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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최치원 선생 관련 자료

아베베1 2013. 2. 17. 09:56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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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공은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가서 노력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공을 종사순관(從事巡官)에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와 징병(徵兵)하고 고격(告檄)하는 글 등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공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나이 28세 때에 희종이 공에게 어버이를 찾아뵈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조서(詔書)를 지닌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이 공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하였다. 공 자신도 중국에서 배워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귀국해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퇴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 지금의 태인(泰仁)이다. -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7년에 해당한다. 공이 그때에 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서산(瑞山)이다. - 태수로 있다가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당나라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해마다 기근이 들면서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나라에 간 적이 있다.
진성왕 8년(894)에 공이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에 임명하였다.
공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나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나 모두 어렵고 험한 운세를 만나서 걸핏하면 낭패를 당하곤 하였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신세를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할 뜻을 지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山林) 아래나 강해(江海)의 주변에서 소요하고 자적하며, 대사(臺榭)를 짓고 송죽(松竹)을 심는가 하면 서사(書史)를 벗 삼고 풍월(風月)을 노래하였는데, 예컨대 경주(慶州)의 남산(南山)과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과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와 합포(合浦)의 월영대(月影臺) 같은 곳은 모두 공이 노닐던 곳이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마음 편히 노닐면서 노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다.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 / 我聞海上三金鼇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 一箭射破金門策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라고 기재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인(高麗人)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상국(上國)에 이름을 떨친 것이 이와 같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주C-001]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말한다. 본 《고운집》에 실려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열전을 전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전재하지는 않고, 간간이 삭제하거나 보충한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 불교도와 친분을 나눈 내용, 고려의 태조를 은밀히 도왔다는 내용 등은 삭제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격황소문(檄黃巢文)〉의 내용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에서 따다가 보충해 넣었다. 또한 문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수정한 부분도 종종 보인다. 《삼국사기》의 열전 부분은 기존의 번역서가 많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병도(李丙燾)의 《국역 삼국사기》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주(譯註)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
[주D-001]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한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 味呑寺南 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하였다.
[주D-002]부친 : 고운의 아버지는 이름이 견일(肩逸)이며, 일찍이 숭복사(嵩福寺)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이르기를, “김순행(金純行)과 나의 아버지 최견일이 일찍이 이곳에서 일을 하였다.” 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D-003]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 : 율수현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현(溧陽縣)이고, 위(尉)는 도적을 잡고 죄수를 다루는 관직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D-004]고변(高騈) : 당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중국 섬서성 유주인(幽州人)이다. 글을 좋아하여 선비를 친구로 삼았는데, 여러 차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황소의 난을 진압할 때 진격을 늦추자 싸울 의지가 없다고 하여 중도에 병권을 빼앗겼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3쪽》 또 ‘騈’의 음은 ‘변’과 ‘병’ 두 가지인데, 이병도는 ‘변’으로 읽었고, 북한본ㆍ이재호본ㆍ신호열본에서는 ‘병’으로 읽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본에서도 ‘병’으로 읽었다.
[주D-005]그중 …… 떨어졌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추가해 넣은 것이다.
[주D-006]태산군(太山郡) :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이다.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현재 정읍시 칠보면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이병도는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 일대로 보았으나(《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83, 676쪽》)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5쪽》
[주D-007]부성군(富城郡) : 신라 웅주(熊州)에 속한 군의 하나로, 현재의 서산시(瑞山市)이다. 고려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이 관호를 없앴다가 충렬왕 때 서산으로 고쳤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3쪽》
[주D-008]진성왕 …… 임명하였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
[주D-009]강주(剛州)의 빙산(氷山) : 강주는 지금의 영주(榮州)로, 고려 성종 때 영주에 강주 단련사(剛州團練使)를 두었다. 빙산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이다. 의성은 당시에 영주 소관 하에 있었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주D-010]그리고 …… 마쳤다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보면, “모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를 맺었다.〔與母兄浮屠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최치원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편자가 최치원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주D-011]나은(羅隱) : 833~909. 자는 소간(昭諫), 자호는 강동생(江東生)이다. 당시에 시명(詩名)을 천하에 진동시키며 특히 영사(詠史)에 뛰어났으나 기풍(譏諷)이 많은 까닭으로 종신토록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난리를 피해 향리로 내려갔다가 절도사(節度使) 전류(錢鏐)에게 발탁되어 종사관으로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舊五代史 卷24 梁書 羅隱列傳》
[주D-012]고운(顧雲) : 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와 《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주D-013]내 …… 자라 :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전한다.
[주D-014]고려인(高麗人) : 신라인(新羅人)의 오기(誤記)이다.
[주D-015]고려 …… 내렸다 : 《고려사》 권4 〈현종세가(顯宗世家) 1〉에 의하면, 현종(顯宗) 11년(1020) 8월에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그 동시에 선성(先聖)의 묘정(廟廷)에 종사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현종 14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고 되어 있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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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대숭복사 비명 병서〔大嵩福寺碑銘 竝序

내가 듣건대, 왕자(王者)는 부조(父祖)가 쌓은 덕업을 기반으로 해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크게 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치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고 예교(禮敎)는 효(孝)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즉 인에 입각하여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확대 적용하고, 효에 입각하여 어버이를 높이는 전범을 거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夏)나라의 홍범(洪範)을 통해서 무편(無偏)의 자세를 본받고, 주(周)나라의 시편(詩篇)을 통해서 불궤(不匱)의 정신을 따라야 할 것이다. 조상의 덕을 닦으면서〔聿修〕 비패(秕稗)의 기롱을 받지 않게 하고, 제사를 올리면서〔克祀〕 빈번(蘋蘩)의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악한 은혜가 만백성에게 골고루 적셔지고, 덕의 향기〔德馨〕가 드높이 하늘에까지 달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애태우며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해 주고 죄인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은 부처가 대미(大迷)의 지경에서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것 아님이 없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조상을 하늘과 짝 지우며 상제(上帝)에 배향하는 것은 불교가 상락(常樂)의 세계에서 존령(尊靈)을 받드는 것 아님이 없다. 이를 통해서 유가에서 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은 불가에서 삼보(三寶)를 소륭(紹隆)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광채가 밝게 비치는 것과 금구(金口 부처의 입)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서토(西土)의 생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태평(太平) 승지(勝地)로 말하면, 성품은 온유하고 화순하며 기운은 발육하고 생장시키는 데에 적합하다. 산림에 정묵(靜默)의 승도(僧徒)가 많아 인(仁)으로 벗을 모으고, 강해가 조종(朝宗)의 형세와 일치하듯 선(善)을 따름이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기풍을 드날리고 범왕(梵王)의 불도(佛道)에 젖어 드는 것이 마치 도장에 인주를 찍는 것과 같고 거푸집 안에 쇠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신(君臣)이 삼보에 귀의할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심지어는 국성(國城)에까지 원하는 대로 탑묘(塔廟)를 즐비하게 세울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니 섬부주(贍部洲)의 해변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사다(都史多)의 천상에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신묘한 일 중에서도 신묘한 이 일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금성(金城)의 남쪽에 있는 일출봉(日出峯) 기슭에 숭복(嵩福)이라는 이름의 가람(伽藍)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람은 선조(先朝 경문왕(景文王))가 왕위를 계승한 초년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원릉(園陵)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건한 것이다. 고사(古寺)가 세워진 유래를 상고하고 신찰(新刹)이 완공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원구(元舅 큰 외숙)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外祖)로서, 고귀한 공자(公子)의 신분이면서도 실로 참다운 고인(古人)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겼던 것처럼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그럴 듯하게 세우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서경(西境)을 함께 기약했던 것처럼 그 건물을 희사하여 상전(像殿)과 경대(經臺)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년에 풍악을 울리던 피리와 가야금이 오늘날에는 사찰의 쇠북과 경쇠가 되었으니, 이처럼 시대에 따라 바뀐 것은 출세간(出世間)의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 사원 주변의 경관 중에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곡사(鵠寺)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앙〔鴦〕처럼 짝하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하여금 성가(聲價)를 드높이게 하고, 거위〔鵝〕처럼 날개를 펼친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빛을 더하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저 바라월(波羅越)의 형태를 표방한 사원이나 굴린차(崛恡遮)의 이름을 기념한 사원이 어찌 천리를 나는 고니의 비유를 취하고 쌍림(雙林)으로 바꿔서 이름을 새로 지은 이 사원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이곳의 지세가 위세 면에서 취두(鷲頭)보다 낮고 지덕(地德) 면에서 용이(龍耳)처럼 높은 만큼, 금계(金界)로 획정하기보다는 옥전(玉田)을 조성하는 것이 적당한 것이었다.
정원(貞元) 무인년(798, 원성왕14) 겨울에 이르러 왕 자신을 장사 지낼 일에 대해 유교(遺敎)를 내리면서 인산(因山)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장지를 택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원이 자리한 터를 지목하여 장차 왕릉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어떤 이가 의문을 제기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유씨(游氏)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구택을 모두 차마 허물 수 없다고 하여 그냥 놔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금지(金地 사원)의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수달다(須達多)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장지로 삼는다면 땅은 복될지라도 하늘은 허물할 것이니 서로 보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정사(政事)를 담당한 자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범묘(梵廟 사원)의 경우는 어디에 있든 반드시 화합하게 되어 있는 만큼, 어디로 가든 간에 맞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는 터도 복된 도량으로 전환하여, 백억겁토록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수(靈隧 묘지)의 경우는 아래로 지맥을 살피고 위로 천심을 헤아려서, 반드시 구원(九原) 속에 사상(四象)을 포섭함으로써 천만대토록 그 여경(餘慶)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불법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상(相)이 없으나 장례는 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거하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도리이다. 단지 청오(靑烏)가 좋다고 간주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어찌 백마(白馬)를 슬피 울게 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이 인사(仁祠)의 내력을 살펴보건대, 본디 척리(戚里)에 속해 있었던 것인 만큼, 낮은 척리에서 높은 왕실로 나아가고 옛 절 대신 새 왕릉을 도모하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다. 그리하여 왕릉이 해역(海域)의 웅장함을 차지하게 하고, 사원이 운천(雲泉)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한다면, 우리 왕실의 복산(福山)이 높이 솟을 것은 물론이요, 저 후문(侯門 척리)의 덕해(德海)도 편안히 흐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知無不爲〕 가운데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各得其所〕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나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중도에 그만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의당 거북점과 시초점〔龜筮〕 모두 사람의 뜻과 서로 들어맞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요, 용(龍)과 제천(諸天)의 신이 환희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精舍 사원)를 옮기고 현궁(玄宮 왕릉)을 조성하는 두 가지 공사에 인부를 동원하고 백공(百工)에게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
감우(紺宇 사원)를 개창(改創)할 때에는 인연이 있는 대중이 서로 이끌고 와서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바람이 통하지 않고,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마치 5리(里)의 안개를 피우는 술법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저잣거리를 이룬 것이나 한때 설산(雪山)의 법회에 대중이 화열하며 모여든 것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와와 재목을 거두고 경전과 불상을 봉대(奉戴)하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번갈아 수수(授受)하며 경쟁적으로 정성을 바쳤으므로, 역부(役夫)가 반걸음도 옮기기 전에 석자(釋子)가 편히 거할 곳이 벌써 이루어졌다.
구원(九原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비록 왕토(王土)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공전(公田 국가 소유의 토지)이 아니었으므로, 왕릉 주변의 토지를 좋은 값으로 매입하여 구롱(丘隴) 200여 결(結)을 보태었으며, 그 대가로 도합 2천 점(苫)의 도곡(稻穀)을 보상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전(畿甸)의 고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소나무를 분담해서 주위에 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쓸쓸히 자꾸만 들려오는 슬픈 바람 소리는 봉황처럼 춤추고 난새처럼 노래했던 옛 생각이 솟구치게 하였고, 어둠에 묻혔다가 밝은 해를 본 묘역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위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건대, 땅은 하구(瑕丘)와 달라도 경계는 양곡(暘谷)과 접하였고,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곡림(穀林)의 상서로운 기운이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수놓은 듯한 봉우리들은 사방 멀리에서 서로 조회(朝會)를 하고, 누인 명주 같은 개펄은 한 가닥 선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실로 교산(喬山)의 빼어남을 간직하고, 필맥(畢陌)의 기이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금지(金枝 왕족)가 계림(雞林)에서 더욱 무성해질 것이요, 옥파(玉派 종실)가 접수(鰈水)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에 앞서 사우(寺宇)를 옮길 적에 땅에서 솟아 나온 것과 같은 점이 있었으나, 아직 화성(化城)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다. 가까스로 잡목을 베어 내어 강만(岡巒)을 구분하고 띠풀을 엮어서 풍우(風雨)를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겨우 70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숨 가쁘게 아홉 조정이나 거치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누차 전복될 위기를 맞았을 뿐 어엿하게 꾸며 볼 여유는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을 맞게 되어서 천세(千歲)의 보배로운 운세를 흠 없이 누리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先大王)은 홍저(虹渚)가 빛을 떨치듯 오잠(鼇岑)에 자취를 드리웠다. 처음에 옥록(玉鹿)에서 명성을 날리며 특별히 풍류(風流)를 진작시키더니, 이윽고 금초(金貂)의 지위에서 관원들을 총괄하며 나라의 풍속을 맑게 하였다. 용전(龍田)의 지위를 차지하고 덕(德)을 심었으며, 봉소(鳳沼)에 거하면서 마음을 계옥(啓沃)하였다. 무슨 말을 할 때에는 인자(仁者)로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였고, 정사를 꾀할 적에는 정도에 입각하여 인도하였다. 팔병(八柄)의 막중한 권한을 모두 행사하여 사유(四維)가 실추된 것을 바로잡아 두서 있게 하였다. 어려운 일들을 차례로 겪었지만 행하는 일마다 이롭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국(杞國)의 근심이 닥쳐와 보위가 비게 되면서 산악이 흔들렸는데, 사슴의 뒤를 좇는 들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까마귀 떼가 동산에 모여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대왕(先大王)이야말로 현명하고 온순한 데다 노성하고 인자하여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는가. 이에 대저(代邸)에서 입신하고 나서 자문(慈門 불문(佛門))에 뜻을 기울이며 선조(先祖)에게 수치를 끼칠까 염려하여 불사를 일으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숭창(嵩唱)에게 청하여 범거(梵居 사원)를 중수하겠다는 뜻을 부처에게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선조의 덕업을 선양하려는 성의를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 않구나.〔愷悌君子 求福不回〕” 라고 한 것이나, 《서경(書經)》에서 말한 바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른다.〔上帝時歆 下民祗協〕” 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이 신불(神佛)의 보우를 받고 선의의 행동을 사람들이 잘 따르게 된 결과, 경(卿)과 사(士)와 대부(大夫)의 뜻이 수귀(守龜)의 뜻과 합치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동국(東國)을 혁혁히 빛내면서 임금으로 임하고 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선왕(先王)이 훙거(薨去)한 사실을 알리고 금상(今上)이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고하였다.
마침내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5)에 천자가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를 정사(正使)로 삼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에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금어대(金魚袋)를 채우고 머리에 해치관(獬豸冠)을 씌워 부사(副使)로 삼은 뒤에 왕인(王人)인 전헌섬(田獻銛)과 함께 와서 조명(詔命)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빛나게 선왕의 뒤를 이어받고 나서 성유(聲猷)를 제대로 봉행함으로써 잘 계승하였다는 이름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왕위에 추대한 지극히 공정한 거조에 참으로 부합된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의 국왕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검교태위 겸 지절충영해군사(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를 제수하였다. 지난날에 선대왕이 제(齊)나라를 변화시키며 빼어난 면모를 드러내고,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향기를 드날리지 않았더라면, 천자가 어떻게 이처럼 봉필(鳳筆)을 날려 해외의 제후(諸侯)를 총애하고 용정(龍旌)을 내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임시로 수행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또한 영광스럽게 천자의 은택에 젖었고 보면, 반드시 영구(靈丘 왕릉)에 나아가 친히 참배해야 하겠기에, 천승(千乘) 제후의 행차를 준비하게 하였으나, 그것이 어찌 십가(十家)의 재산만 소모할 뿐이었겠는가. 이에 마침내 태제(太弟)인 상국(相國)에게 명하여 청묘(淸廟)의 제사에 치제(致齊)하게 하고 현경(玄扃 왕릉)에 대신 참알(參謁)하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계림(雞林)의 번성함이여, 그리고 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코끼리가 밭 갈던 일을 언제나 그리워할 것이요, 시대가 평화로우니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들판과 시내를 화려하게 비추며 태제의 행렬이 지나가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흰 승려가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경하하며 말하기를,
“고귀한 개제(介弟 태제)의 이번 행차로 성제(聖帝)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도가 이루어졌다. 예의 있는 우리의 풍속이 넉넉하게 여유가 있어서, 마침내 바다 물결이 가라앉게 하고, 변방에 전쟁의 티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천리(天吏)가 고르게 하고, 땅의 곡식이 풍성하게 하였다. 그러니 뒤를 이어서 연우(蓮宇 사원)를 중수하고 백성(柏城 왕릉)을 돌볼 적기가 바로 지금이니, 지금 하지 않고 어느 때를 다시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의 효성이 크게 사무쳐서 생각과 꿈이 일치된 결과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을 꿈속에서 뵙게 되었는데, 성조대왕이 선대왕을 어루만지며 고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다.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돌보려고 하는데 조심하고 공경히 할 것이요, 서둘러서 경영하려고 하지 말지어다. 부처의 덕과 나의 힘이 너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진정 중도를 잡고 행한다면 하늘의 복록을 끝까지 길이 누리리라.”
하였다. 이윽고 청랑한 물시계 소리에 맞춰 옥침(玉枕)에서 잠이 깨어 일어나니, 십훈(十煇)으로 점을 치지 않아도 구령(九齡)의 해몽과 일치하는 듯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속히 명하여 법회를 경건히 거행하도록 하였다. 화엄(華嚴)의 대덕(大德)인 석결언(釋決言)이 당사(當寺)에서 유지(有旨)를 받들고 5일 동안 강경(講經)을 하였으니, 효성을 펴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선대왕이 하교하기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不愛其親〕에 대해서는 경(經)에서도 경계한 바이다.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無念爾祖〕’라고 한 시(詩)의 구절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돌보아 주는 이때에 과인이 사원을 중수하려고 하자 꿈속에서까지 감응이 이루어지게 하니 마음이 떨리고 두렵기만 하다.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三年不蜚〕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단 하루라도 반드시 손질할 것〔一日必葺〕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백관(百官)의 어른과 어사(御史)는 이 일에 대한 이해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혔다〔賣兒貼婦〕는 기롱은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혹시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니, 행해야 할 일은 진헌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하는 일을 그대들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애틋한 소원이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여 선조의 혼령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참으로 임금님이 뜻을 먼저 정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여론이 모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원이 이루어지면 구족(九族)에게도 많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한기를 맞았으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소서.”
하였다.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특출한 인재들을 발탁하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출중한 승려들을 뽑았으며, 종실의 세 명의 유능한 신하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석문(釋門)의 두 명의 걸출한 승려인 현량(賢諒)과 신해(神解), 찬도(贊導)하는 승려인 숭창(嵩唱)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 나라의 임금이 단월(檀越 시주)이 되고 국가의 저명한 인물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므로, 역량 면에서 여유가 있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으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늘리려고 하는 터에, 새것을 옛것과 뒤섞이게 하는 것이 어찌 온당하겠는가마는, 단계(檀溪)의 숙원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내원(㮈苑)의 전공(前功)을 해칠 염려도 없지 않기에 옛 재목을 간추려 모아서 높이 다진 대지(垈地)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 웅장한 규모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진흙을 이기고 쇳물을 부으며 다투어 묘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구름 같은 사닥다리를 타고서 수(倕)의 재목을 아슬아슬하게 가설(架設)하고, 서리처럼 하얀 흙벽을 노(獿)의 백악(白堊)에 향을 버무려서 발랐다. 바위산의 기슭을 깎아 내어 담장을 돋우고, 시냇물을 굽어보며 문 앞이 트이게 하였다. 거친 섬돌은 쇠 장식 계단으로 바꾸었고, 낮은 곁채는 아로새긴 회랑(回廊)으로 달라지게 하였다. 겹으로 된 불전(佛殿)은 용(龍)처럼 서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사나(盧舍那)를 주불(主佛)로 봉안하였고, 층으로 된 누각은 봉(鳳)처럼 우뚝 섰는데 그 위에 수다라(修多羅 경(經))를 이름으로 하였다. 고래등 같은 동량을 높이 설치하였고, 난새를 새긴 난간을 마주 보게 하였다. 화려한 반자에는 꽃들이 모여 차례로 줄지어 있고, 수놓은 두공(枓栱)에는 가지가 옹위하듯 서로 맞물려 있는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하여 눈길을 돌리면 누구나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 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영정(影幀)을 모신 별실(別室)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연방(蓮房)과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과 아침마다 밥을 짓는 공양간과 같은 곳이 있었다. 여기에 또 새기고 다듬는 데에 솜씨를 다하고 색칠을 하는 데에 정밀함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위 골짜기와 함께 맑은 기운이 우러나오고 안개 노을과 어울려 서로 찬란하게 빛났다. 옥으로 된 찰간(刹竿)에는 봉래도(蓬萊島)를 비추는 달이 걸려서 두 송이 서리 머금은 흰 연꽃이 피어나고, 쇠로 된 풍경(風磬)에는 솔 우거진 시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딪쳐서 어느 때나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주변의 승경(勝景)을 돌아보더라도 먼 변방에서 경치가 걸출한 곳이었다. 좌측의 산봉우리는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것 같고, 우측의 원습(原隰)은 용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다. 앞을 굽어보면 메기 형상의 산이 검푸르게 줄 지어 서 있고, 뒤를 돌아보면 봉새 같은 언덕이 갈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면 가파르면서 기이하고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삽상하면서 아름다우니, 낙랑(樂浪 신라)의 선경(仙境)은 참으로 낙방(樂邦)이요, 초월(初月)의 명산은 바로 초지(初地)라고 이를 만하다.
잘 건설하여 주도면밀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근실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인방(仁方 동방)을 크게 감싸 줄 것이요, 임금의 보수(寶壽)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사방의 경내로 삼고, 500년을 헤아려서 한 해의 봄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사냥한 표범의 꼬리를 매달아 세우며 바야흐로 기뻐할 이때에, 형산(荊山)의 용에 걸터앉아 떨어뜨린 수염을 안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헌강대왕(獻康大王)은 연소한 나이인데도 높은 덕을 지녔고 뛰어난 체격에 맑은 정신을 소유하였다.〔神淸遠體〕 침문(寢門)에서 내수(內豎)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익실(翼室)에서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는 일〔宅宗〕을 준행(遵行)하였다. 등 문공(滕文公)이 예법을 극진히 하여 거상(居喪)을 한 것처럼 끝까지 극기를 잘 하였고, 초 장왕(楚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政事)를 닦은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군다나 또 천성적으로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고 지혜의 이슬에 몸을 적시면서 선조를 높이는 의리를 드날리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성의를 분발하였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화(中和) 을사년(885, 헌강왕11) 가을에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이어받아 길이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는 일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다. 선조(先朝)에서 세운 곡사(鵠寺)는 이름을 바꿔서 대숭복사(大嵩福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불경을 수지(受持)하는 개사(開士)와 기강을 확립하는 정리(淨吏)가 전지(田地)를 가지고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체 봉은사(奉恩寺)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도록 하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産物)을 전운(轉運)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별도로 두 명의 숙덕(宿德)을 뽑아 입적시켜 상주하게 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게 하라. 그러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저승 세계까지 보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요, 큰 인연을 지은 김원량으로서도 반드시 감통(感通)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발우(鉢盂)에는 향적반(香積飯)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중생을 창도하는 것은 육시 예배(六時禮拜)를 하며 옥경(玉磬)이 울리듯 할 것이요, 부처의 가르침을 수지(修持)하는 것은 만겁(萬劫)토록 하늘의 별이 세상을 비추듯 할 것이다. 위대하도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바 “근심이 없는 분은 문왕일 것이다. 부친이 시작한 일을 아들이 이어받았으니.〔無憂者其惟文王 父作之 子述之〕”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봄에 하신(下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예(禮)에 이르지 않았던가. ‘명은 기물(器物)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라고. 선조(先朝)에서 처음 사원을 세울 적에 큰 서원을 발하였는데, 당시에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부친 최견일(崔肩逸)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을 지어 한번 일컬으면, 과인이나 그대나 모두 효성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니, 그대는 명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떠돌다가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치긴 하였지만, 우구(虞丘)의 비통함을 길이 안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 누리고 있을 뿐이기에, 명을 받들고는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른 채 슬피 오열할 따름이다.
삼가 생각건대, 내가 중국에서 벼슬할 적에 유씨 자규(柳氏子珪)가 동국(東國)의 일을 기록한 내용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서술된 정사에 관한 조목이 왕도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국사(國史)를 읽어 보니, 그것은 완전히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元聖王)) 때의 사적(事迹)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중국 사신 호공 귀후(胡公歸厚)가 복명할 적에 풍요(風謠)를 많이 채록하고는 당시의 재상에게 아뢰기를,
“앞으로 나 이후로 산서(山西) 출신은 해동(海東)에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계림(雞林)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은데, 동국(東國)의 왕이 그 경치를 도장으로 찍어내듯이 시로 지어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요행히 운어(韻語)를 엮는 법을 예전에 배운 덕분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답을 하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군자(君子)가 말을 할 줄 안다고 여겼다. 이는 열조(烈祖)가 사술(四術)로 터전을 닦고 선왕(先王)이 육경(六經)으로 풍속을 교화시켰기 때문이니, 이 어찌 이궐(貽厥)을 위해 힘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동방의 문물이 빛나게 할 수 있었고 보면, 나의 명(銘)에도 부끄러운 말〔愧辭〕이 없게 될 것이요, 나의 붓에도 남은 용기〔餘勇〕가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감히 하늘을 대롱 구멍으로 엿보고 바다를 바가지로 퍼서 재면서 평범한 말로 엮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홀연히 영원한 한탄을 일으키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뒤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선왕의 숫돌에 계속 칼을 갈고 훈지(塤篪)를 불며 가락을 맞추는 시대를 만났다. 일단 큰 왕업을 이어 지키게 된 뒤에는 장차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이루려고 하면서 임금 자리를 편안하게 여기는 일이 없이 그 문물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멀리 태양 같은 형님의 뒤를 따르다가 갑자기 서산에 지는 해 그림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 같은 누이에게 높이 의지하여 동해의 빛이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 전하는 오누이 간에 왕위를 이어 왕가의 계보가 확실한 가운데 빼어난 곤덕(坤德)을 본받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주를 품었다〔懷神珠〕고 하는 것이요, 채석을 구웠다〔鍊彩石〕고 하는 것이다. 전하는 부족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보완하였고 선(善)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우(寶雨)》의 금언(金言)에서 분명히 수기(授記)함을 얻고, 《대운(大雲)》의 옥게(玉偈)와 완전히 부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또 문고(文考 부친인 경문왕)가 부처의 집을 낙성하고 강왕(康王 헌강왕)이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면서 유리(琉璃)와 같은 불세계(佛世界)를 높였으면서도 아직 완염(琬琰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짓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재주가 없는 나에게 거듭 명하여 졸렬한 붓끝을 놀리게 하였다. 내가 비록 못이 먹물로 검게 변한 고사에는 부끄럽고, 서까래와 같은 붓의 꿈을 꾼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장융(張融)이 이왕(二王)의 필법이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은 일에 나름대로 견주면서, 조조(曹操)가 어쩌다가 풀 수 있었던 8자(字)의 찬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설사 세상을 불태운 재가 못을 메우고, 먼지가 휘날려 바다를 뒤덮을지라도 본지(本枝 왕실의 후예)는 번성하여 약목(若木)과 가지런히 번영을 길이 누릴 것이요, 이 풍석(豐石)은 높다랗게 옥초(沃焦)를 마주 보며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손을 모아 절하고 눈물을 훔치며 붓을 잡고서 빛나는 발자취를 따라 명(銘)을 지어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멀어도 보살피지 않음이 없어 / 無遠不照
인연이 있으면 번창하였나니 / 有緣者昌
사원의 공이 드높고 / 功崇淨刹
왕릉의 복이 깊었도다 / 福蔭冥藏
열렬한 우리 영조는 / 烈烈英祖
덕이 명우에 부합하여 / 德符命禹
큰 산 속에 들어간 뒤에 / 納于大麓
이윽고 하토를 차지했도다
 / 奄有下土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 保我子孫
백성의 부모가 되어 / 爲民父母
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 根深桃野
상포에 멀리 나뉘어 흘렀도다 / 派遠桑浦
상여 줄 잡고 영구차 끌고 / 蜃紼龍輴
명당인 능에 새로 모시려고 / 山園保眞
유당의 묘도(墓道)를 개설하고 / 幽堂闢隧
옛 절을 이웃으로 옮겼도다 / 聳塔遷隣
만세토록 애모할 예제(禮制)가 되고 / 萬歲哀禮
천생토록 청정한 인연이 되리니 / 千生淨因
사원은 이로움이 많을 것이요 / 金田厚利
왕손은 길이 봄빛을 누리리라 / 玉葉長春
효손의 깊고 아름다운 덕이 / 孝孫淵懿
천지를 밝게 감동시킨지라 / 昭感天地
봉황이 날고 용이 뛰는 가운데 / 鳳翥龍躍
금규의 상서에 맞게 되었도다 / 金圭合瑞
훤히 살피는 신령에게 요청하여 / 乞靈不昧
복을 구하자 곧장 이르렀나니 / 徼福斯至
선조의 그 은덕 보답하고자 / 欲報之德
불사(佛事)를 성대히 일으켰도다 / 克隆法事
나라의 인재를 가려서 뽑고 / 妙選邦傑
나라의 기술자를 독려하면서 / 嚴敦國工
농사일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 伺農之隙
부처의 집을 완성하였도다 / 成佛之宮
채색 난간에는 봉황이 모여들고 / 彩檻攢鳳
아로새긴 들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 雕樑架虹
둘러친 담장에선 구름이 일어나고 / 繚墉雲矗
단청 벽에는 노을이 한데 녹았도다 / 繢壁霞融
자리한 터전은 앞이 툭 트이고 / 盤基爽塏
접하는 경치도 모두 소쇄하나니 / 觸境蕭灑
쫑긋쫑긋 서 있는 푸른 봉우리요 / 藍岫交聳
퐁퐁 솟아나는 감미로운 샘이로다 / 蘭泉逬瀉
꽃은 봄날 동산에 교태 부리고 / 花媚春巖
달은 가을밤에 높이 떴으니 / 月高秋夜
비록 해외에 있다 해도 / 雖居海外
홀로 천하에 빼어났도다 / 獨秀天下
진은 보덕이라 하고 / 陳稱報德
수는 흥국이라 했다지만 / 隋號興國
왕실의 복이 국력에서 나오는 / 孰與家福
우리의 이 사원만 하겠는가 / 興之國力
불당에는 요란해라 범패 소리 / 堂聒妙音
주방에는 풍성해라 정결한 음식 / 廚豐淨食
정강대왕이 끼치신 교화 / 嗣君遺化
만겁토록 무궁하리로다 / 萬劫無極
아 거룩해라 우리 여왕님은 / 於鑠媧后
효우의 정이 돈독하신 분 / 情敦孝友
형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 致㜫雁行
삼가 용수를 아름답게 하였다오 / 愼徽龍首
나의 문사는 몽당붓이라 부끄럽고 / 詞恧腐毫
나의 글씨는 철주하듯 민망하나 / 書慙掣肘
고래가 사는 바다는 마를지언정 / 鰌壑雖渴
귀부 위의 이 비석은 영원하리라 / 龜珉不朽

[주C-001]대숭복사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로 되어 있다.
[주D-001]무편(無偏) : 편벽됨이 없는 정사를 뜻한다.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넓게 펼쳐진다.〔無偏無黨 王道蕩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불궤(不匱) :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조상의 덕을 닦으면서 :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비패(秕稗) : 쭉정이와 피라는 뜻으로, 가식적이고 미흡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0년에 “야외에서 향연을 베풀면서 궁중의 기물을 모두 갖춘다면 이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고, 만약 갖출 것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벼 곡식 대신에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이 된다.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처럼 되면 임금에게 욕이 돌아갈 것이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면 나쁜 이름이 돌아올 것이다.〔饗而旣具 是棄禮也 若其不具 用秕稗也 用秕稗君辱 棄禮名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제사를 올리면서 :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빈번(蘋蘩) :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진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 빈번과 온조(薀藻)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 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덕의 …… 것이다 :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정치를 하면 향기로워서 신명에게도 감응이 되는 법이니, 서직과 같은 곡식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더위 …… 주고 : 주 무왕(周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게 하며 왼손으로 부축하고 오른손으로 부채질해 주니, 천하 사람들이 그 덕에 귀의했다는 말이 《회남자》 〈인간훈(人間訓)〉에 나온다.
[주D-009]죄인을 …… 것 : 우왕(禹王)이 외출하여 죄인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나온다.
[주D-010]마음속으로 …… 없다 : 대본에는 ‘勞心而扇暍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饗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고운집》에는 ‘豈若’이 ‘莫非’로 되어 있다. 문리로 보아 ‘莫非’가 합당하겠기에, ‘豈若’을 ‘莫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 :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자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기내(畿內)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며 밝게 가르쳤다. 백성들이 밝게 되자 만방의 제후국을 화목하게 하였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라는 말이 나온다. 구족(九族)은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친척을 말한다.
[주D-012]삼보(三寶) :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합칭한 불교의 용어이다. 불보는 부처를 가리키고, 법보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가리키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리킨다.
[주D-013]옥호(玉毫) : 여래(如來) 32상(相)의 하나로, 미간에 있다는 백옥과 같은 흰 털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대광명(大光明)을 발산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비춘다고 한다. 백호(白毫)라고도 한다.
[주D-014]조종(朝宗) : 제후와 백관이 제왕(帝王)을 찾아가서 조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모여 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육도(六度) :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주D-016]섬부주(贍部洲) : 염부제(閻浮提)라고도 한다. 수미산(須彌山) 사대주(四大洲)의 남주(南洲)에 있는 지역으로, 원래는 인도(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長阿含經 卷18 閻浮提洲品》
[주D-017]도사다(都史多) : 범어(梵語) Tuṣita의 음역으로, 보통 도솔천(兜率天)이라고 한다. 도솔천은 불교의 이른바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넷째 층에 있는 하늘로, 외원(外院)과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내원에서 미래불(未來佛)로 이 땅에 하생(下生)하려고 준비하면서 천신(天神)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주D-018]금성(金城) : 신라의 도성을 말한다.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 21년(기원전37)에 지금의 경주(慶州)에 쌓았던 토성이다.
[주D-019]파진찬(波珍飡) : 신라 17관등(官等) 중 넷째 등급으로, 진골(眞骨)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파진간(波珍干) 혹은 해간(海干)이라고도 하였다.
[주D-020]사안(謝安)이 …… 것 : 진(晉)나라 사안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던 고와동산(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는데,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산수 간에 노닐 당시에 항상 가무에 능한 기녀(妓女)를 대동하고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고 한다. 《世說新語 排調》
[주D-021]혜원(慧遠)이 …… 것 :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유유민(劉遺民)과 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를 비롯하여 승속(僧俗)의 18현(賢)과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念佛結社)를 맺은 고사가 있다. 서경(西境)은 서방 정토를 가리킨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주D-022]바라월(波羅越) : 비둘기〔鴿〕를 뜻하는 천축(天竺)의 말로, 여기서는 바라월사(波羅越寺) 즉 합사(鴿寺)를 가리킨다. 달친(達嚫)이라는 나라에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僧伽藍)이 있는데, 이는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든 5층의 사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1층부터 각각 코끼리ㆍ사자ㆍ말ㆍ소ㆍ비둘기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맨 위층의 형태를 취해서 바라월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법현고승전(法顯高僧傳)》 권1에 나온다.
[주D-023]굴린차(崛恡遮) :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있었다는 굴우차(堀忧遮)라는 사원으로, 기러기 절〔雁寺〕이라는 뜻이다. 어떤 비구(比丘)가 파계하여 남해(南海)의 기러기로 태어났는데, 몸집이 3장(丈)이나 되고 사람 말을 하며 끊임없이 《화엄경(華嚴經)》을 외웠다. 남자 불교 신도 한 사람이 보물을 캐러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모래섬에 올라갔다가 그 기러기를 만나 사연을 듣고는 기러기를 위해 사원을 지어 주기로 하고 기러기 등에 타고서 목적을 달성한 뒤에 약속대로 안사(雁寺)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경조(京兆) 숭복사(崇福寺) 승(僧) 사문(沙門) 법장(法藏)이 편집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4 〈풍송(諷誦) 7 중천축일조삼장(中天竺日照三藏)〉에 나온다.
[주D-024]쌍림(雙林)으로 …… 지은 : 김원량(金元良)이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라는 사찰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남조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 선혜대사(善慧大士)가 저택을 희사하여 절강(浙江) 의오현(義烏縣) 운횡산(雲橫山) 아래에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사원 경내에 쌍도수(雙檮樹)가 있는 것을 계기로 쌍림사(雙林寺)라고 칭한 고사가 있다. 이 사원은 뒤에 이름이 보림사(寶林寺)로 바뀌었다. 《續高僧傳 卷25 慧雲傳》 《景德傳燈錄 卷27 善慧大士》
[주D-025]취두(鷲頭) : 여래(如來)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의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취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梵語)를 음역한 것이다.
[주D-026]용이(龍耳) : 감여가(堪輿家)가 풍수지리(風水地理) 면에서 명당으로 꼽는 장지 중의 하나이다.
[주D-027]금계(金界) : 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 혹은 금전(金田)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주D-028]옥전(玉田) : 왕릉(王陵)을 뜻한다. 고대 제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썼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D-029]인산(因山) : 보통 왕과 왕비 등의 장례식으로 국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산의 형세를 그대로 활용해서 능을 만들고, 별도로 봉분을 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30]유씨(游氏)의 …… 놔두었으므로 : 정(鄭)나라 간공(簡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갈 길에 유씨(游氏)의 사당이 있었는데, 자산(子産)이 그 사당을 헐지 말고 피해서 길을 내도록 지시한 고사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2년에 나온다. 또 한 무제(漢武帝) 말기에 노 공왕(魯恭王)이 자기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헐다가 갑자기 종경(鐘磬)과 금슬(琴瑟)의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공사를 중지하고는 그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 수십 종의 고문 경전(古文經傳)을 발굴했던 고사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주D-031]수달다(須達多) : 석가(釋迦)에게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서 희사한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장자(長者) 이름으로,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도 한다. 그가 석가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를 건립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大唐西域記 卷6》 여기서는 김원량(金元良)을 가리킨다.
[주D-032]단지 …… 것이겠는가 : 풍수지리 면에서 명당이기 때문에 왕릉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지, 불교를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사원을 없애려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외국의 국왕이 사원을 모두 없애려고 하였는데, 초제사(招提寺)가 아직 헐리지 않았을 때, 밤에 백마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프게 우는 것〔夜有一白馬 繞塔悲鳴〕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회개하며 중지하고는 초제사를 백마사라고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에 나온다. 청오(靑烏)는 《금낭(錦囊)》과 함께 대표적인 풍수지리서로 꼽히는 책 이름인데, 지관(地官)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033]알고서 …… 되는 : “국가의 이익이 될 일을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충이다.〔公家之利 知無不爲 忠也〕”라는 말이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9년에 나온다.
[주D-034]각각 …… 된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 樂正 雅頌各得其所〕”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5]옷소매 …… 않고 :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마치 장막처럼 이어져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거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5리(里)의 …… 것 : 후한(後漢)의 장해(張楷)가 5리의 지역에 안개가 자욱이 끼게 하는 술법을 잘 구사하였으므로,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가 은거한 홍농산(弘農山)으로 모여들어 저잣거리를 이루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6 張霸列傳 張楷》
[주D-037]왕토(王土) : 왕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경》 〈북산(北山)〉의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의 땅 아님이 없으며,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8]어둠에 …… 하였다 : 왕릉 주위의 형세를 묘사한 것이다. 등공(滕公)으로 불린 한(漢)나라의 하후영(夏侯嬰)이 생전에 땅을 파다가 석곽(石槨)을 얻었는데, 거기에 “가성이 어둠에 묻혔다가 3천 년 만에 밝은 해를 보리니, 아, 등공이 이 방에 거하리로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내게 했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전설이 전한다. 《西京雜記 卷4》 또 제갈량(諸葛亮)이 오(吳)나라 도읍인 건강(建康)에 와서 산천의 형세를 살펴본 뒤에 “종산은 용이 서린 듯하고,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이 거할 곳이다.〔鍾山龍盤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1 吳都形勢》
[주D-039]하구(瑕丘) :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가 거백옥(蘧伯玉)과 함께 산책하다가 죽으면 묻히고 싶다고 한 언덕 이름이다. 《禮記 檀弓上》
[주D-040]양곡(暘谷) : 해 뜨는 곳이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1]기수(祇樹) :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옛날 인도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구입하여 정사(精舍)를 세운 다음 석가모니에게 희사했다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초기의 양대 사원으로 꼽힌다.
[주D-042]곡림(穀林) : 요(堯) 임금을 매장한 곳으로, 제왕의 능을 뜻한다.
[주D-043]교산(喬山) : 황제(黃帝)의 장지(葬地)이다.
[주D-044]필맥(畢陌) :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이 묻힌 곳이다.
[주D-045]접수(鰈水) : 가자미〔比目魚〕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해(東海) 즉 동방을 가리킨다. 《이아》 〈석지(釋地)〉에 “동방에 가자미가 있는데, 짝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 이름을 접이라고 한다.〔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사우(寺宇)를 …… 못하였다 : 땅에서 탑이 불쑥 솟아나온 것처럼 사원을 이전하는 공사가 일단 쉽게 끝나기는 하였으나, 사원다운 면모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그때 부처 앞에 높이 500유순, 가로세로 250유순 되는 칠보로 장식된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서 있었다.〔爾時佛前有七寶塔 高五百由旬 縱廣二百五十由旬 從地踊出住在空中〕”라는 말이 나온다. 화성(化城)은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의 별칭이다. 험난한 여행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D-047]아홉 조정 :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시작해서 47대 헌안왕(憲安王)에 이르는 9대에 걸친 조정을 말한다.
[주D-048]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 : 경문왕이 사원을 중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삼리는 세 가지 이익이라는 말로, 경문왕의 즉위와 관련된 고사이다. 헌안왕이 아들이 없자 김응렴(金膺廉), 즉 경문왕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장녀(長女)보다 소녀(少女)가 아름다웠으나, 장녀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三利〕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장녀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 憲安王》
[주D-049]선대왕(先大王)은 …… 드리웠다 : 경문왕의 출생을 묘사한 말이다. 홍저(虹渚)는 상고시대의 제왕인 소호씨(少昊氏)의 모친 여절(女節)이 무지개〔虹〕처럼 별빛이 화저(華渚)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소호씨를 낳았다는 전설을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宋書 卷27 符瑞志上》 오잠(鼇岑)은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킨다.
[주D-050]옥록(玉鹿)에서 …… 진작시키더니 : 옥록은 검을 뜻하는 옥록로(玉鹿盧)의 준말로, 검술 등 무예에 뛰어난 조예를 보이면서 풍류도(風流道)를 떨쳐 일으켰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풍류(風流)는 〈난랑비(鸞郞碑)〉의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금초(金貂) : 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뜻한다.
[주D-052]용전(龍田) :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밭에 출현한 용이라는 뜻으로, 이미 덕과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현인(賢人)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출현한 용이 밭에 있으니, 임금님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봉소(鳳沼) : 비원(秘苑) 속의 못이라는 뜻으로, 중서성(中書省) 즉 조정을 가리킨다. 봉황지(鳳凰池)라고도 한다.
[주D-054]계옥(啓沃) :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내려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說命上》
[주D-055]팔병(八柄) : 군신(群臣)을 어거하는 작(爵), 녹(祿), 여(予), 치(置), 생(生), 탈(奪), 폐(廢), 주(誅) 등의 여덟 가지 권한을 말하는데, 《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太宰)〉에 그 설명이 나온다.
[주D-056]사유(四維) :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말한다.
[주D-057]기국(杞國)의 근심 : 옛날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天地崩墮〕 자기 몸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하여 침식을 폐하고 걱정을 했다는 기국우천(杞國憂天)의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보통은 쓸데없는 걱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천붕(天崩)의 근심 즉 임금이 죽는 우환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58]사슴의 …… 하였다 :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틈타서 기회를 엿보며 득세하려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변사(辯士)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팽형(烹刑)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진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법도가 해이해짐에, 진나라 이외의 산동 지역이 크게 소란해지면서 다른 성씨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영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좇았는데,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 빠른 자가 먼저 사슴을 잡게 되었다.〔秦之綱絶而維弛 山東大擾 異姓竝起 英俊烏集 秦失其鹿 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라는 등의 말로 화를 모면한 고사가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말미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슴은 제왕의 지위를 뜻한다.
[주D-059]대저(代邸) : 제왕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거하던 곳을 뜻하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황제가 되기 전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거처를 대저라고 칭하였는데,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여씨(呂氏)들을 소탕하고 소제(少帝)를 폐한 뒤에 대왕을 대저에서 영입하여 황제로 추대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漢書 卷4 文帝紀》
[주D-060]화락한 …… 않구나 : 《시경》 〈한록(旱麓)〉에 나온다.
[주D-061]상제가 …… 따른다 :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르기에 그대를 상공으로 세워 이 동하를 다스리게 하노라.〔上帝時歆 下民祗協 庸建爾于上公 尹茲東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수귀(守龜) : 임금이 점복(占卜)에 쓰는 귀갑(龜甲), 혹은 점치는 사람〔卜人〕을 뜻한다.
[주D-063]제(齊)나라를 …… 않았더라면 : 《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64]어찌 …… 뿐이었겠는가 : 왕이 한번 행차하는 데에 따른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지으려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이 든다는 말을 듣고는 “백금은 중등 생활을 하는 열 집의 재산에 해당한다.〔百金 中人十家之産也〕”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한 고사가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 찬(贊)〉에 나온다.
[주D-065]태제(太弟)인 상국(相國) : 원주(原註)에 “뒤에 혜성대왕의 존귀한 시호로 추봉되었다.〔追奉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주D-066]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 형제간의 우애가 돋보인다는 말이다. 영원은 《시경》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67]코끼리가 …… 일 : 성군(聖君)의 치세를 뜻하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코끼리가 감화를 받아서 그를 위해 밭을 갈고, 우왕(禹王)이 회계(會稽)에 묻히자 새가 그를 위해 김매 주었다는 상경조운(象耕鳥耘)의 전설이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4 〈서허(書虛)〉에 나온다.
[주D-068]소가 헐떡거리는 것 : 한(漢)나라의 재상인 병길(丙吉)이, 길에서 싸워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일은 묻지를 않고, 소가 혀를 빼 물고서 헐떡이는 것〔牛喘吐舌〕을 보고는, 음양(陰陽)의 조화가 깨어진 나머지 계절의 기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자세히 물어보았던 고사가 《한서(漢書)》 권74 〈병길전(丙吉傳)〉에 보인다.
[주D-069]천리(天吏) : 사계절을 가리킨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사시는 하늘의 관리요, 일월은 하늘의 사신이다.〔四時者 天之吏也 日月者 天之使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0]십훈(十煇)으로 …… 듯하였다 : 굳이 점을 쳐 보지 않아도 원성왕이 꿈속에서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는 말이다. 십훈은 열 가지의 다양한 햇무리 모양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 모양을 보고 인사(人事)의 길흉을 점쳤다. 구령(九齡)은 주 무왕(周武王)의 꿈 이야기이다. 무왕이 꿈속에서 상제로부터 아홉 개의 치아〔九齡〕를 받았다는 말을 부친인 문왕(文王)이 듣고서, 치아는 연령과 관계된 만큼 90세까지 살 것이라고 해몽하고는, 자기의 100세 수명에서 3년을 무왕에게 주어 93세까지 살게 하고 자신은 97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71]자기 …… 것 : 《효경》 〈성치장(聖治章)〉에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을 패례라고 한다.〔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2]너의 …… 않느냐 :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3]3년 …… 있다 : 그동안 사원의 중수와 관련하여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시간을 아껴서 바로 공사에 착수하고 싶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진 채 정사를 행하지 않자, 오거(伍擧)가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는 무슨 새인가.〔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라고 하니, 장왕이 “3년 동안 날지 않았어도 한번 날면 하늘에 솟구칠 것이요, 3년 동안 울지 않았어도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0 楚世家》 또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3년에 “숙손은 관소에 머무는 시간이 단 하루만 되더라도 그 담장이나 지붕을 손질하여, 그가 떠날 때에는 처음 들어갔을 때와 똑같게 하였다.〔叔孫所館者 雖一日必葺其牆屋 去之如始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4]아이를 …… 잡혔다 : 남조 송 명제(宋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화려하게 세우고는 큰 공덕을 지었다고 자랑하자, 우원(虞愿)이 옆에 있다가 “폐하가 이 사원을 세운 것은 모두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힌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응당 슬피 울며 애통하게 여길 것이다. 그 죄가 탑보다도 더 높이 쌓였을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하겠는가.〔陛下起此寺 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罪高佛圖 有何功德〕”라고 반박한 고사가 전한다. 《南齊書 卷53 良政列傳 虞愿》
[주D-075]건례선문(建禮仙門) : 한(漢)나라 궁궐에 건례문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여 조정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문은 궁궐의 문을 가리킨다.
[주D-076]소현정서(昭玄精署) : 승도(僧徒)를 총괄했던 소현시(昭玄寺)라는 관아를 말한다.
[주D-077]단계(檀溪)의 숙원 : 사원을 중수하려는 소망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고승 도안(道安)이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1년(373)에 양양(襄陽)에서 제일가는 단계사(檀溪寺)를 세우고, 다시 양주 자사(梁州刺史) 양홍충(洋弘忠)으로부터 구리 1만 근을 시주 받아 장륙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한 뒤에, 이제는 숙원을 이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단계사는 금덕사(金德寺)라고도 한다. 《高僧傳 卷5 釋道安傳》
[주D-078]내원(㮈苑)의 전공(前功) : 김원량(金元良)이 예전에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를 세운 공덕을 말한다. 내원은 내녀(㮈女)의 동산이라는 말인데, 범어 āmra의 의역으로, 암몰라원(菴沒羅園)으로 음역된다. 내수(㮈樹)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내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뒤에 마갈다국(摩竭陀國)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비가 되었으며, 양의(良醫) 기바(耆婆)를 낳았다고 한다. 그 동산은 중인도(中印度) 폐사리(吠舍釐 Vaiśālī) 성 부근에 있었으며, 내녀가 불타에게 바치자 불타가 이곳에서 《유마경(維摩經)》을 설했다고 한다. 김원량이 신라 왕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고운이 왕비인 내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出曜經 卷3》 《四分律 卷39》
[주D-079]수(倕) : 수(垂)라고도 한다. 순(舜) 임금의 대신(大臣)으로 공공(共工)이 되어 백공(百工)의 일을 주관하였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80]노(獿) : 고대의 유명한 미장이 이름이다.
[주D-081]초지(初地) :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보살(菩薩)의 십지(十地) 중 첫째 단계로, 일명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주D-082]500년을 …… 하였는데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은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3]번산(樊山)에서 …… 이때에 : 그 당시야말로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룰 좋은 기회였다는 말이다. 옛날에 제왕이 행차할 때 따르는 행렬의 맨 마지막 수레에는 표범 꼬리를 매달아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무창(武昌)의 번산(樊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기에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더니, 그 노파가 “어째서 표범 꼬리를 수레에 매달아 세우지 않느냐.〔何不豎豹尾〕”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欽定淵鑑類函 卷429 豹 1》 번산은 원산(袁山)이라고도 한다.
[주D-084]형산(荊山)의 …… 하였겠는가 : 뜻밖에도 경문왕이 세상을 떠나는 변고를 당하여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85]뛰어난 …… 소유하였다 : 참고로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체격은 뛰어난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주D-086]침문(寢門)에서 …… 것 : 경문왕(景文王)이 죽은 것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로 있을 적에, 매일 세 번씩 침문에 가서 부왕인 왕계(王季)의 안부를 내수(內豎)에게 묻고는 편안하시다는 답변을 들으면 기뻐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87]익실(翼室)에서 …… 일 :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주 성왕(周成王)이 죽었을 때, “남문 밖에 가서 태자 소(釗)를 마중하여, 왕실의 옆방인 익실로 맞아들인 뒤에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逆子釗於南門之外 延入翼室 恤宅宗〕”라는 말이 《서경》 〈고명(顧命)〉에 나온다.
[주D-088]등 문공(滕文公)이 …… 것 : 부왕인 정공(定公)이 세상을 떠나자 맹자(孟子)에게 물어서 거상(居喪)을 극진히 한 일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주D-089]초 장왕(楚莊王)이 …… 것 : 초 장왕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져 있다가 본격적으로 정사를 행하여 마침내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고사를 말한다.
[주D-090]향적반(香積飯) : 중향국(衆香國)의 향적여래(香積如來)가 먹는 음식을 말한다. 향적여래가 이 향적반을 화보살(化菩薩)에게 발우 가득 담아 주고, 화보살이 다시 유마 거사(維摩居士)에게 가득 담아 주어, 비야리성(毗耶離城)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그 향기가 두루 퍼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나온다. 그래서 보통 승려의 음식을 향적반 혹은 향반(香飯)이라고 하고, 사찰의 주방(廚房)을 향적이라고 한다.
[주D-091]근심이 …… 이어받았으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8장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주D-092]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2년 병오년(886), 즉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을 가리킨다. 당의 연호 중에 경력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병(丙)’을 ‘경(景)’으로 바꿔 썼다. 원(元)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은 《춘추호전부록찬소(春秋胡傳附錄纂疏)》 권수상(首上) 논명휘차자(論名諱箚子) ‘역갑을지기 이병위경자(易甲乙之紀 以丙爲景者)’ 조의 해설에 “당 고조의 부친 원제의 이름이 병이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서 갑자를 기록할 때에는 모두 병을 경으로 하였다.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도 경진년에 사당이 이루어졌다고 칭하였다.〔唐高祖父元帝名昞 故唐史紀甲子皆以丙爲景 韓文羅池廟碑 稱景辰廟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3]명(銘)은 …… 마음이다 : 《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솥에 명을 새기는데, 명은 기물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기록하면서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낸다. 선조에게는 모두 미덕도 있고 잘못도 있겠지만, 명의 의리는 미덕만 칭하고 잘못은 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니, 오직 현자만이 할 수가 있다.〔夫鼎有銘 銘者自名也 自名以稱揚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爲先祖者 莫不有美焉 莫不有惡焉 銘之義 稱美而不稱惡 此孝子孝孫之心也 唯賢者能之〕”
[주D-094]월계(月桂)의 …… 하였지만 :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말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힌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95]우구(虞丘)의 비통함 :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주(周)나라 우구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물으니,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고 대답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우구는 고어(皐魚) 혹은 구오자(丘吾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6]계로(季路)의 헛된 영화 : 계로는 공자의 제자 중유(仲由)의 자이다. 자로(子路)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에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 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100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영화일 뿐이요,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7]산서(山西) 출신 : 무인(武人)을 말한다.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라는 속어(俗語)가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신경기전(趙充國辛慶忌傳)〉에 보인다. ‘관동출상 관서출장(關東出相 關西出將)’이라고도 한다. 산은 화산(華山)을 가리키고, 관은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
[주D-098]사술(四術) :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한다.
[주D-099]육경(六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경(樂經)》을 말한다.
[주D-100]이궐(貽厥) :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01]나의 …… 것이요 : 비명을 모두 진실되게 지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채옹(蔡邕)이 곽태(郭太)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부끄러운 느낌을 가졌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유도(有道)는 곽태의 자이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102]나의 …… 것이다 : 손에 쥔 붓끝에서도 힘이 넘쳐 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103]하늘을 …… 재면서 :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빈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답객난(答客難)〉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바가지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 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104]달이 …… 무너져 : 헌강왕(憲康王)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105]훈지(塤篪)를 …… 만났다 : 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이 형과 아우 사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질나발을 불고 중씨는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이 나온다.
[주D-106]멀리 …… 되었다 : 정강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임금의 형과 누이를 각각 태양과 달에 비유하였다.
[주D-107]달 …… 하였다 :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오빠인 정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을 말한다.
[주D-108]신주를 품었다 : 진성여왕이 성군(聖君)이 될 거룩한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다. 《광박물지(廣博物志)》 권10 〈부의 중(斧扆中)〉에 “순(舜) 임금이 석추를 쥐고 신주를 품었다.〔虞舜握石椎 懷神珠〕”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석추를 쥐었다는 것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의 도를 안다는 말이고, 신주를 품었다는 것은 성성(聖性)을 소유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109]채석을 구웠다 : 신라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힘썼다는 말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주D-110]보우(寶雨)의 …… 것이다 : 성스러운 자질과 훌륭한 품행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여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우》는 당(唐)나라 때 달마유지(達摩流支)가 번역한 불경 이름으로, 《현수불퇴전보살기(顯授不退轉菩薩記)》라고도 하는데, 동방의 월광천자(月光天子)가 장차 지나국(支那國)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부처가 수기(授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開元釋敎錄 卷9》 《대운(大雲)》은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만들어진 불경 이름이다. 승려 10인이 《대운경》을 만들어 바치면서 그녀가 하늘의 명을 받아 여제(女帝)가 되었다고 찬양하자, 그 불경을 천하에 반포하고 제주(諸州)에 대운사(大雲寺)를 건립하도록 명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6 則天武后本紀》
[주D-111]못이 …… 고사 : 후한(後漢)의 초성(草聖) 장지(張芝)와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못가에서 붓글씨 연습을 열심히 해서 못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112]서까래와 …… 일 : 진(晉)나라 왕순(王珣)의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처럼 큰 붓〔大筆如椽〕을 건네주자, 꿈을 깨고 나서는 “내가 솜씨를 크게 발휘할 일이 있을 모양이다.〔當有大手筆事〕”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황제가 죽어 애책문(哀冊文)과 시의(諡議) 등을 모두 왕순이 도맡아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王珣》
[주D-113]장융(張融)이 …… 일 : 남조 제(齊)의 장융이 초서에 능하여 항상 자부를 하였는데, 언젠가 황제가 “경의 글씨는 자못 골력이 있긴 하나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卿書殊有骨力 但恨無二王法〕”라고 하니, “신에게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니오라, 이왕에게 신의 필법이 없는 것이 또한 유감입니다.〔非恨臣無二王法 亦恨二王無臣法〕”라고 답변했던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32 張邵列傳 張融》 이왕은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를 가리킨다.
[주D-114]조조(曹操)가 …… 8자(字) : 절묘하게 잘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115]세상을 …… 메우고 : 불교의 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劫火)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주D-116]먼지가 …… 뒤덮을지라도 : 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바닷속에서 또 먼지가 날리게 될 것이라고 성인들이 모두 말하고 있다.〔聖人皆言 海中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전한다. 《神仙傳 卷7 麻姑》
[주D-117]약목(若木) : 고대 신화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서방의 해가 지는 곳에서 자라는 큰 나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상(扶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물론 부상의 뜻으로 쓰였다. 부상은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 이름으로,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한다.
[주D-118]옥초(沃焦) : 전설 속의 큰 산 이름으로, 동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주D-119]가위(迦衛)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로, 석가(釋迦)가 생장한 왕성(王城)의 이름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0]우이(嵎夷) : 해 뜨는 동쪽 바닷가를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1]열렬한 …… 차지했도다 : 경문왕(景文王)이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이 될 자질을 지녔으므로 헌안왕에게 인정을 받아 맏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우(命禹)는 순 임금을 가리킨다. 《논어》 〈요왈(堯曰)〉의 “순 임금도 요 임금에게 받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 임금에게 명하였다.〔舜亦以命禹〕”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요 임금이 신하인 순에게 국정을 맡기기 전에 그를 시험해 볼 목적으로 큰 산속으로 들여보냈는데〔納于大麓〕, 사나운 바람과 뇌우(雷雨)에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서경》 〈순전(舜典)〉에 실려 있다.
[주D-122]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주D-123]상포(桑浦) : 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
[주D-124]보덕(報德) :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1년(560)에 세운 사찰 이름으로, 절강(浙江) 장흥현(長興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 지점에 있으며, 진(陳)나라 주홍(周弘)과 서릉(徐陵)이 각각 지은 보덕사 비(碑)와 탑명(塔銘)이 유명하다.
[주D-125]흥국(興國) : 수 문제(隋文帝)가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때, 45주(州)에 각각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문제가 출생한 곳인 섬서(陝西) 대려현(大荔縣)의 사원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다.
[주D-126]용수(龍首) : 장안(長安)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여기에 미앙궁(未央宮)을 지었으므로 왕궁 혹은 왕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127]나의 …… 민망하나 : 옆에서 팔을 잡아끌며 방해하는 것처럼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는 말의 겸사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령(單父令)이 되었을 때, 관리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옆에서 자꾸 팔을 잡아당겨〔掣肘〕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화를 냄으로써, 참언(讒言)을 잘 듣는 노군(魯君)을 풍자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具備》






계원필경집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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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홍석주(洪奭周)]

《예기》에 이르기를 “단술이 맛이 좋긴 하지만 제사 때에 현주와 명수 같은 물을 윗자리에 놓는 것은 물이 모든 맛의 근본임을 중시하려고 해서이다. 각종 화려한 무늬의 옷감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제사 때에 거친 삼베로 동이를 덮는 것은 부녀자들이 하는 길쌈질의 시초를 돌아보고 귀하게 여기려 해서이다.〔酒醴之美 而玄酒明水之尙 貴五味之本也 黼黻文繡之美 而疏布之尙 反女功之始也〕”라고 하였다. 옛날의 군자(君子)가 그 근본과 시초를 반드시 중하게 여기려 한 것이 이와 같았다.
우리 동방에 문장이 나와서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고운(孤雲) 최공(崔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리고 우리 동방의 선비로서 북쪽으로 중국에 유학(遊學)하여 문장으로 천하에 명성을 떨친 것도 최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최공의 글 가운데 후세에 전하는 것으로는 오직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2부(部)가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이 2부의 서책이 또한 우리 동방 문장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다.
글을 숭상하는 우리 동방의 풍조가 아조(我朝)에 이르러서는 더욱 빛나고 무르익어 집집마다 연허(燕許)와 조유(曹劉)가 배출되면서 시와 문으로 문집을 이룬 것이 집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다. 하지만 최공의 글을 아는 사람은 드물기만 하였다.
내가 일찍이 근대 사람이 편찬한 《동국서목(東國書目)》을 보니 《중산복궤집》이 실려 있기에 널리 구해 보았지만 끝내 얻지 못하였다. 다만 《계원필경》 20권은 우리 집안에서 대대로 소장해 왔으므로 내가 어려서부터 진귀한 글로 알고서 음미해 왔다. 그러나 간혹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비록 박아(博雅)하고 글을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모두 그 글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이 글이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글이 동방에 전하지 않게 된다면, 이는 현주(玄酒)를 태실(太室)에 진설하지 않는 것과 같고, 거친 삼베로 제사용 술동이를 덮지 않는 것과 같게 될 것이니, 어떻게 백성에게 근본을 잊지 말라고 가르칠 수가 있겠는가.
세상에서는 간혹 공의 글이 모두 변려(騈儷) 사륙문(四六文)으로서 옛 작자(作者)의 글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이 중국에 들어가서 활동한 것이 당(唐)나라 의종(懿宗)과 희종(僖宗) 연간이었는데, 당시에 중국의 글이 변려문을 전문으로 일삼았던 것을 감안할 때 공이 그 풍조에 따랐던 것은 원래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공이 지은 글을 보면 왕왕 화려하면서도 들뜨지 않은 것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가령 황소(黃巢)에게 보낸 격문(檄文) 1편만을 보더라도 기운이 굳세고 뜻이 곧으니 결코 교묘하게 아로새기려 한 것이 아니요, 그가 지은 시 역시 평이(平易)하고 우아(優雅)하니 만당(晩唐)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더욱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이는 대개 명수(明水)와 거친 삼베 같은 바탕 위에 단술의 맛과 화려한 옷감의 아름다움을 겸한 것이라고 할 것이니, 이 어찌 더욱 보배로 여겨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공이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군부(軍府)에 들어갔으니 이것만으로도 벌써 당시에 명성을 떨쳤다고 할 것인데, 공은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떠나오면서 마치 헌 신발을 벗어버리듯 하였다. 그 뒤 동방에 돌아와서는 한원(翰苑)에 오르고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거쳐 아찬(阿飡)에 이르렀는데, 아찬은 신라의 대관(大官)이었다. 게다가 현달(顯達)할 길이 바야흐로 끝나지 않았는데도, 공은 또 스스로 산림(山林)의 적막한 곳으로 나아가 배회하며 그 몸을 마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는 대개 그 시대가 모두 뜻있는 일을 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군자(士君子)가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함에 있어서는 출처(出處)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출처에 있어서 그 때를 잃지 않는 것은 현자(賢者)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자가 지은 글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전하지 않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인데, 더군다나 그 글이 저토록 걸출하고 또 동국(東國) 문장의 근본과 시초가 되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호남 관찰사(湖南觀察使) 서공 준평(徐公準平 서유구(徐有榘))은 바로 내가 박아하고 글을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는 자라고 칭한 그 사람이다. 내가 이 글을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얼른 가져다가 교열(校閱)한 뒤에 자기 봉록(俸祿)을 털어 활자로 인쇄해서 수십 백 본(本)을 만들어 널리 전파하려 하면서 “이 글이 동국(東國)에서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아,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백성에게 후덕함을 가르치는 것이요, 현인(賢人)을 표장(表章)하는 것이야말로 백성에게 착한 일을 권면하는 것이다. 서공(徐公)의 마음 씀이 이와 같으니, 그가 호남에서 행하는 정사(政事)가 어떠할지를 또한 알 수가 있다.
이 일이 완료된 뒤에 서공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그대가 바로 이 글을 전하였으니, 지금 한마디 말을 아껴서는 안 된다.”라고 하기에, 내가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최공의 행적의 본말(本末)과 이 글의 고증(攷證) 자료 등에 대해서는 서공의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내가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다.

갑오년(1834, 순조34) 9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풍산(豐山) 홍석주(洪奭周)는 서문을 쓰다.

[주D-001]단술이 …… 해서이다 :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나온다.
[주D-002]연허(燕許) : 당 현종(唐玄宗) 때의 연국공(燕國公) 장열(張說)과 허국공(許國公) 소정(蘇頲)을 병칭한 말이다.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당시에 연허대수필(燕許大手筆)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주D-003]조유(曹劉) : 후한 시대 건안(建安) 연간의 시인인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의 병칭이다.




 
계원필경집 제2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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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祭文)
참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낸 글〔祭巉山神文〕

모년 모월 모일에 신라국입회남사(新羅國入淮南使) 검교창부원외랑(檢校倉部員外郞) 수한림랑(守翰林郞) 사비은어대(賜緋銀魚袋) 김인규(金仁圭)와 회남입신라겸송국신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비어대(賜緋魚袋) 최치원(崔致遠) 등은 삼가 청작(淸酌)과 생뢰(牲牢 희생(犧牲))의 제물을 올려 경건히 참산대왕(巉山大王)의 영전(靈前)에 정성을 바칩니다.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방원(方圓)이 분리되며 처음 청탁(淸濁)으로 나뉠 적에, 융해(融解)하여 강해(江海)가 되고 응결(凝結)하여 산악(山岳)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악으로 말하면, 석산(石山) 위에 흙이 있거나 토산(土山) 위에 돌이 있거나〔石戴土而土戴石〕 하는데, 소석(小石)이 많은 산은 오(磝)라고 하고 대석(大石)이 많은 산은 각(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위엄과 신통을 지닌 산은 드물어서, 모나고 뿔난 것도 없이 입을 다문 채, 그저 퇴부(堆阜)와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 구릉(丘陵)이나 부러워할 모습을 보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오직 이 산의 신령만은 뇌뇌락락(磊磊落落)하여 제학(鯷壑)에 높이 솟아 군림하고, 참참암암(巉巉嵒嵒)하여 경담(鯨潭)을 굽어보며 진압합니다. 위로는 운무(雲霧)가 뒤엉킨 뼈대가 되고, 아래로는 파도가 격동하는 동굴이 됩니다. 아침에는 금오(金烏 )를 영접하기 위해 먼저 나오고, 밤에는 은섬(銀蟾 )을 전송한 뒤에야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므로 드높은 덕이 동하(東夏)와 서이(西夷)에 환히 드러났으며, 현묘한 그 공은 남숙(南儵)과 북홀(北忽)의 손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저 직녀(織女)의 베틀이 하한(河漢 은하(銀河))에 의지했다 하나 이는 한갓 이름만 내세운 것이요, 진제(秦帝)의 다리가 명발(溟渤)에 걸렸다 하나 이는 형체를 막심하게 괴롭힌 것입니다. 매양 편옥(片玉)을 온축했다고 일컬어지니, 어찌 쌍경(雙瓊)의 반열에 끼일 뿐이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내 왕래하는 자들로 하여금 경건히 영령에 의탁하게 하고, 기도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조리 정성을 쏟아 붓게 하였습니다. 빈번(蘋蘩)을 제물(祭物)로 올릴 수도 있는 것이니,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는 말을 믿겠습니다.
지금 김인규 등은 오래전에 중국에 조빙(朝聘)하는 명을 받들었고, 최치원은 처음으로 고국에 빙문(聘問)하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배를 타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앞으로 말고삐도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월(胡越)의 뜻이 다를까 걱정할 것이 없으니, 어찌 이곽(李郭)의 명성이 성대하다고 부끄러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난해 초겨울에 동모(東牟)의 동쪽까지 왔습니다만, 창해(滄海)의 길은 아직도 먼데 현율(玄律 겨울철)은 막바지로 치닫는 때라, 바다 물결이 사나워서 익조(鷁鳥)로도 선박을 띄우기가 어려웠고, 바람 소리가 요란해서 고니도 새장을 떠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고목(刳木)을 해안에 대고, 단봉(斷蓬)을 안정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일(前日)에 단월(端月)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대풍(大風)이 무섭기에, 목을 빼고서 돌아오는 제비를 기다리고, 눈을 돌려서 돌아가는 기러기를 전송했습니다. 바야흐로 무사히 건너갈 날을 기약하며, 거북과 시초(蓍草)가 길한 점괘를 알리면, 곧장 계림(雞林)을 향하여 경쾌하게 개엽(芥葉 일엽편주(一葉片舟))을 띄울 것입니다. 어찌 천리마의 말발굽에 뒤지겠습니까. 송골매의 민첩함과 겨루어 보고자 합니다.
멀리 영봉(靈峯)에 참예(參詣)하려 해도 수궁(壽宮 사당)을 찾을 수는 없고, 푸른 연꽃 같은 봉우리가 거대한 물속에 거꾸로 잠긴 것과 푸른 고둥 같은 산이 맑게 갠 하늘을 높이 떠받친 것만 보이기에, 위령(威靈)이 풍진 밖에 치솟은 것을 우러르고, 영향(影響)이 구름 속에 나부끼는 것을 연상하였습니다. 이에 음식을 정결히 마련하고 비육(肥肉)과 미주(美酒)를 가렸으니, 술맛은 순후(醇厚)하고 희생(犧牲)은 풍성합니다. 삼가 박례(薄禮)를 올리며 감히 음공(陰功)을 바라는 바입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가만히 입김을 불어넣고 은밀히 지시를 내려 파신(波神)이 공손히 두 손을 마주잡고 천후(川后)가 공경히 옷깃을 여미게 함으로써, 초사(楚師)의 남풍(南風)이 건듯 불어와,정백(鄭伯)의 동도(東道)가 활짝 트이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수경(水鏡)의 마음을 비추어 미추(美醜)를 분간하게 하고, 토낭(土囊)의 주둥이를 꿰매어 자웅(雌雄)이 뒤섞이지 않게 하면, 아침에 한만(汗漫)을 관통하고 저녁에 홍몽(鴻濛)을 횡단하여, 반드시 사운(謝運)처럼 석화(石華)를 따러 가고, 장융(張融)처럼 육포(肉脯)를 노래하는 일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함께 모(某)가 물가에 임하여 스스로 살펴보건대, 마치 나무 끝에 오른 것처럼 더욱 두려워지기만 합니다. 생각하면 옛날에 눈빛으로 밤에 등불을 삼고, 얼음물을 저녁에 마시면서, 여러 해 동안 홀로 학업에 힘쓰다가, 오늘에야 비로소 어버이를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차 형주(荊州)의 비단인지 물어보려다가, 외람되게 회계(會稽)의 비단옷을 입게 되었으므로, 총애를 받고는 큰일 날 듯 깜짝 놀라면서〔見寵若驚〕,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받들고 가는 심경〔心如捧盈〕이 되었습니다. 비록 지혜는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어도, 때가 된 뒤에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더군다나 어필(御筆)을 받들고 가는 몸이라서 왕정(王程)이 지체될까 염려됩니다.
지금은 행장(行裝)을 이미 꾸리고 행색(行色)을 엄연히 차렸습니다.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노래 부르며, 배 띄워 순식간에 바다를 편히 건너도록, 오직 대왕의 바람〔大王之風〕에게 부탁드리는 바이니, 일찍 군자의 나라〔君子之國〕에 돌아가서 황제의 명령을 전할 수 있도록 신령의 직분을 소홀히 하지 말기 바랍니다. 상향(尙饗).

[주D-001]경건히 …… 바칩니다 : 대본에는 ‘敬  懸于巉山大王之靈’으로 되어 있는데, 경주 최씨 번역본 원문에 의거하여 ‘敬’ 다음에 ‘致’ 1자를 보충하고 ‘懸’은 ‘懇’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방원(方圓) :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준말로, 즉 천지(天地)를 가리킨다.
[주D-003]석산(石山) …… 하는데 : 《이아(爾雅)》 〈석산(釋山)〉에 “석산 위에 흙이 있는 것을 최외라 하고, 토산 위에 바위가 있는 것을 저라 한다.〔石戴土謂之崔嵬 土戴石爲砠〕”라는 말이 나온다. 한편 《시경》 〈권이(卷耳)〉의 모전(毛傳)에서는 이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해설을 하고 있는데, 학자들은 전사(傳寫)의 잘못으로 보고 있다.
[주D-004]제학(鯷壑) : 제해(鯷海) 즉 제잠(鯷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 즉 발해(渤海)를 가리킨다. 제잠은 동방의 별칭이다. 제명(鯷溟) 혹은 접해(鰈海)라고도 한다.
[주D-005]경담(鯨潭) : 고래가 출몰하는 못이라는 말로, 바다를 형용한 말이다.
[주D-006]현묘한 …… 않았습니다 : 인위가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말이다. 남해의 임금인 숙(儵)과 북해의 임금인 홀(忽)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混沌)의 덕에 감화된 나머지,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눈ㆍ귀ㆍ코ㆍ입의 일곱 구멍을 하루에 하나씩 뚫어 주자, 7일 만에 혼돈이 죽었다는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이다.
[주D-007]진제(秦帝)의 …… 것입니다 : 진 시황(秦始皇)의 석교(石橋)에 대한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진 시황이 동해(東海)에 바윗돌로 징검다리를 놓아 바다를 건너가서 해가 뜨는 곳을 보려고 하자, 신인(神人)이 바위를 바다로 몰고 가면서 채찍질을 하였으므로 바윗돌이 모두 피를 흘리며 붉게 변했다는 이야기가 진(晉)나라 복심(伏深)의 《삼제약기(三齊略記)》에 나온다. 명발(溟渤)은 명해(溟海)와 발해(渤海)의 합칭으로, 보통 대해(大海)를 가리킨다.
[주D-008]마침내 …… 하고 : 대본에는 ‘遂使往來者虔度英靈’으로 되어 있는데, 《동문선(東文選)》 권109 〈제참산신문(祭巉山神文)〉에 의거하여 ‘度’를 ‘託’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9]빈번(蘋蘩)을 …… 믿겠습니다 : 빈번은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지는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빈번과 온조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는 것이다.〔苟有明信……蘋蘩薀藻之菜……可薦於鬼神 可羞於王公〕”라는 말이 나온다. 또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정치를 하면 향기로워서 신명에게도 감응이 되는 법이니, 서직과 같은 곡식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호월(胡越) : 호(胡)와 월(越)의 땅이 각각 북방과 남방에 있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진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훈(俶眞訓)〉에 “다르다는 관점에서 보면 간담도 호월이 되고, 같다는 시각에서 보면 만물이 한 울타리 안에 있다.〔自其異者視之 肝膽胡越 自其同者視之 萬物一圈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1]이곽(李郭) : 이응(李膺)과 곽태(郭泰)의 병칭이다. 동한(東漢)의 명망가인 이응이 낙양(洛陽)에서 고향으로 떠나는 곽태를 전송하면서 둘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갔는데, 이 광경을 보고서 사람들이 신선과 같다고 찬탄하며 부러워했다는 이곽선주(李郭仙舟)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68 郭泰列傳》
[주D-012]동모(東牟) : 등주(登州)의 별칭이다. 당 현종(唐玄宗) 천보(天寶) 1년(742)에 등주를 동모군(東牟郡)으로 개명했다가, 숙종(肅宗) 건원(乾元) 1년(758)에 다시 등주로 바꿨다. 우리나라 및 일본과 왕래하는 중국의 중요한 해항(海港)이었다.
[주D-013]익조(鷁鳥) : 백로와 비슷한 모양의 큰 새인데, 풍랑을 잘 견뎌 낸다 하여 뱃머리에 이 새의 형상을 새겨 걸어 놓았다고 한다.
[주D-014]고니도 …… 두려워하였습니다 : 악천후(惡天候)를 비유한 말이다. 고니는 밖으로 빠져나가 자유의 몸이 되기를 원하겠지만, 날씨가 워낙 사납기 때문에 새장 안을 오히려 안전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주D-015]고목(刳木) : 배의 별칭이다.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의 “나무를 파내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노를 만든다.〔刳木爲舟 剡木爲楫〕”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16]단봉(斷蓬) : 뿌리 없이 날리는 쑥대라는 뜻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주D-017]단월(端月) : 음력 1월을 말한다. 진(秦)나라 때 정(正)을 휘(諱)하여 단(端)을 썼던 데에서 유래한다.
[주D-018]초사(楚師)의 남풍(南風) : 거세지 않은 부드러운 바람이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사광(師曠)이 초나라 군사〔楚師〕가 동원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남방의 노래는 활기가 없어서 죽어 가는 소리가 많으니, 초나라 군사는 필시 아무 공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南風不競 多死聲 楚必無功〕”라고 평한 고사를 인용한 것인데, 고운이 여기서 남풍을 노래가 아닌 바람으로 전용(轉用)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18年》
[주D-019]정백(鄭伯)의 동도(東道) : 중국에서 동방으로 진출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동도는 동도주(東道主)에서 나온 말이다. 춘추 시대에 진(晉)나라와 진(秦)나라가 합동으로 정(鄭)나라를 포위했을 때, 정백(鄭伯)의 신하 촉지무(燭之武)가 진 목공(秦穆公)을 만나 “만약 정나라를 그대로 놔두어, 진(秦)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할 적에 길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하고, 사신들이 왕래할 적에 부족한 물자를 공급하게 한다면, 임금님에게도 손해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若舍鄭以爲東道主 行李之往來 共其乏困 君亦無所害〕”라고 설득하여 포위를 풀게 했던 고사에서 발췌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30年》
[주D-020]토낭(土囊)의 …… 하면 : 폭풍이 성내어 으르렁대지 못하게 조처해 달라는 말이다. 토낭 즉 흙주머니는 동혈(洞穴)의 문학적 표현으로, 토낭의 주둥이는 동구(洞口)를 뜻한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대저 바람은 땅에서 생겨나 푸른 마름꽃 끝에서 살랑거리고, 점점 계곡으로 번져 나가 토낭의 주둥이에서 성내어 으르렁댄다.〔夫風生於地 起於靑蘋之末 侵淫谿谷 盛怒於土囊之口〕”라는 명구가 나온다. 자웅(雌雄)은 자풍(雌風)과 웅풍(雄風)을 말한다. 〈풍부〉에 소위 대왕(大王)의 웅풍과 서인(庶人)의 자풍을 나누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주D-021]한만(汗漫) : 광대무변한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여기서는 바다를 뜻한다.
[주D-022]홍몽(鴻濛) : 해가 뜨는 동방의 들판을 가리킨다. 《회남자(淮南子)》 〈숙진훈(俶眞訓)〉에 “홍몽에 해 그림자를 재는 기둥을 세운다.〔以鴻濛爲景柱〕”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유(高誘)의 주(註)에 “홍몽은 동방의 들판으로 해가 뜨는 곳이다. 그래서 영주를 말한 것이다.〔鴻濛 東方之野 日所出者 故以爲景柱〕”라고 하였다. 영주(景柱)는 구표(晷表)와 같은 말이다.
[주D-023]사운(謝運)처럼 …… 가고 : 남조(南朝) 송(宋)의 사영운(謝靈運)이 지은 시에 “돛을 드날려 석화를 따고, 돛을 매달아 해월을 줍는다.〔揚帆采石華 卦席拾海月〕”라는 표현이 나온다. 《文選 卷22 遊赤石進帆海》 석화(石華)는 바닷가 바위에 붙어 사는 굴을 말한다.
[주D-024]장융(張融)처럼 …… 일 : 항해 도중 재난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남조(南朝) 제(齊)의 장융이 바다에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으나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건어야 자기 본향으로 돌아간다지만, 육포는 또 어떻게 하란 말이냐.〔乾魚自可還其本鄕 肉脯復何爲者哉〕”라고 노래를 지어 부른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32 張邵列傳 張融》
[주D-025]눈빛으로 …… 삼고 : 진(晉)나라 손강(孫康)이 가난해서 등불을 밝힐 기름이 없자 눈빛에 비추어서 책을 읽으며 고학(苦學)했다는 영설독서(映雪讀書)의 고사가 있다. 《初學記 卷2 引 宋齊語》
[주D-026]얼음물을 저녁에 마시면서 : 노심초사하며 애를 태우는 것을 말한다. 《장자》 〈인간세(人間世)〉의 “지금 내가 아침에 명령을 받고 나서 저녁에 얼음물을 마셨으니, 이는 나의 몸속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今吾朝受命而夕飮冰 我其內熱與〕”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D-027]형주(荊州)의 비단 : 청백리(淸白吏)의 봉록(俸祿)으로 마련한 여비(旅費)라는 뜻이다. 진(晉)나라 호위(胡威)가 형주 자사(荊州刺史)로 있는 부친 호질(胡質)을 문후하고 떠날 적에 호질이 비단 1필을 여비로 주었는데, 호위가 무릎을 꿇고서 “대인께서는 청고하신데 어디에서 이런 비단을 얻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大人淸高 不審於何得此絹〕”라고 묻고는, 봉록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서 비로소 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90 良吏列傳 胡威》 또 당(唐)나라 이상은(李商隱)의 시에 “장재의 재주가 못 되어 검각의 명을 새기지는 못하지만, 호위의 뜻을 사모하여 형주의 비단인지 감히 묻고자 합니다.〔雖才非張載 未刊劍閣之銘 而志慕胡威 敢問荊州之絹〕”라는 구절이 나온다. 《李義山文集 卷4 爲柳珪謝京兆公啓2》
[주D-028]회계(會稽)의 비단옷 : 출세를 하여 고향에 돌아갈 때 입는 비단옷이라는 말이다. 한(漢)나라 주매신(朱買臣)이 불우한 환경에서 독실하게 공부하다가 50세의 늦은 나이로 입사(入仕)하여 구경(九卿)의 지위에까지 올랐는데, 무제(武帝)가 그를 회계 태수(會稽太守)에 임명하면서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다니는 것과 같다.〔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漢書 卷64上 朱買臣傳》
[주D-029]총애를 …… 놀라면서 : 《도덕경》 13장의 “사람들은 총애나 치욕을 받으면 큰일 날 듯 깜짝 놀라면서 동요한다.〔寵辱若驚〕”라는 말을 차용한 것이다.
[주D-030]물이 …… 되었습니다 : 《예기》 〈제의(祭義)〉의 “효자는 마치 옥기를 손에 쥔 것처럼,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받들고 가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리하여 조심조심 경건하게 감당할 수 없는 것처럼 하고 잘못되면 어쩔까 하는 자세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孝子如執玉如奉盈 洞洞屬屬然如弗勝 如將失之〕”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주D-031]대왕의 바람 : 송옥(宋玉)의 〈풍부(風賦)〉에 나오는 대왕지풍(大王之風)과 대왕지웅풍(大王之雄風)이라는 표현을 차용한 것이다.
[주D-032]군자의 나라 : 신라를 가리킨다. 당 현종(唐玄宗) 개원(開元) 25년(737)에 성덕왕(聖德王)이 죽고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였는데, 현종이 신라왕 책립 사신으로 형숙(邢璹)을 보내면서 “신라는 군자의 나라로 일컬어지는바, 서기를 잘 아는 것이 중화와 유사하다. 경의 학술이 강론에 능하기 때문에 이 사신에 발탁한 것이니, 그 나라에 가서 경전을 선양하여 대국의 유교의 성대함을 알게 하라.〔新羅號爲君子之國 頗知書記 有類中華 以卿學術 善與講論 故選使充此 到彼宜闡揚經典 使知大國儒教之盛〕”라고 말한 기록이 전한다. 《舊唐書 卷199上 東夷列傳 新羅國》

 
계원필경집 서
교인 계원필경집 서문〔校印桂苑筆耕集序〕[서유구(徐有榘)]

《계원필경집》 20권은 신라의 고운(孤雲) 최공(崔公)이 당나라 회남(淮南) 막부(幕府)에 있을 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응수하여 지은 것으로서,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직접 편집하여 조정에 표문(表文)을 올려 바친 것이다.
공의 이름은 치원(致遠)이요, 자(字)는 해부(海夫)요, 고운은 그의 호(號)이다. 호남(湖南) 옥구(沃溝)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나이 12세에 상선(商船)을 타고 중국에 들어가서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한참 뒤에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가 임기를 마치고 그만두었다.
그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는데,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 고변(高騈)이 회남에 막부를 열고는 공을 불러 도통순관(都統巡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표(表)ㆍ장(狀)ㆍ문(文)ㆍ고(告) 등 모든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황소의 죄를 성토한 격문(檄文)은 천하에 전송(傳誦)되었다. 공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제수되고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에 국신사(國信使)에 충원되어 동방으로 돌아와서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定康王)을 섬기며 한림 학사(翰林學士)와 병부 시랑(兵部侍郞)이 되고 외방으로 나가 무성 태수(武城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때에 가족을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는데, 그의 묘소는 호서(湖西)의 홍산(鴻山)에 있다. 어떤 이는 공이 신선이 되었다고도 하나, 이는 허망한 말이다.
대저 바닷가의 외진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하는 것을 마치 지푸라기 줍듯이 하였으며, 끝내는 문장으로 한 세상을 울리면서 동시(同時)에 빈공(賓貢)한 사람들이 아무도 앞을 다투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참으로 호걸스러운 선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막부에 몇 년 동안 거하면서 고변이 뜻있는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과 여용지(呂用之)와 제갈은(諸葛殷) 등이 허탄하고 망녕되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초연히 인혐(引嫌)하며 떠나갔는데, 떠나간 뒤 3년 만에 회남 지역에서 난리가 일어났고 보면, 공이야말로 또 기미(幾微)를 미리 알고 대처하는 명철한 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그 인격으로 보나 그 문장으로 보나 후세에 전해지도록 해야만 할 것이요 절대로 그대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라왕에게 올린 표문에 의거하면, 이 문집 이외에 금체부(今體賦) 1권, 금체시(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 등이 또 있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계원필경》 20권과 문집 30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다른 것들은 모두 전하지 않고 오직 이 《계원필경집》만 여러 차례 인행(印行)되었는데, 판각(板刻)은 오래전에 잃어버렸고 탑본(搨本) 또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계사년(1833, 순조33) 가을에 내가 호남을 안찰하며 순시하다가 무성(武城)에 이르러 공의 서원을 배알(拜謁)하고는 석귀(石龜)와 유상대(流觴臺) 사이를 배회하면서 유적을 둘러보노라니 감개가 새로웠다. 그때 마침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홍공(洪公)이 이 문집을 부쳐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천 년 가까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져 온 문헌이다. 그대는 옛글을 유통시킬 생각이 없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큰 구슬을 얻은 것처럼 기쁜 한편으로, 시간이 오래 흐를수록 잃어버릴 가능성이 더 커질까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얼른 교정을 하여 취진자(聚珍字)로 인쇄한 뒤에 태인현(泰仁縣)의 무성서원(武城書院)과 합천군(陝川郡)의 가야사(伽倻寺)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아, 명주(名酒)가 있는 동네에는 반드시 두강(杜康)의 이름을 내걸고, 명검(名劍)의 칼날에는 반드시 구야(歐冶)의 이름을 표기하니, 이는 그 근본과 시초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 동방의 시문집들은 이 문집을 개산(開山) 비조(鼻祖)로 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문집이 또한 동방 예원(藝苑)의 근본이요 시초라고 할 것이니, 어찌 이 문집이 닳아 없어지는 대로 그냥 놔두고서 보존하기를 도모하지 않아서야 될 일이겠는가.
공이 동방으로 돌아온 뒤에 저작한 글은 흩어져 없어져서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다만 범궁(梵宮)과 사묘(祠廟) 사이에서 수풀을 헤치고 이끼를 긁어내면 그래도 십여 편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을 분류해 원집(原集)에 붙여서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인쇄해 보고 싶은 생각을 내가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미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역사를 상고해 보면, 당 희종(唐僖宗) 중화(中和) 2년(882, 헌강왕8) 정월에 왕탁(王鐸)이 고변을 대신하여 제도행영도통(諸道行營都統)이 되었고, 5월에는 고변을 시중(侍中)으로 올리고서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파직하였는데, 고변이 병권(兵權)을 잃은 데다가 이권(利權)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표문을 올려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言辭)가 불손하였으므로, 상이 정전(鄭畋)에게 명하여 조서(詔書)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문집에 나오는 〈시중에 올려 준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加侍中表〕〉을 보면, 겸손한 말로 인구(引咎)했을 뿐이요, 격분하거나 발만(勃謾)한 언사는 한마디도 없다. 또 〈선위하는 조서를 내린 것을 감사하는 표문〔謝賜宣慰表〕〉을 보면 “우러러 윤음을 살펴 보건대, 신의 부족한 정사를 매우 가상하게 여기시어 군사들이 단합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고 하시면서〔仰睹綸音 深嘉秕政 師徒輯睦 黎庶安寧〕”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해하고 위로하며 장려해 준 것이 이처럼 은근하고 진지하기만 하였으니, 그렇다면 역사에서 말한 바 “조서를 작성해서 준열히 꾸짖게 하였다.〔草詔切責〕”라고 한 것은, 당시의 실록(實錄)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상고해 보건대, 중화(中和)의 기년(紀年)은 4년으로 끝나는데, 공이 신라왕에게 표문을 올린 연월(年月)을 보면 중화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는 대개 공이 중화 4년 10월에 배를 타고 항해하여 이듬해 봄에 비로소 신라에 도착하였고, 또 그 이듬해에 이 문집을 엮어 올렸던 사정을 감안할 때, 그 1년 전에 광계(光啓)로 개원(改元)한 사실을 어쩌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갑오년(1834, 순조34) 7월 보름날에 달성(達城) 서유구(徐有榘)는 호남포정사(湖南布政司)의 관풍헌(觀風軒)에서 쓰다.

[주D-001]두강(杜康) : 주(周)나라 때에 술을 최초로 빚었다는 사람의 이름이다.
[주D-002]구야(歐冶) : 명검을 잘 만들었던 춘추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월왕(越王)을 위해 담로(湛盧)ㆍ거궐(巨闕)ㆍ승사(勝邪)ㆍ어장(魚腸)ㆍ순구(純鉤)라는 다섯 자루의 칼을 만들고, 초왕(楚王)을 위해 용연(龍淵)ㆍ태아(泰阿)ㆍ공포(工布)라는 세 자루의 칼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D-003]당 희종(唐僖宗) …… 한다 : 《구당서(舊唐書)》 권182 〈고변열전(高騈列傳)〉과 《신당서(新唐書)》 권224 하(下) 〈고변열전〉에 이 내용이 나온다.
[주D-004]황제가 …… 않겠는가 : 당 희종이 정전(鄭畋)에게 조서를 작성하여 질책하도록 한 것은 사실은 고운(孤雲)이 지어 올린 표문 때문이 아니라, 고변의 다른 막료인 고운(顧雲)이 올린 표문이 불손했기 때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55 〈당기(唐紀) 71 희종(僖宗)〉 중화(中和) 2년 5월 조에 보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직위를 올려 시중을 겸하게 하고 염철전운사를 파직하였다. 고변이 이미 병권을 잃은 데다가 다시 이권까지 잃게 되자,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매도하면서 그의 막료인 고운으로 하여금 표문을 작성하게 하여 스스로 호소하였는데, 그 언사가 불손하였다.〔加淮南節度使高騈兼侍中 罷其鹽鐵轉運使 騈旣失兵柄 又解利權 攘袂大詬 遣其幕僚顧雲草表自訴 言辭不遜〕”라고 하고는 그 대략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계원필경집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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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필경 서문〔桂苑筆耕序〕

회남(淮南)에서 본국에 들어오면서 조서(詔書) 등을 보내는 사신을 겸한,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립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首) 1권
오언칠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

신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에 망부(亡父)가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겨를 없이 현자(懸刺)하며 양지(養志)에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실로 인백기천(人百己千)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文物)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정성(情性)을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만, 이것들은 동자(童子)가 전각(篆刻)하는 것과 같아 장부(壯夫)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급기야 외람되게 득어(得魚)하고 나서는 모두 기물(棄物)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뒤이어 동도(東都 낙양(洛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 선주(宣州)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마는〔飽食終日〕,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 한다〔仕優則學〕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 5권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산을 만들 뜻을 더욱 분발하여 복궤(覆簣)의 이름을 내걸고는 마침내 그 지역의 명칭인 중산(中山)을 맨 앞에 얹었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의 군직을 맡으면서부터 고 시중(高侍中)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있는 힘껏 담당하며 4년 동안 마음을 써서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도태(淘汰)하며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披沙見寶〕에 비유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기왓장을 깨뜨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毁瓦畫墁〕보다는 나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계원집》 20권을 우겨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마침 난리를 당하여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이른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는〔饘於是粥於是〕 신세가 되었으므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왕소(王韶)의 말을 가지고 예전의 일을 고증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몸을 움츠린 채 돌아와서 환호작약(歡呼雀躍)하는 이들에게 부끄럽긴 합니다만, 일단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情性)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져서 위에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詩)ㆍ부(賦)ㆍ표(表)ㆍ장(狀) 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화(中和) 6년 정월 일에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소장을 올려 아룁니다.

《계원필경집》 1부 20권
도통순관 시어사 내공봉 최치원 지음


[주D-001]현자(懸刺) : 현두자고(懸頭刺股)의 준말로, 졸음을 쫓기 위해 한(漢)나라 손경(孫敬)이 상투를 끈으로 묶어 대들보에 걸어 매고,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송곳으로 정강이를 찔러 가며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공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002]양지(養志) :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봉양하는 효도라는 뜻으로,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는 등 육신만을 위해서 봉양하는 구체(口體)의 봉양과 상대되는 말인데,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상세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3]인백기천(人百己千) : 남이 백 번 하면 자기는 천 번 한다는 뜻으로,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할 때의 결의를 표현하는 말이다. 《중용장구(中庸章句)》 20장의 “남이 한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백 번이라도 하고, 남이 열 번에 잘 하면 나는 그것을 천 번이라도 할 것이다. 과연 이 방법대로 잘 행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밝아지고, 아무리 유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강해질 것이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라는 말을 전용(轉用)한 것이다.
[주D-004]동자가 …… 일이라서 : 전각(篆刻)은 조충 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새기는 것처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권2 〈오자(吾子)〉에, “동자(童子)의 조충전각과 같은 일을……장부는 하지 않는다.〔童子雕蟲篆刻……壯夫不爲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급기야 …… 여겼습니다 : 과거 급제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그동안 예행 연습으로 지었던 시문들을 모두 폐기 처분했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에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은 생각하지 않게 되고……토끼를 잡고 나면 그물을 잊게 마련이다.〔得魚而忘筌……得兔而忘蹄〕”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배부르게 …… 있었습니다마는 : 《논어》 〈양화(陽貨)〉에 “배부르게 먹고 하루해를 마치면서 마음을 쓰는 곳이 없다면 딱한 일이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벼슬하면서 …… 한다 : 《논어》 〈자장(子張)〉에 “벼슬을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하고, 학문을 하고서 여가가 있으면 벼슬을 한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복궤(覆簣) :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말로 적소성대(積小成大)의 뜻과 같다. 《논어》 〈자한(子罕)〉의 “비유하자면, 산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9]모래를 …… 것 : 남조(南朝) 양(梁)나라 종영(鍾嶸)의 《시품(詩品)》 권1에 “반악(潘岳)의 시는 비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찬란해서 좋지 않은 대목이 없고, 육기(陸機)의 글은 모래를 파헤치고 금을 가려내는 것과 같아서 왕왕 보배가 보인다.〔潘詩爛若舒錦 無處不佳 陸文如披沙簡金 往往見寶〕”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기왓장을 …… 것 :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나오는 말이다.
[주D-011]여기에 …… 먹는 : 공자(孔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의 솥〔鼎〕에 “대부 때에는 고개를 수그리고, 하경(下卿) 때에는 등을 구부리고, 상경(上卿) 때에는 몸을 굽히고서, 길 한복판을 피해 담장을 따라 빨리 걸어간다면, 아무도 나를 감히 업신여기지 못하리라. 나는 여기에 미음을 끓여 먹고 여기에 죽을 끓여 먹어 내 입에 풀칠을 하면서 살아가리라.〔一命而僂 再命而傴 三命而俯 循牆而走 亦莫余敢侮 饘於是 鬻於是 以餬余口〕”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昭公7年》
[주D-012]왕소(王韶)의 …… 것입니다 : 전거 미상이다.
[주D-013]중화(中和) 6년 : 이는 고운(孤雲)의 착오로, 서유구(徐有榘)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계원필경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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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表) 10수
연호의 개정을 하례한 표문〔賀改年號表〕

신(臣) 모(某)는 아룁니다.
금월(今月) 모일(某日)에 진주원(進奏院)의 장보(狀報)를 얻어서 11일에 선하(宣下)된 내용을 살펴보건대, 광명(廣明) 원년(元年)을 고쳐 중화(中和) 원년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대의(大義)를귀성(龜城)에서 펼치시면서 봉기(鳳紀 봉력(鳳曆))의 이름을 바꾸셨으므로, 미호(美號)가 역상(曆象)에 이미 새롭게 된 가운데 환성이 온 누리에 널리 퍼지고 있으니, 신 모는 참으로 뛸 듯이 기뻐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신이 삼가 《예기》 〈왕제(王制)〉를 살펴보건대, 천자가 서쪽으로 순수(巡狩)할 적에 “예를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사계절과 달의 크고 작음을 상고하여 일수(日數)를 바르게 정하고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게 한다.〔命典禮 考時月定日同律〕”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삼추(三秋)의 절후(節候)가 열릴 적에는 만승 천자(萬乘天子)가 지방을 순행하게 마련인데, 지금 서쪽 교외(郊外)에 숙살(肅殺)의 가을바람이 일어나 옥루(玉壘) 지방을 순유(巡遊)하시는 때에 마침내 정삭(正朔)을 거행하는 법도에 따라 개원(改元)의 명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또 《대대례(大戴禮)》에 이르기를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공통된 도리이니,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진다.〔中也者 天下之大本 和也者 天下之達道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익주 자사(益州刺史) 왕양(王襄)이 촉(蜀)의 사인(詞人)인 왕포(王褒)로 하여금 중화(中和)와 악직(樂職)과 선포(宣布)의 시를 지어서 임금의 덕을 노래하게 하였으므로 기구(耆舊)가 지금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우리 성조(聖朝)에서 일찍이 만든 신악(新樂)으로 말하면, 화창한 2월의 절후를 거양(擧揚)하고 조화된 팔풍(八風)의 음악을 퍼뜨려서, 아름다운 이야깃거리를 길이 남기며 창성한 국운(國運)에 걸맞게 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신(聖神) 총예(聰睿)하고 인철(仁哲) 명효(明孝)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보위(寶位)를 계승하여 황유(皇猷)를 떨치는 가운데, 장차 유묘(有苗)를 감화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잠시 적인(狄人)을 피하는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바람이 땅 위에 불기 시작하는 《주역(周易)》의 상사(象辭)를 징험할 수 있게 되었고, 태양이 다시 하늘 복판에 빛나는 아름다운 상서를 여기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년(紀年)에 여유가 있고 현법(懸法)에 결함이 없게 되었으니, 제업(帝業)의 중흥은 멀리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시대를 뛰어넘을 것이요, 민심의 안정은 가까이 원화(元和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와 태화(太和 당 문종(唐文宗)의 연호)의 연대를 이을 것입니다. 동물과 식물이 소생하고 중국과 오랑캐가 열복할 수 있게 하기에 충분하니, 신작(神雀)과 황룡(黃龍)이 나타나는 상서를 압도하게 될 것은 물론이요, 황하(黃河)가 맑아지고 바다가 평온해지는 태평시대의 기대에도 부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 조무래기 반도(叛徒)가 패거리를 지어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잠시 연진(煙塵)의 환란을 일으키다가 곧바로 원야(原野)의 복주(伏誅)를 당하게 될 것이니, 머지않아 서쪽에 행행했던 의장(儀仗)을 되돌리시어 동쪽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하는 예(禮)를 바로 거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지금 이미 일개 부대를 편성하여 나왔으니〔成師以出〕, 반드시 대의(大義)에 입각하여 제대로 행할 것입니다. 몸은 비록 병선(兵船)에 매여 있으나 마음만은 항상 검각(劍閣)을 향해 치달리면서, 승첩(勝捷)을 아뢸 날을 기다리며 태평성대를 길이 축원드리고자 합니다. 초수(楚水)를 굽어보면서 혼이 날아갈 듯하여 조정에 조회(朝會)할 기대를 품고, 진운(秦雲)을 바라보면서 한껏 눈을 들어 태양을 받들 기약을 하고 있습니다만, 영광스럽게 조반(朝班)에 참여하여 행재(行在)에 경하하지도 못한 채 기쁘면서도 떨리고 황공한 심정을 가눌 수가 없기에, 삼가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는 바입니다. 신 모는 참으로 환희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삼가 아룁니다.

[주D-001]귀성(龜城) : 사천(四川) 성도(成都)의 별칭이다. 진 혜왕(秦惠王)의 명을 받들고 장의(張儀)가 성도의 축성 작업을 할 적에 성곽이 자주 무너지곤 하였는데, 무당의 말을 듣고서 강에 올라온 대귀(大龜)의 이동 경로를 따라 축조하여 공사를 완료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귀화성(龜化城)이라고도 한다. 《搜神記 卷13》
[주D-002]옥루(玉壘) : 사천성(四川省) 이현(理縣)의 동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성도(成都)의 대칭으로 흔히 쓰인다.
[주D-003]중은 …… 길러진다 : 《중용장구(中庸章句)》 1장에 나오는 말이다. 《중용》이 예전에는 《예기(禮記)》 속에 편입되어 있었다. 《대대례(大戴禮)》는 한(漢)나라 대덕(戴德)이 전한, 85편의 《예기》이다.
[주D-004]장차 …… 계십니다 :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당 희종(唐僖宗)이 서촉(西蜀) 지역으로 파천(播遷)한 것을 말한다. 유묘(有苗)와 적인(狄人)은 모두 황소를 비유한 것이다. 순(舜) 임금이 복종하지 않는 남방의 유묘씨(有苗氏)를 무력으로 정벌하는 대신에, 문교(文敎)를 펼치면서 방패와 도끼〔干戚〕를 들고 춤을 추자 3년 만에 유묘씨가 귀의했다는 이야기가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나온다. 또 주(周)나라 태왕(大王)이, 적인(狄人)이 침입해 왔을 적에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혼자서 빈(邠) 땅을 떠나 기산(岐山)의 아래에 도읍을 정하고 거주하자, 빈 땅 사람들이 인자한 사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모두 그곳으로 따라가 살았다는 고사가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온다.
[주D-005]바람이 …… 상사(象辭) : 《주역》 〈관괘(觀卦) 상(象)〉에 “바람이 땅 위에 부는 것이 관괘이다. 선왕은 이 관괘를 보고서, 사방을 순행하며 두루 살피고 백성의 풍속을 관찰하여 교화를 베풀었다.〔風行地上 觀 先王以 省方觀民 設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신이 …… 나왔으니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 조에 “일개 부대를 편성하여 나왔다가 적이 강하다는 말을 듣고 물러선다면 대장부가 아니다.〔成師以出 聞敵彊而退 非夫也〕”라는 말이 나온다.

 
 계원필경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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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表) 10수
남만과 통화한 것을 하례한 표문〔賀通和南蠻表〕

신 모는 아룁니다.
신이 진주원의 장보를 얻어 보건대, 입남만통화사(入南蠻通和使) 유광유(劉光裕) 등이 돌아왔다는 것과 운남(雲南)이 통화함과 동시에 국신(國信 국가의 외교 문서)과 금은(金銀)ㆍ기물(器物)ㆍ필단(疋段)ㆍ향(香)ㆍ약(藥)ㆍ말〔馬〕 등을 진헌(進獻)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번에 천위(天威)를 멀리 떨치고 성사(星使)가 신속히 돌아왔는데, 겉으로는 어수룩해도 속으로는 교활한 무리를 교화하여 폐백(幣帛)을 올리고 주옥(珠玉)을 바치는 예의를 다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덕이 이미 만고(萬古)에 뛰어나고 그 은혜가 사이(四夷)에 흡족하게 내렸으니, 신 모는 참으로 환희하며 머리를 조아려 하례드립니다.
삼가 살피건대, 성주(聖主)가 순수(巡狩)의 길흉을 점복(占卜)하며 통화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자, 원인(遠人)이 귀화(歸化)하며 의리를 범하는 것이 상서롭지 못함을 스스로 알았습니다. 이는 권도(權道)를 따르는 일을 위주로 하고 치욕을 참는 덕을 바탕으로 하여, 말은 모두 메아리처럼 응답할 만하게 하고 예(禮)는 원칙을 위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만(南蠻)은 일찍부터 엉뚱한 생각을 품고서 오랫동안 변방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원(中原)을 건드려 성가시게 하면서 유독 순종하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여러 군진(軍鎭)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남방 정벌의 전역(戰役)을 일으키려고도 하였지만, 우리의 빈틈을 노릴까 염려가 되기도 하였고 우리의 혼란을 이용하려는 그들을 방비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봉황(鳳凰)이 조서(詔書)를 입에 물고 먼 지방으로 날아가자마자, 이리의 마음을 품고 있던 무리가 성덕(聖德)에 감화하여 길이 황제의 풍화(風化)에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고대의 성군(聖君)을 본받아 군림하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허물을 감춰 주고 결점을 숨겨 주는 것으로 묘한 계책을 삼고, 군대로 희롱하고 무력으로 더럽히는 것을 좋은 경계로 삼고 계심을 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해(利害)가 걸린 고장임을 분명히 알고 기미(羈縻)하는 방도를 잃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요복(要服)이 조공을 바치게 하고 빈려(賓旅)가 귀화하게 하였으니, 마침 다사다난한 이때를 당하여 벌써 태평시대의 조짐이 보이게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저 표신(驃信)은 실로 구봉(狗封)의 족속인데도 오히려 혼미함을 고쳤습니다. 그렇다면 역적 황소(黃巢)야말로 개미를 모은 것과 같은 무리이니, 이를 박멸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머지않아 대첩(大捷)의 소식을 올리고 길이 중흥(中興)을 축하하게 될 것이니, 반드시 요순(堯舜)의 수레를 앞에서 몰고 우탕(禹湯)의 수레를 뒤에서 끌 수 있을 것이요, 오악(五岳)을 정원으로 삼고 사해(四海)를 연못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 생각이 언제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교주(交州)에서 외구(外寇)를 막고 촉군(蜀郡)에서 군대를 통솔할 적에 처음에는 마원(馬援)처럼 정벌하려는 형세를 전개하다가 뒤에는 수하(隨何)처럼 설득하려는 기략(機略)을 베풀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러러 황제의 위엄을 의탁하여 장수의 방략(方略)을 대략 펼칠 수 있었는데, 오늘을 맞아 애초에 다짐했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기만 합니다.
신이 번진(藩鎭)을 지키는 직임의 한계가 있어서 행재(行在)에 나아가 경축할 수는 없습니다만, 성은(聖恩)을 연모하며 기쁘고 떨리는 지극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기에, 삼가 표문을 받들어 하례하는 말씀을 올립니다. 신 모는 참으로 환희작약(歡喜雀躍)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삼가 아룁니다.

[주D-001]표신(驃信) : 남만(南蠻) 왕의 별칭이다.
[주D-002]구봉(狗封) :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 때 견융(犬戎)이 난리를 일으키자, 제곡이 이를 토벌하는 자에게 미녀를 처로 주고 300호(戶)의 땅에 봉해 주겠다고 하였는데, 제곡의 개〔狗〕인 반호(盤瓠)가 견융의 우두머리를 죽이자, 약속대로 그에게 미녀를 주고 땅을 봉해 주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 구봉씨(狗封氏)의 자손이 후대에 남만의 족속이 되었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94 狗》
[주D-003]마원(馬援) : 후한(後漢)의 복파장군(伏波將軍)으로, 멀리 교지(交趾)를 정벌하고 반란을 진압한 뒤에, 두 개의 구리 기둥을 세워서 한나라의 영토임을 알렸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한나라의 교지가 당나라 때에는 교주(交州)가 되었다.
[주D-004]수하(隨何)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위해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를 설득하여, 초(楚)나라 항우(項羽)를 배반하고 한(漢)나라에 귀순하게 하였다. 《漢書 卷34 黥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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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왕을 위박에 제수한 것을 하례한 표문〔賀建王除魏博表〕

신 모는 아룁니다.
신이 진주원의 장보를 보건대, 2월 22일에 건왕(建王)에게 은제(恩除)를 내리시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재가하고 태보(太保)를 겸하게 하며 위박 절도사(魏博節度使)에 임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성(維城)의 훌륭한 덕행은 열토(列土)의 특별한 영광으로서, 도성 밖의 근심을 분담하는 것이야말로 온 세상의 경사를 표하는 것이라고 하겠기에, 신 모는 참으로 환희하며 머리를 조아려 하례드립니다.
신이 듣건대, 주(周)나라에서는 이를 인지(麟趾)로 노래하였고, 한(漢)나라에서는 견아(犬牙)에 비유하였으니, 각 지방에는 종친 중의 현자(賢者)를 두어야만 하늘의 총애와 위임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건왕은 선(善)을 닦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으니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글을 좋아하여 이미 재주가 많다는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표문을 올려 시험해 보기를 청한다 하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 업(鄴)은 상진(上鎭)으로 일컬어지고 위(魏)는 대명(大名)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반석과 같은 종국(宗國)이 되게 할 목적으로 마침내 여기에 분봉(分封)하는 은총을 내리셨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어찌 장수(漳水) 물가의 민중만 멀리 그 은위(恩威)를 입을 뿐이겠습니까. 길이 온 누리의 백성들이 모두 덕업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번진을 지키는 직임의 한계가 있어서 행재에 나아가 경하하지는 못합니다마는, 참으로 기쁘고도 황공한 심정을 가눌 수 없기에 삼가 표문을 받들어 하례드립니다. 신 모는 참으로 환희작약하며 머리를 조아려 삼가 아룁니다.

[주C-001]건왕(建王) : 당 희종(唐僖宗)의 황자(皇子) 이진(李震)의 봉호(封號)이다.
[주D-001]유성(維城) : 황자(皇子)를 뜻하는 말이다. 《시경》 〈판(板)〉의 “종자는 나라의 성이다.〔宗子維城〕”라는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주D-002]인지(麟趾) : 주 문왕(周文王)의 자손이 훌륭하다는 내용을 노래한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인 〈인지지(麟之趾)〉의 준말이다.
[주D-003]견아(犬牙) : 위 아래가 서로 들쭉날쭉하여 어긋난 개의 이빨을 말한다. 《사기(史記)》 권10 〈효문본기(孝文本紀)〉에 “고제가 자제들을 왕으로 봉하면서 그 땅이 마치 개의 이빨처럼 서로 엇갈리게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반석과 같은 종국(宗國)이라고 하는 것이다.〔高帝封王子弟 地犬牙相制 此所謂磐石之宗也〕”라는 말이 나온다.

 
김형수=아버지의 신명과 삼촌들의 자극이 이제 문자를 얻어가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고은=아 참, 고향 옥구의 바닷가 일대나 서해의 고군산군도에는 최치원의 출생설이 파다하지. 이것이 나에게 문자 운명의 첫 대본인지 모르겠네.

김형수=신라 최치원이 그곳에서 났습니까?

고은=조선 정조 연간의 학자 서유거(徐有渠)와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능화(李能和)는 고군산군도의 한 섬이 신라 하대의 최치원이 태어난 곳이라고 못 박고 있다네.

김형수=저는 경주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고은=본이 경주이지. 이런 주장은 그밖에도 최치원이 두주(杜州) 문창(文昌)에서 출생했다는 설로도 뒷받침되고 있는데 이 두 곳이 다 고군산을 속도(屬島)로 삼은 지역이라네. 실제로 옥구군 미면 서쪽 바닷가에는 식민지 왕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일본 규슈의 대규모 농업 야망가들이 개척한 간척지 한 지역이 문창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어왔는데 해방 직후 그곳에 세워진 문창국민학교라는 이름도 거기에 연원을 두고 있어.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을 기리는 그의 연고지로 된 것이지. 실제로 옥구군 바닷가에는 언덕 위에 자천대(紫泉臺)라는 오래된 정자가 있는데 그곳이 어린 최치원이 글 읽던 곳이라 전해오고 심지어는 거기서 달 밝은 밤에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중국 동해안까지 들려서 중국 아이들이 그 글 읽는 소리로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김형수=그러고 보니 책 읽는 소리가 중국 쪽으로 밀려가려면 발원지가 경주보다 서해 어디여야 맞겠어요.

고은=어떤 기록으로는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이 문창골의 부임지로 와서 아들을 낳은 것을 누차 말하기도 하지. 이 고을 이름이 나중의 시호가 된 것인지 몰라. 이런 전설은 고군산군도의 한 섬인 선유도나 신시도에까지 최치원의 신선(神仙) 전설로도 남아 있어. 신시도 원영대도 최치원이 시를 읊은 곳이라 하지. 육지와 지척에 있는 내초도라는 작은 섬에도 최치원이 모래톱에 글을 쓰며 공부했다는 전설이 있어.

김형수=재미있는 전설이 많았네요. 한데, 신라 사람이 구백제의 골짜기로 왔으면 그다지 신분이 높지는 않았겠습니다.

고은=경주 최씨라는 최치원의 본을 가진 사람들은 내리닫이 육두품이지. 고대 핏줄은 7대까지가 한 가족단위였어. 신라의 지배구조에서 오랫동안 철칙이 되어온 골품제 혈통으로 볼 때 영영 변경될 수 없는 밑바닥 계급이지. 그런데 그 말기에는 바로 이 골품제의 신분 고착이 지극히 불안한 상태로 되었어. 8세기 150년간 왕이 20번이나 바뀌지. 오랫동안 토지도 지위도 없는 육두품은 지배계층의 하수 노릇만 해오다가 이런 말기에 이르러서야 사회체제의 분열과 지방 호족세력의 위협과 함께 그 세력이 슬슬 고개를 들었을 때였지만 그것이 혈통의 전통을 송두리째 극복할 수는 없었지. 물론 이 신라 하대에 이르러 그간의 왕실 불교에 반기를 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재야적 선불교가 할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자장율사의 호국주의 국통(國統) 불교의 근성을 뛰어넘지 못한 것과도 엇비슷하지. 선은 제도적 인과 중심의 업보종교가 아니라 수행하면 성불한다는 탈제도적 개인종교였어.

김형수=최치원이 유불선의 뿌리이며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었다는 말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건가 봅니다.

고은=최치원의 아버지는 육두품이라는 가망 없는 소외계층으로서 구백제 지역 바닷가 수자리를 사는 사람이었어. 장남은 장래의 보장 없는 자신의 처지대로 소년 시절에 입산 삭발의 출가승이 되고 차남 치원은 해외로 보내지게 되지. 당나라에 건너가는 유학생은 승려들의 유학과는 달리 당의 숙위제(宿衛制)의 대상인데 중국에 대한 왕족 귀족의 인질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그래서 처음에는 왕자나 왕족의 자제들밖에 갈 수 없었어. 김운경(金雲卿) 등 60여명이 그 숙위유학으로 외국인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서 장원급제를 했지. 그런데 점점 이 엄격한 숙위제가 풀어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왕족 귀족 출신의 자제들이 낯선 당나라에 가기를 싫어하자 그들 대신 신분이 낮은 우수한 청소년들이 그 어려운 공부에 대신 선발되었지.

김형수=출구가 서쪽으로 열려 있었네요? ‘초추’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서쪽으로는 울 치지 마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쪽이다.” 이 구절이 마치 최치원 아버지의 심정 같아서요.

고은=최치원의 아버지는 거의 한평생을 서해 파도소리만 들어야 하는 수자리 삶이라 바다 건너 어떤 세계에의 야망을 제 아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숙위유학의 기회를 기필코 만들어내어 제 아들을 보낸 것이지. 최치원의 총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그 열두 살짜리를 거의 무리로 보냈어. 너 10년 내 장원 아니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호통을 쳐 보냈지. 본국에의 차디찬 절망이 외국에의 뜨거운 희망으로 된 것이지.

김형수=식민지 시대의 동경 유학쯤, 지금의 미국 유학쯤 되는데, 발품으로 이동하던 시대에 삶의 무대가 어찌 그리 클 수 있는지. 최치원을 어느 정도의 문재(文才)로 봐야 합니까?

고은=최치원은 신라 하대의 삼최(三崔)의 하나였어. 나중에 두 최인 최신지(崔愼之)는 고려 왕건의 사부가 되고 최승후는 후백제 견훤의 군사(軍師) 겸 문관이 된 나머지 몰락하지. 그 무렵의 천재인 김가기는 아예 당나라 선술에 몰입하다가 귀국과 재출국을 반복하고 김이어(金夷魚)도 도교 신선이 되었어. 그때까지 한반도 남북조시대의 북조 발해 숙위유학생이 장원을 계속 독점한 나머지 신라는 자존심이 몹시 상한 상태였는데 모처럼 최치원이 빈공과 장원을 하게 되어 신라사회 전체가 갈채를 보냈어. 

김형수=그래놓고도 난세를 만나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산과 강, 바다를 떠돌았다고 하는데, 그런 유랑 이미지가 선생님의 한때와 겹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고은=그런 그가 만당(晩唐)시대 당나라에서 한동안 촉망을 받다가 암살과 배제의 쓴맛을 보고 당나라 황제 희종(僖宗)의 윤허를 얻어 신라의 관직까지 받아왔어. 신라 관직을 당이 직접 임면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본국에 돌아와 처음의 환영 다음에는 본국 수구세력에게 철저하게 소외되지.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그의 포부는 결국 무효였지. 나중에 조선시대 퇴계나 율곡으로부터 망불자(妄佛者)로 낙인찍히고 도학(道學)과는 상관없다고 배척당함으로써 고려 초기의 추존(追尊)말고는 미래로부터도 불운의 대상이 되고 말았어. 이런 최치원의 생애 첫 걸음이 바로 그 아버지의 임지인 내 고향에서 시작된 것이네.

김형수=군산 열도에서 이미 옛 거장의 기를 받으셨군요?

고은=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치원의 이야기를 통해서 문자에의 막연한 친연화가 이루어진 셈이었네.

김형수=그때의 문자는 물론 한자였지요?

고은=그렇지. 한글이야 글 축에도 들 수 없었네. 내 서당 학동생활도 상당한 기간 반농반학(半農半學)으로 지속되었지. 지금도 기억나는데 내가 처음으로 잿정지 서당으로 가는 날 아침 두루마기 차림의 아버지를 따라 나도 명절 옷을 차려입고 앞산 선영의 고조, 증조의 산소에 가서 그 시향(時享) 조상의 혼령한테 자손의 글공부를 고(告)하는 배례를 했어. 당신의 자손이 글을 시작하나이다라는 인사였어. 조선 유교는 고대, 중세와 달리 조상과 자손을 너무 짙은 색감으로 연결 고착시켰어. 조상에의 예의가 종교였지. 그것이야말로 나의 이데올로기 유전자까지 되고 말았어. 먼 곳에 갈 때나 먼 곳에서 돌아올 때도 조상의 산소나 집 뒤란의 사당에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서 부모나 웃전 어른에게 인사를 했지.

김형수=모든 존재는 다 많은 서사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장’ 안에서 사는 건가 봅니다.

고은=과연 사람마다 달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도 한 개아의 고유명사이기 전에 조상의 승인을 받아야만 온전한 인간의 명칭으로 확정되었다네. 조상에게 바치는 고기를 담은 제기(祭器)를 상형한 문자가 ‘名’이지. 심지어 이런 신성한 이름을 여자가 가졌을 경우라면 그 이름을 남자에게 말한다는 것은 몸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어.

김형수=명명(命名)한다는 말 속에 그런 뜻이 숨어 있었습니까?

고은=이런 이름이야말로 상형의 직접성으로는 ‘어둠 속의 소리’를 뜻하기도 하지. 해가 진 저녁이나 밤에는 눈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으므로 입을 벌려 소리로 부를 수 있단 말이네. 그러므로 존재를 암흑 속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이름의 의미가 되겠지. 

김형수=문자란 결국 어둠 속의 소리를 시각화시킨 거로군요?

고은=인간이 문자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먼저 표시할 수 있다는 원초적인 사명으로부터 문자와 문화가 열리는 뜻에 닿는 것인지 몰라. 물론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게 있는 일상의 소리 이름이야 굳이 문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신성한 삶의 부호임에 틀림없으나 문자가 본디 통치자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권력의 표상이었던 사실의 한쪽에서는 문자란 인간 자신의 이름을 쓴다는 신성행위로서도 의미심장하지.

김형수=그러니까 선생님이 자연적인 ‘소리’의 시대를 마감하고 ‘글’의 시대를 시작하는 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고은=나는 몇 해 동안 세 군데의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 <동몽선습> 그리고 <소학> <논어> 등을 차례로 공부했네. 1938년부터 1942년까지였어. 도중의 한두 해 몇 달 동안은 서당을 중단한 채 집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독학자습을 하기도 했지.

김형수=1933년생이시니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만난 거네요?

고은=<천자문>은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하지. 처음 간 서당의 훈장은 늙은 홀아비였어. 이를테면 사궁(四窮)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분이었어. 사궁의 첫째가 늙은 홀아비, 다음이 늙은 과부, 셋째가 고아, 넷째가 자식 없는 노인이지. 늙는다는 것이 유가(儒家)의 정서로는 어른이지만 생존의 실감으로는 가장 곤궁한 상태이지. 이 늙은 훈장은 <천자문>을 늘 백수문이라고 불렀어. 그 자신도 백발상투를 틀고 있었는데 교육자이기보다 방죽가의 초가삼간 주인답게 틈만 나면 물가에 나가 낚싯대를 놓고 앉아 있기를 좋아했어. <천자문>은 전해오는 바로는 양무제가 주흥사라는 선비에게 하명해서 지은 4자시(四字詩) 250개라고 하지. 김성동의 <천자문> 풀이가 매혹적이지. 이것을 단 하룻밤에 다 지어내고 난 다음날 새벽에 보니 지은 사람의 머리가 백발로 변해 있었다 해서 백수문이라 하는 모양이야.

김형수=<천자문>은 입문서인데, 창작의 고통을 전해주는 야사도 그렇고, 백발상투에 낚싯대를 드리운 훈장님의 존재도 그렇고, 탈속적(脫俗的) 지성의 이미지가 아주 어울립니다.

고은=그런데 이 <천자문>은 처음부터 ‘철수야, 바둑아’로 시작하는 게 아니야. 바로 하늘과 땅이고 우주야. 이것은 그 다음 공부인 <동몽선습> 첫머리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유일사상을 내세우는 차원과도 달라. 바로 세계이고 우주지. 과연 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天地玄黃)”는 주역 곤괘의 ‘천지이지황(天地而地黃)’을 그대로 들어다놓은 것이네. 이런 4자시로 한 자도 반복되지 않게 1천자의 철리(哲理)를 완성한 것이 <천자문>인데 이것은 공부의 시작이지만 끝내는 공부의 궁극이기도 한 셈이지. 끝에 이끼야(也)가 매우 시사적이지 않는가.

김형수=<천자문>이 자연으로 시작해서 인륜으로 나아갔다는 점도 사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글쓰기니까요. 맨 끝에 교훈적인 문장을 장식하는 어조사 ‘야(也)’는 여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모성과 생산을 뜻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고은=<천자문> 공부란 맨바닥에 앉아서 상반신을 끄덕이며 큰소리를 내어 익히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다 암기하게 되지. 그래서 <천자문> 한 권 읽기를 마치면 책을 뒤에 놓고 돌아앉아 하늘 천부터 맨 끝의 이끼 야(也)까지 구성지게 외우는 것이 시험이야. 이때는 어머니가 찰떡 한 말을 해서 시루째나 떡판을 머리에 이거나 아버지가 지게에 지고 와서 훈장을 비롯해 여러 학동들을 먹인다네. 물론 훈장에게는 한 달에 한 번씩 쌀이나 돈으로 학자금을 바쳤어. 부자한테는 훈장을 사랑방에 맞아놓고 아들을 가르치게 하는 독선생 사례도 있지만 나는 다섯 명이나 일곱 명의 학동들과 함께 배웠어. 여섯 살짜리도 열일곱 살짜리도 있었지.

김형수=그 다섯 명이나 일곱 명이 다 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한 시인의 탄생이 천수답 마른 물꼬에서 미꾸라지가 승천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재래 농촌의 집합주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에서 독립하여 고독한 행보를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매우 궁금해집니다.

초추初秋
아우야 서쪽으로는 울 치지 말아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쪽이다

돌아온 아우야
살아가면서
몇 잔 술에 취하여
가을이 오면 이 땅에는 들이 많아진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서쪽
나뭇가지 사이 서쪽이 무한하다

이제 이 세상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도 저문다

아우야 네가 돌아와
빈 마당 울을 치고
다시 살아가려는 아우야
이제 너에게 맡기고
오늘처럼 나는 가려고
어둑어둑한 서쪽으로 환히 길을 찾는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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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공은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 가서 노력할지어다.”라고 하였다.
공은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과거에서 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다. 그 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때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공을 종사순관(從事巡官)에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와 징병(徵兵)하고 고격(告檄)하는 글 등이 모두 공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공의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나이 28세 때에 희종이 공에게 어버이를 찾아뵈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조서(詔書)를 지닌 사신의 자격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헌강왕(憲康王)이 공을 그대로 머물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를 제수하였다. 공 자신도 중국에서 배워 얻은 것이 많았으므로 귀국해서 가슴에 쌓인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퇴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太山郡) - 지금의 태인(泰仁)이다. - 태수(太守)가 되었다.
당 소종(唐昭宗) 경복(景福) 2년(893)은 바로 신라 진성왕(眞聖王) 7년에 해당한다. 공이 그때에 부성군(富城郡) - 지금의 서산(瑞山)이다. - 태수로 있다가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당나라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해마다 기근이 들면서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사명(使命)을 받들고 당나라에 간 적이 있다.
진성왕 8년(894)에 공이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에 임명하였다.
공이 서쪽으로 가서 당나라에서 벼슬할 때나 동쪽으로 고국에 돌아왔을 때나 모두 어렵고 험한 운세를 만나서 걸핏하면 낭패를 당하곤 하였으므로, 스스로 불우한 신세를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할 뜻을 지니지 않았다. 그리하여 산림(山林) 아래나 강해(江海)의 주변에서 소요하고 자적하며, 대사(臺榭)를 짓고 송죽(松竹)을 심는가 하면 서사(書史)를 벗 삼고 풍월(風月)을 노래하였는데, 예컨대 경주(慶州)의 남산(南山)과 강주(剛州)의 빙산(氷山)과 합천(陜川)의 청량사(淸涼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雙溪寺)와 합포(合浦)의 월영대(月影臺) 같은 곳은 모두 공이 노닐던 곳이었다. 그리고 최후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伽倻山)에 은거하여 마음 편히 노닐면서 노년을 보내다가 생을 마쳤다.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 / 我聞海上三金鼇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 一箭射破金門策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최치원의 《사륙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라고 기재하고, 그 주(註)에 “최치원은 고려인(高麗人)으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상국(上國)에 이름을 떨친 것이 이와 같다. 또 문집 30권이 세상에 유행한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문창후(文昌侯)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주C-001]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말한다. 본 《고운집》에 실려 있는 내용은 《삼국사기》에 실린 열전을 전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전재하지는 않고, 간간이 삭제하거나 보충한 부분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의 내용, 불교도와 친분을 나눈 내용, 고려의 태조를 은밀히 도왔다는 내용 등은 삭제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들어 있지 않은 〈격황소문(檄黃巢文)〉의 내용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등에서 따다가 보충해 넣었다. 또한 문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 수정한 부분도 종종 보인다. 《삼국사기》의 열전 부분은 기존의 번역서가 많이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병도(李丙燾)의 《국역 삼국사기》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역주(譯註)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상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
[주D-001]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한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 味呑寺南 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하였다.
[주D-002]부친 : 고운의 아버지는 이름이 견일(肩逸)이며, 일찍이 숭복사(嵩福寺)의 창건에 참여하였다.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이르기를, “김순행(金純行)과 나의 아버지 최견일이 일찍이 이곳에서 일을 하였다.” 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D-003]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 : 율수현은 현재 중국 강소성(江蘇省) 율양현(溧陽縣)이고, 위(尉)는 도적을 잡고 죄수를 다루는 관직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2쪽》
[주D-004]고변(高騈) : 당나라 말기의 문신으로 중국 섬서성 유주인(幽州人)이다. 글을 좋아하여 선비를 친구로 삼았는데, 여러 차례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황소의 난을 진압할 때 진격을 늦추자 싸울 의지가 없다고 하여 중도에 병권을 빼앗겼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3쪽》 또 ‘騈’의 음은 ‘변’과 ‘병’ 두 가지인데, 이병도는 ‘변’으로 읽었고, 북한본ㆍ이재호본ㆍ신호열본에서는 ‘병’으로 읽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본에서도 ‘병’으로 읽었다.
[주D-005]그중 …… 떨어졌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추가해 넣은 것이다.
[주D-006]태산군(太山郡) :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이다. 백제의 대시산군(大尸山郡)이었다. 현재 정읍시 칠보면에는 최치원을 배향한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있다. 이병도는 현재의 부여군 홍산면 일대로 보았으나(《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83, 676쪽》) 이는 잘못된 것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5쪽》
[주D-007]부성군(富城郡) : 신라 웅주(熊州)에 속한 군의 하나로, 현재의 서산시(瑞山市)이다. 고려 인종 때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이 관호를 없앴다가 충렬왕 때 서산으로 고쳤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313쪽》
[주D-008]진성왕 …… 임명하였다 : 《삼국사기》에 없는 내용을 편자가 임의로 보충해 넣은 것이다.
[주D-009]강주(剛州)의 빙산(氷山) : 강주는 지금의 영주(榮州)로, 고려 성종 때 영주에 강주 단련사(剛州團練使)를 두었다. 빙산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이다. 의성은 당시에 영주 소관 하에 있었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주D-010]그리고 …… 마쳤다 :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열전(崔致遠列傳)〉을 보면, “모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를 맺었다.〔與母兄浮屠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최치원이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것은 편자가 최치원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주D-011]나은(羅隱) : 833~909. 자는 소간(昭諫), 자호는 강동생(江東生)이다. 당시에 시명(詩名)을 천하에 진동시키며 특히 영사(詠史)에 뛰어났으나 기풍(譏諷)이 많은 까닭으로 종신토록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난리를 피해 향리로 내려갔다가 절도사(節度使) 전류(錢鏐)에게 발탁되어 종사관으로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舊五代史 卷24 梁書 羅隱列傳》
[주D-012]고운(顧雲) : 당나라의 시인으로 최치원과 시를 주고받았던 인물이다. 자는 수상(垂象), 사룡(士龍)이라고도 한다. 지주(池州) 사람이다. 두순학(杜荀鶴)이나 은문규(殷文圭)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구화산(九華山)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함통(咸通) 15년(874)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변(高駢)을 따라 회남(淮南)에서 종사(從事)하였다. 필사탁(畢師鐸)의 난 이후에는 삽주(霅州)로 물러나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하였다. 건녕(乾寧) 초에 졸하였다. 저서로는 《봉책연화편고(鳳策聯華編稿)》와 《소정잡필(昭亭雜筆)》이 있다.
[주D-013]내 …… 자라 :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전한다.
[주D-014]고려인(高麗人) : 신라인(新羅人)의 오기(誤記)이다.
[주D-015]고려 …… 내렸다 : 《고려사》 권4 〈현종세가(顯宗世家) 1〉에 의하면, 현종(顯宗) 11년(1020) 8월에 최치원에게 내사령(內史令)을 추증하고 그 동시에 선성(先聖)의 묘정(廟廷)에 종사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현종 14년 2월에 문창후(文昌侯)로 추봉(追封)하였다고 되어 있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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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東國通鑑〕

신라 헌강왕(憲康王) 을사(乙巳) 11년(885) - 당나라 광계(光啓) 1년 - 봄 3월에 최치원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최치원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이 말하기를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도착해서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세에 등제(登第)한 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조용(調用)되었으며,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으로 천직(遷職)되었다.
이때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변(高騈)이 병마도통(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최치원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 등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또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天討)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를 돌렸습니다. 우리 무열대왕(武烈大王)이 견마(犬馬)의 성의를 가지고 한 지방의 환란을 평정하는 데에 조력하겠다고 청하면서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였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일삼자 무열이 입조(入朝)하여 향도(鄕導)가 되겠다고 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高宗皇帝) 현경(顯慶) 5년(660)에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칙을 내려 10도(道)의 강병(强兵)과 누선(樓船) 1만 척을 이끌고 가서 백제를 대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그 지역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여 유민(遺民)을 안무(按撫)하고 중국 관원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취미(臭味)가 같지 않은 까닭에 누차 이반의 보고가 올라오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장(總章) 1년(668)에는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격파하게 하고 그곳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를 두었는데, 의봉(儀鳳) 3년(678)에 이르러서는 그 사람들도 하남의 농우(隴右)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잔당이 규합하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의지하면서 국호를 발해(渤海)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개원(開元) 20년(732)에 천조(天朝)에 원한을 품고서 군대를 이끌고 등주(登州)를 엄습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습니다. 이에 현종황제(玄宗皇帝)가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인 고품(高品)ㆍ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인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바다를 건너 공격하게 하는 한편, 우리 왕 김모(金某)를 가자(加資)하여 정태위(正太尉)에 임명한 뒤에 절부(節符)를 쥐고 영해군사(寧海郡事)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깊어 가면서 눈이 많이 쌓여 번방(蕃邦)과 중국의 군사들이 추위에 괴로워하였으므로 칙명을 내려 회군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300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창해(滄海)가 편안한 것은 바로 우리 무열대왕의 공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치원이 유문(儒門)의 말학(末學)이요 해외의 범재로서, 외람되게 표장(表章)을 받들고 낙토에 조회하러 왔으니, 마음속으로 간절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으면 모두 토로하여 진달하는 것이 예의상 합당할 것입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화(元和) 12년(817)에 본국의 왕자(王子) 김장렴(金張廉)이 표풍(飄風)으로 명주(明州)에 와서 상륙하였는데, 절동(浙東)의 모 관원이 발송하여 입경(入京)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중화(中和) 2년(882)에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이 반신(叛臣)의 작란(作亂) 때문에 도로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 초주(楚州)에 상륙하여 이리저리 헤매다가 양주(楊州)에 와서야 성가(聖駕)가 촉(蜀)으로 행차하신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고 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 장검(張儉)을 차출해서 그를 감호하여 서천(西川)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전의 사례가 분명하니, 삼가 원하옵건대 태사시중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은혜를 내려 주소서. 그리하여 특별히 수륙(水陸)의 권첩(券牒)을 내리시어 가는 곳마다 주선(舟船)과 숙식(熟食)과 먼 거리 여행에 필요한 마필(馬匹)과 초료(草料)를 공급하게 하시고, 이와 함께 군대 장교를 차출하여 어가(御駕) 앞까지 보호해서 이르게 해 주시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최치원이 돌아오자 왕이 그를 머무르게 하고는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최치원은 중국에 가서 얻은 것이 많은 만큼 가슴속에 쌓인 경륜을 발휘해 보겠다고 스스로 다짐하였으나, 쇠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 용납받지 못하였으므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주D-001]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 : 이 서장은 언제 올린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진성여왕 7년(893)에 당에 조공 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하였으므로 다시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로 있던 최치원을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고 도적이 잇달아 일어나 길이 막혀 가지 못하였다. 그 후에 최치원이 다시 사신이 되어 당에 갔는데, 당나라의 주현(州縣)에서 공급(供給)을 계속해서 대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당의 재상인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서장을 올렸다.”라고 하였다. 《東史綱目 卷5 上 眞聖女主7年》
[주D-002]동해(東海) …… 신라입니다 : 이는 삼한과 삼국의 관계에 대한 국내의 최초의 설이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권34 〈잡지(雜志) 지리(地理) 1〉에서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하였는데, 이 설이 사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하여 이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설은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마한(馬韓)〉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바, 《삼국유사》의 찬자 역시 고운과 같은 삼한관(三韓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권근(權近)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고구려, 진한은 신라라는 설을 주장하였다. 17세기의 한백겸(韓百謙)은 마한은 백제, 변한은 가야, 진한은 신라라는 설을 제창하였는데, 이후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이 되었다. 그러나 천관우(千寬宇)는 삼한족(三韓族)의 이동설을 들어 마한이 고구려 지역에 살았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삼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혔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6쪽》
[주D-003]수황(隋皇)이 …… 원인이었습니다 : 수나라의 2대 군주인 양제(煬帝)가 대운하(大運河)를 개통하고 장성(長城)을 쌓는 등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키는 한편 사치와 주색에 빠져 백성의 원망을 샀으며, 고구려 정벌에서 크게 실패하는 바람에 국력이 급히 쇠해져 국가가 혼란해지는 가운데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되어 마침내 나라가 망하였다.
[주D-004]정관(貞觀) :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이다.
[주D-005]문황(文皇)이 …… 돌렸습니다 :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문황은 당나라 태종(太宗)의 시호(諡號)이다. 태종은 6월부터 9월까지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돌아갔으며, 친정을 후회하였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당나라 군사는 7만에 불과하였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7쪽》 고운이 이렇게 서술한 것은 외교적인 글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주D-006]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 : 이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잘못으로, 고운이 잘못 기억하여 이렇게 쓴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도독부를 두었는데, 웅진도독부가 나머지 4도독부를 통할하였으며, 몇 년 뒤에 모두 없어지고 그 지역은 신라로 귀속되었다.
[주D-007]하남(河南)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 백제의 유민 중 1만 2807명을 잡아다 장안(長安)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669년에 고구려 유민 3만 명을 강회(江淮)와 산남(山南)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신당서(新唐書)》 권220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보이고 있는바, 백제의 유민도 이 지방으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67쪽》
[주D-008]안동도독부(安東都督部) : 668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설인귀(薛仁貴)를 총독(摠督)으로 삼은 다음 영토를 9도독부, 41주, 100현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 뒤 고구려 유민들의 잇단 반란으로 676년에 도호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겼으며, 한때 폐지하였다가 699년에 안동도독부로 개칭, 얼마 뒤 다시 도호부로 복구하였다. 여러 번 이동이 있었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반란을 계기로 756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주D-009]태백산(太白山) : 백두산(白頭山)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는 동모산(東牟山)의 오기(誤記)이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7쪽》
[주D-010]태복경(太僕卿)인 김사란(金思蘭) : 김사란의 직책이 《동사강목》 권4하 성덕왕 32년(733)에는 태복랑(太僕郞), 권5상 진성여주 7년(893)에는 태복경(太僕卿), 《구당서(舊唐書)》 권199상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국(新羅國)〉에는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으로 되어 있다.
[주D-011]우리 왕 김모(金某) : 성덕왕(聖德王)을 가리킨다. 성덕왕의 본명은 융기(隆基)인데, 당 현종의 이름과 같아 흥광(興光)으로 고쳤다.
[주D-012]김장렴(金張廉) : 헌덕왕(憲德王)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가왕자(假王子)로 생각된다. 817년(헌덕왕9) 10월에 조공사로 당나라에 파견되었는데, 풍랑으로 인하여 표류하다가 현재의 중국 절강성 영파시인 명주(明州) 해안에 도착하여 절동(浙東) 관리의 도움으로 당나라 서울에까지 다녀왔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주D-013]반신(叛臣)의 작란(作亂) : 886년에 당나라에서 일어난 황소(黃巢)의 난을 가리킨다. 《정구복 외, 譯註 三國史記 권4 주석편 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768쪽》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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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찬요〔東史纂要〕

조위(曺偉)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혹자는 의심하기를 “고운(孤雲)이 그 큰 재주를 거두어 속에 품고 동방에 돌아온 뒤에 있는 힘을 다해서 반열(班列)에 나아가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잡아 구제하며 그 궐실(闕失)을 미봉(彌縫)하고 그 문치(文治)를 분식(粉飾)했더라면, 나라의 형세가 그토록 위태롭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니, 견훤(甄萱)과 궁예(弓裔)가 어떻게 함부로 날뛸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산수(山水) 간에 소요하며 편히 노닐기만 하였을 뿐, 나라의 위망(危亡)을 보기를 마치 월(越)나라 사람이 살지고 여윈 것을 보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는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하여 윤리를 어지럽히는 일이나 보배를 속에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놔두는 일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공이 어린 나이에 멀리 바다를 건너면서 험하고 먼 길을 꺼리지 않았고, 약관의 나이가 되기 전에 마치 턱수염을 만지듯 과거에 쉽게 급제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찌 상자평(向子平)이나 대효위(臺孝威)를 본받으려고 했겠는가. 그러고 보면 그가 공명(功名)의 뜻을 가다듬으면서 입신양명에 뜻을 둔 것이야말로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가 당나라에서 벼슬하려니 환시(宦侍)가 안에서 권세를 독점하고 번진(藩鎭)이 밖에서 횡행하는 가운데 주량(朱梁)이 찬탈할 조짐이 이미 싹트고 있었고, 본국에서 벼슬하려니 혼주(昏主)가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정사를 맡기고 여후(女后)가 음란하여 기강을 어지럽히는 가운데 아첨하여 총애받는 신하들만 조정에 가득하여 부화뇌동하며 헐뜯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때에는 원래 자기 한 몸도 용납받을 수가 없을 것인데 자기의 도가 행해지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공의 밝은 식견은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에서도 이미 환히 드러난 바이지만,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는 나무 하나로 지탱할 수가 없고, 큰물이 범람할 때에는 한 손으로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깊은 산골을 찾아 사슴과 벗을 하거나 벽라(薜蘿)를 부여잡고 명월(明月)과 노닌 것이 어찌 공의 본심이었겠는가.
아, 삼국 시대 이래로 문인과 재사가 각 세대마다 없지는 않았지만, 공의 이름이 유독 전무후무하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하여 평소에 공의 발길이 닿은 곳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초인(樵人)과 목수(牧豎) 모두가 손으로 가리키면서 최공(崔公)이 노닐던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여염의 평민이나 시골의 아낙네들까지도 모두 공의 성명을 외우고 공의 문장을 사모할 줄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이 한 몸에 얻어 쌓은 것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을 것이 분명한데 사람과 시대가 서로 맞지 않고 명운과 재질이 서로 어울리지 못했으니, 이 어찌 천고의 한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소싯적에 언젠가 “인간의 요로와 통진은 눈이 뜨일 만한 곳이 없고, 물외의 청산과 녹수는 가끔 꿈속에 돌아간다.〔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라는 공의 글귀를 접하고는, 공의 회포가 표표(飄飄)하여 속진(俗塵) 속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 뒤 공의 평생의 행적(行跡)을 살피다가 국내에 있는 명승지마다 공의 발길이 두루 미친 것을 확인하고는, 청산(靑山) 녹수(綠水)의 글귀가 본래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기에 공의 아의(雅意)의 소재를 알고서 더욱 탄복하였다.

[주C-001]동사찬요(東史簒要) : 1606년(선조39)에 조선 중기의 문신인 오운(吳澐)이 지은 역사책이다. 단군조선부터 삼국까지의 본기(本紀) 4책, 지리지(地理志)와 삼국명신(三國名臣) 1책, 고려명신(高麗名臣) 2책, 별록(別錄) 1책 등 8권 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성룡(柳成龍)이 왕에게 바쳐 유림(儒林)의 표준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책이다. 1609년(광해군1)에 계림부(鷄林府)에서 처음 간행했다가 1614년에 한백겸(韓百謙)의 충고로 〈지리지(地理志)〉를 첨가하고, 길재(吉再) 등 고려 말의 은자들을 추가해 개찬하였다.
[주D-001]조위(曺偉)는 …… 말하였다 : 조위(1454~1503)의 문집인 《매계집(梅溪集)》 권4 〈제최문창전후(題崔文昌傳後)〉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위는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이다. 성종 때 도승지, 호조 참판 등을 지냈으며, 1498년(연산군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義州)에 유배되었다. 이후 순천(順天)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으며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주D-002]나라의 …… 하였으니 : 고운이 자신과 관련된 일 이외에는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알 바가 아니라는 식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마치 남쪽의 월나라 사람이 북쪽 진나라 사람의 살지고 여윈 것을 보는 것처럼 무관심해서, 마음속에 기쁨이나 슬픈 느낌을 전혀 갖지 않는다.〔若越人視秦人之肥瘠 忽焉不加喜戚於其心〕”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자기 …… 일 : 《논어》 〈미자(微子)〉에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하여 인간의 큰 윤리를 어지럽히고 만다.〔欲潔其身 而亂大倫〕”라고 은자(隱者)를 비평한 말이 나온다.
[주D-004]보배를 …… 일 : 《논어》 〈양화(陽貨)〉에 “보배를 속에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그냥 놔둔다면 그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상자평(向子平) : 자평은 후한(後漢)의 고사(高士)인 상장(向長)의 자이다. 왕망(王莽) 때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이 몇 년 동안 그를 부르면서 왕망에게 천거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다가 자녀들을 모두 시집 장가보낸 뒤에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여기라고 하고는 집을 떠나 뜻이 맞는 벗들과 오악(五岳) 명산을 유람하며 종적을 감춘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向長》
[주D-006]대효위(臺孝威) : 효위는 후한의 은사(隱士) 대동(臺佟)의 자이다. 무당산(武當山)에 숨어서 동굴에서 생활하며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장제(章帝) 건초(建初) 연간에 벼슬로 부르자 이에 응하지 않고 아예 멀리 떠나 종적을 감췄다. 《後漢書 卷83 逸民列傳 臺佟》
[주D-007]주량(朱梁) : 주전충(朱全忠)의 양(梁)나라라는 말로, 후량(後梁)을 가리킨다.
[주D-008]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 :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고려 현종(顯宗) 경신(庚申) 11년(1020)에 신라의 집사성 시랑(執事省侍郞) 최치원을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선성(先聖)의 묘정에 종사(從祀)하게 하였다. 당초 태조(太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고운이 보낸 글 중에 “계림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에는 소나무가 푸르다.〔雞林黃葉 鵠嶺靑松〕”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최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밀히 도운 그 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 밖에 《동사찬요(東史纂要)》와 《서악지(西岳誌)》와 〈청학동비명(靑鶴洞碑銘)〉에도 청송 황엽의 구절이 각각 언급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청송은 새로이 흥기하는 고려를 가리키고 황엽은 시들어 가는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고운이 비유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
[주D-009]인간의 …… 돌아간다 :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권17 〈태위에게 재차 올린 계문〔再獻啓〕〉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로(要路)와 통진(通津)은 주요 도로와 사통팔달의 나루라는 뜻으로, 모두 현요(顯要)한 지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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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

고운(孤雲)의 구택(舊宅)은 신라 본피부(本彼部) 황룡사(皇龍寺) 남쪽 미탄사(味呑寺) 북쪽에 있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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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승〔家乘〕

선생의 부친은 휘(諱)가 견일(肩逸)이다.

신라 헌안왕(憲安王) 1년(857) 정축 - 당 선종(唐宣宗) 대중(大中) 11년 - 에 선생이 태어났다.

경문왕(景文王) 8년(868) 무자 - 당 의종(唐懿宗) 함통(咸通) 9년 - 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14년(874) 갑오 -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 - 에 과거 -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하였다. - 에 급제하였다. 선주(宣州) 표수현 위(漂水縣尉) - 다른 판본에는 율수현 위(溧水縣尉)로 되어 있다. - 에 조용(調用)되었다. 성적을 고핵(考覈)하여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이 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의 종사순관(從事巡官)이 되었다.

헌강왕(憲康王) 10년(884) 갑진 - 당 희종 중화(中和) 4년 - 8월에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본국에 사신으로 오게 되었는데, 바닷가에서 순풍을 기다리느라 엄체(淹滯)하여 겨울을 넘겼다.

11년(885) 을사 - 당 희종 광계(光啓) 1년 - 3월에 비로소 본국에 도착하였다. - 연장(年狀)에 이르기를 “무협 중봉의 해에 미천한 몸으로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동토에 금의환향했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土〕”라고 하였다. - 왕이 계속 머무르게 하면서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12년(886) 병오 - 당 희종 광계 2년 - 7월에 헌강왕이 세상을 떠났다. 선생을 시기하는 자들이 조정에 많았으므로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진성왕(眞聖王) 7년(894) 갑인 - 당 소종(唐昭宗) 건녕(乾寧) 1년 - 에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가 되었다. 소명(召命)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길에 도적이 많아서 가지 못하였다. 2월에 시무(時務) 10여 조(條)를 올리니, 왕이 가납(嘉納)하고 아찬(阿飡)으로 삼았다. 스스로 난세를 만난 것을 가슴 아파하며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사이에서 자적하며 오직 시를 짓고 노래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11년(1020) 경신 - 송 진종(宋眞宗) 천희(天禧) 4년 - 에 내사령(內史令)을 추증(追贈)하고, 선성(先聖)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하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회재(李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다음과 같이 글을 올렸다.

14년(1023) 계해 - 송 인종(宋仁宗) 천성(天聖) 1년 - 5월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국조(國朝) 명종(明宗) 7년(1552) 임자 명 숙종(明肅宗) 가정(嘉靖) 31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선현 문창후 최치원은 바로 우리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과 적서를 따지지 말고 먼 변방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대대로 군역의 부담을 지우지 말라.”

16년(1561) 신유 - 명 숙종 가정 40년 - 에 서원(書院)을 경주(慶州) 서악(西岳)에 세웠다. 다음은 《동경지(東京志)》에 나오는 내용이다.
“부윤(府尹) 구암(龜巖) 이공 정(李公楨)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이 선생(李先生)에게 품신(稟申)하여 계해년(1563)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퇴계 선생이 서원을 서악정사(西岳精舍)라고 명명하였다. 강당은 시습(時習)이라 하고, 동재(東齋)는 진수(進修)라 하였으며, 서재(西齋)는 성경(誠敬)이라 하고, 동쪽 하재(下齋)는 절차(切磋)라 하고, 서쪽 하재는 조설(澡雪)이라 하였으며, 앞의 누각은 영귀(詠歸)라 하고, 문은 도동(道東)이라 하였다. 그리고 누각 난간 사이에 선생의 필적을 걸어 놓았는데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 버렸고, 위판은 산골짜기로 옮겨 보관하였다.
만력(萬曆) 경자년(1600, 선조33)에 이시발(李時發)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옛터에 초사(草舍)를 짓고 위판을 다시 봉안하였다. 임인년(1602)에 이시언(李時彦)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사우(祠宇)를 중건하였으나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였다.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최기(崔沂)가 부윤으로 있을 때에 강당과 재사(齋舍)와 전사청(典祀廳)과 장서실(藏書室)을 중건하였다. 천계(天啓) 계해년(1623, 인조1)에 여우길(呂祐吉)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부중(府中)의 유자(儒者)인 진사(進士) 최동언(崔東彥) 등이 상소하여 사액(賜額)해 주기를 청하자, 서악서원(西岳書院)이라고 사액하였다. 편액(扁額)은 원진해(元振海)의 필적이다. 병술년(1646)에 이민환(李民寏)이 부윤으로 있을 때에 영귀루(詠歸樓)를 중건하고, 묘제(廟制)를 동향(東向)으로 하여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와 개국공(開國公 김유신(金庾信))과 문창공(文昌公)을 차례로 모두 향사(享祀)하였다.”
구암 이공 정의 〈서악정사(西岳精舍)〉 시는 다음과 같다.
우가의 몇 마디 말 전해진 그 이후로 / 虞家數語相傳後
만고토록 사문이 백일처럼 환해졌네 / 萬古斯文白日明
마음으로 계합하여 곧장 대답한 증삼(曾參)이요 / 一唯參乎心默契
도가 형통하여 거듭 어질다 한 안회(顔回)였네 / 再賢回也道重亨
광풍이라 동락의 종용한 뜻이라면 / 光風東洛從容意
추월이라 서림의 감개한 정이랄까 / 秋月西林感慨情
벗을 모아 공부할 곳이 지금 있으니 / 會友琢磨今有地
이 당의 이름을 정녕 저버리지 말기를 / 丁寧無負此堂名
퇴계 선생이 이 시에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
기자가 교화한 우리 동방 예부터 좋은 나라 / 箕敎吾東曾善國
문치(文治)의 교화가 빛날 천운이 지금 돌아왔소 / 至今天步屬文明
성인의 인재 양성도 터전이 있어야 하고말고 / 多材聖作非無本
사람이 도를 행해야지 어찌 저절로 형통할까 / 至道人行詎自亨
책 속의 보물 찾는 일 적막해졌으니 / 寥落塵篇尋寶訣
호걸들 상정을 벗어나 분발해야겠지 / 奮興豪傑出常情
선산의 경내에 멋지게 열린 선비들의 집 / 儒宮好闢仙山境
늙은 나도 끼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네 / 老我增思實趁名
그리고 팔계(八溪) 정종영(鄭宗榮)의 시는 다음과 같다.
은나라 기자 때부터 펼쳐진 대동의 문교 / 大東文敎自箕殷
신라 시대에 명현들이 성대하게 일어났네 / 羅代名賢濟濟群
흥망을 백번 겪은 뒤에 남은 산하요 / 興亡百變餘山海
치란의 천년 세월 속에 뒤섞인 취훈이라 / 治亂千秋混臭薰
정별하여 끝내는 바르게 표시하게 되었나니 / 旌別終歸人正表
지휘해 선비가 운집함을 다시 보게 되었도다 / 指麾重見士如雲
장수를 서산 아래에 의탁할 만한데 / 藏修可託西山下
추로에 이론이 왜 그렇게 분분했던가 / 鄒魯曾多外議紛
김학봉(金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서악정사를 참배하며 제생(諸生)에게 보여 준 시는 다음과 같다.
서악정사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었는데 / 西岳精舍舊聞名
원객이 만리 여정에서 지금 막 돌아왔네 / 遠客初回萬里程
구옹이 서원을 세운 뜻을 누가 알리오 / 誰識龜翁開院意
계림의 잎사귀들 모두 바람소리 내는걸
 / 雞林葉葉盡風聲

선조(宣祖) 6년(1573) 계유 - 명 신종(明神宗) 만력(萬曆) 1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文昌侯)는 도덕과 문장으로 우리 동방에서 제일가는 인물이다. 그의 후손은 비록 미천한 서얼이라도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

광해(光海) 을묘년(1615)에 태인(泰仁) 무성(武城)에 서원을 세웠다. 태인에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본군(本郡)의 수재(守宰)로 있을 적에 이 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고 한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의 시는 다음과 같다.
닭 잡던 당일부터 퍼지기 시작한 맑은 향기 / 割雞當日播淸芬
가시나무 위의 봉황이라고 사람들이 말했다오 / 枳棘棲鸞衆所云
천년 전 읊던 혼을 어디에서 찾을거나 / 千載吟魂何處覓
일만 송이 연꽃 속에 일만 개의 고운 / 芙蕖萬柄萬孤雲

인조(仁祖) 4년(1626) 병인 - 명 장종(明章宗) 천계(天啓) 6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의 후예에 대해서는 비록 지서(支庶)와 천얼(賤孼)이라고 하더라도 군정(軍丁)의 일을 시키지 말라.”

현종(顯宗) 11년(1670) 경술 - 청 성조(淸聖祖) 강희(康煕) 9년 - 에 함양(咸陽) 백연(柏淵)에 서원을 세웠다.

숙종(肅宗) 22년(1696) 병자 - 청 성조 강희 35년 - 에 무성서원(武城書院)에 사액(賜額)하였다.

영조(英祖) 31년(1755) 을해 - 청 고종(淸高宗) 건륭(乾隆) 20년 - 에 대구(大丘) 해안현(解顔縣)에 계림사(桂林祠)를 세우고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다. - 지금은 구회당(九會堂) 뒤에 옮겨 세웠다. -

정조(正祖) 20년(1796) 병진 - 청 인종(淸仁宗) 가경(嘉慶) 원년 - 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문창후의 자손은 비록 지서라도 군역으로 침해하지 말라. 그리고 태강(汰講)의 예에 포함시키지 말라.”
○ 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열성조(列聖朝)의 분부를 받은 대로 과연 제대로 준행(遵行)하고 있는지, 해조(該曹)로 하여금 엄히 단속하여 거행하게 하고, 이를 범하는 수령이 있으면 역시 드러나는 대로 심리하여 처단하라.”
- 이상은 모두 가승(家乘)에 나오는 내용이다. -

[주D-001]무협 중봉(巫峽重峯)의 …… 금의환향했다 : 고운이 12세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28세에 귀국했다는 말이다. 무협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가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02]종사(從祀) : 대본에는 ‘從師’로 되어 있는데, 《고려사》 권4 〈현종세가1〉에 의거하여 ‘師’를 ‘祀’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3]최 문창(崔文昌)은 …… 하겠습니까 : 한국문집총간 27집에 수록된 주세붕(周世鵬)의 《무릉잡고(武陵雜稿)》 권5 〈상이회재(上李晦齋)〉에 나온다.
[주D-004]명 숙종(明肅宗) : 묘호(廟號)는 세종(世宗)이다. 숙종은 시호(諡號)이다.
[주D-005]우가(虞家)의 …… 말 :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도를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희(朱熹) 등 송유(宋儒)가 이것을 요(堯)ㆍ순(舜)ㆍ우(禹) 세 성인이 서로 도통(道統)을 주고받은 16자심전(十六字心傳)이라고 강조한 뒤로부터, 개인의 도덕 수양과 치국의 원리로 숭상되어 왔다.
[주D-006]마음으로 …… 증삼(曾參)이요 : 고운이 유가(儒家)의 도를 전수받았다는 뜻의 표현이다. 공자(孔子)가 제자 증삼을 불러서 “나의 도는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하자, 증삼이 “네, 그렇습니다.〔唯〕”라고 곧장 대답하고는, 다른 문인에게 “부자의 도는 바로 충서이다.〔夫子之道 忠恕而已矣〕”라고 설명해 준 내용이 《논어》 〈이인(里仁)〉에 나온다.
[주D-007]도가 …… 안회(顔回)였네 : 공자가 제자 안회의 안빈낙도 생활에 대해서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골목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한결같이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찬탄하면서 두 번이나 어질다고 칭찬한 말이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주D-008]광풍(光風)이라 …… 뜻이라면 : 송유(宋儒)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소싯적에 주돈이(周敦頤)를 공경하여 그에게 찾아가서 배운 것처럼 자신도 고운을 스승으로 받들고서 배우고 싶다는 뜻이다. 광풍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를 뜻하는 말인데, 송나라 황정견(黃庭堅)의 〈염계시서(濂溪詩序)〉에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너무도 고매해서, 흉중이 쇄락하기가 마치 맑은 바람이요 갠 달과 같았다.〔舂陵周茂叔 人品甚高 胸中灑落 如光風霽月〕”라는 말이 나온다. 염계는 주돈이의 호요, 무숙은 그의 자이다. 동락(東洛)은 동도(東都) 낙양(洛陽)이라는 뜻으로, 낙양 출신인 정씨(程氏) 형제를 가리킨다.
[주D-009]추월(秋月)이라 …… 정이랄까 : 주희(朱熹)가 이통(李侗)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이통의 인품을 “빙호추월처럼 투명하여 흠이 하나도 없다.〔如氷壺秋月 瑩徹無瑕〕”라고 평한 말이 《송사(宋史)》 권428 〈도학열전(道學列傳) 이통(李侗)〉에 나온다. 이통은 세상에서 연평 선생(延平先生)으로 일컬어졌는데, 40년 동안 세상과 단절하고 오로지 정좌(靜坐)하여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공부에 힘썼다고 한다. 주희가 고종(高宗) 소흥(紹興) 경진년(1160) 겨울에 여산(廬山) 서림원(西林院)의 유가 상인(惟可上人)의 방에 우거하면서, 조석으로 왕래하며 연평에게 수업받은 사실이 《회암집(晦菴集)》 권2 〈제서림가사달관헌 재제(題西林可師達觀軒再題)〉의 병서(幷序)에 나온다.
[주D-010]벗을 …… 있으니 : 참고로 《논어》 〈안연(顔淵)〉에 “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배양한다.〔君子以文會友 以友輔仁〕”라는 증자(曾子)의 말이 나온다.
[주D-011]치란(治亂)의 …… 취훈(臭薰)이라 : 역사적으로 고운에 대해서 불교에 아첨했다면서 부정적으로 비평하기도 하고,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요 문학의 창도자라고 찬미하는 등 엇갈린 평가가 있어 왔다는 말이다. 취훈은 악취와 향기라는 뜻이다.
[주D-012]정별(旌別)하여 …… 되었나니 : 《서경》 〈필명(畢命)〉에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표창하고 구별하여 그 집과 마을을 표시한다.〔旌別淑慝 表厥宅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3]장수(藏修) : 《예기》 〈학기(學記)〉에 나오는 말로, 학습에 전심하는 것을 뜻한다.
[주D-014]추로(鄒魯)에 …… 분분했던가 : 서악정사를 건립할 당시에 비판하는 말이 많았던 것을 가리킨다. 한국문집총간 29집에 수록된 《퇴계집(退溪集)》 권3에 〈이강이가 서악정사를 새로 설치하고 시를 지어 부쳐 왔기에 차운하여 두 수를 짓다〔李剛而新置西岳精舍 有詩見寄 次韻二首〕〉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첫 번째 시의 자주(自註)에 “강이가 이 일을 경영하면서 비방을 많이 들었다.〔剛而因此營作 多得謗〕”라는 말이 나온다. 위에 소개한 퇴계의 시는 두 번째 시이다. 강이는 이정(李楨)의 자이다. 추로는 맹자와 공자의 고향으로, 문교(文敎)가 흥성한 지역을 가리키는데, 동방예의지국과 함께 우리나라를 뜻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주D-015]구옹이 …… 내는걸 : 처음에는 고운의 서원을 세우는 뜻을 모르고서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지금 보면 서악정사 덕분에 유생들이 교화를 받아서 훌륭한 인재로 양성되고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구옹은 구암(龜巖) 이정(李楨)을 가리킨다.
[주D-016]닭 잡던 당일 : 고운이 태인 군수(泰仁郡守)로 재직하던 때를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수령으로 있을 때, 조그마한 고을에서 예악(禮樂)의 정사를 펼치는 것을 보고는, 공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닭을 잡는 데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랴.〔割雞焉用牛刀〕”라고 농담으로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論語 陽貨》
[주D-017]가시나무 …… 말했다오 : 고운과 같은 현자가 작은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을 탄식했다는 말이다. 후한(後漢)의 고성 영(考城令) 왕환(王渙)이 구람(仇覽)을 주부(主簿)로 임명하려다가 그의 그릇이 워낙 큰 것을 보고서 “가시나무는 봉황이 깃들 곳이 못 된다. 100리의 지역이 어떻게 대현이 밟을 땅이리오.〔枳棘非鸞鳳所棲 百里豈大賢之路〕”라고 탄식하고는 한 달 치 월급을 구람의 태학(太學) 학자금으로 내준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76 循吏列傳 仇覽》
[주D-018]인조(仁祖) …… 6년 : 대본에는 ‘仁祖四年丙寅 明章宗天啓四年’으로 되어 있는데, 병인년(1626)은 천계 6년이므로 고쳐 번역하였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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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승람〔輿地勝覽〕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가야산(伽倻山) 서쪽에 있다. 신라 때 창건되었는데, 최치원의 서암(書巖)과 기각(碁閣)이 있다.

제시석(題詩石):해인사 동네를 세상에서는 홍류동(紅流洞)이라고 부른다. 동네 입구에 무릉교(武陵橋)가 있는데, 그 다리에서 절을 따라 5, 6리쯤 가면 최치원의 제시석이 있다. 후세 사람들은 그 바위를 일러 치원대(致遠臺)라고 한다.

독서당(讀書堂):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가야산에 숨어 살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발만 숲 속에 남겨 놓았을 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인사의 승려가 그날을 택해 명복을 빌고, 그의 영정을 그려서 독서당에 두었다고 한다. 독서당의 옛터는 해인사 서쪽에 있다.

창원(昌原)
월영대(月影臺):회원현(會原縣) 서쪽 바닷가에 있는데 최치원이 노닐었던 곳이다. 석각(石刻)이 있으나 마멸되고 부서졌다.

함양(咸陽)
명환(名宦):최치원
최치원이 해인사 승려 희랑(希朗)에게 부친 시 아래에 적기를 “방로태감 천령군태수 알찬 최치원(防虜太監 天嶺郡太守 遏粲 崔致遠)”이라고 하였다.

서산(瑞山)
명환:최치원
진성왕(眞聖王) 때에 이곳의 태수로 있다가 왕의 부름을 받고 하정사(賀正使)가 되었으나 도적이 창궐하여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태인(泰仁)
명환:최치원
최치원이 중국에서 공부하며 얻은 것이 많다고 스스로 생각하고는 동방으로 돌아와서 장차 자기의 포부를 펼쳐 보려고 하였으나, 쇠한 말세에 시기하는 자들이 많아서 용납받지 못하자 마침내 외방으로 나가 태산군 태수(太山郡太守)가 되었다.

상서장(上書莊)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천(蚊川) 가에 있다. 진성왕 8년(894)에 선생이 상서(上書)하여 시무(時務) 10여 조를 진달하였는데, 그 글을 작성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을 사람들이 지금 건물을 세워 수호하고 있다.
이종상(李鍾祥)의 시는 다음과 같다.
중국의 막부에 노닐 적에도 생각났을 상서장 / 西遊高幕憶書莊
막막히 동방에 돌아와서 뜻이 더욱 깊었으리 / 漠漠東還意更長
한번 가야산 들어간 뒤로 소식은 들리지 않고 / 一入伽倻消息遠
뜬구름 지는 해만 고도에 오늘도 바쁘구나 / 浮雲落照古都忙

독서당(讀書堂)
경주(慶州)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있다. 선생이 글을 읽었던 곳으로, 옛 우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 후세 사람들이 예전의 초석(礎石) 위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학업을 닦았다.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월영대(月影臺) 달그림자가 바다를 비추는 넓이가 97억 3만 8천여 자가 넘는다고 한다.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히 푸른 물결 위에 우뚝 솟은 바위 / 碧波浩渺石崔嵬
그중에 봉래 학사님 노닐던 누대 있네 / 中有蓬萊學士臺
단 옆에 소나무 늙어 가고 잡초만 무성한데 / 松老壇邊荒草合
하늘 끝 구름 나직하니 조각배 떠오는 듯 / 雲低天末片帆來
백년의 문아 뒤에 나온 새로운 시구요 / 百年文雅新詩句
만리의 강산 위에 한 잔의 술이로세 / 萬里江山一酒桮
돌아보면 계림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 回首雞林人不見
달빛만 공연히 해문을 비치며 배회하네 / 月華空照海門廻
채홍철(蔡洪哲)의 시는 다음과 같다.
문장의 풍조가 갈수록 험난해지는 지금 / 文章氣習轉崔嵬
문득 최후 생각에 누대에 한번 올랐소 / 忽憶崔侯一上臺
황학 따라 떠나지 않은 바람과 달이요 / 風月不隨黃鶴去
백구를 좇아 몰려오는 연무와 물결이라 / 煙波相逐白鷗來
비 갠 뒤의 산색은 난간에 짙게 드리우고 / 雨晴山色濃低檻
봄 지난 뒤의 송화는 술잔에 마구 떨어지네 / 春盡松花亂入桮
더구나 진토를 격해 금심이 있으니 / 更有琴心隔塵土
다른 때 비구름 데리고 돌아오리라 / 佗時好與雨雲廻
또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의 역사를 보면 진성왕(眞聖王) 때에 최치원이 있었다. 처음에 당 희종(唐僖宗)을 섬기다가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그곳을 떠나 귀국하였는데, 신라도 정치가 쇠퇴하였으므로 마침내 세상을 버리고 숨어 살았으니, 이로 인해서 ‘닭을 잡고 오리를 잡는다〔操雞搏鴨〕’는 말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최치원이 월영대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그 옆 해상에 고운대(孤雲臺)가 있다.”
고운대에 늙은 감나무가 있는데,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쌍계사(雙溪寺)
지리산(智異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뜰에 오래된 괴목(槐木)이 있는데, 그 뿌리가 북쪽으로 시내를 건너서 얽혀 있으므로, 그 절의 승려가 다리로 이용하는데, 이 나무도 바로 선생이 손수 심었다고 한다. 동구(洞口)에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문처럼 서서 대치하고 있는데, 선생이 손수 ‘쌍계석문(雙溪石門)’ - 동쪽 바위에 쌍계라고 새기고, 서쪽 바위에 석문이라고 새겼다. - 이라고 썼다 한다. 또 선생이 지은 비(碑)가 있고, 사찰 안에 영신암(靈神庵)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시는 다음과 같다.
쌍계사 안에서 고운을 생각하나니 / 雙溪寺裏憶孤雲
당시의 일 분분해서 들을 수가 없네 / 時事紛紛不可聞
동해로 돌아와서도 다시 방랑의 길 / 東海歸來還浪迹
야학이 닭들 속에 뒤섞여 있겠는가 / 祇緣野鶴在雞群
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단성(丹城)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강직하고 고아(古雅)한데, 최고운의 수적(手迹)이라고 세상에서 전한다.
석문(石門)에서 1리쯤 가면 귀룡(龜龍)의 고비(古碑)가 있는데, 그 비액(碑額)에 전자(篆字)로 ‘쌍계사고진감선사비(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전 서국 도순관 승무랑 시어사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분부를 받들어 짓다. 광계 3년(887, 진성여왕1)에 세우다.〔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光啓三年建〕’라고 적혀 있다.
광계(光啓)는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이다. 갑자를 따지면 지금 어언 600여 년이 지났으니, 역시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인물의 존망과 대운의 흥폐가 무궁히 이어지는 속에 이 무심한 비석만이 홀로 없어지지 않고 서 있으니, 탄식을 한번 발할 만도 하다.
내가 비갈(碑碣)을 본 것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연간에 세워졌으니 광계보다 앞선다고 할 것이요, 오대사(五臺寺) 수정(水精)의 기문(記文)은 권적(權適)이 지었으니 그 또한 일세의 문사(文士)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 감회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고운의 수택이 여전히 남아 있는 데다가 고운이 산수 간에 소요할 수밖에 없었던 그 금회(襟懷)가 백세(百世) 뒤에까지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가까이 시봉하며 따름으로써 고운으로 하여금 고독하게 불교를 배우는 자들과 지내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령 고운이 오늘날에 태어났더라면 또한 반드시 큰일을 할 만한 지위에 거하면서 나라를 빛낼 문장 실력을 발휘하여 태평의 시대를 장식했을 것이요, 나 또한 그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받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끼 낀 비석만 매만지고 있으니, 그 감회가 어떻다고 하겠는가.
사찰 북쪽에 고운이 올랐다는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는데, 지금 거승(居僧)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대를 일으킬 예정이라고 한다.”

청량산(淸凉山)
안동부(安東府) 재산현(才山縣) 서쪽에 있다. 치원봉(致遠峯)과 치원암(致遠庵)이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청량산록(遊淸涼山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운이 대당(大唐)에 들어가 황소(黃巢)의 격문을 지은 뒤로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동방의 문장의 시조가 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가 대명(大名)을 등에 지고 동방으로 돌아오자 동방의 사람들은 마치 신선의 한 사람인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그가 한평생 돌아다니며 노닌 물 하나 바위 하나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일컬어 마지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고운이 참으로 숨김없이 바른말을 하며 배격하였더라면, 5백 년 사직의 고려가 꼭 그와 같이 혹독하게 불교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혈(風穴)은 극일암(克一庵) - 극일암(極一庵)으로 된 판본도 있다. - 뒤에 있다. 풍혈의 입구에 두 개의 판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최치원이 앉아서 바둑을 두던 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판이 동굴 안에 있어서 비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천년이 지나도록 썩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치원암에 들러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는데, 그 물이 단애의 갈라진 틈 사이에서 나와 돌 웅덩이에 가득 차 있었으며, 투명하기가 명경과 같고 차갑기가 빙설과 같았다.
그 암자에 들어가 보고 그 누대에 올라가 보니 고운에 대한 감회가 더더욱 사무쳤다. 아, 당시에 임금이 간신을 멀리하고 현인을 가까이하였더라면, 계림(雞林)의 잎이 꼭 그렇게 느닷없이 누렇게 변하여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운은 시운에 맞게 은둔하여 그 이름이 일월과 빛을 다투게 되었지만, 동도(東都 경주(慶州))의 여러 왕릉은 논밭이 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더더욱 서글픈 일이다.”
그리고 그의 시 〈치원대(致遠臺)〉는 다음과 같다.
금탑봉 앞 치원대에 올라서니 / 金塔峯前致遠臺
열한 개 절 문 열린 것이 멀리 보이네 / 遙看十一寺門開
석양 속의 높고 낮은 푸른 절벽이여 / 高低翠壁斜陽裏
누가 용면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고 / 誰倩龍眠圖畫來
또 〈감최고운(感崔孤雲)〉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 갔다가 불우해서 다시 동방으로 / 西行不遇復東行
끝내 산에서 굶은 한을 그 누가 풀겠는가 / 竟餓空山恨孰平
무열왕릉 속에선 황금 발우가 나오고 / 武烈陵中金椀出
가야산 위에는 달 바퀴가 환히 빛나네 / 伽倻嶺上月輪明
또 〈치원대(致遠臺)〉는 다음과 같다.
산봉우리는 다투어 김생의 필법을 드러내고 / 衆峯爭露金生法
외로운 달엔 지금도 치원의 마음이 걸려 있네 / 孤月猶懸致遠心
사흘 묵은 산속에서 사람을 볼 수 없어 / 三宿山中人不見
천추의 누대 위에 홀로 옷깃을 적시노라 / 千秋臺上獨霑襟

학사루(學士樓)
함양(咸陽)의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선생이 태수(太守)로 재직할 때 올라가 감상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뒤에 병화(兵火)로 소실되었는데, 고을 관아를 옮길 때 누대도 옮겨 지으면서 그대로 학사루라고 일컬었다. 또 손수 심은 나무숲이 10여 리에 걸쳐 이어져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이 일을 기록하였다.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시 〈학사루운(學士樓韻)〉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로 둘러싸인 하나의 별천지 / 山水縈廻別一天
이곳에 누대 있어 신선이 노니는 듯 / 樓居此地怳遊仙
촌에 이어진 대숲의 서늘한 기운 자리에 스며들고 / 村連碧篠涼侵席
연무 자욱한 긴 숲의 그림자 연석에 잠기누나 / 煙暝長林影蘸筵
점필의 풍류도 벌써 백년의 해를 넘기고 / 佔畢風流年過百
고운의 묵은 자취 천년이 되어 가는구나 / 孤雲陳迹歲垂千
인간 세상 부앙하며 공연히 배회하였나니 / 人間俯仰空延佇
난간에 기대어 읊조리던 소년 시절 생각나네 / 嘯詠欄楯憶少年

임경대(臨鏡臺)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한다. 양산(梁山) 황산강(黃山江) 절벽 위에 있는데, 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며 시를 지었다.

청룡대(靑龍臺)
김해(金海)에 있다. 선생이 손수 쓴 글씨가 돌에 새겨져 있다. 왼쪽 옆에 선생의 성명이 적혀 있다.

해운대(海雲臺)
동래(東萊) 동쪽 18리 지점에 있다. 산의 절벽이 마치 누에머리처럼 바닷속에 들어가 있다. 선생이 일찍이 누대를 쌓았는데, 그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주신재(周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시 〈등해운대(登海雲臺)〉는 다음과 같다.
대 아래는 가없어서 바로 넓은 바다인데 / 臺下無涯是大洋
유선 한번 떠나가매 학은 아니 날아오네 / 儒仙一去鶴茫茫
구만리 치고 날아갈 날개 생길 듯 / 搏搖九萬欲生羽
술잔 가득 부어 고금을 씻노매라 / 滌蕩古今呼滿觴
눈 들어 조각구름 보면 대마도도 들어오고 / 目極片雲看馬島
마음이 나는 곳 어디냐 하면 바로 부상이라네 / 心飛何處是扶桑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이니 / 玆遊奇絶平生冠
소매 가득 하늘 바람 불어온들 대수리오 / 滿袖天風吹不妨

가야산(伽倻山)
합천(陜川) 야로현(冶罏縣)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선생이 일찍이 가족을 데리고 여기에 은거하였는데, 지금도 치원촌(致遠村)이라는 곳이 있다. -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공경하여 치인촌(治仁村)이라고 고쳐 불렀다. -
점필재(佔畢齋)가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제시석(題詩石) - 선생의 시가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시석이라고 칭한다. - 에 다음과 같이 제(題)하였다.
맑은 시의 광염은 푸른 봉우리 내쏘는데 / 淸詩光焰射蒼巒
먹으로 쓴 흔적은 새긴 바위에 희미해라 / 墨漬餘痕闕泐間
세상에서는 신선 되어 떠났다 말을 할 뿐 / 世上但云尸解去
빈산에 무덤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네 / 那知馬鬣在空山
또 해인사(海印寺) 현판의 시에 화운하여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고운은 시운을 알고 은둔했나니 / 孤雲嘉遯客
태양처럼 대명이 밝게 전한다오 / 白日大名聞
갓과 신발은 매미가 허물 벗듯 / 巾屨同蟬蛻
풍채와 의표는 학의 무리 속에 / 風標混鶴群
속절없이 긁히고 깎인 바둑판이요 / 棋盤空剝落
반으로 갈라진 제시석이라 / 詩石半刳分
소요하던 땅을 가만가만 밟노라니 / 細履徜徉地
추모의 생각만이 절로 간절하구나 / 追懷祇自勤
주신재(周愼齋)의 시 〈가야즉사(伽倻卽事)〉는 다음과 같다.
연하를 밟을 목적으로 나막신 신고 오니 / 爲躡煙霞理屐來
단풍 진 산비탈 구월 경치 정말 아름답고녀 / 楓崖九月正佳哉
비통함 머금은 반일 동안의 애장사요 / 含悽半日哀莊寺
눈물을 흩뿌린 천년 세월의 치원대라 / 灑淚千秋致遠臺
만사에 무심한데 어찌 풍악 좋아할까 / 萬事無心寧喜竽
백년 인생에 술 있으면 입을 적실 뿐 / 百年有酒卽銜桮
갓끈 씻고 노년을 보내고픈 홍류동에서 / 濯纓終老紅流洞
붓을 드니 포사의 재주 아님이 부끄러워 / 泚筆慙非鮑謝才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깎아지른 낭떠러지와 넓고 평평한 바위에 이름을 지어 깊이 파 놓은 그 글자의 획이 완연하다.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噴玉瀑), 완재암(宛在巖) 등은 모두 그가 이름 지은 것들인데, 세월이 오래 지났어도 마멸되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유람을 온 사람들에게 구경거리로 제공할 만하다. 또 최고운이 지은 절구(絶句) 한 수가 폭포의 석면(石面)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매년 장마에 물이 넘쳐 광란하듯 씻겨 내려가는 바람에 온통 닳아 없어져서 지금은 다시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 한동안 만져 보다가 겨우 희미하게나마 한두 글자를 분별할 수가 있었다.”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가야산기(伽倻山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인사(海印寺)는 신라의 고찰로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관하고 있다. 남쪽의 바위 절벽은 신라 최 학사(崔學士)가 은거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천석(川石) 사이에 홍류동, 취적봉, 광풍뢰, 음풍대(吟風臺), 완재암, 분옥폭, 낙화담(落花潭), 첩석대(疊石臺), 회선암(會仙巖) 등이 있으며, 동구를 나서면 무릉교(武陵橋)와 칠성대(七星臺)가 있는데, 모두 학사의 대자(大字)를 돌에 새겨 놓았다.”

학사대(學士臺)
해인사 서쪽에 있다. 그 옆에 100자나 되는 늙은 회(檜)나무가 있는데, 둘레가 3장(丈)을 넘었다. 이 나무를 고운이 손수 심었기 때문에 여기에 누대를 세우고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대는 아직도 우뚝 서 있다.

농산정(籠山亭)
홍류동(紅流洞)에 있다.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온통 감싸게 하였다.〔故敎流水盡籠山〕”라는 고운의 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이다. - 정자 뒤로 몇 걸음 떨어져서 고운의 영당(影堂)이 있다. 그리고 현재 정자 앞에 비를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월류봉(月留峯)
가야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나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온 곳에 있다. 봉우리 아래에 청량사(淸涼寺)가 있는데, 고운이 노닐었던 곳이다.

무릉십이곡(武陵十二曲)
가야산 입구에 있다. 무릉교(武陵橋)에서 치원리(致遠里)까지 10여 리에 걸쳐 흰 돌이 깔린 맑은 내가 붉은 절벽과 푸른 골짜기를 뚫고 지나가는데 참으로 절경이다. 고운이 각 구비마다 품평을 하며 제목을 붙였고 좌우의 봉우리와 골짜기에도 모두 품평을 하며 이름을 붙였다. 신유한(申維翰)이 선생을 사모하여 경운재(景雲齋)를 세우고 시도 지었다.

벽송정(碧松亭)

고령현(高靈縣) 서쪽 30리 지점인 평림(平林) 안에 있었는데, 고운이 노닐며 휴식을 취한 곳이다. - 지금은 수해(水害)로 무너져서 산언덕으로 옮겨 세웠다. -

[주D-001]상서장(上書莊) : 이 상서장부터 아래의 가야산(伽倻山)까지는 《동국여지승람》의 기사를 근간으로 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모아 엮은 것이다. 상서장에 대해서 이곳에서는 고운이 진성왕(眞聖王) 때 올린 시무 십조(時務十條)의 상소문을 이곳에서 썼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와 한국문집총간 198집에 수록된 《성호전집(星湖全集)》 권7 〈해동악부(海東樂府)〉에는 “고려 태조가 일어날 때, 고운이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을 이곳에서 지어 올렸으므로 상서장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D-002]이종상(李鍾祥) : 1799~1870. 본관은 여주(驪州), 호는 정헌(定軒), 경주 출신이다. 서양 학문이 국내에 번지자 이를 근심하고 이 사설(邪說)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1866년(고종3)에 미국의 배 셔먼호가 침범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경주진 소모장(慶州鎭召募將)이 되어 의병을 모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정헌문집(定軒文集)》이 있다.
[주D-003]독서당(讀書堂) : 고운이 글을 읽었다고 하는 독서당은 여기에서 말한 경주 낭산(狼山)에 있는 것 이외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도 있다.
[주D-004]황학(黃鶴) : 옛날 선인(仙人)인 자안(子安)이 황학을 타고 내려온 곳에 황학루(黃鶴樓)라는 누각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이를 소재로 읊은 당(唐)나라 최호(崔顥)의 시 〈등황학루(登黃鶴樓)〉에 “황학은 한 번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토록 부질없이 떠 있도다.〔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05]금심(琴心) : 가야금 연주를 통해서 애모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을 말한다.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을 금심으로 유혹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주D-006]미수(眉叟) 허목(許穆)의 기문(記文) : 한국문집총간 98집에 수록된 《기언(記言)》 권28하 〈월영대기(月影臺記)〉를 말하는데, 현재 판본의 〈월영대기〉에는 이 글의 끝부분에 나오는 감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은 없다.
[주D-007]닭을 …… 잡는다 :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한다는 뜻이다. 저잣거리에서 이인(異人)이 고경(古鏡)을 팔고 있기에 당(唐)나라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구입해서 보니 그 거울에 글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에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先操雞後搏鴨〕”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이 말은 먼저 계림을 장악한 뒤에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힌다는 뜻으로, 고려의 왕건이 신라를 멸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사략(朝鮮史略)》 권4와 《어정전당시(御定全唐詩)》 권875 〈고려경문(高麗鏡文)〉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8]단속사(斷俗寺) ……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진주목(晉州牧) 불우(佛宇) 단속사〉에 “신라 병부 영(兵部令) 김헌정(金獻貞)이 지은 승려 신행(神行)의 비명(碑銘)이 있다.”라고 하였고, 오대사(五臺寺) 조에 “수정사(水精寺)라고도 한다.”라고 하고, 권적의 기문(記文)을 실었다. 권적은 고려 말의 문신(文臣)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의 아들로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고 두 차례나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길창군에 봉해졌다. 원화(元和)는 당 헌종(唐憲宗)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이다.
[주D-009]용면(龍眠) : 송대(宋代)의 저명한 화가 이공린(李公麟)의 별호(別號)인 용면거사(龍眠居士)의 준말이다.
[주D-010]점필의 풍류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고운의 유적을 찾아와서 시를 읊고 노닐었던 것을 말한다.
[주D-011]이 …… 최고이니 : 참고로 소식(蘇軾)의 시에 “남만(南蠻)에 와서 죽을 뻔했어도 나는 원망하지 않아, 이 유람 너무도 좋아 내 평생 최고였으니까.〔九死南荒吾不恨 茲游奇絶冠平生〕”라는 구절이 있다. 《蘇東坡詩集 卷43 六月二十日夜渡海》
[주D-012]애장사(哀莊寺) :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를 가리킨다.
[주D-013]포사(鮑謝) : 남조 송(宋)의 시인인 포조(鮑照)와 사영운(謝靈運)을 병칭한 말이다.
[주D-014]신유한(申維翰)이 …… 지었다 : 신유한(1681~1752)은 조선 후기의 문장가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며, 고령(高靈) 출신이다.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특히 시(詩)와 사(詞)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한국문집총간 200집에 수록된 《청천집(靑泉集)》 권2에는 〈경운재게(景雲齋偈)〉, 〈경운재가(景雲齋歌)〉, 〈제경운재(題景雲齋)〉 등의 시가 실려 있다.

 
고운 선생 사적
단전요의〔檀典要義〕

태백산(太白山)에 있는 단군(檀君)의 전비(篆碑)는 난삽해서 읽기 어려웠는데, 고운이 이 비문을 해독하였다. 그 문자는 다음과 같다.
“一始無始一 碩三極 無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無愧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 一杳演萬往萬來 用變不同本 本心本太陽 仰明人中天中一 一終無終一”

[주C-001]단전요의(檀典要義) : 김용기(金容起)에 의해 일제 시대인 1925년에 출간된 책으로, 전체가 14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대동사강(大東史綱)》 등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주D-001]태백산(太白山)에 …… 해독하였다 : 이른바 《천부경(天符經)》 81자인데,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서 이 경문의 유래나 구두를 찍고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학계에 정설이 없다. 여기에서도 굳이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태백산은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

고운 선생 사적
최고운의 난랑비 서문 및 삼국사〔崔孤雲鸞郞碑序及三國史〕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한다. 들어가서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가서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은 노 사구(魯司寇 공자(孔子))의 뜻이요,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 주사(周柱史 노자(老子))의 종지요, 제악(諸惡)을 짓지 않고 제선(諸善)을 봉행하는 것은 축건 태자(筑乾太子 석가(釋迦))의 교화이다.

 
고운 선생 사적
동사보유〔東史補遺〕

살펴보건대, 마한(馬韓)이 고구려가 되고 진한(辰韓)이 신라가 되고 변한(弁韓)이 백제가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최치원의 정론(定論)이 있다. 이것은 최치원이 처음으로 만들어 낸 설이 아니요, 삼국 이래로 서로 전해 온 설이다. 김부식(金富軾)의 〈지리지(地理誌)〉에도 최치원의 이 주장이 옳다고 하였다.

[주C-001]동사보유(東史補遺) : 1630년(인조8) 전후에 조정(趙挺, 1551~1629)이 지은 역사책으로, 4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단군 조선에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서유구의 《계원필경》 서문〔徐有矩桂苑筆耕序〕

묘는 홍산(鴻山)에 있다. 혹자는, 홍산은 가야(伽倻)의 어느 산기슭의 이름이라고 하였다.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서악지〔西岳誌〕

동국(東國)에서 태어나 그 문장과 사업으로 중원에까지 명성을 날려 후세에 찬란하게 빛나는 이는 천고에 한 사람일 뿐이니, 이런 분은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해야만 할 것이다.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을 가지고 은밀히 고려의 왕업을 도왔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의 식견이 좁아서 그렇게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 기미를 보고는 멀리 떠나 끝내 숨어 살면서 고려 시대에 자취를 더럽히지 않았으니, 홀로 우뚝 서서 세파에 휩쓸리지 않은 그 고결한 지조는 또 백세의 사표가 된다고 할 것이다.
〈서원청액소(書院請額疏)〉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은 문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기미를 보고 벼슬하지 않은 그 지조 또한 나약한 자들의 뜻을 일으켜 세우고 완악한 자들의 행동을 방정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위판(位版)을 개제(改題)할 때 고유(告由)한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오산이 빼어난 원기를 기르고 / 鼇山毓秀
문수가 신령한 정기를 실어
 / 蚊水載靈
맑은 기운이 한데 모인 결과 / 淑氣所鍾
철인이 이에 태어났도다 / 哲人乃生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서 / 竗齡乘桴
북으로 중국에 유학을 한 뒤 / 北學中國
대궐의 과거에 응시를 하여 / 射策金門
급제 명단에 영명을 날렸어라 / 蜚英桂籍
대장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 / 佐成蓮幕
글 짓는 직책을 전담하면서 / 職專翰墨
격문을 어느 날 한번 날리자 / 羽檄朝飛
황소(黃巢)의 넋이 달아났다네 / 狂巢褫魄
천자의 명을 받든 신분으로 / 天子有命
금의환향한 노래자(老萊子)의 뜰 / 錦還萊庭
무거운 책임을 한 몸에 떠맡고서 / 抱負任重
태평한 정치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 庶幾治平
쇠퇴한 말세인 것을 어떻게 하랴 / 已矣其衰
한 손으로는 지탱할 수 없었어라 / 隻手難支
세상 밖의 저 푸른 산으로 / 物外靑山
꿈속에도 때때로 돌아가다가 / 夢有歸時
한 몸 거두어 종적을 감췄나니 / 斂而藏蹤
기미를 살핀 것이 귀신과 같았어라 / 知幾其神
경치 뛰어난 이름난 곳마다 / 名區勝境
유적만 허전하게 벌여 있을 뿐 / 遺迹空陳
선생을 생각해도 볼 수 없는지라 / 思人不見
경모하는 마음만 깊어질 따름이라 / 但深景慕
생각건대 우리 선생은 / 念我先生
문학의 시조가 되시는 분 / 文學之祖
성무에 이미 오르신 위에 / 旣躋聖廡
현사를 다시 건립해서 / 又建賢祠
조촐하게 제사를 드린 것이 / 俎豆蘋蘩
지금 어언 백년의 세월 / 百年于玆
위판에 명휘를 제한 것이 / 位題名諱
불경에 가까운 일일 듯싶어 / 恐近不敬
이제 위판을 개제하여 / 今而改是
아름다운 명호로 바꿨어라 / 美號是正
귀신과 사람이 모두 안정되어 / 神人俱安
복과 녹이 다 함께 오리니 / 福祿來幷
양양히 좌우에 계시면서 / 左右洋洋
이 충심을 굽어살피소서 / 鑑此丹誠

위판을 개제한 뒤의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동방에 문학을 창도하고 / 倡文東邦
중국에 아명(雅名)을 떨치신 분 / 振雅中國
마침내 유원을 빛나게 하여 / 遂光儒苑
길이 제향을 향유하게 되었네 / 永享芬苾
이번에 또 위판을 개제하여 / 亦旣改書
옛것을 다시 새롭게 하였는데 / 其舊維新
지금 중추의 시절을 맞아 / 時維仲秋
정결한 이 제사를 올리나이다 / 薦此明禋

평상시에 제향하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온 천하에 떨치고 / 文振夷夏
은택은 후학에 미쳤으니 / 澤及後學
우리 동방에서 대대로 영원토록 / 靑邱永世
선각에게 보은의 제사를 올립니다 / 式報先覺

[주C-001]서악지(西岳誌) : 정극후(鄭克後, 1577~1658)가 편찬한 책으로,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西岳洞)에 있는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대해 적은 책이다. 1916년에 재간하였다. 정극후는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효익(孝翼), 호는 쌍봉(雙峯)이며, 경주 출신이다.
[주D-001]나약한 …… 것입니다 : 참고로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맹자가 “백이의 풍도를 듣고 나면, 완악한 자들도 행동을 방정하게 하고 나약한 자들도 뜻을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오산(鼇山)이 …… 실어 : 오산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키고, 문수(蚊水) 역시 경주에 있는 문천(蚊川)을 가리킨다.
[주D-003]노래자(老萊子)의 뜰 : 어버이가 계신 고향 집이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가 나이가 70인데도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목적으로 색동옷을 입고서 춤을 추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初學記 卷17 註》
[주D-004]양양히 좌우에 계시면서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6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말이 나온다.




 

최치원을 회상하며 ; 문화의 고장 고군산 일대 새만금 정보마당

2008/04/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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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신선 최치원의 환타지가 곳곳에 스며들어있는 곳이다. 해안을 따라 형성돼있는 연안과 고군산 군도 일대가 신선 최치원 환타지의 무대다. 이 가운데서도 고군산군도의 시점인 신시도는 1,200여년전 신선 최치원이 활동한 환타지의 정수리라고 할 수 있다. 최치원이 글을 읽고 수도를 해 깨우침을 얻은 곳일 뿐만 아니라 중국과 교류하는 전진기지이기도 했다.

 

신시도는 이미 지난 2005년 새만금 방조제로 연결돼 연안이 됐다. 군장산업단지와 비응도를 거쳐 야미도를 지나면 새만금 배수갑문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이곳이 신시도다. 비응도에서 거리는 14km. 신시도는 수십개의 섬이 펼쳐진 고군산군도를 아우르는 주섬(主島)이다. 신시도는 어업을 주로 하는 다른 섬과는 달리 산과 들, 바다가 적절히 조화돼 자급자족이 가능한 곳이다.

 

          

 

아직 새만금 방조제 도로가 한창 건설되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된다. 그러나 신시도와 선유도 등 고군산군도 주민들과 연통이 되면 통행이 가능하다. 방조제로 연결돼 있지만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은 열영산(月影山) 등 10여개가 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민과 관광객이 마을을 가려면 산을 넘거나 신시 배수갑문옆에 마련된 선착장에서 뱃길을 이용해야 한다.

     
·● 신시도 대각산 전망대
  
 

      

 


최치원 설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곳이 바로 신시도의 월영산과 대각산(大覺山)이다. 월영산은 해발 180m로 고군산군도의 주봉이면서 신시도의 주봉이다. 부안쪽의 월영산자락을 잘라 거대한 신시 배수갑문이 앉혀졌다. 배수갑문쪽으로 돌아서 능선을 타고 40분 정도 가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서 보는 고군산군도는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부채살처럼 펼쳐진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 등 고군산군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십개의 섬들이 수놓아진 경관은 선경 그 자체다. 섬과 섬이 이어지면서 그려낸 비경을 보고 있노라면 스스로 신선이라고 느끼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김환용(51) 연안보전네트워크 상임이사는 "수차례의 답사결과 해상신선 최치원이 거문고를 타고 글을 읽었다는 월영대 지점을 추정할수 있었다"며 "주민들 사이에는 아직도 신선 최치원에 대한 이야기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월영산을 지나 능선을 타고 1시간 가량 가면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를 가진 대각산에 이른다. 대각산 정상에는 군산시가 지난 2004년 설치해 놓은 전망대가 있다. 선유도와 신시도를 감싸는 횡경도와 바다가 어우러지는 비경을 경험할 수 있다. 수십년전만 해도 대각산 바로 밑에 신시도 마을이 형성됐으나 지금은 해안쪽으로 옮겨가 소나 염소의 방목장으로 쓰이고 있다.

 

최정봉 이장(50.이장)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월영산과 대각산에 얽힌 최치원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지만 정확하게 기억을 할 수가 없어 망실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며 "체계화해서 최치원 문화센터 같은 것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 이장은 비석거리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마을사람들이 월영산 밑에 지금은 새만금 신시 배수갑문을 설치하기 위해 깎아내린 곳에 비석들을 세워놓은 곳을 비석거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들 비석에는 신시도와 최치원 선생에 얽힌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만금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없어져 버렸다. 중국 난징시와 강소성 등 각 지역에서 최치원 기념사업을 하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 강제선생 비석   
   
                                       


김성환 군산대교수는 "군산은 물론 신시도 등 고군산군도는 최치원 이야기가 산재해 있다"며 "이는최치원 문화센터 건립을 비롯한 문화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된다"고 말했다.

 

△ 신시도의 명칭에서 최치원

 

신시도의 명칭은 문창(文昌)현, 심리(深里), 신치(新峙) 등으로 불리었다. 이들 지명 모두 최치원과 관련됐다는 것. 문창은 고려 현종때 최치원을 문창(文昌侯)이라는 시호를 내린 것에 연유한다. 심리는 최치원이 깊은 바다 가운데로 숨었다는 뜻이고 신치는 최치원이 글을 읽으며 새로움을 다져 우뚝 솟았다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 역사와 문헌속의 최치원

 

역   사

 

최치원이 신라 진성여왕때인 890년경 정읍 태인 지역인 태산군수를 봉직했다. 그러나 신라가 망하고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에 부성군(충남 서산)으로 옮겼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사적이 태인의 피향정과 무성서원이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의 정자로 최치원이 처음 세웠고 현재 건물은 조선 중기때 중건된 것이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태수를 지낸 것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에 세워진 사당 태산사를 이은 서원이다.

 

● 문   헌

 

▽ 이중환 '택리지'(1751)

서쪽의 옥구는 서해에 닿아있는데 자천대가 있다.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돌출돼있고 그 위에 두개의 돌함이 있었다. 산라 때 최고운이 함안에 비밀문서를 감추어두었다고 한다. 이를 사람들이 감히 열어보지 못했고 혹 움익이면 바다에서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쳤다. 이런 얘기가 퍼져 관리가 올 때마다 구경하기 때문에 고을에 많은 폐가 됐다. 그래서 100년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그릇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버려 지금은 찾아보는 사람이 없다.

 

▽ 서유구(1764~1845) '교인 계원필경'

공의 이름은 치원이요, 자는 해부요, 고운은 호이니 호남 옥구사람이다

 

▽ 이규경(1788~) '오주연문장전산고' 최문창사적변증설

최치원의 출생지는 옥구인데 최씨 성의 발상지가 사량부이기 때문에 사량부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옥구는 최치원의 고향이고 경주가 본관이다. 그렇지만 이를 분명하게 증명할 수 없다.

 

▽이능화 '조선무속고'(1927)

옥구에 자천대(紫泉臺)가 있는데 최고운 선생이 노닐던 유적이라고 한다. 고군산군도 한 섬에 금돼지 굴(金猪窟)이 있고 그 앞의 바다를 금돼지바다(金猪洋)라고 불렀다. 옛날에 금빛 털의 돼지가 살던 굴로 제법 신통력이 있었다. 신라 말에 최충이 고을 수령으로 와서 아들을 낳아 치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섬의 옛 이름은 문창군으로 물고기가 많아 당나라 상선이 왕래하며 무역을 하는 곳이었다. 당나라 상인들이 최치원을 보고 기뻐하여 당나라로 데려갔다. 최치원은 당에서 과거를 보고 버슬에 오른 뒤 귀국해 산천을 유람했다. 섬의 월영대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고 지금도 섬사람들은 선생의 기풍을 사모해 사당을 세우고 경배하기를 마치 천신(天神)과 같이 한다.

    

 


  ▲ 최치원이 글을 읽었다는 자천대. 당초 하제 부근의 선연리에 있었으나 미군 비행장 건설로

     옥구향교로 옮겨졌다.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최치원을 모신 문창서원이다.  
 
▽ 고대소설 최고운전

    원은 금돼지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버려진 아이를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젖먹이고 하늘의

    선인들이쳐 대문장가로 키운다. 그리고 최치원은 중국에 들어가 여러 난관을 극복하며 황제

    와 문인들을 굴복시 돌아온다. 그러나 고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가야산에 은거하고 어느

    나무꾼이 산에 들어갔다가  고 운 승려가 바둑두는 것을 구경하고 내려왔더니 3년이 지났다

     는 이야기다.

 

△중국에서 최치원은 중국 난징(南京)시 뤼슈이현에는 당나라 시대 원형을 복원한 초대형 7층

   탑 2층에 최치원 방'에는 시문과 초상이 진열돼있다. 부근의 기념품 상점에는 최치원의 동상

   과 초상, 계원필경등 판매한다. 류슈이 현은 최치원이 관리로 있었던 것을 기념해 동상과 박

   물관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쟝수(江蘇)성 양조우(楊州)시는 2001년부터 지역 박물관에 최치원 전시실을 마련했고 2005

   년에는 최치원 기념관을 건립했다.

 

*최치원 루트

 

  현재에서 최치원 관련지역은 어디일까. 역사와 문헌에서 나타난 곳들을 찾아 더듬어볼 수 있

  다. 최치원이 태어난 설화와 관계있는 금돼지굴은 내초도에 있었다. 내초도는 이미 군장국가

  산업단지로 매립됐다. 자천대는 1800년대 하제 인근 선연리에 재건됐다가 미군비행장이들어

  서면서 옥구읍 옥구향교에 이전됐다. 옥구향교에는 유교의 성인인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과는

  별도로 최치원을 모시는 사당을 갖추고 있다.

 

  신시도는 최치원과 뗄 수 없는 월영산과 대각산이 있다. 최치원이 월영산에서 글읽는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전설은 학문적 명성이 중국에서도 유명했다는 것을 과시한다.

 

  뿐만 아니라 정읍 태인의 피향정과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신라때 태산군수로 있었던 것을 기

  념하는 곳이고 충남 서산은 부성군수로 옮겨간 곳이다.

 

* 최치원 코드-어떤 의미갖나

 

▲ 김영래 교수  
 
김영래 좌계학당 교수는 고군산일대에서 나타나는 황금돼지를 비롯한 최치원 설화는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의미심장한 코드를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치원 설화는 물에 의한 해양과 대륙의 소통, 분쟁의 해소, 갈등의 통합의 문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최치원의 탄생설화에서 나타나는 황금돼지는 "대사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는 돼지로 물에서 헤엄을 잘치는 것은 물론 질주능력이 탁월한 황금빛이 나는 멧돼지를 뜻한다"며 "아시아 신화에서 세상을 구하는 사자로서 기능한다"고 말했다.

 

최치원의 그의 저서 계원필경의 여별여도사(有別女道士)에 나오는 '마고를 알게 되어 기뻤나이다'의 마고는 세상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이를 구하는게 바로 황금돼지로 인류의 구원을 염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물은 마고의 사랑과 눈물과 통합을 의미해 산과 물로 나누어진 분열과 분쟁을 통합을 뜻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산에서 만들어진 물이 바다나 호수로 흘러 기운이 통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물"이라며 "이 물에 사는 성스러운 짐승이 황금돼지로 통합의 매개체"라고 말했다.

 

그는 핵전쟁, 생태파괴, 종교분쟁, 기후급변 등 현 인류가 안고 있는 과제 해결의 열쇠가 최치원의 황금돼지 코드에 있다고 설명했다.

 

 

 

  • 오성산 전설     기벌포 전투     최치원과 군산    무선과 진포대첩
  • 발산초등학교의 비밀   일본인 농장주들
  • 최치원과 군산

    우리 나라 최고의 유학자인 최치원이 군산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여 고려시대에는 그의 시호를 따서 문창현이 생겨났다. 지방자치제가 된 후 각 지역마다 관광문화 상품 개발을 위하여 지역 역사와 연관된 인물과 전설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 군산에서도 새로운 향토사의 중요 인물로 각광받게 될 사람이 있으니 그가 최치원이다. 통일신라말의 대유학자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인 최치원을 당연히 경주 출신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 황당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최치원 군산 출생설은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나름대로 객관적 증거를 지닌 이야기이다. 군산에는 예부터 최치원 선생 출생에 관련된 선유도 전설과 내초도 전설이 전해오고 있었으며 옥구군의 군지에도 최치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고 과거 서해안에 자리한 정자였던 자천대의 내력에도 최치원이 등장한다.

    그러나 최치원과 관련된 전설이 전국적으로 수십 개나 있을 정도로 최치원은 도선 국사나 이태조와 함께 백성의 정신 속에 살아온 영웅적 인물이었기에 이제까지 최치원과 군산에 대한 연관성은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중 이상비 교수의 연구를 시작으로 군산의 최치원 출생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최치원이 군산 출신임을 증명하는 전설과 지명 그리고 유적들을 중심으로 그 진위를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헌강왕 1년(857년)에 태어났다.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하였으며 경주 사량부 또는 본피부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12세데 당에 유학하여 17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직에 나아가 황소의 난에 '토황소격문'을 적어 이름을 날리었다. 이후 28세에 귀국하여 신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시무 10조를 건의하였으나 귀족들에게 배척 당하고 난세에 절망하여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최치원에 대한 기록은 무척이나 짧다. 이제까지 최치원의 출생지는 경주로 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각각 최치원의 출생지를 경주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름은 사량부와 본피부로 다르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서가 경주를 최치원의 고향으로 기록한 이상 최치원의 출생지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최치원의 고향에 대한 전혀 다른 주장이 제기된다. 그것은 정조 때 서모씨라는 사람이 최치원의 전기를 썼는데 그 책에서 최치원의 고향을 고군산(선유도)라고 적은 것이다. 이후 <최고운전>이라는 소설에서는 최치원의 고향을 문창군이라고 적고 있다.

    왜 최치원의 출생지를 고려시대에는 경주 라고 적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군산의 고군산 혹은 문창군으로 변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변화는 본래 최치원의 출생지가 명확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최치원의 출생에 대한 의문의 답은 <삼국사기>의 한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최치원에 대한 기록을 남기며 그 집안을 세계(世系) 실전(失傳)이라 적고 있다. 세계(世系) 실전(失傳)이란 최치원의 집안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어찌하여 유학의 시조라 칭해지는 최치원의 집안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일까?

    최치원의 제자 중에서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 충성하여 고려의 중앙 귀족이 된 자가 많았는데 그 결과 최치원은 도선 국사와 함께 고려의 호국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이다. 이처럼 위대한 사람의 집안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최치원이 통일신라의 도성인 경주 출신이 아니며 또한 지방 호족 출신도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최치원이 경주에 살아온 집안이라면 대학자를 낳은 최치원의 집안이 알려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최치원은 그의 자(字)처럼 외로운 구름 혹은 바다의 구름처럼 신라의 지배 계층과는 전혀 다른 출신 성분의 사람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 군산의 최치원 관련 유적 .

      옛 기록에서 최치원의 출생지로 거론되는 경주와 고군산 그리고 문창군 중 공교롭게도 고군산과 문창군 두 곳이 군산에 있는 지명임은 놀라운 사실이다. 이 중 고군산은 선유도의 옛 이름임은 다들 알고 있지만 문창군은 어디를 말함인가? 이 문창이란 지명은 고려시대 초에 군산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군산에는 연강(회현), 옥산(옥구), 취성(임피) 등의 3개 마을들이 마한시대부터 명칭은 바뀌지만 생활 공간은 바뀜 없이 이어져 살아 왔는데 갑자기 고려 초에 문창현 이라는 행정구역이 하나 늘어난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있었을까? 고려시대에는 지방 행정 단위마다 신분 계급처럼 상하의 차이가 있었는데 어떤 마을 출신이 국가에 공을 세우면 마을의 격을 높이고 반면에 반역을 하면 마을의 격을 낮추거나 마을 자체를 없애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볼 때 고려초 최치원은 문장이 뛰어나다는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는데 이때 그가 태어난 출생지 또한 문창현이라는 지방 명칭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문창현은 옥산(옥구)의 북쪽 10리에 있다고 했으니 과거 서해 바닷가였던 산북동 지역으로 현재의 문창초등학교 인근지역이다. 또 한 가지 최치원의 고향을 논할 때 꼭 등장하는 것이 최치원이 공부를 했다는 월영대이다. 군산에는 이 월영대에 해당하는 곳이 두 곳이 있는데 한 곳은 고군산군도의 월영대이고 나머지 한 곳은 옥구의 자천대이다. 고군산군도 팔경에 보면 월영단풍(月影丹楓)이라는 것이 있는데 선유도의 동쪽 섬인 신시도의 풍경을 칭하는 것이다. 선유도는 고려시대에 외국과 무역을 하는 중간 기착지로써 천 여 호의 주민이 살았고 고려의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큰 섬이었다고 전한다. 또 한 곳인 자천대는 옥구군지에 그곳에서 최치원이 글을 읽으니 그 소리가 중국에까지 들렸다는 기록이 전하는 곳이다.

      현재는 옥구군 상평읍 옥구 향교에 옮겨져 있지만 본래는 군산 비행장이 있는 선연리 하제의 서해안 바닷가에 있었다. 이 곳은 군산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에 소나무가 빽빽한 아름다운 해안이었다고 한다. 옛 지도에 그려진 자천대는 바닷가에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상에서 보았다시피 최치원이 군산 출신이라는 주장은 전혀 허황된 말만은 아니며 다만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할 뿐이다. 고향이란 출생지를 의미하는데 인간의 경우 출생지에 대한 집착은 유별난 데가 있다. 그런데 왜 최치원만은 스스로를 외로운 구름이라고 부르며 고향을 밝히지 않았을꺄? 통일신라말 피폐해진 나라와 백성을 구해보려는 한 지성인의 노력은 그 출생의 내력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이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桂苑筆耕集
    판심제  桂苑筆耕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34年刊
    권책  20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17(㎝)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22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
     저자
    성명  최치원(崔致遠)
    생년  857년(통일신라 헌안왕 1)
    몰년  ?
     海雲(夫)
     孤雲
    본관  慶州
    시호  文昌侯
    특기사항  文廟에 배향
     가계도
     崔肩逸
     
     崔致遠
     

    기사전거 : 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崔致遠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헌안왕 1 857 정축 大中 11 1 慶州 沙梁部에서 태어나다.
    경문왕 8 868 무자 咸通 9 12 당 나라에 건너가 國子監에 유학하다.
    경문왕 14 874 갑오 乾符 1 18 9월, 예부시랑 裵瓉이 主試한 賓貢科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다.
    헌강왕 1 875 을미 乾符 2 19 洛陽을 遊浪하며 지은 賦 5수, 詩 100수, 雜詩賦 30수를 모아 3편으로 편집하다.
    헌강왕 2 876 병신 乾符 3 20 宣州 溧水縣尉가 되다. 이때 公私間에 지은 글을 모아 「中山覆簣集」 5권을 만들다.
    헌강왕 3 877 정유 乾符 4 21 겨울, 율수현위를 사직하다.
    헌강왕 4 878 무술 乾符 5 22 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終南山에서 공부하다.
    헌강왕 5 879 기축 乾符 6 23 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諸道行營兵馬都統 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書記의 일을 맡다. 이후 4년간 軍幕에서 表ㆍ狀ㆍ書ㆍ啓ㆍ檄文 등을 도맡다.
    헌강왕 6 880 경자 廣明 1 24 7월, 〈討黃巢檄文〉을 지어 文名을 천하에 떨치다.
    헌강왕 8 882 임인 中和 2 26 황제로부터 紫金魚袋를 하사받다.
    헌강왕 9 883 계묘 中和 3 27 고변의 書記로 있으면서 지은 만여 편의 글 중에 정수만을 뽑아 「桂苑筆耕」 20권을 만들다.
    헌강왕 10 884 갑진 中和 4 28 10월, 귀국을 결심하고 〈歸勤啓〉를 올리자 唐 僖宗이 送詒使로 삼아 詔書를 내려 허락하다. 顧雲ㆍ楊贍ㆍ吳巒 등과 석별하며 시를 주고받다. ○ 풍랑 때문에 曲浦에서 체류하다.
    헌강왕 11 885 을사 光啓 1 29 3월, 귀국하다. ○ 侍讀 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事가 되다. ○ 왕명으로 〈大崇福寺碑文〉을 짓다.
    헌강왕 12 886 병오 光啓 2 30 1월, 당에서 지은 「계원필경」ㆍ「중산복궤집」 및 詩賦 3권을 헌강왕에게 올리다.
    진성여왕 1 887 정미 光啓 3 31 1월, 〈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並序〉를 짓다.
    진성여왕 4 890 경술 大順 1 34 시기하는 자들로 인해 외직을 자원하여 太山郡(泰仁) 太守가 되다. ○ 왕명으로 〈朗慧和尙碑文〉을 짓다.
    진성여왕 7 893 계축 景福 2 37 富城郡(瑞山) 太守가 되다. 마침 조정에서 賀正使로 삼아 당에 파견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중지되다.
    진성여왕 8 894 갑인 乾寧 1 38 2월, 時務十餘條를 올리다. 왕이 가납하여 阿飡에 임명하다. 그러나 시무책은 시행되지 못한다.
    진성여왕 9 895 을묘 乾寧 2 39 7월, 〈海印寺妙吉祥塔記〉를 짓다.
    진성여왕 10 896 병진 乾寧 3 40 가족을 데리고 伽倻山으로 들어가다.
    효공왕 2 898 무오 光化 1 42 1월, 〈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를 짓다.
    효공왕 4 900 경신 光化 3 44 12월, 〈海印寺善安住院壁記〉를 짓다.
    현종 11 1020 경신 天禧 4 - 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從祀되다.
    현종 14 1023 계해 天聖 1 - 2월, 文昌侯로 追封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 후손에게 군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전교하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 慶州에 서원이 세워지다.(1623년 西岳書院으로 사액)
    광해군 7 1615 을묘 嘉靖 43 - 泰仁 武城에 서원이 세워지다.(1696년 武城書院으로 사액)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 咸陽 柏淵에 서원이 세워지다.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 大丘 解顔縣에 桂林祠를 세워 影幀을 봉안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 「桂苑筆耕集」이 간행되다.(洪奭周ㆍ徐有榘의 序)
    - - 1926 병인 - - - 6월, 후손 崔國述이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다.(盧相稷의 序) ○ 겨울, 후손 崔勉植 등이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다.(李商永의 序)

    기사전거 : 孤雲先生事蹟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당 나라에서 귀국한 직후인 886년에 在唐時의 저작을 정리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도합 28권을 헌강왕에게 올렸다. 이때 아울러 올린 桂苑筆耕集序에 저작목록이 실려 있다. 즉 私試今體 5수 1권,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雜詩賦 30수 1권, 「中山覆簣集」 1부 5권, 「桂苑筆耕集」 1부 20권이다. 〈私試今體〉ㆍ〈五言七言今體詩〉ㆍ〈雜詩賦〉는 東都를 유랑하며 붓으로 호구지책을 할 때 지은 것이고, 「중산복궤집」은 宣州 溧水縣尉로 있을 때 公私間에 지은 것이다. 「계원필경집」은 879년부터 4년간 고변의 幕府에서 從事巡官으로서 書記의 職任을 맡고 있을 때 지은 만여 편의 글 가운데서 정수만을 뽑아 20권으로 편차한 四六文의 전형적인 글이다. 이 중 詩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 저자의 저술에 관하여 「新唐書」에는 四六集 1권, 桂苑筆耕 20권, 「삼국사기」에는 文集 30권, 「해동문헌총록」에는 崔氏文集 30권, 桂苑筆耕 20권, 四六集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집」 20권을 비롯하여 「고운선생문집」 등이다.
    「계원필경집」은 삼국사기ㆍ해동문헌총록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ㆍ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 후 1834년 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洪奭周의 집에 家藏된 舊本을 얻어 編目과 義例는 그대로 두고 잘못된 글자만을 교정하여 全州에서 聚珍字로 간행하였다.《1834年刊本》 이 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4220),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8년에는 후손 崔基鎬 등이 慶州 伊上齋에서 木活字로 간행하였다.《1918年刊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42-2), 고려대ㆍ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30년에는 陰城 慶州崔氏文集發行所에서 新活字로 간행하였다.《1930年刊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82-68)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34년 全州에서 간행된 활자본으로 서울대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洪奭周ㆍ徐有榘ㆍ崔致遠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文이다.
    권수에는 1834년에 쓴 洪奭周와 徐有榘의 校印桂苑筆耕集序와 886년 저자가 「桂苑筆耕」을 포함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합 28권을 저작목록과 함께 헌강왕에게 올릴 때 쓴 自序가 실려 있다.
    권1~16은 淮南에서 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지은 軍文이며, 권17~20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다. 그리고 권 앞에는 각각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권1에는 表 10수, 권2에는 表 10수, 권3에는 狀 10수, 권4에는 奏狀 10수, 권5에는 奏狀 10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天子에게 올린 글이다. 권6은 堂狀으로 狀 10수가 실려 있는데 中國 諸官에게 올린 글이다. 권7~10은 別紙로서 각각 20수가 실려 있다. 권11에는 檄書 4수, 書 6수가 실려 있다. 이 중 〈詩黃巢檄文〉은 저자의 文名을 천하에 떨친 글이다. 권12는 委曲으로 20수의 中國下官에게 보낸 私信이 실려 있다. 권13~14는 擧牒으로 각각 25수가 실려 있는데, 下官들의 人事異動을 통지하는 私信이다. 권15에는 道敎관계의 글인 齋詞 15수, 권16에는 祭文 4수, 書 2수, 記 2수, 疏 2수가 실려 있다.
    권17에는 啓狀 10수가 실려 있다. 이 중 고변의 功德을 칭송한 七言紀德詩 30수가 〈獻詩啓〉 아래에 附記되어 있다. 권18에는 書ㆍ狀ㆍ啓 25수가 실려 있다. 권19에는 狀啓 1수, 別紙 9수, 雜著 10수가 실려 있다. 이 중 잡저는 편지 글이다. 권20에는 啓狀 4수, 別紙 5수, 祭文 1수, 詩 30수가 실려 있다. 대부분 저자가 귀국할 즈음에 올린 狀과 귀국전후의 심경을 읊은 시이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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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대숭복사 비명 병서〔大嵩福寺碑銘 竝序



    내가 듣건대, 왕자(王者)는 부조(父祖)가 쌓은 덕업을 기반으로 해서 자손을 위한 계책을 크게 세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정치는 인(仁)을 근본으로 하고 예교(禮敎)는 효(孝)를 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는 즉 인에 입각하여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을 확대 적용하고, 효에 입각하여 어버이를 높이는 전범을 거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夏)나라의 홍범(洪範)을 통해서 무편(無偏)의 자세를 본받고, 주(周)나라의 시편(詩篇)을 통해서 불궤(不匱)의 정신을 따라야 할 것이다. 조상의 덕을 닦으면서〔聿修〕 비패(秕稗)의 기롱을 받지 않게 하고, 제사를 올리면서〔克祀〕 빈번(蘋蘩)의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악한 은혜가 만백성에게 골고루 적셔지고, 덕의 향기〔德馨〕가 드높이 하늘에까지 달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애태우며 더위 먹은 사람에게 부채질해 주고 죄인을 보고서 눈물을 흘린 것은 부처가 대미(大迷)의 지경에서 중생들을 구제해 주는 것 아님이 없고,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의 조상을 하늘과 짝 지우며 상제(上帝)에 배향하는 것은 불교가 상락(常樂)의 세계에서 존령(尊靈)을 받드는 것 아님이 없다. 이를 통해서 유가에서 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은 불가에서 삼보(三寶)를 소륭(紹隆)하는 것과 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물며 옥호(玉毫)의 광채가 밝게 비치는 것과 금구(金口 부처의 입)의 게송이 흘러 전하는 것이 서토(西土)의 생령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동방의 세계에까지 미치게 되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우리 태평(太平) 승지(勝地)로 말하면, 성품은 온유하고 화순하며 기운은 발육하고 생장시키는 데에 적합하다. 산림에 정묵(靜默)의 승도(僧徒)가 많아 인(仁)으로 벗을 모으고, 강해가 조종(朝宗)의 형세와 일치하듯 선(善)을 따름이 마치 물 흐르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기풍을 드날리고 범왕(梵王)의 불도(佛道)에 젖어 드는 것이 마치 도장에 인주를 찍는 것과 같고 거푸집 안에 쇠가 들어 있는 것과 같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신(君臣)이 삼보에 귀의할 뜻을 밝히고 사서(士庶)가 육도(六度)에 정성을 기울인 결과, 심지어는 국성(國城)에까지 원하는 대로 탑묘(塔廟)를 즐비하게 세울 수 있게끔 되었다. 그러니 섬부주(贍部洲)의 해변에 있다고 하더라도, 도사다(都史多)의 천상에 부끄러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신묘한 일 중에서도 신묘한 이 일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금성(金城)의 남쪽에 있는 일출봉(日出峯) 기슭에 숭복(嵩福)이라는 이름의 가람(伽藍)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람은 선조(先朝 경문왕(景文王))가 왕위를 계승한 초년에 열조(烈祖) 원성대왕(元聖大王)의 원릉(園陵)을 조성하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건한 것이다. 고사(古寺)가 세워진 유래를 상고하고 신찰(新刹)이 완공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원구(元舅 큰 외숙)요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外祖)로서, 고귀한 공자(公子)의 신분이면서도 실로 참다운 고인(古人)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안(謝安)이 동산(東山)에서 마음껏 풍류를 즐겼던 것처럼 가당(歌堂)과 무관(舞館)을 그럴 듯하게 세우더니, 나중에는 혜원(慧遠)이 서경(西境)을 함께 기약했던 것처럼 그 건물을 희사하여 상전(像殿)과 경대(經臺)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당년에 풍악을 울리던 피리와 가야금이 오늘날에는 사찰의 쇠북과 경쇠가 되었으니, 이처럼 시대에 따라 바뀐 것은 출세간(出世間)의 특별한 인연이었다.
    이 사원 주변의 경관 중에 고니〔鵠〕 모양의 바위가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을 그대로 곡사(鵠寺)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원앙〔鴦〕처럼 짝하고 있는 회랑(回廊)으로 하여금 성가(聲價)를 드높이게 하고, 거위〔鵝〕처럼 날개를 펼친 불전(佛殿)으로 하여금 빛을 더하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저 바라월(波羅越)의 형태를 표방한 사원이나 굴린차(崛恡遮)의 이름을 기념한 사원이 어찌 천리를 나는 고니의 비유를 취하고 쌍림(雙林)으로 바꿔서 이름을 새로 지은 이 사원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이곳의 지세가 위세 면에서 취두(鷲頭)보다 낮고 지덕(地德) 면에서 용이(龍耳)처럼 높은 만큼, 금계(金界)로 획정하기보다는 옥전(玉田)을 조성하는 것이 적당한 것이었다.
    정원(貞元) 무인년(798, 원성왕14) 겨울에 이르러 왕 자신을 장사 지낼 일에 대해 유교(遺敎)를 내리면서 인산(因山)하도록 명하였으므로 장지를 택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사원이 자리한 터를 지목하여 장차 왕릉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이때 어떤 이가 의문을 제기하며 말하기를,
    “옛날에 유씨(游氏)의 사당과 공자(孔子)의 구택을 모두 차마 허물 수 없다고 하여 그냥 놔두었으므로 사람들이 지금까지 칭송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 금지(金地 사원)의 땅을 뺏으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수달다(須達多)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을 장지로 삼는다면 땅은 복될지라도 하늘은 허물할 것이니 서로 보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정사(政事)를 담당한 자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범묘(梵廟 사원)의 경우는 어디에 있든 반드시 화합하게 되어 있는 만큼, 어디로 가든 간에 맞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일어나는 터도 복된 도량으로 전환하여, 백억겁토록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반면에 영수(靈隧 묘지)의 경우는 아래로 지맥을 살피고 위로 천심을 헤아려서, 반드시 구원(九原) 속에 사상(四象)을 포섭함으로써 천만대토록 그 여경(餘慶)을 보전하게 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불법은 어느 한 곳에 머무는 상(相)이 없으나 장례는 행하기에 좋은 시기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거하는 것이 하늘에 순응하는 도리이다. 단지 청오(靑烏)가 좋다고 간주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어찌 백마(白馬)를 슬피 울게 하려고 해서 그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이 인사(仁祠)의 내력을 살펴보건대, 본디 척리(戚里)에 속해 있었던 것인 만큼, 낮은 척리에서 높은 왕실로 나아가고 옛 절 대신 새 왕릉을 도모하는 것이 참으로 타당하다. 그리하여 왕릉이 해역(海域)의 웅장함을 차지하게 하고, 사원이 운천(雲泉)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게 한다면, 우리 왕실의 복산(福山)이 높이 솟을 것은 물론이요, 저 후문(侯門 척리)의 덕해(德海)도 편안히 흐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게 되는〔知無不爲〕 가운데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된다〔各得其所〕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저 정(鄭)나라 자산(子産)이 작은 은혜를 베푼 것이나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중도에 그만둔 것과 같은 차원에서 따질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의당 거북점과 시초점〔龜筮〕 모두 사람의 뜻과 서로 들어맞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요, 용(龍)과 제천(諸天)의 신이 환희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精舍 사원)를 옮기고 현궁(玄宮 왕릉)을 조성하는 두 가지 공사에 인부를 동원하고 백공(百工)에게 일을 진행하게 하였다.
    감우(紺宇 사원)를 개창(改創)할 때에는 인연이 있는 대중이 서로 이끌고 와서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바람이 통하지 않고, 송곳을 꽂을 땅조차 없을 정도였으니, 이는 마치 5리(里)의 안개를 피우는 술법을 배우려고 사람들이 달려와서 저잣거리를 이룬 것이나 한때 설산(雪山)의 법회에 대중이 화열하며 모여든 것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와와 재목을 거두고 경전과 불상을 봉대(奉戴)하는 일에 있어서도 서로 번갈아 수수(授受)하며 경쟁적으로 정성을 바쳤으므로, 역부(役夫)가 반걸음도 옮기기 전에 석자(釋子)가 편히 거할 곳이 벌써 이루어졌다.
    구원(九原 왕릉)을 조성할 때에는 비록 왕토(王土)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공전(公田 국가 소유의 토지)이 아니었으므로, 왕릉 주변의 토지를 좋은 값으로 매입하여 구롱(丘隴) 200여 결(結)을 보태었으며, 그 대가로 도합 2천 점(苫)의 도곡(稻穀)을 보상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전(畿甸)의 고을 사람들과 공동으로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소나무를 분담해서 주위에 심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쓸쓸히 자꾸만 들려오는 슬픈 바람 소리는 봉황처럼 춤추고 난새처럼 노래했던 옛 생각이 솟구치게 하였고, 어둠에 묻혔다가 밝은 해를 본 묘역은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위세를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살펴보건대, 땅은 하구(瑕丘)와 달라도 경계는 양곡(暘谷)과 접하였고, 기수(祇樹)의 남은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곡림(穀林)의 상서로운 기운이 그 농도를 더하고 있다. 수놓은 듯한 봉우리들은 사방 멀리에서 서로 조회(朝會)를 하고, 누인 명주 같은 개펄은 한 가닥 선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실로 교산(喬山)의 빼어남을 간직하고, 필맥(畢陌)의 기이함을 보여 주고 있으니, 금지(金枝 왕족)가 계림(雞林)에서 더욱 무성해질 것이요, 옥파(玉派 종실)가 접수(鰈水)에서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에 앞서 사우(寺宇)를 옮길 적에 땅에서 솟아 나온 것과 같은 점이 있었으나, 아직 화성(化城)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다. 가까스로 잡목을 베어 내어 강만(岡巒)을 구분하고 띠풀을 엮어서 풍우(風雨)를 피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겨우 70여 년이 지나는 사이에 숨 가쁘게 아홉 조정이나 거치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누차 전복될 위기를 맞았을 뿐 어엿하게 꾸며 볼 여유는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을 맞게 되어서 천세(千歲)의 보배로운 운세를 흠 없이 누리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선대왕(先大王)은 홍저(虹渚)가 빛을 떨치듯 오잠(鼇岑)에 자취를 드리웠다. 처음에 옥록(玉鹿)에서 명성을 날리며 특별히 풍류(風流)를 진작시키더니, 이윽고 금초(金貂)의 지위에서 관원들을 총괄하며 나라의 풍속을 맑게 하였다. 용전(龍田)의 지위를 차지하고 덕(德)을 심었으며, 봉소(鳳沼)에 거하면서 마음을 계옥(啓沃)하였다. 무슨 말을 할 때에는 인자(仁者)로서 사람을 편안하게 하였고, 정사를 꾀할 적에는 정도에 입각하여 인도하였다. 팔병(八柄)의 막중한 권한을 모두 행사하여 사유(四維)가 실추된 것을 바로잡아 두서 있게 하였다. 어려운 일들을 차례로 겪었지만 행하는 일마다 이롭게 진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국(杞國)의 근심이 닥쳐와 보위가 비게 되면서 산악이 흔들렸는데, 사슴의 뒤를 좇는 들판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까마귀 떼가 동산에 모여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선대왕(先大王)이야말로 현명하고 온순한 데다 노성하고 인자하여 백성들의 추대를 받았으니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겠는가. 이에 대저(代邸)에서 입신하고 나서 자문(慈門 불문(佛門))에 뜻을 기울이며 선조(先祖)에게 수치를 끼칠까 염려하여 불사를 일으킬 것을 발원하였다. 그리하여 분황사(芬皇寺)의 승려 숭창(嵩唱)에게 청하여 범거(梵居 사원)를 중수하겠다는 뜻을 부처에게 아뢰도록 하고 한편으로 김순행(金純行)을 보내어 선조의 덕업을 선양하려는 성의를 사당에 고하게 하였다. 이는 《시경(詩經)》에서 말한 바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 않구나.〔愷悌君子 求福不回〕” 라고 한 것이나, 《서경(書經)》에서 말한 바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른다.〔上帝時歆 下民祗協〕” 라고 한 것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지극한 정성이 신불(神佛)의 보우를 받고 선의의 행동을 사람들이 잘 따르게 된 결과, 경(卿)과 사(士)와 대부(大夫)의 뜻이 수귀(守龜)의 뜻과 합치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동국(東國)을 혁혁히 빛내면서 임금으로 임하고 나서, 배신(陪臣)을 보내어 선왕(先王)이 훙거(薨去)한 사실을 알리고 금상(今上)이 왕위를 계승한 것을 보고하였다.
    마침내 함통(咸通) 6년(865, 경문왕5)에 천자가 섭어사중승(攝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를 정사(正使)로 삼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전에 진사(進士)였던 배광(裵匡)의 허리에 금어대(金魚袋)를 채우고 머리에 해치관(獬豸冠)을 씌워 부사(副使)로 삼은 뒤에 왕인(王人)인 전헌섬(田獻銛)과 함께 와서 조명(詔命)을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빛나게 선왕의 뒤를 이어받고 나서 성유(聲猷)를 제대로 봉행함으로써 잘 계승하였다는 이름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왕위에 추대한 지극히 공정한 거조에 참으로 부합된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신라의 국왕으로 삼는 바이다.”
    하였다. 그리고 이와 함께 검교태위 겸 지절충영해군사(檢校太尉兼持節充寧海軍使)를 제수하였다. 지난날에 선대왕이 제(齊)나라를 변화시키며 빼어난 면모를 드러내고,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하며 향기를 드날리지 않았더라면, 천자가 어떻게 이처럼 봉필(鳳筆)을 날려 해외의 제후(諸侯)를 총애하고 용정(龍旌)을 내려 대사마(大司馬)의 직책을 임시로 수행하게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또한 영광스럽게 천자의 은택에 젖었고 보면, 반드시 영구(靈丘 왕릉)에 나아가 친히 참배해야 하겠기에, 천승(千乘) 제후의 행차를 준비하게 하였으나, 그것이 어찌 십가(十家)의 재산만 소모할 뿐이었겠는가. 이에 마침내 태제(太弟)인 상국(相國)에게 명하여 청묘(淸廟)의 제사에 치제(致齊)하게 하고 현경(玄扃 왕릉)에 대신 참알(參謁)하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계림(雞林)의 번성함이여, 그리고 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코끼리가 밭 갈던 일을 언제나 그리워할 것이요, 시대가 평화로우니 소가 헐떡거리는 것을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들판과 시내를 화려하게 비추며 태제의 행렬이 지나가자 구경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복어처럼 등에 거뭇거뭇하게 점이 찍힌 노인과 고니처럼 눈썹이 흰 승려가 손뼉을 치며 서로 기뻐하고 크게 경하하며 말하기를,
    “고귀한 개제(介弟 태제)의 이번 행차로 성제(聖帝)의 은광(恩光)이 드러나고 우리 임금의 효도가 이루어졌다. 예의 있는 우리의 풍속이 넉넉하게 여유가 있어서, 마침내 바다 물결이 가라앉게 하고, 변방에 전쟁의 티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천리(天吏)가 고르게 하고, 땅의 곡식이 풍성하게 하였다. 그러니 뒤를 이어서 연우(蓮宇 사원)를 중수하고 백성(柏城 왕릉)을 돌볼 적기가 바로 지금이니, 지금 하지 않고 어느 때를 다시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이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의 효성이 크게 사무쳐서 생각과 꿈이 일치된 결과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을 꿈속에서 뵙게 되었는데, 성조대왕이 선대왕을 어루만지며 고하기를,
    “나는 너의 선조이다. 네가 불상을 세우고 나의 능역(陵域)을 돌보려고 하는데 조심하고 공경히 할 것이요, 서둘러서 경영하려고 하지 말지어다. 부처의 덕과 나의 힘이 너의 몸을 보호해 줄 것이다. 진정 중도를 잡고 행한다면 하늘의 복록을 끝까지 길이 누리리라.”
    하였다. 이윽고 청랑한 물시계 소리에 맞춰 옥침(玉枕)에서 잠이 깨어 일어나니, 십훈(十煇)으로 점을 치지 않아도 구령(九齡)의 해몽과 일치하는 듯하였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속히 명하여 법회를 경건히 거행하도록 하였다. 화엄(華嚴)의 대덕(大德)인 석결언(釋決言)이 당사(當寺)에서 유지(有旨)를 받들고 5일 동안 강경(講經)을 하였으니, 효성을 펴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선대왕이 하교하기를,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不愛其親〕에 대해서는 경(經)에서도 경계한 바이다.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無念爾祖〕’라고 한 시(詩)의 구절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돌보아 주는 이때에 과인이 사원을 중수하려고 하자 꿈속에서까지 감응이 이루어지게 하니 마음이 떨리고 두렵기만 하다. 3년 동안 날지 않은 것〔三年不蜚〕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단 하루라도 반드시 손질할 것〔一日必葺〕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백관(百官)의 어른과 어사(御史)는 이 일에 대한 이해관계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혔다〔賣兒貼婦〕는 기롱은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혹시 귀신이 원망하고 사람들이 괴로워한다는 말이 나올까 염려가 되니, 행해야 할 일은 진헌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하는 일을 그대들은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종신(宗臣)인 계종(繼宗)과 훈영(勛榮) 이하가 협의하여 상언(上言)하기를,
    “애틋한 소원이 신명에게 감통(感通)하여 선조의 혼령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참으로 임금님이 뜻을 먼저 정하셨기 때문에 실제로 여론이 모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원이 이루어지면 구족(九族)에게도 많은 경사가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농한기를 맞았으니 토목 공사를 일으키소서.”
    하였다.
    이에 건례선문(建禮仙門)에서 특출한 인재들을 발탁하고, 소현정서(昭玄精署)에서 출중한 승려들을 뽑았으며, 종실의 세 명의 유능한 신하인 단원(端元), 육영(毓榮), 유영(裕榮)과 석문(釋門)의 두 명의 걸출한 승려인 현량(賢諒)과 신해(神解), 찬도(贊導)하는 승려인 숭창(嵩唱) 등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 나라의 임금이 단월(檀越 시주)이 되고 국가의 저명한 인물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므로, 역량 면에서 여유가 있었음은 물론이요 마음속으로도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장차 작은 것을 크게 늘리려고 하는 터에, 새것을 옛것과 뒤섞이게 하는 것이 어찌 온당하겠는가마는, 단계(檀溪)의 숙원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 되고, 내원(㮈苑)의 전공(前功)을 해칠 염려도 없지 않기에 옛 재목을 간추려 모아서 높이 다진 대지(垈地)로 옮겨 놓았다. 그러고는 별을 점치고 날을 헤아려 웅장한 규모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면서 진흙을 이기고 쇳물을 부으며 다투어 묘한 솜씨를 보여 주었다.
    구름 같은 사닥다리를 타고서 수(倕)의 재목을 아슬아슬하게 가설(架設)하고, 서리처럼 하얀 흙벽을 노(獿)의 백악(白堊)에 향을 버무려서 발랐다. 바위산의 기슭을 깎아 내어 담장을 돋우고, 시냇물을 굽어보며 문 앞이 트이게 하였다. 거친 섬돌은 쇠 장식 계단으로 바꾸었고, 낮은 곁채는 아로새긴 회랑(回廊)으로 달라지게 하였다. 겹으로 된 불전(佛殿)은 용(龍)처럼 서렸는데 그 가운데에 노사나(盧舍那)를 주불(主佛)로 봉안하였고, 층으로 된 누각은 봉(鳳)처럼 우뚝 섰는데 그 위에 수다라(修多羅 경(經))를 이름으로 하였다. 고래등 같은 동량을 높이 설치하였고, 난새를 새긴 난간을 마주 보게 하였다. 화려한 반자에는 꽃들이 모여 차례로 줄지어 있고, 수놓은 두공(枓栱)에는 가지가 옹위하듯 서로 맞물려 있는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갈 듯하여 눈길을 돌리면 누구나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그 밖에 더 높이고 고쳐 지은 것으로는, 영정(影幀)을 모신 별실(別室)과 승려들이 거처하는 연방(蓮房)과 음식을 요리하는 식당과 아침마다 밥을 짓는 공양간과 같은 곳이 있었다. 여기에 또 새기고 다듬는 데에 솜씨를 다하고 색칠을 하는 데에 정밀함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바위 골짜기와 함께 맑은 기운이 우러나오고 안개 노을과 어울려 서로 찬란하게 빛났다. 옥으로 된 찰간(刹竿)에는 봉래도(蓬萊島)를 비추는 달이 걸려서 두 송이 서리 머금은 흰 연꽃이 피어나고, 쇠로 된 풍경(風磬)에는 솔 우거진 시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부딪쳐서 어느 때나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주변의 승경(勝景)을 돌아보더라도 먼 변방에서 경치가 걸출한 곳이었다. 좌측의 산봉우리는 닭의 발이 구름을 끌어당기는 것 같고, 우측의 원습(原隰)은 용의 비늘이 햇빛에 반짝이는 것 같다. 앞을 굽어보면 메기 형상의 산이 검푸르게 줄 지어 서 있고, 뒤를 돌아보면 봉새 같은 언덕이 갈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래서 멀리서 바라보면 가파르면서 기이하고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삽상하면서 아름다우니, 낙랑(樂浪 신라)의 선경(仙境)은 참으로 낙방(樂邦)이요, 초월(初月)의 명산은 바로 초지(初地)라고 이를 만하다.
    잘 건설하여 주도면밀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근실히 닦아서 복을 헛되이 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인방(仁方 동방)을 크게 감싸 줄 것이요, 임금의 보수(寶壽)에 이바지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망라하여 사방의 경내로 삼고, 500년을 헤아려서 한 해의 봄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번산(樊山)에서 사냥한 표범의 꼬리를 매달아 세우며 바야흐로 기뻐할 이때에, 형산(荊山)의 용에 걸터앉아 떨어뜨린 수염을 안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헌강대왕(獻康大王)은 연소한 나이인데도 높은 덕을 지녔고 뛰어난 체격에 맑은 정신을 소유하였다.〔神淸遠體〕 침문(寢門)에서 내수(內豎)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게 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익실(翼室)에서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는 일〔宅宗〕을 준행(遵行)하였다. 등 문공(滕文公)이 예법을 극진히 하여 거상(居喪)을 한 것처럼 끝까지 극기를 잘 하였고, 초 장왕(楚莊王)이 때를 기다려 정사(政事)를 닦은 것처럼 실제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더군다나 또 천성적으로 중화(中華)의 풍도를 따르고 지혜의 이슬에 몸을 적시면서 선조를 높이는 의리를 드날리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성의를 분발하였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화(中和) 을사년(885, 헌강왕11) 가을에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일을 이어받아 길이 후손에게 복을 물려주는 일은 바로 나에게 달려 있다. 선조(先朝)에서 세운 곡사(鵠寺)는 이름을 바꿔서 대숭복사(大嵩福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불경을 수지(受持)하는 개사(開士)와 기강을 확립하는 정리(淨吏)가 전지(田地)를 가지고 공양과 보시에 이바지하는 것은 일체 봉은사(奉恩寺)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도록 하라. 고(故) 파진찬(波珍飡) 김원량이 희사한 땅의 산물(産物)을 전운(轉運)하는 일이 가볍지 않으니 정법사(正法司)에 위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별도로 두 명의 숙덕(宿德)을 뽑아 입적시켜 상주하게 하면서 그의 명복을 빌게 하라. 그러면 윗자리에 있는 나로서는 저승 세계까지 보살피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요, 큰 인연을 지은 김원량으로서도 반드시 감통(感通)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지고, 발우(鉢盂)에는 향적반(香積飯)이 가득 담기게 되었다. 중생을 창도하는 것은 육시 예배(六時禮拜)를 하며 옥경(玉磬)이 울리듯 할 것이요, 부처의 가르침을 수지(修持)하는 것은 만겁(萬劫)토록 하늘의 별이 세상을 비추듯 할 것이다. 위대하도다. 이는 공자(孔子)가 말한 바 “근심이 없는 분은 문왕일 것이다. 부친이 시작한 일을 아들이 이어받았으니.〔無憂者其惟文王 父作之 子述之〕”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봄에 하신(下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예(禮)에 이르지 않았던가. ‘명은 기물(器物)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니,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다.〔銘者自名也 以稱其先祖之德 而明著之後世 此孝子孝孫之心也〕’라고. 선조(先朝)에서 처음 사원을 세울 적에 큰 서원을 발하였는데, 당시에 김순행(金純行)과 그대의 부친 최견일(崔肩逸)이 이 일에 종사하였다. 명을 지어 한번 일컬으면, 과인이나 그대나 모두 효성을 바칠 수 있게 될 것이니, 그대는 명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나는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떠돌다가 월계(月桂)의 향기를 훔치긴 하였지만, 우구(虞丘)의 비통함을 길이 안고 계로(季路)의 헛된 영화만 누리고 있을 뿐이기에, 명을 받들고는 놀랍고 두려워서 어찌할 줄 모른 채 슬피 오열할 따름이다.
    삼가 생각건대, 내가 중국에서 벼슬할 적에 유씨 자규(柳氏子珪)가 동국(東國)의 일을 기록한 내용을 열람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서술된 정사에 관한 조목이 왕도 아닌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국사(國史)를 읽어 보니, 그것은 완전히 성조대왕(聖祖大王 원성왕(元聖王)) 때의 사적(事迹)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전해 오는 말을 듣건대, 중국 사신 호공 귀후(胡公歸厚)가 복명할 적에 풍요(風謠)를 많이 채록하고는 당시의 재상에게 아뢰기를,
    “앞으로 나 이후로 산서(山西) 출신은 해동(海東)에 사신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계림(雞林)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은데, 동국(東國)의 왕이 그 경치를 도장으로 찍어내듯이 시로 지어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요행히 운어(韻語)를 엮는 법을 예전에 배운 덕분에 억지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답을 하였습니다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군자(君子)가 말을 할 줄 안다고 여겼다. 이는 열조(烈祖)가 사술(四術)로 터전을 닦고 선왕(先王)이 육경(六經)으로 풍속을 교화시켰기 때문이니, 이 어찌 이궐(貽厥)을 위해 힘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동방의 문물이 빛나게 할 수 있었고 보면, 나의 명(銘)에도 부끄러운 말〔愧辭〕이 없게 될 것이요, 나의 붓에도 남은 용기〔餘勇〕가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감히 하늘을 대롱 구멍으로 엿보고 바다를 바가지로 퍼서 재면서 평범한 말로 엮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달이 떨어지고 산이 무너져 홀연히 영원한 한탄을 일으키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뒤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선왕의 숫돌에 계속 칼을 갈고 훈지(塤篪)를 불며 가락을 맞추는 시대를 만났다. 일단 큰 왕업을 이어 지키게 된 뒤에는 장차 남긴 업적을 계승하여 이루려고 하면서 임금 자리를 편안하게 여기는 일이 없이 그 문물을 잃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멀리 태양 같은 형님의 뒤를 따르다가 갑자기 서산에 지는 해 그림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달 같은 누이에게 높이 의지하여 동해의 빛이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 전하는 오누이 간에 왕위를 이어 왕가의 계보가 확실한 가운데 빼어난 곤덕(坤德)을 본받고 아름다운 천륜을 계승하였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신주를 품었다〔懷神珠〕고 하는 것이요, 채석을 구웠다〔鍊彩石〕고 하는 것이다. 전하는 부족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보완하였고 선(善)이라면 닦지 않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우(寶雨)》의 금언(金言)에서 분명히 수기(授記)함을 얻고, 《대운(大雲)》의 옥게(玉偈)와 완전히 부합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하는 또 문고(文考 부친인 경문왕)가 부처의 집을 낙성하고 강왕(康王 헌강왕)이 승려에게 공양을 베풀면서 유리(琉璃)와 같은 불세계(佛世界)를 높였으면서도 아직 완염(琬琰 비석)에 새기는 글을 짓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재주가 없는 나에게 거듭 명하여 졸렬한 붓끝을 놀리게 하였다. 내가 비록 못이 먹물로 검게 변한 고사에는 부끄럽고, 서까래와 같은 붓의 꿈을 꾼 일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장융(張融)이 이왕(二王)의 필법이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은 일에 나름대로 견주면서, 조조(曹操)가 어쩌다가 풀 수 있었던 8자(字)의 찬사를 들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설사 세상을 불태운 재가 못을 메우고, 먼지가 휘날려 바다를 뒤덮을지라도 본지(本枝 왕실의 후예)는 번성하여 약목(若木)과 가지런히 번영을 길이 누릴 것이요, 이 풍석(豐石)은 높다랗게 옥초(沃焦)를 마주 보며 우뚝 서 있을 것이다. 정성을 다해 손을 모아 절하고 눈물을 훔치며 붓을 잡고서 빛나는 발자취를 따라 명(銘)을 지어 바친다. 명은 다음과 같다.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멀어도 보살피지 않음이 없어 / 無遠不照
    인연이 있으면 번창하였나니 / 有緣者昌
    사원의 공이 드높고 / 功崇淨刹
    왕릉의 복이 깊었도다 / 福蔭冥藏
    열렬한 우리 영조는 / 烈烈英祖
    덕이 명우에 부합하여 / 德符命禹
    큰 산 속에 들어간 뒤에 / 納于大麓
    이윽고 하토를 차지했도다
    / 奄有下土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 保我子孫
    백성의 부모가 되어 / 爲民父母
    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 根深桃野
    상포에 멀리 나뉘어 흘렀도다 / 派遠桑浦
    상여 줄 잡고 영구차 끌고 / 蜃紼龍輴
    명당인 능에 새로 모시려고 / 山園保眞
    유당의 묘도(墓道)를 개설하고 / 幽堂闢隧
    옛 절을 이웃으로 옮겼도다 / 聳塔遷隣
    만세토록 애모할 예제(禮制)가 되고 / 萬歲哀禮
    천생토록 청정한 인연이 되리니 / 千生淨因
    사원은 이로움이 많을 것이요 / 金田厚利
    왕손은 길이 봄빛을 누리리라 / 玉葉長春
    효손의 깊고 아름다운 덕이 / 孝孫淵懿
    천지를 밝게 감동시킨지라 / 昭感天地
    봉황이 날고 용이 뛰는 가운데 / 鳳翥龍躍
    금규의 상서에 맞게 되었도다 / 金圭合瑞
    훤히 살피는 신령에게 요청하여 / 乞靈不昧
    복을 구하자 곧장 이르렀나니 / 徼福斯至
    선조의 그 은덕 보답하고자 / 欲報之德
    불사(佛事)를 성대히 일으켰도다 / 克隆法事
    나라의 인재를 가려서 뽑고 / 妙選邦傑
    나라의 기술자를 독려하면서 / 嚴敦國工
    농사일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 伺農之隙
    부처의 집을 완성하였도다 / 成佛之宮
    채색 난간에는 봉황이 모여들고 / 彩檻攢鳳
    아로새긴 들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 雕樑架虹
    둘러친 담장에선 구름이 일어나고 / 繚墉雲矗
    단청 벽에는 노을이 한데 녹았도다 / 繢壁霞融
    자리한 터전은 앞이 툭 트이고 / 盤基爽塏
    접하는 경치도 모두 소쇄하나니 / 觸境蕭灑
    쫑긋쫑긋 서 있는 푸른 봉우리요 / 藍岫交聳
    퐁퐁 솟아나는 감미로운 샘이로다 / 蘭泉逬瀉
    꽃은 봄날 동산에 교태 부리고 / 花媚春巖
    달은 가을밤에 높이 떴으니 / 月高秋夜
    비록 해외에 있다 해도 / 雖居海外
    홀로 천하에 빼어났도다 / 獨秀天下
    진은 보덕이라 하고 / 陳稱報德
    수는 흥국이라 했다지만 / 隋號興國
    왕실의 복이 국력에서 나오는 / 孰與家福
    우리의 이 사원만 하겠는가 / 興之國力
    불당에는 요란해라 범패 소리 / 堂聒妙音
    주방에는 풍성해라 정결한 음식 / 廚豐淨食
    정강대왕이 끼치신 교화 / 嗣君遺化
    만겁토록 무궁하리로다 / 萬劫無極
    아 거룩해라 우리 여왕님은 / 於鑠媧后
    효우의 정이 돈독하신 분 / 情敦孝友
    형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 致㜫雁行
    삼가 용수를 아름답게 하였다오 / 愼徽龍首
    나의 문사는 몽당붓이라 부끄럽고 / 詞恧腐毫
    나의 글씨는 철주하듯 민망하나 / 書慙掣肘
    고래가 사는 바다는 마를지언정 / 鰌壑雖渴
    귀부 위의 이 비석은 영원하리라 / 龜珉不朽


     

    [주C-001]대숭복사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로 되어 있다.
    [주D-001]무편(無偏) : 편벽됨이 없는 정사를 뜻한다. 《서경》 〈홍범(洪範)〉에 “편벽됨이 없고 편당함이 없으면 왕도가 넓게 펼쳐진다.〔無偏無黨 王道蕩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불궤(不匱) : 지극한 효성을 뜻한다. 《시경》 〈기취(旣醉)〉에 “효자의 효성이 다함이 없으니, 영원히 그대에게 복을 내리리라.〔孝子不匱 永錫爾類〕”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3]조상의 덕을 닦으면서 :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비패(秕稗) : 쭉정이와 피라는 뜻으로, 가식적이고 미흡한 것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0년에 “야외에서 향연을 베풀면서 궁중의 기물을 모두 갖춘다면 이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고, 만약 갖출 것을 제대로 갖추지 않는다면 이는 벼 곡식 대신에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이 된다. 쭉정이와 피를 올리는 것처럼 되면 임금에게 욕이 돌아갈 것이요, 지켜야 할 예의를 버리는 것이 되면 나쁜 이름이 돌아올 것이다.〔饗而旣具 是棄禮也 若其不具 用秕稗也 用秕稗君辱 棄禮名惡〕”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제사를 올리면서 : 《시경》 〈생민(生民)〉에 “처음 주(周)나라 사람을 낳은 것은, 바로 강원이었나니, 낳을 때 어떻게 했느냐 하면,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올렸다오.〔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빈번(蘋蘩) : 마름과 쑥이라는 뜻으로, 귀하진 않아도 정성껏 올리는 제물(祭物)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은공(隱公) 3년에, “진실로 확실한 신의만 있다면 빈번과 온조(薀藻) 같은 변변치 못한 야채와 나물이라도 귀신에게 음식으로 올릴 수가 있고, 왕공에게도 바칠 수가 있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7]덕의 …… 것이다 : 《서경》 〈군진(君陳)〉에 “지극한 정치를 하면 향기로워서 신명에게도 감응이 되는 법이니, 서직과 같은 곡식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의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8]더위 …… 주고 : 주 무왕(周武王)이 더위 먹은 사람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게 하며 왼손으로 부축하고 오른손으로 부채질해 주니, 천하 사람들이 그 덕에 귀의했다는 말이 《회남자》 〈인간훈(人間訓)〉에 나온다.
    [주D-009]죄인을 …… 것 : 우왕(禹王)이 외출하여 죄인을 보자 수레에서 내려 물어보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나온다.
    [주D-010]마음속으로 …… 없다 : 대본에는 ‘勞心而扇暍泣辜 豈若拯群品於大迷之域 竭力而配天饗帝 豈若奉尊靈於常樂之鄕’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고운집》에는 ‘豈若’이 ‘莫非’로 되어 있다. 문리로 보아 ‘莫非’가 합당하겠기에, ‘豈若’을 ‘莫非’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11]구친(九親)을 돈목(敦睦)하는 것 : 《서경》 〈요전(堯典)〉에 “요 임금이 큰 덕을 제대로 밝혀 구족을 친애하자 구족이 화목하게 되었다. 구족이 화목해지자 기내(畿內)의 백성들을 평등하게 다스리며 밝게 가르쳤다. 백성들이 밝게 되자 만방의 제후국을 화목하게 하였다.〔克明俊德 以親九族 九族旣睦 平章百姓 百姓昭明 協和萬邦〕”라는 말이 나온다. 구족(九族)은 고조(高祖)로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친척을 말한다.
    [주D-012]삼보(三寶) :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를 합칭한 불교의 용어이다. 불보는 부처를 가리키고, 법보는 부처의 교법(敎法)을 가리키고, 승보는 부처의 교법대로 수행하는 승려들을 가리킨다.
    [주D-013]옥호(玉毫) : 여래(如來) 32상(相)의 하나로, 미간에 있다는 백옥과 같은 흰 털을 말하는데, 거기에서 대광명(大光明)을 발산하여 시방세계(十方世界)를 비춘다고 한다. 백호(白毫)라고도 한다.
    [주D-014]조종(朝宗) : 제후와 백관이 제왕(帝王)을 찾아가서 조회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비유할 때 표현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마치 백관이 임금에게 조회하듯, 장강(長江)과 한수(漢水)가 바다로 모여 든다.〔江漢朝宗于海〕”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5]육도(六度) : 생사의 차안(此岸)에서 열반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여섯 개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라고도 하는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 등으로 되어 있다.
    [주D-016]섬부주(贍部洲) : 염부제(閻浮提)라고도 한다. 수미산(須彌山) 사대주(四大洲)의 남주(南洲)에 있는 지역으로, 원래는 인도(印度)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으로 쓰이게 되었다. 《長阿含經 卷18 閻浮提洲品》
    [주D-017]도사다(都史多) : 범어(梵語) Tuṣita의 음역으로, 보통 도솔천(兜率天)이라고 한다. 도솔천은 불교의 이른바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넷째 층에 있는 하늘로, 외원(外院)과 내원(內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이 내원에서 미래불(未來佛)로 이 땅에 하생(下生)하려고 준비하면서 천신(天神)들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
    [주D-018]금성(金城) : 신라의 도성을 말한다.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 21년(기원전37)에 지금의 경주(慶州)에 쌓았던 토성이다.
    [주D-019]파진찬(波珍飡) : 신라 17관등(官等) 중 넷째 등급으로, 진골(眞骨)만이 받을 자격이 있었다. 파진간(波珍干) 혹은 해간(海干)이라고도 하였다.
    [주D-020]사안(謝安)이 …… 것 : 진(晉)나라 사안이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던 고와동산(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는데,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산수 간에 노닐 당시에 항상 가무에 능한 기녀(妓女)를 대동하고서 풍류를 한껏 즐겼다고 한다. 《世說新語 排調》
    [주D-021]혜원(慧遠)이 …… 것 : 동진(東晉)의 고승 혜원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유유민(劉遺民)과 뇌차종(雷次宗) 등 명유(名儒)를 비롯하여 승속(僧俗)의 18현(賢)과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라는 염불 결사(念佛結社)를 맺은 고사가 있다. 서경(西境)은 서방 정토를 가리킨다. 《蓮社高賢傳 慧遠法師》
    [주D-022]바라월(波羅越) : 비둘기〔鴿〕를 뜻하는 천축(天竺)의 말로, 여기서는 바라월사(波羅越寺) 즉 합사(鴿寺)를 가리킨다. 달친(達嚫)이라는 나라에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僧伽藍)이 있는데, 이는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든 5층의 사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1층부터 각각 코끼리ㆍ사자ㆍ말ㆍ소ㆍ비둘기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맨 위층의 형태를 취해서 바라월사라고 명명했다는 이야기가 《법현고승전(法顯高僧傳)》 권1에 나온다.
    [주D-023]굴린차(崛恡遮) :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있었다는 굴우차(堀忧遮)라는 사원으로, 기러기 절〔雁寺〕이라는 뜻이다. 어떤 비구(比丘)가 파계하여 남해(南海)의 기러기로 태어났는데, 몸집이 3장(丈)이나 되고 사람 말을 하며 끊임없이 《화엄경(華嚴經)》을 외웠다. 남자 불교 신도 한 사람이 보물을 캐러 바다를 건너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모래섬에 올라갔다가 그 기러기를 만나 사연을 듣고는 기러기를 위해 사원을 지어 주기로 하고 기러기 등에 타고서 목적을 달성한 뒤에 약속대로 안사(雁寺)를 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경조(京兆) 숭복사(崇福寺) 승(僧) 사문(沙門) 법장(法藏)이 편집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 권4 〈풍송(諷誦) 7 중천축일조삼장(中天竺日照三藏)〉에 나온다.
    [주D-024]쌍림(雙林)으로 …… 지은 : 김원량(金元良)이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라는 사찰로 만든 것을 가리킨다. 남조 양 무제(梁武帝) 대동(大同) 5년(539)에 선혜대사(善慧大士)가 저택을 희사하여 절강(浙江) 의오현(義烏縣) 운횡산(雲橫山) 아래에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사원 경내에 쌍도수(雙檮樹)가 있는 것을 계기로 쌍림사(雙林寺)라고 칭한 고사가 있다. 이 사원은 뒤에 이름이 보림사(寶林寺)로 바뀌었다. 《續高僧傳 卷25 慧雲傳》 《景德傳燈錄 卷27 善慧大士》
    [주D-025]취두(鷲頭) : 여래(如來)가 《법화경(法華經)》 등 대승 경전(大乘經傳)을 설했다고 하여 불교 성지로 꼽히는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중인도(中印度) 마갈다국(摩竭陀國) 왕사성(王舍城)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의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취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기사굴산(耆闍崛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범어(梵語)를 음역한 것이다.
    [주D-026]용이(龍耳) : 감여가(堪輿家)가 풍수지리(風水地理) 면에서 명당으로 꼽는 장지 중의 하나이다.
    [주D-027]금계(金界) : 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 혹은 금전(金田)이라고도 한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주D-028]옥전(玉田) : 왕릉(王陵)을 뜻한다. 고대 제왕의 장례에 옥갑(玉匣)을 썼던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D-029]인산(因山) : 보통 왕과 왕비 등의 장례식으로 국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산의 형세를 그대로 활용해서 능을 만들고, 별도로 봉분을 하지는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30]유씨(游氏)의 …… 놔두었으므로 : 정(鄭)나라 간공(簡公)의 장례 행렬이 지나갈 길에 유씨(游氏)의 사당이 있었는데, 자산(子産)이 그 사당을 헐지 말고 피해서 길을 내도록 지시한 고사가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12년에 나온다. 또 한 무제(漢武帝) 말기에 노 공왕(魯恭王)이 자기 궁실을 넓히려고 공자(孔子)의 구택을 헐다가 갑자기 종경(鐘磬)과 금슬(琴瑟)의 소리가 들려오자, 두려운 생각이 들어 공사를 중지하고는 그 벽 속에서 《고문상서(古文尙書)》 등 수십 종의 고문 경전(古文經傳)을 발굴했던 고사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나온다.
    [주D-031]수달다(須達多) : 석가(釋迦)에게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서 희사한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장자(長者) 이름으로, 급고독(給孤獨) 장자라고도 한다. 그가 석가의 설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를 건립했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大唐西域記 卷6》 여기서는 김원량(金元良)을 가리킨다.
    [주D-032]단지 …… 것이겠는가 : 풍수지리 면에서 명당이기 때문에 왕릉으로 삼으려고 그러는 것일 뿐이지, 불교를 탄압하려는 목적에서 사원을 없애려고 하여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옛날 외국의 국왕이 사원을 모두 없애려고 하였는데, 초제사(招提寺)가 아직 헐리지 않았을 때, 밤에 백마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프게 우는 것〔夜有一白馬 繞塔悲鳴〕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이 회개하며 중지하고는 초제사를 백마사라고 개명했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 〈섭마등전(攝摩騰傳)〉에 나온다. 청오(靑烏)는 《금낭(錦囊)》과 함께 대표적인 풍수지리서로 꼽히는 책 이름인데, 지관(地官)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033]알고서 …… 되는 : “국가의 이익이 될 일을 알고서 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충이다.〔公家之利 知無不爲 忠也〕”라는 말이 《춘추좌씨전》 희공(僖公) 9년에 나온다.
    [주D-034]각각 …… 된다 : 《논어》 〈자한(子罕)〉에 “내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고 난 다음에야 음악이 바로잡혀서 아와 송이 각각 제자리를 얻게 되었다.〔吾自衛反魯 樂正 雅頌各得其所〕”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35]옷소매 …… 않고 : 늘어서 있는 사람들의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마치 장막처럼 이어져서 바람이 불어와도 그 사이를 통과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여 북적거렸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臨淄)에 가면,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옷소매 자락을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5리(里)의 …… 것 : 후한(後漢)의 장해(張楷)가 5리의 지역에 안개가 자욱이 끼게 하는 술법을 잘 구사하였으므로, 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그가 은거한 홍농산(弘農山)으로 모여들어 저잣거리를 이루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6 張霸列傳 張楷》
    [주D-037]왕토(王土) : 왕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경》 〈북산(北山)〉의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의 땅 아님이 없으며, 땅의 모든 물가에 이르기까지 왕의 신하 아님이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8]어둠에 …… 하였다 : 왕릉 주위의 형세를 묘사한 것이다. 등공(滕公)으로 불린 한(漢)나라의 하후영(夏侯嬰)이 생전에 땅을 파다가 석곽(石槨)을 얻었는데, 거기에 “가성이 어둠에 묻혔다가 3천 년 만에 밝은 해를 보리니, 아, 등공이 이 방에 거하리로다.〔佳城鬱鬱 三千年見白日 吁嗟滕公居此室〕”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으므로, 죽은 뒤에 그곳에 장사 지내게 했다는 등공가성(滕公佳城)의 전설이 전한다. 《西京雜記 卷4》 또 제갈량(諸葛亮)이 오(吳)나라 도읍인 건강(建康)에 와서 산천의 형세를 살펴본 뒤에 “종산은 용이 서린 듯하고, 석두산은 범이 웅크린 듯하니, 이곳은 제왕이 거할 곳이다.〔鍾山龍盤 石頭虎踞 此帝王之宅〕”라고 탄식한 고사가 전한다. 《古今事文類聚 續集 卷1 吳都形勢》
    [주D-039]하구(瑕丘) :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공숙문자(公叔文子)가 거백옥(蘧伯玉)과 함께 산책하다가 죽으면 묻히고 싶다고 한 언덕 이름이다. 《禮記 檀弓上》
    [주D-040]양곡(暘谷) : 해 뜨는 곳이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해는 양곡에서 떠올라 함지에서 목욕한다.〔日出於暘谷 浴於咸池〕”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1]기수(祇樹) : 사원(寺院)의 별칭이다. 옛날 인도의 기타 태자(祇陀太子) 소유의 원림(園林)을 급고독(給孤獨) 장자가 구입하여 정사(精舍)를 세운 다음 석가모니에게 희사했다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로,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초기의 양대 사원으로 꼽힌다.
    [주D-042]곡림(穀林) : 요(堯) 임금을 매장한 곳으로, 제왕의 능을 뜻한다.
    [주D-043]교산(喬山) : 황제(黃帝)의 장지(葬地)이다.
    [주D-044]필맥(畢陌) :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이 묻힌 곳이다.
    [주D-045]접수(鰈水) : 가자미〔比目魚〕가 나는 바다라는 뜻으로, 동해(東海) 즉 동방을 가리킨다. 《이아》 〈석지(釋地)〉에 “동방에 가자미가 있는데, 짝하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 이름을 접이라고 한다.〔東方有比目魚焉 不比不行 其名謂之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사우(寺宇)를 …… 못하였다 : 땅에서 탑이 불쑥 솟아나온 것처럼 사원을 이전하는 공사가 일단 쉽게 끝나기는 하였으나, 사원다운 면모를 완전히 갖추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견보탑품(見寶塔品)〉에 “그때 부처 앞에 높이 500유순, 가로세로 250유순 되는 칠보로 장식된 탑이 땅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서 있었다.〔爾時佛前有七寶塔 高五百由旬 縱廣二百五十由旬 從地踊出住在空中〕”라는 말이 나온다. 화성(化城)은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의 별칭이다. 험난한 여행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D-047]아홉 조정 : 신라 38대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시작해서 47대 헌안왕(憲安王)에 이르는 9대에 걸친 조정을 말한다.
    [주D-048]삼리(三利)의 수승(殊勝)한 인연 : 경문왕이 사원을 중건하게 된 것을 말한다. 삼리는 세 가지 이익이라는 말로, 경문왕의 즉위와 관련된 고사이다. 헌안왕이 아들이 없자 김응렴(金膺廉), 즉 경문왕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장녀(長女)보다 소녀(少女)가 아름다웠으나, 장녀에게 장가들면 세 가지 이익〔三利〕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장녀와 결혼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 憲安王》
    [주D-049]선대왕(先大王)은 …… 드리웠다 : 경문왕의 출생을 묘사한 말이다. 홍저(虹渚)는 상고시대의 제왕인 소호씨(少昊氏)의 모친 여절(女節)이 무지개〔虹〕처럼 별빛이 화저(華渚)에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소호씨를 낳았다는 전설을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宋書 卷27 符瑞志上》 오잠(鼇岑)은 경주(慶州)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킨다.
    [주D-050]옥록(玉鹿)에서 …… 진작시키더니 : 옥록은 검을 뜻하는 옥록로(玉鹿盧)의 준말로, 검술 등 무예에 뛰어난 조예를 보이면서 풍류도(風流道)를 떨쳐 일으켰다는 말이 아닌가 한다. 풍류(風流)는 〈난랑비(鸞郞碑)〉의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國有玄妙之道 曰風流〕”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금초(金貂) : 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뜻한다.
    [주D-052]용전(龍田) :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밭에 출현한 용이라는 뜻으로, 이미 덕과 실력으로 인정을 받는 현인(賢人)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왕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닌가 한다. 《주역》 〈건괘(乾卦) 구이(九二)〉에 “출현한 용이 밭에 있으니, 임금님을 만나 보는 것이 이롭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봉소(鳳沼) : 비원(秘苑) 속의 못이라는 뜻으로, 중서성(中書省) 즉 조정을 가리킨다. 봉황지(鳳凰池)라고도 한다.
    [주D-054]계옥(啓沃) :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며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 고종(殷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그대 마음속의 물줄기를 터서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내려 적시게 하라.〔啓乃心 沃朕心〕”라고 부탁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書經 說命上》
    [주D-055]팔병(八柄) : 군신(群臣)을 어거하는 작(爵), 녹(祿), 여(予), 치(置), 생(生), 탈(奪), 폐(廢), 주(誅) 등의 여덟 가지 권한을 말하는데, 《주례(周禮)》 〈천관(天官) 태재(太宰)〉에 그 설명이 나온다.
    [주D-056]사유(四維) : 예(禮), 의(義), 염(廉), 치(恥)를 말한다.
    [주D-057]기국(杞國)의 근심 : 옛날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면〔天地崩墮〕 자기 몸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하여 침식을 폐하고 걱정을 했다는 기국우천(杞國憂天)의 고사가 있다. 《列子 天瑞》 보통은 쓸데없는 걱정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천붕(天崩)의 근심 즉 임금이 죽는 우환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58]사슴의 …… 하였다 : 본격적으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혼란을 틈타서 기회를 엿보며 득세하려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제(齊)나라 변사(辯士) 괴통(蒯通)이 한 고조(漢高祖)에게 팽형(烹刑)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에 “진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법도가 해이해짐에, 진나라 이외의 산동 지역이 크게 소란해지면서 다른 성씨들이 일제히 일어나고 영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다. 진나라가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뒤를 좇았는데, 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발 빠른 자가 먼저 사슴을 잡게 되었다.〔秦之綱絶而維弛 山東大擾 異姓竝起 英俊烏集 秦失其鹿 天下共逐之 於是高材疾足者先得焉〕”라는 등의 말로 화를 모면한 고사가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말미에 나온다. 여기에서 사슴은 제왕의 지위를 뜻한다.
    [주D-059]대저(代邸) : 제왕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거하던 곳을 뜻하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황제가 되기 전에 대왕(代王)에 봉해졌으므로, 그의 거처를 대저라고 칭하였는데,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여씨(呂氏)들을 소탕하고 소제(少帝)를 폐한 뒤에 대왕을 대저에서 영입하여 황제로 추대했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漢書 卷4 文帝紀》
    [주D-060]화락한 …… 않구나 : 《시경》 〈한록(旱麓)〉에 나온다.
    [주D-061]상제가 …… 따른다 : 《서경》 〈미자지명(微子之命)〉에 “상제가 이에 흠향하고 아래 백성들이 공경하며 따르기에 그대를 상공으로 세워 이 동하를 다스리게 하노라.〔上帝時歆 下民祗協 庸建爾于上公 尹茲東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수귀(守龜) : 임금이 점복(占卜)에 쓰는 귀갑(龜甲), 혹은 점치는 사람〔卜人〕을 뜻한다.
    [주D-063]제(齊)나라를 …… 않았더라면 : 《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선왕의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64]어찌 …… 뿐이었겠는가 : 왕이 한번 행차하는 데에 따른 비용이 엄청나게 들 것이라는 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노대(露臺)를 지으려다가 백금(百金)의 비용이 든다는 말을 듣고는 “백금은 중등 생활을 하는 열 집의 재산에 해당한다.〔百金 中人十家之産也〕”라고 하면서 그만두게 한 고사가 《한서(漢書)》 권4 〈문제기(文帝紀) 찬(贊)〉에 나온다.
    [주D-065]태제(太弟)인 상국(相國) : 원주(原註)에 “뒤에 혜성대왕의 존귀한 시호로 추봉되었다.〔追奉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주D-066]영원(鴒原)의 무성함이여 : 형제간의 우애가 돋보인다는 말이다. 영원은 《시경》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67]코끼리가 …… 일 : 성군(聖君)의 치세를 뜻하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창오(蒼梧)에서 죽자 코끼리가 감화를 받아서 그를 위해 밭을 갈고, 우왕(禹王)이 회계(會稽)에 묻히자 새가 그를 위해 김매 주었다는 상경조운(象耕鳥耘)의 전설이 한(漢)나라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권4 〈서허(書虛)〉에 나온다.
    [주D-068]소가 헐떡거리는 것 : 한(漢)나라의 재상인 병길(丙吉)이, 길에서 싸워서 사람들이 죽고 다친 일은 묻지를 않고, 소가 혀를 빼 물고서 헐떡이는 것〔牛喘吐舌〕을 보고는, 음양(陰陽)의 조화가 깨어진 나머지 계절의 기후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여 이를 자세히 물어보았던 고사가 《한서(漢書)》 권74 〈병길전(丙吉傳)〉에 보인다.
    [주D-069]천리(天吏) : 사계절을 가리킨다. 《회남자》 〈천문훈(天文訓)〉에 “사시는 하늘의 관리요, 일월은 하늘의 사신이다.〔四時者 天之吏也 日月者 天之使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0]십훈(十煇)으로 …… 듯하였다 : 굳이 점을 쳐 보지 않아도 원성왕이 꿈속에서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는 말이다. 십훈은 열 가지의 다양한 햇무리 모양을 말하는데, 옛날에 이 모양을 보고 인사(人事)의 길흉을 점쳤다. 구령(九齡)은 주 무왕(周武王)의 꿈 이야기이다. 무왕이 꿈속에서 상제로부터 아홉 개의 치아〔九齡〕를 받았다는 말을 부친인 문왕(文王)이 듣고서, 치아는 연령과 관계된 만큼 90세까지 살 것이라고 해몽하고는, 자기의 100세 수명에서 3년을 무왕에게 주어 93세까지 살게 하고 자신은 97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71]자기 …… 것 : 《효경》 〈성치장(聖治章)〉에 “자기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패덕이라 하고, 자기 어버이를 공경하지 않고 타인을 공경하는 것을 패례라고 한다.〔不愛其親而愛他人者 謂之悖德 不敬其親而敬他人者 謂之悖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2]너의 …… 않느냐 : 《시경(詩經)》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3]3년 …… 있다 : 그동안 사원의 중수와 관련하여 아무 일도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이제 시간을 아껴서 바로 공사에 착수하고 싶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 장왕(楚莊王)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진 채 정사를 행하지 않자, 오거(伍擧)가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이는 무슨 새인가.〔三年不蜚不鳴 是何鳥也〕”라고 하니, 장왕이 “3년 동안 날지 않았어도 한번 날면 하늘에 솟구칠 것이요, 3년 동안 울지 않았어도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三年不蜚 蜚將沖天 三年不鳴 鳴將驚人〕”라고 답변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0 楚世家》 또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23년에 “숙손은 관소에 머무는 시간이 단 하루만 되더라도 그 담장이나 지붕을 손질하여, 그가 떠날 때에는 처음 들어갔을 때와 똑같게 하였다.〔叔孫所館者 雖一日必葺其牆屋 去之如始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4]아이를 …… 잡혔다 : 남조 송 명제(宋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화려하게 세우고는 큰 공덕을 지었다고 자랑하자, 우원(虞愿)이 옆에 있다가 “폐하가 이 사원을 세운 것은 모두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전당 잡힌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응당 슬피 울며 애통하게 여길 것이다. 그 죄가 탑보다도 더 높이 쌓였을 것인데, 무슨 공덕이 있다고 하겠는가.〔陛下起此寺 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罪高佛圖 有何功德〕”라고 반박한 고사가 전한다. 《南齊書 卷53 良政列傳 虞愿》
    [주D-075]건례선문(建禮仙門) : 한(漢)나라 궁궐에 건례문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하여 조정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선문은 궁궐의 문을 가리킨다.
    [주D-076]소현정서(昭玄精署) : 승도(僧徒)를 총괄했던 소현시(昭玄寺)라는 관아를 말한다.
    [주D-077]단계(檀溪)의 숙원 : 사원을 중수하려는 소망을 말한다. 동진(東晉)의 고승 도안(道安)이 효무제(孝武帝) 영강(寧康) 1년(373)에 양양(襄陽)에서 제일가는 단계사(檀溪寺)를 세우고, 다시 양주 자사(梁州刺史) 양홍충(洋弘忠)으로부터 구리 1만 근을 시주 받아 장륙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한 뒤에, 이제는 숙원을 이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단계사는 금덕사(金德寺)라고도 한다. 《高僧傳 卷5 釋道安傳》
    [주D-078]내원(㮈苑)의 전공(前功) : 김원량(金元良)이 예전에 저택을 희사하여 곡사(鵠寺)를 세운 공덕을 말한다. 내원은 내녀(㮈女)의 동산이라는 말인데, 범어 āmra의 의역으로, 암몰라원(菴沒羅園)으로 음역된다. 내수(㮈樹)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내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뒤에 마갈다국(摩竭陀國)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의 왕비가 되었으며, 양의(良醫) 기바(耆婆)를 낳았다고 한다. 그 동산은 중인도(中印度) 폐사리(吠舍釐 Vaiśālī) 성 부근에 있었으며, 내녀가 불타에게 바치자 불타가 이곳에서 《유마경(維摩經)》을 설했다고 한다. 김원량이 신라 왕실의 외척이기 때문에, 고운이 왕비인 내녀의 고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出曜經 卷3》 《四分律 卷39》
    [주D-079]수(倕) : 수(垂)라고도 한다. 순(舜) 임금의 대신(大臣)으로 공공(共工)이 되어 백공(百工)의 일을 주관하였다. 《史記 卷1 五帝本紀》
    [주D-080]노(獿) : 고대의 유명한 미장이 이름이다.
    [주D-081]초지(初地) : 《화엄경(華嚴經)》에 나오는 보살(菩薩)의 십지(十地) 중 첫째 단계로, 일명 환희지(歡喜地)라고 한다.
    [주D-082]500년을 …… 하였는데 :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초나라 남쪽에 있는 명령은 500년을 봄으로 삼고, 500년을 가을로 삼는다.〔楚之南有冥靈者 以五百歲爲春 五百歲爲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83]번산(樊山)에서 …… 이때에 : 그 당시야말로 제왕의 공업(功業)을 이룰 좋은 기회였다는 말이다. 옛날에 제왕이 행차할 때 따르는 행렬의 맨 마지막 수레에는 표범 꼬리를 매달아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한다.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무창(武昌)의 번산(樊山)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노파가 무엇을 잡았느냐고 묻기에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고 했더니, 그 노파가 “어째서 표범 꼬리를 수레에 매달아 세우지 않느냐.〔何不豎豹尾〕”라고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欽定淵鑑類函 卷429 豹 1》 번산은 원산(袁山)이라고도 한다.
    [주D-084]형산(荊山)의 …… 하였겠는가 : 뜻밖에도 경문왕이 세상을 떠나는 변고를 당하여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황제(黃帝)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굴하여 형산 아래 호숫가에서 솥을 주조하고 나서 용을 타고 승천할 적에 신하와 후궁 70여 인을 함께 데리고 갔는데, 여기에 참여하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을 잡고 있다가 용의 수염이 빠지는 바람에 모두 떨어졌고, 이때 황제의 활도 함께 떨어졌으므로, 백성들이 그 수염과 활을 안고 통곡하며 그 활을 오호궁(烏號弓)이라고 불렀다는 전설이 전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주D-085]뛰어난 …… 소유하였다 : 참고로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체격은 뛰어난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주D-086]침문(寢門)에서 …… 것 : 경문왕(景文王)이 죽은 것을 말한다. 주 문왕(周文王)이 세자로 있을 적에, 매일 세 번씩 침문에 가서 부왕인 왕계(王季)의 안부를 내수(內豎)에게 묻고는 편안하시다는 답변을 들으면 기뻐하며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예기》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나온다.
    [주D-087]익실(翼室)에서 …… 일 : 거상(居喪)하는 것을 말한다. 주 성왕(周成王)이 죽었을 때, “남문 밖에 가서 태자 소(釗)를 마중하여, 왕실의 옆방인 익실로 맞아들인 뒤에 상차(喪次)의 주인이 되게 하였다.〔逆子釗於南門之外 延入翼室 恤宅宗〕”라는 말이 《서경》 〈고명(顧命)〉에 나온다.
    [주D-088]등 문공(滕文公)이 …… 것 : 부왕인 정공(定公)이 세상을 떠나자 맹자(孟子)에게 물어서 거상(居喪)을 극진히 한 일이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온다.
    [주D-089]초 장왕(楚莊王)이 …… 것 : 초 장왕이 즉위 후 3년 동안 환락에 빠져 있다가 본격적으로 정사를 행하여 마침내 제후(諸侯)의 패자(覇者)가 된 고사를 말한다.
    [주D-090]향적반(香積飯) : 중향국(衆香國)의 향적여래(香積如來)가 먹는 음식을 말한다. 향적여래가 이 향적반을 화보살(化菩薩)에게 발우 가득 담아 주고, 화보살이 다시 유마 거사(維摩居士)에게 가득 담아 주어, 비야리성(毗耶離城) 및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그 향기가 두루 퍼지게 했다는 이야기가 《유마경(維摩經)》 〈향적불품(香積佛品)〉에 나온다. 그래서 보통 승려의 음식을 향적반 혹은 향반(香飯)이라고 하고, 사찰의 주방(廚房)을 향적이라고 한다.
    [주D-091]근심이 …… 이어받았으니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8장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다.
    [주D-092]경력(慶曆) 경오년(景午年) : 당 희종(唐僖宗) 광계(光啓) 2년 병오년(886), 즉 신라 정강왕(定康王) 1년을 가리킨다. 당의 연호 중에 경력이라는 연호는 없다. 혹 잘못 기록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당나라 황실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피하여 ‘병(丙)’을 ‘경(景)’으로 바꿔 썼다. 원(元)나라 왕극관(汪克寬)이 지은 《춘추호전부록찬소(春秋胡傳附錄纂疏)》 권수상(首上) 논명휘차자(論名諱箚子) ‘역갑을지기 이병위경자(易甲乙之紀 以丙爲景者)’ 조의 해설에 “당 고조의 부친 원제의 이름이 병이었기 때문에, 당나라 역사에서 갑자를 기록할 때에는 모두 병을 경으로 하였다. 한유(韓愈)의 〈유주나지묘비(柳州羅池廟碑)〉에도 경진년에 사당이 이루어졌다고 칭하였다.〔唐高祖父元帝名昞 故唐史紀甲子皆以丙爲景 韓文羅池廟碑 稱景辰廟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3]명(銘)은 …… 마음이다 : 《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고운이 중간을 생략하고 인용하였는데,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솥에 명을 새기는데, 명은 기물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기록하면서 선조의 미덕을 일컬어 후세에 분명히 드러낸다. 선조에게는 모두 미덕도 있고 잘못도 있겠지만, 명의 의리는 미덕만 칭하고 잘못은 칭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효자 효손의 마음이니, 오직 현자만이 할 수가 있다.〔夫鼎有銘 銘者自名也 自名以稱揚其先祖之美 而明著之後世者也 爲先祖者 莫不有美焉 莫不有惡焉 銘之義 稱美而不稱惡 此孝子孝孫之心也 唯賢者能之〕”
    [주D-094]월계(月桂)의 …… 하였지만 :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말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천하제일로 뽑힌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꺾고,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을 손에 쥔 것과 같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95]우구(虞丘)의 비통함 :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 다시는 봉양할 수 없는 자식의 슬픔을 말한다. 공자가 주(周)나라 우구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물으니, “나무가 조용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고 대답했다는 풍수지탄(風樹之歎)의 고사가 있다. 우구는 고어(皐魚) 혹은 구오자(丘吾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6]계로(季路)의 헛된 영화 : 계로는 공자의 제자 중유(仲由)의 자이다. 자로(子路)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옛날에 어버이를 모시고 있을 때에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자기는 되는 대로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어버이를 위해서는 100리 바깥에서 쌀을 등에 지고 오곤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 높은 벼슬을 하여 솥을 늘어놓고 진수성찬을 맛보는 신분이 되었지만, 이는 단지 헛된 영화일 뿐이요, 당시에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어버이를 위해 쌀을 지고 왔던 그때의 행복을 다시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고 술회한 고사가 전한다. 《孔子家語 致思》
    [주D-097]산서(山西) 출신 : 무인(武人)을 말한다.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라는 속어(俗語)가 《한서(漢書)》 권69 〈조충국신경기전(趙充國辛慶忌傳)〉에 보인다. ‘관동출상 관서출장(關東出相 關西出將)’이라고도 한다. 산은 화산(華山)을 가리키고, 관은 함곡관(函谷關)을 가리킨다.
    [주D-098]사술(四術) : 시(詩), 서(書), 예(禮), 악(樂)의 네 가지 경술(經術)을 말한다.
    [주D-099]육경(六經)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경(樂經)》을 말한다.
    [주D-100]이궐(貽厥) :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시경》 〈문왕유성(文王有聲)〉의 “풍수 옆에도 기 곡식이 자라는데, 무왕이 어찌 이곳에 천도(遷都)하는 것과 같은 큰일을 하지 않으리오. 그의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주고, 그의 아들에게 편안함과 도움을 주려 함이니, 무왕은 참으로 임금답도다.〔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 武王烝哉〕”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101]나의 …… 것이요 : 비명을 모두 진실되게 지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라는 말이다. 후한(後漢) 채옹(蔡邕)이 곽태(郭太)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부끄러운 느낌을 가졌는데,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유도(有道)는 곽태의 자이다. 《後漢書 卷68 郭太列傳》
    [주D-102]나의 …… 것이다 : 손에 쥔 붓끝에서도 힘이 넘쳐 날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103]하늘을 …… 재면서 :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덤빈다는 뜻의 겸사이다. 한(漢)나라 동방삭(東方朔)이 지은 〈답객난(答客難)〉에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엿보고, 바가지로 퍼서 바닷물을 재며, 풀 줄기로 종을 치는 격이다.〔以管窺天 以蠡測海 以筳撞鍾〕”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104]달이 …… 무너져 : 헌강왕(憲康王)의 죽음을 비유한 말이다.
    [주D-105]훈지(塤篪)를 …… 만났다 : 헌강왕과 정강왕(定康王)이 형과 아우 사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경(詩經)》 〈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질나발을 불고 중씨는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이 나온다.
    [주D-106]멀리 …… 되었다 : 정강왕이 즉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임금의 형과 누이를 각각 태양과 달에 비유하였다.
    [주D-107]달 …… 하였다 :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오빠인 정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을 말한다.
    [주D-108]신주를 품었다 : 진성여왕이 성군(聖君)이 될 거룩한 성품을 지녔다는 말이다. 《광박물지(廣博物志)》 권10 〈부의 중(斧扆中)〉에 “순(舜) 임금이 석추를 쥐고 신주를 품었다.〔虞舜握石椎 懷神珠〕”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석추를 쥐었다는 것은 선기옥형(璇璣玉衡)의 도를 안다는 말이고, 신주를 품었다는 것은 성성(聖性)을 소유하였음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D-109]채석을 구웠다 : 신라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힘썼다는 말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주D-110]보우(寶雨)의 …… 것이다 : 성스러운 자질과 훌륭한 품행이 있었기 때문에 임금의 자리에 올라 여왕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보우》는 당(唐)나라 때 달마유지(達摩流支)가 번역한 불경 이름으로, 《현수불퇴전보살기(顯授不退轉菩薩記)》라고도 하는데, 동방의 월광천자(月光天子)가 장차 지나국(支那國)의 여왕이 될 것이라고 부처가 수기(授記)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開元釋敎錄 卷9》 《대운(大雲)》은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만들어진 불경 이름이다. 승려 10인이 《대운경》을 만들어 바치면서 그녀가 하늘의 명을 받아 여제(女帝)가 되었다고 찬양하자, 그 불경을 천하에 반포하고 제주(諸州)에 대운사(大雲寺)를 건립하도록 명한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6 則天武后本紀》
    [주D-111]못이 …… 고사 : 후한(後漢)의 초성(草聖) 장지(張芝)와 진(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못가에서 붓글씨 연습을 열심히 해서 못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말한다.
    [주D-112]서까래와 …… 일 : 진(晉)나라 왕순(王珣)의 꿈에 어떤 사람이 서까래처럼 큰 붓〔大筆如椽〕을 건네주자, 꿈을 깨고 나서는 “내가 솜씨를 크게 발휘할 일이 있을 모양이다.〔當有大手筆事〕”라고 하였는데, 과연 얼마 뒤에 황제가 죽어 애책문(哀冊文)과 시의(諡議) 등을 모두 왕순이 도맡아 지었던 고사가 전한다. 《晉書 卷65 王導列傳 王珣》
    [주D-113]장융(張融)이 …… 일 : 남조 제(齊)의 장융이 초서에 능하여 항상 자부를 하였는데, 언젠가 황제가 “경의 글씨는 자못 골력이 있긴 하나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卿書殊有骨力 但恨無二王法〕”라고 하니, “신에게 이왕의 필법이 없는 것이 유감이 아니오라, 이왕에게 신의 필법이 없는 것이 또한 유감입니다.〔非恨臣無二王法 亦恨二王無臣法〕”라고 답변했던 고사가 전한다. 《南史 卷32 張邵列傳 張融》 이왕은 왕희지(王羲之)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를 가리킨다.
    [주D-114]조조(曹操)가 …… 8자(字) : 절묘하게 잘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그 은어는 절묘한 호사(好辭)라는 뜻이다.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115]세상을 …… 메우고 : 불교의 설에 의하면, 하나의 세계가 끝날 즈음에 겁화(劫火)가 일어나서 온 세상을 다 불태운다고 하는데, 한 무제(漢武帝) 때 곤명지(昆明池) 밑바닥에서 나온 검은 재에 대하여, 인도 승려 축법란(竺法蘭)이 “바로 그것이 겁화를 당한 재〔劫灰〕”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1 竺法蘭》
    [주D-116]먼지가 …… 뒤덮을지라도 : 선녀 마고(麻姑)가 신선 왕방평(王方平)을 만나서, “저번에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에 가보니까 물이 또 과거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절로 줄어들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말하자, 왕방평이 웃으면서 “바닷속에서 또 먼지가 날리게 될 것이라고 성인들이 모두 말하고 있다.〔聖人皆言 海中復揚塵也〕”라고 말했다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전한다. 《神仙傳 卷7 麻姑》
    [주D-117]약목(若木) : 고대 신화에 나오는 나무 이름으로, 서방의 해가 지는 곳에서 자라는 큰 나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상(扶桑)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물론 부상의 뜻으로 쓰였다. 부상은 동해 속에 있다는 상상의 신목(神木) 이름으로, 해가 뜰 때에는 이 나무의 가지를 흔들고서 올라온다고 한다.
    [주D-118]옥초(沃焦) : 전설 속의 큰 산 이름으로, 동해의 남쪽에 있다고 한다.
    [주D-119]가위(迦衛)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로, 석가(釋迦)가 생장한 왕성(王城)의 이름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0]우이(嵎夷) : 해 뜨는 동쪽 바닷가를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1]열렬한 …… 차지했도다 : 경문왕(景文王)이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이 될 자질을 지녔으므로 헌안왕에게 인정을 받아 맏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우(命禹)는 순 임금을 가리킨다. 《논어》 〈요왈(堯曰)〉의 “순 임금도 요 임금에게 받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 임금에게 명하였다.〔舜亦以命禹〕”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요 임금이 신하인 순에게 국정을 맡기기 전에 그를 시험해 볼 목적으로 큰 산속으로 들여보냈는데〔納于大麓〕, 사나운 바람과 뇌우(雷雨)에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서경》 〈순전(舜典)〉에 실려 있다.
    [주D-122]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주D-123]상포(桑浦) : 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
    [주D-124]보덕(報德) :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1년(560)에 세운 사찰 이름으로, 절강(浙江) 장흥현(長興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 지점에 있으며, 진(陳)나라 주홍(周弘)과 서릉(徐陵)이 각각 지은 보덕사 비(碑)와 탑명(塔銘)이 유명하다.
    [주D-125]흥국(興國) : 수 문제(隋文帝)가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때, 45주(州)에 각각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문제가 출생한 곳인 섬서(陝西) 대려현(大荔縣)의 사원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다.
    [주D-126]용수(龍首) : 장안(長安)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여기에 미앙궁(未央宮)을 지었으므로 왕궁 혹은 왕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주D-127]나의 …… 민망하나 : 옆에서 팔을 잡아끌며 방해하는 것처럼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는 말의 겸사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령(單父令)이 되었을 때, 관리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옆에서 자꾸 팔을 잡아당겨〔掣肘〕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화를 냄으로써, 참언(讒言)을 잘 듣는 노군(魯君)을 풍자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具備》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서악지〔西岳誌〕



    동국(東國)에서 태어나 그 문장과 사업으로 중원에까지 명성을 날려 후세에 찬란하게 빛나는 이는 천고에 한 사람일 뿐이니, 이런 분은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해야만 할 것이다. 청송(靑松) 황엽(黃葉)의 구절을 가지고 은밀히 고려의 왕업을 도왔다고 하는 것은 사가(史家)의 식견이 좁아서 그렇게 전해진 것임이 분명하다. 기미를 보고는 멀리 떠나 끝내 숨어 살면서 고려 시대에 자취를 더럽히지 않았으니, 홀로 우뚝 서서 세파에 휩쓸리지 않은 그 고결한 지조는 또 백세의 사표가 된다고 할 것이다.
    〈서원청액소(書院請額疏)〉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은 문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기미를 보고 벼슬하지 않은 그 지조 또한 나약한 자들의 뜻을 일으켜 세우고 완악한 자들의 행동을 방정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 위판(位版)을 개제(改題)할 때 고유(告由)한 축문(祝文)은 다음과 같다.
    오산이 빼어난 원기를 기르고 / 鼇山毓秀
    문수가 신령한 정기를 실어
    / 蚊水載靈
    맑은 기운이 한데 모인 결과 / 淑氣所鍾
    철인이 이에 태어났도다 / 哲人乃生
    어린 나이에 배를 타고서 / 竗齡乘桴
    북으로 중국에 유학을 한 뒤 / 北學中國
    대궐의 과거에 응시를 하여 / 射策金門
    급제 명단에 영명을 날렸어라 / 蜚英桂籍
    대장의 막부에서 종사관으로 / 佐成蓮幕
    글 짓는 직책을 전담하면서 / 職專翰墨
    격문을 어느 날 한번 날리자 / 羽檄朝飛
    황소(黃巢)의 넋이 달아났다네 / 狂巢褫魄
    천자의 명을 받든 신분으로 / 天子有命
    금의환향한 노래자(老萊子)의 뜰 / 錦還萊庭
    무거운 책임을 한 몸에 떠맡고서 / 抱負任重
    태평한 정치를 이루려고 하였으나 / 庶幾治平
    쇠퇴한 말세인 것을 어떻게 하랴 / 已矣其衰
    한 손으로는 지탱할 수 없었어라 / 隻手難支
    세상 밖의 저 푸른 산으로 / 物外靑山
    꿈속에도 때때로 돌아가다가 / 夢有歸時
    한 몸 거두어 종적을 감췄나니 / 斂而藏蹤
    기미를 살핀 것이 귀신과 같았어라 / 知幾其神
    경치 뛰어난 이름난 곳마다 / 名區勝境
    유적만 허전하게 벌여 있을 뿐 / 遺迹空陳
    선생을 생각해도 볼 수 없는지라 / 思人不見
    경모하는 마음만 깊어질 따름이라 / 但深景慕
    생각건대 우리 선생은 / 念我先生
    문학의 시조가 되시는 분 / 文學之祖
    성무에 이미 오르신 위에 / 旣躋聖廡
    현사를 다시 건립해서 / 又建賢祠
    조촐하게 제사를 드린 것이 / 俎豆蘋蘩
    지금 어언 백년의 세월 / 百年于玆
    위판에 명휘를 제한 것이 / 位題名諱
    불경에 가까운 일일 듯싶어 / 恐近不敬
    이제 위판을 개제하여 / 今而改是
    아름다운 명호로 바꿨어라 / 美號是正
    귀신과 사람이 모두 안정되어 / 神人俱安
    복과 녹이 다 함께 오리니 / 福祿來幷
    양양히 좌우에 계시면서 / 左右洋洋
    이 충심을 굽어살피소서 / 鑑此丹誠

    위판을 개제한 뒤의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동방에 문학을 창도하고 / 倡文東邦
    중국에 아명(雅名)을 떨치신 분 / 振雅中國
    마침내 유원을 빛나게 하여 / 遂光儒苑
    길이 제향을 향유하게 되었네 / 永享芬苾
    이번에 또 위판을 개제하여 / 亦旣改書
    옛것을 다시 새롭게 하였는데 / 其舊維新
    지금 중추의 시절을 맞아 / 時維仲秋
    정결한 이 제사를 올리나이다 / 薦此明禋

    평상시에 제향하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온 천하에 떨치고 / 文振夷夏
    은택은 후학에 미쳤으니 / 澤及後學
    우리 동방에서 대대로 영원토록 / 靑邱永世
    선각에게 보은의 제사를 올립니다 / 式報先覺


     

    [주C-001]서악지(西岳誌) : 정극후(鄭克後, 1577~1658)가 편찬한 책으로,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西岳洞)에 있는 서악서원(西岳書院)에 대해 적은 책이다. 1916년에 재간하였다. 정극후는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효익(孝翼), 호는 쌍봉(雙峯)이며, 경주 출신이다.
    [주D-001]나약한 …… 것입니다 : 참고로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맹자가 “백이의 풍도를 듣고 나면, 완악한 자들도 행동을 방정하게 하고 나약한 자들도 뜻을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2]오산(鼇山)이 …… 실어 : 오산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金鼇山)을 가리키고, 문수(蚊水) 역시 경주에 있는 문천(蚊川)을 가리킨다.
    [주D-003]노래자(老萊子)의 뜰 : 어버이가 계신 고향 집이라는 뜻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은사(隱士)인 노래자가 나이가 70인데도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릴 목적으로 색동옷을 입고서 춤을 추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初學記 卷17 註》
    [주D-004]양양히 좌우에 계시면서 :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6장에 “제사를 지낼 때면 귀신이 양양히 그 위에 있는 듯도 하고 좌우에 있는 듯도 하다.〔承祭祀 洋洋乎如在其上 如在其左右〕”라는 말이 나온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桂苑筆耕集
    판심제  桂苑筆耕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34年刊
    권책  20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17(㎝)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22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
     저자
    성명  최치원(崔致遠)
    생년  857년(통일신라 헌안왕 1)
    몰년  ?
     海雲(夫)
     孤雲
    본관  慶州
    시호  文昌侯
    특기사항  文廟에 배향
     가계도
     崔肩逸
     
     崔致遠
     

    기사전거 : 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崔致遠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헌안왕 1 857 정축 大中 11 1 慶州 沙梁部에서 태어나다.
    경문왕 8 868 무자 咸通 9 12 당 나라에 건너가 國子監에 유학하다.
    경문왕 14 874 갑오 乾符 1 18 9월, 예부시랑 裵瓉이 主試한 賓貢科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다.
    헌강왕 1 875 을미 乾符 2 19 洛陽을 遊浪하며 지은 賦 5수, 詩 100수, 雜詩賦 30수를 모아 3편으로 편집하다.
    헌강왕 2 876 병신 乾符 3 20 宣州 溧水縣尉가 되다. 이때 公私間에 지은 글을 모아 「中山覆簣集」 5권을 만들다.
    헌강왕 3 877 정유 乾符 4 21 겨울, 율수현위를 사직하다.
    헌강왕 4 878 무술 乾符 5 22 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終南山에서 공부하다.
    헌강왕 5 879 기축 乾符 6 23 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諸道行營兵馬都統 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書記의 일을 맡다. 이후 4년간 軍幕에서 表ㆍ狀ㆍ書ㆍ啓ㆍ檄文 등을 도맡다.
    헌강왕 6 880 경자 廣明 1 24 7월, 〈討黃巢檄文〉을 지어 文名을 천하에 떨치다.
    헌강왕 8 882 임인 中和 2 26 황제로부터 紫金魚袋를 하사받다.
    헌강왕 9 883 계묘 中和 3 27 고변의 書記로 있으면서 지은 만여 편의 글 중에 정수만을 뽑아 「桂苑筆耕」 20권을 만들다.
    헌강왕 10 884 갑진 中和 4 28 10월, 귀국을 결심하고 〈歸勤啓〉를 올리자 唐 僖宗이 送詒使로 삼아 詔書를 내려 허락하다. 顧雲ㆍ楊贍ㆍ吳巒 등과 석별하며 시를 주고받다. ○ 풍랑 때문에 曲浦에서 체류하다.
    헌강왕 11 885 을사 光啓 1 29 3월, 귀국하다. ○ 侍讀 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事가 되다. ○ 왕명으로 〈大崇福寺碑文〉을 짓다.
    헌강왕 12 886 병오 光啓 2 30 1월, 당에서 지은 「계원필경」ㆍ「중산복궤집」 및 詩賦 3권을 헌강왕에게 올리다.
    진성여왕 1 887 정미 光啓 3 31 1월, 〈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並序〉를 짓다.
    진성여왕 4 890 경술 大順 1 34 시기하는 자들로 인해 외직을 자원하여 太山郡(泰仁) 太守가 되다. ○ 왕명으로 〈朗慧和尙碑文〉을 짓다.
    진성여왕 7 893 계축 景福 2 37 富城郡(瑞山) 太守가 되다. 마침 조정에서 賀正使로 삼아 당에 파견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중지되다.
    진성여왕 8 894 갑인 乾寧 1 38 2월, 時務十餘條를 올리다. 왕이 가납하여 阿飡에 임명하다. 그러나 시무책은 시행되지 못한다.
    진성여왕 9 895 을묘 乾寧 2 39 7월, 〈海印寺妙吉祥塔記〉를 짓다.
    진성여왕 10 896 병진 乾寧 3 40 가족을 데리고 伽倻山으로 들어가다.
    효공왕 2 898 무오 光化 1 42 1월, 〈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를 짓다.
    효공왕 4 900 경신 光化 3 44 12월, 〈海印寺善安住院壁記〉를 짓다.
    현종 11 1020 경신 天禧 4 - 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從祀되다.
    현종 14 1023 계해 天聖 1 - 2월, 文昌侯로 追封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 후손에게 군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전교하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 慶州에 서원이 세워지다.(1623년 西岳書院으로 사액)
    광해군 7 1615 을묘 嘉靖 43 - 泰仁 武城에 서원이 세워지다.(1696년 武城書院으로 사액)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 咸陽 柏淵에 서원이 세워지다.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 大丘 解顔縣에 桂林祠를 세워 影幀을 봉안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 「桂苑筆耕集」이 간행되다.(洪奭周ㆍ徐有榘의 序)
    - - 1926 병인 - - - 6월, 후손 崔國述이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다.(盧相稷의 序) ○ 겨울, 후손 崔勉植 등이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다.(李商永의 序)

    기사전거 : 孤雲先生事蹟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당 나라에서 귀국한 직후인 886년에 在唐時의 저작을 정리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도합 28권을 헌강왕에게 올렸다. 이때 아울러 올린 桂苑筆耕集序에 저작목록이 실려 있다. 즉 私試今體 5수 1권,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雜詩賦 30수 1권, 「中山覆簣集」 1부 5권, 「桂苑筆耕集」 1부 20권이다. 〈私試今體〉ㆍ〈五言七言今體詩〉ㆍ〈雜詩賦〉는 東都를 유랑하며 붓으로 호구지책을 할 때 지은 것이고, 「중산복궤집」은 宣州 溧水縣尉로 있을 때 公私間에 지은 것이다. 「계원필경집」은 879년부터 4년간 고변의 幕府에서 從事巡官으로서 書記의 職任을 맡고 있을 때 지은 만여 편의 글 가운데서 정수만을 뽑아 20권으로 편차한 四六文의 전형적인 글이다. 이 중 詩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 저자의 저술에 관하여 「新唐書」에는 四六集 1권, 桂苑筆耕 20권, 「삼국사기」에는 文集 30권, 「해동문헌총록」에는 崔氏文集 30권, 桂苑筆耕 20권, 四六集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집」 20권을 비롯하여 「고운선생문집」 등이다.
    「계원필경집」은 삼국사기ㆍ해동문헌총록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ㆍ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 후 1834년 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洪奭周의 집에 家藏된 舊本을 얻어 編目과 義例는 그대로 두고 잘못된 글자만을 교정하여 全州에서 聚珍字로 간행하였다.《1834年刊本》 이 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4220),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8년에는 후손 崔基鎬 등이 慶州 伊上齋에서 木活字로 간행하였다.《1918年刊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42-2), 고려대ㆍ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30년에는 陰城 慶州崔氏文集發行所에서 新活字로 간행하였다.《1930年刊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82-68)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34년 全州에서 간행된 활자본으로 서울대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洪奭周ㆍ徐有榘ㆍ崔致遠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文이다.
    권수에는 1834년에 쓴 洪奭周와 徐有榘의 校印桂苑筆耕集序와 886년 저자가 「桂苑筆耕」을 포함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합 28권을 저작목록과 함께 헌강왕에게 올릴 때 쓴 自序가 실려 있다.
    권1~16은 淮南에서 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지은 軍文이며, 권17~20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다. 그리고 권 앞에는 각각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권1에는 表 10수, 권2에는 表 10수, 권3에는 狀 10수, 권4에는 奏狀 10수, 권5에는 奏狀 10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天子에게 올린 글이다. 권6은 堂狀으로 狀 10수가 실려 있는데 中國 諸官에게 올린 글이다. 권7~10은 別紙로서 각각 20수가 실려 있다. 권11에는 檄書 4수, 書 6수가 실려 있다. 이 중 〈詩黃巢檄文〉은 저자의 文名을 천하에 떨친 글이다. 권12는 委曲으로 20수의 中國下官에게 보낸 私信이 실려 있다. 권13~14는 擧牒으로 각각 25수가 실려 있는데, 下官들의 人事異動을 통지하는 私信이다. 권15에는 道敎관계의 글인 齋詞 15수, 권16에는 祭文 4수, 書 2수, 記 2수, 疏 2수가 실려 있다.
    권17에는 啓狀 10수가 실려 있다. 이 중 고변의 功德을 칭송한 七言紀德詩 30수가 〈獻詩啓〉 아래에 附記되어 있다. 권18에는 書ㆍ狀ㆍ啓 25수가 실려 있다. 권19에는 狀啓 1수, 別紙 9수, 雜著 10수가 실려 있다. 이 중 잡저는 편지 글이다. 권20에는 啓狀 4수, 別紙 5수, 祭文 1수, 詩 30수가 실려 있다. 대부분 저자가 귀국할 즈음에 올린 狀과 귀국전후의 심경을 읊은 시이다.

    필자 : 金圻彬


     

     

    고운 선생 사적
    확대원래대로축소
    숙묘가 병자년(1696, 숙종22)에 무성서원에 치제한 제문〔肅廟丙子武城書院致祭文〕



    아 생각건대 우리 문창후는 / 粤惟文昌
    신라 말년에 우뚝 출현하여 / 挺生羅季
    중국 조정의 관직을 역임하고 / 歷敭中朝
    울연히 나라의 상서가 되신 분 / 蔚爲國瑞
    그 문장 그 학술이 / 文章學術
    천년토록 환하게 빛나 / 輝映千祀
    장성의 사당에 배향되었나니 / 腏食將聖
    사문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음이라 / 斯文未墜
    우리 동방의 유교가 / 我東儒敎
    실로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 實自公始
    세상이 혼탁한 것을 싫어한 나머지 / 厭世混濁
    빛을 감추고 한가함을 택했다네 / 韜光就閒
    봉황이 가시나무에 깃들었나니 / 鸞棲枳棘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저 태산
    / 于彼泰山
    공의 유풍과 여운이 / 流風餘韻
    귀와 눈에 혁혁한지라 / 赫赫耳目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면서 / 邑人追思
    보은의 제사를 오늘도 올립니다 / 報祀靡忒

    그 서원에서 평상시에 제향하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누구보다 먼저 중국에 유학해서 / 北學莫先
    도와 함께 동방으로 돌아오신 분 / 與道俱東
    우리 후학을 창도한 그 공이여 / 倡我後學
    만고토록 영풍을 드날리리라 / 萬古英風


     

    [주D-001]장성(將聖) : 공자(孔子)를 가리킨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우리 선생님은 실로 하늘이 이 세상에 내려 성인이 되게끔 하신 분이다.〔固天縱之將聖〕”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論語 子罕》
    [주D-002]사문(斯文)이 …… 않았음이라 : 《논어》 〈자장(子張)〉에 “문왕과 무왕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아 사람들에게 남아 있으므로, 현자는 큰 것을 알고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작은 것을 알고 있다.〔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라는 말이 있다.
    [주D-003]봉황이 …… 태산(泰山) : 고운과 같은 큰 인물이 몸을 굽혀서 태인(泰仁)과 같은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왔다는 말이다. 태산은 태인의 옛 이름이다. 무성서원은 태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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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사당에서 평상시에 제향하는 축문〔學士堂常享祭文〕후손 최국술(崔國述)



    아 우리 선생은 / 惟我先生
    동국의 유종이신데 / 東國儒宗
    세상을 제대로 만나지 못해 / 與世不遇
    이 산에서 만년을 보내셨네 / 此山甘終
    당에 걸린 초상화도 / 遺像在堂
    옛것 대신 새것으로 모시고서 / 舊廢新崇
    감히 길일을 가려 / 敢以吉辰
    삼가 조촐히 제사를 드립니다 / 黍稷是恭


     

    [주C-001]학사당(學士堂) : 합천 가야산(伽倻山)의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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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가 친히 제문을 지어 화성의 교궁에서 치제할 때 문창공에게 올린 축문〔正祖御製華城校宮致祭時文昌公祝文〕



    봉암의 빼어난 정기 받고 / 鳳巖秀精
    북으로 중원에 유학하여 / 北學中原
    번방의 담장을 널리 개척하고 / 廣拓藩墻
    한원에서 혀로 밭을 가신 분 / 舌耕翰垣
    동방 문학을 창도한 것은 / 東文之倡
    공이 실로 시조라 할 것이니 / 公實爲宗
    화성에 처음 관광하러 와서 / 始觀于華
    먼저 넘치게 술 부어 올립니다 / 先侑盎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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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림사를 옮겨 세울 때 고유한 축문〔桂林祠移建時告由祝文〕[후손 최종석(崔鍾奭)]



    생각건대 우리 동방은 / 惟我東方
    바다 밖에 치우쳐 있는 데다 / 僻在海外
    단군 기자의 시대와 멀어 / 檀箕世遠
    인문이 무지몽매했는데 / 人文貿貿
    이때 선생이 태어나서 / 先生乃降
    맨 먼저 혼돈을 개벽했다네 / 首闢鴻濛
    문장은 북두성과 같았고 / 星斗文章
    명성은 중국을 진동시켰는데 / 華夏令名
    기미를 환히 알고 은거했나니 / 炳幾高蹈
    마음은 한가하고 의리는 정밀했네 / 心閒義精
    선생의 칠분의 유상이 / 七分遺像
    고결하고 또 청수해서 / 載高載淸
    보는 이마다 경외하였는데 / 瞻者起敬
    더구나 후손이야 어떠했으리 / 矧爾雲仍
    먼지 낀 감실에 오래 봉안해서 / 久奉塵龕
    매번 죄송한 생각이 들기에 / 每懷凜悚
    새로 사당을 세우게 되었나니 / 載建新廟
    그곳은 바로 달성(達城)의 지역이네 / 于達之洞
    집과 담장 산뜻하고 깨끗하며 / 宮墻蕭灑
    산과 물이 아름답게 빛나는 곳 / 山水麗明
    길일을 택해 경건히 봉안하니 / 卜吉虔奉
    패옥 소리 쟁그랑 울리는 듯도 / 襟珮
    지금부터 시작하여 앞으로는 / 其始自今
    여기에서 안온하고 평안하리니 / 是妥是安
    우리에게 문명을 내려 주소서 / 惠我文明
    천년만년 영원토록 / 於千萬年


     

    [주C-001]계림사(桂林祠) : 대구(大邱)에 있는 최치원의 영당(影堂)으로, 1755년(영조31)에 건립하였으며, 이후 일제 시대 때 이건(移建)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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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산 독서당의 유허비〔狼山讀書堂遺墟碑〕[이원조(李源祚)]



    선생은 신라 시대 사람인데, 세대가 멀어서 상세히 알아볼 수가 없다. 선생에 대해서 논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으로 말하면 성인의 사당에 올랐고, 문장으로 말하면 문단의 맹주가 되었으며, 생애로 말하면 백이(伯夷)처럼 세상을 피하였고, 자취로 말하면 자방(子房 장량(張良))처럼 선도(仙道)에 의탁하였다. 선생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아, 선생은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만당(晩唐)의 여러 시인들과 어깨를 겨루었으며, 황소(黃巢)의 반란 때 지은 격문(檄文)의 한 구절은 구비(口碑)로 전송(傳頌)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동방으로 돌아왔으나 그때는 이미 신라의 운세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기미를 환히 살펴 벼슬을 그만두고 세상 밖에서 구름처럼 노닐었으니, 강역 안에서 명산이라고 일컬어진 곳은 모두 선생 덕분에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참으로 천하의 선비였다. 한 모퉁이의 동국(東國)도 선생을 포용하기에 부족한데, 하물며 구구하게 작은 하나의 주(州)나 하나의 리(里)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정공(鄭公)의 향리(鄕里)를 세우고 안락(顔樂)의 정자를 세운 것을 보면 반드시 태어나 자란 곳에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고을의 기록을 살펴 보건대, 선생의 고택은 본피부(本彼部)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있고, 상서장(上書莊)은 금오산(金鼇山) 북쪽 문수(蚊水) 위에 있는데, 이곳은 동도(東都)에서 지령(地靈)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과연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더군다나 이곳은 성명(聲明)의 기반이 된 곳이요, 후손이 대대로 지켜 온 곳이니, 어찌 기억에서 없어지게 해서야 될 말이겠는가.
    이 고을 동쪽의 낭산(狼山)에 독서당(讀書堂)의 옛터가 있고 예전의 그 우물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옛날의 주춧돌 위에 건물을 세우고 학업을 닦는 곳으로 삼았다. 이에 후손 사간(思衎) 씨가 비석을 세워 기념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하였는데, 여러 종인(宗人)들이 합의하여 그 뜻을 이루게 되자, 나에게 기문을 써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선생의 위대함이 천하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당(堂)으로 내려왔으니 이를 참으로 가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당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천하로 벋어 나간 것을 감안하면 선생의 사업과 문장이 꼭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선생의 후손이 된 자로서 어떻게 감히 이 일을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주C-001]이원조(李源祚) : 1792~1871.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철종 때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냈으며, 이후 공조 판서를 지냈다. 저서로는 《응와문집(凝窩文集)》이 있다.
    [주D-001]정공(鄭公)의 향리(鄕里)를 세우고 : 후한(後漢)의 경학가(經學家)인 정현(鄭玄)이 가향(家鄕)인 북해(北海) 고밀현(高密縣)으로 돌아오자, 북해상(北海相)인 공융(孔融)이 그를 존경한 나머지 고밀현에 명령하여 특별히 ‘정공향(鄭公鄕)’을 설치하도록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
    [주D-002]안락(顔樂)의 …… 것 : 소식(蘇軾)의 시 〈안락정(顔樂亭)〉 서문에 “안자가 옛날 살던 이른바 누항이라는 곳에 우물이 있다. 그 우물물을 마시던 안씨는 벌써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지 않았으나, 교서 태수 공군 종한이 처음 그 땅을 얻어 우물을 준설한 뒤에 그 위에다 정자를 짓고는 ‘안락정’이라고 명명하였다.〔顔子之故居 所謂陋巷者 有井存焉 而不在顔氏久矣 膠西太守孔君宗翰 始得其地 浚治其井 作亭於其上 命之曰顔樂〕”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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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연사의 기문〔柏淵祠記〕[황경원(黃景源)]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翰林侍讀學士兵部侍郞知瑞書監事) 문창(文昌) 최공 고운(崔公孤雲)의 사당이 함양(咸陽) 백연(柏淵)의 위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이 일찍이 천령(天嶺)의 수재(守宰)를 지냈는데 떠난 뒤에도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천령은 지금에 와서는 함양이 되었다. 그래서 함양부의 사람들이 공의 사당을 세워서 제사 지내는 것이다.
    공의 휘(諱)는 치원(致遠)이다. 어린 나이에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건부(乾符) 1년(874)에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그 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통(都統) 고변(高騈)이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광계(光啓) 1년(885)에 조사(詔使)의 신분으로 동방에 돌아와 김씨(金氏)를 섬기면서 한림시독학사 병부시랑 지서서감사가 되었다. 건녕(乾寧) 1년(894)에 시무 십사(時務十事)를 올렸으나 왕이 채용하지 않자 이에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국사(國史)를 살펴보건대, 공이 본국에 돌아온 뒤로 21년이 지나서 좌복야(左僕射) 배추(裴樞) 등 38인이 청류(淸流)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으면서 당(唐)나라가 결국 멸망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29년이 지나서 김씨의 나라도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대개 이때는 공이 이미 은거한 뒤였다. 이는 공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았고, 또 종국(宗國)이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초연히 멀리 떠나서 세상을 피해 살면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공이 마음속으로 후량(後梁)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고, 또 고려 왕씨(王氏)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깊은 산속으로 도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변이 황소를 토벌할 적에 공이 비분강개하여 고변을 위해 격문을 지어 제도(諸道)의 군병을 모아서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황소의 토벌을 마친 뒤에는 조서(詔書)를 받들고서 동방으로 돌아왔다. 가령 공이 종신토록 당나라에서 벼슬했더라면, 청류의 화(禍)를 어떻게 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공이 그 화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하면서까지 후량의 조정을 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주(慶州) 남쪽에 상서장(上書莊)이 있다. 세상에서는 공이 이곳에서 왕씨(王氏)에게 상서(上書)했다고 일컫고 있다. 그러나 왕씨가 처음 일어날 즈음에 공이 참으로 상서하여 은밀히 도왔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으로 세상을 피해 고독하게 행동하며 산택(山澤) 사이에서 노년을 마치려고만 하고 벼슬은 하지 않으려고 하였겠는가. 왕씨 중에는 공에게 문창후(文昌侯)를 추증하고 국학(國學)에서 제사를 올리게 하면서 대대로 영광으로 여기게 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공이 절조를 높이 하여 왕씨를 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찌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공자가 이르기를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은 것에 대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일컫고 있다.〔伯夷叔齊餓於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라고 하였다. 가령 은(殷)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그 두 사람은 그렇게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굶어 죽은 것은 그들의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다. 공이 떠난 것을 시간적으로 고찰해 보면 그때는 김씨(金氏)가 이미 멸망한 뒤였다. 이것을 보면 공의 뜻이 또한 몸을 깨끗이 하려고 한 것이니, 저 두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금상(今上 영조(英祖)) 21년(1745)에 모후(某侯)가 함양부의 수재(守宰)로 나가 공의 사당에 참배하고는 부인(府人)을 거느리고 그 유지(遺址)에 기초하여 개수한 뒤에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대저 국학에서 공의 제사를 올린 것이 오래되었다. 그러니 부(府)의 관아에서 어찌 꼭 사당을 세워야만 하겠는가. 그렇기는 하지만 일단 공의 유적이 있고 보면, 또한 백세토록 없어지지 않게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이렇게 쓰게 되었다.


     

    [주C-001]황경원(黃景源) : 1709~1787.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유현(儒賢)으로서 대사헌과 각 조(曹)의 판서를 지냈다. 삼례(三禮)와 고문(古文)에 밝고 서도에도 능하였다.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으며, 또 조선 사람으로 중국 조정에 절의(節義)를 지킨 사람을 들어 《명배신전(明陪臣傳)》을 지었다. 문집인 《강한집(江漢集)》이 있다.
    [주D-001]좌복야(左僕射) …… 멸망하였다 : 당(唐)의 마지막 황제인 소선제(昭宣帝) 천우(天祐) 2년(905)에 재상 유찬(柳瓚)이 주전충(朱全忠)의 뜻에 영합하여 대신(大臣)인 배추(裴樞) 등을 모함해서 활주(滑州) 백마역(白馬驛)에서 죽일 적에, 과거에 누차 급제하지 못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이진(李振)이 주전충의 좌리(佐吏)로 있다가 “이 자들은 스스로 청류라고 말을 하니 황하에 던져 넣어서 영원히 탁류가 되게 하는 것이 좋겠다.〔此輩自謂淸流 宜投於黃河 永爲濁流〕”라고 하자, 주전충이 웃으면서 허락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五代史 卷18 梁書 李振列傳》 고운은 신라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주D-002]백이(伯夷)와 …… 있다 : 이 내용은 《논어》 〈계씨(季氏)〉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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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조지겸(趙持謙)]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하며 일소(逸少)의 고사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한다.
    그 누대도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고 말았는데, 나의 벗인 조 사군 자직(趙使君子直 조상우(趙相愚))이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그 누대 위에서 소요하다가 먼 과거의 일에 대한 감회가 뭉클 솟아오르자 바위를 쌓아 증축한 뒤에 작은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왕년에 내가 풍악(楓岳) 아래 고을에서 재직할 적에 신선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지역을 한번 수식(修飾)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할 틈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자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태어나서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에 바닷길로 만리 멀리 중국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대당(大唐)의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에 상대(霜臺 어사대(御史臺))를 밟고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에 들어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선생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원문(轅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방패에 먹을 갈아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으로 하여금 넋이 달아나고 담이 떨어지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100만 군사보다도 낫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는 뛰어난 재질과 성대한 명성을 지니고서 몸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쓰고 남은 찌꺼기만 끄집어내어 활용했어도 한 나라를 유지시키기에는 충분했을 것인데, 그만 매자진(梅子眞)처럼 동묵(銅墨)의 지위에 침륜(沈淪)했는가 하면 끝내 세상 밖에서 떠돌면서 연문(羨門)의 무리에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난 그 시운이 불우해서 중국에 들어가서는 난리에 휩싸였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위망의 조짐이 보였으므로,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한 몸도 보전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표연히 멀리 떠나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혼란한 탁세를 벗어났던 것이었으니,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를 읊다 보면 미상불 두 번 세 번 탄식하면서 그의 뜻을 동정하게도 되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곤 했을 것이니, 계속 감개(感慨)하여 마지않게 되는 것이 어찌 다만 면앙(俛仰) 간의 묵은 자취뿐이겠는가. 공의 청풍(淸風)과 일운(逸韻)이 온 우주 사이에 흘러넘친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공의 지취(志趣)를 아는 자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대저 어떤 지역이 중하게 되고 유명해지는 것은 미상불 그곳의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정(蘭亭)의 무림(茂林)도 일소(逸少)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유상대의 수석(水石)도 문창(文昌)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련다. 그리고 다시 1천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표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르겠다마는,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될는지.


     

    [주C-001]조지겸(趙持謙) : 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주D-001]일소(逸少)의 고사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주D-002]풍악(楓岳) 아래 고을 : 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주D-003]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 : 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주D-004]소금 장수인 노적(老賊) : 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주D-005]매자진(梅子眞)처럼 …… 하면 : 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06]연문(羨門) : 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주D-007]홍류(紅流) 한 절구(絶句) :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주D-008]난정(蘭亭)의 …… 것이다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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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인 유상대의 비기〔泰仁流觴臺碑記〕[조지겸(趙持謙)]



    태인군(泰仁郡)은 바로 신라의 태산군(泰山郡)이다. 이곳은 문창후(文昌侯) 최공(崔公)이 옛날에 태수로 재직한 곳이다.
    관아의 남쪽 7리쯤 되는 곳에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이 매번 여기에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하며 일소(逸少)의 고사를 흉내 냈다고 지금도 부로(父老)들이 전한다.
    그 누대도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황폐해지고 말았는데, 나의 벗인 조 사군 자직(趙使君子直 조상우(趙相愚))이 정사를 행하는 여가에 그 누대 위에서 소요하다가 먼 과거의 일에 대한 감회가 뭉클 솟아오르자 바위를 쌓아 증축한 뒤에 작은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는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왕년에 내가 풍악(楓岳) 아래 고을에서 재직할 적에 신선의 굴택(窟宅)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지역을 한번 수식(修飾)해 보려고 생각하였으나 미처 그렇게 할 틈을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자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하다고 하겠는가.
    내가 생각건대, 선생은 태어나서 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에 바닷길로 만리 멀리 중국에 건너갔다. 그리하여 약관의 나이가 되기도 전에 대당(大唐)의 대과(大科)에 급제한 뒤에 상대(霜臺 어사대(御史臺))를 밟고 금문(金門 금마문(金馬門))에 들어갔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선생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원문(轅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는 방패에 먹을 갈아 소금 장수인 노적(老賊)으로 하여금 넋이 달아나고 담이 떨어지게 하였으니, 이는 그야말로 100만 군사보다도 낫다는 말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는 뛰어난 재질과 성대한 명성을 지니고서 몸을 거두어 동쪽으로 돌아왔으니, 쓰고 남은 찌꺼기만 끄집어내어 활용했어도 한 나라를 유지시키기에는 충분했을 것인데, 그만 매자진(梅子眞)처럼 동묵(銅墨)의 지위에 침륜(沈淪)했는가 하면 끝내 세상 밖에서 떠돌면서 연문(羨門)의 무리에 자신을 의탁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아, 공이 세상에 태어난 그 시운이 불우해서 중국에 들어가서는 난리에 휩싸였고 고국에 돌아와서는 위망의 조짐이 보였으므로, 도를 행할 수 없을 뿐더러 자기 한 몸도 보전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표연히 멀리 떠나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 혼란한 탁세를 벗어났던 것이었으니, 홍류(紅流) 한 절구(絶句)를 읊다 보면 미상불 두 번 세 번 탄식하면서 그의 뜻을 동정하게도 되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그가 이곳에서 한가롭게 소요하곤 했을 것이니, 계속 감개(感慨)하여 마지않게 되는 것이 어찌 다만 면앙(俛仰) 간의 묵은 자취뿐이겠는가. 공의 청풍(淸風)과 일운(逸韻)이 온 우주 사이에 흘러넘친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공의 지취(志趣)를 아는 자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대저 어떤 지역이 중하게 되고 유명해지는 것은 미상불 그곳의 사람과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난정(蘭亭)의 무림(茂林)도 일소(逸少)를 만나지 않았다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나 역시 “이 유상대의 수석(水石)도 문창(文昌)을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다.”라고 말하련다. 그리고 다시 1천여 년이 지나서 또 자직(子直)을 만나 증수(增修)하고 표시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그 일을 행할 적임자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된 일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르겠다마는, 앞으로 자직의 뒤를 이어서 증수할 적임자가 또 누가 될는지.


     

    [주C-001]조지겸(趙持謙) : 1639~1685.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우재(迂齋)이며,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의 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저서로 《우재집(迂齋集)》이 있고, 편서로 《송곡연보(松谷年譜)》가 있다.
    [주D-001]일소(逸少)의 고사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주D-002]풍악(楓岳) 아래 고을 : 강원도 고성(高城)을 가리킨다. 조지겸은 1681년(숙종7)에 고성 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풍악은 금강산(金剛山)의 별칭이다.
    [주D-003]별이 일주(一周)하는 나이 : 12세 때를 말한다. 별은 세성(歲星), 즉 목성(木星)으로, 옛사람들은 세성이 12년마다 하늘을 한 바퀴 돈다고 여겼다.
    [주D-004]소금 장수인 노적(老賊) : 황소(黃巢)를 가리킨다. 그의 집안이 대대로 소금을 파는 일에 종사해서 재물을 많이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舊唐書 卷200下 黃巢列傳》
    [주D-005]매자진(梅子眞)처럼 …… 하면 : 고운이 외방에 나가 고을 수령이 된 것을 말한다. 자진은 한(漢)나라 매복(梅福)의 자이고, 동묵(銅墨)은 지방 수령이 차는 동인(銅印)과 묵수(墨綬)를 말한다. 매복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06]연문(羨門) : 고대 선인이었던 연문자고(羨門子高)를 가리킨다. 진 시황(秦始皇)이 일찍이 동해(東海) 가를 유람하면서 연문자고 등의 선인을 찾았다고 한다.
    [주D-007]홍류(紅流) 한 절구(絶句) : 가야산(伽倻山) 홍류동(紅流洞)에 있는 농산정(籠山亭)을 읊은 절구에 “미친 듯 바위에 부딪치며 산을 보고 포효하니, 지척 간의 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라. 시비하는 소리가 귀에 들릴까 저어해서, 일부러 물을 흘려보내 산을 감싸게 하였다네.〔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라는 말이 나온다. 《고운집》 권1에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주D-008]난정(蘭亭)의 …… 것이다 : 일소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자이다. 왕희지가 명사 42인과 함께 상사일(上巳日)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에 모여서 귀신에게 빌어 재앙을 쫓는 계사(禊事)를 행하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지은 일을 말하는데, 왕희지가 지은 〈난정기(蘭亭記)〉에 그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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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학동의 비명〔靑鶴洞碑銘〕[정두경(鄭斗卿)]



    고려와 백제와 신라로 말하면, 나라는 비록 한 지역에 속한다고 하겠지만 봉래(蓬萊)와 영주(瀛洲)와 방장(方丈)이 있어서 산으로는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다고 할 것인데, 그 기운이 부상(扶桑)에 한데 모여서 기걸한 인물을 특별히 태어나게 하였도다.
    아, 단목(檀木)의 진인(眞人)이 한번 떠나자 태백산(太白山)만 허전하게 남게 되었고, 동명(東明)의 인마(麟馬)가 돌아오지 않자 조천석(朝天石)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상고(上古)의 현풍(玄風)은 이미 멀어지게 되었고, 장생(長生)의 비결은 전해지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나라에서는 한갓 간과(干戈)와 전쟁만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시(詩)를 논하거나 부(賦)를 짓는 인사는 들을 수 없이 적요하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도덕과 문장을 알지 못한 채 말 달리며 활 당기는 무리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해동(海東)에 장보(章甫 유자(儒者)의 관)를 쓴 선비가 없었다면 우리는 좌임(左袵)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남(嶺南)에서 호련(瑚璉 종묘의 제기)의 그릇이 탄강하였으니, 사문(斯文)이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학해(學海)에서 망인(鋩刃)을 숫돌에 갈게 되었고, 사림(詞林)에 기치를 세우게 된 것이었다.
    공의 성은 최(崔)요, 휘(諱)는 치원(致遠)이요, 호는 고운(孤雲)이다. 천명을 받고 태어남에 집안에 상서가 있었고, 육가(陸家)의 연화(蓮花)가 나옴에 사해(四海)와 오악(五嶽)의 자질을 품부받았다.
    진(秦)과 한(漢)의 재질을 능가하여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의 문장을 배웠으며, 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를 바꾸어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아송(雅頌)을 진작시켰다.
    만장(萬丈)의 광염(光焰)을 토할 때는 마치 명월주(明月珠)를 배열한 것과 같았고, 율려(律呂)가 서로 조화되는 것은 흡사 균천악(鈞天樂)을 연주하는 것과 같았나니, 종이 위에서 교룡(蛟龍)이 움직이는 듯, 붓끝에서 풍우(風雨)가 몰아치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발해(渤海)의 파도가 건필(健筆) 덕분에 더욱 장하게 되었음은 물론이요, 부상(扶桑)의 일월이 고명(高名)의 힘을 얻어 거듭 빛나게 되었다.
    구석진 삼한(三韓) 땅에 처하여 산하가 비좁은 것을 매번 탄식하였나니, 무한대한 공간을 우러러 바라보면서 드넓은 우주를 끝까지 파헤쳐 보고자 하였다. 어찌 누항의 시문(柴門)에 거하면서 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을 장차 펼 수가 있겠는가. 창해에 배를 띄우고 문득 한(漢)나라 사신의 뗏목을 좇아, 중국으로 유학하여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도를 다시 즐기게 되었다.
    기주(冀州) 고을에 준마(駿馬)가 남아 있음을 처음 알았나니, 진(秦)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될 것이로다. 노(魯)나라의 뜰을 지날 적에는 계찰(季札)이 음악을 평한 것을 사모하였고, 촉(蜀) 땅의 다리를 건널 적에는 상여(相如)가 다리에 써넣은 것을 본받았다.
    연치(年齒)는 비록 약관에 불과했지만, 재질은 다사(多士)의 위에 군림하였다. 그리하여 천문(天門)에서 책문(策文)을 쏘아 맞추자 자극(紫極)의 황제가 공의 이름을 알았고, 막부(幕府)에서 사부(詞賦)를 지어 날리자 녹림(綠林)의 도적이 무릎을 꿇었다.
    사해에 명성이 널리 퍼짐에 석우(石友)는 유종(儒宗)의 노래를 지어 증정하였으며, 구천(九天)에 날아오름에 김승(金丞)은 한림(翰林)의 관직으로 승진시켰다.
    돌아보면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라서 초(楚)나라 집규(執圭)의 노랫가락을 읊조렸는데, 신선 같은 풍골(風骨)이 진세(塵世)를 벗어났으매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이 하강하였고, 비단옷을 입고 신라로 돌아오매 노담(老聃)의 자기(紫氣)가 동쪽으로 옮겨왔다. 나라 사람들이 기걸한 인재가 없는 것을 탄식하는 가운데 여주(女主 진성여왕(眞聖女王))가 공에게 귀한 직책을 제수하였다.
    국조(國朝)에 어려움이 많은 시대를 당하여, 나의 생이 때에 맞지 않음을 한탄하였나니, 오도(吾道)를 어떻게 펼 수 있었겠으며, 가슴에 온축한 뜻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었겠는가.
    무협 고봉(巫峽高峯)의 해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銀河列宿)의 해에 돌아와서 계림(雞林)에는 누런 잎이 지고 곡령(鵠嶺)에는 소나무가 푸르다고 탄식하였다.
    뜬구름 떠 있는 대궐을 바라보며 속절없이 가생(賈生)의 눈물을 흘렸나니, 이 풍진세상에서 그 누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었겠는가.
    등불 앞에는 만리(萬里)의 마음이요, 세상 밖에는 천산(千山)의 꿈이로다. 홍진이 눈에 들어와 앞을 볼 수 없자 의관을 걸어 놓고 영원히 돌아갔고, 자지(紫芝)로 배고픔을 달래며 임천(林泉)을 향해 높이 드러누웠다.
    한 시내의 송죽(松竹)에 반쯤 닫힌 월영대(月影臺)요, 1만 골의 연하(煙霞)에 멀리 이어진 청학동(靑鶴洞)이라. 문득 물아(物我)를 잊으니 정녕 복희(伏羲) 시대의 백성이요, 사생(死生)을 아랑곳하지 않으니 화서(華胥)의 들판과 방불하였다.
    높은 언덕에 올라 맑게 휘파람 불고, 푸른 강물 굽어보며 길게 노래했나니, 저분이 어떤 분이신가, 내가 나를 잊은 분이로다. 현빈(玄牝)에 통하여 중묘(衆妙)의 문을 스스로 얻었고, 약(藥)은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참동(參同)의 계(契)를 다시금 이었다. 물외(物外)에서 형신(形身)을 길러 곰처럼 매달리고 새처럼 폈으며, 인간 세상의 구각(軀殼)을 벗어 매미처럼 허물 벗고 용처럼 변하였다. 오곡을 먹지 않으면서 바람과 이슬을 들이켜고 경화(瓊華)를 씹었으며, 팔구(八區)를 떨쳐 버리고서 구름과 기운을 타고 일월(日月)을 잡아탔다. 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지극한 사람이라 이를 수가 없어서 만상(萬象)에 뒤섞여 같은 몸이 되었으며, 신령한 기운이라 변하지 않아 천년이 지나서도 오히려 존재하였다. 들고 남에 있어서는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으며, 변화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운산(雲山)의 옛 자취여, 상서장(上書莊)은 없어지지 않았고, 악부(樂府)의 남은 음악이여, 아직도 〈가야곡(伽倻曲)〉에 전하도다.
    아, 위로는 공경(公卿)과 재상(宰相)으로부터, 아래로는 사서(士庶)와 아동(兒童)에 이르기까지, 선생의 성명을 외우지 않은 자가 없고, 선생의 풍채를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다. 남보다 뛰어난 도덕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와 같이 경모를 받을 수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요갈(遼羯)과 국경을 접한 관계로 옛날부터 문학에 뛰어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박제상(朴堤上)이 충성스럽기는 하였지만 열사일 따름이요, 김유신(金庾信)이 영걸스럽기는 하였지만 - 원문 빠짐 - 그런 인물은 있지 않았다.
    오직 우리 선생이 옹색한 사원(詞源)을 개통하고, 황량한 학해(學海)를 개척하였나니, 이는 마치 진(秦)나라의 거울을 궁전에 걸자 오장(五臟)이 모두 보이고, 신우(神禹)의 도끼를 산천에 휘두르자 구주(九州)가 비로소 안정된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동방의 기습(氣習)이 한꺼번에 변하여 나라가 그 덕분에 부지되었나니, 북극의 성신(星辰)이 중심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 모두가 선생을 우러러보았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사당에 공을 배향하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공에게 내렸나니, 천년만년토록 명성이 전해지는 가운데 70명의 고제(高弟)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선성(先聖)의 덕을 사모하여 지금도 제사를 올리게 하고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알게끔 한 것은 그 누구의 공이라고 하겠는가.
    나는 추수(秋水)의 호량(濠梁)을 통해 장생(莊生)의 흉금을 떠올리고, 영천(穎川)의 청풍(淸風)을 통해 허유(許由)의 기상을 꿈꾼다. 나는 유향(劉向)의 《열선전(列仙傳)》을 읽고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를 외우면서 높고 험한 석문(石門)에서 고금을 어루만지며 길게 탄식하고, 맑고 얕은 쌍계(雙溪)에서 은일(隱逸)의 남은 자취를 찾아본다. 아, 선생의 풍도는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다고 하리로다.


     

    [주C-001]청학동(靑鶴洞)의 비명(碑銘) : 이 비명의 작자에 대해서 대본에는 정홍명(鄭弘溟)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편찬자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 비명은 정두경(鄭斗卿)의 문집인 중간본 《동명집(東溟集)》 권10에 〈최학사고운비서(崔學士孤雲碑序)〉라는 제목으로 전재(全載)되어 있는바, 바로 정두경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정두경의 호가 동명(東溟)이므로, 편찬자가 ‘정동명(鄭東溟)’을 ‘정홍명(鄭弘溟)’으로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다. 《고운집》과 《동명집》에 나오는 글을 서로 비교해 보면 글자의 출입이 아주 많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동명이 뒤에 비석에 글을 새길 적에 글을 수정하거나 글자 수를 증감한 것인 듯하다. 또한 대본에는 중간 중간에 빠진 부분이 있어 ‘缺’로 처리되어 있다. 번역을 하면서 글자의 출입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교감하지 않고, 단지 ‘缺’로 되어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동명집》에 나오는 글에서 보충하여 번역하되, 글자의 색깔을 달리하여 구분해 주었다.
    [주D-001]단목(檀木)의 …… 되었고 : 단목은 신단수(神檀樹), 진인(眞人)은 단군(檀君), 태백산(太白山)은 묘향산(妙香山)을 가리킨다.
    [주D-002]동명(東明)의 …… 되었다 : 조천석(朝天石)은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 곁에 있던 바위 이름이다. 옛날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부벽루 아래 기린굴(麒麟窟)에서 기린마(麒麟馬)를 길러 이 말을 타고 기린굴에서 조천석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다.
    [주D-003]좌임(左袵) :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오랑캐의 의복 제도를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孔子)가 관중(管仲)의 공을 찬양하면서 “만약에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들은 머리를 풀고 좌임하는 오랑캐의 신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주D-004]사문(斯文)이 …… 않겠는가 : 고운이 유가(儒家)의 도통을 계승하여 후세에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가 일찍이 광(匡) 땅에서 횡포를 부렸던 양호(陽虎)로 오인받아 그곳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위태로웠을 때 “문왕이 돌아가신 지금에는 사문이 나에게 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이 사문을 망칠 작정이라면 나와 같은 자가 사문에 참여하지 못했겠지만, 하늘이 사문을 망치지 않으려 한다면 광 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文王旣沒 文不在玆乎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라고 강한 자부심을 표명한 대목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05]육가(陸家)의 연화(蓮花) : 세상에서 보기 드문 명산(名産)이라는 뜻으로, 특출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이다. 남조 양(梁) 임방(任昉)의 《술이기(述異記)》 권상에 명산품을 열거하면서, 왕씨(王氏)의 귤원(橘園)과 육가의 백련(白蓮)과 고가(顧家)의 반죽(斑竹)을 거론하였다.
    [주D-006]제(齊)와 양(梁)의 시체(詩體) : 남조(南朝)의 제와 양의 시대에는 시를 지을 때에 대부분 음률(音律)과 대우(對偶)를 중시하여 사조(詞藻)가 화려한 대신 내용은 결여되는 경향을 보였는데, 이를 문학사상 제량체(齊梁體)라고 부른다.
    [주D-007]균천악(鈞天樂) : 균천광악(鈞天廣樂)의 준말로, 중국의 궁중 음악을 뜻하는 말이다. 균천은 천제(天帝)의 거소인데, 춘추 시대에 조간자(趙簡子)가 5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균천에 올라가서 광악을 듣고 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史記 卷43 趙世家》
    [주D-008]상호봉시(桑弧蓬矢)의 뜻 : 천지 사방을 경륜할 큰 뜻을 말한다. 옛날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상목(桑木)으로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걸고 봉초(蓬草)로 화살을 만들어 사방에 쏘는 시늉을 하며 장차 이처럼 웅비할 것을 기대했던 풍습이 있었다. 《禮記 內則》
    [주D-009]창해에 …… 좇아 : 고운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당나라에 들어간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漢)나라 사신은 장건(張騫)을 가리킨다. 그가 한 무제(漢武帝)의 명을 받고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나가서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았는데, 이때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天中記 卷2》 중국이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뗏목을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는 전설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0]기주(冀州) …… 것이로다 : 천리마처럼 뛰어난 인재가 아직도 조정에 선발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중국 사람들이 고운을 보고서 비로소 알았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백락이 기주 북쪽의 들판을 한 번 지나가자 말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伯樂一過冀北之野 而馬群遂空〕”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백락은 천리마를 잘 알아보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또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 사회(士會)가 진(秦)나라에 망명했다가 다시 귀국할 적에, 진(秦)나라 요조(繞朝)가 채찍을 증정하면서 사회의 진짜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대는 진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나의 계책이 마침 채용되지 않았을 뿐이다.〔子無謂秦無人 吾謀適不用也〕”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여기에서 진나라는 변방의 신라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주D-011]계찰(季札)이 …… 것 :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공자 계찰이 노(魯)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周)나라의 음악을 듣고 열국(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아는 등 정확하게 비평했다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주D-012]상여(相如)가 …… 것 : 촉군(蜀郡) 성도(成都)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일찍이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에 성도의 성(城) 북쪽에 있는 승선교(昇仙橋)에 이르러 그 다리 기둥에 “고거사마를 타지 않고서는 다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겠다.〔不乘駟馬高車 不復過此橋〕”라고 써서 기필코 공명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는데, 뒤에 그의 뛰어난 문장 실력을 한 무제(漢武帝)에게 인정받고 출세한 고사가 진(晉)나라 상거(常璩)의 《화양국지(華陽國志)》에 전한다.
    [주D-013]석우(石友)는 …… 증정하였으며 : 고운과 동년(同年)인 중국인 고운(顧雲)이 고운이 귀국할 때 송별시를 지어 준 것을 말하는데, 《고운집》 〈고운 선생 사적(孤雲先生事蹟) 삼국사(三國史) 본전(本傳)〉에 그 시가 소개되어 나온다. 석우는 금석(金石)처럼 정의(情誼)가 굳건한 벗이라는 뜻이다.
    [주D-014]김승(金丞)은 …… 승진시켰다 :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고운을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한 것을 가리킨다. 김승은 김씨(金氏)인 승(丞)이라는 뜻이다. 승은 관직 이름으로, 고대에 천자를 보필하는 4인 중의 하나였다.
    [주D-015]돌아보면 …… 읊조렸는데 : 선진 문명의 중국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고국이 너무도 그리워서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가 중선(仲宣)인 위(魏)나라 왕찬(王粲)이 후한(後漢) 말 동란 때에 형주(荊州)의 누대에 올라 고향 생각을 하며 〈등루부(登樓賦)〉를 지었는데, 그중에 “아름답긴 하다마는 우리의 땅이 아님이여, 어찌 잠깐이라도 머무를 수 있으리오.〔雖信美而非吾土兮 曾何足以少留〕”라고 탄식한 구절이 나온다. 《文選 卷11》 또 전국 시대 월(越)나라 사람 장석(莊舃)이 초(楚)나라에 와서 벼슬하며 집규(執圭)라는 직책의 고관이 되었다가 병에 걸렸는데, 초왕(楚王)이 “누구를 막론하고 병이 들었을 때에는 고향을 생각하게 마련이다. 한번 시험해 보라.”라는 혹자의 말을 듣고는,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장석이 무의식적으로 월나라 노랫가락을 읊조리고 있더라는 고사가 있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주D-016]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 : 동방삭은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해학과 직언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는데, 하늘나라의 반도(蟠桃) 3개를 훔쳐 먹어 3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성정은 별의 영기(靈氣)를 말한다.
    [주D-017]노담(老聃)의 자기(紫氣) : 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일찍이 주(周)나라에서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쇠해진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나갔는데, 노자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의 영(令)으로 있던 윤희(尹喜)가 이에 앞서 함곡관 위에 자색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에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고 한다. 《列仙傳》
    [주D-018]신선 …… 옮겨왔다 : 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仙骨出塵 方朔之星精下降 錦衣還國 老聃之紫氣東來’이다.
    [주D-019]무협 고봉(巫峽高峯)의 …… 돌아와서 : 고운이 12세에 중국에 들어가서 28세에 금의환향했다는 말이다. 무협에 12봉이 있고 하늘에 28수가 있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주D-020]계림(雞林)에는 …… 탄식하였다 : 신라는 쇠망하고 고려는 흥성한다고 고운이 비유했다는 것이다. 곡령은 개경(開京)의 송악(松嶽)을 가리킨다.
    [주D-021]뜬구름 …… 흘렸나니 : 고운이 우국충정에서 우러나온 시무(時務) 10여 책을 진성여왕(眞聖女王)에게 올렸으나 허사로 돌아간 것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가의(賈誼)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文帝)에게 치안책(治安策)을 올리면서 “삼가 일의 형세를 살펴보건대, 통곡할 만한 것이 한 가지요,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 두 가지요, 장탄식할 만한 것이 여섯 가지이다.〔竊惟事勢 可爲痛哭者一 可爲流涕者二 可爲長太息者六〕”라고 전제한 뒤에 하나하나 설명한 고사가 전한다. 《漢書 卷48 賈誼傳》
    [주D-022]이 …… 알아주었겠는가 : 당시 세상에 지기(知己)가 없었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높은 산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친구인 종자기(鍾子期)가 “멋지다. 마치 태산처럼 높기도 하구나.”라고 평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멋지다. 마치 강하처럼 넘실대는구나.”라고 평하였는데, 종자기가 죽고 나서는 백아가 더 이상 세상에 지음(知音)이 없다고 탄식하며 거문고 줄을 끊어 버린 고사가 전한다. 《列子 湯問》 《呂氏春秋 本味》
    [주D-023]홍진이 …… 돌아갔고 : 혼란한 세상에서 벼슬하는 일을 그만두고 산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서 유유자적했다는 말이다. 매복(梅福)이 일찍이 남창 현령(南昌縣令)으로 있다가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는 성의 동문(東門)에 관을 걸어 두고 떠난 뒤에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漢書 卷67 梅福傳》
    [주D-024]자지(紫芝) : 자줏빛의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진(秦)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노인, 즉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甪里先生) 등 사호(四皓)가 자지를 캐 먹고 배고픔을 달래면서 〈자지가(紫芝歌)〉를 지어 불렀다는 고사가 전한다.
    [주D-025]화서(華胥) : 황제(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이상 국가의 이름이다. 황제가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무위자연의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는 꿈을 꾸고는, 여기에서 계발되어 천하에 크게 덕화를 펼쳤다는 전설이 전한다. 《列子 黃帝》
    [주D-026]내가 …… 분이로다 : 대본은 ‘吾喪我’이다. 《장자》 〈제물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인데, 자신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일체 물아(物我)의 경계를 떠난 자유로운 경지를 뜻하는 표현이다.
    [주D-027]현빈(玄牝) :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본원(本源)을 뜻하는 말로, 《노자(老子)》 제6장에 이르기를, “곡신은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하였다.
    [주D-028]참동(參同)의 계(契) : 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인 《참동계》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금(金)을 단련하는 법을 논하였다.
    [주D-029]곰처럼 …… 폈으며 : 옛날에 행하던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곰과 같이 나뭇가지를 기어오르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것을 말한다. 《장자》 〈각의(刻意)〉에 이르기를,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다리를 쭉 뻗듯 체조를 하는 것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30]경화(瓊華) : 전설 속에 나오는 경수(瓊樹)의 꽃으로, 옥가루와 비슷하다고 한다.
    [주D-031]팔구(八區) : 팔방(八方)과 같은 말로, 천하를 가리킨다.
    [주D-032]구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는 뜻이다. 자진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칠월 칠석날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구산(緱山)의 마루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하였다. 《後漢書 卷82 方術列傳上 王喬》
    [주D-033]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 공동산(崆峒山)은 계주(薊州)에 있는 산이고, 광성자는 중국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이다. 광성자가 공동산의 석실(石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씨(皇帝軒轅氏)가 그를 찾아가 함께 노닐면서 수신법(修身法)을 물었다고 한다.
    [주D-034]현빈(玄牝)에 …… 없었다 : 대본에는 ‘缺’로 되어 있는데, 정두경의 《동명집》에 의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이 부분의 원문은 ‘玄牝 自得衆妙之門 藥鍊金丹 更續參同之契 養形神於物外 熊經鳥伸 脫軀殼於人間 蟬蛻龍變 不食五穀 吸風露而嘰瓊華 揮斥八區 乘雲氣而騎日月 揖子晉於緱嶺 訪廣成於崆峒 至人無名 混萬象而同體 神氣不變 曠千載而猶存 出入不知端倪 變化難窮終始’이다.
    [주D-035]진(秦)나라의 …… 보이고 : 진 시황(秦始皇)이 네모진 거울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거울에 비춰 보면 몸속의 오장이 다 보임은 물론이요, 마음속의 선악까지도 모두 밖으로 드러났다는 전설이 진(晉)나라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권3에 나온다.
    [주D-036]신우(神禹)의 …… 것 : 하우(夏禹)가 치산치수를 하며 범람하는 홍수를 막으려고 8년 동안 분주히 돌아다닌 끝에 중국을 구주(九州)로 나누고 안정시킨 고사를 말한다.
    [주D-037]70명의 고제(高弟) :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기(史記)》 권47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3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은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8]나는 …… 떠올리고 : 장자(莊子) 자신이 물고기가 아닌데도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던 것처럼, 정두경 역시 고운은 아니지만 고운의 심회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말이다. 장자가 친구인 혜시(惠施)와 함께 호량(濠梁)을 거닐다가 피라미가 한가롭게 노니는 것을 보고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다.〔是魚之樂也〕”라고 하자, 혜시가 “그대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子非魚 安知魚之樂〕”라고 반박하면서 벌어지는 호량의 토론이 《장자》 〈추수(秋水)〉 맨 마지막에 나온다.
    [주D-039]영천(穎川)의 …… 꿈꾼다 : 고운이 세상의 영화 따위는 돌아보지 않고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기 뜻에 맞게 생활한 것을 가리킨다.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인 허유(許由)가 일찍이 기산(箕山) 아래 영수(穎水) 북쪽에 은거하였는데, 요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이를 거절하면서 귀를 씻었고, 또 손으로 물을 움켜 마시자 어떤 사람이 표주박 하나를 주니 그것을 나무에 걸어 두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그 표주박까지도 번거롭다고 하며 내버렸다는 고사가 전한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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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림사를 옮겨 세운 뒤의 상량문〔桂林祠移建上樑文〕[후손 최국술(崔國述)]



    선생의 도학과 문장은 그 밝음이 고금의 일월과 함께하고, 선생의 성명(聲名)과 의범(儀範)은 그 휘광이 중외(中外)의 산천을 움직였나니, 이에 구당(舊堂)을 중신(重新)하여 유상(遺象)을 길이 모시게 되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문창(文昌) 선생은 순일(純一)한 기운을 품부받고, 만인의 재주를 겸한 자질을 지니고 태어났다. 단군과 기자의 인례(仁禮)의 나라에서 생장하여 공자와 맹자의 성현의 영역에서 학문하였다.
    어린 나이에 경해(鯨海)를 건너가면서 어버이의 엄중한 훈계를 마음속에 새겼고, 용문(龍門)에서 빈공(賓貢)의 과거에 응시하여 제국(帝國)의 영광스럽고 귀한 신분이 되었다.
    옷자락에 자금어대(紫金魚袋)가 번쩍이자 한 시대의 뛰어난 사대부들이 모두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고, 붓을 들어 황소(黃巢)를 격파하자 1천 보루(堡壘)의 용맹한 장군들의 넋이 모두 달아났다. 천하에 횡행(橫行)해도 대적할 자가 없었으니, 해외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밝혔다.
    그런데 안으로는 마침 환시가 권력을 독점하는 때를 만났고, 밖으로는 번진(藩鎭)이 명기(名器)를 희롱하고 있었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진취(進取)할 뜻이 점점 없어지면서 귀근(歸覲)하려는 생각만 더욱 간절해졌다.
    이에 비로소 회해(淮海) 사이에서 행장을 꾸리니 황제의 조서(詔書)가 은혜롭게 내렸고, 다시 참산(巉山)의 아래에서 유작(侑酌)하며 청낭(靑囊)의 공을 고하였다. 등 뒤의 농무(濃霧)와 숙연(宿煙) 속에서 17년간의 나그네 시름을 잠깐 쉬었고, 눈앞의 순랑(順浪)과 고서(孤嶼) 속에서 수만 리의 고향 꿈을 처음 깨었다.
    예전과 다름없는 계림(雞林)은 바로 부모님이 계신 낙국(樂國)이라 한원(翰苑)의 직책을 새로 제수받고는 멋진 군신의 관계를 기대하였다. 중국에서 노닐며 이미 많이 배운 만큼 동쪽으로 돌아와 경륜을 펼쳐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쇠한 세상이 불교를 숭상할 뿐, 대도가 유가에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시의(猜疑)를 당하자 외방 고을에 오래도록 나가 있으면서 간혹 시무책(時務策)을 올리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조정에 매번 배척을 당하곤 하였다.
    그리고 불명(佛銘)을 지을 때에도 불교의 근거 없는 주장을 깊이 경계하면서 그 기회에 군심(君心)을 바로잡으며 인효(仁孝)에 대해서 간절히 진달하곤 하였다. 이것은 바로 선생이 마음을 썩이며 의지를 분발하여 기필코 도를 행하고 몸을 세우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과 서로 맞지 않았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모든 여건으로 볼 때 시기적으로 그만두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학(經學)》을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으니, 심성과 인의에 관한 말이 수십백 언이요, 스스로 산수에 의탁하여 이름을 숨겼으니, 강해(江海)와 호령(湖嶺) 등 노닌 곳이 수천여 리에 달했다.
    아, 마음속으로 터득한 것을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라면, 후세에 전한 것이 어떻게 위의(威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성무(聖廡)에 이미 올랐으니, 조정이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의전(儀典)이 성대하다고 할 것이요, 유원(儒苑)에 원래 있었으니, 사림이 현인을 사모하는 정성이 깊다고 할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선조가 계신 듯 여기는 후손의 마음으로서는, 지금 계신 듯한 선조의 모습을 잊을 수 없는 일이기에 명주에 진영(眞影)을 그린 옛 족자(簇子)를 구해서 본사(本祠)의 숭감(崇龕)에 봉안하기에 이르렀다. 백옥과 같은 모습에 구름과 같은 수염은 저명한 화가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요, 황금관에 연하(煙霞)의 띠는 엄연히 군자의 자태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는 이원(貳院)을 철폐할 때 수습한 것으로서 구당(九堂)의 협실(夾室)에 옮겨 감히 봉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탁자를 놓는 사방의 공간이 협소한 까닭에 제물(祭物)을 진설하고 참배하기에 편치 못한 점이 있었는데, 집안의 재산이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건물을 새로 세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세월을 끌다 보면 망령(亡靈)을 안치할 곳을 마련할 날이 없겠기에 마침내 상의하지도 않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문중에서 논의가 일어나 동시에 상응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북쪽 모퉁이의 길한 땅에 착공하자 좌우에서 기이한 계책을 내어 도왔으며, 서쪽 성에서 좋은 재목을 실어 와서 대소(大小)에 알맞게 쓰게 되었다. 집을 지을 때에는 꼭 화려하게 할 것이 아니라 그저 예법에 맞게 주선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요, 천두(薦豆)는 오직 정결한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니, 성의(誠意)로 제정(齊整)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음에 애오라지 한마디 말을 하여 육장(六章)의 노래를 거들까 한다.

    여보게들 들보 동쪽에 떡을 던지세나 / 兒郞偉抛樑東
    붉은 수레바퀴로 떠오르는 부상의 아침 햇살 / 扶桑朝日上輪紅
    금문에서 책문을 쏜 천년 뒤의 지금에도 / 金門射策千年後
    여전히 금포와 같은 한 색깔을 보여 주네 / 猶見錦袍一色同
    여보게들 들보 서쪽에 떡을 던지세나 / 兒郞偉抛樑西
    눈 아래 들어오는 회해의 구름과 연무 / 淮海雲煙入眼低
    흡사 당년에 격문을 지어 던지던 날에 / 恰似當年投檄日
    황소의 군대가 성 둑에서 달아나듯 하네 / 黃巢軍卒走城堤
    여보게들 들보 남쪽에 떡을 던지세나 / 兒郞偉抛樑南
    푸른 천개의 못을 둘러싼 금호의 강물 / 琴湖環抱碧千潭
    길이 흘러 마지않나니 무엇과 비슷한가 / 長流不盡云何似
    동국의 문원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네 / 東國文源此可諳
    여보게들 들보 북쪽에 떡을 던지세나 / 兒郞偉抛樑北
    천극을 지탱하며 우뚝 치솟은 공악 / 崢嶸公嶽撑天極
    청고한 기상이 참으로 이와 같나니 / 淸高氣像眞如許
    만고에 푸르러 색이 변치 않는다네 / 萬古蒼蒼不變色
    여보게들 들보 위쪽에 떡을 던지세나 / 兒郞偉抛樑上
    모두 서로 향하며 벌여 있는 별자리 / 森羅列宿共相向
    그중에 휘황한 별이 하나 있나니 / 就中有一輝煌者
    역시 정채를 내쏘는 규성이라네 / 也是奎星精彩放
    여보게들 들보 아래쪽에 떡을 던지세나 / 兒郞偉抛樑下
    들판에 가득하게 마름 풀과 기장 있어 / 藻蘋黍稷盈於野
    자손이 매년 향기로운 제사를 올리나니 / 子孫歲歲修香供
    정령도 물을 쏟듯 복을 내려 주시리라 / 應有精靈如水瀉

    삼가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산이 높고 물이 길듯 문호(門戶)가 창대해지게 함은 물론이요, 박문약례(博文約禮)를 하여 다사(多士)가 귀의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고, 약사증상(禴祠烝嘗)을 올리는 일을 천년토록 거르는 일이 없게 해 주시기를.


    [주D-001]회해(淮海) …… 내렸고 : 고운이 신라로 돌아올 적에 중국 황제가 칙서를 주어 보낸 것을 말한다. 회해는 회수(淮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지역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일대의 지역을 가리킨다. 고운이 신라로 돌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종사(從事)하였는데, 당시 직함은 ‘회남입신라 겸 송국신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인 전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前都統巡官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 사비어대(賜緋魚袋)’였다.
    [주D-002]참산(巉山)의 …… 고하였다 :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올 적에 참산의 신에게 제사 지낸 것을 말한다. 참산은 안휘성(安徽省) 사현(泗縣)의 동남쪽 지역의 오하현(五河縣)과의 경계 지역에 있는 산인 참석산(巉石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한국문집총간 1집에 수록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권20에 〈제참산신문(祭巉山神文)〉이란 제문과 〈장귀해동참산춘망(將歸海東巉山春望)〉이란 시가 있는데, 이 작품들은 고운이 우리나라로 돌아올 적에 지은 것이다.
    [주D-003]불명(佛銘)을 …… 하였다 : 이는 고운을 유자(儒者)로 인식시키려는 후손의 강박 관념이 빚어낸 오류로서, 결코 고운의 본의가 아닐 것이다.
    [주D-004]경학(經學) : 《경학대장(經學隊仗)》이라는 책을 가리키는데, 《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의 약칭이다. 중국인 주경원(朱景元)이 지은 것으로, 고운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 권137 〈자부(子部) 47 유서류존목(類書類存目) 1〉에 《경학대장》 3권의 저자와 책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주D-005]규성(奎星) : 문성(文星)으로, 문장(文章)과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한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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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도 영당의 기문〔淸道影堂記〕[노상직(盧相稷)]



    선생은 신라 헌안왕(憲安王) 1년(857) 정축에 태어났다. 12세에 상선(商船)을 따라 당(唐)나라에 들어갔다. 당 희종(唐僖宗) 건부(乾符) 1년(874) 갑오에 제과(制科)에 등제(登第)하였다. 이때 나이 18세였다. 선주(宣州) 율수현 위(溧水縣尉)에 조용(調用)되었다. 그 뒤 시어사 내공봉(侍御史內供奉)으로 승진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기해년(879)에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회남 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이 병마도통(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하면서 선생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고는 서기(書記)에 관한 일을 위임하였다. 이에 선생이 격문(檄文)을 지었는데, 황소가 그 격문을 읽다가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선생의 명성이 천하를 진동하였다.
    나이 28세 때에 귀녕(歸寧)할 뜻을 품자, 황제가 조사(詔使)의 일행에 끼어 동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신라 헌강왕(憲康王)이 선생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시독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이때 신라의 정치는 날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에 선생이 조정에 서는 것이 즐겁지 않았으므로, 외방으로 나가기를 청해 태산(太山)과 부성(富城) 등 고을의 태수가 되었다.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에 하정사(賀正使)의 명을 받고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길이 막히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또 외방으로 나가 천령(天嶺)과 의창(義昌) 등 고을의 태수가 되었다. 뒤이어 처자를 이끌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생을 마쳤다. 이상은 사첩(史牒)에 실린 선생의 전말이다.
    경주(慶州)에 상서장(上書莊)이 있고, 예안(禮安)에 독서암(讀書庵)이 있고, 함양(咸陽)에 학사루(學士樓)가 있고, 창원(昌原)에 월영대(月影臺)가 있고, 합천(陜川)에 홍류동(紅流洞)이 있다. 이상은 아직도 완연히 남아 있는 선생의 유적지이다.
    공부자(孔夫子)의 사당에 종향(從享)되었고, 서악(西岳)과 무성(武城)의 서원에 사액을 받았으며, 함양과 영평(永平)의 선비들이 또 모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상은 선생이 계신 듯 정령(精靈)을 제사 드리는 곳들이다.
    문학을 창도한 공이 있다고 무릉(武陵 주세붕(周世鵬))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편지로 아뢰었고, 진편(塵篇)의 보결(寶訣)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하면서 퇴도(退陶 이황(李滉))는 유궁(儒宮)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만고토록 백일(白日)처럼 환해졌다고 구암(龜巖 이정(李楨))은 사문(斯文)이 전해진 것을 칭송하였고, 계림(雞林)의 잎사귀들 모두가 바람 소리를 낸다고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제생(諸生)에게 시를 지어 보여 주었다. 이상은 공론(公論)이 쇠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세상에서 선생을 흠모하는 자는 굳이 진영(眞影)이 없더라도 방불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풍의(風儀)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려고 할 경우에는 진영이 있다면 그야말로 도움을 주는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해인사(海印寺)에서 선생의 진영을 불도(佛徒)가 근실히 지켜 왔으므로 한 폭의 그림이 천년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깨끗이 보존되었다. 그리하여 오산(鼇山)의 기기(奇氣)가 사라지지 않고, 계원(桂苑)의 필화(筆花)가 서로 비치는 가운데 홍류(紅流)의 음향이 혹 울려도 귀에 시비(是非)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향불을 피우고 공경히 우러러보노라면 속진의 생각이 저절로 해소되곤 하였다.
    그런데 병진년(1916) 가을에 후손인 감찰(監察) 최한룡(崔翰龍) 씨가 도주(道州)의 일곡(日谷)으로 진영을 옮겨와 봉안하였으며, 4년 뒤인 경신년(1920)에는 종인(宗人)들이 건물을 세우고 진영을 안치하였다.
    감찰의 자제인 최상수(崔相秀)가 나를 찾아와서 이 일에 대한 기문을 요청하였다. 이에 내가 묻기를,
    “선생은 대현(大賢)이요, 해인사는 거찰(巨刹)이다. 그대의 선인은 망국의 일개 고신(孤臣)일 뿐인데 저 승려들이 고신에게 무슨 두려움을 느꼈기에 사원의 첫째가는 보물인 진영을 양보하여 싣고서 돌아가게 했단 말인가?”
    하니, 최상수가 대답하기를,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선인이 경술년(1910) 이래로 누차 총독부에 글을 보내고 누차 감옥에 구금되었으므로, 승려들이 혹 이를 의롭게 여긴 나머지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모두 펼 수 있게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기에, 내가 또 물어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생은 산수를 좋아해서 생사 간에 명승지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원손(遠孫)의 보호를 받으려고 가야(伽倻)의 형승(形勝)을 떠나게 되었으니, 진영(眞影)에 혹 좋아하지 않는 기색은 있지 않던가? 만약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취적봉(吹篴峯)이나 음풍뢰(吟風瀨)나 유선대(遊仙臺) 등은 모두 선생이 좋아하던 곳으로 해인사의 동구(洞口)에 있으니, 모쪼록 이를 모사해서 제각(祭閣)의 벽에 걸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륙집(四六集)》과 《계원필경(桂苑筆耕)》과 《경학대장(經學隊仗)》 및 문집 30권을 제각 안에 보관해서 자손이나 후진 가운데 여기에 와서 참배하는 자들로 하여금 선생이 학문을 한 방도를 알게끔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야 선생이 좋아한 것이 오로지 산수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주D-001]헌안왕(憲安王) 1년 정축 : 정축년(857)은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으로 하면 헌안왕 1년이 되고 훙년칭원법(薨年稱元法)으로 하면 헌안왕 2년이 된다.
    [주D-002]천령(天嶺)과 의창(義昌) : 천령은 함양(咸陽)의 고호이고, 의창은 창원(昌原)의 고호이다.
    [주D-003]도주(道州)의 일곡(日谷) : 도주는 청도(淸道)의 고호이고, 일곡은 청도군 각남면에 있는 지명으로, 이곳에 고운의 영정을 모신 계동사(啓東祠)가 있다. 이곳에 있는 영정은 본디 해인사에 있던 것인데, 구한말에 왜적의 약탈이 두려워 최씨 문중에서 해인사 주지와 교섭하여 이곳으로 이봉(移奉)한 것이라고 한다.

     

     

    고운 선생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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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원〔祠院〕



    경주(慶州) 서악서원(西岳書院)
    태인(泰仁) 무성서원(武城書院)
    진주(晉州) 남악서원(南岳書院)
    합천(陜川) 학사당(學士堂) - 영당(影堂) -
    대구(大邱) 계림사(桂林祠) - 영당(影堂) -
    함양(咸陽) 백연사(柏淵祠)
    하동(河東) 영당(影堂)
    창원(昌原) 영당(影堂)
    서산(瑞山) 부성사(富城祠) - 영당(影堂) -
    한산(韓山) 도충사(道忠祠)
    청도(淸道) 영당(影堂)
    울진(蔚珍) 영당(影堂)
    영평(永平) 영당(影堂)
    포천(抱川) 영당(影堂)

    고운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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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賦)
    새벽의 노래〔詠曉〕



    옥루에선 아직 물이 떨어지고 있는데, / 玉漏猶滴
    은하는 벌써 한 바퀴를 돌았다. / 銀河已回
    어슴푸레한 분위기 속에서 산천은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 가고, / 彷彿而山川漸變
    들쭉날쭉 다양하게 온갖 존재가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 參差而物像將開
    높고 낮은 연무 속의 경색이 희미하게나마 구분되니 구름 사이의 궁전을 알아보겠고, / 高低之煙景微分 認雲間之宮殿
    멀고 가까운 곳에서 수레가 일제히 움직이니 거리에 먼지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 遠近之軒車齊動 生陌上之塵埃
    하늘 끝이 발그무레해지며, / 晃蕩天隅
    해 뜨는 곳에 짙푸른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 蔥籠日域
    먼 숲 나뭇가지 끝에서는 성긴 별 몇 점이 깜박거리고, / 殘星映遠林之梢
    길게 벋은 교외의 색깔은 묵은 안개 속에 묻혀 있다. / 宿霧斂長郊之色
    화정에서는 바람결에 학 울음소리가 여전히 아련하게 들려올 것이요, / 華亭風裏 依依而鶴唳猶聞
    파협에서는 달빛 속에 멀리서 들려오던 원숭이의 애잔한 울음소리가 지금쯤은 그쳤을 것이다. / 巴峽月中 迢迢而猿啼已息
    주막집 푸른 깃발 은은히 비치는 마을 저 멀리 초가집에서는 닭소리가 울려오고, / 隱映靑帘 村逈而鷄鳴茅屋
    희미하게 보이는 붉은색 누각의 아로새긴 들보 위에서는 둥지 비운 제비들이 재잘거린다. / 熹微朱閣 巢空而燕語雕樑
    유영의 안에서는 조두 치는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요, / 罷刁斗於柳營之內
    계전의 옆에서는 잠홀을 엄숙히 정제하고 있을 것이다. / 儼簪笏於桂殿之傍
    모래벌판이 막막하게 펼쳐진 변방의 성에서 기르는 말들의 울음소리도 자주 들려오고, / 邊城之牧馬頻嘶 平沙漠漠
    오래된 둑길 푸르름이 뒤덮인 먼 강 위의 외로운 돛배들도 모두 떠나갈 것이다. / 遠江之孤帆盡去 古岸蒼蒼
    고깃배 피리소리 맑게 울려 퍼지고, / 漁篴聲瀏
    다북쑥 함초롬히 이슬 머금은 가운데, / 蓬艸露瀼
    일천 산의 푸른 이내는 높고 낮게 아른거리고, / 千山之翠嵐高下
    사방 들판의 바람 안개는 깊고 옅게 퍼지리라. / 四野之風煙深淺
    누구 집인가 푸른 빛 난간에는 꾀꼬리가 노래를 해도 비단 장막이 여전히 드리워 있을 것이요, / 誰家碧檻 鸎啼而羅幕猶垂
    어느 곳인가 화려한 집에서는 꿈을 깨었어도 구슬 꿴 발을 아직 걷지 않았으리라. / 幾處華堂 夢覺而珠簾未捲
    이날 밤 전 세계가 맑게 개어 / 是夜寰縈
    온 천지가 쾌청한데, / 天地晴
    천리 멀리 아스라이 동이 트면서 / 蒼茫千里
    팔방에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나니, / 曈曨八紘
    불어난 물 위에는 붉은 노을의 그림자가 둥둥 떠가고, / 潦水泛紅霞之影
    궁문을 여는 오경의 성긴 종소리가 귀에 전달된다. / 疏鍾傳紫禁之聲
    임 그리는 아낙을 방치한 깊숙한 규방의 비단 창호도 점차 환해지고, / 置思婦於深閨 紗窓漸白
    우수에 잠긴 사람을 뉘어 놓은 고옥의 어두운 창문도 밝아지는가 싶더니, / 臥愁人於古屋 暗牖纔明
    어느 사이에 맑은 하늘빛이 엷게 떠오르고 / 俄而曙色微分
    아침 햇빛이 내비치려 하면서, / 晨光欲發
    몇 줄 기러기는 남쪽으로 날아가고, / 數行南飛之雁
    한 조각 달은 서쪽으로 기운다. / 一片西傾之月
    홀로 떠난 아들이 걸어가는 상로엔 여관의 문이 여태껏 잠겨 있고, / 動商路獨行之子 旅館猶扃
    백전의 군대가 주둔한 고성엔 호가 소리가 아직도 그치지 않았으리라. / 駐孤城百戰之師 胡笳未歇
    다듬이 소리 썰렁하고, / 砧杵聲寒
    산 숲의 그림자 듬성한데 / 林巒影疏
    사방 벽에는 귀뚜리 소리 어느덧 끊어지고, / 斷蛩音於四壁
    먼 언덕에 내린 서리꽃이 삼엄도 해라. / 肅霜華於遠墟
    금옥 안에서 화장하며 눈썹을 푸르게 그린 미인, / 粧成金屋之中 靑蛾正畫
    연회 끝난 경루 위에는 속절없이 홍촉만 남았으리.
    / 宴罷瓊樓之上 紅燭空餘
    급기야 청신한 아침에 기운이 삽상해지며, / 及其氣爽淸晨
    정신이 창공처럼 명징해지나니 / 魂澄碧落
    천하에 태양 빛이 빠짐없이 비치면서, / 藹高影於夷夏
    음침한 기운이 암학으로 모조리 물러난다. / 蕩回陰於巖壑
    천문만호가 이제 비로소 열리면서, / 千門萬戶兮始開
    광대무변한 하늘과 땅이 눈앞에 새로이 펼쳐지도다. / 洞乾坤之寥廓


     

    [주D-001]옥루(玉漏)에선 …… 있는데 : 궁문(宮門)을 열 시간인 5경(更)이 아직 안 되었다는 말이다. 옥루는 물시계의 미칭(美稱)이다. 예전에 백관들이 새벽부터 집결하여 물시계 소리를 듣고 있다가 대궐 문이 열리는 시각이 되면 일제히 조정에 나아가서 조회에 참석하였는데, 그때까지 대기하는 장소를 대루원(待漏院) 혹은 대루청(待漏廳)이라고 하였다. 당 헌종(唐憲宗) 원화(元和) 2년(807)에 건복문(建福門) 밖에 백관의 대루원을 설치한 고사가 있다. 《舊唐書 卷14 憲宗本紀》
    [주D-002]은하(銀河)는 …… 돌았다 : 은하수가 하늘에서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운한(雲漢)〉에 “밝은 저 은하수여, 하늘에서 환히 빛나며 돌고 있네.〔倬彼雲漢 昭回于天〕”라는 구절이 있는데, 조씨(曹氏)의 주에 “은하수는 동쪽에서 시작하여 미수(尾宿)와 기수(箕宿) 사이를 경유하는데 이를 한진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꿈틀꿈틀 서쪽을 향하다가 남쪽으로 칠성 남쪽에 가서 사라지니, 이것이 바로 은하가 회전하는 도수이다.〔天漢起于東方 經尾箕之間 是爲漢津 委蛇向西 南行至七星南而沒 此其回之度也〕”라고 하였다.
    [주D-003]화정(華亭)에서는 …… 것이요 : 화정은 지금의 상해시(上海市) 송강현(松江縣) 서쪽에 있는데, 학의 산지로 유명하다. 진(晉)나라 육기(陸機)가 벼슬길에 들어서기 전에 동생 육운(陸雲)과 함께 이곳에서 10여 년을 살았는데, 나중에 참소를 받고 처형당하기 직전에 “화정의 학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만 그 일이 또 어떻게 가능하겠는가.〔欲聞華亭鶴唳 可復得乎〕”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尤悔》
    [주D-004]파협(巴峽)에서는 …… 것이다 : 파협은 촉(蜀) 땅 파군(巴郡)의 삼협(三峽)을 가리킨다. 이곳의 원숭이 울음소리는 특히 애절해서 듣는 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주D-005]유영(柳營)의 …… 것이요 : 병영 안의 야경 활동을 끝냈다는 말이다. 유영은 서한(西漢)의 장군 주아부(周亞夫)의 군영 이름인 세류영(細柳營)의 준말이다. 한 문제(漢文帝)가 시찰을 왔을 때에도 군사들이 장군의 명령만 따르면서 황제를 제지한 고사로 유명한데, 이후 군기가 엄한 장군의 군영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史記 卷57 絳侯周勃世家》 조두(刁斗)는 낮에는 취사 용구로 쓰다가 밤이 되면 순라(巡邏)를 돌면서 치는 군대의 기물(器物)로, 구리로 되어 있다.
    [주D-006]계전(桂殿)의 …… 것이다 : 관원들이 의관을 정제하며 조회 준비를 한다는 말이다. 계전은 계수(桂樹), 즉 향나무로 만든 궁전이라는 뜻이고, 잠홀은 관잠(冠簪)과 수판(手板)으로, 관원의 의관을 가리킨다.
    [주D-007]금옥(金屋) …… 남았으리 : 참고로 양 귀비(楊貴妃)를 노래한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금옥 안에서 화장하고 애교 있게 밤에 모셨으며, 옥루 위의 연회가 끝나면 취하여 춘풍과 동화됐네.〔金屋粧成嬌侍夜 玉樓宴罷醉和春〕”라는 구절이 나온다. 《白樂天詩集 卷12》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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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讚)
    화엄 불국사의 석가여래상을 수놓은 당번에 대한 찬 병서〔華嚴佛國寺繡釋迦如來像幡贊 竝序



    듣건대 불법(佛法)의 배에 태워 허공을 날아서 고통의 바다 저 너머로 멀리 벗어나게 하고, 자비의 수레에 불설(佛說)을 싣고서 불타는 사바세계를 높이 빠져나오게 한다고 하였다. 이론으로 따지면 그 묘문(妙門)을 볼 수 없으나, 잘 인도하면 실로 저승길에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더구나 살아서 착한 명망을 세우고, 죽어서 좋은 인연에 의탁하는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움직일 때마다 성취될 것이요, 가는 곳마다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고(故) 전주 대도독(全州大都督) 김공(金公)은 소호(小昊)의 후예요, 태상(太常)의 손자이다. 수레의 휘장을 걷고 풍속을 살피는 데에 능력이 많아서 일찌감치 동호부(銅虎符)를 나누어 가졌으며, 임금이 좌불안석하면서 인재를 절실히 구하는 이때에 조만간 금초관(金貂冠)을 쓰게 되리라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큰 강〔巨川〕을 건너기도 전에 좋은 재목이 먼저 부러질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오.
    부인은 덕이 난혜(蘭蕙)처럼 향기롭고, 예(禮)가 빈번(蘋蘩)을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정결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늘과 같은 부군을 잃었으므로 자신도 마치 땅속에 묻힌 것과 같은 심경이 되었다. 불 꺼진 재와 같은 마음을 부여안고서 절조를 맹서하였고, 구름과 같은 머리털을 잘라 비구니로 용모를 바꾸었으며,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명복을 빌게 하였다.
    그러고는 중화(中和) 6년(886, 정강왕1) 병오 5월 10일에, 삼가 석가모니(釋迦牟尼) 불상을 수놓은 당번(幢幡) 1정(幀)을 받들어 소판(蘇判)을 위해 봉안하며 장엄하게 의식을 마쳤다. 이는 바로 삼귀(三歸)의 뜻을 면려하며 오색(五色)의 문채를 이룬 것으로서, 마름질하여 곱게 물들인 천 위에 바느질로 솜씨 있게 수놓은 것이다. 노을빛이 상서로운 바탕 위에 펼쳐지고, 구름이 영취산(靈鷲山)의 부처를 옹위하고 있으니, 높이 허공에 걸어 놓으면 실로 그 공덕이 찬연히 빛난다. 이를 통해 우러러 하늘에 태어나는 즐거움을 돕고, 애오라지 물처럼 세월이 흘러가는 슬픔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찬(讚)한다.

    외연하도다 성스러운 모습이여 / 巍然聖相
    찬연하도다 신묘한 공덕이여 / 粲爾神功
    복은 저승길을 듬뿍 적셔 주고 / 福潤冥路
    빛은 범왕(梵王)의 집에 부유하도다 / 光浮梵宮
    무지개가 바다의 태양에 번득이는 듯 / 虹翻海日
    봉황이 하늘의 바람에 춤을 추는 듯 / 鳳舞天風
    칠흑 같이 어두운 한밤중에도 / 杳杳玄夜
    푸른 하늘 향해 힘차게 나부끼리 / 飄飄碧空
    한 올 한 올 한 맺힌 바느질 / 絲蘿結恨
    솜씨 다 바쳐서 수놓았나니 / 組繡呈工
    머나먼 도솔천 저 위에까지 / 兜率天上
    그 정성 감응하여 통하리로다 / 精誠感通


     

    [주C-001]화엄(華嚴) …… 찬(讚) : 원래의 대본에는 이 제목 아래에 〈화엄 불국사의 석가여래상을 수놓은 당번에 대한 찬〔華嚴佛國寺繡釋迦如來像幡贊〕〉이라는 이 제목의 내용과 〈대화엄종 불국사의 아미타불상에 대한 찬〔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이라는 제목의 서로 다른 내용 두 개가 불완전하게 한데 뒤섞여 있다. 그래서 두 개의 제목으로 나누어 원문을 다시 수정해서 번역하였는데, 수정본은 《최영성, 譯註 崔致遠全集2, 아세아문화사, 1999》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였다.
    [주D-001]수레의 …… 가졌으며 : 관찰사로서 한 지방을 잘 규찰하며 통솔하였다는 말이다. 동한(東漢)의 가종(賈琮)이 기주 자사(冀州刺史)로 부임할 때 관례를 뒤엎고 수레의 휘장을 걷어 올리게 하면서 “지방 장관은 멀리 보고 널리 들어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수레의 휘장을 드리운 채 자신의 귀와 눈을 가려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31 賈琮列傳》 동호부(銅虎符)는 한대(漢代)에 구리로 범 모양처럼 만든 군대 출동용 부절(符節)인데, 보통 지방 장관의 관인(官印)을 뜻한다.
    [주D-002]금초관(金貂冠) : 황금당(黃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높은 품계의 관원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D-003]큰 …… 했으리오 : 재상으로서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고 대업을 이루기도 전에 아까운 인재가 그만 뜻밖에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는 뜻이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현상(賢相) 부열(傅說)을 얻고 나서 “만일 큰 강을 건너게 되면 내가 그대를 배와 노로 삼을 것이요, 만일 큰 가뭄을 만나게 되면 그대를 단비로 삼을 것이다.〔若濟巨川 用汝作舟楫 若歲大旱 用汝作霖雨〕”라고 말한 내용이 《서경》 〈열명 상(說命上)〉에 나온다.
    [주D-004]삼귀(三歸) : 불교의 삼보(三寶)인 불(佛)ㆍ법(法)ㆍ승(僧)에 귀의하는 것이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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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讚)
    대화엄종 불국사의 아미타불상에 대한 찬 병서〔大華嚴宗佛國寺阿彌陀佛像讚 竝序



    옛날 요오 상인(姚塢上人)은 마음이 한없이 게으르다〔心倦無垠〕면서 이를 부처님 앞에서 바로잡는다〔以質所天〕고 하였으며, 광잠 대사(匡岑大師)는 우러러 구제받기를 생각한다〔仰思攸濟〕면서 모두 서방 정토에 마음을 두었다〔僉心西境〕고 하였다. 이는 모두 법문(法門)에 충분히 참여하여 미리 돌아갈 길을 닦은 것으로서, 먼저 대비하여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대중과 함께 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제사(諸寺)의 승려들이 섬산(剡山)에 머물던 지둔(支遁)의 아름다운 자취를 이으려 하고, 여산(廬山)에 거하던 혜원(慧遠)의 이름난 모임을 세우려고 하면서, 불상을 신묘하게 그려 모시고는 물정(物情)을 널리 이끌어 들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불국사 강당의 서쪽 벽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의 화상(畫像)을 경건히 그리게 되었는데, 그 성상(聖像)을 그리는 일이 일단 마무리되자, 부유(腐儒)인 나에게 글을 지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내가 마음의 향을 사르고 합장을 하며 우러러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부처의 덕에 대해서는 그 본색(本色)이 경(經)에 드러나 있는 외에 또 지도림(支道林 지둔)이 유양(游揚)한 말이 있으며, 승려의 서원에 대해서는 《고승전(高僧傳)》의 〈흥복(興福)〉이 있는 외에 또 유유민(劉遺民)이 윤색한 말이 있는데, 이는 책을 펼쳐 보면 모두 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흑두충(黑頭蟲)인 데다 잡색조(雜色鳥)가 못 되니 어떻게 하겠는가. 억지로 멋지게 지은 글을 본받으려니 단지 부처의 위광만 손상시킬 따름이다. 지금 모방해 보려 한 것이 부끄러울 뿐이니, 한선(寒蟬)처럼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실로 우러러보이기만 한다.
    고(故) 단월(檀越 시주(施主)) 김 승상(金丞相)이 동악(東岳)의 기슭에 사원을 건립하였는데,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 찬란한 빛이 이 높은 산에 먼저 비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이 사원에 거하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을 수행하는 힘이 날로 더해지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염원이 날로 깊어지게 하여, 실제로 동림사(東林寺)의 백련사(白蓮社)처럼 되게 하고 서방 정토에 함께 왕생할 수 있는 기대를 갖게 하였다. 이 복된 땅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찬송한다.

    동해 동쪽 산에 안주한 사원 / 東海東山有住寺
    화엄 불국사가 그 이름이라네 / 華嚴佛國爲名字
    주인인 종곤이 친히 수치하고서 / 主人宗衮親修置
    네 글자로 표제한 깊은 뜻이 있어라 / 標題四語有深義
    화엄에 눈길 돌리면 보이나니 연장이요 / 華嚴寓目瞻蓮藏
    불국에 마음 달리면 이어지나니 안양이라 / 佛國馳心係安養
    악마의 산에 독한 봉우리 평정케 하고 / 欲使魔山平毒嶂
    고통의 바다에 거센 물결 잠재운다오 / 終令苦海無驚浪
    어여뻐라 비구는 즐겁게 보시(布施)하고 / 可愛苾蒭所說施
    미쁘도다 단월은 마음속으로 서원(誓願)하네 / 能遵檀越奉心期
    불상을 그려 동방에서 서방 정토 생각하며 / 東居西想寫形儀
    서산에 해 지듯 스러질 이 몸을 관찰한다오 / 觀身落景指崦嵫
    각기 자기 나라에서 복리를 일으키나니 / 各於其國興福利
    아축여래 역시 기이하기도 하시지 / 阿閦如來亦奇異
    부처의 말씀이야 방위를 굳이 분별하랴마는 / 金言未必辨方位
    구경에는 마음 가리키는 그곳이 있으렷다 / 究竟指心令有地
    빈 거울 마주 대하듯 일어나는 망념이여 / 妄生妄兮空對空
    이 세상 수행은 마지막 죽을 때 조심해야지 / 浮世修行在愼終
    안도하고 부처님 모습 우러르게 되었으니 / 旣能安堵仰睟容
    그 누가 깜깜하게 영험이 없다 말하리오 / 誰謂面墻無感通
    존경스러운 지둔(支遁)과 혜원(慧遠)이여 / 景行支公與遠公
    생사 간에 모두 이 불국 안에 거하도다 / 存歿皆居佛國中


    [주D-001]요오 상인(姚塢上人)은 …… 하였으며 : 요오 상인은 동진(東晉)의 고승 지둔(支遁)을 가리킨다. 그가 요오산(姚塢山)에 거했기 때문인데, 이 사실이 《고승전(高僧傳)》 권4 〈지둔전(支遁傳)〉에 나온다. 그의 말로 인용한 구절은 지둔이 지은 〈아미타불상찬(阿彌陀佛像讚)〉에서 고운이 발췌한 것인데, 《광홍명집(廣弘明集)》 권15에 나온다.
    [주D-002]광잠 대사(匡岑大師)는 …… 하였다 : 광잠 대사는 동진의 고승 혜원(慧遠)을 가리킨다. 광잠 즉 광산(匡山)은 그가 거했던 여산(廬山)의 별칭이다. 그의 말로 인용한 구절은 그가 여산 동림사(東林寺)에서 아미타불에 귀의하여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고 나서 유유민(劉遺民)에게 부탁하여 지은 서문(誓文)을 고운이 발췌한 것인데, 《고승전》 권6 〈혜원전(慧遠傳)〉에 나온다.
    [주D-003]연장(蓮藏) :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하는데,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 권8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D-004]안양(安養) : 안양국(安養國)의 준말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교주로 있는 서방 정토 즉 극락세계를 가리킨다. 중생이 안심하고 양신(養身)할 수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D-005]아축여래(阿閦如來) : 동방의 묘락국(妙樂國)에서 설법하고 있다는 현재불(現在佛)의 이름이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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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讚)
    순응 화상에 대한 찬〔順應和尙贊〕



    동방을 호위하는 우리 대사는 / 東護大師
    남방을 순행한 동자라고 할까 / 南行童子
    몸은 한 조각 구름이라면 / 身一片雲
    뜻은 일천 리 강물이었소 / 志千里水
    부낭을 길이 생각하다가 / 浮囊永思
    뗏목을 버리고 돌아왔나니
    / 捨筏歸止
    피안과 차안을 설명하면서 / 彼岸此岸
    지와 지 아닌 것으로 했다오
    / 喩指非指
    천생의 업으로 선을 배웠으면서도 / 天業受禪
    각현과 같은 풍모를 보였는가 하면
    / 猶如覺賢
    우두의 조사(祖師)들을 제향하면서 / 牛頭垂祫
    상망이 현주(玄珠)를 찾듯 하였어라
    / 象罔撢玄
    산문(山門)에 승지(勝地)를 가려 / 巖扃選勝
    해안에 원종(圓宗)을 제창했나니 / 海岸提圓
    땅은 주저를 높게 해 주고 / 地崇洲渚
    하늘은 임천을 내려 주었네 / 天授林泉
    사람의 입으로 이야기되는 화성이요 / 化城口談
    이심전심의 배움의 전당이라 / 學藪心傳
    가을 달빛 아래 그림자를 짝하고 / 影侔秋月
    봄 아지랑이 속에 감개를 억누르네 / 感隔春煙
    - 원문 빠짐 - / □□□□
    불 속에서 연꽃 봉오리 피어오르리라 / 綻火中蓮


    [주D-001]남방을 순행한 동자 :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구도 보살(求道菩薩) 선재동자(善財童子)를 가리킨다. 처음에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찾아갔다가 다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남쪽으로 여행하여 110성(城)의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법문을 구한 결과 마침내 미진수(微塵數)의 삼매문(三昧門)에 들어섰다고 한다.
    [주D-002]부낭(浮囊)을 …… 돌아왔나니 : 바다 건너 중국에 들어가서 구도하다가 진리를 체득하고 귀국했다는 말이다. 부낭은 물을 건널 때 사용하는 공기 주머니로, 여기서는 배를 타고 중국에 건너가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뗏목은 일단 물을 건너고 나면 더 이상 소용이 없는 물건으로, 여기서는 진리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방편적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주D-003]피안과 …… 했다오 : 피안과 차안이라는 말만 존재할 뿐, 보다 높은 차원에 올라서면 피안이 곧 차안이요 차안이 곧 피안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는 말이다. 《장자》 〈제물론(齊物論)〉에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만 같지 않고, 말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만 같지 않으니, 하늘과 땅은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하나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천생의 …… 하면 : 선승(禪僧)이면서도 교학(敎學)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각현(覺賢)은 동진(東晉) 때 북인도(北印度)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저명한 역경승(譯經僧)이다. 원명은 불타발다라(佛馱跋陀羅)이며, 불현(佛賢)이라고도 한다.
    [주D-005]우두(牛頭)의 …… 하였어라 : 중국 선종(禪宗) 4조(祖) 도신(道信)의 제자인 우두법융(牛頭法融)의 법맥을 이어, 화두(話頭) 참구(參究)를 위주로 하는 조사선(祖師禪)과는 달리, 무심(無心)을 종지로 한 선풍(禪風)을 떨쳤다는 말이다. 상망(象罔)은 무심(無心)을 뜻하는 말로,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한 상망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
    [주D-006]원종(圓宗) : 교의(敎義)가 원만(圓滿)한 대승(大乘)의 종파라는 뜻인데, 보통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이 스스로 원종 혹은 원교(圓敎)라고 칭한다.
    [주D-007]화성(化城) : 환화(幻化)의 성이라는 뜻으로, 사원의 별칭이다. 험난한 여행길에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할 목적으로 도사(導師)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큰 성 하나를 화작(化作)해서 제공했다는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서는 순응이 창건한 해인사(海印寺)를 비유한 말이다.


     

     고운집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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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讚)
    이정 화상에 대한 찬〔利貞和尙贊〕



    한 조각 구름이요 한 마리 학처럼 / 片雲獨鶴
    암학에서 홀로 그림자와 짝하다가 / 儷影嚴壑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사원을 처음 세워 / 草創蓮刹
    혼돈에 구멍이 뚫리게 하였나니
    / 混沌逢鑿
    서원이 막힘없이 시원하게 통해 / 願霈無礙
    인간과 천상이 모두 의지하는도다 / 人天有托


    [주D-001]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 하였나니 : 혼돈(混沌)에 구멍을 뚫듯 가야산(伽倻山)에 토목 공사를 일으켜, 화엄(華嚴)의 연화장세계가 펼쳐지는 해인사(海印寺)를 세웠다는 말이다. 해인사는 이정과 순응이 애장왕(哀莊王)의 귀의를 받아 창건하였다. 남해의 임금인 숙(儵)과 북해의 임금인 홀(忽)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의 덕에 감화된 나머지, 그 은혜에 보답하려고 눈ㆍ귀ㆍ코ㆍ입의 일곱 구멍을 하루에 하나씩 뚫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장자》 〈응제왕(應帝王)〉에 나온다.

     

     

     

    고운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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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무염 화상 비명 병서. 하교를 받들어 짓다. 이하 동일하다.〔無染和尙碑銘 竝序 奉教撰 下同



    제당(帝唐)이 무공으로 난리를 평정하고 문덕(文德)으로 개원(改元)한 해의 창월(暢月), 달이 이지러지기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날, 해가 함지(咸池)에 몸을 담그는 석양에, 해동(海東) 양조(兩朝)의 국사(國師) 선화상(禪和尙)이 목욕을 마치고 가부좌를 한 채 시적(示寂)하였다. 국중(國中)의 사람들이 좌우의 눈을 잃은 것처럼 슬퍼하였으니, 하물며 문하의 제자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었겠는가.
    아, 동방의 땅에 몸을 나툰 것이 89년이요, 서방의 불교 계율을 행한 것이 65년이다. 세상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승좌(繩座)에 기댄 그 모습은 엄연(儼然)히 살아 있는 듯하였다. 문인 순예(詢乂) 등이 호곡(號哭)하며 유체를 받들어 선실(禪室) 안에 임시로 모셨다. 상이 듣고 매우 슬퍼하여 역마(驛馬)로 글을 보내 조문하고 곡식을 부의하였으니, 이는 정결한 공양을 돕고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2년이 지난 뒤에 돌을 다듬어 사리탑(舍利塔)을 쌓고 봉안하였는데, 그 소문이 서울에까지 파다하게 전해졌다.
    보살계 제자(菩薩戒弟子)인 무주 도독(武州都督) 소판(蘇判) 김일(金鎰), 집사 시랑(執事侍郞) 김관유(金寬柔), 패강 도호(浿江都護) 김함웅(金咸雄), 전주 별가(全州別駕) 김영웅(金英雄)은 모두 왕족 출신이다. 그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으로 임금의 덕을 보좌하면서 험난한 세상길에서 스승의 은혜에 힘입었다. 어찌 꼭 출가를 해야만 스승의 인가를 받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마침내 화상의 문인인 소현 대덕(昭玄大德) 석통현(釋通玄)과 사천왕사(四天王寺) 상좌(上座) 석신부(釋愼符)와 의논하기를,
    “스승이 돌아가시자 임금님도 비통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들이 차마 마음을 불 꺼진 재처럼 만들고 혀를 묶어 놓은 채 재삼(在三)의 의리를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재가 제자와 출가 제자들이 서로 호응하여 시호와 탑명(塔銘)을 허락해 줄 것을 위에 청하였다. 이에 상이 하교하여 인가하고, 곧바로 왕손인 하관(夏官 병부(兵部))의 이경(二卿 시랑(侍郞)) 우계(禹珪)에게 명하여, 계원(桂苑)의 행인(行人)인 시어사(侍御史) 최치원(崔致遠)을 불러서 봉래궁(蓬萊宮)에 오게 하였다. 최치원이 이 소명(召命)에 따라 기수(琪樹)와 나란히 요지(瑤墀)를 오른 뒤에 주박(珠箔) 밖에서 무릎을 꿇고 명을 기다리니, 상이 이르기를,
    “고(故) 성주 대사(聖住大師)는 참으로 한 분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다. 그래서 옛날 문고(文考)와 강왕(康王) 모두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국가를 복되게 한 세월이 오래되었다. 나도 처음에 왕위를 계승하고 나서 선왕(先王)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하였으나, 하늘이 아껴서 남겨 두지 않았으므로〔憖遺〕 내가 더욱 마음속으로 슬퍼하는 바이다. 나는 큰 행적을 남긴 사람에게는 큰 이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에게 대낭혜(大朗慧)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리려 한다. 그대는 일찍이 중국에 가서 벼슬길에 올라 실을 물들이고〔絲染〕 금의환향하였다. 돌아보건대 문고는 그대를 국자감(國子監)의 학생으로 선발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고, 강왕은 그대를 국사(國士)로 간주하여 예우하였다. 그러니 그대 역시 국사(國師)의 명(銘)을 지어서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이에 치원이 사양하며 아뢰기를,
    “황공합니다. 전하께서 벼 곡식에 쭉정이가 많이 섞여 있음을 용서하시고, 계수(桂樹)에 향기가 많이 남아 있는 줄로 생각하시어, 글을 지어서 은덕에 보답하도록 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이 내린 행운으로서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대사(大師)는 유위(有爲)의 요박(澆薄)한 세상에서 무위(無爲)의 신비한 종지를 펼친 분인데, 소신이 보잘것없는 유한한 재주를 가지고 무한히 큰 행적을 기록한다는 것은 연약한 수레 위에 무거운 짐을 싣는 것과 같고, 짧은 두레박줄로 깊은 우물의 물을 긷는 것〔短綆汲深〕과 같습니다. 혹 돌이 이상한 말을 하는 일이 있거나, 거북이가 잘 돌아보는 일이 없다면, 결코 산을 빛내고 내를 아름답게 하지는〔山輝川媚〕 못한 채, 도리어 나무숲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시냇물이 수치로 여기게만〔林慙澗愧〕 할 것이니, 붓 잡는 일을 사양할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양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대개 우리나라의 풍속으로서 좋기는 좋은 일이다마는 참으로 이런 일을 하지 못한다면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대는 힘쓸지어다.”
    하였다. 그러고는 거연(遽然)히 서까래만 한 크기의 글 1편(編)을 내어 중연(中涓 시종관(侍從官))으로 하여금 전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문인(門人) 제자가 바친 대사의 행장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건대, 중국에 들어가서 공부한 것은 피차 똑같다고 할 것인데, 스승으로 예우를 받는 자는 어떤 사람이고 그를 위해 부림을 받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쩌면 마음으로 공부한 사람은 높아지는 것이고 입으로 공부한 사람은 수고로운 것인가. 그래서 옛날의 군자가 공부하는 것을 신중히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건대, 마음으로 공부한 사람은 덕을 세우고〔立德〕 입으로 공부한 사람은 말을 세우는〔立言〕 법인데, 저 덕이란 것도 혹 말을 의지해야만 일컬어질 수가 있고, 이 말이란 것도 혹 덕을 의지해야만 썩지 않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덕이 일컬어질 수 있게 되면 그 마음으로 공부한 것이 멀리 후세에까지 전해질 수 있고, 말이 썩지 않게 되면 그 입으로 공부한 것 역시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일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는 것〔爲可爲於可爲之時〕이니, 또 어떻게 감히 전각(篆刻)을 굳이 사양만 할 수 있겠는가.
    서까래만 한 행장을 처음 펼쳐 보건대, 대사가 중국에 갔다가 동방에 돌아온 해,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선(禪)의 깨달음을 얻게 된 인연, 공경(公卿) 및 수재(守宰)들이 귀의하여 우러러본 사실, 상전(像殿)과 영당(影堂)을 개창(開創)한 일 등이 고(故) 한림랑(翰林郞) 김입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聖住寺) 비문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고, 부처를 위하고 후손을 위한 덕화와 임금을 위하고 스승을 위한 성가(聲價)와 세속을 진압하고 마군(魔軍)을 항복받은 위력과 붕(鵬)처럼 드러내고 학(鶴)처럼 돌아온 행적 등이 증(贈) 태부(太傅)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친히 지은 심묘사(深妙寺) 비문에 갖추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부유(腐儒)인 내가 지금 글을 짓는다면 그저 대사가 반열반(般涅槃)의 경지에 든 일과 우리 임금이 솔도파(窣覩波)의 명호를 높인 일이나 드러내는 것이 온당하리라고 여겨졌다.
    나의 입과 나의 손이 합작하여 장차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 보려고〔自適其適〕 하는 차에 대사의 상족(上足)인 필추(苾蒭)가 와서 제구(虀臼)를 재촉하기에 내가 이러한 뜻을 언급하였더니, 그가 말하기를,
    “김입지의 비가 오래전에 세워지긴 하였으나 수십 년 동안 남긴 스승의 미행(美行)이 그래도 빠져 있고, 태부 왕이 신필(神筆)로 기록한 것은 대개 특별한 지우(知遇)만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입으로 옛 성현의 글을 저작(詛嚼)하였고 면전에서 금상(今上)의 명령을 받들었으며 귀로 국사(國師)의 행적을 실컷 들었고 눈으로 문생(門生)의 행장(行狀)을 취하도록 보았다. 그러니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자세히 말하여〔廣記而備言之〕 기필코 가외(可畏)에게 물려줌으로써 처음을 탐색하고 종말을 궁구하게〔原始要終〕 해야 마땅할 것이다. 혹시라도 서소(西笑)하는 이가 소매 속에 넣었다가 서쪽 중국인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게만 된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 내가 감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대는 귀찮다고 꺼리지 말라.”
    하였다.
    이에 내가 광노(狂奴)의 고태(故態)가 남아서 심드렁하게 응하며 말하기를,
    “나는 새끼를 꼬듯 짧게 줄이려고 하는데, 스님은 채소를 사듯〔買菜〕 많이 늘리려고 하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원심(猿心)을 붙잡아 매고서 억지로 모필(毛筆)을 움직이려다가 《한서(漢書)》 〈유후전(留侯傳)〉의 말미에 나오는 말을 기억하였다. 그것은 즉 장량(張良)이 상과 조용히 천하의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이 매우 많지만 천하의 존망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기록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었다. 그렇다면 대사의 시순(時順) 간의 사적(事蹟) 중에도 뚜렷이 드러난 것이 별처럼 많지만 후학을 일깨우는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면 역시 기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 이는 내가 반사(班史)에서 일반(一斑)을 엿본 것임을 자인하는 바이다. 이렇게 해서 다음과 같이 관견(管見)을 서술하게 되었다.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 누리를 환히 비춰 주는 질료로는 아침 해보다 균등한 것이 없고, 기운이 화창하고 융성하여 만물을 길러 주는 공효(功效)로는 봄바람보다 드넓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바람과 이 빛나는 태양은 모두 동방에서 나오는 것인데, 하늘이 이 두 가지 넉넉한 경사를 모으고 산악이 하나의 영성(靈性)을 내린 결과, 군자의 나라에 탄생하고 범왕(梵王)의 집안에 우뚝 서게 한 사람이 있으니, 우리 대사(大師)가 바로 그분이다.
    대사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이니 원각 조사(圓覺祖師)에게 10세 손이 되고, 속성(俗性)은 김씨(金氏)이니 무열대왕(武烈大王)이 8대조가 된다. 대부(大父) 주천(周川)은 골품(骨品)이 진골(眞骨)이고 지위는 한찬(韓粲)이다. 고조와 증조는 모두 출장입상(出將入相)한 분들로서 집집마다 그들을 알고 있는데, 부친 범청(範淸) 때에 일족의 신분이 진골에서 한 등급 내려와 득난(得難)이 되었다. 범청은 만년에 조 문왕(趙文王)의 옛일을 추종하였다.
    모친 화씨(華氏)가 꿈속에서 긴 팔의 천왕(天王)이 연꽃을 드리워 주는 것을 보고는 임신하였으며, 거의 한 시절을 넘겼을 무렵에 다시 꿈속에서 자칭 법장(法藏)이라고 하는 서역(西域)의 도인이 십호(十護)를 주어 태교에 충당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1년을 넘겨서 대사를 낳았다.
    대사는 아해(阿孩) 때에 걷거나 앉을 때에는 반드시 합장하고 가부좌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며, 심지어 아이들과 놀면서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모래를 쌓을 때에도 반드시 불상(佛像)을 그리고 불탑 모양을 만들곤 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차마 하루도 부모 슬하를 떠나지 못하였다. 9세에 비로소 학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눈으로 본 것은 입으로 반드시 외웠으므로 사람들이 해동(海東)의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다.
    세성(歲星)이 끝까지 한 번 도는 때〔一星終〕를 넘기면서 대사가 구류(九流)를 좁게 여기고는, 입도(入道)할 생각으로 먼저 모친에게 아뢰었더니 모친은 예전의 꿈을 생각하고 울면서 “의(䚷)”라고 하였고, 그다음에 부친을 뵈었더니 부친은 늦게야 깨달은 것을 후회하면서 흔쾌히 좋다고 승낙하였다.
    마침내 설산(雪山)의 오색석사(五色石寺)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입은 불경의 약 맛을 보는 데에 정통하였고, 힘은 터진 하늘을 기울〔補天〕 만큼 왕성하였다. 법성 선사(法性禪師)는 일찍이 중국에서 선종(禪宗)인 능가종(楞伽宗)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는데, 대사가 몇 년 동안 스승으로 모시면서 하나도 빠뜨리는 것이 없이 모두 탐색하였다. 이에 법성이 탄식하면서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다〔迅足駸駸 後發前至〕는 말을 내가 그대에게서 확인하였으니, 나는 흡족하기만 하다. 나는 이제 그대에게 팔 남은 용기〔餘勇可賈〕가 없으니, 그대와 같은 사람은 중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을 하니, 대사가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밤중의 노끈〔夜繩〕은 착각하기 쉽고, 공중의 실은 분간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緣木〕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토끼는 그루터기를 지키면서〔守株〕 기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가르친 것과 자기가 깨달은 것에는 서로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참으로 구슬과 불을 얻게 되었다면 조개와 부싯돌은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도에 뜻을 둔 자라면 어찌 스승이 정해져 있겠는가.
    이윽고 그곳을 떠나 부석산(浮石山)의 석징 대덕(釋澄大德)에게 가서 표하건나(驃訶健拏 화엄(華嚴))를 물었는데, 하루에 30명의 몫을 감당할 정도〔日敵三十夫〕의 실력이라서 남천(藍茜)이 본색(本色)을 잃었다. 이에 요배(坳杯)의 비유를 떠올리면서 말하기를,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바라보기만 하면 서쪽 담장을 보지 못하는 법이다. 저 언덕〔彼岸〕이 멀지 않은데, 어찌 꼭 이 땅만을 생각할 것인가.”
    하였다.
    거연(遽然)히 산에서 나와 바닷가에 머물면서 서쪽으로 배 타고 건너 갈 방도를 강구하였다. 마침 국사(國使)가 서절(瑞節)을 지니고 황궁에 가자 이에 편승하여 중국으로 향하였다. 대양 가운데 이르러 풍랑이 갑자기 사납게 일면서 큰 배가 전복되자 사람들이 다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대사는 심우(心友)인 도량(道亮)과 함께 널빤지 하나에 의지하고서 업식(業識)의 바람에 몸을 맡겼다. 밤낮으로 반달 남짓 표류한 끝에 검산도(劍山島)에 이르러 물가에 기어 올라가서는 한참 동안 창연(悵然)히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물고기 뱃속에 들어갈 위기에서 다행히 빠져나왔으니,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을 손에 넣을 희망이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은 돌멩이가 아닌데〔我心非石〕 뒤로 물러날 수야 있겠는가.”
    하였다.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조정사(朝正使)인 왕자(王子) 흔(昕)이 당은포(唐恩浦)에 배를 대었으므로 함께 타고 가게 해 달라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지부산(之罘山) 기슭에 도착한 뒤에 앞의 항해는 어려웠다가 뒤의 항해는 쉬웠던 것을 회고하면서 바다귀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몸 성히 잘 있거라 고래 물결이여, 바람의 악마와 잘 싸워 이겼다.”
    하였다.
    그곳을 떠나 대흥성(大興城) 남산(南山) 지상사(至相寺)에 이르렀을 때 잡화(雜花 화엄(華嚴))를 설하는 사람을 만나서 부석산(浮石山)에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그때 얼굴이 검은 기년(耆年)의 노인 하나가 그를 붙잡고서〔言提之〕 말하기를,
    멀리 사물에서 취하려 하는 것〔遠欲取諸物〕보다는 그대 안의 부처를 인식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사가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
    이로부터 필묵을 버리고 유력하다가 불광사(佛光寺)에서 여만(如滿)에게 도를 물었다. 여만은 강서(江西)의 인가(認可)를 받은 사람으로서 향산(香山)의 상서(尙書) 백낙천(白樂天)과 공문(空門)의 벗이 된 사이였다. 그런데 그가 응대하다가 부끄러운 기색을 띠면서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많이 겪어 보았지만, 이 신라 젊은이와 같은 경우는 거의 보지 못하였다. 뒷날 중국에서 선(禪)이 쇠하면 동이(東夷)를 찾아가서 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곳을 떠나 마곡 보철 화상(麻谷寶徹和尙)을 참알(參謁)하였다. 특별히 가리는 것이 없이 성실하게 일하면서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자기는 반드시 쉽게 행하곤 하였으므로, 대중이 대사를 지목하여 선문(禪門)의 유검루(庾黔婁)와 같은 이행(異行)이라고 하였다. 철공(徹公)이 대사의 고절(苦節)을 가상하게 여기더니, 언젠가 하루는 대사에게 일러 말하기를,
    “옛날 나의 스승 마 화상(馬和尙 마조도일(馬祖道一))께서 나에게 유언하기를 ‘봄에는 꽃이 번성하였는데 가을에는 열매가 적으니, 이는 도수(道樹)를 반연(攀緣)하는 자가 슬퍼하는 것이다. 지금 그대에게 심인(心印)을 전하노니, 뒷날 문도들 중에 기공(奇功)을 세워서 봉(封)할 만한 자가 있거든 봉해 주고 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刓〕 하지는 말라.’라고 하시고, 또 ‘불법(佛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설은 대개 예언하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저 해 뜨는 동방에 있는 선남자(善男子)의 근기(根機)가 지금쯤은 거의 익었을 것이니, 그대가 동방 사람 중에 눈빛으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발견하거든 잘 이끌어서 지혜의 물결이 동해의 모퉁이까지 흘러넘치게 하라. 그 공덕이 결코 얕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스승의 그 말씀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나는 그대가 온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지금 그대에게 심인을 전해 주어 동토(東土)에서 선후(禪侯)의 으뜸이 되게 하노니, 가서 공경히 행할지어다. 그러면 내가 당년에는 강서(江西)의 대아(大兒)요 후세에는 해동(海東)의 대부(大父)로서 선사(先師)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묵건(墨巾)을 머리에 쓰고는 말하기를,
    “뗏목도 이미 버렸는데, 배에 어찌 매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표연(飄然)히 유랑의 길에 올랐으니 그 형세는 막을 수가 없었고 그 뜻은 빼앗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분수(汾水)를 지나고 곽산(崞山)에 올랐으며 고적(古跡)은 반드시 찾고 진승(眞僧)은 반드시 만났다. 언제나 그가 머무는 곳을 보면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대요(大要)는 위험한 것을 편히 여기고 괴로운 것을 달갑게 여기는 데에 있었으며, 사체(四體)를 노예처럼 부리고 일심(一心)을 군주처럼 받드는 것이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로지 곤고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의지할 곳 없는 자들을 보살피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혹독하게 춥고 덥거나 번열증(煩熱症)에 시달리거나 손발에 동상이 들었을 때에도 한번도 나태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대사의 명성을 귀로 듣고는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멀리서 예배를 드렸으며, 동방의 대보살(大菩薩)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30여 년에 걸친 대사의 행적이 이와 같았다.
    회창(會昌) 5년(845, 문성왕7)에 귀국하였으니, 이는 황제의 명령 때문이었다. 국인(國人)이 서로 경축하며 말하기를,
    연성벽(連城璧)이 다시 돌아왔다. 이는 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으로서 이 땅에 행운을 내려 준 것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벼와 삼대가 빽빽이 들어찬 것과 같았다. 왕성에 들어가서 모친을 찾아뵈니, 모친이 크게 환희하며 말하기를,
    “돌이켜 보건대, 내가 옛날에 꿈을 꾼 것은 바로 우담(優曇)이 한번 꽃을 피운 것이 아니겠느냐. 내세에 제도되기를 바라노니, 내가 다시는 의문(倚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련다.”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길을 떠나 여생을 마칠 곳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고르려고 하였다. 그때 마침 왕자(王子) 흔(昕)이 벼슬을 그만두고서 산중재상(山中宰相)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대사를 만나고 싶은 평소의 소원을 풀고는〔邂逅適願〕 말하기를,
    “대사와 나는 모두 용수(龍樹) 을찬(乙粲 이찬(伊飡))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사는 내외(內外)로 용수(龍樹)의 후예가 되는 셈이니, 참으로 휘황해서 따라갈 수 없는 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창해(滄海) 밖에서 소상(瀟湘) 지역을 함께 답사한 추억이 있으니, 친구로서의 인연 역시 결코 얕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웅천주(熊川州 공주(公州)) 서남쪽 모퉁이에 사찰 하나가 있는데, 이곳은 우리 선조인 임해공(臨海公)이 봉지(封地)로 받은 곳입니다. 중간에 병란의 재해를 당한 나머지 금전(金田)이 반쯤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는데, 자애롭고 명철한 분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없어진 것을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다시 이을 수 있겠습니까. 억지로라도 못난 나를 위해서 그곳에 주지(住持)해 주십시오.”
    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으니 머물러야 하겠지요.〔有緣則住〕”
    하였다.
    대중(大中) 초에 비로소 나아가 거주하면서 우선 정비하고 단장하였는데, 이윽고 불도(佛道)가 크게 행해지면서 사원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 멀리에서 배움을 구하는 자들이 천리 길을 반걸음처럼 여기면서 엄청나게 몰려들어 문도가 실로 번성하였다. 이에 대사가 종을 두드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고, 거울이 피곤함을 잊은 것처럼 하면서, 찾아오는 자들마다 혜소(慧炤)로 그들의 눈길을 유도하고 법희(法喜)로 그들의 배를 즐겁게 해 주었으며, 정신없이 오가는 발걸음을 바른 길로 이끌고, 무지몽매한 습속을 변화시켰다.
    문성대왕(文聖大王)이 대사가 운용하는 일을 듣고는 왕화(王化)를 비보(裨補)하는 것 아님이 없다고 여겨 이를 매우 모범적인 사례로 삼았다. 그러고는 수교(手敎)를 날려 우악하게 위로하는 한편, 대사가 산상(山相)에게 대답한 네 마디 말을 대단하게 여겨서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바꾸고 이와 함께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켜 등록하게 하였다. 이에 대사가 사자(使者)에게 응답하기를,
    “사원을 성주(聖住)라고 일컬은 것은 초제(招提 사원의 별칭)로서는 물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마는, 용렬한 소승을 그지없이 총애하시어 외람되게 피리 부는 자리에 높이 끼이게 한 것은 실로 바람을 피한 새에 견줄 일로서 무우(霧雨) 속에 숨은 표범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였다.
    이때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즉위하기 전에 단월(檀越 불교 신도)인 계(季) 서발한(舒發韓) 위흔(魏昕 김양(金陽))과 함께 남북상(南北相)으로 있었는데, 멀리서 제자의 예(禮)를 행하여 차와 향을 예물로 바치며 매달 거르는 때가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명성이 동국(東國)에 모두 퍼지게 되었으므로, 사류(士流)로서 대사의 산문(山門)을 모르면 한세상의 수치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대사의 발에 경의를 표한 사람들은 물러 나와 반드시 탄성을 올리며 말하기를,
    “직접 얼굴을 뵙는 것이 귀로 듣는 것보다 백배나 낫다. 입으로 말씀하시기 전에 벌써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
    하였다. 그리고 사실은 원숭이요 호랑이와 같으면서도 겉으로만 사람의 관을 쓰고 있는 자들도 대사를 접한 뒤에는 각기 조급함을 버리고 포악함을 바꾸고서 다투어 선한 길로 치달렸다.
    그러다가 헌안대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나서 글을 내려 대사의 한마디 말을 청하니, 대사가 답하기를,
    주풍(周豐)이 노공(魯公)에게 대답한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경(禮經)에 실려 있으니, 자리 곁에 새겨 두소서.”
    하였다. 그 뒤에 증(贈) 태사(太師)인 선대왕(先大王 경문왕(景文王))이 즉위해서도 역시 흠앙하며 존중하기를 선조(先朝)의 뜻과 같이 하면서 날이 갈수록 더욱 후하게 예우하였으며, 어떤 일을 시행하더라도 반드시 대사에게 말을 달려 묻게 한 뒤에 거행하였다.
    함통(咸通) 12년(871, 경문왕11) 가을에 왕이 교서(敎書)를 날려 역전(驛傳)으로 대사를 부르면서 이르기를,
    “산림(山林)은 어찌 그렇게 가까이하시면서 성시(城市)는 어찌 그렇게 멀리하십니까.”
    하였다. 이에 대사가 생도(生徒)에게 이르기를,
    “느닷없이 백종(伯宗)에게 내린 명을 받고 보니, 원공(遠公)에게 매우 부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도가 장차 행해지게 하려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될 일이다. 부처가 불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을 생각해서라도 나는 가야만 할 것이다.”
    하였다.
    홀연히 도성에 이르러 서로 만나니,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이 면복(冕服) 차림으로 대사에게 절하며 국사(國師)로 삼았다. 군부인(君夫人)과 세자를 비롯해서 태제(太弟)인 상국(相國)과 여러 공자 및 공손들이 대사를 에워싸고 한결같이 우러러보았는데, 그 광경이 흡사 옛 가람(伽藍)의 벽화 중에 서방(西方) 제국(諸國)의 군장(君長)들이 불타(佛陀)를 모시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과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제자가 재주는 없습니다마는 소싯적에 글짓기를 좋아해서 일찍이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을 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유(有)만 집착하거나 무(無)만 고수하면 단지 한쪽 면으로 치우쳐서 이해하기 십상이다. 진원(眞源)을 찾아가려고 한다면 경계가 끊어진 반야〔般若之絶境〕의 경지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경계가 끊어진 경지에 대해서 혹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경계가 이미 끊어졌으면 언설(言說)의 도리도 끊어진 것입니다. 이는 심인(心印)의 경지이니, 묵묵히 행할 따름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인은 모르겠으니 조금 더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에 무리 가운데 쟁쟁(錚錚)한 자들로 하여금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질문마다 차근차근 답변하여 막힌 것을 통하게 하고 답답한 것을 풀어 주면서, 마치 가을바람이 음산한 안개를 흩어 버리듯 하였다. 이에 상이 크게 기뻐하며 대사를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하면서 이르기를,
    하였다. 대궐을 나온 뒤에는 경상(卿相)들이 다투어 영접해서 함께 논의할 겨를도 없었고, 사서인(士庶人)이 추종해서 떠나려 해도 떠날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의주(衣珠)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이웃집 노인이 무옥(廡玉)을 엿볼 수가 없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장 속의 새처럼 괴롭게 여긴 나머지 곧장 도망치듯 떠나갔다. 상이 억지로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는 친히 글을 내려, 상주(尙州)의 심묘사(深妙寺)가 서울과 멀지 않으니 선정(禪定)을 닦는 별관(別館)으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대사가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그곳에 가서 거하였다. 대사는 어디에서든 하루를 머물더라도 반드시 수리하여 엄연히 사원의 모습을 갖추게 하였다.
    건부(乾符) 3년(876, 헌강왕2) 봄에 선대왕(先大王 경문왕)이 환후(患候)가 좋지 못하자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우리 대의왕(大醫王)을 얼른 모셔 오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대사가 이르기를,
    “산승(山僧)의 발길이 왕문(王門)에 이르는 것은 단 한번이라도 많다고 할 것이다. 나를 아는 자는 성주(聖住)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無住〕고 하겠지만, 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무염(無染)이 오염되었다〔有染〕고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우리 임금과는 향화(香火)의 인연이 있고, 또 도리천(忉利天)으로 떠나실 날짜가 잡혀 있으니, 어찌 한번 가서 영결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도보로 왕궁에 이르러서 약물(藥物)에 해당하는 말을 베풀고 침석(鍼石)에 해당하는 계(戒)를 행하니 불각(不覺) 중에 병이 차도를 보였으므로 온 나라가 기이하게 여겼다. 이윽고 달을 넘겨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익실(翼室)에 거하여 울면서 왕손(王孫)인 훈영(勛榮)에게 명하여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는데, 그 내용에,
    “내가 어려서 부상(父喪)을 당하여 정치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임금을 받들고 부처를 신봉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려는 것과 자기 한 몸만 선하게 하려는 것은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대사께서는 멀리 가지 마시고 거하실 곳을 말씀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이에 대사가 대답하기를,
    “옛날의 스승으로는 육적(六籍 육경(六經))이 있고 오늘의 보필(輔弼)로는 삼경(三卿)이 있습니다. 늙은 산승이 무엇 하는 자이기에 그냥 앉아서 계옥(桂玉)을 축낸단 말입니까. 다만 떠나는 사람이 선물로 남겨 드릴 만한 세 마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즉 제대로 사람을 임용하는 것〔能官人〕입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다음 날 산으로 떠날 여장을 꾸려서 새처럼 날아갔다. 이로부터 소식을 전하는 역마(驛馬)의 그림자가 바위와 시내 사이에 계속 이어졌는데, 역졸(驛卒)들도 목적지가 성주사(聖住寺)라는 것을 알면 환희작약하며 두 손을 모아 고삐를 고쳐 잡고는 왕명을 받드는 길이 지체될까 걱정하면서 마치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내달리듯 하였다. 이 때문에 기상시(騎常侍)의 무리들이 아무리 급한 임무를 부여받아도 손쉽게 거행할 수가 있었다.
    건부제(乾符帝)가 석명(錫命)하던 해에 국내에서 혀끝으로 말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해로운 일을 없애는〔興利除害〕 계책을 올리게 하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대사에게는 만전(蠻牋)을 써서 서한을 보내며 하늘의 은총을 받는 이유가 있다고 말하고는 나라를 유익하게 하는 방책에 대해서 질문하였다. 이에 대사가 옛날 하상지(何尙之)가 송 문제(宋文帝)에게 바친 심성(心聲)을 인용하여 대답하니, 태부(太傅) 왕(王)이 이를 살펴보고 개제(介弟 태제(太弟))인 남궁상(南宮相)에게 일러 말하기를,
    삼외(三畏)는 삼귀(三歸)에 비견되고 오상(五常)은 오계(五戒)와 같으니 왕도(王道)를 제대로 실천하면 불심(佛心)에 부합된다는 대사의 이 말씀이 지극하다. 나와 그대는 모름지기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황제가 서수(西狩)하던 해인 중화(中和)의 가을에 상이 근시(近侍)에게 이르기를,
    하니, 근시가 대답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때때로 세상에 나오게 해서 만호(萬戶)의 눈을 일깨우고 사린(四隣)의 마음을 취(醉)하게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 마니(摩尼)라는 빼어난 보배가 있는데, 지금 빛을 감추고 숭암산(崇巖山)에 숨어 있다. 만약 비장(秘藏)된 궤를 열어 나오게 한다면 삼천세계(三千世界)를 환히 비출 것이니, 수레 12채를 비추는 구슬 따위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나의 문고(文考 경문왕)께서 간절히 영접하시자 일찍이 두 번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옛날 찬후(酇侯)는 한왕(漢王)이 대장(大將)을 임명할 때에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한다고 기롱한 적이 있었다. 한왕이 상산(商山)의 네 노인을 초치(招致)하지 못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지금 듣건대 천자가 몽진(蒙塵)했다 하니, 얼른 달려가서 관수(官守)에게 문안을 올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근왕(勤王)을 더 두텁게 하려면 부처에게 귀의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니, 장차 대사를 영접해야만 반드시 외의(外議)를 흡족하게 할 것이다. 내가 어찌 감히 임금인 지위 하나를 가지고서 연치와 덕성의 둘을 지닌 분에게 거만하게 굴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사신을 정중하게 보내면서 겸손한 말씨로 대사를 초빙하였다. 이에 대사가 말하기를,
    하고, 마침내 와서 상을 만났다.
    이때 선조(先朝)의 예(禮)와 같이 대접한 것 이외에 특별히 더 예우한 것으로 분명하게 손꼽을 만한 것들이 있다. 임금이 대사를 마주하고 공양을 올린 것이 첫 번째 일이요, 손수 향을 전한 것이 두 번째 일이요,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예배를 세 차례 올린 것이 세 번째 일이요, 작미로(鵲尾爐)를 잡고 생생세세(生生世世)의 인연을 맺은 것이 네 번째 일이요, 광종(廣宗)이라는 법호(法號)를 가한 것이 다섯 번째 일이요, 이튿날 조관(朝官)들에게 명하여 대사의 거처로 찾아가서 기러기처럼 줄을 지어 하례하게 한 것이 여섯 번째 일이요, 국중(國中)에서 육의(六義)를 연마하는 자들로 하여금 대사를 전송하는 시편을 짓게 하여, 재가 제자로서 왕손(王孫)인 소판(蘇判) 억영(嶷榮)이 수창한 뒤 지은 시들을 한데 모아 시축(詩軸)을 만들게 하고, 시독(侍讀)이며 한림(翰林)의 재자(才子)인 박옹(朴邕)이 인(引)을 지어 작별 선물로 증정하게 한 것이 일곱 번째 일이요, 거듭 장차(掌次)에게 명하여 정실(淨室)을 마련하게 하고 송별의 의식을 행한 것이 여덟 번째 일이다.
    고별에 임하여 상이 묘결(妙訣)을 구하자, 대사가 종자(從者)에게 암시를 주어 진요(眞要)를 들려 드리도록 하였다. 순예(詢乂)와 원장(圓藏)과 허원(虛源)과 현영(玄影) 같은 자는 사선(四禪) 중에서 청정(淸淨)의 경지를 얻은 자였다. 그들이 실을 뽑듯 지혜를 풀어내고 종지(宗旨)를 세밀히 드러내면서 뜻을 기울임에 태만하지 않고 임금의 마음을 흠뻑 적셔 주니, 상이 매우 희열하면서 두 손을 모아 경배하며 이르기를,
    예전에 문고(文考)는 비파를 내려놓은〔捨瑟〕 현인이었고, 지금 과인은 외람되게 자리를 피해 일어난〔避席〕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공동(崆峒)의 가르침을 청하여 얻었으며, 이를 가슴에 간직하고서 혼돈의 근원을 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비교하면 저 위수(渭水) 물가의 노옹(老翁)은 참으로 이름이나 낚은 사람이요, 흙다리〔圯橋〕 가의 유자(孺子) 또한 대개는 노옹의 자취를 밟은 사람이니, 비록 왕자(王者)의 스승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세 치의 혀를 희롱했을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승께서 비밀히 전하는 한 조각의 마음을 말씀해 주신 것에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받들어 주선(周旋)하며 감히 실추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태부(太傅) 왕(王)은 평소에 화언(華言)을 잘했기 때문에 금옥(金玉)의 소리가 여러 사람이 굳이 떠들어 댈 필요도 없이 입에서 술술 나왔으며, 변려체(騈儷體)의 대구를 이루는 것도 마치 예전에 구상해 둔 것만 같았다.
    대사가 그곳에서 물러 나와 다시 왕손인 소판(蘇判) 김일(金鎰)의 청에 응해 가서 함께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곧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였다.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서는 세상의 모든 인연을 사절하였다. 이에 상이 사신을 보내어 방생장(放生場)의 경계를 표시하게 하니 조수(鳥獸)가 희열하였고, 은구(銀鉤)의 실력을 발휘하여 성주사(聖住寺)의 제액(題額)을 쓰니 용사(龍蛇)가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성대했던 일이 끝나고 창성했던 기한이 홀연히 다하여 헌강대왕(獻康大王)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정강대왕(定康大王)이 즉위하여 양조(兩朝)에서 대사에게 은총을 내린 전례에 따라 그대로 행하면서 승속(僧俗)의 사람들을 거듭 사신으로 보내 영접하게 하였으나 대사는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태위(太尉) 왕(王)이 해외에서 은혜를 베풀면서 대사의 덕을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며 즉위한 지 구순(九旬)이 지나는 동안에 말을 달려 안부를 물은 것이 열 차례나 되었다. 이윽고 요통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는 거연(遽然)히 국의(國醫)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그곳에 이르러 증상을 물어보았으나 대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기를,
    “노병(老病)일 뿐이니 번거롭게 치료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그러고는 하루에 두 번 먹는 미음과 밥을 반드시 종소리가 들린 뒤에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 문도가 대사의 식력(食力)이 떨어질까 염려한 나머지 종을 치는 자에게 몰래 당부하여 거짓으로 자주 치게 하니, 대사가 이에 눈치를 채고는 상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장차 세상을 떠나려고 할 무렵에 옆의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유훈(遺訓)을 대중에게 알리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이미 중수(中壽)를 넘었으니, 죽음의 시기를 피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나는 멀리 여행을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불법(佛法)에 잘 안주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을 그은 것처럼 분명히 할 것이요〔顜若畫一〕, 이를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할 것이다.〔守而勿失〕 옛날의 관리들도 이와 같이 하였으니, 오늘날의 선승(禪僧)들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영결을 고하자마자 의연히 세상을 하직하였다.
    대사는 성품이 공근(恭謹)하였고 언어는 화기를 상하게 하지 않았으니, 《예기(禮記)》의 이른바 “몸가짐은 겸손하였고 말은 낮고 느렸다.〔中退然 言吶吶然〕”라는 평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대사는 학승들을 반드시 선사(禪師)로 대우하였으며, 빈객을 접할 때에도 신분의 존비를 나누어 경의를 표하는 정도를 달리한 적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방에 자비가 가득 넘쳤으므로 대중이 기뻐하며 따랐다. 그리고 5일을 주기로 하여 찾아와서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질의할 기회를 주었다. 대사는 문도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몸 역시 마음의 스승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너희들이 생각하지 않아서 걱정이지, 도라는 것이 어찌 너희들과 멀리 떨어져 있겠느냐. 설사 농부라고 할지라도 속진(俗塵)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치달리는 것은 내 마음이 치달리기 때문이다. 도사(導師)와 교부(敎父)에 어찌 종자(種子)가 따로 있겠느냐.”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마신다고 해서 나의 갈증을 풀어 주지 못하며, 저 사람이 먹는다고 해서 나의 굶주림을 구해 주지 못한다. 어찌하여 자기가 직접 마시며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단 말인가. 어떤 이는 교(敎)와 선(禪)이 같지 않다고도 하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근본 취지를 모르겠다. 이에 대해서는 본래 말들이 많으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였다. 대개 대사는 자기와 같아도 편들지 않고 자기와 달라도 비난하지 않았으며 조용히 앉아서 기심(機心)을 쉬었으니, 그야말로 누더기 옷을 입은 성자와 비슷했다고 할 것이다. 대사의 말은 분명하면서도 순탄하였으며, 그 뜻은 심오하면서도 신실하였다. 그래서 상(相)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상을 떨쳐 버리게 할 수 있었으며, 도(道)를 들은 자들이 부지런히 그것을 실천하여〔勤而行之〕 갈림길 속의 갈림길〔歧中之歧〕에서 헤매지 않게 하였다.
    대사는 장년(壯年)에서부터 노쇠할 때까지 자신을 낮추는 일을 기본으로 하였다. 먹는 것도 양식이 특별히 다르지 않았고 입는 것도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입었다. 어떤 공사를 하든지 간에 대중보다 먼저 일을 하곤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매번 말하기를,
    조사(祖師)께서도 일찍이 진흙을 발로 이기셨는데〔踏泥〕, 내가 어떻게 잠시라도 편안히 쉴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런가 하면 물을 긷거나 나무를 지는 일까지도 몸소 친히 하면서 말하기를,
    “산이 나 때문에 속진(俗塵)에 물들었는데, 내가 어떻게 몸을 편히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대사는 어려서 유가의 서적을 읽어서 그 여운(餘韻)이 입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응수할 때에 운어(韻語)를 많이 사용하였다.
    문제자(門弟子)로서 그 이름을 거론할 수 있는 자가 거의 2천 인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무리와 떨어져 거하면서 도량에 앉아 지낸다〔坐道場〕고 일컬을 만한 자로는 승량(僧亮)과 보신(普愼)과 순예(詢乂)와 심광(心光) 등이 있다. 이 밖에 여러 법손(法孫)이 즐비하여 그 무리가 성황을 이루고 있으니, 실로 마조(馬祖)가 용자(龍子)를 길러서 동방의 대해(大海)가 서방의 강하(江河)를 압도했다고 말할 만하다.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인사(麟史)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공후였던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그의 시조의 지위로 복귀할 것이다.〔公侯之子孫必復其始〕”라고. 옛날 무열대왕(武烈大王)이 을찬(乙粲)으로 있을 적에, 예맥(穢貊 고구려)의 정벌에 필요한 원군을 청할 계책을 가지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명을 받들어 소릉황제(昭陵皇帝 당 태종(唐太宗))를 섬돌 아래에서 알현하였다. 그때 정삭(正朔)을 받들고 복장(服章)을 바꾸기를 원한다고 면대하여 진달하니, 천자가 가상하게 여겨 윤허하고는 조정에서 중화의 복식을 내리는 한편 특진(特進)의 지위를 수여하였다.
    어느 날 황제가 제번(諸蕃)의 왕자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는데, 크게 술자리를 베풀고 보화를 쌓아 둔 뒤에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하게 하였다. 이에 무열왕이 술을 마시는 일은 예법에 입각하여 어지럽게 되지 않도록 하고, 아름다운 비단은 지혜를 써서 많이 획득하였다. 무열왕이 하직 인사를 하고 나오자, 문황(文皇 당 태종)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전송하면서 국기(國器)라고 찬탄하였다.
    급기야 귀국할 무렵에 황제가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온양(溫陽)과 진사(晉祠)의 두 비문(碑文) 및 친히 저술한 《진서(晉書)》 1부(部)를 하사하였다. 이때 봉각(蓬閣)에서 이 글을 베껴 겨우 2본(本)을 바쳐 올렸는데, 하나는 저군(儲君 태자)에게 주고 하나는 우리에게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화자관(華資官)에게 명하여 동문(東門) 밖에서 송별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하였으니, 그 우악한 은총과 두터운 예우야말로 설령 지혜에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목을 놀라게 하기에 족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의 땅이 한번 변화하여 노(魯)나라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로부터 8세(世) 뒤에 대사가 서방에서 배워 동방을 교화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변화하여 도(道)의 경지에 이르게 하였으니, 그러고 보면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으리라〔莫之與京〕고 한 말이 우리 대사가 아니면 그 누구를 두고 한 말이겠는가.
    위대하도다. 선조(先祖)는 두 적국을 평정하여 사람들의 외면의 복식을 바꾸게 하였고, 대사는 여섯 마적(魔賊)을 항복받아 사람들의 내면의 덕성을 닦게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천승(千乘) 제후국의 임금이 양조(兩朝)에 걸쳐서 경배하게 하였고, 사방의 백성들이 만리 길을 달려오게 하였으며, 움직이면 반드시 사람들을 쉽게 따르게 하였고, 가만히 있을 때에도 속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없게 하였다. 이 어찌 반천(半千)의 시운에 응하여 대천(大千)에 몸을 나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복기시(復其始)의 설을 거론한다고 하더라도 겸연쩍게 여길 것이 뭐가 있다고 하겠는가.
    저 문성후(文成侯 장량(張良))는 한 고조(漢高祖)의 사부(師父)가 되어 만호(萬戶)에 봉해지고 열후(列侯)의 지위에 오른 것을 크게 과시하면서 한(韓)나라 재상의 자손으로서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으니 비루한 일이다. 그가 가령 신선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웠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한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중간에 그만두어 학(鶴)의 등 위의 하나의 허깨비 같은 몸이 되고 말았을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 대사가 처음에 속세를 초월하고 중도에 중생을 제도하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깨끗이 한 것과 같을 수가 있겠는가.
    성덕(盛德)을 아름답게 형용할 때에 옛날부터 송(頌)의 문체를 애용하였는데, 송은 게(偈)와 같은 종류이다. 적막의 문을 두드려 명(銘)을 짓노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도가 상도가 된다고 함은 / 可道爲常道
    풀 위의 이슬을 꿰는 것과 같고 / 如穿草上露
    즉불이 진불이 된다고 함은 / 卽佛爲眞佛
    물속의 달을 잡는 것과 같은데 / 如攬水中月
    상도요 진불을 얻은 것은 / 道常得佛眞
    해동의 김 상인이시로다 / 海東金上人
    본래 가지는 성골이 뿌리로서 / 本枝根聖骨
    상서로운 연꽃의 태몽을 받았나니 / 瑞蓮資報身
    오백년 운세에 맞춰 이 땅에 태어나서 / 五百年擇地
    십삼 세에 속세 떠나 출가한 뒤에 / 十三歲離塵
    화엄이 대붕의 길을 이끌어 / 雜花引鵬路
    험한 바다 위에 배를 띄웠어라 / 窽木浮鯨津
    요 임금의 태양 아래 관광하고서 / 觀光堯日下
    큰 뗏목을 모두 버릴 수 있었나니
    / 巨筏悉能捨
    선배들 모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 先達皆嘆云
    고행으로 따라갈 자가 없다 했다네 / 苦行無及者
    불교를 탄압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 沙之復汰之
    동방으로 귀국하니 하늘의 복이라 / 東流是天假
    마음의 구슬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비추었고 / 心珠瑩麻谷
    눈의 거울은 도야를 밝혔다오 / 目鏡燭桃野
    봉황이 날아와서 자태를 드러냄에 / 旣得鳳來儀
    뭇 새들이 다투어 뒤를 따랐는데 / 衆翼爭追隨
    천변만화하는 용을 한번 보시게나 / 試觀龍變化
    범상한 생각으로 어찌 헤아리겠는가 / 凡情那測知
    인방에서 방편을 드러내 보이면서 / 仁方示方便
    성주사에 억지로 주지하였는데 / 聖住強住持
    송문에 석장을 머물 때마다 / 松門遍掛錫
    산길은 송곳 세우기도 어려웠다오 / 巖徑難容錐
    대사는 삼고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 我非待三顧
    칠보로 영접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 我非迎七步
    나가야 할 때에는 잠깐 나갔나니 / 時行則且行
    부처가 불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 때문이었네 / 爲緣付囑故
    두 임금이 아래에서 절을 하였고 / 二王拜下風
    한 나라가 감로에 흠뻑 젖었건만 / 一國滋甘露
    동천의 가을날에 학처럼 나왔다가 / 鶴出洞天秋
    해산의 저물녘에 구름처럼 돌아갔다오 / 雲歸海山暮
    나오는 것은 섭룡보다 귀하였고 / 來貴乎葉龍
    떠나는 것은 명홍보다 높았나니 / 去高乎冥鴻
    물 건너면서는 소보를 좁게 여기다가 / 渡水陿巢父
    골에 들면 낭공보다도 뛰어났어라 / 入谷超朗公
    한번 도외에서 돌아온 뒤로 / 一從歸島外
    세 번 호중에서 노닐었나니 / 三返遊壺中
    사람들이 제멋대로 시비를 논하지만 / 群迷漫臧否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다 하리오 / 至極何異同
    이 도는 담박해서 맛이 없으나 / 是道澹無味
    억지로라도 마시고 먹어야 하리니 / 然須強飮食
    남이 마신 술은 나를 취하게 못하고 / 他酌不吾醉
    남이 먹은 밥은 나를 배부르게 못한다네 / 他飧不吾飽
    대중에게 훈계하여 사심을 버리게 하되 / 誡衆黜心何
    명예와 이익을 겨와 쭉정이로 여기라 하고 / 糠名復粃利
    세속에 권면하여 몸을 단속하게 하되 / 勸俗飾身何
    인과 의를 갑옷과 투구로 여기라 했네 / 甲仁復胄義
    계도하며 버리는 일이 없었나니 / 汲引無棄遺
    그야말로 천인사라 칭할 분이라 / 其實天人師
    옛날 세간에 계실 때에는 / 昔在世間時
    온 나라가 유리처럼 환하였는데 / 擧國成琉璃
    적멸하여 돌아가신 뒤로는 / 自寂滅歸後
    밟는 곳마다 가시풀이 돋는구나 / 觸地生蒺莉
    어찌 그리 일찌감치 열반에 드셨는고 / 泥洹一何早
    고금에 걸쳐 누구나 슬퍼할 일이로다 / 今古所共悲
    사리탑을 쌓고 다시 비석에 새겨 / 甃石復刊石
    유골을 보관하고 자취를 드러냈나니 / 藏形且顯跡
    고니 같은 흰 탑은 청산에 점을 찍었고 / 鵠塔點靑山
    거북 등의 비석은 취벽을 버티고 섰도다 / 龜碑撑翠壁
    이것이 어찌 본래의 마음이리오 / 是豈向來心
    문자만 살피는 것은 헛수고일 뿐 / 徒勞文字覛
    그저 후세에 지금을 알게 하려 함이니 / 欲使後知今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이로다
    / 猶如今視昔
    천년토록 스며들 임금의 은혜요 / 君恩千載深
    만대토록 흠앙할 스승의 교화로다 / 師化萬代欽
    누가 자루 있는 도끼를 잡을 것이며 / 誰持有柯斧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탈 것인가 / 誰倚無絃琴
    선의 경지를 지킬 사람이 없다 해도 / 禪境雖沒守
    객진이 어찌 침노하게야 놔두리오 / 客塵寧許侵
    계봉에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 雞峯待彌勒
    길이 동쪽 계림에 건재하리라
    / 長在東雞林


     

    [주B-001]비(碑) :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금까지 사용한 대본에 오자와 탈자 등 문제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1995년에 이우성 교역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신라사산비명》의 2부 주석(註釋)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다만 글의 순서는 《고운집》 차례를 그대로 따랐다.
    [주C-001]무염 화상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성주산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山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로 되어 있다.
    [주D-001]제당(帝唐)이 …… 창월(暢月) : 당 소종(唐昭宗) 즉위년(888) 11월을 뜻한다. 문덕(文德)은 희종(僖宗)의 연호이지만, 희종은 그해 2월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와서 다음 달에 죽고, 그 뒤를 이어 소종이 즉위하였다. 창월(暢月)은 11월의 별칭이다. 《예기》 〈월령(月令)〉에 “중동지월(仲冬之月)을 창월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D-002]보살계 제자(菩薩戒弟子) : 보살계는 대승 보살(大乘菩薩)이 수지하는 계율로, 소승 성문(小乘聲門)의 계율과 상대되는 말이다. 《범망경(梵網經)》의 계본(戒本)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계본이 있는데, 보통 전자의 십중금계(十重禁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가리킨다. 남조(南朝)의 양 무제(梁武帝)와 진 무제(陳武帝), 수(隋)나라 문제(文帝)와 양제(煬帝) 등이 모두 보살계를 받아 보살계 제자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보살계를 받는 풍조가 한때 성행하였다.
    [주D-003]소판(蘇判) : 신라 17등 관계(官階) 중의 셋째 등급으로, 소판니(蘇判尼)라고도 하고, 잡찬(迊飡) 혹은 잡판(迊判)이라고도 한다.
    [주D-004]재삼(在三)의 의리 : 부(父)ㆍ사(師)ㆍ군(君)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라는 뜻이다. 《국어(國語)》 〈진어(晉語) 1〉의 “사람은 세 분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니, 섬기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어버이는 낳아 주셨고, 스승은 가르쳐 주셨고, 임금은 먹여 주셨기 때문이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5]한 분의 …… 것이다 :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나온다.
    [주D-006]문고(文考)와 강왕(康王) : 문고는 선친이라는 뜻으로, 진성여왕(眞聖女王)의 부친인 경문왕(景文王)을 가리키고, 강왕은 경문왕의 태자요 진성여왕의 오빠인 헌강왕(憲康王)을 가리킨다. 문고는 《서경》 〈강고(康誥)〉의 “지금 백성들을 다스리려면 선친인 문왕(文王)의 언행을 공경히 따라야 한다.〔今民將在祗遹乃文考〕”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07]하늘이 …… 않았으므로 : 하늘이 국가를 위해서 원로를 이 세상에 남겨 두지 않고 일찍 데려갔다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원로 한 분을 아껴 남겨 두어서 우리 임금을 지키게 하지 않는구나.〔不憖遺一老 俾守我王〕”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공자(孔子)가 죽었을 때에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내린 조사(弔辭)에도 “하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구나. 나라의 원로를 조금 더 세상에 있게 하여 나 한 사람을 도와 임금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구나.〔旻天不弔 不憖遺一老 俾屛余一人以在位〕”라고 탄식한 구절이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16年》
    [주D-008]실을 물들이고 : 흰 실이 다양하게 물이 드는 것처럼 본래는 똑같은 사람이지만 각자 속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변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고운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입신출세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묵자(墨子)가 염색할 실을 보고서 “푸른 물에 염색하면 푸르게 되고 누런 물에 염색하면 누렇게 되니, 어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그 색이 함께 변하는구나.〔染於蒼則蒼 染於黃則黃 所入者變 其色亦變〕”라고 탄식했다는 고사가 있다. 《墨子 所染》
    [주D-009]국사(國士) : 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가장 우수한 재능의 소유자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진(晉)나라의 자객 예양(豫讓)이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으려다 실패하여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음을 당할 적에, “내가 예전에 섬겼던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는 나를 중인(衆人)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나도 그들을 중인으로 대접하는 것이고, 지백은 나를 국사로 예우했기 때문에 나도 그에게 국사로서 보답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86 刺客列傳 豫讓》
    [주D-010]벼 …… 용서하시고 : 고운이 명성에 걸맞지 않게 사실은 실력이 별로 없는데도 관대히 용납해 주었다는 뜻의 겸사이다.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의 “벼 싹에 가라지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고, 벼 곡식에 쭉정이가 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若苗之有莠 若粟之有秕〕”라는 말을 전용한 것이다.
    [주D-011]계수(桂樹)에 …… 생각하시어 : 고운이 옛날 당나라 과거에 급제했던 실력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는 뜻의 겸사이다. 계수는 과거 급제와 관련된 비유로 많이 쓰이는데, 진 무제(晉武帝) 때 현량 대책(賢良對策)에서 장원(壯元)을 한 극선(郤詵)이 소감을 묻는 무제의 질문에 “계수나무 숲의 가지 하나요, 곤륜산의 옥돌 한 조각이다.〔桂林之一枝 崑山之片玉〕”라고 답변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52 郤詵列傳》
    [주D-012]짧은 …… 것 : 재능이나 식견이 부족해서 일을 감당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한다. 《장자》 〈지락(至樂)〉의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가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의 물을 길을 수가 없다.〔褚小者不可以懷大 綆短者不可以汲深〕”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13]돌이 …… 일 : 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온다.
    [주D-014]거북이가 …… 일 : 진(晉)나라 공유(孔愉)가 거북이를 돈 주고 사서 방생(放生)을 하자, 그 거북이가 고맙다는 뜻으로 물속에서 몇 차례나 왼쪽을 돌아보고 사라졌는데〔龜中流左顧者數四〕, 공유가 나중에 여부정후(餘不亭侯)에 봉해져서 인장(印章)을 주조할 적에 그 인장의 거북이가 세 번이나 왼쪽을 돌아보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晉書 卷78 孔愉列傳》
    [주D-015]산을 …… 하지는 : 진(晉)나라 육기(陸機)가 지은 〈문부(文賦)〉의 “돌이 옥을 감추고 있으면 그 때문에 산이 빛나고, 물이 진주를 품고 있으면 내가 그 때문에 아름답게 된다.〔石韞玉而山輝 水懷珠而川媚〕”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文選 卷17》
    [주D-016]나무숲이 …… 여기게만 : 남조 제(齊)의 공치규(孔稚珪)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의 “나무숲은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시냇물은 한없이 수치스러워한다.〔林慙無盡 澗愧不歇〕”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주D-017]마음으로 …… 법인데 :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24년에 “덕행을 세우는 것이 최상이요, 공업을 이루는 것이 그다음이요, 훌륭한 말을 남기는 것이 그다음인데, 이 세 가지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없어지지 않으니, 이를 일러 썩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雖久不廢 此之謂不朽〕”라는 노(魯)나라 숙손표(叔孫豹)의 말이 나온다.
    [주D-018]이 …… 것 :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한다면 좋겠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한다면 좋지 않을 것이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19]전각(篆刻) : 조충전각(雕蟲篆刻)의 준말로, 벌레 모양이나 전서(篆書)를 조각하듯이 미사여구로 문장을 꾸미기나 하는 작은 기예라는 뜻의 겸사이다.
    [주D-020]붕(鵬)처럼 …… 행적 : 중국에 갔다가 신라에 돌아온 행적이라는 말이다. 대붕(大鵬)이 9만 리 창공 위로 올라가 남명(南冥)에서 북명(北冥)으로 날아간 이야기가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또 요동(遼東) 사람 정영위(丁令威)가 신선술을 닦은 뒤 천년 만에 한 마리 학이 되어 고향을 찾은 이야기가 《수신후기(搜神後記)》 권1에 나온다.
    [주D-021]반열반(般涅槃) : 고승의 죽음을 가리킨다. 범어 parinirvāṇa의 음역으로, 반열반나(般涅槃那) 혹은 줄여서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반(般), 즉 pari는 완전(完全)하다는 뜻으로, 완전 해탈의 경지에 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멸도(滅度), 원적(圓寂) 등으로 의역된다.
    [주D-022]솔도파(窣覩波) : 탑(塔)을 말한다. 범어(梵語) stūpa의 음역으로, 솔도파(率都婆), 솔도파(窣堵波), 수두파(藪斗婆)라고도 하며, 줄여서 탑파(塔婆) 혹은 탑이라고 한다.
    [주D-023]장차 …… 차에 : 남이야 뭐라고 하든 간에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글을 작성해 보려고 했다는 말이다. 《장자》 〈변무(騈拇)〉에 “남이 좋아하는 것만 덩달아 좋아하고, 정작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지 못하는 자〔適人之適而不自適其適者〕”가 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4]필추(苾蒭) : 비구(比丘) 즉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자 승려를 말한다. 범어(梵語) bhikṣu의 음역으로, 필추(苾芻), 비추(備芻)라고도 하며, 걸사(乞士)로 의역된다.
    [주D-025]제구(虀臼) : 사(辭), 즉 글을 가리킨다. 후한(後漢) 한단순(邯鄲淳)이 효녀 조아(曹娥)를 위해서 지은 이른바 〈조아비(曹娥碑)〉 뒷면에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 절묘 호사(絶妙好辭)라는 뜻으로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는 여덟 글자의 은어(隱語)를 써넣었는데, 후한 말에 조조(曹操)가 양수(楊修)와 함께 길을 가다가 이 글을 보았을 때 양수는 곧바로 알아챘으나 조조는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30리를 더 가서야 깨닫고는, 알고 모르는 것이 30리나 차이가 난다〔有智無智較三十里〕고 탄식했던 고사가 전한다. 참고로 황견은 오색 실〔色絲〕이니 절(絶)이 되고, 유부는 소녀(小女)이니 묘(妙)가 되고, 외손은 딸의 자식〔女子〕이니 호(好)가 되고, 제는 매운〔辛〕 부추이고 구(臼)는 받는 것〔受〕이니 사(辭)의 약자가 된다. 《世說新語 捷悟》
    [주D-026]광범위하게 …… 것이다 : 진(晉)나라 두예(杜預)가 《춘추좌씨전》의 〈서문〉에서 저자인 좌구명(左丘明)의 글에 대해서 “일마다 반드시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자세히 말하였다. 그 글은 유창하고 그 뜻은 심원하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건의 처음을 탐색하고 종말을 궁구하게 하며, 사건과 관련된 미세한 일을 찾고 궁극적인 것을 구명하게 해 준다.〔必廣記而備言之 其文緩 其旨遠 將令學者原始要終 尋其枝葉 究其所窮〕”라고 극찬한 내용이 나온다. 가외(可畏)는 후생(後生)을 가리킨다. 《논어》 〈자한(子罕)〉의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다.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27]서소(西笑)하는 이 : 원래는 서쪽의 장안(長安)을 향해 웃음 짓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관동(關東) 즉 중원(中原)의 사람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서쪽 즉 중국을 사모하여 건너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후한(後漢) 환담(桓譚)의 《신론(新論)》 〈거폐(祛蔽)〉에 “사람들이 장안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서면서 서쪽을 향해 웃음 짓고, 고기 맛이 좋은 것을 알면 푸줏간을 대하고서 입맛을 크게 다신다.〔人聞長安樂 則出門西向而笑 知肉味美 則對屠門而大嚼〕”라는 관동의 속담을 소개하는 말이 나온다.
    [주D-028]광노(狂奴)의 고태(故態) : 후한(後漢)의 고사(高士) 엄광(嚴光)에게 사도(司徒) 후패(侯覇)가 후자도(侯子道)를 보내 초청하였는데, 엄광이 후패를 매도하면서 입으로 간단히 대답하자 후자도가 보고할 말이 별로 없는 것을 혐의하여 몇 마디만 더 해 달라고 요청하니, 엄광이 “채소를 사면서 더 달라고 떼쓰는 격이다.〔買菜乎 求益也〕”라고 핀잔을 주었다. 후패가 이 사연을 적어서 광무제(光武帝)에게 보고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미친 작자의 옛날 하던 버릇 그대로이다.〔狂奴故態也〕”라고 했다는 고사가 진(晉)나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나온다. 엄광은 광무제의 어릴 때 친구이다.
    [주D-029]원심(猿心) :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로,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조급하게 동요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대일경(大日經)》 〈주심품(住心品)〉에서 설명하는 60종(種)의 심상(心相) 중에 원후심(猿猴心)이 나온다. 그리고 심신이 산란하여 제어하기 어려울 때, 심원의마(心猿意馬)라는 비유를 쓰기도 한다.
    [주D-030]시순(時順) :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사람의 일생을 말한다. 《장자》 〈양생주(養生主)〉의 “마침 그때에 태어난 것은 선생이 올 때가 되었기 때문이요, 마침 이때에 세상을 떠난 것은 선생이 갈 때가 된 것이니 도리상 순응해야 할 일이다. 자기에게 닥친 시운을 편안히 여기고서 그 도리를 이해하여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슬픔과 기쁨 따위의 감정이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適來 夫子時也 適去 夫子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1]내가 …… 바이다 : 고운이 《한서(漢書)》의 기술 방식에서 한 수 배웠다는 말이다. 반사(班史)는 반고(班固)가 지은 사서(史書)인 《한서》를 가리키고, 일반(一斑)은 표범 무늬 중의 하나의 반점(斑點)이라는 말이다.
    [주D-032]원각 조사(圓覺祖師)에게 10세손이 되고 : 원각은 중국 선종(禪宗) 초조(初祖)인 달마(達磨)에게 당 대종(唐代宗)이 내린 시호인데, 달마로부터 혜가(慧可), 승찬(僧瓚), 도신(道信), 홍인(弘忍)을 거쳐 6조(祖) 혜능(慧能)에 이르고 여기에서 다시 남악 회양(南嶽懷讓), 마조도일(馬祖道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거쳐 무염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주D-033]득난(得難) : 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나라에 5품이 있으니, 성이ㆍ진골ㆍ득난이 있다. 득난은 얻기 어려운 귀한 성이라는 말인데, 〈문부〉에 ‘혹 쉽게 구해 어려운 것을 얻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육두품을 지칭하는데, 숫자가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일명에서 구명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다음 5품에 사두품과 오두품이 있는데, 이것은 말할 것도 없다.〔國有五品 曰聖而 曰眞骨 曰得難 言貴姓之難得 文賦云 或求易而得難 從言六頭品 數多爲貴 猶一命至九 其四五品不足言〕”라고 하였다. 〈문부(文賦)〉는 진(晉)나라 육기(陸機)의 작품이다. 주관(周官)에서는 일명(一命)의 관직이 가장 낮고, 구명(九命)이 가장 높다.
    [주D-034]조 문왕(趙文王)의 옛일 : 검술을 좋아했던 일을 말한다. 《장자》 〈설검(說劒)〉에 “옛날 조 문왕이 검술을 좋아하였으므로 문하에 모여 식객 노릇을 하는 검사가 3천 명이 넘었다.〔昔趙文王喜劍 劍士夾門而客三千餘人〕”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법장(法藏) :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성불하기 전에 인지(因地)에서 비구(比丘)로 수행할 때의 이름이다.
    [주D-036]아해(阿孩) : 탑본의 원주(原註)에 “방언에 아라고 하니 중국말과 다를 것이 없다.〔方言謂兒 與華無異〕”라고 하였다.
    [주D-037]세성(歲星)이 …… 때 : 12세를 말한다.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9년의 “나이가 12세라면 이것을 일종이라고 이르니, 세성 즉 목성(木星)이 끝까지 한 번 천체(天體)를 돈다는 것이다.〔十二年矣 是謂一終 一星終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38]구류(九流) : 선진(先秦) 시대의 9개 학술의 유파로,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잡가(雜家), 농가(農家)의 학파를 말한다.
    [주D-039]의(䚷) : 탑본의 원주에 “방언으로 허락하는 말이다.〔方言許諾〕”라고 하였다.
    [주D-040]힘은 …… 왕성하였다 : 말세의 쇠한 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다. 공공씨(共工氏)가 전욱(顓頊)과 싸우다가 성이 나서 부주산(不周山)을 머리로 치받자 하늘 기둥이 부러지면서 하늘은 서북쪽으로 기울고 땅은 동남쪽으로 꺼졌다. 이에 여와씨(女媧氏)가 자라의 다리를 잘라서 땅의 사방 기둥을 받쳐 세우고, 오색(五色)의 돌을 구워서 터진 하늘을 메웠다〔補天〕는 전설이 있다. 《淮南子 覽冥訓》 《列子 湯問》
    [주D-041]빠른 …… 도착하였다 : 나이는 비록 어려도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어떤 어른도 따라갈 수가 없다는 뜻으로 극찬한 말이다. 서진(西晉) 장재(張載)가 촉군 태수(蜀郡太守)로 부임하는 부친 장수(張收)를 따라 촉으로 들어가서 〈검각명(劍閣銘)〉을 지었는데, 익주 자사(益州刺史) 장민(張敏)이 이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그 글을 위에 아뢰니, 세조(世祖)가 사신을 보내 그 글을 돌에 새기게 했던 고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양(梁)나라 유협(劉勰)이 지은 《문심조룡(文心雕龍)》 〈명잠(銘箴)〉에 “오직 장재의 〈검각명〉을 보건대, 그 재능이 탁월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빠른 발로 치달려서 뒤에 떠나 먼저 도착하였으니, 민한 지역에 그 명이 새겨진 것도 온당한 일이었다고 하겠다.〔惟張載劍閣 其才淸采 迅足駸駸 後發前至 勒銘岷漢 得其宜矣〕”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42]나는 …… 없으니 : 이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에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교전(交戰)할 적에, 제나라 고고(高固)가 진나라 진영을 유린하며 기세를 떨치고 돌아온 뒤에 “용기가 필요하다면 나의 남은 용기를 팔아 주겠다.〔欲勇者 賈余餘勇〕”라고 소리쳤던 기록이 전한다. 《春秋左氏傳 成公2年》
    [주D-043]밤중의 …… 쉽고 : 유식(唯識) 계통의 불교 종파에서 말하는 삼성(三性) 중의 하나인 망집(妄執)의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설명할 때 흔히 거론하는 사례의 하나로,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있다고 인식하면서 집착하는 오류를 가리킨다.
    [주D-044]공중의 …… 어렵다 : 길쌈을 하여 실을 매우 가늘게 만들었는데도 ‘거칠다〔麤〕’고 항의하는 광인(狂人)에게 허공을 가리키면서 “이 실은 너무도 가는 실이라서 보이지 않는다.”라고 하자, 광인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대승(大乘)에서 주장하는 공(空) 사상을 허공의 실에 비유한 것으로, 《고승전(高僧傳)》 권2 〈구마라습전(鳩摩羅什傳)〉에 그의 스승 반두달다(盤頭達多)의 말로 나온다.
    [주D-045]물고기는 …… 아니요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 “당신의 그런 행동 방식으로 그런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以若所爲 求若所欲 猶緣木而求魚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6]토끼는 …… 아니다 :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고사가 《한비자》 〈오두(五蠹)〉에 나온다.
    [주D-047]하루에 …… 잃었다 : 재능이 워낙 출중해서 제자가 스승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한 달에 걸쳐 외울 분량을 각현(覺賢)이 하루에 모두 외워 버리자, 그의 스승인 구바리(鳩婆利)가 “하루에 30명의 몫을 감당했다.〔一日敵三十夫也〕”라고 찬탄한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2 〈불타발타라전(佛陀跋陀羅傳)〉에 보인다. 남천(藍茜)이 본색(本色)을 잃었다는 말은, 쪽〔藍〕과 꼭두서니〔茜〕에서 나온 청색과 홍색이 쪽과 꼭두서니보다 더 진하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비유로 쓴 말이다.
    [주D-048]요배(坳杯)의 비유 : 요배는 움푹 패인 마루에 담긴 한 잔의 물이라는 뜻으로, 신라와 같은 좁은 땅에서는 포부를 펼 수 없으니, 더 넓은 중국으로 건너가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물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우기에 역부족이다. 한 잔의 물을 움푹 패인 마루 위에 부어 놓으면, 지푸라기야 배처럼 뜨겠지만 잔을 놓으면 달라붙을 것이다. 이는 물이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49]용의 …… 되었다 : 중국에 가서 불법(佛法)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천금의 가치가 나가는 구슬은 반드시 깊은 못 속에 숨어 사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법이다.〔夫千金之珠 必在九重之淵 而驪龍頷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0]내 …… 아닌데 : 《시경》 〈백주(柏舟)〉의 “내 마음은 돌멩이가 아니라서 굴려 볼 수도 없고, 내 마음은 돗자리가 아니라서 돌돌 말 수도 없네.〔我心非石 不可轉也 我心非席 不可卷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51]장경(長慶) : 당 목종(唐穆宗)의 연호로 821년에서 824년까지이다.
    [주D-052]기년(耆年)의 노인 : 60세 정도의 노인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60이 되면 기라고 하며, 이때에는 남에게 지시하며 일을 시킨다.〔六十曰耆 指使〕”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그를 붙잡고서 말하기를 : 참고로 《시경》 〈억(抑)〉에 “손으로 잡아 줄 뿐만이 아니라 일로 보여 주며, 대면하여 가르쳐 줄 뿐만이 아니라 그 귀를 붙잡고 말해 주노라.〔匪手攜之 言示之事 匪面命之 言提其耳〕”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4]멀리 …… 것 : 상고 시대에 복희씨가 “가까이는 자신에게서 상(象)을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여 이에 비로소 팔괘를 만들었다.〔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 始作八卦〕”라는 말이 《주역》 〈계사전 하(繫辭傳下)〉에 나온다.
    [주D-055]강서(江西) : 중국 선종(禪宗) 남종(南宗)의 제7조(祖) 남악 회양(南嶽懷讓)의 제자로, 강서 지방에서 돈오(頓悟)의 선풍(禪風)을 떨친 마조도일(馬祖道一)을 가리킨다.
    [주D-056]향산(香山)의 …… 사이였다 : 당 무종(唐武宗) 때에 백거이(白居易)가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있다가 치사(致仕)한 뒤에 향산으로 들어가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자호하고는 승려 여만(如滿) 등과 함께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고 만년을 보냈던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卷166 白居易列傳》
    [주D-057]유검루(庾黔婁) : 남조 양(梁)의 효자이다. 부친이 병들자 자신의 목숨을 대신 바치겠다고 기도했는가 하면, 병의 증세를 살피기 위해 부친의 대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또 부친이 죽자 예법을 초과하여 여묘살이를 하며 극진히 거상(居喪)하였다.
    [주D-058]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 : 한신(韓信)이 항우(項羽)의 사람됨에 대해서 유방(劉邦)에게 “항왕은 사람을 만나면 공경하고 자애로운 태도로 대하면서 말 역시 인정이 넘치게 하며, 누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눈물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지만, 정작 자기 부하가 공을 세워서 작위를 내려 봉해 주어야 할 경우에는 그 인수(印綬)가 닳아 없어지도록 손에 쥐고서 차마 주지를 못하니, 이것이 이른바 부인의 인이라고 하는 것이다.〔項王見人恭敬慈愛 言語嘔嘔 人有疾病 涕泣分食飮 至使人有功當封爵者 印刓敝 忍不能與 此所謂婦人之仁也〕”라고 평한 고사가 있다. 대본의 ‘완(刓)’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주D-059]황제의 명령 : 불교를 혁파하라는 당 무종(唐武宗)의 명령을 말한다. 이때 수만 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십만의 승려가 환속되는 등 중국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폐불이 단행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이를 회창(會昌)의 법난(法難)이라고 한다.
    [주D-060]연성벽(連城璧) : 전국 시대 진 소왕(秦昭王)이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15성과 바꾸자고 청한 화씨벽(和氏璧)으로, 나라의 진귀한 보배를 뜻한다. 조나라 인상여(藺相如)가 이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에 갔다가 성을 주겠다는 진나라의 약속이 미덥지 못하자, 다시 화씨벽을 온전히 보전해서 조나라로 돌아가게 했던 ‘완벽귀조(完璧歸趙)’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주D-061]우담(優曇) : 우담발라(優曇跋羅)의 준말이다. 불교 전설에 의하면, 이 꽃은 3천 년에 한 번 피는데, 그때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이 세상에 나오거나 부처가 출현하여 설법을 한다고 한다.
    [주D-062]의문(倚門)의 바람 :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초조하게 안부를 걱정하는 어버이의 간절한 심정을 말한다. 전국 시대 제(齊)나라 왕손가(王孫賈)가 15세에 민왕(閔王)을 섬겼는데, 그 모친이 “네가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면 내가 집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고, 네가 저녁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을 때면 내가 마을 문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女朝出而晩來 則吾倚門而望 女暮出而不還 則吾倚閭而望〕”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戰國策 齊策6》
    [주D-063]산중재상(山中宰相) : 남조 제(齊)의 고사(高士) 도홍경(陶弘景)을 가리킨다. 그가 고제(高帝) 때에 제왕시독(諸王侍讀)을 지내다가 관복을 벗어서 신무문(神武門)에 걸어 놓고 사직소를 남긴 뒤에 구용(句容)의 구곡산(句曲山)에 은거하였는데, 양 무제(梁武帝)가 즉위하여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으므로 산중재상이라고 일컬어졌다. 《南史 卷76 隱逸列傳下 陶弘景》
    [주D-064]대사를 …… 풀고는 : 《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해후하여 서로 만났으니, 이제 나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D-065]대사는 …… 셈이니 : 가문(家門)으로는 무열왕(武烈王)의 부친인 용수(龍樹)의 후손이 되고, 불문(佛門)으로는 대승(大乘)의 공관(空觀)을 확립한 용수보살(龍樹菩薩)의 법손(法孫)이 된다는 말이다. 용수보살은 선종(禪宗)에서 초조(初祖)인 마하가섭(摩訶迦葉) 이후 제13조로 추앙되었다.
    [주D-066]이곳은 …… 곳입니다 : 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선조의 휘는 인문이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한 공을 인정하여 임해군공으로 봉하였다.〔祖諱仁問 唐酬伐穢貊 封爲臨海郡公也〕”라고 하였다.
    [주D-067]금전(金田) : 황금을 땅에 깐 지역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가리킨다. 금지(金地)라고도 한다. 인도(印度) 사위성(舍衛城)의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석가(釋迦)의 설법(說法)을 듣고 매우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구매하려고 하였다. 이에 태자가 장난삼아서 “황금을 이 땅에 가득 깔면 팔겠다.”라고 하였는데, 수달 장자가 실제로 집에 있는 황금을 코끼리에 싣고 와서 그 땅에 가득 깔자, 태자가 감동하여 그 땅을 매도하는 한편 자기도 원중(園中)의 임목(林木)을 희사하여 마침내 최초의 불교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를 건립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唐西域記 卷6》
    [주D-068]대중(大中) : 당 선종(唐宣宗)의 연호로 847년에서 859년까지이다.
    [주D-069]종을 …… 하고 : 《예기》 〈학기(學記)〉에 “질문에 잘 대응하는 자는 종을 치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울려 주고,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 준다.〔善待問者如撞鍾 叩之以小者則小鳴 叩之以大者則大鳴〕”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0]거울이 …… 하면서 :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가 《효경》을 강독하려고 하자, 사안(謝安)과 사석(謝石)이 사람들과 함께 사적으로 강습하였다. 이때 차윤(車胤)이 사씨(謝氏)에게 질문하는 것을 어려워하면서 원교(袁喬)에게 “묻지 않으면 덕음(德音)에 손상되는 점이 있을 것이고, 많이 물으면 두 분 사씨를 귀찮게 할 것이다.”라고 하니, 원교가 “필시 그런 혐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차윤이 “그런 줄을 어떻게 아는가?”라고 하니, 원교가 “밝은 거울이 자주 비춰 준다고 피곤해 한 적이 언제 있었으며, 맑은 강물이 온화한 바람을 마다한 적이 언제 있었던가.〔何嘗見明鏡疲於屢照 淸流憚於惠風〕”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世說新語 言語》
    [주D-071]산상(山相)에게 …… 말 : 산중재상(山中宰相) 즉 김흔(金昕)에게 대답한 “인연이 있으니 머물러야 하겠지요.〔有緣則住〕”라는 말을 가리킨다.
    [주D-072]외람되게 …… 것 : 자격도 없는 사람이 허명만 지니고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뜻의 겸사이다. 제 선왕(齊宣王)이 피리 연주를 좋아하여 항상 300인을 모아 합주하게 하자,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슬쩍 끼어들어 피리 부는 흉내만 내면서 국록을 타 먹곤 하였는데,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한 뒤에 한 사람씩 연주하게 하자 본색이 드러날까 겁낸 나머지 도망쳤다는 고사가 전한다. 《韓非子 內儲說上》
    [주D-073]바람을 피한 새 : 자신의 생리에 맞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뜻으로 비유한 말이다. 원거(鶢鶋)라는 해조(海鳥)가 바람을 피해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와 앉자, 임금이 그 새를 정중히 모셔다가 종묘(宗廟)에서 환영연을 베풀면서, 순(舜) 임금의 소악(韶樂)을 연주하고 소ㆍ양ㆍ돼지고기의 요리로 대접하니, 그 새는 눈이 부시고 근심과 슬픔이 교차하여 고기 한 점도 먹지 못하고 술 한 잔도 마시지 못한 채 3일 만에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지락(至樂)〉에 나온다.
    [주D-074]무우(霧雨) …… 표범 : 남산(南山)의 검은 표범은 무우(霧雨)가 계속된 7일 동안 먹을 것이 없어도 그 속에 가만히 숨어 있을 뿐, 게걸스러운 멧돼지와는 달리 산 아래로 내려가서 먹을 것을 구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의 털 무늬를 아름답게 보전하기 위해서였다는 남산현표(南山玄豹)의 고사가 전한다. 《列女傳 卷2 賢明傳 陶答子妻》
    [주D-075]남북상(南北相)으로 있었는데 : 탑본(榻本)의 원주(原註)에 “각각 남상과 북상의 관직에 거하였으니, 좌상과 우상이라는 말과 같다.〔各居其官 猶左右相〕”라고 하였다.
    [주D-076]주풍(周豐)이 …… 말 : 노 애공(魯哀公)이 은사 주풍에게 유우씨(有虞氏)와 하후씨(夏后氏)가 백성에게 신임과 공경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 묻자, 주풍이 “잡초 우거진 무덤 사이에서는 백성들에게 슬퍼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슬퍼하고, 사직과 종묘 근처에서는 백성들에게 공경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공경한다. 은나라 사람이 맹서하는 글을 짓자 백성들이 배반하기 시작하였고, 주나라 사람이 회합하는 일을 행하자 백성들이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예의와 충신과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이 없이 백성의 위에 군림한다면, 비록 굳게 약속을 한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풀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墟墓之間 未施哀於民而民哀 社稷宗廟之中 未施敬於民而民敬 殷人作誓 而民始畔 周人作會 而民始疑 苟無禮義忠信誠慤之心以涖之 雖固結之 民其不解乎〕”라고 대답한 기록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주D-077]백종(伯宗) :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로 진 경공(晉景公)을 섬겼다. 경공 14년에 양산(梁山)이 무너지는 변고가 발생했을 때, 백종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는 현상이라고 위무하면서 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고사가 전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춘추좌씨전》 성공(成公) 5년에 “양산이 무너지자 진나라 군주가 역마를 보내 백종을 급히 부르게 하였다.〔梁山崩 晉侯以傳召伯宗〕”라는 말이 나온다.
    [주D-078]원공(遠公) : 진(晉)나라의 고승 혜원(慧遠)을 가리킨다.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머물면서 한번도 산 밖으로 나간 적이 없으며, 환현(桓玄)이 칭제(稱帝)하며 조서를 내려 승려들에게 속인을 향해 절을 하도록 강요했을 때에도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반박하였다.
    [주D-079]태제(太弟) : 탑본의 원주(原註)에 “추후에 혜성대왕의 시호를 봉하여 높였다.〔追封尊諡惠成大王〕”라고 하였다. 혜성대왕은 경문왕의 아우 위홍(魏弘)의 시호이다.
    [주D-080]유(有)만 …… 것이다 : 《문심조룡(文心雕龍)》 〈논설(論說)〉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서 인용한 것이다.
    [주D-081]몸을 …… 있는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말로, 원래는 공자가 순(舜) 임금을 찬양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그저 임금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뜻의 겸사로 쓰였다.
    [주D-082]남종(南宗) : 중국 선종(禪宗) 가운데 6조(祖) 혜능(慧能) 계열의 돈오(頓悟)를 위주로 하는 종파를 가리킨다. 북종(北宗)은 점수(漸修)를 위주로 하는 신수(神秀) 계열의 종파를 가리킨다. 우리나라는 모두 남종 계열이다.
    [주D-083]순(舜) 임금은 …… 말인가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안연(顔淵)의 말인데, 임금 자신도 노력하면 대사와 같은 훌륭한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상대방을 공경하고 부러워하며 자신을 경책한 말이다.
    [주D-084]나라 …… 되었다 : 사람들이 자기 내부의 불성(佛性)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사람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의주(衣珠)는 옷 속의 보주(寶珠)라는 말로, 불성을 뜻하는 말이다. 《법화경(法華經)》 〈오백제자수기품(五百弟子授記品)〉에 “속옷 속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不覺內衣裏 有無價寶珠〕”라는 말이 나온다. 무옥(廡玉)은 처마 아래에 놓인 옥돌이라는 말로, 타인의 보배를 뜻하는 말이다. 직경이 1자나 되는 옥돌을 얻은 농부가 불길한 괴석이라고 속이는 이웃집 사람의 말을 듣고 처마〔廡〕 아래에 놔두었다가 다시 발광하는 현상에 놀라 들판에 버린 것을 이웃집 사람이 몰래 왕에게 바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고금사문유취속집(古今事文類聚續集)》 권26 〈득옥능변(得玉能辨)〉에 나온다.
    [주D-085]헌강대왕(獻康大王)이 익실(翼室)에 거하여 : 헌강왕이 부왕(父王)인 경문왕의 상을 당하여 정전(正殿) 대신 익실에 거하면서 상복을 입었다는 말이다. 익실은 정전 옆의 좌우에 있는 방이다.
    [주D-086]계옥(桂玉) : 계수나무 땔나무와 옥으로 지은 밥이라는 말이다. 전국 시대 소진(蘇秦)이 초(楚)나라에 가서 “초나라의 밥은 옥보다도 귀하고 땔감은 계수나무보다도 귀하다. 지금 내가 옥으로 지은 밥을 먹고 계수나무로 불을 때고 있으니, 이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楚國之食貴于玉 薪貴于桂 今臣食玉炊桂 不亦難乎〕”라고 불만을 토로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戰國策 楚策3》
    [주D-087]건부제(乾符帝)가 석명(錫命)하던 해 : 건부황제 즉 당 희종(唐僖宗)이 헌강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조서(詔書)를 내린 해라는 뜻으로, 헌강왕 4년(878)에 해당한다.
    [주D-088]만전(蠻牋) : 당나라 때 품질 좋은 신라의 종이를 칭하는 별명이었다. 보통 만전(蠻箋)이라고 한다.
    [주D-089]하상지(何尙之)가 …… 심성(心聲) : 남조 송 문제(宋文帝)가 불경(佛經)을 지남(指南)으로 하여 태평 시대를 이루고 싶다면서 그 대책을 묻자, 시중(侍中) 하상지가 혜원 법사(慧遠法師)의 말을 인용한 뒤에 사람들에게 오계(五戒)와 십선(十善)을 행하도록 하고 이를 나라의 정치에 확대 적용하면 감옥의 죄수가 없어지고 아송(雅頌)의 정치가 흥기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대답한 말이 양나라 승우(僧祐)가 지은 《홍명집(弘明集)》 권11에 수록된 하상지의 〈답송문황제찬양불교사(答宋文皇帝讚揚佛敎事)〉에 나온다. 심성은 말을 가리킨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이 지은 《법언(法言)》 권5 〈문신(問神)〉의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 따라서 소리와 그림으로 나타난 것만 보아도, 그 사람이 군자인지 소인인지 알 수가 있다.〔言心聲也 書心畫也 聲畫形 君子小人見矣〕”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90]삼외(三畏)는 …… 같으니 : 유교와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서로 통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삼외는 군자가 두려워하는 세 가지 일로,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을 두려워하는 것〔畏天命 畏大人 畏聖人之言〕’이다. 삼귀(三歸)는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오상(五常)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이다. 오계(五戒)는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淫)ㆍ불망어(不妄語)ㆍ불음주(不飮酒)를 말한다.
    [주D-091]황제가 …… 가을 : 당 희종(唐僖宗)이 황소(黃巢)의 난을 피해 서촉(西蜀) 성도(成都)로 몽진(蒙塵)한 중화(中和) 1년(881)의 가을로, 헌강왕 7년에 해당한다.
    [주D-092]나라에 …… 옳겠는가 :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궤 속에 넣어서 그냥 보관해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좋은 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까?〔有美玉於斯 韞櫝而藏諸 求善賈而沽諸〕” 하고 묻자, 공자가 “팔아야지, 팔아야 되고말고. 나 역시 제값을 주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자한(子罕)〉에 나온다.
    [주D-093]마니(摩尼) : 범어(梵語) maṇi의 음역으로, 말니(末尼)라고도 하며, 보주(寶珠)로 의역된다. cintāmaṇi는 진타마니(眞陀摩尼)로 음역되는데, 이것은 여의주(如意珠)라는 뜻이다.
    [주D-094]수레 …… 구슬 :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이 자신의 야광주를 자랑하며 “전후로 각각 12채의 수레를 비출 수 있는 구슬이 10개나 된다.〔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라고 자랑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
    [주D-095]옛날 …… 있었다 :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유방(劉邦)에게 “왕께서는 평소에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계시는데, 지금 대장을 임명하면서도 마치 어린아이를 부르는 것처럼 하고 있기 때문에 한신(韓信)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떠나간 것이다.〔王素慢無禮 今拜大將如呼小兒耳 此乃信所以去也〕”라고 충고하여 다시 예우하게 했던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찬후(酇侯)는 소하의 봉호(封號)이다.
    [주D-096]한왕이 …… 때문이었다 : 상산(商山)의 네 노인은 진(秦)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상산에 들어가서 은거했던 4인의 백발노인, 즉 동원공(東園公)ㆍ기리계(綺里季)ㆍ하황공(夏黃公)ㆍ녹리선생(甪里先生)의 상산사호(商山四皓)를 가리킨다. 이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초빙할 때에는 전혀 응하지 않다가 나중에 장량(張良)의 권유를 받고 나와서 태자로 있던 혜제(惠帝)를 보필했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097]내가 …… 되겠는가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세상에서 누구나 존경해야 할 대상이 세 가지 있으니, 작위와 연치와 덕성이 그것이다. 조정에서는 작위만 한 것이 없고, 향리에서는 연치만 한 것이 없고, 세상을 돕고 백성의 어른 노릇을 하는 데에는 덕성만 한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중 작위 하나를 가지고서 연치와 덕성의 둘을 지닌 사람에게 거만하게 굴어서야 되겠는가.〔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 惡得有其一以慢二哉〕”라는 말이 나온다.
    [주D-098]외로운 …… 있어서이겠는가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구름은 아무 생각 없이 봉우리 위에서 나오고, 새는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을 안다.〔雲無心以出岫 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D-099]대왕(大王)의 바람 : 전국 시대 굴원(屈原)의 제자인 송옥(宋玉)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만과 사치를 풍자할 목적으로 〈풍부(風賦)〉라는 글을 지으면서, 바람을 대왕지풍(大王之風)과 서인지풍(庶人之風)으로 구분하였는데, 후대에는 보통 제왕의 뜻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文選 卷13》
    [주D-100]집착함이 없는 것 : 《논어》 〈자한(子罕)〉의 “공자는 네 가지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에게는 사적인 뜻과 기필(期必)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과 이기적인 마음이 없었다.〔子絶四 毋意毋必毋固毋我〕”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101]상사(上士) : 자리이타(自利利他)의 행을 하는 보살(菩薩)을 가리킨다. 《석씨요람(釋氏要覽)》 권상에 “자리와 이타의 행이 없는 자를 하사라 하고, 자리는 있고 이타는 없는 자를 중사라 하고, 자리와 이타의 행이 있는 자를 상사라 한다.〔無自利利他行者 名下士 有自利無利他者 名中士 有二利 名上士〕”라는 《유가론(瑜伽論)》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주D-102]육의(六義) : 《시경》에 나타나는 문학의 창작 정신 및 원칙을 말하는데, 시의 작법상 세 가지의 체제라 할 풍(風)ㆍ아(雅)ㆍ송(頌)과 세 가지의 표현 방법이라 할 부(賦)ㆍ비(比)ㆍ흥(興)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주D-103]사선(四禪) …… 자였다 : 사선은 불교 용어로 사선정(四禪定) 혹은 사정려(四靜慮)라고 한다. 초선(初禪)과 제이선(第二禪)과 제삼선(第三禪)과 제사선(第四禪)의 과정이 있는데, 제사선에는 사청정(捨淸淨)ㆍ염청정(念淸淨)ㆍ불고불낙수(不苦不樂受)ㆍ심일경성(心一境性) 등 사지(四支)의 경지가 있다. 제삼선의 묘락(妙樂)을 여의었기 때문에 사청정(捨淸淨)이라고 칭하고, 오직 수양하는 공덕만 생각하기 때문에 염청정(念淸淨)이라고 칭한다고 한다.
    [주D-104]예전에 …… 되었습니다 : 증점(曾點)과 증삼(曾參) 부자(父子)가 모두 공자의 제자가 되었던 것처럼, 선왕(先王)인 경문왕과 헌강왕 자신 또한 똑같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공서화(公西華)가 먼저 자신의 포부에 대해 답변을 올리자 공자가 마지막으로 증점의 생각을 물었는데, 이에 증점이 조용히 비파를 연주하고 있다가 크게 한바탕 튕기고서 내려놓은 뒤에 일어나서는〔鼓瑟希 鏗爾 舍瑟而作〕 자신의 뜻을 말하여 공자의 허여를 받은 고사가 전한다. 《論語 先進》 또 증점의 아들인 증삼 즉 증자(曾子)가 공자를 모시고 앉았을 적에 공자가 이르기를 “선왕(先王)들은 지덕(至德)과 요도(要道)가 있어서 천하를 순하게 다스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화목하여 상하가 서로 원망함이 없었다. 네가 그것을 알겠느냐?”라고 하니, 증자가 자리를 피해 일어나면서〔避席〕 “삼(參)이 불민하니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孝經 開宗明義章》
    [주D-105]공동(崆峒)의 가르침 : 지인(至人)의 가르침이라는 말로, 대사의 교시를 뜻한다. 고대 전설상의 선인(仙人)인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에 은거하였는데, 황제(黃帝)가 재위(在位) 19년 만에 그를 찾아가 도를 묻고 수도 끝에 지도(至道)의 정수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장자》 〈재유(在宥)〉에 나온다. 공동산은 공동산(空同山)이라고도 한다.
    [주D-106]위수(渭水) 물가의 노옹(老翁) : 강태공(姜太公)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그가 위수 물가의 반계(磻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문왕(文王)을 처음 만나 사부(師傅)로 추대되었고, 뒤에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주D-107]흙다리 가의 유자(孺子) : 한(漢)나라의 장량(張良)을 가리킨다. 그가 한 노인의 신발을 흙다리〔圯橋〕 밑에서 주워 준 인연으로 태공(太公)의 병법을 전수받은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5 留侯世家》
    [주D-108]옛날 …… 있었는데 : 《진서(晉書)》 권9 〈태종간문제기(太宗簡文帝紀)〉에 “사문(沙門) 지도림(支道林)이 일찍이 말하기를 ‘회계왕은 육체는 좋은데 정신은 볼 것이 없다.〔會稽有遠體而無遠神〕’라고 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회계왕은 간문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봉호이다.
    [주D-109]인신(人臣) …… 갖추었으니 : 진(晉)나라 승상 왕도(王導)가 우비(虞)에게 “공유는 공재는 있어도 공망이 없고, 정담은 공망은 있어도 공재가 없다. 공재도 있고 공망도 있는 사람은 바로 그대이다.〔孔愉有公才而無公望 丁潭有公望而無公才 兼之者 其在卿乎〕”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晉書 卷76 虞列傳》 공재는 삼공(三公)이 될 만한 재능을 말하고, 공망은 그 인망을 말한다.
    [주D-110]은구(銀鉤) : 아름다운 필체의 글씨를 뜻하는 말이다. 진(晉)나라 색정(索靖)이 서법(書法)을 논하면서 “멋지게 휘돈 것이 흡사 은 갈고리와 같다.〔婉若銀鉤〕”라고 초서(草書)를 평한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卷60 索靖列傳》
    [주D-111]중수(中壽) : 80세를 가리킨다. 《장자》 〈도척(盜跖)〉에 “인생은 상수(上壽)가 100세요 중수(中壽)가 80세요 하수(下壽)가 60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 온갖 걱정과 우환을 제외하고 진정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수 있는 기간은 한 달 중에서 4, 5일에 불과할 따름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2]옛날의 관리들 : 한(漢)나라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가리킨다. 상국(相國)인 소하가 죽자 조참이 그 직책을 계승하여 소하의 법도를 그대로 준행하다가 3년 뒤에 죽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찬양하여 “소하의 법도는 분명하기가 선을 그은 것 같았네. 조참이 그 뒤를 이어 이를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하였네. 청정한 정사를 행한 그 덕분에, 백성들이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네.〔蕭何爲法 顜若畫一 曹參代之 守而勿失 載其淸淨 民以寧一〕”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54 曹相國世家》
    [주D-113]몸가짐은 …… 느렸다 : 진(晉)나라의 현인(賢人)인 조문자(趙文子)에 대해서 “몸가짐이 겸손하여 마치 옷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하였으며, 말은 낮고 느려서 마치 입으로 말을 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其中退然 如不勝衣 其言吶吶然 如不出諸其口〕”라고 칭찬한 말이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주D-114]누더기 …… 성자 : 《노자(老子)》 70장에 “성인은 겉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지만, 안에는 보배 구슬을 품고 있다.〔聖人被褐懷玉〕”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5]도(道)를 …… 실천하여 : 《노자》 41장에 “상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한다. 중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하게 반응한다. 하등의 인물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라는 말이 나온다.
    [주D-116]갈림길 속의 갈림길 : 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가 전한다. 《列子 說符》
    [주D-117]조사(祖師)께서도 …… 이기셨는데 : 불교 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일컬어지는 가섭(迦葉)이 어느 날 진흙을 발로 이기고 있자〔踏泥〕, 한 사미(沙彌)가 보고는 왜 손수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내가 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서 해 주겠느냐.〔我若不爲 誰爲我爲〕”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五燈會元 卷1 一祖摩訶迦葉尊者》
    [주D-118]도량에 앉아 지낸다 :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세상에 쓸모없는 노쇠한 이 몸이야, 그저 소요하며 도량에 앉아 지냄이 적격이리.〔世間無用殘年處 祗合逍遙坐道場〕”라는 말이 나온다. 《白樂天詩後集 卷17 道場獨坐》
    [주D-119]인사(麟史) : 《춘추》의 별칭이다. 《춘추》가 애공(哀公) 14년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경문(經文)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인경(麟經)이라고도 한다.
    [주D-120]공후(公侯)였던 …… 것이다 : 《춘추좌씨전》 민공(閔公) 원년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주D-121]우리의 …… 이르렀다 : 《논어》 〈옹야(雍也)〉에 “제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노나라를 한번 변화시키면 도의 경지에 이르게 할 수 있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122]더불어 …… 없으리라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의중(懿仲)이 자기 딸을 진경중(陳敬仲)에게 출가시키려 할 때 점을 쳐서 얻은 괘(卦) 중에 “8세 뒤의 후손에 이르러서는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으리라.〔八世之後 莫之與京〕”라는 말이 나온다. 《春秋左氏傳 莊公22年》
    [주D-123]여섯 마적(魔賊) : 인식 주체인 인간의 육근(六根)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경(六境)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육경은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주D-124]이 …… 아니겠는가 : 왕자(王者)와 같은 위인이 나올 500년의 시운(時運)에 맞추어서 대사가 이 세계에 출현하였다는 말이다.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500년마다 왕자가 반드시 나오게 되어 있다.〔五百年必有王者興〕”라는 말이 나오고, 〈진심 하(盡心下)〉에 요순(堯舜)과 탕(湯)과 문왕(文王)과 공자(孔子) 사이의 세월이 각각 500여 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천(大千)은 불교 용어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준말이다.
    [주D-125]복기시(復其始)의 설 : “공후였던 사람의 자손이 반드시 그의 시조(始祖)의 지위로 복귀할 것이다.〔公侯之子孫必復其始〕”라는 《춘추좌씨전》의 설을 말한다.
    [주D-126]가도(可道)가 …… 함은 : 《노자(老子)》 1장에 “도라고 명명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는 말이 나온다.
    [주D-127]즉불(卽佛)이 …… 함은 : 어떤 승려가 마조 선사(馬祖禪師)에게 “화상은 어찌하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설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爲止小兒啼〕”라고 하였고,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오등전서(五燈全書)》 권5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에 나온다.
    [주D-128]요 임금의 …… 있었나니 : 중국에 건너가 고승들을 역방(歷訪)하며 불법을 구한 끝에 마음으로 크게 깨닫고 나서는 그동안에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뗏목은 물을 건너기 위한 것인 만큼 일단 건너고 나면 필요없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방편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관광(觀光)은 《주역》 〈관괘(觀卦) 육사(六四)〉의 “나라의 휘황한 빛을 봄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이 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진 문물을 접하여 견식을 넓힌다는 의미로 통용된다.
    [주D-129]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치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
    [주D-130]인방(仁方) : 동방(東方)을 뜻한다. 인(仁)은 오행(五行) 중 목(木)에 소속되는데, 방위로 볼 때 동쪽에 해당한다.
    [주D-131]삼고(三顧) : 후한(後漢) 말에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 융중(隆中) 땅에서 초옥(草屋)을 짓고 농사지으며 은거하고 있다가, 세 번이나 그곳을 찾아온 유비(劉備)의 정성에 감동되어 세상에 나왔던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를 말한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
    [주D-132]칠보(七步)로 …… 않았지만 :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가 승조(僧稠)를 만나러 왔을 때 영접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승조가 “옛날 빈두로 존자가 아육왕(阿育王)을 영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일곱 걸음을 걸은 탓으로 7년 동안 나라가 잘못되게 하였다.〔昔賓頭盧迎王七步 致七年失國〕”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續高僧傳 卷16 僧稠傳》
    [주D-133]나오는 …… 귀하였고 : 대사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무척 드물었다는 말이다. 섭룡(葉龍)은 섭공(葉公)에게 나타난 용이라는 뜻이다. 섭공자고(葉公子高)라는 사람이 너무도 용을 좋아해서 집안 이곳저곳에 용을 새겨 장식해 놓자 진짜 용이 내려와서 머리를 내밀고 꼬리를 서렸는데, 섭공이 이를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달아났다는 섭공호룡(葉公好龍)의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잡사(雜事) 5〉에 나온다.
    [주D-134]떠나는 …… 높았나니 : 대사가 세속에 잠깐 머물다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훌훌 떨치고 미련 없이 떠나갔다는 말이다. 명홍(冥鴻)은 까마득히 하늘 위로 치솟아 사라지는 기러기라는 뜻이다.
    [주D-135]물 …… 여기다가 : 세상에 나와야 할 때에는 편협하게 은거만을 고수하지 않고 과감하게 나와서 행동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거주하면서 호계(虎溪)라는 시냇물을 결코 건너지 않았는데,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물을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또 허유(許由)와 소보(巢父)가 기산(箕山) 영수(潁水)에 숨어 살았는데, 요(堯)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서 귀를 씻었고, 이 말을 들은 소보는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주D-136]골에 …… 뛰어났어라 : 일단 산중에 들어가서는 철저하게 사원의 청규(淸規)를 지키며 엄격하게 수행했다는 말이다. 전진(前秦) 때의 고승 승랑(僧朗)이 금여곡(金輿谷)에서 수도하면서 승단(僧團)을 엄격하게 이끌었으므로, 그곳을 낭공곡(朗公谷)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5 僧朗傳》
    [주D-137]도외(島外) : 동해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섬의 밖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을 가리킨다.
    [주D-138]호중(壺中) : 호리병 속의 선경(仙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궁중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인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에 들어가서 선경의 낙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下 費長房》
    [주D-139]천인사(天人師) :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불(佛)의 10호(號) 중의 하나이다.
    [주D-140]그저 …… 것이로다 :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후세에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픈 일이다.〔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라는 말이 나온다.
    [주D-141]계봉(雞峯)에 …… 건재하리라 : 미래불(未來佛)인 미륵(彌勒)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이 비석은 건재할 것이라는 말이다. 계봉은 계족산(雞足山)으로 곧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부처의 수제자인 가섭(迦葉)이 여래(如來)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는 이를 부처의 부촉에 따라 미륵에게 전하기 위해 계족산에 가서 선정에 든 뒤에 가부좌하고 입멸하자 계족산 세 봉우리가 하나의 산으로 합쳐졌는데, 장차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손가락으로 튕기면 그 산이 다시 열리면서 가섭이 선정에서 깨어나 의발을 전하게 된다는 불교 설화가 전해 온다. 《佛祖統記 卷5 始祖摩訶迦葉尊者》
     

     

    고운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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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진감 화상 비명 병서〔眞監和尙碑銘 竝序



    대저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른 차이가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방 출신의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할 수도 있고 유교를 공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배를 띄우고 거듭 통역을 바꿔 가면서 유학을 해야 한다. 목숨은 조각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주(寶洲)에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니 먼저 어려운 일을 겪어야만 뒤에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험준한 곤륜산(崑崙山)을 꺼리지 않고 옥을 캐는 사람이나 여룡(驪龍)이 서린 심연(深淵)을 사양하지 않고 구슬을 찾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의 혜거(慧炬)를 얻으면 오승(五乘)의 광채와 융화되고, 유교의 가효(嘉肴)를 얻으면 육경(六經)의 진미를 만끽하게 되어, 1천 가문이 다투어 선에 들어오게 하고〔千門入善〕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一國興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 중에는 신독(身毒)궐리(闕里)에서 설하는 가르침이 흐름도 다르고 체제도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한 모퉁이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시험 삼아 논해 보겠다.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하나의 글자 때문에 한 문장의 뜻을 해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문장 때문에 전체의 의미를 해쳐서도 안 된다.〔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라고 하였다. 또 《예기(禮記)》에서도 “말의 뜻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는가. 상황에 따라서 각기 해당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논을 지어 “석가여래(釋迦如來)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能兼者 物不能兼受故也〕”라고 하였고, 심약(沈約)은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심법(心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일컬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月指〕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坐忘〕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멀리 오르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니, 언어로 비유를 취해서 말한들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겠는가.
    옛날 공자(孔子)는 문제자(門弟子)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予欲無言 天何言哉〕”라고 하였다. 이는 저 정명(淨名)이 침묵으로 문수(文殊)를 대하고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하늘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일반인들이야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하여 널리 우리나라를 빛낸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또 어찌 우리와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禪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요,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에서 벼슬하는 집안이었다. 수(隋)나라 군대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적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었는데, 그때 뜻을 굽혀 고구려의 백성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 뒤 성당(聖唐)의 시대에 와서 옛날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이 판도로 들어올 적에, 지금의 전주(全州) 금마(金馬)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은 창원(昌元)이라고 하는데, 재가 중에 출가인의 행동을 보였다. 모친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니 범승(梵僧)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阿㜷〕의 아들이 되고자 합니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는 것이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잉태하였다.
    선사는 태어날 적에 울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찍부터 언성(言聲)을 내지 않는 상서로운 싹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갈 무렵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을 피우는가 하면 꽃을 꺾어 헌화하곤 하였으며, 간혹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 그림자가 옮겨 가도록 꼼짝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사의 선본(善本)은 원래 백천겁(劫) 이전부터 길러진 것으로서 사람들이 발돋움해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머리를 땋은 아동 때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될 때까지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절실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한 말의 곡식도 저축한 것이 없었고, 또 천시(天時)를 훔칠 만한 조그마한 땅도 없어서 구복(口腹)의 봉양을 위해서는 오직 자기의 노동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생선 파는 일에 종사하며 어버이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려고 노력하였는데, 손은 수고롭게 그물을 짜지 않았어도 마음은 물고기 잡는 일을 이미 잘 알아서 철숙(啜菽)의 봉양을 넉넉히 하며 채란(采蘭)의 노래에 걸맞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흙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 봉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애오라지 힘닿는 대로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희미(希微)의 경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 뒤웅박〔匏瓜〕처럼 젊은 나이에 그냥 한 곳에만 죽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정원(貞元) 20년(804, 애장왕5)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겠다고 청하여 서쪽으로 가는 배에 발을 붙인 뒤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험난한 길도 평탄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자비의 배를 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넌 뒤에 피안(彼岸)에 도착하고 나서 국사(國使)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다르니, 여기에서 작별할까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와서 신감 대사(神鑑大師)를 찾아보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올렸는데, 절이 끝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생에서 아쉽게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다시 만나니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뒤에 얼른 인계(印戒)를 받게 하였는데, 마치 불이 마른 쑥으로 타 들어가고 물이 저습(低濕)한 곳으로 번져 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승도(僧徒)들은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聖人)을 여기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하였다.
    선사는 형모(形貌)가 검었으므로, 대중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며 말없이 처하는 것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後身)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니, 어찌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邑中之黔〕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만 비교될 뿐이었겠는가. 길이 적자(赤頿)청안(靑眼)과 더불어 색상(色相)으로 드러내 보일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원화(元和) 5년(810, 헌덕왕2)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니, 이는 성선(聖善)의 예전의 꿈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구슬처럼 맑게 한 뒤에 다시 배움의 바다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서 마치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쪽보다 더 푸른 것처럼 스승을 능가하였다. 마음은 지수(止水)와 같이 맑았지만 행적은 조각구름과 같이 떠돌았다.
    본국의 승려인 도의(道義)가 선사보다 먼저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는데, 해후하여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適願〕, 이는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었다. 사방으로 멀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불지견(佛知見)을 증득하고는 의공(義公)이 먼저 고국에 돌아가자 선사는 그 길로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만 길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송실(松實)을 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3년이요, 그 뒤에 다시 자각(紫閣)으로 나와 번화한 교통의 요지에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布施)하며 바쁘게 왕래한 것이 또 3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행(苦行)의 수행을 일단 마친 뒤에, 다른 지방에 만행(萬行)을 하는 일도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를 터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몸의 근본인 고향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태화(太和) 4년(830, 흥덕왕5)에 귀국하니, 대각(大覺) 상승(上乘)의 빛이 우리 인역(仁域)을 환히 비췄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봉필(鳳筆)을 날려 영접하여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지난번에 돌아왔는데 상인(上人)이 잇따라 이르러서 두 분의 보살(菩薩)이 되셨도다. 예전에 흑의(黑衣)의 인걸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납의(衲衣)의 영걸을 보게 되었도다. 미천(彌天)의 자애와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며 의지하고 있으니,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雞林)의 경내를 가지고 길상(吉祥)의 집을 이룩하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露嶽) 장백사(長柏寺)에 석장(錫杖)을 머물렀는데, 의원의 집에 환자가 많은 것처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사원이 비록 널찍하긴 하였지만, 물정(物情)이 스스로 비좁게 여겼으므로, 마침내 걸어서 강주(康州) 지리산(智異山)으로 갔다. 그때 몇 마리의 오도(於菟)가 포효하며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은 피하고 평탄한 길로 향하는 것이 유기(兪騎)와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따르는 자들이 겁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이것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영산(靈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적에 맹수가 앞길을 인도한 결과 깊이 산혈(山穴) 속으로 들어가서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을 보게 된 일과 사적(事跡)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니, 저 축담유(竺曇猷)가 꾸벅꾸벅 조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서 송경(誦經)하는 소리를 잘 듣게 한 일만 전적으로 승사(僧史)에서 미담으로 꼽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화개곡(花開谷)의 고(故) 삼법 화상(三法和尙)의 난야(蘭若)의 옛터에 당우(堂宇)를 수축하니, 엄연히 조물(造物)이 이루어 놓은 것만 같았다.
    개성(開成) 3년(838, 민애왕1)에 민애대왕(愍哀大王)이 갑작스럽게 보위에 오르고 나서 깊이 부처의 자비에 의탁할 목적으로 새서(璽書)를 내리고 재(齋)를 올리는 비용을 보내며 특별히 발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발원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을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한편으로 깨닫는 점이 있었다. 선사가 색(色)과 공(空) 두 가지를 초월하고 정(定)과 혜(慧)에 모두 원만하다 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 혜소(慧昭)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이 ‘소(昭)’ 자는 성조(聖朝)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이와 함께 대황룡사(大皇龍寺)에 사적(寺籍)을 편입시키고 경읍(京邑)으로 올라오도록 징소(徵召)하였는데, 왕복하는 사신의 말고삐가 길에서 교차하였지만, 선사는 산악처럼 우뚝 서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에 승조(僧稠)가 원위(元魏)의 세 차례 초빙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大道)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在山行道 不爽大通〕”라고 하였는데, 깊은 산속에 거하며 고상한 뜻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달라도 그 지취(志趣)를 서로 같이 한다고 하겠다. 여러 해를 머무는 동안 가르침을 청하는 자들이 벼와 삼대처럼 대열을 이루어 거의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이한 지역을 두루 물색하다가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전망이 트이고 상쾌하기가 으뜸이었으므로 이곳에 선찰(禪刹)을 경영하였다. 뒤로는 노을 진 산봉우리를 기대고 앞으로는 구름 이는 시내를 굽어보았다. 시계(視界)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악이요, 귀뿌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와 날리는 여울물 소리이다.
    여기에 또 봄에는 냇물에 꽃잎이 떠서 흘러가고,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이 길에 드리우고, 가을에는 골짜기에 달빛이 부서지고, 겨울에는 산마루에 흰 눈이 뒤덮인다. 이처럼 사시에 따라 모습을 뒤바꾸고 만상(萬象)이 빛을 교차하는 가운데, 100가지 자연의 피리 소리가 조화롭게 연주되고 1천 개의 바윗돌이 빼어난 자태를 경쟁한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에서 노닐었던 자들도 여기에 와서는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기를,
    원공(遠公)의 동림(東林)을 바다 밖으로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蓮花世界)야 범인의 상상으로 추측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만, 호리병 속〔壺中〕에 별도로 천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
    하였다. 대나무 홈통을 시렁처럼 이어 물을 끌어 와서 섬돌 주위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사원의 현판을 삼았다.
    선종(禪宗)에서의 법통을 손꼽아 세어 보면, 선사는 바로 조계(曹溪 혜능(慧能))의 현손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六祖 혜능)의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분 바른 벽에 채색을 하여 널리 중생을 유도(誘導)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이는 경(經)에서 말한 바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까닭에, 현란하게 채색하여 여러 가지 상들을 그린 것이다.〔爲說衆生故 綺錯繪衆像〕”라고 한 것이다.
    대중(大中) 4년(850, 문성왕12) 1월 9일 아침에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하니, 내가 이제 가려 한다. 일심(一心)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塔)을 세워서 육신을 보존하려 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서 행적을 기록하려 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끝내자 앉은 자세로 입멸하였다. 세속의 나이로 77세요, 승려의 나이로 41세였다. 이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갑자기 일어나고, 범과 늑대가 슬피 울부짖었으며, 삼나무와 잣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색(紫色)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귀로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양사(梁史)에도 시중(侍中) 저상(褚翔)이 사문(沙門)을 청해 모친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복을 빌었을 때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거룩하게 말 없는 가운데 감응한 것에 어찌 속임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道)에 뜻을 둔 자들은 말을 전해 조문하였고, 정(情)을 잊지 못하는 자들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해하며 애도한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영함(靈函 관곽(棺槨))과 유수(幽隧 묘혈(墓穴))를 사전에 준비해 두게 하였던바, 제자 법량(法諒) 등이 호곡하며 선사의 시신을 받들어 하루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 묘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말도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입는 것은 허름한 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 현귀한 자들이 때때로 찾아와도 대접하는 음식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문인이 배 속을 거북하게 할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하기라도 하면, 선사가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서 찾아왔을 것이니, 거친 밥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고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이 대하였다. 매번 왕인(王人 사신)이 역마(驛馬)를 타고 왕명을 전하러 와서 법력(法力)을 멀리서 기원할 때면 말하기를,
    “왕토(王土)에 거하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마음을 기울여 호념(護念)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뭐하러 꼭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 같은 이 몸에게 멀리 와서 왕명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역마가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실로 안쓰럽기만 합니다.”
    하였다. 혹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자가 있으면, 질화로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만들지도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을 경건히 할 따름이다.”
    하였으며, 또 중국차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돌솥에 불을 지피며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달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하였다. 진성(眞性)을 보지하고, 속정(俗情)을 멀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선사는 본디 범패(梵唄)를 잘하였다. 그 음성은 마치 금옥(金玉)이 울리는 것 같았는데, 측조(側調)로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고도 애잔하여 제천(諸天)의 신들을 환희하게 할 정도여서 길이 먼 곳까지 유전(流傳)될 만한 것이었다. 이를 배우는 자들이 당우(堂宇)에 가득하였는데, 선사는 싫증을 내지 않고 이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동국(東國)에서 어산(魚山 범패)의 묘음(妙音)을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는 것〔掩鼻〕처럼 하면서 옥천(玉泉 진감 선사)의 여향(餘響)을 본받고 있으니, 이 어찌 성문(聲聞)으로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조정 때였는데, 상이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여긴 나머지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가 선사의 유계(遺戒) 내용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문인들이 능곡(陵谷)을 염려하여 선사의 법도를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하게 할 방도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내공봉(內供奉) 일길한(一吉干)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낭(嵩文臺郞) 정순일(鄭詢一)이 쇠를 자를 정도로 마음을 같이하여 선사의 행적을 비석에 새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헌강대왕(憲康大王)이 지화(至化)를 드넓히고 진종(眞宗)을 흠앙하는 뜻에서 진감 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는 탑명을 내리는 한편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누리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해는 양곡(暘谷)에서 떠서 으슥한 곳을 비추지 않는 때가 없고, 바닷가 해안에 뿌리박은 향초는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더더욱 향기를 발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선사가 명(銘)을 짓지도 말고 탑(塔)을 세우지도 말라고 유계(遺戒)를 내렸는데, 서하(西河)의 문도(門徒)에 내려와서 선대(先代)의 뜻을 확고하게 봉행하지 못하였다. 이는 임금에게 억지로 청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임금이 자진해서 그렇게 해 준 것인가. 그저 흰 옥의 흠이 되기에 알맞은 일이라고 하겠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이렇게 비난한다면 그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도〔不近名〕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대개 선정(禪定)의 힘에 의한 결과로 받는 보답이다. 재처럼 싸늘하게 사그라지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함으로써〔爲可爲於可爲之時〕 그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거북이의 등에 비석을 올려놓기도 전에 용이 승천하듯 헌강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今上 정강왕(定康王))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부촉한 그 뜻에 잘 부응하여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였다.
    이웃 산의 초제(招提 사찰)에 또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이 서로 겹쳐서 사람들이 듣고 의혹하였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취하려면 의당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했으므로, 사원의 앞과 뒤의 경관(景觀)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문간에 두 개의 시내가 임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이 사원의 제호(題號)를 내려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상이 하신(下臣)에게 거듭 명하기를,
    “선사는 행실로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진출했다. 그러니 그대가 명(銘)을 짓도록 하라.”
    하기에, 치원(致遠)이 배수(拜手)하고 아뢰기를,
    “예, 잘 알겠습니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물러 나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중국에서 명성을 낚으며 장구(章句) 사이에서 살지고 기름진 작품들을 저작(咀嚼)하였을 뿐, 구준(衢罇)에 대해서는 만끽하며 취해 보지 못한 채, 오직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진흙탕 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더구나 불법(佛法)은 문자를 떠난 것으로서 언어를 구사해 볼 여지가 전혀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만약 뭐라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북쪽으로 수레를 몰면서 남쪽에 있는 초(楚)나라의 영(郢)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외호(外護)와 문인의 대원(大願)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눈을 분명하게 밝혀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과감하게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두 가지 일을 한 몸에 떠맡고서 있는 힘껏 다섯 가지 기능을 한번 모방해 보기로 하였다. 돌에 신이 붙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부끄럽고 두렵기는 하지만, 도(道)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서투른 솜씨지만 필봉(筆鋒)을 숨기는 일을 신이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앞서 언급한 뜻을 거듭 펼쳐서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입 다물고 선정 닦으며 / 杜口禪那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나니 / 歸心佛陀
    근기(根機)가 성숙한 보살의 차원에서 / 根熟菩薩
    도를 넓힐 뿐 다른 뜻이 없었다오 / 弘之靡他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고 / 猛探虎窟
    고래 물결에 멀리 배를 띄워 / 遠泛鯨波
    가서는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 去傳祕印
    와서는 신라를 교화했다오 / 來化斯羅
    그윽한 곳 찾아 승경을 가려 / 尋幽選勝
    바위 벼랑에 터 잡고 쌓은 뒤에 / 卜築巖磴
    물과 달을 보며 심회를 맑게 하고 / 水月澄懷
    구름과 샘물에 감흥을 부쳤다오 / 雲泉奇興
    산은 성과 더불어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 山與性寂
    골에는 범패(梵唄) 소리 메아리치는 가운데 / 谷與梵應
    부딪치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었나니 / 觸境無碍
    기심(機心)을 쉬는 이것이 증입(證入)이라 / 息機是證
    도로써 다섯 조정 협찬을 하고 / 道贊五朝
    위엄으로 뭇 요괴를 꺾으면서 / 威摧衆妖
    묵묵히 자비의 그늘 드리웠을 뿐 / 默垂慈蔭
    임금님의 초빙은 한사코 거절하였다오 / 顯拒嘉招
    바다야 원래 표탕하는 법이지만 / 海自飄蕩
    산이야 언제 동요한 적 있었으리 / 山何動搖
    어떤 생각이나 염려도 하지 않고 / 無思無慮
    깎거나 새겨 꾸미지도 않았다오 / 匪斲匪雕
    먹는 것도 두 가지 음식이 없었고 / 食不兼味
    입는 것도 꼭 구비하지 않았으며 / 服不必備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 風雨如晦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오
    / 始終一致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벋어 나는데 / 慧柯方秀
    불법의 동량이 느닷없이 쓰러지니 / 法棟俄墜
    동천(洞天)의 골짜기는 처량해지고 / 洞壑凄涼
    연하(煙霞)의 등라(藤蘿)는 초췌해졌도다 / 煙蘿憔悴
    사람은 없어도 도는 그대로 / 人亡道存
    가신 님 끝내 잊을 수 없어 / 終不可諼
    상사가 위에 탄원서를 올리니 / 上士陳願
    임금님이 은총을 베풀었다네 / 大君流恩
    해외에 불법의 등불 전하며 / 燈傳海裔
    운근 위에 우뚝 솟은 탑이여 / 塔聳雲根
    천인의 옷자락에 반석이 다 닳도록 / 天衣拂石
    산사(山寺)에 영원히 빛나리로다 / 永耀松門


     

    [주B-001]비(碑) :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금까지 사용한 대본에 오자와 탈자 등 문제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1995년에 이우성 교역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신라사산비명》의 2부 주석(註釋)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다만 글의 순서는 《고운집》 차례를 그대로 따랐다.
    [주C-001]진감 화상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로 되어 있다.
    [주D-001]여룡(驪龍)이 …… 사람 : 여룡 즉 흑룡(黑龍)이 잠들어 있을 때 잡아먹힐 위험을 무릅쓰고 턱 아래의 구슬을 훔쳐 온 사람의 이야기가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나온다.
    [주D-002]오승(五乘) :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통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인승(人乘), 십선(十善) 및 사선(四禪) 팔정(八定)을 통하여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천승(天乘), 사제 법문(四諦法門)을 통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하는 성문승(聲聞乘), 십이인연(十二因緣) 법문을 통하여 벽지불과(辟支佛果)를 얻게 하는 연각승(緣覺乘), 육도(六度) 법문을 통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보살승(菩薩乘)을 가리킨다. 오연(五衍)이라고도 한다.
    [주D-003]1천 …… 하고 : 당(唐)나라 도선(道宣)이 지은 《광홍명집(廣弘明集)》 권3 〈가훈귀심편(家訓歸心篇)〉에 “불교는 1만 행동을 공으로 돌리고 1천 가문이 선에 들어오게 한다. 그 변재와 지혜로 말하면 어찌 단지 칠경이나 백씨의 박학함 정도로 그치겠는가. 요순이나 주공과 공자 그리고 노장 등도 미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萬行歸空 千門入善 辯才智慧 豈徒七經百氏之博哉 明非堯舜周孔老莊所及也〕”라는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4]온 …… 일으키게 : 《대학장구》 전 9장에 “임금의 집안이 인을 행하면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임금의 집안이 사양을 하면 온 나라가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신독(身毒) : 천축(天竺)과 같은 말로, 인도(印度)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불교의 뜻으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열전(西域列傳) 천축(天竺)〉에 “천축국은 신독이라고도 하는데, 월지에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으며, 풍속은 월지와 같다.〔天竺國 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 俗與月氏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궐리(闕里)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고리(故里)인데, 여기서는 유교의 뜻으로 쓰였다.
    [주D-007]시를 …… 된다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8]말의 …… 있다 : 《예기》 〈제의(祭義)〉에 나온다.
    [주D-009]석가여래(釋迦如來)와 …… 때문이다 :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5편 중 네 번째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의 대목에 나오는 글인데, 《고승전(高僧傳)》 권6 〈석혜원전(釋慧遠傳)〉에 수록되어 있다. 고운이 내용을 생략하거나 덧붙인 부분이 있지만 대의는 큰 차이가 없다.
    [주D-010]공자는 …… 다했다 : 심약(沈約)은 남조 양(梁)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이 내용은 그의 〈내전 서(內典序)〉에 나오는데, 《광홍명집(廣弘明集)》 권19에 수록되어 있다.
    [주D-011]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응당 달을 보아야 할 텐데, 손가락만을 쳐다보고는 그것이 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에서 문자와 명상(名相)에 집착하지 말고 실상(實相)을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는 비유이다. 《楞嚴經 卷2》
    [주D-012]앉아서 잊는 경지 : 좌망(坐忘)은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말로, 주객(主客)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道)와 합일된 정신의 경지를 뜻하는데, 불가(佛家)의 삼매(三昧)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D-013]나는 …… 하던가 :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주D-014]정명(淨名)이 …… 대하고 : 정명은 인도(印度) 비야리국(毘耶離國)의 장자(長者)로서 석존(釋尊)의 속제자(俗弟子)였다는 유마거사(維摩居士)를 가리킨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유마거사를 찾아와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유마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維摩經 入不二法門品》
    [주D-015]선서(善逝)가 …… 것 : 선서는 부처의 10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했을 때에, 대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를 짓자, 석가가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육조 대사(六祖大師)의 《법보단경(法寶壇經)》 〈서문〉과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에 나온다.
    [주D-016]천시(天時)를 …… 없어서 : 농사지어 수확할 토지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훔쳐서〔盜天地之時利〕 농사짓고 살아간다는 말이 나온다.
    [주D-017]철숙(啜菽)의 봉양 : 콩죽을 쑤어 먹는다는 말로, 빈한한 집에서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집이 가난해 어버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한탄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면 그것이 곧 효도이다.〔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주D-018]채란(采蘭) : 진(晉)나라 속석(束晰)의 보망시(補亡詩) 〈남해(南陔)〉에 나오는 ‘언채기란(言采其蘭)’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배로운 향초를 캐어 어버이에게 드린다는 뜻에서 어버이 봉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D-019]희미(希微)의 경지 : 소리와 형체가 없는 도(道)의 세계를 말한다. 《노자(老子)》 14장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희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미라 한다.〔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0]내가 …… 되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뒤웅박처럼 한곳에 매달린 채 먹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오체투지(五體投地) : 두 무릎과 두 팔과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불교 예법의 하나로, 접족작례(接足作禮)ㆍ두면예족(頭面禮足)이라고도 한다.
    [주D-022]불이 …… 같았다 : 상호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 물은 축축한 곳으로 번져 가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타들어 간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동방의 성인(聖人)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석안함전(釋安含傳)〉에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의하면,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0)에 태어났는데, 이해에 동방의 성인인 안홍 법사가 서역의 두 삼장과 중국의 승려 2인과 함께 당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崔致遠所撰義相傳云 相眞平建福四十二年受生 是年東方聖人安弘法師與西國二三藏 漢僧二人至自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4]칠도인(漆道人) : 동진(東晉)의 고승(高僧) 도안(道安)의 별칭이다.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권2 〈전량(前涼) 석도안(釋道安)〉에 “나이 11세에 출가하여 불도징을 사사하였다. 글을 읽으면 하루에 만언을 기억하였으며, 재변으로 맞설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총명하였으나 모습은 추하였으므로, 당시에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고 말하였다.〔年十一出家師事佛圖澄 讀書日記萬言 才辯無敵 性聰而貌醜 時語曰漆道人驚四隣〕”라는 말이 나온다. 또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도안은 모습이 총민하고 피부 색깔이 검었으며 담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 왼쪽 팔에 사방 1치쯤 도장 형태의 살점이 돋아났으므로 세상에서 인수보살이라고 불렀다.〔安貌銳而姿黑 喜談論 故諺曰 漆道人驚四隣 左臂有肉 方寸隆起如印 世號印手菩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5]도읍 …… 사람 : 춘추 시대 송(宋)나라 공자 한(罕)을 가리킨다. 송나라 황국보(皇國父)가 태재(太宰)가 되어 임금인 평공(平公)을 위해 누대를 지었는데, 그 일이 농사에 방해가 되었으므로 공자 한이 추수가 끝난 뒤에 공사할 것을 청했지만 평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을 하는 자들이 “택문 가의 얼굴 흰 사람은 실로 우리의 이 공사를 일으켰고,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은 실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네.〔澤門之晳 實興我役 邑中之黔 實慰我心〕”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7년에 나온다.
    [주D-026]적자(赤頿) : 진(晉)나라의 고승 불태야사(佛馱耶舍)를 가리킨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26 〈십팔현전(十八賢傳) 불태야사〉에 “스님은 수염이 붉고 비바사론을 잘 해석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사람들이 붉은 수염의 논주라고 불렀다.〔師頿赤 善解毘婆沙論 時人號赤頿論主〕”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청안(靑眼) : 푸른 눈이라는 뜻으로, 보통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28]성선(聖善) : 모친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개풍(凱風)〉의 “어머님은 성스럽고 선하신데, 우리 중에는 괜찮은 자식이 없도다.〔母氏聖善 我無令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29]해후하여 …… 풀었으니 : 《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우연히 서로 만나, 평소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주D-030]서남쪽에서 …… 것 : 《주역(周易)》 〈곤괘(坤卦) 괘사(卦辭)〉에 “서남쪽으로 가면 벗을 얻고, 동북쪽으로 가면 벗을 잃는다.〔西南得朋 東北喪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1]불지견(佛知見) :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보인다.
    [주D-032]지관(止觀) : 망상을 쉬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불교 수행법으로,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에서 특히 강조한다.
    [주D-033]흑의(黑衣)의 인걸 :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제무제(齊武帝)〉에 “장간사의 현창에게 조칙을 내려 법헌과 함께 승주가 되게 한 뒤에, 강남과 강북의 일을 나누어 맡게 하니, 당시에 이들을 흑의의 두 인걸이라고 불렀다.〔勅長干寺玄暢同法獻爲僧主 分任江南北事 時號黑衣二傑〕”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4]미천(彌天) : 하늘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진(晉)나라 고승 도안(道安)의 별명인데, 여기서는 진감 선사를 비유하였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고사 습착치가 도안을 찾아와서 자칭 사해 습착치라고 말하자, 도안이 미천 석도안이라고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명답변이라고 하였다.〔高士習鑿齒詣安 自稱四海習鑿齒 安答曰 彌天釋道安 時以爲名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의원의 …… 것 :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들어가라. 의원의 집에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오도(於菟) : 호랑이의 별칭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4년에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곡이라 하고, 호랑이를 오도라 한다.〔楚人謂乳穀 謂虎於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7]유기(兪騎) : 유아기(兪兒騎)의 준말로, 제왕의 대가(大駕)가 행차할 때 의장대(儀仗隊)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호위 기마병을 말한다. 유아는 발걸음이 날래어 잘 달리는 등산(登山) 귀신 이름이다.
    [주D-038]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 일 :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 〈선무외전(善無畏傳)〉에 나온다.
    [주D-039]축담유(竺曇猷)가 …… 일 : 맹호(猛虎) 수십 마리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송경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유독 한 마리가 졸고 있자 여의장(如意杖)으로 머리를 두드려 깨워 질책하였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1 〈축담유전(竺曇猷傳)〉에 나온다.
    [주D-040]난야(蘭若) : 범어(梵語) araṇy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한 승려의 한적한 수행처, 즉 사원을 뜻한다.
    [주D-041]개성(開成) …… 나서 : 민애왕 김명(金明)이 희강왕(僖康王)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말하는데, 그도 1년 뒤에 김양(金陽) 등에게 살해되는 운명을 맞는다.
    [주D-042]산에서 …… 청한다 :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6 〈승조전(僧稠傳)〉에 “북위(北魏) 효명제가 일찍이 그의 훌륭한 덕에 감화되어 전후에 걸쳐 세 차례나 초빙하였으나, 승조가 사양하면서 ‘어느 하늘 아래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니,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라고 하니, 황제가 마침내 허락하고는 산으로 공양을 보내었다.〔魏孝明帝夙承令德 前後三召 乃辭云 普天之下莫非王土 乞在山行道不爽大通 帝遂許焉 乃就山送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원공(遠公)의 동림(東林) :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세운 동림사(東林寺)를 말하는데, 주변의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주D-044]연화세계(蓮花世界) :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하는데,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 권8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D-045]호리병 …… 이야기 :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새로 세운 쌍계사(雙溪寺)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주D-046]중생의 …… 것이다 : 《능가경(楞伽經)》 권1 〈일체불어심품(一切佛語心品)〉의 게(偈)에 나온다.
    [주D-047]양사(梁史)에도 …… 있는데 : 《양서(梁書)》 권41 〈저상열전(褚翔列傳)〉에 “저상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중이 되었을 때에 모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사문을 청해 복을 빌었다. 그러자 한밤중에 홀연히 문밖에 기이한 빛이 보이고, 또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새벽녘에 병이 마침내 나았다.〔翔少有孝性 爲侍中時 母疾篤 請沙門祈福 中夜忽見戶外有異光 又聞空中彈指 及曉疾遂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8]측조(側調) : 고악(古樂) 삼조(三調) 중의 하나이다. 송(宋)나라 왕작(王灼)의 《벽계만지(碧溪漫志)》 권5에 “대체로 옛 음악은 성률의 높고 낮음에 따라 셋으로 나눈다. 청조와 평조와 측조가 그것인데, 이를 삼조라고 한다.〔蓋古樂取聲律高下合爲三 曰淸調平調側調 此之謂三調〕”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9]코를 막는 것 : 타인의 기예를 부러워하여 본받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콧병을 앓아서 마치 낙양(洛陽) 서생(書生)의 성조(聲調)처럼 굵고 탁한 코 먹은 소리를 잘 내었는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이 음성을 좋아하여 모방하려고 해도 잘 안 되자 ‘손으로 코를 막고 읊조렸다.〔手掩鼻而吟〕’라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주D-050]능곡(陵谷) :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뒤바뀌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했도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쇠를 …… 같이하여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2]양곡(暘谷) : 전설 속의 해 뜨는 곳을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서하(西河)의 문도(門徒) : 선사의 제자의 제자를 가리킨다. 서하는 노년에 물러나 서하 지역에서 거처하며 교수했던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사의 제자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54]이름이 …… 하였는데도 :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爲善 无近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5]해야 …… 함으로써 :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면 좋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하면 좋지 않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56]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헌강왕과 정강왕은 형과 아우 사이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의 “맏형은 질나발을 불고 둘째 형은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7]구준(衢罇) : 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성인(聖人)의 도를 가리킨다. 《회남자》 〈무칭훈(繆稱訓)〉의 “성인의 도는 마치 대로에 술동이를 놔두고서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자 적당히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置尊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所宜〕”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8]다섯 가지 기능 : 보잘것없는 재능이라는 뜻의 겸사이다. 《순자》 〈권학(勸學)〉에 “교룡은 발이 없어도 잘도 나는데, 땅강아지는 다섯 가지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궁하기만 하다.〔螣蛇無足而飛 梧鼠五技而窮〕”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날 수는 있어도 지붕 위에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는 있어도 꼭대기까지는 가지 못하며, 헤엄을 치기는 해도 골짜기를 건너가지는 못하고, 구멍을 팔 수는 있어도 몸을 가리지는 못하며, 달릴 수는 있어도 사람보다 먼저 가지는 못하니, 이것을 다섯 가지 기능〔五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D-059]돌에 …… 일이라서 : 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오는데, 그 내용 중에 “돌이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어서 말할 수도 있는 일이고, 아니면 백성들이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石不能言 或馮焉 不然民聽濫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0]도(道)라는 …… 것이니 : 《노자》 25장에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1]어떤 …… 않고 : 《장자》 〈지북유(知北遊)〉에 “어떤 생각이나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어떤 곳에도 머물지 말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에 편히 머물게 된다. 어떤 것도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無思無慮始知道 無處無服始安道 無從無道始得道〕”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비바람 …… 한결같았다오 : 《시경》 〈풍우(風雨)〉는 난세에도 절조(節操)를 변하지 않는 군자를 그리워하는 시인데, 그중에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風雨如晦 雞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3]운근(雲根) : 산 위의 바위를 뜻하는 시어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
    [주D-064]천인(天人)의 …… 닳도록 :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40리 되는 반석(磐石)을 천인이 100년에 한 번씩 옷자락으로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고, 8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중겁(中劫), 80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대아승지겁(大阿僧祇劫) 즉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하 〈불모품(佛母品)〉에 나온다. 그 반석은 겁석(劫石)이라고 칭한다.

     

     

     

    고운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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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碑)
    진감 화상 비명 병서〔眞監和尙碑銘 竝序



    대저 도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른 차이가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동방 출신의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할 수도 있고 유교를 공부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쪽으로 큰 바다에 배를 띄우고 거듭 통역을 바꿔 가면서 유학을 해야 한다. 목숨은 조각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주(寶洲)에 이르기를 고대하면서, 빈손으로 갔다가 채워서 돌아오니 먼저 어려운 일을 겪어야만 뒤에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험준한 곤륜산(崑崙山)을 꺼리지 않고 옥을 캐는 사람이나 여룡(驪龍)이 서린 심연(深淵)을 사양하지 않고 구슬을 찾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교의 혜거(慧炬)를 얻으면 오승(五乘)의 광채와 융화되고, 유교의 가효(嘉肴)를 얻으면 육경(六經)의 진미를 만끽하게 되어, 1천 가문이 다투어 선에 들어오게 하고〔千門入善〕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一國興仁〕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학자 중에는 신독(身毒)궐리(闕里)에서 설하는 가르침이 흐름도 다르고 체제도 달라서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끼우는 것처럼 상호 모순되어 한 모퉁이만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 시험 삼아 논해 보겠다.
    “시를 해설하는 사람은 하나의 글자 때문에 한 문장의 뜻을 해쳐서는 안 되고, 하나의 문장 때문에 전체의 의미를 해쳐서도 안 된다.〔說詩者 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라고 하였다. 또 《예기(禮記)》에서도 “말의 뜻이 어찌 한 가지뿐이겠는가. 상황에 따라서 각기 해당하는 바가 다를 수 있다.〔言豈一端而已 夫各有所當〕”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은 논을 지어 “석가여래(釋迦如來)와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는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귀착점은 동일한데, 두 종교의 정수를 함께 아우르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 둘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能兼者 物不能兼受故也〕”라고 하였고, 심약(沈約)은 “공자는 단초를 열었고 석가는 극치를 다했다.〔孔發其端 釋窮其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대체(大體)를 안 자라고 이를 만하니,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지극한 도에 대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 심법(心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말하면, 현묘하고 현묘해서 어떤 이름으로도 일컬을 수가 없고 어떤 설명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다. 비록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月指〕의 뜻이나 앉아서 잊는〔坐忘〕 경지를 체득했다고 할지라도, 끝내는 바람이나 그림자를 붙잡아 매기 어려운 것처럼 표현하기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멀리 오르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니, 언어로 비유를 취해서 말한들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하겠는가.
    옛날 공자(孔子)는 문제자(門弟子)에게 이르기를,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予欲無言 天何言哉〕”라고 하였다. 이는 저 정명(淨名)이 침묵으로 문수(文殊)를 대하고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은밀히 전한 것과 통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굳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서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도 하겠다. 하지만 하늘이야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일반인들이야 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의사를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멀리 현묘한 도를 전하여 널리 우리나라를 빛낸 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또 어찌 우리와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禪師)가 바로 그분이시다.
    선사의 법휘(法諱)는 혜소(慧昭)요,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의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에서 벼슬하는 집안이었다. 수(隋)나라 군대가 요동(遼東)을 정벌할 적에 고구려에서 많이 죽었는데, 그때 뜻을 굽혀 고구려의 백성이 된 사람이 있었다. 그 뒤 성당(聖唐)의 시대에 와서 옛날 한사군(漢四郡)의 지역이 판도로 들어올 적에, 지금의 전주(全州) 금마(金馬)에서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부친은 창원(昌元)이라고 하는데, 재가 중에 출가인의 행동을 보였다. 모친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든 사이에 꿈을 꾸니 범승(梵僧) 한 사람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내가 어머니〔阿㜷〕의 아들이 되고자 합니다.”
    하고는, 유리병을 주는 것이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사를 잉태하였다.
    선사는 태어날 적에 울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찍부터 언성(言聲)을 내지 않는 상서로운 싹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갈 무렵에 아이들과 어울려 놀 적에도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을 피우는가 하면 꽃을 꺾어 헌화하곤 하였으며, 간혹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서 해 그림자가 옮겨 가도록 꼼짝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이를 통해서 대사의 선본(善本)은 원래 백천겁(劫) 이전부터 길러진 것으로서 사람들이 발돋움해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머리를 땋은 아동 때부터 관을 쓴 어른이 될 때까지 어버이의 은혜를 갚으려는 뜻이 절실해서 잠시도 잊은 적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집에는 한 말의 곡식도 저축한 것이 없었고, 또 천시(天時)를 훔칠 만한 조그마한 땅도 없어서 구복(口腹)의 봉양을 위해서는 오직 자기의 노동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생선 파는 일에 종사하며 어버이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려고 노력하였는데, 손은 수고롭게 그물을 짜지 않았어도 마음은 물고기 잡는 일을 이미 잘 알아서 철숙(啜菽)의 봉양을 넉넉히 하며 채란(采蘭)의 노래에 걸맞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흙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 봉분하고는 말하기를,
    “길러 주신 은혜에 대해서는 애오라지 힘닿는 대로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희미(希微)의 경지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찌 뒤웅박〔匏瓜〕처럼 젊은 나이에 그냥 한 곳에만 죽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정원(貞元) 20년(804, 애장왕5)에 세공사(歲貢使)에게 가서 뱃사공이 되겠다고 청하여 서쪽으로 가는 배에 발을 붙인 뒤에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험난한 길도 평탄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자비의 배를 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넌 뒤에 피안(彼岸)에 도착하고 나서 국사(國使)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자 뜻이 다르니, 여기에서 작별할까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길을 떠나 창주(滄洲)에 와서 신감 대사(神鑑大師)를 찾아보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절을 올렸는데, 절이 끝나기도 전에 대사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전생에서 아쉽게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다시 만나니 기쁘다.”
    하였다. 그러고는 서둘러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힌 뒤에 얼른 인계(印戒)를 받게 하였는데, 마치 불이 마른 쑥으로 타 들어가고 물이 저습(低濕)한 곳으로 번져 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승도(僧徒)들은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聖人)을 여기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하였다.
    선사는 형모(形貌)가 검었으므로, 대중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하였다. 이는 현묘한 이치를 탐구하며 말없이 처하는 것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後身)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니, 어찌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邑中之黔〕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던 일에만 비교될 뿐이었겠는가. 길이 적자(赤頿)청안(靑眼)과 더불어 색상(色相)으로 드러내 보일 만한 일이라고 하겠다.
    원화(元和) 5년(810, 헌덕왕2)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니, 이는 성선(聖善)의 예전의 꿈과 부절을 합친 것처럼 완전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을 구슬처럼 맑게 한 뒤에 다시 배움의 바다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아서 마치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쪽보다 더 푸른 것처럼 스승을 능가하였다. 마음은 지수(止水)와 같이 맑았지만 행적은 조각구름과 같이 떠돌았다.
    본국의 승려인 도의(道義)가 선사보다 먼저 중국에 와서 불법(佛法)을 구하였는데, 해후하여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適願〕, 이는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었다. 사방으로 멀리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불지견(佛知見)을 증득하고는 의공(義公)이 먼저 고국에 돌아가자 선사는 그 길로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만 길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송실(松實)을 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3년이요, 그 뒤에 다시 자각(紫閣)으로 나와 번화한 교통의 요지에서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布施)하며 바쁘게 왕래한 것이 또 3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고행(苦行)의 수행을 일단 마친 뒤에, 다른 지방에 만행(萬行)을 하는 일도 일단락을 지었다. 그러나 공(空)의 도리를 터득하였다고 하더라도 이 몸의 근본인 고향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태화(太和) 4년(830, 흥덕왕5)에 귀국하니, 대각(大覺) 상승(上乘)의 빛이 우리 인역(仁域)을 환히 비췄다. 흥덕대왕(興德大王)이 봉필(鳳筆)을 날려 영접하여 위로하면서 이르기를,
    “도의 선사(道義禪師)가 지난번에 돌아왔는데 상인(上人)이 잇따라 이르러서 두 분의 보살(菩薩)이 되셨도다. 예전에 흑의(黑衣)의 인걸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납의(衲衣)의 영걸을 보게 되었도다. 미천(彌天)의 자애와 위엄을 온 나라가 기뻐하며 의지하고 있으니, 과인이 장차 동쪽 계림(雞林)의 경내를 가지고 길상(吉祥)의 집을 이룩하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露嶽) 장백사(長柏寺)에 석장(錫杖)을 머물렀는데, 의원의 집에 환자가 많은 것처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사원이 비록 널찍하긴 하였지만, 물정(物情)이 스스로 비좁게 여겼으므로, 마침내 걸어서 강주(康州) 지리산(智異山)으로 갔다. 그때 몇 마리의 오도(於菟)가 포효하며 앞길을 인도하였는데, 위험한 길은 피하고 평탄한 길로 향하는 것이 유기(兪騎)와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따르는 자들이 겁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이것은 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영산(靈山)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적에 맹수가 앞길을 인도한 결과 깊이 산혈(山穴) 속으로 들어가서 석가모니의 입상(立像)을 보게 된 일과 사적(事跡)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니, 저 축담유(竺曇猷)가 꾸벅꾸벅 조는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려서 송경(誦經)하는 소리를 잘 듣게 한 일만 전적으로 승사(僧史)에서 미담으로 꼽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화개곡(花開谷)의 고(故) 삼법 화상(三法和尙)의 난야(蘭若)의 옛터에 당우(堂宇)를 수축하니, 엄연히 조물(造物)이 이루어 놓은 것만 같았다.
    개성(開成) 3년(838, 민애왕1)에 민애대왕(愍哀大王)이 갑작스럽게 보위에 오르고 나서 깊이 부처의 자비에 의탁할 목적으로 새서(璽書)를 내리고 재(齋)를 올리는 비용을 보내며 특별히 발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선사가 이르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행하면 될 것입니다. 발원은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이 왕에게 복명을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한편으로 깨닫는 점이 있었다. 선사가 색(色)과 공(空) 두 가지를 초월하고 정(定)과 혜(慧)에 모두 원만하다 하여, 왕이 사신을 보내 혜소(慧昭)라는 호를 하사하였는데, 이 ‘소(昭)’ 자는 성조(聖朝)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이와 함께 대황룡사(大皇龍寺)에 사적(寺籍)을 편입시키고 경읍(京邑)으로 올라오도록 징소(徵召)하였는데, 왕복하는 사신의 말고삐가 길에서 교차하였지만, 선사는 산악처럼 우뚝 서서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에 승조(僧稠)가 원위(元魏)의 세 차례 초빙에도 응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大道)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在山行道 不爽大通〕”라고 하였는데, 깊은 산속에 거하며 고상한 뜻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달라도 그 지취(志趣)를 서로 같이 한다고 하겠다. 여러 해를 머무는 동안 가르침을 청하는 자들이 벼와 삼대처럼 대열을 이루어 거의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이한 지역을 두루 물색하다가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전망이 트이고 상쾌하기가 으뜸이었으므로 이곳에 선찰(禪刹)을 경영하였다. 뒤로는 노을 진 산봉우리를 기대고 앞으로는 구름 이는 시내를 굽어보았다. 시계(視界)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악이요, 귀뿌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바위틈에서 쏟아져 나와 날리는 여울물 소리이다.
    여기에 또 봄에는 냇물에 꽃잎이 떠서 흘러가고, 여름에는 소나무 그늘이 길에 드리우고, 가을에는 골짜기에 달빛이 부서지고, 겨울에는 산마루에 흰 눈이 뒤덮인다. 이처럼 사시에 따라 모습을 뒤바꾸고 만상(萬象)이 빛을 교차하는 가운데, 100가지 자연의 피리 소리가 조화롭게 연주되고 1천 개의 바윗돌이 빼어난 자태를 경쟁한다. 그래서 일찍이 중국에서 노닐었던 자들도 여기에 와서는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말하기를,
    원공(遠公)의 동림(東林)을 바다 밖으로 옮겨 왔구나. 연화세계(蓮花世界)야 범인의 상상으로 추측해서 될 일이 아니겠지만, 호리병 속〔壺中〕에 별도로 천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믿을 만하다.”
    하였다. 대나무 홈통을 시렁처럼 이어 물을 끌어 와서 섬돌 주위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사원의 현판을 삼았다.
    선종(禪宗)에서의 법통을 손꼽아 세어 보면, 선사는 바로 조계(曹溪 혜능(慧能))의 현손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六祖 혜능)의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분 바른 벽에 채색을 하여 널리 중생을 유도(誘導)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이는 경(經)에서 말한 바 “중생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까닭에, 현란하게 채색하여 여러 가지 상들을 그린 것이다.〔爲說衆生故 綺錯繪衆像〕”라고 한 것이다.
    대중(大中) 4년(850, 문성왕12) 1월 9일 아침에 문인(門人)에게 고하기를,
    “만법(萬法)이 모두 공(空)하니, 내가 이제 가려 한다. 일심(一心)이 근본이니, 너희들은 힘쓸지어다. 탑(塔)을 세워서 육신을 보존하려 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서 행적을 기록하려 하지 말라.”
    하고는, 말을 끝내자 앉은 자세로 입멸하였다. 세속의 나이로 77세요, 승려의 나이로 41세였다. 이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바람과 우레가 갑자기 일어나고, 범과 늑대가 슬피 울부짖었으며, 삼나무와 잣나무가 변하여 시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색(紫色) 구름이 하늘을 뒤덮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는데,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귀로 듣지 않은 이가 없었다. 양사(梁史)에도 시중(侍中) 저상(褚翔)이 사문(沙門)을 청해 모친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복을 빌었을 때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러고 보면 거룩하게 말 없는 가운데 감응한 것에 어찌 속임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道)에 뜻을 둔 자들은 말을 전해 조문하였고, 정(情)을 잊지 못하는 자들은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해하며 애도한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영함(靈函 관곽(棺槨))과 유수(幽隧 묘혈(墓穴))를 사전에 준비해 두게 하였던바, 제자 법량(法諒) 등이 호곡하며 선사의 시신을 받들어 하루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 묘역에 장사 지냈으니, 이는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말도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입는 것은 허름한 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 현귀한 자들이 때때로 찾아와도 대접하는 음식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문인이 배 속을 거북하게 할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하기라도 하면, 선사가 이르기를,
    “마음이 있어서 찾아왔을 것이니, 거친 밥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고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이 대하였다. 매번 왕인(王人 사신)이 역마(驛馬)를 타고 왕명을 전하러 와서 법력(法力)을 멀리서 기원할 때면 말하기를,
    “왕토(王土)에 거하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이고 있는 자라면 그 누가 마음을 기울여 호념(護念)하며 임금을 위해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또 뭐하러 꼭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 같은 이 몸에게 멀리 와서 왕명을 욕되게 한단 말입니까. 역마가 배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실로 안쓰럽기만 합니다.”
    하였다. 혹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자가 있으면, 질화로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만들지도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을 경건히 할 따름이다.”
    하였으며, 또 중국차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돌솥에 불을 지피며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달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하였다. 진성(眞性)을 보지하고, 속정(俗情)을 멀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선사는 본디 범패(梵唄)를 잘하였다. 그 음성은 마치 금옥(金玉)이 울리는 것 같았는데, 측조(側調)로 날리는 소리가 상쾌하고도 애잔하여 제천(諸天)의 신들을 환희하게 할 정도여서 길이 먼 곳까지 유전(流傳)될 만한 것이었다. 이를 배우는 자들이 당우(堂宇)에 가득하였는데, 선사는 싫증을 내지 않고 이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래서 지금까지 동국(東國)에서 어산(魚山 범패)의 묘음(妙音)을 익히는 자들이 다투어 코를 막는 것〔掩鼻〕처럼 하면서 옥천(玉泉 진감 선사)의 여향(餘響)을 본받고 있으니, 이 어찌 성문(聲聞)으로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文聖大王)의 조정 때였는데, 상이 마음속으로 측은하게 여긴 나머지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가 선사의 유계(遺戒) 내용을 듣고는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겨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문인들이 능곡(陵谷)을 염려하여 선사의 법도를 흠모하는 제자들에게 불후하게 할 방도를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내공봉(內供奉) 일길한(一吉干)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낭(嵩文臺郞) 정순일(鄭詢一)이 쇠를 자를 정도로 마음을 같이하여 선사의 행적을 비석에 새기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헌강대왕(憲康大王)이 지화(至化)를 드넓히고 진종(眞宗)을 흠앙하는 뜻에서 진감 선사(眞鑑禪師)라고 추시(追諡)하고 대공령탑(大空靈塔)이라는 탑명을 내리는 한편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누리게 하였다. 아름답도다. 해는 양곡(暘谷)에서 떠서 으슥한 곳을 비추지 않는 때가 없고, 바닷가 해안에 뿌리박은 향초는 세월이 오래 흐를수록 더더욱 향기를 발할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선사가 명(銘)을 짓지도 말고 탑(塔)을 세우지도 말라고 유계(遺戒)를 내렸는데, 서하(西河)의 문도(門徒)에 내려와서 선대(先代)의 뜻을 확고하게 봉행하지 못하였다. 이는 임금에게 억지로 청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임금이 자진해서 그렇게 해 준 것인가. 그저 흰 옥의 흠이 되기에 알맞은 일이라고 하겠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아, 그러나 이렇게 비난한다면 그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도〔不近名〕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대개 선정(禪定)의 힘에 의한 결과로 받는 보답이다. 재처럼 싸늘하게 사그라지고 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것보다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함으로써〔爲可爲於可爲之時〕 그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거북이의 등에 비석을 올려놓기도 전에 용이 승천하듯 헌강대왕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今上 정강왕(定康王))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부촉한 그 뜻에 잘 부응하여 원래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였다.
    이웃 산의 초제(招提 사찰)에 또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므로 사원의 이름이 서로 겹쳐서 사람들이 듣고 의혹하였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취하려면 의당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라야 했으므로, 사원의 앞과 뒤의 경관(景觀)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문간에 두 개의 시내가 임해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상이 사원의 제호(題號)를 내려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상이 하신(下臣)에게 거듭 명하기를,
    “선사는 행실로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진출했다. 그러니 그대가 명(銘)을 짓도록 하라.”
    하기에, 치원(致遠)이 배수(拜手)하고 아뢰기를,
    “예, 잘 알겠습니다.”
    하였다. 그러고 나서 물러 나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중국에서 명성을 낚으며 장구(章句) 사이에서 살지고 기름진 작품들을 저작(咀嚼)하였을 뿐, 구준(衢罇)에 대해서는 만끽하며 취해 보지 못한 채, 오직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진흙탕 속에 깊이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더구나 불법(佛法)은 문자를 떠난 것으로서 언어를 구사해 볼 여지가 전혀 없는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만약 뭐라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북쪽으로 수레를 몰면서 남쪽에 있는 초(楚)나라의 영(郢)으로 가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외호(外護)와 문인의 대원(大願)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눈을 분명하게 밝혀 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과감하게 글을 짓고 글씨를 쓰는 두 가지 일을 한 몸에 떠맡고서 있는 힘껏 다섯 가지 기능을 한번 모방해 보기로 하였다. 돌에 신이 붙어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부끄럽고 두렵기는 하지만, 도(道)라는 것도 알고 보면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서투른 솜씨지만 필봉(筆鋒)을 숨기는 일을 신이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앞서 언급한 뜻을 거듭 펼쳐서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입 다물고 선정 닦으며 / 杜口禪那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나니 / 歸心佛陀
    근기(根機)가 성숙한 보살의 차원에서 / 根熟菩薩
    도를 넓힐 뿐 다른 뜻이 없었다오 / 弘之靡他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고 / 猛探虎窟
    고래 물결에 멀리 배를 띄워 / 遠泛鯨波
    가서는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 去傳祕印
    와서는 신라를 교화했다오 / 來化斯羅
    그윽한 곳 찾아 승경을 가려 / 尋幽選勝
    바위 벼랑에 터 잡고 쌓은 뒤에 / 卜築巖磴
    물과 달을 보며 심회를 맑게 하고 / 水月澄懷
    구름과 샘물에 감흥을 부쳤다오 / 雲泉奇興
    산은 성과 더불어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 山與性寂
    골에는 범패(梵唄) 소리 메아리치는 가운데 / 谷與梵應
    부딪치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었나니 / 觸境無碍
    기심(機心)을 쉬는 이것이 증입(證入)이라 / 息機是證
    도로써 다섯 조정 협찬을 하고 / 道贊五朝
    위엄으로 뭇 요괴를 꺾으면서 / 威摧衆妖
    묵묵히 자비의 그늘 드리웠을 뿐 / 默垂慈蔭
    임금님의 초빙은 한사코 거절하였다오 / 顯拒嘉招
    바다야 원래 표탕하는 법이지만 / 海自飄蕩
    산이야 언제 동요한 적 있었으리 / 山何動搖
    어떤 생각이나 염려도 하지 않고 / 無思無慮
    깎거나 새겨 꾸미지도 않았다오 / 匪斲匪雕
    먹는 것도 두 가지 음식이 없었고 / 食不兼味
    입는 것도 꼭 구비하지 않았으며 / 服不必備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 風雨如晦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오
    / 始終一致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벋어 나는데 / 慧柯方秀
    불법의 동량이 느닷없이 쓰러지니 / 法棟俄墜
    동천(洞天)의 골짜기는 처량해지고 / 洞壑凄涼
    연하(煙霞)의 등라(藤蘿)는 초췌해졌도다 / 煙蘿憔悴
    사람은 없어도 도는 그대로 / 人亡道存
    가신 님 끝내 잊을 수 없어 / 終不可諼
    상사가 위에 탄원서를 올리니 / 上士陳願
    임금님이 은총을 베풀었다네 / 大君流恩
    해외에 불법의 등불 전하며 / 燈傳海裔
    운근 위에 우뚝 솟은 탑이여 / 塔聳雲根
    천인의 옷자락에 반석이 다 닳도록 / 天衣拂石
    산사(山寺)에 영원히 빛나리로다 / 永耀松門


     

    [주B-001]비(碑) : 지금부터 시작되는 이른바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은 지금까지 사용한 대본에 오자와 탈자 등 문제가 적지 않은 점을 감안하여, 1995년에 이우성 교역으로 아세아문화사에서 간행한 《신라사산비명》의 2부 주석(註釋)에 수록된 대본을 채택하여 번역하였다. 다만 글의 순서는 《고운집》 차례를 그대로 따랐다.
    [주C-001]진감 화상 비명 : 《신라사산비명》에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로 되어 있다.
    [주D-001]여룡(驪龍)이 …… 사람 : 여룡 즉 흑룡(黑龍)이 잠들어 있을 때 잡아먹힐 위험을 무릅쓰고 턱 아래의 구슬을 훔쳐 온 사람의 이야기가 《장자》 〈열어구(列禦寇)〉에 나온다.
    [주D-002]오승(五乘) :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 삼귀(三歸) 오계(五戒)를 통하여 인간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인승(人乘), 십선(十善) 및 사선(四禪) 팔정(八定)을 통하여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천승(天乘), 사제 법문(四諦法門)을 통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하는 성문승(聲聞乘), 십이인연(十二因緣) 법문을 통하여 벽지불과(辟支佛果)를 얻게 하는 연각승(緣覺乘), 육도(六度) 법문을 통하여 무상보리(無上菩提)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보살승(菩薩乘)을 가리킨다. 오연(五衍)이라고도 한다.
    [주D-003]1천 …… 하고 : 당(唐)나라 도선(道宣)이 지은 《광홍명집(廣弘明集)》 권3 〈가훈귀심편(家訓歸心篇)〉에 “불교는 1만 행동을 공으로 돌리고 1천 가문이 선에 들어오게 한다. 그 변재와 지혜로 말하면 어찌 단지 칠경이나 백씨의 박학함 정도로 그치겠는가. 요순이나 주공과 공자 그리고 노장 등도 미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萬行歸空 千門入善 辯才智慧 豈徒七經百氏之博哉 明非堯舜周孔老莊所及也〕”라는 북제(北齊) 안지추(顔之推)의 말이 실려 있다.
    [주D-004]온 …… 일으키게 : 《대학장구》 전 9장에 “임금의 집안이 인을 행하면 온 나라가 인한 마음을 일으키게 되고, 임금의 집안이 사양을 하면 온 나라가 사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된다.〔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5]신독(身毒) : 천축(天竺)과 같은 말로, 인도(印度)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불교의 뜻으로 쓰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8 〈서역열전(西域列傳) 천축(天竺)〉에 “천축국은 신독이라고도 하는데, 월지에서 동남쪽으로 수천 리 떨어져 있으며, 풍속은 월지와 같다.〔天竺國 一名身毒 在月氏之東南數千里 俗與月氏同〕”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6]궐리(闕里) :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에 있는 공자(孔子)의 고리(故里)인데, 여기서는 유교의 뜻으로 쓰였다.
    [주D-007]시를 …… 된다 :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D-008]말의 …… 있다 : 《예기》 〈제의(祭義)〉에 나온다.
    [주D-009]석가여래(釋迦如來)와 …… 때문이다 :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5편 중 네 번째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의 대목에 나오는 글인데, 《고승전(高僧傳)》 권6 〈석혜원전(釋慧遠傳)〉에 수록되어 있다. 고운이 내용을 생략하거나 덧붙인 부분이 있지만 대의는 큰 차이가 없다.
    [주D-010]공자는 …… 다했다 : 심약(沈約)은 남조 양(梁)의 저명한 문학가이다. 이 내용은 그의 〈내전 서(內典序)〉에 나오는데, 《광홍명집(廣弘明集)》 권19에 수록되어 있다.
    [주D-011]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응당 달을 보아야 할 텐데, 손가락만을 쳐다보고는 그것이 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하는 선가(禪家)에서 문자와 명상(名相)에 집착하지 말고 실상(實相)을 보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는 비유이다. 《楞嚴經 卷2》
    [주D-012]앉아서 잊는 경지 : 좌망(坐忘)은 《장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말로, 주객(主客)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도(道)와 합일된 정신의 경지를 뜻하는데, 불가(佛家)의 삼매(三昧)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D-013]나는 …… 하던가 :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 말이 《논어》 〈양화(陽貨)〉에 나온다.
    [주D-014]정명(淨名)이 …… 대하고 : 정명은 인도(印度) 비야리국(毘耶離國)의 장자(長者)로서 석존(釋尊)의 속제자(俗弟子)였다는 유마거사(維摩居士)를 가리킨다.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유마거사를 찾아와서 불이법문(不二法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유마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문수가 탄식하며 “이것이 바로 불이법문으로 들어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維摩經 入不二法門品》
    [주D-015]선서(善逝)가 …… 것 : 선서는 부처의 10호(號) 가운데 하나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염화시중(拈花示衆)했을 때에, 대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직 가섭(迦葉)만이 파안미소(破顔微笑)를 짓자, 석가가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 열반묘심(涅槃妙心), 실상무상(實相無相), 미묘법문(微妙法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부촉하노라.”라고 했다는 말이, 육조 대사(六祖大師)의 《법보단경(法寶壇經)》 〈서문〉과 《오등회원(五燈會元)》 권1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에 나온다.
    [주D-016]천시(天時)를 …… 없어서 : 농사지어 수확할 토지가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훔쳐서〔盜天地之時利〕 농사짓고 살아간다는 말이 나온다.
    [주D-017]철숙(啜菽)의 봉양 : 콩죽을 쑤어 먹는다는 말로, 빈한한 집에서 효성스럽게 어버이를 모시는 것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로가 집이 가난해 어버이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고 한탄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맹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면 그것이 곧 효도이다.〔啜菽飮水 盡其歡 斯之謂孝〕”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주D-018]채란(采蘭) : 진(晉)나라 속석(束晰)의 보망시(補亡詩) 〈남해(南陔)〉에 나오는 ‘언채기란(言采其蘭)’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배로운 향초를 캐어 어버이에게 드린다는 뜻에서 어버이 봉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D-019]희미(希微)의 경지 : 소리와 형체가 없는 도(道)의 세계를 말한다. 《노자(老子)》 14장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는 것을 희라 하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을 미라 한다.〔聽之不聞名曰希 搏之不得名曰微〕”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0]내가 …… 되겠는가 : 《논어》 〈양화(陽貨)〉에 “내가 어찌 뒤웅박처럼 한곳에 매달린 채 먹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는가.〔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21]오체투지(五體投地) : 두 무릎과 두 팔과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는 불교 예법의 하나로, 접족작례(接足作禮)ㆍ두면예족(頭面禮足)이라고도 한다.
    [주D-022]불이 …… 같았다 : 상호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며,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다. 물은 축축한 곳으로 번져 가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타들어 간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3]동방의 성인(聖人)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석안함전(釋安含傳)〉에 “최치원이 지은 〈의상전〉에 의하면, 의상은 진평왕 건복 42년(620)에 태어났는데, 이해에 동방의 성인인 안홍 법사가 서역의 두 삼장과 중국의 승려 2인과 함께 당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崔致遠所撰義相傳云 相眞平建福四十二年受生 是年東方聖人安弘法師與西國二三藏 漢僧二人至自唐〕”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4]칠도인(漆道人) : 동진(東晉)의 고승(高僧) 도안(道安)의 별칭이다. 《석씨계고략(釋氏稽古略)》 권2 〈전량(前涼) 석도안(釋道安)〉에 “나이 11세에 출가하여 불도징을 사사하였다. 글을 읽으면 하루에 만언을 기억하였으며, 재변으로 맞설 사람이 없었다. 성품이 총명하였으나 모습은 추하였으므로, 당시에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고 말하였다.〔年十一出家師事佛圖澄 讀書日記萬言 才辯無敵 性聰而貌醜 時語曰漆道人驚四隣〕”라는 말이 나온다. 또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도안은 모습이 총민하고 피부 색깔이 검었으며 담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칠도인이 사방을 놀라게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또 왼쪽 팔에 사방 1치쯤 도장 형태의 살점이 돋아났으므로 세상에서 인수보살이라고 불렀다.〔安貌銳而姿黑 喜談論 故諺曰 漆道人驚四隣 左臂有肉 方寸隆起如印 世號印手菩薩〕”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5]도읍 …… 사람 : 춘추 시대 송(宋)나라 공자 한(罕)을 가리킨다. 송나라 황국보(皇國父)가 태재(太宰)가 되어 임금인 평공(平公)을 위해 누대를 지었는데, 그 일이 농사에 방해가 되었으므로 공자 한이 추수가 끝난 뒤에 공사할 것을 청했지만 평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일을 하는 자들이 “택문 가의 얼굴 흰 사람은 실로 우리의 이 공사를 일으켰고, 도읍 안의 얼굴 검은 사람은 실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 주네.〔澤門之晳 實興我役 邑中之黔 實慰我心〕”라고 노래했다는 고사가 《춘추좌씨전》 양공(襄公) 17년에 나온다.
    [주D-026]적자(赤頿) : 진(晉)나라의 고승 불태야사(佛馱耶舍)를 가리킨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26 〈십팔현전(十八賢傳) 불태야사〉에 “스님은 수염이 붉고 비바사론을 잘 해석하였기 때문에, 당시에 사람들이 붉은 수염의 논주라고 불렀다.〔師頿赤 善解毘婆沙論 時人號赤頿論主〕”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7]청안(靑眼) : 푸른 눈이라는 뜻으로, 보통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磨)를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주D-028]성선(聖善) : 모친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개풍(凱風)〉의 “어머님은 성스럽고 선하신데, 우리 중에는 괜찮은 자식이 없도다.〔母氏聖善 我無令人〕”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D-029]해후하여 …… 풀었으니 : 《시경》 〈야유만초(野有蔓草)〉의 “우연히 서로 만나, 평소의 소원을 풀었도다.〔邂逅相遇 適我願兮〕”라는 말을 발췌한 것이다.
    [주D-030]서남쪽에서 …… 것 : 《주역(周易)》 〈곤괘(坤卦) 괘사(卦辭)〉에 “서남쪽으로 가면 벗을 얻고, 동북쪽으로 가면 벗을 잃는다.〔西南得朋 東北喪朋〕”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1]불지견(佛知見) : 부처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개(開)ㆍ시(示)ㆍ오(悟)ㆍ입(入)의 사불지견(四佛知見)을 설법했다는 내용이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보인다.
    [주D-032]지관(止觀) : 망상을 쉬고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불교 수행법으로,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傳)으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에서 특히 강조한다.
    [주D-033]흑의(黑衣)의 인걸 :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제무제(齊武帝)〉에 “장간사의 현창에게 조칙을 내려 법헌과 함께 승주가 되게 한 뒤에, 강남과 강북의 일을 나누어 맡게 하니, 당시에 이들을 흑의의 두 인걸이라고 불렀다.〔勅長干寺玄暢同法獻爲僧主 分任江南北事 時號黑衣二傑〕”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4]미천(彌天) : 하늘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진(晉)나라 고승 도안(道安)의 별명인데, 여기서는 진감 선사를 비유하였다. 《불조통기(佛祖統記)》 권36 〈진효무제(晉孝武帝)〉에 “고사 습착치가 도안을 찾아와서 자칭 사해 습착치라고 말하자, 도안이 미천 석도안이라고 대답하였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명답변이라고 하였다.〔高士習鑿齒詣安 自稱四海習鑿齒 安答曰 彌天釋道安 時以爲名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5]의원의 …… 것 : 《장자》 〈인간세(人間世)〉에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들어가라. 의원의 집에는 환자가 많이 모이는 법이다.〔治國去之 亂國就之 醫門多疾〕”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6]오도(於菟) : 호랑이의 별칭이다. 《춘추좌씨전》 선공(宣公) 4년에 “초나라 사람들은 젖을 곡이라 하고, 호랑이를 오도라 한다.〔楚人謂乳穀 謂虎於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37]유기(兪騎) : 유아기(兪兒騎)의 준말로, 제왕의 대가(大駕)가 행차할 때 의장대(儀仗隊)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호위 기마병을 말한다. 유아는 발걸음이 날래어 잘 달리는 등산(登山) 귀신 이름이다.
    [주D-038]선무외 삼장(善無畏三藏)이 …… 일 : 《송고승전(宋高僧傳)》 권2 〈선무외전(善無畏傳)〉에 나온다.
    [주D-039]축담유(竺曇猷)가 …… 일 : 맹호(猛虎) 수십 마리가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송경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유독 한 마리가 졸고 있자 여의장(如意杖)으로 머리를 두드려 깨워 질책하였다는 이야기가 《고승전(高僧傳)》 권11 〈축담유전(竺曇猷傳)〉에 나온다.
    [주D-040]난야(蘭若) : 범어(梵語) araṇya의 음역인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출가한 승려의 한적한 수행처, 즉 사원을 뜻한다.
    [주D-041]개성(開成) …… 나서 : 민애왕 김명(金明)이 희강왕(僖康王)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말하는데, 그도 1년 뒤에 김양(金陽) 등에게 살해되는 운명을 맞는다.
    [주D-042]산에서 …… 청한다 :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6 〈승조전(僧稠傳)〉에 “북위(北魏) 효명제가 일찍이 그의 훌륭한 덕에 감화되어 전후에 걸쳐 세 차례나 초빙하였으나, 승조가 사양하면서 ‘어느 하늘 아래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으니, 산에서 수도하며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해 주기를 청한다.’라고 하니, 황제가 마침내 허락하고는 산으로 공양을 보내었다.〔魏孝明帝夙承令德 前後三召 乃辭云 普天之下莫非王土 乞在山行道不爽大通 帝遂許焉 乃就山送供〕”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3]원공(遠公)의 동림(東林) :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여산(廬山)에 세운 동림사(東林寺)를 말하는데, 주변의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다.
    [주D-044]연화세계(蓮花世界) :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가리킨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보살행(菩薩行)을 닦으며 발원해서 성취한 청정 장엄(淸淨莊嚴) 세계를 말하는데, 《신역 화엄경(新譯華嚴經)》 권8 〈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주D-045]호리병 …… 이야기 : 후한(後漢)의 술사(術士) 비장방(費長房)이 시장에서 약을 파는 선인(仙人) 호공(壺公)을 따라 그의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더니, 그 안에 일월(日月)이 걸려 있고 선경인 별천지(別天地)가 펼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새로 세운 쌍계사(雙溪寺)를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 費長房》
    [주D-046]중생의 …… 것이다 : 《능가경(楞伽經)》 권1 〈일체불어심품(一切佛語心品)〉의 게(偈)에 나온다.
    [주D-047]양사(梁史)에도 …… 있는데 : 《양서(梁書)》 권41 〈저상열전(褚翔列傳)〉에 “저상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시중이 되었을 때에 모친의 병이 위독해지자, 사문을 청해 복을 빌었다. 그러자 한밤중에 홀연히 문밖에 기이한 빛이 보이고, 또 공중에서 손가락 튀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새벽녘에 병이 마침내 나았다.〔翔少有孝性 爲侍中時 母疾篤 請沙門祈福 中夜忽見戶外有異光 又聞空中彈指 及曉疾遂愈〕”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8]측조(側調) : 고악(古樂) 삼조(三調) 중의 하나이다. 송(宋)나라 왕작(王灼)의 《벽계만지(碧溪漫志)》 권5에 “대체로 옛 음악은 성률의 높고 낮음에 따라 셋으로 나눈다. 청조와 평조와 측조가 그것인데, 이를 삼조라고 한다.〔蓋古樂取聲律高下合爲三 曰淸調平調側調 此之謂三調〕”라는 말이 나온다.
    [주D-049]코를 막는 것 : 타인의 기예를 부러워하여 본받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사안(謝安)이 젊었을 때 콧병을 앓아서 마치 낙양(洛陽) 서생(書生)의 성조(聲調)처럼 굵고 탁한 코 먹은 소리를 잘 내었는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이 음성을 좋아하여 모방하려고 해도 잘 안 되자 ‘손으로 코를 막고 읊조렸다.〔手掩鼻而吟〕’라는 고사가 전한다. 《世說新語 雅量》
    [주D-050]능곡(陵谷) : 상전벽해(桑田碧海)처럼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시경》 〈시월지교(十月之交)〉의 “높은 언덕은 골짜기로 뒤바뀌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으로 변했도다.〔高岸爲谷 深谷爲陵〕”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1]쇠를 …… 같이하여 :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두 사람이 마음을 같이하면 쇠도 자를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의 말에서는 난초 향기가 풍겨 나온다.〔二人同心 其利斷金 同心之言 其臭如蘭〕”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2]양곡(暘谷) : 전설 속의 해 뜨는 곳을 말한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3]서하(西河)의 문도(門徒) : 선사의 제자의 제자를 가리킨다. 서하는 노년에 물러나 서하 지역에서 거처하며 교수했던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선사의 제자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54]이름이 …… 하였는데도 : 《장자》 〈양생주(養生主)〉에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爲善 无近名〕”라는 말이 나온다.
    [주D-055]해야 …… 함으로써 :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해조(解嘲)〉에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때에 하면 좋지만,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는 안 될 때에 하면 좋지 않다.〔爲可爲於可爲之時則從 爲不可爲於不可爲之時則凶〕”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56]훈지(塤篪)가 서로 화답하듯 :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하는 말이다. 헌강왕과 정강왕은 형과 아우 사이이다. 《시경》 〈하인사(何人斯)〉의 “맏형은 질나발을 불고 둘째 형은 저를 분다.〔伯氏吹塤 仲氏吹篪〕”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7]구준(衢罇) : 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성인(聖人)의 도를 가리킨다. 《회남자》 〈무칭훈(繆稱訓)〉의 “성인의 도는 마치 대로에 술동이를 놔두고서 지나는 사람마다 크고 작은 양에 따라 각자 적당히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聖人之道 猶中衢而置尊邪 過者斟酌 多少不同 各得所宜〕”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주D-058]다섯 가지 기능 : 보잘것없는 재능이라는 뜻의 겸사이다. 《순자》 〈권학(勸學)〉에 “교룡은 발이 없어도 잘도 나는데, 땅강아지는 다섯 가지 기능을 지녔으면서도 궁하기만 하다.〔螣蛇無足而飛 梧鼠五技而窮〕”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날 수는 있어도 지붕 위에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나무를 타고 올라갈 수는 있어도 꼭대기까지는 가지 못하며, 헤엄을 치기는 해도 골짜기를 건너가지는 못하고, 구멍을 팔 수는 있어도 몸을 가리지는 못하며, 달릴 수는 있어도 사람보다 먼저 가지는 못하니, 이것을 다섯 가지 기능〔五技〕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D-059]돌에 …… 일이라서 : 진나라 위유 지방에서 돌이 말을 했다〔石言于晉魏楡〕는 소문과 관련하여, 사기궁(虒祁宮)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기력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원망하는 소리를 대변한 것이라고, 사광(師曠)이 임금에게 해설한 내용이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8년에 나오는데, 그 내용 중에 “돌이 말하지 못하는 물건이지만, 혹시 신이 붙어서 말할 수도 있는 일이고, 아니면 백성들이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石不能言 或馮焉 不然民聽濫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0]도(道)라는 …… 것이니 : 《노자》 25장에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도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억지로 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1]어떤 …… 않고 : 《장자》 〈지북유(知北遊)〉에 “어떤 생각이나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어떤 곳에도 머물지 말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에 편히 머물게 된다. 어떤 것도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無思無慮始知道 無處無服始安道 無從無道始得道〕”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2]비바람 …… 한결같았다오 : 《시경》 〈풍우(風雨)〉는 난세에도 절조(節操)를 변하지 않는 군자를 그리워하는 시인데, 그중에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風雨如晦 雞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는 말이 나온다.
    [주D-063]운근(雲根) : 산 위의 바위를 뜻하는 시어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
    [주D-064]천인(天人)의 …… 닳도록 :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40리 되는 반석(磐石)을 천인이 100년에 한 번씩 옷자락으로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고, 8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중겁(中劫), 80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대아승지겁(大阿僧祇劫) 즉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하 〈불모품(佛母品)〉에 나온다. 그 반석은 겁석(劫石)이라고 칭한다.

     

     

     

    안동의 제사 스크랩
    2) 文昌侯 崔致遠

    신라 헌강왕(憲康王)때의 유학자이고 경주 최씨의 시조라고 하는데 사전(史傳)이 인멸(湮滅)되어 가계(家系)는 알려지지 아니한다.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69년(경문왕 9) 당나라에 유학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에게 사사(師事)하였다. 18세 되던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879년(憲康王 5) 황소(黃巢)의 난에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그의 격문(檄文)을 비롯한 많은 서장(書狀)을 제술(製述)하여 그의 문명(文名)이 중국에 널리 알려졌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서서감(瑞書鑑)등의 관직을 지냈다. 893년(眞聖女王 7)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고 이듬해 「시무십조(時務十條)」를 상소하여 시행케 하고 아손(阿飡)이 되었다. 만년에 지리산•가야산 등 명산대찰(名山大刹)를 두루 다녔다. 이 무렵 금별산(金鱉山) 상서장(上書莊)에서 고려 태조에게 「계림황엽(鷄林黃葉) 곡영청송(鵠嶺靑松)」이라는 편지를 보내 시대를 예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학문관은 유•불•도 삼교를 융합•조화시킨 삼교조화론(三敎調和論) 내지는 삼교동일론(三敎同一論)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자임을 자처하였고 유학에 대한 학문적 정열과 공자에 대한 존경심을 특히 표출하였다. 아울러 출세를 위한 학문이 무가치한 것임을 인식하고 도의 존폐(存廢)에 관심을 두어 도학적(道學的) 성격을 지닌 학문관을 시사하였다. 또한 당시의 학풍과 관련하여 심학(心學)[思想]과 구학(口學)[文學]으로 분류하고, 훌륭한 사상이라도 문학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사상이 담겨지지 않은 문학은 의미가 없다고 하여 문학과 사상의 중용론(中庸論)을 전개하였다. 그의 유학에 대한 견해는 인사상(仁思想)과 대동사상(大同思想)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는 천과 인 그리고 도의 관계성을 논하여. “천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람이고 사람이 종으로 삼는 것은 도이다.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므로(人能弘道 非道弘人) 도가 존중되면 사람은 자연히 귀하게 된다.” 『고운집(孤雲集)』 「해인사(海印寺)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라고 하여 사람이 하늘을 근원으로 하며 도를 실천하는 존재임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존귀함을 부각시켰다. 한편, 이욕(利欲)에서 벗어나 사람의 본심을 회복할 것을 강조하여 수심(修心)•조심(操心)•직심(直心) 등의 심학적(心學的)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인욕에서 벗어나 사람의 본심인 인으로의 회복은 대동사상(大同思想)으로 표현되었다. 「유교(儒敎)의 좋은 가르침을 들어 때를 잃지 말고, 상고(上古)의 풍교(風敎)를 일으켜서 영원히 대동의 교화를 이뤄야 한다.(「求化修 九雲寺疎」)라고 하여 유교의 이상은 곧 영원한 대동세계(大同世界)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불교와 도교에 관하여 배타적인 입장에 서지 않고 인사상(仁思想)을 바탕으로 합일적인 시도를 하였다. 즉, “인심(人心)은 곧 불(佛)이며 인이 됨은 법칙이다.(「智證大師碑銘」)라고 하여 불교를 인도주의(人道主義)로 해석하고, 각(覺)•해탈(解脫)의 사상이 마음의 문제임을 통찰하고 그 주체자인 인간을 매개로 하여 유교의 인•대동사상과 조화•합일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신선사상(神仙思想)을 철저히 배격하고 노장사상에 많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불교와 도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유교의 바탕 위에서 상호 융합•조화시키고 있다는 데 주목할 만 하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그의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 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설명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고려 현종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追贈).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함양(咸陽)의 백연서원(栢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에 「고운집(孤雲集)」•「계원필경(桂苑筆耕)」•「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석순응전(釋順應傳)」등이 있다


     

     

     

     





     
     大唐新羅國故鳳巖山寺
    敎諡智證大師寂照之塔碑銘幷序

    入朝賀正皇花等使朝請大夫前守兵部侍郞瑞書院
    學士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

    曰五常分位配動方者曰仁心三敎立名顯淨域者曰佛仁心卽佛佛目能仁則也道郁夷柔順性源達迦衛慈悲敎海寔猶石投水雨聚沙然矧東諸侯之外守者莫我大而地靈旣好生爲本風俗亦交讓爲熙熙太平之春
    隱上古之化加以參釋種遍頭寐錦之尊語襲梵音彈舌足多羅之字是乃天彰西顧海東流宜君子之鄕法王之道日日深又日深矣且自魯紀隕星漢徵佩日像跡則百川含月法音則萬籟號風或緝懿縑緗或綵華琬琰
    濫雒宅鏡秦宮之事跡照照焉如揭合璧苟非三尺喙五色毫焉能措辭其間駕說于後以國觀國考從鄕至鄕則風傳沙嶮而來波及海隅之始昔當東表鼎峙之秋有百濟蘇塗之儀若甘泉金人之祀厥後西晉曇始始之貊如」
    攝騰東入句驪阿度度于我如康會南行時迺梁菩薩帝同泰一春我法興王剬律條八載也亦旣海岸植與樂之根日鄕耀增長之寶天融善願地聳勝因爰有中貴捐軀上僊剔髮苾芻西學羅漢東遊因爾混沌
    娑婆遍化莫不選山川勝槪窮土木奇功藻宴坐之宮燭徐行之路信心泉湧慧力風揚果使㵱杵蠲灾鍵櫜騰慶昔之蕞爾三國今也壯哉一家雁刹雲排將無隙地鯨枹雷振不遠諸天漸染有餘幽求無睪攵其敎之興也」
    毗婆娑先至則四郡四諦之輪摩訶衍後來則一國耀一乘之鏡然能龍雲躍律虎風騰洶學海之波濤蔚戒林之柯葉道咸融乎無外情或涉乎有中抑止水停漪高山佩者 盖有之矣世未之知洎長慶初有僧道義
    西泛西堂之奧智光侔智藏而還始語玄契者縛猿心奔北之短矜鷃翼誚南之高旣醉於誦言競嗤爲魔語是用韜光廡下壺中罷思東海東北山大易之無悶中庸之不悔華秀冬嶺芳定林
    蟻慕者彌山雁化谷道不可廢時然行及興德大王纂戎宣康太子監撫去邪毉國樂善肥家洪陟大師亦西堂證心來南岳休足鷩冕陳順風之請龍樓開霧之期顯示密傳朝凡暮聖變非蔚也興且」
    焉試虛見較其宗趣則修修沒修證乎證沒證其靜也山立其動也谷應無爲之益不爭而勝於是乎東人方寸地虛矣能以利海外不言其所利大矣哉爾後觴騫河融道無念爾祖寔繁有劍化
    延津珠還合浦爲巨擘者可屈指焉西化則靜衆無相常山慧覺禪譜益州金鎭州金者是東歸則前所敍北山義南岳陟而降大安徹國師慧目育智力聞雙溪照新興彦涌岩體珍丘休雙峰雲孤山日朝國
    聖住染菩提宗德之厚爲父衆生道之尊爲師王者古所謂逃名名我隨避聲聲我追者皆被恒沙蹟傳豊石有令兄弟宜爾子孫俾定林標秀於鷄林慧水安流於鰈水者矣別有不戶不片庸而見大道不山不海而得上寶恬然息意澹乎忘味彼岸也不行而至此土也不嚴而治七賢孰取譬十住難定位者賢鷄山智證大師其人也始大成也發蒙于梵體大德稟具于瓊儀律師終上達也探玄于慧隱嚴君楊孚令子法胤唐四祖爲五世」
    父東漸于海遡數之雙峰子法朗愼行曾孫遵範玄孫慧隱來孫大師也朗大師從毉之大證按杜中書正倫纂銘云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險途來至所則掬寶歸止非師而誰知者不言復藏于密能秘藏唯行」
    大師然時不利兮道未亨也乃浮于海聞于天肅宗皇帝天什龍兒渡海不憑筏鳳子沖虛無認月師以山鳥海龍二句爲對有深旨哉東還三傳至大師畢萬之後斯驗矣其世緣則王都人金姓子號道憲字智詵父贊瓌」
    母伊氏長慶甲辰歲現乎世中和壬寅曆恣坐也四十三夏歸全也五十九年其具體則身餘面尺儀狀魁岸語言雄亮眞所謂威而不猛者始孕洎滅奇蹤秘說神出鬼沒筆不加紀今其感應聳人耳者六異操履驚」
    人心者六是,而分表之初母夢一巨人告曰僕昔勝見佛季世桑門謓恚故久隨龍報報旣旣矣當爲法孫故侂妙緣願弘慈化因有娠幾四百日灌佛旦誕焉事驗蟒亭夢符像室使佩韋者益擁毳者精修降生之異一也」
    生數夕不嚥乳之則號欲欻有道人過門誨曰欲兒無聲忍絶焄腥母從之竟無恙使乳育者加愼肉飡者懷慙宿習之異二也九歲喪父殆毁滅有追福僧憐之曰幻軀易滅壯志難成昔佛報恩有大方便子勉之感悟輟」
    哭白所生請歸道母慈其幼復念保家無主不許耳踰城故事則亡去就學浮石山忽一日 心驚坐屢遷俄聞倚閭成疾遽歸省而病隨愈時人阮孝緖居無何沈疴謁毉無效枚卜之僉曰宜名隷大神母追惟曩夢覆以
    而泣誓言斯疾若起乞佛爲子信宿果大瘳仰悟慈親終成素志使舐犢割愛飮蛇者釋疑孝感之異三也至十七受具始就壇覺袖中神光熠熠然探之得一珠豈有心而求乃無脛而至眞六度經所喩矣使飢嘑者自飽醉偃者」
    能醒勵心之異四也坐雨竟將它適夜夢遍吉菩薩撫頂提耳曰苦行難行行之必成形痒然黙篆肌骨自是不復服繒絮焉修綫之須必麻楮不穿達屣羽翣毛茵餘用矣使縕黂者開眼衣蟲厚顔律身之異五也自綺年
    飽老成之德加瑩戒珠加畏者競相從求益大師拒之曰人大患好爲師强欲慧不惠其如模不模何耶況浮芥海鄕自濟未暇無影逐爲必笑之態後山行有樵叟假碍前路曰先覺覺後覺何須捨空殼就之則無見焉爰媿且悟不阻來求森竹葦于鷄籃山水石寺俄卜築他所曰不繫爲懷能遷是貴使佔畢三省營巢者九思垂訓之異六也贈大師景文大王心融鼎敎輪工遙深爾思覬俾我卽乃寓書曰伊尹大通宋纖小見以儒釋自邇陟遠甸邑巖」
    居頗有佳所木可擇矣無惜鳳儀妙選近侍中可人鵠陵昆孫立言爲使旣傳敎已因攝齊焉答曰修身化人捨靜奚趣能之命善爲我辭幸許安塗中無令在汶上上聞之益珍重自是譽四飛於無翼衆一變於不言咸通五年
    端儀長翁主未亡人爲稱當來佛是歸敬下生厚資上供以邑司所領賢溪山安樂寺富有泉石之美請爲猿鶴主人告其徒曰山號賢溪地殊愚谷寺名安樂僧盍住持從之徙焉居則化矣使樂山者益靜擇地者愼思
    之是一焉他日告門人曰故韓粲金公嶷勳度我爲僧報公以佛乃鑄丈六玄金像傅之以爰用鎭仁宇導冥路使恩者日篤重義者風從知報之是二焉至八年丁亥檀越翁主使茹金等南畝臧獲本籍授之爲
    傳舍俾永永不易大師因念言王女資法喜尙如是矣佛孫味禪悅豈徒然乎我家匪貧親黨皆歿與落路行人之手寧充門弟子之腹遂於乾符六年莊十二區田五百結隷寺焉飯孰譏囊粥能銘鼎民天是賴佛土可期雖」
    曰我田且居王土始資疑於王孫韓粲繼宗執事侍郞金八元金咸熙正法大統釋玄亮聲九皐應千里贈太傅獻康大王架而允之其年九月敎南川郡僧統訓弼擇別墅劃正場斯盖外佐君臣益地內資父母生天使續
    命者與仁賞歌者悛過檀捨之是三焉有居乾慧地者曰沈忠聞大師刃餘定慧鑑透乾坤志確曇蘭術精安廩禮足已白言弟子有剩地在曦山腹鳳巖龍谷境駭橫目幸構禪宮徐答曰吾未能分身惡用是忠請膠固加以山靈」
    有甲騎爲前騶之異乃錫挺樵溪而歷相焉且見山屛四迾獄鳥掀雲水帶百圍則腰偃石旣愕且唶曰獲是地也庸非天乎不爲靑衲之居其作黃巾之窟遂率先於衆防後爲基起瓦▨四注壓之鑄鐵像二軀以衛之至」
    中和辛丑年敎遣前安輪寺僧統俊恭肅正史裵聿文標定疆域芸賜片帝爲鳳巖焉及大師化往數年有山甿爲野冠者始敢据輪終能食葚得非深奭斗定水預汳魔山之巨力歟使折臂者掘尾者開發之是四焉太傅大王以華風掃弊慧海濡枯素欽靈育之名渴聽法深之論乃注心鷄足灑翰鶴頭以徵之曰外護小緣念踰三際內修大惠幸許一來大師感動琅函言及勝因通世同塵率土懷玉出山轡織迎途至憩足于禪院寺錫安信宿引」
    問心于月池宮時屬纖蘿不風溫樹方夜適覩金波之影端臨玉沼之心大師俯而覬仰而告曰是卽是餘無言上洗然欣契曰金仙花目所傳風流固協於此遂拜爲忘言師及出俾藎譬旨幸宜小停答曰謂牛戴牛所直無」
    幾以鳥養鳥爲惠不貲請從此辭枉之則折上聞之喟然以韻語歎曰旣不留空門鄧侯師是支鶴吾非乃命十戒弟子宣敎省副使馮恕行援送歸山使待兎者離株羨魚者學網出處之侍五焉在世行無遠近夷險」
    未嘗代勞以蹄角及還山氷霓跋涉乃以栟櫚步輿行謝使者日是豈井大春▨所云人車耶顧英君所不須矧形毁者乎然命旣至矣受之爲濟苦具及移疾于安樂練居不能起始乘之使病病者了空賢賢者離執用捨之是」
    六焉至冬抄旣望之二日趺坐悟言之際泊然無常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終風吼谷則聲咽虎溪積雪摧松則色侔鵠樹物感斯極人悲可量而假殯于賢溪其日而遂窆于野其詞曰」
    麟聖依仁仍據德  鹿仙知白能守黑  二敎徒稱天下式  螺髻眞人難确力  十萬里外鏡西域  一千年後燭東國  鷄林地在鼇山側  仙儒自古多奇特  可憐羲仲不曠職  更迎佛日辨空色  敎門從此分階墄  言路因之理溝洫  身依兎窟心難息  足蹋羊岐眼還惑  法海安流眞叵測  心得眼訣苞眞極  得之得類罔象得  黙之黙異寒蟬黙  北山義與南岳陟  垂鵠翅與展鵬翼  海外時來道難抑  遠流禪河無壅塞」
    麻中能自直  珠探衣內休傍貸  湛若賢溪善知識 十二因緣匪虛飾  何用攀  何用舐筆及含墨  彼或遠學來匍匐  我能靜坐降魔賊  莫把意樹誤栽植  莫把情田枉稼穡  莫把恒沙論萬億
    莫把孤雲定南北  德馨四遠聞蔔 化一方安社稷  面奉天花飄縷 心憑水月呈禪拭 ▨▨佳綿誰入棘  腐儒玄杖摘埴 跡耀寶幢名可 才錦頌文難  ▨腸▨飮禪悅食  來向山中看篆刻」

    (음기)

    太傅王馳醫問疾降馬吏營齊不暇無偏無頗能諧有」
    始有終特敎菩薩戒弟子建功鄕令金立言慰勉諸」
    孤賜諡智證禪師塔號寂照仍許勒石俾錄狀聞門」
    人性蠲敏休楊孚繼徽等咸得鳳毛陳迹以獻」
    乙巳歲有國民媒儒道嫁帝鄕而名掛輪中職攀
    者曰崔致遠捧漢后龍緘淮王鵠幣雖」
    鳳擧頗類鶴歸上命信臣淸信者陶竹陽授門」
    人狀賜手敎曰縷褐東師始悲遷化繡衣西使深」
    喜東還不之爲有緣至無恡外孫之作將酬
    之慈臣也雖東箭非材而南冠多幸方思運斧遽」
    號弓國重佛▨家藏僧史法碣相望禪碑最」
    多遍覽色絲試搜殘錦則見無去無來之說競把斗」
    量不生不滅之譚動論車載曾無魯史新
    或用同公舊章是知石不能言益驗道」
    遠唯懊師化去早臣歸來遲靉靆字誰」
    告前日逍遙義不聞眞決每憂傷手莫悟伸擧歎時」
    則露往霜來遽涸愁鬢談道則天高地厚腐頑毫」
    將諧汗漫之遊始述崆峒之美有門人英爽來趣
    金口是資石心彌固忍踰刮骨求甚刻身影伴八」
    言資三復抑六異六是之屬辭無媿賈勇有餘者」
    實乃大師內蕩六魔外除六蔽六度坐證六通
    故也事譬採花文難削藁遂同榛藁勿翦有慙糠粃
    在前跡追蘭殿之遊誰不仰月池佳對偈效柏
    庶幾日域高譚」
        芬皇寺慧江書幷刻字歲八十三」
        院主大德能善
       通俊」
        都唯那等」
       玄逸」
       長解」
       鳴善」
       旦越成西▨大將軍着紫金魚袋蘇判阿叱彌 加恩縣將軍熙弼」
       當縣▨刃治▨▨▨于德明」
      龍德四年歲次甲申六月 日竟建」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대당 신라국 고 희양산 봉암사 교시지증대사의 적조탑비명 및 서

    입조하정 겸 연봉황화등사 조청대부 전수병부시랑 충서서원학사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이 교를 받들어 지음.

    서(序)에 말한다. 오상(五常)을 다섯 방위로 나눔에 동방(東方)에 짝지어진 것을 ‘인(仁)’이라하고, 삼교(三敎)의 명호(名號)를 세움에 정역(淨域)에 나타난 것을 ‘불(佛)’이라 한다. 인심(仁心)이 곧 부처이니, 부처를 ‘능인(能仁)’이라고 일컫는 것은 당연하다. 해돋는 곳〔욱이(郁夷); 신라〕의 유순한 성품의 물줄기를 인도하여, 석가모니의 자비로운 교해(敎海)에 이르도록 하니, 이는 돌을 물에 던지고 비가 모래를 모으는 것 같이 쉬웠다. 하물며 동방의 제후가 외방(外方)을 다스리는 것으로 우리처럼 위대함이 없으며, 산천이 영수(靈秀)하여 이미 호생(好生)으로 근본을 삼고 호양(互讓)으로 선무(先務)를 삼았음에랴. 화락한 태평의 봄이요, 은은한 상고(上古)의 교화로다. 게다가 성(姓)으로 석가의 종족에 참여하여, 국왕같은 분이 삭발하기도 하였으며, 언어가 범어(梵語)를 답습하여 혀를 굴리면 불경의 글자가 되었다. 이는 진실로 하늘이 환하게 서쪽으로 돌아보고, 바다가 이끌어 동방으로 흐르게 한 것이니, 마땅히 군자들이 사는 곳에 부처〔법왕(法王)〕의 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또 깊어질 것이다.
    대저 노(魯)나라에서 하늘로부터 별이 떨어진 것을 기록하고, 한(漢)나라에서 금인(金人)의 목덜미에 일륜(日輪)이 채여 있음을 징험함으로부터, 부처의 자취는 모든 시내가 달을 머금은 듯하고, 설법하는 소리는 온갖 퉁소소리가 바람에 우는 것 같아, 혹 아름다운 일의 자 취를 서적〔겸상(縑緗)〕에 모으기도 하고, 혹 빛나는 사실들을 비석〔완염(琬琰)〕에 수놓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낙양을 범람케 하고 진궁(秦宮)에 거울을 걸어놓은 사적이 마치 해와 달〔합벽(合璧)〕을 걸어 놓은 듯하니, 진실로 3척의 혀와 5색의 붓이 아니면, 어찌 그 사이에 문사(文辭)를 얽고 맞추어 후세에 언설을 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한 나라의 경우에 비추어 다른 나라의 사정을 파악하고 한 지방으로부터 다른 지방에 이른 것을 상고하니, 불법(佛法)의 바람이 사막과 험준한 지대를 지나서 오고, 그 물결이 바다의 한 모퉁이〔해동(海東)〕에 비로소 미치었다.
    옛날 우리나라가 셋으로 나뉘어 솥발과 같이 서로 대치하였을 때에 백제에 ‘소도(蘇塗)’의 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감천궁(甘泉宮)에서 금인(金人)에게 제사지내는 것과 같았다. 그 뒤 섬서(陝西)의 담시(曇始)가 맥(貊) 땅에 들어온 것은, 섭마등(攝摩騰)이 동(東)으로 후한(後漢)에 들어온 것과 같았으며, 고구려의 아도(阿度)가 우리 신라에 건너온 것은, 강승회(康僧會)가 남으로 오(吳)에 간 것과 같았다.
    때는 곧 양나라의 보살제가 동태사에 간지 한해 만이요, 우리 법흥왕께서 율령을 마련하신 지 팔년째였다. 역시 이미 바닷가 계림에 즐거움을 주는 근본을 심었으며, 해뜨는 곳 신라에서 늘어나고 자라나는 보배가 빛났으며, 하늘이 착한 소원을 들어주시고 땅에서 특별히 뛰어난 선인이 솟았다. 이에 귀현한 근신이 있어 제 몸을 바치고, 임금이 삭발하였으며, 비구승이 서쪽으로 가서 배우고, 아라한이 동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혼돈의 상태가 능히 개벽되었으며, 인간 세계가 두루 교화되었으므로, 산천의 좋은 경개(景槪)를 가리어 토목의 기이한 공력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수도할 집을 화려하게 꾸미고, 수행할 길을 밝히니, 신심(信心)이 샘물같이 솟아나고, 혜력(慧力)이 바람처럼 드날렸다. 과연 여(麗)·제(濟)를 크게 무찔러서〔㵱杵〕 재앙을 제거토록 하며, 무기를 거두고 경사를 칭송하게 하니,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한 집이 되었다. 탑이 구름처럼 벌려져서 문득 빈 땅이 없고, 큰 북이 우뢰같이 진동하여 제천에서 멀지 않으니, 점차 번지어 물듦에 여유가 있었고, 조용히 탐구함에 싫증이 없었다. 
    그 교가 일어남에 있어, 아비달마대비파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이 먼저 이르자 우리나라에 사체(四諦)의 법륜이 달렸고, 대승교가 뒤에 오니 전국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 그러나, 의룡(義龍)이 구름처럼 뛰고, 율호(律虎)가 바람같이 오르며, 학해(學海)의 파도가 용솟음치고, 계림(戒林)의 가엽(柯葉)이 무성하며, 도가 모두 끝없는 데 융합하고, 정이 간혹 속이 있는 데 통하였으니, 문득 고인 물이 잔 물결을 잠재우고, 높은 산이 일광(日光)을 두른 듯한 사람이 대개 있었을 것이나, 세상에서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장경(長慶) 초에 이르러, 도의(道義)라는 중이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가서 서당(西堂)의 오지(奧旨)를 보았는데, 지혜의 빛이 지장선사(智藏禪師)와 비등해져서 돌아왔으니, 현계(玄契)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숭이의 마음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남쪽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는 잘못을 감싸고, 메추라기의 날개를 자랑하는 무리들이 남해를 횡단하려는 대붕의 높은 소망을 꾸짖었다. 이미 외우는 말에만 마음이 쏠려 다투어 비웃으며 ‘마어(魔語)’라고 한 까닭에 빛을 지붕 아래 숨기고, 종적을 협소한 곳에 감추었는데, 동해의 동쪽에 갈 생각을 그만두고, 마침내 북산에 은둔하였으니, 어찌 『주역(周易)에서 말한 “세상을 피해 살아도 근심이 없다”는 것이겠는가. 꽃이 겨울 산봉우리에서 빼어나 선정의 숲에서 향기를 풍기매, 덕을 사모하는 자가 산에 가득하였고, 착하게 된 사람이 골짜기를 나섰으니, 도는 폐(廢)해질 수 없으며 때가 그러한 뒤에 행해지는 것이다.
    흥덕대왕(興德大王)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고 선강태자(宣康太子)께서 감무를 하시게 됨에 이르러, 사악한 것을 제거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선을 즐겨하여 왕가의 생활을 기름지게 하였다. 이 때 홍척대사(洪陟大師)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도 역시 서당(西堂)에게서 심인(心印)을 증득하였다. 남악(南岳)에 와서 발을 멈추니, 임금께서 하풍(下風)에 따르겠다는 소청의 뜻을 밝히셨고, 태자께서는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기약을 경하하였다. 드러내 보이고 은밀히 전하여 아침의 범부가 저녁에 성인이 되니, 변함이 널리 행해진 것은 아니나, 일어남이 갑작스러웠다.
    시험삼아 그 종취를 엿보아 비교하건대, 수(修)한 데다 수(修)한 듯하면서 수(修)함이 없고, 증(證)한 데다 증(證)한 것 같으면서 증(證)함이 없는 것이다. 고요히 있을 때는 산이 서있는 것 같고, 움직일 때는 골짜기가 울리는 듯하였으니, 무위(無爲)의 유익함으로 다투지 않고도 이겼던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의 바탕이 허령(虛靈)하게 되었는데, 능히 정리(靜利)로써 해외를 이롭게 하였으면서도, 그 이롭게 한 바를 말하지 않으니 위대하다고 하겠다. 
    그 후 구도승의 뱃길 왕래가 이어지고, 나타낸 바의 방편이 진도(眞道)에 융합하였으니, 그 조상들을 생각하지 않으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였도다.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는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 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無相)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금(益州金) 진주금(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溪寺)의 혜조(慧昭), 신흥언(新興彦), 통▨체(涌▨體), 진무휴(珍無休), 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보리종(菩提宗) 등인데,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두들 교화가 중생세계에 미쳤고, 행적이 부도와 비석에 전하였으며, 좋은 형제에 많은 자손이 있어, 선정(禪定)의 숲으로 하여금 계림(鷄林)에서 빼어나도록 하고, 지혜의 물로 하여금 접수(鰈水)에서 순탄하게 흐르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따로 지게문을 나가거나 들창으로 내다보지 않고도 대도를 보며, 산에 오르거나 바다에 나가지 않고도 상보(上寶)를 얻어, 안정된 마음으로 의념을 잠재우고 담담하게 세상 맛을 잊게 되었다. 저편의 중국에 가지 않고도 도에 이르르고, 이 땅을 엄하게 하지 않고도 잘 다스려졌으니, 칠현(七賢)을 누가 비유로 취하겠는가. 십주(十住)에 계위(階位)를 정하기 어려운 사람이 현계산(賢溪山) 지증대사(智證大師) 그 사람이다.
    처음 크게 이를 적에 범체대덕(梵體大德)에게서 몽매함을 깨우쳤고, 경의율사(瓊儀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마침내 높이 도달할 적엔 혜은엄군(慧隱嚴君)에게서 현리(玄理)를 탐구하였고, 양부령자(楊孚令子)에게 묵계(黙契)를 주었다. 법의 계보를 보면, 당(唐)의 제4조 도신(道信)을 5세부(世父)로 하여 동쪽으로 점차 이땅에 전하여 왔는데, 흐름을 거슬러서 이를 헤아리면, 쌍봉(雙峰)의 제자는 법랑(法朗)이요, 손제자는 신행(愼行)이요, 증손제자는 준범(遵範)이요, 현손제자는 혜은(慧隱)이요, 내손제자(來孫弟子)가 대사이다. 법랑대사는 대의사조(大醫四祖)의 대증(大證)을 따랐는데, 중서령(中書令) 두정륜(杜正倫)이 지은 도신대사명(道信大師銘)에 이르기를, “먼 곳의 기사요 이역의 고인으로 험난한 길을 꺼리지 않고 진소(珍所)에 이르러, 보물을 움켜쥐고 돌아갔다” 하였으니, 법랑대사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다만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으므로 다시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두었는데, 비장한 것을 능히 찾아낸 이는 오직 신행대사뿐이었다. 그러나 때가 불리하여 도가 미처 통하지 못한지라 이에 바다를 건너갔는데, 천자에게 알려지니, 숙종(肅宗)황제께서 총애하여 시구를 내리시되, “용아(龍兒)가 바다를 건너면서 뗏목에 힘입지 않고, 봉자(鳳子)가 하늘을 날면서 달을 인정함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신행대사가 ‘산과 새’, ‘바다와 용’의 두 구로써 대답하니 깊은 뜻이 담겼다. 우리나라에 돌아와 삼대(三代)를 전하여 대사에게 이르렀는 바, 필만(畢萬)의 후대가 이에 증험된 것이다.
    그의 세속 인연을 상고해 보면, 왕도(王都) 사람으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다. 호는 도헌(道憲)이요 자는 지선(智詵)이다. 아버지는 찬괴(贊瓌)이며 어머니는 이씨(伊氏)이다. 장경(長慶) 갑진년(甲辰年)에 세상에 태어나 중화(中和) 임인년(壬寅年)에 세상을 뜨니, 자자(自恣)한 지 43년이고 누린 나이가 59세였다. 그가 갖춘 체상(體相)을 보면, 키가 여덟 자 남짓했고 얼굴이 한 자 쯤이었으며, 의상(儀狀)이 뛰어나며 말소리가 웅장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이른바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은’ 사람이었다. 잉태할 당시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기이한 행적과 숨겨진 이야기는 귀신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 같아 붓으로는 기록할 수 없겠으나, 이제 사람들의 귀를 치켜 세우도록 한 여섯 가지의 이상한 감응과 사람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던 여섯 가지의 옳은 操行을 간추리고 나누어 나타낸다.
    처음 어머니의 꿈에 한 거인이 나타나 고하기를, “나는 과거의 비파시불(毘婆尸佛)로서 말법의 세상에 중이 되었는데, 성을 낸 까닭으로 오랫동안 용보(龍報)를 따랐으나, 업보가 이미 다 끝났으니 마땅히 법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묘연에 의탁하여 자비로운 교화를 널리 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이내 임신하여 거의 4백일을 지나 관불회(灌佛會)의 아침에 태어났는데, 일이 이무기의 복생고사(復生故事)에 징험되고 꿈이 불모(佛母)의 태몽고사에 부합되어, 스스로 경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고 삼가하게 하며, 가사를 두른 자로 하여금 정밀하게 불도를 닦도록 하였으니, 탄생의 기이한 것이 첫째이다.
    태어난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젖을 빨지 않고, 짜서 먹이면 울면서 목이 쉬려고 하였다. 문득 어떤 도인(道人)이 문앞을 지나다가 깨우쳐 말하기를, “아이가 울지 않도록 하려면 훈채(葷菜) 및 육류(肉類)를 참고 끊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말을 따르자 마침내 아무런 탈이 없게 되었다. 젖으로 기르는 이에게 더욱 삼가하도록 하고 고기를 먹는 자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지니게 하였으니, 오랜 풍습의 기이한 것이 둘째이다. 
    아홉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너무 슬퍼하여 거의 훼멸하였다. 추복승이 이를 가련히 여기고 논하여 말하기를, “덧없는 몸은 사라지기 쉬우나 장한 뜻은 이루기 어렵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으심에 큰 방편이 있었으니 그대는 이를 힘쓰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느끼고 깨달아 울음을 거두고는 어머니께 불도에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것을 가엾게 여기고, 다시금 집안을 보전할 주인이 없음을 염려하여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사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고사를 듣고 곧 도망해 가서 부석산에 나아가 배웠다. 문득 하루는 마음이 놀라 자리를 여러 번 옮겼는데, 잠시 뒤에 어머니가 그를 기다리다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급히 고향으로 돌아가 뵈오니 병도 뒤따라 나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완효서에 견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대사에게 고질(痼疾)이 전염되어 의원에게 보여도 효험이 없었다. 여러 사람에게 점을 쳤더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부처에게 이름을 예속시켜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전의 꿈을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조심스럽게 네모진 가사를 몸에 덮고 울면서 맹세하기를, “이 병에서 만약 일어나게 된다면 부처님께 아들로 삼아 달라고 빌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틀 밤을 자고 난 뒤에 과연 완쾌되었다. 우러러 어머니의 염려하심을 깨닫고, 마침내 평소에 품었던 뜻을 이루어, 제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식을 부처에게 선뜻 내주도록 하고, 불도를 미덥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심을 풀게 하였으니, 효성으로 신인을 감동시킨 것의 기이함이 셋째이다.
    열일곱 살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고 비로소 강단에 나아갔다. 소매 속에 빛이 선명한 것을 깨닫고 이를 더듬어 한 구슬을 얻었다. 어찌 마음을 두고 구한 것이겠는가. 곧 발이 없이도 이른 것이니, 참으로 『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비유한 바이다. 굶주려 부르짖는 것으로 하여금 제 스스로 배부르게 하고, 취해서 넘어지는 것으로 하여금 능히 깨어나도록 하였으니, 마음을 면려한 것의 기이함이 넷째이다.
    하안거를 마치고 장차 다른 곳으로 가려 하는데, 밤에 꿈속에서 보현보살이 이마를 어루만지고 귀를 끌어당기면서 말하기를, “고행을 실행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행하면 반드시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뒤 놀란 나머지 오한이 든 것 같았다. 잠자코 살과 뼈대에 새겨 이로부터 다시는 명주옷과 솜옷을 입지 않았고, 긴 실이 필요할 때는 반드시 삼이나 닥나무에서 나온 것을 사용하였으며, 어린 양가죽으로 만든 신도 신지 않았다. 하물며 새깃으로 만든 부채나 털로 만든 깔개를 사용하겠는가. 삼베옷을 입는 자로 하여금 수행에 눈을 뜨게 하고 솜옷을 입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게 여기도록 하였으니, 자신을 단속함의 기이함이 다섯째이다.
    어렸을 때부터 노성한 덕이 풍부하였고, 게다가 계주(戒珠)를 밝혔는지라, 후생들이 다투어 따르면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이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큰 걱정은 남의 스승이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을 억지로 슬기롭게 하고자 해도 그것이 본보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모범이 되게 하는 것과 같겠는가. 하물며 큰 바다에 뜬 지푸라기가 제 자신도 건너갈 겨를이 없음에랴. 그림자에게 형체를 쫓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반드시 비웃음살 꼴이 되리라” 하였다. 뒤에 산길을 가는데 어떤 나뭇꾼이 앞길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선각이 후각을 깨닫게 하는 데 어찌 덧없는 몸을 아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이에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닫고는 와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鷄藍山) 수석사(水石寺)에 대나무와 갈대처럼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얼마 뒤에 다른 곳에 땅을 골라 집을 짓고는 말하기를, “매이지 않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나, 능히 옮겨가는 것이 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책의 글자만 보는 이로 하여금 세 가지를 반성하게 하고 보금자리를 꾸민 자로 하여금 아홉 가지를 생각하도록 하였으니, 훈계를 내린 것의 이상함이 여섯째이다.
    태사에 추증된 경문대왕께서는 마음으로는 유(儒)·불(佛)·도(道) 3교에 융회한 분으로서 직접 대사를 만나 뵙고자 하였다. 멀리서 그의 생각을 깊이 하고, 자신을 가까이 하면서 도와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에 서한을 부쳐 말하기를, “이윤은 사물에 구애받지 않은 사람이고, 송섬은 작은 것까지 살핀 사람입니다. 유교의 입장에서 불교에 비유하면,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왕도 주위의 암거에도 자못 아름다운 곳이 있으니, 새가 앉을 나무를 가릴 수 있는 것처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봉황의 내의(來儀)를 아끼지 마십시오” 하였다. 근시 가운데 쓸만한 사람을 잘 골라 뽑았는데, 원성왕의 6대손인 입언(立言)을 사자로 삼았다. 이미 교지를 전함이 끝나자 거듭 제자로서의 예를 갖추었다. 대사가 대답하기를, “자신을 닦고 남을 교화시킴에 있어 고요한 곳을 버리고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새가 나무를 가려 않을 수 있다’는 분부는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하신 것이오니, 바라건대 그냥 이대로 있게 해주시어, 제가 거듭되는 부름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임금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더욱 진중히 여겼다. 이로부터 그의 명예는 날개가 없이도 사방으로 전해졌으며, 대중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아주 달라졌다.
    함통 5년(864) 겨울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미망인을 자칭하며 당래불(當來佛)에 귀의하였다. 대사를 공경하여 자신을 하생(下生)이라 이르고 상공(上供)을 후히 하였으며, 읍사(邑司)의 영유인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가 산수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원학(猿鶴)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대사가 이에 그의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산의 이름이 현계(賢溪)이고 땅이 우곡(愚谷)과 다르며 절의 이름이 안락(安樂)이거늘, 중으로서 어찌 주지하지 않으리오” 하고는, 그 말을 따라 옮겨서 머무른즉 교화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산과 같이 더욱 고요하게 하고, 땅을 고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중히 생각토록 하였으니, 진퇴의 옳음이 첫째이다.
    어느날 문인에게 일러 말하기를, “고(故) 한찬(韓粲) 김의훈(金嶷勳)이 나를 僧籍에 넣어 중이 되게 하였으니, 공에게 불상으로써 보답하겠노라” 하고는, 곧 1장 6척되는 철불상을 주조하여 선(銑)을 발라, 이에 절을 수호하고 저승으로 인도하는데 사용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자로 하여금 날로 돈독하게 하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처럼 따르도록 하였으니, 보답을 아는 것의 옳음이 둘째이다.
    함통 8년(867) 정해년(丁亥年)에 이르러, 시주인 옹주가 여금(茹金) 등으로 하여금 절에다 좋은 전지와 노비의 문서를 주어 , 어느 승려라도 여관처럼 알고 찾을 수 있게 하고, 언제까지라도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 대사가 그로 인해 깊이 생각해온 바를 말하되, “왕녀께서 법희(法喜)에 의뢰하심이 오히려 이와 같거늘, 불손(佛孫)인 내가 선열(禪悅)을 맛봄이 어찌 헛되이 그렇겠는가. 내 집이 가난하지 않은데 친척족당이 다 죽고 없으니, 내 재산을 길가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도록 놔두는 것보다 차라리 문제자들의 배를 채워주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건부(乾符) 6년(879)에 장(莊) 12구(區)와 전(田) 500결(結)을 희사하여 절에 예속시키니, 밥을 두고 누가 밥주머니라고 조롱했던가. 죽도 능히 솥에 새겨졌도다. 양식에 힘입어 정토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비록 내 땅이라 하더라도 임금의 영토 안에 있으므로, 비로소 왕손인 한찬(韓粲) 계종(繼宗)과 집사시랑(執事侍郞)인 김팔원(金八元), 김함희(金咸熙)에게 질의하여 정법사(正法司)의 대통(大統)인 석현량(釋玄亮)에게 미쳤는데, 심원한 곳에서 소리가 나 천리 밖에서 메아리치니, 태보(太傅)에 추증된 헌강대왕(獻康大王)께서 본보기로 여겨 그를 허락하시었다. 그 해 9월 남천군(南川郡)의 승통(僧統)인 훈필(訓弼)로 하여금 농장을 가리어 정장(正場)을 구획하도록 하였다. 이 모두가 밖으로는 군신이 땅을 늘리도록 도와주고, 안으로는 부모가 천계(天界)에 태어나도록 하는데 이바지한 것이다. 목숨을 이은 사람으로 하여금 인(仁)과 더불게 하고, 가기(歌妓)에게 후히 상을 준 사람으로 하여금 허물을 뉘우치도록 하였으니, 대사가 시주로서 희사한 것의 옳음이 셋째이다.
    건혜(乾慧)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심충(沈忠)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사의 이치를 분별하는 칼날이 선정과 지혜에 넉넉하고, 사물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천문과 지리를 환히 들여다 보며, 의지가 담란(曇蘭)처럼 확고하고 학술이 안름(安廩)과 같이 정밀하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만나뵙는 예의를 표현한 뒤 아뢰기를, “제자에게 남아도는 땅이 있는데, 희양산 중턱에 있습니다. 봉암(鳳巖)·용곡(龍谷)으로 지경이 괴이하여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니, 바라건대 선사(禪寺)를 지으십시오” 하였다. 대사가 천천히 대답하기를, “내가 분신(分身)하지 못하거늘 어찌 이를 사용하겠는가” 라고 하였으나, 심충의 요청이 워낙 굳세고 게다가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전추(前騶)로 삼은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었는지라, 곧 석장을 짚고 나뭇꾼이 다니는 좁은 길로 빨리 가서 두루 살피었다. 산이 사방에 병풍같이 둘러막고 있음을 보니, 붉은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 올라가는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처럼 두른 것을 보니, 이무기가 허리를 돌에 대고 누운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놀라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얻음이 어찌 하늘의 돌보심이 아니겠는가. 승려의 거처가 되지 않는다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중에 솔선하여 후환에 대한 방비를 기본으로 삼았는데, 기와로 인 처마가 사방으로 이어지도록 일으켜 지세를 진압케 하고, 쇠로 만든 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하도록 하였다. 중화(中和) 신축년(辛丑年)(881)에 전(前) 안륜사(安輪寺) 승통(僧統)인 준공(俊恭)과 숙정대(肅正臺)의 사(史)인 배율문(裵聿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표정케 하고, 이어 ‘봉암(鳳巖)’이라고 명명하였다. 대사가 입적한 지 수년이 되었을 때, 산에 사는 백성으로 들도적이 된 자가 있어 처음에는 감히 법륜에 맞섰으나 끝내 감화하게 되었다. 능히 정심(定心)의 물을 깊이 헤아려서 미리 마산(魔山)에 물을 댄 큰 힘이 아니겠는가. 팔이 부러진 사람으로 하여금 의리를 드러내도록 하고, 용미(龍尾)를 파는 사람으로 하여금 광기를 제어하게 하였으니, 선심(善心)을 개발한 것의 옳음이 넷째이다.
    태보대왕(太傅大王)은 중국의 풍속으로써 폐풍(弊風)을 일소하고, 넓은 지혜로써 마른 세상을 적시게 하셨다. 평소에 영육(靈育)의 이름을 흠앙하시고, 법심(法深)의 강론을 간절히 듣고자 했던 터라, 이에 계족산(鷄足山)에 마음을 기울이시어 학두서(鶴頭書)를 보내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밖으로 소연(小緣)을 보호하다가 잠깐 사이에 한해를 넘겨버렸으니, 안으로 대혜(大慧)를 닦을 수 있도록 한번 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대사는 임금의 낭함(琅函)에서 “좋은 인연이 세상에 두루 미침은 (불보살이) 인간계에 섞여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한 것에 감동하여, 옥을 품고 산에서 나왔다. 거마(車馬)가 베날듯이 길에서 맞이하였다. 선원사(禪院寺)에서 휴식하게 되자, 편안히 이틀 동안을 묵게 하고는 인도하여 월지궁(月池宮)에서 ‘심(心)’을 질문하였다. 그 때는 섬세한 조라(蔦蘿)에 바람이 불지 않고 온실수(溫室樹)에 바야흐로 밤이 될 무렵이었는데, 마침 달의 그림자가 맑은 못 가운데 똑바로 비친 것을 보고는, 대사가 고개를 숙여 유심히 살피다가 다시 하늘을 우러러 보고 말하기를, “이것(月)이 곧 이것(心)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상쾌한 듯 흔연히 계합(契合)하고 말씀하시기를, “부처가 연꽃을 들어 뜻을 나타냈거니와, 전하는 유풍여류(遺風餘流)가 진실로 이에 합치되는구려!”라고 하였다. 드디어 제배(除拜)하여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대궐을 나서자, 임금께서 충성스런 신하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타이르도록 하며, 잠시 머물러 주기를 청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우대우(牛戴牛)라고 이르지만, 값나가는 바는 얼마 안됩니다. 새를 새의 본성에 따라 기르신다면 시혜(施惠)됨이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작별하기를 청하오니 이를 굽히면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이를 들으시고 서글퍼하시며, 운어(韻語)로써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베풀어도 이미 머물지 않으니 불문(佛門)의 등후(鄧侯)로다. 대사는 ‘지둔(支遁)이 놓아둔 학(鶴)’이나, 나는 ‘속세를 초월한 갈매기’가 아니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 십계(十戒)를 받은 불자인 선교성부사(宣敎省副使) 풍서행(馮恕行)에게 명하여 대사가 산으로 돌아가는 데 위송(衛送)토록 하였다. 토끼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루터기에서 떠나게 하고, 물고기를 탐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물 만드는 것을 배우도록 하였으니, 세상에 나가서 교화하고 물러와 도를 닦는 것의 옳음이 다섯째이다.
    대사는 세간에서 도를 행함에 있어 멀고 가까움과 평탄하고 험준함을 가림이 없었고, 일찍이 말이나 소에게 노고를 대신토록 하지 않았다. 산으로 돌아감에 미쳐서는 얼음이 얼고 눈이 쌓여 넘고 건너는 데 지장을 주므로, 이에 임금께서 종려나무로 만든 보여(步輿)를 내리시니, 사자에게 사절하며 말하기를, “이 어찌 정대춘(井大春)의 이른바 단순한 ‘인거(人車)’이겠습니까. 뛰어난 인물들을 우대하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바이거늘, 하물려 삭발한 중으로서야. 그러나 왕명이 이미 이르렀으니, 그것을 받아 괴로움을 구제하는 도구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으로 말미암아 안락사(安樂寺)에 옮겨가고 나서 석장을 짚고도 일어날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용하였다. 병을 병으로 여기는 사람에게 공을 깨닫도록 하고,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니, 취사(取捨)의 옳음이 여섯째이다. 
    겨울 12월 기망(旣望)의 이틀 뒤에 이르러 책상다리를 하고 서로 말을 나눈 끝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아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 종일 부는 바람이 골짜기에 진동하니 그 소리는 호계(虎溪)의 울부짖음과 같았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꺾으니 그 빛깔은 사라수(沙羅樹)와 같았다. 외물이 감응함도 이같이 극진하거늘, 사람의 슬픔이야 헤아릴 만하다. 이틀 밤을 넘겨 학계산(賢溪山)에 임시로 유체를 모셨다가, 1년 뒤의 그 날에 희야(曦野)로 옮겨 장사지냈다.

    사(詞)에 이르기를,
    공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노자는 백을 알면서도 능히 흑을 지키었네. 두 교가 한껏 천하의 본보기라 일컬었지만, 석가는 힘 겨루는 것을 나무랐으니, 십만 리 밖에 서역의 거울이 되었고, 일천 년 뒤에 동국의 촛불이 되었네.
    계림의 지경은 오산의 곁에 있으며, 옛부터 선과 유에 기특한 이가 많았네. 아름다울손 희중이여! 직부에 게으르지 않고, 다시금 불일을 맞아 공과 색을 분별하였구나. 이로부터 교문이 여러 층으로 나뉘었으며, 그로 인해 말의 길이 널리 뻗게 되었네.
    몸은 토끼굴에 의지하였으나 마음은 편안키 어려웠고, 발을 양기(羊崎)에 내딛으니 도리어 눈이 현혹될 정도였네. 법해(法海)가 순탄하게 흐를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데, 마음으로 안결(眼訣)을 얻었으니 참되고 극진함을 포괄하였구나. 득(得) 가운데의 득(得)은 망상(罔象)의 얻음과 같은 것이나, 묵(黙) 중의 묵(黙)은 한선(寒蟬)의 울지 않음과 다르도다.
    북산의 도의(道義)가 홍곡(鴻鵠)의 날개를 드리우고, 남악의 홍척(洪陟)이 대붕(大鵬)의 날개를 펼쳤네. 해외에서 알맞은 때에 귀국하매 도는 누르기 어려웠으니, 멀리 뻗은 선의 물줄기가 막힘이 없구나.
    다북쑥이 삼대에 의지하여 스스로 곧을 수 있었고, 구슬을 내 몸에서 찾으매 이웃에게 빌리는 것을 그만 두었네. 담연자약한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열두 인연이 헛된 꾸밈이 아니로다.
    무엇하러 참바를 잡고 말뚝을 박을 것이며, 무엇하러 종이에게 붓을 핥도록 하고 먹물을 머금게할 것인가. 저들은 혹 멀리서 배우고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나는 능히 정좌(靜坐)하여 온갖 마적을 물리쳤도다.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고, 정욕(情欲)의 밭에다 농사를 그르치지 말며, 수없는 항하사(恒河沙)를 두고 만(萬)이다 억(億)이다 논하지 말고, 외로이 뜬 구름을 두고 남북을 논하지 말라.
    덕행의 향기는 사방원지(四方遠地)에 치자나무 꽃처럼 알려졌고, 지혜의 교화는 한편으로 사직을 편안케 하였네. 몸소 임금의 은총을 받들어 누더기를 펄럭였고, 마음을 물에 비친 달에 비유하여 선식(禪拭)을 바쳤네.
    집안의 대를 이을 부유한 처지에서 과연 누가 형극의 길에 들 것인가. 썪은 선비의 도로 대사의 정상(情狀)을 들추기가 부끄럽도다. 발자취가 보당처럼 빛나니 이름을 새길 만한데, 나의 재주가 금송(錦頌)을 감당하지 못하여 글을 짓기 어렵도다. 시끄럽고 번거로운 창자로 선열의 공양에 배부르고자, 산중으로 와서 전각을 살펴보노라.

    <음기>

    태보왕(太傅王)께서 의원을 보내 문병하시고 파발마를 내려 재(齋)를 지내도록 하셨다. 중정(中正)·공평(公平)하게 정무를 보시느라 여가가 없으시면서도, 능히 시종 한결같으셨으니, 보살계를 받은 불자요 건공향(建功鄕)의 수령인 김입언(金立言)에게 특별히 명하여, 외로운 여러 제자들을 위로하게 하고 ‘지증선사(智證禪師)’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리셨다. 이어 비석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대사의 행장을 적어 아뢰라 하시니, 문인인 성견(性蠲)·민휴(敏休)·양부(楊孚)·계미(繼徽) 등은 모두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인지라, 묵은 행적을 거두어 바쳤다.
    을사년(乙巳年)(885)에 이르러 국민 가운데 유도(儒道)를 매개로 하여 황제의 나라에 시집가서 이름을 계륜(桂輪)에 높이 걸고 관직이 계하사(桂下史)에 오른 이가 있어 최치원(崔致遠)이라고 하는데, 당제(唐帝)의 조서를 두 손으로 받들고 회왕(淮王)이 준 의단(衣段)을 함께 가져 왔으니, 비록 이 영광을 봉새가 높이 나는 것에 비하기는 부끄러우나, 학이 청초하게 돌아온 것엔 자못 비길 만하리라. 임금께서 신신(信臣)으로서 청신남(淸信男)인 도죽양(陶竹陽)에게 명하여, 대사의 문인들이 쓴 행장을 치원에게 주도록 하고 수교(手敎)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누더기를 걸친 동국(東國)의 선사(禪師)가 서방(西方)으로 천화(遷化)함을 이전에 슬퍼하였으나, 비단 옷을 입은 서국의 사자(使者)가 동국으로 귀환함을 매우 기뻐하노라. 불후의 대사가 인연이 있어 그대에게 이르게 된 것이니, 절묘한 작품을 아끼지 말아 장차 대사의 자비에 보답토록 하라”라고 하였다. 신이 비록 무인(武人)의 재목이 아니기 때문이긴 하나, 문인이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바야흐로 마음껏 재주를 부리려고 생각하던 차에 갑자기 주상전하의 승하하심을 당하였는데, 다시 나라에서 불서(佛書)를 중히 여기고 집에서는 승사(僧史)를 간직하며, 법갈(法碣)이 서로 바라보고 선비가 가장 많게 되었다. 두루 아름다운 글을 보고 시험삼아 새롭지 못한 글도 찾아 보았는데, “무거무래(無去無來)”의 말이 다투어 말(斗)로 헤아릴 정도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말이 움직이면 수레에 실을 지경이었지만, 일찍이 『춘추(春秋)』에서와 같은 신의가 없었고, 간혹 조공(周公)의 구장(舊章)만을 쓴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이로써 돌이 말하지 못함을 알았고 도가 멀다고 하는 것을 더욱 체험하였다. 오직 한스러운 것은, 대사께서 돌아가신 것이 이르고 신의 귀국이 늦었다는 것이다. ‘애체(靉靆)’라는 두 글자를 두고 누가 지난 날을 알려줄 것인가. 소요원(逍遙園)에서 처럼 설법을 하셨으나, 참다운 비결을 듣지 못하였으니, 매양 감당할 수 없는 처지임을 걱정만 하였지, 서둘러 지어야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때가 늦음을 탄식하자면 이슬처럼 지나고 서리같이 다가와, 갑자기 근심으로 희어진 귀밑머리가 시들어 쇠약한 것 같고, 도의 심원함을 말하자면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터워, 겨우 뻣뻣한 붓털을 썩힐 뿐이다. 장차 얽매임이 없는 놀음에 어울리고자 비로소 공동산(崆峒山)처럼 아름다운 행실을 서술한다.
    문인인 영상(英爽)이 와서 글을 재촉하였을 때 금인(金人)이 입을 다물었던 고사에 따라 돌같은 마음을 더욱 굳히었다. 참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것보다 고통스럽고 요구는 몸을 새기는 것보다 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림자는 8년 동안 함께 짝하였으며, 말은 세번을 되풀이했던 것에 힘입었다. 저 여섯 가지의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의 옳은 일로 글을 지은 것에 부끄러움이 없고 용력(勇力)을 과시하기에 여유가 있는 것은, 실로 곧 대사가 안으로 육마(六魔)를 소탕하고 밖으로 육폐(六蔽)를 제거하여, 행하면 육바라밀(六波羅密)을 포괄하고 좌선(坐禪)하면 육신통(六神通)을 증험하였기 때문이다. 일은 꽃을 따서 모은 것과 같은데, 글은 초고 없애는 것을 어렵게 하였다. 그 결과 가시나무를 쳐내지 않는 것과 같게 되었으니, 쭉정이와 겨가 앞에 있음이 부끄럽다. 자취가 ‘궁전에서의 놀음’을 따랐으매, 누구인들 ‘月池宮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을 우러르지 않겠는가. 게(偈)는 칠언연구(七言聯句)를 본받았으니, 바라건데 해뜨는 곳에서 고상한 말로 비양(飛揚)하라.
    분황사의 중 혜공(慧江)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기다. 원주인 대덕 능선(能善)·통준(通俊), 도유나(都唯那)인 현일(玄逸)·장해(長解)·명선(鳴善), 또 시주로서 갈(碣)을 세웠으며 서▨대장군(西▨大將軍)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착용한 소판(蘇判) 아질미(阿叱彌), 가은현장군(加恩縣將軍) 희필(熙弼), 당현(當縣)(마멸). 용덕(龍德) 4년(924) 세차(歲次) 갑신(甲申) 6월 일에 건립을 마치다.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  幷序」
         前西國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漁袋臣崔致遠奉敎撰幷書篆額」

    道不遠人人無異國是以東人之子爲釋爲儒必也西浮大洋重譯從學命寄刳木必懸寶洲 虛往實歸先難後獲亦猶采玉者不憚崑丘之峻探珠者不辭驪壑之深遂得慧炬則」
    光融五乘嘉肴則味飫六籍竟竟使千門入善能令一國興仁而學者或謂身毒闕里之說敎也分流異體圜鑿方枘互相矛楯守滯一隅嘗試論之說詩者不以文害辭不以辭害志
    禮所謂言豈一端而已夫各有所當故廬峰慧遠著論謂如來之與周孔發致雖殊所歸一揆體極不兼應者物不能兼受故也沈約有云孔發其端釋窮其致眞可謂識其大者始可」
    與言至道矣至若佛語心法玄之又玄名不可名說無可說雖云得月指或坐忘終類係風影難行捕然陟遐自迩取譬何傷且尼父謂門弟子曰予慾無言天何言哉則彼淨名之黙
    對文殊善逝密傳迦葉不勞鼓舌能叶印心言天不言捨此奚適而得遠傳妙道廣耀吾鄕豈異人乎禪師是也禪師法諱慧昭俗姓崔氏其先漢族冠盖山東隋師征遼多沒驪貊」 有降志而爲遐甿者爰及聖唐囊括四郡今爲全州金馬人也父曰昌元在家有出家之行母顧氏嘗晝假寐夢一梵僧謂之曰吾願爲何阿(方言謂母)之子因以瑠璃甖爲寄未幾娠」
    禪師焉生而不啼迺夙挺銷聲息言之勝牙也旣齔從戱必火賁葉爲香采花爲供或西嚮危坐移晷未嘗動容是知善本固百千劫前所栽植非可跂而及者自丱志切反哺跬步」
    不忘而家無斗儲又無尺壤可盜天時者口腹之養惟力是視裨販娵隅爲贍滑甘之業手非勞於結網心已契於忘筌能豊啜菽之資允叶采蘭之詠曁種負土成墳迺曰鞠」
    育之恩聊將力報希微之旨盍以心求吾豈匏瓜壯齡滯跡遂於貞元卄年詣歲貢使求爲榜人寓足西泛多能鄙事視險如夷揮楫慈航超截苦海及達彼岸告國使曰人各有志請」
    從此辭遂行至滄州神鑑大師投體方半大師怡然曰戱別匪遙喜再相遇遽令削染頓受印契若火沾燥艾水注卑然徒中相謂曰東方聖人於此復見禪師形貌黯然衆不名」
    而目爲黑頭陀斯則探玄處黙眞爲漆道人後身豈比夫邑中之黔能慰衆心而已哉永可與赤頿靑眼以色相顯示矣元和五年受具於崇山少林寺瑠璃壇則聖善前夢宛若合符」
    旣瑩戒珠復歸橫海聞一知十茜絳藍靑雖止水澄心而斷雲浪跡粵有鄕僧道義先訪道於華夏邂逅適願西南得朋四遠參尋證佛知見義公前歸故國禪師卽入終南登萬仞之」
    峯餌松實而止觀寂寂者三年後出紫閣當四達之道織芒屩而廣施憧憧者又三年於是苦行旣已修他方亦已遊雖曰觀空豈能忘本乃於大和四年來歸大覺上乘照我仁域」
    興德大王飛鳳筆迎勞曰道義禪師曏已歸止上人繼至爲二菩薩昔聞黑衣之傑今見縷褐之英彌天慈威擧國欣賴寡人行當以東雞林之境成吉祥之宅也始憩錫於尙州露岳」
    長柏寺毉門多病來者如雲方丈雖寬物情自隘遂步至康州知異山有數於菟哮吼前導避危從坦不殊兪騎從者無所怖畏豢犬如也則與善无畏三藏結夏靈山猛獸前路深入」
    山穴見牟尼立像宛同事跡彼竺曇猷之扣睡虎頭令聽經亦未傳媺於僧史也因於花開谷故三法和尙蘭若遺基纂修堂宇儼若化成洎開城三年
    愍哀大王驟登寶位深託玄慈降璽書餽齊費而別求見願禪師曰在勤修善政何用願爲使復于王聞之愧悟以禪師色空雙泯定惠俱圓降使賜號爲慧昭昭字避
    聖祖廟諱易之也貫籍于大皇龍寺徵詣京邑星使往復者交轡于路而岳立不移其志昔僧稠元魏之三召云在山行道不爽大通棲幽養高異代同趣居數年請益者稻麻成」列殆無錐地遂歷銓奇境得南嶺之麓爽塏居最經始禪廬却倚霞岑俯壓雲澗淸眼界者隔江遠岳爽耳根者迸石飛湍至如春谿化夏徑松秋壑月冬嶠雪四時變態萬象交光百」
    籟和唫千巖竟竟秀嘗遊西土者至止咸愕視謂遠公東林移歸海表蓮花世界非凡想可擬壺中別有天地則信也架竹引流環階四注始用玉泉爲牓屈指法胤則禪師乃曹溪之玄」
    孫是用建六祖影堂彩飾粉墉廣資導誘經所謂爲悅衆生故綺錯繪衆像者也大中四年正月九日詰旦告門人曰萬法皆空吾將行矣一心爲本汝等勉之無以塔藏形無以銘紀」
    跡言竟坐滅報年七十七積夏四十一于時天無纖雲風雷欻起虎狼號咽杉栝變衰俄而紫雲翳空空中有彈指聲會葬者無不入耳則梁史褚侍中翔嘗請沙門爲母疾祈福聞」
    空中彈指聖感冥應豈誣也哉凡志於道者寄聲相弔未亡情者銜悲以泣天人痛悼斷可知矣靈函幽隧預使備具弟子法諒等號奉色身不踰日而窆于東峯之冢遵遺命也禪師」
    性不散樸言不由機服煖縕黂食甘糠麧芧菽雜糅蔬佐無二貴達時至曾不異饌門人以墋腹進難則曰有心至此雖糲何害尊卑耋穉接之如一每有王人乘馹傳命遙祈」
    法力則曰凡居王土而戴佛日者孰不傾心護念爲君貯福亦何必遠汚綸言於枯木朽株傳乘之飢不得齕渴不得飮吁可念也或有以胡香爲贈者則以瓦載煻灰」
    不爲丸而焫之曰吾不識是何臭虔心而已復有以漢茗爲供者則以薪爨石釜不爲屑而煮之曰吾不識是何味濡腹而已守眞忤俗皆此類也雅善梵唄金玉其音側調飛聲爽快」
    哀婉能使諸天歡喜永於遠地流傳學者滿堂誨之不倦至今東國習魚山之妙者競如掩鼻玉泉餘響豈非以聲聞度之之化乎禪師泥洹當」
    文聖大王之朝上惻僊襟將寵淨諡及聞遺戒愧而寢之越三門人以陵谷爲慮扣不朽之緣於慕法弟子內供奉一吉干楊晉方崇文臺鄭詢一斷金爲心勒石是請」
    獻康大王恢弘至化欽仰眞宗追諡眞鑑禪師大空靈塔仍許篆刻以永終譽懿乎日出暘谷無幽不燭海岸植香久而弥芳或曰禪師垂不銘不塔之戒而降及西河之徒不能確奉」
    先志求之歟抑與之歟適足爲白珪之玷嘻非之者亦非也不近名而名彰蓋定力之餘報與其灰滅電絶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使聲震大千之界而龜未戴石龍遽昇天」
    今上繼興塤篪相應義諧付囑善者從之以隣岳招提有玉泉之號爲名所累衆耳致惑將俾弃同卽異則宜捨舊從新使目示其寺之所枕倚則以門臨複澗爲對乃錫題爲雙溪焉申」
    命下臣曰師以行顯汝以文進宜爲銘致遠拜手曰唯唯退而思之頃捕名中州嚼腴咀雋于章句間未能盡醉衢罇唯愧深跧泥甃況法離文字無地措言苟或言之北轅適郢第以」
    國主之外護門人之大願非文字不能昭昭乎群目遂敢身從兩役力效五能雖石或憑焉可慙可懼而道强名也何是何非掘笔藏鋒則臣豈敢重宣前義謹札銘云」
    杜口禪那歸心佛陀根熟菩薩弘之靡它猛探虎窟遠泛鯨波去傳秘印來化斯羅尋幽選勝卜築巖磴水月澄懷雲泉寄興山與性寂谷與梵應觸境無硋息機是證道贊五朝威摧」
    衆妖黙垂慈蔭顯拒嘉招海自飃蕩山何動搖無思無慮匪斲匪雕食不兼味服不必備風雨如晦始終一致慧柯方秀法梀俄墜洞壑凄凉煙蘿憔悴人亡道存終不可上士陳願」
    大君流恩燈傳海裔塔聳雲根天衣拂石永耀松門

                     光啓三年七月日建 僧奐榮 刻字」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

    신라국 고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과 서

    전(前) 중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자(篆字)의 제액을 씀.

    무릇 도(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오승(五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가효]을 얻으니 미각은 육경(六經)에서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善)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인(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을 나누고 체제를 달리하여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는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있어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더불어 지선(至善)의 도(道)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말씀하신 데 이르면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고 그림자처럼 가서 붙잡기 어렵다. 그러나 먼 데 이르는 것도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비유를 취한들 무엇이 해로우랴. 공자가 문하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으니 저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하는 데 들어맞은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변방(우리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성스러운 당나라가 4군을 차지함에 이르러 지금 전주의 금마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창원(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아미(阿(방언으로 어머니를 이른다)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천시(天時)를 이용하는 것으로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좋은 음식을 넉넉하게 하는 업으로 삼았다. 손으로 그물을 맺는데 힘쓰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통발을 잊은 데 부합하였다. 능히 부모에게 콩죽을 드려도 그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넉넉하였고 진실로 양친(養親)의 노래[采蘭之詠]에 들어 맞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이내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정원 20년(804), 세공사(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이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속된 일에도 재능이 많아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자비의 배를 노저어 고난의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나라의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인계(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지목하여 흑두타(黑頭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는데 처함이 참으로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길이 붉은 수염의 불타야사(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달마(達磨)와 함께 색상(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년)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의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학림(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서남쪽에서 벗을 얻은 것이다. 사방으로 멀리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증득하였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자각(紫閣)으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공(空)을 관(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태화 4년(830년) 귀국하여 대각(大覺)의 상승(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곧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모니(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축담유(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것 또한 그것 만이 승사(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의 남은 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僧稠)가 후위(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법익(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처럼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이었다. 이에 육조영당(六祖靈堂)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상(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곧 『양사(梁史)』에 “시중 저상(褚翔)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보이지 않게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윤언(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가고 하였고, 또 한다(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들이었다.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하게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였는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기(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일길간인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의 정순일(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양곡(暘谷)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명(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가 비석을 이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과 저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致遠)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法)은 문자(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혹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영(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門人)들의 큰 바램으로 문자(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오능(五能)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도(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른다.

    입을 다물고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는 비인(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성(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을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도(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상사(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천의(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송문(松門)에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환영(奐榮)이 글자를 새김.

    [출전:『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Ⅲ(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