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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베1 2013. 2. 21. 11:08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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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매화 4수

일만 풀 일천 꽃이 피지 않았으니 / 萬草千花不見芳
올해는 절후가 늦어 풍광이 적구나 / 今年節晩少風光
오직 한 그루에 춘심이 드러나 사랑스러워 / 獨憐一樹春心露
한가로이 뜰 앞에 가서 특이한 향기 맡는다 / 閒到庭前嗅異香

한 그루에 온통 꽃이 한껏 피었으니 / 花事全䕺盡意芳
내 집이 이제부터 훨씬 빛이 나겠구나 / 吾廬自此頓輝光
하늘이 낸 지극한 아름다움 독차지하기 어려워 / 天生至美難專己
노니는 벌들이 향기 훔쳐 가는 것 내버려두노라 / 一任遊蜂細竊香

보는 사람이 없어도 절로 꽃 피우니 / 也是無人亦自芳
천품이 좋은 용모를 자랑할 줄 모르네 / 天姿不解矜容光
누가 골짜기 안에서 곡조를 퉁겨 이루었나 / 誰從谷裏彈成操
특별히 산림 은자의 향기가 있어라 / 別有山林隱者香

눈에 가득한 꽃 세상에 드물게 아름다워 / 滿眼繁華絶代芳
산문의 한 가지가 맑은 달빛에 숨었어라 / 山門一朶隱晴光
서호가 지은 시구가 참으로 먼저 형용했나니 / 西湖得句眞先著
희미한 달빛에 은은한 향기가 움직일 때까지 보노라 / 看到黃昏動暗香

[주D-001]서호(西湖)가 지은 시구 : 서호는 송나라 때 은사(隱士)인 임포(林逋)이다. 그의 〈산원소매(山園小梅)〉에 “성근 그림자 비껴 있고 물은 맑고 얕은데, 은은한 향기 풍겨오고 달빛은 희미하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하였다.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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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도연명(陶淵明)의 시에 차운하다 3수

새는 평원의 풀에 내려앉고 / 鳥下平原草
매미는 동산의 버들에서 운다 / 蟬噪芳苑柳
물성을 보고 감회를 일으켜 / 物性看感懷
문을 나서서 오래 응시하노라 / 出門凝睇久
한가히 노닐며 좋은 흥취 만나니 / 優遊逢佳趣
흐르는 물 높은 산이 모두 좋은 벗 / 流峙儘良友
술 마시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 杯酌非所娛
애오라지 태화주에 취해 보리라 / 聊醺太和酒
이러한 마음 가진 지 오래이나 / 此心久成說
실행하지 않으면 저버리는 것이지 / 廢墜亦浪負
원컨대 좋아하는 벗과 만나자고 / 願言從所歡
서로 기약한 것이 이미 두텁건만 / 相期覺已厚
세상 일이 절로 분분히 많으니 / 世故自紛總
이런 좋은 일 내게 무엇이 있으랴 / 於我更何有

큰 훈업은 천고에 남아 있지만 / 大業存千古
그 누가 홀로 마칠 줄 알았던고 / 何人獨知終
사람의 본성은 하늘에서 받은 것 / 賦命粤自天
중국과 오랑캐의 차이가 없어라 / 嗇豐無華戎
훌륭하여라 저 지혜로운 성현들은 / 懿歟彼賢智
몸가짐이 그 얼마나 웅대했던고 / 立身何其雄
곤궁한 처지에도 늘 권도에 통달해 / 處約恒達權
유유히 여유로운 풍모가 있었어라 / 緬然有餘風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뜻을 늘 폈으니 / 在物志常伸
곤궁함을 숨길 필요 어디 있었으랴 / 何必苦諱窮
힘쓰라 우리 학문하는 사람이여 / 勖哉吾黨人
만 권의 책 속에서 노력할지어다 / 努力萬籤中

주명은 바로 남륙에 있고 / 朱明正南陸
흰 달은 동우에서 돋아난다 / 皓月生東隅
사람들은 저녁의 서늘함을 좋아하고 / 衆心欣夕凉
정신이 간간이 발산되어 후련해라 / 精神間發舒
오래 편안하니 고요한 생활 익숙하고 / 久安習自靜
또한 나의 집은 들어가 살 만하지만 / 亦足容我廬
나를 경각시킬 벗이 없음을 어이하랴 / 柰此乏警起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도다 / 悠悠送日居
자신을 돌아보며 때로 탄식하노니 / 撫己時齎咨
잠깐 사이에 산길에 잡초가 무성해라 / 介然山蹊蕪
본성은 본래 각각 정해져 있으니 / 性分固各定
노력하지 않고 다시 어이하리오 / 不勉復何如

[주C-001]도연명(陶淵明)의 시에 차운하다 : 도연명의 〈의고(擬古) 9수〉 중 앞의 세 수에 차운한 것이다.
[주D-001]태화주(太和酒) : 술을 가리킨다. 송나라 소옹(邵雍)의 〈무명공전(无名公傳)〉에 “천성적으로 술을 좋아했는데 일찍이 술을 명명(命名)하여 태화탕(太和湯)이라 했다.” 하였다.
[주D-002]마칠 줄 알았던고 : 《주역》〈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마칠 바를 알아서 마치므로 더불어 의를 보존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윗자리에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아랫자리에 있어도 근심하지 않는다.〔知終終之 可與存義也 是故居上位而不驕 在下位而不憂〕” 하였다.
[주D-003]주명(朱明)은……있고 : 한여름임을 뜻한다. 주명은 태양이고 남륙(南陸)은 남방의 대지(大地)이다. 《한서(漢書)》 권21하 〈율력지 하(律曆志下)〉에 “해가 북륙(北陸)에 가면 겨울이라 하고 서륙(西陸)에 가면 봄이라 하고 남륙에 가면 여름이라 하고 동륙(東陸)에 가면 가을이라 한다.” 하였다.
[주D-004]동우(東隅) : 해가 뜨는 곳으로, 동쪽을 뜻한다.
[주D-005]잠깐……무성해라 : 학문을 게을리 하여 마음에 사욕이 많아졌음을 말한다. 맹자(孟子)가 고자(高子)에게 “산중의 작은 길도 사람이 다니면 금방 길이 되지만 한동안 다니지 않으면 잡초가 자라 길을 막는다. 지금 잡초가 우거져 그대의 마음을 막았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以成路 爲間不用則茅塞之矣 今茅塞子之心矣〕” 하였다. 《孟子 盡心下》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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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꿈을 기록하다 10수. 소서(小序)를 덧붙이다.

정해년 맹춘(孟春)에 내가 꿈속에서 서산(西山)을 만났는데, 공이 절구 한 수를 읊고 나에게 좋은지 좋지 않은지를 물었다. 먼저 앞의 두 구(句)를 말하고 한참 뒤에야 뒤의 두 구를 말했는데 내가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놀라 잠을 깼다. 단지 결구(結句) 열 자만을 기억할 뿐이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할 만하다. 내가 두 구절만으로는 세상에 전해질 수 없다고 여겨 마침내 그 열 자를 모두 압운(押韻)하여 절구를 지었다.

사람이 언덕에 있는 듯한데 / 若有人在阿
입은 옷이 어찌나 환히 밝던지 / 被服何炳烺
산하는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 山河豈不美
천지는 어찌 드넓지 않으랴 / 天地豈不廣

봄이 오니 아침 햇살 따스하고 / 春至朝陽煗
바람이 부니 저녁에 물결이 인다 / 風來夕波興
자유로이 서산을 거니노라니 / 翛然步西山
소나마 잣나무가 구릉을 덮었구나 / 松栢被丘陵

새가 우는 소리는 처량한데 / 鳥啼音悽惋
누각은 비었고 그림자만 한가롭네 / 樓空影婆娑
봄 구름이 쉽게 해를 가리니 / 春陰易欺日
숲에 내리는 비가 푸른 잔디 적신다 / 林雨濕靑莎

외로운 새는 먼 물가 가로지르고 / 獨鳥橫遠渚
돌아가는 기러기는 하늘 높이 난다 / 歸鴻拂蒼昊
오래 서성이다 내 이제 돌아가 / 延佇吾將返
그대를 위해 그윽한 풀을 엮으리 / 爲君結幽草
차가운 해가 서쪽에서 지니 / 寒日下西陸
남은 햇살이 긴 대에 비친다 / 餘輝映脩竹
매화 심은 건 열매 맺지 못했고 / 種梅不成實
난초 심은 건 한창 무성히 푸르네 / 種蘭時茂綠

집 안에 오래된 거문고 있는데 / 堂中有古琴
현이 끊어졌으니 누가 다시 연주하랴 / 絃絶復誰援
때때로 솔바람이 불어오니 / 時有松風入
맑은 소리에 떠도는 넋을 기탁한다
 / 泠泠託遊魂

새들은 몹시 시끄럽게 울어대니 / 衆羽苦啾喧
상서로운 봉황이 그 때문에 괴롭네 / 祥鳳爲之惱
원컨대 높은 바람을 타고서 / 願言乘高風
일거에 곤륜산 위에 이르기를 / 一擧崐岡到

물 흐름이 어찌나 빠른지 / 水流何悤悤
그윽이 울며 산골짜기 벗어난다 / 幽咽響出谷
세상사는 본디 일정하지 않은 법 / 世故固不定
분간하려니 이미 말을 잊었노라 / 欲辨已忘卻

고요한 밤하늘은 사방에 드리웠고 / 靜夜天四垂
뭇별들의 빛은 서로 흔들리누나 / 衆宿光相搖
꿈에서 깨니 얼마나 황홀한지 / 夢覺何怳惚
잎새 소리 소슬하게 들려오누나 / 葉聲來蕭蕭

말하면 이미 슬퍼지고 / 言之旣云慽
들으면 마음이 녹는 듯 / 聽之中如銷
명발의 한 움큼 눈물을 / 明發一掬淚
계수나무 숲에다 뿌린다 / 灑向叢桂條

[주D-001]그윽한 풀을 엮으리 : 향리에서 띳집을 짓겠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기악주가사마육장파주엄팔사군양각로오십운(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에 “바윗골에서 밭을 가니 곡구가 아니요, 풀을 엮으니 바로 하빈이로세.〔耕巖非谷口 結草卽河濱〕” 하였다.
[주D-002]때때로……기탁한다 : 바람이 불어서 현(絃)이 울리는 것을 풍현(風絃)이라 한다. 백거이(白居易)의 〈금(琴)〉에 “거문고를 굽은 궤안에 두고, 게을리 앉아서 정만 머금고 있노라. 무엇 하러 번거롭게 손으로 연주하랴. 풍현이 절로 소리 울리는 것을.〔置琴曲几上 慵坐但含情 何煩故揮弄 風絃自有聲〕” 하였다. 바람이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에 고인이 된 서산(西山)의 넋이 깃들었다는 뜻이다.
[주D-003]명발(明發) : 《시경》〈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날이 밝도록 잠을 못 이루고 두 분을 생각하노라.〔明發不寐 有懷二人〕” 한 데서 온 말로, 부모를 생각하는 효사(孝思)를 뜻한다.
[주D-004]계수나무 숲 : 은사(隱士)가 사는 곳을 뜻한다.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의 문사(文士) 중 소산(小山) 계열에 속하는 문사가 지은 〈초은사(招隱士)〉에 “계수나무 숲 우거져 산이 그윽하니, 구불텅 뻗은 줄기 가지 서로 얽혔어라.〔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蜷兮枝相繚〕” 한 데서 온 말이다.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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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반절교시(反絶交詩) 소서(小序)를 덧붙이다.

옛날에 한(漢)나라 주공숙(朱公叔)이 당시 사람들의 교우(交友)가 돈독하지 못해 가볍게 벗을 버리는 것을 미워하여 〈절교론(絶交論)〉을 지었는데 양(梁)나라 유효표(劉孝標)에 이르러 〈광절교론(廣絶交論)〉을 지어 그 뜻을 넓혔다. 사람들은 〈절교론〉이 있는 줄만 알고 주공숙에게 또 〈절교〉 시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그 〈절교〉 시에 “북산에 올빼미가 있으니, 그 날개를 깨끗이 하지 않는다. 날 때는 바른 곳으로 가지 않고, 잠잘 때는 일정한 곳에 쉬지 않는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배부르면 진흙탕에 엎드린다. 탐욕이 매우 많아 냄새나는 썩은 것까지 먹으니, 창자에는 기름이 가득해도 게걸스러운 식탐이 끝이 없네. 늘 봉황을 보고 탄식하며 봉황은 덕이 없다고 하네. 봉황이 가는 길은 너와는 다르니, 이제 길이 이별하여 각자 제 길에서 노력하길.〔北山有鴟 不潔其翼 飛不正向 寢不定息 飢則木擥 飽則泥伏 饕餮貪汙 臭腐是食 塡腸滿膆 嗜欲無極 長嗚呼鳳 謂鳳無德 鳳之所趨 與子異域 永從此訣 各自努力〕” 하였다. 그러나 절교할 만한 사람은 있지만 교우 그 자체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장난삼아 〈반절교시〉를 짓는다.

천품을 받아 다 같이 사람 되었으니 / 賦天均爲人
사해의 모든 사람들이 바로 형제로세 / 四海乃兄弟
백성의 마음은 진실로 대개 같은 것 / 民情固大同
그 호오의 정이 마음의 근본에서 나오지 / 好惡自根柢
그러나 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듯 / 然如面貌別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은 각각 다르네 / 愚智異品第
스승 삼을 이는 현달한 이가 아니며 / 可師非賢達
불쌍히 여길 이는 비루한 이가 아니랴 / 可矜卽卑替
범범히 다 같이 한가로이 노닐 때 / 泛與同優遊
어진 이는 모두 한 몸처럼 보지만 / 仁者視一體
탁고와 기명의 큰일을 감당할 군자는 / 託孤與寄命
세상에 만나기가 매우 어렵지 / 曠世難攀袂
분분한 이익과 재물의 길에서 / 紛紛利賄塗
시비를 자주 따져서 무엇 하리오 / 何足數詰細
위에 어진 교화가 없으니 / 上焉闕仁化
뭇사람들 이욕 추구해 치달린다 / 衆尙競奔勢
곧은 도는 삼대에서 징험하노니 / 直道徵三代
지금과 옛날이 어찌 다르리오
 / 今古豈殊例
즐거운 모습으로 공경 잃지 않나니 / 怡然敬無失
도를 행함을 교제한 데서 본다네 / 行道見交際
하늘이 차례로 펴 인륜을 밝게 드러내니 / 天敍著明倫
한 번 목이 메었다고 밥을 안 먹어선 안 되지 / 未宜懲噎廢
사람과 관계를 끊는 건 쉽지 않으니 / 絶俗非容易
조수와는 함께 살기 어려운 법이지 / 鳥獸難合契
나에게 참으로 갖춰야 할 예가 있거늘 / 於我儘有禮
굳이 사이를 나쁘게 할 필요 있으랴 / 何必苦拂戾
부질없이 자주 속 좁은 사람 될 뿐 / 徒然累褊薄
인격 향상에는 도리어 방해가 되느니 / 進修反蒙蔽
남의 산에 있는 한 조각의 돌이 / 佗山一片石
옥을 다듬을 때 혹 숫돌로 쓸 수 있지
 / 攻玉或取厲
미워해야 할 바는 합오에 있나니 / 所惡在合汚
남과 어긋난 행동을 하면 결국 병폐가 될 뿐 / 務乖終爲弊
모름지기 〈정완〉의 가르침을 유념해 / 須念訂頑訓
광거를 스스로 맹서해 보아야 하리 / 廣居試自誓

[주D-001]주공숙(朱公叔) : 주목(朱穆)의 자가 공숙이다. 《後漢書 卷43 朱穆列傳》
[주D-002]얼굴이 모두 제각각이듯 : 춘추 시대 정나라 자산(子産)이 “사람 마음이 같지 않음이 마치 그 얼굴과 같다.〔人心之不同 如其面焉〕”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31年》
[주D-003]탁고(託孤)와 기명(寄命) : 어린 임금을 보필하여 국정(國政)을 수행함을 뜻한다. 증자(曾子)가 “육 척의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고, 제후국의 명을 부탁할 만하며, 큰 절조를 세울 때를 만나 굽히지 않는다면, 군자다운 사람이겠는가? 군자다운 사람이다.〔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 하였다. 《論語 泰伯》
[주D-004]곧은……다르리오 :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바른 본성은 변치 않음을 뜻한다. 공자가 “이 백성은 삼대 시대에 곧은 도를 실행했다.〔斯民也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 하였다. 《論語 衛靈公》
[주D-005]공경 잃지 않나니 : 자하(子夏)가 “군자가 공경을 잃지 않고 남과의 관계에서 공손하여 예의가 있으면 사해 안이 모두 형제일 것이다.〔君子敬而無失 與人恭而有禮 四海之內 皆兄弟也〕” 하였다. 《論語 顔淵》
[주D-006]도를……본다네 : 만장이 묻기를 “감히 묻습니다. 교제는 무슨 마음으로 합니까?〔敢問交際何心也〕” 하니, 맹자가 “공손이다.〔恭也〕” 하였다. 《孟子 萬章下》
[주D-007]하늘이 차례로 펴 : 《서경》〈고요모(皐陶謨)〉에 “하늘이 차례로 펴서 법을 두시니 우리 오전을 바로잡아 다섯 가지를 돈후하게 하소서.〔天敍有典 勅我五典 五惇哉〕” 하였다. 채침(蔡沈)의 주(註)에 따르면, 하늘이 차례로 펴는 것은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형제ㆍ부부ㆍ붕우의 윤서(倫敍)이다.
[주D-008]한 번……되지 : 유향(劉向)의 《설원(說苑)》〈담총(談叢)〉에 “한 번 밥을 먹다 목이 메었다 해서 곡식을 끊고 먹지 않으며 한 번 넘어졌다 해서 후퇴하고 가지 않는다.〔一噎之故 絶穀不食 一蹶之故 却足不行〕” 하였다. 여기서는 교우 관계에서 한 번 실망했다 하여 절교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주D-009]조수(鳥獸)와는……법이지 : 세상을 피해서 살던 은자(隱者) 걸닉(桀溺)에 대해 공자(孔子)가 “조수와 더불어서 무리 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과 함께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하였다. 《論語 微子》
[주D-010]남의……있지 : 《시경》〈소아(小雅) 학명(鶴鳴)〉에 “남의 산의 돌이 숫돌이 될 수 있다.……남의 산의 돌로 나의 옥을 갈 수 있다.〔他山之石 可以爲錯……他山之石 可以攻玉〕” 하였다.
[주D-011]합오(合汚) : 더러운 세속에 영합하는 것이다. 맹자가 향원(鄕愿)을 덕(德)을 해치는 적이라 하면서 “세속에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한다.〔同乎流俗 合乎汚世〕” 하였다. 《孟子 盡心下》
[주D-012]정완(訂頑)의 가르침 : 〈정완〉은 북송의 학자 횡거(橫渠) 장재(張載)가 지은 〈서명(西銘)〉을 가리킨다. 횡거가 자신의 학당(學堂) 양쪽 창문에 명(銘)을 써 걸었는데 동쪽의 것을 〈폄우(砭愚)〉라 하고 서쪽의 것을 〈정완〉이라 했다. 이천(伊川)이 “이런 이름은 사람들의 논쟁의 실마리가 될 수 있으니 차라리 그냥 〈동명(東銘)〉ㆍ〈서명〉이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여 횡거가 이에 따라 명칭을 고쳤다. 〈서명〉의 주제는 하늘을 아버지로 여기고 땅을 어머니로 여겨 사람들을 모두 나의 동포와 같이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주D-013]광거(廣居) : 인(仁)을 가킨다. 맹자가 인을 “천하의 넓은 집〔天下之廣居〕”이라 했다. 《孟子 滕文公下》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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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여회(旅懷) 2수

의의한 촌락에서 남은 해를 보내나니 / 依依墟里度殘年
칩거하매 사람 없어 정양하기 편하여라 / 閉戶無人靜養便
자적(自適)한 곳이니 몸이 타향에 있어도 괜찮고 / 適處未妨身在外
한가하니 서권이 늘 눈앞에 있기 좋아라 / 閒來端合卷隨前
마음이 피로하니 혹 참 두면이 어지럽고 / 心勞或眩眞頭面
생각은 멀리 가서 몇 분 성현을 늘 따른다 / 思遠常沿幾聖賢
한가로이 어옹을 만나 파적할 것 꾀하나니 / 閒對漁翁謀破寂
내일 아침엔 푸른 바다에서 선뜻 배 타리라 / 明朝滄海快登船

바람에 날리듯 덧없는 자취 부평초 같나니 / 風飄散跡不停萍
청화가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 익히 보았노라 / 慣見菁華電樣經
우연히 외로운 마을에서 이틀을 묵으며 / 偶向孤村謀信宿
때로 한 켤레 신발 따라 교외로 나가노라 / 時隨雙舃出郊坰
봄 소리는 닭 우는 마을에 은연중 들어오고 / 春聲暗透鷄鳴巷
저녁 낙조는 기러기 앉는 물가에 비껴 밝다 / 夕照斜明鴈落汀
술잔 기울여 마음속 취할 필요가 없나니 / 未必壺觴心骨醉
건곤의 화기가 나의 영혼과 통하는 것을 / 乾坤和氣與通靈

[주D-001]의의(依依)한 촌락 : 아련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호젓한 촌락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전원거(歸田園居)〉에 “어슴푸레 먼 마을의 인가(人家) 보이고, 아련히 마을에서는 연기 피어오르네.〔曖曖遠人邨 依依墟里煙〕” 하였다. 원문의 ‘墟’는 번역 대본에 ‘虛’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참 두면(頭面) : 본성 또는 정신을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건주경덕사영사담연당(虔州景德寺榮師湛然堂)〉에 “곳곳의 사람들 다 우레 번개 잡고 있어, 참 두면을 자세히 보게 허용하지 않는다.〔諸方人人把雷電 不容細看眞頭面〕” 하였다.
[주D-003]청화(菁華) : 영화(英華)와 같은 말로 젊은 시절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추일기부영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秋日蘷府詠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에 “근력이 어떤지 처자식이 묻고, 청화는 세월 따라 변천하누나.〔筋力妻孥問 菁華歲月遷〕” 하였다.
[주D-004]한 켤레 신발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그는 신선술을 익혀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항상 섭현에서 조정으로 날아가 명제를 알현하였다. 명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몰래 태사(太史)를 시켜 엿보게 하였더니, “그가 올 때마다 한 쌍의 들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날아오기를 기다려 그물로 잡았는데 한 켤레의 신발만 얻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기물(器物)을 제조하는 부서인 상방(尙方)의 관원에게 감별하도록 시켰더니, 그 신발은 영평(永平) 4년에 상서(尙書)의 관원에게 하사하였던 신발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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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여회(旅懷) 2수

의의한 촌락에서 남은 해를 보내나니 / 依依墟里度殘年
칩거하매 사람 없어 정양하기 편하여라 / 閉戶無人靜養便
자적(自適)한 곳이니 몸이 타향에 있어도 괜찮고 / 適處未妨身在外
한가하니 서권이 늘 눈앞에 있기 좋아라 / 閒來端合卷隨前
마음이 피로하니 혹 참 두면이 어지럽고 / 心勞或眩眞頭面
생각은 멀리 가서 몇 분 성현을 늘 따른다 / 思遠常沿幾聖賢
한가로이 어옹을 만나 파적할 것 꾀하나니 / 閒對漁翁謀破寂
내일 아침엔 푸른 바다에서 선뜻 배 타리라 / 明朝滄海快登船

바람에 날리듯 덧없는 자취 부평초 같나니 / 風飄散跡不停萍
청화가 번개처럼 지나가는 것 익히 보았노라 / 慣見菁華電樣經
우연히 외로운 마을에서 이틀을 묵으며 / 偶向孤村謀信宿
때로 한 켤레 신발 따라 교외로 나가노라 / 時隨雙舃出郊坰
봄 소리는 닭 우는 마을에 은연중 들어오고 / 春聲暗透鷄鳴巷
저녁 낙조는 기러기 앉는 물가에 비껴 밝다 / 夕照斜明鴈落汀
술잔 기울여 마음속 취할 필요가 없나니 / 未必壺觴心骨醉
건곤의 화기가 나의 영혼과 통하는 것을 / 乾坤和氣與通靈

[주D-001]의의(依依)한 촌락 : 아련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호젓한 촌락을 말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전원거(歸田園居)〉에 “어슴푸레 먼 마을의 인가(人家) 보이고, 아련히 마을에서는 연기 피어오르네.〔曖曖遠人邨 依依墟里煙〕” 하였다. 원문의 ‘墟’는 번역 대본에 ‘虛’로 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2]참 두면(頭面) : 본성 또는 정신을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건주경덕사영사담연당(虔州景德寺榮師湛然堂)〉에 “곳곳의 사람들 다 우레 번개 잡고 있어, 참 두면을 자세히 보게 허용하지 않는다.〔諸方人人把雷電 不容細看眞頭面〕” 하였다.
[주D-003]청화(菁華) : 영화(英華)와 같은 말로 젊은 시절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추일기부영회봉기정감이빈객일백운(秋日蘷府詠懷奉寄鄭監李賓客一百韻)〉에 “근력이 어떤지 처자식이 묻고, 청화는 세월 따라 변천하누나.〔筋力妻孥問 菁華歲月遷〕” 하였다.
[주D-004]한 켤레 신발 :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하동(河東) 사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현령으로 있었는데, 그는 신선술을 익혀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항상 섭현에서 조정으로 날아가 명제를 알현하였다. 명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몰래 태사(太史)를 시켜 엿보게 하였더니, “그가 올 때마다 한 쌍의 들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날아오기를 기다려 그물로 잡았는데 한 켤레의 신발만 얻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기물(器物)을 제조하는 부서인 상방(尙方)의 관원에게 감별하도록 시켰더니, 그 신발은 영평(永平) 4년에 상서(尙書)의 관원에게 하사하였던 신발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卷82上 方術列傳 王喬》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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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파은(坡隱) 박 선생(朴先生) 호(浩) 에 대한 만사 3수

저잣거리 속 은거하시던 곳 방문한 뒤 / 闤闠中間訪隱居
지금까지도 마음이 순주에 취한 듯해라 / 至今猶在醉醇餘
후생은 눈물 흘리며 누구를 의지할거나 / 後生垂淚將安放
예전에 문답한 서찰을 다시 읽어본다오 / 重讀當時答問書

용졸하매 때에 따라 도 절로 보존됐나니 / 用拙隨時道自存
풍모는 이미 멀어졌건만 잊을 수가 없어라 / 儀形已遠不能諠
난곡에 향기만 속절없이 있음을 어이 견딜꼬 / 可堪蘭谷香空在
그 향기 거두어 선생과 함께 땅에 묻었도다 / 卷與先生殉九原
금천(衿川)의 난곡(蘭谷)에 안장하였다.

후세에는 군자다운 사람 만나기 어려운데 / 降世難逢樂只人
뜰에는 풀이 우거지고 뱃속엔 봄기운이어라 / 庭中交翠腹中春
만년에 지은 자연 속 별업(別業)에서 심상을 온전히 했나니 / 坡皐晩業全心賞
구슬 감춘 것을 보배 자랑하는 것과 혼동하지 말라
 / 莫把藏珠混衒珍

[주C-001]파은(坡隱) 박 선생(朴先生) : 박호(朴浩 : 1653〜1718)는 자가 호연(浩然), 호가 청파(靑坡)이며, 본관이 무안(務安)이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밝았다.
[주D-001]순주(醇酒)에 취한 듯해라 : 훌륭한 인품에 감화되었다는 말이다. 삼국 시대 오나라 장수 주유(周瑜)는 자가 공근(公瑾)인데, 정보(程普)가 주유의 인품에 감복하여 말하기를 “공근과 만나면 마치 순주(醇酒)를 마신 것과 같아 나도 모르게 취한다.” 하였다. 《資治通鑑 卷66》
[주D-002]용졸(用拙) : 두보(杜甫)의 시 〈병적(屛跡)〉에 “소졸(疏拙)함으로써 우리 도 보존한다.〔用拙存吾道〕” 한 데서 온 말로, 생계나 세상살이에는 서툶으로써 본성을 보존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는 은거하여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을 뜻한다.
[주D-003]향기만 속절없이 있음 : 난초 향기는 고결한 인품을 상징한다. 당나라 맹교(孟郊)의 〈증최순량(贈崔純亮)〉에 “거울은 깨져도 빛은 바뀌지 않고, 난초는 죽어도 향기는 바뀌지 않는다.〔鏡破不改光 蘭死不改香〕” 하였고, 소식(蘇軾)의 〈왕문옥만사(王文玉挽詞)〉에 “그윽한 난초는 꺾이고 향기로운 바람만 부질없이 남았다.〔幽蘭空覺香風在〕” 하였다.
[주D-004]뜰에는 풀이 우거지고 : 주돈이가 살던 곳의 창 앞에 풀이 무성히 자라도 베지 않기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의 의사와 같다.〔與自家意思一般〕” 하였는데, 이 말은 풀의 살려는 뜻〔生意〕이 자신의 살려는 뜻과 같기 때문에 베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주돈이는 풀을 통해서 천지가 생생(生生)하는 뜻을 보았던 것이다. 《近思錄 卷14》
[주D-005]뱃속엔 봄기운 : 백거이(白居易)의 〈여심양이사인각로동식칙사앵도완물감은인성십사운(與沈楊二舍人閣老同食敕賜櫻桃翫物感恩因成十四韻)〉에 “달콤한 맛은 혀 위의 이슬이 되고, 따스한 기운은 뱃속의 봄이 되도다.〔甘爲舌上露 煖作腹中春〕” 하였다. 여기서는 고인의 온화한 덕성(德性)을 비유하였다.
[주D-006]만년에……말라 : 만년에 자연 속에 집을 짓고 평소에 좋아하던 산수의 경치를 마음껏 구경하며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의 재능을 감추고 은거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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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감악처사(紺岳處士)를 애도하며

한 해가 저물어 서리와 싸락눈 내리니 / 歲晏霜霰至
매서운 추위가 산봉우리에 몰아닥친다 / 峭寒逗巖峀
내가 길 가다가 홀연히 보고서 / 我行忽見之
우두커니 서서 한참 서글피 탄식했네 / 佇立悵歎久
더구나 좋은 벗이 죽었단 말 들었으니 / 况聞良友亡
눈물을 흘려서 옷소매를 적셨노라 / 涕下便霑袖
이 사람이 이미 저승으로 떠났으니 / 斯人已冥莫
이내 마음 다시 누구에게 말할거나 / 斯意復誰語
가련해라 빙옥 같은 그 모습이 / 可憐冰玉姿
떠나가 지금 어디에 있는고 / 去矣今何處
원고 뭉치 속에서 남긴 글 보니 / 散袠見遺文
탁월한 문장에 귀신의 간담 떨어지겠네 / 傑卓鬼膽破
황분 및 장소와 같은 고문들을 / 皇墳及莊騷
깊고 넓게 관통해 마음속에 환하였으니 / 淹貫在心下
그럭저럭 살아가는 의리 없는 사람을 / 悠悠無義子
한마디 말로 완악 나태함에서 일깨웠어라 / 一言起頑惰
빈천한 처지를 감히 싫어했으랴만 / 貧賤敢所惡
재능은 뛰어났건만 하늘의 뜻 어이하랴 / 才命柰天意
낡은 옷은 팔꿈치를 가리지 못했으니 / 鶉衣不掩觳
변변찮은 음식에 안색이 초췌하지 않았으랴 / 藿食顔無悴
내가 예전에 곁에서 모신 적 있는데 / 我昔從後塵
날로 마음속 잡초가 사라짐을 느꼈어라 / 日覺蕪穢去
중년에 근심과 병환으로 고생하셨건만 / 中年憂與病
아득히 거리가 멀어 뵙지 못했는데 / 杳杳音容阻
서신을 보내와서 정회를 말씀하시길 / 書來道情衷
너는 예전에 좋아하던 것에 돈독하니 / 謂汝敦宿好
우리 무리가 군대를 자랑할 만하건만 / 吾儕可張軍
우리 만남이 몹시 더디기만 하니 / 盍簪苦不早
세상일이 어찌 끝이 있으랴 하셨는데 / 世故那可已
이것이 바로 영결의 말씀이 되었네 / 卽斯便長訣
구차히 좋아한 게 아님을 아노니 / 吾知非苟悅
애도의 정 읊으며 누차 슬픔에 마음 꺾인다 / 發詠屢心折

[주D-001]귀신의 간담 떨어지겠네 : 문장이 뛰어나 귀신을 놀라게 할 정도라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취증장비서(醉贈張祕書)〉에 상대방의 문장을 칭찬하여 “험한 말은 귀신의 간담을 떨어뜨리고, 높은 글은 황분에 비기겠네.〔險語破鬼膽 高詞媲皇墳〕” 하였다.
[주D-002]황분(皇墳) :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 삼황(三皇)의 전적을 뜻하는 삼분(三墳)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상고(上古)의 고문을 뜻한다.
[주D-003]장소(莊騷) : 전국 시대의 명문인 《장자(莊子)》와 〈이소(離騷)〉를 가리킨다.
[주D-004]완악 나태함에서 일깨웠어라 : 맹자(孟子)가 “백이의 풍도를 들은 자는, 완악한 이는 언행에 분별이 생기고 나약한 지아비는 뜻을 세움이 있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 한 것을 차용하였다. 《孟子 萬章下》
[주D-005]예전에……돈독하니 : 시서(詩書)와 같은 고서를 읽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학문에 독실함을 뜻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신축세칠월부가환강릉야행도구작(辛丑歲七月赴假還江陵夜行塗口作)〉에 “예전에 좋아하던 시서를 돈독히 연구하고, 원림에는 세속의 정이 없어라.〔詩書敦宿好 林園無世情〕” 하였다.
[주D-006]군대를 자랑할 만하건만 : 원래는 《춘추좌씨전》 환공(桓公) 6년에 보이는 말인데, 한유(韓愈)의 〈취증장비서(醉贈張祕書)〉에 “아매는 글자를 모르지만, 팔분서를 제법 잘 쓴다. 시가 이루어져 그에게 쓰게 하니, 나의 군대를 자랑할 만하여라.〔阿買不識字 頗知書八分 詩成使之寫 亦足張吾軍〕” 하여, 글을 짓고 써서 자기 쪽의 성세(聲勢)를 떨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여기서는 성호가 학문에 독실하니 이제 우리 학문의 성세를 크게 떨칠 것이라는 뜻으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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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사람을 기다리며 3수

기약이 없어서도 안 되지만 / 無期旣不可
기약 있으니 기다리기 힘들구나 / 有期候卻難
그대는 필시 마음이 바쁘겠지 / 忙心君必有
석양이 질 때까지 보고 섰노라 / 看到夕陽殘

기다림이 오래니 마음이 지치고 / 望久心還倦
시간이 흘러가니 성난 마음 생긴다 / 時移輒生嗔
매화를 보아서 원근을 점쳐보니 / 觀梅驗遠近
아직도 그대 오고 있는 도중이구나 / 猶是在途身

산 아래는 모두 가을 풀이요 / 山下皆秋草
산 위에는 조각구름 머무는구나 / 山巓逗片雲
지는 석양 저편에 오는 행인들 / 行人殘照外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그대인 듯 / 一一總疑君

[주D-001]매화를……점쳐보니 : 매화를 보아 점치는 것은 송나라 때 소옹(邵雍)이 고안했다는 서법(筮法)이다. 즉 매화수(梅花數)를 관매점(觀梅占)이라 한다. 그 방법은 임의로 한 글자의 획수를 취하여 8획을 제하고 남은 수로 괘(卦)를 얻고, 또 한 글자의 획수를 취하여 6획을 제하고 남은 수로 효(爻)를 얻은 다음, 역리(易理)에 의거하여 그 길흉을 판단하는 것이다. 원래는 소옹이 매화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데서 비롯했다 한다.

 
 성호전집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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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밤에 읊다

창밖에 모진 바람은 한창 울부짖는데 / 囱外嚴風正怒號
방 안에는 등잔불 하나 외로이 걸려 있구나 / 房中一燈惟孤懸
사방 이웃이 고요해 모든 상념이 비었으니 / 四鄰無喧萬慮空
이러한 때가 그야말로 서책을 펴기 좋아라 / 此時正好開陳篇
서책에는 죽지 않은 성현의 마음이 있어 / 篇中不死聖賢心
직접 가르침을 주시는 듯한 말씀이 전해진다 / 怳如提耳猶流傳
내 눈에 구슬 없어 볼수록 뜻을 모르겠으니 / 我眼無珠看愈眩
옛사람이 지금 사람의 어리석음을 어이하리오 / 古人其柰今人蒙
전주에 마음을 둔 지 십 년이나 되었지만 / 箋註留心十年久
지금도 허둥지둥 동서를 분간하지 못한다 / 至今擿埴迷西東
더구나 지금은 건곤이 긴 어둠에 묻힌 터라 / 况是乾坤正長夜
관상을 찢고서 미친바람을 따라서 가누나 / 冠裳毁裂隨顚風
흙 속에 물건이 있으매 매몰될 수 없어 / 土中有物埋未得
정광이 위로 발사되어 긴 무지개 되건만 / 精光上射爲長虹
슬프다 우리 도가 이제 그만이니
 / 嗚呼此道今已矣
책을 덮고 말없이 근심에 잠겨 있노라 / 掩卷不語憂心忡

[주D-001]눈에 구슬 없어 : 이치를 보는 총명이 없음을 뜻한다. 원나라 무명씨(無名氏)의 《거안제미(擧案齊眉)》에 보인다. 유안무동(有眼無瞳) 또는 육안무주(肉眼無珠)라고도 한다.
[주D-002]관상(冠裳)을 찢고서 : 관상을 찢는다는 것은 원래 열관훼면(裂冠毁冕)이라 하여 주나라 천자(天子)의 왕실을 배반함을 뜻한다. 《春秋左氏傳 昭公9年》 중국의 문물을 훼멸(毁滅)함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송나라 호전(胡銓)이 “폐하께서 한 번 무릎을 굽히면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열관훼면하고 호복(胡服)으로 바꾸어 입을 것입니다.” 하였다. 《宋史 卷374 胡銓列傳》
[주D-003]흙……그만이니 : 보검도 그 빛이 땅속에 매몰되지 않았는데 우리 도는 망한다는 뜻이다. 오나라 때 북두성과 견우성 사이에 늘 보랏빛 기운이 감돌기에 장화(張華)가 예장(豫章)의 점성가(占星家) 뇌환(雷煥)에게 물었더니 보검의 빛이라 하였다. 이에 풍성(豊城)의 감옥 터의 땅속에서 춘추 시대에 만들어진 전설적인 보검인 용천검(龍泉劍)과 태아검(太阿劍) 두 보검을 발굴했다 한다. 《晉書 卷36 張華列傳》




 
성호전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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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춘첩(春帖) 4수

세 들어 사는 집 손님 응접이 거의 없어 / 僦舍全稀應接時
입춘이 왔단 것도 사흘 뒤에야 들었노라 / 立春三日始聞之
북두성 자루 돌았으니 천시(天時)가 정해졌으리 / 斗杓已轉天應定
연수가 불어났으련만 알지 못하였어라 / 年數行添我未知
성품에 맞으니 술병이 더한들 무슨 상관이랴 / 適性肯妨增酒病
새해를 맞아서도 결코 서치를 팔지 않으리라 / 迎新斷不賣書癡
한 가닥 양화의 기운이 가슴 속에 들어오니 / 陽和一脈來方寸
이를 길러 상운 서일을 이루길 기약하노라 / 養與祥雲瑞日期

별이 돌고 달이 그믐 되는 것 더딜 수 없으니 / 星回月朓不容遲
한 해는 용사가 골짜기 달려가는 때를 만났어라 / 歲際龍蛇赴壑馳
하룻밤에 응당 새 일력을 재촉해야 했건만 / 一夜應催新曆日
닷새 동안 여전히 묵은 연시를 빌렸네
 / 半旬猶貸舊年時
궁동에 싸락눈을 눈썹 찌푸리며 보내고 / 窮冬霰雪攢眉送
대지에 초목 번화하길 손꼽아 기다린다 / 大地繁華屈指期
일천 시름 일만 한을 다 이기고서 / 打疊千愁與萬恨
먼저 아이 시켜 새 춘첩시를 짓게 하노라 / 先敎稺子帖新詩

세약이 다하여 구망에 이르니 / 歲籥闌珊逼句芒
객지에서 춘축을 짓느라 고심하노라 / 客中春祝強搜腸
청편이 손에 있으니 나는 분수를 알고 / 靑編在手吾知分
백발이 머리에 가득해도 그대로 무방해라 / 白髮渾頭爾不妨
의리가 앞에 있으니 변별해야 하고 / 理義當前須辨別
공정은 매양 낮으니 경장해야 하리 / 功程每下合更張
심신에 절로 석 자의 부절이 있으니 / 身心自有符三字
구태여 높은 하늘에서 찾을 것은 없어라 / 未必煩求向彼蒼

머리는 둥글고 발은 네모나 상하로 나뉘니 / 首足圓方上下分
남아가 세상에 있으매 기개가 구름 잡는다 / 男兒在世氣拏雲
본디 눈썹 펴는 얘기 스스로 좋아하거니 / 生來自喜伸眉話
가는 곳마다 술잔 잡고 취함을 어찌 사양하리오 / 到處寧辭把酒醺
관자(冠者) 동자(童子)와 서로 즐기는 것 좋아하노니 / 好取冠童相與樂
날짐승 길짐승과는 함께 살지 않는단 걸 뉘 알리오 / 誰知鳥獸不同羣
곁엣 사람은 이내 심사를 묻지 마시라 / 傍人莫問余心事
일점의 영서라 그대 향해 그저 웃을 뿐 / 一點靈犀笑向君

[주D-001]북두성……정해졌으리 :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이미 왔음을 뜻한다. 명나라 이동양(李東陽)의 〈입춘일거가예남교(立春日車駕詣南郊)〉에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 것을 형용하여 “북두성 묵은 자루는 해를 따라 돌고, 남쪽 교외의 아름다운 기운은 성 저편에서 온다.〔北斗舊杓依歲轉 南郊佳氣隔城來〕” 하였다.
[주D-002]성품에 맞으니 : 진(晉)나라 장령(張酃)의 〈주부(酒賦)〉에 “근심을 버리고 걱정을 없애니, 성품에 맞고 감정에 순하여라.〔遺憂消患 適性順情〕” 하였고, 송나라 소철(蘇轍)의 〈한식유남호(寒食遊南湖)〉에 “성품에 맞게도 술동이를 만났고, 회포를 열며 벗에게 읍하노라.〔適性逢遵酒 開懷挹友生〕” 하였다.
[주D-003]서치(書癡)를 팔지 않으리라 : 서치는 책만 열심히 읽는 것을 말한다. 당나라 때 두위(竇威)는 대대로 훈신(勳臣)의 가문에서 자랐다. 그의 형제들은 모두 무예를 숭상했는데 두위 혼자 문사(文史)를 탐독하니 형제들이 그를 비웃어 서치라 했다. 송나라 때 오중(吳中)의 민간 풍속에 제석(除夕)에 아이들이 거리를 다니며 “바보 사려! 멍청이 사려!” 하며 외치고 다녔다 한다. 송나라 범성대(范成大)의 〈납월촌전악부십수서(臘月村田樂府十首序)〉에 보인다.
[주D-004]상운(祥雲) 서일(瑞日) : 상서로운 구름과 해로, 높고 고결한 인품을 비유한다. 주희(朱熹)의 〈명도선생찬(明道先生贊)〉에 정호(程顥)의 인품을 형용하여 “상서로운 해와 구름이요 온화한 바람 단비로다.〔瑞日祥雲 和風甘雨〕” 하였다.
[주D-005]별이……것 : 음력 12월 그믐이 되어 한 해가 감을 뜻한다. 《예기》〈월령(月令)〉에 한 해의 마지막 달인 계동(季冬)을 말하면서 “별이 하늘에서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星回于天〕” 하였다.
[주D-006]용사(龍蛇)가……때 : 제야(除夜)가 왔음을 뜻한다. 소식(蘇軾)이 제야에 지은 〈수세(守歲)〉에 “다해 가는 한 해를 알고 싶은가. 마치 골짜기로 달려가는 뱀과 같도다.〔欲知垂盡歲 有似赴壑蛇〕” 하였다.
[주D-007]하룻밤에……빌렸네 : 첫째 수에서 “입춘이 왔단 것도 사흘 뒤에야 들었노라.”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즉 하룻밤을 고비로 묵은해와 새해가 바뀌었지만 반순(半旬) 가까운 시일 동안은 입춘이 온지도 모르고 지난해인 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주D-008]싸락눈을……보내고 : 눈 속에서 눈썹을 찌푸린 채 시구를 생각하는 것이다. 소식(蘇軾)의 〈정월일일설중과회알객회작(正月一日雪中過淮謁客回作) 2수〉 중 둘째 수에 “무슨 한이 있어 눈썹을 찌푸리는가. 맑은 시구를 얻어서 좋아라.〔攢眉有底恨 得句不妨淸〕” 하였다.
[주D-009]세약(歲籥) : 한 해의 변천을 뜻한다. 약(籥)은 기절의 변화를 측정하는 갈대 대롱을 가리킨다.
[주D-010]구망(句芒) : 고대 전설에 목(木)을 주관하는 벼슬, 또는 목신(木神)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예기》〈월령(月令)〉에서 맹춘(孟春)의 달에 대해 “그 제(帝)는 태호(太皥)이고 그 신(神)은 구망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맹춘을 뜻한다.
[주D-011]청편(靑編)이……알고 : 청편은 서책이다. 즉 서책을 읽는 것이 자기의 분수임을 안다는 뜻이다.
[주D-012]공정(功程)은……하리 : 공정은 공부이다. 즉 공부가 매양 낮아지니 힘을 내어 분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주D-013]석 자의 부절 : 삼자부(三字符)라 한다. 주희(朱熹)의 초년 시절 스승인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가 주희에게 “내가 《주역》에서 입덕(入德)의 문을 얻었으니, 이른바 ‘불원복(不遠復)’이란 것이 바로 나의 삼자부이다.” 하였다. 《心經 卷1》 여기서는 자신이 지키는 학문의 요결(要訣)을 뜻한다.
[주D-014]머리는……나뉘니 : 사람이 머리는 둥글고 발은 모난 것을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것에 비겼다.
[주D-015]기개가 구름 잡는다 : 당나라 승난(僧鸞)의 〈증이찬수재(贈李粲秀才)〉에 “건장하기 씩씩한 송골매와 수리 같아, 구름을 잡고 들판에 사냥하며 높은 하늘에 번득인다.〔駿如健鶻鶚與鵰 拏雲獵野翻重霄〕” 하였다.
[주D-016]눈썹 펴는 얘기 : 근심 걱정을 벗어버리게 하는 얘기이다. 송나라 매요신(梅堯臣)의 〈취중유별영숙자리(醉中留別永叔子履)〉에 “머뭇거리던 진자도 과연 왔으니, 함께 작은 방에 앉아 애오라지 눈썹을 편다.〔逡巡陳子果亦至 共坐小室聊伸眉〕” 하였다.
[주D-017]관자(冠者)……것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자신의 뜻을 말하라는 공자의 명에 슬(瑟)을 울리다 말고, “늦은 봄날 봄옷이 이루어지거든 관자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하였다. 《論語 先進》 관자는 관을 쓴 사람으로 어른을 뜻한다.
[주D-018]날짐승……걸 : 세상을 피해서 살던 은자(隱者) 걸닉(桀溺)에 대해 공자가 “날짐승 길짐승과는 더불어서 무리 지어 살 수 없으니 내가 사람과 함께 살지 않고 누구와 더불어 살겠는가.〔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하였다. 《論語 微子》 성호 자신은 걸닉과 같은 은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주D-019]일점(一點)의 영서(靈犀) :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의 〈무제(無題)〉에 “몸에 채색 봉황의 한 쌍 날개는 없지만, 마음에는 신령한 물소 뿔 한 점의 밝음이 있어라.〔身無彩鳳雙飛翼 心有靈犀一點明〕” 하였다. 물소의 뿔 위에는 무늬가 있어 양쪽 뿔이 서로 감응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점영서(一點靈犀)란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함을 뜻한다.


 
성호전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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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꽃을 구경하며. 옛 시에 차운하다. 3수

만사가 이 중에서 다 사라지나니 / 萬事消磨向此中
한 번 얘기하고 한 번 웃으며 함께 어울린다 / 一談一笑與和同
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고적함을 달랠 만하니 / 有時客到贏排寂
경치 좋은 곳에 산은 높이 저 허공에 꽂혔어라 / 佳處山高迥揷空
흐르는 세월에 머리털은 눈처럼 희고 / 冉冉年光頭雪白
미미한 술 힘에 뺨은 홍조를 띠누나 / 微微酒力頰潮紅
화황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 이 없으니 / 無人不道花荒好
우선 삼삼경 위의 바람을 쐬시라 / 且挹三三逕上風

친척이 단란하게 한자리에 모였으니 / 親戚團圓一席中
우리의 이 풍류를 그 누구와 비교하리오 / 風流吾事較誰同
종족을 거두자는 약속 있으니 장차 노력할 테고 / 收宗有約行努力
세속을 따를 마음 없으니 매양 오활하여라 / 循俗無心每脫空
잔의 술에 미미한 물결은 압록을 일으키고 / 盞酒微波生鴨綠
뜰의 꽃에 내리는 가랑비는 성홍을 적시누나 / 庭花小雨濕猩紅
맑은 기쁨 도도해 손님을 만류할 만하니 / 淸歡滚滚堪留客
정할로 옛날의 풍류를 이어본들 어떠리 / 井轄何妨續古風

생각건대 참된 맛은 가와 안이 혼합돼야지 / 商量眞味混邊中
좋은 흥에 불러서 한방에 함께 모였어라 / 嘉興招呼一室同
구사라 분유가 오늘날에도 있거니 / 舊社枌楡今尙在
새 기쁨이라 화수는 전혀 헛되지 않아라 / 新歡花樹未全空
잘 알겠노라 남맥의 천 이랑 푸른 곡식은 / 定知南陌千畦綠
동화의 열 길 붉은 먼지에 물들지 않음을 / 不染東華十丈紅
사방 좌중에선 분분히 농사 얘기를 하니 / 四座紛紛雜農說
상저를 가지고서 가풍을 삼은들 어떠리 / 任將桑苧作家風

[주D-001]만사가……사라지나니 : 구양수(歐陽脩)의 〈퇴거술회기북경한시중(退居述懷寄北京韓侍中) 2수〉 중 첫째 수에 “일생 동안 부지런히 고생한 것은 책 천 권이요, 만사가 다 사그라져 없어지는 것은 술 백분일세.〔一生勤苦書千卷 萬事消磨酒百分〕” 하였다. ‘술 백분’이란 술이 잔에 가득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꽃을 보는 중에 만사의 시름을 잊는다는 뜻으로 말했다.
[주D-002]화황(花荒) : 꽃구경이다. 송나라 양만리(楊萬里)의 〈자찬(自贊)〉에 “가을에는 월황을 하고 봄에는 화황을 한다.〔秋作月荒 春作花荒〕” 하였다. 월황은 달구경이다. 《誠齋集 卷89》
[주D-003]삼삼경(三三逕) : 송나라 양만리(楊萬里)가 동원(東園)에 구경(九徑), 즉 아홉 갈래의 길을 내고 각각 다른 화목(花木)을 심고 이를 삼삼경(三三徑)이라 했다. 《誠齋集 卷36 三三徑序》
[주D-004]압록(鴨綠) : 물의 빛깔이 오리의 머리처럼 짙푸른 것을 형용한 말이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쾌청(快晴)〉에 “금강의 압록이 산을 안고 온다.〔錦江鴨綠抱山來〕” 하였다.
[주D-005]정할(井轄) : 손님이 가지 못하게 손님이 타고 온 수레의 굴대빗장을 우물에 던져 넣는 것이다. 서한(西漢) 때 진준(陳遵)은 자가 맹공(孟公)인데 술을 몹시 좋아하여 빈객이 집에 가득 모이면 대문을 닫아 빗장을 걸고 손님들이 타고 온 수레의 굴대빗장을 우물에 던져 넣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가지 못하게 하였다. 성어(成語)로는 진준투할(陳遵投轄)이라 한다. 《漢書 卷92 遊俠傳 陳遵》
[주D-006]가와 안이 혼합돼야지 : 불교의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부처님이 말해 놓은 것은 모두 응당 믿고 순종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마치 꿀을 먹을 때 겉과 속이 모두 단 것과 같으니, 나의 경전 또한 그러하다.〔佛所言說 皆應信順 譬如食蜜 中邊皆甛 吾經亦爾〕” 한 데서 온 말이다. 여기서는 친소(親疎)를 구별하지 않고 함께 모이는 것을 비유하기 위해 말하였다.
[주D-007]구사(舊社)라 분유(枌楡) :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고향을 일컫는 말인 분유사(枌楡社)를 가리킨다. 한 고조가 고향인 풍(豐)에 느릅나무를 심어 토지의 신(神)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주D-008]화수(花樹) : 친족의 모임을 뜻한다. 당나라 위장(韋莊)이 화수 아래에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신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해 잠삼(岑參)의 〈위원외화수가(韋員外花樹歌)〉에 “그대의 집 형제를 당할 수 없나니, 열경과 어사와 상서랑이 즐비하구나. 조회에서 돌아와서는 늘 꽃나무 아래 모이나니, 꽃이 옥 항아리에 떨어져 봄술이 향기로워라.〔君家兄弟不可當 列卿御使尙書郞 朝回花底恒會客 花撲玉缸春酒香〕” 한 데서 유래하였다.
[주D-009]동화(東華) : 본래는 천정(天庭)의 동쪽에 있는 별자리 이름인데, 대궐문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주D-010]상저(桑苧) : 뽕과 모시를 심고 가꾸는 것으로 농사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당나라 때 은사(隱士)로 《다경(茶經)》을 지은 육우(陸羽)의 호가 상저옹(桑苧翁)이다.


 
성호전집 제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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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贊)
아름다운 나무에 대한 찬〔嘉樹贊〕

정릉의 저택에 / 維貞陵第
탁 트인 창이 열린 곳 / 厥牖向
여기에 박달나무 심었으니 / 爰有樹檀
정원의 섬돌 곁이네 / 在庭階上
천 가지 만 가지가 무성하여 / 千條萬枝
그늘은 열 대의 수레를 덮고 / 蔭蓋十輛
껍질 속에서 나는 천향은 / 皮裏天香
쓰임을 기다려 버려지지 않네 / 待用不放
뿌리는 깊숙이 샘에 의탁하여 / 根深託泉
용처럼 도사린 채 몸을 보존하니 / 龍蟄存身
울창한 가지는 누대를 가리고 / 薈蔚軒楹
훌륭한 자태는 이웃도 부러워하네 / 斐亹旁鄰
옛날 나의 선조께서 / 昔我先祖
손수 모종을 옮겨 심으시고 / 種蒔躳親
심고 나서 잘 가꾸어 / 旣栽乃培
후손에게 물려주셨는데 / 用遺後人
이후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 / 問幾何歲
백삼십 번이나 봄이 지났구나 / 百三十春
꺾지도 말고 구부리지도 말아서 / 勿栞勿拜
이 집과 더불어 영원케 하라 / 始終與宅
덕 베풀 인물이 탄생할 것을 / 誕厥種德
나무를 통하여 점을 치나니 / 卜惟在木
나무가 영원토록 보존된다면 / 物卽永圖
인물도 끝임 없이 배출되리라 / 人亦無極
후손들이 대대로 이어받아서 / 昆耳遞嬗
이것을 보고서 법칙 삼으니 / 視此作則
사시사철 그 자태 변하지 않고 / 貫時不易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푸르구나 / 柯葉茂綠
여기 이 자리에 종족을 모아 / 聚族於斯
경건히 사랑하며 북돋아 줌에 / 敬愛封植
짙은 녹음과 드리운 그림자는 / 繁陰落影
성대한 조상의 은택이로다 / 旆旆餘澤
근본을 돌아보며 추모를 하니 / 泝回扳慕
마치 가르침을 직접 듣는 듯 / 警咳怳若
예는 근본을 잊지 않으며 / 禮不忘本
행실은 가풍을 따라야 하니 / 行率家風
나무조차 힘써 보호하거늘 / 樹尙勤護
일족이야 말하여 무엇 하리오 / 矧同于宗
나의 말 혹시라도 노망 아니니 / 言或非耄
간절한 나의 마음 전해지리라 / 導達情衷

[주D-001]정릉(貞陵)의 저택 : 성호의 증조부 이상의(李尙毅)가 살던 서울 정동(貞洞)의 구택(舊宅)을 가리킨다. 그 집 정원의 북쪽 계단 옆에 이상의가 심은 박달나무 세 그루가 성호가 살던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星湖全集 卷53 檀軒記》
[주D-002] : 대본에는 ‘敝’로 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볼 때 오자로 판단되므로 바로잡았다.
 
성호전집 제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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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贊)
열두 성현을 그린 화상첩에 대한 찬 병서〔十二聖賢畫像帖贊 幷序

도(道)는 천지 사이에서 만고(萬古)의 세월이 흘러도 유구(悠久)하고, 수천 명의 성인(聖人)을 거쳐도 궤도(軌道)를 같이한다. 그러나 시기에는 쇠퇴한 때와 융성한 때가 있으니, 도가 행해지고 행해지지 않는 것은 그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주공(周公)과 같은 성인이 세상을 만난 것이 어떠하였던가.
아, 풍(風)과 아(雅)의 변화가 주공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치효(鴟鴞)〉 등 여러 편의 시를 보자면 어찌 재삼 탄식이 나오지 않겠는가. 성인은 인륜에 있어 지극한 분이니, 본래 완전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부자(父子)의 도가 어그러진 뒤에야 대순(大舜)과 같은 효자가 있었고, 군신(君臣)의 사이가 멀어진 뒤에야 관용방(關龍逄)과 비간(比干) 같은 충신이 있었으며, 사문(斯文)이 비색(否塞)된 뒤에야 주공,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이 있었다.
공자가 “내가 꿈속에서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공자가 주공의 마음과 맞아 들어가 합치된 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로되, 공자가 주공을 다시 꿈에서 보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면 부자(夫子)의 뜻 역시 사그라진 것이다. 부자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노(魯)나라에서 쫓겨나 광(匡) 땅에서 포위되었으며,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의 사이에서 양식이 떨어졌으며, 환퇴(桓魋)로부터 나무를 베어 버리는 위협을 당하였다. 새의 새끼처럼 아무렇게나 먹고 메추라기처럼 거처도 없었으며, 자리가 덥혀질 새도 없이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다가 어느덧 노쇠해져 버렸으니, 비록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고 백왕(百王)의 법도를 세우고자 했더라도, 그 형세가 어쩔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전술(傳述)만 하고 창작(創作)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으니, 또한 그 심정은 슬프고도 절박한 것이었다.
맹자(孟子)가 “문왕(文王)으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가 500여 년이다.”라고 하였으니, 왕자(王者)가 흥기할 운세는 공자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징험되지 않았으며, “주(周)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다.”라고 하였으니,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사람이 나오는 연수(年數)는 맹자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갔다. 또 말하기를 “그런데도 아무도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아무도 없겠구나.” 하였으니, 도가 행해지지 않음을 맹자는 벌써 깊이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1400년 뒤에 살았던 송(宋)나라의 여러 선철(先哲)들이 옛 경서를 통해 도를 탐구하고 기나긴 밤에도 성현을 상상하면서 오히려 간절하게 당시에 도가 행해지기를 바랐던 상황으로 말하자면, 더욱 가망이 멀어진 것이었다. 병을 다스리는 것에 비유하건대, 삼대(三代) 이전에는 증세를 진단하고 약을 처방하여 죽어 가는 사람을 되살렸지만, 공자와 맹자 이후로는 몸의 모든 혈맥(血脈)이 이미 약해지고 고질병으로 변하여 점차로 악화되는 상황에서 훌륭한 의사가 약주머니 속에 약을 준비하여 시험해 보기를 기다리며 문에 기대어 있다가 끝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화(和)와 완(緩)이 손을 움츠리고 산삼(山蔘)과 지초(芝草)도 쓰이지 못하였으며, 오훼(烏喙)와 마간(馬肝)이 왕왕 해독을 끼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으로부터 문왕과 무왕(武王)까지는 왕도(王道)가 시행되었고, 주공으로부터 주자까지는 마음이 고달팠다. 왕도가 시행되면 당세에 도움이 되고, 마음이 고달프면 후세(後世)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성현이 후세에 남긴 가르침이 찬란하고 후세를 도와 계도함이 무궁하여 천지간의 사람들로서 조금이라도 그 유택(遺澤)을 누리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것은 당시에는 불행이었지만 후인(後人)에게는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왼쪽으로 옷깃을 여미는 오랑캐가 되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 덕이 높으면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은혜가 크면 보답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바다처럼 드넓고 땅처럼 광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면, 끝내 그러한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육경(六經)의 문자를 읽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식견이 얕은 사람은 그 말을 터득하고 식견이 높은 사람은 그 마음을 터득한다. 그런데 그 마음을 터득하여 성현을 알게 되더라도 오히려 미진하다고 여기면, 이에 화상을 구하여 추모할 것을 생각하니, 이것이 바로 화상첩(畫像帖)이 만들어지는 까닭이다.
나의 가형(家兄) 서산공(西山公)의 벗으로 기예(技藝)가 남다른 분이 있었으니, 바로 공재(恭齋) 윤효언(尹孝彦)으로, 그림 그리기를 즐겨서 세상에 뛰어난 화가로 일컬어졌다. 공은 네 폭의 비단에 화상을 그리는 구상을 말해 주었는데, 주공이 한 폭이며, 공자가 안석(案席)에 기댄 가운데 안연(顔淵)과 자유(子游)가 곁에서 모시고 증자(曾子)가 앞에서 간책(簡冊)을 잡고 도를 강론하는 모습이 합하여 한 폭이며, 소옹(邵雍)과 정호(程顥), 정이(程頤) 세 분이 맹자의 진영(眞影) 앞에 공수(拱手)하고 서서 우러러보는 모습이 합하여 한 폭이며, 주자가 기대어 앉아 있는 가운데 황간(黃榦)과 채원정(蔡元定) 두 분이 곁에서 모시고 있는 모습이 합하여 한 폭이니, 모두 12상(像)이었다. 공재가 공경히 승낙하였으나, 그림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공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얼마 뒤에 화상이 완성되자, 공의 유언(遺言)을 전하며 우리 집으로 보내왔다. 참으로 정성을 다하여 그린 마음의 선물이니, 저승에 계신 분이나 이승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보배로운 그림이다. 공은 속세를 떠나 우유자적하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살다가, 마침내 성현의 가르침에 귀의하여 마음속의 포부를 크게 지녔는데, 성현의 도상(圖像)을 벽에 걸어 두고 앙모(仰慕)하려고까지 하였으니, 만년(晩年)에 자중(自重)하던 모습을 이를 통해 또한 볼 수가 있다. 어찌 공의 뜻과 일을 사라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지문(識文)과 아울러 찬(贊)을 지어 이 화상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전말(顚末)을 알도록 하는 바이다.

천하의 중임을 맡았으며 / 任天下重
만대의 걱정을 품었도다 / 懷萬世憂
덕이 이미 높은 데다 / 德旣莫卲
공적 또한 넉넉하였네 / 功亦與優
삼왕(三王)을 겸하여 네 가지 일 시행하니 / 三兼四施
예악이 성대하도다 / 禮樂載盛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 / 夢寐儀刑
성인만이 성인을 알았도다 / 維聖知聖
이상은 첫 번째 찬이다.

봉황이 떠나고 기린이 사라지자 / 鳳逝麟廢
도를 방책에 붙였는데 / 道寄方策
그 누가 확고하게 전수하였나 / 孰確而傳
증자가 노둔함으로 도통(道統)을 이었으며 / 曾以魯得
저 안회(顔回)와 언언(言偃)이 / 彼回曁偃
좌우에서 모시고 받들었으니 / 右侍左尙
아, 선사께서는 / 嗚乎先師
엄숙하기가 유상과 같도다 / 儼若遺像
이상은 두 번째 찬이다.

맹자 생전에는 도가 있더니 / 子在道在
맹자 사후에는 도가 끊겼네 / 子亡道絶
하남 정씨(程氏) 형제가 나고 / 河南伯叔
소강절(邵康節) 또한 함께 나와서
 / 亦粤康節
도통을 찾아서 흥기시키니 / 尋緖勃興
《칠편》의 법도도 한 가지라네 / 七編揆一
그림 속에 계신 성인을 / 畫中之聖
철인들이 존모하여 우러러보네 / 景仰惟哲
이상은 세 번째 찬이다.

예법을 조용히 실천하고 / 禮法從容
인의를 부고(府庫)로 삼아 침잠함이
 / 仁義爲府
스스로 가야 하는 길이건마는 / 自道也是
다시 감히 깨우치는 사람 없었네 / 莫復敢諭
주자를 보고서 알았던 이가 / 彼見而知
오직 문도인 황간과 채원정으로 / 維黃蔡徒
바른 스승을 얻어서 귀의했으니 / 得師爲歸
훌륭하여라 저 장부들이여 / 懿歟夫夫
이상은 네 번째 찬이다.

[주D-001]주공(周公)과 …… 어떠하였던가 : 주공이 도가 쇠퇴하는 시기를 만나 곤경을 겪은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초기에 성왕(成王)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숙부인 주공이 섭정(攝政)을 하였다. 이때에 성왕의 다른 숙부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이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반란을 일으키고 “주공이 장차 어린 성왕에게 불리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자 성왕이 이 말을 믿고 주공을 의심하고 미워하니, 주공이 동쪽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書經 金縢》
[주D-002]풍(風)과 …… 시작되었으니 : 《시경》의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주공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서주(西周)가 왕성할 때에는 선정(善政)이 사방에 두루 미쳐서 가요(歌謠)도 왕의 은택을 노래하는 것이었으나,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이 죽은 뒤로는 선정이 제대로 베풀어지지 않아 원망과 개탄하는 가요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시경》 대서(大序)에 이른 바 “왕도(王道)가 쇠하고 예의가 없어지고 정치가 잘못되면서 변풍과 변아가 생기기 시작했다.”라는 것이다. 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 25편을 정풍(正風)이라 하고, 패풍(邶風)에서 빈풍(豳風)에 이르는 13나라의 135편을 변풍이라고 하며, 소아(小雅)의 〈유월(六月)〉부터 〈하초불황(何草不黃)〉까지 58편을 변소아(變小雅)라 하고, 대아(大雅)의 〈민로(民勞)〉부터 〈소민(召旻)〉까지 23편을 변대아(變大雅)라고 한다.
[주D-003]치효(鴟鴞) : 《시경》 빈풍의 편명이다. 주공이 관숙과 채숙 등의 유언비어로 인하여 동쪽 지방에 피신한 지 2년 만에 비로소 그들을 잡아서 처벌하였다. 그러나 성왕이 여전히 주공의 진심을 알지 못하자, 주공이 〈치효〉를 지어 성왕에게 올렸다. 〈치효〉는 다른 새의 둥지를 부수고 알을 빼앗는 악조(惡鳥)인 올빼미〔鴟鴞〕를 소재로 하여 관숙과 무경 등이 주나라 왕실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사실을 비유한 시이다.
[주D-004]관용방(關龍逄)과 비간(比干) : 관용방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무도한 정사를 간쟁하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비간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음란함을 직언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모두 충신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莊子 人間世》 《史記 卷3 殷本紀》
[주D-005]내가 …… 못하였다 : 《논어》 〈술이(述而)〉에 “심해졌구나, 나의 노쇠함이여. 오래되었구나, 내가 꿈속에서 주공을 다시 뵙지 못한 지가.〔甚矣 吾衰也 久矣 吾不復夢見周公〕”라고 탄식한 공자의 말이 나온다.
[주D-006]노(魯)나라에서 …… 포위되었으며 : 공자가 노나라에서 쫓겨났다는 말이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나는 노나라에서 두 번이나 쫓겨났다.〔吾再逐於魯〕”라고 나오지만, 다른 문헌에는 쫓겨났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 듯하다. 다만 공자가 두 번 노나라를 떠난 사실이 〈공자세가(孔子世家)〉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공자 자신이 노나라를 떠났던 일을 쫓겨났다고 겸손하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공자가 노나라를 처음 떠난 것은 35세 때로, 계평자(季平子)의 반란에서 패한 노나라 소공(昭公)이 제(齊)나라로 망명하여 나라가 혼란해지자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家臣)이 되었다가 몇 년 뒤에 돌아왔다. 공자가 두 번째로 노나라를 떠난 것은 56세 무렵으로, 제나라가 노나라의 정사(政事)를 어지럽히기 위해 여악(女樂)을 보내왔을 때에 권신(權臣)인 계환자(季桓子)가 이것을 받고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자 노나라를 떠나 위(衛)나라로 가서 10개월을 머물고 진(陳)나라로 갔다. 진나라로 가기 위해 광(匡) 땅을 지날 때에 그 지역의 사람들이 공자를 자신들을 괴롭히던 양호(陽虎)로 오인하고 포위하며 위협하였는데, 위나라의 대부 영무자(甯武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D-007]진(陳)나라와 …… 떨어졌으며 : 공자가 3년 동안 채(蔡)나라에 머물다가 초(楚)나라의 초빙을 받아 초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초나라와 오(吳)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진나라와 채나라의 대부들이 사람을 보내 진나라와 채나라의 사이에 머무르던 공자 일행을 포위하여 못 가게 하였다. 이로 인해 공자 일행은 여러 날 동안 양식이 떨어져 굶주리는 고초를 겪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D-008]환퇴(桓魋)로부터 …… 당하였다 : 공자가 송(宋)나라에 있을 때에 큰 나무 아래에서 제자들과 예(禮)를 익히고 있었는데, 평소 공자를 미워하던 사마(司馬) 환퇴가 공자를 해치고자 그 나무를 베어 버리게 한 일이 있었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주D-009]새의 …… 없었으며 : 《장자》 〈천지(天地)〉에 “성인이란 메추라기처럼 일정한 거처도 없고 새의 새끼처럼 부실하게 먹는다. 그러면서도 새처럼 날아다니면서 행적을 남기지 않는다.〔夫聖人 鶉居而鷇食 鳥行而無彰〕”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0]자리가 …… 못하다가 : 공자가 도(道)를 행하기 위해 급급하게 천하(天下)를 돌아다니느라 오래 앉아 있을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다. 반고(班固)의 〈답빈희(答賓戲)〉에 “공자가 앉은 자리는 따스해질 틈이 없었고, 묵자의 집 굴뚝은 검어질 틈이 없었다.〔孔席不暖 墨突不黔〕”라는 말이 나온다. 《文選 卷45》
[주D-011]나는 …… 않는다 : 《논어》 〈술이(述而)〉에 “옛것을 전술만 하고 창작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나를 조심스럽게 우리 노팽에게 견주어 본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라는 말이 나온다.
[주D-012]맹자(孟子)가 …… 것이다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500년마다 반드시 왕자가 나오니,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자가 있다. 주나라 이래로 700여 년이 되었으니, 연수로 말하자면 지났고, 시기로 살펴보자면 지금이 가능하다.〔五百年 必有王者興 其間 必有名世者 由周而來 七百有餘歲矣 以其數則過矣 以其時考之則可矣〕”라는 맹자의 말이 나오고, 〈진심 하(盡心下)〉에 “문왕으로부터 공자에 이르기까지가 500여 년이니, 태공망과 산의생은 직접 보고서 문왕의 도를 알았고, 공자는 들어서 알았다. 공자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100여 년이니, 성인의 세대와 이처럼 멀지 않으며, 성인이 거주하던 곳과 이처럼 매우 가깝되, 그런데도 아무도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아무도 없겠구나.〔由文王至於孔子 五百有餘歲 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 若孔子則聞而知之 由孔子而來 至於今 百有餘歲 去聖人之世 若此其未遠也 近聖人之居 若此其甚也 然而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라는 맹자의 말이 나온다. “그런데도 아무도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아무도 없겠구나.”라는 말은 공자로부터 맹자 당시까지의 시간적 차이가 크지 않고, 맹자가 살던 추(鄒)나라와 공자가 살던 노(魯)나라가 거리상으로 가까운데도, 당시에 이미 공자의 도를 보고서 안 사람이 없었으니, 500년 뒤에도 들어서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탄식한 것이다. 대본에는 이 부분이 ‘然而無由乎爾 則亦無有乎爾’라고 되어 있는데, ‘由’는 ‘有’의 오자(誤字)이다.
[주D-013]화(和)와 …… 일이었다 : 화와 완(緩)은 춘추(春秋) 시대 진(秦)나라에서 양의(良醫)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들로 성현을 비유한 것이고, 산삼과 지초는 대표적인 좋은 약재로 유가(儒家)의 도를 비유한 것이다. 주공 이후로 공자, 맹자, 주희(朱熹)와 같은 성현이 나와 유가의 도를 밝혔으나, 어려운 시대를 만나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는 의미이다. 오훼(烏喙)와 마간(馬肝)은 모두 독성이 있는 약재인데, 여기서는 양주(楊朱), 묵적(墨翟), 노장(老莊), 불가(佛家) 등의 이단(異端) 사상을 비유하였다. 이러한 이단의 사상이 유가가 쇠퇴한 틈을 타서 사람들을 현혹시켜 해독을 끼쳤다는 의미이다.
[주D-014]왼쪽으로 …… 오랑캐 : 《논어》 〈헌문(憲問)〉에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였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注)에,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이다.”라고 하였다.
[주D-015]서산공(西山公) : 성호의 중형(仲兄)인 이잠(李潛, 1660~1706)이다. 자가 중연(仲淵), 호는 섬계(剡溪)ㆍ서산으로, 이하진(李夏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당쟁으로 인해 유배되어 죽자 과거를 포기하고 자연을 유랑하며 살았다. 1706년(숙종32)에 김춘택(金春澤)을 비난하고 세자(世子)의 보호를 역설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일이 빌미가 되어 국문(鞫問)을 당했는데, 국문을 당한 지 6일 만에 죽었다. 문집으로 《섬계유고(剡溪遺稿)》가 남아 있다. 《息山集 卷21 李仲淵墓碣銘, 韓國文集叢刊 178輯》
[주D-016]공재(恭齋) 윤효언(尹孝彦) :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이다. 본관은 해남(海南), 자가 효언, 호는 공재로,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자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물과 동물 그림에 뛰어나 정선(鄭歚)ㆍ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주D-017]황간(黃榦) : 1152~1221. 자는 직경(直卿), 호는 면재(勉齋)이다. 주희(朱熹)의 문인이자 사위로, 주희의 도학을 계승한 인물로 평가된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中國歷代人名大辭典, 上海古籍出版社, 1999》
[주D-018]채원정(蔡元定) : 1135~1198. 자는 계통(季通), 호는 서산(西山)이다. 주희의 문인으로, 주희가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을 주석할 때 그와 많은 학문적 의견을 나누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中國歷代人名大辭典, 上海古籍出版社, 1999》
[주D-019]삼왕(三王)을 …… 시행하니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우왕은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착한 말을 좋아하셨으며, 탕왕은 중도(中道)를 잡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되 특정한 부류를 따지지 않으셨으며, 문왕은 백성을 보기를 다친 사람처럼 여겼고 도를 열망하기를 아직 보지 못한 듯이 하셨으며, 무왕은 가까운 사람이라 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고 먼 사람이라 해서 잊지 않으셨다. 주공은 세 왕의 덕을 겸비하여 그분들이 행한 이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시되,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 생각하기를 밤낮없이 하셨고, 다행히 터득하시면 그대로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리셨다.〔禹惡旨酒 而好善言 湯執中 立賢無方 文王視民如傷 望道而未之見 武王不泄邇 不忘遠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라는 말이 나온다.
[주D-020]증자(曾子)가 …… 이었으며 : 《근사록(近思錄)》 〈위학(爲學)〉에 “증삼은 노둔하기 때문에 마침내 도를 얻었다.〔參也竟以魯得之〕”라는 정호(程顥)의 말이 나온다.
[주D-021]하남(河南) …… 나와서 : 하남 정씨 형제는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고, 강절(康節)은 소옹(邵雍)의 시호이다.
[주D-022]칠편(七編) : 《맹자》를 가리킨다. 《맹자》는 본래 〈양혜왕(梁惠王)〉, 〈공손추(公孫丑)〉, 〈등문공(滕文公)〉, 〈이루(離婁)〉, 〈만장(萬章)〉, 〈고자(告子)〉, 〈진심(盡心)〉의 7편으로 이루어졌는데, 한(漢)나라 때에 조기(趙岐)가 《맹자장구(孟子章句)》를 저술하면서 한 편을 상하(上下)로 나누어 14편이 되었다.
[주D-023]예법을 …… 침잠함이 : 주희가 자신의 화상(畫像)에 대한 자찬(自贊)을 지었는데, “예법의 마당에서 조용히 실천하고, 인의의 부고에서 침잠한다.〔從容乎禮法之場 沈潛乎仁義之府〕”라는 말이 나온다. 《朱子大全 卷85 書畫像自警》

 
성호전집 제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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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贊)
선조 소릉공의 화상에 대한 찬 병서〔先祖少陵公畫像贊 幷序

나의 증왕고(曾王考) 이상공(貳相公)은 임진년(1592, 선조25)의 공로로 광해조에 위성 공신(衛聖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나, 실제로는 위사 공신(衛社功臣)이다. 당시에 주상(主上)은 서쪽으로 영변(寧邊)까지 몽진(蒙塵)하였으며, 광해군이 세자로서 종묘와 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를 이끌었는데, 공은 필선(弼善)의 직책을 띠고 수종(隨從)하였다. 마침내 천지신명의 말없는 도움에 힘입어 나라가 다시 안정되자,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했던 사람들은 호성 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고, 적을 물리친 사람들은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으나, 종묘와 사직을 호위한 공로에는 녹훈이 미치지 않았으니, 이것은 성조(聖朝)의 흠전(欠典)이었다. 옛날 위(衛)나라 헌공(獻公)이 위나라로 돌아올 때에 호종한 자들에게 읍(邑)을 상으로 나누어 주려고 하자, 유장(柳莊)이 말하기를 “만약 모두가 사직을 지키고 있었다면 누가 임금의 말고삐를 잡고 호종했겠으며, 만약 모두가 호종했다면 누가 사직을 지켰겠습니까.” 하니, 이로 인해 결국 나누어 주지 않았다. 이것은 임금을 호종한 일과 사직을 호위한 일의 공로가 같다면 읍을 나누어 주든 그렇지 않든 동일하게 포상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임진년(1592, 선조25)의 일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당시의 견해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임금께 건의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광해군이 즉위하여 비로소 소급하여 녹훈하였는데, 자신의 일이라고 하여 ‘위성(衛聖)’이라고 훈명(勳名)을 붙였으니, 또한 잘못이다. 종묘와 사직이 중요하고 임금은 가볍다. 더구나 그 일이 있던 당시에는 아직 지존(至尊)의 지위에 오르지도 않았음에랴. 계해년(1623, 인조1)에 사직이 안정되자 비로소 그 공훈을 혁파하였는데, 이상 원익(李相元翼)이 건의하기를 “위성훈이라는 것이 비록 광해조(光海朝)에 녹훈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가지게 되었지만, 실상은 종묘와 사직을 호위한 일로 광해와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혁파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다시 회복을 명하였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그 명칭을 곤란하게 여기자 호성훈(扈聖勳)의 뒤에 붙이도록 명하였으나, 논의하는 자들은 뒤에다 붙여서는 안 된다고 하고 혹자는 별도로 훈명을 세워야 한다고 하니, 모두 막혀서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례(舊例)에 따르면, 모든 녹훈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서고(誓誥)를 하사하고 도상(圖像)을 그리게 하니, 단서철권(丹書鐵券)을 하사하고 기린각(麒麟閣)에 도상을 걸어 두었던 고사(故事)를 따른 것이다. 그 고문(誥文)에 이르기를 “교악과 태산처럼 우뚝하여 흔들 수 없는 지조가 있고, 천구와 홍벽처럼 순수하여 손댈 수 없는 보배로움이 있도다.〔喬岳泰山 屹乎難動之節 天球弘璧 粹然不琢之珍〕”라고 하였으니, 공인(公認)된 칭송이다.
영정(影幀)이 맹부(盟府)에 보관되어 있다가 공훈이 혁파되자 사가(私家)로 옮겨 봉안되었는데, 때때로 밖으로 모셔 내어 포쇄(曝曬)한 뒤에 중당(中堂)에 걸어 두고 자손들이 줄지어 시립하고 우러러 배알하니, 의연하게 친히 가르침을 받는 듯하였다. 또한 사문(斯文) 윤덕희(尹德熙)에게 부탁하여 한 본을 전사(傳寫)하도록 하였는데, 예전의 영정에 비하여 조금 작다. 장첩(粧帖)하고 보관하여 후세에 전한다. 찬은 다음과 같다.

군자라는 것은 그릇이니 / 君子者器也
자신에게 쌓아 두면 덕기가 되고 / 蘊之在己爲德器
세상을 다스리는 데 베풀면 재기가 되며 / 措諸世治爲才器
부귀를 누리고 자손이 번성하면 복기가 되네 / 富貴崇高子孫耳耳爲福器
세 가지를 두루 갖추셨으니 / 三者備具
하늘이 도우심이 마땅하도다 / 允天攸佑
쌓지 않는다면 두터울 수 없거니와 / 匪積不厚
안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오래 지속되리 / 匪安奚久
멀리서 발돋움하여 바라봄에 / 遠跂而望
엄숙한 음성과 모습은 조정에서 흔들림이 없었을 것이고 / 儼然聲色不動於廟朝之上
가까이 우러러 배알하니 / 近瞻而拜
온화한 화기가 집안에 흘러넘쳤으리라 / 藹然和氣泛溢於門闌之內
자손들이 소목 따라 시립하노니 / 昭穆列侍
해이한 마음을 감히 품지 않거니와 / 不敢萌懈怠之心
간곡한 가르침이 들리지 아니한가 / 獨不聞提耳警誨之音

[주C-001]소릉공(少陵公) : 성호의 증조인 이상의(李尙毅, 1560~1624)를 가리킨다.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이다. 임진왜란 때 광해군(光海君)을 호종한 공으로 1612년(광해군4) 위성 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어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위성 공신이 혁파되어 훈봉이 삭탈되었다. 이조 판서, 좌찬성 등의 관직을 지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주D-001]이상공(貳相公) : 이상은 의정부 찬성의 별칭인데, 이상의가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주D-002]위(衛)나라 …… 않았다 :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나온다.
[주D-003]계해년에 사직이 안정되자 : 1623년(인조1)에 이귀(李貴), 이서(李曙), 김류(金瑬) 등의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을 가리킨다.
[주D-004]단서철권(丹書鐵券)을 …… 고사(故事) : 단서철권은 쇳조각에 붉은 글씨로 서사(誓辭)를 써서 공신(功臣)에게 주어 그 자손이 죄를 지어도 죄를 면하도록 하던 일종의 증서이다. 기린각(麒麟閣)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세운 누각의 이름인데, 선제(宣帝) 때에 이르러서 곽광(霍光), 장안세(張安世), 소무(蘇武) 등 공신 11인의 초상(肖像)을 여기에 걸어 두었다.
[주D-005]천구(天球)와 홍벽(弘璧) : 《서경》 〈고명(顧命)〉에 “옥을 오중으로 하며 보물을 진열하니, 적도와 대훈과 홍벽과 완염은 서서에 있고 대옥과 이옥과 천구와 하도는 동서에 있다.〔越玉五重 陳寶 赤刀大訓弘璧琬琰在西序 大玉夷玉天球河圖在東序〕”라고 하였으니, 천구와 홍벽은 모두 옥으로 만든 진귀한 구슬이다.
[주D-006]맹부(盟府) : 옛날 공신에게 내린 맹약 문서 즉 서사(誓辭)를 보관하던 관부(官府)인데, 여기서는 충훈부(忠勳府)를 가리킨다.
[주D-007]윤덕희(尹德熙) : 1685~1776.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로,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이다. 윤선도(尹善道)의 현손이자 윤두서(尹斗緖)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산수, 인물, 말 그림에 능하였다. 관직은 정릉 영(貞陵令)을 지냈다.

 
성호전집 제4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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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贊)
군자화에 대한 찬 병서〔君子花贊 幷序

매화라는 나무가 뜰의 섬돌 아래에 있는데, 구불구불한 줄기와 아름다운 가지가 고상하게 높이 자라나서 생기가 발랄하고 자태가 빼어났으니, 처음에는 마치 미소년(美少年)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제대로 길러 화려한 문채가 밖으로 배어 나오는데 관(冠)과 패옥(佩玉)을 가다듬고 용모와 절도를 닦아 두 섬돌 사이를 단정히 오가며 빈주(賓主)의 예(禮)를 돕는 듯하였다.
그런데 잘 보호하지 못하여 길가에 버려두자 말이 짓밟고 소가 들이받아 꺾이고 말았다. 이전의 헌걸차고 길었던 가지와 연약하고 무르던 가지와 성기고 얽혔던 가지가 하룻저녁에 잎이 다 떨어진 나뭇등걸이 되고 말았으니, 이것은 또한 마치 산림(山林)에 은거하던 선비가 위태한 세상, 어지러운 나라에 처한 가운데 상서롭지 못한 때를 만나 횡역(橫逆)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참소와 재앙에 걸려 무고(無辜)하게 형벌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분수를 지키며 원망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피폐한 가지에 남은 싹이 때를 만나자 꽃을 어여쁘고 하얗게 피워 냈으니, 꺾였다 하여 기개가 위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마치 개결(介潔)하게 자신을 검칙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하여도 오히려 형통해지고 위난(危難)을 겪으면서도 더욱 굳건해져서 몸은 비록 병들어도 마음은 빼앗기지 않으며, 지켜야 할 바를 지키고 행해야 할 바를 행하고 극진해야 할 바를 극진히 함으로써 굳건하여 굽힐 수 없는 점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뭇 화초들에 파묻혀서 은은한 향이 드러나지 않아 비록 향기와 고결함이 있음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차분하면서도 우아하고 정신과 자태가 한아(閒雅)하여 뭇 꽃들과 아름다움을 다투지 않으니, 사람에게 견줄 수 있거니와, 세상을 피해 은둔하되 걱정함이 없고 옳게 여겨지지 않아도 걱정함이 없으며 욕심 없이 전원(田園)에 살면서 장차 그렇게 일생을 마칠 듯한 군자(君子)가 아니라면 매화의 이름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침내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찬을 지었다.

꽃 가운데 매화가 있으니 / 花中有梅
군자의 벗이로다 / 君子之友
향기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요 / 香不爲人
정결하기에 저절로 있는 것이니 / 貞乃自有
알아주는 자가 있지 않다면 / 不有知者
어떻게 능히 취할 수 있으랴 / 其何能取
내가 나의 꽃을 사랑하노니 / 我愛我花
기뻐함에 허물이 없으리라 / 悅繹無咎

[주D-001]정신과 자태가 한아(閒雅)하여 : 대본에는 ‘意態間雅’라고 되어 있는데, ‘間’은 ‘閒’의 오자(誤字)이므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古3428-90)에 의거하여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성호전집 제6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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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파은 박 선생 행장〔坡隱朴先生行狀〕

선생의 휘는 호(浩), 자는 호연(浩然)이며, 도성 남쪽의 성파(城坡)에 살았기 때문에 호를 파은(坡隱)이라고 하였다. 그의 선조는 무안인(務安人)이다. 고려(高麗) 국학 전주(國學典酒) 진승(進昇)이 바로 비조(鼻祖)이다. 8대를 지나 형조 판서 의룡(義龍)에 이르러서 본조(本朝)에 벼슬하여 벼슬아치가 계속 이어졌다. 또 8대를 지나 군수 응선(應善)에 이르렀는데 호는 초정(草亭)이며 정사(靖社) 초기에 학행(學行)으로 선발되고 뒤에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형조 좌랑 증 이조 참의 규(䅅)를 낳고, 규가 동지중추부사 증 이조 참판 창하(昌夏)를 낳았다. 창하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현감 이억(李繶)의 딸에게 장가들어 우리 효묘(孝廟) 4년 계사년(1653)에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풍채는 점잖고 모습은 공순하고 말은 공손하여, 한번 보면 곧 그가 단정한 군자임을 알았다. 어릴 때 외갓집에서 자랐다. 외조부 현감공(縣監公)이 만년에 중병(重病)이 있었는데, 선생이 지성으로 간호하여 음식과 약을 직접 마련하였는데 10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대개 증조부 초정공(草亭公)부터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두어 변함없이 법도를 전해 주었다. 선생은 그 설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속학(俗學) 외에 의리(義理)의 첩경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남은 힘을 다하여 외우고 익혀서 더욱 그 의취(意趣)를 알게 되었다. 비록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 공부에 힘썼지만 급제와 낙방을 가지고 안달하지는 않았다.
무오년(1678, 숙종4)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얼마 뒤에 세상 잡무를 끊고서 오도(吾道 유학)에 치력하였다. 이때 종형(從兄)인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涏)이 사문(斯文)의 중망(重望)이 있었는데, 편지를 자주 주고받으며 서로 강정(講訂)하여 형제간에 인(仁)을 돕는 유익함은 있고 세상 일로 자기의 뜻을 빼앗기는 근심은 없었으니, 이미 팔분(八分) 정도의 기본은 된 것이다. 임오년(1702)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12년 뒤인 계사년(1713)에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선생은 이미 은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았다. 6년 뒤인 무술년(1718)에 작고하니 향년 66세였다. 묘는 과천현(果川縣) 이수곡(梨樹谷) 간좌(艮坐)의 산에 있다.
배위(配位)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통덕랑 이이징(李頤徵)의 딸이자, 감사 이진(李袗)의 손녀이다. 선생보다 1년 뒤에 태어났고 향년 91세로 작고하여 과천(果川) 선영에 합장하였다. 1남 6녀를 키웠다. 아들 순문(純文)은 오늘 와서 글을 지어 달라고 청한 자이다. 생원 이의(李儀)ㆍ채철윤(蔡哲胤), 진사 정침(鄭琛)ㆍ이조환(李朝煥), 생원 이제익(李齊益), 진사 목회경(睦會敬)은 사위들이다.
순문은 외아들 사엄(思儼)이 일찍 죽었고, 사위는 정재(鄭洅)이다. 이의는 사위가 다섯인데 오경기(吳敬起), 윤명우(尹命遇), 홍응보(洪應輔), 김설(金揲), 윤의중(尹毅中)이다. 홍응보의 문과 출신 양자(養子) 홍기혁(洪基爀)은 일찍 죽었다. 채철윤은 2남 1녀인데, 아들은 채응휴(蔡膺休), 채응임(蔡膺任)이고, 사위는 이모(李某)이다. 정침은 2남 2녀인데, 아들은 정홍주(鄭弘周), 정홍재(鄭弘載)이고, 사위는 유모(柳某)와 허발(許浡)이다. 이조환은 아들이 하나인데 이재화(李載華)이다. 이제익은 1남 1녀인데, 아들은 이모(李某)이고 사위는 이모(李某)이다. 목회경은 2남 1녀인데, 아들은 목조렴(睦祖濂), 목조수(睦祖洙)이고, 사위는 홍처보(洪處輔)이고, 목조수는 진사이다.
선생은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나 내면(內面)을 기름에 법도가 있었다. 평소에 거처할 때는 새벽에 일어나 의대(衣帶)를 단정히 하고, 책을 대하는 데 엄숙하고 공경하여 하루 종일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는 자질이 노둔하지만 책을 읽을 때 모름지기 의심난 것을 만나면 반드시 남에게 묻고, 반복하여 깊이 생각하여 완전히 이해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몽매함에 이르지 않았다.” 하였다.
근세에는 예학(禮學)이 밝지 않아 사람들이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많았는데, 선생은 고경(古經)을 탐구하고 인정(人情)에 헤아려 본 것이 주고받은 편지에 많이 나타나 있다. 평소 사도(師道)를 자처하지 않았지만 와서 묻는 자에게는 또한 묻는 내용의 양단을 다 말해 주었다. 그 말에 이르기를, “하늘이 만물을 낸 이치가 모두 내 한 몸에 갖추어져 있고, 몸은 백체(百體)를 가지고서 모두 한 마음에 통솔된다. 마음은 지극히 미세하지만 천지의 화육(化育)에 참여하고, 지극히 비어 있지만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다. 밖으로 표현되면 동정(動靜)과 위의(威儀)의 법칙이 되고, 일에 행하면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윤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구하면 사람의 이치는 나와 다를 것이 없고, 물건에서 참고하면 물건의 이치가 사람과 다를 것이 없다. 이것이 만수일본(萬殊一本)의 설이다.” 하였다. 이기(理氣)의 나누어짐에 대해서는 퇴계(退溪)가 돌아가신 뒤로 의론이 여러 갈래였다. 선생은 종형 사인공(舍人公)과 함께 끝까지 옳고 그름을 따져서 주지(主旨)를 밝혔고, 또한 격물(格物)의 해석에 대해 함께 논변하면서 각각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병이 심해져서야 비로소 착오가 있음을 깨닫고 애써 일어나서 구술하여 편지를 쓰게 하였으니, 예전의 견해를 기꺼이 고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무릇 시렁에 있는 이수(理藪)에 관한 책들은 표지(標識)를 하고 의미를 밝히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그 설이 또한 많았으나 미처 책으로 만들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다. 사람을 접할 때에는 성의와 믿음으로 하였고 모난 행동은 완전히 끊어 버렸으며, 기미(氣味)가 조용하여 너나없이 이 때문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공이 가정에서 효도와 우애를 행한 것은 어찌 말을 해야만 드러나겠는가. 이 때문에 생략하니, 이것은 가벼운 것을 들어서 무거운 것을 나타내려는 뜻이다.
나 또한 공을 한두 번 만나 보고, 앉아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장려와 가르침을 자못 많이 받았는데 지금 30년이 되었다. 사우(師友)들은 더욱 멀어졌고 머리는 백발이 되었으나 이룬 것 없이 육신과 정신은 이미 쇠하였다. 비록 온갖 궁리를 다하여 선생의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려고 하지만 가능하겠는가. 대략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이상과 같이 초(草)하였으니, 나 스스로도 내 마음을 저버린 것을 알겠다. 삼가 기록한다.

[주D-001]정사(靖社) 초기 : 정사는 계해년(1623)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말하므로, 정사 초기는 인조 즉위 초기라는 뜻이다.
[주D-002]만수일본(萬殊一本)의 설 : 현상은 만 가지로 다르지만 그 현상이 있게 된 근본은 하나라는 뜻이다. 예컨대, 《서경》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덕은 떳떳한 법이 없어 선을 주장함이 법이 되며, 선은 떳떳한 주장이 없어 능히 한결같음에 합합니다.〔德無常師 主善爲師 善無常主 協于克一〕”라고 하였는데, 그 집전(集傳)에, “덕은 여러 선을 겸하였으니, 선을 주장하지 않으면 일본만수(一本萬殊)의 이치를 얻을 수 없고, 선은 일에 근원하였으니, 일에 합하지 않으면 만수일본의 묘리를 통달할 수 없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