써 우리의 정벌이 장대(張大)해지면 탕왕에게 빛이 있을 것이다.〔我武惟揚 侵于之疆 取彼凶殘 我伐用張 于湯有光〕” 하였다. 이는 탕왕이 일찍이 포악한 걸왕(桀王)을 토벌하였는데, 이제 무왕(武王)이 포악한 주왕(紂王)을 정벌하니, 이는 탕왕에게도 빛이 나는 일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노산군(魯山君)을 단종으로 복위하는 것이 세조에게도 빛나는 일이라고 말하나 이는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주D-038]노(魯)나라 사람의 순사(順祀) : 순사는 소목(昭穆)의 차례에 따라 제사하는 것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8년 조에 “겨울 10월 노나라에서 선공(先公)에게 순사하고 복을 빌었다.” 하였다. 왕실은 혈통보다 종통(宗統)을 중요시하여 혈통으로는 세조가 숙부이고 단종이 조카이지만, 국통으로는 단종이 먼저 즉위하였으므로 세조가 단종 아래에 있는 것이 순서에 맞는다고 본다.
[주D-039]홍광제(弘光帝)가 …… 것 : 홍광제는 명(明)나라 말엽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으로, 홍광은 그의 연호이다. 건문제(建文帝)는 명나라 태조(太祖)의 손자인 혜제(惠帝) 주윤문(朱允炆)으로, 태조의 태자가 일찍 죽자 그의 아들을 황태손으로 삼아 즉위시키니 그가 바로 혜제이다. 1399년 당시 연왕(燕王)이었던 숙부 성조(成祖)에게 찬탈당하고 죽었으나 그 후 명나라 말기에 시호를 회복하고 추숭하였다. 건문은 혜제 연간의 연호로서 명나라는 연호를 곧 당대 황제의 호칭으로 썼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주D-040]사친(私親) : 종실(宗室)로서 왕위를 이어받은 임금의 생부(生父)를 이른다.
[주D-041]오목(於穆)의 …… 더하고 : 오목은 청정(淸靜)하고 경건한 것으로 오목의 자리는 종묘의 사당을 가리킨다. 《시경》 〈청묘(淸廟)〉에 “아, 심원하도다. 이 청정한 사당이여, 제사를 돕는 공후(公侯)들이 공경하고 화락하도다.〔於穆淸廟 肅雝顯相〕” 하였다. 제체(齊體)는 아내를 가리키는데, 반고(班固)의 《백호통(白虎通)》 〈가취(嫁娶)〉에 “아내는 똑같다는 뜻이니 남편과 아내는 체가 같은 것이다.〔妻者 齊也 與夫齊體〕”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42]두 왕비 : 중종의 계비(繼妃)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와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를 가리킨다. 결국 신씨(愼氏)도 영조 때에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되어 두 왕비의 위에 있게 되었다.
[주D-043]정강(靖康)의 난리 : 정강은 송(宋)나라 흠종(欽宗)의 연호로, 정강 2년(1127)에 금군(金軍)이 남하하여 송나라의 수도인 변경(汴京)이 함락되고 상황(上皇)인 휘종(徽宗)과 흠종이 모두 금(金)나라로 잡혀갔다.
[주D-044]소원한 …… 거론하였으니 : 소원한 신하는 전 현감 신규(申奎)를 가리킨 것으로, 그가 상소하여 노산군의 복위와 중종의 폐비인 신씨(愼氏)를 추복(追復)할 것을 청한 일을 이른다.

 

약천연보 제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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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年譜)]




71세 기묘년(1699, 숙종25)
1월에 상이 말을 하사하자 공이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는데, 상이 문 노공(文潞公)의 고사를 인용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가 마마에 걸렸으므로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였는데, 공이 이달에 대궐에 나아갔다. 이달에 세자의 환후가 회복되자, 상은 안구마(鞍具馬)를 면급(面給)하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3월에 상소문을 남겨 두고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가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6월에 상은 승지에게 함께 오라고 명하고, 어의를 보내어 병을 살피게 하였다.
7월에 세 번째 상소하여 치사를 청하자, 상이 수찰(手札)을 내려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윤7월에 상이 다시 어의를 보냈다.
8월에 열한 번째 상소하자, 상은 승지에게 우선 돌아오라고 명하고 별감(別監)을 보내어 전복탕을 하사하였으며, 월름(月廩)과 주급(周急)을 내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해 가을에 서자(庶子) 남학정(南鶴貞)이 태어났다.
10월에 상의 체후가 미령(未寧)하므로 공은 이달에 대궐에 나아갔다. 이달에 상의 환후가 평상을 회복하자,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1월에 상소문을 남겨 두고 곧바로 돌아오자, 상은 다시 승지를 보내어 간곡히 만류하였다.
12월에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 공이 교외에서 곧바로 향리(鄕里)로 돌아가자,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말하기를,
“남 정승의 떠나고 머무는 것이 또한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하였다. 1월에 공이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내가 편전(便殿)에서 입대했을 때 경의 손을 잡고 면전에서 타이른 일은 굶주릴 때 밥을 구하고 목마를 때 물을 구하는 심정보다도 더 간절하였다. 그런데 국사를 헤아리는 경의 깊은 충성으로 어찌 나의 의지하고 도움을 바라는 정성을 헤아리지 않고 이처럼 황급히 나를 버리고 떠나간단 말인가.
옛날 문 노공은 나이가 80세였는데도 치사를 허락해 주지 않고 열흘마다 한 번씩 조회하여 도당(都堂)에서 정사를 의논하게 하였다. 더구나 오늘날은 기근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참혹하여 국가에 우려할 만한 단서가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이다. 가령 경이 이미 치사했다 하더라도 조정에 나와서 옛날 문 노공이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을 다스렸던 고사와 같이 스스로 보필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내 어찌 따르지 않아야 할 소청을 억지로 따라서 원로를 버리지 않고 백발의 늙은 신하에게 자문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이달 13일에 세자가 마마에 걸렸으므로 다음 날 의약청을 설치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먼저 내국 도제조의 직임을 체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도제조는 하루도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고, 사관이 밤에 길을 걸어서 이르렀다. 공은 대궐 아래에 이르러 ‘밖에서 들어왔으니 마땅히 대궐 아래에서 재숙(齋宿)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여 승정원으로 하여금 미품(微稟)하게 하니, 상이 곧바로 입직하라고 명하였다. 11일 만에 의약청을 파하고 그대로 사옹원(司饔院)에 머물도록 명하니, 공은 3일 만에 물러나와 약방에서 유숙하였다. 상은 대면하여 안구마를 하사하고 전지(田地) 15결(結)과 노비 5구(口)를 하사하였다. 2월 5일에 상은 직숙을 파하도록 명하고, 3월 7일에는 문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 3월 13일에 공이 상소문을 남겨 두고 곧바로 돌아오면서 그 상소에 시골에 있을 때에 받지 않았던 녹봉을 실어다 주라는 명령을 굳게 사양하여 아뢰기를,
“무릇 신하가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서 국록을 먹는 것도 오히려 시위소찬(尸位素餐)이라고 합니다. 더구나 향리로 물러나서 1년 또는 반년 동안 있다가 조정에 들어온 뒤에 지난 날짜를 계산해서 다시 그 녹봉을 받는다면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은 승지를 보내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초봄에 전유(傳諭)한 비답에 나의 심중에 있는 말을 다하였으니, 이 어찌 원로대신이 서둘러 지위를 버리고 떠나갈 시기이겠는가.”
하였다. 애초에 공은 숙부인 의졸공(宜拙公 남이성(南二星))보다 네 살이 적었는데, 숙부와 조카가 전후로 현달하였다. 두 분은 장성할 때부터 ‘근력이 미치지 못하는데도 결단하고 떠나지 못하는 것’을 깊은 경계로 삼았으니, 이는 소광(疏廣)과 소수(疏受)가 만족할 때에 그만둔다는 계책을 따르려는 것이었다.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 말할 때에도 이렇게 강조하였다. 이때에 공은 다시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벼슬살이한 이래로 항상 나이가 70이 되고도 벼슬에서 물러날 줄을 몰라, 밤중까지 쉬지 않고 돌아다니는 죄인이 됨을 달게 여기는 것을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서로 알던 선배와 동료들과도 약속한 말이 있습니다. 신의 말을 들은 자들이 지금 비록 대부분 죽어서 지하에 있으나 옛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약속한 말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다.’ 하였으니, 신이 어찌 차마 죽은 자는 지각이 없다 하여 평소의 말을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 5월에 공은 겸직하고 있는 여러 관사(官司)의 전최(殿最)를 실시하지 못했다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답하기를,
“내가 지금 경을 서울로 불러오고자 한다.”
하였다.
○ 6월에 좌상 최석정(崔錫鼎)이 입대하여 권면하여 타일러 소환할 것을 거듭 청하자, 상은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승지 편에 “담(痰)이 뭉쳤다.”라고 부주(附奏)하자, 상이 어의를 보냈다. 공은 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기를,
“이제 전하께서 만일 신이 늙은 말의 지혜가 있어서 혹 길을 찾는 데에 쓸 만하다고 여기신다면 신이 죽기 전에 오히려 어리석고 망녕된 말씀으로라도 성상의 고문(顧問)에 대비할 것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몸이 초야에 있다 해서 잠시인들 우리 성상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7월에 상이 답하기를,
“옛날 명(明)나라의 대산(戴珊)이 치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효종(孝宗)은 허락하지 않고 유대하(劉大夏)를 시켜 태평성세의 조짐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니 차마 나를 버리고 먼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뜻으로 타이르게 하였다. 대산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곧바로 집에 돌아갈 수 없다.’ 하였는데, 군신 간에 정과 뜻이 서로 통함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볼 수가 있다. 더구나 지금 국운의 어려움이 태평성세의 조짐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보다도 훨씬 더하고, 이 소자(小子)가 경을 의지하고 믿음이 또 대산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경이 나를 버리고 무관심한 것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니, 이 어찌 내가 평소에 오랫동안 덕망이 있는 원로대신에게 기대했던 바이겠는가. 나의 뜻이 굳게 정해져 경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을 것이니, 경은 나를 곤궁하게 하지 말라.”
하였다. 공이 세 번째 상소문을 올리니, 상이 수찰(手札)을 내려 이르기를,
하였다. 다섯 번째 상소하여 아뢰기를,
“휘황찬란한 어찰(御札)을 신의 초가집에 내려 주시어 불초하기 이를 데 없는 신이 이처럼 특별한 은혜를 입은 것이 서너 차례나 됩니다. 설령 신이 과연 가슴속에 간직한 경륜이 있다 하더라도 이제 만약 죽음을 무릅쓰고 소명에 달려간다면 반드시 장차 일신을 모두 망치게 되어 전하께서 신을 부르시는 본의를 도리어 잃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인가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말하기를, ‘저 늙은이가 나이가 70이 되었다고 하여 물러갔다가 해가 지난 뒤에 다시 조정에 들어오니, 이 어찌 그의 나이가 다시 젊어져서이겠는가.’라고 하며, ‘저 늙은이가 고질병을 앓는다고 하여 물러갔다가 해가 지난 뒤에 다시 조정에 들어오니, 이 어찌 그의 병이 갑자기 나아서이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또 ‘저 늙은이가 장릉(莊陵)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어 올릴 때에 강교(江郊)에 이르렀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 마침내 다시 조정에 들어온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며, 또 ‘저 늙은이가 왕세자가 마마를 앓으실 때에 약을 의논하는 반열에 들어와 참여했다가 상소문만 남겨 놓고 전하께 하직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물러갔는데, 지금 다시 조정에 들어온 것은 무슨 이유이겠는가?’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이 입이 열 개라도 진실로 스스로 해명할 수 없고, 또한 스스로 세상에 용납될 수가 없을 것이니, 어떻게 국사에 보탬이 됨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섯 번째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이 비록 밖에 있더라도 미천한 신에게 하문하심에 대비할 수 있으니, 이러한 뜻은 지난번 상소에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국가에 불행한 일이 있어서 조정에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발생한다면 신은 들것에 실려서라도 길에 오를 것이요, 설령 목숨이 한두 걸음 사이에 다한다 하더라도 감히 국가를 저버리는 귀신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오늘날 스스로 보답하기를 기약할 수 있는 계책은 이 두 가지뿐입니다. 특별한 예우에 감격하는 마음은 아홉 번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요, 궁중에서 성상을 받드는 것은 다음 생(生)에서나 기약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방현령과 대산 두 신하의 일은 내 지난번 비답에 말하였다. 경의 근력이 아직 왕성함을 내 진실로 알고 있으니, 나이가 더 많아져서 힘이 미치지 못할 때가 되기를 조금 더 기다려 그때 가서 다시 물러날 것을 아뢔야 한다. 지금은 결코 허락할 수 없으니, 경은 이러한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리고 당일로 길에 올라서 군신 간에 뜻이 통하는 만남이 옛날 역사책에만 있는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윤7월에 공이 아홉 번째 상소문을 올렸는데, 승지가 병으로 상소문을 올릴 힘이 없다고 아뢰자, 상이 다시 어의를 보냈다.
○ 8월에 공이 열 번째 상소문을 올리고 인하여 승지가 4개월 동안 머물면서 각 고을에 끼친 주전(廚傳)의 폐단을 아뢰었다. 며칠 있다가 장령 어사휘(魚史徽)가 입대하여 아뢰기를,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는 오직 정성과 예에 달려 있으니,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은 사체를 손상시킬 뿐이요, 또 주전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생각해 보겠다.”
하였다. 얼마 후 상은 공의 열한 번째 상소문에 답할 적에 승지가 우선 돌아오도록 허락하였다. 얼마 후 승지 홍수주(洪受疇)가 입시하여 월름(月廩)과 주급(周急)을 하사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따랐다.
○ 9월에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국전(國典)에 치사한 신하는 절반의 녹봉으로 생활하게 한다는 내용이 있으나 직책을 띠고서 시골에 있는 자에게 매월 녹봉으로 곡식을 계속해서 대 주는 것은 실로 의의(意義)와 전례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월름을 지급하라는 명령을 속히 환수하시고 이어 신의 치사하려는 청원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월름을 내리는 명령은 실로 뜻 없이 내린 것이 아니다.”
하였다.
○ 10월에 상의 체후가 미령하였는데, 공이 상소하여 내국 도제조의 직임을 우선 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속히 길에 오르라고 명하였으며, 다음 날 비망기를 내려 조정에서 문안하지 않음을 책망하였다. 4일 뒤에 공이 도성 밖에 이르러 상소하고 대죄하니, 상은 즉시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공이 마침내 대궐에 나아가 다음 날 아침에 들어가 진찰하였는데, 그다음 날 상은 조정에서 문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얼마 후 상의 체후가 평상으로 돌아오자, 공은 상소하여 먼저 내국 도제조를 체직해 줄 것을 청하고 거듭 치사를 청하니, 상은 한 가지 병을 더 보탠 듯하다 하며 억지로 만류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호조에서 공이 전후 11개월 동안 시골에 있을 때에 받지 않았던 녹봉을 사양한다고 아뢰자, 상이 답하기를,
“다시는 실어 보내지 말아서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 11월에 빈청 인견 때에 공이 내국 도제조의 직임을 우선 체직해 줄 것을 거듭 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며칠 있다가 상소하여 거듭 청하고 이어 고향으로 돌아가 죽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4일이 지난 뒤에 상소문을 남겨 놓고 곧바로 돌아가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한강 너머에서 돈유(敦諭)하였다. 상은 다음 날 승지를 다시 비파담에 보내어 마음을 바꾸고 돌아오라고 명하였다.
○ 12월에 흰 무지개가 태양을 관통하였다. 좌상 서문중(徐文重)이 입대하여 지방에 있는 대신을 불러 오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부사(領府事 남구만)를 여름 내내 재촉하였으나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 결국은 나의 병환 때문에 올라왔으나 또다시 곧바로 돌아갔으니, 조용히 예를 다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조보(朝報)에 실어 우선 나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달에 공이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주원(廚院 사옹원(司饔院))은 본래 대군(大君)이나 왕자가 으레 겸직하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조정에서 왕자의 작위를 정하기 위하여 고사(故事)에 대해 하문하신 일이 있었다 하니, 신은 더욱 전례를 따라 스스로 처신해야 합니다.”
하였다. 일을 해조에 회부하자 왕자가 아직 출합(出閤)하지 않았다고 복주하니, 상은 공이 도제조의 직임을 그대로 겸직하도록 명하였다.

72세 경진년(1700, 숙종26)
1월에 조정에서 시권(試券)을 환봉(換封)한 사람을 삭과(削科)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공은 의논을 올려 전방(全榜)을 삭과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달에 공이 병이 났는데, 상이 어의 두 명을 보내니,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다.
2월에 치사를 거듭 청하고, 3월에 거듭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중궁이 병환이 있으므로 공은 이달에 대궐에 나아갔다.
4월에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했다가 그달로 파하였고, 5월에 다시 설치했다가 그달로 파하였다.
6월에 학질에 걸리니, 상이 어의 두 명을 보내고 내국 도제조의 해임을 허락하였으며, 별감을 보내어 전복탕을 하사하였다.
7월에 상은 전복탕을 하사하고, 8월에도 전복탕을 하사하였다.
11월에 공의 숙부 의졸공(宜拙公)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 지난해 가을에 조정에서 단종(端宗)의 복위로 인하여 증광별시(增廣別試)를 보였는데, 겨울 회시(會試)에 거자(擧子) 중에 서리(書吏)를 매수해서 봉미(封彌)를 바꾼 자가 많았다. 상은 정언(正言) 이탄(李坦)의 말을 받아들여 이성휘(李聖輝)와 송성(宋晟)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이해 1월에 박필위(朴弼渭)와 이수철(李秀哲)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양사(兩司)에서 파방(罷榜)할 것을 청하니, 상이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의논을 올려 아뢰기를,
“이번 과장(科場)에서 부정행위를 한 자가 이처럼 많은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한 거자가 죄를 지어 그 거자를 처벌하는 경우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또 국가의 기강이 엄숙하지 못함이 마침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기강을 진작하여 엄숙하게 하고 징계하는 방도에 있어서도 평상시대로 조처할 수가 없는바, 그대로 방(榜)을 보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다른 재상의 의견도 모두 같았다. 우상(右相) 이세백(李世白)은 말하기를,
“전방(全榜)을 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유상운(柳尙運)은 말하기를,
“일체 엄하게 조사하여 국법을 적용해야 하지만 그대로 방을 보존하여 수교(受敎)를 따르는 것이 국체를 손상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비상한 변고는 상례(常例)로 처리할 수가 없으니, 대신(大臣 남구만)의 파방하자는 의논이 정대(正大)하다고 이를 만하다. 문과는 파방하되 그중에 스스로 답안을 지은 자는 또한 억울하고 원통할 것이니, 정시(庭試)나 혹 별시(別試)를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공이 의논을 올려 아뢰기를,
“과거(科擧)의 고례(古例)를 가지고 아뢰겠습니다. 이미 문과를 파한 경우에는 무과와 생원시ㆍ진사시를 함께 파하는 것도 당연히 이 조처 안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문과만 삭제하고 무과와 생원시ㆍ진사시를 그대로 둔 것은, 창방(唱榜)한 지 한 해가 지났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실로 ‘막대한 경과(慶科)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이 때문에 ‘삭방(削榜)’이라고만 말하고 ‘파방(罷榜)’이라고는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문과의 방(榜)이 없는 것을 흠으로 여겨 명분이 없는 과거를 다시 거행해서 예전에 치렀던 과거에 맞추려고 하니, 이미 의의가 없고 실로 매우 구차합니다. 또 지금 기강이 무너지고 인심이 나빠져서 손님으로 예우하여 선비들을 집합시키는 장소에 마침내 전에 없던 간교한 변고가 있으니, 조정에서는 엄하게 토벌하고 통렬히 징계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바, 선비들의 마음을 위안하고 기쁘게 하기에 절대로 적당한 시기가 아닙니다.
한쪽에서는 죄인을 낭자하게 고문하여 옥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한쪽에서는 또다시 시원(試院)을 열어 경쟁을 조장하는 것은 선비들의 풍속을 장려하고 선비들이 숭상할 바를 돈독히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그 후 9년 여름에 조정에서 기묘년(1699, 숙종25) 과거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절도(絶島)에 정속(定屬)시켜 노비로 삼은 자 외의 여러 사람을 회복시킬 것을 의논하니, 대신 이여(李畬) 등이 모두 찬성하였으나 오직 공만은 끝까지 처음 주장을 견지하였다.
○ 3월에 중궁이 환후가 있자 공은 종일토록 쉬지 않고 달려가서 대궐에 나아갔다. 이날 밤 상이 인견할 때에 이르기를,
“나는 굳이 경에게 근력을 다할 것을 바라지 않는다. 조정에서 의지하고 중하게 여기는 도리로 보아 묘당의 모든 일을 자연히 경과 상의하여 조처할 것이니, 경이 만약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유익한 바가 많을 것이다.”
하니, 공이 답하기를,
“신이 서울에 있으나 지방에 있으나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또 물러가 있는 곳이 서울에서 하룻길이 못 되니, 또한 어찌 왕복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 지난 선조(宣祖) 갑술년(1574, 선조7)에 조헌(趙憲)이 질정관(質正官)으로 중국에 가서 보니, 문묘(文廟) 서북쪽에 계성묘(啓聖廟)가 있었는바, 계성공(啓聖公) 공씨(孔氏)가 북쪽에 있고, 선현인 안무유(顔無繇)와 공리(孔鯉)가 동쪽에 있고, 증석(曾晳)과 맹손(孟孫)이 서쪽에 있었다. 조헌이 조정에 돌아와 상소하여 아뢰기를,
“증자(曾子), 안자(顔子), 자사(子思)가 아버지보다 먼저 제향을 받아먹지 않으니,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생각건대 우리나라 문묘 서쪽에 넓고 빈 땅이 있으니, 만약 의논하여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에 함께 제사한다면 온 나라의 부자(父子) 된 자가 안정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종(顯宗) 무신년(1668, 현종9)에 이르러 관학 유생(館學儒生) 신응징(申應澄) 등이 명나라를 모방하여 정자(程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주자(朱子 주희(朱熹)), 장자(張子 장재(張載)),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아버지까지 함께 제사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이제 공훈이 한때에 드러난 자에게도 오히려 영화가 부모에게 미치는 은전이 있는데, 더구나 저 선성(先聖)과 선현(先賢)의 아버지는 성현을 낳아서 공로가 만세에 있는데도 후세에 보답을 받지 못한다면 성인을 사모하고 현인을 높여서 근원을 추모하고 공로에 보답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 상소문을 예조에 회부하여 대신과 유신들에게 의논하게 하고 마침내 거행하도록 명하였으나 오랫동안 겨를이 없어 거행하지 못하였다.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에 상이 이것을 온당치 못하다 하여 해조에 명하여 물건을 갖추고 때를 기다리게 하였는데, 공이 일찍이 정승 최석정(崔錫鼎)에게 그 불가함을 말하였다. 이해 10월에 최 정승이 판돈녕부사로 입시하여 사체상 의의가 없을 듯하다고 아뢰었으며, 동지경연사 오도일(吳道一)은 기근과 질병이 해마다 잇따라 발생하므로 우선 후일을 기다릴 것을 청하니, 상이 마침내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공이 의논을 올려 아뢰기를,
“안자와 증자, 자사를 그 부친보다 앞에 놓는 것은 공자가 위에 계시니 오히려 압존(壓尊)하는 의리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선조에 대해서는 진실로 예를 미루어서 먼 선조를 추모하는 의리가 있으나, 사도(師道)를 높이는 것으로 말하면 비록 공자 문하의 제자들이라 해도 다만 공자를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입을 뿐이요, 반드시 그것을 미루어 공자의 아버지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구나 천만세(千萬世)가 지난 뒤에 공자를 높여 제사하는 의리로 인하여 미루어서 숙량흘(叔梁紇)에게까지 미치고, 또 숙량흘의 제사로 인하여 미루어서 증점(曾點)과 안로(顔路), 공리(孔鯉) 외에 또 이름도 자(字)도 알지 못하는 맹손씨(孟孫氏)에게까지 미칩니다. 또 그 예(例)를 미루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아버지에게까지 미치고, 또 그 예를 인용하여 주자(周子)와 장자(張子)의 아버지까지 함께 제사하여, 마치 신하가 조정에서 관작을 받으면 그 조고(祖考)와 선고(先考)까지 추증하는 것과 같이 합니다. 이는 성현을 위하여 덕을 높이고 공로에 보답하는 의리로 볼 때 높이고자 하다가 도리어 낮추는 혐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이 일이 가령 당연히 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끝내 번거로운 예와 지나친 문식(文飾)으로 돌아가고 마니,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닐 듯합니다. 우선 중지하고 후일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12월에 상이 신완(申琓)의 의논을 받아들여서 다음 해에 숙량흘(叔梁紇) 등 다섯 현인을 계성사(啓聖祠)에 제향하였고,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의 아버지는 참여시키지 않았다.
○ 공은 내국 도제조의 직임에서 해면되었으나 중궁의 환후가 오랫동안 편안하지 않으므로 감히 돌아갈 것을 아뢰지 못하고, 연이어 여러 관사의 도제조와 호위대장의 직임을 해임해 줄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공이 상소하여 거듭 청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옛날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문무관(文武官) 중에 명신들이 다 사라질 지경이라 하여 다시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뛰어난 무재(茂才)를 지닌 자로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자를 살펴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육지(陸贄)가 당(唐)나라 덕종(德宗)에게 고할 때에도 선진(先進)들은 점점 다 죽어 가는데 후배 중 뛰어난 자들이 잇따르지 못함을 조정의 큰 걱정거리로 여겼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신과 같이 병들어 허약하고 노망한 자에 대해서 즉시 관직을 거두지 않으시고, 준걸들을 불러 맞이하는 방도 또한 널리 열어 놓지 않으시어 여러 지위와 관직이 숫자를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상시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만 해도 그 폐단이 많은데,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게 되면 반드시 당장 낭패할 우려가 있습니다.
다시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인재를 가려서 관직을 제수하는 방도에 특별히 유념하시어 온갖 법도가 무너지고 폐지되는 형국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은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차자의 끝에 아뢴 내용은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73세 신사년(1701, 숙종27)
3월에 상소하여 거듭 치사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에 중궁의 환후가 다소 편안해지자, 공이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아뢰고 거듭 치사를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다음 날 공이 도성을 나오니, 상이 비망기를 내려 만류하므로 마침내 한강 너머에 머물렀다.
5월에 한강 너머에서 상소하여 녹봉을 한사코 사양하였다.
6월에 상은 본관(本官)에게 명하여 월름(月廩)을 계속 대 주게 하였다.
8월에 이인화(李仁華)의 모함으로 인해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 14일에 인현왕비(仁顯王妃)가 승하하니, 대궐 아래로 달려가 곡하고 성복(成服)하였으며, 이날 한강을 건너와 상소를 올리고 마침내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10월에 강교(江郊)에 나아가 대명(待命)하였는데, 양사(兩司)에서 합계할 적에 “공이 지난 갑술년(1694)에 팔의(八議)를 끌어다 말했다.” 하여 우선 먼저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양사에서 패역(悖逆)한 말을 삭제할 것을 청하자, 상은 공이 지나치게 염려했다는 이유로 파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양사에서 인하여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할 것을 청하였다.
12월에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 4월에 중궁의 환후가 조금 편안해졌으므로 공이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아뢰고 거듭 치사를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다음 날 공이 도성을 나오니, 상이 비망기를 내려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공이 길을 되돌아와 강가에 잠시 머물면서 상소하여 거듭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경이 생각을 고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은 바로 오늘날 단비를 바라는 것과 같다.”
하였다. 새벽 무렵 중궁이 다시 미령(未寧)하자, 상이 전교하기를,
“경은 약원(藥院)을 함께 맡고 있음을 생각하여 거취를 조용히 살펴서 나의 소망에 부응하라.”
하니, 공이 마침내 감히 전리(田里)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강 너머 압구정(狎鷗亭)에 머물렀다. 이날 상은 안심하고 들어오라고 거듭 명하였다.
○ 5월에 공은 한강 너머가 바로 향촌(鄕村)이라 해서 상소하여 녹봉을 사양하였다.
○ 6월에 본관에 명하여 월름을 계속 가져다주도록 하자, 공이 다시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 8월에 중궁의 환후가 위독하니, 노론과 남인들이 서로 공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지방의 유생인 이인화(李仁華)가 국모(國母)를 모해한 죄인(罪人)을 토벌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한두 명의 불충(不忠)하고 불의(不義)한 무리들이 마침내 앞뒤를 재 보려는 계책을 품고는 곧 ‘깊고 장구한 생각〔深長慮〕’이라는 세 글자로써 군부(君父)를 공갈하였습니다. 한 나라의 흉악한 역적인 장희재를 용서하는 것이 깊고 장구한 생각이라면, 한 나라의 인심을 시원하게 풀어 주는 것은 어찌 유독 깊고 장구한 생각이 되지 않겠습니까. 간신이 교묘한 말을 늘어놓아서 군부를 속임이 마침내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근래 지방의 유생들이 남의 사주를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내 일찍이 절치부심하였는데, 이제 이인화의 상소를 보건대 원로대신을 모함함이 끝이 없으니, 이 어찌 한 명의 지방 유생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군부를 무시하고 조정을 멸시하는 정상이 지극히 놀랍고 원통하니, 결코 그의 꾀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엄하게 심문하는 것이 국법에 당연하나 우선 관대한 은전을 따라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다음 날 공이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여우와 쥐새끼 같은 하찮은 무리들이 남의 사주를 받고 마음대로 대신을 무함하니,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6일 후에 인현왕비(仁顯王妃)가 승하하니, 공은 대궐 아래로 달려가 곡하고 성복(成服)하였다. 윤공 지완(尹公趾完)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성복하는 자리에서 공과 손을 잡고 영원히 작별하였다. 김춘택(金春澤) 등이 사람을 사주하여 반열을 두루 돌아다니며 고함치기를,
“장희재를 용서한 사람을 앞줄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날 승정원에서 공이 한강을 건너갔다고 아뢰자, 상이 안심하고 들어오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이제 겨우 성복이 지나자 대신이 또다시 강가로 나가니, 나의 서운한 마음을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은 ‘죄명이 이미 중하니 떠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상소를 올리고 대죄하였으며, 마침내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유공 상운(柳公尙運)도 같은 날 한강을 건너왔는데, 해괴한 일이 불일간에 일어날 줄을 알고는 마침내 상소하기를,
“근래에 지방 유생이 갑술년(1694, 숙종20)과 병자년(1696)에 시행한 형벌의 잘못을 논하니, 신은 병자년에 옥사를 다스린 신하로서 이미 요행으로 죄를 피할 수 있는 도리가 없으며, 갑술년의 일로 말하면 오히려 다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장희재를 참작하여 조처하던 초기에 그 당시 영의정인 남구만이 성상께 품재(稟裁)하겠다는 뜻을 신에게 말하였는데, 신은 ‘경도(經道)와 권도(權道)를 때에 따라 적용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후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차자를 올릴 적에 신에게 초고를 보여 주었는데, 신이 또 깊은 충성과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 있다는 말을 주장하여 이 말을 차자의 내용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논하는 자들이 마침내 불충(不忠)과 불의(不義)로써 남구만을 단정하는 죄안(罪案)으로 삼고, 또 이른바 ‘깊고 장구한 생각〔深長慮〕’이라는 세 글자로써 군부(君父)를 공갈하였다는 것은 그 의논을 부추긴 자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죄를 삼는다면 신이 실로 첫 번째가 되어야 할 것이니, 어찌 감히 계면쩍게 스스로 엄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위험한 말을 어찌 입에 올릴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10월에 영상 최석정이 이미 장 희빈에게 은혜를 온전히 내려 살려 줄 것을 청했다 하여 견책을 입었다. 지평 이동언(李東彦)이 상소하기를,
“갑술년(1694, 숙종20)에 권병(權柄)을 잡고 있던 신하가 ‘깊고 장구한 생각’이라는 세 글자로써 큰 죄인을 편안히 쉬게 하여 마침내 이홍발(李弘渤)의 간사한 꾀를 이루고 오늘날의 역변(逆變)을 만들었습니다. 시험 삼아 원임 대신(原任大臣 유상운)이 자백한 한 통의 상소문을 가지고 검증해 보시면 또한 추측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필 대행왕비의 선침(仙寢)이 채 식지도 아니한 날에 날짜가 이미 오래된 지방 유생의 상소문을 억지로 끌어대며 비로소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까. 전하께서는 일찍이 그 근원을 탐구해 보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유독 국문에 참여한 수상(首相)의 몇 통의 차자에만 격분하시는 것입니까.
아, 오늘날 수상의 깊은 근심과 지나친 염려는 왕년에 춘궁(春宮)의 사속(私屬)을 법을 굽혀 보호하려던 자와 비교하여 볼 때 일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나 엄하시고 견벌(譴罰)이 지나치게 무거우니, 또한 눈앞의 가까운 것만을 보시고 먼 훗날을 소홀히 여기시며, 작은 것을 취하고 큰 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기를,
“내 마땅히 가납(嘉納)하겠다.”
하였다. 정언(正言) 김재(金栽) 또한 아뢰기를,
“후일의 이해(利害)를 따지는 마음이 지금의 역모를 빚어냈으니, 이인화를 용서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이 강교(江郊)에 나아가 대명하였다. 9일에 이동언과 김재, 집의 유명웅(兪命雄), 장령 윤헌주(尹憲柱), 사간 어사휘(魚史徽), 헌납 윤홍리(尹弘离), 정언 황일하(黃一夏) 등이 합계(合啓)하기를,
“남구만은 여러 조정을 차례로 섬겼으니, 춘추의 대의를 듣지 못한 것이 아니요, 조종의 큰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도, 사사로운 마음이 화복(禍福)에 편벽되이 집착해서 의친(議親)의 법을 억지로 인용하고 깊고 장구한 생각이라고 칭탁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장 희빈이 불안하면 세자가 불안할 것이요, 세자가 불안하면 종묘사직이 불안할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장희재를 비호하고 군부를 요망한 말로 현혹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이후로 온갖 변괴가 다 나왔습니다. 이번에 요망한 무고(巫蠱)의 화독(禍毒)이 과연 궁궐의 은밀한 곳에서 일어났으니, 만일 장희재가 일찍 국법을 받아 처형되어서 뿌리를 제거했더라면 요망한 난역(亂逆)의 무리가 또한 어찌 감히 나쁜 마음을 지금처럼 참혹하게 제멋대로 부릴 수 있었겠습니까. 국가의 기강이 비로소 떨쳐져서 하늘의 토벌이 행해진다면 역적을 비호한 죄인 중에 으뜸인 자를 요행으로 사면해 줄 수가 없으니, 우선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업동(業同)의 무고의 옥사는 국가를 어지럽힐 것을 도모하였으니, 어찌 조정에 화를 전가하는 데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유상운(柳尙運)이 지성으로 남구만을 구원하고 변호하여 끝내 오늘날의 화를 만들었으니, 또한 어찌 유상운을 죄의 우두머리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선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3일 뒤에 대사간 이익수(李益壽)가 상소하기를,
“남구만은 장희재의 일에 대해 너무 멀리 후일을 염려해서 법을 굽히자는 의논을 급히 주장하였는데, 그 본정(本情)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만 국본(國本)인 세자로 하여금 편안하고 굳건히 하여 근심이 없게 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병자년(1696, 숙종22)의 옥사에서 끝까지 조사하려고 하지 않은 뜻으로 말하면 장희재를 용서해 주기를 청한 일과 똑같이 지나치게 우려해서이고 결코 딴마음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무고의 옥사가 비로소 끝나서 처분이 한 번 내리자 은혜를 온전히 내려야 한다는 청원이 날마다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 당시 대신의 생각 또한 일을 먼저 예측한 소견에서 나온 것으로서, 단지 그 계책이 시기상조여서 오늘날의 비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아, 동기(動機)를 자세히 살펴 죄를 정하면 죄를 받는 자가 할 말이 없고, 자취를 가지고 사람을 비판하면 그 당하는 자가 굴복하지 않는 법이니, 두 신하의 일은 비록 잘못되었으나 마음은 명명백백한데 무고의 옥사를 조장하여 만들었다고 지나치게 말하니, 사람들의 참소하는 말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신하를 아는 것은 군주만 한 이가 없다.’ 하였으니, 두 신하가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청렴하고 충성스러우며 공정하고 정직하였으며, 전하께서 평소 이들에게 의지하고 위임하며 대우한 것이 또한 어떠하셨습니까? 전하의 총명하고 성스러움으로 그들이 행한 바를 살펴보고 그들이 그렇게 한 연유를 관찰하시건대 어찌 대신(臺臣)들이 비난하는 말과 방불한 점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두 신하의 심사(心事)를 내 어찌 모르겠는가. 일은 비록 잘못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딴생각이 없는데, 자취를 가지고 사람을 비판하여 역적을 비호했다고 단죄하고 있으니, 실로 공평하고 진실한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옥당과 사헌부에서 잇따라 대사간 이익수를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 11월에 양사가 입대하여 합계할 때에 도리에 어긋난 한두 마디 말을 삭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조어(措語)를 고쳤지만 당초에는 이해(利害)와 화복을 생각했다고 말하였고, 또 역적을 비호했다고 운운하였다. 나는 남구만이 결코 이해를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요, 또한 그의 처사가 역적을 비호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일을 지나치게 염려한 결과이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 일을 그르친 죄를 논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라.”
하였다. 또 유상운의 일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남구만의 사건이니, 또한 남구만이 지나치게 염려한 것과 같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곧바로 중대한 옥사를 파할 것을 청한 것은 대단히 잘못되었으니, 이로써 파직하라.”
하였다. 이때 박서계(朴西溪)가 공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군신 간에 서로 알아주는 마음이 귀신을 울릴 만합니다.”
하였다. 양사에서 다시 합계하기를,
“큰 죄인이 이미 죄를 피하여 업동의 변고를 초래하였는데, 다시 그 옥사를 느슨하게 처리하였으니, 이른바 ‘깊고 장구한 생각’이라는 것은 도리어 흉한 화를 부른 결과가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만약 장희재가 일찍 국법을 받아 처형되고 처첩이 모두 연좌되었더라면 오늘날의 변고가 반드시 이와 같이 혹독하지 않았을 것이니, 근원을 찾아보면 결코 파직하는 데에 그칠 수가 없습니다. 남구만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출송(門外出送)하소서.”
하였다. 또 병자년(1696, 숙종22)에 한밤중에 청대하여 곧바로 국청을 파할 것을 청했다 해서 유상운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 12월에 인현왕비의 상을 발인하여 하관(下官)할 때에 공은 강교에서 멀리 바라보며 곡(哭)하고 마침내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74세 임오년(1702, 숙종28)
1월에 양사(兩司)에서 공이 일을 그르쳤음을 아뢰었다. 상이 마침내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도록 명하니, 양사에서 인하여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다.
5월에 상이 중도부처(中道付處)하도록 명하였다. 다음 날 정계(停啓)하여 아산(牙山)에 부처되었는데, 이동언(李東彦)이 멀리 유배 보낼 것을 홀로 계청(啓請)하였고, 6월에 정계하였다.
11월에 상이 특별히 방귀전리(放歸田里)하도록 명하였다.
12월에 온양(溫陽)의 역촌(驛村)에 잠시 머물렀다.

○ 지난해 겨울에 대사간 윤덕준(尹德駿)이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라는 계사(啓辭)에 이견을 제기하였다. 이해 1월에 장령 박태창(朴泰昌)이 상소하기를,
“남구만과 유상운이 한마음으로 국가를 보호하고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지 않아서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심복을 받았으니, 그 당시의 조처는 춘궁(春宮)을 위해 지나치게 염려한 데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계(臺啓)에서 미리 헤아릴 수 없는 화변(禍變)을 가지고 한결같이 두 신하에게 죄를 돌리니, 아, 어찌 매우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사간원에서 박태창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양사에서 입대하여 합계하자, 상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집의 윤홍리(尹弘离)가 아뢰기를,
“두 대신의 행동이 비록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나왔으나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어찌 실정이 그렇지 않다고 핑계 대면서 법을 굽혀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언 김상직(金相稷)이 아뢰기를,
“당초에 옥사를 느슨하게 처리한 것이 비록 국가를 위한 깊은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 끝내 망극한 화변을 초래하였으니, 파직하는 벌로는 그 죄를 충분히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따르고 이르기를,
“두 대신이 딴 뜻이 없음을 내 이미 알고 있으나 관계된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한결같이 서로 버티는 것은 온당치 못할 듯하다.”
하였다. 다음 날 윤홍리와 김상직이 다시 정언 황일하(黃一夏)와 함께 합계하기를,
“실정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결코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고 말아서는 안 됩니다.”
하여 공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청하고, 또 간범(干犯)한 바가 일을 그르친 것 뿐만이 아니라고 하여 유상운을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 2월에 헌납 윤행교(尹行敎)가 상소하기를,
“두 신하의 죄를 지난날 성상께서 경연에서 해명해 주신 것은 신하들을 감동시킬 만하였는데, 마침내 파직을 청하자 윤허하시고,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할 것을 청하자 윤허하시고, 또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조금도 제재하지 않으셨습니다. 아, 전하께서 잘 알고 계시는 자인데도 이와 같으시니, 전하께서 알지 못하시는 자는 더욱 무엇을 믿겠습니까.”
하였다.
○ 4월에 서문유(徐文裕)와 조상우(趙相愚)가 이어서 대사헌이 되어 합계한 것에 대해 이견을 제기하였다.
○ 5월에 대사헌 서종태(徐宗泰)도 이와 같이 하였다.
6월에 상이 경연에 납시어 이견을 제기하는 신하들을 반박하자, 윤홍리(尹弘离)가 인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제멋대로 유행한다.”라고 아뢰었다. 이달에 수찬(修撰) 이관명(李觀命)이 입대하여 당론(黨論)의 폐해를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갑술년(1694, 숙종20) 초에 나도 깊이 우려하고 멀리 내다보고 생각한 조처라고 여겼다. 사변이 일어난 뒤에 이르러서 오늘날 대신(臺臣)들도 대신(大臣)이, 저들이 화를 일으킬 것을 미리 알면서도 일부러 풀어 주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니, 실정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지 않는다면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이견을 세워 마치 당론을 견지하듯이 하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종태가 감히 이견을 제기하려는 계책을 품고 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하였다. 다음 날 사간원에서 헌장(憲長) 등 세 사람을 파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를 따랐다. 상이 마침내 공 등을 중도부처하라고 합계에 답하니, 다음 날 정계하였다. 공은 아산(牙山)에, 유 정승은 직산(稷山)에 부처되었다. 7일 후에 영중추부사 윤지선(尹趾善)이 상소하기를,
“신은 지난해 업동(業同)의 옥사가 다시 일어나던 날에 홀로 옥사를 다스리면서 오히려 법조문보다 지나치게 가볍게 처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남구만과 유상운이 모두 견책을 받는 데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홀로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인하여 아뢰기를,
“남구만의 고심(苦心)과 충절(忠節)은 옛사람에게서 찾아보더라도 그런 사람을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세도에 보탬이 되는 바른말과 곧은 의논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무진년(1688, 숙종14)에 경연에서 대답했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이번 일이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데에 관련되어 있으니, 신은 아홉 번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제 만약 깊이 궁구하신다면 반드시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척연(惕然)히 감회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아, 한마음으로 국가를 위하고 이해(利害)와 화복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남구만이 평소에 세운 신념인데, 이제 입고 있는 죄명은 한결같이 이와 반대이니, 어찌 천하에 지극히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백발의 외로운 신하가 이리저리 떠돌며 고생하여 길에서 보는 자들이 모두 한탄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시종 보전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지난해 겨울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을 사사(賜死)하였기 때문에 윤 정승이 이를 언급한 것이다. 지평 이동언(李東彦)이 상소하기를,
“부처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대간들이 급급히 의논을 중지하여 행여 뒤늦을세라 두려워하듯이 하였습니다.”
하였고, 또다시 아뢰기를,
“남구만은 장희재를 곡진히 비호하고, 유상운은 무고(巫蠱)의 역적을 함부로 풀어 주었으니, 부처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하여, 함께 멀리 유배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상이 연신(筵臣)에게 묻기를,
“대신(大臣)에 대한 계사(啓辭)를 한 관사(官司)에서 홀로 아뢰는 전례가 있는가?”
하니, 승지 여필용(呂必容)이 대답하기를,
“전례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난번에 저들 남인도 홀로 아뢴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옥당에서 아뢰기를,
“비록 대신이라도 현재 실직이 없으면 그렇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한두 번 잘못된 전례가 있지만 관작이 없는 대신이라 하더라도 한 관사에서 홀로 아뢰는 것은 지극히 합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 6월에 정계(停啓)하였다. 이달에 인현왕비(仁顯王妃)의 연제(練祭)를 맞이하여 공은 아산(牙山)의 객사와 다소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을의 큰길가에서 멀리 바라보며 곡하였으니, 이는 경내(境內)의 조사(朝士)들과 섞이지 않고자 해서였다. 8월 소상(小祥)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공이 견책을 입자, 양사에서 또다시 영돈녕부사 윤지완(尹趾完)이 박만정(朴萬鼎)의 근저(根柢)라 하여 파직할 것을 합계하였다. 그런데 10월에 윤지완이 영중추부사에 서용되자 윤지완이 상소하기를,
“신은 갑술년(1694, 숙종20) 초기 부름에 달려가기 전에 옥사를 다스리던 수상(首相 남구만)이 편지로 물은 일이 있었는데, 신의 잘못된 소견은 그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신이 조정에 나갔을 적에 수상이 상소한 유생의 심한 비방과 배척을 받아 경황없이 도성을 떠나갔으므로 신 또한 사실대로 자수하고 그대로 물러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또 국가를 위한 ‘깊고 장구한 생각〔深長慮〕’이 일단의 괴로운 마음에서 나왔다고 아뢰었습니다. 이제 ‘깊고 장구한 생각’이라는 말이 가장 심하게 죄목으로 지적받는데 이 말이 신에게서 처음 나왔으니, 이인화(李仁華)의 이른바 ‘간신이 교묘한 말을 만들어 내어 군부를 속였다.’라는 것은 오로지 신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양사에서 합계하여 신을 논핵할 때에 단지 다른 일로 다스려서 파직하는 데에 그쳤습니다. 그리고 이제 도리어 첫 번째로 영화로운 은총을 받으니, 삼가 바라건대 속히 유사에게 명하여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상은 이달에 중궁의 가례(嘉禮)로 인하여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11월에 상은 특별히 공을 방귀전리(放歸田里)하도록 명하였다.
○ 12월에 공이 온양(溫陽)의 역촌(驛村)에 잠시 머물면서 마을의 종인(宗人)들과 함께 한 해를 마쳤다. 이때 아산 현감(牙山縣監) 김성후(金盛後)가 그의 족형인 김창협(金昌協)을 만나 공이 유배지에 있을 때 어떠한 일이 있었다고 무함하자, 김창협이 꾸짖기를,
“너는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분은 반드시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해 봄에 헌납 권상유(權尙游)가 자기 당(黨)인 노론을 따라서 합계하여 공을 배척하였는데, 수년 뒤에 사람을 대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일찍이 여러 차례 사관이 되어 남 정승이 성상 앞에서 일을 아뢴 것을 보니, 모두 간결하고 간절하며 통창하고 찬란하게 조리가 있어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는 것처럼 분명하였다. 다른 정승들은 말이 늘어지고 뜻이 분명하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가 없었으니, 남 정승은 내면에 참으로 아는 정확한 소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 드러난 것이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오직 남 정승 같은 분이 의정부에 계신 뒤에야 비로소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군자들은 여기에서 타고난 천성을 은폐할 수 없음을 알았다.

75세 계미년(1703, 숙종29)
2월에 결성(結城)으로 돌아왔다.
8월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가 별세하였다.

76세 갑신년(1704, 숙종30)
5월에 상이 비망기를 내려 공의 방귀전리(放歸田里)를 풀어 주었는데, 이동언(李東彦)이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달에 정계하였다.
12월에 상이 공에게 직첩(職牒)을 다시 돌려주도록 명하고 서용할 것을 명하였다. 12일에 공의 부인이 별세하였다.

77세 을유년(1705, 숙종31)
1월에 상이 공을 서용할 것을 거듭 명하여 영중추부사의 자리에 올랐다. 본관(本官 결성 현감(結城縣監))에게 명하여 월름을 계속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2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굳게 사양하였다.
3월에 세 번째 상소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달에 군자감 도제조에 차임되었다. 이달에 부인을 결성에 임시로 장례하였다.
윤4월에 상이 특별히 공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사헌부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여 6월에야 정계하였고, 사간원에서 환수할 것을 청하여 7월에야 정계하였다.
8월에 용인(龍仁)에 이르러 비파담 동쪽 대화산(大華山) 서쪽 기슭에 묏자리를 정하였다.
10월에 부인을 이장하였다.

○ 1월에 상이 공을 서용할 것을 거듭 명하자, 호조에서 아뢰기를,
“영중추부사가 시골에 있을 때에 본관에서 일찍이 월름을 실어 보낸 적이 있으니, 지금 또한 전례대로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전례대로 하라.”
하였다. 지평 김재(金栽)가 상소하기를,
“지난해 두 대신이 범한 죄는 명분과 의리에 관계되는데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앞뒤를 돌아보면서 두려워하니, 만일 전하께서 대의로써 결단하지 않으셨다면 전하의 나라는 유국(幽國)이 됨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그를 다시 서용하라는 명령을 갑자기 내리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망녕되이 서로 헤아리기를 ‘전하께서 의리를 주장함이 점점 예전만 못하여 유종(有終)의 미(美)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합니다.”
하였다.
○ 2월에 공이 두 번째 상소하여 월름을 굳게 사양하고 아뢰기를,
“대신(臺臣)의 의논은 단지 신의 죄상을 나열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환이 전하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신이 이러한 상황에 구차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도 심히 어둡고 미련한 일인데, 더구나 은혜로이 내려 주시는 월름을 죽기를 각오하고 끝까지 사양하지 않고서 염치를 무릅쓰고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3월에 공이 세 번째 상소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 4월에 김춘택(金春澤) 등이 지방의 유생을 사주하여 영상 최석정(崔錫鼎)을 저지하여 아뢰기를,
“의리는 국가의 근간입니다. 전하의 큰 공훈과 혁혁한 업적이 대부분 윤리와 강상(綱常)에 있는데, 이제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서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마땅함을 잃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상의 휘호(徽號)를 높일 것을 청하였다. 승정원에서 지방 유생을 불러 그의 상소문을 읽게 하였는데, 휘호의 ‘휘(徽)’ 자를 ‘미(微)’로 잘못 읽자 상은 그 유생을 정거(停擧)하도록 명하였다.
○ 윤4월에 대사헌 이돈(李墪)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그동안 충현(忠賢)을 축출한 것은 모두 명분과 의리로 함정을 삼았습니다.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이 몇 신하들이 어찌 의리와 윤리 강상에 있어 소견이 부족하여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혹 지나치게 우려한 점을 나무란다면 괜찮지만, 명분과 의리를 범한 죄로써 곧바로 내몬다면 어찌 지극히 원통하지 않겠으며, 또한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제 또다시 사람을 사주하여 시험하고 있으니, 어찌 유벌(儒罰)로 처벌하는 데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밝게 통촉하여 통렬히 징계하소서.”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이르기를,
“남구만이 다른 뜻은 없으나 일을 처리한 것은 잘못하였으니, 신하 된 자가 어찌 감히 그 당을 비호한단 말인가. 엄하게 막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이돈을 멀리 귀양 보내고, 또 공과 유상운을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장령 박태동(朴台東)이 명령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6월에 한성 참군(漢城參軍) 성규헌(成揆憲)이 상소하여 두 대신(大臣)을 속히 처형해서 국법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승정원에서 퇴각당하였는데, 정언 박봉령(朴鳳齡)이 성규헌을 태거(汰去)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다음 날 지평 한중희(韓重熙)가 두 대신을 파직하라는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는 계사(啓辭)를 정지하였다. 정언 이명준(李明浚)이, 한중희가 몇 번 아뢴 것으로 자신의 책임을 면하고 홀로 의논을 정지했다 하여 체차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공의 파직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윤허하지 않았다. 영상 최석정(崔錫鼎)이 상소하기를,
“신이 염치를 무릅쓰고 나아가고자 하나 또 한 가지 아뢸 일이 있습니다. 남구만은 바로 신의 스승입니다. 어려서부터 그에게 배워 정의(情誼)가 매우 중하니, 사문(師門)이 모함을 받고 있는 때에 도리상 관직에 염치없이 있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스승이 극악한 죄명을 입어서 극형의 법률로 논하는 시점이겠습니까. 아, 신의 스승이 조정에서 보인 처신은 본래 본말(本末)이 있었습니다. 무진년(1688, 숙종14)의 일로 무겁게 견책을 받았으나 그 본뜻을 보면 곤전(坤殿)을 부지하고자 한 것이었고, 갑술년(1694)의 일로 구설에 많이 올라 곤욕을 겪고 있으나 그 실정을 따져 보면 세자를 편안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전후의 심사(心事)가 태양처럼 분명한데도 의논하는 자들이 멋대로 죄목을 가하여 반드시 죽인 다음에야 그만둘 것이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장령 이정익(李禎翊)이 상소하기를,
“두 대신에게 내린 명령을 환수할 것을 여러 번 아뢴 일도 이미 구차한데 이미 정지하였다가 다시 발론하고, 상신(相臣)이 또 스승을 위한다고 가탁하여 매우 강력히 변론하며 자신의 사심(私心)을 이루고자 하니, 이는 모두 오늘날 명분과 의리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지 않자, 이정익이 인혐(引嫌)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오년(1702, 숙종28) 여름에 장령 이성조(李聖肇)가 합계에 이견을 제기했다 하여 체직되었다가 이때 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는데, 예전의 일로 인혐하였다.
○ 7월에 교리 이의현(李宜顯)이 이정익과 이성조를 모두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성조가 마침내 이정익의 상소문 내용이 옳지 못하다 하여 이정익을 체차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상소문의 내용이 비록 합당하지 않으나 옳지 못하다는 지척은 내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성조가 또다시 인혐하자, 이의현이 입대하여 아뢰기를,
“이성조의 피혐하는 말 가운데에 ‘명분과 의리를 빌려서 남을 막는 칼자루로 삼는다.’라는 것은 이돈(李墪)의 ‘명분과 의리로 함정을 만든다.’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성조를 삭탈관작하도록 명하였다. 이정익이 정언에 제수되자,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는 계사를 다시 정지하였다.

78세 병술년(1706, 숙종32)
3월에 결성으로 돌아왔다.
4월에 서용되어 영중추부사의 자리에 올랐다.
5월에 두 번째 상소하여 월름(月廩)을 굳게 사양하였다.
7월에 세 번째 상소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0월에 상이 기로(耆老)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옷감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11월에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 4월에 빈청 인견 때에 영상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남구만과 유상운 두 신하에게 딴생각이 없음은 상께서 이미 통촉하시어 여러 번 하교하셨습니다. 거두어 서용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한때 연신(筵臣)들이 성상의 뜻에 거슬림으로 인하여 다시 파직하게 해서 아직도 함께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두 신하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죄를 지고 갑자기 죽게 된다면 어찌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성상의 인자함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좌상 서종태(徐宗泰)와 부제학 윤지인(尹趾仁)이 또다시 말씀드리자, 상이 공을 서용하고 다시 월름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79세 정해년(1707, 숙종33)
5월에 상이 사관(史官)에게 함께 오도록 명하자, 공이 두 번째 상소하여 사양하였고, 6월에 다섯 번째 상소하였다.
7월에 대궐에 나아가니, 상이 인견하여 경저(京邸)에 머물도록 권면하고 치사를 허락할 것을 의논하였다. 공이 동문 밖으로 나가 상소하면서 강교(江郊)에 임시로 거주한다는 이유로 거듭 치사를 청하자, 상이 승지를 보내 허락하고 봉조하(奉朝賀)에 제수하였으며, 인견하고 선온(宣醞)하였다. 공이 마침내 서빙고(西氷庫)에 머물러 상소해서 송시열(宋時烈)의 전례를 따르는 것을 환수해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은 마침내 한결같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따라 녹봉을 지급하고 월치(月致)를 참작하여 정하되 물품에 따라 다소 우대해서 주고 봄가을과 세시(歲時)에 별도로 주급(周急)하게 하였다.
8월에 상소하여 주급이 지나치게 후하다고 하여 사양하자, 상이 참작하도록 명하였다.
9월에 한강 가에 옮겨 가 머물면서 상소하여 한강을 건너가 따뜻한 곳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10월에 다시 상소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아 한강 너머에 머물렀다. 한강 너머에 머문다는 이유로 다시 상소하여 녹봉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 5월에 상이 지방에 있는 대신들을 부를 때에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영부사(領府事 남구만)는 예전에도 여러 번 불렀으나 매번 굳게 사양하고 반드시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불러오고자 한다. 전에 내가 아팠을 때와 세자가 병들었을 때에 영부사가 비록 서울로 들어왔으나 즉시 내려갔으니, 정한 계책이 있는 듯하다.”
하니,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인엽(李寅燁)이 아뢰기를,
“영부사는 국가의 원로로서 조정에 큰 논의가 있으면 반드시 높은 학식을 가지고 우러러 대답하였으니, 서울에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상이 사관에게 함께 오도록 명하니,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기를,
“신은 나이가 70에 이르자 곧 치사를 청하였으며, 비록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나 또한 시골로 물러나 있었으니, 이는 밝으신 성상께서 이미 아시는 바입니다. 더구나 처음 치사를 청했던 때로부터 이제 또다시 10년이 지났으니, 예로부터 어찌 70세에 물러났다가 80세에 다시 나온 자가 있겠습니까.
또 삼가 생각건대 군신 간의 대의는 천지 사이에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무릇 신하 된 자가 죄를 입었다가 용서받고 다시 관직에 제수되면 비록 정 숙자(程叔子)와 같이 빈사(賓師)로 자처한 분도 서감(西監)의 벼슬에 임명하는 명령에 나와 사례하였는데, 더구나 신과 같은 자가 어찌 감히 외람되이 스스로 소외되어 교외에 버젓이 누운 채 감격해 마지않는 사사로운 정성을 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지난해에 범한 것으로 말하면 바로 신하로서 지은 지극히 큰 죄입니다. 성상의 도량이 넓어 비록 은혜로이 서용해 주셨으나 부끄럽고 황송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말하면 실로 죄인의 명부에 이름이 적혀 있을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소명에 달려가 대궐에 나아가서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다시 대신의 반열에 서서 거리낌 없이 명분과 의리를 무시하는 죄를 더 보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끝내 윤허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뜻이 있어서이다. 경의 본심에 딴마음이 없음을 내 알고 있다.”
하였다. 공은 두 번째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지난날 지은 죄는 한 번 죽음으로 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대간(臺諫)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신의 본심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상의 비답에 또다시 신의 본심에 딴마음이 없다는 분부가 계시니, 신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평소에 한 일을 생각해 보자 죄는 깊고 은혜는 두텁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전하의 신에 대한 처우로 말한다면, 신의 마음을 살피고 죽음을 용서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다시 관작과 품계를 예전대로 회복하는 것도 이미 국법에 어긋나는데, 더구나 또 은총을 더하여 돈독히 부르신다면 이 어찌 옳겠습니까, 이 어찌 옳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경이 도성을 떠난 지가 지금 8년이 되었으니, 내 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다. 원로대신인 경이 나를 사모하는 정이 반드시 다른 사람보다 갑절이나 될 것임을 나는 진실로 알고 있다. 더구나 지금 국가의 어려움과 우환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경이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고 크게 생각을 고쳐서 달려온 뒤에야 내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하였다.
○ 6월에 상이 공의 네 번째 상소에 답하기를,
“내 대면하고서 타이르고자 한다.”
하였다. 공은 다섯 번째 상소하고, 사관의 서계(書啓)에 부주(附奏)하기를,
“병이 차도가 있기를 기다려 달려가겠습니다.”
하였다.
○ 7월에 공은 사행(私行)이라 하여 역마를 타지 않고 대궐에 나아갔다. 상이 약방(藥房)의 입진(入診) 때에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정신과 근력이 지금도 노쇠하지 않았으니 경저(京邸)에 머무르면서 함께 국사를 의논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밝으신 성상께서 신을 옛 신하로 여기셔서 이처럼 총애하는 명령을 내리셨는데, 신이 만약 벼슬을 탐하여 도성에 지체한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금수(禽獸)라고 지목할 것입니다. 밝으신 성상께서 신의 죄를 바로잡으신다면 비록 부월(鈇鉞)의 벌을 받더라도 진실로 달게 여기겠으나, 다시 조정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신다면 신은 끝내 감히 명령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약방 도제조 최석정이 아뢰기를,
“남구만이 나이가 많다고 하여 물러난 뒤로부터 ‘시골에 있었을 때가 많다.’ 하여 여러 관사에서 규례에 따라 내리는 녹봉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은 서울에 머물 것을 거듭 명하고 이르기를,
“내가 돈독히 부른 것은 한 번 인견하려는 뜻이 아니었다. 경이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성의가 없는 소치이니, 부끄러움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옛사람은 유배지에 있으나 감옥에 있으나 국가에서 하문하는 일이 있으면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으로 하여금 서울에 머물게 하더라도 하문에 우러러 대답하는 것 이외에는 조금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시골에 있더라도 하문하시는 일이 있으면 신이 감히 대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서울에 오래 있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나를 버려서는 안 되고 나는 차마 경을 버릴 수가 없으니, 내가 만약 ‘그대로 서울에 머물겠다.’라는 경의 대답을 듣지 못하면 비록 해가 저물더라도 이 자리를 파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조용히 병환을 조섭하시는 때인데 날이 저물었는데도 오히려 자리에 앉아 계시니, 뒤에 비록 다시 아뢰더라도 지금은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면하여 타이르겠다는 나의 하교는 대면하고서 자세히 말하고자 한 것이다. 지난번에 경이 매번 치사를 청하였으니, 경의 지극한 소원이 여기에 있음을 안다. 이제 만약 치사를 허락한다면 비록 서울에 있더라도 어찌 불안해할 단서가 있겠는가. 경이 서울에 오래 머물 뜻이 없으므로 지극한 소원을 허락해 주고자 하는 것이니, 이는 반드시 만류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인바, 대면하여 타이르는 뜻이 또한 여기에 있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천한 신을 곡진히 염려하심이 이처럼 지극함에 이르시니, 신이 비록 만 번 죽어 분골쇄신한다 하더라도 어찌 은혜의 만분의 일인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판중추부사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최석정이 대답하기를,
“남구만이 무인년(1698, 숙종24)부터 물러갈 것을 청하여 매번 조정에서 이 일을 말하였으나 신 또한 감히 사사로운 정으로써 성상께 아뢰지 못했습니다. 오늘 하교에 그의 소원을 곡진히 염려해 주신 것은 고금(古今)에 드문 일이니, 어찌 성덕(盛德)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공은 상의 체후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거듭 청원하고자 해서 다음 날 동문 밖으로 나오니, 상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위로하고 권면하여 속히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4일 뒤에 공이 상소하기를,
“더러운 죄를 지은 몸으로 은총을 받으니 더욱 놀라워 실로 단 하루도 도성 안에 편안히 머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도성 밖으로 나와 엎드려서 공손히 성상의 안후(安候)를 여쭈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강교(江郊)의 부근에 집을 얻어 거주하려 하니, 신의 심정과 처지가 또한 매우 곤궁합니다. 자애로우신 성상께서 신이 치사하도록 속히 허락해 주셔서, 간곡히 면유(勉諭)하신 말씀대로 이행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답하기를,
“경이 나를 멀리하여 버리지 않고 말한 뜻이 이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니, 내 어찌 식언(食言)을 하겠는가. 특별히 치사하려는 청원을 허락할 것이니, 경은 가까운 교외에 그대로 머물다가 나라에서 묻는 일이 있거든 반드시 가슴속에 품은 생각을 아뢰어서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마침내 봉조하(奉朝賀)를 내렸다. 이달 18일에 공이 사은하니, 상이 인견할 때에 선온(宣醞) 다섯 잔을 내렸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여러 해 동안 멀리 떠나 있다가 이로부터 물러가면 성상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니, 한 번 천안(天顔)을 우러러 뵐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공이 마침내 서빙고(西氷庫)에 머물렀다. 호조에서 《경국대전》을 따라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 주고, 또 계해년(1683, 숙종9) 봄에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에게 내린 전례를 따라 늠속(廩粟), 어물, 소금, 땔감, 숯을 내렸으며, 병조에서 제일과녹패(第一科祿牌)를 전해 주었다. 예전에 《경국대전》의 〈봉조하(奉朝賀)〉에는 “실제로 정1품 관직을 지낸 자로서 봉조하에 임명되면 공신(功臣)인 경우에는 정3품, 공신의 적장자(嫡長子) 및 범인(凡人)인 경우에는 종4품에 해당하는 녹봉을 종신토록 받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송시열이 치사할 때에 병조에서 아뢰기를,
“《경국대전》에는 단지 공신과 범인만을 논하고 대신(大臣)과 기타 직책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은 마침내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아뢰기를,
“이른바 범인은 정1품 이하의 조신(朝臣)을 가리켜 말한 듯하니, 대신은 본래 이 가운데 들어 있는바 오직 한결같이 법조문에 기재된 대로 따라 행해야 합니다.”
하였고, 민정중(閔鼎重)은 아뢰기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의 본래 품계에 따른 평상시의 녹봉을 내려 주어 조정에서 은혜롭게 대접하고 예우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이요, 법전에서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규례를 따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민정중의 의논을 따랐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미 곡식을 받았는데 또 녹봉을 받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 하여 끝내 수령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공은 상소하여 사양하기를,
“종전에 송시열이 초야에서 조정으로 들어오자, 이때 조정에서 곡식 창고를 맡은 관리는 계속해서 곡식을 대 주고 푸줏간을 맡은 관리는 계속해서 고기를 대 주는 의리로 항상 공급해 주었으며, 치사한 뒤에는 또 예전에 공급하던 대로 따라서 마련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미곡(米穀)의 수량이 도리어 영중추부사의 평상시 녹봉보다도 더 많고, 기타 어물, 육류, 땔감, 숯 등의 물건이 이와 같이 많은 양이었으니, 이는 훗날의 치사한 신하가 전례를 그대로 따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호조가 이것을 살피지 못해서 이처럼 잘못 계하받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즉시 호조에 명하여 다시 법전을 살펴보게 해서 매월 술과 고기를 보내 주는 것 외에 곡식과 각종 물건을 하사해 주신 것을 환수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송시열에게 평상시에 받던 녹봉을 내려 준 일은 단지 한때의 특별한 은혜로 이처럼 우대하는 예(禮)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이것을 정해진 법으로 오인하여 〈녹봉(祿俸)〉의 승전(承傳)에 기재한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그 조항을 고쳐야 할 것이니, 어찌 이것을 근거하여 뒷날의 치사하는 신하에게 함부로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송시열이 감히 수령하지 않아서 끝내 환수했다 하니, 영갑(令甲)에 분명하게 기재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병조에 명하시어 신의 봉조하 제일과녹패를 환수하고, 《경국대전》에 기재된 대로 종4품의 녹과(祿科)에 따라 내려 주도록 하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입니다. 이는 미천한 신 개인의 경우만을 위해서 아뢰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국법을 정비하여 밝히는 도리에도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바라건대 성상께서 밝게 살펴주소서.”
하였는데, 상은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 최 영상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봉조하는 일생 동안 사양하고 받는 예절이 몸에 배어 평소 몹시 근엄하였습니다. 듣자 하니 그의 뜻에 하사품이 법전과 크게 다른 것을 불안해하여 ‘만약 환수하지 않으면 장차 한강 너머로 가서 우거해야 할 형편이다.’라고 하니, 늙어서 치사한 대신이 이 때문에 황급히 멀리 떠나가는 것은 성상께서 애써 만류하신 본의가 아닙니다. 이제 절충하여 제도를 만들어서 한결같이 《경국대전》을 따라 종4품의 녹봉을 주소서. 또 법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으로 치사한 사람에게는 모두 매월 술과 고기를 보내 준다.’ 하였으니, 또한 품계에 따라 법식을 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해조로 하여금 쌀과 콩을 거두게 하고 다시 참작하여 정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녹봉은 《경국대전》을 따르고, 매월 보내 주는 물건도 법전을 따르되 약간 우대하는 예를 더하소서. 그리고 만약 외부 사람들의 의논에 종4품의 녹을 주는 것이 너무 적다고 하거든 봄가을과 세시(歲時)에 별도로 주급(周急)을 내리신다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막 대신에게 묻고자 하였는데 아뢴 바가 진실로 마땅하니, 마련하여 거행해서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
하였다.
○ 8월에 공이 상소하여 주급이 너무 후하다고 사양하자, 상이 해조에 명하여 참작하게 해서 마침내 쌀과 콩을 3분의 1로 줄였다.
○ 9월에 공이 처소를 옮겨서 한강 가에 머물렀는데, 얼마 후 상소하여 강을 건너 따뜻한 곳으로 갈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신이 다시 서울에 오니, 기후가 매우 추워서 남쪽 지방과 같지 않습니다. 한번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뒤로는 머리카락까지 곤두설 정도여서 하루도 견딜 수가 없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이미 신을 사랑하여 살려 주고자 하시면서 기어이 서울 어귀에서 목숨이 끊어지게 하신다면 사물의 본성을 완성시켜 주는 방도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최 영상이 강교(江郊)는 적당한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음 날 연석(筵席)에서 공을 도성으로 들어오게 할 것을 청하려 하였다. 공은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내 이미 성상의 특별한 예우를 받았으니, 외람되이 떠나기를 청하는 것은 지역의 원근을 막론하고 실로 황공한 뜻이 있다. 영상이 만약 나를 도성에 들어오도록 할 것을 청한다면 나는 장차 이것을 구실 삼아 당일로 한강을 건널 계획이다. 이렇게 하면 떠나는 것이 실로 명분이 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느냐. 또 영상은 분명 내가 마음속으로는 도성에 거처하고자 하면서 겉으로만 말을 꾸며서 우선 강가로 나가 있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내가 비록 도성에 거처하고자 하더라도 이미 성상 앞에서 한사코 사양한 것이 어떠하였더냐. 그런데 이제 도리어 남에게 끌려서 다시 도성으로 들어간다면 이는 못하는 짓이 없는 사람이니,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한 것이다.”
하였다.
○ 10월에 영상이 주강(晝講)에 입시하여 마침내 공을 위하여 한강을 건너가게 해 줄 것을 거듭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8월에 장령 양성규(梁聖揆)가 상소하여 열성조(列聖朝)에서 이원익(李元翼)과 이경석(李景奭)의 치사를 허락하지 않은 사실을 인용하고 공에게 내린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 교리 송정명(宋正明)과 승지 권지(權持)가 아뢰기를,
“원로대신의 치사를 허락하여 강교에 머물게 하시니, 사람들이 오히려 혹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아뢰기를,
“이 말 또한 옳으나 모든 일은 반드시 실제를 힘쓰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당초에 만약 물러나 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면 봉조하는 반드시 결연히 떠나갔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실제를 힘쓴다.’라는 말이 진실로 내 뜻에 부합한다. 봉조하가 물러나 쉬려는 뜻은 지극한 바람에서 나와서 대면했을 때에 직접 앞자리에서 말하였으니, 그 뜻을 살펴보건대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고 싶지 않은 듯하다. 비록 돈독히 만류하더라도 나와서 벼슬할 리가 없을 듯하니, 헛된 문식으로 억지로 만류할 수가 없다. 봉조하가 지난번에 올린 상소는 멀리 떠나가려는 뜻이 아니었으나 나의 마음에 오히려 서운하게 여겼기 때문에 비지(批旨)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공이 다음 날 다시 상소하자 상이 마침내 허락하니, 공이 드디어 한강을 건너 압구정(狎鷗亭)에 머물렀는데, 향촌(鄕村)에 있다고 하여 녹봉을 굳게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80세 무자년(1708, 숙종34)
3월에 상소하여 성묘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니, 마침내 비파담(琵琶潭)으로 돌아왔다.
윤3월에 상소하여 비파담에 그대로 머물 것을 청하였다.
4월에 녹봉을 받지 않고,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 주는 것을 받지 않았는데, 상이 본읍에 명하여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 주게 하고, 또 월름(月廩)을 주도록 명하였다.

○ 2월에 손자 남극관(南克寬)이 소과(小科)에 급제하였다.
○ 3월에 공이 손자와 함께 성묘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다녀오도록 허락하였는데, 공이 마침내 비파담에 그대로 머물렀다.
○ 윤3월에 공이 상소하기를,
“신의 나이가 이미 80에 찼으니, 반드시 이 실낱같은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선영 가까운 곳으로 돌아가서 선조의 묘소를 소제(掃除)하고 싶은 것은 본래 인정과 사리에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제 특별히 성상의 은혜를 입어 고향 산천에 돌아가 성묘하였으니, 행장을 챙겨 다시 서울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신의 지극한 바람을 굽어 살펴 주소서.”
하였다. 공이 부름에 응하였을 적에 상이 이미 서울에 머물라는 뜻으로 치사를 허락하니, 친구 중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공이 도성에 머물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공은 끝내 결심하고 교외로 나갔다. 김창협(金昌協)이 사위 서종유(徐宗愈)에게 사사로이 이르기를,
“가슴속에 많은 학문을 쌓은 자는 마침내 이와 같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강가에서 3개월을 넘겨 지체하지 않았고 비록 한강 너머에 머물렀으나 공의 뜻이 아니었다. 공이 일찍이 최 영상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옛날 치사할 때에 이윤(伊尹)은 ‘늙었음을 아뢰고 사읍(私邑)으로 돌아간다.’ 하였고, 주공(周公)은 ‘농사일을 밝히겠다.’ 하였으니, 이미 치사하고 나서 그대로 조정에 있는 이치는 결코 없습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 이후에도 치사하고 나서 조정에 그대로 있는 준례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 법전의 봉조하(奉朝賀)라는 벼슬은 국가에서 늙은 신하를 단번에 물리쳐 물러나게 하지 않으려고 이처럼 간곡한 마음으로 법을 만들어서 녹봉으로 얽매어 머물도록 한 것이니, 국가의 덕스러운 뜻은 지극히 후하고 지극히 두텁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가 자처하는 도리로 보아서는 근력이 부족하여 직책을 맡을 수 없다고 하여 치사하고서 또다시 녹봉을 받아먹고 봉직하는 것은 직무의 중요성을 막론하고 어찌 매우 의리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별다른 이유 없이 다만 늙어서 치사한 자도 그 도리가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나처럼 매번 막중한 죄를 지어 감히 서울 안에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자가 치사한 뒤에 갑자기 이와 같은 행동을 한다면 어찌 옳겠습니까.”
하였는데, 이때 공은 끝내 전리(田里)로 돌아갔다.

81세 기축년(1709, 숙종35)
10월에 상이 별감(別監)을 보내어 타락죽을 하사하였다. 이달에 상이 미령하였다.
12월에 약방을 사옹원으로 옮겨 직숙하였다. 이달에 대궐 아래로 나아가서 문안을 올렸는데, 상은 세시(歲時)에 주급할 것을 거듭 명하였다.

○ 12월 14일 새벽에 공이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갔는데, 이후로 15일 동안에 병으로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가지 못한 것이 4일이었다. 이달에 상이 의관(醫官)에게 묻기를,
“봉조하의 기력이 어떠한가?”
하자, 강건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이한 일이다.”
하였다. 상은 섣달그믐에 조정의 문안을 파하도록 명하였다.

82세 경인년(1710, 숙종36)
1월에 상의 체후가 다소 편안해지자 다음 날 공이 도성을 나가니, 상이 연일 사관을 보내어 힘써 만류하였다. 이달에 약방 제조가 견책당함으로 인하여 공이 도성에 들어갔다.
2월에 상의 체후가 평상으로 돌아오자 신하들이 축하하였는데, 다음 날 상이 공을 인견할 적에 문에서 부축을 받게 하였다. 이달에 공이 상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죽을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 날에 상소문을 남겨 두고 곧바로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이달에 공이 병에 걸리자 상이 어의를 보냈다.
3월에 광주(廣州) 탄동(炭洞)의 선영 아래로 옮겨 가 머무니, 상이 다시 어의를 보냈다.
4월에 상이 진연(進宴)을 베풀 적에 사관을 보내어 지방에 있는 대신을 부르니, 공이 강교(江郊)에 나아가 상소하고 물러갔다.
7월에 상이 기로(耆老)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옷감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8월에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상이 변방의 근심으로 인하여 사관을 보내어 지방에 있는 대신을 불렀는데, 공이 전란(戰亂)이 일어난 것과는 차이가 있다 하여 부주(附奏)를 올려 사양하였다. 이달에 토지로 송사하는 자로 인하여 광주 낙생리(樂生里)의 역촌(驛村)으로 옮겨 가 머물렀다.
조정에서 산성(山城)을 쌓을 것을 의논하자, 11월에 공이 의논을 올려서 친기위(親騎衛)의 절목(節目)을 따라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연해(沿海)에 상륙하는 적을 막을 것을 청하니, 상이 급히 강구하여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 1월에 공이 도성을 나와서 상의 체후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돌아갈 것을 아뢰고자 하였는데, 상이 사관을 보내어 경저(京邸)에 머물도록 권면하였다. 다음 날에 상이 다시 사관을 보내어 이르기를,
“며칠 동안 좀 기다렸다가 한 번 대면하여 타이르고자 한다.”
하였다. 6일 후에 상이 “신하가 약을 직접 맛보지 않았다.”라는 《춘추(春秋)》의 내용을 인용하여 약방 도제조 최석정(崔錫鼎) 등을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였다. 공이 마침내 다시 도성에 들어가 2월 15일에 상의 체후가 평상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였다. 다음 날 융복당(隆福堂)에서 인견할 때에 상이 별감(別監)과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문마다 번갈아서 공을 부축하게 하고, 강교(江郊)에 머물 것을 거듭 명하였다. 공은 상의 환후가 쾌차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여 떠나갈 것을 감히 거듭 청하지 못하고 물러가 상소문을 올릴 것을 청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이 노쇠하여 결코 다시는 천안(天顔)을 뵐 도리가 없을 듯하니, 한 번 천안을 우러러보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이를 허락하였다. 공은 끝내 상소문을 남겨 두고 곧바로 돌아왔다.
○ 이해 여름에 서릉부수(西陵副守) 이혼(李渾)이 90년 전의 문서를 위조하여 비파담 부근의 민전(民田)을 가로채려고 쟁송(爭訟)하면서 그 일이 공에게까지 미쳤는데, 험악한 내용이 많았다. 10월에 공이 상소하여 대죄하고 광주 낙생리의 역촌으로 옮겨 가 머물렀다.
○ 지난 병자호란 전에 정공 두경(鄭公斗卿)이 남을 위해 상소하여 국가의 보장(保障)을 논하기를,
“한양(漢陽)은 끝까지 지켜 낼 수가 없고, 남한산성은 비록 험하지만 불행히 포위를 당하면 군량을 수송하는 길이 통하지 못하며, 강화도(江華島)는 사면이 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 험함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바다 안에 있는 한 섬이어서 형세가 매우 고립되어 있으니, 반드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크게 취하고 조운(漕運)하는 길을 넓힌 뒤에야 지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강화도에 실록(實錄)을 봉안할 때에 인하여 3일을 두루 다닌 뒤에야 비로소 강화도를 일주하였는데, 넓이가 거의 300리인 데다가 물가 곳곳마다 모두 배를 정박할 수 있어서 결코 끝까지 지켜 낼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2년 뒤 여름에 금위영 도제조(禁衞營都提調) 민정중(閔鼎重)과 대장(大將) 조사석(趙師錫)이 강화도에 가서 관찰하고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세 군문(軍門)이 힘을 다해 부성(府城)을 쌓으려고 하였다. 상이 경연에 임하여 그 일을 묻자, 공이 우상으로서 대답하기를,
“강도가 험한 이유는 바다가 빙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천연의 요새를 잃고 물러가 부성을 지키려고 마음먹는다면 졸렬한 계책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결코 지켜 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그 후 20년 만에 좌상 이여(李畬)가 도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여, 훈련도감과 금위영, 어영청, 수어청(守禦廳), 총융청(摠戎廳) 다섯 군문의 고군(雇軍)에게 도성 주위를 한정하여 나누어 맡겨서 성이 무너지면 그때그때 즉시 수축하는 계책을 세웠는데, 하다 말다 하여 오래도록 완공하지 못하였다. 우상 이유(李濡)가 수어청과 총융청 두 곳을 빼고 다만 세 군문에만 다시 한정하여 나누어 맡기고자 하였다. 공이 치사할 적에 비변사의 유사 당상(有司堂上)이 묘당의 뜻으로 와서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도성이 무너질 때마다 그때그때 즉시 수축하는 것이 군문의 처지에서 말하면 비록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으나 도성의 처지에서 말하면 100년 안에는 완전한 성의 모습을 갖추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조정에서 만약 도성에 축성하여 수비하는 계책을 반드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길 경우 백성의 원망을 불문하고 온 나라의 힘을 총동원하여 1, 2년 내에 꼭 완성하기를 기필한다면 이 일이 이루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만 서울에 있는 군문으로 하여금 공사를 담당하게 하면서 진행 속도를 계산하지 않는다면 이 일이 어찌 이루어질 리가 있겠는가.
또 지금 도성을 쌓는 것이 설령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다 하더라도 훗날 만약 강한 적이 도성 가까이 쳐들어온다면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반드시 도성의 견고함을 믿고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령 떠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군이 사방에서 포위하여 온 나라가 모두 적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국가가 한 도성만 보전할 뿐일 것이니, 이렇게 되면 틀림없이 양식을 계속 댈 도리가 없을 것이다.
또 도성은 바로 교활하고 간사한 백성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국가의 형세가 약하고 적의 형세가 강하면 뜻밖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변고가 반드시 채 하루가 못 되어 일어날 것이다. 이로써 말한다면 도성의 사세는 다만 평상시에 방비하고 순찰하는 것일 뿐이니, 혹시라도 적에게 포위당하게 되면 반드시 지켜 낼 수가 없을 것이다. 또 조종조(祖宗朝)에서 처음 축성한 본의를 삼가 생각해 보건대 도성의 넓이가 이와 같이 광대하고 드넓은 것은 성을 지키기 위한 계책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은 또 일찍이 말하기를,
“지금 30리 되는 수도의 성을 지킬 수 없다고 한다면 300리나 되는 강도(江都)를 어떻게 지킨단 말인가.”
하였다. 영상 최석정(崔錫鼎)이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 할 것인지 지키지 말아야 할 것인지를 반드시 잘 살펴서 결정한 뒤에야 축성 여부를 비로소 논할 수 있다. 40리 되는 큰 성을 만들고서 지켜 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성에 축성하지 않았으나 다만 강도에 축성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공이 영상에게 답한 편지에 이르기를,
“기어이 말하라고 하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갑술년(1694, 숙종20) 이전에 신후재(申厚載)가 강도 유수(江都留守)가 되었을 적에도 축성하자는 의논이 있어서 묘당의 신하들이 가서 보고는 내성(內城)을 쌓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때 한 장교가 함께 참여하여 보고는 나에게 말하기를, ‘평지의 성은 본래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강도는 사면이 천연의 요새인데, 이미 이곳을 제대로 수비하지 못하였으면서 평지의 우묵하게 들어간 낮은 성을 가지고 적을 막아서 지킬 계책을 한다면 매우 모순됩니다. 강도에는 본래 천연의 요새로 지킬 만한 곳이 있습니다. 고려산(高麗山)과 혈구산(穴口山)은 북쪽과 동쪽, 남쪽으로 이어져 길게 뻗어서 험고(險固)한 성터가 될 만하니, 남한산성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쪽 한 면만 바다에 임하였는데 바닷물이 가까이 있어서 적군이 우리를 포위할 수가 없고, 우리는 자연 바닷길을 따라 배를 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곳에 산성을 쌓는다면 적을 막기 쉬움이 평지에 성을 쌓는 것과 동급에 놓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 두 산의 안은 본래 옛날 본부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사찰이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강도에 축성하자는 의논을 만약 중지할 수 없을 경우 부디 이곳을 자세히 살펴서 과연 저에게 말한 자의 말과 같다면 이곳에 성터를 정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역군(役軍), 역량(役糧), 도구들을 천천히 강구하여 마련하며, 또 이서(李曙)와 같이 지망(地望)과 재능이 있는 자를 얻어서 전적으로 위임하여 시일을 한정하지 말고 기어이 성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지형의 험고함을 이용하여 축성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해서 지금의 부성(府城)을 따라 증축한다면 끝내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 사람이 길을 빌리려고 백두산을 그려 가니, 전 찰방 정도삼(鄭道三)이 이에 대비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을 것을 청하였고, 임오년(1702, 숙종28)에 우상 신완(申琓)이 다시 이것을 청하였으며, 지난해 여름에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 이상휴(李相休)가 북한산과 홍복산(弘福山) 등지에 성을 쌓을 것을 청하였다. 이해 9월에 청나라 사람이 자문(咨文)을 보내어 12일 만에 도착하였는데, 여기에 이르기를,
“성경 장군(盛京將軍) 송주(松柱)가 금주(金州)의 해적(海賊)을 소탕하여 사로잡으니, 남은 적들이 모두 배를 타고 패주하였다. 조선에서 이를 알지 못하고 혹시라도 그곳에 갔다가 잡히면 대국(大國)의 사람으로 오인하여 손을 쓰지 않다가 도리어 적에게 해를 당할까 두렵다. 짐(朕)이 실로 이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효유(曉諭)하는 것이니, 가까운 연해 지방을 마음을 다해 방수(防守)하라.”
하였다.
○ 10월에 장령(掌令) 이익한(李翊漢)이 상소하여 지방에 있는 대신을 부를 것을 청하고 아뢰기를,
“남구만(南九萬)과 윤지완(尹趾完)은 평소에 세운 업적이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에 믿을 만합니다.”
하였다. 며칠 뒤에 상이 비망기를 내려 이르기를,
“대신이 물러나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는 것은 평상시에도 오히려 불가한데, 더구나 이처럼 변방이 다사다난한 때이겠는가. 경이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의리에 있어 무관심하지 못할 것이니, 경은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속히 길에 오르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대신에게 전유(傳諭)하였다. 공은 서계에 부주(附奏)하기를,
“변방의 근심이 비록 우려할 만한 것이 많으나 또한 전란이 일어났을 때와는 차이가 있으니 사사로운 마음에 다짐한 것이 있어 끝내 감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혹 하문하시는 일이 있으면 스스로 심중에 있는 말을 다 아뢰어 말로써 몸을 대신할 것이요, 혹 국경에 변고가 있으면 또한 죽든 살든 간에 앞으로 향해 나아갈 것이니, 길에서 죽거나 백사장에서 죽더라도 모두 달갑게 여기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세 군문의 대장에게 명하여 북한산과 홍복산에 가서 살펴보게 하고 대신에게 이르기를,
“봉조하 남구만이 ‘하문하는 것이 있으면 대답하겠다.’라고 하였으니, 세 군문의 대장이 가서 살펴본 뒤에 지방에 있는 대신에게 물어 결정하겠다.”
하였다. 또 약방 제조에게 이르기를,
“해적이 만약 이르러서 경성(京城)까지 가까이 온다면 형편상 결코 도성을 지키기 어렵다. 병자년(1636, 인조14)에 남한산성은 근왕병(勤王兵)이 모두 왔으나 군량이 다하여 항복하였으니, 수도의 성으로 말하면 근왕병이 미처 오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함락될 것이다.”
하였다. 제조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강도(江都)는 해적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마침내 북한산과 홍복산에 축성하는 일을 지방에 있는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 11월에 공이 의논을 올리기를,
“지금 북쪽에서 자문(咨文)이 오자, 인심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해적이 반드시 불원간에 침범해 올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은 실로 미리 예측하기가 어려우나 안으로 국가의 일을 돌아보면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함은 진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른바 해적이 만약 큰 계책과 원대한 생각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중국의 심장부를 침범할 것이요, 결코 몇 척의 선박으로 요해(遼海)와 심양(瀋陽) 등 연변을 노략질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들은 아마도 해도(海島)에 출몰하는 해적인 듯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또한 굳이 가까이 오(吳)ㆍ월(越)과 청(靑)ㆍ제(齊) 등 재화와 보물이 쌓여 있는 곳을 내버려 두고 멀리 외국의 피폐한 땅을 침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반드시 이러한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으며, 설혹 있다 하더라도 배를 타고 바다를 넘어오는 도적들은 그 숫자가 결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연해의 제도(諸道)에서 만약 정예롭고 용감하며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는 군사를 뽑아서, 혹은 스스로 사마(私馬)를 준비하게 하고 혹은 목장의 관마(官馬)를 지급한 다음 이것을 사육하는 꼴과 곡식을 넉넉히 주어서 내년 3, 4월에 봄 날씨가 따뜻해져 해적들이 준동하는 시기를 기다린다면, 그사이에 군사들은 충분히 훈련할 수 있을 것이고 말은 살지고 건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멀리 해외에서 와서 육지에 내려 노략질하는 해적들이 그 무리가 비록 천 명, 만 명에 이른다 하더라도 돌격 기병대 2, 3백 명으로 또한 충분히 맞서서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멀리 지난 일을 논할 것 없고, 지금 해적이 금주(金州)에서 참패했다는 자문의 내용으로 본다면 또한 그 형세가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급히 강구해야 할 것은 정예로운 돌격 기병대를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와 육지에 내리는 적의 보병을 막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들으니 조정에서는 먼저 도성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북한산과 홍복산에 새로운 성을 쌓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그치지 않는다 하니, 신은 진실로 완급(緩急)의 계책에 있어 크게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또 도성을 지키는 일은 신이 정해년(1707, 숙종33) 가을에 명을 받들고 강교(江郊)에 있을 때 비변사의 당상이 의정부의 뜻을 가지고 와서 묻기에 신이 그 지키기 어려운 상황을 이미 자세히 아뢰었습니다.
북한산과 홍복산으로 말하면 험고(險固)한 형세가 과연 어떠한지는 신이 모르나 조정에서 만약 10년 뒤의 계책을 세우고자 하여 조용히 강구하고, 또 조정의 신하 중에 이 일을 주관할 만한 자를 가려서 남한산성을 이서(李曙)에게 위임한 것처럼 한다면 오랜 뒤에 혹 효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해적에 대한 우려는 만약 이러한 일이 없다면 성을 지킬 필요가 없을 것이요, 만약 이러한 일이 있다면 내년 봄에 있을 듯한데, 지금에서야 그때까지 다 쌓을 수 없는 성을 쌓는 일을 의논한다면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 우리나라의 병력이 비록 지극히 피폐하고 기율(紀律)이 몹시 해이해졌으나 당당한 만승(萬乘)의 나라로서 요해(遼海)와 심양(瀋陽) 사이를 지나가는 도둑 떼의 소식을 듣고는 국내에서 먼저 제풀에 놀라고 동요하여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질 듯한 형세이니, 이는 진실로 천하와 후세에 이러한 소문이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민심을 진정시키고 편안히 하는 방도로 말하면, 산성을 쌓고 도성을 지키는 계책은 우선 서서히 의논하여 결정해도 될 것이요, 오로지 장수를 뽑아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연해 지역을 방비하고 수비하여 적들이 서울에서 가까운 지역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 시급하게 강구하여 조처해야 할 일일 듯싶습니다.
함경도의 친기위(親騎衛)는 당초에는 선발된 자들이 정예로워 꽤 쓸 만하였으나 지금은 피폐하고 쇠잔하여 처음 선발했을 때의 실력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제도와 틀은 또한 필시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니, 다시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명하여 늙고 잔약한 자는 도태시키고 다시 건장한 자들을 모집해서 옛 인원수를 채워 수시로 징발하여 쓸 수 있게 하신다면 반드시 그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도의 감사와 병사가 있는 곳에도 명하여 친기위의 절목에 따라 병사들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양성해서 또한 반드시 비상시에 쓸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황해도에는 이미 어영청의 마병(馬兵)과 금위영의 별효위(別驍衛)가 있는데 예전에 선발하고 훈련시킨 것이 과연 위급할 때에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다시 본 군문 및 황해도의 감영과 병영으로 하여금 함께 의논해서 위급할 때의 대책을 강론하여 정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혹은 옛날 선발한 사람을 그대로 이용하고 혹은 새로 더 뽑도록 하여 이들도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본도에서 나누어 통솔하다가 적의 침략을 받는 곳에 합하여 사용하게 한다면, 효력이 필시 지금의 생소하고 잔약하여 도망하기 쉬운 해변의 주사(舟師)와 육지의 속오군(束伍軍)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년 봄에 해적이 쳐들어올 것을 우려한다면 또한 반드시 올해 안에 제도에 분부하여 조치하여야 거의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혹 지연하고 머뭇거리다가 몇 달이 후딱 지나간 뒤에는 또한 때가 지나 미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제후국에 도(道)가 있으면 지킴이 사방 국경에 있다.’ 하였습니다. 지금 해외의 작은 적에 맞서 해안에서 격퇴하지 못하고 또 관방(關防)에서 차단하지 못하여, 적들이 내지로 침투해 들어와 득실대게 하고, 우리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무리를 늘려 도성을 포위하고 산성을 포위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일개 성 외에는 모두 적의 소유가 되어서 국세가 기울고 인심이 이반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설령 성과 해자(垓子)가 지극히 견고하고 병력과 군량이 아무리 충분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스스로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해적이 반드시 침입해 올지는 참으로 알 수 없으나 만약 이것을 우려하여 산성을 쌓고 도성을 지키는 것으로 대응하려 한다면 신은 그것이 위태롭게만 여겨질 뿐이요, 정말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전교하기를,
“봉조하가 논한 바가 참으로 좋다. 정예로운 돌격 기병대를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와 육지에 내리는 적의 보병을 막게 한다는 것은 바로 나의 뜻과 부합하니, 급히 강구하여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바, 우선 속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에서 복주(覆奏)하기를,
“친기위는 헌의(獻議)에서 청한 대로 본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분부해서 직접 점검하고 살피게 할 것이요, 서관(西關 평안도)은 감사와 병사가 한결같이 절목을 따라 도내의 재주 있고 용맹한 병사들을 별도로 뽑아 올리게 해야 합니다. 해서(海西)에는 어영청의 마병(馬兵)과 금위영의 별효위(別驍衛)가 각각 800여 명인데, 병사들이 모두 건장하고 무예도 뛰어납니다. 다만 친기위의 제도는 매년 시재(試才)하여 우등(優等)인 자를 조용(調用)해서 권면하였는데, 근래에는 이것을 시행하지 않아서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후부터는 북도와 관서에 새로 설치한 다음 당초의 절목을 따라 일체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전마(戰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조처하기 어렵습니다. 목장에 있는 말의 수효로 볼 때 두루 지급하기 어려울 듯하고, 일시적으로 나누어 주고 나서 그대로 훗날의 규례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일은 긴요한 사안에 관계되니, 아끼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복시(司僕寺)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의 세 도와 본 군문에 명하여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공은 초야에 있는 10여 년 동안 국가의 형편과 민생에 대하여 많이 걱정하고 깊이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자나 깨나 한탄하고 항상 우려해서 가슴속에 잊지 못하여 10년을 하루같이 변함없었다. 그러나 사람을 대할 때에 일찍이 시사(時事)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고, 또한 조정의 귀한 신하에게 서신을 보낸 적도 없었다. 이때 좌상 서종태(徐宗泰)가 편지로 묻자, 공은 답하기를,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친기위를 모집하여 선발하는 절목은 대체로 함경도와 차이가 없을 듯합니다. 다만 함경도는 비록 전함 품관(前銜品官)과 유생이라도 평상시에 무예를 익히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여 잠잘 때에도 창과 갑옷을 휴대하고, 싸우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유풍이 꽤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함 품관과 유생이라도 모두 기꺼이 친기위에 소속된 것인데, 서관의 풍습도 북로(北路)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해서 지방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전함 품관과 유생들 중에 비록 용맹과 힘이 출중한 사람이 있더라도 단속받는 군병의 무리에 결코 들어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니 이제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강력히 타일러서 국가를 위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권면하게 해야 실제로 쓸 수 있는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북로 친기위의 우등한 군병을 병조에서 거두어 등용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에 들어온 자들은 모두 다시 나가기를 원하고 뒤에 온 자들은 더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으니, 군대가 날로 피폐하고 잔약해지는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지난날 함경도 한 도에만 시행했는데도 거두어 등용하지 못함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이제 세 도에 아울러 설치한다면 반드시 더더욱 거두어 등용할 수 없을 것이요, 병조의 형편도 다른 데서 등용해야 할 사람을 모두 버리고 친기위만 등용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빈말로 구슬려 정예 병사를 얻어서 전진(戰陣)의 선봉대로 쓰고자 한다면 그 형세가 또한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요, 만약 또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여 지금 속오군처럼 구차히 정원을 채운다면 실제로 쓸 만하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방자하게 구는 습관이 생겨, 잔약하여 부리기 쉬운 속오군만도 못할 것입니다.
당장의 계책으로는 서울 안에 있는 다섯 군문(軍門)의 장관(將官) 수가 수백 명이니, 한 도(道)의 친기위마다 1년에 우등한 자 4명씩을 등용해서 세 도를 합하여 총 16명씩을 경군문(京軍門)의 장관으로 제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그중에 재주가 특별히 뛰어난 자를 간간이 변장(邊將)에 제수하여 격려하고 권장하는 방도로 삼는 것이 좋으니, 이렇게 하면 조정에서는 변방의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지 않을 수 있고, 친기위도 장구히 정예롭고 용맹한 자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반드시 다섯 군문의 대장들과 함께 과좌(窠坐)를 강론하여 결정해서 영구히 시행해야 실속 없는 빈말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漢)나라에서 장사(壯士)들을 칭할 때에 반드시 육군(六郡)의 양가 자제(良家子弟)라고 하였고, 우후(虞詡)가 장수를 논할 때에도 산서(山西) 지방에서 장군이 나온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조정에서는 서북 지방의 무예와 힘이 있는 군사들을 거두어 등용하는 일이 매우 적으니, 무략(武略)이 강화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이것을 기회로 삼아 서북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는 장치로 삼는다면 국가가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에서도 매우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이른바 기병(騎兵)의 운용은 오로지 말에 달려 있는데, 양서(兩西)의 형편은 북관(北關)에 비교하면 또 분명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입니다. 용맹하고 정예로운 군사를 혹 충분히 얻는다 해도 타고 있는 말이 쇠약하면 실로 적을 향해 돌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 민간에서 전마로 사용하기에 합당한 말을 실로 얻기가 어려운데, 선발된 병사로 하여금 반드시 모두 스스로 말을 구비하게 한다면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국가에서 목장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무비(武備)에 쓰기 위해서이니,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된 여러 목장의 말 중에 만일 쓸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가려서 주어야 하는바, 본래 아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만일 부족하면 양서 지방의 관향(管餉)으로 저축한 재물을 가지고 관청에서 좋은 말을 사서 지급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내년 봄과 여름까지 각각 군영으로 하여금 말 먹이는 비용을 넉넉히 지급해 주어서 되〔升〕와 말〔斗〕로 한정하지 말고 반드시 살지고 건장하게 만들어 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번(番)을 나누어 각각 군영에서 머물러 대기하게 하되 대기할 때의 양료(糧料)를 충분히 지급하며, 감사와 병사가 때때로 말의 살지고 수척한 상태와 병사들의 기예가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를 하나하나 점검하고 특별히 상과 벌을 내려 격려하고 권장해서 불시에 징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만약 이 규정을 따라서 오랫동안 시행하고 폐지하지 않는다면 설령 해적(海賊)이 끝내 오지 않아 지금 당장에는 쓸 곳이 없다 해도 후일 다른 적을 대비할 때에 반드시 효험을 볼 날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윤공 증(尹公拯)이 공의 의논을 보고 감탄하기를,
“단지 언론과 계책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또한 원로대신의 건장한 근력(筋力)을 실로 따라가기 어려움을 알겠다.”
하였다. 다음 해 1월에 서 좌상(徐左相 서종태)이 입대하여 공의 글을 대략 아뢰기를,
“이는 모두 헌의(獻議)에 포함되어 있는 뜻입니다.”
하고, 인하여 목장의 말을 지급하고 또 말을 사서 지급할 것을 아뢰었는데, 여러 사람의 의논은 당장 목전에 위급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그 시행을 어렵게 여겼다. 이윽고 해적이 오지 않았으므로 묘당에서 끝내 분명히 거행하지 못하였다.

83세 신묘년(1711, 숙종37)

1월에 상이 옷감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2월에 옷감과 음식을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달에 공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상이 어의 두 명을 보냈으며 별감을 보내 타락죽을 하사하였다. 이달에 공은 광주(廣州) 율현(栗峴)으로 옮겨 머물렀다.
3월 17일 병오일 인시(寅時)에 공이 별세하니, 상이 애통해하는 교서를 내리고 관(棺)에 쓸 재목을 하사하였으며, 3년 동안 녹봉을 전해 주게 하였다. 양궁(兩宮)에서는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5월 2일에 양주(楊州)의 사패(賜牌)한 골짜기 충경공(忠景公)의 묘소 오른쪽 언덕에 공을 예장하였다.
8월에 양궁에서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 1월에 소대(召對)할 적에 검토관(檢討官) 이세근(李世瑾)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매번 노인을 우대하는 정사를 숭상하시니, 치사한 원로대신을 우대하는 조처가 더욱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옷감과 음식을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였다.
○ 2월에 상이 공의 사양하는 상소문에 답하기를,
“이혼(李渾)이 원로대신을 모함한 것이 지극히 놀랍고 한탄스러우니, 경은 조금도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하였다. 공은 병환이 심해지자,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죽은 뒤에도 받지 않으면 은혜에 감사하는 뜻을 스스로 밝힐 길이 없으니, 절하고 받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18일에 상은 공이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 어의를 보냈으며, 3일 후에 더 보내도록 명하였다. 공은 약 한 첩만을 먹고 시를 지어 의원에게 사례하였다.
○ 이보다 앞서 을사년(1665, 현종6) 봄에 금성(金城) 부군(府君)이 병환으로 관직을 떠날 적에 금성현의 향교(鄕校)에 보관되어 있던 《가례(家禮)》 한 질을 가지고 따르게 하였는데, 서울 집에 이르자 책을 돌려보내며 이르기를,
“내 도중에 갑자기 죽어서 집안사람들로 하여금 경황없이 장송(葬送)하게 할까 두려웠기 때문에 이 책을 가져온 것이다.”
하였다. 이때 공은 율현(栗峴)으로 옮겨가 머물 적에 모시던 첩들을 물리치고 잠꼬대하는 사이에도 “남자는 부인의 손에서 죽지 않는다.〔男子不絶於婦人之手〕”라는 아홉 자를 외웠으며, 인하여 《상례비요(喪禮備要)》를 가져왔느냐고 묻곤 하였다. 3월 13일 밤에 공은 시를 지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초나라 풍속에 답청함은 마음 밖의 일이요 / 楚俗踏靑心外事
예경에 경을 생각함은 병중에도 잊지 못하네 / 禮經思敬病中情
하였는데, 이것이 절필(絶筆)이다. 4일 후에 별세하였다.
○ 공은 선조(先祖)의 훈계를 삼가 지켜서 심지어 아이들에게 책을 가르칠 때에도 어렸을 때 가정에서 배웠던 순서를 한결같이 따랐다.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노년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을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전후로 수업한 선비가 수십 명에 이르렀는데, 공이 별세하자 성복(成服)한 자가 20여 명이었다. 부음(訃音)이 함흥(咸興)에 이르니, 선비와 백성 7000여 명이 성천강(城川江) 가에 모여서 곡하였으며, 이윽고 또 문회서원(文會書院)에 배향하였다.
○ 공은 송사하는 자가 있다는 이유로 임시로 매장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리하여 5월에 마침내 충경공(忠景公)의 사패(賜牌)인 선영의 오른쪽 언덕에 예장(禮葬)하였다가 경종(景宗) 원년 신축년(1721) 3월 21일에 비로소 대화산(大華山)에 있는 부인의 묘소 왼쪽에 합장하였다. 경종 2년(1722) 8월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는데, 부지런히 배우고 묻기를 좋아함을 문(文)이라 하고, 청렴하고 방정하며 공정함을 충(忠)이라 한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경종 3년(1723) 가을에 문집 34권이 세상에 간행되었다.
○ 공은 글씨에도 자못 유념하였는데 오로지 한 필체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일찍이 김생(金生)의 글씨를 좋아하였으나 만년에는 안 노공(顔魯公)의 서체를 좋아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별세하기 2년 전에 한집안처럼 지내는 후배가 《소학(小學)》 한 장(章)을 써 달라고 청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내 늙어서 글씨를 쓰지 않았으니, 익힌 뒤에 써 주겠다.”
하였는바, 삼가고 조심하여 정(精)한 것을 싫어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부인은 공의 봉작을 따라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이르렀으며 향년이 73세이다. 집에서 영화롭게 지내는 수십 년 동안 일찍이 밖의 말이 들어오거나 안의 말이 나간 적이 없었으며, 녹봉과 선물을 친족과 이웃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문충공(文忠公)의 뜻이라고 말하였다.
아드님인 회은공(晦隱公 남학명(南鶴鳴))은 20여 세 때부터 수시로 선대의 언행에 관한 문적을 찾았다. 충경공(忠景公)과 충간공(忠簡公 남지(南智))이 세상에 행한 뛰어난 행적이 난리를 겪으며 없어졌는데, 때때로 옛 간찰에 보인다 하여 여러 해 동안 수집하고 발췌해서 문충공의 논찬하는 글에 대비하였고 친족에까지 미쳤다. 이미 대신의 자제로 말세를 당했다 하여 손님을 접대하는 것을 경계하고 조심하였으며 나쁜 사람을 미리 알아 가까이하지 않았다. 문충공이 별세할 때에 회은공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네가 평소에 자식의 직분을 잘 행하여 나에게 많이 간해 주어서 지금 뚜렷하게 빠뜨리거나 잘못한 것이 없다.”
하였으니, 이로써 새벽에 문안하고 날이 어두우면 잠자리를 보살펴 드려 보필을 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회은공은 천거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향년이 69세이다. 사위인 조태상(趙泰相)은 예빈시 정(禮賓寺正)이다.
서자(庶子) 남학성(南鶴聲)은 현감(縣監)이고, 남학청(南鶴淸)과 남학정(南鶴貞)은 모두 찰방(察訪)이며, 서녀(庶女)는 이대곤(李岱坤)에게 출가하였다.
회은공은 3남 2녀를 두었는바, 장남 남극관(南克寬)은 생원(生員)이었는데 문충공이 《춘추(春秋)》의 학문을 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불행히 요절하였다. 차남 남처관(南處寬)은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정랑이었는데, 회은공이 문집(文集)을 간행하려 하였으나 미처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제때에 일을 주관하여 끝내 선대의 뜻을 이루었다. 막내아들은 남오관(南五寬)이다. 두 딸은 정랑 이창원(李昌元)과 지평 이광의(李匡誼)에게 출가하였다. 조태상의 양자 조명빈(趙明彬)은 도사(都事)이다.


 

[주D-001]문 노공(文潞公)의 고사 : 문 노공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인 문언박(文彦博)으로, 노국공(潞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문언박이 80세가 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출사한 일을 가리킨다.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철종(哲宗) 네 임금을 섬기며 50년 동안 출장입상(出將入相)하고 태사(太師)로 치사하였으며, 향년이 92세로 졸하여 노재상으로 유명하다.
[주D-002]소광(疏廣)과 소수(疏受) : 소광은 전한 선제(前漢宣帝) 때 사람으로 소수는 소광의 조카이다. 소광은 한나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소수는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있다가 하루아침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전원생활을 즐겼다. 《漢書 卷71 疏廣傳》
[주D-003]밤중까지 …… 죄인 : 밤이 깊은데도 돌아다니며 쉬지 않음은 나이가 늙었는데도 벼슬을 그만둘 줄 모름을 비유한 것이다. 위(魏)나라의 전예(田豫)는 늙어서 벼슬을 내놓으며 “나이가 70이 넘어 벼슬자리에 있는 것은 비유하면 저녁종이 울리고 물시계의 물이 다했는데도 밤에 돌아다니기를 그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는 죄인입니다.” 하였는바, 이는 곧 노쇠하여 죽을 날이 가까운데도 사직하지 않고 벼슬을 탐함을 이른다. 《三國志 卷26 魏書 田豫傳》
[주D-004]여러 관사(官司)의 전최(殿最) : 전최는 조선 시대에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결정하던 것을 가리킨다. 전(殿)은 고과 성적이 낮은 것이고 최(最)는 고과 성적이 높은 것이다. 매년 6월과 12월에 경관(京官)의 경우 각 관사의 당상관과 제조가 평정하는데, 당시 약천이 여러 관사의 제조를 겸임하고 있었다.
[주D-005]늙은 …… 만하다 : 노마지로(老馬知路)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춘추 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밤중에 길을 잃었는데, 마침 늙은 말이 길을 알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에는 나이 많은 사람의 오랜 경험과 풍부한 지식이 필요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韓非子 說林上》
[주D-006]당(唐)나라의 …… 하였다 : 문황(文皇)은 태종(太宗)을 가리킨다. 그는 명재상 방현령(房玄齡)이 치사(致仕)하려 하자, “나는 양손을 잃은 것처럼 허전하다.” 하고 물러갈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舊唐書 卷66 房玄齡列傳》
[주D-007]주전(廚傳) : 주(廚)는 음식(飮食), 전(傳)은 거마(車馬)의 뜻으로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驛站)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을 이른다.
[주D-008]봉미(封彌) : 시험 답안지의 오른편 끝에 응시자의 성명과 생년월일, 주소와 사조(四祖) 등을 쓰고 봉하여 붙이는 일을 이른다. 사조는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외조부(外祖父)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 새로 임용되는 관원의 신원 조사의 근거로 삼았다.
[주D-009]문묘(文廟) …… 있었는바 : 문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 선사묘(先師廟)라고 하였다가 명나라 성조(成祖) 때 문묘 또는 성묘(聖廟)라고 칭하였는바, 중국의 오성(五聖)인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를 모신 사당이다. 계성(啓聖)은 성인을 나오게 했다는 뜻으로, 계성묘(啓聖廟)는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梁紇), 안자의 아버지인 안무유(顔無繇), 증자의 아버지인 증점(曾點), 자사의 아버지인 공리(孔鯉), 맹자의 아버지인 맹격(孟激)을 별도로 모신 사당이다.
[주D-010]이름도 …… 맹손씨(孟孫氏) : 맹자의 아버지를 가리킨 것으로, 맹자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어 부친의 이름과 자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다만 후대에 그의 이름은 격(激)이고 자는 공의(公宜)라고 밝혀졌다.
[주D-011]공이 …… 말했다 : 장희재를 의친(議親)으로 관대하게 처분함을 이른다. 의친은 팔의(八議)의 하나로, 임금의 단문(袒免) 이상의 친족, 왕대비(王大妃)ㆍ대왕대비의 시마(媤麻) 이상의 친족, 왕비의 소공(小功) 이상의 친족, 세자빈의 대공(大功) 이상의 친족인 사람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 형의 감면을 의정(議定)함을 이른다.
[주D-012]경도(經道)와 …… 한다 : 경도는 정상적인 방법이고 권도(權道)는 임시방편으로 시의(時宜)에 맞게 조처함을 이른다. 곧 장희재(張希載)를 법대로 처리하는 것은 경도이고 장 희빈(張禧嬪)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장희재의 국문을 중지하는 것은 권도이다.
[주D-013]선침(仙寢) : 임금이나 왕비의 시신을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여기에서는 인현왕후를 가리킨다.
[주D-014]요망한 무고(巫蠱)의 화독(禍毒) : 무고는 주술(呪術)로 남을 해치는 것으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된 뒤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는데, 그 후 장 희빈과 그의 오라비 장희재가 인현왕후를 저주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주D-015]병자년의 옥사 : 1696년(숙종22)에 장 희빈과 그의 오라비인 장희재가 업동(業同)이란 종을 시켜 자기 집안의 무덤에 저주하는 물건을 묻어 놓고 이것을 반대파인 노론(老論)에게 뒤집어씌워 화를 전가하려다가 발각된 사건을 가리킨다. 《肅宗實錄 22年 6月》
[주D-016]정계(停啓) : 계사(啓辭)를 정지하는 것으로, 특히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등이 전부터 논계(論啓)하여 오던 일을 정지함을 이른다.
[주D-017]6월에 : 대본에는 ‘先月’로 되어 있는데, 필사 과정의 오류로 판단되어 ‘先’을 ‘六’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8]유국(幽國) : 정치가 혼암(昏暗)한 나라라는 뜻으로, 예의에 어두워 정치를 밝게 하지 못함을 이른다. 《禮記 禮運》
[주D-019]정 숙자(程叔子)와 …… 사례하였는데 : 정 숙자는 이천(伊川) 정이(程頤)를 가리키는바, 형인 명도(明道) 정호(程顥)를 정 백자(程伯子)라 하고 아우인 그를 정 숙자라 하였다. 서감(西監)은 서경(西京) 국자감(國子監)의 약칭인데, 정이는 부주(涪州)로 귀양 갔다가 풀려 돌아와서 다시 서경 국자감의 벼슬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또다시 삭적(削籍)되어 용문(龍門)으로 옮겨 살았다. 《二程全書 卷50 伊川年譜》
[주D-020]제일과녹패(第一科祿牌) : 제일과는 관원 녹봉 18과 중의 첫째 등급으로 정1품의 관원이 이 과에 해당하며, 매월 25일에 지급한다. 녹패는 녹봉을 받는 사람에게 주는 증서로, 종이로 만든 패이다.
[주D-021]범인(凡人) : 여기서는 친공신(親功臣)과 공신 적자(功臣嫡子)가 아닌 일반 문무 관원을 의미한다.
[주D-022]곡식 …… 의리 : 맹자(孟子)의 제자인 만장(萬章)이 “군주가 현자를 기르고자 하면 어떻게 해야 기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묻자, 맹자가 말씀하기를, “처음에 창고와 푸줏간을 맡은 관리가 군주의 명령에 따라 현자에게 곡식과 고기를 가져다 주면 현자가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려 받는다. 그다음부터는 창고를 맡은 관리는 계속해서 곡식을 대 주고 푸줏간을 맡은 관리는 계속해서 고기를 대 준다. 그리하여 현자로 하여금 군주의 명령에 자주 절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한다.” 하였다. 《孟子 萬章下》
[주D-023]승전(承傳) : 왕의 뜻이나 명령을 받아 담당 관리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승정원과 승전색(承傳色)이 담당하였다.
[주D-024]영갑(令甲) : 정령(政令) 또는 법령(法令)을 이른다. 원래 천자의 명령을 영(令)이라 하여 법령의 제1조를 영갑(令甲), 제2조를 영을(令乙)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新書 等齊》
[주D-025]친기위(親騎衛) : 1684년(숙종10)에 변방을 지키기 위하여 함경도 사람들로 조직한 기병 부대로, 나중에는 황해도에도 조직하였다.
[주D-026]신하가 …… 않았다 : 허(許)나라 도공(悼公)이 학질(瘧疾)을 앓다가 그의 세자(世子) 지(止)가 주는 약을 먹고 졸(卒)하였는데, 《춘추》 소공(昭公) 19년 조에 “허나라 세자 지가 그 군주 매를 시해했다.〔許世子止 殺其君買〕”라고 썼다. 이에 대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신하와 자식은 군주와 부모에게 약을 올릴 적에 반드시 약을 맛보아 독성이 있는가를 시험해야 하는데 세자 지가 약을 맛보지 아니하여 허나라 군주가 독한 약을 먹고 죽었으므로 세자를 꾸짖기 위하여 ‘그 군주를 시해했다.’라고 쓴 것이다.” 하였다.
[주D-027]기각지세(掎角之勢) : 기각은 의각(犄角)으로도 쓰는바, 사슴을 잡을 때에 뒤에서는 다리를 잡고 앞에서는 뿔을 잡는 것으로 인신(引伸)하여 군사를 양편으로 나누어 적을 협공(挾攻)하거나 앞뒤에서 견제하는 형세를 이른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4년 조에 “비유하면 사슴을 잡을 적에 진나라 사람들은 뿔을 잡고 융족(戎族)들은 다리를 잡는 것과 같이 한다.〔譬如捕鹿 晉人角之 諸戎掎之〕”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28]자나 …… 우려해서 : 대본에는 ‘窹歎但慮’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但’을 ‘恒’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9]전함 품관(前銜品官) : 한량 품관(閑良品官)을 달리 이르는 말로, 전직(前職)의 품관이라는 뜻이다. 고려 말기와 조선조에 현직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지내던 품관을 이른다.
[주D-030]세 도를 …… 16명씩 : 세 도는 함경도와 평안도, 황해도를 가리킨다. 총 16명은 12명의 오기로 보인다.
[주D-031]과좌(窠坐) : 벼슬자리로, 여기서는 친기위(親騎衛) 출신을 임명할 장관(將官) 자리를 이른다.
[주D-032]육군(六郡) : 한(漢)나라의 천수(天水), 안정(安定), 북지(北地), 상군(上郡), 농서(隴西), 서하(西河)를 일컫는데, 모두 융(戎), 적(狄)에 가까운 서북쪽의 변방 지역이다.
[주D-033]우후(虞詡) : 후한(後漢) 무평(武平) 사람이다. 영계(寗季) 등 수천 명의 도적이 떼를 지어 조가현(朝歌縣)의 현령을 죽이고 소란을 피워 여러 해 동안 평정되지 못하였는데, 우후가 조가장(朝歌長)이 되어 계책을 써서 평정하였다. 《後漢書 卷58 虞詡列傳》
[주D-034]충경공(忠景公) : 조선 초기의 명상인 남재(南在, 1351~1419)의 시호이다. 초명(初名)은 겸(謙)이고 자는 경지(敬之)이며, 호는 구정(龜亭)이다. 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을번(南乙蕃)의 아들이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아우 남은(南誾)과 함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하였으며, 1416년(태종16)에 영의정에 올랐다. 경제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산수(算數)에도 능하여,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주D-035]상례비요(喪禮備要)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지은 것으로, 주자(朱子)의 《가례(家禮)》를 참작하여 상례(喪禮)의 요점을 집대성한 책이다.
[주D-036]답청(踏靑) : 푸른 풀을 밟는다는 뜻으로, 청명(淸明)을 전후하여 들놀이 가는 것을 이른다.
[주D-037]안 노공(顔魯公) : 당(唐)나라의 명필가인 안진경(顔眞卿)을 가리키는바, 노국공(魯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노공이라 칭한 것이다.
[주D-038]문충공의 …… 대비하였고 : 대본에는 ‘用以文忠公論譔’으로 되어 있는데, 《약천연보》 장서각본에 의거하여 ‘文’ 앞에 ‘資’를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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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효종대왕(孝宗大王)의 만사(輓詞) 기해년(1659, 효종 10)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내리시려 / 大任天將降
일찍이 온갖 어려움 고루 겪게 하였네 / 艱難早備嘗
천 년 묵은 거북 껍질 상서를 알렸고 / 千年龜協瑞
오색구름 길조(吉兆)를 나타내었다오 / 五色氣徵祥
대국(代國)을 떠나 기업(基業)을 이어받았고 / 去代基仍纘
창에게 전하여 기업이 더욱 빛났네
/ 傳昌業愈光
아, 남기신 은택이 많으니 / 於戲遺澤厚
세상을 떠나셨어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 / 沒世永無忘


 

[주D-001]천 년 …… 알렸고 : 옛날 점을 칠 때에는 거북 껍질을 태워서 그 갈라진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하였는데, 오래 묵은 거북일수록 영험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주D-002]대국(代國)을 …… 빛났네 : 한(漢) 나라 문제(文帝)는 대국의 왕으로 있었는데, 혜제(惠帝)가 아들 없이 죽고 그의 어머니 여 태후(呂太后)가 집권하다가 죽자,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다. 창(昌)은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이름이다. 문왕의 아버지 계력(季歷)은 태왕(太王)의 셋째 아들이었는데, 형인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이 모두 왕위를 사양하였으므로 태왕의 뒤를 이어 문왕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효종은 원래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있었는데,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어 대통을 이었으므로 문제와 문왕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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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두 번째



주고받아 직접 교훈을 받드시니 / 受授親承訓
위미의 열여섯 글자라오 / 危微十六言
글을 품속에 간직하여 공경할 줄 알았고 / 懷書知克敬
구슬 자리에 당하여 끝내 존위(尊位)에 거하셨네 / 當璧竟居尊
화악은 이불과 베개를 연하였고 / 花萼聯衾枕
봄볕은 시원하고 따뜻함을 받들었다오 / 春暉奉凊溫
다른 해에 시호 짓는 법을 보면 / 他年觀諡法
백행 중에 효도가 근원이라네 / 百行孝爲原


 

[주D-001]위미(危微)의 열여섯 글자라오 : 위미는 위태롭고 미묘한 것으로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니 정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한 열여섯 글자를 가리킨다. 원래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진실로 중도를 잡아지키라.〔允執厥中〕” 하였는데, 순 임금이 우왕(禹王)에게 전위(傳位)하면서 다시 열두 자를 더하여 위와 같이 훈계하였는바, 이는 제왕들이 서로 주고받은 심법(心法)으로 알려져 있다.
[주D-002]구슬 자리에 …… 거하셨네 : 구슬 자리를 당하였다는 것은 임금이 될 조짐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13년 조에, “초(楚) 나라 공왕(恭王)이 적자(嫡子)가 없고 다만 총애하는 아들 다섯 명이 있어 적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신(神)들에게 망(望) 제사를 지낼 적에 사당인 태실(太室)의 뜰에다 구슬을 묻어 놓고는 다섯 아들이 차례로 들어와 절을 하게 하고, 그중에 구슬을 묻어 놓은 자리에서 절하는 자를 적자로 세우기로 하였다. 이때 평왕(平王)은 나이가 어리므로 궁녀가 안고 들어와 재배(再拜)를 하였는데 두 번 다 구슬의 끈이 있는 곳을 밟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평왕이 즉위했다.” 하였다.
[주D-003]화악(花萼)은 …… 연하였고 : 화악은 아가위나무의 꽃인데 서로 붙어 있으므로 형제간을 상징하는바, 곧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한 이불을 덮고 함께 잤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4]봄볕은 …… 받들었다오 : 봄볕은 어머니의 은덕(恩德)을 비유한 것으로,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한 치 되는 풀의 마음 가져다가, 삼춘의 따뜻한 햇볕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여,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삼춘의 따뜻한 봄볕에 비유하고 자신의 작은 정성을 한 치 되는 풀의 마음에 비유한 데서 비롯되었다. 온청(溫凊)은 어버이를 위하여 겨울에는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림을 이른다.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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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최생 석만(崔生錫萬)이 새로 삼가례(三加禮)를 행한다는 말을 들었으나 내 마침 먼 곳에 있어 손님의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자못 한스러웠다. 이에 율시 한 수를 지어 부친다.



듣자 하니 그대 상투를 올렸다 하는데 / 聞子突而弁
서로 그리워하나 길이 아득히 머네 / 相思路正賖
마음은 응당 머리 따라 수렴(收斂)하고 / 心應隨髮斂
덕은 반드시 관과 함께 더 높아지리라 / 德必與冠加
머리 모양 곧으니 기울게 하지 말아야 하고 / 容直宜無側
공손히 보아야 하니 간사한 마음 있을까 두렵네 / 瞻尊恐有邪
시를 주어 권면하는 마음 간절하니 / 贈詩深勸勉
부디 멀리 있는 이 사람 저버리지 마오 / 能勿棄諸遐


 

[주C-001]삼가례(三加禮) : 관례(冠禮)를 이르는바, 관례는 처음에는 치포관(緇布冠)을 가(加)하고, 두 번째에는 가죽으로 만든 피변(皮弁)을 가하고, 세 번째에는 작변(爵弁)을 가하여 모두 세 번 관을 씌우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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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상서(尙書) 남운경(南雲卿) 용익(龍翼) 이 그리워하여 지은 시에 화답하여 그 운에 차운하다. 정사년(1677, 숙종 3)



해안이라 봄눈이 내린 밭을 갈고 / 海岸春耕雪
높은 곳에 올라 한번 휘파람 부노라 / 登皐一舒嘯
날씨가 따뜻해지니 새 울음소리 많고 / 向暖鳥嚶多
추위가 지나가니 기러기 소리 드물구나 / 辭寒雁雝少
어디서 창해의 진주(眞珠)가 와서 / 何來滄海珠
갑자기 이 눈 속을 찬란하게 비추는가 / 忽此眼中照
정의(情誼)는 백 길의 깊은 못과 같고 / 情淵百丈深
필치는 천 길의 뾰족한 봉우리와 같다오 / 筆峯千仞峭
위에는 헤어지고 만나는 즈음 서술하고 / 上敍離合際
아래에는 경계하는 중요한 말씀 적었네 / 下陳箴規要
명심하여 일생을 마칠 수 있으리니 / 銘佩可終身
어찌 다만 구 년의 묘함이랴 / 奚但九年妙
저 옛날 내가 조정에 올라 / 昔余登王朝
반딧불로 작은 빛을 바칠 때에 / 螢爝輸微耀
비록 동생(董生)의 대책에는 부끄러웠으나 / 雖慙董對策
적이 급암(汲黯)의 교조를 사모하였다오 / 竊慕汲矯詔
민폐(民弊)를 개혁하여 감채(蚶菜)의 진상 없애려 하였고 / 革弊願罷蚶
아첨을 바쳐 새매 잡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네 / 獻諛恥捕鷂
과분한 은혜 분수 밖에 내리시어 / 謬恩誠匪分
가까이 모시는 승선으로 부르셨다오 / 近密承宣召
병들어 승명려(承明廬)의 숙직(宿直)에 곤하면서 / 病困承明直
구루산(句漏山)의 단약(丹藥)으로 치료하려 하였네 / 藥思句漏療
병부(兵符)를 차고 처음 읍재(邑宰)로 나갔으며 / 乞符初出宰
지휘하는 깃발 나누어 다시 변방을 순행하였네 / 分麾又巡徼
임기가 차서 장차 들어와 아뢰려 하였는데 / 秩滿將入奏
황도가 갑자기 빛을 감추었다오 / 黃道遽戢曜
성명하신 군주께서 종사를 이으시니 / 聖明纘宗祀
신명(神明)과 사람들 조정과 사당에서 경하하네 / 神人慶朝廟
경연(經筵)에 납시면서 몸을 굽히시니 / 御筵躬還鞠
천문에서 뉘 감히 팔뚝을 흔들랴 / 天門臂敢掉
스스로 생각건대 연도의 무딤으로 / 自念鉛刀鈍
외람되이 봉필(琫珌)의 칼집 꾸몄다오
/ 濫飾琫珌鞘
어리석은 충성은 개도를 잘못하였고 / 愚忠失開導
미친 말씀 함부로 지껄였네 / 瞽言妄號叫
직간(直諫)함은 용 비늘을 거스르다 죽으려 하였고 / 直殊龍鱗逆
목숨은 기러기 털 태우는 것처럼 하찮게 여겼다오
/ 命等鴻毛燎
다행히 사사로운 은혜를 입어 / 尙幸恩私被
물고기 잡고 낚시질하던 고향으로 돌아왔네 / 得返舊漁釣
쑥대가 자라는 오두막집 야성이 편안하고 / 蓬廬野性便
판여에 모시는 어버이 연세 높으셨네 / 板輿親年卲
옛날의 잘못 생각하고 피눈물을 흘리나 / 追愆雖泣血
콩을 먹으니 오히려 기뻐 웃는다오
/ 啜菽猶歡笑
도연명(陶淵明)의 술 마심을 배우지 않으니 / 不學揮陶觴
어찌 사교를 읊을 필요가 있겠는가 / 安用賦謝嶠
마음을 재계하여 진돈을 끊고 / 齋心絶螴蜳
자취를 감추어 밝은 빛 숨기노라 / 淪迹屛焜燿
칠 일 동안 일찍이 잘못 뚫었으니 / 七日曾誤鑿
비록 죽었으나 마땅히 구멍을 메우리라
/ 縱死宜塡竅
상서는 우리 집안의 영재(英才)이니 / 尙書吾宗英
문장이 소조를 압도한다오 / 文章壓昭朓
제작은 조화에 참여되고 / 制作造化參
영화는 하늘에 빼어난 것이라오 / 英華天秀肖
시를 부쳐 멀리 화답을 구하니 / 寄詩遠求和
나의 적수 아님 진실로 알고 있네 / 非敵諒已料
어찌 상구의 악취 나는 것을 가지고 / 寧將商丘嗅
향기로운 난초의 향기와 함께하겠는가
/ 以雜芳蘭燒
다만 나를 좋아하는 뜻에 감사하여 / 秪感好我意
마음속에 기약하고 권면함이 높다오 / 中心期勉劭
우번은 본래 소절하였으니 / 虞翻本疏節
청승이 조문함 달게 여기노라
/ 自甘靑蠅弔
본래 세상의 높은 선비가 아니니 / 素非高世士
감히 대바구니를 멘 장인에게 비기랴
/ 敢擬丈人蓧
말년에 독서의 재미를 알아 / 晩知讀書味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꾸짖음 면하려 하네 / 冀免醉夢誚
거칠게 보답하는 시를 지으니 / 牽率成報章
그대의 백설조에 부끄럽노라 / 愧君白雪調

원운(元韻)


홀로 우주 사이에 우뚝히 서서 / 獨立宇宙間
길게 읊조리고 또 길게 휘파람 부네 / 長吟復長嘯
백설곡을 아뢰고자 하나 / 欲奏白雪曲
음률을 아는 이 적음을 어찌하랴 / 柰此知音少
그대는 자리 위에 보배이니 / 君是席上珍
깨끗하기가 옥산의 햇빛과 같다오 / 淸如玉山照
말은 입에서 나오지 못하는 듯하나 / 言若不出口
마음은 곧고 또 정직하였네 / 其心勁且峭
학문을 함에 이미 근본을 힘썼고 / 爲學旣務本
일을 기록함에 요점을 제시하였다오 / 記事必提要
문장은 삼협의 물 쏟아지는 듯하고 / 詞源倒三峽
필법 또한 절묘하였네 / 筆法又絶妙
한집안에 이소가 있으니 / 一家有二疏
우리 가문 이에 힘입어 영화로웠네 / 吾門賴榮耀
청운의 길 평탄히 걸었으니 / 平步踏靑雲
금마문(金馬門)에 몇 번이나 조명(詔命)을 기다렸나 / 金馬幾待詔
옷자락 잡고 스승에게 나아가니 스승이 호피(虎皮) 방석 거두었고 / 摳衣師撤皮
간언(諫言)을 올리니 군주가 새매를 품속에 숨겼다네 / 進諫君懷鷂
한(漢) 나라 조정의 죽부(竹符) 차고 지방관으로 나가니 / 出分漢庭竹
백성들은 공수(龔遂)와 소신신(召信臣)이라 칭하였네
/ 民稱龔與召
굶주리던 자 그대를 기다려 먹고 / 飢者待君哺
병든 자 그대를 기다려 치료되었다네 / 病者待君療
성주께서 아름다운 정사 표창하시니 / 聖主褒美政
관찰사의 깃발 북쪽 변방에 빛났다오 / 旌節輝北徼
멀리 정호의 활에 통곡하고 / 遠哭鼎湖弓
돌아와 함지의 햇볕을 우러렀네 / 歸仰咸池曜
온화한 모습으로 경악(經幄)에서 모시니 / 雍容侍經帷
장차 낭묘에 등용되게 되었는데 / 且將貯廊廟
뜻에 맞지 않은 일이 있자 / 事有不適意
영화로운 자리 머리 저어 사양하였네 / 榮次頭先掉
평생 강개한 정성은 / 平生慷慨誠
칼이 칼집에서 뛰쳐나오는 듯하였다오 / 有如劍躍鞘
손수 한 상소문을 초하여 / 手草一封疏
아침에 대궐문을 향해 부르짖었네 / 朝向閶闔呌
누가 불타오르는 불길이 / 誰知炎炎火
점점 평원에까지 타오를 줄을 알았으랴
/ 漸至平原燎
중천에 해와 달이 밝아 / 中天日月明
고향으로 돌아가 밭 갈고 낚시질할 것 허락하셨네
/ 却許歸耕釣
자취는 난초를 차던 굴원(屈原)과 달랐으나 / 迹異紉蘭屈
몸은 외를 심던 소평(召平)과 같았다오
/ 身同種瓜卲
떠나는 길에 성시에 들러 / 朅來過城市
잠시 입을 열어 함께 웃었네 / 暫同開口笑
말 타고 서쪽으로 가고 또 남쪽으로 가니 / 西驂又南歸
돌아가는 길 바다와 산이 아득하여라 / 歸路迷海嶠
소식은 기러기가 막혀 있는데 / 音書阻鴻雁
시절은 어느덧 습요함에 놀라네 / 時序驚熠燿
한 해가 저무니 함박눈이 쏟아지고 / 歲暮雨雪多
사나운 바람 수많은 구멍에서 울어 대네 / 獰風吼萬竅
고향을 그려 한밤중 혼만 수고로우니 / 徒勞半夜魂
긴 하늘 바라보매 다할 수 없구나 / 不盡長天眺
어제 정옥이 방문하였는데 / 昨蒙庭玉訪
문장이 부친을 꼭 닮은 것 기뻤다오 / 詞翰喜酷肖
인하여 들으니 호해에는 / 仍聞湖海上
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시재(詩材)라 하네 / 滿眼皆詩料
생선을 사서 때로 밥상에 올리고 / 販鮮時入飧
밭을 개간하여 봄에 불을 놓는다네 / 畬田春可燒
물러나서도 나라를 걱정함은 범중엄(范仲淹)을 배우고 / 退憂且師范
매월 인물을 평함은 허소(許劭)를 배우지 마오 / 月評休學劭
소라고 불러도 굳이 노할 것이 없으니 / 呼牛不必怒
말을 잃음 어찌 위문할 것 있겠는가 / 失馬何須弔
호미 잡고 혹은 지팡이 꽂아 놓으며 / 持鉏或植杖
우산을 메고 또 삼태기를 메리라 / 擔簦仍荷蓧
광채를 머금고 참을 보존한다면 / 含光儻葆眞
사람들 반드시 꾸짖지 못하리다 / 人必未敢誚
내일 아침 옷자락 펄럭이고 떠나가리니 / 明朝拂衣去
나 또한 그대와 함께 하리라 / 吾亦可同調


 

[주D-001]창해(滄海)의 진주(眞珠) : 상대방의 아름다운 시를 미칭한 것이다.
[주D-002]어찌 …… 묘함이랴 : 구 년의 묘함이란 도를 깨달아 크게 선해짐을 이른다. 《장자(莊子)》 우언(寓言)에, “안성자유(顔成子游)가 동곽자기(東郭子綦)에게 이르기를,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뒤로부터 1년 만에 순박한 야인(野人)이 되었고, 2년 만에 세속과 동화하는 사람이 되었고, 3년 만에 통달하였고, 4년 만에 물건과 하나가 되었고, 5년 만에 신령(神靈)이 모두 와서 의귀(依歸)하였고, 6년 만에 조화를 가슴속에 간직하여 귀신이 되었고, 7년 만에 모든 행동이 천연(天然)에 부합하였고, 8년 만에 사(死)와 생(生)을 잊게 되었고, 9년 만에 크게 묘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D-003]반딧불로 …… 때에 : 군주의 덕과 지혜를 태양에 비하고, 자신의 재주와 경륜을 반딧불에 비하여 보잘것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D-004]비록 …… 부끄러웠으나 : 동생(董生)은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학자인 동중서(董仲舒)로, 그가 천거되어 무제에게 올린 대책문(對策文)이 유명한바, 자신의 계책이 그에게 미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주D-005]적이 …… 사모하였다오 : 급암(汲黯) 역시 무제 때에 직간(直諫)을 잘한 인물이며, 교조(矯詔)는 군주의 조칙이나 명령을 사칭함을 이른다. 급암이 일찍이 알자(謁者)가 되어 하내(河內) 지방에 실화(失火)를 조사하러 가던 도중 하남(河南) 지방에 수재(水災)와 한해(旱害)가 심하여 백성들이 크게 굶주린 것을 보고는 황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창고를 열어 이들을 구제하였는바, 약천 역시 급암을 사모하여 백성을 구휼하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주D-006]민폐(民弊)를 …… 하였고 : 감채(蚶菜)는 붉은 조개의 일종이다. 당(唐) 나라 때에 남해 지방에서 감채를 진상하여 백성들의 폐해가 심하였는데, 공규(孔戣)가 글을 올려 이것을 말해서 감채를 진상하지 않도록 하였다.
[주D-007]아첨을 …… 부끄러워하였네 : 당 나라 고종(高宗) 때에 유제현(劉齊賢)이 진주 사마(晉州司馬)가 되었는데, 진주에는 유명한 매가 생산되었다. 장군 사흥종(史興宗)이 임금을 따라 동산에서 사냥하다가 아뢰기를, “진주에는 좋은 매가 생산되니, 진주 사마로 있는 유제현으로 하여금 매를 잡아 진상하게 하소서.” 하고 청하였다. 이에 임금은 “유제현이 어찌 새매를 잡아 바칠 자이겠는가. 경은 그를 이렇게 대하지 말라.” 하였다. 《資治通鑑 卷201 唐紀》
[주D-008]승명려(承明廬) : 한(漢) 나라 때 금마문(金馬門) 옆에 있었던 전각(殿閣)으로, 서적을 교열(校閱)하던 곳이다.
[주D-009]구루산(句漏山)의 단약(丹藥) : 구루산은 광동성(廣東省)에 있는 산 이름으로 단사(丹砂)가 생산되는바, 진(晉) 나라 때 갈홍(葛洪)이 이곳에서 연단술(煉丹術)을 익혔다 한다. 단약은 단사를 구워 만든 선약(仙藥)이다.
[주D-010]황도(黃道)가 …… 감추었다오 : 황도는 태양이 다니는 길인바, 태양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곧 군주가 승하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11]천문(天門)에서 …… 흔들랴 : 천문은 궁궐 문으로, 신하들이 궁궐 문에 들어갈 때에는 공경하여 몸을 굽히므로 감히 팔을 휘젓고 들어가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주D-012]스스로 …… 꾸몄다오 : 연도(鉛刀)는 납으로 만든 칼이어서 예리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재주 없음을 비유한 것이며, 봉필(琫珌)은 패도(佩刀)의 장식으로, 봉은 칼집의 윗쪽 부분이고 필은 칼집의 아랫쪽 부분이다. 《시경》 소아(小雅) 첨피낙의(瞻彼洛矣)에, “군자가 이르니, 칼집에 봉이 있고 또 필이 있다.〔君子至止 鞞琫有珌〕” 하였는바, 여기의 군자는 제후왕을 가리킨 것으로, 곧 재주가 없는 자신이 군주에게 신임을 받아 쓰여짐을 말한 것이다.
[주D-013]직간(直諫)함은 …… 여겼다오 : 용 비늘을 거스른다는 것은 직간을 하다가 제왕의 노여움을 삼을 이른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에, “용의 턱 아래에 거슬려 난 비늘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크게 노한다.” 하여, 직간으로 임금의 분노를 삼을 비유한 데서 유래하였다. 기러기 털은 쉽게 타버리므로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여겨 직언을 다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4]판여(板輿)에 …… 높으셨네 : 판여는 사람이 타고 다니는 한 기구로, 노인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진(晉) 나라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대부인(大夫人)이 마침내 판여를 타고 가벼운 수레에 올랐다.” 하였는데, 이후 관리들이 임지(任地)에 있으면서 부모를 맞이하여 봉양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여기서도 자신이 나이 많은 부모를 판여에 모셔 봉양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5]옛날의 …… 웃는다오 : 콩을 먹었다는 것은 시골에서 부모를 모시고 콩을 먹으며 가난하게 생활함을 이른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자로가 ‘서글픕니다. 저는 가난 때문에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봉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별세한 뒤에는 예를 다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자, 공자가 ‘콩을 먹고 물을 마시며 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하면 이것을 일러 효도라 한다.〔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 했다.” 하였다. 여기서는 약천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뉘우쳐 피눈물을 흘리고 있으나 또한 부모를 모시고 생활하여 즐거움을 말한 것이다.
[주D-016]어찌 …… 있겠는가 : 사교(謝嶠)는 확실치 않다. 혹 사안(謝安)의 동산(東山)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안은 남조(南朝) 시대 진(晉) 나라의 명재상으로, 일찍이 동산에 은거하여 기생을 끼고 놀다가 세상에 나와 훌륭한 정치를 편 인물이다.
[주D-017]마음을 …… 끊고 : 진돈(螴蜳)은 벌레가 겨울잠에서 막 깨어나 활발하지 못한 모양으로, 사람이 어리벙벙하여 안정되지 못한 모습을 비유하는바, 마음을 재계하여 매우 안정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18]칠 일 …… 메우리라 : 칠 일 동안 일찍이 잘못 뚫었다는 것은 무리하게 일함을 비유한다.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혼돈(渾沌)은 중앙의 신(神)이었는데,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고 없고 입도 없어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도 맡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였다. 남해의 신인 숙(儵)과 북해의 신인 홀(忽)이 그의 은덕을 갚기 위해 보고 듣게 하려고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 주었더니, 혼돈이 그만 죽고 말았다.” 하였다. 숙과 홀은 빠르다는 뜻으로 유위(有爲)를 의미하고, 혼돈은 개발되지 아니하여 원래의 상태를 온전히 보존한 것으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의미한다.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는 것은 사람의 얼굴에 눈과 귀 등 일곱 개의 구멍이 있으므로 사람의 지혜를 인위적으로 개발함을 이른다. 여기서는 이 고사를 빌어 세상일을 무리하게 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야 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주D-019]문장(文章)이 …… 압도한다오 : 소조(昭朓)는 남조(南朝)의 문장가인 포소(鮑昭)와 사조(謝朓)를 가리킨다. 포소는 송 나라 사람으로 자가 명원(明遠)이고 본래의 이름이 조(照)인데, 당 나라 때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이름을 휘하여 소(昭)로 썼는바, 시문을 잘하였으며 임해왕자(臨海王子)의 참군(參軍)이 되었으므로 포참군(鮑參軍)이라 칭하였다. 사조는 남제(南齊) 사람으로 자가 현휘(玄暉)인데, 일찍이 선성(宣城)의 태수(太守)가 되었으므로 사선성(謝宣城)이라 칭하였다. 그의 시는 특별히 이백(李白)이 좋아하였다. 원문에 조(眺)로 되어 있는 것을 조(朓)로 바로잡았다.
[주D-020]어찌 …… 함께하겠는가 : 상구(商丘)는 지명이다. 《열선전(列仙傳)》에, “상구자진(商丘子晉)이란 자는 상구 사람이니 젓대를 불며 돼지를 키웠다.” 하였다. 여기서는 상구의 돼지똥 냄새를 가지고 자신의 문장에 비유하고, 향기로운 난초를 가지고 상대방의 훌륭한 문장에 비유한 것이다.
[주D-021]우번(虞翻)은 …… 여기노라 : 우번은 삼국 시대 오(吳) 나라 사람으로 자가 중상(仲翔)인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높은 기개가 있었다. 자주 직간을 하여 오 나라 임금인 손권(孫權)에게 미움을 받고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또 술을 마시고 실수하여 남쪽 지방으로 멀리 좌천되었다. 소절(疏節)은 고고(孤高)한 절개와 지조를 이른다.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우번전(虞翻傳)의 주(註)에 우번별전(虞翻別傳)의 내용이 보이는데, 여기에 “우번이 남쪽 지방으로 추방된 다음 스스로 말하기를, ‘소절하여 군주의 노여움을 범하고 죄를 얻었으니, 바닷가에 영원히 버려짐이 마땅하다.’ 했다.” 하였다. 청승(靑蠅)은 쉬파리로, 쉬파리가 조문한다는 것은 조문객이 적음을 이르는바, 죽은 뒤에 조문 오는 사람이 없고 오직 쉬파리만 시신에 붙어 있음을 이른다. 여기서는 자신이 우번처럼 지조만 높아 세상에 버림받고 죽은 뒤에 청승만이 날아들 것임을 말한 것이다.
[주D-022]본래 …… 비기랴 : 대바구니를 멘 장인(丈人)은 은자(隱者)를 이른다. 《논어》 미자(微子)에, “자로(子路)가 공자를 따라가다가 뒤에 처져 있었는데, 지팡이로 대바구니를 메고 가는 장인을 만나 부자(夫子)를 보았느냐고 묻자, 장인은 ‘그대는 사지를 움직여 부지런히 일하지 않고 오곡(五穀)을 분별하지 못하니, 누구를 부자라 하는가?’ 하고 지팡이를 꽂아놓고 김을 매었다.” 하였다. 여기서는 자신이 본래 세상을 은둔하는 높은 선비가 아니므로 은자에 비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주D-023]백설조(白雪調) : 백설은 곡조의 이름으로, 문장의 격조(格調)가 고아(高雅)하여 범속(凡俗)을 초탈함을 이른다. 춘추 시대 초(楚) 나라 사람이 양춘(陽春)과 백설이라는 곡을 불렀는데, 하도 고상하여 화답하는 자가 십여 명에 불과하였다 한다. 《文選 宋玉 對楚王問》 여기서는 상대방의 훌륭한 시문(詩文)을 칭찬하여 말한 것이다.
[주D-024]문장은 …… 듯하고 : 삼협(三峽)은 중국 사천성(四川省)과 호북성(湖北省)에 걸쳐 있는 양자강 상류(上流)의 구당협(瞿塘峽)ㆍ무협(巫峽)ㆍ서릉협(西陵峽)을 합하여 칭하는 것으로, 문장을 술술 지어 마치 삼협의 물살이 쏟아져 내리는 듯함을 말한 것이다.
[주D-025]한집안에 이소(二疏)가 있으니 : 이소는 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인 소광(疏廣)과 그의 조카인 소수(疏受)를 이른다. 이들은 각각 태자의 태부(太傅)와 소부(少傅)로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니 사람들이 모두 그들의 어짊을 칭찬하였는바, 약천과 그의 숙부인 남이성(南二星)을 이들 숙질에 비한 것이다.
[주D-026]금마문(金馬門)에 …… 기다렸나 : 금마문은 궁궐 문을 이르는바, 한(漢) 나라 때에 어진 선비들을 초빙하여 금마문에 머물게 하고 황제의 조명(詔命)으로 이들의 의견이나 계책을 물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주D-027]옷자락 …… 거두었고 : 옛날 스승이 학문을 강론할 때에 호피(虎皮) 방석을 깔고 앉았으므로, 호피 방석은 스승의 자리를 일컫는다. 제자가 스승에게 나아갈 때에는 옷자락을 잡고 공손히 나아가는바, 호피 방석을 거두었다는 것은 스승이 제자의 높은 학식에 탄복하여 스승의 자리를 양보하였음을 의미한다.
[주D-028]간언(諫言)을 …… 숨겼다네 :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새매를 갖고 놀다가 직간을 잘하는 위징(魏徵)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소매 속에 넣어 숨겼는데, 위징은 이것을 눈치채고 물러가지 않아 끝내 그 새매가 소매 속에서 죽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29]한(漢) 나라 …… 칭하였네 : 죽부(竹符)는 대나무 병부(兵符)로, 수령이 차는 병부이다. 공수(龔遂)는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의 명관(名官)으로 발해 태수(渤海太守)가 되어 치적(治績)이 뛰어났고, 소신신(召信臣)은 남양 태수(南陽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약천 또한 지방관이 되어 이들처럼 선정을 베풀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D-030]멀리 …… 통곡하고 : 옛날 황제(黃帝)가 정호(鼎湖)에서 솥에 단약(丹藥)을 구워 먹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자, 신하들이 그 관(棺)을 열어보니 황제의 시신은 없고 군주가 쓰던 활과 칼만 남아 있었으므로 이것을 안고 울었다 한다. 정호(鼎湖)의 활은 군주가 승하(昇遐)한 것을 이른다.
[주D-031]돌아와 …… 우러렀네 : 함지(咸池)는 전설상 해가 목욕하는 곳이라 한다. 해는 군주를 상징하므로 새로 즉위한 군주를 우러름을 말한 것이다.
[주D-032]누가 …… 알았으랴 : 약천을 비방하는 말이 크게 일어났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33]중천(中天)에 …… 허락하셨네 : 중천의 해와 달은 현명한 군주를 가리킨 것으로, 임금이 약천의 충성어린 심정을 살피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주D-034]자취는 …… 같았다오 : 굴원(屈原)은 전국 시대 초(楚) 나라의 충신으로, 그가 지은 《이소경(離騷經)》에, “향초(香草)인 강리와 벽지 몸에 두르고, 가을 난초 엮어 허리에 찼다오.〔扈江離與辟芷兮 紉秋蘭以爲佩〕”라고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소평(卲平)은 소평(召平)으로도 쓰는바, 진(秦) 나라 때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으나, 진 나라가 망하자 삼베옷을 입고 장안(長安)의 동쪽에서 오이를 가꾸었는데, 그 오이 맛이 특별히 좋았으므로 동릉과(東陵瓜)라 칭하였다. 여기서는 약천의 행적이 귀양 간 굴원과 달랐으나 시골에 돌아와 채소를 가꾸는 모습은 소평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주D-035]시절은 …… 놀라네 : 습요(熠燿)는 반짝거리는 모양으로, 반딧불이 반짝거림을 이른다. 《시경》 빈풍(豳風) 동산(東山)에, “반짝거리는 반딧불이다.〔熠燿宵行〕” 하였는바, 세월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늦여름이 되어 반딧불이 날아다님을 말한 것이다.
[주D-036]어제 정옥(庭玉)이 방문하였는데 : 정옥은 집안의 옥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의 자제를 이르는바, 곧 약천의 아들인 남학명(南鶴鳴)이 찾아옴을 말한 것이다.
[주D-037]물러나서도 …… 배우고 : 범중엄(范仲淹)은 북송(北宋)의 명재상으로, 그가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에, “옛날 인인(仁人)의 마음은 …… 남의 일로 기뻐하지 않고 자신의 일로 슬퍼하지 않아, 묘당의 높은 곳에 있으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있으면 군주를 걱정하니, 이는 조정에 나가서도 또한 걱정하고 물러나서도 또한 걱정하는 것이다.〔古仁人之心 …… 不以物喜 不以己悲 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退亦憂〕” 하였다. 여기서는 곧 비록 시골에 있어도 국가를 걱정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주D-038]매월 …… 마오 : 허소(許劭)는 후한(後漢) 때 사람으로 인물을 잘 알아보아 매월 초하루가 되면 인물을 품평하였으므로, 이것을 월단평(月旦評)이라 칭하였는바, 여기서는 이 고사를 들어 입을 다물고 인물평을 일절 하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다.
[주D-039]말을 …… 있겠는가 : 말을 잃었다는 것은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인용한 것으로, 상대방이 자신을 미련한 소라고 부르고 욕하여도 노할 것이 없고 말을 잃어도 굳이 서운해할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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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광진(廣津)의 별장(別莊)에서 서계(西溪) 박형 계긍(朴兄季肯) 세당(世堂) 의 시운에 차운하다.



소년 시절 즐기던 일 머리 돌리자 허사이니 / 少年歡樂轉頭空
일 년 넘도록 헤어졌다가 반야를 함께하였네 / 隔歲乖離半夜同
이로부터 호산이 다시 천리나 멀어지리니 / 從此湖山更千里
서로 생각함은 오직 꿈속에 혼이나 통하리라 / 相思唯有夢魂通

두 번째

강가에 푸른 산 한 띠처럼 멀리 있는데 / 江上靑山一帶賖
깨끗한 폭포가 흐르는 곳이 나의 집이라오 / 玉流飛處是吾家
아름다운 손님 시를 쓰고 간 뒤로부터 / 自從佳客題詩後
새로 자란 소나무 가지 문에 비껴 있네 / 新長松枝映戶斜

세 번째

유수처럼 흐르는 세월 어찌 멈추랴 / 流年似水何曾住
세상일 뜬구름과 같아 기약할 수 없구나 / 浮世如雲不可期
나의 집에 도리어 나그네가 됨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소 / 休怪吾廬還作客
건곤이 인간의 역려임을 일찍 알았노라 / 乾坤逆旅早能知

네 번째


새로 수석 좋은 가야의 골짝 얻으니 / 新得伽倻水石洞
장차 반을 나누어 꽃을 심을 것 허락하네 / 將分一半許栽花
산 위의 참새들 얼려 죽이지 말라 / 莫爲凍殺山頭雀
어디든 생업(生業)을 도모함 절로 방법이 있다네 / 隨處謀生自有涯

원운(元韻)

호해에 서로 바라보며 세월을 보냈는데 / 湖海相望歲月空
강산(江山)을 또다시 잠시 함께하노라 / 江山又此暫時同
표표히 헤어져 동서로 흩어지니 / 飄飄解袂東西散
먼 길 어떻게 소식을 통할 수 있을까 / 路遠何緣信耗通

두 번째

강가의 길따라 백운 속으로 들어가니 / 緣江路入白雲賖
붉은 밤과 누런 배 두서너 집의 마을이라오 / 赤栗黃梨三兩家
멀리 바라보니 초가집 더욱 깊은 곳에 / 遙見茅齋更深處
반송(盤松)의 언덕에 작은 시냇물 비껴 흐르네 / 低松陰畔小溪斜

세 번째

처음 이곳을 경영함은 뜻이 없지 않았으니 / 初營此地非無意
한가롭게 말년을 쉬려고 해서였네 / 應有休閒歲晩期
오늘날 도리어 와서 과객이 되니 / 今日却來爲過客
아득한 세상만사 다시 누가 알쏘냐 / 悠悠萬事復誰知

네 번째

그대에게 들으니 호중에 경치 좋은 곳 있으며 / 聞君見說湖中勝
여기에는 아름다운 꽃 심을 곳도 많다 하네 / 勝處偏多可種花
어이하면 가솔들 거느리고 그대 따라 은둔해서 / 安得將家隨共隱
모내기하고 게 잡으며 생애를 보낼는지 / 秧苗罛蟹送生涯


 

[주D-001]건곤(乾坤)이 …… 알았노라 : 역려(逆旅)는 여관방으로, 하늘과 땅은 수많은 인간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라 하여 말한 것이다.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에, “천지는 만물의 역려이고, 광음은 백대의 과객이다.〔夫天地者萬物之逆旅 光陰者百代之過客〕” 하였다.
[주D-002]산 …… 말라 : 산 위란 차가운 흘간산(紇干山) 위를 이른 것이다. 흘간산은 일명 흘진산(紇眞山)으로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는데, 이곳은 여름철에도 눈이 쌓여 있기 때문에 속담에 ‘흘간산 위의 얼어 죽는 참새야, 어이하여 날아가 좋은 곳에서 살지 않는가.〔紇眞山頭凍死雀 何不飛去生處樂〕’ 하였으므로,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3]호중(湖中) : 호서(湖西) 지방을 가리킨 것으로, 약천 역시 호서인 결성(結城)에 살았다.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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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노곡(蘆谷)의 시골집 시냇가에서 이석여(李錫余) 삼석(三錫) 의 시운에 차운하다.



단풍숲의 가을 그림자 참으로 아련한데 / 楓林秋影正依微
멀리 높은 산에 오르니 저녁 햇빛 비추누나 / 遠上寒山帶夕暉
폭포수 한 줄기는 얼굴 위로 떨어지고 / 懸瀑一條當面落
한가로운 구름 몇 점은 옷을 헤치고 날아간다 / 閒雲數點拂衣飛
그윽하고 깊은 골짝에는 언덕 따라 길이 나 있고 / 幽深洞府緣崖路
고요하고 쓸쓸한 인가는 물가에 사립문이 나 있네 / 靜散人家近水扉
그대와 함께 이곳에 살면서 / 便欲與君棲此地
영원히 진세를 하직하고 돌아가지 않았으면 / 永辭塵世未言歸


 

 

 

약천집 제2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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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좌윤(左尹) 최공(崔公) 묘갈명



지금 영의정으로 있는 최공 석정(崔公錫鼎)의 아우인 이조 판서 석항(錫恒)이 그 선부군(先府君) 정수재(靜修齋) 좌윤공(左尹公)의 행장을 나에게 주고 묘에 명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아, 나는 실로 문장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덕을 형용할 수 있겠는가. 내가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어찌 차마 두 자제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차마 공이 평소에 인정해 주신 것을 잊고서 사실을 기록하는 일을 담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장을 살펴보니, 완산 최씨(完山崔氏)는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순작(純爵)이 비조(鼻祖)이다. 고려조로부터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으며, 덕업을 서로 계승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된 휘 수준(秀俊)이 있었는데, 이분이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기남(起南)을 낳았고, 이분이 영의정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며 휘가 명길(鳴吉)이고 호가 지천(遲川)인 분을 낳았다. 배위는 인동 장씨(仁東張氏)이니,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만(晩)의 따님이다. 문충공은 아우가 있었으니 이조 참판으로 휘가 혜길(惠吉)이고, 그 배위는 함평 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춘원(春元)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후량(後亮)이고 자가 한경(漢卿)이다. 문충공이 처음에 아들이 없어 공을 데려다가 양자로 삼았는데 늦게 아들을 두니, 이름이 후상(後尙)이었다. 문충공은 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조정에 청해서 공을 후사로 정하였다. 이때 문충공은 일등 공신으로 요직을 담당하여 매일 한가한 틈이 없으므로 집안 살림을 모두 공에게 맡겼는데, 공은 실로 가사를 잘 주관한다는 칭찬이 있었다.
정축년 공은 상신의 자제로 심양(瀋陽)에 가서 인질이 되었으며, 임오년 문충공이 오랑캐에게 붙잡혀가서 감옥에 갇히자, 공은 파발마를 타고 세 번이나 오랑캐 지방을 왕래하며 주선해서 화를 늦추었으며, 을유년 문충공을 모시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정해년 문충공이 별세하였다. 공은 심양에 머문 것이 거의 8, 9년이었으므로 몸이 수고롭고 마음이 고달파서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는데 상을 당하여 더욱 심해지자 문을 닫고 병을 잘 다스려서 오랜 뒤에 다소 덜해졌다.
신묘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남별전 참봉(南別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사산감역(四山監役)에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었다. 병오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에 제수되고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승진하였으며, 종부시 주부, 공조 좌랑, 충훈부 도사를 역임하였다.
경술년 배천 군수(白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다음 해 체직되고 을묘년 사복시 첨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시국이 크게 변하니, 벼슬살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진산 군수(珍山郡守)와 면천 군수(沔川郡守)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기미년 영천 군수(榮川郡守)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체직되었다.
경신년(1680, 숙종 6) 보사 공신(保社功臣)을 녹훈할 때에 정사 원훈(靖社元勳)의 큰아들로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으며, 신유년 청풍 부사(淸風府使)에 제수되었다가 계해년 체직되었다.
을축년 70세가 되니, 조정에서는 두 아들이 시종관(侍從官)이라 하여 은혜를 미루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로 올리고 세습하여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좌윤 겸 도총부부총관을 제수하였는데, 얼마 안 있다가 사양하여 체직되고 집에서 한가롭게 여생을 보냈다. 기사년(1689) 세상의 일이 또 변하여 보사 공신을 삭탈하자 이로 인하여 품계가 강등되어 통정대부가 되었다.
계유년(1693, 숙종 19) 정침에서 고종명(考終命)을 하여 양주(楊州) 천마산(天磨山) 아래 판곡리(板谷里) 간좌(艮坐)의 산에 장례하니, 선영을 따른 것이었다. 이해 여름 다시 보사 공신의 훈호(勳號)를 복구해 주어 품계와 직책을 옛날과 같이 환급하였으며, 치제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배위 광주 안씨(廣州安氏)는 관찰사 헌징(獻徵)의 따님인데, 장엄하고 후중하며 단정하고 정성스러워 부도(婦道)를 특히 잘 닦으니 친척들이 귀의하였으며, 문충공이 더욱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신유년에 출생하고 계축년에 별세하여 공의 묘소에 부장되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석진(錫晉)은 정랑인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은 바로 의정(議政) 석정(錫鼎)이고 다음은 바로 판서 석항(錫恒)이며, 장녀는 진사 윤제명(尹濟明)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현감 신곡(申轂)에게 출가하였다. 정랑은 4남을 두었으니 생원 창헌(昌憲), 도사 창연(昌演), 봉사 창민(昌敏)과 창억(昌億)이다. 의정은 공의 아우인 응교 후상(後尙)에게 양자 갔는데 아들 창대(昌大)를 두었는바, 지금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있다. 판서는 공의 생가 아우인 교관 후원(後遠)에게 양자 갔으며, 또 창억(昌億)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다. 손녀와 외손이 또 약간 명이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바르며 의표가 단정하여, 남들과 화합하면서도 휩쓸려서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장엄하면서도 사납지 않았으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고 현자를 친애하여 한결같이 성심에서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사모하며 좋아하였다. 공은 침착한 사려와 원대한 식견이 있었으므로, 문충공이 깊이 믿어서 군국(軍國)의 기무를 자문하는 일이 많았다.
무인년 공은 심양(瀋陽)에 인질로 있다가 돌아와 문충공에게 아뢰기를 “대인께서 국정을 담당함에 두 가지 잘못된 일이 있으니, 김청음(金淸陰 김상헌(金尙憲))을 논박하여 배척한 것과 중을 홍 군문(洪軍門)으로 보낸 것이 이것입니다. 화의와 척화가 일은 비록 대립되나 마음은 모두 국가를 위하는 충심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에 이르러 결국 대인의 말씀이 비로소 맞았으니, 이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맹약을 맺은 것은 다행이 아니요 실로 치욕이니, 대인에게 있어서는 굳이 나라를 보전했다 하여 훌륭함이 될 수 없으며, 청음에게 있어서는 또한 일을 그르쳤다 하여 허물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의심과 서로 막힌 마음을 제거하고 서신을 왕래하여 청 나라와 화친하는 일이 부득이함을 깊이 밝히시고 또한 깨끗한 의론이 없을 수 없음을 장려하여, 피차간에 심사가 툭 트이게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잘잘못을 거론해서 서로 반목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남조(南朝)와 통신(通信)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별도로 단사(單使)를 보내어서 상주문을 가지고 항해하되 옛날 고려 때에 송 나라와 내왕했던 옛 길을 다시 찾아낸다면, 배 한 척만 있으면 중국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침내 중에게 배를 주어서 요동(遼東)과 심양의 경계를 지나가게 하시니, 저들의 정탐이 서로 이어져서 오랑캐에게 발각되기가 쉬우며, 비록 혹 군문(軍門)에 이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황제의 조정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자, 문충공은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내 이런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였다.
뒤에 들으니 해변을 순라하던 오랑캐 기병들이 우리나라 배가 서쪽을 향하는 것을 바라보고 우리에게 의심을 품었는데, 홍 군문이 오랑캐에게 항복하자, 우리나라에서 보낸 편지를 찾아내어 문충공이 붙잡혀 가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대인은 국가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가는 것을 진실로 마음에 달갑게 여기실 터이나, 자식이 아버지의 죽음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면 또한 지극함을 쓰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 하고, 마침내 많은 돈을 가지고 심양의 관문에 들어가서 권력자를 설득하였다.
이때 청음 김공 또한 구류되어 같은 관사에 있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김공은 평소 성품이 방정하고 엄격하시니, 뇌물을 쓰는 것을 마음에 나쁘게 여기지 않겠는가.” 하였으나 공은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들어가 김공에게 묻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자, 김공은 대답하기를 “옛날의 어진 사람이다.” 하였다. 공은 나와서 말씀하기를 “김공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공이 동쪽으로 돌아오게 되자 김공은 공에게 시가(詩歌)를 지어 주었으며, 또 작은 서문을 지어 공을 매우 칭찬하였다.
공은 학문에 있어 이미 가정에서 교육을 받고 또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과 백헌(白軒) 이공(李公 이경석(李景奭))에게 수학하여 유가(儒家)의 여러 책을 두루 읽었으나 일찍부터 고질병을 앓아 공부에 전심전력하지 못하였는데, 항상 이것을 한하였다. 평소 역사책을 두루 섭렵하여 꿰뚫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국가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지는 조짐과 현신(賢臣)과 간신이 나가고 물러가는 기미에 대하여 일찍이 깊이 마음을 쏟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인물을 품평함에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많이 말하였다.
공은 시에 있어 재주가 매우 뛰어났다. 비록 중간에 환난을 겪어 힘을 다 쓰지는 못하였으나 시를 지으면 왕왕 경구(警句)가 있었다. 심양에 있을 적에 시를 지었는데 청음공이 자주 품평하고 칭찬하였으며, 말년에 문원(文苑)의 여러 공들과 창수한 것이 많이 있는데, 모두 그 격조와 운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칭찬하였다. 이것을 모아 약간 권을 만든 것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마음이 깨끗하고 욕망이 적으며 또 몸을 아끼고 보호하여, 여러 해 동안 볼모가 되었으나 집안 식구를 데리고 가지 않았으며, 관서 지방을 왕래할 적에 한 번도 음악과 기생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감사 구봉서(具鳳瑞)가 공을 칭찬하기를 “최한경(崔漢卿)의 뛰어난 절개는 소무(蘇武)보다 더하다.” 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잃게 되자 나이가 그리 노쇠하지 않았으나 첩을 두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세 고을을 맡았을 적에 모두 깨끗함과 고요함으로 고을을 다스렸으며, 배천(白川)에 있을 적에 마침 신해년 큰 흉년을 당하였는데, 굶주린 자들을 많이 살려주니, 남긴 은혜가 더욱 깊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비석에 새기기를 ‘만세불망(萬世不忘)’이라 하고 그 앞을 지나가는 자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경례하였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남과 사귈 때에는 위급한 일에 달려가 구원하기를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기개와 충절을 사모하여 비록 덫과 함정이 앞에 있더라도 피하지 않고, 나쁜 사람을 멀리하여 때가 묻지 않게 하였으니, 무릇 이러한 종류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들을 가르치기를 순수하고 깊게 하여, 아들에게 잠(箴) 한 편을 지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마음이 보존되면 자연 후중하고, 말이 적으면 후회와 부끄러움이 적게 된다. 벗을 취함에는 반드시 기국과 식견을 먼저 하고, 일을 당해서는 마땅히 공경하고 삼갈 것을 생각하라.〔心存則自然凝重 言寡則可無悔吝 取友必先器識 臨事宜思敬謹〕”
이 몇 마디 말은 내용이 천근하면서도 뜻이 심원하고 적은 것을 들어 큰 것을 포괄하였으니, 진실로 사람을 만드는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더구나 공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자신이 솔선수범하였음에랴. 복을 남김이 성대하여 두 아들이 현달해서 한 시대의 유명한 공경이 된 것이 당연하니, 아 거룩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우리 최공은 / 維我崔公
자식이 되어 직분을 다하였으니 / 爲子盡職
어떤 험한 것인들 구제하지 못하며 / 何險不濟
아버지가 되어 자식을 잘 가르쳤으니 / 爲父能敎
어떤 경사인들 열어놓지 않았겠는가 / 何慶不啓
자식이 자식 노릇 하고 아비가 아비 노릇 함은 / 子子父父
인도의 큰 강령이니 / 人道大體
모든 행실의 근원이요 / 百行之源
온갖 선의 뿌리라오 / 衆善之柢
이것을 명문에 새겨 밝혀서 / 銘以昭之
오는 자들을 기다리노라 / 來者是徯


 

[주D-001]호문정(胡文定)을 법으로 삼아 : 호문정은 북송(北宋)의 학자인 호안국(胡安國)으로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호안국은 처음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인(寅)을 양자로 세웠는데, 뒤에 아들 굉(宏)을 낳았으나 파양(罷養)하지 않고 그대로 제사를 물려주었다.
[주D-002]중을 …… 보낸 것 : 중은 승려인 독보(獨步)를 가리키고 홍 군문(洪軍門)은 명 나라 도독(都督) 홍승주(洪承疇)를 가리킨다. 독보는 초명이 중헐(中歇)로 묘향산에서 수도하다가 병자호란에 공을 세웠으며, 홍승주의 군영에 가서 청 나라를 정탐하였는데, 홍승주가 청 나라에 항복하여 이 사실이 발각되었다. 뒤에 임경업(林慶業)의 밑에서 명 나라를 왕복하다가 명 나라가 망한 후 임경업과 함께 청 나라에 잡혀갔다.
[주D-003]남조(南朝) : 남쪽 조정이란 뜻으로 명 나라 의종(毅宗)이 이자성(李自成)에게 망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세운 조정을 이른다. 1644년 의종이 자결하자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남경(南京)에서 즉위하였으며, 다음해 복왕이 청 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히자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복주(福州)에서 황제를 칭하였고, 당왕이 또 청군에게 붙잡히자 주계왕(朱桂王) 유랑(由榔)이 조경(肇慶)에서 황제라 칭하였으나 또다시 청군에게 쫓겨 평락(平樂)으로 달아나 16년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주D-004]산의생(散宜生) :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어진 신하로, 문왕이 주왕(紂王)에게 미움을 받고 옥에 갇히자 보옥(寶王)과 미인(美人)을 주왕에게 뇌물로 바쳐 석방되게 하였다.
[주D-005]소무(蘇武) :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의 충신으로 흉노(匈奴)에게 끌려가 온갖 고생을 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언제나 한 나라의 깃발을 손에 잡고 있어 깃발이 모두 닳아버렸다. 그러다가 19년 만에 귀환하였는바, 주인공이 절개를 지킨 것이 소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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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최 청풍 한경(崔淸風漢卿)에 대한 만사 병소서 갑술년(1694, 숙종 20)

예전부터 서로 친하여 시를 주고받았으니, 별세할 때에 글이 없을 수 없었다. 이에 감히 두자미(杜子美)의 ‘준 시를 어찌 감히 실추하겠는가〔贈詩焉敢墜〕’라는 뜻으로 삼가 율시 두 수를 지어 영연(靈筵)의 아래에 멀리 받들어 올렸는데, 만가(輓歌)에 쓰기 위한 것이 아니므로 발인(發靷)할 시기가 이미 지났음을 따지지 않았다.

상국이 집안을 전함은 무후와 같았으니 / 相國傳家似武侯
공을 얻어 후사로 삼아 걱정이 없었다네 / 得公爲嗣可無憂
어진 명성 일찍 드러나니 혼정신성을 도왔고 / 賢聲早著晨昏助
고상한 법도 많이 칭찬하니 법상이 남았구려 / 雅度多稱法象留
과거 급제는 비록 못 하였으나 문장이 실로 아름답고 / 科第縱拚文實美
세습의 봉작은 비록 못 하였으나 품계가 높았다오 / 襲封雖褫秩猶優
다시 오동나무와 대나무에 머무는 난곡을 보리니 / 更看梧竹停鸞鵠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쉬지 않음 어쩌랴 / 其柰風搖樹不休

[주C-001]최 청풍 한경(崔淸風漢卿) : 한경은 최후량(崔後亮 : 1616~1693)의 자인데, 청풍 부사(淸風府使)를 지냈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호는 정수재(靜修齋), 본관은 전주(全州)로, 이조 판서 혜길(惠吉)의 아들이었는데 백부(伯父)인 명길(鳴吉)에게 입양되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석정(錫鼎)은 다시 숙부(叔父) 후상(後尙)에게 입양되었다.
[주D-001]두자미(杜子美)의 …… 실추하겠는가 : 두자미는 두보를 가리킨 것으로, 자미는 그의 자이다. 이 내용은 상대방이 지어준 시를 어찌 감히 잊겠느냐는 뜻인데, 두보가 지은 ‘팽주(彭州) 왕윤(王掄)의 만사(輓詞)’에 보인다.
[주D-002]상국이 …… 같았으니 : 무후(武侯)는 촉한(蜀漢)의 명재상인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제갈량은 아들이 없어 형 제갈근(諸葛瑾)의 둘째 아들인 교(喬)를 양자로 삼았는데, 뒤에 아들 첨(瞻)을 낳았다. 교는 원래 자가 중신(仲愼)이었는데, 제갈 량의 양자가 되고는 자를 백송(伯松)으로 고쳤다. 그 후 제갈근의 아들 각(恪)이 오 나라에서 전가족이 몰살당하자, 교의 아들 반(攀)이 다시 제갈근의 뒤를 이었다.
[주D-003]다시 …… 보리니 : 훌륭한 자제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물러나 소부(少傅)를 뵈니, 푸른 대나무와 푸른 오동나무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이 멈추어 서 있는 듯하였으니, 능히 그 가업을 지킬 수 있는 분이었다.〔退見少傅 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其業者也〕” 하였다. 곧 난새와 고니와 같은 훌륭한 자손들이 있음을 본다는 뜻이다. 《古文眞寶 後集 卷4》
[주D-004]바람이 …… 어쩌랴 : 옛날 효자인 고어(皐魚)의 시(詩)에,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 하였으므로 이 말을 인용하여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주체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약천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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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최 사재(崔四宰) 관(寬) 에 대한 만사 을해년(1695, 숙종 21)

지위가 높아도 마음은 더욱 공손하고 / 位峻心愈下
나이가 많아도 배움은 더욱 부지런하였네 / 年高學益勤
어떤 사람이 높은 절개 비견할까 / 人誰擬苦節
세상이 함께 맑은 향기 취하였네 / 世共挹淸芬
정침(正寢)에 통곡하니 지금 서글프고 / 哭寢今忉怛
문에 오르니 그 옛날 다정도 하였지 / 登門舊懇懃
전형이 이미 멀리 사라지니 / 典刑嗟已遠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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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함관령 높고도 높은데 / 咸關嶺高復高
밤에 자고 새벽에 떠나니 찬 구름 날아가네 / 夜宿曉去寒雲飛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이 눈물 너에게 부치려 하니 / 孤臣冤淚欲附汝
비가 되어 장안에 돌아가서 / 願帶爲雨長安歸
장안의 구중궁궐 속에 / 長安宮闕九重裏
혹시라도 임을 향해 한번 뿌렸으면 하노라 / 儻向君前一霏霏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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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청석령 이미 지났는데 / 靑石嶺已過
구련성은 어드메뇨 / 九連城何許
호지(胡地)의 바람 차갑고 또 차가우며 / 胡風寒又寒
음산한 비 괴롭고 또 괴로워라 / 陰雨苦復苦
누가 나의 이 발걸음 그려다가 / 誰能畫我此行李
멀리 임금님이 계신 곳에 부쳐 줄까 / 遠寄君王處
약천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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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동방이 밝았느냐 / 東方明否
노고지리 우지진다 / 鸕鴣已鳴
소 먹이는 아이는 어이하여 아직도 잠을 자는가 / 飯牛兒胡爲眠在房
산 너머 밭 이랑이 길고도 긴데 / 山外有田壟畝闊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언제나 다 간단 말인가 / 今猶不起何時耕



 

약천집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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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비(六臣墓碑) 무자년(1708, 숙종 34)



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충신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육신이라고 칭하였다.
경성(京城)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 각각 짧은 비갈에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여섯 성씨 중에 네 개만 있고 두 개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육신의 묘라고 전해온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성씨(成氏)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씨(河氏)의 묘는 영남(嶺南)의 선산(善山)에 있고 유씨(柳氏)의 묘만 유독 소재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육신이 죽을 적에 그 종족(宗族)이 망하여 없어져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서 묻었으나,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주선하였으니 형편상 어렵고 쉬움이 혹 차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혹은 고향에 시신을 모셔다 장례하기도 하고, 혹은 끝내 시신을 땅에 묻지 못했는가 보다.
또 듣자하니 총관의 묘소가 또 홍주(洪州)의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형벌을 받은 뒤에 지체(肢體)를 각각 하나씩 묻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라고 한다. 만일 이 말이 과연 맞는다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또 이곳에 성씨의 묘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 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비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 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성씨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성씨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네 성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에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성씨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 육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은 자손들이 없고 오직 박씨만이 유복의 손자가 있어 이름이 노예에 뒤섞여서 수사(收司)를 면하였다.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충성을 가엾게 여겨 녹용하였다.
6세손 익찬(翊贊) 숭고(崇古)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노량진의 묘소는 비록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어 의심하고 있으나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있으니, 이것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찌 성씨만 있고 이름이 없다 하여 믿지 않고 돌보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옛 봉분을 더 쌓고 새 비갈을 세웠으며, 또 상공(相公) 허목(許穆)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이름하기를 ‘육신의총비문(六臣疑塚碑文)’이라 하였으나 미처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5년 기미에 성상이 노량진에서 열무하실 적에 여러 공경(公卿)들의 아룀을 따라 강 건너에서 묘를 바라보시고는 한탄하고 감회를 일으키시어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이에 분발되어서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향하였다. 17년 신미에 상이 장릉(章陵)에 전알(展謁)하러 가실 적에 연(輦)이 묘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성상은 또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민절(愍節)’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아, 이보다 전에는 이른바 육신의 묘라는 것이 다만 구릉의 한 줌 흙더미이고 부식된 한 조각의 빗돌이어서 강가의 늙은이와 나루터의 아전들이 오갈 적에 은밀히 이곳을 가리키며 말로 서로 전했었는데, 이제는 이 사실이 공경의 아룀에 올랐으며 성상이 두 번이나 보시고 융숭한 예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이미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으라는 은혜로운 명령이 있었고, 또 사우를 세워 제향하고 관직과 품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제사를 특별히 내려주고 화려한 편액을 밝게 게시하였다.
조정에서 표창함이 이와 같이 빛나고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유허(遺墟)에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두어서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으로 하여금 황폐한 풀과 차가운 연기와 도깨비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가운데 길이 매몰되게 한다면, 당시 의사들이 봉분을 쌓고 비갈을 세운 고달픈 마음을 저버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성조(聖朝)에서 충신을 표창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기 드문 은전을 헛되게 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박공(朴公)의 영혼 또한 어찌 ‘내 다행히 남은 혈손(血孫)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숭고의 손자인 청안 현감(淸安縣監) 경여(慶餘)가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여 이 일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도(神道)에 비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늙고 혼몽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 노량의 묘소가 육신의 무덤이 됨은 믿을 만하고 의심할 수 없음이 참으로 그대 조고의 유의(遺意)와 같다. 저 옛날 장릉의 지위와 칭호가 회복되지 않았을 때에는 오히려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끝까지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육신에 대하여 흔쾌히 권장해 주어서 풍성(風聲)을 길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장릉을 복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노량의 묘소에 있어서만 유독 의심스러워 신빙할 수 없다 해서 단단한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옛날에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새로 드러냄을 이루어 지금에 밝혀서 장구한 후세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차례로 쓰고 명한다.

서호의 남쪽 강안에 / 西湖南岸
옹기종기 무덤 있는데 / 有墓纍纍
각각 표시한 글이 있어 / 各有其表
다섯 비갈에 네 성씨가 적혀 있네 / 五碣四氏
예로부터 전해 오기를 / 傳道自古
육신이 묻힌 곳이라 하는데 / 六臣所閟
성씨는 여섯이나 / 其氏有六
이곳에 네 개만 갖추어졌네 / 此具其四
화가 일어나던 때에 / 禍發之際
의를 사모하여 묻은 것이니 / 事出慕義
그 이름을 쓰지 않음은 / 不書其名
까닭 있어서임을 아노라 / 知有所以
어이하여 후세 사람들은 / 云何後人
여기에 의심을 하는가 / 有疑于是
비록 문적이 없어서이나 / 雖緣無籍
실은 기휘함을 염려해서라오 / 實慮有忌
다행히 성조를 만나 / 幸會聖朝
성상의 마음에 감동함이 있으니 / 有感天意
충절을 표창함이 / 褒忠獎節
지극하지 않음이 없네 / 靡有不至
백일의 광채가 / 白日之光
깊은 땅속까지 통하여 / 洞徹九地
넓은 도량과 큰 은덕 / 曠度大德
형용하여 말할 수 없어라 / 不可擬議
옛날에 기휘하던 것 / 昔者所諱
이제는 모두 피함이 없다오 / 今悉無避
생각건대 차례로 표시한 글 / 言念列表
저와 같이 없어지지 않았고 / 不泐如彼
또 봉분하고 나무를 심어 / 又加封植
이와 같이 훌륭하니 / 其盛若此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 人之然疑
이제는 끝낼 수 있으리라 / 汔可已已
취금헌(醉琴軒)은 후손이 있어 / 醉琴有後
함께 육신(六臣)의 제사를 주관하네 / 並主六祀
전하여 육세에 이르러서 / 傳至六世
무너진 묘소를 수리하고 / 曾修墓圮
또 비문을 기술하였으나 / 且述碑文
아직도 곧바로 쓰지 못하였는데 / 猶靳直致
지난해에 이르러 / 爰及頃年
장릉을 복위하였다오 / 莊陵復位
무덤을 높여 새로 만든 듯하고 / 崇岡若新
여러 석물을 다 구비하니 / 象設咸備
군주와 신하는 일체인데 / 一體君臣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 事豈有異
이곳에 묻혀 있는 넋을 받듦은 / 奉玆降魄
더욱 의심할 것이 없도다 / 尤宜無貳
분명히 글을 새겨서 / 明言顯刻
천 년에 길이 보이노니 / 用視千禩
부디 영령들이여 / 庶幾英靈
끝까지 이곳에 모이소서 / 終焉此萃


 

[주D-001]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 : 총관은 아버지인 성승(成勝), 승지는 그의 아들인 성삼문(成三問)을 가리킨다.
[주D-002]수사(收司) : 법을 맡은 기관에 체포됨을 이른다.
[주D-003]취금헌(醉琴軒) : 박팽년(朴彭年)의 호이다

 

 

약천집 제2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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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승(家乘)
남 장군(南將軍) 휘 이(怡) 의 묘소에 제사한 글 묘소는 남양(南陽) 북면 10리쯤 되는 대전리(大田里)에 있는데, 해룡(亥龍)에 임감입수(壬坎入首)이고 병향(丙向)이다.



유세차(維歲次) 경인년(1710, 숙종 36) 10월 임진삭(壬辰朔) 9일 경오에 6대 재종손(再從孫)인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치사 봉조하 구만은 이미 늙고 또 병들어서,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묘소에 직접 가지 못하고, 삼가 삼종질(三從姪)인 진사 학증(鶴增)으로 하여금 맑은 술과 여러 가지 제수를 받들어 고(故) 남 장군의 묘소에 밝게 아룁니다.
아, 장군은 양반 가문에서 출생하였고 천부적으로 신묘한 용맹을 타고나셨습니다. 뜻은 쇠와 돌처럼 굳세고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었습니다. 성명한 군주를 만나 약관 시절 조정에서 벼슬하여 배반한 적을 북로(北路)에서 무찌르고, 또 반역한 오랑캐를 건주(建州)에서 섬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조에서는 공신에 책록되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웅장한 지략과 뛰어난 명성이 중국과 오랑캐 지방에 진동하였는데, 뜻밖에 모함을 받아 죄 없이 죽음을 당하시니, 깊고 지극한 원통함을 실로 하늘에 하소연하려 해도 할 길이 없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이미 참혹한 화를 당하시고 또 후손이 없어서 묘역이 황폐해지고 향화(香火)가 미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어찌 더욱 의사(義士)들의 슬픈 마음을 일으키고 지사(志士)들의 눈물을 자아내게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스러운 것은 위엄스러운 명성이 없어지지 않고 신령스러운 기운이 아직도 혁혁해서 시골 노인과 촌백성들이 동요와 민담으로 서로 전하여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에 한 고을의 높고 낮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증명한 바를 얻어 묘소라고 지적하는 곳에 봉분을 만들고 유허를 구획해서 반드시 믿을 만하고 의심할 바 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감히 도백에게 글을 올리고 본부(本府)에 하소연해서 가장 가까이 투장(偸葬)한 두세 무덤을 파서 옮겼는데, 이제 장차 봉분을 더 쌓아 올리고 다시 사초(莎草)하며 신정(神庭)을 깨끗이 청소해서 처음 장례할 때처럼 하려 합니다. 옛날과 지금을 생각함에 서글픈 마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사적이 아득히 멀고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으니, 화변(禍變)이 일어나던 초기에 여기에 묘소를 경영한 것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연대가 요원하고 수호할 사람이 없어 한식절(寒食節)에 보리밥을 올리지 못한 것이 또 언제부터입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몇 자의 비갈에 비문을 새겨 묘소 앞에 세워서 후세 사람들에게 밝게 보여 주는 것만 한 방도가 없으니, 이렇게 하면 불량하고 의롭지 못한 무리들이 다시는 묘소에 침범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여러 종인들 중에 다시 큰 뜻을 품고 큰 권력을 소유한 자가 있기를 실로 후일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흠향하소서.


 

 

 
간이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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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 음기(陰記)와 묘표(墓表)를 덧붙임
고(故) 고려(高麗) 통헌대부(通憲大夫) 추밀원 직부사(樞密院直副使) 남공(南公)의 묘표(墓表)

내가 영남(嶺南) 지방의 우도(右道)에서 절도사(節度使)의 지휘를 받고 있을 적에, 절도사인 김공(金公)이 나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나는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외손(外孫)이다. 외가(外家)의 선영(先塋)이 본현(本縣)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묘소를 식별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묘비(墓碑)로 쓸 만한 좋은 돌이 나온다고 하는데, 또 의령과 거리도 매우 가까우니, 감히 폐를 끼치고자 한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받고 선조(先祖)를 추모하려는 공의 정성에 감복한 나머지 감히 농사철이라는 이유로 거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민력(民力)을 동원하고 공인(工人) 약간 명을 대주어 그 일을 하게 하였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비용의 약 절반은 절도사의 군문(軍門)에서 부담을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을 마쳤을 때 공이 또다시 글을 보내고 남문(南門)에서 작성한 행장(行狀)을 나에게 부치면서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힘을 빌린 덕분에 비석 문제는 그런대로 해결을 하였다. 이제는 그 비석에 글을 기록하여 저간의 사정에 대한 곡절을 대략이나마 갖추어 놓고 싶은데, 그 일을 감히 그대에게 부탁하고자 한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받고 선조를 추모하려는 공의 정성에 또다시 감복한 나머지 감히 글솜씨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고려조에 휘 군보(君甫)라는 분이 통헌대부(通憲大夫) 밀직 부사(密直副使)로 생을 마쳤는데, 어진 덕으로 세상에 알려졌었다. 그는 비순위장(備巡衛將) 남혁지(南赫胝)와 풍저 부사(豐儲副使) 남익지(南益胝) 등 두 아들을 두었으며, 그 뒤로도 세상에 귀한 신분의 관원을 배출하는 등 성대함을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저명한 인물로는 본조(本朝)의 좌의정(左議政) 남재(南在)와 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를 들 수 있으며, 그 아래로 추강거사(秋江居士) 남효온(南孝溫)이 유명하다.
그런데 추강(秋江)이 지은 가승(家乘)을 보면, 그 묘소가 본현(本縣) 관아의 뒤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관아가 지금 없어진 상태에서 세대가 더욱 멀어져 그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황선(黃瑄)이 현감(縣監)으로 있을 적에 그 고을의 북쪽 언덕 사이에 건물을 수축(修築)하려 하다가 옛 무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없애 평지로 만들 생각을 하였는데, 어느 날 밤 꿈에 고관(高官)이 나타나 말하기를, “늘어진 소나무 아래에 있는 무덤이 바로 나의 거처이니, 여무(余武)라는 사람을 찾아가 물어보도록 하라. 나는 너에게 선조가 되느니라.” 하였다.
이에 황(黃)이 깜짝 놀라 여무라는 사람을 수소문해서 찾아보니 나이가 백여 세 되는 고리(故吏)였는데, 그가 또 뜻밖에 말하기를, “저는 원님께서 저를 부르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꿈에 남 상공(南相公)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고을 수령이 나의 거처를 물어볼 것인데, 저쪽 몇 번째가 바로 그곳이다.’ 하셨습니다.” 하였다.
황(黃)은 본디 그의 외계(外系)에서 나왔던 터라서 이 말을 듣고는 더욱 감격을 하고 기이하게 여긴 나머지 그 묘소에 객토(客土)를 더 쌓아 봉분(封墳)을 높이 하였는데, 그 흙 속에서 나온 보라색 돌이 곧바로 부서지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새겨져 있는 글 가운데 남(南)이라는 글자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더더욱 의심할 여지없이 믿게끔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황금 반지 하나와 대구(帶鉤) 세 개를 얻어 도성에 살고 있는 남씨(南氏)들에게 보내 주면서 그 사연을 일러 주었다.
그러자 첨지중추부사 남치욱(南致勗)과 지사(知事) 남치근(南致勤)과 참판(參判) 남응운(南應雲) 등이 서로 슬피 울면서 이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들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승지(承旨) 남언순(南彦純)이 주부(注簿)의 일로 본도(本道)에서 순찰사(巡察使)를 보좌하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묘소에 가서 그 유물(遺物)을 거기에 도로 묻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한 다음 봉분을 더 올려 확대해서 쌓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지금 절도공(節度公)이 와서 살펴보고는 또다시 마음을 기울여 비석을 세우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찰의 승려들에게 전지(田地)를 내주어 그 묘소를 지키게 한 것은 황 현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요, 노호(奴戶)를 더해 주어 그 생업(生業)에 보탬이 되게 하고 재(齋)를 지내는 사찰을 복원(復元)하여 관역(官役)을 면하게 해 준 것은 승지로부터 시작된 것이요, 재를 지내는 사찰에 자금을 더 보조하여 시제(時祭)를 지낼 수 있게 하고 제사 지낼 때의 석상(石牀)과 비석을 세우고 기록을 남기게 한 것은 절도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절도공의 이름은 김찬(金璨)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감인 이위(李韡) 역시 그 가문의 족보(族譜)에 들어 있는 사람인 만큼 뭔가 반드시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가 된다.
아, 남 대부(南大夫)가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외(內外)의 친족 중에서 성대하게 의관(衣冠)이 배출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더욱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정령(精靈)이 깃들여 있는 곳을 또 꿈을 통해 후손과 시골 노인에게 알려 주어 유택(幽宅)이 훼손되는 일을 면하게 하고, 그 뒤로도 계속 처음 장례를 행했던 때처럼 경영(經營)을 하게 하였으니, 선인(善人)이 후손으로부터 보은(報恩)을 받아 영원히 불후(不朽)하게 되는 것이 또한 이와 같다고 하겠다.

[주D-001]남문(南門) : 군남문(軍南門)의 준말로, 하늘을 지키는 대장군(大將軍)의 남문을 가리키는 별 이름인데, 보통 남쪽 변방을 지키는 절도사 등의 장수를 뜻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