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좌참찬 박공 묘지명

좌참찬(左參贊) 박공(朴公) 동선 묘지명

아베베1 2013. 2. 27. 08:25


 





약천집 제15권

 묘지명(墓誌銘)
좌참찬(左參贊) 박공(朴公) 묘지명 을묘년(1675, 숙종 1)

좌참찬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박공을 숭정(崇禎) 경진년(1640, 인조 18) 2월 모일에 김포군(金浦郡) 마산리(馬山里) 신좌(辛坐)의 산에 장례하였다. 장례한 지 36년 만에 공의 손자인 승지 세견(世堅)과 응교(應敎) 세당(世堂)이 유당(幽堂)에 지문(誌文)이 없어 세월이 오래되면 증거할 것이 없을까 깊이 우려해서 태학사(太學士) 조공 복양(趙公復陽)이 지은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구만(九萬)에게 명문(銘文)을 부탁하니, 내 감히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구만은 늦게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나 미처 공의 문하에 오르지 못했으나 오직 응교군(應敎君)이 구만의 자형(姊兄)이 되어서 다행히 혼인의 우호를 맺어 유풍(遺風)을 익히 들었으므로 이에 감히 행장을 받아 차례대로 실적(實跡)을 기재하는 바이다.
공은 휘가 동선(東善)이고 자가 자수(子粹)이니, 그 선대는 신라 왕족에서 나와 나주(羅州) 반남현(潘南縣)을 관향으로 삼았다. 고려 말에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 상충(尙衷)이 있었는데, 충절(忠節)로 권간(權姦)에게 저촉되어 유배 가던 도중 별세하니, 세상에서는 반남 선생(潘南先生)이라 칭하였다. 아들 시(訔)가 우리 태종조에 벼슬해서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기록되고 벼슬이 의정이며 시호가 평도(平度)였으니, 명망과 공렬(功烈)이 크게 빛났다. 증조는 이조 정랑(吏曹正郞) 휘 조년(兆年)이고, 조고는 사간(司諫) 휘 소(紹)이니, 호가 야천(冶川)인데 올바른 학문과 정직한 도(道)로 큰 명망을 이루었는바, 사암(思菴) 박 선생(朴先生 박순(朴淳))이 실로 묘갈명을 지었다. 선고는 사재감 정(司宰監正) 휘 응천(應川)이고, 선비(先妣)는 순천 김씨(順天金氏)이니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 희려(希呂)의 따님이다.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 17) 6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기축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경인년 문과에 올랐으며, 계축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고 갑자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가 얼마 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을축년 왕명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제수되었다. 경진년(1640, 인조 18) 정월 갑인일에 집에서 별세하였는데 아드님인 참판공 정(炡)의 공훈으로 은혜를 미루어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이력을 살펴보면 내직(內職)으로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시강원(侍講院)의 설서(設書)와 사서(司書),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 병조(兵曹)의 좌랑(佐郞)과 정랑(正郞), 성균관(成均館)의 전적(典籍)과 직강(直講), 예조(禮曹)의 좌랑과 정랑, 통례원(通禮院)의 상례(相禮)와 통례(通禮), 종부시 정(宗簿寺正), 사복시 정(司僕寺正), 사간원 대사간, 병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 이조 참판, 형조 판서, 지돈녕부사, 지중추부사, 의정부좌우참찬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議政府左右參贊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을 지냈는데, 참찬과 대사헌을 가장 여러 번 하고 오래하였다. 외직(外職)으로는 남포 현감(藍浦縣監), 경기 도사(京畿都事), 수안 군수(遂安郡守), 부평(富平)ㆍ인천(仁川)ㆍ남양(南陽)의 도호부사(都護府使),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으며, 외국에 나간 것은 하동지 부사(賀冬至副使)로 연경(燕京)에 갔었다.
공은 처음 벼슬할 때부터 내외직을 출입하며 차례로 승진한 것이 50여 년인데, 지론(持論)과 행한 일 중에 기록할 만한 일들이 많다. 지금 대략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처음 정언(正言)에 임명되자, 당시 상국 정철(鄭澈)을 모함한 일을 배척하다가 크게 미움을 받아 체직되어 떠나갔다. 남포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홍주(洪州)를 습격하려 한다는 것을 정탐하여 알고는 급히 수사(水使) 최호(崔湖)를 맞이하여 함께 토벌하려 하였다. 최호가 “나는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있으니, 어떻게 육지의 역적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공이 강력히 간하니 비로소 따랐다. 이에 최호와 함께 홍주에 가서 목사(牧使)인 홍공 가신(洪公可臣)과 병력을 합하여 성에 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성 아래에 이르러 큰소리만 지를 뿐 들어오지 못하다가 궁박한 실정이 드러나서 스스로 궤멸되어 떠나가니, 그 무리들이 이몽학을 목 베어 항복하였다. 이는 실로 공이 미리 알고서 먼저 대비한 공이었다. 조정에서 역적을 평정한 공로를 기록하여 처음에는 공신록(功臣錄)에 참여되었는데,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논박하여 고쳤으나 공은 끝내 침묵하여 이러한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공의 공로를 훌륭하게 여기지 않고 공로를 자랑하지 않음을 더 훌륭하게 여겼다.
정유년(1597, 선조 30) 왜구가 다시 쳐들어와서 남포현(藍浦縣)의 경내에 이르자, 공은 수사에게 청하여 함께 남포현 동쪽 옥마봉(玉馬峯)을 차단하고자 하였으나 수사가 따르지 않았다. 적이 남포현으로 들어오자 공이 아전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피할 적에 타고 다니던 말을 내주어 사람들을 건너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다. 수안 군수(遂安郡守)로 있을 때에는 치적이 뛰어남으로 인해 승진하여 임용하는 표창이 있었으나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기 위하여 즉시 부르지 않았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 적신(賊臣)들이 백관을 위협하여 정청(庭請)하려 하였는데, 공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위험하게 여겼다. 관아의 하리가 공을 위하여 몰래 관아의 문서에 공이 참여했다고 썼는데, 공은 즉시 실상을 드러내어 스스로 조정에서 말씀하기를 “관아의 하리가 함부로 기록한 것이니 나는 실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였다. 흉악한 무리들은 크게 놀라서 공이 서궁(西宮)을 위하여 충절을 세운다고 지적하고 멀리 유배 보낼 것을 논하였는데, 마침 우연한 일로 유배 가지 않게 되었다. 이로부터 공은 물러나 교외에 거주하였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하자 공은 자질(子姪)들을 거느리고 반정에 따랐는데, 인조가 등극한 다음 첫 번째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공이 간신들을 토벌하고 탐관오리들을 축출하며 병폐를 개혁하고 폐지된 것을 거행하였으니, 모든 새로운 교화를 폄에 대각(臺閣)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사헌부의 장관이 되자, 병인년 과거에 고관(考官)의 자제가 많음을 논하여 파방(罷榜)하였고, 정묘년 난리에 윤훤(尹暄) 등이 성(城)을 버린 죄를 탄핵하여 군법(軍法)을 바로잡았으며, 경오년 장릉(章陵)에 대한 추존이 이루어져서 장차 부묘(祔廟)하려 할 적에 공은 존호(尊號)의 글자수를 줄여 강쇄(降殺)하는 뜻을 보존할 것을 청하였다가 성상의 뜻을 거슬러 삭탈관직당하였다. 이 세 가지 일 중에 둘은 명문거족(名門巨族)과 관계된 것이어서 처단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하나는 군주의 효심과 관련된 일이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이었는데도 공은 모두 돌아보지 않았다. 윤공 황(尹公煌)과 이공 목(李公楘)은 공과 언론하는 자리에서 주선한 것이 많았는데, 공이 일을 당하면 그때마다 번번이 곧바로 나아가 직언을 올리고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옷깃을 여미고 탄복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
공은 인품이 온화하고 정직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았으며 질박하여 거짓이 없고 담박하여 경영함이 없었으며, 선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함이 지성에서 나오니, 보는 자들이 후덕한 장자(長者)임을 알았다. 모부인을 섬길 적에 정성과 효성을 구비하여 8, 90세에 이르러 모자(母子)가 모두 귀밑머리와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색동옷을 입는 즐거움이 있었으며, 과부가 된 누이를 데려다 한 집에서 살았는데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아무리 적어도 함께 먹었다. 여러 조카와 종손(從孫)들의 집이 수십 가호였는데, 무릇 아침저녁으로 밥 먹는 것과 관혼상제(冠婚喪祭)의 비용을 공에게 우러러 공급받지 않음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위엄을 세우지 않아도 엄격하여 내외가 엄숙하였으며, 비록 하인과 어린아이들이라도 공의 곁에 가까이 있으면 감히 나쁜 말로 사람을 꾸짖지 못하였다. 거처하는 곳에는 책상을 정돈하였고, 뜰과 집에는 한 점의 먼지도 없었다.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성종대왕(成宗大王)의 아홉 번째 아드님인 익양군(益陽君) 회(懷)의 증손녀이자 청성군(淸城君) 걸(傑)의 따님으로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가세(家勢)가 지극히 가난하였으나 집안일을 부지런히 힘써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서 남편의 뜻을 받듦이 매우 지극하였다. 병인년에 출생하고 경인년에 별세하였는데, 그해 9월 공의 묘소에 부장(祔葬)하였다.
1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바로 참판 정(炡)으로 정사 공신(靖社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풍도(風度)가 사림(士林)에 으뜸이었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으며, 딸은 찰방(察訪) 정사무(鄭思武)에게 출가하였다.
참판은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 세규(世圭)는 문학이 있었으나 일찍 요절하였고, 다음은 세견(世堅)이고, 다음은 세후(世垕)이니 또한 관례(冠禮)할 나이를 넘기고 요절하였고, 다음은 세당(世堂)이며 딸은 현감 이영휘(李永輝)에게 출가하였다. 찰방은 1녀를 두었으니 선비 박영(朴穎)에게 출가하였다.
세규의 두 딸은 이지만(李之萬)과 조창운(趙昌耘)에게 출가하였다. 세견은 2남을 두었으니 태상(泰尙)은 이조 정랑이고, 태소(泰素)는 생원으로 세규의 양자가 되었다. 세당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태유(泰維)는 진사이고 태보(泰輔)는 생원으로 세후의 양자가 되었다. 이영휘는 3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택(澤)ㆍ탁(濯)ㆍ식(湜)이고, 딸은 홍수적(洪受績)에게 출가하였다. 박영의 1남은 도화(道和)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 嗚呼
내가 근세의 선비를 살펴보건대 / 以余觀乎近世之士
신진들은 대부분 모남을 힘쓰나 / 新進者多淬厲圭角
만년에 지위가 높아지면 / 而遲暮隆滿
느슨해지지 않는 자가 실로 드물며 / 不弛置者實難
혹 겉으로는 크게 꾸며 명성을 내나 / 或外藩飾爲聲名
그 내면을 살펴보면 / 而察乎其內
힘써 스스로 다스리는 자가 또한 드물다 / 能斷斷自治者亦罕
공으로 말하면 지위가 상경에 오르고 / 若公位躋上卿
나이가 기구에 이르렀으나 / 年及耆耈
꼿꼿하여 아첨하지 않아서 / 而棘棘不阿
풍도가 더욱 매웠으며 / 風節益辣
사람을 대할 적에 성실하여 / 對人恂恂
마치 말을 잘하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 言若不出口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고 / 而篤于孝友
종족에게 은혜로웠으며 / 惠于宗族
가정에 엄숙하였다 / 肅于家室
갑작스러운 변란에 임기응변을 잘하였고 / 矧乎應機於卒暴之變
윤기를 보호하는 데 절개를 드높여서 / 抗節於倫紀之防
인자의 용맹과 군자의 강함을 징험하였으니 / 又以驗夫仁者之勇君子之剛
무릇 이는 명을 짓는 법에 부응하기에 / 凡此可以應銘法
이것으로 명을 짓노라 / 是以爲銘

[주D-001]정청(庭請) : 세자나 의정(議政)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궐 뜰에 나아가 중대 사건을 계품(啓稟)하고 하교를 기다리는 일을 이른다.
[주D-002]서궁(西宮) : 서궁에 있던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가리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