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영의정 홍공 시호를 행한 행장

영의정 홍공(洪公)의 시호를 청한 행장

아베베1 2013. 2. 27. 08:12


 


     이미지 사진은 삼각산 의상능선 의 모습 2013.2.22. 삼각산 산행시 촬영 


약천집 제2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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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장(行狀) 부 언행록(附言行錄)
영의정 홍공(洪公)의 시호를 청한 행장 정묘년(1687, 숙종 13)

인조(仁祖)ㆍ효종(孝宗)ㆍ현종(顯宗) 세 조정에 명신(名臣)인 홍공 명하(洪公命夏)가 있었으니, 자가 대이(大而)이고 호가 기천(沂川)이며 관향이 남양(南陽)이다.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고려조부터 시작하여 고려가 끝날 때까지 장수와 정승이 된 자가 15대를 이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 선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냈다. 휘 춘경(春卿)은 벼슬이 관찰사이고, 이분이 휘 성민(聖民)을 낳으니 두 공신에 책록(策錄)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조 판서로 양관의 대제학을 겸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분이 휘 서익(瑞翼)을 낳으니 세상이 어두운 때를 당하여 벼슬이 분병조 참의(分兵曹參議)였다. 이상은 공의 3대 선조인데 모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8세에 문장을 지었고 13세에 초시(初試)에 입격하였으며 관례한 뒤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중간에 과거에 낙방하고 음직(蔭職)으로 세마(洗馬)와 부솔(副率)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으며, 또다시 찰방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사양하고 체직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문과에 급제하니, 조야에서는 훌륭한 인물을 얻었다고 서로 축하하였다. 분관(分館)하기 전에 천거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고 참하관(參下官)으로 있으면서 옥당에 기록되니, 모두 한때의 지극한 명망이 있는 곳이다. 6품으로 올라 정언에 제수되고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헌납으로 승진하였다.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갔다가 들어와 사헌부, 옥당, 이조의 낭관, 검상(檢詳),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원손강서원(元孫講書院)의 익선관(翊善官)과 찬독관(贊讀官) 및 세자시강원의 문학을 겸하였다. 암행어사로 관동 지방과 경기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가례도감(嘉禮都監)에서 복무한 공로로 품계가 올랐으며 승정원의 승지로 들어갔다.
또다시 문신의 정시(庭試)에 급제하고 예조ㆍ병조ㆍ공조의 참의와 대사간, 승문원 부제조를 역임하였으며, 특별히 선발되어 한성부 우윤에 발탁되고 비변사와 선혜청의 당상을 겸하였다. 여러 조의 참판과 부제학, 대사헌, 도승지, 대사성을 두루 거치고는 형조 판서로 품계를 뛰어넘어 승진하였으며, 호조 판서로 있다가 이조 판서로 옮겨 가고 경연과 도총부, 세자우빈객을 겸하였다. 우참찬, 예조와 병조의 판서에 제수되고 수어사(守禦使)를 겸하였는데, 동전(東銓 이조)에 판서가 된 것이 세 번이요 서전(西銓 병조)에 판서가 된 것이 두 번이며 판의금부사를 겸하였다. 예조 판서로 있다가 우의정에 대배(大拜)되고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세자부(世子傅)와 호위대장을 겸하였으며 영의정에 오르고 세자사(世子師)를 겸하였다. 나이 61세에 별세하였다.
공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는 청렴하고 충성하는 조행(操行)이 드러나서 선한 사람들의 종주(宗主)가 되고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된 지가 20년이 넘는다. 언론에 나타나고 행사에 드러나 기록할 만한 것이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가 없으므로 지금 조정의 중요한 계책과 군주의 융숭한 예우로 시운에 관계된 것만을 가지고 말하겠다.
공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세교(世敎)를 유지하려는 뜻이 있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백씨(伯氏)인 남녕공(南寧公)의 서번(西藩 평안도 관찰사)에 있는 임소로 모부인(母夫人)을 문안 갔는데, 나덕헌(羅德憲) 등이 심양(瀋陽)에 사신 갔다가 왕명을 욕되게 했다는 말을 듣고는 남녕공을 도와 상소를 올려 그의 목을 베어 머리를 오랑캐 땅으로 보낼 것을 청하였다.
낮은 관직에 있을 때부터 이미 세도를 만회하려는 뜻이 있었다. 병술년(1646)에 처음으로 사간원의 관직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김자점(金自點)이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그의 아들 김련(金鍊)이 특지로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자 공은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낙정(樂靜) 조공(趙公 조석윤(趙錫胤))이 직언을 하다가 왕의 뜻을 거슬렀는데, 대사헌 이하 여러 사헌부의 관원들이 조공과 의견을 달리하자 공은 모두 잘못을 들어 탄핵하였다. 이 때문에 상의 엄한 견책을 받고 먼 고을로 쫓겨났다. 돌아오게 되자 아전과 백성들이 화상(畵像)을 그려 제사하고 비석을 새겨 추모하는 마음을 붙였다.
효종이 처음 즉위하자 공이 첫 번째로 이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는데, 홀로 엄격한 풍모를 유지하여 공정한 도를 넓히고 요행을 억제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그리하여 장관이 의망하려는 자가 혹 적임자가 아니면 그때마다 반대하였고 반대해도 되지 않으면 붓을 던지고 일어나니, 당시 사람들이 낭관의 체통을 얻었다고 칭찬하였다. 상소를 올려 선왕조의 간신(諫臣)인 홍무적(洪茂績)ㆍ이응시(李應蓍)ㆍ심노(沈) 등을 석방할 것을 청하였으며, 심양저(瀋陽邸)의 군관(軍官)이었던 사람을 특별히 수령에 제수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니, 상이 충직하다고 칭찬하였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두 분이 조정의 의논이 분열된다 하여 서로 이어 도성을 떠나자, 공은 상소를 올려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더욱 극진히 해서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돌려 국민의 희망을 거듭 잃지 말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은 충직한 말을 연달아 올린다고 칭찬하였다. 이때 정사를 말하는 자들이 좌절을 많이 당하여 혹 관직 임명 시 낙점을 받지 못하곤 하니, 공은 언로를 깊이 염려하여 수천 자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서 간언을 받아들이는 뜻을 극구 아뢰었다.
상은 답하기를, “신하의 도리는 충성을 다함에 있고 군주의 도리는 간언을 받아들임에 있다. 네가 이미 직분을 다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며, 또다시 승정원에 유시하기를, “원래의 상소문에 볼 만한 점이 많이 있으므로 궁중에 남겨 둔다.” 하였다. 공은 옥당에 있을 때에 여러 번 차자와 상소를 올려 군주의 덕과 당시의 정사를 논하였으며, 언로를 논함에 있어서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승정원에 있을 때에 왕명에 따라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대신(臺臣)들이 조금만 성상의 뜻을 어기면 그때마다 엄한 명령을 가하시고 지난번에는 또 베어 죽이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하의 이 말씀이 반드시 참으로 베어 죽이시려는 것은 아니나 성인(聖人)은 희롱하는 말이 없으니, 어찌 분노할 때에 가볍게 말씀을 내어서 사방의 이목을 놀라게 하십니까. 우리 조종조의 가법(家法)은 여러 신하들을 예우하여 일찍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선대왕에 이르러서는 재위하신 27년 동안 조정의 신하가 비록 어리석고 미련하여 스스로 죄와 과오에 빠지더라도 일찍이 털끝만큼도 베어 죽인다는 생각을 두신 적이 없었으니, 더구나 이것을 말로 나타내셨겠습니까.” 하였다.
상은 경연에 임하여 공에게 유시하기를, “그대의 상소문은 나의 병통에 매우 적절하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우대하는 비답을 내려 권장할 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문자로 형용하는 것은 진실하지 않을 듯하므로 특별히 대면하여 유시하는 것이요, 소본(疏本)은 우선 궁중에 남겨 두어 다시 보겠다.” 하고는 인하여 상소문 안에 진술한 당시의 폐단을 세세히 물었으며, 또 표범 가죽을 하사하고 말하기를, “이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나 나의 뜻을 표하노라.” 하였다. 공은 이에 더욱 성상의 지우(知遇)에 감동하여 일을 따라 말을 다하니, 상 또한 돌아보고 유념함이 더욱 중하였으며, 새로 한성부 우윤을 제수하고 상이 쓰는 금건환(金巾環)을 하사하였다.
사간원에 장관으로 있을 때에 공은 성상의 체후가 편치 못하다 하여, 상소를 올려 마음을 깨끗이 해서 병을 다스리는 방법을 논하였으며, 또 하찮은 즐거움을 좋아하여 대업(大業)을 잊어버림을 경계하는 말을 아뢰었다.
상이 총애하는 아우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연경에 사신 가니, 일행들이 불법을 많이 저질렀다. 공이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자, 상은 그 대상이 인평대군이기 때문에 매우 노하였으며, 인평대군이 또 차자를 올려 격발시켰다. 이에 상은 공을 체직하고 연경 사행의 부사(副使)로 차임하였는데, 언로가 굳이 간하자 중지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끝내 전에 내린 명령을 다시 내렸다. 이에 공은 명령을 받고 국경을 나갔는데, 청렴함을 스스로 힘써 비록 서적과 향료와 약품이라도 털끝만큼도 가까이함이 없었다. 연경에서 으레 내려 주는 은과 비단을 모두 의주부(義州府)에 남겨 두었으며, 여행에 쓰고 남은 물자를 수행한 사람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었다.
아전(亞銓 이조 참판)으로 있을 때에 판서가 지방에 있어서 도목정(都目政)이 기한을 지나자, 상은 특명으로 공에게 도목정을 열게 하였다. 자연도(紫燕島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에 진영을 설치할 적에 상은 경연에서 특별히 공의 이름을 불러 말하기를, “자연도의 일을 모두 경에게 맡긴다.” 하였으니, 군주에게 인정을 받고 임무를 맡음이 이와 같았다. 사헌부에 있을 적에, 말을 올렸다가 죄를 얻은 자를 석방하여 충간하는 길을 널리 열어 줄 것을 청하였으며, 혼례와 상례와 제례를 한결같이 법전대로 행하여 사치하는 풍습을 금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천조(天曹 이조)의 장관이 되어서는 재변으로 인해 왕명에 따라 상소하여 정치하는 체통을 논하였는데, 자리를 비워 두고 현자를 초빙하여 반드시 초야에 있는 현자를 데려올 것을 청하자, 상은 충직하고 절실하여 오늘날의 좋은 약석(藥石)이 될 만하다고 칭찬하였다. 또 겨울에 천둥으로 인해 상소하여 경계의 말을 올려서 인재를 진작시켜 새롭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은 또 칭찬하고 받아들였다.
기해년(1659, 효종 10) 봄에 지평 윤휴(尹鑴)가 송도(松都)의 선비 집안에서 대대로 장례해 온 땅을 빼앗으려 하여 송사하였으나 패소하고는 사직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선비를 예우하는 도리는 그가 사직하였다고 해서 체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이에 공은 나아가 아뢰기를, “직책이 시종관의 대열에 있으면서 이름이 송사의 문안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염치를 무릅쓰고 나와 벼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연신이 또다시 억울함이 풀리지 못했다고 말하자, 공은 사정에 치우친다 하여 배척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자녀들이 어미의 옥사에 연좌되어 군(君)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하였는데, 상이 은혜를 미루어 벼슬을 내려 주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에 공이 대답하기를, “성상께서는 징(澂)과 숙(潚)을 보호하고 석방하여 돌아오게 한 다음 관작을 회복시켜 주셨으니, 법을 굽혀 은혜를 폄에 있어 어찌 피차의 간격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 말로 재앙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하니, 상은 측은히 여겨 눈물을 흘리고 따랐다.
또 왕명에 따라 상소를 올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닦아서 각각 직책을 다하고 한결같이 공정하게 하여 기강을 세울 것을 아뢰자, 상은 답하기를, “의미심장하다, 경의 이 말이여.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우려할 만한 일이 목전에 가득함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으며, 천재지변이 거듭 나타남을 어찌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도성의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구휼하였는데, 이때 사대부로서 혹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고 속여서 받아 가는 자가 있었다. 공의 사위 이름도 그 가운데에 있었는데, 공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라 즉시 삭제해 버리게 하였다. 우재(尤齋) 송공 시열(宋公時烈)이 상에게 아뢰기를, “《대학(大學)》의 의리에 녹을 먹는 집안은 백성과 작은 이익을 다투지 않는 법인데, 사대부로서 이 의리를 아는 자는 오직 홍모(洪某)가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현종(顯宗)이 새로 즉위하자, 공은 다시 이조 판서가 되어 내수사(內需司)에서 법을 어기고 절수(折受)한 것을 강력히 간쟁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꾸짖었다. 공이 항거하는 상소를 올려 밝게 분변하고 이어 선왕조의 유교(遺敎)를 어길 수 없음을 아뢰자, 상은 뉘우치고 깨닫는 뜻을 열어 보여주었다.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대왕대비가 효종(孝宗)의 상에 기년복(期年服)을 입은 것을 가지고 상소하여, 우재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두 분을 모함하였다. 상이 그의 간악함을 깊이 헤아리고 특명으로 삭탈관직을 하였는데, 공은 상소를 올려 음과 양이 사라지고 자라나는 기회를 가지고 깊이 경계하였다. 전 판서 조경(趙絅)이 또다시 상소하여 윤선도를 비호하자, 공은 청대(請對)하여 간사함과 바름을 통렬히 논변할 것을 강력히 청하니, 상은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상이 한해(旱害)로 인하여 신료(臣僚)들을 소대(召對)할 때에 공은 병으로 입대(入對)하지 못하고 상소를 올려 재앙을 사라지게 할 대책을 올렸는데, 그 조목은 진실한 덕을 닦아 천심(天心)을 감동시키고 근본인 마음을 깨끗이 하여 수양을 다하며, 근검절약을 숭상하여 나쁜 폐습을 고치고 시비를 분명히 밝혀 조정을 바로잡으며, 강학(講學)을 힘써 정치하는 도리를 넓히고 유현(儒賢)을 불러 성상의 덕을 보필하며, 인재를 극진히 배양하여 인물을 키우자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의정부에 오르자, 첫 번째로 각 아문과 세력가와 토호들이 어살〔漁箭〕과 나뭇갓〔柴場〕을 불법으로 차지하는 것을 엄금하고 처벌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군주의 기강을 총괄하고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도모하며 어진 이와 인재를 선발하고 간쟁을 받아들이는 등의 일을 가지고 조목조목 경계의 말을 아뢰었다.
또다시 정사(正使)로 연경에 갔는데, 상은 특별히 중사(中使)를 보내어 서쪽 교외에서 선온(宣醞)하고 두 아들에게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공은 상의 지극한 보살핌에 감격하여 상소를 올려 사례하고, 인하여 조정의 정사와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개혁할 것과 그 시행을 아뢰었는데, 상은 우대하여 받아들였다. 공이 돌아와서 복명하자, 상은 직접 대면하여 위로하였다. 공은 이때 서도(西道) 지방의 포흠 난 환자(還上)와 이웃과 친족들에게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탕감해 줄 것과 관향(管餉)의 포자(鋪子)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는데, 모두 들어주었다.
별자리의 변고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면직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사치의 폐단은 반드시 나라를 망치는 데 이르게 합니다. 흥평위(興平尉)의 집 칸수가 너무 많아서 200여 칸에 이르고, 또 2층의 누각이 있어 매우 참람하고 한도를 넘었으니, 허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또한 받아들였다.
장령 이무(李堥)가 상소하여 우상 허적(許積)이 인망(人望)이 아니라고 배척하자, 상은 대신을 동요시킨다 해서 삭탈관직 하여 내쫓도록 명하였다. 간관이 이를 간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귀양 가거나 삭탈관직 되는 자가 계속 이어졌으며 또 이무의 죄를 한 등급 더 올렸는데, 공이 두세 번 강력히 간쟁하자 상이 이로 인해 간관을 귀양 보내라는 명령을 환수하였다.
뒤에 공은 별자리의 변고로 인하여 면직을 청하고 이무가 죄를 받음이 너무 지나침을 아뢰었으며, 등대하여 또다시 이무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지극히 아뢰었다. 뒤이어 또다시 차자를 올려 여섯 가지의 잘하지 못한 조목을 가지고 스스로 탄핵하고, 초야에 있는 유신을 불러와 계옥(啓沃)의 책임을 전담시켜서 근본을 바로잡아 훌륭한 정치를 펴는 도리를 다할 것을 청하였다.
영남의 유생 유세철(柳世哲)이 윤선도의 의논을 근본으로 하여 흉악한 상소를 올리자, 공은 청대(請對)하여 변론하기를, “기해년의 복제는 바로 대신들이 모여 의논해서 여쭈어 행한 것이요, 유신이 홀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히 허목(許穆)의 상소문이 나오고 뒤이어 윤선도와 조경(趙絅)의 상소가 있었으며, 이 상소문에 또다시 고묘(告廟)할 것을 청하고 있으니, 그 뜻은 오로지 송시열 등을 모함하여 해쳐서 지극한 죄를 가하려는 것입니다. 어찌 흉악하고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간사한 자와 바른 자가 서로 알력을 일으키는 것은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바입니다. 옛날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그 단서가 매우 미약하였으나 끝내 큰 화를 이루었으니, 어찌 오늘날에 또다시 이러한 일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예(禮)를 의논하는 것은 본래 의견이 분분하여 정론이 없는 취송(聚訟)이라고 일컬어져 오니, 만약 예를 논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냥 두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로써 사람을 모함하여 분풀이하려는 밑천으로 삼으니, 거절해서 확연(廓然)히 물리치지 않는다면 후일의 근심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은 굳이 통렬히 변론함을 급선무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요, 여러 신하들과 서로 의논해서 방한(防閑)을 세워 근원을 막는 바탕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방한을 세우는 것은 사람의 입을 막는다는 비난을 부를까 두렵습니다. 오직 당초에 고금을 참작하여 국가의 제도를 따랐다는 뜻으로써 명백하게 구분하고 풀어 주어서 중외의 사람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이때 병자년(1636, 인조 14)에 청나라로 잡혀갔던 백성이 달아나 돌아왔다가 다시 간 자가 있었다. 이 일을 조사하는 사신이 와서 관(館)에 있었는데, 조정의 의논이 흉흉하여 “달아나 돌아온 자를 즉시 잡아 돌려보내지 않은 것은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약조에 위배되니, 잘못이 조정에 있어 화를 장차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상이 이 일을 끌어다 스스로 책임져 신하들의 죄를 늦추어 주고자 하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이 의리이니, 어찌 감히 군주에게 죄를 떠넘기고 스스로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사신을 대하여 말하기를, “오늘날의 일은 죄가 신하들에게 있으니, 주상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국왕은 이 일을 몰랐는가?” 하니, 공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군주의 죄를 증명하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의 잘못을 증명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금수도 하지 않는 짓인데 어찌 이것을 묻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은 얼굴빛이 흙빛이 되어 서로 돌아보고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처럼 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상은 공손한 말로 스스로 책임을 져 청나라 사신에게 미봉책으로, 여러 신하들을 유배 보내는 형률로 처벌하기로 하고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청나라 자문(咨文)에 회답하게 되어서는 여러 신하들의 죄를 면하게 해 주고 조정에서 5000금(金)의 벌금을 물게 되었다. 공은 말하기를, “벌이 군부(君父)에게 돌아가고 신하가 관작과 녹을 보존하는 것은 절대로 이러한 이치가 없다.” 하고, 여러 번 사직하는 단자를 올렸으나 상은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군주가 치욕을 당한 것을 애통해하여, 묘당(廟堂)의 여러 신하들이 책임지고 자신의 죄로 삼지 못한 것을 논해서 체직할 것을 청하자, 상이 크게 노하여 양사(兩司)의 관원을 모두 귀양 보냈다.
그 후 사간 이후(李垕)가 외직으로 있다가 와서 비로소 청나라 사신이 조사할 적에 공이 스스로 죄를 책임진 실상을 말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오히려 석연치 않아 하였다. 그러나 이로써 죄를 주자는 청원은 오직 다른 정승에게만 미치고 공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공이 성 밖으로 나가 대죄하자, 상은 어찰(御札)로 불러 위로하고 풀어 주려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공은 여러 번 차자를 올려 면직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유배 보낸 신하들을 소환할 것을 청하였는데, 오랜 뒤에 상이 공의 체직을 허락하였다.
상이 온천에 행차할 때에 공에게 대가(大駕)를 따라오도록 명하고 또 가교(駕轎)를 내려 주었는데, 공은 작은 수레를 타고 행궁에 뒤따라 도착해서 들어가 사례하며 말하기를, “대간들이 논한 것은 군부를 높이고 의리를 밝히려는 데서 나온 것이니, 그들을 꺾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성상의 노여움이 그치지 아니하여 한결같이 모두 귀양 보내고 쫓아내셨으니, 이미 성상의 덕에 누가 되고 또 언로에 방해가 됩니다. 그리하여 신등의 죄가 갈수록 한층 더해집니다.” 하고 반복해 마지않으니, 상이 비로소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다시 완전히 석방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행재소(行在所)에서 유신(儒臣)들을 부르고 연세가 높은 분을 높이며, 백성들의 부역을 줄이고 어진 수령을 표창하며, 억울한 옥사를 살피고 혼인하는 비용을 도와주며, 인재를 방문하고 본군(本郡)의 문묘(文廟)에 치제(致祭)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공이 호종하고 돌아와 강가에 머물며 감히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니, 상이 어찰을 내렸는데 “경이 만약 오지 않으면 나도 부르는 것을 그치지 않겠다.”는 전교가 있었다. 공이 부득이 대궐에 나아가서 귀양 보낸 신하들을 완전히 석방할 것을 다시 청하자, 상은 이를 허락하였다. 공이 즉시 물러나 강가로 돌아오니, 얼마 후 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표류하던 선박이 제주도에 정박하였는데, 선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중국식 의관을 그대로 따르고 영력(永曆)의 책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영력황제(永曆皇帝)는 바로 융무(隆武)의 뒤를 이어서 조경(肇慶)에서 즉위한 자였다. 조정의 의논은 장차 이 사람을 연경으로 압송하려 하였는데, 공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압송하는 것은 의리상 불가하니, 우리 측에서 편의대로 선처해야 합니다.” 하였으며, 또 거듭 성상 앞에서 간청하였으나 끝내 청나라와의 약조를 두려워하여 공의 의견이 시행되지 못하였다.
한해(旱害)로 인해 여러 도의 전세(田稅)와 신공(身貢)으로 바치는 삼베를 줄일 것을 청하였다. 어떤 연신(筵臣)이 명년에 만약 다시 흉년이 들면 경비가 염려스럽다고 말하자,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하늘이 만약 송나라에 복을 내린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마침 별이 떨어지는 변고가 있자,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재앙이 대신에게 있다.”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가 장차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병이 위독하였다. 의원의 문진(問診)이 도로에 이어지고 궁중의 관원이 문병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은 놀라고 슬퍼하여 철조(輟朝)하고 소찬(素饌)을 들었으며, 원조(元朝)의 하례를 정지하고 조문과 부의를 내리고 치제하였으며, 관에서 초상과 장례를 돕기를 모두 예대로 하였다. 사대부들은 서로 조정에서 조문하였고 여항의 백성들은 집으로 달려와 곡하였는데, 모두들 한탄하고 크게 한숨 쉬며 말하기를, “어진 정승이 별세하였으니 나라가 장차 어찌될꼬.” 하였다.
공은 평소 경연에 나아가 아뢰고 대답한 것 외에 간하는 상소 50여 장을 올렸는데, 이것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언제나 정자(程子)의 ‘군주의 잘못을 간할 줄만 알고 군주의 덕을 기르게 할 줄은 알지 못한다.’는 말을 가지고 군주를 섬기는 경계로 삼았다. 그러므로 위태로운 것과 의심스러운 것이 싹트려 하고 군주의 허물이 드러나기 이전에 기미에 앞서 미리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효종 때에 신하를 베어 죽인다는 하교를 하지 말도록 청한 것이 바로 그 한 가지 일이며, 일찍이 현종에게 아뢰기를, “궁중이 엄숙하지 못해서 종친과 외척이 편복(便服)을 입고 궁중에 들어가 밤새도록 유숙하는 자가 있으니, 그 버릇을 조장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현종이 일찍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묻기를, “궁중의 말이 혹 외부로 나가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자, 공은 나아가 아뢰기를, “외간의 말을 내간에 전하는 자가 바로 그 계제(階梯)입니다.” 하니, 당시에 이것을 명언이라 하였다. 공이 은미한 것을 걱정하고 먼 훗날을 염려하는 충직함이 이와 같았다. 또 일찍이 현종에게 아뢰기를, “예조에서 이미 혼례, 상례, 제례를 정하여 중외에 거듭 분부하였는데,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을 천장(遷葬)할 때에 궁중에서 내온 제물(祭物)이 너무 지나치게 풍성합니다. 궁중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바깥사람들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늘날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각자 자신의 아내와 딸이 사용하는 금으로 만든 봉황 비녀와 수놓은 치마를 없앤 뒤에야 백성들이 정해진 한도를 넘는 것을 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상하를 바로잡고 풍간함에 간절함이 이와 같았다.
세금을 적게 거두고 부역을 줄이며 비용을 절감함으로써 백성을 기르는 근본을 삼음에 이르러서는 바로 종신토록 정성을 들인 바였고, 마음속에 성심을 쌓아 위로 군주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므로 언제나 건의하고 요청하면 비록 여러 사람의 의논이 저지하고 동요하더라도 끝내 빼앗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은택이 반드시 백성들에게 미쳐서 일일이 다 셀 수가 없다.
동전(東銓)과 서전(西銓)을 맡았을 때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과 의견의 같고 다름에 따라 인물을 취사선택하지 않았으며, 친분과 청탁에 따라 끌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인물을 나오게 하고 물러나게 한 것이 전후에 걸쳐 10여 년이 넘었는데도 비난하는 말이 끝내 미치지 않았다. 예론(禮論)이 일어난 뒤부터 흉악한 사람들이 화를 야기해 기아(機牙)가 간간이 나오니, 공은 세도(世道)를 깊이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전후로 면대(面對)하고 상소하여 아뢸 적에 번거롭고 중복됨을 싫어하지 않고 성상의 마음이 환히 깨닫기를 기필하였으며, 단지 한때의 선과 악을 구별할 뿐만이 아니었다.
평소 사양하고 받는 예절에 가장 엄격하였고, 뇌물 받는 것을 깊은 수치로 여겼다. 곤궁할 때에 자형(姊兄)이 가까운 고을에 수령으로 있었으나 한 번도 편지하여 구걸한 적이 없었으며, 높은 지위에 올라서는 여러 고을에서 올리는 세찬(歲饌)도 숫자가 많으면 또한 받지 않았다.
자신을 받들기를 간략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니 이는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살던 집이 오두막에 문이 낮았으나 종신토록 서까래 한 개도 더 보태지 않았으며, 외출할 때에 탈 말이 없었는데 사위가 작은 말 한 마리를 올리자 10년 동안 타고 바꾸지 않았다. 먹을 때에는 밥상에 맛있는 음식을 두 가지 이상 놓지 않았으며, 옷은 해마다 만들어 입지 않았고 조복(朝服)도 해지고 때가 낌을 면치 못하였다. 효종이 일찍이 공을 칭찬하여 이르기를, “홍모는 지위가 총재에 올랐으나 검소함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하고는 특별히 초피(貂皮) 모자와 비단 및 쓰던 보도(寶刀)와 가죽신과 띠를 하사하여 장려하였다.
효종은 즉위하자 자나 깨나 어진 이와 호걸들을 생각하고 여러 신하들을 차례로 선발하여 심복으로 위임하였는데 공이 실로 그중에 첫 번째였고, 또 자중 자애하는 선비들을 초빙하여 나라를 편안히 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이에 산림에 있는 여러 현자들이 함께 조정에 도열하여 거의 국정이 새로워졌다.
공은 좌우에서 주선하고 상하를 소통시켜 혹은 목공(繆公)을 위하여 자사(子思)의 곁에 있었고 혹은 설류(泄柳)와 신상(申詳)을 위하여 목공의 곁에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이 조정에 나오면 함께 가부(可否)를 서로 이루어 함께 공경하고 서로 화합해서 간격이 없었고, 이들이 조정에서 물러나면 이들을 위하여 강력히 청하여 불러 돌아오게 해서 돈독히 보필할 것을 책임 지웠다. 그리고 현종이 즉위함에 이르러서도 성실한 마음이 한결같으니, 이 때문에 공이 세상을 마치도록 사림들이 공에게 의지하여 편안하였다.
또 상에게 경계의 말을 올려서 반복하여 그치지 않았는데, 언제나 언로를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러므로 말 때문에 견책을 입은 자가 있으면 간곡히 개진하여 끝내 반드시 풀려나게 해 줄 것을 기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혹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록 횡역(橫逆)이 심해도 언짢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그 사람을 위하여 밀어주었으니, 이른바 ‘군주에게 간하고자 한다면 먼저 남의 간언부터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공은 실제로 지니고 있었다. 사대부들의 마음을 크게 복종시킨 것이 특히 이 점에 있었다.
다른 일은 논할 것이 없고 우선 구만(九萬)이 몸소 직접 경험한 것을 가지고 말하겠다. 공이 사헌부 장관으로 있을 때에 구만이 마침 정언에 임명되어 일로 인하여 거역하는 말을 올렸는데 말이 실로 불손하였는바, 공은 끝내 이 때문에 인피(引避)하고 체직하였다. 그리고 구만이 대사간으로 있을 때에 공은 상부(相府 정부)에 있었는데, 또다시 정사 때문에 서로 충돌하여 내가 말을 가릴 줄 모르니 옆에서 듣는 자들도 견디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평탄하게 받아주어 안색과 말소리에 나타내지 않고 마음속에 개의치 않았으며, 그 뒤에 구만을 대하는 것이 더욱 지극하고 간곡하여 정성스러운 뜻이 넘쳤다. 구만은 이에 비로소 세상에 과연 도량이 넓은 군자가 있어서 보통 사람의 심정으로는 헤아릴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신하들을 관찰해 보니, 바른말을 하고 직간을 하여 군주의 안색을 범하면서 그릇됨을 바로잡는 자가 진실로 많았다. 그러나 인재를 좋아하고 후진들을 권장하여 비록 자신을 저촉하거나 범함이 있어도 끝내 서운해하는 바가 없는 자는 옛날 역사책에서 찾아보아도 거의 없다시피 하여 겨우 있을까 말까 하였고 근대에는 실로 오직 공 한 사람뿐이다. 이는 구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요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이 공공연히 칭송하는 바이다. 높은 지위에 있고 국가의 정권을 잡아서 군주의 혈구(絜矩)의 정치를 돕는 자는 어찌 공에게서 법을 취하지 않겠는가.
공이 별세한 지가 이제 장차 2기(紀) 곧 24년이 되는데, 자손들이 일찍 죽음으로 인해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아직도 상부에 청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함께 답답해하고 한탄하는 바이다. 이에 감히 행장을 지어 실제를 기록해서 태상(太常)에게 보내어 상고함이 있게 하는 바이다.

[주D-001]심양저(瀋陽邸) : 효종이 볼모로 잡혀가 머물렀던 곳이다.
[주D-002]금건환(金巾環) : 금으로 만든 두건 위의 옥환(玉環)을 이른다.
[주D-003]계옥(啓沃) : 대신이 선언(善言)을 아뢰어 임금을 보필함을 이르는 것으로 《서경(書經)》 열명(說命)의 “네 마음을 열어서 내 마음에 대도록 하라.〔啓乃心 沃朕心〕”는 말을 축약한 것이다.
[주D-004]가교(駕轎) : 임금과 세자의 장거리 행차에 사용하는 가마를 이른다. 임금의 보편적 교통수단이었던 연(輦)을 간편하게 개량한 것으로, 말을 앞뒤에 한 마리씩 두어 안장의 양편에 패의 끝을 걸어 끌게 하였고 황색의 복장을 한 하인들이 앞뒤 양쪽에 채가 흔들리지 않도록 누르며 갔다.
[주D-005]양이(量移) : 멀리 유배된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김을 이른다.
[주D-006]영력황제(永曆皇帝)는 …… 자였다 : 영력황제는 명나라의 명맥을 유지한 주왕(柱王) 주유랑(朱由榔)으로 영력은 그의 연호이며, 융무(隆武)는 당왕(唐王) 율건(聿鍵)의 연호이다. 조경(肇慶)은 지금의 광동성(廣東省) 일대를 가리킨다.
[주D-007]하늘이 …… 것입니다 : 송(宋)나라 신종(神宗)이 승하한 다음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사마광(司馬光)이 집권하여 왕안석(王安石)이 시행한 신법(新法)을 모두 바꾸었다. 혹자가 사마광에게 “옛 신하인 장돈(章惇)과 여혜경(呂惠卿) 등은 모두 소인인데 후일 부자간의 의리로 이간질하면 붕당(朋黨)의 화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자, 사마광은 정색하고 “하늘이 만약 우리 송나라를 돕는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그대로 개혁하였는데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宋史全文 卷13 宋哲宗》
[주D-008]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 계곡(谿谷) 장유(張維 : 1587 ~ 1638)의 봉호이다. 자는 지국(持國)이고 본관은 덕수(德水)로 효종(孝宗)의 비(妃)인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부친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문장에도 능하였으며, 1631년(인조 9) 딸이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에게 출가하여 신풍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고 시호가 문충(文忠)이다.
[주D-009]예론(禮論) : 1659년(효종 10) 5월 효종이 승하함에 따라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를 기년으로 정하였는바, 이듬해 4월 남인(南人)인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자의대비의 복제를 3년으로 해야 한다는 설을 주장함으로써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을 가리킨다.
[주D-010]기아(機牙) : 쇠뇌의 시위를 잡아당겨 화살을 놓는 기관을 이르는데, 상대방을 해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011]목공(繆公)을 …… 있었다 : 목공은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군주이고 자사(子思)는 공급(孔伋)의 자(字)로 공자(孔子)의 손자이며 설류(泄柳)와 신상(申詳)은 모두 당시의 현자였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옛날에 노나라 목공은 자사의 곁에 자기의 성의를 전달할 사람이 없으면 자사를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였고, 설류와 신상은 목공의 곁에 보좌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그 몸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였다.” 하였다.
[주D-012]가부(可否)를 서로 이루어 : 정사에 있어 무조건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 가장 알맞은 방법을 취함을 이른다.
[주D-013]혈구(絜矩) : 혈(絜)은 헤아리는 것이고 구(矩)는 곡척(曲尺)으로 네모나게 만드는 기구로, 혈구는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도(道)를 말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10장에 “윗사람에게서 싫어했던 것으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서 싫어했던 것으로써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 오른쪽에게서 싫어했던 것으로써 왼쪽을 사귀지 말며 왼쪽에게서 싫어했던 것으로써 오른쪽을 사귀지 말지니, 이것을 일러 구(矩)로 헤아리는 도(道)라고 한다.〔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