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신도비 등/증 이조 판서 조종도 묘갈명

조 판서(吏曹判書) 조공(趙公) 종도 의 묘갈명(墓碣銘)

아베베1 2013. 3. 2. 14:04

 






















 
조공 조종도  선생은  본관은 함안 자는 백유 이시며 ,  생육신이신 어계 조려의 5세손이며 ,의령현감을 
제수 하셨고 재임시 의령군 의령읍 퇴계 이황의 추모서원인 덕곡서원을 건립 하셨다 지금도 의령군 덕실입구에 전해오고
 있다  
고향은 함안이시다
 어계선생의 5세손 이시고 어계선생은 저의 직계선조인 연촌공과 교류를 가진 분이며  어계 선생의 문집과 ,선조님의 문집인 연촌 유사에 당시의 詩(공원창화시)가 전해오는 내용을 알수가 있었다    그리고 장릉지에도 전해오고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았아 가는 것을 반대하여 운둔을 하였던 절개있는 선비로 전해오고 있다 .
 연촌공은 전남 영암으로 , 어계공은 경남 함안으로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셨다 ..   

 처가 장모님의 본관인 함안 군북 월촌 이시다 장모님의 직계선조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런 인연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
 된것이다  
 선대의 인연이 후대에 이어져 혼인으로 이루어 졌다. 
 전주와 함안의 인연이 500년이 지난 시점에도 이어져 오는 인연이 되었다 ..    

 
1537~1597.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시호는 충의(忠毅).

조종도(趙宗道)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문신.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풀려나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안의(安義)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함.

기언 별집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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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묘문(丘墓文)
증(贈)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공(趙公)의 묘갈명(墓碣銘)

공은 휘는 종도(宗道)요, 자는 백유(伯由)요, 성은 조씨(趙氏)로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5세조(世祖) 조여(趙旅)는 노릉(魯陵 단종) 1년(1453)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는데 세조(世祖) 때를 당하여서는 세상을 피하여 스스로 삼가 지키고 호(號)를 어계은자(漁溪隱者)라 하였다. 어계의 3세손 안음 현감(安陰縣監) 조응경(趙應卿)은 바른 품행으로 명망이 높아 《함주인물지(咸州人物誌)》에 보이는데, 공에게는 왕부(王父 조부)가 된다. 황고(皇考) 조언(趙堰)은 송규암(宋奎庵 송인수(宋麟壽))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는데, 그 또한 훌륭한데도 속세에서 은둔한 사람이다. 명종(明宗) 때 불러서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어머니 강씨(姜氏)는 대사성(大司成) 강로(姜老)의 손녀이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16년(1537, 중종32) 2월 5일 갑인일에 공이 출생했는데, 7세에 글을 지을 줄 알았고, 10세에는 은군자(隱君子) 정두(鄭斗) 선생에게 배웠는데, 선생은 매우 뛰어나고 훌륭하되 숨어 살아 세상에서 아는 이가 없었다. 공(公)은 남보다 훨씬 총명하여 경사(經史)나 제자(諸子)를 한 번만 읽으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 22세(1559)에 상사(上舍)에 올라 공천(公薦)으로 처음 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에 제수(除授)되었다. 이때에 일본(日本)이 현소(玄蘇)를 보내왔다. 현소는 시(詩)로 우리를 시험하여 업신여기는 일이 많았으나 공이 지은 시를 볼 때는 꼭 두 번 절하고 읽었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거쳐 곧 양지 현감(陽智縣監)이 되었는데 수의(繡衣 암행어사(暗行御史))가, 공이 정치를 잘 한다고 위에 아뢰자, 상(上)이 표리(表裏 옷의 겉감과 안감)를 하사(下賜)하여 장려하였다. 뒤에 여러 번 벼슬에 기용되었는데, 나아가기도 하고 나아가지 않기도 하였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금구 현령(金溝縣令)이 되었는데, 주인을 배반한 종이 이웃 읍(邑)에 의탁하자 와서 송사한 일이 있었는데 잘잘못은 따지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였다. 공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당장에 결정하여 그 주인(主人)에게 되돌려 보내자 인심(人心)이 크게 복종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읍(邑)에서 변(變 정여립(鄭汝立)의 반란 사건을 말함)을 아뢴 일이 있었는데, 옥사에 억울한 일이 많았다. 사람들을 잡아 가둘 때 공은 속으로 그들이 죄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벗겨 주고 곧 옥사를 파하였다. 뒤에 공도 연좌(連坐)되어 최수우(崔守愚) 선생과 같이 체포되어 옥에 갇혀 겨울을 지냈는데, 최수우는 옥졸(獄卒)을 종 다루듯 호령하며 꾸짖었고, 공은 태연하게 떠들고 웃자, 옥중(獄中)에서,
“최사축(崔司畜)의 호령과 조 금구(趙金溝)의 웃음에 갇힌 신세임을 모두 잊었다.”
하였다. 최수우는 마침내 옥중에서 여위어 죽었고 공은 풀려났는데, 최수우의 말만 나오면 문득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倭寇)의 변(變)이 일어나자 여러 군(郡)이 소문만 듣고도 미리 겁내어 달아나고 흩어지니, 적(賊)은 승세를 타고 전진하였다. 공이 서울에 갔다가 난리가 났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돌아오다가 정언(正言) 이흥상(李興相)을 만나 개연(慨然)히 적을 토벌할 일을 말하고, 같이 죽을 것을 약속하였다. 함양(咸陽)에 이르러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공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군현(郡縣)에 격문(檄文)을 전하고, 곧 군사를 일으키니, 김공이 공에게 의령(宜寧)을 임시로 맡게 하였다. 의령에 당도하자, 곽재우(郭再祐) 공이 이미 의령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공은 바로 곽공에게 의령을 맡으라고 미루어 주고, 다시 김공을 만나러 돌아오는데 길에서 들으니,
“양경(兩京 한양ㆍ평양)을 지키지 못하여 거가(車駕)가 벌써 중강(重江 대동강(大同江)ㆍ청천강(淸川江))을 지났으니, 나라는 망했다.”
하므로, 강에 이르러 스스로 몸을 던져 죽으려 하였다. 그러자 김공이 말하기를,
“안 된다. 뜬소문은 믿을 수 없으며, 또 헛되이 죽는 것은 무익하다.”
하니, 공이 그렇게 여겼다. 이때 상(上)이 용만(龍灣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에 거둥하여 의병(義兵)을 일으킨 공(功)으로 공(公)에게 장악원 첨정 벼슬을 상(賞)으로 내렸다가 단성 현감(丹城縣監)으로 바꾸었다. 마침 대란(大亂)을 당한 때라서 국내에 큰 기근이 들자, 공은 창고를 열어 구제하고 부족하면 사재(私財)를 털어 뒤를 대었다. 그해에 김공이 순찰사가 되었는데, 전염병에 걸려 군중(軍中)에서 죽자, 공이 그 초상을 치렀다.
다음해에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갔다. 뒤에 안주 목사(安州牧使)와 청풍 군수(淸風郡守)에 임명 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赴任)하지 않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함양 군수(咸陽郡守)가 되었는데 정유년(1597, 선조30)에 적이 다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으로 향하니, 공이 체찰사에게 글을 올려 한 고을의 군민(軍民)을 전부 붙여 주면 목숨 걸고 지키겠다고 청하여, 드디어 경내(境內)의 군민을 거느리고 험한 곳에서 웅거하여 지켰다. 조금 뒤에 황석(黃石)을 지키라는 명이 있자, 공이 곧 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 공과 의논하여 성루(城壘)를 완전히 수리하였다. 얼마 뒤 공이 함양에서 갈려 가게 되자, 모두 말하기를,
“수성(守城)하기는 위태롭고 또 관리로서의 직책도 없으니, 떠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내 벌써 목숨 걸고 지키겠노라고 벗과 약속했고, 적은 이미 급하니 의리상 떠날 수 없다.”
하니, 함양의 자제들이 처음에는 흩어져 가려고 하다가 공의 의로움을 듣고는 그를 따랐다. 주장(主將) 백사림(白士霖)이 말하기를,
“성이 험하니 적은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하더니, 적이 성에 임박해서는 백사림이 밤에 성을 헐고 몰래 도망가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공이 곽공과 북향 재배하고 죽으니, 8월 18일이며 나이는 61세였다.
처(妻) 이씨(李氏)는 고 참찬(參贊) 이준민(李俊民)의 딸이다. 공은 일이 잘되지 않을 것을 알고 죽기를 맹세하며 처자에게 성(城)에서 나갈 것을 명하였으나 이씨는 말하기를,
“노첩(老妾)도 따라 죽겠습니다. 의리상 떠날 수 없습니다.”
하고, 두 아들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조씨(趙氏)로 하여금 제사(祭祀)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
하고 절개를 지켜 죽었으며, 곽씨 집안 온 식구가 다 죽었다. 이 일을 아뢰자 상이 예로써 제사를 지내 주고, 처음에는 공에게 사복시 첨정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여러 번 올려 이조 판서를 증직하여 충신(忠臣)임을 표(表)하였고, 고향 사람들은 충현사(忠賢詞)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황석(黃石)의 아래에 장사 지냈다가 무술년(1598, 선조31)에 진주(晉州)의 소남(召南)으로 옮겨 장사 지냈다.
공은 지극한 성품과 높은 행실이 있어, 부모를 섬기되 부모가 자식 생각하는 마음만큼 부모를 생각하지 못할까 걱정하며 친척에게 어질게 하고 친구를 사귀는 데 충직하였으며, 고금(古今)의 치란(治亂)과 인물(人物)의 장단을 서로 논의할 때면 말투가 엄정(嚴正)하여 남을 권면할 만하였다. 세상에 도가 날로 더러워짐을 보고는 마시고 취하며 웃고 즐기면서 스스로 희학하여 자신의 호를 대소헌(大笑軒)이라 하였다. 뜻이 커서 사사로이 생산(生産)하는 것이 없어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다. 일찍이 상국(相國)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백유(伯由)는 겉보기엔 방탕한 것 같으나, 안으로 지킴은 견고하고 확실하여 열장부(烈丈夫)의 위풍(威風)이 있다.”
하였다. 아들 셋이 있는데, 장자(長子) 조영해(趙英海)는 일찍 죽었고, 차남 조영호(趙英濩)는 성이 함락되었을 때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고, 조영혼(趙英混)은 아직 어리다. 딸은 모두 넷인데, 그 사위는 권약(權瀹), 김몽지(金夢芝), 노굉(盧肱), 정익건(鄭益乾)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벗과 약속하여 죽음을 사양하지 않음은 / 許友不辭死
의리요 / 義也
목숨을 바쳐 나라를 위하여 죽음은 / 殺身以徇國
절개다 / 節也
오직 의리 있고 절개 있으니 / 惟義惟節
충신 중의 충신이다 / 忠臣之烈也

 
 국조보감 제3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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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조 9
30년(정유, 1597)

○ 1월. 중국 조정에서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양호(楊鎬)를 경리(經理)로,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총독(總督)으로 삼고, 군문(軍門) 마귀(麻貴)를 제독(提督)으로 삼아 선대병(宣大兵) 1천을 통솔하게 하고,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은 요동병(遼東兵) 3천을 거느리고,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남병(南兵) 4천을 거느리고, 유격(遊擊) 우백영(牛伯英)은 밀운병(密雲兵) 2천을 거느리고, 유격(遊擊) 진우충(陳愚衷)은 연수병(延綏兵) 2천을 거느리고, 참정(參政) 소응궁(蕭應宮)이 감군(監軍)하고, 호부 낭중(戶部郎中) 동한유(董漢儒)가 군량을 감독해 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양방형과 심유경 등이 명(命)을 욕되게 하고 돌아왔는데, 중국에서는 "수길이 우리의 큰 은혜를 배반하여 관군(官軍)을 죽였다.” 하여 오랫동안 군사를 철수시키지 않고, 병부 상서 석성(石星)을 하옥시키고 심유경을 붙잡아 갔었다. 조정에서 또 잇달아 권협(權悏) 등을 보내 급함을 고하니, 드디어 재차 군사를 동원하여 계속해 나온 것이다.
○ 7월.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패하여 죽고 전라 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 수사 최호(崔湖) 등이 죽었다. 한산도의 전쟁에서 패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조정과 재야가 매우 놀랐다. 상이 비변사의 신하들을 불러 보고 대책을 묻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 판서 이항복이 아뢰기를,
“지금의 계책은 오직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는 것뿐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8월.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䞭)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체찰사 이원익은 황석산성이 호남과 영남의 요충지이므로 적이 반드시 빼앗고자 할 것으로 여겨서 세 고을의 군사를 예속시키어 곽준에게 지키도록 명하였다.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督戰)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곽준이 태연한 기색으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끝내 해를 당하였는데, 그의 두 아들 이상(履常)과 이후(履厚)가 시체를 부둥켜 안고 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준의 딸은 유문호(柳文虎)에게 시집을 갔는데, 문호가 적에게 사로잡히자 곽씨가 이미 성을 빠져 나왔다가 그 말은 듣고는 여종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같이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도 사로잡혔으니 내가 어찌 차마 홀로 살아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조종도(趙宗道)는 전에 함양 군수(咸陽郡守)를 지내고 집에 있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들판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 하고는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라는 시를 지었는데, 마침내 곽준과 함께 전사하였다.
○ 9월. 처음에 적장 행장(行長)과 의지(義智)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격해 와 남원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서로 여러 날을 버티고 있었다. 적병이 나무와 풀로 참호를 메우고 밤을 틈타 육박해 올라와 어지러이 탄환을 쏘아대니, 성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이에 총병 양원은 휘하 몇 사람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겨우 죽음을 면하였고,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는 모두 죽었다. 총병 중군(摠兵 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總) 장표(蔣表), 모승선(毛承先)과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 부사 임현(任鉉), 판관(判官)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도 모두 죽었다.
○ 경리 양호(楊鎬)가 부총병 해생(解生) 등을 시켜 적병을 직산(稷山)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고부터 승승장구하여 경기 지방을 핍박하였다. 경리 양호가 평양에서 그 소식을 듣고 도성으로 달려와 제독을 불러 싸우지 않은 상황을 꾸짖고, 제독과 함께 계책을 정해 정용(精勇)한 기사(騎士)를 몰래 뽑아 해생ㆍ우백영(牛伯英)ㆍ양등산(楊登山)ㆍ파귀(頗貴)로 하여금 거느리고 직산에서 맞아 치게 하였다. 해생 등은 직산의 소사평(素沙坪)에 복병해 있다가 적병이 미처 대오를 정렬하기 전에 돌격하니, 적이 흩어져 도망하였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또 유격(遊擊) 파새(擺賽)를 보내어 2천의 기병을 이끌고 따르게 하여 네 장수와 합세해서 추격하여 또 격파하였다.
이날에 경리와 제독이 상에게 강가로 나아가 보기를 청하자, 상이 부득이하여 행차하였다. 인심이 흉흉하고 놀라 백성들이 짐을 꾸려놓고 대기하였고 내전은 전쟁을 피해 서쪽으로 행차하였는데, 첩보가 이르러서야 서울이 조금 진정되었다.
○ 10월. 상이 흥인문(興仁門) 밖으로 나아가 묘사(廟社)의 신주(神主)를 친히 맞아 권설소(權設所)에 이르러 분향례(焚香禮)를 행하였다.
○ 11월. 경리 양호와 제독 마귀(麻貴)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경상도로 갔다. 양호가 떠나면서 상에게 말하기를 "내가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을 정벌하려는데, 국왕도 함께 가자.”고 하니, 상이 즉시 응답하여 승낙하였다. 이튿날 상과 경리가 고삐를 나란히 하고 성을 나갔는데, 경리가 험한 길로 말을 달려 가자 상도 재빨리 달려 따라갔는데, 자세가 안정되고 여유가 있었다. 이에 경리가 돌아보고 웃으면서 "왕과 함께 일을 할 만하다.” 하였다. 상이 말에서 내리려는데, 백관과 위사(衛士)가 한 사람도 뒤따라 온 자가 없고, 오직 선전관 유승서(柳承緖)만이 따라와 고삐를 잡았다. 강가에 이르러 경리가 굳이 상에게 도성으로 돌아가라고 청하니 상이 돌아왔다.

[주D-001]공동산 …… 영광일세 : 은자(隱者)의 생활도 좋지만 나라를 위하여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스럽다는 뜻. 공동산(崆峒山)은 중국 황제(黃帝) 때의 은자 광성자(廣成子)가 있던 곳으로, 은자의 대명사로 쓰인다. 《莊子 在宥》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에 회양(睢陽)에서 고립되어 사력을 다해 성을 지켜 싸우다가 죽은 당(唐)의 충신이다. 《唐書 卷192》

 

 
약천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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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명(神道碑銘)
좌참찬 효익(孝翼) 이공(李公) 신도비명 무자년(1708, 숙종 34)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고려 때에 태사(太師)를 지낸 도(棹) 이후로 가문이 번창하여 명망과 덕행이 이어졌다. 본조에 들어와서 휘 승간(承幹)이 있었으니 경상우도 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이고, 이분이 휘 순전(純全)을 낳으니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使)이며, 이분이 휘 건(楗)을 낳으니 사헌부 감찰로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이분이 휘 정윤(貞胤)을 낳으니 진사로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공량(公亮)을 낳으니 강개하여 명예와 절의를 숭상해서 포의로 있을 적에 사류들 사이에 중망이 있었으며, 만년에 선공감 참봉(繕工監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벼슬하지 않고 별세하였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판서의 배필은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니, 판교(判校) 언형(彦亨)의 따님으로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 19)에 공을 낳았다.
공은 휘가 준민(俊民)이고 자가 자수(子修)이고 호가 신암(新菴)이다. 어려서부터 숙성(夙成)하였고 장성해서는 인품이 뛰어났다. 약관 시절에 문예와 학업이 크게 진전되었으며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33세에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처음 성균관에 배속되었다가 추천으로 예문관에 들어갔다.
내직으로는 정언, 수찬, 지평, 장령, 대사헌, 직강(直講), 사성(司成), 사도시 부정(司䆃寺副正), 사복시(司僕寺)ㆍ종부시(宗簿寺)ㆍ장악원(掌樂院)ㆍ봉상시(奉常寺)의 정(正), 예조의 좌랑ㆍ참판ㆍ판서, 호조의 참판ㆍ판서, 병조의 좌랑ㆍ정랑ㆍ참의ㆍ참판ㆍ판서, 형조의 참판ㆍ판서, 공조의 참판ㆍ판서, 한성부의 우윤ㆍ판윤, 도승지, 의정부의 좌참찬ㆍ우참찬, 지경연사(知經筵事), 도총관, 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영변 판관(寧邊判官), 양재 찰방(良才察訪), 황해 도사(黃海都事), 영월 군수(寧越郡守), 나주 목사(羅州牧使), 강릉 부사(江陵府使), 강계 부사(江界府使), 평안 병마절도사(平安兵馬節度使), 전라ㆍ평안ㆍ경기의 관찰사,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지냈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이니, 이는 공이 조정에 올라 역임한 관직의 차례이다.
명종(明宗) 을묘년에 이량(李樑)이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공이 정언에 임명되어, 이량이 권력을 독단하여 무도한 죄를 탄핵하려 하자, 그는 자기의 무리를 사주하여 공을 배척해서 영변(寧邊)의 좌이(佐貳 판관)로 내보내어 외직에서 머문 것이 10여 년이었다. 갑자년 나주 목사로 있다가 강계로 옮기니, 이량이 막 실세하여 그곳으로 유배와 있었다. 공이 부임하던 날 술을 가지고 가서 위로하니, 이량은 크게 감동하여 부끄러워하고 그림을 그린 병풍에 시를 써 줄 것을 청하자, 공은 ‘세한에 서로 대함에 각각 무심하다〔歲寒相對各無心〕’라는 시구를 써 주었다.
영변의 좌이로 있을 적에 날마다 부사(府使)의 군막에 안후를 살펴 예를 매우 삼가니, 주장(主將)이 사례하기를 “공의 기국(器局)과 도량을 살펴보니, 남의 아래에 오래 있을 자가 아니다. 후일 내가 반드시 공의 관하(管下)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공이 관서 지방에 병마절도사가 되어 부임했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숙천 부사(肅川府使)로 활과 화살을 메고 앞에서 말을 몰았다.
영월에 부임해 있을 적에 평소 알지 못하는 서생이 뵙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현재 치악산(雉岳山) 산중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3년 동안 먹을 양식을 얻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은 그의 성명을 묻지 않고 양식을 주었으며, 그가 다시 수송해 가기 어려움을 말하자 공은 사람에게 명하여 실어다 주게 하였다. 그후 공이 서전(西銓 병조)의 장관이 되었을 적에 참판의 자리에 있는 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제가 바로 당일에 양식을 구걸한 서생입니다.” 하였다.
공이 성균관에 있을 적에 서로 아는 자가 사국(史局 춘추관)에 있으면서 공을 천거하였다. 그 사람이 전조(銓曹)의 낭관이 되자, 사람들은 모두 공이 전조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이끌어 주려 하지 않았는데, 뒷날 사건에 연루되어 벼슬을 못하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늙고 집이 몹시 가난하였는데, 공이 사시(四時)의 녹봉과 노모를 봉양할 물자를 나누어 주어 계속해 보내 주니, 그는 그제서야 한탄하기를 “이처럼 훌륭한 벗이 있었는데 내가 일찍 알지 못했으니, 오늘날 버림받은 것이 당연하다.” 하였다.
선조(宣祖) 초년에 야대(夜對)에 입시하였는데, 신선의 일을 언급하였다. 상이 “세상에 과연 신선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좌우에서는 모두 그 허탄함을 말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말씀하기를 “신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묻자, 공은 대답하기를 “판서 원혼(元混)이 평생 동안 술을 경계하고 여색을 삼가서 나이가 90에 이르렀으나 얼굴 모습이 조금도 쇠하지 않고 걸음걸이가 나는 듯이 빠르니, 신은 이 사람을 신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은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을 엄숙하게 고쳤다.
공은 처음 대각(臺閣)에 들어가서 강직한 성품 때문에 권력을 쥔 간신들을 거슬러 여러 번 위기를 당하였으나 늙어 백수(白首)가 되어서도 굳센 기운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선조 중엽에 조정의 의론이 분열되자, 공은 서로 배척하고 충돌하는 것을 싫어하여 한 번도 어느 쪽을 편든 경우가 없었으며, 오직 동서(東西)의 당쟁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를 공경히 따랐다. 그러다가 문성공이 별세하자 당인(黨人)들이 문성공을 공격하여 그치지 않으니, 공은 그들을 사사로운 원수처럼 여겨 원통해하고 매번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그의 무함을 드러내어 말씀하였는데, 옆에서 공의 말씀을 듣는 자들은 목을 움츠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리낌없이 말하였다. 당인들이 눈을 흘기며 다투어 모함하고자 하였으나 중상모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벼슬이 오르지 못하여 중추부(中樞府)에 오래 묶여 있고 요로를 맡지 못하였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상소문에 이른바 “기개가 높고 굳센 이모(李某)조차 한번 이이(李珥)를 어질다고 말하자, 10년 동안 벼슬이 막혀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바로 중봉이 당시의 일을 직접 보고서 분한 마음을 내어 말한 것인바, 이는 공이 마음을 세우고 처신한 대략이다.
대부인(大夫人)은 처사(處士)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누님이다. 성품과 법도가 자못 엄하였으나 공은 대부인을 섬길 적에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완연히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하듯이 하였다. 대부인의 수가 90에 이르렀는데, 이때 공의 나이가 5, 60이 넘었으나 좌우에서 부지런히 봉양하기를 젊었을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대부인을 모시고 앉아 있을 적에 비록 밤이 깊더라도 반드시 취침하시기를 기다린 뒤에 자신의 처소로 물러갔으며, 닭이 울면 일어나서 문안한 뒤에야 공청(公廳)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하룻밤은 바람과 눈이 세차게 몰아치고 또 공이 숙취(宿醉)에서 깨어나지 못하였다. 모시는 첩이 잠시 그칠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어버이 연세가 이미 높으시니, 비록 오랫동안 모시고자 하나 어찌 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 상국 정철(鄭澈)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매일 새벽에 공의 발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이 판서가 대부인의 처소에 문안가는 것이다.” 하였으며, 공을 만날 적마다 반드시 절하여 공경을 지극히 하였다. 공은 외직에 있을 적에 대부인의 편지를 받들고 오는 자가 있으면 비록 노예라도 반드시 상좌에 앉히고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공은 대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 훼손하지 말아야 할 나이를 넘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상례를 집행할 적에 규정된 예보다 지나치게 하면서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여 겨우 복을 벗자 몇 개월 만에 별세하였으니, 공의 정성과 효도는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공은 천품이 높고 활달하며 풍조(風調)가 준걸스럽고 빼어났다. 사람들과 사귈 적에 마음이 평탄하여 간격이 없어서, 바라보면 절로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담론을 잘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면 사리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어서 언제나 온 좌중의 사람들을 굴복시키곤 하였다.
전대의 고사를 많이 알아서 사람들과 말할 적에 마치 자신이 그 사이에 가서 직접 본 것처럼 말씀하였다. 일을 만나면 분발하고 격앙되어 비록 위험한 함정이 앞에 있더라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피함이 없어서 우뚝하여 천 길 높이 서 있는 절벽의 기상이 있었다. 그리하여 집안에 있을 때에는 자제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관청에 있을 때에는 아전들이 일찍이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성품이 본래 소탈하고 검소하였으나 자신을 다스림에는 매우 엄격하였다. 관직에 있은 지가 40여 년이고 지위가 상경(上卿)에 올랐으나 가산을 조금도 늘리지 않았다. 평상시에 스스로 푸른 삼베옷을 입었고 집안 식구들에게 채색옷 입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마구간에는 좋은 말을 기르지 않고 뜰에는 화훼(花卉)를 심지 않았다.
시문을 짓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으나 때로 혹 좋은 경치를 만나 붓을 잡고 글을 쓰면 내용이 호걸스럽고 굳세어 기이한 기운이 있어 마치 공의 인품과 같았다.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일찍이 서총대(瑞蔥臺)에서 열무(閱武)할 적에 장원을 하여 특별히 의장마(儀仗馬)를 하사받았다. 공이 절하여 받고는 오른손으로 고삐를 쥐고 끌고 가서 대부인에게 바치니, 보는 자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공은 강직한 성품으로 악한 사람을 미워하여 모함하는 자들에게 많이 시기를 받았으나, 국가의 큰 일을 담당할 만한 당세의 훌륭한 사람과 장덕(長德)을 논하게 되면 비록 평소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라도 공을 먼저 추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망과 실제가 더욱 높아져서 정승으로 임용될 날이 머지않았는데 하늘이 별안간 남겨 두지 않으니, 세상을 위하여 생각하는 자들이 이 때문에 거듭 애석히 여겼다. 이는 공의 평소 행실과 풍교(風敎)와 덕화(德化)이니, 그 대략을 상상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공이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 23) 11월 29일에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조문과 제사를 규례와 같이 하였으며, 양주(楊州)의 고령산(古靈山)에 있는 선영의 아래에 장례하였다.
초취 부인 팔계 정씨(八溪鄭氏)는 별좌(別坐) 백거(伯渠)의 따님인데, 3남 4녀를 두었다. 아들 유훈(有訓)은 군수이고 종훈(從訓)은 도사이고 수훈(受訓)은 부사이며, 딸은 군수 조종도(趙宗道), 승지 조원(趙瑗), 사인(士人) 유철(柳澈), 선교랑(宣敎郞) 노극성(盧克誠)에게 출가하였다. 재취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된 기(機)의 따님인데, 딸 하나를 두어 찰방 이중서(李重緖)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과 증손과 현손이 수백 명이다.
일찍이 현종(顯宗) 때에 공의 증손인 승지 지무(枝茂)가 공의 말씀과 행실을 기록하여 태학사(太學士) 조복양(趙復陽)에게 청해서 공의 시장(諡狀)을 찬(撰)하게 하였는데, 금상 무인년(1698, 숙종 24)에 조정에 올려 시호를 청하자 효익(孝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지금 공의 현손인 첨지 세연(世延)이 그 아들 장령 성조(聖肇)에게 명하여 나에게 와서 공의 신도비명을 청하게 하였다. 나는 늦게 태어나서 공이 살아 계실 때와 접하지 못하였고 또 견문이 매우 고루하니, 어찌 공의 아름다운 덕을 제대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증거할 만한 문헌이 아직 남아 있다. 앞에는 중봉(重峯) 조공(趙公)의 상소문에 기개가 높고 거룩하다고 칭하였고, 뒤에는 태학사 조공(趙公)의 시장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청렴하며 기개가 높고 비범해서 한 시대의 빼어난 인물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근거하여 명문을 지을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우리 조선조에 / 於皇我朝
많은 선비 양성하였는데 / 作成多士
명종과 선조 때에 더욱 성하니 / 盛極明宣
풍수(豐水) 가에 풀이 무성한 것 같았다오 / 猶豐有芑
우리 공의 출생은 / 我公之生
실로 이 시기를 당하니 / 實當斯會
큰 재목과 뛰어난 기국 / 宏材偉器
국가를 호위하였네 / 維國之衛
벼슬길에 오른 처음에는 / 發軔伊始
간사한 자들에게 길이 막혔네 / 觸邪見遏
먼저는 처졌으나 뒤에는 올라 / 先蹇後騰
지위가 상경에 이르렀으며 / 位至卿月
성부를 두루 역임하고 / 周流省部
번병을 차례로 시험하였는데 / 歷試屛毗
문과 무를 적당히 쓰니 / 文武惟用
좌우에 모두 마땅하였네 / 左右俱宜
그 지조 높고 깨끗하며 / 峻潔其操
그 기개 용맹스러웠다오 / 邁往其氣
큰 임무 받을 수 있음이 / 可以大受
누가 공의 위에 있었겠는가 / 孰居公右
공은 선과 악을 분별함에 / 公於淑慝
특별히 엄격하게 하였으니 / 特嚴分別
저 생강과 계피에 비유하면 / 譬彼薑桂
늙을수록 더욱 매워지네 / 老而愈辣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 求忠於孝
옛날의 훈계가 있으니 / 惟古有訓
공과 같이 지극한 효행은 / 如公至行
거의 증민을 따르리라 / 庶追曾閔
공은 온전한 덕이 있으니 / 公有全德
모두 칭찬할 만하였으나 / 皆足聽聞
그중 소중한 것을 말하자면 / 若言所重
더욱 어버이를 섬김에 있었네 / 尤在事親
만년에 하관의 장관이 되어 / 晩長夏官
이름이 금구에 드니 / 名入金甌
장차 불원간에 / 將於朝夕
조정에서 왕의 계책 도우리라 / 登贊王猷
여러 사람들 크게 기대하며 / 輿人顒望
오히려 늦다고 여겼는데 / 猶以爲遲
어찌 백 년을 못 살아서 / 胡靳百年
그 은택 다하지 못하였는가 / 未究厥施
공의 훌륭한 유풍과 여운 / 流風遺韻
없어지지 않고 사람에게 남아 있어 / 不泯在人
입으로 서로 전하니 / 以口相傳
아무리 오래되어도 새롭구나 / 雖久如新
공은 훌륭한 손자가 많아 / 公多聞孫
관직이 이어져 영화를 누리네 / 簪組奕舃
길이 효심을 생각하여 / 永言孝思
신도비를 세워 드러나게 새겼네 / 圖樹顯刻
양주의 경내 / 維楊之境
고령산의 언덕에 / 古靈之岡
도끼 모양의 묘소가 있으니 / 爰有斧屋
바로 공이 묻힌 곳이라오 / 寔公之藏
뒤이어 명문을 지어서 / 文追作銘
천추에 영원히 보이노니 / 用示千秋
없어지지 않고 길이 남아서 / 不泐不朽
그 아름다움 크게 전하리라 / 以鴻厥休

[주D-001]훼손하지 …… 나이 :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나이 50이 되면 상을 치르느라 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는 50이 되면 늙어 쇠하기 시작하는 때이므로 상례(喪禮)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D-002]태학사(太學士) : 대제학의 옛 명칭이다.
[주D-003]풍수(豐水) …… 같았다오 : 풍수는 주(周) 나라 문왕(文王)이 도읍했던 풍(豐)에 있는 물 이름이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에 “풍수 가에 풀이 무성하니, 무왕이 어찌 이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겠는가.〔豐水有芑 武王豈不仕〕” 하였는바, 이는 풍수 부근에 생물이 번창함을 읊은 것이라 한다.
[주D-004]성부(省部) : 옛날 상서성(尙書省)이나 이부(吏部)와 같은 관청으로 조선조의 육조(六曹) 따위를 이른다.
[주D-005]증민(曾閔) : 공자(孔子)의 제자인 증삼(曾參)과 민손(閔損)으로, 이들은 모두 효행이 지극하였다. 민손은 자가 자건(子騫)으로 계모의 학대를 잘 참아내고 결국 감복(感服)시켜 더욱 유명하다.
[주D-006]하관(夏官)의 장관 : 하관은 병조를 이르는바, 이는 육조(六曹)를 천(天)ㆍ지(地)ㆍ춘(春)ㆍ하(夏)ㆍ추(秋)ㆍ동(冬)으로 나눈 데서 나온 것이다. 장관은 판서를 이른다.

 
연려실기술 제1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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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영남(嶺南) 의병(義兵)

전 훈련 봉사(訓鍊奉事) 권응수(權應銖)는 신녕(新寧)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혹 영천(永川)이라고도 한다.
응수는 처음에 수영 군관으로서 자제(아우 응전(應銓)과 이온수(李蘊秀) 등)와 노복을 거느리고 상도(上道)의 토적을 죽였으며, 또한 요로에 복병해 놓았다가 뒤떨어진 적군을 죽이기도 하였다. 여러 장정을 모아서 적을 맞아 정면에서 공격하기도 하고 뒤에서 공격하기도 하였는데, 두려워하여 피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습격을 받았으나 그의 말이 강건하여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초유사(김성일(金誠一))가 그를 의병대장으로 삼았다.
○ 9월에 영천에 있던 적군이 봉고어사(封庫御史)라고 자칭하면서 신녕을 향하여 오는데, 안동(安東) 의병장 권응수가 정대임(鄭大任)ㆍ정세아(鄭世雅)ㆍ조성(曺珹)ㆍ신해(申海) 등과 함께 박연(朴淵)에서 만나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이때 영천 백성들이 그 고을에 주둔하고서 웅거한 적군을 무찌르려고 응수 등에게 구원을 청하여 왔으므로 응수 등이 함께 진군하여 추평(楸坪)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니, 적들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못하는데도 군사들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응수는 담략과 용맹이 있어 곧장 군사 몇 사람을 베어 죽이고 뛰쳐 나가 군사들의 앞장을 섰다. 모든 군사들이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적군은 관사로 도망갔다. 바람을 따라서 불을 지르니 거의 다 타죽고 혹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수백여 명을 죽였으므로 시체 썩는 냄새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기재(寄齋)》에는, “응수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한 사람당 섶 한 묶음씩을 들고서 밤에 영천을 공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안동 이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해 갔으므로 좌도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 병사 박진(朴晉)이 즉시 장계를 올려서 응수는 통정에 올랐고 《기재》에는, “절충조방장(折衝助防將)으로 발탁되었다.”고 하였다.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에게는 차등 있게 상으로 관직을 주었다.
○ 응수는, 자는 중평(仲平)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갑신년에 무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병사에 이르렀으며, 선무 공신 2등으로 두 번째이다. 에 녹훈되어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고 찬성(贊成)에 증직되었다.
○ 정대임은, 본관이 영일(迎日)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고, 계사년에 공으로 예천 군수에 임명되었다. 용궁(龍宮)ㆍ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 박진을 수행하여 경주ㆍ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 정세아는 영천 사람으로 진사였는데 그때 나이가 67세였다. 적군이 영천을 점거하니, 세아가 좌수 유서(柳瑞)ㆍ생원 조희익(曺希益) 등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불러 모아서 적군을 잡아 죽인 숫자가 매우 많았다. 성을 보전한 승리는 모두 세아 등의 의병을 먼저 일으킨 힘이었다. 《순영록(巡營錄)》
○ 세아는, 자는 화숙(和淑)이고 호는 호수(湖叟)며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격파하고 그 공로로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임명되었다. 뒤에 여러 차례 증직되어 병조 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 공의 아들은 의번(宜藩)인데, 을유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다. 경주(慶州) 전투에서 세아가 포위되니 의번이 두 번이나 여러 겹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다가 마침내 적군에게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뒤에 정려(旌閭)되었다.
○ 조성은, 본관이 창녕(昌寧)이다. 그의 형 조경(曺瓊)과 함께 공산(公山)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켜 적군을 토벌하여 여러 번 이겼다. 공으로 군자 판관에 임명되었고, 갑오년에 무과를 주어 벼슬이 절제사에 이르렀다.
○ 신해는 하양(河陽) 사람이다. 훈련 봉사(訓鍊奉事)로서 군사를 모집하여 적군을 토벌하였다.
○ 본관이 함안(咸安)인 전 현감 조종도(趙宗道)는, 전 직장 이로(李魯) 등과 함께 서울에 있다가 왜변의 소식을 듣고 즉시 본도로 돌아가며 약속하기를, “마땅히 의병을 일으킬 것인데,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동지와 함께 물에 빠져 죽을 것이지 의리상 적에게 욕을 볼 수는 없다.”고 하였다.이때에 이르러서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그 통문에 “죽음이 비록 싫기는 하지만 천지에 적들이 그물처럼 둘러싸서 도망가 살 곳이 없으니, 비록 살기를 도모하여 개ㆍ돼지처럼 치욕을 참고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의리에 죽을지언정 감히 살기를 바라겠느냐? 인(仁)을 위해 생명을 버리겠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 뒤 정유년에 종도가 황석산성(黃石山城) 전투에서 죽으니, 사람들은, “그 문구의 말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일월록》
○ 이로의 통문에, “백척이 되는 나무가 이미 뽑혔어도 한 치의 뿌리에서 생기를 돌릴 수 있을 것이며, 아홉 길의 산이 장차 완성되려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큰 공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문구가 있었다.
○ 유종개(柳宗价)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경상 좌도의 산골 10여 고을은 전란과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간혹 강개한 뜻을 가진 선비가 고을 사람을 격려하여 적군을 토벌할 것을 타일렀으나, 백성들은 조석으로 편히 지내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고 군사를 일으키자는 사람을 도리어 원망하였다. 종개는 개연히 맨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고을의 군사 수백 명을 모아서 산중에 진을 쳤다. 강원도의 적군이 횡행하여 못된 짓을 하다가 광비촌(廣比村)을 지나가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령(掌令) 윤흠신(尹欽信)ㆍ윤흠도(尹欽道)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였다.적군의 선봉이 변장을 하고 몰래 다니는데도 척후병이 이를 알지 못하여 복병들이 모두 흩어졌다. 종개 등이 갑작스럽게 적군을 만나 용감하게 싸우고 후퇴하지 않다가 힘이 다 떨어지고 구원군이 없어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적군이 드디어 불지르고 노략질하고서 갔다.
○ 유종개의 자는 계유(季裕)이며,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기묘년에 진사가 되었고, 을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 정자(校書正字)가 되었다.
○ 예안(禮安) 사람 전 한림 김해(金垓)가 의병을 일으켰다.
종개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의병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초유사가 격문을 띄워서 국은을 잊었음을 책망하고 의병에 나갈 것을 격려하였으며, 안집사(安集使) 김륵(金玏) 또한 통문을 들렸다. 이에 영천(榮川)ㆍ풍기(豐基) 선비들과 전 한림 김해ㆍ생원 금응훈(琴應勳)ㆍ진사 임흘(任屹) 등 여러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여 잇달아 일어나니 군사가 만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김해의 통제를 받았다. 김해는 본래 인망(人望)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고 중히 여겼다. 《일월록》
○ 좌도의 의병이 일직현(一直縣)에 모여서 맹약할 때에 김해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뒤에 김면(金沔)이 본도의 대장이 되었음을 듣고 의병 문서를 강을 건너 김면에게 보내었다. 김면이 열람하여 보니, 모두 유생들로 부대가 편성되었으므로, “이것들이야말로 참된 의병이다.” 하였다. 계사년에 김해는 명 나라 군사를 따라서 경주에 있다가 병으로 죽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수찬에 증직되었다.《일월록》
○ 박정완(朴廷琬)이 군사를 모집하여 김면을 따라갔는데, 재산을 털어서 군량을 공급하였고 활과 화살도 직접 마련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상당히 공을 세웠다. 김면이 무계(茂溪)에서 승전한 것은 정완의 힘이 컸는데도 공에는 참여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히 여겼다. 《순영록》
○ 삼가(三嘉) 사람 학유(學諭) 박사제(朴思齊)의 형제와 봉사(奉事) 노흠(盧欽), 생원 권양(權瀁), 단성(丹城) 사람 권세춘(權世春)ㆍ권제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순영록》
○ 금산(金山) 사람 박사 여대로(呂大老)와 권응성(權應星)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는데, 응성이 임시로 대장이 되어서 김면과 지례(知禮)ㆍ금산의 적군을 협공하였다. 그 뒤에 적군의 습격을 당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순영록》
○ 창녕 사람 생원 신방즙(辛邦楫)ㆍ충의(忠義) 성천희(成天禧)ㆍ정자(正字) 성안의(成安義)ㆍ유학 곽찬(郭趲)ㆍ보인(保人) 조열(曺悅) 등이 군사를 모아서 적군 토벌을 도왔다. 천희 등이 군사 십여 명을 거느리고, 창녕의 적군을 포위하고 종일토록 교전하여 본읍의 군수라고 자칭하는 적을 쏘아 맞추자 3일 만에 적군이 성책을 불지르고 도망갔다. 《순영록》
○ 경주 사람 김호(金虎)가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토벌하였다. 초유사가 김호를 도대장(都大將)으로,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를 소모장(召募將)으로, 진사 최신린(崔臣隣)을 소모유사(召募有司)로 직책을 맡기니, 김호 등이 더욱 용기를 분발하였다. 8월 2일에 적군 기병 5백여 명이 언양(彦陽)에서 노곡(奴谷)을 향하여 오자 김호 등이 군사 1천 4백 명을 거느리고 대항하였는데, 호는 창에 찔리고서도 더욱 힘써 싸웠다. 적군이 본주(本州)의 큰 진으로 도망가자 추격하여 5십여 명을 죽였다. 전후의 경주 승전에서 그보다 앞 선 자는 없었다.
○ 고성(固城) 사람 봉사 최강(崔堈)은 어려서 글을 익히고 늦게서야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담략이 있었다. 무사들의 출세를 구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성품이 또 강직하여 자신의 의사를 굽혀서 남의 비위를 맞추지도 않았다. 이때에 와서 군사를 일으키니 군사들이 비록 많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신임을 얻었고, 전투에 임해서는 자신이 앞장을 섰다. 정기룡(鄭起龍)ㆍ안신갑(安信甲)과 명망은 같았으나 군사를 통솔하는 재주는 그들보다 나았다. 또 진주성 함락조 아래에도 적혀 있다.
○ 상주 사람 진사 김각(金覺)과 장자 이준(李埈)은 의병을 일으키려고 격문을 보냈다.
○ 예안 사람 진사 이숙량(李叔樑) 등은 격문을 지어서 여러 고을에 전하고 효유하였다.
○ 인동(仁同) 향병장(鄕兵將) 장사진(張士珍)은 날래고 용맹하며 담략이 있어서 마음을 단단히 가지고 힘써 적군을 토벌하였고, 그의 아우 사규(士珪)가 전사하자 더욱 분발하였다. 별장이 되어서 군사를 거느리고 요충지를 지키고 있는데, 하루는 적군 수백 명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사진은 용사 수십 명만을 거느리고 뛰쳐나가 맞아 싸워 먼저 비단 옷에 은 투구를 쓴 놈을 쏘아서 그의 머리를 베어 창에 매다니 적군들은 울부짖으며 도망갔다. 사진은 승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10일 뒤에 적은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다시 와서는 먼저 기병 십여 명을 거느리고서 싸움을 걸어 오므로 사진이 또 돌격하여 활을 쏘아대니 적들이 시윗 소리에 따라서 거꾸러졌다. 이에 드디어 날쌘 기세로 추격하여 죽이자 갑자기 적군의 복병이 나타났으나 사진은 오히려 크게 호통치며 힘껏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해도 저물었는데, 적군 한 놈이 갑자기 앞으로 달려들어 사진의 한 팔을 쳐서 끊어 버렸다. 한쪽 팔만으로도 용기를 떨치며 공격하여 마지 아니하더니 그만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나라에서 이 사실을 듣고 통정(通政)ㆍ수사(水使)를 증직하였다.
○ 사진은 군위(軍威) 향교 유생이었다. 본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적군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적군은 그를 두려워하여 장장군이라고 부르며 그가 맡은 구역에는 감히 침입하지 못하였다.
○ 배덕문(裵德文)과 배설(裵楔)이 의병을 일으켰다.
○ 배덕문은, 자는 숙회(叔晦)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명종 계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군수를 지냈다.
○ 배설은 덕문의 아들이다.
○ 성주《선생안(先生案)》에 제말(諸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성(固城) 사람이었다. 임진란을 당해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공격하였는데, 향하는 곳에는 앞을 막는 자가 없어서 곽재우(郭再祐)와 나란히 일컬어졌으나 명성은 오히려 그보다도 높았다. 조정에서 특별히 본주 목사를 제수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죽어서 공명이 크게 드러나지 못했다 한다. 또 소문에는 적군과 진을 마주쳐서 교전할 적에는 용기가 충전하여 수염이 모두 위로 뻗친 것이 흡사 빳빳한 고슴도치 털과 같았으므로 적군들이 멀리서 바라보고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한다. 《약천집(藥泉集)》

 
학봉집 부록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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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문(祭文)]
제문(祭文) [조종도(趙宗道)]

곧은 절개 나라의 역사책에 실려 있고 / 直節載國簡策
공훈 업적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났네 / 勳業著人耳目
만고토록 죽지 않고 길이 남아 있을 거니 / 萬古不死而長存
내가 다시 무슨 말을 거기에다 덧붙이랴 / 吾復何贅說也
일 논함에 자신 견해 고집하지 않았고 / 論事則未嘗偏執己見
우리들이 책임 나눠 받는 것을 탄식했네 / 咄咄乎吾儕之分受其責
임종할 땐 집안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 臨終則未嘗語及家事
원수들과 양립 못함 곡진하게 말하였네 / 諄諄於漢賊之不可兩立
이것은 나 혼자만 얻어들은 말들로서 / 此吾所獨聞
외인들은 알 수가 없었던 일들이네 / 而非外人之所共識也
지하에서 비록 서로 만난다곤 하지만 / 地下雖曰相逢
이 이별에 그 어찌 통곡하지 않으리오 / 此別寧不痛哭


 
학봉일고 부록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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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지(文殊誌)
학봉 선생(鶴峯先生)의 용사사적(龍蛇事蹟)

○ 공의 휘(諱)는 성일(誠一)이고, 자(字)는 사순(士純)이며,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문소(聞韶) 계파(系派)로서 대대로 벼슬살이한 집안이며, 영가부(永嘉府)의 임하현(臨河縣)에서 살았다. 공은 일찍이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모나고 날카롭고 굳세고 엄한 성품을 다스려 부드럽게 하였다. 타고난 천분(天分)이 비록 곧았으나, 실천하여 닦은 공부 또한 많았다.
갑자년(1564, 명종 19)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무진년(1568, 선조 1)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내한(內翰)으로 들어갔다가 이조(吏曹)를 거치고, 옥당(玉堂)에 뽑혀 화요직(華要職)을 역임하여 한 시대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바를 능히 말하였는바, 강직한 지조와 충의의 표상을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에 공이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극론(極論)하였는데, 말이 대단히 간절하였으며, 왕자궁(王子宮)에서 재물을 불리고 이권(利權)을 독차지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곧바로 탄핵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깜짝 놀라면서 허물을 인책하였으며, 조야(朝野)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얼마 뒤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옮겨졌다.
○ 임진년(1592, 선조 25) 봄에 중추부(中樞府)로 전임(轉任)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남방(南方)의 일을 걱정하여 장수를 바꾸기로 의논하였는데, 상께서 특별히 공에게 대신 맡도록 명하여, 드디어 공을 경상우도 병사(慶尙右道兵使)로 삼았다. 공은 명을 받고서 곧바로 떠났는데, 이는 대개 공이 일찍이 아뢰기를, “두려워할 것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요, 섬오랑캐는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모두들 탄식하고 애석해하면서 공의 앞일을 걱정하였다.
행차가 미처 병영(兵營)에 이르기도 전에 변방의 급보(急報)가 하루에 세 번이나 이르러 서울이 발칵 뒤집혔다. 상께서 크게 노하여 정원(政院)에 글을 내려 이르기를, “김성일이 일찍이 ‘일본은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대거 내침(來侵)하였으니, 내가 장차 김성일을 국문(鞫問)하겠다.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재신(宰臣)과 추신(樞臣)들이 모두 입시해 있었는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상공(相公)만이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뢰기를, “이처럼 위급하고 절박한 때에 신이 어찌 차마 성상께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김성일은, 소견은 비록 혹 왜놈들에게 가리워진 바가 있었을지라도, 그의 평소 심지만은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니, 상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다시 전 병사(兵使) 조대곤(曺大坤)에게 그대로 왜적을 막는 일을 맡게 하였다.
○ 공이 상주(尙州)에 와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밤새워 말을 달려 본진(本鎭)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이미 분성(盆城 김해(金海)의 고호(古號))을 격파하고서 좌도(左道)를 치고 있었다. 행차가 의령(宜寧)에 이르러서 장차 정암(鼎巖)을 건너서 곧바로 본진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왜적들이 강우(江右)를 유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휘하(麾下)의 장사들이 모두 머리를 맞대고 말하기를, “정암 길은 왜적들이 있는 곳과 아주 가까우니 이번에 가는 길이 반드시 위험할 것이다. 그러니 진주(晉州)를 경유하여 함안(咸安)으로 나가 왜적들이 있는 곳을 조금 돌아서 가느니만 못하다. 그런데 병사(兵使)께서는 영(令)이 엄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니, 사실대로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정암에는 배가 없다는 내용으로 공에게 고하고, 또 공의 아들인 김역(金湙)을 시켜서, 강물이 불어났고 배도 없으니 진주로 가는 것이 편하다는 내용으로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공이 군관(軍官) 김옥(金玉)을 시켜서 가 보게 하였는데, 김옥 또한 돌아와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배가 없어서 건널 수가 없습니다. 사또께서는 속히 진주 길로 가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듣지 않고 물러가라고 한 다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왜적들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머뭇거리면서 빙 돌아서 가겠는가. 내가 직접 가서 살펴보겠다.” 하였다.
공이 여러 군사들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가 정암에 도착해서 보니, 강가에 배가 있었다. 이에 공이 곧바로 김옥 등을 잡아오게 하고는 자신을 속인 죄를 캐묻고서 장차 처형하려고 하자 김옥이 소리치기를, “저의 죄는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공께서는 지금 왜적들과 맞닥뜨리고 있으니, 한 번 죽어서 속죄(贖罪)하고자 합니다.” 하니, 공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이미 공을 세워 속죄하겠다고 하였으니, 앞으로 왜적들을 만나 싸울 경우에는 마땅히 앞장서서 돌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이번의 죄까지 아울러 다스려서 결단코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군령장(軍令狀)을 책임지고 받들도록 하고 군마(軍馬)를 독촉하여 출발하였다.
○ 길을 가다가 해망원(海望原)에 도착하였다. 경상우도 병사 조대곤(曺大坤)이 성을 버리고 퇴각하여 주둔해 있다가 황망히 도망치려고 하였는데, 공이 도착한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맞아 읍하고는 곧바로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가려고 하였다. 공이 준엄한 말로 책망하기를, “장군은 한 지방을 맡은 장수로서 군대를 주둔시킨 채 진격하지 않아 김해성(金海城)을 함락당하게 하였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된다. 더구나 세신(世臣) 숙장(宿將)으로서 이처럼 극심한 사변을 당하여서는 의리상 달아나서는 안 된다.” 하니, 조대곤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탐하러 나갔던 군사가 왜적의 선봉이 이미 이르렀다고 급히 보고해 왔다. 잠시 뒤에 백마를 타고 새의 깃으로 만든 옷에 금빛 갑옷을 입고 은빛 투구와 금빛 가면을 쓴 왜적 2명이 칼을 휘두르면서 50여 보 앞까지 다가왔다. 장사들이 처음으로 적의 칼날을 보고는 모두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공이 여러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동요하지 말라고 하고는 호상(胡床)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조대곤이 일어나서 말을 타고 달아나려고 하자, 공이 꾸짖으면서 그러지 못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우리측 군사가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겨 말에서 내려 땅에 앉아 부채질을 해댔다. 이에 공이 용사들을 선발하여 돌격하게 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서로 돌아보면서 머뭇거렸다. 공이 김옥의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치기를, “네가 전에 먼저 앞장서서 돌격해 공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도 피할 것인가?” 하니, 김옥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그러자 여러 군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한꺼번에 돌진하였다. 몇 리를 뒤쫓아가자 매복하고 있던 왜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단단하게 포위하였다. 여러 군사들이 해자(垓子) 한복판에서 한바탕 혼전을 벌이면서 목숨을 내놓고 서로 싸웠는데, 왜적의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거꾸러뜨리자, 나머지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 이에 우리측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왜적들의 금 장식을 한 안장, 건장한 말, 보검 등을 노획하고, 수급(首級) 하나를 참(斬)하여 돌아왔다.
이 싸움이, 난이 일어난 처음에 왜적들과 가장 먼저 접전한 싸움인데, 군졸은 1000명도 못 되었고, 무기는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능히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이로부터 군사들의 사기가 조금은 진작되었다. 이에 즉시 군관(軍官) 이숭인(李崇仁)을 올려보내어 수급을 바치면서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였는데, 장계의 첫머리에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공이 먼저 보졸(步卒)들로 하여금 천천히 퇴각하게 하고는 가장 뒤에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내지(內地)로 들어갔다. 성 안에서 흩어졌던 군졸들을 끌어모아 1000여 명의 군졸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 미련하고 사나워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므로, 도망가려 한 죄를 따져서 본보기로 13명의 목을 베어 군중에 조리돌리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벌벌 떨었다. 군세(軍勢)가 조금 잡히자, 여융 우후(厲戎虞候) 이협(李俠)으로 하여금 감히 동요하지 못하게 하고, 장차 사력을 다해 싸워 지킬 계획을 하였다.
○ 갑자기 공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렸다는 급한 전갈이 왔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오지 않아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만한 문서가 없으며, 큰 도적이 앞에 있는데, 한 방면을 맡은 대장이 어찌 쉽사리 진영을 버리고 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런 명령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피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그날로 즉시 길을 떠나자, 군사들이 모두 새처럼 흩어져 떠나갔다.
○ 공이 가다가 직산(稷山)에 당도하였을 때 죄를 용서하고 초유사(招諭使)에 제수한다는 왕명을 받았다. 이는 왕이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던 날 세자의 말을 듣고서 한 일이다. 공은 유지(有旨)를 받들어 읽고는 흐느끼면서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 직산의 수령인 박의(朴宜)는 군자다운 사람으로, 평소에 공과 서로 친한 터였으므로 크게 기뻐하면서 현리(縣吏) 조순걸(趙舜傑)을 군아(軍牙)로 삼아 그로 하여금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공이 완산(完山)과 용성(龍城) 두 개의 큰 부(府)를 거쳐 지나갔는데, 다 지나도록 의기(義氣)를 떨쳐 일어나 나라를 위해 통탄하는 자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였다. 운봉(雲峯)에 이르니 어떤 선비가 백의(白衣)를 입고 경계 지점에서 맞이하였는데, 그가 공의 손을 잡고 크게 통곡하고는 은밀히 말하기를,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巡察使)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것을 느슨히 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죄를 성토하고자 하니, 영공(令公)께서는 영남(嶺南)으로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남은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광의 목을 베어 의기가 신장되면 사람들이 용기를 낼 것입니다. 그때 호남의 전 고을을 규합하여 군사를 모아 대대적으로 훈련시키고 근왕병(勤王兵)을 동원하여 서울로 곧장 쳐들어가십시오. 그리하여 한강 가에 웅거해 있는 왜적을 내쫓고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을 섬멸해, 비린내를 깨끗이 씻어 내고 서쪽으로 간 난여(鑾輿)를 맞이할 경우, 이미 무너져버린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요는 공을 이루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어찌 영남과 호남을 구분하겠습니까. 필마로 동쪽에 간들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하니, 공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해(利害)를 모른다. 왕명을 받들어서 일하는 것만 알 뿐이다. 그리고 순찰사의 목을 베는 것이 의리에 있어서 불가한 점은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그 선비가 그 말을 듣고는 납득하여, 드디어 그 일이 중지되었다.
도순찰사(都巡察使) 김수(金晬)가 거창(居昌)에서부터 근왕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호남으로 가다가 운봉(雲峯)에 도착하여 공과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놀라고 무색하여 할 말을 잃었다. 이에 공이 의리로써 책망하여 말하기를, “한 지방을 맡은 신하는 마땅히 임지(任地)에서 죽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임지를 버리고 여기에 왔단 말이오. 한 도를 모두 잃고서도 구원하지 못하였는데, 단기(單騎)로 멀리 가서 능히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소? 영공께서는 빨리 되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니, 김수가 말을 타고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뻔뻔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갔다. 영남 사람들이 당초에는 그가 영남을 버리고 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던 차에, 김수가 다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들 얼굴을 찡그리면서 서로 위로하였다.
영암(靈巖)의 무인(武人) 소상진(蘇尙眞)이 공의 말 앞에서 글을 올리고 따라가기를 원하자, 공이 허락하였다. 이때 강우(江右)의 8, 9개 군(郡)이 왜적에게 함락당하지 않고 있었으나, 새로 쌓은 성에는 장수가 없고, 옛 읍(邑)에는 수령이 없는 탓에, 사서(士庶)와 남녀(男女)를 막론하고 모두들 산골짜기에 가득 차 있어서, 평지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 5월 4일에 공이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함양 군수 이각(李覺)은 공관(空館)에 우두커니 앉아 있고, 늙은 아전 몇 사람만이 뜰 아래에 보일 뿐이었다. 공이 군수를 독려하여 고을 사람들을 불러모았는데, 전 현령(縣令) 조종도(趙宗道)와 전 직장(直長) 이노(李魯)가 기약도 없이 모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을 썼는데, 문장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왔기 때문에 붓에 먹을 적실 겨를조차 없었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중간에 와서 불운한 탓에 섬오랑캐들이 몰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 강토를 함부로 유린하면서 동쪽과 서쪽 두 방면에서 돌진해 들어왔다. 그런데 큰 성과 큰 진에는 일찍이 방비책(防備策)을 설치하지 않았던 탓에 열흘 남짓한 사이에 험한 관문과 높은 고개를 넘어 곧바로 서울을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상께서는 서울을 떠나 파천(播遷)하고, 온 나라 사람들은 도망쳐 숨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생긴 이후로 오랑캐의 화란이 오늘날처럼 참혹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여러 곤수(閫帥)들은 국가의 간성(干城)인데도 왜적들이 침입했다는 소문만 듣고서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적병을 겁내어 움츠러들기도 하였다. 수령들은 한 고을의 군장(君長)인데도 모두들 자신의 처자식을 안전한 곳에 피난시키고 무기고(武器庫)를 불태웠다. 그리하여 한 사람도 충의(忠義)를 떨쳐 일어나 앞장서서 왜적을 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불쌍한 우리 군사와 백성들이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해서 흩어져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거센 물결에 한 번 무너지자 이를 막아낼 도리가 없어 성에는 창을 든 군사가 없었고, 고을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왜적들은 도착하는 곳마다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쳐들어오는 것처럼 몰려들어와 마침내 영남 한 도가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형세가 마치 흙더미가 무너지고 기왓장이 깨지는 듯하여 조석간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변고인가.
그러나 이것이 어찌 단지 변장(邊將)이나 수령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 지방의 선비와 백성들 또한 그 책임을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옛날에 큰 난리를 만나서도 나라를 잘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윗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뜻이 있었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적들이 아직 이르지도 않았는데 선비와 백성들은 앞장서서 먼저 도망쳐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구차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만 하였다. 이에 수령은 백성이 없게 되고 장수는 군졸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누구와 더불어 왜적을 막을 수 있었겠는가.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옛날에 추(鄒) 나라와 노(魯) 나라가 전쟁을 할 적에 추 나라 관리들은 전사한 자가 30여 명이나 되었는데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이것은 관리들이 평상시에 백성들의 고통을 잘 돌보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선비와 백성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변고가 있는 것이 어찌 맹자(孟子)가 말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 아아, 이것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근년 이래로 조세(租稅)가 과연 가혹하였고, 부역(賦役)도 과연 과중하였으니, 백성들이 당연히 명령을 감당해 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쌓고 해자(垓子)를 파고 방비하는 도구를 갖추는 것은 모두가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에 와서 본다면 성상께서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원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어찌 백성들을 학대하면서 자신을 이익되게 한 것이겠는가. 더구나 추 나라와 노 나라의 싸움은 비록 한쪽이 이기고 한쪽이 지기는 하였지만, 이는 다 같은 중국의 나라로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이익이 되거나 손해될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의 풍습을 가진 왜적들은 우리 땅에 한 번 들어오자 즉시 웅거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부녀자들을 잡아가서 처첩으로 삼고, 우리의 장정들을 마구 죽여 씨를 남기지 않았으며, 즐비한 민가는 모두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고, 공사(公私)의 재물은 모두 빼앗아 차지하였다. 이에 독기는 사방에 가득 차고 죽은 사람의 피는 천 리에 흘렀으니, 백성들이 참혹하게 화를 당한 것을 어찌 차마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실로 지사(志士)는 창을 베고 자면서 왜적을 쳐 죽일 날이요, 충신은 국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 경상도 67개 고을 가운데에 아직까지 의(義)를 주창하여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 없다. 그러면서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도망치지 못할까 걱정하고, 깊은 산속으로 숨지 못할까만을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설령 산속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피하여 마침내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열사(烈士)는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보전할 길이 절대로 없을 것인데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그 이유에 대해서 낱낱이 말하여 사민(士民)들의 의혹을 깨뜨리고자 한다.
지금 왜적들은 서울을 침범하는 일에 급급하여 지체하지 않고 곧장 행군해 올라갔기 때문에 병화(兵禍)가 여러 고을에 두루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왜적들이 목적을 달성한 뒤 흉악한 무리들이 국내에 가득 차게 될 경우, 그때에도 산골짜기가 과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되겠는가? 이를 비유해 보면 마치 큰 물결이 하늘까지 치솟고, 거센 불길이 들판을 불태우는 것과 같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다시 어디에서 몸을 붙이고 살 수 있겠는가.
산골짜기에서 나오지 않을 경우에는 시일이 오래 지나면 식량이 떨어져서 깊은 산속에서 앉은 채로 굶어죽을 것이다.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나올 경우에는 부모와 처자식이 모두 왜적에게 사로잡혀 가서 욕을 당할 것이며, 예의를 지키는 사족(士族)은 짓밟혀 결단이 나게 될 것이다. 왜적에게 항복하면 영원토록 올빼미같이 흉악한 족속이 될 것이고,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왜적의 칼날 아래 죽은 귀신이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야만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해(利害)와 생사(生死)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아아, 군신(君臣)간의 큰 의리는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큰 도리로서, 이른바 사람이 지켜야 하는 떳떳한 법도인 것이다. 무릇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이 피난하고 종묘사직이 넘어지며, 만백성들이 다 죽어가는 것을 가만히 앉은 채로 보면서도 아무런 관심도 없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부모가 왜적의 칼날에 맞아 죽고 형제와 처자식이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되어, 집안의 화가 위급한 처지이다. 그런데도 자식이나 동생된 자가 머리를 싸 쥐고 쥐새끼처럼 숨기만 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 온전하기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식된 도리로 볼 때 어떻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디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1000년의 국운을 유지한 신라(新羅)와 500년의 국운을 지탱한 고려(高麗) 및 우리 조선(朝鮮) 200년 동안에 충신과 효자의 아름다운 명성과 뜨거운 의열이 청사(靑史)에 빛나는바, 아름다운 절의와 순후한 풍습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민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바이다.
또 근래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두 선생이 한 시대에 나란히 나서 도학(道學)을 처음으로 강명(講明)하면서 인심을 순화시키고 윤기(倫紀)를 바로잡는 것을 자신들의 임무로 삼았다. 이에 선비들 가운데에는 두 선생의 교육에 감화되고 흥기하여 본받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평소에 많은 성현들의 글을 읽었으니, 이들의 자부심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하루아침에 왜변(倭變)을 만나서는 오로지 살기만을 구하고 죽기를 피하는 데 급급하여, 스스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뒤로 하는 죄악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 구차스럽게 한 목숨을 부지한다고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있겠으며, 죽어 지하에 들어가서는 또한 무슨 낯으로 우리 선현(先賢)들을 뵐 수 있겠는가.
의관(衣冠)을 갖추고 예악(禮樂)을 배운 몸으로 치욕을 당할 수 있겠으며, 머리를 깎고 문신을 새기는 야만인의 풍습을 따를 수 있겠는가. 200년을 지켜 내려온 종묘사직을 차마 왜적들의 손에 넘겨줄 수 있겠으며, 수천 리의 조국 강산을 차마 왜적들의 소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문명한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의 나라가 되고, 인류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인데, 이것을 참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진(秦) 나라는 애당초 순전한 오랑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노련(魯連)은 오히려 달가운 마음으로 바다에 빠져 죽으려 하였다. 지금 이 야만인의 풍습을 가진 섬오랑캐들은 얼마나 추잡한 종족인가. 그런데도 우리 강토를 멋대로 훔쳐서 차지하고 우리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고 욕보이도록 내버려 둔 채, 내쫓아 버리고 죽여 버릴 것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저놈들은 용기가 있고 우리는 겁이 많으며, 저놈들의 무기는 날카롭고 우리 무기는 무디다. 그러니 설령 의병을 일으키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고 있다. 아, 어쩌면 이리도 생각이 모자란단 말인가.
옛날의 충신과 열사는 이기고 지는 것 때문에 뜻을 바꾸지 않았고, 강하고 약한 것 때문에 기운이 꺾이지 않았다. 의리에 있어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면 비록 백 번 싸워 백 번 다 지더라도 맨주먹을 휘두르고 번쩍이는 칼날에 맞서 싸워 만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 왜적들은 비록 강하다고는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으니, 전쟁에서 꺼리는 것을 범하였다. 그러니 어찌 제대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 군사가 비록 겁이 많다고는 하지만, 용감하고 겁내는 것이 어찌 일정한 것이겠는가. 충의가 북받치면 약한 자도 강해질 수 있고,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사를 대적할 수 있는 법, 단지 마음 한 번 먹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현재 무너져 도망친 군사가 산골짜기에 가득히 널려 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비록 빠져나와 살려고 하였으나, 끝내 한 번 죽음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모두들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단지 앞에서 주창하는 자가 없어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런 때를 당하여 한 사람의 의사(義士)가 떨치고 일어나 큰소리로 한 번 외치기만 하면, 원근에서 구름같이 모이고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앉은 자리에서 계책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상께서 이미 애통해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셨으며, 또 소신(小臣)을 형편없다고 여기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모아 유시하는 책임을 맡기셨다. 당(唐) 나라의 무식한 군사와 사나운 군졸들도 오히려 흥원(興元)의 조서(詔書)를 보고 울었는데, 하물며 예의를 숭상하는 지방에 사는 선비로서 어찌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넘쳐 군부(君父)의 위급함에 달려나가지 않겠는가.
내가 진실로 원하노니, 이 격문(檄文)이 도착하는 날 수령은 한 고을에 분명하게 효유하고 변장은 사졸들을 격려하라. 그리고 문무(文武)의 조정 관원들과 부로(父老), 유생(儒生) 등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유시하라. 그리하여 동지를 불러모아 충의로써 서로 맺은 다음 방비책을 세워 스스로 막기도 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거들기도 하라. 부자(富者)들은 유차달(柳車達)처럼 곡식을 날라 군량을 대고, 용사들은 원충갑(元冲甲)처럼 용기를 내어 왜적을 무찌르라.
집집마다 사람마다 각자가 싸우면서 일시에 함께 일어나면, 군사의 위용은 크게 진작되고 용기는 백 배나 솟구쳐서, 괭이나 고무래도 튼튼하고 날카로운 무기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왜적들이 비록 큰 칼과 긴 창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두렵겠는가. 만약에 일이 성공하면 나라의 부끄러움을 완전히 씻을 것이며, 일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다. 제군들은 힘쓸지어다.
나는 일개 썩은 선비이므로 비록 전쟁하는 일은 배우지 못하였으나,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온 도가 뒤엎어진 뒤끝에 책임을 떠맡았는데, 뜻은 초(楚) 나라를 보전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나 신포서(申包胥)의 충성을 본받을 수 없고, 사당에 통곡하고 군사를 일으킴에 한갓 장순(張巡)의 충렬을 사모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의사(義士)들의 힘을 빌어 기울어진 국가를 다시 회복하는 공을 세우기를 기대하고 있다. 조정에서 내리는 상격(賞格)은 나중에 줄 것이니, 이 모두에 대해 마땅히 잘 알지어다.”
하였다.
○ 함양(咸陽)은 본래 문헌(文獻)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온 곳으로, 판서 노진(盧禛)의 맏며느리는 현령 조종도(趙宗道)의 누이동생인데, 연줄을 따라 통혼이 있었던 터였다. 이에 현령 조종도가 몸소 산에 들어가서 여러 노씨(盧氏)들을 보고 창의(倡義)하기를 도타이 권면하였다. 그러자 그 뒤에 군내의 선비들도 많이 와서 모였다. 공이 이들을 위하여 의리로써 타이르니,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모두들 말하기를, “영공께서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여 일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김수(金睟)와 조대곤(曺大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심을 고동시켜서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시 김수를 맞이하여 왔단 말입니까. 우리들은 처음에 영공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치 어린아이가 젖줄을 물려주기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순찰사 김수가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운이 꺾이고 위축되어 감히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순찰사가 본도를 버린 것도 의리가 아니요, 한 도에 원수(元帥)가 없는 것 또한 의리가 아니다. 나는 다만 의리로써 사람을 대하고 의리로써 일을 처리할 줄만 알 뿐이다. 여러분의 말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의리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 것입니까?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의병을 일으키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겉으로는 비록 그들을 억누르는 체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실상 갸륵하게 여겼다.
○ 공이 처음 함양에 이르러서 곽재우(郭再祐)의 일을 듣고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겨서 즉시 편지를 보내어 불렀다. 김수가 편지를 보내어 공에게 묻기를, “곽재우가 하는 짓이 어떠합니까?” 하였는데, 공이 극히 칭찬하여 답하였다.
○ 10일에 함양을 떠나서 산음(山陰)으로 향하였는데, 초유사(招諭使)의 깃발을 앞세우고 그 군(郡)에 사는 사인(士人) 황윤(黃潤)과 소상진(蘇尙眞)을 군관(軍官)으로 삼아 둘이 짝을 지어 앞장서 가게 하고, 조종도와 이노(李魯) 두 사람에게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저녁 때쯤에 산음에 이르니 고을의 수령인 김낙(金洛)이 환아정(換鵝亭)에 관사(館舍)를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여 접대하였다. 공이 얼굴빛을 바꾸면서 김낙을 불러 책망하기를, “이와 같은 성찬은 오늘날 신하된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받아먹을 바가 아니다. 비록 먹는다고 하더라도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갈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두 줄기 눈물을 줄줄 흘리니, 김낙이 사죄하고 황송해하면서 물러갔다.
그 고을 사람 오장(吳長)과 의령(宜寧) 사람 이지(李旨), 단성(丹城) 사람 김경근(金景謹)이 칼을 잡고 와서 맞이하니, 공이 감사해하면서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같이 와서 나를 찾아주니, 반드시 기이한 계책이 있을 것이다. 원컨대 한 말씀 들려주기 바란다.” 하자, 김경근이 언성을 높여 큰소리로 말하기를, “김수와 조대곤을 죽이지 않고서는 대의(大義)를 펴서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와 같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 그렇게 해서는 일을 이룰 수가 없다.” 하였다.
김낙은 어진 관원이라서 평소에 민심을 얻고 있었으므로 갑작스럽게 군사를 모집하였는데도 800여 명이나 되었다. 진주(晉州)의 전 주부(主簿) 손승의(孫承義)가 와서 뜰 아래에서 절하므로, 곧바로 고령 가수(高靈假守)로 차임하여 보냈다. 그리고는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인재가 없어서 쓰기는 하였지만, 눈에 정기가 없으니 오래 살 수 있을까?” 하였는데,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성현(星峴)의 싸움에서 죽었다.
○ 하동 현감(河東縣監)으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창고의 곡식을 도둑질하는 토적(土賊) 15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는 내용이었다. 공이 보고서 끝에 써서 회보하기를, “토민(土民)들이 난리를 틈타서 도둑이 되어 관창(官倉)의 곡식을 훔치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는 목베어 마땅하다. 그러나 만일 죄 없는 백성까지 죽이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잘 삼가서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 이틀 동안 머물고서 진주로 향해 떠나려고 할 때 조종도를 의령 가수(宜寧假守)로 삼고, 이노를 삼가(三嘉)와 단성(丹城)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가서 군졸을 수합하도록 하였다. 이노가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큰일이므로 마땅히 먼저 규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잘못하면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자, 이노가 대답하기를, “초유사의 전령목패(傳令木牌)를 많이 만들어서 먼저 응모한 여러 고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열읍(列邑)에 호령을 시행할 수가 있어서 명분이 바르고 일이 순할 것입니다.” 하니, 공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이에 일행이 모두 목패를 찼다.
단성에 이르니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산으로부터 내려와서 머뭇거리면서 들어섰는데, 몹시 떨고 있었다.
○ 곽재우가 공의 서신을 보고 전쟁에 나아가는 관복(冠服) 차림으로 와서 공을 뵈었다. 공이 그를 보고는 이상하게 여겼으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서는 더욱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서로 국사(國事)에 힘쓰다가 죽기로 약속하고, 동행하여 진주에 이르렀다.
○ 이때 초계(草溪)에는 수령이 없어서 전 군수 곽율(郭)을 가수(假守)로 삼았으며, 의령에도 수령이 없는 데다가 조종도 역시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사양하자, 전 목사(牧使)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그로 하여금 곽재우와 합심하여 의병들을 불러모으게 하였다. 오운은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처음부터 자신의 재물을 희사하여 군량을 공급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더욱 온 마음을 다해 일하였다.
○ 공이 단성에서 바로 진주로 나아갔다. 진주 목사 이경(李璥)과 판관 김시민(金時敏)이 지리산(智異山) 상원동(上院洞)에 숨어 있었다. 김시민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기다렸으나, 이경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공이 전령(傳令)하여 나오도록 하니, 이경이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
판관 김시민을 독촉하여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판관이 일찍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많이 모여들어 군사 수천 명을 얻은 다음, 대오를 나누어 성을 지키게 되었다. 이에 군사를 조련하고 위세를 떨치게 되어 군대의 기율이 자못 정제되었으며, 성이 무너진 곳은 고치고 못이 얕은 곳은 더욱 깊이 팠다. 공이 말하기를, “진양(晉陽)은 호남(湖南)의 보장(保障)이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게 되며, 호남이 없게 되면 국가는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될 것이다. 왜적들이 항상 노리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니, 방비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 성을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 공이 군(軍)에 기율이 없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조목(條目)을 정한 다음 열읍(列邑)에 명령을 전하였는데, 그 조목에 이르기를, “흩어져 도망치는 것이 풍조가 되었는바, 도망치는 자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뿔뿔이 도망치면 일일이 군법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있다. 그러나 항오(行伍)에는 자연 통솔(統率)이 있는 법이다. 10명의 군사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통장(統將)을 참수하고, 통장 가운데에서 도망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도훈도(都訓導)를 참수하며, 전군(全軍)이 모두 도망칠 경우에는 영장(領將)을 참수하라. 그리고 도망친 자를 잡아보내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그들도 같은 죄를 주어라.”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앞서는 충의(忠義)로써 권면하였는데, 이제 와서 형법(刑法)으로써 단속하는 것은 말세의 일이다. 적용하는 것을 당기기도 하고 늦추기도 하여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펴라.” 하니, 군정(軍情)이 모두 고무되고 두려워하여 감히 도망치는 자가 없었다.
○ 공이 처음 진양에 이르렀을 때 목사는 산속으로 도망치고 군사와 백성들은 모여들지 않은 탓에 성 안은 적적하여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직 강물만 출렁이고 있었다. 공이 서글픈 생각으로 이리저리 거닐며 슬픔과 울적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던 차에 조종도(趙宗道)가 의령(宜寧)으로부터 와서 공의 손을 부여잡고는 말하기를, “진양은 거진(巨鎭)이고 목사는 명관(名官)인데 왜적들이 이르기도 전에 일이 이미 이와 같으니, 앞으로는 다시 손써 볼 도리가 없을 것인바, 빨리 죽어서 눈으로 안 보느니만 못합니다. 영공과 함께 이 강물에 빠져 죽었으면 합니다. 괜히 왜적들의 칼날에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공의 손을 잡아당겨 강가로 이끌었는데, 잡은 손이 힘차서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이야 머지 않았지만, 헛되이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녀자들이 하는 짓을 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선왕(先王)께서 남기신 은택이 아직은 다 없어지지 않았고, 주상께서도 이미 자신을 죄책하는 교서를 내려, 하늘이 현재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는 조짐이 싹트고 있다. 다행히도 여러분들이 의병을 일으켜 도우는 데에 힘입어서 열읍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집에 응하고 있다고 한다. 선비들이 백성들의 본보기가 된다면 백성들이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런 뒤에 군사를 나누어 요충지를 지키고 있으면서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면, 적은 숫자의 군대로도 하(夏) 나라를 부흥시키기에 충분하였던바, 나라를 회복시키는 공을 이루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 못할 때에는 당(唐) 나라의 장순(張巡)처럼 죽음으로써 지키거나 안호경(顔杲卿)처럼 적을 꾸짖다가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처럼 서두르는가. 이 강물이 증명할 것으로,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인하여 서로 마주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크게 통곡하고 헤어졌다.
○ 의병대장 김면(金沔)이 무계(茂溪)에서 승첩(勝捷)하였을 적에 왜적의 화함(花艦)에서 얻은 보화(寶貨) 몇 바리를 공에게 보내고는 행재소(行在所)에 올려보내라고 하였다. 공이 촉성루(矗城樓)의 누각에 앉아서 수량을 점고하여 살펴보니, 채금(綵錦)과 진보(珍寶) 등의 물품이 몹시 많았다. 그러자 승첩한 것을 몹시 칭찬하기는 하면서도 난처해하는 기색이 있는 듯하였다.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과 도사 김영남(金穎男)이 번갈아 칭탄하면서 말하기를, “주상께서 내탕고(內帑庫)의 재물을 모조리 내버리고서 몸만 빠져 서쪽으로 파천하였는데, 가을이 머지않았습니다. 변방 땅은 추위가 일찍 닥칠 것인데, 상방(尙方)의 어복(御服)을 누가 지어 올리겠습니까? 그리고 왕자와 왕녀가 많고 궁인과 시녀도 많으니, 빨리 보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공이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제군들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용만(龍灣)은 한 모퉁이에 있어 변방길이 멀고 험하며, 왜적들이 각처에 꽉 차 있어서 첩보(牒報)조차 전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제군들은 오로지 의기를 분발하여 왜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하기만을 도모할 것이요, 어복을 마련하여 올리지 못하는 것이나 왕자와 시녀들이 추위에 떨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명주와 비단은 관서(關西) 지방의 토산물(土産物)로서, 아직은 그 지방이 보전되고 있으니, 어찌 어복을 마련할 옷감이 없음을 걱정하겠는가.”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지해(志海) - 김면(金沔)의 자(字) - 가 이와 같은 자잘한 일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하여 이를 다 흩어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영공께서 하시는 일은 다만 초유(招諭)하는 일입니다. 그 밖의 공사(公事)를 어찌하여 도사에게 맡겨서 처리하게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김면이 이미 나에게 보냈는데, 도사가 이것을 받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리(營吏)로 하여금 남원(南原)으로 가져가서 남원의 부고(府庫)에 보관해 두고 왜적이 물러가 길이 뚫리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 조종도를 단성(丹城), 산음(山陰), 함안(咸安)에 보내어 군사를 점고하게 하고, 이노를 의령(宜寧), 삼가(三嘉), 합천(陜川)에 보내어 군사를 사열하게 하였다.
○ 함안의 소모관(召募官) 이정(李瀞)이 촉석성(矗石城)에 와서 공을 뵈었다. 이노가 돌아와서 여러 장사들이 충의심을 분발하여 힘써 싸우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고하였다. 조종도는 도중에 병이 나 돌아오지 못하고는 서신을 보내어 보고하였다. 공이 이노의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직접 가서 보지 않겠는가. 내 장차 의령, 초계, 합천을 돌아서 거창으로 가겠다.” 하고는 그 이튿날 일찍 출발하였다.
일행이 가다가 수리원(愁離院)에 도착하였을 때 거창에서 보고가 올라왔는데,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에 있는 왜적이 합세하여 공격해 와 장차 우지(牛旨)를 넘어오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일이 매우 급박하였다. 공이 말을 세우고는 이정과 이노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본래는 여러 고을을 순열(巡閱)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듣건대 거창이 위급하다고 하니, 내가 장차 그곳으로 가겠다.”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삼가로 가니, 삼가 현감 장령(張翎)은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현에 사는 박사겸(朴思謙) 등 10여 인이 함께 와서 공을 뵙고 분부를 기다렸는데, 지공(支供)하는 것이 창졸간인데도 아주 잘 갖추어져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이 고을에는 선비가 많다고 하더니, 참으로 그러하구나.” 하였다. 제생(諸生)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영공의 충성스럽고 강직함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다 알고 있는바, 공의 소문이 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합니다. 지금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삼면이 모두 왜적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데, 우리 현이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바라건대 영공께서는 거창으로 가지 마시고 이곳에 머물러 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열읍에 명령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거나, 아니면 용사들을 뽑아 보내어 전진(戰陣)으로 가서 힘껏 싸우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 나라의 흥망이 매인 몸으로 필마를 타고 맨손으로 왜적들의 칼날을 무릅쓰고 범하여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하면서, 번갈아 가면서 찾아와 간하고는 모두 읍하고 물러갔다. 공이 웃으면서 이정과 이노에게 말하기를, “제생들이 나를 가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은 내가 싸움터에 나갔다가 죽을까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일찍 떠나려고 하면서 이정을 보내어 고을에 돌아가 군대를 통솔하게 하고, 이노를 의령, 함안, 산음의 사저관(私儲官)으로 삼았다. 이정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모두 뒤에 남으면 공과 함께 갈 사람이 없는데, 어쩌시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함안을 유숭인(柳崇仁)에게만 맡겨 둘 수 없으며, 곡식을 마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하였다.
○ 공이 거창에 이르자 산음, 함양, 안음(安陰)의 군사들이 일시에 모두 와서 모였다. 공이 뒤에 있으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 왜적들이 고개를 넘어오지 못하였다.
이번 길에 김면(金沔)을 진중(陣中)에서 만나보고는 이틀 밤을 자면서 위로하였다. 공이 처음으로 박성(朴惺)을 만나보았는데, 일찍이 그의 이름을 들었는지라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막하(幕下)에 두었다.
○ 공이 거창으로부터 돌아와 합천에 이르러서 의병대장 정인홍(鄭仁弘)을 진중에서 만나보았다. 삼가에 이르러서 진주 사람들이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을 내쫓았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노하여, 고을 아전들과 도장(都將)을 묶어 끌고 와서는 곤장을 쳐 보냈다.
○ 이때 영남은 한가운데가 나눠져서 강좌(江左)에는 혈맥(血脈)이 통하지 않아 열읍(列邑)이 텅 빈 탓에 왜적들이 거리낄 것이 없었으므로, 각자 수령이라고 칭하면서 마음대로 나다니며 노략질하였다. 이에 공이 탄식하기를, “상계(上界)의 변경 지방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강 건너편 세 고을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영산(靈山)은 정로위(定虜衛) 신방주(辛邦柱)를 가장(假將)으로,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신갑(辛)을 별장(別將)으로, 생원(生員) 신방즙(辛邦楫)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고, 창녕(昌寧)은 충순위(忠順衛) 성천희(成天禧)를 가장으로, 보인(保人) 조열(曺悅)을 별장으로,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 성안의(成安義)를 소모관으로 삼았다.
현풍(玄風)의 경우 사족(士族) 집안사람들이 모두 다 강을 건너서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고, 남아 있는 이민(吏民)들은 대부분 왜적에게 부역(赴役)하여, 길을 오가면서 짐을 운반하고 있었다. 공이 이 말을 듣고는 이를 미워하여 즉시 격문(檄文)을 지어 유시하였다. 그리고는 명을 내려 전 군수 엄홍(嚴泓)을 의병별장(義兵別將)으로, 곽찬(郭趲)을 소모관으로 삼았다. 그 격문에 이르기를,
“나라의 운수가 지극히 불운하여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오랑캐들이 몰아쳐 들어왔으므로, 임금께서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으며, 종묘와 사직이 몽진하였다. 아아, 사람은 다 떳떳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이 땅에 살고 있는 자치고 그 누가 의리와 충성을 다하여 몸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 죽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우리 영남 지방은 본래부터 도덕과 학문이 가장 뛰어난 지방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그중에서도 포산(苞山 현풍(玄風)의 고호(古號)) 한 현(縣)은 또 선비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러니 그동안에 의리와 절개에 죽은 자가 어찌 한이 있겠는가. 지금 왜적들이 성 안에 웅거해 있으면서 사방으로 나가 죽이고 노략질하고 있는데, 그 해를 당한 사람은 우리의 부형이 아니면 처자식이다. 위로는 임금의 원수이니 한 하늘을 함께 이고 살아갈 수 없으며, 아래로는 형제와 처자식의 원수이니 또한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산골짜기 숲 속에 엎드려 숨어 있는 자들이 창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을 잠시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의병을 일으켜 강개한 마음으로 왜적을 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왜적들이 꽉 차 있음으로 해서 우리 백성들이 싸울 바탕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충의로운 선비는 죽고 사는 것으로써 뜻을 바꾸지 않으며, 용감한 사람은 강하고 약함으로써 뜻이 꺾이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비밀히 서로 연락하여 효유하고 의병을 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그리하여 힘이 왜적을 칠 만하면 지방을 지키면서 원충갑(元沖甲)의 군사처럼 떨쳐 일어나도 좋을 것이요, 형세가 자립할 수 없으면 군사를 이끌고 병사(兵使)의 군대로 들어가도 좋을 것이다. 또 나를 버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의병이 되어 강을 건너오는 것 또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난번에 합천(陜川) 사람인 의령 군수(宜寧郡守) 정인홍(鄭仁弘)과 고령(高靈) 사람인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충성을 드날리고 의기를 드높여 한번 소리치자, 각 주군(州郡)에서 그에 따라 호응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군사의 위세가 크게 떨쳐져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세울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러니 본현의 사민(士民)들도 왜노(倭奴)들의 위협에 겁먹지 말고 더더욱 의열(義烈)의 기운을 발휘하여 한결같이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을 생각하라. 그럴 경우 충분(忠憤)이 솟구치는 바에 용기가 백 배는 날 것으로, 저 왜적들이 어찌 감히 우리를 당해 내겠는가.
하물며 이 왜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멀리 들어왔다가 흉악한 칼날이 이미 꺾여서, 송도(松都)의 청석령(靑石嶺)에서 크게 패하였고, 서경(西京)의 대동강(大同江)에서 빠져 죽었으며, 철령(鐵嶺)을 넘은 자들은 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에게 섬멸당하였다. 그리고 명(明) 나라 군사 5만 명이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조승훈(祖承訓), 곽몽징(郭夢徵), 왕수신(王守臣) 등 세 대장이 각각 정병(精兵) 수만 명씩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구원하러 내려오고 있다. 또 수군(水軍) 10만 명이 산동(山東)으로부터 곧바로 왜놈들의 소굴로 쳐들어가고 있다.
우리의 형세가 이미 떨쳐져서 왜적이 망할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지금이야말로 바로 뜻있는 선비가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공을 세울 때인 것이다. 만약 시일을 늦추다가 앉은 채로 기회를 놓치게 되면, 화란을 평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천하의 대륜(大倫)에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무슨 면목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백성들 가운데에는 무식하여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알지 못하는 자도 있을 것이니, 이들은 오직 상(賞)과 벌(罰)로써만 권장하고 징계할 수 있다. 그대들은 조정의 사목(事目)을 보지 못하였는가? 거기에 보면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적의 수급 1급을 벤 자는 급제(及第)를 주고, 2급을 벤 자는 6품직을 주고, 3급을 벤 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주고, 왜장을 벤 자는 녹훈(錄勳)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준다.’ 하였다. 무부(武夫)나 용사(勇士)들은 의병이 있는 곳으로 달려나가 뜻을 가다듬어 힘껏 싸우라. 그럴 경우 위로는 2품의 벼슬까지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훈신(勳臣)의 반열에 끼게 되어, 영화는 한 몸에 가득하고 혜택은 후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니, 이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줄곧 숲 속에 숨어 엎드려 있을 경우에는, 비록 왜놈의 칼날은 면한다 할지라도, 깊은 산속에서 굶어죽는 것을 면할 수 있겠는가? 설령 만에 하나 구차스럽게 살아났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난리가 평정되고 나면 나라에서는 그에 따른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처자식들까지도 모두 잡혀 죽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니 힘써 싸워 큰 공을 세우고 중한 상을 받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 이해와 화복이 어떻다 하겠는가. 살아서는 열사(烈士)가 되고 죽어서는 충혼(忠魂)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힘쓸지어다.”
하였다.
○ 김수(金睟)가 용인(龍仁)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와 산음(山陰)에 머물렀는데,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군사를 나누어 붙임으로써, 의병들로 하여금 무너지고 흩어지게 해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이에 민심이 더욱 떠들썩하고 여러 사람들의 노여움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혹은 그의 죄를 성토하고 가서 쳐서 신인(神人)의 분노를 풀자고 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마땅히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려서 스스로 달아나게 하자고도 하였다. 그러자 곽재우가 드디어 김수의 죄를 나열하여 격문을 돌렸다.
○ 공이 일찍이 김수에 대한 원망이 도민들의 뼛골 깊숙이 사무쳐 있음을 알았으므로, 혹시라도 이로 인해 뜻밖의 변고라도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이에 즉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어 역순(逆順)의 이치로써 달래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의병장은 처음 변란이 일어났을 때부터 재산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은 채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칠 마음만 가졌다. 그러니 비록 옛날의 열사(烈士)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당직(當職)이 경내에 이르러서 즉시 글을 보내 불렀더니, 의병장은 늙고 졸렬한 나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고 단성(丹城)으로 와서 나를 만났는데, 나는 한 번 인사하는 사이에 그대가 이미 자신을 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을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 뒤에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 낙동강 가를 횡행하면서 앞장서서 왜적을 쳐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왜적들이 함부로 몰아쳐 들어오지 못하여 이 일대의 여러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되었다.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사방으로 퍼지매 듣는 사람들마다 모두 고무되어 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으니, 왜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는 것을 날짜를 세어가면서 기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 영웅다운 풍도와 의열한 마음은 당대에 빛날 뿐만 아니라, 장차 역사에 드리워져서 후세에 전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듣건대, 의병장이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문(檄文)을 보내어서 감히 패역스러운 말을 함부로 하였다고 하는데, 방백(方伯)이 어떠한 관원이고 의병장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방백에게 실제로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서는 조정에서 조처가 있을 것인바, 도민(道民)이 손을 쓸 일은 아닌 것이다.
의병장은 충의로운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왜적을 치는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장차 이룰 판인데,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일족까지 멸망당하는 지경에 빠지는 짓을 할 줄을 내가 어찌 헤아리기나 하였겠는가. 당(唐) 나라의 배반한 졸개가 주수(主帥)를 찬역(簒逆)하여 쫓아냈다가 화를 당한 사람이 무릇 몇 사람이나 되었는가? 그런데도 앞서 실패한 일을 다시 되풀이하려 한단 말인가?
돌아오는 길을 잃은 것은 《주역(周易)》에서 경계한 바이며, 화를 돌이켜서 복으로 삼는 것은 지혜 있는 선비가 취할 바이다. 내 말을 따르면 순하게 되어 복이 많을 것이고,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거스르게 되어 화를 받을 것인데, 그 기미가 털끝만한 사이도 없는 만큼, 의병장은 잘 생각하길 바란다.”
하였다.
○ 곽재우가 진양(晉陽)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오던 도중 개금원(介金院)에 이르러서 첩문(帖文)을 보고는 그 즉시 답서를 보냈는데, 그 답서에 이르기를, “역순(逆順)의 이치에 대해서는 저 역시 일찍이 대강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합하(閤下)께서 저에 대해 걱정하느라 스스로를 걱정하실 겨를이 없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비록 그러나 합하는 주상께서 보내신 분이니, 어찌 감히 저 자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합하의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 공은 또한 조정에서 김수의 장계를 보고 혹시라도 곽재우를 역적으로 몰아 죽일까 염려하여, 곧바로 사유를 갖추어서 급히 장계를 올려 곽재우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밝혔다. 그 계사(啓辭)에 이르기를,
“의령의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켜서 왜적을 친 일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계달하였습니다. 이번에 뜻밖의 변고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어났는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 지극히 걱정됩니다.
곽재우는 바로 고(故) 통정대부(通政大夫) 곽월(郭越)의 아들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손자 사위로서, 중간에 무학(武學)을 배우다가 이를 버리고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사람됨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으며, 거상(居喪)함에 있어서 극진히 슬퍼하여 향리(鄕里)에서 자못 효행을 칭송하였습니다.
변란이 처음 일어났을 때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가 서로 잇달아 도주하고, 왜적들이 장차 밀양(密陽)을 범하려고 하였는데, 감사 김수(金睟)는 절제(節制)를 맡은 장수가 포위된 성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서 밀양으로부터 영산(靈山)으로 물러나 있다가 곧바로 초계(草溪)로 향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곽재우가 분연히 일어나서 말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도망하였는데도 처형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서 지금은 또 왜적이 좌도(左道)에서 나오고 있는데도 초계로 퇴주(退走)하였다. 그러니 감사를 베어 죽이는 것이 옳다.’ 하고는, 칼을 들고 길목에서 김수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향리 사람들이 극력 말리므로 중지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우병사 조대곤(曺大坤) 및 방어사(防禦使), 조방장(助防將), 수령(守令) 등이 모두 왜적의 소문만 듣고 무너져서 달아난 탓에 열흘 남짓한 사이에 왜적이 서울의 대궐을 범하였습니다. 그러자 곽재우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의분에 못이겨 말하기를, ‘이런 무리들은 왜적을 호위하여 서울로 들어가 군부(君父)에게 화를 끼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모두 베어 죽여야 한다.’ 하면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항상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자기 집 재산을 흩어 군사를 모집하니, 그의 첩이 ‘어찌하여 이러한 개죽음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면서 말리자, 곽재우는 몹시 노하여 칼을 뽑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자식의 의복조차도 군졸의 아내들에게 다 내주었으므로 가업(家業)이 이로 인해 탕진되어 굶주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의 매부인 허언심(許彦深)의 집에 처자식을 맡긴 다음, 모집한 장사들을 거느리고 가면서 왜적을 치겠다고 큰소리치자, 향리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는 모두들 미쳐서 발광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벌써 의령과 초계 두 고을은 모두 왜적이 휩쓸고 지나가 고을이 텅 비어 있었으며, 의령의 관고(官庫)는 불에 타버린 탓에 곽재우의 군사는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에 초계와 신반현(新反縣)의 창고에 있는 곡식을 내어 군사에게 먹였는데, 합천 군수(陜川郡守) 전현룡(田見龍)이 곽재우를 도둑이라고 논하여 병사에게 보고하니, 병사가 명을 내려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병에 응모하였던 자들이 그 말을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도착하여 즉시 글을 보내어서 곽재우를 불렀으므로 군위(軍威)가 다시 떨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곽재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줄곧 왜적을 쳤는데, 왜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전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당백(一當百)의 용사가 되었습니다. 싸울 때에는 반드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帖裏)을 입고 당상관의 전립(氈笠) 차림을 하고 싸우면서, 스스로 호하기를 ‘홍의천강장군(紅衣天降將軍)’이라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는데, 오고가는 것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여 왜적들이 철환(鐵丸)을 일제히 쏘아도 맞히지 못하였습니다. 혹은 말 위에서 북을 치면서 천천히 가서 행군하는 절도로 삼기도 하였으며, 혹은 사람을 시켜 피리도 불고 호루라기도 불게 하여 두려워하는 뜻이 없음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산속에 의병(疑兵)을 많이 풀어놓고 피리도 불고 북도 치고 하면서 떠들어댔으며, 혹은 곳곳에 복병을 숨겨놓아 마치 사람이 없는 듯 고요하다가 왜적이 이르면 갑자기 쏴 죽이기도 하였으며, 혹은 왜적의 배를 뒤쫓아가 해안에서 활을 쏘기도 하여, 어느 하루도 싸우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왜적의 머리를 벤 것이 모든 장수 중에 가장 많았으며, 쏴 죽인 자는 그 숫자를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왜적들도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부르면서 감히 해안에 올라와 노략질을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의령(宜寧), 삼가(三嘉) 두 고을의 백성들은 모두 생업에 편안하여 힘써 농사지어 오곡의 풍성함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도내의 나머지 성들이 지금까지 보전된 데에는 곽재우의 공이 아주 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삼도(三道)의 장수가 수원(水原)에서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위태로운 말과 망녕된 말을 수없이 지껄여댔습니다. 순찰사가 비록 편지를 보내어서 공적을 표창하고 계문하여 공을 아뢰었으나, 역시 뜻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혹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면 반드시 칼을 움켜잡고 성을 냈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갑자기 두 차례나 순찰사의 영문(營門)에 격서(檄書)를 보내어서 낱낱이 그 죄를 열거하고는 토벌하겠다고 떠들어댔으며, 또 각 고을의 의병장들에게 통문을 돌려 토죄(討罪)하겠다는 뜻을 말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는 놀라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순찰사가 신에게 공문을 보내어 의령 고을에 명하여 곽재우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곽재우가 실제로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한다면 현재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있으니 한 사람의 역사(力士)로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며, 만약 역심을 품고 있지 않다면 편지 한 장으로도 넉넉히 깨우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에 곧바로 곽재우에게 첩문(帖文)을 보내어 다방면으로 비유해 깨우쳤으며, 김면(金沔)도 글을 보내어서 경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재우가 곧바로 마음을 돌려 신의 말대로 잘 따랐으며, 진주(晉州)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구원하기로 하여, 3일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곽재우는 일개 도민으로서 감사를 범하려고 하여 죄를 성토하고 격서를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것이 비록 스스로는 나라를 위한 마음에서 분통스러워 그렇게까지 한 것이라고는 하나, 행적이 난민(亂民)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즉시 토죄하여 제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곽재우는 온 나라가 함몰된 뒤에 능히 외로운 군사로 용감히 왜적을 쳤으므로, 도내의 잔민(殘民)들이 그를 간성(干城)처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서 난폭한 말을 하였다고 하여 곧바로 베어 죽이면, 보전되어 있는 남은 성은 왜적을 막을 계책이 없을 것이며, 군민(軍民)들은 그의 죄를 모르고 있어서 한꺼번에 흩어져 무너질 것입니다. 이에 신이 미봉(彌縫)하여 진정시키는 계책을 써서 재삼 계칙(戒飭)하였더니, 이미 신의 말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순찰사(都巡察使)에게 죄를 졌으니, 아마도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워서 다른 변고를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듣건대, 을묘년(1555, 명종 10)의 왜변(倭變)이 일어났을 때 전라 감사 김주(金澍)가 영암(靈巖)에서 다른 고을로 달아났습니다. 그러자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기(尹箕)가 당시에 유생(儒生)으로서 포위된 성 안에 있다가 칼을 뽑아 들고 베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김주는 성조차 내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여 잘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논자(論者)들이 지금까지도 윤기의 용기에 대해 칭송하고, 김주가 능히 포용한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곽재우의 일이 비록 몹시 미치광스럽고 망녕되기는 하나, 그의 마음은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감사가 만약 김주가 처리한 바와 같이 대처한다면, 반드시 조용해져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김수(金睟)에게 글을 보내어서 선처하도록 부탁한 결과, 걱정될 만한 변은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김수가 이미 곽재우를 반적(叛賊)이라고 계문하였으며, 또 다른 사람을 사주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이 일로써 조정에서 그를 죄준다면, 그가 죄에 승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도의 인심을 수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몹시 마음 아프고 절박합니다.
곽재우가 충의(忠義)를 일으켜 분발한 상황과 용감히 왜적을 친 공은 온 도에 널리 퍼지고 드러나서 아이들이나 군졸들까지도 모두 곽 장군(郭將軍)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그는 용병(用兵)에 뛰어나서 장수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만약 미치광스럽고 망녕된 짓을 한 데 대한 주벌을 조금만 늦추어준다면, 반드시 공을 세워 보답할 것입니다.
신은 불행하게도 명을 받든 이후에 두 번이나 이런 변을 만났습니다. 신이 4월 중에 호남(湖南) 길로 오다가 운봉현(雲峯縣)에 이르렀을 때 호남 사람들이 순찰사 이광(李洸)이 근왕(勤王)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고자 하면서, 신에게 비밀히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에 신이 대의(大義)로써 그 말을 꺾었으며, 곧장 김수와 상의하여 이광에게 알려 대비하라고 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김수가 말하기를, ‘그들이 근왕하는 데 늦게 달려갔다는 이유로 토죄하려고 하니, 의로운 선비라고 이를 만하다. 만약 이 사람들을 베어 죽인다면 한 도의 인심이 더욱 격해질 것이다. 이광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은 그의 말에 따라 그만두었습니다.
지금 이 곽재우의 일이 꼭 저번의 그 일과 같습니다. 김수가 진실로 호남 사람들을 조처한 의리로써 곽재우에 대해 조처한다면, 난처한 일이 없을 듯합니다. 신과 김면이 곽재우에게 보내 경계하여 신칙한 글과 곽재우가 보낸 답서를 아울러 등서(謄書)하여 올립니다.”
하였다.
○ 영천(永川)의 진사 정세아(鄭世雅), 생원 조희익(曺希益), 전 현령 곽회근(郭懷瑾) 등 60여 명이 공이 초유(招諭)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기별을 듣고는 수천 자로 된 긴 글을 지어 보냈다. 그 내용은, 강좌(江左)의 여러 수장(守將)들이 처음에는 도망쳐 숨었다가 이제서야 기어나와서 의병들을 억누르고 있는 상황을 하나하나 거론하였으며, 또 ‘경주 부윤(慶州府尹) 윤인함(尹仁涵)이 부사(府史), 이서(吏胥), 악사(樂士) 등을 이끌고 기계(杞溪)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 한 부(府)를 통째로 왜적에게 내주고서는, 왜적이 이미 물러갔는데도 아직 한 번도 산 밖으로 나오지 않고 도리어 의병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과, ‘병사(兵使) 박진(朴晉)이 의병을 호령하고 관군을 억압함으로써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수습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좌도(左道)에서는 품명(稟命)할 곳이 없으니, 영공의 지휘를 듣고자 한다.’는 것이었는데, 몇 사람을 시켜서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와서 공에게 글을 바쳤다.
공이 그 글을 받고는 매우 기뻐하여 그들을 위유(慰諭)한 다음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제군들이 호랑이 굴을 무릅쓰고 험난한 길을 지나서 멀리까지 와 문안하니, 참으로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이 지극하지 않으면 어찌 능히 이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한다. 내가 명을 받들고 와서 초유하고 있으니, 의리상 이곳과 저곳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처럼 길이 막혀서 비록 지휘하고자 하더라도 문보(文報)가 통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이어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권응수(權應銖)를 의병대장으로 삼은 다음, 이웃 몇몇 고을에도 다 의병장을 정하여서 권응수의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처음에 권응수가 향병(鄕兵)을 끌어모아서 왜적들을 많이 참획하였으며, 영천의 사인(士人) 조희익 등과 모의하여 네 고을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영양성(永陽城)에 굳게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쳐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공이 추천해 준 데에 감격하여 더욱 분발하여 싸움터에 부지런히 달려나갔으므로 왜적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이에 좌도의 민심이 이로 말미암아 조금 떨쳐져 모두들 왜적을 토벌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공이 이때 거창(居昌)에 오래 머물러 있으니, 왜적들이 진양(晉陽)에 장수가 없다는 것을 탐지하고는 창원(昌原)과 진해(鎭海)에 주둔해 있던 왜적들이 서로 호응하여 고성(固城)을 경유한 다음 사천(泗川)에 집결하여 진양으로 대거 침입해 왔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급히 달려가 단성(丹城)에 이르러서 함양, 산음, 단성의 군병을 모두 동원하여 진양으로 달려갔다. 그런 다음 김시민(金時敏)을 독려하여 그로 하여금 동요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을 우익(右翼)으로 삼아 구원하게 하였다.
곽재우가 공의 명령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달려가서 진주성에 들어가니, 군세가 자못 성하였다. 왜적들이 촉석루(矗石樓) 앞까지 와서 다만 한 줄기 강물을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공 역시 뒤쫓아와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더욱더 명령에 복종하고 합세하여 추격하니, 왜적들이 낭패하여 달아났는데, 살상한 왜적의 숫자가 몹시 많았다. 드디어 사천, 진해, 고성의 왜적들이 모두 도망쳤다.
○ 남원(南原) 사람인 전 좌랑(佐郞) 이대윤(李大胤)과 유학(幼學) 소혜(蘇徯)가 족인(族人)을 보내 공에게 서한을 올리고 각각 백미 100석씩을 바쳐서 군수(軍需)에 보태어 쓰라고 하였는데, 공이 서한을 받고서는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좌랑은 본래부터 순실(淳實)한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곡식을 이렇게 많이 모아서 쌓아 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김천 찰방(金泉察訪) 조존선(趙存善)을 남원으로 보내어 곡식을 실어 오게 하였다.
○ 공이 항상 상주(尙州)의 소식을 몰라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함창(咸昌)의 사인 이홍도(李弘道)와 상주의 사인 조정(趙靖) 등이 와서 이봉(李逢)이 의기를 떨쳐 왜적을 토벌한 일을 말하니, 공이 서한을 보내어 이봉의 공을 기리고 의병장으로 삼은 다음, 상주의 전 한림(翰林) 정경세(鄭經世), 함창의 전 찰방(察訪) 권경호(權景虎), 문경(聞慶)의 유학(幼學) 신담(申譚)을 세 고을의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각각 향병을 모집하여 이봉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 5월 이후에 네 번이나 장계를 올렸으나 한 번도 회답이 오지 않았다. 간혹 회답이 있긴 하였지만, 그것은 승정원(承政院)에서 받았다고만 하는 내용일 뿐, 가타부타 별다른 말이 없었다. 공이 북쪽을 향하여 바라보면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길게 탄식하였다.
의병대장 정인홍이 공을 삼가의 정금당(淨襟堂)으로 찾아와 뵙고는 밤중까지 마주앉아 이야기하였는데, 강개하고 격렬한 두 사람의 우국충정은 피차 똑같았다. 정인홍의 아들 정연(鄭沇)도 따라왔는데, 기개가 너무 우뚝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돌아간 뒤에 공이 말하기를, “아깝다. 싹이 나서 결실을 맺지 못하겠구나.”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목구멍에 병이 나 죽었다.
정인홍이 보고하는 문서의 말투가 직절(直截)하고 불손하였으며, 혹 공의 지휘를 받지 않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이에 공이 조금도 용서함이 없이 준엄한 말로 꾸짖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군관(軍官)을 잡아다가 매질하기도 하였다.
○ 공이 의령에 도착하자 곽재우가 보낸 군졸이 와서 낙동강에 있는 왜적들이 내려온다고 보고하였다. 공이 즉시 고을의 유생(儒生)과 품관(品官)들을 불러모아서 모두 색깔이 있는 옷을 입게 하고, 인근의 남정(男丁)들을 끌어모아 군용(軍容)을 성대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이들을 대동하고 신반현(新反縣)으로 향해 가서 곽재우의 군사들을 위로하고 기강(岐江) 가에서 군사들의 위엄을 뽐냈으나, 하루해가 다 가도록 왜적들이 오지 않았다. 이에 다시 곽재우의 집으로 돌아왔다.
○ 선전관(宣傳官) 이극신(李克新)이 유지(有旨)를 가지고 와서 비로소 경상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에 제수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즉시 분향(焚香)하고는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명을 공손히 받들었는데, 평양(平壤)이 함락당하여 대가(大駕)가 용만(龍灣)으로 몽진(蒙塵)하고, 동궁(東宮)이 안협(安峽)으로 돌아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을 치면서 대성통곡하고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백발이 다 된 외로운 신하가 왕명을 받들고 남쪽으로 온 지 이미 오래되었건만, 근왕(勤王)하는 군사를 힘써 일으키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내의 왜적조차 능히 소탕하지 못하였다. 그러고서는 난여(鑾輿)가 초야를 헤매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는 것을 앉은 채로 바라보면서 구차한 목숨을 오늘날까지 보전하고 있다. 임금의 은혜를 잊고 나라를 저버린 부끄러움은 만 번 죽어도 씻기 어려운데, 천벌을 내리지 않고 도리어 한 방면을 맡겨 주시니, 분골쇄신한들 어찌 그 크나큰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수 있겠는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발붙여 돌아갈 곳 없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 그 밖에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 인하여 선전관과 함께 돌아와서 현(縣) 안에 있는 촌사(村舍)에 이르렀다. 근방에 사는 사우(士友) 박이장(朴而章),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오운(吳澐), 이정(李瀞), 삼가 현감(三嘉縣監) 장령(張翎) 및 온 고을의 대소 사민(士民)들이 모두 모여서는 다들 혀를 차면서 공이 떠나가는 것을 애석해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선전관이 임금이 계신 곳으로부터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와서 만리 먼 길에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남쪽 사람들로 하여금 비로소 행재소(行在所)의 소식을 듣게 하였으니, 나이 어려서 고향을 잃고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뵐 수 있게 된 것보다도 더 기쁘다. 그러니 모든 성의를 다하여 대접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에 마을에 사는 사인들이 앞다투어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 심지어는 눈물을 흩뿌리면서 목 놓아 울기까지 하면서 송별하였다.
○ 공이 말하기를, “이미 좌도 감사가 되었으니 우도의 일을 이제 관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그러나 처음부터 의병을 관섭해 왔는데, 상규(常規)에 따른다는 핑계로 우려스러운 조짐이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계달하지 않는 것은 실로 신하된 도리가 아니다. 직분을 뛰어넘는다는 혐의를 받는다 하더라도 회피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하나하나 조목을 들어 품계하기를,
“당초에 김면(金沔)은 고령(高靈)과 거창(居昌)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정인홍(鄭仁弘)은 합천(陜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군대의 성세가 자못 진작되었으며 형세 또한 확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면은 성은을 입어 합천 군수에 제수되고, 정인홍은 제용감 정에 제수되었습니다. 이에 세 고을 군사들이 각각 그 장수를 잃고서는 모두들 맥이 풀려 있으니, 이는 실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니 일이 평정된 뒤에 부임하도록 하는 것이 기의(機宜)에 합당할 듯합니다.
전 군수 곽율(郭)은 지금 초계(草溪)의 가수(假守)로 있는데, 고을을 잘 다스려서 군사와 백성들이 사랑하여 떠받들면서 모두 진짜 군수로 삼기를 원합니다. 새 군수 곽눌(郭訥)은 현재 있는 곳을 알지 못하니, 곽율을 본군의 군수로 삼는 것이 역시 온당할 듯합니다.
의령(宜寧)은 현감 오응창(吳應昌)이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 뒤로 왜구가 분탕질하여 보전할 길이 전혀 없는 형편이었는데, 곽재우(郭再祐)와 권난(權鸞)이 맨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 전 목사 오운(吳澐)이 또 소모관이 되어 온 고을에 개유(開諭)하여 2000여 명을 끌어모은 다음, 그 가운데 노약자를 떼어내어 보인(保人)으로 주고, 군기(軍器)를 만들어 전투할 도구를 갖추었습니다. 이에 이 한 고을이 한 도의 보장(保障)이 되어 왜적들이 감히 강 서편을 엿보지 못하고 있으니, 이상 몇 사람의 공로는 실로 온 도내 사람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의령의 새 현감 김충민(金忠敏)은 본현이 그의 외가가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작년 10월부터 금년 3월까지 본현의 성 쌓는 감독관이 되어서는 온당치 못하게 일을 처리하여 온 고을을 병들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호랑이나 독약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현감으로 온다는 소문을 듣고는 백성들이 다들 흩어져 떠나갈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찌 의령 한 고을만의 해만 되겠습니까. 실로 한 도의 이해가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급한 때를 당해서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급한 일이고, 또 의병에 관계되는 일이기에, 감히 이와 같이 직분을 뛰어넘어서 말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황송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였다.
○ 그 다음 날 공이 산음(山陰)에서 초계(草溪)로 옮겨가 머물면서 장차 좌도로 향해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우도 사람들이 어린이는 울고 늙은이는 한숨짓고 어른들은 울부짖으면서 마치 물을 잃은 물고기나 집이 불타는 제비와 같이 어찌할 줄 몰라하였으며, 의병들은 모두 마음이 꺾이고 맥이 풀려서 수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비들 수천 명이 떼를 지어 와서 날마다 뜰 아래 서서 머물러 있기를 간청하였다. 초계의 유생 이대기(李大期) 등 30여 인이 머물러 있어 달라고 진정하는 만원서(挽轅書)를 올렸다.
그 대략에,
“지금 병기(兵器)가 잘 들고 날카롭지 않은 것이 아니요, 성지(城池)가 높고 깊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고을 수령 가운데에 어진 사람이 없고, 진영의 장수에 적합한 사람을 얻지 못하여, 정사(政事)가 맹호보다도 가혹하고 법망(法網)이 가을풀보다도 촘촘한 탓에, 함부로 토색질하고 마구 주구질하여 백성들이 흩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급기야 왜적들이 쳐들어오는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나자 장수나 수령으로 있는 자들이 자신들이 평소에 한 일이 민심을 크게 잃어서 비록 수습하려고 하여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았으므로, 숲 속으로 달아나 숨으면서 오히려 깊이 숨지 못할까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국가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 이제 다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전 장령(掌令) 정인홍(鄭仁弘)과 전 좌랑(佐郞) 김면(金沔)이 합하(閤下)께서 내리신 초유(招諭)하는 격문(檄文)에 응하여 외로운 충성심에 스스로 격동되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쳐 일어나,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흩어져 도망친 사람들을 끌어모으자 원근에서 의병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군대의 형세가 조금은 진작되고, 의기의 칼날이 자못 예리해졌습니다. 이에 형세를 크게 펼쳐 왜적들을 쳐 죽이자, 돌진해 오던 왜적들의 기세가 많이 꺾였습니다. 그러니 강우(江右)의 8, 9개 군(郡)이 왜적들의 침입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합하께서 잘 절제(節制)하신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이번에 교서(敎書)가 서쪽에서 내려와 좌도 감사가 되어 가시게 되자, 여정(輿情)은 이미 맥이 풀리고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어, 모여들었던 자들은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의병이 되려고 하던 자들은 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저 탐악스러운 아전들과 백성들을 해치는 감사는 의병들을 질시하여 온갖 방도로 모해하려고 하면서, 심지어는 불궤(不軌)를 도모하였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감히 자신들 멋대로 술수를 부리지 못하였던 것은 상국(相國)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상공께서 한 번 낙동강을 건너서 동쪽으로 가시고 나면, 전날에 귀신같이 숨어 있고 물여우처럼 잠복해 있던 자들이 그 기운을 드날리게 될 것이요, 노여움을 품고 미워하던 자들 또한 마음대로 수단을 부릴 것입니다. 그럴 경우 정충(精忠)과 의열(義烈) 두 의병대장과 같은 사람들이 어찌 구차하게 공을 이루기를 바라서 저들에게 견제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뿐만이 아닙니다. 의령(宜寧)의 의사(義士) 곽재우(郭再祐)는 칼을 차고 창의(倡義)하여 충분(忠憤)이 늠름하지만, 광망스러운 마음을 잘 절제하지 못하여 방백(方伯)의 뜻을 거슬렀습니다. 곽재우가 믿는 바는 오직 합하뿐인데, 합하께서 가시고 나면 형세상 장차 보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곽재우가 없으면 의령이 없을 것이고, 의령이 없으면 삼가(三嘉) 이서(以西)의 지역이 장차 차례차례 함락당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합하께서 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의병들이 모이느냐 흩어지느냐에 관계되지 않겠으며, 나라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일의 성패(成敗)와 이해(利害)가 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구구하게 임금의 명에 달려나가는 상규(常規)만을 지키려고 하다가, 놓쳐서는 안 될 사기(事機)를 그르친다면, 합하께서 전날에 초유한 공이 허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삼가 합하께서는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영남 한 도를 위해서도 다행이고 나라를 위해서도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이미 성상의 명이 있으니 어찌 내 임의대로 하겠는가.” 하였다. 안동(安東)은 공의 고향으로, 그곳에 가면 선롱(先壟)을 돌아볼 수 있고, 가속(家屬)들을 볼 수 있고, 친구들을 만나볼 수 있으며, 부월(斧鉞)을 잡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상적인 정리로 볼 때 기뻐하는 바이다. 더구나 전쟁으로 어지러운 중이겠는가. 그런데도 좌도로 떠나가 다 이루어져 가던 공이 무너지는 것을 깊이 걱정하였으니, 나랏일을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는 것이 이와 같았다.
강우(江右) 여러 고을의 유생들이 앞다투어 공을 머물러 있게 해 달라는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는데, 합천(陜川), 초계, 삼가, 의령, 진주(晉州), 단성(丹城)의 경우에는 진사 박이문(朴而文)이 소두(疏頭)가 되고, 거창(居昌), 안음(安陰), 함양(咸陽)의 경우에는 진사 정유명(鄭惟明)이 소두가 되었다.
박이문이 올린 상소는 아래와 같다.
“감사(監司)는 한 도의 주인이고 절도사(節度使)는 삼군(三軍)의 장수이므로, 병졸과 백성을 훈련시킬 임무를 부여하고, 임기응변하여 적을 제압하는 방략을 책임지웠으니, 군민(軍民)의 이해와 국가의 안위가 모두 이들에게 달려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편벽되어서 자기 멋대로 하는 자나 겁이 많고 혼모한 자가 감당할 수 있는 직임이겠습니까.
왜적과 접전하기도 전에 열읍(列邑)이 파도처럼 무너지고 군사와 백성들이 흩어져 떠났는바, 그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그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은 누가 그 허물을 책임져야 하겠습니까? 본도 감사 김수(金睟)는 산과 바다 같은 성상의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실낱같이 하찮은 자신의 목숨만을 아껴서, 산골 고을로 도망치면서도 오히려 깊이 숨어들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으며, 성을 지키는 좋은 계책을 도리어 오활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원래 나라의 울타리가 될 만한 재능이 없는 데다가 몹시 혼미하기까지 하여,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을 호위하게 하면서 왜적을 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고서야 사나운 왜적이 휘몰아쳐 오는 것은, 사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적들의 형세가 더욱더 치성하여 온 도내에 꽉 차 있으므로, 다시는 손을 쓸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좌도 감사 김성일이 왕명을 띠고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회복시킬 뜻을 간절히 품고 원근에 초유하여 충의(忠義)로써 격려하였습니다. 이에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세 사람이 하늘에 맹세코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기약하고는, 향리(鄕里)에서 분기하여 동지를 불러모았습니다. 그리하여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차단하고 성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쳐서, 군대의 위세가 날로 진작되고 병력이 조금은 강해졌습니다. 이에 낙동강 서쪽의 6, 7개 고을이 병화를 면하여 오늘날의 즉묵성(卽墨城)이 되었는바, 나라를 수복할 터전이 이로 인하여 마련되었습니다.
그런데 김수는 몸에 무거운 죄를 지고 세인의 배척을 받게 되자, 자기의 죄를 메꿀 수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른 사람의 공적이 이루어져가는 것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당(私黨)을 심어 의병을 무너뜨리려 하였고, 임금을 속여 사정(私情)을 쓰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용인(龍仁)에서 패전하였을 때 무슨 포로를 바친 공이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말을 꾸며 거짓으로 주달하여 왜적 한 놈 죽이지 않은 김경로(金敬老)로 하여금 후한 상을 받게 하였습니다.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덕열(李德悅)은, 정사가 맹호보다 가혹하고 공사(公私)의 부역이 번다했으며, 성을 버리고 산에 숨어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더욱 심하게 들볶았고 의병을 억눌러서 백방으로 모해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부월(鈇鉞)의 참형은 시행하지 않고 도리어 표창하는 주달을 올렸습니다.
성상의 귀를 속이고 당여(黨與)를 만들어 서로 도운 형적이 마침내 드러나게 되니, 김수인들 어찌 한 사람의 손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조대곤의 죄는 모두가 죽여야 마땅하다고 하는데도 김수는 그를 족당(族黨)이라는 이유로 사정(私情)을 두어, 구악(舊惡)을 징계하기는커녕 새로운 명령이 또 내려지게 해, 구차스럽게 살아남은 무리들로 하여금 기탄할 바가 없게 하였습니다.
아아, 한 마리의 이리가 길에 나서면 백 마리의 여우가 아첨하고, 한 도깨비가 방 안을 엿보면 온갖 간귀(奸鬼)가 아부하는 법입니다. 김수가 의사(義士)를 질시하여 온갖 계교로 중상모략하고, 자신의 주구(走狗)들을 사주하여 제멋대로 흉계를 펴자, 김경눌(金敬訥)이나 김충민(金忠敏) 같은 자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뜻에 영합하여, 의병을 원수처럼 배척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아아, 한 사람이 어진 이를 방해하여도 오히려 나라를 결단내기에 충분한 법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부화뇌동하는 자가 여러 고을에 흘러넘치고 있으니, 쇠약해진 운세를 만회하고 어지러운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아예 바랄 수 없을 듯합니다.
아아, 나라를 광복할 터전은 영남에 있고, 영남을 회복할 책임은 김성일에게 달려 있습니다. 김성일이 없으면 의병이 없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또 영남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김성일이 왕명을 받들고 강을 건너 동쪽으로 가고 나면, 간사한 무리들은 눈을 부라릴 것이고 의병들은 맥이 풀릴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일이 어찌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에만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들의 생각으로는, 한 방면을 나누어 맡는 책임은 비록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있으나, 왜적을 토벌하는 사세는 본디 저곳과 이곳을 나눌 수 없을 듯합니다. 이미 내리신 어명을 비록 다시 돌이킬 수 없으나, 김성일로 하여금 좌도와 우도를 아울러 살피면서 의용군을 격려하게 한다면, 이는 실로 양도(兩道)를 전담하는 중책을 맡아 영남 한 도를 총괄해 절제하는 것이니, 위태로움을 되돌릴 기틀이 오로지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아아, 형상(刑賞)의 도는 신상필벌(信賞必罰)에 있는바, 상헌(常憲)을 시행함에 있어서 이동(異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조대곤의 죄는 이각(李珏)과 다름이 없는데, 한 사람은 참수하고 한 사람은 유임되었으며, 김수의 악함은 이광(李洸)보다 더한데, 한 사람은 내쫓고 한 사람은 내쫓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치 배를 삼킨 큰 고기는 그물에서 빠져나오고, 음산한 그늘이 광명을 가린 것과 같은 격이라고 하겠습니다.
조대곤이 비겁하게 물러난 죄는 그에 따른 형률(刑律)이 있을 것이며, 김수와 같이 나라를 저버리고 사정을 따라서 도망쳐 숨은 죄악은 저 송(宋) 나라의 역적인 진회(秦檜)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들을 제거하면 나라의 명맥을 존속시킬 수 있고,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를 회복하기 어려울 것이니, 흥망의 기틀이 여기에서 결판날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마시고 굽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정유명이 올린 상소는 아래와 같다.
“오늘날의 일은 모두 의병의 힘에 의지하지 않음이 없고, 의병으로 하여금 종시토록 공을 이루게 한 것은 김성일의 공입니다. 이제 김성일이 좌도 감사로 옮겨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쓰는 것이 제대로 되었다고 할 만하며, 좌도의 생민들은 행복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수복하는 공을 완수하는 데에 있어서는 다 이루어져가는 즈음에 장애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을 쓰고 버리는 방도에는 좌도와 우도에 따라 완급(緩急)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도 몇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은 김성일을 인자한 어머니와 같이 보고 있으며, 김성일을 장성(長城)과 같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왜적들을 쓸어버리고, 한 번 살아남아서 태평 시대를 보기를 기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우도에서 빼앗아다가 좌도에 주는 일이 전혀 뜻밖에 생겼으므로, 충신들은 실망하고 있고 의병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아아, 김성일이 떠나가고 머무는 것이 어찌 유독 경상우도 의병들의 성패에만 관계가 있겠습니까. 곽재우는 가산을 전부 내놓아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치다가 간악한 사람의 저해를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성일이 서한을 보내어 장려하니,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욱 감격하여 몸소 강회(江淮)의 보장을 책임져서, 공이 남도에서 제일가게 되었습니다. 김성일이 떠나가면 곽재우의 일은 견제받을 염려가 있을 것이며, 구구한 몇 고을마저 보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조정의 조치가 적당하지 못하여 백성들이 희망을 상실한다면, 중흥의 공은 다시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 공은 좌도로 가자니 길이 막혔고,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사세가 구애되었다. 이에 김수에게 말해서 정병(精兵)을 뽑아 호송해 줄 것을 청하고, 박성(朴惺)을 가도사(假都事)로 삼았다. 김수가 거창으로부터 와서 공을 전송하려고 하자, 공이 맞이하여 합천에서 모였다.
○ 9월 4일에 초계를 경유한 다음 밤을 틈타서 낙동강을 건너고 현풍(玄風), 창녕(昌寧), 밀양(密陽), 청도(淸道)의 지경을 몰래 통과하여 하양(河陽)에 도달하니, 좌도의 백성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하였다. 수문장(守門將) 신초(辛礎)를 현풍 가수(玄風假守)로 삼고,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이숙(李潚)을 영산 가수(靈山假守)로 삼았다.
○ 이틀 후 신령(新寧)에 도착하여 다시 우도 감사로 돌아가라는 왕명을 받았다. 공이 박성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본도의 군병이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위험한 곳을 넘고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안동까지는 불과 이틀 길이니, 가서 성묘하지 않으면 어찌 인정이라고 하겠는가.” 하니, 박성이 말하기를, “본도의 군병을 누가 독려하여 보내겠습니까. 더구나 이곳에는 머무를 곳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서 성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그날로 선산(先山)에 달려가 성묘하고, 하루를 묵은 다음 곧바로 돌아와 대구(大邱)의 동화사(桐華寺)에 도착하니, 좌도 병사 박진(朴晉)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왜적을 칠 일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이때 대구 부사 윤현(尹晛)이 상사(喪師)의 율(律)을 범하였으므로, 공이 군법으로 다스려 곤장을 치려고 하다가 훈계만 하고서 그만두었다.
상도(上道)의 유생 400여 명이 제각기 의병을 일으키고는 전 한림(翰林) 김해(金垓)를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뜻을 가다듬어 나아가 칠 계획을 세웠고, 생원 임흘(任屹)도 안동 지방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치기로 맹세하였으며, 권응수(權應銖)의 군대도 위세가 바야흐로 떨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 병사 박진에게 견제를 당하여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공이 박진을 보고 곡진하게 타이르면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 김해(金垓)는 본디 병골(病骨)로서 의기를 떨쳐 일어나 자신을 잊고 왜적을 막다가 병에 걸려 진중(陣中)에서 죽었다. - 그런데도 박진은 나이 어린 무인(武人)이라서 흔쾌하게 그러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권응수가 경주(慶州)에서 싸울 적에 영천(永川)의 생원 최인제(崔仁濟), 정의번(鄭宜藩) 등 17명이 같은 날 살상당하였고, 관동(關東)에 있던 왜적이 넘어올 때 예안(禮安)에 사는 급제(及第) 유종개(柳宗介)와 안동의 유학(幼學) 윤흠신(尹欽信), 생원 임흘이 외로운 군대를 이끌고 재산(才山)과 소천(小川)의 경계에서 막아 싸웠는데, 유종개와 윤흠신 형제가 진두(陣頭)에서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공이 비로소 그 사실을 듣고는 크게 놀라면서 탄복하여 말하기를, “200년 동안 북돋아 길러낸 남은 교화가 아직은 다 끊어지지 않았구나.” 하였다.
그 뒤에 올린 장계에 이르기를, “박진은 한 도의 병권(兵權)을 혼자서 농단하여 의기를 떨쳐 일어나는 의사(義士)가 있으면 반드시 저지하고 억눌러서 그 군사를 모조리 빼앗습니다. 권응수는 날쌔고 건장하며 슬기로운 지려가 있어 무변(武弁) 중에서는 얻기 어려운 인재로서, 그로 하여금 한쪽 방면을 담당하게 하여 마음대로 하게 한다면 공을 이루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 병사(兵使)가 있어서 뜻대로 행사하지 못하므로, 식자들이 매우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싸우다가 죽은 유생들의 가상한 충렬은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상의 일들은 본도의 감사가 있으니 신이 아뢰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나 신 역시 좌도로부터 체임되어 왔으므로 감히 주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마중나와 기다리고 있어야 할 강우(江右)의 군사가 오래도록 이르지 않자, 박진에게 말하여 좌도의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서 어둠 속을 뚫고 100여 리나 걸어와 밤사이에 팔거(八莒), 하빈(河濱)을 지나고, 17일 아침에 아무 탈 없이 고령(高靈)에 이르렀다. 이날 새벽에 대구에 있던 왜적이 동쪽에서 오고, 성주(星州)에 있던 왜적은 서쪽에서 가서 하빈에 모였으니, 공의 행차가 만약 몇 시각만 지체되었더라도 일이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자 모두들 이것은 신명(神明)이 보호한 바라고 말하였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은 평소부터 공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마중할 군사를 내보내지 않았고, 또 경계까지 와서 맞이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은 이를 접어두고 문책하지 않았다.
김수와 거창에서 회합하여 관인(官印)과 부절(符節)을 인계받고 곧바로 산음으로 가 머물렀는데, 조종도(趙宗道)는 함양에서 오고, 이노(李魯)는 지리산에서 나오고, 박성(朴惺)은 안음에서 왔다.
○ 김시민(金時敏)이 일찍이 김수에게 붙었는데, 김수가 공이 좌도에 간 틈을 타서 ‘진양은 지킬 수 없으니 성을 지키는 것은 위태롭다. 들판에서 싸우면 살아날 길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김시민에게 급급히 와서 우지(牛旨)의 위급함을 구원하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김시민이 본주(本州)를 버리고 와 거창에 이르러 김면(金沔)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이때 마침 개령(開寧)의 왜적들이 부대를 많이 이끌고 와서 우지를 치려고 하였다. 김시민이 김면의 명에 따라 지례(知禮)에서 왜적들을 맞아 싸우면서 앞장서서 용기를 떨쳐 나아가 싸워 왜적들의 예기를 꺾어 물리치고 왜적들을 많이 쏘아 죽였으나 자신도 왼쪽 발에 총알을 맞아 그의 진중에 머물러 있었다.
공이 진양에 수비가 없다는 것을 듣고는 크게 놀라 군관(軍官)을 보내어 김시민을 잡아오게 하니, 김시민이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발에 입은 부상을 핑계로 교자(轎子)를 타고 왔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게 업혀서 들어와 공을 뵙고는 신발을 벗은 다음 맨발을 드러내어 공에게 보였다. 그러자 공이 훈계하고 신칙하여 돌려보내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김시민의 정신이 어지러우니, 아마도 오래 살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이 다시 오자 강우(江右)의 선비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되살아났다. 회복을 바랄 수 있겠다.” 하였다.
거제 현령(巨濟縣令) 김준민(金俊民)을 합천(陜川)의 가장(假將)으로 삼았다. 정인홍이 밤에 성주(星州)의 왜적을 습격할 적에 김준민이 선봉이 되어 성 아래까지 바짝 다가갔다. 새벽녘에 왜적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마구 돌진하여 총알과 칼날이 번개가 번쩍이듯 빗발쳤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퇴각하였다. 이때 김준민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로 물러섰다하면서 군사들의 뒤를 막아서서 왜적들을 쏘았는데, 쏠 적마다 모두 맞추었으므로 왜적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게 한 뒤에야 말을 몰아 천천히 돌아왔다. 온 군대가 그 덕분에 보전될 수 있었으며, 김준민이 아니었더라면 정인홍도 위태로울 뻔하였다. 교생(校生) 주국신(周國新)은 정인홍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파리한 말을 타고 따라갔다가 왜적의 추격을 받아 죽었다.
정인홍이 이번 거사(擧事)를 하면서 공에게 아뢰지 않았으므로 공이 온당치 못하게 여기고 있던 차에 계속해서 싸움에 패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더욱 화를 냈다. 정인홍의 문첩(文牒)이 왔는데, 김준민의 공은 말하지 않고 자신의 참모와 자제(子弟)들의 이름만 공을 세운 자의 명단 윗줄에 기록하였다. 그러자 공이 답하여 보내기를, “공을 과장해서 상을 노리는 것은 무변(武弁)이나 하는 짓이다. 의병장의 휘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마는, 관할 부관(副官)을 엄중하게 신칙하여 거짓으로 보고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즉시 비장(裨將)을 보내어 정인홍의 행수군관(行首軍官)을 잡아다가, 아뢰지 않고 거사한 죄를 문책하여 볼기를 수십 대 쳤으며, 또 훈계하기를, “김준민은 날랜 장수이니 능멸하거나 모욕해서는 안 된다.” 하자, 정인홍이 불쾌하게 여겼다.
정인홍의 문생들은 항상 ‘우리 선생은 일국의 중망을 걸머지고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었으므로 선생이 하는 일들을 남들이 다 의표(儀表)로 삼고 있다. 그런데 누가 감히 옳고 그름을 따진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 일이 있고서는 모두들 낙담하여 말하기를, “순찰사 또한 어진 사람인데 어찌하여 우리 스승을 이와 같이 박대하는가.” 하였다.
공이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천성이었다. 국사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비록 이름 높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남들은 다 멈칫멈칫해도 공만은 홀로 꼿꼿하게 대하였으므로, 공을 잘 모르는 사람은 공을 의심하고, 공을 잘 아는 사람은 공을 믿었다.
○ 공은 여러 진영에서 왜적의 수급을 바칠 때마다 반드시 몸소 검사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더러우니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아니다. 잘못하면 우리나라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수령이 많이 비어서 자리를 메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삼가의 전적(典籍) 박사제(朴思濟)는 의병을 일으켜서 공로가 그 본직보다 뛰어나므로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임명하고, 거창의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 변혼(卞渾)은 힘껏 싸워 왜적을 물리쳐서 일찍이 부장(部將)에 제수되었으므로 문경 현감(聞慶縣監)에 임명하고, 금산(金山)의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여대로(呂大老)는 그 고을에서 군사를 일으켜 여러 차례 왜적의 수급을 바쳤으므로 지례 현감(知禮縣監)에 임명하고, 진주(晉州)의 훈련원 봉사 정기룡(鄭起龍)은 날쌔고 용감하여 잘 싸워서 공로가 가장 우수하므로 관계(官階)를 뛰어넘어 상주 판관(尙州判官)에 임명하고, 진주의 부장 강덕룡(姜德龍)은 활을 잘 쏘아서 전투에 쓸 만하므로 함창 현감(咸昌縣監)에 임명하였다.
성주(星州)는 오랫동안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서 더욱더 참혹하게 탕진된 탓에 왜적을 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의병대장인 제용감 정(濟用監正) 정인홍(鄭仁弘)을 그 고을의 목사(牧使)에 임명하였다. 함안(咸安)의 소모관(召募官) 이정(李瀞)은 유숭인(柳崇仁)을 도와서 마침내 큰 승첩을 거두었으나, 스스로 그 공을 차지하지 않아서 다만 별제(別提)에 제수되었으므로 사근 찰방(沙斤察訪)에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이들 모두에 대해 임시로 차임하였다는 장계를 올렸다.
공이 인재를 써서 배치시키는 것이 모두 뭇사람들의 바람에 흡족하였는데, 이는 대개 조정 명령에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 이보다 앞서 도승지(都承旨)가 보낸 서장(書狀)에, “수령과 변방 장수가 혹 전투에서 죽거나 도망친 곳은, 군무(軍務)가 바야흐로 급한 이러한 때에 왕명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서 차임한다면 일이 반드시 허술해질 것이다. 그러니 도내에 현재 있는 사람 가운데 감당할 만한 자를 자리가 비는 대로 임시로 메꾼 다음, 일일이 계문하라.” 하였다.
왜적들이 합포(合浦)를 짓밟고 장차 파릉(巴陵)을 침범하려 하므로, 공이 산음, 단성, 삼가, 의령 네 고을의 유생을 거느리고 정호(鼎湖) 가에서 병력을 과시하였는데, 네 고을 수령과 오운, 조종도, 이노 등이 공을 따랐으며, 초계의 가수(假守) 곽율(郭)도 왔다. 깃발을 많이 만들어서 왼편과 오른편의 산 위에 줄지어 꽂았다.
오운과 조종도 두 사람이 강을 건너 함안에 군대를 주둔시켜 방어하려고 하였는데, 곽재우가 말하기를, “왜적이 만약 대거 몰려올 경우에는 강물을 등지고 싸워서는 안 된다. 일이 잘못될 경우 누가 그 허물을 책임질 것인가. 이 강 여울목에서 막으면 된다.” 하였다. 그러자 왜적들이 과연 멀리서 바라보고서는 도망쳤다.
별도로 초계의 정병 10여 명을 추려서 염탐하러 보낼 적에 곽율이 몸소 술병을 들고 가 뱃머리에서 그들을 전송하였다. 그러자 공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참으로 훌륭한 수령이다. 자신의 참된 마음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옮겨 놓았다. 사람마다 모두 그와 같이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 호남의 의병장인 전 부사 최경회(崔慶會)가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산음(山陰)에 와서는 어디에 군사를 주둔시킬까를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진주의 살천창(薩川倉)이 어떻겠는가?” 하니, 최경회가 그러겠다고 하였다.
오장(吳長)이 공에게 진언하기를, “왜적들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성하여 장차 곧장 쳐들어올 기세이니, 호남의 군사들은 의당 단성에 주둔해 있으면서 왜적들의 예봉을 꺾어야 합니다. 살천창은 지리산 아래에 있어서 본주와의 거리가 너무나 멀어 성원(聲援)이 서로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호남의 군사들로 하여금 스스로 피란하게 하는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다. 조종도가 또 말하자,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단성에 주둔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고을의 수령이 어두워서 창고 곡식을 모조리 잃었으니, 만약 호남의 군사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이웃 고을들로 하여금 지공을 하게 해야 할 것이다. 살천창에 쌓여 있는 군량이 두어 달은 지탱할 수 있다. 참으로 최경회가 잘 지휘하기만 한다면, 진양(晉陽)의 외원(外援)이 될 수가 있고 단성의 내응(內應)이 될 수도 있을 뿐더러, 또한 흩어져 나와서 산을 뒤지는 왜적들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자, 조종도가 말하기를, “그렇기는 합니다만, 호남의 군사가 능히 공의 말씀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점심때가 되었으므로 점심을 먹었다. 호남의 군사들이 살천창으로 갔다.
○ 김해(金海)에 있던 왜적들이 부산(釜山)의 왜적들과 함께 창원(昌原)에 모였는데, 그 무리가 수만 여 명이나 되었다. 왜적들이 정진(鼎津)을 넘어 건너지 못하고는 합세하여 나와서 곧바로 진양으로 쳐들어왔다. 김시민이 승진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공이 공문을 보내어 면려하기를, “목사는 대대로 충효의 가문에 나서 나라의 은혜를 후히 받았으니,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嶽), 진주 판관 성수경(成守慶), 전 만호(萬戶) 최덕량(崔德良), 권관(權管) 이찬종(李纘宗) 등으로 하여금 김시민과 협력하여 방어하게 하였다.
왜적들이 열 겹이나 성을 포위하여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공은 근처의 고을에 주둔해 있으면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활과 화살을 많이 준 다음, 밤을 틈타 적진(賊陣) 중에 허술한 곳인 남강(南江)을 통해 진양성 안으로 숨어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한 것이 몇 차례나 되었으며, 간첩을 끊임없이 보내어 왜적들의 진퇴와 수비의 허실을 환하게 알았다.
곽재우의 선봉장인 심대승(沈大承)이 밤에 진주의 북쪽 산 위에 이르러서 횃불을 들고 북을 울리며 고함지르고서는 물러나오고, 고성(固城)의 가현령(假縣令) 조응도(趙凝道)는 최강(崔堈), 정유경(鄭惟敬) 등과 더불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강 건너편에서 병력을 과시하였다. 곽재우가 심대승으로 하여금 진주의 북쪽 산에 올라가서 왜적을 향해 ‘전라도의 의병과 홍의장군(紅衣將軍)이 내일 와서 군사를 합하여 너희들을 무찔러 섬멸시킬 터이니, 그렇게 알라.’고 크게 외치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전라도의 군사가 단성에서 살천(薩川)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적들이 고을 경계에 이르러서 바라보니 과연 곽재우의 말과 부합되었므로, 곧바로 놀라서 달아났다. 이날 왜적들이 살천 가까운 곳까지 분탕질을 하면서 왔으나, 호남의 군사가 이미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침범해 오지는 못하였다.
김시민이 기병(奇兵)을 매복시키고 예기(銳氣)를 쌓은 다음 왜적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려서 응전하였다. 왜적들이 포위하여 공격한 지 7일이 되도록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며,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왜적들이 그들이 묵던 천막과 쌓인 송장을 불태우고는 허둥지둥 도망쳐 버렸다. 합천(陜川)의 가장(假將) 김준민(金俊民)이 단계(丹溪)에 이르러서 왜적을 만나 급히 치니, 왜적들이 곧바로 달아나 돌아갔다. 이에 드디어 단성현에 들어가서 왜적들이 질러놓은 불을 껐다.
한창 왜적들이 쳐들어올 때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說), 가배량 권관(加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 등이 같은 날 총에 맞아 죽었다.
○ 진양성의 첩서(捷書)가 한밤중에 이르렀는데, 공은 촛불을 밝히고 앉아서 성을 지키고 왜적을 물리친 상황을 자세히 캐물었다. 그리고는 즉시 아전을 불러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원근에 사는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게 하였으며, 여러 사람을 불러서 말하기를, “만약 이 성을 지켜내지 못하였다면 성 안에 있던 수만 명이 모두 어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온 도내의 남은 성도 전혀 보존할 만한 형세가 없어서, 다시는 성에 들어가 지키려는 뜻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였다.
휘하의 군교(軍校)들이 들어가 치하하니, 공이 그들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목사 김시민의 공로요, 성을 지킨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백발이 된 쓸모없는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다만 너희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왜적 무찌르기를 능히 김시민이 한 것과 같이 하라. 그렇게 하면 어찌 높은 벼슬만 얻겠는가. 이름이 죽백(竹帛)에 새겨져서 후세에까지 빛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성을 지킨 상황을 갖추어 기록하고 김시민의 공로를 한껏 기려서 그날로 치계하였다.
사천 현감 정득열이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전 수문장(守門將) 신갑(申)을 가수(假守)로 삼았다. 단성 현감 이제(李磾)가 도망쳐 숨어 신망을 잃은 탓에 왜적이 성 안에 마음대로 들어왔으므로, 그를 파면하고 대신 첨정(僉正) 조종도를 가수로 삼았다.
공이 장차 진양에 가서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하려고 하다가 개령(開寧), 성주(星州)에 왜적들의 변란이 바야흐로 급박하였기 때문에 도사(都事)를 보내어 진주에 들러 군사를 위로하게 하고, 자신은 삼가를 향해 출발하였다.
○ 박성(朴惺)을 무곡차사원(貿穀差使員)으로 삼았다. 대개 공천(公賤)들의 공미(貢米)와 염분(鹽盆)의 세포(稅布)로 밑천을 삼았는데, 박성이 추위와 고생을 꺼리지 않고 힘껏 쫓아다녔다. 공이 또 박성과 이노에게 권하여 강우(江右)의 선비들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의연곡(義捐穀)을 끌어모아 군수(軍需)를 돕게 하였다.
○ 소촌 찰방(召村察訪) 김수회(金壽恢)를 호남에 보내어 도사(都事) 최철견(崔鐵堅)에게 군량과 구황곡(救荒穀)을 청구하였다.
○ 개령에 있던 왜적이 지례(知禮)를 침범하고, 성주에 있던 왜적이 고령(高靈)에 침입하자, 휘하의 용사들을 나누어 보내 싸움을 돕게 하고, 또 나머지 군사로 성원하여 구원하게 하니, 왜적들이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공이 정인홍과 김면 두 의병대장에게 공문을 보내고 명령을 전달하는 즈음에 몹시 엄격하게 대하였는데, 언사가 가혹하고 준절하여 조금도 용서함이 없었다. 이에 조종도가 조용히 말하기를, “두 사람은 다 한 시대의 명사(名士)로서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왜적을 토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억누르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두 사람에게 어찌 다른 뜻이야 있겠는가. 조정 안에서 일을 같이 한다면야 비록 체모(體貌)를 모른다거나 기의(機宜)에 합당치 못한 점이 있더라도 오히려 용서하여 그 직절(直截)한 마음씨를 길러주는 것이 옳다. 그러나 지금은 조정이 멀리 서쪽 변두리에 있고 침략을 당한 화란이 예전에 없었던 바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여러 장수들이 명령을 어기도록 내버려둬서야 되겠는가. 말이 엄준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제멋대로 하는 것을 꺾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내가 그들이 충성을 다하는 것은 기리고 제멋대로 하는 것은 막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본떠서 말류의 폐단을 방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찌 그들에 대해 추호라도 의심하거나 저지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러겠는가.” 하였다.
○ 정인홍과 김면 두 의병대장은 명성과 지위가 비슷하게 높아서 서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정인홍의 참모들은 모두 그의 문생(門生)들이었는데, 그중에 권양(權瀁)과 같은 자는 경솔하고 괴망(怪妄)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높이 떠받들어 의병 가운데 제일가는 공을 세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김면의 성망과 공적이 자못 정인홍보다 높아지자, 와언을 일으키고 비방을 조작하여 시끄러이 떠들어대면서 많은 말을 해, 두 장수로 하여금 서로 용납되지 못하게 하였다.
정인홍이 김면에게 글을 보내면서 온당치 못한 말을 드러내놓고 하였으며, 김면 또한 불만스러워하여 형세가 정말 화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공이 두 진영에 가서 통렬히 말하기를, “마땅히 합심하여 왜적을 쳐서 함께 국난을 구제할 것이요, 부박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아첨하기를 좋아하여 이간질하는 자는 내가 마땅히 추궁하여 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니, 이로부터 부박한 무리들이 말썽부리는 것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 어느 날 이정(李瀞)이 심부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함안(咸安)과 진양(晉陽)의 경계에서 싸우다가 죽은 백골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와서는, 여러 진영의 장수들을 시켜 거두어 묻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때는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공이 영리(營吏)를 불러서 공문을 보내게 한 다음, 말하기를, “착한 말을 듣고는 밤을 묵히지 않는 것이 나의 천성(天性)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이정을 시켜서 전란이 일어난 초기에 사절(死節)한 사람의 이름을 모아 기록하게 하였다. 이정이 몇 명의 명단을 기록해 올리면서 말하기를, “여자는 지극히 무식한 사람들인데도 절개를 세운 자가 고을마다 없는 곳이 없건만, 남자는 여러 고을에 한 사람도 없으니, 너무나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니, 공은 손을 내저어 그 말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으로 하여금 낯가죽이 두꺼워지게 한다.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였다.
○ 온 도내의 유랑민(流浪民)이 공의 행차가 지나가면 길을 막고, 머무르면 뜰에 가득 찼는데, 공은 반드시 소금과 쌀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거창, 함양, 산음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한 다음, 별도로 유식한 자를 정하여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수시로 그 음식물을 가져다가 직접 살피고 맛보았다. 또 솔잎가루를 많이 만들어 죽에 섞어서 먹이도록 하였다.
조금 완전한 지역이라고는 다만 이 세 고을뿐으로서, 각 진영의 군량이 다 여기서 나왔으나, 앞으로 계속해서 댈 수가 없는 형편이었으므로 밤낮으로 걱정하고 탄식하였다. 이에 최철견(崔鐵堅)에게 구제를 요청하여 두 번이나 김천 찰방(金泉察訪) 조존선(趙存善)을 보내고, 그 다음에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을 보내고, 그 다음에 창원 부사(昌原府使) 장의국(張義國)을 보내고, 그 다음에 전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을 보내고, 그 다음에 박성(朴惺)을 보냈다. 그런데도 번번이 시원스러운 조처가 없자, 공이 말하기를, “어찌 차마 이렇게 한단 말인가. 호남의 곡식이 제 집 물건이며, 영남 사람은 왕의 신하가 아니란 말인가?” 하였다.
함양은 실상 부유한 집들이 많았지만 군수가 나약해서 사사로이 쌓아둔 것을 봉고(封庫)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그것을 뽑아 기록한 다음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령하였다. 어떤 완고한 자가 흔쾌히 따르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자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위력을 써서 하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도리로써 일깨워 주어야만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렇지가 않다. 함양은 호남 땅에 가까워서 풍속이 사나워서 사람들이 모두 재물에 인색하니, 도리로써 일깨워 주기는 어렵다. 한 사람을 볼기쳐서 만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니, 나는 그만둘 수가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볼기를 수십 대 친 다음 곧바로 축대 위에 끌어다 앉히고 간곡하게 타이르면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니, 그 사람도 볼기 맞은 것을 원망하지 않고 뉘우쳐 깨닫고 돌아갔다. 그 뒤로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모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목숨을 보전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공은 소소한 관문(關文)이나 통첩(通牒) 등에 대해서도 반드시 친히 지었는데 간혹 한밤이 지나 잠들기도 하였다. 이에 피로가 쌓이고 소갈증이 들어 장차 큰 병이 나게 되었다. 조종도가 번거로이 자질구레한 일까지 한다고 말하자, 공이 한숨을 쉬면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조정의 관리들이 맑지 못한 탓에 살육을 저지르는 데까지 이르게 되어 인심이 흩어지고 섬오랑캐들이 쳐들어오기에 이르렀으니, 우리들이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그 죄를 갚을 길이 없다. 그런데 어찌 감히 번거로이 수고하는 것을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큰일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한다면, 어찌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산음(山陰)의 지곡사(智谷寺)에서 염초(焰硝)를 굽게 하였다. 또 호남의 숙련공을 시켜서 조총(鳥銃)을 만드는 법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비록 동(銅)은 아니었으나, 정철(正鐵)로는 만들 수 있었다. 이 일은 모두 고을의 수령인 김낙(金洛)으로 하여금 맡아 감독하게 하였다.
○ 상이 김면을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으로 삼아서 원근의 여러 군대를 모두 관할하게 하였다. 김면은 임금의 명령을 받고 감격스럽고 송구스럽게 여겨 더더 분발하여 흉적을 무찌를 것을 기약하고는 성위(聲威)를 크게 펼쳐서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 뒤에 김면이 김시민을 대신하여 병사(兵使)가 되었다. 공이 거창(居昌)에 이르러 서로 모여서는 큰 술잔으로 몇 순배를 대작한 다음, 손을 잡고 심회를 토로하면서 울기도 하고 읊조리기도 하다가 먼동이 틀 무렵에야 자리를 파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공이 김면의 배리(陪吏)를 잡아다가 볼기를 치면서 말하기를, “전날에 의병대장으로서 지휘에 순종하지 않은 것도 잘못인데, 이제는 병사가 되었으니 결코 스스로 편한 대로만 하지는 말라.” 하였다. 이렇게 한 지 오래지 않아서 병사가 병으로 죽었다. 공이 그의 죽음을 듣고는 몹시 애통해하면서 곧바로 장계를 올렸는데, 그 장계에 이르기를,
“병사 김면은 본디 병이 많은 사람으로서, 산림(山林)에서 병을 요양하고 지내면서 세상일에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처음 병란이 일어났을 때 분연히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이 왜적들과는 같은 하늘 아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는 1년이 넘도록 피나게 싸워서 여러 차례 왜적들의 예봉을 꺾었으니, 강우(江右) 일대가 여태까지 보존된 것은 대부분 그의 공로입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에는 그의 처자식들이 가까운 땅에서 유리걸식하고 있는데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에 접어들어서는 사뭇 서리와 눈 속에서 지냈으므로 사람들이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그는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태연하였으니,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밝고 환하기가 단사(丹砂)와 같았습니다.
은전(恩典)을 입어 병사에 제수된 뒤로는 더욱더 책임의 중대함을 생각해 두렵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몸소 여러 군대를 통솔하고 나아가 금산(金山)에 주둔하여 선산(善山)에 있는 왜적들과 서로 버티니, 왜적들이 자못 위축되어서 도망치려는 기색이 현저하였습니다. 그런데 몸을 상한 것이 쌓인 나머지 갑자기 큰 병에 걸려서 군중(軍中)에서 목숨을 마쳤습니다.
장성(長城)이 한 번 무너지매 삼군(三軍)이 모두 눈물을 삼킵니다. 하늘이 돕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신은 외로이 홀로 남아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김면이 의병장이 되었을 적부터 비록 공의 절제(節制)를 받기는 하였지만, 호령을 시행하는 사이에 간혹 맞서는 일이 많았다. 공은 김면의 성질이 편협하고 고집스럽다고 하면서 자못 불만스러운 뜻이 있음을 여러 차례 말과 안색에 나타내기도 했으므로, 사람들이 혹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죽음을 슬퍼하고 포양(褒揚)해서 장계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공의 마음쓰는 것이 공평하고 어진 사람을 좋아함이 성심에서 나온 것에 심복하였다. 공이 만시(挽詩) 3편을 지어서 보내 주었다.
○ 진양 목사(晉陽牧使) 김시민(金時敏)이 병사에 승진되었으나, 죽고 말았다. 이때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곡식을 지리산(智異山)에 감추어 두었으므로 꿔준 것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산에서 나올 뜻이 없었다. 공이 진주에 이르러서 조안(糶案)을 가져다 보고는 크게 노하여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으로 하여금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10여 명을 지적해 뽑아서 산음으로 묶어 보내게 하니, 진주의 백성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박성이 말하기를, “이들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마땅히 엄중히 다스려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하니, 공이 그럴듯하게 여겨 장차 엄하게 캐물어서 형률(刑律)을 쓰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노가 말하기를, “진주 토호(土豪)들의 습관은 갑자기 고치기 어려운 것으로,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국초(國初)에 하륜(河崙)이 태종조(太宗朝)의 공신(功臣)으로서 향소(鄕所)나 향교(鄕校)에 모두 전속(專屬)된 동리를 두도록 청한 다음, 사패(賜牌)를 받아서 그 부세(賦稅)와 공물(貢物)을 거두어 썼으며, 정양(鄭驤)이 찬성(贊成)으로서 이곳에 와서 좌수(座首)가 되었습니다. 상신(相臣)과 장신(將臣)이 대대로 향권(鄕權)을 잡은 탓에 비록 잔약해진 후손이라고 할지라도 옛날 습관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이제신(李濟臣)이 목사가 되었을 적에는 그 사패를 가져다가 불태우고 그 전속 동리를 모두 빼앗은 다음, 토호의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거실(巨室) 10여 집을 10여 년 동안이나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에 그들의 재산을 모두 탕진하게 되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하였습니다. 기축년의 변고(變故) 때에는 징사(徵士) 최영경(崔永慶)은 삼봉(三峯)이란 혐의를 받아 원통하게 죽었고, 유종지(柳宗智)는 모의하는 데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었고, 고을 안의 착한 선비였던 하항(河沆) 같은 무리들도 분통이 터져 목멘 채 죽었습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 원한이 맺혀 인심이 들끓어 흉흉한바, 사태가 어떻게 진전될지 모를 판입니다. 지금 만약 서두른다면 더욱더 소란스럽게만 될 것이니,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이끌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교화에 순종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죽이는 것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귀 기울여 듣더니만 말하기를, “내가 듣지 못한 내용이다. 태종께서 사패를 내려 주신 것도 옳은 것인가를 모르겠지만, 이제신이 불태운 것은 어쩜 그리 불경하단 말인가.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들을 고문하려다가 중지하고 결박을 풀어준 다음, 의리를 밝혀서 말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면서 죽여달라고 청하였다.
공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효유(曉諭)하는 방문(榜文)을 썼는데, 그 방문에 대략 이르기를, “왜적이 온 나라 안에 가득 차서 제멋대로 횡행하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숨어 엎드려 읍과 촌이 텅텅 비고 아무런 방비가 없는 탓이다. 방비는 장수가 있어도 군사가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요, 군사가 있어도 군량이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을은 영남의 큰 고을로서 나라의 보장이 되는 곳이다. 사람마다 예악(禮樂)를 알고 집집마다 시서(詩書)를 외운다는 것은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고, 인재(人材)의 부고(府庫)이며 장상(將相)들이 대를 이었다는 것은 국론(國論)에 드러났다. 그런데 이제 이런 일이 있을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리산을 길이 안착할 땅으로 알고, 감춘 곡식을 오래 갈 물품으로 아는가? 마땅히 빨리 환곡을 바치고 성을 지켜서 너희들의 선조를 더럽힘이 없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판관에게 영을 내려 가두어 둔 사람들을 모두 석방시키게 하였다. 그런 다음 곡식이 있는 자는 임의대로 곡식을 바치게 하되, 환곡이 있으면 말소시키고, 환곡이 없으면 곡식을 헌납했다고 기재하게 하였는데, 두 달이 못가서 곡식 수만 여 석을 얻었다.
○ 공은 명(明) 나라 군사가 많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항상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대대로 독실한 충정(忠貞)으로 대국(大國)을 지성껏 섬긴 것이 지금에 와서야 징험되었다. 중국 군사가 몰아쳐 내려와서 왜적을 압박한다면 왜적들이 물러가기를 기약할 수 있으니, 백성들에게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내년에 씨 뿌릴 종자를 미리 조처하지 않는다면 왜적들이 물러간다 하더라도 백성들이 살아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전후로 곡식을 옮기기를 계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중간에서 지체되어 전달되지 못하거나, 혹은 밖에서 가로막혀 보고되지 않았다. 공은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정성이 뱃속에 꽉 차고 가슴속에 꽉 차서, 밤을 새워가며 잠을 못 이루고 걱정한 탓에 귀밑머리와 눈썹이 모두 하얗게 세었다.
○ 곽준(郭䞭)은 본디 어진 선비로서 김면(金沔)의 참모가 되어 힘쓴 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천거하여 자여 찰방(自如察訪)으로 삼았다.
○ 상주(尙州)와 함창(咸昌)의 유생들이 공에게 서한을 올려 목사 김해(金澥)와 현감 이국필(李國弼)의 죄악을 낱낱이 진술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진정 이 서한대로라면 그들은 백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다. 상주의 풍속은 원래 순박해서 고을 수령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지금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김해와 이국필의 죄상을 잘 알 수가 있다. 어찌 속히 장계하여 파면시켜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해는 그 뒤에 보은(報恩)에 있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였고, 이국필은 여러 고을에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였다.
○ 계사년(1593, 선조 26)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휘하의 선비 및 종사관 여러 사람이 수령들과 함께 들어와 뵈니, 공이 추연히 슬픈 기색을 띠고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해가 바뀌었는데도 왜적들은 아직도 국내에 가득 차 있고, 서쪽 국경은 아득히 소식이 끊긴 지 이미 오래이다. 외로운 신하가 죽지 않고 헛되이 나이만 또 한 살 더 먹었으니, 장차 무슨 얼굴로 다시 임금을 뵐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수령들에게 말하기를, “아침밥은 올리지 말라. 내가 어찌 차마 들겠는가.” 하였다.
이노가 아이의 병으로 인해 집에 들어가 있으면서 공에게 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왜적들의 형세를 보건대 7, 8년 안에는 소탕될 기약이 없는데, 여러 진영의 장수들은 단지 속히 하고자 서두르는 마음만 품어, 오늘 제거되지 않으면 내일 제거되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먼 앞날을 헤아리는 생각은 조금도 없고 가까운 성공만을 취하려 하여, 형식적으로 꾸미기만을 힘쓰고 실제적인 성과를 거둘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에 주옥(珠玉)과도 같은 군량을 마치 흙 쓰듯 마구 낭비하니, 필경에는 군량이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럴 경우 비록 훌륭한 장수가 있다 한들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의 생각으로는, 영공(令公)의 일행 중에도 형식적으로 꾸미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군관(軍官) 수십 명을 감해야 하고, 영리(營吏) 10여 명 또한 도태시켜야 합니다. 이들은 앉아 있으면 식량을 소비하는 걱정이 있고, 쏘다니면 말을 징발하는 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몇 고을의 백성들 힘이 마르고 말라서 극도에 달했으니, 영공께서 앞서 단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 진영에서 식량만 축내는 자들을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줄일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이에 대해 회답하기를, “며칠 동안에 잇달아 보낸 글을 받으니, 한없이 감사하고 위로가 돼오. 지면에 가득찬 많은 말들은 긴요한 말 아닌 것이 없으니, 삼가 명심해 마지않겠소. 붕우의 도리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 오늘날에 다시 옛사람이 하듯이 한 일을 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소. 항상 깊이 명심할 뿐 아니라, 당장 시행하겠소.” 하였다.
○ 강언룡(姜彦龍)을 유곡 가찰방(幽谷假察訪)으로 삼은 다음, 계청(啓請)하여 정식 찰방으로 삼았다. 강언룡은 곽재우와 함께 일하면서 왜적을 치고 무기를 많이 준비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었다.
○ 공이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유성룡(柳成龍))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남쪽 지방에 남은 백성들이 되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하였다. 종자(種子)를 운반해 오고 흉년을 구제하는 것 등의 일에 대해서 공문상에서 누누이 진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보낸 서한에도 이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하였는데, 참된 마음이 환하게 밝아서 한결같이 가슴속에 맺힌 듯하여 잠깐 사이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 함양 군수(咸陽郡守)의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그 내용은, ‘명 나라 군사가 정월 7일에 평양의 왜적을 섬멸하여 남은 왜적이 없다시피 하며, 그 나머지 도당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해서(海西)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도 일시에 도망쳤다. 이긴 기세를 타고 추격해 와서 바야흐로 임진(臨津)까지 이르렀으니, 한양(漢陽)은 이미 금세 수복하게 생겼으며, 멀리 추격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도 아침 아니면 저녁일 것이다. 그러니 호남(湖南)에도 통지해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웃 고을 수령들이 모두 와서 모이고, 도사(都事) 역시 아림(娥林)으로부터 와서 이르렀는데, 손뼉을 치고 떠들어대면서 기쁨에 날뛰느라 목이 메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은 대나무를 쪼개는 듯한 위세를 가졌고, 섬오랑캐들은 새털에 불이 붙는 듯한 형편이 되었으니,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 새재[鳥嶺]를 넘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맞이하고 지공(支供)하는 데 대한 조처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도사를 하동(河東), 곤양(昆陽), 진주(晉州), 의령(宜寧) 등의 관장(官長)과 장수(將帥)에게 보내어 군량과 기타 공급에 필요한 것들을 운반해 오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노 혼자서만 큰소리로 말하기를, “이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급히 서두를 것이 없습니다. 명 나라 군사들이 평양을 회복하고 바닷길을 맑게 하였으므로, 그 위풍이 미치는 곳마다 흉적들이 넋을 잃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릇 전투의 기세는 찰 때와 줄어들 때가 있고, 성할 때와 쇠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한양에 웅거해 있는 왜적들을 당장은 패배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적들이 반드시 군사와 말을 쉬게 한 다음 다시 덤비려고 꾀할 것이니, 명 나라 군사가 새재를 넘어 남쪽으로 오는 일은 몇 달 뒤에나 가능할 것입니다. 하물며 새재 이하의 여러 성에는 왜적들이 현재 꽉 차 있습니다. 설령 명 나라 군사가 빨리 온다고 한들 우리가 어디에다가 양곡을 쌓아 놓고 기다리겠습니까? 조정에서도 반드시 본도에 이것을 조처하기를 바랄 수 없을 것이며, 양호(兩湖)에 전적으로 책임지울 것입니다. 그러니 아직은 시끄러이 굴지 말고 상황이 변해 가는 것을 보아가면서 잘 조처하는 편이 옳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온 좌중이 크게 놀라 미친 자의 괴상한 말이라고 하면서 너나없이 비난하고 나무랐으나, 공만은 홀로 옳다고 하여 그르게 여기지 않았다.
김낙(金洛)이 앞으로 달려나와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에 관해 염탐하고자 군관(軍官)과 영리(營吏)를 보냈으나, 모두 떠도는 말만 듣고 중도에 돌아왔기 때문에 늦을지 빠를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전적(李典籍)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가 기꺼이 가려 하겠는가? 물어보기는 하겠다.” 하였다. 이노가 이때 마침 밖에 있었는데, 불러서 물어보니, 그 자리에서 응낙하면서 말하기를, “그러겠습니다. 진실로 공의 명령이라면 어느 곳인들 가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는 그날로 길을 떠나자, 공이 이노를 보고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염탐할 뿐만 아니라, 농사철이 이미 박두했으니 종자곡(種子穀)도 아울러 청해 가지고 오라.” 하였다.
이노가 여산(礪山)에 이르렀으나, 명 나라 군사에 관한 정식 보고가 별반 없으므로, 졸개 한 사람을 보내어 공에게 서한을 올려 보고하기를, “상도(上道)에는 현재 명 나라 군사에 관한 기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소란스럽게 하지 말고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갈 길을 생각하게 하소서.” 하였다. 공이 이노의 서한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김영남(金穎男)에게 통지하여 서둘지 말고 늦추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소요하지 않았다.
이노가 말을 달려 직산(稷山)에 도달하니, 직산의 수령 박의(朴宜)가 동헌(東軒)에 묵고 있었다. 이때 도체찰사 서애 상공(西厓相公)은 임진(臨津)에 머물러 있고, 부사(副使) 김찬(金瓚)은 온양(溫陽)에 머물러 있었다. 직산의 아전 조순걸(趙舜傑)을 직산 수령에게 빌려서 단기(單騎)로 임진을 향해 가려고 하였다. 수원(水原) 경계에 이르자 부사의 군관 2명이 말을 달려와서는 말하기를, “용인(龍仁), 죽산(竹山), 사평(沙平)에 주둔한 왜적이 수원, 금천(衿川) 지역에 출몰하면서 약탈하는데, 날마다 쉴새가 없으므로 저희들도 산길을 타고 간신히 피해서 오는 참이니,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명 나라 군사의 동정을 살피고 싶다면, 저희들이 도체찰사의 처소에서 오는 길인데, 별다른 얘기는 없습니다.” 하면서, 굳이 같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되돌아와 직산에 이르니, 직산 수령이 말하기를, “그대의 하인들은 모두 병을 앓고 있으며 길은 이렇게 막혔으니, 단신으로 뚫고 나아갈 수 없는 형세이다. 종자곡을 운반하는 한 가지 일은 서한으로 품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샛길로 가는 공차인(公差人)이 있기에 딱한 처지를 고하는 서신을 그 편에 부쳐 서애에게 올리게 하였다. 또 아산(牙山)으로 가서 배를 빌려 타고 바닷길로 갈까 했는데, 때마침 호부(戶部)의 낭관(郞官)이 조창(漕倉)에 와 머물면서 호서와 호남의 전세(田稅)를 감독해 운반하느라고 공사(公私)의 선척을 모조리 끌어갔으므로, 배편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에 드디어 온양에서 공주(公州)를 거쳐 부사를 알현하고 종자곡을 옮기는 일을 요청하니, 부사가 도체찰사에게 여쭈어서 조처하겠다고만 하였다. 이노가 다시 간곡하게 여러 차례 간청한 뒤에야 겨우 전라 도사에게 500석을 넘겨주게 하였다. 이에 전주에 이르러서 도사를 만나보았다.
공이 함양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쪽 소식을 기다리다가 군국(軍國)의 걱정스러운 기미를 눈으로 직접 보고는 울분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여 군교(軍校)인 수문장(守門將) 박경록(朴慶祿)을 보내어 치계하였는데, 그 치계에 이르기를,
“왜적들은 우리가 평양(平壤)을 수복하였다는 말을 듣고부터 벌과 개미처럼 모여 있던 자들이 모두 도망쳐서 돌아갈 뜻을 품고 있었는데, 중국 군사가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서 진격하지 않고 있자 다시 기운이 살아났습니다. 이에 문경(聞慶), 함창(咸昌), 상주(尙州)에 머물러 있는 왜적들이 멋대로 분탕질하기를 변란이 일어났던 처음보다도 더 심하게 하고 있습니다. 전라도의 수군(水軍)이 패전한 뒤로는 웅천(熊川), 김해(金海), 창원(昌原)에 있는 왜적들이 다시 창궐하는 조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의 군량은 이미 다 떨어졌습니다.
곽재우(郭再祐)의 군사는 굶주림으로 인해 다 흩어졌으므로 장차 군사가 없는 장수가 되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주사(舟師)와 격군(格軍)도 군량을 계속 댈 길이 없으므로 형세상 장차 저절로 무너질 형편이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사들도 오래 지탱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왜적들과 서로 버티면서 보름이나 한 달만 지체하면 잠깐 사이에 흙더미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니, 신이 비록 만 번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부민(富民)들이 쌓아 놓은 개인의 곡식은 작년부터 다 조사하여 찾아냈는데, 처음에는 상을 줄 것이라 여겨서 바치려는 자가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상을 내리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에 곡식을 바치라는 영을 여러 번 내렸으나, 한 사람도 응하는 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비록 재물과 곡식이 바닥났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백성들이 국법을 믿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군졸들은 한 해가 넘도록 비바람을 무릅쓰고 복무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백 번을 싸운 끝에 살아남은 자들로서, 비록 군공(軍功)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수고함을 가엾게 여겨서 보살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싸워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신은 보답할 만한 물품이 없으므로 단지 조정에서 상을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격려하고 권장하는 바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에 감히 그들의 공로를 덮어 두지 못하고 전후로 계문하면서 번거롭게 아뢰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다른 사람의 공을 훔치고 은혜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환심을 사겠습니까. 대개 백성의 마음은 이미 떠났고 국가의 형세는 이미 글러버렸으므로,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군사들의 마음을 고무시키고 인심을 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전란이 일어나고부터 조정에서는 그래도 사람이 못났다고 하여 그 사람의 말까지 안 듣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에 의병을 일으켜 공이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은상(恩賞)을 내렸으므로, 사람마다 떨치고 일어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이에 이르러서 구차스럽게 한 모퉁이나마 보전하고 있는 것은, 터럭끝만한 것도 다 조정에서 잘 처리하신 까닭입니다.
다만 급보(急報)가 끊임없이 올라오고 군서(軍書)가 많이 쌓였으므로 해당 관서의 하리(下吏)가 미처 다 살펴보지 못한 탓에, 공이 적은데도 녹공(錄功)되거나 공이 큰데도 녹공에 빠진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심지어는 정군(正軍)으로서 적의 수급 하나도 베지 못하였는데도 판관에 제수된 경우가 있으며, 수문장으로서 한 번 힘써 싸웠다는 이유로 목사로 뛰어오른 경우도 있으며, 종의 자식이 왜놈 중 하나를 목베었다는 이유로 그 주인이 3품의 정직(正職)에 오른 경우가 있는 반면, 장사(將士)가 수십 명의 왜적을 목베었는데도 지금까지 한 등급을 올리는 상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 밖의 온당하지 못한 일들은 낱낱이 들어 말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뜻 있는 선비들은 모르는 체하고 있고, 장졸(將卒)들은 맥이 풀려 있습니다. 그리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 해가 넘도록 창을 메고 만 번 죽기를 무릅쓰고 피나는 싸움을 하였는데도 녹공되지 않았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있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이 이러하므로 장수된 자가 비록 날마다 싸움을 독려하지만, 전혀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서 도망하는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 이들을 불러모으려고 하여도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도 실로 어찌하면 좋을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예로부터 신용을 잃고 상주는 것을 아끼면 비록 태평할 때라도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난리가 나서 망하는 때에야 일러 무엇하겠습니까. 믿는 바는 중국의 군사로, 그들이 쏜살같이 내려온다면 회복하는 것이 며칠 안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고 있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조석간에 죽을 사람이니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조정이 언제쯤이나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될는지 알 수 없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고 싶으나 길이 없습니다.
본도의 흉년과 굶주림은 옛날에 없던 일로서, 왜적의 칼날 밑에 살아남은 백성이 얼마 안 됩니다. 그런데 요행히 죽지 않은 자들은 서로 모여서 도둑질을 하면서 사람으로써 양식을 삼고 있습니다. 이들을 비록 계속하여 잡아 죽이기는 하지만, 또한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데다가 곡식 종자가 한 톨도 없어 왜적이 비록 물러간다 하더라도 농사지을 만한 형편이 전혀 없으니, 도내 사람들의 목숨은 적병이 오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김없이 저절로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호남 백성들의 형편은, 비록 꼴과 곡식을 실어 보내는 데 시달리고는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아직은 온전합니다. 만약 호남에서 군량과 곡식 종자를 각각 수만 섬씩 옮겨온다면, 신이 비록 직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는 하지만, 굶주린 자를 진휼하고 왜적을 막으며, 겸하여 농사도 폐하지 않게 함으로써, 호남의 보장(保障)을 완전하게 해 국가를 회복하는 기틀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죽음이 있을 뿐, 다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설자들이 말하기를, ‘호남의 재물과 곡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곡식을 옮길 수 없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생각없이 한 말인 듯합니다. 신이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 있으면서 호남 선비들을 만나지 않는 날이 없는바, 그쪽 창고에 있는 곡식이 다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또 남원 부사(南原府使) 윤안성(尹安性)을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호남과 영남은 입술과 이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도와야 할 처지로, 영남이 망하면 호남이 그 다음에 망할 것이다. 그러니 곡식을 옮기는 일을 속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조정에서 회답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는 양곡이 이미 다 떨어질 것이니, 제때에 미쳐서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습니다. 호남 수령의 말이 이와 같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앞서 계하(啓下)한 쌀과 콩 각 2000섬은 1만 명 군인의 열흘 양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미 중국 군사를 먹이기 위하여 수만 섬을 본도에 운반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에 그 쌀과 콩이 이미 운봉(雲峯)과 남원(南原) 등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 군사가 끝내 고개를 넘어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쌓아두고 보내지 않고 있으니, 그 계책이 빈틈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땅인들 왕의 영토가 아니며, 어느 백성인들 왕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중국 군사가 넘어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으로 굶는 사람도 살리고 군량도 계속댄다면, 양쪽 다 편하지 않겠습니까?
공명고신(空名告身), 허통(許通), 면천(免賤) 등의 항목에 대한 차첩(差帖)을 보내 줄 것을 여러 차례 계청한 바 있으니, 속히 시행하여 거꾸로 매달린 듯한 위급함을 구제한다면, 만분의 일이나마 보전할 길이 있을 듯합니다.
이처럼 중국 군사가 경내에 있어서 그들을 먹이기에도 겨를이 없는 때를 당해서 이런 번거로운 청을 하였으니, 신이 너무도 완급(緩急)을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본도의 존망이 국가에 관계됨이 매우 크므로, 이와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다 말씀 올립니다.”
하였다. 이때는 3월 4일로, 이것이 맨 나중에 올린 장계이다. 전후로 올린 장계의 수만 마디 말들을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이것만은 맨 마지막 장계이기에 적어둔다.
○ 이노가 돌아와서 상도(上道)에서 보고 들은 바를 빠짐없이 고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대가 가지 않았더라면 자칫하다가 도내의 처치를 그르칠 뻔하였다. 이 사이에 만약 종자곡을 얻으면 난리에 살아남은 백성들이 다 죽지는 않을 텐데, 농사철이 이미 늦었으니 어떻게 제때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 다음 날 도사와 그 밖의 여러 사람의 일행이 산음(山陰)에 이르렀다.
서애가 공의 첩장(牒狀) 및 서한을 보고는 딱한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간절하게 주청(奏請)하니, 왕도 또한 측은하게 여겨서 주달한 것을 승락하였다. 그런 다음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이 그 자리에서 2만 석을 넘겨주게 하고, 호남 감사에게 공문을 보냈으나, 호남 감사가 1만 석을 감하여 보내 주었다. 이에 공이 또 최철견(崔鐵堅)에게 사람을 보내어 여러 고을에 나누어 매기지 말고 다만 남원(南原)과 순천(順天) 두 대부(大府)에 각각 5000석씩을 매겨서 운반하는 데 편리하게 해 달라고 청했더니, 최철견이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이때 전 좌랑(佐郞) 박이장(朴而章)이 또한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막하에 있었으므로, 공이 말하기를, “박 종사(朴從事)는 남원으로 가고, 이 종사(李從事)는 순천으로 가서 잘 살펴보고서 운반해 오라.” 하였다.
묵은 지 5일 만에 진양(晉陽)으로 가니,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는 굶주린 백성들이 쑥대머리에 귀신 얼굴을 해 가지고서 길가로 마중나온 자가 대략 수천 명이나 되었는데, 울면서 절하고 감사해하면서 축수하고는 말하기를, “아버지시여 어머니시여, 우리를 건져 주고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공이시여, 만복을 누리시고 백세토록 장수하소서.” 하였다. 이보다 앞서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에게 신칙해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게 하였는데, 고을에 이르러서 다시금 그 영을 신칙하니, 고을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더욱더 일에 힘썼다.
공은 매일같이 성을 순시하고 마루와 성첩을 살펴보면서 수리하였다. 항상 뒤로 물려서 쌓은 새 성이 튼튼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여, 세 곳을 택해 포루(砲樓)를 세우고 사대(射臺)도 많이 설치하였으며, 호(壕)를 파서 성 밑에 돌리고 물을 끌어들여 깊게 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는 뒤를 따르는 여러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사람의 소견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높은 언덕에 튼튼하게 쌓은 성을 헐고 진흙의 땅에 물려 쌓아서 왜적으로 하여금 시렁을 얽어 굽어보면서 쳐들어오기에 쉽게 하였으니, 이것 또한 운수인 것이다.” 하였다. 날마다 새로 세운 북문(北門)의 누각 위에 앉아서 군사를 사열하고 사격을 연습하게 하였다.
이때 역질(疫疾)이 창궐하기는 곳곳이 다 마찬가지였는 데다가 공에게 굶주림을 구호해 주기를 바라서 사람들이 모두들 성 안으로 모여든 탓에, 신음하는 소리가 귀에서 끊이지 않고, 굶주림에 아우성치는 형상이 항상 눈앞에 가득 찼다. 이에 공이 갈근탕(葛根湯)을 써서 앓는 이를 구제하게 하고, 모든 수단을 다해 죽을 쑤어서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막하의 여러 사람들이 공에게 간하기를, “하늘의 운행이 조화를 잃고 괴상한 기운이 가득 차서 이에 부딪치는 자는 죽고 범한 자는 병드는 판국입니다. 비록 깊은 방에 있더라도 호령(號令)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니, 문루(門樓)에 나와 앉아있지 마십시오.” 하자, 공이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다.” 하면서, 듣지 않았다.
진주 판관(晉州判官) 성수경(成守慶)을 시켜서 무기를 전담해 다스리되, 조총(鳥銃)을 많이 만들게 하고, 또 화전(火箭)을 많이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남원의 곡식은 함양(咸陽), 산음(山陰), 삼가(三嘉), 합천(陜川) 등 고을로 하여금 소와 말로 번갈아 가면서 실어다가 지례(知禮), 금산(金山), 개령(開寧), 성주(星州), 고령(高靈)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순천(順天)의 곡식은 진주(晉州), 하동(河東), 곤양(昆陽), 남해(南海), 사천(泗川), 고성(固城), 거제(巨濟) 등의 고을로 하여금 배에 싣고 바다로 운반해서 사천, 거제, 고성, 함안, 단성, 진주 지방의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비록 넉넉히 나누어 주지는 못하였으나, 때맞추어서 종자를 뿌리게 하니, 황폐해진 고을의 백성들이 다 죽어 넘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차츰차츰 안집하여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가 공의 덕분이었다.
○ 공은 명령을 받들고 온 뒤로 능히 왜적을 소탕해 요기(妖氣)를 맑게 하지 못하여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밤낮없이 노심초사하느라 심열(心熱)이 몹시 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는 내상(內傷)에 감기 기운이 겹친 데다가 역질 기운마저 이를 틈타 파고들어 4월 19일부터 두통을 앓기 시작하여 점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노와 박성이 항상 곁을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약과 미음을 올렸는데, 공은 그것을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약을 마신다고 해서 살아날 사람이 아니다. 그대들은 그만두라.” 하였다. 박성이 그래도 강권해 마지않았다. 진주 고을의 늙은 의원인 김남(金南)이 와서 진맥한 다음 말하기를, “다시는 약을 드리지 마십시오.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목숨은 시운(時運)에 관계되는바, 하늘의 뜻이니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박성이 말하기를, “비록 그런 줄은 알지만 어찌 차마 약을 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공의 아들 김역(金湙) 역시 역질에 걸려 서편 방에서 앓고 있었는데, 공은 병세의 더하고 덜함은 묻지 않은 채 항상 두 사람에게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이 오래지 않아서 경내에 이를 텐데, 어떻게 지공할 것인가? 그대들은 힘쓰라.” 하였다. 병이 위독할 때에는 혼미해서 의식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입을 움직이면서 가냘픈 말로 쉴새없이 말을 하였는데, 하는 말들이 모두 나랏일 아닌 것이 없었다. 때로는 간혹 목을 빼어 큰소리로 말하기를, “명 나라 군사들은 이미 도착하였는가? 주둔해 있는 왜적들은 이미 도망쳤는가?” 할 뿐, 시종 집안일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공의 측실 부인이 자녀를 거느리고 서울에서 내려와 곤양(昆陽)의 경내에 있는 사위의 집에 와서 살고 있었는데, 여종을 보내어 병문안을 하려고 하자, 공은 손을 내저으면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4월 그믐날에 공이 졸(卒)하였다. 이노가 박성 등과 함께 곡하고 염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서 김역 또한 죽었다. 박성은 고을에 머물러 있으면서 관 짜는 것을 감독하고, 이노는 두류산(頭流山) 밑에 들어가서 임시로 장례지낼 묘혈을 파는 일을 감독하였다. 3일 뒤에 박성이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관을 호송하고 이르러 그날로 장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세 사람이 모두 손을 잡고는 사모하는 마음에 머뭇거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서로 목놓아 오래도록 통곡한 다음 흩어졌다.
○ 온 도내의 선비와 백성들이 공의 초상을 듣고서는 골육지친의 부고를 받은 것처럼 모두들 하나같이 애통해하고 아까워하면서 말하기를, “충신(忠臣)이 갔고, 열사(烈士)가 죽었으니, 절의(節義)는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며, 국가는 장차 누구를 믿을꼬.” 하였다.
성 안과 성 밖에서 구호해 주기를 바라던 유랑민들이 10명, 100명씩 떼를 지어 울고 흐느끼면서 쓰러진 채 슬피 통곡해 목쉰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였으며, 사방으로 흩어져 떠나가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무심해서 우리의 어버이를 빼앗아 가는가. 이미 모두 다 끝났으니, 명이 다 되었다.” 하였다. 길에서 이 소식을 듣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서로 상심하였다.
○ 도헌(都憲) 김늑(金玏)이 공을 대신하여 직책을 맡았다. 이해 6월 그믐날에 왜적이 진양을 함락하였다. 명 나라 군사들이 새재[鳥嶺]를 넘어왔다. 총병(總兵) 유정(劉鋌)이 합천(陜川)에 주둔하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가 거창(居昌)에 주둔하니, 온 나라 안이 흉흉하고 온 도내가 허둥지둥하여 공을 고향에 반장(返葬)할 겨를이 없었다. 좌도 순찰사(左道巡察使) 한 상국 효순(韓相國孝純)이 좌도와 우도를 합하여 겸직하면서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방백(方伯)으로 있으면서 차마 객사(客死)한 사순(士純)의 관을 고향으로 반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반장하지 않는다면 지하에서 사순을 만나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본부와 이웃 고을에 명령하여 편의에 따라 묘를 만들게 하고, 또 단성 현감 조종도를 상여 차사원(喪輿差使員)으로, 전 좌랑 이노를 가도사(假都事)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보살펴서 발인(發靷)해 호상(護喪)하여 가게 하였다. 이는 조종도와 이노 두 사람이 공의 지우(知遇)를 받은 자로서, 공을 위하여 능히 마음을 다할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공의 상여가 지나는 여러 고을에서는 공의 충의에 감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므로, 난리에 분탕되었다는 핑계로 회피하지 않고 모두들 힘을 바쳤다. 그 덕분에 정한 날짜를 어기지 않고 산소에 이르러서 모월 모일에 장사 지냈다.
○ 공의 맏아들인 김집(金潗)이 분상(奔喪)하여 임시로 매장한 곳 곁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때는 바야흐로 왜적들이 한창 겁략할 때였으므로, 서모(庶母)와 서제(庶弟)인 김잠(金潛) 등을 데리고 지리산 골짜기로 피하였는데, 여러 차례 급박한 상황을 만나 거의 벗어날 수가 없었는데도 끝내 왜적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적들이 공의 묘소에 이르러서는 묘소의 용미(龍尾) 부분을 몇 촌 파다가는 그만두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의 신령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도와주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하였다. 그러니 밝고 밝은 복을 그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현대부(賢大夫)의 고사(故事)에 대해서는 태사(太史)의 기록이 있고 태상시(太常寺)의 행장(行狀)이 있어서 매몰되어 없어지지 않게 한다. 그러나 공의 이때의 행적은 태사가 다 기록하지 못하고 태상시에서 행장을 지을 겨를이 없었다. 그런 데다 비석(碑石)에 새기고 지석(誌石)에 기록한 것도 혹 없어져서 증거로 삼을 바가 없게 되니, 학(鶴)을 그리려다가 두루미를 만드는 것이나마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학문(學問)은 연원(淵源)이 있어서 능히 스승을 얻었고, 행실(行實)은 가정에서 드러나 아버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절의(節義)가 세상에 동한 것은 빼어난 기운을 타고나서이고, 나라를 위하여 온 힘을 쏟다가 죽은 것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다. 문장(文章)이야 여사(餘事)였지만 한유(韓愈)와 두보(杜甫)에게서 나와 영원토록 썩지 않을 것이고, 아름다운 이름은 산악(山岳)과 나란하여 영원토록 전해질 것이다.
황명(皇明) 만력(萬曆) 25년(1597, 선조 30) 정유년 3월 하한(下澣)에 문수산인(文殊山人)은 삼가 기록한다.

[주C-001]학봉 선생(鶴峯先生)의 용사사적(龍蛇事蹟) : 역문의 ○ 표시는 원문에는 없으나,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용사일기(龍蛇日記)》에 따라 넣었다. 이하도 같다.
[주D-001]공과 …… 되었는데 : 원문에는 이 부분이 ‘여공홀지(與公忽地)’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여공홀치(與公忽値)’로 바로잡았다.
[주D-002]공사(公私)의 재물은 : 원문에는 ‘공사개장(公私蓋藏)’으로 되어 있으나, 뜻이 통하지 않아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공사축장(公私蓄藏)’으로 바로잡았다.
[주D-003]수공(首功)을 …… 진(秦) 나라 : 수공은 적병의 목을 베어오는 공을 말한다. 진 나라의 법제(法制)에는 적병의 목을 헤아려서 목 1개당 자급 1등급을 올려 주었다. 뒷날에 적병의 목을 수급(首級)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생긴 말이다. 《사기》 노중련열전(魯仲連列傳)에, “저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수공(首功)을 으뜸 공으로 삼는 나라이다.” 하였다.
[주D-004]노련(魯連)은 …… 하였다 : 노련은 노중련(魯仲連)으로, 제(齊) 나라의 장수이다. 일찍이 조(趙) 나라에 머물러 있을 적에 진 나라가 조(趙) 나라를 공격해 와서 정세가 위급하였다. 그때 위(衛) 나라에서 조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진 나라 왕을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진 나라는 예의를 버리고 살인만을 일삼는 무도한 나라임을 역설하면서, 만약 진 나라가 칭제(稱帝)한다면 자신은 동해(東海)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하여 그 일을 중지시켰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주D-005]당(唐) 나라의 …… 울었는데 : 흥원(興元)은 당 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덕종 때 반적(叛賊) 요영언(姚令言)과 주자(朱泚)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 수도 장안(長安)을 침범하였으므로, 덕종이 봉천(奉天)에 피난해 있으면서 흥원 원년에 자신을 죄책(罪責)하는 조서를 반포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하였다. 그러자 이성(李晟) 등이 그 조서를 보고는 감격하면서 용기를 내어 적병을 쳐 장안을 수복하였다. 《舊唐書 卷133 李晟列傳》
[주D-006]유차달(柳車達) : 고려 태조 때의 공신으로 문화 유씨(文化柳氏)의 시조이다. 태조 때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워서 대승(大丞)에 제수되었으며,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 《高麗史 卷99 列傳 12》
[주D-007]원충갑(元冲甲)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무신이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原州)의 별초(別抄)에 소속되어 있다가 충렬왕 17년(1291)에 합단(哈丹)이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례에 걸쳐서 적을 크게 무찔러 성을 지켜 후세에까지 무명(武名)을 남겼다. 《高麗史 卷104 列傳 17》
[주D-008]신포서(申包胥)의 충성 : 신포서는 춘추 시대 초(楚) 나라의 대부(大夫)로, 성은 공손(公孫)인데, 신(申) 땅에 봉작되었으므로 신포서라고 한다. 오자서(伍子胥)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는데, 오자서가 오(吳) 나라로 도망치면서 신포서에게, “내가 초 나라를 전복시킬 것이다.” 하자, 신포서가 “그대가 초 나라를 전복시키면 내가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 하였다. 그 뒤에 오자서가 오 나라의 군사를 이끌고 초 나라의 수도인 영(郢)에 침입하자, 진(秦)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는데,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조정의 담에 기대어서 통곡하였다. 그러자 진 나라의 애공(哀公)이 감동하여 구원병을 내어주므로, 그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와서 국난을 평정하였다. 《淮南子 修務訓》
[주D-009]장순(張巡)의 충렬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0]인재가 …… 하였지만 : 원문에는 ‘승핍취용(承乏取勇)’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용(勇)은 용(用)인 듯하다.” 하였다.
[주D-011]은혜와 …… 펴라 : 원문에는 ‘은위병시(恩威並施)’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시(施)는 행(行)일 듯하다.” 하였다.
[주D-012]장순(張巡) :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의 충신이다. 천보(天寶)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처음에 진원 영(眞源令)으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인솔하고 당 나라의 시조인 현원 황제(玄元皇帝)의 묘(廟)에 나아가 통곡한 다음 기병(起兵)하여 반란군을 막았다. 그 뒤에는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인 수양성(睢陽城)을 몇 달 동안 사수하고 있었는데, 구원병이 오지 않아 양식은 다 떨어지고 힘은 다 소진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그러자 태수(太守)로 있던 허원(許遠)과 함께 사절(死節)하였다. 《舊唐書 卷187 張巡列傳》
[주D-013]안호경(顔杲卿) : 당 나라 현종(玄宗)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안녹산이 사사명(史思明)으로 하여금 상산군(常山郡)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때 성을 지키고 있던 위위경(衛尉卿) 안호경이 군사가 적어 성이 함락되면서 사사명의 포로가 되었는데, 동도(東都)로 끌려가서는 안녹산을 크게 꾸짖다가 처형당했다. 《舊唐書 卷187 顔杲卿列傳》
[주D-014]원근에서 메아리치듯 호응하였으니 : 원문에는 ‘원근향응(遠近嚮應)’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향(嚮)은 향(響)일 것이다.” 하였다.
[주D-015]돌아오는 …… 바 :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돌아오는 길을 잃었으니 흉하다.[迷復 凶]” 하였다.
[주D-016]절제(節制)를 …… 여기고서 : 원문에는 ‘내절제지수 부당재위성중(乃節制之帥 不當在圍城中)’으로 되어 있는데, 뜻이 통하지 않기에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위절제지수 부당재위성중(謂節制之帥 不當在圍城中)’으로 바로잡았다.
[주D-017]윤기의 …… 칭송하고 : 원문에는 ‘칭기용(稱其勇)’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기(其)는 아마도 기(箕)일 것이다.” 하였다.
[주D-018]왜적들이 …… 있으니 : 원문에는 ‘적불감규유강면(賊不敢窺覦江面)’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적불감규유강서(賊不敢窺覦江西)’로 바로잡았다.
[주D-019]산음(山陰)에서 : 원문에는 ‘향산음(向山陰)’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자산음(自山陰)’으로 바로잡았다.
[주D-020]도리어 …… 올렸습니다 : 원문에는 ‘포장지주반(褒獎之奏反)’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포장지주반상(褒獎之奏反上)’으로 바로잡았다.
[주D-021]성상의 귀를 속이고 : 원문에는 ‘기□천청(欺□天聽)’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기망천청(欺罔天聽)’으로 바로잡았다.
[주D-022]반드시 저지하고 억눌러서 : 원문에는 ‘필가저억(必加沮抑)’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저(沮)는 본디 조(阻)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3]교자(轎子)를 타고 왔다 : 원문에는 ‘승교하래(乘轎下來)’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교(轎)는 본디 교(橋)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4]그리고는 …… 뵙고는 : 원문에는 ‘부어입알(負於入謁)’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부어인입알(負於人入謁)’로 바로잡았다.
[주D-025]선생이 하는 일들을 : 원문에는 ‘범소시장(凡所施張)’으로 되어 있는데, 두주에, “시(施)는 아마도 시(弛)일 듯하다.” 하였다.
[주D-026]누가 …… 것인가 : 원문에는 ‘수제기구(誰濟其咎)’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수집기구(誰執其咎)’로 바로잡았다.
[주D-027]진주의 살천창(薩川倉)이 어떻겠는가 : 원문에는 ‘진주살천창하여(晉州薩川倉何如)’로 되어 있는데, 두주(頭註)에 “살(薩)은 본디 륙()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주D-028]목사는 …… 나서 : 원문에는 ‘목사가세충효(牧使家勢忠孝)’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목사가세충효(牧使家世忠孝)’로 바로잡았다.
[주D-029]아첨하기를 좋아하여 : 원문에는 ‘호생참간(好生讒)’으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호생참유(好生讒諛)’로 바로잡았다.
[주D-030]지곡사(智谷寺) : 원문에는 ‘지곡사(旨谷寺)’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지곡사는 산청군 산청면 내리(內里)의 지리산 기슭에 있는 절이다.
[주D-031]이제신(李濟臣)이 …… 잡아 가두었습니다 : 이제신이 선조 11년(1578)에 진주 목사로 있으면서 토호(土豪)들의 폐단을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도리어 토호들의 모함으로 인해 병부(兵符)를 잃고 벼슬을 사임한 뒤에 향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주D-032]유종지(柳宗智) : 원문에는 ‘유종지(柳宗旨)’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33]명 나라 …… 도착하였는가 : 원문에는 ‘천병기이호(天兵其已乎)’로 되어 있는데, 《용사일기》에 의거하여 ‘천병기이지호(天兵其已至乎)’로 바로잡았다.




다산시문집 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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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
진양절도사가 되어 떠나는 이 호군  을 전송하다[送李 護軍  爲晉陽節度使]

글 배움은 사실상 무익한 거고 / 學書故無益
검술 배움 그 또한 삼갈 일이나 / 學劍良所愼
대장부로 태어나 묻혀 살 수야 / 丈夫重埋沒
입신 양명 꾸준히 추구해야지 / 俛焉思自振
태평세월 방패 창 거둔 지 오래 / 干戈久已櫜
요순 같은 성군이 대를 이으니 / 繼繼堯與舜
한 자 한 치 약간의 공이 없어도 / 未有尺寸功
맨손으로 큰 인장 얻을 수 있네 / 徒手取斗印
남쪽 변방 수많은 진영 가운데 / 南方衆藩鎭
웅장하긴 진주가 으뜸이라지 / 雄壯首數晉
깃발은 먼지 속에 펄럭인다면 / 旗旄蹴紅塵
쇠도끼는 시퍼런 날이 삼엄해 / 鐵鉞森靑刃
전별 자리 친근한 손님들 모여 / 祖席聚親賓
술과 고기 번갈아 권해 올릴 제 / 酒肉紛更進
나도 와서 나아가 노래 바치니 / 我來前致詞
가는 이엔 반드시 선물 주는 법 / 行者必有贐
내 삼가 듣자하니 진주 삼장사 / 恭聞三壯士
의로운 소리 천지를 진동했거니 / 義聲天地震
범가죽 천년 뒤에 남기었다면 / 豹皮留千載
기럭털 한순간에 집어던졌지
 / 鴻毛擲一瞬
강산에는 어둔 기운 맑게 개이고 / 江山霽氛翳
성곽에 불탄 재가 걷히고 나니 / 城郭收灰燼
피어린 땅 행락의 장소로 변해 / 血地翻行樂
높이 솟은 누각들 신기루 같아 / 樓閣騰如蜃
고운 단장 미인들 북적거리고 / 娥娥紛黛叢
호탕한 풍류객들 진을 쳤고야 / 蕩蕩風流陣
안개 경치 정말로 즐길 만하니 / 煙景信可娛
바람 추위 그 누가 꺼려할쏜가 / 風寒誰復謹
낡은 칼 녹슬어도 갈지 않고 / 古劍鏥不磨
묵은 못 흙탕 쌓여 파기 어렵다 / 廢池淤難濬
비록 설사 국경에 탈이 없어도 / 疆場雖無事
불화 속 미친 이웃 어찌 잊으리 / 狂隣詎忘釁
한 나라 조정 안에 무신 많은데 / 漢廷足武臣
표요교위 특별히 선발되었네 / 嫖姚特被遴
나라 보답 언제나 충직 지키고 / 報國思蹇蹇
몸 다스림 마땅히 공손해야만 / 律己宜恂恂
머리서 발끝까지 임이 주신 것 / 頂踵皆君賜
재물이며 여색에 몸 바칠 수야 / 貨色敢有殉
군사훈련 폐한 지 오래이거니 / 敎鍊久已廢
지휘 단속 마땅히 엄격히 하소 / 節制宜嚴迅
군사가 몸이 얼고 굶주리거든 / 士卒若凍餒
받은 녹을 다 풀어 구제한다면 / 廩祿悉捐賑
변방 행여 위급한 변고 있을 때 / 邊門有警急
칠척이라 한몸을 아니 아끼리 / 七尺宜無吝
당신 집은 대대로 유가의 집안 / 君家世儒素
학문 행실 드높은 경지 이루니 / 學行躋華峻
만약 즐겨 노는 걸 일삼는다면 / 苟爲供佚樂
무얼로 후손에게 잘못을 빌꼬 / 何以謝後胤
가거든 국사 부디 잘 다스리소 / 去矣理王事
당신 위해 센 머리 안타깝다오 / 爲君惜衰鬢

[주C-001]진양절도사가 되어 떠나는 이 호군을 전송하다 : 진양 절도사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의 별칭이다. 진양은 진주(晉州)의 옛 이름이다. 이격은 무신으로 자는 천로(天老),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다산보다 14세 연상으로 1748년에 태어났다.
[주D-001]진주 삼장사 : 본디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가리키는데 다산은 선조 26년(1593) 6월 진주성에서 왜적과 대항하여 9주야를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은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황진(黃進)을 가리킨 것이다. 《矗石樓中三壯士詩考證》ㆍ《牧民心書 兵曹 禦寇》
[주D-002]범가죽 …… 집어던졌지 : 진주 삼장사가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림으로써 그 거룩한 이름이 길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범가죽을 남겼다는 것은 범은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인용한 것으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고, 기러기털을 집어던졌다는 것은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털처럼 여겨 미련없이 버렸다는 것이다.
[주D-003]표요교위 : 한 무제(漢武帝) 때의 장수 곽거병(霍去病)이 지낸 벼슬이름인데, 여기서는 무신인 이격(李格)을 가리킨 것이다.

 다산시문집 제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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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記)
진주 의기사기(晉州義妓祠記)

부녀자들의 성품은 죽음을 가볍게 여긴다. 그러나 하품(下品)인 사람은 분독(忿毒)을 이기지 못하여 울적하여 죽고 상품(上品)인 사람은 의로워서 그 몸이 더럽혀지고 욕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죽는다. 그가 죽었을 때 모두들 절개가 바르다고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기 혼자 죽는 데 그친다. 창기(娼妓)와 같은 부류는 말할 나위도 없다.
어려서부터 풍류스럽고 음탕한 일과 정(情)을 옮기고 바꾸는 일에 길들여졌으므로, 그들의 성품은 흘러다니고 한군데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 또한 남자들은 모두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부부(夫婦)의 예에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군신(君臣)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로부터 전쟁터에서 멋대로 미녀(美女)를 약탈한 경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죽어서 절개를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옛날에 왜구(倭寇)가 진주(晉州)를 함락하였을 때 의로운 기생이 있었으니, 그녀는 왜장(倭將)을 꾀어 강 가운데 있는 돌 위에서 마주 춤을 추다가 춤이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에 그를 껴안고 못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이곳이 그녀의 의절(義節)을 기리는 사(祠)이다. 아, 어찌 열렬한 현부인이 아니랴. 지금 생각해 볼 때, 왜장 한 명을 죽인 것이 삼장사(三壯士)의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으나, 성이 함락되려고 할 때 이웃 고을에서는 병사를 풀어서 구원해 주지 아니하고, 조정에서는 공(功)을 시기하여서 패하기만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견고한 성지(城池)를 적군의 손아귀에 떨어뜨려 충신과 지사의 분노와 한탄이 이 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는데, 보잘것없는 한 여자가 적장을 죽여 보국(報國)을 하였으니 군신(君臣)간의 의리가 환히 하늘과 땅 사이에 빛나서, 한 성에서의 패배가 문제되지 아니했다.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닌가.
사(祠)가 오래도록 수리를 하지 못하여 비바람이 새었는데, 지금의 절도사(節度使) 홍공(洪公)이 부서진 것을 고치고 새롭게 단청(丹靑)을 칠한 다음 나에게 그 일을 기록하게 하고, 자신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촉석루(矗石樓) 위에 걸었다.

[주D-001]의로운 기생 : 진주(晉州) 기생 논개(論介)를 말함. 그녀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가 함락되자, 왜장(倭將)과 촉석루(矗石樓)에서 연회를 베풀다가, 왜장을 껴안고 남강(南江)에 빠져 왜장과 함께 죽었다고 함.
[주D-002]삼장사(三壯士) : 임진왜란 때 진주의 촉석루에 올라가 당면한 국가의 장래를 통탄(痛歎)하며 죽기로 맹세하고 나라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한 세 장사로, 김성일(金誠一)ㆍ조종도(趙宗道)ㆍ이노(李魯)를 말함. 이러한 영남(嶺南)의 설(說)에 대해 호남(湖南)에서는 진주성이 함락될 때 투신 자결했던 김천일(金千鎰)ㆍ최경회(崔慶會)ㆍ고종후(高從厚)를 삼장사라고 일컬음.


 
一蠹先生續集卷之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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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附錄
世系源流 a_015_54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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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氏其先。河東府人。先生曾王考宗簿寺正公之義。始居于咸陽郡。
先生七世祖國龍。高麗高宗朝。密直副使。墓。河東府橫甫面鰕谷甲坐。有二子。芝衍,蘭衍。文左尹。 芝衍。卽先生六世祖。
芝衍 忠宣王朝。都僉議贊成事。諡文忠。墓。考墓右麓甲坐。配郡夫人李氏。墓祔。有二子。翊。贈判書。宥。 宥。卽先生五世祖。
015_541b宥 樞密院副使。墓失傳。有二子。堅,賢。 堅。卽先生高祖。
堅 版圖判書。墓失傳。有一子。之義。 之義。卽先生曾祖。
之義 宗簿寺正。墓郡南晦洞子坐。配寶城宣氏。司諫一德之女。有一子復周。 復周。卽先生王父。
復周 號竹堂。典農寺判事。以孝旌閭。道學享道谷院。墓。郡南血溪乾坐。配。郡夫人載寧李氏。墓失傳。配。郡夫人江陽李氏。墓。郡北釜夜辛坐。有一子。六乙。 六乙。卽先生皇考。
六乙 國史。乙作一。我世祖丁亥。以咸吉道虞侯。立殣於賊臣施愛亂。贈漢城府左尹。墓。郡東昇安沙岡丑坐。配貞夫人慶州崔氏。牧使孝孫女。墓。昇安竹岡子坐。有三子。汝昌。汝裕。縣監。無后。汝寬。參奉。生二子。希顏。文都事。希參。縣監。縣監生二子。善男,彥男。彥男出015_541c系從叔希卨后。 汝昌。卽先生。先生事蹟。載在國朝儒先錄及事實大略。墓。昇安考墓左麓艮坐。配。貞敬夫人完山李氏。桃平君末生女。定宗大王孫。墓。公墓上艮坐。

流 繁不盡錄。故止於十世。而但書宗系。
先生有二子。希稷,直長。嫡無嗣。只有庶子如山。四世大宗。不可傳於庶孼。臨終。托宗祀於弟希卨。 希卨。正郞。系子彥男。
孫彥男,希卨子。同中樞。生父希參。宣祖丁酉。同郭䞭,趙宗道。殉於黃石山城。子大民。庶子秀民 如山。希稷子。贈參議。子天壽,桂壽,萬壽,德壽。
曾孫大民,彥男子。蔭縣監。子弘緖。 秀民,彥男子。師事寒岡鄭先生。以學行薦。除參奉。享道谷院。子弘纘,弘繼,弘經。 天壽,如山子。子元禮,亨禮。 桂壽,如山子。子興禮,仲禮。 萬壽,如山子。无后。 德壽。如山子。无后。
015_541d玄孫弘緖,大民子。蔭參奉。文學正。師事寒岡鄭先生。光海朝。如山之孫元禮。諂附仁弘,爾瞻。作奪宗之變。仁祖改玉元年。上疏歸正。以道義。享蘫溪別祠。子光漢,光淵。庶子光潤。 弘纘,秀民子。无后。 弘繼,秀民子。无后。 弘經,秀民子。贈掌隷院判決事。子光淑,光湜,光渭,光濂。 元禮,天壽子。都事。子時豪,時俊。 亨禮。天壽子。子時雲,時遇。 興禮,桂壽子。都事。子光澈。 仲禮。桂壽子。進士,參奉。子光仁。
五世孫光漢,弘緖子。進士。薰陶先業。事親至誠。涉獵經史。文章卓犖。子世杓。 光淵,弘緖子。進士。仁祖乙亥。選入太學。同宋時瑩疏請栗,牛兩先生從祀。被出於嶺外。孝宗乙未。以館學薦。除察訪。子世模,世楨。庶子世檍。 光淑,弘經子。无后。 光湜,弘經子。贈左尹。子祖文述文。 光渭,弘經子。子世檜。 光濂,弘經子。无后。 時豪,元禮子。无后。 時俊,元禮子。宣務郞。子弼聖,弼君。 時雲,亨禮子。无015_542a后。 時遇,亨禮子 光澈,興禮子。子世彬,世休,世來。 光仁。仲禮子。通政。子龍。
六世孫世杓,光漢子。蔭縣監。子煕章,煕載,煕文。庶子煕瞻。 世模,光淵子。進士。子道兼。庶子逸兼。 世楨,光淵子。子煕道,煕運。 世檍,光淵子。子煕遠,煕普。 祖文,光湜子。同中樞。子煕泰。述文,光湜子。贈軍資監正。子煕福,煕祿。 世檜,光渭子。子煕錫。 弼聖,時俊子。子贇,斒出系。斕出系。 弼君,時俊子。系子斒。 世彬,光澈子。參奉。子東里。 世休,光澈子。子是豪。 世來,光澈子。系子斕。 龍。光仁子。子貴哲。
七世孫煕章,世杓子。蔭察訪。子胤獻,宗獻。 煕載,世杓子。子述獻,纘獻。 煕文,世杓子。子承獻。 道兼,世模子。子恒基。 逸兼,世模子。子壽獻。 煕道,世楨015_542b子。子履基,益基,紹獻。 煕運,世楨子。以行義薦。除參奉。英祖戊申。亮亂倡義。以忠義命旌閭。子重獻,尙獻,師獻,祖獻,志獻,孝獻。庶子後獻,敬獻。 煕遠,世檍子。子起獻。 煕普,世檍子。子有獻。 煕泰,祖文子。子一獻。 煕福,述文子。系子大獻。 煕祿,述文子。子大獻。出系。再獻,赫獻。 贇,弼聖子。文禮曹佐郞。子河龍,河瑞。 斒,弼君子。生父弼聖。子河憲。 東里,世彬子。文判官。子維宗,維楨,維幹,維城。 是豪,世休子。子東河,宗河。 斕,世來子。生父弼聖。子河鵾。 貴哲。龍子。子河望,河碩,河雲。
八世孫胤獻,煕章子。蔭縣監。戊申。亮亂倡義。以忠義贈吏議。命旌閭。系子鎭華 宗獻,煕章子。子鎭壽,鎭禧,鎭祿。 述獻 煕載子。子鎭厚,鎭泰。 纘獻,煕載子。亮亂倡義。命旌閭。子鎭華出系。鎭恒。鎭衡出系。 承獻,煕文子。亮亂倡義。命旌閭。子鎭垈,鎭福。 恒基,道兼子。系子鎭圭。 壽獻,逸兼子。子鎭豪,鎭杰。 履基,015_542c煕道子。系子鎭一。 益基,煕道子。系子鎭衡。 紹獻,煕道子。亮亂倡義。命旌閭。子鎭一。出系。 重獻,煕運子。亮亂倡義。命旌閭。子鎭成。 尙獻,煕運子。亮亂倡義。命旌閭。子鎭緯。出系。鎭權,鎭維,鎭綱。 師獻,煕運子。亮亂倡義。命旌閭。系子鎭緯。 祖獻,煕運子。子鎭望。 志獻,煕運子。子鎭鼎,鎭宅。 孝獻,煕運子。子鎭普。鎭圭出系。 後獻,煕運子。子鎭邦。 敬獻,煕運子。子鎭臣。 起獻,煕遠子。子鎭箕。 有獻,煕普子。子鎭億,鎭賢,鎭璧,鎭甲,鎭烈。 一獻,煕泰子。子鎭赫,鎭彥,鎭極。 大獻,煕福子。生父煕祿。子鎭南,鎭八。 再獻,煕祿子。子鎭源。 赫獻,煕祿子。子鎭喆,鎭相,鎭淑。 河龍,贇子。子鎭喆,命喆。 河瑞,贇子。判官。子文喆,國喆。 維宗,東里子。子邦式,邦龍。 維楨,東里子。子邦憲,邦彥,邦翰,邦桓。 維幹,東里子。子邦赫。 維城,東里子。子邦弼。 河鵾。斕子。子邦祚。
015_542d九世孫鎭華,胤獻子。蔭奉事。生父纘獻。子德濟。 鎭壽,宗獻子。系子德渾。 鎭禧,宗獻子。子德渾。出系。系子德奎。庶子德洧。 鎭祿,宗獻子。子德河。進士。德奎出系。 鎭厚,述獻子。亮亂倡義。命旌閭。系子德洙。 鎭泰,述獻子。子德洙。出系。德淳出系。德浚。 鎭恒,纘獻子。系子德澄。 鎭岱,承獻子。系子德淳。 鎭福,承獻子。子德濡。 鎭圭,恒基子。生父孝獻。子德澮。 鎭豪,壽獻子。子德泳,德涵。 鎭杰,壽獻子。子德泗。 鎭一,履基子。生父紹獻。子德演。 鎭衡,益基子。生父纘獻。子德澄,德澈。 鎭成,重獻子。子德浩。 鎭經,尙獻子。子德汶。 鎭緯,師獻子。生父尙獻。子德溵。 鎭望,祖獻子。子德洛,德濂,德泓,德溫,德和,德基。 鎭鼎,志獻子。子德源。 鎭宅,志獻子。系子德洤。 鎭普,孝獻子。子德海。 鎭邦,後獻子。子德滿。 鎭箕,起獻子。子德函,德永,德明。 鎭賢,有獻子。系子德壹。 鎭甲,有獻子。子德佑。 鎭015_543a烈,有獻子。子德漳。德壹出系。德泰,德七。 鎭赫,一獻子。子德裕。 鎭彥,一獻子。德沇,德瀅。 鎭極,一獻子。子德沾。 鎭南,大獻子。系子德洪。 鎭八,大獻子。進士同中樞。子德洪出系。德玄進士。德注。 鎭源,再獻子。子德滂,德泮,德一。 鎭喆,赫獻子。子德淵。德溶出系。 鎭相,赫獻子。系子德溶。 鎭淑,赫獻子。贈戶參。子德儉。以孝贈敎官。德誼。同中樞。 鎭喆,河龍子。子道彥。 命喆,河龍子。系子道興。 文喆,河瑞子。贈都事。子道宅,道弘。 國喆,河瑞子。子道淵,道化。 邦式,維宗子。子道貫,道南。 邦龍,維宗子。无后。 邦憲,維楨子。子道一。 邦彥,維楨子。子道顯。 邦翰,維楨子。子道亨,道明。 邦桓,維楨子。无后。 邦赫,維幹子。子道敏,道晉。 邦弼,維城子。子道重。 邦祚。河鵾子。子德源。
十世孫德濟。鎭華子。蔭縣監。子東老。東民。進參奉。東蓍。以孝贈監察。東耇,東翊。015_543b庶子東運,東彥。
十一世孫東老。德濟子。蔭縣監。子煥輔。煥義文承旨。煥禮。煥祖進士。煥弼進士。
十二世孫煥輔。東老子。進士。蔭參奉。子在箕,在斗。庶子在翼監役。在煕武部將。
十三世孫在箕。煥輔子。蔭郡守。子直鉉。國鉉文應敎。庶子鳳鉉檢書。
十四世孫直鉉。在箕子。進士。蔭參奉。系子淳元。庶子淳宅學官。
十五世孫淳元。直鉉子。進士。文直閣。生父圭鉉參奉。祖在復。曾祖煥球。高祖監察東蓍。系子近相。
十六世孫近相。淳元子。生父淳圭。祖麒鉉。曾祖在修。高祖煥禮。子炳鎬。