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고향 忠義 고장 宜寧/세종실록지의 의령기록

宜寧縣題名記 代縣監金意從作

아베베1 2013. 2. 11. 21:00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족두리봉의 모습이다   

容齋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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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行狀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世子傅李公行狀。[周世鵬撰] a_020_291a

公諱荇。字擇之。號容齋。系出德水縣。今屬京畿豐德郡。八代祖諱劭。在高麗朝。閤門,祗候。賜紫金魚帒,知三司事。七代祖諱允蒀。民部典書。贈僉議政丞,德水府院君。六代祖諱千善。恭愍朝。誅奇氏有功。守司空柱國。樂安伯。諡良簡。五代祖諱仁範。政堂文學,藝文館大提學。高020_291b祖諱揚。工曹參議。贈工曹判書。曾祖諱明晨。知敦寧府事。諡康平。祖諱抽。知溫陽郡事。贈左贊成兼判義禁府事。考諱宜茂。字馨之。號蓮軒。天質醇正。接物以誠。無甚愛憎。不妄言笑。未有邊幅。豁如也。擢丁酉科。成廟方銳意文治。試文士于闕庭。連居三魁。特命授弘文館校理。歷爲吏曹正郞。躋憲府。至執義。躡玉堂。至應敎。入薇垣。爲司諫。適逢燕山朝。負大器而不大施。人皆惜其不做。爲詩文。操管立就。有文集。官至洪州牧使而卒。贈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自溫陽以下。皆以公貴推恩也。妣昌020_291c寧成氏。贈貞敬夫人。寶文閣大提學文肅公諱石瑢。是曾祖。京幾都觀察黜陟使諱槪。是爲祖。校書館校理,贈禮曹參判諱熺。是爲考。內外德門。其積善也。兩隆會爲一家。卽符餘慶。克生五男二女。男長曰菤。擢己酉武科。官至節度使。次曰芑。辛酉文科。今左相。次卽公。次苓。庚午武科。官至平海郡守。次薇。乙亥文科。今爲大司憲。一女。卽贊成曺公繼商夫人。公以成化戊戌五月壬午生。自齠齕時。聰敏好學。夜以繼日。不妄遊嬉。如成人焉。弘治乙卯。公年十八。擢丙科及第。選爲權知承文院副正字。丁巳冬。選補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020_291d轉至奉敎。始。先進頗以年少易之。及見公修草。莫不愕然歎服。己未春。參修成廟實錄。秋。例授成均館典籍兼南學敎授。庚申四月。以賀聖節質正官。赴京師。秋。拜弘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辛酉。坐論事。遷成均館典籍。壬戌春。除禮曹佐郞。未幾。遷世子侍講院司書。癸亥夏。拜司憲府持平。九月。陞弘文館副校理。例帶兼職。尋陞校理。甲子春。除司諫院獻納。還爲弘文館應敎。時燕山主荒亂。深憾母妃尹氏之廢死。殺先朝舊臣殆盡。又欲追崇尹氏。極其徽號。議于廷。皆曰。允當。公與同僚獨議曰。追崇之典。於020_292a禮已極。今不可復加。燕山主大怒。下獄鞫之。將置首議人極刑。或有冀免者。力辨不已。唯公順受。無一辭。兄弟親戚。爭勸其自明。公曰。死。命也。安忍移于人。以偸生乎。時應敎權公達手。在外逮繫。未及至。至則曰。唱議者。我也。非李某也。於是。權公死。而公得杖流于忠州。人皆多權公。而服公臨死不奪也。六月。又坐朴修撰誾事。再杖還配。例充役。秋九月。復論前議事。追繫拷掠。幾至大故者數。至冬十二月。減死論杖。屬嶺外之咸安郡爲奴。乙丑春正月。方至配所。秋八月。又因匿名書獄。繫掠更冬。至明年丙寅春正月。出配巨濟島。二月。方至配所。就高020_292b絶嶺下。圍棘以守。是年秋。又令收繫。杖限死。垂上道。遭時乃免。初燕山。誅戮朝士。無虛日。公前後逮繫杖配。極慘酷。親戚見之。無不泣涕。公未嘗一出怨言。人皆曰。必不免。公亦不動心。讀書不輟。人或止之。公曰。朝聞道矣。夕死何憾。丙寅九月。中廟卽阼。以弘文館校理召還。俄陞爲副應敎。又命賜暇讀書于淨業院。丁卯秋。承命爲江原道鄕試試官。往江陵。九月。陞應敎。十二月。丁內憂。庚午二月。服闋。除成均館司藝。四月。拜弘文館副應敎兼藝文館應敎。尋除議政府檢詳,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七月。陞爲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舊例。以舍人司都堂郞廳。必選一時名艶。爲蓮亭會。及公之爲舍人也。有筆之於壁曰。桃李無華。李某入中書堂。蓋言其遠色也。士林傳笑。公終身不近聲色。其律己之嚴。多類此。辛未五月。除奉常寺副正,知製敎兼承文院參校。九月。丁外艱。癸酉十一月。服闋。除成均館司藝,知製敎。自後。常兼知製敎。甲戌三月。陞司成。十一月爲司贍寺正。乙亥二月。除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六月。特授通政。爲司諫院大司諫。公久滯下僚。聞是命。士林相賀。方章敬之薨也。潭陽府使朴祥,淳昌郡守金淨上疏。請以愼廢嬪爲后者。外議洶洶。皆020_292d以爲然。公爲大司諫。獨奮然曰。此不可爲也。當死執。遂力爭。其議遂寢。於是。上親迎我大妃。其不識事理者。謂公請鞫祥等。是欲謀害士林也。公嘗曰。燕山主爲母妃。反讎我先王。赤戮朝臣。幾危宗社。愼守勤旣伏辜。誅其父。而立其女爲國母。以蹈覆轍。奈社稷何。誠爲大事。極言其不可爾。豈欲置是屬於死耶。寧甘受其言而不忍負宗社。冬十月。坐言事。左授僉知中樞府事。十二月。拜弘文館副提學。丙子冬。移病不出。遞爲僉知中樞府事。丁丑春。除成均館大司成。夏。復入爲副提學。六月。復爲大司成。謝恩之日。上傳于公曰。以副提學爲大司成。舊無是例。但作人爲重。特授之。七月。拜承政院左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八月。陞都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是月。特拜嘉善,司憲府大司憲。初。新進喜變更。好自用。公不肯苟合。由是見忤。果有移書臺諫。論公爲誤國。九月。降授僉知中樞府事。公怡然笑曰。一身進退。豈可苟乎。歸守桑梓。以終餘年。是吾志也。翌日。匹馬南歸。僑居于沔川之滄澤村。自號滄澤漁叟。公不事生產。初寓沔川也。伯兄節度公。聞公窘乏。與之穀二百斛。公曰。我若飢。不待兄之見許而取食。終020_293b不取一斛。時水原府使李誠彥上疏。辨公之誣。不報。成均館儒生。亦草疏欲上陳。而爲安處謙所沮。識者莫不傷歎。惜公之去。至有流涕者。戊寅正月。除兵曹參知。黽勉赴命。卽告病還于沔。又除戶曹參議。不赴。己卯冬。朝議稍定。十二月。除弘文館副提學。有旨召還。庚辰正月。特授嘉善工曹參判兼同知經筵,春秋館事,守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公初爲己卯人所斥。及還。乃曰。己卯之誤。宰相之過也。年少之輩。未經世故者。驟加高位。任其紛亂。而不加裁制。其人何罪。抑非宰相有以致之乎。二月。兼同知義禁府事。十020_293c月。兼世子右副賓客。秋。爲證考使湖嶺二南。辛巳正月。特授資憲。爲工曹判書。兼知義禁府事,世子左副賓客。餘如舊。尋又特授議政府右參贊。今皇帝卽位。遣翰林院修撰唐皐,兵科給事中史道。頒來登極詔。以公爲遠接使。迎于境上。往還酬唱。深得其歡心。時今左相爲義州牧使。兩使聞公荊樹之蘩。乃指五星之說。稱美之。兩使到弘濟院。以殿下迎詔後乘輦還宮。爲非禮。公據例言之。兩使輒有怒色曰。俺等專欲尙禮。參贊亦有此言耶。公對曰。殿下今待詔郊外。敬事朝廷之禮。大人自當見之。上使怡然笑曰。因參贊020_293d之誠敬。已悉國王之誠敬也。唐使。天下正人。每歎服公之爲人及其詩章。稱爲吟壇老將。戒副使愼勿輕投。癸未。陞左參贊。十月二十五日。王世子行入學禮。以公爲博士官。博士官。乃師傅之職。必選一代碩德。公於講論之際。應答之辭。皆出人意表。世子問及治國之事。公對曰。非今日所當問。因陳孝敬之道。論者服其得體。秋。加階崇政。陞右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餘如舊。一日。公乘軒車向闕。有儒生裴珣。步遇於景福宮碑隅。隱軀而窺之。公以袂拭淚。兩目皆赤。生怪之甚。行見有人當刑。始知公乃泣辜也。聞者曰。公之是心。020_294a卽天地好生之心。世之不知公者。雖罔曰不愛物。豈可信哉。甲申夏。特授吏曹判書。銓甄一出於至公。人無間言。言者以弘化闕位。秋。復爲左贊成。丁亥十月。特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戊子春。滿浦僉使沈思遜。爲野人所戕。麾下士。皆散走而不救。公曰。此而不誅。何以示法。朝廷竟免其死。議者皆以公言爲然。中廟方赫怒。銳意西討。朝議多贊之。已命許硡爲大將。公獨抗節極諫。忠悃之發。反覆不已。語載國乘。其大要。兵凶戰危。難保萬全。使許硡爲020_294b將。雖必勝萬全。旣勝之後。未可以又使硡守之。邊患將無窮矣。竟不興師。西北邊蒼生。至今免爲魚肉者。繄公之忠懇是賴。九月。上幸驪州。公爲留都大將。庚寅冬。陞左議政,兼世子傅。餘如舊。貞顯之喪。卜兆于宣陵之南麓。禮曹例更審定。時有以風水名者。同曹欲啓請率行。公曰。不可。同曺強欲啓之。公毅然曰。此輩欲售其術。若以爲不可用。將改卜他地乎。不然則後必有言。竟不帶行。時洪相國彥弼。爲禮曹判書。後値中宗之喪。已卜靖陵。而尹霖以邪喙。煽動朝廷。大役將就而未定者累日。於是。洪相語及其事。歎曰。容齋料020_294c事。眞不可及也。使李公若在。必無此事。嘗有人言福城君將不利於東宮。公曰。不殺老夫。不可以動搖。聞者竦然。公見朝廷之勢。漸至委靡。及登相位。常以爲憂。至忘寢食。每進言於上曰。請察威權之所在。蓋有所指也。辛卯十月。因論金安老事。降授判中樞府事。兼領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成均館事。初。公與安老。同在翰苑。同入讀書堂。披心相善者。久矣。當南文景之率同朝。請竄安老也。公獨以爲無名而逐宰相。不得無弊也。至涕泣相送。文景聞而笑曰。李公寬厚容物。不知是人之奸邪。終必爲其所賣。然若他人。則理020_294d須同責。如李公。胸中坦然無可疑者。固不可以是爲責。及安老之還入也。其子延城尉金禧。連上其父之冤。收議于三公。時公爲相。以安老初被無形之罪。今又年久。當自上斟酌耳。公之意。蓋欲使自便居住而已。及放還。夤緣復職。締結躁進。以行胸臆。其有嫌怨者。竄逐殆盡。公始悟其狀。見安老。則斥言其陰私。嚴辭峻責。不少忌諱。安老有慙色曰。此皆臺諫所爲。非吾之所敢知也。公何以指言我也。退與其黨。陰爲沮公之謀。唱爲之說曰。李某構成吾事。非止罪吾也。將以陷士林。於是。朋比安老者。謀欲構陷。每遺所親信。探公之意。大司憲沈彥020_295a慶問于公曰。外有浮言。臺諫欲論相公者。此非臺中之論。故臺諫欲自明云。公笑曰。若然則吾爲萬世之權臣矣。臺諫豈可以此自明乎。嘗於族會中。有安老之黨。來謂公曰。東宮孤單。頤叔爲羽翼。不可動搖。公曰。國儲已定。在朝之臣。誰不欲爲東宮死者。朝廷只有一安老乎。及見其所著遣愚文。歎曰。小人情狀。盡在是矣。決意斥逐。子弟懼。交諫曰。請引疾避位。以全門戶。公曰。吾無先見之智。不能防於未萌。而又避禍以負聖明乎。一身死生。不足恤。但恐奸人得志。國事日非也。遂與領議政鄭光弼。俱陳安老奸邪。請竄之。正言許沆曰。020_295b李某怯於被彈。托劾安老。謀害士林。於是。臺諫,侍從附於安老者。幷起而及攻公。以公德望素著。不敢遽加罪名。只遞政府。而餘人。或罷或竄。公論旣噤。邪議朋興。有以公尙未抵罪爲言。明年壬辰三月。生員李宗翼。上疏言時政得失。語及公之無罪。更激其怒。遂竄公于平安道咸從縣。甲午十月二十五日。卒于謫所。享年五十七。乙未春三月十三日。葬于沔川長者洞先塋之南麓。丁酉冬十月。安老及其黨伏罪。十一月。命復公之舊職。公身長十尺許。面方而髥茂。龜背而麟定。抱荊玉而璞如也。團和氣而塑如也。其傑魁如龍虎。翔峙如鸞鳳。望020_295c之。知其爲大人君子也。早有大志。爲學甚勤。蓮軒謂公曰。余觀四佳徐公。終身爲苦。汝亦欲作苦矣。蓋公之少時。蓮軒已知其爲典文衡矣。雖在晩年。每鷄鳴而起。就榻讀書。其好學眞如飢渴之嗜飮食。平居無惰容。未嘗有疾言遽色。雖甚怒。亦未嘗罵人以死。食不重肉。衣纔蔽體。仕宦三十年。不問有無。室廬如寒素家。子女滿堂。僅得衣食而已。或勸置田莊。公曰。食祿之家。務占田園。無祿者。何以聊生。吾祿足以代耕。置田莊。爲子孫計。不亦勞乎。子弟服飾奢。不許升堂。且曰。汝輩苟志於善。雖不得科第。吾亦無所恨。所乘馬。人不堪騎。公亦不以爲020_295d意。至斃而後。代以他馬。及爲宰相。內兄遺以軺。一軺十年。大抵自奉極菲薄。人不堪處。而處之有裕。嘗曰。祿不及親友。而侈自奉。吾不忍爲也。其待親戚。無遠近。必周急撫窮。如恐不及。家計屢空。亦有所不暇顧也。其待人無貴賤。一出至誠。未見有安排。人無賢愚。莫不信服。有布衣交。來求祿仕。公引接甚款。其人一日。以苞苴來餽。公曰。吾所以遇子。故人之意也。今子以窮求官。而遺我以賂。是子非窮矣。何必求官。官職其可以賂得乎。遂謝不見。大慙而去。公每訓諸子曰。吾平生所得。在於不欺。其好善惡惡。出於天性。故見人不善。必面責之。人不敢020_296a干以私。朝廷倚以爲重。有以關節不到目之。又曰。人臣居位食祿。當不忘君恩。無負國家。一身不可顧也。如或藉權勢以樹私恩。厚聚斂以殖田園。便一家爲子孫計。則吾不爲也。又曰。荷國厚恩。須思毫末報效。苟不容於時。而不得行吾志。則當引身而退。彼貪位冒祿。俯仰隨波。則吾亦不爲也。況排斥異己。唯自全是圖乎。拜相之日。公乃流涕曰。無德而位高。何以堪之。痛自抑遜。子弟族親有求官。輒拒之曰。朝廷官爵。豈宰相施恩之具耶。常以王曾恩出怨歸之言。爲得宰相體。由是。僥倖者或多怨之。末年。憂朝廷。歎曰。士林各樹朋020_296b黨。非國家之福。此宋朝所以亡也。嘗於經幄。極陳時弊。謂將有後日無窮之患。其見士林。則必切責曰。君等自作不靖。以此群邪仄目。竟至被斥。又曰。今人家有寶器。則皆知其護惜。其提携必謹。如恐失墜。至於國家事。從心左右。未有念其失手者。是以國家大器。反不如其家之小器。豈不戾哉。嘗開小齋於南山之靑鶴洞。又號靑鶴道人。夾路種松檜桃柳。公退。扶杖逍遙。蕭然如野人。一日。有錄事乘昏報奇去。有一人着屐麤衣。率小童。出洞門。錄事騎過。而問政丞在乎。公徐顧曰。欲報奇乎。我來此云。錄事不覺墜焉。其忠朴類此。凡遇胥020_296c屬。亦必恭謹。至今稱其寬仁。自公爲安老所誣。一時文士。爲後生出題。多拈放猊。不然則啜羹也。蓋放猊。指公之仁。啜羹。指安老之忍。及公歿於謫所。聞者莫不流涕。至於安老之敗。中外歌舞。群兒皆雀躍。有人曰。彼小兒何所知而喜。又有一人應聲曰。兒之父。曾受其毒。故雖小兒。亦知其爲喜也。可以見君子小人之辨。而人心之難誣也。公娶宗室璋山副守稠女。生四男三女。男長元禎。閑居沔川。不樂仕進。次元祥。今爲興德縣監。次元福。今爲尙衣直長。次元祿。中庚子司馬。登辛丑第。今爲弘文館校理。女長。適敦寧府參奉崔世龍。次適幼學柳夢宣。季020_296d適幼學柳滋。公之學出於論語。其詩文據事直書。去藻飾。不爲詭異險絶之辭。而如天成神造。無有斧鑿痕。盡人情。該物理。必妙詣其極。卓乎其不可企及。嘗作逐野人檄文。南止亭深爲之歎服。古無主文硯。止亭爲大硯。傳于公曰。此所以爲斯文傳心也。不及再傳而公歿。平生著述。未嘗置草。其得手稿者。唯謫居南遷海島三錄,南遊錄,和南岳唱酬集而已。旁求裒集。詩若千卷。文若工卷。其寓咸從也。不復事吟詠。唯杜門讀書。刪成東國史略。手自繕寫。惟公積德如崇山。可見者。畜泄雲雨。而茫乎不可窺其根基之厚也。偉量如鉅海。可見者。容育020_297a鯨鯤。而浩乎不可知其津涘之遠也。訥訥其言。如不克出口也。慥慥其心。如不克勝衣也。儉而能安。貞而不諒。敬愛盡於兄弟。信義著於朋友。一念之謹。百行之備。豈天地儲精。生應中興。爲邦家之瑞耶。至於危邦之抗議也。死獄之不辨也。大婚之得正也。擯使之合儀也。入學之善對也。泣辜之遺愛也。西征之止擧也。苞餽之無及也。田園之不占也。其忠似劉向。其節似孔融。其德似丙吉。其儀似公西赤。其孝似穎考叔。其仁似子產。其諫似魏相。其廉似楊震。其勇似諸葛亮。若文章。乃其餘事耳。澤被生民。而民不知。功在社稷。而國無券。所謂世020_297b皆知有功之爲功。而不知無功之爲有功者。豈虛語歟。公之子元祿。錄公事跡。請述行狀。世鵬於公。辱知最深。不敢以不文辭。參紀見聞如右。謹狀。





容齋先生集卷之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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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散文
宜寧縣題名記 代縣監金意從作 


縣古新羅獐含。創置之自靡聞。至景德朝。始改今名。厥後因之。革更附屬。間亦不一。而書乘無徵。嗟夫。邑之建置沿革。大事也。而尙不足徵。況爲宰於是者。或六期三期。或一兩期。或未周期。如行旅之寄宿於傳舍。鯈忽斯020_514d須之頃。舊者遠。而新者又舊矣。其名字之昧昧而無傳也。無足怪已。某以不肖。叨佩左符。才劣割鷄。任重製錦。深淵薄氷。未足云喩。日復一日。以及瓜代。釋負怠肩。雖自爲幸。而從新得舊。從舊得遠。身非金石。能無憮然。言念往者。亦復如是。而月日未幾。名姓無記。耆吏遺黎。莫能備究。豈非一邑之大欠。今摭縣司舊簿。得朴公習以下五十三員。輒列于左。幷錄歷履年月。有建置亦書。繼以不肖之名。不敢自讓者。此不過題名籍耳。非取義於他也。自開闢以至今玆。有地有宰。不知歷幾許甲子。而見錄不過兩周庚午。前乎此者。無傳焉。良可嘆也。嗚呼。020_515a闇崛不改。鼎津長流。悠悠千古。閱人幾何。前旣往矣。其在後者無窮。續而書之。俾無失墜。寔有望於後之君子。

용재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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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散文)
의령현제명기(宜寧縣題名記) 현감(縣監) 김의종(金意從)을 대신해서 짓다.

현은 옛날 신라의 장함(獐含) 땅인데 언제 처음 생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경덕왕(景德王)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그 후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사이 변혁(變革)을 겪고 부속(附屬)이 바뀐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징험할 기록이 없다. 아, 고을의 건치(建置)와 연혁은 큰일임에도 오히려 징험할 수 없다니. 게다가 이 고을에 수령이 된 이는 혹 6년, 3년 또는 1, 2년 또는 1년도 못 채우고 임기를 마쳐서 마치 나그네가 여관에 잠시 머무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훌쩍 떠나 버린다. 그리하여 옛사람은 멀어지고 새 사람은 또 옛사람이 되고 마니, 그 성명이 그대로 묻혀서 전해지지 않는 것이 괴이쩍을 것도 없다.
나는 불초한 몸으로 외람되이 수령의 직책을 맡았는데, 재주는 할계(割鷄)에 부끄럽고 직임은 제금(製錦)에 무거우니, 깊은 못가에 이른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다는 비유로도 나의 두려운 마음을 형언할 수 없다. 날이 가고 또 날이 가서 임기가 차니, 어깨의 무거운 짐을 풀어놓게 된 것은 비록 나 자신으로서는 다행스럽다. 그러나 새 사람으로부터 옛사람이 되고 옛사람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 되니, 몸이 금석(金石)처럼 변치 않는 것이 아니거늘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 있으리요. 이에 생각해 보건대, 옛날에도 역시 이와 같아 세월이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령의 성명을 기억하지 못하여 늙은 아전이나 백성들조차도 죄다 알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이 고을의 큰 흠이 아니리요. 이제 현의 옛 장부들을 모아서 박공 습(朴公習) 이하 53원(員)의 성명을 찾아 아래에 열거함과 아울러 그들의 임기 연월(年月)을 기록하고 건치한 것이 있으면 역시 썼다. 그리고 불초의 이름을 이어 적어서 감히 스스로 겸양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이름을 적는 장부일 뿐이기 때문이지 감히 달리 의의(意義)를 둔 것은 아니다.
개벽(開闢)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땅이 있고 수령이 있은 지 몇 갑자(甲子)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기록에 보이는 것은 경오(庚午)를 두 차례 주행(周行)한 데 불과하고 이보다 이전의 것은 전해지지 않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하다.
오호라, 사굴산(闍窟山)은 모습이 바뀌지 않고 정진(鼎津)은 물이 길이 흐르건만, 유유한 천고의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간 사람이 그 몇이런고. 과거는 이미 지나갔지만 앞으로 훗날은 무궁하니, 계속하여 이름을 써서 실추함이 없기를 실로 훗날의 군자에게 바라노라.

[주D-001]할계(割鷄) : 닭을 잡는다는 말로,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어 예악(禮樂)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보고 공자가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리요.[割鷄焉用牛刀]” 한 데서 유래하였다. 《論語 陽貨》
[주D-002]제금(製錦) : 비단을 마름질한다는 말로, 고을을 다스리는 것을 뜻한다. 정(鄭)나라 자피(子皮)가 나이 어린 윤향(尹向)을 시켜 읍(邑)을 다스리게 하려 하자, 자산(子産)이 이르기를 “그대에게 좋은 비단이 있다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가지고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春秋左傳 襄公31年》



 
호음잡고(湖陰雜稿)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湖陰雜稿
판심제 湖陰詩稿
간종 활자본
간행년 1577년경刊
권책 8권 8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5×16(㎝)
어미 上下大黑口三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67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25
 저자
성명 정사용(鄭士龍)
생년 1491년(성종 22)
몰년 1570년(선조 3)
 雲卿
 湖陰
본관 東萊
 가계도
 鄭蘭宗
 判書
 鄭光輔
 府使
 鄭漢龍
 縣令
 鄭士龍
 
 鄭純褧
 上浩軍
 鄭純裒
 觀象監正
 鄭元龍
 進士
 鄭彦龍
 郡守
 鄭光弼
 領議政

기사전거 : 世系圖에 의함
 행력
왕력서기간지연호연령기사
성종221491신해弘治41태어나다.
~~~~~~4~5모친상을 당하다.
중종41509기사正德419생원시에 합격하다. ○ 별시문과에 합격하다.
중종51510경오正德520봄, 홍문관 정자가 되다. ○ 檜山郡守로 나가 있는 부친을 찾아뵙다.
중종81513계유正德82312월, 사간원 정언이 되다.
중종101515을해正德1025賜暇讀書하다.
중종111516병자正德11269월, 문과 重試에 장원하다.
중종141519기묘正德142911월, 홍문관 직제학이 되다.
중종161521신사正德16319월, 원접사 李荇의 從事官으로 중국사신 唐皐ㆍ史道를 맞아 수창하다. 〈皇華和稿〉를 짓다. ○ 11월, 典翰이 되다.
중종171522임오嘉靖132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다.
중종181523계미嘉靖233윤4월, 부제학이 되다. ○ 파직되어 宜春(宜寧)에 내려가다. 〈宜春日錄〉을 짓다.
중종231528무자嘉靖7385월, 서울에 올라오다. 〈北上錄〉을 짓다.
중종241529기축嘉靖839〈己丑雜錄〉을 짓다.
중종281533계사嘉靖12433월, 掌樂院 副提調가 되다. ○ 7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가 곧 체직되어 형조참의가 되다. ○ 9월, 체직되다.
중종291534갑오嘉靖134410월, 冬至使가 되어 중국에 가다.
중종301535을미嘉靖14452월, 李希輔 등과 함께 師儒로 뽑히다.
중종311536병신嘉靖15469월, 漢城府右尹이 되다.
중종321537정유嘉靖1647平壤迎慰使가 되어 중국사신 龔用卿ㆍ吳希孟을 맞이하다. 〈朝天錄〉, 〈皇華和稿〉를 짓다.
중종341539기해嘉靖1849중국사신 華察ㆍ薛廷寵이 오자 製述官이 되어 시문을 짓다.
중종371542임인嘉靖2152한성부좌윤이 되다. ○ 11월, 중국사신을 접빈한 공으로 예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여론에 의해 체직되다.
중종381543계묘嘉靖2253한성부판윤이 되다. ○ 伯兄 鄭漢龍이 졸하다.
중종391544갑진嘉靖23541월, 判尹을 사직하다. ○ 공조판서가 되다. ○ 9월, 동지사가 되어 중국에 가다. 〈甲辰朝天錄〉을 짓다.
명종11546병오嘉靖2556원접사가 되어 중국사신 王鶴을 맞이하다. 〈儐接日錄〉을 짓다. ○ 2월, 지중추부사가 되다. ○ 형조판서가 되다. 〈秋官錄〉을 짓다.
명종31548무신嘉靖27583월, 형조판서에서 체직되다. ○ 5월, 實錄廳堂上을 사직하다.
명종41549기유嘉靖2859〈樞府日錄〉을 짓다.
명종51550경술嘉靖29603월, 知敦寧府事가 되다. 〈敦寧日錄〉을 짓다. ○ 5월, 예조판서가 되다. 〈經國大典註解序〉를 짓다. 〈南宮日錄〉을 짓다.
명종61551신해嘉靖3061詩文을 정리하고 序를 짓다.
명종71552임자嘉靖316210월, 일본사신을 접빈하다.
명종91554갑인嘉靖33642월, 대제학이 되다.
명종101555을묘嘉靖3465병조판서가 되다. ○ 윤11월, 체직되어 판중추부사가 되다.
명종131558무오嘉靖37689월, 殿試 策問 제목을 누설하여 대제학에서 파직되다. ○ 11월,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다.
명종151560경신嘉靖397010월, 공조판서가 되다. ○ 耆老所에 들어가다.
명종171562임술嘉靖41725월, 輔國崇祿大夫로 加資되고 판중추부사가 되다.
명종181563계해嘉靖42739월, 李樑이 실각할 때 그 일당이라 하여 관직이 삭탈되다.
선조31570경오隆慶4804월, 卒하다. 楊州에 묻히다. ○ 10월, 光國原從功臣으로 職牒이 회복되다.
선조61573계유萬曆1-문집이 간행되다.(저자의 自序)
--1962임인---후손 鄭升謨ㆍ鄭雲弘 등이 문집을 중간하다.

기사전거 : 中宗ㆍ明宗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1551년에 저자가 정리하여 自編한 定稿本이 남아 있었는데 이 정고본을 增編하여 1573년경에 간행하였다.《초간본》 초간본은 8권 8책의 목활자로 되어 있다. 柳希春의 「眉巖日記」에 의하면, 1573년 5월에 28貼을 印行했다는 기록과 같은 해 6월에는 內館諸員 朴世昆이 粧潢한 「湖陰集」 8책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고, 또 1577년에 權應仁이 지은 〈大觀齋亂稿跋〉에는 본 문집이 이미 간행된 사실을 보여 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면 초간본은 1573년경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일본 宮內省 圖書寮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는 宮內省 圖書寮藏本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장본은 권8이 後寫補充本으로 되어 있다.
1962년에는 후손 鄭升謨ㆍ鄭雲弘 등이 石印하여 문집을 간행하였다.《중간본》 중간본은 8권 4책으로 되어 있으며, 후손 鄭升謨ㆍ鄭鎭漢ㆍ鄭國鎭ㆍ鄭雲弘 등이 지은 跋이 첨부되어 있다. 이 본은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577년경 간행된 초간본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이다. 이 중 補寫되어 있는 제8권은 동일본인 일본 宮內省 圖書寮藏本을 촬영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마이크로필름 〈古M3644-37〉에서 대체하였다.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詩稿 6권ㆍ文稿 2권ㆍ附錄 합 8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1551년에 지은 저자의 自序가 실려 있다.
詩稿 6권에는 各體詩가 창작 배경에 따른 편명으로 묶어져 있으며, 각 편은 창작 시기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권1에는 〈玉堂錄〉 14제, 〈覲省錄〉 43제, 〈宜春日錄〉 65제, 〈北上錄〉 23제, 〈己丑雜錄〉 49제가 실려 있다. 권2에는 〈洪陽錄〉 33제, 〈省墓錄〉 16제, 〈朝天錄〉 115제, 〈新安日錄〉 36제, 〈龍灣日錄〉 65제가 실려 있다. 이 중 〈조천록〉과 〈신안일록〉은 1537년 중국사신을 영접할 때 지은 작품이고, 〈용만일록〉은 1544~1545년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지은 작품이다. 권3에는 〈宜春雜錄〉 42제, 〈賜告錄〉 49제, 〈庚子錄〉 11제, 〈關東日錄〉 101제, 〈癸卯酬唱錄〉 22제, 〈甲辰朝天錄〉 6제, 〈儐接日錄〉 50제가 실려 있다. 이 중 〈사고록〉은 1539년 휴가를 얻어 東萊 온천 등지를 다니면서 지은 작품이고, 〈관동일록〉은 1541년경 관동을 유람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뒤에 洪彥弼 등의 跋이 첨부되어 있다. 〈갑진조천록〉은 1544년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온 때의 작품이며, 〈빈접일록〉은 1545~1546년 원접사로서 중국사신을 맞이하러 나가서 지은 작품이다. 권4에는 〈秋官錄〉 22제, 〈湖西奉使錄〉 2제, 〈樞府日錄〉 41제, 〈敦寧日錄〉 14제, 〈南宮日錄〉 89제, 〈應製錄〉 25제가 실려 있다. 이 중 〈남궁일록〉은 1550~1553년 예조판서로 봉직할 때 지은 작품이다. 권5에는 위 편명에 속하지 않은 작품들을 모은 〈雜稿〉 99제, 〈雜記日錄〉 84제가 실려 있다. 권6에는 〈拾遺錄〉 78제, 〈皇華和稿〉 140제가 실려 있는데, 〈황화화고〉는 네 차례에 걸친 중국사신 접빈시 중국사신과 차운ㆍ화답한 시들로 묶어져 있다.
文稿는 2권으로 되어 있다. 권7에는 神道碑銘 등 碑誌類 36편이 실려 있고, 권8에는 箚ㆍ記ㆍ書後ㆍ祭文ㆍ銘ㆍ表ㆍ箋ㆍ議ㆍ辭狀ㆍ序ㆍ策問ㆍ跋 등의 잡저 38편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 唐皐ㆍ龔用卿 등 중국사신들이 저자에게 지어 준 詩文 7편이 실려 있다.

필자 : 吳世玉



 
 湖陰雜稿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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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宜春雜錄
擬四時。回文詞。 a_025_074a
[


悤悤綠暗春深院。蝶繞蜂來落晩紅。功課小詩尋久廢。草生池裏夢衰翁。
長日困時回夢渴。椀氷沈李要枯腸。塘回漲滿蒲芽短。點點嬌鵝戲浴黃。
桐井生涼秋信報。夜堂高揭半簾風。同誰與說懷人遠。鴻燕斷音鄕路窮。
梅小吐香新臘趁。地鑪添炭煖回春。開尊一酌催來客。025_074b雪擁門深愁斷人。

 
湖陰雜稿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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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宜春雜錄
答崔玄風公瑾見寄 a_025_074d


苞山一髮望中賖。瓊樹森森疊巘遮。剝啄人傳書尺至。偏題細字問窮遐。
復艚淸漲浸寒沙。盡日孤舟閣岸斜。有待昏鴉期不至。晩風黃葉滿貧家。
我鬚君鬢各蒼然。髫稚情親四十年。五馬幾時尋甫里。擬呼兒女拜燈前。
湖南按使憶同閭。攻苦書巢作隊魚。起廢頭顱無寸黑。025_075a佇聞旌異有殊除。
城翁矍鑠老彌麤。許國心胸屈壯圖。蕙帳歌空無客到。春來山鳥勸提壺。
對獄驚魂費去來。肩輿江路恨邅廻。桐陰滿院榴花發。共置淸尊把一杯。
百畝蒼雲蔽斷山。淸波吹座洗塵顏。何方買地安茅把。臥數千帆過一灣。
瑤草山中斸背陽。詩情誰合得先嘗。鈴齋定試風鑪鼎。分與茶材解渴羌。


 
湖陰雜稿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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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碑誌]
有明朝鮮國資憲大夫戶曹判書兼同知成均館事安公神道碑銘 幷序 a_025_21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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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安氏系出廣州。遠有譜牒。歷高麗入本朝。有開城留後諡思簡公諱省。最顯于世。寔公曾祖。祖諱從生。司憲監察。贈吏曹參判。考諱彭老。安東判官。贈兵曹判書。妣權氏。贈貞夫人。福川君諡莊簡公諱愷之女。監察以下贈爵。皆以公貴故。公諱潤德。字善卿。生有異質。及長。篤意治經。窮日夜不懈。中成化乙酉生員。癸卯文科。選補權知承文副正字。朝議以公深於經學。宜025_216b令師諸生。啓移成均。由學諭陞至博士。丁未。以司錄。遷宗簿主簿。弘治戊申。拜正言。明年。移地官爲佐郞。俄丁內憂。服闋。授兵曹佐郞。甲寅。陞持平。以擧職聞。乙卯。改刑曹正郞。大臣會議疑獄。問其顚末。掌者不能答。公從旁對甚悉。觀者咸器重之。未幾。移兵曹。秋官難其代。請留。特令因舊。歷尙衣,掌樂僉正。簡入都堂爲檢詳。擢重試。陞舍人,知製敎。又兼史職。戊午。轉司諫。己未。巡邊大臣薦公備幕。移閑局爲相禮。尋陞直提學。庚申。擢拜同副承旨。壬戌。特階二品。出按慶尙。剸劇興學。績用茂著。以刑曹參判徵還。充賀正于燕。還歷戶,刑二曹亞卿。甲子。建節畿甸。燕山政亂。公坐忤旨。謫配金堤。正德丙寅。中廟改玉。起公授漢城左尹。錄原從功。階嘉靖。丁卯。復爲刑曹參判。移兵曹。庚午。倭奴寇薺浦。殺鎭將。仍陷熊川城朝。廷推擧公有將才。陞秩資憲。以知中樞。充副元帥。以行諸軍。擊倭大捷。凱還奏功。拜漢城判尹。轉判刑曹。乙亥。命觀察平安道。大修檀君,箕子祠。構作成庫於文廟。貯米若布。權其子母。俾供餼廩。月聚諸生。課其所業。加以賞罰。其經承口講指畫者皆彬彬可觀。丁丑。引疾辭。以知中樞召還。兼帶同知成均。辛巳。遷工曹判書。帝遣太監金義,陳浩。冊立世子。頒025_216d誥命。公承遠接之命。迎送江上。義等服公才識。涕泣而別。嘉靖癸未。移判戶曹。隨事綜密。上嘗臨朝。嘉奬不已。丙戌。公年至。詣閤乞骸。上優敎不許。時年輩與公埒者。高贊成荊山等凡七人。公擬洛社之會作契。常置酒高會。丁亥。拜左參贊。辛卯。又判工曹。以病改知中樞。乙未。卒于第。公生天順丁丑。至是年九月十四日易簀。春秋七十有九。訃聞。輟朝賜賻祭有加。用十一月二十七日。葬于廣州靈長山思簡公墓原。從治命也。公宇量弘毅。不喜苛禮。而平居必整服端坐。雖子弟。未嘗見惰容。歷任中外。文簿滿案。奮筆裁判。初若不思。卒025_217a皆就緖。長於料敵。每邊報告警。必咨於公。動中事宜。性又孝友。遇忌日。必悲慕。潔誠以祭。兄弟早世。恤其遺孀。歸其孤女。凡所經紀。必與罄力。夫人羅氏。監察文緖之女。賢有法度。先公卒。生四男二女。男長曰漢英。弘文博士。中丁卯文科次。漢雄。宗簿主簿。中丁卯進士。皆夙逝。次漢俊。今爲海州牧使。次漢彥。今爲江華府使。女長適副正李瑛。次適別坐鄭鈜。側室有二女。皆適宗室。博士生三女。長適府使鄭世紹。次適趙忭。次適掌令李彥忱。牧使生二女。長適許凝。次適兪涵。府使生二男。汝敬,汝恒。公與吾先君同年生。契分最篤。兩家子弟以父兄視025_217b之。故公之二子。以最跡問銘。屬于士龍。安可以不文辭。銘曰。
國家興隆。必有世臣。宣力贊謨。以翊休辰。思簡宦著。莊簡勳顯。二姓之配。公象其善。窮經取科。始振英聲。冠豸讞疑。最簡廷評。六官務殷。屛毗寄重。公實遍爲。動受褒寵。人或斂手。公刃乃恢。用不盡才。造物之猜。引年乞閑。眷留彌篤。高會繼洛。足以儀俗。矧有四鳳。克業其家。緜繼復始。流慶必遐。孝思顯親。圖永於聞。有欲視德。請考斯文。

 
湖陰雜稿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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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己丑雜錄
自遣 a_025_029d
   

萬里流離作寓公。移家還得竹林中。疏籬菜圃新霑雨。深樹山禽亂叫風。食力漸知安舊業。荷戈粗免役微躬。天涯夢不交京輦。玉殿趨朝認絳籠。

 
중종 5년 경오(1510,정덕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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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1일 (병신)
김석철이 웅천의 사정을 아뢰고 서울의 군관을 내려보내 줄 것을 청하다

김석철(金錫哲)이 치계하기를,
“신은 윤효빙(尹孝聘) 등의 이첩(移牒)을 보고서 주진(主鎭)의 군사를 거느리고 웅천으로 달려가서 왜적과 접전하였으며, 초닷샛날에는 묘시(卯時)부터 해가 저물때까지 힘껏 싸웠습니다. 김해 부사 성수재(成秀才)가 적 1명을 사살하였고, 아군이 사살한 왜적 또한 많았으나 적은 오히려 군사를 물리지 않았으며, 남대양(南大洋) 바다 가운데에 적선이 와서 정박하는 것을 보고 성세(聲勢)를 관망하여 진퇴(進退)를 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웅천성이 고단(孤單)하므로 금단관(金丹串) 군사 1백 명을 초발(抄發)하여 이해(李海) 및 동진(同鎭) 가권관(假權管) 최양(崔洋)으로 하여금 영솔하여 구원하러 가게 하였는데, 적병이 길을 가로막고 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므로 7인만이 들어가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퇴각하였습니다. 신과 경차관 이식·김해 부사 성수재·함안 군수(咸安郡守) 박겸무(朴兼武)·고성 현령(固城縣令) 윤효빙·의령 현감(宜寧縣監) 김의종(金意從)·칠원 현감(漆原縣監) 김경동(金景童)·군기시 직장(軍器寺直長) 이해(李海)·겸사복(兼司僕) 오찬(吳粲) 등이 북산(北山)에 결진하여 웅거하면서, 날이 저문 뒤에 다시 이해를 보내어 앞에 내보냈던 원군(援軍) 1백 명과 웅천 아전 전의손(田義孫) 등 5인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케 하였으나, 왜인이 북문 중로에 매복하여 있다가 보고 고함을 치며 귀로(歸路)를 막고 공격하므로 또 입성하지 못하고 진중으로 돌아왔습니다.
밤 2경(更)에는 왜적들이 우리 나라 사람의 옷을 빼앗아 입고서 창을 가지고 우위(右衛)에 돌입하여 크게 외치니 군중(軍中)이 놀라고 의혹하여 분주(奔走)했습니다. 신 또한 홀로 보전하지 못하고 조금 퇴각하여 변을 관망하다가 밝기를 기다려 다시 싸우려 하였으나, 한윤은 초엿샛날 미명(未明)에 성을 버리고 도망쳐 나갔습니다. 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웅천현 대팔현(大八峴)에 다다르니, 적은 산 위에 벌여 있기도 하고 혹은 숲속에 은복해 있는데, 종일 비가 내렸으므로 멀리 바라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가 싸우지 못하고 군사를 뒤로 물리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신이 관할하는 각관(各官)에서 징발한 군사도 또한 길이 멀어서 미처 모이지 않았으며, 먼저 도착한 자가 겨우 5백여 명이라 병력이 외롭고 약하여 적을 제어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청컨대 무재가 있는 서울의 군관(軍官)과 군사를 급히 내려보내시어 방어를 돕게 함이 어떻겠습니까? 신 또한 바야흐로 군사를 거느리고 외원(外援)하겠습니다. 한윤은 성을 견고하게 하여 고수하지 못하고 버리고 도주했으므로, 윤을 창원부(昌原府)에 가두었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웅천이 포위를 당했을 처음에 고성 현령 윤효빙(尹孝聘)도 또한 포위당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한윤은 무인(武人)이므로 모든 시책을 반드시 효빙에게 의뢰하였고, 웅천 백성들도 의지하여 믿었다. 효빙이 밤중에 문을 열고 먼저 달아나니, 사졸들도 효빙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서로 계속하여 담을 넘어 도망하였다. 한윤은 문졸(門卒)이 굳게 지키지 못하여 사졸을 도산(逃散)케 했다 하여 손수 문지기의 목을 베었다. 사졸이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성은 외로왔으며 구원마저 끊어져 포위를 당한 지 3일째에는 성 안의 군사라고는 겨우 두어 사람이 남았을 뿐이었다. 한윤이 김해 부사 성수재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수재는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에 도착했으나 군사를 멈추고 들어오지 않았으며, 절도사 김석철에게 갔으나 석철은 두려워하면서 뒤로 물러나 웅크리고 곧 구원에 나서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윤에게 말하기를 ‘네가 퇴각하여 나온 것은 잘했다.’ 하며 구원하지 않은 죄를 벗으려고 꾀하였고, 한윤이 성을 지키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조정에 알려 한윤을 목 베어 군중(群衆)에 조리돌리니, 남중(南中)의 사서(士庶)들이 한윤을 원통하게 여기고 석철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성수재·윤효빙 같은 자는 복주(伏誅)되어야 마땅할 것인데 모두 벗어나서 죄를 면하니, 물정(物情)이 분하게 여겼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전에 윤이 이웃 고을의 비자(婢子)를 첩으로 삼았는데, 이때에 첩이 먼저 달아나기를 청하니, 윤이 군관을 시켜 밤중에 가만히 문을 열고 데리고 도망하게 하고, 윤도 뒤따라 달아났다.’ 하였다.
【원전】 14 집 425 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역사-편사(編史)




 
 용재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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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도록(海島錄)
이날 저녁 사면서(赦免書)가 이르렀기에 밤에 견내량(見乃梁)을 건너 이튿날 의령(宜寧)의 집으로 돌아갔다.

홍치(弘治) 갑자년 여름 4월, 폐비(廢妃) 윤씨(尹氏)를 추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장형(杖刑)을 받고 충주(忠州)로 유배되었고, 6월에는 중열(仲說)의 논사(論事)에 연루되어 재차 장형을 받고 배소로 돌아가 관례에 따라 노역(勞役)에 충원되었으며, 가을 9월에는 다시 앞의 사안(事案)을 문제 삼아 뒤미처 포박하여 고문하는 통에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그해 겨울 12월에 이르러서는 사형에서 감면되어 장형을 받고 함안군(咸安郡) 관노(官奴)로 유배되어, 을축년 봄 정월에야 비로소 배소(配所)에 당도하였고, 가을 8월에는 또 익명서(匿名書)의 옥사로 포박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겨울을 지냈다. 이듬해 병인년 봄 정월에 거제도로 유배되어 2월에야 비로소 배소에 당도하여 고절령(高絶嶺) 아래 가시울을 둘러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해 가을 또 서울로 압송하여 죽도록 곤장을 치라는 명(命)이 떨어져 길에 오르려던 차에 성상(聖上)의 즉위를 만나 사면되었으니, 이날이 바로 9월 10일이다. 처음 찬축(竄逐)되고부터 성상이 즉위한 때까지가 무릇 15갑자(甲子)이니, 충주(忠州)에 유배된 기간이 근 200일이고 함안(咸安)에 관노로 배속된 기간이 이백 수십 일이고 해도(海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기간은 함안에 있은 기간과 같으며, 전후로 감옥에 갇힌 기간은 충주에 있은 기간과 같고 왕래하느라 도로에 있은 기간이 또 70여 일 남짓 된다.
정덕(正德) 병인년 중양절(重陽節) 이틀 뒤에 덕수(德水) 이행(李荇) 택지(擇之)는 의령(宜寧)의 별장에서 쓰노라.

남쪽 변방에 귀양 살다 겨우 살아남았으니 / 憔悴南荒萬死餘
원래 박복한 팔자는 독서 좋아하는 자이지 / 元來薄相是耽書
반생토록 겪은 우환은 나와 비슷하지만 / 半生憂患都相似
천고에 빛날 문장은 내가 외려 못 따르지 / 千古文章却不如
마음 아는 게 중요하지 이게 무슨 소용이랴 / 但貴知心寧用此
모쪼록 부지런히 찾아와 서로 소원하지 말기를 / 須勤命駕莫成疏
그대 기다려 상의할 한 가지 일이 있노니 / 待君一事煩相略
어드메 청산에서 함께 띳집을 짓고서 살꼬 / 何處靑山共結廬

함께 승명려에서 들어가 숙직하던 당시 / 同入承明儤直餘
재앙의 불씨는 원래 한 통의 상소문이었지 / 禍胎元是一封書
일찍이 이백의 시가 무적인 줄 알았지만 / 早知白也詩無敵
종지의 학문은 그만 못해 스스로 부끄러웠네 / 自愧宗之學不如

이 일은 그저 시름겨울 때 쓸 만할 뿐이요 / 此事只堪愁處用
남은 인생 벗님과 소원히 지내선 안 되지 / 殘年未可故人疏
당시에 다시금 동풍의 손이 있어서 / 當時更有東風客
기꺼이 경루를 내려와 초려를 방문하였지 / 肯下瓊樓訪草廬
동풍의 손[東風客]은 실물(實物)을 가리키는 것인데, 오얏꽃이 동풍물(東風物 봄바람이 불 때의 물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경오년(1510) 여름 5월에, 계림(鷄林) 최자진(崔子眞)은 적노라.

동야는 화려한 관복 걸쳤어도 / 東野被華袞
가난 호소하는 신세 못 면했고 / 未免號寒蟲
이부는 바닷가로 귀양 가 죽어 / 吏部竄濱死
푸른 바다에서 고래를 탔었지 / 掣鯨滄海中

곤궁할수록 힘을 더욱 떨치고 / 困窮力益肆
옥중에 묻힌 검이 무지개 토하듯 / 埋獄劍吐虹
화락하고 자득한 보진자여 / 于于葆眞子
본래 대궐에 계셨던 분인데 / 本在明光宮
재주 높아 천하를 작게 보고 / 才高小天下
도가 커서 나라가 수용 못 했지 / 道大國不容
용감 민첩함을 조물주가 시기해 / 造物忌勇銳
귀양살이로 그 기봉을 꺾었나니 / 謫居挫其鋒
남방 유배로 그 기운을 주리고 / 南遷餒其氣
섬 유배로 그 몸을 괴롭히었지 / 海島苦其躬
삼 년에 세 차례 찬축되게 했으니 / 三年三罪逐
벙어리 귀머거리 만들 작정이었나 / 意欲作瘖聾
가시울 집도 그를 구속하지 못해 / 荐棘不能局
정신은 홍몽의 세계에 훌쩍 날았지 / 神馭超鴻濛
아무런 걸림 없이 소요동에 노닐며 / 放曠逍遙洞
모든 사물을 죄다 망라해 가졌지 / 無物不牢籠
궁한 새가 궁한 물고기 만난 격 / 窮鳥會窮鱗
황하가 끝내 맑아질 날 기다렸네 / 河淸俟有終
독작과 기회 등 시의 구절들은 / 獨酌記懷語
진실한 뜻이 가슴속에서 쏟아져 / 頓頓寫由衷
시름은 초택의 신하보다도 깊고 / 騷於楚澤臣
방달하기는 칠원의 늙은이 같아라 / 達似漆園翁
손으로 세 권의 시록(詩錄)을 받들고서 / 手捧三錄篇
낭랑히 읽어 보니 내 가슴이 열리누나 / 朗讀開我胸
창이 무기고에 삼엄히 늘어선 듯 / 戈矛森武庫
패옥이 맑은 소리를 울리는 듯해라 / 環佩鳴琤琮
하찮은 솜씨로 훌륭한 솜씨 이으니 / 庬涼續貂後
풀 막대로 어찌 큰 종을 울리리요 / 寸莛寧發鍾
보진(葆眞), 소요동(逍遙洞), 사하청(俟河淸), 궁조(窮鳥), 궁린(窮鱗), 독작(獨酌), 기회(記懷) 등은 모두 집록(輯錄) 중의 말을 쓴 것이다.
경오년 7월 삭단(朔旦)에 조신(曺伸)은 두 번 절하고 적거록(謫居錄), 남천록(南遷錄), 해도록(海島錄) 세 권의 뒤에 쓰다.

[주D-001]승명려(承明廬) : 고대에 천자(天子)가 기거하던 좌우의 노침(路寢)을 승명전(承明殿)이라 하고, 승명전 곁의 시신(侍臣)들이 숙직하던 방을 승명려라 하였다.
[주D-002]일찍이 …… 부끄러웠네 :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을 같은 이씨(李氏)인 용재에게 비기고 이백과 벗이었던 최종지(崔宗之)를 역시 같은 최씨(崔氏)인 최자진(崔子眞) 자신에 비겼다. 최종지는 두보(杜甫)의 유명한 작품인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보인다.
[주D-003]이 일은 …… 뿐이요 : 이 일은 시 짓는 것을 가리킨다. 즉 시 짓는 일로 적소(謫所)에서 시름을 달랜다는 뜻이다.
[주D-004]당시에 …… 방문하였지 : 경루(瓊樓)는 옥으로 꾸민 화려한 누각으로 일반적으로는 달에 있다는 선궁(仙宮)을 뜻한다. 아래 글에서 보듯이 여기서는 용재가 이씨(李氏)이므로 오얏꽃에 비유, 이렇게 말한 듯하다.
[주D-005]동야(東野)는 …… 탔었지 : 동야는 대과(大科)에 급제하고도 평생을 빈한(貧寒)하게 보낸 당(唐)나라 시인 맹교(孟郊)를 가리키고, 이부(吏部)는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고 조주(潮洲)로 귀양 간 당나라 문장가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맹교는 역시 동시대의 시인 가도(賈島)와 교한도수(郊寒島瘦)라 병칭되어 빈한한 시인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주D-006]보진자(葆眞子) : 용재를 가리킨다. 용재는 《용재집》 제3권에 실린 시 〈인성당(忍性堂)〉의 자주(自註)에서, “내가 해도(海島)에 유배되어 살 때 가시울타리로 둘러쳐진 그 집을 보진당(葆眞堂)이라 이름하고, 그 동네를 소요동(消遙洞)이라 이름하였다.”라고 하였다.
[주D-007]모든 …… 가졌지 : 시로 주변의 사물을 남김없이 읊어 내었다는 뜻이다.
[주D-008]궁한 물고기 만난 격 : 《용재집》 제6권 〈20일, 홍대요(洪大曜) 직경(直卿)과 김공석(金公碩)이 가시울이 둘러쳐진 집으로 나를 찾아왔기에, 시냇가 송정(松亭)에서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시를 적어 이 일을 기록하다.〉에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9]황하(黃河)가 …… 기다렸네 : 《용재집》 제5권 〈고문(拷問)하라는 어명이 또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내가 반드시 죽을 줄을 알았다. 이에 여덟 편을 써서 스스로 마음을 달래노니, 훗날 이 시를 보는 이 또한 슬퍼하리라.〉에 이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주D-010]독작(獨酌) : 《용재집》 제6권 〈홀로 술을 마시며〉를 가리킨다.
[주D-011]기회(記懷) : 《용재집》 제5권 〈삼월 삼짇날 회포를 적다.〉를 가리킨다.
[주D-012]초택(楚澤)의 신하 : 찬축(竄逐)되어 상수(湘水)에 빠져 죽은 초(楚)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그의 대표작이 〈이소경(離騷經)〉이다. 초택은 상수를 가리킨다.
[주D-013]칠원(漆園)의 늙은이 : 장자(莊子)를 가리킨다. 장자가 몽(蒙) 땅 칠원(漆園)이란 곳의 관리(官吏)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주D-014]창이 …… 늘어선 듯 : 진(晉)나라 때 두예(杜預)가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사람들이 두무고(杜武庫)라 불렀으며, 삼국 시대 위(魏)나라 종회(鍾會)를 두고 《진서(晉書)》에 “종회는, 마치 무고(武庫)를 보는 것과도 같아 창들이 삼엄하게 눈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太平御覽 卷445》 여기서는 시 속에 온갖 사물과 고사가 빼곡히 들어차 있음을 뜻한다.
[주D-015]풀 …… 울리리요 : 자로(子路)가 당시 임금들이 공자(孔子)를 등용하지 못한 것을 두고 “천하의 큰 종을 걸어 놓고 짧은 풀 막대기로 치면 어찌 소리를 울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는 조신(曺伸)이 용재의 시록(詩錄) 뒤에 자신의 시를 붙이고서 스스로 부끄럽다고 겸사하고 있는 것이다.
 
명재유고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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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최자진(崔子眞준망(俊望) 에 대한 만사

슬프구나, 최자진이여 / 哀哉崔子眞
운명이 어찌 그리 박복했던지 / 賦命一何薄
한평생 온갖 고초 두루 맛보고 / 平生有千苦
죽도록 낙이라곤 하나 없었네 / 到死無一樂
글을 배우고도 이름 못 이룬 채로 / 學字不成名
오두막에서 신세 한탄하였고 / 窮廬歎枯落
농사를 지었어도 수확이 없어 / 學稼不得秋
온 식구가 언제나 주린 기색 역력했지 / 擧族長飢色
아내가 있었지만 먼저 세상 떠나고 / 有妻扣盆歌
자식마저 먼저 죽어 곡하게 했네 / 有兒投杖哭
여기저기 새 무덤을 만들어 주고 / 纍纍起新墳
외로운 집에서 쓸쓸히 사니 / 寥寥托孤屋
대문 밖엔 쑥대가 길을 메우고 / 出門蓬沒逕
들어가면 서까래가 이마를 쳤지 / 入門椽打額
해가 져도 밥 짓는 연기가 없어 / 日晏爨無煙
빈창자에 천둥소리 요란히 나고 / 空膓雷吼作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못한 채 / 冬衣未掛絮
찬 골짝에서 갖은 고초 겪었지 / 波吒度寒谷
언제나 얼굴 가득 수심이 짙고 / 窮愁恒滿顔
귀밑머리 하얗게 변했었는데 / 雙鬢已成白
한번 누워 겨우 열흘 넘기고서는 / 一臥僅經旬
단번에 운명을 하고 말았네 / 居然隕精魄
검루처럼 제대로 염도 못 하고 / 黔婁不歛足
오십 세도 못 되어 세상 떠났네 / 紫極欠半百
슬프구나, 최자진이여 / 哀哉崔子眞
그대 액운 누군들 탄식하지 않으랴만 / 孰不歎子阨
나는 유독 그대에게 말해 주리니 / 我獨爲君言
그대 지금 진택으로 돌아갔다고 / 君今返眞宅
슬픔과 기쁨이며 장수와 요절 / 悲歡與壽夭
부귀와 빈천 및 영화와 굴욕 / 貴賤及榮辱
인간 세상 천만 가지 일들이 / 人間千般事
끝나고 나면 모두가 부질없는 것 / 事了都幻迹
무한한 번뇌를 다 벗어 버리고 / 脫去無限惱
아무것도 모른 채 나무에 누워도 / 冥冥臥一木
지난날 살아생전 걱정거리들 / 向來有生累
조금도 상관하지 않게 됐으니 / 一毫到不得
아는 것 있고 없고 따질 것 없이 / 無論知有無
그 어찌 쾌적한 일 아니겠는가 / 豈不眞快適
안연은 서른둘에 요절했으니 / 顔淵三十二
오십이면 어찌 빨리 갔다 하리오 / 五十詎是促
옷소매로 얼굴을 가렸던 사람 / 當年蒙袂者
오히려 구학을 면치 못했고
 / 猶不免溝壑
영계기(榮啓期)는 새끼로 띠 삼았는데 / 榮啓行帶索
초라한 옷이라도 만족해야지 / 布褐亦云足
양왕손보다는 또 더욱 나으니 / 且勝楊王孫
그는 나체인 채로 묻어 달라 하였지
 / 千年裸爲飾
두 아들이 아버지의 유업 이으니 / 二子守靑氈
동야는 복이라고 부러워하리 / 東野應羡福
슬프구나, 최자진이여 / 哀哉崔子眞
떠난 사람 무엇 하러 슬퍼하랴만 / 去矣奚所慽
교제한 정의에다 척분이 겹쳐 / 交情與戚誼
오래도록 다정한 사이였는데 / 宿昔每款曲
한스럽게 제각기 병을 앓느라 / 各恨病冗俱
서로 자주 만나지 못했었는데 / 叅尋不能數
별안간에 흉보를 듣고 나서는 / 一朝報凶音
몇 달 동안 마음이 슬펐었는데 / 累月心愴惻
어느새 장례 지낼 날짜 닥쳐와 / 窀穸忽有期
이승 저승 영원히 갈리게 됐네 / 幽明將永隔
장지로 직접 가서 영결을 해도 / 臨穴與之訣
정리상 슬픈 마음 한없을 텐데 / 於情寧有極
오랜 세월 병마에 시달린 신세 / 顧此疲薾久
자리를 지고 누워 신음하느라 / 呻吟正負席
한번 가서 슬픔을 토할 길 없어 / 無由致一哀
부질없이 슬퍼하니 부끄러울 뿐 / 負負空悲恧
붓이 가는 대로 애사 쓰자니 / 信筆寫哀章
옛 생각에 눈물이 흐르려 하네 / 感舊淚欲滴
그대 그리 멀리는 못 갔으리니 / 君行尙不遠
넋이 있어 이 마음 알아주리라 / 魂在應相識

[주D-001]검루(黔婁)처럼 …… 하고 : 전국 시대 제(齊)나라의 고사(高士) 검루(黔婁) 선생이 죽었을 때 증자(曾子)가 조문을 갔는데, 염을 할 천이 부족하여 시신의 수족(手足)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고 한다. 즉 덕을 갖춘 채 빈천하게 살다 간 사람을 가리킨다. 《列女傳 卷2》
[주D-002]옷소매로 …… 못했고 : 제(齊)나라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검오(黔敖)라는 사람이 길에서 밥을 지어 굶주린 자들을 기다렸다가 밥을 먹이고 있었다. 이때 어떤 굶주린 사람이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신발을 끌며 눈이 흐릿해져서 앞도 잘 보지 못한 채 걸어왔다. 검오가 왼손에는 밥을 들고 오른손에 마실 것을 들고서 “어서 와서 먹어라.”고 말하자, 그는 눈을 치켜뜨면서 “나는 오직 ‘어서 와서 먹어라.’고 하며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쇠약해진 것이오.”라고 하였다. 검오가 잘못되었다고 사과했으나 끝내 먹지 않고 죽었다고 한다. 《禮記 檀弓下》 즉 남들에게 비굴하게 얻어먹고 살려 하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곤궁함을 면치 못했다는 뜻이다.
[주D-003]영계기(榮啓期)는 …… 삼았는데 : 영계기는 춘추(春秋) 시대의 은사(隱士)로서,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도(道)를 즐긴 사람이다. 영계기가 사슴가죽으로 만든 초라한 갖옷에 새끼줄로 띠를 대신하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고, 공자(孔子)가 “선생께서는 무엇이 즐겁습니까?”라고 묻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고, 남자로 태어난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고, 내 나이 벌써 구십다섯인 것이 세 번째의 즐거움이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列子 天瑞》
[주D-004]양왕손(楊王孫)보다는 …… 하였지 : 양왕손은 전한(前漢) 때 사람이다. 황로(黃老)의 학문을 배워 천금이나 되는 가산(家産)을 자신의 몸을 봉양하는 데 투자하였는데, 죽을 때가 되자 자신을 나체로 묻어 지나치게 후장(厚葬)하는 세속의 풍습을 바로잡도록 하라고 아들에게 유언한 바 있다. 《漢書 卷67 楊王孫傳》
[주D-005]동야(東野)는 복이라고 부러워하리 : 동야는 당(唐)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자(字)이다. 한유(韓愈)의 시 맹동야실자(孟東野失子)의 서문(序文)에 “동야가 연달아 세 아들을 낳았으나 며칠이 못 되어 잃곤 하였으므로, 늙어 가면서 후손이 없는 것을 생각하고는 슬퍼하였다.” 하였다. 여기에서는 최준망(崔俊望)은 그래도 아들이 둘이나 남아 있으므로 아들을 모두 잃었던 맹교가 그를 부러워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용재집 제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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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유록(南遊錄) 경오년
갑자년 겨울, 내가 자진(子眞)과 함께 남쪽으로 유배될 적에 수회리(水回里)에 이르러, “그 언제나 다시 물과 함께 돌아올꼬.[何時更與水同回]”라는 시구를 지었다. 그 후 과연 방면(放免)되었고 이제 영남으로 가는 길인데, 자진이 시를 지어 작별하기를, “수회촌에 길이 지난날과 같으리.[水回村裏路如昨]” 하였다. 수회리에 이르러 보니 그 사람 자진이 생각나기에 그 구절의 글자를 나누어 운(韻)으로 삼아 시를 읊었다. 7수(七首)

이 늙은이를 기억하느뇨 / 記取此老無
은근히 흐르는 물에게 묻노라 / 慇懃問流水
이번 길은 지난날과는 다르지만 / 玆遊非昔行
빼어난 경치는 완연히 그대로일세 / 形勝宛然是

나의 시 과연 징험되었나니 / 吾詩果然驗
이미 물과 함께 돌아왔었지 / 曾與水同回
깊은 산속 길을 향해 가노니 / 爲向雲山道
부생에 이곳 몇 번이나 왕래하는고 / 浮生幾往來

돌길은 여덟아홉 굽이 꺾이고 / 石路八九折
거주하는 백성 서너 마을이로세 / 居民三四村
지난날엔 한창 눈이 쌓였더니 / 往時正積雪
오늘은 봄바람이 따사로이 부누나 / 今日春風暄

나의 벗이라 최자진 / 吾友崔子眞
그 사람은 호해의 선비이지 / 其人湖海士
공의 청산 편을 읊조리고 / 詠公靑山篇
다시 청산 속으로 들어가노라 / 又入靑山裏
자진이 이별할 때 지은 시에, “청산은 일일이 가는 안장을 좇으리.[靑山一一逐征鞍]”라는 구절이 있다.

이미 한강의 배에서 작별하고 / 已別漢江船
홀로 수회리 길을 찾아가노라 / 獨尋水回路
우뚝하게 높이 솟은 새재라 / 峨峨鳥嶺高
그대 위해 좋은 시구를 외노라 / 爲子誦佳句
“우뚝하게 높이 솟은 새재[峨峨鳥嶺高]”는 역시 자진이 남쪽으로 귀양 갈 때 지은 시구(詩句)이다.

적막한 최 부자여 / 寂寞崔夫子
서로 이별 후 편지 한 통 없었지 / 相離闕一書
풍편(風便)에 지성스레 안부 묻노니 / 因風勤問訊
요즈음 침식(寢食)은 어떠하시오 / 眠食定何如

척촉대 아래서 술 마시던 일 / 躑躅臺前飮
지금은 어느덧 옛날이 됐구나 / 如今已成昨
나의 마음이 곧 그대 마음이니 / 吾心卽若心
서로 마음속 응당 잘 알리라 / 兩地應領略
자진의 집에 척촉대(躑躅臺)가 있다.

[주D-001]눈이 쌓였더니 : 동짓달 11일, 조령촌(鳥嶺村)에 묵었는데, 이날 저녁 눈보라가 몰아치기에 최자진(崔子眞)과 영남으로 내려가면서 이 조령을 넘던 때를 회상하였다. 이때를 가리킨다.

 容齋先生集卷之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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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南遊錄 庚午年
甲子冬。僕與子眞。同南遷。抵水回里。有何時更與水同回之句。後果放回。今將南遊。子眞作詩爲別云。水回村裏路如昨。行到水回里。有懷其人。分字爲韻以賦。七首。 a_020_47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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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取此老無。慇懃問流水。玆遊非昔行。形勝宛然是。
吾詩果然驗。曾與水同回。爲向雲山道。浮生幾往來。
石路八九折。居民三四村。往時正積雪。今月春風暄。
吾友崔子眞。其人湖海士。詠公靑山篇。又入靑山裏。子眞別詩。有靑山一一逐征鞍之句。
已別漢江船。獨尋水回路。峨峨鳥嶺高。爲子誦佳句。峨峨鳥嶺高。亦子眞南遷時句也。
寂寞崔夫子。相離闕一書。因風勤問訊。眠食定何如。
020_470d躑躅臺前飮。如今已成昨。吾心卽若心。兩地應領略。子眞家有躑躅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