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2010년 병인년 사자성어

2013.2.22. 삼각산 의상 능선 산행

아베베1 2013. 2. 23. 20:34

 

 

 

 

 

 

 

 

 

 

 

 

 

 

 

 

 

 

 

 

 

 

 

 

 

 

 

 

 

 

 

 

 

 

 

 

 

 

 

 

 

 

다산시문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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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행궁을 바라보며[望行宮] 북한산성은 백제 때부터 있던 것인데 숙종조(肅宗朝) 말기에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증축하였다. 내성과 외성이 있다


연로는 사자재로 뚫려 있고요 / 輦路通獅嶺
별궁은 기러기재 인접하였네 / 離宮接雁峯
진경은 검각 잔도 의지하였고 / 秦京依劍閣
연부는 거용 요새 믿었고말고
/ 燕府恃居庸
좁은 벼랑 사다리 경사 심하고 / 窄壁雲梯急
굽은 골짝 쇠사슬 겹겹이로세 / 回谿鐵鎖重
그런대로 열흘은 버틸 만한데 / 堪爲旬日計
이곳에 몇 사람을 수용할 건고 / 能得幾人容
묘당에서 짜낸 지혜 치밀하였고 / 廊廟謨猷密
백성들 불평없이 부역 응했네 / 黎元力役恭
올라보니 가슴에 감개무량해 / 登臨有感慨
저녁종 울릴 때까지 홀로 서 있네 / 獨立到昏鍾


[주D-001]연로 : 임금이 탄 수레나 가마가 다니는 길.
[주D-002]진경은 …… 믿었고말고 : 진경은 진 나라 서울 장안(長安)이고 검각은 사천(四川)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 잔도(棧道)의 이름이다. 사천과 섬서(陝西) 사이의 주요 통로로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연부는 북경(北京)을 가리키고 거용은 북경 창평현(昌平縣) 서북쪽 군도산(軍都山)에 있는 관(關) 이름이다. 우리나라 한양이 북한산을 등에 업고 의지하는 것이 장안은 검각을, 북경은 거용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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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행궁을 바라보며[望行宮] 북한산성은 백제 때부터 있던 것인데 숙종조(肅宗朝) 말기에 상신(相臣) 이유(李濡)가 건의하여 증축하였다. 내성과 외성이 있다


연로는 사자재로 뚫려 있고요 / 輦路通獅嶺
별궁은 기러기재 인접하였네 / 離宮接雁峯
진경은 검각 잔도 의지하였고 / 秦京依劍閣
연부는 거용 요새 믿었고말고
/ 燕府恃居庸
좁은 벼랑 사다리 경사 심하고 / 窄壁雲梯急
굽은 골짝 쇠사슬 겹겹이로세 / 回谿鐵鎖重
그런대로 열흘은 버틸 만한데 / 堪爲旬日計
이곳에 몇 사람을 수용할 건고 / 能得幾人容
묘당에서 짜낸 지혜 치밀하였고 / 廊廟謨猷密
백성들 불평없이 부역 응했네 / 黎元力役恭
올라보니 가슴에 감개무량해 / 登臨有感慨
저녁종 울릴 때까지 홀로 서 있네 / 獨立到昏鍾


 

[주D-001]연로 : 임금이 탄 수레나 가마가 다니는 길.
[주D-002]진경은 …… 믿었고말고 : 진경은 진 나라 서울 장안(長安)이고 검각은 사천(四川) 검각현(劍閣縣) 동북쪽 대검산(大劍山)과 소검산(小劍山) 사이에 있는 잔도(棧道)의 이름이다. 사천과 섬서(陝西) 사이의 주요 통로로서 군사적인 요충지이다. 연부는 북경(北京)을 가리키고 거용은 북경 창평현(昌平縣) 서북쪽 군도산(軍都山)에 있는 관(關) 이름이다. 우리나라 한양이 북한산을 등에 업고 의지하는 것이 장안은 검각을, 북경은 거용을 믿고 의지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동사강목 제1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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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 신라 지마왕 21년, 고구려 태조왕 80년, 백제 개루왕 5년(한 순제 양가(陽嘉) 원년, 132)


춘2월 백제가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쌓았다.

추7월 고구려 좌보 목도루(穆度婁)가 사면하였다.
왕의 아우 수성이 왜산(倭山)지금 미상 에 사냥하며 좌우와 연회하였는데 관나우태(貫那于合) 미유(彌儒)와 환나(桓那)의 어지류(菸支留)와 비류나 조의(沸流那皂衣) 양신(陽神) 등이 수성의 심복이 되어, 가만히 수성에게 이르기를,
“처음 모본왕(慕本王)이 죽었을 때 여러 신료들이 왕자 재사(再思)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고 왕에게 사양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미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왕이 이미 늙었으면서도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계획하소서.”
하니, 수성이 말하기를,
“승습(承襲)을 적장(嫡長)으로 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常道)이다. 왕이 비록 늙었으나, 적자가 있으니, 어찌 감히 넘보겠는가?”
하였다. 미유가 말하기를,
“아우가 어질어서 형의 뒤를 이은 일은 옛날에도 있었습니다. 그대는 의심하지 마시오.”
하니, 좌보 목도루가 수성에게 다른 뜻이 있는 것을 알고, 병을 칭탁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안】 목도루는 난을 겪기 전에 놀라 물러났으니, 가히 명철한 선비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속된 세상을 도망쳐 멀리 떠나지 못하고 찬탈하는 것을 앉아서 구경하다가 마침내 역점놈의 신하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동사강목 제2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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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유년 신라 자비왕 12년, 고구려 장수왕 57년, 백제 개로왕 15년(북위 헌문제 황흥 3, 469)


춘정월 계림이 경도 방리(坊里)의 명칭을 정하였다.

하4월 계림의 서쪽에 큰 수해가 있었다.

추7월 마립간(麻立干)이 수해가 있었던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였다.

8월 백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동10월 백제가 청목령(靑木嶺)에 성책을 설치하였다.
백제가 쌍성(雙城) 지금은 미상 을 수축하여 청목령에 큰 성책을 설치하고 북한산성의 군사를 나누어 수자리하였다.


 

 

 

동사강목 제3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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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해년 신라 진평왕 25년, 고구려 영양왕 14년, 백제 무왕 4년(수 문제 인수 3, 603)


고구려가 신라의 북한산성을 침략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북한산성이 신라의 소유가 되면서부터 고구려인들이 기어코 이를 취하려고 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당시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어 취하려 하니, 신라 왕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지나매, 북한산 성중에서 북을 치고 떠들면서 서로 호응하니, 고승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물러갔다.
【안】 열국(列國)이 분할하여 다스릴 적에는 경계가 있게 마련인데, 그 지형이 험준한 땅[形勝]을 내가 지키게 되면 요지가 될 것이요, 적이 웅거하면 해가 될 것이니, 그러므로 나라를 가진 자는 반드시 이런 것을 다투어 차지하여 나라를 굳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남쪽으로는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는 임진강(臨津江)에 미치고, 동으로는 태산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를 굽어보아 사방의 거리가 쪽 고르니, 이것은 해동 제일의 요새(要塞)이다.
그러므로 삼국 시대에는 반드시 서로 다투는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차지하면 신라와 백제가 싸움에 어렵고, 신라가 차지하면 고구려와 백제를 패배시키니, 진실로 지리(地理)가 좋은 곳이다.


 

 

동사강목 제4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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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년 신라 태종 8년, 문무왕 원년, 고구려 왕 장(藏) 20년, 백제 왕 풍(豊) 원년(당고종 용삭(龍朔) 원년, 661)


춘정월 백제의 종실(宗室)인 복신(福信)이, 옛 왕자인 풍(豊)을 주류성(周留城)에서 왕으로 세우고 나아가 웅진(熊津)을 포위하였다.
풍은 일찍이 왜(倭)에 인질(人質)로 가 있었는데 무왕(武王)의 종자(從子) 복신이,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 지금은 미상 을 점거하고 풍을 맞아 세우니,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호응하여 군사를 이끌고 유인원(劉仁願)을 포위하였고, 또 부성(府城) 근처 네 곳에 성을 만들어 포위하여 지키면서, 유인원의 군사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다.

2월 신라가 군사를 보내 웅진을 구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백제 사람들이 사자성을 공격하므로 신라 왕이 이찬(伊飡) 품일(品日)을 명하여 대당 장군(大幢將軍)을 삼고 문왕(文王) 양도(良圖)로 부장을 삼았으며, 문충(文忠)으로 상주 장군(上州將軍)을 삼고 진왕(眞王)으로 부장을 삼았으며, 의복(義服)으로 하주 장군(下州將軍)을 삼고, 무염 욱천(武欻旭川)으로 남천 대감(南川大監)을 삼고, 문품(文品)으로 서당 장군(誓幢將軍)을 삼고, 의광(義光)으로 낭당 장군(郞幢將軍)을 삼아서, 사자성을 구하게 하였다. 품일이 먼저 두량윤성(豆良尹城)지금은 정산(定山) 의 남쪽에 이르러 진영 설치할 땅을 살펴볼 때 백제 사람들이 신라군의 진영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을 보고 급히 나와 공격하니, 신라의 군사들은 놀라 무너졌다. 대군(大軍)이 계속 와서 고사비성(古沙比城 지금은 미상 바깥에 주둔하고 두량윤성을 1개월 6일 동안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돌려 빈골양(賓骨壤)지금은 미상 으로 돌아오다가 갑자기 백제 군사를 만나 싸우다가 패하였다. 그리하여 무기와 치중(輜重)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오직 문충ㆍ의광만이 백제의 군사를 각산(角山)지금은 미상 에서 격파하고 그들의 둔보(屯堡)로 들어가서 2천여 급(級)을 베었다. 왕은 군사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김순(金純)ㆍ천존(千存)ㆍ죽지(竹旨) 등를 보내어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 지금은 미상 에 이르러 군사가 후퇴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패전했기 때문에 벌을 논하였는데 차등이 있게 하였다.
○ 백제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군사를 일으켜 복신에 호응하였다.
상지(常之)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 키가 7척이며 용맹하고 지략(智略)이 있어 벼슬이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풍달(風達)지금은 미상 군장(郡將)을 겸하였다. 정방이 백제를 멸할 때에 상지가 전부(前部)로써 항복하였으나 정방이 왕 의자(義慈)를 가두고 군사를 놓아 크게 노략질하므로 상지는 두려워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를 모으니, 한달 만에 귀부(歸附)한 자가 3만여 인이었다. 정방이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고 별부(別部) 사타상여(沙咤相如)와 함께 각각 요험지(要險地)에 웅거하니, 여러 성이 많이 귀부하였다. 이때에 군사를 이끌고 복신에 호응한 것이다.

3월 당의 유인궤(劉仁軌) 및 신라의 군사들이 웅진을 구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깨뜨리니, 복신은 물러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였다.
그때 낭장 유인궤는 죄에 연좌되어 백의종군(白衣從軍 민간의 자격으로 종군하는 것)하였는데, 조칙(詔勅)으로 검교 대방주 자사(檢校帶方州刺史) 대방주는 《지리고(地理考)》에 보인다 를 삼아 왕문도(王文度)의 무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가서 신라의 군사를 내어 유인원(劉仁願)을 구하게 하니, 인궤는 기뻐 말하기를,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에게 부귀를 누리게 한다.”
하고, 당력(唐曆)과 묘휘(廟諱)를 청해 가지고 가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이(東夷)를 깨끗이 평정하고 정삭(正朔)을 해표(海表 바다 바깥이라는 뜻)에 반포하리라.”
하였다. 인궤는 군사를 엄정히 제어(制御)하여 신라의 군사와 함께 옮겨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였다. 복신 등은 웅진 입구에 2개의 목책을 세우고 막았으나 인궤와 신라의 군사가 합세하여 공격하니 백제의 군사는 도망하여 목책으로 들어가려고 다리를 건너기 위하여 서로 다투다가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1만여 인이나 되었다. 복신 등은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가 임존성에 웅거하였다. 신라의 군사는 양식이 떨어져서 돌아갔고, 또 부성(府城)이 곤핍(困乏)하였기 때문에 다시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여 주니, 웅진은 이로 인하여 모두 살아났다.
○ 백제 장수 복신이 신라의 구원병을 요격(邀擊 도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급습하는 것)하여 패배시켰다.
그때 도침(道琛)은 스스로 영군 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상잠 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면서, 유민(遺民)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사자를 인궤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들으니 당과 신라가 백제 사람을 모두 섬멸하고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니 그렇게 죽는 것보다는 어찌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더니, 인궤도 사자를 보내어 글을 지어 화복(禍福)을 갖추어 말하였다. 그러나 도침 등은 그 사자를 외관(外館)에 가두어 두고 교만한 말로 이르기를,
“너는 벼슬이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니 함께 논의할 수 없다.”
하고, 답서(答書)도 없이 돌려보냈다.
당이 군사 1천 명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인궤는 무리가 적었기 때문에 인원(仁願)의 군사와 합하고 사졸을 쉬게 하고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신라 군사와 합하여 공격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신라 왕은 그의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원케 하였다. 그리하여 고사(古泗)에 이르러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나 복신이 군사적은 것을 알고 요격하여 패배시켰다. 김흠이 갈령(葛嶺)지금은 미상 에서 도망하여 오니, 신라의 군사들은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모두 복신에게 항복하였다. 복신은 승세(勝勢)를 타고 다시 부성(府城)을 포위하니 웅진의 길이 끊기고 식량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신라에서는 건장한 사람들을 모집하여 몰래 식량을 보내어 그들의 곤핍(困乏)을 구제하였다. 이때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하였으나 풍(豊)은 제어(制御)하지 못하고 주제(主祭)만 할 뿐이었다. 복신은 인원이 외로운 성에 구원병이 없음을 알고는 사자를 보내어 타일러 말하기를,
“대사(大使)는 어느 때에 서쪽으로 돌아가겠소? 돌아갈 때는 사람을 보내 송별(送別)하겠소.”
하였는데, 말이 매우 거만하였다.

하4월 당이 임아상(任雅相) 등을 보내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쳤다.
당이 다시 아상(雅相)으로 패강도(浿江道)와 행군총관(行軍摠管)을 삼고 계필 하력(契苾何力)으로 요동도(遼東道)의 행군총관을 삼고, 소정방으로 평양도(平壤道)의 행군총관을 삼아 소사업(蘇嗣業) 및 여러 호병(胡兵)과 함께 모두 35군(軍)을 수륙(水陸)으로 길을 나누어 진격하게 하고, 제(帝)는 스스로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그들 뒤를 이으려 하니 울주 자사(蔚州刺史) 이군구(李君球)가 말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온 힘을 기울여 이를 도모하기에 이릅니까? 만일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지켜야 하는데 적게 동원하면 위엄이 떨쳐지지 못하고 많이 동원하면 국내의 인심이 편치 못할 것이니 이는 천하가 수비하는 것 때문에 피폐될 것입니다. 신은, 정벌(征伐)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滅)하는 것이 멸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무후(武后)가 또한 간하므로, 조칙하여 군사를 돌아오게 하였다.

5월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생각하기를, 신라의 정예병(精銳兵)은 모두 백제에 가 있고 내지(內地)는 비어 있으니 칠 수 있으리라 하고, 뇌음신(惱音信)을 보내어 말갈의 장수 생해(生偕)와 함께 수륙(水陸)으로 나아가 합군(合軍)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여주(驪州) 오포(梧浦)이다)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군사를 옮겨 북한산성을 공격하는데, 고구려 군사는 서쪽에 진영을 설치하고 말갈은 동쪽에 둔진(屯陣)하여 포거(砲車)를 벌여 놓고 돌을 쏘아대니 성과 집들이 마구 무너졌다. 성주(城主)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陀川)은 성 바깥에 질려(蒺藜 적을 막는데 쓰는 마름쇠)를 던져서 성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고, 또 안양사(安養寺)의 창고를 뜯어다가 성의 파괴된 곳에 망루(望樓)를 만들어 굵은 밧줄로 얽고 마소의 가죽과 비단옷을 매달고 안에 노포(弩砲 쇠뇌)를 설치하여 놓고 지켰다. 그때 성내의 남녀는 2천 8백 인밖에 없었는데 이들을 격려하여 사수(死守)한 지 20여 일이 경과되자 식량은 떨어지고 힘도 지쳐 있었다. 그러나 지성(至誠)으로 하늘에 빌었더니 갑자기 큰 별이 고구려의 진영에 떨어졌고, 또 우레의 변괴가 있었다. 마침내 뇌음신은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돌아갔고 왕은 동타천을 발탁하여 대내마를 삼았다.
그때 신라는 바깥으로는 당의 군사와 호응하고 안으로는 백제의 땅을 경략(經略)하면서, 또 남은 힘으로 고구려와 말갈을 막은 것은 모두 김유신의 힘이었다. 유신이 어느날 남문 밖에 서 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오니 유신이 고구려의 첩자(諜者)임을 알고 묻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하니, 첩자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자 유신이 또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 왕은 위로는 하늘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들은 생업(生業)을 즐기고 있다. 너는 돌아가 너의 나라에 알려라.”
하고, 드디어 놓아 돌려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라가 작은 나라이기는 하나 김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가벼이 여길 수 없다.”
하였다.
○ 신라는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 지금의 합천(陜川)에 옮겼다.
아찬 종정(宗貞)으로 도독을 삼았다.

6월 신라의 대관사(大官寺) 샘물이 피로 변하였다.
또 금마군(金馬郡)에는 땅에 피가 흘러 5보(步)의 넓이에 번졌다.
○ 신라 왕 춘추(春秋)가 훙(薨)하고 태자 법민(法敏)이 즉위하였다.
신라의 제도에, 왕에게 하루 반미(飯米) 서 말과 수꿩 아홉 마리를 바쳤는데, 왕이 백제를 멸하고는 주선(晝膳 점심)을 없앴다. 이때에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들어 베 한 필이 벼 30석, 혹은 50석과 맞먹어서 백성들이 성대(聖代)라 일컬었다. 왕은 군사를 조련(操鍊)하고 무사(武士)를 기르며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기고 재능이 있는 자를 부려서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할 운(運)을 열어 놓았다. 훙(薨)할 적에 나이는 59세였고 묘호(廟號)는 태종(太宗), 시호(諡號)는 무열(武烈)이었으며 영경사(永敬寺) 북쪽 지금의 경주부 서악리(西岳里)에 있다 에 장사지냈다.
태자 법민이 즉위하니, 이가 문 무왕(文武王)이다. 왕비 김씨는 파진찬 선품(善品)의 딸이니, 이가 자의 왕후(慈儀王后)이다.

추8월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크게 격파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하였다. 마읍은 《일통지(一統志)》에 평양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미상
○ 신라 왕이 당의 군사와 합세하여 고구려를 쳤다.
김인문(金仁間)ㆍ김유돈(金儒敦) 등이 당에서 돌아와 조서(詔書)를 전하였는데 이르기를,
“짐(朕)이 이미 백제를 멸하여 그대 나라의 환란을 없앴다. 그런데 지금 고구려가 험고함을 믿고 예맥(濊貊)과 같이 악행을 하니, 짐이 그대와 함께 망해가는 오랑캐를 섬멸하려 한다.”
하였다. 왕이 우복(憂服 부모의 상(喪)) 중에 있었으나 제의 칙령 어기기를 어렵게 여겨 김유신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 진주(眞珠)ㆍ흠돌(欽突)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천존(天存)ㆍ죽지(竹旨)ㆍ천품(天品)을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품일(品日)ㆍ충상(忠常)ㆍ의복(義服)을 상주 총관(上州摠管)으로, 진흠(眞欽)ㆍ중신(衆臣)ㆍ자간(自簡)을 하주 총관(下州摠管)으로, 군관(軍官)ㆍ수세(藪世)ㆍ고순(高純)을 남천주 총관(南川州摠管)으로, 술실(述實)ㆍ달관(達官)ㆍ문영(文穎)을 수약주 총관(首若州摠管)으로, 문훈(文訓)ㆍ진순(眞純)을 하서주 총관(河西州摠管)으로, 진복(眞福)을 서당 총관(誓幢摠管)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총관(郞幢摠管)으로, 위지(慰知)를 계금대감(罽矜大監)으로 삼고, 상이 스스로 23총관을 거느리고 행군(行軍)하였다.

9월 신라 왕이 웅현(熊峴)에 주둔하여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그 성을 지키던 장수는 전사하였다.
그때에 당의 함자도총관(含資道摠管) 유덕민(劉德敏)이 칙령을 받들고 신라 왕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軍糧)을 운반하게 하였다. 그때 또 웅진도 독부에서 사자를 보내 급박함을 알리니, 왕이 덕민(德敏)에게 이르기를,
“평양에 먼저 군량을 공급한다면 웅진의 길이 끊어져서 그곳을 지키는 한병(漢兵)이 적의 손에 떨어질까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이들을 먼저 구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덕민과 함께 행군하여 이곡정(飴谷停)지금은 미상 에 이르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백제의 잔적(殘賊)이 옹산성(甕山城) 지금은 미상 에 웅거하고 있다.”
하니,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 효유(曉諭)하였으나 성장(城將)이 따르지 않았다. 왕이 웅현정(熊峴停) 지금은 미상 에 도착하여 여러 군사들에게 서약하고 진군(進軍)하여 이들을 포위하였다. 김유신이 사람을 시켜 성장에게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죄를 받게 되었다. 그러니 명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고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일 것이니 무엇 하러 외로운 성을 혼자 지키는가? 빨리 항복하면 부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성은 작으나 군사와 식량이 넉넉하고 사졸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니, 유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곤핍한 짐승이 오히려 싸우려 한다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하고,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공격하여 먼저 큰 성책(城柵)을 불사르고 수천 명을 참살하였다. 왕이 친히 싸움을 독려하니 사졸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서 3일 만에 성을 함락시켰으며 그 장수를 잡아 죽였고, 품일이 또 우술성(雨述城)을 공격하여 1천 급을 베었다. 마침내 백제의 달솔(達率)인 조복(助服)과 은솔(恩率)인 파가(波加) 등이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니, 왕은 두 사람을 급찬(級飡)으로 삼았고, 또 조복에게는 고타야군(古陀耶郡)의 태수(太守)로 제수하고 전택(田宅)과 의물(衣物)도 겸하여 하사하였다. 왕이 여러 군사에게 영(令)을 내려, 웅진에 성을 쌓아 도로를 개통시키게 하였다.
【안】 신자(臣子)가 되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나라가 망함에 회복하기를 도모하는 것은 신자의 직분(職分)이다. 옹산성을 지키던 장수가 임금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된 뒤를 당하여, 외로운 성을 굳게 지켜 당과 신라의 군사에 항거하고, 김유신에게 답하는 말에,
“성은 작으나 사졸은 의롭고 용맹스러우니 차라리 싸워 죽을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니, 그 충과 용은 위대한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서(史書)에 그의 이름이 빠졌다. 성이 함락된 뒤에 유신이 마땅히 예로 초치(招致)할 것이요, 만일 그래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죽기로써 맹세하거든 마땅히 그의 충절을 이루어 주어 죽게 하고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 주며 그 묘에 비석을 세워서 기리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그의 처자에게도 생업(生業)을 주어야 인자(仁者)의 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유신은 성내어 죽였으니 무엇으로 인신(人臣)된 자를 권장하겠는가?
○ 당(唐)의 계필 하력(契苾何力)이 고구려의 군사를 압록강에서 격파하고 돌아갔다.
개소문(蓋蘇文)이 그의 아들 남생(男生)을 시켜 정병(精兵) 수만으로 압록강을 지키게 하니 당군이 건너지 못하였다. 마침 계필 하력이 얼음이 언 때를 만나서 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며 강을 건너 진격하니 고구려 군사가 무너졌다. 하력이 수십 리를 쫓아가 죽이니 죽은 자가 3만 명이었고, 남은 무리들은 항복하였으며, 남생은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나 죽음을 면하였다. 그때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칙이 있어 돌아갔다.

동10월 신라 왕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에 앞서 왕이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정방을 만나보게 하니, 정방이 회답하기를,
“내가 명을 받고 적을 토벌하기 위해 만 리 바다를 건너와서 한 달이 넘도록 배회(俳徊)하였는데도 왕(신라의 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고, 양곡도 대어 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였다. 그래서 왕은 여러 신하와 의논하니, 모두 적진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을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신에게 중책을 주시면 죽어도 어려움을 사양치 않겠습니다. 오늘은 이 노신(老臣)이 충절을 다하는 날이니, 적전 속으로 달려가 소 장군(蘇將軍)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왕은 기뻐서 이르기를,
“국경을 넘은 뒤에는 상벌(賞罰)을 자의로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왕이, 당의 조제사(吊祭使)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유신에게 맡기고 돌아오니, 유신 등은 군사를 쉬게 하고 다음 명을 기다렸다.

12월 신라가 군량을 웅진에 운반하여 주었다.
그때 유덕민(劉德敏)이 평양에 군량 수송할 것을 독촉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웅진의 양곡이 다하였는데 먼저 웅진으로 운반하면 칙지(勅旨)를 어기는 것이 되고, 만약 평양으로 운반하면 또한 웅진의 양곡이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하고, 이에 노약자(老弱者)를 뽑아 웅진으로 양곡을 운반케 하고, 정병(精兵)들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웅진이 백제의 핍박을 받음에 있어, 신라가 군량 수만 곡(斛)을 남으로 웅진에, 북으로 평양에 전후 공급했고, 또 머물러 진수(鎭守)하는 한병(漢兵)의 의복까지도 모두 신라에서 공급해 주었다. 이 때문에 신라의 백성은 공급에 피폐되어 풀뿌리를 캐어 먹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였다.


 

[주D-001]당력(唐曆)과 묘휘(廟諱) : 당의 달력과 임금이 죽으면 올리는 휘(諱)인데, 제후의 나라에 내리는 것임. 여기에서는 항복을 받아 달력과 묘휘를 내리겠다는 뜻.


 

 

군정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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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융청(摠戎廳)
군기(軍器)


조총 5,223자루[柄] 3,532자루는 속오군과 장아병 등에게 나누어 준다. ○ 왜총(倭銃) 7자루, 별총(別銃) 30자루, 장총(長銃) 29자루. 순환포(循環砲) 4좌(坐), 일와포(一窩砲) 1좌, 조총체철(鳥銃體鐵) 50자루, 화약 14,449근 8냥 8돈 4푼, 연환(鉛丸) 442,166개(箇) 대연환 3,346개. 화승(火繩) 415대내(臺乃), 화약통 771개, 화전 487지(枝), 화전죽 1,465지, 전죽(箭竹) 64,418개, 남비개(南飛箇) 165부(部), 활 1,091장(張) 312장은 장아병ㆍ기대장(旗隊長) 등에게 나누어 준다. ○ 흑각궁 552장, 장궁 105장, 향각궁(鄕角弓) 5장. 흑각궁노궁(黑角弓弩弓) 2장, 교자궁노궁(交子弓弩弓) 52장, 장전(長箭) 862부(浮) 28개 312부는 장아병과 기대 장등에게 나누어 준다. 편전 425부 25개, 궁노전 480부 8개, 장전촉(長箭鏃) 2,022개, 편전촉 210개, 통아(筒兒) 263개, 궁노기(弓弩機) 69부, 환도 818자루 482자루는 장아병ㆍ기대장ㆍ각색 표하군 등에게 나누어 준다. 왜장검 2자루, 통개 310부 흑서피(黑鼠皮) 통개 27부. 담통개(擔筒箇) 323부 312부는 장아병과 기대장 등에게 나누어 준다. 요구창(饒口槍) 3자루, 능철(菱鐵) 17,329개 15,600개는 장아병 등에게 나누어 준다. 거마창(拒馬槍) 812부, 협도(挾刀) 22자루, 북 17좌 대북 2좌, 소북 6좌. 징 13좌 대징 1좌, 소징 8좌. 황촉 8,878자루, 석류황(石硫黃) 79근 1냥 5돈 왜석유황 36근. 조두 100총(叢), 동노구(銅爐口) 127좌, 아리금(阿里金) 95거리, 동부(銅釜) 2좌, 유소라(鍮所羅) 12좌, 가이(假耳) 75개 이상은 봉부동(封不動) 무명 군복[木軍服] 3가지를 갖추어 350벌, 지유삼(紙油衫) 247벌, 무명 홍쾌자[木綿紅掛子] 4벌, 무명 황색 호의[木綿黃號衣] 50벌, 전립(戰笠) 250입, 홍전립(紅氈笠) 52입(立), 홍단휘건(紅緞揮巾) 1쌍, 관이전(貫耳箭) 28지, 영전(令箭) 20지, 주장(朱杖) 50개, 숙정패(肅靜牌) 1쌍, 쇠사슬 48거리, 남색 대단 영기[藍大緞令旗] 40면, 순시기 64면, 나팔 5쌍, 호적(號笛) 5쌍, 나각(螺角) 1쌍, 동대각(銅大角) 1쌍, 자바라[啫哱囉] 2쌍, 점자(點子) 2쌍, 소라[鑼] 1쌍, 솔발(摔鈸) 1쌍, 장구[長皷] 1쌍, 삼혈총(三穴銃) 9자루, 대단 대기치 38면(面) 대기(大旗) 5면, 신기(神旗) 5면, 고초기(高招旗) 5면, 문기(門旗) 10면, 각기(角旗) 8면, 청도기(淸道旗) 2면, 금고기(金鼓旗) 2면 표미기(豹尾旗) 1면임. 이광단(二廣緞) 대기치 38면, 좌독기(座纛旗) 1면, 수자기(帥字旗) 1면 달아매는 줄까지 갖춘다. 기우비(旗雨備) 120가지, 모단전건(帽緞戰巾) 10입(立), 천총ㆍ파총ㆍ초관의 방색수기(方色手旗) 33면, 방색호의 33벌[領], 부와 사의 신기(神旗) 32면, 부ㆍ사ㆍ초의 인기(認旗) 34면, 지로고초기(指路高招旗) 6면, 기총기(旗摠旗) 78면, 대장기(隊長旗) 234면, 절(節) 1자루, 월(鉞) 1자루, 독(纛) 1자루, 당보기 10면, 방기죽(放機竹) 2개, 소등철(小燈鐵) 58개, 남사롱(藍紗籠) 13쌍, 유지롱(油紙籠) 104개 방색지롱 44개. 대차일(大遮日) 2부(浮) 큰 밧줄도 갖춘다. 대지의(大地衣) 1부, 전ㆍ후차장(前後遮帳) 4부, 군막 4부 우비까지 갖춘다. 평군막(平軍幕) 6부, 삼베 휘장 26부, 무명 갑장 62부 쇠말뚝[鐵末]도 갖춘다. 유둔(油芚) 30부. 이상은 항시 사용하는 것으로 파손되는 대로 새로 만든다.
북한산성의 훈련도감창ㆍ금위영창ㆍ어영청창ㆍ승창[北漢訓禁御僧倉] 조총 8,266자루[柄] 훈창 3,000자루, 금창 1,207자루, 어창 1,783자루, 승창 2,276자루. 대장총 300자루 금창. 나팔별총 10자루 어창. 중총 54자루 훈창 17정, 금창 20자루, 어창 17자루. 삼혈총 15자루 어창. 수철대포(水鐵大砲) 67좌(坐) 훈창 19좌, 금창 18좌, 어창 18좌, 승창 12좌. 위원포(威遠砲) 87좌 승창. 쌍문포(雙門砲) 1좌, 동포 10좌 금창. 목모포(木母砲) 626좌 훈창 40좌, 금창 101좌, 어창 195좌, 승창 290좌. 철불량기 모포(鐵佛狼機母砲) 60좌 승창. 철자포(鐵字砲) 3,982훈창 400좌, 금창 966좌, 어창 550좌, 승창 2,066좌. 단가포(單家砲) 54좌, 수철단가포 체철(體鐵) 179좌 금창. 유불랑기(鍮佛狼機) 415좌 훈창 80좌, 금창 120좌, 어창 105좌, 승창 110좌. 화약 54,749근 12냥 9돈 훈창 24,929근 8냥, 금창 19,894근 11냥 4돈, 어창 9,925근 9냥 5돈. 연환(鉛丸) 1,335,216개 훈창 503,100개, 금창 506,806개, 어창 325,310개. 수철환(水鐵丸) 9,446개 훈창 4,538개, 금창 4,908개. 화약통 9,325개 금창 500개, 어창 1,000개, 승창 7,825개. 이약승(耳藥升) 4,934개 훈창 220개, 금창 1,767개, 어창 1,000개, 승창 1,947개. 화승 9,376대내(臺乃) 훈창 700대내, 금창 6,069대내, 어창 1,767대내, 승창 840대내. 화전 2,494지(枝) 훈창 1,498지, 어창 996지. 화전죽 1,498개, 화전촉 1,500개, 약선(藥線) 700조(條) 훈창. 교자궁 5,554장(張) 금창 1,000장, 어창 1,500장, 승창 3,054장. 공궁현(空弓弦) 500개 어창. 장전 3,375부 금창 500부, 어창 1,000부, 승창 1,875부. 편전 2,575부(浮) 금창 500부, 어창 500부, 승창 1,575부. 통아 2,125개 금창 500개, 어창 500개, 승창 1,125개. 환도 1,051자루[柄] 금창 694자루, 어창 200자루, 승창 157자루. 호검(胡劍) 100자루 금창. 장창 896자루 금창 300자루, 승창 596자루. 천리경(千里鏡) 1부(部) 훈창. 황촉 45,247자루 금창 30,000자루, 어창 15,247자루. 철룡 400개 금창 100개, 어창 300개. 수자기(帥字旗) 1면 어창. 달아매는 밧줄도 갖춘다. 이광단 대기치 38면, 북 18좌, 대고(大皷) 4좌, 나팔 11쌍, 징 22좌, 목대각(木大角) 10쌍, 동노구 130좌, 아리금 100쌍 어창. 밥솥[食鼎] 1,402좌 훈창 51좌, 금창 65좌, 승창 1,386좌. 가시목철장(加時木鐵杖) 220개 훈창. 잠철(簪鐵) 539개 금창 329개, 어창 210개. 철요심(鐵凹心 화약을 담는 그릇) 25개 어창. 동거(童車) 32좌 금창. 사슬차정(絲乷釵丁) 215개. 금창.
임진진(臨津鎭) 조총 180자루[柄], 화약 100근, 연환 5,000개, 환도 255자루, 장전 24부(浮), 담통개 24부(部), 교자궁 24장(張), 편담(扁擔) 18개, 별장ㆍ초관의 방색수기 3면(面), 인기(認旗) 3면, 신기 5면, 기총기(旗摠旗) 6면, 대장기(隊長旗) 24면. 이상은 봉부동이다.
장산진(長山鎭) 조총 180자루, 화약 100근, 연환 5,000개, 환도 255자루, 장전 24부(浮), 담통개 24부(部), 교자궁 24장, 편담(扁擔) 18개, 별장ㆍ초관의 방색수기 3면, 인기 3면, 신기(神旗) 5면, 기총기 6면, 대장기 24면. 이상은 봉부동이다.


 

[주D-001]거마창(拒馬槍) : 전쟁에 쓰는 방수용(防守用) 병기. 요해지(要害地)에 두어서 적기(敵騎)의 진격을 막음.
[주D-002]봉부동(封不動) : 긴급시에 대비한 군기 등을 봉해놓고 그때가 오기 전에는 절대로 쓰지 않음.
[주D-003]좌독기(座纛旗) : 깃대를 받쳐 세우는 장치가 되어 있는 큰 독기(纛旗). 독기(纛旗)는 원수의 대기(大旗).
[주D1-001]5,223 : ‘5,223’이 어느 본에는 ‘5,233’으로 되어 있음.
[주D1-002]3,532 : ‘3,532’가 어느 본에는 ‘3,513’으로 되어 있음.
[주D1-003]1,091 : ‘1,091’이 어느 본에는 ‘1,901’로 되어 있음.
[주D1-004]312 : ‘312’가 어느 본에는 ‘313’으로 되어 있음.
[주D1-005]2,022 : ‘2,022’가 어느 본에는 ‘2,025’로 되어 있음.
[주D1-006]무명 군복[木軍服] : ‘무명제 군복[木軍服]’의 ‘木’이 어느 본에는 ‘大’로 되어 있음.
[주D1-007]홍전립(紅氈笠) : ‘홍전립(紅氈笠)’의 ‘氈’이 어느 본에는 ‘戰’으로 되어 있음.
[주D1-008]입(立) : ‘입(立)’이 어느 본에는 ‘笠’으로 되어 있음.
[주D1-009]50 : ‘50’이 어느 본에는 ‘20’으로 되어 있음.
[주D1-010]표미기(豹尾旗) : ‘표미기(豹尾旗)’의 ‘尾’가 어느 본에는 ‘毛’로 되어 있음.
[주D1-011]1면 : ‘1면(一面)’의 ‘一’이 어느 본에는 ‘二’로 되어 있음.
[주D1-012]수자기(帥字旗) : ‘수자기(帥字旗)’의 ‘字’가 어느 본에는 ‘子’로 되어 있음.
[주D1-013]모단전건(帽緞戰巾) : ‘모단(帽緞)’의 ‘帽’가 어느 본에는 ‘冒’로 되어 있음.
[주D1-014]전ㆍ후차장(前後遮帳) : ‘전ㆍ후차장(前後遮帳)’이 어느 본에는 ‘前後遮日’로 되어 있음.
[주D1-015]쇠말뚝[鐵末] : ‘쇠말뚝[鐵末]’의 ‘末’이 어느 본에는 ‘木’으로 되어 있음.
[주D1-016]북한산성의 …… 승창[北漢訓禁御僧倉] : 북한산성의 훈련 도감창ㆍ금위영창ㆍ어영청장ㆍ승창[北漢訓禁御僧倉]’의 ‘訓禁御’가 빠져 있음.
[주D1-017]3,982 : ‘3,982’가 어느 본에는 ‘3,937’로 되어 있음.
[주D1-018]54,749 : ‘54,749’가 원본과 어느 본에는 ‘54,745’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따라 고쳤음.
[주D1-019]325,310 : ‘325,310’이 원본과 어느 본에는 ‘325,280’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따라 고쳤음.
[주D1-020]996 : ‘996’이 원본과 어느 본에는 ‘999’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의하여 고쳤음.
[주D1-021]약선(藥線) : ‘약선(藥線)’의 ‘線’이 어느 본에는 ‘綿’으로 되어 있음.
[주D1-022]1,500 : ‘1,500’이 원본과 어느 본에는 ‘1,400’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의거하여 고쳤음.
[주D1-023]공궁현(空弓弦) : ‘공궁현(空弓弦)’의 ‘弦’이 어느 본에는 ‘絃’으로 되어 있음.
[주D1-024]수자기(帥字旗) : ‘수자기(帥字旗)’의 ‘字’가 어느 본에는 ‘子’로 되어 있음.
[주D1-025]5,000 : ‘5,000’이 어느 본에는 ‘50’으로 되어 있음.
[주D1-026]편담(扁擔) : ‘편담(扁擔)’의 ‘擔’이 어느 본에는 ‘筒’으로 되어 있음.
[주D1-027]5,000 : ‘5,000’이 어느 본에는 ‘50’으로 되어 있음.
[주D1-028]편담(扁擔) : ‘편담(扁擔)’의 ‘擔’이 어느 본에는 ‘筒’으로 되어 있음.


 

 

 

군정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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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융청(摠戎廳)
금지 조항(禁條)


영종 36년 경진(1760년)에 국왕의 명령으로 북한산성대성문(大成門)의 도로가 도성의 주맥에 방해가 있으므로 폐쇄하여 사용하지 않고 대남문(大南門)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 정종 즉위년 병신(영종 52년 1776년)에 좌윤 장지항(張志恒)이 계청하여 본청의 금표(禁標) 내에 과거부터 있는 묘에 합장(合葬)하는 것은 금지하지 않고, 신규의 묘나 구묘에 붙여서 묘를 설치하는 것은 금지하기로 하였다.


 

[주D-001]장지항(張志恒) : 1721년(경종 1)~1778년(정종 2). 자는 월여(月如), 본관은 인동(仁同). 총융사를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냄.
[주D1-001]대성문(大成門) : ‘대성문(大成門)’의 ‘成’이 어느 본에는 ‘城’으로 되어 있음.
[주D1-002]대남문(大南門) : ‘대남문(大南門)’이 어느 본에는 ‘南大門’으로 되어 있음.


 

 

기언 별집 제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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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고양(高陽) 산수기(山水記) 무술년


9년 여름에, 상의 부름을 받고 고양까지 와서 병으로 사양하고 물러 나와, 고봉(高峯)의 죽원(竹院)에서 5일을 머물러 있다가 서산(西山)에 이르러, 주인과 함께 독재동(篤才洞) 계곡 사이에서 놀았다. 위에는 조그만 폭포가 있어 그 밑에 절벽이 생겼고 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두 그루 소나무가 있는데, 그 사이로 가리키며,
“저기는 집을 지을 만하고, 저기는 밭을 이룰 만하고, 저기는 목욕을 할 만하고, 저기는 놀 만하다.”
하였다. 그 이튿날 중흥동(重興洞)으로 들어가니, 고성(古城)이 산정(山頂)을 둘러 석문(石門)으로 된 수구(水口)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이것이 고려(高麗)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이다. 석문을 들어가니, 반석(盤石)의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며 골짜기가 모두 높은 바위와 절벽을 이루어 절정까지 모두 그러하였다. 그 밑에 민지암(閔漬巖)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민지(閔漬)는 고려(高麗)의 재신(宰臣)으로 불도를 좋아하여 명산 대택(名山大澤)에 두루 노닐었으니, 내가 일찍이 환희령(懽喜嶺)에 올랐을 적에도 석대(石臺)에 민지의 고적(古跡)이 있었다. 반석 위에 앉아 못물을 구경하고 돌다리를 건너려니, 이끼가 많이 끼어서 돌이 미끄러웠다. 어젯밤에 산중에 큰비가 와서 바위 밑에는 습기가 쌓였고 산길은 모두 질척질척하였다. 깊숙이 계곡 사이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어둠 빛이 짙은지라, 이에 석문(石門)을 나와 서산 주인(西山主人)의 집에서 잤다.
그 이튿날 아침에 권영숙(權永叔)ㆍ정문옹(鄭文翁)ㆍ한중징(韓仲澄)ㆍ이자응(李子膺)과 이자인(李子仁)의 형제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왔으므로, 주인이 순채(蓴菜)와 생선을 장만하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
나는 병이 있어 의원을 만나려고 몇 친구를 따라 성서(城西)로 향했는데, 중흥동을 지나다가 가섭령(伽葉嶺) 뒷산에서 쉬고 동리 어구에 이르러 시냇가 돌 위에서 쉬다가, 인하여 이번 걸음의 산수기(山水記)를 지었으니, 도중에 종이와 붓이 없어서 추기(追記)하여 제군(諸君)에게 보인다.
미수(眉叟)는 쓴다.


 

 

 

성호전집 제5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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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북한산 유람기〔遊北漢記〕


금상 재위 38년(1712, 숙종38)에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할 것을 건의한 자가 있었으니, 대개 도성(都城)이 사방으로 트여 있어 위급한 경우 수비할 수가 없고 남한산성(南漢山城)은 물에 막혀서 창졸간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에 역사(役事)를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이르러 겨우 끝마쳤는데, 이에 내가 가서 유람하였다. 새로 쌓은 성첩(城堞)은 까마득히 높아 붙잡고 기어오를 수 없을 것 같았고, 개통한 길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대개 성 주위가 30리(里)는 족히 되었는데, 무릇 사람이 담요로 감싸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험한 곳까지 모두 성가퀴를 두었다. 북쪽으로 백운봉(白雲峯)부터 동쪽으로 옛 성터까지 비스듬하게 뻗어 있고 다시 나한봉(羅漢峯) 등의 여러 봉우리를 거쳐서 서쪽 중흥동 어귀에서 합쳐지니, 참으로 이른바 천연의 요새인 백이관(百二關)이란 것이 이것이다.
옛날 백제(百濟)의 온조(溫祚)가 나라를 세울 때 열 명의 신하와 한산(漢山)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터 잡고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지금의 백운봉이 그곳이다. 드디어 위례(慰禮)를 도읍으로 정하였다가 그 뒤에 남한(南漢)으로 옮겼다. 비류왕(比流王) 때에 이르러 왕의 서제(庶弟) 내신좌평(內臣佐平) 우복(優福)이 북한(北漢)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371)에 다시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다. 개로왕(蓋鹵王) 21년(475)에 이르러 고구려가 몰래 승려 도림(道琳)을 시켜 왕을 모시게 하니, 도림이 왕을 꾀어 궁실을 수리하고 성곽을 축조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만들도록 하니, 양식 창고가 바닥나고 백성들은 곤궁해졌다. 도림이 돌아가 고하자 고구려가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왕을 잡아 살해하니, 왕자(王子)인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에서 즉위하였다. 이것이 북한산성에 얽힌 고사(故事)이다.
고구려가 공격하여 함락할 때에 그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 남성(南城)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의 남문(南門) 밖에 다시 골짜기가 하나 있는데 도성(都城)과 접해 있고 역시 형세가 잘 갖춰져 있으니 틀림없이 이곳에 내성(內城)과 외곽(外郭)을 만들었을 것이다. 듣건대,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대개 이곳을 차지한 자는 굳이 병기나 화력의 이로움이 필요치 않으니, 몽둥이와 투석으로도 높은 성장(城牆)에 올라 날랜 적병을 칠 수 있다. 또 동서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고 멀리까지 길이 통하니, 운용하는 데 좋은 방법만 있으면 그 형세는 충분히 뛰어난 점이 있다. 다만 수구문(水口門) 쪽이 자못 낮고 평평하여 구름사다리나 빈 수레로 잡고 올라갈 수 있으나, 안으로 구덩이가 깊어 들어가는 경사가 가팔라서 평평하고 넓은 곳이 조금도 없으니, 혹 빗물에 무너지게 되면 사람들이 발을 붙이기 어려울 것이다. 또 높은 봉우리와 산꼭대기 같은 곳들은 가뭄이 들면 물을 운반하기가 필시 어려울 것이고, 날씨가 추우면 꽁꽁 얼어서 방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그 이해(利害)에 대한 것이다.
성의 역사가 막 완결되었지만 궁실이 아직 건립되지 않았고 저장 창고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상황이다. 민의(民意)는 흩어지기 쉽고 국용(國用)은 넉넉하기 어려우니, 수십 년 오랜 세월의 계획을 가지고 기약하지 않으면 불의의 환란에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민사(民事)를 돌보지 않고 뜻을 다하여 속성(速成)하려고 한다면 이 또한 넓적다리를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격일 뿐이니, 이렇게 되면 비록 성을 방위하는 설비가 있다 하더라도 적을 막을 군졸이 없을까 걱정된다. 또 예로부터 성에서 패전하는 자는 대부분 소홀히 여긴 데에서 문제가 생기니, 국조(國朝)의 병자년(1636, 인조14) 강도(江都)의 변란 같은 유(類)가 그것이다. 자연의 험고함은 믿을 만하지만 또한 두려운 것이니, 방위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이 성이 설령 흠결이 있다 할지라도 백여 년 동안 백제의 터전이 되어서 삼국(三國)이 교전할 무렵 고구려와 겨룰 적에 본디 성하(城下)에서 꺾어 그 위세를 떨쳤었는데, 혼미하고 욕심을 부리다가 패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의 탓이겠는가. 조정의 시책이 어떤 방향으로 나올지 모르겠다. 이것이 그 시무(時務)이다.
개로왕이 망한 것은 꾀는 말을 듣고 패망의 기미를 잊었기 때문이다. 궁궐을 크게 짓고 누대(樓臺)를 장식하였으며 욱리(郁里)의 돌을 취하여 석곽으로 쓰기도 하고 사성(蛇城)의 동쪽까지 제방을 쌓아 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마침내 나라의 정세가 위태롭게 되고 적의 책략이 이루어졌으니, 뒤늦게 후회하여도 어찌할 수가 없어 자신은 포로로서 죽었다. 개로왕이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현명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의 말을 신용하여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백성들은 피폐하고 군사들은 약하니, 누가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리오.” 하였다. 아, 깨달았지만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백제가 없어지지 않은 것만도 요행이다. 이것은 그 감계(鑑戒)이다.
무릇 옛것에 집착하는 사람은 “덕(德)에 달린 것이지 험고한 지형에 달린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말단적인 방법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유리한 지형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하나만 잡고 둘을 폐하는 격이다. 양(梁)나라가 궁궐의 해자를 파자 백성들이 먼저 뿔뿔이 흩어졌고, 거(莒)나라가 방비(防備)가 없자 초(楚)나라가 운(鄆) 땅을 침입하였다. 이러하니 어찌 다만 잘못이 방비에 있지 덕에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덕에 있지 방비의 허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상(子常)이 영(郢)에 성을 쌓으니 심윤(沈尹) 술(戌)이 그 수위(守衛)가 너무 작다고 기롱하였고, 진(晉)나라가 포(蒲)와 굴(屈)에 성을 쌓자 사위(士蔿)가 전쟁이 없는데 성을 쌓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것은 또 나라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중흥사(中興寺)에 이르러 기숙하고 이튿날 아침에 두세 동반자와 함께 노적봉(露積峰)을 경유하여 북성(北城)에 올라 인수봉(仁壽峯)을 바라보고 백운중대(白雲中臺)에 이르렀다가 길이 위태로워 그만두었다. 돌아와 절에서 쉬고 수구문을 따라 돌아왔다. 그 산천의 모습 같은 것은 전에 유람한 기문에 자세히 실려 있으므로 다시 기술하지 않는다.


 

[주D-001]북한산성(北漢山城)을 …… 있었으니 :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의하면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37) 4월 3일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그해 10월 19일에 완성하였고, 다음 해 1712년 10월 8일에 어영청과 금위영이 주관한 창고와 문루, 우물을 파는 일 등의 공역을 마무리하였다. 이후 행궁을 짓는 일과 탕춘대까지 중성을 쌓는 일 등은 계속 논의되었다. 여기서 건의했다는 자가 누군지는 확실치 않으나, 북한산성의 축조에 대한 논의는 효종 때 송시열도 했었고 숙종 초부터 계속 축성에 대한 찬반론이 대치되다가 이유(李濡)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반대론을 물리치고 건설되었다.
[주D-002]담요로 …… 곳 : 군대가 지형이 매우 험한 곳을 쳐들어갈 경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담요로 감싸는 것을 말한다. 위(魏)나라 등예(鄧艾)가 촉(蜀)나라를 정벌할 때 700여 리를 무인지경으로 달려갔는데 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너무 위태하자, 등예는 담요로 스스로를 감싼 뒤 굴러서 내려갔고 다른 병사들은 나무를 부여잡고 절벽 가를 더듬으며 고기 떼처럼 한 줄로 나아갔다는 고사가 있다. 《事文類聚 居處部》
[주D-003]백이관(百二關) :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천연 요새를 말한다. 옛날 진(秦)나라 땅이 험고하여 “2만 인으로 제후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다.〔秦得百二焉〕”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史記 卷8 高祖本紀》
[주D-004]백제(百濟)의 온조(溫祚) : ‘백제(百濟)’가 이병휴 필사본에는 ‘십제(十濟)’로 되어 있는데, 난외(欄外)에 교정주로 “백제의 옛 호칭이 십제이니 ‘십(十)’은 ‘백(百)’이어야 할 듯하다.”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온조가 위례 지역에 정착한 시기에는 국호를 십제라고 했고, 이후 비류의 남은 일파와 세력을 합치면서 국호를 다시 백제로 바꾸었으므로 이때는 십제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성호가 이런 시기적인 차이를 인식해서 십제라고 하였는지 아니면 백제의 고호로서 십제를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주D-005]고구려가 …… 살해하니 : 개로왕 21년(475) 9월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3만의 군사로 급습하여 7일 만에 한성(漢城)을 함락하였는데, 왕족과 개로왕은 고구려 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8천 명 이상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백제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뺏겨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개로왕의 왕권강화책에 대한 귀족 세력의 불만과 대고구려 봉쇄라는 외교정책의 실패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사6-백제, 국사편찬위원회편》
[주D-006]궁궐을 …… 하였다 : 이 부분은 안정복(安鼎福)이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 제2하 개로왕조에 나오는 기사와 내용이 일치한다. 다만 욱리(郁里)와 사성(蛇城)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아 분명하지 않다.
[주D-007]덕(德)에 …… 아니다 : 전국 시대 명장 오기(吳起)가 위(魏)나라 무후(武侯)를 섬겼는데, 무후가 서하(西河)에 배를 띄우고 내려가다가 중류에서 오기를 돌아보며 “아름답구나, 산천의 험고함이여. 이것이 위나라의 보배로다.”라고 하자, 오기가 답하기를 “덕에 달린 것이지 지형의 험고함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만일 주군이 덕을 닦지 않으시면 배 안의 사람들이 모두 적국이 될 것입니다.” 하였던 고사가 있다. 《史記 卷65 孫子吳起列傳》 후에 지형적인 유리함이 덕치(德治)만 못하다는 논리에 주로 인용되었다.
[주D-008]양(梁)나라가 …… 흩어졌고 : 양백(梁伯)이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자주 성을 쌓자 백성들이 피로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적(敵)이 침입해 올 것이라고 하여 궁 주위에 해자를 파도록 하고는 진(秦)나라가 장차 불의에 공격할 것이라고 핑계 대니,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미리 도망하였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僖公19年》 이는 적을 대비하는 형세를 갖추어도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여 패망한 예이다.
[주D-009]거(莒)나라가 …… 침입하였다 : 성공(成公) 9년에 초(楚)나라가, 거나라가 미처 수비하지 않은 운(鄆) 땅을 침입하자 군자가 논평하기를, “거나라가 땅이 외진 것을 믿고 성곽을 수선하지 않아서 12일 만에 초나라에게 세 성을 빼앗겼다. 그러니 방비를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春秋左氏傳 成公9年》 이는 나라의 방비가 취약해 패전한 예로 든 것이다.
[주D-010]자상(子常)이 …… 기롱하였고 : 소공(昭公) 23년에 초나라 영윤 자상이 초나라의 수도 방비를 위해 영(郢)에 성을 쌓자 심윤 술(戌)은, 덕을 닦아서 백성들을 친애하며 제후국들과 신의를 지키고 관리들을 잘 다스리고 국경의 수비를 굳건히 하면 내우와 외침의 두려움이 없을 텐데 자상이 이것은 하지 않고 수도에만 성을 쌓으니, 그 지킴이 너무 작다고 비난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23年》 이는 나라의 방비를 지엽적인 수단에만 의존함을 기롱한 것이다.
[주D-011]진(晉)나라가 …… 경계하였다 : 진 헌공(晉獻公)이 두 공자(公子)를 위해 사위(士蔿)로 하여금 포(蒲)와 굴(屈)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사위가 섶을 섞어 대충 쌓았다. 헌공이 이를 책망하자 사위가 말하기를, “상(喪)이 없는데도 슬퍼하면 근심할 일이 반드시 그에 맞추어 오고, 전쟁이 없는데 성을 쌓으면 원수가 반드시 그곳을 차지한다고 했으니, 원수의 보루를 무엇 때문에 신중히 쌓겠습니까. 시에 ‘덕으로 회유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종자(宗子)가 견고한 성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군께서 덕을 닦고 종자를 굳건히 하시면 이만한 성이 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5年》
[주D-012]전에 유람한 기문 : 《국역 성호전집》 제53권 〈삼각산 유람기〉를 말한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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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어전고(邊圉典故)
산성(山城)


경기도 한성부(漢城府) 북한산성(北漢山城)양주(楊州)에 속한다. 은 경성(京城)에서 북쪽으로 30리에 있으며, 동북으로 양주와의 거리가 30리이다. 숙종(肅宗) 신묘년(1711)에 석성(石城)을 쌓았다.
중흥동 석성(重興洞石城)은 중흥사(重興寺) 북쪽에 있으며, 주위가 9천 4백 17척(尺)이고, 성중에는 산이 있는데 노적가리 같다 하여 노적산(露積山)이라고 일컫는다. 《여지승람》
○ 개성부(開城府) 대흥산성(大興山城)은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 두 산 사이에 있으며, 성거산은 옛날에는 우봉현(牛峯縣)에 속하였고, 아래에 박연폭포(朴淵瀑布)가 있다. 숙종 2년 병진(1676)에 석성을 쌓았다.
○ 광주(廣州)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성에서 동남으로 40리 되는 한수(漢水) 남쪽에 있으며, 북으로 광주 옛 고을과 5리보다 조금 먼 거리이다. 동쪽은 백제(百濟) 옛 도읍이니, 온조왕(溫祚王) 13년(B.C.6)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여기에 도읍을 옮기고 성곽과 궁궐을 세웠으며, 위례성 민호(民戶)를 옮겨와서 12세 3백 80여 년을 지냈으며,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191)에 이르러 다시 남평양(南平壤)지금의 서울 으로 옮겼다. 초고왕이 옮긴 뒤부터 백제와 신라를 거쳐 고려에 이르기까지 1천여 년 동안의 성의 흥폐(興廢)는 다시 상고할 길이 없으며, 이조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이 성에 뜻을 많이 두었으나 당국(當國)한 사람이 건의하지 못하고 말았다. 《계곡집(谿谷集)》,《남한성기략(南漢城記略)》
○ 광해(光海) 신유년(1621)에 보장(保障)으로 정하였다.
○ 인조(仁祖) 갑자년(1624) 이괄(李适)의 난 후에 여러 사람이 서울 가까운 곳에 마땅히 보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가 이 성을 보수하기를 건의하니, 처음에 심기원(沈器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얼마 있다 심기원이 상(喪)을 당하여 갔으므로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가 그 임무를 대신 맡았고, 목사 문희성(文希聖)과 별장 이일원(李一元) 등이 감독하였다. 갑자년(1624) 가을에 시작하여 병인년(1626) 가을에 공사를 끝내 마침내 고을의 감영을 옮기니, 비축한 물자와 백성들이 은연히 하나의 웅진(雄鎭)이 되었다. 《남한성기략》
○ 이서가 도첩(度牒)을 발행하여 승도(僧徒)를 통제하여 구역을 나누어 맡아 공사를 책임지게 하였다.
○ 병자년(1636) 3월에 남한산성에 온조묘(溫祚廟 )를 세웠다.
○ 수원(水原) 독성산성(禿城山城)은 옛 감영의 동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석축(石築)이다.
○ 강화(江華) 정족산성(鼎足山城)은 옛날에는 삼랑성(三郞城)이라 일컬었으며, 단군조(檀君條)에 상세하다. 선원각(璿源閣) 사각(史閣)이 그 안에 있다. 영조 무오년(1738)에 성을 개축하였다.
○ 통진(通津) 문수산성(文殊山城)은 부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숙종 계유년(1693)에 후릉(厚陵)에 거동할 때에 이 산을 바라보고 승전(承傳)을 보내 형세를 그려서 들이게 하고, 강도(江都) 나룻길에 중요한 곳이라 하여 갑술년(1694) 봄에 비로소 석축(石築)을 쌓으라고 하였다.
○ 충청도 청주(淸州)의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율봉역(栗峯驛) 북산에 있는데, 석축이다. 안에 12개 우물이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지금은 병사(兵使)와 우후(虞侯)가 머물러 있다.
○ 공주(公州) 쌍수산성(雙樹山城)은 공산성(公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북쪽 2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다. 안에 우물 셋과 연못 하나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백제 때의 옛 성이며, 신라 김헌창(金憲昌)이 웅거하던 곳이라 한다. 《여지승람》
갑자년 이괄의 난 때에 인조가 머물렀던 행궁(行宮)이 있으며, 지금은 충청 중군(中軍)이 거처한다.
경상도 칠곡(漆谷) 가산산성(架山山城)칠곡ㆍ의홍(義興)ㆍ신녕(新寧)ㆍ군위(軍威)ㆍ하양(河陽)에 속하며, 칠곡은 본래 성주(星州) 아래 팔거(八莒)의 속현(屬縣)이다.
○ 인조 기묘년(1639)에 경상 감사 이명웅(李命雄)이 비로소 가산산성을 쌓았으니, 주위가 3천 8백 30보(步), 1천 7백 52첩(堞)이다. 처음에는 근방 몇몇 군(郡) 지역을 떼어 한 읍(邑)을 설치하고 병영을 옮겨 진소(鎭所)로 할 작정이었으나, 조정에서 다만 성주(星州) 1현만 떼어 칠곡부를 설치하였다. 이윽고 시기하는 자들이 백성들을 부역시킨다고 탄핵하였으며, 이로부터 산성의 일은 세상 사람들이 기피하였다. 뒤에 임담(林墰)이 감사가 되어 형승(形勝)을 임금께 갖추어 올려 이명웅에게 추후로 포상하기를 청하니, 이명웅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 선산(善山) 금오산성(金烏山城)선산ㆍ금산(金山)ㆍ개녕(開寧)ㆍ지례(智禮)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別將)을 두었다.
○ 금오산은 고려 때 남숭산(南嵩山)이라 일컬어 해주(海州) 북숭산(北嵩山)과 짝하였다. 산성은 석축이며, 주위가 7천 6백 44척이고 높이가 7척인데, 석벽을 이용하여 성으로 한 것이 반이나 된다. 높고 험준하고 기이하고 가파르며 안에는 연못 셋과 시내 하나가 있으며, 고려 말에 백성이 왜(倭)를 피해 들어가 살았다.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있다. 《여지승람》
○ 성주(星州) 독용산성(禿用山城) 성주ㆍ고령(高靈)에 속한다.
○ 주의 서쪽 33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만 3천 64척인데, 그 안에 시내 셋과 샘이 하나 있다. 《여지승람》
○ 문경(聞慶) 조령산성(鳥嶺山城) 문경ㆍ함창(咸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을 두고 있다.
○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되는 연풍현(延豐縣) 경계에 있는데, 세상에서 초점(草帖)이라 부른다. 《여지승람》
○ 문경의 북쪽 조령 동쪽에 한 산성이 있는데, ‘어류(御留)’라 부른다. 혹 말하기를, 고려 태조가 잠깐 머무른 곳이라고 하며, 그 안의 넓이는 남한산성에 비교하여 10분의 9가 되고, 형세의 험고(險固)함은 남한산성에 비할 바가 아니다. 동남쪽은 절벽이 만 길이나 되어 새와 짐승도 넘지 못하며, 북쪽은 동남쪽에 비해 조금 낮지만 또 인력(人力)으로는 도저히 통과 할 수 없어 성첩(城堞)을 약간만 설치하면 안심할 만하다.그 서쪽에도 통과할 만한 길은 있지만 남한산성의 가장 험한 곳과 비교해 보아도 몇 곱절이나 된다. 성을 쌓은 곳은 5~6백 파(把)에 불과하고, 성안에는 샘이며 수목이 무진장이다. 자연적인 험함은 실로 동남 지방의 제일이라 4~5만 병갑(兵甲)을 수용할 만하니, 만전(萬全)한 곳은 이를 두고는 없을 것이다. 성 북쪽의 월암(月巖)과 그 동쪽의 작성(鵲城)ㆍ순흥(順興)과 그 서쪽의 조령ㆍ희양성(曦暘城)과 그 남쪽의 고모(姑母)ㆍ토천(兎遷)이 혹은 그지없이 험한 산성이요, 혹은 사닥다리 길이어서 관(關)을 설치하여 약간의 군사를 포치하여 머룰러 둔다면 성원(聲援)이 서로 닿고 호령(號令)을 서로 통할 수 있으니, 호령(湖嶺) 삼도(三道)와 동북 기전(畿甸)을 또한 진정(鎭定)시킬 수 있어서 서북에 일이 생기면 파천하여 머물 곳이 될 것이고 남방에 위급이 있으면 방어할 곳이 될 것이다. 백강집(百江集)
○ 진주(晉州) 촉석산성(矗石山城) 진주에 속한다
○ 주의 남쪽 1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4천 3백 59척이며, 높이가 15척인데, 안에 우물과 샘이 각각 세 개씩 있다.
○ 대구(大丘)의 공산성(公山城), 인동(仁同)의 천생성(天生城), 의령(宜寧)의 정진(鼎津), 삼가(三嘉)의 산성, 합천(陜川)의 야로산성(冶爐山城), 성주(星州)의 가야산성(伽倻山城)은 모두 천연적으로 험한 곳이니, 마땅히 차례로 수축하여 곡식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켜 굳게 지키면서 움직이지 않고 청야(淸野)하여 적을 기다리면, 적이 앞으로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뒤로는 꺼리는 바가 없을 것이니, 나라를 보호하고 도적을 막는 방도에 실로 편리할 것이다. 《서애집(西厓集)》
○ 전라도 장성(長城)의 입암산성(笠巖山城)장성ㆍ태인(泰仁)ㆍ고창(高敞)ㆍ정읍(井邑)ㆍ흥덕(興德)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과 승장(僧將)이 있다. 입암산(笠巖山) 옛 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28척이며,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며 안에 시내가 하나 있다. 《여지승람》 정읍(井邑)
○ 정읍 입암산성은 산세가 험하고 높으며 꼭대기는 움푹 파였고 사면은 높고 가운데는 평평하다. 성이 그 지형 관계로 모양이 말 구유 같으며 각(閣)이 비계[棚] 위에 있다. 밖에서 쳐다보면 은은하고 엄연해서 그 안을 헤아릴 수 없다. 성중에서는 사방으로 눈을 가리는 것이 없으며 샘과 못이 넉넉하여 1만 마리의 말을 물 먹일 수 있다. 험하고 견고하기가 금성(金城)에는 미치지 못하나 형세는 훨씬 낫다. 동ㆍ남ㆍ북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입암(笠巖) 한면(一面)은 위령(葦嶺)의 큰길을 굽어 보며 제압하니, 지세가 더욱 기기하고 장대하다. 《백사집(白沙集)》의 체찰사(體察使) 때의 장계
○ 담양(潭陽) 금성산성(金城山城) 담양ㆍ순창(淳昌)에 속한다. 은 지금 별장이 있다.
○ 부의 북쪽 1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석축이고 주위가 1천 8백 4척이며, 안에 시내 하나와 샘 아홉 개가 있다. 《여지승람》
○ 담양의 금성은 어느 때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하면, “고려 말에 아기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 금성에서 말에 먹이를 먹이겠다고 소리쳤다.”고 기록되었는데, 주(註)에는 지금 담양부에 있다고 하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우리 태조가 남원(南原)에서부터 운봉(雲峯)을 넘어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함을 듣고 제장(諸將)과 함께 꾀하기를 “만일에 차질이 있으면 물러가 금성을 보전하자.”고 했다고 하니, 이 금성이 그 금성인지 알 수 없다. 동ㆍ서ㆍ남 세 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며, 담양에서부터 올라오는 데는 길이 산등으로 나서 한 줄기가 백 번이나 꼬불꼬불하여 6, 리를 돌아야 비로소 남문에 도달한다.남문 밖 양 곁은 모두 깊은 구렁이며 동문 밖 6, 0보(步)는 돌이 옆으로 서서 성중의 한 면을 노려보고 있으며 화살이 올 수 있는 거리이니 가장 꺼리는 곳이다. 지금 만약 양마성(羊馬城)을 뒤로 물려 쌓는다면 먼저 점거당할 우려에 대비하게 될 것이며, 서문의 양 곁은 산이 모두 높게 솟아 적이 오면 구멍 가운데 든 것 같아서 감히 함부로 곧장 충돌하지 못할 것이다. 샘이 증암(甑巖) 밑에서 솟아 시내를 이루어 흘러내리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또 9개 우물이 있다. 동북과 정남에는 벽이 천 길 높이로 서 있으며, 성 모양이 기이하고 장대하며 넓다. 사변이 높고 가운데가 꺼졌으며 밖에는 큰 봉우리가 없어서 안을 엿보기가 어렵고, 성 밖의 사면은 길이 여러 갈래로 퍼져있으니 참으로 형세가 좋은 곳이다. 《백사집》
○ 정유란(丁酉亂)에 왜군이 호남의 여러 성을 보고 그 허술함을 비웃지 않는 곳이 없었으나, 담양의 금성을 보고서는 말하기를, “조선이 이 성을 굳게 지켰다면 우리 군사가 어떻게 함락시켰는가.” 하였다. 《서애집》의 체찰사 때의 장계
○ 무주(茂朱)의 적상산성(赤裳山城)은 안에 사고(史庫)가 있다. 그래서 무주 부사가 수성장(守城將)을 겸하고 있다.
○ 상산(裳山)은 현의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민간에서 치마성[裳城]이라 부른다. 사면이 절벽이며 층층이 높아서 마치 사람의 치마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 옛사람이 험준함을 이용하여 성을 만들었으며 겨우 두 길이 통할 뿐인데 그 안은 평탄하고 넓어 개울물이 사방에서 흐르니 정말 하늘이 만든 험지이다. 글안(契丹)과 왜구의 난 때는 근처 수십 군민이 모두 이 성에 의지하여 안전하였으며, 고려 때 최영(崔瑩)이 산성을 쌓고 창고를 지어 뜻밖의 변란에 대비하자고 청했었다. 우리 세종조에 체찰사 최윤덕(崔潤德)이 고을을 돌아보다가 이에 이르러, 마침 운무(雲霧)가 자욱하여 두루 돌아보지 못하고서 성을 쌓고 창고 설치하기에 마땅치 않다고 하여 일이 결국 중단되었다. 《여지승람》 장빈호찬(長貧胡撰)
○ 상산 고성(古城)은 석축으로 주위가 2만 6천 9백 20이다.
○ 남원(南原) 교룡산성(蛟龍山城)
○ 부의 서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북쪽에는 밀덕(密德)ㆍ복덕(福德) 두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산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5천 7백 17척이고 높이가 10척이며, 안에는 99개의 우물과 조그만 시내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산이 조종(祖宗)이 없이 들 가운데 우뚝 솟았으며, 두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밀덕이고 남쪽은 복덕이다. 산을 둘러 성을 쌓았는데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으며, 성은 모두 석축이고 8개 우물이 있다. 명 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일찍이 이 성에 올라 지맥(地脈)을 좇아 우물을 파자 간간이 물이 나오니 유정이 말하기를, “성이 크면서 펀펀하니 인력을 반드시 들여야 하겠다.” 하였다. 성 밖 서ㆍ남ㆍ북 삼면에는 안을 들여다 볼 만한 높은 봉우리가 없고, 밀덕과 복덕 두 줄기는 동으로 뻗쳐 내렸는데, 마치 두 마리 이무기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는 세 동(洞)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운데가 적암(赤巖)이고, 북쪽이 우암(牛巖)이며, 남쪽이 빙암(氷巖)이다.두 봉우리는 머리가 되고 두 줄기는 등이 되며 세 동(洞)은 배가 되어 폐부(肺腑)가 겹쳐 가리고 남ㆍ북이 막히어 수미(首尾)가 서로 통하지 않고, 가슴과 등이 서로 관통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급할 때를 당하면 쇠와 북[金鼓]의 호령으로 지휘할 수 없다.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인데, 문 밖에 큰 길이 있어 소와 말이 모두 통하며, 길 위에서 성안을 내려다 보면 개미 새끼까지 헤아릴 수 있다. 문에서 수백 보 되는 거리에 높은 언덕이 있는데, 화살이 미칠 수 없는 곳이며, 뒤쪽이 평평하여 적이 오면 군사를 감출 만하다. 우리 태조가 일찍이 이곳에 군사를 주둔시켰다가 적과 싸워 쳐부셨다. 《백사집》
○ 전주(全州) 위봉산성(威鳳山城)은 별장이 있다.
○ 동복(同福) 옹성산(甕城山)은 세 바위가 있는데, 모양이 독[甕]과 같으므로 옹성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남ㆍ북에 두 문이 있는데, 다만 이곳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구불구불한 돌 길은 겨우 인적(人跡)이 통하며, 길이 벼랑 아래에 나고 성은 벼랑 위에 있어 성 위에 왕래하는 사람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지나가지 못한다.동성(東城) 아래 10여 보 되는 곳에 뾰죽한 봉우리가 마주 서 있고 사이에 좁은 길이 있는데,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 없으며, 남에서 서쪽으로 뻗치고 북에서 동쪽까지는 모두 온 돌[全石]이 벽을 깎아질러서 만 길이나 되니, 원숭이조차 지나가지 못할 그야말로 천험(天險)이다. 성안에 7개의 우물이 있으나 그다지 풍족하지는 않으며, 서봉(西峯) 아래로 가만히 적벽(赤壁)을 통하여 새끼줄을 드리워 큰 시내에서 물을 길을 수 있는데, 깎아지른 석벽이 공중에 달려 있어 적병은 그것을 볼 수 없다. 옛 터가 많이 퇴폐했었는데, 황진(黃進)이 현감으로 있을 때, 옆으로 동북면의 한 구석을 가로질러 내성(內城)을 쌓았다. 《백사집》
○ 나주(羅州) 금성산성(錦城山城)은 서ㆍ남ㆍ북 세 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한 면은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다. 성중에 5개의 우물이 있는데, 동문 큰 골의 2개의 우물이 가장 크다. 또 네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인데, 정녕이 주봉(主峯)이고, 동ㆍ서ㆍ남 세 봉우리는 앞에서 손을 맞잡고 읍하는 것 같아 손짓에 서로 응하고 언어를 서로 통할 수 있다. 동ㆍ북 두 봉우리의 갈래는 고리처럼 둘러서서 골을 이루어 군사를 감출 만하며, 혹은 샘이 부족하다 말하나 성 쌓을 때에 부역하는 사람 5천 명이 동문의 샘 한 곳에서 물을 마셔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산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므로 성의 형세가 옆으로 기울어졌다.동문 밖 산등성은 수백 보로 이어져 가다가 장원봉(壯元峯)에 이르렀고, 산등성을 좇아 성안을 우러러 볼 수 있으며, 철환(鐵丸)이 미치는 거리다. 서ㆍ남 두 면은 성이 산허리를 둘러서 내외로 구분되어 첩(堞)을 지키는 사람은 몸이 산 밖에 있되, 동ㆍ남의 이면(裏面)과는 지척간이지만 서로 돌아볼 수 없으니, 이것이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바다. 역대 연표(歷代年表)를 상고하건대,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에 웅거하다가 전라도로 침범해 오니 군(郡)ㆍ현(縣)이 모두 항복했는데, 상호장(上戶長) 정여(鄭呂)가 성을 지키기를 주창하여 여러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금성을 보전하기로 하고, 가시나무를 심어 책(柵)을 삼고 무기를 들고 사수(死守)하니 적이 7일 밤낮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글안(契丹)이 침노해 오자, 현종이 남쪽으로 파천하여 군사를 이곳에 머무르게 하니, 글안이 패하여 물러났으므로 현종이 이 주(州)를 승격시켜 목(牧)으로 했다고 한다. 《백사집》
○ 강진(康津) 수인산성(修因山城)은 병영(兵營) 동쪽에 있다. 본영에서 남문에 이르자면 좁은 길을 돌고 돌아 문 밖에 닿으며, 지세가 비좁아서 사람이 나란히 서질 못한다. 북문은 더욱 험준하며, 다만 동문이 적의 공격을 받을 곳이고, 문밖에 골이 있는데 수덕(修德)이라 한다. 산세가 높았다 낮았다 하여 성의 안과 밖이 서로 환히 보이며, 화살이 모두 미친다. 동문에서 남쪽으로는 별도로 소동문(小東門)이 있으며, 문밖 백 수십 보 되는 곳에 한 봉우리가 우뚝 막아 섰는데, 물희봉(勿喜峯)이라 부른다. 적이 만약 먼저 점거하면 성중 한 면은 감히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선적봉(仙跡峯)은 성 밖에 또 깎아지른 뫼가 있는데 수십 보를 돌출했으며, 네 구석이 깎아질러 쉽게 오를 수 없다. 노적(露積)이 주봉(主峯)인데, 서ㆍ남ㆍ북 세 면은 매우 험한 곳이지만 사이에 언덕이 있어 적이 의지할 만하고, 물희봉은 더욱 크게 해를 받을 곳이며, 동문 안팎은 장애가 없으니 장점이 단점을 가리지 못한다. 옛날에는 샘을 걱정했으나 동문 밖 수십 보 되는 곳에 여러 골짜기의 샘이 합해 시내를 이루었으며, 지금은 구성(舊城) 밖에 별도로 자성(子城)을 쌓으면서 시내를 에워싸 시내가 성안에 들어갔다. 주위가 7백여 척 가량 된다. 《백사집》
○ 황해도 황주(黃州) 정방산성(正方山城)은 별장이 있다.
○ 정방산은 주의 남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여지승람》
○ 해주(海州) 수양산성(首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수양산은 고을의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대(臺)가 있고,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8백 56척이고, 높이가 18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안함(安咸)ㆍ원로(元老)ㆍ동중(蕫仲) 세 사람이 처음 터를 잡아 쌓았으며, 산중에 또 고죽군(孤竹郡)의 옛 터가 있다 한다. 《여지승람》
○ 은율(殷栗) 구월산성(九月山城)은 별장이 있다.
○ 구월산은 현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허리에 물이 있는데, 고요연(高腰淵)이라 부른다. 모양이 가마솥 같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 없다. 속세에서 말하기를 용이 있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바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4천 3백 86척이고, 높이가 15척이다. 성 모양이 큰 배와 같으며, 남ㆍ북은 길이 없고 동ㆍ서에는 다만 잔도(棧道)가 있을 뿐이다. 성안은 나무가 다발로 묶어놓은 것 같으며, 물이 여러 골짜기에서 나와 시내 하나를 이루고, 성의 서쪽에 이르러서는 양 곁에 우뚝 솟은 산이 문처럼 서 있는데, 물이 문밖으로 흘러 나가 폭포가 되었다. 성중에 좌우 두 창고가 있는데, 문화(文化)ㆍ신천(信川)ㆍ안악(安岳)의 창고는 왼쪽에 속하고, 은율(殷栗)ㆍ풍천(豐川)ㆍ송화(松禾)ㆍ장연(長淵)ㆍ장련(長連)의 창고는 오른쪽에 속한다. 《여지승람》
○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
○ 서흥(瑞興) 대현산성(大峴山城)은 별장이 있다.
○ 대현산은 부의 북쪽 7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고을의 진산(鎭山)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2만 2백 38척이고, 높이가 23척이며, 안에 2개의 샘과 1개의 못이 있다. 서흥ㆍ수안(遂安)ㆍ곡산(谷山)ㆍ신계(新溪)ㆍ우봉(牛蜂)ㆍ토산(兔山)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 등에 군창(軍倉)이 있다. 《여지승람》
○ 재령(載寧) 장수산성(長壽山城)은 별장이 있다.
○ 장수산은 군(郡)의 북쪽 5리 되는 곳에 있는데, 고을의 진산이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8천 9백 15척이고, 높이가 9척이다. 암석이 험준하게 막혔고, 안에 7개의 샘이 있으며, 군창이 있다.
○ 평안도 자산(慈山)의 자모산성(慈母山城)자산ㆍ성천(成川)ㆍ영유(永柔)에 속한다. 은 별장이 있다.
○ 자모산은 군의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으며,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1만 2천 7백 3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다. 성안 골짜기마다 샘이 솟아 사람들이 말하기를, 99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군창이 있다. 《여지승람》
○ 용강(龍岡) 황룡산성(黃龍山城)은 별장이 있다.
○ 선천(宣川) 검산산성(劍山山城)
○ 검산은 군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고, 봉우리가 험준하여 칼날 같다. 《여지승람》
○ 선천 동림산성(東林山城)은 군의 북쪽 62리 되는 곳에 있으며, 바로 옛날의 선주성(宣州城)이다. 서ㆍ북은 토축(土築)이고, 동ㆍ남은 석축이며, 주위가 1만 7천 5백 62척이고, 안에 샘 5개가 있다. 《여지승람》
○ 창성(昌城) 당아산성(當峨山城) 《여지승람》에는 당아리산(堂阿里山)이라 하였다.
○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은 주의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백룡마(白龍馬)가 나와 놀아서 이름하였다고 한다.
○ 영변(寧邊) 철옹산성(鐵甕山城)
○ 약산(藥山)은 부의 서쪽 8리 되는 곳에 있으며 진산이다. 고기(古記)에, “약산의 험준함은 동방에서 제일이다.” 하였으며, 봉우리들이 층층 겹겹으로 서로 둘러 서서 모양이 마치 철옹(鐵甕) 같다. 《여지승람》
○ 세종조에 평안도 도체찰사 황희(黃喜)가 약산 성터를 정하여 영변부(寧邊府)를 설치해서 도절제사 영(都節制使營)으로 삼았다. 이때에 북쪽 오랑캐가 누차 변방을 침입하므로 중요한 곳에 성을 쌓아서 막으라고 명하였다. 판관 이정(李禎 퇴계 이황의 증조)이 감독하였다. 《서애집》
○ 용천(龍川) 용골산성(龍骨山城)
○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龍虎山)이라고 하며, 군의 동쪽 8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 철산(鐵山) 운암산성(雲暗山城)
○ 웅골산(熊骨山)은 군의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며, 운엄사(雲嚴寺)가 있다. 《여지승람》
○ 곽산(郭山) 능한산성(凌漢山城)
○ 능한산은 웅화산(熊花山)이라고도 하며, 군의 동북쪽 7리 되는 곳에 있는데, 진산이다. 산성은 석축인데, 주위가 6천 9백 13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안에 23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고, 군창이 있다.
○ 평양(平壤) 보산산성(保山山城)
○ 압록강(鴨綠江) 이남 청천강(淸川江) 이북의 각 읍에는 모두 산성이 있으니, 의주(義州)의 백마(白馬), 용천의 용골, 철산의 운암, 선천의 검산, 곽산ㆍ정주의 능한, 가산(嘉山)의 효성(曉星)이 모두 험준한 곳을 택하여 요해지(要害地)에 웅거한 것이니,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식암집(息菴集)》
○ 구성(龜城)이 가장 요해지인데, 예전엔 산성이 있어 형세가 매우 좋았다. 지금은 편의에 따라 수축해서 적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곽산의 능한산성과 창성(昌城)의 청산산성(靑山山城)은 예전에는 창고가 있었으니, 지금 또한 마땅히 수축해야 한다.
○ 여러 곳의 산성이 자못 읍내와 서로 멀어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에 사는 백성들을 거두어 산성에 들어가게 하니, 적이 멀리 있으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험하고 먼 것을 꺼려 성에 들어가 보호받기를 싫어하고, 적이 가까이 있으면 산과 들로 숨어 명령을 좇으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이웃 고을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전라도 한 도로 말하면 담양부(潭湯府)를 마땅히 금성(金城)에 설치하여 근처 몇 고을을 떼어서 더해주고, 정읍과 장성을 입암(笠巖)에 옮겨서 또한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영남의 모든 산성도 모두 그 고을의 감영이 되게 하여 주둔 군사가 서로 바라볼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형세를 이루게 하면 나라가 저절로 견고해 질 것이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
○ 성은 본래 고을을 보호하는 것이니, 사람의 집에 울타리가 있어 보호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는 고을은 빈약하고 산이 많으므로 산성과 고을의 구별이 생겼으니, 본말을 알지 못함이 심하다. 대개 성을 다른 곳에 쌓고서 위급에 임해서야 비로소 고을 백성들을 거두어 들이니, 백성들이 들어가려 하지 않아 마침내 빈 성이 되어 모든 일이 어긋나며, 들어간 사람도 마음을 붙히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도망치니, 장차 누구와 함께 성을 지키겠는가. 평시의 살던 집과 부고(府庫)와 백성을 이용하여 더불어 함께 지켜 사람마다 부모ㆍ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서로 전혀 다르다. 가령 산성을 고수하고 읍에 있는 창고와 백성과 가축을 모두 버려 적에게 준다면 산꼭대기만 지킨들 끝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반드시 망할 것이다. 《반계수록》
○ 우리나라 사람은 의레 산성을 말하지만, 지난 번 금주성(金州城)은 평지인데도 포위된 지 3년 동안 싸워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만약 외로운 산성에 갑자기 투입했다면 몇 달이 되지 않아서 식량이 끊어지고 사람들이 흩어져서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니, 어찌 해를 넘기며 지탱하기를 바라겠는가. 그 이해를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반계수록》


 

[주D-001]청야(淸野) : 청야는 적병이 침입할 때에 백성들을 전부 성안으로 몰아 들이고, 들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아 적병으로 하여금 거처할 곳과 먹을 것이 없어 곤란을 당하게 하는 전술이다.


 

 

임하필기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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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북한산성(北漢山城) 축성(築城)에 대한 논의


숙종 30년(1704)에 신완(申琬)이 아뢰기를, “북한산성은 매우 험조(險阻)한 데다 도성(都城)과 지척의 거리에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대가(大駕)가 이곳에 주필(駐蹕)한다면 도성의 사민(士民)들이 힘을 합쳐서 이를 굳게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비록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더라도 결단코 이를 모두 포위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이를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이른바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논들이 서로 일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이를 방해하였다.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를 보장(保障)할 수 있는 곳으로 말하면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바다로 도적이 침입하게 될 경우 이때 대가(大駕)가 강도로 들어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으로 말하면 이는 비록 산세(山勢)가 미약하기는 하지만 실로 천연의 요새(要塞)로서 이 또한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는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산성에 대한 계책으로 말하면 신의 생각은 수상(首相)과는 다소 다릅니다. 도성이 비록 넓다고는 하나 북한산성의 둘레는 도성에 비하여 5리나 더 된다고 하며 지세의 험함도 도성보다 더하므로 이 또한 넓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북한산성을 새로 쌓는 공력을 도성을 증수(增修)하는 데 들인다면 그것이 한층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있는 곳으로서 사민(士民)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성들과 더불어 함께 지키면서 이들로 하여금 각자 자기 부모를 보호하고 처자를 보존하게 한다면 어느 누군들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바쳐 이를 지키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신완이 말하기를, “험조(險阻)한 점으로 말하면 북한산성이 훨씬 더합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에 주필하는 문제에 대하여 의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도성은 종묘와 사직이 여기에 있고 신민들이 여기에 살고 있으니 참으로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입니다. 이미 북한산성을 쌓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 도성이라도 쌓아서 근본에 대한 계책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이여가 말하기를, “미리 대비하는 대책으로 말하면 바다의 방위에만 의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당 먼저 육지의 병력을 안정시켜서 근본을 튼튼하게 한 다음에 이를 굳건히 지켜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 실로 훌륭한 계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산성은 비록 험고(險固)하다고 말하지만 만약 도성을 적에게 내주고 위축된 병력을 가지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한다면 이는 결국 적들과의 간격이 단지 하나의 성문(城門)을 격한 것이 될 뿐이니, 이러고도 능히 사람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감히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성을 버리고서 군부(君父)를 모시고 북한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 만전(萬全)을 도모하는 계책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경인년(1710, 숙종36)에 장신(將臣) 이기하(李基夏)와 김석연(金錫衍)을 보내어서 북한산성 축성(築城)의 편의 여부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이에 김석연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이덕형(李德馨)은, 바로 도성의 지근(至近) 거리에 이와 같은 천연의 요새가 있는데도 이를 그냥 버려두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결단코 이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 바다의 도적이 염려된다는 북자(北咨 청나라의 자문(咨文))로 인하여 상도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묘년(1711, 숙종37) 4월에 성을 쌓기 시작해서 이해 9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다음 해 임진년 4월에 거가(車駕)가 이곳에 행행(幸行)하여 그 천연의 험고함에 감탄하였다. 성의 둘레는 7620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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