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한원부원군 조창원 행장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혜목(惠穆) 조공(趙公) 묘지명 정사년(1677, 숙종 3)

아베베1 2013. 2. 27. 20:31

 

 

 

 

 

 

 

약천집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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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墓誌銘)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혜목(惠穆) 조공(趙公) 묘지명 정사년(1677, 숙종 3)

저 옛날 병술년(1646, 인조 24) 봄 2월 30일에 한원부원군 조공이 집에서 별세하니, 인조대왕은 그를 위하여 이틀 동안 조회 보지 않고 중귀(中貴)에게 명하여 초상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유사(有司)가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양주(楊州) 땅에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17년이 지난 계묘년(1663, 현종 4) 겨울 10월 25일에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가 별세하자, 현종대왕(顯宗大王)은 앞서의 초상 때와 같이 예(禮)를 다하고 사전(四殿)이 수의(襚衣)를 하사하였다. 양주의 무덤이 묏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송도(松都)의 고운산(高雲山)에 이장하고 부인을 부장하였으며, 5년이 지난 무신년에 또다시 용인현(龍仁縣)의 동침동(銅鍼洞)으로 이장하였다. 8년이 지난 병진년에 또다시 양주 금곡촌(金谷村)의 선영 옆 묘좌(卯坐)의 산에 이장하였는데, 금상 전하께서 예장하기를 선왕과 같이 하였다.
지난 기유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時))에서 의론을 올리자 공에게 시호를 혜목(惠穆)이라 내려 이미 사당에 고유하고 신도비(神道碑)에 새겼다. 그런데 병진년에 면례(緬禮)하게 되자, 유사가 왕명에 따라 용머리에 거북 좌대를 한 신도비를 새 무덤에 함께 옮기게 하니, 별세한 것을 슬퍼하고 추존하여 예가 구비되고 지극해서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다. 다만 산소를 여러 번 이장하여 묘지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니, 공의 사손(嗣孫)인 태상(泰相)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구만에게 명문(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여 새겨서 묘소에 묻으려 하였다.
아, 구만은 몽매한 소자이니, 어찌 감히 잘하지 못하는 문장으로 공의 거룩한 덕을 더럽히겠는가. 이 때문에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간청하기를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아, 이 구만은 궁벽한 시골의 후생이라서 미처 공의 얼굴을 뵙지 못했으나 일찍이 공의 아드님인 승지공(承旨公)과 동방급제하여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동료로 함께 근무하여 살아서는 세한(歲寒)의 기약이 있었고 죽어서는 인척(姻戚)의 의탁함이 있었다. 만약 죽은 자가 다시 나와서 구만에게 부탁한다면 내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의리상 감히 거절할 수가 없다. 이제 어찌 차마 그 아드님의 요청을 끝내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삼가 가장을 살펴보니, 공은 휘가 창원(昌遠)이고 자가 대형(大亨)이며 관향이 양주(楊州)이다. 시조 잠(岑)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판원사(判院事)에 추증되었는데 대대로 한양(漢陽)의 향교동(鄕校洞)에 거주하였다. 손자 의(誼)는 태조(太祖)가 한양에 궁궐터를 정할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이사하여 고려조에 대한 충절의 뜻을 보였다. 아들 말생(末生)은 문과에 급제하여 문형(文衡)을 맡고 벼슬이 영사(領事)이며 시호가 문강(文剛)이다. 아들이 있었으니, 사직(司直) 찬(瓚)과 관찰사 근(瑾)이다. 관찰사의 증손 무강(無疆)은 성종대왕의 따님인 숙혜옹주(淑惠翁主)에게 장가들어 한천위(漢川尉)에 봉해졌다. 한천위의 아들 연손(連孫)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아들이 없어 사직의 5세손 남(擥)을 양자로 삼았는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들 휘 존성(存性)은 문과에 올라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임금을 차례로 섬기고 벼슬이 돈녕부사에 이르렀는데, 중외에 공적이 드러나 명신(名臣)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가 소민(昭敏)이다. 배위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강원도 도사 신충(藎忠)의 따님으로, 바로 공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이니, 이는 공의 선조의 세덕(世德)이다.
공은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 8월 정묘일에 출생하였다. 나이 서른이 넘어 태학(太學)의 생도로 활인서(活人署)와 금화사(禁火司), 예빈시(禮賓寺)에 뽑혀 제수되고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이때 이미 세도(世道)가 무너졌으므로 벼슬하는 데 뜻이 없어 취임하기도 하고 취임하지 않기도 하였다.
인조가 반정하자, 추탄(楸灘) 오 상공(吳相公 오윤겸(吳允謙))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아산 현감(牙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직산 현감(稷山縣監)에 제수되었다.
무진년(1628, 인조 6) 소민공(昭敏公)이 병환이 있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모시다가 얼마 안 있어 상을 당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 상복을 벗었는데, 지난번 직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 표창을 받았다는 이유로 높이 승진하여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되니, 이는 특별한 예우였다. 이해 겨울에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갔는데 임기가 차자 고을 사람들이 더 유임할 것을 청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이 일어난 뒤로는 관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를 읊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무인년 여름 조정에서 훌륭한 지방관으로 뽑혀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제수되었다. 이해 겨울 인조대왕이 계비(繼妃)를 뽑을 적에 공의 셋째 따님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혼례가 이미 정해지자, 공을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올리고, 중전에 오르자 공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올리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하니, 이는 국가의 전례(典禮)였다. 인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 내섬시(內贍寺)와 사재감(司宰監)과 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를 겸하였으니, 이는 공이 지낸 관직의 이력이다.
추관(秋官 형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는 형벌이 문란한 때를 당하여 옥사(獄事)가 번거롭고 많았으나 공평함을 유지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미루었으며 부지런하고 또 민첩해서 지체된 문서가 없으니, 명성이 여러 동료들을 능가하였다.
직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혼란하고 포악하던 시기의 뒤를 이었고, 이 지역이 큰 길가에 있어서 누적된 병폐가 쇠털처럼 많아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나 공은 청렴하게 봉직하고 치밀하게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몇 년이 못 되어 치적이 이루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 공평하고 분명하다는 명성이 이웃 고을에까지 퍼졌다. 이에 어려운 사건이 있으면 질정하여 해결하려는 자들이 모두 몰려와서 금시(金矢)의 수입금이 쌓이자, 이것을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어서 묵은 포흠(逋欠)이 모두 없어졌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비단을 하사하고 품계를 올려 주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고을 사람들은 수레를 붙잡고 이임(離任)을 만류했고 덕행을 석비에 새겼다.
여산 군수로 있을 때에는 이 지역에 호강(豪强)한 풍속이 많았는데, 공이 모두 주후(柱後)로 다스려 조정의 귀함을 믿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자들을 일체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을 해치는 자들이 제거되자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선동하여 자물쇠를 거머쥐고 국고를 노략질하였는데, 공이 추적하여 체포해서 법을 적용할 적에 큰 죄인은 죽이고 추종한 자들은 살려 주어 각각 적합하게 하니, 온 고을이 이 덕에 다시 편안해졌다. 이 때문에 임기가 찼으나 다시 재임하였으며, 떠나가자 또 공덕비를 세웠다.
공은 직임을 맡을 적에 청렴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안정함으로 백성을 다스려서, 번거로움을 제거하고 병폐를 없애면서도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자들을 적발하고 강한 자를 꺾으면서도 분수를 넘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업이 거행되고 백성들이 편안하며 정사가 엄하고 사람들이 그리워해서 본말(本末)에 순서가 있고 공사(公私)가 모두 이루어졌으니 이는 공의 치적(治績)이다.
공은 훌륭한 아버지에 훌륭한 아들이었으니, 착하고 순한 성품으로 안에서 가정교훈을 받아 어렸을 적에 이미 자제의 직분을 다한다고 알려졌다. 겨우 열 살 때에 어버이를 모시고 피난을 갔는데 곁에서 부축하여 발이 부르터서 장차 터지려 하였으나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고 말하기를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드릴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장성하자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봉양하여 온화함과 공경함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있을 때에 기년(朞年)이 되기 전에는 채소와 과일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우애가 충심(衷心)에서 우러나와 미루어 친족들과 외척들에게까지 미쳐서 지극히 화목하였다. 그리하여 곤궁한 자들을 구휼해 주고 추위에 떠는 자들을 옷을 입혀 주니, 고을 사람들과 친족들이 귀의하여 자기 집처럼 여겼다.
부귀해진 뒤에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기를 더욱 지극히 하였다.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포의(布衣)로 분수를 뛰어넘어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오르니, 이는 영화가 아니요 재앙이다. 또다시 사치함으로써 넘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의복과 기물과 주택을 예전보다 조금도 늘리지 않았으며 음악과 노리개 등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집안사람들이 교화되어 비록 나이가 어리고 또 천한 자라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 입기를 부끄러워하니 사람들이 혹 촌스럽다고 조롱하였다.
하인들을 매우 엄히 단속해서 집안에 조절(棗節)의 위엄이 있었으나 국법을 범하면 번번이 잡아다가 옥리에게 보내곤 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성만(盛滿)한 자리에 처하여 우려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았으니, 이때에 만약 한 번이라도 말씀을 잘못하였다면 또한 충분히 재앙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하와 내외간에 일찍이 털끝만큼도 지적하고 비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끝내 훌륭한 명예를 보전하였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백성들이 존경하여 영화를 누렸고 별세하여서는 사람들의 슬픔이 지극하였으니, 만일 충신(忠信)과 독후(篤厚)가 천성에서 우러나오고 공검(恭儉)과 근신(謹愼)으로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이것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는 공의 덕행(德行)이다.
부인은 대사간으로 좌찬성에 추증된 최철견(崔鐵堅)의 따님이니,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17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부인은 시부모를 섬길 적에 시집왔을 때로부터 초상을 치르고 제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하였으며, 남편을 받들 적에 일찍이 한 번도 집안의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지 않으며 “이런 일로 우리 공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 16) 대례(大禮)가 이루어져 가문이 하루아침에 혁혁해지자, 사람들이 보고 들음을 달리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항상 아침저녁으로 전복되고 실추됨이 있을 것처럼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친척들이 그 얼굴빛을 바라보고는 감히 그 앞에서 치하하는 말을 올리지 못하였다. 또 장수를 누려 궁문에 통적(通籍)한 것이 거의 30년이었다. 따님이 대비가 되어 성자신손(聖子神孫)의 봉양을 받으시는 것을 두루 보았으니, 그 높음과 영화가 비길 데가 없었으나 일찍이 궁 내외로 말이 드나드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부인이 착하고 삼가신 덕이요 또한 어찌 공께서 평소 경계하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들 윤석(胤錫)이 바로 승지공이니 문과에 올라 이미 현달하였으나 부인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하다가 상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장녀는 참판 신익전(申翊全)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현감 한정상(韓鼎相)에게 시집갔으며, 우리 자의공신 대왕대비(慈懿恭愼大王大妃)는 막내따님이다.
승지는 1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바로 태상(泰相)이고 딸은 참봉 구문수(具文洙)와 심기(沈機), 이언저(李彦著), 윤의교(尹義敎), 이흥조(李興朝)의 아내가 되었다. 참판은 5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정(晸)은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이 되었고, 섬(暹)은 별검(別檢)이며, 창(昶)과 진사 엽(曄)과 앙(昻)이 있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의 부인이 되었고, 차녀는 뽑혀서 왕자 숭선군(崇善君) 징(澂)의 부인이 되었으며, 막내는 윤지빈(尹之贇)의 아내가 되었다. 현감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 종건(宗建)과 종운(宗運)ㆍ종적(宗廸)이며, 딸은 생원 김정신(金鼎臣)과 홍만통(洪萬通)의 아내가 되었다.
내 일찍이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의 찬(贊)을 읽어 보니, 겸손과 교만의 효험을 인용하고 화와 복의 근원을 논하였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 겸손한 자에게 복으로 보답하고 교만한 자에게 화로 보답함은 외척에 있어 더욱 잘 나타나며, 외척이 화를 받느냐 복을 받느냐에 따라 일찍이 그 나라의 흥망성쇠가 연관되지 않은 적이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지금 공이 높은 지위에 있어도 마음을 겸손히 하고 위태로운 곳에 있어도 몸을 편안히 하여, 집안이 온전함을 얻고 나라 또한 이에 의지한 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겸손함의 효험이 어찌 다만 공에게 복이 되었을 뿐이겠는가.
의논하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공이 세덕(世德)을 계승함이 저와 같았고 또 훌륭한 덕행이 있었으니, 만약 부원군(府院君)의 은혜로 승진하지 않았더라면 치적이 세상에 나타남이 반드시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한다. 아, 이 참으로 어렵고 쉬움과 가볍고 무거움을 아는 자인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조씨(趙氏)의 시초는 / 惟趙之始
고려 말에 알려져서 / 聞于麗季
양주(楊州)를 관향으로 하였네 / 著籍于楊
바른 선비 있었으니 / 厥有貞士
자식들에게 복을 물려주어 / 委子以祉
대대로 아름다움 이어갔네 / 延世流芳
또한 금련이 되었고 / 亦越禁臠
뻗쳐 소민공에 이르러서는 / 施及昭敏
명성과 공렬이 드날렸네 / 聲烈載揚
공이 그 전통을 이어 / 公承厥緖
아름다움이 일찍 드러나니 / 懿美蚤著
가문이 번창하였다오 / 惟家之昌
모습이 풍부하고 기상이 후덕하며 / 貌豐氣厚
자질이 질박하고 행실이 아름다우니 / 質素行茂
정성스럽고 인자하고 양순하였네 / 悃愊慈良
처음에는 가문의 음덕을 따랐고 / 初從門庇
끝에는 자력으로 높이 올라 / 終以己致
세상의 공황이 되었다오 / 爲世龔黃
길거리에 칭송하는 동요가 위로 알려지니 / 逵謠上聞
비단을 나누어 주어 / 庭帛斯分
아름다운 공적 표창하였네 / 嘉績用章
훌륭한 덕 사람들에게 마땅하니 / 令德宜人
하늘의 복이 거듭되어 / 天祐自申
성녀를 탄강하였다오 / 聖女誕祥
위수(渭水)에서 맞이하고 관작을 높이니 / 迎渭褒紀
지위가 높고 예가 특별하여 / 位崇禮異
참으로 빛나고 찬란하였네 / 燀爀煒煌
공은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 惟公畏愼
은총 받음을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 / 處寵若隕
깊은 못과 살얼음에 임하듯이 처신하였네 / 淵氷自將
집안사람들 모두 교화되어 / 家化其爲
나라 사람들이 믿으니 / 國人信之
누가 감히 비방하겠는가 / 孰敢訾傷
몸을 편안히 하고 종족을 보전하여 / 禔身保族
또한 나라에 아름다우니 / 亦休于國
유풍을 잊을 수 없어라 / 流風不忘
아 우리 춘휘는 / 猗我春暉
사조의 모의이시니 / 四朝母儀
아름다운 칭찬이 더욱 드러나네 / 徽音益彰
근원이 풍부한 냇물과 같아 / 如川羨源
반드시 그 가문에 근본하니 / 必本其門
이 누구의 영광인가 / 是誰之光
또 훌륭한 자제가 있고 / 且有能子
손자가 있어 뒤를 이어 / 有孫以嗣
대대로 제사를 받든다오 / 式奉烝嘗
이 복록을 이룬 것이 / 臻玆福履
어찌 이유가 없다 말하겠는가 / 豈曰無以
겸손하면 복을 누리는 상도(常道)라오 / 謙亨之常
즐거운 이 언덕에 / 樂哉斯丘
당과 같은 무덤이 있으니 / 若堂幽幽
공의 체백(體魄) 묻혀 있네 / 惟公所藏
내 명시를 지어 / 我作銘詩
무궁한 후세에 기약하노니 / 以期無隳
만세에 길이길이 전하리라 / 萬世之長

[주D-001]중귀(中貴) : 궁중에서 유난히 사랑을 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후세에는 오로지 환관(宦官)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주D-002]사전(四殿) : 인조(仁祖)의 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와 효종(孝宗)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및 현종(顯宗)과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03]금시(金矢) : 동(銅) 30근과 화살 1속을 말한다. 소송이 생기면 관청이 담보물로 양측에서 동 30근이나 화살 1속을 받은 다음 심리를 하여 승소한 이는 돌려주고 패소한 자의 것은 몰수한다.
[주D-004]주후(柱後) : 원래 법관(法官)이 쓰는 관(冠)인데, 여기서는 법률을 비유하였다.
[주D-005]조절(棗節)의 위엄 : 조절은 미리 조심하여 예절을 지킴을 이른다. 옛날 며느리가 시집와서 시아버지를 뵈올 적에 대추〔棗〕와 밤〔栗〕을 올렸는바, 조(棗)는 조(早)와 음이 같고 밤은 숙연(肅然)의 뜻이 있어 미리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한다. 《儀禮 士昏禮 疏》
[주D-006]통적(通籍) : 문표(門標)에 이름을 올리면 궁문의 출입을 허락하는 것으로, 고관대작이나 종친과 외척에게 궁문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던 제도이다.
[주D-007]금련(禁臠) : 동진(東晉)의 원제(元帝)가 처음 건업(建業)에 진주했을 때에, 몹시 곤궁하여 돼지를 얻으면 진미로 여겼으며, 그중에도 정수리 부분을 더욱 진미로 여겨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고 오직 황제만 이것을 먹을 수 있었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진릉공주(晉陵公主)를 사혼(謝混)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그만 황제가 승하하여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원숭(袁崧)이 사혼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하자, 옥순(玉珣)은 원숭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금련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 후 사혼은 끝내 진릉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晉書 卷15 謝混傳》 여기서는 선조인 무강(無疆)이 성종의 따님인 숙혜공주(淑惠公主)에게 장가들어 한천위(漢川尉)가 되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8]공황(龔黃) :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의 훌륭한 지방관인 발해 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와 영천 태수(穎川太守) 황패(黃覇)를 이른다.
[주D-009]위수(渭水)에서 …… 높이니 : 주(周) 나라 문왕은 태사(太姒)를 위수에서 비(妃)로 맞이하였는데, 《시경》 대아 대명(大明)에 “문왕이 초년에 하늘이 배필을 내려 주시니, 흡수의 북쪽에 있으며 위수의 가에 있다.〔文王初載 天作之合 在洽之陽 在渭之涘〕” 하였으며, 이어서 “납폐(納幣)하는 예(禮)로 그 길함을 정하시고 위수에서 친히 맞이했다.〔文定厥祥 親迎于渭〕”라고 보인다. 춘추 시대 주 나라 환왕(桓王)은 기(紀) 나라에 장가들면서 왕비의 아버지인 기후(紀侯)의 관작이 낮다 하여 작위를 올려 주었다. 《冊府元龜 卷142 尊外戚》
[주D-010]춘휘(春暉) :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을 위해 옷을 촘촘히 꿰매 주신 어머니를 생각하여 “한 치 되는 풀의 마음 가져다가 삼춘의 따뜻한 봄볕에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는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작은 효심을 풀의 마음에 비유하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삼춘의 따뜻한 봄볕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두고 한 말이다.
[주D-011]사조(四朝)의 모의(母儀) : 사조는 네 조정으로 인조와 효종, 현종과 숙종을 가리키며, 모의는 국모(國母)의 자리에 있음을 이른다.

 
약천집 제1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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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지명(墓誌銘)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혜목(惠穆) 조공(趙公) 묘지명 정사년(1677, 숙종 3)

저 옛날 병술년(1646, 인조 24) 봄 2월 30일에 한원부원군 조공이 집에서 별세하니, 인조대왕은 그를 위하여 이틀 동안 조회 보지 않고 중귀(中貴)에게 명하여 초상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유사(有司)가 상구(喪具)를 마련하여 양주(楊州) 땅에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17년이 지난 계묘년(1663, 현종 4) 겨울 10월 25일에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최씨(崔氏)가 별세하자, 현종대왕(顯宗大王)은 앞서의 초상 때와 같이 예(禮)를 다하고 사전(四殿)이 수의(襚衣)를 하사하였다. 양주의 무덤이 묏자리가 좋지 않다 하여 송도(松都)의 고운산(高雲山)에 이장하고 부인을 부장하였으며, 5년이 지난 무신년에 또다시 용인현(龍仁縣)의 동침동(銅鍼洞)으로 이장하였다. 8년이 지난 병진년에 또다시 양주 금곡촌(金谷村)의 선영 옆 묘좌(卯坐)의 산에 이장하였는데, 금상 전하께서 예장하기를 선왕과 같이 하였다.
지난 기유년 태상(太常 봉상시(奉常時))에서 의론을 올리자 공에게 시호를 혜목(惠穆)이라 내려 이미 사당에 고유하고 신도비(神道碑)에 새겼다. 그런데 병진년에 면례(緬禮)하게 되자, 유사가 왕명에 따라 용머리에 거북 좌대를 한 신도비를 새 무덤에 함께 옮기게 하니, 별세한 것을 슬퍼하고 추존하여 예가 구비되고 지극해서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게 되었다. 다만 산소를 여러 번 이장하여 묘지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니, 공의 사손(嗣孫)인 태상(泰相)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구만에게 명문(銘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여 새겨서 묘소에 묻으려 하였다.
아, 구만은 몽매한 소자이니, 어찌 감히 잘하지 못하는 문장으로 공의 거룩한 덕을 더럽히겠는가. 이 때문에 두세 번 사양하였으나 간청하기를 오히려 그치지 않았다. 아, 이 구만은 궁벽한 시골의 후생이라서 미처 공의 얼굴을 뵙지 못했으나 일찍이 공의 아드님인 승지공(承旨公)과 동방급제하여 이름을 나란히 하였고 동료로 함께 근무하여 살아서는 세한(歲寒)의 기약이 있었고 죽어서는 인척(姻戚)의 의탁함이 있었다. 만약 죽은 자가 다시 나와서 구만에게 부탁한다면 내 비록 문장을 잘하지 못하나 의리상 감히 거절할 수가 없다. 이제 어찌 차마 그 아드님의 요청을 끝내 저버릴 수 있겠는가.
삼가 가장을 살펴보니, 공은 휘가 창원(昌遠)이고 자가 대형(大亨)이며 관향이 양주(楊州)이다. 시조 잠(岑)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판원사(判院事)에 추증되었는데 대대로 한양(漢陽)의 향교동(鄕校洞)에 거주하였다. 손자 의(誼)는 태조(太祖)가 한양에 궁궐터를 정할 때에 벼슬을 버리고 이사하여 고려조에 대한 충절의 뜻을 보였다. 아들 말생(末生)은 문과에 급제하여 문형(文衡)을 맡고 벼슬이 영사(領事)이며 시호가 문강(文剛)이다. 아들이 있었으니, 사직(司直) 찬(瓚)과 관찰사 근(瑾)이다. 관찰사의 증손 무강(無疆)은 성종대왕의 따님인 숙혜옹주(淑惠翁主)에게 장가들어 한천위(漢川尉)에 봉해졌다. 한천위의 아들 연손(連孫)은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아들이 없어 사직의 5세손 남(擥)을 양자로 삼았는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들 휘 존성(存性)은 문과에 올라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임금을 차례로 섬기고 벼슬이 돈녕부사에 이르렀는데, 중외에 공적이 드러나 명신(名臣)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가 소민(昭敏)이다. 배위 용인 이씨(龍仁李氏)는 강원도 도사 신충(藎忠)의 따님으로, 바로 공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이니, 이는 공의 선조의 세덕(世德)이다.
공은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 16) 8월 정묘일에 출생하였다. 나이 서른이 넘어 태학(太學)의 생도로 활인서(活人署)와 금화사(禁火司), 예빈시(禮賓寺)에 뽑혀 제수되고 상의원 별제(尙衣院別提)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이때 이미 세도(世道)가 무너졌으므로 벼슬하는 데 뜻이 없어 취임하기도 하고 취임하지 않기도 하였다.
인조가 반정하자, 추탄(楸灘) 오 상공(吳相公 오윤겸(吳允謙))이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여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고, 얼마 후 아산 현감(牙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 2) 직산 현감(稷山縣監)에 제수되었다.
무진년(1628, 인조 6) 소민공(昭敏公)이 병환이 있으므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 모시다가 얼마 안 있어 상을 당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 9) 상복을 벗었는데, 지난번 직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 표창을 받았다는 이유로 높이 승진하여 군자감 정(軍資監正)에 제수되니, 이는 특별한 예우였다. 이해 겨울에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갔는데 임기가 차자 고을 사람들이 더 유임할 것을 청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이 일어난 뒤로는 관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시를 읊고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무인년 여름 조정에서 훌륭한 지방관으로 뽑혀 인천 부사(仁川府使)에 제수되었다. 이해 겨울 인조대왕이 계비(繼妃)를 뽑을 적에 공의 셋째 따님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혼례가 이미 정해지자, 공을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올리고, 중전에 오르자 공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올리고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하니, 이는 국가의 전례(典禮)였다. 인하여 오위도총부 도총관, 내섬시(內贍寺)와 사재감(司宰監)과 장악원(掌樂院)의 제조(提調)를 겸하였으니, 이는 공이 지낸 관직의 이력이다.
추관(秋官 형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는 형벌이 문란한 때를 당하여 옥사(獄事)가 번거롭고 많았으나 공평함을 유지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미루었으며 부지런하고 또 민첩해서 지체된 문서가 없으니, 명성이 여러 동료들을 능가하였다.
직산 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혼란하고 포악하던 시기의 뒤를 이었고, 이 지역이 큰 길가에 있어서 누적된 병폐가 쇠털처럼 많아 어찌할 방도가 없었으나 공은 청렴하게 봉직하고 치밀하게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몇 년이 못 되어 치적이 이루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 공평하고 분명하다는 명성이 이웃 고을에까지 퍼졌다. 이에 어려운 사건이 있으면 질정하여 해결하려는 자들이 모두 몰려와서 금시(金矢)의 수입금이 쌓이자, 이것을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어서 묵은 포흠(逋欠)이 모두 없어졌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비단을 하사하고 품계를 올려 주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고을 사람들은 수레를 붙잡고 이임(離任)을 만류했고 덕행을 석비에 새겼다.
여산 군수로 있을 때에는 이 지역에 호강(豪强)한 풍속이 많았는데, 공이 모두 주후(柱後)로 다스려 조정의 귀함을 믿고 그들을 도와주려는 자들을 일체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을 해치는 자들이 제거되자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선동하여 자물쇠를 거머쥐고 국고를 노략질하였는데, 공이 추적하여 체포해서 법을 적용할 적에 큰 죄인은 죽이고 추종한 자들은 살려 주어 각각 적합하게 하니, 온 고을이 이 덕에 다시 편안해졌다. 이 때문에 임기가 찼으나 다시 재임하였으며, 떠나가자 또 공덕비를 세웠다.
공은 직임을 맡을 적에 청렴함으로 자신을 다스리고 안정함으로 백성을 다스려서, 번거로움을 제거하고 병폐를 없애면서도 명예를 탐하지 않았으며 간사한 자들을 적발하고 강한 자를 꺾으면서도 분수를 넘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업이 거행되고 백성들이 편안하며 정사가 엄하고 사람들이 그리워해서 본말(本末)에 순서가 있고 공사(公私)가 모두 이루어졌으니 이는 공의 치적(治績)이다.
공은 훌륭한 아버지에 훌륭한 아들이었으니, 착하고 순한 성품으로 안에서 가정교훈을 받아 어렸을 적에 이미 자제의 직분을 다한다고 알려졌다. 겨우 열 살 때에 어버이를 모시고 피난을 갔는데 곁에서 부축하여 발이 부르터서 장차 터지려 하였으나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고 말하기를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드릴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장성하자 새벽부터 밤늦도록 부지런히 봉양하여 온화함과 공경함이 모두 지극하였으며, 상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있을 때에 기년(朞年)이 되기 전에는 채소와 과일을 입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우애가 충심(衷心)에서 우러나와 미루어 친족들과 외척들에게까지 미쳐서 지극히 화목하였다. 그리하여 곤궁한 자들을 구휼해 주고 추위에 떠는 자들을 옷을 입혀 주니, 고을 사람들과 친족들이 귀의하여 자기 집처럼 여겼다.
부귀해진 뒤에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기를 더욱 지극히 하였다.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포의(布衣)로 분수를 뛰어넘어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오르니, 이는 영화가 아니요 재앙이다. 또다시 사치함으로써 넘치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의복과 기물과 주택을 예전보다 조금도 늘리지 않았으며 음악과 노리개 등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집안사람들이 교화되어 비록 나이가 어리고 또 천한 자라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 입기를 부끄러워하니 사람들이 혹 촌스럽다고 조롱하였다.
하인들을 매우 엄히 단속해서 집안에 조절(棗節)의 위엄이 있었으나 국법을 범하면 번번이 잡아다가 옥리에게 보내곤 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성만(盛滿)한 자리에 처하여 우려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았으니, 이때에 만약 한 번이라도 말씀을 잘못하였다면 또한 충분히 재앙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하와 내외간에 일찍이 털끝만큼도 지적하고 비판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 끝내 훌륭한 명예를 보전하였다. 그리하여 살아서는 백성들이 존경하여 영화를 누렸고 별세하여서는 사람들의 슬픔이 지극하였으니, 만일 충신(忠信)과 독후(篤厚)가 천성에서 우러나오고 공검(恭儉)과 근신(謹愼)으로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이것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이는 공의 덕행(德行)이다.
부인은 대사간으로 좌찬성에 추증된 최철견(崔鐵堅)의 따님이니,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17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부인은 시부모를 섬길 적에 시집왔을 때로부터 초상을 치르고 제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하였으며, 남편을 받들 적에 일찍이 한 번도 집안의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지 않으며 “이런 일로 우리 공에게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 16) 대례(大禮)가 이루어져 가문이 하루아침에 혁혁해지자, 사람들이 보고 들음을 달리하였으나 부인은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항상 아침저녁으로 전복되고 실추됨이 있을 것처럼 조심하였다. 그리하여 친척들이 그 얼굴빛을 바라보고는 감히 그 앞에서 치하하는 말을 올리지 못하였다. 또 장수를 누려 궁문에 통적(通籍)한 것이 거의 30년이었다. 따님이 대비가 되어 성자신손(聖子神孫)의 봉양을 받으시는 것을 두루 보았으니, 그 높음과 영화가 비길 데가 없었으나 일찍이 궁 내외로 말이 드나드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부인이 착하고 삼가신 덕이요 또한 어찌 공께서 평소 경계하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들 윤석(胤錫)이 바로 승지공이니 문과에 올라 이미 현달하였으나 부인의 상을 당하여 애통해하다가 상을 마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장녀는 참판 신익전(申翊全)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현감 한정상(韓鼎相)에게 시집갔으며, 우리 자의공신 대왕대비(慈懿恭愼大王大妃)는 막내따님이다.
승지는 1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바로 태상(泰相)이고 딸은 참봉 구문수(具文洙)와 심기(沈機), 이언저(李彦著), 윤의교(尹義敎), 이흥조(李興朝)의 아내가 되었다. 참판은 5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 정(晸)은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이 되었고, 섬(暹)은 별검(別檢)이며, 창(昶)과 진사 엽(曄)과 앙(昻)이 있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의 부인이 되었고, 차녀는 뽑혀서 왕자 숭선군(崇善君) 징(澂)의 부인이 되었으며, 막내는 윤지빈(尹之贇)의 아내가 되었다. 현감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진사 종건(宗建)과 종운(宗運)ㆍ종적(宗廸)이며, 딸은 생원 김정신(金鼎臣)과 홍만통(洪萬通)의 아내가 되었다.
내 일찍이 《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의 찬(贊)을 읽어 보니, 겸손과 교만의 효험을 인용하고 화와 복의 근원을 논하였다. 나는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아, 겸손한 자에게 복으로 보답하고 교만한 자에게 화로 보답함은 외척에 있어 더욱 잘 나타나며, 외척이 화를 받느냐 복을 받느냐에 따라 일찍이 그 나라의 흥망성쇠가 연관되지 않은 적이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지금 공이 높은 지위에 있어도 마음을 겸손히 하고 위태로운 곳에 있어도 몸을 편안히 하여, 집안이 온전함을 얻고 나라 또한 이에 의지한 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겸손함의 효험이 어찌 다만 공에게 복이 되었을 뿐이겠는가.
의논하는 자들은 혹 말하기를 “공이 세덕(世德)을 계승함이 저와 같았고 또 훌륭한 덕행이 있었으니, 만약 부원군(府院君)의 은혜로 승진하지 않았더라면 치적이 세상에 나타남이 반드시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한다. 아, 이 참으로 어렵고 쉬움과 가볍고 무거움을 아는 자인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조씨(趙氏)의 시초는 / 惟趙之始
고려 말에 알려져서 / 聞于麗季
양주(楊州)를 관향으로 하였네 / 著籍于楊
바른 선비 있었으니 / 厥有貞士
자식들에게 복을 물려주어 / 委子以祉
대대로 아름다움 이어갔네 / 延世流芳
또한 금련이 되었고 / 亦越禁臠
뻗쳐 소민공에 이르러서는 / 施及昭敏
명성과 공렬이 드날렸네 / 聲烈載揚
공이 그 전통을 이어 / 公承厥緖
아름다움이 일찍 드러나니 / 懿美蚤著
가문이 번창하였다오 / 惟家之昌
모습이 풍부하고 기상이 후덕하며 / 貌豐氣厚
자질이 질박하고 행실이 아름다우니 / 質素行茂
정성스럽고 인자하고 양순하였네 / 悃愊慈良
처음에는 가문의 음덕을 따랐고 / 初從門庇
끝에는 자력으로 높이 올라 / 終以己致
세상의 공황이 되었다오 / 爲世龔黃
길거리에 칭송하는 동요가 위로 알려지니 / 逵謠上聞
비단을 나누어 주어 / 庭帛斯分
아름다운 공적 표창하였네 / 嘉績用章
훌륭한 덕 사람들에게 마땅하니 / 令德宜人
하늘의 복이 거듭되어 / 天祐自申
성녀를 탄강하였다오 / 聖女誕祥
위수(渭水)에서 맞이하고 관작을 높이니 / 迎渭褒紀
지위가 높고 예가 특별하여 / 位崇禮異
참으로 빛나고 찬란하였네 / 燀爀煒煌
공은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 惟公畏愼
은총 받음을 떨어지는 것처럼 여겨 / 處寵若隕
깊은 못과 살얼음에 임하듯이 처신하였네 / 淵氷自將
집안사람들 모두 교화되어 / 家化其爲
나라 사람들이 믿으니 / 國人信之
누가 감히 비방하겠는가 / 孰敢訾傷
몸을 편안히 하고 종족을 보전하여 / 禔身保族
또한 나라에 아름다우니 / 亦休于國
유풍을 잊을 수 없어라 / 流風不忘
아 우리 춘휘는 / 猗我春暉
사조의 모의이시니 / 四朝母儀
아름다운 칭찬이 더욱 드러나네 / 徽音益彰
근원이 풍부한 냇물과 같아 / 如川羨源
반드시 그 가문에 근본하니 / 必本其門
이 누구의 영광인가 / 是誰之光
또 훌륭한 자제가 있고 / 且有能子
손자가 있어 뒤를 이어 / 有孫以嗣
대대로 제사를 받든다오 / 式奉烝嘗
이 복록을 이룬 것이 / 臻玆福履
어찌 이유가 없다 말하겠는가 / 豈曰無以
겸손하면 복을 누리는 상도(常道)라오 / 謙亨之常
즐거운 이 언덕에 / 樂哉斯丘
당과 같은 무덤이 있으니 / 若堂幽幽
공의 체백(體魄) 묻혀 있네 / 惟公所藏
내 명시를 지어 / 我作銘詩
무궁한 후세에 기약하노니 / 以期無隳
만세에 길이길이 전하리라 / 萬世之長

[주D-001]중귀(中貴) : 궁중에서 유난히 사랑을 받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후세에는 오로지 환관(宦官)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주D-002]사전(四殿) : 인조(仁祖)의 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와 효종(孝宗)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및 현종(顯宗)과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주D-003]금시(金矢) : 동(銅) 30근과 화살 1속을 말한다. 소송이 생기면 관청이 담보물로 양측에서 동 30근이나 화살 1속을 받은 다음 심리를 하여 승소한 이는 돌려주고 패소한 자의 것은 몰수한다.
[주D-004]주후(柱後) : 원래 법관(法官)이 쓰는 관(冠)인데, 여기서는 법률을 비유하였다.
[주D-005]조절(棗節)의 위엄 : 조절은 미리 조심하여 예절을 지킴을 이른다. 옛날 며느리가 시집와서 시아버지를 뵈올 적에 대추〔棗〕와 밤〔栗〕을 올렸는바, 조(棗)는 조(早)와 음이 같고 밤은 숙연(肅然)의 뜻이 있어 미리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한다. 《儀禮 士昏禮 疏》
[주D-006]통적(通籍) : 문표(門標)에 이름을 올리면 궁문의 출입을 허락하는 것으로, 고관대작이나 종친과 외척에게 궁문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하던 제도이다.
[주D-007]금련(禁臠) : 동진(東晉)의 원제(元帝)가 처음 건업(建業)에 진주했을 때에, 몹시 곤궁하여 돼지를 얻으면 진미로 여겼으며, 그중에도 정수리 부분을 더욱 진미로 여겨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하고 오직 황제만 이것을 먹을 수 있었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진릉공주(晉陵公主)를 사혼(謝混)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는데, 그만 황제가 승하하여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원숭(袁崧)이 사혼에게 딸을 시집보내려 하자, 옥순(玉珣)은 원숭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금련을 가까이하지 말라.”고 농담을 하였는데, 그 후 사혼은 끝내 진릉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晉書 卷15 謝混傳》 여기서는 선조인 무강(無疆)이 성종의 따님인 숙혜공주(淑惠公主)에게 장가들어 한천위(漢川尉)가 되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주D-008]공황(龔黃) :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의 훌륭한 지방관인 발해 태수(渤海太守) 공수(龔遂)와 영천 태수(穎川太守) 황패(黃覇)를 이른다.
[주D-009]위수(渭水)에서 …… 높이니 : 주(周) 나라 문왕은 태사(太姒)를 위수에서 비(妃)로 맞이하였는데, 《시경》 대아 대명(大明)에 “문왕이 초년에 하늘이 배필을 내려 주시니, 흡수의 북쪽에 있으며 위수의 가에 있다.〔文王初載 天作之合 在洽之陽 在渭之涘〕” 하였으며, 이어서 “납폐(納幣)하는 예(禮)로 그 길함을 정하시고 위수에서 친히 맞이했다.〔文定厥祥 親迎于渭〕”라고 보인다. 춘추 시대 주 나라 환왕(桓王)은 기(紀) 나라에 장가들면서 왕비의 아버지인 기후(紀侯)의 관작이 낮다 하여 작위를 올려 주었다. 《冊府元龜 卷142 尊外戚》
[주D-010]춘휘(春暉) :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에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을 위해 옷을 촘촘히 꿰매 주신 어머니를 생각하여 “한 치 되는 풀의 마음 가져다가 삼춘의 따뜻한 봄볕에 보답하기 어려워라.〔難將寸草心 報得三春暉〕”라고 하였는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자식의 작은 효심을 풀의 마음에 비유하고,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삼춘의 따뜻한 봄볕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두고 한 말이다.
[주D-011]사조(四朝)의 모의(母儀) : 사조는 네 조정으로 인조와 효종, 현종과 숙종을 가리키며, 모의는 국모(國母)의 자리에 있음을 이른다.

 
상촌선생집 제2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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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명(神道碑銘) 11수
관찰사 최공 신도비명(觀察使崔公神道碑銘)

흠은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이미 몽은(夢隱) 최공(崔公)이 팔척 장신에다 호걸다운 용모를 지녀 속태를 벗은 혼탁한 세상의 호장부(好丈夫)라는 것을 알고 생각하기를 “공은 반드시 활기차고 씩씩하게 진보하여 묘당에 입신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방의 방백이 되어 만리 타향에서 공을 세울 것이지 결코 구질구질하게 서울 장안의 녹미(祿米)만 찾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흠은 과거에 급제하여 낭서(郞署)를 역임하고 만력 임진년에 체찰사의 막하에 차출되어 그 부관으로 호남을 순찰하였는데, 몽은공은 그때 전라 도사(全羅都事)로 있었으므로 날마다 함께 어울려 군중의 일을 같이 처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어느 한 지역을 담당할 만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아울러 공의 임진년 사적을 얻어들었으니, 다음과 같다. 왜적이 전력을 다해 쳐들어올 당시에 관찰사 이광(李洸)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서 적의 꼴도 보기 전에 궤멸하고 더 이상 북상할 계획을 하지 못하자, 공은 의분에 겨워 적과 함께 살 수 없다고 맹세하고 전주 사민(士民)에게 포고하기를 “적이 경성으로 들어가 주상은 서쪽으로 파천하였고 호남 속에서도 풍패(豐沛 전주를 말함)만 온전하니,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일이 만약 잘못된다면 나를 이 땅에 묻어달라.” 하고, 마침내 사력을 다해 전주를 지켰다. 얼마 안 되어 조정이 이광을 문책하여 권공 율(權公慄)이 그 후임이 되었다가 다시 원수로 승진하여 경기 지방으로 진군하고 이공 정암(李公廷馣)이 그 후임이 되었다. 공이 군병을 거느리고 남원을 지키고 있을 때 중국 참장 낙상지(駱尙志)가 순천(順天)에서 진주(晉州)가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와 공과 합류하였다. 그런데 적의 기병이 주변 고을까지 접근하여 남원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나가자, 어느 한 역관(譯官)이 공에게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공은 흔들리지 않으니 낙장(駱將)이 의롭게 여겼다. 공은 낙장과 연대하여 바깥 진영을 설치하고 군병을 보내 돌아가는 적을 초멸함으로써 남원이 보존되었으며, 또 한 도내의 군량을 대대적으로 운송하여 권 원수(權元帥)의 군사에게 보급하였다. 그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자 공의 벼슬을 올려 치하하였으나 공을 시기하는 자가 저해하였다. 그 후 몇 년 뒤에 흠은 또 권 원수의 막료가 되었는데 권공이 임진년에 국사에 사력을 다한 자를 거론할 때는 반드시 ‘최공, 최공’ 하였다.
고의 휘는 철견(鐵堅), 자는 응구(應久)이고 몽은은 그의 호이다. 최씨의 선계는 전주에서 나왔는데 원조(遠祖) 득평(得枰)은 고려조를 보좌하였고 본조에 들어와 대대로 관직을 살았다. 고조 효기(孝基)는 증 이조 참판이고 증조 해(瀣)는 이조 참의이고 조부 희증(希曾)은 숨은 덕이 있었는데 증 형조 참의이며, 선고 역(櫟)은 증 호조 참판이고 선비 이씨는 선계가 선파(璿派)에서 나왔는데 희릉령 석(熙陵令晳)의 따님이다. 가정 무신년(1548, 명종3)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 자랐는데 능히 스스로 분발해 글을 배워 조금 컸을 때 이미 이름이 났다. 병자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을유년에 별시에 장원 급제한 뒤에 전적ㆍ감찰ㆍ형조 좌랑ㆍ사간원 정언ㆍ병조 좌랑ㆍ대동찰방(大同察訪)을 역임하였다.
경인년에 다시 병조로 들어가 정랑이 되었으며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직강과 병조 정랑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는데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하여 풍저창 수(豐儲倉守)를 겸임하였다.
계사년에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고 정유년에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으며, 을해년에는 조정으로 들어와 내자시 정(內資寺正)이 되고 다시 정언ㆍ장령ㆍ필선ㆍ사간에다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 예빈시 정(禮賓寺正)으로 체직되어서는 상소하여 시폐(時弊)를 개진하니 선묘가 가상히 여겼다. 얼마 안 되어 집의에 제수되고 동부승지로 승진하여 통정에 가자되었다가 곧 대사헌이 되었다. 신축년에 황해관찰사에 제수되고 호조 참의로 체직되었으며 갑진년에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었다가 신병으로 해직되어 돌아왔다. 무신년에 선묘가 승하하셨을 때 풍수가의 말로 인해 산릉을 오래도록 잡지 못하자 공은 상소하여 그 부당함을 말함으로써 조정의 논의가 마침내 결정되었다. 만년에 신병이 들어 근 10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하다가 무오년(1618, 광해군10) 겨울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71세였다. 이듬해 기미년에 양주(楊州) 송산(松山) 해좌(亥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부인은 진주 정씨(晉州鄭氏)로 진사 윤붕(允弸)의 따님인데 공보다 7년 앞서 작고했으며 공과 합장하였다.
3남 4녀를 두어 장남은 행(行)으로 군수이고 다음은 구(衢)로 전적이고 다음은 현(衒)으로 요절하였으며, 딸은 박신(朴信)ㆍ목륭(睦霳)ㆍ심기(沈綨)ㆍ조창원(趙昌遠)에게 시집갔고 서출(庶出)로 1남 연(衍)이 있다. 내외 손자는 약간 명이 있다.
공은 담박하고 차분하여 공명을 세우는 것을 일삼지 않았고 평소에 재산을 늘리는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책을 보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고 문장력이 매우 풍부하여 붓대를 잡으면 거침없이 수백 자를 즉시 이루어냈다. 일찍이 승지로 있을 때 선묘께서 그 문장을 기특하게 여겨 고문 중에서 어떤 것을 숭상하는가 묻기까지 하였다. 이미 재주와 기국을 갖추었으면서도 지닌 것을 다 베풀어 쓰지 못하였으니, 장차 하늘의 보답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흠의 아들 익전(翊全)은 공의 사위 조군(趙君)의 동상랑(東床郞 사위의 별칭)이 되었으므로 흠이 공에 대해서는 한 조정에 벼슬하여 우의가 두터운 정도만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쓰여질 것 같더니만 / 如必以施
뜻을 얻지 못했으니 / 而乃不偶
자기 당댄 막혔으나 / 嗇之于身
뒤에 결실 거뒀다네 / 而食於後
울창한 저 동녘산은 / 鬱彼東阡
공의 만년 무덤인데 / 萬年之藏
사실대로 명을 지어 / 我銘非諛
이 현당을 빛낸다오 / 賁玆玄堂

 

상촌선생집 부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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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공의 휘(諱)는 흠(欽)이고 자(字)는 경숙(敬叔)이며 성(姓)은 신씨(申氏)이다.
신씨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에서 나왔다. 그 뒤 태사(太師) 장절공(壯節公)숭겸(崇謙)이 고려(高麗)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일을 도와 원훈(元勲)이 되었는데, 끝내 자기 몸으로 대신해 순절(殉節)하자 태조가 평산(平山)을 그의 관향으로 내려 주었으므로, 그뒤로 마침내 평산인이 되었다.
대대로 벼슬이 뒤를 이었는데,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휘 효(曉)라는 분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대과(大科)에 장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右正言)이 되었다. 그러나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행주(幸州)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고 도성(都城)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는데 나이 81 세에 죽었다. 그의 백씨(伯氏)인재공(寅齋公) 개(槩)는 세종(世宗)을 도와 태평시대를 이루었었다. 그런데 독실하게 논하는 사람들은 공이 인재보다 뛰어났다고 본래부터 일컬어 왔는데 이 분이 바로 공의 5대 조(祖)이다.
고조 휘 자계(自繼)는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로서 이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고, 증조 휘 세경(世卿)은 덕을 드러내지 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하여 기묘(己卯) 명현(名賢)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는데 처음에 왕자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가 사직서 령(社稷署令)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으며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조(祖) 휘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으로서 이간공(夷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공이 정승이 됨에 미쳐 좌찬성으로 더 증직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명성을 떨치고 두루 요직을 거쳐 공보(公輔)의 기대를 한 몸에 안았었다.
고(考) 휘 승서(承緖)는 학문과 행동이 모두 우수하여 일찍이 태학(太學)에 들어갔으며 낭서(郞署)를 거쳐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는데 은혜로운 정사를 많이 베푼 까닭에 고을 사람들이 사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마지막 관직은 개성부 도사였는데 공이 귀하게 되면서 누차 증직되어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가 되었다.
비(妣)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의정부 좌참찬 기수(麒壽)의 딸로서 정숙한 덕과 훌륭한 범절을 지녔는데 친족들이 여성 사대부라고 일컬었다. 부인이 가슴 속으로 큰 별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다음 날 공을 낳았는데 이때가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 1월 경신일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남달랐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 같았고 오른쪽 뺨에 탄환(彈丸) 모양의 빨간 사마귀가 있었다. 유아 시절에 노는 것도 범상치 않았으며 몸가짐이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7세 때 대부인(大夫人 남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말)이 송도(松都)에서 죽자 공이 장례 행렬을 따라 수백 리를 걸어가면서 거스르는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이 유자(孺子)로서 울며 성인과 같은 예를 취했으므로 길가의 사람들이 탄식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정공(議政公)이 잇따라 죽었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사모하는 것이 어머니 때와 같았다. 외왕부(外王父 외할아버지)인 참찬공이 데려다 키우면서 8세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을 내주었다. 참찬공이 시험삼아 ‘춘자(春)’자를 손자들에게 내주며 한 귀절씩 만들어 보라고 하였는데, 공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천지 만물 가운데 봄이 맏이다.”고 하자, 참찬공이 극구 탄상(歎賞)하며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이로부터 글 공부가 날로 진보되어 몇 권을 뗀 뒤로는 번거롭게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였는데, 10세 때 《논어(論語)》와 이소(離騷)를 몇 차례 읽어 보고는 곧장 배송(背誦)하면서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참찬공이 더욱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13세에 경(經)ㆍ사(史)ㆍ자(子)ㆍ집(集)을 두루 보고 유려하게 표현하며 글을 잘 지었으므로 이때부터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선달(先達)로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많이들 찾아 왔다.
14세에 염락(㾾洛 송(宋) 나라 성리학파를 말함) 제현(諸賢)들이 남긴 글을 모두 가져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뜻을 궁구하는 한편, 불가(佛家)나 노장(老莊) 등 제가(諸家)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참찬공의 집에 장서가 많았는데, 공이 늘 장서각 속에 들어가 문을 닫고 마음대로 보면서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상위(象緯 천문(天文))ㆍ감여(堪輿 지리(地理))ㆍ율력(律曆)ㆍ산수(算數)ㆍ기황(岐黃 의학)의 유파(流派)에 대해서도 모두 꿰뚫어 알게 되었다.
경진년에 청강(淸江) 이공 제신(李公濟臣)의 문에 납채(納采)를 들였다. 청강은 《주역(周易)》을 잘 알기로 이름이 났으므로 공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배움을 청하였는데, 전(傳)을 얼마 강하고 나자 청강이 별안간 사석(師席)을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미 대의(大意)를 터득했는데 다시 무슨 도움이 필요하겠는가.’ 하였다.
계미년 공의 나이 18세 때에 사론(士論)이 날로 나뉘어져 삼사(三司)가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을 논하면서 그의 죄를 꾸며 내려 하였다. 공의 외삼촌 송응개(宋應漑)가 당시 대사간이었는데, 조회에서 돌아와 공에게 탄핵문을 내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너의 생각에는 어떠하냐?’고 하였다. 공이 그 속에 사리에 어긋나는 말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에 좋지 않게 여겨 천천히 대답하기를 ‘이공이야말로 당세의 중망(重望)을 짊어지고 있는 분인데, 외삼촌이 그렇게 말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하자, 응개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여러 종자제(從子弟)들은 바로 공이 율곡을 편든다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비방하는 의논을 크게 펼쳤는데, 이로 말미암아 군소배(群小輩)들에게 질시를 받게 되었다.
을유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제8명(第八名)으로 합격하고, 진사시(進士試)에 제3명(第三名)으로 합격하였다.
병술년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러나 집정(執政)이 전의 일에 혐의를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성균관 권지(權知)와 학유(學諭)에 충당된 다음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훈도(訓導)로 쫓겨났다가 또 광주(廣州)로 옮겨졌으며, 무자년에는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거리가 멀고 살기 어려운 곳이나 아무리 비천한 자리에 임명해도 말과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뒤 오래지 않아 파면되어 동호 독서당(東湖讀書堂)에 몸을 담게 되었는데, 세상 일에 일체 간여하는 일이 없이 글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며 스스로 즐겼다.
기축년 겨울에 사관(史館)으로 뽑혀 들어 왔으나 병 때문에 응강(應講)하지 못하였다.
경인년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고 차서에 따라 승진하여 봉교(奉敎)에 이르렀다.
신묘년에 관례에 따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전직(轉職)되었고 천거를 받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진년에 왜구(倭寇)가 도성에 육박하자 조정이 급히 현능인(賢能人)을 거두어 들였는데 공도 서용(敍用)되는 가운데 포함되었다. 그러나 권신(權臣)이 이때를 틈타 공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 하여 양재 찰방(良才察訪)에 임명하였다. 공이 그날 즉시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任地)에 이르러 보니 역사(驛舍)가 이미 텅 비어버린 상태였는데,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대군을 이끌고 바로 뒤에 들이닥쳤다. 신립은 평소 위엄이 있고 용맹스러웠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벌벌 떨며 감히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런데 공이 들어가 보고서 조용히 상황을 설명하니, 신립도 공경하는 태도로 공을 중하게 대하면서 끝내 책망하는 말이 없었다.
공은 신립을 따라 조령(鳥嶺)으로 갔는데 신립이 패하고 말았다. 이에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하는 등 경사(京師)가 크게 혼란 상태에 빠졌는데, 공은 관인(官印)을 가슴에 품고 장차 행재소(行在所)로 뒤쫓아 가려 했으나 길이 막히는 바람에 고생 끝에 협중(峽中)으로 들어갔다. 이때 전 부윤 남언경(南彦經)과 피난 온 사대부들이 의병(義兵)을 일으키려고 계획하고 공의 힘을 빌려 행재소에 사정을 갖춰 상소하려 하면서 같이 일할 것을 청했으나, 공이 사양하고 간도(間道)를 경유하여 배로 강도(江都)에 내려간 뒤 행재소로 돌아갈 계책을 세웠다.
상국 정철(鄭澈)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양호(兩湖)의 군사를 관장하면서 먼저 강도에 주둔하고 있다가 공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는데, 공은 조정에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상국이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인가.’ 하고 마침내 계문(啓聞)하니, 공이 비로소 임명에 응했다.
처음 호서(湖西)에 이르렀을 때, 상국이 공의 재주를 인정하고 시험해 볼 목적으로 막부(幕府)의 기무(機務)를 모두 공에게 위임하였다. 공이 일에 익숙한 아전 10명을 옆에 두고 부첩(簿牒)을 나누어 준 뒤 일제히 소리를 질러 사안(事案)을 아뢰게 하는 한편,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앞에 나와 불편한 정상을 다투어 진달하게 하였는데, 아무리 안독(案牘)이 번거롭고 뜰에서 호소하는 내용이 혼란스러워도 공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판결하면서 종횡으로 치달려 처리하는 것 어느 하나도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것 없이 일이 모두 그 자리에서 판별되었다. 또 공으로 하여금 격문(檄文)을 지어 조정의 덕의(德意)를 선포하게 하였는데, 이를 듣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그리고 관군(官軍)과 의병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장차 분쟁이 일어날 걱정이 있게 되자 공이 글을 지어 효유(曉諭)하였는데 역시 모두들 두려운 마음을 갖고 태도를 바꾸었다.
겨울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영유(永柔)의 행궁(行宮)에 입조(入朝)하였다. 이때는 왜적의 대군이 경도(京都)에 있고 나머지 왜구가 팔도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명(明) 나라가 군대를 출동시켜 정벌하고 있는 때였다. 그리하여 여러 장군들이 군영을 나누어 주둔하고 있으면서 급히 전하는 격문이 빗발치듯 하였는데, 서로들 왕래하며 의사를 소통할 때는 모두 통역 대신 문자로 대신하고 있었다. 이 일을 이공 호민(李公好閔)이 앞서 관장하고 있다가 상을 당해 이 직책에서 떠나갔는데, 공이 도착하면서 이 일을 대신 맡게 되었다. 처리해야 할 각종 문서가 하루에도 수십 상자씩 되었는데 민첩하게 응수하며 처리하는 솜씨가 신출귀몰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를 위해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그에게 제수하고 또 지제교(知製敎)를 겸대하게 하였다.
계사년 5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고, 겨울에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여 서울에 돌아왔다. 황제가 행인(行人)사헌(司憲)을 보내 조칙을 내렸는데, 원접사(遠接使)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공을 끌어들여 종사관으로 삼았다.
갑오년 정월에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송유진(宋儒眞)이 모반한 일이 발각되자 상이 친국(親鞫)하였는데, 공이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서 지극히 상세하게 안문(按問)하고 정밀하면서도 민첩하게 응대하자 상이 자주 그를 지목하여 그 일을 맡겼다. 옥사(獄事)가 완결된 뒤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 승진해 서용(敍用)되고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조정이 명(明) 나라 병부 상서의 의논에 쫓긴 나머지 기미책(羈縻策)을 상주(上奏)하자 공이 차자(剳子)를 올려 그 잘못을 논하였다. 상국 정철(鄭澈)이 시배(時輩)에게 모함을 받았었는데, 죽은 뒤에도 물어뜯김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그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려 하였는데, 정공 엽(鄭公曄)이 옥당에 있는 것을 꺼린 나머지 먼저 그를 공격하여 쫓아낸 뒤에 이어 일대(一隊)의 사류(士類)를 모두 축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공이 그 기미를 알아채고 사실을 주워모아 스스로 탄핵하고 사헌부의 직책을 떠났는데, 이로 말미암아 더욱 시배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임명되었다가 서장관(書狀官)에 충당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을미년에 복명(復命)한 뒤,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ㆍ군기시 정(軍器寺正)ㆍ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다. 순안어사(巡按御史)로 함경도에 나가자 부하를 사납게 대한 장수와 탐관오리들이 공이 온다는 말을 듣고는 인끈을 풀고 떠나기도 하였으며, 성격이 거세고 거만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는 감사(監司)홍여순(洪汝諄)도 공을 보고는 자기를 낮춰 대하였다. 공이 험난함을 꺼리지 않고 직접 시골 마을들을 찾아 다니면서 백성의 질고(疾苦)를 조목별로 진달하여 견감(蠲減)시켜 주었으므로 북도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공을 사모하고 있다.
병신년에 의정부 사인(舍人)을 거쳐 장악원 정으로 옮겨졌으며,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막하(幕下)에서 종사관으로 있다가 서반직(西班職)의 호군(護軍)에 서용(敍用)되었고 다시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다.
호서(湖西)에서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역모를 꾀해 군사를 일으킨 뒤 잇따라 몇개 군(郡)을 함락시키자 원수가 변을 듣고 군대를 진격시켰는데, 적이 이미 패한 뒤 조정에서 괴수만 잡아들여 다스리고 나머지 패거리들 수천 명은 모두 원수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원수는 모두 죽여 없애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이 ‘남의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는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왕자(王者)의 정치이다.’고 말하자, 원수가 크게 깨닫고는 즉시 공을 조정에 보내 사유를 갖춰 보고하게 하니, 상이 그 청을 윤허하고 이어 공이 동참하여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죄가 특히 많은 자 7명만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차례차례 풀어주었는데, 이렇게 해서 호서 백성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음은 물론 원근의 지역에서 모두 한 목소리로 칭찬들을 하게끔 되었다.
정유년에 사섬시 정(司贍寺正)과 예빈시 정(禮賓寺正)이 되었다. 명 나라의 병부 상서 형개(邢玠)가 군대를 감독하러 나오자 공이 접반사(接伴使) 신점(申點)을 수행하여 요동(遼東)의 봉황성(鳳凰城)으로 마중나갔다가 11월에 조정에 돌아왔다. 그뒤 연이어 평산 부사(平山府使)와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이는 두 고을이 통행이 잦은 큰길에 위치하여 잔파(殘破)되었으므로 군소배들이 기필코 공을 좋지 못한 곳에 몰아넣어 기를 꺾고 욕보이려 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대신이 이에 대해 사론(士論)이 허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공이 사명(辭命)을 담당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문득 아뢰어 도성에 머물게 하였다.
무술년에 장악원 정 겸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다가 천거에 의해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校理)와 응교(應敎)가 되었으며 교서관 교리를 겸대하였다. 이때 경략(經略)양호(楊鎬)가 군량이 조달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자문(咨文)을 보내 근신(近臣)으로 하여금 독촉하도록 요구하니, 선묘(宣廟)가 그 일을 공에게 명하였다. 이에 공이 입직소(入直所)에서 나와 하직 인사를 드린 뒤 곧바로 관서(關西) 지방으로 달려가 무더위와 비바람을 무릅쓰고 해항(海港)을 드나들며 군량 17만 곡(斛)을 운반하였다. 겨울에 문서를 짓는 일 때문에 급히 불려 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병 때문에 체차되고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옹원 정(司饔院正)으로 옮겨졌다.
기해년에 재차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가 되었다가 종부시 정(宗簿寺正)과 의정부 사인(舍人)으로 옮겼으며,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고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면서 통정대부(洞政大夫)로 자계(資階)가 올랐는데, 으레 겸대하는 직책 외에 또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승지는 승문원 제조를 겸대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도 대신이 특별히 아뢰어 그대로 겸대하게 한 것인데, 이로부터 여러 차례 승지로 임명되었지만 모두 그 겸대직을 띠고 있었다. 겨울에 체차되어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전직(轉職)되었다.
경자년에 호군을 거쳐 다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다가 순서에 따라 차례로 우승지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체차되어 사직(司直)을 제수받았다. 여름에 예조 참의로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대사간으로 옮겨졌으며 여기에서 체차된 뒤 호군을 제수받았고 가을에는 병조 참지에서 이조 참의로 이동했다.
신축년에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이때 《주역(周易)》 고경(古經)을 위에 바친 자가 있었는데, 상이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교정해서 베껴 올리도록 명하니, 공이 이를 인하여 상차(上箚)하였다. 그 대략적인 내용을 보면,
“대저 《주역》이란 책은 네 분의 성인(聖人)을 거쳐 대의(大義)가 밝혀지고 세 분의 현인(賢人)을 경과하여 미지(微旨)가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괘효(卦爻)의 강유(剛柔)와 상수(象數)의 변역(變易)과 유명(幽明)의 일과 귀신의 정상과 삼극(三極 삼재(三才), 즉 천(天)ㆍ지(地)ㆍ인(人)임)의 도리가 모두 드러나 명쾌하게 밝혀지면서 숨김없이 들추어 내지고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의 도(道)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쉽게 이해됨으로써 혐의하던 것을 해결하게 되고 유예하던 것을 결정하게 되었으니, 이렇게 해서 비로소 사람들이 헤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현(顯)과 미(微)에 간격이 없고 체(體)와 용(用)의 근원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그 말이 오묘하고 가리키는 그 뜻이 심원하고 그 변화가 무궁한 만큼 참으로 성인의 마음과 같은 경지에서 보고 올바른 의리를 터득한 자가 아니면, 대부분 다른 길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옛날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각각 전(傳)과 본의(本義)를 내지 않았던들 그 속에 온축(薀蓄)되어 있던 조촐하고 바르고 정미로운 도가 하마터면 없어질 뻔하였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선천(先天)의 학문은 심(心)를 근본으로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천도(先天圖)야말로 심학(心學)인 것이다.’ 하였으며, 주렴계(周㾾溪)의 태극도(太極圖)에 이르러서는 중정 인의(中正仁義)로 단안을 내리면서 이 도리에 따라 닦아 나가면 길(吉)하게 되는 반면 이에 어긋나게 할 경우엔 흉하게 된다고 경계하였는데, 계사전(繫辭傳)을 보면 ‘성인이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닦아 그 의식(意識)의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해 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역》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이를 먼저 마음에 적용하지 않으면 《주역》을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배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 선(善)의 길로 발동되면 양(陽)이 움직여 복(復)이 되지만 악(惡)의 길로 발동되면 음(陰)이 싹터서 구(姤)가 됩니다. 한번 구(姤)가 되고 한 번 복(復)이 됨에 따라서 혹 곤(坤)의 위태로움에 처하게 될 수도 있고 혹 건(乾)의 강명(剛明)한 덕과 짝할 수도 있으니, 그 차이가 현격하다 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그 누가 또한 저쪽을 버리고 이쪽으로 나아오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천리(天理)는 기르기는 어려운 반면 잃기는 쉽고 인욕(人慾)은 빠져들기는 쉬운 반면 막기가 어려운 법인데, 이에 대해서 제어할 방도를 알지 못하게 되면 가려진 자는 더욱 가려지고 어두운 자는 더욱 어두워지기만 한 결과 음(陰)의 기운이 끝까지 치고 올라가 양(陽)을 모두 떨굼으로써 천지가 폐색(閉塞)되고 말 것입니다.
《주역》에서 말한 ‘적연부동(寂然不動)’은 곧 자사자(子思子)가 말한 ‘미발지중(未發之中)’이고 《주역》에서 말한 ‘감이수통(感而遂通)’은 곧 자사자가 말한 ‘발이중절(發而中節)’로서 하나로 관통되는 것일 뿐 처음부터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의 심체(心體)로 하여금 적연부동한 가운데에서 천기(天機)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고 감응(感應)할 때에 본원(本源)이 늘 깨끗해지게 하면서 외물(外物)이 내 앞에 교차되어도 같이 휩쓸리지 않고 명경 지수(明鏡止水)처럼 티끌 하나라도 오염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신령스러움과 밝음이 내 몸에 있게 되고 열리고 닫히는 것이 나를 말미암게 될 것이니, 상(象)을 관찰하고 점(占)을 음미하는 것은 단지 여사(餘事)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천도(天道)는 원(元)에 기초하여 만물을 내고 인주(人主)는 그 원(元)을 몸받아 만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남의 임금이 되는 도는 하늘과 똑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천도는 꾸준하여 쉬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오면서도 그 차서가 문란되지 않고 어둠과 밝음이 교체되면서도 그 운행에 착오가 없는 것인데, 한 번이라도 쉬는 일이 있게 되면 만물을 내는 공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주역》을 통해 법받아야 할 것이 바로 건(乾)의 꾸준함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구두(口讀)와 문의(文義)에만 신경을 쓰지 마시고, 여러 주석가들의 자질구레한 해석에도 구애를 받지 마시고, 오직 중정 인의(中正仁義)로 방향을 정하시어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주는 묘한 이치를 탐구하도록 하소서. 비(否)의 극한 상황에 당하면 그 상황을 전환시킬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규(睽)의 극한 상황에 당하면 모여 합하게 할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손(損)의 때를 당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더해 줄 계책을 생각하시고, 박(剝)의 때를 당하면 수레를 얻을 방법을 생각하소서.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의 괘(卦) 하나의 효(爻)를 만날 때마다 모두 그 시의(時義)를 궁구하여 각각 쓰임에 맞게 하면 쉽고 간명하게 되어 천하의 이치를 터득하게 될 것이니, 영원히 지속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아, 양수(陽數)는 1이고 음수(陰數)는 2인 관계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잘 다스려진 때는 항상 적었고 어지러운 때가 늘 많았는데, 이 점을 성인이 걱정하시어 소장(消長)과 관련된 절목에 대해서는 일찍이 근실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시대에 따라 응하면서 변통해 그 기준에 합치되게 함으로써 이 세상을 대유(大有)의 성세(盛世)에 올려놓고 미제(未濟)의 어려움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름대로 성명(聖明)에게 기대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선묘(宣廟)가 너그럽게 답하였다. 선묘가 또 옥당에 명하여 《춘추(春秋)》에 대한 좌씨(左氏)ㆍ호씨(胡氏)ㆍ정씨(程氏) 등 3가(家)의 전(傳)을 모아 1편(編)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에 공이 또 차자를 올려 《춘추》에 나오는 복수(復讐)의 대의(大義)를 신명(申明)하였는데, 그 대략에,
“《춘추》 한 책이야말로 성인의 대용(大用)이요 오경(五經)의 단안(斷案)입니다. 왕자(王者)를 높이고 패자(霸者)를 물리치며,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정하며, 시비를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별하여 이미 지나간 2백 년 동안의 자취를 가지고 천만 세 미래의 모훈(謨訓)을 삼았으니, 그 뜻이 은미(隱微)하고 그 의리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성인에게 또한 부득이한 면이 있었다 할 것입니다. 가령 과거에 주(周) 나라 왕실이 동천(東遷)하지 않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교화가 없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자(孔夫子)의 도가 당시에 행해질 수 있었다면, 《춘추》 1부(部)의 글이 바로 그 당대에 바로 시행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니, 어찌 앞으로 올 세상을 가르치는 정도로만 끝나고 말았겠습니까. 성인의 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고 성인의 정치를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성인의 말씀을 높고 위대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옛날의 도를 오활하고 시대에 동떨어져 준행(遵行)하기 어렵다고 하지 마소서. 가슴 속에 간직하는 것은 반드시 천리(天理)의 바름에 기초하시고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실 것이며, 일을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왕도(王道)의 표준에 맞도록 궁구하시고 치우친 패도(霸道)의 술수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크게는 나라를 경륜하고 다스리는 일과 작게는 갖가지 일에 응수하는 일과 은미하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 혼자 있을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덕(天德)을 지니고 계신다면 백왕(百王)의 바꿀 수 없는 대법(大法)을 어찌 오늘날에 행할 수 없겠습니까.
더구나 《춘추》의 기록을 보면, 난신(亂臣)적자(賊子)에 대해서 그렇게 엄할 수가 없고,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분별하는 데 그렇게 근실할 수가 없으며, 복수의 의리에 대해서는 더욱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씨(胡氏)의 전(傳)을 보면 이 점에 대해 간절하게 이야기하면서 후세(後世)를 위해 경계해 주고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애석하게도 그 말이 쓰여지지 않은 채 남도(南渡)하여 목전의 안일만 탐하다가 날로 쇠퇴해진 나머지 끝내는 이적이 중하(中夏)에 들어와 주인 노릇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이는 꼭 이러한 뜻이 밝혀지지 않아 그런 길로 이끈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군신(君臣) 상하가 힘을 합치고 마음을 같이하여 진정 복수의 의리를 가슴에 새긴 뒤 한 세상을 떨쳐 일어나게 하여 통쾌하게 이목(耳目)을 일신(一新)시킨다면, 전하께서 이 책을 숭신(崇信)하시는 그 실효를 더욱 보게 되실 것입니다.”
하니, 선묘가 다시 너그럽게 답하였다. 그리고 그 차자들을 두 책의 첫머리에 아울러 싣도록 명하고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켜 가장(嘉獎)하는 뜻을 보였다.
임인년 2월에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체차되어 호군을 제수받았다. 4월에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하고 겨울에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분부를 받들어 명(明) 나라 장관(將官)들의 동정(東征)한 실상에 대해 약간 권을 지어 올리고, 또 왕비 김씨(金氏)의 책문(册文)을 지었는데, 그 공으로 모두 구마(廐馬)를 하사받았다.
계묘년 정월에 예조와 병조의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이 해에 세 번 부제학이 되고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을 겸하였다. 선묘가 서각(書閣)에 보관된 우리 나라의 시문(詩文) 1천여 권을 공에게 산정(刪定)토록 명하였는데, 일단 일을 끝낸 뒤에 여러 사신(詞臣)과 함께 하기를 청해서 확증하여 마무리한 뒤 바치니, 다시 구마를 하사하였다. 겨울에 예조 참판으로 옮겼다.
갑진년 여름에 부제학에서 승진하여 세자 좌부빈객을 겸하였다가 체차되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 겸 동지춘추관사를 제수받았다. 선묘가 한창 《주역》을 강하고 있었는데, 공이 명을 받고 여러 유신(儒臣)과 함께 《역경(易經)》을 교정하였다. 가을에 병조 참판이 되고 겨울에 부제학이 되었다.
을사년 정월에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1월에 발탁되어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병오년 봄에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명 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주지번(朱之蕃)과 급사중(給事中) 양유년(梁有年)이 원손(元孫)의 탄생과 관련한 조명(詔命)을 가지고 와 반포하였을 때 공이 의주(義州)에 영위사(迎慰使)로 나갔으며, 또 《황화집(皇華集)》의 서문을 짓도록 명을 받았다.
여름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병란을 겪은 뒤로 과제(科第)를 거쳐 사관(仕官)을 엿보는 무사들이 무수히 많았고, 공을 세워 직책을 제수받아야 할 군리(軍吏)들이 장부에 가득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전(西銓)의 벼슬길을 제대로 안배하는 일이 복잡 다단해서 전후 이 직위에 있던 자들이 대부분 비방을 받고 떠나갔었다. 그러다가 공이 이 책임을 맡게 되자 뭇 관원들이 나름대로 상상하기를 ‘공이 유아(儒雅)하고 중망(重望)이 있으나 무사들의 인사 행정에 관한 한 꼭 잘 하리라고 보장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업무를 본 몇 개월 동안 단정히 앉아 객을 사절하면서 청탁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한편 스스로 물정(物情)을 주도면밀하게 살펴 주의(注擬)하며 조처하는 일을 모두 합당하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심복하였다. 그리고 대열에서 이탈해 도망친 명 나라 군사들을 쇄환(刷還)할 때를 당하여 그들이 작당해서 난동을 부리려고 꾀하자 공이 계책을 내어 방편을 써서 대처하였으므로 끝내 변고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체차되어 상호군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김계(金稽)라는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의 생부)을 추숭(追崇)하자고 청하였는데, 그 일이 종백(宗伯)에게 돌아왔다. 당시 행상(倖相 유영경(柳永慶)을 말함)이 정무를 맡고 있었는데 상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망령되이 그 일을 기회로 아첨하려고 하여 그의 친당(親黨)을 보내 공의 뜻을 낚아보려 하였다. 이에 공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복원(濮園 송(宋) 나라 영종(英宗)의 생부 복안의왕(濮安懿王)을 말함)의 고사(故事)와 관련하여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의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하자, 물어보러 온 자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떠나갔는데, 그 의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정미년에 체차되어 상호군 겸 도총관이 되었다.
무신년 정월에 지중추부사 겸 경기 관찰사ㆍ병마수군절도사ㆍ개성부 유수가 되었다. 2월에 선묘가 승하하였다. 상사(喪事)에 필요한 물품을 대부분 기내(畿內)에 의지해서 마련했는데, 이에 앞서 공이 한 책자를 준비해 두고 급할 때 부응할 여러 물품들을 기록한 뒤 담당 관리에게 내주어 예비토록 하였으므로 제때에 공급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게끔 되었다. 부름을 받고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선묘의 애책문(哀册文)을 지었다.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加資)되어 한성부 판윤 겸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는데, 돈체사(頓遞使)로 현궁(玄宮)까지의 길을 담당하였다. 인산(因山)이 끝난 뒤 구마(廐馬)를 하사받았다. 삼사(三司)가 장왕자(長王子) 임해군 진(臨海君珒)이 불궤(不軌)를 도모했다고 고하여 큰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그 결과 당여(黨與)를 체포해 다스리고 임해는 해도(海島)에 금고(禁錮)시켰는데, 공이 10 일 동안에 두 차례나 대사헌이 되었으면서도 모두 숙배(肅拜)하지 않았으므로 이때부터 광해(光海)가 좋지 않게 여겼다.
기유년 봄에 예조 판서와 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황제가 행인(行人)웅화(熊化)를 보내 조제(弔祭)를 내리고 태감(太監) 유용(劉用)을 보내 책명(册命)을 반포하게 하였는데, 공이 또 의주(義州)로 가서 두 사신을 영위(迎慰)하였다. 돌아와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 지중추부사로서 세자 책봉을 주청(奏請)하는 상사(上使)로 뽑혀 연경(燕京)에 갔다.
경술년 4월에 복명(復命)하고, 다시 예조 판서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며, 봉전(封典)에 관한 일을 완전무결하게 수행했다 하여 특별히 노비와 전토(田土)를 하사받는 동시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었다.
좌상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총재사(總裁使)로서 《선묘실록(宣廟實錄)》을 감수(監修)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대제학을 도청(都廳)이라 칭하고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총재가 특별히 공을 거론하여 대제학과 함께 도청이 되도록 청하였는데, 공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이 총재에게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수십 년에 걸친 사초(史草)가 불행히도 병란 통에 없어져 당시의 훌륭한 말들과 아름다운 정사가 백분의 일도 남아 있지 않으니 장차 영구히 보존할 기록을 정리하여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의당 먼저 치란(治亂)과 관계된 충현(忠賢)과 간영(姦侫)을 분별한 다음에 다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보첩(譜牒)과 비지(碑誌)에서 뽑아내고 그 실제 자취를 한데 모아 연시(年時)를 고찰해서 편찬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거의 완전하게 될 것이다.’ 하니, 총재가 이를 옳게 여겼는데, 일을 착수하기도 전에 공과 이공이 모두 파직되었다.
광해(光海)가 좌도(左道)를 신봉한 나머지 장차 신궁(新宮)으로 나아가려 할 때에 재앙을 물리치는 법을 행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이 아뢰기를 ‘인군(人君)이 임어(臨御)하는 것은 해가 하늘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비정상적인 일을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일로 후세에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하며 강력히 간쟁하자, 이에 중지하였다.
신해년 여름에 동지경연(同知經筵)을 겸하고, 겨울에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임자년 여름에 다시 도총관(都摠管)을 겸하였다.
계축년 4월에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소하여 국구(國舅)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끼고 역모했다고 고하였는데 조정 사대부들에게까지 말이 연루되었다. 광해가 김제남을 하옥시켜 사사(賜死)하고 그의 두 아들과 사위 한 명도 아울러 죽이면서 교묘하게 얽어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에 앞서 선묘(宣廟)가 임종할 때에 평소 공경하며 중히 여겼던 재신(宰臣) 7인에게 유교(遺敎)를 내렸는데, 공도 참여했었다. 그 유교에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민(臣民)에게 죄를 졌으므로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는데, 지금 홀연히 중병(重病)을 얻게 되었다. 오래 살고 못 사는 데에는 운수가 있고 죽고 사는 것에도 명(命)이 있는데, 이는 밤과 낮이 바뀌는 것을 어길 수 없는 것과 같아서 성인도 면하지 못하는 것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대군(大君)이 어려 다 자란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니, 이 점이 마음에 걸릴 따름이다. 내가 죽은 뒤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만일 사설(邪說)이 일어나면, 여러 경들이 사랑하여 보호하며 거들어주었으면 한다. 감히 이 일을 부탁한다.”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뒷날 이런 변이 일어날 줄을 선묘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사간 이지완(李志完)과 정언 유활(柳活) 등이 권간(權奸)의 뜻을 받들어 7신(臣)이 즉시 변명(辨明)하지 않았다고 논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되도록 하였는데, 이는 마치 있지도 않은 선왕의 유교를 있는 것처럼 꾸민 양 여기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정협(鄭浹)이란 자가 역시 간인(奸人)으로부터 몰래 꾀임을 받고 이름있는 공경(公卿)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댔으므로 차례차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공은 옥에 갇혀서도 신기(神氣)가 평상시와 같았는데 말이 순리에 맞고 사리 또한 분명하였으므로 간당(奸黨)이 공을 매우 미워하면서도 끝내 해칠 수가 없어 석방해 내보내면서 편리할 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이에 김포(金浦) 선산 아래로 돌아와 몇 칸 짜리 초옥(草屋)을 마련하였는데, 협착하여 거주할 만한 곳이 못 되었지만, 공은 그곳에 살면서 느긋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하루암(何陋菴)’이라는 편액(扁額)을 내걸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갑인년에 공의 맏아들인 동양위(東陽尉)가 공을 위해 산기슭에 집을 지어 못을 파고 나무를 심는 등 편히 쉴 곳으로 만들었는데, 공이 그 집을 ‘감지(坎止)’라고 명명하고는 그 속에 깊이 들어 앉아 초연히 자유스러운 생활을 즐기면서 책을 좌우에 두고 피곤함도 잊은 채 깊은 뜻을 탐구하였다. 공이 예전에 소자(邵子 소강절(邵康節)임)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읽다가 한두 군데 계합(契合)되지 않은 곳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홀연히 깨달아 알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선천관규(先天管窺)》를 직접 저술하였다. 그런데 그뒤 〈소자전서(邵子全書)〉를 얻어 비교해 보니 과연 차이가 나는 점이 없었다.
병진년에 이이첨 등이 밤낮으로 부추겨 광해를 두렵게 함으로써 모후(母后)에 대해 엄청난 짓을 저지르려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김제남을 육시(戮屍)하여 저자거리에 전시하게 하고, 대사헌 정근(鄭瑾)ㆍ대사간 정조(鄭造) 부제학 유숙(柳潚) 등으로 하여금 7신에게 가죄(加罪)하기를 청하게 하여 원도(遠道)에 나누어 유배시켰다. 이에 금오랑(金吾郞)이 파견되어 공을 압송해 춘천(春川)으로 갔다. 때는 추운 겨울철에 눈까지 내려 잔도(棧道)가 미끄러운 탓으로 말도 통행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은 신발까지 벗고 도보로 온갖 고생을 하며 재를 넘었는데 길가에 엎어지고 넘어지며 발과 손마저 모두 맨살로 드러났으므로 보는 자들이 공을 위해 눈물을 뿌렸다. 배소(配所)에 이르러 풀뿌리로 엮어 우거(寓居)를 만들고 이름을 여암(旅菴)이라 하였다. 유배 생활 5년 동안에 문밖을 나서지 않고 오직 옛 전적(典籍)을 보고 스스로 즐기면서 고향 떠나 구속되어 있는 외로운 신세를 잊었다.
신유년에 사면을 받고 다시 김포로 돌아왔다.
계해년 봄에 상이 의거(義擧)를 일으켜 반정(反正)하고 혼조(昏朝) 때의 죄적(罪籍)을 말끔히 없애버린 뒤 구신(舊臣)을 모두 불렀다. 공도 입조(入朝)하였는데 그날로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이어 홍문관 대제학ㆍ예문관 대제학ㆍ지춘추관 성균관사를 겸하였다.
혁명 초기에 대소 관료 대부분이 거의 바뀌었는데, 공이 물의(物議)를 널리 채집하여 주의(注擬)하고 전형(銓衡)하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자 상도 공을 믿고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제목(除目)이 내려질 때마다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눈을 씻고 다시들 보게끔 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조정이 일신(一新)되었다.
7월에 승진하여 우의정 겸 영경연(領經筵)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대배(大拜) 예정일에 상변(上變)한 자가 있어 매우 빈번하게 잡아들이는 상황이었는데, 상이 속히 공을 기용하려고 하여 하루에 사자(使者)가 세 명이나 이르자 공이 마침내 명령대로 따랐다. 상이 인견(引見)하고 맨 먼저 옥사(獄事)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였는데, 공이 새로이 교화를 펴는 마당에 억울한 사람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먼저 덕(德)을 앞세우고 형(刑)은 나중으로 돌려야 한다는 점을 강력히 진달하면서 매우 간절하게 아뢰니, 상이 이 때문에 태도를 바꾸었다. 그리하여 옥사에 과연 실상이 없게 되자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에 도하(都下)의 백성들이 모두 경사스러운 일이라고들 일컬으며 환호하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겨울에 재이(災異)를 인하여 구언(求言)하자, 공이 상차(上箚)하여 시무(時務)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치도(治道)에는 대본(大本)과 대경(大經)이 있고, 정치에는 대요(大要)가 있습니다. 대본이 확립된 뒤에야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드러나고, 대경이 닦여진 뒤에야 바람직한 집안의 틀과 국가의 법도가 세워지는 것이며, 대요를 얻은 다음에야 시행하고 배치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중정(中正)한 기운을 받고 태어난 존재이니, 마음의 본체(本體)가 그야말로 허명(虛明)하고 순일(純一)하여 당초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단지 외물(外物)에 감응되는 것이 하나가 아닌 까닭에 선과 악이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큰 것이 확립되고 보면 작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이 말하는 대본(大本)인 것입니다.
신은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반드시 의로운 일을 많이 축적하시면서 잊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하지도 않는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일에 따라 체험하시면서 거기에 동요되거나 마음을 뺏기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문자를 통해 찾아보시면서 이치를 끝까지 궁구해내실 수 있겠습니까. 강론을 통해 탐색하시면서 선을 택해 고수하실 수 있겠습니까. 인애(仁愛)를 체(體)로 삼으시면서 지성(至誠)으로 견지하실 수 있겠습니까. 분노를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면서 다른 곳에 화풀이하거나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하며 싹트기 전에 제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늘처럼 텅 빈 마음으로 외물(外物)이 올 때 순응(順應)하실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천위(天位)이고 지극히 어려운 것이 천위인데, 하늘이 밝은 명(命)을 내렸을 때 앞으로 길하게 되고 흉하게 되는 것은 처음에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크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규합할 수 없고 지극히 바르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일거수 일투족을 아랫사람들이 엿보고 영(令)이 한 번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 말을 주고 받습니다. 기뻐하면 그것을 기화로 은혜를 파는 자가 있게 되고, 화를 내면 그것을 이용해 위세를 부리는 자가 생기게 되고, 사랑하면 그 틈에 개인 욕심을 채우려는 자가 나타나게 되고, 미워하면 그것을 빙자하여 원망을 키우는 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의리가 정립(定立)되지 않으면 귀에 들어오는 것이 많을수록 미혹하기 쉽게 되고, 뜻을 확고하게 수립하지 않으면 선(善)을 고수한다고 하면서도 혹 다른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근본을 세움에 있어 삼가야 할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마땅히 집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齊家)가 되지 않고서 어떻게 나라가 다스려지겠습니까. 성주(成周)의 제도를 보면 빈어(嬪御)와 시위(侍衛)를 비롯해서 음식ㆍ의복ㆍ재화를 담당하는 관원들 모두가 천관(天官)의 통솔을 받아, 설어(褻御)와 복종(僕從)에 정인(正人) 아닌 사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위에 서서 자기 몸만 삼가고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정치의 교화가 널리 퍼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폐조(廢朝) 때에는 가정(家政)이 먼저 혼란해진 탓으로 참언이 이를 통해 들어오고, 뇌물이 이를 통해 들어왔으며,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벼슬 주는 권한이 모두 이를 통해서 나오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인척(姻戚)이 행하고 중간에는 무변(武弁)이 행하고 마지막에는 사대부 중에 이름이 있다고 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이런 일을 행하다가 끝내 나라를 망치고야 말았습니다.
아, 그 당시에도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저 사대부들도 어찌 모두가 탐욕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까. 단지 발신(發身)할 길이 그것밖에 없고 온 세상이 다 그런 짓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둑에 터진 구멍 하나가 엄청난 홍수의 재앙을 맞게 하고 처음에 싹을 잘라버리지 않았다가는 끝내 도끼자루를 들어야 하는 법이니,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신 것이 해가 중천에 뜬 것과 같으니 구름과 안개가 끼는 일을 다시 염려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성(聖)과 광(狂)이 가름나는 것인 만큼 삼가하고 경계하셔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요전(堯典)》을 보면 ‘능히 큰 덕을 밝혀 구족(九族)을 가까이 하였다.’고 하였고, 《예기(禮記 대전(大傳)을 말함)》에는 ‘성인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 우선적으로 행한 일이 다섯 가지인데 그 첫째가 친족을 다스리는 일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친친(親親)한 다음 인민(仁民)하고 인민(仁民)한 다음 애물(愛物)하는 것이 본래 선후(先後)의 순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거 폐조(廢朝) 때에는 간신(奸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시의(猜疑)로 유도한 나머지 종척(宗戚) 가운데에서 멸망당한 자가 많이 나오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내외의 마음이 이탈된 것 모두가 이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창성하는 기회를 만나 윤기(倫紀)가 다시 밝혀지고 사람들마다 살 곳을 얻게 되어 겨우 숨을 쉬다가 소생하게 되었으니, 편안하도록 감싸주고 화목하게 하는 것 또한 힘써야 할 하나의 가법(家法)이라 할 것입니다. 이상이 신이 이야기하는 대경(大經)입니다.
정치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한 마디 명령을 내려 다그치며 곧바로 이루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큰 난리를 겪은 뒤로 민심이 쉽게 동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재성(裁省)하는 제도의 목적이 본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데도 완민(頑民)은 원망하고, 대동법(大同法)의 본래 목적이 균역(均役)하기 위한 것인데도 호민(豪民)은 원망하고 있으며, 널리 탕척(蕩滌)해주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족함을 알지 못하는가 하면, 초병(抄兵)하는 일이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데도 거꾸로 고달프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백성의 습성이란 변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백성이 원망한다고 한다면 호민이나 완민을 말할 것 없이 모두 국가의 근심거리가 된다 할 것입니다.
도민(都民)의 휴척(休戚)은 탁지(度支)에 달려 있고 외방의 휴척은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백성의 원망이 없어지게 하려면 백성의 호오(好惡)를 살펴서 하기만 하면 될 뿐이니, 섣불리 내려온 관습대로 따르려 하면 성헌(成憲)이 무너질 것이고, 너무 지나치게 몰아부치려 하면 슬퍼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광무(光武)가 중흥(中興)했던 것처럼 하려 한다면 구장(舊章)을 모두 일소한 뒤 한 시대의 제도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고, 서한(西漢)의 소제(昭帝)나 선제(宣帝)처럼 조종(祖宗)의 법도를 계술(繼述)하려고 한다면 너무 심한 것들을 제거하고 미비점만 보충하면 될 것이니, 완급에 중도를 얻어 각박한 것만 제거하면 될 것입니다.
대저 경장(更張)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하정(下情)을 살펴 시행할 발판을 마련해야 하고, 변통할 때에는 반드시 시작할 때와 끝날 때를 잘 계획하고 생각해서 영구히 지속되도록 도모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명령을 내리는 것이 흐르는 물에 근원이 있는 것처럼 되어 순리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쓸 때에는 행실이 올바른지 먼저 살피고 풍속을 권장할 때에는 근본이 충실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양(禮讓)하는 정신을 드높이고 경쟁하는 일을 멎게 하며 염치를 기르고 부박한 행동을 억제하게 하여 차라리 형식보다는 내용을 따르게 하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앞세우게 한다면 세도(世道)를 혹 만회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행하다 보면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국체(國體)가 확립될 텐데, 시의(時宜)를 살피고 헤아려 조종의 전범(典範)을 법받아 행한다면 그런대로 성취될 희망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말씀드린 대요(大要)입니다.
치병(治兵)에 관한 한 가지 일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급한데, 제때에 정비해두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변에 대처할 수가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수신(帥臣)과 병사(兵事)를 잘 아는 여러 숙장(宿將)들에게 하문하시어 일찍 계책을 세우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수령은 고을마다 적임자를 얻기가 여러 가지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수령들을 현부(賢否)에 따라 출척(黜陟)시키는 권한은 전적으로 감사(監司)에게 있는데, 성격이 유약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는 그런 일을 처리하는 데 방해만 되고, 기운이 왕성하고 기세가 날카로운 자가 족히 풍력(風力)으로 재단할 자질을 지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시험해 보지 않으면 능력이 발휘되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종신(從臣)과 낭서(郞署) 중에 참으로 그런 재주를 가지고 있는 자가 있을 경우 살펴 발탁해서 방면(方面)의 중책을 맡겨 보았으면 합니다.
관료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아전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데 온갖 일이 번쇄해지고 있는 이유는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육조(六曹)의 낭료(郞僚)와 각사(各司)의 관원들에 대해 일체 법전에 있는 임기만료제를 적용하고 앞질러 천거하는 일이 없게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담당 관아가 잘 다스려지지 않을 경우 그 관아가 소속된 육부(六部)를 늘 규찰하고 적발하여 정부(政府)에 보고토록 해야 할 것이니, 그러면 육부와 각사 모두 통제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관서(關西)일로(一路)에 병제(兵制)를 세우려 할 경우, 대체적인 일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일이야 원융(元戎)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 절제(節制)를 받아 수행하는 수령을 더욱 중요시해야 할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헤아리는 것은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미리 추산하는 것은 상황에 부딪쳐 처리하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도원수(都元帥) 및 양서(兩西)의 관찰사에게 하유하시어 그 도(道)의 수령의 현부(賢否)를 가지고 한 번 상세히 살펴 조사한 뒤 조목별로 상문(上聞)토록 함으로써 이웃 고을들을 모두 실질적인 재능이 있는 자에게 맡겨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했으면 합니다.
원자(元子)의 나이가 이미 12세나 되었으니, 국본(國本 세자)을 세우는 일은 참으로 제때에 맞게 해야 하고 올바로 인도하는 방도 역시 갖추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예관(禮官)에게 봉전(封典)을 품(稟)하여 청하도록 분부를 내리시어 일찍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를 가까이함으로써 덕을 기르는 터전으로 삼도록 했으면 합니다.”
하고, 원춘(元春)의 4잠(箴)으로 임조(臨朝)ㆍ연거(燕居)ㆍ진학(進學)ㆍ체건(體乾)을 바치니, 상이 가납(嘉納)하고 선온(宣醞)하는 한편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갑자년 봄에 부원수 이괄(李适)과 순변사(巡邊使) 한명련(韓明璉)이 군사를 출동시켜 반란을 일으켰다. 상이 장차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면서 공에게 자전(慈殿)을 호위하여 강도(江都)로 나누어 들어갈 것을 명하였으나, 공이 청대(請對)하고 분조(分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강력히 진달하니, 상이 동의하여 마침내 양궁(兩宮)이 모두 공주(公州)로 가게 되었다. 얼마 있다가 이괄이 패몰하여 그의 머리가 행재소에 전해지자 종묘(宗廟)에 고하고 머리를 바쳤다. 예관(禮官)이 진하(陳賀)에 대한 일을 의논하니, 공이 의논드리기를,
“역신(逆臣)이 대궐을 범하여 임금이 몽진(夢塵)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축하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환도(還都)할 때에 공은 명을 받고 공산(公山 공주)에 머물러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인 뒤 방방(放榜 합격자 발표)하고 복명(復命)하였다. 상이 호종(扈從)한 신하들을 책훈(策勲)하려 하였는데, 공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하니, 상이 중지하였다. 자전(慈殿)의 하인 가운데 범법자가 있었으므로 헌부가 구속하고 힐문하자, 상이 노하여 대관(臺官)을 모조리 체차시키라고 명하였는데, 공이 상차(上箚)하여 너그럽게 포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여러 훈신(勲臣)들이 상의하기를 ‘인성군 공(仁城君珙)이 여러 차례나 역적의 입에서 거론되었으니, 먼 외딴 지역으로 유배보내 화의 씨앗을 근절하는 것이 좋겠다.’하고, 조정 관료들과 함께 복합(伏閤)하여 강력히 청하였는데, 상이 경솔하게 처리하려고들 한다고 의심하여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요상(僚相)에게 말하기를,
“법에 입각한 조정의 의논이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지친(至親)을 용서해주는 것 또한 상의 성덕(盛德)에 관련된 일이다.”
하였는데, 우찬성 이귀(李貴)가 그 말을 듣고 버럭 성을 내며 공석(公席)에서 공을 매도하였다. 공이 상차하여 아랫 관원이 대신을 욕보인 것은 국체(國體)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말하고 즉시 병을 핑계로 물러날 것을 청하니, 상이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이광정(李光庭)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장만(張晩)을 불러 그때의 상황을 하문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사실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상이 노하여 준절히 꾸짖는 내용으로 하교하였는데, 대간이 또한 이 일을 논하니, 이에 상이 이귀ㆍ이광정ㆍ장만 등을 모두 체직시켰다. 그리고 여러 차례나 공에게 사신을 보내 위로하며 머물러 있도록 이르니, 공이 다시 상차하여 세 신하에 대한 견책을 관대히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사헌 최명길(崔鳴吉)이 불법 행위를 한 능원군 보(綾原君俌)의 일을 논하니, 상이 노하여 준엄한 내용으로 분부를 내렸다. 공이 상차하여 대각(臺閣)을 예우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킴으로써 천명(天命)을 영원히 보존하도록 도모해야 한다고 말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응교 박정(朴炡)이 옥당의 동료 2ㆍ3명과 함께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였는데, 상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박정 등이 배척하는 것으로 의심하고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할 것을 명하자, 공이 상차하여 구제하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이귀가 경연 석상에서 박정 등의 일을 인하여 논하면서 김류(金瑬)를 심각하게 헐뜯자, 상이 크게 노하여 박정과 나만갑(羅萬甲) 등을 유배보내도록 명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상차하기를,
“이귀가 김류를 논한 그 말이 대부분 중도에 어긋났으므로 신은 생각하기를 ‘두 원훈(元勲)이 대립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못 된다.’하고 혼자서 지붕만 쳐다보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런데 방금 하교를 보니 박정과 나만갑을 멀리 유배보내도록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분열의 단서에 깊이 관심을 가지시고 그 근원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박정과 나만갑이 중도에 맞지 않는 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견벌(譴罰)이 시행되었는데, 이귀가 오늘날 말한 것에 대해서 박정 등이 꼭 미리 알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고 보면, 그들이 범한 것은 바로 전일의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귀 때문에 무턱대고 중률(重律)로 치죄한다면 이는 타당한 형정(刑政)이 못 될 듯싶습니다.”
하고, 또 큰 재해를 인하여 언로(言路)를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을 곡진하게 진달하니, 상이 특별히 위엄을 거두었는데, 박정 등이 이로 인하여 죄를 면하게 되었다.
을축년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이 죽었다. 예관이 상의 복제(服制)를 의논하여 부장기(不杖期)로 정했는데, 상이 삼년상을 행하려 하자, 공이 요상(僚相)과 대궐을 떠나지 않고 강력히 간쟁한 결과 끝내 예관의 의논을 따르게 되었다. 또 상이 직접 상주(喪主) 역할을 담당하려고 하자, 공이 다시 백관을 이끌고 아뢰기를,
“지금 계운궁(啓運宮)의 상에 능원군 보(綾原君俌)가 상을 주관토록 청한 것은, 성명께서는 이미 종묘(宗廟)의 주인이 되신 몸이라서 다시 사친(私親)을 위해 상주 노릇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어서야 윤허를 받았다. 상이 대원군(大院君)의 묘(墓)를 원(園)으로 칭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니, 공이 아뢰기를,
“원(園)은 능(陵)의 다른 이름입니다. 고금의 문헌을 보면 원능(園陵)이니 원침(園寢)이니 하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천자와 제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해 쓴 말로서, 능의 아래 묘의 위를 따로 지칭해 하나의 ‘원(園)’ 자를 써서 융강(隆降)의 절목을 삼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예관(禮官)이 공성(孔聖)의 호(號)를 개정하고 아울러 종사(從祀)하는 선유(先儒)들의 승출(陞黜)까지 의논할 것을 청하니, 공이 의논드렸는데, 그 대략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15년에 문묘(文廟)를 지었는데, 그 당시 천하 악독(嶽瀆)과 성황(城隍)과 전대(前代) 충신 열사들의 봉호(封號)를 모두 바로 잡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의 묘호(廟號)와 종향(從享)의 봉작(封爵)만은 옛날 그대로 하였으니, 지금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명 나라의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허위로 병액(兵額)을 무턱대고 작성한 뒤 억지를 부려 군량을 조달시키고 스스로 봉작(封爵)을 부여하면서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행동을 점점 더해만 갔다. 천계(天啓 명 희종(明熹宗)의 연호. 1621~1627) 6년 천자가 원자(元子)의 탄생과 관련하여 한림(翰林)강왈광(姜曰廣)과 급사중(給事中) 왕몽윤(王夢尹)을 보내 우리 나라에 조서(詔書)를 반포케 하고 돌아가는 길에 모영(毛營)의 군대를 사열하도록 하였다. 평안 감사 윤훤(尹暄)이 조사(詔使)를 따라 철산에 이르렀을 때, 모영에서 예씨(兒氏) 성을 가진 자가 윤훤에게 밀서를 보내면서 모장(毛將)이 장차 불측한 변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조정의 의논이 흉흉해지면서 대신 이하가 궐하(闕下)에 모여 변보(變報)를 기다렸는데, 혹 군사를 일으켜 가서 토벌하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나, 공만은 아뢰기를,
“모장이야말로 교활하기 짝이 없어 헤아리기 어려우나, 필시 조사에게 무례한 짓은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윽고 역마(驛馬)로 급보(急報)가 들어 왔는데 과연 공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
병인년 가을에 별시(別試)를 보여 선비를 뽑았는데, 공이 독권관(讀卷官)으로 전중(殿中)에 들어가 시험을 관장하였다. 그런데 합격자의 이름을 개봉하고 보니, 공의 아들 익전(翊全)과 손자 면(冕) 그리고 대독관(對讀官) 조박(趙璞)의 아들 전소(全素)가 모두 끼어 있었다. 이에 헌부가 고관(考官)이 사정(私情)을 둔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논하면서 파방(罷榜 합격자 전원의 취소)과 아울러 여러 고관들의 파직을 청하였다. 공이 강상(江上)으로 나가 대죄(待罪)하면서 상차(上箚)하여 정위(廷尉)의 심문에 나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어비(御批)를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공이 재차 상차하여 시원(試院)의 곡절을 모두 진달하고 이어 사직을 청하니, 상이 다시 어비를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 전유(傳諭)케 하면서 즉시 들어오게 하였다. 그리고 그때 마침 원(園)을 참배하는 예(禮)가 있어 공에게 도성에 남아 있도록 명하였으므로 공이 마지 못해 소명(召命)에 응하였다.
상이 추후에 낸 시권(試卷)을 조박이 앞장서서 거두었다는 이유로 그를 하옥시켜 국문(鞫問)하게 하자, 공이 세 차례에 걸쳐 상차해 사직하면서 진달하기를,
“여러 고관들이 함께 가부를 의논했었는데 조박만 신문을 받게 되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태연하게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정고(呈告)를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 전유(傳諭)케 하고 비답하기를,
“경이 조정에 있은 지 40년 동안 조그만 하자가 하나도 없었는데, 경의 명성에 대해서는 내가 또한 오래 전부터 들어 왔다. 그런데 이번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 뜻밖에 나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는 경의 불행일 뿐 아니라 국가에 있어서도 불행이라 할 것이다. 설혹 불공정했다손 치더라도, 과거 허균(許荺)의 간상(奸狀)을 예를 들면 그때 상신(相臣)은 눈치채지 못했었는데, 더구나 가부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경의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지난날 상신이 그일 때문에 인퇴(引退)하지 않았었고 보면 오늘날 또한 근거로 삼을 전규(前規)가 있다 하겠는데, 승출(陞黜)하고 고하(高下)를 매길 때에 경은 참여하지도 않았었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부디 고사(固辭)하지 말고 속히 출사(出仕)하여 여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공이 다시 감히 출사하지 못할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사직하니, 상이 재차 승지를 보내 비답을 내렸는데, 그 대략에,
“경의 뜻에 맞춰 허락해 준다면 내가 경을 의심한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고, 경이 만약 시종 물러가려고 한다면 경이 나에 대해서 유감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니, 내가 예전부터 믿고 의지하던 것과 경이 시종 충성을 바치려 했던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경의 거취(去就)야말로 나라의 안위(安危)와 관계되니, 속히 나의 뜻을 체득하여 빨리 나와 행공(行公)하라.”
하였다. 그때 마침 간관(諫官) 한 사람이 파방(罷榜)의 당부(當否)를 논하였으므로 공이 더욱 강력히 떠나갈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다시 사관을 보내 유시(諭示)하며 답하기를,
“지난번 전시(殿試)에서 경이 관여하지 않았었고 근일 들어 나라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를 ‘고관(考官)이 파직당하고 구속되었다 하더라도 상신(相臣)이 그때 일을 담당하지 않은 이상 나라 일을 위해 나오도록 애쓰는 것이 의리상 구애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리고 정승의 자리가 모두 비어 있는 이때 대신이 마음 속으로 불안해하고 있으니, 권면해서 출사(出仕)케 하는 것이야말로 대신을 대우하는 나의 도리로 볼 때 역시 해가 되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그래서 여러 차례 근신(近臣)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유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뜻밖의 논(論)이 나왔는데, 내가 실질적으로 대우하고 있지 않다고 하고 경을 배척하면서 그따위 정승을 장차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을 막아 억누르고 경을 낭패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지금 경이 일단 사람들로부터 처음에는 추켜 올려졌다가 나중에는 그지없이 헐뜯는 말을 들었으니 필시 출사하는 일을 불안하게 여길 것인데, 나 또한 끝내 형식적으로만 대우한다는 비평이 스스로 달갑게 여겨지지 않으니, 지금 우선 경의 요구에 억지로 부응하여 경의 뜻을 편안하게 해 주려 한다.”
하고, 정승의 직위를 해면(解免)하고 판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공이 오래 전부터 부담에서 풀려나려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져 장차 일을 모두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가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정묘년 정월에 상차하여 마음 속의 뜻을 전달하였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자 몇십 장(章)이 되더라도 기필코 요구를 관철한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다. 그런데 17일에 서쪽에서 위급함을 알리는 보고가 들어왔다. 노적(奴賊) 수만 명이 기병(騎兵)으로 의주(義州)를 습격하고 잇따라 몇 개 군(郡)을 함락시켰는데, 10일 사이에 서관(西關)을 유린한 것이었다. 이에 공을 기용하여 좌의정과 세자부(世子傅)에 임명하고 세자를 받들어 남하(南下)하도록 하였다. 24일에 길을 떠나 수원(水原)에 도착해서 호남의 병력을 가지고 적을 토벌하라고 봉차(封箚)해 청하고, 전주(全州)에 도착해서 적이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군사를 풀어 사방을 약탈한다는 말을 듣고는 또 차자를 올려 적이 약조를 위반한 일을 힐난하라고 청하면서 사유를 모두 갖추어 상문(上聞)하였다.
공이 분조(分朝)에 있으면서 정성을 미루어 보호하고 일에 따라 진규(進規)하여 보익(補翼)함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여 체찰사(體察使)인 이공 원익(李公元翼)과 마음을 합해 계책을 세운 뒤 병력을 조달하고 군량을 운송하여 대조(大朝 임금)를 도와 주었으며, 조목별로 군민(軍民)의 폐막(弊瘼)을 위에 아뢰어 견면(蠲免)시켰다.
3월에 세자를 배행(陪行)하여 강도(江都)에 들어가니, 다시 선온(宣醞)하라고 명하고 호피(虎皮)와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대신을 지척(指斥)하자 공이 요상(僚相)과 함께 차자를 진달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위유(慰諭)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4월에 대가(大駕)가 경도(京都)로 돌와왔다. 영의정이 사직하여 체차되었으므로 공이 좌의정으로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때 나머지 적들이 아직 의주(義州)에 머물며 청천강(淸川江) 서쪽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하면서 출몰하여 노략질하며 철수해 돌아갈 뜻이 없었다. 이에 공이 건의하기를,
“적이 우리 경내에 있는데 장사(將士)가 머물며 떠나지 않고 있으니 부원수(副元帥) 이하를 책려하여 군대를 엄히 단속해서 뒤를 밟게 하소서.”
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 남ㆍ북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와 정주(定州)에 나가 주둔하면서 간사(間使)를 보내 약조를 위배했다고 책망하니, 적이 마침내 거두어 돌아갔다. 적이 물러간 뒤에 유민(遺民)들이 많이 아사(餓死)하였으므로 공이 또 건의하여 곡식을 옮겨서 진구(賑救)해 주고 곡식 종자와 농우(農牛)를 나누어 주게 함으로써 생업이 안정되게 하였다. 그리고 영장(營將)을 팔로(八路)에 설치해 군무(軍務)를 나누어 관할하게 하면서 오로지 조련에 힘쓰게 하고, 안주(安州)와 황주(黃州)의 성곽과 기계를 더 늘리는 동시에 곡식을 비축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7월에 영의정에 오르고 세자사(世子師)를 관례대로 겸대하였는데, 상차하여 사직하였으나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면서 다그쳐 기용하였다. 겨울에 세자가 친영례(親迎禮)를 행하게 되었는데, 공이 도감(都監)의 일을 주관하면서 번거로운 비용을 줄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라갔다. 또 병란을 겪은 뒤로 기계(器械)가 결단났으니 제때에 정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경 대부로부터 포목을 내어 군비(軍費)를 돕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사서인(士庶人) 중에서도 이런 풍도를 접하고 납부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대장(大將)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로 하여금 군기(軍器)를 만들게 하고 남은 포목으로는 서로(西路) 백성들 가운데 굶주리는 자에게 나누어주어 구제하게 하였다. 또 관직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각각 솜옷을 내도록 하여 옷 없는 서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는데 이 덕분에 백성들이 많이 살아남게 되었다.
무진년 봄에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허체(許䙗)가 그 모의를 알고서 조카 허선(許選) 등으로 하여금 쪽지에 급히 쓴 글을 가지고 가서 우상 김류(金瑬)와 참판 홍서봉(洪瑞鳳)에게 통지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상은 마침 궐하(闕下)에 있었던 관계로 쪽지 전달이 조금 지체되었고 홍서봉 역시 대기하느라 미처 발설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교체되어 나오다가 그 소식을 듣고는 비국(備局)에 좌정하여 서봉에게 그 글을 발설토록 재촉하고, 이서(李曙)와 신경진(申景禛) 등으로 하여금 성 밖에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병기를 싣고 들어오는 적도(賊徒)를 체포하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허선 등이 잇따라 정원에 가서 모두 고하였으므로 서로 나누어 잡은 적당의 수가 매우 많았는데, 그 결과 전후로 복주(伏誅)된 자가 50여 인이나 되었다. 그런데 적도의 공초(供招)에 나온 자라 하더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문득 그 사실을 알려 의논드렸는데, 상이 모두 따랐다.
역도가 아직 체포되기 이전에 은밀히 꾀하고 간교하게 계책을 세운 것을 보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으로는 궁인(宮人)ㆍ환수(宦竪)ㆍ액정(掖庭)의 하리(下吏)와 결탁하고 밖으로는 죄를 받았거나 뜻대로 안 되어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무리들과 연결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잡아 놓는 등 화란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었는데, 공이 용맹스럽게 떨쳐 일어나 계책을 세우고 결행하여 순식간에 큰 재앙을 말끔히 씻어 없앤 것이었다. 그리고는 밤낮으로 안옥(按獄)하느라 몇십 일씩 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여러 죄수들의 공초가 실타래처럼 엉기고 구름처럼 쌓였어도 전말을 환히 비추어 보고 곡직(曲直)을 낱낱이 가려냄으로써 기필코 한 사람도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이 없게끔 하였다. 이에 안옥에 같이 참여했던 제공(諸公)이 모두 공의 재주에는 정말 따라가기 어렵다고 탄복하였는데, 공 역시 이 때문에 더욱 초췌해졌다. 옥사(獄事)가 완결되자 상이 상변(上變)한 사람 및 추관(推官)까지 모두 녹공(錄功)할 것을 명했으나, 공은 요상(僚相)과 함께 극력 사양하여 그 공을 차지하지 않고 단지 안마(鞍馬)를 하사한 것만 받았다.
이에 앞서 정묘년 여름에 혜성(彗星)이 태음(太陰 북방)에 나타났는데 태복(太僕)의 주마관(主馬官)이 죽는다는 점사(占辭)가 나왔고, 금년 봄에는 전성(塡星)이 태성(台星)에 들어갔는데 이는 상상(上相)에게 재앙이 있을 조짐이라고 태사(太史)가 아뢰었었다. 그런데 공이 상상(上相)으로 태복시의 제조(提調)를 맡으면서 오래도록 마정(馬政)을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였는데, 6월 11일에 이르러 어깨뼈 부위에 악창이 발작하였다. 이때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상차하여 인구(引咎)하였는데, 상이 교외에 단(壇)을 쌓고 친히 기도드릴 때에도 공은 병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또 상차하여 해직을 청하니, 어비(御批)로 너그럽게 답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약을 싸들고 가서 병을 보살피게 하는 동시에 어찬(御饌)까지 나누어 하사하였다. 대궐에서 문병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왕세자 역시 누차 궁관(宮官)을 보내 문후(問侯)하였는데, 이 달 29일 무오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향년 63세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영의정이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정성을 다해 나라를 도왔는데, 국가의 운세가 불행하여 이렇게 훌륭한 신하를 잃었으니, 내가 매우 가슴아파하며 애도하는 바이다. 상장(喪葬)에 필요한 물품들을 해사(該司)로 하여금 기준에 따라 보내도록 하여 부족하게 되는 근심이 없게끔 하라.”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병란을 겪은 뒤로 여러 종친과 대신의 부증(賻贈)에 모두 감쇄(減殺)하는 예를 썼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또 중사(中使) 및 예관(禮官)을 보내 조제(弔祭)를 행하게 하고 안에서 별도의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특별히 도승지를 보내 고자(孤子)를 조문하게 하였다. 자전(慈殿)도 중사를 보내 고자를 조문하게 하고 부의를 내렸다. 왕세자는 부음을 듣고는 그날 즉시 궁료(宮僚)를 이끌고 외당(外堂)에서 거애(擧哀)하였으며, 또 직접 상가에 이르러 예대로 조문을 행하였다. 그리고 내외에서 각각 보통 때보다 많이 물품을 내어 조의를 표하였는데, 이는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은수(恩數)였다. 이해 9월 13일 경오에 광주부(廣州府) 동리(東里) 을향(乙向)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태상(太常 봉상시(奉常寺))이 시장(諡狀)에 의거하여 문정(文貞)으로 역명(易名 시호(諡號))할 것을 청하였는데, 시법(諡法)을 살펴보면 근학 호문(勤學好問)을 문(文)이라 하고 청백 수절(淸白守節)을 정(貞)이라 하는 것으로서 이에 상이 윤허하였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고려 태사(太師) 도(棹)의 후예로서 절도사(節度使) 증 영의정(贈領議政) 제신(濟臣)의 딸인데,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집에 있을 때부터 이미 훌륭하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15세에 공에게 시집왔다.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는데도 집안 일이 자연스럽게 다스려졌고 제사와 관련된 일체의 일을 힘껏 주선하였다.
공이 일찍이 병에 걸려 오래도록 낫지 않았는데, 부인이 비녀와 귀걸이를 팔아 맛좋은 음식을 마련하는가 하면 의원을 부르고 약을 맛보며 직접 조제(調劑)하기도 하면서 허리 끈도 풀지 않고 머리 단장도 하지 않은 것이 1년이나 되었다. 성격 또한 청렴 결백하여 의로운 물건이 아니면 취하지 않았다. 공이 여러 차례 양전(兩銓 이조와 병조)의 좌랑으로 있는 동안 어떤 이가 계집종을 통해 뇌물을 쓰며 청탁하려 한 때도 있었는데,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어려서 엄군(嚴君 아버지)을 모실 때에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커서 군자(君子)를 모시면서도 엄군처럼 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익 때문에 우리 집안의 범절을 중하게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궁액(宮掖)과 인척 관계를 맺은 뒤로는 더욱 집안이 번성하는 데 따른 후환을 두려워하여 왕래하며 개인적으로 찾아보고 빌붙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이 부하고 귀하게 되는 것을 부러워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집에서 물건 값이 헐할 때 몽땅 사두어 쌓아놓았다가 군현(郡縣)의 공물로 바쳐 이익을 독점하는 사례를 듣거나 금전을 써서 결탁해 몰래 후원을 받으려는 경우를 듣게 될 때면 자기 몸까지 더러워질 것처럼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리고는 오직 날마다 부지런히 길쌈을 하면서 자신의 용도로 삼았다. 그래서 상국 이 항복(相國李恒福)이 이웃에 살면서, 부인의 오빠 이공 수준(李公壽俊)에게 말하기를,
“우리 동네에 재상의 부인이 많이 있지만 염결(廉潔)하기로는 오직 신씨 집안의 부인이 있을 뿐이다.”
하기까지 하였다.
공의 누님이 과부가 되어 빈한하게 살자 부인이 그녀와 함께 30년 동안 한솥밥을 먹었는데도 그들 사이를 이간하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또 조카딸 몇 사람이 의지할 곳 없이 떠돌자 부인이 또 집에 데려다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여주었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은 그렇게 검약할 수가 없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옷은 몸에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옷을 지어 올리기라도 하면 즉시 궤짝 속에 넣으면서 말하기를 ‘화려한 옷은 나 자신이 불편하다.’고 하였다.
계축년에 변이 일어나자 부인이 죄수 머리에 시커먼 얼굴 형상으로 뜰에 거적을 깔아놓고 단식하며 몇 번이나 자결하려 하였다. 무오년에 대론(大論)이 일어나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고 위협했을 때 동양위(東陽尉)가 거취를 물으니, 부인이 말하기를,
“내가 근심되고 두렵기는 하다마는 어떻게 너에게 의롭지 못한 일을 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대의(大義)에 통한 것이 이와 같았다. 그래서 공도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이만큼이라도 이루면서 크게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안에서 도와준 덕분이다.”
고 하였다. 계해년 정월 2일 김포(金浦)의 집에서 병으로 죽었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맏아들 익성(翊聖)은 선조대왕의 셋째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에게 장가들어 동양위(東陽尉)의 호를 받았으며, 다음 익전(翊全)은 현감 조창원(趙昌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맏딸은 현감 박호(朴濠)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문과(文科)에 급제한 좌랑(佐郞) 조계원(趙啓遠)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문과 출신인 학유(學諭) 박의(朴漪)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시직(侍直) 강문성(姜文星)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참봉 이욱(李旭)에게 시집갔다.
동양위는 5남 4녀를 두었다. 면(冕)은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했고, 다음은 변(昪)이고, 다음은 경(炅)이고, 다음은 최(最)이고, 다음은 향(曏)이다. 딸은 홍명하(洪命夏)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익전은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현감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세모(世模)ㆍ세해(世楷)이고, 맏딸은 이수인(李壽仁)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임일유(林一儒)에게 시집갔다. 좌랑은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진석(晉錫)ㆍ귀석(龜錫)ㆍ희석(禧錫)이고, 딸은 어리다. 학유는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시직은 3녀를 낳았는데 어리다. 참봉은 2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내외 증손은 통틀어 모두 약간 명이다.
부인은 처음에 통진현(通津縣) 신촌(新村) 계좌(癸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금년 12월 17일에 공의 묘 좌측으로 옮겨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일찍 고아가 되어 외가에서 자랐는데, 수업받는 혜택을 받지는 못했지만 성현의 글 속에서 제대로 스승을 찾아내어 무상(舞象 성동(成童)즉 15세를 말함)의 나이에 학문을 이미 널리 통하게 되었다. 학업은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하고 명예에 관심두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평소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장중하게 되도록 스스로 노력하였으며 한결같이 주경(主敬)에 입각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입신(立身)의 근본으로 삼았다.
성명(性命)의 근원에 대한 통찰이 뛰어나 자득의 경지에 이르렀고, 속유(俗儒)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아정(雅正)하게 법도를 지녔다. 선유(先儒)가 이치를 강론한 책에 대해서는 모두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 탐구하였으며, 근대 학자들의 설에 대해서도 미진한 점 없이 모두 이해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백자(程伯子 정호(程顥))와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를 사모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백자는 성인(聖人)의 자질을 지녔고 요부는 성인의 재주를 가졌다.”
하였다. 일단 전원으로 돌아 온 뒤로는 더욱 세상 일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고명한 경지에 노닐어 거의 조물주와 더불어 친구가 되는 경지가 되었는데도 이를 사람에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에 참알(參謁)한 뒤 물러나와서는 분향하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비속한 언어를 입에 내놓지 않았고 나태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제사 때에는 반드시 미리 재계(齋戒)하고 반성하고 정결히 하였으며 진설(陳設)하는 일 등을 모두 직접 행하였다.
형제들과 우애하고 종당(宗黨)과 화목한 것이야말로 공의 천성에 근본한 것이었으나 융쇄(隆殺)하는 절도가 있었고, 문에는 개인적인 청탁이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가끔 빌려 써도 넉넉지 못했는데, 팔아먹을 한 고랑의 땅도 없고 한 사람의 하인을 늘린 일도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대신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을 때 누차 풍성하게 하사를 받았으나, 공 자신이 쓰는 기물이나 복완(服玩 장식품이나 노리개 종류)으로부터 아래로 동복(僮僕)ㆍ여마(輿馬)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공이 포의(布衣)로 있었을 때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나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였다. 집의 거실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가인(家人)이 수리하자고 청하니, 공은 말하기를,
“나라 일이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 일을 손댈 수 있겠는가.”
하고, 방 하나를 치우고 거처하였는데 상탑(牀榻)이 쓸쓸하기만 하였다. 임종(臨終)하던 날에는 의금(衣衾)에 여벌이 없었고 쌀독도 비어 제전(祭奠)을 남의 힘을 빌어 마련하였다.
일찍부터 청빈한 생활로 몸이 수척해졌으나 한가롭고 고요한 것을 스스로 기뻐하였으므로 남과 더불어 청탁하러 가지도 않았고 다른 이들이 몰려 가는 곳에는 발을 딛지도 않았다. 오직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평이하고 험난한 곳을 가리지 않으면서 명을 듣는 즉시 행하였다.
선묘(宣廟) 말년에 이르러 날이 갈수록 후하게 대우를 받았는데, 오래도록 경악(經幄)에 있으면서 진강(進講)할 때마다 세세히 분석하고 정미로운 의리를 요약해서 진달했으므로 선묘가 이 때문에 경청하였다. 여러 차례 은대(銀臺 승정원)의 장관이 되고 백사(百司)의 기강을 바로잡았는데 사리에 맞게 진언하여 옛 사람이 납언(納言)하던 풍도가 있었다. 육경(六卿)의 직위에 올라서는 대체(大體)를 유지하려고 힘쓰면서 직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러다가 성명(聖明 인조를 말함)의 시대를 만나 군신 간에 더욱 뜻이 잘 맞게 되었는데,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해도 확고하게 소신을 지켰으며, 여러 의견을 종합하되 헛된 의논에 흔들리지 않았고, 충성심에서 널리 도움되는 말을 진달하면서도 요점을 가려 제대로 했다. 간절한 심정으로 잠규(箴規)를 올려 요약해서 말씀드리는 도리를 다하였고 부지런히 큰 꾀를 내면서 모두 아름다움을 위에 돌렸다.
인재를 아껴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했으며 후배들을 이끌어 도와주어 많이 성취케 하였는데, 늘 말하기를,
“전한(前漢)이 융성했던 것은 풍속이 돈후해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낭서(郞署)의 소관(小官) 중에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의 실수를 덮어 주었고, 후배 중에 방종하며 행동을 무겁게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를 단속하여 장경(莊敬)의 뜻을 알게끔 하였다.
치도(治道)를 논함에 있어서는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하기를,
“조종(祖宗)을 법받기만 해도 다스리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조정의 지나친 거조를 보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한 가지 좋은 계책을 얻으면 반드시 건의하여 시행하곤 하였다. 기염을 토하며 이야기하는 자와는 말로 따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일에 당해서는 끝내 가차없었다. 그리고 조정의 청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백관들보다 앞서 나섰는데, 죽을 때까지 이런 일을 태만히 하지 않았다.
정묘년 여름부터 국가에 일이 많아 비국(備局)이 회좌(會坐)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곤 하였으며, 아무리 피곤해도 억지로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니 몸이 다하도록 힘을 쏟는 의를 극진히 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금년 여름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리 경내(境內)에 들어 왔다. 그런데 그들이 요구하는 몇 개 조목 모두가 득실(得失)에 크게 관계되는 것들이었으므로 공이 그때 벌써 악창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관아에 나왔는데, 그뒤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도 깊이 염려하며 그 일을 팽개치지 않았다. 비국의 낭관(郞官)이 상의 분부를 받고 수의(收議)하러 오자 공이 입으로 몇 줄을 불러 주면서 시자(侍者)에게 받아 쓰게 하다가 힘이 달려 그만두었는데, 기(氣)가 장차 끊어지려 하여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오랑캐의 사신이 돌아갔는지의 여부를 물어보고, 또 말하기를,
“가뭄의 재해가 이와 같으니 백성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늘이 재해를 내린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이다. 내가 죽어 하늘이 비를 내려 주신다면 한이 없겠다.”
하였다.
공은 감식안이 탁월하여 국가의 기의(機宜)와 인물의 종시(終始)를 예언했었는데 뒤에 보면 그대로 징험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동료와 한 번 친교를 맺으면 흰 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이 없었으며, 이익을 따르고 세력을 좇으며 세속적인 일을 경영하는 자를 보면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았다.
평소 절도있게 말을 하고 행동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앞에서 오만하게 하거나 장난을 치지 못했는데 공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미리 경계를 설정해두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어놓았는데,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흔연히 같이 어울려 간혹 점잖은 해학으로 응대하는 등 사기(辭氣) 사이에 봄 날씨와 같은 따뜻한 기운이 애연히 흘러 넘쳤다.
병인년에 무함을 당한 뒤로는 조정에 서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외적의 침입으로 다시 출사(出仕)하는 일을 면하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사직소를 준비해 늘 주머니 속에 차고 다녔었는데, 유효립(柳孝立)의 옥사가 마무리되자 사직소를 꺼내 자제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런 때라면 은혜를 청해도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뒤에 보고를 드렸는데, 좌상 오공(吳公)이 벌써 급하다고 청한데다가 또 그냥 놔둘 수 없는 변방의 일이 발생했기에, 마침내 책상 위에 말아두고 수심에 차 그 밤을 지새웠었다. 그러다가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세상을 하직했으니, 아, 가슴아픈 일이다. 군자가 말하기를,
“공의 포부가 대단하였는데 다사다난한 때를 만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였고 덕에 걸맞게 오래 살지도 못하였으니, 더욱 애석하기만 하다.”
하였고,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공이 반정(反正) 초기에 맨 먼저 초탁(超擢)되는 은혜를 입어 두 번이나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랐는데, 시의(時議)가 새로 일 만들어내기를 좋아했는데도 공은 오로지 진정(鎭靜)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시의가 전비(前非)를 심각하게 따지려드는 때였는데도 공은 오로지 관용의 정신으로 일관했으며, 시의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곧은 체하기를 좋아하였는데도 공은 오로지 충후(忠厚)하게 하려고 힘썼다.
그리고 당시 중용되어 권세를 잡은 사람들은 혁명에 참여한 원훈(元勳)이 아니면 선조(先朝) 때부터의 숙망(宿望)이 있고 청명(淸名)과 직절(直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모두 조정의 반열에 서게 되자 서로들 기세로 맞버티면서 멋대로 논의를 내곤 하였는데, 공이 그 사이에서 조용하고 화락한 모습을 보이면서 잘 조화시켰으므로, 현자(賢者)는 의지할 곳이 있게 되어 기운이 북돋아지고 불초자(不肖者)는 꺼리는 바가 있게 되어 그 자취를 거두게 되었다. 따라서 공의 상업(相業)은, 태평시대를 만나 좋은 풍속 그대로 앉아서 진정시켰던 자와 비교해 본다면, 그 공이 열 배 정도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다.”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할 줄 안다고 하였다.
공은 젊었을 때 경당(敬堂)이라 호(號)하고 또 백졸(百拙)이라 호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고(南皐)로 일컫기도 하고 현헌(玄軒)으로 바꿔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김포(金浦)상두산(象頭山) 아래에서 농장 생활을 할 때에는 상촌거사(象村居士)라는 하나의 호를 사용하였으며, 만년에 들어서는 현옹(玄翁)이라고 호하였는데, 시골에 돌아가 있을 때는 방옹(放翁)으로 일컫기도 하고, 유배 생활 중에는 여암(旅菴)이라고 편액(扁額)을 걸기도 하였다. 한편 백사(白沙) 이 상국(李相國)의 부음(訃音)을 듣고 애도하여 글을 지을 때는 현옹(玄翁)으로 명명했었는데, 이에 대해 스스로 서술하기를,
“현옹이란 자는 어떤 사람인가. 글로 세상에 알려졌어도 옹(翁)은 글을 일삼지 않았고, 조정의 높은 관직을 역임했어도 옹은 관직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죄를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어도 옹은 그 죄 때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즐기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경영하는 것도 없었으며 가난해도 부유하게 여겼고 풍요한 환경에 처해도 부족했던 때처럼 지내었다. 사람과 교제함에 다른 사람이 친소(親疏)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고 외물(外物)과 접함에 외물이 구속시킬 수가 없었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 제자(諸子)에 널리 통했으며 근원에 약간 도달하긴 했으나 아직 완전한 귀결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천지 만물의 도수(度數)에 회통(會通)한 바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그 대략적인 면을 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서적을 보는 외에는 종일토록 유연히 지내면서 속물(俗物)이 감히 범접치 못하도록 하였다.
한 시대의 승류(勝流)와 모두 교우관계를 맺어 옹을 아는 자가 많았는데 혹 그의 글을 알아주기도 하고 혹 그의 행한 일을 알아주기도 하였다. 백사옹(白沙翁)이란 자가 옹과 이웃에 살면서 옹의 흥취를 알아 주었는데 옹도 마찬가지로 백사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백사가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어 죽고말자 옹이 지기(知己)를 잃은 탄식을 금하지 못하면서 인세(人世)에 대한 뜻이 없어졌다.”
하였다.
공의 문장 작법은 육경(六經)에 기초하고 있는데, 어려서는 창려(昌黎 한퇴지(韓退之))를 좋아하였고, 일단 장년이 되어서는 고문(古文)을 모두 가져다 읽었으며, 만년에 이르러서는 벽장 깊숙한 곳에서 좌씨(左氏)ㆍ사기(史記)ㆍ장자(莊子)ㆍ이소(離騷)ㆍ예기(禮記)ㆍ고악부(古樂府)ㆍ선시(選詩)ㆍ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 등 제가(諸家)의 글을 꺼내어 좌우에 두고 꽤나 애송하면서 대가(大家)의 문체를 수명(修明)하였다. 서법(書法)도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나 사람들을 위해 붓을 잡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찰한(札翰)을 얻기라도 하면 대부분 간직해두고 보배로 여겼다. 그러다가 계해년 뒤로는 문묵(文墨)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공은 그저 물러나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술한 시문(詩文)으로는 상촌고(象村稿)전집(前集) 10책(册)ㆍ후집(後集) 2책ㆍ속집(續集) 4책ㆍ별집(別集) 6책ㆍ여집(餘集) 3책ㆍ 내집(內集) 1책ㆍ만집(漫集) 6책과 선천규관(先天窺管) 1책ㆍ구정록(求正錄) 1책ㆍ 화도시(和陶詩) 3책이 있다.
아, 공이 조정에 선 4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두루 겪으면서 이루어낸 그 공덕(功德)과 사업이야말로 사람의 이목(耳目)에 분명히 남아 있으니, 좋아하는 사람이 혼자서 차지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겠다. 삼가 가장(家狀)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 겸 동지성균관사(議政府右參贊兼同知成均館事) 김상헌(金尙憲)은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