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임진년산행 /2013.1.16. 도봉산 등축제

2013.2.16. 도봉 유등 축제 (도봉구 방학동 방학천)

아베베1 2013. 2. 16. 22:36

 

 

 

 

도봉산은 서울의 명산으로 백두대간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한북정맥의 한 봉우리로서 산 전체가 웅장한 바위로 이루어져 톱날같은 화강암벽이 흰빛을 뽐내며 공중에 솟아있어 이름 그대로「도를 닦는 봉우리」처럼 지조와 의리가 있어 보이는 산이다.

도봉산은 태백산맥에서 동남쪽으로 뻗어내려 온 광주산맥의 한 산으로, 강원도 철원에서부터 봉우리가 일어나서 기복을 반복하여 들어오다가 여기에 와서 멈추었는데, 서울의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양주군 장흥면에 걸쳐있다. 고려시대 때부터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명산으로서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에 있는 「원종대사혜진탑비」에 의하면, 당시 도봉산에 있었던 도봉선원(道峰禪院)은 여주에 있었던 고달선원, 문경에 있었던 희양선원과 함께 당시 3대 선원(禪院)으로 불렸다고 한다. 조선초기 이후 도봉산은 삼각산과 함께 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천축사 뒤편에 위치한 만장봉(萬丈峰), 바위 봉우리가 기둥처럼 솟아있는 주봉(主峰), 그밖에 도봉(道峰), 선인봉(仙人峰)등이 연이어 있어 용의 기세 같기도 하고 혹은 거북모양 같기도 하여 보는 각도에 따라 기기묘묘하게 비춰져 특이한 인상과 감동을 안겨준다.

1973년 7월 1일 성북구에서 도봉구로 분구 될 당시 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인 도봉산의 이름을 따라 이 지역을 도봉구라 하였다.

  도봉동 동명의 유래는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 아래 있어 얻어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리 가운데 상누원리?무수동?영국리 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4월 1일 전국의 부(府)?군(郡)을 통폐합할 때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을 만들면서 노해면내에 도봉리?방학리·쌍문리·창동리·월계리·공덕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 등 9개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종래 해등촌면의 상누원리·무수동·영국리를 합하여 처음으로 도봉리라 하였다. 1963년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도봉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방학동이 분동되어 나갔고, 1977년 도봉1·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노원구로 편입되었으나, 1989년 다시 도봉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있고, 남서쪽으로 도봉산과 북한산의 연봉을 따라 봉우리와 구릉지대가 많고 맑은 계곡이 곳곳에 있어 자연 경관이 아름답다. 동쪽은 한천을 경계로 상계동과 접하며, 서쪽의 경기도 양주군, 남쪽의 방학동, 북쪽의 경기도 의정부시와 접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다락원, 서원말, 무수울, 웃다락원 등이 있다. 다락원과 웃다락원은 의정부시와의 인접지역에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하던 사람들이 묵던 원(院)이 있었고, 그 원집에 다락, 즉 누각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옛지명

  ▲가며기 : 서원내 앞에 있는 들
  ▲갓굴 : 서원내 서쪽에 있는 골짜기
  ▲고당재 : 굿을 하는 신당이 있던 고개
  ▲기둥바위 : 말굽바위 위에 있는 바위. 바위가 기둥같이 서 있음. 한자로는 ‘柱峰’
  ▲누에머리 : 상마당 옆에 있는 골짜기. 산이 누에머리와 같다.
  ▲다락원 : 다락으로 된 원(院)이 있었다. 한자로는 누원(樓院)이라고 한다.
  ▲도당재 : 굿을 하는 신당이 있는 고개.
  ▲뒷굴 : 도봉서원 뒤에 있는 골짜기
  ▲마당바위 : 상마당 가운데에 있는 바위. 모양이 넓적함.
  ▲매봉재 : 서원 서북쪽 매봉이 있는 고개
  ▲먹뱅이 : 서원 서남쪽에 있는 고개
  ▲묏굴 : 서원 너머 골짜기로, 옛 분묘가 많았다.
  ▲배꼽바위 : 도봉서원 뒤에 있는 바위. 모양이 배꼽과 같음.
  ▲벌통바위 : 자라바위 밑에 있는 바위. 모양이 벌통과 같음.
  ▲병풍바위 : 천축사 밑에 있는 바위. 모양이 병풍과 같음.
  ▲보문사 : 원통사의 다른 이름.
  ▲상마답 : 뒷굴 옆에 있는 골짜기
  ▲새닥다리바위 : 망월사 앞에 있는 바위. 모양이 사닥다리와 같음.
  ▲색시굴 : 상마답 옆에 있는 골짜기
  ▲서낭당 : 무수울의 다른 이름. 서낭당이 있었다.
  ▲서원내 : 도봉서원 앞에서 흐르는 시내물의 이름을 따라 마을이름이 생겨났다. 한자로는 서원천동(書院川洞)이라고 한다.
  ▲서원안말 : 도봉서원이 있는 마을.
  ▲영국리(寧國里) : 서원안말의 다른이름. 도봉서원 이전 영국사(寧國寺)가 있었다.
  ▲웃다락원 : 다락원 위쪽에 있는 마을. 한자로는 상루원(上樓院)
  ▲무수울 : 근심걱정이 없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무수동(無愁洞).
  ▲웃무수울 : 무수울 위쪽에 있는 마을. 한자로는 상무수동(上無愁洞)
  ▲인력거바위 : 병풍바위 옆에 있는 바위. 모양이 인절미와 같음.
  ▲자라바위 : 도봉서원 앞 등에 있는 바위. 모양이 자라와 같음.
  ▲족두리바위 : 도봉서원 동남쪽에 있는 바위. 모양이 족두리와 같음.
  ▲좀먹은바위 : 인절미 바위 옆에 있는 바위. 모양이 좀이 먹은 것 같음.
  ▲중다리 : 서낭당이 앞에 있는 들
  ▲치마바위 : 자라바위 뒤에 있는 바위. 모양이 치마를 두른 것 같음.
  ▲학굴 : 도봉서원 앞에 있는 큰 골짜기.
  ▲허벙다리 : 도봉서원 북쪽에 있는 바위. 큰 바위의 틈새가 넓고 깊어서 한번 헛다리 빠지게 되면 서해 바다에 가서 떨어진다고 함.
  ▲호랑바위 : 치마바위 뒤에 있는 바위. 모양이 호랑이와 같음.

  방학동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는 도봉서원(道峯書院)의 창건과 관련하여 조선시대 어느 임금이 도봉서원의 터를 정하기 위하여 도봉산 중턱에 앉아 있다가 학(鶴)이 평화스럽게 놀고 있는 것을 보고 방학(放鶴)이라하였다는 이야기와 또 이곳 지형이 학이 알을 품고 있는것 같다고 하여 방학(放鶴)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학(鶴)과 관련된 전설은 아마도 한자(漢字)로 방학리(放鶴里)란 지명이 이루어진 후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보인다.

   또한 곡식을 찧는 기구인 방아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말로 ‘방아골(굴)’로 불리던 것을 한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음이 비슷한 방학리(放鶴里)로 고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방학동의 원래 이름은 암회리(岩回里)였는데, 도봉산 줄기가 동남방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다시 되돌아와 암회리라 했던 것을 학(鶴)이 날아가는 형국의 지세로 보아 풍수지리가의 조언으로 일제시대 ‘방학(放鶴)’이라 작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 지역이었고, 1914년 노해면 방학리로 되었다. 1963년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방학동으로 되었고, 1973년 도봉구 관할로 되었다. 1975년 도봉동에서 분동하였으며 1980년 방학1·2동으로 분동, 1988년 2동이 다시 2·3동으로 분동되었다. 법정동인 방학동은 행정동인 방학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은 방학로가 마을의 중심을 지나며, 성북구에서 의정부시로 나가는 도봉로가 동쪽으로 지나고 있다. 예로부터 도심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어서 북한산 자락에는 왕실과 귀족들의 묘소가 많이 있다.

  ※ 옛지명
     ▲가살피 : 도봉동과의 경계지점에 있는 마을 
     ▲금성윗들 : 방학굴 앞에 있는 들
     ▲금잇들 : 도당말 앞에 있는 들, 거머리가 많았음.
     ▲논굴재 : 방학굴에 있는 고개
     ▲도당말 : 도당(都堂), 즉 마을의 수호신을 제사지내는 신목(神木)이 있던 마을.  한자로는 陶唐洞
     ▲도당재 : 도당말 뒤에 있던 고개, 굿을 하는 도당이 있었다.
     ▲돌멩이 고개 : 문둥굴에서 우이동으로 가는 고개
     ▲뒷말 : 도당말의 다른이름, 방학굴 뒤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문둥굴 : 도당말 곁에 있는 마을
     ▲볕고개 : 동남쪽으로 향하여 볕이 잘드는 마을
     ▲복개내 : 방학동에서 중랑천으로 들어가는 내. 한자로 “福開川”
     ▲봇들 : 종잣들 못미쳐 있는 들. 물을 대는 보가 있었음.
     ▲봉자끝 : 도당말 끝에 있는 마을
     ▲봉작배 : 방학굴에 있는 고개, 구리금정의 명당이 있었다고 한다.
     ▲샘말 : 원당이와 문둥굴 사이에 있는 마을. 사잇말의 변음으로 추정됨
     ▲샘말고개 : 샘말과 원당이 사이에 있는 마을.
     ▲샛방굴 고개 : 샛방굴에서 도당말로 가는 고개.
     ▲생잇들 : 도당말 앞에 있는 들
     ▲서낭굴 : 방학굴에 있는 작은 마을
     ▲서빠탱이 : 장폿들과 금성윗들 사이에 있는 들.
     ▲성고개 : 바위가 성(城)과 같은 고개 밑에 있는 마을. 바위를 돌아 들어간다  하여 암회리(岩回里)라고도 이름하였다.
     ▲시루봉 : 도당말 뒤에 있는 봉우리, 모양이 시루같다.
     ▲옹주못등 : 옹주(翁主)의 묘소가 있는 등성이.
     ▲원당이 : 소원을 비는 신당(神堂)이 있어서 생긴 이름. 한자로 “元唐里”
     ▲장폿들 : 샛방굴 앞에 있느 들. 장포가 많음
     ▲종잣들 : 중랑포 주변에 있는 들
     ▲주석배 : 연산군묘 뒤에 있는 고개
     ▲중천(中川) : 방학리의 중간에 있는 내. 중천교(中川橋)가 있었음.
     ▲초당말 : 초당(草堂)이 있었던 마을
     ▲터꿩이들 : 가살피 아래에 있는 들. 꿩메가 많았음
     ▲하맛들 : 연산군 묘소 앞에 있는 들. 하마피(下馬碑)가 있었음. 한자로 ‘下馬坪’
     ▲황소바윗굴 : 방학굴에 있는 골짜기. 모양이 황소 같은 바위가 있다.    

   쌍문동 동명(洞名)의 유래는 몇가지가 전해온다.

   하나는 현 쌍문동 286번지 근처에 계성(鷄聲)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계성과 그 부인이 이름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 아들이 생시에 부모를 정성껏 모시지 못한 것을 후회하여 부모의 묘 앞에 움집을 짓고 여러해 동안 기거하다가 죽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지극히 여겨 그의 묘 근처에 효자문(孝子門)을 두 개 세운데서 쌍문(雙門)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에는 현 창동 우체국부근에 열녀문이 두 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며 또 쌍갈래길에 이문(里門)이 있었으므로 ‘쌍갈무늬’가 쌍문으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최근에는 ‘쌍문(雙門)’은 효자문(孝子門)이 두 개라 쌍문이라 한것인데, 효자 남궁지와 그의 처 하동 정씨(鄭氏), 그의 아들 효자 남궁 조 부자가 고종으로부터 효자문을 받았는데 부자(父子)의 묘소가 노해파출소(옛 쌍문동 중심지)에서 볼 때 남과 북에 있어 ‘쌍문’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으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기 가운데 소라리(所蘿里)·계성리(鷄聲里)지역에 해당한다. 1914년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어 노해면이 설치되었을 때 소라리·계성리가 통합되면서 쌍문리라는 지명이 처음 나타났다.

  1963년 1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 노해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쌍문리는 창동 동사무소 관할 하에 있었다.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도봉구에 편입되었으며,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쌍문1~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 이전까지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을 위주로 하고 있었으며, 그 후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여 쌍문로와 도봉로 주위에는 상가가 밀집되어 있다. 자연마을로 계성동, 쇠죽골, 해등천 등이 있었는데, 이 마을들이 합쳐져 동을 형성하였다.  

 ※ 옛 지명
   ▲박수겻 고개 : 쌍문리에 있는 고개
   ▲쇠죽골 : 쌍문1동 내시묘(內侍墓)가 있는 아랫마을인데, 동대문시장에 소를  팔러 가기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이곳에서 쇠죽을 먹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으로 소여물골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경기도와 서울의 연락도로로 주막도 있었다.
   ▲제성동 : 계성과 효성 지극한 아들이 살았다는 마을. 지금의 쌍문1동 지역.
   ▲해등천(海等川) : 현 쌍문2동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소군래라는 하천에서 깨끗한 물이 이마을을 거쳐 방학동으로 흘렀는데, 물이 바닷물처럼 맑아서 해등천이라고 불렀다고 함.

  창동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곳에 양곡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창동초등학교 옆 공터에는 오랜 옛날부터 창동리(倉洞里)라는 돌로 제작된 이정표가 세워졌었는데, 1995년 9월 1일 창5동 동사무소옆으로 이전하였다. 언제부터인가 검은 페인트로 ‘창동리’‘재건’이라는 글자가 쓰여졌다고 한다.

 도봉구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중랑천을 경계로 노원구 상계동, 서쪽은 쌍문동, 남쪽은 강북구 번동, 북쪽은 방학동과 접해 있다. 창골·유만(流滿)·말미·모랫말 등의 자연마을이 합쳐 창동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해등촌면에 속하였는데, 1912년에 편찬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경기도편에 나타나는 양주군 해등촌면 12개 리 가운데 창동리(倉洞里)·마산리(馬山里)·유만리(流滿里)지역에 해당한다. 이후 1914년 4월 1일 전국의 부(府)·군(郡)을 통폐합할 때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을 만들면서 , 노해면 내에 도봉리·방학리·쌍문리·창동리·월계리·공덕리·하계리·중계리·상계리·등 9개리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종래 해등촌면의 마산리·유만리·창동리를 합하여 창동리라 하였다.  1963년 노해면이 서울시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창동이 되었고, 1973년 도봉구로 편입 되었다. 1988년 노원구로 편입되었다가 1989년 다시 도봉구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되었다.

  창동일대는 쌍문동과 함께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토기, 석기, 간석기 등의 유물이 8·15 광복 전 일본인들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부터 마을의 유래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옛지명
  ▲더퍼리 : 유만이 앞에 있는 넓은 들.
  ▲말미 : 옛날 산에다 말을 많이 먹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 한자는 마산동(馬山洞)
  ▲모랫마을 : 창1동과 월계동고의 경계지역에 모래가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방줏굴 : 방죽이 있는 마을
  ▲배라깃들 : 수원(水源)이 적어 날씨가 가물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창동 292번지 300번지 일대에 해당.
  ▲삼봉못(三峰淵) : 부근에 삼각산의 봉우리가 바쳤다는 연못.
  ▲유만리(流滿里) : 큰 늪이 있어 물이 가득하였던 데서 연유함. 일명 한내(漢內)
  ▲종자들 : 유만이 앞에 있는 들. 7년을 가물어도 물이 있어 종자가 되었다고 함.
  ▲창골 : 조선시대 창고가 있었던 데서 연유함.


















































서울 도봉구 방학동  방학 사거리 주변 방학천에 도봉 유등 축제가 열리고 있다

야간에 주변 산책을 겸하여 발길을 돌려 보는 것도 좋을듯 하다 

야간이라서 약간 추운것도 있지만  오랜만에 돕ㅇ에서 보는 유등 축제 인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