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소재 오신수 신도비

소재 선생(蘇齋先生)휘(諱)는 수신(守愼)이요, 신도비명(神道碑銘)

아베베1 2013. 3. 1. 21:49


 









기언 별집 제1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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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소재 선생(蘇齋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원임(原任) 영의정(領議政) 소재(蘇齋) 노 선생(盧先生)의 휘(諱)는 수신(守愼)이요, 자(字)는 과회(寡悔)이다.
노씨는 삼한(三韓)의 대성(大姓)으로 광산(光山)이 본관이다. 고려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 노서(盧恕)가 좌우위 대호군(左右衛大護軍)으로 치사(致仕)한 노단(盧亶)을 낳고, 노단은 감찰 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을 낳고, 노준경은 노숭(盧嵩)을 낳았다. 노숭은 본조에 와서 우의정이 되었으며, 노숭의 2세(世)에 지사간원사 노상례(盧尙禮)가 있고, 노상례의 2세에는 동지중추 노덕기(盧德基)가 있는데 혜장왕(惠莊王 세조의 시호(諡號)) 때에 출처 대절(出處大節)이 있었으니, 그 사실은 김 문간공(金文簡公 문간은 김종직(金宗直)의 시호)이 찬(撰)한 지석문(誌石文)에 기록되어 있으며, 바로 선생의 5세조(世祖)가 된다.
증조(曾祖) 노경장(盧敬長)은 돈녕부 참봉으로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조(祖) 노후(盧珝)는 풍저창 수(豊儲倉守)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노홍(盧鴻)은 활인서 별제로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는데, 모두 선생이 귀(貴)하였기 때문에 3세를 추은(推恩)한 것이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성주(星州)가 본관이며, 예조 참판 자화(自華)의 따님이다.
선생은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경술(經術) 방면에 더욱 조예가 깊었다. 성동(成童 15세)이 되기 전에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17세에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자는 장길(長吉) 시호는 정효(貞孝)) 선생의 따님을 아내로 삼았고, 이로 인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20세에 박사 제자(博士弟子)에 뽑혔는데 태학의 선비들이 선생을 존경하는 자가 많았다. 모재(慕齋) 김 문경공(金文敬公 이름은 안국(安國), 자는 국경(國卿))이 지관사(知館事)로 있을 때, 시습잠(時習箴)으로 제생(諸生)을 시험하고 인재가 성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선생이 지은 글을 보고 다시 감탄하기를,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27세에 회재(晦齋) 이 문원공(李文元公 이름은 언적(彦迪), 자는 복고(復古))을 처음으로 뵙고 존심(存心 마음을 보존하는 것)하는 방법을 듣고자 하자 문원공이 손바닥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물건이 이 안에 있는데 꼭 쥐면 깨지고 놓아두면 잃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망조(忘助)의 이명(異名)입니다.”
하였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22년(1543, 중종38) 갑과(甲科) 장원으로 뽑혀서 처음에는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다시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 다음해(1544, 중종39)에 시강원 사서로 옮겨서 《서연강의(書筵講義)》를 지었다.
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과 독서당(讀書堂 연소한 문관에게 사가독서를 시킨 곳으로 후에 호당(湖堂)이라 함)에 뽑혔으며, 도학(道學)으로 서로 추앙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해 공희왕(恭僖王 중종의 시호(諡號))이 승하(昇遐)하고 영정왕(榮靖王 인종의 시호)이 왕위에 올랐다. 다음해 을사년(1545, 인종 원년)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이기(李芑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시호는 문경(文敬))를 간사한 소인이라고 논핵(論劾)하였고, 이조 좌랑에 옮기게 되었다. 영정왕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공헌왕(恭憲王 명종의 시호)이 즉위하자, 윤임(尹任)의 사건으로 사화(士禍)가 일어났고, 선생은 직첩(職牒)이 거두어져 충주로 돌아왔다.
명종 3년 정언각(鄭彦愨)이 벽서(壁書)를 올리자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관련된 사람에게 죄를 가하였는데, 선생은 처음에는 순천에 정배(定配)되고 그해 다시 진도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옥주(沃州 진도의 옛 이름)에 대하여 2천 언을 지었다.
선생은 진도에서 19년을 있었다. 그곳은 해중(海中)이라 주민이 원래 우매하였는데, 선생이 그들에게 예속(禮俗)을 가르쳐 비로소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에 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집중설(執中說),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 등을 저술하였다. 이 문순공이 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사도(斯道)가 동방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서로 왕복한 서한(書翰)이 있다.
공헌왕 즉위 20년에 비로소 을사사화에 관련된 사람을 석방하여, 선생은 괴산(槐山)으로 양이(量移 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되었다. 소경왕(昭敬王 선조의 시호)이 즉위하자 이 충정공(李忠正公 충정은 이준경(李浚慶)의 시호, 호는 동고(東皐), 자는 원길(原吉))이 상에게 아뢰어 드디어 수용(收用)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선생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1569, 선조2)에는 직제학 겸 예문관응교에 승직되었고, 다시 부제학으로 올랐다.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기를 간청하니 상이 대신의 말을 받아들여 특별히 청주 목사를 제수하였으며, 곧 호서 관찰사가 되었다.
선생은 치본(治本 다스리는 근본)에 관한 수천 언(言)을 올리고 이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바치니, 상이 교서관(校書館)에 내려 간행토록 하였다. 그 무렵 부친 의정공(議政公)이 별세하여 분상(奔喪 먼 곳에서 친상을 당하여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일)하였는데 너무 슬퍼하여 상을 치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일이 알려지자 상이 특별히 어의(御醫)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선생은 상소하여 사례하고 군덕(君德)에 관한 여섯 가지 경계할 항목을 바쳤다.
첫째, 훈고 해석만을 힘쓰고 실지 의리를 밝히는 데 힘쓰지 않는 것,
둘째, 남의 결점만 살피고 치도(治道)를 바로 세우지 않는 것,
셋째, 권세를 장악하는 것만 힘쓰고 인심을 수습하려 하지 않는 것,
넷째, 전례(前例)만 따르고 고의(古義 선인(先人)들의 참뜻)를 시행하지 않는 것,
다섯째, 아첨하는 말만 좋아하고 정직한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
여섯째, 재능과 기예(技藝)만을 즐기며 도량과 식견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 문순공과 더불어 상제례서(喪祭禮書)를 강론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대사간에 제수되자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특히 대사헌을 제수하자 이것도 고사(固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모친이 병중이라 휴가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를 하루도 곁에서 떠나 보낼 수 없다. 노모(老母)를 서울로 모시도록 하라.”
하고, 현(縣)과 도(道)에 명하여 이 일을 돕도록 하였다. 서울에 들어와 선생이 민사(民事)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상이 수고를 위로하고 다시 이르기를,
“현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에게 직책을 맡기고 수령을 선택하여 우선 백성이 풍족히 된 뒤에야 조종(祖宗)의 치적(治績)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임신년(1572, 선조5)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곧 판서로 승급되었다. 당시에 현황제(顯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즉위하여 등극(登極)을 반포(頒布)하는 조사(詔使 조서를 받들어 온 사신)가 오게 되자, 선생이 상빈(上儐)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관반(館伴)이 되었다. 뒤이어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상관의(祥冠儀)》를 지어서 올렸다. 다음해인 계유년(1573, 선조6)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상이 즉위한 원년(元年)에 교리(校理)로 소환되어 1년에 세 번이나 옮겨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돌아온 지 3년 만에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요직에 임용됨이 비할 데 없으며 모든 사람이 흠모하였다. 여름에 상이 삼공과 천관(天官 이조의 별칭)에게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추천토록 명하니, 조목(趙穆), 이지함(李之菡), 김천일(金千鎰), 최영경(崔永慶) 등을 추천하고, 또한 선비 유몽학(柳夢鶴), 기대정(奇大鼎), 홍가신(洪可臣), 유몽정(柳夢井) 등 네 사람을 추천하니, 모두 6품(品)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재이(災異)가 있자 병을 핑계 대어 물러날 것을 간청하니, 상은 이를 허락하였는데, 정원(政院)과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서 아뢰기를,
“나라의 원로(元老)를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 또한 유임시킬 것을 상에게 아뢰어 다시 정승에 유임되었다. 정업원(淨業院)을 철폐하고 장오법(贓汙法)을 거듭 엄중히 할 것을 간청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8)에 인순대비(仁順大妃)가 승하하자 선생은 좌상(左相)인 박순(朴淳)과 함께 백모(白帽)에 백대(白帶)로 삼년상을 마치는 의견을 아뢰니 이를 따랐다.
당시에 당의(黨議)가 크게 일어나 소란하자 선생은 상에게 아뢰어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다 함께 좌천시켜 보외(補外 고관(高官)을 징계하여 지방관으로 보임(補任)시키는 것)토록 아뢰었다. 곽월(郭越)이 상소하여 일을 말한 가운데,
“외인(外人)이 궁중과 내통하여 사림을 해친다.”
는 말이 있어 상이 노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말은 항간에 떠도는 말로 신도 들었습니다. 곽월이 경솔하게 길에서 떠도는 말을 믿고 그러한 것이니, 이는 그의 잘못이지만 그 말을 가지고 말한 사람까지 죄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정축년(1577, 선조10)에 인성대비(仁聖大妃)가 위독하자 대신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이유(李瑠 계림군(桂林君). 성종의 제3자인 계성군의 양자),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복관(復官)하는 일이었다. 상이 이 일에 대처할 방법을 하문(下問)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신은 을사년의 죄인입니다. 말을 하건 하지 않건 죄가 되는 것이나, 네 사람의 관작을 회복하여 대비를 위로해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고, 의정부에서도 이어 그때의 공신들의 훈작을 삭제하고 연좌(連坐)를 풀어 주고 적몰(籍沒)된 것을 환원토록 청하였다.
무인년(1578, 선조11) 정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자 사직코자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모친인 대부인(大夫人)이 나이 80세가 되자, 상이 미두(米豆) 30석(碩)과 주(酒), 수(脩 건육(乾肉)), 어석(魚腊 생선포) 등의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은 전문(箋文)을 올리고 끝내 사직코자 하였으나,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곧 다시 정승으로 복직되었으니, 이것은 대신이 상에게 아뢰었기 때문이다.
간관(諫官)인 강서(姜緖)가 교만함을 경계하는 글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직설적이라 주위가 숙연(肅然)히 이를 꺼리고 두렵게 여겨 감히 발설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이 아뢰기를,
“강서의 말은 다른 사람이 말하기 힘든 것을 능히 말하였으며, 상께서도 듣기 싫어하시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옛말에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다.’ 하였는데, 상께서 간언을 이같이 너그럽게 받아들이시니, 이 같은 신하가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교리 김우옹(金宇顒)이 성운(成運)을 증작(贈爵)할 것을 제의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조식(曺植), 성운(成運), 이항(李恒)은 선왕(先王)께서 불러들인 세 사람입니다. 조식은 높은 지조가 있고, 성운은 겸손하여 두 분 모두 자수(自守)하는 선비라 할 수 있으며, 이항은 평온한 성품으로 실제로 후학을 깨우쳐 인도하여 학자에게 공이 많으니, 이제 포전(褒典)하려면 마땅히 이항을 우선하고 성운은 다음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당시 조식은 이미 대사간에 증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상이 병환이 나자 선생을 침소로 불러들이셨는데, 모든 대신이 뒤를 따랐다. 상이 선생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사자(嗣子 세자)를 잘 보필하라.”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목숨을 걸고 시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의 병환이 회복되자 삼공을 인견(引見)하여 선비를 추천토록 하니, 선생은 민순(閔純)을 천거하였다.
신사년(1581, 선조14) 봄에 재이가 일어나자 사직코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鄭澈)이 이에 대한 비답문(批答文 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문)을 찬(撰)하였는데, 그 가운데 나무라고 모욕하는 말이 많았는데, 상이 이를 알면서도 개작(改作)하지 않았다. 선생이 사직을 고집했으나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그대를 과인에게 주었으니 떠날 수 없다.”
하였다. 이해 9월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별세하였다. 상이 각별한 조부(吊賻 치부(致賻)와 조제(吊祭))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지나치게 몸을 손상시켜 모든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하고, 날이 춥고 길이 먼 것을 염려하여 입고 있던 초구(貂裘)를 벗어 주고 아울러 약물(藥物)을 하사하고 수총(守塜)하지 말고 집에 돌아와 곡(哭)하도록 했으며, 열읍(列邑)이 모두 상사(喪事)를 돕도록 하였다. 장사 전에 상께서 선생이 초상(初喪)에 절차 있음을 듣고 예유(禮諭)를 극진히 했으며, 장사를 마치자 다시 반곡(返哭)하라는 명이 있었다. 반곡을 마치자 선생은 의려(倚廬 중문 밖 한 구석에 세운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거적자리와 풀베개로 잠을 자고 거친 밥으로 끼니를 이으니, 선생의 나이 67세였다. 상이 이를 염려하여 임시방편을 따르도록 간곡히 권면하고 미두(米豆)를 하사하고, 겨울이 되자 또 하사하였다. 선생은 이에 사례하고 상소하기를,
“벼슬하여서는 녹(祿)을 받아서 부모를 봉양하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사물(賜物)로 제사를 받들게 되니, 신의 모친은 살아 있을 때나 돌아간 뒤 모두 신의 공 없는 녹을 드셨습니다.”
하였다. 대상(大祥)에 이르자 돌아가 가묘(家廟 집안의 사당(祠堂))에 부사(祔祀) 지내기를 빌었다. 이때에 좌상(左相)이 없었으며 붕당이 한창 서로 공격을 일삼으니 조정이 크게 어지러웠다. 상이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선생이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 드디어 좌의정을 제수하였다. 선생은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부르고 한편 사관을 보내어 중도에서 위문케 했으며, 한강 가에서 선온(宣醞 신하에게 술을 하사함)하는 등 예우가 각별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늙은 것을 칭탁하고 면직을 빌었으나 허락받지 못했으며,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영의정을 제수하였다. 명을 받고 상에게 사의(辭意)를 올리고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등을 전리(田里)로 돌려보낼 것을 아뢰었는데, 이때 박근원은 이미 죽은 뒤였다. 이들 세 사람은 계미년(1583, 선조16)에 쟁론하다가 죄를 얻어 귀양 갔는데, 이들은 삼찬(三竄)이라고 불리었다.
병술년(1586, 선조19) 4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자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편액(扁額)을 달고 자명(自銘)을 지었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또다시 연로한 것을 구실로 소를 올려 면직을 비니, 상은 이를 허락했으나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제 중외(中外)가 소란하여 근심이 많은 판국에 모(某)의 덕망이 아니면 이것은 진정(鎭靜)할 수가 없을 것이니, 물러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드디어 명을 취소하였다. 다음해(1588, 선조21) 여름에 사직을 고집하여 윤허받았으나, 곧 특명으로 다시 제수하고 분부하기를,
“사관을 보내면 모(某)가 연로하여 행례(行禮)할 수 없을 것이니, 본부(本府)의 낭사(郞舍)로 하여금 선유(宣諭)토록 하라.”
하였다. 선생은 오히려 굳이 사양하여 마지않았으나 판중추부사의 직책에 옮겨졌다. 기축년(1589, 선조22) 봄에 봉조하(奉朝賀)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치사하려 했으나 이것도 윤허하지 않았다.
일본의 왜인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자, 이 일을 대신에게 회부하여 의논케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천하에 악은 똑같은 것이다. 수길(秀吉)은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의리상 사귈 수가 없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아뢴 사건으로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났다. 선생은 전에 명을 받아 김우옹(金宇顒) 등을 추천한 일이 있었는데, 정여립이 한창 이름을 날리던 때라 그도 또한 추천 명단 가운데 들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모(某)를 융숭(隆崇)하게 우대하였는데 죄인을 끌어들였으니, 이는 나라의 위망(危亡)이 관련된 것이다.”
하니, 그 뜻이 준엄하였다. 선생은 곧 국문(國門) 밖에 나가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상이 대신의 말을 듣고 판중추부사를 파직하였다. 이때 정철(鄭澈)이 좌상이 되어 실제로 옥사를 다스렸는데, 옥사가 점차 만연되어 진신(搢紳)들이 크게 화를 입었으며 인심이 흉흉하였다. 누군가가 전례를 들어 스스로 해명토록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이미 잘못 천거하였으니 법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스스로 변명하여 면책(免責)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다음해(1590, 선조23) 4월 7일에 별세하였다. 선생은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0년(1515, 중종10)에 태어나서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8년(1590, 선조23)에 졸(卒)하니, 76세였다. 화령(化寧)에다 장사했으며, 자신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은 광릉 이씨(廣陵李氏)로, 선생과 동년생(同年生)이다. 선생이 별세한 그해 3월 12일에 별세했으며, 선생과 같이 부장(祔葬 한 무덤 안에 함께 장사 지냄)하였다. 아들이 없어 조카 노대해(盧大海)를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관직은 영천 군수(榮川郡守)이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로는 노계래(盧戒來), 노계난(盧戒難), 노계후(盧戒後) 셋이 있고, 사위는 파주 목사(坡州牧使) 허징(許澂) 한 사람이 있다.
노대해는 예천 군수(醴泉郡守)인 노도형(盧道亨)을 낳았으며, 노도형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生員) 노석명(盧碩命), 안변 도호부사 노준명(盧峻命), 봉화 현감(奉化縣監) 노경명(盧景命)이다. 사위는 응교(應敎) 심대부(沈大孚), 진사(進士) 유덕구(柳德耇), 도사(都事) 이항(李沆), 진사 이홍석(李弘奭) 등이 있다.
선생의 학문은 사람이 지켜야 할 평상의 도리에 독실하고, 천덕(天德)과 천도(天道)에 통달하여 만사 만물에까지 미쳤다.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잘 지내고 붕우 간에 교제하는 데로부터 임금을 섬기고 풍속을 바르게 교화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차례가 자신에게 근본하고 가정에서 시작하여 나라에까지 미루어 나간 것이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여 대의를 바르게 하고 현재(賢才)를 천거하고 구장(舊章 예부터 내려오는 전장(典章))을 준수하여 정치의 체통을 밝혔으니, 이러한 내용은 그의 강의서(講義書)인 《구색(懼塞)》, 《양정(養正)》 등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모두 임금에게 학문을 권하는 글이다.
선생이 외딴 바다 섬에서 죄수가 되어 깊은 시름과 곤궁 속에서도 재주와 학식을 함양하여 마침내 크게 쓰이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문장이 매우 높아 용주(龍洲) 학사 조경(趙絅)이 평하기를,
“그의 성률(聲律)의 고기(古氣)는 은 나라 유(卣 울창주를 담는 그릇)와 주 나라 이(彛 종묘의 제기)에 비길 수 있다.”
하였다. 선생은 옛 성인이나 현인들의 글을 탐독하고 이를 깊이 체득하였으며 이것이 쌓여 문장이 되어 나왔으므로 ‘《역경(易經)》의 문체는 기(奇)하면서 일정한 법칙이 있고, 《시경(詩經)》은 바르면서 화려하고, 《춘추(春秋)》는 필법이 근엄하다.’는 말은 선생에게 장대의 먹줄이나 대패처럼 꼭 맞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선생의 문장이 송유(宋儒)와 같지 않다고 의심하나, 왕봉주(王鳳洲 명(明) 나라 사람으로 봉주는 호, 이름은 세정(世貞))도 말하기를,
“이(理)를 말한 것에도 품별(品別)이 있으니, 무숙(茂叔 송(宋)의 주돈이(周敦頤)의 자, 호는 염계(濂溪))의 간결하면서도 준엄함과 이정(二程 송(宋)의 대유(大儒)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분명하고 합당함과 자후(子厚 송(宋)의 장재(張載)의 자, 호는 횡거(橫渠))의 깊이 있음이 다 함께 도(道)를 지키는 데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선생의 운문은 해도(海道)에서 지낸 19년 동안의 택반음(澤畔吟 관직에서 쫓겨나 실의에 빠져 지은 시)으로, 바로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우울한 심정을 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장계곡(張谿谷 계곡은 장유(張維)의 호, 자는 지국(持國))이 말하기를,
“소재(穌齋)의 기격(氣格)은 웅발(雄拔)하다.”
하였으며, 최간이(崔簡易 간이는 최립(崔岦)의 호, 자는 입지(立之)), 차창주(車滄洲 창주는 차운로(車雲輅)의 호, 자는 만리(萬理)임)는,
“본조(本朝) 3백 년 간에 문필에 종사한 사람으로 이에 미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고까지 하였으니, 어찌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리겠는가?
선생의 별호(別號)는 소재(蘇齋) 또는 이재(伊齋) 혹은 암실(暗室)이다. 최후에 좌상 정탁(鄭琢 호는 약포(藥圃), 자는 자정(子精))이 왕을 모시고 조용히 말하기를,
“모(某)와 같은 어진 사람을 상이 신임하고 중책을 맡겼는데, 하루아침에 잘못 추천한 일에 연좌되어 배척을 받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광해군 2년에 정의(廷議)에서 선생을 소경왕(昭敬王 선조의 시호)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광해군은 ‘종시(終始)를 보존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罷)하도록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옥주(沃州)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하였다. 상주(尙州)의 도남(道南), 충주(忠州)의 계상(溪上)에 사당이 있으나 모두 합향(合享)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도덕이 있고 박문하니 / 道德博文
인이요 / 仁也
나라 위해 예를 다했으니 / 爲國以禮
경이로다 / 敬也
할 말을 다하여 숨김이 없었으니 / 盡言無隱
충이요 / 忠也
바른 것을 지켜 의리를 곧게 하였으니 / 守經直義
정이로다 / 正也

[주D-001]망조(忘助) : 《맹자》 공손추에 나온 ‘물망(勿忘)ㆍ물조장(勿助長)’을 줄인 말이다. 즉 마음에 잊지도 말고 급히 성과를 거두려고 조장(助長)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주D-002]윤임(尹任)의 사건 : 윤임은 중종(中宗)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라비로 인종(仁宗)의 외삼촌이며, 윤원형(尹元衡)은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오라비로 명종(明宗)의 외삼촌인데,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불렀다. 인종이 승하한 뒤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자 윤원형 형제는 크게 세력을 얻어, 윤임 일파를 처형 혹은 유배하는 등의 화를 입혔다.
[주D-003]정언각(鄭彦慤)이 벽서(壁書)를 올리자 : 당시 부제학(副提學)으로 있던 정언각이 명종 2년 9월에 양재역(良才驛)에서 “여왕(女王)이 집권하고 간신(奸臣) 이기 등이 농권(弄權)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익명의 벽서(壁書)를 발견하고, 윤인경(尹仁鏡),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에게 알리자 ‘이 같은 사론(邪論)은 을사옥(乙巳獄)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증거’라 하여 이에 관련된 20여 인을 유배시켰다. 이것을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 한다.
[주D-004]정업원(淨業院) : 서울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밑에 있던 승방(僧房)으로,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가 거처하던 곳이다. 송씨는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하고 강원도 영월에 귀양 가 살해된 뒤 이곳으로 옮겨 여생을 보냈다.
[주D-005]백모(白帽)에 백대(白帶) : 당시 모대(帽帶)에 대한 의논이 분분했으나, 연보(年譜)에 의하면 “시사(視事)하는 복장이 흰색인데 관(冠)과 대(帶)만 검은색으로 한다면 보기에 민망하니, 《의주(儀註)》를 다소 변경하더라도 흰색 모대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다.
[주D-006]이유(李瑠) …… 유인숙(柳仁淑) 등 : 이들은 대비의 오라비되는 윤임의 일파로 인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찬축(竄逐)되거나 사사(賜死)된 사람들이다. 윤원형은 윤임이 명종이 추대됨을 원치 않고 계림군 이유를 추대하려 하였는데, 유관, 유인숙 등이 이를 도왔다고 하여 이들을 제거하였다.
[주D-007]봉조하(奉朝賀) : 2품 이상의 퇴임 관리가 종신토록 그에 알맞는 봉록을 지급받고 실제 사무에는 종사하지 않는 것.
[주D-008]정여립의 …… 사건으로 : 정여립은 원래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문하인이었는데, 율곡이 죽자 동인(東人)이 우세함을 알고 율곡을 비난하여 이로써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 뒤 선조 20년 변경에 왜변이 있게 되자 전주 부윤 남언경(南彦經)의 청으로 정여립이 장정을 징발할 때 군부(軍簿)를 자기 손에 넣게 되자,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반역을 위한 동지회를 구성하고 거병을 꾀했으나,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에게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주D-009]성률(聲律) : 사성(四聲)의 규칙에 맞추어 지은 시부(詩賦)를 말한다.
[주D-010]《역경(易經)》의 …… 근엄하다 : 한유(韓愈)의 저술 진학해(進學解)에서 온 말.
[주D-011]후세의 자운(子雲) : 자운(子雲)은 한(漢) 나라 사람 양웅(揚雄)의 자(字)이다. 양웅이 《주역(周易)》을 모방하여 《태현경(太玄經)》을 짓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처럼 어려운 글을 누가 읽겠는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양웅은 “나는 후세의 자운을 기다린다.” 하였다. 이후로 후세의 훌륭한 학자나 문인을 일컫는 말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